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시간대에 버스를 탔더니 만원이다.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잔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반사적으로 안간힘이 느껴졌다. 더할 수 없을 만큼 가득 찬 느낌, 한도까지 끌어올리는 기운 말이다. 잔뜩 밀린 일, 잔뜩 화난 얼굴, 잔뜩 짊어진 짐 같은 것이 떠올라 도리질을 쳤다. 된소리가 있어서 그런지 발음할 때부터 잔뜩 힘이 들어가게 되는 단어다. 버스에서 내릴 때 어느새 나는 부사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간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 것을 보니 불러 세워도 대답이 없을 것 같다. 그 사람이 멈추었다면 나는 분명 툭 쏘아붙였을 것이다. 묵었던 감정..
시청자가 세계관을 선택할 수 있는 드라마도 나올까? 지금도 구간마다 시청자의 선택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인터랙티브형 드라마가 있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시청 전에 배제하고 싶거나, 강화하고 싶은 설정을 미리 선택하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 ‘로맨스 제거’ 버전을 선택한다면 모든 종류의 로맨스가 금지되어 사랑이 싹트려 할 때마다 등장인물이 죽을 것이다. 사람들이 오로지 자산관리에만 열중하고, 드라마의 결말을 보려면 추가 결제를 해야 하는 ‘자본주의 강화’ 버전, 남자들이 저임금 가사노동에 시달리다 이유 없이 벌을 받는 ‘난폭한 페미니즘’ 버전을 고를 수도 있다. 간단한 선택만으로 나의 신념을 확인하고, 다른 종류의 가치관을 체험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물론 동시에 분열과 논란을 초래하겠지만…. 나에..
어제는 꿈을 꾸었다. 신간 제작이 막 끝나서 출판사에 책이 도착했는데, 첫 페이지부터 오·탈자가 수십개. 가슴이 철렁하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인쇄된 책 전부를 다시 제작해야 한다는 낭패감과 함께 비용과 시간은 어쩌나 하는 걱정이 밀려온다. 꿈에서 깨어나서는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아직도 이런 악몽에 시달리다니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라떼는 말이야…” 하고 나 때의 경험을 무용담으로 떠벌리기는 싫지만, 확실히 그때를 겪은 편집자는 요즘의 젊은 편집자와는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우리들 늙은 편집자는 인쇄 직전에 발견한 오자 때문에 필름 판을 오려붙이고, 없어진 사진식자 한 글자를 찾으려고 편집부 책상 밑을 끙끙대며 수색하곤 했다. 이런 경험을 가진 편집자와, 모니터 화면에서 키 몇 개로 간단히..
지난 추석 때 처가에 갔다가 급체를 하고 말았다. 명절 음식을 푸짐하게 먹어서? 나의 소화능력은 평균 이상이다. 음식이 잘못 되어서? 오, 그럴 리가. 이유는 TV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트로트 때문이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가수들이 비슷비슷한 창법으로 비슷비슷한 노래를 부른다. 집이었다면 바로 채널을 돌렸겠지만 나는 처가에서 리모컨을 잡는 사위가 아니다. 연신 잔을 비우며 술의 힘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결국 집을 뛰쳐나가 한 시간 정도 쌀쌀한 밤거리를 걸은 후에야 속을 달랠 수 있었다. 트로트로 공간을 채우는 집이 처가만은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평생 트로트에 관심이 없었다. 1970년대 명동에서 놀던 분답게 양희은의 오랜 팬이었으며 몇 년 전에는 장미여관의 팬을 자처하기도 했다..
“건강해야 한다. 몸도 마음도.” 친구와 통화를 끊기 전, 저 말을 건넸다. 그는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작년 말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무엇을 제일 하고 싶은지 묻자 전국에 있는 공원에 가고 싶다고 한다. “일단 집 근처에 있는 공원부터 가야지. 집과 병원만 오가다 보니 오래 살았는데도 이 동네가 좀 낯설어.” 하고 싶은 일이 의외로 소박한 것이어서 놀랐다. 전국에는 무수히 많은 공원이 있을 테니, 소박하지만 커다란 꿈이다. 몸과 마음이 둘 다 건강하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는 계획이기도 하다. 공원을 다니면서 틈틈이 전국에 있는 산에 오르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거 알아? 우리나라에 산이 4000개가 넘게 있대. 하루에 하나씩 오른다고 해도 10년도 더 걸리겠지.” 친구는 장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눈..
지난 11일 한국의 스캐터랩에서 만든 인공지능 챗봇(Chatbot) ‘이루다’ 서비스가 많은 논란 끝에 중단되었다. 익명으로 수집한 데이터 보안의 오류와 개인정보 유출 의혹이 결정적인 사유로 작용했지만, 발단은 어디까지나 “‘이루다’가 이용자를 통해 차별적인 혐오 표현을 습득 후 재생산하고 있다”는 인공지능 윤리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대화형 로봇인 ‘이루다’가 ‘20대 여성’이라는 고정된 설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는데, 이용자들이 여성의 모습을 한 가상의 캐릭터를 상대로 성적인 대화를 유도하고, 언어폭력을 반복해 성범죄를 연상하게 하는 패턴을 학습시켰기 때문이다. 이용자의 대부분이 10대 청소년임을 알고 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지만, 제작사는 ‘로봇이 실제 사람(..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 독일작가 막스 피카르트는 에서 이렇게 썼다. “예전에는 침묵이 모든 사물을 뒤덮고 있었고, 그래서 인간은 한 대상에 다가가기 이전에 먼저 그 침묵의 막을 뚫고 나가야 했다. 사상과 사물은 그것들을 둘러싼 침묵에 의해서 보호되었고, 그리하여 인간은 그것들의 급박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이 사라진 오늘날 인간은 오히려 더 이상 능동적으로 사상과 사물을 향해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것들이 인간에게 달려들어 인간 주위에서 소용돌이친다. 인간은 이미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생각되는 대상이 된 것이다.” 침묵은 의외로 수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생각과 사물이 달려들어 우리를 점거하지 못하도록 막는 사이, 천천히 능동적인 시도를 꾀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 침묵을 잃으면..
코로나19는 이별의 풍경도 바꿨다. 장례식장은 한산해졌다. 상주가 장례 일정에 더하여 계좌번호를 함께 알린다. 청첩장에 계좌번호를 적어도 눈살 찌푸리던 사람들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낯설다. 그나마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코로나19로 사망하면 장례조차 치를 수 없다. 사망 직후 화장터로 간다. 임종을 지키기는커녕 염습도 할 수 없다. 고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볼 기회조차 없다. 가족들마저 자가격리 중이라면 이별의 모든 과정은 생략될 것이다. 그 감정을 나는 차마 헤아릴 수 없다. 어디 사람과 사람의 이별뿐일까. 오후 9시 영업제한으로 사실상 술집에 갈 수 없고 카페도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니 사람들을 만날 일이 없다. 일과 관련된 사람도 카톡이나 짧은 통화로 일 얘기만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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