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에프엑스’의 전 멤버 설리가 지난 14일 안타깝게도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내게는 그의 극단적 선택이 같은 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사임 발표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그 충격의 차이는 단지 직책과 생명의 차이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대, 일상, 젠더의 차이였다. 어린 나이에 수년 동안 지독한 남성 악플에 시달려야 했던 가련한 삶. 데뷔 때부터 ‘에프엑스’의 음악을 좋아했고, 그의 당당함을 응원했다. 오랫동안 누리꾼의 악플에 시달려 극심한 우울증을 앓은 그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여성 뮤지션으로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당당하게 살고 싶은 것이 왜 비난을 받아야 할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보다 더한 시련이 있을까? 그는 그렇게 죽었다. 아니 가수이자 배우로서 ‘연예계’라는 잔인한 도시에서 더 이상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스스로 생을 멈추었다. 

그의 사망 전날 보았던 영화 <조커>의 배경인 고담시와 주인공 아서 플렉이 자꾸 떠오른다. 비정한 고담시의 외로운 무명 코미디 배우 아서 플렉이 내뱉은 대사들은 마치 설리의 내면의 독백과도 같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정신질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척해야 하는 것이야.” “난 살면서 단 1초라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내 죽음이 내 삶보다 가치 있기를.” 

가수 겸 배우인 설리. 이충진 기자 hot@khan.kr

아서 플렉의 대사를 설리에게 대입해보았다. 미쳐 돌아가는 고담시처럼 극한경쟁, 감정노동, 극단적 악플에 시달리는 한국 연예계는 비극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마음의 아픔을 고백하기는커녕 오히려 관객을 향해 미소를 지어야 하는 위선의 시간들, 유명하지만 나는 과연 행복한가를 수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잔인한 아이돌시장, 이해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 여성 아이돌들의 내면의 아픔들, 악플에 시달리면서 삶보다 죽음을 가치 있게 선택한 ‘절망적인 소망’이란 역설. 설리의 황망한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이돌 스타가 되려면, 감정노동과 악플은 평소의 감기처럼 달고 다녀야 한다는 아이돌의 숙명은 특히 여성으로서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이다. 

아이돌이기 이전에 여성주체로서 당당해지기를 원했던 설리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악플은 마음의 심장을 찌르는 백정의 칼날이 되어 그에게 향한다. 아마도 그러한 악플과 공생하는 선정적인 연예 저널리즘이 문제의 발단일지도 모른다. 악의적인 기사는 악플을 낳고, 악플은 다시 악의적인 기사를 재생산한다. 그리고 그의 연예활동을 오랫동안 지원했던 소속사 역시 근원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열일곱 살에 데뷔할 당시 ‘에프엑스’의 막내였다. 연습생 시절부터 과도한 경쟁에 시달려왔던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들, 그것들을 해소할 수 있는 휴식과 대화가 충분했는지 묻고 싶다. 그 어느 당사자들보다 소속사 식구들이 가장 마음 아프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떠나는 일이 없도록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설리의 죽음을 개인의 극단적인 선택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그의 죽음은 그와 동시대를 함께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지난 화요일 밤, 문화방송 <PD수첩>에서 모 방송사 오디션 프로그램의 조작과 부정행위의 의혹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매우 충격적이고, 허탈하다. 

모든 오디션은 각본에 불과하고 팬들의 투표 역시 부질없이 조작된 것이다. 그렇게 부정하게 선발된 멤버들은 그 방송사의 소속사로 묶여서 오랜 기간 동안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노예처럼 일하다가 사라진다. 설리의 죽음의 한 징후를 보는 것 같다. 

우정과 배려가 없는 잔인한 사람, 잔인한 시스템, 잔인한 자본, 잔인한 세상. 이 잔혹한 세상을 떠난 설리에게 말하고 싶다. 죽음이 삶보다 더 값질 수 있도록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행복하기만 바랄게.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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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누구나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참여와 연대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이 자유롭게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고, 서로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은 ‘인터넷 공론장’뿐만 아니라 ‘민주적인 참여’의 기본 조건이다. 슬프게도 인터넷 역시 현실 공간에서 작동하는 제약들이 고스란히 작동한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 이래 민주주의의 이상은 권리를 가진 시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쟁점을 토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교육과 이해가 있으며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때를 가정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항상 ‘과두정’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고, 쟁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시간과 학습이라는 자원과 노력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선 현실공간의 정치적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모두에게 시간적 여유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로마공화정 역시 귀족, 기사, 평민 계급의 투표를 통해 국정 현안을 결정하는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평민들은 공화정에 불만을 표시하며 오늘날 ‘몬테 사크로(Monte Sacro)’라고 불리는 성산(聖山)에 올라 농성했다. 집단 파업을 일으킨 것이다. 절차에 따라 투표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로마공화정의 투표는 귀족, 기사, 그리고 마지막에 평민이 투표하게 되어 있었다. 귀족과 기사 계급이 담합해 투표를 마치고 나면 평민은 표결에 참여하기도 전에 결정이 끝났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쟁점이 발생해도 금세 다른 쟁점에 덮이는 사회라고 한다. 초스피드로 움직이는 이 세계에서 나날이 발생하는 모든 쟁점을 파악하고,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거나 전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상 표결이 끝난 뒤에나 도착한다. 과거 디지털미디어의 주류가 PC 기반의 웹(Web)이던 시절이 영화 &lt;엑스맨&gt;의 ‘퀵실버’가 움직이는 정도의 속도였다면, 모바일 플랫폼 앱(App)의 시대인 현재는 ‘퀵실버’에 더해 공간을 순간 이동하는 ‘나이트 크롤러’까지 합세한 스피드로 움직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정치가 되었든, 문화가 되었든 평론가만큼 힘든 직업은 없을 것이다. 

디지털미디어 시대,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는 계급이 아니라 이슈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이고 분산된 대중이다. 과거의 대중이 조직이나 명망가를 중심으로 몸의 연대를 구사했다면, 오늘날의 대중은 여러 차원으로 분산되고 다양한 구성을 지니고 있기에 분석하기 어렵다. 과거의 대중이 일정한 형태를 가진 고체였다면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대중은 정보와 이슈에 따라 액체처럼 유동하다가 이슈와 함께 증발한다. 문제는 그와 같은 시대이기에 선동(propaganda)에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영주의와 진영논리를 염려하지만, 오늘날의 디지털 대중은 특정한 이즘과 이론을 따르지 않는 탈이념적 대중이라는 점에서 요동치는 물결이다. 과거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대중문화가 사회적 시멘트 역할을 한다고 비판했지만, 오늘날의 대중은 ‘접착’이 아니라 간단한 ‘접속’으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소셜미디어의 개인은 분절과 동종집단화 과정의 무한 반복(폐절, 차단 등의 자체 필터링 과정)을 통해 ‘취향최적화’를 이뤄 나간다. 

동종의 취향을 공유한 집단은 공론화 과정에서 그들의 취향에 거슬리는 집단을 힘으로 억압하고 싶은 손쉬운 유혹에 빠지게 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감과 나눔을 반복할수록 배타적 집단의식이 강화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빚는 것이다. 여기에 선동의 대가인 에드워드 버네이즈나 괴벨스도 울고 갈 만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지식인(Digerati)들이 언론인을 자처하며 미디어 공간을 점유해 나간다. 하이테크놀로지로 무장한 친절한 선동가와 대변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주변에 당신의 주장과 생각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없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당신은 이미 커다란 위험에 빠졌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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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1일 지면게재기사-

조국과 나경원. 386세대의 대표주자로 각각 진보와 보수의 ‘가치’를 대표한다. 조국은 ‘민주주의’를 최고 가치로 삼는다. 민주주의는 경제민주화와 표현의 자유를 뜻한다. 소득주도성장과 국민성장 모두 경제민주화를 위한 것이다. 검찰개혁은 군사 언어가 통제하는 검찰의 위계질서를 시민 언어로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나경원의 제일 가치는 ‘성장주의’. 성장주의는 경제성장과 시장의 자유를 말한다. 현재 한국 사회가 겪는 모든 문제는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사회주의 포퓰리즘 정책 탓에 생긴 것이다. 기업가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지속해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사회 전 영역에 시장 자유를 확대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성장주의는 한국 현대사의 두 기본가치로 서로 경합하면서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함께 일구어왔다. 진보와 보수 모두 공적 담론에서는 민주주의와 성장주의에 기댄다. 진보도 성장주의를 설파하고, 보수도 민주주의를 찬양한다. 가치의 차원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무엇을 앞세우느냐 정도의 차이다. 그런데도 진보와 보수는 마치 가치의 차원에서 완전히 다른 것처럼 격렬히 다툰다. 진보는 보수를 수구꼴통이라 조롱하고, 보수는 진보를 종북좌빨이라 낙인찍는다. 다소 과한 듯하지만, 이는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주고받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어디에나 나타나는 정상적인 정치 과정이다. 사실 이런 ‘만들어진 차이’ 때문에 선거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가 아주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조국과 나경원의 삶을 접하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사회학에서는 가치를 추구하는 방식을 조절하는 규칙을 ‘규범’이라 부른다.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어도 규범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한 종교 안에 수많은 교파가 존재하는 이유다. 하도 싸우길래 사람들은 조국과 나경원이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어느 정도 믿게 되었다. 그런데 목적달성을 위해 온갖 사회자본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너무나 쌍둥이라 화들짝 놀랐다.

“난 나경원과 관련된 의혹이나 소문 또는 팩트에 대해 별로 놀랍지도 화나지도 않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일 거라는 예상이나 편견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조국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뉴스를 접할 때는 허탈 씁쓸. 때론 다소 분노.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가 이런 거였나?”

지방대 자녀를 둔 한 386세대가 대화 도중 내뱉은 한탄이다. 그는 미국에 장기체류할 당시 자녀를 그곳 학교에 보냈다. 귀국할 즈음 아이를 미국에 남겨둘까 잠시 고민하다가 접었다. 돌아오니 당장 극심한 입시교육이 아이를 맞이했다. 영어 특기생 입학을 노리고 외고에 보낼까 하다 그만두었다. 자신이나 아내 모두 ‘혼자 힘’으로 시험 봐서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주변에서 품앗이로 서로 자녀 스펙 쌓아주느라 바쁠 때도 짐짓 무시했다. 자녀는 정시로 대학시험을 보았고, ‘스카이’는커녕 ‘인서울’도 들어갈 수 없었다. 재수했지만 별무소용. 결국, 지방대로 낙찰됐다. 조국과 나경원으로 도배된 뉴스를 보다, 나지막이 읊조렸다. “미안하다, 아들아.”

가치와 규범이 일관된 보수가 차라리 더 낫다! 아마도 적잖은 사람이 이와 비슷한 삐뚤어진 분노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조국 규탄 촛불집회를 연 일부 스카이대생의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나는 시험 보고 들어왔는데, 저들은 부모 덕 본 것 아닌가? 떳떳이 공정사회를 외친다. 그런데 이 시험이란 게 뭔가? 오지선다형, 단편적 토막지식 암기력 테스트다. 시험 한 번으로 평생의 복권을 기대한다. 그렇다면 부모 덕도 기대할 수 없고, 순간 암기력 테스트에도 능하지 못한 학생들은 어떻게 되는가? 부모의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이 부족하다 보니 고급 스펙은커녕 기초적인 인적자본조차 쌓을 형편이 안되는 ‘지방 청년들’. 이들에게 공정이란 스카이나 인서울끼리 벌이는 내부경쟁에 불과하다. 경쟁 밖에 자신을 놓고 가족 안에서만 살 궁리를 한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으니 우짖지도 않는다. 사실 미래를 만들어갈 청년 대다수는 지방에 산다. 이들의 삶을 살피지 않고선 민주주의든 성장주의든 소수 누리는 자들만의 휑한 잔치일 뿐이다.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 ‘국과원(조국과 나경원)’이 역설적으로 일깨운 진실이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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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8일 지면게재기사-

요즘 유난히 ‘단독’이란 단어를 많이 접한다. 언론 종사자에게는 의미가 큰 것 같지만, 단독이라는 머리를 한 기사가 특별하게 느껴진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포털이 모든 뉴스를 한곳에 모으는 상황에서 단독이라는 제목이 무슨 소용인지도 궁금하다.

곧이곧대로 풀어보면, 단독기사는 기자가 누구보다 열심히 취재하여 다른 언론사에서 인지하지 못한 사실을 밝힌 보도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단독기사가 특별하다고 느껴지지 않으니 의아한데, 아마도 단독이 붙은 기사의 충분성이나 짜임새가 부족하여 그런 것 같다. 예를 들어, 경향신문에 게재된 ‘[단독]검 “정경심 교수 남매, 이면계약서 통해 코링크 돈 횡령” 판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살펴보면 “검찰의 말에 따르면 이면계약서를 통해 10억여원을 불법적으로 횡령했다. 지분 0.99%를 얻은 후 매달 800만원을 받았다. 허위계약으로 매월 200만원의 자문료를 받았다”가 주된 내용이다. 

이 기사를 클릭하며 가장 궁금했던 건 ‘이면계약’의 내용이었다. 어떤 계약을 맺었고 무엇이 문제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기사에 명쾌한 내용은 없었다. 검찰에서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은 것인지, 그렇다면 당사자에게 물어보기는 했는지,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기사를 내는 게 옳은 것인지 의아했다. 

궁금증을 안은 채 기사를 곰곰이 살펴보니 적힌 내용만으로는 검찰의 주장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우선 이면계약서를 통해 횡령한다는 게 가능할까? 계약은 갑과 을이 서로 어찌하기로 약속을 맺는 것이니, 표면계약이든 이면계약이든 ‘을이 얼마를 투자하면 갑이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일 것이다. 통상적인 계약이라면 갑과 을은 별개의 주체이므로 을은 횡령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횡령이란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횡령하거나 반환을 거부함으로써 성립하는 죄이다. 흔한 예는 회사의 자산을 관리하는 사람이 회삿돈을 유용하는 경우이다. 

즉 검찰 주장의 앞뒤가 맞으려면 갑과 을이 내부 관계여야 한다. 예컨대 실질적인 회사의 소유자 및 의사결정자(을)가 자기 회사(갑)와 어떤 계약을 맺어 비정상적으로 돈을 받는 경우 등이다. 검찰이 그간 ‘정 교수가 펀드 운용사 경영에 관여했다’는 식으로 주장하였던 것을 고려하면, 같은 선상에서 취재자료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는 기존에 수없이 보도된 ‘정 교수가 펀드 운용사 경영에 관여했다’라는 검찰 주장의 반복에 불과하니 단독 보도로 다룰 만한 새로운 사실로 부족한 것 아닐까? 

이처럼 판단에 근거가 될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 스스로 어렵게 추측을 이어가야 한다면 충분한 기사는 아닐 것이다. 기존의 검찰 주장을 기정사실로 인식하여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 모르겠으나, 기자와 독자의 정보 및 인식이 같을 수는 없으므로 이해를 돕기 위한 부연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펀드 수익과 자문료 등이 갑과 을이 내부 관계라는 혐의를 키우려는 검찰의 근거라면, 통상적인 펀드 수익 및 자문료와 비교해서 얼마나 과다하고 비정상적 수준인지 취재해서 알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단독 보도는 신속해야 하니 기사 내용을 숙고하지 못한 채 내보낼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서 충분한 내용을 담지 못하거나 짜임새가 떨어진다면 독자 처지에서는 의미가 없다. 한 방송사의 보도국장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몇 시간 빠른 ‘시간차 단독’이라며 최근의 상황에 대해 자조 섞인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피치 못하게 언론사끼리 단독 경쟁을 해야 한다면, 좀 더 찬찬히 짚은 별도의 심층 기사로 보완해 주는 방법도 있다. 취재와 기사 작성에 지쳐있겠지만, 경향신문은 신뢰도에서 수위를 다투는 언론사이다. 독자로서 조금 더 수고해주실 것을 바라 마지않는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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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는 어떤 조건에서 일어날까요? 불만이 커지면 시위가 일어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어떤 이론은 경제, 사회적 조건을 따져봅니다. 지배계층의 균열, 억압의 강도 등 정치역학적 조건을 연구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들이 흔히 간과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시위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첫 번째 이론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세상에 불만 없는 사람 없지만 모든 사람이 늘 시위를 하지는 않죠. 2016~2017년 촛불집회가 절정에 달했을 때 참가자 수가 200만명 정도였습니다. 5000만명을 넘는 인구 10분의 1에도 못 미치지요. 이를 뒤집어 보면 시위는, 특히 촛불집회 같은 대형 시위는 정말 극적인, 과장을 보태면 기적적인 현상입니다. 그 바쁜 사람들이 일상을 포기하고 거리에 나섭니다. 공권력이나 상대방과의 충돌 가능성도 있죠. 게다가 나 하나 안 나가도 시위 크기는 비슷합니다. 시위의 열매 또한 내 참가와는 관계없이 따먹을 수 있죠. 그래서 이를 다 무릅쓰고 일어나는 시위는 그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2016년, 대통령이 나라를 버린 지 오래됐음을 알게 됐습니다. 야당은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지 못한 채 헤맸죠. 그런 탓에 국민이 직접 나섰습니다. 이들이 광화문을 가득 메우고서야 국회, 법원, 정부가 움직였습니다. 이 사례는 민의의 무서움도 보여주었지만, 대의정치를 기본으로 하는 민주체제의 한계도 보여주었죠. 수백만 시민이 거리를 메워야 할 만큼 큰 한계였습니다. 2019년, 또다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지난달 28일 열린 ‘제7차 사법적폐 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에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반포대로와 인도를 가득 메웠죠.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한 검찰수사가 결정적 방아쇠 역할을 했습니다. 과도한 검찰수사로 정치인을 잃은 아픔이 있는 이들은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을 겁니다.

그래서 이번 시위는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일제와 한민족, 전두환과 학생세력, 박근혜와 시민, 이렇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가 아니니까요. 검찰은 법무부 소속 정부 기관일 뿐입니다. 법무부 장관의 지휘를 받는, 대통령 한참 밑의 기관입니다. 이를 상대로 문재인 지지자들이 시위한 셈입니다. 어찌 된 걸까요. 검찰도 문재인 정부의 일부고 윤석열 검찰총장도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했는데 말이죠. 물론 이번 사태가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조국 대전’이라 불리는 이 논쟁은 여러 주제가 섞여 있습니다. 검찰수사가 과도했는지, 정치적인지는 대표적 이슈입니다. 조국 장관 가족의 행태에 대한 법적, 도덕적 논의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검찰개혁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전망도 분명치 않죠. 논쟁의 열기도 대단해 소위 진보진영 안에서도 서로 얼굴을 붉힙니다.

그래도 검찰은 정부 기관일 뿐입니다. 일개 정부 기관을 다스리는데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거리를 메워야 한다면 대통령의 정치력을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돌이켜보면 검찰과의 대립뿐 아닙니다. 정부·여당과 자유한국당 간의 대립은 몇 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박근혜 지지 세력의 목소리도 잦아들지 않고 있죠. 다른 한편으로 노동계와의 관계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기대했던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이 세상은 빨리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달 말이면 미국 하원은 트럼프 대통령 탄핵 절차를 마치리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습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하원에 소환됐죠. 탄핵이 진행될수록 트럼프 대통령의 정부 장악력도 떨어지고 다른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을 겁니다. 북·미관계 개선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크죠. 이렇게 되면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업적인 한반도 평화정착에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상황이 악화되면 중국의 입김은 더욱 커질 테고 미·중 대립은 격화될 겁니다. 

한국은 선택을 강요받을 테죠. 이에 대비하는 외교전략은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일외교, 환경문제 등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죠. 장관 하나를 두고 나라 전체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이러고 있는 게 답답할 따름입니다. 모르고 있다면 그 또한 심각한 문제죠.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칼로 자르는 결단을 촉구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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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과 검찰을 잘 구분하시나요? 법원에 검찰청 일을 보러 오고, 검찰청에 법원 일을 보러 오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저도 옆 건물로 가시라고 안내하기도 합니다. 엄연히 하는 일이 다른데 시민들이 이렇게 혼동하는 이유가 뭘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법원과 검찰 건물이 나란히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연원을 찾기 위해 먼저 서울시립미술관에 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하고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언덕밑 정동길 교회당 옆으로 가 보시죠.

서울시립미술관은 대한제국 시절 최고 법원 역할을 했던 평리원 자리였습니다. 평리원이 청사를 옮기면서 한성재판소가 그 자리를 썼습니다. 일제강점 후에 같은 터에서 자리를 옮겨 경성재판소를 지었습니다. 국권을 회복한 후에는 대법원이 그 건물을 그대로 씁니다. 대법원은 1995년 지금의 서초동 청사로 이전했고, 그 후에 서울시가 이곳에 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만, 미술관의 네모난 건물에 들어서면 가운데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습니다. 건물 위에서 그 형상을 보면 ‘日’자 형태입니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그들이 그렇게 설계한 건 이해하겠는데, 주권을 되찾은 후로도 그 건물을 대법원, 그러니까 우리 최고 사법기관 건물로 썼다니 의아합니다.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때 대법원이 다른 곳에서 한옥 형태의 청사를 썼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여하튼 이랬던 곳이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변신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경성재판소 건물 안에는 판사실과 검사실이 함께 있었습니다. 법정도 있었고요. 아직까지 법원 청사와 검찰 청사가 나란히 있는 이유는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얼마 전까지 사법부 소속 사법연수원을 마쳐야 검사가 되던 시절이 이어졌고, 일하는 건물도 나란히 서 있으니 시민들은 판사와 검사를 비슷한 일을 하는 같은 집단으로 인식해 왔던 겁니다.

이제 이런 인식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2000년대 들어 변화의 움직임이 강해집니다. 형사 사건에서 증거 조사를 공개 법정에서 제대로 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기록과 조서로 이루어지던 형사 사건 심리에 대한 비판 수위가 계속 올라갔습니다. 기록을 집어던지란 말까지 나왔습니다. 꾸준한 논의와 협업 끝에 2007년 형사소송법이 개정됩니다. 그 법이 2008년 1월1일 시행되면서 법정을 중심으로 하는 진실 공방의 틀이 갖추어집니다. 형사 법정의 배치도 그에 따라 바뀝니다. 이 시기를 전후한 시점에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영장심사였습니다. 그전까지 구속영장이 청구돼도 판사가 피의자를 심문하지 않았습니다. 서류만 보고 구속 여부를 결정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어색하지만, 그땐 그랬습니다. 언론에서 ‘영장실질심사’라는 말을 아직도 쓰고 있죠? 특이하게 ‘실질’이라는 말을 붙이는데요, 2008년 전까지는 구속심사를 형식적으로 했으니까, 이제부터 “실질적으로 해 봅시다!”라고 해서 생겨난 말이 영장실질심사였습니다. 지금은 판사가 피의자 얼굴을 직접 보면서 이야기를 듣고 구속 여부를 결정합니다. 이제는 실질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영장심사’라고 하면 됩니다. 

공개된 법정에서 진행되는 형사 사건의 증거 조사, 그리고 구속 전에 판사가 피의자를 직접 대면하고 구속의 적법성과 필요성을 확인하는 절차는 이제 어느 정도 그 틀을 갖추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진행되어 온 노력의 성과였습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벌이는 변론이야말로 법원의 가장 큰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올해로 주권을 회복한 지 74년이 흘렀습니다. 대법원이 종전 경성재판소 건물에서 나와 서초동 청사로 옮긴 지 24년이 지났습니다. 우리 것이 아니었던 예전 것들은 이제 덜어내고 진정 주권자인 국민을 위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사법개혁, 검찰개혁을 논의하면서 바라봐야 할 곳은 법원도 검찰도 아닌, 주권자인 국민이라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한 번에 바뀌진 않았고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돌담길은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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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하다보면 거리에서 다양한 시민들을 접한다. 그런데 보통의 직장인들이 하루 동안 만나는 비정규직은 얼마나 될까. 출근길 집을 나서며 제일 먼저 만나는 아파트 경비원은 파견노동자다. 자주 들르는 사무실 근처 커피점과 편의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는 파트타임이다. 사무실 건물 청소노동자는 용역노동자다. 사무직이라고 상황은 다르지 않다. 주위 건물에서 매일 아침 만나는 얼굴은 2년 계약직이거나 파견업체 소속 노동자가 대부분이다. 그야말로 사회전체가 비정규직의 바다와 같다.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시장에서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의 문제가 주된 관심사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순간 ‘차별’과 ‘불평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정규직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업무를 수행함에도 기본급, 성과급, 사내복지, 교육연수 모두 차이가 있다. 비품, 사원증, 동호회 활동은 물론이고 구내식당이나 커피점, 휴게실과 셔틀버스 이용까지 일터에서의 차별은 하나둘이 아니다. 아직도 계약직 직원에게는 명함조차 지급하지 않는 곳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비정규직의 고용불안과 차별해소를 위한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되었다. 비정규직 문제제기 10년, 법제도 시행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는 지난 20년 사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취업자(2690만명) 중 전통적인 비정규직(821만명)은 어느 정도 통계에 포착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제 파트타임은 2배 이상 증가했고, 파견용역 간접고용 비정규직도 증가했다. 그러나 최근 일부 조사에서도 확인되듯 특수고용노동자 240만명, 플랫폼노동자 53만명, 1인 자영업자 403만명이 더 큰 문제다.

꼼꼼히 살펴봐야겠지만 이들 가운데 다수는 노동시장에서 20대와 50대 이상이다. 또한 일부를 제외하면 일하는 형태나 작업과정의 차이도 별로 없다. 숙련도가 높은 전문적인 일자리보다는 단순 반복적인 일자리가 많아 기술발전 과정에서 자동화나 인공지능(AI)으로 대체될 개연성도 높다. 일의 자율성은 물론 사회적 안전망도 보장받지 못한다. 이처럼 일자리 변화는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기업들은 과거의 비즈니스 모델을 버리고 새로운 모델을 과감히 구축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프랜차이즈나 디지털 플랫폼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이와 같은 일자리를 ‘보호를 필요로 하는 고용’으로 규정하고 다양한 논의를 시작한 지 오래다. 전 세계적으로 산업구조나 기술발전 과정에서 미래의 일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일지 모른다. 일과 삶의 균형이 가능한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자율성이 높은 직업 출현도 가능하다. 그러나 모호한 고용관계 속에서 근로기준법이나 사회보험을 적용받지 못한다는 점은 우리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숙제다. 아마도 노동시장의 사회적 보호인데, 비고용기간의 소득 안정성과 같은 보편주의적 접근으로 보인다.

2018년부터 덴마크와 프랑스는 사회보험 사각지대 해소와 교육훈련 강화 등을 통해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자발적 이퇴직자, 단기 계약직, 자영업자에게도 실업급여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재고용 지원수당이나 재취업 교육수당(20.81유로), 그리고 직업훈련 기간 중 다양한 혜택(직업훈련계좌, 개인휴가)을 꼽을 수 있다. 물론 기업들에 26세 미만 청년고용이나 계약직의 정규직 전환 시 고용보험료 감면 혜택도 병행하고 있다. 게다가 비정규직이나 장애인, 예술인 등에게는 별도의 보충적 혜택도 있다. 이제 우리도 변화하는 환경에 조응하면서도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시점이 되었다. 사회구성원 누구나 재충전할 권리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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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법 권력이 가장 강한 나라이다. 가장 강하다는 것은 법이 국치와 민생의 근간이어서가 아니라 권력의 작용지점이라는 의미에서다. 법은 그 자체로 권력이고, 권력을 재생산하고, 권력을 무장해제시킨다. 권력에는 정치권력, 경제권력, 문화권력 등이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법 권력은 그 모든 권력 위해 군림한다. 최근 한국 사회의 국론과 여론은 모두 조국 법무부 장관으로 통한다. 그가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하기까지 근 한 달간 한국 사회는 법 권력이란 블랙홀에 빠졌다. 그가 법 권력을 적절하게 견제해야 하는 민정수석의 자리에 있다가 예외적으로 곧바로 법무부 장관의 자리에 오른 것도 그렇고, 그의 시대적 소명이 법 권력의 최종지점인 검찰개혁에 있는 것도 그렇다. 

조국은 서울대 법대 출신이고, 서울대 법대 교수이다. 그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자유한국당의 나경원 원내대표, 김진태 의원도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그와 세기의 법 권력 헤비급 타이틀 매치를 기다리고 있는 윤석열 검찰총장도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법 권력을 해체하기 위해 나선 조국 역시 법 권력의 중심에 있으며, 그를 반대하는 자들도 역시 법 권력의 구세력들이다. 법 권력의 전복과 배제의 법칙은 오로지 그들만의 게임이고, 그들 권력의 반복과 차이만을 재생산한다. 이것이 조국게임의 딜레마이다. 조국으로 표상되는 검찰개혁과 조국사태로 한국 사회를 마비시킨 반동적인 행동들은 모두 결국 법 권력의 항구적 힘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법 권력은 그 자체로 국가권력이자 사회권력이 되었다. 20대 국회의원 300명 중에서 법대 출신 의원은 총 64명으로 전체 의원의 21.3%를 차지한다. 더불어민주당이 27명으로 가장 많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해 여야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의 주요 정당인, 정치인, 선출직 주요 단체장 상당수가 법대 출신이다. 대기업의 임원들, 국가 주요 산하기관 고위 임원들 역시 법대 출신이거나, 전직 법조인이 많다. 이는 그만큼 한국 사회의 권력구조가 법조계 인사들로 과잉 결정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실제 법의 정의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법의 정의를 위해 법 권력은 해체돼야 하지만, 정작 법 권력은 법의 정의를 구현한다는 명분으로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악순환이 법 권력의 역사적 실체이다. 

조국게임은 그 점에서 법 권력 실체를 여실히 드러낸다. 조국과 조국게임은 같지 않다. 조국게임은 법 권력을 해체하려는 조국의 의지나 사명과 무관하다. 그 의지와 사명은 단지 법 권력의 재생산을 증명하는 허무한 게임의 룰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법 권력은 조국을 조국게임의 구성요소로 만들어 버렸다. 역설적이게도 조국이 민주주의에 기반한 법과 원칙을 호소하면 할수록 개혁의 대상자들은 그 정당성을 무력화하는 무기로 법을 사용한다. 조국과 그의 딸, 부인과 관련해 모든 신상을 털려는 검찰과 보수언론의 최종 노림수는 가능한 한 모든 위법행위를 적발하는 데 있다. 

우리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많은 민중들이 고통을 당하며 법에 호소했던 역사들을 알고 있다. 수많은 양심수들이 수십년이 지나고서 법 앞에서 무죄를 인정받고, 수많은 해고노동자들이 부당해고에 맞서 오랜 법적 투쟁을 통해 승소한 사례들을 기억한다. 그나마 민중들이 법정에서 이기는 사례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민중들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법 권력은 단지 찰나의 시간만 필요하다. 사법개혁은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고, 법이 만인을 평등하게 만드는 세상을 여는 것일 텐데, 사법개혁은 권력의 장 안에서 이미 스캔들이 되었고, 희화화되었다.     

미셸 푸코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책에서 권력, 법, 진실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법은 주권의 관계들이 아니라 지배의 관계를 전달하고 작동시키는 것이다. 법 권력은 그 작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지배적 힘이다. 조국게임은 의도와 관계없이 이러한 지배적 법 권력의 재생산을 위한 꽃놀이패일 수 있다. 우리는 윤석열 검찰총장을 통해 이미 그것을 학습한 바 있지 않은가?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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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일관계가 경색된 원인으로 어떤 이들은 2018년 10월30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을 들지만, 이것은 단순히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일본 기업이 1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라는 시대의 목소리이며,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는 구호가 말로만 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한·일 양국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는 역사적 판결이 되었다. 

전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냉전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미·일동맹의 하부구조로 강요되었던 한·일동맹이 사실은 매우 불편한 동거였으며 이대로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멀리 베를린 장벽에서 시작된 냉전 해체의 바람은 오랜 시간이 걸려 극동(極東)의 비무장지대까지 불어왔다. 그간 우리는 안으로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싸우고, 밖으로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 분투해왔다. 시간이 흘러 지난 6월30일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간 만남이 이루어졌다. 바야흐로 한반도의 해빙이 시작된다고 환호하던 바로 다음날 일본의 아베 정부는 한국에 대해 반도체 제조 핵심 소재 3개 품목의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했고, 결국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배제했다. 

우리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이후 더 연장하지 않기로 하자 미국 정부는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아베 정부가 한·일관계를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로 되돌리겠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외교적 패착을 둔 상태에서 미국 정부가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는 일본에 기운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은 과거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애치슨라인 때부터 미국이 한국을 홀대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최근 중국이 우리에게 보이는 태도와 비교된다. 지난 9월11일 인천에서 개최된 새얼아침대화 400회 기념 조찬강연에 강사로 초빙된 추궈훙 중국 대사는 일본 정부의 대한국 수출규제와 관련해 “역사 문제를 경제제재로 풀 수 없다”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나 피해자(한국)가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한다 하더라도 가해자(일본)는 겸허하게 대해야 한다. 최근 급격히 우경화하고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주변국들에 큰 우려를 사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수출규제에 대해 한국인들의 사려 깊고 이성적인 태도는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 '주전장' 포스터. 사진제공 시네마달

미키 데자키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주전장(主戰場)>에서 아베 정부의 각료는 물론 자민당 의원 중 많은 수가 소속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회의의 대표위원 가세 히데아키는 “중국은 조만간 붕괴할 것이고 그러면 한국은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세상에서 가장 친일적인 훌륭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한국은 정말 귀여운 나라예요. 버릇없는 꼬마가 시끄럽게 구는 것처럼 정말 귀엽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그 대목에서 카터 행정부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했던 브레진스키가 작고하기 전 마지막으로 펴낸 저서 <전략적 비전(Strategic Vision)>이 떠올랐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의 전 지구적 영향력 쇠퇴를 예측하면서 한국에는 중국과 함께 갈 것인가, 일본과 함께 갈 것인가, 그도 아니면 홀로 갈 것인가 세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자 문명이었던 중국의 흡입력을 5000년간 버텼고, 대륙을 넘보는 일본의 잦은 침략을 견뎌냈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민족이 두 동강 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평화를 추구해 오늘의 위치에 이르렀다. 지난 8·15 경축사에서 대통령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말했다. 하지만 아직 미국의 전 지구적 영향력은 쇠퇴하지 않았고, 미래의 우리가 누구와 함께 갈지 결정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우리가 홀로 가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어려움과 맞닥뜨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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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 기사를 살펴보면 조국 법무부 장관과 관련되지 않은 걸 찾기 어렵다. 그동안 쏟아낸 기사가 수십만건에 이른다는 얘기도 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것도 많고, 추측기사도 적지 않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신상털기나 가짜뉴스와 다를 바 없는 ‘카더라’ ‘아님 말고’ 식의 기사들을 읽고 나면 피곤과 짜증이 밀려온다. 

언론을 신뢰할 수 있다면 이런 소동들이 소위 ‘알권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전례를 살펴보면, 어떤 언론사는 의도적으로 가짜뉴스를 만들어낸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려울 정도이다. 요즘 시국에 별 관심은 얻지 못하겠지만 한 경제전문지의 이상한 기사에 대해 짚어보았다.

몇 개월 전 한 경제신문에 “시세 80%로 취약계층 위한다는 ‘사회주택’…달동네로 떠밀린 ‘깡통 사회주택’만 속출”이란 기사가 실렸다. ‘달동네’와 ‘깡통’이 뜻하는 바를 상식적으로 풀어보자면, 각각 ‘산등성이나 산비탈 등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비어있음’ 정도일 것이다. 이에 바탕을 두고 기사의 적절성과 사실 여부를 따져보았다.

우선 사회주택정책에 문제가 있다며 제목으로 뽑은 ‘취약계층을 위하는 사회주택이 달동네에 공급된다’는 명제는 사회주택 비판의 논리적 근거가 되기 어렵다. 저소득층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 주변시세보다 더 저렴한 주택이 공급되었다면 주거안정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기자의 신념이 서울시 전역에 사회주택이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달동네에만 공급되는 것을 비판할 여지는 있다. 그런데 ‘달동네에 떠밀렸다’고 단정할 근거가 없다. 

서울시의 사회주택이 공급된 지역은 ‘사회주택플랫폼(http://soco.seoul.go.kr/)’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1인 가구 기준 455가구가 공급되었는데, 동별 공급량이 20가구 이상인 경우를 내림차순으로 살펴보면 성북구 성북동 42가구, 관악구 신림동 40가구, 은평구 갈현동 33가구, 강남구 역삼동 28가구, 종로구 이화동 27가구, 강북구 수유동 27가구, 마포구 연남동 26가구, 은평구 녹번동 25가구, 서대문구 연희동 24가구, 관악구 봉천동 22가구이다. 접근성의 기준인 전철역까지의 거리를 살펴보면, 평균거리는 640m이다. 통상적인 도보생활권의 기준인 500m와 별 차이가 없는데, 전체의 절반이 넘는 232가구가 전철역에서 500m 이내에 위치한다. 21세기 서울에서 달동네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억지에 불과하다.

한편 2019년 8월 말 기준으로 서울시 사회주택의 공실은 82가구이다. 전체 공급량의 18%에 해당한다. 전철역까지 거리에 따라 구분하여 집계해보면 500m 이내의 공실은 31가구, 500m 범위 밖의 공실은 51가구이다. 전철에 대한 접근성이 양호한 곳의 공실률은 13% 수준이며, 전철과 다소 거리가 있어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의 공실률은 23% 수준으로 조금 높다. 하지만 깡통 운운할 정도는 아니다.

같은 기자는 사회주택에 관한 기사를 두 꼭지 더 작성하였다. 각각 “사회주택 먼저 도입한 유럽 각국, 취약계층 주거 보조금으로 선회” “밑 빠진 독 지원하더니…서울시 사회주택기업 ‘연쇄 부도’ 위기”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앞의 기사는 유럽의 사회주택 지원제도를 엉뚱하게 해석하여 유럽에서는 사회주택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식의 잘못된 제목을 달았다. 뒤의 기사는 한 업체가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전체 사회주택이 부실하다고 부풀리기 위해 비약과 억측으로 채워 문제가 많다. 

이런 기사들은 소셜미디어나 커뮤니티에서 무책임하게 생성되는 가짜뉴스와 다를 바가 없다. 

가짜뉴스는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멀쩡하던 회사가 큰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다. 기사의 탈을 쓴 가짜뉴스를 걸러내기 위한 언론의 자정 노력이 절실하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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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싸고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어떤 이들은 그가 한때 대한민국의 체제전복을 꾀했던 사노맹 소속으로 활동했다는 점을 들어 빨간색을 덧칠한다. 또 어떤 이들은 진보주의자가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십억원대의 자산가가 될 수 있었냐며 냉소를 퍼붓는다. 다른 이들은 그의 딸이 온갖 편법으로 스펙을 쌓아 명문 대학에 입학한 것 아니냐며 분노한다. 앞의 둘은 별 관심이 안 갔지만, 마지막 문제는 달랐다. 한국 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스펙에 빠져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가시적 징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하루 앞둔 5일 오후 국회에서 방송사 관계자들이 중계 준비를 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2007년 당시 고교 1학년이던 조국 후보자의 딸은 한 의과대학 연구소에서 2주간 인턴 활동을 한 후 국내에서 발행하는 SCI 학술지에 제1저자로 영어 논문을 실었다. 일반인들은 SCI가 무엇이고 그것이 한국 과학계에서 어떤 지위를 누리고 있는지 짐작조차 어려울 것이다. SCI는 Science Citation Index의 약자로 과학자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과학 논문을 한군데 모아놓은 데이터베이스다. 원래 1960년대 미국의 민간 과학정보연구원이 세워 운영하다가 현재는 거대 글로벌 기업이 도맡아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있다.

한국 학계에서 SCI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세계화 바람이 거세게 불 때부터다. 이전까지 한국 학계는 일종의 동호인 소모임과 비슷해서 아는 사람끼리 학술지를 만들어 서로 논문을 실었다. 심사가 제대로 이뤄질 리 없고 안면과 인맥으로 논문의 운명이 결정되곤 했다. 이러한 부끄러운 관행은 교육 당국이 SCI 학술지에 영어 논문을 쓰라고 압박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학이 아무리 중립성과 객관성을 내세우고 있다지만 외국 학술지에 영어 논문을 싣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과학계는 앞다투어 국내 학술지를 SCI 학술지로 바꿔치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 과학계는 나름 SCI 학술지를 여럿 거느리게 되었다. 굳이 외국 SCI 학술지에 기를 쓰고 논문을 투고해야 할 필요가 줄어들었다. 국내 SCI 학술지에 논문을 많이 싣게 되니 교육 당국이 그토록 원하는 세계화 지수가 가파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 국내 SCI 학술지에 조국 후보자 딸의 영어 논문이 실렸다. 영어 번역에 힘쓴 것이 고마워 연구책임자가 호의로 제1저자에 넣어준 것이라 한다. SCI 학술지가 과학자와 고등학생이 스펙용 성과를 서로 주고받는 호혜성의 장으로 돌변한 것이다. SCI 논문이 취업, 승진, 연구비 확보를 위한 스펙용으로 위력이 있다는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대학입시에도 효용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스펙 사회! 자연과학의 SCI를 본떠 사회과학에는 SSCI(Social Science Citation Index), 인문학에는 A&HCI(Arts and Humanities Citation Index)가 있다. 세계화 바람을 등에 업은 교육 당국은 글로벌 사기업이 만든 지표를 토대로 대학의 세계화 정도를 재고 차등 지원해 왔다. 등록금 동결로 한 푼이 아쉬운 대학은 더 많은 재정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SSCI와 A&HCI 학술지에 영어 논문을 실은 학자를 우대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존 학자는 물론 학문 후속세대마저도 독창적인 문제를 제기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스펙용 논문을 싣는 ‘방법’ 터득에 몰두하게 되었다.

적폐청산을 외치며 출발한 문재인 정부는 다른 건 몰라도 학계에서 일어난 세계화 적폐에는 손도 못 대고 있다. 그러는 사이 학술지가 연구자는 물론 가족과 지인의 스펙을 쌓는 장으로 오염되고 있다. 연구자의 윤리 결핍도 문제지만, 외국 지표를 무기로 단기 성과를 내라고 윽박지르는 정책도 그에 못지않다. 정작 외국 학계에서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지표를 맹종하는 정책을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당장 폐기하기 어렵다면, 교육 당국이 국민 세금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KCI(Korea Citation Index)에서 제대로 된 지표라도 만들자. ‘소위’ 전문가집단의 스펙 쌓는 데에만 도움이 되는 학술지 대신 우리 삶의 문제에 대해 우리 언어로 새로운 연구 질문을 던져 토론과 논쟁의 장을 만들어나가는 학술지를 우대하라!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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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사건을 다뤄왔습니다. 보람을 느끼기도, 안도하기도, 슬프고 아프기도 했습니다. 사건을 종결하고도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남아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은 아동, 청소년이 유명을 달리한 사건들이었습니다. “제대로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어느 선배 판사의 말은 아직도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런 사건은 사실 우리 생활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교통사고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운전자의 부주의 뒤에는 관심 부족, 시스템 부재가 작용하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년간 수출 종목으로 자동차 생산에 전념해왔습니다. 도로를 넓혀서 자동차의 도로 주행 속도를 올렸습니다. 법령을 정비해서 종합보험에 가입돼 있으면 특별한 잘못을 제외한 교통사고에 대해 처벌을 면하는 특례까지 두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사람들은 도로 밑으로 굴을 파서 길을 건넜습니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차가 먼저 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골목에서도 차가 오면 양보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차는 남을 윽박지를 수 있는 권력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몹시 불편합니다. 

‘걷기 좋은 도시’를 추구하면서 걷기 환경은 꽤 좋아졌습니다. 지하도가 있어도 도로 위로 횡단보도를 내줬고, 주말에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차 없는 길을 만들어줬습니다. ‘보행자 주권’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런 노력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실제로 교통사고 사망 사고는 줄고 있습니다. 그래도 길을 걷고 도로를 건너다 보면 보행자는 여전히 을(乙)입니다. 그래서 우회전 차량에 대한 시스템을 정비하겠다는 소식은 반갑습니다. 학교 앞 교통시설에 대해 두 가지 제안을 할까 합니다. 

첫째, 학교 앞 횡단보도 면적 넓히기. 학교 앞 횡단보도의 면적을 지금보다 2배 이상 넓히면 좋겠습니다. 서울 대학로 큰길에 제법 넓은 횡단보도가 있습니다. 넓어진 횡단보도가 보행자에게 어떤 안정감을 주는지 알 수 있습니다. 횡단보도가 넓어지다 보니 그 안에 차가 들어설 수 없습니다. 어지간한 파렴치가 아니고서는 그 넓은 횡단보도에 차를 들이고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차 두세 대 정도 공간이면 횡단보도를 두 배로 넓힐 수 있습니다. 넓어진 자리만큼 차는 공간을 손해 보지만, 사람은 그 몇 곱절 더 많이 그 공간에 다닐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양해는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학교 앞 횡단보도는 지금보다 2배 이상 폭을 넓혀도 됩니다. 

둘째, 교차로 대각선(X자형) 횡단보도 늘리기. 차를 위해서는 동시신호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위한 동시신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4거리 교차로에 횡단보도는 모서리 4개에 대각선 2개, 모두 6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대각선 횡단보도야말로 차가 아닌, 사람을 위한 동시신호입니다. 대각선 횡단보도야말로 ‘횡단’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점점 늘고는 있지만, 지금보다 더 전향적인 생각으로 대각선(X자형) 횡단보도를 대폭 확대하면 좋겠습니다. 특히 학교 주변에는. 

안전 말고도 제가 이런 제안을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질서 의식을 가르치려면 학교 앞에서, 그리고 제일 눈에 잘 띄는 곳부터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횡단보도에 차가 떡하니 들어서 있고, 신호 지키기를 기대하기보다 신호를 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이 많다면 이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단속, 규제, 이런 말에 시민들이 공감하고 따르리라 기대해선 곤란합니다. 우리 시민 의식은 이미 그보다 앞서 있습니다. 정권마다 구호처럼 외치는 ‘법치국가’의 초석을 다지려면 단속하고 규제하기보다, 시스템부터 훑어봐야 합니다. 우회전하는 차 보고 알아서 안전하게 운전하라, 정지선을 지키라고만 이야기해서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시스템을 바꿔서 설득해야 합니다. 불합리한 현상을 그대로 두고 단속할 테니 지키라고만 하면 시대착오입니다. 차에서 내려 현장에 나가보고 직접 걸어 다니면서 역지사지의 마음과 눈높이로 시민의 생각을 읽어야 합니다.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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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요즘 화제다. 책 곳곳에서는 소위 ‘꼰대질’을 하는 기성세대와 자신을 ‘호갱’으로 대하는 기업을 외면하는 청년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사고방식, 행동, 양태 차이점을 잘 보여준다. 간단, 재미, 정직이라는 키워드다.

우리 연구소의 20대 연구원도 비슷하다. 관심 없는 내용은 읽지 않고, 3줄 이상의 댓글은 읽지 않는다. SNS에서 큰 이모티콘은 싫어한다. 스마트폰 데이터 비용이 아까운지라 고용량 사진은 사절한다. TV는 보고 싶은 장면만 찾아서 본다. 일상의 대화에서 ‘월급 루팡’(월루)과 같은 알아듣기 힘든 줄임말도 자주 사용한다. 그렇다고 1990년대 청년들이 어설프고 맥락이 없진 않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청년들은 우리 사회가 해석해준 대로 살아야 하는 삶을 당당히 거부한다.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청년들이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더 많은 변화, 더 넓은 참여, 더 나은 미래’를 실현하고자 한다. 우리는 서울청년시민회의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청년시민회의는 2017년 시작되어 3년째다. 올해는 시장 직속의 ‘청년청’과 함께 약 500억원의 청년자율예산제를 논의하는 플랫폼이 되고 있다.

청년시민회의는 지난 6개월간 청년 1000명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자기 목소리를 내온 공간이다. 20대 초반부터 직장인까지 매우 다양한 청년들은 더 나은 변화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학생(193명), 회사원(168명), 청년활동가(97명), 구직 청년(89명), 프리랜서(63명) 등 매우 다양하다. 1000명이나 되는 청년들은 왜, 어떤 이유로 한자리에 모였을까. 학교 졸업 후 대기업 취업을 당연시하거나, 공무원시험 준비가 전부인 것에 대한 거부일지도 모른다. 바뀌지 않는 사회에 대한 변화의 욕구인 것 같다. 아무리 요구해도 변화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섭섭함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년간 학교를 벗어난 청년들에게 자기증명만을 요구했을 뿐, 사회 가치에 대한 목소리를 낼 공간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청년들의 진지함은 1970년생인 내게는 충격이었다. 몇 차례에 걸쳐 자기 시간을 내면서까지 각자도생의 시대에 그들의 언어와 목소리로 청년정책을 만들고 있었다. 시민으로서 평등권을 보장하는 작은 참여를 요구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함께 소통하는 길입니다!”라는 무박2일의 워크숍에서 눈에 띈 문구는 청년 감수성을 가늠케 한다.

도시주거, 건강, 교육, 복지안전망, 일자리경제, 민주주의, 평등다양성 등 30여개 분과로 나뉘어 6개월간 청년정책을 만들었다. 일반(45개), 특별기획(9개), 자치구(42개)까지 총 96개 정책이 제안되었다. 프리랜서 안전망부터 안전한 공간, 은둔형 외톨이, 쫓겨나지 않는 도시, 일터 내 민주주의, 중소기업 복리후생 계좌제까지 현실적 정책들이다. 지난 3월 첫 모임을 시작으로 분과회의, 소주제회의, 부서 간담회까지 치열한 고민을 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사업은 특별기획과 자치구 영역이다. 2개 이상의 영역에 걸쳐 추진돼야 할 특별정책과 지역문제 해결 자치구형 정책을 위해 제안된 것들이다. 특히 서울시 청년자치예산 중 자치구에 5분의 1이 할애됐다. 16곳에 77억원이 배정됐다. 소소한 식탁, 재능 공유 마켓, 마음건강, 1인 가구 기반 조성, 미래직업 양성 등 동네 참여예산의 실현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와 자치구라는 지역을 연결하려는 청년들의 세밀함을 엿볼 수 있다. ‘정책의 변화’와 ‘시선의 확대’를 느낄 수 있다.

청년시민회의를 시작했던 청년들은 ‘1000개의 필요, 500개의 아이디어, 100개의 정책’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경험도, 언어도, 풍경도 낯설었던 행정조직에서 그들은 어떤 상상력을 펼쳤을까. 8월31일 보편적 권리로서 지방정부의 청년정책을 확인하고 싶다. 공정성이 화두인 요즘, 불평등과 격차해소의 중요성이 논의되면 좋겠다. 이제 우리도 핀란드(주택수당, 마음건강), 오스트리아(교육훈련), 프랑스(자기활동계좌제), 영국(사회자본)의 정책들이 청년들의 언어와 상상력으로 도입되길 기대해 본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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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눈에 띄게 잦아지자 또다시 핵무장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보수성향의 전문가와 정치인들 중심으로 “핵무기를 배치할수록 비핵화 협상력이 커진다” “사생결단을 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 “전술핵 전진 배치, 핵억지력 강화 방안이 비핵화 협상에 반영돼야 한다” “미국이 핵우산으로 한국을 보호해주겠느냐”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핵의 균형’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공론의 장으로 한층 나온 느낌이다.

핵무장은커녕 전술핵이라도 남한 내에 반입되면 북한 비핵화는 사실상 물 건너가고 덩달아 북한의 핵무장을 정당화하며 북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시킬 압박과 명분 역시 사라짐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게다가 전술핵이 들어오면 여섯 차례 핵실험으로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의 관에다 대못을 박는 셈이 된다. 이 과정에서 과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후과(後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중국의 군사적·경제적 위협과, 최악의 경우 단교(斷交)까지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학계, 정치권, 시민단체 등에서 전술핵 재반입을 공론화해 주길 제안한다. 전제가 있다. 주한미군(엄격히 말해 지상군) 철수와 연계하는 것이다. 넓게 보면 주한미군 철수는 진보진영의 비원(悲願)이었고, 전술핵 반입은 보수진영의 숙원(宿願)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과거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식으로 여러 차례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적정 수준의 미군이 전술핵을 통제할 경우 한국 자체 핵무장 욕구를 억지하는 효과는 분명 있다. 여기에다 근력을 키워 나가는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 장사꾼 트럼프에게는 가성비가 높은 흥미로운 옵션일 수가 있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미군을 철수하고 핵무기를 전진배치하는 것은 중국과의 전면전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결기가 없는 한 불가능한 시나리오이긴 하다. 중국은 미군이 한반도에서 나갈 경우 쌍수를 들어 환영하겠지만 미군 철수에 따른 안보 공백을 채우기 위해 일례로 베이징과 거리가 불과 1000㎞ 이내인 군산 공군기지에 미국이 전술핵을 재배치하는 것까지 용인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1967년 한 해에만 남한에 미국 핵무기의 숫자가 무려 950기였다는 점을, 그리고 박정희가 닉슨의 괌 독트린(1965·7·25)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막고자 제주도를 핵무기 기지로 미국에 제공할 수도 있음을 제안(1969·10)한 역사적 사실들을 미국이 모를 리가 없다. 그린란드를 매입하겠다는, ‘트럼프가 있는 미국’과 ‘트럼프가 없는 미국’은 같은 미국이 아니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프린터에 깊이 끼어있는 종이처럼 엉켜버린 상태에서 미국은 동북아시아 원 안에 ‘핵 보유국 북한’을 넣고 전략을 새롭게 짜고 있다. 문서상으로는 주한미군을 현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한국의 방위비분담금은 획기적으로 인상하고, 동시에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폐기에 따라 한국을 포함하여 동북아 지역 어디엔가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전략이다. 미국은 여러 선택 사항 중 경중(輕重)과 선후(先後)를 따진 후 우리의 급소를 찾아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럴 경우 관건은 내우외환을 겪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의 압력과 중국의 위협까지 동시에 감내할 여력이 있느냐이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만드는 높은 파도는 ‘평화경제’의 성벽을 아무리 높이 쌓고, ‘우리민족끼리’의 해자(垓字)를 아무리 깊이 파도 성 안으로 넘쳐 들어오게 마련이다. 

막스 베버는 선(善)은 선에서만, 악(惡)은 악에서만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정치적 어린아이’(political infant)라고 했다. 선한 의도가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음은 동서고금의 불편한 진실이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자강(自强)과 균세(均勢)를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이 정치적 유아(幼兒)가 될지 아니면 정치적 거인이 될지 두고 볼 일이다.

<이병철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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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키우며 세상에 쉬운 일이 없음을 간절히 느낍니다. 김성태 의원도 아버지로서 마음고생이 많지 않았을까요. 딸은 취업은 고사하고 취업 준비도 잘 안된 듯합니다. 서류전형 탈락, 면접 최하위권 등의 성적을 보면 말입니다. 검찰에 따르면 김 의원은 KT에 딸을 채용하도록 청탁했고, 그 결과 정규직 자리를 꿰찼습니다. 하지만 김성태 본인은 이를 검찰의 무리한 기소, 정치보복이라는 주장 등을 하며 눈물까지 보였습니다. 최종 법적 판단을 기다려 봐야겠죠. 문제는 김성태가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입니다.

헌법 46조는 국회의원의 청렴, 양심, 공익 추구 의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책임이 단순히 도덕적인 것을 넘어 제도적, 정치적 근간임을 말해주는 것이죠. 공익은 말 그대로 공공의 이익이고 사적일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개인이 더 이득을, 다른 누구는 손해를 보기는 합니다. 지역경제를 위해 도로를 건설해도 누구는 집값이 올라 이득을 챙기지만, 다른 누구는 소음과 먼지로 괴롭죠. 어떤 공공정책도 이런 양면성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의가 중요합니다. 전체를 위했다는 대의와 명분이 없으면 어떤 정책도 효과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공익을, 대의를 추구한다는 대중의 신뢰는 민주사회 질서의 근본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회의원이라는 자리가 갖는 ‘정치적’ 책임이 그만큼 엄중한 것이죠.

김성태는 그 정치적 책임을 저버린 셈이 됐습니다. 드러난 정황이 심각한 만큼 자리에서 물러나고 법적 다툼을 하는 게 맞죠. 하지만 눈물이 나오고 “피를 토할”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비슷한 일이 너무 많으니까요. 당장 KT 채용 의혹만 봐도 다른 전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들이 의심을 받았습니다. 강원랜드 비리도 판박이 꼴이었죠. 채용비리뿐만도 아닙니다. 특활비를 줄였다지만 국회 예산을 빼돌리거나 주변에 몰아준 사례도 수없이 많습니다. 주식을 가진 회사를 위한 법안을 발의, 재산을 불리기도 하죠. 그렇다고 할 일은 제대로 하나요? 전 국민 앞에서 폭력과 폭행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파업마저 일삼습니다. 그사이 사회 곳곳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법안은 빛을 못 봤습니다. 추가경정예산안도 제출된 지 100일이 되도록 버려져 있었죠.

반면 자기 목과 밥그릇 지키기에는 열심입니다. 자유한국당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저지 폭행 조사를 원천무효, 정치공세라며 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불체포특권’을 악용해 경찰 수사를 피하는 셈이죠. 이런 식의 방탄국회는 수도 없지만 개선하려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제 목에 방울 달기 싫은 겁니다. 4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국회는 ‘김영란법’을 통과시키면서 ‘이해 충돌 방지’ 규정을 뺐죠. 김영란 전 대법관 본인이 반쪽 법안이라고 꼬집은 이유입니다. 이를 올해 정부가 다시 추진하면서 ‘국회의원’을 적용 대상으로 명시했지만, 통과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국회를 보고 있으면 “재산상의 권리·이익 또는 직위를 취득하거나 타인을 위하여 그 취득을 알선”하는 데 너무 익숙하고 편안해 보입니다. 다들 하니 나도 한다. 그래서 한 것뿐인데, 내가 누군데 처벌은 말도 안된다. 모두 이러는 사이 국회의원 질은 하향평준화됩니다. 게다가 시급한 현안은 논의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국회가 신뢰도가 가장 낮은 국가사회기관 1등(올해 1.8%), 2등(2018년 2.4%)을 다투는 게 당연하죠. 국회의 정당성이 약해지면서 민주체제의 근간도 흔들립니다. 이런 자들이 만든 법에 믿음이 갈 턱이 없고, 지키자니 억울하고 벌 받아도 억울합니다. 특단의 조치를 위한 시민들의 지혜와 힘을 급히 모아야 합니다. 국회의원의 돈 씀씀이도 줄이고 임기도 미국 하원처럼 2년으로 단축해야 합니다. 임기를 줄이는 게 당장 어려우면 4년에 한 번 있는 선거를 2년에 한 번씩, 의원 절반을 뽑는 것은 어떨까요. 공수처를 빨리 만들고 고위공직자들 죄는 일반인보다 더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민의를 듣고 법을 만드는 게, 거들먹거릴 일이 아닌 보통 업인 사회는 기다린다고 오는 것은 아닐 테지요.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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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의 일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가족과 함께 집 근처 나들이를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인천 계양산 자락에 예쁜 정원이 갖춰진 카페가 있었다. 열 살 난 딸과 아내랑 함께 바람이나 쐴 겸 향했다. 카페는 주차할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북적였다. 갑자기 딸이 “아빠! 여긴 내가 못 들어가는 곳이야. 여기 ‘노키즈존’이라 13세 미만 어린이는 들어갈 수 없대”라고 한다. 검색할 때는 몰랐는데,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입구에 정말 그런 푯말이 서 있었다. 

부랴부랴 다른 곳을 찾아갔다. 아이에게 코코아 한 잔을 사주며 차별당하고 거절당한 기분에 대해 물어봤다.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기분이 어때?”라고 묻자, 아이는 “아빠, 엄마랑 오랜만에 바람 쐬러 나왔는데 나 때문에 못 가서 미안해”라고 한다. 혹시 ‘여자’라서 차별당한 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만약 네가 한국 사람이어서 또는 피부색이 달라서 차별당한다면 어떨까?” 하고 물었더니 정말 불쾌한 표정으로 “그렇다면 정말 화가 날 것 같다”고 했다. 

우리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며 평등권을 기본적 권리로 선언하고 있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 조건 없는 평등이 민주주의와 근대 인권의 핵심 개념이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이를 법적·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실정이다. ‘차별금지법’이 입법예고된 것이 2007년의 일이다. 어느새 12년이나 경과했지만, 지금까지 이 법이 제정되지 못한 까닭은 ‘성적 지향’을 문제 삼은 일부 보수개신교와 출신국가와 성별 등으로 노동조건을 차별하는 재계의 반대, 그리고 이에 동조하거나 눈치를 보아 온 정부와 국회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차별과 혐오 정서는 더욱 커져가고 있다. 우리는 1992년 유엔난민협약에 가입했고, 2013년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한 국가이지만, 지난해 제주 난민 사태가 보여주듯 난민 혐오 정서가 강한 사회이다. 3·1운동 100주년이라지만, 과거 우리도 나라를 잃고 세계 곳곳을 떠돌던 난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연세대학교에서는 이번 학기부터 실시하기로 한 보편적 인권교육에 대해 일부 세력이 ‘기독교정신에 반하는 인권교육’이라거나, ‘강제적 인권교육으로 학생의 교육선택권’을 침해한다며 반발하고 나서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12년 “각종 차별 문제를 근본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참여정부에서 추진되었던 차별금지법 제정을 다시 추진할 것”이라고 공약했었다. 그러나 2017년 대선 때는 ‘국가인권위원회 법이 존재하므로 불필요하다’며 공약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했다. 이후 유엔에서 수차례에 걸쳐 우리 정부에 성별·연령·인종·장애·종교·성적 지향·학력 등이 포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지만, ILO 핵심협약 비준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함께 잘사는 나라’, 누구나 공정한 기회를 가지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나라”라고 했다. 

우리에게 차별금지법과 ILO 핵심협약 비준이 필요한 이유는 작게는 공동체 내부의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고, 차별과 혐오가 죄라는 사실을 널리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더 넓게 보면 조건 없는 환대(hospitality)라는 인류 보편의 정의를 위한 것이다. 환대는 공동체 안에 이미 있는 자,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배제되고 소외된 자에 대한 환대이다. 대통령이 말하는 ‘함께 잘사는 나라’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마음을 울리는 경축사와 선언을 들려주었고, 시민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 땅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위한 정부와 대통령의 의미 있는 실천이 보고 싶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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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차는 왜 고장이 잦을까? 

조지 애컬로프는 1970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정보의 비대칭’ 때문에 시장에서 질이 나쁜 물건 위주로 거래된다고 결론지었다. 판매자와 달리 구매자는 차의 특성이나 성능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판매자가 매긴 가격이 합당한지 확인할 방도가 없어서 ‘뽑기 운’에 기대야 하는 구매자는 평균 가격 정도를 지불하려 할 것이다. 그 가격에 좋은 차를 팔 수는 없지만 나쁜 차를 파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 결국 나쁜 차만 거래된다. 

이처럼 정보의 불균형이 존재하므로 합리적인 시장이 형성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연구하는 분야를 정보경제학이라고 하며, 이를 집대성한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2001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정보의 비대칭이 낳는 여러 문제 중에 대리인 딜레마가 있다. 본인·대리인 문제라고도 하는데, 분업을 기본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흔히 발생한다. 일을 맡기는 사람이 맡을 사람의 행태, 즉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제대로 된 재료를 사용하는지 등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을 맡기는 당사자의 편익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비효율이 생긴다. 

이런 문제는 경제활동뿐만 아니라 정치나 공공행정에서도 폭넓게 관찰된다. 정보의 우위를 지닌 정치가나 행정가의 경우 자칫 주민의 편익을 무시하는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도 있다.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정치와 공공행정에서 발생하는 대리인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는 주민 주도의 노력 중 하나가 참여민주주의이다. 적극적으로 정보의 공개를 요구하고 정책 결정에 참여하려는 행동이다. 주민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치를 실현하기도 한다.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마을활동을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마을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마을활동을 하는 이유도 다양하다. 참여민주주의나 주민자치의 실현은 수많은 마을의 욕구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다. 이른바 ‘행복추구권’ 또는 ‘자기결정권’에 대한 조항이다. 자기결정권이란 어떤 권력, 권위, 규범, 관습, 통념 등의 간섭 없이 자기 운명에 관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의적 권리를 말한다. 

마을활동을 살펴보면 자기결정권의 발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을공동체 활성화에 대한 지원은 헌법에 따른 기본권 보장이다. 

2012년 무렵 각 지자체에서 조례를 제정하여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주민의 자치요구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의도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앙부처별로 각각 주민활동 지원사업을 벌임에 따라 지방행정도 실국별로 유사한 사업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형식적으로나마 마을공동체 활성화라는 명칭으로 흩어져 있던 지원사업을 묶으려는 의도가 보이기도 한다. 귀찮고 어려운 일을 주민에게 떠넘기려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행정의 연장으로 여기는 셈이다. 

이런 인식은 중간지원조직에 대한 관리와 간섭을 통해 드러난다. 모 광역단체의 협치 담당 팀장이 중간지원조직의 활동가들을 모아놓고 “당신들은 공무원과 같으니 근태관리를 받는 게 당연하다. 모든 활동을 일일이 보고하라”고 일장훈시를 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런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마을공동체에 대한 제대로 된 지원이 가능할 리 없다. 중간지원조직의 수많은 활동 중에는 위탁받은 행정업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주민자치나 자기결정권 실현이라는 주민의 염원도 실현해야 하는 매우 복잡하고 어렵고 헌신적인 활동도 중요하다. 마을에 대한 지원, 중간지원조직의 운영과 존폐에 대한 권한을 지닌 지방자치단체의 올바른 인식과 태도가 절실하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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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 휴게소에 잠시 내렸다. 15분의 짧은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화장실에 잠깐 들른 후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한 터라 출출했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주문대로 갔다. 사람 대신 사람 키의 입간판이 맞이했다. 더 이상 사람이 주문을 받지 않으니 키오스크(Kiosk)라는 무인자동결제기를 사용하라고 일러주고 있었다. 키오스크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서두르라고 재촉하는 낌새가 느껴졌다. 스크린 터치를 몇 번 하다 연이어 실수를 하니 조바심이 났다. 우물쭈물 제대로 주문도 못하고 나왔다. 가판대에서 핫도그나 살까 했더니 여기도 키오스크였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 포기하고 돌아섰다. 어느새 버스 떠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늦은 저녁에 식당에 갔다. 식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가 둘러보았지만 손님은커녕 주문받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속이 훤히 보이는 주방에 요리사만 달랑 있었다. 키오스크를 이용하라는 안내문이 보였다. 지난번 경험도 있고 해서 이번엔 아주 자신만만하게 키오스크 앞에 섰다. 몇 번의 스크린 터치를 통해 무사히 주문을 마치고 뿌듯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음식을 기다리는데 손님이 들어왔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것 같았다. 시어머니가 아주 호기롭게 음식을 사겠다고 한다. 그런데 키오스크로 주문한다는 말에 어쩔 줄 몰라 한다. 며느리가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나서자 아니라며 신용카드를 뽑아든다. 몇 번의 실수를 거듭하자 보다 못한 며느리가 자기 신용카드를 꺼냈다. 가벼운 실랑이가 오간 후 결국 시어머니는 포기하고 며느리가 계산했다.

패스트푸드점에서나 활용되었던 키오스크가 일반 식당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서비스’는 키오스크에 떠넘기고 ‘물질’을 팔고 있다. 명분은 효율성이다.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의 욕구를 최대한 빨리 성취하게 해준다. 판매자는 인건비를 줄여 더 많은 이윤을 빨리 뽑아낸다. 구매자는 표준화된 제품의 카탈로그에서 원하는 음식을 골라 최대한 빨리 위장의 결핍을 채운다. 사회학자 조지 리처는 이를 사회의 맥도널드화라고 일찍이 말했다. 맥도널드화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효율성이다. 하지만 판매자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구매자에게 떠넘기는 것이니 구매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효율적이지 않다. 효율성마저도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이를 깨닫게 되면 구매자의 방문이 줄고 판매자의 이윤도 축난다.

한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고객이 무인 키오스크를 이용해 햄버거를 주문 하고 있다. 주영재 기자

일반 식당에까지 키오스크가 확산되는 것은 한국 사회 전체가 ‘키오스크 사회’로 대전환하고 있다는 메타포다. 문화적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대전환은 양가적이다. 우선 전자기기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행위자에게 자유를 준다. 판매자와 구매자가 전자기기를 통해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익명성이 극대화된다. 그들 모두 사람으로서 마땅히 주고받아야 할 의례의 압박에서 벗어난다. 서비스산업이 요구하는 감정노동과 감정관리의 필요성이 줄어든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사회학자 지멜이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든 ‘사회적 어울림’(sociability)을 쪼그라트린다. 사회적 어울림은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마치 동등한 것처럼 대하는 동시에 서로를 독특한 존재로 존중한다. 신분제를 제거했다는 현대사회에서도 시민들은 여전히 사회구조적으로 동등하지 않다. 그럼에도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갖추고 있다면 사회적 어울림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키오스크 사회는 다른 시민들과 마주할 사회적 장을 줄임으로써 이러한 문화적 역량을 키울 기회 자체를 축소시킨다.

키오스크와의 상호작용이 사회적 어울림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전자기기와 상호작용하려면 교육받아야 하듯 사람과 상호행위하기 위해서도 배워야 한다.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대할 수 있는 게임의 규칙을 습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게임을 펼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 키오스크의 확산을 단지 경제적 효율성이나 접근의 평등성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되는 이유다. 키오스크 사회가 번져갈수록 더욱더 사회적 어울림의 공간을 이곳저곳 널리 구축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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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 권리를 말합니다. 인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와 정부는 이런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할 책무를 가집니다. 나라 밖으로 잠시 나가보겠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국제법이 작용합니다. 전 지구를 아울러 국제법이라고 부를 만한 실체는 1차 세계대전 후에 생겨납니다. 끔찍한 전쟁을 겪고 나서야 국제법 관념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까지는 인권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국가 간 연맹이 느슨했고, 여전히 식민지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상황이 달라집니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전후방 구분도 없이 도시 전체가 격전지가 되어 버렸고, 무기 성능 향상으로 민간인 피해가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나치 정권은 국가의 이름을 걸고 홀로코스트를 자행합니다. 그 끔찍한 상황을 보고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국제법이 개인의 인권 보장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을 보호하자는 소극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누구든 인간으로서 국가와 국제사회의 부당한 간섭 없이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고, 그런 권리가 침해되면 개인이 인권을 걸고 자기의 이름으로 배상청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유엔은 2005년 그 확인을 위한 결의를 합니다. ‘Basic Principles and Guidelines on the Right to a Remedy and Reparation for Victims of Gros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 Rights Law and Seriou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약칭: 피해자 구제권리 기본원칙과 가이드라인)’라는 결의입니다. 국제인권법이나 국제인도법의 중대한 위반으로 피해를 입은 개인은 국가나 법인, 개인을 상대로 직접 손해배상 청구권을 가진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결의는 그때까지 확립된 국제법상 개인 권리에 관한 법리를 집대성한 문서로 ‘피해자 권리장전’으로 불립니다.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으니까 독일과 일본도 당연히 찬성했습니다. 독일은 이런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정당 성향에 상관없이 누가 총리가 되어도 희생자 앞에 무릎을 꿇고 헌화하면서 사과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가 인권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그 흐름을 말씀 드렸습니다. 국제기구 근무 경험을 가진 동료 판사가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잠시 질문 드리겠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대신 포기할 수 있나요? 질문을 약간 바꿔서, 인권에 부당한 침해를 받은 국민이 배상청구를 하면 국가가 그 청구를 못하게 막을 수 있나요? 법률 관계는 개인과 기업, 개인과 국가, 국가와 국가 간에 모두 성립할 수 있고, 이들 법률 관계는 서로 간섭하지 않습니다. 서로 간섭할 수 있다고 하면, 특히나 국가가 개인의 권리 행사를 대신할 수 있다거나 포기시킬 수 있다고 하면, 그런 체제는 전체주의입니다.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국가의 3요소 가운데 국민이 사라진 체제입니다. 국가와 정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은 뼈아픈 경험과 지극히 당연한 논리에서 비롯한 인권을 향한 발걸음이자, 세계가 공감하고 격려하는 옳은 방향입니다. 이웃나라에서 강제징용 판결 때문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흐름, 무엇보다 인권에 기초해서 2012년, 그 후로 6년이나 지난 2018년에야 대법원은 강제징용자들의 권리를 최종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웃나라 사정은 당파적 이익을 위한 정권의 선택이지 나라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안쓰럽습니다. 언제 의자를 돌려 앉아 자국 국민에게도 같은 요구를 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일본 국민이 정부보다 현명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시간은 연속하고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작용하며 이어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성하는 미래는 소중합니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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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우버나 배달앱으로 표현되는 ‘플랫폼노동’이 사회적 이슈다. 우리는 ‘타다’ 드라이버나 ‘쿠팡’ 플렉스 기사, ‘대리주부’ 가사서비스 직업이 대표적이다. 이들 대부분 정보통신기술(ICT)과 융합되어 하나의 산업 생태계가 형성된 곳이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들이 하나둘 생겨나더니 어느덧 꽤 많아졌다. 이미 배달업 다수는 플랫폼노동으로 이동했다. 몇 년 전과 달리 일자리 지도가 바뀌는 것 같다. 그렇다면 플랫폼노동은 우리에게 기회일까, 장애일까. 

영국이나 미국은 물론 유럽연합 국가들에서는 취업자의 2% 남짓이라고 한다. 특히 기술발전으로 온라인 노동의 증가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201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보니 거의 매년 26% 이상 성장하고 있다. 특히 소프트웨어 개발 및 크리에이티브, 멀티미디어 직업군의 성장이 확인된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디지털 부둣가’나 ‘디지털 갤리선 노예’처럼 일감 찾는 가상이민과 같은 표현도 사용한다. 유럽연합이나 미국, 영국에서 플랫폼노동 규모는 취업자의 0.5%에서 4.0%로 추정된다. 우리도 올해 처음 플랫폼노동 규모가 발표되었는데 취업자의 약 53만명(1.5~2.3%) 수준이다. 아마도 IT나 물류유통 산업의 규모를 보면 그보다 더 많을 것 같다.

이런 이유로 국제노동기구(ILO)는 디지털 경제시대 노동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플랫폼노동의 정의와 유형부터 대안까지 매우 활발하다. ILO는 플랫폼노동을 온라인 작업의 ‘웹’(web) 기반 일자리와 배달운송·가사서비스 작업처럼 ‘지역장소’(local) 기반 일자리로 구분한다. 언론에 알려진 몇몇 사례만 보더라도 플랫폼노동은 전 세계 다양한 지역의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소득 수단을 제공한다. 앞으로 디지털경제 시대의 핵심은 데이터 가치 창출인데, 제조업 못지않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 같다. ‘바퀴 달린 컴퓨터’라는 표현처럼 플랫폼노동은 기존 유해 환경에서 벗어난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다. 또 일과 삶의 균형이 자유로운 일자리도 있다. 꼼꼼히 봐야겠지만 가사서비스 영역처럼 비공식 부문의 일이, 공식부문으로 전환된 긍정성도 있다. 

문제는 산업은 성장하는데 명확한 사용자가 없다. 그래서 고용 없는 성장이라고도 한다. 이유는 플랫폼노동 다수가 근로계약이 아닌 사업자 계약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최저임금이나 휴일휴가, 퇴직금, 사회보험 등을 적용받지 못한다. 실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플랫폼노동은 보수가 낮고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제공받는다. 게다가 플랫폼노동자들은 기존보다 더 심각할 정도의 시간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 직업도 많다. 대표적으로 고객 서비스 평점이나 리뷰 시스템이다. 고객 평가는 소득과 일자리에 직결된다. 좋은 평가는 등급 향상으로 연결되고, 본인 소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부 기업은 서비스 평가가 낮은 사람들을 회원 목록에서 탈퇴시키기도 한다. 결국 고객에 의한 통제가 단순 통제가 아닌 일자리 상실의 신호인 것이다. 

이미 플랫폼노동은 국경을 초월하기에 노동법 준수 여부를 모니터링하기 어렵다. 계약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시정할 공식적인 제도도 없다. 일부 고숙련 일자리를 제외하면 중간 수준의 일자리들이 저숙련 플랫폼노동으로 대체될 개연성도 많다. 앞으로 플랫폼노동은 더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기에 최소한의 권리와 보호가 필요하다. 이미 대안적 논의는 시작되고 있다. 시장에서의 표준적인 계약과 수수료 책정, 계약방식이나 고용형태와 상관없는 사회적 안전망 적용, 데이터 및 사생활보호 논의까지 여러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디지털 과세’를 통해 플랫폼노동자의 소득과 실업급여, 유급휴가, 교육훈련 등의 비용에 활용하자는 주장도 있다. 프랑스(노동법), 덴마크(단체협약), 이탈리아(사회협약)에서는 플랫폼노동자에게도 노동자와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 사례도 있다. 이제 우리도 플랫폼경제시대, 기술혁신과 위험성 사이에서 미래의 일은 어떻게 변화될지 논의할 시점이 된 듯하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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