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제자와 공유하는 단톡방에서 카톡이 울린다. 40대 후반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현재 박사과정을 수료한 대학원 여제자다.

“모두 잘 계시나요? 저는 코로나 땜에 무서운 게 아니라 삼시세끼 밥 땜에 무서워요. 친밀성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나갈 데도 없고, 책도 못 보고 논문도 손도 못 대고 답답해요.” 킥킥 웃을 사이도 없이 또 다른 여제자가 메시지를 보낸다. “저는 바깥 코로나가 무서운 게 아니라 집에서 밥 달라는 코로나 때문에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있습니다. 얼른 친밀성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비슷한 글이 연이어 달린다. 

보다 못해 나도 한마디 덧붙인다. “죄송합니다. 성장이 멈춰 혼자 밥상 못 차리는 어린아이라서.” 키득키득 이모티콘이 따라붙더니, 이내 묻는다. “자발적일까요? 비자발적일까요? 남편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코로나19의 전파를 막기 위해 전 사회적으로 펼치는 이방인 사이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엉뚱하게도 가족 사이의 ‘사회적 거리 없애기’로 나타나고 있다. 가게 문을 닫은 자영업자나 재택근무 중인 직장인이나 개학이 미뤄진 아이나 모두 나갈 데가 없어 종일 집 안에서만 북적댄다. TV만 틀면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먹방은 식도락을 강제하지만, 삼시세끼 식구 밥상 차리는 전담자는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밥상 차리는 걸 두고 말다툼이 일어나고 급기야 폭력이 발생한다. 어느새 가해자와 피해자가 된 가족 성원인데도 친밀한 사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통하지 않는다. 

친밀성이란 뭔가? 차가운 근대 개인주의 정서에 맞선 따뜻한 집단주의 정서다. 최근까지도 친밀성은 이성 간 낭만적 사랑을 통해 구성된 근대 핵가족을 모델로 논의돼 왔다. 근대 핵가족은 남녀 간 낭만적 사랑을 고리로 해서 형성된다. 남녀는 서로 신체적·정신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 서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통해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혼해서 평생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자녀를 출산하고 사랑으로 돌보고 온전한 성인으로 사회화시키면서 가족 사이의 친밀성은 더욱 강화된다. 가족은 냉혹한 근대성에 맞서 살아갈 정서적 힘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이렇듯 친밀성을 차가운 근대성에 대한 치유책으로 이상화하게 되면 그 뒤쪽 어두운 면을 못 보게 된다. 친밀한 사이에서는 근대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 여성이 돌봄 전담자가 되어 남편과 아이를 돌보다가 정작 자신의 자아를 돌보지 못해 황폐해진다. 근대 핵가족이 성 불평등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한번 결혼하면 남성가부장의 경제적 부양능력과 전업주부의 정서적 지원능력이 결합해서 평생의 애착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로는 제대로 된 경제적 부양능력이 없는, 설사 있다 해도 소통능력을 상실한 ‘자발적 어린아이’를 돌보고 출산하고 육아하고 살림하느라 여성은 자아를 잃어버린다. 무엇보다 가족성원으로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탓이다.

사람은 어느 장소에 있든 자신의 공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인격적 공간’을 지녀야 한다. 어떤 누구도 이 인격적 공간을 침해당하면 고유의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 모두 자신의 인격적 공간을 침해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이유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과 사회적 공간을 공유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 겹치는 사회적 공간에서 나의 인격적 공간은 물론 상대방의 인격적 공간도 보호하려고 호혜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근대 민주주의 사회적 공간의 특성이다. 친밀성의 공간으로 이상화된 집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공공장소의 사회적 거리를 회복하자는 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이에 더해 집에서 여성의 인격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도 벌여야 한다.

<최종렬 |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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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시간을 셈한다. 몇 번이나 세었을까. 오늘이 한달이다, 오십일이다, 백일이다, 이백일이다. 그렇게 쌓아온 시간이 곧 삼백일이 된다. 강남역 철탑 위,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의 시간이다. 1990년대 삼성항공(테크윈)에 입사해 노조설립을 주도하다 해고당한 그는 노조탄압과 부당해고에 대한 삼성의 사과와 복직을 요구하며, 작년 6월 철탑에 올랐다. ‘무노조 삼성’에서 노동조합을 시도했던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비노조 경영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그룹노사전략’을 수립하고 에버랜드 내 상황실을 설치하여 노조설립을 시도하는 근로자들을 상당 기간 감시하면서 그들의 사생활 비밀을 함부로 빼내고, 징계사유를 억지로 찾아내어 징계하여 회사에서 내쫓으려 하거나 급여를 깎아 경제적 압박을 가하게 만들고,…노조 활동을 한 근로자들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려 한다는 이유만으로 회사 내에서 적대시되고 그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게 된다.”

삼성 에버랜드 노조와해 사건 판결문의 일부다. 김용희에게 일어난 것도 이러한 일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삼성 경영진의 인식을 19세기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에 등장하는 산업도시 코크타운의 공장주에 비유했다. 이 19세기적 노동탄압 사건은 작년 12월 7년 만에 유죄 판결을 받았고, 당시 삼성 미래전략실에서 사건을 주도했던 관련자들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삼성의 조직적인 노조파괴 행위는 김용희 같은 피해 노동자들의 끈질긴 증언과 투쟁이 없었다면 세상에 드러날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스페인, 영국, 독일,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이 ‘코로나 파업’을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감염 위험에도 작업을 강행하거나 노동자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는 회사에 항의하고 대책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파업을 할 수 있을까? ‘노동자들의 위기를 막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는 60일간 해고를 금지하고 덴마크 정부는 임금 보전을 요구하는데, 한국에선 ‘기업의 위기를 막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당한다. 이 차이는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코로나19 사태는 동물들이 위험에 처한 곳에서는 인간도 안전할 수 없고, 노동자가 아픈 곳에서는 다른 시민들도 건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안전망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안전망이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를 당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현실이 계속되는 한, 쿠팡맨이 쓰러져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고 콜센터 노동자들이 집단감염되는 이 현실도 끝나지 않는다. 김용희의 현실은 우리의 현실이다.

최근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 공여 및 횡령 사건 파기환송심을 앞두고, ‘삼성준법감시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지난 3월11일, 이 기구는 삼성그룹이 과거의 노조와해공작 등 노동탄압 문제에 대해 반성하고 국민들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삼성이 정말로 반성의 의지를 보이려면, 제일 먼저 김용희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는 삼성에 의해 파괴당한 노동조합과 노동자를 상징하며, 노동자로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들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김용희의 삼백일은, 삼성이 침묵한 삼백일이다. 김용희의 철탑 위 시간이 길어질수록 삼성의 죄도 그만큼 무거워진다. 사태를 묵인하고 방관한 정부와 여당도 마찬가지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의 2대주주다. 의지만 있다면 구할 수 있다. ‘국민’의 한 사람인 노동자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며 버티고 있다. 그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언제까지 그의 사위어가는 몸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4월4일, 삼백일이 된다. 이제 응답하라. 김용희가 철탑 위에 있는 한, 삼성의 노조파괴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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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현실에서 실험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인류가 어떻게 삶의 방식을 바꾸면 기후변화를 저지할 수 있는지를 인류의 운명을 걸고 실험해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문제엔 수리(數理) 모델링을 사용한다. 기후변화에 영향을 주는 요소 간의 관계를 수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수식 속의 일부 요소는 인간이 바꿀 수 있어서, 특정 요소가 기후에 주는 영향을 실험해 볼 수 있다. 현재 인류가 추진하고 있는 저탄소 정책 등은 이런 방식으로 효과성이 검증된 정책이다.   

감염병은 어떨까. 감염의 시작과 번져간 흔적은 빅데이터에 표현되고, 사후에 수학적 방식의 모델링으로 작동했던 방식을 드러낸다. 일단 수식이 생기면, 그 안에 포함된 일부 요소를 바꿔보는 방식으로, 정책적 대응이 감염 확산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실험해볼 수 있다.   

근대 역사에서 인류 최대의 재앙은 약 100년 전의 스페인 독감이다. 2년 동안 지구상에서 35명 중 1명이 사라졌다. 특히 심한 피해를 본 이란은 인구 5명 중 1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에서는 무오년 독감으로 불리며 14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사망자 대부분이 청년층에서 발생했지만, 이번 코로나19의 사망자는 주로 노년층이다. 이전의 경험이 다음에도 적용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뜻이다.   

감염병을 수학적으로 접근하는 시도는 17세기 페스트 대응에서 실마리가 보이지만, 18세기 스위스 수학자인 다니엘 베르누이가 천연두의 확산을 수식으로 표현한 게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의 수학 실험은 대규모의 예방 접종이 인류의 기대수명을 3년 늘린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현대의 수리감염역학(mathematical epidemiology) 연구자들은 감염병의 확산 과정을 미분방정식이나 차분방정식으로 표현하고 컴퓨터를 사용해서 수치적으로 푼다.   

이와는 다른 네트워크 이론의 접근도 있다. 할리우드의 배우들을 무작위로 분포된 점들로 표현하고, 서로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는 걸 연상해보자. 수많은 점과 선이 있는 사회관계망에서, 선이 별로 없는 건 외톨이이고, 많은 사람과 이어진 건 ‘마당발’이다. 만약 많은 점 사이에 제멋대로(random) 선을 그으면 반드시 몇 개의 마당발이 나온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사실이다. 상호 연결된 인터넷 접속지들의 네트워크에서도 이런 마당발 허브가 여럿 생기는데, 해커가 이런 허브를 공격하면 전체 인터넷의 심대한 접속 장애가 발생한다. 이번에 우리나라 코로나19의 확산을 점과 선으로 표현한다면, 특정 종교단체나 콜센터 등이 이런 ‘마당발’의 역할로 등장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은옥 건국대 수학과 교수팀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 개념까지 반영한 코로나19 수리모델링을 최근에 시도했다. 전통적인 SIR 방식에서는 31번째 확진자 발생 이후 급속도로 확진자가 증가해서 전 인구가 감염될 때까지 확산한다. 6개의 미분방정식으로 구성된 새 모델은,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실행되면 일부 감염으로 끝난다. 행동 변화로 인해 감염전파율이 2%로 줄어들고, 증상발현 후 격리까지 평균 4일 걸리는 경우는 6월 중순에, 격리에 하루 더 걸린다면 10월 말에 종식된다. 3월14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의 훨씬 단순한 무작위성 실험도, 지역 격리는 전체 감염을 늦추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일부 감염만으로 종식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사회문화적 요소를 모두 수식에 반영하기 힘들고 각종 상수 값은 기존 데이터로 추정한 것이라서 종료 시점의 예측 용도로 사용하긴 힘들다. 하지만 수학적 실험이 의미하는 대응 정책은 분명하다. 혹독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행하고, 증상발현 후 최대한 신속히 격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격리에서 하루를 단축하면, 코로나19 종식은 넉 달 빨라진다.

<박형주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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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가 새로운 질병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벌써 많은 분이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고인과 유가족 여러분께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질병과 싸우시는 분들과 그 주변 분들도 용기를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힘든 싸움에서 앞장서고 계신 질병관리본부를 비롯한 정부 관계자와 의사, 간호사, 응급구조사, 소방대원 등 사회 안녕을 책임지는 모든 분께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마스크를 나누는 이웃, 힘들어도 힘을 모으는 국민 여러분의 모습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에서 보여주시는 용기와 헌신에 저 또한 큰 힘을 얻습니다. 곧 총선이 다가옵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자 정치적 의지를 표현하는 기회입니다. 꼭 선거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걱정과 의견을 후보들에게 전달하십시오. 이 위기를 헤쳐나갈 지혜와 또 다가올 위기를 대비할 혜안도 이들과 나누어주십시오. 그리고 선거가 끝나면 또다시 힘을 모아야 합니다. 정치적 지지를 떠나 지금 이 위기를 헤쳐나가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 힘을 보태주십시오. 이 위기가 끝나는 날 밝은 얼굴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요즘 같은 때 전직 대통령이 발표할 만한 글입니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 중 누구도 간단한 격려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우리는 박근혜의 ‘옥중서신’을 받았죠. 그 편지는 정적에 대한 적대감과 꺾이지 않는 권력욕을 잘 드러냈습니다. 게다가 “기존 거대 야당 중심으로…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치라며 미래통합당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이를 전달한 유영하 변호사는 미래통합당의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에 입당했죠. 당장 황교안 대표는 입장문을 내며 반색했습니다. 탄핵 국면에서 박근혜 편에 서지 않았던 이들의 입장에서 면죄부와 현실정치의 인정을 동시에 받은 셈이니까요. 조원진 의원의 자유공화당은 섭섭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태극기집회를 주도하며 박근혜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해온 일등 공신이 이들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야말로 박근혜 말처럼 “배신의 정치”가 아닐까요.

박근혜는 늘 절대적 충성을 요구해왔습니다. 최순실부터 경북의 지지자, 태극기부대는 그 요구에 충실하게 따랐죠. 개인적 울분, 과거에의 향수, 정치적 성향, 그 어떤 것이었든 박근혜를 통해 정치판으로, 광장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이들은 사실과 이성에 작별을 고했습니다. 최순실의 태블릿PC는 조작이라고 “믿고” 박근혜는 억울하다고 “믿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빨갱이이고 한국의 공산화를 꿈꾼다고 “믿습니다”. 증거, 검찰 조사, 법원 판단으로 드러난 사실은 무시합니다. 문재인 정책은 중도 우파이고, 그의 비전도 그쯤 된다는 사실도 중요치 않습니다. 다만 박근혜와 이들의 측근이 내려준 교시에 충실할 뿐이죠. 딱 종교의 모습입니다. 박근혜 자신은 어떤가요. 공익과 선의를 가장해 사리사욕만 채우며 거짓과 기만으로 추종자를 조종합니다. 사회와 나라는 뒷전이고 교세 확장에만 집중하죠. 이를 위해 나라 전체의 번영과 안정도 뒤흔들어버립니다. 종교지도자의 전형적 모습입니다.

한국은 종교 분쟁이 없어 다행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박근혜교는 민주체제를 위협했고 남북관계를 구렁텅이에 빠뜨렸습니다. 그 여진은 아직도 한국을 흔들고 있죠. 거슬러 올라가면 이명박 장로, 이승만 장로가 있고, 이들은 박근혜교 신자의 우상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이들은 공산주의를 상대로 상상의 성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비슷한 종교세력이 자라날 토양도 커갔습니다. 신천지가 그렇고 구원파가 그랬죠. 보통 사람들에게 생소한 교회들이 큰 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게 우연일까요. 이들을 이단이라고 부르지만, 기존의 교회들은 얼마나 다를까요. 종교적 맹신과 집단적 사고 또한 이번 위기를 통해 돌아봐야 할 우리 안의 숙제 중 하나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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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가 흩어져 있던 민심을 한곳으로 모으고 있다. 

보통사람들은 언제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는가라는 질문에 마이클 최 미국 UCLA대학교 교수는 저서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가>에서 “시위대의 수가 충분해서 경찰이 구속하거나 억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만 참여한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조정(coordination)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공유지식(shared knowledge)이 창출되는 사회적 과정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가 안다는 사실을 상대가 알고, 상대가 안다는 사실은 내가 알고, 이 사실을 서로 아는 상태”가 공유지식이다. 공유지식의 대표적인 플랫폼으로 공식행사, 집회, 미디어 이벤트 그리고 공공 의례(儀禮) 등이 있다. 네트워크가 강할수록 자신들만의 공유지식을 산출하는 능력이 높게 나타난다. 전광훈 목사가 이끌었던 광화문광장 집회와 이만희 목사의 신천지교회가 그랬다. 

신천지 교인들은 불문곡직 만인의 공적(公敵)이 됐다. 끓어오르는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고자 이만희 신천지 총회장은 두 번의 큰절로 용서를 구하고자 했다. 앞서 신천지 측은 홈페이지와 유튜브, 페이스북 계정 등을 통해 낸 입장문, 그리고 교인 명단 제출 등 나름 조정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뒤이어 허위 명단 제출과 중국 우한에 신천지 지교회가 있다는 사실 등을 은폐한 것이 드러나면서 공분(公憤)을 더 키웠다.

전 목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구속되기 전 광화문 집회 단상(2월23일)에서 “야외에서 (코로나19) 감염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며 “하나님은 전염병에서 우리를 고쳐준다. 다음에도 예배 오시라”고 말했다. 바이러스 확산 방지에 협조하기보다는 정권 타도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 지지자들에게 정부에 비타협적으로 임할 것을 명하는 조정을 유도했다. 모두 악수(惡手)를 뒀다. 

사회심리학자들은 타인의 신념에 대해 오도(誤導)된 신념을 가지고서 공유지식을 형성하지 못한 상황을 가리켜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과학적 사실과 동떨어진 ‘요설(妖說)’ 같은 주장이 난무하는 광화문광장이 그랬다. 오염된 언어들이 광장의 허공을 가로지르며 낡고 찢어진 깃발처럼 나부꼈다. 조선시대 면암 최익현이 광화문에 엎드려 강화도조약(1876) 철폐를 요구하면서 올린 ‘도끼상소’ 기백은커녕 ‘촛불’로 상징되는 정의와 공정 모두 실종된 지는 오래다.

시나브로 코로나19로 문재인 정권의 촛불이 흔들리고 있다. 실기(失機)와 실언(失言)한 정부·여당이 진상을 호도(糊塗)한 것이 화를 키웠다. 설상가상으로 바이러스의 조기 소멸을 점쳤던 대통령의 낙관적 언어는 의도치 않게 허언(虛言)이 됐다. 주워 담을 수 없는 패착(敗着)이었다. 대통령은 그 결과 깊은 정치적 내상을 입었으며, 관련 참모들은 모두 대역죄를 지었다. 애꿎은 시민들만 졸지에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마스크 유랑민’ 처지가 됐다. 정부에 대한 신뢰는 대리석 바닥에 던져진 유리잔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마스크 구매행렬은 정권 위기의 전조를 알리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이다. 그렇다면 하루바삐 마스크 품귀 현상을 잠재우는 게 상책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정치가이자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곤 진실한 사람들(good men)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라며 반어법으로 말했다. 세월호 참사 때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고 물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그 질문에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취임사에서 굳게 다짐했다. 봄이 오면 우리는 오염된 광장을 청소하고서 정의와 공정 그리고 민주주의를 다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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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친구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외국에 사는 친구인데 가족 행사가 있어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감염이 됐다. 친구가 걱정된다며 보내준 링크에는 차분히 적은 병상일지가 있었다. 평소 건강했는데 가벼운 인후통과 마른기침을 느끼자마자 자가격리를 하고 바로 전화해 검사를 받는 등 조심스럽고 책임감 있게 대응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지의 일부를 칼럼에 쓰고 싶어 연락을 했다. 정중한 사양의 답을 들었다. 감사와 희망이 담긴 글이었고 나 역시 일상의 소중함을 적은 부분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인용하고 싶었는데 거절의 의사가 단호했다. 응원의 메시지도 많았지만 글을 올린 후 온갖 비방을 들었다고 했다. 글을 왜 올렸느냐, 신천지냐, 탄핵에 찬성하느냐, 중국 거쳐 왔느냐… 이런 상황에서 매체를 통해 알려지고 나면 자신과 가족이 받을 2차 가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듣고 보니 단호한 거절이 이해가 갔다. 동시에 화도 났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누구든 간에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것이 의사의 도리이듯 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 낫기를 기원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 어디를 거쳤든, 무슨 종교를 믿든, 어디에 살든 당장 아픈 이를 추궁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며 만약 그중 어느 하나라도 해당되면 감염되는 것이 마땅하기라도 하다는 건가? 공동체의 불행을 함께 이겨낼 궁리보다는 위기를 빌미로 남을 공격하고, 궁지에 몰아 희열을 느끼고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위기 때 본모습이 나온다고 했는데 오히려 신난 듯이 보이는 이들도 있는 건 착각일까.

시계가 진짜니 가짜니, 마스크 공급이 풀리네 마네, 사과를 하라 마라 갑론을박 트래픽의 급증으로 바빠진 뉴스 사이트와는 달리 나를 포함해 많은 이의 삶이 단순해졌다. 퇴근 후 약속해 친구를 만나고, 사람 많은 거리를 걷고, 맛집에 줄을 서고, 장난치며 손을 잡고, 깔깔대며 이야기하다 침이라도 튀면 면박을 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이 새삼스럽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기침을 하자 옆자리 사람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보는 이가 다 무안할 정도였지만 일어서는 사람도 이해가 간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눈만 빼꼼하니 중동 어느 나라에 온 것 같기도 하다. 온라인으로 주문을 하려고 보니 품절인 항목이 유난히 많다. 음울한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 현실이 됐다. 이런 날이 이렇게 갑자기 닥칠 줄 몰랐다. 당연한 줄 알았던 일상이 이토록 쉽게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이 와중에 밖에 안 나갔더니 통장에 돈이 쌓였다며 코로나19가 물러가면 매일 세끼 외식을 하겠다고 자영업자들 각오하라는 이가 있지를 않나, 질병관리본부에 자양강장제를 보냈다는 이도 있고, 배송기사를 위해 문고리에 포장도 안 뜯은 마스크를 걸어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비난하고 사재기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무료 급식소가 폐쇄되자 도시락을 전달하고, 동네 그룹홈과 쉼터에 익명으로 간편식을 배송하는 이도 있다. 대구에 병상이 부족해 입원을 기다리다 쓰러지는 상황이 늘자 광주에서 경증환자를 이송해 치료를 시작했다.

광주시 발표자료는 무척 비장했는데 마음에 닿는 문구가 있었다. “1980년 5월, 고립되었던 광주가 결코 외롭지 않았던 것은 광주와 뜻을 함께해준 수많은 연대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경계하고 밀어내기보다 더욱 긴밀한 연대를 통해 국민의 모든 역량을 결집해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이것이 지난 100년간 이어온 3·1 독립운동의 정신이며, 40주년을 맞이하는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이자 “광주다움”이라고 했다. 서울서 나고 자랐지만 ‘광주다움’을 좀 장착해야겠다.

암울한 재난 영화가 따뜻한 휴먼 드라마로 변하는 순간 바이러스는 사그라든다. 영화 보면 다 그렇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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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병리학자, 인류학자, 위생학자, 진보주의자 이렇게 네 명의 위대한 인물을 잃었다.” 1902년 루돌프 피르호 사망 당시, 한 독일 신문의 부고기사다. 의대 교과서에는 병리학의 아버지로 등장하는데, 한때는 심지어 ‘의학의 교황’으로 불릴 만큼 저명한 의사였다. 또한 인류학의 창시자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독일인류학회를 창립했는데, 현대 인류학의 아버지, 프란츠 보아스가 그의 제자다.

어린 시절 피르호는 영특했지만, 의과대학에 갈 학비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의대에 진학했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무상으로 가르쳐주었는데, 대신 군의관으로 의무복무해야 했다. 훔볼트 대학교의 전신이다. 의대생이 된 피르호는 학문에서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다. 의사면허를 취득한 피르호는 베를린대의 강사로 임명되었다. 안락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전도유망한 27세의 의사, 피르호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실레지아 지방에 발진티푸스가 크게 유행한 것이다. 프로이센 정부는 실태 조사를 위해 그를 파견했다.

새내기 의사였에 불과했던 피르호는 사실 전염병에 관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의 눈에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주민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위생 시설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군주는 이들의 고통에 무심했다. 전염병이 돌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피르호는 300쪽에 이르는 발칙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전면적인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세금을 면제하고, 도로를 개선하고, 고아원을 설치하고, 구호기금을 만들라.’ 

물론 프로이센 정부는 보고서를 채택할 생각이 없었다. 보고서를 제출한 지 8일 만에 피르호는 3월 혁명에 동참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바라던 혁명은, 그러나 실패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시골에 좌천된 그는 두문불출하며 연구에 매진했다. 획기적 발견을 거듭했다. 약 10년의 ‘유배’를 마치고 베를린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인류학자로도 활약했다. 코카서스, 이집트, 수단 등에서 인류학 현지 조사에 나섰고, 트로이 유적의 발굴에 참여했다. 수백만명의 독일인에 대한 인류학 연구를 통해 ‘독일인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더 큰 규모’에서 빛을 발했다. 바로 정치였다. 베를린 시의원과 독일의회 의원을 장기간 역임하면서 젊은 시절 보고서에 썼던 꿈을 하나씩 실현해 나갔다. 공공보건 제도를 만들고, 식품위생법, 상하수도 개선 등 거대한 사회개혁에 나섰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교육과 번영이 세상을 위한 처방이라고 믿었다.

코로나19가 유행하는 대구와 경북 지역으로 벌써 수백명의 공중보건의와 군의관이 파견되었다. 피르호처럼 갓 의사 면허 혹은 전문의 자격을 받은 젊은 의사들이다. 국립의료원의 내과 의료진, 국립정신건강센터의 정신과 의사와 간호사도 최일선에서 싸우고 있다. 민간 자원도 줄을 잇는다. 그들의 눈에 과연 무엇이 보일까? 아마 실레지아에 파견된 피르호의 눈에 비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백 명의 비전문가가 백 가지 처방을 부르짖는 시국이다. 혐오가 대책이고, 차별이 예방이고, 배제가 방역이란다. 인류사를 통해 무수히 반복되었지만, 별로 성공한 적이 없는 전략이다. 이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일선의 공무원과 의료진이 안타깝다. 사태가 진정되면, 구석기 시대의 처방에 따르지 않은 이유를 힘겹게 소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혐오로 전염병을 막을 수 있다면 나부터 앞장서겠다. 2000년 이후 전 세계에서 유행한 전염병만 60여건. 지속 불가능한 원시적 전략이다. 

피르호는 이렇게 말했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대규모의 의학에 불과하다. 사회과학으로서의 의학은 이론적 해결책을, 정치와 인류학은 실제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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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가 새로운 초국적 협치체제를 만들 거라는 주장이 한동안 유행했다. 절대주권을 가진 국가가 명확하게 구획된 영토 안에 사는 자국민을 통치하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섣부른 주장도 나왔다. 영토의 경계를 넘나들며 벌어지는 사회적 삶이 그러한 주장의 주요 근거로 활용되었다. 이주의 지구화, 기업의 초국적 활동,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가능해진 초국적 공론장, 온난화와 같은 지구적 환경문제, 초국적 테러리즘 등이 그러한 예다. 낙관적 전망과 달리 아직 이에 대처하기 위한 초국적 협치체제는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개별 국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초국적 재난이 주기적으로 밀려오고 있다. 이번 전 세계의 문제가 된 코로나19도 그러한 재난의 하나다. 초국적 협치체제가 부실한 틈을 타고 재난의 당사자가 누구인가 정의하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먼저 코로나19를 특정 지역주민의 문제로 지역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일부 언론이 코로나19를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국지적인 폐렴으로 프레임했다. 코로나19의 전파자인 중국 우한 주민의 입국을 원천 봉쇄하자는 주장을 쏟아냈다. 정부가 이러한 프레임을 따르지 않자 코로나19 확산을 친중좌파 정권의 눈치보기와 무능력의 문제로 정치화하고 나섰다. 이 과정에서 작게는 우한 주민, 크게는 중국 국민 전체를 바이러스를 무차별적으로 퍼트리는 미개한 인종으로 비하했다.

감염자 수가 한동안 통제되는 듯하자 이러한 인종주의 프레임이 잦아들었다. 신천지 대구교회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대규모로 나왔다. 이미 이단으로 낙인찍힌 신천지교회를 사회악을 퍼트리는 괴기한 밀교 집단으로 프레임했다. 사회에 복된 소리를 전하는 미션을 다하고 악한 소리를 쏟아내는 주류 종교집단이 선봉에 섰다. 누가 이단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기는 마찬가지인데도 말이다. 절대악으로 몰릴 지경에 이르자 신천지교회가 부랴부랴 정부에 협조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제 감염원인 신천지 교인만 격리, 전수조사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대구·경북에 감염자 수가 급속도로 늘어났고, 여러 나라에서 한국 국민의 입국을 막았다. 어떤 나라는 대구·경북에서 온 지역민만 콕 골라내 입국을 막았다. 자국민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코로나19 감염원을 한국으로 지역화하는 전략을 펼쳤다. 국내에서도 대구·경북을 봉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고, 서울특별시민만 국민이냐는 볼멘 반론이 나왔다. 이참에 정치권은 지역감정과 진영논리를 부추기며 정치적 이득 추구에 몰두했다. 그러자 SNS가 혐오의 언어로 도배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특유의 보수성으로 시간의 실향민 취급받던 대구·경북이 졸지에 코로나19의 창궐지역으로 오염되었다. 대구·경북 주민은 공중위생을 관리할 역량조차 없는 냄새나고 지저분한 토착민으로 전락했다.

갈수록 일상의 삶이 탈영토화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탈영토화란 상호 연계와 의존의 네트워크가 급속히 발전하고 그 안에서 개인적, 사회적, 지역적, 국가적, 국제적, 지구적 차원들이 상호작용하는 밀도가 높은 상태를 말한다. 원인과 결과라는 선형적 모델을 통해 상호작용의 과정과 후과를 예측·통제하기 어렵다. 특히 코로나19와 같은 신종 바이러스는 전례가 없어 누가 당사자인지 가늠하기 더욱 힘들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특정한 인종, 종교, 지역에 당사자를 한정하고 혐오와 배제의 언어를 쏟아내면 안된다. 인종, 종교, 지역과 상관없이 원치 않아도 영향받는 사람이라면 모두 당사자다. 개인적 차원에서부터 지구적 차원까지 모두 포괄하는 다차원적인 협력이 필요한 이유다. 당사자인 우리가 서로 연대와 포용의 언어를 써서 소통하고 이를 통해 함께 문제 상황을 정의하고 해결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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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하고 부르면 열에 여덟은 성난 얼굴로 돌아본다는 곳,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어디서든 빵하고 터져 나올 만큼, 그만큼 억압된 것이 있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바이러스가 우리를 불렀다. 누가 감염된 자인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확산된 혐오와 불안을 보면서 계속 떠오르던 말이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일본에서 분노의 표적이 되었던 그 조선인은, 중국인이 되었고, 다시 대구 사람들이 되고, 이제 ‘신천지’가 되고 있다. 그들을 격리하고 제거하면 우리 모두 안전해질 수 있을까?

위험한 존재를 ‘안전한 공간, 건강한 사회’로부터 제거하는 방식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방식은 소독과 방역, 의심과 격리, 배제와 추방이다. 그들은 흑인이거나, 무슬림일 수도 있고, 중국인이거나 한국인일 수도 있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코로나19의 세계적 전파를 알리면서 마스크를 쓴 사진과 함께 ‘메이드 인 차이나’를 표제어로 내걸었다. 미국의 CNN뉴스는 중국 소식을 전하면서 한복 입고 마스크 쓴 한국인들을 자료화면으로 내보냈다. 극우정치의 공통 문법인 인종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발화하는 것은 불길한 신호다. ‘유색인종’은 난민이나 트랜스젠더가 될 수도 있고, 반지하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폐쇄병동에 갇힌 정신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전염병 이전에 이미 기피되었던 존재들은 다시 병리학의 법정으로 불려 나온다. 

내가 사는 강원도 접경지역에서는 아프리카돼지열병 이후 멧돼지 포획 작전이 계속되고 있다. 어느 날 마을 전체가 멧돼지를 막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였다. 포수들이 산에 들어갈 때는 인근 주민들에게 입산금지를 알리는 문자가 온다. 그럴 때 멧돼지의 심정이 되곤 한다. 멧돼지는 열병과도 싸우고 사냥꾼과도 싸워야 한다. 멧돼지를 막으면 돼지들이 안전해질까? 돼지들에게 살처분과 상품화를 위해 도살당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안전한 것일까?

2018년 한 해 동안 노동현장의 사고 사망자 수는 971명, 산재로 죽은 노동자는 2142명, 자살로 숨진 사람은 1만3670명이었다.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노동현장은 바이러스 감염 지역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래도 그건 불안하지 않았다. 남의 일이었으니까. 작년 한 해 한국에서 도축된 돼지는 약 1800만마리, 닭은 무려 10억마리에 이른다. 그건 무섭지 않았다. 먹히는 자가 아니라 먹는 자니까. 

하지만 아무리 모르는 척해도, 사람들은 모르지 않는다. 이 세계가 켜켜이 쌓이는 죽음 위에서 만들어진 풍요로운 세계라는 것을. 누적된 불안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미칠 듯이 터져 나와 때릴 곳을 찾기 마련이다. 광기는 언제나 약한 곳을 향해 터져나간다. 그 마지막에 파시즘과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그걸 막는 길은 마땅히 증오해야 할 대상을 향해 분노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때 정치의 물음이 필요하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가 아니라 종교에서 구원을 찾고, 왜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폐쇄병동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가? 

병든 닭을 10억마리씩 소비하고, 매년 500만마리의 가축을 살처분하는 사회가 건강할 리 없다. 재난이 그 일상을 중단시키면 사람들은 비로소 묻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 존재인지,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 재난은 함께 살자는 물음을 가지고 돌아오는 추방자들의 귀환이자, 일상을 중단시키는 ‘자연의 파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면, 자연은 계속 더 강력한 경고를 보낼 것이다. 우리 공동의 세계에 풀려진 독은 무엇이며, 어디서 온 것인가? 과잉생산, 과잉소비, 거대한 낭비 위에 굴러가는 성장의 경제를 멈추지 않으면 재난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너무 오래 감염되어 있었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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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개강이다. 언제부터인가 대학 강의를 나가면서 낯선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졸업해야 할 학생들이 학교에 남아 있는 현상이다. 바로 졸업 유예자들이다. 목적의식이 명확한 친구들도 있지만, 졸업을 앞두고 자기모색이 필요한 친구들도 보인다. 이제는 취업 자체가 이행기 노동시장에서 하나의 ‘인생시험’이 된 것 같다. 청년들은 1년 내내 취업을 준비한다. 심지어 대학 1학년 신입생 때부터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내 마음이 더 우울하다. 

취업 준비와 경력 쌓기를 위한 휴학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난 10년 새 대학 휴학자 비율은 더 증가하는 추세다. 2명 중 1명은 취업 문제로 휴학을 한다. 대졸자 10명 중 4명이 취업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나마 눈높이를 낮춘 ‘하향 취업’이 반영된 지표다. 어렵게 취업을 하더라도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취업 후 2년 사이에 직장을 떠나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소위 ‘묻지마 취업’은 줄었지만 직장 유지율이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 노동조건이나 직장 분위기, 전망 등이 맞지 않아서다. 

통계 분류상 이렇게 개인적 사유로 직장을 떠나는 자는 ‘자발적 퇴사’로 분류된다. 그 순간 고용보험 적용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렇다 보니 실업급여를 받지 못한다. 자발적 퇴직자는 20대·30대 첫 직장을 택한 청년들이 더 많다. 고용보험 사각지대에 놓인 청년들이 384만명(37.8%)이나 된다. 그중 5인 미만 영세사업장이나 비정규직이기에 고용보험에 누락된 청년들이 170만명(16.8%)이다. 더 큰 문제는 아르바이트나 프리랜서처럼 가입 대상에서 제외된 청년들도 107만명(10.5%)이나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업하지 못한 청년 문제가 주로 부각되다 보니, 졸업 이후 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 된 지 오래다. 취업 후 어쩔 수 없이 혹은 보다 나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직장을 떠나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고용안정과 임금, 복지 등의 선호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대기업과 공무원이 취업의 전부로 인식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최근 직업선택 기준이 다변화되고 있는 것도 확인된다. 주위에도 일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하는 청년들이 하나둘 생기고 있다. 하고 싶은 일, 즐거운 일을 찾고자 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삶과 가치관의 이런 변화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사회현상에 제도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용보험제도는 더욱 그렇다. 예전엔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비정규직 청년이 화두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각지대가 아니라 한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고 봐야 한다. 특히 고용보험을 납입하고도 ‘자발적 이직’이라는 이유로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24만명의 청년을 방치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사회인지 반문해야 한다. 연간 423억원이면 재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6개월의 기회와 시간을 보장해 줄 수 있다. 물론 조금 더 사회적 포용성이 있다면 아르바이트(23만명)나 1인 창업과 프리랜서 청년(100만명)에게까지 그 대상을 넓히는 고민을 할 수도 있다. 국가가 사회 밖에 놓인 청년들을 위해 실업급여 적용대상을 넓혀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취업을 위해 부모나 주위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좋은 일자리를 찾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그 몫은 개인이 아닌 국가의 몫이어야 한다. 기존 제도에서 ‘배제된 청년’에게 평등한 노동시장의 권리는 정책의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청년의 일자리 유입과 이탈 과정의 이행기 노동시장 특성을 고려한다면 ‘소득’을 기준으로 사회보험 체계가 재설계되어야 한다. 고용보험료를 개인이 모두 부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도 아니다. 유럽에서는 국가에서 그 몫을 책임지기도 한다. 프랑스는 작년부터 고용보험료(2.4%)를 국가가 대신 맡고 있다. 4·15 총선에서 이런 의제가 진정 청년을 위한 공약이 아닐까.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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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에서 1666년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던 해였다. 런던 인구의 4분의 1이 전염병으로 죽어 나간 절망의 해였다. 23세 청년 뉴턴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깨달은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했다. 

뉴턴은 질량을 가진 두 물체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원리를 수식으로 표현해냈다. 이제 지구상의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동일한 보편 원리로 설명할 수 있게 됐다. 갈릴레오는 피사의사탑에서 무거운 공이 가벼운 공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실험으로 뒤집었지만, 이제 뉴턴은 갈릴레오의 관찰이 필연임을 증명할 수 있게 됐다. 

천체의 운동을 다루려니 가장 큰 문제가 수학적 도구의 부족이었다. 이때까지의 수학은 정적이어서 ‘움직이는 세계’를 다루기에 적절하지 못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한계를 통감한 이 청년은 결국 천체의 운동을 다루기 위해 미분과 적분의 개념을 창안해냈다. 인류 역사에 ‘동적 세계관의 출현’이라고 기록될 만한 대사건이다. 

평범한 유년기를 보냈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뉴턴은 국가 재난 사태에 따른 휴교령으로 고향에서 지내게 됐다. 평범한 젊은이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휴식의 한 해가 문명사를 바꾼 것이다. 

살면서 누구나 관찰하는 ‘낮과 밤’ ‘월식과 일식’ ‘계절의 변화’를 뉴턴의 이론은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은 문제들이 지속해서 나타났다. 다자관계의 복잡함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단둘만 있는 양자관계의 단순함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태양과 행성 하나만 있다면 행성의 경로는 타원이어야 하지만, 행성이 여럿 있다 보니 자기들끼리 끌어당기는 힘까지 생겨서 완벽한 타원을 망가트린다. 태양과 지구와 달의 삼각관계도 비슷해서 양자관계의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다. 결국 18세기의 수학자인 라그랑주가 수학적 천재성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눈에 보이는 달의 모습이 변화하는 것도, 지구의 자전축이 흔들리는 것도, 춘분점이 조금씩 바뀌는 것도 그는 뉴턴의 이론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사후 설명하는 것만 가지고 방대한 시간과 돈을 들여 과학을 후원하기는 힘들다. 경험하고 관찰한 사실을 명쾌하게 설명하니 참 용하다 싶지만, 그래봤자 이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현상 아닌가. 우리가 아직 모르는 일을 미리 알게 해주는 힘이야말로 마법 같은 일 아닌가. 

물론 뉴턴의 이론은 예언의 힘도 가졌음이 입증됐다. 18세기에 인류는 천왕성까지 7개의 행성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바깥쪽에 있는 천왕성의 움직임에 설명할 수 없는 변이가 관측됐다. 그래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행성이 천왕성 밖에 있을 거라는 가설이 생겨났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천문학자인 애덤스와 르베리에는 관찰된 불규칙성을 토대로 가상의 행성의 궤도를 계산했다. 그들이 맞는다면, 수학적으로 계산된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서 그 행성은 나타나야 한다. 망원경으로 무장한 관찰자들은 이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해왕성을 발견한 것이다. 무작위적인 관찰이 아닌, ‘기획된 발견’이었다. 끝없는 모래사장에서 특정한 돌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위치를 미리 알고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예언에 가까운 이런 일은 이제 일상에 가깝다. 수백년 전에 나타난 핼리혜성의 출현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 우리는 다음번 출현 시기를 ‘예언’할 수 있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 위해, 얼마만큼의 연료를 탑재하고 어떤 속도로 출발시켜야 하는지 우리는 미리 안다. 

과학적 이론의 힘은 단지 현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언의 힘으로 미지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수학적 필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해왕성의 발견은, 관측 기술의 진보 때문이 아닌, 수학적 필연의 결과였다.

<박형주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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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에서는 주권국가를 유·무형의 인적 및 물적 자원의 국경 이동에 대한 통제권과 자국 영토 내에서 최종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총체로 개념화한다. 그러나 국가의 ‘자율성’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다. 주권국가들이 공식적으로 서로에 대해 독립적이긴 해도 전략적, 군사적, 경제적 의존이나 종속 등 여러 이유로 상대국가의 주권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국제정치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위계적 관계에서 하부국가가 보여주는 순응적 외교정책 행태는 외부로부터의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했거나, 자율성을 확보했더라도 현저히 작다는 것을 나타낸다. 오래전 한국이 그랬다. 

박정희가 주도한 1961년 군사쿠데타가 미국과 한국 사이에 ‘제도화된 후견-피후견 관계’를 낳았음은 우리 현대사의 불편한 진실이다. 1964년 9월 사실상 1차 파병이 시작된 베트남전 참가(이후 1966년 4월까지 모두 4차례 파병이 이루어짐)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후견-피후견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한·일 국교정상화는 당시 악화일로에 있던 인도차이나 정세 요인 이외에 베트남 참전에 따른 한국의 군사적 공백을 이용한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미국의 책략과 미국으로부터 대외원조가 절실했던 박정희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이후 한국은 냉전기에 형성된 한·미·일 삼국구조에서 달갑지 않은 ‘주니어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미관계가 이처럼 위계적이긴 해도 아직도 과거의 후견-피후견 관계라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더군다나 한·미관계를 조공 내지 사대관계 운운하는 것은 자기비하적이다. 미국의 지배적인 관계가 더는 한국을 압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이를 부정한다. 탄핵위기를 넘긴 트럼프는 이미 여러 차례 한국을 부자국가로 규정하고서 방위비 분담금을 훨씬 많이 부담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의 심복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몇 주 전 월스트리트저널에 공동기고 형식으로 “한국은 동맹이지 미국에 의존하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절반만 옳다. 

진보 성향의 문재인 정부가 미국 주도의 질서에서 탈피하고자 외교적 노력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례로, 문재인 대통령은 2년 전 재외공관장 만찬에서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세계와 함께 걸어가되 우리가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우리는 우리 외교가 자주적인 독립정신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문 대통령에게서 ‘동맹의 방기(放棄)’에 대한 우려를 찾기란 어렵다. 

그렇다고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펼치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곧장 반미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의 우려 섞인 전망은 기우에 가깝다고 본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반미의 길로 돌아설 수 없도록 서울과 워싱턴을 잇는 연결망들이 복합적으로 촘촘하게 짜여 있으며, 무엇보다 70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혈맹’관계를 무 자르듯이 단절하는 게 생각만큼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상호 안보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동맹이 적절히 유지·관리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현재의 ‘울퉁불퉁한(bumpy)’ 동맹은 의외로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은 20세기에 손님으로 이 땅에 왔다. 그 손님이 만든 지배-의존적 동맹의 관계가 종종 주인인 한국의 외부적 자율성을 훼손하기도 했다.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 미확보로 인한 한·미의 특수한 주권적 관계에 유달리 불편을 느끼는 21세기 진보세력은 어느 때보다 강도 높게 ‘동맹의 정상화’를 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북한 개별관광 개시 시점과 난항에 빠진 한·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 협상 결과가 진보정부의 대외적 자율성의 크기를 측정하는 가늠자가 될 것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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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컨벤션센터를 개조해 만든 임시병원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환자들이 수용돼 있다. 우한 _ AP연합뉴스

“한국보다 확진자 수가 더 많대!” “내 그럴 줄 알았다. 싹 쓸어버렸으면 좋겠다.”

카페 옆자리의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이웃 나라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개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분위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디서도 “안됐다”라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독일어에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가 있다. 문자 그대로 하면 ‘해로운 기쁨’, 뉘앙스를 살리면 ‘사악한 즐거움’이다. 타인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즐거워하는 심술궂은 마음을 뜻한다. 길 가다 바나나 껍질을 밟아 크게 넘어지는 사람을 보고 웃는 것도 샤덴프로이데다. 경쟁 팀의 선수가 부상을 입었을 때 잘됐다는 마음이 드는 것,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 곤경에 처했을 때 고소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샤덴프로이데다. 가까운 사이에도 이런 감정은 존재한다.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대기업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씁쓸함, 그러다 몇 년째 승진에서 누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겉으로는 표를 내지 않아도 속으로 은밀하게 친구의 불행을 기뻐할 수도 있다.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지닌 가장 악한 감정이 샤덴프로이데라고 했다. 어릴 적엔 친구가 웃으면 같이 웃고, 울면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따라 울었는데, 그때는 몰랐던 이 사악한 즐거움을 우리는 어쩌다 습득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경쟁의식 때문일 것이다. 한국 교육의 동력이자 메커니즘인 경쟁은 친구가 잘해도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동창과, 입사동기와, 이웃과, 본 적도 없는 엄마 친구 자식과 비교하며 나의 우위를 찾는다. 나와 남을, 우리와 그들을 가른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함께 슬퍼하기보다 무탈한 나의 현재에 안도하며 비교우위를 즐긴다. 세상이 온통 제로섬인 것처럼 누군가 잘되면 내가 뒤처지는 것 같고 누군가에게 불행이 닥치면 불행의 할당량이 나를 비켜가서 다행이라고 여긴다. 내가 속한 또는 내가 지지하는 우리 그룹에 나쁜 일이 생긴다면 걱정하고 슬퍼하겠지만 ‘우리’가 아닌 ‘그들’에게는 불행이 닥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만 괜찮으면 상관없다.

무서운 것은 샤덴프로이데가 전염된다는 점이다.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느꼈더라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던 감정이 남이 표현하는 것을 보면 대범해진다. 익명을 보장받으면 잔인해진다. 심지어 누군가에게 불행이 닥치기를 바라게 되기까지 한다. 소리 없이 퍼지는 샤덴프로이데는 악성 바이러스만큼이나 전염력이 강하고 위험하다.

유명인이 갑작스레 나쁜 일을 당했을 때 동정하는 이도 있지만 당해 마땅하다는 조롱도 많다. 대중이 보기에 별 노력 없이 성공을 거뒀거나 부정한 방법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한 경우라면 샤덴프로이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악한 즐거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름의 정의라는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행운, 잘나가는 이가 누리는 권력이 내 눈에는 불평등이다. 그런 사람에게 불행이 닥치는 것은 정의, 즉 공정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불행을 당해 마땅한 사람이 있을까? ‘우리’와 ‘그들’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우리’의 범위는 늘기보다는 줄어들기가 쉽다. 종국에는 나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그들’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어서 나 혼자 잘한다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저 멀리서 나타난 바이러스가 금세 전 세계에 번진 것처럼, 명절에 가족과 밥을 먹다가 감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남의 불행을 고소하다고 여기지 말자. 내가 안녕하려면 남도 안녕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가 우리인, 금을 그어 나와 남을 나눌 수 없는 세상이다. 나 혼자 잘 사는 세상은 없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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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공감이라는 말처럼 크게 성공한 심리학 용어도 없을 것이다. 원래는 그리 흔히 쓰던 말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니 여섯 번 등장한다. 한 번은 한명회가 명나라에서 성종의 표문을 올리며 황제의 은덕을 찬양할 때 쓰였다. 나머지는 임금의 성덕에 군신이 같이 감격한다며 쓰였다.

혹시 개화 이후 많이 쓰게 된 것일까? 옛 신문을 검색해도 잘 찾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1941년 12월9일 매일신보에 실린 ‘제국을 절대 지지, 독일조야 만강의 공감’ 제하의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독일 국민이 일본 제국을 지지하며 가슴 벅차게 공감한다는 내용이다. 기사 이틀 전, 진주만 공습이 있었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예전에는 공감이란 말을 그다지 흔히 쓰지 않았다. 노래 가사에 감동할 때나 썼던 것 같다. 정신의학을 시작하며 공감의 심리를 배웠지만, 이처럼 대중화될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온갖 곳에 남용된다. 우리 동네엔 공감 떡집도 있고, 공감 치킨도 있다. 공감대 아파트도 있다. 바야흐로 공감의 시대다. 한때는 재건이나 현대, 부흥이란 말이 인기를 끌었고, 미래, 융합, 세계화 등의 용어도 히트한 적이 있다. 당시 가장 절박했던 가치다. 공감도 마찬가지다. 동시대인의 마음에 뭔가 깊이 와닿는 것이 있으니 인기를 얻는다. 그렇지 않다면 갈비 공감이나 공감 떡볶이처럼 썩 공감 가지 않는 상호가 등장할 리 없다.

현대인은 공감에 굶주려 있는 것일까? 콘라트 로렌츠는 밀집 도시에 사는 현대인일수록 오히려 서로 멀어지며 고립된다고 하였다. 하긴 전통사회에서는 공감이라는 말이 그리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과 친지는 물론이고, 부락민 모두 서로의 생각을 항상 넘치도록 나누었을 테니 말이다. 구중궁궐에 갇힌 임금에게나 ‘백성이 성덕에 공감한다’라고 꼭 집어 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 정서적 공감이다. 타인의 기쁨이나 슬픔을 보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상태다. 자동으로 일어날 뿐 아니라 대부분 어렵지 않게 경험한다. 주관적인 감정적 전염이다. 둘째, 인지적 공감이다. 타인의 입장이나 형편을 고려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제법 애를 써야 가능하다. 빈자에게 부자를, 부자에게 빈자를 공감해보라고 해보자. 부러움이나 연민의 감정이 앞서서 제대로 공감하기 어렵다. 인지적 공감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추상적 과정이다.

정서적으로 전혀 공감되지 않는 대상에게 인지적으로 공감해본 적 있는가? 정신과 전공의 때 그런 훈련을 받는다. 사실 환자의 과도한 기분이나 엉뚱한 행동, 망상에 금방 공감하긴 어렵다. 물론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진짜 공감은 아니다. 잘해야 동정심이다. 도무지 납득되지 않지만, 그런데도 상대를 이해해내려는 인지적 공감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큰 인기를 끄는 공감은 전자의 공감이다. 자동으로 마음이 끌리는 대상이나 주장에 대해서 ‘공감’한다면서, 그렇지 않은 자를 ‘공감 능력이 없다’며 나무란다. 하지만 이건 공감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입장 차이에 불과하다. 마네의 그림을 보며 감탄하는 친구가 왜 감동하지 않느냐며 혀를 끌끌 찬다. 나는 모네를 더 좋아하는데. 

그러니 상대가 공감 능력이 없다며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공감 능력 부족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저 상대를 비난하기 위해서 ‘공감’이라는 힙한 용어를 덧씌워 몰아세우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서로 공감하는 우리 편’과 ‘공감할 수 없는 상대편’을 가르는 경계의 언어로 잘못 쓰이고 있다.

공감은 같은 생각을 가진 무리가 쌓는 확고한 감정적 성벽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잇는 가느다란 인지적 교량이다. ‘너는 도대체 왜 공감하지 못하느냐’라는 말이야말로 얼마나 ‘비공감적’인가.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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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연애-결혼-출산-육아의 자연적 연계를 당연하게 여기는 낭만적 사랑이 파탄나고 있다. 젊은 여성이 벌이고 있는 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라는 4B 운동이 대표적인 징후다. 이에 대해 국가는 저출산이라는 인구 문제로 접근하고,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 혐오로 대응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젠더 분리주의가 빠른 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낭만적 사랑이란 두 남녀가 서로 자아를 탐색하고 존중하고 숭배하면서 각자 분리된 자아를 합쳐 공통된 자아로 확충하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에서는 나의 자아를 확충시켜줄 상대방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상대방의 자아를 엄청나게 탐색하는데, 그게 바로 연애다. 

연애하는 동안 두 자아는 자유롭고 평등하다. 경제적 부, 정치적 권력, 사회적 지위, 몸과 나이와 종교, 인종과 국적 등 어떤 사회적 힘도 연인 사이에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연인은 자유롭고 평등하면서도 서로에게는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처럼 밀고 당기는 에로틱한 게임을 한다. 사회학 창건자의 한 명인 게오르크 지멜이 연애를 근대 사회성의 원형으로 본 이유다.

낭만적 사랑은 근대 사회성의 씨앗을 품고 있다. 연애하기 위해 각자 부모의 집으로부터 나와 따로 둘만의 집을 차린다. 이 집이 근대 초기의 가부장적 핵가족제도다. 남성의 경제적 지원능력과 여성의 정서적 지원능력이 결합한다. 노동시장이 남성에게만 열려 있기에 여성은 먹고살기 위해 남성의 경제적 능력에 의존한다. 남성은 노동시장에서 가족 임금을 벌기 위해 과잉 노동에 시달리다가 정서적 에너지가 고갈된다. 이를 채워줄 여성의 정서적 지원에 기댄다. 상대방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며 낭만적 사랑은 평생 애착 관계로 이상화된다. 실제로는 연애가 지녔던 근대 사회성의 씨앗이 젠더 불평등한 결혼생활로 인해 채 발아되지 못한다. 

할머니세대는 연애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부장에 이끌려 결혼했다.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독특하게 존중받고 살아갈 문화 역량을 키울 기회조차 없이 운명처럼 주어진 가부장제에 평생 귀속되어 살았다. 어머니세대는 낭만적 사랑을 통해 근대 사회성을 잠깐 체험하기는 했지만, 가부장적 핵가족으로 귀결되는 젠더 불평등한 결혼생활로 이를 잃어버렸다. 소통하지 못하는 남편 대신 평생 온갖 돌봄노동을 하느라 할머니의 삶과 비슷해졌다. 딸세대는 노동시장에 나가게 됨으로써 젠더 불평등한 낭만적 사랑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마땅한 현실적 대안이 없어 일과 사랑 모두에서 돌봄을 전담하다 좌절을 맛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할머니-어머니-딸로 반근대적인 삶이 이어지고 있다. 전혀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고 독자적인 존재로 존중받지도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 사회는 이러한 여성의 삶을 숭고하다고 찬양하고 있다. 그럴수록 여성은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 이야기처럼 치매에 걸려 집 밖을 떠돌거나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처럼 병원에 유폐되어 말라 죽어간다.

어떻게 해야 하나? 

현재 연애할 수 있는 사회구조적 환경을 만들려는 여러 정책이 고안되고 있다.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문화 역량은 중요하다. 낭만적 사랑에서 싹이 튼 근대 사회성을 급진화하고 전면화해야 한다. 연애는 자신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을 연인끼리 서로 입증하는 친밀성 공연이다. 이 공연을 제대로 해서 친밀성 너머의 다른 세계에 가서도 타자와 함께 공동의 사회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문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 역량을 발휘해서 사회 전체를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악한 젠더 습속을 바꾸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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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병원에서 맞았다. 병실에는 네 명의 환자와 간병인, 보호자들이 생활을 하고 있다. 앞자리의 아주머니는 중국서 왔는데 식당에서 일하다가 다리가 으깨졌다. 이 때문에 한국 온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일을 쉬어본다. 그 옆 침대에는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몸으로 들어와 얼굴에 겁이 가득한 할머니가 있다. 자식들은 잘 오지 못한다. “둘째 아들인데, 오늘 오려고 했는데 일이 밀려서 못 온대.” 전화가 올 때마다 간병인이 귀에 대고 소리를 친다. 남의 돌봄을 받는 것이 낯선 할머니는 간병인도 어려워한다. 

할머니의 맞은편 침대에 있는 분은 반대로 간호사도 아랫사람 부리듯 호령한다. 위아래 서열이 분명해서 요구사항이 있으면 간호사한테는 ‘지시’하고, 의사한테는 ‘부탁’한다. 돈의 힘이지 싶었는데, 식당 장사로 돈을 벌어 이제는 다달이 집세 받는 건물도 있는 ‘건물주’라 한다. 큰돈은 벌었으나 큰 병이 남았다. 병이 멈춰 세운 삶은 다들 마찬가지다. 

그러니 불행은 평등한가? 중국서 온 아주머니는 병원에 너무 늦게 와서 잘못하면 다리를 잃을 뻔했는데도, 기어코 조기 퇴원을 한다. “사정이 있어서”라고 부끄럽게 말하는 이에게 무슨 사정인지는 묻지 않았다.

이 병실은 사회의 축소판 같다. 담당 주치의는 모두 남자인데, 간호사는 모두 여자다. 의사는 아무개 선생님인데, 간호사는 누구라도 그냥 간호사님이고, 간병인, 청소노동자, 조리노동자는 그림자처럼 이름 없이 일한다. 환자들은 갈수록 의사보다 간호사, 간병인에게 몸과 마음을 더 의지한다. 

다 큰 어른 몸을 일으켜 앉히고, 세우고, 씻기고, 밥을 먹이는 일은 쉽지 않은 중노동이다. 사이사이에 청소노동자가 바닥을 닦고 나가는데, 눈 한 번 마주칠 틈도 없이 먼지처럼 사라진다. 그에겐 하루에 몇 개의 병실이 주어질까? 굽은 허리 사이로 보이는 파스는 그가 진 노동의 무게를 말해준다. 사회에서 매기는 노동의 가치는 그 무게와 반대다. 말의 가치도 그렇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신년 특집 토론회가 열렸다. 서울에 사는, 부유한, 고학력, 전문직, 나이 많은, 이름 있는 남자들이 둘러앉아 나랏일을 말하는데 꼭 남의 나라 말 같다. 

과연 우리의 삶을 제대로 알기나 할까. 기자협회 보도를 보니, 기자들이 취재할 때 의견이나 정보를 듣는 사람들도 저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인구 구성에서는 1%가 조금 넘는 교수, 의사, 변호사, 대표, 임원 등 전문가와 관리자가 의견 그룹에서는 70% 가까이 차지한다. 그런 지면에, 원고지 아홉 장의 몫이 주어졌다. 여기에 뭘 써야 할까. 중국에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뉴스가 들려오는데 그 속에 없는 사람들의 말이 생각났다.

환자들의 불안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법에 대해선 의사보다 잘 알던 그들. 병원 구석구석의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 역시 자기 자리에선 전문가다. 사스 때도, 메르스 때도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른 병원 노동자들이, 같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서로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 직장 평의회가 있다면 지금 같은 위기도 훨씬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일터와 삶터의 민주정치는 사회도 그만큼 더 안전하게 만든다. 

위기의 시대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도 요청한다. 자연의 다른 존재와 인간이 공동으로 구성하는 정치공동체와 그런 생명의 정치가 가능할까. 먼지의 말과 강물의 말에 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위기 속에서 먼지 같은 존재들이 주체로 귀환하는 것을 본다. 원래 민주주의는 그런 존재들이 만들어간 정치이기도 하다.

<채효정 |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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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새해 국회에서 청년기본법이 통과되었다. 법안 발의 1319일 만의 결실이다. 법안이 통과되던 날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청년도 있었다. 이런 날이 올까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법안 통과까지 수많은 청년 활동가들이 노력을 했다. 그들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실 청년기본법은 여야 간 이견이 없었던 비쟁점법안이었다. 그러나 보수야당의 발목 잡기에 법안 통과는 녹록지 않았다. 20대 국회 1호 법안을 청년기본법으로 발의하고도 청년의 삶을 외면하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지금 총선을 앞두고 청년과 ‘동반자’가 되겠다고 한다. 보수야당과 정치인들의 이런 행태들에 더 화가 난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까지는 약 1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사이 돈 때문에 만남을 피하고 끼니를 거르는 청년들도 있다. 취업 준비에 필요한 학원비와 주거·생활비에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청년까지. 청년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주위에 수많은 청년들이 학력, 지역, 젠더 등의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다. 다들 크게 모나지 않은 청년들인데 왜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그간 청년들은 자신들이 겪는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데 기성사회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학교를 떠난 순간 취업을 하지 못한 자는 우리 사회에서 말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심각한 문제는 소득불균형과 자산격차가 교육과 직업까지 대물림되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는 구조적 불평등이 임계점에 와 있고, 그 중심에 청년들이 놓여 있다. 월 200만원 미만 저소득 부모의 자녀 역시 저소득 확률이 절반 이상(56.4%)이고, 부모가 비정규직일 때 취업 자녀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될 확률은 3분의 1(37.1%)이나 된다. 

청년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적어도 공정한 출발이 필요하다. 절차적 공정성에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경쟁에 내몰린 청년들의 현실을 바꾸기 어렵다. 청년의 삶을 공감하고 이해해야, 청년정책도 변한다. 청년정책의 공백과 빈자리에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 서울시가 2015년부터 시작한 청년수당은 다양한 정책적 효과를 확인시켜준다. 진로를 정하지 못한 청년 10명 중 7명 이상(76.6%)은 목표를 찾거나 구직에 나섰고,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심리적 안정감도 찾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서울시는 지난 19일 국내 최초로 ‘청년 불평등 완화를 위한 범사회적 대화기구’를 발족했다. 100여명의 다양한 시민들이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해 토론하고 대안을 만들 예정이다. 10대부터 60대까지 학생, 회사원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서울만이 아니라 지역의 청년들도 눈에 띈다. 앞으로 2년간 공정·격차 해소, 정치·사회 참여, 분배·소득 재구성 각 3개 분야 전문가, 활동가 그리고 자문단이 시민들과 함께 공론의 장을 꾸려갈 예정이다.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첫 시도다. “우리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청소년 활동가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납작한 공정성’이 아닌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기대인 것 같다.

“소득은 굶주린 배를 채우지만, 자산은 삶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킨다”는 한 학자의 말은 정책이 어떻게 작동되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준다. 청년 불평등 해결의 출발점은 목소리가 박탈된 청년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 것이다. 사회가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고, 비로소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문제’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그동안 “분노해봤자 변하는 게 없다”는 청년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더 많은 청년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이제 서울에서 시작한 청년들의 ‘들려질 권리’가 타 지역과 중앙정부에까지 이어지면 좋겠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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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국내 개봉된 영화 <커런트 워>(전류전쟁)에서 토머스 에디슨을 연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말한다. “전류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는 거야.” 전기의 등장으로 백열전구와 공장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이로 인해 인류의 삶이 통째로 바뀌고 산업 생산성이 폭증할 걸 내다본 걸까. 요즘엔 전기자동차가 내연기관을 위협하는 지경이니 대단한 미래예측이다.

영화는 19세기 후반의 전기 도입 시기에 토머스 에디슨과 니콜라 테슬라라는 두 명의 걸출한 천재가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노력형 에디슨은 직류를 밀었고, 천재 테슬라는 교류를 주장했다. 요즘 건전지에 사용되는 직류는 전압을 올리고 내리기 힘든 속성 때문에 가정에서 사용하는 낮은 전압으로 송전해야 했다. 전압이 낮으면 멀리 못 가고 발전소를 곳곳에 분산 배치해야 하니 공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테슬라의 교류 방식은 변압이 쉽다. 교류를 초고압으로 멀리 송전하고 동네 근처에서 전압을 내려서 배전하면 발전소는 드문드문 있어도 된다. 결국 테슬라를 밀었던 웨스팅하우스가 승리했다.

전기가 본격적으로 인류 삶에 영향을 주기까지 왜 그리 오랜 세월이 필요했을까. 자석을 움직이면 전기가 생긴다는 발전의 원리를 19세기 전에는 몰랐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발견으로 발전이 가능해졌고, ‘커런트 워’로 이어졌다. 영화는 직류와 교류를 두고 발명자와 거대 자본이 뒤섞여 벌어지는 음모와 대립을 보여준다. 승자인 테슬라는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잊혀지지만, 패자인 에디슨은 위대한 발명가의 명성을 남겼으니 그래도 나은 형편이었다.

100년이 훌쩍 넘어서 테슬라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다시 등장한 것은 일론 머스크가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를 창업하면서였다. 머스크는 다가올 미래를 미리 보는 듯한 통찰력으로 사람들을 열광시킨다. 마치 컬트의 느낌이랄까. 20세기 말까지도 내연기관 자동차를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의 전기자동차가 살아생전에 출현하기는 힘들어 보였으니 정말 외계인 같은 사람이긴 하다. 역설적으로 머스크는 니콜라 테슬라의 교류가 아닌 토머스 에디슨의 직류를 중심으로 사업을 한다. 전기자동차뿐만 아니라 그가 만든 또 다른 사업체인 태양광 업체도 직류 발전 및 저장을 하니까. 직류 변압 기술의 발전으로 최근엔 고압 직류 송전도 확대되는 추세다.

전기와 자기의 상호 작용을 4개의 수학 방정식으로 완벽하게 기술해낸 사람은 19세기 중반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제임스 맥스웰이다. 아름답고 대칭적인 방식으로 전기와 자기가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 연관돼 있음을 표현한 맥스웰의 수학적 체계화는 결국 2차 산업혁명을 촉발했다. 자기장이 변하면 전기장이 생긴다는 방정식에서 발전기가 발명됐고, 전기장이 변하면 자기장이 생긴다는 방정식에서 모터가 발명됐다.

인류가 전기와 자기를 다룰 줄 알기까지는 난산의 과정이 있었다. 먼저 전기와 자기가 바뀌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이게 해결되지 않고는 발전소도 전기자동차도 출현할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와 중세 유럽에는 무엇인가가 변화하면서 새로운 것이 출현한다는 발상을 표현하는 언어가 없었다. 2000년 동안 유럽 사유 체계의 핵심이었던 유클리드 기하는 철저하게 정적이다. 움직이지 않는 점과 선을 다룬다. ‘변화하는 무엇’을 다루는 언어가 아니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움직이지 않는 삼각형을 다루지 않는가.

결국 17세기에 아이작 뉴턴이라는 전무후무한 수준의 천재가 나타나 천체의 운동을 다루는 언어를 창안했다. ‘변화를 다루는 언어’, 미적분이 탄생한 것이다. 정적 세계관을 넘어 동적 세계관의 출현이다. 19세기 전자기학은 미적분을 사용해서 전기장의 변화와 자기장의 변화를 표현해냈고, 인류는 전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전기는 이제 21세기 새로운 모빌리티의 중심이 되면서 또 다른 혁신의 중심에 서 있다.

<박형주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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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산불이 언제 시작됐는지 기억하시나요? 지난해 9월입니다. 사그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이 산불은 시드니 등 대도시가 위치한 호주 동남부를 초토화하고 있습니다. 한국 면적 절반에 달하는 4만9000여㎢가 불탔고 사망자도 24명에 달하죠. 야생 동물의 피해도 막대합니다. 코알라 등 포유류를 비롯해 동물 10억 여마리가 화재로 죽었으리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산불 열기는 너무 맹렬해 자신의 날씨를 만들어내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산불은 점점 더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때문이죠. 되풀이되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 지난해 아마존 산불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대규모 산불은 바로 기후변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더 배출하면서 산불 위험도 증가합니다. 악순환의 연속이죠. 호주 산불은 돌이킬 수 없는 기후재앙이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캥거루섬 숲에서 7일(현지시간) 한 야생동물 구조 활동가가 산불 피해를 본 코알라를 구조하고 있다. 캥거루섬 _ EPA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나 자유한국당은 이 전 지구적 재앙에 대해 아무 말이 없습니다. 환경문제만 해도 4대강사업으로 인한 하천 오염, 40%에 달하는 석탄 중심 발전, 공장식 축산 등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습니다. 평화와 안보도 마찬가지죠. 모두가 북핵에 매달려 있을 때 한국 국방 예산이 50조원을 돌파했음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핵을 들고 밑에서는 F-35A 전투기를 날리는 게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는지 돌이켜보지 않죠. 기본적 인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의 폭언·체벌·강요 등에 시달리는 학생, 기본적 삶도 힘든 빈곤층, 그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성소수자, 법적·신체적 폭력에 지속적으로 고통받는 외국인 노동자, 모두 선거 때만 관심을 갖습니다.

이런 무관심에는 제도적 요인도 큽니다. 이들이 뛰어온 선거판에서는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민주당계 아니면 한국당계 정당 중 하나가 이기는 선거제도에서 다양한,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준연동형 비례제가 통과되면서 변화의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이 제도는 정당 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의 차이를 좁히려는 것이죠. 그래서 20대 총선에서 7.2% 정당득표율에도 불구하고 2% 의석만 차지한 정의당의 비극을 없애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소수정당의 의회 진출이 늘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녹색당, 청년당, 노동당, 동성애자당 등이 원내에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정당이 여러 목소리를 내면 기존 거대정당이 외면했던 이슈가 주목을 받을 겁니다. 법과 정책으로도 발전될 테죠. 당장은 아니더라도 독일처럼 녹색당이 정권을 잡는 날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호주 산불도, 동성 간 결혼도 심각하게 논의하게 될 겁니다. 민주체제 핵심은 권력 분화이니 양당체제를 끝내고 여러 당이 권력을 나누게 되면 그만큼 민주주의는 발전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발전은 쉽지 않겠죠. 기존 정치 지도자들의 퇴행적 행태가 사라지는 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당장 한국당은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을 꾸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를 창피한 줄도 모르고 당당히 주장하는 걸 보면 한심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한국당 황교안 대표처럼 자기 진영 통합을 외치는 것 또한 미래에의 비전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극단적 정당의 출현도 가능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유럽의 경우처럼 극단적 민족주의 정당도 생길 수 있습니다. 

유권자의 책임이 더 커지는 셈입니다. 다양한 정당은 그만큼 우리를 더 잘 대변하게 될 테니까요. 미움과 독선이 가득한 정당들이 득세한다면 우리 사회가 그렇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포용과 관용을 우선시하는 정당들이 득세하는 여의도, 그런 정당을 키워낼 우리 사회를 꿈꾸어 봅니다.

<남태현 |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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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안정과 발전의 밑거름이 된 ‘목요클럽’ 같은 대화모델을 살려 정당과 각계각층 대표들을 정기적으로 만나겠다.” 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가 지난 7일 인사청문회 모두발언에서 한 말이다.

목요클럽의 공식 명칭은 ‘수출과 생산 증대를 위한 협력기구’다. 1946년부터 23년 동안 스웨덴을 이끈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가 시작했다. 한국처럼 대기업 중심 수출 위주 경제인 스웨덴에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가 있었다. 에를란데르는 총리로서 각종 기념행사, 포럼, 회의 등에서 여러 단체의 대표를 만났지만 그때뿐이었다. 1년에 한두 차례 기업 총수와 노동조합 대표를 만나는 공식 모임은 대부분 성과 없이 끝났다. 단체마다 정부가 수용할 수 없는 정책을 요구할 때가 많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정권을 흔들어 좌초시키려고도 했다. 그렇게 첫 임기를 보낸 에를란데르는 1948년 선거에서 승리하자마자 열매 맺는 대화의 장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목요클럽을 조직했다.

2주에 한 번씩 모이는 목요클럽은 재무장관 주재로 경제인연합회, 농업인연합회, 도매인연합회, 무역협회, 중소기업연합회, 노동조합총연맹, 사무직노동조합총연맹 대표가 참석했다. 주요 경제정책과 현안을 두고 논의를 이어갔으며 참가자는 물론 총리 자신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0년대 중반, 정부와 대기업의 관계가 악화되자 목요클럽도 시들해졌다. 에를란데르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는 총리의 하프순드 별장으로 경제계 대표를 초대해 자신이 직접 주재하는 하프순드 회의를 시작했다. 에를란데르는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매일의 다짐을 일기로 남겼는데 “정치권력을 대표하는 사람은 경제권력을 가진 이들과 끊임없이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썼다.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이어진 하프순드 회의는 목요클럽보다 참가자의 폭이 넓었다. 개별 기업 대표, 금융인, 이익단체 대표, 각 부처의 고위 관리자, 노동조합 관계자 등을 회의 이후에도 수시로 만났다. 하프순드 별장에는 호수가 딸려 있는데 에를란데르는 손님과 함께 작은 보트에 올라 손수 노를 저었다. 수행원 없이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는 그 배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에를란데르는 일기에 “이번 상황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듣는 것은 매우 큰 도움이 되었고, 그들 역시 왜 우리가 그렇게 했는지 그 이유를 듣는 것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하프순드 회의를 다녀온 당시 경제인연합회 회장이 한 인터뷰에서 “무척 효과적이고 유쾌한 토론”이었다고 한 걸 보아 양쪽 모두가 만족한 모임이었던 모양이다. 에를란데르 일기장의 하프순드 일정에는 “이번 회담은 무척 잘 진행되었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목요클럽과 하프순드 회의는 사라졌지만 정부와 각 단체가 수시로 만나 협의하는 문화는 남았다. 전통적으로 기업가와 부유층을 대변하는 보수연합이 집권했는데도 어떻게 파업이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2013년 당시 스웨덴의 재무장관은 지난 1년 반 동안 노동조합을 350번 만났다고 답했다.

노동환경 개선과 증세를 주장하는 사민당 대표인 에를란데르가 총리직에 올랐을 때 재계는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했다. 에를란데르는 일기에 여러 차례 괴로움을 털어놓으며 “재계는 나를 민간 기업을 말살하려는 네로처럼 여긴다”고 썼다. 목요클럽과 하프순드를 거치며 에를란데르에 대한 평가는 합리적이고 말이 통하는 정치인으로 변했고 노사정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대화의 끈을 이어갔다.

처음 모임을 시작했을 때 “오페라와 샴페인 이야기를 하는 경제인들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던 에를란데르의 솔직한 고백이 “효과적이고 유쾌한 토론”으로 변하기까지, 23년이라는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고뇌와 노력이 녹아 있을지 정치의 무게를 되새긴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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