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의 이름은 차마 적지 못하겠다. 이런 글을 쓴다고 동의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고, 또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내내 아들 아무개의 어머니로 불렸다. 딸과 아들을 두었지만, 유독 아들의 어머니로 기억되는 건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다. 군에 간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1998년 7월이었다. 군 당국은 사고라 했다. 황망 중에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직접 본 현장은 군 당국의 설명과 달랐다. 아들과 함께 있었다던 선임 병사의 말도 달랐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군 당국은 아들이 실수로 배전반에 감전되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현장을 목격했다던 선임 병사는 평소 아들이 자기를 괴롭히는 이상한 사람으로 꼽던 자였다. 그는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배전반에서 떼어놓는 등 노력을 했단다. 단박에 거짓말인지 알았다. 

인체도 전기가 통하는 도체이기에 살리려고 팔을 잡았다면 그 선임병도 감전되었을 터였다. 어머니의 추궁에 진실이 밝혀졌다. 사고사는 과실치사로 또 폭행치사로 바뀌었다. 아들은 국가유공자로 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가해자는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는 혼자서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혀냈다. 놀라운 일이다. 

그의 아들의 억울함은 풀었지만, 비슷한 죽음은 멈추지 않았다. 1998년 한 해에만 248명의 군인이 죽었다. 매일처럼 그의 아들과 비슷한 죽음이 반복되었다. 의문의 죽음들이다. 김훈 중위처럼 아버지가 육군 중장이고 자신은 육사 출신 장교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일하던 인권단체에는 군의문사 가족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작은 인권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수백명의 죽음을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었다. 몇 군데를 빼고는 현장을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때 그가 나타났다. 그는 금세 군 사망 가족들의 구심이 되었다. 군 폭력 희생자 유가족 단체도 만들었다. 자식 잃은 부모들은 열심히 싸웠다. 국가 차원에서 군 의문사 사건위원회를 만들고 조사활동을 벌였던 것도 이런 싸움 덕분에 가능했다. 자식을 군에서 잃은 부모들은 기본적인 정보조차 알 수 없었다. 책임자를 만날 수도 없었다. 장군은커녕 연대장이나 대대장조차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단체를 만든 유족들은 달랐다. 이들은 국방부 장관도 만났다. 비록 국방부 앞에서 9일이나 단식투쟁을 벌인 다음이었지만, 아무튼 군대도 세상도 그렇게 변해갔다. 

군 사망사건 유족들의 가장 큰 공로는 군 사망사건 자체를 현저하게 줄인 것이다. 지난해 군 사망자는 모두 86명이다. 이것도 적지 않은 숫자지만, 지난 20년 동안 3분의 1 가까이로 줄어든 거다. 박정희 정권 시절, 매년 1300~1500명씩 죽어나가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이지 극적 변화다. 

스무 살 남짓의 동년배에 비해 군에 간 젊은이들의 자살률은 낮다. 군에 가면 자살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 거꾸로 낮아진다. 군대가 사회보다 목숨 보전이란 측면에서는 더 안전한 곳이 되었다. 사회는 나빠졌고, 군대는 더 좋아진 거다. 그와 군 사망 유가족들의 여러 모임이 함께 일궈낸 성과였다. 

대신, 그의 집안은 엉망이 되었다. 아들의 죽음은 시작일 뿐이었다. 아들은 손주를 안겨주었지만, 손주는 장애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조차 못했다. 가족들에게는 손주가 아들의 무덤 앞에서 “아빠!”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 불안정한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딸도 내내 편치 못했다. 그는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참극이 벌어졌다. 지난해 말, 아니면 연초였을까. 왜 일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들의 죽음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거다. 참극은 더 큰 참극으로 이어졌다. 

그의 죽음은 누구의 책임일까. 죽음을 선택한 자신의 책임만은 아닐 거다. 국가와 군대는 그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무릇 모든 죽음이 그렇다. 자연사가 아닌 죽음에는 누군가의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저 무턱대고 책임만 지라는 게 아니다. 자연사가 아니라면, 공동체와 지도자들의 노력에 따라 관리도 통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장 군의 노력, 시민사회, 특히 유족들의 노력으로 군 사망사건 자체가 줄어든 것이 유력한 근거가 된다. 

반면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으로 에둘러 말하는 자살은 1990년 3251명에서 2018년 1만3670명으로 네 배 이상 늘었다.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는 26.6명이 되었다. 나라가 망했던, 그래서 국치로 기억하는 경술년,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는 2.8명이었다. 우리는 나라 망하던 때보다 열 배쯤 더 험한 세상에 살고 있는 거다. 특히 10대, 20대, 3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통계는 너무 끔찍하다.

자살도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군대에서도 가능했던 일을 국가 차원에서 못할 일은 없다. 아무개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자살률 감소를 국정과제의 앞머리에 놓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개인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탈출구에 의지하게 하면 안 된다. 자살의 책임을 자살자에게만 물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하지만 어떻게 노력하는가에 따라 어떻게 죽는지는 달라질 수 있다. 애써 노력한 끝에 군 사망사건을 줄이고, 교통사고 사망자를 줄인 것처럼, 자살자도 줄일 수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oci90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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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화재 희생자 분향소에서 이낙연 전 총리의 “현직이 아니라서”라는 발언은 옳았으되 ‘대화’는 아니었다. 유가족은 ‘대책’을 물은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사고가 거듭되느냐고 따졌을 것이다. 비대칭적 대화에 실수해서 정치인이 힐난을 받은 것은 그렇다 치자. 정작 궁금한 것은 책임자들이 같은 사고가 반복되는 이유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이다.

이번 사고는 12년 전 이천시 호법면 냉동창고 화재의 복제다. 원인조차 같다. 단열재인 우레탄을 도포하기 위해 시너에 녹이는 순간 시너는 증기가 되어 건물 전체를 채운다. 여기서 용접을 했다니 화약 창고에서 불놀이하는 꼴이다. 어떻게 이 어처구니없는 행위의 조합이 12년이 지나서도 그대로일까?

두 가지다. 우선 우레탄 발포와 용접 사이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실내 환기 상태, 이격 거리 등에 따라 화재로 연결되지 않거나 쉽게 제압하곤 했다면 시공자로서는 ‘해도 되는’ 일이 된다. 마감에 쫓겨 9개 업체 78명이 동시 투입되었다니 당연히 시도했을 일이다.

둘째, 위험방지 규정과 감독자가 있으나 허깨비라는 점이다. 가연물이 있는 건물에서 불꽃작업을 할 때 소화기구와 비산방지 덮개의 구비, 상주 안전관리자의 감시가 산업안전보건법 규정이다. 그러나 공기와 공사비에 압박받는 현장소장, 사장에 맞서 원칙을 우길 안전관리자란 현실에는 없다.

결국 하인리히 법칙대로다. 소방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불꽃에 의한 화재는 5825건, 32명이 숨졌다. 2008년 이천사고 후 잠깐 멈칫하다 2013년부터 다시 늘어나 매년 1000건 이상이다. 이번 사고는 이 많은 전조 후에 찾아온 본 파도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정부, 여당의 대책을 보면 여전히 동문서답이다. 이해찬 대표는 애꿎은 샌드위치 패널을 탓하며 ‘건축자재안전기준’을 개선하겠단다. 급조된 ‘건설현장 화재안전 범정부 TF’는 녹음기 수준의 위법사항 엄중처벌 타령이다.

처벌강화는 한계에 달했다. 샌드위치 패널 역시 범인이 아니다. 원가를 줄이려 사고마저 감수하겠다는 사업주, 시공자에게 비주거용인 창고도 비싼 난연성 자재로 지으라는 건 현실을 모르는 처방이다.

핵심은 왜 위험한 행위의 조합이 여전히 감행되느냐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의하면 시공사 ‘건우’의 2018년 ‘환산재해율’은 4.5%, 100명 중 4.5명이 재해를 당했다는 뜻으로 건설업 평균의 무려 6배다. 당연히 관급공사는 어려울 터, 가격으로 수주하는 민간 공사를 맡아 모험하며 손익을 맞추다 사달이 난 것이다.

근본적 해결방안 또한 중소규모건설 산업생태계에서 찾아야 한다. 여러 노력으로 작년 전체 산재사망은 7.6% 줄었으나 건설은 겨우 2.6% 감소에 그쳤다. 이마저 공기업, 대형 현장의 감소분으로 중소형 민간 현장은 요지부동이다. 여기는 처벌과 규정 강화라는 약발이 안 듣는다. 저가·속도·모험이 이미 ‘문화’가 된 곳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시장을, 법제도는 문화를 이길 수 없다. 이참에 ‘건설문화혁신운동’을 일으키면 어떨까? 목표는 ‘신용기반형 건설’이다. 제대로 값을 치르는 대신 안전과 성능에 관한 한 무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재해율에 따라 보험료율을 차등화하고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실시하면 머지않아 좀비 건설사들은 스스로 퇴출될 것이다. 지난 50년을 뜯어고치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유족들은 이 전 총리에게 울부짖은 것이 아닐까.

<함인선 건축가 한양대 건축학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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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건너편에 위치한 ‘평화의 소녀상’이 빗물에 젖어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정의기억연대와 이 단체를 이끌어온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당선인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을 틈타 친일 극단세력이 위안부 운동을 폄훼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지난 7일 기자회견 후 2차례 열린 수요시위 장소 인근에선 보수단체들이 맞불시위를 열었다. 이들은 ‘위안부상 철거, 수요시위 중단’을 주장했다. 지난 20일에는 20대가 서울 흑석동에 설치된 소녀상을 돌로 훼손한 일도 있었다. 위안부 운동에 흠집을 내면서 30년 운동 역사 전체를 부정·폄훼하는 처사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용수 할머니의 요구는 정의연을 중심으로 한 지난 30년 동안의 위안부 운동을 짚고 개선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 할머니의 비판을 운동 전체에 대한 비판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심지어 한 극우 인사는 “이용수씨는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다. 불쌍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미지와 전혀 합치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일제 침략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비판하기는커녕 위안부에 대한 사실 자체를 왜곡하고 있다. 정의연 수요시위에 대한 맞불시위를 이끈 반일동상진실규명 공대위도 일본 극우세력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 단체는 일본 극우세력이 사용하는 ‘위안부상’ ‘위안부(소녀상) 비즈니스’라는 용어까지 공공연히 쓴다. 그 핵심 인물은 지난해 일본 돈으로 유엔 인권이사회 정기회의에 참석해 “(일제하) 한국인 노무자들의 임금은 높았고, 전쟁 기간 자유롭고 편한 삶을 살았다”는 망언도 했다. 위안부 운동 단체 내부의 이견 노출을 기회 삼아 자신들의 굴절된 역사 인식을 퍼뜨리려는 망동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이용수 할머니의 뜻을 왜곡하면서 역사를 후퇴시키는 이들 단체의 행동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일본 우파성향 언론들이 최근 수요시위 중단과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기 시작한 데는 이들 단체의 망동이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이들의 주장이 우리 사회에서 용납되어선 안 된다. 더불어 이들에게 비판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의연을 둘러싼 의혹이 속히 해소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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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5일 서울의 한 엘리베이터 안. 마스크를 쓰지 않은 한 남성이 기침하자 다른 남성이 왜 마스크도 안 쓰고 기침을 하냐고 따졌다. 뭔 훈계냐며 맞받아치자 격분해 몸싸움을 벌였다. 3월9일 광주의 한 주차장. 마스크 없이 운전하러 온 대리기사에게 왜 마스크를 안 쓰고 왔냐고 손님이 물었다. 대리기사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분노로 멱살을 휘어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같은 달 17일 부평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지나가던 행인을 한 남성이 쫓아가 따져 물은 후 목을 조르고 폭행했다.

이달 5일 권영진 대구시장은 공공장소에서 의무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정부가 이날부터 ‘사회적(물리적) 거리 두기’를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완화했지만, 코로나19가 가장 심했던 대구는 이와 별도로 강도 높은 방역대책이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5월13일부터는 이를 위반하면 관련법에 따라 고발 조치하여 최대 300만원 벌금형을 받을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대구참여연대는 충분한 논의와 공감 없이 내려진 이번 행정명령이 시민을 계도와 통제 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했다. 대구시는 5월26일까지 계도 기간을 연장하고 그 기간에는 벌금형을 유예하겠다며 한 걸음 물러섰다.

코로나19가 도시 공공장소의 풍경을 뒤바꾸고 있다. 도시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은 대개 서로 이름도 생애사도 모르는 이방인으로 만난다. 그런데도 같은 사회적 공간을 점유하며 함께 질서를 만들어가야만 한다. 이방인들은 상대방에 대한 즉각적인 관찰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상호작용의 질서를 만들어간다. 이를 위해 상대방의 겉모습에서 얻은 정보가 실제의 그를 드러낸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한정되어 있어 그의 진정한 동기, 목적, 의도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심하게 된다.

도시 공공장소의 삶은 신뢰와 의심을 동시에 해야 하는 역설에 놓여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도시 공공장소에 나서는 사람은 모두 자신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야만 한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을 상대방에게 심어주지 않는 겉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누구든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겉모습을 하고 공공장소에 나올 의무를 지닌 이유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이를 ‘몸 숙어’(body idiom)라 불렀다. 어느 사회나 도시 공공장소에 나올 수 있는 몸 숙어는 그 사회 특유의 방식으로 관례화되어 있다. 이 관례화된 몸 숙어를 이해하게 되면 생면부지의 이방인들도 함께 상호작용의 질서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정상적인 몸 숙어를 드러내는 사람은 타자가 접근할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놓는다. 같은 공간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관찰하거나 거꾸로 자신이 그를 관찰하는 게 두렵거나 꺼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정상적인 몸 숙어는 상대방으로부터 온당한 사유가 없는 한 실제 접근되지 않도록 막아준다. 정상적 몸 숙어를 하고 공공장소에 나서는 일은 호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 호혜성의 규범이 깨지면 감정 질서에 균열이 일고 분노가 삐져나와 마침내 싸움으로 번진다. 

한국 사회에서 마스크는 이제 도시 공공장소에 나갈 때 갖추어야 할 몸 숙어의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마스크 착용은 자신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상대방에게 드러내는 규범적 행위다. 이러한 변화된 규범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필요한 충돌과 싸움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특정한 몸 숙어를 법으로 강제해서는 안 된다. 잘못을 따져 처벌하는 법의 정의만 가지고는 공공장소의 질서를 안정되게 만들어갈 수 없다. 서로 접근 가능한 사람으로 열어놓으면서도 온당한 이유 없이는 접근당하지 않도록 안내하는 새로운 몸 숙어를 이해하고 호혜적으로 실천하는 게 먼저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suz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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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세계적인 코로나19 대유행은 불가항력의 재해가 아니라 인간이 저질러온 생태계 파괴, 급속한 지구화 등이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이 재난의 배후에 도사린 근대자본주의체제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역병은 되풀이해서 우리를 덮칠 것이다. 이제 인류는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헛수고 대신에 새로운 일상에 익숙해지는 난제를 풀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일상은 수동적 적응의 문제만은 아니며, 적극적 창조의 도전이기도 하다. 기후위기, 사회적 양극화 등 근대의 모순을 넘어설 진정한 탈근대의 비전을 가져야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재난 자본주의’가 지칭하듯이 기성체제가 재난을 활용하며 오히려 강화될 수도 있다. 이미 숱한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의 대학 역시 기로에 처했다. 이럴수록 개혁의 후퇴 아닌, 한층 정교한 개혁안 마련이 절실하다.

해외 대학과 마찬가지로 국내 대학들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비대면수업으로 학사일정을 이어가고 있다. 방역 조치에도 상당한 재정이 필요한 터에, 학령인구 급감과 10년이 넘은 등록금 동결로 이미 형편없는 재정 상황은 악화일로이다. 코로나19가 경제를 멈춰 세우는 바람에 세수 급감이 코앞에 닥친 현실에서 정부의 고등교육 지원은 더 불투명해졌으며, 이미 시장에 내맡겨진 대학 구조조정이 더욱 무질서하고 잔인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위기일수록 원칙을 지키는 대안 모색이 중요하다. 한 예로, 이참에 현행 3월 입학제를 9월 입학제로 바꾸자는 제안은 혼란스럽다. 9월 입학제 취지의 하나는 요즘 어린이의 빠른 성장에 맞게 취학연령을 6개월 앞당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논의는 9월 입학제를 운영해온 국가들보다 취학연령을 1년 늦추게 되니 합당하지 않다. 물론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해야겠지만, 9월 입학제 주장은 촉박해진 대입 일정에 지나치게 민감한 무원칙한 반응이다. 만약 감염 확산이 심해져 수험생들이 내년 3월보다 훨씬 늦게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대학이 여름·겨울 학기 운영까지 재편하여 지체된 학사일정을 소화하는 편이 타당하다. 대학입시가 여전히 우리 교육의 블랙홀임을 드러내는 해프닝 같아 씁쓸하며, 가난한 맞벌이 부모가 육아와 자녀교육에서 겪는 부담은 까맣게 잊힌 느낌이다.

대학등록금 일부 환불 요구 또한 원칙적으로 따질 점이 많다. 비대면강의의 한계나 학교 시설을 이용할 수 없는 불이익 탓에 당연한 움직임이지만, 자칫하면 고등교육의 내일을 위한 핵심 쟁점을 놓칠 수 있다. 10여년 전에 대학교육의 질에 비해 가파르게 상승하는 등록금에 대한 반발로 ‘반값 등록금’이 뜨거운 사회적 의제가 된 과거를 냉철히 돌아봐야 한다. 당시 ‘반값 등록금’ 요구에 여야 정치권까지 공감한 덕분에 등록금 동결과 함께 국가장학금이 박근혜 정부 4년 사이 연 3000억원대에서 4조원대로 급증했다. 그러나 이 투자는 경제적으로 힘든 학생에게 당장 보탬이 될망정 대학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개별 학생에게 소득분위별로 지급하는 방식 탓에 막대한 재원이 사립대학의 공공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과제엔 전혀 기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좀 과장하자면, 국가장학금이 한계사학 내지 비리사학의 연명을 도운 셈이다.

‘반값 등록금’이 고등교육의 핵심을 찌르지 못한 일면적 구호였던 것처럼, 등록금 환불 요구가 대학교육이라는 상품 구매자의 권리 주장에 머문다면 무의미하다. 공공재인 고등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책임을 다할 것을 동시에 요구해야 하며, 학생의 권리, 교육의 경쟁력과 질적 향상, 고등교육 지원의 정부 책임이 선순환을 이룰 정책을 요구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위기일수록 원칙이 중요하다. 최근 현 정부의 공약 이행을 점검한 언론보도는 고등교육의 핵심 공약인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와 공영형 사립대가 제자리걸음임을 지적했지만,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 이 주요 공약들을 더 잘 실행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내실있는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도 중요하지만, 전체 대학의 80% 이상이 사학이기 때문에 공영형 사립대는 더 중요하다. 그러나 후자는 올해 예산이 전액 삭감되어 공약 포기를 공식화한 꼴이며, 작년 예산이 이월된 실증연구사업도 전문대를 부당하게 배제한 채 4년제 대학 세 곳만 선정했다. 즉 공영형 사립대는 재추진 차원의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다. 인류를 고통에 빠뜨리는 근대적 삶의 모순을 극복할 인재 양성과 학문적 성과가 가능하려면, 공공성이 확고한 대학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가 공공의료의 긴요함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있듯이.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kmh@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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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5월22일 (출처:경향신문DB)

검찰이 회계부정과 기부금 횡령 의혹 등이 제기된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인과 정의기억연대(정의연)에 대한 강제수사에 착수했다. 서울서부지검은 20일과 21일 이틀에 걸쳐 서울 성산동 정의연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그리고 마포구 쉼터 등 3곳을 압수수색했다. 한국을 대표해온 여성인권단체가 검찰의 수사를 받기에 이른 현실에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진실규명이 불가피할 정도로 윤미향 당선인과 정의연을 둘러싸고 매일 새로운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기부금 회계처리 부실에서 할머니 쉼터 매매를 둘러싼 의혹으로 번지더니 이젠 해외 사업을 위한 모금액 사용처까지 의심받고 있다. 소녀상 배지를 판매하는 사회적기업이 낸 기부금 중 5억4000만원이 국세청 공시 자료에서 누락되기도 했다. 윤 당선인이 정의연 대표 당시 여러 개인 계좌로 기부금을 모았고, 그중 일부 사업은 모금액과 집행액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정의연에 이어 위안부 피해 할머니 6명이 생활하는 경기 광주시 ‘나눔의집’이 후원금을 전용하고 할머니들을 홀대해온 정황이 드러난 것도 당혹스럽다. 나눔의집 후원금은 2015년 한·일 합의 이후 매년 20억원 가까이 모여 올해 72억원에 이르고 있지만 할머니들은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직원들이 MBC <PD수첩>을 통해 폭로했다. 시민들이 용돈을 아껴 할머니들을 위해 쓰라고 보낸 기부금이 부동산 매입과 생활관 증축에 쓰였다. 반면 시설은 할머니들의 진료·재활치료·장례비에는 한 푼도 지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소중히 돌보는 안식처인 줄 알았던 나눔의집이 후원금으로 자기들 잇속 챙기기에 바빴다니 통탄할 노릇이다. 

정의연과 나눔의집을 둘러싼 사태를 수습하려면 결자해지(結者解之)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우선 윤 당선인이 직접 나서 제기된 의혹을 해명해야 한다.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객관적 자료와 함께 소상히 설명하는 방식이 옳다. 시간을 끌수록 정의연의 신뢰 회복은 어려워진다. 나눔의집도 안신권 소장과 이사회가 공개 해명하고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자칫하면  위안부 인권운동의 동력까지 꺼질 수 있는 위기상황임을 인식해야 한다. 

수요시위가 열린 20일 위안부 인권운동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원로 12명이 입장문을 냈다. 이들이 밝힌 대로 위안부 인권운동은 우리 사회가 외면해온 우리의 역사를 마주하며, 한국의 역사를 새로 써나갔다. 위안부 인권운동이 지속돼야 할 까닭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운동방식 전반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정의연의 운동방식이 피해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했고, 피해자가 아닌 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다는 지적을 겸허히 새겨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여성인권·민족·외교 등 다양한 논쟁점이 얽힌 문제이지만, 피해자 개인의 ‘삶’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는지도 자성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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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는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재난과 같다. 원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기에 마땅한 대책도 없다. 그저 그 시간을 버티며 견뎌낸다. 그래서 앓는다는 건 버티는 것이다. 지금 ‘코로나의 시절’을 지독히 앓고 있는 인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은 이전부터 이미 앓을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늙든 젊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문학작품들 속 무수한 ‘앓는 삶’들이 이야기한다.

한국 사회는 더욱 그러하겠지만, 세계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세계가 안전하지 않다는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이전과 똑같이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사회는 재난을 만났을 때 힘을 확인한다. 재난이 거대할수록 실감도 통렬하다. 내부의 진실도 마주하게 된다. 효율과 성장으로 강한 국가·사회를 만든다는 글로벌 자본주의 신화는 코로나19로 무력해졌다. 한순간에 찢겨버린 자본과 상품의 그물망 앞에서 ‘미신’이 됐다. 코로나만큼이나 두려운 절대적 빈곤의 엄습 징후에 인류는 떨고 있다. “자본주의에 있어 불황이란 고맙고도 시원한 두쉬(Dusche·소나기)와도 같은 것”이란 슘페터의 위로가 현실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삶들이 앓다가 사그라질지 모른다.

그래서 재난을 기점으로 거대한 사회적 변화가 온다. 세상이 낯선 것이 되었을 때 인류의 유전자는 급변한다. 재난은 시련이지만, 인류 진화를 재촉하는 도전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위기와 적응은 인간의 생존을 가능케 한 근원적 힘이었다.

코로나19가 일깨운 몇 가지 진실이 있다.

우선 근대 이후 인류 사이 밀집도를 높여온 세계의 구성은 감염병 상황에서 극도로 취약한 체제임이 명백해졌다. 코로나19의 사망률을 높인 것은 병원체의 강력함이 아니다. 폭발하는 감염에 의료체계가 따라가지 못하는 ‘한계 초과’의 탓이 크다. 치료는커녕 진단도 받지 못하고 집에서 스러져간 죽음들이 그러하다. 세계 곳곳에서 인간은 무력했고 참담했다. 효율과 영리에 의료를 맞춘 곳일수록 참담함의 크기는 컸다. 코로나와 같은 ‘창궐’의 상황에 인류가 맞서려면 사회가 늘 일정한 ‘의료 여력’을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이 같은 ‘의료 예비군’은 민영의료 체계에선 상상조차 힘들다.

인류 삶과 일의 모습도 크게 변할 수밖에 없다. 대면 접촉 중심의 세상은 종언을 고했다. “이번 코로나 사태의 최대 승자는 ‘쿠팡’ ”이란 농담처럼 디지털 사회는 더욱 급격하고 난폭하게 다가오고 있다. 인간은 밀집 속에서도 하나하나 분절·고립된 ‘섬’들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언택트(Untact)’는 곧 ‘온택트(Ontact)’가 된다.

이 모든 변화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소비의 창출’이다.생산·소비 경제의 금 밖으로 비켜난 존재들의 생계는 어찌할 것이냐는 문제이다. 섬처럼 고립된 존재도 먹고, 입어야 한다. 또한 그런 소비 부대가 없는 생산 경제는 존재하기 힘들다. 소비와 생산을 계속 돌리기 위한 ‘부’는 어디서 가져올 것인가.

그래서 ‘기본소득’ 이야기는 ‘운명적’이다. 코로나19와 무관하게 곧 다가올 운명이었다는 의미다. 실리콘밸리의 IT기업가들이 앞장서 기본소득을 주창해온 것도 그런 이유다. 소위 그들의 ‘혁신 엔진’을 돌리기 위해선 상품을 소비할 무수한 섬들은 필수적이다. 물론 기본소득이 이렇게 재난과 함께 성큼 다가올 줄은 몰랐다.

실상 코로나19가 인류에게 준 경고는 기본소득의 문제를 훨씬 뛰어넘는다. 핵심은 신자유주의 이후 해체되고 있는 ‘사회’의 복원이다. 코로나19는 사회와 자본의 관계 재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민영화가 가장 먼저 파괴한 것이 공공성이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이 작동한 한국과 철저히 의료를 민영화한 미국의 차이는 이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민영화의 창의와 효율은 거짓이었다. 공공성을 해체하고 사회를 무력한 개인의 조각들로 전락시켰을 뿐이다. 자본은 그 위에서 갑질하며 군림했다. 그런 세상은 ‘인류적 재앙’을 감당할 수 없다.

‘코로나 뉴딜’의 정수는 ‘사회의 강화’가 되어야 한다. ‘자본은 사회를 위해 존재하며 사회의 것’이란 오랜 인간의 정의로 복귀하는 것이다. 사회의 자본 통제, 자본의 사회적 복속·기여야말로 핵심이다. 다행히 지금 인류는 서로의 ‘연약함’에 공감하고, ‘연대’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부자나 빈자나 모두 지구라는 한배를 탔음’(차드의 시인 달렙)을 진심으로 감각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인류의 가장 큰 진화는 바로 그것이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lubof@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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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반팔을 입은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을 걷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폭염재난이란 것도 매년 반복되어 상투적이 되었지만, 그 세어지는 강도에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더 두렵게 만드는 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 사태가 폭염재난과 중첩되는 앞으로의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피서를 위한 이동도, 피서지 개방도, 에너지빈곤층을 위한 공공시설 운영도 어려워 보인다. 재난이 늘 그렇듯 코로나 팬데믹 또한 약자를 힘들게 만들었고, 이중의 재난이 닥칠 가능성이 높아진 지금 사회적 약자의 위험수위 또한 높아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구 어디든 사람이 살 수 있게 된 지금 역설적이게도 기술의 남용으로 맞은 기후위기로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생겨나고 있다. 온도가 너무 높아 체온 조절을 위한 땀조차 배출하지 못하는 곳이 늘어간다는 뉴스는 기후재난시대의 걱정을 공포로 바꾸고 있다. 여기에 더해 매년 그래온 것처럼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더욱 뜨거운 여름이 될 것’이라는 예측 같지 않은 예측도 빈도를 높이고 있다.

지구 전체에 드리운 이 거대한 기후재난은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먼 북극의 얘기로나 치부된다. 우리나라 온도가 지구 평균의 두 배, 해수면은 지구 평균보다 2.5배나 더 가파르게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불편한 진실임에도 언제나 그랬듯 딴 나라 얘기로 치부된다. 한 줌 빙하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굶주린 북극곰 사진과 함께 기후위기를 경고하는 클리셰적 외침은 위기를 타개할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기후위기를 초래한 인간의 자업자득이라는 석학들의 주장 역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함은 동일하다. 반면 에너지 전환 주장이 마치 경제를 망칠 악마의 외침인 양 주장하는 기득권의 선동은 공고하다. 이 지루한 상황에서 폭염재난은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이번 코로나 국면에서 우리나라에선 정말 먼 미래 같았던 기본소득제도 논의의 불꽃이 제대로 지펴졌고, 빠르게 전 국민 재난지원금 교부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소득이 끊긴 긴급한 상황을 맞은 많은 국민에게 한 차례의 응급처치는 말 그대로 순간의 해결일 뿐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최악 상황을 대비해야만 하는 이유다.

이번에 급물살을 탄 기본소득제도는 IT시대와 오버랩될 포스트 코로나시대를 맞아 우리 사회 최대 화두로 떠오를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 전에 당장 설상가상으로 다가올 폭염이라는 재난을 피해갈 방안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 방안 중 하나로 기본소득에 앞서 최소한의 삶을 보장할 전 국민 기본공제를 빠르게 고민할 시간이다. 모든 가구에 폭염을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전기와 물 등 공공재를 기본으로 제공하는 공제구간을 두는 방안이다. 절약한다면 비용 없이 전기와 물을 쓸 수 있도록 말이다. 필수사용량 기본공제로 발생하는 손실분은 에너지 과소비구간의 누진세 강화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물과 전기의 필수사용공제는 에너지빈곤층을 위한 최소한의 정부지원임과 동시에 기후재난시대를 타개할 에너지 절약의 실천 및 인식전환 계기가 될 것이다.

이번 재난지원금 교부가 비록 비선별 지원방식을 취했음에도, 나눠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를 위해 걷지 않는 것은 행정력 최소화와 효과 극대화를 위한 최선의 방안이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hwan94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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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게 아니라 엄중하고 지루한 비대면 시절에 섹스는 어찌하고들 있는지 온라인 설문조사라도 나서고 싶은 터였다. 공공연하고 은밀하게 자행되는 최고의 밀착행위에 대해 방역당국의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세부지침이 없는 게 무지하게 이상했다. 비말이 가장 위험한 감염경로라니 최소한 ‘키스 금지령’이라도 나오려니 고대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가라앉을 때까지 모든 시민은 자위(自慰)로 대체하라!”는 포고령을 내리고, 경찰에 공무원에 신기술들을 동원해서라도 낮이고 밤이고 교접 현장을 색출해야 했다. 혹시라도 건전한 시민의식 덕분에 모두들 자발적으로 억눌러 참는 중이라면, 그토록 심각하다는 저출산 문제는 대체 어쩔 셈인지 그게 또 궁금했다. 아, 저출산 따위는 까먹었겠구나. 웬만한 건 다 재택으로 밀쳐지는 마당에, 집 안에 길게 들어앉아 뭔 짓들을 할지 도무지 의심스러웠다. 

하긴 애들도 재택이니 걔네들이 좀 보초를 서 줄라나? 근데 그게 또 특히 남자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거라고들 하던 거였으니, 아무래도 “가정에 머물라!”는 방역방침은 심각한 오류로 평가돼야 한다. “2m 간격을 두고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걸어라!”가 최고의 방침이었지 싶다. 

거리 두기 완화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사실 아슬아슬한 폭탄 돌리기다 싶었는데, 하필 폭탄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수많은 이성애자들의 ‘사랑하는 가족’ 간 밀착 확산 사태가 좀 수습되어 가던 4월 말 5월 초 연휴에 ‘젊은것’들이 이태원과 강남으로, 클럽과 노래방으로 떼로 몰려다니다가 터진 거다. 이때다 싶은 한 언론사는 코로나 재확산이 염려된다면서 5년 전에 써두었다던 ‘블랙 수면방’ 기사를 올렸다. “… TV, 음료수 자판기, 재떨이 등이 있는 평범한 휴게실로 보였다. 입구 옆에 놓인 콘돔과 젤이 한가득 담긴 바구니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중략) 마음에 들면 건드려 보고 반응이 있으면 관계를 하고, 거부하면 다른 방으로 간다.” 문란(紊亂)은 고사하고 착해빠졌네, 뭐. 

2002년 노무현의 대선 공약이었던 차별금지법은 아직 까마득하고, 2017년 후보 시절 성소수자 의제를 ‘나중에’로 미뤘던 문재인은 임기가 반이 넘도록 꿈쩍도 안 하고 있는데, 2020년 5월 정세균 총리는 “특정 커뮤니티에 대한 비난은 ‘적어도 방역 관점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알량한 말을 해야 했던 걸 보면, 코로나19가 나름 또 할 일은 한다. 

며칠 전 한 게이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일부를 수정해 옮긴다. 

“왜 우리의 시민의식은 우리의 부재로 증명되어야 하나. 착하고 순종적인 시민이 되고 싶어 종로도 이태원도 번개도 끊고 살겠다는 익명의 글이 떠오른다. 쓰레기 언론과 달리 방역의 대상으로라도 비로소 호명해주는 방역당국에 대해 짐짓 감격하는 마음이 생겼던 게, 생각해보면 비참하다. (중략) 누군가에게는 자칫 직장과 가족과 사회에서의 입지가 결딴날 수 있는 변수가 그들에겐 그저 행정상의 세부적 난맥이다. 카드 사용내역으로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어 자가격리를 통보받자 우선 공포가 엄습했던 것에도, 뒤늦게 실소가 터진다. 이 모든 웃음 포인트를 넘어 우리끼리 안 만나는 게 지고지순의 방역대책이자 시민의식이라면, 그 지엄한 명을 못 이기는 척 따라주는 수밖에. 2주를 넘긴 오늘 나는 왜 홀로 하염없이 종로를 걷고 있을까. 내게 죄가 있어 종로 사거리 클럽 앞에 목이 매달려야 한다면 차라리 속이 시원하겠다. 자책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 검은 밤 같은 시국이 그저 아연하다.”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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