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거리를 걷는데 부슬부슬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어 비를 조금이라도 피하려고 갖고 있던 머플러를 머리에 둘렀다. 한참을 가는데 옆을 지나가던 차 한대가 속도를 줄이더니 청년 둘셋이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제스처를 섞어가며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빗속에서, 움직이는 차 안에서 지나가며 외친 말이지만 혐오 발언이 분명했다.

10년 전 이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오롯이 ‘이방인’이 되는 순간에 느낀 공포 때문이다. 소리를 지른 이들은 현지인, 나는 유학생, 그러니까 이주자였다. 소리를 지른 이들은 남성, 나는 여성이었다. 소리를 지른 이들의 종교는 알 수 없으나, 나는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 보일 만한 복장이었다. 

당시 유학을 하던 곳은 몇 년 전 벌어진 큰 테러로 특정 종교나 인종을 향한 분노와 거부감이 큰 상태였다. 그렇다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행해진 밑도 끝도 없는 공격이 제대로 설명되진 않는다.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이 공포의 근원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여성이자 이주자이자 동남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한 여성이 남편에게 폭행당했다는 뉴스를 보자 그때가 생각났다. 남편이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살림을 제대로 하지 않아 맞을 만한 행동을 했다” 등의 이유로 부인을 폭행했다는 것은, ‘다름’을 이유로 폭력이 행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이 여성을 향해 ‘폭행 유도’, ‘의도적 촬영’이라거나 ‘유부남과 교제한 내연녀’ 등의 비판이 쏟아지며 ‘폭행 피해자’라는 본질이 흐려지는 상황도 벌어졌다.

베트남인 아내를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남편 A(36)씨가 8일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혼을 통한 이주를 선택한 여성들의 경우 제도적으로 배우자인 남편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신원보증서 제출 규정은 폐지됐지만, 여전히 국적 취득 전 체류 연장을 위해선 남편의 동행이 요구되는 등 사실상 ‘신원보증’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위급 상황이 발생한다고 해도 이주여성은 버티고 참아낸다. 양육권 문제도 걸려 있다. 이번에 폭행을 당한 여성은 베트남 언론에 “이혼한 뒤 아이의 양육권을 갖고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부에선 이주여성들이 ‘국적 취득을 위해 접근한다’는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한다.

노동현장의 여성 이주노동자도 폭력에 취약하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에선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이주노동자 가사도우미들이 고용주에 의해 살해되거나 표백제를 강제로 먹는 등의 수난을 겪은 일이 외신을 통해 알려졌다. 

성폭력에도 노출돼 있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제조업 분야 여성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보면 응답자 가운데 성희롱·성폭력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11.7%였고, 피해 상황에서도 ‘말로 대응하거나 그냥 참았다’고 한 경우가 40%에 달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인종차별적 시선이 차별과 폭행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2009년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을 향해 “냄새나는 XX”라고 했던 남성이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모욕죄 유죄를 선고받은 경우도 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이번 폭행 사례가 알려지자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성명에서 “한국 사회에는 아시아 개발도상국 이주여성에 대한 성·인종 차별적인 인식이 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는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의 책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에 더한 글에서 이 같은 모순을 ‘GDP 인종주의’라고 표현했다. “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글로벌 패밀리’이고 비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다문화가정’”이라는 대목은 곱씹어봄 직하다.

‘선’ 하나를 넘으면 누구나 이방인이 된다.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기에 아무도 ‘이방인’일 수 없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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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물어본 사람은 없지만, ‘탈(脫)브라’ 취재후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지난달 15일자 토요판 커버스토리에 ‘굿바이, 브라’라는 제목으로 한국 여성 31명의 탈브라 체험기를 담았습니다.

기사를 쓰게 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여름이 오네. 아 덥다. 속옷이 존재감을 확 드러내는 그 계절이 또 오는구나.’ 이런 제 마음을 어떻게 읽었는지 SNS에는 유독 편한 브래지어 광고가 올라왔습니다. ‘안 입은 것 같대. 편하지만 가슴은 모아준대. 셔츠인데 유두를 가려줘서 이것만 입어도 된대.’ 광고들을 보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이렇게까지 브래지어를 입어야 하는 이유가 뭐지?’ 

출처:경향신문DB

그래, 브래지어 얘기를 한번 써보자 싶었습니다. 흔히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 것을 ‘노(NO)브라’라고 하는데, 그 말은 뭔가 불편했습니다. 입는 게 정상인데 안 입는다는 뜻이 포함된 것 같아서요. ‘탈브라’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습니다. 이미 ‘유브라, 탈브라’라는 단어로 SNS엔 많은 글이 올라와 있더군요.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며 사는 한국 사회에서 탈브라를 경험하고 실행한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제 주위에는 탈브라를 하는 사람이 없어(보여)서 어떻게 인터뷰할 사람들을 구할까 고민했어요. 드랙킹 취재 때 만난 드랙아티스트 ‘아장맨’이 생각났습니다. 아장맨은 흔쾌히 자신의 트위터에 저의 글을 올려주었습니다. ‘탈브라 아무말대잔치를 벌여보자’는 내용이었죠.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10대부터 70대까지… 덴마크, 파리, 네덜란드의 교민과 유학생까지. 이성애자, 성소수자, 직장인, 프리랜서, 학생, 딸을 키우는 주부 등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탈브라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약 70명의 연락을 받았는데 시간의 한계 때문에 그중에서 31명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편하려고, 페미니즘을 공부하다가, 아파서 등등) 탈브라를 시작했다가, 점점 자신의 몸과 이 사회의 금기, 차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얘기해줬습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으면 가슴이 처진다고, 브래지어 끈은 보이지 않게 하라며 엄마에게 혼났다는 한 여성분이 들려준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왜 우리는 가슴을 꼭 가려야 하며, 가린 것도 가려야 하며, 보이지 말아야 할 가슴까지 그 와중에 남들 기준에 예뻐 보이게 관리해야 하는 거죠?” 불편한 속옷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음란한 시선과 모순적인 규제가 많은 상처를 새겼으며, 2000년 이후 태어난 학생들까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웠습니다. 

많은 분들이 설리씨 얘기를 했습니다. 설리씨는 최근 방송에서 “브래지어는 액세서리일 뿐”이라 해서 박수를 받았죠. (사실, 취재하며 설리씨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답을 얻지 못했어요. 설리씨, DM 보내 미안해요. 어쨌든 그 마음, 온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쫄보 중의 쫄보’랍니다. 그런 저도 지지난주 탈브라를 실행해봤습니다. 외국이었고 남들은 거의 수영복 차림인 분위기였지만… 그때 느낀 해방감을 뭐라고 표현할까요. “자유로워서 자유가 뭔지 잊었다”고 해준 분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탈브라 기사의 주제는 “여러분, 브라를 벗으세요!”가 아닙니다. 브라를 입고 벗고를 선택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함께 나눠보고 싶었어요. 언젠가는 “어머머머. 개인이 속옷을 입고 벗고를 사회가 규제하던 시대가 있었대. 여성과 남성의 가슴을 차별하던 시대가 있었대”라며 갸우뚱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요. 탈브라 취재를 도와준 많은 분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자유를 동경하는 쫄보였습니다.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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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점점 신문을 믿지 않게 되었다. 방송 뉴스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열흘 전 발표된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영국 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의 공동연구 결과는 참담하다. 우리나라 뉴스 신뢰도는 조사 대상 37개국 가운데 최하위였다. “거의 항상 대부분의 뉴스를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핀란드(62%)나 포르투갈(62%) 등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우리나라는 지난해에도 꼴찌였다.

우리나라 뉴스가 오보투성이여서 못 믿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가짜뉴스의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는 비율은 61%로 나타났는데, 이는 브라질(85%), 포르투갈(71%) 등에 비하면 한참 낮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불신과 불안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뉴스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의심보다는 그 뉴스를 만든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다”는 의심을 하는 것 같다. 언론사의 정파적 위치나 경제적 이해관계, 심지어 기자 개인의 불순한 사적 목적이 기사 안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뉴스가 설령 거짓은 아니더라도 일부만을 보여주는 반쪽짜리 거울이라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기자가 안 보거나 못 보는 세상이 너무 크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기자는 현상이나 사람을 관찰하고 취재하고 분석해서 기사를 쓴다. 잘못 볼 수도 있고 전문성이 떨어져서 꼼꼼한 분석에 실패할 수도 있다. 당연히 비판받을 일이지만, 용인할 만한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관찰하는 위치가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보아도, 내리깐 눈에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뉴스 신뢰도 조사결과가 발표된 같은 날, 조선일보는 “느닷없는 부산~헬싱키 노선…국내 항공사들 뿔났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핀란드에서 항공 노선 신설을 발표한 것에 대한 일종의 ‘분석’ 기사였다. 국내 항공사들과 인천국제공항이 큰 손실을 입을 테지만 국익 대신 영남권 유권자를 염두에 둔 선심성 정책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 기사에 부산 지역 주민들과 정치인, 그리고 언론이 ‘더 뿔났다’. 유럽을 가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을 낭비하며 인천공항을 거쳐야 하는 지역민의 불편은 안중에도 없는 편향된 기사라는 것이다.

조선일보 기사를 ‘가짜뉴스’라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보도 아니다. 정부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언론사라서 문제인가? 감시와 비판이 언론의 사명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 또한 이해해줄 수도 있다. 정작 큰 문제는 언론사가 혹은 기자들이, 이 사건을 서울의 대기업 옥상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거기서 관찰하면 수도권 바깥은 보이지 않으며, 거대한 비행기에 가려 정작 그 안의 승객들은 보이지 않는다. 해당 기사에서 언급한 취재원은 “항공업계 관계자”, “한 대형 항공사 임원”, 그리고 항공산업을 연구하는 경영학과 교수였다. 인천공항까지 힘들게 가야 했던 연간 300만명의 동남권 지역 여행객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최근 서울시는 4개 버스 노선의 새벽 시간대 배차를 늘렸다. 새벽 노동자들을 꽉꽉 채워서 운행하던 노선들이다. 몇몇 기자들이 마치 새로운 사건이 생긴 듯 이 새벽 버스에 올라타 승객들의 애환과 사연을 취재했다. 수십년 동안 거기에 있었으나 기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꽤 오래전에는 기자들도 거의 매일 이들과 같은 버스를 탔다. 기자들이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출퇴근을 하던 그 시절에는 버스 노선의 문제, 기사들의 난폭운전, 버스회사 비리 등이 심심치 않게 사회면을 장식했었다. 기자 월급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생활수준이 오르자 승용차의 성능, 교통 체증, 휘발유 가격 같은 주제가 만원버스 이야기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주요 언론사의 중견 기자들은 거의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파적으로는 다양할지 몰라도 경제적, 문화적 수준과 배경이 비슷하다. 대기업과 노동자가 대립할 때 많은 언론이 은근슬쩍 기업 편을 드는 듯 보이는 것도 반드시 광고 수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기업에 더 쉽게 감정이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탓이 크다. 기자들 주변에는 비정규직 공장 노동자보다는 기업 임원이 더 많다. 수도권 밖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더더욱 만나기 어렵다. 서 있는 위치가 거의 거기서 거기다. 바라보는 지점도 큰 차이가 없다. 독자들이 언론을 외면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언론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간지나 텔레비전 뉴스 대신 유튜브를 보고 팟캐스트를 듣고 이상한 정보를 카톡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뉴스 신뢰도를 단박에 회복시키는 비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기자들이 좀 움직였으면 좋겠다. 서 있는 자리를 옮겨야 달리 보인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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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후배가 지난주 결혼했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나 14년을 연애하고 드디어 식장에 들어섰다는데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이 정말 예쁘더라, 들떠서 이야기하는데 듣던 이는 시큰둥하게 “결혼하기 전에 평균 3~4명은 만난다는데 한 사람이라니 손해 아니냐”고 대꾸했다.

마치 ‘표준’처럼 통용되는 ‘평균 3~4명’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모 결혼정보업체가 과거 결혼적령기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미혼 남녀의 이성교제 평균 횟수는 ‘남성 4.7회, 여성 4.3회’라고 한다. 하지만 그 숫자는 교제경험이 없다(13.3%)부터 10회 이상(8.3%)이라는 답변을 모아서 나눈 것이다. 이 같은 부류의 설문조사는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오해를 산다. 평균은 ‘특정 집단의 정보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대푯값’으로 추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이지, 그 자체가 ‘표준’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그 ‘평균’은 ‘표준’을 넘어 ‘정상’의 자리까지 종종 넘본다. 서울 거주 25~29세 남성의 평균 키는 175.6㎝이고, 고3 여학생 평균 몸무게는 57.8㎏이고, 아기는 평균 생후 6개월이면 뒤집기를 한다는 등의 통계 수치를 접하면 사고는 자동회로처럼 ‘평균에 부합하는지’ 자신의 경우를 놓고 가늠하기 일쑤다.

사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그 같은 ‘평균’이란 숫자는 별 도움이 안된다. 발달심리학자인 토드 로즈 하버드대 교수가 <평균의 종말>에서 소개한 ‘노르마(Norma)’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노르마는 미국의 한 부인과 의사가 젊은 여성 1만5000명으로부터 수집한 신체치수 자료를 바탕으로 조각가 에이브럼 벨스키가 1942년 만든 조각상이다. 노르마의 뜻이 ‘정상’인 것처럼 이 ‘표준모델’은 “평균값이 여성의 정상 체격을 판단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했다.

워낙 인기가 높다보니 1945년에는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까지 열렸다. 그런데 경쟁이 치열할 것이라는 예상은 엇나갔다. 대회에 참가한 3864명의 여성 중에서 9개 항목의 ‘평균’ 치수에 딱 들어맞는 ‘노르마’의 몸을 가진 이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평균=표준=정상’이라는 오류에 빠져 있던 당시의 전문가들은 당황한 나머지 ‘여성들이 건강하지 않아서 빚어진 문제’라고 해석하고 말았다. 극도로 다양한 인간은 ‘평균’이라는 ‘납작한 숫자’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눈앞에 두고도 말이다. 

‘납작한 말’도 마찬가지다. 명쾌한 진실 같지만 삶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 예로 “흑인은 수영을 못한다”가 있다. 해부학적 특징 때문에 타 인종보다 물에 덜 떠서 그렇다는 건데, 미국의 시몬 마누엘 선수가 2016년 리우 올림픽 여자 자유형 100m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걸 보면 그렇지 않은 게 분명하다. 사실 흑인들이 수영을 못하는 것은 같은 물에 몸을 담그고 싶지 않던 백인들이 오랫동안 이들의 출입을 금지한 인종차별 문화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

“시험 점수가 좋으면 똑똑하다”도 비슷한 예다. 로즈 교수에 따르면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은 SAT 점수와 출신학교의 명성이 재능을 예견케 하는 지표가 되지 못하고, 학부 성적도 졸업 후 3년 동안만 유효하다고 본다. 각 인재가 가진 재능이 들쭉날쭉해서 어느 하나의 점수로 평가할 수 없다고 결론냈기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 만사에서는 오랫동안 당연시해왔던 문제들에도 때때로 물음표를 달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순간 맹점이 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적잖기 때문이다. 납작한 숫자의 눈치를 보거나, 납작한 말에 가두기엔 삶이 넘치도록 다양하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하게 살면 그만 아닐까.

<최민영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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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별로 어떤 게 더 나쁜 범죄인지 따질 생각은 없지만, 아동학대는 한 아이의 인생과 그 아이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삶을 파괴하는 범죄다. 대검찰청의 2015년 한 연구용역 보고서는 ‘피해자로서의 아동은 발달 단계에 있으므로 신체적·정신적·성적 가해행위가 성인보다 훨씬 큰 법익 침해를 야기할 위험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이들은 “별것 아니겠지”라며 넘길 수 있는 작은 학대 행위라도 아이에게 장차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이의 부모는 어떤가. 아이를 학대당하도록 뒀다는 자책을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 아이가 커가면서 조금만 어긋나도 과거의 학대 사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아이를 위험한 환경에 두는 국가와 사회를 원망할 것이다. 이로 인해 다니던 직장을 관두거나, 아이를 더 낳으려다 포기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그래서 아동학대범죄는 엄하게 처벌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형법’ 등에서 처벌하는 아동학대관련범죄 종류만 20개에 달하고, 범행의 경중에 따라 가중 처벌도 내릴 수 있게 해놓았다.

하지만 엄격한 법과는 달리 아동학대범들에게 내려지는 판결들을 살펴보면 관대하기 짝이 없다. 소변과 각종 오물이 묻은 휴지로 아이들 입을 닦는 등의 학대를 한 한 보육교사는 최근 판결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00여 차례에 걸쳐 아이들을 학대한 보육교사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지난해 11월 발간자료를 보면 아동학대범죄자의 75%가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 내지 벌금형을 받았다. 가끔은 아동학대범에게 중형이 내려지기도 하지만, 이는 이미 아동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뒤의 경우다.

국회입법조사처의 지난해 5월 보고서를 보면 국내 아동학대 피해아동 발견율은 2016년 기준 2.15‰(인구 1000명당 발견율)로, 미국(9.2‰)·호주(8.5‰) 등에 비해 턱없이 낮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001~2016년 통계를 보면 아동학대 신고접수 및 의심사례 건수의 일관된 증가추세를 보인다”며 “한국사회에 잠재적인 아동학대 사례가 만연한 상태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고 우려했다.

그나마 아동학대 범죄가 적발돼도 범행을 입증하거나 피해사실을 증명하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아동학대로 인한 피해를 막으려면 현실적으로 ‘예방’만이 최선책이다. 아동학대범들에게 형벌 외에도 아동복지법을 통해 학교나 학원, 보육기관 등 아동관련기관에 10년간 취업을 못하도록 제한하는 제도를 둔 이유였다. 누군가는 “가혹하다”고 할 만한 이런 제도가 아이들을 보호하고, 가정을 살리고, 사회 전체를 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에 최근 변화가 있었다. 지난해 6월 헌법재판소는 “일괄적으로 아동학대범에게 10년 취업제한을 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아동학대를 엄벌해야 한다는 취지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안에 따라 10년 제한이 ‘정말’ 억울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도 싶다. 헌재결정에 따라 법이 개정돼 12일부터는 범행의 경중에 따라 최장 10년까지 취업제한을 법원이 내릴 수 있다.

종전 아동학대범들에게는 환영할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법의 부칙이 개정돼 12일 이전에 아동학대로 확정판결을 받은 범죄자들의 취업제한이 기존 ‘일괄 10년’에서 ‘최대 5년’으로 대폭 감경된 것이다. 이에 따라 소변 묻은 휴지를 아이들 입에 들이댄 교사의 경우 예전 같으면 10년이었어야 할 취업제한이 3년으로 줄었다. 벌금형만 받은 학대범들은 1년만 기다리면 재취업이 된다. 취업제한도 일종의 형벌로 본다면 아마도 역대급 ‘감형 이벤트’가 아닐까 싶다. 예정보다 일찍 아동관련기관으로 돌아오게 될 학대범들이 모쪼록 마음을 고쳐먹고 재범에 나서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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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라면 먼저 보수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스님들은 앞서 나가지 않는다. 스마트폰 같은 신문물도 사용하지만 먼저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다. 사회가 움직이면 조금씩 따라간다. 급변하는 사회가 과속으로 사고를 내지 않도록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감사한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스님들이 종무원 노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내부적으로 해결하면 될 문제에 검찰이나 경찰 같은 외부의 힘을 동원하려는 것이 좋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5주 전에는 ‘더 쿨한 스님을 보고 싶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원래 이해심도 많고, 약자를 보호하는 데 관심도 많은 스님들이 더 넓은 마음으로 노조원들을 대해달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최근 조계종이 종무원 노조 간부들을 징계하는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조계종 총무원은 노조에 대한 전근대적인 인식은 그대로인데, 징계하는 방식은 그 어떤 기관보다 ‘세련’됐고 절차는 신속했다. 지난 4월에 한 번 놀랐고, 지난달에 또 놀랐다. ‘이렇게 해도 되나? 아니, 법적으로 가능하긴 한 건가?’란 말이 절로 나왔다.

조계종 인사위원회는 지난달 9일 심원섭 지부장과 심주완 사무국장, 박정규 홍보부장 등 노조 집행부 3명에게 지난달 15일부터 ‘자택 대기발령’을 내렸다. 이들은 징계위원회를 앞두고 이미 대기발령을 받아 현업에서 배제된 상태였지만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조건을 추가했다.

앞서 조계종 노조 집행부 3명은 지난 4월10일부터 지난달 15일까지 강원도 낙산사로 대기발령을 받아 떠났다 서울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서울에 있는 조계종 총무원으로 출퇴근을 하던 사람들이다. 집과 가족 모두 서울에 있다. 조계종 종단은 이들에게 ‘산불피해 지원’이라는 명분을 주고 강원도로 보냈다.  

조계종 인사위원회는 징계위원회를 거쳐 지난달 24일 심원섭 지부장과 심주완 사무국장에게 징계를 내렸다. 심 지부장은 해고 통보를 받았고, 심 사무국장은 정직 2개월 징계를 받았다. 부친상을 당해 지난달 17일 열린 징계위원회에 출석하지 못했던 박정규 홍보부장은 지난달 27일 별도로 열린 징계위원회를 거쳐 지난 3일 정직 1개월이 확정됐다. 

조계종 인사위원회는 노조가 ‘종단 사업에 부정 내지 비리가 있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검찰 고발과 기자회견을 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을 징계 사유로 들었다. 그러나 조계종 인사위원회가 지키려는 것이 종단의 명예뿐은 아닌 듯하다. 노조의 전언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노조 간부들이 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관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자 총무원의 한 간부 스님은 “아비어미를 고소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노조가 지난 4월4일 자승 전 총무원장을 검찰에 고발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자승 전 원장은 재임 시절 승려노후기금을 위한 생수 판매 사업을 하면서 5억원 이상을 특정인에게 빼돌려 종단과 사찰에 손해를 입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노조는 징계에 불복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 역시 노동법에 밝은 변호사를 수소문해 맞대응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쯤되면 누가 더 종단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린다.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더 크게 만든 것이 누구인지도 알쏭달쏭하다. 

이제는 조계종 총무원이 그토록 바라는 부처님법이 아니라 사회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사회법은 ‘부모를 고소했다’는 이유로 자식을 처벌하지 않는다. 기관의 전직 수장을 비리혐의로 고발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하지도 않는다. 사회법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 역시 그러할 것이라 생각한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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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은어 중 ‘어그로’라는 말이 있다. 대개 ‘어그로를 끈다’는 관용구로 사용된다. 영어 단어 aggravation에서 왔다는 게 정설이다. 도발, 약올리기의 뜻을 가졌다. 

어그로를 끈다는 것은 부정적인 이슈를 내세워 관심을 모은다는 뜻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유행하고 있는 ‘막말’은 ‘어그로를 끄는 관종’의 짓이다. 현실 정치의 어그로는 실보다 득이 많다. 어그로의 수위만큼 자신의 지명도가 높아진다. 점점 더 자극적인 어그로가 유혹하는 어그로의 악순환이다. 

정치 관종의 어그로는 잃을 게 별로 없다. 막말과 망언은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정치판을 지저분하게 오염시킨다.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동시에 일부 지지자들을 결집시킨다.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지긋지긋한 정치로부터 떠나게 만들고, 지지자를 결집시키니 완벽한 플러스다. 정치판이 오염될수록 새로운 ‘유망주’가 유입될 가능성도 낮다. 새 얼굴이 없으니 자신의 자리는 더욱 탄탄해진다. 

지나치다 싶으면 사과를 하면 된다. 요즘 말로 ‘영혼 없는’ 사과는 다시 한번 어그로를 끄는 데 효과적이기까지 하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에 대한 혐오표현을 공개적으로 한 뒤 “정확한 의미와 구체적 유래를 전혀 모르고 썼다”고 해명했다. 

‘어그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단어지만 출발은 달랐다. 원래 ‘어그로’는 ‘팀을 위한 희생’을 뜻하는, 말하자면 ‘숭고미’를 가진 단어였다.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MMORPG)에서 이 말이 나왔다. 여러 명의 플레이어가 참가하는 온라인 역할 게임이다. ‘파티’를 구성해 괴물(몬스터)을 사냥하는 것이 게임의 주된 목적 중 하나다. 

게이머의 역할은 크게 탱커, 딜러, 힐러의 3가지로 나뉜다. 딜러는 원거리 공격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몬스터를 공격해 에너지를 떨어뜨린다. 인터넷 은어 중 ‘상대를 극도로 괴롭힌다’는 뜻의 ‘극딜’이 여기서 나왔다. ‘딜링’은 상대를 공격하는 행위다.

힐러는 힐링(healing)을 맡는다. 전투 도중 피해를 입은 팀원들을 치료해 회복시켜주는 역할이다. 마지막 하나, 탱커가 바로 ‘어그로’의 주인공이다. 탱커는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몬스터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낸다. 탱커가 두들겨 맞으면서 버티는 동안 딜러가 몬스터를 공격하고, 힐러가 탱커 또는 딜러를 치료하면서 팀 전력을 높인다. 3가지 캐릭터의 호흡이 맞아야 몬스터를 때려잡을 수 있다. 

몬스터의 공격이 딜러나 힐러를 향하면 파티 전력에 큰 손실을 입는다. 탱커는 몬스터가 계속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때 사용하는 전술이 바로 ‘어그로’다. 탱커는 몬스터를 향해 도발을 계속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든다. ‘어그로를 끄는’ 것은 대중들에게(혹은 지지자들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팀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희생적 행동이다. ‘내 친구들 말고 나를 때려라’라고 외치는 행동이다. 내가 두들겨 맞는 동안 내 동료들이 승리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종합격투기 선수 권아솔은 ‘어그로’ 전문이었다. 로드FC 소속으로 거침없이 막말을 이어갔다. 때로는 ‘트래시 토크’ 수준을 넘기도 했다. 지난 18일 제주에서 열린 굽네몰 로드FC 053 메인이벤트에서 만수르 바르나위에게 1라운드 초반 리어네이키드초크를 당해 졌다. 팬들의 비난이 거셌다. 권아솔은 SNS에 이렇게 적었다.

“선수가 시합을 못했다면 욕을 먹어야 한다. 그렇지만 선은 지켜달라. 나라의 지원도 못 받는 한국 종합격투기가 살아남는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해서 한 거다. 이런 게 아니면 사람들이 봐주지 않는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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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위해 차려준 음식에 대한 그리움은 언제나 강렬하다. 화려한 음식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식당 한쪽에서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는 음식을 먹노라면 그곳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먹어본 적은 없어도 그곳을 떠올리게 하는 것 또한 음식이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를 보면 ‘쿠바 샌드위치’ 맛이 궁금해진다. 음식평론가와 설전을 벌인 후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쫓겨난 셰프 칼이 푸드트럭에서 버터를 듬뿍 발라 구워내는 쿠바 샌드위치는 입맛을 다시게 한다. 사정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쿠바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말이다. 칼은 아들에게 ‘카페 드 몽’의 설탕 파우더를 탈탈 뿌린 프랑스식 도넛 ‘베녜’를 맛보게 하기 위해 미국 뉴올리언스에 푸드트럭을 세운다. “천천히 먹어. 생의 첫 베녜는 다신 못 먹어. 세계 어디서도 이 맛은 못 내”라는 영화 속 대사 덕에 이곳의 베녜는 전 세계에 입소문이 났다.

나만 해도 10여년도 더 지났지만 베트남 휴양지 달랏에서 화덕에 구운 바게트와 함께 먹은 치즈 맛이 지금도 또렷하다. 홍콩 센트럴 뒷골목의 완탕면은 어떤가. 주인 할머니가 손짓으로 일러준 대로 그 집의 비법 소스를 한 숟갈 넣으니 놀라울 정도로 맛이 달라졌었다. 그때 처음 먹어본 완탕면에 반해 수없이 완탕면을 먹으러 다녔지만, 서울에서 그 맛을 내는 집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음식에는 그곳만의 맛이 담겨 있을 터이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의 한 장면.

뉴욕, 런던, 파리, 도쿄 등 세계 주요 도시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요소. 거기에도 음식이 있다. 하버드대 에드워드 글레이저 경제학과 교수는 “대부분의 도시에서 위대한 극장들보다는 위대한 식당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다. 도시를 살리는 요인 중 하나가 ‘음식’이란 얘기다. 

음식에 대해 ‘피시 앤드 칩스’ 말고는 없다는 지독한 조롱을 받는 영국이지만, 런던에는 세계적인 셰프들과 유명 식당들이 많다. 이달 초 출장길에 잠깐 들른 런던에서 만난 한 업체 사장은 요즘 뜨는 음식으로 한식을 꼽았다. 런던 킹스크로스에 있는 한식당 ‘kimchee’(김치)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못 먹을 정도로 핫플레이스라고 한다. 한국 여행객들이 현지 음식이 맞지 않아 찾는 한식당과는 외양부터 다른 이곳은 종업원들도 한국인은 고용하지 않는 현지화 전략을 썼다. 잉카 유적지 외에는 내세울 게 없었던 페루 역시 매년 9월 리마에서 열리는 ‘미스투라’라는 남미 대륙 최대의 음식 축제가 사람들을 모은다. “멀다고 하면 안되갔구나.” 이 한마디에 4·27 남북정상회담 당일 점심에는 평양냉면집마다 긴 줄을 선 풍경과 냉면 인증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오기도 했다.

최근 서울시도 도시 공동체를 위해 음식에 주목한다. 지난해부터 서울역 일대에 ‘요리를 통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요리인류> 등 요리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KBS 이욱정 PD가 음식을 통한 도시재생이라는 주제로 기획을 맡았다. 올해는 식재료 공동구매, 공동손질, 공동배분을 하는 마을공동체 ‘우리마을 쿠킹박스’를 진행하고 있다.

사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음식을 매개로 공동체를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건강하게 먹기 위한 노력만으로 우리는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도시에서 잃어버린 연대의식을 되찾을 수도 있다. 2008년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온 것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광우병’ 때문이었다. <식탁 위의 세상>에는 1967년 마틴 루서 킹의 우주의 상호연결성에 대한 연설이 나온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끝마치기도 전에 지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이 말은 상관없어 보이는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평화를 얻지 못할 거라는 우려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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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배노동자 과로사는 어제오늘 제기된 문제가 아니다. 2017년 6월12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 집배원 과로사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배노동자들의 현실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더불어민주당 신창현 의원실에 따르면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과로와 근무 중 교통사고, 자살로 숨진 우정사업본부 직원은 157명이다. 올해 들어서도 5명의 집배노동자가 숨졌다.

지난 13일에는 무기계약직 집배원으로 일하던 30대 이은장씨가 다음날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잠자다 돌연사했다. 전형적인 과로사다. 이씨는 평소 과중한 업무로 힘들다는 말을 주변에 했다고 한다. 근무로 인정받지 못하는 시간 외 ‘무료노동’도 잦았다. 비 오듯 흐르는 땀 때문에 챙긴 여분의 옷, 짐을 나르다 생기는 상처를 치료할 소독제 등은 필수품이었다. 정규직이 돼 행복을 배달하겠다는 이씨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수십년간 반복되는 집배노동자 문제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정사업본부 노사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집배원 노동조건 개선 기획추진단’이 지난해 9월 낸 ‘집배원 노동조건 실태 및 개선 방안’에 따르면 연평균 2745시간(한국 임금노동자 평균 2052시간)에 달하는 집배노동자 노동시간을 주 52시간(연 2340시간)으로 단축하기 위해서는 2853명의 인력이 추가로 필요하다. 하지만 지난해 국회는 정규직 집배원을 1000명 증원하기 위한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지난 13일 새벽 어머니와 살던 세종시 자택에서 과로로 숨진 30대 비정규직 집배노동자 이은장씨가 이른 출근을 위해 전날(12일) 밤 거실에 미리 준비해 둔 집배원 조끼. 조끼 안에는 업무에 필요한 잔돈, 우편물도착안내서, 볼펜, 매직, 자동차 키, PDA 배터리 등이 들어 있었다. 정대연 기자

결국 돈이 문제다. 집배원 증원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우정사업본부 우편사업부문에서 적자가 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지난해에는 적자가 1000억원이 넘었다. 정보통신기술 발달로 기업들이 e메일이나 온라인 메신저 등으로 고지서를 발송하는 경우가 늘어난 탓이다. 민간택배업체들과 낮은 단가로 경쟁하면서 우체국 택배 수익성도 나빠지고 있다. 

그러나 우편물량이 준다고 집배노동자들의 업무강도가 낮아진 건 아니다. 전자상거래 활성화로 택배가 늘어나고, 1~2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가구 단위로 이뤄지는 우편 배달 노동강도는 오히려 세졌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연히 돈이 든다. 

보편적 공공서비스인 우편을 비용만으로 따지는 게 타당할까. 오지에 홀로 사는 노인도 우편물을 받아볼 수 있어야 한다. 외딴섬에 산다는 이유로 선거공보물, 법원송달물을 받아보지 못한다면…. 이윤이 최우선 가치인 민간기업이라면 손해를 보는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 적자를 줄이기 위해 당장 우체국 수를 대폭 줄일 것이다. 국회가 이 ‘죽음의 행렬’을 거두기 위해서는 인력과 재정 투입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제라도 예산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한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우편요금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통우편 50g 기준(2017년) 한국 우편요금은 350원으로, 영국(722원), 일본(806원), 독일(976원) 등의 절반 이하다. 공공서비스를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한 어느 정도의 요금 인상을 검토해봐야 한다. 기업·정부 등이 우편물을 다량 발송할 때 깎아주는 돈이 연 2500억원에 달하는데 감액률이 타당한지 살펴볼 필요도 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정책사회부 | 정대연 ho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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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가 고되겠다 싶을 정도로 마음 착한 지인이 있었다. 작은 일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고 누구든 계산 없이 성심성의껏 돕는 능력자였다. 하지만 사장은 그의 노하우만 날름날름 빼먹을 뿐 제대로 처우하지 않았다. 사람 좋은 지인은 고민은 하면서도 싫은 소리는 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처지에 답답해하면서 이기적인 사장의 승승장구가 부당하다고 여겼다.


조직심리학자인 애덤 그랜트 미 펜실베이니아 와튼스쿨 교수가 다양한 문화권에서 3만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세상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먼저 타인을 나보다 먼저 배려하는 ‘주는 사람’(giver)으로 전체 중 25%의 비율을 차지한다. 자기이익만을 챙기는 ‘받는 사람’(taker)의 비율은 19%였다. 그 두 극단 사이에는 ‘맞추는 사람’(matcher)이 56%로 폭넓게 분포한다.


업무성과로 볼 때 이타적인 ‘주는 사람’은 아주 나쁘거나 아주 좋은 양극단을 달렸다. 이들은 조직 내 다른 사람들을 돕느라 정작 자신의 업무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등 ‘번아웃’에 빠지는 경우가 적잖았다. 이렇게 착한 ‘호구’들이 뒤처질 때 그럼 이기적인 사람들이 성공할까. 꼭 그렇진 않다는 게 그랜트 교수의 설명이다. ‘기브 앤드 테이크’ 개념이 확실한 ‘맞추는 사람’들이 이들을 응징하기 때문에 성공을 하더라도 ‘반짝 성공’에 그친다고 한다. 그렇게 호혜주의에 기반한 사회협력이라는 원칙이 지속되는 것이다.


이 같은 원칙은 일찌감치 수학적으로도 검증된 바 있다. 로버트 액설로드 미 미시간 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바탕으로 하는 컴퓨터 대회를 열어 수십 개의 다양한 전략들을 대전시킨 결과, 맘씨 좋은 ‘팃포탯’(Tit For Tat: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 최고의 강자였다고 <협력의 진화>(1984)에서 소개했다. ‘팃포탯’의 원칙은 간단하다. 상대방에게 기본적으로 호의적이고, 이후에는 받은 대로만 명료하게 돌려준다. 상대방이 한 번 배신했다 치면 한 번만 응징하고 이후에는 관대하게 뒤끝 없이 용서하고 다시 협력의 문을 열어놓는다.


반대로 복잡한 음모나 불신에 바탕을 둔 프로그램들은 오히려 승률이 낮았다. 한 번이라도 배신당하면 끝까지 응징하는 ‘프리드먼’, 상대방이 배신할 확률이 높다는 계산이 서면 먼저 뒤통수 쳐서 이익을 챙기는 ‘다우닝’, 상대방의 신뢰를 얻다가 느닷없이 배신하는 ‘트랜퀼라이저’ 등은 승자가 되지 못했다.


액설로드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반복적인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네 가지 방법을 충고한다. ‘질투하지 마라. 먼저 배반하지 마라. 협력이든 배반이든 그대로 되갚아라. 너무 영악하게 굴지 마라.’ 사랑과 자비로 아울렀어야 할 듯한 세 번째 문장을 제외하면 설교나 설법의 한 부분이라고 해도 괜찮을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앞의 이익에 흔들린다. 재산을 둘러싼 형제자매 간 암투가 기업을 산산조각 낸 사례가 부지기수인데도 ‘호구는 되지 않겠다’며 역사를 반복한다. 얄팍한 상술로 온라인에서 그럴듯하게 치장한 물건을 팔다가 들통나서 분노의 소비자 폭격을 받는 사례는 잊을 만하면 다시 나온다. 


선의를 믿고, 꾸준히 진심으로 바르고 느린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들 보기엔 ‘호구’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진짜 이기는 사람들은 그런 호구들이다. 이들이 오랜 시간에 거쳐 얻는 ‘사회적 신뢰’라는 자산만큼 귀한 게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앞에서 말한 맘씨 착한 지인은 몇 년 뒤 독립해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는 전문가로 살고 있다. 그를 호구로 봤던 사장네 회사는 업계에서 잊혀졌다. 그걸 보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의 실패에 초조해하며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한국어 문장은 끝까지 읽어봐야 아는 것처럼 인생의 결론도 오랜 시간이 지나봐야 안다.


<최민영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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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우리집에 연탄을 땠어요. 근데 연탄을 때니까 방이 아주 따뜻하고 나무를 안 해와도 돼서 힘이 덜 들었어요.”

연탄이라니. 갑자기 왜 연탄 얘길 하실까. 지난 4월29일 삼성백혈병 산재사망자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64)를 인터뷰하던 중이었다.

황씨는 2007년 삼성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던 둘째 딸을 잃고 10년 넘게 삼성을 상대로 싸웠다.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더 희망이 있겠다는 만류와 돈 뜯어내려는 수작이라는 조롱 등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황씨는 재판에서 삼성을 이겼다. 과학과 의학과 법률의 논리로 중무장했던 삼성은 황씨의 질긴 투쟁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삼성의 거액 회유를 뿌리치고, 삼성직업병피해자들을 위한 인권단체 ‘반올림’을 만들어 삼성으로부터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 약속도 받아냈다.

보상도 사과도 끝났지만, 황씨는 속초에서 택시운전을 하다 ‘일’이 있을 땐 전국으로 달려간다. 지난 4월28일엔 마석 모란공원에 갔다. 태안화력발전소 산재사망자 김용균씨의 추모조형물 제막식에 참석했다. 세계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이기도 했던 이날 황씨는 마이크를 잡고 “우리 정부는 정신 차려야 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노동자가 직업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정부가 그런 기업을 처벌하긴커녕 상을 주고 세금을 수천억원씩 깎아줍니다. 학교에서 노동자 교육은 시키지도 않고 기업에서 일하라고 합니다. 노동자는 안 죽으려야 안 죽을 수가 없고 안 다치려야 안 다칠 수가 없습니다.”

산업재해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모임 ‘다시는’ 만든 세 부모. 특성화고현장실습 피해가족모임의 김용만씨,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반올림의 황상기씨. 김용만·김미숙·황상기(왼쪽부터)씨가 지난 4월29일 함께 걷고 있다. ‘산업재해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을 만든 세 사람은 전날 경기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김용균씨 추모 조형물 제막식과 2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국회의원들과의 이야기마당에 함께했다. 김영민 기자

29일엔 국회에서 열린 ‘산재·재난참사 유가족이 기업책임강화 법안발의 의원들과 함께하는 이야기마당’에도 참석했다. “이런 자리 하는 걸 우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업과 정부가 노동자를 핍박하고 압박하고 병들고 죽게 만들어서…. 우리 아들·딸들이 더 이상 병들고 죽지 않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올림’의 이상수 활동가는 “사실 아버님이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했다. 삼성과의 합의 이후 마치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이 온몸이 통증을 쏟아내고 있다고 했다.

궁금했다. 아무리 좋은 세상이 와도 그의 딸은 살아돌아오지 않는다. 딸의 죽음을 많은 이들 앞에서 계속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부모에겐 참기 힘든 고통이다. 게다가 야박한 인심은 자식을 잃은 아비도 조롱하고 모욕한다. 그가 이제 자신만의 평안을 추구한다고 해도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을 굳이 감내하며, 그가 남의 자식들을 위해 나서는 이유가 정말 궁금했다.

황씨가 꺼낸 대답은 ‘연탄’이었다. “근데 그 연탄이란 것은 광산노동자들이 자기 목숨을 다 바쳐서 캐낸 거잖아요. 제가 택시운전을 해서 먹고살 수 있었던 것도 누군가가 비포장도로에 포장을 깔끔하게 해줬기 때문이에요. 여태껏 살면서 나는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받고 살아왔거든요. 그럼 나도 다른 노동자들, 미래의 노동자들에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야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겨울 황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이 너무 소년 같아서 놀랐다. 나쁜 일이라곤 당해본 적이 없는 듯한 해사한 얼굴로 그는 딸의 죽음을, 다른 이들의 생명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 맑은 얼굴의 이유를, 자기 몸이 아파가면서도 계속 목소리를 내는 이유를 이번에 만나고서야 알았다. 황상기씨는 연탄 한 장의 따뜻함을, 그 따뜻함 뒤에 숨은 수고로움을, 그 수고로움 뒤에 스러진 많은 생명을 몸에 새기고 살아가고 있다.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건강한 존재들.” 황상기씨, 그리고 그와 손잡은 ‘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의 가족들이 모두 안녕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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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한국일보는 경북 경산에 있는 ‘작은 교회’ 이야기를 전했다. 유명건축가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신도가 30여명뿐인 하양 무학로 교회를 무료로 설계해 주었다는 가슴 따뜻한 내용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크게 짓기만 하는 대도시 대형교회와 달리 단층으로 작게 지어 교회 본연의 역할을 강조했다는 점도 덧붙였다.

내 담당 분야에 이런 좋은 기사거리가 있었는데 몰랐다는 자책과 함께 기사를 읽는데 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승 대표가 설계비를 제외하고도 교회 건축비가 턱없이 모자랐는데 주변의 도움으로 빚 없이 완공할 수 있었다는 부분이었다. 도움을 준 이웃 명단에는 ‘경쟁 관계’인 경북 은해사도 있었다.

은해사 주지 돈관 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돈관 스님은 “뭐 그런 걸 다 물어보냐”며 “근처에 어려운 교회가 있어 돈을 조금 보탰다. 나도 하느님께 복 한번 받아보려고 했다”고 답했다. 시쳇말로 참 ‘쿨’한 반응이었다. 그 교회 목사님과는 그 이전부터 교류하며 지내던 사이라고도 말했다. 종교를 담당하면서 쿨한 성직자를 많이 만났다. 불교 조계종 스님들도 적지 않다. 다른 종교와 종단에도 항상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사회 문제를 두고 발언하는 데도 거침없는 분들이 많다. 스님 개개인의 성품도 있겠지만, 불교 특유의 열린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스님들의 ‘쿨’한 성품이 작용하지 않는 대상이 있다. 조계종 내부에 만들어진 노조(조계종 노조)다. 특히 조계종 총무원에서 보직을 맡고 있는 스님들은 노조의 존재 이유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종무원들로 이뤄진 조계종 노조는 지난달 4일 전 총무원장인 자승 스님을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자승 전 총무원장이 재임 시절 승려노후기금 마련을 위해 생수 판매 사업을 하면서 5억원 이상을 특정인에게 빼돌려 종단과 사찰에 손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 3월18일에는 총무원이 단체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며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구제신청을 냈다. 종단의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현 총무원장 원행 스님을 ‘사용자’로 명기했다.

노조의 ‘공격’에 조계종 총무원은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지난달 5일 조계종 노조 지부장을 비롯한 핵심 간부 3명을 대기발령했다. 그것만으로 모자라 같은 달 10일 ‘산불복구 지원’이란 명목하에 이들을 강원도 낙산사로 전보 조치했다. 일반 기업들이 노조를 압박할 때 쓰던 방식과 다르지 않다.

스님들은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지난달 1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원행 스님은 “이익을 창출하는 집단도 아닌데 (민주노총 산하) 산별노조에 가입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정서가 깔려 있다”고 말했다. 기획실장 오심 스님은 “각 사찰에 가보니 무슨 불교에서 노조냐고 의아하게 생각한다”며 “(사찰)분담금 내지 말고 종무원 없이 운영하자는 말까지 나온다”고 전했다. 

스님들이 모든 노조에 화를 내는 것은 아니다. 국내 최장기 분쟁사업장이었던 콜텍의 노사가 13년 만에 합의하기까지 조계종은 노조에 큰 힘을 보탰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는 2012년부터 콜텍 해고노동자들과 연대했고 지난달 22일 콜텍 노사가 합의할 때도 함께했다. 조계종이 발행하는 불교신문은 지난달 27일 이인근 금속노조 콜텍 지회장이 조계종과 사회노동위원회 스님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고 보도했다. 조계종이 자랑하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다. 스님들은 ‘많은 혜택을 받는 종교단체의 종무원’이 만든 노조와 ‘해고 노동자’들이 만든 노조는 다르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도 노조의 업무는 같다. 노조는 임금인상이나 복지확대 외에도 하는 일이 많다. 그중에는 사용자의 전횡을 견제하고 일터의 건전성을 지키는 일도 포함된다. 종단 내부의 노조도 쿨하게 대하는 스님들을 보고 싶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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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에서 맛보게 되는 최초의 달콤한 경험은 바로 호텔 문을 열고 들어설 때라고 말했다. 낯선 이들이 환영해주는 경험은 ‘삶의 생생한 안정감’을 제공한다. <여행의 이유>에서 그는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지 않고 안전함을 느끼는 순간을 그리워하는데, 그 경험은 호텔이라는 장소로 표상되어 있다”고 말한다. 

한편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 ‘19호실로 가다’의 주인공 수전에게 호텔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곳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을 꾸리지만 수전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느낀다. 그에게 집이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이 쉼 없이 요구되는 돌봄의 공간일 뿐이다. 수전은 오로지 홀로 되기 위해 런던의 후미진 호텔을 찾는다. 

지난 주말, 내게 호텔은 생의 안정감을 확인하게 해주는 곳도,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물론 낯선 이들에게 환영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조건이 정해진 환영, 반쪽짜리 환영이었다. 그곳은 차라리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인 차별과 배제의 장소였다. 

높은 층수, 뛰어난 전망을 자랑한다는 서울 도심의 한 호텔에 묵기로 한 것은 딸아이 생일을 맞아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놀이공원 근처에 위치한 호텔이어서 정한 곳이었다. 하지만 체크인을 하는 순간부터 기대는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환한 미소의 직원은 전망 좋은 라운지를 투숙객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단서를 붙였다. “단, 만 12세 미만 아동은 출입 금지입니다.” 물론 홈페이지의 화려한 소개글에 그런 문구는 없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그곳에 있기 부적절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모든 투숙객”에 우리는 포함될 수 없었다. 대신 근처 아쿠아리움 이용권을 지급했지만, 어쩐지 “이거 줄 테니 나가주세요”란 뜻으로 들렸다. 

‘부적절한 사람’이 된 경험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이와 함께 호텔 수영장을 찾았다. 그곳에선 거의 추방당할 위기에 놓였다. 수영장 옆 사우나에 아이는 들어갈 수 없다는 거였다. 대신 작은 샤워실에서 간단한 샤워는 가능하다고 했다. 비좁은 샤워실에서 불편하게 아이를 챙기고 짐정리를 하고 있자니 더부살이하는 군식구가 된 느낌이었다. 

인류학자 김현경식으로 말하자면 그곳에서 나와 아이는 순간 ‘그림자’가 사라져버린 사람이 됐다. <사람, 장소, 환대>에는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 나오는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김현경은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환대와 장소를 꼽는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는 묻는다.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게 아닐까?”

그날 호텔은 나에게 생의 안정감이 아니라 불안정감을 확인하는 장소였다. 우리 사회에서 아이란 ‘미성숙한 인간’으로서 특정 장소에서 배제되고 추방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또 ‘나의 진정한 사회적 위치’를 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아이를 동반한 부모’로서 나 역시 배제·추방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 말이다. 그곳에서 나와 아이는 조건부 환대를 받는 ‘이등 시민’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 이번 경험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의식과 무의식에 자국을 남길지 두렵다.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합헌 의견을 낸 두 명의 재판관은 “우리 모두 태아였다”고 말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뿐 아니라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경제적 조건, 국가의 책임에 대한 고민 없는 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말을 바꿔 말해보자.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아이를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취급하고 배제하는 사회, 이 사회가 과연 아이가 태어나 온전한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인가.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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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생인 한 회사 후배와 대화를 하다 흠칫 놀란 적이 있다. “저는 영화 잘 안 봐요. 유튜브에 가면 짧게 짧게 설명해 놓은 영상들 있어서 그걸 봐요. 몇 시간 동안 어떻게 봐요.” ‘아 그렇구나!’


입사 16년차인 나에게 그는 ‘요즘 후배’의 기준이다. 그는 센스 있고 합리적으로 일하며 제 몫을 해낸다.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지만 선이 확실하고 끈적한 관계보단 산뜻한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개인차는 있겠으나 대체로 9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에겐 비슷한 특징이 엿보인다.

이런 90년대생이 한꺼번에 우리 팀에 몰려왔다. 영상 제작을 함께할 인턴PD가 합류한 것이다. 앞으로 이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고, 이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90년대생이 온다>라는 책을 읽었다. 258쪽에 나온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트위터 멘션. “망연자실한 리서치 결과 십대들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로 두 시간 동안 휴대폰을 꺼놔야 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1위를 차지했다. 나는 영화의 적이 휴대폰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16년 전엔 나도 신입이었다. 입사 2년차쯤, 당시 15년차였던 한 선배가 신입인 나에게 적잖이 당황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거침없고 직선적이었다고. 이제 추억을 곱씹는 선배가 됐지만 말이다. 앞에 언급한 책에 채현국 선생님(효암학원 이사장)의 발언도 인용되는데, 채현국 선생님은 2014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가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라고 했다. 나이가 들고 ‘아비’가 된 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거늘 이런 가차 없는 말씀이 야속하기도 하다.

그런데 잠깐 뒤집어 보면 그리 섭섭할 일은 아니다. ‘아비’는 이미 많이 누리고 많이 가졌다. 많이 도전했고, 실패했으며 성공했다. 연륜이 나이테처럼 켜켜이 생겨나는 사이에 어쩌면 현실에 만족하며 변화에 소극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썩는다’는 채현국 선생님의 표현을 아프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고민을 들어주고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아비’가 되는 것. 어쩌면 ‘아비’로 생존하는 것은 걸음마를 시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다. 어쩐지 선배 세대가 억울하다고? 아니다. 90년대생도 언젠가 ‘아비’가 된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른다.

어른됨을 고민하다가 생각의 끝은 신문에 이른다. 신문은 올드 미디어다. 레거시 미디어, 트래디셔널 미디어 등 올드 미디어를 부르는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어쨌든 뉴미디어는 아니다. 우리는 열심히 달려왔고 유튜브를 위시한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에도 달리고 있지만 어느새 늙어버렸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잠깐 뒤집어 보면 레거시 미디어는 이미 많이 누리고 많이 가졌다. 많이 도전했고, 실패했으며 성공했다. 노하우가 축적되는 사이 지금의 방식에 안주하게 되고 도전정신은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올드 미디어에 쏟아지는 비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가치 있는 언론으로 남는 것은 미디어 스타트업보다 더 어려울 것 같다. 앞으로의 시대에 신문은 ‘아비’가 아니라 다시 태어난 ‘아들’을 자처하고, 과감한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혁신이 그렇게 쉽냐고? 아니다. 그렇지만 변화의 타이밍이 언제인지 고민하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이미 미디어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조직이든 개인이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정답을 제시해 줄 초인은 없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아비’와 ‘아들’이 함께 만들어갈 뿐이다. 이제 90년대생 인턴들이 쓴 뼈 때리는 콘텐츠 분석 보고서를 더 읽어 봐야겠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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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의 노래 속 ‘잡초’는 이름도, 꽃도, 향기도, 손도, 발도 없다.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존재다. 여자농구 청주 KB스타즈를 우승으로 이끈 안덕수 감독은 ‘잡초’라 불렸다. 아무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갖고 있는 걸 잘 몰라서다. 한국 사회에서 인물을 평가하는 첫번째 요소인 ‘학연’과 ‘지연’을 갖추지 못했다.

경기 화성시 봉담면 와우리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덩치가 컸다. 주변의 권유로 농구공을 잡았다. 매산초등학교와 삼일중을 거쳤다. 중3 시절 전국대회에서 펄펄 날았고 우승을 따냈다. 안 감독은 “옛날 기억은 항상 좋은 일만 남기지만 같은 학년에서 우리 친구들을 이길 선수는 없었다. 다 한 수 아래였다”고 했다. 같은 학년 동기들은 얼마 뒤 불기 시작한 ‘농구대잔치 열풍’의 주인공이 됐다. 전희철과 김병철이 한 학년 위, 양희승과 서장훈, 추승균 등이 동기였다. 

우승 뒤 일본으로 친선경기를 하러 갔다. 그곳에서 일본 고교(하쓰시바고)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농구공은 잘 다뤘지만 일본어는 몰랐다. 이미 같은 재단의 삼일상고 진학이 예정돼 있던 터였다. 농사짓던 아버지가 말했다.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1989년 당시 일본과의 경제적 격차는 상당했다. 운동 선수에게 짐 싸는 일은 익숙했지만, 말 한마디도 안 통하는 곳은 낯설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첫 반년 동안 죽도록 고생했다. 말이 안 통하니 그곳에서야 말로 ‘잡초’였다. 안 감독은 “그래도 나중에는 일본 후배들이 형제처럼 잘 따랐다”고 했다.

고교 졸업 뒤 일본의 규슈산업대에서 월 10만엔씩 장학금을 받으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대학 졸업 무렵, 한국에도 ‘프로농구’가 생겼다. 삼성에 입단했지만 그를 위한 자리는 넓지 않았다. 습관성 어깨 탈구도 발목을 잡았다. 선수생활이 일찍 끝났다. 대학농구연맹 사무국장을 지내다 2007년 일본 여자프로농구 샹송화장품에서 코치 제의를 받았다. 당시 일본 여자 농구는 한국 농구에 뒤져 있었다. 아내와 아들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낯선 곳을 향한 또 한 번의 도전이었다. 9년 동안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일본 농구는 한국 농구에 역전했다. 그사이 안 감독도 일본 농구가 가진 시스템의 힘을 온몸으로 배웠다.

2016년 초 KB스타즈의 감독 자리가 비어 있었다. 많은 ‘국내 농구인’들이 그 자리를 노렸다. 학연·지연은 물론 여러 가지 ‘인연’을 동원해 관심과 욕심을 전했다. 안 감독은 여기저기 줄을 대는 대신 당시 챔피언이었던 우리은행의 챔프전 경기를 보러 다녔다. 안 감독은 “경기를 보면서 배우는 게 많았다”고 했다. KB스타즈는 팀 분위기 쇄신을 원했다. WKBL 출범 뒤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인연이 없는 ‘잡초’가 적격이라는 판단이었다. 구단 관계자가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샹송화장품을 설득했다. 감독직을 고사했던 안 감독은 “3년을 기다려달라는 게 내 수락 조건이었다”고 했다.

감독 첫해 드래프트에서 박지수를 지명할 수 있었던 것은 운명 같은 행운이었다. ‘잡초’로 지낸 지난 세월은 소통 능력을 키웠다. 일본어 한 글자를 모르고도 살아남았다.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뜻을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선수들은 “감정 표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게 오히려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긴박한 순간 복잡한 언어보다 솔직한 표정이 더 정확하게 뜻을 전하기 마련이다. 화려한 꽃과 향기로 속이는 대신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잡초의 힘이다. 한국 여자 농구 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던 정선민을 FA로 데려오고도 하지 못했던 우승을 약속했던 3년 만에 결국 해냈다.

중3 때 일본을 가지 않았더라면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을지 모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안 감독은 “그래도 일본으로 갔을 것”이라고 했다. “온실 속 화초는 보는 사람이 즐겁지만 끈질긴 잡초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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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몰아친 밤이었다. 바람은 시뻘건 불씨를 사방으로 날랐다. 불은 바람을 타고 ‘도깨비불’처럼 삽시간에 번졌다. 그날 밤은 모두 쉬이 잠들지 못했다. 노모는 대처로 나간 자식의 안부가, 농부는 창고에 쌓아놓은 못자리가 걱정이었다.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낳았지만, 손쓸 틈도 없이 들이닥친 화마를 피해 집을 빠져나오느라 도리가 없었다.

강원 일대를 휩쓴 산불이 일어난 밤을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14년 전 ‘양양 산불’이 일어난 날이다. 주민들에게는 양양에서 시작된 산불이 강풍을 타고 번져 천년 고찰 낙산사가 한순간에 무너지던 모습이 떠오른 밤이었을 테다. 이번에도 주민들은 큰불에 밤새 마음을 졸였다. 그나마 하루 만에 불길이 잡혔다. 단시간에 최대 규모의 소방력을 투입해 불과의 사투를 벌인 결과였다. 소방당국은 산불 발생 2시간여 만에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덕분에 서울양양고속도로는 전국에서 출동한 소방차들이 밝힌 경광등으로 훤했다.

정부의 대응 체계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예정된 일정을 취소하고 화재 현장을 찾아 주민을 만났다. 임기를 하루 남긴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임식을 취소하고 현장을 지키다 진영 후임 장관에게 임무를 인계했다. 화재 다음날 정부는 피해지역인 고성과 속초, 강릉, 동해, 인제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4일 오후 7시17분쯤 강원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일대에서 발생한 산불이 확산되며 불길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이날 불은 원암리의 한 주유소 맞은편 도로변 변압기가 터지면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길이 속초 시내 쪽으로 번지며 고성·속초지역 콘도 숙박객과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려져 긴급 대피하는 등 밤새 큰 혼란이 빚어졌다. 이 불로 오후 11시30분 현재 1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소방청은 재난 대응 최고 수준인 ‘대응 3단계’를 발령하고, 전국의 소방차를 속초지역에 지원토록 조치했다. 연합뉴스

재난을 당한 국민이 정부에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었을까. 당장 피해를 줄일 순 없지만, 정부가 국민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 말이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 시스템의 붕괴를 목격했다. 이는 재난에 대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9·11 사태를 겪은 미국인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은 전적으로 국가의 대응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번 산불 진화에도 시민의 힘이 빛을 발했다. 사람들에게 산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일조했던 건 소셜미디어(SNS)에 시시각각 올라온 현장 사진들이었다. SNS에서는 목줄에 묶인 탓에 불길을 피하지 못해 털이 검게 그을린 강아지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 주민은 화재 현황 지도를 만들어 정보를 공유했고, 펜션을 운영하는 숙박업자는 빈방을 기꺼이 내주었다.

하지만 큰불에 너나없이 마음을 쏟고 있는 동안에도 정치권은 ‘네 탓’ 공방을 벌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페이스북에 “촛불 좋아하더니 온 나라가 산불, 온 국민은 화병”이라고 썼다. 자유한국당 민경욱 대변인은 페이스북에 “왜 이리 불이 많이 나나”라는 글을 올렸다가 비난이 빗발치자 게시글을 삭제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철수 속초시장은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가 산불 현장을 지키지 못하는 바람에 논란의 중심에 서야 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저자 레베카 솔닛은 이러한 상태를 ‘엘리트 패닉’이라 칭한다. 그는 엘리트 집단으로 대표되는 정부와 관료조직은, 재난 앞에서 스스로 혼란 속에 빠져든다고 했다. 그는 “재난은 사회적 요구를 증폭시키고 새로운 집단에 힘을 부여하는 한편, 정부의 조직적·행정적·도덕적 결함을 노출시킴으로써 정치제도에 부담을 준다”고 지적했다. 

시민들이 재난에 맞서 새롭게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타주의를 발휘할 때, 정부는 스스로의 권위를 지키고, 무능을 숨기고자 거짓을 말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대형 재난은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하는가?’ ‘인간 본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재난 뒤에는 취약한 사회 시스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평상시에는 잘 보이지 않던 인간 본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재난을 모두 예방할 수는 없다. 같은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대응책을 세울 수 있을 뿐이다. 내년 강원도의 봄날엔 새까만 재가 아닌 벚꽃잎이 날렸으면 한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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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이맘때 서울 사대문 안에서 분신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이제는 경희궁자이아파트가 들어선 돈의문 재개발지역에서다. 일식집을 하던 고모씨(당시 67세)는 2016년 4월12일 15년 된 자신의 식당이 강제철거되는 현장에서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의 가게가 있던 새문안의 ‘맛집 골목’엔 조선시대 골목의 흔적과 1920년대 한옥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2003년 뉴타운 지역에 편입되면서 전부 헐려 근린공원이 될 운명이었는데,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인 2015년 서울시가 용도를 문화시설로 바꾸기로 했다. 토지와 건물을 재개발조합으로부터 기부채납받기로 하고 ‘돈의문박물관마을’ 조성을 추진해 2017년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근린공원이 되면 종로구로 넘어가게 돼 있던 토지 소유권을 놓고 시와 구가 협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사업이 지지부진했다. 예술가들에게 기획전시 공간으로 내줬지만 관람객이 오지 않아 ‘유령마을’이란 오명까지 얻었다. 결국 시는 땅 문제는 해결이 안된 채로 지난해 10월 민간에 긴급 용역을 내서 운영주체를 뽑았다.

서울시는 서울 종로구 경희궁 옆 골목 안쪽에 위치한 ‘돈의문박물관마을’을 새롭게 꾸며 3일 공개했다. 최미랑 기자  

“전면 철거하는 재개발을 반성하고 재생의 관점에서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문화마을로 만들고자 했다.” 3일 서울시가 새로 단장한 돈의문박물관마을을 공개하며 밝힌 취지다. ‘근현대 100년, 기억의 보관소’를 콘셉트로 잡았다. 

건물들을 신축·리모델링하는 데는 총 300억원이 들었고 운영엔 연간 25억원이 든다. 사라질 뻔한 공간을 지켜낸 만큼 어떻게 다시 꾸몄을지 기대가 컸다. 그런데 이날 공개된 마을을 둘러보니 내용이 참담했다. 보존한 건물 40채 중 16채를 ‘마을전시관’으로 만들었다. 그중 ‘생활사전시관’에는 연탄과 비누, 빨래판과 아궁이 같은 것들을 모아뒀다. 사진관, 이발소, 오락실, 만화방, 구락부(클럽)도 엉성하게 재현했다. ‘새문안극장’에서는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맨발의 청춘>이 상영됐다. 1970년대 교복을 입은 도슨트(관람객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가 “추억의 감성을 느껴보시라”고 강조하는 동안 골목길에선 1990년대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또 한옥을 살려 만든 ‘체험전시관’에선 닥종이·자수·한지공예 등 체험수업을 한다. ‘아날로그 감성’을 억지로 짜내는 듯한 공간과 프로그램들이었다. ‘인위적인 테마파크 이상의 의미가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담당 공무원은 “건물들이 남아있는 것 자체로 시민들에게 의미가 클 것”이라고 답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 ‘마을전시관’에 새롭게 꾸며진 ‘새문안만화방’(왼쪽)과 ‘돈의문콤퓨타게임장’. 서울시는 “스마트폰 터치가 아닌 조이스틱으로 게임을 하고, 웹툰 대신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아날로그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며 “부모와 아이가 함께 꼭 가봐야 할 장소로 추천한다”고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최미랑 기자

재개발에 밀려난 세입자들에게 시는 2015년 “편의시설을 들이게 되면 특별분양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업종보다는 ‘콘셉트’에 맞는 것을 들일 생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미 뿔뿔이 흩어져 자리 잡은 상인들이 과연 이곳으로 되돌아올까. 시는 ‘살아있는 참여형 공간’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삶이 밀려난 자리에 중구난방으로 과거의 생활을 박제해 놓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최미랑 | 전국사회부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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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대형마트·백화점·슈퍼 등에서 비닐봉지 사용이 일제히 금지된 이번주, 공교롭게도 두 장의 사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나는 이탈리아 해안에서 발견됐다는 향유고래. 날카로운 이빨을 자랑한다는 이 고래의 모습은 처참했다. 지난 주말 이탈리아 해안에서 발견된 8m 길이의 고래 배 속엔 무려 48.5파운드(22㎏)의 쓰레기가 담겨 있었다. 상표 및 바코드가 붙은 세제 용기를 비롯해 접시, 쇼핑백, 낚싯줄 등이 나왔다. 이 암컷 고래는 새끼도 배에 품고 있었다.

또 다른 사진은 최근 국내 한 미술관에 걸린 사진작가 크리스 조던의 ‘앨버트로스’다.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그가 태평양 ‘미드웨이섬’에서 찍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새’ 앨버트로스는 불행하게도 인간의 탐욕과 대량 소비가 불러온 재앙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어미 새는 독약인 줄도 모른 채 주워온 플라스틱을 아기 새에게 먹이고, 죽은 앨버트로스의 배에는 각종 플라스틱 조각들이 가득 차 있다. 슬픔을 넘어 죄책감, 그리고 분노마저 불러일으킨다.

플라스틱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부쩍 국내외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썩지 않는 쓰레기를 품을 수 있는 생태계의 임계치가 넘은 듯 여기저기에서 자연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플라스틱의 폐해가 무서운 것은 최후의 피해자는 인류가 될 것임을 누구나 짐작하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은 벨기에 출신의 미국 화학자 리오 베이클랜드가 1909년 발명한 이후 세계대전을 거치며 급격히 생산량이 증가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지난 65년간 플라스틱은 83억t 생산됐고, 이 중 63억t이 쓰레기로 버려졌다. 

특히 방치된 플라스틱이 잘게 쪼개져 생긴 미세플라스틱은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불과 6~7년 전만 해도 이름조차 낯설었던 미세먼지가 현재는 일상적인 환경피해가 됐듯 몇 년 후면 미세플라스틱에 대한 공포로 해산물을 마음놓고 못 먹게 될지도 모른다.

플라스틱으로 인한 해양 생태계 오염이 심각해지면서 결국 각국 정부도 나서고 있다. 유럽의회는 2021년부터 나이프·빨대·면봉 막대·접시 등 플라스틱으로 만든 10개 종류 일회용 제품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지난주 가결했다. 찬성이 560표로 반대 35표, 기권 28표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법안은 또 2029년까지 플라스틱병의 90%를 재활용하고, 2025년부터는 플라스틱병 제조 시 재생 플라스틱을 25~30% 포함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도 담았다.  

미국의 경우 주정부 차원에서 움직임이 감지된다. 뉴욕주는 캘리포니아에 이어 두번째로 내년 3월부터 소매점에서 일회용 비닐봉지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 다음달 의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이 법안은 각 카운티가 종이봉투를 유료화하는 방안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요즘 한국에서도 비슷한 소식이 들린다. 지난해 중국이 폐비닐 수입금지를 결정하면서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가 일상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플라스틱 쓰레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재사용률을 끌어올린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이제 쇼핑하러 나서기 전 장바구니를 꼭 챙긴다. 기업체들의 과대포장 문제는 제쳐놓고 일반 시민들만 다잡는다는 불만도 들린다.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과대포장을 우선 단속하고 비닐봉지 대체재를 만들어 보급하는 게 더 좋았을 법하다. 그러나 플라스틱 생산과 소비의 주체는 다름 아닌 우리 모두이다. 과대포장도 따지고 보면 보기 좋고 깨끗한 상품을 원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한 물건은 폐기도 인간이 해야 한다”는 한 환경운동가의 말처럼 이제는 누구라도 나서야 할 때이다.

<문주영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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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한 통 썼다. 편지의 형식을 빌린 인터뷰 요청글이었다. 한번은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보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마음을 먹는 일이 쉽지 않았다. 연락처를 알아내고도 하루를 꼬박 망설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인터뷰를 청하는 이유를 적은 뒤 최근에 쓴 몇 건의 인터뷰 기사를 덧붙였다. 일로 쓰는 모든 글이 다 어렵지만 이 글이 근래에 쓴 어떤 글보다도 쓰기 힘들었다. 읽고 또 읽으며 몇 글자를 붙였다 뗐다 한 끝에 전송을 눌렀다. 편지를 보낸 지 11시간쯤 지나서 답을 받았다. 편지의 수신인은 세월호 사건 희생자의 유가족이다.

‘비겁하다’는 말이 제일 두렵다. 그건 내가 비겁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지난 삶을 돌아보면, 나는 정면승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힘들고 어렵고 골치아픈 일은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 같다. 꼭 해야 할 말, 꼭 해야 할 일도 빙빙 돌리고 미루다가 타인에게 더 상처를 주고 폐를 끼치는 일도 많았다. 가끔 강심장 같다는 평을 들을 때가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정말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중요한 거의 모든 순간에 실은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나의 ‘비겁의 역사’는 길고도 길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것은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태도였다. 2014년 4월 이후 몇 달간은 대한민국의 모든 기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세월호 사건을 취재했다. 매일 화가 나 있었고 기사를 써도 써도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맡았던 취재가 끝난 뒤에는 의식적으로 세월호 사건을 피해 도망다녔다. 저 엄청난 분노와 슬픔 속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반복해서 다짐했다. 세월호 관련 기록을 정리한 여러 권의 책들도 쌓아만 두고 한 장도 읽지 않았다.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 앞을 여러 번 지났지만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팽목분향소 앞 자갈밭에 놓여 있는 노란 조약돌. 색이 바래고 글씨가 희미해져 가고 있다. 서성일 기자

그러나 도망다닌 5년 동안 세월호 사건에서 조금도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좋아하는 책과 영화와 노래의 모든 슬픈 서사가 창작자의 의도와는 달리 세월호의 이야기로 읽혔다. 책을 읽다 말고 영화를 보다 말고 노래를 듣다 말고 우는 것도 아닌, 울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로 몇 번을 멍하니 있었다. 누군가 ‘골든타임’이라는 표현을 쓰면 명치 끝이 아팠다. 2016년 늦가을,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서 촛불시민들 사이로 세월호 유가족들이 탄 차가 들어섰다. 시민들은 경찰에게 길을 열라고 외쳤지만, 노란 리본을 단 그 차를 본 순간 내 목소리는 꽉 막혀버렸다.

2019년 4월, 지금 책상에는 세월호 관련 책과 자료가 수북이 쌓여 있다. 인터뷰를 청한 기자가 비겁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기꺼이 자신의 아픔을 들려주기로 결심한 분을 만나기 위해, 그동안 외면하려 애썼던 깊고 어두운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작가들의 글을 모은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작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신형철씨는 2014년 이렇게 썼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그는 지난해 펴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서문에선 이렇게 썼다. “아이들이 가라앉는 걸 본 이후 한동안 나는 뉴스를 보며 자주 울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괴로워 피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눈물도 멈췄다. (중략) 이런 일들을 겪고 나는 무참해져서 이제부터 내 알량한 문학공부는 슬픔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사건을 말하는 것은 두렵고 아프다.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어쩌면 100년 뒤에도 이 사건이 남긴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준비한다. ‘쫄보’가 될지언정 더 이상 비겁하게 살지 말자는 마음으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는 최소한의 도리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모두가 침몰한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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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마다 돌아오는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재평가를 앞두고 결국 사달이 났다. 전국 43개 자사고 중 올해 재평가 대상은 22개. 이 중 13개 자사고가 모여 있는 서울에서 자사고 교장 22명이 지난 25일 모여 “재평가를 전면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서울 유일의 광역 자사고인 하나고를 제외한 22개 자사고가 모두 참여한 선언이니 현재대로라면 서울시 자사고 재평가는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이튿날 열린 서울시교육청과 자사고들 간 간담회에서도 서로 입장 차이만 확인했다.

자사고들은 시교육청이 만든 평가 기준이 과거보다 지나치게 높다며 기준 완화를 요구 중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정당한 요구라고 보기 어렵다. 수험생이 출제자에게 “문제가 너무 어려우니 쉽게 내달라”고 요구하진 않는다. 세상에 그런 시험은 없다. 더욱이 자사고 재평가는 엄연히 교육법으로 규정된 법률행위다. 기본적으로 자사고가 그 평가 기준을 이유로 재평가를 거부할 대상은 아니라는 얘기다. 서울교사노동조합 등이 “재평가를 거부하는 것은 자사고 지정 요건을 위반하는 위법행위”라고 비판하고 나선 배경이다.

자사고가 무엇을 기대하고 집단행동에 나섰는지 단정하긴 어렵다. 정말로 시교육청이 평가 기준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자사고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워 민선으로 교육감직을 연임하고, 기회만 되면 자사고 폐지를 외쳐온 조희연 교육감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되면 속된 말로 ‘가오’가 빠져도 너무 빠지지 않나.

5년 전을 떠올려본다. 2014년에도 자사고 재평가가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14개 자사고가 평가를 받았고, 8개 학교가 기준 미달로 나타났다. 시교육청은 규정에 따라 해당 자사고에 대해 폐지 절차에 들어갔지만 교육부가 제동을 걸었다. 교육법에는 자사고를 취소하려면 교육부와 시교육청이 ‘사전 협의’를 해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는 자사고를 없앨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시교육청과 교육부의 법정 공방으로 번졌고, 지난해 대법원은 “사전 협의가 안됐으니 지정 취소를 하면 안된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시교육청이 진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올해 자사고 재평가 결과 발표 및 후속 조치는 연말쯤에나 이뤄진다. 그리고 내년엔 바로 총선이 있다. 일각에선 자사고들의 평가 거부 선언을 ‘제2의 한유총 사태’와도 비교하지만 뜯어보면 결이 많이 다르다. 한유총 사태는 학부모와 여론이 스스로 정부 편에 섰다.

자사고 문제는 다르다. 인생을 좌우한다는 대학 입시가 걸려 있는 문제다. 당장 자녀가 다니는 자사고가 일반고로 전환된다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학부모는 많지 않다. 지난해 학교 측이 스스로 원해 일반고로 전환한 대성고의 경우 아직도 전환에 따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유총 문제와 달리 자사고는 지역 민심과 여론을 동요시킬 휘발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선언문을 들고 나타난 22명의 교장과 그 뒤에 자리 잡은 사학재단들은 이를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려되는 점은 교육부의 침묵이 길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자사고 폐지를 공약으로 걸고 당선됐다. 시교육청이 재평가와 지정 취소를 강행했을 때 교육부가 5년 전처럼 딴지를 걸지 않아야 정상이다. 규모와 그 파급력을 봤을 때 자사고들이 집단 평가 거부에 나섰을 때 즉각 교육부가 나섰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여당 내에서도 누구는 자사고를 없애자 하고, 누구는 “우리 지역에만 없다”며 자사고를 달라고 한다. 내년 총선에 현 정부의 명운과 차기 대권의 향방까지 걸렸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자사고가 됐든 정부가 됐든 교육을 가지고 정치놀음하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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