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의 일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가족과 함께 집 근처 나들이를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인천 계양산 자락에 예쁜 정원이 갖춰진 카페가 있었다. 열 살 난 딸과 아내랑 함께 바람이나 쐴 겸 향했다. 카페는 주차할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북적였다. 갑자기 딸이 “아빠! 여긴 내가 못 들어가는 곳이야. 여기 ‘노키즈존’이라 13세 미만 어린이는 들어갈 수 없대”라고 한다. 검색할 때는 몰랐는데,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입구에 정말 그런 푯말이 서 있었다. 

부랴부랴 다른 곳을 찾아갔다. 아이에게 코코아 한 잔을 사주며 차별당하고 거절당한 기분에 대해 물어봤다.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기분이 어때?”라고 묻자, 아이는 “아빠, 엄마랑 오랜만에 바람 쐬러 나왔는데 나 때문에 못 가서 미안해”라고 한다. 혹시 ‘여자’라서 차별당한 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만약 네가 한국 사람이어서 또는 피부색이 달라서 차별당한다면 어떨까?” 하고 물었더니 정말 불쾌한 표정으로 “그렇다면 정말 화가 날 것 같다”고 했다. 

우리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며 평등권을 기본적 권리로 선언하고 있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 조건 없는 평등이 민주주의와 근대 인권의 핵심 개념이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이를 법적·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실정이다. ‘차별금지법’이 입법예고된 것이 2007년의 일이다. 어느새 12년이나 경과했지만, 지금까지 이 법이 제정되지 못한 까닭은 ‘성적 지향’을 문제 삼은 일부 보수개신교와 출신국가와 성별 등으로 노동조건을 차별하는 재계의 반대, 그리고 이에 동조하거나 눈치를 보아 온 정부와 국회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차별과 혐오 정서는 더욱 커져가고 있다. 우리는 1992년 유엔난민협약에 가입했고, 2013년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한 국가이지만, 지난해 제주 난민 사태가 보여주듯 난민 혐오 정서가 강한 사회이다. 3·1운동 100주년이라지만, 과거 우리도 나라를 잃고 세계 곳곳을 떠돌던 난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연세대학교에서는 이번 학기부터 실시하기로 한 보편적 인권교육에 대해 일부 세력이 ‘기독교정신에 반하는 인권교육’이라거나, ‘강제적 인권교육으로 학생의 교육선택권’을 침해한다며 반발하고 나서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12년 “각종 차별 문제를 근본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참여정부에서 추진되었던 차별금지법 제정을 다시 추진할 것”이라고 공약했었다. 그러나 2017년 대선 때는 ‘국가인권위원회 법이 존재하므로 불필요하다’며 공약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했다. 이후 유엔에서 수차례에 걸쳐 우리 정부에 성별·연령·인종·장애·종교·성적 지향·학력 등이 포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지만, ILO 핵심협약 비준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함께 잘사는 나라’, 누구나 공정한 기회를 가지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나라”라고 했다. 

우리에게 차별금지법과 ILO 핵심협약 비준이 필요한 이유는 작게는 공동체 내부의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고, 차별과 혐오가 죄라는 사실을 널리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더 넓게 보면 조건 없는 환대(hospitality)라는 인류 보편의 정의를 위한 것이다. 환대는 공동체 안에 이미 있는 자,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배제되고 소외된 자에 대한 환대이다. 대통령이 말하는 ‘함께 잘사는 나라’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마음을 울리는 경축사와 선언을 들려주었고, 시민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 땅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위한 정부와 대통령의 의미 있는 실천이 보고 싶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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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차는 왜 고장이 잦을까? 

조지 애컬로프는 1970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정보의 비대칭’ 때문에 시장에서 질이 나쁜 물건 위주로 거래된다고 결론지었다. 판매자와 달리 구매자는 차의 특성이나 성능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판매자가 매긴 가격이 합당한지 확인할 방도가 없어서 ‘뽑기 운’에 기대야 하는 구매자는 평균 가격 정도를 지불하려 할 것이다. 그 가격에 좋은 차를 팔 수는 없지만 나쁜 차를 파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 결국 나쁜 차만 거래된다. 

이처럼 정보의 불균형이 존재하므로 합리적인 시장이 형성될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연구하는 분야를 정보경제학이라고 하며, 이를 집대성한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2001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정보의 비대칭이 낳는 여러 문제 중에 대리인 딜레마가 있다. 본인·대리인 문제라고도 하는데, 분업을 기본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흔히 발생한다. 일을 맡기는 사람이 맡을 사람의 행태, 즉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제대로 된 재료를 사용하는지 등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을 맡기는 당사자의 편익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비효율이 생긴다. 

이런 문제는 경제활동뿐만 아니라 정치나 공공행정에서도 폭넓게 관찰된다. 정보의 우위를 지닌 정치가나 행정가의 경우 자칫 주민의 편익을 무시하는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도 있다.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정치와 공공행정에서 발생하는 대리인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는 주민 주도의 노력 중 하나가 참여민주주의이다. 적극적으로 정보의 공개를 요구하고 정책 결정에 참여하려는 행동이다. 주민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치를 실현하기도 한다.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마을활동을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마을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마을활동을 하는 이유도 다양하다. 참여민주주의나 주민자치의 실현은 수많은 마을의 욕구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다. 이른바 ‘행복추구권’ 또는 ‘자기결정권’에 대한 조항이다. 자기결정권이란 어떤 권력, 권위, 규범, 관습, 통념 등의 간섭 없이 자기 운명에 관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의적 권리를 말한다. 

마을활동을 살펴보면 자기결정권의 발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을공동체 활성화에 대한 지원은 헌법에 따른 기본권 보장이다. 

2012년 무렵 각 지자체에서 조례를 제정하여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주민의 자치요구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의도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앙부처별로 각각 주민활동 지원사업을 벌임에 따라 지방행정도 실국별로 유사한 사업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형식적으로나마 마을공동체 활성화라는 명칭으로 흩어져 있던 지원사업을 묶으려는 의도가 보이기도 한다. 귀찮고 어려운 일을 주민에게 떠넘기려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행정의 연장으로 여기는 셈이다. 

이런 인식은 중간지원조직에 대한 관리와 간섭을 통해 드러난다. 모 광역단체의 협치 담당 팀장이 중간지원조직의 활동가들을 모아놓고 “당신들은 공무원과 같으니 근태관리를 받는 게 당연하다. 모든 활동을 일일이 보고하라”고 일장훈시를 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런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마을공동체에 대한 제대로 된 지원이 가능할 리 없다. 중간지원조직의 수많은 활동 중에는 위탁받은 행정업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주민자치나 자기결정권 실현이라는 주민의 염원도 실현해야 하는 매우 복잡하고 어렵고 헌신적인 활동도 중요하다. 마을에 대한 지원, 중간지원조직의 운영과 존폐에 대한 권한을 지닌 지방자치단체의 올바른 인식과 태도가 절실하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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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 휴게소에 잠시 내렸다. 15분의 짧은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화장실에 잠깐 들른 후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한 터라 출출했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주문대로 갔다. 사람 대신 사람 키의 입간판이 맞이했다. 더 이상 사람이 주문을 받지 않으니 키오스크(Kiosk)라는 무인자동결제기를 사용하라고 일러주고 있었다. 키오스크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서두르라고 재촉하는 낌새가 느껴졌다. 스크린 터치를 몇 번 하다 연이어 실수를 하니 조바심이 났다. 우물쭈물 제대로 주문도 못하고 나왔다. 가판대에서 핫도그나 살까 했더니 여기도 키오스크였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 포기하고 돌아섰다. 어느새 버스 떠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늦은 저녁에 식당에 갔다. 식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가 둘러보았지만 손님은커녕 주문받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속이 훤히 보이는 주방에 요리사만 달랑 있었다. 키오스크를 이용하라는 안내문이 보였다. 지난번 경험도 있고 해서 이번엔 아주 자신만만하게 키오스크 앞에 섰다. 몇 번의 스크린 터치를 통해 무사히 주문을 마치고 뿌듯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음식을 기다리는데 손님이 들어왔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것 같았다. 시어머니가 아주 호기롭게 음식을 사겠다고 한다. 그런데 키오스크로 주문한다는 말에 어쩔 줄 몰라 한다. 며느리가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나서자 아니라며 신용카드를 뽑아든다. 몇 번의 실수를 거듭하자 보다 못한 며느리가 자기 신용카드를 꺼냈다. 가벼운 실랑이가 오간 후 결국 시어머니는 포기하고 며느리가 계산했다.

패스트푸드점에서나 활용되었던 키오스크가 일반 식당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서비스’는 키오스크에 떠넘기고 ‘물질’을 팔고 있다. 명분은 효율성이다.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의 욕구를 최대한 빨리 성취하게 해준다. 판매자는 인건비를 줄여 더 많은 이윤을 빨리 뽑아낸다. 구매자는 표준화된 제품의 카탈로그에서 원하는 음식을 골라 최대한 빨리 위장의 결핍을 채운다. 사회학자 조지 리처는 이를 사회의 맥도널드화라고 일찍이 말했다. 맥도널드화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효율성이다. 하지만 판매자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구매자에게 떠넘기는 것이니 구매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효율적이지 않다. 효율성마저도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이를 깨닫게 되면 구매자의 방문이 줄고 판매자의 이윤도 축난다.

한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고객이 무인 키오스크를 이용해 햄버거를 주문 하고 있다. 주영재 기자

일반 식당에까지 키오스크가 확산되는 것은 한국 사회 전체가 ‘키오스크 사회’로 대전환하고 있다는 메타포다. 문화적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대전환은 양가적이다. 우선 전자기기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행위자에게 자유를 준다. 판매자와 구매자가 전자기기를 통해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익명성이 극대화된다. 그들 모두 사람으로서 마땅히 주고받아야 할 의례의 압박에서 벗어난다. 서비스산업이 요구하는 감정노동과 감정관리의 필요성이 줄어든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사회학자 지멜이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든 ‘사회적 어울림’(sociability)을 쪼그라트린다. 사회적 어울림은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마치 동등한 것처럼 대하는 동시에 서로를 독특한 존재로 존중한다. 신분제를 제거했다는 현대사회에서도 시민들은 여전히 사회구조적으로 동등하지 않다. 그럼에도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갖추고 있다면 사회적 어울림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키오스크 사회는 다른 시민들과 마주할 사회적 장을 줄임으로써 이러한 문화적 역량을 키울 기회 자체를 축소시킨다.

키오스크와의 상호작용이 사회적 어울림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전자기기와 상호작용하려면 교육받아야 하듯 사람과 상호행위하기 위해서도 배워야 한다.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대할 수 있는 게임의 규칙을 습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게임을 펼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 키오스크의 확산을 단지 경제적 효율성이나 접근의 평등성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되는 이유다. 키오스크 사회가 번져갈수록 더욱더 사회적 어울림의 공간을 이곳저곳 널리 구축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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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 권리를 말합니다. 인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와 정부는 이런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할 책무를 가집니다. 나라 밖으로 잠시 나가보겠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국제법이 작용합니다. 전 지구를 아울러 국제법이라고 부를 만한 실체는 1차 세계대전 후에 생겨납니다. 끔찍한 전쟁을 겪고 나서야 국제법 관념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까지는 인권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국가 간 연맹이 느슨했고, 여전히 식민지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상황이 달라집니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전후방 구분도 없이 도시 전체가 격전지가 되어 버렸고, 무기 성능 향상으로 민간인 피해가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나치 정권은 국가의 이름을 걸고 홀로코스트를 자행합니다. 그 끔찍한 상황을 보고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국제법이 개인의 인권 보장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을 보호하자는 소극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누구든 인간으로서 국가와 국제사회의 부당한 간섭 없이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고, 그런 권리가 침해되면 개인이 인권을 걸고 자기의 이름으로 배상청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유엔은 2005년 그 확인을 위한 결의를 합니다. ‘Basic Principles and Guidelines on the Right to a Remedy and Reparation for Victims of Gros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 Rights Law and Seriou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약칭: 피해자 구제권리 기본원칙과 가이드라인)’라는 결의입니다. 국제인권법이나 국제인도법의 중대한 위반으로 피해를 입은 개인은 국가나 법인, 개인을 상대로 직접 손해배상 청구권을 가진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결의는 그때까지 확립된 국제법상 개인 권리에 관한 법리를 집대성한 문서로 ‘피해자 권리장전’으로 불립니다.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으니까 독일과 일본도 당연히 찬성했습니다. 독일은 이런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정당 성향에 상관없이 누가 총리가 되어도 희생자 앞에 무릎을 꿇고 헌화하면서 사과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가 인권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그 흐름을 말씀 드렸습니다. 국제기구 근무 경험을 가진 동료 판사가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잠시 질문 드리겠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대신 포기할 수 있나요? 질문을 약간 바꿔서, 인권에 부당한 침해를 받은 국민이 배상청구를 하면 국가가 그 청구를 못하게 막을 수 있나요? 법률 관계는 개인과 기업, 개인과 국가, 국가와 국가 간에 모두 성립할 수 있고, 이들 법률 관계는 서로 간섭하지 않습니다. 서로 간섭할 수 있다고 하면, 특히나 국가가 개인의 권리 행사를 대신할 수 있다거나 포기시킬 수 있다고 하면, 그런 체제는 전체주의입니다.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국가의 3요소 가운데 국민이 사라진 체제입니다. 국가와 정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은 뼈아픈 경험과 지극히 당연한 논리에서 비롯한 인권을 향한 발걸음이자, 세계가 공감하고 격려하는 옳은 방향입니다. 이웃나라에서 강제징용 판결 때문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흐름, 무엇보다 인권에 기초해서 2012년, 그 후로 6년이나 지난 2018년에야 대법원은 강제징용자들의 권리를 최종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웃나라 사정은 당파적 이익을 위한 정권의 선택이지 나라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안쓰럽습니다. 언제 의자를 돌려 앉아 자국 국민에게도 같은 요구를 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일본 국민이 정부보다 현명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시간은 연속하고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작용하며 이어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성하는 미래는 소중합니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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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우버나 배달앱으로 표현되는 ‘플랫폼노동’이 사회적 이슈다. 우리는 ‘타다’ 드라이버나 ‘쿠팡’ 플렉스 기사, ‘대리주부’ 가사서비스 직업이 대표적이다. 이들 대부분 정보통신기술(ICT)과 융합되어 하나의 산업 생태계가 형성된 곳이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들이 하나둘 생겨나더니 어느덧 꽤 많아졌다. 이미 배달업 다수는 플랫폼노동으로 이동했다. 몇 년 전과 달리 일자리 지도가 바뀌는 것 같다. 그렇다면 플랫폼노동은 우리에게 기회일까, 장애일까. 

영국이나 미국은 물론 유럽연합 국가들에서는 취업자의 2% 남짓이라고 한다. 특히 기술발전으로 온라인 노동의 증가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201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보니 거의 매년 26% 이상 성장하고 있다. 특히 소프트웨어 개발 및 크리에이티브, 멀티미디어 직업군의 성장이 확인된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디지털 부둣가’나 ‘디지털 갤리선 노예’처럼 일감 찾는 가상이민과 같은 표현도 사용한다. 유럽연합이나 미국, 영국에서 플랫폼노동 규모는 취업자의 0.5%에서 4.0%로 추정된다. 우리도 올해 처음 플랫폼노동 규모가 발표되었는데 취업자의 약 53만명(1.5~2.3%) 수준이다. 아마도 IT나 물류유통 산업의 규모를 보면 그보다 더 많을 것 같다.

이런 이유로 국제노동기구(ILO)는 디지털 경제시대 노동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플랫폼노동의 정의와 유형부터 대안까지 매우 활발하다. ILO는 플랫폼노동을 온라인 작업의 ‘웹’(web) 기반 일자리와 배달운송·가사서비스 작업처럼 ‘지역장소’(local) 기반 일자리로 구분한다. 언론에 알려진 몇몇 사례만 보더라도 플랫폼노동은 전 세계 다양한 지역의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소득 수단을 제공한다. 앞으로 디지털경제 시대의 핵심은 데이터 가치 창출인데, 제조업 못지않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 같다. ‘바퀴 달린 컴퓨터’라는 표현처럼 플랫폼노동은 기존 유해 환경에서 벗어난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다. 또 일과 삶의 균형이 자유로운 일자리도 있다. 꼼꼼히 봐야겠지만 가사서비스 영역처럼 비공식 부문의 일이, 공식부문으로 전환된 긍정성도 있다. 

문제는 산업은 성장하는데 명확한 사용자가 없다. 그래서 고용 없는 성장이라고도 한다. 이유는 플랫폼노동 다수가 근로계약이 아닌 사업자 계약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최저임금이나 휴일휴가, 퇴직금, 사회보험 등을 적용받지 못한다. 실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플랫폼노동은 보수가 낮고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제공받는다. 게다가 플랫폼노동자들은 기존보다 더 심각할 정도의 시간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 직업도 많다. 대표적으로 고객 서비스 평점이나 리뷰 시스템이다. 고객 평가는 소득과 일자리에 직결된다. 좋은 평가는 등급 향상으로 연결되고, 본인 소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부 기업은 서비스 평가가 낮은 사람들을 회원 목록에서 탈퇴시키기도 한다. 결국 고객에 의한 통제가 단순 통제가 아닌 일자리 상실의 신호인 것이다. 

이미 플랫폼노동은 국경을 초월하기에 노동법 준수 여부를 모니터링하기 어렵다. 계약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시정할 공식적인 제도도 없다. 일부 고숙련 일자리를 제외하면 중간 수준의 일자리들이 저숙련 플랫폼노동으로 대체될 개연성도 많다. 앞으로 플랫폼노동은 더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기에 최소한의 권리와 보호가 필요하다. 이미 대안적 논의는 시작되고 있다. 시장에서의 표준적인 계약과 수수료 책정, 계약방식이나 고용형태와 상관없는 사회적 안전망 적용, 데이터 및 사생활보호 논의까지 여러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디지털 과세’를 통해 플랫폼노동자의 소득과 실업급여, 유급휴가, 교육훈련 등의 비용에 활용하자는 주장도 있다. 프랑스(노동법), 덴마크(단체협약), 이탈리아(사회협약)에서는 플랫폼노동자에게도 노동자와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 사례도 있다. 이제 우리도 플랫폼경제시대, 기술혁신과 위험성 사이에서 미래의 일은 어떻게 변화될지 논의할 시점이 된 듯하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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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찾은 교토의 여름은 무덥고 습했다.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한·일 두 나라가 연일 주고받는 날선 언어와는 달리 교토에서 만난 지인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반갑게 맞이해줬다. 대화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악화 일로를 걷는 한·일관계로 이어졌다. 짧은 시간에 문재인 정부와 아베 내각 간 출구가 마련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회의적 의견이 다수였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은 일본 지식인층에서조차 한·일관계를 논할 때는 냉철한 이성과 논리의 언어가 실종된다고 개탄했다. 그 자리를 ‘신념의 언어’가 차지했다. 한·일관계가 서울 출발 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정부 간 교류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대학 간 학문적 교류와 협력 역시 예전과 확연히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확정된 교류 일정도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취소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특히 일본이 우위에 있다고 간주하는 분야의 협력은 더욱 그랬다. 열려있던 소통의 문들조차 하나, 둘씩 서서히 닫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한·일관계가 이성적, 합리적, 과학적이지 않고 이념(또는 신념)적으로 경화되는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한다. 

첫째, 한·일의 민과 관이 질문을 던지고 함께 대답을 찾아 나서기보다는 각자 신념에 매몰되어 그 신념이 지향하는 것들을 절대선이자 정의로 맹신하고 상대를 제압하려 한다. 사실(fact)의 힘을 믿기보다는 강철 같은 신념을 내세워 한·일관계의 현실을 바꿔보려고 한다. 사실이 아닌 완강한 신념으로 무장한 언어는 소통이 아닌 불통을 만들었다. 그 언어는 곧장 무기가 됐다. 결국 ‘간헐적 반일 감정’의 주기만 단축시켰다. 

둘째, ‘군국주의 일본’이 보여준 야만성이 잠복기를 거쳐 아베의 시대에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아베에게 던질 ‘아름다운 복수’는 어쩌면 우리만의 공허한 감성적 수사일 수 있겠다 싶다. 일본이라고 해서 이성적 집단이 분출하는 높은 윤리의식과 정의가 왜 없을까마는 미국과 탯줄이 연결된 아베의 시선이 불길한 이유는 문재인 정부를 더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때문이다. 이러한 ‘아베의 일본’을 이웃국가로 두고서 한·일관계의 미래를 밝게 그려나가기란 어렵다. 

셋째, 한·일관계의 이른바 패러다임 이동(shift)이 시작됐다.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이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규정하고 있는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을 의미한다고 할 때, 한·일관계의 패러다임 시프트는 당대 일본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한국에 대해 공유하고 있던 신념과 가치체계가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양국 모두 ‘정상적 인식’으로 서로를 보는 것이 한계에 도달, 이제는 새로운 렌즈로 양국관계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작금 한·일의 불화는 두 정치지도자가 지니고 있는 세계관 충돌의 결과이다. 무엇보다 아베의 일본은 유독 한국인에게만 깊은 회오(悔悟)도 없이 역사로부터 애써 도망을 치려고 한다. 아베가 그 역사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지는 의문이다. 이와는 별개로, 1965년 한일기본협정 시대의 한국이 아닌 지금의 우리가 여전히 일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긴 호흡으로 역사를 읽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 퇴행적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 간 갈등에서 전환점은 어느 지점에서 만들어질 것인가?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긴 해도 한국이 1965년 기본협정을 폐기할 의사가 없다면 그리고 일본이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끝맺기를 희망할 것이라는 점을 가정하면 어떤 형태로든 봉합은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처의 흔적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폐 속에 결핵을 앓은 자국이 완치가 되더라도 남는 것처럼 말이다.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서로 격돌한 시간도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저녁자리를 끝내고 어둠이 짙게 내린 교토의 거리로 나서자 고온다습한 공기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이병철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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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사 모리스 스즈키는 <우리 안의 과거>라는 책을 통해 “과거는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기억되고 역사화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한·일관계의 위기를 둘러싸고 이적행위에 가까운, 정부 전복이라도 희망하는 듯 막말을 쏟아내는 일부 수구언론과 정치권의 행동을 살피기 위해 10년 전의 우리, 어쩌면 20여년 전의 우리로 되돌아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에 이르는 정권교체 과정은 보수기득권 세력과 일정한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다. 비록 국민이 열망하는 전면적 민주화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개혁이 조금씩이나마 진행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대한민국의 수구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입지와 이해를 크게 위협하는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에 의해 기획된 문화투쟁은 자신들이 장악한 언론사를 통한 거대한 반동이었다. 1987년 민주화투쟁을 통해 우리 사회의 정치공간이 대폭 확장되었지만, 확장된 공간으로 스며든 것은 민주화, 노동운동 세력이기보다 그간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야합하던 수구세력이었다. 

3당 야합을 통해 한 뿌리가 된 김영삼 정부였지만, 그들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자학적 역사관으로 비판하면서 반공친미주의를 앞세워 권력을 장악하고, 분단을 고착화한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국부(國父)’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부활시키는 상징조작에 나선다. 이승만을 앞세워 자연스럽게 박정희로 연결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의미는 사라지고, 한보와 김현철 사건 등으로 실추된 정권의 도덕성을 만회하기 위한 인기 전략으로 치부되었다. 무능한 민주화 세력에 대비되는 유능한 박정희의 근대화 세력이라는 이미지가 강력한 리더십과 청렴, 자기희생과 경제성장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박정희 사망 10년 즈음에 실시된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과오보다 공적이 많았다”는 응답이 전체 61%를 차지했다. 과거는 선택적으로 기억된다는 점에서 ‘질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탄압, 인권과 민주주의의 상실은 쉽게 망각된 반면 ‘양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각종 경제지표와 생활지표들이 부각되었다. IMF 외환위기로부터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유산과 철저하게 결별하기는커녕 도리어 박정희기념관 건립 지원을 약속했다. 표면적으로 화해와 용서를 말했지만 사과 없는 일방적 용서였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100일의 밀월조차 허용되지 않을 만큼 수구언론의 난타를 당했다. 이것은 훗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쉴 틈 없이 진행되었다. 무능한 민주에 대한 실망이든, 문화투쟁의 결과였든 10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렀다. 수구세력이 펼친 문화투쟁의 정점은 2008년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정권의 방송통신위원회 출범이었다. 대통령의 멘토라 불렸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과 이명박 정권은 과거 두 번의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원인을 ‘공중파 방송’ 때문이라 보았고, 집권 직후부터 공영방송을 비롯한 미디어 장악을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언론 장악을 위해 이명박 정권이 경찰, 검찰, 국세청, 법원,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같은 국가기관까지 총동원하여 공영방송 사장들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축출되었다. 이후 MB특보 출신 사장들은 눈에 거슬리는 언론종사자들을 걸러냈고, KBS와 MBC를 비롯한 공영미디어 시스템은 무력화되고 말았다. MB정권과 방송통신위원회는 종편 채널들을 각종 특혜와 편법을 통해 신설하도록 제도화했다. 지금도 우리는 과거 정권의 언론장악 기도가 남긴 상처와 공포를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으며 오늘을 기만하고 왜곡하는 자들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도 존재한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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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8일 국회에서 국회교육희망포럼이 주최하고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박경미, 도종환 의원과 예술대학생 네트워크가 주관하는 ‘예술대학 교육여건 실태와 지원방향’ 토론회가 열렸다. 효율성과 취업률을 중시하는 대학평가체제가 보편화되면서 예술대학은 늘 구조조정 1순위였다. 예술대학은 취업률, 전임교원 확보율, 등록금 환원율 부문에서 다른 단과대학과 비교했을 때 가장 낮은 수준에 있다. 예술대학의 입시 경쟁률이 여전히 매우 높고, 등록금도 평균적으로 의과대학 다음으로 높은데, 정작 예술대학의 교육환경은 열악하기 이를 데 없다. 지방 예술대학은 폐과, 통폐합, 정원감축의 구조조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포럼을 주관한 예술대학생 네트워크가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예술대학의 등록금은 국공립대학은 평균 50만원, 사립대학은 105만원이 더 많다. 전임교원 비율은 인문대학과 비교했을 때도, 전국 141개교 중에서 98개교가 낮았다. 등록금을 많이 내는데도, 정작 ‘실험실습비’는 차등등록금의 13.97%, 전체 등록금의 3%밖에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돈은 훨씬 많이 내고, 혜택은 못 받는 상황인 것이다. 예술대학생 네트워크가 전국의 예술대학생 1만15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9%만이 교육환경에 만족한 반면, 72.8%가 불만족이라는 답변을 했다. 작년 미투 운동을 통해 드러났듯이, 예술대학은 위계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사건의 온상이 되었다. 예술대학은 이 상태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학생들은 창작의 미래를 포기하고 일찌감치 다른 길을 알아봐야 하는 것인가?

예술대학 학생들의 절규와 예술대학의 열악한 환경을 꼼꼼하게 분석한 자료를 접하면서 내심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예술대학의 위기 극복을 위해 교수들이 그동안 특별히 한 게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대학 교수들은 학생들의 이러한 활동에 격려는 못할망정 겁박을 했다고 하니 한심한 노릇이다. 이대로라면 예술대학 교수들은 학생들로부터 존경받기는커녕 성희롱, 성폭력의 가해자로, 교육과정의 무능한 스승으로, 예술현장의 위계적 권력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더 이상 부끄럽기 전에, 예술대학의 미래를 위해 교수들이 나서야 할 때다. 나는 예술대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예술전공 학생들이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실천을 제안하고 싶다. 첫째 교육-창작-현장이 유기적으로 잘 연계될 수 있도록 예술대학이 프로덕션 시스템으로 체질 개선해야 한다. 예술의 현장은 급격하게 바뀌었는데, 학교의 교육과정은 30~40년 전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프로덕션 시스템은 예술대학을 상업화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학교 안에서 교육과 창작과 제작이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교육과정을 혁신하는 게 목표이다.  

둘째, 청년예술가들을 위한 지속 가능한 종합적인 지원 계획이 필요하다. 지원의 사각지대에 있는 청년예술가들의 창작 지원, 무대가 아니더라도 예술전공을 살려서 다양한 사회진출을 이끌 수 있는 활동지원, 지속 가능한 창작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마련해주는 생활지원을 종합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술대학의 새로운 교육·창작 환경을 개선하는 국책 사업이 필요하다. 2000년대 초반 인문학이 위기를 맞이했을 때, 전국의 인문대학 교수들이 나서서 인문학 살리기 운동을 펼쳐 인문한국(HK)사업이 시작됐다. 예술대학도 인문한국사업처럼 예술대학의 교육과 창작 역량을 강화하는 가칭 예술한국(AK)사업을 신속하게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지원정책을 위해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예술대학의 교수들도 제자들의 교육권과 창작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예술대학 살리기 운동에 나서야 한다. 이런 일련의 노력들이 약탈적 대학평가와 위계에 의한 성희롱·성폭력으로 망가진 예술대학을 살리는 길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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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의 소문난 맛집에 가면 어김없이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이 맞이할 때가 있었다. 박 전 대통령과 악수하며 기뻐 어쩔 줄 몰라하는 음식점 주인의 사진을 보자고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2016년 탄핵 국면을 지나면서 슬그머니 사진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진이 있던 자리는 철 지난 바닷가처럼 한동안 휑하니 비어 있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한 맛집에 들렀더니 그 자리를 <백종원의 삼대천왕> 사진이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박근혜에서 백종원으로!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만약 대구·경북의 모든 음식점에 <백종원의 골목식당> 사진이 걸리는 날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나는 ‘박의 국가언어’로 살던 대구·경북 사람들이 ‘백의 시장언어’로 살아가는 날을 상상해본다.

‘박’은 모든 문제를 중앙정치 탓으로 돌리는 국가언어를 상징한다. 지역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고 투덜대면서도 지역 스스로 해결할 생각 대신 대구·경북 출신의 유력 정치인만 바라본다. 제발 대기업을 유치해서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줬으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모델이다. 고속도로 만들고 중공업에 투자해서 지역경제를 일으켰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똑같이 해주리라 바랐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이 모든 게 종북좌빨이 방해한 탓이다. 뿌리를 뽑아버려야 할 텐데, 정말 자유 대한민국의 앞날이 걱정된다.

‘백’은 기업가로 자신을 변화시켜 살아가려는 시장언어를 대표한다. 백종원은 영세식당 주인에게 자기를 교정, 치료, 계발, 혁신해야 할 부실기업으로 보라고 다그친다. 더 나아가 문제투성이인 자신을 우량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자기계발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라고 말한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불확실성을 오히려 자유를 실현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기업가적 주체가 되라고 가르친다.

현재 대구·경북에는 박에서 백으로 변화할 징조가 여전히 보잘것없다. 오히려 맛집 행세하며 시장언어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십수년 전 대구로 이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을 때다. 외국에서 살던 친구가 사업차 대구를 방문한 김에 나를 찾아왔다. 회포를 풀러 삼겹살집에 마주앉았다. 2인분을 시켰더니 3인분부터 주문을 받는다는 예상치 못한 응대가 나왔다. 저녁을 먹고 왔으니 안주용으로 2인분만 달라고 호소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둘이 오면 2인분 시키는 것이 정상인데 왜 그러냐고 따져 물었다. 1인분 값이 싸기에 밑반찬 생각하면 이윤이 남지 않기 때문이란다. 손님이 주인 돈 벌어주기 위해 있는 것인가? 고깃집이 여기밖에 없냐며 호기롭게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다른 곳도 다르지 않았다.

그 이후 비슷한 일을 거듭거듭 겪었다. 이제 둘이 삼겹살집에 가면 아주 자연스럽게 3인분을 시킨다. 저항하다가 지역 습속에 젖어든 것이다. 최근에도 이러한 습속은 여전히 막강하다. 어떤 집은 일단 3인분 시켜야 하고, 그 후부터 새로 주문할 때는 무조건 2인분이 기준이다. 더 먹고 싶으면 결국 5인분을 주문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가 막혀 왜 그렇게 하냐고 물었다. 주변의 고깃집에서 항의를 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습속이란 사실상 막강한 제재를 담고 있는 지역의 담합인 셈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시장이 사회적 유대를 산산이 부수고 시민을 이기주의자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으로 가득하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결이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에 따르면, 유용성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환 당사자들이 서로 경쟁할 때 시장이 존재하게 된다. 조직 안에서 일어나는 ‘위계’에 의한 내부자거래나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습속’에 의한 교환은 경쟁을 제한한다. 그런 점에서 그곳에는 시장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오로지 시장에서만 교환을 위한 경쟁 과정을 통해 교환 당사자들의 유용성에 대한 욕망이 호혜적으로 충족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위계와 습속을 통해 교환해온 대구·경북 일상의 삶에서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은 셈이다. 생활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화되었다거나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의해 포획되었다고 선험적으로 질타하기 전에 대구·경북 일상의 삶을 톺아보아야 할 이유다. 나는 묻는다. ‘박대백’은 과연 대구·경북 일상의 삶에 시장언어가 비로소 침투해 들어가는 작은 낌새인가?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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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불상(四不像)’이란 동물이 있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야생에서 사라진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서방 세계에 19세기 무렵에 알려졌고, 그 직후 야생에서 멸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서울동물원에서 사불상을 처음 봤습니다. 

‘사불상.’ 이름이 참 독특합니다. 꼬리는 당나귀, 발굽은 소, 머리는 말, 뿔은 사슴과 비슷한데, 가만히 보면 이 네 가지 동물 중에 어느 것도 닮지 않았다고 해서 결국 이름이 ‘사불상’이 되었다고 하네요. 서울동물원에서 봤던 ‘사불상’의 소개 내용은 이렇습니다. “프랑스 선교사인 Armand David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본국인 중국에서는 ‘milu’라고 알려져 있다. 야생에서는 2000년 전쯤에 멸종되었고, 오직 중국 왕의 사냥을 위한 장소에만 남아있었다. 후에 유럽의 사립동물원으로 이동되었다. 사불상의 발굽은 크고 넓은데 움직일 때마다 딸깍거리는 소리를 낸다. 사불상은 습지에서 수생식물을 주로 먹어서 반수생동물(semi-aquatic)로 불리기도 한다. 사불상의 털은 곱슬곱슬한데, 겨울이 되면 칙칙하고 윤기 없는 회색으로 변한다. 지금은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는 동물인데, 아주 적은 개체가 중국에 재도입되기도 했다.”

서울동물원 표지 설명에는 2000년 전쯤 멸종했다고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1900년까지 중국 야생에 소수가 살아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의화단의 난’ 때 이들의 마지막 서식지가 군대 주둔지가 되면서 사람의 먹이가 되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사불상은 그 직전에 영국으로 밀반출되었던 종자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방송으로 영국 동물원에서 사불상을 관리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사불상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큼지막한 사슴 같았습니다. 덩치가 꽤 큽니다. 동물원 관리인의 설명으로는 사불상이 민첩하고 예민해서 마취 총도 잘 피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멸종했을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신만이 알 것 같습니다. 지금도 사라져가는 동식물들이 많으니까요. 그래도 이 동물을 보면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겼습니다. 먼저 이름부터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름에 ‘아니다’라는 부정의 뜻을 담은 ‘불(不)’자를 넣다니, 그것도 네 번이나. 부정이 이들의 부정을 낳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정의 말을 빼고 이름을 다시 지으면 어떨까. ‘닮지 않았다’는 부정의 말을 걷어내고 긍정의 언어를 생각해봤습니다. 모두를 닮았다는 뜻으로, ‘사함상(四咸像)’이라고 지으면 어떨까.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 긍정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 실체와 윤곽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인식의 대상이 뚜렷해지면서 공감하게 되고, 처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도 변해갑니다. 사불상의 이름을 모두 닮았다는 긍정의 이름으로 지어주고 그 실체를 바라봤다면 지금도 야생에서 이 동물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을 탓할 때에 사불상 생각을 합니다. 내가 먼저 부정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런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부끄러운 일이 많습니다. 부정은 결국 나에 대한 부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긍정하는 눈으로 인정하며 바라볼 때에 아이도 바뀌고, 동물도 바뀌고, 나도 바뀝니다. 부정의 나비 효과를 긍정의 날갯짓으로 바꾸는 것은 결국 나의 몫입니다. 

역사와 인권을 부정하고, 그것도 세 번, 네 번이나 부정하고, 외교와 경제를 등에 업고 정부가 나서서 기업을 몰아세우며 또 부정하는 태도는 그래서 위험합니다. 역사의 굴레에서 고통받았던 사람들을 국가권력의 틀 안에서만 움직이라고 독촉하면 안됩니다. 아픔을 긍정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나라가 대신해서 그들의 권리를 포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부정은 결국 지금의 우리, 우리 미래 세대에 대한 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닮은 것은 닮았다고 솔직하게 말할 때입니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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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조사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연락처에 서비스 관계자들이 많다. 병원, 은행, 로펌, 백화점, 호텔, IT, 통신, 방송사, 운송 등 다양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기억은 간호사다. 직장생활 중 가장 힘든 일로 밤과 낮이 수시로 바뀌는 3교대 근무를 꼽았다. 학교 졸업 후 병원에서 처음으로 밤 근무를 시작했을 때, 일을 계속할지 고민까지 했었다고 한다. “몇 달간은 우울증도 생겼던 것 같고.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병원 생활 3년째에는 몸도 망가지고, 친구들도 못 만났었다. 쉬는 날이면, 자기계발보다 잠자는 것에 만족했다”는 말에는 힘든 삶이 녹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직장인’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일요일 저녁만 되면 다음 날 출근 걱정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사람들. 매일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직장 생활은 장시간노동에 2주일 이상의 휴가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현실.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일터는 과연 안전한가. 1년, 2년, 3년을 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건강검진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하고서야 휴직을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는 일을 하며 병들어가야 할까. 출근할 때마다 아파하는 직장인들. 왜 우리는 일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과거 우리 사회에서 진폐(1980), 화학물질중독(1990), 뇌심혈관계질환(2000), 직업성암(2010)과 같은 작업환경 위험성이 시기별로 사회적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도의 변화와 맞물린 결과다. 최근에는 감정노동, 괴롭힘, 플랫폼노동, 디지털건강과 같은 영역들이 새로운 의제로 제시되고 있다. 이들 모두 비표준적인 계약과 고용으로 안전보건 보호정책의 부족 탓에 어려움을 겪는 노동자들이다. 아직 많은 노동자들이 여전히 일터에서 안전보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도 이런 위험을 마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올해 ‘일의 미래를 위한 노동안전보건’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 서문에서는 100년 전, 세계는 왜 직업병과 산재사고에 대응했는지 질문을 던진다. 

특히 ILO는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사회심리적 위험이나 업무 관련 스트레스 등과 관련된 비감염성질환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ILO는 지난 6월 108차 총회에서는 ‘일터에서의 폭력과 괴롭힘’(ILO Convention on Violence and Harassment) 관련 협약(190호)과 권고(206호)를 채택했다. 이날 채택된 협약은 직장에서 근로계약 조건과 상관없이 어떠한 종류의 폭력이나 괴롭힘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때마침 한국도 오는 16일부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다. 아직 시행도 되기 전부터 기업은 물론 직장의 관리자들은 법률의 포괄성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괴롭힘’의 정의 및 종류와 행위에 따라 포괄성이 높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직장갑질119라는 시민단체가 이달 초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니, 10명 중 3명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았고, 법이 시행되어도 괴롭힘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이 무려 41.9%나 되었다. 기존 관성에서 변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폭력과 괴롭힘을 제거하는 것은 필수적인 시대적 과제다. 

이제 우리도 노동안전의 위험을 예측하고 새로운 미래의 노동에 대처해야 한다. ILO협약에 비해 우리의 법률은 협소하고 제한적이다. 이번 협약에서는 신체적 학대는 물론이고 언어적 학대, 왕따, 폭력, 성희롱, 위협 및 스토킹 등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정보통신이나 플랫폼노동을 포함하여 계약상의 지위와 관계없이 직장은 모두 보호받는다. 가해자는 고객이니 서비스 제공 및 환자와 같은 제3자도 고려된다. 

일터의 위험성을 예측하고 미래의 노동에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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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안 먹어.” 

아이를 키우다 보면 별별 생떼를 다 듣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그렇게 사랑스럽던 아이는 떠나고 괴물이 눈을 비비며 마루로 나오죠. 이제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억지. 잘못은 전부 남의 탓. 귀찮다, 내버려 두라는 고함. 부모가 아닌 원수를 바라보는 눈빛. 잘못은 아이가 했지만, 그 애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해야 합니다. 밥 안 먹겠다는 말은 실소마저 나오죠. 화나죠. 슬프고 답답합니다. 한심해 실망스럽기도 하죠. 배 속에 다시 넣고 싶기도 하고,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아무도 안 볼 때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당황한 부모는 책도 읽고 강연도 듣습니다. 여러 조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비슷하고 크게 새롭지도 않죠. 신뢰와 사랑도 보여주어야 하며 대화의 끈을 놓지 말라는 충고도 빠지지 않습니다. 

자유한국당을 보면 딱 그런 사춘기 아이 같습니다. 생떼와 투정이 무서운 중2를 뺨치는 듯합니다. 국회 가출을 한 게 지난 4월. 거의 석 달이 다 되도록 아무 일도 안 하지만 목청과 기상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자기 당 의원조차 설득시키지 못한 채 “소외정치, 야합의 정치로 제1야당을 찍어 내리려 한다면 이제 국회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민망함을 감추려 하고 있습니다. 민망할 수밖에 없는 게 이 논란의 원인 제공도 자유한국당이 했기 때문이죠. 국회가 마냥 손 놓고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바로 그 패스트트랙을 막고자, 즉 국회를 멈추기 위해 자유한국당은 폭행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서 국회법 위반·특수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고발되자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죠. 여기에는 자기에게 불리할 선거법 개정을 막고자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입만 열면 “좌파독재”라며 억지를 이어가고 있죠. 딱 사춘기 시작한 애들 꼴입니다.

아이들이 아무리 힘들게 해도 버릴 수 없듯 자유한국당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한국 정치의 엄연한 한 축이니까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오냐오냐하며 내버려 둘 수도 없죠. 애들처럼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대화가 필요합니다. 정치권 내의 대화는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원내대표 간 합의는 좌초됐고 청와대 회동도 무산됐죠. 자유한국당에 다른 정당과 청와대는 행패의 대상일 뿐 대화 상대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니 유권자가 나서야 합니다. 유권자의 목소리는 선거개혁을 통해 커질 수 있습니다. 지금 자유한국당이 반대하는 선거제도 개편안은 충분치 않습니다. 비례대표의 의석수를 늘리고 비례성도 강화해야 합니다. 다양할 수밖에 없는 유권자 목소리를 대변할 여러 정당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경쟁하게 해야 합니다. 4년에 한 번 있는 국회의원 선거도 2년에 한 번씩, 의원 절반을 뽑아야 합니다. 선거가 자주 있어야 유권자 눈치를 더 볼 테니까요. 중앙당 공천이란 구시대적 제도도 끝을 내야 합니다. 후보도 당원과 시민 손으로 뽑아야죠.

동시에 단호해야 합니다. 대화를 원치 않는 아이들을 붙잡고 사정해봤자 서로 감정만 상합니다. 규칙을 정했으면 지키라고 요구하고 어기면 벌도 내려야죠. 자유한국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국회법은 그간 국회폭력을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이 법과 전통을 뻔뻔하게 파괴했습니다. 패스트트랙과 관련한 정치권의 고소·고발 사건은 엄격하게 판단하고 죄가 드러나면 단호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법을 우습게 아는,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적폐를 놔두고 과거의 적폐청산은 불가능합니다. 힘, 돈, 연줄로 법 위에 군림한 이들을 끌어내려 우리와 같은 곳에 세워야 합니다. 국회의원의 갖가지 특권도 모두 공개하고 대폭 줄여야 합니다.

지난 몇 년 삼권분립의 두 축인 청와대와 대법원 모두 개혁 대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국회는 그 시작조차 없었죠. 여기엔 자유한국당의 분탕질이 큰 몫을 했습니다. 이제 자유한국당이 사춘기 정치를 멈추고 성숙할 수 있도록 검찰, 법원, 유권자 모두가 힘을 합쳐 도와야겠습니다. 밥 안 먹겠다는 아이, 밥 주지 맙시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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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람들의 자신만만한 발언을 들을 때마다 공연히 비위가 상했다. 최근 들어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한 대학 특강에서 “학점도 엉터리, 토익 점수도 800점”인 청년이 큰 기업 다섯 군데에 합격했는데 그 청년이 내 아들이라고 자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생존권 투쟁에 나선 택시 노동자를 4차 산업 혁신을 가로막는 세력으로 몰아붙인 이재웅 쏘카 대표의 발언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기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무언가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는 것 같다. 나처럼만 하면 되는데, 나는 비법을 알고, 알려 줄 수도 있는데 ‘너희들은 이거 모르지?’라며 섣부르게 가르치려 든다. 물론 부모 잘 둔 덕에 권력과 부를 얻어 사회지배층이 된 ‘블러드 엘리트’에 비해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더 높이 평가받고, 존경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포브스’에서는 해마다 한·미·중·일 4개국 부호의 재산현황을 조사해 발표한다. 2017년 현황에 따르면 한국은 이들 국가 중 상속형 부자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한국은 상위 부호 50명 가운데 상속형 부자 비율이 62%(31명)로 미국의 30.0%(15명), 일본 36.0%(18명)와 비교해도 월등히 높았다. 중국은 상속형 부자가 2명(4.0%)에 불과했다. 그나마 반가운 소식은 한국에서도 이른바 자수성가형 부자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기사였다. 개천에서 용(龍) 나기 어렵고 개천마저 말라간다는데, 과연 어떤 사람들이 성공했을까. 그들 대부분은 IT업계 벤처기업가 1세대였고, 1960년대 후반에 태어나 명문대를 졸업하고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주도한 벤처·닷컴버블 시기에 창업한 인물들이었다. 과거 세대에게 정주영과 이병철 같은 이들이 기업영웅이었다면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겐 이들이 새로운 영웅이며 그만큼 영향력도 커졌다.

모 경제신문에서 운영하는 ‘슈퍼리치’ 사이트에서 2019년 6월21일 현재 이들의 재산 소유 현황과 가족관계를 살펴볼 수 있었다. 김정주 NXC 회장(2조660억원)은 유명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개인용 컴퓨터를 소유했다. 요즘에야 집에 PC 없는 것이 더 놀랄 일이겠으나, 1980년대 초반 가정집에 자기 PC를 가진 중학생은 매우 드물었다. 부친은 아들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주었고, 창업 이후 5년간 아들 회사의 대표직을 맡아 각종 계약의 자문역할을 해주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해진 NHN 전 의장(1조3442억원)의 부친은 전 삼성생명 대표이사였고 그는 삼성 사내벤처제도를 통해 창업했다. 이재웅 대표는 학창 시절 이해진과 서울 청담동의 같은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살았고, 어머니들의 친분 덕분에 서로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의 부친 역시 한국종합건설 계열사 총괄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렇다고 피에르 부르디외가 &lt;구별짓기&gt;에서 말한 것처럼 문화자본이야말로 계급재생산의 핵심요소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김범수 현 카카오 의장(2조1866억원)은 어린 시절 할머니를 포함해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 살았고, 앞서 이재웅 대표와 설전을 벌였던 김정호 베어배터 대표의 부친은 택시 운전사였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1조223억원)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혹독한 가난을 맛보았고, 넷마블게임즈 방준혁 대표(1조6000억원 추정)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성공한 사람들도 저마다의 사연과 어려움이 있었을 테고, 도전정신과 과감한 실행력 등 여러 가지 자질과 능력의 비범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 비법을 알려주는 수많은 서사가 보여주지 않는 이면이 있다. 먼저 그들의 성공 뒤에 숨겨진 IT업계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의 주역이라는 화려한 수식 뒤에서 혹독한 야근과 비정상적인 대우에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 말이다. 그들 못잖게 성공하고 싶은, 아니 평범한 삶이라도 평온히 살아가길 희망하는 이들의 행복은 어째서 그토록 이루어지기 어려운 구조인지 살피지 않는 성공이란 결국 그 구조를 강화하는 헛된 미담일 뿐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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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없는 전공 2위’라는 말을 들었을 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공이 2위라는 표현은 전공 성적이 2위라는 말인가? 2등이나 했는데 의미가 없다고?’ 등과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검색을 해보고 나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미국의 한 언론이 가장 ‘쓸모없는 전공 10위’를 소개하고 있었다. 인류학 및 고고학, 영화·비디오 및 사진, 미술, 철학 및 종교, 음악, 체육, 역사, 영어영문 등이 불명예를 안았다. 실업률이 높고 연봉이 낮다는 이유였다. 반면에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은 전공은 경영학, 컴퓨터 및 정보과학, 공학, 의학, 수학 및 통계학 등이었다. 이학, 인문학, 문예의 토대 위에 실용과학이 의미가 있다는 건 좀 살아보면 깨달을 수 있는 상식이다. 잘못된 기준을 두고 평가하거나 평가를 위한 평가가 얼마나 의미 없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평가란 좁게는 ‘물건 값을 헤아려 매김’을 뜻하고, 좀 더 넓게는 ‘사물의 가치나 수준 따위를 평함’이라고 정의된다. 즉 돈을 쓸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게 평가의 근본 이유이다. 하지만 사려는 입장에서 값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파는 쪽에서 이런저런 비용을 따져서 ‘희망’ 가격을 매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마저도 어려운 물건의 경우에는 ‘감정평가’를 한다. 하지만 모두가 결과에 만족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복수의 감정평가를 평균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일상적인 상거래에서도 이러한데 다른 목적의 평가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학업의 평가는 시험을 통해 이뤄진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시험을 치른다는 것은 학업의 성취도와 부족한 부분을 살펴 좀 더 효과적인 학습계획을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학생의 등급을 나누기 위한 수단처럼 여겨진다. 이런 평가는 시험을 잘 치르게 할 여력이 되는 부모에게나 유용할 뿐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쓸모없을뿐더러 유해하다. 평가의 방식을 떠나서 목적과 쓰임이 중요하다.

직원들에게 인건비를 지출하는 기업들은 고과를 통해 자사의 인력을 평가하고 급여와 승진에 반영한다. 최근에는 상사가 일방적으로 부하직원을 평가하는 방법에서 탈피하여 다면평가를 도입하기도 한다. 상위자, 동료, 하위자, 고객 등 피평가자와 관련된 모든 사람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방식이다. 이처럼 새로운 평가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도입하는 이유는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서이지만 제대로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친구의 회사를 망하게 하려면 경영 컨설팅을 받게 하고 성과지표를 도입하게 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성과지표는 ‘미래성과를 측정하기 위한 핵심지표들을 묶은 평가기준’을 뜻하며 계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간단하게 계량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러니 우습기만 한 지표들이 버젓이 쓰인다. 보고서 작성 개수, 업무회의 진행 건수, 구매자 면담 건수 등이 진정한 성과가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일반기업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에서도 의미 없는 지표가 종종 쓰이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성과지표를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에도 적용하라는 압력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명분은 지원정책이 얼마나 마을공동체 활성화에 기여했는지 성과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지만, 일반경영에서도 도입이 어려운데 다양한 가치를 품고 있는 마을공동체의 평가에 적절할 리 없다고 여겨진다.

굳이 정책의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면, 일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 정책이 추구했던 목표와 철학이 얼마나 구현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경제정책의 성과를 담당 공무원이나 개별 기업이 아니라 경제성장률이나 고용률 등으로 살피듯이 마을공동체 지원의 성과도 개별 참여자가 아니라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진정으로 살피는 방법을 구해야 좀 더 의미 있는 평가일 것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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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늦은 밤 갑자기 카톡이 울렸다. “대구에서 발표할 일이 있어 왔다가 동대구역 가는 길입니다. 불금의 저녁, 대구도 길이 많이 막히네요. 엄청 덥고요. 기사 아저씨는 계속 문 정부 욕만 하시고.” 아는 교수였다. 답장을 보냈다. “제가 반복적으로 겪는 일 겪으셨군요. 서울 말씨만 쓰면 바로 나옵니다.” 위로의 문자가 왔다. “아…그런 거군요. 대구에서 사는 거 만만치 않으시겠습니다.”

어쩌다가 대구가, 참내. 목구멍으로부터 쓴물이 올라왔다. 2005년 대구로 이사 왔으니 벌써 십 수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택시를 타면 몇 마디 말에 바로 타지 사람인 걸 알아챈다. 구어 활용 습득 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아무리 대구 말씨를 흉내 내도 금방 티가 나는 모양이다. 열의 여섯, 일곱은 ‘소위’ 진보 정권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얼마전에도 그랬다. 서울 갔다 돌아오는 길 동대구역에서 택시를 탔다. 행선지를 말하고 몇 마디 주고받고나니 ‘주 52시간 근무제’와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밤중에 손님이 없다카이요. 주 52시간 정책인동 뭔동 땜에 밤에 일을 안 한다카이. 일을 안 하이 일감이 어데 있심니꺼. 소득주도성장한다꼬 카는데 일하는 시간이 줄었뿌이 소득도 준다카이요. 수출로 묵고사는 나라 아닙니꺼, 우리가. 이기 말이 되는 일입니꺼, 어데요. 최저임금 올린다고 설치뿌리이 원가가 올라가가 수출경쟁력이 똑 떨지는 거 아입니꺼?”

이럴 경우 보통 “예, 예” 하며 짐짓 맞장구를 쳐준다. 집에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택시기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아닌가. “이기 다 자유민주주의 파괴할라꼬 카는 빨갱이 때문이라예. 아이라예?” 나도 모르게 욱했나 보다. “자유민주주의가 뭡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택시기사가 움찔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내뱉었다. “자유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카마 그 뭐라캐야 되노. 자유 아입니꺼? 자유!” 작정을 하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 자유가 뭐냐니까요?” 대답을 못하고 버벅대다 고함을 지른다. “독재 안 하는 기지예. 문재인 함 보이소. 좌파독재 아이라예? 지 혼자 다 해묵잖아예. 국민 생각은 쪼매도 안 하고 저거들 빨갱이만 좋자고 그카는 거 아니라예. 그카다가 문재인이 총 맞아가 죽는다카이요, 죽어.” 깜짝 놀랐다. “아니 대통령을 총 쏴서 죽이는 게 자유민주주의예요?” “그라마 아니란 말인교? 자유민주주의 미국 함 보이소. 케네디도 총 맞아가 죽었잖는교.” 무슨 이런 논리가? “아니 자기랑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고 총 쏴 죽이는 게 자유민주주의예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아이라. 그 말은 그렇다카는 기 아닙니꺼? 누가 문재인 총 싸가 쥑이뿌만 어얘노 카는기지, 내 말은. 그래 좌파독재하다 보만 국민이 가마이 있겠는교?”

갑자기 1970년대 미국의 암울한 현실을 고발한 영화 <택시 드라이버>가 떠올랐다. 베트남전 퇴역군인인 주인공은 심야 택시를 몰며 쓰레기와 같은 추악한 뉴욕 밤거리를 떠돈다. 고작 이따위 나라를 지키려고 베트남에 가서 목숨 걸고 싸웠단 말인가.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싶지만 현실적 힘이 없다. 마지막 희망인 사랑마저도 일그러지자 분노가 극에 달한다. 모든 게 잘못된 정치 탓 같다.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과대망상으로 유력 대통령 후보의 암살에 나선다. 

자신이 처한 참혹한 현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때 무력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 무력감은 가상의 악에 대한 분노와 테러로 돌변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가 말로 의사소통하는 정치제도를 만든 이유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치가 무력감과 분노를 자극하고 조장하는 폭력적인 ‘군사 언어’에 기대면 희망이 없다. 현재 수많은 ‘택시 드라이버’가 군사 언어를 사용해서 무력감과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럴수록 공감을 못 얻고 끼리끼리 고립되어 과대망상 테러를 꿈꾼다. 보다 보편적인 ‘시민 언어’를 써서 자신이 처한 곤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정치의 공간이 활짝 열려야 비로소 문제 해결의 길이 보인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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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201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의 노래 ‘Blowing in the Wind’의 첫 소절입니다. 이 노랫말처럼 우리는 사람이라고 불리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걸을 수 있었기에 편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발로 걸으며 얻게 된 두 손의 잉여로 도구를 만들고 불을 다루며 꾸준히 뭔가를 창조해 왔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걸으면서 생각하고, 그러면서 진화해 왔습니다. 

“내가 치는 음표는 다른 피아니스트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음표 사이의 정지, 그렇다. 바로 그곳에 예술이 존재한다.”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의 말입니다. 이 말처럼 걷기란 제 삶에서 쉼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풀기 어려운 사건과 분쟁이 이 땅에서 생겨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실의 입은 너무 커서 사실을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의 손들이 그 입안으로 들락거립니다. 그사이에서 판사는 진실을 가려야 합니다. 

그 무게감이 숙명보다 무거운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저는 걷습니다. 걷다 보면 사건과 단절되고, 그 단절이 오히려 사건 해결에 실마리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풀리지 않는 난제를 걸으면서 풀어갔던 경험을 꽤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업무의 연장인 셈입니다. 그래도 머릿속에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내면서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걸으면서 이보다 더 심오한 일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걸으면서 철학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은 삶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왕의 스승 역할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이라는 사설 학원을 세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매일 아침 산책을 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모임을 ‘소요학파’ 또는 ‘페리파토스학파’라고 불렀습니다. 소요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이란 뜻입니다(표준국어대사전). 페리파토스는 산책길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소요학파는 ‘걷기학파’인 셈입니다. 서구 근대 사상의 근원이 된 학파의 일상이 공부가 아니고 걷는 일이었다니,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고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걷기처럼 격렬하지 않은 운동이 창의성을 기르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 때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신경세포는 계속 만들어지는데, 걷기 같은 운동이 그 생성을 돕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정재승 <열두 발자국>).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암 사망의 3분의 1은 조기검진으로, 또 3분의 1은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예방이 가능한데, 주 5회 이상 꾸준히 걷기만 해도 새로운 세포가 생성되고 암세포는 소멸한다고 합니다(EBS 라디오 캠페인). 

걷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신체 활동이자, 다양한 두뇌 활동이 덤으로 따라오는 꽤 괜찮은 선택입니다. 따로 운동할 시간을 낼 수 없는 현대 도시 생활에 걷기처럼 간편하고 효율적인 신체 활동은 없는 것 같습니다(생계 활동으로 따로 걸을 시간을 내지 못하는 분들께는 양해의 말씀 구합니다). 

철학의 역사, 누군가의 조언, 연구 결과가 알려주듯이, 사람은 걸으면서 현명해졌습니다. 자연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속에 인간이 만든 건축이 얼마나 볼만한지, 내 앞을 사뿐히 지나는 고양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걷다 보면 보입니다. 어느 시인이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뒀던 저녁 거리마다, 어릴 적 뛰놀던 종로 골목마다, 뽀얀 우윳빛 숲속에, 그리고 북녘 땅 천지와 명사십리에 여러분의 발길이 닿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고위 공직자와 기업 임원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걸어 다니기 바랍니다. 걷다 보면 세상이 보이고, 그러면 나라와 기업 모두 현명해집니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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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권이나 노동정책을 주제로 강연을 하다보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처럼 노동 문제 관련 유엔 산하 전문기구는 없나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충격을 받는다. WHO는 1923년에 설립되었지만, 국제노동기구(ILO)는 그보다 4년이 빠른 1919년 설립되었고, 2019년 현재 187개 국가들이 가입한 상태다. 우리는 1991년 152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사실 ILO는 각국의 노동입법수준을 발전·향상시켜 노동조건과 생활수준을 보장하고 개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실업과 불완전고용, 노사관계, 경제발전, 자동화를 비롯한 기술변화 문제 등에 관한 연구도 한다. ILO는 2019년 100주년을 맞이하여 &lt;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gt;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오는 10일부터 약 10일 동안 100주년 기념 총회도 개최된다. 매년 열리는 총회에는 우리를 포함해 전 세계 노사정 대표가 모두 참가한다. 아마도 이번 총회에서는 ‘미래의 일’과 관련된 10가지 권고사항을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평생교육, 성평등, 보편적 노동권 보장, 좋은 일자리 실현과 기술투자 및 사회적 보호 등이다.

그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변화하는 노동환경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인공지능, 자동화, 로봇공학 등 기술발전은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가능성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의 새로운 기회가 주는 혜택을 받을 준비가 안된 노동자들이 기술발전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학교에서 배운 교육과 지식은 미래에 창출되는 일자리에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새로 습득한 기술은 오래 못 가 쓸모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한다. 

2019년 대한민국의 노동현실과 일의 미래는 암울하다. 우체국 집배 노동자들이 지난 10년 사이 191명이나 사망했다고 한다. 올해에만 벌써 4명이 과로로 목숨을 잃었다. 언론 기사를 보니 우정본부는 적자 문제로 인력 충원이 더딘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 말에 더 화가 난다. 그럼 앞으로 흑자가 되기 전에는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어도 괜찮다는 것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아직도 여성과 남성 화장실이 분리되지 않는 A공공기관도 있고, B공공기관 자회사 직원들은 별도의 휴게실이 없어 화장실에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다. 민간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수년째 같은 곳에서 일을 해도 처우개선은 없이 새로운 업체가 바뀔 때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노동시장 상황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일하는 사람 10명 중 4명은 비정규직이다. 여성의 임금은 남성에 비해 여전히 35% 정도 낮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저임금은 다소 해소되었으나 자산의 대물림으로 인한 소득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과도한 노동시간에 시달리거나 산업재해로 매년 목숨을 잃고 있다. 직장 스트레스는 정신건강 위험을 심화시켰다. 그럼에도 90%의 노동자들은 아직도 노동기본권을 누리지 못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일터에서의 권리를 위해 헌법에 보장된 노동조합을 만들고 보니 정규직 전환을 해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 수십년간 우리 사회에서 ‘일터의 권리’는 없었다. 대한민국은 ILO 주40시간 협약을 했어도 세계 최장시간 일하는 곳이다. 산업안전보건 협약을 6개나 비준했지만 OECD에서 가장 높다. 영국 사망률의 26배다. “모든 노동자들은 계약형태나 고용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는 인간적인 노동환경을 보장하는 적절한 노동보호를 누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100년 전 ILO가 선언한 “진정으로 보다 인간적인 노동체제”인 것이다. 

이제 우리도 그 여정에 함께해야 하고, 더 나은 일의 미래를 위한 기회를 포착해야 할 시기다. ILO 100주년 보고서는 유급휴가제도를 통한 평생교육훈련 시행, 플랫폼 노동과 같은 비표준적 고용의 규율,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사회안전망 확대를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 경영참여나, 여성과 청년 문제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ILO 1호 협약이 8시간 노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도 ‘더 나은 미래의 일’을 위한 목표는 절실한 과제일 듯하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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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국가전략의 부재 또는 빈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종종 제기되곤 했지만 5년 단임 정권을 책임진 주체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법 87조에 따라 제정된 국가안전보장회의법을 포함한 어느 법령에도 ‘국가안전보장’ 및 ‘국가안보’의 정의는 없다. 다만 노무현 정부 시절 미국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를 벤치마킹하여 2004년 처음으로 ‘국가안보전략보고서’를 발간, 국가이익(국가목표)을 “국가의 생존, 번영과 발전 등 어떠한 안보환경하에서도 지향해야 할 가치”로 정의했을 뿐이다. 

이후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국가이익(목표)은 온데간데없이 정권의 이익과 전략이 마치 국가이익과 전략인 양 호도됐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태생 탓에 강대국들이 내뿜는 세력정치 자장(磁場)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음에도 5년마다 나타났다 사라진 역대 정권은 예외 없이 국가안보의 한 축인 외교정책을 지지층만을 의식한 국내정치 공학적 관점에서만 다루면서 국가이익과 국가전략의 본래 의미가 실종되는 데 한 요인을 제공했다. 그사이 외교가 차지하는 공간은 눈에 띄게 축소됐다. 더군다나 ‘청와대 정부’라고까지 불리는 상황에서 외교부가 독자적으로 공간을 넓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며, 불길한 징후는 이미 예고됐다. 

2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외교부에)그렇게 훌륭한 엘리트들이 많이 모여있는데도 우리 외교역량이 우리나라의 어떤 국력이나 국가적 위상을 제대로 받쳐주지 못한다는 판단이 많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문 대통령은 외무고시 출신에다 특정 학맥 중심의 조직문화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과거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외교부에 대해 유사한 지적들이 있었다. 그 후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의 문재인 정부에서도 외교부의 뼈를 깎는 환골탈태는 없었던 셈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대사에 외교직 공무원들을 철저히 배제했고, 외교수장에 외교부 주류와는 거리가 먼 외부 인사를 임명했다. 이때만 해도 외교부의 ‘워싱턴 스쿨’ ‘저팬 스쿨’ ‘차이나 스쿨’처럼 폐쇄적 순혈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로 해석됐다. 

그러나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지금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 혁신이 실패를 넘어 자칫 외교의 위기로 이어지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주미 한국대사관 외교관의 위법행위, 깐풍기 대사, 명칭 오기, 그리고 구겨진 태극기 게양에서 드러난 일부 외교부 직원들의 기강해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독 회담 2분’이 상징하는 한·미관계의 불편한 진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무산 등이야말로 한국 외교의 위기를 알리는 대표지표이다. 

이처럼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 불확실성이 이전보다 훨씬 높아진 한국 외교 위기의 본질은 국가이익 전략의 부재에 기인한다. 그래서 묻는다. 임기 중반에 접어드는 문재인 정부는 정권을 넘어서는 국가이익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를 어떤 방식으로 달성하겠다는 로드맵 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북한 비핵화가 국가목표 중 하나라면 비핵화에 대한 입장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북한을 대상으로 양자 간 국익을 정하고 이에 따른 전술이 아닌 전략을 마련했는가? ‘늘공’들을 의전과 현안으로 내몰고 ‘어공’들 위주로 냉엄한 강대국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존망을 가를 수 있는 국가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이 야인시절 쓴 책에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전략실 제2차장 관련 일화가 소개돼 있다. 김 차장이 오래전 외교통상부 외교통상교섭본부장직을 떠나면서 직원들에게 “외교통상부는 장교 요원을 뽑아 사병으로 쓴다”고 했다는 것이다. 조 차관 역시 “정치적 리더십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은 관료집단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했다. 이제라도 국가이익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특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주적이고 유연한, 창의적 외교전략을 수립하기를 기대한다.

<이병철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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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내면은 치열한 싸움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 싸움은 어딘가를 엄숙하게 향하기도 하죠.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던 고상돈이나 모두가 꺼리던 소록도를 향하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의 싸움이 그랬습니다. 때로는 무엇인가를 반대하기 위한 싸움도 합니다. 하얼빈 역에서 방아쇠를 당기던 안중근의 손길, 1987년 종로 한 골목길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소녀의 눈물, 뻔히 질 것을 알며 부산으로 내려가던 한 정치인의 발길에는 아무 말 없어도 그 사람의 진심이 보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고개를 숙이게 되죠.

황교안도 진심을 솔직히 드러냈습니다.

5월17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한다 … 정치적 입장에서도 동성애는 우리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동성애와 관련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하며 교육을 통해 동성애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죠. 정체성 이슈인 동성애를 선택의 문제로 본 그릇된 시각보다 그 배경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의 반대, 그의 싸움이 어디 있는가. 바로 성경입니다.

2017년 한 기독교 강연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놀랄 일은 아니죠. 황교안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50년 동안 주일 예배를 단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 독실한 기독교 전도사입니다. 검사 시절에도 부임하는 곳마다 예배 모임을 만들어 ‘검찰 복음화’를 외쳤죠. 가난하고 공부도 못했던 자기가 관직에 오른 것도, 총리 시절 가뭄을 극복한 것도, 법안 통과도 예수 덕이라며 자기 믿음을 자랑했다죠. 다른 종교를 어떻게 보는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오신날 한 절을 찾은 황교안은 합장도, 예법에 따른 반배도, 의식 참여도 거부했죠. 내 신만 정당하고 그의 가르침 그대로, 온전히 따르며 세상과의 타협을 반대한다는 시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각을 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하죠.

어떤 종교건 근본주의가 활개를 칠 때는 정치적 이유가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디 왕가처럼 권력을 유지하고 공고히 하는 데 쓰곤 하죠. 정부가 역할을 못하면 그 공백을 채우기도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가자지구의 하마스가 그런 경우죠. 정책으로 승부가 안되니 종교를 동원해 표를 모으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봅니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 인도 모디 총리가 그랬고 미국의 공화당도 그랬습니다. 미국 공화당은 기독교 세력을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낙태, 동성애 등 가치 이슈를 들고나와 보수 기독교 표를 쓸어 모았죠. 덕택에 공화당은 부자 배를 불리는 경제정책을 내면서도 가난한 다수의 표를 끌어모을 수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삶은 점점 힘들어지고 그럴수록 성서의 외침을 더 크게 틀어댔죠. 대립과 불신은 커갔습니다. 극단적 정파성은 최근 유례가 없을 정도로 깊어져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교활한 정치가 공화당 자기 발등마저 찍고 있습니다. 극우 정치에는 종교와 가치뿐 정책이 상관이 없죠. 그러다 보니 정책에 무지하고 목소리만 큰 사람이 활개를 칠 판을 깔아준 셈이 되었죠. 거기에 트럼프가 등장한 겁니다. 이제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어 공화당 주류를 다 삼켜버렸습니다. 하긴 공포정치와 전쟁도 벌어지는 마당에 이런 종교의 폐해는 얌전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문제는 심각합니다.

어떤 종교를 따르고 그 믿음이 근본주의적일지 아닐지 선택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교회가 아닌 공당의 대표라면 좀 생각해봐야겠죠. 황교안이, 자유한국당의 정책과 주장이 공익을 해치면서 자기 믿음만 따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당대표직을 맡은 지 두세달 만에 근본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듯한 황교안의 행보가 걱정스럽습니다. 다른 종교를 무시하는 것과 다른 정치세력을 무시하는 것. 자기 신만 신이라는 환상과 좌파독재를 물리쳐야 한다는 환상. 과연 무관한 것일까요?

그냥 정치적 레토릭일 뿐 그의 종교적 신념과 아무 상관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고약한 길로 황교안은 향하고 있으니까요. 사상과 지역 갈등으로 찢긴 나라를 종교로 또 나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 일 없게 정화수 떠 놓고 간절히 기도라도 해야겠습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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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에 출마 선언할 무렵만 하더라도 미국은 물론 국내 정치평론가들은 그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잠시 스쳐가는 거품 인기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슈퍼 화요일이라 불리는 경선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자 트럼프 대세론이 공고해졌다. 뒤늦게 언론과 방송은 트럼프 돌풍의 주요 원인으로 실업률, 무역 적자, 테러 사건 이후 무슬림을 비롯한 해외 이민자에 대한 혐오 등 ‘러스트 벨트(rust belt)’로 상징되는 보수 백인 계층의 불만과 위기의식을 트럼프가 막말을 통해 대리만족시켜준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막말이 널리 유포될 수 있는 미디어 환경과 사회구조의 변화이다. 

1960년 케네디와 닉슨의 TV 토론 이후 60년이 흐르는 동안 미디어 환경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했다. 트럼프의 성공은 변화한 미디어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눈부신(?) 성공은 한국의 정치인들에게도 학습효과와 자극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정치인과 막말이 갑작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정치를 넘어 일상화되어간다는 것이다. 신문, 라디오 그리고 TV 같은 전통적인 대중매체에 케이블방송과 인터넷이 추가되면서 미디어의 영역이 놀랍게 확장되었고,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본격적인 1인 미디어의 시대가 열렸다. 이 같은 변화는 그간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담화들이 실수든, 의도적인 것이든 곧장 공적담론의 장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뜻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개인의 신상정보가 유리벽처럼 투명해지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말과 글, 행위 역시 여과 없이 전파되는 시대란 의미이다. 위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트럼프의 성공에 자극받은 정치권과 신규 미디어는 이것을 기회로 여긴다. 미디어 시장에 후발주자로 진입한 종편, 인터넷 방송이 시청률에 연연하여 극단적인 막말을 묵인하거나 갈등상황을 의도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지율에 목을 매는 정당과 정치인이 정치적 이유로 이런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미디어 연구자들에 따르면 케이블방송 뉴스나 인터넷 뉴스를 즐겨 소비하는 사람일수록 뉴스 보도의 객관성이나 중립성보다는 정파성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는데, 종편의 보도 강도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은 스스로 망언과 페이크뉴스를 만들어내는 미디어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막말과 페이크뉴스에 몰두하는 시청자일수록 대화와 타협보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도덕 불감증 증세를 보인다. 문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견의 차이가 합리적인 토론과 설득, 타협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막말을 통해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청취자들을 향해서만 발언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막말을 중요한 정치수단으로 삼는 ‘부족주의(tribalism)’ 정치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혐오의 정치이며 사회의 신뢰를 파괴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막말과 거짓뉴스가 혐오를 유포하며 제2의 성공을 꿈꾼다. 어떤 이들은 이를 받아 다시 유포하며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J K 롤링의 판타지 소설 <해리 포터>에는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비춰주는 마법의 거울 이야기가 나온다. 그 거울에는 “에리스드 스트라 에루 오이트 우베 카푸루 오이트 온 워시(erised stra ehru oyt ube cafru oyt on woshI)”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 문구를 거울에 비춰보면 “나는 당신의 얼굴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속 소망을 보여준다(I show not your face but your hearts desire)”라는 뜻이다. 

막말과 거짓뉴스가 발호할 수 있는 배경은 자신의 확증 편향에 따라 거짓과 혐오발언을 별생각 없이 소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다. 누군가 당신에게 거짓뉴스를 전달하거나 혐오를 조장하는 막말을 하거나 성범죄 동영상을 공유하려 할 때, 항의하라! 낮고 작은 목소리라도 단호하게 거부하라! 그것만이 우리 자신을, 사회를 지키는 방법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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