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경향시선'에 해당되는 글 291건

  1. 2019.02.11 세수
  2. 2019.01.28
  3. 2019.01.21 푸른 양말을 신던 봄날 -연남동 4
  4. 2019.01.14 이 겨울밤
  5. 2019.01.07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6. 2018.12.31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
  7. 2018.12.26 고랑 몰라
  8. 2018.12.17 달의 뒤편
  9. 2018.12.10 화살
  10. 2018.12.03 마음을 들여다본다
  11. 2018.11.26 서른세 개의 동사들 사이에서
  12. 2018.11.19 꽃을 만드는 손
  13. 2018.11.12 물건
  14. 2018.11.05 돌이 말할 때까지
  15. 2018.10.30 세탁기
  16. 2018.10.22 초혼(招魂)
  17. 2018.10.15 말 없는 소리
  18. 2018.10.08 얼굴 2
  19. 2018.10.01 고무줄놀이
  20. 2018.09.17 반 다발

두 손을 모아 강물을 받아요

그 물로 얼굴을 비벼요

물고기 냄새와 달빛 냄새가

나네요

아침 해가 강물에게 들려준

얘기를 느낄 수 있어요

 

손에서 얼굴 냄새가 나요

평생 화장수 한번

바르지 않았죠

슬픈 날은 얼굴에서

별 냄새가 나요

반짝반짝 흘러내리는 별

내 몸 어딘가 이리 많은 별이

있었다니 신비해요

별이 있어 세월 내내

행복했지요

별이 있어 해와 달도

외롭지 않았지요

 

슬플 때면 강으로 가요

쭈그리고 앉아

강물로 얼굴을 비벼요

얼굴이 환해지니

그리운 당신에게 갈 수 있어요

곽재구(1954~)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깨끗한 강물을 두 손으로 떠서 세수를 했으면 좋겠다. 물고기들의 집인 강물을 떠서. 초승달과 만월의 빛이 밤새 하얗게 내린 강물을 떠서.

그렇게 강물로 얼굴을 감쌌으면 한다. 슬픈 날엔 얼굴에서 별 냄새가 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외롭고 쓸쓸하고 어두운 시간과 장소에 별이 살고 있기 때문일 테다. 그럼에도 별은 스스로 빛을 모아 빛나면서 슬픔을 견뎌내기 때문일 테다.

시인은 다른 시편에서도 강에 대해 노래했다. ‘물고기와 나’에서는 “물고기는 몸이 예쁘다/ 하루종일 물속에서 춤을 춘다”라고 썼고, ‘강물’에서는 “물을 보면 좋아요/ 종일 노래 불러요”라고 썼다. 강물에서 춤과 노래를 발견했다. 우리의 일상을 강물처럼 두 손으로 떠서 세수를 한다면 우리도 보다 다양한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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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경향시선

아직 던져지지 않은 돌

아직 부서지지 않은 돌

 

아직 정을 맞지 않은 돌

 

아직 푸른 이끼를

천사의 옷처럼 두르고 있는 돌

 

아직 말하여지지 않은 돌

아직 침묵을 수업 중인 돌

 

아직 이슬을 어머니로 생각하는 돌

 

그리고 잠시 손에 쥐었다

내려놓은 돌

 

아직 조금 빛을 품고 있는 돌

 

유강희(1968~)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곳에 가만히 앉은 돌멩이가 하나 있다. 햇살 아래 잠든 듯이. 아직은 생김새가 태어난 모양 그대로인 돌멩이다. 손을 타지 않고, 다른 것이 섞이지 않고, 가공되지 않은 채로. 푸른 이끼도 입고 있다. 날개를 접은 채. 태어나지 않은 언어를 갖고 있는 돌멩이. 내내 잠잠하게 있는 돌멩이. 아침이면 부시고 맑은 이슬이 이마에 데구루루 구르는 돌멩이. 그리고 한 번 나의 옷깃을 스쳐간 돌멩이. 내면에는 순수와 사랑과 빛을 하얀 새알처럼 품고 있는 돌.

시인은 시 ‘돌아’에서 이렇게 또 썼다. “돌아/ 너무 맑은 날 아침은/ 네 가난한 거죽에도/ 새 옷 한 벌 해주고 싶어// 어느 영원의 반짝이는 개울 하나/ 너랑 손잡고 건너고 싶어”

돌은 작고 고유한 존재요, 하나의 우주요, 돌은 못된 생각이 없는 착한 성격이요, 돌은 우리가 더욱더 가꾸어야 할 그 어떤 반짝임과 밝음일 것이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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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양말을 신던 봄날의 기억은 따뜻하다. 약국에서 두통약을 사고, 흰 양말 열 켤레를 사고, 망원시장에 들러 복숭아 몇 알을 샀다. 일요일 저녁에는 면 셔츠를 입고 스키야키를 먹으며 무연고 무덤과 양치류의 우울은 밀쳐두었다. 태풍 매미가 오던 해, 여름의 철학이나 새벽 두 시 첫 눈송이를 받던 손바닥은 기억하자. 마포평생학습관에서 절판된 책을 빌린 행운과 당신 이마를 때리는 초저녁 싸락눈을 사랑하자. 등 뒤로 멀어지는 이별은 용서하자. 쓸쓸하고 여윈 연남동에서도 이를 악물고 견딜 만했으니까.

장석주(1955~)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연남동’이라는 이 동네는 특정한 장소라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보통의 동네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약국과 상점과 식당과 네거리와 시장과 도서관이 있고, 사랑의 싹틈과 낙화가 있고, 휴일의 소박한 행복이 있고, 계절의 바뀜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사는, 이를 꼭 마주 물고 참으며 사는, 편두통을 앓는, 평범한 우리들이 있다. “푸른 양말을 신던 봄날”이라는 시구는 봄날의 신록을 떠올리게 한다. 또 풋풋하게 자라나는 풀들의 싱그러움처럼 마음에 신선하게 품은 내일의 계획과 희망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어느 곳에서든, 어떤 때에든 우리는 이처럼 ‘푸른 양말’을 신을 일이다. “눈 온 뒤 파밭에서 파랗게 솟은 파인 듯” 발목에 푸른빛을 두를 일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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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청기 끼고 나서 나도 모르게

소리 안 나게 문을 여닫곤 한다.

누가 들을까 봐도 아닌데

그리운 문소리도 있는데.

 

귀 조금 밝히고 보니 이즘 사는 일

조약돌 밑으로 꼬리 감춘 눈석임물.

흐르긴 흐르는가?

흐르는 감각만 남았는가?

 

감각들이 연필심처럼 무뎌지고 있다.

창밖 어둠 속에 싸락눈 내리는 기척 분명한데.

눈과 귀는 창 앞에서 더듬대고 있다

그래도 볼펜처럼 이만 끝! 아닌 게 다행?

 

어디까지가 다행일까?

청각을 뿌리까지 잃은 베토벤이

소리의 어둠 속에서

소리로 숨 쉬고 소리로 노래하고 몸부림치며

소리로 밑도 끝도 없이 깊어지는 이 겨울밤.

황동규(1938~)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이가 들면 귀로 소리를 듣는 힘도 약해진다. 귀에 보청기를 꽂은 시인은 무뎌지는 감각에 대해 생각한다. 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서 없어지듯이 차츰 약해지고 꺼지는 감각에 대해 생각한다. 빼족하던 연필심이 점점 뭉뚝해지는 것처럼 감각이 서서히 무디어지고 둔해지는 게 그나마 다행 아니냐고 자문한다. 소리를 들을 수 없었음에도 수많은 역작을 작곡한 베토벤이 감내했던 ‘소리의 어둠’을, 그리고 그의 예술혼을 생각한다. 황동규 시인은 “시(詩)에서 내려 침묵을 듣고 싶다”라고 쓴 적이 있다. 침묵은 너무 커서 밑도 끝도 없다. 요즘 겨울날 밤의 침묵은 목탄(木炭)보다 검고, 강(江)처럼 길다. 그러나 침묵은 아무 소리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격렬한 소리들이 간신히 결박되어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아직 쏟아지지 않은 그 소리들을 들으려는 것이리라.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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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일없이 길거리를 쏘다니기도 하고

강가에 나가 강물 위를 나는 물새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카사블랑카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바이칼호의 새 떼들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니까


다 늙어 꿈이 이루어져

바이칼호에 가서 찬 호수에 손도 담가보고

사하라에 가서 모래 속에 발도 묻어보고

파리의 외진 카페에서 포도주에 취하기도 했다

그때도 나는 행복했다, 밤마다 꿈속에서는

친구네 퀴퀴한 주막집 뒷방에서 몰래 취하거나

아니면 도랑을 쳐 얼개미로 민물새우를 건지면서


창밖엔 눈발이 치고

모래바람 부는 사하라와 고추잠자리 떼 빨간 동구 앞 길을

번갈아 오가면서, 지금 나는

병상에서 행복하다 

-신경림(1935~)


일러스트_김상민 화백

한때 바람을 쐬러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자유롭게 높이 날아오르는 새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카사블랑카와 바이칼 호수로의 유랑을 꿈꿨다. 그리고 그 꿈을 이뤘다. 이국의 큰 호수와 아득한 모래사막과 번화한 거리를 다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옛 마을의 뒷방과 좁은 개울에서 보냈던, 소중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오늘은 눈발이 유리창에 하얗게 치고, 시인은 타국의 막막하게 펼쳐진 사막과 옛 마을의 어귀를 번갈아가며 생각한다. 꿈이 있었던 시간과 방황했던 시간은 행복했다. 그리고 꿈을 이룬 시간도 행복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화관(花冠)을 쓴 것처럼 눈부신 순간들이다. 밤하늘에 뽈록거리는 별처럼 빛나는 순간들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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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비가 와서 바깥은 경극의 배경과 잘 어울렸다 찻잎을 물에 띄울 때 고요의 눈썹은 내가 그린 듯 가깝다 먹구름과 싸우면서 제 높이를 슬슬 키웠던 능선 그림자도 한 움큼 불러 물에 담갔다 물은 언제 뜨거워지는가 물이 쉽게 끓기나 할까마는 물이 펄펄 끓으면 영혼은 현실과 마주친다 양철 주전자가 물의 온도에 접근하면서 마침내 쇠붙이까지 물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주둥이에서 쇄쇄 김이 올라오고 때마침 뚜껑은 들떠서 십 리쯤은 도망갈 기세이다 물도 주전자도 뜨겁다고 뜨거워 못 견딘다고 이제 너희가 외쳐라 송재학(1955~)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비가 오는 날이어서 날씨는 마치 경극의 극적인 장면을 보는 듯하다. 찻잎을 우려 차를 마실 때에 시인은 푸른 찻잎에서 고요의 가느스름한 눈썹을 본다. 찻잔에는 능선의 그림자도 비쳤다. 시인은 맑은 물을 찻주전자에 부어 끓인다. 끓으면서 물과 주전자가 격해지는 것을 바라본다. 찻주전자 주둥이에서는 김이 몰아쳐 나오고, 뚜껑은 들썩들썩하며 곧 말처럼 멀리 달아날 기세다. 이 펄펄 끓는 물과 몹시 요동하는 찻주전자를 보면서 시인은 말한다. 뜨거워 견딜 수 없는 속내를 숨기지 말고 모두 털어놓으라고. “사물의 안에 원래 있는 것을 발견하거나 발견 이상의 것을 시인은 해야 한다”라고 송재학 시인은 말한 적이 있다. 내년에는 다른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을 잘 살펴야겠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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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을 잡아 엿을 고는 성탄일

딸이 전복을 따야 농가목돈 물고

딸이 소라를 잡아야 학자금 갚고

사나흘 솥단지 안에서 엿기름이 졸아든다

엿을 먹어야 지픈 바당에 든다

솔칵타는 성탄일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

눈 살 때까지는 동짓달에도 숨비소리를 뱉어야 한다

시집간 딸이 물질 간 성탄일에 궁퉁이 어신 눈이 내리고

베롱 베롱

부끌레기 부끄지 말라고 뭉근 불로 무쇠솥을 지들리는 어머니

김병심(1973~)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시는 제주 방언으로 썼다. “지픈”은 깊음을, “솔칵”은 소나무 가지를, “쉐”는 소를, “궁퉁이 어신”은 눈치 없음을, “눈 살 때까지”는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를, “베롱 베롱”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불빛을, “부끌레기 부끄지 말라고”는 거품이 넘치지 않은 상태를, “지들리는”은 누름을 뜻한다. 그리고 “고랑 몰라”는 말을 해도 모른다는 뜻이다. 시집 간 딸이 차가운 겨울 바다에 물질을 하러 간 날에 친정어머니는 엿을 곤다. 성탄절인 날에도 딸은 생계를 위해 전복과 소라를 따러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무심하게도 굵은 눈은 내린다. 어머니의 근심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엿을 고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성탄절의 교회 종소리를 들었다고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바다 보다 푸르고 깊고, 성스럽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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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긁을 때 아무리 용써도 손 닿지 않는 곳이 있다 경상도 사람인 내가 읽을 수는 있어도 발음할 수 없는 시니피앙 ‘어’와 ‘으’, 달의 뒤편이다 천수관음처럼 손바닥에 눈알 붙이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내 얼굴, 달의 뒤편이다 물고문 전기고문 꼬챙이에 꿰어 돌려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더듬이 떼고 날개 떼어 구워 먹을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 없는 귀뚜라미 울음 같은 것, 내 눈동자의 뒤편이다

장옥관(1955~)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모든 것에 뒤쪽이 있다. 그곳은 잘 닿지 않는다. 한꺼번에 힘을 몰아 쓰더라도 미치지 못한다. 마치 손으로 긁으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너른 등짝의 한 곳처럼. 달의 이면(裏面)처럼. 경상도 사람은 ‘어’와 ‘으’를 옳게 발음하지 못하는데 이 영역도 달의 뒤편 같은 것이요, 내가 볼 수 없는 내 얼굴도 달의 뒤편 같은 것이다. 또한 가을날의 밤에 듣게 되는 애절한 귀뚜라미의 울음도 우리가 애써도 갖기 어려운 것이다. 이처럼 가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의 뒤편이 있다. 내 형편으로는 하기 어려운, 능력 밖의 일이 있다. 그러므로 용을 써도 되지 않는 일은 남의 손을 빌려서 하면 된다. 어울려서 한 벌이나 한 쌍을 이루면 된다. 손뼉을 부딪쳐 소리를 내듯이.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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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녁에 박힌 화살이 꼬리를 흔들고 있다

찬 두부 속을 파고 들어가는 뜨거운 미꾸라지처럼

머리통을 과녁판에 묻고 온몸을 흔들고 있다

여전히 멈추지 않은 속도로 나무판 두께를 밀고 있다

과녁을 뚫고 날아가려고 꼬리가 몸통을 밀고 있다

더 나아가지 않는 속도를 나무 속에 욱여넣고 있다

긴 포물선의 길을 깜깜한 나무 속에 들이붓고 있다

속도는 흐르고 흘러 녹이 다 슬었는데

과녁판에는 아직도 화살이 퍼덕거려서

출렁이는 파문이 나이테를 밀며 퍼져나가고 있다

-김기택(195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화살이 하나의 표적에 도달하고도 화살이 그곳으로 그 방향으로 쏠리고 몰리는 힘은 곧바로 멈추지 않는다. 과녁의 안쪽으로 계속 퍼져 들어가려고 한다. 화살을 맞은 과녁 또한 그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 격동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에 받게 되는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나의 말과 눈빛과 표정과 움직임도 누군가의 마음에 가하는 하나의 센 힘이다. 그래서 흥분과 눈물을 일으키거나, 기쁨의 감정이 북받쳐 흘러넘치도록 한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나목의 빈 가지를 흔들어놓는 것을 본다. 빈 가지는 한동안 위아래로 폭을 갖고 흔들린다. 누군가의 큰 목소리가 산에 부딪쳐 되울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메아리가 골짜기에 사방으로 퍼지고 흩어지는 것을 끝까지 듣는다. 소리가 그친 뒤에도 여음(餘音)이 있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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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들여다본다.

눈으로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

발을 내밀어 디뎌본다.

그런데 너를 이렇게 들여다보는 것을

누가 보지 않을까?

 

길 아닌 곳으로 방향을 잡아

파고든다. 풀숲을 헤쳐나간다.

나무 뒤에도 숨고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멀리 내다본다.

 

마음을 밟고 있는 몸 끝으로

삶의 비밀보다 더 깊은 곳에서

끄집어낸 것들을 떨어뜨린다.

너는 중얼거림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되어 깨어난다.

채호기(195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가 않다. 마음의 영토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곳은 우거진 곳이며, 길이 나 있지 않은 곳이며, 어지럽게 갈래가 져 있는 곳이다. 또한 깊고, 불분명하고, 변하며, 덮여 있다. 이 시는 이러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끄집어내 떨어뜨린 것이 ‘중얼거림’이라고 말한다. 숨겨져 있던 것이, 알려져 있지 않던 것이 부지불식간에 바깥으로 드러나는 경우 가운데 하나가 ‘중얼거림’이라고 말한다. 예부터 하루 세 번 자신을 관조(觀照)하라고 가르쳤다. 열고, 살피고, 먼지를 걷어내는 일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주인으로, 귀의처로 삼으라고 했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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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옥상에서

서른세 개의 날개를 돌려라

 

오가 가다 오르다 내리다 흐르다 멈추다 녹다 얼다 타오르다 꺼지다 보다 듣다 생각하다 말하다 삼키다 뱉다 잡다 놓다 울다 웃다 주다 받다 묻다 답하다 밀다 당기다 열다 닫다 떠오르다 가라앉다 부르다 사라지다 넘다

 

서른세 개의 동사들 사이에서

하나의 파도가 밀려가고 또 하나의 파도가 밀려올 것이니

세상은 우리의 손끝에서 부서지고 다시 태어날 것이니

 

기다리지만 말고 서른세 개의 노를 저어 찾아라

세계의 손끝에서 마악 태어난 당신을

나희덕(1966~)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움직임과 작용을 나타내는 서른세 개의 단어들이 여기에 있다. 서른세 개의 날개이며 노(櫓)인 동사들이다. 이 동사들로 하늘을 날고, 바다를 건넌다. 이 동사들이 우리의 활동을 설명한다. 우리는 밀려가고 밀려오는 삶의 파도 위에, 이 동사들의 파도 위에서 살아간다.

하나의 행위는 자족적으로 일어나고 유지되고 종결된다. 그러나 하나의 행위는 이 세상에 작용해서 어떤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물론 어떤 움직임에 대해 거스르는 반대의 움직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가 서로 이웃해서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나희덕 시인이 표현한 대로 “감자 덩굴에 매달린 작은 감자알처럼” 혹은 “두 개의 떡잎처럼” 말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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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다곤 파고다 보리수 아래서

나무 밑에서 태어나고

나무 밑에서 성장하고

나무 밑에서 깨우치고

나무 밑에서 성불하고

나무 밑에서 입열반한

앙상한 가지를 우거진 나무로

마침내 무성한 숲으로 만든

먼 옛날의 손을 든 그를 보네

 

꽃을 만드는 손이 되라고

그런 꽃을 피우는 사람이 되라고

다른 사람을 위해 피는

수많은 꽃과 나무들 뒤섞이고

수많은 색과 색들이 어우러지는

그곳이 피안이라고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차안이면서 곧 피안이라고

- 곽효환(196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쉐다곤 파고다는 미얀마 양곤의 북쪽 언덕에 있는 거대한 불탑이다. 부처의 유품과 머리카락이 봉안되어 있다. 황금(쉐)으로 된 언덕(다곤)의 불탑 사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시인은 이곳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의 생애를 생각한다. 나고, 자라고, 수행해서 깨닫고, 입멸한 부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부처의 가르침이 “꽃을 피우는 사람이 되라”는 데에 있다고 본다. ‘꽃’은 지혜, 사랑과 자비, 용서와 관용, 긍휼, 나눔이라는 아름다운 가치를 일컫는 것일 테다. 세상의 사람들이 이익과 즐거움을 나누고, 차별 없이 뒤섞이고 어울려서 평화롭게 함께 사는 세계, 그곳이 바로 잘 우거진 숲이며 극락세계일 것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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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었다.

노출되었고 옮기려면 나 혼자는 안되지만 여럿이 달라붙으면 한꺼번에 치울 수 있는

 

그것은

내가 뭔가를 하고 있을 때 있었다. 가만히 두면 감자에 싹이 나는 물건이 아니라서 뭘 하는지 몰랐지만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던

 

그것은

더는 사용할 수 없는 크기로 있었다. 이제 나는 그것이 옆에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옆에 두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임승유(1973~)

꽤 큼직한 것이 한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온 지 오래되었다. 그것은 늘 내 생활의 공간에 있었다. 그것은 너무 가만히 있어서, 자라거나 변하는 것이 아니어서 각별히 눈길이 가는 일이 드물었지만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이제 그것을 무언가에 맞게 쓸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것이 내 가까이에 있다는 것 때문에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내 옆에 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의식하기 시작하자 그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하듯이 우리에겐 있는 듯 없는 듯이 함께 살아온, 내 몸과 마음의 그림자처럼 되어버린 물건들이 있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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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끝내자마자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창 바깥을 쳐다보았다

백색의 햇살 너머 북한산을 보았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뭘 보고 있는지 묻는 그에게 나는 날씨가 좋다고 말했다

 

버스에 그를 태워 보내고 나는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책을 얼굴에 덮고 잠이 들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과 우정을 나눌 차례가 왔고 아침이 왔다

주워온 조약돌 하나를 꺼내어 마주했다 돌이 말을 할 때까지

김소연(196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미묘한 움직임들이 생활을 만든다. 모래알들이 모여 모래사장을 이루듯이. 미묘한 움직임에는 마음의 율동이 일어난다. 높고 낮은 파도가 바다에 일어나듯이. 대개는 이러한 움직임들에 무심하지만 이 시는 그렇지 않다. 가만히 움직이는 것을 바라본다. 원경(遠景)과 근경(近景)을 모두 바라본다.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옛사람에게 가기도 한다. 그리고 침묵하는 돌에게까지도. 별것 아닌 듯한 데서 모든 게 생겨난다. “백색의 햇살”에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보는 것이, 속마음의 능선과 골짜기를 바라보는 것이 썩 잘 어울리는 요즘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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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 뒤 다용도실에는

세탁기가 놓여 있어

세탁기가 세탁하느라 끙끙대는

소리를 자주 들어야 한다

끙끙, 그 소리는 어찌나 규칙적인지

한참을 듣고 있으면

나도 함께 끙끙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 집 빨래는 세탁기만 하는 게 아니다

어떤 땐 소리에 취해 내가 나를 두들겨

빨 때가 있는데 잠시 잠깐 머릿속이 맑아지기도 한다

어깨가 쑤시고 목이 뻐근하고

손발이 저린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식구들은 내가 얼마나 고되게 사는지 모른다

어쩌다 쓰는 시에도 소리가 들어와 음을 짓는다

이재무(1958~)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옷 더미를 빠느라 세탁기가 돌아간다. 세탁기는 힘에 겹고 부대껴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시인은 그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듣다보면, 내가 나를 빠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소리를 들으면 내가 나를 두들기고 헹궈내는 것만 같은 때가 있다. 내가 세탁기가 되기도 하고, 내가 때 절은 빨랫감이 되기도 하면서. 그래서 나는 몸이 쏘삭거리고, 노곤하고, 또 시큰거린다. 식구들이 나의 이 힘든 노동을 알아주길 바라기도 하고, 아무래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좀 서운하기도 하다. 시를 쓸 때에도 그 빨래하는 소리를,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옷 빠는 소리는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 들어와 앉듯이, 한 편의 시 속에도 들어와 앉는다. 내가 나를 치대어서, 내가 내게서 흙물과 더러움과 속됨을 빼는 일이여, 세탁의 일이여.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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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아래를 모르고

메아리처럼 비밀을 모르고

새처럼 현기증을 모르는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강물에 던졌다

나는 너를 공중에 뿌렸다

 

앞에는 비, 곧 눈으로 바뀔 거야

뒤에는 눈, 곧 비로 바뀔 거야

 

앞과 뒤를 모르고

햇빛과 달빛을 모르고

내게로 오는 길을 모르는,

아무 데서나 오고 있는 너를 사랑해

김행숙(1970~)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초혼(招魂)은 망자의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을 뜻하지만, 이 시에서는 사랑하는 이를 무척이나 보고 싶은 마음을 애틋하게 담았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위와 아래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메아리처럼 어디에라도 터놓고 떳떳하게 울려 퍼져 나가고, 생각과 열의가 높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강에도 있고, 하늘에도 있으니 어디에라도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와 나중이 따로 없이, 낮과 밤의 구분도 없이, 아무 데서나, 언제든 내게 온다. 모든 방향에서 전면적으로 내게 온다. 비의 시간이나 눈의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넘어서서 내게 온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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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더듬 촛불을 켠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예고 없는 정전이다

 

어둠이 환하게 식탁을 비춘다

동그랗게 사위가 살아나고

마주 앉은 얼굴 말그랗다

꾸역꾸역 낯선 침묵을 우겨 넣는다

 

달그락, 뚝배기 속 숟가락이 부딪는다

다각, 젓가락 두 짝이 키 맞춘다

아내는 무국 한 국자를 더 떠오고

주말드라마도 스포츠뉴스도 못 본 채

밥을 먹는다

말 없는 소리를 듣는다

 

사람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

눈 큰 짐승 여물 먹는 소리 별반 다르지 않다

어둔 촛불 탓일까 끔벅끔벅 아내의 눈이

깊다

안성덕(1955~)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던 전기가 갑자기 끊어졌다. 겨우 촛불을 켜서 사방의 둘레에 둥근 빛을 둘렀다. 부부는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계속한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이 산뜻하고 맑게 드러나고, 어둠 속에서 그릇과 수저가 닿는 소리가 잔물결처럼 들려온다. 평소에 잊고 지냈던, 작고 각별하지 않았던 생활의 소리들이 도드라진다. 마치 평평한 면에 글자를 양각한 듯이.

가운데에 촛불을 켜 놓고, 이글루에 들어앉은 것처럼 둥근 빛 속에 마주 앉아서, 서로의 얼굴과 밥 먹는 소리를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하게 보고 듣는 밤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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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 하루 치의 인상과 마주할 때

반반한 거울 너머 주름투성이 저 얼굴은

어디서 이목구비를 꾸어왔을까?

오래 돌아서 온 길이라며 수심 가득 찬

표정을 풀어 새날의 기분을 구겨놓는다

 

얼굴은, 왜 화가 나느냐며

상전벽해도 시시로는 안 바뀐다며 어른 위에

어린아이를 덮어씌우지만

턱수염까지 쉬어선 믿을 수 없다

증명하면서 항변하면서 그물처럼 촘촘해지지만

걸려드는 건 속이 터진 심술뿐,

 

누군가의 저녁을 닫으려고 혼잣말로 얼굴은

중얼거린다, 한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인데

왜 이리 요철이 많담, 타일이라면

이어 붙여도 똑같을 텐데!

김명인(1946~)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침에 거울 속에서 자신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만난 사람이 있다. 거울은 울퉁불퉁한 데가 없이 반듯하지만, 거울 속 한 사람의 얼굴 인상은 주름투성이에 근심이 가득하다. 그런 표정이 새날 아침의 싱그러운 분위기와 잘 어울릴 리가 없다.

화를 품은 얼굴을 만날 때가 있다. 또 괜히 심술이 난 얼굴을 마주할 때도 있다. 그런 얼굴은 구김살이 많고 고르지가 않다. 마치 오목하고 볼록한 요철 같다. 얼굴은 한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 얼굴에는 감정이나 기분이 씌어 있다. 화장을 화사하게 다시 하듯이 얼굴의 표정을 곱게 바꿀 일이다. 웃는 얼굴과 부드러운 말로 새날의 아침을 만날 일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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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소녀가 물랑을 잡고 있다

한쪽에 나무

한쪽에 노을

발목에서 시작

소녀와 소녀 사이에서 소녀가 뛴다

물랑에 걸려 소녀가 사라진다

소녀와 나무가 물랑을 잡는다

무릎에서 가랑이로 올라가는 물랑

소녀와 나무 사이에서 소녀가 뛴다

물랑에 걸려 소녀가 사라진다

혼자 남은 소녀

나무와 노을이 물랑을 잡는다

허리에서 겨드랑이로 올라가는 물랑

소녀는 나무와 노을 사이에서 뛴다

까르르

물랑에 걸려 소녀가

신영배(1972~)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릴 적에 고무줄을 발목에 걸어 넘는 여자 아이를 보았다. 길게 늘인 고무줄을 노래에 맞춰서 넘는 아이의 밝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아이들이 잡고 있는 고무줄 위를 아이가 뛴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은 물의 잠잠한 수면 같고, 출렁출렁하는 물결 같고, 고요한 수평선 같다. 고무줄은 무릎 높이에서 허리 높이로, 겨드랑이 높이로 점점 높아진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소녀의 가볍고 날랜 몸도, 까르르 웃는 소리도 점점 높아진다. ‘물랑’이라는 낯선 시어는 시인이 만들어낸 것이다. 시 ‘물결을 그리다’에서 “어항 속에 물을 그린다/ 물랑 물랑/ 물을 흔든다/ 물랑 물랑 물랑 물랑”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서, ‘물’ 이미지의 부드럽고, 연하고, 잔뜩 머금은 물기 그것의 상태를 ‘물랑’이라는 시어에 담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시에서는 두 소녀가 잡고 있는 고무줄이 흔들리는 물처럼 탄력이 있게 물결을 이루며 경쾌하게 움직이고 있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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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한 다발을 사서

친구와 나눴다

오래도록 꽃이 없던

화병이 놓인

방이 활짝 밝아졌다

 

너, 아직도 꽃을 사는구나

언니가 말했다

이 꽃 누가 줬어?

대접받고 사는 친구가 말했다

넌 살 만한가 보다

일이 꼬인 친구가 말했다

드물게 지갑을 열어 꽃을 사는 나는

앞다퉈 피운 욕망의

뿌리가 잘린

꽃송이들을 보고 있다

 

반 다발의

뿌리 없는 꽃들

초연하다

조은(1960~)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간만에 지갑을 열어 꽃을 한 다발 산 시인은 친구와 반을 나눠, 그 반 다발의 꽃을 빈 화병에 꽂는다. 그 순간 방이 마치 빛 속으로 열린 듯이 한껏 밝아진다. 반 다발의 꽃을 본 언니와 ‘대접받고 사는 친구’와 ‘일이 꼬인 친구’가 반 다발 꽃의 출처를 심드렁하게 묻는다. 그냥 얻는 경우 아니라면 뭐 하러 돈을 내서, 그 나이에 꽃을 다 사느냐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때로는 꽃이 없는 화병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면의 밝음을 가꿔야겠다. 반 다발의 생화 같은 생기, 풋풋함, 빛, 그리고 향기의 개화가 마음속에 가득하도록. 시인은 시 ‘발자국’에서 “영혼을 외면했던/ 오늘 내 발자국이/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위험해 보인다”라고 써서 영혼을 가꾸는 일에 대해 말했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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