나이 오십을 흔히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한다. 우주 만물의 이치를 알게 되는 나이라는 뜻이다. 2020년 대한민국의 50대는 어떤가. 은퇴를 앞둔 터라 걱정은 많고, 늘 불안하다. “너무 일만 했다”고 생각하다가도 “한 것 없이 세월만 보냈다”고 자책하기 일쑤다. 유엔은 얼마 전 65세까지를 청년, 이후 79세까지가 중년이라는 새 연령분류표준을 제시했다. 의학 발달로 젊어진 신체 나이, 줄어든 생산가능인구를 반영한 지표이다. 우리 노인연령 기준도 65세다. 이 나이가 돼야 각종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다. 최근엔 이를 70세로 늘리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은퇴가 코앞인데 ‘노인 대접’ 받기까지 긴 틈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른바 ‘소득 크레바스(공백기)’다. 

하나금융그룹 행복연구센터가 11일 ‘대한민국 퇴직자들이 사는 법’을 내놓았다. 50~64세 퇴직자 1000명을 상대로 한 조사 결과인데, 10명 중 6명 이상이 45~54세에 직장을 그만뒀다. 그러다보니 국민연금을 받기까지 평균 12년6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퇴직금은 생활비·자녀지원·대출 상환 등에 사용했다. 살기가 빠듯해 절반 이상이 재취업하거나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배우자까지 포함하면 은퇴가구의 85%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월평균 394만원을 벌었고, 252만원을 생활비로 썼다. 씀씀이를 줄여 월평균 110만원을 저축했는데, 노후 의료비와 자녀 결혼자금 걱정 때문이었다. 여가 시간은 은퇴 후 되레 줄거나 비슷했다. 돈이 없어서, 일하느라 시간이 없어서라고 했다. 이들이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는 시기는 평균 66세였다.

이번 조사는 퇴직자가 대상이다. 40%가 넘는 국민연금 미가입자 등 안전망 밖에 있는 국민들의 은퇴생활은 이들보다 더 나쁠 것이다. 시사하는 바는 크다. 직장을 그만둬도 건강수명에 이를 때까지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음이 확인됐다. 자녀나 국가의 도움으로 생활하는 은퇴자는 거의 없었다. 보고서는 퇴직자의 상당수가 은퇴 후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는데 일을 시작하면서, 또는 가족의 격려로 치유됐다고 했다. 정부의 고용안전망 강화와 함께 가족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절실한 것이 요즘 50대 가장인 것이다.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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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등신(著述等身). 키만큼 책을 쓴다는 뜻이다. 본인 신장 높이의 책을 쓰는 저자들도 있지만 이제 내 몫은 등신같이 독서하기에도 빠듯하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망설이다 산으로 간다. 예보대로 아침부터 비가 뿌렸다. 강원도 횡성의 청태산. 산림휴양림 입구에서 소정의 절차를 밟고 산을 오를 때 기이한 문자처럼 나무가 울창하다. 우중의 산을 거슬러 오르자니 큰 책 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외계인이 끄적거린 낙서 같은 이끼를 비롯해 모든 식물들은 세상의 비밀을 적어놓은 암호문.

나보다 키가 몇 배나 큰 산. 돌 틈 사이 서 있는 도깨비부채 옆에서 도(道)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달콤한 비, 축축한 안개, 추락한 구름이 빚어내는 풍경 속에 낯선 이방인같이 던져졌으니 그런 말이 필요했던 것. 도는 그냥 도여도 도인 줄 모르는 도가 가장 좋은 도 아니겠어요! 툭 던지는 말에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도를 찾아 외가로 달려갔다.

대진고속도로 빠져나와 국도 타고 무주구천동 지나 백두대간의 한 구간인 덕유산 빼재를 넘으면 나는 도를 손으로 만지고 뺨에 비비는 실감을 하게 된다. 저 빼어난 고개를 넘어서는 순간 눈으로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나에겐 도로 가는 지름길이다. 고개 아래 자루처럼 폭 싸인 한 골짜기는 이름도 아주 거창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거창군 주상면 완대리 도동마을. 바로 나의 외가가 있는 곳이다. 어릴 때부터 참 입에 익은 이름인데 막상 글로 쓰려고 하니 난감하다. 도골, 독골, 돗골 중 하나일 텐데 어느 것이든 도의 골짜기라는 뜻은 분명하다 하겠다.

오늘은 도(道)가 나온 이 자리가 또 다른 도동(道洞)이다. 길에서 잠깐 비켜난 곳에 신갈나무가 우뚝하고 제 뿌리를 드러내었다. 지하에서 지상의 근황을 살피는 듯 작은 구멍이 보이고 보초처럼 세워놓은 건 금괭이눈. 이 꽃은 탁월하다. 꽃받침 위에 초가처럼 네모진 꽃들이 다닥다닥하고 새 문명이라도 낳을 것 같은 구조이다. 늘 하늘을 바로 받들며 비를 정면으로 맞아야 하기에 글 읽는 소리, 톡톡톡 울려나는 이 작은 꽃동네야말로 내 마음속 외가(外家)! 금괭이눈, 범의귀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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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KBO리그가 지난 5일 개막했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증가하던 때를 떠올려보면 개막은 감격스러운 일이다. 보건 공무원과 의료진이 흘린 땀방울,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했던 시민들의 수고가 개막이라는 결실을 이뤘다.

전 세계 스포츠가 멈춘 상황에서 KBO리그 개막은 지구촌의 화제이기도 했다. 개막은 한국이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거의 승리하고 있다는 표상이었다. 중동의 알자지라를 포함한 많은 외신들이 개막전 현장을 취재했다. 더 나아가 미국 스포츠채널 ESPN은 KBO리그 TV 중계권을 구입해 미국 내 중계방송을 시작했다. KBO리그가 졸지에 미국 무대에 오르게 됐다.

그동안 KBO리그는 즐거웠다. 팬들은 멋진 플레이에 환호했고 패배를 분하게 여겼으며 실책성 플레이엔 유머 코드를 씌워 희화화하면서 ‘예능’으로 즐겼다. 그런데 KBO리그가 ESPN을 통해 미국에 중계되면서 리그 수준을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현직 프로야구 감독이 리그 수준이 낮다고 한탄하는가 하면, ‘미국이 보는 앞에서 수준 낮은 경기를 해선 안 된다’는 기사가 나온다. 선수들의 실책 없이 경기가 끝나면 ‘미국 보기에 부끄러운 야구 없었다’는 안도의 목소리가 더해진다. 선수 혼자 부끄러워하면 됐을 한심한 플레이를, 지금은 현장 스태프와 미디어가 집단적으로 반성하고 있다. 영화계에선 일찍이 봉준호 감독이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을 “로컬(지역)” 행사라고 부르는 ‘쿨’함을 자랑했건만, 한국 야구계는 약소국 감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야구 종주국인 미국 메이저리그의 수준이 KBO리그보다 몇 수 위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안달복달해봤자 KBO리그가 하루아침에 메이저리그 수준으로 올라서지는 못한다. KBO리그가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유도 국가대표 선수들이 종주국 일본에 인정받기 위해 훈련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1905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 <YMCA 야구단>에서 이호창(송강호)은 타격을 한 후 1루를 향해 뛰지 않고 걸어간다. 양반은 뛰어선 안 된다고 가르친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저서 <혼자서 본 영화>에서 이 장면을 서술하면서 “외세와 강자의 시선을 내면화한 나머지 (중략) 스스로 감시하며 강제하고 있다”고 썼다. KBO리그가 미국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건 타격을 하고 1루로 걸어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야구를 잘하면 좋지만 못한다고 해서 단체로 창피할 일도 아니다.

한국 여론의 기우와 달리 미국 언론은 KBO리그의 매력을 찾는 데 열심이다. 뉴욕타임스는 “KBO는 아직 도루와 번트를 한다. 순수함이 있다. 메이저리그처럼 타구 발사각이나 투구 회전율에 매몰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워싱턴포스트는 “KBO는 보석 같은 리그”라는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의 발언을 전했다.

아쉬운 쪽은 미국 언론이다. 메이저리그 개막이 연기돼 콘텐츠가 없는 상황에 KBO리그가 단비가 됐다. KBO가 ‘갑’이다. 선수들은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플레이를 하는 것으로 족하다.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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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9단인 줄만 알았더니 정책 9단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회고하며 한 말이다. “정책적 과제는 손대지 않은 게 없더라”면서다. 2020년 5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비슷한 말을 했다. 문재인 정부 정책을 보면서 혹시나 노 전 대통령이 한 말이 있는지 찾아보면 “반드시 뭐가 있더라”고 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크고 작은 진보 정책을 설계했고, 그렇게 국정에 뿌려진 씨앗들이 보수정부 9년간 묻혔다가 다시 싹을 틔우고 살이 붙고 있다고 본 것일 테다.

김대중 정부 마지막 해 10월에야 겨우 첫발을 뗀 ‘매달 넷째주 토요휴무제’는 2년 뒤 노무현 정부에서 ‘주5일 근무·수업’으로 정착되고, 지금 ‘주52시간 근무제’로 한발 더 나아갔다. 세 고비 다 ‘시기상조’라는 저항이 있었다. 1999년 외환위기 속 시작된 국민기초생활제는 수급액을 올리며 사각지대를 좁혀가고 있고, 제주 4·3사건과 5·18민주화운동도 진상규명-명예회복과 보상-대통령 사과-국가기념일 제정의 긴 여정을 밟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복지정책 저작권은 현재의 국민연금·의약분업·건강보험 체계를 완성한 김대중 정부에, 대미정책의 변곡점은 용산기지 공원화·전작권 전환·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노무현 정부에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국가인권위와 여성부를 세상에 내놓았다면, 노무현 정부는 종부세·사학법(개방형이사제)·공공기관 지방이전의 발판을 놨다. 여소야대나 내분, 제왕적 야당 총재와 보수언론의 집요한 공격 속에서 임기 말까지 내디딘 정책들이다. 집권 4년차 김 전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30%, 한·미 FTA로 지지층 이반을 겪은 노 전 대통령은 23%일 때였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180석이 있었으면 무엇을 했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한 달 전 4·15 총선에서 180석 거여(巨與)가 출현한 후 밥자리에서 나온 얘기다. 김대중 청와대의 마지막 대변인이었던 박선숙 의원에게 물었다. 바로 교육이라는 말이 나왔다. “평준화 교육이 산업화 시대에 맞다면 지식정보시대엔 창의성을 높여야 한다”는 게 김 전 대통령의 숙원이었다고 했다. 평준화·수월성 대치를 넘어 근본적인 교육 틀과 학벌 없는 사회를 짜고 싶은 ‘고졸 대통령’이었지만, 착수도 못했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어록과 회고를 담은 책 <진보의 미래>와 <운명이다>엔 아프게 돌아본 두 가지가 나온다. 검경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못한 것을 깊이 후회했고, 제일 가슴 아파한 것은 노동의 유연화였다. 고삐 풀린 비정규직 사회의 브레이크를 밟지 못한 자책이었다.

바야흐로, 처음 가는 길이다. 집권 4년차 문을 여는 문재인 대통령 국정지지도가 71%를 찍었다. 앞선 3년을 촛불로 출발했다면, 지금은 봉쇄 없이 코로나19 큰 불을 잡은 자부심·합심(合心)·경계심이 ‘전시 대통령’의 지지율을 받치는 3각 축이다. 3주 후 180석 거여는 21대 국회 모든 상임위에서 절대적 과반수를 점한다. 지방정부와 교육감, 사법 권력도 진보가 대세다. 아스팔트 태극기부대에 휩싸였던 제1야당의 황교안 체제는 끝났다. 어느 시간까지는 변화의 몸부림을 치고 국민 눈을 무서워할 야당복(福)도 더해질 수 있다. 코로나와 총선이 리셋한 세상, 그 운전대를 진보가 잡았다. 무엇도 할 수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절대 권력이다.

거여의 버킷리스트는 달라질까. 총선 직후 사방에서 권고한 ‘겸손한 권력’은 조심조심 지지율 관리나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코로나19를 헤쳐가면서, 다시 국정 키를 쥔 진보의 역정에서 곱씹을 것은 ‘큰 개혁’이다. 연금보험, 공공임대주택, 최저임금, 79% 최고한계소득세…. 미국 사회보장제도 기틀이 만들어진 것은 90년 전의 대공황이다. 그 뉴딜 시책은 모두 100일 안에 나왔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삶의 위기에서 오고, 그 출구는 언제나 약자들의 힘겨운 삶에서 먼저 열린다. 

2020년의 대한민국도 다를 게 없다. 갈 길이 먼 전 국민 고용안전망, 넘어진 데서 또 넘어지는 재난안전망,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녹색 뉴딜, 또 절감한 공공의료, 백년지대계를 짤 국가교육위원회는 속도 있게 만들어가야 할 길이다. 버릴 것도 있다. 기업에 40조원을 부으면서 재난지원금 3조원 올리는 데 파르르 떠는 정부는 곤란하다. 국가와 기업만 빠져나오고 국민들은 피눈물 흘린 IMF 외환위기를 되풀이해서도 안 된다. 사람들의 삶을, 예산 배분의 관행을, 세상의 부조리를 바꾸는 게 사회·경제제도 개혁이다. 처음 가는 180석의 길, 진보의 미래도 거기에 있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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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운동을 전개해온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11일 기자회견을 열어 최근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연이 성금·기금을 받아 할머니들에게 쓴 적이 없다”고 폭로한 데 대해 해명했다. 정의연은 이날 일부 공시된 회계표기의 부정확한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사과했다. 국세청에 공개한 2016~2019년 기부금 개별지출 항목에 수혜인원이 이해할 수 없게 표기된 부분에 대해서도 “데이터가 깔끔하게 처리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기금 운용에 문제는 없다고 밝혔다. 이유야 어떻든 지난 30년 동안 한국 시민사회를 대표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투쟁해온 단체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안타깝다. 

이번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정의연이라는 단체의 성격과 운용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정의연은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로 발족한 뒤 지금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을 밝히고 그들의 인권을 대변해왔다.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데 머물지 않고 위안부 문제를 전시 성폭력 문제, 보편적 여성인권 문제로 확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수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노력이 더해진 결과이지만 정의연 활동가들의 노력이 중심이 된 것이 사실이다. 사회운동 단체는 특정 피해자들의 생활 안정을 주목적으로 하는 인도적 지원단체와 다르다. 정의연으로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대한 직접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국제적 관심을 제고하는 활동 등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실제 정의연의 피해자 지원사업에는 후원금 전달뿐 아니라 건강치료지원, 인권·명예회복 활동 지원, 정기방문, 쉼터 운영 등 다양하다. 그 밖에 연구·조사, 해외홍보 등 활동들이 전개돼 왔다. 이런 활동에 대한 이 할머니와 정의연의 이해가 엇갈린 게 이번 사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연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제기된 의문이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의연은 이용수 할머니가 제기한 의문을 푸는 데 더 노력해야 한다. 정의연에서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있었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이 단체를 오래 이끌어온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당선인인 윤미향 전 이사장이 직접 나서야 한다. 하지만 본질을 벗어난 문제 제기는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위안부 운동’의 대의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사태가 조속히 마무리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외면하는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운동이 계속돼야 한다. ‘위안부 운동’이 이번 갈등을 딛고 보다 굳건해지기를 시민들은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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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운동을 전개해온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11일 기자회견을 열어 최근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연이 성금·기금을 받아 할머니들에게 쓴 적이 없다”고 폭로한 데 대해 해명했다. 정의연은 이날 일부 공시된 회계표기의 부정확한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사과했다. 국세청에 공개한 2016~2019년 기부금 개별지출 항목에 수혜인원이 이해할 수 없게 표기된 부분에 대해서도 “데이터가 깔끔하게 처리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기금 운용에 문제는 없다고 밝혔다. 이유야 어떻든 지난 30년 동안 한국 시민사회를 대표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투쟁해온 단체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안타깝다. 

이번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정의연이라는 단체의 성격과 운용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정의연은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로 발족한 뒤 지금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을 밝히고 그들의 인권을 대변해왔다.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데 머물지 않고 위안부 문제를 전시 성폭력 문제, 보편적 여성인권 문제로 확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수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노력이 더해진 결과이지만 정의연 활동가들의 노력이 중심이 된 것이 사실이다. 사회운동 단체는 특정 피해자들의 생활 안정을 주목적으로 하는 인도적 지원단체와 다르다. 정의연으로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대한 직접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국제적 관심을 제고하는 활동 등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실제 정의연의 피해자 지원사업에는 후원금 전달뿐 아니라 건강치료지원, 인권·명예회복 활동 지원, 정기방문, 쉼터 운영 등 다양하다. 그 밖에 연구·조사, 해외홍보 등 활동들이 전개돼 왔다. 이런 활동에 대한 이 할머니와 정의연의 이해가 엇갈린 게 이번 사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연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제기된 의문이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의연은 이용수 할머니가 제기한 의문을 푸는 데 더 노력해야 한다. 정의연에서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있었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이 단체를 오래 이끌어온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당선인인 윤미향 전 이사장이 직접 나서야 한다. 하지만 본질을 벗어난 문제 제기는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위안부 운동’의 대의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 사태가 조속히 마무리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외면하는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운동이 계속돼야 한다. ‘위안부 운동’이 이번 갈등을 딛고 보다 굳건해지기를 시민들은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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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이태원 클럽 관련 코로나19 확진자가 80명을 넘어섰다. 신규 발생이 이틀 연속 30명을 넘으면서 사태가 한 달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서울 집단감염으로는 100명 넘은 확진자가 발생한 구로구 콜센터에 이어 두번째 규모다. 그러나 이태원 클럽 확진자는 거주지가 수도권을 넘어 충북·부산·제주까지 퍼져 있어 전국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직장인, 간호사, 군인 등 직업군도 다양해 2차 집단감염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상황은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이태원 클럽 방문자는 대부분 20~30대들이다. 젊은층 확진자는 감염력이 크다. 또 무증상 감염이 많아 ‘조용한 전파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조기 진단과 치료가 절실한 이유다. 현재까지 확인된 이태원 소재 클럽 방문자는 5500여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연락이 닿아 당국이 방역 조치한 방문자는 2000여명에 불과하다. 방역당국은 경찰청·통신업체의 도움을 받아 3000명이 넘는 미확인 방문자의 신상 파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경찰의 자택 추적이나 통신기지 조회로 클럽 방문자를 찾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방문자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려되는 것은 20~30대의 감염병에 대한 안이한 인식이다. 유명순 서울대 교수 연구팀의 ‘코로나19 인식조사’에 따르면, 20~30대 젊은층은 “감염은 운”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감염이 불러올 피해를 심각하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이태원발 감염 비상이 선포된 지난 주말에도 서울 강남과 홍대 일대의 포장마차와 라운지바 등 술집은 젊은이들로 북적댔다. 유흥업소 집합금지 명령 대상에서 제외된 지방 도시들의 클럽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건강한 젊은이는 코로나19에 감염돼도 치명률 등 위험은 낮다. 그러나 활동성이 강한 확진자가 끼치는 피해는 다른 연령층보다 훨씬 크다. 클럽 방문 확진자의 가족과 지인, 동료 등 2차 감염자는 20명이 넘는다. 이 중에는 손자와 식사한 80대 할머니도 있다. 

이태원 클럽 집단감염으로 코로나19는 재확산 기로에 놓이게 됐다. 최선의 확산 방지책은 클럽 방문자의 자발적인 신고와 검사이다. 방문자는 이태원 유흥시설 방문 사실만 알리면 무료 검사를 받을 수 있다. 철저한 익명검사제로 개인 신상정보 노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코로나19 차단을 위해 ‘숨어있는’ 젊은이들이 나서야 한다. ‘쉬쉬’하고 망설이는 순간, 그들은 조용한 전파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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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태원 클럽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집단 감염으로 학교들의 등교 재연기가 발표된 11일 오후 서울 성동구 성수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 책상이 간격을 유지한 채 배치돼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오는 13일로 예정된 고교 3학년들의 등교개학을 목전에 두고 또다시 모든 학년의 등교 수업을 일주일씩 연기하기로 했다. 고교 3학년은 오는 20일로, 다음달 1일이었던 중1·초5~6학년의 등교일은 6월8일로 늦춰진다. 서울 이태원의 클럽에서 시작된 코로나19 확산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지역 감염 우려가 높아진 데 따른 것이다. 재연기는 불가피한 조치이지만 개학 이후 빠듯한 입시 준비에 박차를 가하려던 고3생들로서는 당혹스러울 것이다. 당국은 조속히 재연기에 따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시민 건강이 최우선인 만큼 교육부의 개학 연기 조치에는 무리가 없다. 더구나 이날 방역당국은 클럽발 감염 확진자가 13일까지 급증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고, 고3 학생들의 등교에 우려를 표했다. 서울, 경기, 충북 교육감 등도 고3 개학을 최소 일주일 늦출 것을 제안했다. 지난 5일까지의 연휴기간 시민들의 이동이 늘어나며 감염병 확산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지난 4일 교육부가 잠복기 2주일도 지나기 전에 고3 학생들의 등교 결정을 내린 것을 두고 이미 성급하다는 지적이 무성했다. 학생들의 건강권을 얘기하면서도 ‘입시가 방역을 이긴 결정’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던 터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등교개학은 학생들의 안전이 담보된 뒤에 최대한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교육청과 각 학교는 우선 개학 연기에 따른 온라인수업 연장과 등교수업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교육당국의 기대대로 오는 20일 고3 등교수업이 제대로 시작될지도 불투명하다. 이태원 집단 감염을 넘어서도 문제는 남는다. 방역당국은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는 완화와 유행을 반복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교육당국은 지난 두 달 넘게 계속 상황에 밀려 개학을 연기해왔다. 이제는 향후 돌발 상황과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 더 이상 땜질식 대응으로 학교현장에 혼란을 가중시켜선 안 된다. 감염병 상황이 예측 불가능한 탓도 있지만 교육당국의 결정이 너무 늦고 불투명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기존의 학사일정에 억지로 기간만 맞춰, 문제가 없다는 말만 해선 안 된다. 잦은 학사일정 변경 등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 고3 수험생들에 제대로 된 대책이 필요하다. 교육부와 교육청, 학교가 협력해 남은 1학기 교육 과정과 시험 일정, 평가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조속히 내놔야 한다. 교육당국이 중심을 잡아야 현장의 혼란을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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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을 언어의 형태로 전달할 때 종종 소통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코끼리를 묘사했지만 하마로 알아들으면 방법이 없다. 이런 일은 과학적 발견의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1999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발사한 화성 탐사선이 화성 궤도에서 추락했다. 조사 결과 제작사인 록히드 마틴 팀은 구 영국식 단위를 사용했지만, 발사를 맡은 NASA 팀은 미터 단위를 사용한 탓이었다. 50마일(80㎞)이라고 했는데 50㎞로 잘못 들은 것이다. 소통의 과정에서 혼동의 여지가 없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다.

과학적 개념이 문화적 차이나 언어적 차이로 다르게 전달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물리학이나 화학의 주요 발견은 수학 방정식의 형태로 표현된다. 읽는 사람이 기본적인 수학적 훈련을 받았다면, 인종이나 언어 또는 문화와 관계없이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그래서 수학은 과학의 언어라고 불리는데, 모든 문화적 차이를 넘는 보편 언어의 성격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갈릴레오는 “자연이란 책은 수학이란 언어로 쓰여있다”고 말했다. 

수학의 언어적 측면을 깊이 파고든 대표적인 사람으로 버트런드 러셀을 들 수 있다.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까닭에 그를 철학자 또는 작가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러셀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수학 교수를 지내며 비유클리드 기하학 논문을 썼다. 수학을 논리학과 동일시해서, 모든 수학적 개념은 기호논리학으로 정의되고 증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칸토르 집합론의 한계를 넘기 위해 러셀 패러독스를 창안했고, 화이트헤드와 함께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를 저술했다. 20세기의 저명한 언어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박사과정 제자였는데, 러셀 자신이 이 천재 제자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러셀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평화운동을 벌이다 1916년 케임브리지 교수직에서 해임된 뒤에 나중에 복직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평화 활동 및 저술 활동을 왕성히 벌여서 노벨상까지 받게 됐으니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움직이지 않는 점과 선을 다루는 전통적인 유클리드 기하는 정적인 세계관을 대변하며, 2000년 동안 유럽에서 과학의 언어 역할을 했다. 하지만 17세기에 천체의 운동을 다루는 과정에서 출현한 미적분학은 새로운 동적 세계관의 신천지를 열었다. 움직이는 세계를 다루는 언어가 된 것이다. 물체의 운동을 다루는 뉴턴 방정식이나 전기와 자기의 움직임을 다루는 맥스웰 방정식, 양자역학의 슈뢰딩거 방정식은 모두 미적분의 언어로 표현된 인간 지성의 대표작이다. 미적분이라는 새로운 언어가 근대과학의 발전을 촉발했듯이, 새 언어는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셜록 홈스의 논리적 수사가 수학의 언어적 성격을 보여주는 거라면, 비약적으로 발전한 요즘 과학수사(CSI)는 수학의 과학기술적 측면을 보여준다. 한동안 유행하던 미국 드라마인 <넘버스>는 2005년부터 5년 넘게 여섯 시즌 방영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인기 드라마였다. FBI 요원이 수학 교수인 동생의 도움을 받아 어려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 드라마를 위해 수학 계산 소프트웨어 회사인 울프람은 수학자 자문팀을 구성하여 협조했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 사용된 수식이나 영상은 대강 써 내려간 게 없다. 흐릿한 영상을 컴퓨터로 처리해서 선명한 영상을 얻는 장면은, 부족한 데이터로부터 편미분방정식을 사용한 역문제로 영상을 복원해내는 수학 이론의 쓰임새를 보여준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미 정립된 공학지식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적 형태의 문제가 나타나는데, 알려진 수학적 지식을 일상적으로 응용하는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기도 한다. 이런 문제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요하고 종종 새로운 수학을 창조하기도 한다. 마치 천체의 운동이 뉴턴을 자극한 것처럼.

<박형주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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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대통령 담화로 윤곽이 드러난, 코로나19 이후에 대한 정부의 구상은 ‘디지털화’와 ‘전 국민 고용보험’으로 요약된다. 코로나19 극복에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와 높은 시민의식이 강조되었음을 상기해보면, 그 내용은 지나치게 경제·산업 일변도였다. ‘사회적’ 측면이 증발했다는 것이다.

우선 ‘뉴딜’의 관점이 경제주의적이다. 그것은 1930년대 자본주의에서 초래된 위기가 경제공황 하나로만 알려졌던 시대의 산물이다. 코로나19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가 도래했다고 한다.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코로나19라는 생물학적 재난 역시 현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위기다. 그렇다면 코로나19와 현대 자본주의의 관계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한국판 뉴딜’에서 규정하는 코로나19는 비대면 산업의 확충(‘디지털화’)을 요구하는 경제적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세계화된 시장경제에 기초한 삶이 경제공황 외에도 생물학적 참사를 유발했다는 사실 자체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인수공통 감염병의 잦은 발병뿐만 아니라 그동안 수없이 발생한 가축 전염병과도 관련하여, 사회 또는 산업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정책의 방향 전환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런 분야에서도 일자리 창출을 계획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국내에서 코로나19는 신천지와 같은 시민사회 사각지대의 존재, 집단적 돌봄 및 요양 기관의 취약성, 아파도 출근해야 하는 권위주의 조직문화,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맞벌이 부부의 자녀 교육 및 돌봄 문제, 사립유치원의 이용료 반환 문제, 성소수자에 대한 언론의 노이즈마케팅,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둔감함 등 여러 사회 문제들을 음지에서 꺼내 부각시켰다. 이것은 사회에서 숨겨지고 억압된 문제를 시민사회의 참여를 통해 해결하는 문제, 돌봄과 요양 부문에 대한 총체적 재점검 및 인력·지원 강화 문제, 노동과 정보에서의 인권 강화, 자녀 돌봄 및 아동교육의 질적 강화 등에 대한 고민을 숙고하도록 한다. 이런 사회적 측면에서도 일자리 창출이 논의되어야 한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에는 현대사회와 코로나19 간의 또 다른 관계를 드러냈다. 마스크나 의료용품 생산 및 제조업 부품산업의 외주화로 균형을 잃은 경제구조, 신자유주의적 공공의료 축소와 공공의료보험의 미비, 만성화한 간호 및 돌봄 인력 부족 등으로 야기된 의료체계 붕괴의 공포, 외국인 노동자들의 주변화한 삶과 열악한 노동 및 주거 조건 등은 감염병에 대한 ‘선진국’의 취약성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키웠다. 특히 세계 최고의 의료 지식 및 정보기술(IT) 전문기업이 포진한 미국이 현재 최대 위험국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기술과 산업 발전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미국과 유럽의 사례가 말해주는 것은, 디지털화 등의 ‘기술적’ 해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그것이 어떤 사회관계 속에 구현되는가이다. 특히 공공성과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기술 발전의 성과를 판가름한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한국판 뉴딜’이 공공의료나 교육 및 돌봄의 공공성 확대를 통해서만 미래지향적일 수 있음을, 그리고 사회간접자본(SOC)이 디지털화뿐 아니라 돌봄과 사회적·생태적 안전 분야에도 확충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코로나19 난국 극복에 기여한 배달산업이 만들어낸 쓰레기 문제 해결 등 정부가 연구하고 지원해야 할 분야는 많다.

<홍찬숙 | 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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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와 더불어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동안 자리 잡은 ‘거리 두기’ ‘록다운’ ‘셧다운’과 같은 단어를 들을 때면 나는 가끔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어릴 적에 들었던 나병 환자를 수용했던 소록도를 둘러싼 괴기한 이야기나 대학 시절 친구들과 시간 가는지 모르고 어울리다가 야간통금에 발이 묶인 경험도 떠올리게 된다. 작년에 이주해서 사는 이곳 알가르브에서 마주치는 상대방이 혹시 코로나19에 감염되었는지 몰라 잠시 불안하게 되고 매일 아침 산책하는 해변도 통금에 걸렸기 때문에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런 중에 한국에서 얼마 전부터 영어에서 직역된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 대신 ‘생활 속 거리 두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권장하는 ‘물리적’ 거리 두기, 아니면 그냥 거리 두기라는 단어를 내가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 원래 사회적 거리라는 개념은 공간사회학에서 말하는 계급이나 계층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지멜은 물리적 공간과 구별되는 사회화의 형식을 의미하는 사회적 공간 개념을 제시했다. 부의 정도, 신분이나 취향 등에 따라 서로 가까이 어울리거나 아니면 서로 소원하거나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으로 이해되는 사회적 거리는 따라서 코로나19 예방수칙으로 강조되는 물리적 거리 두기와는 다르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제일 많이 등장한 단어는 역시 ‘격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백신이나 치료약이 없는 상황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주위 사람을 감염하는 것을 먼저 차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염병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병의 하나인 나병에 걸린 환자들을 이스라엘 성 밖으로 내보내 이들의 병이 치유될 때까지 돌아올 수 없게 했다는 &lt;모세서&gt;의 이야기나 조선 시대 출막(出幕)이란 임시 시설을 성 밖에 두고 감염자를 관리했다는 &lt;실록&gt;의 기록도 격리의 중요성을 증언한다. 중세 유럽에서 급속히 퍼진 페스트를 막기 위해 항구도시들은 외국 배가 들어오면 40일 동안 항구 밖에 머물게 해서 환자가 발생하지 않을 때만 입항이 허락되는 조처를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탈리아어로 숫자 40(콰란티네)이 격리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환자의 격리 문제는 단순히 치료나 예방의학적 논의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장기간에 걸친 격리로 환자와 그의 가족이 겪는 정신적인 타격은 말할 것도 없고, 대량감염을 막기 위한 대대적인 격리와 봉쇄조처로 사회생활이 전반적으로 마비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거리 두기를 포함한 일련의 강력한 통제를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이의 장기화에 따른 불편도 생겼으며 거주와 이전의 기본적인 자유가 침해받고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회 성원의 건강과 생명이 우선이라는 주장에 대해 마비된 경제가 먼저 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반발도 역시 강하다. 이 문제의 해결은 결국 의학적인 판단을 함께 고려한 신중한 정치적인 결단에 달려 있다. 코로나19 대책을 설명하는 전문가의 의견이 비록 생명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큰 설득력을 얻지만 아직 자신의 영역을 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우리의 생활세계 모습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이른바 ‘홈오피스’나 ‘가상오피스’ 그리고 ‘온라인수업’의 도입 등으로 직장과 학교생활도 화상을 통해서나 가상공간에서 가능하다는 새로운 경험이 생겼다. 우리의 몸이 움직이는 실제적 공간이 디지털 공간으로 변화하는 데서 생기는 장점도 있지만 문제점도 많다. 홈오피스나 가상오피스 안에서 일과 삶을 유연하게 결합할 수 있지만 직장과 사생활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며 사회적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소외감도 크다. 온라인수업도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의 관계 단절도 문제지만 학부모의 경제사정이나 주거환경에 따라 학습효과에도 많은 차이가 생긴다.

가상공간 속의 개인은 몸에만 갇혀 있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수시로 변화하면서 확장할 수 있기에 새로운 공동체의 적극적 성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가상공동체가 개개인의 음성, 체취와 체온 등을 담은 몸을 매개로 해 지금까지 이루어진 공동체를 쉽게 대신할 수는 없다. ‘몸은 이 세계에 내린 닻이다’라는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지적처럼 몸이 함께하지 못하는 세계는 역시 공허할 뿐이다.

매년 5월1일 유럽의 주요 도시를 돌며 연주하는 ‘베를린 필하모니’가 올해는 베를린에서 청중 없는 연주회를 가졌다. 지휘자를 포함해 15명만이 동시에 무대에 설 수 있는 조건 때문에 실내악 연주 홀에서 열려 온라인으로 중계됐다. 나의 귀국 문제를 다루었던 다큐멘터리영화 <경계도시 1>의 배경 음악인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4번도 연주되었다. 넓은 무대 위에 서로 멀리 떨어져 연주하는 단원과 청중의 박수와 환호 소리도 없는 텅 빈 객석을 향해 인사하는 지휘자의 모습에서 외로움이 느껴졌다.

코로나19 사태로 일찍부터 심한 충격에 휩싸인 밀라노 시민들이 봉쇄조처로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날이 저물면 자주 발코니에 나가 서로 인사를 나누며 1997년 아카데미상을 받았던 로베르토 베니니의 비극적 희극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제곡을 합창한다. “삶이 아름다워서 우리는 슬픔을 잊을 수 있네/ 삶이 아름다워서 우리는 더욱더 밝은 날을 생각하네/ 막을 내리기 전에 당신이 해야 할 또 다른 놀이가 있지/ 삶은 그렇게 아름다운 거야”로 끝나는 노래는 봉쇄된 공간 속으로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다. 닫힌 공간이 따뜻한 연대 속에서 열린 공간으로 변하는 모습이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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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영상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되고 있다. 한계는 오로지 우리의 상상력에 달렸다. 만들어진 영상은 지구 어디로든 순식간에 전달된다. 보고 싶은 모든 영화나 드라마를 어디로든 누구에게든 전송하는 기술이 10여년 전에도 있었지만, 그런 서비스를 할 수 있는 시스템도 기업도 없었다. 저작권 침해를 일삼는 웹하드 업체들이 난립하면서, 한국의 온라인 콘텐츠 수급 시스템이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한국에 넷플릭스가 상륙하면서 그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영화와 드라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꿈이 현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막상 넷플릭스에 가입하면 기대한 만큼은 아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생각만큼 볼거리가 풍성하지는 않다. 바쁠 때는 몇 달간 시청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나는 1만원 남짓의 월 회비조차 아까워 넷플릭스에서 탈퇴하기도 했다. 영화 마니아들은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기존 영화 중에서 볼만한 영화는 대부분 관람한 상태였다. 오래전에 제작된 외국 드라마나 넷플릭스가 새로 제작하는 드라마 중에서 취향을 저격할 정도의 작품을 찾는 것은 그렇게 용이하지도 않았다. 내 경우에는 몇 회 정도 시청하다가 그만두기 일쑤였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는 걸까. 

소셜미디어에서 최근에 널리 유포된 ‘넷플릭스 증후군’이라는 말에 공감한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이 용어는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영화와 드라마 중에서 무엇을 볼지 찾아보다가, 막상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는 상황”을 가리킨다고 한다. 콘텐츠가 방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에 꼭 맞는 콘텐츠를 찾는 게 실제로 그리 쉽지 않다. 어떤 때에는 중저가 상품을 파는 백화점에 물건을 사러 온 손님 같은 심정이 된다. 수많은 물건이 진열되어 있지만, 비슷비슷한 것들 속에서 확실히 마음을 끄는 것은 별로 없다. 여러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다채로운 변종들이 즐비하지만,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새롭지는 않은 것이다. 마치 퍼스널 컴퓨터가 그런 것처럼 스토리텔링에 더 이상 커다란 혁신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 코로나19 사태는 넷플릭스에 새로운 날개를 달아주었다. 외출이 줄어들고 극장에 가기도 어려우니까, 자연히 넷플릭스에 매달리는 시간이 늘어난다. 코로나19 사태로 가장 큰 수혜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위세는 영화 &lt;사냥의 시간&gt; 사건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극장상영이 어려워진 &lt;사냥의 시간&gt;을 넷플릭스라는 구원투수가 전격적으로 구매한 것이다. 원래 이 영화의 해외배급을 맡은 다른 회사가 이미 체결된 여러 해외배급계약과 어긋난다며 문제를 제기했으나, 며칠 후 갈등은 봉합되었다. 코로나19로 사면초가에 빠졌던 &lt;사냥의 시간&gt;은 넷플릭스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극장에서 상영하지 못하는 영화를 거액에 사들여 즉시 전 세계에 유통시키고, 그 흥행결과에는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다른 회사가 또 있을까. 이보다 더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위력을 뚜렷하게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넷플릭스가 주도하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는 미래 영상산업의 총아가 될 것인가. 가까운 미래의 장밋빛 전망에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다. 남은 것은 이 서비스가 우리가 보고 싶은 콘텐츠를 얼마나 잘 제작하여 제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직까지 콘텐츠의 수준은 환상적이지 않다. 앞으로 콘텐츠 업계의 거인인 디즈니와 세계 최고의 기업인 애플이 본격적으로 가세한다면 콘텐츠의 질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주목된다. 

한국 영상산업의 장래는 어떨까.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사는 돈이 마르지 않는 투자자의 투자를 받고, 전 세계적인 유통망에 접근할 기회를 얻었다.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와 드라마에 투자하던 기존의 기업과 극장은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다. 현재 흐름을 보면 한국 영상산업에 엄청난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CJ와 같은 선두 기업은 적어도 아시아 콘텐츠 시장에서는 넷플릭스와 같은 지위를 차지하고 싶을지 모른다.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는 명실상부하게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을 것인가. 그 성패는 기술이나 네트워크보다는 철학과 감성 그리고 스토리텔링 능력이 결정할 것이다. 10년 후 세계영상산업의 지도가 어떻게 그려질지, 우리는 안방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세상의 모든 영화와 드라마를 넉넉히 즐기고 있을지 무척 궁금하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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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때 친한 친구가 있었다. 친구 손을 잡고 인기 많던 만화영화 이야기를 하며 친구네 집에 가는 것이 그 시절 나의 일상이었다. 가끔 친구 어머니는 라면을 끓여주었고, 그럴 때면 친구 오빠와 마주 앉아 먹었다. 오빠는 6학년이었다. 그런데도 젓가락질을 잘 못했다. 내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재촉하지 않고 말을 들어주는 것이 그와 대화하는 방법임을 알았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모두 그 오빠를 ‘특수’라고 불렀다. ‘특수’는 특수학급에서 따로 교육을 받는 장애 학우를 말하는 나쁜 은어였다. 오빠는 발달장애 학우였다.

2학년이 되었다. 오빠는 졸업했지만, 또 다른 특수학급의 친구들이 학교에 여전히 남아 나와 같은 교실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어느새 특수학급 친구들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관내에서 가장 큰 중학교에 다녔지만 특수학급은 없었다. 고등학교는 시험을 봐서 들어갔다. 발달장애 학우들과 마주칠 일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세계는 그렇게 작아졌다.

흔히들 대학에 가면 세상이 넓어진다고 한다. ‘넓어진다’는 말에는 속임수가 있다. 대학에 가니 새롭게 보이는 건 있더라. 비슷한 수능 성적을 가진 친구들은 비슷한 목표를 가진다. 신기하게도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가정환경, 교육환경, 경제환경도 비슷했다. 부모님의 소득, 부모님이 가진 자산에 따라 만나는 무리가 달라졌다. 다른 삶을 볼 일이 없었다. 빈곤, 장애, 제도 밖 삶. 모두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나의 세계는 더 작아졌다.

며칠 전 코로나19가 재확산하며 또다시 혐오의 물결이 일고 있다. 인천시는 한 인권단체에 인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의 명단을 달라는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여기서 누군가의 ‘작은 세계’를 본다. 팬데믹을 우려한 대응이었을 거다. 그러나 이 조치는 과한 것을 넘어 아예 잘못됐다. 클럽 출입자와 퀴어축제 조직위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인천시가 한 것은 방역이 아니라, 성소수자를 관리가 필요한 집단으로 낙인찍은 차별적 행위다. 아마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왜 소수자에 대해 무지할까. 초등학교 2학년이 되고 친구와 발달장애를 가진 친구의 오빠 모두 동네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부끄럽지만, 이 글을 쓰면서 처음 그 이유를 고민해봤다. 원인은 법에 있었다.       

특수교육법은 각 학교의 특수교육 대상자 수에 따라 학교에 특수학급을 설치하도록 한다. 발달장애 자녀를 가진 부모는 특수학급이 없는 가까운 학교에 특수학급이 설치되길 기다리는 것보다 특수학급이 있는 먼 학교를 찾는 게 더 쉽다. 친구 오빠를 비롯한 모든 장애인 친구들은 특수학급이 설치된 중학교가 있는 지역으로 이사했을지 모른다. 비장애인은 쉽고 당연하게 얻는 교육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을 바꿔야만 얻을 수 있는 투쟁의 대상이다.

어쩌면 우리는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배제와 단절을 학습해왔을지도 모른다. 특수학급이 설치된 초등학교에서 우리는 ‘특수’라고 말하면 선생님께 혼나고, 그 단어 사용을 금지당하며 어떤 행위가 혐오인지 배웠다. 같이 배식을 받고 함께 교실을 청소하면서, 어디까지가 도움이고 어디부터 시혜인지 배웠다. 그러나 진학을 거듭하며 체득한 건 옆의 친구와 경쟁하는 법이었다. 다름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 없었다. 다름과 단절하는 것이 살아남는 법이었다. 혐오의 세상은 이렇게 견고해진다.

무지는 “나만 편하면 상관없다”는, 이기적인 무관심의 동의어다. 그래서 무지는 혐오의 변명이 되지 못한다. 점점 더 견고해지는 혐오 속에서 누군가의 일상은 위태해진다. 빈곤, 장애, 성소수자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정책결정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얼마나 넓은 세계 속에 살고 있을까. 우리의 작은 세계는 또 누구의 삶을 위협할까. 이 고민이 당사자 정치와 공감의 중요성을 외치는 이유다.

<조희원 청년참여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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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스승의 날’은 충남 강경여자중·고등학교 청소년적십자단 단원들이 병중에 있거나 퇴직한 교사들을 위문하기 위해 찾아가기 시작한 데서 유래됐다. 처음에는 5월24일이 ‘은사의 날’이었는데, 1965년 교직단체 등이 주관하면서 세종대왕 탄일인 5월15일로 변경했다. 백성을 사랑한 세종대왕을 우리 민족의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생활하다 보면 은사의 정년퇴임과 같은 일을 자주 접한다. 회사의 선배나 후배의 정년퇴임도 그렇다. 이때 축하한다고 해야 할지, 아쉽다고 해야 할지 참 모호하다. 이와 관련해 국립국어원은 “정년퇴임을 하는 분께 하는 적당한 인사말은 축하의 뜻을 담은 말이 좋다”고 밝혔다. 그동안의 공적을 기리고, 지난 삶이 알찼던 것처럼 정년 뒤의 삶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축의금 봉투에는 ‘(그동안의) 공적을 기립니다’ 또는 ‘근축(謹祝)’ ‘송공(頌功)’ 가운데 적절히 골라 쓰면 된다.

한편 스승 또는 윗사람이 남자인 경우 그 부인을 부르는 말은 ‘사모님’이고, 스승 또는 윗사람이 여자라면 그의 남편은 ‘사부님’이 바른 호칭이다.

<엄민용 스포츠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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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사들은 매일 발열 체크를 하고 빈 교실로 출근해 온라인수업 일정을 소화한다. 점심은 집에서 도시락을 싸 오거나 음식을 배달시켜 혼자 먹는다. 오후엔 교실 소독, 수업 준비, 가정과 연락, 공문 처리, 업무회의를 한다. 회의는 비대면으로 하는데 협의 사항이 많을 땐 모여서 멀찍이 떨어져서 한다. 등교하면 많은 아이들과 가까이 지낼 교사들이라 더욱 감염에 주의하고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에 노력한다. 

이전부터 학교는 새로운 국면의 연속이었다. 5차례 개학이 연기됐고 온라인개학이 결정되었다. 교사들은 스마트 기기 활용법을 서로 가르쳐주고 공유와 협업으로 함께 준비했다. 온라인수업은 초기에 서버 증설, 대리 출석, 저작권 등의 문제가 있었고 취약계층 학습 보완과 강의식 수업의 한계가 남았지만 지금은 안정적으로 가고 있다.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학교는 등교수업이란, 또 다른 가보지 않은 길을 앞두고 있다. 교육부와 교육청 매뉴얼은 전체를 포괄하는 지침이므로 일선에선 학교 특성과 지역 사정에 맞춘 구체적 기준이 필요하다. 온라인개학으로 스마트 기기를 기반으로 한 미래 학교를 초보적 단계에서 모두가 체험해봤다면 등교수업은 학교 자치를 앞당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66㎡ 교실에서 20~30명의 아이들이 두 팔 간격을 유지하며 생활할 수 있을까? 집에서 마스크 없이 지낸 아이들이 교실에서 마스크를 종일 착용한 채 공부할 수 있을까? 학생 간 상호작용 없이 지식 전달 방식으로 효과적인 수업이 될까? 발열 학생을 가정에 인계할 때 연락이 안 되면 어떻게 할까? 정답이 없는 질문들에 “예”를 남발하는 무책임한 긍정보다 “아니요”라는 책임 있는 부정을 존중하며 고심을 거듭해 제3의 대안을 만들어가고 있다.

백신이 개발되고 충분한 백신 수량이 확보될 때까지 비상체제는 계속된다고 한다. 그때까지 학교생활은 수업보다 방역이 우선될 것이고 등교수업도 언제든 온라인으로 전환할 태세로 운영될 것이다. 교사, 학부모, 학생 모두 방역의 긴장을 안고 성실하게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 더욱 협력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지난 수업에서 재난에 대비한 생존 배낭을 꾸린다면 무엇을 담을 것인가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침낭, 구급상자, 비상식량, 가족사진 등을 꼽았다. 만약 코로나19에 대한 생존 배낭이 있다면 감사, 시민의식, 용기, 인내를 담아야 할 것 같다. 방역당국과 의료진에 대한 감사, 마스크 사재기를 하지 않고 생활방역에 참여하는 시민의식, 불편을 감수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용기와 인내 말이다.

레오 리오니의 <헤엄이(Swimmy)>를 보면 큰 물고기의 공격에 두려워하던 작은 물고기들이 모두 모여 커다란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위험을 극복한다. 시련을 이기는 가장 큰 힘은 ‘연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책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기에 사회적 연대의 힘을 발휘하는 과정이 의미 있게 남을 것이다.

<위지영 서울 신남성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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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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