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대의 한 창업동아리가 온라인 커뮤니티와 카페에 자신들이 사용하던 볼펜을 판매한다는 글을 올렸다. 취지는 이랬다. “좋은 기운을 전해드리고자 직접 손편지를 쓰고, 공부할 때 사용한 펜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해당 게시물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번지면서 학벌주의에 대한 개탄이 이어졌다. 결국 이 창업동아리는 사과문을 올리고 상품 판매를 중지했다. 

이 ‘우발적인 해프닝’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주술에 빠져 있는지 새삼 일깨워준다. 이 동아리는 ‘공부의 신’이 사용하던 볼펜을 사서 공부하면 ‘좋은 기운’이 수험생에게 전염되어 시험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다. 단지 ‘사물’에 불과한 볼펜이 현실세계에서 ‘실제 효과’를 발휘하는 주술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주술은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합리적 목적을 비합리적 수단을 통해 성취하려 한다.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합리적 목적은 부귀영화와 장수 같은 실제적인 것들이다. 대개 사람들은 일상의 합리적 수단을 통해 이러한 목적을 추구한다. 하지만 아무리 합리적 수단을 활용해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으면 주술에 의지한다. 주술사는 초일상적 힘을 조작하여 현실세계에서 실제적인 목적을 얻으려고 한다. 

현재 한국 사회의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합리적 목적은 ‘생존’과 ‘성공’이다. 한국 사회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합리적 수단으로 교육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교육이 자극-반응 연쇄처럼 깊은 사유 없이 단 몇 초 만에 계속 답해야 하는 퀴즈 풀이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잘 풀려면 교육받은 내용을 최대한 많이 기억하고 있다가 짧은 시험 시간 안에 모조리 토해내야 한다. 나무 위의 침팬지가 먹이와 적이 어디에 있는지 한 장면으로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낸 학자들은 이를 ‘사진기억’이라 부른다. 한국 사회는 사진기억 능력을 테스트해서 그 결과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 차별대우한다.

한국 사회는 사진기억 능력이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노력은 곧 좋은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과 이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매니저 맘’이 판치는 학벌자본 세습사회에서 개인의 노력만으로 사진기억 능력을 키울 수는 없다. 가족 전체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여력이 없는 대부분의 가족에게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사진기억 능력을 키우라는 미션이 부여된다. 하지만 침팬지가 아닌 바에야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벅차다. 공부라는 합리적 수단이 비합리적 결과를 낳는다. 서울대생이 쓰던 볼펜과 같은 초일상적 힘에 기대는 이유다.

우스꽝스럽지만 이 주술이 현실세계에서 실제적인 효과를 낸다. 사진기억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시험에 통과해서 세속적인 복을 마구 누린다. 최근 헌법재판관 후보 부부의 재산 내역에 많은 국민이 놀란 것은 그들이 무슨 엄청난 불법과 편법을 저질렀다거나 국민의 눈높이를 벗어났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사진기억 능력이 휘두르는 막대한 주술적 힘과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부부가 판사와 변호사로 한 20년 일하면 50억원대의 자산가가 될 수 있다! 전관예우와 같은 비윤리적인 행태를 통해서만 떼돈을 버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서울대생이 쓰던 볼펜의 주술적 힘에 의지해서라도 사진기억 능력을 키우고 싶다. 물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힌 고도로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참과 거짓을 인지적으로 식별하는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시장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진기억 능력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들이 과도하게 복을 누리고 있다면 수요보다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서둘러 수요 공급 함수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선 왜곡된 보상 체계를 바로잡기 위해서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다. 사진기억 능력으로 얻은 초일상적 힘을 활용해 복을 누리려고만 할 뿐 생존과 성공을 넘어서는 초월적 목적 하나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는 ‘주술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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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꾼 사건이 있습니다. 그날도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보내고 따사로운 봄날을 맞을 생각에 가슴은 두근댔습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날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고, 우리의 시각을 바꿀 중대한 사건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2014년 4월16일 수요일 아침. 

“그러면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내뱉는 이 말이 내 입에서도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뚫린 사회안전망의 작은 구멍에서 새어나온 오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주시했습니다. 전 국민의 눈과 귀는 이미 바다로, 항구로, 그리고 세월호 속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습니다.

올해로 세월호 사건 5주기를 맞습니다. 세월호에 승선했다가 참변을 당한 아이들도 이젠 하늘에서 바뀐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무던히 외쳐왔고, 끊임없이 호소했고, 속절없이 기다렸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 외침의 의미를. 우리는 그 외침에 호응하지 못했습니다. 

경기 안산시 단원구의 ‘4·16기억저장소’는 ‘기억 투쟁’의 맨 앞에 선 곳이다. 지난 12일 단원고 인근 강서고 학생들이 저장소가 운영하는 4·16기억전시관을 찾아 둘러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아끼던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면 슬픔이 바로 찾아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경황을 살피는 데 시간이 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또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워집니다. 아끼던 사람이 베풀었던 친절이, 그 따스함이, 그 사람이 보여준 사랑이 떠오릅니다. 그 짓궂음이 그리워지고, 다시 티격태격 옥신각신하고 싶어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밀려오는 이 슬픔과 그리움은 줄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오히려 커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을 아끼던 사람들을 공감해야 합니다. 끝까지 공감해야 합니다. 

지난 3월18일,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분향소와 천막을 거뒀습니다. 그 자리의 의미를 새기는 공간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 같습니다. 광화문 거리를 거닐 때면 역사처럼 가슴에 스며든 아이들의 자취를 되새기고는 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의 숨결을 여전히 느낄 수 있기에 진실을 찾는 작업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진실을 찾는 과정은 시간을 잇는 고리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연속하고,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작용하며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 우리는 이제 아이들이 가르쳐준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그 희망은 아이들이 알려준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하지 못했던 스승 역할을 아이들이 대신 해줬습니다. 뒤늦게나마 우리는 그들이 알려준 희망의 의미를 깨달았기에, 두려움을 떨치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희망을 알려주고 가르쳤다는 증거는 세월호에서 나눈 아이들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운명을 예감하고도 사랑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말한 사랑에서 희망을 봤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끝까지 나눴습니다. 자기 것까지 내주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마지막 메시지에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4월을 맞아 윤동주 시인이 쓴 산문 한 구절과 아이들의 마지막 메시지를 옮기며 글을 마칩니다.

“일반은 현대 학생 도덕이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스승을 섬길 줄을 모른다고들 합니다./ 옳은 말씀들입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나 이 결함을 괴로워하는 우리들 어깨에 지워 광야로 내쫓아버려야 하나요./ 우리들의 아픈 데를 알아주는 스승, 우리들의 생채기를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세계가 있다면/ 박탈된 도덕일지언정 기울여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겠습니다./ 온정의 거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손목을 붙잡고 목 놓아 울겠습니다.”(윤동주, ‘화원에 꽃이 핀다’에서)

“내 것 입어”/ “너는?”/ “나? 가져와야지.”

“엄마 사랑해요, 아빠 사랑해요.”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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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집을 나올 때면 가끔 아파트 앞 생활폐기물 수거 차량과 마주친다. 시민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도로 한쪽에 차량을 정차하고 음식물이나 폐기물을 수거한다. 청소 노동자들을 대하는 인식 차이일까. 일본이나 유럽에선 생활폐기물 수집운반이 낮에 진행되는데, 우리는 새벽에 한다. 그러다 보니 업무상 재해나 사망사건도 많다. 1년에 꼭 한 번 정도 청소 노동자의 사망사고를 접한다. 전국에 생활폐기물 운반수거의 87.7%가 민간위탁으로 운영되다 보니, ‘위험의 외주화’는 공공부문에서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민간위탁 노동자 고용의 질은 우리가 꼭 짚어야 할 문제다. 저임금에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가 대부분이다보니 양질의 시민서비스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특히 민간위탁 시설의 법률 위반현상은 심각하다. 연장 및 휴일근무 수당, 연차휴가 등 기본적인 노동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자의 권리가 민간위탁이라는 이유로 숨겨지거나 은폐되고 있는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수탁업체 대표 및 관리자들의 노동 감수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의 힘이 도시를 위해 뭔가 커다란 것을 해주리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이런 믿음을 유지하면서 그간 정부는 다양한 기본 서비스를 꾸준히 외주화했다. 사실 민간위탁은 대시민서비스의 일부를 외부 전문기관에 위임·대행이라는 ‘합리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간위탁의 회계 부정, 용역비 과다청구, 임금 가로채기, 선정 비리, 관리 감독 부실 등이 언론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위법적이고 탈법적 현상들을 지자체는 제대로 점검조차 하지 않고 있다. 공적자원을 시장의 힘에 넘겨버린 민간위탁의 비민주적 속성을 보여준다. 

지난해 기준 공공부문 민간위탁은 1만개가 넘고, 노동자는 약 19만6000명이나 된다. 정부 재정의 1.86%에 해당하는 7조9600억원 규모다. 민간위탁 다수는 사회서비스 시설이다. 어린이집부터 사회복지, 장애인, 아동, 청소년, 정신건강 등 47.2%가량 차지한다. 그러나 도서관, 상수도 검침, 콜센터, 지하철 역사 등 매우 다양한 대국민 공공서비스들이 민간에 맡겨진 상태다. 최근에는 중앙정부가 국고보조 사업으로 지원하는 지자체 ‘센터’들도 민간위탁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정부는 도시의 공공서비스를 민간위탁으로 운영했다. 지자체 평균 100개 정도의 업무들이 공공이 아닌 민간에 맡겨진 상태다. 

공공부문에서 민간위탁 ‘신화’는 IMF 경제위기 이후 비용절감과 조직효율성을 이유로 더 확대되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사이 서울, 광주 등에서 일부 민간위탁을 직영 혹은 재구조화했다. 때마침 정부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3단계 민간위탁’ 내용을 발표했다. 문제는 민간위탁이 공공서비스 전달체계 변경과 관련되어 있다며 기관 자율에 맡기겠다고 한다. 기관 자율에 맡기는 것은 사실상 정규직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지자체 일부 업무들은 노무도급 성격의 용역근로 형태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1단계와 2단계에 해당되어야 할 간접고용 업무들이다. 

우리는 노르웨이 제3의 도시인 트론헤임의 ‘지자체 실험 모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도시는 지자체 공공서비스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민간위탁을 물리치고 직영으로 운영한 공공행정조직의 내부적인 민주적 변화를 이끈 곳이다. 특히 공공서비스를 직영 운영하면서 직원들의 병가 신청자가 11%에서 2%로 줄었고, 일자리 만족도가 높아진 것은 도시의 좋은 일자리 모델의 의미 있는 성과다. 독일 베를린의 생활폐기물 시영회사는 청소 노동자들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심리치료 프로그램(박스 스톱)도 제공하고 있다. 

공공서비스를 시장에 맡겨야 더 효율적이라는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민간위탁 서비스들을 공적 통제 아래로 되돌리려는 선택이 필요하다. 초점은 ‘돈이 아니라 서비스 질 향상’이라는 이점을 봐야 한다. 시민의 삶에 핵심이 되는 국가의 일부를 되찾는 정책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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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장, 의원들 말투는 거칠고 언성은 높습니다. 긴 연설과 장황한 훈계 사이로 질문과 답변은 고춧가루처럼 뿌려질 뿐이죠. 위장 전입, 논문 표절, 탈세, 병역 면제, 부동산 투기 등이 드러나면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잘 몰랐다, 배우자가 했다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공수는 바뀌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욕하고 책임지라는 요구도 전형적입니다. 인재풀이 적다는 비판도 빠지질 않죠. 이렇게 식상한 연속극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청와대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그냥 한국 지도층의 민낯이 드러나는 것 아닐까요.

문재인 정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명망과 전문성을 고루 갖췄다는 김연철 통일부 장관 후보자도 부동산 의혹을 받았죠. 다운계약서 작성, 아파트 분양권 전매, 부동산 차명 거래 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후보자는 처제 탓으로 돌렸고 송구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막말 논란이 더해졌습니다. 한 예로 2016년 김종인 당시 민주당 비대위원장을 “박근혜가 씹다 버린 껌”이라 했다고 논란이 됐죠.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천안함 사건을 “북한 소행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김 후보자의 과거 발언이 문제 됐습니다. 이제 와서 북한 소행이라고 입장을 바꾼 데 대한 추궁이 있었습니다. “편향적 인식”, “친북주의자”, “북한 대변인”, “북한 통일전선부장 후보감” 등 야당 의원들의 원색적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김 후보자는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의해 공격을 받아 침몰당했다는 것은 일관적인 입장이었다”고 해명했죠.

사실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침몰 직후부터 나왔던 의혹 중 시원하게 풀린 게 거의 없죠. 우선 북한 어뢰에 의해 두 동강이 났다는 정부 설명은 너무 미흡합니다. 배 밑에 긁힌 자국, 깨끗한 절단면, 생존자들에게 고막 파열, 화상 등이 전무한 점 등은 폭발이 있었다면 설명하기 힘듭니다. 정부가 제시한 증거도 미덥지 않습니다. 기껏 찾은, 유일한 증거인 어뢰추진체에는 그 유명한 ‘1번’이라는 글씨가 선명해 논란이 됐죠. 여기서 나온, 폭발 과정에서 생겼다는 알루미늄 산화물은 침전으로 생긴 알루미늄 수화물임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억지로 공개한 CCTV 화면도 조작이고, TOD 화면에 나온 물체는 확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즉 어뢰폭발이 있었는지, 그 증거는 있는지, 다른 원인은 없었는지, 아무 대답도 없는 게 정부의 설명 아닌 설명인 겁니다.

북한 어뢰가 아니면 뭐라는 소리냐고 짜증 낼 수도 있지만, 그 답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아닌, 정부가 내놓아야 합니다. 정부가 설마 거짓말을 했겠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크고 작은 범죄를 돌아보면 이는 그냥 희망 사항일 뿐임을 쉽게 알 수 있죠. 그 반대입니다. 그 많은 거짓과 전횡을 언제 다 되돌아볼까 오히려 걱정입니다. 물론 천안함 침몰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으로 46명의 목숨이 사라졌습니다.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최소한의 의심을 갖는 게 예의가 아닐까요. 더군다나 정치 엘리트들이라면 말이죠. 하지만 청문회에서 그런 모습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을 밝히고 거짓을 점검하는 대신 야유와 선동으로 일관했습니다. 그것도 색깔 공세를 펴가며 말이죠. 김 후보자도 자신의 의심이 합리적이었음을 주장하기보다 꼬리를 내리며 이에 동조한 셈이 됐죠.

우리 사회는 반공이 국교인 듯합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북한이 범인이라는 믿음을 퍼뜨리고 입맛에 맞는 증거만 축복합니다. 반론과 의심은 불경이라며 처단하죠. 신자들은 멸공의 노래를 부르며 안도합니다. 그 축복 덕택에 우리는 제주도, 광주의 학살에 눈을 감았고 독재를, 그들의 고문과 살인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렇게 피를 불러온 “빨갱이” 딱지를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는 게 21세기 한국입니다. 그러니 태극기부대가, 박근혜를 향한 그들의 애정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 공산주의가 몰락한 게 1990년대 초이지만 여의도는 1950년대 초에 아직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그런 국회에 미래를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그냥 국민의 생떼가 아닐까요. 그러면, 그 미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그 국회는 왜 있는 걸까요. 그 대답을 위해서라도 국회는, 정부는 천안함 침몰에 대한, 과거 정부의 대응에 대한 조사를 서둘러야 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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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신은 저항하지 않았습니까?” “왜 당신은 기차에 탔습니까?” “1만5000명의 사람이 거기 있었고 수백 명의 간수들만 있는데 왜 당신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제 발로 처형장까지 걸어가 자신의 무덤을 파고, 옷을 벗어 가지런히 쌓아놓고, 총살당하기 위해 나란히 눕게 한 이들에게 저항하지 않은(또는 못한) 유대인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그들의 복종과 순응을 따져 묻는 검사의 질문을 소개하고 있다. 아렌트는 그 이유에 대해 직접 말하는 대신 부헨발트에 수용되었던 다비드 루세의 말을 인용한다.

“고문당한 희생자들이 저항 없이 스스로 교수대에 목을 매고,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더 이상 긍정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포기하도록 요구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그저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아무런 까닭 없이, 단순한 가학성 때문에 비밀경찰 요원들이 유대인의 패배를 요구한 것은 아니다. 교수대로 올라가기 전에 희생자를 이미 파괴하는 데 성공한 체제가 … 한 민족을 노예 상태로 만드는, 다른 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최상의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안다. 복종하는 가운데, 바보처럼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 인간의 행진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없다.”

나치 시대를 살았던 노인들 중엔 그 시절엔 자전거에 자물쇠를 안 채우고 문 앞에 세워둘 수 있었고, 장발과 싸움패는 제국노동봉사단에 끌려갔다는 걸 나치의 업적으로 기억하곤 한다. 파시즘이 지배하던 이탈리아를 살았던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고백한다. 그 시절엔 기차가 시간표대로 제 시간에 운행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질서와 규율이 지켜지던 세상이었지만, 유대인은 보호받지 못했다. 거리에서 유대인 여성이나 노인이 돌격대원에게 폭행을 당해도, 유대인이 운영하는 상점 유리창이 박살나거나 방화를 해도 지켜보던 시민들이 함께 항의하거나, 경찰이 다가와서 도와주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갔다. 공권력이 가해자와 공범일 때, 가해자들은 그런 일을 저질러도 아무도 처벌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피해자들은 아무리 피해를 당해도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어 무기력해졌다.

최근 들어 나는 몇 가지 사건에 주목하고 있다. 교과서와 참고서 발행으로 오랫동안 부와 명성을 쌓은 한 출판사에서 전직 대통령을 조롱하는 사진을 공무원 수험용 일반 교재에 수록했다. 신출내기 편집자의 실수라고 한다. 모 종편 방송국에서 김학의·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여론조사 결과를 다루면서 공수처 설립 찬성 의견이 82.9%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여주는 그래프에서는 반대 12.6%와 모름/무응답 4.5%와 거의 비슷하게 표시하여 방송했다. 아마도 그 방송국은 이것 역시 실수라고 해명할 것이다. 방송에서 자료 화면이나 이미지에 ‘일베’ 같은 특정 사이트의 왜곡 이미지를 사용해 물의를 빚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와 관련한 재발 방지 약속은 구두선에 그치고 말았다.

한 사람이 10여년 전에 벌어진 억울한 죽음에 대해 홀로 증언하고 있다. 피의자도 아닌 참고인이 10여차례 이상 출두해 직접 조사를 받았지만, 정작 이 사건의 피의자로 지목받고 있는 남성 중 일부는 조사받기 위해 출두조차 한 적이 없거나 호텔에서 30분 정도의 약식 조사에 그쳤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직접 고용한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자살 당할까’ 두려워 병원에서 자살 위험도 검사까지 받아 공개했다. 경찰이 24시간 경호를 약속했지만, 신변 보호를 위해 경찰에서 지급한 위치추적 장치 겸 비상호출 스마트 워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기계 고장이거나 실수였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우연과 실수가 여러 차례 겹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진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침묵하는 한, 평범을 가장한 악의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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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썬과 황금폰. 해리슨 포드 주연의 할리우드 액션 어드벤처 영화 제목에 어울릴 것 같은 이 두 단어는 현재 우리 사회 상층부 남성 권력의 정치·젠더 폭력의 실체를 표상하는 기표들이다. 하나는 불타는 청춘의 욕망을 상징하는 클럽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뭔가 중대한 내용을 저장한 비밀 휴대폰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두 기표는 이제 남성 상층부의 가부장 권력을 말할 때,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이 관계는 역사와 세대를 거쳐 재생산된다. 권번과 교방에서 요정과 궁정동 안가에 이르기까지, 버닝썬은 역사적으로 재생산된 정치·젠더 폭력 놀이방의 최신 버전이다. 

정치·젠더 폭력의 놀이 장소로서 버닝썬은 간판만 다를 뿐이지, 과거 대원각, 궁정동과 동일 업소다. 이 업소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도 유사하다. 버닝썬 사건에 연루된 승리와 정준영, 그리고 그들을 비즈니스로 엮은 이문호 대표, 그들의 불법 영업을 눈감아 준 것으로 의심을 사고 있는 경찰 간부들은 궁정동 안가에 등장한 인물들과 흡사하다. 그리고 장자연 사건에 연루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과 모 언론사 대표, 그리고 그들에게 원주 별장을 제공하고 집단 성매매를 제공한 윤중천, 그리고 그 사건을 덮은 검찰 수뇌부도 거의 속편의 영화를 찍는 다른 등장인물들이다. 영화 촬영지인 궁정동, 버닝썬, 원주 별장은 장소는 다르지만, 하는 짓은 동일하다. 그리고 그 장소에는 항상 연예인이 등장한다.  

성관계 동영상 불법 촬영·유포 논란을 빚은 가수 정준영(왼쪽)과 성 접대 의혹이 불거진 빅뱅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가 14일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방경찰청으로 출석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그런데 단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연예인의 위치이다. 버닝썬사건에서 연예인은 젠더폭력의 가해자로 등장하는 반면, 장자연사건에서 연예인은 피해자, 아니 희생자로 등장한다. 승리와 정준영과 장자연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는 남성연예인으로 불법으로 촬영한 성관계 동영상을 불법으로 서로 공유한 자들이고, 후자는 그 남성 젠더폭력의 가장 참혹한 피해자라는 점이다.

황금폰은 여성들에게는 이중 피해의 공간이다. 거꾸로 황금폰은 버닝썬에서 폭력을 행사한 남성연예인의 이중 폭력의 공간이다. 황금폰은 버닝썬의 정치·젠더 폭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 공간이다. 그래서 황금폰은 버닝썬보다 더 심각한 남성 상층부 젠더폭력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중의 폭력, 이중 착취의 가상공간이자, 권력의 관음증, 타자를 노예화하는 플랫폼이다. 어느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거론되었던, 수많은 여성연예인들의 번호가 저장된, 그리고 그들과 카톡 메신저로만 사용된다는, 황금폰의 정체는 무엇일까? 황금폰의 의혹은 사실로 밝혀졌다. 그것은 불법 촬영한 성관계 동영상을 서로 공유한 남성연예인들의 젠더폭력의 전리품인 것이다. 

버닝썬과 마찬가지로 황금폰 역시 역사적으로 재생산된다. 핫라인, 대포폰, 밀수폰, 묻지마 카드 등이 황금폰의 다른 이름이다. 황금폰과 그 사용법은 연예인만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남성 상층부에 속한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은 황금폰을 가지고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하고 싶어 한다. 그곳이 대개는 불법적인 행위이지만, 죄책감 없이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사교공간에서 자랑하고 위세를 떤다. 버닝썬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불법 행위임을 알면서도 경찰과 검찰 권력을 운운하며 황금폰에서 더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유통되길 욕망한다. 그 콘텐츠들이 더 자극적이고 불법적일수록 황금폰의 은밀한 가치는 더 높아진다. 그들은 그렇게 놀기 원하는 자들이다. 버닝썬사건을 한국 아이돌 문화의 위기 혹은 추락의 증거로 한정하는 것은 좁은 시각이다. 

그것은 동료 여성연예인을 바라보는 남성연예인들의 바뀌지 않는 가부장적 젠더폭력이고, 한국 남성 상층부 권력의 젠더 착취의 가학적 증상의 전형이다. 버닝썬에서 황금폰으로 이어지는 젠더폭력의 과정은 단절과 우연이 아닌 연속과 심화의 과정이다. 그것은 미투 운동의 연장에 있으며, 장자연사건의 정치적 스캔들의 연장에 있다. 왜냐하면 버닝썬과 황금폰은 남성 정치·젠더 폭력의 짝패이기 때문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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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 지면을 빌려 쓴 ‘사회주택, 개미지옥에 맞서는 바보 같은 노력’이라는 글이 엉뚱하게 읽혀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가까운 지인은 개미지옥이나 바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쓸 필요가 있냐는 핀잔을 놓았다. 의도와 다른 반응이 있을 때마다 글쓰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일각에서는 불편하겠지만, 현재의 주택시장에 대해 개미지옥이라는 비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바보 같은’이라는 제목만 보였는지, 사회주택을 비판하는 글이라고 정반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어서 당혹스러웠다.

제목을 달면서 처음에는 사회주택 분야의 어려움을 직설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처절한’이라고 쓰는 것을 고민했다. 그런데 어렵지만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그곳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즐겁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있기에, 지나치게 암울한 이미지는 적절치 않다고 느껴졌다. 그러다 비영리 사회주택이 순진하다고 비웃음을 사는 게 떠올랐다. 이윤을 좇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 없는 사업자들은 판 흐리지 말고 제발 떠났으면 좋겠다.” 사회주택 관련 민간주체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던 간담회에서 나온 말이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려고, 주택시장의 모순과 부조리를 없애고 토지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어렵게 버티는 비영리 주체가 졸지에 판을 흐리며 민폐를 끼치는 능력 없는 사람이 되었다. 손해를 보며 사회주택 정책에 바보처럼 협조하는 것이 공공으로부터 유리한 조건의 지원을 받아오는 데에 걸림돌이라는 이유였다. 심정은 이해되지만, 사회주택의 취지에는 맞지 않는 발언이다.

사회주택 지원조례의 초안을 만들 때 어떻게 하면 사회주택의 취지가 훼손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비영리법인, 공익법인, 사회적협동조합, 사회적기업을 사회주택 공급주체로 규정하여 서울시에 제안하였다. 모두 비영리를 목적으로 하거나 사회적 이익을 강조하는 회사 형태이다.

주택에서 발생하는 이윤, 즉 불로소득은 입주자들이 낸 임대료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주택시장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의 주축은 상위계층이 가져가는 하위계층의 임대료다. 불로소득의 또 다른 축인 시세차익이 줄어들기라도 하면 임대료가 크게 치솟는다. 이런 부조리한 구조를 끊기 위해서는 임대주택에 끼어있는 불로소득을 걷어내야 한다. 사회주택을 도입하면서 비영리성을 강조한 이유였다.

하지만 사회적협동조합의 인가과정이 복잡해 많은 사업자가 참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어쩌면 양적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반협동조합이 포함되도록 수정된 조례가 제정되었다. 일반협동조합은 조합원에 대한 배당을 할 수 있으므로 영리 추구가 가능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주택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입주자들이 부담하는 임대료에서 나온다. 영리를 추구하면 임대료가 오르거나 주택의 품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리에 기반한 사회주택 공급은 모순이고 허상일 뿐이다. 오히려 비영리성이 사회주택의 시장경쟁력을 담보하는 토대이다. 즉 사회주택 활성화의 관건은 민간이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공익적이고 비영리적인 주택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여 그에 맞는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례가 개정되어 중소기업까지 지원대상에 포함되었다. 사회주택의 비영리성이 점점 옅어지는 것 같아서 착잡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에게는 ‘바보 같은 노력’으로 비치는 비영리 추구가 사회주택이 어렵게 추구하고 있는 본질이며,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력한 대안이라는 점을, 우리 사회의 발전과 혁신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차근차근 되짚어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최근 사회주택에 관심을 두는 지자체가 점차 늘어나고 있고, 몇몇 곳에서는 사회주택 지원조례의 제정을 고려하고 있다고도 한다. 부디 사회주택의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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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 KBS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방영하고 있는 <도전 골든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생존주의 시대답게 청소년 100명이 50문제를 풀면서 매 순간 살아남아야 하는 서바이벌 포맷이다. 50문제를 모두 맞힌 사람은 골든벨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새길 수 있다. 하다보면 중간에 학생들이 대거 탈락하는데, 패자부활이란 이름의 매우 간단한 게임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50번 문제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채 탈락한다. 가끔 최후까지 살아남은 한 명이 50번 문제에 도전할 때도 있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대부분 생존경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구나.’ ‘최후의 승자는 결국 한 명이구나.’ 일상의 삶이 서바이벌 게임처럼 변한 지금 사회 전 성원이 모두 이런 생각에 빠져들면 사회가 지속될 수 없다. 좌절과 냉소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달래어 다시 생존경쟁에 복귀시켜야 한다. 패자부활 게임이 필요한 이유다. 힐링을 시켜 다시 희망을 갖게 만들어 생존경쟁에 복귀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메시지도 문제지만, 문제의 수준도 그에 못지않다. 2016년 나온 문제다. “다음 중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아닌 사람은? 1) 톨스토이 2) 타고르 3) 앙드레 지드 4) 펄 벅 5) 헤르만 헤세.” “멘델스존 <결혼 행진곡>은 요정들과 청춘남녀의 아름답고 몽환적인 사랑을 그린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입니다. 어떤 작품일까요?” 도대체 이따위 문제를 풀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읽지도 않은 책, 감상하지도 않은 음악 ‘제목’을 알아맞힌다고 박수치고 환호하고 장학금 주고 명예의전당에 이름 올리는 우스꽝스러운 사회.

골든벨 명예의전당에 오른 어느 최후 생존자의 고백이다. “방송 퀴즈라는 게 문제를 처음 들었을 때 바로 생각나지 않으면 절대 맞힐 수가 없거든요. 여유 시간을 5초 더 준다고 하여 생각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50문제 모두 제가 순간적으로 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왔으니 정말 행운이었던 거죠.” 자극-반응 연쇄처럼 깊은 사유 없이 단 몇 초 만에 계속 답을 해야 하는 문제를 잘 맞혀야 한다.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 승승장구한다. 이 골든벨 최후 승자는 대학 들어간 지 몇 년 채 되지도 않아 사법시험에 붙었다. 도대체 시험문제가 어떻기에?

1996년 38회 사법시험에 나온 역사 문제다. “다음 중 고려후기에 閔漬가 편찬한 史書는? 1) 古今錄 2) 千秋金鏡錄 3) 本朝編年綱目 4) 史略 5) 編年通錄.” 응시자가 읽어보지도 않았을 역사서 이름 알아맞히기 퀴즈다. 대부분 이름만 전하는 역사서라 접할 수조차 없다. 엘리트가 치르는 사법시험이니 한자(漢字) 읽기 능력 검증이라도 하려는 걸까? 어쨌든 골든벨 퀴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문제를 잘 푼 사람들은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었다. 그 후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법조계, 정계, 재계, 언론계의 특권층이 되어 온 나라를 쥐락펴락해왔다.

그나마 이제 사법시험 제도가 폐지되었으니 사정이 달라졌을까? 아니다. 시험문제를 보면 대부분 정보의 옳고 그름을 묻는 순간 기억 능력 테스트다. 기껏해야 암기한 단순 지식을 바탕으로 순차적으로 추론하는 논리 문제다. 인지능력 테스트인 셈이다. 물론 복잡한 현대사회에는 참과 거짓을 순식간에 인지적으로 식별해내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이 과도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일까? 자극-반응에 몰두하다보면 자아가 축소되기 마련이다. 보다 일반화된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대상화해서 타자들과 정서적·도덕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감퇴된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현재 ‘온 나라 공무원 되기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는 퀴즈풀이 결과로 한 줄 세워서 극소수의 승자에게는 삐뚤어진 엘리트 의식과 특권을, 나머지 대다수 패자에게는 지나친 열패감과 차별을 평생 각인시키는 ‘골든벨 사회’. 2018년 9급 공무원 한국사 문제다. 자, 다 같이 한번 풀어보도록 하자. “다음 해외 견문 기록을 시기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표해록 ㄴ. 열하일기 ㄷ. 서유견문 ㄹ. 해동제국기”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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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이 둘은 상충하면서 서로 보완하는 관계를 가집니다. 법원은 언론의 힘이 약했던 1980년대까지 언론에 힘을 실어주는 판결을 했습니다. 서울 올림픽 후로 언론 시장이 커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무리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는 인격권 보호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 국가 운명에까지 영향을 끼칠 공론의 장이나 공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철저한 검증을 위해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공격이 아닌 한’ 책임을 면하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때 대법원 판결에 표현의 자유에는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표현의 자유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위축 효과를 없애려는 배려입니다. 역사는 언로(言路)를 터서 보장하고 시민과 언론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꾸준히 암시해 왔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 반(反)공산당 기류가 정국을 휘감았습니다.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가 미국 연방정부 국무부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선언한 후의 일입니다. 사실 그때까지 미국에 우리가 알고 있는 온전한 표현의 자유는 없었습니다. 1960년대 워런 대법원장 시절로 불리던 시기에 접어들며 미국 연방대법원은 현실적 악의를 증명하지 못하면 언론은 면책된다고 선언합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미국 언론은 날개를 펼칩니다. 현실적 악의론을 선언한 뉴욕타임스 판결이 1964년 선고됐습니다. 그때부터 딱 10년 후에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리며 퇴임합니다. 대통령과 그 측근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언론의 지속적인 보도가 이어지면서 언론이 민주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길을 걷습니다. 2002년을 전후하여 대법원 판결에 그 전까지 볼 수 없었던 표현들이 속속 등장합니다. ‘숨 쉴 공간’ ‘위축 효과’처럼 사상의 자유 시장을 염두에 둔 표현들이 판결에 등장합니다. 무척 기뻤습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30년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숨 쉴 공간’을 찾아 숨 가쁘게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4년 정도 지난 2016년에 현직 대통령과 측근의 비리를 알리는 보도가 고개를 들었고, 언론은 시민들을 광화문광장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이처럼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공적 인물을 희화하거나 논평할 자유도 포함합니다. 희화와 논평에는 때때로 모욕적인 표현, 불쾌한 표현이 섞일 수 있습니다.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 세 가지 중 하나 같습니다. 외면하거나, 웃어넘기거나, 화를 내거나. 대중은 공적 인물에 대해 이 가운데 어떤 반응을 기대할까요?

“정치 만평은 공격 무기이자, 냉소와 조소와 야유를 위한 무기이다. 만평이 어떤 정치가의 등을 두드려 칭찬하고자 하는 때에는 거의 효과가 없다. 보통은 벌침과 같은 때에 환영받고, 항상 상당 부분 논란을 야기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1988년 허슬러지 사건 판결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허슬러지는 광고 패러디라는 이름으로 저명한 인물을 상대로 심각한 모욕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판결은 대중이 저급한 패러디 광고를 진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제합니다. 정치 풍자가 자리 잡은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시원하게 한 번 웃어버리고 만다는 뜻입니다.

공격 대상과 그 측근에게는 풍자나 논평을 외면하거나 같이 웃어버리는 것이 현명한 대처입니다.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대중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요새는 위축되기보다는 의아해할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집단 인식을 가진 대중이 공적 인물보다 더 현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화가 난다면 허슬러지 광고에 나온 말을 새겨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패러디입니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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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복지제도의 필요성은 인식하지만 어떤 복지국가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다. 기초노령연금이나 아동과 청년수당이 대표적 사례다. 각 정책 모두 도입 초기 사회적 논쟁이 많았다. 개별 정책 모두 시민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라기보다는 하나의 조건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나 구조조정이 발생하면 실업급여를 적용받는다. 그러나 그 실업급여제도가 만들어진 역사는 길지 않고 적용자도 일부에 한정된다. 이런 현실에서 빈곤 및 재취업 등을 위한 다양한 사회수당을 생각하기는 어려운 조건이다.

그런데 지난 3월5일 노사정 합의로 ‘한국형 실업부조제도’가 발표되었다. 고용보험에 가입한 노동자에게만 적용이 가능했던 실업급여를 저소득 구직자와 자영업자에게까지도 확대한다는 것이다. 내년부터 저소득층 대상 매월 50만원씩 6개월간 지급된다. 그간 도움을 받지 못한 미취업 구직자는 물론 전직 자영업자와 경력 단절자까지 혜택을 받게 된다. 사회보험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생계지원과 고용서비스가 결합된 형태다. 일정한 소득을 기준으로 대상자가 좁혀진 한계가 있지만 사회정책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노동시장 위험과 고용불안정은 몇몇 지표들이 확인해 준다. 일터에서 비정규직이나 자영업 노동시장은 매우 심각하다. 1년 미만 근속자(31.3%)가 많다보니 사회보험(37.8%), 교육훈련(38.4%), 유급휴가(24.5%) 적용자는 10명 중 3명이 고작이다. 직장에 취업해도 10년 이상 장기 근속자 비율은 20.1%에 불과하다. 게다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나라와 비교하여 1인 자영업자도 2배(15.4%)나 많다. 이런 현실에서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국가는 인간이 삶을 유지하고 사회적 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권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지방정부의 몫도 있다. 최근 서울시에서 발표한 시민의 사회적 안전망들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서울시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영세자영업자에게 유급병가를 지원한다고 한다. 생활임금 수준으로 10일 정도 지원한다고 하니 아파도 병원에 가기 어려운 저소득 시민에 대한 소득지원 성격을 담고 있다. 특히 열심히 일했음에도 사업을 접게 된 소상공인의 폐업 지원을 위한 채무감면이나 지원제도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필요한 정책 중 하나다.

게다가 올해 7월부터 비정규직 대상 휴가비 지원(25만원)도 시행한다. 중앙정부가 시행하는 중소기업 휴가비 지원제도(20만원)가 정규직이 주 대상인 반면, 서울시는 저임금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노동자가 대상이다. 서울지역 비정규직 휴가사용률이 1주일 남짓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의미가 있다. 1936년 처음으로 2주간 누구나 연속으로 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프랑스에 비하면 80여년의 격차다. 그 밖에도 프리랜서 지원이나 미취업 청년을 대상으로 한 청년수당과 같은 제도는 “어떤 신분이나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시민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철학을 담은 것으로 봐야 한다.

영국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라는 영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에서 고용센터 공무원은 질병수당을 신청하러 온 주인공에게 오로지 원칙과 기준 그리고 절차만 강조한다. 고용센터에서 질병수당을 제공하는 데 있어 개인의 ‘잘못’과 사회의 ‘잘못’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서울시 정책들은 시민권을 보장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있다. 앞으로 다른 지방정부에서도 다양한 정책들이 시민들에게 ‘더 가까이, 더 구체적으로’ 전달되면 좋겠다. ‘평등한 시민권’은 소득, 거주지 등의 기본적 욕구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다만 정책 설계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원칙도 있다. 시민의 안전망은 시혜와 배려의 관점이 아니라 권리와 평등의 관점이어야 한다. 몇 년 후 한 지방정부에서 시민보험을 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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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북·미 회담이 결렬되자 한쪽에선 탄식이, 다른 쪽에선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정상회담은 보통 형식에 불과할 뿐이어서 충격이 컸죠. 설명과 전망도 다양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애초에 합의서에 있지도 않던 무리한 요구를 했다. 아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경제제재 완전 해제를 요구했다. 일본 훼방 탓이다. 매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 때문이다. 뮬러 특검 수사 등 미국 정치가 문제였다. 대화 국면은 이어갈 것이다. 회담 재개에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미국의 위상이 타격을 받았다. 심지어 이 결렬로 김정은 위원장 건강이 안 좋다는 말까지 나왔죠.

이 말이 맞는지, 저 말이 맞는지 헷갈립니다. 사실 확인할 길은 없죠. 이런 외교 사건은 전모가 드러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증언, 문서 등이 나오고, 양측 자료를 비교, 확인하려면 수십년이 걸리죠. 그러니 이 수많은 설명은 추측에 불과합니다. 어떤 추측은 근거나 논리가 좀 낫지만 그래도 추측일 뿐입니다. 확인할 수 없으니 아무 말을 해도 되는, 그래서 수많은 말들이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확인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북·미 회담에 미치는 한국의 미미한 영향력이었죠. 협상 결렬을 예상치도 못했고 손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바로 우리 문제인데도 말입니다. 문재인 정부 공을 깎아내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북한을 이끌고, 미국을 밀며 여기까지 오는 데 작지 않은 기여를 했습니다. 결렬 후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중재자의 역할을 주문했고 국제 제재 한도 내에서 가능한 남북 교류를 추진할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국제정세의 보조적 역할에 불과하죠. 거기에 현 정부 정책의 한계가 있습니다. 사실 대한민국 탄생부터 우리는 국제정세의, 특히 미국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한계까지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요.

한반도 현실을 부정해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그 굴레 안에서, 우물 안에서 쉽게 만족해서도 안될 겁니다. 우리만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들을 서둘러야죠. 그중 하나는 우리 안의 북한을 다시 그리는 겁니다. 우리 안의 북한이 빨갱이 괴물로 남아 있다면 한반도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북한 핵무기가 없어져도, 북·미가 평화협정을 맺어도 모자랍니다. 우리 안의 북한이 같이 살 이웃으로 바뀌고 나서야만 가능합니다. 북핵 위기 국면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과업이 우리 손에 있는 셈이죠.

북한을 있는 그대로, 그들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그 시작입니다. 금강산관광으로는 모자라죠. 남한 대중이 북한 대중매체를 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노동신문, 조선중앙TV 등 북한 매체를 전면적으로 허용하면 어떨까요. 남북한 교류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해야겠죠. 특별 공연이 아닌 일상적 교류로 전환돼야 합니다. 남북 군대가 동해에서 합동 훈련을 하는 것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북한으로 봉사활동을 가는 것도 좋겠죠. 북한 학생이 유학을 온다면 어떨까요. 남북 교류가 일상적으로 이뤄질 때 공포는 이해로 바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변화를 준비해야 합니다. 우선 국가보안법을 하루빨리 폐지해야겠죠. 달라지는 현실에 맞지도 않고 평화스러운 미래의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당장 북한 매체를 보고 유통하고 싶어도 보안법 7조는 “문서·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수입·복사·소지·운반·반포·판매 또는 취득한 자는 그 각항에 정한 형에 처한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죠. 보안법 때문에 이런 면에서 북한이 낫다고 말하기도 겁납니다. 그러니 국가보안법 폐지는 각종 정치공작의 근거를 없앨 뿐 아니라 북한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평가, 남북 간 다양한 교류의 물꼬를 틀 것이 분명합니다. 주한미군에 대한 논의도 해야겠죠. 주한미군은 북한에 대한 공포가 현실화한 괴물이니까요. 분담금 요구도 거세지는 마당에 주한미군의 축소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줄이면 얼마나, 철수는 언제나 등에 대한 논의를 서둘러야 합니다.

우리 안의 북한이 바뀌면 이를 지켜보는 북한의 실체도 변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도 달라지겠죠. 그러고 나서야 남북은 진정한 평화 공존의 첫발을 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어깨동무한 그 발걸음은 누구도 막지 못할 겁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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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법원 문턱을 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의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법원의 송사에 이르게 되는 현실을 빗대어 생긴 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의 뒷받침 없이 개혁은 존재할 수 없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망했던 촛불의 힘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지 어느덧 2년여가 되어간다. 헌정질서를 유린한 전직 대통령은 수감되었고, 전직 사법부 수장 역시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법적 제도와 구조적 개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월15일 국가정보원·검찰·경찰 개혁 전략회의에서 “국정원·검찰·경찰 개혁은 정권의 이익이나 정략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하면서 “입법을 통한 개혁의 법제화와 제도화”를 요청했다. 대통령이 요구한다고 여소야대 국회가 쉽게 움직일 리 없고, 대통령부터 야당과 더 많은 대화와 타협을 시도해야 할 시점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국회의 역할이 중요한 상황에서 국회가 보이지 않는다.

2018년 12월15일 여야 5당 원내대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방안 검토와 선거제도 개혁 관련 법안의 1월 임시국회 합의 처리 등을 담은 합의문을 발표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국민의 80%가 찬성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와 국정원 개혁 등 권력기관 개혁도 한국당의 발목잡기에 막혀 조금의 진전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4월이면 제21대 국회의원선거가 진행될 것이고, 이제 조금 있으면 정치판의 모든 이슈가 선거 국면으로 전환될 것이다.

국민이 요구하는 입법 개혁을 나 몰라라 하고, 불필요한 정쟁만을 반복하며 재판청탁, 채용청탁, 불필요한 외유와 성희롱, 심지어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5·18 망언’까지 일삼았지만, 반성하는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 국회는 모든 개혁 법안이 집결되고, 논의되어 처리해야 하는 장소지만, 단 하나의 법안도 통과할 수 없는 적폐의 철옹성이 되어가고 있다. 대화와 타협은커녕 논의의 장 자체가 열리지 않는다. 이러고도 국회가 스스로 개혁의 주체를 자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무기력과 태만이다. 한국당은 애초부터 선거법 개혁 자체를 거부해왔지만, 여당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 대표로 있었던 2015년부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당론으로 채택했고, 2017년에는 이 제도를 권역별로 도입한다는 대선 공약을 내걸었다. 그런데 여당이 되고, 당 대표가 새로 뽑히고 나자 무슨 계산인지 선거제도 개혁에 미온적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는 개혁에 애를 태우는데 집권여당이 이처럼 몸을 사리는 것은 아마도 당내 공천권을 행사하려는 세력의 노림수와 그들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의원이 많은 탓일 게다.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 중 하나는 조조와 유비, 손권이 함께 자웅을 겨룬 ‘적벽대전’이다. 제갈공명의 신출귀몰한 전략과 계책이 유난히 돋보이지만, 내게는 노숙이라는 고지식한 신하가 가장 돋보였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손권에게 항복을 권고했을 때, 동오의 장수와 신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천자를 앞세운 조조의 명분과 백만 대군의 위세에 짓눌려 그에게 항복을 권했다. 오로지 노숙만이 항복을 만류하며 분을 참지 못하고 손권에게 말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조조에게 항복하더라도 돌아갈 고향 땅이 있고 그곳에서 말단 관직이나마 차지할 수 있습니다만, 장군께서 항복하신다면 대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자는 국민의 염원과 개혁의 열망을 뭉개고 앉아 지역구 예산만 챙기고, 공천 받아서 배지만 달면 되는 국회의원이라면 그들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청산해야 할 적폐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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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서울시는 토지임대부 사회주택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사회주택 사업자에게 서울시의 토지를 빌려주는 사업이다. 임대료를 주변 시세보다 낮게 책정하여 장기간 운영하는 것이 조건이다. 얼핏 저렴한 주택을 많이 공급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서울시가 정한 조건으로는 토지를 임대하는 게 구입하는 것에 비해 저렴하지 않다. 토지를 임대할 때와 구입할 때의 비용을 비교하려면 크게 토지임대료, 시장금리, 보유세, 시세차익을 검토하여야 한다. 임대하는 경우에는 토지임대료가 비용이 되며, 구입하는 경우에는 시장금리, 보유세가 비용이 되고 지가변동에 따른 시세차익이 수익이 된다.

마포구 성산동의 350㎡ 면적의 대지를 기준으로 분석해보면, 2018년 기준 토지감정가는 약 23억원 수준이다. 서울시는 감정가의 1%를 연 임대료로 받는다. 즉 토지를 임대할 때 비용은 연간 약 2300만원이다. 2018년 12월 기준 담보대출의 이율은 연 3% 수준이다.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시중에서 자금을 조달한다면 연간 6300만원 정도의 이자를 내야 한다. 한편 23억원인 토지의 보유세는 재산세, 지방교육세, 도시지역분을 합하여 400만원 정도이다. 즉 토지를 구입할 때 비용은 6700만원이다.

최근 5년간 지가변동률을 평균하면 월 0.4%이다. 즉 연간 5%의 시세차익을 기대할 수 있다. 연간 1억원이 넘는다. 구입할 때의 비용을 제하고 약 3300만원이 남는다. 지난 10년간 지가변동률을 평균하더라도 월 0.214%이며, 연간 2.6%의 시세차익을 기대할 수 있다. 연간 6000만원 정도 된다. 이러면 수지가 마이너스 700만원이지만 임대할 때 비용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토지를 구입하여 시세차익을 얻는 것이 이득이다.

서울시는 사회주택 사업자에게 30년간 토지를 임대한다. 사업자에게 유리한 특혜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저렴한 주택을 공급함에 있어서 큰 걸림돌이다. 토지를 30년밖에 못 쓴다는 것은 그 위의 주택도 30년밖에 못 쓴다는 것이다. 30년만 쓸 주택이라고 해서 싸게 지을 수는 없다. 관련 기준에 맞추어서 일반주택과 똑같은 비용을 들여야 한다.

제대로 된 주택을 지으려면 최소한 평당 600만원, ㎡당 180만원의 건축비가 소요된다. 용적률 200%를 기준으로 하면 12억6000만원의 건축비가 발생한다. 이를 30년으로 나누면 연간 4200만원을 부담하는 셈이다. 건축비에 대한 이자도 4000만원 발생한다. 토지를 제외한 주택보유세는 약 400만원이다. 여기에 토지임대료를 포함하여 최소한 1년에 1억원 정도 부담해야 한다. 10가구가 거주한다고 가정하면 가구당 1년에 1000만원을 부담해야 하며, 보증금 2억원에 월세 60만원 정도가 된다. 이는 주변 시세와 동일한 수준이다. 토지임대부 사회주택은 주변 시세의 80%보다 낮게 임대료를 책정해야 한다. 즉 월 48만원이 임대료의 상한이다. 부족한 12만원은 사업자가 부담하여야 한다. 즉 순손실이다.

시세차익을 포기하고, 자기 인건비도 못 건지며, 무모하게, 때로는 비웃음을 사며 사회주택을 공급하려는 이유는 명백하다. 시세차익이 지배하는 사회는 끝없는 가격 상승에 기댄, 서민의 소득을 무한정 빨아들이는 개미지옥이기 때문이다. 공공과 지역공동체가 토지를 소유하면서 서민이 충분히 부담할 수 있는 주택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손실을 감수하면서 토지임대부 사회주택을 공급하려는 것이다.

서울시는 토지임대부 사회주택사업을 토지지원리츠사업으로 전환하면서 토지임대료를 2%로 상향하였다. 주요 출자자의 요구일 것이다. 자본이득이 목표인 리츠와 사회주택의 궁합이 좋을 리 없다. 애석하게도 사회주택 공급 조건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부디, 사회주택을 위한 처절한 노력에 우리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적절히 응답해주기를 바란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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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경북에 사는 두 명의 80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다. 둘 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결혼을 꼽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신부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A여성은 결혼 후 3일 만에 시집으로 옮겼다. 반면 B여성은 1년 동안 친정살이를 하다 시집으로 갔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 3일 만에 옮긴 A의 경우 친정집의 곤궁한 살림 탓에 입 하나 덜자는 심산으로 빨리 시집으로 떠났다. 형편이 어렵다보니 혼수를 거의 마련하지 못하고 몸만 달랑이었다.

형편이 조금 나은 B의 경우 1년 동안 친정에서 신부수업을 받았다. 그동안 신랑은 거의 찾아올 수 없었다. 처가를 방문하려면 고기라도 한 근 끊어서 가야 할 터인데 형편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처가 역시 신랑이 찾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돌아갈 때 고기 한 근이라도 들려 보내야 하는데 이 역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신랑은 밤도둑처럼 몰래 왔다가 남이 안 보는 새벽을 틈타 떠나곤 했다. 1년 신부수업이 끝난 후 B는 나름 혼수를 장만하여 시집을 갔다.

시집을 간 두 여성의 삶은 이후 많이 달랐다. 3일 만에 시집을 간 A는 온갖 시집살이에 시달렸다. 혼수를 장만해오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더군다나 제대로 된 신부수업을 받지 못해 집안일을 못한다며 구박을 당했다. 너무 힘들 때면 친정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얼굴조차 비출 수 없었다. 친정에서 출가외인이라며 아예 연락조차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매몰차다며 동네 사람들이 쑤군댔다. A는 친정과 완전히 단절된 채 시집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지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아 나름 집안에서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1년 있다가 시집으로 간 B의 경우 친정과 계속 연락하며 지냈다. 시집에 가 있지만 오롯이 시집만의 사람이 아니었다. B를 보면 그 뒤에 떡하니 버팀목으로 있는 B 집안이 떠오른다. 시집에서 B를 함부로 부려먹을 수 없는 이유다. B 집안 역시 시집간 딸을 계속해서 돌본다. 그냥 방기했다가는 B 집안의 명예와 평판이 땅에 떨어진다. 그렇게 되면 마을 전체에서 B 집안의 사회적 지위가 훼손될 게 뻔하다. B의 시집 역시 B를 막 대하면 자신의 명예와 평판이 곤두박질친다는 것을 잘 안다.

전통 사회에서 결혼은 여성을 시집으로 보내는 일종의 ‘도덕적 파견’이었다. 언뜻 여성 매매처럼 보이지만, 시장경제에서 나타나는 상품 매매와는 다르다. 시장경제에서 매매는 판매자가 구매자에게 상품을 판매하고 나면 그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잃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전통 사회에서는 어떤 특정의 명예와 평판을 지닌 사람이나 사물은 남에게 넘겨준다 해도 그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잃지 않는다. 받은 사람도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소중히 대하고 보존하려 든다. 언젠가 되돌려주어야 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빠른 속도로 ‘몰도덕적 파견 사회’로 전환되고 있다. 파견노동자와 근로계약을 맺은 파견사업주가 사용사업주에게 파견계약을 맺어 팔아넘긴다. 그러면 사용사업주가 파견사업주의 눈치를 보지 않고 파견노동자를 제멋대로 사용한다. 파견노동자로부터 노무를 제공받으면서도 그에 대한 아무런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파견사업주 역시 일단 파견하였으니 파견노동자가 어찌 되든 자신의 도덕적 책임이 아니라며 발뺌한다.

이러는 사이 파견노동자는 아무런 도덕적 연결망이 없는 공백 상태에 빠진다. 고립무원, 홀로 노동하다 사고가 나도 어디 호소할 데가 없다. A의 경우는 결국 시집에서 도덕적 책임을 떠안았지만, 현재 파견노동자의 경우는 그렇지도 못하다. 수많은 파견노동자가 죽어나가는 사이 명예와 평판을 내팽개친 파견사업주와 사용사업주는 경제적 효율성을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주어야 하고 받아야 하며 또다시 되돌려주어야 하는 호혜적 도덕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고 있다. 만능 해결책인 양 때만 되면 사회적 대타협 운운하지만,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도덕적 이유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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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면 시인을 생각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사랑을 쉽고 정제된 언어로 풀어냈습니다. 시인은 보편, 인도주의, 휴머니즘으로 호흡했습니다. 인류가 사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든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 윤동주 시인이 이 땅에 심은 자산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이 세상 어디에 내놔도 모두가 공감할 정서와 연민을 그의 말에 담았습니다. 특정 대상에 대한 저항시인으로만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윤동주 시인을 두려워했습니다. 창씨개명이라는 민족정신에 대한 지독한 고문을 가하던 시기에, 우리의 언어로 세계 어디서나 보편타당한 인류애를 담은, 사랑을 담은 연민 어린 시를 이 땅의 누군가가 쓴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우리만의 시인이 아닌, 인류의 시인으로서 세계인의 보편 정서를 담은 시가 우리말로 쓰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군국주의자들의 땅이 아닌, 그들이 핍박하던 땅에서 그런 시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의식을 분석한다는 명목으로 어두운 생체실험실로 그를 끌고 간 것입니다. 시인에게서 느낀 두려움이 이처럼 그들이 시인을 괴롭힌 이유라면, 사실 진실로 불쌍한 존재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 결국 시인을 우리 가슴에 더 깊숙이 박아서 진정한 인류의 시인으로 자라게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로 시인의 그런 운명이 우리에게 깊은 연민을 심어준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

3·1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습니다. 조국을 잃은 슬픔과 혼돈을 뒤로하고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민중의 외침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주권을 찾은 후로 우리는 지금까지 민중의 외침으로 정권을 바꿔왔습니다. 4·19민주화운동, 6월항쟁, 그리고 촛불시민혁명이 그 외침이었습니다. 운동, 항쟁, 혁명과 같은 작명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불의에 항거하고 진정한 주권을 되찾기 위해 의연하게 거리로 나서고, 무자비한 희생을 감수하고도 무폭력으로 평화를 외쳤던 100년 전의 외침이 줄곧 이어져 온 것입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대한민국헌법 전문의 첫 구절이 이런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민주화 경험은 프랑스혁명에 이어 세계가 주목할 귀감이 돼가고 있고, 여러 경제 지표는 우리가 선진국 대열에 올랐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에 우리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던 세계가 이제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숭고한 희생으로 지고한 가치를 지켜온 우리의 정서를 그의 시 속에 담아왔습니다. 편협하고 왜곡된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오히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힘을 그 안에 담았습니다. 처음에 연민으로만 다가왔던 그의 언어는 읽을수록, 들을수록 왜 우리 민중이 숭고한 희생으로 총칼 앞에 나섰는지 이해하게 해 줍니다. 저는 이런 우리들의 외침에 언제나 윤동주 시인이 함께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시인은 조국의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시간이 꽤 흘렀기 때문에 광복이니 해방이니 하는 말들을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남겨진 숙제들이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사안은 진행 중입니다. 이 사안은 인류 보편의 인권 문제라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해서 양도나 포기를 운운할 수 없습니다. 상대국도 두려움을 떨치고 사안의 본질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한은 평화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상대가 손을 내민 상태라면 주변 국가들이 적극 동참하고, 그 손목을 잡아줘야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시인의 언어는 우리 안에서 살아납니다. 시인이 말한 도착하여야 할 시대의 정거장과 온정의 거리가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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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카풀 도입과 광주형 일자리가 세간의 관심사다. 양쪽 다 산업과 지역의 새로운 일자리 모델로 제시된 것인데 찬반 논란이 많다. 두 사례의 시사점은 하나다. 어떤 정책과 사업의 실행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을 배제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편리함과 효율성만 강조해서도, 산업경제만 강조해서도 안됨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일자리를 만들어야 할까. 아마도 중앙정부나 많은 지자체들은 또 다른 광주형 일자리에 관심을 기울일 것 같다. 그러나 보다 혁신적인 모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관련해 세 가지 아이디어를 꺼내 보고자 한다.

첫째, 광주형 일자리에서 고민하지 못한 ‘노동의 인간화’ 모델까지 논의해 보자. 앞으로 제조업 생산라인은 디지털화 과정에서 생산성 논쟁이 노사 간 쟁점이 될 것 같다. 이때 노사 상생의 대안적 공장(볼보, 폭스바겐)을 모색하면 좋겠다. 총체적 학습과 자율성이 확보된 ‘보람 있는 일터’를 만들고자 노사가 함께하면 좋겠다. 무엇보다 지속 가능하고 괜찮은 일자리를 위한 기업과 정부의 투자 확대가 핵심이다. 과거처럼 공모 사업으로 운영하는 정부의 일회성 사업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지역 맞춤형 일자리나 특별회계 포괄보조금 사업 중에는 실효성이 불확실한 사업이 많다. 오히려 기업의 장기투자를 증대시키기 위한 인센티브 구조개편이 필요하다. 제조업 공장만이 아닌 도심 서비스 일자리도 중요한데, 이탈리아 밀라노시의 디지털 경제 모델을 참조할 만하다. 이 모델은 기업 투자를 지자체에서 지원하고 지역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한다. 대학과 학생도 참여한다. 도시의 맞춤형 일자리 창출이 목표이지만 ‘노동의 권리’가 행동 계획에 주요한 원칙으로 제시되고 있다.

둘째, 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을 위한 새로운 도심 일자리를 모색하면 어떨까. 청년들이 일하고자 하는 기업은 꼭 주거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노동시장의 이동성과 수요공급 불일치 해소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지자체 간 협력 사업, 즉 행정구역을 벗어난 ‘도시권 일자리 프로젝트’를 모색할 수 있다. 하나의 지역이 아닌 몇 개의 지자체가 권역을 형성, 공동으로 지원된 ‘새 일자리 루트’를 만드는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청년 일자리를 위한 ‘5-3-1 캠페인’(Five three one campaign)은 참고할 만하다. 기술투자와 교육훈련 등 사용자가 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청년들의 잠재력 실현과 지역경제 활성화 등 긍정적 성과 세 가지 이유, 그리고 한 가지 긍정적인 결과물. 바로 지역경제 성장과 취업 증진이다. 이를 위해 정부가 공공정책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지원하고자 하는 기술 활용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의 삶과 제도의 패러다임이 혁신적으로 변화될 시기가 된 것 같다. 이제 공공부문에서 직접 일자리를 대량으로 창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앞으로 기존의 정형화된 풀타임 일자리는 더욱 힘들다. 그간 많은 지자체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일자리 질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정부의 95만개나 되는 재정지원 일자리들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새로운 일자리 모델로 ‘시민활동 일자리 계좌제’를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시민활동 계좌제는 지역에서 ‘일 경험’과 ‘유급 일자리 형태’를 융합한 새로운 모델이다. 지역에서 주 15시간에서 25시간 내외의 활동을 하고, 보상 성격으로 활동 시간이 계좌에 적립되어 본인이 필요할 때 유급으로 인출하는 것이다. 다양한 시민활동 참여자들은 활동계좌를 만들고, 직장을 잃거나 직업훈련 등 필요할 때 계좌에서 시간당 금액을 인출하여 사용하자는 것이다. 국내 몇몇 지자체에서도 실험적 논의가 제시되고 있지만 행정과 관습에 발목 잡혀 단 한 발짝도 진척을 못하고 있다.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는 국제노동기구(ILO)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을 제시하면서 인간 중심의 노동 10대 의제를 제시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개인역량과 제도 및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위한 투자확대였다. 과연 새로운 대안적 일자리 실험은 우리 사회에서 가능할까.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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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자기 부족에 충실하고, 어떤 부족에 속하는지 따지는 게 중요합니다. 한 부족끼리는 편의도 봐주고 서로 끌어줍니다. 계약도 쉽고 돈거래도 수월해집니다. 서로 참견과 잔소리도 주고받죠. 내부 위계질서도 중요합니다. 나이, 지위 등 권위가 귀할 수밖에요. 여기서 옳고 그름을 따지다간 큰일입니다. 모난 놈이 되죠. ‘사회성’도 없는 놈이 됩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조심조심,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길들였습니다. 개인으로 온전히 서기가 불안하고 그렇게 서 있는 개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것은 그 부작용일 겁니다. 게다가 판단마저 흐려지기 쉽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주장을 교환하기보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게 익숙하니까요. 우리 부족인지 저쪽인지, 우리 부족이면 내 밑인지 위인지 가늠합니다. 그 판단에 따라 옳고 그름마저 달라지기도 하죠.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이 미국 뉴욕에서 공무 연수 중 일행과 스트립바를 방문,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스트립바에 가서 옷 벗은 무희 춤을 즐겼다는 제보가 있었죠. 최 의원은 술집에 갔지만, 계산은 사비로 했다고 맞받았습니다. 공무 수행과 사적 행위의 구분은 따져볼 만합니다. 세금으로 묵은 호텔에서 사비로 술 마시는 것은 괜찮은가? 그렇다면 어디서 선을 그어야 하는가? 미국과 한국의 술 문화 비교도 해볼 만합니다. 노래방 도우미랑 어깨동무하는 것과 옷 벗은 무희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 노동의 소비는 정당한가? 그렇다면 어디까지 정당한가? 하지만 치열하고 건전한 토론 대신 논의는 부족 따지기로 전락했습니다. 최 의원은 제보자가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라고, 저쪽 부족이니 믿을 말이 아니라고 말이죠.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드루킹 댓글조작 관여 유죄 판결을 받고 법정구속까지 됐습니다. 컴퓨터 등 장애 업무방해죄는 1995년에 만들어진 뒤 단일 혐의로 실형이 선고된 적이 없어서 충격을 줬죠. 하지만 이 판결은 놀라운 기술 변화에 따른 우리 사회, 그리고 민주체제에 대한 숙제 또한 주었습니다. 누구나 위키피디아, 유튜브 등에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오늘, 이 법을 어떻게, 얼마만큼 적용해야 하나? 댓글 위력이 얼마나 큰가? 이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인터넷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당장 논의해야 할 문제들이죠. 하지만 김 지사와 지지자들은 판사가 속해있다고 추측되는 부족을 도마에 올렸습니다. 법원행정처 인사관리심의관을 지냈으며 사법농단 혐의로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비서실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적했죠. 저쪽의 판단이니 객관적일 수 없다며 말이죠.

저쪽의 보복이라는 주장은 여러모로 비생산적입니다. 첫째, 이미 지적한 대로 생산적 논쟁의 기회를 앗아갑니다. 둘째, 주장의 진위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동기를 알아야 판단할 수 있지만 마음속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죠. 그러니 논쟁은 보복이다, 아니다 사이를 맴돌기만 합니다. 자기들 분노 게이지를 한껏 높이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그것뿐이죠. 문제 해결은커녕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셋째, 치열한 논쟁 대신 부족의 깃발만 가리다 보면 스스로도 퇴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어느 부족에 속하는지 가리기는 쉽습니다. 증거를 살피고 주장을 가다듬는 게 어렵죠. 쉬운 해결책만 좇다 보면 지성은 마비되고 정체성마저도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한인이 많이 사는 미국 버지니아는 정치 추문으로 요즘 시끄럽습니다. 주지사 노덤의 대학 졸업앨범에서 백인테러집단인 KKK 복장을 한 사람과 흑인으로 분장한 백인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공개됐습니다. 이들 중 하나가 노덤 주지사라는 의혹과 함께요. 분노가 폭발했고 사임 요구가 거셉니다. 민주당 진영에서도 말이죠. 인종 갈등 극복은 민주당의 주요 과제이고, 그런 만큼 좌시할 수 없죠. 보수 쪽 정치 공세로 볼 만한 정황증거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를 들먹이는 대신 대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누가 의혹을 제기했건, 그 동기가 무엇이건 민주당 정체성을 위협할 사태임을 직감한 탓이죠.

우리 편 잘못에 적극적으로 침묵하는 부족 마인드는 솔직한 고백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회 발전에 큰 관심 없어. 우리는 이 정도로 퇴화한 부족이야. 우리는 그 정도 잘못은 잘못으로 보지 않아. 고백을 들었으니 선택을 해야겠죠. 부족 멤버십에 흡족하며 같이 퇴화할 것인가. 성찰하며 앞으로 나갈 것인가.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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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 월드컵 직전에 일본 축구 대표팀의 간판 선수였던 나카타 히데토시에게 일본의 한 우익 신문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일본 대표팀 평가전 성적이 좋지 않은데, 그 이유가 일본 선수들에게는 애국심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당신은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는데, 다음 평가전에 당신이 기미가요를 부르면 선수들과 관중들이 감동을 받아 축구의 신이 경기장에 강림할 것이다. 기미가요를 부를 텐가? 나카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기미가요, 너무 장엄해서 축구하기 전에 부를 만한 노래는 아니죠.” 실제로 그는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고, 그날 평가전에서 유일하게 기미가요를 크게 따라 부른 선수는 브라질에서 귀화한 산토스였다.

한국의 축구 대표팀은 경기 전 애국가가 나오면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따라 부른다. 군 복무 중인 선수들은 거수경례로 태극기를 향한다. 조국을 대표해서 경기장에 나서는 선수들은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전사들이다. 특히 한·일전에 나설 때 선수들의 마음은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다. 일본에만큼은 질 수 없다는 정신력은 적어도 역대 일본전의 압도적인 승리의 원동력인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투혼은 아마도 우리의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압축하는 언어일 것이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방송 인터뷰를 할 때, 대부분의 선수들은 “지금까지 저를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합니다”로 시작한다. 간혹 국가에서 지원한 태릉선수촌에서 맘 놓고 운동한 것이 금메달을 따게 된 큰 힘이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한다. 과거 사회주의국가에 있었던,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국가대표 선수들의 합숙 훈련소인 태릉선수촌은 한국형 스포츠 내셔널리즘의 생산기지였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은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생각한다. 태릉선수촌은 현재 진천으로 이전했지만, 조국이 나를 호명한 것을 인증하는 장소이자, 금메달 꿈을 펼칠 수 있는 꿈의 성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조국이 부른 태릉선수촌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과 격리돼 성폭력과 반인권적 폭행의 비밀장소가 되었다. 쇼트트랙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심석희 선수는 조재범 코치로부터 상습적인 폭행과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그녀가 성폭행을 당한 장소로 지목한 곳이 바로 태릉과 진천 선수촌, 한국체육대 빙상장 라커룸이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합숙하는 장소는 외부와 격리돼 일반인들은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코치들은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빌미로 체벌과 폭행을 정당화한다. 이게 다 너희들 금메달 따게 하려는 것이고, 국위선양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문을 건다. 협회는 코치들의 만행을 알면서도 금메달이란 지상과제를 위해 묵인한다. 금메달과 국위선양은 선수들의 인권 위에 군림한다. 심석희 선수에게 금메달은 개인의 값진 영광이 아니라 강압과 폭력의 대가로 얻은 국가의 전리품이었던 것이다. 심석희 선수의 폭로와 고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시민단체에서 기자회견을 하니, 빙상 체육인들은 다음 올림픽에 금메달 못 따면, 너희들이 책임질 거냐고 겁박을 한다. 금메달로 최종 수렴되는 스포츠 내셔널리즘은 코치와 협회가 폭력을 조장하고 공모하게 만드는 어둠의 속이다.

스포츠 내셔널리즘은 조국 근대화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가난한 시절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국가 이데올로기는 스포츠를 통해 대중들을 단결시킨다. 베트남 국민들의 최근 축구 열풍도 그 신화에 해당된다. 그런데 스포츠 내셔널리즘은 대중의 광기와 폭력을 동원해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 정당한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이다. 그것은 선수들의 인권을 짓밟고,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공포의 주술이다. 제2의 심석희 선수 사태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괴물 같은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내파해야 한다. 대표선수들이 합숙하는 선수촌을 해산시키고, 선수 코치들에게 인권교육을 실시하며,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주는, 이른바 “금메달이 아니어도 괜찮아, 너희들만 행복하면” 프로젝트를 가동해야 한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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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개념의 관광이란 말은 1800년대 영국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1838년 스탕달의 <여행자의 회상기(Memories d’un touriste)>란 작품을 통해 ‘관광객(tourist)’이란 단어가 일반화되었다. 1873년 쥘 베른이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쓸 무렵 관광은 삶의 여유를 즐기는 중산 계층의 필수 교양이자 미덕이 되었다. 기술 발달은 20세기의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고, 20세기는 본격적인 대중여행의 길을 열었다. 세계관광기구(UNWTO)의 통계에 따르면 1995년 5억3000여명이었던 전 세계 해외여행자 수가 2012년 10억명을 돌파하였고, 2017년엔 13억200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인도의 총인구가 13억6000만명이란 사실을 상기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목적으로 이동하는지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찾는 여행지가 지나치게 유럽과 아시아·태평양의 몇몇 지역에 편중된다는 것이다. 유명 관광지로 알려진 지역들은 해당 도시의 수용 능력 이상의 관광객이 몰리는 오버 투어리즘(overtourism)으로 인한 사회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최근 필리핀의 유명관광지인 보라카이가 환경정화를 목적으로 6개월간 관광지 폐쇄를 결정한 것, 하와이가 노숙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거나 에메랄드빛 바다를 자랑하던 몰디브의 산호가 떼죽음하여 생명이 살 수 없는 좀비지대로 변모해가는 등 과잉관광은 심각한 생태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이란 새로운 사회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은 ‘관광지화되다(touristify)’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결합한 용어로 관광객의 과잉 증가로 인한 난개발, 교통 혼잡, 범죄율과 거주 비용 증가 등의 사회문제가 발생해 원거주민이 누려야 할 삶의 질이 하락하고, 내몰리는 현상을 의미한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등에서는 관광객을 위한 현대식 호텔과 레스토랑이 유입되면서 주민 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세탁소, 정육점 등 기초 편의시설마저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해 주민들이 관광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한때 지역 활성화의 좋은 본보기였던 통영 동피랑, 서울 북촌 한옥마을 등에서도 마을 원주민이 밀려나거나 관광객과의 마찰이 빚어지고, 이화동 벽화마을은 관광명소가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 스스로 벽화를 지우기도 했다.

그 어느 지역보다 심각한 곳이 제주다. 68만명의 도민이 살고 있는 제주엔 주민의 스무 배가 넘는 1500만명의 관광객이 한 해에 찾는다. 이는 제주보다 주민 인구는 두 배에 불과하지만, 면적은 15배가 넘는 하와이 관광객의 두 배다. 그런데도 제주는 관광산업을 활성화한다는 미명 아래 30년 이상 수령을 가진 삼나무 숲길인 비자림로 확장공사를 강행하고,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동백동산 습지 부근에 골프장, 생태계의 보고인 곶자왈 인근엔 채석장이 성업 중이다. 그마저도 부족해 제2공항 건설을 무리하게 추진하여 주민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뜨내기 관광객의 눈에는 한없이 아름답기만 한 제주가 68만 도민이 머물러 살기에 행복한 곳일까? 이것이 일부 토건세력과 외지 투자자들의 이득이 아닌 제주 도민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까? 행복지수 세계 1위를 자랑하는 부탄 역시 국가 수입의 상당 부분을 관광에 의존하며, 관광 수입으로 무상교육·의료를 시행하고 있지만 관광객 수를 제한하고 있다. 너무 많은 관광객은 국민 삶의 질을 위협하고 생태환경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관광(觀光)이란 고작 서구의 ‘tourism’에 대응하기 위한 번역어로 사용되지만, 이 말은 <역경(易經)>의 “관국지광(觀國之光)”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래 의미는 ‘덕을 지닌 이가 다스리는 나라의 찬란한 문물을 이웃한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원희룡 도지사는 관광이 뭔지 모르며, 도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도 모르는 것 같다. 그에게 묻고 싶다. “무시거가 겅 중허우꽈(무엇이 중요한데)?”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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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정책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한쪽에서는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올라 노동시장이 위축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노동 가격이 오르니 기존 노동자마저 해고해서 실업률이 증가한다. 기업의 활력이 떨어지고 상품과 서비스 가격이 폭등해 경제가 파탄난다. 다른 한쪽에서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어렵게 된 것은 임대료와 카드수수료 같은 다른 요인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최저임금 수준이 OECD 가입국 기준으로 볼 때 결코 높지 않으니 더 올려야 한다. 가계소득이 늘면 소비가 증가하고, 기업들이 투자를 확대해서 경제가 성장한다.

파탄이냐, 성장이냐 다투는 사이 최저임금이 오롯이 경제 문제인 것처럼 오인되고 있다. 최소한의 사람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최저임금 정책의 원래 취지가 묻혀버렸다. 왜 최저임금을 보장해야 하는가? 편협한 경제 논리에서 벗어나려면 이러한 질문을 문화적 차원에서 근본화해야 한다. 답은 확실하다. 사람을 다른 사람의 소유물, 즉 노예로 떨어트리지 않기 위함이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 노예는 법률적 차원으로 볼 때 주인이 소유한 사물이었다. 주인은 노예를 사물처럼 사고팔고 쓰고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소유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근대 시장경제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물일 뿐이다.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재산’이 될 수 없다. 이제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에서 자유인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근대 시장경제에서도 사람의 특정 부분은 사고팔린다. 노동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조차도 소유자는 구매자가 아니라 노동자 자신이다. 노동자는 노동시장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팔아 살아간다. 생존만을 위해 노동을 팔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노예의 강제 노동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신분 사회와 달리 근대사회에서 인간은 아직 삶의 행로가 완전히 정해지지 않은 자유인이다. 활동을 통해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야 하는 열린 존재다. 노동은 그러한 활동의 하나다.

이렇듯 근대 시장경제는 사람을 노예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경제 논리에만 맡겨놓으면 사람이 다시 노예로 전락한다는 것을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여 이를 방지한다. 최저임금 정책은 바로 그러한 방지책의 하나다. 노예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최저 가이드라인이다. 그런데도 온 나라가 최저임금을 기업이 지불해야 할 불필요한 비용으로 보고 저주한다. 사실상 노예제를 옹호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기업이 노동을 구매해놓고 마치 인간을 소유한 것처럼 마구 갑질을 해댄다. 

현재 많은 청년이 비정규직과 파견직에 내몰리고 있다.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돕기 위해 노동 시장을 유연하게 만들기 위해서란다. 여기에서 고용은 기업의 경제 효율성 문제로 축소된다. 기업은 생존하는 데 잠시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청년은 희망을 빼앗긴다. 그래서 자신의 꿈과 욕망의 수준을 낮춘다. 새로 시작하려는 의지가 봉쇄된다. 청년의 진입을 아예 가로막거나 비정규직과 파견직으로 불태우는 ‘고용 저주 사회’의 노예로 전락한 청년의 가슴속에 원한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러니 사람을 벌레 대하듯 하고 입만 열면 혐오와 증오의 언어가 튀어나온다.

이렇듯 소득주도성장론이 저주에 떠밀리자 이제 혁신성장하자고 한다. 하지만 이제껏 누리던 이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인건비 줄이는 데 모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단기적으로는 가장 효율적인 생존 방법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바보짓이다. 최고의 혁신은 다름 아닌 고용이다. 고용은 새로 오는 자에게 새로 시작할 수 있도록 환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절대적인 환대를 통해 이 땅에 살게 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먼저 와있는 자들의 절대적인 환대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시작도 못해보고 바로 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터 잡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되갚아야 할 차례다. 청년, 새 이야기를 가지고 온 새 사람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절대적으로 환대하자.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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