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년 전 과거가 되었다만은 (…) 조선의 요리 독립까지 잃어버리는 것을 구경했다. (…) 장유(醬油)라는 것이 우리나라 간장을 동화시켜 가지고 소위 선일융화(鮮日融和)를 실현시켰다. (…) 고추장, 김칫국 몇 가지가 하도 어이가 없는 듯이 한구석에 박혀 있는 꼴이라고는 적막해서 볼 수 없었다.” 동아일보 1923년 3월3일자에 실린 김재은의 회고다. 7년 전이니 1916년이다. 기미년 만세 시위가 터지기 3년 전이다. 기고자는 “사랑”과 “근심” 때문에 글을 썼다는데 고추장, 김칫국이 한구석에 처박히듯 조선 음식이 처량해진 내력을 돌아보매 이렇다. 일식 전골인 스키야키는 고급 조선요릿집에서 신선로를 진작에 “구축(驅逐)”했다. 스키야키가 밥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일식 절임인 복신지(福神漬·후쿠진즈케)가 따라붙었다. 후쿠진즈케라는 “들척지근한 물건”이 조선의 짠지를 “정복”했다. 후쿠진즈케는 일제 군대의 급양이 서양식으로 바뀐 가운데서도 지급된 일식 반찬이다. 또한 양과자는 다식을 대신하고, 정종은 조선의 소주를 “병합(倂合)”해 전횡을 다했다. 그러고는 장유, 곧 일식 간장인 쇼유가 맛 설계의 바탕인 조선의 간장을 동화함으로써 선일융화, 곧 조선 사람의 일본인화가 실현되었다. 선일융화를 뒤이은 통치 구호가 ‘내선일체(內鮮一體)’다. 1936년 부임한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내세운 바다. 먹어 들어가는 쪽에서야 융화네, 한 몸(一體)이네 못할 소리가 없겠지만, 실제로는 한쪽의 절멸을 바라는 수작 아닌가. 1910년 나라 망한 지 6년 만에 조선의 미각 상상력도, 음식도 적막한 지경에 이르렀다. 당하는 쪽에서 볼 때에는 한 역사 공동체 절멸의 징후였다.

오늘날의 독자는 이 거친 민족주의 수사에 유치하다는 꼬리표를 망설임 없이 붙일 테다. 하지만 사랑, 근심, 구축, 정복, 병합, 일선융합 같은 엄중한 말의 행간을 더 살피고 싶다. 기고자는 조선인 일상의 사물이 쓰이지 않아서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 ‘쓰이지 않음’이 그저 조선식 일품요리, 반찬, 과자, 술, 장 사용의 빈도가 줄어든 현황만을 가리킬까. 가령 ‘들척지근함’은 산업화한 식품과 음식이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는 입맛을 단박에 사로잡은 비결이다. 일본제국의 설탕, 세계 최초의 MSG 제품인 아지노모토(그 한국판이 미원이다), 왜간장 셋이 손잡으면 들척지근하기에 대체로 무난한 맛을 쉬이 낼 수 있다. 이때 아지노모토와 왜간장이야말로 일본의 일상 감각에다 일본적인 상상력을 잘 쓴 끝에 얻은 현대 일본의 발명이다.

1908년 일본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는 MSG 제조 기술의 특허를 받는다. 세계 최초로 ‘감칠맛(旨味·우마미)’을 규명한 성과가 발판이다. 이 조미료의 열쇠인 글루탐산은 1866년 독일 화학자 리트하우젠(Karl Heinrich Ritthausen)이 처음으로 발견했지만, 이를 바탕으로 그때까지 미지의 영역에 있던 단맛·신맛·쓴맛·짠맛에 이은 제5의 맛을 개관적으로 설명한 사람은 이케다였다. 그는 회의했다. 일본인 일상의 식재료인 다시마, 가쓰오부시를 우린 맛, 그 맛이 음식과 어울린 일본적인 맛의 실체는 당시 화학 교과서로는 이해도 설명도 불가능했다. 그는 교과서 밖으로 치고 나갔다. 일본의 맛이 객관화되자 메이지시대까지도 일본인 스스로 구미 식품에 견주어 열등하다고 여긴 일식 간장과 된장을 세계화할 자신감이 붙었다. 1929년 이후 일본 산분해간장의 산업화 또한 이케다의 일본 미각 재발견의 연장에 있다. 깃코만(龜甲萬)으로 대표되는 일식 간장 산업의 세계화 또한 여기에 힘입었다. 일본 과학기술의 현대적 현현과 산업혁명에는 민족주의에 앞서는 ‘민족성’이 한가득이다. 오늘날 한식은 어떨까. 민족주의에 기댄 탄식을 넘은, 구체적인 내 유산과 일상 감각의 탐구에서는? 아직 드러내지 못한 가능성을 발현시킬 내 상상력에서는? 여전히 1923년식 탄식뿐이라면 섭섭하지 않은가. 아직 잘 써본 적이 없는 상상력. 쓰지 않아서 쓰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를 상상력. 오늘도 설탕·MSG·왜간장으로 들척지근한 백반 한 상 앞에서 사무친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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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쯤 유럽연합은 ‘미래를 위한 100대 급진적 혁신기술들’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약 330페이지에 달하는 이 보고서에는 방대한 과학기술 문헌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자동 분석을 하고 전문가 패널들이 수단계에 걸쳐 검증한 기술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연구는 유럽연합의 과학기술 혁신역량을 강화하고 유럽 산업경쟁력을 높이며, 유엔의 지속가능개발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추진 중인 호라이즌(Horizon)  유럽과 호라이즌 2020 프로그램을 잘 추진하기 위하여 수행되었다. 급진적이고 획기적인 혁신기술 87개와 사회 혁신시스템 13개를 포함한 100가지를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들 100가지 기술과는 별개로 22가지의 글로벌 가치 네트워크를 제시하여 이러한 기술들의 개발을 추진하기 전에 미래의 변화상에 따라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가치와 비전도 함께 제시하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혁신기술 87개를 보면 모든 나라들이 집중 투자하고 있는 인공지능(AI)은 역시 강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AI+X프로그램과 같이 특정 응용분야에 AI를 적용하는 기술들이 포함되었다. 이들 중에는 대화인식과 감정인식, 챗봇, 뇌기능 매핑, 인공시냅스, 뇌신경 모방칩, 자율주행, 하늘을 나는 차, 정밀농업 등이 있다. 유럽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메탄하이드레이트 수확기술, 바이오플라스틱, 랩온어칩, 챗봇 등과 함께 유럽이 상대적으로 약한 분야들, 즉 4D 프린팅, 그래핀 트랜지스터, 에너지 수확, 하이퍼루핑 등도 명시하였다. 이외에도 그래핀과 같은 이차원 물질들, 음식 3D 프린팅, 항생제 감수성 테스트, 인공광합성, 생분해성 센서, 유전체 편집, 집단 생물 지성, 메타물질, 미생물 연료전지, 식물 간 정보 교환, 플라스틱 분해, 퀀텀컴퓨터와 퀀텀암호기술, 재생의학, 자가치유 물질, 스마트 문신, 스마트 창, 폐수로부터 영양분 수거 등 많은 흥미로운 기술들이 포함되었다. 

나의 경우도 지난 25년간 연구해 온 바이오플라스틱은 유럽의 다수 회사들이 상용화를 추진 중이다. 생분해성 플라스틱의 직접 발효 생산, 단량체의 발효 생산 후 중합에 의한 플라스틱 생산, 전분 등 천연고분자의 활용 등이 복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음식 3D 프린팅은 재작년 미국의 샌타모니카 소재 미쉐린 별 두 개의 멜리세 식당에서 3D 프린팅으로 프렌치어니언 수프에 들어가는 크루통을 만든 것이 화제가 되면서 주목받았다. 앞으로는 3D 프린팅을 이용하여 잘 먹지 않는 아이들을 유혹(?)할 수 있는 뽀로로 형태의 밥과 반찬뿐 아니라 다양한 영양성분들이 개인 맞춤형으로 들어 있고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진 훌륭한 음식들을 맛보게 될 것이다. 시간에 따라 혹은 환경 변화에 따라 특성이나 형태가 변할 수 있도록 하는 4D 프린팅도 점점 더 발전할 것으로 예측된다. 우리 몸에 부착하여 여러 생체정보를 획득하고 약물을 전달하는 스마트 문신, 우리 몸에 들어가 진단이나 치료를 하고 분해되어 없어지는 생분해성 센서 등도 비약적 기술 발전과 응용이 예측된다. 유럽연합에서 스웜 지능(swarm intelligence)이라고 부르는 기술은 개미들이나 군집비행을 하는 새들이 각자 행동을 하지만 다른 개체들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모사하여 활용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 응용분야가 이동수단과 군사용으로 넓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회혁신 시스템 리스트를 보면 접근경제(access economy)와 공유경제, 대체화폐기술, 기본소득, body 2.0 혹은 정량화된 자신, 자동차 없는 도시, 협력 혁신공간, 건강정보의 소유 및 공유, 교육시스템의 재발명 등이 포함되었다. 

이 중 교육시스템의 재발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지금은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 대학원까지의 학습을 통해 개인 학습이 끝나지만 앞으로는 평생 학습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평생학습 인프라, AI 등 다양한 혁신기술들을 이용한 학습, P2P 학습, 집단지성 학습 등이 가능하도록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의 혁신과 함께 ‘전 국민 평생학습 시스템’의 신속하고 체계적인 구축을 제안한다. 접근경제와 공유경제의 경우에는 인터넷과 모바일의 급속한 발전으로 물건을 소유하기보다는 경험하는 쪽으로 많이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음악이나 책을 소유하기보다는 원할 때 듣고 읽는 경험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제품이나 콘텐츠의 활용이 접근이나 공유 형태로 바뀔 것이다.

글로벌 가치 네트워크에는 유엔의 지속가능개발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비전이 여럿 포함되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탄소 억제, 지속 가능한 에너지, 물, 식량과 소재뿐 아니라 고령자들의 품위 있고 의미 있는 생활, 사회적 혁신역량, 사회안전망, 개인 맞춤형 제조, 사전행동적 자발적 건강관리, 인간과 기계의 원격 상호작용, 사용자 데이터 시장, 다수 참여 정보 및 지식 창출 등 다가오는 미래에 펼쳐질 세상에 필요한 플랫폼들이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빅데이터 기반 정밀의료시대가 다가오면서 개개인의 유전정보와 생활 및 식습관 정보 등 데이터들이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 전체의 건강에 기여하는 정보로 활용될 것이다. 최근 유럽은 100만+게놈프로젝트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때 개개인의 데이터들의 소유권과 공유가치 등 생각할 것이 많다. 

이들 비전과 기술 중 다수는 우리나라 기업, 정부, 대학, 출연연구소 등에서도 이미 예측하고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이 보고서에서 각 기술별 분석을 하면서 현재의 기술 성숙도, 지금으로부터 20년 뒤인 2038년에 이 기술이 얼마나 중요하게 사용될지에 대한 예측, 그리고 유럽의 현 기술 수준과 위치 등 3가지 요소들을 함께 분석하여 발표하였다. 

우리도 각 기술별로 우리나라 현황의 정확한 진단과 선도그룹 집중 지원, 중간그룹의 선도그룹화 전략, 미진한 그룹의 육성전략을 잘 추진하여 매우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혁신 시대에 잘 대비해야 하겠다.

<이상엽 카이스트 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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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탬파베이 레이스는 1998년 창단했다. 같은 해 창단한 애리조나가 2001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 것과 달리 창단 뒤 10년 동안 줄곧 꼴찌였다. 운도 나빴다. 하필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는 ‘부자팀’ 소굴이었다.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등과 겨뤄야 했다. 162경기 시즌 100패가 거듭됐다. 

한국선수들도 많이 뛰었다. 서재응, 류제국이 모두 탬파베이를 거쳤다. 지금은 최지만이 뛰고 있다.

10년 동안 꼴찌를 하던 팀은 11년째인 2008년 완전히 다른 팀이 됐다. 

이름을 데블레이스에서 ‘악마’를 뗀 레이스로 바꿨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오클랜드가 했던 전략이 ‘머니볼’이었다면 탬파베이가 2008년 이후 하고 있는 야구는 ‘데이터볼’이다. 월 스트리트에서 잔뼈가 굵은, 탬파베이의 새 구단주들은 데이터로 무장하고 팀을 변신시켰다. 첫번째 전략은 ‘시프트’였다. 야구장을 잘게 쪼개고, 각 영역에 따른 타구 확률을 계산했다. 내야수들이 한쪽 방향으로 치우치게 섰고 상대에게 안타를 덜 허용했다.

시프트를 둘러싼 시선은 차가웠다. 많은 이들이 “야구가 120년 넘도록 지금의 수비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감각과 인상이 아니라, 숫자로 들여다본 야구는 달랐다. 10년 전 ‘파격’은 지금 ‘일상’이 됐다.

탬파베이의 전통 파괴 실험은 계속되는 중이다. 

지난해 탬파베이는 ‘오프너’라는 파격을 선보였다. 선발 투수가 나와 5이닝 이상 던지고, 나머지를 불펜 투수들이 나와 막는, 전통적 야구와 완전히 달랐다. 탬파베이는 수준급 선발 3명을 빼고, 나머지 2자리에 선발 투수 대신 ‘오프너’라 불리는 투수를 썼다. 선발 투수가 길어야 1~2이닝을 막는다. 때로 마무리가 먼저 나와 1회를 막았다. 어차피 27개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거라면 앞에 3~6개를 확실하게 막는 게 승리 확률을 높인다는 계산이다. 계산은 정확했다. 탬파베이는 90승72패를 거뒀다. 아메리칸리그 15개팀 중 딱 6위여서 5팀이 나가는 가을야구에 못 갔다. 중부지구 1위 클리블랜드와의 승차는 1경기였다.

올해 탬파베이는 또 다른 파격을 선보이는 중이다. 선발 투수 오프너가 아니라 이번에는 타선의 오프너다. 전통적인 타선은 출루율이 높은 1~2번 타자에 장타력을 갖춘 3~4번 타자로 꾸려진다. 1~2번이 출루하면 3~5번 타자가 홈으로 불러들이는 식이다. 4번 타자는 팀에서 가장 강한 타자가 선다.

메이저리그는 최근 3~5번이 할 일을 2~4번으로 당기는 추세다. 강한 타자를 2번에 세워서, 한 번이라도 더 타석에 들어서게 한다. 이른바 ‘강한 2번론’이다. 탬파베이는 한 발 더 나갔다. 굳이 2번을 강하게 할 게 아니라 아예 가장 잘 치는 타자를 1번에 세웠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 전체 1번 타순의 OPS는 0.758인데, 탬파베이 1번 타자들의 OPS는 무려 1.008이다. 1번 타자가 때린 홈런이 21개로 가장 많다. 탬파베이 4번 타자의 홈런은 겨우 9개다. 4번보다 훨씬 강한 1번 타자를 쓴다. 또 하나의 전통 파괴 혁신이다.

탬파베이의 올 시즌 연봉총액은 6300만달러로 메이저리그 전체 꼴찌다. 그런데도 뉴욕 양키스에 이은 지구 2위를 달리고 있다. 아메리칸리그 전체 4위여서 가을야구에 나설 수 있다. 과감하게 전통을 깬 결과다.

KBO리그에서도 벽 하나가 깨졌다. LG 투수 한선태는 25일 SK전에 등판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한선태는 프로야구 최초로 야구부를 거치지 않은 ‘비선수 출신’ 선수다. 탬파베이의 ‘오프너’는 막힌 길을 뚫었다. LG 한선태도 가로막던 벽을 부순 오프너였다. 벽이 하나 무너질 때 세상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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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곧 분단 후 처음 민간에 개방된 DMZ(비무장지대)의 GP(감시초소)를 탐방하게 됩니다.” 철원 ‘평화의 길’ 해설사의 말에 참가자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철책 통문이 열리면서 버스가 ‘금단의 땅’으로 들어갔다. 버스는 역곡천의 배미교를 지나 화살머리고지로 향했다. 탐방객들의 표정에 호기심과 긴장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지난 22일 ‘DMZ 평화의 길’ 탐방단의 일원으로 6·25 최대 격전지였던 철원의 백마고지 전적지와 화살머리고지 인근을 돌아봤다. 1952년 10월 백마고지에서는 열흘간 고지쟁탈전이 이어지면서 국군과 중공군 등 1만8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전협정을 앞두고 벌어진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는 미군과 프랑스군 100여명을 포함해 300여명이 전사했다. 탐방단은 백마고지 전적비 일대를 돌아본 뒤 남방한계선 철조망 너머 DMZ의 백마고지 GP를 올려다봤다.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철책이 없었다면 유럽의 중세 고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DMZ에는 평화와 긴장이 함께 있었다. 

탐방단은 백마고지 조망대에서 공작새능선까지 남방한계선 철책길 3.5㎞를 걸었다. 윤형 철조망을 올린 철책은 삼엄했다. 길 반대편에 펼쳐진 논은 여느 농촌 풍경 그대로였다. 간혹 ‘무장공비 침투지역’ 표지판이 보였다. 경계 위의 전쟁과 평화다. 초병의 인솔로 찾아간 화살머리고지는 ‘평화의 길’ 철원 구간의 하이라이트다. 이곳에서는 6·25 전사자 유해발굴이 한창이다. 국방부는 지난 4월 이후 유해 456점, 유품 3만2000여점을 수습했다. 유품 일부는 GP 벙커에 전시 중이다. 총탄구멍이 숭숭 뚫린 철모가 전쟁의 참혹상을 증언한다. 초소 아래에서는 유해 발굴을 위한 진입로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비무장지대 내 유해발굴은 지난해 9·19 남북군사합의서에 따른 조치다. 남북은 당초 공동유해발굴을 약속했으나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남측 구간에서만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북측의 호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군사분계선(MDL) 너머로 북측이 개설한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남북정상은 9·19 남북군사합의서를 통해 DMZ를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4가지 이행조치를 내놓았다. GP 상호 철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 남북공동유해발굴, 역사유적 공동조사·발굴이 그것이다. 이 중 GP 철수, JSA 비무장화는 순조로운 편이다. 공동유해발굴은 절반만 이행되고 있다. 9·19 군사합의 가운데 가장 뒤처진 분야는 역사유적 조사·발굴이다. 

남북은 9·19합의서에 비무장지대 내 역사유적 공동조사·발굴을 명시했다. DMZ 내 역사유적을 민족정체성 회복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자는 데 합의한 것이다. 서울 면적 1.5배에 달하는 비무장지대에는 도성지, 고분, 산성, 사찰터, 천연기념물 등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이 중 전문가들이 꼽는 조사·발굴의 1순위는 궁예도성(철원도성)이다. 궁예도성은 후고구려(태봉국)를 세운 궁예가 905년 철원 풍천원 벌판에 세운 서울 성곽이다. 외성과 내성의 둘레가 각각 12.5㎞와 7.7㎞로 당나라 장안성이나 발해 동경성보다 크다. 궁예도성터는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DMZ 안에 푹 잠겨 있어 남북 공동 연구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일제식민 시기만 해도 이곳에는 석탑·석등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벽이 무너지고 유물들이 멸실됐지만, 성터 윤곽만큼은 항공사진이나 구글지도에 나타날 정도로 뚜렷하다. 남쪽의 철원 평화전망대에서는 성터를 조망할 수 있다.

궁예도성은 화살머리고지에서 동쪽으로 약 12㎞ 떨어져 있다. 두 곳이 ‘평화의 길’로 연결된다면 철원의 DMZ는 평화와 안보의 산교육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과 달리 궁예도성 조사는 남북 군사합의 10개월이 되도록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있다. 비무장지대 유적 조사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 국방부는 역사유적 공동조사·발굴의 우선조치로 ‘태봉국 철원성’(궁예도성)을 꼽았다. 문화재청은 ‘남북문화재 교류사업단’을 꾸려 궁예도성 발굴·조사에 대비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북한과 개성 만월대를 공동발굴한 경험이 있다. 비무장지대 문화재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도 적극 검토 중이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궁예도성 조사·연구를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문제는 북한의 뜨뜻미지근한 자세다. 정부는 북측에 9·19합의서 이행을 촉구해야 한다. 오는 29일 방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DMZ 인근 초소를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이 DMZ 평화만들기의 전기가 되길 바란다. DMZ 유적 공동발굴만큼 확실한 문화교류는 없다. 그 출발점에 궁예도성이 있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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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땅 얘기책 성경을 읽고 자라선지 사막이 항상 궁금했다. 금모래 사장이 앞산만 하다는 말에 상상이 가지 않았다. 첫 사막은 사하라였다. 체 게바라도 걸었다는 알제리의 사하라. 이후론 자주 사막을 찾았다. 우리나라에도 섬마을에 사구사막이 몇 군데 있다. 사막이라고 하기엔 밋밋하긴 하지만서두. 이 정도 ‘열탕 날씨’라면 언젠가 사막 땅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사막에도 마을이 있다. 오아시스를 벗어나면 살 수가 없기에 계율이 매우 엄하지만 거기도 매한가지 사람 사는 동네. 사막에 가면 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아무리 낮에 햇살이 뜨겁더라도 밤이 되면 겨울만큼 춥다. 사막의 낙타들은 소중하게 여기는 주인을 만나 다복하게 살아가는 편이다. 사막엔 적토마나 오토바이조차도 힘을 쓰지 못한다. 겨울왕국의 개들도 마찬가지. 사랑받는 주인 아래 충성스러운 명견이 나타나 앞장을 선다.

“힐난을 받고 자란 아이는 남을 헐뜯는다. 미움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잘 다툰다. 놀림을 받고 자라면 남과 어울리지 못한다. 격려를 받고 자라면 자신감이 커진다. 칭찬을 받고 자라면 감사할 줄 안다. 인정을 받고 자라면 자신의 생을 소중하게 여긴다.” 인기강사 글렌 반 에케렌의 얘기. 사막의 수도원은 엄격한 규율만큼 서로 보살핌이 각별하다. 동물들도 음식을 나눠먹을 줄 안다. 목마른 여행자들도 먼저 물을 내민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이 빛나듯이 극악한 환경에서 사랑과 배려가 훨씬 많아진다. 사막에서 인류의 성인들이 나고 자란 것을 생각해보라. 

인적이 드문 곳일수록 사람이 반갑고 소중하다. 사막에선 별이 하늘의 마을이나 되는 양 밝고 환하다. 인생 4막장, 그도 사막인가. 황량했던 인생도 사막에 가면 별빛의 조명과 축복을 받게 된다. 오만가지 음식과 물건들로 넘쳐나는 도심을 떠나서 조금은 춥고 외로운 사막을 찾아가는 여행을 권해주고 싶다. 평생 가장 많은 별을 볼 수 있는 기회, 물 한 모금의 감사, 사람에 대한 그리움, 낙타처럼 선한 동물과의 조우까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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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멕시코를 가르는 리오그란데 강가에서 숨진 한 부녀가 지구촌을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미국으로 가기 위해 강을 건너다 변을 당한 엘살바도르 난민 오스카르 알베르토 마르티네스 라미레스(25)와 딸 발레리아(2)가 그들이다. 멕시코 기자의 카메라에 잡힌 이 부녀의 모습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아빠는 마지막 순간까지 딸의 머리를 자신의 티셔츠 안에 넣어 감싸고, 딸 역시 필사적으로 아빠의 목을 팔로 감고 있었다. 4년 전 지중해를 건너다 배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숨진 3살짜리 시리아 난민 아기 아일란 쿠르디를 연상시킨다. 당시 터키 관광지 해안가 모래밭에 천진난만한 자세로 엎드려 있는 쿠르디의 모습에 전 세계인이 울었다. 

지난해 중남미 국가 난민(캐러밴)들이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로 몰린 이후 이들 부녀의 비극은 일상이 되고 있다. 전날에도 리오그란데강에서 어린아이 3명 등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 한 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난민이 283명에 이른다. 여기에 멕시코는 이달 들어 갑자기 이민자 단속을 크게 강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멕시코가 국경에서 난민을 철저히 막지 않으면 멕시코산 수입품에 최고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협박한 탓이다. 최근에는 미국 남부의 이민자 수용시설에서 아이들이 수주일째 씻지도 못하는 비인도적 실태까지 드러났다. 미 언론들이 “IS와 해적들도 치약과 비누는 줬다”고 자국의 처사를 비난하고 있다. 요행히 국경을 건너 미국에 안착한다 해도 난민들의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쿠르디 사후 큰 반향에도 불구하고 난민 문제 해결은 요원하기만 하다. 유럽 각국에서는 오히려 반이민·난민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라미레스 부녀의 비극을 두고 ‘난민을 만든 위정자를 탓해야지 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미국을 비난하느냐’는 사람들이 있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난민에 공감하지 못하고 실리만을 들이대는 것은 비인도적이다. 트럼프는 반이민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4월 불법 이민자에 미온적으로 대응한다고 국토안보부 장관을 경질하더니 세관국경보호국 국장까지 강성인물로 교체한다고 한다. 이민으로 성장한 미국의 역주행이 끝도 없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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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트랙 국가대표팀 내에서 발생한 성희롱 사건으로 남녀 대표선수 전원이 25일 충북 진천 선수촌에서 퇴촌 조치됐다. 앞서 지난 17일 쇼트트랙 대표팀이 선수촌 내에서 암벽등반 훈련을 하다 남자대표팀 ㄱ선수가 남자 후배 ㄴ선수의 바지를 내린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자 선수를 포함한 동료들이 보는 상황에서 수치심을 느낀 ㄴ선수는 성희롱당했다며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두 선수는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스타급 선수들이다. 진천 선수촌은 쇼트트랙 대표팀 전체의 기강 해이를 문제 삼아 ‘1개월간 전원 퇴촌’이라는 초유의 조치를 내렸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은 다음달 스포츠 공정위원회를 열어 ㄱ선수 징계를 논의할 예정이다.

성폭력은 어떠한 집단 내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 이성 간은 물론 동성 간에도 마찬가지다. 쇼트트랙 대표팀 사태는 성희롱 자체도 잘못이지만, 사후 대응은 더 부적절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최우선 과제는 피해자 보호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사건 다음날부터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빙상연맹 측은 가해자의 사과를 이끌어내는 대신 화해를 권유했다고 한다. 가해자는 사건 이후에도 훈련에 계속 참여하다 25일에야 다른 선수들과 함께 선수촌을 떠났다. 

더 큰 문제는 가해자가 명확한 사건임에도 피해자와 다른 선수들까지 불이익을 받게 된 부분이다. 선수촌에서 쫓겨난 대표선수들은 한 달 동안 훈련수당 등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선수촌 측은 이번 성희롱 사건뿐 아니라, 4개월 전 남자 선수가 여자 선수 숙소에 무단 출입한 사례 등 다른 사건도 고려해 결정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향후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공개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자신은 물론 사건과 무관한 동료들에게까지 피해가 돌아간다면 누가 입을 열 수 있겠는가.

조재범 전 코치 사건이 드러난 후 폭력과 성폭력으로 얼룩진 빙상계의 환골탈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ㄱ선수 성희롱 사건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음을 말해준다. 빙상연맹은 일벌백계 차원에서 ㄱ선수에게 강력한 징계조치를 취해야 한다. ㄴ선수에게 화해를 압박하는 등 ‘2차 가해’를 한 관계자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옳다. 또한 사건과 관계없이 불이익을 당한 선수들에 대해선 조기 재입촌 등의 조치를 검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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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나이 45억년. 고생인류의 출현은 300만년 전이고,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대륙을 떠난 것은 5만년 전쯤이다. 인류 문명의 출현은 1만년도 되지 않았다. 인간의 수명은 기껏해야 100년 정도다. 지구 나이에 비하면 미미하다. 그런데 매일 해가 뜨고,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게 빛나는 것, 그리고 비와 눈이 내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호모사피엔스의 눈에 세상은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6600만년 전 하늘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지금의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떨어졌다. 지름 10㎞의 물체는 200㎞에 이르는 충돌 구덩이를 남겼다. 칙술루브 크레이터다. 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낮에는 태양이, 밤에는 별이 뜨지 않는 암흑세계다. 많은 생명체가 멸종을 맞았다. 세상의 지배자였던 공룡도 같은 운명이었다. 대멸종 사태는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도 4차례나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대멸종은 포유류, 나아가 인류가 태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너무 허황된 얘기라고? 불과 100여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1908년 러시아 시베리아의 퉁구스카란 곳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원인을 놓고 해석이 분분했다. 동심원상으로 나무들이 바깥쪽을 향해 쓰러져 있는 화재현장은 의심을 증폭시켰다. 연구결과 지구로 돌진하던 물체가 지상에서 터지면서 흔적을 남긴 것으로 분석됐다. 물체의 지름은 60여m에 불과했지만 8000만 그루의 나무를 전소시켰다. 유럽 중심부에 떨어졌다면 수백만명의 피해가 났을 것이라고 한다.

한국천문연구원이 25일 지구 근처로 접근하는 지름 160m짜리 소행성을 발견했다. 2026년에 지구 근처 426만㎞까지 접근할 것이라고 한다. 지구 근처 750만㎞ 안쪽으로 들어오고 지름이 140m를 넘으면 ‘지구위협 소행성’이라고 부른다. 연구원은 이 소행성을 ‘PP29’로 이름 지었다. 지구 충돌확률은 28억분의 1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지구위협 소행성은 83개에 불과하다. 아직도 검은 천체에서 어느 물체가 지구를 향해 달려오는지 다 알지 못한다. 퉁구스카에 떨어졌던 크기의 물체는 언제든 충돌할 수 있다. 지구가 절대적으로 안전한 행성이라는 생각은 접어야 하지 않을까.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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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3억5175만원 규모의 대법원 전자법정 입찰비리는 경향신문이 지난해 시작한 탐사보도로 드러났다. 법원행정처가 이곳 출신 업자와 짜고 17만원짜리 영상·음향 장비를 225만원에 사들이는 등 비리를 저지르면서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달 서울중앙지법 1심 판결은 언론보도로 수사가 시작됐다고 밝혔고, 지난 1월 서울중앙지검이 제출한 증거목록 가장 앞에도 경향신문 기사들이 있다. 지난해 여름 경향신문 보도가 시작되자 김명수 대법원은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는 허위자료를 언론사에 돌렸다. 당시 정재헌 전산정보관리국장이 지휘해 박진웅 공보관이 배포한 것으로 김흥준 윤리감사관의 부실감사와도 관련이 있다. 

허위자료를 만든 전산정보관리국 직원들은 1심 판결에서 징역 10년 등을 선고받았다. 송인권 재판장은 “이 사건 범행이 (중략) 언론보도를 통해 불거지자 피고인은 진실을 숨기고 수사에 대비하기 위해 관련자들과 진술을 맞추려는 시도까지 하였고, 법원 자체 조사나 수사 과정에서 계속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였으며, 이 법정에 이르러서도 최종 공판기일 직전까지 계속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주범인 강한수 전산정보관리국 정보화지원과장에게 징역 10년과 벌금 7억2000만원을 선고했다. 손창우 사이버안전과장 등에게도 징역 10년과 벌금 5억2000만원 등을 선고했다.

전자법정 비리 탐사보도는 대법원 주류들과의 싸움이었다. 경향신문 보도가 한창이던 지난해 가을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까지 속인 그들이다.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작년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오스트리아산 초고가 실물화상기가 불가피하다고) 시연회까지 했고, 당시 저도 꼭 필요하고 문제가 없다고 동의해줬는데 그런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이렇게 (전산정보관리국 판사들을 징계하라고) 말하고 있다”고 최근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말했다. 비리가 저질러진 10년 동안 전산정보관리국 책임자이던 판사는 14명이다. 역대 국장은 이정석, 최창영, 이영훈, 정재헌 판사이고, 심의관은 기우종, 이정환, 원호신, 고범석, 이태웅, 이은상, 임영철, 이상엽, 장정환, 유동균 판사다.

사법권력보다 상대하기 힘든 상대는 전산지식을 가진 기술관료다. 전산정보관리국 책임자이던 판사는 경향신문 취재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답했다. 책임자의 변명치고는 구차하지만 일말의 진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법원 기술관료들이 시민세금을 업체로 빼돌리고 이를 뇌물로 되받아먹는 동안 시비를 가리는 전문가인 판사들도 당하고 있었다(물론 이는 직무유기이며 형법 제122조가 정한 죄이다). 이러한 대법원 전자법정 비리가 세상에 드러나고 법정에서 확인된 배경에는 부조리를 바로잡으려 자신과 가족의 불행까지 감수한 내부 제보자가 있다. 

제보는 지난해 초여름에 받았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야였기에 내용을 이해하고 반론을 해소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제보자를 두 차례 만나 설명을 들었고 다른 루트를 통해서도 내용이 진실한지 검증했다. 수많은 e메일과 전화로 제보자에게 내용을 묻고 확인했다. 이 모든 과정을 제보자는 묵묵히 견뎠다. 기사화를 앞두고 그에게 말했다. “취재원 보호는 내 목숨과도 같다. 제보 의도는 중요하지 않고 묻지도 않겠다. 하지만 어떻게든 제보자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제보 사실이 드러나고 업계에서 매장될 수 있다”며 신중히 생각하라고 했다. 그는 진실이 밝혀지길 원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대법, 행정처 퇴직자에 243억 ‘입찰 특혜’ 의혹”이라는 첫 보도가 8월13일자에 나갔다. 김명수 대법원은 빤한 거짓말을 했다. “전자법정 사업을 수주한 드림아이씨티가 (중략) 전직 전산공무원이 관여되어 있는지 여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음.” 이유는 김명수 대법원장 치적용 사업인 스마트법원 4.0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장 임기 마지막 해인 2023년 완성을 목표로 국가예산 3054억원을 쓰려 했다. 이 사업 책임자 정재헌 전산정보관리국장은 김명수 대법원장 인사청문회를 준비한 대법원장 복심이다. 그들의 거짓말을 밝혀내는 데도 제보자가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전자법정 비리는 대법원의 허위해명에 묻혔을 것이다. 

제보자는 징역 2년 실형을 지난 13일 선고받았다. 그는 전자법정 입찰비리를 저지른 업체의 직원이었다. “지시 내지 승인하에 이 사건 각 범행을 저지른 측면은 없지 아니하나 (중략) 담당한 구체적인 역할에 비추어보면 (중략) 가담 정도는 절대 가볍지 아니하다”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전자법정 관련 법원 사업의 입찰비리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론에 제보함으로써 이 사건 입찰비리 및 뇌물 범죄의 전모가 드러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밝혔다. 이번 일로 제보자를 포함해 15명이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전산정보관리국 판사는 단 한 사람 징계조차 받지 않았다. 이 기사들을 쓰지 말아야 했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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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에 비해 수확이 적더라도 자투리땅이라도 있으면 농작물을 심으려는 게 농업인의 마음이다. 하지만 애써 키운 농작물을 팔 곳이 없을 때는 막막하기 그지없다. 우리 농촌을 살펴보면 농가의 70%가 경지면적 1㏊ 미만이고, 연간 농축산물 판매액이 500만원 미만인 농가가 절반(53.7%)을 넘는다고 하니, 이들 영세소농의 판로 확보를 통한 농가 간 소득양극화 해소가 절실한 상황이다.

중소 농업인의 소득을 높일 방법을 고민하던 중, 지난 4월 농가 탐방 때 만난 원주의 한 농업인이 “하우스 600평에서 소량다품종 생산을 하면 과거에는 팔 곳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로컬푸드 직매장 덕분에 1년에 며칠을 제외하고 매일 통장에 돈이 들어와 행복하게 농사짓는다”며 만족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로컬푸드가 소득양극화를 해소할 좋은 대책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로컬푸드 직매장은 소량다품종 생산 중소 농업인에게 안정적 판로를 제공하고 지역사회에 안전한 먹거리를 공급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지역에서 생산된 먹거리를 그 지역에서 소비함으로써 장거리 이동과 다단계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아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득이다. 우선 생산자인 농업인이 행복하다. 정성껏 기른 농작물의 양이 적어도, 조금 못생겨도 신선하고 맛있으면 직매장에서는 잘 팔린다. 그만큼 소득도 늘어나고 가격을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자존감과 성취감도 높다.

소비자는 매일 갓 수확한 신선한 농산물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 농식품신유통연구원에 따르면 로컬푸드 직매장을 방문하는 소비자의 약 66%가 월 5~10회 정기적으로 구입하고 로컬푸드의 신선함과 안전성, 저렴한 가격을 매력으로 꼽았다고 한다. 판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농산물 구매로 농업·농촌에 도움을 주고, 지역 내 소비로 푸드마일리지가 감축되어 환경 보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

40년의 로컬푸드 역사를 가진 일본은 2016년 기준으로 2만3440개의 직매장이 있고 판매액이 10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로컬푸드를 통해 농가 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단순한 직매장을 넘어 농가레스토랑, 가공공장, 체험공간 등이 결합된 6차 산업화로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농협은 2012년 전북 완주 용진농협에서 첫 직매장을 개설한 이후 로컬푸드 확대에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전국에 200개를 개설했다. 이를 통해 3만7000여농가가 농가당 연평균 83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약 3000억원의 소득 증대를 이룬 것이다. 직거래를 통해 소비자 구매비용을 연간 640억원 절감하고, 매장당 1.8명씩 360개의 지역일자리도 창출했다. 근래에는 농촌농협 조합원이 인근 도시농협 직매장에 출하하는 도농상생형이나 지자체와 협력해 문화공간 등을 결합한 복합센터, 은행 내부에 운영하는 숍인숍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이에 올해 당초 100개를 신설하려던 목표를 2배인 200개로 확대하고 중앙회와 농축협이 400억원의 자금을 투입할 계획이다.

로컬푸드는 단순한 농산물 판매장이 아니라 유통단계 축소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고 정(情)을 나눌 수 있는 매개체이다. 로컬푸드 활성화로 농촌과 도시가 더욱 가까워지고, 5000만 국민이 농업·농촌의 가치를 공유하는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

<김병원 | 농협중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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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업주부다. 아내와 합의해 가사 노동한 지 십 년이 넘었다. 일상은 여느 주부와 같다. 밥 짓고, 아내를 출근시키고, 청소하고, 책 읽고 저녁엔 아내의 퇴근을 기다린다. 아내와 저녁 밥상에 앉아 온종일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그러니 아내가 늦기라도 하면 절로 잔소리가 나온다. 동료들과의 술자리를 좋아하는 아내는 그를 생각해 되도록 일찍 귀가한다.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서로에게 맞춰가고 있는 것이다. 그도 아내도 현재 삶에 불만이 없다. 

하지만 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여전히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간혹 얼굴 볼 적마다 언제까지 집에서 허송세월할 거냐고 책망한다. 집이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주체적인 노동 공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가족은 집에 있는 그의 존재를 ‘無(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가 집 밖으로 나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바란다. 그는 가족과 부딪칠 때마다 생각한다. 혹시 나도 전업주부인 내가 당당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낮에 슈퍼마켓에서 혼자 장을 볼 때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주말에 아내와 함께 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그를 만나고 며칠 뒤, 두 아들을 키우는 친구를 만났다. 결혼한 뒤에도 꽤 오래 직장을 다녔고, 근래에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그는 얘기 끝에 이리 말했다.

“내 아들들이 잘 커서 처자식 잘 먹여 살려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지 뭐.”

엄마로서 아들이 제 몫 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깃장이 생겼다. 왜 ‘처’는 아들이 잘 먹여 살려야 하는 존재인가? 남자는 기필코 그래야 하는가?

며칠 전 한 설문 조사에서 “남편이 할 일은 돈을 버는 것이고 아내가 할 일은 가정과 가족을 돌보는 것이다”라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68.8%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보면서 반가웠다.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여성이든 남성이든 또 다른 성이든 자기 스스로 선택한 역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니. 그러니 아들 있는 친구여, 아들의 얼굴 모를 처자식 걱정은 내려놓고 그저 아들이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자라길 바라시게.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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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세계 최초로 외국의 원조를 받던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국제개발협력의 롤 모델 국가다. 해외 원조를 의무적으로 이행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 중 인프라 지원·봉사단 파견 규모까지 최상위다. 나 또한 그 일환으로 농촌진흥청 해외농업기술협력사업(KOPIA)에 소속돼 ‘농업’ 공적개발원조(ODA) 업무를 담당 중이다. 11개월간 국내 면적의 10배 이상 되는 남미 볼리비아 전역을 누비며 알게 된 사실은 이곳 남미 최빈국이감자, 토마토, 퀴노아 같은 세계 주요 식량자원의 원산지라는 점이다. 

그러나 유전자원의 보고(寶庫)인 볼리비아는 전례 없는 환경위기를 맞고 있다. 현지 337개 지자체의 67%가 지난 11년간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고, 9.2%(고원지대)는 서리와 강설 피해를 입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르기 쉬운 6000m급 안데스 설산은 1980~2009년 사이에 빙하의 37.4%가 녹아 수자원도 잃고 지역 수입원인 스키장도 폐쇄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농림·축산 분야 피해는 전체 사회·경제 섹터의 62%(약 2700억원)라 한다. 이 같은 기후변화 심화는 재래 유전자원 손실로 이어진다. 특히 자원을 채집하고 이를 중장기 보존할 시설이 미비한 볼리비아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그들의 농업 ODA 사업제안서에 기후변화·생물다양성 문구가 예외 없이 등장하는 이유다.

한국 또한 기후변화를 겪고 있다. 동해의 해수온도가 상승하여 한류성 어류인 명태 등이 사라진 지 10년. 대구 특산물인 사과는 강원도에서 재배되고, 망고 등 동남아 열대작물은 충청지역까지 북상하는 등 한반도 식생 판도가 뒤집히고 있다. 그래도 한국은 노르웨이에 이어 ‘제2의 노아의 방주’라 불리는 세계 중복 종자보존소 설비를 갖췄기에 유전자원 멸종위기에 대응하는 게 가능하다. 실제 정부는 보존 중인 종자를 기후변화에 적응 가능한 신품종으로 개발하여 기후변화 위기를 기회로 삼고자 노력 중이다.

농촌진흥청은 올해 KOPIA 10주년을 맞아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총 22개 국 농업기관장(차관급)을 초빙해 지난 한 주간 워크숍을 진행했다. 볼리비아 농업산림혁신청장도 참석해 한·볼리비아 농업 ODA사업 성과와 발전방향을 공유했다. 마침 정부도 작년 제4차 국가생물다양성전략(2019~2023년)을 통해 생물다양성 ODA 사업 비율을 기존 1.12%에서 4.10%로 올렸다. 해외자원부국 생물자원 정보화 지원을 통해 우수 유전자원을 교류·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정책이다.OECD 회원국인 한국과 개도국 볼리비아의 지속 가능한 윈윈 전략이 이번 10주년 워크숍을 통해 마련된 것이다.

<김주영 | 농진청 코피아볼리비아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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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한 분만 나와주세요. 빨리 빨리 남자분 나오시라고요. 빨리, 빨리!”

철 지난 얘기를 해보자. 지난 5월13일 밤, 술에 취한 중년 남성 두 명이 난동을 부렸다. 경찰이 출동했지만, 취객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특히 같이 출동한 여자 경찰은 근처에 있던 일반 시민에게 도움을 요청한 끝에 결국 수갑을 채울 수 있었다. 이른바 ‘대림동 여경 사건’이다. 남녀를 떠나서 취객을 제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영화 <범죄도시>의 마동석은 상황이 발생하면 한방에 상대를 때려눕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 모든 경찰이 다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진 않다. 게다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점점 높아지다 보니, 행여 진압과정에서 범죄자가 다치면 경찰관이 징계를 받기도 한다. 경찰의 대응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암사동 10대 난동 사건에서 경찰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도 그 때문이다. 대림동 사건 이후 경찰은 경찰관을 폭행하면 테이저건이나 권총을 쏠 수 있게 기준을 바꾼다고 하지만, 이게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간 경찰은 나름의 업무를 잘 수행했으며, 우리 사회가 그래도 평온하게 유지되는 것은 다 이분들의 공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려스러운 것은 요즘 부쩍 늘어난, 휴대폰을 이용한 영상 촬영이다. 대림동 사건만 해도 매일 수도 없이 일어나는 흔해빠진 것에 불과했지만, 누군가가 진압과정을 촬영해 인터넷에 올리는 바람에 전국적 관심이 쏠린 엄청난 사건이 됐다. 혼자 힘으로 수갑을 채우지 못한 여경에 대한 성토가 빗발쳤고, 이는 여경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졌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여경을 없애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오고, “여경만 체력검사 수준이 낮으니 취객조차 제압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인터넷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남경에 비해 여경의 체력검사 기준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남녀의 신체 골격 자체가 차이 나는 판에 푸시업을 잘한다고 해서 여경이 남성 범죄자를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시민의 도움을 요청하는 게 그렇게 욕먹을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질서는 모든 시민들이 협력해서 이루어 나가는 것이지, 경찰에게만 맡겨두고 나 몰라라 해서는 안되니 말이다. 마트에서 여성을 납치해 살해한 범죄자 김일곤의 경우 남경 둘이서 제압하지 못해 지나가던 시민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당시 남경들을 욕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걸 보면, 대림동 사건의 여경을 향한 비난에는 여성혐오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찰이라고 해서 다 힘쓰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아동청소년 및 성범죄 등을 다룰 때 여성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표창원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찰 업무의 70% 이상은 사실은 소통이다. 피해자 민원인 말씀 듣고 피해 상황과 갈등을 조정, 중재한다.” 실제 경찰청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경찰의 478개 직무 중 체력과 무관한 직무는 76%인 반면 체력과 관련한 직무는 24%에 불과하단다. 게다가 남경들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일어난 사건을 보자. 강남서에 근무하는 ㄱ경장은 자신이 담당한 교통사고 조사 대상자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해당 여성은 접촉사고를 내서 조사를 받았는데, 이후 상대방과 합의해 내사 종결을 앞둔 상황이었다. ㄱ경장은 상호 합의하에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이런 관계가 적절하지 않음은 상식이다. 3년 전에는 이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만든 학교전담경찰관 두 명이 자신과 상담을 한 여고생들과 성관계를 맺은 것이다. 해당 학생들은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이들인데, 괜히 상담했다가 봉변을 당한 셈이다. 그중 한 명은 이로 인해 자살 시도까지 했으니 문제가 심각하다. 이들이 남경이 아닌 여경이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터. 그렇다면 여경을 증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방방곡곡 울려 퍼져야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남경들이 저지른 다른 비리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맡은 성매매업소에 ‘단속이 뜨니 단골손님만 받으라’고 조언하는 등 뒤를 봐준 경찰관 3명이 구속된 게 며칠 전이고, 몇 달 전에는 강남 클럽에서 3000만원의 뇌물을 받고 청소년이 출입한 것을 무마해준 경찰이 입건됐다.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버닝썬 사건에도 남경들이 연루됐지만, 이 사건들은 남경 무용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림동 여경의 대응이 미숙했다고 해도, 그게 위 사건들보다 더 중한 일일까? 남경의 엄청난 비리에는 침묵하고 여경의 일에만 흥분하는 이 현상을 여혐 이외의 말로 설명하긴 어려울 듯하다. 

여혐이 우리 사회를 잠식한 게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그 여혐이 경찰이나 소방관 등 힘쓰는 일에 집중되는 것은 그 자리가 좋은 일자리로 인식되고 있는 데다, 남성들이 최소한 힘에서는 여성보다 앞선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경찰 인력은 총 12만487명, 그중 여자 경찰은 1만3594명(11.3%)에 불과하다. 이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수치이고, 고위직 비율을 따졌을 때는 더 한심한 통계가 나오지만, 여혐에 찌든 우리 남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몰랑. 저 자리 우리가 다 가질 거야!”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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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금개혁 토론 자리에 참여하면서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낀다. 입장의 차이를 떠나 여러 전문가들이 피로와 무기력을 토로한다. 예전에는 연금제도를 튼튼히 세워보겠다고 나섰는데 이번엔 그러한 의욕을 갖기 어렵다는 고백이다. 무엇보다 지금 논의되는 정부안이 연금개혁의 과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궁금해하는 질문, 즉 공적연금으로 노후를 보장하고 재정 불안도 해소할 수 있을까에 응답하기보다는 정부 임기 동안 논란만 피하려는 미봉책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대안을 내놓을 엄두는 나지 않으니 속절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는 탄식이다. 근래 연금개혁 논의가 지지부진한 배경 중 하나이다.

마침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대담한 제안을 내놓았다. 외국 연금을 둘러보고 가진 지난주 기자간담회와 언론 인터뷰에서 “정부든, 전문가든 국민연금개혁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자신이 먼저 대전환의 방향을 언급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국민연금을 낸 돈만큼 받는 소득비례 방식으로 바꾸자, 기초연금은 50만~60만원으로 올리면서 조세 기반도 확충하자’로 요약된다. 국민연금에서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조금 조정하는 정부의 ‘부분개혁안’과 비교해 현행 연금체계를 대대적으로 바꾸는 ‘구조개혁안’으로 불릴 수 있다. 보건복지부가 보도자료까지 내서 검토한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비판할 만큼 정부 내부에선 획기적인 내용이다.

정부안과 무엇이 다른가? 먼저 기초연금의 대폭 인상이다. 정부안은 역대 처음으로 ‘최저노후소득보장’을 담았다고 자랑한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합해 대략 ‘공적연금 100만원’을 구현한다. 그런데 여기에 해당하는 대상은 평균 소득, 평균 가입기간을 가진 사람이다. 정작 하위계층 노인들은 최저노후소득을 보장받지 못한다. 포용국가를 주창하면서 실제 어려운 노인들은 포용하지 않는 연금안이다. 노인 절반이 빈곤한 우리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건 기초연금이다. 지금보다 두 배가량 기초연금을 올리자는 제안이 의미를 지니는 이유이다. 물론 세금 확충은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이다.

두 번째는 국민연금 급여구조의 재설계이다. 보통 서구에서 국민연금은 가입자의 개별 소득에 완전비례하도록 설계하고 소득재분배는 별도로 기초연금을 통해 도모한다. 반면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비례급여가 절반, 기초연금과 비슷한 효과를 지닌 균등급여가 절반으로 구성돼 있다. 서구의 이원체계가 국민연금 제도 하나에 통합돼 있는 셈이다. 이후 기초연금이 새로 도입되면서 우리나라 연금체계에서 재분배 몫이 중복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학계와 정치권 일부에서 국민연금을 완전비례연금으로 전환하자는 의견이 제시돼 왔다. 이러면 국민연금은 젊었을 때 소득과 연동하는 노후보장제도로, 기초연금은 세금을 재원으로 재분배를 증진하는 제도로 역할이 명확해진다. 이때 국민연금에서 재분배 기능이 사라져 하위계층의 국민연금액이 낮아지는 문제는 기초연금 인상으로 보완한다.

세 번째는 국민연금재정의 지속가능성이다. 정부안은 보험료율을 인상하므로 재정안정화 조치도 담았다고 설명한다. 사실이 아니다. 소득대체율 인상분만큼만 올리기에, 애초 연금개혁 논의를 촉발한 현행 국민연금의 재정불균형은 그대로 놔둔다. 재정안정화에 있어선 국민연금개혁 없이 그냥 넘어간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다르지 않다. 이사장의 구체적인 재정안정화 방안은 알 수 없으나 국민연금을 완전비례연금으로 전환할 경우 재정의 지속가능성 논점도 적극적으로 다루어지리라 기대한다. 

사실 위 구조개혁은 선진국 연금체계가 발전해온 방향이다. 서구 연금에서 현재 세대들은 수지균형에 맞게 보험료를 내면서 동시에 하위계층의 노후도 보장한다. 심지어 수명이 늘어나면 수급연령을 늦추거나 급여를 조정하는 자동안정화장치까지 갖춰가고 있다. 내부 수지불균형과 초고령화 위험을 방치하면서 단지 ‘연금지급 법제화’에 의존하려는 우리와 확연히 다르다.

정부는 국민연금을 ‘낸 것보다 2배 이상 평생 받으며 기금이 소진돼도 지급되는 마법의 제도’로 홍보한다. 이 정도면 국민연금에 감탄하고 고마워해야 하건만 여전히 시민들은 무언가 개운치 않다며 의문을 떨치지 못한다. 지급 보장은 법률을 넘어 지속가능성을 위한 실질적 기반을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다. 연금 논의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그만큼 정부안이 좁은 틀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이사장의 제안대로 연금개혁의 지평을 넓히자. 노후 빈곤에 처한 노인들에게 기초연금을 두껍게 지급하면서 국민연금의 지속가능성도 추구하는 구조개혁까지 이야기하자.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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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대학원 시절, 학생들의 농담에 빈번히 등장하던 대상은 교수님들이었다. 악의적인 ‘뒷담화’는 물론 아니었으며 애정 어린 우스갯소리였다고 기억한다. 내가 속한 연구실의 주된 레퍼토리는 지도교수님의 도련님 같은 면모와 관련된 일화였다. 

유학 중인 선배들이 잠시 귀국해 모임을 가졌던 밤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선생님 이야기가 나왔다. 선배 한 분이 “군복무 중 끊었던 사탕 다시 드신 일화 요즘은 말씀 안 하시냐” 묻자, “담배도 아니고 사탕이라니 과연 소공자시네요”라며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형들 놀이판에 끼고 싶은 막내처럼 나는 “순대 같은 건 아예 입에도 못 대실걸요?” 거들었다. 

다음날은 빙 둘러앉아 선생님과 차를 마셨다. 전날 밤 소공자 운운하던 익살은 어디 가고 다들 묵묵히 찻잔만 기울였다. “유학생활 중 순대가 그립다더라” 이후 이야기가 끊기려 하자 한 선배가 “근데 소영이가 선생님 순대 못 드실 것 같답니다”라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답을 하지 않고 웃으셨다. 그리고 며칠 후 제자들과 점심에 순댓국밥을 먹으러 가자시더니 메뉴판도 안 보고 주문하시는 것이었다. 그때껏 분식집 당면순대 말고 먹어본 적 없던 나는 작은 목소리로 아주머니께 “저는 선지랑 간 같은 건 빼고 주세요”라고 했다. 선생님이 소영아, 부르셨다. 

“소영이가 순대 먹을 줄 모르는구나. 순대의 핵심은 간이야.”

내가 대학 입학할 당시 선생님은 우리 단과대에서 제일 젊은 교원이었다. 첫 수업시간에 뵙고 저런 멋있는 교수님도 다 있나 싶었다. 범인들은 닿지 못할 세계에 속한 존재 같았다. 한 노교수님께서 우리 학번의 중간고사 답안 수준에 개탄하며 1학년 때부터 답안지를 독일어로 써내던 총명한 모 교수 일화를 들려주신 이후 더 그러했다. 그런 분이 “순대의 핵심은 간이야” 같은 멘트를 던지며 되갚으시다니. 그날 나는 선생님의 빈틈을 처음 보았다. 어느 근사한 분을 넘어 ‘우리 선생님’으로 생각한 것이 그 무렵부터였다.

그해 겨울방학이었다. 재미 삼아 친구와 사주카페에 갔다. 거기선 두루뭉술하게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줬지만 연애운은 달랐다. 친구는 이듬해 연애운이 찬란하다 했고, 내 경우엔 공부나 열심히 하랬다. 연애는 관심사가 아니어서 대수롭잖게 넘겼다. 친구가 영화표를 예매해뒀대서 카페비용은 내가 내려고 화장실 간 사이 먼저 계산했다. 이윽고 돌아온 그녀는 “내 연애운 소영이가 산 거네” 하였다. 순간 그녀 눈빛에 스치던 소심한 아쉬움과, 운세에 연연한 게 부끄러운 듯 꼭 다문 입매를 보았다. 그때 느낀 애틋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친구는 우리 학번 여학생들 가운데 가장 반짝였다. 1학년 때부터 여느 법대 신입생과는 달랐다. 단발머리 몇 가닥만 파랗게 물들인 그녀가 강의실로 들어서면 환하게 빛이 났다. 동일한 장면도 나 혼자 있으면 인디영화였지만 친구가 더해지면 청춘드라마였다. 학부시절 나는 친구에게 선망과 더불어 미묘한 상대적 박탈감을 품었다. 그 박탈감을 지우고 온전히 마음 연 계기가 ‘미신스러운’ 빈틈을 목도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운을 사고도 이듬해나 다음해나 연애는 못하였지만, 대신 대학원생활 내내 서로 의지한 벗을 얻었다.

돌이켜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을 막연히 동경하는 것은 상대의 매력과 장점 때문일지라도 그를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우연히 보게 된 빈틈을 통해서였다. 누군가의 세련된 매너에서 어색함을 감추려는 몸짓을 읽었을 때, 냉소 이면에서 뜨겁고 서투른 열정을 보았을 때, 강인해 보였던 이가 실은 심약한 ‘새가슴’임을 느꼈을 때.

아주 가끔 그게 안되기도 한다. 이해관계가 대립할 경우 누군가의 단점이 빈틈임을 알아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편 빈틈이 아예 찾아지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보고 또 살펴도 근사하기만 한 거다! 짐작건대 내 고집스러운 선망이 그의 약함마저 멋짐으로 채색했기 때문일 테다. 살아가면서 충돌하는 이의 빈틈을 연민하고, 선망하는 이의 빈틈은 알아보게 됐으면 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빈틈에도 좀 너그러운 마음을 품게 되면 좋겠다.

<이소영 | 제주대 교수·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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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방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박근혜 정부 인사들이 1심에서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설립과 활동을 방해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행적 조사를 저지하려 한 행태가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참사 이후 5년여 만에 박근혜 정부 인사들의 책임을 물은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재판부가 상당수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하면서 유죄가 인정된 피고인들도 집행유예를 받는 데 그친 점은 실망스럽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막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이병기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왼쪽부터)이 25일 1심 선고가 내려진 송파구 서울동부지법을 나서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서울동부지법은 25일 이병기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징역 2년에 집유 3년, 윤학배 전 해수부 차관은 징역 1년6월에 집유 2년을 선고받았다. 안종범 전 경제수석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재판부는 “이 사건 범행은 대통령비서실과 해수부 장차관의 권력을 동원해 각종 회의를 진행하거나 공문서를 작성·배포하는 등의 조직적 형태로 이뤄졌다”며 “결과적으로 특조위는 뒤늦은 시점에 구성돼 방해와 비협조에 시달리다 성과를 내지 못하고 활동을 마치게 됐다”고 지적했다. 다만 “다른 권력기관의 정치적 공세가 특조위 활동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진상규명이 저해된 모든 책임을 피고인들에게 돌릴 수는 없다고 했다.

선고 직후 세월호 유가족들은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어디에 하소연해야 하느냐”며 오열했다고 한다. 5주기가 지나도록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현실이 부끄럽고 안타깝다. 법원도 인정했듯이 특조위는 최종보고서조차 작성하지 못한 채 2016년 9월 해산됐다. 뒤이어 출범한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도 선체 인양의 성과를 내기는 했으나 침몰·구조 실패의 원인은 규명하지 못한 채 지난해 8월 활동을 종료했다. 현재는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조사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나 아직 의미 있는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304명이 희생되고, 그 가족 수천명이 비탄에 빠졌으며, 수많은 시민이 고통을 겪은 전대미문의 비극이다.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고 넘어간다면 유가족은 물론 공동체 전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 정부와 국회는 진상규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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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25일 일부 상임위는 열리고, 일부는 반쪽 운영되고, 일부는 개회조차 하지 못했다. 자유한국당 소속 윤상현 외교통일위원장은 “당파를 초월해서 대한민국 힘과 지혜를 모으라는 게 국민의 명령”이라며 회의를 진행했다. 한국당 의원들도 참석했다. 의원들은 외교부·통일부 장관을 상대로 북한 목선의 삼척항 입항 사건과 악화일로인 한·일관계 등 현안을 따졌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는 한국당 의원들이 불참한 채 ‘반쪽 상임위’를 열었다. 한국당 의원들은 입맛대로 찾아먹는 뷔페식당처럼 자신들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상임위만 선별적으로 참석했다. 국회는 온전히 열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열린 것도 아닌 기형적인 모습이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오른쪽)가 26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표 및 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가 이렇게 된 데는 전적으로 한국당에 책임이 있다. 한국당은 전날 여야 3당 원내대표의 국회 정상화 합의를 2시간 만에 의총에서 뒤집고 합의문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 한국당 강경파 의원들은 3당 합의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얻어낸 게 없다”고 반발했다고 한다. 학생이 학교에 가는 게 당연하듯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등원하는 건 대의기관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다. 여기에 뭘 얻고 말고 할 게 있단 말인가. 시민의 대의를 받들어 입법활동을 해야 할 국회를 인질로 잡고 정치공세를 벌이는 모습에 시민들도 진저리를 치고 있다. 이제 국회에 “들어오라”고 호소하는 대신 “아예 나가달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한데도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우리 의원들의 의견이 국민의 의견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이 서명한 합의문을 면전에서 퇴짜 맞고 리더십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그의 항변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야 3당은 기존 합의대로 6월 임시국회 의사일정을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당연하다. 지금 국회에는 차일피일 미루고 표류해온 법안이 1만건 넘게 쌓여 있다. 그런데도 한국당은 말로는 민생을 챙기겠다면서 국회를 무력화하고 장외에서 정부 비판만 하고 있다. 그렇게 문을 닫은 지 석 달이 다 된다. 

국회 정상화는 정치권의 합의를 넘어 국회의원의 당연한 의무요, 시민의 명령이다. 시민의 대표가 시민의 삶에 관심이 없다면 이미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국회의원이기를 포기하고 국회를 박차고 나간 마당에 더 이상 기다릴 이유도, 필요도 없다. 한국당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상임위에서 사회권을 내놓지 않을 경우 국회법에 명시된 대로 다른 정당 제1교섭단체 간사가 사회권을 넘겨받아 위원회를 열어야 한다. 한국당이 없어도 국회가 운영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국회를 정상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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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는 25일 등급제 폐지, 맞춤형 지원, 전달체계 강화 방안 등을 담은 ‘수요자 중심 장애인 지원책’을 다음달 1일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키로 했다고 밝혔다. 장애인등급제는 의학적 심사로 장애인을 1~6등급으로 구분하고, 차별적으로 혜택을 제공하는 제도다. 그러나 장애인의 실체적 어려움을 해소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등급 요건을 채우지 못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장애인도 많았다. 지원받는 장애인에게는 ‘등급 낙인’을 찍어 인권침해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등급제 폐지는 31년 만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아닐 수 없다.

출처:경향신문DB

등급제가 없어지면서 장애인은 ‘장애 정도가 심한 장애인’ ‘심하지 않은 장애인’으로 나뉘게 된다. 6개 등급에 따른 차별적 혜택으로 지원의 경계·사각에 있던 많은 장애인들이 보험료 경감·거주시설·보조기기 이용 등에서 더 많은 혜택을 받게 된다니 다행스럽다. 1~3급 장애인만 이용할 수 있었던 활동지원서비스는 장애인 누구라도 신청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기본적인 생활유지를 위해 도움이 절실했던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장애인지원 종합조사’를 도입, 직접 면담을 통해 원하는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파악해 그에 알맞은 도움을 제공키로 한 것도 장애인의 실체적 어려움 해소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찾아가는 상담’으로 복지 사각에 놓였던 독거중증장애인 등을 사회안전망 안으로 끌어들이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중증장애인이 있는 가구에 대한 생계급여 지원 때 부양의무자 기준을 없앤 것도 구성원의 장애로 고통받는 가구의 최소한 삶을 국가가 보장키로 했다는 점에서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장애등급 판정이 의학적 기준에서 심사자 판단으로 바뀌면서 혜택이 축소되거나 정부지원 밖으로 밀려나는 장애인이 생겨날 우려가 있다. 정부의 종합조사를 적용했을 때 적지 않은 장애인들의 활동지원서비스가 줄어드는 결과가 나왔다는 연구보고서가 있다. 종합조사표가 장애인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다. 정부는 경과 기간을 두어 이런 피해를 최소화하고, 제도 시행 후에도 3년마다 종합조사표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장애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권리를 행사토록 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다. 정부는 단 한 명도 억울한 장애인이 없도록, 제도의 신뢰 확보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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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말이 강박이 된 지 오래다. “행복하세요!”라는 말이 마치 힘든 일상을 감추기 위한 주술처럼 느껴진다.

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폭력 없는 행복한 학교’라는 현수막이 부적처럼 나부끼는 것을 볼 때면,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폭력의 실체는 외면한 채 행복한 학교를 외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말이다.

아이들끼리 일어나는 싸움은 폭력의 한 측면일 뿐, 본질적 문제는 아니다.

한국방정환재단이 조사한 ‘국제 비교로 본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에 따르면 최근 6년 동안 한국 학생들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 수준이다. 자살 충동을 느꼈다는 어린이·청소년은 22.8%로 최고치에 가깝다. 그런데도 별로 놀랍지 않다는 게 더 놀라울 따름이다.

한편 지난 2월 &lt;추적 60분&gt;에서는 자해에 빠져 있는 청소년의 실상이 낱낱이 보도된 바 있다. 중학교 1학년 아이들 10명 중 1명이 자해 경험이 있다고 한다.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자기 몸에 고통을 가함으로써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아이들. 취재진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주변의 말과 시선”을 자해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생명 존중 교육을 강화하고, 학교에 전문 상담사를 파견하는 일이 필요하겠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우리 교육의 병폐를 뿌리 뽑지 않는 한, 아이들의 자해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학교는 약육강식과 승자독식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차와 등급이 민주주의의 고귀한 가치를 압도한 지 오래다. 자유와 평등, 평화와 연대는 대학 입시라는 욕망 앞에서 그저 허울뿐인 담론으로 치부될 뿐이다.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했던 정권도 이 거대한 욕망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새로운 틀 위에서 교육 생태계를 설계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지금으로써는 국가교육위원회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국가교육위원회의 핵심은 ‘초정권적, 초정파적 사회적 합의기구’라는 것과 10년 단위의 중장기 국가교육 비전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임기에 맞추어진 짧은 주기로는 국가교육 철학을 담아내기가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임기 내에 성과를 내야 하고, 유권자의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치의 생리로는 교육의 백년지대계는 난망할 수밖에 없다. 정권과 정파를 넘어서는 사회적 합의기구가 절실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국가교육위원회의 출범을 두고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은 듯하다. 국가교육위원회의 독립성 보장 문제, 교육부의 옥상옥(屋上屋)이 될 것이라는 우려 등은 국가교육회의 측에서도 되새겨야 할 문제일 것이다.

다만 국가교육위원회의 출범을 정치적인 유불리(有不利)로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할 필요가 있겠다. 지금 상정해야 할 궁극적인 의제는 진정한 배움과 아이들의 삶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해(害)하고 있는 아이들의 절규 앞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지는 추태는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폭력의 가해자라는 측면에서 어른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권력, 혹은 교육에 가까이 있는 어른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국가교육위원회의 출범이 진정한 배움으로 나아가는 마중물이 될 수 있길 바란다. 부족한 부분은 치열한 토론을 통해 보완해 나가면 될 일이다. 교육이 인간의 소외를 부추기는 일은 이제 그만 멈춰야 한다. 정치와 교육계의 대승적인 결단이 있길 바란다.

<이충일 | 오산 다온초 교사·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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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산문 한편을 탈고했다. 주제는 대략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 대한 것이었다. 원고지 100장의 짧지 않은 분량이었는데도 미처 못다 한 이야기가 지천이다. 어린 시절 한옥에 살았고 한국전쟁의 폭격을 피한 대구는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은 골목들이 많았다. 그 집은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흙길과 얼기설기 엮은 판자로 만든 담이 서 있던 막다른 골목의 끝집이었고 자동차는커녕 리어카 정도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그랬으니 집은 날이 어두워지면 돌아가는 곳일 뿐 아주 많은 시간을 골목에서 보냈다. 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집보다 학교나 골목에서 보낸 시간이 더욱 많았기 때문일까, 집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집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골목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여하튼 원고를 탈고하자마자 일본의 나라시(奈良市)로 향했다. 그러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4일 동안 70㎞ 남짓하게 걸었다. 그것도 나라시를 벗어나지 않고 오전 6시부터 10시 정도까지 또 오후 4시부터 7시까지만 걷고 볕이 따가운 낮 시간은 호텔에서 쉬었다. 그렇게 걸은 곳은 나라마치(奈良町)라고 부르는 골목이다. 사실 나라마치의 구역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러나 나라마치의 역사는 골목의 길이만큼 길다.

일본은 710년 겐메이텐노(元明天皇)가 도읍지를 나라로 옮겨 헤이죠큐(平城宮)를 짓고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를 열었다. 그 후, 718년 아스카무라(明日香村)에 있던 호코지(法興寺)를 나라로 옮겨 간고지(元興寺)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호코지는 일본 최초의 가람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카데라(飛鳥寺)와 같은 곳이다. 당시 나라에는 이미 도다이지(東大寺)와 고후쿠지(興福寺) 같은 대형 사찰들이 있었으며 간고지는 그 사찰들과 다른 구역에 터를 잡았다.

후에 간고지는 두 곳으로 나뉘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간고지는 고쿠라쿠보(極樂坊)가 있는 곳이다. 간고지 주변은 아스카촌으로부터 옮겨 왔던 당시부터 도시계획이 시작되어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다. 지금도 그 골목들은 형태가 망가지지 않았는데 골목의 작은 사거리에 서면 대략 사방 골목의 끝이 보일 만큼 반듯하다. 그렇다고 굽이진 골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골목을 만나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큼 간고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나라마치의 모든 골목은 먹줄을 놓은 것처럼 곧다.

골목을 걷다가 눈에 띄는 집들은 대개 에도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더불어 길의 악령을 막고 행인을 지켜 준다는 도소진(道祖神)을 비롯하여 고진도(庚申堂)와 같은 전통신앙의 흔적들도 보였다. 그렇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재들이 있다고 해서 골목이 고인 물 같지는 않았다. 숱하게 흩어져 있는 신사나 사찰과 함께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흔적이 곳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드문드문 보이던 곡식이나 생선, 채소 같은 것을 파는 작은 가게와 이발소 그리고 굴뚝 높은 목욕탕은 비록 고요해 보이는 골목일지라도 아직 왕성하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더할 나위 없는 증거였다.

그런가 하면 1994년 추석에는 중국의 후퉁(胡同)을 걸었다. 처음 간 북경이었지만 무리와 떨어져 혼자 자금성 근처를 며칠 동안 헤매고 다녔었다. 그 후, 북경에 갈 때마다 후퉁의 매력을 잊지 못해 쏘다녔고 지난해와 지지난해는 후퉁 속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며칠 묵으며 골목을 속속들이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의 후퉁과 1994년의 그것은 전혀 딴판이다. 당시는 그저 북경의 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후퉁의 면적 자체가 줄어들었고 상업적인 장소는 훨씬 더 많아졌다. 그런데 중국의 후퉁과 일본 나라마치를 하늘에서 보면 흥미롭다. 직접 하늘에 올라갈 재간은 없지만 구글 지도나 오래된 고지도는 지금은 물론 오래전부터 골목들이 바둑판처럼 반듯했음을 보여 준다. 이번에 나라마치를 찾았을 때 마침 나라마치 자료관에서 일대를 그린 고지도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어서 한나절쯤은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한 지도들은 두 나라의 도읍이 모두 계획된 도시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러나 일본의 골목이 중국의 골목에 비하여 더욱 반듯해 보이는 것은 골목 안에 방치된 물건들이 없이 오로지 길과 벽 그리고 전봇대만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 후퉁의 골목에는 갖은 물건들이 만만찮게 놓여 있다. 그 때문에 골목은 삐뚤빼뚤해지고 좁았다가 또 넓어져 전혀 반듯해 보이지 않는다. 비록 그렇더라도 중국은 후퉁의 가치에 대하여 이제라도 눈을 뜨고 옛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500년 도읍지인 서울의 골목은 어떨까. 아무래도 우리의 유전자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는 것에 약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있던 것을 없애 버리거나 새로운 것을 만드는 유전자는 탁월하다. 그런 유전자의 힘은 골목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사대문 주변의 골목들 중 몇 곳이 사라져 버리거나 많은 곳이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최근 말썽이 되었던 세운상가 주변이 그렇고 벌써 몇 년 지난 이야기지만 익선동의 요정 오진암(梧珍庵)도 헐렸다. 그 자리에 호텔이 들어섰는데 그것 하나가 주변 건물 생태계를 바꾸지는 않았을까 염려된다. 마치 늪지에 뿌리내린 관목 한 그루가 야금야금 늪을 황폐화시키듯이 말이다.

또 얼마 전 돈의문 근처에 박물관마을이 생겼다. 나는 그 마을과 붙어 있던 고등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일대의 골목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었기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맞닥뜨린 박물관마을의 정체성이 의아하고 모호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죄 때려 부수고 새로 짓지 않았다는 정도이다. 때로 우리나라가 보여주는 미덕은 낡은 것보다 새것, 옛것보다 현대적이다 못해 미래지향적인 것을 떠받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며, 새것은 낡고 헌것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지누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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