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김웅의 덧뵈기'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20.01.09 ‘수사권 조정’의 약속
  2. 2019.12.12 신용문객잔
  3. 2019.11.14 쇼를 수호하라
  4. 2019.09.19 다음 세대 억압하는 전 세대의 관행
  5. 2019.08.22 조말생 성공기
  6. 2019.07.25 곤충시대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수사권 조정’이라는 것이 곧 국회를 통과할 겁니다. 이른바 패스트트랙에 올라갔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지요. 패스트트랙에 올라탔을 때 저는 대검찰청 형사정책단장이었습니다. 작금의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놈이지요. 누구의 조롱대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불러야 할 텐데, 사실 저는 죄가 없습니다. 돌도끼 한 자루 들고 고질라와 카이쥬 태그팀과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형정단장이라고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처음 국회를 찾았을 때, 여당 국회의원에게 들은 첫마디는 “너무 늦었다”였습니다. 법안도 안 만들어졌는데 이미 늦었다니, 이건 출산 준비하러 간 출산박람회에서 유골함 강매당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사실 이 수사권 조정 합의안이라는 게 핵무기 개발처럼 어찌나 은밀히 이뤄졌는지,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들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법무부 장관이 밝혔듯 검찰의 입장은 아예 듣지 않았고요. 물론, 경찰의 의견은 들었다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에 미뤄볼 때 경찰은 깊게 관여한 것 같은데, 어차피 직접 당사자인 국민도 모르니 제가 그리 억울해할 일은 아닙니다.

대문도 못 들어간 놈이 안방 구경 하겠습니까. 당연히 국회에서도 문전박대였죠. 여당에 찾아가 설명하면 ‘대검 간부들이 괴문서를 뿌리며 의원들을 압박한다’고 위협받았죠. 구걸수사나 하는 제가 여당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는 개차반이 된 겁니다. 하릴없이 야당을 찾아가면 ‘여당 패싱하는 것이냐’고 화를 냈습니다. 찾아가도 성화, 안 찾아가도 성화였고 토론회에도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높은 분은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습니다. ‘짐이 곧 국가’라는 말은 들었어도 ‘내가 곧 정부’라는 것은 처음 들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선수 입장이라도 시켜주는데, 저는 라커룸만 구경하고 나왔습니다.

검찰이 수사권 조정에 반대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오히려 수사권 조정 합의안을 지켜달라는 겁니다. 수사권 조정 합의안에는 “수사권 조정은 자치경찰제와 함께 추진하기로 한다”라고 눈밭의 동백처럼 명확히 찍혀 있거든요. 국정과제 이행계획에서도 “실효적인 자치경찰제 도입 등과 연계하여 수사권 조정안 마련, 연동하여 시행”이라고 되어 있고, 대통령께서도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권력 비대화 우려가 있으므로 자치경찰이 필요, 수사권 조정은 자치경찰과 함께 원샷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을 지켜달라는 것이 그리 큰 죄는 아니지 않나요. 물론 정부도 자치경찰제안이란 것을 발표했어요. 하지만 그걸 자치경찰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넉넉히 쳐줘도 자치방범대 정도죠.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당 싱크탱크에서도 그건 자치경찰제가 아니라고 했거든요. 정부의 국책연구기관인 형사정책연구원도 의문이라고 하고, 참여연대는 한술 더 떠 자치경찰제라고 부르기 민망하다고 합니다. 여당 국회의원조차 무늬만 자치경찰제라고 하는데, 그게 자치경찰이면 새우깡이 새우튀김입니다. 물론 그 새우깡조차 석모도 갈매기가 채갔는지 감감무소식입니다. 원샷으로 마셨는지 모르겠는데, 뺑덕어미에게 전 재산 털린 심봉사 심정입니다.

두 번째 합의는 행정경찰과 사법경찰 분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정보경찰의 폐지일 겁니다. 참여연대가 “정보경찰 유지하면 경찰개혁도 없다”고 말한 바 있어요. 지금 청와대 비서관이 되신 분도 “기존 경찰 정보국은 폐지하고 범죄정보 수집 위주의 정보조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밝히셨고요. 기형적으로 강력한 정보경찰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가 우려하고 있어요. ‘영화 <1987>보다 더 막강한 공룡경찰이 될 것’ ‘정보기관에 실질적 수사권을 부여하는 것은 나치의 제국안전중앙청과 일제강점기 고등경찰과 유사한 것으로 매우 위험한 정부조직 설계’라고 합니다. 나치의 게슈타포라는 거죠.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에서는 ‘정보경찰 축소나 폐지가 검경 수사권 조정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현 상태라면 경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이 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인지 작년에는 경실련 등 11개의 시민단체가 모여 ‘정보경찰폐지넷’을 발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일제 고등계로 출발한 정보경찰 역사상 가장 극성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검사들 승진 순위까지 매길 정도가 되었으니 곧 전 국민의 순위도 매길지 모릅니다. 물론 얼마 전 국회에서 경찰개혁도 하겠다고 밝히긴 했습니다. 반갑기는 합니다만, 20대 국회가 다 끝난 시점이라 추수 다 끝나고 눈밭에 모내기하겠다는 것으로 들리지만 그래도 약속은 지켜질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야 ‘수사권 조정은 정보경찰과 야합을 통한 20년 집권론의 핵심’이라든가, ‘포장지는 검찰개혁이나 내용물은 경찰공화국’이라는 헛소문이 거짓으로 밝혀지지 않겠습니까. 그게 가짜뉴스라는 것이 밝혀질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감히 한 말씀 올렸습니다.

<김웅 법무연수원 교수·<검사내전> 저자>

'일반 칼럼 > 김웅의 덧뵈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사권 조정’의 약속  (0) 2020.01.09
신용문객잔  (0) 2019.12.12
쇼를 수호하라  (0) 2019.11.14
다음 세대 억압하는 전 세대의 관행  (0) 2019.09.19
조말생 성공기  (0) 2019.08.22
곤충시대  (0) 2019.07.2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lt;신용문객잔&gt;. 모래와 칼이 날리고 지사들의 의기와 애달픈 서사가 날카롭던 오래된 무협영화이다.

때는 명나라 경태제 시기, 주원장의 기상은 서리를 맞은 노각 꼬리처럼 쭈그러든 지 오래였고, 토목의 변으로 정통 황제가 사라진 혼란의 시기였다. 정치와 행정을 장악한 환관들의 전횡은 극에 달했고, 환관들의 시녀 노릇이나 하는 문무대신과 행정 6부는 노루 꼬리보다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나라의 기강은 개족보가 되어 일개 환관이 상서나 대장군을 개 부르듯 오라 가라 할 정도가 되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원성이 온 천하를 뒤덮었으나 몇 자 되지 않는 궁궐의 담은 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창귀 같은 환관들은 동창이라는 정보경찰을 만들어 온 나라를 사찰하고 감시했다. 게슈타포나 KGB와 같은 정보경찰인 동창은 민정을 감시하고 반대파의 약점을 수집하며 필요한 경우 암살도 서슴지 않았다. 동창은 그 대가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요즘 같으면 하명수사하고 출세와 공천을 얻는 것이다.

영화에서 나오듯 명나라 때 환관의 발호는 극심했다. 위충현이라는 환관은 황제보다 더 큰 위세를 누렸다. 심지어 그가 행차할 때면 많은 문사들과 언관들이 앞장서 구천세를 외쳤고 살아있는 위충현을 기리는 사당도 만들었다. 권력남용을 견제해야 하는 대간과 청요직마저 위충현의 조카, 아들을 자처했다고 한다. 환관에게 아들이라니 짚신에 구슬 감기요, 돼지 발톱에 봉숭아물이지만 그 덕분에 환관이 던져주는 관직을 얻어먹고 살았다. 하지만 나라의 기강이 떨어지면 장마철 호박꽃처럼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는 법이다.

영화 속에서 동창의 수괴 조소흠은 병부상서 양원이 병권을 내놓지 않자 그를 체포한다. 사법부까지 장악하였기에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모는 것은 일도 아니다. 결국 황제를 배반했다는 누명을 씌워 양원을 죽인다. 예나 지금이나 도둑이 매 드는 것은 변함이 없다.

환관들은 양원의 병사들이 충직한 주회안 장군을 중심으로 뭉쳐 봉기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주회안을 유인하여 죽이기로 하고, 양원의 어린 자식들을 서역 변방으로 끌고 간다. 조소흠은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검은 화살단을 이끌고 그 뒤를 따른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주회안은 애인 구모언으로 하여금 이들을 구출하게 하고, 구모언으로 등장하는 임청하는 ‘동방불패’급의 천상계 검술로 검은 화살단을 한칼에 도륙한다. 일휘소탕 혈염산하가 이런 모습이리라. 양원의 자식들을 구한 구모언은 주회안과 만나기로 한 용문객잔에 먼저 도착한다. 용문객잔의 주인은 금양옥인데, 그녀는 인육만두를 만들어 팔거나 망명자들을 등쳐먹는 도적패의 우두머리다. 장만옥이 연기한 금양옥은 어떤 남자라도 유혹할 수 있는 천하절색인 데다 전치화살이라는 표창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무공 고수이기도 하다.

야심한 시각 주회안이 객잔으로 깃들이고, 장만옥은 그 주회안에게 매료되어 전치화살 대신 유혹의 눈빛을 던지지만, 정작 주회안은 유혹하지 못하고 애먼 조선 청년들의 심쿵사만 유발했다. 때마침 고수들로 구성된 동창의 선발대가 도착하여 주회안 일행의 도주를 막는다. 뜬금없이 서역 사막에 집중 호우가 쏟아지고, 어수룩하고 탐욕스러운 성문지기와 부하들까지 끼어들면서 객잔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살기가 흐른다. 드디어 동창 본대를 이끌고 조소흠이 도달하고, 주회안 일행은 필사의 탈출을 시도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조소흠과 주회안, 구모언, 금양옥 간의 결투로 장식된다. 모래바람이 화면 가득 채우는 가운데, 날카로운 칼날들이 마치 휘파람처럼 날린다. 수십 합이 흐르고 점차 주회안 일행은 절대고수 조소흠에게 밀려 위기를 맞이한다. 결국 구모언은 주회안을 대신하여 조소흠의 칼을 맞고 유사에 빠져 죽는다. 물론 현실과 달리 영화에서는 늘 악당이 패퇴하니 크게 상심할 것은 아니다. 느닷없이 토둔술을 구사하며 나타난 객잔의 주방장이 조소흠을 공격한다. 조소흠은 인육만두나 만들던 주방장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죽는다. 갑분싸 상황이나, 개미가 둑 무너뜨리고, 굼벵이가 담장 뚫는다고 압제는 늘 가장 낮은 보통의 존재들이 쓰러뜨리는 것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주회안 장군은 쓸쓸히 사막으로 떠난다. 장만옥은 용문객잔에 불을 놓으면서 자신의 모든 것과 과거를 버린 후 주회안을 따라 사막으로 향한다. 영화는 이렇게 끝나고 그들의 뒷이야기는 알 수 없다. 아마 주회안은 쓸쓸하게 죽어갔을 것이다. 평생 풍찬노숙 속에서 쫓기다 현상금 몇 푼에 팔린 추적자의 칼에 맞아 모래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 권세에 도전하면 죽음뿐이 아니겠는가.

주회안 장군은 어찌하여 죽는 길을 택했을까? 금주령에 누룩장사 같은 등신 천치일지도 모른다. 다른 대신들처럼 동창에 복종하고 피아 구분을 잘했다면 물에 든 해파리처럼 어느 세파에도 늘 잘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샘은 천 길 바위에서도 솟는 법이고, 개와 달리 늑대는 사료를 먹지 않는다. 결국 사람이 남기는 것은 이름뿐이다.

<김웅 법무연수원 교수·<검사내전> 저자>

'일반 칼럼 > 김웅의 덧뵈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사권 조정’의 약속  (0) 2020.01.09
신용문객잔  (0) 2019.12.12
쇼를 수호하라  (0) 2019.11.14
다음 세대 억압하는 전 세대의 관행  (0) 2019.09.19
조말생 성공기  (0) 2019.08.22
곤충시대  (0) 2019.07.2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어린 시절 우리들의 영웅은 로버트 태권브이와 김일 선수였다. 일제 로봇이 독점하던 때에 혜성처럼 나타난 로버트 태권브이는 곧, 마징가 제트와 싸우면 누가 이길 것인가를 놓고 조무래기들의 주먹다짐도 불사하게 만드는 애국심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마징가 제트 따위는 늦가을 고추잠자리처럼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신앙 고백하듯 말했지만, 일제 샤프펜슬의 상품성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과학기술의 총합체인 로봇 분야에서 일본을 이긴다는 것이 쉽게 확신되지 않았다. 찝찝한 집단적 정신승리에 불과했다. 그 찜찜함을 일거에 날려주는 것은 역시 프로레슬링이었다. 박치기 한 방으로 산만 한 덩치의 상대방을 일거에 침몰시키던 김일 선수나 표범처럼 날아 적들의 가슴팍에 드롭킥을 내리꽂던 이왕표 선수는 우리 시대의 방탄소년단이자 어벤저스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프로레슬링은 늘 같은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경기 초반, 일본 ‘쪽바리’ 선수들은 실력에서 달렸기 때문에 헤드록 같은 기본 기술에도 버둥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싱겁게 끝날 것 같은 경기에는 늘 반전이 있었는데, 경기가 안 풀리면 일본 선수들은 괴춤에서 드라이버나 멍키스패너를 꺼내곤 했다. 분명 신체검사를 마쳤음에도 도대체 어떻게 저런 흉기가 ‘스판빤스’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안되었지만, 그 흉기로 김일 선수 두정부를 깔 때 그것을 방조하는 주심을 보면서 이것이 브레이크 없는 차량 같은 잔인한 음모였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다. 선혈을 쏟고 난 김일 선수는 머리칼을 잃은 삼손처럼 힘을 잃었고, 농약 맞은 개구락지처럼 바닥을 구르곤 했다. 번연히 벌어지는 비극적 역사의 반복 앞에 관중은 그저 환장할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김일 선수가 있었다. 저 정도 피를 흘렸다면 실혈성 쇼크로 사망했을 것임이 분명함에도 우리의 김일 선수는 기사회생했다. 역사적 소명과 국민들의 준엄한 명령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불의와 민족적 분노가 극에 달할 즈음 김일 선수는 멍키스패너를 휘두르는 일본 선수들을 향해 블록버스터급 박치기를 날리고 핵사이다로 경기를 매조지 지었다. 그 공정과 정의의 승리가 어찌나 감격스러운지 우리는 조금 전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선혈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스패너에 까인 전두부 열창상이 마치 <엑스맨>의 울버린처럼 순식간에 자연 치유된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뿌듯한 ‘국뽕’의 추억은 장영철 선수가 외친 “프로레슬링은 모두 쇼다”라는 말과 함께 대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버렸다. 그 외침은 황우석 박사의 3번 줄기세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대중은 자신의 환호와 애정이 거짓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했기 때문에 그것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진실을 외친 대가는 컸다. 장영철 선수는 한순간에 배신자가 되어 대중의 분노를 직면해야 했다.

자신의 선호와 애착이 부정당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부정된다고 오해한다. 그래서 믿고 싶은 것만 찾고 예정된 결론만을 원한다.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하나 결국 자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고, 원하는 것만을 알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과 거짓 사이에는 늘 거짓 위로와 흑마법 같은 선동이 끼어든다. 그래서 위로는 거짓이고 진실은 고통스럽다.

대중은 결국 프로레슬링을 수호했다. 하지만 그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프로레슬링 스타들은 그 오랜 기간 선악대결과 반일감정 같은 진부한 스토리만을 반복했다. 후배들을 키우지 않고 단지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는 불쏘시개로만 활용했다. 자신들만이 스타여야 하기에 새 캐릭터나 변화는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재미난 골에 범 나고, 오래 앉으면 새도 살 맞는 법이다. 그 사이 홍수환 선수는 4전5기 끝에 카라스키야를 때려눕히고 챔피언을 먹었고, 대일파스를 등에 바르고 나타난 이만기 장사는 들배지기로 거인들을 넘어뜨렸다. 서릿발 같던 권력의 가피도 사라졌다. 봄이 오면 아침볕만으로도 녹는 것이 서리다. 사기극을 수호했지만 내심 요강 뚜껑으로 물 떠먹은 것처럼 꺼림칙했던 대중도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스포츠로 갈아탔다.

만약 장영철의 외침이 있었을 때, 프로레슬링이 철저한 훈련이 만들어낸 종합기예라는 사실을 밝혔다면, 간단해 보이는 수플렉스 하나만도 극히 정교하고 환상적인 퍼포먼스라는 사실을 알렸다면, 그랬다면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 우월감이 무너지는 것을, 무엇보다 자신들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기에 사실을 부인했다. 그렇지만 동에서 뜬 해가 서쪽으로 가듯, 높은 데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세대는 바뀐다. 마찬가지로 20년간 절대적으로 군림했던, 질식할 것 같은 꼰대세대도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아무리 열광했어도 우리는 그 쇼가 모두 거짓이었음을, 지금이 아닌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김웅 법무연수원 교수·<검사내전> 저자

'일반 칼럼 > 김웅의 덧뵈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사권 조정’의 약속  (0) 2020.01.09
신용문객잔  (0) 2019.12.12
쇼를 수호하라  (0) 2019.11.14
다음 세대 억압하는 전 세대의 관행  (0) 2019.09.19
조말생 성공기  (0) 2019.08.22
곤충시대  (0) 2019.07.2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과학자들이 원숭이를 가둬놓고 실험을 했다. 과학자들이 하는 일이 대부분 그렇듯 이번 실험도 고약하다. 실험장인 스키너 박스 안에 나무를 설치하고 그 위에 바나나를 매달아 놓았다. 물론 공짜 바나나는 아니다.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려고만 하면 가장 질겁하는 물을 뿌려댔다. 원숭이 뇌에 전극을 꼽거나 전기고문을 하는 실험에 비하면 양반이니 너무 분노하지는 말자. 몇 번 짜릿한 물벼락을 경험하자 원숭이들은 아무도 나무에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평형상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 평형, 평정 상태를 파괴하고 극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과학자들은 원래 있던 원숭이 중 한 마리를 빼고 대신 새로운 원숭이를 집어넣는다. 물벼락을 맞아본 적 없는 신참 원숭이는 바나나를 보고 환장하여 나무에 오르려고 한다. 그러자 고참 원숭이들이 질겁하며 신참을 말렸다. 물정 모르는 신참놈 때문에 자신들까지 물에 맞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원숭이들이 말리자 신참은 나무에 오르는 것을 단념했다. 이런 식으로 원숭이를 하나씩 빼고 그 자리에 신참 원숭이들을 채워 넣었다. 매번 신참들은 나무를 오르려다 다른 원숭이들의 제지를 받았고, 나무에 오르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 스키너 박스에 원래 있었던 원숭이들은 모두 빠지고 물을 맞아본 적이 없는 신참들로만 채워졌다. 하지만 그 어떤 원숭이도 나무에 오르지 않았다. 실제 물을 맞은 원숭이들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관행이 되어 울타리 안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실험이 이뤄졌다. 과학자가 진료대기실에 미리 지시를 받은 실험자 10명을 앉아 있게 했다. 실제 환자가 진료대기실에 들어오면 실험이 시작된다. ‘삐’ 하는 버저 소리가 들리면 실험자 10명이 일제히 일어났다가 앉는 것이다. 이를 본 환자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 이내 엉거주춤하고, 곧 다른 사람들처럼 일어섰다 앉는 것을 따라 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지 않은 동조 효과, 동화 본능 때문이다. 처음 환자가 동조 현상을 보이면 다른 환자를 집어넣고 실험자 1명을 뺀다. 두 번째 환자도 첫 번째 환자와 동일한 반응을 한다. 결론은 원숭이와 동일하다. 10명의 실험자가 모두 빠지고 환자들로만 채워져도 그 진료대기실에 있는 환자들은 버저 소리에 모두 일어섰다 앉는 행동을 하게 된다.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나 그 행동은 대기실을 지배한다.

물론 모든 관행과 습관에는 그 배경이 있다. 유대인이 피를 빼고 고기를 먹는 것이나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피하는 것, 여자에게 히잡을 씌우는 것 등은 당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그 배경이 사라진 이후에도 관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의 상황이 특별히 나쁘지 않으면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현상유지바이어스(status quo bias)나 손실회피성에서 나오는 현상이기도 하나 비합리적이다.

나이트 샤말란이라는 영화감독이 있다. ‘절름발이가 범인이다’(&lt;유주얼 서스펙트&gt;) 이후 가장 저주받을 스포일러인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를 낳은 &lt;식스센스&gt;라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그가 만든 작품 중에 &lt;빌리지&gt;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숲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마을이다. 기계도, 전기도, 범죄도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는 매우 무서운 금기가 있다. 마을 사람이 숲으로 들어가면 그 숲에 있는 ‘괴물’이 사람들을 해치는 것이다. 늘 역대급 반전을 보여줬던 감독의 작품치고는 극히 시시한 공포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전이 펼쳐진다. 이 영화의 최대 반전은 배경이 현대라는 점에 있다. 이 마을은 현대 미국의 한복판에 위치한다. 과거 도시에서 범죄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모여 이 마을을 만든 것이다. 현대문명이 범죄를 낳는다고 믿는 그들은 산업화 이전의 공동체를 건설한다. 그들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자라나는 새 세대에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숲속의 ‘괴물’을 만든 것이다.

전 세대의 규범과 기억은 다음 세대를 억압한다. 그들의 순수한 마음은 때로는 세상을 자신들의 기억 속에 가두기 위해 공포와 거짓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한 기억이 억압으로 작용할 때 새 세대가 할 일은 타인의 과거와 주어진 미래에 저항하는 것이다. 의심하고 도전하고 주변으로부터 달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나이가 적다고 새 세대는 아니다. 진정 새로운 세대는 과거의 강화된 기억과 그 부작용인 공포와 무분별한 추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시작된다. 물론 변화는 어렵고 이를 막으려는 시도는 거짓과 강압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관성은 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세계에서도 작용’하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야말로 실체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살아있는 존재라 함은 어떤 과정의 이른 단계에서 나중 단계로 발전하여 가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는 도토리가 참나무로 자라듯 본질에 따른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김웅 법무연수원 교수·<검사내전> 저자>

'일반 칼럼 > 김웅의 덧뵈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사권 조정’의 약속  (0) 2020.01.09
신용문객잔  (0) 2019.12.12
쇼를 수호하라  (0) 2019.11.14
다음 세대 억압하는 전 세대의 관행  (0) 2019.09.19
조말생 성공기  (0) 2019.08.22
곤충시대  (0) 2019.07.2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조선 초 함길도에 김생이라는 거부가 살았다. 함길도는 함경남북도에 걸친 땅인데 발해가 망한 후 거란족 등이 차지했다가 조선 초에 다시 우리 땅이 되었다. 김생은 미개척지 함길도로 이주하여 황무지 개간으로 큰 부를 이뤘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으련만, 그건 동화 속 이야기이고 현실에서는 늘 악당이 등장한다. 김생의 친구 김원룡에게는 김도련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자가 무척 사악했다. 김도련은 흉계를 꾸며 김생의 부를 빼앗기로 마음먹는다. 김도련은 ‘김생이 내 아버지의 노비였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면서 노비추쇄문서를 형조에 제출했다. 노비추쇄문서는 도망간 노예를 찾아달라고 형조 등에 제출하는 소장과 같은 것이다. 친구 사이였던 김생과 김원룡이 주종관계일 리 없건만, 황당하게도 형조는 김도련의 손을 들어준다. 김생과 후손들을 김도련의 노비로 만들어버리고 모든 재산을 빼앗아 김도련에게 넘겼다. 

상식 밖의 결론에는 늘 권력이 도사리고 있다. 당시 형방승지였던 조말생이 김도련의 뇌물을 받고 이런 불법을 자행한 것이었다. 김생 일가는 억울함을 풀려고 했으나 조말생의 권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놀랍게도 조말생은 당대의 염근리로 행세하면서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탐관오리가 청백리로 둔갑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낡은 신발을 신거나 낡은 가방만 들쳐 메도, 서민의 대변자인 것처럼 떠들기만 해도 가능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김생 일가는 형조에 김도련을 고발했다. 하지만 병조판서로 승진한 조말생은 손을 써 이를 방해했다. 조말생의 지시에 따라 재판을 지연한 형조참의는 그 대가로 친척들의 벼슬을 점지받았다. 김생 일가는 다시 사헌부를 찾아갔다. 역시 조말생은 사헌부를 압박했다. 인사권으로 위협하고 부당한 수사를 한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하지만 사헌부는 조말생의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진상을 밝혀냈다. 조말생뿐 아니라 김도련으로부터 뇌물(노비)을 받은 관료 수십명의 범죄를 밝혀내 왕에게 보고했다. 좌의정, 우의정, 개국공신, 병조참의 등이 포함되어 있어 지금으로 치면 김도련 게이트라 불릴 만한 대형 부패사건이었다. 하지만 왕은 조말생의 죄상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국민들의 눈높이에는 안 맞지만 불법은 없었다’는 만능 치트키다. 이에 힘을 얻은 조말생은 사헌부 관원들을 모함했다. 아들 조선은 폭력배를 동원하여 대사헌을 감시했다. 심지어 사헌부에서 조사받고 나온 증인을 납치하여 폭력으로 증언을 번복시키기도 했다. 

사헌부의 수사가 막히자 사간원이 나섰다. 사간원은 조말생에 대해 국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라 주청한다. 하지만 왕은 자신이 이미 결정했는데, 더 이상의 처벌을 주장하는 것은 반역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사슴을 말이라 우길 수 있고, ‘내가 납득되지 않으니 당신의 주장은 틀렸다’고 억지 부릴 수 있는 게 권력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말생은 사면되었고 더욱 승승장구했다. 왕은 그를 의금부 제조로 임명했다. 의금부는 왕의 교지를 받들어 수사와 재판을 하는 최고의 사법기관이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 치면 뇌물 전과자가 대법원장 혹은 검찰총장이 된 것이다. 지금도 논문 표절, 주가 조작 가담,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재산 빼돌리기 등을 해야만 고관대작이 될 수 있으니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비정상이 반복되면 그것이 정상이다. 물론 사간원 대간들은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고 시위를 했다. 조말생과 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조말생의 아들은 문과에도 급제했다. 쓰앵님을 동원했는지, 인턴을 출중하게 수행한 덕인지 모르나 아무튼 조말생이 과거를 담당하는 예문관 대제학으로 있던 때였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로또급 행운은 늘 권력자의 자식들에게만 일어난다. 행운은 권력지향적인가 보다. 행운을 믿지 않은 홍문관 관리들은 조말생의 아들에 대한 급제자 발표를 거부했다. 조말생은 인사권으로 그들을 ‘조졌다’. 간신이 총애를 받으면 권신이 되고, 권신은 부정과 부패를 낳는다. 

이야기의 결말은 씁쓸하다. 조말생은 판중추원사 등 요직을 차지하고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이 모든 사건의 주범 격인 김도련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억울하게 노비가 된 김생의 후손들은 결국 면천(免賤)하지 못하고 노비로 살다 죽었다. 현실은, 동화와 달리 대개 악당이 승리한다. 지금 우리가 그보다 나은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조말생은 능력이라도 출중했다. 그나마 남은 거라고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한 청요직 관리들의 기상 정도라 할 것이다. 

광해군 3년 과거에서 ‘가장 시급한 나랏일이 무엇인가’라는 책문이 나왔다. 이에 합격자 임숙영은 ‘임금의 잘못이 국가의 병이다’라고 답했다. 격분한 광해군은 임숙영을 불합격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넉 달에 걸친 삼사의 격렬한 반대에 결국 왕은 뜻을 굽히고 임숙영을 합격시킬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으로서는 분할 노릇이지만, 이게 나라다.

<김웅 법무연수원 교수·<검사내전> 저자>

'일반 칼럼 > 김웅의 덧뵈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사권 조정’의 약속  (0) 2020.01.09
신용문객잔  (0) 2019.12.12
쇼를 수호하라  (0) 2019.11.14
다음 세대 억압하는 전 세대의 관행  (0) 2019.09.19
조말생 성공기  (0) 2019.08.22
곤충시대  (0) 2019.07.2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실 세상의 주인은 곤충이다. 곱등이, 노린재, 집게벌레 등이 지구의 주인이라니 불쾌감이 치솟겠지만, 지구 환경을 만들고 인류를 선택한 것은 곤충이다. 

공룡시대에서 포유류 전성시대가 된 것도 단지 하늘에서 날아온 불덩어리 덕분만은 아니라고 한다. 거대 고사리 대신 화분식물이 지구를 뒤덮어 포유류들이 먹고살 수 있게 해준 것도 벌, 나비, 파리와 같은 곤충들의 수분활동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과학자들이 그렇다고 한다. 

아무튼 우리의 착각과 달리 우리가 곤충들을 선택한 게  아니라  곤충들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곤충은 지구 환경도 바꾸고 있다. 예를 들어 더 이상 석탄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흰개미 등이 나무 잔해를 분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게다가 전체 곤충의 90%는 익충이라고 한다. 각종 유기물을 먹어치우고 분해해서 지구를 쓰레기더미에서 벗어나게 한 것도 곤충이다. 곤충이 못 먹는 플라스틱으로 인해 지구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보면 곤충이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지구에서 가장 위협적인 동물도 곤충이다. 사자, 호랑이, 코끼리, 코브라 따위가 강력하다고 하나, 이들에 의해 매년 죽어가는 사람은 불과 몇 십, 몇 백에 불과하다. 반면 곤충은 상비군 격인 모기 하나만 해도 매년 인류 50만명을 학살한다. 파리, 빈대, 진드기, 바퀴벌레까지 나설 것도 없다. 차포 떼고 졸만으로도 페이커급의 슈퍼플레이를 하는 셈이다. 

물론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하여 벌레를 나쁘게 볼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고 치면 사람이 가장 나쁘다.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동물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그래서 곤충을 퇴치하는 회사보다 사람을 퇴치하는 무기회사가 더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곤충은 미래산업의 주역이다. 곤충으로부터 신소재를 만들고, 불치병 치료제도 만든다. 미래의 단백질 공급원도 곤충이 대체할 거라고 한다. 밀웜과 같은 곤충식품만 먹어도 환경문제가 완화될 수 있다. 인간이 소만 먹지 않아도 매년 1500억㎏ 이상의 메탄을 줄일 수 있다. 게다가 더 이상 오리에게 유황을 먹이지 않아도 된다. 

우리나라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곤충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정확히는 벌레시대가 더 적합하겠다. 벌레를 숭상하고 흠모하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서로를 벌레로 분류하고 있다. 틀딱충, 맘충, 한남충, 급식충, 애비충, 설명충, 진지충 등등… 거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벌레로 분류된다. 혹자는 이것이 모욕적인 혐오표현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인간 중심주의에 빠진 고루한 단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맘충, 틀딱충 등등이 혐오표현이라면 스파이더맨, 앤트맨도 혐오표현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길러내는 엄마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산업화를 이룬 어르신들의 공덕을 곤충의 초인적인 능력에 빗대어 맘충, 틀딱충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도 납득하기 어렵다면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벌레가 사람보다 낫다는 방증 아닌가. 게다가 ‘나는 개똥벌레’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이라고 스스로나 사랑하는 상대를 벌레에 빗대어 노래 부르기도 한다. 물론 메퇴지, 쿵쾅이, 검새, 기레기와 같이 안타깝게도 곤충에 이르지 못하는 부류들도 있다. 분발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벌레로 부르는 이유가 ‘상대를 비하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우리는 기초교육을 통해, 갈등과 이견은 사회 규범을 조절하거나 만들어내고, 연합과 제휴를 통해 구성원 간의 유대를 길러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일부의 문제를 전체 부류의 문제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권력의 음모이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벌레라고 부르면서 박멸과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우리 모두가 벌레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벌, 개미와 같이 철저하게 조직화, 분화된 진사회 동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견도 없고 번뇌와 고통도 사라지고 하나의 목적과 조직을 위해 철저하게 복속하고 그것이 존재의 목적이 되는 통제된 사회가 될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소통은 사라지고, 걸러지지 않으나 사실상 검열된 정보와 선동의 흐름만이 교환되게 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면 친일파 혹은 빨갱이’라는 기적의 논리나 ‘나만이 정의’ ‘국민은 옳다’는 식의 사상의 포르노가 횡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들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분위기와 증오의 격류에 휩쓸려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니체도 ‘착각은 개인들에게는 기이한 일이 되지만 집단, 당파, 민족, 시대의 경우에는 엄연한 규범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맘충, 틀딱충, 한남충 등은 혐오의 표현이 아니어야만 한다.

<김웅 대검찰청 미래기획형사정책단장>

'일반 칼럼 > 김웅의 덧뵈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사권 조정’의 약속  (0) 2020.01.09
신용문객잔  (0) 2019.12.12
쇼를 수호하라  (0) 2019.11.14
다음 세대 억압하는 전 세대의 관행  (0) 2019.09.19
조말생 성공기  (0) 2019.08.22
곤충시대  (0) 2019.07.2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