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우리의 오월은 경계에 서 있다. 겨우내 열려 있던 공간을 부리나케 푸른 잎들로 채운 오월은 봄을 성큼 지나 여름을 향해 가고 있다. 경계는 우리 몸 안에도 존재하는데 몸의 내부 장기를 외부와 연결한다. 호흡 과정을 통해 폐는 몸 구석구석에 산소를 공급한다. 소장을 거쳐 들어온 영양소도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포유동물인 인간은 산소 또는 영양분과 마주하는 폐와 소장의 경계막을 충분히 접고 구부려 표면적을 극대화한 후에야 비로소 세포를 먹여살릴 수 있게 되었다. 피부 면적은 2㎡에 불과한 데 비해 인간의 평균 폐 표면적은 50㎡(약 15평)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놀랍지 아니한가?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리 소화기관의 표면적은 그보다 서너 배는 더 넓다.  

먹고 숨 쉬는 경계의 표면적이 넓다는 점은 경이롭지만 그 현상이 산소와 영양분 흡수를 향한 우리 몸의 해부학적 안간힘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일견 슬프기도 하다. 어쨌든 표면적만 보아도 피부는 확실히 방어 기관이고 폐와 소장은 에너지와 물질을 몸속으로 끊임없이 집어넣는 역동적인 기관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오월이면 나는 또 다른 경계에 대해 생각한다. 바로 태반이다. 참 손이 많이 가던 아기가 제법 사람 꼴을 갖춘 일을 축하하는 어린이날이나 그 일을 묵묵히 감내한 어버이들의 사랑에 감사하는 어버이날이 공존할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저 기관 때문이 아니던가? 인간의 배아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필요한 모든 물질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태반도 그 기능에 걸맞게 표면적이 11~14㎡에 달한다. 20㎝ 크기의 원반 모습을 띤 태반의 한쪽은 엄마의 자궁내막에, 다른 한쪽은 탯줄을 매개로 아기와 연결되어 태반 포유류 특유의 기관을 이룬다. 이들은 태반 없이 발생 초기에 태어난 새끼를 ‘육아낭’이라는 주머니에서 키우는 캥거루와는 사뭇 다른 생식 전략을 발전시켜 왔다. 또한 이 전략은 알에서 태어나 젖을 먹는 원시 포유류인 오리너구리 생식과도 큰 차이가 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발생학 강의를 하다 가끔 나는 “누가 태반을 만들었을까?”라는 생경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고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당연히 ‘임부가 만드는 것 아냐’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질문자의 의도를 고려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실 태반은 태아가 만든다. 정자와 난자 하나가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수정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종류의 세포로 분화된다. 하나는 태아가 될 줄기세포들이고 나머지는 태반이 될 줄기세포들이다. 태아 줄기세포는 심장과 뇌, 피부 등등을 포함해서 약 3~4㎏에 이르는 신생아의 각종 세포로 분화하겠지만 태반 줄기세포는 태아와 산모의 경계면인 약 450g의 태반을 조직화한다. 이 태반을 통해 임부는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고 태아의 노폐물을 처리한다. 매분마다 임부의 심장을 빠져 나가는 혈액의 20% 정도가 태반을 경계로 태아와 마주한다. 이런 방식으로 태반 포유류는 조류 혹은 파충류의 탄산칼슘 알껍데기와 난황을 완전히 대체하고 자손을 보다 안전하게 이 세상에 내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전략이 임부의 부담을 크게 가중시켰다는 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지구상에 태반 포유류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주연이 필요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바이러스다. 애써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우리 유전체의 약 8%는 바이러스에서 유래했다. 바이러스는 유전자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을 복제하는 데 필요한 단백질 공장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이러스가 스스로를 복제하기 위해서는 세균이나 동물의 세포 안에 들어가 그들의 복제 기구에 무임승차해야 한다. 그렇게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그것을 일일이 조립한 후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를 터뜨리고 탈출한다. 역전사 바이러스라고 불리는 매우 특별한 한 종류의 바이러스는 자신의 유전체를 숙주 세균이나 인간의 세포 유전체에 슬며시 끼워 놓는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유전체에 바이러스의 흔적이 살아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돌연변이로 바이러스 유전체가 병원성을 잃은 데다, 또 숙주인 우리 세포도 이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면역계의 시선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러한 제어 장치도 완벽하지는 않아서 가끔 말썽을 일으킬 때가 있다. 여기저기 함부로 움직이기 때문에 점핑 유전자라는 이름이 붙은 바이러스 유전자 조각이 인간 유전자 중간에 끼어들면 암세포로 바뀌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 포유류 조상은 바이러스의 유전자 하나를 태반을 만드는 데 차출하는 술수를 발휘하게 되었다. 그것은 본디 숙주의 세포막에 바이러스의 껍데기를 합칠 때 쓰던 단백질이었다. 태반의 핵심인 영양막 세포는 ‘신시틴(syncytin)’이라 불리는 바로 이 바이러스 기원 단백질을 이용하여 임부 자궁 내막에 녹아 융합해 들어간다. 이런 방식으로 태아는 임부의 혈액으로부터 영양소를 효과적으로 확보할 전초기지를 마련했다. 프랑스 과학자 하이드만은 영장류 태반에서 신시틴 아형(亞型) 단백질을 발견하고 이것이 임부의 면역계를 약화시켜 태아를 공격하지 못하게 돕는 부가적 역할을 한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바이러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 바이러스에서 비롯된 유전자들이 태아와 임부 사이의 ‘의사소통’에 적극 참여한다는 연구 결과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인간의 유전체에 편입한 바이러스 유전체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오월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 혹은 이전 세대와의 자리바꿈을 공식적으로 기억하고 기념하는 달이다. 바이러스와 인간 사이에 맺은 생물학적 제휴 아래 비로소 이런 일이 가능해졌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키메라인 것이다. 6월이 오기 전에 부모님 산소에 다녀와야겠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이러스와 인간 사이, 생물학적 제휴  (0) 2019.05.16
봄은 꿈이다  (0) 2019.04.18
꽃도 광합성을 한다  (0) 2019.03.21
하루 한 끼  (0) 2019.02.21
털 잃은 인류, 언제부터 옷을 입었을까  (0) 2018.11.29
극성  (0) 2018.10.0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막 피어난 수수꽃다리 꽃에 앉아 날개를 접고 꿈을 꾸는 나비는 태양에서 날아온 광자(photon)에 흠뻑 취해 있다. 이런 나른하고 이완된 기운은 금방이라도 나까지 엄습할 듯하다.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유독 봄에 피곤하고 무기력한 증상을 우리는 춘곤증이라고 부른다. 낮이 길어지고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 북반구 대륙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긴 겨울 동안은 햇빛이 내리쬐는 낮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우리 몸속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의 재고가 바닥난다. 이에 반해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춘곤증이 생긴다는 가설도 있다. 또는 기온이 올라가 혈관이 이완되고 혈압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런 증세가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춘곤증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평균 시간만큼 잠을 자지 못해서 잠의 고리(高利) ‘빚’에 시달리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기네스북에서조차 ‘잠 안 자고 버티기’ 기록 분야를 폐지했을 만큼 과학자들은 부족한 잠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다각도로 연구했다. 너무 많이 자도 좋을 것은 없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현대인들은 세탁기나 냉장고 혹은 휴대폰과 같은 ‘시간 절약 기계’ 살 돈을 버느라 잠잘 시간을 앗기는 일이 다반사다. 이런 수면 부족은 우리 몸 곳곳에 스트레스를 불러온다. 그래서 수면과학자들은 평균 수면 시간보다 잠을 적게 자는 행위가 빚을 지는 일이라고 단정 지어 말한다. 사실 평생 지속되는 인간의 행동 중 잠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 운동하거나 밥을 먹는 시간은 잠자는 시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동물의 몸속에 수면을 유도하는 기구(machinery)를 켜고 끄는 스위치가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주로 초파리를 사용한다. 포도 껍질에 몰려드는 자그마한 곤충 말이다. 생긴 것은 보잘것없지만 이들의 유전체는 인간의 그것과 비슷하고 기능적인 면에서도 흡사한 부분들이 많다. 초파리들도 잠을 설치면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수명도 줄어든다. 하지만 남들보다 적게 자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도 있는 까닭에 동물의 수면을 조절하는 유전적 소인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연구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2005년 위스콘신 대학의 토노니 교수는 9000종의 초파리 돌연변이체를 조사한 뒤 칼륨 채널을 암호화하는 셰이커(shaker)라는 유전자에 문제가 있으면 잠을 적게 잔다고 보고했다. 뒤이어 수면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항균 작용을 하는 유전자도 알려졌다. 잠을 자는 일이 곧 면역계를 강화시킨다는 점을 증명한 셈이다. 기억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가 잠 역시 관장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잠을 자지 않으며 공부하면 학습 효과가 줄어들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과학자들은 잠을 잘 때 활발하게 일하는 한 무리의 신경세포들이 초파리 뇌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세포들이 밤에 일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세포가 일을 잘하도록 수면 환경을 조성하면 곧 불면증을 치료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렇듯 생명체가 잠에 들 수 있게 단백질의 활성을 조절하는 일이 초파리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잘 보존되어 왔다면 잠은 결국 동물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과학자들은 잠의 기능을 일반적으로 뇌와 근육에 휴식 시간을 주거나 손상을 회복하는 일, 포식자를 피하는 일, 에너지를 절약하는 일, 정보 처리와 저장 등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러한 몇 가지 효과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연구 결과가 올해 3월 ‘네이처’에 보고되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잠은 체내에 누적된 활성산소를 제거하고 생체 내 에너지 상태를 재정비한 후 다음날을 대비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산소와 함께 살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산화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고 말한다. 음식물에서 채굴한 전자가 간혹 부적절하게 산소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녹슨 쇠도 ‘화학적’으로 산화적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보면 된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산소를 다루어야 한다. 우리 세포 안의 에너지 발전소인 미토콘드리아는 산소가 없으면 에너지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연료가 바닥난 자동차처럼 주저앉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부산스레 산소를 써서 에너지를 만들어야만 간신히 하루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천형처럼 산소와 함께 사는 동안 동물은 잠을 자야만 한다. 내려오다 만 모래시계를 뒤집듯 잠을 설친 뒤 활성산소를 이고 진 채로 출근길에 나서는 사람들의 어깨는 축 처질 수밖에 없다. 비단 인간만 그런 것도 아니다. 세포분열 시간이 불과 30분이 안되는 대장균도 어떤 식으로든 ‘휴식’ 시간을 가질 것이다. 또한 행동을 기준으로 봤을 때 잠을 자지 않는다고 알려진 귀뚜라미나 얼룩물고기 또는 개구리도 반드시 잠을 자야 할 것이다. 다만 그들이 어떻게 잠을 자는지 우리가 아직 자세히 모를 뿐이다. 

파킨슨이나 알츠하이머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먼저 수면의 질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운동이나 기억을 담당하는 신경세포를 허물어뜨릴 단백질의 손상이 수면을 관장하는 신경세포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만약 다른 어떤 생리학적 과정보다도 수면이 질병을 치유하는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잠을 잘 자는 행위는 곧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일과 직결된다. 그렇다면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면서 서로 잠을 권해야 하지 않겠는가? 4월은 잔인한 달이라지만 어쨌든 꽃은 피는 게고 솟아오르는 아지랑이와 함께 우리도 나른한 나비의 꿈을 한번 꾸어봄직하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이러스와 인간 사이, 생물학적 제휴  (0) 2019.05.16
봄은 꿈이다  (0) 2019.04.18
꽃도 광합성을 한다  (0) 2019.03.21
하루 한 끼  (0) 2019.02.21
털 잃은 인류, 언제부터 옷을 입었을까  (0) 2018.11.29
극성  (0) 2018.10.0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삼동 내내 간직해 온 열매가 아직도 붉은데 다시 새봄을 맞은 산수유는 꽃망울을 틔워냈다. 봄이다. 무채색의 칙칙함을 한방에 날려버리듯 봄꽃은 밝고 화려하다. 곧 벚꽃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도 필 것이다. 남들보다 서둘러 꽃을 피우면 비록 적은 양의 꿀을 제공하더라도  꽃가루를 실어 나를 벌들이 찾아들 것이기에 산수유가 저런 전략을 취했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잎 없이 열린 공간으로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서발막대 거칠 것 없이 날아갈 수 있다는 점도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꽃은 대표적인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식물은 몇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생식에 필요한 에너지를 조달한다. 첫 번째는 잎에서 광합성을 진행하는 방법이다. 이는 잎에서 만든 탄수화물로 꽃을 피우고 매개 동물을 유인할 꿀을 만드는 일이며 많은 수의 식물이 취하는 보편적인 방식이다. 두 번째는 생식에 들이는 비용을 줄이는 일이다. 지난해 저장해 두었던 탄수화물을 꽃 피우는 데 사용하는 산수유나 벚꽃이 이런 전략을 쓴다. 마지막은 생식기관이 직접 광합성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꽃은 광합성에 참여한다. 아마 가장 대표적인 것이 푸른색을 띤 꽃받침일 것이다. 꽃이 지고 열매가 익어갈 때까지 꽃받침은 적극적으로 광합성에 참여하기도 한다. 최근 나는 감을 보관하는 방법에 대해 기술한 호주 농림부의 출판물을 읽다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감의 초록색 꽃받침 네 개를 하나씩 떼 가면서 감의 크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측정한 연구 결과였다. 놀랍게도 네 개 꽃받침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감의 크기가 제일 컸고 꽃받침 수가 줄어들면서 감의 크기는 비례적으로 작아졌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꽃받침 말고 꽃잎, 암술 혹은 수술대와 같은 꽃의 생식 부위에서도 광합성이 진행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식물의 거의 모든 기관이 많든 적든 탄소를 고정하는 광합성 작업에 나서는 걸 알 수 있다. 익기 전의 과일이나 일년생 풀의 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맹그로브라는 식물은 뿌리로도 광합성을 한다. 물론 이파리에 비해 그 효율은 떨어진다. 하지만 아직 여물지 않은 밀의 쭉정이는 단위 면적당 광합성 효율이 잎의 75%에 이르기도 한다. 이삭의 수를 감안하면 이는 쉽사리 무시하지 못할 양이다.

광합성 전문 기관인 잎은 기공이라는 구멍을 통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인다. 지금처럼 인간의 활동을 통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수치가 증가하면 식물은 그 사실을 금방 알아채고 기공의 입구를 좁히거나 그 수를 줄임으로써 광합성 원자재의 양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중국과 영국의 과학자들은 1924년과 1998년에 채취한 은행나무 잎에서 기공의 수가 각각 134개에서 97개로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미국 식물학 잡지에 발표했다. 잎 뒷면에 있는 기공의 숫자를 세면 식물이 살았던 당시 대기 중에 존재했던 이산화탄소의 양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식물은 대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탄수화물의 재료인 이산화탄소를 확보할 수 있다. 

식물도 동물과 다름없이 자신이 만든 포도당을 사용하여 에너지를 얻고 그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방출한다. 따라서 광합성을 하지 않는 온대 지방의 겨울이나 빛이 없는 깜깜한 밤에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양이 약간 증가한다. 전문 광합성 기관이 아닌 줄기나 과일 혹은 꽃받침은 자신들의 날숨에 포함된 이산화탄소의 일부를 여투어 다시 쓰면서 광합성을 수행한다. 이렇게 식물은 따로 기공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매우 효과적인 이산화탄소 경제를 운영해 나간다. 

동물이나 대부분의 세균은 갖지 못한 엽록체를 구비한 식물이나 조류가 이 행성에서 진행하는 광합성 과정은 실로 지구 전체를 먹여 살린다. 행성의 바깥에서 도달한 한 방향의 태양에너지를 지구 생명체가 포획하는 유일한 방법이 광합성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외부의 에너지를 지구 안으로 들여오는 통로로서 광합성 생명체들은 든든한 곡물 창고인 셈이지만 실제 이들은 지구에 도달하는 전체 태양에너지의 1%도 채 사용하지 못한다. 이 정도만으로도 식물의 생물량은 지구 전체 생명체의 80%에 육박한다. 2018년 이스라엘 와이즈만 연구소와 미국의 칼텍 연구진은 지구에 사는 생명체 전체의 탄소 무게가 5500억t이고 그중 식물의 무게가 4500억t에 이른다고 추정했고 그 연구 결과를 미 국립과학원 회보에 발표했다. 이 수치는 우리 인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 세계 인구는 약 12년마다 10억명씩 늘고 있지만 인간의 주요 곡물인 밀과 쌀 생산량이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과학자들은 태양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저장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가까운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식물의 경제 방식을 배우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인류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식물이 잎뿐만 아니라 여러 기관을 최대한 이용하여 대기권 혹은 자신의 날숨 속에 들어 있는 이산화탄소를 영양소로 변환시키는 과정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특히 인간이 작물화에 성공한 밀과 쌀 같은 곡물의 쭉정이조차 광합성을 한다는 사실은 경탄할 만하다. 식물의 이런 기예를 보고 있으면 생명의 역사에 기여한 인간의 발명품이 알코올을 농축시키거나 끓는점에 따라 석유를 분류하는 ‘증류’ 또는 ‘바퀴’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깊은 자괴감마저 든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이 광합성에 참여하는 분자 기구나 유전적 기초를 비로소 눈치채기 시작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엽록소를 동물의 세포에 이식하든, 식물의 잎이나 뿌리를 흉내 낸 로봇을 제작하든 인류의 운명은 앞으로도 거의 수십억년 동안 무상으로 제공될 가능성이 큰 저 태양에너지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올해도 여전히 봄은 꽃으로 그득하겠지만 이젠 그 꽃받침에 내려앉는 태양빛마저도 눈여겨보게 된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이러스와 인간 사이, 생물학적 제휴  (0) 2019.05.16
봄은 꿈이다  (0) 2019.04.18
꽃도 광합성을 한다  (0) 2019.03.21
하루 한 끼  (0) 2019.02.21
털 잃은 인류, 언제부터 옷을 입었을까  (0) 2018.11.29
극성  (0) 2018.10.0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인간은 잘 때 먹지 않는다. 잠자는 동안 우리는 탄수화물이나 단백질과 같은 영양소를 소화할 효소도 만들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유전자의 스위치도 꺼버린다. 잘 때 먹지 않는다는 이 짧은 문장을 뒤집어 읽으면 ‘우리는 깨어 있을 때에만 음식을 먹는다’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먹을까? 모든 사람이 매일매일 하는 일이니까 우리는 이미 답을 잘 알고 있다.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이다. 얼마 전에 초등학생들 방학계획표 그리듯 깨어 있는 시간을 셋으로 나누고 그 시간만큼 교대로 밥을 안 먹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그들은 ‘릴레이 단식’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래서 나도 잠시 짬을 내서 계산해 보았다. 1900년대 초반 인류는 평균 아홉 시간을 잤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인류의 평균 수면시간은 7시간30분 정도이다. 평균을 얘기할 때면 늘 수많은 개별자들이 눈앞에 떠오르지만 일단 계산을 해보자. 하루 7시간30분 잔다면 깨어 있는 시간은 16시간30분이다. 이를 3으로 나누면 5시간30분이다. 아침에 일어나 바로 단식을 시작한 사람의 행적을 따라가보자. 오전 7시30분에 일어난 사람은 그때부터 단식에 돌입하여 오후 1시에 바통을 넘겨주고 그때부터는 자유롭게 밥을 먹을 수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안타까운 아침잠 10분을 위해 아침도 못 먹고 출근하는 길에서 이런 뉴스를 들었다면 그야말로 실소할 일이지만 어쨌든 그 단식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내게 하나의 생물학적 질문을 던져 주었다. 우리는 왜 하루 세 끼를 먹는가? 두 끼 혹은 한 끼를 먹으면 안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보통 두 가지 접근 방식을 취한다. 하나는 다른 동물들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밤과 낮의 주기적 리듬에 따라 생활하도록 적응했다는 생물학적 의미를 되짚어보는 일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자고 잘 때는 먹지 않는 신체 리듬에 적응해왔다. 이른바 일주기 생체 리듬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하루 24시간을 주기로 생리 혹은 대사 과정이 주기적으로 매일같이 반복된다. 이 리듬이 깨지면 우리는 쉽게 살찌고 스트레스에도 매우 취약해진다. 하지만 인간이 불을 밝혀 밤을 낮처럼 쓰면서 생체 리듬이 일상적으로 깨지는 상황이 찾아왔다. 평소 잠을 자던 시간에 잠을 자기는커녕 오히려 먹는 일이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화석연료를 사용하거나 댐처럼 높은 곳에 담긴 물의 중력을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 시기 이후 먹고사는 인간의 행위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끼니의 역사에 대한 두 번째 접근 방식이다.

지금처럼 전 세계적으로 세 끼니가 자리를 잡은 것은 미국의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이 정해진 시간에 함께 모여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작업시간을 할애하다보니 규칙성과 세 끼니 개념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하루 세 끼를 먹는 일이 일상화된 지는 불과 200년도 되지 않았다. 세 끼니 말고도 산업혁명의 여파는 컸다. 가장 명시적인 효과는 아마도 전기가 상용화되면서 전 세계가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가동되는 체계로 전환된 것일 것이다. 전 세계 노동자의 10% 이상은 밤낮을 바꿔 교대작업을 한다고 한다. 하루 종일 사무실과 산업 현장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 산업혁명은 밤이 되면 먹지 말아야 한다는 생물학적 명제에 인간이 공식적으로 불복종을 선언한 근대적 사건인 셈이다.

2014년 미국 국립 노화연구소 마크 매트슨 박사는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시간을 신체가 생물학적으로 결정한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유전자 혹은 세포가 원하는 ‘끼니’가 있다는 뜻이다. ‘비만(Obesity)’이라는 잡지에 실린 논문에서 하버드 대학 브리검 여성 병원의 프랜크 쉬어 박사는 어두워 배고픔이 최고조에 이르기 전에 식사를 해야 한다는 일주기 생체 리듬 데이터를 제시했다. 그 연구에 따르면 잠에서 바로 깬 아침에는 오히려 배고픈 느낌이 가장 적었다. 이는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는 통념과는 사뭇 다른 결과였다. 또한 이 연구 결과는 인간이 하루 세 끼를 먹는 일이 생물학적으로 에너지 과잉 상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 끼를 빼지 않고 먹는 중에 우리는 흔히 스낵도 먹는다. 진화적으로 스낵은 사냥 나갔다가 우연히 잡은 토끼 같은 것이다. 늘 먹는 끼니에 반해 간혹 먹는 음식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쿠키나 파이, 초콜릿, 과자, 라면 등이 모두 스낵이다. 인간의 역사에 본격적으로 편입된 발효식품인 술도 에너지 함량이 높은 스낵의 일종이다. 세 끼,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특히 점심과 저녁 식후에 먹는 스낵은 일주기 생체 리듬을 교란할 뿐만 아니라 비만과 고혈압과 같은 현대적 의미에서 ‘인간이 만든 질병’의 직접,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우리는 먼 조상에 비해 에너지가 농축된 음식물을 거리낌 없이 먹는다. 불로 익히거나 가루 내서 익혀 소화하기 쉽게 가공된 음식물이 도처에 넘쳐난다. 오직 유일하게 인간만이(모든 인간은 아닐지라도) 언제든 포만하게 먹을 수 있는 지구 역사 최초의 기회를 얻었다. 이 말은 거꾸로 해석하면 인간의 유전자와 세포가 굶주림 속에서 오랫동안 단련되었다는 뜻이 된다. 굶주림의 시기를 거치면서 인간은 음식이 넘쳐나는 시기에는 배불리 먹고 그것을 지방의 형태로 저장했다. 이런 방식이 우리 조상의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운동을 열심히 해도 쉽게 살이 빠지지 않는 이유가 인류의 이런 대물림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다. 최근 들어 평소의 절반 정도의 열량을 매일 섭취하거나 아니면 하루는 굶고 다음날은 평소처럼 먹는 일을 반복하는 간헐적 단식이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성을 높이고 상처를 치유하며 여러 대사 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는 논문이 여러 편 나왔다. 그럴 수 있겠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행복하게 가끔씩 배불리 잘 먹는 일도 삶의 한 즐거움이라는 느낌을 저버리지 못한다. 다만 수저를 들기 전에 한 가지만 생각하자. 먹는 절대량을 좀 줄이고 되도록 밝을 때 동료나 친구, 가족과 즐겁게 먹자. 그리고 행복하게 숨을 쉬자.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은 꿈이다  (0) 2019.04.18
꽃도 광합성을 한다  (0) 2019.03.21
하루 한 끼  (0) 2019.02.21
털 잃은 인류, 언제부터 옷을 입었을까  (0) 2018.11.29
극성  (0) 2018.10.04
인간의 치아와 상어의 치아  (0) 2018.08.2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첫눈이 내렸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대부분의 겨울 외투 안에서 보온 효과를 주는 날짐승의 깃털은 피부의 변형된 형태로 인간의 손톱이나 침팬지의 털과 그 유래가 별로 다르지 않다. 갓 태어난 새끼만 먹을 수 있도록 젖을 발명해 낸 포유류의 또 다른 대표적인 특성이 바로 털이다. 피부 표면에 단열 효과가 매우 뛰어난 털외투를 두른 것이다. 하지만 털은 몸 안의 열을 외부로 방출되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에 포유류가 덥고 건조한 기후에 적응하는 데 방해가 된다.

사람들은 흔히 5000종이 넘는 포유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털이 없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말은 틀렸다. 사실 침팬지나 인간이나 털이 자라나는 모낭의 수는 다르지 않다. 인간의 머리에는 약 10만개, 몸통에는 300만~500만개의 모낭이 있다. 거기서 털이 나고 자라고 빠지는 일이 진행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보다 침팬지의 털이 더 굵고 더 시커멓고 길게 자란다는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러므로 질문은 털이 왜 사라졌느냐가 아니라 ‘왜 털이 왜소해졌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이에 다윈은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인간이 털을 버렸다고 말했다. 한편 어떤 과학자들은 온도에 민감한 뇌를 보호하기 위해 인간이 털을 잃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가장 빠른 동물인 치타가 1분을 달리지 못하고 털북숭이 사람과 동물이 태양 아래에서 쉽게 열사병에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적도 근처의 초기 인류에게 효율적으로 열을 식히는 장치는 꼭 필요했을 것이다. 다른 과학자들은 무리지어 동굴에서 살던 인류를 괴롭힌 이(lice)나 벼룩 등, 외부 기생충을 피하기 위해 털을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기생충들이 질병을 옮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원인이야 어떻든 털을 잃은 인간은 이제 땀샘을 한껏 구비하고 외부로 열을 방출하면서 두 발로 대지 위를 오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지구력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류가 탄생한 것이다.

그럼 인류는 언제 벌거숭이가 되었을까? 몇 가지 증거를 바탕으로 과학자들은 약 120만년 전에 두 발로 걷던 인간의 몸에서 털이 사라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단열재 털을 잃은 인간은 밤이나 고위도의 추위를 견디기에 무척 불리했을 것이다. 뭔가 대안이 필요했으리라는 뜻이다. 털이 없어지는 사건을 전후해서 인간이 불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버드 대학의 인류학자인 리처드 랭엄은 인간의 구강 구조를 증거로 내세우며 인류가 불을 사용한 시기가 털을 벗은 시기보다 앞섰으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치아의 크기가 줄고 턱의 힘이 약해지면서 느슨해진 머리뼈 덕분에 신생아 뇌의 크기를 키울 수 있었고 소화 효율이 높아져 인간이 먹는 데 쓰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고 랭엄은 말했다. 그럴싸하다. 

불 말고 추위에 대한 인간의 적응성을 높일 만한 수단이 또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옷이다. 그러면 인류는 언제부터 옷을 입었을까? 옷의 재료가 동물의 가죽이든 식물의 섬유든 생체 물질은 쉽게 분해되기 때문에 화석으로 오래 남지 못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의 유전체 분석을 통해 인간이 언제부터 옷을 입게 되었는지 알아냈다. 고인류학에 분자생물학 기법이 가미된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700만년 전 공통조상으로부터 침팬지와 초기 인류가 분기된 것처럼 옷 솔기에 사는 이도 머릿니와 진화적 작별을 치르고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종(種, species)으로 살아가리라 작정한 것이었다. 

플로리다 자연사박물관의 데이비드 리드 박사팀은 해부학적으로 현생인류인 아프리카 사람들이 약 8만3000년에서 17만년 전 사이에 본격적으로 옷을 입게 되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머리에 살던 이가 의복으로 터전을 옮겨 살게 된 역사를 유전체에서 복원한 것이었다. 유전체를 분석하는 과학자들은 여러 생명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매우 잘 보존된 유전자의 염기 혹은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을 비교하면서 생물 종 사이의 유연관계를 파악한다. 인류가 언제 털을 잃게 됐는지 짐작하게 된 것도 포유동물의 피부와 털의 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비교 분석 후 얻은 결론이었다. 털옷을 벗고 불을 지핀 인류는 이윽고 옷을 갖춰 입게 됨으로써 위도나 고도가 높은 곳으로 출정할 준비를 갖췄다. 그렇다고는 해도 인류는 섣불리 터전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대대적으로 아프리카를 등지게 된 까닭은 그들이 살던 아프리카 동부 지역이 건조해지면서 먹을 게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체체파리와 같은 곤충이 매개하는 질병이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열악한 상황에서 약 몇 만 명까지 줄었던 인구는 현재 75억명을 넘어섰다. 털옷을 벗은 인류는 불과 옷을 발명한 데다 난방이 가동되는 콘크리트 벽 안에서 칩거 중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혜택을 누리지는 못한다. 지금도 칼바람이 들이치는 고시원 쪽방에서 난로 하나로 쪽잠을 청하는 이들은 먼 옛날에 잃어버린 인간의 털옷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도 광합성을 한다  (0) 2019.03.21
하루 한 끼  (0) 2019.02.21
털 잃은 인류, 언제부터 옷을 입었을까  (0) 2018.11.29
극성  (0) 2018.10.04
인간의 치아와 상어의 치아  (0) 2018.08.29
곤충의 날개  (0) 2018.08.0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북극성은 영어로 폴라리스(polaris)다. 한반도의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 별자리 중간쯤에 있다고 알려진 북극성은 길 잃은 사람의 길라잡이 역할도 하는 붙박이별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포라는 집을 구성하는 가재도구 중 하나인 섬모를 연구하던 10여 년 전 내가 관심을 기울였던 단백질의 이름도 폴라리스였다. 이 단백질에 문제가 있으면 발생 과정에서 몸통의 좌·우측 배치가 달라진다니 세포 안에서도 폴라리스가 길라잡이 역할을 톡톡히 하는 모양이다. 세포생물학에서 우리들은 특정한 단백질이나 혹은 세포 내 소기관이 있어야 할 자리에 꼭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할 때 극성(polar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체의 바깥쪽 표면인 피부나 몸통 내부를 관통하는 소화기관의 표면을 구성하는 상피세포들은 빈틈없이 닫혀 있어야 한다. 상처가 나면 아프기도 하지만 세균이나 곰팡이가 침범하기도 쉽다는 점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세포들끼리 서로 밀착하여 닫혀 있기 때문에 세포의 위쪽 면과 아래쪽 그리고 측면의 환경이 서로 각기 달라진다. 피부 세포의 바깥막은 공기와 맞닿아 있지만 측면은 이웃하는 세포의 측면과 바짝 달라붙는다. 점액을 밖으로 밀어내는 먼지떨이 모양의 섬모는 기도 상피세포의 바깥 면에만 분포되어 있다. 거기가 아니면 섬모의 존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상피세포의 바깥쪽 막에 섬모가 존재할 때 극성이 잘 유지되고 있다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화학자들은 물을 대표적인 극성 물질이라고 말해왔다. 수소 2개와 산소 1개로 이루어진 물 분자 안에서 전자를 갈구하는 산소 부근에 전자가 밀집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소 쪽에는 전자의 밀도가 적고 따라서 두 원소 간의 전기적 성질이 달라진다. 물의 바로 이런 극성 때문에 소금쟁이가 수면 위에 떠 움직이고 100m에 이르는 미국 삼나무 꼭대기까지 물이 공급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살아있는 생명체에서나 그 생명체 안을 채우고 있는 화학물질 모두에게서 극성은 무척 중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극성은 언제 깨지게 될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이른바 ‘상피진피 전이’일 것이다. 이 용어는 대열을 벗어난 상피세포가 노마드 진피세포로 변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웃하는 세포와 오롱이조롱이 붙어 해독작용을 담당하던 6각형 모양의 간세포가 외씨버선 모양의 진피세포로 날렵하게 탈바꿈한 뒤 혈관을 타고 폐에 둥지를 틀게 되면 간세포로서 자신의 정체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암 생물학자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암세포가 폐에 전이되었다고 말한다. 세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간에서 붙박이로 해독작용을 하던 간세포의 극성이 깨졌다는 표현을 선호한다.

소화기관에서 몸통 안으로 들어온 포도당은 총길이 12만㎞인 인간의 혈관을 따라 돌면서 영양소가 필요한 세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세포 해부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말은 혈액과 맞닿은 혈관내피 세포 표면에 포도당 운반 단백질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닐 뿐이다. 원래 있어야 할 장소를 벗어나면 포도당을 운반해야 할 이 단백질의 쓰임새가 가뭇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은 세포나 단백질만이 아니다. 가령 가장 따뜻할 때조차 평균 기온이 10도도 되지 않는 툰드라 지대에 사는 모기들이 사라지면 무슨 일이 생길까? 이곳 물웅덩이 모기 유충들은 썩은 이끼를 분해하는 청소동물이자 물고기들의 먹잇감이다. 성충 모기들은 순록의 피를 빨아 먹는다. 극성스러운 모기떼를 피해 순록은 바람을 거슬러 움직인다. 그러므로 모기가 사라지면 순록의 이동 경로가 달라질 것이고 이들을 쫓는 늑대들의 생존 전략도 분명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기 유충을 먹이로 삼던 물고기들이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찾아오리란 것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한때 병목 단계를 지나올 정도로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다던 인류는 현재 75억 명을 넘어섰다. 그 결과 마천루가 늘어선 대도시들이 남북반구 온대 지방을 따라 난립하고 있다. 특히 북위 30~50도 지역은 그야말로 인간과 그들의 콘크리트 안식처로 가득 찼다. 그 덕택에 원래 있어야 할 곳을 잃은 말 못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고통을 겪는다. 대전의 동물원을 탈출했던 퓨마 ‘호롱이’는 네 시간 동안 자신이 의당 누려야 했을 ‘극성’의 안온함을 온전히 만끽했을까? 닷새 동안 100㎞를 이동해 한사코 김천의 한 산을 고집했던 지리산 반달곰은 자신이 있어야 할 최적의 장소를 찾아낸 것일까? 추운 날 도심으로 내려오는 멧돼지들과 인간이 함께 사는 일은 가능할까?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 인간은 단순히 ‘지구이웃’을 제거하는 가장 손쉽고 이기적인 전략을 자주 선택했다. 구제역에 시달리는 사육 돼지들과 A4 종이 한 장 정도의 공간에서 살던 병든 닭을 그저 땅에 묻어왔을 뿐이다. 다른 모든 생명체의 정당한 서식처를 파괴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만큼 인간의 ‘극성’은 정말 그리도 고귀한 것일까?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루 한 끼  (0) 2019.02.21
털 잃은 인류, 언제부터 옷을 입었을까  (0) 2018.11.29
극성  (0) 2018.10.04
인간의 치아와 상어의 치아  (0) 2018.08.29
곤충의 날개  (0) 2018.08.01
도토리  (0) 2018.07.0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호주 퀸즐랜드 선샤인 해안의 동물원 국장이었던 스티브 어윈(Steve Irwin)은 2006년 홍어에 물려서 죽었다. 그는 열렬한 환경 운동가이자 원시림 탐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악어 사냥꾼’으로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던 인물이다. 잔치 때마다 빼놓지 않고 홍어무침을 먹었던 나는 저 뉴스를 보며 ‘독이 있는 홍어도 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벌처럼 쏘는 범무늬노랑가오리(stingray)는 꼬리에 가시가 자리 잡고 아래 독의 분비선이 있어서 포식자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재미있는 점은 홍어와 같이 연골어류에 속하는 상어의 비늘도 저 가시와 진화적 기원이 서로 같은 상동 기관이라는 사실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돌토돌한 상어의 피부는 방패비늘(楯鱗, placoid scales)이라고 불리는 200~500 마이크로미터(㎛, 100만분의 1m) 크기의 비늘로 덮여 있다. 전자 현미경으로 상어 피부를 관찰했던 과학자들은 저 비늘이 우리 인간의 치아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고기와 사지동물의 중간 단계에 해당하며 “팔굽혀 펴기”를 할 수 있었던 물고기 화석을 발견한 닐 슈빈(Neil Shubin)은 턱이 없는 어류인 칠성장어 이빨에서 입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인 상어의 방패비늘을 보았다. 척추동물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방어용 외골격 조직을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내골격 이빨로 용도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캄브리아기를 규정하는 대량의 화석은 분해가 쉽지 않은 이런 외골격과 이빨, 그리고 근육이 붙어 있던 뼈에 다름 아니다. 생명체의 역사에서 마침내 “피로 물든 이빨과 발톱”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인간처럼 척추동물로 분류되지만 턱이 없어 무악어류로 불리는 생명체 중에는 우리가 즐겨 먹는 곰장어도 있다. 청소동물로 바다 아래쪽에 사는 곰장어와 달리 몸통에 7개의 아가미 구멍이 있는 칠성장어는 강한 이빨을 물고기 몸통에 박아 체액을 빨아먹는다. 강원도 양양 남대천에서 발견되는 칠성장어는 먹장어와 더불어 ‘살아있는 화석’이면서 동시에 이빨이 턱보다 먼저 진화했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하는 신비로운 물고기이기도 하다.

턱과 이빨은 살아가는 데 먹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점을 웅변하는 진화적 장치이다. 척추동물의 98%가 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저 기관의 유용성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턱은 먹잇감을 잡고 소화기관 안으로 집어넣는 일을 수행한다. 이빨이 없는 닭도 부리와 턱을 움직여 물고기를 입안으로 욱여넣는다. 하지만 이빨이 있으면 잡고 씹어서 소화의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사자나 기린 모두 먹는 방식은 사실상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이빨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뿐이다.

잡식성인 인간의 입에는 앞니, 송곳니, 어금니가 각각 8개, 4개, 20개 있다. 앞니는 끊고 자른다. 송곳니는 구멍을 낼 수 있다. 어금니는 맷돌처럼 음식을 잘게 갈 수 있다.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육식성인 사자는 송곳니가, 초식성인 기린은 어금니가 발달했다. 코끼리는 길고 커다란 엄니(ivory)를 공격용으로 사용한다. 200개가 넘는 이빨을 가진 돌고래도 있다. 과학자들은 포유류가 진화하면서 이빨의 수는 점차 줄어든 반면 다양성은 증가했다고 말한다. 동물의 이빨은 다양하지만 사실 그 형태는 무엇을 먹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젖을 먹을 때 이빨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을 포함한 젖먹이 포유동물이 태어날 때 이가 없다는 사실이 단박에 이해가 된다.

약 6~8개월 정도 자라면 아기의 입 아래쪽에서 앞니 2개로 시작해 얼추 30개월 정도면 전부 20개의 젖니가 나오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두 발로 걷는 사건보다 치아가 나오는 일이 먼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30개월 정도면 젖을 떼고 아기가 다른 종류의 음식물을 먹을 생물학적 준비가 완성된다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치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발생을 시작한다. 수정이 되고 약 8주 후면 젖니, 20주 후면 영구치의 발생이 시작되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52개의 치아를 다 갖고 있다. 그게 인간 치아의 전 재산이다. 상어는 살아 있는 동안 3만번 이빨을 교체할 수 있다고 한다. 빠지면 바로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에 곤충이 탈바꿈하듯 치아를 교체한다. 아이의 몸통은 성장을 하지만 한번 형성된 치아는 더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이 될 때까지 부피가 네 배 증가하는 뇌를 담기 위해 인간의 머리통은 당연히 커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자라난 턱에 맞춰 인간은 치아를 새것으로 교체할 필요가 생겼다. 새로 나온 영구치는 더 크고 튼튼하다. 뼈와 달리 수산화 인회석이라는 무기염류가 함유된 강력한 법랑질(enamel)이 위아래 두 개의 이빨이 마주치는 부위에 자리 잡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랑질을 만드는 세포는 잇몸을 뚫고 치아가 나오자마자 죽어버린다. 치아의 표면이 부식되고 손상되면 다시 회복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사랑니는 17~21세 정도에 느지막하게 나온다. 아예 사랑니가 없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인간이 불을 사용하면서 턱과 이빨에 부담을 줄인 덕택일 것이다. 앞으로 인류가 더 부드러운 음식을 먹게 되면 우리 치아는 약해지고 그 수도 더 줄어들지 모르겠다. 길게 보면 인간은 늘 진화하는 중임에 분명하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털 잃은 인류, 언제부터 옷을 입었을까  (0) 2018.11.29
극성  (0) 2018.10.04
인간의 치아와 상어의 치아  (0) 2018.08.29
곤충의 날개  (0) 2018.08.01
도토리  (0) 2018.07.04
길가메시 프로젝트  (0) 2018.06.07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한여름이다. 잠자리가 날고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키 높이 웃자란 나무에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약 3억년 전 데본기에 곤충의 날개가 진화했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었다. 최초로 지구 상공을 점령한 곤충은 기세등등하게 자신들의 세계를 펼쳐 나갔다. 전체 동물계의 약 70%를 차지하는 곤충은 전 세계적으로 1000만종에 육박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지구의 어디에서도 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매미의 옛 이름은 ‘매암’이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곧바로 이름이 되었음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소수(素數)를 아는 ‘수학자’ 곤충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매미는 홀수년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 서식하는 13종의 매미 중에서 참매미와 지지매미는 5년을 주기로 지상에 나온다. 왜 그런 독특한 행동을 매미가 진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재미있는 가설이 있다. 첫 번째는 천적 가설이다. 눈에 보이는 매미를 먹잇감으로 삼는 새나 동물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천적이 소수년, 평년 가릴 것 없이 주변에 존재한다면 매미의 저런 전략은 하등 쓸모가 없어진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먹잇감 경쟁 가설이다. 같은 생태 지위 안에 살아가는 서로 다른 종의 매미들끼리 먹이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만의 주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같은 지역에 수명주기가 5년인 매미와 7년인 매미가 산다면 이들 두 매미가 동시에 활동하는 시기는 35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게 된다. 그렇지만 이 설명은 매미 말고도 엄청난 수의 동물과 곤충들이 동일한 공간을 두고 경쟁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다소 궁색해진다.

곤충은 어린 시절과 성충일 때 먹잇감이 다르다. 하긴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도 신생아들에게 그들만의 먹잇감을 따로 장만했다. 젖이 그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포유류라고 부르지 않던가? 하지만 식재료만 두고 보았을 때 인간과 매미의 생활사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신생아에게 젖을 먹이는 시기는 길어야 3년이다. 그 시기가 지나면 젖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활성을 잃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기는 젖이 아닌 다른 음식물을 먹는다. 하지만 매미는 성체로 살아가는 기간이 기껏해야 한 달인 반면 애벌레로 꽤 오랜 시간을 땅 아래에서 지낸다.

성체로서 매미가 지상에 머무는 동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짝짓기를 하고 나무 껍질 안쪽에 알을 낳는 일이다. 일 년 뒤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는 나무에서 내려와 한 자나 되는 땅속에서 살아간다. 매미 애벌레가 주로 먹는 것은 식물의 뿌리가 흡수한 수액이다. 그 수액을 먹고 몇 년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뿌리가 땅에서 흡수한 수액에는 애벌레가 살아갈 영양소가 무척 부족하다. 이에 매미 애벌레가 선택한 전략은 공생체 미생물을 몸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이 미생물은 애벌레가 필요한 아미노산과 비타민 등을 제공하는 대신 식재료와 생활공간을 제공받는다. 이런 연합이 맺어지는 순간 애벌레 숙주와 공생체는 운명 공동체가 된다. 2018년 일본 쓰쿠바 대학의 다케마 후카쓰 연구진은 일본에 서식하는 24종의 매미 몸 안에 살아가는 공생체를 연구해서 그 결과를 미 과학원 회보에 게재했다. 술시아(Sulcia)라는 미생물은 24종의 매미 모두에서 발견되었고 매미 몸 안에서 몇 종류의 아미노산을 합성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다른 한 종의 미생물 공생체는 일부 매미들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저 공생체가 없는 매미 몸에는 효모와 비슷한 곰팡이 기생 생명체가 득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매미 생활사에 곰팡이 기생체는 아주 일찍부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나무에서 떨어진 애벌레가 땅을 파고 들어가는 동안 이 곰팡이가 침입하기 때문이다. 이 곰팡이는 몇 년을 애벌레와 살다가 성체로 변하기 전에 자실체를 싹 틔우고 포자를 땅에 뿌려댄다. 이것이 고가의 한약재로 쓰이는 동충하초(冬蟲夏草)의 실체이다. 애벌레와 기생체 사이의 줄다리기 결과가 매미의 진화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애벌레는 저 곰팡이를 구슬러서 친구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개 기생체들은 안락한 환경에 안주하면서 자신의 유전 정보를 허술하게 관리한다. 그러면 숙주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아미노산을 합성하는 효소 유전자가 고장 나면 숙주도 공생체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에 그렇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숙주 애벌레는 기생체 곰팡이를 공생체로 돌리는 전략을 개발해 낸 것이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원한 기생체도 없고 영원한 공생체도 없는 것이다. 소임을 다한 공생체는 새로운 공생체로 대체되고 저 효모 비슷한 곰팡이는 애벌레 숙주를 위해 아미노산과 비타민을 생산하고 있었다. 반면 동충하초는 싹트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 것이다.

나무껍질에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새겨진 허물인 선퇴(蟬退)를 남기고 탈바꿈에 성공한 매미는 땅속에서 펼쳐진 곰팡이와의 오랜 투쟁에서 승전보를 쟁취한 자들이다. 크게 울 만한 자격이 넘친다. 더위에 매미 울음마저 지쳐갈 무렵에야 가을이 오려는가? 덥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극성  (0) 2018.10.04
인간의 치아와 상어의 치아  (0) 2018.08.29
곤충의 날개  (0) 2018.08.01
도토리  (0) 2018.07.04
길가메시 프로젝트  (0) 2018.06.07
엄마가 물려준 미토콘드리아  (0) 2018.05.0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속썩은풀이라고도 불리는 여러해살이 식물인 황금(黃芩)의 학명은 스쿠텔라리아 바이칼렌시스(Scutellaria bicalensis)다. 이 식물은 햇빛을 차단하는 화합물인 바이칼린(baicalin)을 만든다. 화학적으로 플라보노이드 계열의 물질인 바이칼린을 발음하는 순간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러시아의 바이칼 호숫가, 거대한 평원에서 거침없이 쏟아지는 태양빛을 온몸으로 마주하는 자그마한 풀을 떠올린다. 파도에 실려 육상에 처음 들어왔던 식물의 조상들은 물속에서는 마주하지 못했던 과도한 양의 자외선에 대항해 스스로를 지켜야 했을 것이다. 그 결과 항산화제 화합물인 플라보노이드가 만들어졌다. 현존하는 육상식물 대부분은 많든 적든 플라보노이드 화합물을 만든다. 너무 강한 햇빛은 식물 세포 내부의 유전 정보인 DNA나 효소 단백질을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약 3억6000만년 전 데본기 후반 혹은 석탄기 초기에 식물들은 플라보노이드를 만드는 생합성 경로를 바꾸어 지금껏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두 종류 화합물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중 하나는 리그닌(lignin)이다. 리그닌은 일종의 접착제라고 보면 된다. 이들은 탄수화물 덩어리인 셀룰로오스를 붙잡아 강력한 세포벽을 만들었다. 그 강인한 화합물 덕에 나무고사리 등 양치류 식물은 곧추서서 태양을 향해 잎을 뻗어 올렸다. 급기야 이 나무들은 30m 넘게 자라났다. 하지만 리그닌이라는 화합물을 분해할 수 있는 세균이 아직 진화하지 못한 데다 뿌리마저 약했던 이들 양치식물은 분해되지 못한 채 땅속에 모두 묻혀버렸다. 먼 훗날 석탄으로 환생한 이 나무들은 현재 대기권으로 이산화탄소를 빠르게 돌려보내고 있다.

다른 한 종류의 화합물은 타닌(tannin)이라고 부른다. 앞에서 언급한 플라보노이드 혹은 탄수화물을 구심점으로 삼아 분자량이 500에서 2만 돌턴에 이르는 거대한 화합물이 만들어졌다. 리그닌처럼 타닌도 주로 나무에 존재한다. 떫은 감, 밤 껍질 혹은 차에 풍부하게 들어 있다. 바나나 껍질에도 많이 들어 있다고 한다. 리그닌이 나무를 서 있게 했다면 타닌은 초식동물이나 그 밖의 곤충 혹은 곰팡이나 세균의 접근을 막는 일종의 기피제(deterrent) 역할을 했다. 타닌이 쓴맛을 내기 때문이다. 

화합물 안에 존재하는 많은 페놀기가 단백질이나 물과 강하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에 타닌은 수렴성이 있다고 말한다. 도토리를 먹은 말이 갑자기 죽거나 감을 먹은 다음날 배변이 힘든 이유는 동일하다. 이 화합물이 대장에서 물을 격리시켜 변을 굳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쓴맛은 식물을 먹잇감으로 삼는 모든 생명체에게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자연계에서 쓴맛은 곧 독성이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그래서 물고기와 같은 경골어류 또는 척추동물이 쓴맛을 감지하는 수용체 단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유충일 때 풀을 뜯어먹어야 하는 곤충도 쓴맛을 감지하는 단백질을 갖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감각기관이 아닌 우리 인간의 기도에서도 쓴맛 수용체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쓴맛 수용체 단백질이 공기 중으로 들어가는 먼지나 미세 플라스틱 입자를 쓴맛으로 느낄지도 모르겠다.

맛에 관한 한 인간은 다소 가학적인 데가 있다. 매운 것도 쓴 것도 기꺼이 먹는다. 한방에서 쓴맛은 건위(健胃) 효과를 갖는다고 한다. 위를 건강하게 한다는 의미와 쓴맛이 합쳐져서 고미 건위제라는 말이 등장했다. 얼마 전 식당에 갔다가 돼지가 타닌이 풍부한 도토리를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도토리를 먹도록 돼지를 방목해서 키우기 때문에 고기 맛이 좋다는 논조였다. 이들 돼지의 근육질 사이에 지방의 함량이 높다는 논문도 찾아 읽었다. 타닌 말고도 도토리에는 탄수화물과 지방이 풍부하다. 아마 도토리에 풍부한 지방이 돼지의 육질을 부드럽게 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돼지는 쓰디쓴 타닌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논문에 따르면 다른 종류의 풀과 함께 먹어 돼지가 타닌의 쓰고 수렴성이 있는 특성을 완화시켰다고 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돼지 말고 인간도 도토리를 먹는다. 다람쥐들도 습한 땅속에 도토리를 묻어 쓴맛을 줄인 다음 나중에 그것을 찾아 먹는다고 한다. 도토리의 영어 표기 acorn은 oak(신갈나무)와 corn(낟알)의 합성어다. 신갈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우리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전 세계적으로 북반구 온대지방에 넓게 퍼져 있다. <신갈나무>라는 책을 쓴 윌리엄 로건은 신갈나무와 초기 인류의 정착지가 ‘거의 일치한다’고 해석했다. 쉽게 말하면 도토리가 초기 인류의 중요한 식량원이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다른 곡물이 이를 대체하면서 지금은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도토리의 중요성은 현저하게 줄었다.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 캘리포니아 지역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도토리를 저장하고 가루를 내어 식량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도 우리처럼 여러 번 물에 우려내 도토리의 붉은 빛 타닌을 제거했다.

여름날 창밖으로 보이는 신갈나무가 올곧다. 가을이면 허리를 굽힌 사람들이 검은 봉지 안에 도토리 열매를 주워 모을 게다. 추운 날 배고픈 멧돼지는 인간의 마을로 내려온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의 치아와 상어의 치아  (0) 2018.08.29
곤충의 날개  (0) 2018.08.01
도토리  (0) 2018.07.04
길가메시 프로젝트  (0) 2018.06.07
엄마가 물려준 미토콘드리아  (0) 2018.05.09
낮의 길이  (0) 2018.04.1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 4월21일 일본 남단인 가고시마현에 사는 한 노인이 별세했다. 그 사건이 전 세계의 이목을 끈 이유는 죽기 직전까지 그 노인이 지구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었던 까닭이다. 19세기의 마지막 해인 1900년에 태어난 나비 다지마는 프랑스의 잔 칼망, 미국의 사라 나우스에 이어 인류 역사상 세 번째로 오래 살았던 사람이다. 말할 것도 없이 생몰 연도가 문서에 기록된 경우만 유효하다. 

나비 다지마는 117년 8개월을, 칼망은 122년 6개월, 나우스는 119년 2개월을 살았다. 모두 여성인 이들은 110년을 넘게 산 초장수(super-centenarian) 인간 집단에 속한다. 가장 오래 살았던 남성은 일본인인 기무라 지무에몬이며 116세를 살았다고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기원전 인류 최초의 서사시를 쓴 수메르의 길가메시를 시작으로 중국의 진시황제 등 수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꿈꾸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사실만을 밝힐 수 있었다. 생물학에서 자주 발견되는 예외도 죽음을 비켜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도 수명을 늘리기를 꿈꾼다. 구글까지 나서서 500세 수명을 목표로 벌거숭이두더지쥐를 연구하고 있다. 보통 쥐의 수명이 2~3년임을 감안하면 30년을 넘게 사는 저 두더지쥐에 과학자들이 현혹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수명은 생물학적 한계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의학과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더 연장할 수 있는 것일까?

지난 세기 인간의 기대 수명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증가했던 눈앞의 증거가 워낙 확고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인간의 수명에 한계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생아 사망률을 극적으로 줄였던 공중 보건과 환경 위생의 개선에 힘입은 바가 컸다. 미국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대의 과학자들은 1968년 이후 41개국의 사망자 기록이 담긴 국제 수명 데이터베이스를 훑어서 인간의 수명에 어떤 패턴이 있는지 조사했다. 2016년 네이처에 실린 이들 논문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오래 사는 사람들의 수는 현재에 가까울수록 증가했지만 일정 시점에 이르면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105세까지 산 사람들의 수는 늘었지만 123세까지 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100살이 넘은 사람 1000명 중 하나가 110살 문턱을 넘는다고 한다. 오래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생물학적으로 장수와 관련된 유전자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의 실체를 찾아다닌다.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은 일본의 어느 지역을 찾아 거기 사는 사람들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체 돌연변이를 찾아냈던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나 역학 연구 결과는 인간의 최대 수명이 125세를 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여태껏 오래 살았던 사람 20명의 사진을 보면 우리는 쉽게 인간의 근육에 새겨진 세월의 파괴력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인간은 채워진 마개를 연 채 수돗물을 틀어 물을 채우고 있는 욕조에 비유할 수 있다. 수돗물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욕조 안의 물은 소용돌이를 멈추고 마침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저 간단없이 공급되는 수돗물을 우리는 업이라고도 하고 생물학적으로는 물질대사라 부른다. 인간은 입으로 들어온 영양소를 물질대사를 통해 산소와 버무려 물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하지만 그 효율은 50%를 밑돈다. 열로 소모하는 영양분이 많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그것을 사용한다.

문제는 산소다. 우리는 폐를 통해 들어온 산소를 다 쓰지 않는다. 그 증거는 적도 부근에서와 극지방 근처에서 정맥에 흐르는 혈액의 색이 다르다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적도 부근에서 정맥혈의 색이 더 붉다. 심장으로 돌아오는 적혈구가 산소를 더 많이 싣고 있다는 뜻이고 이 말은 신체가 산소를 적게 소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는 반대로 추운 극지방에서는 산소를 알뜰히 써서 에너지뿐만 아니라 열도 생산해야 살 수 있다. 이런 관찰을 토대로 네덜란드 상선의 독일 의사 메이어는 열역학 법칙을 고안했다. 입으로 들어온 영양소가 지닌 에너지는 사람이 수행하는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나머지는 열로 변환되지만 총량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맥의 혈액 색깔에서 추론한 것이다. 대단한 상상력이다. 최근 나는 우리가 사용하는 산소의 양이 호흡한 총량의 2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인간은 이 사용하지 않은 80%의 산소도 덥히기 위해 애를 쓴다. 게다가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의 80%는 질소이다. 겨울에 우리는 저 질소도 덥혀서 공기 중으로 헛되이 내보낸다. 물리학자들은 저 헛된 노력을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표현한다. 물이 담긴 비커에 퍼지는 한 방울의 잉크 입자처럼 인간이 음식을 먹고 욕조의 소용돌이를 돌리는 한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 있다. 그 증가된 엔트로피는 120살 먹은 노인의 피부에 새겨진 주름으로, 또 그들을 굼뜨게 걷게 하는 근육의 퇴화로 이어진다. 하나 수명을 연장하려는 노력 한쪽에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으로 살아가는 20대의 팔뚝에 펼쳐질 100년의 세월은 또한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그러니 우리는 낭비되는 산소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 입으로 들어가는 ‘수돗물’의 양을 줄일 일을 심각하게 고려할 때가 되었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곤충의 날개  (0) 2018.08.01
도토리  (0) 2018.07.04
길가메시 프로젝트  (0) 2018.06.07
엄마가 물려준 미토콘드리아  (0) 2018.05.09
낮의 길이  (0) 2018.04.11
정온식물  (0) 2018.03.1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여느 때와 달리 5월은 감정의 외출이 잦은 달이다. 어린이날에 이어 어버이날, 스승의날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짬을 내 우리는 인간의 유전자 혹은 인류의 지식이 대물림되는 현장을 애써 기억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노력은 다소 소모적인 데가 없지는 않겠지만 삶의 고명이자 향신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대물림은 ‘닮음’을 지속하는 과정이다. 자식은 부모를 닮게 마련이다. 닮았다곤 해도 자식은 부모와 꼭 같지는 않다. 바로 이 ‘같지 않음’ 때문에 지구가 생물학적으로 다양성을 띠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저 대물림의 주체는 세포다. 지구에 사는 75억이 넘는 인간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하나의 세포로부터 시작했다. 엄마로부터 하나, 아빠로부터 하나 이 두 개의 세포가 합쳐져 하나 된 세포인 수정란으로부터 인간은 발생을 시작한다. 한 개의 세포가 두 개가 되고 그것이 다시 네 개, 여덟 개… 이런 식으로 아홉 달이 지나야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 탄생하게 된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한 세포가 두 개가 될 때에는 세포가 가진 가구 일습을 두 배로 불린 다음 그것을 공평하게 반으로 나누어 갖는다. 그렇게 세포는 서로 닮는다. 이제 나눠 갖는 세포의 가구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대물림을 얘기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유전자는 고이고이 포개져 핵 안에 보관된다. 이 유전자에 담긴 정보를 풀어 단백질 노동자를 만드는 장소는 소포체다. 단백질을 만들 때 쓰이는 에너지는 주로 미토콘드리아가 공급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흔히 미토콘드리아를 세포 내 발전소로 비유한다. 그것 외에도 단백질을 가공하는 골지체와 생체 물질의 재활용을 담당하는 리소좀이 있다.

이런 가구를 하나도 구비하지 못한 채 오직 산소만 운반하는 적혈구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세포 대부분은 저런 세포 소기관 가재도구를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 인간은 부모로부터 세 종류의 유전 정보를 물려받는다. 엄마와 아빠로부터 물려받는 각각 한 가지의 유전체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토콘드리아도 자신만의 독특한 유전체를 가지고 당당하게 한몫 끼어든다. 바로 여기에 생물학의 가장 미묘한 수수께끼가 숨어있다. 미토콘드리아는 ‘불균등하게도’ 오직 모계를 통해서만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미토콘드리아는 난자를 통해서만 후대로 전달된다. 따라서 아들만 있는 엄마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체는 궁극적으로 진화의 무대에서 가뭇없이 사라진다.

왜 미토콘드리아가 문제가 될까? 그것은 인간이 물질과 에너지를 계속해서 공급해 주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체계이고 우리가 먹은 음식물은 최종적으로 미토콘드리아에서 화학적 에너지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전기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면 미토콘드리아의 위력을 능히 가늠할 수 있다. 앞에서 발전소에 비유했던 점을 떠올리면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미토콘드리아에서 평생 계속되는 에너지 생산 과정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미토콘드리아 안에 전자 고압선이 흐르기 때문이다. 피복이 벗겨진 채 운반되는 전기가 위험하듯 자리를 벗어난 미토콘드리아의 전자들은 세포 안팎의 단백질과 지질 혹은 유전자 가릴 것 없이 공격할 수 있다. 흔히 우리가 활성 산소라 부르는 것의 실체가 바로 궤도를 ‘벗어난’ 전자이다.

인간이 가진 수백 가지 세포 중 유일하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난자 안에는 미토콘드리아가 가득 들어차 있다. 자신의 유전자와 함께 엄마는 그 미토콘드리아를 자식에게 물려준다. 한 달에 한 번씩 난소를 나온 난자는 나팔관이라 불리는 길을 따라 움직인다. 중도에서 수정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자궁까지 오는 데 며칠이라는 시간이 더 걸린다. 머나먼 거리를 움직이지만 그동안 난자는 거의 에너지를 만들지 않는다. 앞에서 설명했듯 에너지를 만드는 동안 불가피하게 미토콘드리아 안에서 활성 산소가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자는 활성 산소가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공격하여 태아에게 심각한 손상을 입힐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대물림 방식을 채택했다.

그렇다면 나팔관을 따라 난자를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그것은 바로 섬모(纖毛·cilia)라 불리는 또 다른 세포 소기관의 움직임에서 나온다. 숨 쉴 때 공기에 섞여 들어오는 미세먼지를 붙잡아 점액과 함께 몸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 기도(氣道) 세포의 섬모이다. 마찬가지로 나팔관에서도 갈대 이삭처럼 늘어선 섬모가 일사불란하게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난자를 이끌어 간다. 난자는 마치 가마에 탄 새색시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고 에너지 사용을 극소화하면서 행여나 미토콘드리아나 난자에 들어 있는 유전체가 다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렇게 금지옥엽처럼 고이 간수한 미토콘드리아를 물려받은 수정란은 아홉 달 동안 완결체로 자라난다. 분열하여 그 수를 늘릴 수 있기 때문에 난자에서 온 종잣돈 미토콘드리아는 태아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 안에서 쉼 없이 에너지를 만드는 평생 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이렇게 일사불란한 한 방향 섬모의 움직임에 기댄 난자의 미동 없음을 기리어 인간들은 기꺼이 어버이날을 만들어 냈다. 하늘 푸른 5월이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토리  (0) 2018.07.04
길가메시 프로젝트  (0) 2018.06.07
엄마가 물려준 미토콘드리아  (0) 2018.05.09
낮의 길이  (0) 2018.04.11
정온식물  (0) 2018.03.14
‘바이러스 스나이퍼’ 크리스퍼  (0) 2018.02.1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만물이 소생(蘇生)한다는 봄이다. 작년의 잎을 아직 매달고 있는 단풍나무도 새로이 자줏빛 잎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활짝 기지개를 펴는 식물과 달리 어떤 사람들은 봄에 아지랑이처럼 다소 무기력해진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춘곤증이라고 부르고 거기서 벗어나려 애쓴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을 시나브로 지나 밤의 길이가 11시간 반보다 줄어들면 우리 뇌는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을 적게 만들어낸다. 밤의 길이가 긴 겨울에 멜라토닌을 더 많이 만들어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인간도 겨울에는 잠을 더 자는 게 생물학적으로 맞는 것 같다.

지구의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밤낮의 길이는 제각각이라 해도 하루의 길이는 24시간으로 일정하게 유지된다. 이 24시간을 주기로 인간의 생물학적 변화가 반복된다. 잠이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잠을 잘 때는 먹지 못하기 때문에 밤에는 소화를 담당하는 효소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이런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하루의 활동 주기를 결정하는 사령부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뇌 시상하부, 시교차상핵이라는 그 이름조차 생소한 곳에 있다. 약 2만개의 신경세포가 여기에 포진하고 있으면서 망막을 통해 들어온 빛의 세기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른 동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마주하는 외부 환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빛이다. 이 사실은 인간의 망막에서 색을 감지하는 세포가 450만개인 반면 빛과 어둠을 감지하는 세포가 9000만개에 육박한다는 저 숫자의 엄정한 차이에서도 실감할 수 있다.

꽃이 피고 봄이 왔다는 것은 곧 낮의 길이가 길어졌다는 말이다. 햇볕이 더 강하고 더 오랫동안 내리쬐는 것이다. 이에 반응하여 우리의 신체는 체온이 올라가고 그에 따라 혈관이 확장된다. 5ℓ의 혈액이 돌아다니는 우리 혈관의 길이가 10만㎞라는 점을 상기해보자. 혈관이 아주 조금만 팽창해도 혈압은 떨어지게 된다. 그 결과 뇌로 가는 산소의 양도 줄어든다. 따라서 봄이 되면 몸이 나른하고 피곤한 춘곤증이 나타나는 것이다. 낮의 길이에 따라 신체가 반응하는 현상은 시차 적응과 비슷하다. 인간의 몸이 늘어난 햇빛에 적응하는 데 2~3주가 걸리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낮이 길어지면 우리 몸은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을 적게 만드는 대신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을 더 많이 만들어낸다. 좀 더 왕성하게 활동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빛을 찾아 나서고 활발하게 세로토닌을 만들어내면 일교차가 큰 환절기에 걸리기 쉬운 감염 질환도 피해갈 수 있다.

이렇듯 낮의 길이에 대응하여 행동이나 물질대사를 변화시키는 적응 방식은 동물, 식물은 말할 것도 없고 곰팡이, 세균 등 지구상 거의 모든 생명체가 보편적으로 취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밤과 낮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광합성으로 귀결된다. 밤이 되면 식물도 광합성을 멈추고 동물처럼 산소를 소모하며 호흡한다. 밤이 되면 식물이건 동물이건 모두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내보낸다. 하지만 해가 뜨면 식물과 조류는 이산화탄소를 포도당으로 전환시키면서 부산물로 산소를 방출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소를 감히 ‘쓰레기’라고 부르는 사람을 볼 수는 없겠지만 과거 먼 옛날 산소가 독성 물질이었던 적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생명체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얘기다. 따라서 낮에 만들어진 산소를 피하기 위해 세균들이 하루의 활동 주기(circadian rhythm)를 조절하는 ‘최초’의 체계를 발명했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사실 산소를 피하는 일은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에 해당되는 천형과도 같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인간을 위시한 생명체들은 항산화제라는 물질을 만들어냈다. 항산화제에는 비타민 C와 같은 작은 물질이 있는 반면 단백질처럼 커다란 물질도 있다. 퍼록시리독신(peroxiredoxin)이라는 단백질은 광합성을 하는 남세균과 과일의 단맛을 좋아하는 초파리뿐만 아니라 쥐, 애기장대 등 거의 대부분의 생명체에 존재하며 빛의 길이에 따라 24시간을 주기로 그 양이 변화한다. 빛과 어둠은 무척 다양한 방식으로 생명 활동을 제어한다.

2017년 낮의 길이와 관련된 한 가지 흥미로운 연구가 ‘사이언스 중개 연구’라는 저널에 발표되었다. 낮에 입은 상처가 밤에 다친 상처보다 더 빨리 회복된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밤이 아니라 낮에 화상을 입은 사람의 피부가 더 빨리 회복될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밤에 화상을 입은 사람의 상처가 회복되는 데 60%나 더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결과가 나온 까닭이다. 그러므로 부득이 수술을 하게 되는 경우라 해도 가능하면 낮에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가 곧바로 따라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새겨진 상처도 밝고 꽃이 피는 봄에 더 빨리 회복될 수 있을까? 생물학적으로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되기 시작할 테니까. 하지만 그것뿐일까? 4월16일이 다가온다. 노란 리본은 가시광선을 감지하는 우리 망막 안의 세포를 따라 뇌에 그 모습을 새긴다. 햇볕이 내리쬐는 시간이 길어지는 그 바다를 우리는 지긋이 응시할 것이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가메시 프로젝트  (0) 2018.06.07
엄마가 물려준 미토콘드리아  (0) 2018.05.09
낮의 길이  (0) 2018.04.11
정온식물  (0) 2018.03.14
‘바이러스 스나이퍼’ 크리스퍼  (0) 2018.02.14
코딱지  (0) 2017.12.20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어릴 적 과히 정갈하지 않은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다가 곰팡이에 된서리를 맞은 적이 있었다. 두피에 마늘즙이나 식초를 바른다거나 백열전등으로 지진다거나 하는 민간요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곰팡이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내 기억에 곰팡이는 ‘강한 적’이었다. 지구상에는 약 150만종의 곰팡이가 있다고 한다. 엄청난 숫자다. 그중 식물에 쉽게 침입하는 곰팡이는 27만종, 곤충에는 5만종 정도가 있다고 한다. 반면 포유동물에 질병을 일으키는 곰팡이의 숫자는 수백 종에 불과하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 차이는 왜 생겨났을까? 우선 쉽게 면역계를 그 원인으로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면역계 외에도 포유동물은 곰팡이와 맞설 그럴싸한 나름의 전략을 수립했다. 바로 체온을 올리는 일이었다. 뉴욕 앨버트 아인슈타인 대학 카사드발 교수는 포유류가 섭씨 30~40도 사이에서 체온을 1도씩 올릴 때마다 곰팡이의 침입을 6%씩 저지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렇듯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은 에너지 예산 면에서 보자면 꽤나 소비적이지만 최소한 곰팡이를 퇴치하는 데는 안성맞춤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러면 곰팡이 퇴치 외에 정온성의 다른 이점은 없을까? 캘리포니아 대학 앨버트 베넷과 오리건 대학 존 루벤은 정온동물과 변온동물의 가장 큰 차이가 지구력에 있다고 보았다. 먹이를 쫓아가는 사자와 물속에서 눈만 내놓고 먹잇감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악어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이해될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포유동물과 닭 따위의 조류는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정온동물로 자신을 무장함으로써 살아가는 장소를 추운 곳까지 확장하고 근육을 빠르게 움직여 먹이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온도가 10도 올라갈 때 근육의 움직임이나 효소의 활성이 두 배로 증가한다는 점은 잘 알려진 생리학적 법칙이다. 물론 50도를 넘어가면 세포 일꾼인 단백질의 변성이 시작되므로 정온동물의 체온은 40도 근처에서 최적화된다. 근육에는 이동하는 데 쓰이는 가로무늬근도 있지만 소화기관이나 혈관을 움직이는 민무늬근도 있다. 정온성을 가진 생명체는 밤낮 할 것 없이 심장, 간을 포함한 소화기관 및 콩팥의 기능을 완벽하게 유지한다. 심장이 혈액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빠른 속도로 운반하는 동안 콩팥은 질소 노폐물을 몸 밖으로 신속하게 내보낸다. 흡수를 마친 소화기관은 간으로 영양소를 빠짐없이 보낸다. 정온동물 신체 기관의 이런 여러 장점들을 한데 모아보면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정온성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정온성을 선택한 동물은 전체 동물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150만 중에 조류 9000종, 포유동물 4500종을 제외한 나머지 99.9%의 동물은 주변 환경에 따라 체온이 변하는 변온성을 채택했다.

이렇게 보면 정온성은 생명체 진화 전 과정에서 극히 예외적인 드라마에 속한다. 그렇다면 일부 동물계에서 정온성은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을까? 과연 파충류인 공룡의 피는 차갑기만 했을까? 공룡을 연구한 최근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큰 육상 동물이었던 용반목(Sauropod) 공룡은 풀을 먹었다고 한다. 초식동물들이 흔히 겪는 문제는 탄소에 비해 질소의 섭취량이 적다는 점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충분한 양의 질소를 섭취하려면 동물은 상대적으로 탄소가 풍부한 풀을 많이 먹어야 한다. 잠을 줄이면서까지 풀을 먹은 결과 동물의 몸에는 탄소가 과도하게 축적되었다. 이 축적된 탄소를 처리하기 위해 공룡들이 취한 방식은 두 가지였는데 그 하나는 몸집을 키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탄소를 태워서 열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연구를 주도한 리버풀의 존 무어스 대학 윌킨슨 박사는 체중에 비해 표면적이 상대적으로 넓은 몸집의 공룡 새끼들이 열을 내면서 탄소를 처리했다면 생존에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탄소를 태워 열을 내는 대사 체계가 야행성 포유류에서도 시작되었으리라고 과학자들은 짐작한다. 우리는 정온성이 포유동물과 조류에 국한해서 진화되었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생애 어느 순간 잠깐이라도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생명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어류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참치, 황새치, 악상어가 열을 내면서 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눈 주변의 근육을 움직여 먹잇감을 정확히 포착한다. 비단뱀도 알을 낳고 부화하는 동안 몸의 열을 내 자신의 분신을 보호하려 든다. 심지어 식물도 생식하는 동안 에너지를 써서 열을 낸다. 바로 수분에 참여할 곤충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손난로’ 전략이다. 딱정벌레는 온도가 40도가 넘는 천남성과 식물들의 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씨를 성숙시키기 위해 연꽃도 열을 낸다.

경칩 지난 절기에 눈이 쌓인 산길을 걷다 마주치는 복수초(福壽草) 노란 꽃이나 변산 바람꽃도 열을 내 눈을 녹이고 안온하게 자리 잡는다. 남들보다 일찍 수분을 마치고 씨를 만들어 살아남기 위한 안간힘을 보고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하루 꼬박 세끼를 먹고 100년을 향해 산다고 하는 인간은 무슨 아름다움을 바라 하루 종일 열을 낼까? 2018년 한국의 봄날, 쑥이며 민들레 앉은뱅이 풀들이 앞 다투어 돋을새김으로 고개를 내민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가 물려준 미토콘드리아  (0) 2018.05.09
낮의 길이  (0) 2018.04.11
정온식물  (0) 2018.03.14
‘바이러스 스나이퍼’ 크리스퍼  (0) 2018.02.14
코딱지  (0) 2017.12.20
미세플라스틱의 거대한 세계  (0) 2017.11.22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사람이 평균 70년을 산다면 그중 1년은 감기에 걸려 있다는 통계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햇수로 따지면 매년 약 닷새 좀 넘게, 일수로 따지면 매일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인 20분 남짓 우리가 감기에 골골하고 있는 셈이 된다. 평생 고뿔을 모르고 살았노라 곤댓짓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일 년에 한두 차례 감기를 명절 손님처럼 맞는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10%의 인류가 경험한다는 감기는 바이러스 때문에 발병한다. 우리처럼 온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온이 떨어지는 겨울에 감기에 취약하다. 날이 차가워진 까닭에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면역력이 떨어져서 쉽게 감기에 걸릴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계절에 따른 온도 차이가 크지 않은 적도 근처의 사람들은 감기에 잘 걸리지 않을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홍콩에서는 작년에 감기 바이러스의 사촌격인 인플루엔자 감염으로 300명이 넘게 죽었다. 아열대 기후의 특징을 보이는 홍콩에서 여름 시즌인 5월에서 8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2006년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적도 근처의 사람들도 온대 지방인 미국 사람들 못지않게 감기에 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뉴욕에든 자바섬에든 바이러스는 늘 있는 것이고 어떤 이유에서든 면역력이 떨어진 인간을 골라서 바이러스가 습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온대 지방과 마찬가지로 적도 지역에서도 감기에 취약한 연령층은 U자 그래프를 그린다. 아주 어리거나 나이든 사람들의 면역력이 상대적으로 쉽게 약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면역계는 왜 감기 바이러스에 유독 취약한 것일까? 일주일 정도의 휴식과 따뜻한 콩나물국 말고 다른 처방은 없는 것일까?

뉴스를 조금만 눈여겨보면 바이러스는 사람뿐만 아니라 새들과 식물에도 거침없이 달려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물고기, 개구리, 악어도 사는 동안 한번쯤은 바이러스에 시달린다. 지금까지 나열한 생명체는 모두 눈에 보이지만 현미경으로나 보임직한 세균도 바이러스 때문에 흔히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다양한 바이러스 중에서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와 조류가 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들이 있다. 감기는 이미 얘기했고, 현대판 흑사병이라 불리는 에이즈, 소두(小頭)증을 유발한다는 지카, 해마다 갈마들며 조류 독감과 구제역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 바이러스는 RNA라는 다소 불안정한 유전 물질의 돌연변이를 통해 끊임없이 변신하며 약물이나 백신에 대해 내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세균은 이런 RNA 바이러스에 상대적으로 강한 내성을 보인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세균은 쉽사리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다른 수단도 있겠지만 침입한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감지하고 제거하는, 크리스퍼(CRISPR)라 불리는 세균의 면역 담당 저격수가 한몫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리스퍼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줄임말이다. 세균의 유전자 가위니까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자른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를 자를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 생물학의 묘미가 살아 숨 쉰다. 세균의 크리스퍼는 자르고자 하는 바이러스 유전자 표적에 지퍼를 채운 것처럼 착 달라붙는다. 그런 다음 크리스퍼와 팀을 이뤄 일하는 가위 단백질이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싹둑 잘라버린다. 스스로를 조립하지 못한 바이러스는 이제 더 이상 바이러스가 아니며 온전하게 살아서 세균 밖을 나갈 도리가 없다.

사실 크리스퍼의 단서를 짐작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1987년 세균의 유전자를 비교 분석하던 일본의 연구진들이 크리스퍼의 존재를 눈치챘다. 하지만 그 정체가 밝혀진 것은 21세기에 접어든 뒤였다. 요구르트나 요플레와 같은 발효 유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균을 조사하던 덴마크의 대니스코 연구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체계가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내성을 갖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흥미로운 점은 크리스퍼가 과거 세균 집단에 무단 침입했던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채무기록처럼 꼼꼼히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세균은 자신을 한번 침입한 바이러스를 쉽사리 잊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면역계의 이러한 특성을 두고 적응성 면역이라고 칭한다.

이후 분자생물학자들이 크리스퍼의 파급력을 짐작하게 되면서 변방에 있던 세균의 면역 체계가 일약 유전공학의 총아로 떠올랐다. 마침내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인공적으로 합성하여 정확하고 빠르게 동물이나 식물의 특정 유전자 부위를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혈우병과 같은 유전 질환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게 될 것이다. 비계 대신 살코기가 듬뿍 든 ‘슈퍼’돼지를 만들 수도 있다. 곰팡이 감염에 강한 바나나도 곧 선보일 것이다. 크리스퍼는 이미 변화의 장도에 올랐다.

한편 과학자들은 크리스퍼가 본디 바이러스의 대항마로서 진화한 세균의 방어체계라는 점을 잊지 않고 그것을 난공불락의 감기 바이러스를 무력화시키는 데도 쓸 수 있으리라 궁리한다. 무작정 살처분에 맡기는 구제역과 조류 바이러스 감염 가축들도 곧 크리스퍼와 한번쯤 만나야 하지 않을까? 영하의 강추위가 한정 없이 길어지는 이 겨울, 나는 작고 작은 것들의 세상을 꿈꾼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낮의 길이  (0) 2018.04.11
정온식물  (0) 2018.03.14
‘바이러스 스나이퍼’ 크리스퍼  (0) 2018.02.14
코딱지  (0) 2017.12.20
미세플라스틱의 거대한 세계  (0) 2017.11.22
45억년  (0) 2017.09.20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신호 대기 중인 차 안에 홀로 있는 남성은 주로 코를 파면서 짧은 시간을 요긴하게 보낸다고 한다. 여기서 방점은 아무래도 ‘홀로 있는’과 ‘남성’에 찍힐 것 같다. 혼자 있을 때 코를 파는 일이 흔하고 그런 행위가 성별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난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중인환시(衆人環視) 중에 코를 파는 행동을 권장하는 사회는 없다. 그렇다면 들켰을 때 창피할 수도 있는 코 파는 행위가 사라지지 않고 인간 사회에 만연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최근 여러 국가의 과학자들이 모여 코 파기와 관련된 인간의 유전자가 있지 않을까 연구한 적이 있었다.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별 쓸데없는 연구를 다 한다고 지청구 먹기 딱 좋은 실험 소재다. 하지만 ‘우리 피부는 왜 밤에 더 가려울까?’와 같은 궁금증을 파헤쳐가는 동안 가려움을 매개하는 새로운 신경세포가 발견되기도 했으니 코딱지를 연구하다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미생물 세계의 장관을 접하지 말란 법도 없다. 유전자가 코를 파는 행위와 같은 형질을 결정한다고 하면 늘 그렇듯 ‘유전자 만능’에 관한 찬반 논쟁이 불거진다. 해석에 유의해야 한다면서 다국적 연구진은 코 파는 일이 콧구멍을 청결하게 유지하기 위해 ‘자연 선택된’ 행동이라고 말했다. 인류의 생존에 뭔가 이점이 있었다는 뜻이다. 가느다란 인간의 손가락과 마디가 코 파기에 적합하다는 따위의 다소 허무맹랑한 주장도 있지만 이는 논외로 치자. 그러나 콧구멍을 청결하게 하는 일이 카나비노이드(cannabinoid) 신호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데 대해선 솔깃한 느낌이 든다. 소량이나마 초콜릿에도 들어 있는 카나비노이드는 대마초의 주성분이며 우리 인간의 뇌에서도 작동하는 신경전달 물질이다. 우리 뇌 안의 보상 회로는 마약성 식물인 대마나 아편에서 발견되는 물질과 흡사한 화합물을 사용한다. 이런 연구 결과를 접하면 코 파는 행위가 탐닉적인 성격을 띨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닌 게 아니라 코 파기의 즐거움을 논한 책이 시중에 회자되기도 한다.

많지는 않지만 코 파기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다. 2001년 “흉내 낼 수 없거나 흉내 내면 안 되는” 연구 결과로 이그(Ig) 노벨상을 받은 인도의 안드라데와 스리하리는 청소년과 아이들 200명을 대상으로 코 파는 행위에 대해 조사했다. 결과에 따르면 코 파는 일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수행하는 매우 보편적인 인간의 특성에 속한다. 하지만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연구하고 논문으로 발표하는 과학자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코 파는 행위가 즐거움을 준다거나 가려운 데를 긁는 행위가 뇌의 행복 중추를 자극한다는 연구도 극히 최근에 수행된 일이다. 임상 정신의학 저널에 소개된 안드라데와 스리하리의 연구 결과 중 흥미로운 사실은 심지어 코딱지가 맛있다고 답했던 아이들이 4.5퍼센트나 된다고 꼭 집어 숫자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맛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나도 코딱지의 짭조름한 맛을 기억한다.

올해 초 동료로부터 코딱지를 먹는 일이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건강에 좋을 수도 있다는 투의 얘기를 들었다. 얘기의 출처는 네이처에 나온 논문이었다. 내용은 방대하지만 결론은 으레 그렇듯 지극히 단순했다. 우리 코딱지에 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이 항생물질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는 토양에 사는 미생물이 항생물질을 만든다는 기존의 통념을 흔들어 놓았다. 흔히 우리는 인간 질병의 원인이라며, 눈에 보이지 않게 작은 미생물을 싸잡아 ‘공공의 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의 미생물은 인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일부 미생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유익한 생명체들이다. 요즘 들어 이들 미생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늘고 있다. 서점에 가면 10퍼센트 인간이니 우리 몸에 미생물이 너무 많다느니 하는 내용의 책을 쉽게 볼 수 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 전체의 열 배 정도가 세균이고 그 무게는 무려 고기 ‘두 근 반’인 1.5킬로그램에 이른다. 이들 미생물 대부분은 대장(大腸)의 ‘주민’들이고 인간의 소화기관이 처리하지 못한 섬유질 등을 먹고 살면서 인간 영양소의 약 10퍼센트를 보상으로 제공한다. 그러나 북적거리는 그곳이 아니라도 우리 몸 곳곳에서 미생물은 꿋꿋이 살아간다. 한 올의 머리카락을 분간하지만 우리 눈이 세균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다행인가?

입속처럼 콧속에도 90종류가 넘는 미생물이 상주한다. 사람마다 얼굴 생김이 다르듯 이들 미생물의 구성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들의 코에는 루그더닌이라는 무척 생소한 이름의 항생제를 만드는 미생물이 산다고 한다. 여러 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이 물질은 항생제 내성을 가진 고약한 세균의 생육을 저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그더닌을 만드는 미생물을 보유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여 병원성 세균에 대한 무기 하나를 더 가진 것이 아닐까? 혹시 우리 몸에 상주하는 세균은 우리 면역계의 일부일까? 질문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 답을 얻기 위한 연구도 지속되어야 한다. 사소해 보이는 코딱지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물음을 거듭하다 보면 우리 안 작디작은 세계가 시나브로 그 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온식물  (0) 2018.03.14
‘바이러스 스나이퍼’ 크리스퍼  (0) 2018.02.14
코딱지  (0) 2017.12.20
미세플라스틱의 거대한 세계  (0) 2017.11.22
45억년  (0) 2017.09.20
포유동물의 사치스러움  (0) 2017.08.23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인간의 평균 키보다 네다섯 배 정도 길기 때문에 우리의 구절양장 소화기관은 똬리 치듯 구부러져 있다. 입으로 들어온 영양소를 최대한 흡수하려는 절박함이 고스란히 반영된 해부학이다. 사실 인간이 음식을 먹는 이유는 육안으로 식별 불가능한 우리의 작은 세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그들이 먹을 수 있게 아주 잘게 쪼개주어야만 세포가 살고 세포의 집합체인 우리도 산다. 단백질은 스무 종류의 개별 아미노산으로, 전분은 포도당으로 그리고 지방도 지방산으로 쪼개져야 비로소 소장에서 원활한 흡수가 가능해진다. 광어에서 온 단백질 정보와 감자에서 온 전분의 정보가 이런 기본 단위로 쪼개지지 않은 채 흡수되면 생명체는 곧바로 면역계를 출동시킨다. 해독되지 않은 날것 정보를 내가 아닌 ‘비아’(非我)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따라서 먹고 흡수하는 소화 행위는 곧 서로 다른 생명체에서 도달한 정보를 해체하고 개별화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해체할 수 없는 정보에 노출되는 일은 없을까?

물론 있다. 한때 호황을 누렸던 석탄 채굴장의 노동자들이 먹고 마셨던 탄가루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지금은 규제가 심하지만 내열성이 좋아 한때 건축 자재로 흔하게 사용되었던 규산염 섬유 결정인 석면도 인간의 폐나 소화기관에서 해체되지 않은 정보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몸에서 면역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이런 날것 정보에 인간이 노출되면 오랜 잠복기를 거쳐 진폐증(asbestosis)이나 복막 중피종(mesothelioma)이라는 달갑지 않은 병이 찾아올 수 있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미세 먼지도 ‘인플라마좀’이라 불리는 면역 반응 복합체를 건드릴 가능성이 높다. 흔히 간과되긴 하지만 담배 연기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립자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다. 이는 미국에서 담배 실험할 때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환경에서 온 것 말고 우리 몸에서 만들어져서 면역 반응을 부추기는 물질들도 많다. 이런 물질들은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 생체 물질이 과량으로 존재할 때 만들어질 가능성이 부쩍 커진다. 가령 혈중에 다량으로 떠돌던 포도당이 화학적으로 알부민 단백질에 달라붙어 생겨난 물질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현상은 당뇨병 환자에게서 쉽게 발생하리라 예측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과량일 때 날카로운 미세 칼날 결정을 만드는 콜레스테롤도, 통풍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알려진 요산 결정도 염증 반응을 일으킨다. 

몸 안에서 만들어졌건 환경에서 유래했건 간에 우리는 이런 물질을 통틀어 위험 인자라고 부른다. 이 위험 인자라는 말은 세균이나 병원성 미생물에 대적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면역계가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근 들어 새로운 위험 인자가 등장했다. 바로 미세플라스틱이다. 죽은 가마우지 배에서 발견되는 플라스틱병이나 어구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미세플라스틱은 큰 플라스틱병들이 파도와 태양빛에 닳고 닳아 잘게 부서지다가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게 크기가 줄어든 것들이다. 감내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노,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미세플라스틱이 설탕과 꿀, 맥주 그리고 소금에서 발견된다는 논문도 최근 출간되었다. 심지어 각질을 제거하는 의약부외품에도 미세플라스틱이 존재한다. 해수면에서 증발된 수증기의 순환을 통해 혹은 버려진 플라스틱이 닳아 육지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된다. 

이렇듯 잠깐만 살펴보아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플라스틱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통감하게 된다.

굴이나 홍합을 통해 우리가 섭취하는 미세플라스틱이 1만개라고 치고 그 양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자. 평균 크기가 1마이크로미터인 미세플라스틱 1만개를 죽 늘이면 10㎜가 된다. 1㎝다. 1년에 그 정도라니 무시할 만한 양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 미세플라스틱은 세포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인간 진화 역사에서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물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마시는 정수기 물에서도 미세플라스틱 조각이 발견된다니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굴러갈 것 같지는 않다.

2016년 한 해에만 인류는 3억2000만t의 플라스틱을 만들었다. 이 중 40%가 단순히 물건을 포장하기 위해 쓰였다. 1950년 이후 2015년까지 생산된 플라스틱 양은 모두 83억t이다. 그중 76%에 해당하는 약 63억t이 쓰레기로 폐기처분되었다. 재활용 비율은 고작 10%도 되지 않는다. 이처럼 현생 인류는 신속하게 분해할 기술이나 미생물도 없는 상태에서 플라스틱을 산처럼 쌓고 있다. 

바다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잇감을 쫓는 물고기는 배 안에 플라스틱, 미세플라스틱 가리지 않고 채워 넣는다. 잠시 후 생선 요리라는 이름의 미세플라스틱 ‘요리’가 우리 식탁에 오른다. 후식으로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용액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플라스틱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하늘에서는 미세플라스틱이 가을 단풍과 함께 떨어진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세포는 미세플라스틱을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하지만 그 세포의 집합체인 인간은 오늘도 플라스틱을 만들고 무심코 버린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이러스 스나이퍼’ 크리스퍼  (0) 2018.02.14
코딱지  (0) 2017.12.20
미세플라스틱의 거대한 세계  (0) 2017.11.22
45억년  (0) 2017.09.20
포유동물의 사치스러움  (0) 2017.08.23
나무는 죽음을 품고 산다  (0) 2017.07.2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우리는 지구가 생긴 지 45억년이 넘었다고 배운다. 얼추 100마이크로미터인 머리카락 한 올의 지름을 1년이라 치면 지구의 나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 약 450킬로미터에 해당한다. 우리의 머리카락 45억개를 빈틈없이 잇대 세우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일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퇴하긴 했지만 한때 나와 동종업계 사람처럼 보였던 한 장관 후보자는 지구의 나이가 6000년 정도라고 ‘신앙적으로’ 주장했다. 여기저기 뒤져보니 1650년대 아일랜드의 주교 어셔(James Ussher)라는 사람이 성서를 꼼꼼히 해석한 뒤 지구가 기원전 4004년 10월23일에 탄생했다고 말했단다. 이 주장에 따르면 2017년인 현재 지구는 6021년에서 한 달 정도가 모자란 세월을 살았다. 앞의 비유를 적용해보면 지구의 나이는 머리카락 6000개가 나란히 선 거리, 6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이는 성인의 보폭보다 짧고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 있던 우물의 반지름 정도가 될까 말까 한 길이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런데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45억년 정도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발을 딛고 선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는 불편함이 책을 쓰는 계기였다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나 광물과 지구가 함께 진화해왔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지구 이야기>에는 지구의 나이를 캐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17세기 이후 유럽의 과학 혁명 시기에 지구의 나이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척 많았다. 꼬리 달린 혜성을 발견하고 그것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에드먼드 핼리는 바닷물 속에 들어있는 소금의 총량과 강을 통해 매년 바다로 흘러드는 소금양을 측정하면 지구의 나이를 알 수 있다고 추론했다. 1715년의 일이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머금은 산성비가 대륙을 침식시켜 지각의 염분을 쓸고 바다로 갈 것이기에 이런 추론은 상당히 그럴싸하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로 민물은 고사하고 바닷물에 녹아있는 소금의 양을 측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증명할 실험적 방법이 없다면 그 어떤 가설도 상상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비글호를 타고 항해하던 5년 동안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를 탐독했던 다윈은 영국 남부 지역의 지질학적 변화가 얼추 3억년에 걸쳐서 완성되었다고 <종의 기원> 초판에서 한때나마 주장했다. ‘한때나마’라고 쓴 까닭은 <종의 기원> 3판에서 다윈이 슬며시 그 내용을 빼버렸기 때문이다. 극심했던 종교계의 반대로 인해 자신의 이론이 훼손될까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다. 19세기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인 켈빈 경도 지구 나이를 추산하는 데 합세했다. 하지만 그도 당대에 축적된 과학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지구를 먹여 살리는 태양이 수천만년 동안 꺾이지 않고 그 기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켈빈은 4억년에서 1억년으로 계속해서 지구의 나이를 줄여나가다가 최종적으로는 2400만년이라고 말했다. 1897년의 일이다. 20세기가 다 되었을 당시의 과학자들은 축적된 과학 지식과 인류의 이성에 기반을 둔 지구의 나이를 수천만년까지 늘려놓았다.

지질학적 변화나 화석을 통해 드러난 증거는 지구의 역사가 다윈이나 지질학자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길다는 점을 암시했지만 그 사실을 증명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19세기 후반 지구의 나이를 추정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동위원소의 발견이다. 서랍 속 포장된 사진판 위에 우라늄 광석 덩어리를 던져두었던 프랑스의 앙리 베크렐은 나중에 사진판에서 빛에 노출된 듯 우라늄 광석의 흔적이 새겨진 모습을 발견했다. 베크렐에게 우라늄 광석을 받은 마리 퀴리는 특정한 암석이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성질을 방사능이라고 불렀다. 여세를 몰아 라듐, 폴로늄이라는 방사능 물질을 발견한 퀴리는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연거푸 받았다. 얼마 뒤 물리학자 러더퍼드는 방사능 원소가 붕괴되면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하고 그 때문에 지구 내부가 뜨겁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게다가 그는 우라늄 원소가 납 원소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제 인류는 지구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과학적 기반을 한껏 다졌다. 20세기 초 우라늄 원석 연구를 파고든 러더퍼드는 그 암석이 7억년이 넘은 물체라고 발표했다. 21세기인 현재 우리는 우라늄 원소의 반감기가 약 45억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구 탄생 초기에 우라늄 원소가 100개 있었다면 지금은 50개 정도가 남았다는 뜻이다. 이는 우라늄 50개가 납 원소로 변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45억년이 지나 지금보다 태양의 온도가 더 떨어지게 되면 25개의 우라늄과 75개의 납 원소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 예측은 들어맞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과학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50살이 넘은 나더러 사실은 당신이 49살에 태어났으니 고작 1년을 산 것에 불과하다고 속삭인대서 믿을 내가 아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과학적 질문이 설 자리는 비좁다. 지금껏 인류의 역사는 과학적 질문이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온 기록이 아니었던가?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딱지  (0) 2017.12.20
미세플라스틱의 거대한 세계  (0) 2017.11.22
45억년  (0) 2017.09.20
포유동물의 사치스러움  (0) 2017.08.23
나무는 죽음을 품고 산다  (0) 2017.07.26
방광은 왜 거기에 있게 됐을까  (0) 2017.06.28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점화에 의한 가스 팽창이 피스톤을 움직이고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터빈을 돌려 전깃불을 밝힌다. 연료가 계속 공급되고 상류에서 물이 지속적으로 흘러드는 한 자동차는 움직이고 터빈은 전기를 생산할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으며 다만 변환될 뿐이라고 말한다. 혹은 폭포 위의 물이 가진 위치 에너지가 전기 에너지로 변화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두산 장백폭포처럼 그냥 아래로 떨어지는 물은 무슨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 자갈을 좀 더 아래쪽으로 밀어냈거나 아니면 지축을 흔들면서 지각을 구성하는 물질의 온도를 높였을 것이다. 아래로 떨어진 물이 폭포 위로 저절로 올라가지 못하듯이 터빈을 돌리지 못한 에너지도 다시 회수될 수는 없다. 이렇듯 유용한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되지 못한 것들은 필연적으로 낭비되어 흩어진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설명이 가능할까? 못할 리 없다. 우리말에 ‘밥심으로 일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음식물에 들어 있는 화학 에너지를 추출해서 일을 한다. 뛰고 생각하고 신문을 읽는 모든 행위들에 바로 이들 에너지가 사용된다. 우리는 음식물에 포함된 화학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받지 못하면 작동을 멈춰버리는 ‘비평형계’ 생명체일 뿐이다.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지구와 지구 위의 대부분의 생명체는 태양 에너지의 신세를 지고 있다. 우리가 먹는 밥이나 고기도 결국 태양에서 출발한 에너지가 전기화학적 변환을 거친 결과물에 불과하다. 태양빛이 미치지 않는 심해의 열수분출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구 내부 에너지를 이용해서 살아가는 소수의 생명체는 물론 예외이다.

이제 우리 입으로 들어온 화학 에너지의 운명을 쫓아가 보자. 상황을 단순화하기 위해 밥만 먹는다고 가정해보자. 소화기관에서 소화되지 않고 몸 밖으로 나가는 10%를 제외한 90%의 밥 대부분은 포도당의 형태로 혈액에 들어온다. 혈액을 전신으로 순환시키는 심장 덕에 포도당은 신체 각 세포에 전달된다. 수십조개에 달하는 인체의 세포들은 포도당을 잘게 쪼개서 에너지를 회수한다. 생물학책에는 포도당 한 개로 38개의 ATP(아데노신 3인산) 분자를 만들 수 있다고 적혀 있다. ATP는 생명체의 에너지 통화라 불리는데 우리가 먹은 탄수화물은 ATP 형태로 전환되기 전에는 세포가 일을 수행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 하지만 세포들은 실제 30개가 못되는 ATP 분자를 만들 뿐이다.

ATP라는 에너지 통화로 변하지 못한 포도당의 에너지는 세포 내부의 물을 덥히는데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이나 새들은 자신들이 섭취한 영양소의 상당 부분을 열에너지로 바꾼다. 내연 기관의 온도가 올라 자동차 밖으로 흩어지는 것과 달리 포유동물은 한동안 열을 보존한다. 하지만 그 열은 어디에 보관될까? 생물학 교과서를 보면 우리 몸의 7할은 물이다. 생체 내에 포함되어 있는 여타 물질에 비해 물의 크기는 매우 작다. 따라서 순전히 분자의 숫자로만 따질 때 우리 몸은 거의 대부분 물이라고 볼 수 있다. 물이 가득 찬 풍선과 같은 육신이 내리누르는 중력을 오직 두 발로 서서 평생을 버티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비타민C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헝가리의 생화학자, 얼베르트 센트죄르지는 “생명은 고체의 장단에 맞춰 물이 추는 춤”이라고 말했다. 물을 제외한 인간의 육신 중 3할은 고체이고 그중 얼추 절반이 단백질이다. 물에 녹는 일부 단백질도 여기서는 의미상 고체 역할을 맡는다. 그렇다면 얼베르트 센트죄르지의 말은 “생명은 단백질의 장단에 맞춰 물이 추는 춤”으로 각색되고 생명은 “물이 추는 춤”이라는 말로 축약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물이 추는 춤의 핵심은 물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정온성에 있다. 물의 온도가 10도 올라가면 효소 단백질의 활성은 두 배 증가한다. 40도 근처에서 최대 효율을 나타내는 단백질은 그보다 10도 정도 높은 온도에서 계란 흰자처럼 변성된다. 차가운 토굴에서 나와 몸을 따뜻하게 덥히지 못한 도마뱀의 미오신 근육 단백질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파충류의 혈액, 즉 물도 춤을 추어야 하는 것이다. 변온동물인 이들 도마뱀은 태양을 향해 기꺼이 몸을 맡겨 체온을 높인 후에야 비로소 먹을 것을 찾아 나설 수 있다. 파충류들도 분명 물을 덥히겠지만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에 비해 훨씬 적은 양의 음식물을 입에 집어넣고 밤이 되면 기꺼이 체온을 떨어뜨린다. 반면 닭이 부산스레 모이를 쪼고 염소가 잠을 줄여가며 열 시간 넘게 풀을 씹는 이유는 바로 이들 몸을 구성하는 7할의 액체를 밤낮으로 데우기 위해서다. 그래야 아밀라아제와 셀룰라아제 효소가 전분이나 셀룰로오스를 효과적으로 분해하고 근육을 움직일 수 있다. 정온성을 확보한 동물들은 털로 몸을 치장한 뒤 온대지방을 지나 극지방까지 생활터전을 넓혀나갔다. 하지만 극지방 가까운 곳에서 뱀에게 물리는 사건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껏 살펴보았듯 인간을 필두로 하는 포유동물은 양서류나 파충류 등의 변온성 동물에 비해 꽤나 사치스러운 삶의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그 사치스러움은 정온성에서 극치를 선보인다. 체온만큼 기온이 상승하는 더운 여름날 에어컨을 틀어대며 자신의 환경을 10도 이상 낮추면서도 제 몸의 체온을 37도로 유지하기 위해 인간들은 계란이 열 개나 들어간 계란말이를 거침없이 먹는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세플라스틱의 거대한 세계  (0) 2017.11.22
45억년  (0) 2017.09.20
포유동물의 사치스러움  (0) 2017.08.23
나무는 죽음을 품고 산다  (0) 2017.07.26
방광은 왜 거기에 있게 됐을까  (0) 2017.06.28
산소와 숨쉬기  (0) 2017.05.3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시인 김수영이 노래했듯이 풀은 쉽사리 눕는다. 인간의 경험이 대뇌 피질의 신경세포 시냅스에 각인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는 풀과 나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 경계가 다소 모호한 대나무(대나무는 볏과의 풀이다)와 담쟁이덩굴(나무다) 같은 식물을 논외로 치면 대부분의 풀은 한 해가 가기 전에 땅 위로 솟아난 부위인 줄기가 죽으면서 사라진다. 죽기 전에 풀은 서둘러 꽃을 피우고 많은 양의 씨를 주변 여기저기 퍼뜨려 놓아야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한 세대가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풀의 삶은 간소할 수밖에 없다. 반면 나무는 자신의 내부에 죽음을 안고 살아간다.

풀과 나무는 둘 다 관다발 조직을 갖는다. 물이나 영양분이 들고 나는 통로인 관다발은 물관과 체관으로 구성된다. 뿌리를 통해 흡수된 물과 무기 염류는 안쪽의 물관을 지나 잎과 세포에 공급된다. 한편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포도당과 탄수화물은 물관의 바깥쪽에 있는 체관을 통해 저장되거나 세포의 에너지원이 된다. 이들 물관과 체관 사이에는 왕성하게 세포 분열을 하는 부름켜가 끼어 있다. 부름켜 세포는 안쪽으로 자라서는 물관을, 밖으로 자라서는 체관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와 같은 온대 지방에서는 부름켜의 활성이 계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 결과 나이테가 생긴다. 사실 나이테는 물관과 주로 관계가 있다. 봄여름 동안에 빠르게 자란 물관은 상대적으로 옅은 색이지만 가을에 더디게 자란 물관 부위는 짙은 동심원을 그리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나이테의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부름켜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 이때 작년에 활동했던 물관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 하지만 이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나무의 둥치를 굵게 만든다. 따라서 둥치 굵은 나무의 속은 더 이상 물관의 노릇을 하지 못하고 죽어 있는 셈이다. 이렇게 맨 바깥쪽 물관만 살아 있는 나무는 뿌리에서 흡수한 물을 잎으로 보내 광합성에 사용하게 한다. 2월 말에서 3월 초 고로쇠나무 수액을 받을 때 나무 표면에서 구멍의 깊이가 약 2㎝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아도 나무의 이런 해부학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부름켜의 바깥 부위인 체관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밖으로 밀려나 수피로 변하면서 최종적으로 인간의 피부처럼 떨어져 나간다. 비가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분 다음날 나무 둥치 아래를 한번 살펴보라. 나무껍질이 우수수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때 물관이었다가 지금은 나무를 지탱하는 가운데 부위(심재)의 튼실함 덕에 높이 자라난 나무는 광합성을 왕성하게 수행하며 생태계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했다. 관다발 조직을 가진 식물은 4억2000만년 전인 데본기에 양치류 형태로 엄청나게 번성했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인목(鱗木)과 나무고사리 등이 지구 표면을 수놓았다. 이때 지구는 대륙이 한데 모여 있었던 판게아 시절이었고 습지가 많았다. 이 습지에 쓰러진 거대한 나무고사리와 인목이 퇴적되면서 다량의 석탄이 만들어지게 된다. 바야흐로 석탄기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 지질학회에서는 석탄기를 전기인 미시시피기와 후기 펜실베이니아기로 나누어 구분한다. 지금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는 집의 지하에서 석탄이 나오면 주정부에 양도하겠다는 서류에 서명해야 집을 살 수 있다. 석탄이 매장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광범위하게 석탄이 매장되기 위해서는 지질학뿐만 아니라 화학도 가세해야 했다. 나무의 목질소라고 불리는 리그닌(Lignin)이 진화한 것이다. 나무의 목질을 구성하는 세포벽은 포도당 다당류인 셀룰로오스와 방향족 수산화물의 중합체인 리그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탄기에는 이들 고분자 화합물을 분해할 수 있는 생태계가 아직 조성되지 않은 데다가 뿌리가 약한 양치류가 퇴적될 수 있는 지질학적 교란도 흔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광합성 과정에서 합성된 탄수화물이 이산화탄소로 연소되지 않고 고스란히 땅에 묻혔다. 그렇기에 석탄은 한때 지상의 삶을 영위했던 고대 식물의 아바타이며 그 주성분은 탄소이다.

하지만 고생대 이후부터는 나무의 고분자 물질을 분해할 수 있는 세균과 곰팡이, 곤충 등이 차근차근 진화해 나오면서 지구는 석탄기처럼 본격적으로 탄소가 매장될 기회를 다시는 얻지 못했다. 탄소가 산소와 반응하여 이산화탄소로 또 그 역순으로 순환되는 체계가 점차 균형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쓰는 화석 연료인 석탄은 석탄기에 거의 유일하게 다량으로 매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석탄은 땅속 깊은 곳에 퇴적된 채 수억 년의 세월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근대 산업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페름기 이후 축적되었다는 석유도 이 흐름에 가세했다. 4차 산업혁명이 세간의 화두인 현재 우리는 화석 연료가 고갈된 이후의 세상에 대해 다시 고민한다. 그러나 인류가 현재의 삶의 방식을 지속한다면 우리에게 답은 많지 않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바퀴를 무려 네 개나 가진 승용차로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할 때 우리는 약 80㎏의 이산화탄소를 대기권에 보탠다. 하지만 그동안 자동차는 단 1g의 산소도 만들지 못한다. 다만 과거에 쓰지 않았던 산소를 매우 빠른 속도로 소모할 뿐이다. <탄소의 시대>의 저자 에릭 로스턴은 연비 좋은 차로 수원과 서울을 왕복할 정도인 약 4ℓ 정도의 석유가 과거 식물 90여t에 해당한다고 일갈했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45억년  (0) 2017.09.20
포유동물의 사치스러움  (0) 2017.08.23
나무는 죽음을 품고 산다  (0) 2017.07.26
방광은 왜 거기에 있게 됐을까  (0) 2017.06.28
산소와 숨쉬기  (0) 2017.05.31
밥을 먹는다  (0) 2017.05.08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2000년대 중반에 읽은 한 국내 문학상 수상작은 아픈 아내를 떠나보내는 중년 사내의 뒷모습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사내가 전립선 비대증으로 인해 방광 비우기를 힘들어했다는 대목만 흐릿하게 기억난다. 방광에서 몸 밖으로 오줌을 내보내는 길목에 위치한 전립선이 부으면 마땅히 배설되어야 할 노폐물이 방광에 고일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방광은 노폐물을 잠시 저장하는 창고에 불과한 것일까?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생명체가 물에 녹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나트륨이나 염소, 인과 같은 무기 염류를 논외로 치면 수용성 폐기물의 대부분은 요소와 암모니아다. 이들은 모두 질소를 함유하는 화합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소를 몸 밖으로 내보내는 장치가 동물 생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잠시 인체 생리학 교과서를 참고해보면 주로 요소의 형태로 배설되는 질소의 양은 하루 평균 10g 정도라고 한다. 굳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 몸은 “구관이 나가면 신관이 들어오리라”는 것을 기대한다. 6.25g의 단백질이 1g의 질소에 해당하기 때문에 10g의 질소를 벌충하려면 우리는 얼추 하루 평균 60g 정도의 ‘신관’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 소화 효소로 분해된 단백질은 스무개 아미노산의 형태로 우리 몸 안에 들어온다. 이 스무개 아미노산의 운명은 크게 세 가지로 갈린다. 우선 포도당처럼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거나 혹은 이산화탄소가 떨어져 나가면서 도파민이나 아드레날린 같은 신경 전달 물질로 전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역동적으로 순환되는 단백질의 구성 요소가 되는 비율이 가장 높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약 200종의 세포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 120일을 사는 적혈구도 있지만 소장의 상피세포는 3일을 넘기지 못한다. 간세포도 반년에서 일년 사이에 새것으로 교체된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의 간이 매일 새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그저 허언은 아닌 것이다. 또한 물을 제외하면 이들 세포 무게의 절반 가까이가 바로 단백질의 몫이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지는 동안 단백질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분해되는 것이다. 바로 그 역동성이 방광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질소 10g으로 나타난다.

질소를 순환하는 일이 포유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물고기는 질소가 한개 포함된 암모니아 형태로 노폐물을 처리한다. 암모니아는 독성이 있기 때문에 간에서 만들어지는 즉시 몸 밖으로 배출되어야 한다. 콩팥과 연결된 총배설강을 통해서다. 하지만 인간은 에너지를 써서 암모니아나 질소 노폐물을 요소로 바꿔버린다. 요소는 암모니아에 비해 독성이 적기도 하지만 질소가 두개 포함된 요소를 만드는 일은 또한 질소를 농축시키는 효과도 갖는다. 이런 방식으로 포유류는 물고기에 비해 노폐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을 절반으로 줄인 것이다. 이는 육상에서 사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물고기와 달리 하늘을 나는 새는 따로 오줌을 싸지 않는다. 이들은 콩팥에서 요산을 만들어 소화기관으로 직접 보낸다. 따라서 방광도 없고 똥오줌의 구분도 없다. 나는데 무거운 짐을 싣고 다닐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포유류는 무슨 이유로 거추장스러운 기관 하나를 더 만들어 무거운 물을 차고 다니게 되었을까? 정온성인 포유류의 체온 조절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방광이 발달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반면 오줌을 질질 흘리고 다니면 포식자에게 노출될 위험이 클 것이기에 방광에 오줌을 보관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혹은 방광이라는 중간 기착지 없이 콩팥이 외부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면 세균이나 기생충에 감염될 확률이 커질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면역계가 있는데 콩팥을 보호하기 위해 굳이 방광이라는 독립된 기관이 따로 존재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해부학자들도 있다. 요관을 통해 밖으로 나가야 하는 정자가 다치지 않게 산성인 오줌을 보관할 필요가 있어서 방광이 발달했다는 가설도 있다. 그렇지만 이 가설은 여성의 생식기관 해부학도 고려해야 일반화가 가능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방광을 그저 항문의 괄약근쯤으로 여겨 인간의 사회적 품위 유지를 위해 진화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지에 오줌을 지리지 않기 위해 수천만년 전부터 방광이 진화해 왔으리라고 믿기는 쉽지 않다. 또 개나 돼지, 아니 원숭이가 애써 오줌을 참으리라 기대하기도 힘들다. 1979년 벤틀리라는 미국의 과학자는 사막에 사는 포유동물이나 양서류가 체중에 비해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을 저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물을 저장하는 곳으로서 방광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저장된 무기 염류가 다시 혈액으로 흡수될 수 있기 때문에 방광이 삼투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이렇듯 방광에 대한 논의와 주장은 다양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방광은 물질대사 폐기물과 함께 많은 양의 물을 저장하는 흥미로운 장소이지만 한편으로는 과학자들의 눈길이 좀체 닿지 않는 인기 없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여기저기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우려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한데 나는 방광이 왜 거기에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일반 칼럼 > 김홍표의 과학 한귀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45억년  (0) 2017.09.20
포유동물의 사치스러움  (0) 2017.08.23
나무는 죽음을 품고 산다  (0) 2017.07.26
방광은 왜 거기에 있게 됐을까  (0) 2017.06.28
산소와 숨쉬기  (0) 2017.05.31
밥을 먹는다  (0) 2017.05.08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