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 다산과 아암의 길에 있는 다산초당. 강윤중 기자


“남이 어려울 때

자기는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의 오만한 근성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벼운 농담일망정

‘나는 전번에 이리저리 도와주었는데

저들은 이렇게 하는구나!’ 하는 소리를 한마디라도

입 밖에 내뱉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말이 한 번이라도

입 밖에 나오면 지난날 쌓아놓은 공덕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듯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 속의 이 말을

하루에 한 번씩 되새김하면

다산 초당의 청정한 바람 소리도

가까이 들려오는 기쁨


기껏 좋은 일 선한 일 하고도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여

향기를 달아나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나라고 고백하는 사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푸른 기침 소리


- 시집 <희망은 깨어있네> 중에서


요즘은 그냥 단순한 소풍보다는 특별한 장소를 정해 공부도 하고 자연도 즐기는 문화답사나 성지순례가 더 기억에 남고 뜻깊은 나들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몇년 전 우리 수녀님들과 같이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에 다녀온 후엔 유배지에서 수많은 글을 남긴 정약용에게 더욱 관심을 갖고 그의 저서들을 구해 읽었는데 특히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살면 살수록 수도생활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겸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된 겸손이란 자신이 어떤 선한 일을 하고도 요란하게 생색을 내거나 보답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성경에 나오는 착한 종과 같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 17.7) 하는 담백한 태도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살다보면 자신의 어떤 수고나 선행에 대해 누가 몰라주면 서운해하고 그걸 마음속에만 담아두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미성숙한 표현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가까운 이들에겐 그 서운함을 지나치게 솔직하게 말하고 나서 스스로 무안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벼운 농담일망정/ 나는 전번에 이리저리 도와주었는데/ 저들은 이렇게 하는구나! 하는 소리를 한마디라도/ 입 밖에 내뱉어서는 안 된다”

다산이 아들에게 경고하는 이 말이 오늘 따라 깊이 가슴에 와 박힙니다. 지난날엔 저도 종종 습관적으로 ‘내가 평소에 수녀님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챙기는 것에 비하면 나는 별로 챙김을 받지 못해 서운할 때가 있어요’라고 말을 했다면 요즘은 설령 서운하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조금씩 하다보니 평화가 찾아옵니다. 때로 동료들이 “수녀님은 매번 섬세하게 우릴 챙기는 데 반해서 우린 그렇지 못해 죄송해요!”라고 말을 하면 얼른 “사람마다 사랑의 표현방식이 다르니까요. 

저는 사소한 거라도 드릴 게 있고 챙기는 게 취미니까 당연히 그리하는 것이고 수녀님들은 그 대신 기도로 무형의 선물을 주시니 더 귀한 거지요”라고 표현을 함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편안하게 하고자 노력합니다.

가정에서든 수도원에서든 상대에게 무엇을 바라고 하는 비교급의 말은 종종 좋은 관계를 그르치는 걸림돌이 됩니다. 이번에 코로나19 사태로 TV에서 가장 자주 만나게 된 질병관리본부장 정은경님이 막중한 업무로 인해 ‘잠은 자느냐?’는 질문을 받고 어떤 푸념이나 불평 섞인 부정적 답변보다는 ‘한 시간 이상은 잔다’고 대답하는 걸 보고 외신들도 ‘숨은 영웅’으로 표현하며 감동했다지요. 그 특별한 소임이 힘든 게 사실인데도 늘 차분한 음성으로 상황보고를 하는 그 모습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충직한 종의 모습이 떠올라 저 역시 울컥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 발 뒤로 물러나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의 소중함을 새롭게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좀 더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면 이 또한 코로나19가 준 교훈적 선물이 아닐는지요. 

남이 잘한 것에 대해서는 ‘덕분입니다’ 하고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제 탓입니다’ 하고 선한 일을 했을 때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지요’ 하는 그런 마음으로 다산 정약용의 말을 명심하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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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샤넬이 가격 인상을 예고한 가운데 13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본점 명품관 앞에 고객들이 줄을 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8월 미국의 회원제 할인마트인 코스트코가 중국 상하이에 1호 매장을 열었다. 개장을 기다리던 중국 고객들은 전동 셔터가 올라가기 시작하자 매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매장 곳곳에서는 고객들이 서로 먼저 물건을 사겠다며 몸싸움을 벌였다. 코스트코 측은 결국 개점 4시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또 10여년 전 아이폰이 중국 시장에서 신상품을 선보일 때면 베이징과 상하이의 주요 애플스토어 매장에는 전날부터 수천명이 줄을 서곤 했다. 판매를 늦게 시작했다가 계란 세례를 받는 매장도 속출했다.

요 며칠 사이 한국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관찰된다. ‘샤넬 오픈런’이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샤넬이 14일부터 가격을 인상하겠다고 예고하자 전국 유명 백화점에서는 개장 전부터 줄을 섰다가 문이 열리면 매장으로 뛰어들어가는 이른바 ‘오픈런’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의 한 백화점 매장에서는 가방을 사려 3시간 넘게 기다렸고, 부산에서는 100여명의 고객이 줄을 섰다. 최대 1000만원에 달하는 인기 상품들은 아예 살 수 없다고 한다. 

오픈런은 명품업체가 가격을 올릴 때 종종 목격된다. 명품 소비자들은 “지금 사는 게 가장 싸다”고 말한다. ‘샤테크’(샤넬+재테크)라는 말도 나온다. 과시적 소비로 인해 가격이 높아질수록 수요가 증가하는 ‘베블런 효과’도 작용한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억눌렸던 고소득층의 소비가 분출하는 ‘보복소비’로 수요가 증가했다는 평가다. 이를테면 해외여행을 못 간 사람들이 돈을 명품 구입에 쓰고 있다는 식이다. 주요 백화점 명품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 이상 증가했다.

돈을 어디에 쓸지는 가진 사람의 자유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수백만원짜리 가방을 먼저 사겠다며 내달리는 모습은 불편하다. 지난달 구직급여 지급액은 9933억원이었다. 역대 최대 규모다. 전염병도 경제위기도 가난하고 약한 계층을 먼저 노린다. 한쪽에는 생계의 벼랑에 몰려 긴급재난지원금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더 비싼 물건을 사려고 뛰어다니는 이들이 있다. 양극화 심화는 코로나19 시대 한국 사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샤넬 오픈런이 씁쓸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박영환 논설위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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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병 검사관이 청년에게 물었다.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피식 웃으며 청년이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은 주저가 됩니다만 친구라면 당장 죽일 수 있습니다.” 웃자고 하는 얘기. 나쁜 놈의 친구들이 꼭 있다. 그 친구 따라다니면 만날 고생길. 가장 나쁜 친구가 어깨에 앉아 있는 귀신놈이다. 언젠가 스타강사 김창옥씨가 이런 말을 하더군. “결정적인 순간에 그 귀신 같은 존재가 나한테 말을 합니다. ‘봐봐. 사람들이 너를 그렇게 보잖아. 봐봐. 저 사람들이 널 무시하고 있는 거야. 봐봐. 너 같은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쓰여 있어, 그러니까 넌 거기 가면 안 돼.’ 이런 말들이 들려와요. 귀신이 어깨에 앉아서 하는 소리죠…. 안 좋은 기운을 가지면, 안 좋은 기운이 계속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온갖 귀신이 붙어서 삶이 무거워지죠.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답게 살아야죠. 헛것 보고 헛것 들으면서 살지 말아야죠.” 여기서 말하는 귀신이란, 내 안의 또 다른 나일 것이다.

그림쟁이 벗들이랑 코로나 퇴치 게릴라 전시를 가졌는데, 그냥 길거리에다 띄엄띄엄 펼쳐놓은 퍼포먼스. 그중 가장 잘 팔려나간 게 코로나 퇴치 부적이더군. 나도 마수걸이로 몇 장 사드렸다. 침실 머리맡에 걸려 있는 십자가 곁에다가 고이 붙여놓았다. 재밌자고 하는 얘기.

부적으로 해결될 일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꼬인 인생이 부적으로 술술 풀린다면 얼마나 쉬우랴. 어젠 친구들과 여수 낭도에 있는 젖샘막걸리 도가에 가서 서대회 한 접시에다 일잔 쭉. 연예인들 사진과 매직펜 사인이 가득 붙어 있더만. 그도 장사 잘되라는 부적이리라. 러시아와 동유럽 여행을 종종 다녔는데, 그곳 가게마다 이콘 성상이 걸려 있다. 한번은 숙소 주인이 내게 이콘이 담긴 묵주를 선물로 주었다. 지니고 여행하면 하늘이 보호해줄 거라면서. 그 한마디에 혹해 차고 다녔는데, 기이하게도 놓쳤다 싶은 열차가 연착을 한달지, 팔자에 없는 미모의 여인이 뜨거운 차가버섯 차를 권하며 길동무가 되어 주기도 했다. 한동안 묵주 신세를 졌다. 하지만 내 인생의 진짜 부적은 어깨에 앉아 있는 귀신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이름. 좋은 기운의 사람, 헛것이 아닌 참인 사람. 당신의 기도임을 명심한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날마다 파이팅을 외친다. 사랑한다고 연필로 쓴다.

<임의진 목사·시인 shodanc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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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광 가속기를 쓰고 싶어도 제때 쓸 수가 없습니다. 선정이 되더라도 보통은 6개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2차전지 사업을 하는 모 대기업 수석연구원의 하소연이다. 방사광 가속기는 전자를 가속시켜 나오는 빛으로 물질의 구조를 밝혀내는 최첨단 과학장비다. 반도체, 에너지, 신약 등의 신물질·소재, 부품 개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장치다. 그런데 분석장비가 있어도 제때 쓸 수 없다는 것이다. 2차전지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능가할 미래 먹거리 산업이다. 국내 기업들은 중국과 치열한 선점 경쟁을 펼치고 있다. 앞서가기 위해선 더 잘 만들어야 하는데 전지의 구조 분석은 필수 과정이다. 그는 “실험 공간도 상대적으로 열악하고, 그마저 전문가가 없으면 연구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지난 2월 열린 ‘대형가속기 공청회’에서도 산업계 불만이 쏟아졌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신청 과정이 너무 길어, 급한 실험은 일본에서 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가 발표한 지난해 가속기 산업체 수요 대응은 47%였다. 이 수치에는 이용하고 싶어도 신청조차 하지 못하는 기업 수요는 포함되지 않았다.

방사광 가속기는 경북 포항에 3, 4세대 2기가 있다. 국가 자산이지만 포항공대 가속기연구소가 위탁운영하고, 실험 배정은 학계·연구계 모임체인 한국방사광이용자협회가 한다. 협회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물었다. 김재영 총무이사(기초과학연구원 연구위원)는 “가속기 이용자는 매년 3차례 신청을 받아 엄격한 심사를 통해 선정한다”며 “산업체를 위한 별도의 긴급과제신청, 전용융합분석 제도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산업체 이용은 저조하다. 2018년 포항가속기가 실험한 과제는 1637개다. 누가 이용했나 봤더니 대학·연구소가 94.4%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산업체는 1.5%에 불과했다. 타 기관을 통해 실험·분석한 과제를 포함해도 9.6%였다. 김 이사는 “산업체 이용이 낮은 것은 전문 인력이 부족하고, 과제 요구수준이 낮은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심사과정이 길고, 산업체 요구를 즉시 수용할 만큼 실험시간을 내주기 힘든 여건도 있다”고 했다.

지난 8일 다목적 방사광 가속기 신축 부지로 충북 청주가 결정됐다. 생산·부가가치 유발효과는 9조원이 넘고, 늘어날 일자리는 13만여개에 달한다. 이런 경제적 효과 외에 주목되는 것은 가속기의 성능이다. 방사광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노도영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은 “청주 가속기는 극한성능 저장 링(Ultimate Storage Ring)이 될 것”이라며 “이론적으로 가능한 연구의 끝단까지 가려는 가속기”라고 했다.

방사광 가속기 추가 구축 필요성은 수년 전부터 제기돼왔다. 그러나 정부는 중이온가속기가 완공되는 2021년까지는 신규 추진을 않기로 한 바 있다. 1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사업비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과의 무역전쟁이 시작되면서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 요구가 제기됐다. 그래서 추가 구축이 결정됐다. 노 원장은 “너무 서둘러 추진하면서 연구·산업계 요구가 제대로 반영될지 걱정”이라고 했다. 결정 과정에서 “정치권 입김이 작용했다”는 주장까지 나온 터다. 정부는 앞으로 있을 예비타당성 심사, 개념·상세 설계 과정에서 이런 우려를 해소 할 방안들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정부는 청주 방사광 가속기의 30% 이상을 산업계가 쓰도록 하고, 원하는 기업에 대해선 아예 시설 일부를 직접 설치·운용토록 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청주 가속기의 가동은 일러야 2028년부터다. 더욱이 국내 기업 중 가속기 전문 연구인력을 확보한 곳은 손을 꼽을 정도다. 좋은 실험 소재가 있어도, 가속기 이용에 엄두도 못 내는 것이 산업계 현실인 것이다. 

지금까지 방사광 가속기는 학계·연구계 중심으로 운영돼왔다. 성과가 작지 않지만, 산업계 요구까지 즉시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또한 사실이다. 이의 해소를 위해 정부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기업들도 적극 투자에 나서야겠지만, 더 시급한 것은 운영시스템을 바꾸는 일이다. 전문인력을 양성해 기획·실험·결과 분석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지원해야 한다. 산업계의 아이디어와 투자, 연구계의 연구수행능력을 버무려 시너지를 낼, 협업 체계 구축도 시급하다. 이런 일들을 추진·운영할 새로운 거버넌스 구축은 말할 것도 없다. 청주 방사광 가속기가 최첨단 기능을 갖추더라도 지금처럼 운영하다가는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반쪽 가속기’에 머물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일이다.

<김종훈 논설위원 k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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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3학년생들의 온라인 개학이 시작된 20일 오전 서울 노원구 화랑초등학교 1학년 4반 홍성미 교사가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아이는 아침마다 컴퓨터를 켠다. 이젠 제법 익숙하게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누르고 화상으로 선생님과 만난다. 아침 조회 시간은 30분 남짓. 처음 며칠간 아이들은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어느 아이는 잠옷 바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고, 어느 아이는 떡을 먹으며 인사를 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곁에서 지켜보다 한숨이 나왔다.

오전 11시30분에 진행되던 아침 조회는 지난주부터 오전 9시10분으로 당겨졌다. 선생님은 이 시간 동안 숙제검사를 하거나 그날 학습 내용 중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줬다. 요즘은 국어와 수학 등 주요 과목 수업이 이뤄지기도 한다.

조회가 끝나면 아이는 주간학습계획서에 적힌 과목대로 온라인수업을 듣는다. 시간표는 간혹 6교시까지 돼 있지만, 10분 내외 동영상을 보면 되는 체육과 음악 등도 있어 대략 2시간이면 하루치 수업이 끝난다. 한 달 사이, 원격수업은 우려보다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과제다. 국어·수학·과학·사회·영어 등 주요 과목에는 과제가 나오는데, 교과서를 읽거나 관련 동영상을 보고 문제를 푸는 과제는 아이가 어려워하지 않는다. 복병은 ‘우리 고장 그리기’와 ‘땅콩 관찰하기’ 등과 같은 사회·과학 과목의 과제였다. 

학교에서였다면 모둠활동으로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해결했을 과제들이다. ‘느낌을 살려 시 낭송하기’ 과제에도 아이는 난감해했다. 교실에서였다면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조금 뻘쭘해도 시도했을 테지만, 집에서는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참여형 과제도 정답 풀이식 과제를 하듯 해치워버리기 일쑤다.

코로나19로 많은 일상의 변화를 겪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상황이 가장 안타깝다. 온라인수업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자극을 주며 생각을 깊고 넓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마땅찮다.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 미처 몰랐던 자신의 역량과 가능성을 깨닫는 기회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아이는 요즘 “학교 가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이유를 물어보면 “심심하다”고 한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서 좋지 않으냐고 하니 “심심한 게 더 싫다”고 한다. 아이도 ‘건강한 자극’ 없는 일상의 무료함을 느끼고 있다.

온라인수업 덕분에 학교의 소중함을 알았다는 학부모도 많다. 학교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 성장의 터전임을, 아이는 물론 학부모도 알게 된 것은 등교수업 연기의 예상치 못한 성과일지도 모른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향후 원격수업 병행 등 학습 방법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교육계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도 긍정적이다.

교육당국은 온라인수업을 ‘가보지 않은 길’이라고 표현한다. 내비게이션이 있으면 가장 빠른 길로 목적지에 도착하겠지만, 온라인수업은 그동안 누구도 제대로 가본 적 없는 길이다. 큰길인 줄 알고 들어섰더니 좁은 골목길일 수 있고, 어디론가 연결되겠거니 했는데 막다른 길일 수도 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기도 하고, 여러 갈래로 나뉜 길목에서 머뭇거리기도 할 것이다. 다만 길을 잃었을 때도 올바른 방향으로만 가면 된다. 학교 문이 석 달간 굳게 닫혀 있는 지금도 아이들의 건강과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이성희 mong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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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오랜만에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속담을 만났다. 알다시피 전혀 알지 못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저 약이 병을 낫게 하는 약(藥)이 아니라, 비위가 상해 은근히 화가 날 때 받치는 약처럼 느껴졌다. ‘약 오르다’ 형태로 주로 쓰이는 약 말이다. 하나라도 더 알겠다고 아등바등하던 어린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지식에 대한 열망이 아니었다. 친구들의 대화를 토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갈까봐 전전긍긍했다.

나는 친구들을 모아놓고 시도 때도 없이 “너는 무슨 색을 좋아해?”나 “학교 끝나고 뭐 할 거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맥락이 없었다. 또랑또랑한 눈빛과 목소리 때문일까. 친구들은 우물쭈물하다가 황급히 답을 내놓았다. 그러면 또 해당 색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냥 좋아”라는 답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상에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은 없대.” ‘없어’가 아닌 ‘없대’라는 종결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나는 권위를 확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가 그래?”라고 반문했다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소 저돌적인 친교 방식 때문에 나는 친구들의 생일을 다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거리를 가깝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가 넘어지면 얼른 달려가 부축해주는 게 친구의 역할일 것이다. 넘어진 친구 앞에서 “너는 빨간색을 좋아하고 가을에 태어났잖아”라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커다란 나머지, 다가가기에만 급급했다. 친구를 이해하기보다 친구에게 나를 이해시키려고만 했다. 너에 대해 이렇게나 많이 알고 있는 나를 알아달라고.

아홉 살 때였다. 친구와 가족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친구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마 얘기를 꺼낼 때마다 표정이 어두워지던 것이 퍼뜩 생각났지만, 그런 이유라고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때 어떤 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비단 친구와 나 사이의 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와 나 사이의 거리이기도 했다. 모르는 것만큼이나 아는 것이 두려워졌다. 모를 때는 거리낄 것도, 책임을 질 필요도 없었는데 알고 난 후에는 가슴에 돌이 하나씩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어른들이 “넌 몰라도 돼”라고 말할 때마다 투정을 부리곤 했던 나는, 이제 같은 말을 듣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사춘기가 찾아왔을 때, 나를 찍어 누르던 말은 “그것도 몰라?”였다. 몰라도 된다고 했던 사람들이 그것도 모르냐고 윽박질렀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던 사람들이 방향을 틀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무엇은 꼭 알아야 하고 어떤 것은 몰라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만 모른다는 사실에 잔뜩 약 올랐다가도 아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의심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정작 내가 몰랐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무슨 색을 좋아하지?”나 “학교 끝나고 뭐 하지?” 같은 심상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성인이 된 후, 알다가도 모를 일들이 늘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철퇴를 맞기도 하고 당연한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경우도 생겨났다. 알아도 입을 다물어야 하거나 모르는 것을 숨겨야 하는 때가 늘었다. 알고 싶은 것이 참 많았던 나는 머릿속에 모르고 싶은 것들을 모아놓는 방을 따로 만들었다. 몰라도 아는 척하던 사람이 몰라서 궁금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알기 위해 주위를 시종 귀찮게 하던 사람이 몰라서 기꺼이 상상해보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모르는 것은 약(藥)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시가 뭔지 몰라도, 아니 시가 뭔지 몰라서 그것을 쓴다. 몰라서 좋은 일이다.

<오은 시인 wimwender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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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법외노조화가 박근혜 정부 이전 이명박(MB) 정부 때부터 국가정보원 주도로 치밀하게 계획·진행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겨레는 13일 국정원 내부문건과 재판기록 등을 통해 이명박 정부 국정원의 ‘전교조 불법단체화’ 청와대 보고를 시작으로 보수단체와 행정부처를 동원한 집요한 ‘전교조 비합법화 공작’의 증거들이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실제 문서로 확인하고 보니 모골이 송연하다. 국가에 의한 노조파괴 행위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은 2010년 1월 “해직자 노조가입을 인정하는 전교조 규약을 이유로 불법단체화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청와대에 보고한다. 곧이어 보수 학부모단체에 전교조에 대한 비판 여론 조성을 부탁하고, 3월엔 노동부가 이 단체 요청대로 전교조에 조합원 자격 부여와 관련된 규약 시정명령을 내렸다. 나아가 국정원은 보수단체를 적극 활용해 2년간 1억7000여만원을 지급하며 전방위 전교조 흠집내기에 나선다. 온갖 중상모략과 여론조작으로 강경 이미지를 덧씌워 ‘반전교조 정서’를 만드는 일을 국가정보기관이 벌인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 10월 노동부는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통보했다. 이명박, 박근혜 등 두 개 정권의 3년 반에 걸친 공작이 완성된 것이다.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비망록에 전교조 법외노조화를 ‘긴 프로세스 끝에 얻은 성과’라고 적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해직자 9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조합원 6만명의 전교조를 법 밖으로 밀어버린 일은 국제기준에 어긋나는 몰상식한 처사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어느 나라도 해고자의 노조가입을 법으로 막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10대 촛불개혁 과제’ 중 유일하게 시행되지 않은 것이 교원노조 재합법화이다. 박근혜 정부가 법외노조로 선언한 뒤 해고된 전교조 전임교사 34명이 아직도 교단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 명은 이미 정년퇴직했고 4명도 내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최근에는 해직교원의 노조가입을 허용하는 내용이 빠진 교원노조법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했다. 전교조의 법외노조 조치가 추악한 공작의 결과물임이 확인됐다. 문재인 정부와 정치권은 전교조에 씌워진 법외노조의 굴레를 주저없이 벗기고 교원들의 권익을 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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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7일 오후 대구시 남구 한 찻집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수요집회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며 관련단체를 비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둘러싸고 논란이 불거진 후 처음으로 입장을 밝혔다. 이 할머니는 13일 경향신문에 보낸 입장문과 인터뷰에서 최근 사태에 대해 “지난 30년간의 투쟁 과정에서 나타났던 사업 방식의 오류나 잘못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할머니는 또 한·일 학생들에 대한 역사교육 필요성을 강조했고, 신뢰 회복을 위해 2015년 한·일 합의 관련 의견수렴·면담 내용 등의 공개도 요구했다. ‘사업 방식의 오류와 잘못’에 대해서는 “누군가를 비난하는 과정이 아니라 현시대에 맞는 사업 방식과 책임 있는 집행 과정, 투명한 공개로 국민 누구나 공감하는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인터뷰를 통해 재차 강조했다. 

정의연은 위안부 피해 당사자이자 오랜 세월 투쟁해온 이 할머니의 쓴소리를 존중하고 경청해야 한다. 정의연과 그 전신인 정대협(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 위안부 인권운동을 세계적인 여성 평화운동으로 일궈오는 데 헌신해왔음은 주지하는 바다. 하지만 30년이라는 오랜 기간 활동하면서 운동 방식과 단체 운영을 둘러싸고 견해차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문제들이 내부에서 해소되지 못한 결과가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과 입장문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으면 바로잡고, 타당한 지적은 열린 태도로 수용하는 것이 운동의 대의를 지키는 길이다. 정의연은 할머니의 지적과 당부를 죽비 삼아 위안부운동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내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이번 일로 시민들의 지지 속에 전개돼온 위안부 인권운동이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이날 서울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439차 정기 수요시위에는 코로나19 사태 탓에 온라인으로 참여했던 시민들이 모처럼 현장을 찾아 ‘사랑합니다’라는 손팻말로 정의연을 응원했다. 정의연에 대한 정치권 등의 본말전도식 의혹제기로 운동의 대의가 훼손돼선 안 된다며 연대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 할머니도 입장문에서 위안부운동에 대한 “폄훼나 소모적인 논쟁은 지양돼야 한다”고 못 박았다. 정의연은 물론 정치권, 보수언론 등 모두 이 할머니의 뜻을 새겨야 한다. 이번 논란을 정치화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친일·반일’ ‘진보·보수’의 프레임을 씌워 소모적 공방을 지속하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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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 하지 마이소… 내 가족은 집에 있어요’ 노래에 대한 열정을 접어야 했던 한 많은 45년생 ‘둘째 이모 김다비’의 캐릭터를 쓴 김신영은 할 말 있는 이들을 위한 스피커 역할을 해내며 여성 예능의 새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미디어랩 시소 제공

요즘 유튜브는 가수 ‘비’로 인해 뜨겁다. 2017년에 발표된 노래 ‘깡’의 가사와 안무를 놀리며 밈으로 따라하는 열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오빠’라고 지칭하는 자의식, 자신의 열정에 흠뻑 취해있는 허세, 꾸러기 같은 재간과 무대 매너는 이제 환호가 아닌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에 한 번은 ‘깡’ 뮤직비디오를 본다는 뜻의 ‘1일 1깡’이라는 신조어마저 생겼을 정도다. 여자 친구에게 접근한 남자를 ‘손봐줄’ 것이라며 ‘죽는다’고 협박하는 2014년 작 ‘차에 타봐’까지 소환되고 있다. 정작 비는 등판하지 않고 있지만 당사자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유행의 흐름을 스스로 만들고 소비하는 대중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유희 행위다. ‘깡’과 ‘차에 타봐’에 대한 댓글 모음이 그 자체로 하나의 콘텐츠가 될 정도로 비 열풍은 생산자의 기획과 무관한 대중들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왜 지금일까? 이 노래들이 새삼 유행을 타고 있는 이유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과거의 영상 콘텐츠가 발굴되고 있는 분위기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동시대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젠더감수성이라는 촉수가 건드려진 까닭이 크다. 대중문화에서 과시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이 수용되는 임계점을 초과하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강제로 키스하거나 라이벌인 남자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폭력 행위가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최대치의 표현으로 통용되던 200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비는 그 임계점에 정확히 걸려 있다. 데뷔 시절부터 지금까지 무대매너, 가사, 안무 스타일을 일관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비는 마치 화석연대측정법처럼 달라진 우리 사회의 젠더감수성을 측정하는 지표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달라진 감수성을 판별하는 최근의 또 다른 리트머스종이는 코미디언 김신영이 연기하는 빠른 45년생 트로트 가수 ‘둘째이모 김다비’다. 근로자의날인 5월1일에 맞추어 발매한 싱글 ‘주라주라’는 회사 대표에게 야근과 회식을 줄이고 휴가와 보너스를 달라고 말하는 가사로 한국 사회의 노동 감각을 건드린다. 그런데 가사에 대한 공감 못지않게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는 지점은 빨간색 골프웨어와 레이스 장갑, 알이 없는 반테 안경과 립스틱 묻은 치아, 한껏 솟은 머리 뽕과 무수히 꽂혀있는 나비핀, 어깨를 들썩이는 웃음과 억양이 심한 사투리처럼 현실 고증에 가까운 중년 여성의 재현이다.

새삼스러운 것은 이러한 중년 여성 노동자 캐릭터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간 김신영이 연기했던 세신사, 식당 이모 등 중년 여성 노동자는 다소 억척스럽고 부담스러운 비호감의 존재로서 공감대를 형성해 웃음을 유발하곤 했다. 그러나 가수가 되고 싶다는 오랜 욕망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회사 대표에게는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은 하며, 예능 프로그램에서 대중에게 애정을 요구하는 둘째이모 김다비는 ‘조카’들의 응원과 지지를 받는 친근한 호감 캐릭터로 자리 잡고 있다. 오히려 늦은 나이의 여성이라는 조건에도 자아를 실현하며 자유롭게 도전하는 이미지가 청년 세대의 억압된 욕망을 대리 수행한다.  

남성 중심적인 예능 프로그램에서 소외되어 유튜브, 팟캐스트 등 새로운 활로에 도전하고 있는 송은이 등 여성 예능인들의 활동과 겹쳐 읽히면서, 둘째이모 김다비의 활약은 중년 여성 노동자에 대한 달라진 기대의 반영인 동시에 그 자체로 페미니즘적 수행이 된다.

예능 콘텐츠를 선별적으로 소비하고 능동적으로 의미화하는 대중의 반응은 그 자체로 지금 우리 사회의 감수성을 심문한다. 그렇다면 과시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에 환호하고 억척스러운 중년 여성 노동자를 비호감 캐릭터로 받아들였던 과거의 공통감각 역시 그 자체로 질문과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예능 콘텐츠를 소비하며 웃고 있는 지금도 우리는, 심문하는 동시에 심문받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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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일본 음식점에서는 생간(生肝)을 먹을 수 없다. 비행기 갈아타느라 나리타 공항에서 맥주 한 병 마신 시간이 일본 체류의 전부인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겠지만 사실 저 말을 한 사람은 일본인 친구다. 공동 연구차 한국에 잠시 머무르는 그를 신촌 뒷골목에서 만났다. 허름한 음식점에 앉자마자 곁들이로 나온 처녑과 생간을 보고 화색이 돌던 그 친구에게 나는 그것을 아예 한 접시 주문해 주었다. 그는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간은 붉다. 실험동물 내부에서 붉은색을 띠는 기관은 네 곳이다. 심장, 콩팥, 지라 그리고 간이다. 모두 혈액이 몰리는 기관들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간다. 심장은 피를 공급하는 펌프이고 지라는 120일 수명을 다한 적혈구가 분해되는 장소이다. 혈액 속의 질소 노폐물을 제거하고 염류의 균형을 도모하는 콩팥도, 혈장 단백질인 알부민을 만드는 간도 혈액의 세례를 듬뿍 받는 곳이다. 혈액이 닿지 않는 기관이 어디 있으랴만 그 양은 다소 차이가 있어서 폐는 분홍빛을 띠고 인슐린을 만드는 췌장은 누르스름하다.

우리는 길거리에서도 쉽게 간의 해부학을 공부할 수 있다. 순대를 파는 포장마차에서 내장을 섞어 달라고 하면 대개 간과 폐 일부를 숭덩숭덩 썰어 준다. 입으로 가져가기 전 간의 모습을 눈여겨본 적이 있는가? 간 절편에서 세 개의 구멍이 뚫린 모습을 아마 쉽게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두 개는 혈액이 간으로 들어가는 통로이고 나머지 하나는 간에서 만든 담즙산이 나오는 담관이다. 혈액이 들어가는 주된 통로가 두 개인 기관은 간이 유일하다. 심장에서 콩팥 혹은 지라에 들어가는 혈액의 주된 통로는 모두 한 개다.

심장을 떠난 혈액은 신선한 공기를 전신에 운반하는 동시에 각종 기관이 배출한 노폐물을 싣고 심장으로 되돌아온다.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들숨 부피의 약 5분의 1인 산소만을 호흡에 사용한다. 공기 중의 산소 기체를 포획하는 일이 자신의 소임인 적혈구는 들숨의 나머지 5분의 4에 해당하는 질소를 뺀 산소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산소와 강하게 결합하는 헤모글로빈 덕택에 적혈구는 이런 신비로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더욱 놀라운 점은 정작 적혈구 자체는 산소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산소를 사용하는 세포 소기관인 미토콘드리아가 적혈구에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6할 이상이 적혈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인간의 산소 경제 효율은 썩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

산소 외에도 흡수한 영양소 공급을 담당하는 우리 순환계는 심장에서 시작해 동맥, 세동맥, 모세혈관으로 가지를 치다가 다시 역순으로 모세혈관, 세정맥, 정맥을 거쳐 심장으로 들어오는 기본 설계를 고수한다. 콩팥도 장딴지 근육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끊임없이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우리 소화기관도 마찬가지다. 위나 소장에 뻗은 혈관은 소화와 흡수 과정을 거친 나노 크기의 영양소를 우리 몸 안으로 끌어들인다. 포도당이나 아미노산 혹은 지방산이 대표적인 물질이다. 이들 물질을 몸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입에서 항문에 이르는 소화기관이 명실상부한 우리의 몸 ‘밖’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위와 소장은 입을 통과한 음식물을 한 개의 세포가 사용할 수 있는 크기로 잘게 부순다. 그렇지 않으면 영양소가 세포막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포막을 통과하지 못한 영양소는 여전히 몸 밖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장 상피 세포막을 통과해 모세혈관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이들 나노 크기의 영양소가 에너지원으로 쓰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소화기관에서 출발한 혈관이 바로 심장으로 되돌아가는 대신 먼저 간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짐작하다시피 간은 관문으로서 외부에서 들어온 물질이 안전한지 검증하는 일종의 ‘입국 심사’를 폭넓게 진행한다.

소화기관을 떠난 혈액이 간으로 향하는 혈관계는 ‘간문맥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소화기 혈관은 간문맥을 통과한 뒤 간이라는 거대한 ‘모세혈관 덩어리’를 한 번 더 거쳐야만 비로소 심장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렇듯 간에는 심장에서 온 간동맥과 소화관에서 출발한 간문맥, 두 곳의 혈액이 몰려든다. 산소와 영양소를 머금은 피가 합쳐지는 것이다. 간세포 사이사이에 촘촘히 자리한 모세혈관을 갖춘 간은 외부에서 들어온 독성 물질과 세균을 제거한다. 독성 물질의 대사는 간세포가 담당하고 세균은 모세혈관에 상주하는 면역세포가 처리한다. 대장에 뻗은 혈관도 심장에 가기 전 간을 거친다. 영양소 흡수는 대부분 소장에서 이루어지지만 대장을 통해서도 10% 정도의 영양소가 흡수된다. 대장에 거주하는 세균들이 소장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식이섬유를 소화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장이나 췌장 및 지라를 거쳐 온 혈액도 대부분 간을 지나 심장으로 간다. 간문맥계는 먹장어처럼 턱이 없는 원시 동물에서부터 가오리나 새 및 인간에 이르기까지 구조적, 기능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모든 유기체는 소화기관을 통과하는 음식물에서 최대 효율로 영양소를 추출하려 한다. 식도 아래에서 대장의 끝까지 진 음식, 마른 음식 그 어떤 것도 허투루 보내는 법이 없다. 소장은 축구장만 한 넓이를 흡수 공간으로 쓰고 있으며 간문맥은 커다란 투망을 펼친 것처럼 8~9m에 이르는 소화기관의 거의 전부를 망라한다.

먹고살기의 곤궁했던 역사는 우리 몸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소화기관을 거의 통째로 어우르는 간문맥의 저 유장함도 마찬가지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ghimh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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