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김웅의 덧뵈기'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09.19 다음 세대 억압하는 전 세대의 관행
  2. 2019.08.22 조말생 성공기
  3. 2019.07.25 곤충시대

과학자들이 원숭이를 가둬놓고 실험을 했다. 과학자들이 하는 일이 대부분 그렇듯 이번 실험도 고약하다. 실험장인 스키너 박스 안에 나무를 설치하고 그 위에 바나나를 매달아 놓았다. 물론 공짜 바나나는 아니다.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려고만 하면 가장 질겁하는 물을 뿌려댔다. 원숭이 뇌에 전극을 꼽거나 전기고문을 하는 실험에 비하면 양반이니 너무 분노하지는 말자. 몇 번 짜릿한 물벼락을 경험하자 원숭이들은 아무도 나무에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평형상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 평형, 평정 상태를 파괴하고 극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과학자들은 원래 있던 원숭이 중 한 마리를 빼고 대신 새로운 원숭이를 집어넣는다. 물벼락을 맞아본 적 없는 신참 원숭이는 바나나를 보고 환장하여 나무에 오르려고 한다. 그러자 고참 원숭이들이 질겁하며 신참을 말렸다. 물정 모르는 신참놈 때문에 자신들까지 물에 맞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원숭이들이 말리자 신참은 나무에 오르는 것을 단념했다. 이런 식으로 원숭이를 하나씩 빼고 그 자리에 신참 원숭이들을 채워 넣었다. 매번 신참들은 나무를 오르려다 다른 원숭이들의 제지를 받았고, 나무에 오르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 스키너 박스에 원래 있었던 원숭이들은 모두 빠지고 물을 맞아본 적이 없는 신참들로만 채워졌다. 하지만 그 어떤 원숭이도 나무에 오르지 않았다. 실제 물을 맞은 원숭이들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관행이 되어 울타리 안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실험이 이뤄졌다. 과학자가 진료대기실에 미리 지시를 받은 실험자 10명을 앉아 있게 했다. 실제 환자가 진료대기실에 들어오면 실험이 시작된다. ‘삐’ 하는 버저 소리가 들리면 실험자 10명이 일제히 일어났다가 앉는 것이다. 이를 본 환자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 이내 엉거주춤하고, 곧 다른 사람들처럼 일어섰다 앉는 것을 따라 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지 않은 동조 효과, 동화 본능 때문이다. 처음 환자가 동조 현상을 보이면 다른 환자를 집어넣고 실험자 1명을 뺀다. 두 번째 환자도 첫 번째 환자와 동일한 반응을 한다. 결론은 원숭이와 동일하다. 10명의 실험자가 모두 빠지고 환자들로만 채워져도 그 진료대기실에 있는 환자들은 버저 소리에 모두 일어섰다 앉는 행동을 하게 된다.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나 그 행동은 대기실을 지배한다.

물론 모든 관행과 습관에는 그 배경이 있다. 유대인이 피를 빼고 고기를 먹는 것이나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피하는 것, 여자에게 히잡을 씌우는 것 등은 당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그 배경이 사라진 이후에도 관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의 상황이 특별히 나쁘지 않으면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현상유지바이어스(status quo bias)나 손실회피성에서 나오는 현상이기도 하나 비합리적이다.

나이트 샤말란이라는 영화감독이 있다. ‘절름발이가 범인이다’(<유주얼 서스펙트>) 이후 가장 저주받을 스포일러인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를 낳은 <식스센스>라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그가 만든 작품 중에 <빌리지>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숲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마을이다. 기계도, 전기도, 범죄도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는 매우 무서운 금기가 있다. 마을 사람이 숲으로 들어가면 그 숲에 있는 ‘괴물’이 사람들을 해치는 것이다. 늘 역대급 반전을 보여줬던 감독의 작품치고는 극히 시시한 공포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전이 펼쳐진다. 이 영화의 최대 반전은 배경이 현대라는 점에 있다. 이 마을은 현대 미국의 한복판에 위치한다. 과거 도시에서 범죄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모여 이 마을을 만든 것이다. 현대문명이 범죄를 낳는다고 믿는 그들은 산업화 이전의 공동체를 건설한다. 그들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자라나는 새 세대에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숲속의 ‘괴물’을 만든 것이다.

전 세대의 규범과 기억은 다음 세대를 억압한다. 그들의 순수한 마음은 때로는 세상을 자신들의 기억 속에 가두기 위해 공포와 거짓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한 기억이 억압으로 작용할 때 새 세대가 할 일은 타인의 과거와 주어진 미래에 저항하는 것이다. 의심하고 도전하고 주변으로부터 달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나이가 적다고 새 세대는 아니다. 진정 새로운 세대는 과거의 강화된 기억과 그 부작용인 공포와 무분별한 추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시작된다. 물론 변화는 어렵고 이를 막으려는 시도는 거짓과 강압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관성은 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세계에서도 작용’하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야말로 실체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살아있는 존재라 함은 어떤 과정의 이른 단계에서 나중 단계로 발전하여 가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는 도토리가 참나무로 자라듯 본질에 따른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김웅 법무연수원 교수·<검사내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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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함길도에 김생이라는 거부가 살았다. 함길도는 함경남북도에 걸친 땅인데 발해가 망한 후 거란족 등이 차지했다가 조선 초에 다시 우리 땅이 되었다. 김생은 미개척지 함길도로 이주하여 황무지 개간으로 큰 부를 이뤘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으련만, 그건 동화 속 이야기이고 현실에서는 늘 악당이 등장한다. 김생의 친구 김원룡에게는 김도련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자가 무척 사악했다. 김도련은 흉계를 꾸며 김생의 부를 빼앗기로 마음먹는다. 김도련은 ‘김생이 내 아버지의 노비였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면서 노비추쇄문서를 형조에 제출했다. 노비추쇄문서는 도망간 노예를 찾아달라고 형조 등에 제출하는 소장과 같은 것이다. 친구 사이였던 김생과 김원룡이 주종관계일 리 없건만, 황당하게도 형조는 김도련의 손을 들어준다. 김생과 후손들을 김도련의 노비로 만들어버리고 모든 재산을 빼앗아 김도련에게 넘겼다. 

상식 밖의 결론에는 늘 권력이 도사리고 있다. 당시 형방승지였던 조말생이 김도련의 뇌물을 받고 이런 불법을 자행한 것이었다. 김생 일가는 억울함을 풀려고 했으나 조말생의 권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놀랍게도 조말생은 당대의 염근리로 행세하면서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탐관오리가 청백리로 둔갑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낡은 신발을 신거나 낡은 가방만 들쳐 메도, 서민의 대변자인 것처럼 떠들기만 해도 가능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김생 일가는 형조에 김도련을 고발했다. 하지만 병조판서로 승진한 조말생은 손을 써 이를 방해했다. 조말생의 지시에 따라 재판을 지연한 형조참의는 그 대가로 친척들의 벼슬을 점지받았다. 김생 일가는 다시 사헌부를 찾아갔다. 역시 조말생은 사헌부를 압박했다. 인사권으로 위협하고 부당한 수사를 한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하지만 사헌부는 조말생의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진상을 밝혀냈다. 조말생뿐 아니라 김도련으로부터 뇌물(노비)을 받은 관료 수십명의 범죄를 밝혀내 왕에게 보고했다. 좌의정, 우의정, 개국공신, 병조참의 등이 포함되어 있어 지금으로 치면 김도련 게이트라 불릴 만한 대형 부패사건이었다. 하지만 왕은 조말생의 죄상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국민들의 눈높이에는 안 맞지만 불법은 없었다’는 만능 치트키다. 이에 힘을 얻은 조말생은 사헌부 관원들을 모함했다. 아들 조선은 폭력배를 동원하여 대사헌을 감시했다. 심지어 사헌부에서 조사받고 나온 증인을 납치하여 폭력으로 증언을 번복시키기도 했다. 

사헌부의 수사가 막히자 사간원이 나섰다. 사간원은 조말생에 대해 국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라 주청한다. 하지만 왕은 자신이 이미 결정했는데, 더 이상의 처벌을 주장하는 것은 반역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사슴을 말이라 우길 수 있고, ‘내가 납득되지 않으니 당신의 주장은 틀렸다’고 억지 부릴 수 있는 게 권력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말생은 사면되었고 더욱 승승장구했다. 왕은 그를 의금부 제조로 임명했다. 의금부는 왕의 교지를 받들어 수사와 재판을 하는 최고의 사법기관이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 치면 뇌물 전과자가 대법원장 혹은 검찰총장이 된 것이다. 지금도 논문 표절, 주가 조작 가담,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재산 빼돌리기 등을 해야만 고관대작이 될 수 있으니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비정상이 반복되면 그것이 정상이다. 물론 사간원 대간들은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고 시위를 했다. 조말생과 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조말생의 아들은 문과에도 급제했다. 쓰앵님을 동원했는지, 인턴을 출중하게 수행한 덕인지 모르나 아무튼 조말생이 과거를 담당하는 예문관 대제학으로 있던 때였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로또급 행운은 늘 권력자의 자식들에게만 일어난다. 행운은 권력지향적인가 보다. 행운을 믿지 않은 홍문관 관리들은 조말생의 아들에 대한 급제자 발표를 거부했다. 조말생은 인사권으로 그들을 ‘조졌다’. 간신이 총애를 받으면 권신이 되고, 권신은 부정과 부패를 낳는다. 

이야기의 결말은 씁쓸하다. 조말생은 판중추원사 등 요직을 차지하고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이 모든 사건의 주범 격인 김도련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억울하게 노비가 된 김생의 후손들은 결국 면천(免賤)하지 못하고 노비로 살다 죽었다. 현실은, 동화와 달리 대개 악당이 승리한다. 지금 우리가 그보다 나은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조말생은 능력이라도 출중했다. 그나마 남은 거라고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한 청요직 관리들의 기상 정도라 할 것이다. 

광해군 3년 과거에서 ‘가장 시급한 나랏일이 무엇인가’라는 책문이 나왔다. 이에 합격자 임숙영은 ‘임금의 잘못이 국가의 병이다’라고 답했다. 격분한 광해군은 임숙영을 불합격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넉 달에 걸친 삼사의 격렬한 반대에 결국 왕은 뜻을 굽히고 임숙영을 합격시킬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으로서는 분할 노릇이지만, 이게 나라다.

<김웅 법무연수원 교수·<검사내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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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상의 주인은 곤충이다. 곱등이, 노린재, 집게벌레 등이 지구의 주인이라니 불쾌감이 치솟겠지만, 지구 환경을 만들고 인류를 선택한 것은 곤충이다. 

공룡시대에서 포유류 전성시대가 된 것도 단지 하늘에서 날아온 불덩어리 덕분만은 아니라고 한다. 거대 고사리 대신 화분식물이 지구를 뒤덮어 포유류들이 먹고살 수 있게 해준 것도 벌, 나비, 파리와 같은 곤충들의 수분활동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과학자들이 그렇다고 한다. 

아무튼 우리의 착각과 달리 우리가 곤충들을 선택한 게  아니라  곤충들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곤충은 지구 환경도 바꾸고 있다. 예를 들어 더 이상 석탄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흰개미 등이 나무 잔해를 분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게다가 전체 곤충의 90%는 익충이라고 한다. 각종 유기물을 먹어치우고 분해해서 지구를 쓰레기더미에서 벗어나게 한 것도 곤충이다. 곤충이 못 먹는 플라스틱으로 인해 지구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보면 곤충이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지구에서 가장 위협적인 동물도 곤충이다. 사자, 호랑이, 코끼리, 코브라 따위가 강력하다고 하나, 이들에 의해 매년 죽어가는 사람은 불과 몇 십, 몇 백에 불과하다. 반면 곤충은 상비군 격인 모기 하나만 해도 매년 인류 50만명을 학살한다. 파리, 빈대, 진드기, 바퀴벌레까지 나설 것도 없다. 차포 떼고 졸만으로도 페이커급의 슈퍼플레이를 하는 셈이다. 

물론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하여 벌레를 나쁘게 볼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고 치면 사람이 가장 나쁘다.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동물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그래서 곤충을 퇴치하는 회사보다 사람을 퇴치하는 무기회사가 더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곤충은 미래산업의 주역이다. 곤충으로부터 신소재를 만들고, 불치병 치료제도 만든다. 미래의 단백질 공급원도 곤충이 대체할 거라고 한다. 밀웜과 같은 곤충식품만 먹어도 환경문제가 완화될 수 있다. 인간이 소만 먹지 않아도 매년 1500억㎏ 이상의 메탄을 줄일 수 있다. 게다가 더 이상 오리에게 유황을 먹이지 않아도 된다. 

우리나라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곤충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정확히는 벌레시대가 더 적합하겠다. 벌레를 숭상하고 흠모하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서로를 벌레로 분류하고 있다. 틀딱충, 맘충, 한남충, 급식충, 애비충, 설명충, 진지충 등등… 거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벌레로 분류된다. 혹자는 이것이 모욕적인 혐오표현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인간 중심주의에 빠진 고루한 단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맘충, 틀딱충 등등이 혐오표현이라면 스파이더맨, 앤트맨도 혐오표현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길러내는 엄마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산업화를 이룬 어르신들의 공덕을 곤충의 초인적인 능력에 빗대어 맘충, 틀딱충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도 납득하기 어렵다면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벌레가 사람보다 낫다는 방증 아닌가. 게다가 ‘나는 개똥벌레’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이라고 스스로나 사랑하는 상대를 벌레에 빗대어 노래 부르기도 한다. 물론 메퇴지, 쿵쾅이, 검새, 기레기와 같이 안타깝게도 곤충에 이르지 못하는 부류들도 있다. 분발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벌레로 부르는 이유가 ‘상대를 비하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우리는 기초교육을 통해, 갈등과 이견은 사회 규범을 조절하거나 만들어내고, 연합과 제휴를 통해 구성원 간의 유대를 길러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일부의 문제를 전체 부류의 문제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권력의 음모이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벌레라고 부르면서 박멸과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우리 모두가 벌레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벌, 개미와 같이 철저하게 조직화, 분화된 진사회 동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견도 없고 번뇌와 고통도 사라지고 하나의 목적과 조직을 위해 철저하게 복속하고 그것이 존재의 목적이 되는 통제된 사회가 될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소통은 사라지고, 걸러지지 않으나 사실상 검열된 정보와 선동의 흐름만이 교환되게 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면 친일파 혹은 빨갱이’라는 기적의 논리나 ‘나만이 정의’ ‘국민은 옳다’는 식의 사상의 포르노가 횡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들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분위기와 증오의 격류에 휩쓸려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니체도 ‘착각은 개인들에게는 기이한 일이 되지만 집단, 당파, 민족, 시대의 경우에는 엄연한 규범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맘충, 틀딱충, 한남충 등은 혐오의 표현이 아니어야만 한다.

<김웅 대검찰청 미래기획형사정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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