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군기지 여러 곳이 ‘발암물질 범벅’인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 15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모린 설리번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의 보고서(2018년 3월 작성)에 따르면 주한 미군기지 5곳의 지하수에서 기준치를 최대 15배 초과한 과불화 화합물이 검출됐다. 과불화옥탄산(PFOA)과 과불화옥탄술폰산(PFOS) 등 과불화 화합물은 발암물질이다. 이런 유해물질이 미군기지 가운데 대구와 경북의 2곳, 의정부 2곳, 군산 1곳에서 기준치를 초과해 검출된 것이다. 주한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관리실태가 엉망이라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경기 의정부시 고산동에 있는 캠프 스탠리 주한 미군기지의 문이 15일 굳게 닫혀 있다. 김기남 기자

그동안 국내 미군기지의 환경문제는 벤젠, 톨루엔, 크실렌 등 유류 관련 오염이 대부분이었다. 미군기지 주변 토지와 지하수 오염이 기지 내 기름유출 사고로 다뤄졌기 때문에 과불화 화합물 오염은 생각지도 않았다. 미군기지가 또 다른 유독화학물질로 오염되지는 않았는지 총체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과불화 화합물의 유해성은 끔찍하다. 태아와 어린이의 발달지연, 콜레스테롤 증가, 전립선·신장·고환암 등과 관련성이 있다고 한다. 이런 경고는 미 국방부 스스로가 밝힌 위험성이다. 더구나 과불화 화합물은 자연은 물론 인체 내에서 거의 분해되지 않고 잔류해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영원한 화학물질’로 불린다고 한다. 국제암연구소는 발암 추정물질로 분리하고 있다. 또한 잔류성 유기오염물질에 관한 국제협약인 스톡홀름협약은 PFOS와 PFOA의 제조·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출처:경향신문DB)

이번에 유해물질이 발견된 미군기지들은 미군이 사용 중이다. 미군기지 내 과불화 화합물 오염도가 높은 이유는 이 물질이 포함된 소방장비를 사용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소방장비 사용이 계속되는 한 발암물질의 배출은 중단되지 않는 것이다. 비가 올 때마다 미군기지의 유해물질이 스며들어 기지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지하수를 오염시킬 가능성이 높다.

주한 미군기지 내 기준치 이상의 과불화 화합물 검출은 미 국방부가 작성한 보고서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환경오염 실태를 밝힌 만큼 왜곡이나 축소는 있을 수 없다. 미국은 미군기지 내 과불화 화합물 오염 대책을 즉시 마련해야 한다. 한국 정부도 미군기지 인근 지역의 지하수 오염실태를 정밀조사하고 주민건강 영향조사도 실시해야 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피해는 미국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차제에 미군기지 오염정화 비용을 미국이 부담하는 방법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주한 미군기지라 해도 땅을 빌려주고 오염 뒤처리까지 감당해야 하는 일은 더 이상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호주의 산불이 언제 시작됐는지 기억하시나요? 지난해 9월입니다. 사그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이 산불은 시드니 등 대도시가 위치한 호주 동남부를 초토화하고 있습니다. 한국 면적 절반에 달하는 4만9000여㎢가 불탔고 사망자도 24명에 달하죠. 야생 동물의 피해도 막대합니다. 코알라 등 포유류를 비롯해 동물 10억 여마리가 화재로 죽었으리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산불 열기는 너무 맹렬해 자신의 날씨를 만들어내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산불은 점점 더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때문이죠. 되풀이되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 지난해 아마존 산불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대규모 산불은 바로 기후변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더 배출하면서 산불 위험도 증가합니다. 악순환의 연속이죠. 호주 산불은 돌이킬 수 없는 기후재앙이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캥거루섬 숲에서 7일(현지시간) 한 야생동물 구조 활동가가 산불 피해를 본 코알라를 구조하고 있다. 캥거루섬 _ EPA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나 자유한국당은 이 전 지구적 재앙에 대해 아무 말이 없습니다. 환경문제만 해도 4대강사업으로 인한 하천 오염, 40%에 달하는 석탄 중심 발전, 공장식 축산 등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습니다. 평화와 안보도 마찬가지죠. 모두가 북핵에 매달려 있을 때 한국 국방 예산이 50조원을 돌파했음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핵을 들고 밑에서는 F-35A 전투기를 날리는 게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는지 돌이켜보지 않죠. 기본적 인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의 폭언·체벌·강요 등에 시달리는 학생, 기본적 삶도 힘든 빈곤층, 그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성소수자, 법적·신체적 폭력에 지속적으로 고통받는 외국인 노동자, 모두 선거 때만 관심을 갖습니다.

이런 무관심에는 제도적 요인도 큽니다. 이들이 뛰어온 선거판에서는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민주당계 아니면 한국당계 정당 중 하나가 이기는 선거제도에서 다양한,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준연동형 비례제가 통과되면서 변화의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이 제도는 정당 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의 차이를 좁히려는 것이죠. 그래서 20대 총선에서 7.2% 정당득표율에도 불구하고 2% 의석만 차지한 정의당의 비극을 없애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소수정당의 의회 진출이 늘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녹색당, 청년당, 노동당, 동성애자당 등이 원내에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정당이 여러 목소리를 내면 기존 거대정당이 외면했던 이슈가 주목을 받을 겁니다. 법과 정책으로도 발전될 테죠. 당장은 아니더라도 독일처럼 녹색당이 정권을 잡는 날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호주 산불도, 동성 간 결혼도 심각하게 논의하게 될 겁니다. 민주체제 핵심은 권력 분화이니 양당체제를 끝내고 여러 당이 권력을 나누게 되면 그만큼 민주주의는 발전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발전은 쉽지 않겠죠. 기존 정치 지도자들의 퇴행적 행태가 사라지는 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당장 한국당은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을 꾸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를 창피한 줄도 모르고 당당히 주장하는 걸 보면 한심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한국당 황교안 대표처럼 자기 진영 통합을 외치는 것 또한 미래에의 비전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극단적 정당의 출현도 가능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유럽의 경우처럼 극단적 민족주의 정당도 생길 수 있습니다. 

유권자의 책임이 더 커지는 셈입니다. 다양한 정당은 그만큼 우리를 더 잘 대변하게 될 테니까요. 미움과 독선이 가득한 정당들이 득세한다면 우리 사회가 그렇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포용과 관용을 우선시하는 정당들이 득세하는 여의도, 그런 정당을 키워낼 우리 사회를 꿈꾸어 봅니다.

<남태현 |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아주대의료원과 이국종 아주대병원 교수(경기남부권역 외상센터장) 간의 갈등이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사건은 유모 아주대의료원장이 이국종 교수에게 폭언과 욕설을 한 녹취파일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시작됐다. 의료원 측은 “녹취는 4~5년 전 상황”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유 원장과 이 교수 간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다. 급기야 16일 아주대 의과대학교수회가 이번 사건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규정하고 유 원장은 이 교수에게 사과하고 사임하라는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대학 의료원장이 중증외상치료의 권위자인 유명 의사에게까지 언어폭력을 자행한 현실이 개탄스럽다.

아주대 교수회는 이번 사태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진단했지만, 의료원장 개인의 일탈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사태의 이면에는 권역외상센터를 둘러싼 의료원장과 이 교수 사이의 오랜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의료원 측과 이 교수는 외상센터 운영 방식, 의료진 배치, 헬기 이송 범위 등을 둘러싸고 충돌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사태의 배경에는 적자운영, 인력부족 등 권역외상센터의 열악한 현실이 깔려 있다. 

권역외상센터는 중증외상환자의 응급수술과 치료를 담당하는 의료공급체계다. 전문의료진이 24시간 대기해야 하고 시설과 장비 등에 적잖은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2018년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권역외상센터 3곳의 손익현황을 분석한 결과, 수입보다 손실이 훨씬 크게 나타났다. 정부의 보조금이 없으면 사실상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오죽하면 민간병원의 권역외상센터 운영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얘기가 나오겠는가.

정부는 2년 전 권역외상센터 전문의 지원금과 간호사 인건비를 인상하는 등 중증외상 진료체계 개선대책을 내놓았다. 보건복지부는 권역외상센터 지정병원에 매년 7억~27억원의 외상전담 전문의 충원 비용을 지원한다. 또 외상전용 중환자실, 입원병상 확충 등 명목으로 80억원을 투입하고 있다. 지난해 외상센터에 지원된 예산은 532억원이었다. 그럼에도 외상센터의 의료인력과 시설은 크게 부족하다. 외상센터는 중증외상환자에게는 꼭 필요한 사회안전망이다. 전국에는 17곳의 권역외상센터(준비 3곳 포함)가 있다. 정부는 전면적인 실태조사를 통해 외상센터가 지속 가능한 의료체계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원과 보완에 나서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대법원이 16일 ‘박근혜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 KBS의 세월호 참사 보도에 개입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정현 의원(무소속)에 대해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방송법 제정 57년 만에 언론을 통제한 정치권력을 단죄한 첫 대법원 판결로 의미가 크다. 다시는 권력이 언론을 통제할 수 없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정현 무소속 의원이 지난해 10월28일 2심 선고공판 출석을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이 의원은 청와대 홍보수석이던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KBS의 보도를 통제하려 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의원은 참사 직후 KBS <뉴스9>가 해경에 대해 7건의 비판적 보도를 하자 당시 김모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보도하면 전부 다 해경 저 XX들이 잘못해갖고 지금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할 것 아니냐”며 따졌다. 검찰특별수사단 재수사를 통해 드러난 해경의 구조·수색 난맥상으로 볼 때, 이 의원의 이 발언은 ‘진실을 덮으라’는 주문이었다. 이 의원은 또 이 방송사 심야프로그램 <뉴스라인>의 보도 방향과 관련, “다른 걸로 대체를 해주든지 녹음 한 번만 더해달라”고 했다. 이 의원 요구로 해군과 해경의 손발이 맞지않아 초기 구조작업이 지연된 부분이 뉴스에서 삭제됐다고 한다.

이 의원의 행위는 ‘누구든지 방송 편성에 관해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는 방송법 위반이다. 명백하게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 대법원은 법리와 증거만을 볼 뿐, 양형을 따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형량만 보고 판결이 주는 의미까지 퇴색될까 두렵다.

청와대 홍보수석은 ‘대통령의 입’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권에 이어 9년간 언론을 장악했다. 당시 KBS, MBC 등 공영·공공 매체들이 정권의 무능과 비리에 눈감았던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당시 KBS 측이 권력의 부당한 요구를 일부라도 수용했던 것이 그 같은 점을 말해준다. 대법원 판결은 이와 같은 권력의 부당한 언론 장악과 통제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대법원 판결은 국가와 언론에 질문을 던진 셈이다. ‘국가와 권력기관은 진심으로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을 존중하고 있는가. 또 언론은 국가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라는 본연의 책무를 다하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8894글자 중 겨우 56자였다. 조금 더하자면 174개 글자다. 합해도 230글자, 전체 글 중 2.6%에 불과하다. 취임 3주년이 된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기후변화와 미세먼지를 언급한 글자의 개수다. 글자 숫자만 가지고 중요도를 다루기엔 무리가 있지만 빈약한 건 사실이다. 더 놀라운 건 신년 기자회견 당시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물은 기자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새삼스러운가!

기후위기는 정치 지도자의 어젠다다. 그저 급작스러운 날씨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2010년 기후위기로 러시아에서 밀 생산량이 25% 줄어 수출이 중단되었다. 이웃 시리아에서 수입의 대부분을 밀값으로 지출하던 서민층이 폭동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했고, 그 결과 대거 난민과 이슬람국가(IS)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산불이 휩쓸고 간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버종 지역에서 15일(현지시간) 한 주민이 불에 탄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호주의 산불도 산불로 끝나는 게 아니다. 1인당 국내총생산이 약 5만7000달러에 달하는 세계적인 부국 호주의 시민들이 장기간 지속된 산불과 기후변화의 여파로 기후난민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재산상 손해는 44억달러에 달하며 야생동물 10억여마리가 폐사하였다.

지난해 12월 기후변화 당사국총회가 진행되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독립 평가기관인 저먼워치, 뉴클라이밋연구소, 기후행동네트워크(CAN)가 ‘기후변화대응지수(CCPI) 2020’을 발표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예상했듯이 전체 61위 중 58위로, 지난해 57위에서 한 단계 떨어졌다. 100점 만점에 28.53점. 그런데도 여전히 기후변화를 남의 나라 일인 것처럼 탄소감축에 관심이 없다. 아직도 석탄발전소는 60기나 가동하면서 오히려 7기를 더 건설하고 있고 동남아로 수출까지 하고 있다. 선진국은 탄소배출을 감축하고 있지만 우리는 계속 증가하여 2018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7억t을 넘겼다.

산불로 부모를 잃은 새끼 캥거루와 왈라비들이 15일(현지시간) 호주 퀸즐랜드주 비어와 호주동물원 야생동물병원에 마련된 임시 숙소에서 쉬고 있다. 호주에선 지난해 9월 이후 심화한 남동부 지역 산불로 남한 면적보다 넓은 땅이 불탔으며 동물 10억마리 이상이 희생됐다. 현재까지 28명이 사망하고, 주민 10만명에게 대피령이 내려졌다. ‘기후 난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연합뉴스

유럽의회는 지난 11월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하였고, 세계 1200여개 지방정부들도 이 기후위기 비상사태에 공감하여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 ‘제로’에 도전하고 있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신년사에서 ‘지구 온난화는 현실이며 인류를 위협하는 기후 변화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적 능력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지금도 가능하다. 오늘 우리가 행동에 나서지 않아서 나타나는 결과는 우리의 자녀, 그리고 손자 세대가 겪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의 총리들의 신년사에서도 기후변화에 대한 각오와 결심이 비장하게 흐르고 있었다.

호주 산불, 미국의 대홍수, 인도의 열파 등 폴 크루그먼의 말대로 우리는 ‘대재앙이 뉴 노멀로 자리 잡은 세계’에 살고 있다. 과연 재난이 우리를 피해갈 것인가. 우리는 어떤 대비를 하고 있나. 우리는 누가, 어디에서 우리의 안전과 미래를 지켜줄까.

호주산불로 코알라가 새까맣게 타죽고 멸종위기에 처했다는 뉴스가 띄엄띄엄 나오는 가운데 이제 모든 뉴스의 중심은 선거, 선거로 흘러 내 가슴도 타들어 간다. 그러나 선거는 모든 이슈의 블랙홀이 될 수도 있고 혁신가들이 무대에 오르는 경연장이 될 수도 있다. 미래를 읽고 대전환을 이끌 기후혁신가들의 등장을 기대한다.

<이미경 | 환경재단 상임이사>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 사람이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는 나이는 몇 살부터일까. 어린이의 말에 우호적인 가정에서조차 아이의 의견은 최종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간식 종류 같은 가벼운 선택에서는 어린이를 한껏 존중하지만 집 안의 가구를 옮기는 일 정도만 되어도 어린이의 발언은 빠르게 배제된다. 대화가 중요하다며 협의를 청하는 순간에도 결론은 대개 내려져 있다. 그럴수록 어린이는 떼쓰기로 대응한다. 이때 “너는 네 생각만 하는구나” 같은 비난을 들으면 스스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하던 어린이는 위축된다. 어른의 입장에 공감하고 반성할 것을 요구받는다. 시민의 제1조건은 생각과 의견을 갖는 것이다. 어린이가 사회의 갈등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자신과 연관된 문제에서조차 겉치레로만 존중받는다면 그는 언제쯤 진짜 시민이 되어볼 수 있을까. 어려서부터 독립적으로 인정받으며 현실을 바꾸어보는 경험은 소중하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법을 알게 된다. 규제와 훈화가 아니라 실질적인 실행과 거절의 권리를 손에 들어야 시민의 삶에 다가갈 수 있다.

만 15세인 페넬로페 레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젊은 유니세프 대사로 어린이 기후패널을 이끌고 유엔 기후회담에 참여한다. 여덟 살부터 기후 문제에 대해 발언해왔으며 열한 살 때는 어린이 환경단체인 에코 에이전트의 이사로도 일했다. 그는 “기후변화는 어린이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는 내 친구와 이웃, 다음 세대가 살아갈 기회를 위해서 싸울 것”이라고 말한다. 유니세프 노르웨이의 카밀라 비켄 사무총장은 페넬로페 레아야말로 현재 가장 분명하고 강한 목소리를 지닌 기후변화 활동가라고 평했다. 2019년 예테보리도서전에서 해양 폐기물을 다룬 그림책 <플라스틱 섬>에 대한 북토크가 열렸는데 그날 온 50대 노르웨이 여성은 존경하는 환경운동가에게 이 책을 선물하겠다며 이명애 작가로부터 사인을 받아갔다. 그 존경의 대상이 바로 페넬로페 레아다.

위의 사례를 읽고 우리 현실과 온도차가 크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거기에는 나이서열주의가 있을 것이다. 아동과 청소년이 정치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면 어른들은 나이도 어린데 대견하다고 시혜적 칭찬을 내놓거나, 나이도 어린데 뭘 아느냐고 비웃는다. 두 반응에는 모두 그들을 한 사람의 동료 시민으로 여기지 않는 차별적 태도가 있다. 어린이는 잘 자라서 어른을 기쁘게 하려고 예비적으로 존재하는 인력이 아니라 나름대로 오늘을 나답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시민의 활동에 나이가 제약이 될 수는 없다. 아동,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세계적 흐름이다. 2011년 데뷔해 유튜브에서 4억4000만 조회수를 기록한 멕시코의 청소년밴드 바스케스사운드(V-sounds)는 이주 아동이 당하는 차별과 청소년들이 겪는 폭력을 막기 위해서 정치활동을 병행 중이다. 2006년생인 페루의 프란체스카 아론손은 10대 소녀들이 어머니가 되어 아이를 돌보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가 정치, 지역사회, 학교 운영에서 청소년의 참여권 확대를 촉구하며 분투했고 그 덕분에 4·15 총선부터는 만 18세도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기성세대는 새로운 유권자가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게 되면서 다가올 변화를 걱정한다. 그러나 그동안 아동과 청소년의 생각과 목소리를 귀여움이나 귀찮음으로만 받아들였던 자신의 편견에 찬 모습을 더 염려해야 한다. 몇 살이냐고 나이를 묻기 전에 그 동료 시민의 생각을 정중히 청해듣는 태도가 먼저다.

<김지은 |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후의 편의점은 초등학생들의 차지다. 다른 편의점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정용이 일하는 편의점은 늘 그랬다. 가까운 곳에 초등학교가 두 곳이나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편의점은 가깝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편의점 내 테이블에 앉아 삼각김밥을 불닭볶음면이나 국물떡볶이에 찍어 먹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정용은 속으로 그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아이들은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학원 숙제를 하기도 했고, 연예인들의 뒷담화에 열을 올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봤다. 중2병이 일찍 찾아온 6학년 아이들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블루레몬에이드를 두 시간에 걸쳐 천천히 마시기도 했고, 연애를 하는 아이들은 하리보 한 봉을 사이에 둔 채 ‘여보’ ‘자기’ 해 가며 말랑말랑한 서로의 볼을 꼬집어대기도 했다.         

정용이 일부러 밤 9시 근무로 옮긴 것은 그 꼴을 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쓰레기가 지나치게 많이 나와서 그랬다. 아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늘 무언가가 묻어 있거나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아이들 옆에서 계속계속 그걸 치우다 보면 어쩐지 어떤 수치심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아이를 만난 것은 밤의 편의점에서였다. 6학년이었고, 남자아이였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밤 10시15분 정확하게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안경을 쓰고 롱패딩에 무거운 백팩을 멘 아이. 아이는 늘 혼자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컵밥을 먹었다. 그게 저녁인 듯싶었다. 아이는 밥을 먹으면서도 영어 단어장을 보았고, 중간중간 필통을 꺼내 어떤 대목에 밑줄을 긋기도 했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무언가를 흘리지도 않았고, 밥을 먹고 나면 물티슈로 테이블을 깨끗이 훔치기도 했다. 편의점을 나갈 때면 정용을 바라보며 깍듯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꼭 그런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정용은 그 아이에게 자주 눈길이 갔다. 밤에 혼자 다니는 아이들은 그 모습만으로도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     

정용은 아이에게 슬쩍 사이다를 내밀기도 했고, 츄파춥스 사탕 하나를 건네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이는 두 손으로 예의 바르게 받았다. 한 달 넘게 아이는 꾸준히 편의점에 왔지만, 정용은 그 이상 다가가진 않았다. 부모님은 뭐 하시니? 집은 어디니? 왜 혼자 밥을 먹니? 그딴 건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정용은 무언가 다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가 정용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 날이었다.

“형…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아이는 고개를 숙이진 않았지만 정용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말했다. 말인즉슨 일월 첫째 주 금요일에 있는 졸업식에 자신과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 졸업식? 졸업식은 이월이 아닌가? 알고 보니 요즘 초등학교 졸업식은 대부분 일월에 열린다고 했다.       

아이의 학교는 특이하게 졸업식장에 부모나 형제 중 한 명과 함께 입장한다고 했다. 함께 단상에 올라 한 명은 졸업장을 받고, 또 한 명은 학교에서 준비한 선물을 받는 것, 그게 전통이라고 했다.

“한 시간이면 되거든요. 오전 열 시부터 열한 시까지만….”

정용은 그 말을 하는 아이에게 또다시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그것 역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생각해볼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용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한 시간, 단지 한 시간일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내내 어떤 은근한 자부 같은 것이 느껴져 귓불이 달아오르기도 했다.

졸업생은 모두 백십명이었다. 정용은 학교 강당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아이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의자에 앉은 채 계속 떠들고 부모와 함께 셀카를 찍어댔지만,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곧은 자세로 앉아 단상을 쳐다보다가 이따금 안경을 닦는 것이 전부였다. 다른 아이가 불러도 말없이 웃어주기만 했다. 괜히 어색하고 긴장한 것은 정용이었다. 아이에게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저도 모르게 허벅지에 계속 힘을 주기도 했다. 식이 모두 끝나면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같이 먹어야지.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정용은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식은 별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졸업생이 한 명 한 명 단상에 올라올 때마다 강당 뒤편 대형화면에 아이의 사진과 함께 장래희망이 적힌 글귀가 떠올랐다. 정용은 그제야 아이의 이름이 ‘김호창’이라는 것과 아이의 꿈이 ‘의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 그래, 의사도 되고, 병원도 차리렴. 그래서 나중엔 오늘 같은 날은 아예 기억도 하지 마렴. 정용은 그렇게 아이를 응원해주었다. 정용은 아이의 진짜 친형처럼 손을 잡고 단상에 올랐고, 정중하게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식이 모두 끝나고 정용은 아이와 함께 운동장으로 걸어 나왔다. 아이는 꽃다발도 없이 졸업장만 든 상태였다.

“어디, 짜장면이라도 먹으러 갈까?”

정용이 묻자,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에요.”  

아이는 그렇게 말한 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편지봉투였다.

“형, 오늘 너무 고마웠어요. 아빠가 많이 넣지는 못했대요.”

아이는 그러면서 다시 한번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편지봉투에는 삼만원이 들어 있었다. 정용은 그 봉투를 든 채 잠깐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뒤돌아 교문 쪽으로 걸어갔다. 정용은 아이의 얼굴을 다시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수치심과는 또 다른, 어떤 무섬증 때문이었다. 교문에 내걸린 ‘축 졸업’ 플래카드가 바람에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이기호 | 소설가·광주대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남정호 솔로 ‘흉내’. 2007년 아르코 소극장. ⓒ 요이치 쓰카다(Youichi-Tsukada)

최근 몸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것 같다.

몸을 안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사람을 안다는 것이다. 사람을 아는 것을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마음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마음은 몸이 있어야 비로소 성립되기 때문이다.

몸 중에서도 얼굴은 가장 두드러지게 그 사람을 드러낸다.

지금부터 150여년 전에 미국인 링컨은 “남자는 마흔 살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라”는 명언을 했다. 이 말은 남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적용될 수밖에 없다.

남자건 여자건 나이를 먹으면 자신의 삶의 역사를 보여주는 얼굴, 이 반갑지 않은 보고서에 당황하게 된다. 미간에 깊숙이 파인 주름은 그동안 매사에 불만스러워 늘 찌푸린 표정을 해 왔던 옹졸함의, 처진 눈꺼풀은 그동안 타인을 성의 있게 응시하지 않은 습관의 산물이다. 다행히도 화장이 일시적이나마 세월을 조금 덜어주었는데 때맞추어 나온 성형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나의 얼굴을 바꿀 수도 있게 되었다.

멋진 세상인가?

아니 무서운 세상이다!

얼굴뿐만이 아니다. 몸도 다이어트나 여러 운동을 통해 개조되고 세상의 다양한 언어들이 사라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다양한 몸들이 사라지고 있다. 자신도 현대사회의 일원임을 증명하기 위해 지구촌의 모든 이들이 서구 지향적인 획일적 신체를 가지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 

그런데 몸짓은 아직 개체적, 지역적, 민족적 다양함을 유지하고 있다.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형성되어 온 독특한 몸짓이야말로 쉽게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말은 거짓을 교묘하게 구사하지만 몸짓은 거짓이 서투르다.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몸짓에 내포된 속내를 감지할 수 있다. 거만하지 않고 비굴하지도 않은 적절한 몸짓을 잘 구사하면 성형이나 다이어트에 의존하는 것보다 더 멋진 매력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럼 그런 몸짓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몸짓이 풍요로운 무용공연을 자주 접하도록 하시지요.

대부분의 안무가는 이런 몸짓들을 기반으로 하여 움직임의 언어를 재창조한다. 따라서 무용 관객 3년이 되어 그 움직임들을 따라가다 보면 당구풍월(堂狗風月)이 되어 어느새 그 매력적인 몸짓들을 공유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은연중에 하는 사소한 몸짓의 의미도 해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남정호 현대무용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수원지방법원이 15일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한 인터넷사이트 ‘배드파더스(Bad Fathers·나쁜 아빠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초상권이나 명예훼손보다 양육비를 아이들의 생존권 문제라고 한 사이트 운영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배드파더스는 미혼모나 이혼한 싱글맘이 제보한 합의서·판결문을 토대로 양육비 약속을 어긴 부모의 얼굴 사진과 이름·거주지·직업 등을 게재하고 있다. 2018년 개설된 사이트엔 수백명의 신상정보와 ‘113건이 해결됐다’는 공지가 떠 있다. 이 재판은 지난해 5월 검찰이 벌금 300만원에 약식기소한 뒤 재판부가 “일반적 명예훼손 사건과 다르다”며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국민참여재판이 열려 화제가 됐다. 지난해 2월엔 방송통신심의위에도 ‘사이트 폐쇄’ 요구가 접수됐으나 거부됐다. 자정을 넘기며 15시간 이어진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무죄 평결을 내렸고, 재판부는 대가 없이 양육비 고통을 알린 사이트에 대해 “공공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양육비를 뭉개는 부모들에게 ‘사회적 경종’을 울린 셈이다.

피해 양육자의 소송·추심을 도와주는 양육비이행관리원이 2015년 출범했다. 경제적 능력이 있어도 나 몰라라 하는 걸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정부서비스 후에도 양육비지급이행률은 30%대에 머물고 있다. 2015~2018년 소송으로 양육비 지급 명령이 떨어진 1만414건 중 받아낸 것은 3297건(31.7%)에 그쳤다. 여성가족부 한부모가정 조사에서도 73.1%는 양육비를 한번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세 통계는 미혼모·싱글맘 3명 중 2명이 합의이행을 요구하거나 재판을 거쳐도 양육비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동인권단체들은 양육비 미지급으로 고통받는 아동이 100만명을 넘었다고 추산한다.

미국·영국·덴마크 등에선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의 운전면허를 정지하고, 출국을 제한하며, 형사처벌도 하고 있다. 아이의 생명줄인 양육비를 사인간 채무보다 아동학대와 유기·방임 문제로 보는 것이다. 한국에도 소송이란 막다른 절차가 있지만, 피해자들은 시간·비용 부담에 속만 태울 때가 많다. 아이들의 미래를 벼랑으로 내모는 양육비 사기는 관용의 울타리 밖에 있다. 국회는 양육비 해태 시 법적·생활경제적 제재를 담은 10개의 계류법안들을 조속히 심의·처리하고, 한부모가정 양육비에 대한 국가적 책임도 더 높아져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요즘은 새해 인사보다 “2020년이 되면 자동차가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하는 진부한 실망을 더 많이 듣는다. 나는 ‘자동차가 날아다닌다는 발상 자체가 완전 과거형 아닌가? 날아다니는데 굳이 무겁고 바퀴 달린 자동차 모양일 필요가 없잖아’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고 “그러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더 진부한 인사를 하고 만다.

비록 2020년의 풍경이 어릴 적에 그렸던 상상화나 과학 엑스포 전시관에서 봤던 모습은 아니지만, 나는 유튜브 ‘맞춤동영상’ 때문에 내가 충분히 미래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미래는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죽을 때까지 돈을 쓰지 않고 모아도 집을 살 수 없다고 저주받은 세대의 청년답게 아침 출근길에 부동산 대책을 브리핑하는 유튜브 영상 하나를 본다. 봐도 무슨 말인지 통 어렵기 때문에 금방 끄고 ‘오늘 뭐 먹지’를 검색해서 점심메뉴를 미리 골라본다. 수많은 맵고 짠 외식들을 보다가 갑자기 건강이 염려되어 건강식 위주로 검색어를 바꾼다. 장수를 위해 샐러드를 먹으라는 사람과 샐러드는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잘못된 식습관이라고 말하는 사람, 샐러드로 연간 억대의 수입을 올린다는 청년 사업가, 브로콜리를 먹는 고양이 영상이 같이 나온다. 당연히 고양이의 브로콜리 먹방을 선택하고 흐뭇하게 본 뒤에, 이어지는 연관 동영상 중 “안돼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라는 멋진 가사가 있는 브로콜리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라는 명곡을 재생해본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내 유튜브 메인 채널에는 ‘억 소리 나는 한강뷰 아파트’ ‘일주일 동안 샐러드만 먹기’ ‘고양이의 냉동잉어 먹방’이 같이 나오게 되고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하며 잠시 혼란에 빠졌다가 한동안 유튜브를 켜지 않는다.

이런 고민을 친구한테 얘기하니 친구는 가만히 살펴보면 그게 전부 다 나의 관심사가 아니겠냐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싫은 거다. 사람들 대부분 하루 동안 수십 가지의 생각을 떠올리고 망각할 텐데 유튜브 한번 봤다는 이유로 나의 허튼 뇌 활동 기록이 한꺼번에 전시되다니. 이것이야말로 SF영화에 나오던 미래다. 

‘인간, 네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수치심을 느껴봐’ 하는 로봇들의 저항!

나는 인공지능에게 지배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대책을 세웠다. 바로 ‘유튜브 영상에 댓글 남기기’다. 비웃지 마시라. 글 한 편을 대충 훑어도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면 그것은 내 것이 된다고 했다. 유튜브 댓글창을 보니 이미 굉장히 많은 감상들이 남겨져 있었다. 고양이가 브로콜리를 먹는 영상에는 “고양이가 브로콜리를 먹는 소리가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브로콜리가 아니라 콜리플라워인 것 같습니다”, 집값 떨어지는 징조들을 소개하는 영상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담합해서 집값 떨어질 때까지 안 사면 좋겠다”, 또 무언가를 열심히 폭로 중인 가로세로연구소의 영상에는 “변희재님 안경 벗고 렌즈 끼시면 멋질 것 같습니다”까지. ‘굳이 내가 댓글을 단다고 해서 로봇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또다시 한동안 유튜브를 켜지 않게 된다.

설날쯤이면 새해 인사를 슬슬 마무리해도 좋을 것이다.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유튜브를 보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한다. 상대가 봤을 수십개, 수백개의 영상 중에서 봤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채널은 무엇이고 그게 어떤 재미인지 묻고 싶다. 그러고는 마치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 방향을 유도하듯이 그렇다면 유튜브에서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채널은 무엇인가요? 하고 물어본 뒤 부정적인 감정을 나누다가 유튜브를 끄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2020년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새해 대화는 없을 것이다.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새해, 유튜브를 끄면 할 수 있는 일들  (0) 2020.01.16
그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0) 2020.01.09
익명의 시간  (0) 2020.01.02
처음 시를 쓰던 날  (0) 2019.12.19
좋은 대화를 위한 평론  (0) 2019.12.12
당신의 편지  (0) 2019.11.2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질학자 토끼를 따라가는 샛강 어귀나 노출된 사암층 어디.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오슬오슬 춥다. 토끼털처럼 따스한 옷을 챙겨 입고 나서야 한다. 토끼 똥이 보이면 근처에 분명히 토끼굴이 있을 거다. 토끼를 뒤에서 부르면 휙 돌아보는 까닭은 눈이 뒤에 없기 때문. 시시한 수수께끼.

시베리아 하고도 바이칼 호수에 얼음이 땡땡 얼었겠다. 용기가 대단한 토끼는 앙가라강 얼음강을 건너기도 한다. 시베리아 사람들은 얼음호수를 내다보면서 꼭 토끼굴처럼 생긴 조그만 사우나 공간에 들어가 ‘바냐’를 즐긴다. 나도 러시아에 가면 종종 바냐를 해보곤 한다. 자작나무 잎사귀로 등때기와 허벅지를 자근자근 때리면서 더운 물을 뿌린다. 바냐란 러시아식 전통 사우나. 한 집에서 자작나무를 쪼개 불을 때고 바냐에 초대를 하면 주민들이 보드카와 빵과 청어조림을 들고 모이게 되는데, 어지간한 마을 대소사는 이 바냐 시간에 결정이 다 된다.

달구어진 돌덩이를 바라보며 토끼처럼 빨간 눈으로 이눔의 스키 저눔의 스키 수다를 떨어댄다. 뒤에다가 스키만 집어넣으면 무조건 러시아말 중급. 20도 30도 40도짜리 술을 나눠 마신다. 그러다보면 ‘졸도’할 수도 있다. 토끼굴 바냐를 마치고 나와 횡단열차에 오르면 출출하여 도시락 라면을 사먹게 된다. 러시아에서 ‘도시락’이라는 상표의 네모진 컵라면은 그냥 라면을 뜻하는 대명사다. 러시아 사람들 중에 도시락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기차는 24시간 따뜻한 물을 제공한다. 온수를 붓고 기다리면서 젓가락 대신 포크를 만지작거린다. 토끼가 배춧잎을 조근조근 씹듯이 라면줄기를 후루룩 쩝~ 하고서 밖을 살짝 내다보면 하얀 눈이 삽으로 퍼서 뿌리듯 내려싼다. ‘눈에 맞아서 죽어봐라’ 하는 식으로다가 마구마구 내린다. “펄펄 눈이 옵니다, 마구마구 눈이 옵니다….” 토끼굴 같은 기차칸에서 살을 에는 추위를 피하며 어디론가 저마다들 흘러서 간다. 당신은 시방 어디로 가는 길인가.

<임의진 목사·시인>

'일반 칼럼 > 임의진의 시골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끼굴  (0) 2020.01.16
때밀이  (0) 2020.01.09
게릴라 쥐  (0) 2020.01.02
자작자작  (0) 2019.12.26
세밑 덕담  (0) 2019.12.19
거비거비의 프러포즈  (0) 2019.12.12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수만 잔의 커피를 마셨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커피를 좋아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이제 그동안 마신 커피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자. 어쩌면 생애 처음 마신 커피였을 달달한 믹스 커피, 시험공부를 하다가 도서관에서 마신 자판기 커피, 추운 겨울에 손을 녹일 요량으로 마시던 캔 커피, 인상적이었던 카페, 함께 마신 사람들… 내 머릿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기억들이 하나씩 둘씩 떠오르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십에서 수천의 장소를 지나고, 수백가지 음식을 먹고, 온갖 사람을 만나 갖가지 사건을 경험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항상 떠올리며 살아가지는 않지만, 이 중 많은 것들에 대한 기억이 뇌 속에 남아있다.  

이 기억들은 의도적으로 떠올리거나, 기억과 관련된 무언가를 마주함으로써 떠올려질 수 있다. 사람들에게 다양한 단어들이 적힌 목록을 외우게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목록에서 꽃에 해당하는 것을 떠올려 달라고 하면 사람들은 장미, 튤립처럼 꽃들만 떠올릴 수 있다. 이렇게 단서를 주면, 사람들은 무작정 목록 속의 단어들을 떠올려 보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보다 더 많은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떠올려지지 않는다고 해서 잊혀진 것은 아님을 뜻한다. 완전히 잊혀진 일도 있겠지만, 지금 떠올려지지 않을 뿐인 기억도 있다.

■ 기억흔적

뇌 속에서는 기능이 곧 구조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뇌 속의 어떤 부분이 구조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외부 사건에 반응해서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이나 신경세포의 활동 특성이 변하는데, 이렇게 변한 부분을 기억흔적(engram)이라고 한다. 기억은 기억흔적에 저장된다.

기억의 회상을 연구하려면 특정한 기억의 기억흔적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들을 표시하고, 이 신경세포들의 활동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아무 신경세포나 기억흔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활동이 유난히 활발한 신경세포들 중의 일부가 기억흔적이 된다는 사실이 활용된다. 활동이 유난히 활발한 신경세포들에서는 종종 급속초기발현 유전자가 발현되므로, 특정한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이 유전자가 발현된 신경세포들은 그 사건의 기억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특정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에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한 신경세포를 찾아서, 이 신경세포들의 활동을 실험자가 조절할 수 있게 만들면 된다.

이를 위해서 광유전학과 약물을 혼합한 방식이 더러 사용된다. (1)약물 X가 체내에 없을 때만 급속초기발현 유전자의 발현이 유전자A의 발현을 유도하고, (2)유전자A의 발현은 빛으로 신경세포의 활동을 조절하게 해주는 단백질의 발현(광유전학)을 유도하도록 생쥐의 유전자를 변형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생쥐에게 평소에는 약물 X를 투여하다가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약물 X의 투여를 중단한다. 그러면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급속초기발현 유전자를 발현한 신경세포(해당 실험의 기억흔적)에서는 유전자A가 발현되고, 연달아서 빛으로 신경세포의 활동을 조절하게 해주는 단백질이 발현된다. 이렇게 하면 해당 실험의 기억흔적에 접근할 수 있다.

이제 이 방법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실제 사례를 살펴보자. 한 연구에서는 생쥐를 상자에 넣고 발에 전기충격을 주어 공포학습을 시키는 동안, 위 방법을 사용해서 공포학습의 기억흔적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들을 빛으로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공포학습을 시킨 생쥐는 전기충격을 받았던 상자에 들어가기만 해도 벌벌 떨었다. 그 상자가 전기충격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포학습의 기억흔적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들을 억제하면 전기충격을 받았던 상자에 있어도 훨씬 더 적게 떨었다. 한편, 공포학습을 시킨 생쥐라도 전기충격을 받지 않은, 다른 상자에 들어가면 별로 떨지 않는다. 전기충격을 떠올릴 단서가 없기 때문인데 이런 상황에서도 공포학습의 기억흔적에 해당하는 신경세포들을 자극하면, 생쥐들은 마치 전기충격 상자에 있는 것처럼 벌벌 떤다고 한다.

위와는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실제 없었던 사건의 기억흔적을 만들 수도 있다. 한 연구에서는 다른 실험에서는 생쥐에게 향기A가 풍기는 동안 전기충격을 주었다. 그 뒤 향기A가 나는 방과 다른 향기B가 나는 방을 생쥐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하면, 생쥐는 향기B가 나는 방에서 더 오래 머문다. 전기충격을 받았던 기억과 관련된 향기는 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쥐가 향기A를 맡는 동안 전기충격을 주는 대신, 향기A에 반응하는 신경세포들을 활성화시키는 동안 회피 반응을 강화하는 신경세포들을 활성화시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향기A를 맡은 적도, 전기충격을 받은 적도 없었음에도 생쥐들은 향기A가 나는 방보다 향기B가 나는 방을 선호했다. 이는 생쥐에게 향기A를 기피하는 기억이 인공적으로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이처럼 기억 연구에는 다양한 방법이 활용되고 있다.

■ 기억: 떠올려지고 변해가고 잊혀지는

기억은 영구불변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기억의 내용이 변하기도 하고, 영원히 잊혀지기도 한다. 요즘 자주 접하는 것들과 거리가 멀어서 떠올리기 힘들어지기도 하고,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억하는 내용이 너무 많아져서 떠올리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오늘 또 하루치의 행복한 기억을 쌓아가시길.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출연 중인 방송 프로그램의 ‘막내작가’ ㄱ씨를 보면 흰 토끼가 떠오른다. 통통한 하얀 볼, 늘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 도드라진 앞니 두 개. 그런데 그날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찾을 수 없었다. 흡사 억울한 토끼 같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해들은 사연은 이렇다. ㄱ씨는 하나의 집이었던 것을 여러 원룸으로 쪼갠 다가구주택에서 월세로 살았다. 단열·방음 등에 문제 있음은 당연했고, 기타 수리 가능한 문제도 건물 주인이 제때 고쳐주지 않아 불편했다. 그렇다고 전문가를 불러 수리한 뒤 영수증과 함께 비용을 청구하는 방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계약기간 동안 버틸 따름이었고, 기한이 만료되자 쾌재를 부르며 모든 짐과 함께 탈출했다.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벽에 곰팡이가 생겼다는 게 이유였다. 환풍이 어려운 구조를 가진, 노후된 주택 자체 문제라고 ㄱ씨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도배 비용은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임대인은 정확한 비용은 청구하지 않은 채 보증금 1000만원을 돌려주지 않고 버텼다. ㄱ씨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부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집주인은 모친과 통화하며 그동안 ㄱ씨의 집에 누가 방문했는지 사생활을 노출하며 ㄱ씨를 깎아내렸고, 모친에게도 모욕적인 언사를 했다. 사생활 보호에 어찌나 둔감한지, 그는 일전에 잠긴 문을 열고 침입해 ㄱ씨의 비명을 자아낸 적도 있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여서 ㄱ씨는 더욱 놀랐다.

사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다. 나도 이제 1인 가구 6년차다. 6년 동안 더러운 꼴을 많이 봤다. 그럼에도 ㄱ씨의 얘기에 새삼 놀란 것은, ‘종합판’이어서다. 한두 가지 결점을 가진 집주인은 흔하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나 다 갖추다니…. 이제 2020년인데, 이 정도로 낡아빠진 집주인이 멸종하지 않았다니….

ㄱ씨가 서투르긴 했다. 특히 보증금 받기 전 짐을 다 빼고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줬다는 얘기에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서툰 상대라도 이렇게까지 막 나가면 안되는 거잖아. 밟힐 것 같은 대상은 짓밟고 빨대 꽂아 부를 증식하는 삶의 방식, 혹시 나이 지긋한 집주인이 이제껏 살아온 방식이 아닐는지.

배경에는 이를 허용하는 사회가 있다. 자기 소유의 주택이어도 세입자가 사는 동안 권리가 제한되며, 동시에 지켜줘야 할 세입자의 권리가 있다는 기본 중의 기본을 무시하는 임대인에게 그렇게 살면 큰일 난다고 옆구리 세게 꼬집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제부턴가 ‘주택 문제’를 다루는 뉴스에 관심이 줄었다. 대부분이 서울의 아파트 매매 관련 뉴스였기 때문이다. 내겐 1000만원도 큰돈인데, 그것도 오랜 기간에야 간신히 모을 수 있는데, 몇 억원을 우습게 말하는 기사에 박탈감과 불안감이 자극됐다. 자극된 사람이 나뿐만 아니어서 지속적인 집값 상승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설움 안 당하려면 빚내서 집 사야 한다는 ‘심리’.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자산이 있어야 가능하다.

서울에서 아파트 사는 것, 어차피 이번 생엔 가망 없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니, 대한민국 전체 인구를 따지면 이쪽이 다수다. 그럼에도 많은 언론은 서울의 아파트를 가졌거나,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계급을 위한 뉴스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자분들이 감정이입하는 계급인가 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파트 매매가 등락을 매일매일 중계하듯, ‘해도 너무한’ 집주인이 발견될 때마다 한 명 한 명 대서특필한다면? 자신의 행위가 파급력 있는 매체에 보도될 가능성이 높음을 의식한다면, 해도 너무한 짓은 좀 덜 하지 않을까? 세입자가 통화 내용 등 증빙자료와 함께 제보하면 후속 취재를 통해 보도하는 상설 코너가 있는 프라임 타임 뉴스쇼를 그려본다. ㄱ씨와 같은 이들이 제보할 수 있게. 앞으로의 10년은 나아지기를.

<최서윤 작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나는 만화가다. 지금은 사라진 신문 소설 삽화로 2002년에 데뷔했다. 인터넷 만화도 그 무렵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이른 시도였다. 그런데 정작 웹툰은 많이 그리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다. 그냥 내가 포털사이트에 들어가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트렌드에서 동떨어진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을 자주 한다. 비슷한 문제로 마음 졸이는 친구들과 요즘 하는 이야기가 말과 자동차의 비유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말이나 마차를 탔다. 그런데 이제 대부분의 사람은 마차 대신 자동차를 탄다. 말과 자동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짐작하기 쉽다. 종이만화가 말이라면 웹툰은 자동차다. 음반 대 음원 다운로드, 종이책 대 팟캐스트, 종이신문 대 온라인 매체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들었다. 유튜브, 즉 지금의 자동차조차 옛날 물건으로 보이게 만드는 자율주행차의 시대가 이미 열렸다고도 한다. 

나는 뒤늦게 웹툰으로 갈아타는 문제를 고민하는데, 남들은 벌써 웹툰 시대 이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변화가 참 빠르다.

세 가지 생각을 한다. 첫째, 콘텐츠 향유자의 입장은 간단하다. 타는 쪽에서 보면 자동차가 낫다. 빠르고 쾌적하고 돈도 덜 든다(말똥도 없다). 둘째, 창작자의 입장은 복잡하다. 마차 만들던 사람이 자기 먹고살기 힘들다고 남들한테 자동차 타지 말라고 하면, 호응할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남은 인생을 마차에 올인할까, 자동차 공장에 일자리를 알아볼까.

나 같은 말발굽 기술자는 자동차 시대를 맞아 생각할 것이 많다. 자동차가 아직 걸음마 단계라거나 반대로 마차가 이미 사라진 시대라면, 이야기는 쉽다. 고민할 필요 없이 한쪽을 택하면 된다. 지금 같은 과도기가 문제다. 수익과 지출이며 일하는 보람이며 작가 브랜드며 여러 가지를 고려해봤다. 내 경우만 놓고 보면, 종이만화로 얻던 이득과 웹툰으로 얻을 이득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매체를 바꿔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리 아프다.

얼마 전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오늘날 말안장 가격은 옛날보다 비싸다고 한다. “뉴욕에서 말발굽 네 개의 가격은 자동차 바퀴 네 개의 가격과 동일하다. 말발굽은 4~5주밖에 사용할 수 없는데 말이다.” 경쟁자가 없으니 되레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는 말씀. ‘포지셔닝’이라는 마케팅 이론으로 유명한 알 리스의 글이다. 말과 자동차 이야기를 보면서 셋째, 버티고 버텨 최후의 말발굽 기술자가 되면 어떨까도 상상해본다. 그런데 많은 사람을 위한 전략은 아닐 것이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 앞으로 이 칼럼을 통해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김태권 | 만화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이하 경칭 생략)가 연초 정계복귀를 선언한 직후다. 한 페이스북 페이지에 ‘누가 더 정치를 잘할 거라 생각하나?’라는 설문이 올라왔다. 선택지는 안철수와 ‘펭수’ 둘이다. 누구를 내세운들 ‘직통령’ 펭수를 당할 리야마는, 안철수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때 청년들의 희망이었던 안철수로서는 실로 격세지감이다. 다분히 흥밋거리 설문이 눈길을 끈 건 펭수에 반사되는 안철수의 특성 때문이었을 게다. 펭수에게는 있지만 안철수에게는 부족한 게 있다. 메시지의 명료함과 구체성이다. 정치언어로 바꾸면 뚜렷한 노선과 원칙, 정체성이다. 리얼미터 여론조사(1월7일)에서 안철수의 정치노선을 ‘보수적’으로 인식하는 응답이 28%, ‘중도적’ 17%, ‘진보적’ 9.6%로 나타났다. 그리고 ‘모른다’는 응답이 45%에 달했다. 정치를 시작한 지 9년이 되었는데도 정체성과 노선마저 모호한 셈이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경향신문DB

안철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현실정치 복귀를 알린 뒤 토론회 영상 메시지, 당원 신년 메시지, 신간 출간 등을 통해 “다시 정치를 시작한” 동기와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다. “낡은 정치와 기득권에 대한 과감한 청산”을 기치로 리더십 교체, 정치 패러다임 전환, 정치권 세대교체를 정치개혁의 과제로 제시했다. 신간에서는 미래 3대 비전으로 행복한 국민, 공정한 사회, 일하는 정치를 내걸었다. 소중한 가치들이지만, 안철수만의 것이 보이지 않는다. ‘낡은 정치’ 대 ‘새정치’의 구도는 유효하지 않다. ‘새로움’은 더는 안철수의 무기가 아니다. 1년5개월 만에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비전을 펼치지만, 안철수의 길은 오리무중이다. 세 갈래도 모자라 ‘제4의 길’이 운위되는 지경이다. 낡은 정치와 기득권 청산을 누구(세력)와 어떤 노선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 하겠다는 것인지가 빠진 탓이다. 귀국하면 이것부터 ‘펭수의 화법’으로 제시해야 한다.

‘조국사태’와 ‘검찰정국’을 거치면서 양극단을 혐오하는 무당층과 중도 영역이 보다 견고해졌다. 극렬한 진영 대립은 지지층 결집과 더불어 정치 염증에 기반한 무당층과 중도층의 확대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한국갤럽의 신년 정기조사에서 무당층은 25%로 자유한국당 지지율(20%)보다 높다. 20대 무당파는 40%에 이르고, 중도층에서는 절반에 육박한다. 외형상으론 ‘안철수현상’을 불렀던 9년 전과 유사한 환경이다. “정치를 그만둘지 심각히 고민했다”는 안철수가 총선을 앞두고 등판한 것은 과거 실패한 ‘다당제시대 개혁’과 ‘기득권 양당의 벽’을 허물 토양이 조성되었다고 나름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권 4년차에 치러지는 총선임에도 정권심판보다 야권심판론이 더 높다. ‘박근혜 탄핵’에 찬성한 중도보수가 한국당으로 돌아오지 않은 결과다. 보수통합은 그것을 반전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유승민세력을 더해 단순히 덩치만 키운다고 쉽지 않다. ‘도로 새누리당’으론 무당파와 중도보수가 다 흡수되지 않는다. ‘안철수’라는 제3의 상징이 절실한 이유다. 하지만 안철수가 ‘통합호’에 몸을 싣는 순간, 안철수는 정치적으로 죽는다. 낡은 정치와 기득권 타파, 다당제 개혁과 중도 등 안철수정치의 명분과 자산을 죄다 전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안철수는 역시 ‘펭수의 화법’으로 보수통합에 대한 입장부터 분명히 정리해야 한다.

안철수의 정계복귀와 신당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당파와 중도층, 청년층에서 지지와 찬성 여론이 높은 것은 기존 정당이 아닌 새로운 당에 대한 기대감을 반영한다. 극단의 진영 대결 속에서 무당층은 커지고 중도층이 늘어나 다당제 요구는 있으나 이를 묶어낼 구심이 없던 상황이다. 무당파와 중도층의 다당제 동력을 수렴할 수 있느냐가 안철수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또 다른 제3당의 길은 분명 고난의 길이다. 기계적 중간과 ‘반문’ 깃발로는 십리도 못 간다. 양대 정당 사이에서 제3당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설정해야 한다. 사회·경제 개혁 메시지가 명료해야 하고, 정치 목표가 무엇인지 보다 명징한 언어로 보여야 한다. 제3당이 철지난 정치세력, 정치인들의 도피처가 되어서는 희망이 없다. 결국 얼마나 대중성 있고 참신한 인물을 참여시키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안철수는 17개월 전 정치일선을 떠나면서 토로했다. “5년9개월 동안 정치를 하면서 다당제시대 개혁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기득권 양당 벽을 허물지는 못했다. 미흡한 점도 많았다. 그러나 제가 갔던 길이 올바른 길이라 믿고 있다.” 다시 다당제 개혁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안철수의 마지막 시간이다.

<양권모 논설실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마이클 샌델의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What money can’t buy)>은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지만 요즘은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교도소 수감자들이 추가 비용을 지불하면 깨끗하고 조용하면서 다른 죄수들과 동떨어진 개인 감방으로 옮길 수 있다. 비용은 1박에 82달러.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는 ‘나 홀로 운전자’라도 돈을 내면 2명 이상 탑승차량을 위한 ‘전용 차선’을 이용할 수 있다. 교통량에 따라 다르지만 출퇴근 시간에는 8달러다. 당일 바로 진료받을 수 있는 의사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도 판매된다. 연간 1500~2만5000달러 수준이다. 미국으로 이민할 수 있는 권리는 50만달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멸종위기에 놓인 검은코뿔소를 사냥할 수 있는 권리는 15만달러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늘어나면 부자들의 생활은 편리해지겠지만 정의와 공정의 관점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불평등과 차별이 심해지고, 사람들의 도덕 관념도 희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죄를 지어도 가난한 사람은 더 열악한 감방에서 생활해야 한다. 회원 고객에게 휴대전화 번호를 넘긴 의사들은 기존 진료를 줄일 수밖에 없어 결국 서민의 병원 이용 문턱이 높아진다. 샌델은 “부유함의 유일한 장점이 요트나 스포츠카를 사고 환상적인 휴가를 즐길 수 있는 능력이라면 부의 불평등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 좋은 의료, 안전한 이웃들에 자리 잡은 주택, 엘리트 학교 입학 등 돈으로 살 수 있는 대상이 많아지면서 부의 분배가 점점 커다란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했다.


어린이들에게 줄을 잘 서라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되,

특권을 가진 사람이 오면

순순히 양보하라고 해야 한다?


우리 사회 트렌드도 다르지 않다. 10년 전만 해도 놀이공원의 ‘청룡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줄을 서야 했다. 하지만 요즘은 인파로 붐비는 토요일 오후에도 줄 서는 수고 없이 놀이기구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웃돈을 주고 ‘특별 패스’를 구입하는 것이다. 항공사 발권 창구나 비행기 탑승구의 퍼스트 클래스가 놀이공원까지 확대된 셈이다. 이제 어린이들에게 줄을 잘 서라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줄을 서서 이용 순서를 기다리되, 특권을 가진 사람이 오면 순순히 양보하라고 해야 한다.

미국 대학들만큼 노골적인 기여입학제는 아니지만 돈으로 사고파는 한국의 사교육 프로그램은 부자 자녀의 명문대 입학 확률을 높인다. 수십억원을 주고 고위 판사나 검사를 지낸 ‘전관’ 변호사를 고용하면 같은 죄를 저질러도 처벌은 가볍게 받는다. 돈과 권력은 늘 함께 움직인다. 사업가와 유착된 고위 관료,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 공천 장사를 하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사라지는 날이 과연 올까. 돈과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명예도 거래된다. 재벌이나 대기업 회장 치고 웬만한 대학의 명예박사 아닌 이들이 없다. 학위의 대가가 무엇일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스포츠대회에 붙이는 이름도 거래된다. 한국야구위원회가 주관한 지난해 프로야구 리그 공식 명칭은 ‘신한은행 마이카 KBO 리그’였다. 서울대 경영대학 건물 중에는 LG관, SK관이 있다. 서울대가 공짜로 건물에 기업 이름을 붙여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장경제 시스템은 사람도 돈으로 평가한다. 2년 전 중견기업에서 퇴직해 마을버스 운전을 하는 내 친구의 노동력은 한 달에 300만원이다. 특별한 기술과 자본이 없는 50대 남성의 가치는 이 수준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투수 류현진의 몸값(4년간 8000만달러)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다. 그러나 내 친구는 그의 팔순 노모가 세상에서 최고로 믿고 의지하는 아들이고, 딸의 존경을 받는 행복한 아빠다.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파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과거보다 점점 더 많아지고,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랑, 우정, 양심, 건강 등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다.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꿈꾼다면 평화, 민주주의, 투표권 같은 것은 누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넘겨줄 수 없다. 어머니가 손수 끓인 된장찌개와 여섯 살 조카가 괴발개발 그려 보내준 연하장처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도 있다. 경자년 새해,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한다.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우리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오창민 디지털뉴스편집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새해가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다. 이맘때마다 많이 들리는 성어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다. 새해의 시작을 맞아 운동, 금연, 외국어 공부 등 모처럼 작심한 일들이 며칠 가지 못해 흐지부지되고 만 데 대한 후회와 자괴의 마음이 전해지는 말이다.

작심삼일은 고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속담을 한문으로 옮긴 말이다. 사흘 고기 잡고 이틀 그물 말린다는 뜻의 ‘삼천타어(三天打魚) 양천쇄망(兩天쇄網)’이라는 중국어 표현, 머리 깎고 승려가 된 지 사흘 만에 못 견디고 환속한다는 뜻의 ‘삼일방주(三日坊主)’라는 일본어 표현 등이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는 한다. 하지만 작심삼일은 17세기부터 용례가 보이는 우리 고유의 성어다.

사실 어떤 목적을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는 뜻의 작심(作心)이라는 어휘 자체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흔히 쓰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결심(決心)이 더 일반적인 어휘다. 무언가가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의 “작어심(作於心)”이라는 구문은 많이 보인다. 맹자는 변론을 즐긴다는 비판에 대해 이단사설이 횡행하는 것을 막고 유가의 도를 계승하기 위해 부득이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맹자가 말하는 유가의 도는 요임금 때 범람하는 황하를 다스림으로써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든 데에서 출발한다. 홍수가 지나간 땅에 득실거리는 벌레와 도마뱀 따위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것을 표현한 글자가 개(改)이고, 그렇게 바로잡는 행위를 일반화한 글자가 정(政)이다. 환경을 바로잡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정치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생각이 일을 그르치고 결국 정치를 그르치게 되므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라는 것이다.

작심삼일도 사흘마다 한 번씩 하면 된다는 말들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라도 위로받고 늘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그 역시 나쁘지 않겠다. 문제는 오히려 작심삼일이 두려워서 작심 자체를 안 하는 데에 있다. 성찰 없이는 작심도 없다. 끊임없는 성찰과 작심이 아니고는 우리의 삶도, 사회와 정치도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에 달렸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일반 칼럼 > 송혁기의 책상물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심삼일  (0) 2020.01.15
송구영신의 마음  (0) 2019.12.18
너무 작은 뜨락  (0) 2019.12.04
장점이 없는 사람  (0) 2019.11.20
11월의 방정환  (0) 2019.11.06
고니와 닭  (0) 2019.10.23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KTX역 지하에 결혼식장이 있었다. 역 대합실 1층에서 이어진 긴 지하 터널을 통과하면 거짓말처럼 결혼식장이 나왔다. 조도가 낮아 희읍스레한 터널 끝 유리 격자문 안쪽에는 한낮 햇빛처럼 밝은 빛이 아롱거렸다. 그 문이 열리면 미지의 세상이 있을 것 같은, 혼자 길을 걷다 둘이 만나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는 결혼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세상을 떠난 친척 아저씨를 떠올렸다.

그런데 키가 커서 한참 올려다봐야 했던 그의 선한 얼굴이 신랑의 모습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꼬마였을 때 서너 번 보았을 뿐이고, 친척 아저씨가 돌아가신 뒤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주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신랑을 단박에 알아봤다. 한때 청년이었지만 노인이 된 친척 아저씨들도 마찬가지였다. 쌀자루를 번쩍 들어 얹던 어깨는 조붓해지고, 까랑까랑하던 목소리는 느려지고, 꼿꼿했던 걸음은 수굿해진 노인들도 모두 돌아가신 자신의 부모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이들의 시간이 계속 이어지는 듯했다. 

결혼식장을 나와 다시 긴 터널을 걸어서 다시 기차에 올라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나는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나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른 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엄마와 똑같아 울었다는 이가 떠올랐다. 엄마와 다르게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슬펐다는 그의 말에 나는 공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고 보면 대개의 사람에게 삶이란 부모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비록 얼굴은 닮더라도 부모와 다른 삶을 살고자 했던 이들의 시간이 좀 더 나은 시간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아무튼 결혼하고 새롭게 길을 떠나는 청년도 그의 아버지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기를, 이 세상의 모든 청년이 시속 300㎞로 내달리는 KTX처럼 부모로부터 더 빨리 달아나 부모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길, 그것이 인간의 진보이며 역사일 테니.

<김해원 동화작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기후변화가 예측한 것보다 훨씬 빨리 가속화되고 있다. 정부기관들이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학생들까지 시위에 나서고 있으며, 법정에서는 기후 소송이 진행되는 등 풀뿌리 시민운동도 앞장서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전 세계 153개국 과학자 1만1000명은 기후변화 대처 비상선언을 발표하고 세계 각국이 즉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바이오사이언스’에 논문을 발표하고 기후변화 완화를 위한 행동지침을 제시했다.

이들이 제시한 지침은 먼저 화석연료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고 화석연료에 대한 보조금을 폐지하는 동시에 강력한 탄소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메탄과 블랙카본 등 단기성 온실가스를 신속하게 줄이자는 주장이다. 셋째는 산림을 비롯한 자연생태계를 복원 및 보호함으로써 이들 생태계가 탄소를 흡수하는 큰 몫을 담당하게 할 것, 넷째는 동물성 식품을 덜 섭취하는 채식 위주로 식생활을 바꾸자는 주장이다. 다섯째는 탄소 없는 경제로 전환해 국내총생산(GDP) 성장과 풍요의 추구라는 목표에서 탈피하자는 것이고, 여섯째는 적절한 정책을 통해 하루 20만명 이상 늘어나는 지구촌 인구를 안정화시키자는 내용이다.

특히 채식 위주의 식단 변화는 이산화탄소뿐 아니라 메탄과 블랙카본 같은 단기성 온실가스도 현저하게 줄여준다. 블랙카본의 40~50%가 숲과 대초원을 불태우는 데서 배출되고 축산업은 삼림 파괴와 메탄의 주 배출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축 사료가 아닌 사람이 먹을 식량 재배를 위한 농토를 넓히는 한편 축산업으로 사용되는 농지에 삼림을 조성함으로써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다.

이미 작년 8월 제네바에서 개최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총회는 세계 각국 정부가 승인한 ‘기후변화와 토지에 관한 특별보고서’를 발표하고 화석연료 감축과 함께 토지 이용의 획기적 전환 없이는 기후재앙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선진국에서 육류와 유제품 섭취량을 줄일 것을 권고하며, 전 인류가 채식이나 비건(완전 채식)으로 식습관을 바꿀 경우 최대 연간 80억t의 온실가스 감축이 가능하고, 음식물 쓰레기만 신경 써도 연간 전 지구 온실가스 배출량의 8~10%를 줄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경작·혼농임업 등 식량 생산방식을 바꿔도 2050년까지 최대 연간 96억t의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음을 밝혔다. 종합하면 생산에서 폐기까지 먹거리 시스템만 개선해도 전 지구 온실가스 배출의 최대 50% 가까운 양을 줄일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식습관 변화를 연결고리로 땅과 동식물들과의 관계를 새로이 할 수 있다. 기후변화 및 사막화의 완화, 생물다양성의 복원을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물 부족·인류 건강·식량·양극화 문제의 해결이란 가능성도 확인해 준다. 

인류는 식습관 변화를 통한 악순환과 선순환 가운데 양자택일의 순간에 서 있다. 인간과 지구, 밥상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밥상혁명의 순간이다.

<고용석 |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대학에 입학하고 이듬해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생애 첫 투표를 한다고 들떠 있는데, 선거일보다 며칠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에게는 투표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선거에 대해 이러저러 떠드는 친구들 속에서 혼자 소외된 기분에 꽤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 일이, 투표도 하지 못해놓고, 내 생애 첫 번째 선거일이 되었다.

그다음의 선거는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선거가 있는 날마다 아버지가 새벽 일찍 우리를 깨웠던 기억만 있다. ‘투표는 꼭 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신념이자 소신이었다. 그래서 어물거리다가 시간을 놓치는 법이 없도록 자식들에게 투표권이 생긴 후에는 우리까지도 독려해서 투표소에 데려가시고는 했다. 잠도 덜 깬 눈으로 서늘한 투표소 복도에 서 있던 몇 번의 풍경이 지금도 선하다.

그렇게 우리를 데려간 아버지가 찍는 정당은 늘 한결같았다. 나와는 다른 정당. 한 번도 서로에게 물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서로 알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정치 성향에 대해서 가족끼리 자주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도 어쩌다 이야기를 해보면 서로 생각이 달랐다. 그러니까 ‘기성세대의 잘못으로 나라가 이렇게 되었다’와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애들이 투표를 이상하게 해서 분열이 된다’는 그런 오랜 지적들이 우리 가족 내부에서도 존재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나는 신기했다. 어떻게 아버지는 우리에게 한 번도 당신이 지향하는 바를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 젊은 것들 사람 뽑을 줄 모르니 투표 같은 거 하러 가지 말라고 할 법도 한데, 그런 말 한마디 없이 당신과 다른 사람 뽑을 줄 뻔히 알면서 그 줄에 세워놓을 생각을 했을까. 여쭤본 적이 없어 그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태도에 깃든 것이 일종의 위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옳다고 믿는 사회의 구현을 위해 당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로막지 않는 것, 그것이 가끔은 그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에 대한 강한 신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그런 태도가 시민사회의 공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공립학교를 잠깐 경험할 일이 있었는데, 미 대통령 선거를 치르던 시기였다. 주별로 각당 후보 경선이 진행 중이었는데,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이들에게 민주·공화 각당 경선 후보들의 공약이 담긴 선거 자료집을 나눠주고, 선거제도 전반에 대한 설명과 함께 검토하여 에세이를 쓰는 숙제가 주어졌다. 인상 깊은 건 그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누구를 뽑겠는가” 혹은 “각각의 공약이 어떻게 타당한가”를 묻기 이전에 이들에게 주어진 피선거권의 자격을 포함하여 현 선거제도가 타당한가에 대한 질문을 먼저 던진 점이었다. 선거 연령에 대한 질문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나는 그 질문이 무척 신선했는데, 그 질문을 본 순간 선거가 단지 우리를 대표할 누군가를 뽑는 것만이 아니라 누가 우리 사회의 시민인가,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묻는 제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열 살 남짓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그런 수업과 질문이 자연스레 가능하다는 점도 충분히 놀라웠다.

만 18세 이하 선거권이 통과되었다. 당장 총선을 앞에 두고 있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유효표의 등장으로 보이는 듯하다. 그보다는 새로운 시민의 유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던질 표의 향방은 결국 그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에서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의 몫일 것이다. 그러므로 향후 이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질 예정이라는 선거교육은 각 정당의 득실 이전에,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묻고 고민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교육이 되었으면 좋겠다. 환영한다, 젊은 시민들.

<한지혜 소설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