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제자와 공유하는 단톡방에서 카톡이 울린다. 40대 후반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현재 박사과정을 수료한 대학원 여제자다.

“모두 잘 계시나요? 저는 코로나 땜에 무서운 게 아니라 삼시세끼 밥 땜에 무서워요. 친밀성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나갈 데도 없고, 책도 못 보고 논문도 손도 못 대고 답답해요.” 킥킥 웃을 사이도 없이 또 다른 여제자가 메시지를 보낸다. “저는 바깥 코로나가 무서운 게 아니라 집에서 밥 달라는 코로나 때문에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있습니다. 얼른 친밀성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비슷한 글이 연이어 달린다. 

보다 못해 나도 한마디 덧붙인다. “죄송합니다. 성장이 멈춰 혼자 밥상 못 차리는 어린아이라서.” 키득키득 이모티콘이 따라붙더니, 이내 묻는다. “자발적일까요? 비자발적일까요? 남편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코로나19의 전파를 막기 위해 전 사회적으로 펼치는 이방인 사이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엉뚱하게도 가족 사이의 ‘사회적 거리 없애기’로 나타나고 있다. 가게 문을 닫은 자영업자나 재택근무 중인 직장인이나 개학이 미뤄진 아이나 모두 나갈 데가 없어 종일 집 안에서만 북적댄다. TV만 틀면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먹방은 식도락을 강제하지만, 삼시세끼 식구 밥상 차리는 전담자는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밥상 차리는 걸 두고 말다툼이 일어나고 급기야 폭력이 발생한다. 어느새 가해자와 피해자가 된 가족 성원인데도 친밀한 사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통하지 않는다. 

친밀성이란 뭔가? 차가운 근대 개인주의 정서에 맞선 따뜻한 집단주의 정서다. 최근까지도 친밀성은 이성 간 낭만적 사랑을 통해 구성된 근대 핵가족을 모델로 논의돼 왔다. 근대 핵가족은 남녀 간 낭만적 사랑을 고리로 해서 형성된다. 남녀는 서로 신체적·정신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 서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통해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혼해서 평생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자녀를 출산하고 사랑으로 돌보고 온전한 성인으로 사회화시키면서 가족 사이의 친밀성은 더욱 강화된다. 가족은 냉혹한 근대성에 맞서 살아갈 정서적 힘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이렇듯 친밀성을 차가운 근대성에 대한 치유책으로 이상화하게 되면 그 뒤쪽 어두운 면을 못 보게 된다. 친밀한 사이에서는 근대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 여성이 돌봄 전담자가 되어 남편과 아이를 돌보다가 정작 자신의 자아를 돌보지 못해 황폐해진다. 근대 핵가족이 성 불평등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한번 결혼하면 남성가부장의 경제적 부양능력과 전업주부의 정서적 지원능력이 결합해서 평생의 애착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로는 제대로 된 경제적 부양능력이 없는, 설사 있다 해도 소통능력을 상실한 ‘자발적 어린아이’를 돌보고 출산하고 육아하고 살림하느라 여성은 자아를 잃어버린다. 무엇보다 가족성원으로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탓이다.

사람은 어느 장소에 있든 자신의 공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인격적 공간’을 지녀야 한다. 어떤 누구도 이 인격적 공간을 침해당하면 고유의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 모두 자신의 인격적 공간을 침해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이유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과 사회적 공간을 공유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 겹치는 사회적 공간에서 나의 인격적 공간은 물론 상대방의 인격적 공간도 보호하려고 호혜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근대 민주주의 사회적 공간의 특성이다. 친밀성의 공간으로 이상화된 집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공공장소의 사회적 거리를 회복하자는 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이에 더해 집에서 여성의 인격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도 벌여야 한다.

<최종렬 |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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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많은 젊은이가 공무원을 꿈꾼다. 코로나19 때문에 학교 문은 닫았지만, 공무원 고시학원은 여전하다. 수험생들 열기는 늘 뜨겁다. 다들 열심이다. 공무원의 높은 인기는 신분 보장 때문이다. 공무원의 신분 보장은 헌법 사항이다. 최고위 규범이 가장 높은 수준에서 고용 안전을 보장한다. 게다가 급여도 안정적이다. 연금도 꽤 쏠쏠하다. 사회복지 분야처럼 힘든 업무를 반복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공직사회가 업무 효율을 주로 따지는 곳은 아니어서 노동조건은 대개 안정적이다. ‘격무와 박봉’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공무원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주고 먹고살 만한 급여에다 높은 수익률을 자랑하는 연금까지 두루 보장하는 건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헌법 제7조의 규정처럼 국민 전체를 위해 봉사하며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거다. 지금 당장의 사태가 그렇다. 공무원들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진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가야 했을 거다. 해외가 주목하고 칭찬할 정도로 한국의 공무원들은 제대로 대응하고 있다. 이게 바로 공무원의 존재 이유다. 

그런데 가끔은 대한민국의 주인이 국민이기보다는 공무원들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용해 오로지 자신의 잇속만 챙길 때는 특히 그렇다. 

국가보훈처 공무원들은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독립기념관, 88관광개발(골프장) 등 보훈처 관할 기관 종사자들과 함께 ‘나라사랑공제회’를 만들었다. 2012년, 보훈처 설립 50주년을 기념했단다. 정관에 밝힌 설립 목적이다. “국가보훈 업무에 헌신하는 소속 회원들의 생활 안정과 복지 증진을 도모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일깨우는 사회공헌과 보훈행정에 기여함.” 얼핏 보면 나라 사랑, 곧 국가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거나 희생된 분들을 위한 조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독립, 호국, 민주화 분야의 국가유공자들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그냥 보훈처와 공단 직원들의 잇속을 챙기는 게 전부다. 

설립 과정도 부적절했다. 행사 기획사, 여행사, 인쇄업체 등 보훈처 납품업체들에서 재단 출연금을 거뒀다. 출연금을 낸 업체들은 그만큼 혜택을 받았다. 2011년 보훈처 관련 매출이 전혀 없던 여행사는 2012년에만 2억2000여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출연금만이 아니다. 보훈처는 업체들과 사업을 하면서 얻은 수익의 일정 비율을 공제회에 납부하게 했다. 이렇게 거둬들인 돈은 모두 3억5000만원이었다. 

나라사랑공제회가 집중한 사업은 부동산 투자였다. 2015년 11월엔 경기도 성남, 다음해 3월엔 강원도 춘천에 있는 빌딩을 샀다. 각각 86억원, 128억원짜리였다. 공제회의 투자, 곧 보훈처 공무원들의 욕망은 촛불에도 정권교체에도 굴하지 않았다. 2017년 9월에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으로 진출해 170억원짜리 빌딩을 샀다. 건물 매입비용은 모두 은행 대출을 통해 조달했다. 땅을 담보로 빚을 내어 건물을 사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런 투자를 바탕으로 회원들에게는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 사실상 제로금리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퇴직급여 이자율은 4.25%다. 2016년 12월까지는 연 5.75%의 확정금리를 적용했다. 회원 자격이 없는 퇴직자에게도 자금 예탁을 통한 재산 증식의 기회를 준다. 5000만원까지 연복리 2.75%의 이자를 준다.

2018년 ‘국민중심보훈혁신위원회’는 보훈처장에게 나라사랑공제회 해산을 권고했다. 보훈처장이 설립 허가를 취소하라는 거다. 보훈처 공무원과 공단 직원들은 사영기업 노동자나 자영업자에 비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 보훈섬김이 같은 무기계약직은 격무와 박봉에 시달리지만 회원 자격도 주지 않았다. 정작 복지가 절실한 사람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정규직끼리만 혜택을 누리겠다는 폐쇄적 운영이다. 수익의 일부라도 국가유공자를 위해 내놓거나 국가의 기억사업이나 돌봄사업에 보태는 일도 전혀 없었다. 기부활동도 공적인 역할도 지금껏 전혀 없었다. 

나라사랑공제회는 정부의 설립 허가권을 악용한 대표적 사례다. 이익을 내겠다며 부동산 투자만 반복하는 것도 이상하다. 빚을 내서라도 부동산을 매입하는 게 이익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무원들의 조직이라면 달랐어야 했다. 

보훈처장은 권고를 수용했지만, 공무원들은 재산 처리를 위해 말미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말미가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공제회 해산은 유야무야된 것처럼 보인다. 최근에는 이사장도 새로 뽑고 전국의 보훈청을 돌면서 설명회를 개최하고 있다. 해산은커녕 몸집을 더 키우고 있다. 부동산 투자도 잘해서 이윤을 크게 내고 있으니 회원으로 참여해달라고 독려하고 있다. 

사실 부동산 투자는 보훈처 직원들만 벌인 일은 아니다. 법무부 직원들인 교정공무원들의 교정공제회는 아예 ‘부동산투자부’란 부서를 신설하고 매년 1000억원 안팎의 매물을 사겠다고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빌딩을 798억8000만원에 사들였다. 교정공제회는 교도관들의 회비만이 아니라 교도소 물품 납품을 독점해 수익을 올리는데, 역시 귀결은 부동산이었다. 경찰공제회, 군인공제회, 행정공제회 등도 마찬가지였다. 콘도나 호텔, 또는 골프장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장 각광받는 투자처는 역시 부동산이었다. 부동산 불패 신화는 공직사회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나 관련 장관들이 부동산을 안정시키겠다고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는 건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공무원 이익단체들은 수익용 부동산을 사들이면서 시민들에게만 자제를 호소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공무원이라고 희생만 강요당할 수는 없다. 그들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제대로 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공무원이 가진 권한을 이용해 오로지 제 잇속만 차린다면 큰 문제가 아닌가. 민주적 통제가 절실한 상황이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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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는 코로나19 사태로 세계는 물론 우리나라 실물경제도 비상이라며, 경영계 요구를 담은 경제·노동 분야 40대 입법 개선과제를 국회에 제출했다. 

경제 분야 세부사항은 법인세 인하, 법인세 최저한세제 폐지,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및 온라인쇼핑 영업시간 제한의 폐지 및 완화, 기업 경영의 안정성과 영속성 확보를 위해 최대주주 의결권 확대, 상속세 최고세율 25%로 인하, 상속세 공제요건 완화 등이다. 노동 분야 세부사항은 탄력근로제와 선택적 근로시간제 개선, 연장근로 허용 사유 확대, 해고 요건 완화, 사업장 내 시설점거 쟁의행위 금지, 쟁의행위 시 대체근로 전면 금지규정 삭제 등이다. 그동안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 걸고 싸웠지만 계속 밀려온 노동권 관련 사안들 중 그나마 남아있는 조항들조차 코로나19를 핑계로 모두 없애버리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나 더 공고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주요 경제주체 초청 원탁회의’에서 손경식 경총 회장은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정부가 기업의 기를 살려줘야 한다며 위에 나열한 깨알 같은 조항들의 요약을 건의하면서, 삶의 바닥이 무너지고 있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시급한 집행을 고대하는 재난소득지원에 대해서는 효과가 없을 거라며 반대했다. 경총이 재난소득기금을 내겠다고 해야 할 판에, 이것이 인간(人間)인가?

지난달 칼럼 “코로나19, 미세먼지 ‘좋음’”에서 설명했듯 기후위기가 근본 원인인 코로나19 사태는 계속 반복될 것이며, 이는 이윤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경제성장과 개발지상주의로 치달려온 경제정치체제와 그 운영자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또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성과가 체제 내 권력자들과 이에 빌붙은 전문가 집단들에게 집중되고, 생계와 가족에 발목 잡혀 성장에 동원된 노동자들과 시민들에게는 제대로 분배되지 않은 채 불평등과 불공정이 대물림되어 왔다. 

코로나19 사태는 인간사회의 총체적 문제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아니 바로잡으라는 생태적 경고다. ‘오로지 성장’이 핵심인 자본주의의 폐해와 막다른 절벽의 실상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윤리 이전에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더 이상 ‘성장’은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신성장’이니 ‘지속가능한 성장’ 따위 역시 이 절벽 앞에서 인간과 생태자원을 마지막까지 쥐어짜 이득을 챙겨보겠다는 발상일 뿐이다. 

이제는 경제를 포함한 사회 전반의 구조적, 정책적, 문화적 차원에서 ‘탈성장’의 경로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미 늦었지만 더 늦추어서는 안 된다. 탈성장에 관한 담론과 실천들은 국내외에서 오래전부터 축적되어 왔으며, 우리 사회에서 아직 힘 있는 세력으로 모아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요즘 겪고 있는 녹색당의 혼돈은 더없이 가슴 아프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대혼란을 통과하며 다급하게 실험하고 있는 공공적 집행과 자발적 실천들을 평가하고 정리하면서, 혼란 너머를 만들어내야 한다. 경제와 정치는 물론 과학기술과 여가문화와 일상생활 모두에서 이전과는 다른 관점과 실천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문제는 대전환을 책임지고 만들어나갈 정치세력이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조차 ‘쟤네가 원조 도둑놈’이라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시궁창에 빠뜨린 두 날강도 보수정치 패거리들에게는 기대하는 바 없다. 탈성장의 경로를 책임 있게 만들어나갈 생태적 관점의 진보정치와 시민의 힘을 고대한다.

<최현숙 | 구술생애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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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혁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25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텔레그램 등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온라인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성착취 불법 영상물을 제작·유포한 혐의로 구속된 조주빈씨가 25일 검찰에 송치됐다. 서울중앙지검은 이날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 TF를 구성하고 TF 총괄팀장 산하 여성아동범죄조사부에 이 사건을 배당했다. 경찰청도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본부를 이날부터 열었다. 검경이 조씨가 주도한 이른바 ‘박사방’을 포함해 ‘텔레그램 n번방’ 수사를 본격화한 것이다. 검경은 무관용 원칙에 따라 대화방 개설·운영자는 물론이고 시청·공유한 이용자까지 전원 수사해 엄벌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반인간적·반사회적인 신종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단죄가 막 시작된 것이다. 

수사당국의 과제는 산적해 있다. 첫째, 익명성·보안성이 강화된 디지털기술 속으로 숨어드는 유사 범죄자들을 계속 찾아내는 일이다. 경찰조사 결과 조씨는 법망의 추적을 피하고자 가상통화로 입장료를 받는 수법을 썼다. 보안이 철저하다는 텔레그램에 불안을 감지한 이들은 이미 또 다른 해외 서버 메신저로 옮겨가기도 했다. 제2, 제3의 ‘n번방’이 언제든 횡행할 형국이다. 둘째, 2차 피해 방지에 주력해야 한다. 조씨 검거 이후 규모는 줄었으나 여전히 온라인 대화방을 통한 성착취 불법 영상물 거래가 버젓이 이뤄지고 있다. ‘대피소’로 이름 붙인 새 대화방에 5000명이 모였다고 한다. 심지어 “경찰에 잡혀간 텔레그램 유명인들을 추모한다”는 ‘추모방’까지 나왔다고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법리를 면밀히 검토하고 사건처리 기준을 강화하는 것이다. 검찰은 조씨 사건에 ‘범죄단체조직죄’를 추가 적용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유사 사건에 내린 처분들에 대해서도 전면 재검토한다고 한다. 사이버 성범죄 관련 처벌법을 따로 제정해 강력 처벌하자는 취지의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 엊그제 하루 만에 10만명이 동의했다. 솜방망이 처벌로는 디지털 성범죄를 뿌리뽑기는커녕 재발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수사 당국은 엄중히 새겨야 한다.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성착취 불법 영상물이 유포·공유된 텔레그램 대화방 가입자 26만명 전원에 대한 조사와 신상공개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단순 이용자라도 일벌백계하겠다는 정부 의지를 재차 확인한 것이다. 관련 당국은 이런 자세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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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코로나19 여파로 전국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 개학을 2주일 더 연기하기로 발표한 17일 오후 경기 수원시 파장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교사들이 신입생들을 위해 준비한 교과서와 선물 등을 정리하고 있다. 수원 _ 연합뉴스

코로나19 몸살을 앓는 한국 사회가 예의주시하는 날이 있다. 전국 유치원과 초·중·고교의 개학일로 잡아놓은 4월6일이다. 방역당국은 25일 “현시점에선 속단할 수 없다”며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다. 교육부는 확진자 발생 추이, 학교 내 집단감염의 통제 능력, 방역 매뉴얼·인력·물자의 준비 정도를 보면서 판단하겠다고 했다. 개학을 한다는 것은 코로나19 대응 방식이 장기적인 생활방역으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반대로 등교·등원할 604만명의 학생과 가족·학교의 불안감이 크다면 개학을 강행하기도 어렵다. 세번이나 늦춘 개학을 예정대로 진행하느냐, 다시 연기하느냐에 따라 시민들의 생활 전반과 경제·교육·방역도 중대한 변곡점을 맞게 된다.

코로나19 새 확진자는 25일에도 100명이 추가됐다. 절반이 넘는 51명이 해외 입국자이거나 접촉자였다. 국내의 집단감염도 산발적으로 이어지고, 다중이용시설에서 새로 발생할 위험도 상존한다. 방역 전문가들은 생활방역 전환 시점을 ‘현재의 의료·방역체계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고 있다. ‘한 자릿수 확진자’를 기준 삼기도 하고, 더 넓혀 ‘감염경로의 역학조사를 할 수 있는 범위’로 잡기도 한다. 어느 잣대로든 장기전은 불가피하며, 열흘 뒤에는 개학을 두고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개학은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로 결정돼야 한다. 개학이 사회에 미칠 파급력은 클 수밖에 없다. 돌봄과도 맞물려 있고, 학원·종교·프로스포츠협회가 활동 재개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도 개학이다. 신음하는 경제를 오래 방치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고민도 무시할 수 없다. 반대로 개학했다가 확진자가 나오면 학교를 폐쇄해야 하는 혼선과 수업결손 피해가 뒤따른다. 방역 긴장이 최고조로 높아질 시점이 개학인 셈이다. 아직도 법정 수업일수에 9일의 여유가 남아 있다. 입시·학사 일정을 손대면 2주 더 개학을 늦출 수도 있다. 결국 코로나19의 잔불이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 개학을 할지, 한다면 개학 후 어느 정도의 확진자 숫자를 용인하고, 사회활동 제약과 방역 수위는 어떻게 유지할지, 경제적 유불리는 어떻게 볼지 사회 전체가 논의하고 크게 합의할 시점이 됐다. 시간에 쫓겨 벼랑 끝에서 정치적으로 결단할 문제가 아니다. 방역당국이 전문가·시민사회와 함께하는 사회적 협의기구를 준비하는 이유도 그것일 테다.

4월6일은 정부의 목표치에 가깝다. 그새 수업·급식을 학년별로 달리할 준비를 하고, 가능한 곳은 2부제 수업도 모색하고, 온라인 수업 역량도 키워야 한다. 개학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 뒤 온 사회가 참여하는 성숙한 논의를 거쳐 결정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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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김형, 이리로 오라니까.” 우형이 나의 옷깃을 당기며 넌지시 말한다. 김형,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다. 평론가님, 작가님, 선생님, 형, 오빠, 김작…. 살면서 참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지만 성이 김씨라는 것 외에는 어떤 정보값도 없는 호칭, 김형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사는 게 힘들어졌다. 상반기 강연과 행사가 쓰나미처럼 휩쓸려 나갔다. 글값만으로는 생계를 감당하기 곤란하다. 음악이나 미디어 업계에 있는 지인들에게 일감 좀 없냐고 손을 벌려볼까 생각했다. 이내 관뒀다. 그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공연과 행사가 다 취소돼 있는 직원도 줄여야 할 판이다. 이런저런 대출을 알아봤지만 근로소득세, 사업소득세를 내지 않는 프리랜서를 위한 대출은 없다. 기타소득세 3.3%만 내는 세입자를 위한 나라는 없어 보인다. 어쩌겠는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용직의 삶을 시작했다. 일정이 없는 날이면 수도권에 있는 물류센터에 나가기 시작했다.

보통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었던 새벽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 됐다. 오전 5시 반쯤 일어나 6시에 집을 나선다. 6시30분에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물류 센터에 도착하면 오전 7시20분. 서울과 수도권 여기저기에서 출발한 셔틀버스에서 수백명이 쏟아져 나온다. 마치 양떼가 우리에 들어가듯 하나뿐인 입구로 줄을 서서 들어간다. 열외 없이 마스크를 쓰고 열감지기를 통과한 후 사물함에 휴대폰을 포함한 모든 짐을 보관한 후 각자의 작업장으로 향한다. 이름은 사라진다. 휴대폰 번호 8자리로 만든 바코드를 찍고 일에 투입된다. 창고의 물건을 집품하거나 포장하거나 분류한다. 하루 종일 PDA로 물건마다, 그 물건들을 담는 박스마다 박혀 있는 바코드를 찍으면서 일을 한다. 누군가와 대화는커녕, 인사를 나눌 틈도 없다. 바코드로 인식되고 바코드를 찍는 사람들은 아직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는 부품이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로 인간이 부품화된 현대사회를 풍자한 영화를 찍은 게 1936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게 똑같다는 생각을 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주문에 따라 물건을 담고, 포장하고, 재고파악을 하고, 분류하며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별별 물건들을 주문하고 소비하는 게 자못 신기하기도 하다. 시간의 상대성을 절실히 깨달을 때도 있고, 편의와 환경은 필연적으로 반비례 관계임을 체감하기도 한다. 마스크와 목장갑을 착용하고 보내는 침묵의 하루들을 모으면 책 한 권은 금세 쓸 수 있을 듯싶다.

일이 익숙해지니 사람들이 보인다. 대부분은 휴학생이나 주부이다. 자주 나와 얼굴을 익힌 또래 사람들끼리 그룹을 지어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을 보낸다. 내 또래 남자들도 가끔 보인다. 흡연실에서 한두 명씩 얼굴을 익히다 보니 넉살 좋은 누군가 먼저 말을 건다. 그룹이 된다.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다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3.3% 인생이라는 것.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해 직격타를 맞은 업종에 있다는 것. 이벤트 회사에 다니던 사람, 영화판에 있는 사람, 지역축제를 기획하는 회사에 있는 사람… 대출을 받을 수도 없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폭탄을 맞아 일거리를 구걸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통성명을 하지만 이름은 기억하지 않는다. ‘실장’ ‘대표’ ‘팀장’ 등 원래 직함으로 부르지도 않는다. 약속이라도 한듯 서로를 ‘김형’ ‘최형’으로 부르며 각자의 ‘본캐’를 지킨다. 이것은 원래 우리의 삶이 아니라는 무의식적 담합의 호칭 같다. 점심을 먹은 후 그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며 15분 남짓한 시간을 보낸다. 다시 오후의 일을 시작한다. 셔틀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들과도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인사는 “내일 봅시다”가 아니다. “빨리 여기서 안 봐야 할 텐데”다. 3.3% 인생들이 본래의 하루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김작가 |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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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향신문DB)

마스크 5부제로 정점을 찍었던 ‘마스크 대란’의 먼지가 차츰 가라앉고 있다. 연일 ‘마스크’가 넘쳐났던 신문과 방송 헤드라인에서 마스크는 이제 자취를 감췄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된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서만 유독 모든 관심을 빨아들였던 ‘마스크 블랙홀 현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개인이든 사회든 ‘오답노트’가 중요하다. 대란이 잦아들고 있는 이때, 다음을 위해서라도 주요 플레이어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오답노트를 한번 만들어 보자.

정부 측면에선 마스크 착용과 관련해 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 점이 뼈아픈 실책이다. 감염병 컨트롤타워인 질병관리본부의 공식입장은 줄곧 ‘일반인에겐 필요 없다, 호흡기 증상이 있는 사람이나 노약자들의 의료기관 방문 시 마스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1월 ‘감염예방을 위해 KF94, KF99 등급 마스크 사용이 바람직하다’고 했다가, 지난달엔 KF80으로 기준을 낮추고, 일반 시민은 혼잡하지 않은 곳에선 마스크가 필요 없다고 했다. 지방 정부도 엇박자를 내긴 마찬가지였다. 가령 경향신문사엔 손씻기와 기침예절 등을 강조하는 질본의 예방수칙 포스터가 붙어 있지만, 필자의 아파트엔 ‘대중교통 이용, 공공장소 방문 시 필수’라는 단서하에, 마스크 착용을 제1 수칙으로 당부한 서울시의 포스터가 게시돼 있다. ‘언제 어디서나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으라’는 구청의 안내방송도 하루 2번씩 나온다. ‘건강한 시민엔 필요 없다’는 질본의 원칙이 무색하게도,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마스크를 쓰고 회의하거나 외부행사 현장을 방문하는 고위공직자, 정치인들의 모습도 ‘무조건 마스크’ 메시지를 각인시켰다. 물론 마스크 대란의 최대 실책은 현장 수급상황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끝내 대통령 사과까지 부른 경제부처의 헛발질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전문가 집단은 또 어땠나. 코로나19는 공기 전파가 안되므로, 세균 접촉 가능성이 높은 손씻기가 가장 중요하고, 손으로 눈·코·입과 얼굴을 만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세계보건기구(WHO), 미 질병통제센터(CDC), 대만과 싱가포르 방역당국, 질본 등의 일관된 의견이다. 대한감염학회와 대한예방의학회 등은 이를 따라 권고했지만, 대한의사협회는 지난달부터 마스크 착용을 도드라지게 강조했다. 지난 12일엔 아예 정부 방침과 반대로, 면 마스크 사용, 보건용 마스크 재사용을 권고하지 않는다고 했다가, 마스크 부족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자, 사흘 만에 “안 쓰는 것보단 면 마스크라도, 일회용 재사용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다시 내기도 했다. 불안한 시민들에게 차분히 설명하기보다 정부 비판에 골몰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언론이 가장 문제였다. 풍랑에 휩싸일 때 냉정히 사태를 분석하고 건설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언론의 본분일 텐데, 혼란을 방치하고 불안을 증폭한 경우가 많았다. 정부와 전문가 집단이 말하는 대로 받아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왜 주무 부처, 지방정부의 마스크 착용 권고가 다른지, 한국·외국의 상황과 마스크 착용 기준이 과학적으로 다른 것인지를 질문하고 통일된 의견을 주문했어야 했다. 언론사 홈페이지에 확진자 수나 동선을 공개하는 대신 모든 언론이 공통의 생활수칙을 반복해서 알렸다면 어땠을까. 특히 보수언론들은 대만의 배급제를 부러워하다가, 막상 마스크 5부제를 시작하니 사회주의라고 공격하는가 하면, ‘마스크가 손씻기의 면죄부가 될까 두렵다. 마스크 쓰지 않을 권리를 달라’고 하더니, ‘마스크 문제도 해결 못하는 정부’라며 마스크 대란을 부채질하는 이중 잣대를 드러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국내외 상황에서 언론은 공동체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왔나. 언론은 반성해야 한다.

마스크 대란 속에서 우리 사회는 뭘 잃고 얻었나. 마스크만 문제없이 공급됐다면 재난상황은 크게 줄었을까. 감염의 80%를 차지하는 콜센터, 요양시설, 종교시설 등의 집단감염을 마스크로 막을 수 있었을까. 바이러스로 인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촘촘히 연결돼 있다는 사실, 다른 이의 건강이 나의 건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마스크 대란의 주요 플레이어들이 제 역할을 잘했다면, 현명한 시민들은 과도한 마스크 집착 대신 마스크 양보하기, 아파도 쉴 수 없는 사회적 약자 돌아보기 등에 진작 눈을 돌려 스스로 희망의 싹을 틔웠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쯤 조금은 덜 불안하고, 좀 더 뿌듯했을 것 같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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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꼬마가 엄마에게 그랬다. “엄마! 나 사랑하면 소원하나 들어줘잉.” “엄마는 널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버리고, 또 어떤 것이라도 가져다줄게.” 그러자 꼬마가 속삭였다. “그럼 아빠를 버리고 마트 아저씨랑 결혼해줘요. 과자를 정말 맘껏 먹고 싶엉.” 요 맹랑한 것.

아이들이 긴긴 방학을 보내고 있다. 밥해서 먹이느라고 젊은 엄마 아빠들이 고생 많으시겠다. 과자도 많이 먹을 텐데, 봄에 이빨이 썩으면 치과 병원은 가을에 추수를 하겠지. 이빨이 빨리 썩으면 새 이빨이 얼른 나겠다. 뭐든지 좋게 생각하기. 하루는 지나가던 아재가 그만 새똥 벼락을 맞았다. “에잇 더러워. 저눔의 새 똥구멍을 그냥~.” 곁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한마디. “여보! 얼마나 다행인가요. 황소가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생각해봐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우왕. 그랬담 세상이 똥바다 됐겠네. 오랜 날 행복하게 사는 부부를 만나보면 공통된 모습이 있단다. 한쪽에서 말을 많이 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 말을 열심히 듣는 편이란다. 다만 듣는 쪽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공통된 답변. 무슨 말을 하든 그냥 흘려듣는 것. 삭아서 담을 게 없는 사그랑주머니를 갖고 살면 앙금이 하나도 없이 평안 모드. 지저분하고 모진 말을 가슴에 쌓아두면 똥이 되고 독이 된다.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라고 확신하며 살자. 그러려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비뚤어지거나 잘못된 길을 가려 하면 꿈에서라도 나타나 뜯어말릴 것. 하느님이 몰래 우리나라에 찾아와 길을 걷는데, 햇볕이 따가워서 ‘갓’을 쓰고 다녔단다. 그러다 어떤 충청도 양반을 만나게 되었다. “저기 아저씨. 길 좀 물어 볼라는데요.” “갓 불렀어유?” 허걱~ “갓 블레스 유, 신의 가호를 빕니다.” 정체가 탄로나 버렸네. 그래서 한국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셨다는 싱거운 얘기. 우리는 서로를 축복한다. 이 어렵고 추운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 반드시 있길. 갓 불렀어유?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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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해주신 재밌는 얘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한 일꾼이 하루 품삯을 묻는 만석꾼 고용인에게 첫날 딱 쌀알 한 톨을 달라고 했다. 이튿날에는 하루 전 품삯의 두 배인 쌀알 두 톨, 다음날은 마찬가지로 전날 품삯의 두 배인 네 톨. 몇 번 손가락을 꼽아보던 만석꾼은 흔쾌히 그렇게 하자고 동의한다. 일주일 지나도 하루 품삯으로 채 한 숟가락에도 못 미치는 쌀알을 달라고 하니, 아주 멍청한 일꾼이라고 생각하면서.

쌀 한 톨의 무게와 쌀 한 되의 무게를 비교해 계산하면, 16~17일이 지나면 하루 품삯이 쌀 한 되쯤 된다. 그리고 22일째가 되는 날 일꾼은 하루 품삯으로 쌀 한 가마니를 받는다. 다음날은 쌀 두 가마니, 그 다음날은 하루에 무려 쌀 네 가마니를 받는다. 만석꾼 부자 고용인이 한 해 수확인 만석 전체를 일꾼의 하루 품삯으로 지급해야 하는 날은 한 달하고 일주일쯤이 지난 뒤다. 멍청한 것은 일꾼이 아니었다. 이게 웬 횡재냐 하며, 덥석 계약을 수락한 만석꾼이 멍청했다는 얘기다.

초등학생들을 위해 선생님이 만드신 것으로 보이는 이 재밌는 옛날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만, 우리는 얘기를 더 이어갈 수 있다. 하루에 두 배씩 꾸준히 늘어나면 일 년 뒤 쌀알의 숫자는 약 10의 110승이 된다. 1뒤에 0을 110개를 붙여 적어야 하는 아주 큰 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주를 구성하는 원자의 전체 숫자가 이보다 훨씬 작은 10의 80승 정도이기 때문이다. 잠깐 계산해보니 관측 가능한 우주의 부피를 쌀알로 가득 채우려면 10의 88승개의 쌀알이 필요하다. 일 년이 지나면 우리가 사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우주는 빈틈없이 쌀알로 가득 차고도 넘치고, 우리 우주와 같은 크기의 10의 22승개의 다른 우주도 쌀알로 빈틈없이 채울 수 있다. 

선생님 얘기의 쌀알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몇 배’꼴로 늘어나는 것들이 있다. 기하급수적인 증가, 혹은 지수함수적인 증가라고 부른다. 운이 좋아 일 년 수익률이 지속적으로 10%를 유지하는 펀드에 가입했다면, 펀드의 적립액은 산술급수가 아닌 기하급수를 따라 늘어난다. 경제성장을 매년의 ‘성장률’로 측정하는 것도 이처럼 지수함수를 따라 경제가 성장한다는 ‘가정’에 따른 계산법이다. 기하급수와는 다르게 늘어나는 것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산술급수적인 증가이다. 오늘 한 톨이면, 내일은 두 톨, 다음날은 세 톨, 그리고 네 톨, 이렇게 두 날 사이에 늘어나는 양이 딱 정해져 일정한 방식이다. 연봉이 정해진 회사원의 일 년 동안 누적 수입은 일월, 이월, 삼월, 시간이 흐르면서 산술급수를 따라 늘어난다. 당연히 기하급수가 산술급수보다 훨씬 빨리 늘어난다. 어제보다 두 톨을 더 받는 일꾼과, 어제보다 두 배를 더 받는 일꾼이 있다고 하면, 며칠만 지나면 둘의 품삯 차이는 무지막지하게 커진다. 한 일꾼이 밥 한 숟가락의 쌀알을 받을 때, 다른 일꾼의 하루 품삯은 만석꾼의 땅 전체를 사고도 남는다. 

영국의 맬서스는 18세기 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식량의 생산으로 부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인류의 암울한 빈곤의 미래를 예상했다. 그가 점쳤던 암울한 미래는 우리 후손들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한스 로슬링의 책 &lt;팩트풀니스&gt;에 의하면, 인구 증가는 장기적으로는 우리의 걱정거리가 아니다. 이미 전 세계적인 규모로는 어린아이들의 숫자가 증가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에서 인구가 늘고 있는 것은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보건과 의학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맬서스의 예측 이후 인류가 걸어온 길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경제성장이 인구 증가보다 더 빠른 기하급수를 따랐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곳에 상존하는 빈곤 문제는 인류의 총생산량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배분의 문제다. 과식으로 늘어난 몸무게를 줄이려 헬스클럽에 가는 사람들과 하루 한 끼의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게 현대의 모습이다.

일꾼의 쌀알 품삯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쌀알 품삯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는 만석꾼의 파산으로 결국 멈춘다. 만석꾼이 어떤 방식으로라도 품삯을 계속 지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주에 존재하는 10의 80승의 원자로 10의 110승의 쌀알을 만들 수는 결코 없다는 자명한 진실이 더 이상의 증가를 가로막는다. 기하급수적인 증가는 영원히 계속될 수 없어 결국 멈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0년 3월 하순, 여러 나라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지수함수를 따라 늘고 있다. 이런 증가의 양상이 결국 수그러들 것은 분명하다.

전염병의 전파에 대한 여러 연구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 있다. 외부로부터의 유입을 막는 강력한 제한은 단지 전염병의 대규모 확산 시기를 늦출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일관된 연구 결과다. 결국 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염의 최종적인 규모는 그 나라의 방역 시스템이 결정한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확진자의 증가폭이 완화되는 시점이 나라마다 다른 이유다. 아무런 방역의 노력이 없다면, 수많은 확진자 중 상당수는 인체의 면역계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감염을 이겨내겠지만,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동반하게 된다.

늘어난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빠르게 늘어나는 것과 느리게 늘어나는 것의 차이는 정말 크다. 빠르게 늘어나는 것을 느리게 늘어나는 형태로 바꾸고 결국 늘어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처음 발병지가 어디인지를 따지며 외부를 비판하는 것은 비겁한 핑계 대기다. 혐오는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

<김범준 |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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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긴장과 단절, 공포가 일상화하면서 개인 삶도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전염병은 경제·사회 시스템과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원·달러 환율은 폭등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급여가 줄고 실업자들은 늘고 있다. 정부가 그렇게 잡으려고 했던 강남 아파트 가격도 상승세가 꺾였다. 

그런 코로나19도 한국 사회 만악의 뿌리인 사교육에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다. 집단감염 우려로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학원은 학생들로 다시 붐비고 있다. 서울은 이달 중순만 해도 학원 10곳 중 3~4곳이 쉬었지만 대부분 다시 문을 열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고, 공급이 또다시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대치동과 목동의 유명 단과학원과 오피스텔 교습소는 학교 수업 공백으로 오히려 특수를 누린다고 한다. 대입 학원과 기숙학원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수능시험 공부를 하고 있다. 평시든 비상시든 호황이든 불황이든 사교육에 브레이크는 없다.

게임 이론의 고전적사례인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는 서로 믿고 협력하면 모두에게 이익이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해 모두 피해를 보는 상황을 일컫는다. 학생과 학부모가 바로 딜레마에 빠진 죄수 처지다. 

공범이 두 명 있다. 둘이 모두 범죄를 부인하면 무죄다. 둘 다 자백하면 유죄다. 한 사람만 자백하면 그 사람은 무죄이지만 부인한 사람은 더 큰 벌을 받는다. 둘 다 부인하는 게 최선이지만 상대방을 믿지 못해 둘 다 자백하고, 모두 감옥에 간다는 게 죄수의 딜레마 결론이다.


집단감염 우려에 학교 문 닫아도

학원은 학생들로 다시 붐비는 중

남에게 뒤처질까 두려운 부모들

아이의 건강이 위협받는데도

사교육에 돈 쏟아붓기 못 멈춰


사교육도 똑같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모두 약속을 하고 한날한시에 학원 수업이나 과외를 딱 끊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되면 사교육 경쟁은 끝난다. 부모는 돈을 아끼고, 아이들은 공부 부담을 덜 수 있다. 입시가 보다 공정해지고, 계층 이동 사다리가 복원된다. 하지만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물리적 거리 두기’ 총력전이 펼쳐지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학원에 간다. 일부는 수강생이 줄어든 지금이 성적 올리기에는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사교육을 하기 때문에 사교육은 그 자체로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 수도권 인기 대학에 합격한 상위 10% 정도만 본전을 건진다. 90%에겐 결과적으로 돈 낭비, 시간 낭비일 뿐이다. 사교육은 사회의 인재 선발도 방해한다. 입시는 사회에 필요한 우수 인재를 뽑는 기능이 있지만 부모의 경제력 덕분에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을 우수 인재로 잘못 뽑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교육의 폐해가 크고 당장 학생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지만 교육당국의 조치는 학원에 휴원을 권고하는 수준이다. 정부에 협조하지 않으면 제재하겠다고 엄포를 놓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다. 학부모와 학생들을 강제로 말릴 수도 없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의 ‘과외 금지령’은 민주화 이후 위헌 판결이 났다.

차선책은 학교 휴업 동안 정부가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을 신속하게 제공하는 것이지만 이번 코로나19 국면에서도 공교육은 사교육에 밀렸다. 교육부가 지난 2월 중순 개학 연기 결정을 내리자 사교육업체들은 곧바로 온라인 특강을 편성했다. ‘일타’ 강사들은 2월 말부터 마치 개학한 것처럼 1교시 2교시 시간표를 짜서 인터넷 강의를 제공하고 있다. 교육방송(EBS) 인강이 호평을 받고 있지만 사교육만큼 빠르지는 못했다. 일선 학교는 당초 개학날인 3월2일 즈음 비상연락망을 가동해 학생들에게 학습 계획표와 독서 목록 등을 배포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미 2~3주일 전 학원에서 수백장의 신학기 수학·영어 학습 자료와 과제물을 받은 터였다.

지난해 초·중·고교 학생은 545만명으로 1년 전보다 13만명(2.4%) 줄었지만 사교육비 총액은 21조원으로 2018년(19조5000억원)보다 7.8% 늘었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 학벌 폐해와 학력 차별도 여전하고, 교육당국은 무기력하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신뢰다. 사교육 문제의 해답도 같다. 하지만 어떻게 상대를 믿으란 말인가. ‘남이 안 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남이 사교육을 안 할 때 나만 하면 대박인데’. 코로나19로 아이의 건강이 위협받고 가장이 언제 회사에서 잘릴지 몰라 걱정하면서도 매월 수백만원씩 사교육에 쏟아붓는 현실이 한 편의 부조리극 같다.

<오창민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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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그러니까 시각적 쾌락을 목적으로 타인의 무덤에 가본 적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나에게 무덤이란 국립묘지처럼 ‘참배’하거나, 부모님의 묘소처럼 ‘애도’하는 곳이었다. 관광객으로 나폴리에 오니 감히 무덤을 구경하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관광 안내 책자에서 구한 나폴리의 ‘볼거리’ 정보에 따라 카타콤, 즉 지하무덤을 구경하기로 했다.

개별 관광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다. 사전 예약을 해야 하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서만 구경할 수 있다. 예약을 대행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카타콤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폴리 지하의 산 제나로 카타콤을 탐험하세요! 나폴리 수호성인 산 제나로와 도시 간 끈끈한 유대감에 대해서도 알아보세요!” 이 초대장은 카타콤을 다소 경쾌하게 소개하며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혹시라도 지하무덤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예약을 망설이고 있는 사람도 카타콤이 제공하는 볼거리를 보다 유혹적으로 설명하는 다음 문장을 읽고 나면 어느새 결제 버튼을 누르게 된다. “시간을 거슬러 나폴리의 수호성인 산 제나로의 지하묘지로 여행해 보세요. 나폴리의 거리 아래로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그려진 아름다운 프레스코화와 비잔틴화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하묘지로의 ‘여행’,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일상에서 불가능한 일을 체험하는 것을 여행의 참맛이라고 느끼는 관광객은 이곳이야말로 여행 온 이유를 설명해주는 최적의 장소라 간주한다. 그리고 구경한다.

그랬다. 그곳엔 구경거리가 많았다. 아무리 지질적인 장점이 있다 하더라도 지하 땅굴을 다층으로 판 건축 솜씨는 신기했고, 이곳 저곳에서 발견되는 프레스코 그림은 놀랍기만 했다. 관광객이 기대하는 구경에 대한 모든 욕구를 충실히 충족시키는 곳이었다. 지하세계 ‘탐험’이 끝나고 “지하묘지로의 여행”을 마무리할 때 탐험 여행을 안내했던 가이드가 폰타넬레 공동묘지 방문을 권했다.

전 세계 여행객의 인공지능인 구글 지도를 검색해보니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혹시 한국에 잘 알려진 곳인가 하여 네이버도 검색해봤다. 폰타넬레 공동묘지에 관한 블로그 포스팅이 거의 없다. 그곳에 갈 충분한 이유가 된다. 묘지를 향해 가는 동안 폰타넬레 공동묘지를 페이스북에 포스팅할 생각에 흐뭇했다. 남들이 모르는 나폴리의 ‘진정성’에 독점적으로 가까이 가는 느낌이었다.

폰타넬라 공동묘지는 카타콤과 달랐다. 입구부터 산처럼 쌓인 해골과 뼈 더미와 마주쳤다. 여긴 카타콤의 프레스코 그림처럼 시각적 안정을 유도하는 볼거리가 없다. 해골은 해골끼리, 뼈는 뼈대로 가지런히 분류되어 만들어진 기괴한 군집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1836년에서 37년 사이 당시 인구 35만7000명이었던 나폴리에서 3만2145명이 도시를 휩쓴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미처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시체가 폰타넬레 공동묘지에 무덤도 만들지 않은 채 쌓였다. 어디에도 이들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표식이 없다. 뼈 위에 뼈가, 해골 옆에 해골이 쌓여 있으나 저 뼈는 어느 해골과 한때 한 사람의 것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날 밤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잠들어도 해골과 뼈가 꿈에 자꾸 나타났다. 깨어나면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날 밤 나폴리에서 겪었던 그 불편함의 이유를 17세기 영국 시인 존던의 산문에서 찾았다. “어떤 이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전체의 일부다. 만일 흙덩이가 바다에 씻겨 가면 유럽은 줄어들 것이고, 갑(岬)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이며, 친구와 자신의 땅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어떤 사람이 죽어도 나는 줄어드니 이는 내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지 말지니, 그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 매일 뉴스에 숫자로 표기되는 사람, 그 죽음은 구경거리가 아니다. 그 사람을 위해 제대로 울리지 않은 장례식의 종소리, 그 종소리는 나를 위해 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날 나폴리에서 나를 위해 울리는 3만2145번의 종소리를 들었으니 제대로 잠이 들지 못했던 것은 당연했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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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거리 두기를 위해 사람과의 만남을 가능한 한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렇게 살 수만은 없다. 그래서 화상회의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온라인 모임을 했다. 일요일 밤 10시, 약속한 시간에 화상회의 채팅창에 접속하자 친구들의 일상 풍경들이 분할돼 한 화면에 펼쳐졌다. 한 친구는 안 자고 더 논다고 버티는 아이를 막 재우고 나왔다. ‘평화롭게 잠든 아이를 보는 부모의 고단한 기쁨’이 무언지 맥주 캔을 따는 친구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금주를 결심한 친구였고 그것은 맛없는 무알코올 맥주였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한 친구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김치찌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양파가 없어서 부엌 안을 방황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 친구는 반려동물과 산책하고 돌아왔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굳이 나누지는 않았을 일상의 풍경이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남의 잠옷을 구경할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놀겠다고 안 자고, 김치찌개를 끓여야 하는데 양파가 없고, 늦은 밤인데 반려동물이 산책하러 가자고 조르는 이런 소소한 고난이 사실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안다.

창밖의 사이렌 소리가 화상 채팅창을 통해 친구들의 공간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마포대교 근처에 살아 사이렌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 소리는 누군가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 뜻이다. 요즘 들어 사이렌 소리가 자주 들리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한강의 투신자 구조율은 97%다. 잦아진 사이렌 소리는 말한다. 이제 시작이라고.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떨어지지 않도록 서로서로 잘 잡아줘야 한다고.

업무, 경제, 생활 모든 영역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와중에 각자 일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심되고 고맙다. 반복되는 하루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힘으로 어떻게든 계속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 거리는 두되 마음만은 가까이. 서로에게 더 다가가고자 한다. 필요할 땐 손을 내밀면서.

<정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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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로 인해 아동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고 들려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아동학대 근절을 위해 각계각층이 해 왔던 부단한 노력도 아이의 죽음 앞에서는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침통함을 금할 수 없다.

그동안 아동학대에 대한 조사와 사례관리는 공공이 아닌 민간 사회복지법인에 의해 운영되는 아동보호전문기관이 담당해 왔다. 아동 보호에 대한 신념과 열정, 전문성을 겸비한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들은 일선 현장에서 아동학대 행위자의 폭언과 폭행 및 가용자원의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아동들을 학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하지만 민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아동학대 행위자가 문을 걸어 잠그고 개입을 끝까지 거부하면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곤 했다. 그로 인한 보호의 공백 속에서 작년 10월 5세 아동이 계부의 잔혹한 폭행으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이제는 더 이상 비극적인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특단의 변화가 요구되는 때다.

지난 3월 초, 아동학대 대응체계를 공공 중심으로 개편하는 ‘아동복지법’과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번 법 개정으로 20년간 민간이 담당해 온 아동학대 조사와 응급보호를 지방자치단체의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이 담당하게 되었다. 기존의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심층사례관리전담기관으로서 아동학대 피해아동 및 가족에 대한 사례관리를 수행하게 되었다.

개정안은 국가가 아동학대 발생부터 사례관리와 종료까지 책임 있게 개입하여 피해아동 보호를 공백 없이 수행하겠다는 정책 의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정책 방향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인가는 앞으로 아동권리보장원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에 아동권리보장원은 정책 실현을 위해 하위 법령에 세부적으로 포함되어야 할 내용을 고민하고 관계 부처에 의견을 전달하는 한편,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의 전문성 함양’과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심층사례관리전담기관화’라는 과제 해결에 주력하고 있다.

먼저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이 현장에 투입되어 아동학대 조사와 응급보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매뉴얼 및 교육과정을 개발할 것이다. 또한 기존에 업무를 수행해 온 아동보호전문기관의 노하우를 빠짐없이 전수할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한편 심층사례관리 기능을 수행하게 될 아동보호전문기관이 아동과 가정의 기능회복을 지원해 재학대를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도록 보다 전문적이고 구조화된 사례관리 모듈을 개발·보급할 예정이다. 더불어, 아동학대 대응체계 개편에 따른 변화의 시기에 실무적 혼선을 최소화하기 위한 공공과 민간의 효과적인 협력 또한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갈 것이다.

우리는 아동학대 대응체계 공공화가 ‘아동 안전 최우선 정책’으로 자리매김하길 소망한다. 공공과 민간의 협력과 공조를 통해 아동학대 대응체계 공공화가 아동권리실현의 꽃을 피우기를 기대한다.

<윤혜미 | 아동권리보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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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3월11일 충북 청주시 질병관리본부 긴급상황실을 방문해 코로나19 대응에 분투 중인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한국이 코로나19 사태 통제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신천지발’ 환자의 급속 확산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적극적인 대처로 진정 국면에 접어든 덕이다. 해외로부터 드라이브 스루 등 ‘한국 모델’의 노하우 전수 요청도 잇따른다. 한국의 성과는 정부의 발 빠른 대처와 헌신적인 의료진, 성숙한 시민사회가 어우러진 결과다. 감염 정보를 숨김없이 공개해 방역정책에 대한 시민의 신뢰를 끌어냈고, 이는 시민의 적극적인 정책 참여로 이어졌다. 그러나 방역 인력 및 시스템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면 코로나19 기세를 누그러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량 검사만 해도 숙련된 인력과 복잡한 위생 설비 및 검사 재료가 확보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느 날 필요성을 느낀 지도자가 “합시다”라고 외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의 대혼란은 코로나19 진압의 첫 단계에서 대량 검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검사에서 누락된 환자들은 감염병 확산의 매개체가 되기 십상이다.

질병관리본부를 차관급 조직으로 격상한 것도 ‘신의 한 수’라 할 만하다. 그 덕에 질본은 컨트롤타워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정은경 본부장의 활약도 특별하다. 그는 차분하고 전문적인 발표와 설명으로 시민의 불안과 공포를 잠재워주고 있다. 그와 같은 방역 전문가가 ‘메르스 해고 폭풍’을 넘어 문재인 정부에서 방역 책임자로 올라선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런 사전 대비들은 의료공공성에서 나온다. 인터넷에 나도는 코로나19 치료비 명세서를 본 적 있는가. 900만원 넘는 치료비에 환자 부담은 4만원에 불과했다. 건강보험공단과 질본, 지자체 보건소가 치료비를 분담하기 때문에 이런 계산서가 가능해진다. 미국의 경우 코로나19 검사비는 국가 부담이지만 수천만원에 달하는 치료비는 환자가 내야 한다. 최근 미국 교민들의 ‘코로나19 귀국 행렬’은 한국의 저렴한 의료비가 배경에 있다.

현재의 의료공공성 수준은 반(反)시장이나 포퓰리즘으로 보는 보수와의 치열한 투쟁 끝에 얻어낸 결과다. 만약 이명박 정권이 추진한 의료민영화가 시행 중이었다면? 이번 사태는 훨씬 더 끔찍했을 것이다. 시민 다수가 대량 검사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고, 고가의 비용 탓에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게 뻔하다. 의료서비스를 시장에 넘기자 구급차 한 번 타는 데 1000달러가 넘는 돈을 내야 하는 미국을 생각하면 당장 답이 나온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의료영리화 정책도 공공성을 해친다는 점에서는 의료민영화 정책 못지않다.

민영화든 영리화든 자본이 의료서비스를 장악하게 되면 의료 행위는 수익창출 수단으로 전락한다. 정상 체온의 아기를 열이 있다고 속이고, 가벼운 상처에도 입원시킨 미국 병원그룹 HMA의 사례는 영리병원의 본질을 잘 설명해준다. 이런 영리병원이 돈이 안되는 감염병에 관심을 갖겠는가. 감염내과 수가는 여타 진료에 비해 낮기 때문에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있는 돈을 쓰기 일쑤다.

한국의 의료공공성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공공병원 비중은 전체 병원의 5.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압도적’ 꼴찌다(2016년 기준). 공공병원 병상 비율(10.3%)도 마찬가지다. 의료공공 정책이 보수에 의해 매번 발목이 잡힌 탓이 크다. 현 정부 들어서도 공공보건의료 핵심인력 양성을 위한 국립공공의대 설립법안은 국회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고, 감염병 전문병원 설립 역시 첫 삽도 뜨지 못했다. 메르스 사태 때 190명이던 감염내과 전문의는 지금 270명으로 늘어났을 뿐이다. 적자라며 진주의료원을 폐쇄한 논리가 아직도 한국 의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전 세계에서 1만6000명이 숨지고 각국의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고 있다. 이만큼 치열하고 참혹한 전쟁도 드물다. 따지고 보면 ‘감염병 전쟁’은 일반 전쟁보다 잦다. 일반 전쟁은 70년 넘게 발생하지 않았지만 감염병 전쟁은 2000년대 들어서만 벌써 4번째다.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군대가 필요하다. 예방·검진·치료를 위한 의료 및 행정 인력과 시설, 조직을 육성해야 한다. 훈련과 교육도 빼놓으면 안된다. 막대한 돈과 시간이 들고, 평상시 손해를 보는 일이지만 위기 때는 진가를 발휘한다. 돈은 편의와 물질적 풍요를 제공한다. 의료공공성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 어디에 더 비중을 둬야 할지는 명백하다. 또다시 돈에 눈이 멀지 않기 바란다.

<조호연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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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공자(孔子)가 자신의 도가 하나로 꿰어져 있다고 말하자 증삼(曾參)은 그것이 충(忠)과 서(恕)를 가리키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서(恕)는 공자가 자공(子貢)에게 평생의 좌우명으로 준 글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일상에서 활용되는 어휘가 ‘용서(容恕)’밖에 없을 정도로 서(恕)는 사라져 가는 글자가 되고 말았다. 서(恕)는 남의 마음도 나와 같으리라는 점을 헤아려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상대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덮어 준다는 ‘용서’의 현대적 의미보다 훨씬 외연이 큰 말이다.

용서를 미덕으로 강조할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한, 용서를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명령은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용서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피해자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되고 가해자에게는 면죄부를 얻는 기회가 되기 십상이다. 가해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처벌을 온전히 받을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피해자로서 가해자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점이 깊이 와 닿을 때, 비로소 피해자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용서다.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협박해 성 착취 동영상을 찍고 이를 인터넷에서 회원제로 유포한 사건이 공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말의 서(恕)라도 있다면 차마 할 수 없을 행위를 자행하는 데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사이버라는 창문 너머의 익명성에 숨어 그것을 즐겨왔다는 사실에 치가 떨린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이들은 이미 서(恕)의 대상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간과되어 온 문화 위에서 탄생한 괴물이라는 점에서 남성의 일원으로 자괴와 참회를 금할 수 없다.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한때 충격을 주었다가 잊히곤 해왔음을 상기한다. 이번에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다면 이 괴물은 더 흉측한 몰골이 되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취할 수 있는 가장 넓은 대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처벌을 촉구한다. 추호의 용서도 허용하지 않는 것, 이번 일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서(恕)의 실현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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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어머니가 집에 계신다. 얼마 전 산소공급기에 문제가 생겼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출장 수리가 안된다고 한다. 또 큰 병원 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하필이면 추천받은 병원에서 확진자가 대거 발생했다. 전국 요양병원이 전수조사 중인 가운데 집에 모셔 다행이다 싶었지만 우리집도 이 역병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멀리 있던 공포가 점차 내 집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다. 역병의 위험을 비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질병도 위험하지만 더 큰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다. 실내체육시설과 유흥업소 등에 운영 중단 권고가 내려졌고 장사가 안돼 자진 휴업하거나 폐업하는 곳도 속출하고 있다. 10만명의 학교 비정규직은 개학 연기로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됐고, 여행이나 관광운수업 등에서는 무급휴직에 이어 정리해고가 이어지고 있다. 대기업 해외 공장이 멈추기 시작했고 세계 경제도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병에 걸리지 않고 버티는 것도 문제겠지만 생계를 해결하는 게 더 큰 어려움이 됐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위험과 공포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상대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다. 도시 봉쇄나 이동 금지, 생필품 사재기와 총기 구입 쇄도도 멀리 있는 다른 나라의 일이다. 정부에 대한 비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질병관리본부의 신속한 대처와 투명한 정보 공개에 많은 사람들이 신뢰를 보내고 있다. 또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예배와 영업을 강행하는 곳이 있고 질병 예방보다 봄철 꽃구경에 취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국민은 차분하게 정부의 방역지침을 따르고 있다. 

참 훌륭한 국민들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권리의식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과도한 자유의 제한이나 인권 침해 없이도 전파 속도가 제한될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우한 교민은 결국 따뜻한 환대 속에 입국했고 어느 정치인은 대구·경북 지역 봉쇄 발언으로 당직에서 사퇴해야 했다. 중국인이나 신천지 교인을 향한 혐오 발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 국민적 분위기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질병관리본부가 제 역할을 하는 것도 국민들 덕분이다. 세월호 사건을 눈감지 않고 안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대대적으로 촉구한 결과다.

그런데 예외도 있다. 바로 정치인들이다. 지금 같은 비상상황에도 아랑곳 않고, 아니 오히려 국민들의 관심이 다른 데 가있는 틈을 타서 자기들끼리의 권력 다툼에만 혈안이다. 정치권이 비례정당을 둘러싼 이전투구로 난장판이 됐다. 국민은 안중에 없고 팬덤 정치만 남았다. 명분은 사라지고 이기는 것만이 지상과제가 됐다. 국민이 존중받지 못하고 상식과 대의가 실종되고 내일을 위한 비전에는 무심한 선거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는 명약관화하다. 

루소가 틀렸다.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국민들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고 투표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2020년 한국에서는 선거 때조차 국민이 주인이 될 수 없다. 정당과 정치인은 선거로써 심판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심판도 무의미해졌다. 누가 차선이고 차악인지도 구분이 어렵게 됐다. 4·15 총선에서 주인은 정치인이고 국민들은 노예에 불과할 위기에 처했다. 노예가 어찌 주인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어느 주인을 고를까 고민하거나 고민도 없이 주인을 맞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 훌륭한 국민들은 어떤 잘못된 정권도 심판하지 않고 넘어갔던 적이 없다. 멀리 4월 혁명과 6월 항쟁을 들지 않더라도 불과 몇 년 전의 촛불집회가 증명한다. 달라진 것은 대상뿐이다. 과거에는 집권세력에 한정됐다면 지금은 여야를 망라해 기득권 정당 전체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지난가을 ‘조국 사태’를 겪으면서 국정을 농단하고 국민을 농락하는 정치집단이 과거 독재정권에 기반을 둔 정당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지금, 자유한국당에 이어 민주화운동을 뿌리로 해 탄생한 민주당까지 반민주적 권모술수로 헌정질서를 교란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누군가는 위성정당에 투표하지 말자고 한다. 또 누군가는 혐오를 양산하는 거대 양당에 표를 주지 말자고 한다. 시민사회단체들은 비례 ‘위장정당’ 해산을 위해 온라인 저항행동을 전개하자고 하고 선거 연기나 보이콧 주장도 나오고 있다. 어느 게 좀 더 나은 방법인지는 몰라도 국민들의 체념과 분노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누가 승리하더라도 암수에 의한 것이지 국민과 함께 얻은 정당한 승리는 아니다. 현 정부도 앞으로 국민으로부터 정치적 동력을 얻기는 어렵게 됐다. 코로나19보다 더한 역병이 지금의 한국 정치다.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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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외국에 알리는 포스터. 트위터 계정 ‘n번방 텔레그램 탈퇴 총공’ 갈무리 누리꾼들이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영어·일본어·중국어 등 다양한 외국어로 만든 포스터. 트위터 계정 ‘n번방 텔레그램 탈퇴 총공’ 갈무리

‘온라인 페르소나를 만들려 하던 초창기부터 나는, 가상의 남자가 되는 게 가상의 여자가 되는 것보다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28년 전, 게임 연구를 통해 온라인시대의 자아정체성 문제를 탐구하고자 했던 MIT의 심리학자 셰리 터클은 연구 현장인 게임으로 뛰어들기 전 이런 고민을 했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역할놀이 게임 세계에서 여자는 남자로, 남자는 여자로 혹은 중성의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고를 수 있었다. 성역할 바꾸기를 통해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성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연구결과를 정리한 터클의 책 <스크린 위의 삶(Life on the screen)>은 온라인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실제세계와는 달리 다중의 정체성을 경영하며 때로는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스스로에게 숨 쉴 틈을 주고, 때로는 현실에 저항할 힘을 기르는지를 보여주는 고전이 되었다.  

터클이 연구하던 시절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지금, 온라인 세계와 실제 세계는 어떻게 연결되고, 스며들고, 분리되고 있을까? 이제 우리는 카톡 대화에서 이모티콘으로 웃음 짓는다고 해도 상대가 실제로 웃고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으며, 인스타그램에 그림 같은 점심식사 사진을 올린다고 해도 그 사람의 하루가 그림같이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날 갑자기 페이스북의 친구로부터 삭제를 당하면 세상 밖으로 떠밀려난 것 같은 고립감을 느끼고 메신저에서 모욕을 당하면 맞대면한 상태에서 뺨을 맞은 것 같은 분노감에 몸을 떤다. 온라인공간에서의 다툼이나 따돌림이 현실의 폭력사건으로 번지거나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는 얘기들은 이제 낯설지 않다. 사이버공간과 현실의 삶은 씨실과 날실처럼 치밀하게 직조되어 우리의 생활세계가 된다. 사이버(cyber)를 가상(假想)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실재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이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시기에, 엿새 만에 4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이버공간에 모였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라고 불리는 성착취, 성폭력 사건의 용의자는 물론이고 가입자 전원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쏟아냈다. 이 분노는 밝혀진 미성년 피해자만 16명인 극악한 성착취,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일시적 폭발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무법천지처럼 방치되어왔던 사이버공간의 생존권에 대해 사람들이 힘을 합해 “그만!”이라는 경고음을 쏘아올리고 있는 것이다. 

국민청원의 요구에서 두 가지에 주목한다. 첫 번째는 익명성 뒤에 숨어있는 모든 가담자들을 실제세계로 끌어내자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차마 다시 말로 옮기기도 끔찍한 성착취와 성폭력을 당하면서도 가해자들의 요구에 굴복했던 이유는 가족이나 친지에게 알리겠다는 협박 때문이었다. n번방, 박사방 등을 만든 사람은 물론이고, 거기에 모여들어 “잡히지 않는다” “현행법에 걸려도 처벌받을 가능성이 없다”며 희희낙락했던 26만명도 실제세계로 불려나오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두 번째는 주범을 ‘박사’나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몇몇에 국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물다섯 살의 남성 용의자가 텔레그램에서 ‘박사방’이라는 지옥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돈을 내는 소비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수요를 잡지 않고 공급만을 잡는 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람들은 또한 알고 있다. 

코로나19는 우리 앞에 예측불허의 시간을 열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후의 세계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n번방 사건도 이전과 같을 수 없는 미래, 새로운 질서를 요구한다. 사람들이 사이버공간에서 먼저 움직였고, 이제 실제세계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정은령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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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중국 경극의 독특한 얼굴 화장을 화검이나 검보라고 한다. 그런데 화검은 ‘상처 자국 또는 반점이 있는 얼굴’을 뜻하는 화면(花面)이라는 단어와 같이 쓰인다. 화면은 곧이곧대로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러나 반어적으로도 쓰이는데 <임하필기>에 보면 ‘천연두가 심하여 얼굴에 마맛자국이 생긴 것을 일컫는다’고 되어 있다. 원나라 사람들 중 불화(不花)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유난히 많은데 불화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꽃이 피지 않는 장소가 화단이나 정원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이의 얼굴이다. 천연두를 많이 앓았던 원나라와 금나라 사람들이 이름 자체에 부적의 의미를 담아 화면이 되지 않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천연두가 창궐했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역병의 시대를 어떻게 넘겼을까. 당시는 지금처럼 한순간 일어났다가 지나가는 일이 아니라 ‘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잦거나 반복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전국으로 번진 마마는 지금의 ‘코로나19’처럼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사대부들은 우선 발병 지역을 피하고 봤다. 미수 허목은 경기도 연천의 은거당에 머물렀는데 1678년 낭선군 이우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머물던 마을에 역병이 돌아 10여명이 죽으니 하릴없이 궁벽한 산골짜기로 몸을 피했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거처를 급히 옮기느라 읽던 책은 물론 필연조차 챙겨오지 못해 심사를 달랠 소일거리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그보다 12년 뒤인 1690년 3월에는 전남 나주의 회진마을에 살던 창계 임영이 세 살배기 아들을 품에 안고 10여명의 식솔들과 함께 부랴부랴 마을을 떠났다. 마마가 덮쳤기 때문이다. 그가 몸을 피한 곳은 둘째 형님인 임정이 살던 영산강 하구의 강마을인 무안군 일로읍 사교마을이었으니 그곳까지 1박2일의 뱃길이었다.

명재 윤증은 1708년 3월 역질이 번지자 충남 예산의 선영과 마주 보는 곳에 있던 사찰인 정수사로 거처를 옮겼다. 정수사는 중종과 문정왕후의 3녀인 인순공주의 원당이었지만 후에 윤증 집안이 분암으로 삼아서 종회를 열기도 하고 가문의 강학 장소로 사용하기도 한 곳이다. 윤증은 몸을 피해 ‘정수사에서 역질을 피하다’라는 시를 지었는데 종일 말 한마디 나눌 사람조차 없는 외로움을 토로했다. 

동계 정온은 온 집안이 역병에 걸려 큰아들인 정창시의 장례를 여섯 달이 지나서야 치렀으며, 목재 홍여하는 1664년에 종조숙부인 합강정 홍호약의 제문을 썼는데 홍호약이 숨을 거둔 지 열두 달이 지나서 장례를 치른다며 애통해한다. 홍호약이 역병으로 숨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숨을 거둘 당시 역병이 돌아 누구 하나 모이질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며 너무도 슬프고 죄를 지었다며 글을 시작한다.

성리학자인 녹문 임성주는 1784년 7월, 셋째 아우인 운호 임정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딸의 혼례를 치른 후 잔치에 모였던 손님들이 돌아가자 아들이 갑자기 역병 의심증세를 보였다며 한탄한다. 이에 아들을 기거하던 집에 둔 채 가족들과 자신은 집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또 하나의 집을 구해 형과 어머니가 간호를 했는데 두려움이 컸다고 고백한다. 그런가하면 옥담 이응희는 1623년 4월 처와 자식이 모두 염질에 걸렸다. 이에 함께 살던 어머니를 모시고 집을 떠났다가 석 달이 지나서야 돌아왔다고 하니 남거나 떠났던 이 모두 두려움에 떨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 무명자 윤기는 ‘협리한화’라는 글에서 생필품이 동난 것에 대해 말한다. 1815년 지금의 양평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는데 기근과 역병으로 인해 소금·젓갈·땔나무·생선·신발 같은 것들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고 물가가 몇 곱절이나 뛰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 역병이 번지면 모두 살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앞에 말한 임성주가 아우에게 보낸 편지의 첫머리에 “목숨을 건지느라 겨를이 없다”고 썼을까. 

그 와중에 지금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거리 두기’처럼 역병이 창궐한 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중요한 강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대부도 있었다. 그는 대산 이상정으로 1729년 고재 이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퇴계 이황을 배향한 여강서원에서의 강회가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묻는다. 그러곤 강회에 참석자들이 모두 역병을 꺼리는데 자신의 거처가 역병 창궐 지역에 있어 강회에 참석한다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기고 말 것만 같아 행장을 꾸려 출발하려다 스스로 멈췄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선조들은 나름대로 굳건하게 견디고 이겨냈으며 역병은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들기도 했다. <삼국유사>의 처용도 그렇거니와 962년인 고려 광종 13년에는 쇠로 만든 당간이 용두사에 세워졌다. 청주의 향리 김예종이 역병인 염질에 걸린 후 쾌차를 바라면서 시주해 건립된 것인데 국보 제41호 용두사지철당간이 그것이다. 조선에서는 역병이 창궐하던 17~18세기에 마을과 사찰 어귀에 역병을 물리치기 위한 장승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길가에 서서 이정표 노릇을 하던 장승이 주로 남도지방 마을과 사찰 어귀의 지킴이로 변신을 시작한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것을 견디고 이겨내려 갖가지 지혜를 짜내기 마련이고 그 결과는 이처럼 하나의 문화로도 남는다. 

예로부터 마마를 큰손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결국 돌아갈 손님이지만 그가 어떤 상처와 문화를 남기고 물러갈 것인지는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다. 그래서 보다 더 현명하고 배려 깊은 대처가 무엇보다 요구되는 지금이다. 모두 강건하고 지혜롭게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며 ‘코로나19’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견디기를 응원한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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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국민연금이 수탁자책임원칙(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선언한 이후 더 적극적인 주주 권한 행사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올해 주총부터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의 본질과 절차에 대한 오해로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비판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 반대하는 측이 내세우는 가장 큰 논거는 대부분의 주요 기업에서 대주주 지위를 점하고 있는 국민연금이 독립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정부 또는 일부 이해관계자 집단의 영향력에 좌우되어 왜곡된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의 타당성을 따져보기 위해선 먼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관련 의사결정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구조를 보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가 주주권 행사의 원칙과 기준을 설정하고 이를 지침으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와 기금운용본부가 구체적인 사안을 판단하고 최종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 국민연금이 내리는 의사결정의 독립성과 객관성 부족에 대한 우려는 구체적인 증거에 의거하기보다는 주주권 행사 관련 기구의 구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의 의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이며 관련 정부 부처 차관이 위원으로 참여한다는 측면에서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주장이다. 그러나 기금운용위원회는 주주권 행사의 원칙과 기준을 제시할 뿐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간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개별 기업의 경영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우려할 수준은 아닐 것이다.

구체적인 사안에 있어 주주권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이다.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지침에 따른 일상적인 의결권 행사를 제외한 모든 주주권 행사와 관련되는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기구이다.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전문가 중 근로자, 사용자, 지역가입자 단체가 각각 3인씩 추천해 9인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이 이해관계자를 중심으로 구성원이 균형 있게 안분되어 있어 상호견제 및 감시 기능이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외압’을 성공시키려면 이렇게 스펙트럼이 다양한 위원 9명 중 과반인 5명을 포섭해야 하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부에선 수탁자책임전문위원의 전문성 부족을 우려하지만 이는 동의할 수 없는 지적이다. 수탁자책임전문위원들은 법률, 경제, 경영, 금융, 자산운용 등 관련 분야에서 적어도 5년 이상 연구를 수행하거나 실무에 직접 종사한 경험을 보유하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위원들은 기금운용본부와 의안 분석 자문기관의 분석 내용 등 다양한 자료를 검토하고 자신들이 보유한 전문적 식견에 따라 자신을 추천한 기관의 간여 없이 독립적으로 의사를 결정한다.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의 전문성을 의심하는 것은 이 위원회의 구성이 위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존재 목적을 부정하는 처사일 것이다.

현재 국민연금의 지배구조에 취약한 측면이 존재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부정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활용해 현재 구조의 취약점을 보완함으로써 기금 가치 극대화라는 목적 추구에 적극 임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다.

<박창균 |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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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손꼽아 세어보니 열 번이 넘는다. 아파트 출입문을 열 때 여섯 번, 집 안으로 들어설 때 또 여섯 번 번호판을 눌러야 한다. 2층에 살아서 엘리베이터 버튼에 손대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배달음식이나 택배가 오면 또 긴장한다. 배달하는 분이 마스크를 썼는지 즉각 확인하고 얼른 물건을 받아드는데 그때마다 손잡이 부분이 신경 쓰인다.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예민해진다. 손잡이를 잡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코로나19 사태가 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일상적 삶은 다름 아닌 손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엄연한 사실을 절감한다. 사회생활이란 수많은 문을 드나드는 것이고, 그 문은 매번 손을 써야 여닫을 수 있다. 과학기술이 진전하면서 손의 역할은 크게 줄었지만, 손이 하는 일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손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를 연결한다.

어디 손뿐이랴. 신종 감염병이 낯익었던 모든 것을 낯설게 한다. 그중 하나가 사회적 거리다. 다른 사람과 1~2m 간격을 두라는 것인데, 이 범세계적 캠페인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말(飛沫)을 공유하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 집과 일터를 비롯해 학교, 대중교통, 극장, 거리에서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신다. 내 날숨이 누군가의 폐로 들어가고, 누군가의 날숨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사람과 새, 사람과 나무도 다르지 않다. 뭇생명은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신종 감염병은 기왕의 체제와 시스템의 이면을 노출시켰다. 자본주의 경제의 취약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시민들(소비자)이 이동을 멈추자 시장이 얼어버린 것이다. 개별 국가의 안이한 대처도 동시다발로 노출됐다. 대부분 국가가 관성에 젖어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인지했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공공의료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지적했듯이 의료는 전적으로 정치 문제라는 사실이 또 한 번 판명됐다.

신종 감염병이 ‘세계적 대유행’ 단계로 접어들자 지구촌 곳곳에서 또 다른 민낯이 목격됐다. ‘2차 대전 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선언하고 나선 유럽에서는 그들이 자랑하던 관용(포용)의 문화가 혐오를 넘어 적대로 증폭됐다. 아시아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가 하면, 화장지와 식료품을 사재기하고,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맨얼굴로 거리를 활보했다. 물론 그곳에도 ‘선한 사람들’이 있어 자가격리 중인 이웃을 찾아 위로하고, 봉쇄된 도시의 아파트 베란다는 합창 무대가 되기도 했다. 

전 세계가 신종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장기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경고음이 들린다. 재난이 일상화할 것이라는 예측은 기후학자들이 벌써부터 제기해왔다. 지구 평균 기온이 급상승할 경우 우리가 감수해야 할 재앙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후위기에 견주면 이번 사태는 일시적으로 보인다. 신종 바이러스는 언젠가 약해질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에 대한 개인, 지역, 국가, 세계의 대응이 근시안적이어서 안타깝기만 하다. 

최근 우리나라 정부가 내놓은 대책 중내 눈길을 붙잡은 것이 있다. ‘국민 모두가 방역의 개인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국민들이 저마다 방역 주체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손을 자주 씻고, 외출을 삼가며, 밖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매 순간 내가 나를 관찰해야 한다. 무의식적 행동을 매 순간 의식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위빠사나(마음챙김) 같은 종교 수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또 이렇게 같은 시간대에, 그것도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펴보게 된 적이 있었던가. 나는, 우리가 저마다 진정한 방역의 주체가 된다면, 그래서 2주 가까이 자신의 일상을 깊이 성찰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도달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사태를 극복하고 돌아가고 싶은 일상은 과연 어떤 것인가. 코로나19 이전의 ‘나’로 돌아가면 그만인가. 지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정상화’가 예전과 다름없는 삶과 사회, 예전과 똑같은 국가와 문명인가. 의철학자 조르주 캉길렘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건강을 회복한다는 것은 원상태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방역을 하면서 원상회복이 아니라 다른 미래를 설계하는 주체가 바로 ‘전환의 주체’다. 이번에 우리가 전환의 주체로 재탄생할 수 있다면 또 다가올 전염병은 물론 기후위기를 비롯한 장기 비상사태에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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