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의 노래 속 ‘잡초’는 이름도, 꽃도, 향기도, 손도, 발도 없다.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존재다. 여자농구 청주 KB스타즈를 우승으로 이끈 안덕수 감독은 ‘잡초’라 불렸다. 아무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갖고 있는 걸 잘 몰라서다. 한국 사회에서 인물을 평가하는 첫번째 요소인 ‘학연’과 ‘지연’을 갖추지 못했다.

경기 화성시 봉담면 와우리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덩치가 컸다. 주변의 권유로 농구공을 잡았다. 매산초등학교와 삼일중을 거쳤다. 중3 시절 전국대회에서 펄펄 날았고 우승을 따냈다. 안 감독은 “옛날 기억은 항상 좋은 일만 남기지만 같은 학년에서 우리 친구들을 이길 선수는 없었다. 다 한 수 아래였다”고 했다. 같은 학년 동기들은 얼마 뒤 불기 시작한 ‘농구대잔치 열풍’의 주인공이 됐다. 전희철과 김병철이 한 학년 위, 양희승과 서장훈, 추승균 등이 동기였다. 

우승 뒤 일본으로 친선경기를 하러 갔다. 그곳에서 일본 고교(하쓰시바고)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농구공은 잘 다뤘지만 일본어는 몰랐다. 이미 같은 재단의 삼일상고 진학이 예정돼 있던 터였다. 농사짓던 아버지가 말했다.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1989년 당시 일본과의 경제적 격차는 상당했다. 운동 선수에게 짐 싸는 일은 익숙했지만, 말 한마디도 안 통하는 곳은 낯설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첫 반년 동안 죽도록 고생했다. 말이 안 통하니 그곳에서야 말로 ‘잡초’였다. 안 감독은 “그래도 나중에는 일본 후배들이 형제처럼 잘 따랐다”고 했다.

고교 졸업 뒤 일본의 규슈산업대에서 월 10만엔씩 장학금을 받으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대학 졸업 무렵, 한국에도 ‘프로농구’가 생겼다. 삼성에 입단했지만 그를 위한 자리는 넓지 않았다. 습관성 어깨 탈구도 발목을 잡았다. 선수생활이 일찍 끝났다. 대학농구연맹 사무국장을 지내다 2007년 일본 여자프로농구 샹송화장품에서 코치 제의를 받았다. 당시 일본 여자 농구는 한국 농구에 뒤져 있었다. 아내와 아들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낯선 곳을 향한 또 한 번의 도전이었다. 9년 동안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일본 농구는 한국 농구에 역전했다. 그사이 안 감독도 일본 농구가 가진 시스템의 힘을 온몸으로 배웠다.

2016년 초 KB스타즈의 감독 자리가 비어 있었다. 많은 ‘국내 농구인’들이 그 자리를 노렸다. 학연·지연은 물론 여러 가지 ‘인연’을 동원해 관심과 욕심을 전했다. 안 감독은 여기저기 줄을 대는 대신 당시 챔피언이었던 우리은행의 챔프전 경기를 보러 다녔다. 안 감독은 “경기를 보면서 배우는 게 많았다”고 했다. KB스타즈는 팀 분위기 쇄신을 원했다. WKBL 출범 뒤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인연이 없는 ‘잡초’가 적격이라는 판단이었다. 구단 관계자가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샹송화장품을 설득했다. 감독직을 고사했던 안 감독은 “3년을 기다려달라는 게 내 수락 조건이었다”고 했다.

감독 첫해 드래프트에서 박지수를 지명할 수 있었던 것은 운명 같은 행운이었다. ‘잡초’로 지낸 지난 세월은 소통 능력을 키웠다. 일본어 한 글자를 모르고도 살아남았다.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뜻을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선수들은 “감정 표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게 오히려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긴박한 순간 복잡한 언어보다 솔직한 표정이 더 정확하게 뜻을 전하기 마련이다. 화려한 꽃과 향기로 속이는 대신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잡초의 힘이다. 한국 여자 농구 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던 정선민을 FA로 데려오고도 하지 못했던 우승을 약속했던 3년 만에 결국 해냈다.

중3 때 일본을 가지 않았더라면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을지 모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안 감독은 “그래도 일본으로 갔을 것”이라고 했다. “온실 속 화초는 보는 사람이 즐겁지만 끈질긴 잡초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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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몰아친 밤이었다. 바람은 시뻘건 불씨를 사방으로 날랐다. 불은 바람을 타고 ‘도깨비불’처럼 삽시간에 번졌다. 그날 밤은 모두 쉬이 잠들지 못했다. 노모는 대처로 나간 자식의 안부가, 농부는 창고에 쌓아놓은 못자리가 걱정이었다.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낳았지만, 손쓸 틈도 없이 들이닥친 화마를 피해 집을 빠져나오느라 도리가 없었다.

강원 일대를 휩쓴 산불이 일어난 밤을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14년 전 ‘양양 산불’이 일어난 날이다. 주민들에게는 양양에서 시작된 산불이 강풍을 타고 번져 천년 고찰 낙산사가 한순간에 무너지던 모습이 떠오른 밤이었을 테다. 이번에도 주민들은 큰불에 밤새 마음을 졸였다. 그나마 하루 만에 불길이 잡혔다. 단시간에 최대 규모의 소방력을 투입해 불과의 사투를 벌인 결과였다. 소방당국은 산불 발생 2시간여 만에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덕분에 서울양양고속도로는 전국에서 출동한 소방차들이 밝힌 경광등으로 훤했다.

정부의 대응 체계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예정된 일정을 취소하고 화재 현장을 찾아 주민을 만났다. 임기를 하루 남긴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임식을 취소하고 현장을 지키다 진영 후임 장관에게 임무를 인계했다. 화재 다음날 정부는 피해지역인 고성과 속초, 강릉, 동해, 인제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4일 오후 7시17분쯤 강원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일대에서 발생한 산불이 확산되며 불길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이날 불은 원암리의 한 주유소 맞은편 도로변 변압기가 터지면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길이 속초 시내 쪽으로 번지며 고성·속초지역 콘도 숙박객과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려져 긴급 대피하는 등 밤새 큰 혼란이 빚어졌다. 이 불로 오후 11시30분 현재 1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소방청은 재난 대응 최고 수준인 ‘대응 3단계’를 발령하고, 전국의 소방차를 속초지역에 지원토록 조치했다. 연합뉴스

재난을 당한 국민이 정부에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었을까. 당장 피해를 줄일 순 없지만, 정부가 국민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 말이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 시스템의 붕괴를 목격했다. 이는 재난에 대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9·11 사태를 겪은 미국인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은 전적으로 국가의 대응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번 산불 진화에도 시민의 힘이 빛을 발했다. 사람들에게 산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일조했던 건 소셜미디어(SNS)에 시시각각 올라온 현장 사진들이었다. SNS에서는 목줄에 묶인 탓에 불길을 피하지 못해 털이 검게 그을린 강아지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 주민은 화재 현황 지도를 만들어 정보를 공유했고, 펜션을 운영하는 숙박업자는 빈방을 기꺼이 내주었다.

하지만 큰불에 너나없이 마음을 쏟고 있는 동안에도 정치권은 ‘네 탓’ 공방을 벌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페이스북에 “촛불 좋아하더니 온 나라가 산불, 온 국민은 화병”이라고 썼다. 자유한국당 민경욱 대변인은 페이스북에 “왜 이리 불이 많이 나나”라는 글을 올렸다가 비난이 빗발치자 게시글을 삭제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철수 속초시장은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가 산불 현장을 지키지 못하는 바람에 논란의 중심에 서야 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저자 레베카 솔닛은 이러한 상태를 ‘엘리트 패닉’이라 칭한다. 그는 엘리트 집단으로 대표되는 정부와 관료조직은, 재난 앞에서 스스로 혼란 속에 빠져든다고 했다. 그는 “재난은 사회적 요구를 증폭시키고 새로운 집단에 힘을 부여하는 한편, 정부의 조직적·행정적·도덕적 결함을 노출시킴으로써 정치제도에 부담을 준다”고 지적했다. 

시민들이 재난에 맞서 새롭게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타주의를 발휘할 때, 정부는 스스로의 권위를 지키고, 무능을 숨기고자 거짓을 말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대형 재난은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하는가?’ ‘인간 본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재난 뒤에는 취약한 사회 시스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평상시에는 잘 보이지 않던 인간 본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재난을 모두 예방할 수는 없다. 같은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대응책을 세울 수 있을 뿐이다. 내년 강원도의 봄날엔 새까만 재가 아닌 벚꽃잎이 날렸으면 한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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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이맘때 서울 사대문 안에서 분신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이제는 경희궁자이아파트가 들어선 돈의문 재개발지역에서다. 일식집을 하던 고모씨(당시 67세)는 2016년 4월12일 15년 된 자신의 식당이 강제철거되는 현장에서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의 가게가 있던 새문안의 ‘맛집 골목’엔 조선시대 골목의 흔적과 1920년대 한옥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2003년 뉴타운 지역에 편입되면서 전부 헐려 근린공원이 될 운명이었는데,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인 2015년 서울시가 용도를 문화시설로 바꾸기로 했다. 토지와 건물을 재개발조합으로부터 기부채납받기로 하고 ‘돈의문박물관마을’ 조성을 추진해 2017년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근린공원이 되면 종로구로 넘어가게 돼 있던 토지 소유권을 놓고 시와 구가 협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사업이 지지부진했다. 예술가들에게 기획전시 공간으로 내줬지만 관람객이 오지 않아 ‘유령마을’이란 오명까지 얻었다. 결국 시는 땅 문제는 해결이 안된 채로 지난해 10월 민간에 긴급 용역을 내서 운영주체를 뽑았다.

서울시는 서울 종로구 경희궁 옆 골목 안쪽에 위치한 ‘돈의문박물관마을’을 새롭게 꾸며 3일 공개했다. 최미랑 기자  

“전면 철거하는 재개발을 반성하고 재생의 관점에서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문화마을로 만들고자 했다.” 3일 서울시가 새로 단장한 돈의문박물관마을을 공개하며 밝힌 취지다. ‘근현대 100년, 기억의 보관소’를 콘셉트로 잡았다. 

건물들을 신축·리모델링하는 데는 총 300억원이 들었고 운영엔 연간 25억원이 든다. 사라질 뻔한 공간을 지켜낸 만큼 어떻게 다시 꾸몄을지 기대가 컸다. 그런데 이날 공개된 마을을 둘러보니 내용이 참담했다. 보존한 건물 40채 중 16채를 ‘마을전시관’으로 만들었다. 그중 ‘생활사전시관’에는 연탄과 비누, 빨래판과 아궁이 같은 것들을 모아뒀다. 사진관, 이발소, 오락실, 만화방, 구락부(클럽)도 엉성하게 재현했다. ‘새문안극장’에서는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맨발의 청춘>이 상영됐다. 1970년대 교복을 입은 도슨트(관람객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가 “추억의 감성을 느껴보시라”고 강조하는 동안 골목길에선 1990년대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또 한옥을 살려 만든 ‘체험전시관’에선 닥종이·자수·한지공예 등 체험수업을 한다. ‘아날로그 감성’을 억지로 짜내는 듯한 공간과 프로그램들이었다. ‘인위적인 테마파크 이상의 의미가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담당 공무원은 “건물들이 남아있는 것 자체로 시민들에게 의미가 클 것”이라고 답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 ‘마을전시관’에 새롭게 꾸며진 ‘새문안만화방’(왼쪽)과 ‘돈의문콤퓨타게임장’. 서울시는 “스마트폰 터치가 아닌 조이스틱으로 게임을 하고, 웹툰 대신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아날로그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며 “부모와 아이가 함께 꼭 가봐야 할 장소로 추천한다”고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최미랑 기자

재개발에 밀려난 세입자들에게 시는 2015년 “편의시설을 들이게 되면 특별분양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업종보다는 ‘콘셉트’에 맞는 것을 들일 생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미 뿔뿔이 흩어져 자리 잡은 상인들이 과연 이곳으로 되돌아올까. 시는 ‘살아있는 참여형 공간’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삶이 밀려난 자리에 중구난방으로 과거의 생활을 박제해 놓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최미랑 | 전국사회부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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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대형마트·백화점·슈퍼 등에서 비닐봉지 사용이 일제히 금지된 이번주, 공교롭게도 두 장의 사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나는 이탈리아 해안에서 발견됐다는 향유고래. 날카로운 이빨을 자랑한다는 이 고래의 모습은 처참했다. 지난 주말 이탈리아 해안에서 발견된 8m 길이의 고래 배 속엔 무려 48.5파운드(22㎏)의 쓰레기가 담겨 있었다. 상표 및 바코드가 붙은 세제 용기를 비롯해 접시, 쇼핑백, 낚싯줄 등이 나왔다. 이 암컷 고래는 새끼도 배에 품고 있었다.

또 다른 사진은 최근 국내 한 미술관에 걸린 사진작가 크리스 조던의 ‘앨버트로스’다.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그가 태평양 ‘미드웨이섬’에서 찍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새’ 앨버트로스는 불행하게도 인간의 탐욕과 대량 소비가 불러온 재앙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어미 새는 독약인 줄도 모른 채 주워온 플라스틱을 아기 새에게 먹이고, 죽은 앨버트로스의 배에는 각종 플라스틱 조각들이 가득 차 있다. 슬픔을 넘어 죄책감, 그리고 분노마저 불러일으킨다.

플라스틱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부쩍 국내외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썩지 않는 쓰레기를 품을 수 있는 생태계의 임계치가 넘은 듯 여기저기에서 자연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플라스틱의 폐해가 무서운 것은 최후의 피해자는 인류가 될 것임을 누구나 짐작하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은 벨기에 출신의 미국 화학자 리오 베이클랜드가 1909년 발명한 이후 세계대전을 거치며 급격히 생산량이 증가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지난 65년간 플라스틱은 83억t 생산됐고, 이 중 63억t이 쓰레기로 버려졌다. 

특히 방치된 플라스틱이 잘게 쪼개져 생긴 미세플라스틱은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불과 6~7년 전만 해도 이름조차 낯설었던 미세먼지가 현재는 일상적인 환경피해가 됐듯 몇 년 후면 미세플라스틱에 대한 공포로 해산물을 마음놓고 못 먹게 될지도 모른다.

플라스틱으로 인한 해양 생태계 오염이 심각해지면서 결국 각국 정부도 나서고 있다. 유럽의회는 2021년부터 나이프·빨대·면봉 막대·접시 등 플라스틱으로 만든 10개 종류 일회용 제품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지난주 가결했다. 찬성이 560표로 반대 35표, 기권 28표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법안은 또 2029년까지 플라스틱병의 90%를 재활용하고, 2025년부터는 플라스틱병 제조 시 재생 플라스틱을 25~30% 포함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도 담았다.  

미국의 경우 주정부 차원에서 움직임이 감지된다. 뉴욕주는 캘리포니아에 이어 두번째로 내년 3월부터 소매점에서 일회용 비닐봉지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 다음달 의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이 법안은 각 카운티가 종이봉투를 유료화하는 방안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요즘 한국에서도 비슷한 소식이 들린다. 지난해 중국이 폐비닐 수입금지를 결정하면서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가 일상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플라스틱 쓰레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재사용률을 끌어올린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이제 쇼핑하러 나서기 전 장바구니를 꼭 챙긴다. 기업체들의 과대포장 문제는 제쳐놓고 일반 시민들만 다잡는다는 불만도 들린다.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과대포장을 우선 단속하고 비닐봉지 대체재를 만들어 보급하는 게 더 좋았을 법하다. 그러나 플라스틱 생산과 소비의 주체는 다름 아닌 우리 모두이다. 과대포장도 따지고 보면 보기 좋고 깨끗한 상품을 원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한 물건은 폐기도 인간이 해야 한다”는 한 환경운동가의 말처럼 이제는 누구라도 나서야 할 때이다.

<문주영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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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한 통 썼다. 편지의 형식을 빌린 인터뷰 요청글이었다. 한번은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보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마음을 먹는 일이 쉽지 않았다. 연락처를 알아내고도 하루를 꼬박 망설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인터뷰를 청하는 이유를 적은 뒤 최근에 쓴 몇 건의 인터뷰 기사를 덧붙였다. 일로 쓰는 모든 글이 다 어렵지만 이 글이 근래에 쓴 어떤 글보다도 쓰기 힘들었다. 읽고 또 읽으며 몇 글자를 붙였다 뗐다 한 끝에 전송을 눌렀다. 편지를 보낸 지 11시간쯤 지나서 답을 받았다. 편지의 수신인은 세월호 사건 희생자의 유가족이다.

‘비겁하다’는 말이 제일 두렵다. 그건 내가 비겁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지난 삶을 돌아보면, 나는 정면승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힘들고 어렵고 골치아픈 일은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꼭 해야 할 말, 꼭 해야 할 일도 빙빙 돌리고 미루다가 타인에게 더 상처를 주고 폐를 끼치는 일도 많았다. 가끔 강심장 같다는 평을 들을 때가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정말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중요한 거의 모든 순간에 실은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나의 ‘비겁의 역사’는 길고도 길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것은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태도였다. 2014년 4월 이후 몇 달간은 대한민국의 모든 기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세월호 사건을 취재했다. 매일 화가 나 있었고 기사를 써도 써도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맡았던 취재가 끝난 뒤에는 의식적으로 세월호 사건을 피해 도망다녔다. 저 엄청난 분노와 슬픔 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반복해서 다짐했다. 세월호 관련 기록을 정리한 여러 권의 책들도 쌓아만 두고 한 장도 읽지 않았다.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 앞을 여러 번 지났지만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팽목분향소 앞 자갈밭에 놓여 있는 노란 조약돌. 색이 바래고 글씨가 희미해져 가고 있다. 서성일 기자

그러나 도망다닌 5년 동안 세월호 사건에서 조금도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좋아하는 책과 영화와 노래의 모든 슬픈 서사가 창작자의 의도와는 달리 세월호의 이야기로 읽혔다. 책을 읽다 말고 영화를 보다 말고 노래를 듣다 말고 우는 것도 아닌, 울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로 몇 번을 멍하니 있었다. 누군가 ‘골든타임’이라는 표현을 쓰면 명치 끝이 아팠다. 2016년 늦가을,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서 촛불시민들 사이로 세월호 유가족들이 탄 차가 들어섰다. 시민들은 경찰에게 길을 열라고 외쳤지만, 노란 리본을 단 그 차를 본 순간 내 목소리는 꽉 막혀버렸다.

2019년 4월, 지금 책상에는 세월호 관련 책과 자료가 수북이 쌓여 있다. 인터뷰를 청한 기자가 비겁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기꺼이 자신의 아픔을 들려주기로 결심한 분을 만나기 위해, 그동안 외면하려 애썼던 깊고 어두운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작가들의 글을 모은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작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신형철씨는 2014년 이렇게 썼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그는 지난해 펴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서문에선 이렇게 썼다. “아이들이 가라앉는 걸 본 이후 한동안 나는 뉴스를 보며 자주 울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괴로워 피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눈물도 멈췄다. (중략) 이런 일들을 겪고 나는 무참해져서 이제부터 내 알량한 문학공부는 슬픔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사건을 말하는 것은 두렵고 아프다.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어쩌면 100년 뒤에도 이 사건이 남긴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준비한다. ‘쫄보’가 될지언정 더 이상 비겁하게 살지 말자는 마음으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는 최소한의 도리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모두가 침몰한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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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마다 돌아오는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재평가를 앞두고 결국 사달이 났다. 전국 43개 자사고 중 올해 재평가 대상은 22개. 이 중 13개 자사고가 모여 있는 서울에서 자사고 교장 22명이 지난 25일 모여 “재평가를 전면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서울 유일의 광역 자사고인 하나고를 제외한 22개 자사고가 모두 참여한 선언이니 현재대로라면 서울시 자사고 재평가는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이튿날 열린 서울시교육청과 자사고들 간 간담회에서도 서로 입장 차이만 확인했다.

자사고들은 시교육청이 만든 평가 기준이 과거보다 지나치게 높다며 기준 완화를 요구 중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정당한 요구라고 보기 어렵다. 수험생이 출제자에게 “문제가 너무 어려우니 쉽게 내달라”고 요구하진 않는다. 세상에 그런 시험은 없다. 더욱이 자사고 재평가는 엄연히 교육법으로 규정된 법률행위다. 기본적으로 자사고가 그 평가 기준을 이유로 재평가를 거부할 대상은 아니라는 얘기다. 서울교사노동조합 등이 “재평가를 거부하는 것은 자사고 지정 요건을 위반하는 위법행위”라고 비판하고 나선 배경이다.

자사고가 무엇을 기대하고 집단행동에 나섰는지 단정하긴 어렵다. 정말로 시교육청이 평가 기준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자사고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워 민선으로 교육감직을 연임하고, 기회만 되면 자사고 폐지를 외쳐온 조희연 교육감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되면 속된 말로 ‘가오’가 빠져도 너무 빠지지 않나.

5년 전을 떠올려본다. 2014년에도 자사고 재평가가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14개 자사고가 평가를 받았고, 8개 학교가 기준 미달로 나타났다. 시교육청은 규정에 따라 해당 자사고에 대해 폐지 절차에 들어갔지만 교육부가 제동을 걸었다. 교육법에는 자사고를 취소하려면 교육부와 시교육청이 ‘사전 협의’를 해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는 자사고를 없앨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시교육청과 교육부의 법정 공방으로 번졌고, 지난해 대법원은 “사전 협의가 안됐으니 지정 취소를 하면 안된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시교육청이 진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올해 자사고 재평가 결과 발표 및 후속 조치는 연말쯤에나 이뤄진다. 그리고 내년엔 바로 총선이 있다. 일각에선 자사고들의 평가 거부 선언을 ‘제2의 한유총 사태’와도 비교하지만 뜯어보면 결이 많이 다르다. 한유총 사태는 학부모와 여론이 스스로 정부 편에 섰다.

자사고 문제는 다르다. 인생을 좌우한다는 대학 입시가 걸려 있는 문제다. 당장 자녀가 다니는 자사고가 일반고로 전환된다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학부모는 많지 않다. 지난해 학교 측이 스스로 원해 일반고로 전환한 대성고의 경우 아직도 전환에 따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유총 문제와 달리 자사고는 지역 민심과 여론을 동요시킬 휘발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선언문을 들고 나타난 22명의 교장과 그 뒤에 자리 잡은 사학재단들은 이를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려되는 점은 교육부의 침묵이 길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자사고 폐지를 공약으로 걸고 당선됐다. 시교육청이 재평가와 지정 취소를 강행했을 때 교육부가 5년 전처럼 딴지를 걸지 않아야 정상이다. 규모와 그 파급력을 봤을 때 자사고들이 집단 평가 거부에 나섰을 때 즉각 교육부가 나섰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여당 내에서도 누구는 자사고를 없애자 하고, 누구는 “우리 지역에만 없다”며 자사고를 달라고 한다. 내년 총선에 현 정부의 명운과 차기 대권의 향방까지 걸렸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자사고가 됐든 정부가 됐든 교육을 가지고 정치놀음하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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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영영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여성과 남성이 같은 세상에서 사는 일이란 원래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 내가 겪은 몇 가지 경험에 비춰보면 그렇다.

물리적인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은 태어난 뒤로,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접하는 경험과 인식하는 세상이 다르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같은 일을 겪어도 완전히 다른 기억을 가질 수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여성이 훨씬 더 위험한 세상에 살고 더 많은 차별을 받는다.

몇 년 전 일이다. 회사에서 야근을 마치고 택시를 탔다. 기사님에게 행선지를 이야기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택시는 낯선 길로 가고 있었다. 주변에 가로등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순간 겁이 났다. 그러나 곧 별일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내가 택시 강도나 납치범이라면 술에 취하지도 않은 멀쩡한 남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을 것 같지 않았다. 다시 잠이 들었고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기사님에게 슬쩍 물어보니 본인이 아는 지름길을 택해서 왔다고 했다. 실제로 택시비도 조금 적게 나왔다.

집에 와서 아내와 이 짧은 해프닝에 대해 이야기해 보니 ‘남자라서 다행’이었다. 아내는 여성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쉽게 다시 잠들지는 못했을 것이라 했다. 맞다. 내가 여성이었다면 택시가 집 앞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어쩌면 한밤중에 이런 택시를 잡아탄 스스로를 탓했을지도 모른다.

여성·흑인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캡틴 마블>. 월드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얼마 전 영화 <캡틴 마블>을 봤다. ‘페미니즘 영화’라며 일부 남성들이 관람을 거부하고 있는 작품이다. 우려와 달리 페미니즘 요소가 극의 전개를 해치지 않았다. ‘여자들은 할 수 없을 것이란 편견을 이겨내는 여주인공’은 너무나 교과서적이라 ‘진짜 이게 페미니즘 요소의 전부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난해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다음달 개봉하는 <어벤져스: 엔드 게임>을 이어주는 영화로는 무난하다고 여겼다.

같은 영화를 보고 온 회사 여자 후배의 반응은 나와 달랐다. 평소 마블 영화를 즐기지 않았지만 <캡틴 마블>은 정말 재밌고 감동적으로 봤다고 했다.

특히 “여자는 조종사가 될 수 없어” “여자는 너무 감정적이야” “여자가 하기엔 무리야”라는 ‘조언’을 쉴 새 없이 받으며 자란 주인공이 이런 편견을 박살내고 우주 최강의 전사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가슴을 두드린 모양이었다. 이 후배는 ‘딸과 함께 볼 영화’를 찾고 있는 선배에게 <캡틴 마블>을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최근 성폭력 처벌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방송인 정준영의 범행을 보는 시선에도 ‘온도차’가 있다. 획일적으로 재단하기는 어렵겠지만, 남성들은 대체로 정준영의 범죄를 ‘실재하는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아마도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이 많은데 왜 언론은 정준영 사건만을 다루나. 뭔가 음모가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남성일 것이다. 반면 여성들에게 정준영의 범행은 언제라도 눈앞에 닥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니 ‘다른 사건도 중요하지만, 이 사건 역시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남성과 여성은 원래 다르게 태어난 존재이니 별 수 없다고 포기할 일은 아니다. 거창하게 세계 평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족의 평화, 직장의 평화, 궁극적으로는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두 세계의 간극을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다.

사실 방법은 이미 나와 있다. 여성들은 두 세계 간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 와중에 비판을 받고, 논란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을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럼 이제 공은 반대편에 있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가야 한다. 아직 할 일이 많고, 갈 길이 멀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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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고구마를 캐다가 금맥을 찾았다는 표현을 썼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고구마인 줄 알았는데 펄떡이는 심장을 캐낸 형국이다. ‘버닝썬 사건’은 가수 승리의 성접대, 약물 강간, 불법 동영상 촬영과 공유, 공권력과의 유착 의혹까지 그 추악한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여성의 몸을 물건 취급하고, 성폭력 범죄를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는 ‘남성연대’의 심장 말이다. 권력과 부가 쥐꼬리만큼이라도 있는 자리에선 어김없이 드러나는 낡은 심장.

이 모든 게 연결돼 있다는 게 놀랍진 않다. 승리는 버닝썬에서 불법 약물을 유통하고, 이를 통해 여성을 강간하고 성접대에 이용하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경찰이 버닝썬의 범죄행위를 눈감고 비호해준 의혹도 드러났다. 이런 일들이 승리가 벌인 사업의 영역에서 벌어졌다. 승리와 친한 연예인들의 사적인 대화방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나. 가수 정준영은 성관계를 불법촬영해 공유했고, 참여자들의 대화에선 약물에 의한 강간이 있을 가능성도 드러났다. 2016년 여자친구를 불법촬영한 혐의로 입건됐던 정준영은 ‘죄송한 척’을 한 후 경찰의 부실수사에 힘입어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었다.

폭행과 마약, 성범죄 등 각종 논란에 휩싸인 서울 강남 클럽 ‘버닝썬’이 지난달 17일 영업을 중단한채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다. 이석우 기자

이들의 일터인 방송은 어땠을까. 정준영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따뜻하게 받아줬다. 그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현재 드러난 ‘불법촬영 범죄’와 연관된 듯한 일을 언급하고, 남성 연예인들이 농담거리로 삼는 장면이 공중파를 타고 나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언급된 정준영의 ‘황금폰’에 있는 ‘도감’, 승리의 ‘외장하드’에 있다는 ‘야동’엔 이들의 대화방에서 오갔던 불법촬영 영상들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대중의 성의식을 왜곡시키는 데 일조했다.

TV에서 보던 익숙한 얼굴들이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 연예인의 부와 권력으로도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현행법을 조롱하고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긴 했다. 그동안 봐왔던 유사한 사건의 주인공들은 유력 재벌이나 고위 공무원쯤의 감투는 쓰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정도의 부와 명성만으로도 쉽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 이것에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토대이며, 남성연대로 다져진 사회구조였던 것이다.

지금 승리-정준영 사건은 필연적으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접대 의혹’과 ‘장자연 사건’과 만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유희나 여흥으로 여기고, 공권력과의 유착으로 범죄를 무마했다는 점에서다. 때마침 ‘장자연 리스트’의 목격자 윤지오씨가 10년간 해외에서 체류해오다 최근 귀국해 공개증언에 나섰다. 장자연 사건의 공소시효를 연장하고 재수사를 촉구하는 국민청원도 60만명이 넘게 참여했다. 김학의 전 차관과 관련해서도, 부실수사를 입증하는 새로운 증언이 나오고 있다.

희망적인 것은 우리는 이제야 ‘가해자 중심’으로 사건을 보는 법을 익혀 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피해자 리스트가 떠돌고, 동영상을 찾는 움직임도 있지만, 동시에 SNS에선 “우리는 피해자가 궁금하지 않습니다”라는 포스터가 널리 공유됐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과거였다면 ‘남성 연예인의 일탈’ 정도로 넘어갔을 사건이 범죄로 정의되고 가해자가 중심의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 그동안 디지털 성폭력을 가시화하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시킨 ‘미투 운동’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서 강간이 권력과 폭력의 범죄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문화적으로 강간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남성연대’(male bonding)의 실체를 해부하고 폭로했다. 그는 “불균형을 바로잡고 우리 자신과 남성들을 강간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한다면, 여러 층위에서 함께해야만 하는 일은 바로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작은 문이 열렸다. 이제 그 문을 활짝 열어젖힐 차례다.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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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래!” 구순 노친네의 목청은 쩌렁쩌렁했다. 걸음걸이부터 힘찼다. 골프라운딩을 두 바퀴 하고도 남을 성싶다.

참 기이한 일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아니 요즘은 더 정확히 그냥 ‘전두환씨’가 새삼 미디어를 장식하고 있다. 맞서 싸우던 이들은 하나둘 떠나고 이 늙은 내란수괴는 보란 듯이 강건하고 당당하다. 먼저, 29년 만이라던가. 서울 연희동 골목 장면을 보자니 개인적으로 두 개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하나. 바야흐로 ‘땡전뉴스’가 판을 치던 1984년 6월 어느 날. 당시 한 초등학생은 학교의 소집명령에 학우들과 수㎞를 걸어서 경북의 고속도로 인터체인지(IC)에 이르렀다. ‘전통 각하’께서 고속도로 개통을 축하하려고 지나가실 때 손을 흔들기 위해서다. 광주를 밟고 최고권력자가 된 전씨가 동서화합을 명분으로 급조한 88올림픽고속도로다. 워낙 서둘러 2차선으로 만든 탓에 한동안 국내 사망률 최고 ‘죽음의 고속도로’로 악명 높았다. 그날 한참을 기다려도 그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정작 각하께선 헬기로 지나갔단다. 대구에서 대학교에 다니던 동네 형은 방학 때 와선 “전두환 일당이 총으로 사람을 쏘고 권력을 뺏었다”는 무서운 얘기를 들려줬지만 말귀를 알아먹기엔 어렸다.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 전 대통령이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린 재판을 마친 후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둘. 1995년 봄이던가. 대학교 학생회관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밖이 술렁거리고 시끄러웠다. 일단의 선배들이 두 줄을 지어 교정을 다니며 구호를 외쳤다. “독재자 전두환을 처벌하라!” 더러는 야상 군복까지 입은 복학생 선배들이 대학도서관에서 입신양명을 위해 공부하다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들고일어난 것이다. 공소시효 만료를 앞둔 시점이었던 것 같다.

역사에는 ‘문민정부’ 김영삼(YS) 정부가 전두환·노태우의 12·12 쿠데타를 단죄한 것으로 돼 있다. 앞서 3당 합당에 대한 ‘야합’ 비난에 “호랑이를 잡으러 굴로 들어왔다”고도 했던 YS다. 광주 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5·18 특별법도 만들었지만 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 시민사회는 전두환·노태우씨를 검찰에 고소, 고발했다. 그날 도서관에서 책을 잠시 덮고 뛰쳐나온 선배들의 함성은 그런 연장선에 있다. 훗날 한나라당으로 제17대 국회의원 금배지까지 단 장윤석 서울지검 공안1부장은 1995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처분했다. 헌법재판소 결정까지 겪고서야 기소돼, 끝내 두 쿠데타 주역은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반란수괴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런데도 저들은 틈만 나면 왜 버젓이 갈등을 부추길까. 북한군 개입설까지 퍼뜨리며…. 이는 마치 전범들을 영웅시하고 위안부, 나아가 독도까지 트집 잡아 끊임없이 잡음을 즐기는 일본 우익과 닮은꼴이다. 단죄를 못한 탓이다. 독일 등지에도 전쟁범죄를 정당화하고, 인종주의를 신봉하는 늙은 옛 나치단원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사실 지만원씨 발언 등이 불거져나온 맥락이나 시점이 중요하다. 바로 정부의 지지도가 떨어진 때다. 독버섯의 포자는 그늘진 어딘가에 늘 퍼져 있다. 역사를 되돌리려는 자들은 음습한 틈을 노린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이들이 슬금슬금 피어날 것이다. 그러다 훗날 전통 각하의 위패가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모셔지지 말란 법이 없다.

그날 도서관을 뛰쳐나온 선배들께 늦게나마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 시대의 멍에를 짊어진 386정치인들이 소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망언을 잠재우고, 민주화를 꽃피운 이름들을 더 아름답게 빛낼 열쇠가 될 것이다. 단지 전두환 때리기에 머물러서도 안된다. 그것이야말로 저들이 뻔한 수작을 걸어온 이유일 수 있어서다.

한편으론 각하의 만수무강을 빈다. 왜 이러냐고? 진솔한 사과도 없이 몸져누우시기엔 아직 이르다.

<전병역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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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에게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논쟁’의 영역이다. 홍 전 대표가 페이스북에 직접 노출한 ‘센’ 발언이 기자에게 고민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쓸까? 말까?’

홍 전 대표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자들은 왜 고민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고민이 시작되는 이유는 ‘쓰는 것’의 몇 가지 효용 때문이다. ① 발언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직접 판단할 수 있게 한다. ② 온라인에서 잘 팔린다. 반대로 ‘쓰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이유도 있다. ① 요즘 같은 실시간 소통 시대에 굳이 왜 기사로 워딩을 그대로 전달하나. ② 발언 자체에 대한 판단과 검증이 필요하진 않을까.

취재원에게 접근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관의 자세가 필요했다. 객관성, 중립성 등 거리를 유지한 건조한 사실 전달이 언론의 가치였으며 ‘전달자’ ‘매개자’로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했다. 지금도 누군가의 발언과 사진 등이 고스란히 기사화되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주요 인사의 발언, 셀럽의 SNS 등은 발화와 거의 동시에 ‘속보’라는 이름으로 실시간으로 전달된다. 사실 온라인 경쟁만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 관행과 가치는 유효한 측면이 있다. ‘뭐 이런 걸 기사로 쓰느냐’는 악플이 달릴지언정 클릭은 해봤다는 얘기니까.

그렇다보니 아이러니가 생긴다. 독자들이 디지털 시대의 기자와 기사에 기대하는 가치는 분명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기자들이 독점하던 정보나 인물에 대한 접근 장벽은 사실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들고 동영상을 찍어 실시간으로 나만의 뉴스를 만들 수 있는 시대다. 이제 기자는 따옴표 속에 담긴 ‘말’(text) 자체를 넘어 따옴표 너머의 ‘맥락’(context)을 짚어주는 사람으로 진화해야 한다.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가 충돌한 현장을 종합적으로 비춰보고 사실이 아닌 진실이 무엇인지 ‘판정을 내리는’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특히 어떤 발언이나 행위가 소수를 향한 혐오이거나 역사를 왜곡하는 경우 언론의 검증 절차, 기자의 독자적 해석과 판단을 전제한, ‘진실의 판정자’로서의 적극적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성소수자를 인정하게 되면 근친상간, 소아성애, 시체성애, 수간까지 비화될 것 “5·18민주화운동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 등의 발언을 따옴표 속에 묶어 그대로 전달만 하는 것을 독자들은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2016년 대선을 앞둔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라는 공화당 후보를 만났는데, 당시 뉴욕타임스 짐 루텐버그 기자는 기사를 통해 “당신이 트럼프 후보가 가장 최악의 인종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방향으로 선동하려는 사람이라고 믿는 저널리스트라면 어떻게 그를 보도할 것이냐고 묻는다. 문제 발언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과연 저널리즘의 가치에 맞느냐는 질문이다. 이후 미국에선 유력 정치인의 발언이 사실인지 여부를 ‘체크’해 전달하는 ‘팩트 체크’ 보도가 나타난다. ‘트럼프가 A라고 말했다’고 보도하는 게 아니라 ‘트럼프가 A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틀린 발언이며 B가 맞다’고 보도하는 것이다. 물론 그 검증 방법은 사실에 입각해야 하고, 검증의 기반이 된 정보나 발언인의 출처도 투명해야 한다.

당연히 이 같은 역할에는 부담이 따른다. 미국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팩트 체크 기사의 정치적 편향성에 대해선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 기자가 판정자 역할을 하는 것이 맞느냐고 묻는 이들도 여전히 있다. 정준희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겸임교수가 신문과방송 2월호 기고에서 쓴 문장을 빌려 말하고 싶다. “이 몫을 감당하지 않은 저널리스트, 이 과정을 거치지 못한 기사는 고작해야 ‘발언의 진실성’에 대한 책임 회피를 위한 결과물일 뿐이다. ”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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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시청역 1번 출구를 나와 덕수궁 돌담길을 거쳐 정동교회를 지난다. 그 길 끝에 경향신문이 있다.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바닥을 수놓는 아름다운 출근길이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는 묵직한 숙연함이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혼란스러웠던 구한말의 역사와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길에는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이 있고, 아관파천의 무대였던 구 러시아공사관이 있고, 을사늑약을 맺은 중명전이 있다. 또 유관순 열사 동상이 교정을 지키는 이화여고가 있다.

얼마 전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하얀 천이 쳐졌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고종황제의 국장을 재연한 것이라고 했다. 고작 100년 전만 해도 이 땅에 왕이 있었고, 주권 잃은 왕의 타살 의혹에 민중들은 분노했다. 이 땅은 일제 치하였고 우리글과 우리말을 맘껏 쓰지 못했다. 언제 광복이 될지, 아니 광복이 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1919년 그날 태극기 하나 들고 맨몸으로 거리에 뛰쳐나온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단한 용기다.

3·1 운동 100주년을 앞둔 지난달 24일 덕수궁을 흰 천으로 둘러싸 고종 장례를 재현하는 <백년 만의 국장> 전시 준비가 한창이다. 이석우 기자

어쩌면 올 3·1절은 한반도의 축제가 될 뻔했다. 앞선 2월27~28일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긴 진통 끝에 성사된 만남이었기에 무언가 나올 것 같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은 경제적으로 큰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는 덕담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건넬 때는 울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합의는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보따리가 부족했을 수도, 김 위원장의 요구가 과했을 수도 있다. 원인이 무엇이든 담대한 성과를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실망스러운 결과다.

반면 북·미 회담에 부정적이던 사람들은 “나쁜 결과보다는 결렬이 낫다”며 빈손 결과를 환영하고 있다. 놀랄 일은 아니다. 100년 전에도 ‘그런다고 광복이 될 줄 아느냐’며 독립운동에 냉소적인 사람들은 있었다. 심지어는 일제에 붙어 부역을 한 조선인 순사도 있었다. 미래는 단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에 역사는 언제나 절실한 자들의 몫이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직전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기대를 많이 하는데 2차 북·미 정상회담은 생각보다 난제가 많아 큰 성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며 “그렇더라도 실망하지는 마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다시 만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또 한발 전진한 것”이라고 했다. 나라 밖에서 보는 한반도 정세는 냉정했다.

북·미 정상이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진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트위터에 올렸다는 시 한 편이 올라왔다.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이던 2015년 10월28일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에 2 대 15로 대패하고 올린 안도현 시인의 시다.

‘그날은 절대로 쉽게 오지 않는다/ 그날은 깨지고 박살 나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다음에 온다/ 그날은 참고 기다리면서 엉덩이가 짓물러진 다음에 온다/ 그날은 그날을 고대하는 마음과 마음들이 뒤섞이고 걸러지고/ 나눠지고 침전되고 정리된 이후에 온다’

3·1운동 이후 광복까지도 26년이 걸렸다. 한두 번의 훈풍으로 70년간 굳어진 고드름이 단번에 녹기를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일지 모른다. 고약한 꽃샘추위에 조금 녹다가 다시 얼고, 다시 얼었다 또 녹으면서 고드름은 봄을 맞는다. 개성공단도, 금강산관광도, 남북 철도 연결도 그렇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니 덕수궁 돌담길 은행나무 끝에 움이 살짝 텄다. 제비 한 마리 온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제비가 와야 봄이 온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지지배배 웃으며 헤어졌다. 봄은 올 것이다.

<박병률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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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과 환경부가 지난달 25일 서해에서 진행한 미세먼지 저감을 위한 인공강우 실험이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27일 발표한 상세분석 결과에 따르면 비가 아주 약간 내렸지만, 미세먼지를 줄이는 효과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예고된 실패였다. 전문가들은 시간당 10㎜의 비가 2시간 이상은 내려야 미세먼지를 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인공강우 기술로는 시간당 고작 1㎜가 늘어나는 정도다. 게다가 인공강우 실험의 영향권은 100~200㎢ 정도의 국지적인 범위라 시민들의 기대처럼 서해상에 ‘커튼’을 칠 정도도 못된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초미세먼지 주의보가 내려진 지난 12일 마스크를 쓴 한 시민이 서울 여의도를 걷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그럼에도 인공강우 실험에 ‘미세먼지 저감’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것은 지난달 22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미세먼지를 재난에 준하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특단의 대책을 시도”하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었다.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해 인공강우 등 새로운 방안의 필요성을 밝힌 것이다. 미세먼지 때문에 갑갑한 국민들의 마음을 씻어내는 심정으로 인공강우 실험이라도 시도했을 것이다.

예정된 실험에 미세먼지 저감 효과 분석을 추가한 것이고, 장기적으로 과학기술을 축적한다는 측면에선 무조건 나무랄 일은 못된다. 문제는 대통령의 발언에 맞춰 부랴부랴 ‘보여주기’식 이벤트를 벌이는 게 미세먼지 문제 해결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다.

정부에 지금 필요한 것은 ‘기우제’가 아니라 상황을 명확히 전달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미세먼지 발생 원인을 중국 탓으로만 여겨서도 안된다. 그리고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을 더 강력하게 시행해야 한다. 계절은 봄으로 변하고 미세먼지 농도는 더욱 짙어지고 있다. ‘보여주기’ 대책으로는 잠시 눈을 돌릴 뿐, 근본적 해결 방안은 될 수 없다.

<배문규 | 정책사회부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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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다가 투신한 한 젊은 엄마의 안타까운 뉴스가 흘러나왔다. 옆에서 같이 TV를 보던 한 어르신은 “미친X” 하고 대뜸 욕부터 하셨다. 산모가 왜 우울증에 시달렸는지에 대한 상세 배경이 생략된 빈약한 뉴스 탓도 있겠지만 기존 세대들은 갓난아기를 둔 여성들의 산후우울증을 대개는 “정신이 나약해서 생기는 문제”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어릴 적 모성애는 출산하면 저절로 생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예쁜 아기가 생겼다는 기쁨도 잠시, 불안감이 앞섰다. 과연 저 자그마한 아기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특히 아기에 대한 사랑스러운 감정과는 별개로 아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가정 내 역학구도에서 아이가 절대적 우위일 때의 상황들은 당혹스러웠다. 아이가 보호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라는 것과는 별개로 사회는 때때로 아이를 위한 전방위적인 희생을 엄마가 원하지 않을 때,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엄마에게 요구하곤 한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 속엔 기쁨과 만족감도 많지만 기혼의 직장맘이라면 으레 겪었을 뻔하고도 짠한 에피소드들이 나를 포함해 주변에 차고 넘친다.

요즘 여성들의 출산과 육아 기피는 더 이상 뉴스거리가 못된다.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지난해 1.05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고, 올해는 1.0 미만으로 붕괴될 상황에 놓여 있다. 결혼 소식을 전한 한 지인도 ‘딩크’를 선언했다. 결혼은 해도 아이는 낳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전지구적으로 여성들이 과거보다 아이들을 덜 낳는 이유로 전문가들은 핵가족의 확산, 경제적 상황, 높아진 초혼 연령 등을 꼽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중요한 다른 이유가 빠진 듯하다. 바로 출산과 육아를 통해 여성들이 느끼는 삶의 효능감이 과거보다 못해졌다는 점이다.

농경시대 소위 자궁가족(uterine family) 시절에는 가진 것과 배운 것 없는 젊은 여성이 시집와서 할 수 있는 최대 능력치는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남편 집안에 더해 가면서 ‘어머니’로서 자신의 세력권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도 이런 맥락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하지만 요즘 딸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귀한 대접을 받고 아들과 동등하게 경쟁한다. 학창 시절 또는 결혼 전 사회생활의 결과물들은 오히려 여성들이 남성들을 압도한다. 과거엔 결혼과 자녀양육을 통해서만 여성을 넘어 엄마라는 사회인으로 재평가받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도리어 ‘자녀 양육’에 대한 사전학습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레 맞이하는 ‘알파걸들의 엄마되기’는 삶의 시너지를 내기는커녕 멘붕에 빠지기 일쑤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저출산대책들이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하다. 최근 헝가리 정부가 자국 여성들을 겨냥해 자녀 넷 이상 낳을 경우 평생 소득세 면제 등 7가지 정책을 발표했지만 전문가들은 실효성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정부만 해도 2006년부터 지금까지 저출산대책에 143조원이나 쏟아부었다.

19세기 여행가로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 여성회원이었던 이사벨라 버드, 대영제국의 토대를 닦았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등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던 독립 여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더라도 자의식 강한 요즘 여성들 역시 아이가 없어도 자신들만의 즐거움을 찾아 잘 살고들 있다. 나이 마흔 넘은 주변의 지인들을 보더라도 그들은 강사 내지 공무원으로, 큰 회사·작은 회사 직원 등으로 밥벌이하면서 일상의 소소함을 만끽하면서 지낸다. 지구상 가장 번식에 성공한 가축 동물과 아프리카 초원을 뛰어노는 멸종위기의 야생 동물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생각해보면 그네들의 심리가 영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비유가 생뚱맞지만 말이다.

<문주영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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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 불심검문을 당한 적이 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경찰관이 붙잡아 세웠다. “어디 가니? 책가방 좀 열어봐.” 불쾌했으나 두려움이 불쾌함을 압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약한 장난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옆 동네에 전두환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옆’까지의 거리는 꽤 됐지만, 대학생들의 시위(그땐 데모라고 했다) 소식이 들려오면 우리 동네까지 분위기가 달라졌다. 무전기를 든 경찰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대통령이 근처에 사니 치안걱정 안 해도 돼 좋다는 소리도,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한 대통령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불편해진다는 소리도 들렸다. 전두환이 사는 곳은 어디쯤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멀고 아득한 느낌이어서 어릴 적 그의 이미지는 마치 전래동화에 나오는 상상 속의 괴물 같았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사람은 없지만, 마을 사람들이 때맞춰 어린아이나 곡식을 바치지 않으면 마을에 재앙을 내린다는 전설 속의 괴물.

10년쯤 뒤에 연희동의 한 밥집에서 우연히 ‘괴물’의 꼬리를 목격했다. 내가 가려던 곳의 옆 식당이 부산스러워 보였다. 전두환 일행이 왔다고 했다. 한우먹기캠페인을 돕기 위한 행보라고 입구에 있던 누군가가 친절히 설명해줬다. 그제서야 방금 슬쩍 보인 흰색 정장을 입은 뒷모습이 전두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식당 안에서도 사람들은 전두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보니 피부가 번쩍번쩍하네” “이 동네 오래 사니까 대통령도 보네”라는 어쩐지 기분 좋아보이는 반응과, “도둑놈, 살인자가 어딜 돌아다녀” “동네의 수치”라는 말도 들렸다. 그날 밥은 맛이 없었다. 식당 탓은 아니었다.

알고 싶지 않은 그의 근황은 여전히 불쑥불쑥 일상을 파고든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던 그는 2013년 검찰의 대대적인 추징금환수작전 이후에도 연희동 대저택에서 생활하고 있고, 2017년에는 무려 3권 분량의 <전두환 회고록>을 출간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회고록에서 “가면 쓴 사탄” “거짓말쟁이”라고 묘사해 2018년 사자명예훼손혐의로 기소된 그는 5년 넘게 기억상실증과 알츠하이머병을 앓아왔다고 주장했다. 2019년에는 치매환자라는 그가 대설주의보가 내린 강원 홍천에서 골프를 치고 심지어 스코어를 암산해 캐디의 수고를 덜어줬다는 소식이 들렸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1월18일 (출처:경향신문DB)

왜 저렇게 살까. 아흔 살이 다 된 저 노인은 어째서 부끄러움을 모를까. 정당해산을 치적으로 내세우며 자유한국당 대표를 하겠다고 나선 박근혜 정부의 전 국무총리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됐다는 주장이 전개된 공청회를 연 국회의원들을 보며 의문이 풀렸다. 전두환은 외롭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 곳곳엔 여전히 ‘전두환들’이 살고 있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으며 일부는 그들의 주장과 선동에 끌려다닌다. 혼자가 아닌 전두환은 부끄럽지 않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부끄러움을 모른다.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법정에서 고통받은 것은 아이히만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하고 차분한 그를 목격한 한나 아렌트(1906~1975·철학자)였던 것처럼.

광주지법 형사8단독 김호석 판사는 3월11일 열리는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재판에 피고인 전두환에 대한 강제구인장을 발부했다. 그가 제발로 나올지, 끌려나올지 혹은 ‘치매암산골프’를 능가하는 어떤 기발한 이유로 법정행을 피할지는 알 수 없다.

전두환의 비자금을 추적한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2013년, 고나무 지음)>이란 책이 나왔을 때 ‘아직’이라는 표현에 더 눈길이 갔다. 조금은 가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최근 다시 꺼내 본 그 책에선 ‘살아있는’이라는 부분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됐다. 전두환은 지금 살아있는가. 저런 삶도 삶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오래전 이웃의 한 사람으로 그에게 이른 조의(弔意)를 표한다.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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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는 일주일씩의 시차를 두고 찾아왔다. 이주일 전, 갑자기 남편이 복통과 몸살에 시달렸다. 일주일 전 아이가 비슷한 증세를 보이더니, 일주일을 꼬박 앓았다. 지난 주말, 마침내 나에게도 오한과 복통이 찾아왔다. 왜 놀아주지 않냐며 성화인 아이로부터 누워 쉴 시간을 쟁취하는 동안 지난 2주간 나의 무심함이 빚어낸 풍경들이 보였다. 아픈 남편이 안쓰러운 한편, 병마로 상실된 남편의 노동력을 내가 메꿔야 하자 슬쩍 짜증이 치밀기도 했던 것, 아픈 아이가 떼쓰자 버럭댄 것. 그 순간이 한없이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아프니까. ‘누워 있는 자리가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른 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중국적을 가지고 태어난다. 건강한 나라와 병의 나라에 동시에 속한 시민으로서의 이중국적이다”라고 수전 손택은 말했다. 건강한 몸과 아픈 몸이라는 ‘이중국적’을 공유한 경험으로 인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간신히 짐작해볼 수 있다. 고작 바이러스성 장염과 감기를 갖고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내가 알 수 없는 질병과 고통들이 도처에 널렸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은 여전히 이해 불가능성의 영역에 머무는 일이 많다.

서울도서관 서울기록문화관에 걸린 세월호 추본 리본. 김창길 기자

별것 아닌 투병기를 어쭙잖게 꺼내든 것은 최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가능한지 묻는 사람들이 많아져서다. 지난해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내놓은 데 이어 사회학자 엄기호는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펴냈다. 최근엔 미국 작가 레슬리 제이미슨의 <공감 연습>이란 책이 나왔다.

‘고통을 이해하기’에 관한 책들이 쏟아지는 것에 대해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엄기호)는 말이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세월호 참사, 미투 운동,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죽음…. 하지만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소화하기 힘든 시대를 관통해왔기 때문이라고.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그러했다. 타인을 집어삼킨 거대한 슬픔을 조롱하고 혐오하기까지 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당한 폭력과 고통에 대해 이해하기보다는 ‘피해자다움’을 평가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건 가능한가? 사실 이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100% 같은 입장과 상황에 처하기는 불가능하며, 100%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의 아픔을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을 지레짐작하고 이해하려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레슬리 제이미슨은 “공감하려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낙태, 희귀병을 앓은 경험 등의 고통을 겪은 끝에 타인의 고통에도 민감한 촉수를 갖게 되었다. 그조차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질문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탐구한 인상적인 작품을 만났다. 황정은은 연작소설집 <디디의 우산>에서 ‘묵자(墨字)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맹인의 문자가 ‘점자(點字)’라면 비맹인의 문자는 ‘묵자’라는 일침. 그것이 너무도 당연해 부를 필요도 없는 게 ‘묵자’의 세계다.

처음 접해 본 ‘묵자’라는 말에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우리가 거대악에 대해 비판하기는 쉽다. 이명박을, 박근혜를, 최순실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재벌 일가의 부 세습을, 갑질을 비판하는 것도 쉽다. 왜냐하면 나는 재벌도 아니고 부패한 권력자도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묵자’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점자’의 세계에 살고 있는 타인의 고통을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다만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무지의 영역을 조금씩 줄여나가고, 이해의 영역을 늘려가기 위한 노력, 나 자신을 콩알만큼이라도 확장시키려는 노력 말이다.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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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선수를 둔 한 학부모의 얘기다. 선수들이 경기를 하면, 조를 짜서 ‘다과 봉사’를 나가야 한단다. 경기 응원을 온 선수들 학부모와 경기를 지켜보는 각종 야구 관계자들에게 과자와 커피 등을 나눠주는 일이다. 어떤 선수가 잘하는지 지켜보는 스카우트들에게도 과자와 커피를 대접한다. 저학년 학생을 둔 어머니가 ‘다과 봉사’ 차례가 됐다. 경기장에서 다과를 준비하는데 고학년 학생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어이, 아가씨 커피 한 잔만 타 봐.” 충격을 받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전학을 고민했다.

심석희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감춰져 곪았던 스포츠계 각종 문제들이 쏟아졌다. ‘메달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가리고 덮고 어르고 윽박질렀던 사실이 드러났다.

꼬마 시절부터 새벽잠 쫓아가며 스케이트를 탔던 선수들은 메달을 위한 기계였다. 메달을 이유로 두들겨 팼다. 폭행 사실을 알리려는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하자 코치의 코치인 전명규 한국체대 교수는 “올림픽이 코앞이니 일단 올림픽에 집중하자”며 막아섰다. 올림픽이 끝나고 나니 이번에는 두들겨 팬 코치 구하기에 나섰다. 맞은 선수들에게 “너희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고 윽박질렀다.

상습상해 등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가 23일 경기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을 마친 뒤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드라마 <SKY 캐슬>은 빙상 링크 위에서 ‘아이스 캐슬’로 이미 단단하게 성을 쌓아두고 있었다. ‘아이스 캐슬’ 속 김주영들은 ‘서울의대’ 대신 ‘금메달’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짬짜미’와 ‘탱크’는 금메달을 위한 전략으로 포장됐지만, 자발적 결정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드라마 속 시험지 빼돌리기와 다르지 않다.

젊은빙상인연대는 6건의 추가 성폭력 사실을 확인했다.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외부 관계자는 “피해자 몇은 공개 의지가 있었지만 부모님들의 거부가 완강했다. 2차 피해를 걱정했지만 더 큰 이유는 전명규 교수의 영향력 아래 더 이상 빙상계에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공포 때문”이라고 말했다.

드라마에서 한서진은 예서에게 말했다.

“엄마도 알아 이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상황인지, 얼마나 잘못하는 일인지 알아. 그렇지만 예서야. 엄마는 네 인생 절대 포기 못해. 엄마가 다 감당할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공부만 해.” 양심이건, 이미 남은 상처건 다 중요하지 않다. 지금껏 들인 노력과, 거의 다 올라온 피라미드 끝이 모든 것을 덮는다.

아이스 캐슬을 만든 것은 빙상의 김주영, 한서진들이었다. 빙상의 김주영들은 ‘애국심’과 ‘금메달’이라는 숭고한 가치로 무장했고, 한서진들은 김주영들의 시스템에 가담하려다 덫에 갇혔다.

한서진들이 김주영을 만들었지만, 이미 괴물이 된 김주영은 한서진들의 약점을 너무 잘 안다. 무슨 짓을 해도 “이게 다 서울의대(금메달)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나만 믿으면 된다”고 강요한다. 믿지 못하겠다고, 뭔가 잘못됐다고 하면, “그렇다면 나가라”라고 한다. 밖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태도다.

자신의 길을 따르는 이들에게 각종 압박과 특혜를 주며 옥죈다. 드라마 속 조 선생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자꾸 회의감이 든다”고 하자 김주영은 “제 자식을 남들보다 더 뛰어나게 만들고픈 부모들의 욕망이 있는 한 입시 결과만 좋으면 그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어. 자식을 우리한테 맡기면 그들의 영혼도 우리 손아귀에 있거든. 지옥불에 처넣을 수도 있지”라고 말했다. 이어 조 선생에게 집 한 채를 선물했다. 조 선생은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드라마에서 느끼는 기시감이란.

승리와 메달이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면, 스포츠 전체가 ‘캐슬’이고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맨 앞의 어머니는 그나마 작은 용기를 냈다. 맞서 싸우지는 못했지만 먼 지방학교로 전학을 택했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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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콘텐츠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여러번 받았다. “원래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지난 10여년간 정치부에만 있다가 전혀 새로운 일을 하는 상황을 걱정하고 격려하는 말이었지만 불편했다. ‘그런 쪽이라니? 저널리즘과 미디어 환경이 이렇게 빨리 변하고 있는데, 뉴콘텐츠에 대한 고민은 모두의 숙제 아닌가?’ 뉴콘텐츠는 신문의 일이 아니라는 듯 들리는 그 말에 괜스레 속이 배배 꼬였다.

알고 있다. 그들의 고민과 나의 고민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디에도 정답이 없는 신문의 미래를 고민하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찾기처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생각해본다. 단지 신문이 낡은 플랫폼이라 외면받는가? 아니면 레거시 미디어라는 틀 속에서 독자와의 공감에 소홀했나?

7년 만에 다시 글을 내놓은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동안 진료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환자로 규정하고 의사라는 우월적 위치에 대한 자각 없이 살았던 것이다. 진료실 밖에서 흰 가운이라는 보호막 없이 그들의 속마음을 들으며 그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환자’라는 틀로만 바라봐도 괜찮은 사람이란 세상에 없다.”

뜨끔했다. 흰 가운을 입은 정신과 의사와 수십년 전의 관성으로 신문을 만드는 저널리스트가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의사가 진료실에 들어선 사람을 환자로 인식하는 접근법 자체를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그 행위가 비전문적이라고도, 나쁜 뜻을 담았다고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환자라는 틀로‘만’ 진료실에서 만나는 사람을 규정한 결과 의사는 자연스럽게 ‘우월적 지위’에 올랐고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저널리스트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매스미디어 시대의 제작·유통 방식에 익숙했다. 그 방법이 당연했고, 그에 따라 ‘뉴스 생산자’로서 전문성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기사 생산 행위 자체를 독자보다 앞세우게 되면서 의도치 않지만 참담한 결과를 손에 들었다. 언론의 신뢰도는 추락했고 고루하고 답답한 ‘소통 불가’ 이미지가 더해졌다.

지나치게 자조적인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돌아보고 더 혁신해야 한다. 어떻게? 혹자는 콘텐츠 홍수 속에 종이신문의 시대는 이미 갔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들은 문제는 플랫폼이 아니라 콘텐츠라고 말한다. 혼란스럽다. 전 세계 유수의 레거시 미디어들이 수많은 실험을 했지만 누구도 ‘나를 따르라’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팩트체크를 브랜드화한 워싱턴포스트, 뉴스 유료화를 안착시킨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등 때로는 성과를 낸 도전들마저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는 영원한 돌파구로 평가되지 않고, 향후 도태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성공 정도로 여겨진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이 있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해답을 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길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실낱같은 불빛은 독자들은 여전히 제대로 된 콘텐츠를 원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권력과 자본의 이면을 드러내는 보도에 박수를 칠 것이고, 독자의 요구를 잘 담아낸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엔 반응할 것이다. 신문의 시대가 간 것이 아니라 신문이 만들어 낸 것만 읽던 독자의 시대가 갔음을 직시해야 한다.

“저널리스트는 직업을 통해 훈련된 공감 전문가가 될 수 있다.” KBS PD로 교육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가 직접 현장으로 뛰어든 정찬필 미래교실네트워크 사무총장이 지난해 ‘저널리즘의 미래 콘퍼런스’에서 한 말이다. ‘흰 가운’은 던져버리고 저널리스트의 공감 능력을 되살려 보면 어떨까. 독자여! 당신이 옳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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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성과 직무 관련성이 없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김기정 서울서부지방법원장이 2016년 법원도서관장으로 있으면서 직원 친목 도모 명목으로 기업에서 금품·편의를 제공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김 법원장 측은 이렇게 반박했다. 지위를 이용한 적도 없고, 재판 업무도 맡지 않을 때라고 했다.

김 법원장은 야구경기 스카이박스 입장권, 영화 VIP시사 관람권, 글램핑장 이용권 등을 받았다. 주식, 고급차량, 현찰을 뇌물로 받아 큰 사회적 논란이 된 법조인들과 비교하면 수수 명목은 사소해 보일 수도 있다. ‘사소한 관행’은 인정해도 되는 것일까?  

고도의 윤리 의식은 법관에게 필수다. 외국의 잣대는 엄격하다. ‘각국 법관 징계 제도에 관한 연구’(사법정책연구원) 보고서는 미국 연방법원의 모범법관행동규범을 소개한다. 보고서는 법관 징계사유 행위로 “합리적 일반인의 관점에서 법관의 독립성·청렴성·공평성을 해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선물·융자·유증·이익 기타 재산적 가치가 있는 물품을 수령하는 경우”도 든다.

캐나다 법관윤리원칙도 ‘청렴성’을 두고 “법관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지식인의 입장에서 볼 때 법관 자신의 행동이 비난받을 수 없는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 펴낸 ‘법관 윤리’를 보면, 법관이 친구 변호사 개업식에 본인의 소속 법원명과 직위를 적은 화분을 보내는 것도 제한했다. 판사와 변호사 간 유착 같은 오해를 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막았다. 

김 법원장은 ‘친구 호의를 받아 직원들에게 선의를 베푼’ 행위가 비난받을 소지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공무원, 그것도 고위 법관의 지위라서 받은 선물은 아닐까? ‘기업의 친구들’이 왜 자신에게 물질적 호의를 보였는지 성찰도 하지 못한 듯하다.

김 법원장의 수수는 ‘외관의 공정성’에 어긋난다. 바깥에서 바라봤을 때 공정해야 한다. 기업이 제공하는 금품·편의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는 법관을 신뢰할 수는 없다.

<이혜리 | 사회부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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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 만나 결혼한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25년 뒤에 헤어질 것을 알았더라도 우린 결혼했을 것이다. 우리는 부부로서 함께 멋진 삶을 살았으며 부모로서, 친구로서, 벤처 프로젝트 파트너로서, 모험을 추구하는 개인으로서 앞으로 멋진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우리를 표현하는) 단어는 달라지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며 소중한 친구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인 제프 베이조스 부부의 이혼 발표는 이랬다. 세상에 이렇게 ‘쿨’한 이혼 선언이라니. 3만4000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 최고경영자(CEO)인 제프 베이조스와 부인 매켄지 베이조스가 지난해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해 나란히 포즈를 취한 모습. 세계 최고 부호인 베이조스가 9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결혼 25년 만에 이혼을 선언해 부인과의 재산분할이 어떻게 될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세상에 쉬운 이혼은 없다. 베이조스 부부도 상상하지 못할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일부 언론은 베이조스의 불륜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쿨’한 발표를 한 데 대해 혹자는 말한다. 결국은 돈 아니겠느냐고. 아내 매켄지가 받을 수 있는 위자료로 70조원 얘기가 나온다. 천문학적인 돈을 가지면 친권과 양육권, 상대에 대한 감정적 앙금 등이 모두 치유될까.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은 치열하게 법정 다툼 중이다.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도 이혼소송 중이다. 70조원까지는 안되겠지만 이들의 위자료도 50억~80억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일반인이면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이다. 돈이 있다고 모두가 ‘쿨’한 이별을 하는 것은 아니다.

비단 부부 사이뿐일까. 심지어 직장도 그렇다. 20년 근무하고 나가면서 회사와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화려하게 영입됐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기업 간 전략적 제휴도 끝이 아름다운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북유럽은 좀 다른 것 같다. 이혼도 우리보다는 일반적이고 해직도 쉬워 보인다. 북유럽 사람들이 특별히 마무리를 잘하는 성향이라서 그럴까? 그보다는 제도를 주목한다. 북유럽은 계약관계가 촘촘해 책임소재가 명확하고 복지가 잘 마련돼 있어 새로운 선택에 부담이 없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어렵다고 ‘동거’를 선택하는 그들이다. 상대와 헤어진다고 생활이 궁핍해지는 것도 아니다. 아동·육아수당을 받으면 부담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다. 직장도 마찬가지. 취업과 실직은 명시된 계약서를 따르고 설혹 직장을 잃어도 실업급여가 충분해 다음을 준비할 수 있다.

심리적인 요소도 있다. 혜민 스님은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연애가 깨질 때 우아하게 헤어지는 사람은 없다”며 “나란 인간도 엄청 치사하구나, 아주 못됐구나를 깨달아야 다른 완벽하지 못한 사람을 봤을 때 쉽게 손가락질하지 않게 된다”고 썼다. 부족한 나와 그동안 살아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면 생각보다 ‘쿨’한 이별을 할 수 있다. 부족한 나를 20년간 써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면 회사와도 우아한 이별이 가능할지 모른다.

인사철이다. 신문 한쪽에는 승진자 명단이 가득하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축하 인사가 쏟아지겠지만 그 자리를 지켰던 선임자의 얘기는 없다. 승진자 명단에도, 부서이동자 명단에도 없다면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따로 연락을 취해볼까 생각하다가도 행여 실례가 될까 싶어 망설여진다. 회사랑 ‘아름다운 이별’을 못했을까봐 그의 주변 동료들에게 묻기도 조심스럽다. 사라진 그들이 머지않은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묵직해진다.

‘이 회사에서 함께한 시간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았던 일이라 생각한다. 저는 나가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나의 가족이다.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자.’ 나는, 당신은 떠날 때 ‘쿨’한 퇴직 인사를 남길 수 있을까. 헤어짐에도 기술이 필요할 텐데 어디서도 배운 적 없다. 그래서일까, 헤어짐은 여전히 낯설다. 우아한 이별은 더더욱.

<박병률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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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 드라마 한 편이 한국을 들썩인다. 드라마는 세간의 분위기를 가볍고도 빠르게 담아내는 덕에 사람들은 드라마 한 편을 통해 미처 본인이 자각하지 못했던 시대적 유행과 분위기를 훑곤 한다. 드라마 <SKY 캐슬>은 대학입시가 갖는 의미를 21세기 한국사회에 투영시켜 교육이 갖는 세속성을 이야기한다. 교육이 더 이상 계층 이동을 위한 ‘유연한’ 사다리가 아닌 계층 유지 또는 계층 확대를 위한 ‘배타적인’ 사다리가 됐을 때 어떤 현상들을 낳게 되는지 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시선이 멈춘 지점은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의 폐해도, 자식교육을 향한 엄마들의 그악스러움도 아닌 바로 아빠들의 무기력함이었다. 아빠들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다. 물론 드라마 속 아빠들은 의사·교수 등으로 사회적으론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JTBC 드라마 의 한 장면.

하지만 ‘돈만 잘 벌어다 주면 가장 노릇 다 한 줄 알았다’는 극 중 영재 아버지의 고백처럼 그들은 여전히 집안일과 자식일에 별 관심이 없다. 자식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건 오직 성적표가 나올 때뿐이다. 자녀의 명문대 입학이나 학생회장 당선 소식 등은 아빠의 사회적 지위를 돋보이게 하는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가짜 하버드생인 딸이 아빠한테 눈물을 흘리며 소리친다. “공부 잘하는 자식만 자식이라는 생각 들게 했잖아!”

과정을 공유하지 않은 채 성과의 기쁨만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다. 힘들 때 옆에 있어주는 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은 가족에게도, 심지어 가족의 리더 격인 아빠들에게도 통용된다.

미국 연수 시절 미국 아빠들이 외계인처럼 보였다. 평일 축구·농구 수업에 오는 아이들 중 절반 이상이 아빠들과 함께 왔다. 한국처럼 직업강사가 아닌 자원봉사 체제로 꾸려지는 스포츠 클럽 성격상 축구 코치, 농구 코치는 대개 누구 누구의 아빠들이었다.

축구 매치가 있던 어느 토요일 놀라운 광경을 봤다. 상대편 축구팀 코치가 아기띠를 맨 채로 호루라기를 불며 경기 심판을 보고 있었다. 그의 배 위엔 돌도 채 되지 않은 작은 아기가 매달려 있었고, 초등학교 1학년인 그의 큰아이는 축구 경기를 뛰고 있었다. 싱글 대디인지, 엄마의 부재 때문인지 추측할 새도 없이 입이 쩍 벌어졌다. 동료 이웃이 털어놓은 목격담도 보통은 넘었다. 농구수업에 갔더니 젊은 아빠가 무려 4명의 아이를 유모차와 아기띠를 동원해 홀로 돌보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언제쯤 이런 풍경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지표로만 봐도 한국 아빠들의 가사노동 분담률은 현저히 낮다. 남성 가사 분담률은 16.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3.6%)의 절반 수준이다. 덴마크(43.4%), 핀란드(40.7%) 등 유럽 복지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신자유주의 첨병인 미국조차 아빠들의 가사분담률(38%)은 평균을 웃돈다.

경제학자 우석훈은 “엄마의 역할, 돈의 역할로 극한까지 밀고 온 것이 우리 교육의 모습”이라며 “아직 사용해볼 여지가 남은 것이 아빠의 역할”이라고 지적했다. 아빠와 대화하고 여행하고 공부하는 생활, 아빠가 자녀교육으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사교육의 고통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아빠들이 안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오는 길을 몰라서 오지 않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단순히 여유로운 일상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밥벌이를 하는 아빠가 자신의 건강을 살피고, 가족을 돌보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삶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엔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각박하고 부족하다.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 도입 등으로 불거진 후폭풍만 봐도 그렇다. 한국 사회의 아빠들은 언제쯤 가정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문주영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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