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법원이 강제징용 가해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한 압류결정문의 ‘공시송달’을 결정하면서 해당 기업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현금화 절차가 개시됐다. 대구지법 포항지원은 지난 1일 포스코와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의 합작회사인 피앤알(PNR)에 대한 압류명령 결정 등의 공시송달을 결정했다. 공시송달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서류가 송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절차다. 두 달 후인 8월4일 효력이 발생하면 법원은 이때부터 PNR 주식을 강제 매각해 현금화하라고 명령할 수 있게 된다.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의 자산매각 시 보복조치를 예고해온 터라 한·일 간 수출규제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갈등을 뛰어넘는 외교 격랑이 우려된다. 

이번 공시송달 결정의 의미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법원 판결에 따라 일본 기업의 재산을 처분함으로써 현금화하는 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일본은 이 조치가 가동하면 모든 수단을 강구해 대응하겠다고 공언해왔다. 한·일 간 갈등을 폭발시킬 시한폭탄의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4일 “모든 선택지를 시야에 넣고 대응하겠다”고 했다. 일본 언론들은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인상 등 보복조치를 거론했다. 일본이 선제 도발에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일 양국 관계의 파국을 막기 위한 외교적 해법이 절실하다. 하지만 일본은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기존 입장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일본은 한국 정부의 ‘1+1(한·일 기업의 자발적 참여로 위자료 지급)’ 방안은 물론 강제징용 피해자를 지원해온 한·일 양국 변호사·시민단체가 올 초 문제해결을 위한 양국 협의체를 구성하자는 방안도 거부했다. 

송달절차가 시작돼도 채무자 심문과 자산평가 등 후속 절차가 남아있어 실제 현금화까지는 시일이 소요된다. 양국은 이 사이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일단 국내적으로 사태 해결을 위한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정부가 피해당사자와 변호사·시민단체 간 사회적 대화기구를 만들어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국회도 적극 나서야 한다. 정치권은 나서봐야 득될 게 없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온 것이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다는 지적을 새겨야 한다. 일본 정부는 수출규제 조치가 자국 기업들 매출만 격감시키는 부메랑이 됐음을 돌아보고 추가 보복을 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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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4일 국회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기본소득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기본소득 문제를 이슈화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김 위원장은 4일 2차 비대위 회의에서 “기본소득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시기”라고 밝혔다. 그는 전날에도 “보수가 지향하는 가치인 형식적 자유는 전혀 의미가 없다”면서 “물질적 자유를 어떻게 극대화시켜야 하는지가 정치의 기본 목표”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비대위원장을 맡으며 통합당을 진보보다 앞서가는 ‘진취적인 정당’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 방법으로 정책경쟁을 택했다. 그는 “표를 어떻게 하면 극대화하느냐의 경쟁을 위해서는 계층을 포용해야 하고 그러려면 정책경쟁을 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책의 방향은 ‘포용 성장’으로 설정했다. 비대위 산하에 첫 위원회로 경제혁신위원회를 설치하고 ‘약자와의 동행’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기본소득은 바로 약자와의 동행을 위한 첫번째 정책 이슈인 셈이다. 플랫폼노동자들의 4대보험 문제를 의제화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취지일 것이다. 

기본소득 문제는 이제 막 논의를 시작했을 뿐이다. 김 위원장 스스로 현실화는 “상당히 요원하다”고 했다. 재원 마련이나 기존 복지체계 구조조정 여부 등에 대한 김 위원장의 구상도 불명확하다. 그럼에도 약자와의 동행을 키워드로 하는 혁신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사회적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따뜻한 보수정당은 통합당이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방향이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김 위원장의 말이 단순히 표를 얻으려는 구호에 그친다면 민심을 붙잡지 못할 것이다. 김 위원장과 비대위는 구체적인 후속 정책을 내놓고 실천함으로써 변화 의지를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이 주도하는 변화는 당의 기존 지향과 상당히 다르다. 당장 내부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화와 설득을 통한 내부 정리가 필요하다. 

김 위원장은 여당과의 관계에서도 “더 이상 반대를 위한 반대는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국가발전과 국민안녕을 위한 일이라면 적극 협력하겠다고도 했다. 선거법 개정에서부터 코로나19 대응, 긴급재난지원금 지급까지 사사건건 반대해온 통합당의 행태에 비추면 반가운 일이다. 백번 옳은 말이지만 이 역시 실천이 중요하다. 김 위원장의 약속대로 3차 추경과 일하는 국회 만들기에 적극 협력하는 통합당의 모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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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20년 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6·15선언이죠. 하지만 남북관계는 아직 안갯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여명학교도 그중 하나입니다. 여명학교는 탈북 청소년들을 가르칩니다. 작년 말 은평구로 새 터를 정하자 곧 주민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도 아니고 북한 이탈 학생이 기숙사에서 거주하는 학교다 보니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우려된다”는 주장도 있었죠. 여명학교는 통일여론의 바로미터입니다. 여러 조사를 살펴보면 “긍정적으로 보지만 관심은 크지 않고 경제적 부담에 신경 쓰인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론을 통탄하며, 이런저런 통일교육을 주문합니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통일은 종교화된 지 오래입니다. 실체가 없고, 비논리적이며, 주술적 힘을 갖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통일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역대 정부 통일안은 다 비슷하죠. 화해협력, 남북연합, 선거, 그리고 통일이 정석입니다. 하지만 통일 그 자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없죠. 통일되면 어떤 나라가 되나요? 수도는 서울로, 아니면 평양으로 하나요? 대통령제 등 정치체제, 선거 여부, 화폐 통합, 인구 이동, 부동산시장 규제, 군대와 경찰의 통폐합, 교육체제 이원화 등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 것이 한둘이 아니죠. 하지만 학계 내 제한적 논의뿐입니다. 막연한 희망, 믿음뿐인 셈이죠.

통일이란 목표는 정당한가요? 한민족이었으니 통일돼야 한다고 하지만 그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발명품임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민족의식 자체가 일제강점기 전후해서 생겼죠. 게다가 ‘한민족이니까 통일해야 된다. 왜? 한민족이니까’라는 주장은 순환논리로 설득력이 떨어지죠. 남한과 북한이 이미 다른 민족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습니다. 정치, 경제, 언어, 풍습, 역사관, 정체성 등 어느 면을 봐도 차이가 크죠. 같은 한민족이다 우겨도 문제는 남습니다. 한 민족이 두 나라에서 살면 안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독일민족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나뉘어 잘 삽니다. 대만은 분단에 만족하고 있죠. 통일이 외려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 탐라의 고통은 4·3항쟁까지 이어졌죠. 예멘 내전은 현재진행형입니다.

통일의 혜택을 드는 주장도 있습니다. 통일비용과 분단비용을 비교하며 “통일이 대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분단비용은 지금도 줄일 수 있습니다. 남북 방위비(330억달러)는 남북 간 외교 노력을 통해 줄일 수 있습니다. 통일 후 중국, 일본 때문에 줄이지 못할 수도 있죠. 남북철도 건설도, 남북경제특구 가동도 통일 전에 가능합니다. 통일되고 대박이 났다고 칩시다. 누구의 대박일까요? 자본주의 발달이 고도화돼 있는 남한, 그중에서도 대기업에 그 이득이 집중되겠죠. 북한 땅은 남한, 서구 투기자본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빈부격차가 더 벌어지고 긴장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 등 정치외교적 혜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나뉘어 있다고 꼭 전쟁을 하지는 않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보면 알 수 있죠. 한 나라를 이루고 있다고 꼭 평화롭지도 않죠. 유고슬라비아나 시리아처럼 말입니다.

사회적 논의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의 소원” 통일은 정치적 주술이었습니다. 북진통일을 위해서 빨갱이를 무찔러야 한다는 소리나, 민족통일을 위해 외세를 처단해야 한다는 소리 모두 정권 유지를 위해 이용됐죠. 그리고 이제 껍데기만 덩그러니 남게 된 겁니다. 관심이 떨어지는 게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이제 그 껍데기를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통일 제단에서 내려와 이 땅에서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통일이 아니라 평화와 공존에 있죠. 이를 위해 부지런히 뛰어야 합니다. 여명학교에 자리를 내주며 시작하면 어떨까요.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TXNAM@salisbury.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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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규칙은 스포츠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상상해 보라. 농구경기에 공격제한시간이 없다면 경기가 어떻게 진행될까? 점수가 앞서는 팀은 계속 공을 돌리기 일쑤일 테고, 지는 팀은 공격권을 가져오기 위해 일부러 파울을 해서 자유투를 유도하는 방법을 주로 쓸 것이다. 실제로 미국프로농구(NBA) 초창기 경기들이 그랬다. 재미도 인기도 없었다. 24초 이내에 공격을 해야 한다는 규칙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격제한시간이 도입되고 나서야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됐다. 조직의 성패도 마찬가지다. 변화를 위해선 기본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한다.

21대 국회가 시작됐다. 코로나19발 초유의 위기 상황을 맞아 그 어느 때보다도 ‘일하는 국회’에 대한 요구가 강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제안이 넘쳐나지만, 무엇보다도 상시국회가 정착되길 바란다. 정기국회와 임시국회의 구분은 1948년 제헌국회 때부터 일본의회를 모델로 도입된 것이다. 이젠 시대 상황에 맞게 바꿀 때가 됐다. 헌법조항을 핑계대기도 하지만, 국회법을 바꿔 임시국회를 상시화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사실 대부분의 선진국 의회에선 상시회기가 기본이다. 미국, 영국, 독일의 의회는 상시회기이고, 프랑스도 헌법에서 9개월간의 정기회기를 지정하고 있지만 총리의 요구나 정당 간 협상에 의해 회기연장이 가능하니 상시회기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또다시 원구성 협상에서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한다. 이해는 되는데, 동의하긴 어렵다. 국회법엔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첫 임시회 일정 및 상임위원장 선출과 관련해서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법5조에선 “첫 임시회는 의원의 임기 개시 후 7일에 집회”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41조엔 상임위원장은 “본회의에서 선거하며, 첫 집회일부터 3일 이내에 실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대로라면 6월8일 이전에 모든 원구성이 마무리되어야 한다. 관행과 법이 충돌할 땐, 당연히 법이 우선해야 한다. 그게 법치고 민주정치다.

한국에선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미국 의회에선 원구성 협상이란 것 자체가 없다. 상하원의 모든 상임위원장직, 심지어 소위원회 위원장직도 다수당이 당연직으로 차지한다. 물론 회기 중에 상임위원회나 본회의 소집은 언제든 가능한 구조다. 여야 합의를 전제로 하는 한국 국회의 관행과 사뭇 다르다. 특히 상징적 존재의 의미가 강한 한국의 국회의장과 달리, 하원의 경우엔 하원의장이 다수당 지도부와 협의를 통해 본회의에서 어떤 법안을 언제, 어떻게, 어떤 순서로 심의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상원의 경우에도 실질적으로는 다수당 원내대표가 하원의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일부 한국 언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수당에 의한 ‘의회독재’가 제도화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미국의 정치환경은 한국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점은 ‘승자독식’의 다수결 원칙이 선거제도와 의회 운영에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는 이와 달리 선거에선 ‘승자독식’의 원칙을 채택하면서도 국회 운영에선 관행적으로 ‘합의주의’를 채택해오고 있다. 이 두 원리의 불일치가 반복적인 국회 파행과 공전의 원인이 되어 왔다. 독재의 경험도 길고, 사회문화적으로 동질성이 높다 보니 ‘승자독식’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분명 공감하고 이해하는 바다. 하지만 ‘견제를 위한 견제’나 ‘반대를 위한 반대’가 관행이란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상황은 책임정치 구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늘 국회 문 열고 당당하게 정책으로 경쟁하는 정치를 국민들은 바란다.

야당의 입장도 이해는 된다. 그동안 여야가 바뀔 때마다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아온 것이 사실이고, 정당득표율과 국회 의석수 간의 괴리도 지속되어왔다. 지난 총선도 지역구 선거결과만 놓고 보면, 더불어민주당의 득표율은 50%에 조금 못 미치지만 전체 253석의 지역구 의석 중 163석(64.4%)을 차지했고, 미래통합당의 득표율은 42%에 달하지만 의석수는 84석(33.2%)에 불과하다. 관행상으로는 미래통합당이 원구성 협상에서 정당득표율에 해당하는 몫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협상은 하되, 국회법에 규정된 원구성 규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요구를 관철시키려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구태다. 여당보다 더 적극적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는 정책들로 승부를 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 13대 국회로부터 32년이나 흘렀다. 최소한 상시국회는 기본이 돼야 한다. 지금 과거의 비효율 국회를 반복할 만큼 한가로운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강명구 뉴욕시립대 바룩칼리지 정치경제학 종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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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표지.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고 신영복 선생은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여름 징역’의 고충을 이렇게 묘사했다. 폭염이 열악한 환경 속 가난한 이들에겐 창살 없는 감옥이 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에어컨 등 문명의 이기를 갖춘 공간에서 폭염과 열대야를 보낼 일반 시민들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쪽방촌 주민들에게 여름은 그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지자체들은 취약계층의 ‘일상 속 여름 징역’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각종 대책을 내놨다. 잠깐이나마 더위를 피하고 잠도 청할 수 있도록 복지관, 경로당 등에 (야간) 무더위쉼터를 만드는가 하면 물을 뿌려 더위를 식히는 쿨링포그, 바닥분수 등도 설치했다. 그런데 올해는 이런 ‘여름 피난처’마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기존 대책들이 거리 두기를 어렵게 하는 데다 바이러스의 온상이 될 수도 있어 지자체마다 전전긍긍하고 있다. 

4일 경상도와 전라도 곳곳에 올해 첫 폭염특보가 발령됐다. 올여름 폭염과 열대야 일수는 평년의 2배 이상이 될 것으로 예보됐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이미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맞는 첫 번째 여름으로,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힘든 여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와 폭염은 취약계층에 더욱 가혹하다. 

신영복 선생은 이어 말한다.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 그러나 머지않아 조석(朝夕)의 추량(秋凉)은 우리들끼리 서로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바이러스도, 폭염도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이 있어야 이길 수 있다. 이번 여름이 ‘경험해보지 못한 집단지성과 연대의 여름’이 되길 기대해본다.

<송현숙 논설위원 s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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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주여행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지난달 말 사상 첫 민간 우주선 ‘크루 드래건’을 성공적으로 쏘아올린 스페이스X 외에도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버진’그룹 리처드 브랜슨도 회사를 세우고 우주여행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한 번에 수억원이 드는 우주여행을 상류층의 호사로 볼 수도 있겠으나 우주여행을 다녀온 우주비행사들은 엄청난 경험을 했다고 밝혔다. 먼저 다치바나 다카시의 <우주로부터의 귀환>에 나온 비행사들의 체험을 들어보자.

“틈만 나면 지구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지루하지 않았다. (중략) 나는 미국 국민이라든가, 텍사스 사람이라든가, 휴스턴 시민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의식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지구에의 귀속의식뿐이었다.”(에드워드 깁슨)

“눈 아래로 지구를 보고 있으면 지금 현재 어딘가에서 인간과 인간이 영토와 이데올로기를 위해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바보 같은 짓처럼 생각된다”(돈 아이즐리)

“밤이면 소총의 불빛까지도 보인다. (중략) 우주에서 이 아름다운 지구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위에서 지구인 동료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 전쟁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슬프게 생각되는 것이다.”(월터 쉬라)

지구의 대기오염을 보고 대체 “우리들은 지구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고 통탄한 비행사도 있다. 우주비행사 러셀 슈와이카트는 “우주 체험을 한 뒤에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 없다”고 말했다.

우주여행은 결국 지구를 돌아보는 여행이다. 우주비행은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을 벗어나 자신이 살던 곳을 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우주비행사들은 총탄의 불빛을 보고 분노했지만 앞으로 우주여행자들은 산불이나 홍수로 허덕이는 지구의 모습에 비통해할지 모른다. 미국과 호주는 물론 북극권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대형 화재는 1979년 이후 20% 정도 늘었다. 1980년 이후 폭풍 발생 빈도는 2배 증가했다. 한쪽은 가물어서 불타고, 한쪽은 홍수와 쓰나미에 휩쓸리고 있다. 기후관측 사상 최초, 수백, 수천년 만의 처음이라고 명명된 재난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대기 중 배출된 탄소 중 절반 이상은 지난 30년 사이에 배출됐다.

어쩌면 우주여행자들은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에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태평양에는 텍사스주 크기의 거대한 ‘쓰레기 조류대’가 있다. 2차대전부터 상용화되기 시작한 플라스틱은 1940년대만 해도 사용량이 ‘0’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히말라야부터 심해까지 플라스틱 쓰레기를 볼 수 있다. 수전 프라인켈은 “21세기 첫 10년간 만든 플라스틱의 양은 20세기 전체 기간 동안 만든 양에 육박한다”고 했다.

우리는 화석연료를 마구잡이로 써서 지구를 데워놓았고, 썩지도 않는 쓰레기를 마구 버려서 지구를 더럽혀 놓았다.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미친 영향이 이토록 참혹하기에 과학자들은 농경이 시작된 이후의 시기를 인류세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오르도비스기, 데본기, 페름기, 트라이아스기, 백악기 등 모두 5번 대멸종이 있었는데 이 시대가 멸종의 시기에 비할 만큼 크다는 의미다.

실제로 지구에서 생멸한 생물종 중 인간만큼 악명 높은 학살자는 없다. 평균 4년마다 한 종이 멸종하지만, 인간에 의한 멸종은 최대 12만 배나 많다. 인간이 파괴해버린 자연 생태계에서 동물들은 점점 숨쉬고 살아갈 땅을 잃고 있다. 세계자연기금은 1970년부터 2014년까지 44년간 지구상에 살고 있는 포유류와 조류, 어류, 파충류, 양서류의 개체 수가 60% 감소했다고 2018년 발표했다. 무서운 속도다. 

인간은 이제 스스로를 멸종의 문턱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아직도 화석연료를 흥청망청 써대고 있는 통에 지구의 기온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북극의 영구동토가 녹으면 지금까지 접촉하지 못한 바이러스가 풀려날 수 있다.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은 더 흔하게 발병할 것이다. 산불, 홍수, 전염병 등 재해의 일상화, ‘뉴 노멀’이다.

우주여행은 초거시적으로 지구를 보는 것이라면, 지구에서는 미시적으로 지구를 살펴볼 수 있다.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가 밟고 있는 지구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망가진 지구를 버리고 우주 식민지로 가겠다는 발상 자체도 터무니없지만, 갈 수도 없다. 미래는커녕 지금 당장이 위기다. 2014년 기후정상회의를 앞두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지구 외에는) 플래닛(행성) B가 없기 때문에 플랜 B가 없다”고 했다.

1990년 보이저 1호가 촬영한 지구의 사진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이 “지구를 찍는 것이 무슨 과학적 가치가 있느냐”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항공우주국(NASA)을 설득해 보이저 1호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 촬영했다. 칼 세이건의 말대로 우주라는 광대한 공간에서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이다. 세이건의 부인 앤 드루얀은 “칼이 지구의 이미지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충격적인 힘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밝혔다. 올해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출간 40주년이다. 세이건은 <코스모스> 말미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b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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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는 지난 1일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가 원청 사용자를 상대로 낸 쟁의조정신청에 대해 “우리 위원회의 조정대상이 아니”라며 돌려보냈다. 원청 사용자를 노사관계의 당사자로 볼 수 있을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원청 사용자가 노동조합법상 사용자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중노위는 직접 근로관계에 해당(묵시적 근로관계설)되는 경우만이 아니라, 근로조건에 대한 실질적·구체적 지배·결정(실질적 지배력설)을 하는 경우도 판단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기존의 중노위 입장보다는 진전된 변화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작 실질적 지배력 유무에 대해서는 명확한 판단기준을 밝히지 않았다. 실질적 지배력이 있는 자인지에 대해 신청인 노동조합(노동자들)의 ‘입증부족’을 탓하며 사실상 조정위원회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고 회피했다. 무려 증거자료만 2000여쪽의 서류를 제출했음에도 말이다.

중노위는 노조법상 사용자성 판단의 기초로 묵시적 근로관계설을 들며 2008년 대법원 판결을 인용한 반면, 실질적 지배력설의 근거로는 하급심 판결만을 언급, 2010년 현대중공업 대법원 판결은 밝히지 않았다. 2010년 대법원 판결은 노조법상 사용자성을 판단할 때 기존(묵시적 근로관계설)과 달리 ‘실질적 지배력’을 기준으로 사용자 개념을 확대할 수 있다고 판시한 것이다. 근로기준법상 근로계약관계에 근거한 고용주가 아니라도 근로계약관계를 넘어 노동조합법상 사용자 책임의 주체를 확대한다는 취지로, 묵시적 근로관계나 파견 근로관계보다 더 폭넓은 사용자 개념이다. 

중노위가 결정문에서 현대중공업 대법원 판결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질적 지배력을 근거로 노조법상 사용자 개념을 확대한 대법원 판결의 의미를 다분히 의도적으로 평가절하하며 쟁의조정의 근거로 삼지 않으려는 속내를 비친 것이다.

소극적이고 노골적인 회피로 일관한 이번 중노위의 결정은 적극적인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망각한 것이다. 사실상 묵시적 근로관계에 이르지 않는다면 실질적 지배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원청 사용자로 하여금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를 부인할 수 있는 면죄부를 준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간접고용으로 발생되는 문제들로부터 책임을 회피하고 은폐하려는 원청 사용자의 시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잘못된 시그널을 줄 것이다.

이미 수차례 국제노동기구(ILO)는 원청 사용자와의 실질적 교섭을 권고해왔고,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원청 사용자가 간접고용 노동자의 근로조건 등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이 있는 자임을 인정한 것은 이미 다툼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중노위의 이번 결정은 국제사회와 인권기구가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그간의 노고를 깡그리 무시했다는 점에서 과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심은 있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중노위는 신청인 노동조합이 원청 사용자와의 교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쟁점교섭대상이었던 재난경영위원회 및 안전보건협의체에 하청 노동자의 참여 보장,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원·하청 공동협의체 구성 등을 권고했다. 이는 원청 사용자와의 실질적인 교섭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중노위는 원청 사용자가 간접고용 노동자의 노동문제에 대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개별법적 근로계약관계가 없더라도 집단법적 노사관계에서 사용자로서 교섭에 성실히 응하라는 가장 원칙적인 권고조차 할 용기도, 지혜도 가지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박주영 민주노총 법률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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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동네 공립 도서관에서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수도권 지역에 대한 강화된 방역 조치 시행에 따라 오는 14일까지 문을 닫는다’는 알림이었다. 서울시교육청 산하 도서관과 구청 도서관도 폐쇄 조치가 내려졌다. 서울·인천·경기 지역의 미술관·박물관도 운영이 전면 중단됐다.

도서관은 지난 3~4월에도 일제히 문을 닫았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주춤해지자 지난달 초 문을 열었지만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감염이 늘면서 3주 만에 다시 폐쇄됐다. 읽고 싶은 책을 온라인으로 신청하면 이른바 ‘워킹 스루’나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책을 빌릴 수 있는지 도서관에 문의했다. 도서관 직원은 이번 폐쇄 기간에는 그런 서비스도 안 한다며 미안해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쿠팡 물류센터가 폐쇄된 점을 들어 도서관 책을 외부에 유통하는 것 자체가 곤란하다고 말했다.

전염병 확산을 막는 게 급선무이므로 도서관 폐쇄와 대출 서비스 중단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방역 당국으로서도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학원이나 술집, 클럽 같은 곳은 여전히 성업 중이고, 전국의 초·중·고교생들이 오프라인 등교를 시작한 마당에 도서관을 폐쇄하는 것이 능사인지 의문이 든다. 정세균 국무총리의 말처럼 “두렵다는 이유로 일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불특정 다수가 드나드는 다중이용시설(多衆利用施設)이지만 도서관은 코로나19 방역에 그리 취약한 곳이 아니다.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1만1600여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지만 도서관에서 발생한 경우는 없다. 도서관에서는 큰 소리로 대화하는 것이 금지돼 비말(飛沫)로 인한 감염 위험도 적다. 

운영의 묘를 살리면 도서관 내 코로나19 전파 가능성은 더욱 낮출 수 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지 않게 온라인이나 전화로 이용자 예약을 받거나 약국에서 공적 마스크를 판매하듯 ‘5부제’를 하면 된다. 개인 정보 유출과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지만 QR코드 전자출입시스템 도입도 생각해볼 수 있다. 통풍이 잘되고 널찍한 실외 공간에 임시 서가를 운영하는 방안도 있다. 방역 때문에 일손이 부족하다면 인력을 늘리거나 한시적으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할 수 있다. 이미 정부는 35조원의 세번째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해 수십만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한 터다.

유종필 전 국회도서관장이 쓴 <세계 도서관 기행>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아카데미 도서관 사연이 실려 있다. 당시 레닌그라드는 히틀러 독일군에 900일 가까이 봉쇄됐다. 식량과 연료가 바닥나고 도시에는 매일 수백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건물 유리창이 깨지고 영하 30~40도의 혹한에 난방도 되지 않았지만 과학아카데미 도서관은 단 하루도 닫지 않았다. 심지어 군대와 병원을 위한 이동도서관까지 운영했고, 이 과정에서 도서관 직원의 절반이 사망했다고 한다. 전쟁과 고립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직원들이 도서관 문을 연 것은 도서관이란 존재 자체가 주민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 구소련의 도서관이 한 일을 2020년 한국의 도서관이 못할 이유는 없다. 도서관 문을 닫아 접근을 막을 게 아니라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로 갈 만한 장소가 마땅찮은 시민들에게 도서관 이용을 유도하는 역발상 행정은 어떤가. 평소 도서관에 가지 않는 사람들도 이번 기회에 도서관을 접하게 해 도서관 이용자의 저변을 확대하는 것이다. 미술관과 박물관도 마찬가지다. 방역을 철저히 하면서 개관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클럽이나 노래방으로 향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줄 것이다.

코로나19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까지 바꾸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는 일에 독서는 필수다. 문화강좌 개최 등 도서관의 사랑방 기능은 잠시 축소하더라도 시민들이 원하는 책을 읽고 자료를 찾을 수 있게 해야 한다. 특히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이번 기회에 도서관의 진가를 경험할 수 있도록 당국이 노력을 해줬으면 한다.

지식의 보고인 도서관은 최고의 복지시설이기도 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서관은 부자와 빈자,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코로나19가 무서워도 도서관은 열어야 한다. 재난 이후를 대비하고 양극화를 완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공 시스템이 바로 도서관이다.

<오창민 사회에디터 risk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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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와 그린 뉴딜. 뜨겁고 무서운 주제다. 포스트까지 생각할 겨를 없이 코로나19 와중에 모두 어렵다. 그럼에도 지난 12일 국무회의에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국판 뉴딜’에 “그린 뉴딜이 포함돼야 한다”고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이후 그린 뉴딜이 회자되고 있다.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과연 그 정의가 무엇인지, 대통령의 수사로 끝나지 않게 제대로 이행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다.

통상 뉴딜은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으로 쓰이는데 현재와 같은 경제구조 속에서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생산활동을 줄이는 건 대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후위기도 막고 생산활동도 높이는 묘안이란 게 존재할 수 있을까? 특히 정부의 그린 뉴딜 목소리에 어정쩡한 입장에 있는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2015년 출간한 스톡홀름 대학 요한 록스트룀 교수의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Big World Small Planet)>가 그린 뉴딜의 기초체력을 높이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다. 책에 따르면 2014년 5월에 열린 스톡홀름 식량포럼에서 지속 가능 발전 세계기업위원회(WBCSD) 의장 피터 베커는 “기업의 사회적 책무는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세계 경제의 10%를 좌우하는 200여개 다국적 기업들의 네트워크 수장이 나서서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고 화석연료 탓에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더 이상 지구를 기업 외적인 이슈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2014년 다보스포럼에서 니콜라스 스턴경이 지적한 대로 지속 가능성은 세계 성장의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일한’ 이야기가 되었다. 기후위기의 겨우 한 갈래에 불과한 코로나19로 벌벌 떠는 이 시점에 새길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획재정부가 중심이 되고 환경부도 TF를 꾸리고 있는 그린 뉴딜 정책에 기대와 우려가 함께하고 있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낯설다는 이유로 일단 배척당하고 욕을 먹는다. 피터 드러커 교수는 “모든 사람이 환영하는 프로젝트라면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관성의 허들을 깨고 넘어가야 하는 또 다른 과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린 뉴딜을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지구자원을 포함한 환경을 보호의 대상으로 격리시키는 고정관념을 깨는 일일 것이다. 다시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로 돌아가자면 우리는 여태 한쪽에는 자연이 다른 한쪽에는 사회가 자리한 세상에서 살아왔다. 환경 대 발전. 그런데 그 두 가지는 결단코 만나는 법이 없다. 지구자원은 외부 효과가 아니다. 모든 부의 원천인 지구 위에서 살아가면서 그것을 어떻게 ‘외부’라고 선언할 수 있겠나!

사족인데, 2018년도 우리나라 기업이 집행한 사회공헌 예산은 1조7000억원 정도 된다. 그중 환경분야는 동물까지 포함하여 겨우 4%에 불과하다. 그린 뉴딜의 큰 물결 속에서 기업이 정부와 함께 지구자원을 지키면서 새로운 부와 일자리를 창출하길 바란다. 손톱만 한 사회공헌 예산이지만 이 또한 지구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전환되길 바란다. 이제 지구는 ‘기업과 한 몸’이다. 최고경영자(CEO)의 E는 ‘Ecology(생태)’여야 한다. 죽은 지구에서 기업은 없다.

<이미경 환경재단 상임이사 egreen@greenfund.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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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같다”는 말은 여러 오해를 품고 있다. 사람들은 동화에서 꿈과 희망이 가득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세계를 떠올린다. 작은 생명 하나 소홀히 여기지 않는 평등한 세상을 상상하기도 한다. “아동문학을 하는 분인데 술을 너무 잘 드시네요” 같은 말을 들어본 적도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어린이의 존재는 방긋방긋 잘 웃어야 하고 해맑아야 한다. ‘해맑다’는 말은 어른이 실현하지 못하는 이상향을 함축한 것이다. 어린이가 어른 앞에서 “나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은 공공연한 금기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어린이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이 되는 상황을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어린이의 웃음에서 구하면서 눈물은 외면한다. 어린이에게 종종 어른만큼 또는 더욱 가혹한 처벌을 요구하기도 한다. 19세기 초까지도 잘못을 저지른 여섯살 어린이를 교수형에 처한 기록이 있다. 지난 월요일에는 파키스탄의 여덟 살 어린이 조라가 고용주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먹이를 주던 앵무새가 새장에서 날아갔다는 이유였다. 조라는 자신보다 더 어린 그 집의 아기를 돌보던 아동 노동자였다.

다시 동화 이야기로 돌아가면, 뉴베리상으로 잘 알려진 존 뉴베리는 성공한 동화책 출판업자였다. 그가 ‘제임스 박사의 해열제’의 특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약을 팔기 위해서 자신이 출판하는 어린이책에 꾸준히 ‘제임스 박사의 해열제’를 먹지 않으면 인물이 죽는 내용을 포함시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뉴베리가 만든 책을 사고 돈을 조금만 더 내면 사은품으로 공과 바늘을 하나씩 주었는데 나쁜 일을 하면 그 공의 검은 쪽, 착한 일을 하면 빨간 쪽에 바늘을 꽂게 되어 있었다. 어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어린이는 몇 번의 재판을 거치는 어른들보다 훨씬 쉽게 ‘악의 오명’을 쓴다. 어른들은 추상화된 자기 상상 속의 어린이와 눈앞의 어린이가 일치하지 않으면 힘으로 그 어린이를 짓밟는다. 고립된 어린이에게는 변호사가 없다. 우리 곁에서도 한 어린이가 여행가방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계모의 악행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 무자비한 성인 권력의 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것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 6월 5일 (출처:경향신문DB)

또다시 동화 이야기로 돌아가면, 뉴베리 가문은 약도 잘 팔고 동화책도 잘 팔았지만 어떻든 어린이책을 펴내어 외로운 어린이들이 자신의 변호인을 책 속에서라도 모실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1922년에 시작된 뉴베리상은 2020년에 수상작으로 제리 크래프트의 <뉴 키드>를 선정했다. 이 책의 주인공 조던 뱅크스는 사립학교에서 몇 안 되는 유색인종 학생이다. 반 아이와 교사는 “경제적 지원”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반사적으로 조던을 쳐다본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빈민가에 살며 망가진 가정에서 자랐고 아빠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난 규칙을 지켜야 하고 다른 애들은 어겨도 되는”, 겉으로 우아한 이 학교는 조던에게는 적대적 공간이며 조던은 그 제도와 싸운다. 조던의 이야기는 미국의 시위 현장을 걷는 어린이에게 힘이 될 것이다. 좋은 어린이책은 이렇게 동화 같은 일을 한다.

마지막으로 동화 이야기로 돌아가면, 영원히 어린이로 사는 피터팬은 없다. 피터팬의 존재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건 오히려 자라지 않는 어린이에 대한 상상의 비현실성이다. 어린이를 비롯한 모든 약자는 세계와 투쟁하며 성장하고 독립한다. 어린이는 필연적으로 자란다. 그 필연을 두려워하는 건 약자를 영원한 도구로 여겨온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가장 염려하는 건 성숙 없이 성장만 해서 어른이 되어버린 저열한 차별주의자들이 여전히 눈앞에 있다는 것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d@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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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청 직원들이 5월12일 긴급재난지원금 신청과 관련해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시작된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과정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꼈다. 분명히 전 국민에게 주겠다고 했는데 세대주만 신청할 수 있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정부는 1인 가구는 40만원, 2인 가구 60만원, 3인 가구 80만원, 4인 이상 가구 100만원으로, 전국 2171만가구의 세대주가 신청하고 받을 수 있도록 긴급재난지원금을 설계했다. 세대주 아닌 세대원들은 지원금을 구경조차 못했다. 

세대주는 주거 및 생계를 같이하는 생활단위인 ‘세대’의 대표를 말한다. 1962년 주민등록법과 함께 등장한 세대주는 각종 신고의무 등 행정편의가 목적으로, 실생활에선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다. 주민등록표상의 성인 세대원 중 아무나 될 수 있고, 기존 세대주의 동의를 거치면 언제든 세대주 변경이 가능하다. 평소엔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세대주가 긴급재난지원금 신청의 주체가 되면서 관심의 대상이 됐다. 세대주를 둘러싼 구멍들도 드러났다. 이혼소송 중이거나 별거, 가정폭력 등으로 세대주와 불화가 심각한 세대원은 지원금을 받을 수 없었다. 가구 구성이 법적 가족관계와 다른 경우나 세대주가 행방불명 또는 연락두절인 경우도 있었다. 잇단 이의제기에 정부가 구제할 길을 열어놓았지만, 서류를 통해 가정불화 등을 명확하게 입증하지 못하면 지원받는 것이 어렵게 돼 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현재 이런저런 이의신청이 26만건을 넘었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우리처럼 현금지원을 한 나라 중 가구별로 지급한 곳은 없다. 미국은 납세자의 94%에 1인당 148만원씩, 일본은 모든 국민에게 1인당 114만원, 싱가포르는 소득별로 52만~104만원을 지급했다. 국내 지자체 중 상당수도 개인별로 지원금을 지급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의당, 가족구성권연구소 등은 ‘세대별 지원’ 기준을 낡은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이재명 경기지사의 말에 공감이 간다. 이 지사는 “개인별 지원이 편하고 빠른 데다 가부장적 개념인 세대주만 신청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헌법상 평등 원칙에 잘 맞지 않는다”고 했다. 

세대주 논란은 사소한 듯 보이지만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냈다. 가족을 동원의 대상으로 간주해 사회보장의 우선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기고, 필요할 때마다 손쉽게 세대(가구) 단위의 선별적 복지지원을 해오던 오랜 관행의 일면을 제대로 부각했다. 

가족은 그 구성과 구성원들의 역할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남성 1인에 의한 생계 부양자 모델’의 퇴조가 확연하다. 가구 구성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며, 어느 한 명이 절대적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구성원들이 조금씩 나눠 생계에 기여하면서 서로 기대어 사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정부는 ‘4인 가족’을 기준으로 그 이상은 모두 100만원으로 ‘퉁치고’ 말았지만, 4인 가족은 이미 솔기가 뜯어진 낡은 옷이다. 2018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국 2050만가구 중 대세는 1인 가구(29.3%)와 2인 가구(27.3%)다. 4인 가구는 17%로, 2010년 2인 가구에 1위 자리를 내줬다. 그리고 지금도 감소 중이다. “재난지원금 몇 십만원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여길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주변엔 몇 만원이 절실한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긴급재난지원금은 부모를 모시거나 자녀가 많아 더 긴급한 지원이 필요해 보이는 대가족에 불리하다는 역차별 논란도 빚었다. 국제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이 재난지원금 기준은 무슨 취지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정했는지 묻고 싶다. 

재난지원금은 한 예일 뿐, 우리 사회에선 복지지원의 기본단위가 과도하게 세대 기준으로 쏠려 있다. 여성가족부가 세대주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56개 법령을 검토해 “주택, 조세지원, 복지급여 전달 등의 정책 지원이 세대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변화하는 가족 구성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보고서를 낸 것이 이미 4년 전이다. 세대주(head of household), ‘집안의 대장’이라니 2020년에 너무나 낡은 개념 아닌가. 서구 사회는 1960년대부터 변화하는 가족 구성에 맞춰 복지 이전 모델을 다듬어왔다. 

‘세대별(가구별)’ 지원을 ‘개인별’로 바꾸는 것은 단어 하나를 고치는 게 아니다. 철학을 바꾸는 것이다. 가족 내 개인들이 모두 튼튼하게 설 수 있도록 구성원 각자를 중심에 두고 지원하는 것이 맞다. 재난지원금 신청(신용·체크카드)은 내일까지다. 2020년이 역사상 처음 ‘온 국민’이 재난지원금을 받은 해와 더불어, 우리사회 복지의 철학을 바꾼 논의가 시작된 해로도 기록되길 바란다.

<송현숙 논설위원 s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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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청와대사진기자단)

정부가 질병관리본부(질본)를 질병관리청으로 승격하고 보건복지부에 ‘보건’과 ‘복지’를 각각 담당하는 복수차관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또 질병관리청 산하에 권역별 ‘질병대응센터’를 신설키로 했다. 행정안전부는 3일 이 같은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정부의 보건의료 기능을 강화하고, 질병관리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높이겠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시의적절한 조치라고 본다. 

이번 정부조직 개편의 핵심은 질본의 ‘청’으로의 승격이다. 복지부 소속기관인 질병관리본부가 중앙행정기관인 질병관리청으로 승격하면 예산·인사·조직을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감염병 정책·집행에서 실질적 권한을 갖게 된다. 또 역학조사관 등 전문인력을 대폭 확충할 수 있어 신종 감염병에 대한 신속 대처가 가능해진다. 감염병 정책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해 감염병 대응 역량을 한층 높인다는 것이다. 코로나19와 같은 신종 전염병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에서 감염병 관리를 전담하는 독립기관의 설립은 시대적 요구이다. 

지난 1월20일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자 질병관리본부는 중앙방역대책본부를 꾸리며 신속하게 대응했다. 확진자 발생지역에 방역관·역학조사관을 파견해 감시와 역학조사를 실시하는가 하면 감염병 위생수칙을 만들어 대국민 교육·홍보에 나섰다. 또 민간 의료계·지자체와 협력해 지역 방역망을 구축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가 4개월 넘게 지속되고 있지만, 감염병 폭발을 피하며 해외에서 ‘K방역’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질병관리본부 구성원의 헌신과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관리청이 설립되고 복지부에 복수차관제가 도입되면 관련 조직·인력이 크게 보강될 것이다. 행정조직 확대나 인력충원은 보건의료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작일 뿐이다. 권역별 질병대응센터 신설과 함께 지역사회 의료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병상 기준 10% 수준인 공공의료를 20%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 또 공공의료기관·중소병원 인력 수급을 위해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 21세기는 감염병의 시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신종 감염병 발생 주기는 3~5년으로 짧아질 것이라고 한다. 질병관리청이 국내 감염병 대응 역량을 키우고 보건의료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견인차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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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전 의원.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3일 “법이 정한 날짜에 국회를 연다”고 밝혔다. 미래통합당의 동의가 없어도 5일 본회의를 열어 국회의장단을 선출하겠다는 것이다. 원구성 협상 타결 후 개원을 주장하는 통합당의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를 ‘히틀러식 독재’라며 반발하고 있다. 법정 시한 내 개원은 당연히 지켜야 한다. 늑장개원이란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자는 주장도 맞다. 문제는 177석 거대여당 민주당의 협상 의지와 태도다. 여야가 함께하는 시한 내 개원을 성사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원구성은 교섭단체 간 협상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민주당은 18개 상임위원장을 모두 가질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제1야당의 주장은 아우성 정도로 취급한다. 협상전술이겠지만 지나치다. 일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법과 원칙만큼이나 협상과 타협도 중요하다. 명분만 앞세우며 수적 우위로 밀어붙이는 건 협치라기보다 독주에 가깝다. 

민주당이 당론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금태섭 전 의원을 징계한 사실도 밝혀졌다. 지난해 12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표결에서 기권표를 던진 금 전 의원에 대해 경고 처분을 내린 것이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양심에 따라 표결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국회법도 이를 보장하고 있다. 개원을 앞두고 소속 의원들의 개별 행동을 막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건 당연하다. 강한 여당이 되기 위해 질서 있는 당 운영은 필요하다. 하지만 하나의 이견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비민주적이다. 금 전 의원은 재심을 청구했다. 잘못된 징계를 철회하는 게 맞다. 

과거사 문제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과거사는 당연히 바로잡아야 한다. 5·18민주화운동 왜곡처벌법과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안을 당론 추진하기로 한 것은 환영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경중과 우선 순위가 있다. 코로나19 위기극복이 최우선 과제인 상황에서 여당의 메시지가 온통 과거사에 집중되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법원 판결까지 나온 한명숙 전 총리 뇌물수수 사건의 쟁점화는 정치적 한풀이로 비칠 수 있다. 양향자 의원이 대표발의한 역사왜곡금지법안에는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를 연상케 하는 조항도 포함됐다. 

민주당은 시민들이 177석을 만들어준 의미를 다시 새겨야 한다. 코로나19 위기극복과 민생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매진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기 바란다. 성과만 낼 수 있다면 당내 민주주의나 야당과의 협치를 무시해도 된다는 착각도 버려야 한다. 오만한 여당은 무능한 여당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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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깡’을 들으면 멍해진다. 그 노래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퇴근길에 동네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특공대 복장을 한 사람이 나타나 한 손엔 조명, 한 손엔 폭죽을 든 채 화를 내며 꿀렁대는 것을 본다면? 그러다 랩을 하는데 그 가사가 “모두 인정해 내 몸의 가치/ 허나 자만하지 않지”라며 자만을 하고 “허세와는 거리가 멀어 귀찮아 죽겠네”라며 허세를 떠는 내용이라면? 개인이 자신을 연출하는 방식이 자신감 넘치고 요란스럽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며 멋지다고 박수치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이미 사색이 된 얼굴로 잘한다며 환호해봤자 그 모습은 도리어 그를 위협하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니 ‘깡’을 들으면 그저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요? 여기서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한가? 물론 자만이나 허세가 자기 확신의 결과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하지만 늘 무언가를 말한 뒤에 그 말이 받을 공격과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 쓰는 요즘은 그런 가짜 자신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2018년 호주의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가 발표한 넷플릭스 코미디쇼 <나의 이야기>는 공개와 동시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쇼에서 해나 개즈비는 절반이 지난 시점 갑자기 “이제 코미디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더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뚱뚱하고 못생긴 레즈비언’으로 자신을 비하하거나, 고통스러운 과거를 농담거리로 만들지 않겠다고. 그것이 코미디라면 코미디를 그만두겠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 또한 명확하게 밝힌다.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을 존중하고 덜 외롭게 하기 위해서”라고. 더 이상 코미디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코미디가 되어버린 <나의 이야기>는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그만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것은 코미디쇼가 아니라 미화된 테드(TED) 강연” “쇼가 아닌 대학교 강의” “지루한 독백”.

2020년 5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해나 개즈비의 새로운 코미디 <나의 더글러스>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받았던 공격에 대한 해나 개즈비의 훌륭하고 세심한 답변이 들어있다. 기존 코미디가 갖고 있던 자학적인 웃음을 거두고, 그것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고백한 뒤 이 시대의 코미디는 끝났다고 외친 위대한 여성 코미디언은 전보다는 가벼운 표정으로 나타나 “<나의 이야기>가 이렇게 흥행할 줄 알았더라면 3부작 정도로 나눠서 할 걸 그랬다”는 유머를 던지며 새로운 쇼를 시작한다. 그는 한 시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치밀하게 설계한 대본 안에 수백 개의 복선을 만들고 회수하며 관객들을 쥐고 흔든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의 이야기>를 향한 비판을 반박한다. “이미 테드는 미화되어 있는데 왜 또 미화를 하는 거죠?” “내 쇼가 강연 같다고? 진짜 강연을 보여줄까! 이게 강연이야!” 불이 꺼지고 무대 위 스크린에 그림들이 등장한다. 진짜 강연처럼 명화 속 여성혐오들을 엄청난 펀치라인을 통해 깨부순다. (해나 개즈비는 미술사학 전공자다)

말을 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자꾸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생각만 할 것인가. 사람은 백퍼센트의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다. 일단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하자! 그리고 돌아오는 반응이든 공격이든 그것과 맞서보자. 그렇게 하다 보면 나의 이상적인 주장과 초라한 현실 사이의 간극도 줄어들지 않겠나. 내 생각이 틀렸다면 실컷 우기다가 부끄러워하자. 지금도 이 글이 ‘비의 깡을 옹호하는 것처럼 읽히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겨낸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서문에 있지 않다! 그렇게 보인다면 죄송합니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b@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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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일상을 대중적으로 표현한 작가 노먼 록웰의 ‘궁핍으로부터의 자유’(1943).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 깔딱고개를 오를 때다. 1941년 1월6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의회 연두교서에서 “우리가 다져나갈 미래는 네 가지의 본질적이고 인간적인 자유에 기초를 둔 세계”라며 언론(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역설했다. 30번이나 국민들과 노변정담(爐邊情談)을 한 루스벨트 생애에서도 손꼽히는 명연설이다. 세번째 궁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는 빈곤층·실업자의 복지와 사회안전망을 보듬자는 것이다. 그 말을 3일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초선들에게 옮겼다. 김 위원장은 “궁핍으로부터 자유를 찾아야 한다”며 “이 실질적인 자유를 당이 어떻게 구현할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대공황과 코로나19의 공명(共鳴)일까. 뉴딜(New Deal)도 그랬고, ‘루스벨트 소환’이 이어지고 있다. 

김 위원장의 표현은 그간 빈곤과 불평등에 주목한 진보학자들이 써온 말이다.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도의 석학 아마르티아 센(하버드대 교수)이 확장시켰다. “악마는 항상 꼴찌부터 잡아먹는다”고 한 그는 빈곤을 ‘자유가 박탈된 조건’으로 보고, 어떤 경제위기가 닥쳐도 빈자들이 굶어죽지 않고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실질적 자유’란 말도 기본소득 주창자인 필립 판 파레이스(벨기에 루뱅대 교수)가 저서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에서 쓴 개념이다. 파레이스는 2018년 경향포럼 패널로 서울을 찾아 “모든 이가 어떤 사회적 활동도 선택할 수 있는 지지대가 기본소득”이라고 말했다. 빈자가 말하는 자유는 불평등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한국 보수엔 낯선 ‘자유’ 개념이다. 

김 위원장은 통합당 의원들에게 “과거 가치관과 떨어지는 일이 있어도 시비를 너무 걸지 마라”며 ‘약자와의 동행’을 되뇌고 있다. 김 위원장은 “재정 문제를 따져보겠다”며 신중한 자세지만, 당에선 기본소득 얘기도 움트고 있다. 총선 참패 후 제1야당의 새 방향을 큰 정부(복지·재정 확대)로 잡은 셈이다. 그 길은 언젠가 보수 내 작은 정부(시장주의) 목소리와 부딪칠 것이다. 넘느냐, 막히느냐, 돌아가느냐. 그의 리더십도, 한국의 보수도 거기서 첫 고비를 맞을 듯싶다.

<이기수 논설위원 k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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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하면 젊은이들 춤추고 노는 곳으로만 안다. 사람이 모이면 그게 자동으로 클럽 활동. 더운 날 누군 죽어라 밥벌이 땜에 곤죽이 되어 사는데 핑핑 놀고먹는 치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부아가 난다고 ‘부에나’인가. 하지만 인간이 줄곧 침울하게 살 필요는 없다. 춤도 추고 술도 마시며 사는 게 인생이다. 이른 더위에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 생각나서 음반을 틀어놓고 편지를 쓰고 있는데, 엉덩이가 나도 모르게 들썩거리게 된다.

헤밍웨이는 럼과 라임과 설탕을 갈아 녹인 칵테일 다이키리, 톡 쏘는 향의 애플민트를 섞은 칵테일 모히토를 매일 야채주스를 마시듯 즐겨 했다. 선선한 아침바람을 쐬며 <노인과 바다>를 집필하고, 저녁이면 해변 어느 쿠반 재즈밴드가 있는 클럽에서 술친구들을 찾았다. 어부들 눈에 하릴없는 백수로 보일 이 영감에 대해선 부아가 날 일이 없었던 게, 술값 계산을 종종 해주는 골든벨의 센스. 거기다 음악가들에게 팁을 쥐여주고는 했으며 자택 파티에 초대했다.

쿠바엔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노예상인에 의해 집합되었다. 돼지우리 쿨리에 싣고 왔다고 해서 이들을 ‘쿨리’라 부른다. 아프리카 노예들만 배에서 죽어나간 게 아니었다. 중국인 노예들도 아바나에 도착하면 알몸으로 신체 검진을 받았다. 여기엔 우리 한국인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흑인 노예에 이어 차별과 수모를 겪어야 했다. 노래와 춤으로 견디며 지내다가 혁명이 터지자 흑인과 쿨리와 혼혈인들은 어깨를 겯고 동참했다.

쿠바엔 단골로 드나들던 술집, 음반사, 연락처를 나눈 친구들이 여럿이다. 내게 살사를 가르쳐준 여인과 최상의 모히토를 마는 비법을 전수해준 친구들. “두 송이의 치자꽃을 당신께 드려요. 해질 녘 한 송이라도 시들면 당신 마음이 떠났음을 꽃들도 눈치챈 거겠지요. 부디 내 특별한 입맞춤의 사랑을 기억해줘요.” 간곡한 사랑의 발라드를 기억한다. 미국에 없는 사랑과 연민이 작고 가난한 섬나라 쿠바엔 있다. 돈과 무력이 지배하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

<임의진 목사·시인 shodanc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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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방송법은 간접광고를 규제하고 있다. 허용은 하지만, 선은 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시행령에 이런 조항이 있다. ‘간접광고가 해당 방송프로그램의 내용이나 구성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할 것’ ‘해당 방송프로그램에서 간접광고를 하는 상품 등을 언급하거나 구매·이용을 권유하지 아니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 ‘간접광고로 인하여 시청자의 시청흐름이 방해되지 아니하도록 할 것’ 등이다.

지난달 9일 밤에 방송한 SBS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 8회의 한 장면을 보면 이렇다. 잠복 중인 여자형사가 차 안에서 컵라면을 먹는다. 후배인 남자형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포장된 볶음김치를 내민다. 김치를 맛본 여자형사가 감탄하며 말한다. “아, 시원해, 장미(남자형사의 별명) 김치 좀 먹을 줄 아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여자형사가 주머니에서 화장품을 꺼내 입술과 볼에 찍어 바른다. 남자형사가 묻는다. “그 신문물은 뭔데….” 여자형사가 대답한다. “애들 앞에서는 멀티 밤도 못 바른다더니. 너 가져. 이거 하나면 다 돼.” 이 장면들은 방송된 지 한달이 다되어가는 지금도 시청자들 사이에서 ‘홈쇼핑을 방불케하는 PPL 광고(방송 소품을 이용한 간접광고)’로 회자되고 있다.     

지난 4월 시작한 <더 킹>은 ‘시청률 보증수표’로 불리는 김은숙 작가의 작품답지 않게 고전 중이다. 1~2회만 시청률 10%를 넘어섰을 뿐 지난달 30일 방송된 13회까지 쭈욱 ‘한 자릿수’ 시청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은 3회 동안에 대단한 반등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달 29일에는 ‘전 국민의 안전의식 고취를 위해’ <더 킹>이 방송될 시간에 영화 <컨테이젼>이 긴급 편성되기도 했다.  

실패 요인을 따져보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평행세계라는 생소한 설정, 이전 작품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 등 여러 진단이 나온다. 여기에 과도한 PPL 광고 문제도 빠지지 않는다. 사실 드라마가 실패한 뒤 나오는 지적은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단점은 작품이 실패했을 때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작품이 보란 듯이 성공했을 때는 되레 생소함이 신선함으로, 익숙한 연기와 연출이 정석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PPL 광고에 대한 지적은 다르다. 지금까지 등장한 PPL 광고 분량을 정확히 측정해 보지는 않았지만 <더 킹>의 경우는 확실히 과도하다. 명백하게 ‘시청자의 시청흐름’을 방해한다. 나 역시 <더 킹>을 시청하다가 맥락 없는 PPL 광고가 등장해 어이없어했던 경험이 한두번이 아니다. 처음에는 황당했다가, 수차례 반복되니 무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물론 PPL 광고가 필요한 방송제작의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니 웬만한 PPL 광고는 용인할 수 있는 여유도 있다. 다만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줬으면 좋겠다. 지난해 9월21일 방송된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 14회가 아예 극 중에 ‘맥락 없는 PPL 광고’를 논의하는 장면을 넣어 실제 PPL 광고를 실행한 것처럼. 지극히 일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PPL 광고가 진행되고 있는 작은 장면도 작가의 작품 속에 있지 않은가.

<홍진수 문화부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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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구글 번역기를 써본 적이 있는가?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공지능 번역기의 수준은 매우 낮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영어와 한글은 어순이 다른데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번역을 해낸다. 문장은 단어들의 나열로 구성되는데, 이 나열에서 자주 반복되는 패턴을 학습하고, 학습된 패턴을 활용하기 때문에 단어별로 번역하던 예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결과가 나온다. 사진이나 언어처럼 복잡한 데이터에서 통계적인 패턴을 찾아내는 능력은 인공신경망을 사용하는 기계학습의 중요한 강점 중 하나다.

그렇다면 기계학습을 사용해서 신경 활동의 패턴을 언어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할까? 놀랍게도 가능했다. 마킨(Makin) 등은 사람들이 말하는 동안의 뇌 활동을 측정하고, 측정된 신경 활동을 언어로 번역하는 기술을 지난 4월 ‘네이처’ 신경과학지에 발표했다. 이 기술은 신경 활동을 언어로 번역하는 기존의 방법들보다 훨씬 더 적은 데이터를 사용했으며, 높은 정확도를 보였다. 기존의 기술과 마킨의 기술은 어떤 측면에서 달랐을까? 

■뇌 활동을 글자로 번역하는 법

말하는 동안의 신경 활동으로부터 말하는 내용을 추론해내는 기술은, 생각으로 로봇 팔을 조종하는 기술과 유사하다. 둘 다 뇌 속 신경 활동을 측정하고, 측정된 내용을 해석해서 외부 장치의 활동을 조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경 활동과 외부 기계의 정보 소통과 관련된 기술을 뇌-기계 상호작용이라고 부른다. 이제 생각으로 로봇 팔을 조종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먼저 팔을 들 때는 신경 활동이 어떤지, 팔을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는 신경 활동이 어떤지를 컴퓨터에 학습시킨다. 그 뒤, 팔을 움직이려는 생각을 하는 동안의 뇌 활동을 해석하고, 그 결과를 로봇 팔에 전달해 로봇 팔을 조종한다.

사고나 질병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의 뇌 활동으로부터 이들이 하려는 말을 문자 언어로 전환하는 기술에도 비슷한 방법이 사용된다. 먼저, 말을 하는 것과 관련된 뇌 부위인 가쪽 고랑(sylvian fissure)의 신경 활동이나, 혀와 성대 근육을 조정하는 운동 신경의 활동을 측정하고, 이로부터 혀와 성대를 어떻게 움직이려고 하는지 추론한다. 그 뒤, 추론된 움직임이 어떤 말에 해당하는지 추론하는 방식이 사용되곤 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방식은 정확도가 매우 낮았다. 틀릴 확률이 39%에서 60%에 달하곤 했다.

마킨 등은 조금 다른 방법을 썼다. 혀와 성대의 어떤 움직임을 추론하는 중간 단계를 과감하게 건너뛰었다. 대신에 측정된 신경 활동으로부터 말하려는 내용을 직접 추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인공지능 번역기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듯이, 신경 활동을 바로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 결과 틀릴 확률이 최저 8%까지 낮아질 정도로 정확도가 높아졌다. 사람들이 음성 언어를 글자로 채록하는 정확도가 약 5%이므로 틀릴 확률을 8%까지 낮춘 것은 대단히 놀라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비교적 적은 데이터로도 이 기술을 활용할 수 있었다. 뇌-컴퓨터 상호작용 기술에서는 대개 개인별로 특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생각으로 로봇 팔을 조종하면, 공장에서 완제품을 만들어 출하할 수 없다. 사람마다 뇌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고, 신경 활동을 측정하는 전극이 이식된 위치가 조금씩 다르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신경 활동의 특색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을 움직이려 할 때 뇌 활동이 어떤지 측정하고 기계를 학습시키는 과정은 사용자가 바뀔 때마다 해주어야 한다. 심층 인공신경망의 학습에는 대개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므로, 사람마다 별도로 기계를 학습시켜야 한다는 점은 상당한 장애물이었다. 

그런데 마킨 등은, 한 사람에게서 얻은 많은 데이터(460개 문장, 1800가지 단어)로 기계를 학습시킨 뒤, 학습된 기계를 다른 사람에게 얻은 적은 데이터(30개 문장, 125가지 단어, 4분 소요)로 추가 학습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런 방식이 가능한 것은 개인별로 뇌 활동의 특성과 측정된 위치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4분의 학습만 시킨 기계에서는 보통 53%나 되는 에러율이 나왔지만, 미리 학습시킨 기계를 4분간의 데이터로 더 학습시켰더니 에러율이 36%로 17%나 줄어들었다. 이는 비교적 적은 데이터로도 개인별 맞춤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기술과 제도

최근에는 연구 재현성과 발전 속도를 높이기 위해 코드와 자료를 공개하는 경향이 있다. 마킨 등의 논문에 사용된 프로그래밍 코드와 자료도 모두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언젠가 수술로 뇌에 전극을 이식하지 않고도 생각을 언어로 전환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하면, 신경 활동으로 가전제품을 조작한다든가, 지루한 회의 시간에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하게 해주는 등 다양한 서비스가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가장 사적 영역인 마음이 상업 영역과 공공 영역에서 활용될 수 있는 시대가 역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것이다. 당장은 거부감이 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코로나 위기를 맞아 사생활 침해에 대한 경각심이 낮아진 것처럼, 테러 등 사회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그 시기를 기점으로 마음의 사생활이 공개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기술이 사회에 큰 영향을 주는 시대에는 시민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기술이 활용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과학과 기술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필자가 신경과학 칼럼을 계속 쓰는 이유다.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ryung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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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두고 차분히 여러 번 퇴고하는 것이 원고의 질을 높이는 걸 알면서도, 기한을 앞두고 쫓기듯 글을 쓴다. 턱밑에 다가온 ‘마감’에 멱살을 잡혀서야 키보드 앞에 앉는 것이다.

“매일 규칙적으로 작업실에 나가는 게 그래서 중요한 것 같아.” 원고 마감에 있어 장소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설파했던 프리랜서 ㄱ씨가 말했다. 하지만 그도 마감 코앞에 시작하다 편집자에게 굽실굽실 사과하며 기한 미룬 게 여러 번임을 내가 안다. ‘지는?’이라는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나 보다. 그는 당황한 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래 동네 도서관에서 작업했는데 요즘에는 안 열어서… 코로나 때문에 벌이도 시원치 않은데 작업실 따로 얻기도 부담 되고… 아무래도 동네 카페 어디 좋은 데 하나 물색해야겠지?”

ㄱ씨의 말을 듣고보니, 새삼스레 놀라웠다. 공공도서관이 문 닫는 일이 이렇게 자주, 오래 있을 줄이야. 그간 코로나19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일괄 조치로 공공도서관의 운영이 중단됐다. 책은 전자도서관에서 대출할 수 있지만(이것도 한계는 있다), ㄱ씨처럼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한 사람은 어쩌지? 그중 상당수는 동네 카페마저 이용하기 부담스러운 취업준비생일 테고, 작업실 대용 카페가 없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도 많을 텐데.

게다가 공공도서관에는 도서열람실만 있는 게 아니다. 공공도서관 휴관은 평소 열람실을 애용하지 않았던 내게도 큰 영향을 줬다. 올해 경기도의 한 공공도서관과 한 달에 한 번씩 영화를 상영하고 영화 관련 이야기를 시민들과 나누기로 약정했는데, 도서관 운영이 강제 중단되며 상영회도 거듭 미뤄지고 있다. 그러다 2020년이 절반 가까이 지나버렸네….

공공도서관은 계급 격차를 좁히는 역할을 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부모 잘 만나’ 풍부한 예술 감상과 악기 연주, 스포츠 등으로 표현력, 절제력, 안정된 심리 상태 등을 가꿔간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는 여러 면에서 삶의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고 여러 연구 결과는 말한다. 이것이 정의롭지 않은 것은,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랜덤’ 요소가 불러오는 차이를 줄이기 위해 사회가 개입해야 한다.

“요즘 시대에는 인터넷으로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학습이 가능한데 공공이 나설 필요 있나?” 같은 반론이 나올까봐 하는 말인데, 좋은 장비와 랜선은 공짜로 주어지나? 가진 게 없는 이들이 공공의 시설을 쓰며 최소한의 기회 평등을 보장받고, 세금으로 운영되는 무료 혹은 저비용 프로그램으로 관심 범위를 넓히고, 시행착오를 겪고 피드백 받으며 성장하게끔 하는 것. 공공기관의 의의다. 참고로 내가 진행할 상영회도 사전 신청만 하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열릴 수만 있다면….

코로나, 정말 지긋지긋하고 무섭다. 이제 좀 진정되나 싶었는데 이토록 무서운 속도로 폭증하는 확진자 수라니. 그렇다고 숫자가 커질 때마다 공공기관 닫는 거,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백신 상용화 뒤에야 안심할 수 있을 텐데, 그건 지나온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통과해야 가능할 것이다. 공공기관은 오히려, 그때까지 시민들의 벗이 돼줘야 하지 않을까? 특히 상대적으로 더 큰 경제적·심리적 고통을 겪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공공도서관, 박물관, 미술관은 비빌 언덕이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 방역의 노하우를 꽤나 쌓지 않았던가? 항시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면 많은 일을 예방할 수 있었음을 이제는 안다. 앞으로 또 확진자가 급증하더라도 기관의 전면 폐쇄보다, 이용자들이 빠짐없이 마스크 쓰고 거리를 두게끔 철저히 감독하고 환기하며 운영하는 것은 어떨까? 운영을 중단한 탓에 연초에 책정한 예산 대부분을 쓰지 못했을 텐데, 그중 일부를 방역 관련 감시·감독 인력 확충에 쓰는 것이다. 현재의 하향식 행정 시스템을 감안한다면, 이 문제에 있어선 ‘윗분’들의 결단이 중요할 것 같다. 공공시설 운영으로 저소득층, 프리랜서, 취업준비생에게 희망을 주세요!

<최서윤 작가 monthlyingyeo@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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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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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견뎌야 할까. 지난 세기의 책 속에서 몇 가지 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 1348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치명적인 흑사병이 돈다. 감염되면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에 달걀 크기의 종기가 생기고 온몸에 반점이 나타난다. 증상이 보이면 예외 없이 며칠 안에 죽는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사망자가 나오는 가운데 온 도시가 혼란에 빠져든다. 절제된 생활을 하면 병이 피해갈 것이라고 여기고 무리를 지어 은둔을 하는 사람들, 어차피 닥쳐올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음주와 방탕으로 불안을 달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열 명의 선남선녀가 시골 별장으로 표표히 떠난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이 귀족들이 각자 하루에 하나씩 열흘에 걸쳐 풀어놓는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중세사회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와 당시 성직자들의 위선에 대한 풍자는 이 작품을 근대 소설의 원형(原型)으로 꼽게 하지만, 100개의 이야기 중에 흑사병에 관한 것은 없다. 전형적인 회피의 서사다.

카뮈의 <페스트>는 사뭇 다르다. 1940년대 알제리의 도시 오랑. 죽어가는 쥐들이 등장하고 며칠 후부터 흑사병이 창궐한다. 도시는 봉쇄되고 사람들은 갇힌다. 감염 위험성 때문에 편지 왕래도 금지된다. 우연히 도시를 떠나 있던 가족, 친지들과 서로 안부를 궁금해하는 장면은 요즘의 사정과 별로 다르지 않다. 주인공은 병마가 물러날 때까지 온 힘을 다해서 싸우는 사람들. 의사, 성직자, 자원봉사대원 등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병을 극복하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다. 끝 모를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던 어느 날 갑자기 페스트는 홀연히 사라진다.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또 다른 이야기다. 당시로서는 치명적인 감염병을 제목에 달고 있지만 정작 콜레라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고 주인공들의 50년에 걸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일상이 계속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가 코로나 시대를 헤치고 나가는 모습이 이런 소설들과 같을 수 없다. 세계화의 시대에 감염병은 지구 어디에나 존재한다. 숨거나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한 없는 봉쇄도 마찬가지. 교역과 분업의 사슬이 끊어지면 먹고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상을 이어갈 수도 없다. 치료제를 발견하고 백신을 개발해서 자연을 상대로 승리하겠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겠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의학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의학상 중대한 발견은 과학적 설계와 노력이 아니라 대부분 우연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로나19 백신 개발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몇 년 걸릴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전문가들은 결국 각국 정부가 단계적으로 봉쇄 해제에 나설 것이라고 본다. 봉쇄와 격리는 감염병 예방에 가장 효과적이겠지만, 동시에 경제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치명률이 비교적 높지 않은 점도 그러한 판단의 근거가 될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도 스스로 조심하면서 경제활동에 나서라는 조치를 받아들일 것이다. 수입이 없어진 계층은 정부의 봉쇄조치를 해제하라는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치료제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봉쇄를 해제하는 것은 노년층이나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 등 취약계층의 생명과 건강을 담보로 모험을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은 코로나19에 걸려도 사망할 위험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이런 조치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 깊은 틈새를 만들고 오래가는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범인류적 위기에 대응하는 세계 각국 정부의 모습은 사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실망스럽다. 전문가들은 십 수 년 전부터 전 세계적인 감염병의 유행을 경고해왔고, 그 원인이 될 수 있는 후보 중 1순위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꼽기도 했다. 다른 나라들은 몰라도 적어도 미국 등 초강대국은 예측 가능한 위기에 대비했어야 하지 않나. 서로 자국의 방역이 상대적으로 가장 우수하다고 자랑하거나 애매한 봉쇄조치를 해놓고 국민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듯한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시기야말로 우리가 사는 공동체, 정부, 국가의 역할을 다시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인류는 이보다 덜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앞으로 급격한 기후변화 등 더욱 상상하기 힘든 위기가 닥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 시간을 잘 견디고 사회의 시스템을 보완하면 더 어려운 때에도 대비할 수 있다. 토머스 하디는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있기를 원한다면 먼저 최악의 상황을 정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 힘들더라도 가장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함께 가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이 어두운 시기를 이겨내는 길이다.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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