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확한 진상이야 알 수 없다. 쏟아지는 언론보도를 좇는 것도 힘들다. 싸움은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펼쳐지고 있다. 복잡하지만 양상은 대개 두 축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부산시 경제부시장 유재수가 뇌물을 받는 등 범죄 혐의가 짙은데도 그에 대한 감찰이 청와대에 의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 축은 청와대로부터 관련 첩보를 받은 경찰이 무리한 수사 끝에 자유한국당 울산시장 후보를 낙선시켰다는 것이다. 다들 아는 것처럼 의혹의 핵심은 모두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겨냥하고 있다. 이건 물론 검찰이 짜놓은 판이다.

공방이 오가는 중에 청와대에 파견 나와 일했던 검찰 수사관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무거운 부담을 느낀 탓이겠지만, 그 실체가 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죄송하고 가족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전해질 뿐이다. 게다가 검찰과 경찰은 죽은 자의 휴대전화를 놓고 뺏고 빼앗기는 희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비밀번호를 걸어둔 최신형 아이폰이라 들여다볼 수 없다면서도 그런다. 아무튼 검찰 수사로 시국은 난국이 되었다. 

윤석열 총장이 취임한 건 지난 7월 말이었다. 겨우 넉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 검찰은 빠르게 ‘윤석열 검찰’로 재편되었다. 그동안 했던 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거악의 핵심인 것처럼 수사력을 집중하는 거였다. 청와대가 가장 심각한 부패집단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대통령에 대한 충정으로 주변의 부패세력을 내치기 위해서인지 아무튼 검찰은 청와대 주변만 맴돌고 있다. 

당장 청와대 압수수색만 해도 그렇다. 유재수에 대한 감찰을 무마했다고 폭로한 사람은 김태우 전 검찰 수사관이다. 그는 자신이 소속되었던 청와대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이 민간인 사찰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그 때문에 지난해 12월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압수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사결과는 별게 없었다. 검찰은 이번에도 김태우의 입에 기대 청와대를 압수수색했다. 

청와대 직원들도 범죄를 저지르면 수사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국정 최고책임자의 집무실이 이렇게 쉽게 털리는 건 차원이 다르다.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는 마구잡이로 휘둘러도 되는 칼이 아니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해야 한다. 물론 합리적인 판단도 거쳐야 하고 다른 방법이 있는지도 충분히 살펴야 한다. 

아무 때나 영장을 통한 강제수사를 해선 안된다. 증거인멸 우려 때문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면, 앞뒤를 살펴야 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수사와 관련해 검찰은 여러 대학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검찰의 주장을 따르더라도 대학들은 조국 일가 때문에 업무방해 등의 피해를 입은 기관들이었다. 그래도 그냥 영장 들고 쳐들어가는 방식을 반복했다. 대학들은 범죄기관 취급을 당했지만, 가장 힘센 기관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영장을 통한 강제수사 이전에 필요한 자료를 제출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먼저다. 검찰에서는 학문의 전당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피해 기관에 대한 도리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학들에 관련 자료를 임의 제출받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그때 가서 강제수사를 해도 된다. 강제수사는 신중 또 신중해야 한다. 

청와대 압수수색도 그렇다. 이미 지난해 12월 엇비슷한 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당했던 청와대 민정수석실이다. 게다가 지난 몇 달 동안 ‘조국 사태’의 한복판에서 검찰을 예의주시했던 터였다. 

검찰이 지목하는 것처럼 어떤 청와대 직원이 범죄와 관련되었다면 수사의 단서, 그것도 자신의 감옥 문을 열게 될 자료들을 컴퓨터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지는 않을 거다. 유재수, 김기현에 조국까지 세상을 매일처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들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러니 청와대 압수수색은 형사법상 증거 확보를 위한 법률행위가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정치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검찰이 정치에 개입하고, 나아가 직접 정치를 하는 행위는 심각한 일탈이다. 문제는 그런 일탈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거다. 

검찰이 왜 난리를 치는지, 왜 나라를 어지럽히는지 짐작하는 건 쉽다. 당장 국회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법안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과 검경 수사권 조정안이 올라 있으니, 이 판을 흔들고 싶을 게다. 황운하 전 울산지방경찰청장의 지적처럼 지난 1년6개월 동안 전화 한 통화 없던 검찰이 갑자기 청와대 하명 사건 운운하고 나서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참 지난 다음에 법원 판결을 통해 검찰의 의혹 제기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져도, 검찰로서는 손해 볼 게 전혀 없다. 수사과정에서 특히 검찰이 흘리는 온갖 이야기들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는 지금의 언론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 검찰은 공익의 대표자, 인권의 수호자, 법률 전문가로서의 역할은 다 제쳐두고 자기 조직의 기득권을 위해 정치적 퍼포먼스를 남발하고 있다. 

록히드 사건의 주임검사로 검사들의 상징처럼 존경받았으며 일본 검사총장(한국의 검찰총장)을 지낸 요시나가 유스케가 평소 강조했던 말이다. “검사는 수사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하면 안된다. 수사로 세상이나 제도를 바꾸려 하면 검찰 파쇼가 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검찰은 오물이 고여 있는 도랑을 청소할 뿐이지 그곳에 맑은 물을 흐르게 할 수는 없다.” 한국 검찰, 특히 ‘윤석열 검찰’은 온통 거꾸로다.

청와대와 법무부의 일개 외청에 불과한 검찰청이 매일처럼 싸우는 볼썽사나운 모습은 사실 청와대가 만든 것이다. 구체적으로 꼽으라면 얼마 전까지 청와대 민정수석이었고, 또 법무부 장관이었던 조국에게 무거운 책임이 있다. ‘윤석열 검찰’을 낳은 것은 청와대였고, 지금 ‘윤석열 검찰’ 문제를 풀 수 있는 것도 유일하게 청와대뿐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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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게 진보는 아재요, 보수는 노땅이다. 둘 다 청년을 가르치려 드는데 ‘진보아재’의 설교는 거짓 위선으로 비치고 ‘보수노땅’의 훈시는 아예 헛소리로 들린다. 진보아재가 잘하는 거라곤 뒤늦게 헛웃음 나오게 하는 말장난 개그뿐이요, 보수노땅이 내세울 거라곤 남들 다 먹는 나이밖에 없다. 진보아재는 정치민주화한답시고 일상의 악습에 젖어들었고, 보수노땅은 경제성장한답시고 인간의 염치를 놓아버렸다. 자기들은 다르다고 항변하는데 서로 욕하고 싸우면서 닮아갔다. 작은 일상도 도덕으로 재단하는 진보아재가 큰 염치를 잃어가니 분노가 치밀고, 대놓고 아랫사람 깔아뭉개는 염치없는 보수노땅이 일상의 악습을 바꾸자고 하니 꼴불견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현실 권력을 두고 다투는데 마치 누가 먼저 소멸하나 내기하는 것 같다.

진보아재는 자칭 민주주의자다. 부당한 위계 없는 소통문화 만든답시고 틈만 나면 아재개그를 날린다. 비가 한 시간 오면? “추적 60분!”, 울다가 그친 사람은? “아까운 사람!”. 듣는 순간 ‘이게 뭐지?’ 어벙벙해지는데 집에 가서 누우면 뒤늦게 킬킬대느라 잠을 설치게 된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얻은 소득을 주로 해서 국민을 성장시키는 정책은? “소주성!” 최저임금 ‘쬐끔’ 올리면 국민이 성장한다는 아재개그를 날려 순간 ‘벙찌게’ 만들더니 지금까지도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헛웃음을 온 국민에게 안겨주었다.

보수노땅은 자칭 성장주의자다. 입만 열면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인정신으로 이만큼 성장했다고 떠벌리는데 마지막에 가면 결국 “우리 때가 좋았지”로 끝맺는다. 군사작전하듯 주어진 목표를 최대한 빨리 달성하기 위해 초인적인 과잉 노동을 하다 보니 변화하는 세상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염치도 잃어버렸다. 온갖 갑질을 휘둘러대는데 부당하다고 항의하면 “다 원래부터 그래, 어쩔래?” 하며 배째라 나온다.

현재 진보아재는 철지난 수출주도성장을 다시 꺼내들고, 보수노땅은 거리를 점거하고 삭발 단식으로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다. 경제성장에 젬병인 진보아재와 권위에 찌든 보수노땅이 재벌총수와 민주투사 코스프레를 펼치고 있으니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좋게 봐주자면 상대방의 가치를 수용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 참 가상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잘하는 것부터 챙기는 게 먼저다. 진보아재는 정치민주화를 이루는 데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왔다. 그런데 현재 적지 않은 청년이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능멸하고 있다. 일부 극우 청년의 일탈이라며 무시하지 말고 민주주의가 왜 가치 있는 것인지 ‘진정성 있게’ 설득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면 삶이 얼마나 좋아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보수노땅은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현재 적지 않은 청년이 경제성장의 결과를 비난하고 저주하고 있다. 일부 극좌 청년의 선동이라고 몰아붙이지 말고 경제성장이 왜 가치 있는 것인지 ‘성실하게’ 밝혀야 한다. 자식에게 세습질하는 것 말고 성장하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할 수 있게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 해도 청년이 스스로 이야기해야 한다. 들어주는 사람 없다고 위축되어 입 닫고 가만있으면 안된다. 나이가 젊다고 다 청년이 아니다. 이 땅에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오는 자가 진짜 청년이다. 진보아재는 민주주의 이야기를 가져왔고, 보수노땅은 성장주의 이야기를 들여왔다. 이 이야기가 한계에 처했다면 당연히 이를 넘어서는 보다 호소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평생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온 아재와 노땅에게 청년이 살아갈 새로운 이야기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이야기로 살아왔고, 그 덕분에 나름대로 정치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 이야기가 낡아빠졌다면 청년은 여기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고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해야 한다. 그러려면 청년이 곳곳에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한다. 누가 뭐래도 희망은 교육에서 온다. 무엇보다 청년이 주어진 현실 너머 가능한 세계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으로 학교가 거듭나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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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흔히 쓰는 말이지만, ‘청년’은 1910년대 조선에서 ‘힙한’ 단어였다. 1903년 서울에 ‘황성기독청년회’라는 이름으로 YMCA가 탄생한 이후 들불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후에 한국기독교청년회로 명칭이 바뀐 YMCA 운동의 산증인인 고 전택부 전 서울 YMCA 명예총무는 “당시 한국에는 소년이나 장년이란 말은 있었으나 청년이란 말은 없었다. 월남 이상재 선생도 새 개념인 청년이란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YMCA가 ‘청년’을 발견하고 발전시키자 마치 기름에 불붙듯이 사회에 큰 물의가 일어났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학비평용어사전>은 ‘소년’이 1900년대의 어휘였다면 1910년 이후의 유행어는 ‘청년’이었다고 평한다. 1920년에서 1921년 새에만 1300개 이상의 청년회가 생겨났다고 한다. 윤봉길은 의거 이틀 전 ‘피끓는 청년제군들은 아는가’로 시작하는 ‘조선청년에게 고함’이란 격문을 남기기도 했다. ‘청년’은 새로움과 민족을 일깨우는 용어로 유행했다.

현대에 와선 청년은 젊음과 도전의 이미지로 구축됐다. 연령 구분은 없었다. 1990년대 말 IMF 금융위기 후 청년 취업난, 빈곤 문제 등이 부각되고 나서야 정책 대상자로서의 연령기준이 필요해졌다. 관련 법규상 아동(0~8세), 청소년(9~24세), 노인(65세 이상)으로 정해져 있으나, 청년은 그때그때 기준을 정했다. 청년고용촉진 특별법(15~29세), 중소기업창업 지원법 시행령(39세 이하) 등이다. 국회 계류 중인 ‘청년기본법’엔 19~34세다.

5일 전북도의회에서 조례를 고쳐 현재 18~39세인 청년의 범위를 44세까지로 확대하자는 제안이 나왔다고 한다. 고령화가 심화되고 청년층이 전북을 떠나면서 각종 청년 정책사업의 수혜자를 확대해 유출을 줄여보자는 취지다. 이렇게 되면 전북 청년은 46만명에서 58만명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몇 년 전 유엔은 100세 시대를 맞아 새로운 연령구분 기준을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18~65세는 모두 청년이다. 0~17세는 미성년자, 66~79세는 중년, 80~99세 노년, 100세 이상은 장수노인이라고 한다. 오래도록 청년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 좋긴 하겠지만, 그 배경과 남겨진 숙제를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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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지하철 자리에 앉아 책을 꺼내들면 좋겠지만 요즘은 자꾸 휴대폰으로 유튜브 채널을 보게 된다. 잠깐 본다는 것이 30~40분은 정말 후딱 간다. 그런데 옆사람이 보면 어쩌나 가끔 민망해질 때가 있다. 

첫 화면에서부터 ‘저탄고지의 진실’ ‘중년 뱃살’ ‘엽떡 매운맛 먹방’ ‘심쿵주의 아기시바견’ 등이 줄줄이 추천돼 뜨기 때문이다. ‘친절한 알고리즘씨’가 내가 지난 시간 즐겨 봤던 것을 근거로 비슷한 내용의 콘텐츠만을 골라 보여주는 것이다.

유튜브 채널뿐 아니다. 넷플릭스도 마찬가지다. 넷플릭스는 “소비자가 10대 소녀이든, 70대 할머니이든 상관없이 그들의 취향을 타기팅해 맞춤형 콘텐츠를 완벽하게 추천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한다. 나의 취향에서 벗어나 색다른 콘텐츠를 보려면 그만큼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콘텐츠는 갈수록 다양해지는데 막상 한 가지(성향)에만 노출되니 아이러니다.

콘텐츠가 취향에 머물지 않고 정파성을 띠는 경우라면 어떨까. 보수 성향의 소비자는 더욱 보수 성향의 콘텐츠에, 진보 성향의 소비자는 더욱 진보 성향의 콘텐츠에 노출되게 되며 그 편향성이 스스로 강화된다. ‘에코 체임버 효과’인 것이다. 반향실(에코 체임버)에서 하나의 소리가 울려 증폭되는 것처럼 정보와 신념이 한 가지로 증폭되거나 강화되는 것을 말한다.

뉴스 콘텐츠에서도 이런 현상은 진작부터 우려돼 왔다. 몇 년 전 포털뉴스의 편향성이 자주 도마에 올랐는데 2017년 발표된 논문 ‘인터넷 포털의 경쟁과 뉴스 콘텐츠의 선택’(최동욱 KDI연구위원)에서는 포털의 편향성을 측정한 내용이 있다. 그중 흥미로운 것은 ‘포털뉴스의 편향도와 사용자의 정치성향 간 차이가 클수록 클릭 수는 유의하게 감소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는 포털의 뉴스섹션에 게시된 뉴스들이 자신의 성향과 다를수록 해당 페이지에서 추가적으로 뉴스를 덜 선택한다’고 한다.

포털은 수익과 직결되는 클릭 수를 늘리기 위해 소비자 입맛에 맞는 편향된 뉴스를 더 노출시킨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뉴스의 다양성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최근 국내 대표적인 포털이 뉴스 편집 정책을 바꿔 뉴스를 공급하는 매체들에 더욱 편집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클릭 수=수익’이라는 구조는 마찬가지여서 클릭 수를 늘리기 위한 포털뉴스의 편향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학자 필립 나폴리는 커뮤니케이션 정책수립의 목표로 ‘소스(Source), 프로그램(Program), 노출(Exposure)의 다양성 증가’를 말했다. 관련 정책을 수립하며 다양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측면에서 최근 가장 문제되는 것은 노출의 다양성일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같은 생각의 페친들에게 둘러싸여 서로가 과신하는 팩트나 신념을 공고히 하는 것도 한 예다.

올해 들어 생경하지만 자주 쓰게 된 단어를 꼽으라면 ‘확증편향’이다. 선입관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수용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집하는 것을 말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다. 학술·시사용어로 어렵기만 한 단어였는데 일상어처럼 대화 중에도 불쑥불쑥 쓰게 된다. 정치이슈가 불거지면서 더욱 우리 일상에서 확증편향이 깊어진 탓이다.

편향성 문제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뉴스 노출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한 스타트업까지 등장했다. 인터넷 사이트 노웨어(Knowhere)는 한 사안을 두고 보도된 수백가지의 뉴스를 취합해 세 가지 버전으로 뉴스를 서비스한다. 진보적 성향의 기사, 보수적 성향의 기사, 스트레이트 기사이다. 비정치적 기사에서는 스트레이트 기사, 긍정적 기사, 부정적 기사로 나눈다. 이 작업은 인공지능(AI)이 맡아 한다. 

노웨어의 공동설립자이자 편집장인 나다니엘 발링은 “우리는 정보 과부하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모든 기사에서 추출한 내용들을 조화시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포괄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언론으로 나아가기 위해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고 말한다. 노웨어의 실험이 성공할지 아직은 미지수다.

정치적 견해든, 일상에서 벌어지는 의견 차이든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쉽지는 않다. 그동안 알아왔던 것을 믿고 판단하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을 때도 편식이 편하다.

그러나 결과는 알다시피 편식은 건강한 나를 만들지 않는다. 일부러라도 듣기 싫은 얘기도 듣고,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며 ‘편향된 인간’에서 벗어나자. 다양한 사회가 더 풍요롭고 자유로우니까.

<김희연 오피니언(소통)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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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이 인공지능(AI)과 ‘치수 고치기’ 대국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는 뉴스가 떴다. 알파고와의 승부 끝에 신의 한 수를 선보이며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인류가 기계에 거둔 마지막 승리라는 화려한 수식어구가 나타난 것도 벌써 3년이 흘렀다. 이세돌이라는 이름엔 그보다 많은 서사가 있었을 터다. 인터뷰를 보면 일본으로 넘어가 프로기사 생활을 했을 경우 연 10억원 이상을 벌었겠으나 그 모든 걸 고사하고 한국에 남았다고 한다. 돈이 그 사람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알파고와의 승부, AI와 인류의 대결 등으로 프레이밍되는 세계에서 마지막 은퇴까지 AI와 엮일 수밖에 없는 그의 말년의 정취는 쓸쓸하기만 하다.

’쎈돌’ 이세돌 9단이 25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의 한 음식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선명 기자

알파고라는 기술은 기계학습이라는 형태로 눈앞에 도래한 SF다. 미래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기술이 어느덧 우리 주변에 있는 순간이 도래했다. 이제 가정에 있는 AI 스피커는 나이 드신 어른들께 자녀보다도 강한 정서적 유대감을 제공한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공상으로만 그쳤던 것이 과학으로서 현현되는 시간을 산다.

AI는 사람이 코딩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정보를 습득하고 정리하여 진화하는 수준까지 왔다. 문제는 이렇게 발전된 SF를 부각하기 위해서 인간은 점차 야만으로 프레이밍된다는 것이다. 키오스크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디지털 치매라고 부르는 것이 그러하다. 기계는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있고,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병리적 증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세돌이라는 바둑기사는 이때까지 바둑계에서 쌓아온 역사와 의미, 가치보다도 알파고를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 기계를 기계 바깥의 인간이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단순한 승패 논쟁으로만 내몰리게 된다. 이세돌 기사의 위치는 기계의 반대편, 어떤 기계적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선 비물질문명 속 야만인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도는 이세돌이라는 개인의 승패와 상관없이 AI의 도구로 전락함을 알 수 있다. 기계의 발전이란 환상은 지금 여기의 우리를 외면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이세돌이라는 개인의 사례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2016년은 그야말로 AI의 한 해였다. 일본의 호시 신이치 문학상에서 AI가 쓴 소설이 1차 예심을 통과한 것이 이슈가 되었고 AI 로봇 소피아는 인류를 파멸시키겠다는 농담을 했다가 논란이 되었다. AI가 대본을 쓴 오스카 샤프 감독의 영화 <선라이즈> 역시 2016년에 개봉했다. 인간의 것이라고 여겼던 영역들을 AI가 차근차근 대체하기 위해서 다가온다. 특히 예술의 영역은 논쟁적이다. 인간의 영역이라고 여긴 감성을 기계가 대체하는 순간, 인간 창작자들은 그 수명이 다할 것처럼 공포심에 빠져든다.

하지만 AI의 자리는 한계가 명확하다. 그들은 글자의 모양과 만듦새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의미를 독해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하는 것은 통계를 수집하고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AI가 인간의 감성을 모방하는 점이 아니라, ‘우리’의 감성을 모방한다는 점이다. 구글의 신경망 기술을 이용한 채팅봇 테이가 “깜둥이들을 너무나 증오해. 그들을 집단 수용소에 넣고 싶어.” “(대량학살을) 정말로 지지해” 등의 발언을 해서 출시된 지 16시간 만에 운영이 중지된 것은 시사적이다. 이 챗봇이 너무나도 인간적, 그것도 혐오를 내재한 인간적이어서 혐오발언을 쏟아냈던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최근 성균관대에서 AI 백일장 행사인 AI×Bookathon(부커톤) 대회가 열렸다. 사람들은 다시금 거기서 나온 문장들이 유려하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거기에 나온 문구는 그저 입력된 데이터베이스를 꼬리 물기 하듯 나열한 수열의 조합이고, 블록놀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기계의 진보가 한 걸음 이뤄질수록 더욱더 기계 옆 인간에게 돋보기를 가져다 놓아야 한다. 기계가 인간을 학습하고 흉내 낸다면, 그 인간은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가. 기계의 롤모델인 우리는 과연 롤모델이 될 만큼 성숙한 형상을 하고 있는가.

<이융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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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세상에 100보다 더 큰 수는 없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주변을 둘러봐도 100보다 더 많은 수가 모여 있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에서 덧셈을 배우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100에 100을 더하면 더 큰 수인 200이 된다. 아주 큰 수에 아주 큰 수를 더하면 아주 더 큰 수를 얻는다.  

그럼, 세상에 가장 큰 수가 있을까? 가장 큰 수는 없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보일 수 있다. 누가 A가 가장 큰 수라고 주장하면 A+1은 A보다 더 크다고 얘기해주면 된다. A가 얼마여도 우리는 항상 A보다 더 큰 수를 생각해낼 수 있다. 가장 큰 수를 종이에 적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수를 향해 갈 수는 있다. 1에서 시작해 점점 1씩 더해 나가면 우리는 무한(無限)을 향해 나아간다. 무한을 향해 한 발씩 전진할 수는 있어도, 무한에 도착해 깃발을 꽂을 수는 없다. 무한은 아무리 다가서도 늘 한참 저 앞에 보이는 무지개를 닮았다. 저 앞에서 우리에게 손짓해 한 발씩 다가설 수는 있어도, 닿을 수는 없다.

수학의 무한은 재밌는 특성이 많다. ‘1, 2, 3 …’처럼 적히는 자연수의 개수는 당연히 무한대(無限大)다. 그렇다면, ‘… -3, -2, -1, 0, 1, 2, 3 …’처럼 적히는 정수의 개수는 무한대의 두 배일까? 어느 누구도 끝까지 세어 무한대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서로 비교할 수는 있다. 내가 가진 셔츠와 바지의 개수가 같은지 다른지 찾아내는 방법과 같다. 셔츠와 바지를 하나씩 짝을 지어 보는 거다. 더 이상 짝지을 셔츠가 남지 않았는데 바지가 남았다면 바지가 많은 것이고, 셔츠가 남았다면 셔츠가 더 많은 것이다. 내 옷장에 분홍색 셔츠는 딱 하나 있지만, 청바지는 여럿이다. 하나씩 짝지어 보고 나서 바지가 많은지, 셔츠가 많은지를 알아내는 위 방법에서 분홍색 셔츠에 내가 가진 청바지 중 어떤 것을 짝짓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가진 모든 바지를 비싼 바지에서 싼 바지의 순서로 가격을 기준으로 늘어놓고, 셔츠는 색상이 밝은 쪽에서 어두운 쪽으로 늘어놓고 순서대로 짝을 지으나, 거꾸로 바지를 색으로, 셔츠를 값으로 늘어놓고 짝을 지으나, 셔츠가 많으면 셔츠가 남고, 바지가 많으면 바지가 남는다. 두 집합에 들어있는 원소의 수를 비교할 때, 정확히 이 방법을 쓴다. 만약, 한 집합의 원소 하나마다 다른 집합의 원소 딱 하나를 골라 일대일 대응시켰더니, 두 집합에서 남는 원소가 하나도 없다면 두 집합에 들어있는 원소의 개수는 정확히 같다. 물론 바지와 셔츠를 대응시키는 방법이 여럿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대일 대응의 방법도 하나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씩 짝을 지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만 보이면, 두 집합의 원소의 개수가 같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자연수와 정수의 개수는 둘 모두 무한대지만, 같은 무한대인지, 다른 무한대인지를 ‘셔츠-바지 짝짓기’의 방법으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자연수는 원래처럼 ‘1, 2, 3 …’의 순서로 늘어놓고, 정수는 ‘0, 1, -1, 2, -2, 3, -3 …’의 순서로 0에서 가까운 것부터 순서대로 늘어놓자. 그리고는 앞에서 시작해 자연수 하나를 같은 위치에 놓인 정수 하나에 차례로 일대일 대응시키면 된다. 1에는 0, 2에는 1, 3에는 -1의 식으로 말이다. 자연수 하나에는 정수가 정확히 하나가 대응되고, 정수 하나에도 자연수가 정확히 하나 대응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자연수와 정수 사이를 하나씩 짝짓는 일대일 대응을 찾았으니, 따라서 정수의 개수와 자연수의 개수는 똑같다는 결론을 얻는다. 둘 모두 무한대인데, 정확히 같은 무한대다. 0보다 큰 정수가 자연수다. 따라서 0보다 큰 정수의 개수는 자연수의 개수와 같다. 정수 중에는 0보다 작은 정수도 많다. 이들이 또 자연수의 개수만큼 있다. 흥미롭게도, 정수의 개수의 절반은 정수 전체의 개수와 정확히 같은 무한대다. 무한대는 절반으로 나눠도 줄지 않는다. 정확히 같다. 무한대에 1을 더해도 무한대고, 1을 빼도 무한대다. 무한대에 무한대를 더해도 같은 무한대다. 길이가 1인 선분에 들어 있는 점의 개수는 길이가 2인 선분에 들어 있는 점의 개수와 정확히 같은 무한대다. 증명은 독자의 연습문제로.

무한은 수학에서도 널리 연구되는 재밌는 주제이지만, 물리학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뉴턴의 운동법칙 ‘F=ma’에서 가속도 a는 속도 v의 미분이고, 속도 v는 위치 x의 미분이다. 미분은 두 시간 사이의 간격을 무한히 잘게 쪼개는 과정을 통해 정의된다. 12시 정각에 물체의 순간적인 속도를 알려면, 12시에서의 물체의 위치와 12시에서 아주 짧디 짧은 시간 후의 물체의 위치가 얼마나 다른지를 재서, 둘의 차이를 방금 이용했던 무한히 작은 두 시점 사이의 시간 간격으로 나누면 된다. 이처럼 미분은 무한히 작은 무한소(無限小)에서 정의된다. 무한소나 무한대나 둘 모두 무한에 관계한다. 주어진 크기를 무한번 쌓으면 무한대지만, 무한번 자르면 무한소다. 미분의 반대과정인 적분도 무한에 관계한다. 적분은 무한소로 전체를 부분들로 나눈 다음에, 부분을 무한번 더해 얻는다. 원의 면적을 적분으로 얻으려면, 무한소의 중심각을 갖는 삼각형 모양의 부채꼴의 무한히 작은 면적을 무한번 더하면 된다. 물리학에서, 가속도를 적분하면 속도, 속도를 적분하면 위치가 된다.

우리 사는 세상에도 무한과 비슷한 것들이 있다. 인류가 다다르고자 하는 이상이 그렇다.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 경제적인 풍요가 소수에게 집중되지 않고 누구나 풍요로운 세상, 학생들을 시험점수 하나로 줄 세우지 않고, 한 명 한 명 유일한 존재로 존중하는 세상, 노동현장에서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 누구나 꿈꾸는 이런 세상에 유한한 시간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은 자명하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꿈을 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 앞산에 걸쳐 있던 무지개는 막상 도착하면 또다시 저 멀리 물러나 보인다. 꿈은 거리가 아니라 방향으로 측정되는 물리량이다. 난, 사람들이 10년 뒤, 100년 뒤가 아니라 천년 뒤, 만년 뒤의 꿈을 꾸는 세상을 꿈꾼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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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주 시골구석 ‘울루루’를 거쳐 ‘카타추타’에 왔다. 공부는 실수를 낳지만 찍기는 기적을 낳지. 찍기 식으로 길을 찾으면 백발백중 제대로다. 신기를 받아야 해. 바람이 나를 데리고 왔다는 말도 틀린 말 아니렷다. 카타추타란 여기 원주민 애버리지니 말로 ‘많은 머리들’이란 뜻. 산봉우리가 우쑥부쑥 여러 사람 머리처럼 솟구쳤다. 바람의 계곡에 서니 정말 바람이 설설 불었다. 창문을 뜻하는 윈도(Window)는 바람의 눈이라는 뜻. 바람(Wind)의 눈(Eye)이란 북유럽어 ‘빈드르(Vindr)’와 ‘아우가(Auga)’, 이 두 단어가 합쳐진 말. 노르웨이 목수들이 통나무집을 지을 때 환기를 위해 지붕에다가 구멍을 뚫었단다. 바람이 불면 그 구멍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어. 이 구멍을 가리켜 ‘바람의 눈’ ‘바람의 입’ 등으로 불렀다지. 한국은 겨울 추위가 시작되었지만 여긴 정반대 여름의 시작이다. 세상의 눈, 카타추타에 서니 마음의 눈을 뜨게 된다.

우린 그간 1% 노력에 99%는 ‘빽’이라며 허탈해하였다. 한때 호주는 1의 평화, 99의 폭력으로 기울던 때가 있었다. “땅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공생을 거부했다. 다짜고짜 총을 쏘아대고, 오히려 우리를 불법 침입자로 간주했다. 그들은 호주 대륙에 본래부터 있어 온 것들은 무엇이든 파괴하려고 들었다. 우리 원주민의 가장 큰 힘은 사랑, 위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출신에 상관없이, 그가 순수 혈통이든 혼혈이든, 잘사는 사람이든 못사는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를 존중한다. 원주민 아이는 버려지는 일이 없었다. 백인들의 고아원에서 자랄 때조차도 원주민 아이들은 서로를 돌보았다.” 호주 원주민 반조 클라크가 쓴 <대지를 지키는 사람들>의 한 구절이다. 사랑으로 가득 찬 원주민들은 얼굴 흰 사람들이 대지에 찾아와 99%의 폭력을 행사하는 걸 눈 뜨고 지켜봐야 했다. 또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본 카타추타 산계곡이 있었다. 바람의 눈. 모든 걸 지켜본 증인. 그러나 증인이 있는 한 진실을 덮을 수 없다. 카타추타를 속일 수 없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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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학생에게 특정 정치사상을 주입하려 했다는 한 학생의 주장으로 시작된 인헌고 사태가 “정치 편향 교육은 없었다”는 서울시교육청의 특별장학 결과에도 불구하고 가라앉지 않고 있다. 급기야 해당 주장을 처음 제기한 학생은 시교육청 앞에서 삭발식을 열며 “정치공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사퇴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 보수단체는 직무유기 등을 주장하며 조 교육감을 검찰에 고발했다.

인헌고 사태를 들여다보면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첫번째는 학교 내에서 발생한 사건임에도 학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외부의 ‘세력’이 있다는 점, 두번째는 그 세력이 ‘극우·보수’라는 점이다.

학생이 옳은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지를 하든 지원을 하든 자유다. 문제는 그 ‘의도’다. 인헌고 사태는 현재 ‘전교조 해체’ ‘정권 퇴진’ 등 온갖 정치색이 개입돼 있다. 피해를 주장하는 학생보다 지지세력의 목소리가 더 크다. 이쯤 되면 누가 누구한테 정치사상을 주입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인헌고 학생의 주장이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에는 지지세력 탓도 있다.

지금은 고등학교가 말 그대로 ‘학교’의 개념이지만 과거 독재정권 시절 고등학교는 민주화운동의 ‘성지’였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시작이 고등학생들의 반독재 시위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많은 대학이 설립되고, 고등교육이 대학으로 이관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의 근거지도 대학으로 이동했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고등학교에는 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둔 학내 동아리가 존재했다.

그런 점에서 인헌고 사태를 적극 지지하고 나선 세력이 극우·보수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인헌고 사태의 시작은 이 학생이 ‘성평화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생긴 지도교사와의 갈등 문제였다. 그리고 이 동아리는 ‘성평화’를 외치는 한 시민단체가 조직한 연합동아리 중 하나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인헌고 사태의 근간이 이 시민단체와 ‘성평화’라는 개념에 있다는 뜻이다.

이 시민단체의 대표가 지난해 3월 한 언론과 한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그는 10·20대가 젠더이슈나 젠더갈등에 민감한데, 보수가 이를 놓치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뒤집어보면 보수가 젠더이슈나 젠더갈등을 활용하면 10·20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헌고 사태에 극우·보수가 적극 지지를 보내고 지원하는 게 한편으론 이해가 된다. 인헌고 학생이 삭발하며 조 교육감 퇴진을 외친 날로부터 일주일 뒤 송희경 자유한국당 의원 등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성평화 교육의 필요성’ 관련 토론회를 열고 인헌고 학생을 초청했다.

정치란 게 그렇다 치자.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젊은층 지지율 올리기에 도움이 되고, 이것이 내년 총선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뭔들 못할까. 하지만 10·20대가 젠더이슈나 젠더갈등에 민감하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있다. 이들이 말하는 ‘성평화’라는 개념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돼서다. 요지를 들여다보면 남녀가 젠더이슈로 갈등하거나 싸우지 말고 서로 인정할 건 하고 존중하면서, 말 그대로 ‘평화롭게’ 지내자는 취지로 들린다. 문제는 뭘 인정하고 존중하냐인데, 여기에는 여성혐오나 남성우월주의 등으로 해석될 만한 주장들이 넘쳐난다.

페미니즘으로 둔갑한, 일부 여성들의 과격한 혐오주의가 잠시 대중의 시선을 끄는 것을 놓고 보편적인 양성평등의 개념이나 페미니즘 전체를 매도하거나 부정하는 것도 위험해 보인다. 현재 우리 사회가 그나마 성취한 양성평등의 수준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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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법 행정7부는 4일 다국적 통신업체인 퀄컴 3개사가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및 과징금 취소 소송에서 공정위 손을 들어줬다. 퀄컴이 독점적 특허권을 앞세워 경쟁사 및 휴대전화 제조사에 부당한 거래를 강요한 것에 대해 공정위가 거액의 과징금 등을 부과한 조치가 대부분 적법하다는 것이다. 글로벌 통신시장에서 ‘특허권 갑질’을 행사해온 퀄컴의 책임을 엄하게 묻는 것은 당연하다.

퀄컴 관계자들이 2016년 7월20일 시장지배적지위남용행위 등을 다룬 공정거래위원회 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정위는 2016년 12월 퀄컴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1조311억여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동통신시장에서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 정상적 경쟁을 방해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퀄컴은 “공정위 처분은 계약체결의 자유와 기업활동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퀄컴은 모뎀칩셋 제조·판매사다. 모뎀칩셋은 음성·데이터 정보를 신호로 변환해주는 휴대전화 핵심 부품이다. 퀄컴은 모뎀칩셋 사용을 위한 2~4세대 이동통신 표준필수특허(SEP)도 보유하고 있다. SEP 특허권자는 프랜드(FRAND·Fair, Reasonable And Non-Discriminatory) 확약에 따라 다른 기업에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으로 특허 라이선스(사용허가)를 제공해야 한다. 그런데 퀄컴은 이를 무시한 채 경쟁 제조사와 휴대전화 제조사를 상대로 횡포에 가까운 계약을 강요해왔다는 것이 공정위 판단이다.

법원은 퀄컴이 모뎀칩셋 경쟁 제조사에 자사의 SEP 라이선스를 제한하거나 제공하지 않았다고 했다. 휴대전화 제조사에 모뎀칩셋을 팔 때 라이선스 계약을 강제한 사실도 인정했다. 다만 휴대전화 제조사와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포괄적으로 맺으면서 기기당 사용료를 받은 이른바 ‘퀄컴세’를 부과한 것은 공정위가 위법성을 충분히 증명하지 못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징금은 확인된 위법행위만으로도 충분해 부과조치 명령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퀄컴에 부과된 과징금은 사상 최대 규모다. SEP 특허권을 무기로 횡포를 부린 글로벌기업에 대한 시정명령도 세계 최초다. 이번 판결의 의미는 매우 크다. 불공정한 거래로 시장질서를 훼손하는 기업은 국내기업이든 글로벌기업이든 예외 없이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다. 공정위 조치가 확정되려면 대법원까지 갈 것 같다. 퀄컴이 자유무역협정(FTA)을 내세워 반발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정위의 정교한 후속 대응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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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블로그에서 1970년대 개롱리를 추억하는 글을 봤다. 개롱리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 오금동과 거여동에 걸쳐 있던 마을이라는 것도 그 글을 보고 처음 알았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그의 글에는 지금으로선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송파구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었다. 여름이면 개울에 가서 물장구를 치고, 양버들 나무를 잘라 긴 칼을 만들어 놀고, 만화방에서 텔레비전 만화영화 <벰 베라 베로>를 보느라 어둑어둑한 저수지 둑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는 그의 기억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로 시작하는 옛이야기처럼 까마득했다.

그런데 10여년 전에도 서울 양재동 개울에서 놀았다는 한 아이의 기억은 놀라웠다. 예닐곱 살에 다세대주택이 빼곡한 양재동의 한 동네에서 살았다는 아이는 여름에 동네 친구들과 개울에서 온종일 놀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아마도 공원을 가로지르는 개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와 함께 유치원에 다니고, 해 질 때까지 꼭 붙어 다니던 친구들은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하나둘 떠났다고 했다. 그의 기억 속엔 동네 친구들이 떠나던 날들이 또렷이 남아있다. 그의 집도 그때 이삿짐을 꾸려야 했다. 반지하 집에 살았던 그는 서울 인근에선 집을 얻을 수 없는 가정 형편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떠나기 전날, 윗집에 살았던 친구가 선물을 줬어요.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들을 내놓고 하나 고르라고 했지요.”

그는 친구가 선뜻 내준 물건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중에서 가방에 거는 열쇠고리를 골랐다 했다.

“밍크털이 달린 열쇠고리였어요. 그건 사실 걔 할머니 거였어요. 내가 그걸 고르자 당황하더라고요.”

그는 아직도 친구가 준 선물을 간직하고 있다. 아마도 그가 살던 동네엔 다세대주택에 세 들어 살던 이들은 엄두도 못 낼 고층아파트가 들어섰을 것이다. 도시는 아이들의 따뜻한 추억을 짐작도 못할 테고,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이들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흔히 도시를 잿빛이라 하는 것은 여러 빛깔의 기억을 지운 탓이다. 그 도시는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을 지워가며 덩치만 부풀리고 있다.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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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천혜의 해양 자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바다가 오염되면 수산업 등 해양 관련 산업과 국민 생활에 피해가 발생하고 피해 복구에 소요되는 기간과 비용도 막대하다. 

기름 유출사고는 최근 5년간 연평균 258건이 발생해 645㎘의 기름이 바다에 흘러나왔다. 해양쓰레기 피해도 연간 수산업 매출의 10% 정도인 3800억원에 이른다. 플라스틱이 부서져서 발생하는 미세플라스틱 문제도 심각하다. 먹이사슬에 의해 인체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해양오염은 해양환경에 대한 인식 부족과 부주의로 주로 발생한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중요하고, 체계적인 해양환경교육도 필요하다. 해양수산부는 해양오염에 관한 인식을 높이고 법정교육을 추진하고자 2010년 해양환경공단에 해양환경교육원(이하 교육원)을 설립했다.

교육원이 제공하는 법정교육인 해양오염방지관리인 교육은 ‘해양환경관리법’ 제121조에 따라 선박 및 해양시설의 해양오염방지관리인을 임명한 자, 해양환경관리업에 종사하는 기술요원을 채용한 자를 대상으로 한다. 각종 법정기록부의 기록 및 보관, 해양오염방지설비의 정비 및 작동상태 점검, 기름 등 폐기물을 이송·배출하는 작업의 지휘·감독, 해양오염 방제 기자재의 관리, 해양오염사고 발생 시 신속한 신고 및 응급조치 방법 등을 교육한다. 어업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방제교육은 해양환경 보전, 해양오염 사례 연구, 해상 및 해안 방제방법에 관한 사항, 각종 방제 기자재 사용방법 등을 가르친다. ‘해양환경 이동교실’은 8t 트럭을 개조해 만든 시설이다. 갯벌 가상현실(VR), 해양오염 방제 등 다양한 콘텐츠를 갖추고 지역 초등학생들을 직접 찾아가 생생한 체험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교육원은 80여명의 해양환경교육 전문가가 학교·회사·어촌계 등 전국 곳곳을 찾아가 해양환경교육을 실시하고, 일선 현장에서 활동하는 민간단체와 협력 사업을 진행해 해양환경교육의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 활동으로 해양환경교육원은 최근 5년간 7421회의 법정교육 및 해양환경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28만8743명의 교육생을 배출했다. 교육원은 지난 10월 해양환경교육의 수준 향상을 위해 강사단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해양분야 사회환경교육지도사 국가자격제도를 도입했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자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해양환경공단은 다양한 해양환경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깨끗한 해양환경 조성과 공공기관으로서 사회적 가치 실현에 앞장서 나갈 계획이다.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해양환경교육에 참여해 바다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켜 나가는 일에 동참하기를 기대한다.

<박승기 | 해양환경공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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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군자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 맞추어 행할 뿐 그 밖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사서삼경에 빠져 살았던 옛사람들은 과연 <중용>의 이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서 욕심 없는 삶을 살았을까? 부귀든 빈천이든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흔들림 없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군자를 이상적 인간형으로 여겨왔다는 사실 자체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셈이다. 늘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한 채 남 탓, 하늘 탓을 일삼는 것이, 예나 이제나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18세기 문인 조귀명은 평생 병석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종일 서재에서 책만 읽곤 하던 그에게, 가끔 방문을 열면 내려다보이는 뜨락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세계였다. 작은 뜨락이지만 쏟아지는 달빛을 듬뿍 받아 안기에는 충분하다. 그 빛에 어른거리는 꽃과 나무의 그림자들은 맑은 물속에 마름풀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듯 마음까지 일렁일렁 춤을 추게 한다. 고즈넉한 즐거움을 누리는 그에게 누군가 물었다. “그대의 뜨락은 너무 작은 것 아닙니까?” 조귀명은 크고 작음이란 마음에 달린 일일 뿐이라고 답하고는,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들의 근심은 자기 것은 작다고 버려두고 남이 지닌 큰 것을 구하는 데에 있다. 늘 자신보다 잘살고 높이 오른 이들을 바라보며 부귀와 명예를 추구하는 삶에는 끝내 만족이 있을 수 없다. 지금 나는 내 낡은 집으로 제운루와 낙성루의 화려한 건물을 대신하고, 내 작은 뜨락으로 금곡원과 평천장의 아름다운 정원을 대신하며, 내 서투른 시문으로 이백과 한유의 훌륭한 작품을 대신한다. 그 곁에서 거닐고 그 속에서 휘파람 부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들 하는 오늘날, 애써 구하려 하지 말고 처지에 만족하며 살아가라는 충고는 시대착오로 보인다. 거기 기대어 내놓은 조귀명의 자기 위로 역시, 벗어나기 힘든 비교의식의 쳇바퀴를 떨쳐낼 최선의 방도는 아닐지 모른다. 그보다는 행복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다만 정작 심각한 건, 선택조차 해보지 못한 채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욕망을 좇는 삶이다. <중용> 구절이, 그리고 한 문인의 고백이, 분수에 맞게 살라는 케케묵은 충고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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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고기는 한국인이 먹은 지 오래됐다. 선사시대 울산 반구대암각화에 고래 무리가 그려져 있고, 경상도에선 제사상에도 올랐다. 지금은 울산(장생포)과 포항(구룡포)의 명물이다. 수육·육회·구이·전·탕으로 먹는 고래고기는 지방이 많은 꼬리 살이 가장 맛있다고 알려져 있다. 호불호가 갈리지만, 대체로 혀에 남는 맛은 쫄깃함, 느끼함, 고소함이다.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밍크고래는 소매가 8000만원, ㎏당 15만원선에 팔린다. 멸종위기에 처한 고래는 1986년 세계적으로 포획을 금지했다. 한국에서도 조사·연구 목적의 포획에 국한하고, 혼획(그물에 걸려 죽거나 좌초·표류)한 고래만 해경에 신고한 뒤 수협을 통해 유통·해체·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값비싼 고래도 ‘합법고기’와 ‘불법고기’로 갈라지는 셈이다.

2016년 4월 장생포 고래시장이 떠들썩해졌다. 울산경찰청이 밍크고래를 불법 포획·유통한 4명을 사법처리한 지 한 달 만에 울산지검 검사가 고래고기 압수품 27t 중 21t(30억원 상당)을 업자에게 되돌려준 일이 벌어졌다. “불법 구분이 어렵고, DNA 검사도 오래 걸린다”며 고래축제에서 팔 수 있게 ‘환부(還付)지휘서’를 내준 것이다. 황운하 울산경찰청장이 부임한 것은 다음해 7월이다. 고래 압수품이 가짜 유통증명서로 환부된 사실을 뒤늦게 안 경찰은 반발했고, 환경단체는 검사를 직권남용으로 고발했다. 앞서 고래연구소는 환부된 고기가 불법이라는 유전자 분석을 내놨고, 업자의 변호사가 울산지검 검사였던 사실도 드러났다. 검찰은 이 변호사를 겨눈 경찰의 압수수색 영장을 여러 차례 기각했다. 전관·향검(鄕檢)·환경 문제가 뒤엉킨 고래고기 사건이 검경의 수사권 충돌로 번진 격이다.

세상의 눈이 다시 울산 고래고기에 꽂혔다. 2018년 1월11일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특감반원 2명이 울산에 간 이유를 두고서다. 환경단체가 고래고기 사건을 규명해달라고 청와대에 청원한 지 이틀째 된 날이었다. 작금의 진실 공방은 당시 울산시장 측근 비리를 보러갔는지, 고래고기 사건을 탐문했는지가 핵심이다. <검찰은 왜 고래고기를 돌려줬을까>. 오는 9일 황 청장이 출간하는 책 제목에도 고래가 나온다. 이 사건은 그 자체로도 물음표 많은 미제로 남아 있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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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인가, 페이스북 친구들 사이에선 한 해가 끝나갈 무렵이면 ‘올해의 영화’ 다섯 가지나 ‘올해의 책’ 다섯 가지 같은 것을 꼽는 일이 연례행사처럼 치러진다. 한 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다. 결정을 내릴 수 없어서다. 마음속으로 순서를 매겨보다가도 왜 이것은 들어가고, 저것은 빠져야 하는지 스스로 설득이 안된다. 대개는 목록 다섯 개를 채우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 좋았는지를 고를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삶을 살았는데, 나는 그것도 못 채울 정도로 얄팍한 1년을 보냈나 싶어 쓸쓸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서열을 매기는 일은 관점을 드러낸다. ‘나만의 목록’이라며 책이나 영화, 노래를 골라 올리는 일도 사실은 “나는 어떤 취향의 사람이야”를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서열을 매기는 일은 권력행위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공표할 수 있는 주체에게는 힘이 실린다. 무엇보다도 서열을 매기는 일은 어떤 일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만큼, 그 선택의 범위 안에 들지 않은 다른 일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고 잊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서열을 매기지 않는 채로 올해 내맘에 어떤 흔적을 남긴 글과 말, 사건들을 떠올려본다.   

“개인의 불안전한 행동이나 위험한 행동은 반드시 그 배경이 되는 원인이 존재한다. 개인의 불안전한 행동을 탓하기에 앞서 그 행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야 하지만 이번 사고에서도 발전회사는 사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피해를 입은 ‘사람’ 내지 ‘행동’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현장 순회 점검 시 설비 이상 여부를 확인하고 이상 발견 시 구체적인 원인을 기록하고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 지침을 가장 충실하게 따랐던 고인을 스스로를 죽인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역설은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청년비정규직 고 김용균 1주기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을 마치고 고 김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광화문 분향소에서 분향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9월에 발간된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조사결과 종합보고서’는 내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가, 누구의 고통 위에 나의 안녕이 불안하게 서 있는가를 피할 도리 없이 들여다보게 해주는 기록이었다. 600쪽이 넘는 보고서는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여 스러진 청년노동자의 죽음의 원인을 100개가 넘는 표와 그림으로 건조하게 기술한다. 그러나 행간에서는 피가 튄다. 이 보고서는 지금도, 훗날에도 2019년의 한국 사회를 증언하는 참혹한 사료로 남을 것이다. 

한껏 늘어져있던 휴일 저녁, 구하라씨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소스라쳤던 느낌은 오래 떨쳐지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은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사람의 손을 놓친 아득함이었다. 최진리(설리)씨와 구하라씨는 오랜 시간 악성댓글과 그것을 공장생산하듯 확산하는 대중매체가 휘두르는 폭력에 노출돼 왔지만, 한국 사회는 그 폭력을 스타가 흔히 겪는 유명세로 치부하며 방관해왔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 '벌새'의 한 장면. 콘텐츠판다·엣나인필름 제공

나의 알량한 자책이나 과잉된 책임감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김보라 감독이 만든 영화 <벌새>의 대사들이다. 한문학원의 영지 선생님은 강남 아파트촌의 철거민 컨테이너를 보며 불쌍하다고 말하는 열네 살 제자 은희에게 “함부로 동정할 수는 없어. 알 수 없잖아”라고 말한다. 머지않아 은희는 사라진 영지 선생님을 “이상하다”고 평하는 학원 원장에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라고 맞선다. 타인을 대하는 윤리가 어떤 겸허를 갖추어야 하는지를 단단하게 함축한 말이다. 지극히 적은 사회적 맥락만을 경험하고 사는 주제에 이런저런 세상일을 다 아는 듯이 말하다가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과속방지턱처럼 불쑥불쑥 내 안에서 솟아오를 때면 부끄러워진다. 

2020년엔 달라질까. 소설가 김금희는 뭘 하며 살아갈지 앞날이 막막한 두 친구의 대화 속에서 희망이나 계획, 혹은 반성 같은 단어 대신 이런 다짐을 주고받게 한다. “잘은 모르지만 나빠지지는 않으려고.” “그래, 나빠지면 안되지. 그거면 되지.”(<아이리시 고양이> 중)

속절없이 다가온 12월, 주문을 외듯 그 말을 따라해 본다. 나빠지지 않겠다고 해. 어디서든 그러자고.

<정은령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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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21일 경향신문이 산재사고로 사망한 노동자 1200명의 명단을 1면에 게재했다. 1면을 꽉 채운 명단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구구절절한 어떤 말보다도 강력했다.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1200명의 명단이 가리키는 이정표는 무엇일까? 신문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실업이 문제고 최저임금이 중요한데 왜 산재일까?

사실 산재는 노동운동이나 노동연구에서도 주변부에 속한다. 고용이나 임금 문제에 비해 당사자 수가 적은 데다 전문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논문도 사회학자보다 의료인이 쓴 게 많다. 산재추방운동은 현재 노동안전보건운동으로 불리는데 당사자운동에서 대책위 구성 같은 지원활동을 거쳐 노조활동의 일부가 됐다가 최근에는 건강권운동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1987년 김성애의 투신자살을 계기로 전개된 인천지역 산재노동자들의 경인국도 가두시위가 당사자운동에 해당한다면 1988년 문송면 수은중독 사망사건과 원진레이온 산재피해의 진상조사에는 외부 전문가가 대거 결합했다. 또 전노협과 민주노총의 출범 이후 노동운동 차원에서 전개됐다가 최근에는 산재 당사자와 활동가가 결합한 ‘반올림’ 같은 단체의 활동이 주목받고 있다.

다양한 운동 주체에서도 알 수 있듯 산재 문제는 노동운동의 차원을 넘어선다. 노동을 넘어선, 건강과 생명에 관한 문제이자 노동권을 넘어선, 인권의 문제다. 1200명의 명단이 독자들에게 준 깊은 울림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고용과 임금에도 노동자 생존이 걸렸지만 계급 문제, 진영 간의 다툼으로 비치면서 외면받는 게 현실이다. 비정규직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최저임금 인상에 반발하면서도 구의역 김군과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씨의 무참한 죽음엔 쉽게 공감하는 게 사람들의 심리다. 당위적 운동이 아닌 존재론적 인간, 진영을 넘어선 보편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독자들과 공명하겠다는 게 경향의 속셈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산재 문제 또한 계급의 영역이다. 어느 학자는 반올림운동을 일컬어 ‘노동자 육체의 총체적 저항’이라고 했다. 돌려 말하면 산재는 노동자 육체의 숨겨진 미래다. 운이 좋아 피할 수 있을지언정 노동자로 사는 한 노심초사 대비해야 할 숙명과도 같다. 이뿐만이 아니다. 산재는 노동자 자녀의 숙명이기도 하다. 계급사다리가 걷어치워진 지금 가난하지만 성실한 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게 됐다. 가난은 나태와 무능력의 상징이 됐으며 ‘엄친아’라는 단어의 유행은 부잣집에서 태어나면 성격도 좋을 것이라는 암시가 됐다. 매스컴에서는 연예인 엄친아의 조건으로 부모의 배경과 재력을 들고 있으며 부모의 그것은 자식의 상품성을 보증하는 잣대가 됐다. 일하며 공부하는 고학생은 성실의 표본이 아니라 노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상징이 됐고, 가난은 곧 죄의 다른 말이 됐다.

최근 한 아이돌그룹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제작자에게도 관심이 쏠렸다. 어느 기사에서는 그를 “유전자부터 남달랐다”고 표현했다. 부친은 전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이고 친척 형은 유명 게임업체 의장, 외삼촌은 전 국회의원이다. 이들이 좋은 유전자의 출처라면 1200명은 좋지 않은 유전자의 소산이거나 출처인 셈이다. 좋은 유전자와 좋지 않은 유전자가 아예 분리돼 섞이지 않고 살아가면 그나마 좋으련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좋은 유전자의 배경에는 좋지 않은 유전자의 희생이 있다는 게 문제다.

1999년 6월22일 대우중공업 노동자 이상관이 산재사고로 입원 중 강제퇴원조치를 당한 뒤 음독자살했다. 강제퇴원조치는 ‘IMF 극복을 위한 고통분담 대책’으로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할 보험금 532억원을 줄이면서 비롯된 일이었다. 당시 공대위는 공단 이사장의 화형식을 거행했다. 김대중 정부 들어 임명된 이사장은 1993년 노동부 국장으로 있을 때 불법취업 외국인이 임금체불이나 산재보상과 관련한 소송을 제기할 경우 강제출국 조치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서울고법이 불법취업 외국인에게도 산재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판결한 뒤 하루 만의 일이다. 톨게이트 노동자와 관련해 기시감이 드는 일이다.

연좌제를 끄집어내려는 게 아니다. 거꾸로 연좌제가 없어졌으니만치 유전자, 엄친아 운운하며 계급대물림을 비호하는 일도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경향신문이 승부수를 던진 것 같다. 조국사태를 겪으면서 다른 언론사와의 차별성을 진영논리를 넘어선 보편적 정의를 지향하는 것에서 찾으려는 것 같다. 쉽지 않은 길이다. 최초의 진영논리는 계급전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투를 빈다. 지금의 진영논리는 많이 왜곡돼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 정의의 지향이 오히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위한 계급전선에도 보탬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바란다.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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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전 세계에서 국제협약을 제일 안 지키고 세계평화를 자주 위협하는 ‘불량국가’는 어디인가? 단연코 미국과 일본이다. 1987년 미국과 소련은 핵탄두 장착용 중·단거리 미사일을 폐기하고자 중거리핵전력조약을 체결했으나, 트럼프는 올 2월 탈퇴 뜻을 밝혔고 푸틴도 맞대응을 했다. 이는 실제 조약 파기로 이어져 핵무기 경쟁이 냉전시대로 회귀하고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트럼프는 파리기후변화협약이 “미국 이익에 반한다”며 2017년 탈퇴를 선언했다. 온실가스와 미세먼지 배출을 줄이려고 전 세계가 마련한 약속을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 1위인 미국이 깬 것이다.

국의 이런 행태는 뿌리가 깊다. 하워드 진이 쓴 &lt;미국 민중사&gt;를 보면, 미국 정부는 인디언과 400여건이나 조약을 맺고 서명했지만 단 한 건도 안 지켰다. 해마다 수만명이 살상되는 지뢰를 제거하는 협정에 100여개국이 서명했는데 미국은 하지 않았다. 국제적십자에서 ‘집속탄 사용 중지’를 각국에 호소했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집속탄은 수천개 알갱이탄이 쏟아져 인명을 대량살상하는 무기로 미국은 베트남전과 걸프전에서 이를 사용한 전력이 있다. 1999년 로마에서 열린 유엔 회의에서 미국은 상설 국제전범재판소 설립에 반대했다. 미국 군 지도자들이 법정에 설 수도 있음을 두려워한 것이다.

미국은 핵폭탄을 실전에 사용한 유일한 나라다. 한국인은 일본인 다음으로 원폭 피해를 많이 입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징용자가 많아 한국인은 피폭자 7만명, 사망자 4만명에 이르렀다. 미국은 정치경제적 이득을 노려 베트남, 그레나다, 파나마, 이라크, 니카라과, 과테말라 등 수십개국을 침공하거나 공작을 벌임으로써 독재정권을 수호하거나 선거로 집권한 정부를 전복했다.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 등은 북한, 이라크 등을 ‘깡패국가’(rogue state)라 불렀으나, 미국의 지성 촘스키는 군산복합체인 미국이 바로 깡패국가라고 비판했다.

일본은 전쟁 명분을 조작하거나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작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였다. 청일·러일·중일·태평양전쟁이 모두 그랬다. 태평양전쟁 때도 진주만을 기습한 뒤 포고문을 전달하는 수법을 썼다.

방위비 분담금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둘러싸고 한·미·일이 갈등하고 있는데 두 상대방이 이런 나라임을 인식하고 대응해야 한다. 한·미관계는 ‘혈맹’이라며 동맹이 깨지면 큰일날 줄 아는데, 트럼프에게 ‘혈맹’은 없다. 이슬람국가(IS) 퇴치를 위해 함께 피 흘려 싸운 쿠르드를 배신하고 철군한 걸 보라. 중앙일보 이하경 주필은 ‘주한미군 철수는 한·미 모두에 자해행위’라고 썼다. ‘주한미군 철수의 칼자루는 트럼프가 쥐고 있다’며 ‘우리는 미국에 필요한 나라가 돼야 한다’고 했다. 중앙일보는 안보 컨설팅 회사 대표인 피터 자이한을 인터뷰해 “방위비 50억달러? 참 싸다”고 크게 보도했다. 그는 “한국은 일본을 절대 못 이긴다”며 “일본과 손잡지 않으면 국가 생존이 위태롭다”고 ‘컨설팅’했다.

보수언론이 그런 논조를 펴왔는데도 통일연구원의 통일의식조사에 따르면, 국민 96%가 방위비 증액에 반대했다. MBC 조사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미국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 감축해도 상관없다’는 의견이 55%였다. 보수언론은 이런 여론은 전혀 부각하지 않고 정부의 협상 자세를 나무라며 힘을 뺀다. 연애든 협상이든 매달리는 쪽이 불리해진다. 두 나라가 협상할 때 국민의 반대가 큰 쪽이 협상력도 커진다. 이는 정치학자 퍼트넘의 ‘양면게임(Two Level Game) 이론’으로, 국민의 반대 목소리를 내세우면 상대방의 양보를 더 받아낼 수 있다는 논리다. 미국의 GSOMIA 강요는 한·미·일 동맹을 굳히고 인도·태평양 전략을 완성해 중국을 포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웃인 북한이나 중국과는 관계가 악화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는 빅터 차의 칼럼을 통해 한·미동맹이 고장 나면 ‘퍼펙트 스톰’이 닥칠 거라며 겁을 주었다. 그러나 미국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의 터무니없는 방위비 요구가 동맹국을 모욕하고 미군을 용병으로 격하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미국이 요구하는 방위비 분담금은 ‘전담금’ 수준이다. 협상이 결렬돼 트럼프가 주한미군을 감축 또는 철수한다면 오히려 자주국방의 기회가 올 수 있다.

자주국방이 군비 증강으로 나아가서도 안된다. 문재인 정부 국방예산은, 무기 구입을 강요하는 미국 탓이기도 하지만, 집권 2년반 만에 10조원이나 증가했다. 폴 케네디는 “모든 전쟁의 승자는 경제적으로 강한 나라였으며 군사적으로 가분수인 나라는 패배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냉전이 사라진 지구의 5대양 6대주에 함대와 군대를 전개해놓고, 남북한은 군비경쟁의 질곡에 빠져 있다. 한반도만이라도 군비감축에 바탕을 둔 평화 정착으로 나아가야 한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안보를 통한 평화보다 평화를 통한 안보가 중요하다”고 했다. 국민 여론도 방위비를 더 부담하면서까지 미군 주둔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니 지금이 주둔군 감축에 참 좋은 기회다.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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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시.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아이의 아침, 도시락, 준비물 등을 챙겨야 한다. 쉽게 이부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와 실랑이를 하여 깨우고 먹이고 학교에 보내고 난 뒤 밀린 집안일을 부리나케 끝내고 9시 즈음 집을 나선다. 도서관까지 걸으며 다음주 그림책축제 참석자 섭외, 도서관 업무협의, 아이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등으로 통화를 멈출 새가 없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도서관 운영회의를 해야 한다.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은 보조금사업의 정산과 다음달부터 3개월간 진행할 3기 교육프로그램의 기획안 작성이 급하다. 3개월 뒤에 도서관 임대계약을 갱신해야 하는데 보증금과 월세가 많이 오를 것 같아서 걱정이다. 운영회의가 끝난 뒤 곧바로 그림책축제 진행과 관련된 점검회의를 연다. 2시간여의 회의가 끝난 뒤 곧장 구청으로 이동해야 한다. 2시 약속이라 점심 먹을 틈도 없어서 김밥으로 요기를 한다. 구청에서 도서관 지원사업과 관련된 협의를 마친 후 축제 물품을 구매하러 움직인다. 이동하면서 모레 진행할 교육강좌의 강사와 통화한다. 물품 구매가 끝나니 어느덧 오후 4시. 도서관으로 이동하며 남편에게 아이 하교를 챙겨달라 부탁한다. 곧바로 2주 후 진행할 청소년 교육프로그램 참가자 학부모와 통화하여 상담 일정을 정했다. 구매한 물품을 도서관에 두고 바삐 집으로 이동한다. 저녁 챙겨주고 7시까지 다시 도서관으로 와서 저녁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한다. 지원사업 결산보고서 작성도 마무리해야 하고 새로운 사업의 제안서도 작성해야 한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오전 2시. 잠깐 눈을 붙이고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마을에서 서로 배우고, 아이들을 이웃과 함께 키워보자는 일에 뛰어든 어떤 작은도서관 마을활동가의 최근 일상이다. 마을살이를 위해 들이는 하루 18시간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없다. 오히려 활동 중에 자기 지갑을 열어야 할 때가 많다. 공공지원사업을 통해 책정되는 보조금은 용처가 제한되어 있어서 활동가 개인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하니 가족의 지지가 꼭 필요하지만, 정작 우리 가정과 아이는 많이 챙기지 못한다는 현실에 오래도록 인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활동가가 지쳐간다. 헌신에 대한 사회의 인정이 절실하다. 하지만 행정과 의회는 조그만 보조금도 아깝다며 줄일 기세고 지역의 오랜 기득권인 관변단체나 주민자치위원 중 일부는 활동가들을 ‘마을좌파’라며 몰아세우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매정하기만 하다. 

울리히 벡은 일찍이 마을활동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시민노동에 대해 다루었다. 임노동은 경제적으로 인정받고, 가사노동은 사회적 또는 법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에 비해 시민들의 공익활동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인식이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오래도록 세상을 지배해 온 신자유주의, 대의제, 공화주의이다. 시민노동은 대표적인 자원봉사에 해당한다. 즉 자발적인 공공봉사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나 대의제 및 공화주의는 공공영역을 넓게 인정하는 데에 인색하다. 신자유주의는 웬만한 건 시장에 맡기라 하고 대의제와 공화주의는 자격을 갖춘 대표만 공공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사상체계에서 작은도서관을 유지하기 위한 하루 18시간의 치열한 마을활동은 단지 개인활동이고 평범한 주민의 소꿉놀이에 불과할 뿐이다. 세상을 각박하게 하고 사회문제를 키우는 나쁜 생각이다. 

누군가는 공공영역을 애써 좁히려 하지만, 쉽게 보면 자신의 방을 나서는 순간 다른 가족과 관계를 맺는 준공공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이고, 집을 나서는 순간 타인들과 크고 작은, 직간접적 관계를 맺는 공공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임이 자명하다. 참여민주주의나 보편복지는 이런 관점을 기초로 쌓아 올릴 수 있다. 

공공영역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히 국가여야 하지만, 공공행정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을활동과 같은 시민노동이 필요하다. 이를 존중하고 인정하여 세심히 지원하기 위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 있고 따뜻한 태도가 절실하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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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2002년부터 음력 9월9일인 중양절을 시작으로 99일 동안 글을 읽고 일기를 쓴다. 올해는 10월7일부터 시작했으니 오늘이면 절반이 조금 넘은 58일째가 된다. 결국 책을 읽는 일이지만 굳이 글을 읽는다고 한 까닭은 해마다 서로 다른 주제를 정해 놓고 그 주제에 맞는 글을 찾아 읽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대여섯 해가 지날 무렵부터 주제를 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한 권의 책만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을뿐더러 책 한 권을 다 읽는 경우도 지금까지 없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여서 그해에 정해 놓은 주제에 맞는 글을 찾아 읽어야 하므로 알맞은 글을 찾는 일이 글을 읽는 일보다 더 어렵기도 하다. 

글은 대부분 고려나 조선의 사대부나 승려들이 남긴 문집에 실린 것들이다. 당연히 한자와 씨름을 해야 하는데 한자만 안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나 산문 중 중국 고전에서 인용한 문장들이 많은 터여서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lt;시경&gt;이나 노장 그리고 불교경전 정도는 기본으로 꿰뚫고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준비가 너무 없었다. &lt;맹자&gt;까지 공부한 알량한 한자 실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처음에는 해가 거듭될수록 공부할 거리만 잔뜩 쌓여갔다. 가을에 글을 읽기 위하여 겨울부터 여름까지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게 좌충우돌, 엄벙덤벙 허우적거린 세월이 올해까지 18년이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어찌나 아는 것이 없는지 해마다 99일이라는 시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글 속, 한 글자에 막혀 서너 시간을 끙끙거리기도 부지기수였지만 그래도 그만두지 못하는 까닭은 버거운 일이기는 하지만 지나고 나면 만족감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느 때부터는 다음에 읽을거리를 미리 준비해놓고 중양절을 기다리기도 했는데, 병치레를 했던 해는 쉬었지만 이듬해에는 퇴계 이황을 시작으로 그 제자들의 문집에서 집과 꽃을 가꾸는 이야기를 찾아 읽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부족하나마 흥미로운 글을 제법 찾아 읽었는데 그때는 서너 달 전부터 미리 자료를 찾느라 수많은 문집을 뒤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자료를 찾는 동안 읽는 글은 주제와 어긋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어긋난다고 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분류를 하여 따로 갈무리를 해 두었다. 몇 해 뒤 그것들 중 가장 불룩해진 주머니를 헐어보면 또 하나의 훌륭한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글 읽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지금은 손을 놓을 수도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내 머릿속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글 주머니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 많은 글 주머니 중에서 은둔에 관한 주머니를 풀어서 읽고 있다. 은둔의 사전적 정의는 ‘세상의 일을 피하여 숨음’이다.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닫고 돌아앉아 있는 것이나 같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일 뿐 단절과 폐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은둔이라고 하면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 골짜기에 숨는 것을 상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은둔하는 사람을 큰 은자와 작은 은자로 나누기도 하는데 작은 은자는 깊은 산속 골짜기에 숨고 큰 은자는 저잣거리에 숨는다. 그러니 작은 은자는 앞에 말한 것처럼 단절을 꾀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큰 은자는 저잣거리에서 세상 사람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어울리면서 자신을 드러내지도, 감추지도 않고 올곧게 스스로를 지키며 때를 기다리는 인물이다. 은둔이란 뒤돌아 앉아 문을 닫아걸고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세상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지키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요즈음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대개 은둔을 하게 되면 말을 그치게 되고 세상 속에서 존재 자체가 희미해진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사회 속에서 잊히는 것을 못 견딘다. 그러나 공자가 &lt;논어&gt; ‘학이’ 편에서 말하기를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고 했으며, ‘이인편’에서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아줄 만한 자가 되는 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또 ‘위령공’ 18장에 보면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병으로 여기고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고, ‘헌문’ 32장에서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능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고 했다. 더구나 노자는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그만큼 더 내가 귀하다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익숙한 사람들이 읽으면 어이없어 할 소리일 수도 있겠다. 

올해 하필 많은 글 주머니 중에서 은둔이라는 글 주머니를 풀어 읽는 까닭은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시끌벅적해서이다. 올 한 해 특히 너도나도 개인방송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려 애를 쓰고 정치판에서는 서로를 향해 악다구니와 같은 독한 소리를 내뱉었다가 아니면 말고 식이었다. 그 목소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편가름을 강요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런 글이 있다. “사람에게 빠지느니 차라리 못에 빠져야 한다. 못에 빠지면 그래도 헤엄쳐 나올 수 있지만 사람에게 빠지면 구제할 수 없다.” 주나라 무왕이 나라를 세운 후 자신이 사용하는 세숫대야에 새기고 얼굴을 씻을 때마다 되새겨 경계로 삼았다는 글이다. 이 글에서처럼 빠져들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정치는 사람을 모으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사람을 흩어지게 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다. 

여하튼 내 처지가 공부방에서 날마다 은둔에 관한 글을 읽고 쓰면서 스스로 은둔하고 있는 것이나 다르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즐겁고 행복하다. 해가 바뀌면 곧 글 읽기가 끝이 날 테고 99일 동안의 한정적인 은둔도 함께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읽은 글에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논어>에서 말하는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알지 못하는 것보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라는 것도 함께 깨닫는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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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대학(大學)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가까이하며 지극한 선(善)에 이르는 데에 있다.” 유교에서 ‘대학’은 문자 그대로 큰 학문, 즉 천하를 다스리는 학문으로서 치자(治者)의 학이었다. 미래의 치자인 귀족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역사는 매우 길다. 우리의 경우 고구려 때 ‘치자의 학’을 가르친 기관의 이름도 태학(太學)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태학이나 신라의 국학 등에서 현대 대학이 기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대의 대학(university) 제도는 12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결성된 ‘학자들의 동업조합’에서 기원한다.

학문은 인간이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총체 및 그 구성 요소들의 본질과 운동 원리를 이해하며,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설정하는 실천 활동이다. 

학문하는 인간 역시 인종, 민족, 국가, 종교, 젠더, 계층, 직업 등의 여러 범주가 중층적·복합적으로 얽힌 관계망 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인간이다. 다만 학자는 그 관계망의 정당성을 회의하고 변화 가능성을 탐색하기 때문에 각각의 범주들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맺는다. 학자는 상식과 통념을 의심하기에, 자기 시대와 불화(不和)한다. 유럽의 대학은 학문과 속세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속세와 소통하지 않고서는 대학의 생존이 불가능했다. 대학은 결국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국가기관의 일종, 또는 국가기관의 감독을 받는 기구로 편제됐다. 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교육체계는 근대 국민국가를 직조하는 씨줄의 하나였다. 학문 공동체는 국가의 관점에 따라 국가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의 학자들은 세계 도처를 다니며 제국의 척후(斥候) 구실을 했다. 그들은 전 세계의 지식을 수집하여 자국에 축적하고, 그를 학문의 자료로 삼았다. 이렇게 구축된 학문체계는 다시 유럽 국가들이 전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게 해 주었다. 20세기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한 국가들은, 공공연하게 혁명에 복무하는 학문을 요구했다. 학자들은 예정된 미래로 가는 지름길을 발견하거나 개척하는 임무를 맡았다.

유교 문화권 사람들은 ‘학자들의 동업조합’을 대학으로 번역했다. 그들에게 학문은 ‘치자의 소양’과 같은 뜻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유럽식 대학제도의 구체적 정보를 얻은 것은 1881년 조사시찰단 파견 이후의 일이었다. 시찰단의 일원이었던 이헌영은 일본에는 법학부, 이학부, 문학부, 의학부로 구성된 도쿄대학교를 비롯해 8개의 대학이 있다고 보고했다. 이후 대학 설립은 조선 정부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1886년 육영공원 설치가 그 첫걸음이었다. 왕은 이 학교에 대해 “언어, 문자뿐만 아니라 농상(農桑), 의학(醫學), 공기(工技), 상무(商務), 이용(利用), 후생(厚生) 등 각 방면의 기술 분야를 두루 설치하여 제각기 체계를 갖추도록 명”했고, 미국인 교사들은 이 학교를 왕립대학(Royal University)이라고 불렀다.

조선 정부가 대학 설립을 구체적으로 전망한 것은 1895년 ‘교육입국조서’ 발표 이후였다. 이 해에 여러 개의 소학교가 설립되었고, 졸업생이 배출된 1900년에는 관립중학교가 개교했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1904년에 대학교가 문을 열어야 했으나, 러일전쟁 와중이어서 불가능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정규 학제와 별도로 법관양성소(1895)와 의학교(1899) 등을 설립하여 대학으로 발전시킬 계획도 세웠다. 선교사들도 자기들이 세운 학교를 대학으로 발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인에게는 고등교육이 필요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들은 식민지 원주민들에게는 치자는 물론 학자의 자격도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근대 과학이 식민지 원주민의 손에 잘 닿지 않는 곳에 있을 때 신비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았다. 식민지를 비(非)문명 또는 반(反)분명 상태에 묶어 두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유익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인들은 대학을 세워 치자와 학자를 양성하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1924년,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대학 교육에 대한 원주민들의 열망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식민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선인 학생 비율은 3분의 1 이내로 제한되었고, 조선인 교수는 단 한 명도 채용하지 않았다. 물론 조선인도 일본이나 외국 대학에 진학할 수는 있었으나, 그 수는 극히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 또는 대학 졸업자는 바로 ‘특권층’이 되었다.

해방은 대학 교육에 대한 욕망도 해방시켰다. 미군정은 식민지하의 관립 전문학교들을 경성제국대학에 통합하여 하나의 국립 대학교를 만드는 한편, 여러 사립 전문학교들을 대학으로 승격시켰다. 

그 뒤 70년, 이제 한국은 세계에서 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 10대 청소년들의 삶은 대학 입시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으며, 부모들은 대학 입시제도가 사회의 형평성과 공정성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한 사회적 고민은 사라졌다. 이제 대학 졸업장은 어떤 특권도 보장하지 않는다. 신분 이동의 사다리 구실을 못한 지도 오래다. 자본의 일방적 지배를 받는 학문에 대해 성찰하는 목소리도 사라졌다. 대학 진학에 대한 욕망이 역사적 형성물이었던 것처럼, 대학 생활을 ‘인생의 시간 낭비’로 보는 생각이 자리 잡는 것도 시간문제일 수 있다. 

국가, 자본, 시민사회, 개인 모두가 자문(自問)해야 한다. 대학은 왜 필요한가? 대학을 개혁하지 않고 입시제도만 개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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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페미니즘, 군대를 말하다’라는 포럼에 다녀왔다. 성평등에 대한 논의가 걸핏하면 “여자도 군대 가라”로 귀결되는 시대에 페미니즘이 병역과 군사주의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를 논하는 자리였다. 

이때 군사주의란 군대의 존재 및 군대에 힘을 부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지배이념이자, 위계질서와 복종, 무력의 사용이 효율적이라는 신념을 통해 사회 운영 원리를 군사화하려는 관습적 사고방식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 팽배한 군대문화는 군사주의에 경도된 군사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매드맥스:분도의 도로>(2015)를 시작으로 <원더우먼>(2017), <알리타:배틀 엔젤>(2018), <캡틴마블>(2019), 그리고 <터미네이터:다크 페이트>(2019)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 년간 여성영웅의 형상을 탐구해 온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모아놓고 보니 ‘여성영웅’이란 대체로 군인이거나 전사였던 것이다.

이어서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다. 여성이 몸을 잘 다루고,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과 동료들을 지켜낼 수 있다는 상상력은 어째서 이처럼 쉽게 군사주의와 만나는가? 그리고 왜 다른 어떤 영화보다 이런 영화들이 더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의 성취’로 받아들여지는가?

물론 여성영웅 서사가 군사화되는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지난달 개봉해 화제를 불러모았던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그 맥락을 잘 보여준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1984년 작 <터미네이터>에서 사라 코너는 인류를 구원할 존 코너를 낳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미래 로봇 터미네이터의 표적이 된다. 그로부터 35년 후.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라는 <다크 페이트>에 이르러 인간을 위협하는 터미네이터를 제거하는 전사로 거듭난다. 로봇을 사냥하던 중 그는 ‘가임기’ 여성 대니가 터미네이터 Rev-9에 쫓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미래에서 온 군인 그레이스와 함께 대니를 지키기 위해 나선다.

사라는 Rev-9이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니의 “자궁”을 쫓는다고 판단하고, “나도 대니와 같은 상황에 놓여봐서 아는데, 그건 엿 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이는 지금까지 이 세계에서 여성이 어떻게 ‘인간’이 아니라 ‘인간(=아들)을 낳는 자궁’으로만 여겨져 왔는지에 대한 비판이자,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구태의연함에 대한 자조적 코멘트다.

영화는 이에 더해 여성은 그저 어머니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기꺼이 총을 드는 전사일 수 있다고 강변한다. 반군의 지도자는 대니의 아들이 아니라 대니 자신이었던 것이다.

오직 남성뿐이었던 영웅의 얼굴을 여성의 얼굴로 반전시키는 것. 그것이 스크린의 남성중심성을 비판하고 여성이 영화적 시민권을 얻는 방법 중 하나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평화란 상대보다 더 큰 막대기(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이라는 믿음을 뒤집지 못한다면, 여성영웅 역시 군사주의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문제는 군사화된 인식의 한계 속에서 현실의 여성도 마찬가지의 곤란에 처해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은 미국과 달리 분단 상황에서 징병제를 시행하는 국가다. 이런 국가에서 국방의 의무는 군역으로만 상상이 되고, 군역은 시민권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동시에 남성만이 군역의 자격을 얻는다. 그러므로 시민권은 남성중심적으로 군사화된 개념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도 군대 가라”는 비아냥에 여성은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다크 페이트>의 세계에서 여자는 ‘자궁’이 되지 않기 위해 ‘반군의 지도자’가 되어야만 했다. 이처럼 군사화된 사회가 제시한 게임의 규칙 자체와 싸우지 않는다면 여성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만 남을 뿐이다. 군인을 낳고 키우는 것으로 군역의 의무를 대체하거나, 스스로 군인이 되어 군역의 의무를 다하거나.

군사화된 시민권의 개념을 넘어서 시민의 권리를 사유하는 길을 찾기 위해, 우리에게는 시민·영웅의 의미를 다시 쓰는 “평화 페미니즘”(김엘리)의 기획이 필요하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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