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 년간, 음악평론가로서 글쓰기 다음으로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토크 행사에 참여한 것이었다. 최근엔 정말 많은 음악인들이 토크가 연계된 콘서트를 진행하고, 미술인들 역시 전시장에서 수많은 전시 연계 토크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예술가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런 자리에서 나는 주로 사회자 또는 음악평론가로 참여해 질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런 작업을 선보인 이유는 무엇인지, 어떤 문제의식이 있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었는지 등 그간 창작자에게 궁금했던 것을 공론장에서 직접 물어볼 수 있는 이 토크의 현장은 일종의 비평 ‘현장실습’과 같은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경험상 이런 자리는 ‘대화 그 자체’를 위해 마련되었다. 어떤 특정 해답을 도출하려는 의도 없이 일단 유연하고 풍성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던 것이다. 좋은 대화가 가장 중요한 이 자리에서는 상대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고, 그에 맞는 적절한, 때로는 비판적인 시선을 지닌 질문을 던질 것이 요구되었다. 말과 글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겠으나 나는 예술가들과 이런 토크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와 혼자 평론을 쓸 때의 태도에 그리 큰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양쪽 모두에서 나는 음악 혹은 음악가의 말을 듣고 ‘질문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평론이 질문하는 일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어떤 이는 거시적 차원에서 음악계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진단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촉구한다. 혹자는 현장의 계보를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한다. 누군가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이제까지의 일들을 솎아내 무엇에 더 주목해야 하는지를 정리해 소개하기도 한다. 모두가 무심했던 곳 어딘가에 숨어있던 문제적 상황을 예리한 눈으로 포착해 개선방안을 제안하는 필자도 있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는 평론가의 위치는 저 높은 곳에서 현장을 관망하며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을 수도, 모두가 떠난 자리를 주의 깊게 되돌아보는 시점에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마치 토크의 현장에서 예술가와 대화를 나눌 때처럼, 같은 위치에서 같은 시차를 공유하며 지금의 일에 대해 질문하는 일이다. 내가 음악을 듣고 떠오른 생각을 굳이 글로 정리해 내보내는 이유는 나의 ‘질문’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기 때문인 듯하다.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다보니 늘 자문자답을 하거나 의문으로 글을 끝맺게 되어 답답한 마음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유연한 태도로 대화의 가능성을 잠재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에 이러한 입장을 지향하고 있다. 좋은 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경청하고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는 이것이 평론이 갖추어야 할 동일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비평문은 근본적으로 그것이 글인 만큼 어떤 의견을 정리해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건넬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이 모든 일이 ‘대화’를 위한 것이라고 상정하고, 대화자 없이도 좋은 대화를 만드는 것과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평론가라는 말을 가끔 ‘질문자’ 혹은 ‘대화자’라는 말로 바꾸어보곤 한다. 그러다 보면 평론가라는 직업에 부여된 과업이 ‘평가하여 논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창작자들에게 ‘좋은 질문을 건네는 일’로 탈바꿈하는 것 같다.

평론가라는 직함에는 어딘가 날선 느낌이 있다. 물론 평론가는 자신의 위치를 예민하게 인지하고, 무디지 않은 시선으로 엄중히 고민하며 글을 써내야 한다. 그런 면에서라면 평론가는 실제로 날카로워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 벼려진 칼끝이 더 자주 겨냥해야 하는 것은 음악보다는 평론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타인의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평론의 목적과 방향, 그리고 그 글이 어떤 영향력을 가질지 재고해봐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입장에서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다듬어나가고 싶은 것은 바로 나 자신의 태도를 점검하게 만드는 반성의 시선, 그리고 평가자가 아닌 ‘대화자’의 자리에서 음악과 음악가들에게 질문하는 태도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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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는 여느 부자지간처럼 소가 닭을 보듯 닭이 소를 보듯 하며 오랜 세월 서로를 견뎌왔다. 어떤 점에서는 현명한 처사였다고도 할 수 있었다. 대놓고 으르렁거렸다면 서로에게 상처만 줬을 테니까. 그런 이유로 우리 부자는 보고도 못 본 체하거나 에둘러서 말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이처럼 말이 통하지 않아 아예 말을 별로 나누지 않는 사이였음에도 기억에 남는 아버지와의 일화는 너무 많아서 아버지를 생각하면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다.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 주말이었다. 그날쯤 편지가 도착하리라 여긴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쉬지 않고 달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오전에 이미 우체부 아저씨가 다녀갔을 테니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했을 거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가 아니던가. 고운 필체로 다정한 이야기가 담겼을 여학생의 편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간지러워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마루에 놓인 편지봉투가 와락 눈에 들어왔다. 나만 보면 심드렁하게 되새김질을 해서 밉상이던 외양간의 소들조차 그때만큼은 사랑스러웠다. 

나는 한달음에 토방 위로 뛰어 올라가 마루에 가방을 던져놓고 편지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봉투에 쓰인 삐뚤삐뚤하다 못해 난폭해 보이기까지 한 글자를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굵직한 사인펜으로 쓴 게 분명한 그 글자들을 말이다. “홍기, 보아라. 우리는 외출허니 소 밥은 니가 주거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맞춤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어서, 내 이름마저 틀리게 써서, 꼼짝 말고 집이나 지키라는 명령이어서가 아니었다. 뜯어보지도 못한 예쁜 봉투에 쓰인 아버지의 악필에 내 순정은 물론 편지를 보낸 그이의 순정마저 짓밟힌 듯해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를 미워했는데 그때부터 나는 정말로 아버지를 미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군대에 갈 때였다. 입영 영장을 받아놓고 대여섯 달쯤을 고향 집에서 지냈다. 아버지와 나 모두에게 영락없이 불편한 몇 달이었다. 다른 집 자식들처럼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도 아니지, 일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니 농사일에 써먹을 수도 없지, 게다가 별 쓸모도 없는 글 나부랭이나 쓰겠다며 집에 죽치고 들어앉았으니 아버지의 심기가 어떠할지 뻔히 보였다. 입영 날짜를 앞당길 수만 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윽고 그날이 다가왔다. 너무 먼 길이어서 하루 전날 집을 나서야 했고 나 혼자 떠나야 했다. 대문에서 큰절 한 번 올리면 당분간 아버지와는 볼 일이 없게 된 거였다. 어머니는 눈시울을 적셨지만 아버지는 담담했다. 아버지가 내게 봉투를 건넸다. 여비는 어머니가 이미 줬던 터라 나는 아버지가 따로 챙겨주는 돈 봉투이겠거니 하며 주머니에 넣고 집을 떠났다. 

기차에서 봉투를 꺼내 보았다. 딸려 나온 건 편지지였다. 눈에 익은 아버지의 필체. 굵은 사인펜으로 휘갈겨 쓴 편지였는데 내가 당신에게 받은 첫 편지였고 이후에도 다시 받아본 적 없는 유일한 편지였다. 아마 다른 때였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여전히 정서법에 어긋나는 악필인 데다 내용도 진부했다. 상관의 명령에 충실하고 나라에 보탬이 되는 군인이 되어라, 솔선수범해라, 전우애를 발휘해라 등등.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이런 거였다. 니 어머니는 아프지 말라고만 헌다. 나는 편지지를 봉투에 넣고 차창 밖의 뭉개진 풍경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 짧은 편지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든 이력이 담겨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다인 아버지는 문장이 형편없었고 초등학교 중퇴인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어머니도 쉬운 글자는 더듬더듬 읽었으나 쓸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내게 당부하고 싶었던 말을 아버지가 편지 끝에 덧붙여 써야만 했던 이유다. 말이 안 통해 아예 말을 별로 나누지 않는 사람 사이에도 기억에 남는 사연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금은 안다. 그이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거의 모든 걸 말해왔으니까.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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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바깥에서 귀마개를 끼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수도권 인근에 살고, 사무실 없이 불규칙하게 이곳저곳 오가며 일하기에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꽤 긴 편이다. 혼자 일을 하거나 바깥 업무 중에 뜨는 시간이 생기면 도시생활자 프리랜서들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카페를 주로 찾는다. 곳곳에 자리한 수많은 카페 중에서도 내가 선호하는 곳은 무엇보다 조용한 곳이다. 일하기에 좋고 쉬기에도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공간을 찾아갈 일말의 여유도 없거나 간혹 아무리 돌아다녀도 조용한 곳이 없을 때가 있다.

많은 이들이 비유하듯 눈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감을 수 없는 탓에, 귀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예측 불가능한 소리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귀마개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크나큰 위력을 발휘하는 비장의 무기였다. 귀마개는 집중을 방해하거나 평온을 깨뜨리는 수만가지 요인 중 소리 하나만큼은 흐리게 해줄 수 있었다. 처음엔 별 기대가 없었지만, 조용함의 힘은 대단했다. 소리를 덜 들으면 확실히 덜 피곤하고, 덜 산만했다. 점차 그 매력에 빠져든 나는 카페는 물론이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심지어는 이미 꽤 조용한 도서관이나 집에서도 귀마개를 끼우게 됐다. 바깥소리를 스스로 ‘뮤트’하는 것에 차츰 익숙해지자 평소보다 소리에 예민해져서 날이 설 때가 많아지기도 했지만, 평소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주변 소리를 세심히 들으며 도시의 소리풍경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을 되돌아볼 수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한 공간의 소리는 대체로 그곳을 점유한 사람들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졌다. 어떤 이들은 ‘서울은 너무 시끄럽다’라는 식으로 한 도시 전체를 시끄러운 곳으로 일축하기도 하고 가끔은 나도 그런 불평 섞인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언제나 시끄럽기만 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 소란스러운 곳이 마냥 거북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많은 소리가 오가는 공간에는 특유의 활기가 있고, 가끔은 적당히 소란스러울 때 부담 없이 말하고 움직일 수 있기도 하다. 그런 소리환경을 마련해두는 것이 으레 그 공간에 기대되는 미덕일 때도 있다. 하지만 짧은 경험상 도시생활에서 느낀 아쉬움이 있었다면, ‘항상 조용한 곳’을 찾는 일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인구밀집지역을 오가면서 그곳이 고요하기를 바라는 게 애초에 어불성설인 것 같긴 하지만, 조용함의 힘을 잘 알게 된 나는 일상 속에서 잠잠한 공간을 더 자주 만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을 품게 됐다.

도시마다 특수한 상황과 문화가 있는 만큼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나, 유독 마음에 깊게 남은 특별한 경험이 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마치 서울 지하철의 ‘약냉방칸’처럼 곳곳에 ‘조용한 칸’으로 표시된 곳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곳에서는 열차 소리, 문소리, 안내방송 외에는 정말 별다른 소리 없이 고요함을 즐길 수 있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곳이 지하철이어서가 아니고, ‘조용한 칸’이라는 분리된 공간에서만큼은 고요함을 즐기자는 약속이 수월하게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여들고 소리가 넘쳐날 수밖에 없는 이 도시생활에서는 소리에 대한 피로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도시생활자들의 마음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지, 어떤 업장에서는 간혹 시끄러운 손님은 퇴장당할 수 있다거나, 조용한 공간 유지를 위해 특정 손님층은 입장이 불가능하다는 문구를 내걸기도 한다. 이렇게까지 날 선 태도를 취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조용함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용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특정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합의를 마련하는 약속의 방식을 꿋꿋이 지향했으면 한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모이는 공적 영역의 소리를 고요히 유지하는 것은 많은 이들의 섬세한 배려와 노력이 필요한 까다로운 일이다. 내게 그것은 무언가를 제거하고 조용함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노력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공동의 목표점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실천의 결과’로 받아들이는 게 훨씬 더 쾌적할 것이라는 점을 믿는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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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마을에 가면 한 번씩 들러 안부를 묻는 이가 있다. 그이는 나와 비슷한 나이지만 나보다 키가 크고 늘씬하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낮이거나 밤이거나 아직은 넉넉하다 할 수는 없어도 제법 무성해진 가지를 마을 정자 지붕 쪽으로 드리운 채 그 곁을 한결같이 지키고 있다. 

수령 사십 년에 가까운 이 느티나무를 심던 날이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이 흰수염 노인이라 부르던 이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서이다. 본래 그 자리에는 족히 이백 년은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시름시름 앓더니 더는 잎사귀가 돋지 않게 되었고 어느 날 번개에 맞아 몸통 일부가 떨어져 나가기까지 했다. 한동안 방치되었던 고사목을 뿌리째 뽑은 뒤 마을 사람들은 어린 느티나무 한 그루를 추렴하여 사다 심었다. 그 일에 앞장선 이가 흰수염 노인이었다. 나는 땅을 삽으로 파거나 물 양동이를 나르며 그 일을 도왔는데 내 어린 손아귀에 다 들어올 만큼 가느다랬던지라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야 예전의 느티나무만큼 자랄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별 흥미도 기대도 없었다. 

노인은 밑동 부근의 흙을 정성스레 골라주었고 듬뿍 물을 주고 난 뒤 다정하게 느티나무를 쓰다듬었다. 노인은 이 나무가 정자 지붕을 덮을 듯이 자라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면 그 아래서 목침을 베고 바람이 지날 때마다 잎사귀들이 몸을 비비며 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한숨 푹 자고 싶다고 거의 수줍어하면서 말했는데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난감한 말이기도 했다. 동네 노인 중에서도 가장 연배가 높아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한 이 고비늙은 노인에게는 그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꿈인 탓이었다. 그럼에도 노인이 어린 느티나무를 보며 꿈이라도 꾸듯 눈빛을 빛낼 때는 까닭 없이 서글퍼졌다.

그로부터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노인은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도 어린 느티나무는 여전히 어린나무에 불과했고 노인의 꿈은 노인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느티나무를 심던 날 보았던 노인의 눈빛만은 내 마음에 박혔고 이따금 나는 거기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눈빛이 누군가의 눈빛을,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아이들의 눈동자에 떠오르던 빛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꿈을 꾸는 노인이라니. 

아무도 노인에게 꿈이 뭐냐고 묻지 않는다. 노인을 꿈꿀 수 없는 존재로 치부하고 꿈을 꾸는 노인이 있다면 헛된 꿈을 꾼다며 조롱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꿈을 꾸는 노인이 있다면 그 노인이야말로 우리의 통념과 상식을 뛰어넘어 우리가 안전하고 평온하다고 믿는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인 셈이다. 꿈을 꾸는 노인은 불온하다. 그들이 꾸는 불온한 꿈은 이 세계를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계로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다. 고등학생이 되어 고향을 떠난 뒤로는 그 나무를 드물게 볼 수밖에 없었고 여전히 내 눈에 느티나무의 성장은 더디기만 했다. 그러나 십 년이 흐르고 또다시 십 년이 흐르고… 언제부턴가 느티나무는 짙은 그늘을 드리울 수 있게 되었고 그 아래 목침을 베고 잠드는 사람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나는 흰수염 노인의 꿈이 그이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버린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꿈꾸는 노인은 자신만을 위한 꿈을 꾸지는 않는다. 노인의 꿈은 다음 세대를 위한 꿈이기에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윤리적인 꿈 가운데 하나이다. 일당 몇만 원에 노인을 매수하여 광장으로 몰려들게 한 자들은 단지 노인을 짓밟은 게 아니라 인간의 꿈을 짓밟은 것이다. 노인에게서 꿈을 박탈한 것이며 꿈꿀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은 것이다. 노인이 꿈을 꿀까 봐 두려워 푼돈을 쥐여주고 꿈을 꾸지 못하도록 억누른 것이다. 노인이 꾸는 꿈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꿈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 아니 그걸 알기에 인간의 미래를 한사코 파렴치하고 비열한 자들의 수중에 남겨두려는 자들. 감히 노인을 능멸하고 능욕한 자들. 부디 그들이 그 노인들의 꿈에 등장하기를 바란다. 노인들의 꿈속에서 영원히 소멸하는 존재로 등장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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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딸은 손가락이나 무릎, 다리 등을 어딘가에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아빠 이거 봐, 아파! 하면서 내 관심을 끌려는 말과 행동을 자주 한다. 나는 아프겠다 하면서 호호 불어주는데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해왔던 터라 나의 이런 말과 행동에 아이는 익숙한 평안을 느끼며 안심을 한다. 나도 평소에 아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보면 잘 잤는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묻고, 어린이집에 갔다 오면 오늘은 뭘 했는지 뭐가 재미있었는지를 묻는다. 그러면 아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재잘재잘 즐겁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이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아이가 무언가를 내게 보여주고 싶어 할 때, 그림이나 공작물이나 뭐든 자기가 만든 걸 자랑하고 싶거나 내게 주고 싶어 할 때 나는 얼마나 자주 딴짓을 하면서 그걸 보았던가. 오롯이 아이 앞에 앉아 귀를 기울이고 감탄한 적이 몇 번이나 되었던가. 아이는 또한 내 말과 행동에서 무관심하면서도 관심 있어 하는 척한다는 걸 얼마나 자주 느꼈을까.

어느 날 나는 아이에게 일인용 소파를 가리키며 물었다. 거기에 앉아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아이가 배가 고프다며 보채고 울 때마다 젖병을 물렸던 기억이 나서였다. 아빠가 여기 앉아서 분유 먹여준 거 기억나? 안 나지? 그러자 딸은 응, 안 나. 근데 이건 기억나, 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는 거실로 나를 이끌더니 무릎걸음으로 베란다 창을 향해 기어가는 거였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아빠랑 엄마가 저기 서서 밖을 보는데 내가 이렇게 기어서 갔던 건 기억나.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하다! 아이가 언제 일을 기억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에게 이미지로 남은 건 나와 아내가 나란히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거였고 아마도 그건 우리의 뒷모습이었을 거다.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고도 그게 누구인지 아는 것. 그게 하필이면 뒷모습이라는 것. 그런 것들 때문에 가슴이 저릿했다. 아이에게 이미지로 남은 우리의 뒷모습과 그걸 보고 기어서 다가오던 아이. 세월은 그런 식으로 흘러 우리는 앞선 사람의 뒤를 따라 살아가고 그들이 보았던 것들, 그러니까 노을이거나 별이거나 눈이 쌓여가는 어느 길이거나 비 내리는 풍경들을 보면서 삶의 영속성을 사유하게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아이를 볼 때마다 두려움을 느낀다. 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 남들만큼 뒷바라지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다. 그런 점에서 아이는 내게 가난을 환기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이를 보면 가난한 내가 분명하게 보이면서 서러워진다. 가난을 한탄하는 순간에만 진정으로 가난해진다는 신념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는 이 가난을 비난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난한 주제에 왜… 그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듣는 사람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까지 상처받는 말일 것이므로 우리는 오래도록 아플 것이다.

이런 일들을 피해가기는 어렵다. 지금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앞으로 우리의 삶에서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피해갈 수 없다면 똑바로 대면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마저 손 놓은 채 무심히 지나가지 않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다’라고 했던 파스칼의 말을 기억한다. 그런 순간에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부유함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부유한 자들을 부러워한 적은 있으나 열망한 적은 없다. 다만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당하게 분배받아 부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국정원, 검찰, 경찰 가운데 부당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있을 때 그 앞에 비굴하게 조아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 걸 가로막고 방해하는 자들은 최선을 다해 증오했노라고. 적어도 네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공권력을 사유화한 파렴치한 자들만을 위한 정치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름다운 세상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너의 웃음 한 조각 눈물 한 방울마저 잊지 않고 살아왔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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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타로의 에세이집 &lt;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gt;는 무대에 올라서기 직전에 그가 거울 속에서 만난 한 피아노 연주자의 외양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책의 서문이자 필자를 소개하는 이 짧은 글은 이어질 내용이 ‘피아노 연주자인 자신을 아주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는 나’의 글이 될 것을 짐작하게 한다.

서양음악에 관한 글쓰기에서 ‘무대 위의 연주’는 가장 까다로운 글감 중 하나다. 그 원인은 여럿이겠으나 우선 가장 근본적인 난점은 이것이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공연은 시간이 지나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다. 음반이나 영상과 달리 공연으로만 접한 연주에 관해 쓸 때는 정량화된 데이터나 기록물에 의존하기가 어렵다. 그저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만 의지해 그 연주를 복기하며 뭔가를 써내는 일은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또 공연장에서는 연주 말고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일이 얽히고설키며 연주에 개입하는데, 그 모든 미묘한 관계를 글에 모두 담아내기도 결코 쉽지 않다. 많은 이들의 원성을 사는 기침 소리는 물론 연주자들끼리 주고받는 눈짓, 소리로 들려오진 않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객석의 기류 같은 것이 그 예다. 이러한 ‘현장성’은 연주에 대한 일목요연한 글쓰기를 어렵게 만드는 주범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직접 공연장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lt;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gt;에서 타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피아노 연주자가 공연장에서 겪는 일들이다. 물론 바흐나 쇼팽 등 그가 자신을 잊고 몰입해서 연주해야 할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글의 중요한 일부다. 하지만 그는 흔히 공연의 주변부로 여겨졌던 요소나 관객 시점에서 보고 들을 수 없었던 무대의 이면을 소개하는 데 더욱 집중한다. 불안과 긴장 가득한 자신의 꿈부터 날 선 몸의 감각, 언제나 그가 지니고 다니는 악보들, 공연장이 뿜어내는 위용, 조율사와의 소통, 무대로 걸어 나오는 자신의 걸음걸이, 연주 직전에 손을 가다듬는 찰나의 순간, 객석에서 늘 들려오는 사탕 껍질 소리와 마른 헛기침, 악보를 넘겨주는 이와의 미묘한 호흡, 공연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박수소리의 음향, 그리고 텅 빈 객석을 바라볼 때의 역설적인 충만함까지. 음악과 더불어 공연을 구성하는 이 크고 작은 요인들은 무대 위의 주인공이자 예리한 관찰자인 타로에게 흥미로운 글감이 된다.

지나치기 쉬운 이 요인들을 하나하나 포착하는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가 음악만큼이나 ‘공연’에 매료된 것처럼 보인다. 타로에게는 공간, 분위기, 몸짓, 손짓, 크고 작은 소리 등 이 모든 것이 결코 부수적인 것들이나 소음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그에게 연주 도중에 사탕 봉지를 조용히 여는 관객은 서로 마주치지 않고 말도 나누지 않지만 함께 한 곡의 실내악을 연주하는 충실한 파트너이고, 연주 시작 전의 박수갈채는 청중의 몰입도와 공간의 음향을 측정하는 중요한 가늠자다. 돌이켜보면 청중 입장에서 공연을 볼 때도 음악과 음악 아닌 것을 엄밀하게 갈라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 같다. 지휘자가 무대로 걸어 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음악이 시작되는 것 같았을 때, 한 곡의 연주가 끝나고 소리는 완전히 잦아들었지만 연주자들이 여전히 음악을 듣고 있다고 느껴질 때 등 공연에서는 말 그대로 모든 순간이 음악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듯했다.

만약 우리가 음악을 소리의 예술이 아니라 공연의 예술로 접근한다면 공연에서 맞닥뜨린 어떤 요인을 음악 외적인 것으로 분리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타로도 기나긴 지면을 할애해 공연을 지탱하는 그 수많은 요인을 하나하나 음악적 대상으로 불러낸 것일 테다. 그 어수선하고도 다뤄내기 까다로운 ‘무대 위의 연주’에 관한 이야기를 공연 전체에 관한 이야기로 조금씩 확장해 나가는 타로의 글을 읽다 보면 음악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더욱 생생하고 흥미진진하게 다가온다. ‘공연’이라는 사건의 정체는 무엇이고 우리는 거기서 어떤 음악적 순간을 즐기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며 공연의 여러 결을 촘촘히 드러낸 글을 읽는 것은 접하기 드문 행운이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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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이 뜬 어느 저녁에 딸과 산책하러 나갔다. 날이 흐린 탓에 보름달인데도 영 밝지가 않아 입김이 서린 창 너머에 떠오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우리는 함께 고개를 들어 달을 보았다. 달이 어떻게 보이는지 말해주고 싶었기에 무슨 표현을 고르면 좋을지 잠시 고민을 했다. 아무래도 산문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솥에 든 찐빵 같다거나 야단맞고 나와 시무룩해 보인다는 식의 긴 묘사문들만 떠올랐다. 어쨌든 그럴듯한 비유를 찾아보려 애쓰는데 딸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거였다. 아빠, 달이 녹았어. 아이의 그 한마디에 혀끝에 맴돌던 모든 말들이 스르르 녹아 버렸다. 그래, 달이 녹았구나. 그보다 더 그럴듯하고 적확한 표현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 안에서는 결코 생겨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말이었다.

이토록 간명하고 순진하고 투명한 말을 잃어버린 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이따금 아이들의 말에 놀라는 이유는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이 내가 보는 세상과 퍽 달라 보여서이다. 같은 세상을 보고 있음에도 아이들의 눈에 더 잘 보일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이 내가 아는 세상보다 더 비밀스럽고 아름답다는 사실 앞에 고요히 무릎을 꿇고 싶어서이다. 아름다운 말에는 비참한 세상을 실제로 더 아름다워지게 하는 힘이 있고 아이들의 말에도 그와 비슷한 힘이 있다. 아이들의 말은 시인의 말에 가장 가깝고 그건 곧 우리 모두 한때 시인이었다는 뜻이기도 할 거다.

그에 비하자면 정치인의 말은 얼마나 졸렬한가. 일본 불매운동이 시작된 이후 나경원, 황교안, 홍준표 같은 자들의 말을 듣고 읽으면서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그들의 말은 하나같이 막말이다. 거칠고 상스럽다. 그들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 테고 흐린 날 달을 가리키며 달이 녹았다고 말할 줄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아이들의 언어에서 누구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언어는 앙상하기 이를 데 없어 혐오의 감정 외에는 다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언어를 바꾸어야 한다. 언어를 바꿀 수 없다면 세상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언어로 이 세계가 한결 더 거칠어지고 상스러워질 테니까.

그럼에도 모든 막말이 막말인 것만은 아니다. 막말이라고 해서 다 거칠고 상스러운 건 아니다. 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어느 시인이 처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다. 그이의 의원 사무실로 축하문과 축하 꽃다발 등이 쉼 없이 날아들었다. 거기에 이질적인 문구가 새겨진 화분 하나도 섞여 있었다. 근조 누구누구 시인. 시인의 동료 시인들이 보낸 화분이었다. 장례식장에 보내는 조화나 다름이 없었으니 축하는커녕 조롱을 넘어 상당한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화분이었다. 뒤늦게 화분을 발견한 보좌관이 당장 치우겠다고 하자 시인은 손을 내저었다. 그냥 놔두시게. 왜냐고 묻자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걸 보면서 내가 죽었구나 하며 날마다 되새겨 보겠네. 나는 이 일화를 듣고 시인이 근조라는 막말에서 동료 시인들의 분노와 혐오만을 읽지는 않았음을 알았다. 국회의원 이전에 시인임을 잊지 말라는, 어차피 정치를 하기로 했다면 시인답게 하라는 다정한 질책으로도 받아들였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은 시인의 내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이미 근조라는 단어 속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근조라는 말은 막말이면서도 막말이 아닌 셈이고 분노와 혐오를 담고 있지만 더 이상 분노와 혐오만은 아닌 셈이다. 그 단어는 진심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욕쟁이 할머니의 욕설을 듣고도 웃는 이유는 우리가 이상한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욕설에 담겨 있는 진심을 헤아릴 수 있어서이다. 친한 친구들과 이따금 비속어를 나누는 사람은 친구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친구의 진심이 드러나지 않는 말의 내부에도 있음을 안다. 우리 모두 일상에서 비록 시는 아닐지라도 아직 시를 완전히 잃지는 않은 말을 주고받으며 살기에 진짜 막말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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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라는 지명을 처음 인식하게 된 건 미군기지와 관련해서였다.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의 범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의 범죄도 그에 못지않았던 터라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오키나와는 여전히 먼 나라였다. 지도를 보면 오키나와가 일본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일본 열도의 남쪽 끄트머리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오키나와는 일본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으니까. 오키나와에 정말 관심을 갖게 된 건 메도루마 슌의 소설을 읽고 난 뒤부터였다. 그제야 오키나와의 역사를 다룬 글을 찾아 읽으며 오키나와를 알아갔다. 

메도루마 슌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몇몇 단편만 두고 말하자면 낯익고도 낯설어 뭐라 표현하기 쉽지 않은 묘한 특색이 있다. 인물의 한쪽 다리가 퉁퉁 붓더니 엄지발가락에서 물이 나오게 되고 밤마다 귀신들이 나타나 그 물을 받아먹는다거나 넋이 나간 사람의 입속에 소라게가 들어가 있다는 식의 설정은 분명히 현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환상성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메도루마 슌의 소설에 도입된 이러한 환상성은 최근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환상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외려 러시아의 고골과 같은 옛 작가들이 환상성을 다루었던 방식을 떠올리게 할 만큼 순진하고 단순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환상적이라고 여겼던 부분들이 어떤 실제보다 실제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게 되고 비로소 환상성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현실에 가까워야 한다, 라고 했던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를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그이의 소설에서 소설가의 곤혹을 느꼈다. 비참한 역사를 마주한 소설가가 선택할 수밖에 없고 선택해야만 했던 환상성이 환상으로의 도피로 여겨지지 않도록 고뇌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비난받을 여지가 있는 인물을 내세워 그 인물의 내면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고통을 손에 잡힐 듯이 그려 보여줄 수 있으려면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이의 용기 덕분에 일본 내부의 식민지라는 오키나와의 정체성이 다른 어떤 문학에서보다 더 사실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일왕의 생일 축하연에서 일본 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던 아무로 나미에의 용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소설가의 용기였다. 그들의 용기가 귀중한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베 정권의 행보와 관련해서 일본 상품을 불매하는 운동이 한창이다. 이 운동은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평화헌법이라 불리는 일본의 헌법 9조를 개정하여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바꾸려 하는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적 움직임을 거부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운동은 혐오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에 겐자부로와 같은 일본의 양심들이 오래전부터 혼신의 힘을 다해 막으려 했던 일들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 헌법이 개정되었을 때 악몽이 다시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고 느끼게 될 이들은 아마도 오키나와 사람들일 테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 가운데 하나는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느끼는 고통을 상상할 줄 아는 용기일 것이다. 우리가 이명박·박근혜 시절을 살면서 느껴야 했던 비참함을 지금 그들도 느끼고 있다. 아베를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그들은 지금 고통받고 있다. 우리는 그이들을 환대해야 하고 그이들을 격려해야 하며 그이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일본은 가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오키나와라면 괜찮지 않을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곳. 관념적으로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삶과 현실 그 자체로 전쟁을 느낄 수밖에 없는, 평화헌법이 개정되는 순간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될 그이들이라면 손을 내미는 게 온당하지 않을까. 그곳은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니까.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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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은 서핑의 새로운 성지다. 수도권에서의 접근이 용이하고, 초보자와 고수 모두에게 적합한 파도가 있기 때문이다. 마니아의 문화였던 서핑이 양양이 발견된 후 새로운 해양문화가 됐다. 양양 서핑의 중심지는 죽도해변이다. 한적한 어촌이었던 이곳은 몇 년 사이 렌털숍과 스쿨, 아기자기한 카페와 펍으로 가득한 ‘힙 플레이스’가 됐다. 맛집이나 술집 같은 유흥업에 의해 뜬 동네와 문화나 예술로 인해 발전하는 동네의 차이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현상을 기록하려는 자의 유무다. 양양은 후자다.

강원 양양군 현남면 죽도해변에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몰려 서핑을 즐기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죽도해변에서 인구해변으로 넘어가다보면 검은색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눈에 띄는 로고가 있다. WSB 팜 서프 매거진(WSB Farm Surf Magazine: 이하 WSB). 면사무소와 파출소가 있는, 나름 지역의 중심지지만 ‘매거진’이라는 명칭이 낯선 게 사실이다. WSB를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서핑 플랫폼회사다. 2016년과 이듬해 여름마다 2권의 무크지를 발간했고 서핑을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참가한 콤필레이션 앨범 <파도타러 가는 7번 국도>를 제작했다. 이 ‘잡지사’의 핵심 인력은 두 명, 한동훈 대표와 장래홍 편집장이다. 서핑대회에서 만난 둘은 본래 타지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의기투합하여 서핑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하고 2013년 양양으로 내려와 사무실을 차렸다. 때마침 서핑이 곧 붐을 타기 시작했다. 서핑을 하려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그들을 가르치는 숍과 스쿨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말하자면 문화가 움튼 것이다. 하지만 서핑을 다루는 전문지도 없고, 서퍼들과 공유할 수 있는 매체도 없었다. 기록되지 않는 유행은 기억으로만 남는 법. 그래서 무크지를 만들었다. 가이드북이자 서핑문화의 기록지다. 국내외의 서핑 스폿, 서핑에 목숨을 건 이들의 인터뷰, 그리고 초보자부터 숙련자까지 커버하는 서핑 가이드 등 서핑과 관련된 거의 모든 콘텐츠가 담겨 있다. 한 대표와 장 편집장을 포함, 공식 스태프는 네 명에 불과한데 사진, 필자, 일러스트, 번역까지 참여한 인원은 웬만한 메이저 잡지에 뒤지지 않는다. 그만큼 서퍼들의 커뮤니티가 탄탄하다는 증거다. 

무크지와 음반 같은 아날로그 매체만 낸 게 아니다. WSB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이 운영하는 동명의 홈페이지와 애플리케이션(앱) 때문이다. 인터뷰, 스폿 소개 등이 있는 ‘서프 TV’ ‘스폿 가이드’ ‘서핑 레슨’ 등 다양한 서핑 콘텐츠를 동영상으로 제공하는 이 앱의 핵심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하고 있는 라이브 웹캠이다. 국내 해변 23곳에 HD 웹카메라를 설치하고 파도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한다. “타지에서 살고 있는 서퍼들은 현지의 지인들을 통해서만 서핑 가능 여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다보면 파도가 좋다고 해서 달려왔는데 ‘낚시’인 경우도 생긴다. 지인이 없으면 기상청 예보만 보고 확인할 수 있다. 기상청 예보에 파도 정보는 없다.” 장 편집장의 말이다. 이 웹캠은 보다 정확한 서핑을 가능케 했다. 당일로 서핑을 즐기는 경우 출발 전 아예 어느 스폿의 파도가 좋은지 확인한 후 행선지를 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각 기상 스타트업과 제휴, 스폿마다 파도차트를 제공한다. 일출과 일몰 시간은 물론이고, 시간대별로 바람의 방향과 속도, 초당 파도의 높이, 물때까지 서핑에 필요한 꼼꼼한 정보를 제공한다. 파도는 사람의 뜻대로 만들 수 없지만, WSB를 통해 최소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만들어졌다. “서핑을 통해 알게 된 지인은 평일에도 늘 우리 홈페이지를 띄워놓고 파도 치는 모습을 바라본다고 하더라. 꼭 서핑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ASMR처럼 활용한다고 하더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폭풍이 몰아치든, 사무실에서건 고속도로에서건 WSB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바다에 데려다 놓는다. 서핑문화를 모으고 엮어 지금을 기록하고, 기술을 활용하여 미래를 바꾼다. 몇 년 사이 죽도해변의 땅값은 수직상승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파도가 밀려온다. 하지만 WSB는 ‘문화와 기술’이 교차하는 또 다른 파도를 만들고 있다. 이 파도가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해 새로운 바다로 나아갈 수 있기를 응원한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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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글을 써왔지만 정말 좋은 글이 무엇인지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어떤 글을 읽고 참 좋은 글이라며 감탄하는 경우는 많지만 왜 좋은 글인지를 설명해야 한다면 곤혹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게 하나 있다면 좋은 글을 읽고 나면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든 아주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훌륭한 글이라 해도 단번에 사람의 마음을 저만큼 옮겨놓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처럼 훌륭한 글이 있다면 사람이 쓴 게 아니라고 해도 좋을 테다. 어쨌거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좋은 글들은 부드럽게 우리 내면으로 스며들어와서는 우리의 마음을 어느 쪽으로든 한 뼘 정도 움직여 놓고 가버린다. 

이 사소한 움직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중도, 중용처럼 우리가 익히 알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삶의 태도들이 실제로 실현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 여겨져서이다. 과유불급은 넘치는 것과 모자라는 게 똑같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도를 지키며 중용의 미덕을 발휘하는 게 중요함을 암시적으로 가리키기도 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만 들으면 어린 시절의 일화가 하나 떠오른다. 6남매의 장녀인 어머니는 당신의 동기들과는 무척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어머니의 고향은 고창이고 결혼해서 살게 된 곳은 정읍인데 고창이나 정읍이나 촌구석인 건 매한가지였지만 당신의 다른 형제들은 모두 서울에서 성가하여 살았던 까닭에 아무래도 신세가 비교되어 마음이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큰딸이 보고 싶으면 바람처럼 왔다가 겨우 하룻밤 주무시다 가시곤 했다. 외할아버지는 시골 동네에서 촌부로 나이 들어가는 큰딸이 안타까워 오래 머물지 못한 거였고 어머니는 사는 꼴을 속속들이 내비쳐 당신 아버지를 마음 아프게 할 수 없어 오래 붙들지 못한 거였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고 나면 어머니는 언제나 남몰래 눈물바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이었다. 외할머니가 혼자 찾아온다는 기별이 있었다. 그런 일은 아직 한 번도 없었기에 어머니는 무척 들떠 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내 기억 속에서 아버지가 등장하게 된다. 아버지는 맏사위답게 장모님을 모시고 싶었지만 달리 해드릴 일이 없었으므로 연로하신 장모님이 머무는 동안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고된 몸을 지지면 좋겠다 싶었다. 장인어른은 바람처럼 왔다 한숨만 내쉬다 가곤 했던 터라 모실 겨를조차 없었지만 장모님이 찾아오는 건 처음인 데다 며칠 머물 계획이라 아버지도 잔뜩 긴장했던 거였다. 외할머니가 오기 하루 전날이었다. 아버지는 평소라면 드나들 생각도 안 하던 부엌에 들어가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군불을 땠다. 말이 군불이지 아궁이 속으로 끝도 없이 솔가리와 장작을 밀어 넣었다. 이러다 솥이 다 녹고 구들장이 타 없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난생처음 후끈거리다 못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방에서 잠을 잤는데 새벽녘에 우리 식구 모두 깨어나 난리를 피워야 했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났고 불을 켜서 확인해보니 바닥에 깔아둔 요가 여기저기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부리나케 요와 이불을 밖으로 던졌다. 그러고 나니 처참한 방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나 불을 땠는지 아랫목이 그냥 그을린 상태가 아니라 장판이 여기저기 다 타버린 거였다. 너무 뜨거워서 발바닥이 델 지경이었다. 날이 샐 때까지 아버지와 나는 장판을 여기저기 들춰 주전자로 조금씩 물을 흘려 넣으면서 물이 마르면 다시 흘려 넣기를 되풀이해야 했다. 그날 집에 오신 외할머니는 끌탕을 했다. 살다살다 장판이 이렇게 타버린 건 처음 본다고 했다. 과유불급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나는 외할머니의 마음이 아주 조금 움직인 걸 보았다. 한심하고 무능한 맏사위지만 한심하고 무능해도 괜찮다는 쪽으로 한 뼘쯤 움직인 것을…. 올바른 중간이란 반드시 중간이라 여겨지는 어딘가를 점유할 때만 가능한 건 아닐 테다. 걸을 때마다 무게중심이 이동하듯 지금 당장은 모자라거나 넘쳐보일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느 한순간 절묘하게 무게중심이 되어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설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하니 말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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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산문 한편을 탈고했다. 주제는 대략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 대한 것이었다. 원고지 100장의 짧지 않은 분량이었는데도 미처 못다 한 이야기가 지천이다. 어린 시절 한옥에 살았고 한국전쟁의 폭격을 피한 대구는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은 골목들이 많았다. 그 집은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흙길과 얼기설기 엮은 판자로 만든 담이 서 있던 막다른 골목의 끝집이었고 자동차는커녕 리어카 정도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그랬으니 집은 날이 어두워지면 돌아가는 곳일 뿐 아주 많은 시간을 골목에서 보냈다. 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집보다 학교나 골목에서 보낸 시간이 더욱 많았기 때문일까, 집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집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골목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여하튼 원고를 탈고하자마자 일본의 나라시(奈良市)로 향했다. 그러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4일 동안 70㎞ 남짓하게 걸었다. 그것도 나라시를 벗어나지 않고 오전 6시부터 10시 정도까지 또 오후 4시부터 7시까지만 걷고 볕이 따가운 낮 시간은 호텔에서 쉬었다. 그렇게 걸은 곳은 나라마치(奈良町)라고 부르는 골목이다. 사실 나라마치의 구역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러나 나라마치의 역사는 골목의 길이만큼 길다.

일본은 710년 겐메이텐노(元明天皇)가 도읍지를 나라로 옮겨 헤이죠큐(平城宮)를 짓고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를 열었다. 그 후, 718년 아스카무라(明日香村)에 있던 호코지(法興寺)를 나라로 옮겨 간고지(元興寺)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호코지는 일본 최초의 가람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카데라(飛鳥寺)와 같은 곳이다. 당시 나라에는 이미 도다이지(東大寺)와 고후쿠지(興福寺) 같은 대형 사찰들이 있었으며 간고지는 그 사찰들과 다른 구역에 터를 잡았다.

후에 간고지는 두 곳으로 나뉘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간고지는 고쿠라쿠보(極樂坊)가 있는 곳이다. 간고지 주변은 아스카촌으로부터 옮겨 왔던 당시부터 도시계획이 시작되어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다. 지금도 그 골목들은 형태가 망가지지 않았는데 골목의 작은 사거리에 서면 대략 사방 골목의 끝이 보일 만큼 반듯하다. 그렇다고 굽이진 골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골목을 만나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큼 간고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나라마치의 모든 골목은 먹줄을 놓은 것처럼 곧다.

골목을 걷다가 눈에 띄는 집들은 대개 에도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더불어 길의 악령을 막고 행인을 지켜 준다는 도소진(道祖神)을 비롯하여 고진도(庚申堂)와 같은 전통신앙의 흔적들도 보였다. 그렇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재들이 있다고 해서 골목이 고인 물 같지는 않았다. 숱하게 흩어져 있는 신사나 사찰과 함께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흔적이 곳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드문드문 보이던 곡식이나 생선, 채소 같은 것을 파는 작은 가게와 이발소 그리고 굴뚝 높은 목욕탕은 비록 고요해 보이는 골목일지라도 아직 왕성하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더할 나위 없는 증거였다.

그런가 하면 1994년 추석에는 중국의 후퉁(胡同)을 걸었다. 처음 간 북경이었지만 무리와 떨어져 혼자 자금성 근처를 며칠 동안 헤매고 다녔었다. 그 후, 북경에 갈 때마다 후퉁의 매력을 잊지 못해 쏘다녔고 지난해와 지지난해는 후퉁 속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며칠 묵으며 골목을 속속들이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의 후퉁과 1994년의 그것은 전혀 딴판이다. 당시는 그저 북경의 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후퉁의 면적 자체가 줄어들었고 상업적인 장소는 훨씬 더 많아졌다. 그런데 중국의 후퉁과 일본 나라마치를 하늘에서 보면 흥미롭다. 직접 하늘에 올라갈 재간은 없지만 구글 지도나 오래된 고지도는 지금은 물론 오래전부터 골목들이 바둑판처럼 반듯했음을 보여 준다. 이번에 나라마치를 찾았을 때 마침 나라마치 자료관에서 일대를 그린 고지도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어서 한나절쯤은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한 지도들은 두 나라의 도읍이 모두 계획된 도시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러나 일본의 골목이 중국의 골목에 비하여 더욱 반듯해 보이는 것은 골목 안에 방치된 물건들이 없이 오로지 길과 벽 그리고 전봇대만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 후퉁의 골목에는 갖은 물건들이 만만찮게 놓여 있다. 그 때문에 골목은 삐뚤빼뚤해지고 좁았다가 또 넓어져 전혀 반듯해 보이지 않는다. 비록 그렇더라도 중국은 후퉁의 가치에 대하여 이제라도 눈을 뜨고 옛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500년 도읍지인 서울의 골목은 어떨까. 아무래도 우리의 유전자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는 것에 약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있던 것을 없애 버리거나 새로운 것을 만드는 유전자는 탁월하다. 그런 유전자의 힘은 골목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사대문 주변의 골목들 중 몇 곳이 사라져 버리거나 많은 곳이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최근 말썽이 되었던 세운상가 주변이 그렇고 벌써 몇 년 지난 이야기지만 익선동의 요정 오진암(梧珍庵)도 헐렸다. 그 자리에 호텔이 들어섰는데 그것 하나가 주변 건물 생태계를 바꾸지는 않았을까 염려된다. 마치 늪지에 뿌리내린 관목 한 그루가 야금야금 늪을 황폐화시키듯이 말이다.

또 얼마 전 돈의문 근처에 박물관마을이 생겼다. 나는 그 마을과 붙어 있던 고등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일대의 골목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었기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맞닥뜨린 박물관마을의 정체성이 의아하고 모호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죄 때려 부수고 새로 짓지 않았다는 정도이다. 때로 우리나라가 보여주는 미덕은 낡은 것보다 새것, 옛것보다 현대적이다 못해 미래지향적인 것을 떠받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며, 새것은 낡고 헌것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지누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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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어느 평일 오후였다. 나는 집 근처의 카페에 혼자 앉아 있었다. 다른 손님이 없어 호젓한 터라 책을 읽고 글을 쓰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 시간이란 하루가 알맞게 익어서 어떤 글을 읽어도 난해하지 않고 어떤 글을 써도 난잡하지 않을 듯해 자신만만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카페를 홀로 소유한 듯한 기분인 데다 성질마저 넉넉하고 부드러워져서 나도 다른 작가들처럼 밝고 곱고 따뜻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카운터 안쪽에서 졸던 직원이 일어났고 내가 누리던 평온도 깨졌다.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중년의 부부 뒤로 초등학교 오륙 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따라 들어왔다. 세 식구는 남은 자리도 많았건만 하필이면 내 앞자리에 앉았다. 부부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고 딸은 주름이 많이 잡힌 원피스 차림에 토끼 귀처럼 봉긋 솟은 장식이 있는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나는 되도록 그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이혼하자고! 그래, 이혼해! 엄마, 아빠 이혼하지 마, 응?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터라 무심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듣다 보니 부부가 무엇 때문에 다투는지를 알게 되었다. 남편 쪽은 아내의 친정 식구들이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던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로 더는 참을 수가 없으며 시댁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당신도 견딜 수 없다는 주장이었고 아내 쪽은 남편의 오해와 망상이 지긋지긋하며 무능도 분수가 있지 앞으로도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는 바에야 갈라서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을 거라는 주장이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다투고 있을 수많은 부부들처럼 다투는 거였다. 내가 적이 걱정스러웠던 건 세 식구 가운데 아직 어린 딸아이였다. 부부가 핏대를 세우며 서로를 비난하는 동안 딸은 울먹이면서 엄마와 아빠를 타일렀다. 딸은 급기야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더 잘할게, 그러니까 이혼하지 마, 응? 하면서 부모의 불화와 다툼이 자기 탓이라는 듯 애원했고 나는 그 아이에게 너는 잘못한 게 없단다 하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나는 그 부부가 서로를 증오하게 된 내밀한 속사정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증오가 어디에서 태어났든 저 아이에게서 비롯된 것일 수는 없으므로 이 상황이 자기 탓이라며 자책하는 아이에게 누군가는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그 사람이 그 아이의 부모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거였다. 나는 오래전 그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법원 앞 다방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나란히 앉았고 맞은편에는 아버지가 앉았다. 옛날식 다방이라서 취향에 따라 커피, 프림, 설탕을 타 마셔야 했다. 아버지는 찻숟가락으로 커피는 두 숟가락, 프림은 세 숟가락, 설탕은 두 숟가락을 떠넣었는데 속으로 아버지 입맛도 나랑 다르지 않구나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보다 선명한 기억은 아버지가 찻숟가락으로 찻잔을 젓던 모습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손놀림에서는 당신의 불안과 슬픔과 고통이 그대로 전해졌다. 찻잔 안쪽 벽에 찻숟가락이 자꾸만 부딪혀서 따닥, 따닥, 따닥…… 소리가 내내 귓가에 울렸다. 아버지는 식은 커피를 단번에 들이켠 뒤 나를 똑바로 보면서 네 엄마 잘 모셔라, 하더니 벌떡 일어나 다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부리나케 아버지를 뒤쫓아나갔고 법원 담장을 따라 걷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때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이의 얼굴보다 많은 말을 해주기도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버지는……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세 식구는 한결 개운해진 낯으로 일어났다. 서운했던 감정을 다 털어놓고 보니 그런 감정이 별거 아님을 깨달아 머쓱해하는 얼굴로 보였다. 딸이 먼저 카페를 나갔고 부부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나는 분명 부부가 딸의 뒷모습에 잠시 시선을 고정했던 것이라고 믿는다. 부부가 다투는 동안에는 들리지 않았던 딸의 목소리를 그 순간 들은 것이라고 믿는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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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TV에서는 저녁 일일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보려고 보는 건 아닌데도 잠깐잠깐 눈을 돌릴 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볼 때마다 ‘막장’의 요소가 기다렸다는 듯 나왔기 때문이다. 회상장면에서 스카프를 두른 여인이 아이를 잘사는 집 앞에 놓는다든가, 세월이 흐른 후 그 여인의 시어머니가 졸도한다든가, 그 여인과 또 다른 여인이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우고 있다든가 하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보려고 보는 게 아니었다.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온통 그랬다. 평소 드라마를 보지 않기에 말로만 들었던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무엇인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욕하면서 시간을 소비하는가, 직관적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도 야구를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약속이 없는 날 저녁 6시반이 되면 나는 반사적으로 TV를 켠다. 그리고 3~4시간을 오직 야구를 보는 데 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은 다행히 리그 상위권에 있어서 지는 날보다 이기는 날이 많지만 그렇다해도 저녁 내내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실책이 나온다든가, 주자를 잔뜩 쌓아놓고 올라온 타자가 병살타로 이닝을 종료시킨다든가 하면 어김없이 욕이 튀어나온다. 무엇보다 가장 화나는 상황은 순탄하게 잘 흘러가던 시합이 막판에 뒤집힐 때다. 그것도 상대방이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 선수의 어이없는 플레이로 분위기를 헌납할 때는 평소 잘 쓰지 않던 극단적인 표현이 혀끝에서 맴돈다. 팀이 이기고 있을 때 나오는 필승조 투수들을 모두 올린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시합이 끝난 후에도 ‘오늘의 역적’을 원망하게 된다. 감정 동요 없이 볼 수 있는 시합은 1회부터 9회까지 모두가 무난하게 잘해서 쉽게 승기를 잡거나 반대로 초장부터 경기가 터져 나가서 기대가 힘든 경우밖에 없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시합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 같다. 이런저런 야구 커뮤니티마다 그날 부진했던 선수를 능지처참할 기세로 달려들고, 이해할 수 없는 운용을 한 감독의 부모 안부를 묻는 일이 일상이다. 잘하건 못하건 모든 감독들의 성이 강제로 ‘돌’로 바뀌는 일은 프로야구 감독이라면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늘 하위권에 있는 팀의 팬들은 제발 해체하라고 울부짖는다. 일희일비야말로 스포츠 열혈팬들의 공통점이라지만 일주일에 여섯번 시합을 하는 야구의 특성상 일희일비의 정도도 심하다. 모든 순간들이 점으로 연결되는 까닭에 모든 플레이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시간제한도 없으니 고통의 시간도 길다. 분노의 레저다. 이렇게 쓰고 보니 차라리 막장 드라마가 나은 것 같다. 어쨌든 그런 드라마는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이쯤 되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스포츠를 본다는 말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 시간에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게 백배 천배 나을 텐데.

그럼에도 우리는 왜 야구를, 스포츠를 보는 것일까. 영국의 작가이자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의 열혈 팬인 닉 혼비는 그의 데뷔작 <피버 피치>에서 이렇게 썼다. “축구는 또 하나의 우주로서, 노동과 마찬가지로 심각하고 스트레스가 심한 것이며, 염려와 희망과 실망을, 그리고 이따금씩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내가 축구를 보러 가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 적어도 오락을 위해서 가는 것은 아니다. 토요일 오후 주위에 모여 앉은 침울한 얼굴들을 보면, 남들도 나와 같은 기분임을 알 수 있다. 충성스러운 축구팬에게, 보기 즐거운 축구의 존재는 정글 한가운데서 쓰러지는 나무의 존재와 같다. 우리는 그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왜 쓰러지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입장은 아닌 것이다.” 패배한 경기의 허탈함, 이긴 경기 안에서의 실책으로 인한 분노 등을 걷어내고 복기하자면 한 경기 한 경기가 인생과 같다. 삶에서의 어이없던 실수를 대입해보고, 승부가 필요했던 때 과감하지 못했던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된다. 그러니 모든 스포츠 팬들이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종목을 인생이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냥 좋기만 한 인생이 없듯, 마냥 좋기만 한 경기도 없으니. 승부를 예상할 수 없기에, 나는 저녁에 TV를 켠다. 야구장을 찾는다.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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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조금 늦게 식당에 들어갔더니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고 다들 막 식사를 하는 참이었다. 나는 후배 옆 빈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달게 밥을 먹었다. 수저를 내려놓고서야 내 옆의 후배가 찌개를 전혀 먹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넌 왜 찌개를 안 먹니? 하고 묻다가 퍼뜩 깨달았다. 뚝배기로 나온 찌개는 두 사람에 하나씩이었다. 그걸 내 찌개인 줄만 알고 나 혼자서 다 퍼먹어 버렸던 거다. 멋쩍고 부끄러웠다. 식사 자리에 조금 늦어 차림상의 면모를 한눈에 알아채지 못한 탓도 있었다지만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피할 수 있는 실수이기도 했다. 이미 식사는 끝나버렸고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자 후배는 선배가 맛있게 먹었으니 괜찮다고 했다. 그 말에 심사가 복잡해졌다. 비록 나는 먹지 못했으나 선배가 맛있게 먹었으니, 그게 누구든 맛있게 먹은 사람이 있었으니 다 괜찮다는 후배의 넉넉함에 비하자면 나는 얼마나 초라한가. 나이를 이렇게 먹고도 이런 실수, 정말 실수라면 그나마 다행일 이런 일들을 여전히 겪는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후배가 그냥 괜찮다고 말했다면 나는 속으로 후배가 전혀 괜찮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언제까지나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선배가 맛있게 먹었으니 괜찮다는 말은 괜찮다는 말에 하나의 설명이 덧붙여진 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괜찮은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게끔 하는 말이었고 실수를 저지른 이의 마음까지 다독이고 배려하는 힘을 지닌 말이었다. 

배려란 그냥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상대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상대가 어떻게 느낄지 어떤 생각을 할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하고 사소한 일도 무겁게 여길 줄 알아야 가능한 태도다.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게 여의치 않은 일이라는 건 사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중학생일 때부터 알았다. 

그 시절 우리 집은 반쯤 찢어지게 가난했고 바다와 먼 내륙 지역이라 아주 가끔 밥상에 생선구이가 올라왔다. 그런 날 밥상을 물리고 나면 어머니는 부엌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생선대가리밖에 남지 않은 그걸 드셨다. 오래전부터 보아왔던 터라 무심히 지나쳤는데 어느 날인가는 제법 머리가 굵었다는 티를 내고 싶었는지 어머니에게 왜 그걸 드시는지 물었다. 그러자 당신은 원래 생선대가리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아마도 어두육미 운운하며 수긍했던 것 같다. 그다음 날이었다. 동네 형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농담을 듣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어머니 생신이라며 돼지비계를 잔뜩 사더랴. 왜 살코기를 안 사고 비계만 사냐고 물으니깐 우리 어머니는 원래 고기 안 좋아해요, 비계만 좋아해요 하더랴. 참말로 이런 바보가 또 어디 있겄냐. 자식 먹이려고 살코기 싫다 하신 건 모르고 우리 어머니는 비계만 좋아하신다니.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는데 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농담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생선대가리를 좋아하시는구나 했던 내가 바로 어머니는 비계만 좋아한다고 했던 그 사람임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동네 형은 내 속도 모르고 계속 말했다. 그런 불상놈의 자식, 남의 속은 눈곱만큼도 헤아리지 못하고 저만 아는 자식, 세상에 누군들 그 좋은 살코기를 마다하고 비계만 찾겠냐, 그렇게 살면 세상 헛산 거다,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동네 형이 다 알고서 나를 나무라는 것만 같았다. 조금만 신경을 기울이면 알 수도 있었을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나는 아마도 사색이 되었을 거다.

세월이 흐른 뒤 어머니가 바다에서 난 것들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생선을 굽고 살을 발라 자식 입에 넣어주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당신에게 물었다. 그 좋아하던 생선을 어찌 참으셨대요? 당신은 이렇게 답했다. 네가 하도 맛나게 먹은 게 아무렇지도 않았어야. 맛있게 드셨으니 괜찮아요. 살면서 나도 이런 말 한번쯤 누군가에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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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네가 뜨는 몇 가지 패턴이 있다. 임대료가 저렴하고 어느 정도 상권이 형성된 지역에 예술가들이 터를 잡는다. 그들이 공연이나 전시 등을 통해 어떤 움직임을 만든다. 주변에 그 움직임을 동경하는 카페나 술집, 식당들이 생겨난다. 입소문이 나고 새로운 걸 찾는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터진다. 1980년대의 신촌, 1990년대의 홍대 앞, 2000년대의 가로수길이 거쳐온 패턴이다. 또 하나의 패턴은 전통적 주거지나 낙후되어 있던 과거 도심이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다. 아파트가 주거의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은 1990년대 이후, 아이들의 성장 배경은 그전에 비해 규격화됐다. 똑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똑같은 극장 체인점에서 영화를 봤다. 전국 어디나 있는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와 커피를 먹었다. 고층 아파트와 빌딩이 빼곡히 들어찬 하늘에 익숙한 이 세대에 붉은 벽돌 단독주택과 저층 건물이 주가 된 풍경은 ‘낡은 새로운’ 것이다. SNS의 등장 이후 이런 동네는 이 세대에 가장 각광받는 곳이 됐다. 그들이 사는 일상과는 다른 배경을 제시했고, 무엇보다 붉은 벽돌의 질감과 색감은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된 그림을 만들어냈다. 경리단길, 해방촌, 망원동, 을지로 등이 이런 배경을 등에 업고 떴다.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은, 서울의 핫 플레이스는 성수동이다. 여기는 참으로 신기한 지역이다. 강남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고, 강북 중심지까지도 20분 안에 갈 수 있는 천혜의 교통 환경임에도 오랫동안 준공업지대로 남아 있었다. 뒤로는 서울숲이, 양옆에는 한양대학교와 건국대학교라고 하는 거대 상권이 존재하는데도 그랬다. 나이 든 서울 토박이들에게는 ‘뚝섬’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을 성수동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2010년대 중반이다. 디웰 하우스, 카우앤독 같은 공유 오피스&하우스 등이 생겨나면서 스타트업과 소셜벤처 관계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림창고, 베란다 인더스트리얼 등 창고와 공장 시절의 내·외관을 고스란히 간직한 카페들이 인스타그래머들을 끌어들였다.

성수동이 뜬 패턴은 후자, 즉 낙후된 지역의 재발견에 의해서지만 이 동네의 부상은 딱 하나로 설명하기 힘들다. 우선 ‘중심축’이 없다. 어느 동네든 메인 스트리트가 있다. 그게 기존 주민들이 다니던 길이건, 새로운 ‘핫스폿’을 중심으로 형성된 길이건 축이 되는 거리가 있고 이 축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간다. 가로수길 옆에 세로수길이 만들어지고, 홍대 앞을 축으로 상수, 연남 등이 활성화된 게 그런 예다. 그런데 성수동에는 그런 중심축이 없다. 넓은 필지의 공장과 창고, 아파트형 공장(지식산업센터)들이 사방에 있는 지역이기에 소규모 자본 창업을 위한 공급이 부족하다. 따라서 ‘A카페 옆 B베이커리’ 같은, 일반적 상권의 형태가 존재하기 힘들다. 어니언, 성수연방과 같이 아예 대형 창고와 공장을 리모델링해서 운영하는 업체들도 있지만 소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른 동네와 달리 성수동의 핫 플레이스는 대개 점으로 존재한다. 스마트폰으로 지도 앱을 켜고 다니는 문화에 최적화된, 보물찾기의 지역이다.

또 하나 ‘밤’이 없다. 모든 상권은, 특히 한국에서는 2차와 3차에 최적화된 술집들이 존재한다. 1차로 배를 채운 후 2차에서 본격적으로 달리고, 3차로 마무리한다든가 하는. 하지만 성수동의 야경은 어둡다. 1차로 갈 만한 곳은 많으나 2차로 갈 수 있는 곳은 극히 제한적이다. 3차는 더 그렇다. 지역에 새롭게 입주한 젊은이들도 늦은 시간이 되면 다리를 건너거나 건대 앞으로 간다고 하니 대략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성수동이 원래부터 ‘노는 동네’가 아니라 ‘사는 동네’이자 ‘일하는 동네’였으며, 건대나 한양대 등 기존 상권에서 유입되고 확장된 상권 또한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특성들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성수동이 젠트리피케이션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공장과 창고들이 원체 크기에 쉽사리 재개발, 재건축하기 어렵다. 놀러 와서 소비하는 시간이 제한적이기에 주거지의 급속한 상업화가 일어나기 힘들다. 한 탕을 노리고 들어오는 이들에게 진입장벽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낙관적인 예측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의가 아니라 구조가 프랜차이즈화의 파도를 막는 방파제가 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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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이에게 관용어의 사용은 대체로 피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다. 사유와 반성을 거치지 않고 습관적으로 구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용어의 예는 무수히 많겠지만 세간에서 논란이 되었던 표현을 언급하고 싶다. 그중 하나는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인데 보통 부정적이고 희화화된 느낌을 준다. 

좀 오래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 지역의 의회에서 이 관용어를 추방하자는 결의서를 채택한 적이 있다. 그 결의서에서 언급되었던 한 선배 소설가가 관용적으로 사용했을 뿐인데 비난받는 게 부당하다면서 투덜대던 게 기억이 난다. 다른 하나는 ‘소설 쓴다’는 말이다.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경우나 터무니없는 일 등을 가리키는데 그냥 소설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언젠가 온라인에서 청와대 대변인과 소설가 사이에 잠시 다툼이 있었다. 청와대 대변인은 뉴스란 사실에 기반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때 사용된 소설은 거짓말, 왜곡 등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한 소설가가 불쾌하다고 반응했고 청와대 대변인은 관용적 표현일 뿐인데 웬 시비냐고 응수했다. 관용어라 해도 누군가는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고 그런 의도 없이 사용한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을 향한 비난이 부당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삼천포와 관련된 논란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갈 일이 있었다. 내게도 삼천포는 이 표현으로 익숙한 지역이었지 실제로 가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삼천포에 머무는 동안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워서였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글에서나 말에서나 단 한 번도 ‘삼천포로 빠진다’는 표현을 써 본 적이 없다. 이 관용어가 무심코 튀어나오려 해도 내게 깊이 각인되었던 삼천포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스스로 사유하고 반성하며 다른 표현을 찾아내도록 나를 격려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지역 의회에서 이 관용어를 추방하자는 결의서 대신에 ‘우리 동네에 놀러오세요’라는 결의서를 채택했다면 어땠을까. 

청와대 대변인과 소설가의 다툼을 보면서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만약 그 대변인이 소설에 감동받은 적이 있다면, 소설이 그의 내면을 뒤흔들어 언제까지나 멈추지 않는 떨림과 속울음으로 남는 경험을 했더라면, 거짓말을 소설로 치환하는 문장 앞에서 아마도 머뭇거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소설의 관용적 표현이 거슬렸다면 불쾌하다고 투덜대는 것보다 위대한 문학에 고양되어 본 적 없는 쓸쓸한 마음에 아름다운 소설 한 편을 권유하는 게 진정으로 다정한 일이었을 것이다. 

관용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사유와 반성 없이 관용어를 쓰는 습관에 있다. 

광주를 폄하하고 5·18을 왜곡하는 자들은 예전부터 보아왔으므로 지겹도록 익숙한 자들이다. 그들이 쓰는 말 역시 진부하기 이를 데 없어 하나의 관용어라 해도 좋을 정도다. 그들이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이 낡아빠진 관용어를 진실처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건 혐오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혐오는 나와 다르다고 내가 알지 못한다고 간주하는 것들을 향한다. 혐오를 넘어서려면 나와 다르지 않음을 발견해야 하고 진실로 알아야 한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고 오래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까 광주와 5·18을 왜곡하고 모욕한 자들은 사실 광주와 5·18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고백한 셈이다.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절망과 공포와 굴욕 속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용기를 잃지 않으려 애썼던 사람들의 육성을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왜 아름다운지 왜 그토록 숭고한지 모르는 이유는 그들이 한 번도 민주주의에 감동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모독한 게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며 민주주의를 알고 싶지도 않다는 속내를 들킨 것일 뿐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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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국방부는 국방백서에서 대체복무제를 둘러싼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용어 대신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자라는 용어를 고수하겠다고 밝혔다. 군에서 병역의무를 이행했거나 이행 중이거나 이행할 사람들이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국민적 우려를 고려했다고 한다. 국방부의 해명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오해의 가능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주목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해의 여지를 두지 않기 위해 이 용어를 예민하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러나 ‘오해의 가능성’이란 미묘한 문제이기도 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 문제의 미묘함을 어린 시절에 처음으로 실감했던 듯하다. 대체로 시골집들이 그랬듯이 우리 집에도 욕실이 없었다. 커다란 고무 함지가 나의 욕조였고 거기에 데운 물을 채운 뒤 몸을 담가 때를 불리면 어머니가 때수건으로 박박 밀어주곤 했다.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근 동안에는 즐겁지만 물이 식어 점점 차가워지고 때수건이 지난 자리가 벌겋게 달아오르면 그처럼 고역스러운 일도 없었다. 마음이 널을 뛴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2018년 11월 30일 오전 대구구치소에서 출소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마중 나온 가족과 포옹하고 있다. 법무부는 이날 양심적 병역거부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 중 57명을 가석방했다. 연합뉴스

그러다 언제부턴가 봄이 되면 수돗가에 나무로 틀을 짜서 부엌 벽과 맞닿은 부분을 제외한 삼면을 방수포로 가렸다. 평소에는 활짝 열려 있지만 접어 올린 방수포의 끝자락을 잡아 내리면 담장 밖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가려졌고 겨울이 되기 전까지 거기서 우리 식구는 등물을 하거나 목욕을 했다. 한여름이면 대낮에도 방수포만 내린 채 등물을 했고 그 작고 아늑하며 천장이 없는 터라 답답하지 않은 우리만의 욕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나는 즐거웠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점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절 시골마을에서 사내아이가 알몸도 아니고 그저 웃통을 벗고 등물을 하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었던 터라 외려 유난을 떤다는 인상을 줄까 봐 꺼려지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슬쩍 내비치며 부모님께 물었더니 보이는 우리가 수치스러워서가 아니라 우연히 벌거벗은 우리를 본 누군가가 수치스러워하지 않도록 그렇게 한다는 거였다. 나는 이 설명이 인상적이었던 터라 오래 곱씹어 보았고 윤리의 요체 가운데 하나도 이런 형태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수치를 아는 자는 반드시 타인이 느끼게 될 수치를 고려한다는 것. 타인이 수치를 느끼게 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의 수치에만 골몰한다면 윤리적이라 일컬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이를테면 ‘오해의 가능성’은 ‘오해하지 않을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자신의 수치에만 몰두하게 되면 타인의 수치를 무시하게 되는 것처럼. 국방부가 ‘오해의 가능성’만큼 ‘오해하지 않을 가능성’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고려했다면,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에 집착하는 대신 이 용어를 두고 갈등이 생겨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모른 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복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일이 만약 수치스럽다면 왜 그런지 우리는 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군복무를 수행하는 일에 자긍심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방부는 온갖 비리를 척결하여 사병들에게 질 좋은 식사와 보급품을 제공해야 하고 지휘관은 부하를 종처럼 부리는 게 아니라 존중해야 하며 모든 군인은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를 부여받아야 한다. 의문사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면 수사 과정부터 투명하게 공개되어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하고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이 병역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관리 감독해야 하며 부당한 청탁이 결코 통용될 수 없게 해야 한다. 마침내 군복무를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국토만을 방위하는 것이 아니라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까지도 보호한다는 자긍심을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그들이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 군복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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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냈을 때에는 집 근처의 사설 기관을 이용했다. 아이가 첫 등원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아침 하늘이 어떠했는지 엄마 손을 잡고 미지의 세계로 처음 들어서던 아이의 뒷모습이 어떠했는지 눈에 선하다. 물론 그날을 나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아이를 등원시키고 안절부절못하던 아내일 테고 아내의 시름도 그때부터 깊어졌던 듯하다. 아마도 아내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를 맡긴 부모라면 누구나 내 아이가 홀대를 받는 건 아닌지 혹은 학대를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서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 두려움이 우리 사이 불화의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일단 맡겼으면 믿고 보자는 식이었지만 아내는 알림장을 꼼꼼하게 살펴 이상 징후가 없음을 확인하고 어린이집 선생에게 커피 한잔이라도 건네야만 안심을 했다. 늘 사소한 일들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아이가 말 못할 일이 생겨 고통받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서 눈물바람이 되면 나는 그깟 일에 아파하지 말라는 식으로 힐난하고 끝내 말다툼을 하게 되는 거였다.

그러다 어린이집에서 사고가 났다. 야외활동을 하고 나서, 한 아이를 두고 온 거였다. 하원 시간에 맞춰 아이 엄마가 왔을 때에야 어린이집 선생들도 아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혼자 헤매던 아이의 손을 잡고 어린이집까지 데려다주어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아내는 사설 기관을 그만두고 공동육아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공동육아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아이가 학대당할 염려는 없었다. 그러다 내 벌이로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아내는 겨울 방학 동안 돌봄교실 교사로 일하게 되었고 아침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는 건 내 일이 되었다.

이전에도 두어 달 아이를 돌본 적은 있지만 두어 살 무렵이라 그리 힘든 줄 몰랐던 모양이다. 아이를 먹이고 입힌 뒤 차에 태워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는데도 고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러면서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일들에 예민해져갔고 공동생활에 어쩔 수 없이 익숙해져야 하는 아이를 가까이 지켜보면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제야 그깟 일에 아파하지 말라 힐난했던 내가 얼마나 철없고 어리석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더불어 부모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두려움을 이용하는 자들이 얼마나 비열한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나도 살면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줬고 앞으로도 노력은 하겠지만 그런 일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 12월 13일 (출처:경향신문DB)

언젠가 나는 이 글에서 우리가 누군가와 불화하게 되는 것은 이미 해버린 일들, 이미 저지른 실수들 탓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들, 미안하다 말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은 탓일 수 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아마 보통의 경우 미안하다 말하지 않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는 이유는 상대방이 마음을 다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을 다친 사람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해도 결코 그깟 일이 될 수 없고 그토록 사소해 보이는 일에 마음을 다치는 이유는 그이가 그 일에 마음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가까운 사람이 그 사실을 잊고 위로는커녕 소심하다고 타박한다면 궁지에 몰린 듯 쓸쓸하고 적막할 것이다.

어쩌면 지구에 사는 우리는 모두 궁지에 몰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어디나 궁지일지도 모른다. 한 철거민이 한강에 뛰어들어 주검으로 떠오르고 이제 스물네살밖에 안된 한 젊은 노동자가 기계에 끼여 무참히 죽어가는 시절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깟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삶에 대한 그치지 않는 불안과 두려움. 태어날 때부터 지녔던 것만 같은 불안과 두려움을 품고 궁지에 몰려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무리 사소한 일도 그깟 일일 수는 없을 테니 가까운 누군가가 사소한 일에 상심한 듯 보이면 그렇게 보이도록 애써 참고 견디는 중일 수도 있음을 헤아려보자.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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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눈앞에 다가온 이 즈음이면 여러 해 전 잠시 들렀던 크레타가 떠오른다. 그리스 여행을 마음먹었을 때 내가 염두에 두었던 곳은 아테네가 아닌 크레타였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거기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이 있어서였다. 죽어 묻힌 이를 그리워하는 건 내가 오래된 책들에서 위안을 구하는 것과 비슷했지만 무엇보다 죽은 이는 말이 없어서였다. 크레타는 포근했다. 에게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납지 않았다. 옛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라클리온 구시가는 미로와 같은 골목을 품은 살아 있는 유적지였고 국가부도 사태로 어수선했던 아테네와는 달리 차분한 활기가 정갈하게 내려앉은 곳이었다. 계절 탓에 관광객이 드물었음에도 야외 테이블은 식사를 하며 맥주를 마시거나 물을 타면 우윳빛으로 변하는 우조를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렌지 나무 우듬지에는 수백마리의 지빠귀가 깃들었고 해질 무렵이면 새떼가 허공에 그물을 치며 날아다녔다. 

오후 늦게 그곳에 도착한 나는 물어물어 예약한 호텔을 찾아갔고 이름은 호텔이지만 여관이나 다름없는 방에 짐을 풀고 산책을 나섰다.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에는 늘 비슷한 기분이 되곤 했는데, 이를테면 내가 처음 제주도에 갔을 때 제주도 사람에게 “육지에서 왔수꽈?”라는 질문을 듣고 새삼 나는 육지 출신이구나 하고 깨달았듯이 낯설고 이질적인 그 공간이 내게 너는 누구냐고 묻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소리 없는 질문에 대답을 해보려 애썼지만 어떤 말도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여행을 하는 이유는 이 곤혹을 실감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며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덜컹거리는 기계음이 들려와 쉬이 잠들 수 없는 방에서 두 손으로 무릎을 그러안은 채 왜 이토록 먼 곳까지 와야만 했는지, 촌놈인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를 뛰어넘은 게 아닌지, 그런 두려움을 곱씹으며 졸다 깨다를 반복했고 피곤이 덜 가신 채 아침을 맞았다.

첫 행선지는 카잔차키스의 무덤이었다. 나는 지도를 짚어가며 방향을 잡았지만 주택가를 지날 때는 길을 잃은 게 아닌가라는 걱정이 들었다. 마침 슈퍼에서 장을 보고 나온 중년의 부인에게 길을 물었고 그이는 한참을 설명하다가 내가 여전히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자신의 차를 가리키며 타라고 했다. 그이는 내게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고 나는 답했다. 무얼 하는 사람이냐 물었고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소설가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이는 환하게 웃으며 반갑다, 환영한다, 영광이다 등의 말을 했고 자신이 카잔차키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덧붙였다. 나는 아마 얼굴이 달아올랐을 테다. 그이는 계단만 오르면 카잔차키스의 무덤에 닿는 성벽 아래 나를 내려주었고 깊은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카잔차키스의 무덤은 기대한 대로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했다. 평평한 돌과 십자가 하나, 묘석 하나가 전부였고 묘석에는 그의 소설에서 따온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에 파문을 당해 살아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그. 주검이 되어 이 고즈넉한 성채 위에 몸을 누인 채 영원한 침묵에 들어간 그. 나는 고개를 돌려서 이라클리온 앞바다, 에게해를 보았다. 그리고 돌담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는 내 또래의 사내를 보았다. 관광객은 아닌 듯 그는 가벼운 차림이었고 우수에 잠긴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내가 느끼는 슬픔과 비슷한 걸 보았다. 우리 모두 말없이 누운 한 소설가를 등진 채 바다를 보는 중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으며 한국어로 글을 쓰는데 내 자부심을 인정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 부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그를 슬프게 하는 게 무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는 슬픔을 아는 사람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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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발을 디뎠던 시절에도 서울은 1000만이었다. 한마디로 어딜 가나 사람, 사람이었다. 그리고 도시에 살면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건 도시인들이 보여준 사람에 대한 태도였다. 물론 그보다 앞서 혼란스러웠던 사소한 일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학교 근처 식당의 물가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저렴한 편이라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이 3000~4000원쯤이었다. 거기에 밥 한 공기를 추가하려면 1000원을 더 내야 했는데 나는 이 셈법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밥 한 톨이라도 흘렸다간 보릿고개부터 시작해 박통시절을 지나 신토불이에 이르기까지 지겹게 훈계를 들어야 했던 나로서는 찌개 값의 8할은 밥값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밥 한 공기를 추가하려면 2000~3000원쯤을 더 지불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거다. 내가 보기에 밥 한 공기가 1000원이라는 건 정말 헐값이었고 그렇게 헐값에 먹어도 좋을 만큼 쌀밥 한 그릇이 대수롭지 않은 양식이라는 점을 납득하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는 그런 사실들에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되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를 헷갈리게 하는 건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 너무 흔해’와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태도였다. 물론 이런 시구가 하나의 수사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으나 선뜻 마음이 열리는 수사도 아니었다. 아무리 서울이 넓다 해도 1000만이라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어디에서나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고 어쩌면 그런 환경에서 견뎌야 하는 이들에게 서울보다 지겨운 곳도 없을 것이다. 그처럼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단 한 명과도 진정한 관계를 맺기 어렵고 외롭다면 그곳이야말로 지옥일 테니까.

나는 그 지옥이 싫지 않았다. 사람이 그냥 무서울 때도 있고 관계 맺기와 소통의 어려움 탓에 무서울 때도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나를 늑대처럼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사람의 일이었다. 소통이 불가능해도 기적처럼 소통이 이뤄지는 짧은 한순간이 없지 않을 테고 절망이 만연해도 희망이 전멸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 또 하나의 모래알로 섞여들고 싶었고 그들과 사연을 만들고 싶었다. 사연이란, 적어도 내게 사연이란 삶의 요체였다. 고향마을은 오래전부터 쇠락해가는 중이었고 내가 떠나올 무렵에는 이미 반쯤 부서진 곳이었다. 이내가 끼고 땅거미가 드리워지면 밤보다 먼저 침묵이 찾아왔고 기나긴 밤을 지키는 건 바람 소리뿐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땅을 떠나 어딘가를 헤매는 중이었고 그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태어나는 일도 드물었다. 하루하루가 1000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되풀이되었다. 사람마저 어제의 그 사람이 내일의 그 사람일 거였다. 그러나 어느 이슥한 밤, 누군가의 방에 모여 소일거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면 그이들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한 낯선 사람들이 되곤 했다. 그이들의 가슴 바닥에 쟁여졌던 사연들이 풀려나와 이야기의 그물이 만들어졌고 침침한 백열등으로는 결코 그러할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그이들은 상심과 회한과 그리움만을 그물에 남겨둔 채 그물을 빠져나가는 물처럼 캄캄한 마당을 흘러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갔고 아마도 내가 알던 그 사람으로 되돌아와 잠자리에 누울 거였다.

사연을 지닌 존재들. 나이를 먹어가는 게 아니라 사연을 쌓아가던 사람들. 사람이 떠난 자리를 기억하고 그 빈자리에 이야기를 채워 넣어 세계를 무한히 확장하며 살던 사람들. 그런 이유로 내게 서울은, 1000만이 북적이며 사는 서울은, 1000만의 사연이 어우러져 1000만배로 확장된 공간이며 가능성이었다. 사람이 흔할수록 사연은 깊어지고 내밀해진다. 사람이 흔할수록 사연이 확장시킬 영토는 무한에 가까워지며 이 작은 지구에 우주 전체를 이주시킬 수 있게 된다. 사람이 흔하다니. 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알고도 흔하다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흔한 것이야말로 사람이 흔하다고 말하는 태도가 아닐까.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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