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두 엄마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너무 울었는지 퉁퉁 부어 있더니 어느 날은 며칠 새 바짝 말라 있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 힘겹게 버티며 살아내는 표정, 둘 다 그랬다.

두 엄마는 모두 자식을 잃었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내걸고 거리로 나왔다. 엄마를 떠난 두 아들의 이름 뒤에는 ‘법’이 따라다닌다. 김용균법과 민식이법. 사람들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과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각각 그렇게 부른다. 지난 9월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숨진 김민식군의 엄마 박초희씨는 “그렇게 쓰라고 지어준 이름이 아니다”라며 울었다. 지난해 12월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비정규직 김용균씨의 엄마 김미숙씨는 ‘세상을 좋게 하고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는 뜻이라던 아들의 이름을 그냥 쓴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우연히 본 두 엄마의 모습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은 내게도 아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은 고 김민식군과 같은 9살로, 고 김용균씨처럼 엄마와 셀카 찍기를 좋아한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엄마의 애끊는 심정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무심한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그렇게 한들 뭐가 달라지겠냐고.

어느 부모가 자식을 잃고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까. 내 아이의 학교 앞 횡단보도에도 신호등이 없다. 1년 새 정규직이 35만명 줄고 비정규직은 86만여명이나 증가하는 노동현실에서 그 누구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두 엄마 모두 처참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살았을 우리 이웃이며, 또 우리다.

고 김용균씨의 엄마는 한 기자회견에서 “자식 죽은 부모가 나서지 않으면 사람들이 봐주지 않는다. 이만큼 힘들고 억장이 무너지는 가슴을 끌어안고 해야 국민이 알아주고 조금이라고 귀 기울여준다”고 했다. 슬픔을 가누기도 전에 일어섰던 것은 자식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내년부터 원청업체 책임을 강화하는 김용균법이 시행되지만, 고 김용균씨가 일하던 사업장에서는 여전히 비정규직인 하청노동자가 위험한 작업을 맡을 수 있다. 민식이법은 국회를 통과했지만, 13세 미만 어린이가 탑승하는 모든 차량을 어린이 통학차량으로 관리하는 ‘태호·유찬이법’과 안전사고 때 응급처치를 의무화하는 ‘해인이법’ 등 아직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어린이 생명안전 법안은 많다.

엄마들은 ‘투사’가 되어가고 있다. 고 김용균씨의 엄마는 아들의 1주기 추모대회에서 “너를 비록 살릴 순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삶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 싶다. 이제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길을 위해 걸어가겠다”고 했다. 고 김민식군의 엄마는 법안 통과를 위해 국회의원 앞에 무릎을 꿇으며 “다른 아이들이라도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돌아보면 우리의 역사에서 자식의 이름을 내걸고 거리에 나선 엄마들이 많았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 두 어머니는 자식 이름과 함께 일생을 살며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며 세상을 바꾸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엄마에게 아이 이름은 내 이름과도 같다. 아이를 낳고 줄곧 직장생활을 한 나도 ‘OO엄마’라고 불릴 때가 많다. 아예 아이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세상의 잘못된 것을 바꾸기 위해 자식의 이름을 앞세워 세상에 나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이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엄마는 자식의 죽음을 곱씹고 곱씹을 것이며, 그때마다 속은 까맣게 문드러질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두 엄마의 용기와 희생에 고개를 숙인다.

<이성희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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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대중잡지 ‘삼천리’에 재밌는 설문조사가 하나 실렸다. “내가 서울 여시장이 된다면?”

일제강점기 서울시장(경성부윤)은 당연히 일본인이 맡아 했다. 그러니 조선인, 더구나 여성은 시장이 절대 될 리 없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을 가정한 질문이었다. 당대 유명 여성 대부분은 이 질문에 “모든 서울시민에게 영양주사를 한 대씩 놓고…” “허영심을 근절하기 위해 화장품 세금을 100배 인상하겠다”는 식의 진지하지 않은 ‘공약’을 남발했다. “제가 서울 여시장이라니 천지개벽을 하게요”라며 상상 자체를 부정한 답변도 있다. 

하지만 이들과는 달리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은 여성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화가 나혜석이다. 나혜석은 전차 요금 구역제 폐지를 서울시정의 첫 번째 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전차 서대문선과 마포선 간, 동대문선과 청량리선 간, 광희문선과 왕십리선 간을 하나의 구역으로 변경하겠다”고 했다. 당시 동대문과 남대문을 경계로 교외선으로 환승하려면 전차 요금 5전을 더 내야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이 주로 살던 도심에서 밀려나 교외에 거주하면서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조선인들의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1930년대 경성에서도 교통 문제가 중요한 현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주요한 대중교통수단으로 거리를 누볐던 전차는 점차 버스의 장애물로 변했다. 전차는 교통혼잡을 이유로 결국, 1968년 11월 멈췄다. 

전차가 사라지고 버스가 들어선 서울은 해마다 변했다. 

누군가 기막힌 요술이라도 부린 것일까. 차도는 계속 늘어났는데 도로는 여전히 막히고, 보행자는 밀려났다. 미세먼지의 주요 원인인 차량이 내뿜는 배출가스로 인한 경제 손실이 날로 커지면서 전 세계 대도시들은 도심에서 차량 운행을 제한하는 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1999년 스페인 폰테베드라에서 시작된 ‘차 없는 도시’ 캠페인은 어느새 세계 도시들의 공통 과제로 자리 잡았다. 지난 10월15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시 교통국 이사회는 2025년까지 가장 붐비는 거리인 ‘마켓 스트리트’를 전면 보행길로 바꾸는 안을 승인했다. 스웨덴 스톡홀름, 싱가포르, 영국 런던 등에서는 ‘차 없는 도시’로 가는 중간 단계로 ‘교통혼잡세’를 걷고 있다. 서울시도 이제는 보행자 우선의 ‘걷는 도시 서울’을 내세운다. 주요 도로 찻길을 줄이고 모두 보행자와 자전거에 내줄 방침이다. 4대문 안은 공해유발차량 진입을 차단하고 이달부터 과태료를 부과한다. 

세계 도시들이 차 없는 도시를 추진하는 것은 단순히 공기질을 개선하고, 걷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IT 전문매체 와이어드는 차 없는 도시 시행 효과에 대해 “도심의 차량 수가 줄어들수록 보행자들의 사회적 교류가 늘어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는 사실이 많은 연구에서 증명됐다”고 분석했다.

보행친화도시는 찻길을 줄이고 자전거길을 넓힌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다. 2017년 12월 종로 중앙버스전용차로(BRT)를 개통하고 그 일대 보도를 넓혔지만, 보행자들이 늘어나 실제로 주변 상권이 살아났는지는 의문이다. 따릉이를 타고 광화문과 경복궁 주변만 다녀봐도 시내에 얼마나 많은 구릉지가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서울 시내를 걸어보라. 돈을 지불하지 않고는 쉴 곳이 거의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걷고 싶은 도시는 어디서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이런 점에서 서울시가 내년부터 운행하기로 한 ‘녹색순환버스’는 반길 만하다. 

85년 전 질문으로 돌아가자. “내가 시장이 된다면?” ‘땡땡~’거리며 전차가 도심을 달리게 하겠다. 종로 같은 구도심은 버스전용차로보다 전차가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전차는 매연도 배출하지 않는다. 마침 ‘노면전차’를 운행할 수 있도록 도로교통법이 개정됐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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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학생에게 특정 정치사상을 주입하려 했다는 한 학생의 주장으로 시작된 인헌고 사태가 “정치 편향 교육은 없었다”는 서울시교육청의 특별장학 결과에도 불구하고 가라앉지 않고 있다. 급기야 해당 주장을 처음 제기한 학생은 시교육청 앞에서 삭발식을 열며 “정치공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사퇴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 보수단체는 직무유기 등을 주장하며 조 교육감을 검찰에 고발했다.

인헌고 사태를 들여다보면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첫번째는 학교 내에서 발생한 사건임에도 학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외부의 ‘세력’이 있다는 점, 두번째는 그 세력이 ‘극우·보수’라는 점이다.

학생이 옳은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지를 하든 지원을 하든 자유다. 문제는 그 ‘의도’다. 인헌고 사태는 현재 ‘전교조 해체’ ‘정권 퇴진’ 등 온갖 정치색이 개입돼 있다. 피해를 주장하는 학생보다 지지세력의 목소리가 더 크다. 이쯤 되면 누가 누구한테 정치사상을 주입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인헌고 학생의 주장이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에는 지지세력 탓도 있다.

지금은 고등학교가 말 그대로 ‘학교’의 개념이지만 과거 독재정권 시절 고등학교는 민주화운동의 ‘성지’였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시작이 고등학생들의 반독재 시위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많은 대학이 설립되고, 고등교육이 대학으로 이관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의 근거지도 대학으로 이동했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고등학교에는 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둔 학내 동아리가 존재했다.

그런 점에서 인헌고 사태를 적극 지지하고 나선 세력이 극우·보수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인헌고 사태의 시작은 이 학생이 ‘성평화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생긴 지도교사와의 갈등 문제였다. 그리고 이 동아리는 ‘성평화’를 외치는 한 시민단체가 조직한 연합동아리 중 하나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인헌고 사태의 근간이 이 시민단체와 ‘성평화’라는 개념에 있다는 뜻이다.

이 시민단체의 대표가 지난해 3월 한 언론과 한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그는 10·20대가 젠더이슈나 젠더갈등에 민감한데, 보수가 이를 놓치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뒤집어보면 보수가 젠더이슈나 젠더갈등을 활용하면 10·20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헌고 사태에 극우·보수가 적극 지지를 보내고 지원하는 게 한편으론 이해가 된다. 인헌고 학생이 삭발하며 조 교육감 퇴진을 외친 날로부터 일주일 뒤 송희경 자유한국당 의원 등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성평화 교육의 필요성’ 관련 토론회를 열고 인헌고 학생을 초청했다.

정치란 게 그렇다 치자.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젊은층 지지율 올리기에 도움이 되고, 이것이 내년 총선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뭔들 못할까. 하지만 10·20대가 젠더이슈나 젠더갈등에 민감하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있다. 이들이 말하는 ‘성평화’라는 개념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돼서다. 요지를 들여다보면 남녀가 젠더이슈로 갈등하거나 싸우지 말고 서로 인정할 건 하고 존중하면서, 말 그대로 ‘평화롭게’ 지내자는 취지로 들린다. 문제는 뭘 인정하고 존중하냐인데, 여기에는 여성혐오나 남성우월주의 등으로 해석될 만한 주장들이 넘쳐난다.

페미니즘으로 둔갑한, 일부 여성들의 과격한 혐오주의가 잠시 대중의 시선을 끄는 것을 놓고 보편적인 양성평등의 개념이나 페미니즘 전체를 매도하거나 부정하는 것도 위험해 보인다. 현재 우리 사회가 그나마 성취한 양성평등의 수준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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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저녁, 또 하나의 마침표가 찍혔다는 소식을 듣고 멍해졌다. 끝나서는 안될 문장이 갑자기 중단되듯이 예고 없이 찍혀버린 마침표. 그 마침표는 하나의 사실을 가리켰다. 자살. 이 두 글자는 비교적 명확하게 죽음의 원인을 설명한다. 살인 용의자도, 수사기관의 수사도, 재판부의 판결도 필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갑작스레 찍혀버린 마침표 앞에는 무수히 많은 문장들이 있음을. 한 사람의 삶이, 이를 꺾어버리고 상하게 한 폭력과 사회적 압박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문장을 이어가고자 했던 손을 억지로 잡아채 비틀어버린 힘들이 있었다는 것을. 

25일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가수 구하라씨의 조문장소에 팬들이 들어가고 있다. 구씨의 빈소는 서울 강남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지만, 팬들을 위해 따로 이곳에 조문장소가 차려졌다. 김정근 선임기자

마침표 이전에 쓰인 수많은 문장들을 기억한다. 적어도 최근 쓰인 문장들은, 고인의 손으로 쓰이지 않았다. 불법촬영·폭행·협박 등으로 이어진 문장들은 집행유예로 끝을 맺었다. 여론은 피해자에게 가혹했지만, 법원은 가해자에게 관대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0단독 오덕식 부장판사는 가해자 최종범에게 상해·협박 등은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불법촬영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했다. 최종범은 미용실을 새로 열고, 축하 파티를 열었다. 만신창이가 된 쪽은 피해자인 고인이었다. 고인에 의해 쓰이지 않은 왜곡되고 비틀린 말들이 문장을 이어가는 손을 꺾어 마침표를 찍게 했을 것이다. 

비보가 ‘속보’라는 이름을 달고 퍼지기 이틀 전, 또 하나의 속보가 전해졌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무죄 소식이었다. 의혹 제기 후 6년 만에 법정에 선 김학의의 재판 결과 성접대는 공소시효가 지나서, 뇌물 등은 증거가 없어서 무죄였다. 김학의 사건 재수사는 버닝썬으로 남성 연예인의 성폭력, 권력과의 유착 의혹이 불거지자 ‘썬학장’(버닝썬+김학의+장자연)으로 불리면서 촉구됐다. 검찰과거사위원회는 ‘장자연 사건’은 재수사조차 하지 않았고, 김학의 사건은 재수사에 부쳤다. 하지만 남은 것은 ‘무죄’다. 

무죄, 증거없음, 집행유예. 이 가벼운 말들은 피해자에게 당신이 입은 피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당신의 고통은 별거 아니라고,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와 폭력은 대수롭지 않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 동영상’을 검색·공유하며 피해자가 입은 폭력을 재생산하고 조롱했다. 세상에 발붙일 곳 없다고 느낀 이들은 세상을 떠난다. 이 죽음에 수사기관은, 사법부는, 당신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가. 

때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25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폭력추방의날’이다. 세계 각국에서 여성 살해·폭력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프랑스에서는 올해 남편이나 연인, 헤어진 연인 등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이 최소 116명에 이른다고 한다. 독일 베를린에선 올해 119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며 ‘페미사이드’ 반대 집회를 열었다. 거리엔 “더 이상 누구도 죽어선 안된다”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한국은?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 보도 사건을 분석한 결과 2017년 남편이나 애인 등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85명이었으며, 살인미수까지 합하면 188건에 달했다.

여성들은 살해당하고, 맞고, 몸을 촬영당하고, 험담과 수군거림, 손가락질을 받고 고통에 내몰린다. 가해자에게 수사기관과 법원은 불기소하고, 무죄를 선고하고, 집행유예로 풀어준다. 이런 사회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피해자가 생긴다면, 이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남성에 의한 여성혐오적 여성살해’를 뜻하는 페미사이드는 현재진행형이다. 

아름답고 재능 있던 한 사람이 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난 곳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곳이다. 이곳을 변화시키는 것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 갑작스레 마침표를 찍고 끝나버린 문장을 우리가 제대로 완성해야 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라. 당신이 사는 삶을 사랑해라.” 고인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이제 고통 없는 곳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인 채로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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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신이죠?” “왜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 이유는 바로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미국의 ‘아싸’ 여성 정치신인 4인의 의원 도전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녹 다운 더 하우스>에서 의원이 되기 전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자신이 왜 뉴욕 14선거구 하원의원 선거 민주당 경선에 출마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1989년생인 오카시오코르테스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텐더로 일해왔다. 정치경력은 없다. 그런 그가 여성, 유색인종, 노동자 계급을 자기정체성으로 규정하고, 기득권과 반대 방향에 놓인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대신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공약도 철저히 이 원칙에 따른다. 모든 사람을 위한 건강보험, 그린뉴딜로 불리는 100% 재생가능에너지, 국공립학교 등록금 무료 등이다. 방법도 기존과 다르다. 기업 기부금은 받지 않는 풀뿌리 시민 모금으로 선거자금을 모았고, SNS를 활용해 소통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제는 ‘인싸’가 된 그를 종종 공격한다. 대표적인 레토릭은 “원래 나라로 돌아가라”는 인종차별적 발언. 푸에르토리코 이민 3세인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이렇게 응수한다. “내가 온 나라, 우리 모두가 맹세한 나라는 미국”이라고.

정치권으로 복귀한 이자스민 전 의원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을 보고 오카시오코르테스가 떠올랐다. 오카시오코르테스가 “근본적”이라고 했던 바로 그 질문, “왜 당신이죠?”에 대한 답을 우리 사회가 이 전 의원에게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사람들은 이 전 의원에게 묻는다. “왜 이제 와서 정의당으로 가는 거냐” “굳이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고. 사실 이 정도 질문이면 괜찮은 편에 속한다. 관련 기사엔 “왜 세금을 축내느냐” “당신들 나라 가서 권리 찾아라” “대한민국이 우습나” 등의 댓글이 수두룩하다.

보수정당에 몸담았던 그의 전력을 문제 삼는 것이라면 ‘철새 논란’에 휩싸인 과거의 정치인들과 다를 바 없이 비판을 받으면 될 일이다. 이 전 의원은 “새누리당이었을 때는 그나마 약자들이나 소수자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유한국당으로 변하며 그 생각이 달라졌다고 느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여기에 동의할지 말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문제는 그에게 쏟아지는 비판의 대부분이 인종이나 성별, 이주민이라는 지위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는 최초의 이주자 출신 의원이지만 영원한 아웃사이더였고, 게다가 여성이기에 이중의 혐오에 시달렸다. 보수진영에선 이주민의 권익이라는 어젠다 자체로 비판받았고, 진보진영에선 보수진영에 둥지를 튼 의도를 의심했다. 상황은 수년 전보다 나을 바 없다. 여전히 그는 “자극적인 (이주민) 혐오발언이 많아졌고 안타깝고 아쉽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 전 의원이 19대 국회에서 대표발의한 법안들을 찾아본다. 외국인 관련 이민 정책을 통합하여 정비하자는 내용의 이민사회기본법안, 세계 다른 어떤 아동과 마찬가지로 이주아동 역시 차별 없는 생활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안, 성폭행·성희롱 피해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보호를 위한 시설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 소수자의 권익을 확대하기 위한 법안들이 눈에 띈다.

정의당 입당식에서 그는 250만명의 이주민을 대신해 말했다. “저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여러분과 한국 사람이 되는 과정이 달랐을 뿐이다.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를 말하려 한다.” 오카시오코르테스의 출마의 변과 닮아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물어볼 차례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가 아니라 “왜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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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인 모 선배가 10년 전 어느 날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당시 선배는 서쪽바다 안면도에서 가족과 함께 소박한 펜션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간간이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여가 시간에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괜찮은 ‘제2의 인생’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림에 빠진 그는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겠다며 어느 날 말도 통하지 않는 프랑스로 용감하게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고생 끝에 올가을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하얀 캔버스 위에 정연하면서도 변칙적으로 이어지는 검은 선들을 그린 한 작품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보면서 생각했다. 10년은 어른도 멋지게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구나. 그의 용기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나이 들면 뭐 하지.’ 40~50대 직장인들을 만나면 약방의 감초처럼 나오는 주제다. 고민도, 사정도 제각각이지만 핵심적 질문은 두 가지 정도로 좁혀진다. ‘지금껏 나는 어떤 경험을 쌓았으며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생 달리기의 중간결산을 숨 돌리면서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재능을 따라 가보지 않은 길로 성큼 발을 내디딜 수 있다면 운이 좋은 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40대 취업자는 19분기 연속 감소 중이고, 재취업이 어렵자 나선 창업에서마저 하루 평균 609명이 문을 닫을 만큼 사정이 좋지 않다. 많은 중년들이 생계 책임 때문에 비바람 몰아치는 바다로 배를 띄웠다가 휘청이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자의든 타의든 노동시장에서 떠밀려 나올 때를 대비한 비상용 구명정을 옆구리에 낀다. 정년이 얼마 안 남은 한 대기업 남성 임원은 타고난 미각을 바탕으로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누구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자격증을 취득해 시장을 선점한다는 구체적인 방안을 세워놨다. 정년퇴직 이후 유튜버로 변신해 어려운 경제 이슈 해설에 나선 이도 있다.


그 이후도 공통의 근심거리다. 가난한 노인이 될 확률이 이 나라에선 매우 높기 때문이다.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빈곤율이 높아진 게 인구고령화에 따른 구조적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정부는 노인일자리 공공사업 확대를 통해 사회안전망을 깔았지만 대부분 반찬값 벌이에 그친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생계를 꾸릴 만한 민간부문 일자리는 지난해 기준 16%까지 되레 줄었다. 여기에다 소비자발 ‘고령화 쇼크’도 더해진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전 세계적으로 선진국의 기대수명이 100세를 내다보게 됐고, 사람들은 언제 병원비가 더 들지, 언제 죽을지도 예상할 수 없으니 많은 돈을 쓰지 않고 저축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정치·사회 역시 이 같은 고령화에 따른 보수화로 전체적으로 활력이 떨어지는 건 아닌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얘기를 듣고 보니 100세 시대에 나 같은 월급쟁이는 최소 80세까지는 일해야 한다는 뜻이구나 싶었다. 요즘 같은 인공지능(AI) 중심의 기술혁신 시대에는 뭘 새로 배운다고 해도 그 일자리가 오래지 않아 사라질 리스크도 상당한데 정말 나이 들면 뭐 하지. 게다가 새로운 직업기술을 매번 다 제대로 배울 수는 있을까.


이렇듯 저성장·고령화·기술혁명의 삼각파도가 거센 노동시장에서 정말 걱정되는 것은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걸까.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데이비드 데밍 교수에 따르면 예상 밖으로 인문사회과학이라고 한다. 문제 해결 능력, 비판적 사고 및 적응력을 갖출 수 있어 40세를 기점으로는 과학·기술·엔지니어링·수학(STEM) 전공자의 연봉을 앞지르는 ‘이기는 거북이’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산업구조가 급변하는 불확실한 시대에는 ‘기본기’가 최선이라는 뜻일 테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차세대들이 나이 들어 일할 수 있는 일자리나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최민영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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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인터뷰로 장혜영씨(32)를 만났습니다. 혜영씨는 발달장애인 동생 혜정씨(31)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많은 발달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시설에 격리돼 사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동생을 시설 밖 세상으로 이끌었죠. 초고를 혜영씨에게 보냈는데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비장애인 누구도 사회에서 홀로 살지 못한다. 보이는 장애와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을 뿐”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장에서 차별이 보이나요?

혜영씨는 “ ‘장애’라는 표현 자체가 부정적으로 쓰인 듯한 오해가 생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오해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자연스레 부정적인 것,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장애’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메시지를 받은 순간, 저는 뒤통수부터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혜영씨를 만나기 바로 얼마 전 김지혜 교수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읽었거든요.

장혜영씨는 “동생 혜정의 장애는 혜정이라는 사람의 일부이지만, 그것이 혜정이라는 존재 자체는 아니다”라며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누구나 자신의 존엄과 의지를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다문화학을 연구하는 김지혜 교수는 3년 전 혐오표현에 관한 토론회에 갔다가,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습니다. 토론회에서 명확한 결정이 나오지 않은 상황을 두고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다가, 한 참석자로부터 “그런데 왜 결정장애란 말을 쓰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김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결정장애.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말이 어느 날 사고를 쳤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뭐가 문제지?’ 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보이는 장애와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을 뿐”이라거나 “결정장애”라는 말을 장애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장애인에게 장애는 고치거나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의 정체성 가운데 하나를 당연히 열등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그것도 마치 재미있는 표현인 듯 말까지 만들어 쓴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10월26일자 커버스토리로 우리 사회의 선량한 차별과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을 다루게 된 것은 저의 이런 낯 뜨거운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책을 열심히 읽고도, “보이는 장애와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을 뿐” 같은 표현을 쓰고 장애문제에 뭔가 좀 아는 사람인 양 은근히 우쭐해져 있었던 제 모습. 다시 생각해도 정말 ‘이불킥’입니다.

김연수 작가는 <소설가의 일>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내 책상은 지저분해지고 수염은 제멋대로 자라고 바닥에는 지우개 가루가 흩어지게 되는데, 이건 우리가 사는 우주가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쓰고 고치고 또 쓰고 또 고치는 노력을 반복해야 한다는 뜻인데요.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지런히 제 머리와 마음의 방을 쓸고 닦고,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저도 어느 순간 차별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나쁜 의도는 없지만 무심코 차별을 저지르는 사람을 김 교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라 표현했고, 장혜영씨는 혜정씨와의 탈시설기를 담은 책 <어른이 되면>에서 ‘친절한 차별주의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선량한 차별, 친절한 차별이라는 프레임조차 실은 ‘가해자’의 입장을 배려해 쓴 표현입니다. 차별은 차별일 뿐이죠.

김지혜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누군가 말을 건네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3년 전 ‘결정장애’라는 말의 차별성을 누군가 지적해준 것처럼요. 말해봤자 소용없는 사람에겐 그런 조언조차 해주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오늘 제가 쓴 글에도 어쩌면 얼굴을 붉히며 이불을 밤새 걷어찰 만한 표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렵고 부끄럽지만, 부지런히 배우고 고치겠습니다. 그렇게 어제보다는 오늘, 차별주의자에서 한 뼘 더 멀어지고 싶습니다.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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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한 마리는 2시간20분, 스터디룸 대여와 음료는 45분, 전기료는 3시간 반….

도연(가명)이는 일해야 하는 시간으로 비용을 계산하는 나름의 셈 방식이 있다. 이른바 ‘시급 치환’. 친구랑 먹는 밥부터 500원을 추가해야만 먹을 수 있는 아이스 음료까지 “그 돈이면 내가 얼마를 더 일해야 하는데”를 떠올리며 아르바이트 시급에 맞춰 가치를 환산해 보는 거다. 도연이 얘기는 서울시 청년수당 지원을 받은 30명의 이야기를 모은 에세이 ‘청년수당이란 응원’에 나오는 내용이다. 

도연이 말고도 돈에 쪼들리는 이 땅의 많은 청년들이 시급 8350원에 ‘청춘’을 판다. 제 빛깔을 잃은 청춘의 가격은 얼마일까?

돌아보면 내 청춘도 설렘보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더 많았다. 제대로 된 꿈도 없었다. 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꿈 따위는 지레 밀쳐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 다행히 밥벌이는 하고 있지만, 수명이 늘어난 만큼 노후가 또 걱정이다. 한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데, 모두가 힘들다고 행복하지 않다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흙수저’로 자신들의 계급을 규정해버린 청년들에게 ‘눈을 낮춰라’ ‘우리 때는 더했다’며 윽박지르곤 한다. 요즘 애들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혼밥’을 즐기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을 경우, 메뉴와 가격을 선택하는 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이라는 고백을 듣고 나면 어렴풋이 그 시절 우리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사실 고용 절벽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청년 세대의 고통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청년 문제가 부각되면서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청년을 위한 복지정책을 주요 정책으로 내놓고 있다. 서울시 ‘청년수당’도 그중 하나다. 청년수당은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들에게 매달 50만원씩 주는 청년활동지원비다. 경기 성남시의 청년배당이 원조 격이지만 개념이 다르다. 청년수당은 신청 연령과 인원을 제한하고 있고 미취업자 청년만을 대상으로 한다. 청년배당은 취업 여부나 소득을 따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본소득 개념에 한발 다가선 정책이지만, 만 24세 청년에게 1년에 100만원의 지역 상품권을 준다는 한계가 있다.

최근 서울시는 청년수당 지원을 현재 연간 7000명에서 3년간 10만명으로 늘리기로 결정했다. 1인 청년가구에게 월 20만원의 월세를 지원하는 ‘청년월세’도 신설했다. 청년층의 주요 문제인 ‘구직’과 ‘주거’ 불평등을 완화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청년수당 시행 4년차를 맞은 지금도 ‘포퓰리즘’ ‘세금낭비’라는 인식이 따라온다. 물론 청년들에게 청년수당이 실제로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지원 금액과 대상을 크게 늘리는 만큼 사용처 확대 등 정책방안을 촘촘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은 당연하다. 청년들에게 50만원은 푼돈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던 일을 무조건 그만둘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니 일부 청년들이 수당을 유흥비로 쓴다는 비난은 거두자. 어차피 이 수당은 청년들에게 잠시 숨을 돌리라고 주는 돈이다. 학원 대신 노래방이나 영화관에 가면 좀 어떤가.

청년정책은 늘 청년이 ‘사회의 미래’라는 당위성을 전제로 한다. 서울시가 28일 발표한 신혼부부 주거지원 정책도 마찬가지다. 이들 정책의 밑바탕에는 청년의 결혼이 출산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일종의 투자인 셈이다. 청년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크게 바꿔야 하는 이유다. 여전히 우리나라의 복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거의 최하위 수준이다. 분명한 것은 과거의 삶보다는 나아질 것이라는 것. 그러니 정부 정책이 청년에게만 맞춰져 있다고 불평하지 말자. 다음은 당신 차례일 테니까.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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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은 말 중 가장 충격적인 언사는 지난 13일 나온 “톨게이트 수납원이 (현재 농성을 하고 있는데) 없어지는 직업이라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나”라는 말이었다. 하이패스 등의 보급으로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사람이 직접 돈을 받는 일이 실제로 적어지고 있고, 사라지는 직업이라는 낙인은 종종 리스트로도 만들어져 나올 정도이니 표현 자체로만 봐서는 충격적이랄 것은 없다. 그전에도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기도 하다.

문제는 저 말을 한 사람이 청와대 고위관계자이고, 저 말이 출입기자들과의 대화 중에 나왔다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관여하는 사람이, 그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드러낸 표현이었다.

사양산업을 언급할 때 항상 손에 꼽히는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고, 언론 못지않게 사양산업으로 취급받는 출판을 담당하고 있다. 굳이 내가 일하는 일터가, 내가 맡고 있는 분야가 사양산업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톨게이트 수납원이 그렇듯이 아마 사라질 직업이라는 진단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구질구질하게 보일지라도, 곧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기록은 해두고 싶다. 매주 100권이 넘는 책이 신문사로 배송되어 온다. 이름난 대형 출판사가 오래전부터 발간을 예고한 유명 작가의 책부터, 처음 들어본 출판사의 ‘무명작가’의 책까지 하루에도 많게는 수십권씩 책이 쌓인다. 

종이봉투에 책과 보도자료를 넣어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가끔은 편집자나 작가가 직접 쓴 편지를 동봉하기도 한다. 대부분 책만 보내고 말지만 어떤 출판사나 작가는 담당자 e메일로 자료를 또 보낸다. 자리를 비우기 일쑤인 담당자와 통화가 될 때까지 전화를 해서 책과 자료가 잘 도착했는지 직접 확인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들어온 책들을 골라내는 것은 내 몫이다. 출판사와 작가의 이름이 낯설고, 제목이 생뚱맞고, 표지 디자인이 촌스러워도 한 번씩은 다 펼쳐본다. 대체로 큰 출판사와 유명 작가의 책이 기사로 쓰기에 적합할 확률이 높지만 이미 회사에 온 책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의 일을 ‘사양산업’이라고 쉽게 판정내리는 사람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쏟아져 나오는 책 10권 중 9권은 찾는 독자가 없어 초판 1쇄만 찍고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책을 다룬 기사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 세상에 서평을 찾아 읽는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온라인 기사 조회수는 다른 분야에 비해 확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만드는 사람도, 책 기사를 쓰는 사람도 최선을 다한다. 세상에 꼭 필요한 책이라 여기고, 세상에 꼭 필요한 기사라 생각하며 일한다. 무엇보다 이 일은 그들의 ‘생업’이다.

얼마 전 40년 넘게 출판사를 운영한 분을 만났다. ‘돈 안되는 책’을 만들면서 부도 위기도 겪었지만 아직 책을 내고 있다. 책이 나오면 수십권을 언론사에 보낸다. ‘지면에 소개도 잘 안되는 책을 왜 보내시냐’고 물었다. “광고효과도 바라지만 기자들이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라 보낸다”고 했다. 또 “지금은 안 읽어도 언젠가는 기사에 도움이 될 책이라 보낸다”고도 했다.

지난 13일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한 말을 다시 곱씹어본다. 경제전문가로서 냉정한 현실인식이라 볼 수도 있다. 국가경제를 위해서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톨게이트 수납원이라는 직무와 신문, 출판 같은 산업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나”라고 물은 그 고위관계자에게 이 대답은 전해주고 싶다. “당신만 보고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뒤에 사람까지 보이니 말을 아끼는 것뿐이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란 말이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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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워싱턴의 구원투수 대니얼 허드슨은 데이브 마르티네스 감독이 경기 후반 믿고 쓰던 선수였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포스트시즌은 모든 출전 팀들이 우승을 위해 최상의 전력으로 맞붙는 대결의 장이다. 워싱턴이 포스트시즌 챔피언십시리즈에 진출했으니 허드슨도 야구장 불펜에서 대기해야 했다.

그러나 허드슨은 시리즈 1차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출산휴가를 내고 부인 곁으로 돌아가 셋째 딸이 태어나는 것을 지켜본 뒤 2차전에 맞춰 팀으로 복귀했다. 이토록 중요한 경기에 투수가 집안일을 핑계로 불참하다니! 팬들 사이에서 비난 여론이 일었다. 정작 마르티네스 감독은 “가족이 언제나 먼저다.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허드슨의 소셜미디어엔 팬들의 악성 댓글이 줄을 이었다.

이번 해프닝은 메이저리그가 ‘일·가정 양립’에서 뒤처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앞서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메이저리그는 2011년 노사 단체협상을 통해 선수가 최장 3일까지 출산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내 남성 프로스포츠 중 선수에게 유급 출산휴가를 주는 종목은 야구가 유일하다.

실제로 많은 선수들이 이 휴가를 사용한다. 뉴욕 양키스의 선발투수 다나카 마사히로도 지난 6월 등판을 한 차례 건너뛰고 출산휴가를 다녀왔다. 워싱턴 팬들은 하필이면 포스트시즌에 자리를 비운 허드슨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허드슨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 것뿐이다. 아기가 아버지의 직업과 포스트시즌 일정을 고려해 세상에 나올 날짜를 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엄연히 존재하는 제도를 활용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메이저리그 선수는 2014년에도 있었다. 당시 뉴욕 메츠의 2루수 대니얼 머피는 첫아이의 탄생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출산휴가를 내고 정규시즌 개막 1·2차전에 불참했다가 지역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개적으로 비난당했다. 2명의 ‘시사평론가’는 라디오 방송에서 “메이저리그 선수라면 (직접 가지 않고 산후조리를 도울) 간호사를 고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거나 “부인이 제왕절개를 했다던데, 그럼 시즌 개막 전에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로 머피를 공격했다. 

남의 제왕절개 사실까지 거론하며 철 지난 남성성을 과시하고 싶었던 이들 ‘평론가’는 비판 여론에 등 떠밀려 결국 사과했다.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이들을 “아마추어 산과 전문의”라고 조롱하면서 “2014년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냉소했다. 시대가 2014년씩이나 됐으면 새로운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개탄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개탄스러운 일은 2019년에도 있다. 어느 남성 기자는 최근 유시민 작가가 진행하는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에서 KBS 여성 기자를 겨냥한 성희롱 발언을 했다가 해당 방송사는 물론  한국여기자협회 등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이에 질세라 법원은 희한한 판결을 내놨다. 수원지법은 20일 “손은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신체 부위로 보기 어렵다”며 여성 부하직원의 손을 주물러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신체 부위를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곳과 아닌 곳으로 나눌 수 있다는 재판부의 발상 자체가 사람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일이다. ‘이제 아이들에게 남이 손을 주무르는 건 추행이 아니라고 가르쳐야 하느냐’는 부모들의 댓글은 이번 판결이 시민들의 상식선을 얼마나 밑돌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미투’ 운동 이후 한껏 고양된 시민들의 의식 수준과도 동떨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수치스러운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왜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일까. 낡은 사고는 감추고, 타인의 사정과 고통에 공감하는 척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2019년에도 무리인 것일까.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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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처음에 노브라 사진을 올리고 말들이 많았다. 이때 무서워하고 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편견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외모 평가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칭찬도 어쨌든 평가 아니냐.” (JTBC2 <악플의 밤>) “2019년 4월 11일 낙태죄는 폐지된다. 영광스러운 날! 모든 여성에게 선택권을.” (인스타그램)

지난 14일 설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전해진 직후부터 그가 남긴 치열한 분투의 기록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여성이라면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용기를 기억하자”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터져나왔다. ‘악플의 희생양이 된, 요절한 20대 여자 연예인’으로 설리의 삶을 축소할 수 없다는 거대한 애도의 물결이다.

설리는 여자, 그리고 연예인에게 유독 가혹한 사회적 편견과 지독하게 맞서 싸운 예외적이고 독보적인 ‘여자 연예인’이었다. ‘여자 연예인답게’ 욕망의 대상으로 순순히 박제되길 바라는 대중의 기대를 끊임없이 배신하고, 자신만의 다양한 모습과 소신을 지속적으로 밝힌 용기있는 여성이었다. 바로 그 이유로 ‘악플 세례’와 ‘논란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회적 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가장 폭력적인 곳에서, 가장 전투적으로 싸웠던 25세의 여성 설리. 많은 이들이 그에게서 ‘투쟁가’의 얼굴을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지난 7월 설리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Girls supporting girls(여자는 여자가 돕는다)’라고 적힌 붉은색 티를 입은 사진을 올렸다. 인스타그램 갈무리

하지만 설리의 이 투쟁에는, 줄곧 ‘기행’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룹 f(x)의 멤버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그는 항상 주목받던 ‘여자 아이돌’이긴 했지만 그의 이름이 대중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된 것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적극적인 소통에 나서면서부터였다. 2016년 그가 편안한 차림으로 찍은 ‘셀카’를 SNS에 게시한 이후부터, 그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태어나 단 한 번도 착용해 본 적이 없는 브래지어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년간 지독한 악플과 악의적 기사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 5월에는 배우 이성민을 두고 “성민씨”라고 호칭한 설리의 SNS 게시물을 두고 ‘예의가 없다’ 비판하는 여론이 쏟아지기도 했다. 설리보다 경력과 나이가 많은 이성민을 ‘선배님’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밖에도 그를 둘러싼 ‘논란’은 수도 없이 반복됐다. 그가 집에서 파티를 하고 친구와 술을 마시는 모습이 SNS에 공개될 때마다 “설리 이대로 괜찮은가”하는 무용한 제언이 쏟아져나왔다.

그럼에도 설리는 맞섰다. 수년간 ‘노브라 셀카’를 지속적으로 올렸다. 분명 무서웠을 것이고, 숨고 싶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직접 밝혔듯이 “편견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노브라’를 하나의 운동이자,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흐름이 등장한 것은 그가 용기내 올린 수 많은 ‘셀카’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성민씨’ 호칭 논란이 일었을 때도 그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우린 모두 서로를 아끼는 동료이자 친구다. 내가 알아서 한다”며, 한국의 보수적인 서열 문화에 태연하게 경종을 울렸다. 

지난해 8월 설리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게시글을 올렸다. 이에 일본 누리꾼이 항의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인스타그램 갈무리

‘기행의 장’처럼 여겨졌던 그의 SNS는 약자와 약자가 연대하는 하나의 장으로 변모해가기 시작했다. 그는 세계 여성의 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SNS를 통해 기꺼이 기념했고 ‘Girls Supporting Girls(여자는 여자가 돕는다)’라는 문구가 박힌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게시했다. ‘기행’으로 불리던 그의 시도들은, 누군가에겐 오늘을 살아갈 ‘연대의 힘’이 됐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니. 나는 여기 있는데.” 지난 7월 발표한 첫 솔로곡 ‘고블린’에서 설리는 이렇게 노래했다. 얼마든지 멈출 수 있는 싸움이었다. ‘기행’이라는 오명과, 각종 성희롱성 악플 속에서도 그가 고통스러운 싸움을 이어간 이유는 바로 ‘여기 있는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길 바랐기 때문에.

“설리가 행복하길 바랐다. 설리가 행복한 세상이라면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누리꾼은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그의 싸움에 위안과 용기를 얻었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만큼, 지금 이곳엔 상실이 크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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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SNS, 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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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이른 아침, 회사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뉴콘텐츠팀에서 다양한 월경용품을 소개하면서 ‘건강한 월경’을 말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한 사회적기업 ‘이지앤모어’에 대한 콘텐츠를 만들었는데 이를 접한 독자의 전화였다.

기사를 쓴 후배로부터 전해들은 통화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전화를 한 독자는 60대 남성인데 손주 가운데 하나뿐인 11세 손녀를 위해 생리대 외에 월경용품 박스를 사주고 싶다는 것. 지면 기사를 보고 연락을 했는데, 신문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업체의 연락처가 없고, 인터넷 주문은 할 줄 모르니 전화번호를 좀 알려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어머! 가족인 ‘남자 어른’으로부터 생리대 선물이라니.

그간 월경은 금기의 주제였다. 프랑스의 페미니스트이자 저널리스트인 엘리즈 티에보는 저서 <이것은 나의 피>에서 여성들은 임신 등 일부 기간을 제외하곤 평균 40년 동안 매달 5일간은 피를 흘리고, 지금 지구상에 8억명 정도가 월경을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월경은 은어로 불리며 금기시된다. 월경 대신 ‘생리적 현상’의 줄임말인 ‘생리’로 불리고, ‘그날’ ‘마법’이라고 에둘러 명칭된다. 

티에보는 회상한다. “물놀이를 하지 못했던 그 긴 나날이 생각난다. 탐폰을 넣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고, 패드는 다리 사이에서 커다란 공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해변에서 옷을 반만 입고, 불행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이 수영하는 것을 지켜보며 머물러 있었다.” 동서고금의 ‘티에보’들은 다들 공감할 이야기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꽁꽁 감싸고 숨기는 것이 여성에게 부여된 그래야만 하는 태도였지만 이제 생리대를 살 돈이 없다는 고민도, 여성의 몸에 건강한 생리대를 사용하고 싶다는 욕구도, 다양한 월경용품을 골라 쓰고 싶다는 선택권도 적극적으로 표출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된 이지앤모어의 안지혜 대표는 “‘월경’이라는 이름을 찾아주고자 한다”고 했다.

이런 세상인데 감싸고 싶은 몸을 억지로 드러내야 할 처지로 몰리는 이들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지난 9월9일부터 농성을 벌이고 있는 톨게이트 수납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대다수가 여성인 이들은 도로공사의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김천 본사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경찰의 강제진압 시도에 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상의를 벗어던졌다. 박순향 전국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부지부장은 “저희가 할 수 있는 ‘내 몸에 손대지 마라’라고 외쳤다. 누가 외쳤는지 모르겠지만 ‘벗자’라는 단어에 우리는 벗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궁지에 몰려 눈물로 상의를 탈의한 여성들에게 쏟아진 건 가혹한 시선이었다. 58개 시민단체가 국가인권위에 낸 진정서를 보면 강제연행에 항의하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이 상의를 탈의했을 때 경찰과 사측이 촬영을 하고 비웃는 일이 있었다는 내용도 담겼다.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몸을 드러냈다는 뉴스에 달린 댓글들은 입에 담기조차 어렵다. ‘중년 여성’이자 ‘노동자’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가 담긴 멘트들에 차라리 눈을 감고 싶다. 자발적인 탈코르셋 운동이 벌어지는 시대에 누군가는 최후의 수단으로 옷을 벗어야 하고, 그 행위마저 조롱당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이렇게까지 세상이 나아졌구나’ 싶다가도 ‘아직도 세상은 이 지경이냐’ 싶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지만 그 흐름 속에 오히려 휩쓸려 버린 이들도 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힘이 없는, 억울한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에게, 참사 2000일을 넘기는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산업재해로 쓰러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보이지조차 않는 난민 신청자와 이주노동자들에게, 생활고에 시달린 탈북 모자와 송파 세 모녀에게, 장애인과 성소수자들에게….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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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돈을 많이 쓰는 팀’이 이기는 종목이다. 뉴욕 양키스가 ‘악의 제국’으로 불렸던 것은 막강한 자금력으로 스타 선수들을 끌어모아 우승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우승을 통해 인기를 높였고, 더 많은 돈을 벌어 또 뛰어난 선수를 사들였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난다 긴다 하는 선수들을 긁어 모았다. 상대팀에 가면 잘할까봐, 데려다 놓고 쓰지 않은 선수가 여럿이었다.

야구가 ‘이기는 방법’을 새로 찾은 것은 약 20년 전의 일이다. 가난했던 오클랜드가 2001년 21연승을 달리면서 주목을 받았다. 우연히 이긴 게 아니라는 게 책과 영화로 만들어진 ‘머니볼’로 잘 알려지게 됐다. 홈런을 펑펑 때리던 시대, 오클랜드는 남들이 주목하지 않던 ‘출루율’에 주목했고, 덕분에 승리에 필요한 선수를 비교적 싼 가격에 모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이기는 방법’을 찾기 위한 전쟁이 시작됐다. 야구를 잘했던 이들의 경험과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 야구라는 종목을 잘게 잘라 분석하는 여러 가지 기법이 동원됐다. 만년 꼴찌였던 탬파베이는 창단 10년째인 2008년 ‘수비 시프트’를 바탕으로 뉴욕 양키스를 꺾고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에 올랐다. 타구 방향을 감으로 추측하는 대신, 실제 데이터로 추적해 수비 위치를 옮겨 실점을 줄였다.

야구는 더욱 치밀해졌다. 2015년부터 메이저리그 야구장에 ‘스탯캐스트’라는 정밀 측정 장비가 설치됐다. 투구 회전 수와 무브먼트, 타구의 각도와 발사속도 등이 플레이마다 측정되고 계산돼 숫자로 쌓였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수많은 이론과 실험이 반복됐다. 그리고 몇 가지 길을 찾았다.

승리 공식은 이제 뻔하다. 회전 수가 많은 강속구를 던지고, 이를 때려 넘기는 길이 승리 지름길이다. 빨라지는 구속에 연속 안타 가능성은 낮아졌다. 효율적인 훈련법으로 힘을 키우고, 더 효율적인 스윙으로 스피드를 높여서 홈런을 노리는 것이 승리 확률을 높인다. 그래서 메이저리그는 대부분이 ‘홈런’을 노리는 스윙을 한다.

2019시즌 메이저리그는 한 시즌 홈런 6776개로 역대 최다였던 2년 전 6105개를 11%나 뛰어넘었다. 미네소타는 팀 홈런 307개로 신기록을 세웠다. 뉴욕 양키스가 306개, LA 다저스는 279개를 때렸다. 모두가 홈런을 노리는 스윙을 하니 삼진도 늘었다. 12년 연속 늘어나고 있는 삼진 4만2823개는 지난해보다 4%, 2007년보다 무려 33%나 증가했다.

홈런이 늘고, 삼진이 늘다 보니 모 아니면 도의 야구가 이어졌다. 야구는 지루해졌다. 승리의 길을 찾았는데, 관중 수가 줄어든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2019시즌 메이저리그 관중 숫자는 6850만여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7000만명 관중 수가 무너진 것은 2003년 이후 처음이다. 늘어난 중계권료 수입 등으로 여전히 돈이 넘쳐나지만 ‘지루해진 야구’는 미래에 대한 적신호다.

여기저기서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 야구 칼럼니스트 롭 나이어는 책 &lt;파워볼&gt;에서 “야구통계전문가들이 승리를 향하는 최적의 길을 찾아냈는지는 몰라도 팬들이 보기에 즐겁고 신나는 야구는 아니다”라면서 “지난 수십년 동안 야구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목이 증명했다. 팬들이 원하는 걸 주지 못하면, 그 종목은 결국 망한다”라고 적었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가 ‘이기는 것’에만 골몰하고 있다. ‘밀리면 끝이다’라는 공포는 ‘승자독식사회’가 가져다준 저주에 가깝다. 정치는 갈등을 해결하는 게 목적이지만 승리를 위한 정치공학적 계산과 수사만 난무하고 있다. 

잔뜩 쌓인 문제들이 풀리지 않는다. 이기는 방법만 따지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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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부터 취재 분야로 출판을 담당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매주 수많은 책 중에서 소개할 신간을 선정하고 서평까지 쓰는 것이다. 매일 회사로 배송되는 책들을 검토해 부 전체 회의에 올릴 리스트를 만든다. 출판사의 책 배송을 대행하는 업체가 붙여둔 스티커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출판사의 땀입니다. 희망을 선물해주세요.’ 전에는 누가 공짜로 줘도 안 읽을 제목을 가진 책이라도 다시 보게 만드는 마법의 문구다.

1차로 검토해 추린 책이 15~20권 정도가 된다. 문학과 학술을 맡고 있는 다른 기자들의 리스트를 합치면 다시 30여권이 된다. 이 책들을 놓고 문화부원들이 모여 회의를 한다. 먼저 출판 담당이 책의 주요 내용과 특이 사항을 설명한다. 길고 긴 회의 끝에 최종적으로 경향신문 지면에 소개될 책을 결정한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선택을 받은 책은 8~9권에 불과하다. 단신으로 소개하는 책까지 합쳐도 20권이 안된다.

부서 전체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고는 하지만 회의에 올라갈 책을 고르는 것은 순전히 출판 담당의 몫이다. 1차 검토에서 탈락한 책들은 대부분 다시 볼 일이 없다. 이러다 보니 출판 담당으로서 선택에 많은 부담을 느낀다. 혹시나 책을 고르는 눈이 부족해 좋은 책을 놓치지나 않을까 항상 불안하다.

책을 선정하고 서평을 써 송고한 후에는 불안감이 더 커진다. 경향신문의 신간 소개는 토요일자 신문에 나온다. 대부분 같은 요일이지만 몇몇 신문은 금요일자에 신간 소개 기사를 내보내기도 한다.

매주 금요일 아침이 되면 여러 신문을 볼 수 있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다른 신문부터 본다. 가끔은 새벽에 눈이 떠져 아직 나오지도 않은 지면을 찾아보곤 한다. 토요일에도 마찬가지다. 다른 신문의 출판 담당자들도 나와 비슷한 선택을 했다는 것을 확인해야 안심이 된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반드시 지면에 써야 할 책을 놓친 적은 없는 것 같다. 수준 이하의 책을 골라서 웃음거리가 되지도 않았다. 지면을 차지하는 비중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전체적으로 보면 비슷비슷한 책이 각 일간지의 선택을 받았다.

이렇게 한 달여를 보낸 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일간지들이 선택하는 책은 다 비슷비슷할까. 가장 ‘좋은’ 답이야, 모두가 가장 좋은 책을 골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그럴 일은 없다. 아주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취향이 갈리는 것이 책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은 사람, 정확히는 환경이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슷한 학력을 가지고 있고, 비슷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며, 비슷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독자에게 보이기’ 가장 좋은 책을 선택하려 한다면 비슷한 책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를 포함한 요즘 기자의 한계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하게 알고 있을지라도 사람이 자신이 자라왔고 현재도 살아가고 있는 환경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영역 밖으로 단 한발을 내딛기가 어렵다. 취재원에게 입으로는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기사에는 온전히 담지 못하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까치발을 딛고서라도 내가 몸담고 있는 구역 밖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필요하면 과감히 밖으로 나가보는 것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쉽지 않지만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지난 17일 신간 &lt;판결과 정의&gt;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김영란 전 대법관은 대법원 판결에 대한 책을 쓰는 이유로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또 “내 책을 읽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해줄 때 가장 고맙다”고도 했다. 전직 대법관이자 교수에게 기자의 가장 큰 덕목을 배웠다.

<홍진수 문화부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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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커리 코원은 브루클린 공원에서 막대기로 ‘무장’한 채 우리 아이 이턴 롱스트리트의 얼굴을 쳤다.” “잠시만요, 무장이라고요? 그냥 ‘가지고’ 정도가 좋겠군요.”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동명 원작을 영화로 옮긴 <대학살의 신>은 아이들 싸움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한 아이의 집에 모인 두 부부 이야기다. 처음에야 걱정과 위로, 사과의 말이 오가지만 이들의 논쟁은 결국 싸움으로 번져 서로의 본색을 드러낸다.

때린 아이의 아빠 앨런은 자신이 변호하는 제약회사가 발매한 혈압약의 부작용을 덮으려 한다. 교양이 넘치는 그의 부인 낸시는 대화 도중 연신 전화를 받는 남편에게 눈치를 주지만, 막상 자신의 명품가방이 내동댕이쳐졌을 때는 예의는 온데간데없다. 맞은 아이의 엄마 페넬로피는 ‘다르푸르 학살 사태’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다. 그러나 실상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고통보다는 낸시의 구토로 더럽혀진 절판된 화집이 더 걱정이다. 그의 남편 마이클은 수익만 좇는 제약회사를 비난하지만, 정작 가족 몰래 햄스터를 내다버린 사실이 들통나 낸시에게 도덕성을 공격받는다.

그렇다. 네 사람은 모두 배울 만큼 배운, 먹고살 만한 미국의 중상류층이다. 영화는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의 위선을 비웃는다. 여기에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아동 성폭행 혐의로 유럽에서 도피 생활을 하고 있는 로만 폴란스키라는 것을 더하면 씁쓸함은 배가된다.

새삼스럽지 않은 이 영화 얘기를 꺼낸 것은 여태껏 벌어지고 있는 조국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여러 논쟁들이 더 이상 진보·보수나 여야 등 이념이나 진영을 매개로 한 갈등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가진 자들이 부를 대물림하고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위선과 표변을 일삼는 ‘한국 사회 기득권자들에 대한 보고서’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모순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녀들이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월가 점령시위 등에서 불평등한 사회를 비판하며 울려퍼진 ‘우리는 99퍼센트다’ 구호에는 대다수의 분노가 집약됐다. 당시 최상위층인 1퍼센트에 대한 비판을 이끌었던 이들은 중상류층 지식인들이었다. 하지만 이젠 불평등 구조를 분석하려면 ‘중산층’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책임도 빼놓아서는 안된다. 경제학자 리처드 리브스의 책 <20 VS 80의 사회>의 관점을 빌려보자. 리브스는 기존 불평등 담론에서 벗어나 논의의 초점을 20 대 80의 사회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상류층은 인맥과 연줄을 통해 교육, 인턴, 고소득 일자리 등을 자신의 자녀에게 마련해주고 사회적 지위를 물려주려 한다”며 이를 ‘기회 사재기’라고 부른다. 이는 자녀 세대가 하위 계층으로 떨어지는 위험을 막아주는 ‘유리 바닥’이 된다고 했다. 반면 계층 하부에선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내가 리브스의 주장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지적한 상위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중상류층의 행태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된 현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 이미 커져버린 불평등의 간극을 좁히려면 나머지 80퍼센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강남 집값 잡기’보다는 차라리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서울시도 강남·북 균형발전을 핵심 정책으로 내세운다. 지난달 강남에 있는 인재개발원과 서울연구원,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강북 이전을 확정했지만 내부 구성원들의 반발이 심하다. 

이치는 간단하다. 불평등의 간극은 거저 줄지 않는다. 가진 자들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리브스의 친구처럼 “나는 평일에는 불평등 문제를 비난하고, 주말과 저녁에는 불평등 강화에 일조해”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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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수나 운동 선수가 외국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거나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을 때 국내 언론이 반드시 쓰는 기사가 이른바 ‘외신 반응’이다. 미국·유럽 등의 언론이 이 뛰어난 한국인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현지 기사를 찾아내 우리말로 풀어 소개하는 것이다.

외신의 평가를 기사로 작성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거둔 성공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다각도로 조명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기사는 동북아시아 변방 국가 특유의 감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일면식도 없는 남남이지만 같은 한국인이 서구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자랑스러워지는 것이다.

김연아는 기자들에게 수많은 외신 반응 기사를 쓰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힘차고 아름다운 연기로 피겨 스케이팅 최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김연아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에게 밀려 은메달을 획득했을 때였다. 김연아는 의연하게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그를 응원했던 한국 팬들은 판정이 불공정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집단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팬들의 분노가 얼마나 굉장했는지, 이 현상에 대한 외신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김연아가 은메달에 그쳤을 때 한국인들이 분노한 것은 놀랍지 않다”며 “오랜 세월 한국은 국제 대회 성적을 자부심과 결부했던 나라”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인들이 전쟁의 폐허와 가난을 딛고 폭발적 경제 성장을 이뤘음에도 여전히 자국을 ‘약소국’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OECD 경제 순위나 국제 스포츠 대회 성적, 노벨상 개수 등 정량화할 수 있는 성과가 한국의 위상을 높여주는 걸로 여긴다고 분석했다. 김연아의 은메달이 불러온 분노의 후폭풍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를 갈구하는 한국인들의 심리를 서구 언론에 드러내 보인 사건이 됐다.

그러나 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인을 응원하는 마음들을 모두 애국심이나 자격지심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해외에서 뛰는 한국인 운동 선수를 국가대항전에 출전한 국가대표 선수인 양 편파 중계하는 방송에 눈살을 찌푸리는 팬들도 많다. 사회가 바뀌고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인들의 해외 활약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해졌기 때문이리라.

LA 다저스 류현진이 7월20일 마이애미전에서 힘껏 공을 던지고 있다. AP연합뉴스

최근 기자들에게 외신 반응을 쓰게 만든 스타는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의 류현진이다. 올 시즌 류현진은 뛰어난 투구로 메이저리그 최정상에 오르며,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 수상 후보로까지 거론돼 왔다. 한국 야구팬들에게 친숙한 얼굴인 류현진의 활약은 반가운 일이다. 류현진의 경기 내용을 소개한 기사에서 악성 댓글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 팬들은 류현진이 외국에서 ‘국위’를 ‘선양’했기 때문에 응원한 게 아니다. 류현진을 덮어놓고 칭송하는 댓글엔 ‘국뽕(애국심에 도취된 것)’이라는 빈정거림이 따라붙는다. 팬들이 류현진에게 원하는 것은 국위선양보다 차라리 ‘힐링’에 가깝다.

우리는 삶에 짓눌려 항상 피곤하고, 별다른 낙이 없다. 정치권엔 믿을 사람이 없고, 경제는 언제 좋아질 것인지 기약이 없다. 웃을 일 없는 사람들에게 류현진은 정교한 투구를 지켜보고 감탄하는 즐거움과 승리의 기쁨을 안겨준다. 경기에 몰입하는 동안은 걱정과 잡념을 잊을 수 있다. 적잖은 팬들이 “요즘 류현진 보는 맛에 산다”고 고백하는 이유다.

류현진은 최근 몇 경기에서 부진했다. 사이영상을 받는다면 개인의 영광이자 한국인의 메이저리그 도전사에 한 획을 긋겠지만, 사이영상을 못 받아도 실패는 아니다. 남은 경기에서 잘 던진다면 한국 팬들은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즐기려 보는 게 스포츠 아니겠는가.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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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옛 동료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입사 만 20주년이라는 인사였다. SNS 댓글로 옛 동료들 몇몇이 더 모였다. 대부분 여기저기 흩어졌지만 또 몇몇은 여전히 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다들 이모티콘으로 박수를 보냈다). 처음 넥타이를 맸을 때, 세기말이었다. 불안과 희망이 공존하던 때였다. 막 인터넷 콘텐츠 시장이 무르익기 시작할 때였다.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된, 드라마 속에서나 나오는 ‘PC통신’ 회사에서 일을 했다. 콘텐츠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BBS라 불리던 게시판 글 하나하나가 귀했고, 가치 있었다. 그렇게 생산된 콘텐츠를 기획하고 관리하다가, 콘텐츠를 직접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옮긴 게 지금의 일이다.

그러니까 콘텐츠를 다루기 시작한 게 만 20년 됐다. 읽을거리, 들을거리, 볼거리 등 정보와 재미를 담은 ‘콘텐츠’는 20년 동안 제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꿨다. 색깔과 모양만 달라도 신선했던 텍스트 콘텐츠는 영상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면 구닥다리로 평가받는 시대가 됐다. 신문사의 일이 그렇다.

비록 뉴스 콘텐츠는 공짜라도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으니, 콘텐츠를 돈 주고 보자는 결심을 한 게 몇 년 전의 일이다. ‘구독 경제’라는 산업에 편입했다. 카드 사용 내역서를 뒤져보니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세계적 영화 드라마 콘텐츠 플랫폼 N사에 지불한 돈이 월 만원이 넘는다. 여기에 없는 걸 보기 위해 국내 플랫폼 P와 T에 각각 몇천원이 또 들어간다. 음악을 듣는데 어쩌다 보니 2가지 서비스를 이용하게 됐다(아내와 같이 쓰는데, 동시 접속을 막아서다). 스트리밍서비스 B와 최근 열심히 광고를 하는 V를 쓴다. 둘은 사실 같은 회사, 대형 포털 N사의 서비스다. 이게 또 몇천원씩이다.

요즘엔 전자책 시장도 구독 경제 열풍이다. R사에 매달 몇천원을 꼬박꼬박 내고 있다. 그래도 이전보다 읽은 책의 숫자는 확실히 늘었다. 일 때문에 미국 야구책을 읽으려면 미국 전자책 A사를 이용해야 하는데, 여기도 구독 서비스가 있다. 아직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해, 그때그때 사서 읽는다. 지난 1년간 4권을 사는 데 든 비용이 약 6만원인 걸 보니 이것도 구독 서비스를 신청해야 하나 싶다.

미국 야구를 봐야 해서 MLB TV 1년 사용권을 매년 결제한다. 13만원 정도 한다. 미국스포츠잡지 S와 E의 1년 온라인 정기 구독 이용료가 각 4만5000원 정도다. 새로 생긴 미국 스포츠 뉴스 온라인 유료매체 A의 1년 구독료가 약 7만원이다. 앗, 카드로 빠져나갈 때는 몰랐는데, 합해보니 연 80만원이 넘는다. 집에서 보는 신문구독료 2부는 넣지도 않았다. 옆에 있던 아내가 한마디 한다. “추석이라 돈 쓸 곳도 많은데.”

그러고 보니 추석이 1주일 남았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새삼 곰곰이 생각하는데 거실 구석에 해마다 회사에서 추석선물로 보내준 스팸이 잔뜩이다. 그렇다, 한국 추석엔 역시 스팸이 아니던가. 콘텐츠에서 구독을 거쳐 추석을 지나 스팸에 도착했다. 돌고 돌았지만 길은 연결되어 있다. 20년 전이 세기말이었다면, 2019년은 더욱 암울하다.

가짜 뉴스가 문제가 아니라 스팸 뉴스의 시대인 게 문제다. 구독이면 끊으면 되는데 ‘공짜’라는 외피를 두르고 포털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진다. 인터넷 초창기, 요란한 제목으로 유혹하는 스팸메일 더미를 빼다 박았다. 메일 서비스 회사들은 너도나도 ‘스팸차단’ 버튼을 달았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역시 ‘스팸차단’ 기능이 필수다. 스팸뉴스는 뉴스 전체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치밀해서 친절한 뉴스는 스팸 더미에 묻혀 사라지기 일쑤다. 그러니 다들 덜 치밀해 덜 친절한 스팸생산 유혹에 빠진다. 

추석 밤, 휘영청 한가위 달에게 비노니 제발 포털에 ‘스팸뉴스 차단’ 버튼 하나 만들어주소서.

<이용균 스포츠부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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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는 몹시도 답답한 시간이었다. 기승을 부리던 폭염이나 일본과의 관계,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 때문만은 아니다. ‘전주 여인숙 화재…폐지 주워 쪽방 생활하던 노인 3명 사망’ ‘창문도, 에어컨도 없는 휴게실서 숨진 서울대 청소노동자’ ‘냉장고는 텅 빈 채…보호사각서 죽어간 탈북 모자’ ‘속초 아파트 건설 현장서 엘리베이터 추락…3명 사망·3명 부상’ ‘목동 빗물펌프장 사고’ 등 쏟아지는 기사를 보고 있자니 속이 타들어 갔다.

사람이 죽고 있다. 일을 하다가, 폭염에, 배를 곯다가, 쪽방에 불이 났는데 피하지 못해서. 그리고 뉴스 검색창에 오르지 않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가는 수많은 죽음이 있다.

안전사회시민연대와 노년유니온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일 서울 목동 빗물 펌프장 앞에서 사망 사고 참사 규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석우 기자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은 예정돼 있다. 죽음을 살아가는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잘 맞이하기 위한 지침서들도 쏟아진다. 그 방법과 시점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인간의 몸과 질병, 죽음에는 사회적 원인이 스며 있다. 김승섭 교수는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라고 했다.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죽음이 시시때때로 목도된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씨,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을 하던 김모군, 과로에 쓰러진 수많은 집배원들, 5년 전 빈곤을 이기지 못한 송파 세 모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세월호의 사람들. 이들은 노동자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 끊어지지 않는 빈곤의 악순환, 유해성분 물질이 안전한 제품으로 둔갑하는 구조, ‘가만히 있으라’로 응축되는 사회적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고 나서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죽음이 있다.

사회의 치부를 떠안은 비극에서 마취된 공동체를 본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빈곤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고,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고, 안전하게 살고 일할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부패한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여러 곳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고는 이내 사라져버리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은유 작가는 ‘현장실습생 르포집’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서 말한다. “그동안 거리에서 장애인을 못 봤다면 장애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만한 여건이 아니라서 그렇듯이, 지금까지 성폭력 피해자를 못 봤다면 그런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말해도 들어주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듯, 특성화고 학생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맥락에 따라 자연스레 비가시화된다.” ‘일반’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순간의 충격파를 던지지만 그마저도 쉽게 잊혀지고 만다. 쏟아졌던 기사들도 이미 사라졌다. 존재, 메시지, 죽음마저도 휘발된다는 것은 절망적이다.

그래서 남은 이들이 기억해야 한다. 떠난 이가 남긴 궤적과 이 이후를 기록해야 한다. ‘그것 말고도 해야 할 다른 일이 많으니까, 경제가 어려우니까’라는 핑계들은 ‘그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에 다름 아니라고 외쳐야 한다. 앞서 언급한 책에서 김승섭 교수는 세월호 참사 관련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밝혔다. “아픔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대책이 있을 리도 없었겠지요. 그 참사의 원인을 제공했던 국가는 그 아픔을 개개인에게 넘긴 채, 계속 정권이 바뀌며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세월호 참사마저 그렇게 보내고 나면, 우리에게 공동체라고 부르는 무엇인가가 영영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개인의 죽음이 덧없이 잊혀지지 않는, 기억과 기록으로 각성한 공동체를 꿈꿔 본다.

<이지선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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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 412호 법정.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실시간으로 상황을 보고했다고 허위 답변한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에 대한 1심 판결 선고공판이 열렸다. 

이곳은 좌석이 30개 정도밖에 안되는 소법정이다. 기자는 사전에 취재용 방청권을 받아 법정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청권이 없어 법정에 들어오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법정 경위들과 다투고 있다고 했다.

“김기춘 나와라!” “방청 못하게 하는 판사 각성하라!” 유가족들 항의는 형사30부 권희 재판장이 선고문을 낭독하는 동안에도 이어졌다. 누군가는 법정 문을 쿵쿵 두드렸고 그 과정에서 고성과 격한 단어도 나왔다. 권 재판장 목소리가 묻히거나 중간중간 끊어지기도 했다. 법정 경위를 향해 한 차례 “해결이 안돼요?”라고 물은 권 재판장은 계속 선고를 진행했다. 

법정 문은 꽉 닫혀 있었다. 36도의 기온에 환기도, 냉방도 안되는 소법정에서 1시간가량 선고가 이어졌다. 이마엔 땀이 줄줄 흘렀고, 법정 밖에선 유가족들의 분노 섞인 호소가 들려왔다.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선고문 낭독을 듣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꼭 이렇게 선고를 해야 했을까. 법원은 청사에 입간판 형태로 ‘재판 방청권을 선착순으로 배부한다’고 공지했다 한다. 법원 청사를 자주 드나들지 않는 시민에게는 익숙지 않은 방식이다. 홈페이지에 공지글을 올리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김경수 경남지사 재판과도 다르다. 

권 재판장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법정에는 여유 공간이 있기 때문에 유가족들이 그곳에 서서 방청하도록 할 수도 있다. 다른 재판에서도 방청을 원하는 시민이 많은 경우 서서 선고를 듣게 하거나, 아예 법정 문을 열어놓기도 한다. 상황을 진정시키는 차원에서라도 잠시 휴정하거나 유가족들에게 법정에 들어오게 할 수 없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한 뒤 선고를 이어갈 수도 있다.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라 방청객이 많을 것을 예측하고 애초에 더 큰 법정에서 선고를 진행할 수도 있었다.

핵심은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다. 재판 진행은 재판장 재량이고, 김 전 실장에게 적용된 혐의는 허위공문서 작성과 행사죄다. 엄밀히 말하면 유가족들이 ‘범죄 피해자’는 아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책임 회피로 진상규명이 지연됐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유가족들이 입었다. 실질적인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을 피해자로 명시한 세월호특별법도 있다. 가해자에게 어떤 판결이 선고되는지는 피해자의 알권리에 속한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 사건을 심리한 판사들이 발간한 백서를 보면 충격이나 슬픔에 찬 유가족들의 격앙된 반응을 피해자의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이해하고, 제어만 하기보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으면서 달래는 방법을 고민한 내용이 나온다.

유가족들이 법정에 들어가지 못하던 그 시각, 같은 법원의 417호 대법정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법정은 공간이 넓고 냉방도 잘된다. 방청객은 그다지 없지만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은 대법정에서 재판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시 묻는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정말 법정에 들어갈 수 없었나, 법원은 꼭 그렇게 선고를 해야 했나.

<이혜리 | 사회부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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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히로뽕 수출 X나게 해가, 그 망할 놈의 원숭이 새끼들 다 뽕 쳐맞고 오줌 질질…. 애국이 별겁니까, 예? 우리가 일본을 뭐라도 이겨야 될 거 아닙니까.” 좀 거칠긴 해도, 이 대목에서 웃지 않은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이건 영화 <범죄와의 전쟁> 중 히로뽕을 밀수출하려는 세관원 최익현의 말일 뿐이다. 현실에서 더한 일도 일제강점기 한반도와 만주, 간도 등지에서 벌어졌다. 일본도에 죽어나거나 온몸에 문신이 새겨진 위안부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영화 대사는 그냥 개그일 뿐, 오히려 너무 싱겁게 느껴질 테다. 임진왜란 때는 어땠는가. “통석의 염” 같은 모호한 표현이 아니라, 적어도 독일 수준 같은 반성과 사죄 위에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을 치유하지 않는 한 참된 ‘한·일 국교정상화’는 요원하다. 외교 수사로 아무리 꾸며봐야 공염불이다.

최근 일본의 잇단 수출규제 조치에 들불처럼 번지는 불매운동이 예사롭지 않다. 대체 어느 정도로 일본 제품이 사랑받는지 궁금했다. 한 날은 어느 고교생의 필통을 살펴봤다. 이름도 생소한 일본 볼펜이나 형광펜, 지우개까지 한 움큼이 나왔다. 3분의 2가 넘는다. 학생도 이번에야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생활 구석구석에 일제가 파고들었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좋은 ‘샤프’는 늘 일제였다. 국산은 펜 끝이 흔들리곤 해서 툭하면 얇은 심이 부러졌다. 그러나 이젠 우리 경제가 일본의 꼬붕 노릇 하던 시절이 아니다.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오전 광주 광산구의 한 거리에 'NO! 아베, OK! 광복' 문구가 걸려 있다. 이 현수막은 더불어민주당 광주 광산을 지역위원회가 시민들의 모금을 받아 내걸었다. 연합뉴스

일본의 수출규제는 역사 문제에서 비롯됐지만, 배경에는 급성장한 한국 경제에 대한 견제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일본 전자업체 이익을 더해도 삼성전자 하나보다 못한 처지다. 일본 기술자가 없으면 고장 난 제철소를 못 돌리던 시절도 아니다. 과거 브라운관 TV 때는 소니, 파나소닉 같은 제품을 우리는 못 만들 줄 알았다. 그러나 액정화면(LCD)으로 넘어오자 삼성, LG가 뒤엎어버렸다. 현대정공 시절 미쓰비시 차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껍데기 씌워서 팔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적어도 신차 품질로는 일본 도요타, 혼다 같은 대중 브랜드는 따라잡았다.

아직 곳곳에 일본 기술력은 탄탄해 보인다. 자전거 변속기만 봐도 시마노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카본 소재는 일본 도레이가 잡고 있다. 국내 굴지 대기업에 ‘국산 카본도 만들어보라’고 했더니 돌아온 답은 “돈이 안된다”였다. 중요한 소재이지만 정작 뒤늦게 손대기에는 이익보다 비용이 더 드는 격이다. 삼성 같은 대기업이 시마노 뺨칠 변속기 하나 못 만들까. 결국 이런 건 강소기업들이 해내야 한다. 정부 지원은 물론 대·중소 협력체제를 통해 마중물을 부어야 할 때다.

무조건 반일, 극일이 현명한 해법은 아니다. 동북아 평화협력을 위해서라면 어차피 일본과도 손잡아야 한다. ‘아시아의 패권자’가 될 가능성이 큰 중국을 어떻게 견제하느냐가 한국과 일본엔 향후 큰 숙제다. 과거 1000여년 역사에서 보듯 대륙세력인 중국과 해양세력인 일본이 충돌했고, 그 완충지는 한국이었다. 청일전쟁에, 만주국의 오점까지 지닌 중국이 일본을 그냥 놔둘 리 없다. 이번 한·일 갈등의 뿌리는 대중 견제용 포석이란 해석까지 나온다. 일본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한국에 잘 보여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다.

지금 전국적으로 불타오른 반일감정은 그냥 내버려둬라. 어차피 한풀이 굿판은 1965년 억지 합의로 꿰맞춘 한·일이 치러야 할 대가다. 참된 해법은 그 뒤 자연스레 찾게 될 것이다. 그 대전제는 일본을 ‘정상국가’로 바로잡는 일이다. 징용에 끌려가 죽을 고생을 했건만 그런 기억조차 지워져가는 어르신들을 보면 한 인간으로서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유대인은 요즘도 나치를 찾아 단죄하기 위해 이런 팻말을 붙인다고 한다. ‘Spat, aber nicht zu spat(늦었지만 너무 늦진 않았다).’

<전병역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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