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9월2일, 서울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과 석수역 사이 철로에서 사전 조사 작업을 하던 코레일 하청업체 노동자 정씨(44), 전동차에 치여 사망. 9월3일, 경기도 화성 동탄 삼성물산 공사현장에서 전선작업 중이던 소방전기업체 소속 하청업체 노동자, 감전 후 추락하여 사망. 인천 초등학교 급식소 공사 현장에서 추락하는 거푸집 구조물에 머리를 맞아 노동자 1명 사망. 철재 구조물에서 추락한 1명 부상…. 한 노동단체의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시작된 지난 9월의 죽음의 행진은 매일 이어졌다. 아니 9월에만이 아니라 재작년에도, 지난해에도, 올해도 이어졌고, 이대로라면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다. 

산업현장에서 매일 3명의 노동자가 추락하고, 감전되고,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어간다. 질병을 얻어서 죽어가는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매일 5~6명이 죽어간다. 생명을 가진 노동자, 꿈을 가진 사람이었고,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고, 누군가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 사람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너무도 과거에도, 지금도 잘 알고 있다. 신문을 비롯한 언론에는 죽어가는 노동자의 3분의 1만 세 줄짜리 1단 기사로 알려진다. 사회적 애도는 거기에서 끝난다. 

이 노동단체의 언론보도를 추적한 통계는 지난 9월 41명이 산업현장에서 일하다 죽었음을 보여준다. 지난 8월에도, 7월에도, 6월에도 그렇게 죽어갔고, 언론보도를 통해서 알려지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한 달에 200명 가까이, 1년이면 2000명 가까이 죽어간다. 이들이 죽고 나면 안전대책들이 발표되고, 잠시 현장은 안전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되지만 사건의 종결은 죽은 자에 대한 약간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끝나고, 세상의 산업현장에서는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노동자들이 그들의 동료들이 죽어간 그 자리에서 똑같이 안전이 무시되는 작업공정을 거치면서 일을 한다. 결국은 죽은 사람이 안전모를 안 썼다든지 하는 개인의 안전의식 부재, 안전 불감증으로 몰아간다. 죽은 자만 억울하게 끝나는 게 산업재해 사망사건의 결론이다. 

이런 심각한 사회현상에 대해서 소설가 김훈은, 대한민국은 신분이 세습되는 고대국가와 같은 먹이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면서 “이 피라미드의 최하위에 속하는 노동자들은 고층으로 올라가고, 고층에서 떨어진다. 책임은 아래로 내려가서 소멸하고 이윤은 위로 올라가서 쌓인다”고 일갈했다. 

만약 매일 떨어져 죽어가는 이들이 하층 노동자들이 아니라 고위층의 자녀들이었다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었을 것 아니냐는 탄식이 뒤따른다. 노동자 중에도 죽을 위험이 있는 위험한 노동은 하청, 재하청, 재재하청 노동자들에게로 넘겨진다. 죽어도 원청이 책임지지 않는 산업구조, 누구 하나 죽어도 안전설비와 안전대책을 마련하는 비용보다는 적으므로 굳이 큰돈 들여서 안전한 사업장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의 목숨보다 이윤을 내는 일이 더 가치 있고 중요하다고 보는 기업윤리, 그런 기업의 사업장이 고용노동부가 인정하는 안전사업장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거기서 죽은 노동자는 그 사업의 원청이 아니라 하청업체에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이주노동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힘없는, 지위가 낮은 노동자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여겨진다. 

이런 죽음의 행렬을 끝내자고 모인 사람들이 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게 하자면서 산재 사망 유가족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의 이름은 ‘다시는’이다. 삼성반도체의 황유미 아버지, 제주 산업체에서 현장실습 사고로 사망한 이민호군의 부모, 지난해 태안화력발전소의 김용균씨 어머니 등이 이 모임의 참여자다. 결국 우리 사회는 정부도, 국회도, 사법부도 죽음의 행렬을 멈추지 못하고 있으니 자식을 앞세운 비통한 유가족들이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는 유가족들의 헌신을 역사 속에서 이미 알고 있다. 전태일 열사를 잃은 이소선 어머니의 헌신으로 그나마 노동자들이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소선과 같은 민주화운동 과정에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이 모인 단체인 유가협이 만들어진 것은 1986년이었다. 고문으로 자식을 잃은 박종철의 아버지 고 박정기씨, 최루탄에 희생된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씨와 같은 유가족들은 1980년대부터 민주화 현장을 지키며 수십 년을 싸워왔다. 그분들의 노고와 헌신 덕분에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힘겹지만 이만큼이라도 전진해왔다. 의문사 유가족들이 활동하면서 군에서 사망사고도 줄어들었다. 강제납치와 고문과 불법구금이 사라지고, 의문사가 이만큼이라도 줄어든 배경에는 이들 유가족들의 헌신이 있었음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까.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그런 유가족들의 길을 가기로 했다. 이소선 어머니가 전태일 열사와의 약속을 지켜냈듯이 오로지 “내가 김용균”이라면서 “미친 세상과 싸우는 엄마”로 나섰다. 그 엄마가 국회에 가서 의원들을 잡고 호소하면서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될 수 있었다. 태안화력발전소를 비롯한 위험의 외주화 문제가 이만큼이라도 세상의 주목을 끌 수 있었다. 오는 10월26일 출범하는 ‘김용균재단’은 위험의 외주화를 없애고, 비정규직의 차별을 철폐하고 노동자들이 존중받고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역할을 찾아 나선다.

“다른 사람들이 나 같은 아픔을 겪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일도 그만뒀어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이전의 엄마로, 이전의 김미숙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아버린 그 사람, 세월호 유가족들이 자식들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음을 알면서도 진상규명을 외치고 있는 것처럼 김미숙씨도 그 길을 가려고 한다. 

결국 우리는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 덕에 안전사회로 한 걸음 더 빨리 나갈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기서도 유가족들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 산 넘어 산인 그 험한 길을 나서는 김미숙씨와 산재 사망 유가족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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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국정감사에서 우리나라 고독사 5명 중 1명이 장애인이며 장애인 고독사는 전년도에 비해 80% 증가했다는 충격적인 사회문제가 드러났다. ‘2018년 장애인 무연고 사망자 현황’에 따르면 고독사한 장애인의 장애유형은 지체장애가 52.2%를 차지해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보여줬다. 이 문제를 가장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대상자의 연령 제한을 폐지하는 것이다. 

만 65세가 되면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지 못한다. 65세부터 노인 장기요양급여로 전환되는데 이 서비스는 하루 4시간이 전부여서 나머지 20시간은 혼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장애인계에서 활동지원서비스 연령 제한 철폐 요구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국정감사 참고인으로 나온 박명애씨는 47세에 장애인야학을 통해 공부한 후 장애인운동가가 되어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 제도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등 장애인 권리보장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내년 1월부터는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되어 다시 집 안에 갇혀 살아야 한다며 장애인 활동지원 연령 제한의 폐해를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9월17일 한 장애인매체에는 ‘거기 누구 없나요?’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많은 공감을 유발했다. 글쓴이는 시골에서 상경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여 전문직 직업까지 가졌으나 결혼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뺑소니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장애를 갖게 된 한미순씨다. 그는 사고로 건강과 사랑, 미래의 꿈 모두를 잃고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면서도 사람다워지고 싶어서 타자봉을 입에 물고 한 자 한 자 글을 써서 작가의 꿈을 이루었다. 또한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구필화가가 되었다. 그렇게 35년을 살며 많은 이들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야 한다는 희망을 주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어 온전히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살아야 하기에 그에게는 활동지원서비스가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연령 제한으로 서비스가 끊겨 먹지도, 배설하지도, 특히나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전화를 받지도 걸지도 못하는 상황이 될 텐데 그것은 그냥 죽으라는 소리와 다름이 없다. 물론 요양원으로 가는 방법은 있다. 하지만 그는 “65세 이후에도 살아 있는 삶이고 싶다”고 호소하며 계속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싶은 삶을 소망한다. 그것이 허영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활동지원서비스가 중단되면 장애인의 삶은 한순간에 또 다른 장벽에 부딪히게 되고 그러다 고독사로 이어질 것이 뻔한데 정부가 왜 이토록 잔인한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는 활동보조사라는 공공일자리도 창출한다. 내년에는 활동보조사 일자리가 7만8261개로 확대된다고 하니 약 8만명이 장애인으로 인해 일자리를 얻게 된다. 65세 이상 장애인에게도 활동보조서비스를 받게 한다면 일자리가 더욱 늘어날 테니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정부는 65세 생일이 사형선고일이 된다는 장애인계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비장애인은 65세 이후 노인만 되지만 장애인은 65세 이후 노인이 될 뿐만 아니라 장애도 그대로 유지되기에 활동지원서비스를 나이로 종료시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보건복지부는 65세 이후의 활동지원서비스 수급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궤변만 늘어놓고 있다. 

고독사할 위기에 빠진 고령장애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정치적 범죄 행위다.

<방귀희 | (사)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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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리움을 동력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때때로 글쓰기는 사랑하는 것들을 불멸화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글은 필연적으로 구체적이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대부분 대체 불가능하다. 쉽게 대체 가능하다면 그리움에 마음 아플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그 대상의 세부정보를 낱낱이 알게 된다. 다른 존재와는 어떤 점이 다른지, 언뜻 흔해 보여도 왜 그 존재가 이 세상에 하나뿐인지를 배워간다. 그 존재는 이제 결코 흔해질 수 없다. 구체적으로 고유해졌으니까. 이 구체적인 고유함을 기억하며 쓰는 글에는 수많은 디테일이 담긴다. 나의 글쓰기 수업을 들으러 온 열아홉 살의 파도라는 아이가 쓴 글도 그랬다. 그가 10년 전의 어느 오후를 회상하며 쓴 글이다.

“몸이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한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방통대에 과제를 제출하러 갔고 잠에서 깬 나는 물을 마시려고 일어났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비틀며 부엌으로 들어서는데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의 태양빛이 부엌을 비추고 있었다. 찬란하고도 따뜻한 황금빛이 말이다. 부엌 곳곳에 스민 빛과 그림자를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집 부엌 예쁘네. 그런데 왜 울컥하지? 눈 아래쪽이 축축해졌다. 잠을 너무 푹 자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식탁을 지나치는 순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앞으로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직 삼십대였던 엄마와 일곱 살의 나와 다섯 살의 동생이었다. 우리는 오븐 앞에서 쿠키가 구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븐에서 새어나오는 주황빛이 내 코끝을 물들였다. 엄마는 전자파가 나온다며 세 발짝 뒤로 가자고 말했다. 동생은 얼굴에 밀가루를 잔뜩 묻힌 채 나를 끌어당겼다. 나의 분홍색 내복 끄트머리에 밀가루 반죽이 묻었다. 엄마의 등에는 쿠키 세 개를 만들고도 남을 정도의 반죽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랑 동생은 엄마 몰래 킬킬댔다. 그러다가 내 눈앞의 오븐은 희미해지고 반쯤 열린 수납장이 드러났다. 아무도 없는 집안이 고요했다. 방금까지는 쿠키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는데 지금은 엄마가 아침에 끓인 김치찌개 냄새가 났다. 더 이상 삼십대의 엄마와 일곱 살의 나는 없다. 동생이 만든 똥 모양 쿠키와 2007년의 겨울도 없다. 킬킬대던 웃음도 없다.”

이 글을 읽는 동안 나는 파도가 살던 아파트 부엌에 함께 서있는 것 같았다. 숱한 아파트의 여느 살림집처럼 보여도 정확히 똑같은 집은 단 한 채도 없을 바로 그 집. 가보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었다. 파도가 독자에게 구체적인 장면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파도는 그리움을 설명하는 대신 그리운 이미지를 그저 보여주었다. 좋은 문장은 글자만으로도 무궁무진한 이미지를 독자의 마음속에 그려낸다. 디테일한 묘사란 부디 이렇게 상상해달라는 요청과도 같다. 문장 속 디테일과 함께 우리는 과거와 미래로 드나든다. 다른 이를 나처럼 느끼기도 하고, 나를 새롭게 다시 보기도 한다.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작품 중 ‘십대 소녀’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일부를 옮겨 적어본다.

“십대 소녀인 나/ 그 애가 갑자기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 친한 벗을 대하듯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 나한테는 분명 낯설고 먼 존재일 텐데.// (…)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 대신 뭔가 더 가치 있는 걸 알고 있는 양 당당하게 군다./ 나는 훨씬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함부로 확신하지 못한다.// 그 애가 내게 시를 보여준다/ (…) 나는 그 시들을 읽고, 또 읽는다./ 흠, 이 작품은 제법인걸,/ 조금만 압축하고/ 몇 군데만 손보면 되겠네./ 나머지는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다// (…) 우리의 대화가 자꾸만 끊긴다./ 그 애의 초라한 손목시계 위에서/ 시간은 여전히 싸구려인 데다 불안정하다./ 내 시간은 훨씬 값비싸고, 정확한 데 반해.// 그러다 마침내 그 애가 사라지던 순간,/ 서두르다 그만 목도리를 두고 갔다.// 천연 모직에다/ 줄무늬 패턴,/ 그 애를 위해/ 우리 엄마가 코바늘로 뜬 목도리.// 그걸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심보르스카는 말했다. 자기가 쓰는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이라고. 그리하여 돌아가야만 한다고. 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일이 멀어지는 걸 보며 계속 살아가는 사람 아닐까. 멀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을 기록하며.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두며, 하지만 결코 디테일을 잊지 않으며 말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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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 수시 원서접수가 끝나고 학생들의 빈자리가 점점 늘어나면서, 고3 교실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일반고의 정시 지원율이 자율고·특목고의 6분의 1 수준이기 때문에 일반고에서 정시(수능)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한 반에 몇 명 되지 않는다. 수능을 목전에 둔 이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이어폰을 꽂고 각자에게 필요한 수능 준비를 한다. 학생들마다 시험과목과 등급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교사가 자기 수업 들으라고 강요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수능 준비생들만 따로 도서실에 모아놓고 공부하도록 하는 학교도 있다. 수시에 지원한 대다수 학생들의 면접까지 끝나면 수업을 하려고 해도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아서 교사들은 시간마다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고 자리에 앉히느라 애를 먹는다. 학생들은 정해진 출석일수를 채워야 졸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할 일도 없는 교실에서 8교시까지 버텨야 한다.

예체능계 학생들은 아침에 왔다가 일찌감치 조퇴를 한다. 소위 무단조퇴(미인정조퇴)이다. 실기준비를 위한 조퇴를 인정해주면, 수능준비를 위한 조퇴도 인정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규정상 진학준비를 위한 조퇴는 인정되지 않는다. 만약 이런 조퇴를 인정해준다면 일반고 3학년 2학기 교실에는 남아있을 학생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중간·기말고사, 두 번의 시험일정은 1~2학년과 똑같이 진행된다. 이 두 번의 시험성적은 당해연도 대입전형에는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백지답안을 내거나 답안지에 각종 모양으로 마킹을 해서 내는 학생들도 있다. 2학기에 해야 할 수행평가를 1학기 말, 학생들이 다 있을 때 미리 해놓는 학교도 많다. 학사일정이 완전히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이 자신들 전형 일정의 편의를 위해 내신성적을 1학기까지만 반영하기 때문에 3학년 2학기, 공교육의 한 학기가 통째로 희생되고 있다.

초·중·고 12년, 마지막 학기의 교실 풍경은 이렇게 주인 없이 버려진 폐가처럼 황량하기만 하다. 이 황량한 폐가에서 학생들은 각자 홀로 남은 시간을 버틴다. 교실 한쪽에 모여 웃고 떠들기도 하고, 때로는 그 틈바구니에서 밤새 아르바이트하느라 못 잔 잠을 자기도 한다. 이도 저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학생들은 자다가 깨서 스마트폰을 보다가 다시 자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교실 풍경이 우리가 원했던 모습인가.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왜 이러한 교실 풍경이 만들어지고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교육당국에 간곡히 요청한다. 고3 2학기 교실이 정상화되도록 현행 입시 제도를 개선해 달라. 최소한 3학년 2학기 중간고사까지라도 수시에 반영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달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 학생들의 공교육 12년, 마지막 학기를 아름다운 마무리와 축하, 새로운 출발과 도전을 위한 시간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고3 2학기 교육과정의 개선점을 마련해 달라. 모든 복잡한 사안들이 그렇듯이 교육정책 또한 정치, 경제의 여러 요인과 얽혀있지만 우리 학생들의 고3 마지막 학기를 내실화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개선방안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교육부와 대학, 교육청, 학교의 책임 있는 담당자들이 모여 현 시점에서 조율 가능한 최대치를 만들어내고 실행 가능한 것부터 해나가면 된다. 

인식은 언제나 선택의 문제이다. 대학의 편의 때문에 우리 학생들의 고3 마지막 학기, 소중한 경험과 시간을 언제까지 이렇게 방치해둘 수는 없다.

<조춘애 광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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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힘은 산을 뽑을 듯하고 기개는 세상을 뒤덮을 만하다)로 유명합니다. 천하장사의 대명사입니다. 하지만 항우는 제 힘만 믿고 고집부리다 망합니다. 스스로 똑똑하고 강하다 자부하는 이들이 대개 남의 말을 안 듣지요. 학문도 검술도 병법도 지루하다고 시시해합니다. 제 힘과 빠른 두뇌회전을 과신합니다. 결국 항우는 덜 세고 덜 똑똑하지만 더 노력하고 더 머리 맞댄 이들에게 모든 걸 잃고 스스로 강물에 몸 던져 목숨을 끊습니다.

속담에 ‘항우도 댕댕이덩굴에 걸려 넘어진다’가 있습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와 같은 속담입니다. 댕댕이덩굴은 햇볕 잘 드는 산자락에 많습니다. 나무 감아 올라가기도 하고 바위 타 넘기도 하며 땅바닥 질러 자라기도 합니다. 이 댕댕이덩굴은 등나무처럼 덩굴나무입니다. 그래서 덩굴이 참 질깁니다. 2년쯤 자란 댕댕이덩굴은 속 빈 가는 덩굴이지만 웬만한 장사 아니면 못 끊습니다. 그래서 튼튼한 댕댕이바구니도 짤 수 있지요. 산에 나무하러 갈 땐 몇 명씩 무리 짓습니다. 맹수가 나타날 수도 있고 누군가 다치면 부축해 내려와야 하니까요. 땔거리 자르고 모아 감당할 만큼 지게에 쌓습니다. 이때 힘세다고 으쓱하는 사람 꼭 있습니다. 남들 곱으로 잔뜩 올려선 끙차 짊어집니다. “아, 이 사람아. 그러다 허리 나가.” “뭐, 이까짓 거 갖고!” 씩씩 척척 산길 내려갑니다. “바닥 잘 보고 가.” “걱정은. 내가 한두 번 왔어? 눈 감고도….” 바로 그때, 덤불길 가로지른 댕댕이덩굴에 발목 탁! 산더미 지게째 와르르 엎어집니다.

벌써 사뭇 단풍철입니다. 단풍에 홀려 낙엽 밑 못 보면 미끄러지고 고꾸라집니다. 아차하다 온몸에 어혈 단풍 듭니다. 발밑에 눈 달린 등산 베테랑 없습니다. 괜히 으쓱대다 머쓱해지지 말자고요. 진짜 전문가는 조심 전문가입니다. 질긴 사람은 참 조심스럽습니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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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워싱턴의 구원투수 대니얼 허드슨은 데이브 마르티네스 감독이 경기 후반 믿고 쓰던 선수였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포스트시즌은 모든 출전 팀들이 우승을 위해 최상의 전력으로 맞붙는 대결의 장이다. 워싱턴이 포스트시즌 챔피언십시리즈에 진출했으니 허드슨도 야구장 불펜에서 대기해야 했다.

그러나 허드슨은 시리즈 1차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출산휴가를 내고 부인 곁으로 돌아가 셋째 딸이 태어나는 것을 지켜본 뒤 2차전에 맞춰 팀으로 복귀했다. 이토록 중요한 경기에 투수가 집안일을 핑계로 불참하다니! 팬들 사이에서 비난 여론이 일었다. 정작 마르티네스 감독은 “가족이 언제나 먼저다.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허드슨의 소셜미디어엔 팬들의 악성 댓글이 줄을 이었다.

이번 해프닝은 메이저리그가 ‘일·가정 양립’에서 뒤처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앞서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메이저리그는 2011년 노사 단체협상을 통해 선수가 최장 3일까지 출산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내 남성 프로스포츠 중 선수에게 유급 출산휴가를 주는 종목은 야구가 유일하다.

실제로 많은 선수들이 이 휴가를 사용한다. 뉴욕 양키스의 선발투수 다나카 마사히로도 지난 6월 등판을 한 차례 건너뛰고 출산휴가를 다녀왔다. 워싱턴 팬들은 하필이면 포스트시즌에 자리를 비운 허드슨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허드슨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 것뿐이다. 아기가 아버지의 직업과 포스트시즌 일정을 고려해 세상에 나올 날짜를 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엄연히 존재하는 제도를 활용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메이저리그 선수는 2014년에도 있었다. 당시 뉴욕 메츠의 2루수 대니얼 머피는 첫아이의 탄생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출산휴가를 내고 정규시즌 개막 1·2차전에 불참했다가 지역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개적으로 비난당했다. 2명의 ‘시사평론가’는 라디오 방송에서 “메이저리그 선수라면 (직접 가지 않고 산후조리를 도울) 간호사를 고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거나 “부인이 제왕절개를 했다던데, 그럼 시즌 개막 전에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로 머피를 공격했다. 

남의 제왕절개 사실까지 거론하며 철 지난 남성성을 과시하고 싶었던 이들 ‘평론가’는 비판 여론에 등 떠밀려 결국 사과했다.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이들을 “아마추어 산과 전문의”라고 조롱하면서 “2014년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냉소했다. 시대가 2014년씩이나 됐으면 새로운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개탄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개탄스러운 일은 2019년에도 있다. 어느 남성 기자는 최근 유시민 작가가 진행하는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에서 KBS 여성 기자를 겨냥한 성희롱 발언을 했다가 해당 방송사는 물론  한국여기자협회 등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이에 질세라 법원은 희한한 판결을 내놨다. 수원지법은 20일 “손은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신체 부위로 보기 어렵다”며 여성 부하직원의 손을 주물러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신체 부위를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곳과 아닌 곳으로 나눌 수 있다는 재판부의 발상 자체가 사람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일이다. ‘이제 아이들에게 남이 손을 주무르는 건 추행이 아니라고 가르쳐야 하느냐’는 부모들의 댓글은 이번 판결이 시민들의 상식선을 얼마나 밑돌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미투’ 운동 이후 한껏 고양된 시민들의 의식 수준과도 동떨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수치스러운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왜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일까. 낡은 사고는 감추고, 타인의 사정과 고통에 공감하는 척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2019년에도 무리인 것일까.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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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나날 속에서 며칠만 돌이켜본다. 과거는 실은 앞날에 있다. 뒤돌아보는 일도 앞을 보는 것이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복도로 나와 신문철을 뒤적이니 며칠 전의 그 기사가 나온다. “경주 금령총서 최대 규모 56㎝ ‘혀 내민 말 모양’ 토기 발굴”이라는 제목이다. “혀를 낼름 표현한 말 모양 토기의 정체는 무엇인가. 경주 금령총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것 중 압도적인 크기(56㎝)의 말 모양 토기가 발굴됐다. 그런데 이 말 모양 토기의 모습은 혀를 쑥 내밀고 있었다.”(경향신문 10월1일자)

하필이면 왜 혀를 강조한 말일까. 거의 실물 크기라는 말 사진을 보면서 말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왜 말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혀를 꼬부리고 있을까. 수도꼭지를 틀면 찬물과 더운물이 같이 나오듯 혹 지금 말은 거짓말이나 참말이 저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말하려 함은 아닐까. 

참 말이 많은 시대다. 라디오에서는 노래보다 수다가 더 많다. 산에 가면 꽃에도 꽂히지만 생각을 발굴하기에 좋다. 걷는 것과 궁리하는 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인체 기관 중에서 많이 사용하는 게 발이라면 가급적 적게 사용할 게 입이어야 하지 않을까. 밥과 말은 한 기관을 공통으로 이용하니 먹은 만큼만 말할 기회를 주자는 입법청원이라도 해볼까. 그런 싱거운 생각을 해보는데 어느덧 광양의 백운산 골짜기였다. 드물게 일본목련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산에 가면 나무는 혀처럼 잎을 달고 있다. 같은 햇빛과 같은 물을 먹은 탓에 나무의 혀는 비슷하다. 내는 소리도 한결같다. 그저 받침 없는 홀소리들.

일본목련의 매끈한 허벅지에 누군가 칼로 예리한 빗금을 그어놓았다. 산에서 직선을 사용하는 건 인간들뿐이다. 글을 안다고 제 이름 석 자를 새겨놓은 것이었다. 마이크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말하면 되었지 이렇게 나무를 괴롭히는 건 무슨 심보인가. 신라 시대의 말은 그 말을 전하려 이렇게 뒤늦게 나타난 게 아닐까. 나무는 그 상처를 오래 기억하며 못난 이름을 천천히 지우고 있었다. 내 얼굴을 덮고도 남을 만큼 큰 잎, 아니 큰 혀를 가진 일본목련, 목련과의 낙엽교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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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누구누구를 사법처리할 방침이다”라는 표현이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검찰이 수사결과를 브리핑하면서 ‘사법처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니까 언론도 따라 쓴다. 여기서 사법처리란 수사를 해서 기소했다는 뜻이다. 공소장 제출로 법원에 재판을 청구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굳이 ‘사법’처리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통상 ‘사법(司法)’이란 무엇이 법인지를 말한다는 의미로 사법부가 하는 업무다. 그만큼 행정부에 속하는 검찰의 사무가 사법부의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사법처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검사들은 자신들이 법관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고 인식하면서 법관과의 동일성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검사의 직무와 권한은 사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형사절차에서 중추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태도가 이해가 간다. 검찰은 기소편의주의에 따라 불기소처분 결정으로 형사사건을 종결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어 판결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법관의 지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광범위하게 법관의 임무를 대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많은 형사사건은 법정으로 가기 전에 법관의 재판이 아니라 검사의 사법적 판단으로 종결된다. 그래서 우리는 검찰을 사법부에 준한다는 의미로 준사법기관(準司法機關)이라 부르고 검찰 스스로도 준사법기관임을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청은 법무부의 외청으로서 행정부에 속하지만 개개 검사의 직무는 사법권과 아주 밀접하다. 그런 의미에서 검찰은 행정기관이면서 동시에 사법기관인 이중성격을 가진 기관이다. 엄격히 말하면 사법기관은 아니지만 오로지 진실과 정의에 따라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준사법기관이다. 그래서 법관 독립의 이념은 검사에 대하여도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사법기관이 아니면서도 사법부와 함께 형사사법에 공동으로 기여해야 하는 검사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검사에게 법관과 같은 자격을 요구하고 그 신분도 보장한다. 검찰권 행사로 국민의 권리와 자유가 제한되고 침해되기 때문에 엄격한 법적 근거와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행정기관보다는 법률구속성이 더 높다. 검찰이 본질적으로 행정부 소속이지만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되고 국민과 정치권력, 법원에 의한 견제와 감시의 대상이 되는 이유다. 

이렇듯 법관과 유사한 임무를 수행하는 권한을 갖는 검사에게는 법관과 마찬가지로 객관성, 공정성 및 진실과 정의의 원칙이 엄격하게 요구되어야 한다. 그래서 검사를 단독제의 관청으로 구성한 것이다. 일반 공무원과는 달리 개개의 검사가 검찰권을 행사하는 국가기관이라는 뜻이다. 검사는 검찰총장이나 검사장의 보조기관이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 검찰사무를 행할 권한을 갖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동안 검찰은 준사법기관임을 자부할 정도로 독립적이고 중립적이었는가.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검찰권을 행사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자신의 권한을 확대하고 싶을 때만 준사법기관임을 외친 것은 아니었던가. 검찰비판에 방어막으로 준사법기관성을 내세운 것은 아니었던가. 

그동안 검찰은 조직을 지킬 때 준사법기관임을 강조해왔다. 법원과 동등하게 대우받기를 원할 때 준사법기관을 무기로 들고나왔다. 법관과 동일한 신분보장을 요구할 때 들고나오는 논리가 준사법기관이었다. 검찰의 인사권과 예산권의 독립을 주장할 때도 준사법기관임을 내세웠다. 의전과 대우를 받을 때에도 그랬다. 검찰은 검사장을 고등법원 부장판사와 같은 차관급이라고 보면서 출퇴근 차량 등 고법 부장판사가 받는 대우를 그대로 검사장에게도 해왔던 것이다. 일은 준사법기관에 걸맞지 않게 하면서 대접만 받아온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자기 이름으로 검찰사무를 처리하지만 실은 상명하복의 위계 속에 속박되어 있었다. 바로 검사동일체 원칙으로 표현되는 상명하복관계 때문이다. 검찰개혁의 핵심은 상명하복의 위계조직에서 벗어나 준사법기관성을 검찰사무 곳곳에 실현하는 것이다. 상명하복의 검찰조직이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의 정치적 소신이나 성향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폐쇄적 조직이라는 점이 더해지면 개개 검사의 권력행사의 정치적 독립성 및 중립성은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검찰개혁을 위한 최우선과제는 무엇보다도 상하관계의 위계질서를 완화시켜 검찰 내부의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조직이 관료화, 위계화, 폐쇄화되면 될수록 권력 기관화되고 정치적 영향 가능성이 증가하게 되며 정치권력이 검찰을 사유화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조직의 민주화와 외적 통제만이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그래야 검찰이 온전한 준사법기관이 될 수 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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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罷場) 분위기가 역력하다. 스웨덴 스톡홀름 외곽의 한적한 리조트로 집결한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협상 실무자들은 각자 준비한 카드를 내보이고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 거래가 성사되기가 어렵다고 판단, 본국의 훈령에 따라 보따리를 싸고 기약도 없이 떠났다. 중재국 스웨덴이 다시 회동할 것을 제안했지만 회담 결렬 후 보여준 북한의 격렬한 반응으로 볼 때 성사되더라도 결과는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년 내에 다시 회동할 가능성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합리적이다. 한때 ‘비바치시모’(매우 빠르고 활기차게)로 타오르던 비핵화 불꽃이 돌연 꺼지게 될 운명에 놓였다.

작년 6월 싱가포르에서 두 정상이 역사적 대좌를 할 때만 해도 비핵화 협상이 이렇게까지 곤두박질칠 것으로 예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비핵화 협상이 ‘귀뚜라미 보일러처럼 잘 작동해서’ 새로운 북·미관계가 발아(發芽)되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것으로 내심 기대하면서 합의문이 어떻게 도출될지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합의문은 서로 상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들의 기본 입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합의문이 그러했다. 특히 북한은 합의문 1조에 큰 기대를 했다. 베트남 하노이 회담(2019·2·27~28) 결렬 전까지 8개월의 템포는 ‘프레스토’(매우 빠르게) 이상이었다.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후 성사된 판문점 회동(2019·6·30)은 남·북·미 모두 4개월의 암중모색, 말하자면 ‘렌티시모’(매우 느리게)를 거치면서 생겨난 극적인 정치 이벤트였다. 의도했든 아니든 트럼프는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서 북한 땅을 밟은 최초의 미국 지도자가 됐다. 북한도 판문점 회동을 “정전협정 이후 66년 만에 분단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악수를 하는 놀라운 현실이 펼쳐졌다”며 회담 내용보다는 성사 배경과 회동의 정치·외교적 의미를 부각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노이에서 트럼프에게 굴욕을 당한 김정은은 와신상담 후 ‘소스테누토’(소리를 충분히 끌면서 음을 그대로 지니고)를 고수, 판문점 회동 이후 스톡홀름 실무회담(10·5~6) 직전까지 총 아홉 차례 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 서두르는 듯한 인상이 역력했다. 외무성 제1부상 최선희가 그랬고, 비핵화 실무협상 대표 김명길 또한 그러했다.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올라 미국 주도의 제재를 비난한 김정은의 행보를 ‘위대한 사색’으로 칭송한 노동신문 보도와는 달리 김 위원장에게서 ‘그라베’(장중하게 느리게)의 템포를 찾기란 어려웠다.

김정은은 작년 5월 노동당 7차 대회 중앙위원회 사업총화(결산) 보고에서 “올해부터 2020년까지의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을 철저히 수행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병진노선을 틀어쥐고 에네르기(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면서 인민생활을 결정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어떡하든지 고난을 넘어서려는 김정은의 결기가 도드라졌다. 더군다나 내년은 5개년 전략이 끝나는 연도이자 노동당 창건 75주년이 되는 ‘꺾어지는 해’(整週年)다. 핵 억제력을 확보한 김정은은 이제는 인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성과를 보여주고, 젊은 지도자로서 선대(先代)와의 차별성을 최대한 부각시키려 애쓴다. 동시에 중국과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관계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하루바삐 정상국가로 도약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김정은의 절박함이 비핵화를 고리로 ‘막가파 트럼프’의 미국을 어떡하든 움직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으리라 본다.

하지만 탄핵 낭떠러지로 몰리고 있는 트럼프는 북핵에 집중할 겨를이 없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마저 민주당 주도 탄핵 조사 목록에 올랐다. 터키와 쿠르드족 간 전쟁을 촉발한 트럼프의 시리아 미군 철수 오판으로 공화당조차 트럼프를 거칠게 비판하고 있다. 비핵화 동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트럼프의 비핵화 시계는 자연스레 ‘렌티시모’다. 활짝 열리는 듯했던 비핵화의 기회의 창이 빠르게 닫히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이래저래 한반도 안과 밖의 풍경이 모두 어둡고, 어지럽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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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21일 정경심 동양대 교수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강제수사 전환 55일 만이다. 그사이 수십곳에 대한 압수수색 등 전방위적 수사가 이뤄졌고, 조국 전 법무장관 동생과 조카 등 관련자에 대한 소환·구속·기소 등이 이뤄졌다. 정 교수에 대한 재판도 시작됐다. 수사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남은 것은 조 전 장관 연루 의혹 정도다. 곧 있을 영장실질심사에서 법원은 직접 심문을 통해 ‘조국 수사’에 대한 첫 사법적 판단을 내놓을 것이다. 검찰은 범죄 혐의가 중대하고 정 교수의 증거인멸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정 교수 측은 “검찰이 사실관계를 오해하고 있다”며 “법원 영장심사에서 명확하게 해명하겠다”고 밝혔다. 법원은 여론과 정치권의 압박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법과 원칙에 따라 판단하기를 바란다.

검찰이 21일 조국 전 법무장관의 부인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정 교수에게 제기된 혐의는 이미 기소된 사문서 위조까지 포함, 모두 11개에 이른다. 자녀 입시비리 관련 허위작성공문서행사 등 4개 혐의, 사모펀드 관련 업무상횡령 등 3개 혐의, 증거 위조·은닉 교사 등이다. 사안은 결코 가볍지 않다. 검찰이 정 교수의 뇌종양·뇌경색 호소에도 불구, 영장 청구라는 강수를 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먼지털기식 검찰 수사에 대한 논란은 피해 가기 어렵다. 증거인멸을 놓고도, 그 과정과 진실 여부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검찰 수사가 피의사실 공표 등으로 ‘여론재판’에 회부된 조 전 장관 가족의 인권은 심각한 침해를 받았다. 그 책임은 온전히 검찰의 몫이다. 검찰은 ‘정치검찰’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왜 계속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인권보장을 최우선 가치로 둔 검찰개혁’ 약속을 차질없이 이행하는 것이야말로 국민 신뢰를 되찾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정치권은 ‘조국사태’를 검찰과 법원의 판단에 맡기고 민생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지난 두 달여간 정치권은 조국사태를 빌미 삼아 정쟁이나 일삼고, 검찰·사법부를 겁박했다. 정 교수 영장청구에 대해 “기각하면 사법부 치욕의 날이 될 것”이라는 황교안 한국당 대표의 엄포는 삼권분립이 엄존하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혼란과 갈등을 조장할 뿐이다.

지금 정치권이 할 일은 안팎으로 힘든 경제를 살리고, 국민이 바라는 ‘공정한 사회’를 조성하는 것이다. 정부도 조국사태의 사법적 해결과 별개로, 특권과 반칙을 청산할 개혁안을 내놓아야 한다. 조국사태가 단순한 진통을 넘어 더 나은 사회로 한 걸음 나아가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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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한다. 21일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개도국 지위 포기를 곧 발표할 계획이다. 한국은 1995년 WTO 출범 당시 농업 분야에서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들의 WTO 개도국 지위 포기’를 요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불응할 경우 독자적으로 중단조치에 나서겠다고 하자 대만, 브라질,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이 개도국 지위를 포기했다. 이에 한국 정부도 동참하는 것이 미국의 통상 압박이나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 실리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것 같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10월 22일 (출처:경향신문DB)

개도국 지위 포기로 우려되는 건 농업 분야의 피해다. 정부는 한국 농업의 피해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기존 특혜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특혜의 지속 여부는 앞으로 협상에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협상이 언제 이뤄질지 알 수 없고,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일단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면 종전과 같은 특혜를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국은 자유무역협정(FTA) 등으로 농축수산물 관세장벽이 붕괴되고 있다. 그나마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쌀 등 주요 농산물을 특별품목으로 지정·보호해왔다. 그러나 개도국 지위를 포기할 경우 외국산 수입쌀의 관세를 낮춰야 한다. 그리고 쌀값 등 농산물 가격 안정에 쓰이는 농업보조총액도 절반 정도 삭감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1조4900억원에서 8000억원으로 대폭 낮춰야 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 농업을 지킬 보루에 구멍이 뚫리는 셈이다.

농민단체들은 정부의 WTO 개도국 지위 포기에 강력 반발하고 있다. 정부의 결정이 ‘통상주권과 농업의 포기선언’이라고 주장한다. 정부는 농민단체들과 만나 의견 수렴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농민단체는 정부가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처방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농민들의 주장에 과도한 대목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WTO 개도국 지위를 받은 지 20년 이상 흘렀어도 농업소득은 정체상태에 있다. 도시와 농촌 간 소득격차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 모두 농업의 활성화에 손을 놓고 있었던 탓 아닌가. 정부는 이번 사태로 인한 농업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급급할 게 아니다. 차제에 우리 농업의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장기적인 활성화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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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자녀의 대입전형을 전수조사하는 특별법 발의가 잇따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21일 발의한 데 이어 자유한국당·정의당 등도 관련법 마련을 예고했다. 사사건건 갈등해온 정치권이 이 법안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여야 모두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만큼 입법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의미 있는 움직임이다.

[장도리]2019년 10월 21일 (출처:경향신문DB)

지난주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최근 10년간 자녀 입시를 치른 전·현직 국회의원과 고위공직자를 대상으로 입시특혜 여부를 조사하는 ‘고위공직자 자녀 입시비리 조사를 위한 특별법안’을 내놓았다. 이어 21일 박찬대 민주당 의원도 ‘국회의원 자녀의 대학입학전형조사과정에 관한 특별법안’ 발의를 발표했다. 조사기간은 1년 이내, 조사 대상은 20대 국회의원으로 하고, 혐의가 있을 땐 검찰고발과 수사요청 등을 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한국당 신보라 의원은 조사대상을 현역 국회의원뿐 아니라 차관급·청와대 비서관급 이상 고위공직자로 넓히되, 조사기간은 6개월로 줄이자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 정의당은 현역 의원을 포함한 18~20대 국회의원 전체,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의 정부기관·지방자치단체 차관급 이상 고위공직자 직계 자녀 중 2009~2019학년도에 4년제 대학을 입학한 경우로 조사대상을 대폭 넓힌 안을 준비 중이다.

각당의 특별법 발의는 이른바 ‘조국 정국’에서 촉발됐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특혜 의혹이 제기되면서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은 전체 지도층으로 향했다. 지난달 말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국회의원과 고위공직자 자녀의 입시비리를 국회 차원에서 전수조사하자고 제안했고, 민주당이 호응했다. 나아가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도 “거리낄 게 없다”고 찬성 입장을 밝히며 급물살을 탔다. 

조국 정국이 폭로와 문제제기의 시간이었다면 이젠 정리와 해결의 시간이다. 법안 취지에 여야 모두 동의한 만큼, 상식선에서 법안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 상류층의 대입 특권 의혹이 거세게 일었고, 총선이 6개월 남은 시점에서 각당이 이 법안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마저 정치적 셈법으로 대응한다면 역풍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번 법안 발의를 계기로 다시는 입시특혜 논란이 일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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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은 책 <콜럼바인>을 며칠에 걸쳐 무서운 마음으로 읽었다. 무섭다고 말하는 것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1999년 미국 컬럼비아주의 고등학교 콜럼바인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에 관한 책이다. 7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인데, 단순히 사건에 대한 취재와 분석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부제로 붙은 말마따나 그 비극에 대한 총체적인 보고서이다. 도대체 그런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리고 도대체 그런 일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1999년 4월20일. 두 명의 소년이 폭탄과 산탄총으로 무장을 하고 자기가 다니던 학교로 태연히 걸어들어가 학생 12명과 한 명의 교사를 죽였다. 그들의 계획대로였다면 훨씬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왔을 것이다. 책은 그들이 범행을 계획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매우 세밀하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아마도 사이코패스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총격자와 그의 공범이 범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끔찍한 정신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너무나 정상적이지가 않아서 오히려 안심하는 마음을 갖게 할 정도다.  

언제나 더 무서운 것은 극히 정상적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이 극히 정상적이라고 믿으면서 저지르는 일들이다. 그래서 이 총격범들에 대한 이야기가 무서워지는 건 오히려 그들이 평범한 가정에서 보통의 소년들로 자라났다는 지점이다. 두 소년 중 한 소년의 어머니는 그 후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썼다. 강연도 했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아들이 겪는 정신적 문제에 대해 몰랐다고 말을 한다. 변명을 하는 건 아니다. 알 수 없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왜’라는 질문은 남는다. 아니 그래서 더 남을 것이다.

책은 또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뿐만 아니다. 사건 처리 과정의 실수를 은폐하려는 공권력의 시도, 사건을 자극적으로 다루려는 언론의 행태, 심지어 희생자를 종교적으로 추앙하는 종교단체의 이야기도 나온다. 사건은 어떻게든 이미 벌어졌지만, 그것을 처리하고 극복하는 과정이 복마전으로 치달으면서 사건은 비극이 된다.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건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려고 노력했던 한 희생자의 부모가 좌절을 겪은 끝에 하는 말이다. “‘나’는 정의를 단념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게다가 총기난사 사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총기와 관련된 사건은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행인가? 책을 읽는 내내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사이코패스든 무엇이든, 총기 구입이 그토록 수월하지 않았다면, 마치 편의점에 가서 술 몇 병 사듯이 그렇게 쉽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이런 일이 이렇게 쉽게 벌어지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미국에 살고 있었다면 당장 총기규제에 찬동하는 서명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다행’인 이 나라에서도 사람은 죽는다. 총에 맞아 죽듯이 댓글에 맞아 죽는다. 댓글을 쓰기 위해 클릭을 하는 건 총을 사고 탄환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도 더 간단한 일일 것이다. 너무 간단한 나머지 누가 죽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변명도 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비겁하다. 용서가 안되는 변명일 것이다.

또 한 사람의 비극적인 소식 때문에 지난주 내내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되기 전에 한마디쯤은 해줘도 좋았을 텐데. 닿지 않더라도, 할 수는 있었을 텐데. 그녀의 나이 때부터 시작해서 이 나이 될 때까지 브래지어라고 하면 그야말로 진절머리를 내는 나로서는 그녀에 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눈이 갔다.  

당당해서 참 보기 좋았다. 그 친구가 투사가 아니고 여권운동가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겼으면 했다. 그것이 단순히 옷차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여성에 관한 인식의 문제이며, 여성이 스스로 취해야 할 권리와 태도에 관한 문제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자꾸 미안해진다. 그 친구의 참담한 결정이 단지 그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한 가지 원인이 어디 있겠나. 모든 원인은 서로 얽혀 있고 어떤 원인이 또 다른 원인을 촉발한다.

책 <콜럼바인>에서는 그날 총격으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당한 한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누가 너에게 이런 짓을 한 줄 아느냐는 부모의 질문에 소년의 대답이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용서해줘요, 제발요.”

용서는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지 당하게 한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어느 글에다 쓴 적이 있다. 가해자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 피해자가 세상을 떴으니 그 뒤에 남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용서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노력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안다. 최진리법을 입안하자는 청원에 눈이 가는 이유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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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창가 구석진 자리. 내가 들를 때마다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탁자 한쪽에는 조간신문과 커피잔, 그리고 생수병. 팔순에 가까워 보이는 노인은 늘 책을 읽고 있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책을 펼친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실루엣이 그렇게 단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은 작은 자를 대고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곤 했다. 두 시간 가까이 꼼짝 않고 읽기에 몰두했다. 때로 반신상(半身像)처럼 보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찾아가는 카페가 있다. 인테리어가 소박하고 자그마한 뒤뜰에는 파라솔이 몇 개 펼쳐져 있다. 점심시간을 피하면 빈자리가 많다. 도심의 고층빌딩 숲에 숨겨놓은 ‘비밀의 정원’ 같은 곳이어서 드나들 때마다 재개발 광풍에 휩쓸리지 않았으면 하고 혼잣말을 하곤 한다. 얼마 전부터는 매번 ‘책 읽는 노인’을 볼 수 있어 카페가 그 자리에 그대로 버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간절해졌다.

대학가에서 주택가까지 도처에 카페 간판이 내걸리는 것을 보고 한때 의아해한 적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거리게 됐다.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다.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무실이자 응접실이고 공부방이자 집필실이다. 가족 형태와 주거 공간이 크게 바뀌면서 카페의 기능은 훨씬 다양해졌다. 카페는 일과 휴식, 나와 타인, 낮과 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 있는 경계의 공간이다.

개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카페와 같은 사적 공간을 마련한다. 사회적 압력을 피할 수 있는 사적 영역이 없다면 현기증 나는 이 ‘복잡계’에서 생존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밀실에서 자기와 만날 수 있어야 광장으로 나갈 수 있다.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밀실의 밀실다움이다. 고시원, 옥탑방, 반지하, 원룸을 바람직한 밀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고독의 공간이 아니라 고립의 공간이기 십상이다. 다른 하나는 광장과 거리, 공원과 같은 공적 영역이 급격하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지적이지만 밀실과 광장이 균형을 이뤄야 개인과 사회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장소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이승희 옮김, 민음사)에서 19세기 이후 개인주의의 거듭된 변화, 다시 말해 정체성의 변화를 동질사회와 다원화사회를 배경으로 섬세하게 진단한다. 카림은 개인주의를 세 개 세대로 구분하고, 현재 우리는 3세대 개인주의와 만나고 있다고 말한다. 카림에 따르면 개인주의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일대 전환을 이뤘다.

19세기부터 지난 세기 중반까지 유럽을 지배한 1세대 개인주의는 기존 계급사회에서 개인을 해방시켰다. 이 첫 번째 개인은 민족이나 정당에 소속돼 개인이라는 특성을 추상화함으로써 동등한 법적 권리를 획득했다. 주체의 변화가 목표였던 1세대에게는 정당, 교회, 학교의 역할이 중차대했다. 이 거대 기관들이 민족 중심의 동질사회를 형성하고 개인에게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하지만 민족(공인)과 민주주의(개인)는 서로 충돌하는 관계였다.

1960년대에 출현한 2세대 개인주의는 1세대와 달리 주체가 변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2세대는 기존 삶의 양식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두 번째 개인은 ‘프로젝트형 인간’이자 ‘표현하는 주체’다. 이들은 1세대가 추구했던 ‘동등’이 아니라 ‘차이’를 우선한다.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말을 걸라’며 정체성의 문제를 정치 무대에 올려놓았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 즉 다른 정체성을 온전한 정체성의 범주에 등록시키려는 것이다.

3세대 개인주의의 특성은 2세대와 공통점이 많은데 ‘작아지는 자아’로 요약된다. 세 번째 개인에게는 우연성이 수시로 개입해 불확실성이 가중된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보증해야 하는 다원화사회의 고단한 구성원이다. 카림은 공통된 세계관이 부재하는 다원화사회에서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중립성’뿐이라고 말한다. 이 중립성은 오스트리아의 ‘만남구역’과 같은 공적 공간에서 구현된다. 만남구역은 교통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 속도 제한 말고는 특별한 규제가 없다. 이용자들이 스스로 관리, 운영하는 공적 공간이다. 만남구역의 확대판 중 하나가 월가 점령 시위다. 

카림은 다원화사회를 인간화하는 지름길이 장소를 창조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다름과 다름이 공존하는 온전한 삶과 사회는 공유 공간을 어떻게 생성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개인주의 탐구를 우리에게 직접 적용하는 것은 무리지만 우리는 몇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과연 몇 세대 개인인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그것은 또 몇 개인가. 우리의 밀실은 어디이고 광장은 또 어디인가. 우리는 ‘사회적·심리적 홈리스’가 아닌가. 카림에 따르면 우리가 창조해야 할 공유 공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냥 주어지지도 않는다. 정당이 계획하지도 않는다. 

주말마다 촛불이 밝혀지고 태극기가 휘날린다. 우리는 언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공적 장소’를 창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 1세대 개인주의의 틀에 안주하고 있는 저 ‘낡은 정치’를 지금 여기로 소환할 수 있을까.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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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나라는 국토교통부와 환경부가 수량과 수질을 나누어 물을 관리해 왔으나 분산된 관리체계로 인한 업무의 중복과 비효율이 지적되어 왔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정부조직법을 개정해 물 관리를 환경부로 일원화했다.

한편 물을 둘러싼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상류지역의 개발제한과 하류지역의 수질오염 문제로 인해 지역 간 입장 차이가 첨예하게 얽혀 있으며, 여러 이해당사자들과의 협력 없이는 정부 혼자서 물과 관련된 갈등을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번에 국가물관리위원회와 4개 유역물관리위원회가 공식 출범하면서 통합 물관리를 위한 첫걸음을 떼었다. 물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물 정책을 수립하는 것에 위원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

우선, 위원회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4대강 보 처리에 대해 심도 있는 협의를 통해 지혜를 모아 미래지향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보 존치와 개방의 효과가 정확히 입증되지 않은 채 주민, 환경단체, 정치권의 의견 대립이 심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역물관리위원회에 참여하는 지역 대표들도 주민 및 전문가들과 꾸준히 소통하면서 공공재인 유역의 물을 가장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국가·유역물관리위원회가 지속 가능한 통합 물 관리 실현을 위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과제를 충실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첫째, 물관리위원회는 물관리기본법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정부, 지자체, 지역주민, 전문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이러한 소통의 과정은 물관리위원회가 심의·의결해야 할 최상위 계획인 국가물관리기본계획의 수립 과정에서부터 충실히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지자체와 환경부, 수자원공사, 환경공단 등 관련 기관과도 긴밀히 협력하고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둘째, 물관리위원회는 물 분쟁 조정 결과에 대한 실효성을 확보해야 한다. 관건은 이해당사자들이 물관리위원회의 조정 결과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물 분쟁 조정에 갈등과 관련된 모든 이해당사자를 참여시켜야 한다. 관련된 전문가 집단도 반드시 조정 과정에 참여해 객관적인 자료 검토에 근거한 합리적 해결책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이해당사자들로 하여금 전문적 판단에 근거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셋째, 유역 내의 물 정책과 현안은 우선적으로 유역물관리위원회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각각의 유역은 고유의 환경 특성에 따라 물 현안이 다양하고 상이하다. 유역 물 정책과 현안에 대한 논의는 유역 구성원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유역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유역 내 논의를 통해서도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할 경우 국가물관리위원회에서 심화된 논의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통합 물 관리기구에 거는 관심과 기대가 크다. 그렇지만 복잡하게 얽힌 물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위원회가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활성화하고 물 분쟁 조정의 실효성을 확보한다면, 물 분야 최상위 의사결정기구로서 국가 물 관리 선진화를 앞당길 것으로 기대된다.

<윤성택 | 고려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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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딱히 서늘한 바람 부는 가을이어서가 아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서도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고 차분해질 것만 같았다. 종종 여행을 다녔지만 그건 호기심이 앞선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충동은 그런 여행 감각과 또 달랐다. 일상의 루틴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뭔가 하루하루 구멍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침실에 들여놓은 시집 책장에 손을 뻗어 아무 시집을 펼쳐 한 편 읽는 일, 절대로 거르지 않는 아침 식사, 출근하면 컴퓨터를 열기 전에 나무와 고양이의 동태를 살피는 일, 퇴근하기 전 사무실 골목을 기웃거리기 등 업무의 과중에 상관없이 반복되는 행위가 삶에 힘을 실어준다고 믿었는데 시큰둥해진 것이다.

떠날 수 없을 때 대체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전시회 관람과 영화관에 숨어들어가는 일. 현실과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를 거치면 기운이 회복되겠지.

전시를 찾아다니며 직업병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전시 벽면의 문장 타이포를 유심히 보거나 작품의 배열, 관람 동선도 내가 만드는 책 편집과 연결되었다. 일 생각에 빠져서 현실의 답답함을 잊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그러다가 ‘알로하셔츠전’이라는 독특한 전시를 보았다.

미국 서부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에서 2년, 하와이에서 2년을 산 이우일·선현경 만화가 부부가 서울로 돌아와 여는 전시는 뜻밖에도 작업한 작품이 아니라 현지에서 그러모은 오래된 알로하셔츠를 내건 것이다. 꽤 오래전 신혼여행으로 1년간 바깥세상을 다녀온 커플이니 짐작은 했지만, 그 후에도 이들은 출장도, 단순한 여행도 아닌 낯선 곳에서 ‘눌러앉아 살기’를 실천했다.

“나는 늘 ‘익숙한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원했다. 왜 나는 자꾸만 낯선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일까. 이유가 특별히 없다면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 아닐까. 어쩌면 새로움과 낯섦을 찾아 헤매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적일지 모른다”라고 <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에서 이 작가는 고백했다. 창작자인 이들에게 잘 모르는 곳, 낯선 경험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전시장에서 마주친 알로하셔츠들은 놀라울 만큼 다양하고 독특한 문양이 많았다. 작가가 모아들인 것이니 프린트된 그림이며 포인트며 점잖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신선하고 재밌었다. 알로하셔츠에는 하와이 주민들의 예술 감각과 문화가 그대로 드러났다. 전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어 마음에 드는 두 장을 선택했다. 당장 걸치고 싶을 정도로 화려한 색감에 끌렸다. 반팔 알로하셔츠를 어떻게 입어야 할지 홀로 패션쇼를 벌였다. 가을 긴팔 옷 위에 겹쳐 입은 알로하셔츠는 색달랐다.

거울 앞에서 옷을 겹쳐 입으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발견하고 내가 왜 떠나고 싶었던가 이유를 알았다. 이 장난기를 잠시 잃었던 것이다. 경직되고 유머 없는 날들 속에서 숨이 막혔던 것이다. 생업의 긴장감에 마모되는 곳이 나올 만한 시기였다.

그날 밤 보랏빛 책을 펼쳤다. 얼른 읽고 싶어도 펼쳐볼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였던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을.

“귤 한 알./ 인공적으로 연명하는 나에게/ 귤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 작은 귤의 껍질을 깠다./ 코로 가져갔다./ 사계절이, 콧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향기만이/ 향기만이/ 그게 삶이라는 듯.” 시인 듯 삶인 듯 처연하고 아름다운 글을 읽고 코를 벌름거렸다. 본능적으로 향을 맡아보겠다는 자세였다.

답답하다고 여기는 날들도, 그것이 향기일지 악취일지 알 수 없으나 어떤 냄새로 분명 남을 것이다.

이우일·선현경 부부가 돌아온 소감은 담백했다. “익숙한 곳에서 멀어질 때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는 것처럼 내가, 우리가 작아졌다. 그렇게 작아질 때마다 익숙한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돌아온 이들은 익숙한 것의 가치를 말한다. 돌아올 수 없이 멀리 떠난 시인은 떠나기 전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말로, 자신에게 많은 것을 던져준 세계와 사람들에게 닿고 싶어 했다.

나도 언젠가 떠날 것이다. 담백한 소감조차 밝힐 일 없는 곳으로. 그때 일상도 멈출 거라고 생각하니 떠나고 싶은 충동으로 안달복달하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여행을 가지 않아도 여행감은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 이 날들도 콧가를 스치는 향기가 될 수 있을 테니. 오늘을 잘 살자.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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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로 이사를 오고 크게 달라진 것 하나는 관공서에 드나들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서른 몇 해 동안 서울에서 관공서에 갔던 모든 횟수보다 하동에 내려와 관공서에 간 횟수가 훨씬 많았다. 면사무소와 군청과 농업기술센터와 보건소와 농산물품질관리원 같은 곳들. 면사무소 직원은 온 마을 사람들 얼굴을 알고, 사람들은 해마다 올해 관에서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신경을 기울인다.

지방으로 내려와 살면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문화행사를 치러낸 이가 있었다. 그는 지역 유지가 노골적으로 몇 사람을 지정해서 꽂아넣거나, 그런 상황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공무원에 대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다. 결국 그는 정해진 기간을 다 채우지 못했다. 늘 해오던 관습에 대해 문제가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오래 버틸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지역 사회의 규모가 작아서인지, 그런 일들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어디에서나 눈에 띈다. 논이었던 땅에 어느 날 갑자기 과일나무가 벼처럼 빼곡하게 심긴 다음해에 그 땅이 도로로 수용이 된다거나(나무그루 수마다 보상을 받는다.), 한 해에 2주쯤 관광철에 교통량 조사를 해서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토목 공사를 벌인다거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지역의 상징 조형물 같은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 글자 그대로 상징이어서, 빙하 꼭대기와도 같은 상징물 아래에, 다크웹 같은 세상이 펼쳐져 있다. 언젠가는 지역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신청하는 사람이 창구 직원에게 선물을 건네는 것도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그저 아는 사이에 선물을 주는 것인 줄로 생각했다.

관청과 가까운 삶이어서 그럴까. 이명박 시절에 내려와서 박근혜 정부까지, 이런 일들은 점점 버젓해지고 더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았다. 지방자치라는 것이 지방의 토호와 관청의 어긋난 관행을 제도로 뒷받침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른들은 ‘나서기’라고들 하셨다.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이들이 지방의원을 하고, 지역의 여러 기관 자리를 도맡는다. 사람을 때리고, 욕하고 했던 예천군 군의원들은 제명을 당한 다음, 그걸 취소시켜달라고 소송까지 했다. 이 군의원들이 유별난 경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소문은 금세 퍼지고,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그 누군가가 또 누구와 어떤 사이인가 하는 것도 알려진다. 그러고 나서는, 그런 일을 벌인 사람이 공적인 책임을 지거나, 처벌을 받는 경우는 적다. 국회의원쯤 하는 사람이라면, 수사를 하는 지역 경찰서에서 현장에 가 보는 일도 없이 수사를 끝내는 일도 벌어진다. 그것은 지방의 검찰과 법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들리는 말로 판사는 서울까지 가는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한직이고, 검사는 관할 지역의 규모가 작을수록 한직이라고 한다. 지방에서 일하는 것을 두고, ‘한직’과 ‘좌천’과 ‘영전’으로 설명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란, 좌천되어 한직을 떠도는 사람들의 법치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지방의 비리가, 그것이 저질러지는 방식이 꿈쩍 않고 있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조국 장관의 사퇴 발표가 있고, 가슴이 찢어진다는 한 작가의 말을 보았다. 집어든 책에서는 ‘생나무가 빠개지는 것 같다’는 글귀도 들어왔다. 그리고 암전. 지난달에 아이들과 서초동 집회에 다녀온 뒤로, 스스로 품었던 마음들을 찬찬히 되짚어 봐야 했다. 엊그제 19일, 서초동에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고 한다. 앞으로도 서초동 검찰 앞에서 주말마다 사람들이 마음을 모은다고 했다. 간절한 만큼, 서로 즐기며 북돋우는 자리라고도 했다. 생나무가 빠개진 자리에, 다시 어린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었다.

<전광진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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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수많은 기자회견이 열린다. 하나같이 절박하지 않은 것들이 없다. 돌아오는 메아리 없이 이리저리 떠돌다 결국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목소리들이다.

하지만 최근 대형마트 노동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제발 상자에 ‘손잡이 구멍’이라도 뚫어달라”고 호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첨단 기계를 도입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상자에 구멍을 뚫어달라는 요구라니. 어쩌다 우리 사회는 이런 ‘소박한’ 요구까지 절박하게 호소하도록 만든단 말인가.

대형마트 노동자들은 매일 무거운 상자를 수백차례씩 들고 나른다. 상자의 무게는 평균 10㎏, 최대 25㎏. 그것을 하루 평균 345회 이상 운반한다. 상자에는 손잡이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하중을 분산시키지도 못한 채 그 묵중한 상자를 바닥부터 한번에 들어올려야 한다. 골병이 들 수밖에 없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지난 6월 롯데마트, 이마트, 홈플러스 등 주요 대형마트 노동자 517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56.3%가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고, 69.3%는 이로 인한 병원 치료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데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뚫으면 신체 부담을 10~40%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냥 구멍만 뚫으면 된다. 이쯤되면 이런 탄식이 육성으로 터져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니, 도대체 대형마트들은 상자에 구멍도 안 뚫어주고 이제까지 뭐했단 말인가.

고객의 충동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상품을 배치할 때 인체공학과 심리공학까지 동원하는 마트들이 같은 무게라도 하중이 분산되지 않으면 신체에 주는 타격이 더 크다는 간단한 물리공학조차 몰랐을 리 없다.

혹시 마트 노동자들이 손잡이 구멍을 뚫어달라는 상자가 텅스텐 합금으로라도 만들어진 것일까. 물론 그럴 리도 없다. 이들이 하루에도 345회 이상 낑낑대며 들고 나르는 최대 25㎏ 무게의 상자는 두께가 채 1㎝도 안되는, 흔히 볼 수 있는 종이상자다. GTX 열차를 놓기 위해 지하 40m 땅속까지 뚫는 이 첨단기술 사회는 고작 그 1㎝도 안되는 두께의 종이상자에 구멍조차 뚫어주지 못한다.

이러한 모순은 노동현장 곳곳에서 비극으로 되풀이된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은 “풍속 70m/s의 강풍과 진도 7.0의 지진에서 버틸 수 있는 ‘아웃리거 벨트월’ 시스템을 적용하고 초고강도 강재 ‘HSA800강’을 사용해 지어진 부산의 101층짜리 초고층건물 엘시티의 초정밀 과학에 ‘일하는 사람’은 빠져 있었다”고 지적했다(한겨레 10월2일자 칼럼 ‘거대한 공동의 묵인’). 지난해 5월 이 건물을 짓다가 외부 유리 작업을 하던 노동자 4명이 사망했다. “바람과 지진에 이긴다는 초강재와 초첨단 기술 현장에서 (안전작업 발판과 벽면을 연결해주던) 간단한 고정장치가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오로지 소비자와 자본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첨단기술의 혜택이 현장 작업 노동자의 안전을 향상시키는 데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 같은 현실은 우리에게 기술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를 되묻게 한다. 하긴 “톨게이트 수납원들은 (기술의 발달로 어차피) 없어질 직업”이라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거리낌 없이 발언하는 사회에서 그 기술을 노동자를 위해서도 써 달라는 요구는 사치일지 모른다.

해외에서는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작업 현장에서 인공지능(AI)과 드론 같은 첨단기술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시도되고 있다. 최근 싱가포르 주택개발청은 지상 2m 이상 높이에서 작업하는 건설 노동자들이 추락 방지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지 않은 위험지점 1m 이내로 접근하면 경고음이 울리도록 하고, 드론이 찍은 수천장의 현장 사진을 AI가 분석해 위험 요소들을 미연에 방지하는 시스템을 시범도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사례들이 우리에게는 허무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한국 사회의 산재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본을 지키지 않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20㎏ 무게의 쌀과 음료수 상자를 나르느라 요추, 경추 간판 탈출증 진단을 받아 4개월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손잡이가 있으면 조금이나마 무리가 덜 갈 것 같습니다” “상품이 가득 든 상자 바닥을 잡고 들어야 하니 자세가 구부러지고 허리와 무릎에 무리가 너무 많이 갑니다. 손잡이가 있으면 좀 더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자에 손잡이 구멍조차 안 뚫어주는 이런 사회에서 무슨 안전을 기대할 수 있겠나. 마트 노동자들이 ‘나에게 손잡이가 필요한 이유’라는 자필 손편지까지 쓰게 만들다니, 기업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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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경향시선

어느날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의 반만큼도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말의

성찬이나 말의 홍수 속에서 나는

오히려 말이 고팠다

고픈 말을 움켜쥐고 말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쉬운 말들과 놀고 싶어서 말의

공터를 한번 힐끗 본다

참말은 문득 예리한 혀끝으로

잘려나가고 씨가 된 말이

땅끝으로 날아다닌다

말이 꽃을 피운다면 기쁘리. 말이

길을 낸다면 웃으리. 말은

누구에겐들 업(業)이 아니리


모든 말이 허망하여도 말의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냐

우리는 누구나

쌓인 말의 나무 밑으로 돌아간다.


천양희(1942~)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나치게 많은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낸 거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홍수를 이룬 말들 속에서 오히려 말의 허기를 느낄 때가 있다. 말에도 때가 있고, 말에도 공터가 있다. “말의 공터”라는 말은 얼마나 멋진가. 말의 비어 있는 땅을 볼 줄 아는 사람의 말은 나직하고 신중하고 고상하다. 여지를 두는 말, 에둘러 해서 듣는 이가 짐작하게 하는 말이 좋은 말이다. 그런 말은 세상에 꽃을 피우고, 세상에 길을 낸다.

그러나 이 세상엔 창처럼 찌르는 말이 넘쳐난다. 나오는 대로 함부로 하는 말이 넘쳐난다. 사실이 아닌데도 사실인 것처럼 꾸며 대는 말이 넘쳐난다. 불 같은 말은 스스로의 마음을 먼저 다치게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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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설리(본명 최진리)가 하늘나라로 간 이후, 나도 왠지 모를 우울감과 슬픔에 시달렸다. 좋아했던 한 연예인이 이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과 고통의 원인에 무관심한 세상 때문이기도 하다. 당당한 행동과 밝은 표정 뒤에 감추어야 했을 두려움과 외로움, 아픔과 절망감에 통감하는 여성들의 마음에 애도의 강물이 흐르는 사이 악플과 언론으로 주범의 과녁을 바꿔가며 세상은 지금도 설왕설래 중이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책임을 느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얼굴 없는 악플이나 신체 없는 언론사인가, 댓글을 작성하고 기사를 쓰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소비하는 사람들인가.

가수 겸 배우 설리. 연합뉴스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 더해 ‘여성’에 대한 심오한 편견을 장착하고, ‘여성+연예인’의 취약성을 노린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한 자들. 연예인이 사용하는 차량과 거주지, 자주 가는 식당과 옷집에서부터, 누구와 사귀는지 결혼했는지 이혼했는지 등 가장 사적인 영역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살이 빠졌네, 쪘네, 얼굴이 예뻐졌네, 성형했네, 옷차림이 어떻네, 몸매와 얼굴 품평을 낙으로 삼고, 조금만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이상한’ 여자로 취급해 가차 없이 비난하거나 폄훼하고 조롱하고 공격하는 이들. 남자 연예인이 하면 소신발언이라 칭송하다가도, 여자 연예인이 하면 관심종자라 비난하거나 ‘페미니스트’라고 태그 붙여 집요하게 송곳을 꽂아댔던 이들. 여성을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이거나 눈요깃거리, 성적 만족의 도구 정도로 보는 자들. 모두 설리를 죽음으로 몰아간 주범들이다.

여성 연예인들의 삶을 도마에 올려놓고 부위별로 나누어 품평회를 일삼던 TV 연예오락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들. 파파라치처럼 사생활 꽁무니나 쫓고 소셜미디어 계정 하나하나를 기사화해 아니면 말고 식의 ‘의혹’을 제기하고, 특정 행동을 ‘페미니스트’ ‘논란’이라 규정해 공격을 부추긴 기자들. 여성의 피해에 공감하는 기사를 멀쩡히 쓰는 척하다 자신들만의 단톡방에선 그 고통의 가장 내밀한 부분마저 희롱거리로 전시하거나 오락거리로 소비하고 어떠한 제재나 처벌도 받지 않는 자들. 

연예인의 사망 소식에 집 앞과 빈소에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진을 치고, 악플러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던 사진들을 애도랍시고 끄집어내어 다시 망자의 명예를 물어뜯는 이들. 악플을 기사화해 악플을 유도하고, 상처를 팔아 다시 상처를 입히고, 스스로 만든 논란에 기름을 부어 논란을 기정사실화하며, 한 여성의 죽음을 이용해 다른 여성의 사회적 죽음을 유발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기생하는 이들이 또 다른 주범이다.

나는 의심한다. 온라인에 ‘설리 사망’ 보고서를 퍼트린 대한민국 공무원은 이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인가. 여성 연예인들을 성적 착취의 대상, 돈벌이용 상품, 남성연대의 도구 정도로 생각했던 그 검사, 기획사 대표, 언론사 대표는 이들과 전혀 다른 인간들일까. 사람의 실제 모습을 모방한 성인용 인형(소위 리얼돌)을 국감 현장에 들고나와 “산업화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 국회의원은 또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인가. 아동 음란물 사이트를 만들고 운영하고 다운로드로 돈을 버는 사람들, 체포된 성범죄자를 불기소하거나 기소중지하거나 집행유예로 선처를 베푸는 사람들은 완전히 별개의 인간들인가. 불법촬영물을 찍고 올리고 거래하고 다운받고 낄낄거리며 소비하는 남자들은 또 완전히 무관한 이들인가. 미성년자에게 전화번호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거절하자 ‘탈락’이라 과감히 말하더니, 논란이 되자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남자 연예인과 제작진은 또 완전히 다른 사람인가.

이들은 어쩌면 젊고 재기발랄한 한 여성의 데이트강간 사건을 악의적으로 왜곡해 보도하고, 출신배경을 캐서 인신공격하며, 온갖 외모 품평과 추문을 만들어 ‘방종한’ 여자로 몰아 결국 사회적으로 매장한 100년 전 이 땅의 언론 및 남성 문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아닐까. 조선 최초의 여성 근대 시인이자 소설가, 언론인, 영화배우, 연극배우였던 김명순은 그렇게 사회적·실존적 죽음을 맞았고, 이제야 그의 이름과 작품이 서서히 복권되고 있다.

우리가 최진리의 용기 있는 행동과 죽음의 배경을 마음을 다해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이유는 쓰레기더미 같은 악플과 기사만이 역사로 남아 현재 이 땅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이 다시 왜곡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목숨을 다해 소리친 이야기가 지워지고 여성의 죽음을 생산하는 세상의 ‘진리’가 단 하나의 ‘진실’로 남아선 안되기 때문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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