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부터 취재 분야로 출판을 담당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매주 수많은 책 중에서 소개할 신간을 선정하고 서평까지 쓰는 것이다. 매일 회사로 배송되는 책들을 검토해 부 전체 회의에 올릴 리스트를 만든다. 출판사의 책 배송을 대행하는 업체가 붙여둔 스티커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출판사의 땀입니다. 희망을 선물해주세요.’ 전에는 누가 공짜로 줘도 안 읽을 제목을 가진 책이라도 다시 보게 만드는 마법의 문구다.

1차로 검토해 추린 책이 15~20권 정도가 된다. 문학과 학술을 맡고 있는 다른 기자들의 리스트를 합치면 다시 30여권이 된다. 이 책들을 놓고 문화부원들이 모여 회의를 한다. 먼저 출판 담당이 책의 주요 내용과 특이 사항을 설명한다. 길고 긴 회의 끝에 최종적으로 경향신문 지면에 소개될 책을 결정한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선택을 받은 책은 8~9권에 불과하다. 단신으로 소개하는 책까지 합쳐도 20권이 안된다.

부서 전체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고는 하지만 회의에 올라갈 책을 고르는 것은 순전히 출판 담당의 몫이다. 1차 검토에서 탈락한 책들은 대부분 다시 볼 일이 없다. 이러다 보니 출판 담당으로서 선택에 많은 부담을 느낀다. 혹시나 책을 고르는 눈이 부족해 좋은 책을 놓치지나 않을까 항상 불안하다.

책을 선정하고 서평을 써 송고한 후에는 불안감이 더 커진다. 경향신문의 신간 소개는 토요일자 신문에 나온다. 대부분 같은 요일이지만 몇몇 신문은 금요일자에 신간 소개 기사를 내보내기도 한다.

매주 금요일 아침이 되면 여러 신문을 볼 수 있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다른 신문부터 본다. 가끔은 새벽에 눈이 떠져 아직 나오지도 않은 지면을 찾아보곤 한다. 토요일에도 마찬가지다. 다른 신문의 출판 담당자들도 나와 비슷한 선택을 했다는 것을 확인해야 안심이 된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반드시 지면에 써야 할 책을 놓친 적은 없는 것 같다. 수준 이하의 책을 골라서 웃음거리가 되지도 않았다. 지면을 차지하는 비중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전체적으로 보면 비슷비슷한 책이 각 일간지의 선택을 받았다.

이렇게 한 달여를 보낸 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일간지들이 선택하는 책은 다 비슷비슷할까. 가장 ‘좋은’ 답이야, 모두가 가장 좋은 책을 골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그럴 일은 없다. 아주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취향이 갈리는 것이 책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은 사람, 정확히는 환경이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슷한 학력을 가지고 있고, 비슷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며, 비슷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독자에게 보이기’ 가장 좋은 책을 선택하려 한다면 비슷한 책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를 포함한 요즘 기자의 한계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하게 알고 있을지라도 사람이 자신이 자라왔고 현재도 살아가고 있는 환경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영역 밖으로 단 한발을 내딛기가 어렵다. 취재원에게 입으로는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기사에는 온전히 담지 못하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까치발을 딛고서라도 내가 몸담고 있는 구역 밖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필요하면 과감히 밖으로 나가보는 것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쉽지 않지만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지난 17일 신간 <판결과 정의>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김영란 전 대법관은 대법원 판결에 대한 책을 쓰는 이유로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또 “내 책을 읽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해줄 때 가장 고맙다”고도 했다. 전직 대법관이자 교수에게 기자의 가장 큰 덕목을 배웠다.

<홍진수 문화부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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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커리 코원은 브루클린 공원에서 막대기로 ‘무장’한 채 우리 아이 이턴 롱스트리트의 얼굴을 쳤다.” “잠시만요, 무장이라고요? 그냥 ‘가지고’ 정도가 좋겠군요.”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동명 원작을 영화로 옮긴 <대학살의 신>은 아이들 싸움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한 아이의 집에 모인 두 부부 이야기다. 처음에야 걱정과 위로, 사과의 말이 오가지만 이들의 논쟁은 결국 싸움으로 번져 서로의 본색을 드러낸다.

때린 아이의 아빠 앨런은 자신이 변호하는 제약회사가 발매한 혈압약의 부작용을 덮으려 한다. 교양이 넘치는 그의 부인 낸시는 대화 도중 연신 전화를 받는 남편에게 눈치를 주지만, 막상 자신의 명품가방이 내동댕이쳐졌을 때는 예의는 온데간데없다. 맞은 아이의 엄마 페넬로피는 ‘다르푸르 학살 사태’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다. 그러나 실상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고통보다는 낸시의 구토로 더럽혀진 절판된 화집이 더 걱정이다. 그의 남편 마이클은 수익만 좇는 제약회사를 비난하지만, 정작 가족 몰래 햄스터를 내다버린 사실이 들통나 낸시에게 도덕성을 공격받는다.

그렇다. 네 사람은 모두 배울 만큼 배운, 먹고살 만한 미국의 중상류층이다. 영화는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의 위선을 비웃는다. 여기에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아동 성폭행 혐의로 유럽에서 도피 생활을 하고 있는 로만 폴란스키라는 것을 더하면 씁쓸함은 배가된다.

새삼스럽지 않은 이 영화 얘기를 꺼낸 것은 여태껏 벌어지고 있는 조국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여러 논쟁들이 더 이상 진보·보수나 여야 등 이념이나 진영을 매개로 한 갈등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가진 자들이 부를 대물림하고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위선과 표변을 일삼는 ‘한국 사회 기득권자들에 대한 보고서’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모순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녀들이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월가 점령시위 등에서 불평등한 사회를 비판하며 울려퍼진 ‘우리는 99퍼센트다’ 구호에는 대다수의 분노가 집약됐다. 당시 최상위층인 1퍼센트에 대한 비판을 이끌었던 이들은 중상류층 지식인들이었다. 하지만 이젠 불평등 구조를 분석하려면 ‘중산층’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책임도 빼놓아서는 안된다. 경제학자 리처드 리브스의 책 <20 VS 80의 사회>의 관점을 빌려보자. 리브스는 기존 불평등 담론에서 벗어나 논의의 초점을 20 대 80의 사회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상류층은 인맥과 연줄을 통해 교육, 인턴, 고소득 일자리 등을 자신의 자녀에게 마련해주고 사회적 지위를 물려주려 한다”며 이를 ‘기회 사재기’라고 부른다. 이는 자녀 세대가 하위 계층으로 떨어지는 위험을 막아주는 ‘유리 바닥’이 된다고 했다. 반면 계층 하부에선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내가 리브스의 주장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지적한 상위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중상류층의 행태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된 현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 이미 커져버린 불평등의 간극을 좁히려면 나머지 80퍼센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강남 집값 잡기’보다는 차라리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서울시도 강남·북 균형발전을 핵심 정책으로 내세운다. 지난달 강남에 있는 인재개발원과 서울연구원,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강북 이전을 확정했지만 내부 구성원들의 반발이 심하다. 

이치는 간단하다. 불평등의 간극은 거저 줄지 않는다. 가진 자들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리브스의 친구처럼 “나는 평일에는 불평등 문제를 비난하고, 주말과 저녁에는 불평등 강화에 일조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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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수나 운동 선수가 외국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거나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을 때 국내 언론이 반드시 쓰는 기사가 이른바 ‘외신 반응’이다. 미국·유럽 등의 언론이 이 뛰어난 한국인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현지 기사를 찾아내 우리말로 풀어 소개하는 것이다.

외신의 평가를 기사로 작성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거둔 성공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다각도로 조명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기사는 동북아시아 변방 국가 특유의 감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일면식도 없는 남남이지만 같은 한국인이 서구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자랑스러워지는 것이다.

김연아는 기자들에게 수많은 외신 반응 기사를 쓰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힘차고 아름다운 연기로 피겨 스케이팅 최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김연아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에게 밀려 은메달을 획득했을 때였다. 김연아는 의연하게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그를 응원했던 한국 팬들은 판정이 불공정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집단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팬들의 분노가 얼마나 굉장했는지, 이 현상에 대한 외신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김연아가 은메달에 그쳤을 때 한국인들이 분노한 것은 놀랍지 않다”며 “오랜 세월 한국은 국제 대회 성적을 자부심과 결부했던 나라”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인들이 전쟁의 폐허와 가난을 딛고 폭발적 경제 성장을 이뤘음에도 여전히 자국을 ‘약소국’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OECD 경제 순위나 국제 스포츠 대회 성적, 노벨상 개수 등 정량화할 수 있는 성과가 한국의 위상을 높여주는 걸로 여긴다고 분석했다. 김연아의 은메달이 불러온 분노의 후폭풍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를 갈구하는 한국인들의 심리를 서구 언론에 드러내 보인 사건이 됐다.

그러나 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인을 응원하는 마음들을 모두 애국심이나 자격지심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해외에서 뛰는 한국인 운동 선수를 국가대항전에 출전한 국가대표 선수인 양 편파 중계하는 방송에 눈살을 찌푸리는 팬들도 많다. 사회가 바뀌고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인들의 해외 활약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해졌기 때문이리라.

LA 다저스 류현진이 7월20일 마이애미전에서 힘껏 공을 던지고 있다. AP연합뉴스

최근 기자들에게 외신 반응을 쓰게 만든 스타는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의 류현진이다. 올 시즌 류현진은 뛰어난 투구로 메이저리그 최정상에 오르며,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 수상 후보로까지 거론돼 왔다. 한국 야구팬들에게 친숙한 얼굴인 류현진의 활약은 반가운 일이다. 류현진의 경기 내용을 소개한 기사에서 악성 댓글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 팬들은 류현진이 외국에서 ‘국위’를 ‘선양’했기 때문에 응원한 게 아니다. 류현진을 덮어놓고 칭송하는 댓글엔 ‘국뽕(애국심에 도취된 것)’이라는 빈정거림이 따라붙는다. 팬들이 류현진에게 원하는 것은 국위선양보다 차라리 ‘힐링’에 가깝다.

우리는 삶에 짓눌려 항상 피곤하고, 별다른 낙이 없다. 정치권엔 믿을 사람이 없고, 경제는 언제 좋아질 것인지 기약이 없다. 웃을 일 없는 사람들에게 류현진은 정교한 투구를 지켜보고 감탄하는 즐거움과 승리의 기쁨을 안겨준다. 경기에 몰입하는 동안은 걱정과 잡념을 잊을 수 있다. 적잖은 팬들이 “요즘 류현진 보는 맛에 산다”고 고백하는 이유다.

류현진은 최근 몇 경기에서 부진했다. 사이영상을 받는다면 개인의 영광이자 한국인의 메이저리그 도전사에 한 획을 긋겠지만, 사이영상을 못 받아도 실패는 아니다. 남은 경기에서 잘 던진다면 한국 팬들은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즐기려 보는 게 스포츠 아니겠는가.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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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옛 동료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입사 만 20주년이라는 인사였다. SNS 댓글로 옛 동료들 몇몇이 더 모였다. 대부분 여기저기 흩어졌지만 또 몇몇은 여전히 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다들 이모티콘으로 박수를 보냈다). 처음 넥타이를 맸을 때, 세기말이었다. 불안과 희망이 공존하던 때였다. 막 인터넷 콘텐츠 시장이 무르익기 시작할 때였다.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된, 드라마 속에서나 나오는 ‘PC통신’ 회사에서 일을 했다. 콘텐츠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BBS라 불리던 게시판 글 하나하나가 귀했고, 가치 있었다. 그렇게 생산된 콘텐츠를 기획하고 관리하다가, 콘텐츠를 직접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옮긴 게 지금의 일이다.

그러니까 콘텐츠를 다루기 시작한 게 만 20년 됐다. 읽을거리, 들을거리, 볼거리 등 정보와 재미를 담은 ‘콘텐츠’는 20년 동안 제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꿨다. 색깔과 모양만 달라도 신선했던 텍스트 콘텐츠는 영상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면 구닥다리로 평가받는 시대가 됐다. 신문사의 일이 그렇다.

비록 뉴스 콘텐츠는 공짜라도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으니, 콘텐츠를 돈 주고 보자는 결심을 한 게 몇 년 전의 일이다. ‘구독 경제’라는 산업에 편입했다. 카드 사용 내역서를 뒤져보니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세계적 영화 드라마 콘텐츠 플랫폼 N사에 지불한 돈이 월 만원이 넘는다. 여기에 없는 걸 보기 위해 국내 플랫폼 P와 T에 각각 몇천원이 또 들어간다. 음악을 듣는데 어쩌다 보니 2가지 서비스를 이용하게 됐다(아내와 같이 쓰는데, 동시 접속을 막아서다). 스트리밍서비스 B와 최근 열심히 광고를 하는 V를 쓴다. 둘은 사실 같은 회사, 대형 포털 N사의 서비스다. 이게 또 몇천원씩이다.

요즘엔 전자책 시장도 구독 경제 열풍이다. R사에 매달 몇천원을 꼬박꼬박 내고 있다. 그래도 이전보다 읽은 책의 숫자는 확실히 늘었다. 일 때문에 미국 야구책을 읽으려면 미국 전자책 A사를 이용해야 하는데, 여기도 구독 서비스가 있다. 아직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해, 그때그때 사서 읽는다. 지난 1년간 4권을 사는 데 든 비용이 약 6만원인 걸 보니 이것도 구독 서비스를 신청해야 하나 싶다.

미국 야구를 봐야 해서 MLB TV 1년 사용권을 매년 결제한다. 13만원 정도 한다. 미국스포츠잡지 S와 E의 1년 온라인 정기 구독 이용료가 각 4만5000원 정도다. 새로 생긴 미국 스포츠 뉴스 온라인 유료매체 A의 1년 구독료가 약 7만원이다. 앗, 카드로 빠져나갈 때는 몰랐는데, 합해보니 연 80만원이 넘는다. 집에서 보는 신문구독료 2부는 넣지도 않았다. 옆에 있던 아내가 한마디 한다. “추석이라 돈 쓸 곳도 많은데.”

그러고 보니 추석이 1주일 남았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새삼 곰곰이 생각하는데 거실 구석에 해마다 회사에서 추석선물로 보내준 스팸이 잔뜩이다. 그렇다, 한국 추석엔 역시 스팸이 아니던가. 콘텐츠에서 구독을 거쳐 추석을 지나 스팸에 도착했다. 돌고 돌았지만 길은 연결되어 있다. 20년 전이 세기말이었다면, 2019년은 더욱 암울하다.

가짜 뉴스가 문제가 아니라 스팸 뉴스의 시대인 게 문제다. 구독이면 끊으면 되는데 ‘공짜’라는 외피를 두르고 포털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진다. 인터넷 초창기, 요란한 제목으로 유혹하는 스팸메일 더미를 빼다 박았다. 메일 서비스 회사들은 너도나도 ‘스팸차단’ 버튼을 달았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역시 ‘스팸차단’ 기능이 필수다. 스팸뉴스는 뉴스 전체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치밀해서 친절한 뉴스는 스팸 더미에 묻혀 사라지기 일쑤다. 그러니 다들 덜 치밀해 덜 친절한 스팸생산 유혹에 빠진다. 

추석 밤, 휘영청 한가위 달에게 비노니 제발 포털에 ‘스팸뉴스 차단’ 버튼 하나 만들어주소서.

<이용균 스포츠부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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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는 몹시도 답답한 시간이었다. 기승을 부리던 폭염이나 일본과의 관계,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 때문만은 아니다. ‘전주 여인숙 화재…폐지 주워 쪽방 생활하던 노인 3명 사망’ ‘창문도, 에어컨도 없는 휴게실서 숨진 서울대 청소노동자’ ‘냉장고는 텅 빈 채…보호사각서 죽어간 탈북 모자’ ‘속초 아파트 건설 현장서 엘리베이터 추락…3명 사망·3명 부상’ ‘목동 빗물펌프장 사고’ 등 쏟아지는 기사를 보고 있자니 속이 타들어 갔다.

사람이 죽고 있다. 일을 하다가, 폭염에, 배를 곯다가, 쪽방에 불이 났는데 피하지 못해서. 그리고 뉴스 검색창에 오르지 않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가는 수많은 죽음이 있다.

안전사회시민연대와 노년유니온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일 서울 목동 빗물 펌프장 앞에서 사망 사고 참사 규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석우 기자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은 예정돼 있다. 죽음을 살아가는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잘 맞이하기 위한 지침서들도 쏟아진다. 그 방법과 시점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인간의 몸과 질병, 죽음에는 사회적 원인이 스며 있다. 김승섭 교수는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라고 했다.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죽음이 시시때때로 목도된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씨,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을 하던 김모군, 과로에 쓰러진 수많은 집배원들, 5년 전 빈곤을 이기지 못한 송파 세 모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세월호의 사람들. 이들은 노동자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 끊어지지 않는 빈곤의 악순환, 유해성분 물질이 안전한 제품으로 둔갑하는 구조, ‘가만히 있으라’로 응축되는 사회적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고 나서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죽음이 있다.

사회의 치부를 떠안은 비극에서 마취된 공동체를 본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빈곤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고, 안전하게 살고 일할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부패한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여러 곳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고는 이내 사라져버리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은유 작가는 ‘현장실습생 르포집’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서 말한다. “그동안 거리에서 장애인을 못 봤다면 장애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만한 여건이 아니라서 그렇듯이, 지금까지 성폭력 피해자를 못 봤다면 그런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말해도 들어주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듯, 특성화고 학생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맥락에 따라 자연스레 비가시화된다.” ‘일반’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순간의 충격파를 던지지만 그마저도 쉽게 잊혀지고 만다. 쏟아졌던 기사들도 이미 사라졌다. 존재, 메시지, 죽음마저도 휘발된다는 것은 절망적이다.

그래서 남은 이들이 기억해야 한다. 떠난 이가 남긴 궤적과 이 이후를 기록해야 한다. ‘그것 말고도 해야 할 다른 일이 많으니까, 경제가 어려우니까’라는 핑계들은 ‘그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에 다름 아니라고 외쳐야 한다. 앞서 언급한 책에서 김승섭 교수는 세월호 참사 관련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밝혔다. “아픔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대책이 있을 리도 없었겠지요. 그 참사의 원인을 제공했던 국가는 그 아픔을 개개인에게 넘긴 채, 계속 정권이 바뀌며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세월호 참사마저 그렇게 보내고 나면, 우리에게 공동체라고 부르는 무엇인가가 영영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개인의 죽음이 덧없이 잊혀지지 않는, 기억과 기록으로 각성한 공동체를 꿈꿔 본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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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 412호 법정.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실시간으로 상황을 보고했다고 허위 답변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에 대한 1심 판결 선고공판이 열렸다. 

이곳은 좌석이 30개 정도밖에 안되는 소법정이다. 기자는 사전에 취재용 방청권을 받아 법정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청권이 없어 법정에 들어오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법정 경위들과 다투고 있다고 했다.

“김기춘 나와라!” “방청 못하게 하는 판사 각성하라!” 유가족들 항의는 형사30부 권희 재판장이 선고문을 낭독하는 동안에도 이어졌다. 누군가는 법정 문을 쿵쿵 두드렸고 그 과정에서 고성과 격한 단어도 나왔다. 권 재판장 목소리가 묻히거나 중간중간 끊어지기도 했다. 법정 경위를 향해 한 차례 “해결이 안돼요?”라고 물은 권 재판장은 계속 선고를 진행했다. 

법정 문은 꽉 닫혀 있었다. 36도의 기온에 환기도, 냉방도 안되는 소법정에서 1시간가량 선고가 이어졌다. 이마엔 땀이 줄줄 흘렀고, 법정 밖에선 유가족들의 분노 섞인 호소가 들려왔다.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선고문 낭독을 듣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꼭 이렇게 선고를 해야 했을까. 법원은 청사에 입간판 형태로 ‘재판 방청권을 선착순으로 배부한다’고 공지했다 한다. 법원 청사를 자주 드나들지 않는 시민에게는 익숙지 않은 방식이다. 홈페이지에 공지글을 올리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김경수 경남지사 재판과도 다르다. 

권 재판장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법정에는 여유 공간이 있기 때문에 유가족들이 그곳에 서서 방청하도록 할 수도 있다. 다른 재판에서도 방청을 원하는 시민이 많은 경우 서서 선고를 듣게 하거나, 아예 법정 문을 열어놓기도 한다. 상황을 진정시키는 차원에서라도 잠시 휴정하거나 유가족들에게 법정에 들어오게 할 수 없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한 뒤 선고를 이어갈 수도 있다.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라 방청객이 많을 것을 예측하고 애초에 더 큰 법정에서 선고를 진행할 수도 있었다.

핵심은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다. 재판 진행은 재판장 재량이고, 김 전 실장에게 적용된 혐의는 허위공문서 작성과 행사죄다. 엄밀히 말하면 유가족들이 ‘범죄 피해자’는 아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책임 회피로 진상규명이 지연됐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유가족들이 입었다. 실질적인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을 피해자로 명시한 세월호특별법도 있다. 가해자에게 어떤 판결이 선고되는지는 피해자의 알권리에 속한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 사건을 심리한 판사들이 발간한 백서를 보면 충격이나 슬픔에 찬 유가족들의 격앙된 반응을 피해자의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이해하고, 제어만 하기보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으면서 달래는 방법을 고민한 내용이 나온다.

유가족들이 법정에 들어가지 못하던 그 시각, 같은 법원의 417호 대법정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법정은 공간이 넓고 냉방도 잘된다. 방청객은 그다지 없지만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은 대법정에서 재판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시 묻는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정말 법정에 들어갈 수 없었나, 법원은 꼭 그렇게 선고를 해야 했나.

<이혜리 | 사회부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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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히로뽕 수출 X나게 해가, 그 망할 놈의 원숭이 새끼들 다 뽕 쳐맞고 오줌 질질…. 애국이 별겁니까, 예? 우리가 일본을 뭐라도 이겨야 될 거 아닙니까.” 좀 거칠긴 해도, 이 대목에서 웃지 않은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이건 영화 <범죄와의 전쟁> 중 히로뽕을 밀수출하려는 세관원 최익현의 말일 뿐이다. 현실에서 더한 일도 일제강점기 한반도와 만주, 간도 등지에서 벌어졌다. 일본도에 죽어나거나 온몸에 문신이 새겨진 위안부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영화 대사는 그냥 개그일 뿐, 오히려 너무 싱겁게 느껴질 테다. 임진왜란 때는 어땠는가. “통석의 염” 같은 모호한 표현이 아니라, 적어도 독일 수준 같은 반성과 사죄 위에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을 치유하지 않는 한 참된 ‘한·일 국교정상화’는 요원하다. 외교 수사로 아무리 꾸며봐야 공염불이다.

최근 일본의 잇단 수출규제 조치에 들불처럼 번지는 불매운동이 예사롭지 않다. 대체 어느 정도로 일본 제품이 사랑받는지 궁금했다. 한 날은 어느 고교생의 필통을 살펴봤다. 이름도 생소한 일본 볼펜이나 형광펜, 지우개까지 한 움큼이 나왔다. 3분의 2가 넘는다. 학생도 이번에야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생활 구석구석에 일제가 파고들었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좋은 ‘샤프’는 늘 일제였다. 국산은 펜 끝이 흔들리곤 해서 툭하면 얇은 심이 부러졌다. 그러나 이젠 우리 경제가 일본의 꼬붕 노릇 하던 시절이 아니다.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오전 광주 광산구의 한 거리에 'NO! 아베, OK! 광복' 문구가 걸려 있다. 이 현수막은 더불어민주당 광주 광산을 지역위원회가 시민들의 모금을 받아 내걸었다. 연합뉴스

일본의 수출규제는 역사 문제에서 비롯됐지만, 배경에는 급성장한 한국 경제에 대한 견제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일본 전자업체 이익을 더해도 삼성전자 하나보다 못한 처지다. 일본 기술자가 없으면 고장 난 제철소를 못 돌리던 시절도 아니다. 과거 브라운관 TV 때는 소니, 파나소닉 같은 제품을 우리는 못 만들 줄 알았다. 그러나 액정화면(LCD)으로 넘어오자 삼성, LG가 뒤엎어버렸다. 현대정공 시절 미쓰비시 차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껍데기 씌워서 팔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적어도 신차 품질로는 일본 도요타, 혼다 같은 대중 브랜드는 따라잡았다.

아직 곳곳에 일본 기술력은 탄탄해 보인다. 자전거 변속기만 봐도 시마노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카본 소재는 일본 도레이가 잡고 있다. 국내 굴지 대기업에 ‘국산 카본도 만들어보라’고 했더니 돌아온 답은 “돈이 안된다”였다. 중요한 소재이지만 정작 뒤늦게 손대기에는 이익보다 비용이 더 드는 격이다. 삼성 같은 대기업이 시마노 뺨칠 변속기 하나 못 만들까. 결국 이런 건 강소기업들이 해내야 한다. 정부 지원은 물론 대·중소 협력체제를 통해 마중물을 부어야 할 때다.

무조건 반일, 극일이 현명한 해법은 아니다. 동북아 평화협력을 위해서라면 어차피 일본과도 손잡아야 한다. ‘아시아의 패권자’가 될 가능성이 큰 중국을 어떻게 견제하느냐가 한국과 일본엔 향후 큰 숙제다. 과거 1000여년 역사에서 보듯 대륙세력인 중국과 해양세력인 일본이 충돌했고, 그 완충지는 한국이었다. 청일전쟁에, 만주국의 오점까지 지닌 중국이 일본을 그냥 놔둘 리 없다. 이번 한·일 갈등의 뿌리는 대중 견제용 포석이란 해석까지 나온다. 일본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한국에 잘 보여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다.

지금 전국적으로 불타오른 반일감정은 그냥 내버려둬라. 어차피 한풀이 굿판은 1965년 억지 합의로 꿰맞춘 한·일이 치러야 할 대가다. 참된 해법은 그 뒤 자연스레 찾게 될 것이다. 그 대전제는 일본을 ‘정상국가’로 바로잡는 일이다. 징용에 끌려가 죽을 고생을 했건만 그런 기억조차 지워져가는 어르신들을 보면 한 인간으로서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유대인은 요즘도 나치를 찾아 단죄하기 위해 이런 팻말을 붙인다고 한다. ‘Spat, aber nicht zu spat(늦었지만 너무 늦진 않았다).’

<전병역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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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운씨(74) 가족을 처음 만난 건 2009년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 재판장이 판결을 선고하자, 피고인석과 방청석에선 분노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환호라고 할 수도 없는 묘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탄식하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박수를 쳤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는 이도 보였다. 사연 없는 소송이 없고, 승소와 패소로만 단정할 수 없는 것이 판결이지만 그날의 풍경은 더욱 그랬다.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 피해자들의 재심이었다.

박동운씨와 박씨의 고모부 허현씨, 고모 박미심씨(왼쪽 사진부터)는 1981년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 피해자인 이들은 38년째 ‘가해자’ 국가와 싸우며, 다른 사회적 약자들을 도우며 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은 법조를 출입한 뒤 처음으로 취재한 재심사건이었다. 그때 나는 4년차 기자였다. 군사정권 시절 위정자들은 민간인들을 간첩으로 조작해 ‘나라의 군기(국민들을 다 부하처럼 여겼던 것 같다)’를 잡았다. 무작정 잡아다 감금하고 고문한 뒤 허위자백을 강요했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간첩단 검거’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경향신문도 그때 그런 보도를 했다. 1981년 7월31일자 경향신문 1면을 보면, 왼쪽 머리기사로 ‘부부, 아들 낀 고정간첩 7명 검거’라는 제목의 기사를 볼 수 있다. “진도를 거점으로 24년간 암약했다”는 내용과 함께, 피의자 5명의 얼굴사진도 실렸다. 그때 두 살이던 나는 물론 이 기사를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한 피해자의 말 때문에 옛날 기사를 찾아봤다. 그날 재심재판이 끝나고 기자들은 법정 밖에서 피해자들을 기다렸다. 28년 만에 ‘간첩’이라는 멍에를 벗은 소감을 듣기 위해서였다. 한 피해자가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가 간첩이라고 신문 1면에 썼잖아요. 이제 우리가 간첩이 아니라고, 다시 그만 한 크기로 써줘요.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박동운씨의 고모부, 허현씨였다. 하필이면 허씨의 정면에 서 있던 나는 그 말이 가시 같았다. 슬픈 예감은 맞았다. 28년 전의 기사를 보며, 얼굴이 벌게졌다.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갔다. 국가는 “너를 간첩이라 부르기로 했으니 간첩이라고 말하라”고 했다. 고문받을 때 질끈 감아 견뎌낸 눈가엔 어느덧 주름이 들러붙었다. 이 가족은 지난 세월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다루는지 바라만 볼뿐, 제대로 된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했다. 사진 위부터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의 생존자 박동운씨, 허현씨, 박미심씨.

2019년 7월10일 전남 진도에서 박동운씨와 허현씨, 박미심씨를 만났다. 좋은 일로 만났다면 좋았겠지만, 여전히 국가의 손해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취재하기 위해서 만났다. 박근혜 정부에선, 양승태 대법원이 조작사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를 개발해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거래’를 시도했다. 문재인 정부에선, 재심을 거쳐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지만 법무부가 상고해 이를 또 막고 있다.

이 사건의 피해자 8명 중 3명은 고인이 됐고, 생존자들은 모두 나이 앞자리가 바뀌었다. 박씨 가족을 다시 취재하면서, 국가로부터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고 사회로부터 매정한 손가락질을 당한 이들이 지난 10년간 묵묵히 다른 피해자들(고문피해자, 쌍용차 해고노동자, 용산참사 피해가족, 세월호참사 가족)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고 한동안 멍했다. 잔인한 국가는 여전히 이들을 괴롭히고 있지만, 이들을 망치는 데는 실패했다. 박동운씨 가족은 스스로 ‘피해자’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피해자들의 품격이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10년 전 이 가족의 사건을 처음 취재했던 나는 14년차 기자가 됐다. 지금의 경향신문은 국정원이나 검찰에서 발표한 사건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쓰지 않는다(고 믿는다). 전두환 정권 때 시작된 진도가족간첩단 조작사건은 정권이 7번 바뀐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국가만, 지독하게도 변하지 않았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지난 9일 “서해맹산(誓海盟山)의 정신으로 공정한 법질서 확립, 검찰 개혁, 법무부 혁신 등 소명을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38년 전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굳이 산과 바다에까지 맹세할 필요는 없다. 행정문서(상고 포기) 한 장이면 된다. 부끄러움을 아는 국가의 품격을 기대한다.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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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으면서 나만의 취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젊음에 기댄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도 안 통하고 몸은 힘들어 죽겠는데도 그 불편함에 굳이 시간과 돈을 쓰는 여행과 관련된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다. ‘투덜이’ 빌 브라이슨도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게 여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때 비행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비행은 장거리일수록 좋았다. 낯선 땅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 이동은 심야 버스나 기차를 이용했다. 패키지여행은 내겐 ‘여행’이 아니었다. 나는 ‘다르다’고 내심 으스댔었다. 근데 그냥 젊어서 그런 것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5시간이 넘는 비행은 걱정부터 앞섰다. 오지 트레킹보다는 도시 관광, 숙박은 도미토리가 아닌 호텔로 자연스레 나의 여행은 변해갔다. 그러다 10여년 전부터 시작한 게 일본 소도시 여행이다. 반나절이면 돌아볼 수 있는 소도시에 숙소를 잡고, 로컬푸드 마켓에서 과일을 사먹거나 일본인들을 따라 식사 때마다 생맥주를 마시는 것. 바로 일본 여행의 재미였다.

6일 오전 서울 중구 남대문 앞에서 서울 중구청 관계자가 일본이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노(보이콧) 재팬’,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배너기를 설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올해 여름은 다르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맞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함께 지난달 중순부터 자발적으로 ‘일본 여행 안 가기’ 운동이 시작됐다. 누군가 페이스북에 장난스레 올려놓은 ‘친일파’ 테스트에도 일본 여행에 관한 항목이 있다. ‘일본 여행을 자주 간다’ ‘일본말을 할 줄 안다’ ‘고양이를 좋아한다’ ‘남에게 신세지기를 싫어한다’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한다’ 등으로 이 중 3가지만 해당되면 친일파라고.

일본이 우리에게 인기 여행지가 된 이유는 길어봐야 2시간 남짓,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관광인프라도 훌륭하다. 일본정부관광국(JNTO) 통계를 보면,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중 한국인은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지난해에만 753만명이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최근  국토교통부 항공통계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여름휴가가 본격화된 7월 중순 이후 보름간 인천공항을 이용해 일본 여행을 다녀온 승객은 휴가 시즌을 앞둔 한 달 전 같은 기간과 비교해 13.4% 감소했다.

얼마 못 갈 거라던 일본의 예상과는 달리 불매운동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시민들은 각종 커뮤니티에서 일본 여행 취소 인증샷을 올리고 있다. ‘노(NO), 보이콧 저팬,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 로고는 소셜미디어에서 삽시간에 퍼져 서로를 독려하며 결속력을 다지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 도시들과의 문화교류를 잇따라 중단하고 있다. 서울시도 일본과의 교류 중단을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어서, 당장 이번달과 다음달 도쿄에서 열릴 예정이던 교류행사의 성사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또한 10월13일 개최 예정인 ‘서울달리기대회’와 관련해 한국미즈노 등 일본 브랜드를 협찬사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보이콧’은 아베 정부에 타격을 줄 수 있을까. 당장 일본의 입장 변화를 끌어낼 순 없겠지만 적어도 한국이 만만찮다는 것은 보여줄 수 있다. 물론 효과를 보려면 6개월 이상 지속돼야 한다. 이제 정부는 냉정해야 한다. 지자체들도 교류를 이어나가야 한다. 이미 국민들은 차분히 일본과의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반일 감정은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 때론 상상 밖의 힘을 발휘한다. 분명한 사실은 그런 내셔널리즘이 감정에 휩싸인다면 장기적으로 큰 손해를 낳는다는 것이다. 내셔널리즘이 배타주의로 바뀌는 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폭염 속 우리는 견디기 힘든 지점에 서 있다. 일본 대신 집 근처 시원한 도서관으로 북캉스를 떠나보자.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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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대 박힌 그 코는/ 내 딸의 코였어./ 빨대가 막아버린 그 숨은/ 내 딸의 숨이었어./ 한순간 멋과 편리를 위해 잠깐 쓰고 버린 것들이/ 내 딸의 숨을 막고/ 내 딸의 삶을 후벼판 거지.”(‘무제’)

시를 본 순간 숨이 잠깐 멎는 듯했다. 세월호 유가족 유경근씨가 쓴 시다. 코에 빨대가 꽂힌 거북이의 모습에서 딸을 떠올린 유경근씨의 고통이 어떤 것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또 그가 ‘그 사건’ 이전과 이후에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다에 수장된 딸과, 바다거북이가 겪는 고통이 그에겐 분리되지 않았다. 거기엔 뛰어난 시적 상상력이나 은유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떠올랐을 것이다. 국가와 사회 시스템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이 목숨을 잃은 딸과 인간이 생각 없이 버린 쓰레기로 목숨을 잃고 다치는 동물이 그에겐 하나로 연결됐다. 

6월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 법적 사용 금지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한 참가자가 바다거북이 탈을 쓰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유경근씨는 생명다양성재단·시셰퍼드코리아 등 환경단체에서 기획한 ‘쓰레기와 동물과 시’(쓰동시) 프로젝트에 참여해 이 시를 썼다. 동물에게 피해를 주는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다. 지난해 ‘재활용 쓰레기 대란’은 우리가 버린 쓰레기가 저절로 사라지지 않고 언제든 눈앞에 귀환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몇몇 대책이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쓰레기는 불편한 형태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의성에 쌓인 거대한 ‘쓰레기 산’과 같은 모습으로, 플라스틱 조각을 아기새에게 먹이로 주는 앨버트로스의 모습으로.

빨대가 코에 박힌 거북이, 앨버트로스의 입에서 나온 플라스틱의 이미지는 충격적이지만, 너무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나와 연결된 일로 느끼긴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조사 결과는 내가 버린 쓰레기가 이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명다양성재단과 영국 케임브리지대가 공동 조사한 보고서엔 한국에서 배출한 플라스틱 쓰레기가 매년 바닷새 5000마리, 바다포유류 500마리를 죽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눈감고 있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증거’가 생긴 셈이다. 내가 버린 플라스틱은 바다를 건너 굶주린 앨버트로스나 거북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생명을 죽이고 내장에 남아 썩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볍고 편한 플라스틱이 지닌 불멸성이다. 

최근 김한민의 <아무튼, 비건>에서 ‘연결’이란 말을 새롭게 접했다. 그에 따르면 ‘연결감’은 나와 남을 구분하고 배제하는 타자화와 대척점에 있는 개념으로, 동물은 “가장 타자화된 타자, 남 중의 남”이다. 그는 지난해 ‘동물 축제 반대 축제’를 기획한 데 이어 ‘쓰동시’에 함께하며 바다 생물을 죽이는 쓰레기에 대해 말한다. 그는 “비건(채식주의자)이 되는 것은 산업과 국가와 영혼 없는 전문가들이 단절시킨 풍부한 관계성을 회복하는 사회운동”이라고 말한다. 

유경근씨의 시가 찌르는 듯한 고통으로 와닿은 것 또한 ‘연결감’ 때문이다. 바다 생물의 고통이 부모 잃은 자식의 고통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전환되어 전달됨으로써 ‘타자’였던 거북이의 고통이 내게 와닿았다. 세월호 참사를 초래한 무능력한 국가·사회 시스템의 폭력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무관심과 남용이 다른 생명에겐 폭력이 될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육식의 성정치>에선 고기 뒤에 가려진 진짜 동물의 모습을 ‘부재 지시 대상’이라고 부른다. 삼겹살이란 명칭은 살아 움직이는 독립된 생명체로서의 돼지를 망각하게 만들고 공장식 축산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을 가려버린다. ‘가려진 대상’을 인식하는 데는 대단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 공장식 축산의 실상, 플라스틱 쓰레기의 폐해에 대한 정보는 넘쳐난다. 그저 눈감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잠시만이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내가 먹고 쓰고 버리는 행위가 세계와 다른 생명에 끼치는 영향을 직시하는 것이다. 제대로 본다면, 이전과 이후는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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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문재인 대통령님도 비리 사립유치원 개혁운동에 함께해 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의 요지는 많게는 수십억원에 달하는 회계비리가 적발된 사립유치원들의 ‘범죄수익’을 환수하고, 유치원에 대한 감사를 강화하도록 대통령이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청원자는 지난 3월 유치원 집단 개학연기 사태 당시 활동했던 경기도 지역 학부모단체와 정의당 경기도당이다.

사립유치원의 설립 인가 및 폐원, 감사 및 처분 등에 관한 권한은 대부분 교육감에게 있다. 문제가 있다면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에게 했어야 할 청원이 청와대까지 온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청원자들은 “경기도교육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개학연기 사태가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의 ‘완패’로 끝나긴 했지만 사립유치원 문제는 사실상 해결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가장 필요했던 ‘유치원 3법’ 개정은 국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다. 원아 200명 이상 대형 유치원에 대한 에듀파인 도입은 법률 소송에 휘말렸다. 그나마 강도 높은 감사를 통해 사립유치원의 각종 비리를 밝혀낸 게 유일한 성과로 꼽히지만, 유치원 문제가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이 감사마저 흐지부지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전국 사립유치원의 절반에 달하는 1800여개의 유치원이 있고, 신도시들을 중심으로 대형 사립유치원이 많은 경기도에서 말이다.

표면적으로만 봐도 경기교육청의 최근 감사는 비위를 적발하기 위함인지, ‘전수 감사 달성’이라는 전시 행정을 위함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감사 대상 기간을 ‘직전 5년’에서 ‘직전 3년’으로 줄여 비위가 극심했던 2014~2015년 회계장부에 대해선 면죄부를 줬다. “감사가 약화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감사 대상이 너무 많다”는 이유를 들어 본청에서 하던 감사 업무 일부를 산하 교육지원청에 넘겨줬다. 

감사 대상임을 통보받은 유치원들이 이를 회피할 목적으로 폐원 신청을 내는데도 “요건을 갖추었으니 안 받아줄 수 없다”며 족족 폐원을 받아줬다. 올해 폐원을 허가해준 52개 유치원 중 48개가 감사 대상 유치원이었다.

학부모단체와 정의당은 이 같은 감사 축소 의혹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지만 경기교육청의 답변은 매번 “문제없이 잘하고 있다” “근거 없는 주장이다”라는 식이었다. 보다 못한 한 시민감사관은 “감사 과정에 외압이 있었다”고 언론에 폭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경기교육청은 “진상을 밝히겠다”면서도 진상규명에 앞서 해당 시민감사관의 업무를 정지시키고 직위해제부터 했다. 현행법상 공공기관에 제보한 게 아닌 이상 ‘공익제보자’ 취급도 못 받는 탓에 이 시민감사관은 보호받기는커녕 억울함을 호소할 곳조차 찾기 어려운 처지다.

교육청의 업무를 감시하고 문제가 있다면 이를 바로잡아야 할 경기도의회의 경우 감시는커녕 사립유치원의 이익을 대변하고 감사를 방해하기 위해 각종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경기도의회 홈페이지에 게시된 올해 교육위원회 회의록만 뒤져봐도 도의원들이 유치원을 어떤 방식으로 옹호해왔는지는 쉽게 확인된다. 이 문제 역시 학부모단체 등이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등에 수차례 이의를 제기했지만 민주당이 여태껏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학부모단체가 찾은 곳이 국민청원이다. ‘답변 기준’인 20만명을 넘기지 못하면 다른 수많은 청원처럼 잊힐 거 같아 이참에 이들을 대신해 물어보려 한다. 

경기도교육청, 그리고 경기도의회에는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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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거리를 걷는데 부슬부슬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어 비를 조금이라도 피하려고 갖고 있던 머플러를 머리에 둘렀다. 한참을 가는데 옆을 지나가던 차 한대가 속도를 줄이더니 청년 둘셋이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제스처를 섞어가며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빗속에서, 움직이는 차 안에서 지나가며 외친 말이지만 혐오 발언이 분명했다.

10년 전 이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오롯이 ‘이방인’이 되는 순간에 느낀 공포 때문이다. 소리를 지른 이들은 현지인, 나는 유학생, 그러니까 이주자였다. 소리를 지른 이들은 남성, 나는 여성이었다. 소리를 지른 이들의 종교는 알 수 없으나, 나는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 보일 만한 복장이었다. 

당시 유학을 하던 곳은 몇 년 전 벌어진 큰 테러로 특정 종교나 인종을 향한 분노와 거부감이 큰 상태였다. 그렇다고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행해진 밑도 끝도 없는 공격이 제대로 설명되진 않는다.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이 공포의 근원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여성이자 이주자이자 동남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한 여성이 남편에게 폭행당했다는 뉴스를 보자 그때가 생각났다. 남편이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살림을 제대로 하지 않아 맞을 만한 행동을 했다” 등의 이유로 부인을 폭행했다는 것은, ‘다름’을 이유로 폭력이 행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이 여성을 향해 ‘폭행 유도’, ‘의도적 촬영’이라거나 ‘유부남과 교제한 내연녀’ 등의 비판이 쏟아지며 ‘폭행 피해자’라는 본질이 흐려지는 상황도 벌어졌다.

베트남인 아내를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남편 A(36)씨가 8일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혼을 통한 이주를 선택한 여성들의 경우 제도적으로 배우자인 남편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신원보증서 제출 규정은 폐지됐지만, 여전히 국적 취득 전 체류 연장을 위해선 남편의 동행이 요구되는 등 사실상 ‘신원보증’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위급 상황이 발생한다고 해도 이주여성은 버티고 참아낸다. 양육권 문제도 걸려 있다. 이번에 폭행을 당한 여성은 베트남 언론에 “이혼한 뒤 아이의 양육권을 갖고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부에선 이주여성들이 ‘국적 취득을 위해 접근한다’는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한다.

노동현장의 여성 이주노동자도 폭력에 취약하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에선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온 이주노동자 가사도우미들이 고용주에 의해 살해되거나 표백제를 강제로 먹는 등의 수난을 겪은 일이 외신을 통해 알려졌다. 

성폭력에도 노출돼 있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제조업 분야 여성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보면 응답자 가운데 성희롱·성폭력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11.7%였고, 피해 상황에서도 ‘말로 대응하거나 그냥 참았다’고 한 경우가 40%에 달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인종차별적 시선이 차별과 폭행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점이다. 2009년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을 향해 “냄새나는 XX”라고 했던 남성이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모욕죄 유죄를 선고받은 경우도 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이번 폭행 사례가 알려지자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성명에서 “한국 사회에는 아시아 개발도상국 이주여성에 대한 성·인종 차별적인 인식이 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는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의 책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에 더한 글에서 이 같은 모순을 ‘GDP 인종주의’라고 표현했다. “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글로벌 패밀리’이고 비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다문화가정’”이라는 대목은 곱씹어봄 직하다.

‘선’ 하나를 넘으면 누구나 이방인이 된다.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기에 아무도 ‘이방인’일 수 없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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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물어본 사람은 없지만, ‘탈(脫)브라’ 취재후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지난달 15일자 토요판 커버스토리에 ‘굿바이, 브라’라는 제목으로 한국 여성 31명의 탈브라 체험기를 담았습니다.

기사를 쓰게 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여름이 오네. 아 덥다. 속옷이 존재감을 확 드러내는 그 계절이 또 오는구나.’ 이런 제 마음을 어떻게 읽었는지 SNS에는 유독 편한 브래지어 광고가 올라왔습니다. ‘안 입은 것 같대. 편하지만 가슴은 모아준대. 셔츠인데 유두를 가려줘서 이것만 입어도 된대.’ 광고들을 보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이렇게까지 브래지어를 입어야 하는 이유가 뭐지?’ 

출처:경향신문DB

그래, 브래지어 얘기를 한번 써보자 싶었습니다. 흔히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 것을 ‘노(NO)브라’라고 하는데, 그 말은 뭔가 불편했습니다. 입는 게 정상인데 안 입는다는 뜻이 포함된 것 같아서요. ‘탈브라’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습니다. 이미 ‘유브라, 탈브라’라는 단어로 SNS엔 많은 글이 올라와 있더군요.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며 사는 한국 사회에서 탈브라를 경험하고 실행한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제 주위에는 탈브라를 하는 사람이 없어(보여)서 어떻게 인터뷰할 사람들을 구할까 고민했어요. 드랙킹 취재 때 만난 드랙아티스트 ‘아장맨’이 생각났습니다. 아장맨은 흔쾌히 자신의 트위터에 저의 글을 올려주었습니다. ‘탈브라 아무말대잔치를 벌여보자’는 내용이었죠.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10대부터 70대까지… 덴마크, 파리, 네덜란드의 교민과 유학생까지. 이성애자, 성소수자, 직장인, 프리랜서, 학생, 딸을 키우는 주부 등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탈브라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약 70명의 연락을 받았는데 시간의 한계 때문에 그중에서 31명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편하려고, 페미니즘을 공부하다가, 아파서 등등) 탈브라를 시작했다가, 점점 자신의 몸과 이 사회의 금기, 차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얘기해줬습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으면 가슴이 처진다고, 브래지어 끈은 보이지 않게 하라며 엄마에게 혼났다는 한 여성분이 들려준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왜 우리는 가슴을 꼭 가려야 하며, 가린 것도 가려야 하며, 보이지 말아야 할 가슴까지 그 와중에 남들 기준에 예뻐 보이게 관리해야 하는 거죠?” 불편한 속옷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음란한 시선과 모순적인 규제가 많은 상처를 새겼으며, 2000년 이후 태어난 학생들까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웠습니다. 

많은 분들이 설리씨 얘기를 했습니다. 설리씨는 최근 방송에서 “브래지어는 액세서리일 뿐”이라 해서 박수를 받았죠. (사실, 취재하며 설리씨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답을 얻지 못했어요. 설리씨, DM 보내 미안해요. 어쨌든 그 마음, 온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쫄보 중의 쫄보’랍니다. 그런 저도 지지난주 탈브라를 실행해봤습니다. 외국이었고 남들은 거의 수영복 차림인 분위기였지만… 그때 느낀 해방감을 뭐라고 표현할까요. “자유로워서 자유가 뭔지 잊었다”고 해준 분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탈브라 기사의 주제는 “여러분, 브라를 벗으세요!”가 아닙니다. 브라를 입고 벗고를 선택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함께 나눠보고 싶었어요. 언젠가는 “어머머머. 개인이 속옷을 입고 벗고를 사회가 규제하던 시대가 있었대. 여성과 남성의 가슴을 차별하던 시대가 있었대”라며 갸우뚱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요. 탈브라 취재를 도와준 많은 분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자유를 동경하는 쫄보였습니다.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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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점점 신문을 믿지 않게 되었다. 방송 뉴스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열흘 전 발표된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영국 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의 공동연구 결과는 참담하다. 우리나라 뉴스 신뢰도는 조사 대상 37개국 가운데 최하위였다. “거의 항상 대부분의 뉴스를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핀란드(62%)나 포르투갈(62%) 등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우리나라는 지난해에도 꼴찌였다.

우리나라 뉴스가 오보투성이여서 못 믿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가짜뉴스의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는 비율은 61%로 나타났는데, 이는 브라질(85%), 포르투갈(71%) 등에 비하면 한참 낮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불신과 불안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뉴스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의심보다는 그 뉴스를 만든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다”는 의심을 하는 것 같다. 언론사의 정파적 위치나 경제적 이해관계, 심지어 기자 개인의 불순한 사적 목적이 기사 안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뉴스가 설령 거짓은 아니더라도 일부만을 보여주는 반쪽짜리 거울이라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기자가 안 보거나 못 보는 세상이 너무 크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기자는 현상이나 사람을 관찰하고 취재하고 분석해서 기사를 쓴다. 잘못 볼 수도 있고 전문성이 떨어져서 꼼꼼한 분석에 실패할 수도 있다. 당연히 비판받을 일이지만, 용인할 만한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관찰하는 위치가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보아도, 내리깐 눈에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뉴스 신뢰도 조사결과가 발표된 같은 날, 조선일보는 “느닷없는 부산~헬싱키 노선…국내 항공사들 뿔났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핀란드에서 항공 노선 신설을 발표한 것에 대한 일종의 ‘분석’ 기사였다. 국내 항공사들과 인천국제공항이 큰 손실을 입을 테지만 국익 대신 영남권 유권자를 염두에 둔 선심성 정책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 기사에 부산 지역 주민들과 정치인, 그리고 언론이 ‘더 뿔났다’. 유럽을 가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을 낭비하며 인천공항을 거쳐야 하는 지역민의 불편은 안중에도 없는 편향된 기사라는 것이다.

조선일보 기사를 ‘가짜뉴스’라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보도 아니다. 정부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언론사라서 문제인가? 감시와 비판이 언론의 사명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 또한 이해해줄 수도 있다. 정작 큰 문제는 언론사가 혹은 기자들이, 이 사건을 서울의 대기업 옥상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거기서 관찰하면 수도권 바깥은 보이지 않으며, 거대한 비행기에 가려 정작 그 안의 승객들은 보이지 않는다. 해당 기사에서 언급한 취재원은 “항공업계 관계자”, “한 대형 항공사 임원”, 그리고 항공산업을 연구하는 경영학과 교수였다. 인천공항까지 힘들게 가야 했던 연간 300만명의 동남권 지역 여행객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최근 서울시는 4개 버스 노선의 새벽 시간대 배차를 늘렸다. 새벽 노동자들을 꽉꽉 채워서 운행하던 노선들이다. 몇몇 기자들이 마치 새로운 사건이 생긴 듯 이 새벽 버스에 올라타 승객들의 애환과 사연을 취재했다. 수십년 동안 거기에 있었으나 기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꽤 오래전에는 기자들도 거의 매일 이들과 같은 버스를 탔다. 기자들이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출퇴근을 하던 그 시절에는 버스 노선의 문제, 기사들의 난폭운전, 버스회사 비리 등이 심심치 않게 사회면을 장식했었다. 기자 월급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생활수준이 오르자 승용차의 성능, 교통 체증, 휘발유 가격 같은 주제가 만원버스 이야기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주요 언론사의 중견 기자들은 거의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파적으로는 다양할지 몰라도 경제적, 문화적 수준과 배경이 비슷하다. 대기업과 노동자가 대립할 때 많은 언론이 은근슬쩍 기업 편을 드는 듯 보이는 것도 반드시 광고 수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기업에 더 쉽게 감정이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탓이 크다. 기자들 주변에는 비정규직 공장 노동자보다는 기업 임원이 더 많다. 수도권 밖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더더욱 만나기 어렵다. 서 있는 위치가 거의 거기서 거기다. 바라보는 지점도 큰 차이가 없다. 독자들이 언론을 외면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언론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간지나 텔레비전 뉴스 대신 유튜브를 보고 팟캐스트를 듣고 이상한 정보를 카톡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뉴스 신뢰도를 단박에 회복시키는 비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기자들이 좀 움직였으면 좋겠다. 서 있는 자리를 옮겨야 달리 보인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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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후배가 지난주 결혼했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나 14년을 연애하고 드디어 식장에 들어섰다는데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이 정말 예쁘더라, 들떠서 이야기하는데 듣던 이는 시큰둥하게 “결혼하기 전에 평균 3~4명은 만난다는데 한 사람이라니 손해 아니냐”고 대꾸했다.

마치 ‘표준’처럼 통용되는 ‘평균 3~4명’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모 결혼정보업체가 과거 결혼적령기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미혼 남녀의 이성교제 평균 횟수는 ‘남성 4.7회, 여성 4.3회’라고 한다. 하지만 그 숫자는 교제경험이 없다(13.3%)부터 10회 이상(8.3%)이라는 답변을 모아서 나눈 것이다. 이 같은 부류의 설문조사는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오해를 산다. 평균은 ‘특정 집단의 정보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대푯값’으로 추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이지, 그 자체가 ‘표준’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그 ‘평균’은 ‘표준’을 넘어 ‘정상’의 자리까지 종종 넘본다. 서울 거주 25~29세 남성의 평균 키는 175.6㎝이고, 고3 여학생 평균 몸무게는 57.8㎏이고, 아기는 평균 생후 6개월이면 뒤집기를 한다는 등의 통계 수치를 접하면 사고는 자동회로처럼 ‘평균에 부합하는지’ 자신의 경우를 놓고 가늠하기 일쑤다.

사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그 같은 ‘평균’이란 숫자는 별 도움이 안된다. 발달심리학자인 토드 로즈 하버드대 교수가 <평균의 종말>에서 소개한 ‘노르마(Norma)’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노르마는 미국의 한 부인과 의사가 젊은 여성 1만5000명으로부터 수집한 신체치수 자료를 바탕으로 조각가 에이브럼 벨스키가 1942년 만든 조각상이다. 노르마의 뜻이 ‘정상’인 것처럼 이 ‘표준모델’은 “평균값이 여성의 정상 체격을 판단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했다.

워낙 인기가 높다보니 1945년에는 ‘노르마 닮은꼴 찾기’ 대회까지 열렸다. 그런데 경쟁이 치열할 것이라는 예상은 엇나갔다. 대회에 참가한 3864명의 여성 중에서 9개 항목의 ‘평균’ 치수에 딱 들어맞는 ‘노르마’의 몸을 가진 이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평균=표준=정상’이라는 오류에 빠져 있던 당시의 전문가들은 당황한 나머지 ‘여성들이 건강하지 않아서 빚어진 문제’라고 해석하고 말았다. 극도로 다양한 인간은 ‘평균’이라는 ‘납작한 숫자’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눈앞에 두고도 말이다. 

‘납작한 말’도 마찬가지다. 명쾌한 진실 같지만 삶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 예로 “흑인은 수영을 못한다”가 있다. 해부학적 특징 때문에 타 인종보다 물에 덜 떠서 그렇다는 건데, 미국의 시몬 마누엘 선수가 2016년 리우 올림픽 여자 자유형 100m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걸 보면 그렇지 않은 게 분명하다. 사실 흑인들이 수영을 못하는 것은 같은 물에 몸을 담그고 싶지 않던 백인들이 오랫동안 이들의 출입을 금지한 인종차별 문화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

“시험 점수가 좋으면 똑똑하다”도 비슷한 예다. 로즈 교수에 따르면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은 SAT 점수와 출신학교의 명성이 재능을 예견케 하는 지표가 되지 못하고, 학부 성적도 졸업 후 3년 동안만 유효하다고 본다. 각 인재가 가진 재능이 들쭉날쭉해서 어느 하나의 점수로 평가할 수 없다고 결론냈기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 만사에서는 오랫동안 당연시해왔던 문제들에도 때때로 물음표를 달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순간 맹점이 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적잖기 때문이다. 납작한 숫자의 눈치를 보거나, 납작한 말에 가두기엔 삶이 넘치도록 다양하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하게 살면 그만 아닐까.

<최민영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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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별로 어떤 게 더 나쁜 범죄인지 따질 생각은 없지만, 아동학대는 한 아이의 인생과 그 아이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삶을 파괴하는 범죄다. 대검찰청의 2015년 한 연구용역 보고서는 ‘피해자로서의 아동은 발달 단계에 있으므로 신체적·정신적·성적 가해행위가 성인보다 훨씬 큰 법익 침해를 야기할 위험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이들은 “별것 아니겠지”라며 넘길 수 있는 작은 학대 행위라도 아이에게 장차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이의 부모는 어떤가. 아이를 학대당하도록 뒀다는 자책을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 아이가 커가면서 조금만 어긋나도 과거의 학대 사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아이를 위험한 환경에 두는 국가와 사회를 원망할 것이다. 이로 인해 다니던 직장을 관두거나, 아이를 더 낳으려다 포기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그래서 아동학대범죄는 엄하게 처벌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형법’ 등에서 처벌하는 아동학대관련범죄 종류만 20개에 달하고, 범행의 경중에 따라 가중 처벌도 내릴 수 있게 해놓았다.

하지만 엄격한 법과는 달리 아동학대범들에게 내려지는 판결들을 살펴보면 관대하기 짝이 없다. 소변과 각종 오물이 묻은 휴지로 아이들 입을 닦는 등의 학대를 한 한 보육교사는 최근 판결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00여 차례에 걸쳐 아이들을 학대한 보육교사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지난해 11월 발간자료를 보면 아동학대범죄자의 75%가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 내지 벌금형을 받았다. 가끔은 아동학대범에게 중형이 내려지기도 하지만, 이는 이미 아동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뒤의 경우다.

국회입법조사처의 지난해 5월 보고서를 보면 국내 아동학대 피해아동 발견율은 2016년 기준 2.15‰(인구 1000명당 발견율)로, 미국(9.2‰)·호주(8.5‰) 등에 비해 턱없이 낮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001~2016년 통계를 보면 아동학대 신고접수 및 의심사례 건수의 일관된 증가추세를 보인다”며 “한국사회에 잠재적인 아동학대 사례가 만연한 상태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고 우려했다.

그나마 아동학대 범죄가 적발돼도 범행을 입증하거나 피해사실을 증명하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아동학대로 인한 피해를 막으려면 현실적으로 ‘예방’만이 최선책이다. 아동학대범들에게 형벌 외에도 아동복지법을 통해 학교나 학원, 보육기관 등 아동관련기관에 10년간 취업을 못하도록 제한하는 제도를 둔 이유였다. 누군가는 “가혹하다”고 할 만한 이런 제도가 아이들을 보호하고, 가정을 살리고, 사회 전체를 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에 최근 변화가 있었다. 지난해 6월 헌법재판소는 “일괄적으로 아동학대범에게 10년 취업제한을 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아동학대를 엄벌해야 한다는 취지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안에 따라 10년 제한이 ‘정말’ 억울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도 싶다. 헌재결정에 따라 법이 개정돼 12일부터는 범행의 경중에 따라 최장 10년까지 취업제한을 법원이 내릴 수 있다.

종전 아동학대범들에게는 환영할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법의 부칙이 개정돼 12일 이전에 아동학대로 확정판결을 받은 범죄자들의 취업제한이 기존 ‘일괄 10년’에서 ‘최대 5년’으로 대폭 감경된 것이다. 이에 따라 소변 묻은 휴지를 아이들 입에 들이댄 교사의 경우 예전 같으면 10년이었어야 할 취업제한이 3년으로 줄었다. 벌금형만 받은 학대범들은 1년만 기다리면 재취업이 된다. 취업제한도 일종의 형벌로 본다면 아마도 역대급 ‘감형 이벤트’가 아닐까 싶다. 예정보다 일찍 아동관련기관으로 돌아오게 될 학대범들이 모쪼록 마음을 고쳐먹고 재범에 나서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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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라면 먼저 보수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스님들은 앞서 나가지 않는다. 스마트폰 같은 신문물도 사용하지만 먼저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다. 사회가 움직이면 조금씩 따라간다. 급변하는 사회가 과속으로 사고를 내지 않도록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감사한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스님들이 종무원 노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내부적으로 해결하면 될 문제에 검찰이나 경찰 같은 외부의 힘을 동원하려는 것이 좋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5주 전에는 ‘더 쿨한 스님을 보고 싶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원래 이해심도 많고, 약자를 보호하는 데 관심도 많은 스님들이 더 넓은 마음으로 노조원들을 대해달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최근 조계종이 종무원 노조 간부들을 징계하는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조계종 총무원은 노조에 대한 전근대적인 인식은 그대로인데, 징계하는 방식은 그 어떤 기관보다 ‘세련’됐고 절차는 신속했다. 지난 4월에 한 번 놀랐고, 지난달에 또 놀랐다. ‘이렇게 해도 되나? 아니, 법적으로 가능하긴 한 건가?’란 말이 절로 나왔다.

조계종 인사위원회는 지난달 9일 심원섭 지부장과 심주완 사무국장, 박정규 홍보부장 등 노조 집행부 3명에게 지난달 15일부터 ‘자택 대기발령’을 내렸다. 이들은 징계위원회를 앞두고 이미 대기발령을 받아 현업에서 배제된 상태였지만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조건을 추가했다.

앞서 조계종 노조 집행부 3명은 지난 4월10일부터 지난달 15일까지 강원도 낙산사로 대기발령을 받아 떠났다 서울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서울에 있는 조계종 총무원으로 출퇴근을 하던 사람들이다. 집과 가족 모두 서울에 있다. 조계종 종단은 이들에게 ‘산불피해 지원’이라는 명분을 주고 강원도로 보냈다.  

조계종 인사위원회는 징계위원회를 거쳐 지난달 24일 심원섭 지부장과 심주완 사무국장에게 징계를 내렸다. 심 지부장은 해고 통보를 받았고, 심 사무국장은 정직 2개월 징계를 받았다. 부친상을 당해 지난달 17일 열린 징계위원회에 출석하지 못했던 박정규 홍보부장은 지난달 27일 별도로 열린 징계위원회를 거쳐 지난 3일 정직 1개월이 확정됐다. 

조계종 인사위원회는 노조가 ‘종단 사업에 부정 내지 비리가 있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검찰 고발과 기자회견을 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을 징계 사유로 들었다. 그러나 조계종 인사위원회가 지키려는 것이 종단의 명예뿐은 아닌 듯하다. 노조의 전언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노조 간부들이 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관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자 총무원의 한 간부 스님은 “아비어미를 고소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노조가 지난 4월4일 자승 전 총무원장을 검찰에 고발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자승 전 원장은 재임 시절 승려노후기금을 위한 생수 판매 사업을 하면서 5억원 이상을 특정인에게 빼돌려 종단과 사찰에 손해를 입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노조는 징계에 불복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 역시 노동법에 밝은 변호사를 수소문해 맞대응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쯤되면 누가 더 종단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린다.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더 크게 만든 것이 누구인지도 알쏭달쏭하다. 

이제는 조계종 총무원이 그토록 바라는 부처님법이 아니라 사회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사회법은 ‘부모를 고소했다’는 이유로 자식을 처벌하지 않는다. 기관의 전직 수장을 비리혐의로 고발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하지도 않는다. 사회법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 역시 그러할 것이라 생각한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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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은어 중 ‘어그로’라는 말이 있다. 대개 ‘어그로를 끈다’는 관용구로 사용된다. 영어 단어 aggravation에서 왔다는 게 정설이다. 도발, 약올리기의 뜻을 가졌다. 

어그로를 끈다는 것은 부정적인 이슈를 내세워 관심을 모은다는 뜻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유행하고 있는 ‘막말’은 ‘어그로를 끄는 관종’의 짓이다. 현실 정치의 어그로는 실보다 득이 많다. 어그로의 수위만큼 자신의 지명도가 높아진다. 점점 더 자극적인 어그로가 유혹하는 어그로의 악순환이다. 

정치 관종의 어그로는 잃을 게 별로 없다. 막말과 망언은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정치판을 지저분하게 오염시킨다.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동시에 일부 지지자들을 결집시킨다.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지긋지긋한 정치로부터 떠나게 만들고, 지지자를 결집시키니 완벽한 플러스다. 정치판이 오염될수록 새로운 ‘유망주’가 유입될 가능성도 낮다. 새 얼굴이 없으니 자신의 자리는 더욱 탄탄해진다. 

지나치다 싶으면 사과를 하면 된다. 요즘 말로 ‘영혼 없는’ 사과는 다시 한번 어그로를 끄는 데 효과적이기까지 하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에 대한 혐오표현을 공개적으로 한 뒤 “정확한 의미와 구체적 유래를 전혀 모르고 썼다”고 해명했다. 

‘어그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단어지만 출발은 달랐다. 원래 ‘어그로’는 ‘팀을 위한 희생’을 뜻하는, 말하자면 ‘숭고미’를 가진 단어였다.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MMORPG)에서 이 말이 나왔다. 여러 명의 플레이어가 참가하는 온라인 역할 게임이다. ‘파티’를 구성해 괴물(몬스터)을 사냥하는 것이 게임의 주된 목적 중 하나다. 

게이머의 역할은 크게 탱커, 딜러, 힐러의 3가지로 나뉜다. 딜러는 원거리 공격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몬스터를 공격해 에너지를 떨어뜨린다. 인터넷 은어 중 ‘상대를 극도로 괴롭힌다’는 뜻의 ‘극딜’이 여기서 나왔다. ‘딜링’은 상대를 공격하는 행위다.

힐러는 힐링(healing)을 맡는다. 전투 도중 피해를 입은 팀원들을 치료해 회복시켜주는 역할이다. 마지막 하나, 탱커가 바로 ‘어그로’의 주인공이다. 탱커는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몬스터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낸다. 탱커가 두들겨 맞으면서 버티는 동안 딜러가 몬스터를 공격하고, 힐러가 탱커 또는 딜러를 치료하면서 팀 전력을 높인다. 3가지 캐릭터의 호흡이 맞아야 몬스터를 때려잡을 수 있다. 

몬스터의 공격이 딜러나 힐러를 향하면 파티 전력에 큰 손실을 입는다. 탱커는 몬스터가 계속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때 사용하는 전술이 바로 ‘어그로’다. 탱커는 몬스터를 향해 도발을 계속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든다. ‘어그로를 끄는’ 것은 대중들에게(혹은 지지자들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팀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희생적 행동이다. ‘내 친구들 말고 나를 때려라’라고 외치는 행동이다. 내가 두들겨 맞는 동안 내 동료들이 승리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종합격투기 선수 권아솔은 ‘어그로’ 전문이었다. 로드FC 소속으로 거침없이 막말을 이어갔다. 때로는 ‘트래시 토크’ 수준을 넘기도 했다. 지난 18일 제주에서 열린 굽네몰 로드FC 053 메인이벤트에서 만수르 바르나위에게 1라운드 초반 리어네이키드초크를 당해 졌다. 팬들의 비난이 거셌다. 권아솔은 SNS에 이렇게 적었다.

“선수가 시합을 못했다면 욕을 먹어야 한다. 그렇지만 선은 지켜달라. 나라의 지원도 못 받는 한국 종합격투기가 살아남는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해서 한 거다. 이런 게 아니면 사람들이 봐주지 않는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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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위해 차려준 음식에 대한 그리움은 언제나 강렬하다. 화려한 음식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식당 한쪽에서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는 음식을 먹노라면 그곳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먹어본 적은 없어도 그곳을 떠올리게 하는 것 또한 음식이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를 보면 ‘쿠바 샌드위치’ 맛이 궁금해진다. 음식평론가와 설전을 벌인 후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쫓겨난 셰프 칼이 푸드트럭에서 버터를 듬뿍 발라 구워내는 쿠바 샌드위치는 입맛을 다시게 한다. 사정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쿠바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말이다. 칼은 아들에게 ‘카페 드 몽’의 설탕 파우더를 탈탈 뿌린 프랑스식 도넛 ‘베녜’를 맛보게 하기 위해 미국 뉴올리언스에 푸드트럭을 세운다. “천천히 먹어. 생의 첫 베녜는 다신 못 먹어. 세계 어디서도 이 맛은 못 내”라는 영화 속 대사 덕에 이곳의 베녜는 전 세계에 입소문이 났다.

나만 해도 10여년도 더 지났지만 베트남 휴양지 달랏에서 화덕에 구운 바게트와 함께 먹은 치즈 맛이 지금도 또렷하다. 홍콩 센트럴 뒷골목의 완탕면은 어떤가. 주인 할머니가 손짓으로 일러준 대로 그 집의 비법 소스를 한 숟갈 넣으니 놀라울 정도로 맛이 달라졌었다. 그때 처음 먹어본 완탕면에 반해 수없이 완탕면을 먹으러 다녔지만, 서울에서 그 맛을 내는 집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음식에는 그곳만의 맛이 담겨 있을 터이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의 한 장면.

뉴욕, 런던, 파리, 도쿄 등 세계 주요 도시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요소. 거기에도 음식이 있다. 하버드대 에드워드 글레이저 경제학과 교수는 “대부분의 도시에서 위대한 극장들보다는 위대한 식당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다. 도시를 살리는 요인 중 하나가 ‘음식’이란 얘기다. 

음식에 대해 ‘피시 앤드 칩스’ 말고는 없다는 지독한 조롱을 받는 영국이지만, 런던에는 세계적인 셰프들과 유명 식당들이 많다. 이달 초 출장길에 잠깐 들른 런던에서 만난 한 업체 사장은 요즘 뜨는 음식으로 한식을 꼽았다. 런던 킹스크로스에 있는 한식당 ‘kimchee’(김치)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못 먹을 정도로 핫플레이스라고 한다. 한국 여행객들이 현지 음식이 맞지 않아 찾는 한식당과는 외양부터 다른 이곳은 종업원들도 한국인은 고용하지 않는 현지화 전략을 썼다. 잉카 유적지 외에는 내세울 게 없었던 페루 역시 매년 9월 리마에서 열리는 ‘미스투라’라는 남미 대륙 최대의 음식 축제가 사람들을 모은다. “멀다고 하면 안되갔구나.” 이 한마디에 4·27 남북정상회담 당일 점심에는 평양냉면집마다 긴 줄을 선 풍경과 냉면 인증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오기도 했다.

최근 서울시도 도시 공동체를 위해 음식에 주목한다. 지난해부터 서울역 일대에 ‘요리를 통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요리인류> 등 요리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KBS 이욱정 PD가 음식을 통한 도시재생이라는 주제로 기획을 맡았다. 올해는 식재료 공동구매, 공동손질, 공동배분을 하는 마을공동체 ‘우리마을 쿠킹박스’를 진행하고 있다.

사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음식을 매개로 공동체를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건강하게 먹기 위한 노력만으로 우리는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도시에서 잃어버린 연대의식을 되찾을 수도 있다. 2008년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온 것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광우병’ 때문이었다. <식탁 위의 세상>에는 1967년 마틴 루서 킹의 우주의 상호연결성에 대한 연설이 나온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끝마치기도 전에 지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이 말은 상관없어 보이는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평화를 얻지 못할 거라는 우려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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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배노동자 과로사는 어제오늘 제기된 문제가 아니다. 2017년 6월12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 집배원 과로사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배노동자들의 현실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더불어민주당 신창현 의원실에 따르면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과로와 근무 중 교통사고, 자살로 숨진 우정사업본부 직원은 157명이다. 올해 들어서도 5명의 집배노동자가 숨졌다.

지난 13일에는 무기계약직 집배원으로 일하던 30대 이은장씨가 다음날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잠자다 돌연사했다. 전형적인 과로사다. 이씨는 평소 과중한 업무로 힘들다는 말을 주변에 했다고 한다. 근무로 인정받지 못하는 시간 외 ‘무료노동’도 잦았다. 비 오듯 흐르는 땀 때문에 챙긴 여분의 옷, 짐을 나르다 생기는 상처를 치료할 소독제 등은 필수품이었다. 정규직이 돼 행복을 배달하겠다는 이씨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수십년간 반복되는 집배노동자 문제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정사업본부 노사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집배원 노동조건 개선 기획추진단’이 지난해 9월 낸 ‘집배원 노동조건 실태 및 개선 방안’에 따르면 연평균 2745시간(한국 임금노동자 평균 2052시간)에 달하는 집배노동자 노동시간을 주 52시간(연 2340시간)으로 단축하기 위해서는 2853명의 인력이 추가로 필요하다. 하지만 지난해 국회는 정규직 집배원을 1000명 증원하기 위한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지난 13일 새벽 어머니와 살던 세종시 자택에서 과로로 숨진 30대 비정규직 집배노동자 이은장씨가 이른 출근을 위해 전날(12일) 밤 거실에 미리 준비해 둔 집배원 조끼. 조끼 안에는 업무에 필요한 잔돈, 우편물도착안내서, 볼펜, 매직, 자동차 키, PDA 배터리 등이 들어 있었다. 정대연 기자

결국 돈이 문제다. 집배원 증원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우정사업본부 우편사업부문에서 적자가 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지난해에는 적자가 1000억원이 넘었다. 정보통신기술 발달로 기업들이 e메일이나 온라인 메신저 등으로 고지서를 발송하는 경우가 늘어난 탓이다. 민간택배업체들과 낮은 단가로 경쟁하면서 우체국 택배 수익성도 나빠지고 있다. 

그러나 우편물량이 준다고 집배노동자들의 업무강도가 낮아진 건 아니다. 전자상거래 활성화로 택배가 늘어나고, 1~2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가구 단위로 이뤄지는 우편 배달 노동강도는 오히려 세졌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연히 돈이 든다. 

보편적 공공서비스인 우편을 비용만으로 따지는 게 타당할까. 오지에 홀로 사는 노인도 우편물을 받아볼 수 있어야 한다. 외딴섬에 산다는 이유로 선거공보물, 법원송달물을 받아보지 못한다면…. 이윤이 최우선 가치인 민간기업이라면 손해를 보는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 적자를 줄이기 위해 당장 우체국 수를 대폭 줄일 것이다. 국회가 이 ‘죽음의 행렬’을 거두기 위해서는 인력과 재정 투입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제라도 예산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한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우편요금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통우편 50g 기준(2017년) 한국 우편요금은 350원으로, 영국(722원), 일본(806원), 독일(976원) 등의 절반 이하다. 공공서비스를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한 어느 정도의 요금 인상을 검토해봐야 한다. 기업·정부 등이 우편물을 다량 발송할 때 깎아주는 돈이 연 2500억원에 달하는데 감액률이 타당한지 살펴볼 필요도 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정책사회부 | 정대연 ho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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