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친구 모임에서는 꼭 ‘농활’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풋풋했던 시절의 가장 끈끈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서다. 방학을 맞으면 품삯이라도 벌충하길 바라던 부모님 뜻을 거스르고 굳이 농활을 가서 남의 밭을 매곤 했다. 덕분에 영호남 두루 다녀보았고 이는 공부의 자산이 되었다. 도시내기 친구들도 텔레비전에서 농활 지역 이야기가 나오면 눈길이 간다고 말한다. 정서적 연고가 생긴 셈이다. 

도시민 10명 중 3명은 은퇴 후 농촌에 내려가서 살 의향이 있다 하지만 막상 돌아가고 싶은 농촌은 소멸 위기다. 농어촌 지역의 43% 정도가 소멸위험 지역으로 분류될 정도고, 지방재정은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곳도 많다. 이런 도농 간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고, 농어촌 생존에 어느 정도 숨통을 틔울 방법으로 고안된 제도가 ‘고향세’다. 이는 수도권 주민들이 일정 금액을 농어촌 지자체에 기부하고, 세금 공제를 받는 제도다. 이에 대한 답례로 지자체는 지역의 특산물로 기부자에게 답례품을 제공할 수도 있다. 

‘고향세’는 2008년 일본에서 먼저 도입되었다. 농어촌 과소화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고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최근 고향세 납부의 과열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답례품 경쟁이 과열되면서 제도적 보완에 들어갈 정도로 고향세는 인기다. 한국은 2008년 당시 문국현 대선후보가 공약으로 내걸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이기도 하다.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되어 있다. 고향세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60% 정도의 찬성률을 보이고 있다. 다만 정치권의 이해득실이 남았다. 여야를 막론하고 농어촌 기반의 국회의원들은 빠른 도입을 촉구하고 있지만, 대도시 국회의원들은 세수가 유출될까 봐 소극적이거나 반대 입장이다. 결국 아직까지도 고향세 도입 논의는 표류 중이다. 

고향세가 도입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고향에 기부하겠다. 도시 태생의 시민들은 여행을 가서 위로를 받은 지역에 할 수도 있고, 대학 시절 다녀온 농활의 추억을 떠올리며 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 고향세 도입에 대한 신뢰가 충분하지 않다. 홍보 부족과 집행의 투명성 미비 때문이다. 따라서 농어촌 주민들의 실질적인 복지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용처가 분명히 정해져야 한다. 지역마다 사정이 다르니 답례품의 형평성도 맞출 필요가 있다. 어찌 됐든 제도적 장치만 섬세하게 마련된다면 좋은 제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근래 지방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긍정적이었던 마음이 차갑게 식는다. 예천군의원들 해외연수 추태와 자리 보존을 하는 뻔뻔함을 보자면 말이다. 예천군 농산물 불매 움직임까지 나왔을 정도로 시민들의 분노가 크다. 사과로 유명한 예천군은 이번 설날 대목장 주문이 급감해 생산자들이 타격을 받았다. 지방의원들이 지역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킨 것이다. 급한 마음에 예천군수가 농산물 구입을 호소하고 나선 상황이다. 이는 전형적인 ‘오너리스크’다. 외식 프랜차이즈 오너들의 갑질과 추태에 결국 등 터지는 것은 가맹점주들인 것처럼 예천군민들 등만 터져나갔다.

‘고향사랑기부제’든 ‘고향세’든 세금이 움직이는 일이고, 세금 배치는 정치의 문제다. 그런데 농촌에 숨통이 트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정 기부한 돈이 저 정도 수준의 정치인들의 손에 놀아날까 봐 망설여진다. 예천의 사과는 달고 맛있다. 사과는 죄가 없다. 다만 사람이 죄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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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고위 공무원이며 현재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에 파견되어 있는 한민호 사무처장이 대한출판문화협회(이하 ‘출협’) 윤철호 회장을 명예훼손으로 형사고발하고 민사소송도 제기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지난 1월7일 윤철호 회장은 문체부가 작년 12월31일 발표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책임규명 이행계획이 불공정하고 불철저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윤태용 한국저작권보호원장과 한민호 사무처장의 실명을 거론했는데, 후자가 자신의 명예를 크게 훼손했다며 고소·고발을 한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16년 8월, 당시 한민호는 문체부 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SNS상의 댓글로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고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대한민국 지성사에 치명적인 해독을 끼친 책입니다. 반성하는 의미에서 상응하는 책을 ‘해당 출판사가’ 내야 하거늘” 운운하며 파장을 일으켰다. 자발적으로 블랙리스트를 실행하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의심이 든다. 더구나 출협 회장의 성명은 당시의 담당 과장은 수사의뢰를 하면서 그 상급자였던 한민호에 대해 아무 조치가 없는 명백한 모순을 지적했을 뿐이다.  

블랙리스트 사태의 경과를 잠깐 되돌아보자. 2017년 7월 문체부 산하 민관합동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공동위원장은 신학철 화백, 도종환 문체부 장관)가 출범하여 1년 가까이 활동한 후, 2018년 6월 권고안을 제출하여 관련 공무원과 산하기관 임직원 131명(수사의뢰 26명, 징계 105명)의 책임규명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문체부가 9월에 발표한 이행계획은 검토 대상 68명(수사의뢰 24명, 징계 44명) 중 수사의뢰 7명, 주의 조치 12명에 그쳤다. 

문화예술계는 사실상 징계가 전혀 없다며 크게 반발했다. 11월3일 문화예술인들은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9시간 이상 걸려 국회에서 청와대까지 항의 행진했으며, 11월8일 청와대 앞에서 이용선 시민사회수석을 만나 철저한 책임규명 대책수립을 요구했다. 이 수석은 문화예술계의 목소리를 대통령에게 가감없이 전달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지만, 12월31일 문체부는 관련 공무원과 산하기관 임직원 10명을 수사의뢰, 68명을 징계와 주의 조치(문체부 소속 징계대상자는 단 1명!)하는 최종 이행계획을 내놓고 장관과 간부들의 2차 대국민 사과로 마무리하려 들었다.

문화예술계의 의견을 반영했다고 내세우지만 이 최종 대책도 턱없이 부족하여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출협 회장의 성명에 민·형사상의 명예훼손을 걸어오다니 도대체 무슨 짓인가. 말문이 막힐 지경이지만, 두 가지만 강조한다.

첫째, 블랙리스트 관련 기소는 형법 123조 공무원의 직권 남용 및 권리행사 방해죄를 근거로 하지만, 이런 형사재판이 초유의 일이라 확립된 판례가 없어 이미 재판 중인 피고인들은 법의 틈새를 이용해 빠져나가려 발버둥치고 있다. 그러나 설령 관련 법률이 미비하더라도 검찰과 사법부는 우리 헌법의 정신과 함께 제22조 1항(“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등 관련 조항을 명심해야 한다. 블랙리스트에 대한 단호한 처벌은 헌법적 의무이다. 따라서 검찰은 문체부가 넘긴 수사대상자에 국한하지 말고 철저하고 광범위한 수사를 해야 한다. 사법부 또한 숱한 촛불들이 ‘이게 나라냐’고 외치며 헌법과 법률이 지켜지는 국가를 요구한 시대정신에 맞는 판례를 확립해야 한다.

둘째, 블랙리스트 관련자 처벌이야말로 정부 안의 수많은 양심적이고 유능한 공무원들을 살리는 길이다. 상급자의 지시를 어기기 어렵다는 핑계, 과거의 공로, 다른 사안과의 형평성 등을 명분으로 처벌을 흐지부지한다면, 블랙리스트에 저항하다 고초를 겪은 공직자는 물론이고 양심과 원칙을 지키려고 남몰래 애쓰며 고통을 당한 더 많은 이들은 대체 뭐가 되는가. 엄정한 처벌만이 나라 운영의 중추인 공무원 사회를 구한다.

끝으로 더불어민주당과 이해찬 대표에게 호소한다.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말바꾸기와 꼼수에 매달리지 말고 하루속히 자유한국당 아닌 야당들과 흔쾌히 합의해야 한다. 당신들이 기득권에 눈멀어 머뭇거리는 와중에 적폐 관료마저 털끝만 한 반성 없이 적반하장의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감히 5·18을 폄훼하는 배짱은 또 어디서 나오겠는가. 내년 4월 총선에서 집권당의 승리와 함께 촛불혁명의 진전을 위한 발판을 놓을 시한, 즉 선거법 개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려야 할 시한이 불과 보름도 남지 않았다. 집권당이 주저하면 대통령이라도 직접 나서야 한다. ‘촛불정부’는 국민의 뜻을 외면한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없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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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카풀 도입과 광주형 일자리가 세간의 관심사다. 양쪽 다 산업과 지역의 새로운 일자리 모델로 제시된 것인데 찬반 논란이 많다. 두 사례의 시사점은 하나다. 어떤 정책과 사업의 실행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을 배제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편리함과 효율성만 강조해서도, 산업경제만 강조해서도 안됨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일자리를 만들어야 할까. 아마도 중앙정부나 많은 지자체들은 또 다른 광주형 일자리에 관심을 기울일 것 같다. 그러나 보다 혁신적인 모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관련해 세 가지 아이디어를 꺼내 보고자 한다.

첫째, 광주형 일자리에서 고민하지 못한 ‘노동의 인간화’ 모델까지 논의해 보자. 앞으로 제조업 생산라인은 디지털화 과정에서 생산성 논쟁이 노사 간 쟁점이 될 것 같다. 이때 노사 상생의 대안적 공장(볼보, 폭스바겐)을 모색하면 좋겠다. 총체적 학습과 자율성이 확보된 ‘보람 있는 일터’를 만들고자 노사가 함께하면 좋겠다. 무엇보다 지속 가능하고 괜찮은 일자리를 위한 기업과 정부의 투자 확대가 핵심이다. 과거처럼 공모 사업으로 운영하는 정부의 일회성 사업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지역 맞춤형 일자리나 특별회계 포괄보조금 사업 중에는 실효성이 불확실한 사업이 많다. 오히려 기업의 장기투자를 증대시키기 위한 인센티브 구조개편이 필요하다. 제조업 공장만이 아닌 도심 서비스 일자리도 중요한데, 이탈리아 밀라노시의 디지털 경제 모델을 참조할 만하다. 이 모델은 기업 투자를 지자체에서 지원하고 지역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한다. 대학과 학생도 참여한다. 도시의 맞춤형 일자리 창출이 목표이지만 ‘노동의 권리’가 행동 계획에 주요한 원칙으로 제시되고 있다.

둘째, 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을 위한 새로운 도심 일자리를 모색하면 어떨까. 청년들이 일하고자 하는 기업은 꼭 주거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노동시장의 이동성과 수요공급 불일치 해소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지자체 간 협력 사업, 즉 행정구역을 벗어난 ‘도시권 일자리 프로젝트’를 모색할 수 있다. 하나의 지역이 아닌 몇 개의 지자체가 권역을 형성, 공동으로 지원된 ‘새 일자리 루트’를 만드는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청년 일자리를 위한 ‘5-3-1 캠페인’(Five three one campaign)은 참고할 만하다. 기술투자와 교육훈련 등 사용자가 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청년들의 잠재력 실현과 지역경제 활성화 등 긍정적 성과 세 가지 이유, 그리고 한 가지 긍정적인 결과물. 바로 지역경제 성장과 취업 증진이다. 이를 위해 정부가 공공정책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지원하고자 하는 기술 활용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의 삶과 제도의 패러다임이 혁신적으로 변화될 시기가 된 것 같다. 이제 공공부문에서 직접 일자리를 대량으로 창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앞으로 기존의 정형화된 풀타임 일자리는 더욱 힘들다. 그간 많은 지자체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일자리 질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정부의 95만개나 되는 재정지원 일자리들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새로운 일자리 모델로 ‘시민활동 일자리 계좌제’를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시민활동 계좌제는 지역에서 ‘일 경험’과 ‘유급 일자리 형태’를 융합한 새로운 모델이다. 지역에서 주 15시간에서 25시간 내외의 활동을 하고, 보상 성격으로 활동 시간이 계좌에 적립되어 본인이 필요할 때 유급으로 인출하는 것이다. 다양한 시민활동 참여자들은 활동계좌를 만들고, 직장을 잃거나 직업훈련 등 필요할 때 계좌에서 시간당 금액을 인출하여 사용하자는 것이다. 국내 몇몇 지자체에서도 실험적 논의가 제시되고 있지만 행정과 관습에 발목 잡혀 단 한 발짝도 진척을 못하고 있다.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는 국제노동기구(ILO)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을 제시하면서 인간 중심의 노동 10대 의제를 제시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개인역량과 제도 및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위한 투자확대였다. 과연 새로운 대안적 일자리 실험은 우리 사회에서 가능할까.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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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경찰제가 올해 서울·세종·제주 등 5곳에서 시범실시하고 2021년 전국으로 확대된다. 당·정·청은 14일 국가경찰 4만3000명을 자치경찰로 이관하는 자치경찰제 전면 도입안을 발표했다. 각 시·도에 지방경찰청과 경찰서에 해당하는 자치경찰본부와 자치경찰대를 신설하고 생활안전, 여성·청소년, 교통 등 주민밀착형 민생치안 활동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아울러 자치경찰에 성폭력, 학교폭력, 교통사고, 음주운전과 공무집행방해 등 일부 범죄 수사권을 주기로 했다.

자치경찰제는 중앙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지역 경찰이 주민들의 민주적 통제하에 주민 친화적인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미국과 유럽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실시 중이다. 우리는 1948년 정부 수립 때부터 논의만 무성했는데, 이제 전면 시행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자치경찰제가 실시되면 경찰을 지역 주민의 삶에 밀착시킴으로써 지역 특성에 따라 다양한 맞춤형 치안 정책을 기대할 수 있다.

자치경찰제의 성패는 정치적 중립 보장과 이원화 체제에서 치안 사각지대를 없앨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무엇보다 시·도지사가 인사권을 갖게 된 만큼 자칫 자치경찰이 지방정치의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가장 크다. 그렇지 않아도 일부 지자체장·지방의회 의원들의 수준 낮은 처신이 끊이지 않는 마당에 자치경찰과 지방토호세력의 유착 가능성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지방자치의 현실이다. 국가경찰의 견제 등 엄격한 감시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다.

시민의 관심사는 경찰의 소속 변경이 아니라 인권과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느냐에 있다.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업무 혼선을 막기 위해 112상황실에서 합동근무한다고 하지만, 국가범죄와 지방범죄를 칼로 무 자르듯 나누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업무 중복으로 인한 충돌과 떠넘기기 같은 부작용으로 치안의 질이 떨어진다면 새 제도는 도입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성폭력 같은 예민한 수사는 오랜 경험과 전문성이 필요한데, 부실수사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정부·여당은 올 상반기 중 경찰법 개정안을 처리하고 곧바로 시행할 계획이다. 시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전에 허점과 혼선을 막기 위해 빈틈없는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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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많은 사람에게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영역이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알려지지 않은 영역이기도 하다. 뇌에 대한 기초과학 연구 성과와 뇌과학 연구를 위해 필요한 기술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증진할 뿐만 아니라 산업, 제도, 철학, 윤리 등 여러 측면에서 미래 사회를 바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연합, 중국, 캐나다, 호주, 한국, 일본에서 뇌과학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거나 운영하고 있다.

■ 과학 프로젝트 사례

대규모 뇌과학 프로젝트는 제도, 윤리, 철학, 과학 대중화, 기술,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사회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한다. 유럽의 휴먼 브레인 프로젝트를 통해 이 상호작용을 살펴보자. 

2013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는 2023년까지 10년간 총 12억달러가 투자될 예정이다. 뇌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휴먼 브레인 프로젝트는 뇌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고 이를 위해 신경 정보를 분석하며, 신경계를 모방한 컴퓨팅과 로봇공학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빅데이터 기술과 제도, 인간 의식에 대한 이해의 진전, 슈퍼 컴퓨팅 기술, 로봇공학, 신경모방 기술 등에서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원래부터 관련된 분야가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비슷한 규모의 미국 프로젝트인 브레인 이니셔티브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드러난다. 

브레인 이니셔티브의 목표는 뇌 속의 개별 세포와 신경 네트워크의 역동적인 활동을 실시간에 가까운 속도로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의 개발과 활용을 촉진함으로써 뇌 연구를 진척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신경계의 활동을 세포 수준, 회로 수준 등 여러 수준에서 정밀하게 관측하고 조절하는 기술, 사람의 뇌 활동을 비침습적으로 관측하는 기술, 마음의 생물학적 기반을 이해하기 위한 데이터 분석 기술 등이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기술들은 향후 치료를 비롯한 다른 목적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연합의 휴먼 브레인 프로젝트와는 미묘하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다. 

■ 과학 프로젝트와 사회

휴먼 브레인 프로젝트는 초안 단계에서부터 이 프로젝트의 진행과 성과가 다양한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논제를 던져줄 것으로 예상됐다. 그래서 전체 예산의 4%를 투자해서 잠재적인 기회와 위험, 윤리적인 문제들을 확인하고, 과학자, 시민, 사회학자, 철학자, 정책 관계자 등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협의하며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흔히들 윤리와 규제는 기술 발전 속도를 저해하기는 하지만, 바람직한 사회를 위해 감수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휴먼 브레인 프로젝트의 사례를 보면, 연구·개발 과정에서 다양한 주체들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융합학문을 창발시키고, 관련된 기술을 마련하며, 제도를 실험해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째서 그런지 살펴보자. 

휴먼 브레인 프로젝트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뇌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연구실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생산한 연구 데이터들을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 모은 방대한 데이터를 적절히 분류해 메타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해야 했다. 특히 공유된 데이터가 개인의 뇌와 관련되는 만큼, 개인 정보를 보호하면서도 연구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어야 했다. 이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데이터의 생산에서 분류, 폐기에 이르는 빅데이터 기술과 데이터를 공유하는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이 개발되고, 이에 걸맞은 제도가 연구되고, 제도와 기술이 실험되었다. 이렇게 마련된 기술과 제도는 나중에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 프로젝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도와 다른 기술들이 협력해 길을 내고, 실험하면서, 사회의 다른 영역도 준비시키는 효과를 낸 셈이다. 

뇌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고, 신경계를 모방해서 만든 하드웨어로 구현하는 과정은 뇌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가설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과 로봇공학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시뮬레이션된 뇌나, 뇌를 모방해서 만든 하드웨어에서 의식이 생겨나면 어떻게 할까’와 같은 염려도 생겨났다. 이 고민은 어떻게 하면 ‘의식을 측정할 수 있을까? 의식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다른 존재를 구별하는 특징은 무엇인가?’와 같은 학술 연구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연구 주제들은 철학과 뇌과학 등 여러 학문들을 융합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로봇 윤리 등 기술 변화가 초래할 혼란에 시민사회를 준비시키는 효과를 낸다. 만일 알파고와 이세돌이 바둑 경기를 하기 전에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시민들이 받았던 충격이 훨씬 더 적지 않았을까? 인공지능이 가져올 사회 변화에 대한 풍부한 과학픽션(SF) 작품들이 생겨나는 한편, 변화에 대비하여 준비하기에도 유리하지 않았을까? 

■ 국제 협력

과학은 예술과 스포츠처럼 국경이 없는 분야이다. 다른 연구자들도 충분히 재현할 수 있는 연구 성과를 내야 하는 과학과 기술 연구의 특성상 국경을 넘는 협력과 공유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과 기술 지식의 악용은 한 국경 안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규모 뇌과학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여러 국가들이 뇌과학 연구 성과의 윤리적인 활용을 도모하는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작년 대구에서 이 학술회의가 열려,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할 만한 신경윤리적인 문제가 논의됐다. 

현대 과학은 연구 단계에서부터 경제만이 아닌 사회 제도와 철학, 문화, 시민사회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고 있다.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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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홀로 사는 경우가 더 많다. 확고한 신념을 좇은 결과는 아니다. 앞으로 겪게 될, 지금은 알 수 없는 일로 뭔가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제까지 삶의 추이를 보면 앞으로도 웬만하면 쭉 1인 가구로 살겠거니 한다. 그러니 일단 이 삶의 형식 속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가꾸는 데 집중할 수밖에. 이 점은 나도, 그들도 같다. 차이점은 고양이 유무랄까? 나의 집에만 고양이가 없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1인 가구 모임을 가질 때, 깔깔 웃다가도 시간이 흐르고 이야기가 깊어지면 어두운 주제가 튀어나온다. 더 정확히 말하면, 깔깔 웃다가 어두운 이야기도 농담처럼 툭 던진다는 편이 맞겠다. 그래서 계속 웃게 된다. 심지어 죽음을 말할 때도. 고양이 집사들의 고양이 사랑에 크게 감탄하는 때이기도 하다. 

고양이털 알레르기가 있지만 약을 먹으며 계속 고양이와 함께 사는 친구 A는 예전에 본 뉴스를 말하며 운을 뗐다. ‘1고양이 1인 가구’의 인간이 집에서 급사했고 며칠 지나 시신이 발견됐는데, 고양이가 시신의 얼굴 부분을 먹어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우리 애도 그러면 다행이겠다, 굶을 일 없을 테니’ 생각부터 했다는 말을 하며 보살같이 웃었다. 친구 B는 유기농 보살이었다. 한 술 더 떠, 우리 애에게 나쁜 것을 먹이면 안 되니까 언제라도 비상식량이 될지 모를 스스로에게 늘 유기농만, 좋은 것만 공급하려 노력한다고 했다. 고양이라는 존재가 돈 벌고 운동하는 데 가장 큰 동력이 된다는 C는 가급적 밖에서 급사하고 싶다 했다. 시신 발견이 빠를 테고, 신분증을 확인하자마자 부모님께 연락 취할 테고, 그만큼 고양이에게 결핍의 시간은 짧을 테니.

사랑하는 ‘우리 애’ 자랑을 하는 이들이 행복한 것 같아 보기 좋았다. 흐뭇하게 지켜보며 생각했다. 역시 제 눈에 안경이다. 내 눈에도 웬만한 인간보다 고양이가 더 귀엽긴 하지만 심장이 아프고 막 그럴 정도는 아니던데. 친구들이 소셜미디어에 고양이 사진 올린 게 눈에 띄면 무덤덤한 얼굴로 ‘좋아요’ 누르고 금세 잊곤 했다. 굳이 같이 살 정도로 마음 움직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수입이 불규칙한 프리랜서로서, 스스로를 책임지기도 벅차다는 생각이 늘 있어 고양이에게 내줄 마음의 공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보살핌이 있어야만 제대로 생존할 수 있는 여린 생명체의 보호자로 함께 살기 위해서는 다부진 책임감과 넉넉한 인내심, 무엇보다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다. ‘반려동물’을 살리기 위해 수백만원 턱턱 내는 능력자들을 보며 ‘리스펙트’ 했다. 훗날 나는 나를 위해 그 정도의 치료비를 팍팍 쓸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나 하나 적당히 추스르며 후회 없이 살다 가급적 지구에 해악 덜 끼치고 소멸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래도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흐르도록 점 하나 보태고픈 시민적 욕망은 있다. 얼마나 시민의식이 투철한지, 급사 뒤 내 시체가 오래 방치되면 사회적 비용이 증가할까 봐, 썩는 냄새에 이웃이 고통받을까 봐 사서 걱정한다. 그래서 빠른 시체 수습을 위해 사적 장치를 마련했다. ‘고독한 생존방’이 그것이다. 다른 말은 쓰지 않고 ‘ㅅㅈ(생존)’만 쓰는 채팅방이다. 게시판에 구성원의 주소가 등록되어 있어,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수요일 오전 11시~오후 1시) 안에 생존 신고를 하지 않으면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친구들도 이 방에 있다.

이처럼 나와 다른 ‘홀로’들은 다름을 존중하면서도 공통의 기반을 공유하며,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고 실행한다. 이게 우리에겐 일상인데, 사회에서는 아직도 1인 가구를 ‘현상’ 취급하는 모양이다. 명절 뒤의 들썩임을 보고 새삼 환기했다. 결혼 ‘못’한다며 인격모독까지 당했다는 증언들이 숱하게 쏟아진 것이다. ‘미혼’과 ‘저출산’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일부 언론의 논조도 지속되고 있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애나 개랑 살든, 혹은 고양이랑 살든, 그도 아니면 오롯이 혼자이든. 책임지기만 한다면, 구성원을 억압하고 착취하지 않는다면, 행복하고자 택한 타인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자. 더 나아가 제도적 모색도 함께하는 동료 시민을 기대하면… 기대가 너무 큰 걸까? 최근 활발히 논의되는 제도로는 생활동반자법이 있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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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의 노래 가운데 ‘예순네 살이 되었을 때’가 있다. 웬 아임 식스티 포. “시간이 흘러간 뒤에 머리숱도 없어지고, 나이는 지긋해져도, 밸런타인데이 때나 아니면 생일날 내게 와인과 엽서를 보내주고 그러실 거죠? 당신은 따뜻한 난롯불 곁에서 스웨터를 짜세요. 일요일 아침이면 드라이브도 같이 가요. 꽃 마당을 돌보며 잡초도 뽑을게요. 예순네 살 때에도 당신에게 나는 필요한 존재겠죠? 근검절약하다 보면 여름마다 흰 섬에 유람도 떠날 수 있을 거예요.” 예순 살 넘어서까지 다투지 않고 함께 여행 다닐 친구가 있다면 행운아. 나이 들면 부인이 남편을 보통 이겨먹게 된다. 옆집 영감들은 다들 죽어 산에 누워 자는데 아직도 방에서 자고 일어나 귀찮게 구느냐며 타박도 듣겠지. 그러기 전에 적당할 때 알아서 떠나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여자가 남자보다 수명이 좀 더 길다고 한다. 천국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할 시간을 특별히 주신 거겠지. 화장을 하지 않아도 무조건 예쁜 것은 눈에 콩깍지가 낀 때문이다.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선물처럼 달콤한 사랑을 나누는 사이들은 질리지도 않는지 오래도록 눈을 마주친다. 사랑하는 사이엔 보고픔이 더 커서 시선에 민망함이 없다. 요새 아이들은 앞에 친구를 두고도 휴대폰만 만지작댄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사랑한다고 노래할 수 있으랴. 수십 년 된 사이들을 보면 아직도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한다. 되레 정성을 더 쏟으면 쏟았지 소홀하게 굴지 않는다. 주기보다 받기를 바라면서 변덕이 죽 끓는 사람에겐 예순네 살의 친구란 그림의 떡이겠다. “짜라빠빠 그대는 아름다워. 짜짜라 짜라빠빠빠. 짜라빠빠 당신은 믿음직해. 짜짜라 짜라빠빠빠. 짜라빠빠 수줍어하지 말고. 짜짜라 짜라빠빠빠. 짜라빠빠 즐겁게 노래해요. 짜라짜라 빠빠빠.” 늙어 죽을 때까지 짜라빠빠 노래하고, 누군가의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성공한 인생.

티베트 속담에 “서두르면 라싸에 도착하기 어렵다. 천천히 걸어야 목적지에 닿게 된다”는 말이 있다. 짜라빠빠 주문을 외우며 오늘부터 천천히, 일단은 예순네 살까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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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는 사람을 ‘선비’라 부르고, 결혼한 남자에게 ‘서방(書房)’이라는 우아한 호칭을 부여한 것은 글 읽는 일을 높게 치는 유교 사회의 영향이다. 그러나 선비가 독서인의 정체성을 지키기란 쉽지 않았다. 추위는 독서의 가장 큰 훼방꾼이었다. 이덕무가 ‘<논어> 한 질은 바람이 들어오는 곳에 쌓아 놓고 <한서>는 나란히 잇대어 이불로 덮고서 글을 읽었다’(‘이목구심서’)거나, 남산골 딸깍발이가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이희승, ‘딸깍발이’)고 별렀다는 이야기는 겨울 독서의 어려움을 잘 말해준다.

최근 서울대 노조의 ‘도서관 난방 중단’ 파업을 놓고 말이 많았던 것은 유교의 숭문(崇文) 의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언론이 만들어낸 ‘냉골 도서관’이라는 용어는 산골의 겨울바람만큼이나 몸을 오싹하게 한다. ‘냉골 학생회관’ ‘냉골 체육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장소가 서울대의 도서관이라는 점은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파업을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공부해 들어간 대학인데, 도서관 난방을 중단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을 터이다. 서울대생, 그리고 도서관 이용자는 특별한 사람일 것이라는 선민의식도 한몫했다. 서울대생을 ‘미래 인재’라며 “도서관과 연구실의 난방마저 볼모로 임금 투쟁하는 이번 서울대 파업은 우리 사회의 금기마저 짓밟는 초유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비난했던 서울대 중앙도서관장의 인식은 그 정점이다. 

‘냉골 도서관’이 간과한 것은 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권이다. 서울대 시설관리직 노동자들은 임금 현실화,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난방 파업’에 들어갔다. 요구는 설득력이 있었고, 파업은 적법했다. 그러나 보수 언론은 노조의 파업 이유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대신 ‘냉골 도서관’을 앞세우며 학습권 침해를 강조했다. 파업이 이어지면서 노동권에 눈을 떴고, 노동권과 학습권을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졌다. 다행히 난방 파업은 닷새 만에 끝이 났다. 옛날 글만 읽던 선비는 자신의 사랑방에 군불을 땠던 누군가를 기억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시설관리 노동자들을 보게 됐다. ‘냉골 도서관’ 덕분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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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이에게 관용어의 사용은 대체로 피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다. 사유와 반성을 거치지 않고 습관적으로 구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용어의 예는 무수히 많겠지만 세간에서 논란이 되었던 표현을 언급하고 싶다. 그중 하나는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인데 보통 부정적이고 희화화된 느낌을 준다. 

좀 오래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 지역의 의회에서 이 관용어를 추방하자는 결의서를 채택한 적이 있다. 그 결의서에서 언급되었던 한 선배 소설가가 관용적으로 사용했을 뿐인데 비난받는 게 부당하다면서 투덜대던 게 기억이 난다. 다른 하나는 ‘소설 쓴다’는 말이다.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경우나 터무니없는 일 등을 가리키는데 그냥 소설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언젠가 온라인에서 청와대 대변인과 소설가 사이에 잠시 다툼이 있었다. 청와대 대변인은 뉴스란 사실에 기반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때 사용된 소설은 거짓말, 왜곡 등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한 소설가가 불쾌하다고 반응했고 청와대 대변인은 관용적 표현일 뿐인데 웬 시비냐고 응수했다. 관용어라 해도 누군가는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고 그런 의도 없이 사용한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을 향한 비난이 부당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삼천포와 관련된 논란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갈 일이 있었다. 내게도 삼천포는 이 표현으로 익숙한 지역이었지 실제로 가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삼천포에 머무는 동안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워서였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글에서나 말에서나 단 한 번도 ‘삼천포로 빠진다’는 표현을 써 본 적이 없다. 이 관용어가 무심코 튀어나오려 해도 내게 깊이 각인되었던 삼천포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스스로 사유하고 반성하며 다른 표현을 찾아내도록 나를 격려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지역 의회에서 이 관용어를 추방하자는 결의서 대신에 ‘우리 동네에 놀러오세요’라는 결의서를 채택했다면 어땠을까. 

청와대 대변인과 소설가의 다툼을 보면서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만약 그 대변인이 소설에 감동받은 적이 있다면, 소설이 그의 내면을 뒤흔들어 언제까지나 멈추지 않는 떨림과 속울음으로 남는 경험을 했더라면, 거짓말을 소설로 치환하는 문장 앞에서 아마도 머뭇거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소설의 관용적 표현이 거슬렸다면 불쾌하다고 투덜대는 것보다 위대한 문학에 고양되어 본 적 없는 쓸쓸한 마음에 아름다운 소설 한 편을 권유하는 게 진정으로 다정한 일이었을 것이다. 

관용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사유와 반성 없이 관용어를 쓰는 습관에 있다. 

광주를 폄하하고 5·18을 왜곡하는 자들은 예전부터 보아왔으므로 지겹도록 익숙한 자들이다. 그들이 쓰는 말 역시 진부하기 이를 데 없어 하나의 관용어라 해도 좋을 정도다. 그들이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이 낡아빠진 관용어를 진실처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건 혐오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혐오는 나와 다르다고 내가 알지 못한다고 간주하는 것들을 향한다. 혐오를 넘어서려면 나와 다르지 않음을 발견해야 하고 진실로 알아야 한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고 오래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까 광주와 5·18을 왜곡하고 모욕한 자들은 사실 광주와 5·18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고백한 셈이다.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절망과 공포와 굴욕 속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용기를 잃지 않으려 애썼던 사람들의 육성을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왜 아름다운지 왜 그토록 숭고한지 모르는 이유는 그들이 한 번도 민주주의에 감동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모독한 게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며 민주주의를 알고 싶지도 않다는 속내를 들킨 것일 뿐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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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일본의 유명한 컨설팅 회사인 Sigmaxyz에 초대를 받아 다녀왔다. 이 회사는 도쿄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회사로 일본 내에 비즈니스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곳에서 반나절 정도를 보내면서 일본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스마트폰 사용 예절이었다. 100여명의 직원들이 개방된 사무실에서 일하는데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올려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마트폰 사용조차도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여 일하는 시간에는 오로지 일에만 집중하는 그들의 모습이 놀라웠다. 회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2시간 정도 회의를 하면서 스마트폰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상대방의 눈을 보며 말하고 상대가 말하는 내용은 열심히 수첩에 받아 적는다. 이렇게 집중해서 일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들 한 명 한 명이 일본 경제를 불황의 터널에서 벗어나게 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일본과 비교해보면 한국은 스마트폰 사용에 너무나 관대하다. 올바른 스마트폰 사용 에티켓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면 대화는 이어지지만 다들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기 바쁘다. 일터에서도 스마트폰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일한다. 혹시나 카톡 메시지를 놓칠세라 틈틈이 휴대폰을 체크한다. 일의 흐름이 깨지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스마트폰이 전달해주는 지인들의 실시간 이야기만 궁금할 뿐이다. 회의 시간이나 교육 시간에도 틈틈이 스마트폰을 본다. 심지어 동료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기보다는 스마트폰을 본다. 다들 그렇게 행동하니 마치 그러한 것이 당연한 행위처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DB)

음성과 메시지만을 전달하는 2세대 이동통신을 사용하던 1990년 이후 20년 동안 우리에게는 그나마 휴대폰 사용 예절이 있었다. 공공장소에서는 진동 모드로 사용하고 전화벨이 울리면 예의 없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기술이 점진적으로 우리 삶에 퍼지다 보니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이를 기반으로 문화를 형성해나갈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기술의 급진적인 발전으로 스마트폰이라 불리며 등장한 3세대 이동통신은 10년이라는 단기간에 우리 삶 속 깊이 침투해버렸다. 스마트폰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스마트폰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제 스마트폰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2018년 11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통계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 등록된 스마트폰 단말기 회선수는 5068만개로 통계청에서 제시한 2019년 우리나라 추계인구수 5181만명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심지어 미국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조사 대상 39개국 중 한국이 스마트폰 보급률 1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마트폰 보급률 세계 1위에 걸맞은 스마트폰 사용 예절을 갖추고 있는가? 아니면 심각해지는 스마트폰 중독 문제에 대해서 고심하기 바쁜가? 우리나라 청소년 30% 이상이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이라고 하니 좀 더 강도 높은 대책이 필요하다. 올바른 스마트폰 사용 문화 구축을 위해서는 정부, 조직, 가정의 3박자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가족끼리 모여서도 각자의 스마트폰만 보는 문화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하태호 | KAIST 기술경영 전문대학원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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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백화점이 있고, 서울로 가는 전철이 있는 도시로 전학 갔다. 같은 날 광주에서 전학 온 아이가 있었다. 우리는 같은 반에 배정받아서 내내 붙어 다녔다. 하나는 말이 느린 데다 툭하면 ‘기야?’라고 되물어 반 아이들을 배꼽 빠지게 했고, 하나는 저도 모르게 전라도 사투리가 입에서 튀어나올까 봐 우물댔다. 그래서 둘이 따로 점심을 먹었고, 고향이 그리울 적마다 빈 운동장에 나란히 앉아 훌쩍였다.

내가 친구 어머니의 김치를 아주 좋아하게 될 무렵, 친구는 은밀하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참말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너도 절대로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돼.” 그의 비밀은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에 대한 기억이었다. 광주 시내에 살았던 그는 총을 든 군인들이 군홧발로 안방까지 뛰어 들어왔으며, 그전에 그의 아버지는 용케 고등학생인 큰아들을 옥상 큰 빨간 ‘다라’ 안에 숨겨 놓는 것을 보았다고. 군인들은 청년들만 보이면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고.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온 식구가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고.

아마도 나는 그때 ‘기야?’ 대신 ‘왜’라고 물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군인들이 왜? 내 친구는 소리 죽여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이 말을 하면 잡혀갈 거래. 국민에게 총을 발포하라고 명령한 장본인이 대통령이던 시절이었으니, 내 친구의 두려움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해 봄의 진실이 세상에 밝혀지고, 피의자들이 인정한 사실이 재판 판결문에 똑똑히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광주에서 만난 사람들은 두 눈으로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렸다. 1980년 5월에 내 친구와 같은 나이에 광주에 있었다는 이가 말했다. 그때 일을 말하면 집안이 망할 거라고 한 아버지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고. 그들은 의심했다. 과연 세상이 진실을 지켜줄 수 있는가를.

요즘 5·18민주화운동 망언들을 보면 허탈하다. 도대체 지난 30여년 동안 힘겹게 밝혀온 진실이 이리도 가벼운 것이었는가? 그들의 거짓을 망언으로만 규정하고 말 것인가? 그들을 진짜 이대로 보고만 있을 것인가?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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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여성’이라는 단어가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단어 그 자체로만 풀이한다면 직업을 갖고 있는 여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단어는 엉뚱한 의미로 사용되곤 했다. 지금도 국어사전에서는 ‘직업여성’을 “주로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여자가 직업이 있으면 유흥업 종사자라니 시대착오적이다. 그러한 의미로 사용되는 ‘직업여성’이라는 단어는 마땅히 사라져야 했다.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다.

한때 자주 쓰였으나 사라진 단어를 더 찾아본다면, ‘고학생’도 빼놓을 수 없다. 학비를 벌며 고생하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고학생’이라는 단어는 그 사람이 ‘학생’임을 강조한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하는 일의 성격에 대한 질문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학생’을 강조하는 한, 그 사람은 학업을 마치면 노동도 그만두리라는 예측을 포함하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고학생’, 대학 진학자가 매우 드물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단어다. 대학 진학률이 70%를 오르내리는 시대가 등장했고, ‘고학생’이라는 단어는 아르바이트생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아르바이트, 본래 독일어로 노동이라는 뜻이다. 어쩌다가 한국어에서 아르바이트가 생업이 아니라 부업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대 한국어에서 그런 의미로 통한다. 

밤에 비행기에서 땅을 내려다보면 한국의 풍경, 특히 서울의 풍경은 말 그대로 불야성이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잠들지 않는 도시, 24시간 동안 움직이는 도시.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한국을 이렇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자랑일까? 그저 특성을 묘사한 것일까? 아니면 숨겨진 부끄러움일까? 비행기가 고도를 점차 낮추면 밤이 없는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하나둘 드러난다. 교회의 붉은 십자가 사이에서 이 도시를 24시간 동안 잠들게 하지 않는 상점이 보인다. 교회만큼이나 많은 24시간 편의점과 편의점 사이에 ‘24H 맥도날드’가 있고, 24시간 영업하는 주유소와 김밥집이 있다. 도시를 잠들지 않게 하는 그곳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을 우리는 시간제 노동자라는 말보다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이라 부른다.

시간제 노동자로 부르냐,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냐는 단순한 호칭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아르바이트가 부업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한, 아르바이트 노동에는 젊을 때 임시로 잠깐 하고 마는 일이라는 뉘앙스가 따라붙는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고학생의 이미지로 시간제 노동을 포장하면 마치 시간제 노동은 젊은 시절의 낭만인 듯한 착각을 유발한다.

아르바이트라고 불리는 노동을 하는 모든 사람이 고학생은 아니다. 아르바이트 노동을 하는 모든 사람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로 미화될 수 있는 연령대의 사람도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10대 청소년의 전단지 돌리기부터 60대 노인의 지하철 택배까지, 대학생과 주부의 파트타임 잡부터 정규직 노동자의 투잡과 해고 노동자의 생계 수단까지” “나이와 성별, 업무 성격”을 가리지 않는 노동에 의해 24시간 움직인다. 그 구체적인 노동을 아르바이트라는 부업의 뉘앙스를 잔뜩 풍기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

부업으로 아르바이트 노동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시간제 노동자에게 그 노동은 부업이 아니라 생업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그들의 노동을 아르바이트라 부른다. 아르바이트라는 단어는 현재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하는 일의 성격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 ‘고학생’이 사라졌고, 경력단절에 처한 고학력 여성 노동자가 시간제 노동으로만 재취업할 수 있고, 빈곤을 피하기 위해 형편없는 임금에라도 시간제 노동을 해야 하는 노인이 있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시간제 노동을 본업으로 할 수밖에 없는 대졸자가 있는 현실을 아르바이트라는 단어는 담아낼 수 없다. 

아르바이트를 대신한 ‘알바’는 부업이라는 딱지, 젊어서 하는 임시 고생이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현실을 반영하려는 고육지책으로 만들어진 ‘민중언어’에 가깝다. 비록 ‘알바’는 ‘전문용어’로 인정되지는 않지만, 아르바이트라는 속임수 용어보다는 현실을 더 잘 표현한다. ‘전문용어’보다 ‘민중언어’는 세상의 변화를 더 빨리 포착한다. 정책언어는 때로 전문용어보다 오히려 민중언어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정책이 사람을 배반하지 않으려면.

이 칼럼을 쓰기 위해 책 한 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주 3일은 맥도날드와 우버이츠 라이더로 일하며 생계비를 벌고, ‘알바’노조 위원장이기도 했던 박정훈씨가 쓴 책이다. 그 책의 제목은 큼직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묻는다.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그렇다. 생업으로 시간제 노동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음에도 왜 ‘알바’는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이들을 없는 존재로 만들어 노동 관련 법에 의해 보호해야 할 시민의 범주에서 제외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의 질문을 따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법정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주휴수당과 적정한 휴식시간을 제공하지 않으려는 속셈이 아니라면.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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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3차례의 큰 산업혁명을 거쳤다. 산업혁명을 잘 활용한 나라들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했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국도 1차 산업혁명의 기회를 잡지 못해 일제 지배로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2차 산업혁명에 지혜롭게 대처하여 세계가 인정하는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현재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큰 기회 앞에서 국가의 흥망이 달린 갈림길에 서 있다.

메가트랜드의 큰 흐름으로 보아 4차 산업혁명이 성공하려면 가장 먼저 과학문화를 일으켜야 한다. 그러려면 국민정서가 생활과학화되어야 한다. 역사가 짧은 미국은 학부모들이 자녀의 손을 잡고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이나 시카고과학산업박물관을 놀이동산처럼 여기며 찾는다. 박물관 측은 1차적으로 박물관을 시민들의 과학 관문이라 인식하여 아동들에게는 재미와 동기를 부여하고, 성인에게는 기초과학이나 원리 등의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러한 선순환구조가 과학문화를 이끌어 냈고, 미국이 세계 최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경제대국이 되는 원동력이었다.

우리의 현실은 암담하다. 초등학생 때 단체로 박물관이나 과학관을 가끔 방문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박물관을 찾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설사 단체나 개인이 박물관을 찾아도 방문자를 대상으로 제공하는 활동지나 교육프로그램 수준은 지극히 얇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한국은 후보자 명단에도 끼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하지만 우리의 교육을 바꾸지 않는 한 앞으로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한국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이상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을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방한 때 충고의 말을 한 지도 12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교육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올해 문재인 정부의 공약사항 중 하나인 국가교육위원회가 설립될 것으로 보인다. 많은 공론과 중지를 모아야겠지만 제도 개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물관과 학교를 연계한 한국식 융합교육(STEAM)도 시급히 활성화되어야 한다. 과학관에서는 학교영역에서 할 수 없는 과학 교보재를 만들어 서로 공유하면서 과학교사와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프로그램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박물관과 과학관, 학교를 관할하는 정부 부처가 달라 교육프로그램의 공유도 어렵다. 정부는 박물관 참관을 일반 관광의 성격이 아닌, 교육관광이 되도록 정책 마인드를 바꾸어야 한다. 세계적인 박물관 명소를 분석해보면 대부분 교육관광이다. ‘박물관이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곳’이라는 말이 있다.

시간은 기회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지금의 기회를 활용하여 미래 선진 강국의 대한민국을 만들자!

<박종락 | 한국전통창조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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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선린상업학교 3학년 학생 33명은 반도현이(半島顯二) 선생의 인솔 아래 지난 11일 밤 평양에 도착하여 다음날 평양 시내와 모란봉, 기자림(箕子林) 등 명승고적을 탐방하고 오후 차로 진남포로 향하여 출발하였다더라.’

동아일보는 1922년 5월17일자 신문에서 서울 선린상업학교 학생들의 평양 수학여행을 이렇게 전했다. 그즈음 신문들은 각 학교 학생들의 평양 수학여행 소식을 잇따라 보도했다. 선린상업 학생들이 서울로 돌아온 지 1주일 뒤,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 100여명이 평양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6월에는 전주고보 학생 94명이 5박6일 일정으로 대전~평양~서울~인천을 돌아봤다. 앞서 1921년 5월에는 대구고보 학생들이 수학여행차 서울과 평양을 다녀왔다. 당시 평양 수학여행은 신문의 주요 기삿거리였다.

수학여행이 꽃피던 시기였다. 수학여행은 근대적 학교가 들어선 1910년대 도입되었지만, 1920년대 들어 학생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여행지로는 경주, 부여, 정읍, 강화, 합천, 수원, 원산, 금강산, 개성, 신의주 등 다양했지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서울과 평양이었다. 특히 명승고적이 많은 평양은 수학여행 1번지로 꼽혔다. 고조선·고구려의 옛 도읍지라는 점이 학생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했다. 신설된 경의선은 평양 철도 여행에 대한 호기심을 높였다.

여행이 익숙함과 관행으로부터의 일탈이라면, 수학여행은 일탈을 통한 학습이다. 새로운 장소와 부딪치면서 새로운 경험과 생각을 갖게 한다. 호연지기를 길러줄 뿐 아니라 역사, 지리 등에 대한 인문지식을 넓혀준다. 그래서 수학여행은 학창시절의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다. 12일 금강산을 방문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북한 교육당국과 만나 평양 수학여행을 제안할 예정이라고 한다. 서울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통해 북측의 역사·문화·교육시설 등을 방문하고 서울·평양 학교 간 자매결연을 통해 평양 학생들을 서울로 초청하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남북 학생들이 서울과 평양으로 수학여행을 오가면 통일·평화교육은 덤으로 따라올 것이다. 30년 전 동·서독 학생들은 독일이 통일되기에 앞서 수학여행을 통해 국경을 넘나들었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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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는 삶이 일상이던 시절에도 밤샘을 하는 이들은 있었다. 3000년 전 중국 정치인 주공(周公)이 밤샘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전의 성군이 행한 훌륭한 정치에 조금이라도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으면 하늘을 우러러보며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빨리 실행하고 싶어서 또 그대로 앉아 뜬눈으로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낮처럼 밝은 밤이 일상인 오늘날, 밤샘을 불사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밤샘인가? 눈앞의 즐거움을 탐닉하며 밤을 새울 수도 있겠으나, 먼 훗날의 즐거움을 그리며 성공의 조건들을 채우기 위해 사력을 다해 밤을 새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목적이 즐거움에 있다면, 자신의 몸을 혹사해 가며 과연 얼마나 지속 가능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까? 장자(莊子)는 진정한 즐거움이란 오히려 무위(無爲)할 때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작은 주머니에 큰 물건을 담으려 하거나 두레박줄은 짧은데 깊은 물을 길어 올리려 하는 데에서 불행이 시작된다. 왕을 모시는 주연과 음악으로 바닷새를 대접한다면 새는 즐거워하기는커녕 괴로워하다 죽고 말 것이다. 모두에게 같은 욕망을 강요하는 교육에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 프랑스 문학과 영화를 즐기는 친구가 불어불문학과에 진학하고 천체 관측의 매력에 빠진 친구가 천문학과나 지구과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마땅한데, 여전히 한 줄 세우기에 급급하다. 전공별 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입시전형이 이루어져야 중·고등학교 교육의 과목 간 차별이 줄어들고 공교육 정상화의 길도 열릴 수 있다.

주공은 불행했을까? 그가 그렇게 노심초사 이루려 한 성군의 정치는 이런 것이었다. 선한 말을 맛난 술보다 좋아하고 편견 없이 훌륭한 이를 등용하며, 약한 이들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고 늘 새로운 마음으로 이상을 추구하며, 가까운 자를 존중하고 먼 자를 잊지 않는 일이다. 주공에게는 이를 실행하기 위한 밤샘이야말로 무위였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그의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우리의 밤샘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아니, 우리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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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부든 임기를 마친 후 가장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정책이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긍정적인 정책으로 무엇이 꼽힐까? 아마 ‘문재인케어’가 유력한 후보이지 않을까 싶다. 집권 이전부터 꼼꼼히 준비되었고 구체적 로드맵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나중에 문재인 정부를 상징하는 대표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기에는 부족함이 남는다. 국민건강보험 보장률 목표가 기존 63.4%에서 조금 상향된 70%에 머물기 때문이다. 광범위한 비급여의 우선 정비, 국민건강보험의 중장기 재정 등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신중한 행보이다.

더 과감해야 한다. 전체 보장률을 획기적으로 올리기 어렵다면 특정 인구집단에 집중하는 전략도 괜찮다. 어린이부터 병원비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어린이 무상의료’는 어떤가? 이미 시민사회에선 수십개 어린이단체, 복지단체들이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연대’를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

뜻이 이루어지는 걸까? 근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발표한 로드맵에 의하면 올해부터 1세 미만 아동의 의료비가 사실상 제로화된다. 단계적으로 초등학교 입학 이전 아동까지 대상을 확대하고, 이를 위한 재정방안을 올해 국가재정전략회의에 제안할 예정이다. 비록 아동에 한정되지만 이러한 기조라면 머지않은 시기에 모든 연령으로 전면화될 수 있기에, 아동 의료비 제로화는 대한민국 복지를 한 단계 높인 정책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상표와 내용물이 딱 일치하지는 않는다. 정부는 의료비 제로화라고 부르지만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급여’ 진료에 한해 본인부담을 최하 5%까지 낮출 뿐이다. 과중한 의료비의 핵심 원인인 비급여는 예비급여로 전환돼 공적 관리체계로 들어오지만 여전히 50~90%의 높은 본인부담을 별도로 환자에게 청구한다. 2016년에 5세 이하 어린이의 입원비 전체 내역을 보면, 법정급여 본인부담금은 8%에 불과하지만 비급여 비용은 3배인 24%에 달했다. 이러한 의료비 구조에서 비급여가 빠진 제로화는 이름값을 하기 어렵다. 정부가 보완책으로 비급여까지 포함하는 ‘재난적 의료비 지원’을 내놓았지만 대상이 하위 50% 계층에 한정되고 지원금도 본인이 부담하는 의료비의 절반에 그쳐 역시 한계를 지닌다.

반면 눈을 지자체로 돌리면 대담한 시도가 발견된다. 경기도 성남시는 ‘18세 미만 의료비 100만원 상한제’를 추진 중이다. 올해 7월부터 의학적 성격의 비급여 진료까지 포함해 1년에 환자 부담이 100만원을 넘으면 초과 금액을 성남시가 책임진다. 아무리 아파도 100만원까지만 가족이 지불하니 고액 질환의 경우 사실상 어린이 무상의료라고 불릴 만하다.

생각보다 소요예산이 많지 않다. 18세 미만 중에서 한 해 병원비가 100만원이 넘는 사람은 약 4% 정도이다. 중앙정부의 재난적 의료비 지원, 소아암 및 미숙아 지원 등 기존 공적인 대책과 민간의료보험의 보험금까지 적용하고 남는 본인부담금 중 100만원 초과액을 지자체가 지원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성남시에 따르면, 1년에 15억원 정도이니 가성비가 높다. 일부 지자체도 성남시 시도를 주목하고 있어 여러 지역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

물론 성남시의 100만원 상한제는 여러 논점을 지닌다. 우선 민간의료보험과 정면충돌한다. 성남시 정책에선 민간의료보험의 보상금을 먼저 적용하기에 사실상 민간의료보험 미가입자가 지원 대상이다. 우리나라에서 20세 미만 10명 중 대략 8명이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해 있고 이들이 내는 한 해 보험료가 연 4조~5조원으로 추정된다. 이 사업이 진행될수록 민간의료보험 해약 사태가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아픈 아이가 있는 집이 성남시로 전입하는 ‘의료 이주’도 예상된다. 성남시 거주기간이 1년 이상이면 지원받을 수 있으니 이사도 생각할 수 있다.

논란이 생기겠지만, 전향적인 일이다. 서구 복지국가가 그러하듯이, 병원비는 민간의료보험 대신 공공재정으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 의료 이주도 당사자에게는 절박한 선택이다. 오죽하면 이사까지 단행하겠는가. 문제는 두 논점 모두 예산의 증액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성남시는 이 사업이 성공할수록 예산 부담이 커지는 역설적 상황을 맞을 수 있다.

결국 중앙정부가 나서야 한다. 공공재정으로 전체 국민의 병원비를 해결하고, 지역과 관계없이 동일하게 의료서비스를 책임지는 건 중앙정부의 역할이다. 어린이 병원비 해결을 위한 성남시의 선도적 발걸음이 중앙정부의 사업으로 발전해야 한다. 의료비 제로화 이름에 걸맞은 어린이 무상의료, 지금 시작하자.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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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가 지난 지 한참이지만 겨울의 낮은 짧았다. 마석 모란공원에 장례행렬이 도착할 때만 해도 서녘 산기슭에 걸렸던 해는 금세 넘어갔고, 곧바로 어둠이 공원묘지 전체를 덮어버렸다. 발전차에서 끌어온 전등빛에 의지해서 하관식이 진행되는 내내 김미숙씨는 울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훅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동생의 부축에 의지해서 하관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따금씩 눈물만 흘렸다. 깊은 그 눈빛, 아마도 자신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비현실적인 것만 같은 눈빛으로 그는 하관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런 그를 두고 인터넷에서는 아들을 묻으면서도 울지 않는 비정한 엄마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외동아들을 잃은 그 엄마는 “청년의 목은 어디에 뒹굴고 있었는지/ 찢겨진 몸통은 어디에 버려져 있었는지/ 피는 몇 됫박이 흘러 탄가루에 섞였는지”(영결식에서 송경동 시인이 낭송한 조시 중에서)를 보았던 엄마다. 시커먼 석탄 가루를 뒤집어쓴 아들의 머리는 몸과 따로 뒹굴었고, 시신이 수습되기도 전에 컨베이어벨트는 재가동되었다. 피를 머금은 석탄이 컨베이어를 타고 들어가 전기를 만들었을까. 사고가 나고 며칠 뒤 김용균 노동자가 일하던 현장을 찾고 나서 김미숙씨는 말했다. “아이의 동료들에게 빨리 나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일하다가 죽는 거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970년대 탄광 같은 곳에서 어떤 부모가 자식이 일하는 걸 보겠냐고도 했다. 그래도 공기업에 취직했으니 힘들어도 견디어 보라고 했던 그 엄마는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세상의 어둠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 민주노총이나, 시민단체들을 “그저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그 엄마는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병든 남편과 외동아들을 2교대 노동을 하면서 책임지는 일에만 몰두해 있던 평범한 엄마였다.

아들을 잃은 뒤 그 엄마는 태안과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아들이 남긴 숙제”를 풀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지난 연말에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을 위해서 국회에 상주하면서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했다. “죽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런 덕에 28년 만에 산안법이 개정되었다. 추모제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김미숙씨에게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정작 아들 김용균이 일했던 발전소는 외주화 금지 사업장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 산안법은 최초로 산재사고에 대한 원청의 책임을 명기한 법이 되었다.

산안법이 개정됐지만, 막상 해를 넘기고도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과 같은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설 명절 전에 장례를 치르기 위한 결단으로 빈소를 서울대병원으로 옮기고, 시민단체 대표들이 단식에 들어갔다. 설 연휴 동안 정부, 여당이 움직이면서 협상이 진행됐고, 마침내 2월5일 정부와 야당이 유가족 측과 시민단체들이 요구하는 내용을 수용하는 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2월9일 김용균씨가 사망한 지 62일 만에 태안과 서울을 오가면서 장례를 치렀다.

김용균씨가 묻힌 곳은 마석 모란공원 특구다. 그곳은 전태일 열사 죽음 이후 민주화운동의 성지처럼 되어 있는 곳이다. 노동운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수많은 이들이 그곳에 모여 있다. 김용균이 62일 만에 안식에 들어간 그 자리 앞쪽으로는 전태일이 있고, 이소선 어머니의 자리가 있다. 거기서 곧바로 올라가 공원묘지 끝에 이르면 박종철과 그의 아버지 박정기씨의 묘가 있다.

이소선 어머니는 41살 때 전태일을 잃었다. 그리고 41년을 더 살면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아들의 유언을 지켜냈다. 그런 어머니는 노동자의 어머니에서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다. 1987년 막내아들을 잃은 박정기씨는 고문으로 죽은 아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서울대병원 빈소를 찾았던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씨도 1987년 아들을 잃은 뒤 민주투사로 나서서 자식의 죽음을 승화시켜오고 있다.

그런 뒤에도 삼성 반도체에서 딸 황유미를 잃은 아버지 황상기씨, 제주도 생수공장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산업체 현장학습 고교생 이민호군의 아버지 이상영씨도 자식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도 박근혜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유가족들이 김미숙씨의 지표가 되었다.

그런 김미숙씨를 두고 유가족이 너무 나댄다는 비난이 일었다. 대통령 면담을 거절할 때가 가장 크게 비난받았다. 민주노총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모욕적인 언사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민주노총, 시민단체들과 같이 움직이는 김미숙씨에 대해 좋게 보지 않는 시선들은 따갑기만 하다.

우리 사회에는 유가족에 대한 고정된 상이 있다. 자식을 잃은 유가족은 울다가 기절해야 한다. 보상이나 받고 조용히 물러서서 정부에 대해 정치권에 대해 고맙다고 인사해야 한다. 어디 대통령이나 정부에 대해 그리고 국회에 대해 무언가를 요구하는 유가족은 찍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가족들은 고분고분하지만 않다. 자신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자식의 죽음은 헛되게 지워지고, 묻힐 것이라는 점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청심환을 먹으면서도 자신이 가야 할 곳을 가게 된다.

몸집 작은 김미숙씨는 보기보다 단단하다. 그런 그이지만 청심환을 복용해야만 버틸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아들의 부재를 매일 확인하면서 살아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가르쳐준 대로 용균이의 사진을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꺼내 볼까? 용균이가 살던 방은 그대로 둔 채로 아침이면 인사하고, 저녁에 들어가면 인사할까? 이제 김미숙씨는 혼자 그런 시간들을 견뎌내야 한다.

아들 또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끌어안은 김미숙, 그의 길은 험할 것이다. 험한 세상을 헤쳐 가는 김미숙씨에게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은 빚을 지게 될 것이다. 그게 불순한 유가족의 운명이지 않을까.

<박래군 |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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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준비 없이 글쓰기 교사가 되었다. 아이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내 수업에 와서는 엄청나게 재밌는 글을 완성하고 집에 돌아갔다. 그들이 쓴 게 왜 재밌는지, 어떻게 좋은지 정확하게 칭찬해주고 싶어서 나는 책을 많이 읽었다.

좋은 문장의 근거를 생각할 때 자주 다시 읽은 책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다. 이 소설에는 작문 연습을 하는 어린 쌍둥이가 등장한다. 전쟁과 가난 때문에 그들에겐 선생님이 따로 없다. 둘은 부엌 식탁에 앉아 서로에게 글감을 내준다. 그 주제로 두 시간 동안 종이 두 장에다 각자의 글을 쓴다. 다 쓰면 글을 바꿔서 읽어본다. 상대방의 글쓰기 교사가 되어주는 것이다. 사전을 찾아가며 철자법 틀린 것을 고치고 문장을 수정한다. 문장을 고칠 때에는 쌍둥이들만의 규칙이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쉽사리 ‘친절하다’라고 쓰지 않는다.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쌍둥이는 친절하다는 말 대신 이렇게 쓴다. ‘그는 우리에게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또한 쌍둥이는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좋아한다’는 단어는 모호하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서 ‘이 마을은 아름답다’와 같은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그 말이 둘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실에 충실한 문장을 연습한다.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 묘사를 훈련한다.

이러한 묘사만이 좋은 문장일 리는 없다. 모든 글쓰기에 적절한 훈련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들의 연습 방식을 자주 떠올리며 글을 읽고 쓴다. 무언가를 게으르게 표현하지 않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좋은 글은 독자가 이야기를 믿게 만든다. 읽는 이의 눈앞에 구체적인 장면을 건넨다. 무수한 작가들이 잘 써준 생생한 장면들을 읽으며 나는 잠시 다른 존재가 되어볼 수 있었다.

2015년 나의 수업을 들으러 왔던 열두 살의 우예린은 달리기에 관해 이렇게 썼다. ‘달리는 사람들은 얼굴 살이 위아래로 훌렁거린다. 내 차례가 오면 저 멀리서 선생님이 깃발을 올린다. 깃발이 내려오면 달려야 하니까 심장이 쿵쾅댄다. 출발하는 순간 재빨리 발을 움직여야 하는데 떨려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뛰다보면 바람이 날 밀어주는 느낌이다. 하늘을 나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럼 발의 움직임이 더 빨라진다. 바람 생각을 하면서 뛰면 나는 어느새 1등이나 2등이 되어 있다.’

이 글을 읽다가 내 심장도 좀 더 빨리 뛰었다. ‘뛰다 보면 바람이 날 밀어주는 느낌’이라니 정말 찬란하다. 바람 생각을 하면서 뛸 수만 있다면 날마다 달려도 좋을 것이다. 누군가는 ‘나는 달리기를 잘한다’라고만 요약할 수도 있겠으나 우예린은 멋진 디테일을 생략하지 않았다. 그는 또 앞구르기에 대해서도 썼다.

‘앞구르기는 재미있지만 막상 해보면 무섭다. 내 차례가 오면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눈을 크게 뜬 채로 입술을 꼭 깨물고 몸을 앞으로 굴린다. 구르는 동안엔 그저 할 수 있다는 말만 머릿속에서 맴돈다. 한 바퀴를 다 돌고나면 어지러워서 잠시 멍해진다.’

꼭 나도 같이 앞구르기를 한 것만 같다. 몸을 한 바퀴 굴리는 짧은 순간이 작가만의 것으로 그치지 않고 독자의 감각에도 닿는다. 까먹고 있던 앞구르기의 두려움과 재미를 상기시킨다.

열 살 김지온은 ‘불’에 관해 이렇게 썼다. ‘나는 불이 너무 아름다운 것 같다. 멋진 색을 뿜으며 뜨겁게 타오르는 불이 좋다. 불이 아름다운 이유는 몇천 년 전부터 어둠을 막아주고 맹수로부터 공격을 막아줬기 때문이다. 또한 색깔들이 불을 아름답게 만든다. 불은 빨강, 파랑, 보라, 노랑으로 나뉘는데 맨 밑에 있는 보라색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다. 가스레인지에서 나오는 불을 특히 좋아한다. 보라색의 불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지온의 글을 읽기 전까지 나는 불의 색에 관해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온도별로 다른 그 색깔들이 그의 눈에는 영롱하게 아른거렸을 것이다. 그의 문장을 읽은 뒤로 나도 가끔 불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아이들의 문장은 나에게 새로운 몸의 감각을 선물하곤 했다. 그들의 글에 자주 설득당하며 글쓰기 교사로 일했다.

<이슬아 | 작가·‘일간 이슬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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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 잘하고 있는데 ‘오라이’ 차 트렁크 탕탕 해주고, 내비 찍고 가는 택시 안에서 ‘인간내비’를 자처하며, 제 일도 아닌데 제 일인 양 끼어들고, 물어보거나 도와달라지도 않았는데 ‘그건 내가 좀 아는데’ 하며 만물박사 명박(明博) 빙의로 나서는 사람을 보면 한마디 해주고 싶을 겁니다. ‘오지랖도 참…’ 오지랖은 상체에 입은 겉옷의 앞자락을 말하지만, 주제 모르고 아무 일에나 쓸데없이 참견한다는 말 ‘오지랖이 넓다’의 준말이기도 합니다.

조선 초기까지는 저고리에 오지랖이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저고리라 부를 수도 없게 골반쯤까지 덮는 길이라 짧은 목욕가운처럼 허리끈을 둘러서 여몄지요. 그러다 저고리 길이가 점점 짧아져 허리 위로 올라오자 허리띠 대신 저고리 안팎에 속고름, (겉)고름을 달아 그것을 묶어 여미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옆에서 보면 속이 다 들여다보이니 어쩔 수 없이 천을 한 치가량 덧댔습니다. 그 덧댄 부분이 오지랖입니다. 그런데 그 오지랖 넓은 게 왜 조롱거리가 되었을까요? 이 말은 ‘그래, 너 참 잘났다’처럼 반어법입니다. ‘오지랖이 넓다’는 사실 다음과 같은 말이 줄어든 것이라 보면 됩니다. “그래, 오지랖 그리 넓어서 네 앞가림은 참 잘하겠다.” 제 앞에 닥친 일을 제힘으로 어찌어찌 해낸다는 ‘앞가림’과, 옷 속 들여다보이지 않게 ‘앞 가림’ 하는 오지랖을 가지고 반어적으로 조롱하는 것이지요. 오지랖 참견에는 어쩌면 내가 너보다 더 잘 안다는 우월의식, 또는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인정욕구라는, 지나치게 ‘사회적 동물’이고픈 두 가지 심리가 있을지 모릅니다.

오지랖 대장 말고도 천성적으로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다 해보려는 이도 종종 ‘오지라퍼(오지랖er)’ 소리를 듣습니다. 농으로 “오지랖도 참…” 할 수는 있지만 충고처럼 간섭은 맙시다. 그것도 ‘오지랖이 넓은’ 것일 수 있으니까요.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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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지나고 벌써 한 달. 아라비아 숫자가 큼지막한 달력 아래에서 살지만 그 속에 숨은 24절기를 올해부터 몸에 밀착시키기로 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고작 오늘밖에 살지 못하는 내가 한 해의 중심을 그 어디로 삼는 건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한해살이의 시작을 입춘(立春)에 맞추는 게 좋을 듯하다. 봄이 저기에 저렇게 서는 것처럼 나도 여기에 이렇게 독립적으로 서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로 하자.

설 연휴의 여세를 몰아 오래전부터 별렀던 교동도에 갔다. 아직도 명절이면 찾아오는 어릴 적 냄새가 조금 남아 있을 것도 같았다. 저물 무렵을 겨냥했지만 도착하고 보니 늦은 오후였다. 교동제비집에 들러 몸을 녹인 뒤 대룡시장에 갔다. 좁은 골목마다 그 시절을 통과해낸 사람들이 추억에 젖은 얼굴로 서성거린다. 관광객들로 불이 난 호떡집을 비롯해 이런저런 점빵들 사이로 효도관광, 신혼여행 안내문도 있다. 장례식장 빼놓고 있을 건 다 있는 시장. 그 끄트머리에서 산 가래떡을 입에 물고 골목을 벗어나니 교동초등학교가 있다. 제106회 졸업식을 축하하는 현수막 옆으로 우람한 측백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교문 기둥을 만지는데 어쩔 수 없이 내 고향 초등학교의 졸업식 생각이 났다. 풍금 소리에 맞춰 졸업식 노래를 부르고 나온 언니들은 교문을 부여잡고 한참을 울고 난 뒤에 흩어졌었지. 학교 담벼락에 초상화가 있다. 이 학교를 떠나고, 이 세상도 마저 졸업하신 다섯 분의 제1회 졸업생들.

방학도 없이 학교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건 측백나무들이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목구멍이 조금 간질간질해지는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운동장을 걸어 새삼스레 나무를 세어보았다. 좌측으로 54그루, 우측으로 29그루. 이 학교와 이 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저장하는 건 측백나무들이다.

멀리 해가 뚜렷하게 지는 것을 보면서 시장으로 돌아와서 양초를 샀다. 이제 집에 가서 불을 켜면 겨울에도 푸르른 측백나무 사이로 많은 생각이 푸르륵 일어나겠다. 교동도의 측백나무, 측백나무과의 상록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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