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년 전 과거가 되었다만은 (…) 조선의 요리 독립까지 잃어버리는 것을 구경했다. (…) 장유(醬油)라는 것이 우리나라 간장을 동화시켜 가지고 소위 선일융화(鮮日融和)를 실현시켰다. (…) 고추장, 김칫국 몇 가지가 하도 어이가 없는 듯이 한구석에 박혀 있는 꼴이라고는 적막해서 볼 수 없었다.” 동아일보 1923년 3월3일자에 실린 김재은의 회고다. 7년 전이니 1916년이다. 기미년 만세 시위가 터지기 3년 전이다. 기고자는 “사랑”과 “근심” 때문에 글을 썼다는데 고추장, 김칫국이 한구석에 처박히듯 조선 음식이 처량해진 내력을 돌아보매 이렇다. 일식 전골인 스키야키는 고급 조선요릿집에서 신선로를 진작에 “구축(驅逐)”했다. 스키야키가 밥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일식 절임인 복신지(福神漬·후쿠진즈케)가 따라붙었다. 후쿠진즈케라는 “들척지근한 물건”이 조선의 짠지를 “정복”했다. 후쿠진즈케는 일제 군대의 급양이 서양식으로 바뀐 가운데서도 지급된 일식 반찬이다. 또한 양과자는 다식을 대신하고, 정종은 조선의 소주를 “병합(倂合)”해 전횡을 다했다. 그러고는 장유, 곧 일식 간장인 쇼유가 맛 설계의 바탕인 조선의 간장을 동화함으로써 선일융화, 곧 조선 사람의 일본인화가 실현되었다. 선일융화를 뒤이은 통치 구호가 ‘내선일체(內鮮一體)’다. 1936년 부임한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내세운 바다. 먹어 들어가는 쪽에서야 융화네, 한 몸(一體)이네 못할 소리가 없겠지만, 실제로는 한쪽의 절멸을 바라는 수작 아닌가. 1910년 나라 망한 지 6년 만에 조선의 미각 상상력도, 음식도 적막한 지경에 이르렀다. 당하는 쪽에서 볼 때에는 한 역사 공동체 절멸의 징후였다.

오늘날의 독자는 이 거친 민족주의 수사에 유치하다는 꼬리표를 망설임 없이 붙일 테다. 하지만 사랑, 근심, 구축, 정복, 병합, 일선융합 같은 엄중한 말의 행간을 더 살피고 싶다. 기고자는 조선인 일상의 사물이 쓰이지 않아서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 ‘쓰이지 않음’이 그저 조선식 일품요리, 반찬, 과자, 술, 장 사용의 빈도가 줄어든 현황만을 가리킬까. 가령 ‘들척지근함’은 산업화한 식품과 음식이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는 입맛을 단박에 사로잡은 비결이다. 일본제국의 설탕, 세계 최초의 MSG 제품인 아지노모토(그 한국판이 미원이다), 왜간장 셋이 손잡으면 들척지근하기에 대체로 무난한 맛을 쉬이 낼 수 있다. 이때 아지노모토와 왜간장이야말로 일본의 일상 감각에다 일본적인 상상력을 잘 쓴 끝에 얻은 현대 일본의 발명이다.

1908년 일본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는 MSG 제조 기술의 특허를 받는다. 세계 최초로 ‘감칠맛(旨味·우마미)’을 규명한 성과가 발판이다. 이 조미료의 열쇠인 글루탐산은 1866년 독일 화학자 리트하우젠(Karl Heinrich Ritthausen)이 처음으로 발견했지만, 이를 바탕으로 그때까지 미지의 영역에 있던 단맛·신맛·쓴맛·짠맛에 이은 제5의 맛을 개관적으로 설명한 사람은 이케다였다. 그는 회의했다. 일본인 일상의 식재료인 다시마, 가쓰오부시를 우린 맛, 그 맛이 음식과 어울린 일본적인 맛의 실체는 당시 화학 교과서로는 이해도 설명도 불가능했다. 그는 교과서 밖으로 치고 나갔다. 일본의 맛이 객관화되자 메이지시대까지도 일본인 스스로 구미 식품에 견주어 열등하다고 여긴 일식 간장과 된장을 세계화할 자신감이 붙었다. 1929년 이후 일본 산분해간장의 산업화 또한 이케다의 일본 미각 재발견의 연장에 있다. 깃코만(龜甲萬)으로 대표되는 일식 간장 산업의 세계화 또한 여기에 힘입었다. 일본 과학기술의 현대적 현현과 산업혁명에는 민족주의에 앞서는 ‘민족성’이 한가득이다. 오늘날 한식은 어떨까. 민족주의에 기댄 탄식을 넘은, 구체적인 내 유산과 일상 감각의 탐구에서는? 아직 드러내지 못한 가능성을 발현시킬 내 상상력에서는? 여전히 1923년식 탄식뿐이라면 섭섭하지 않은가. 아직 잘 써본 적이 없는 상상력. 쓰지 않아서 쓰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를 상상력. 오늘도 설탕·MSG·왜간장으로 들척지근한 백반 한 상 앞에서 사무친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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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쯤 유럽연합은 ‘미래를 위한 100대 급진적 혁신기술들’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약 330페이지에 달하는 이 보고서에는 방대한 과학기술 문헌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자동 분석을 하고 전문가 패널들이 수단계에 걸쳐 검증한 기술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연구는 유럽연합의 과학기술 혁신역량을 강화하고 유럽 산업경쟁력을 높이며, 유엔의 지속가능개발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추진 중인 호라이즌(Horizon)  유럽과 호라이즌 2020 프로그램을 잘 추진하기 위하여 수행되었다. 급진적이고 획기적인 혁신기술 87개와 사회 혁신시스템 13개를 포함한 100가지를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들 100가지 기술과는 별개로 22가지의 글로벌 가치 네트워크를 제시하여 이러한 기술들의 개발을 추진하기 전에 미래의 변화상에 따라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가치와 비전도 함께 제시하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혁신기술 87개를 보면 모든 나라들이 집중 투자하고 있는 인공지능(AI)은 역시 강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AI+X프로그램과 같이 특정 응용분야에 AI를 적용하는 기술들이 포함되었다. 이들 중에는 대화인식과 감정인식, 챗봇, 뇌기능 매핑, 인공시냅스, 뇌신경 모방칩, 자율주행, 하늘을 나는 차, 정밀농업 등이 있다. 유럽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메탄하이드레이트 수확기술, 바이오플라스틱, 랩온어칩, 챗봇 등과 함께 유럽이 상대적으로 약한 분야들, 즉 4D 프린팅, 그래핀 트랜지스터, 에너지 수확, 하이퍼루핑 등도 명시하였다. 이외에도 그래핀과 같은 이차원 물질들, 음식 3D 프린팅, 항생제 감수성 테스트, 인공광합성, 생분해성 센서, 유전체 편집, 집단 생물 지성, 메타물질, 미생물 연료전지, 식물 간 정보 교환, 플라스틱 분해, 퀀텀컴퓨터와 퀀텀암호기술, 재생의학, 자가치유 물질, 스마트 문신, 스마트 창, 폐수로부터 영양분 수거 등 많은 흥미로운 기술들이 포함되었다. 

나의 경우도 지난 25년간 연구해 온 바이오플라스틱은 유럽의 다수 회사들이 상용화를 추진 중이다. 생분해성 플라스틱의 직접 발효 생산, 단량체의 발효 생산 후 중합에 의한 플라스틱 생산, 전분 등 천연고분자의 활용 등이 복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음식 3D 프린팅은 재작년 미국의 샌타모니카 소재 미쉐린 별 두 개의 멜리세 식당에서 3D 프린팅으로 프렌치어니언 수프에 들어가는 크루통을 만든 것이 화제가 되면서 주목받았다. 앞으로는 3D 프린팅을 이용하여 잘 먹지 않는 아이들을 유혹(?)할 수 있는 뽀로로 형태의 밥과 반찬뿐 아니라 다양한 영양성분들이 개인 맞춤형으로 들어 있고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진 훌륭한 음식들을 맛보게 될 것이다. 시간에 따라 혹은 환경 변화에 따라 특성이나 형태가 변할 수 있도록 하는 4D 프린팅도 점점 더 발전할 것으로 예측된다. 우리 몸에 부착하여 여러 생체정보를 획득하고 약물을 전달하는 스마트 문신, 우리 몸에 들어가 진단이나 치료를 하고 분해되어 없어지는 생분해성 센서 등도 비약적 기술 발전과 응용이 예측된다. 유럽연합에서 스웜 지능(swarm intelligence)이라고 부르는 기술은 개미들이나 군집비행을 하는 새들이 각자 행동을 하지만 다른 개체들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모사하여 활용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 응용분야가 이동수단과 군사용으로 넓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회혁신 시스템 리스트를 보면 접근경제(access economy)와 공유경제, 대체화폐기술, 기본소득, body 2.0 혹은 정량화된 자신, 자동차 없는 도시, 협력 혁신공간, 건강정보의 소유 및 공유, 교육시스템의 재발명 등이 포함되었다. 

이 중 교육시스템의 재발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지금은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 대학원까지의 학습을 통해 개인 학습이 끝나지만 앞으로는 평생 학습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평생학습 인프라, AI 등 다양한 혁신기술들을 이용한 학습, P2P 학습, 집단지성 학습 등이 가능하도록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의 혁신과 함께 ‘전 국민 평생학습 시스템’의 신속하고 체계적인 구축을 제안한다. 접근경제와 공유경제의 경우에는 인터넷과 모바일의 급속한 발전으로 물건을 소유하기보다는 경험하는 쪽으로 많이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음악이나 책을 소유하기보다는 원할 때 듣고 읽는 경험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제품이나 콘텐츠의 활용이 접근이나 공유 형태로 바뀔 것이다.

글로벌 가치 네트워크에는 유엔의 지속가능개발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비전이 여럿 포함되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탄소 억제, 지속 가능한 에너지, 물, 식량과 소재뿐 아니라 고령자들의 품위 있고 의미 있는 생활, 사회적 혁신역량, 사회안전망, 개인 맞춤형 제조, 사전행동적 자발적 건강관리, 인간과 기계의 원격 상호작용, 사용자 데이터 시장, 다수 참여 정보 및 지식 창출 등 다가오는 미래에 펼쳐질 세상에 필요한 플랫폼들이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빅데이터 기반 정밀의료시대가 다가오면서 개개인의 유전정보와 생활 및 식습관 정보 등 데이터들이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 전체의 건강에 기여하는 정보로 활용될 것이다. 최근 유럽은 100만+게놈프로젝트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때 개개인의 데이터들의 소유권과 공유가치 등 생각할 것이 많다. 

이들 비전과 기술 중 다수는 우리나라 기업, 정부, 대학, 출연연구소 등에서도 이미 예측하고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이 보고서에서 각 기술별 분석을 하면서 현재의 기술 성숙도, 지금으로부터 20년 뒤인 2038년에 이 기술이 얼마나 중요하게 사용될지에 대한 예측, 그리고 유럽의 현 기술 수준과 위치 등 3가지 요소들을 함께 분석하여 발표하였다. 

우리도 각 기술별로 우리나라 현황의 정확한 진단과 선도그룹 집중 지원, 중간그룹의 선도그룹화 전략, 미진한 그룹의 육성전략을 잘 추진하여 매우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혁신 시대에 잘 대비해야 하겠다.

<이상엽 카이스트 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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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곧 분단 후 처음 민간에 개방된 DMZ(비무장지대)의 GP(감시초소)를 탐방하게 됩니다.” 철원 ‘평화의 길’ 해설사의 말에 참가자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철책 통문이 열리면서 버스가 ‘금단의 땅’으로 들어갔다. 버스는 역곡천의 배미교를 지나 화살머리고지로 향했다. 탐방객들의 표정에 호기심과 긴장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지난 22일 ‘DMZ 평화의 길’ 탐방단의 일원으로 6·25 최대 격전지였던 철원의 백마고지 전적지와 화살머리고지 인근을 돌아봤다. 1952년 10월 백마고지에서는 열흘간 고지쟁탈전이 이어지면서 국군과 중공군 등 1만8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전협정을 앞두고 벌어진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는 미군과 프랑스군 100여명을 포함해 300여명이 전사했다. 탐방단은 백마고지 전적비 일대를 돌아본 뒤 남방한계선 철조망 너머 DMZ의 백마고지 GP를 올려다봤다.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철책이 없었다면 유럽의 중세 고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DMZ에는 평화와 긴장이 함께 있었다. 

탐방단은 백마고지 조망대에서 공작새능선까지 남방한계선 철책길 3.5㎞를 걸었다. 윤형 철조망을 올린 철책은 삼엄했다. 길 반대편에 펼쳐진 논은 여느 농촌 풍경 그대로였다. 간혹 ‘무장공비 침투지역’ 표지판이 보였다. 경계 위의 전쟁과 평화다. 초병의 인솔로 찾아간 화살머리고지는 ‘평화의 길’ 철원 구간의 하이라이트다. 이곳에서는 6·25 전사자 유해발굴이 한창이다. 국방부는 지난 4월 이후 유해 456점, 유품 3만2000여점을 수습했다. 유품 일부는 GP 벙커에 전시 중이다. 총탄구멍이 숭숭 뚫린 철모가 전쟁의 참혹상을 증언한다. 초소 아래에서는 유해 발굴을 위한 진입로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비무장지대 내 유해발굴은 지난해 9·19 남북군사합의서에 따른 조치다. 남북은 당초 공동유해발굴을 약속했으나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남측 구간에서만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북측의 호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군사분계선(MDL) 너머로 북측이 개설한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남북정상은 9·19 남북군사합의서를 통해 DMZ를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4가지 이행조치를 내놓았다. GP 상호 철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 남북공동유해발굴, 역사유적 공동조사·발굴이 그것이다. 이 중 GP 철수, JSA 비무장화는 순조로운 편이다. 공동유해발굴은 절반만 이행되고 있다. 9·19 군사합의 가운데 가장 뒤처진 분야는 역사유적 조사·발굴이다. 

남북은 9·19합의서에 비무장지대 내 역사유적 공동조사·발굴을 명시했다. DMZ 내 역사유적을 민족정체성 회복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자는 데 합의한 것이다. 서울 면적 1.5배에 달하는 비무장지대에는 도성지, 고분, 산성, 사찰터, 천연기념물 등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이 중 전문가들이 꼽는 조사·발굴의 1순위는 궁예도성(철원도성)이다. 궁예도성은 후고구려(태봉국)를 세운 궁예가 905년 철원 풍천원 벌판에 세운 서울 성곽이다. 외성과 내성의 둘레가 각각 12.5㎞와 7.7㎞로 당나라 장안성이나 발해 동경성보다 크다. 궁예도성터는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DMZ 안에 푹 잠겨 있어 남북 공동 연구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일제식민 시기만 해도 이곳에는 석탑·석등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벽이 무너지고 유물들이 멸실됐지만, 성터 윤곽만큼은 항공사진이나 구글지도에 나타날 정도로 뚜렷하다. 남쪽의 철원 평화전망대에서는 성터를 조망할 수 있다.

궁예도성은 화살머리고지에서 동쪽으로 약 12㎞ 떨어져 있다. 두 곳이 ‘평화의 길’로 연결된다면 철원의 DMZ는 평화와 안보의 산교육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과 달리 궁예도성 조사는 남북 군사합의 10개월이 되도록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있다. 비무장지대 유적 조사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 국방부는 역사유적 공동조사·발굴의 우선조치로 ‘태봉국 철원성’(궁예도성)을 꼽았다. 문화재청은 ‘남북문화재 교류사업단’을 꾸려 궁예도성 발굴·조사에 대비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북한과 개성 만월대를 공동발굴한 경험이 있다. 비무장지대 문화재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도 적극 검토 중이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궁예도성 조사·연구를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문제는 북한의 뜨뜻미지근한 자세다. 정부는 북측에 9·19합의서 이행을 촉구해야 한다. 오는 29일 방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DMZ 인근 초소를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이 DMZ 평화만들기의 전기가 되길 바란다. DMZ 유적 공동발굴만큼 확실한 문화교류는 없다. 그 출발점에 궁예도성이 있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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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땅 얘기책 성경을 읽고 자라선지 사막이 항상 궁금했다. 금모래 사장이 앞산만 하다는 말에 상상이 가지 않았다. 첫 사막은 사하라였다. 체 게바라도 걸었다는 알제리의 사하라. 이후론 자주 사막을 찾았다. 우리나라에도 섬마을에 사구사막이 몇 군데 있다. 사막이라고 하기엔 밋밋하긴 하지만서두. 이 정도 ‘열탕 날씨’라면 언젠가 사막 땅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사막에도 마을이 있다. 오아시스를 벗어나면 살 수가 없기에 계율이 매우 엄하지만 거기도 매한가지 사람 사는 동네. 사막에 가면 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아무리 낮에 햇살이 뜨겁더라도 밤이 되면 겨울만큼 춥다. 사막의 낙타들은 소중하게 여기는 주인을 만나 다복하게 살아가는 편이다. 사막엔 적토마나 오토바이조차도 힘을 쓰지 못한다. 겨울왕국의 개들도 마찬가지. 사랑받는 주인 아래 충성스러운 명견이 나타나 앞장을 선다.

“힐난을 받고 자란 아이는 남을 헐뜯는다. 미움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잘 다툰다. 놀림을 받고 자라면 남과 어울리지 못한다. 격려를 받고 자라면 자신감이 커진다. 칭찬을 받고 자라면 감사할 줄 안다. 인정을 받고 자라면 자신의 생을 소중하게 여긴다.” 인기강사 글렌 반 에케렌의 얘기. 사막의 수도원은 엄격한 규율만큼 서로 보살핌이 각별하다. 동물들도 음식을 나눠먹을 줄 안다. 목마른 여행자들도 먼저 물을 내민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이 빛나듯이 극악한 환경에서 사랑과 배려가 훨씬 많아진다. 사막에서 인류의 성인들이 나고 자란 것을 생각해보라. 

인적이 드문 곳일수록 사람이 반갑고 소중하다. 사막에선 별이 하늘의 마을이나 되는 양 밝고 환하다. 인생 4막장, 그도 사막인가. 황량했던 인생도 사막에 가면 별빛의 조명과 축복을 받게 된다. 오만가지 음식과 물건들로 넘쳐나는 도심을 떠나서 조금은 춥고 외로운 사막을 찾아가는 여행을 권해주고 싶다. 평생 가장 많은 별을 볼 수 있는 기회, 물 한 모금의 감사, 사람에 대한 그리움, 낙타처럼 선한 동물과의 조우까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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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멕시코를 가르는 리오그란데 강가에서 숨진 한 부녀가 지구촌을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미국으로 가기 위해 강을 건너다 변을 당한 엘살바도르 난민 오스카르 알베르토 마르티네스 라미레스(25)와 딸 발레리아(2)가 그들이다. 멕시코 기자의 카메라에 잡힌 이 부녀의 모습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아빠는 마지막 순간까지 딸의 머리를 자신의 티셔츠 안에 넣어 감싸고, 딸 역시 필사적으로 아빠의 목을 팔로 감고 있었다. 4년 전 지중해를 건너다 배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숨진 3살짜리 시리아 난민 아기 아일란 쿠르디를 연상시킨다. 당시 터키 관광지 해안가 모래밭에 천진난만한 자세로 엎드려 있는 쿠르디의 모습에 전 세계인이 울었다. 

지난해 중남미 국가 난민(캐러밴)들이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로 몰린 이후 이들 부녀의 비극은 일상이 되고 있다. 전날에도 리오그란데강에서 어린아이 3명 등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 한 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난민이 283명에 이른다. 여기에 멕시코는 이달 들어 갑자기 이민자 단속을 크게 강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멕시코가 국경에서 난민을 철저히 막지 않으면 멕시코산 수입품에 최고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협박한 탓이다. 최근에는 미국 남부의 이민자 수용시설에서 아이들이 수주일째 씻지도 못하는 비인도적 실태까지 드러났다. 미 언론들이 “IS와 해적들도 치약과 비누는 줬다”고 자국의 처사를 비난하고 있다. 요행히 국경을 건너 미국에 안착한다 해도 난민들의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쿠르디 사후 큰 반향에도 불구하고 난민 문제 해결은 요원하기만 하다. 유럽 각국에서는 오히려 반이민·난민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라미레스 부녀의 비극을 두고 ‘난민을 만든 위정자를 탓해야지 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미국을 비난하느냐’는 사람들이 있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난민에 공감하지 못하고 실리만을 들이대는 것은 비인도적이다. 트럼프는 반이민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4월 불법 이민자에 미온적으로 대응한다고 국토안보부 장관을 경질하더니 세관국경보호국 국장까지 강성인물로 교체한다고 한다. 이민으로 성장한 미국의 역주행이 끝도 없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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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트랙 국가대표팀 내에서 발생한 성희롱 사건으로 남녀 대표선수 전원이 25일 충북 진천 선수촌에서 퇴촌 조치됐다. 앞서 지난 17일 쇼트트랙 대표팀이 선수촌 내에서 암벽등반 훈련을 하다 남자대표팀 ㄱ선수가 남자 후배 ㄴ선수의 바지를 내린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자 선수를 포함한 동료들이 보는 상황에서 수치심을 느낀 ㄴ선수는 성희롱당했다며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두 선수는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스타급 선수들이다. 진천 선수촌은 쇼트트랙 대표팀 전체의 기강 해이를 문제 삼아 ‘1개월간 전원 퇴촌’이라는 초유의 조치를 내렸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은 다음달 스포츠 공정위원회를 열어 ㄱ선수 징계를 논의할 예정이다.

성폭력은 어떠한 집단 내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 이성 간은 물론 동성 간에도 마찬가지다. 쇼트트랙 대표팀 사태는 성희롱 자체도 잘못이지만, 사후 대응은 더 부적절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최우선 과제는 피해자 보호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사건 다음날부터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빙상연맹 측은 가해자의 사과를 이끌어내는 대신 화해를 권유했다고 한다. 가해자는 사건 이후에도 훈련에 계속 참여하다 25일에야 다른 선수들과 함께 선수촌을 떠났다. 

더 큰 문제는 가해자가 명확한 사건임에도 피해자와 다른 선수들까지 불이익을 받게 된 부분이다. 선수촌에서 쫓겨난 대표선수들은 한 달 동안 훈련수당 등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선수촌 측은 이번 성희롱 사건뿐 아니라, 4개월 전 남자 선수가 여자 선수 숙소에 무단 출입한 사례 등 다른 사건도 고려해 결정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향후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공개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자신은 물론 사건과 무관한 동료들에게까지 피해가 돌아간다면 누가 입을 열 수 있겠는가.

조재범 전 코치 사건이 드러난 후 폭력과 성폭력으로 얼룩진 빙상계의 환골탈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ㄱ선수 성희롱 사건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음을 말해준다. 빙상연맹은 일벌백계 차원에서 ㄱ선수에게 강력한 징계조치를 취해야 한다. ㄴ선수에게 화해를 압박하는 등 ‘2차 가해’를 한 관계자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옳다. 또한 사건과 관계없이 불이익을 당한 선수들에 대해선 조기 재입촌 등의 조치를 검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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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나이 45억년. 고생인류의 출현은 300만년 전이고,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대륙을 떠난 것은 5만년 전쯤이다. 인류 문명의 출현은 1만년도 되지 않았다. 인간의 수명은 기껏해야 100년 정도다. 지구 나이에 비하면 미미하다. 그런데 매일 해가 뜨고,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게 빛나는 것, 그리고 비와 눈이 내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호모사피엔스의 눈에 세상은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6600만년 전 하늘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지금의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떨어졌다. 지름 10㎞의 물체는 200㎞에 이르는 충돌 구덩이를 남겼다. 칙술루브 크레이터다. 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낮에는 태양이, 밤에는 별이 뜨지 않는 암흑세계다. 많은 생명체가 멸종을 맞았다. 세상의 지배자였던 공룡도 같은 운명이었다. 대멸종 사태는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도 4차례나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대멸종은 포유류, 나아가 인류가 태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너무 허황된 얘기라고? 불과 100여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1908년 러시아 시베리아의 퉁구스카란 곳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원인을 놓고 해석이 분분했다. 동심원상으로 나무들이 바깥쪽을 향해 쓰러져 있는 화재현장은 의심을 증폭시켰다. 연구결과 지구로 돌진하던 물체가 지상에서 터지면서 흔적을 남긴 것으로 분석됐다. 물체의 지름은 60여m에 불과했지만 8000만 그루의 나무를 전소시켰다. 유럽 중심부에 떨어졌다면 수백만명의 피해가 났을 것이라고 한다.

한국천문연구원이 25일 지구 근처로 접근하는 지름 160m짜리 소행성을 발견했다. 2026년에 지구 근처 426만㎞까지 접근할 것이라고 한다. 지구 근처 750만㎞ 안쪽으로 들어오고 지름이 140m를 넘으면 ‘지구위협 소행성’이라고 부른다. 연구원은 이 소행성을 ‘PP29’로 이름 지었다. 지구 충돌확률은 28억분의 1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지구위협 소행성은 83개에 불과하다. 아직도 검은 천체에서 어느 물체가 지구를 향해 달려오는지 다 알지 못한다. 퉁구스카에 떨어졌던 크기의 물체는 언제든 충돌할 수 있다. 지구가 절대적으로 안전한 행성이라는 생각은 접어야 하지 않을까.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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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3억5175만원 규모의 대법원 전자법정 입찰비리는 경향신문이 지난해 시작한 탐사보도로 드러났다. 법원행정처가 이곳 출신 업자와 짜고 17만원짜리 영상·음향 장비를 225만원에 사들이는 등 비리를 저지르면서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달 서울중앙지법 1심 판결은 언론보도로 수사가 시작됐다고 밝혔고, 지난 1월 서울중앙지검이 제출한 증거목록 가장 앞에도 경향신문 기사들이 있다. 지난해 여름 경향신문 보도가 시작되자 김명수 대법원은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는 허위자료를 언론사에 돌렸다. 당시 정재헌 전산정보관리국장이 지휘해 박진웅 공보관이 배포한 것으로 김흥준 윤리감사관의 부실감사와도 관련이 있다. 

허위자료를 만든 전산정보관리국 직원들은 1심 판결에서 징역 10년 등을 선고받았다. 송인권 재판장은 “이 사건 범행이 (중략) 언론보도를 통해 불거지자 피고인은 진실을 숨기고 수사에 대비하기 위해 관련자들과 진술을 맞추려는 시도까지 하였고, 법원 자체 조사나 수사 과정에서 계속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였으며, 이 법정에 이르러서도 최종 공판기일 직전까지 계속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주범인 강한수 전산정보관리국 정보화지원과장에게 징역 10년과 벌금 7억2000만원을 선고했다. 손창우 사이버안전과장 등에게도 징역 10년과 벌금 5억2000만원 등을 선고했다.

전자법정 비리 탐사보도는 대법원 주류들과의 싸움이었다. 경향신문 보도가 한창이던 지난해 가을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까지 속인 그들이다.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작년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오스트리아산 초고가 실물화상기가 불가피하다고) 시연회까지 했고, 당시 저도 꼭 필요하고 문제가 없다고 동의해줬는데 그런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이렇게 (전산정보관리국 판사들을 징계하라고) 말하고 있다”고 최근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말했다. 비리가 저질러진 10년 동안 전산정보관리국 책임자이던 판사는 14명이다. 역대 국장은 이정석, 최창영, 이영훈, 정재헌 판사이고, 심의관은 기우종, 이정환, 원호신, 고범석, 이태웅, 이은상, 임영철, 이상엽, 장정환, 유동균 판사다.

사법권력보다 상대하기 힘든 상대는 전산지식을 가진 기술관료다. 전산정보관리국 책임자이던 판사는 경향신문 취재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답했다. 책임자의 변명치고는 구차하지만 일말의 진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법원 기술관료들이 시민세금을 업체로 빼돌리고 이를 뇌물로 되받아먹는 동안 시비를 가리는 전문가인 판사들도 당하고 있었다(물론 이는 직무유기이며 형법 제122조가 정한 죄이다). 이러한 대법원 전자법정 비리가 세상에 드러나고 법정에서 확인된 배경에는 부조리를 바로잡으려 자신과 가족의 불행까지 감수한 내부 제보자가 있다. 

제보는 지난해 초여름에 받았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야였기에 내용을 이해하고 반론을 해소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제보자를 두 차례 만나 설명을 들었고 다른 루트를 통해서도 내용이 진실한지 검증했다. 수많은 e메일과 전화로 제보자에게 내용을 묻고 확인했다. 이 모든 과정을 제보자는 묵묵히 견뎠다. 기사화를 앞두고 그에게 말했다. “취재원 보호는 내 목숨과도 같다. 제보 의도는 중요하지 않고 묻지도 않겠다. 하지만 어떻게든 제보자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제보 사실이 드러나고 업계에서 매장될 수 있다”며 신중히 생각하라고 했다. 그는 진실이 밝혀지길 원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대법, 행정처 퇴직자에 243억 ‘입찰 특혜’ 의혹”이라는 첫 보도가 8월13일자에 나갔다. 김명수 대법원은 빤한 거짓말을 했다. “전자법정 사업을 수주한 드림아이씨티가 (중략) 전직 전산공무원이 관여되어 있는지 여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음.” 이유는 김명수 대법원장 치적용 사업인 스마트법원 4.0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장 임기 마지막 해인 2023년 완성을 목표로 국가예산 3054억원을 쓰려 했다. 이 사업 책임자 정재헌 전산정보관리국장은 김명수 대법원장 인사청문회를 준비한 대법원장 복심이다. 그들의 거짓말을 밝혀내는 데도 제보자가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전자법정 비리는 대법원의 허위해명에 묻혔을 것이다. 

제보자는 징역 2년 실형을 지난 13일 선고받았다. 그는 전자법정 입찰비리를 저지른 업체의 직원이었다. “지시 내지 승인하에 이 사건 각 범행을 저지른 측면은 없지 아니하나 (중략) 담당한 구체적인 역할에 비추어보면 (중략) 가담 정도는 절대 가볍지 아니하다”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전자법정 관련 법원 사업의 입찰비리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론에 제보함으로써 이 사건 입찰비리 및 뇌물 범죄의 전모가 드러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밝혔다. 이번 일로 제보자를 포함해 15명이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전산정보관리국 판사는 단 한 사람 징계조차 받지 않았다. 이 기사들을 쓰지 말아야 했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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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에 비해 수확이 적더라도 자투리땅이라도 있으면 농작물을 심으려는 게 농업인의 마음이다. 하지만 애써 키운 농작물을 팔 곳이 없을 때는 막막하기 그지없다. 우리 농촌을 살펴보면 농가의 70%가 경지면적 1㏊ 미만이고, 연간 농축산물 판매액이 500만원 미만인 농가가 절반(53.7%)을 넘는다고 하니, 이들 영세소농의 판로 확보를 통한 농가 간 소득양극화 해소가 절실한 상황이다.

중소 농업인의 소득을 높일 방법을 고민하던 중, 지난 4월 농가 탐방 때 만난 원주의 한 농업인이 “하우스 600평에서 소량다품종 생산을 하면 과거에는 팔 곳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로컬푸드 직매장 덕분에 1년에 며칠을 제외하고 매일 통장에 돈이 들어와 행복하게 농사짓는다”며 만족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로컬푸드가 소득양극화를 해소할 좋은 대책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로컬푸드 직매장은 소량다품종 생산 중소 농업인에게 안정적 판로를 제공하고 지역사회에 안전한 먹거리를 공급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지역에서 생산된 먹거리를 그 지역에서 소비함으로써 장거리 이동과 다단계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아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득이다. 우선 생산자인 농업인이 행복하다. 정성껏 기른 농작물의 양이 적어도, 조금 못생겨도 신선하고 맛있으면 직매장에서는 잘 팔린다. 그만큼 소득도 늘어나고 가격을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자존감과 성취감도 높다.

소비자는 매일 갓 수확한 신선한 농산물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 농식품신유통연구원에 따르면 로컬푸드 직매장을 방문하는 소비자의 약 66%가 월 5~10회 정기적으로 구입하고 로컬푸드의 신선함과 안전성, 저렴한 가격을 매력으로 꼽았다고 한다. 판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농산물 구매로 농업·농촌에 도움을 주고, 지역 내 소비로 푸드마일리지가 감축되어 환경 보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

40년의 로컬푸드 역사를 가진 일본은 2016년 기준으로 2만3440개의 직매장이 있고 판매액이 10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로컬푸드를 통해 농가 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단순한 직매장을 넘어 농가레스토랑, 가공공장, 체험공간 등이 결합된 6차 산업화로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농협은 2012년 전북 완주 용진농협에서 첫 직매장을 개설한 이후 로컬푸드 확대에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전국에 200개를 개설했다. 이를 통해 3만7000여농가가 농가당 연평균 83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약 3000억원의 소득 증대를 이룬 것이다. 직거래를 통해 소비자 구매비용을 연간 640억원 절감하고, 매장당 1.8명씩 360개의 지역일자리도 창출했다. 근래에는 농촌농협 조합원이 인근 도시농협 직매장에 출하하는 도농상생형이나 지자체와 협력해 문화공간 등을 결합한 복합센터, 은행 내부에 운영하는 숍인숍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이에 올해 당초 100개를 신설하려던 목표를 2배인 200개로 확대하고 중앙회와 농축협이 400억원의 자금을 투입할 계획이다.

로컬푸드는 단순한 농산물 판매장이 아니라 유통단계 축소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고 정(情)을 나눌 수 있는 매개체이다. 로컬푸드 활성화로 농촌과 도시가 더욱 가까워지고, 5000만 국민이 농업·농촌의 가치를 공유하는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

<김병원 | 농협중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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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업주부다. 아내와 합의해 가사 노동한 지 십 년이 넘었다. 일상은 여느 주부와 같다. 밥 짓고, 아내를 출근시키고, 청소하고, 책 읽고 저녁엔 아내의 퇴근을 기다린다. 아내와 저녁 밥상에 앉아 온종일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그러니 아내가 늦기라도 하면 절로 잔소리가 나온다. 동료들과의 술자리를 좋아하는 아내는 그를 생각해 되도록 일찍 귀가한다.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서로에게 맞춰가고 있는 것이다. 그도 아내도 현재 삶에 불만이 없다. 

하지만 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여전히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간혹 얼굴 볼 적마다 언제까지 집에서 허송세월할 거냐고 책망한다. 집이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주체적인 노동 공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가족은 집에 있는 그의 존재를 ‘無(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가 집 밖으로 나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바란다. 그는 가족과 부딪칠 때마다 생각한다. 혹시 나도 전업주부인 내가 당당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낮에 슈퍼마켓에서 혼자 장을 볼 때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주말에 아내와 함께 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그를 만나고 며칠 뒤, 두 아들을 키우는 친구를 만났다. 결혼한 뒤에도 꽤 오래 직장을 다녔고, 근래에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그는 얘기 끝에 이리 말했다.

“내 아들들이 잘 커서 처자식 잘 먹여 살려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지 뭐.”

엄마로서 아들이 제 몫 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깃장이 생겼다. 왜 ‘처’는 아들이 잘 먹여 살려야 하는 존재인가? 남자는 기필코 그래야 하는가?

며칠 전 한 설문 조사에서 “남편이 할 일은 돈을 버는 것이고 아내가 할 일은 가정과 가족을 돌보는 것이다”라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68.8%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보면서 반가웠다.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여성이든 남성이든 또 다른 성이든 자기 스스로 선택한 역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니. 그러니 아들 있는 친구여, 아들의 얼굴 모를 처자식 걱정은 내려놓고 그저 아들이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자라길 바라시게.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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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한국전쟁 이후 세계 최초로 외국의 원조를 받던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국제개발협력의 롤 모델 국가다. 해외 원조를 의무적으로 이행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 중 인프라 지원·봉사단 파견 규모까지 최상위다. 나 또한 그 일환으로 농촌진흥청 해외농업기술협력사업(KOPIA)에 소속돼 ‘농업’ 공적개발원조(ODA) 업무를 담당 중이다. 11개월간 국내 면적의 10배 이상 되는 남미 볼리비아 전역을 누비며 알게 된 사실은 이곳 남미 최빈국이감자, 토마토, 퀴노아 같은 세계 주요 식량자원의 원산지라는 점이다. 

그러나 유전자원의 보고(寶庫)인 볼리비아는 전례 없는 환경위기를 맞고 있다. 현지 337개 지자체의 67%가 지난 11년간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고, 9.2%(고원지대)는 서리와 강설 피해를 입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르기 쉬운 6000m급 안데스 설산은 1980~2009년 사이에 빙하의 37.4%가 녹아 수자원도 잃고 지역 수입원인 스키장도 폐쇄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농림·축산 분야 피해는 전체 사회·경제 섹터의 62%(약 2700억원)라 한다. 이 같은 기후변화 심화는 재래 유전자원 손실로 이어진다. 특히 자원을 채집하고 이를 중장기 보존할 시설이 미비한 볼리비아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그들의 농업 ODA 사업제안서에 기후변화·생물다양성 문구가 예외 없이 등장하는 이유다.

한국 또한 기후변화를 겪고 있다. 동해의 해수온도가 상승하여 한류성 어류인 명태 등이 사라진 지 10년. 대구 특산물인 사과는 강원도에서 재배되고, 망고 등 동남아 열대작물은 충청지역까지 북상하는 등 한반도 식생 판도가 뒤집히고 있다. 그래도 한국은 노르웨이에 이어 ‘제2의 노아의 방주’라 불리는 세계 중복 종자보존소 설비를 갖췄기에 유전자원 멸종위기에 대응하는 게 가능하다. 실제 정부는 보존 중인 종자를 기후변화에 적응 가능한 신품종으로 개발하여 기후변화 위기를 기회로 삼고자 노력 중이다.

농촌진흥청은 올해 KOPIA 10주년을 맞아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총 22개 국 농업기관장(차관급)을 초빙해 지난 한 주간 워크숍을 진행했다. 볼리비아 농업산림혁신청장도 참석해 한·볼리비아 농업 ODA사업 성과와 발전방향을 공유했다. 마침 정부도 작년 제4차 국가생물다양성전략(2019~2023년)을 통해 생물다양성 ODA 사업 비율을 기존 1.12%에서 4.10%로 올렸다. 해외자원부국 생물자원 정보화 지원을 통해 우수 유전자원을 교류·확보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정책이다.OECD 회원국인 한국과 개도국 볼리비아의 지속 가능한 윈윈 전략이 이번 10주년 워크숍을 통해 마련된 것이다.

<김주영 | 농진청 코피아볼리비아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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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대학원 시절, 학생들의 농담에 빈번히 등장하던 대상은 교수님들이었다. 악의적인 ‘뒷담화’는 물론 아니었으며 애정 어린 우스갯소리였다고 기억한다. 내가 속한 연구실의 주된 레퍼토리는 지도교수님의 도련님 같은 면모와 관련된 일화였다. 

유학 중인 선배들이 잠시 귀국해 모임을 가졌던 밤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선생님 이야기가 나왔다. 선배 한 분이 “군복무 중 끊었던 사탕 다시 드신 일화 요즘은 말씀 안 하시냐” 묻자, “담배도 아니고 사탕이라니 과연 소공자시네요”라며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형들 놀이판에 끼고 싶은 막내처럼 나는 “순대 같은 건 아예 입에도 못 대실걸요?” 거들었다. 

다음날은 빙 둘러앉아 선생님과 차를 마셨다. 전날 밤 소공자 운운하던 익살은 어디 가고 다들 묵묵히 찻잔만 기울였다. “유학생활 중 순대가 그립다더라” 이후 이야기가 끊기려 하자 한 선배가 “근데 소영이가 선생님 순대 못 드실 것 같답니다”라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답을 하지 않고 웃으셨다. 그리고 며칠 후 제자들과 점심에 순댓국밥을 먹으러 가자시더니 메뉴판도 안 보고 주문하시는 것이었다. 그때껏 분식집 당면순대 말고 먹어본 적 없던 나는 작은 목소리로 아주머니께 “저는 선지랑 간 같은 건 빼고 주세요”라고 했다. 선생님이 소영아, 부르셨다. 

“소영이가 순대 먹을 줄 모르는구나. 순대의 핵심은 간이야.”

내가 대학 입학할 당시 선생님은 우리 단과대에서 제일 젊은 교원이었다. 첫 수업시간에 뵙고 저런 멋있는 교수님도 다 있나 싶었다. 범인들은 닿지 못할 세계에 속한 존재 같았다. 한 노교수님께서 우리 학번의 중간고사 답안 수준에 개탄하며 1학년 때부터 답안지를 독일어로 써내던 총명한 모 교수 일화를 들려주신 이후 더 그러했다. 그런 분이 “순대의 핵심은 간이야” 같은 멘트를 던지며 되갚으시다니. 그날 나는 선생님의 빈틈을 처음 보았다. 어느 근사한 분을 넘어 ‘우리 선생님’으로 생각한 것이 그 무렵부터였다.

그해 겨울방학이었다. 재미 삼아 친구와 사주카페에 갔다. 거기선 두루뭉술하게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줬지만 연애운은 달랐다. 친구는 이듬해 연애운이 찬란하다 했고, 내 경우엔 공부나 열심히 하랬다. 연애는 관심사가 아니어서 대수롭잖게 넘겼다. 친구가 영화표를 예매해뒀대서 카페비용은 내가 내려고 화장실 간 사이 먼저 계산했다. 이윽고 돌아온 그녀는 “내 연애운 소영이가 산 거네” 하였다. 순간 그녀 눈빛에 스치던 소심한 아쉬움과, 운세에 연연한 게 부끄러운 듯 꼭 다문 입매를 보았다. 그때 느낀 애틋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친구는 우리 학번 여학생들 가운데 가장 반짝였다. 1학년 때부터 여느 법대 신입생과는 달랐다. 단발머리 몇 가닥만 파랗게 물들인 그녀가 강의실로 들어서면 환하게 빛이 났다. 동일한 장면도 나 혼자 있으면 인디영화였지만 친구가 더해지면 청춘드라마였다. 학부시절 나는 친구에게 선망과 더불어 미묘한 상대적 박탈감을 품었다. 그 박탈감을 지우고 온전히 마음 연 계기가 ‘미신스러운’ 빈틈을 목도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운을 사고도 이듬해나 다음해나 연애는 못하였지만, 대신 대학원생활 내내 서로 의지한 벗을 얻었다.

돌이켜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을 막연히 동경하는 것은 상대의 매력과 장점 때문일지라도 그를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우연히 보게 된 빈틈을 통해서였다. 누군가의 세련된 매너에서 어색함을 감추려는 몸짓을 읽었을 때, 냉소 이면에서 뜨겁고 서투른 열정을 보았을 때, 강인해 보였던 이가 실은 심약한 ‘새가슴’임을 느꼈을 때.

아주 가끔 그게 안되기도 한다. 이해관계가 대립할 경우 누군가의 단점이 빈틈임을 알아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편 빈틈이 아예 찾아지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보고 또 살펴도 근사하기만 한 거다! 짐작건대 내 고집스러운 선망이 그의 약함마저 멋짐으로 채색했기 때문일 테다. 살아가면서 충돌하는 이의 빈틈을 연민하고, 선망하는 이의 빈틈은 알아보게 됐으면 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빈틈에도 좀 너그러운 마음을 품게 되면 좋겠다.

<이소영 | 제주대 교수·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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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방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박근혜 정부 인사들이 1심에서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설립과 활동을 방해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행적 조사를 저지하려 한 행태가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참사 이후 5년여 만에 박근혜 정부 인사들의 책임을 물은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재판부가 상당수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하면서 유죄가 인정된 피고인들도 집행유예를 받는 데 그친 점은 실망스럽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막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이병기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왼쪽부터)이 25일 1심 선고가 내려진 송파구 서울동부지법을 나서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서울동부지법은 25일 이병기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징역 2년에 집유 3년, 윤학배 전 해수부 차관은 징역 1년6월에 집유 2년을 선고받았다. 안종범 전 경제수석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재판부는 “이 사건 범행은 대통령비서실과 해수부 장차관의 권력을 동원해 각종 회의를 진행하거나 공문서를 작성·배포하는 등의 조직적 형태로 이뤄졌다”며 “결과적으로 특조위는 뒤늦은 시점에 구성돼 방해와 비협조에 시달리다 성과를 내지 못하고 활동을 마치게 됐다”고 지적했다. 다만 “다른 권력기관의 정치적 공세가 특조위 활동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진상규명이 저해된 모든 책임을 피고인들에게 돌릴 수는 없다고 했다.

선고 직후 세월호 유가족들은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어디에 하소연해야 하느냐”며 오열했다고 한다. 5주기가 지나도록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현실이 부끄럽고 안타깝다. 법원도 인정했듯이 특조위는 최종보고서조차 작성하지 못한 채 2016년 9월 해산됐다. 뒤이어 출범한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도 선체 인양의 성과를 내기는 했으나 침몰·구조 실패의 원인은 규명하지 못한 채 지난해 8월 활동을 종료했다. 현재는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조사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나 아직 의미 있는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304명이 희생되고, 그 가족 수천명이 비탄에 빠졌으며, 수많은 시민이 고통을 겪은 전대미문의 비극이다.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고 넘어간다면 유가족은 물론 공동체 전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 정부와 국회는 진상규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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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는 25일 등급제 폐지, 맞춤형 지원, 전달체계 강화 방안 등을 담은 ‘수요자 중심 장애인 지원책’을 다음달 1일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키로 했다고 밝혔다. 장애인등급제는 의학적 심사로 장애인을 1~6등급으로 구분하고, 차별적으로 혜택을 제공하는 제도다. 그러나 장애인의 실체적 어려움을 해소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등급 요건을 채우지 못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장애인도 많았다. 지원받는 장애인에게는 ‘등급 낙인’을 찍어 인권침해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등급제 폐지는 31년 만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아닐 수 없다.

출처:경향신문DB

등급제가 없어지면서 장애인은 ‘장애 정도가 심한 장애인’ ‘심하지 않은 장애인’으로 나뉘게 된다. 6개 등급에 따른 차별적 혜택으로 지원의 경계·사각에 있던 많은 장애인들이 보험료 경감·거주시설·보조기기 이용 등에서 더 많은 혜택을 받게 된다니 다행스럽다. 1~3급 장애인만 이용할 수 있었던 활동지원서비스는 장애인 누구라도 신청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기본적인 생활유지를 위해 도움이 절실했던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장애인지원 종합조사’를 도입, 직접 면담을 통해 원하는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파악해 그에 알맞은 도움을 제공키로 한 것도 장애인의 실체적 어려움 해소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찾아가는 상담’으로 복지 사각에 놓였던 독거중증장애인 등을 사회안전망 안으로 끌어들이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중증장애인이 있는 가구에 대한 생계급여 지원 때 부양의무자 기준을 없앤 것도 구성원의 장애로 고통받는 가구의 최소한 삶을 국가가 보장키로 했다는 점에서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장애등급 판정이 의학적 기준에서 심사자 판단으로 바뀌면서 혜택이 축소되거나 정부지원 밖으로 밀려나는 장애인이 생겨날 우려가 있다. 정부의 종합조사를 적용했을 때 적지 않은 장애인들의 활동지원서비스가 줄어드는 결과가 나왔다는 연구보고서가 있다. 종합조사표가 장애인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다. 정부는 경과 기간을 두어 이런 피해를 최소화하고, 제도 시행 후에도 3년마다 종합조사표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장애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권리를 행사토록 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다. 정부는 단 한 명도 억울한 장애인이 없도록, 제도의 신뢰 확보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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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산문 한편을 탈고했다. 주제는 대략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 대한 것이었다. 원고지 100장의 짧지 않은 분량이었는데도 미처 못다 한 이야기가 지천이다. 어린 시절 한옥에 살았고 한국전쟁의 폭격을 피한 대구는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은 골목들이 많았다. 그 집은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흙길과 얼기설기 엮은 판자로 만든 담이 서 있던 막다른 골목의 끝집이었고 자동차는커녕 리어카 정도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그랬으니 집은 날이 어두워지면 돌아가는 곳일 뿐 아주 많은 시간을 골목에서 보냈다. 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집보다 학교나 골목에서 보낸 시간이 더욱 많았기 때문일까, 집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집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골목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여하튼 원고를 탈고하자마자 일본의 나라시(奈良市)로 향했다. 그러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4일 동안 70㎞ 남짓하게 걸었다. 그것도 나라시를 벗어나지 않고 오전 6시부터 10시 정도까지 또 오후 4시부터 7시까지만 걷고 볕이 따가운 낮 시간은 호텔에서 쉬었다. 그렇게 걸은 곳은 나라마치(奈良町)라고 부르는 골목이다. 사실 나라마치의 구역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러나 나라마치의 역사는 골목의 길이만큼 길다.

일본은 710년 겐메이텐노(元明天皇)가 도읍지를 나라로 옮겨 헤이죠큐(平城宮)를 짓고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를 열었다. 그 후, 718년 아스카무라(明日香村)에 있던 호코지(法興寺)를 나라로 옮겨 간고지(元興寺)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호코지는 일본 최초의 가람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카데라(飛鳥寺)와 같은 곳이다. 당시 나라에는 이미 도다이지(東大寺)와 고후쿠지(興福寺) 같은 대형 사찰들이 있었으며 간고지는 그 사찰들과 다른 구역에 터를 잡았다.

후에 간고지는 두 곳으로 나뉘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간고지는 고쿠라쿠보(極樂坊)가 있는 곳이다. 간고지 주변은 아스카촌으로부터 옮겨 왔던 당시부터 도시계획이 시작되어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다. 지금도 그 골목들은 형태가 망가지지 않았는데 골목의 작은 사거리에 서면 대략 사방 골목의 끝이 보일 만큼 반듯하다. 그렇다고 굽이진 골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골목을 만나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큼 간고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나라마치의 모든 골목은 먹줄을 놓은 것처럼 곧다.

골목을 걷다가 눈에 띄는 집들은 대개 에도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더불어 길의 악령을 막고 행인을 지켜 준다는 도소진(道祖神)을 비롯하여 고진도(庚申堂)와 같은 전통신앙의 흔적들도 보였다. 그렇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재들이 있다고 해서 골목이 고인 물 같지는 않았다. 숱하게 흩어져 있는 신사나 사찰과 함께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흔적이 곳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드문드문 보이던 곡식이나 생선, 채소 같은 것을 파는 작은 가게와 이발소 그리고 굴뚝 높은 목욕탕은 비록 고요해 보이는 골목일지라도 아직 왕성하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더할 나위 없는 증거였다.

그런가 하면 1994년 추석에는 중국의 후퉁(胡同)을 걸었다. 처음 간 북경이었지만 무리와 떨어져 혼자 자금성 근처를 며칠 동안 헤매고 다녔었다. 그 후, 북경에 갈 때마다 후퉁의 매력을 잊지 못해 쏘다녔고 지난해와 지지난해는 후퉁 속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며칠 묵으며 골목을 속속들이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의 후퉁과 1994년의 그것은 전혀 딴판이다. 당시는 그저 북경의 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후퉁의 면적 자체가 줄어들었고 상업적인 장소는 훨씬 더 많아졌다. 그런데 중국의 후퉁과 일본 나라마치를 하늘에서 보면 흥미롭다. 직접 하늘에 올라갈 재간은 없지만 구글 지도나 오래된 고지도는 지금은 물론 오래전부터 골목들이 바둑판처럼 반듯했음을 보여 준다. 이번에 나라마치를 찾았을 때 마침 나라마치 자료관에서 일대를 그린 고지도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어서 한나절쯤은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한 지도들은 두 나라의 도읍이 모두 계획된 도시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러나 일본의 골목이 중국의 골목에 비하여 더욱 반듯해 보이는 것은 골목 안에 방치된 물건들이 없이 오로지 길과 벽 그리고 전봇대만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 후퉁의 골목에는 갖은 물건들이 만만찮게 놓여 있다. 그 때문에 골목은 삐뚤빼뚤해지고 좁았다가 또 넓어져 전혀 반듯해 보이지 않는다. 비록 그렇더라도 중국은 후퉁의 가치에 대하여 이제라도 눈을 뜨고 옛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500년 도읍지인 서울의 골목은 어떨까. 아무래도 우리의 유전자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는 것에 약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있던 것을 없애 버리거나 새로운 것을 만드는 유전자는 탁월하다. 그런 유전자의 힘은 골목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사대문 주변의 골목들 중 몇 곳이 사라져 버리거나 많은 곳이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최근 말썽이 되었던 세운상가 주변이 그렇고 벌써 몇 년 지난 이야기지만 익선동의 요정 오진암(梧珍庵)도 헐렸다. 그 자리에 호텔이 들어섰는데 그것 하나가 주변 건물 생태계를 바꾸지는 않았을까 염려된다. 마치 늪지에 뿌리내린 관목 한 그루가 야금야금 늪을 황폐화시키듯이 말이다.

또 얼마 전 돈의문 근처에 박물관마을이 생겼다. 나는 그 마을과 붙어 있던 고등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일대의 골목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었기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맞닥뜨린 박물관마을의 정체성이 의아하고 모호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죄 때려 부수고 새로 짓지 않았다는 정도이다. 때로 우리나라가 보여주는 미덕은 낡은 것보다 새것, 옛것보다 현대적이다 못해 미래지향적인 것을 떠받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며, 새것은 낡고 헌것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지누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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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제작은 노동 강도가 세기로 유명한데, 지금까지 그 ‘빡센’ 분위기가 문제로 지적되기보다 낭만화되어 온 게 사실이다. 과로는 젊음을 불태운다는, 영혼을 바친다는, 사명을 다한다는 식으로 포장되었다. 영웅담이 방송사에 넘쳐났다. 조연출 때 며칠 동안 몇 시간밖에 못 잤다는 것으로 입씨름이 붙었다.

나도 입사했을 때 이 일이 적당히 해선 안되는 일이라고 배웠다. 죽어라 해야 남들만큼 한다고 들었다. 이 일이 낭만화될 수 있었던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고 보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편집을 하다 시계를 보면 서너 시간이 지나 있었다. 시청자 반응이 좋으면 가슴이 뜨거워졌다.

과로가 일상화되니 여러 기행들이 넘쳐났다. 어느 PD는 며칠 만에 집에 돌아가 샤워를 하곤 입고 있던 옷을 다시 입고 나왔다. 수염을 자르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집에 가지 않고 숙직실에서 사는 사람도 있었다. 과로가 ‘장려’되면 과로를 인정받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다들 휴식과 퇴근을 숨기고 ‘계속 일하고 있는 상태’에 있으려 했다.

나는 조연출 시절 주로 바지를 갈아입지 않았다. 건빵바지 하나로 버티고 상의를 몇 개 갈아입으며 일을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려 했다. 늦으면 국장실 앞 소파에서 주로 잤다. 다들 하는 이런 설정의 목적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최대한 알리는 데 있다는 것을 일찍 간파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국장과 부장들이 회의하러 모이며 나의 자는 모습을 시청했다. 그리고 각 부서에 돌아가 나의 과로를 많은 이들에게 알렸다. “쟤는 왜 집에 안 가고 일만 하니?” 그건 칭찬이었고 다른 이에게는 압박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설정은 돌아서 나에게 왔다.

일하는 데 ‘전념’할수록 소속감이 강해졌고 통과의례를 거치고 있다는 점에 자부심이 생겼다. 일을 많이 하니 빨리 또 많이 배웠다. 사회 초년 인정 욕구가 충족되니 되도록 무리해서 일을 했다. 시키면 거절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런 게 참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이들이 죽음의 문턱을 경험했다. 지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을 나 역시 몇 번 느꼈다. 지병을 얻는 사람도 생겼다. 회사가 그런 분위기를 강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이 강제되지 않는 공간에서 전력을 다하려는 PD에게 브레이크를 걸기는 쉽지 않다. 도제식으로 일을 배우고 평판이 중요한 사내 환경에서 후배 PD들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제작을 요구하기 쉽지 않다. 또 프리랜서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과로가 낭만화되었던 시간은 다른 누군가에는, 또 그렇게 생각한 이들에게도 사실 잔인한 시간이었다.

과로는 페미니즘 관점에서 남성중심사회를 공고히 하는 기제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문제였다. 육체적으로 ‘나약한’ 사람이 소외되었고 일할 때건, 술 마실 때건 ‘최선을 다하는’ 후배가 대접받았다. 선배들은 자기 밑에 있을 때 과로를 마다하지 않고 헌신한 후배에게 기회와 편의를 더 제공하려고 했다. 규정된 시간 안에서 일을 할 경우 생기지 않을 편향이 자리 잡게 된 거다. 남자들이 입사 후에는 더 유능하다는 인식도 착시가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소모적으로 일했을 뿐이고 솔직히 돌이켜보니 그럴수록 더 후져졌다.

일을 오래 해보니 스태프의 과로는 PD의 무능과 준비 부족에 기인함을 차츰 알게 되었다. 스태프가 과로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리더는 나태해지기 쉽다. 시간 제약이 강화될수록 PD에게 필요한 것이 막연한 근성보다는 치열한 고민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나아가 제작 시스템과 산업의 규제 환경이 노동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느꼈다. 직책이 높은 선배 중 현명한 이들은 디테일한 간섭보다는 환경 개선에 관심을 쏟았다. 비효율은 고민하지 않으면 당연하게만 보이기 마련이다.

이한빛 PD가 세상을 떠나면서 과로가 문제라는 인식이 더 자리를 잡았다. 후배에게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도 창피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방송계에도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이 가까이 왔다. 방송사도 환경에 맞는 세부적인 규칙을 합리적으로 짜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건강한 환경이 강제되면 긍정적인 효과가 많을 것 같다. 적응할수록 더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 믿는다. 아마 다른 분야도 다른 듯 비슷하지 않을까.

<김신완 | MBC PD·<아빠가 되는 시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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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 끝내주는 국숫집이 있다. 칼칼한 맛도 맛이지만 그 옥호가 특히 눈길을 끈다. ‘언 칼국수’. 간판에 ‘言’이라고 한자로 딱 박혀 있다. “言. 날카로운 칼과 口가 합친 것. 칼로 까칠까칠하게 만들듯 하나하나 확실하게 구별되는 게 말”이라고 옥편은 그 자원을 풀이한다. 무심코 그냥 하는 게 말인 줄로 안다. 언어가 없다면 세상은 분별될 수 없다. 제아무리 깊은 궁리를 해도 말이 없다면 무엇으로 그 궁리를 바깥으로 운반할 수 있겠는가. 옹알이만 하다가 일생이 지나간다. 한편 그것을 그것이라 말해버리면 그것밖에 되지 못하니 이 말의 감옥은 또 어쩔 것인가. 말, 그게 결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틉틉한 멸치국물에 색다른 고명. 한 숟가락 뜨면 맑아도 그릇 속은 깊고 묘하다. 이 쫄깃하면서도 뚝뚝 끊어지는 면발을 이 이름에 담은 것일까. 말끔히 비우고 난 뒤 주인을 찾았더니, 원래 ‘언니네 칼국수’였는데 상호등록을 하려니 한자가 필요해서 언(言)으로 했다고 한다. 얼큰했던 맛이 확 깨는 싱거운 답이 아닐 수 없었다.

심학산 자락에서 놀다가 저녁을 맞이했다. 간단하게 때우자며 출판단지 입구의 청국장집, ‘진달래’로 갔다. 주말이라 오히려 한가해서 우리 둘은 특별 대접을 받는 기분이다. 보리밥을 바탕으로 각종 나물과 큼지막한 상추에 고추장을 섞어 밥을 비볐다. 밥알 하나하나가 다 살아 있어 막걸리 안주로도 훌륭하다. 몇 술 뜨는데 비로소 라디오 소리가 걸어왔다. &lt;배미향의 저녁스케치&gt;에서 전해주는 날씨 소식. 먼 지방에는 비, 경기에는 돌풍이 분단다. 그 끝에 오늘은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라고 했다.

공터로 나오니 전혀 다른 국면의 세상이 또렷하다. 눈앞의 풍경은 언어의 집합이기도 하다. 산과 들판, 집과 골목이 있다. 이들을 가능케 하는 햇살이 짱짱하다. 텃밭 옆에 건장한 건 살구나무였다. 노란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아직은 밍밍하고 떫은 맛. 여름의 한 지극한 경지인 하지이니 오늘이야말로 열매는 가장 당도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가물가물한 하늘에 저물어가는 기해년의 하지. 나무 아래서 그 이름만 겨우 알 수 있는 살구를 툭 건드리자 가지가 살짝 흔들렸다. 살구나무, 장미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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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 사건에서 강한 폭행, 협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 강간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피해 여성의 내면적 심리와 공포를 도외시한 견해다.” ‘성인지 감수성’이 분명한 이 판결은 언제 내려졌을까. 2004년 10월이다. 서울북부지법 박철 부장판사(현 변호사)는 처남과 동거 중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이런 판결문을 내놓았다.

한국 형사사법은 20세기로 돌아간 걸까. 2019년 6월 서울고법 형사9부는 10세 여아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 이모씨(사건 당시 34세)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사건의 얼개는 이렇다. 보습학원 원장인 이씨는 채팅 앱을 통해 ㄱ양을 알게 됐다. 그는 한밤중에 ㄱ양을 만나 집으로 데려갔다. ㄱ양에게 소주 두 잔을 마시게 한 뒤 술에 취한 ㄱ양이 침대에 눕자 성폭행했다. 1심은 이씨가 피해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누른 것이 폭행·협박에 해당한다고 봤다. 반면 2심은 폭행·협박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기소된 혐의(성폭력처벌법상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대신 미성년자의제강간 혐의를 적용했다. 미성년자의제강간은 피해자가 13세 미만임을 알고 간음할 경우 폭행·협박이 없어도 처벌하는 것으로, 형량이 훨씬 가볍다.

기사에서 다루지 않은 ‘감형할 만한 사유’가 판결문에는 들어 있지 않을까? 판결문을 살펴봤다. 더 참담해졌다. 재판부 판단은 이렇다. “영상녹화물에서 피해자는 ‘직접적으로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조사관이 ‘그냥 누르기만 한 거야?’라는 취지로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통해선 피고인이 피해자의 몸을 누르게 된 경위, 피고인이 누른 피해자의 신체 부위, 피고인이 행사한 유형력의 정도, 피해자가 느낀 감정을 확인할 수 없다.” “피고인은 (사건 당시) 피해자가 아프다며 밀어내는 행동을 했다고 진술했으나, 폭행·협박으로 반항을 억압했다고 인정하기엔 부족하다.”

재판부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확산되자 설명자료를 냈다. 피해자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수사과정에서의 진술만으로는 폭행을 인정하기에 부족했고, 재판부 권유로 검사가 피해자를 증인신청했으나 피해자가 출석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무죄선고될 사안이나, 형사소송법의 이념인 정의와 형평을 고려해 미성년자의제강간을 유죄로 인정했다”고도 했다.

‘정의’와 형평’은 충분히 고려됐는가. 동의하기 어렵다.

① 아동 대상 성폭력 사건에 ‘아동’이 없다 → 성인 여성도 낯선 조사관 앞에서 성폭력 피해를 구체적으로 진술하기는 쉽지 않다. 피해자는 10세 아동이다. 더구나 술에 취해 누워 있던 상태였다. 조사받을 때도 폭행·협박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재판부는 이런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 어디를, 얼마나’ 눌렸는지 말하지 않았다며 피해자 진술을 사실상 배척했다. 한밤중에, 둘만 있는 공간에서, 성인 남성이 술 취한 여아의 몸을 누른 행위가 폭행·협박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② 피고인의 신빙성 검증에 소홀했다 → 1심 판결에는 피고인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한 대목이 있다. “관계 자체를 부인했다가 DNA검사 결과가 나오자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 2심 판결은 피고인의 신빙성을 다루지 않았다. 술을 먹인 점을 지나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동이 의식불명인 준강간 상태까지는 아니었다 해도, 그런 무저항 상태로 이끌려는 (가해자의)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③ 판례 변화를 외면했다 → 2심 판결은 폭행·협박의 의미를 가장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最狹義說)’을 따랐다. 최협의설은 대법원이 1992년 강간치상 사건에서 “가해자의 폭행·협박은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고 밝힌 데서 비롯했다. 이 판례는 점차 완화돼왔다. 한 판사는 “최근엔 문장상으로 최협의설을 취하지만, 구체적으로는 피해자의 연령 등에 따라 폭행 인정 정도가 다양화되고 기준도 낮아지고 있다”며 “이번 판결이 예외적”이라고 말했다. 대법원도 지난해 “성폭력 피해자의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진술의 증명력을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에 입각한 판단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피고인과 검찰 모두 상고하면서 판단은 대법원 몫이 됐다. 대법원은 선언해야 한다. 성폭력 재판에서 피해자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피고인 진술의 신빙성도 검증해야 한다는 점을. 나아가 대법원은 27년 묵은 판례를 폐기하고 새로운 판례를 수립해야 한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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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람들의 자신만만한 발언을 들을 때마다 공연히 비위가 상했다. 최근 들어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한 대학 특강에서 “학점도 엉터리, 토익 점수도 800점”인 청년이 큰 기업 다섯 군데에 합격했는데 그 청년이 내 아들이라고 자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생존권 투쟁에 나선 택시 노동자를 4차 산업 혁신을 가로막는 세력으로 몰아붙인 이재웅 쏘카 대표의 발언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기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무언가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는 것 같다. 나처럼만 하면 되는데, 나는 비법을 알고, 알려 줄 수도 있는데 ‘너희들은 이거 모르지?’라며 섣부르게 가르치려 든다. 물론 부모 잘 둔 덕에 권력과 부를 얻어 사회지배층이 된 ‘블러드 엘리트’에 비해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더 높이 평가받고, 존경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포브스’에서는 해마다 한·미·중·일 4개국 부호의 재산현황을 조사해 발표한다. 2017년 현황에 따르면 한국은 이들 국가 중 상속형 부자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한국은 상위 부호 50명 가운데 상속형 부자 비율이 62%(31명)로 미국의 30.0%(15명), 일본 36.0%(18명)와 비교해도 월등히 높았다. 중국은 상속형 부자가 2명(4.0%)에 불과했다. 그나마 반가운 소식은 한국에서도 이른바 자수성가형 부자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기사였다. 개천에서 용(龍) 나기 어렵고 개천마저 말라간다는데, 과연 어떤 사람들이 성공했을까. 그들 대부분은 IT업계 벤처기업가 1세대였고, 1960년대 후반에 태어나 명문대를 졸업하고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주도한 벤처·닷컴버블 시기에 창업한 인물들이었다. 과거 세대에게 정주영과 이병철 같은 이들이 기업영웅이었다면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겐 이들이 새로운 영웅이며 그만큼 영향력도 커졌다.

모 경제신문에서 운영하는 ‘슈퍼리치’ 사이트에서 2019년 6월21일 현재 이들의 재산 소유 현황과 가족관계를 살펴볼 수 있었다. 김정주 NXC 회장(2조660억원)은 유명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개인용 컴퓨터를 소유했다. 요즘에야 집에 PC 없는 것이 더 놀랄 일이겠으나, 1980년대 초반 가정집에 자기 PC를 가진 중학생은 매우 드물었다. 부친은 아들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주었고, 창업 이후 5년간 아들 회사의 대표직을 맡아 각종 계약의 자문역할을 해주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해진 NHN 전 의장(1조3442억원)의 부친은 전 삼성생명 대표이사였고 그는 삼성 사내벤처제도를 통해 창업했다. 이재웅 대표는 학창 시절 이해진과 서울 청담동의 같은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살았고, 어머니들의 친분 덕분에 서로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의 부친 역시 한국종합건설 계열사 총괄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렇다고 피에르 부르디외가 &lt;구별짓기&gt;에서 말한 것처럼 문화자본이야말로 계급재생산의 핵심요소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김범수 현 카카오 의장(2조1866억원)은 어린 시절 할머니를 포함해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 살았고, 앞서 이재웅 대표와 설전을 벌였던 김정호 베어배터 대표의 부친은 택시 운전사였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1조223억원)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혹독한 가난을 맛보았고, 넷마블게임즈 방준혁 대표(1조6000억원 추정)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성공한 사람들도 저마다의 사연과 어려움이 있었을 테고, 도전정신과 과감한 실행력 등 여러 가지 자질과 능력의 비범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 비법을 알려주는 수많은 서사가 보여주지 않는 이면이 있다. 먼저 그들의 성공 뒤에 숨겨진 IT업계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의 주역이라는 화려한 수식 뒤에서 혹독한 야근과 비정상적인 대우에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 말이다. 그들 못잖게 성공하고 싶은, 아니 평범한 삶이라도 평온히 살아가길 희망하는 이들의 행복은 어째서 그토록 이루어지기 어려운 구조인지 살피지 않는 성공이란 결국 그 구조를 강화하는 헛된 미담일 뿐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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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잭 매키는 이름난 병원의 잘나가는 외과의사다. 행복한 가정과 고급저택을 가지고 있다. 유능하지만 환자의 고통에 냉담한 그가 어느 날 후두암에 걸렸다.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환자로 신분이 바뀌자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검사를 시행하는 의사는 불친절하고 일방통행이다. 병원은 방사선 치료 시간을 지키지 않고, 간호사에게 따져보지만 여의치 않다. 무신경, 무성의, 무대응에 분노하지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병원 관계자는 없다. 환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병원에, 환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던 의사가 절망한다. 1991년에 나온 미국 영화 <더 닥터>의 줄거리다.

어떤 전문가는 그의 전문지식을 구하는 소비자의 말에 둔감하다. 아예 외면하기도 한다. 이유인즉 직업적 판단에 방해가 된다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나쁜 태도는 냉소와 비웃음이다. 입원 전의 잭 매키는 환자에 대한 감정이입이 자연스럽지 않으냐는 레지던트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외과의사가 남의 살을 찢는데 무슨 감정을 갖나?”

나는 팔자에 없는 국회의원 출마 예정자가 됐던 일이 있다. 판사 재직 중이던 1995년 어느 일간신문에 내가 집권여당 소속으로 모 지역구에 출마하려 한다는 기사가 났다. 그 기사를 다른 신문이 인용하면서 근 한 달간 후속보도가 이어졌다. 영문을 모르겠는데, 지인들로부터는 전화가 빗발쳤다.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봐도 취재원을 밝힐 수 없다는 답만 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해당 정당의 조직국에서 자료가 나왔다는 거였다. 책임자인 의원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 자료를 흘린 일이 없다면서 그가 덧붙인 말은 “판사님, 참 이상하시네요. 남들은 그런 데 이름을 못 올려 안달인데, 왜 그걸 싫어하세요?”였다.

생각다 못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 갔다. 사무원의 퉁명스러운 응대는 그렇다 치고, 변호사가 제일 먼저 던진 질문은 “이거, 사건이 됩니까?”였다. 된다고 대답하자, 고개를 갸우뚱하던 변호사가 “판사가 된다면 되겠지…”라고 하더니, 그 정당 대표자의 대표권을 어찌 증명할 것인지 물었다. 정당은 법인이 아니라서 등기소에서는 증명서를 받을 수 없다기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글쎄, 그런 증명서를 발급해 본 일이 없으나 한번 신청서를 내 보라는 것이었다. 소송이란 게 이렇게 힘든 일인가. 다음날 더욱 기막힌 일이 생겼다. 변호사가 전화를 걸어와, 요즘 이런 사건을 하다가는 바로 세무조사로 보복당할 수 있다고들 하니 내 사건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직 판사가 되어서도 법적 구제를 받기가 이리 힘든데 보통 사람은 어떨까 싶었다. 

의사, 성직자, 법률가, 교직 등 전문직 종사자가 환자, 신자, 소송 당사자나 의뢰인, 학생 등을 상대하면서 그들과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때로는 공감해 줄 마음을 갖지 않기도 한다. 전문직 종사자가 상대하는 이들은 자기의 고충을 호소하면서 때로 떼를 쓰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고, 엉터리 주장을 펴기도 한다. 

전문직 종사자의 직업윤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를 이르는 내용이 핵심이다. 학교나 교과서에서 이런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왜 윤리칙이 중요한지를 내면화하지 못한 채 그저 그것을 답안에 옮겨 점수를 따고, 그 점수로 자리와 밥을 얻어 안온한 일상에 들어가고 심지어 높은 자리에 앉아 떵떵거리다 보니, 어느덧 바보가 되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주문이 재미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직업적 소명에 대한 자각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문제는 내면화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를 망각하면, 즉 역지사지라는 이름의 위대한 상상력을 잃으면, 그 순간 전문직 종사자는 본래의 책무를 저버리고 사회적 사명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전문직이 적어도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 권력자라고 함에 동의한다면, 모든 권력자에 대한 경구는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권력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피지배자의 입장에 서 볼 줄 아는 것이다.

법정에서 가장 힘이 빠지는 순간은 담당 판사의 태도가 냉담할 때다. 변호사 된 지 얼마 안돼 형사사건 법정에 처음 들어가서 겪은 일이다. 항소심 재판장이 심리에 앞서 다들 들으라면서 일장 연설을 하는데, 피고인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자기에게 유리한 증거를 신청할 수 있으며 아무튼 1심 법원에서 못했던 주장이나 입증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끝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나중에 피고인 측 주장이 허위거나 증거조사가 불필요했다고 밝혀지면 형이 가중될 테니 그건 각오하라. 순간 법정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한 분위기에 싸였다.

전직 판사였던 어느 변호사가 사법농단 사건의 피고인이 된 후 페이스북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몸소 피의자, 피고인이 되어 보고 나서야 적법절차, 무죄추정원칙, 증거재판주의, 피의사실 공표 처벌 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런데… 왜 이제야 뼈가 저린가. 뼈가 저리기 전에 마음가짐을 점검했어야 할 일 아닌가. 높은 법대에 앉은 이들이여, 간절히 비노니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선언을 진실로, 진실로 가슴에 새겨 보라. 시간이 없다. 어느 날 법대에서 내려오면 늦다. 그때 당신은 이미 판사가 아니다.

<정인진 |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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