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육 한 점이 꽃을 피웠다. 아무도 몰래 살며시 이틀 잎을 열었다 다시 닫아버렸다. 어디에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천 년 비바람과 일억 광년 빛이 섞였던 것,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없다. 누구에게나 ‘그대’는 지울 수 없는 상흔. 이 넓은 우주에서 이 짧은 찰나에 우리 이렇게 만났다 다시 처음처럼 헤어진 것만으로 기적이고 황홀이다. 정한용(1958~) 오늘 “꽃을 피”운 “다육 한 점”을 지긋이 바라보던 시인은 ‘지극’과 ‘정성’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이름 모를 다육은 오래전에 그리운 곳을 떠났지만, 흔들림 없이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람과 달리 고향에 가고 싶다거나, 배가 고프다거나, 아프다고 칭얼대지 않는다. 햇빛 잘 드는 창가에 두고 겨우 일주일에 한 번 ..

연못이 거위를 번쩍 들었다 놓는다 날아가지 못하는 거위의 일생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물에 띄워 놓은 한 덩이 두부처럼 거위는 후회하지 않아서 다시 거위가 된다 연못을 잠그고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새와 거위 사이가 멀어져서 날이 저물었다 창문이 많은 봄이었는데 들길 산길에 색색의 기분들이 흘러 다니는 봄날이었는데 홍일표(1958~)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을 ‘가금(家禽)’이라 한다. 까마득한 날에 길들여진 거위는 날개가 존재하지만 날지 못한다. “연못이 거위를 번쩍 들었다 놓”아도 연못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연못에서 벗어나 창공을 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다. 자율의지를 상실한 거위는 스스로 연못에 갇혀 버린다. 속박을 자유라 착각한다. 그 순간 작은 세상이었던 연못은 감옥..

내 심장 한 모서리 나무 한 그루 심네 비 그친 저 아득한 거리에서 옮겨온 나무 눈보라가 와서 가지를 흔들 때 혹은 노을 한 보자기 걸쳐 나부낄 때 아픔을 견디며 잎 내고 꽃 피워 올릴 때 못 견디게 보고 싶은 것들 내 심장에 뿌리 깊게 뻗어 나무 한 그루 살고 있네 문효치(1943~) 바위는 한번 자리 잡으면 떠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묵묵히 풍화를 견딘다. 어지간한 비바람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바위는 옆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 위로 기어다니는 개미나 자벌레를 통해 세월의 변화를 감지한다. 그들의 쉼터나 은신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시인은 ‘바위’ 연작시 70편을 묶은 시집에서 “함묵과 무표정의 발언을 채록”했다고 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 꾹 닫은, 마음속에 쟁여둔 침묵의 언어가 시(詩)인 셈..

얇은 솜 위에 올려둔 콩이 물을 머금더니 발이 튀어나오고 햇빛 닮은 쉼표 하나 찍어준다 초 단위로 살아서 사방으로 뻗어가려고 가녀린 침묵을 세운다 연두로 물들이는 세상 아래 촉촉한 스펀지가 울고 있다 콩 한 알이 울어야 할 슬픔을 모두 뱉어내고 거룩한 울음 앞에 우두커니 서서 쉼표로 돋아난 발자국을 꼼지락거린다 권지영(1974~)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니는 아이의 숙제일 것이다. 강낭콩에 싹을 틔우고, 화분에 옮겨심어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때까지 관찰일기를 쓰는.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물 머금은 종이행주 위에서 발아의 순간을, 단단히 웅크리고 있던 생명이 싹트는 것을 아이와 함께 오래 지켜보았다.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지켜볼 것이다. 시인은 생명이 탄생하는 숭고한 시간에서 “초 단위로 살아..

저 성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말 걸어볼 사람이 없고 진열장에 든 빵을 살 수 없는 곳, 쌓인 눈을 만질 수도 없고 멀리 마주본 두 성의 불빛만 거울 같은 곳, 창 너머 희끗한 하인도 은둔자 같군요. 사계의 성을 숭상하는. 집시들의 노랫소리가 풍문처럼 울려퍼지고 밤새 젖지 않는 신발로 어디든 갈 수 있군요. 암벽 같은 성문이 밤을 갈랐다. 오래 묵은 입술로 하인이 말했다. 어서 오세요, 방마다 이야기가 잠겨 있고 귀가 늘어나는 곳으로, 돌아갈 때는 저 반대편 성으로 나올 거예요. 불확실한 어투처럼 떠도는 입자들 어두운 간격을 몬존히 스미는 눈,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성으로 걸어들어갔다. 강신애(1961~) 낯선 여행지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불현듯 이정표를 만난다. 하지만 길이 여러 갈래라 어디로 가야 할지 ..

사방이 열려 있는 계절이 노크도 없이 들어와 익어가는 노루 토끼 아침저녁 들락거리는 큰 눈 치운 겨울밤 쪽잠 다치지 않을까 뒤꿈치 들고 다녀간 노루의 허방 짚은 아침 죄송죄송 발자국 편지를 읽는 대문을 떼어낸 자리 5일장 골목마다 머리 조아리며 받아 온 푸성귀 몇 줌 내어놓는 사방이 길이고 문인 그런 집이 되고 싶다 산간 마을 어디쯤 살고 있을, 김남수(1954~) 산간 마을에서 담장을 허문다는 건 경계를 없애는 동시에 경계하지 않겠다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자유로이 담장 위 넘나드는 날짐승뿐 아니라 산짐승과도 이웃해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다. 그런 마을에 폭설이 내린다. 사람과 집, 집과 마을 사이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눈을 치운다. 혼자가 아니라 마을 사람 거의 다 동원된다. 간..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아라 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 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늘 똑같던 공간이 다른 움직임으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이색적인 선(線)들과 색깔을 그으면서, 마침내 아직까지 없었던 시간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열고 있다! 그래 나는 찬탄하느니 저 바깥의 움직임 없이 어떻게 그걸 바라보는 일 없이 어떻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바라건대 나는 마음먹는 대로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 있으리니…… 정현종(1939~) 허공(虛空)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다. 공기로 가득 차 있으면서 나무가 자라고, 새 떼가 날 만큼 텅 비어 있다. 시인은 무심히 창밖을 내다본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의 풍경이다. 안도 밖도 시간이 정지한 듯 무료하다. 그때 낮게 내려앉은 ..

무기력으로 떠오른 내가 무기력으로 가라앉습니다 천둥 번개, 내 안의 내력으로 가라앉습니다 나는 내가 없는 존재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막다른 골목 끝에서 천둥소리에 실려 오는 물방울 하나 하얀 나비 날개로 날아오릅니다 누가 앉았다 돌아간 흔적 없는 공터, 웅덩이 같은 빈 발자국에 빗방울이 고요히 내려와 앉았다가 사라집니다 이영춘(1941~) 새해가 코앞인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사라지기는커녕 기세등등하다. 시인은 ‘죽은 시인의 방’이라는 시에서 “눈을 뜨고 감아도 똑같은 일상의 감옥”이라 했다. 매일 보는 가족도, 행동도, 사물도 멈추어 있다. 무기력한 나날의 연속이다. 일상에 지친 시인은 “어느 창을 열면 봄을 만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져보지만, 지금 같아선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시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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