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학에서는 주권국가를 유·무형의 인적 및 물적 자원의 국경 이동에 대한 통제권과 자국 영토 내에서 최종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총체로 개념화한다. 그러나 국가의 ‘자율성’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다. 주권국가들이 공식적으로 서로에 대해 독립적이긴 해도 전략적, 군사적, 경제적 의존이나 종속 등 여러 이유로 상대국가의 주권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국제정치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위계적 관계에서 하부국가가 보여주는 순응적 외교정책 행태는 외부로부터의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했거나, 자율성을 확보했더라도 현저히 작다는 것을 나타낸다. 오래전 한국이 그랬다. 

박정희가 주도한 1961년 군사쿠데타가 미국과 한국 사이에 ‘제도화된 후견-피후견 관계’를 낳았음은 우리 현대사의 불편한 진실이다. 1964년 9월 사실상 1차 파병이 시작된 베트남전 참가(이후 1966년 4월까지 모두 4차례 파병이 이루어짐)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후견-피후견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한·일 국교정상화는 당시 악화일로에 있던 인도차이나 정세 요인 이외에 베트남 참전에 따른 한국의 군사적 공백을 이용한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미국의 책략과 미국으로부터 대외원조가 절실했던 박정희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이후 한국은 냉전기에 형성된 한·미·일 삼국구조에서 달갑지 않은 ‘주니어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미관계가 이처럼 위계적이긴 해도 아직도 과거의 후견-피후견 관계라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더군다나 한·미관계를 조공 내지 사대관계 운운하는 것은 자기비하적이다. 미국의 지배적인 관계가 더는 한국을 압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이를 부정한다. 탄핵위기를 넘긴 트럼프는 이미 여러 차례 한국을 부자국가로 규정하고서 방위비 분담금을 훨씬 많이 부담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의 심복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몇 주 전 월스트리트저널에 공동기고 형식으로 “한국은 동맹이지 미국에 의존하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절반만 옳다. 

진보 성향의 문재인 정부가 미국 주도의 질서에서 탈피하고자 외교적 노력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례로, 문재인 대통령은 2년 전 재외공관장 만찬에서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세계와 함께 걸어가되 우리가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우리는 우리 외교가 자주적인 독립정신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문 대통령에게서 ‘동맹의 방기(放棄)’에 대한 우려를 찾기란 어렵다. 

그렇다고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펼치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곧장 반미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의 우려 섞인 전망은 기우에 가깝다고 본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반미의 길로 돌아설 수 없도록 서울과 워싱턴을 잇는 연결망들이 복합적으로 촘촘하게 짜여 있으며, 무엇보다 70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혈맹’관계를 무 자르듯이 단절하는 게 생각만큼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상호 안보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동맹이 적절히 유지·관리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현재의 ‘울퉁불퉁한(bumpy)’ 동맹은 의외로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은 20세기에 손님으로 이 땅에 왔다. 그 손님이 만든 지배-의존적 동맹의 관계가 종종 주인인 한국의 외부적 자율성을 훼손하기도 했다.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 미확보로 인한 한·미의 특수한 주권적 관계에 유달리 불편을 느끼는 21세기 진보세력은 어느 때보다 강도 높게 ‘동맹의 정상화’를 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북한 개별관광 개시 시점과 난항에 빠진 한·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 협상 결과가 진보정부의 대외적 자율성의 크기를 측정하는 가늠자가 될 것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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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컨벤션센터를 개조해 만든 임시병원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환자들이 수용돼 있다. 우한 _ AP연합뉴스

“한국보다 확진자 수가 더 많대!” “내 그럴 줄 알았다. 싹 쓸어버렸으면 좋겠다.”

카페 옆자리의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이웃 나라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개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분위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디서도 “안됐다”라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독일어에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가 있다. 문자 그대로 하면 ‘해로운 기쁨’, 뉘앙스를 살리면 ‘사악한 즐거움’이다. 타인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즐거워하는 심술궂은 마음을 뜻한다. 길 가다 바나나 껍질을 밟아 크게 넘어지는 사람을 보고 웃는 것도 샤덴프로이데다. 경쟁 팀의 선수가 부상을 입었을 때 잘됐다는 마음이 드는 것,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 곤경에 처했을 때 고소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샤덴프로이데다. 가까운 사이에도 이런 감정은 존재한다.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대기업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씁쓸함, 그러다 몇 년째 승진에서 누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겉으로는 표를 내지 않아도 속으로 은밀하게 친구의 불행을 기뻐할 수도 있다.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지닌 가장 악한 감정이 샤덴프로이데라고 했다. 어릴 적엔 친구가 웃으면 같이 웃고, 울면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따라 울었는데, 그때는 몰랐던 이 사악한 즐거움을 우리는 어쩌다 습득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경쟁의식 때문일 것이다. 한국 교육의 동력이자 메커니즘인 경쟁은 친구가 잘해도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동창과, 입사동기와, 이웃과, 본 적도 없는 엄마 친구 자식과 비교하며 나의 우위를 찾는다. 나와 남을, 우리와 그들을 가른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함께 슬퍼하기보다 무탈한 나의 현재에 안도하며 비교우위를 즐긴다. 세상이 온통 제로섬인 것처럼 누군가 잘되면 내가 뒤처지는 것 같고 누군가에게 불행이 닥치면 불행의 할당량이 나를 비켜가서 다행이라고 여긴다. 내가 속한 또는 내가 지지하는 우리 그룹에 나쁜 일이 생긴다면 걱정하고 슬퍼하겠지만 ‘우리’가 아닌 ‘그들’에게는 불행이 닥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만 괜찮으면 상관없다.

무서운 것은 샤덴프로이데가 전염된다는 점이다.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느꼈더라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던 감정이 남이 표현하는 것을 보면 대범해진다. 익명을 보장받으면 잔인해진다. 심지어 누군가에게 불행이 닥치기를 바라게 되기까지 한다. 소리 없이 퍼지는 샤덴프로이데는 악성 바이러스만큼이나 전염력이 강하고 위험하다.

유명인이 갑작스레 나쁜 일을 당했을 때 동정하는 이도 있지만 당해 마땅하다는 조롱도 많다. 대중이 보기에 별 노력 없이 성공을 거뒀거나 부정한 방법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한 경우라면 샤덴프로이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악한 즐거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름의 정의라는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행운, 잘나가는 이가 누리는 권력이 내 눈에는 불평등이다. 그런 사람에게 불행이 닥치는 것은 정의, 즉 공정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불행을 당해 마땅한 사람이 있을까? ‘우리’와 ‘그들’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우리’의 범위는 늘기보다는 줄어들기가 쉽다. 종국에는 나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그들’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어서 나 혼자 잘한다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저 멀리서 나타난 바이러스가 금세 전 세계에 번진 것처럼, 명절에 가족과 밥을 먹다가 감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남의 불행을 고소하다고 여기지 말자. 내가 안녕하려면 남도 안녕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가 우리인, 금을 그어 나와 남을 나눌 수 없는 세상이다. 나 혼자 잘 사는 세상은 없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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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공감이라는 말처럼 크게 성공한 심리학 용어도 없을 것이다. 원래는 그리 흔히 쓰던 말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니 여섯 번 등장한다. 한 번은 한명회가 명나라에서 성종의 표문을 올리며 황제의 은덕을 찬양할 때 쓰였다. 나머지는 임금의 성덕에 군신이 같이 감격한다며 쓰였다.

혹시 개화 이후 많이 쓰게 된 것일까? 옛 신문을 검색해도 잘 찾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1941년 12월9일 매일신보에 실린 ‘제국을 절대 지지, 독일조야 만강의 공감’ 제하의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독일 국민이 일본 제국을 지지하며 가슴 벅차게 공감한다는 내용이다. 기사 이틀 전, 진주만 공습이 있었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예전에는 공감이란 말을 그다지 흔히 쓰지 않았다. 노래 가사에 감동할 때나 썼던 것 같다. 정신의학을 시작하며 공감의 심리를 배웠지만, 이처럼 대중화될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온갖 곳에 남용된다. 우리 동네엔 공감 떡집도 있고, 공감 치킨도 있다. 공감대 아파트도 있다. 바야흐로 공감의 시대다. 한때는 재건이나 현대, 부흥이란 말이 인기를 끌었고, 미래, 융합, 세계화 등의 용어도 히트한 적이 있다. 당시 가장 절박했던 가치다. 공감도 마찬가지다. 동시대인의 마음에 뭔가 깊이 와닿는 것이 있으니 인기를 얻는다. 그렇지 않다면 갈비 공감이나 공감 떡볶이처럼 썩 공감 가지 않는 상호가 등장할 리 없다.

현대인은 공감에 굶주려 있는 것일까? 콘라트 로렌츠는 밀집 도시에 사는 현대인일수록 오히려 서로 멀어지며 고립된다고 하였다. 하긴 전통사회에서는 공감이라는 말이 그리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과 친지는 물론이고, 부락민 모두 서로의 생각을 항상 넘치도록 나누었을 테니 말이다. 구중궁궐에 갇힌 임금에게나 ‘백성이 성덕에 공감한다’라고 꼭 집어 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 정서적 공감이다. 타인의 기쁨이나 슬픔을 보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상태다. 자동으로 일어날 뿐 아니라 대부분 어렵지 않게 경험한다. 주관적인 감정적 전염이다. 둘째, 인지적 공감이다. 타인의 입장이나 형편을 고려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제법 애를 써야 가능하다. 빈자에게 부자를, 부자에게 빈자를 공감해보라고 해보자. 부러움이나 연민의 감정이 앞서서 제대로 공감하기 어렵다. 인지적 공감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추상적 과정이다.

정서적으로 전혀 공감되지 않는 대상에게 인지적으로 공감해본 적 있는가? 정신과 전공의 때 그런 훈련을 받는다. 사실 환자의 과도한 기분이나 엉뚱한 행동, 망상에 금방 공감하긴 어렵다. 물론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진짜 공감은 아니다. 잘해야 동정심이다. 도무지 납득되지 않지만, 그런데도 상대를 이해해내려는 인지적 공감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큰 인기를 끄는 공감은 전자의 공감이다. 자동으로 마음이 끌리는 대상이나 주장에 대해서 ‘공감’한다면서, 그렇지 않은 자를 ‘공감 능력이 없다’며 나무란다. 하지만 이건 공감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입장 차이에 불과하다. 마네의 그림을 보며 감탄하는 친구가 왜 감동하지 않느냐며 혀를 끌끌 찬다. 나는 모네를 더 좋아하는데. 

그러니 상대가 공감 능력이 없다며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공감 능력 부족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저 상대를 비난하기 위해서 ‘공감’이라는 힙한 용어를 덧씌워 몰아세우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서로 공감하는 우리 편’과 ‘공감할 수 없는 상대편’을 가르는 경계의 언어로 잘못 쓰이고 있다.

공감은 같은 생각을 가진 무리가 쌓는 확고한 감정적 성벽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잇는 가느다란 인지적 교량이다. ‘너는 도대체 왜 공감하지 못하느냐’라는 말이야말로 얼마나 ‘비공감적’인가.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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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연애-결혼-출산-육아의 자연적 연계를 당연하게 여기는 낭만적 사랑이 파탄나고 있다. 젊은 여성이 벌이고 있는 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라는 4B 운동이 대표적인 징후다. 이에 대해 국가는 저출산이라는 인구 문제로 접근하고,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 혐오로 대응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젠더 분리주의가 빠른 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낭만적 사랑이란 두 남녀가 서로 자아를 탐색하고 존중하고 숭배하면서 각자 분리된 자아를 합쳐 공통된 자아로 확충하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에서는 나의 자아를 확충시켜줄 상대방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상대방의 자아를 엄청나게 탐색하는데, 그게 바로 연애다. 

연애하는 동안 두 자아는 자유롭고 평등하다. 경제적 부, 정치적 권력, 사회적 지위, 몸과 나이와 종교, 인종과 국적 등 어떤 사회적 힘도 연인 사이에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연인은 자유롭고 평등하면서도 서로에게는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처럼 밀고 당기는 에로틱한 게임을 한다. 사회학 창건자의 한 명인 게오르크 지멜이 연애를 근대 사회성의 원형으로 본 이유다.

낭만적 사랑은 근대 사회성의 씨앗을 품고 있다. 연애하기 위해 각자 부모의 집으로부터 나와 따로 둘만의 집을 차린다. 이 집이 근대 초기의 가부장적 핵가족제도다. 남성의 경제적 지원능력과 여성의 정서적 지원능력이 결합한다. 노동시장이 남성에게만 열려 있기에 여성은 먹고살기 위해 남성의 경제적 능력에 의존한다. 남성은 노동시장에서 가족 임금을 벌기 위해 과잉 노동에 시달리다가 정서적 에너지가 고갈된다. 이를 채워줄 여성의 정서적 지원에 기댄다. 상대방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며 낭만적 사랑은 평생 애착 관계로 이상화된다. 실제로는 연애가 지녔던 근대 사회성의 씨앗이 젠더 불평등한 결혼생활로 인해 채 발아되지 못한다. 

할머니세대는 연애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부장에 이끌려 결혼했다.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독특하게 존중받고 살아갈 문화 역량을 키울 기회조차 없이 운명처럼 주어진 가부장제에 평생 귀속되어 살았다. 어머니세대는 낭만적 사랑을 통해 근대 사회성을 잠깐 체험하기는 했지만, 가부장적 핵가족으로 귀결되는 젠더 불평등한 결혼생활로 이를 잃어버렸다. 소통하지 못하는 남편 대신 평생 온갖 돌봄노동을 하느라 할머니의 삶과 비슷해졌다. 딸세대는 노동시장에 나가게 됨으로써 젠더 불평등한 낭만적 사랑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마땅한 현실적 대안이 없어 일과 사랑 모두에서 돌봄을 전담하다 좌절을 맛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할머니-어머니-딸로 반근대적인 삶이 이어지고 있다. 전혀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고 독자적인 존재로 존중받지도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 사회는 이러한 여성의 삶을 숭고하다고 찬양하고 있다. 그럴수록 여성은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 이야기처럼 치매에 걸려 집 밖을 떠돌거나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처럼 병원에 유폐되어 말라 죽어간다.

어떻게 해야 하나? 

현재 연애할 수 있는 사회구조적 환경을 만들려는 여러 정책이 고안되고 있다.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문화 역량은 중요하다. 낭만적 사랑에서 싹이 튼 근대 사회성을 급진화하고 전면화해야 한다. 연애는 자신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을 연인끼리 서로 입증하는 친밀성 공연이다. 이 공연을 제대로 해서 친밀성 너머의 다른 세계에 가서도 타자와 함께 공동의 사회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문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 역량을 발휘해서 사회 전체를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악한 젠더 습속을 바꾸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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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병원에서 맞았다. 병실에는 네 명의 환자와 간병인, 보호자들이 생활을 하고 있다. 앞자리의 아주머니는 중국서 왔는데 식당에서 일하다가 다리가 으깨졌다. 이 때문에 한국 온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일을 쉬어본다. 그 옆 침대에는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몸으로 들어와 얼굴에 겁이 가득한 할머니가 있다. 자식들은 잘 오지 못한다. “둘째 아들인데, 오늘 오려고 했는데 일이 밀려서 못 온대.” 전화가 올 때마다 간병인이 귀에 대고 소리를 친다. 남의 돌봄을 받는 것이 낯선 할머니는 간병인도 어려워한다. 

할머니의 맞은편 침대에 있는 분은 반대로 간호사도 아랫사람 부리듯 호령한다. 위아래 서열이 분명해서 요구사항이 있으면 간호사한테는 ‘지시’하고, 의사한테는 ‘부탁’한다. 돈의 힘이지 싶었는데, 식당 장사로 돈을 벌어 이제는 다달이 집세 받는 건물도 있는 ‘건물주’라 한다. 큰돈은 벌었으나 큰 병이 남았다. 병이 멈춰 세운 삶은 다들 마찬가지다. 

그러니 불행은 평등한가? 중국서 온 아주머니는 병원에 너무 늦게 와서 잘못하면 다리를 잃을 뻔했는데도, 기어코 조기 퇴원을 한다. “사정이 있어서”라고 부끄럽게 말하는 이에게 무슨 사정인지는 묻지 않았다.

이 병실은 사회의 축소판 같다. 담당 주치의는 모두 남자인데, 간호사는 모두 여자다. 의사는 아무개 선생님인데, 간호사는 누구라도 그냥 간호사님이고, 간병인, 청소노동자, 조리노동자는 그림자처럼 이름 없이 일한다. 환자들은 갈수록 의사보다 간호사, 간병인에게 몸과 마음을 더 의지한다. 

다 큰 어른 몸을 일으켜 앉히고, 세우고, 씻기고, 밥을 먹이는 일은 쉽지 않은 중노동이다. 사이사이에 청소노동자가 바닥을 닦고 나가는데, 눈 한 번 마주칠 틈도 없이 먼지처럼 사라진다. 그에겐 하루에 몇 개의 병실이 주어질까? 굽은 허리 사이로 보이는 파스는 그가 진 노동의 무게를 말해준다. 사회에서 매기는 노동의 가치는 그 무게와 반대다. 말의 가치도 그렇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신년 특집 토론회가 열렸다. 서울에 사는, 부유한, 고학력, 전문직, 나이 많은, 이름 있는 남자들이 둘러앉아 나랏일을 말하는데 꼭 남의 나라 말 같다. 

과연 우리의 삶을 제대로 알기나 할까. 기자협회 보도를 보니, 기자들이 취재할 때 의견이나 정보를 듣는 사람들도 저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인구 구성에서는 1%가 조금 넘는 교수, 의사, 변호사, 대표, 임원 등 전문가와 관리자가 의견 그룹에서는 70% 가까이 차지한다. 그런 지면에, 원고지 아홉 장의 몫이 주어졌다. 여기에 뭘 써야 할까. 중국에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뉴스가 들려오는데 그 속에 없는 사람들의 말이 생각났다.

환자들의 불안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법에 대해선 의사보다 잘 알던 그들. 병원 구석구석의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 역시 자기 자리에선 전문가다. 사스 때도, 메르스 때도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른 병원 노동자들이, 같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서로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 직장 평의회가 있다면 지금 같은 위기도 훨씬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일터와 삶터의 민주정치는 사회도 그만큼 더 안전하게 만든다. 

위기의 시대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도 요청한다. 자연의 다른 존재와 인간이 공동으로 구성하는 정치공동체와 그런 생명의 정치가 가능할까. 먼지의 말과 강물의 말에 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위기 속에서 먼지 같은 존재들이 주체로 귀환하는 것을 본다. 원래 민주주의는 그런 존재들이 만들어간 정치이기도 하다.

<채효정 |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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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새해 국회에서 청년기본법이 통과되었다. 법안 발의 1319일 만의 결실이다. 법안이 통과되던 날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청년도 있었다. 이런 날이 올까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법안 통과까지 수많은 청년 활동가들이 노력을 했다. 그들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실 청년기본법은 여야 간 이견이 없었던 비쟁점법안이었다. 그러나 보수야당의 발목 잡기에 법안 통과는 녹록지 않았다. 20대 국회 1호 법안을 청년기본법으로 발의하고도 청년의 삶을 외면하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지금 총선을 앞두고 청년과 ‘동반자’가 되겠다고 한다. 보수야당과 정치인들의 이런 행태들에 더 화가 난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까지는 약 1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사이 돈 때문에 만남을 피하고 끼니를 거르는 청년들도 있다. 취업 준비에 필요한 학원비와 주거·생활비에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청년까지. 청년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주위에 수많은 청년들이 학력, 지역, 젠더 등의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다. 다들 크게 모나지 않은 청년들인데 왜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그간 청년들은 자신들이 겪는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데 기성사회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학교를 떠난 순간 취업을 하지 못한 자는 우리 사회에서 말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심각한 문제는 소득불균형과 자산격차가 교육과 직업까지 대물림되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는 구조적 불평등이 임계점에 와 있고, 그 중심에 청년들이 놓여 있다. 월 200만원 미만 저소득 부모의 자녀 역시 저소득 확률이 절반 이상(56.4%)이고, 부모가 비정규직일 때 취업 자녀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될 확률은 3분의 1(37.1%)이나 된다. 

청년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적어도 공정한 출발이 필요하다. 절차적 공정성에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경쟁에 내몰린 청년들의 현실을 바꾸기 어렵다. 청년의 삶을 공감하고 이해해야, 청년정책도 변한다. 청년정책의 공백과 빈자리에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 서울시가 2015년부터 시작한 청년수당은 다양한 정책적 효과를 확인시켜준다. 진로를 정하지 못한 청년 10명 중 7명 이상(76.6%)은 목표를 찾거나 구직에 나섰고,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심리적 안정감도 찾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서울시는 지난 19일 국내 최초로 ‘청년 불평등 완화를 위한 범사회적 대화기구’를 발족했다. 100여명의 다양한 시민들이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해 토론하고 대안을 만들 예정이다. 10대부터 60대까지 학생, 회사원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서울만이 아니라 지역의 청년들도 눈에 띈다. 앞으로 2년간 공정·격차 해소, 정치·사회 참여, 분배·소득 재구성 각 3개 분야 전문가, 활동가 그리고 자문단이 시민들과 함께 공론의 장을 꾸려갈 예정이다.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첫 시도다. “우리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청소년 활동가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납작한 공정성’이 아닌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기대인 것 같다.

“소득은 굶주린 배를 채우지만, 자산은 삶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킨다”는 한 학자의 말은 정책이 어떻게 작동되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준다. 청년 불평등 해결의 출발점은 목소리가 박탈된 청년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 것이다. 사회가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고, 비로소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문제’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그동안 “분노해봤자 변하는 게 없다”는 청년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더 많은 청년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이제 서울에서 시작한 청년들의 ‘들려질 권리’가 타 지역과 중앙정부에까지 이어지면 좋겠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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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국내 개봉된 영화 <커런트 워>(전류전쟁)에서 토머스 에디슨을 연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말한다. “전류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는 거야.” 전기의 등장으로 백열전구와 공장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이로 인해 인류의 삶이 통째로 바뀌고 산업 생산성이 폭증할 걸 내다본 걸까. 요즘엔 전기자동차가 내연기관을 위협하는 지경이니 대단한 미래예측이다.

영화는 19세기 후반의 전기 도입 시기에 토머스 에디슨과 니콜라 테슬라라는 두 명의 걸출한 천재가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노력형 에디슨은 직류를 밀었고, 천재 테슬라는 교류를 주장했다. 요즘 건전지에 사용되는 직류는 전압을 올리고 내리기 힘든 속성 때문에 가정에서 사용하는 낮은 전압으로 송전해야 했다. 전압이 낮으면 멀리 못 가고 발전소를 곳곳에 분산 배치해야 하니 공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테슬라의 교류 방식은 변압이 쉽다. 교류를 초고압으로 멀리 송전하고 동네 근처에서 전압을 내려서 배전하면 발전소는 드문드문 있어도 된다. 결국 테슬라를 밀었던 웨스팅하우스가 승리했다.

전기가 본격적으로 인류 삶에 영향을 주기까지 왜 그리 오랜 세월이 필요했을까. 자석을 움직이면 전기가 생긴다는 발전의 원리를 19세기 전에는 몰랐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발견으로 발전이 가능해졌고, ‘커런트 워’로 이어졌다. 영화는 직류와 교류를 두고 발명자와 거대 자본이 뒤섞여 벌어지는 음모와 대립을 보여준다. 승자인 테슬라는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잊혀지지만, 패자인 에디슨은 위대한 발명가의 명성을 남겼으니 그래도 나은 형편이었다.

100년이 훌쩍 넘어서 테슬라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다시 등장한 것은 일론 머스크가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를 창업하면서였다. 머스크는 다가올 미래를 미리 보는 듯한 통찰력으로 사람들을 열광시킨다. 마치 컬트의 느낌이랄까. 20세기 말까지도 내연기관 자동차를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의 전기자동차가 살아생전에 출현하기는 힘들어 보였으니 정말 외계인 같은 사람이긴 하다. 역설적으로 머스크는 니콜라 테슬라의 교류가 아닌 토머스 에디슨의 직류를 중심으로 사업을 한다. 전기자동차뿐만 아니라 그가 만든 또 다른 사업체인 태양광 업체도 직류 발전 및 저장을 하니까. 직류 변압 기술의 발전으로 최근엔 고압 직류 송전도 확대되는 추세다.

전기와 자기의 상호 작용을 4개의 수학 방정식으로 완벽하게 기술해낸 사람은 19세기 중반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제임스 맥스웰이다. 아름답고 대칭적인 방식으로 전기와 자기가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 연관돼 있음을 표현한 맥스웰의 수학적 체계화는 결국 2차 산업혁명을 촉발했다. 자기장이 변하면 전기장이 생긴다는 방정식에서 발전기가 발명됐고, 전기장이 변하면 자기장이 생긴다는 방정식에서 모터가 발명됐다.

인류가 전기와 자기를 다룰 줄 알기까지는 난산의 과정이 있었다. 먼저 전기와 자기가 바뀌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이게 해결되지 않고는 발전소도 전기자동차도 출현할 수 없었다. 고대 그리스와 중세 유럽에는 무엇인가가 변화하면서 새로운 것이 출현한다는 발상을 표현하는 언어가 없었다. 2000년 동안 유럽 사유 체계의 핵심이었던 유클리드 기하는 철저하게 정적이다. 움직이지 않는 점과 선을 다룬다. ‘변화하는 무엇’을 다루는 언어가 아니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움직이지 않는 삼각형을 다루지 않는가.

결국 17세기에 아이작 뉴턴이라는 전무후무한 수준의 천재가 나타나 천체의 운동을 다루는 언어를 창안했다. ‘변화를 다루는 언어’, 미적분이 탄생한 것이다. 정적 세계관을 넘어 동적 세계관의 출현이다. 19세기 전자기학은 미적분을 사용해서 전기장의 변화와 자기장의 변화를 표현해냈고, 인류는 전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전기는 이제 21세기 새로운 모빌리티의 중심이 되면서 또 다른 혁신의 중심에 서 있다.

<박형주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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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산불이 언제 시작됐는지 기억하시나요? 지난해 9월입니다. 사그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이 산불은 시드니 등 대도시가 위치한 호주 동남부를 초토화하고 있습니다. 한국 면적 절반에 달하는 4만9000여㎢가 불탔고 사망자도 24명에 달하죠. 야생 동물의 피해도 막대합니다. 코알라 등 포유류를 비롯해 동물 10억 여마리가 화재로 죽었으리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산불 열기는 너무 맹렬해 자신의 날씨를 만들어내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산불은 점점 더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때문이죠. 되풀이되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 지난해 아마존 산불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대규모 산불은 바로 기후변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더 배출하면서 산불 위험도 증가합니다. 악순환의 연속이죠. 호주 산불은 돌이킬 수 없는 기후재앙이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캥거루섬 숲에서 7일(현지시간) 한 야생동물 구조 활동가가 산불 피해를 본 코알라를 구조하고 있다. 캥거루섬 _ EPA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나 자유한국당은 이 전 지구적 재앙에 대해 아무 말이 없습니다. 환경문제만 해도 4대강사업으로 인한 하천 오염, 40%에 달하는 석탄 중심 발전, 공장식 축산 등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습니다. 평화와 안보도 마찬가지죠. 모두가 북핵에 매달려 있을 때 한국 국방 예산이 50조원을 돌파했음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핵을 들고 밑에서는 F-35A 전투기를 날리는 게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는지 돌이켜보지 않죠. 기본적 인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의 폭언·체벌·강요 등에 시달리는 학생, 기본적 삶도 힘든 빈곤층, 그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성소수자, 법적·신체적 폭력에 지속적으로 고통받는 외국인 노동자, 모두 선거 때만 관심을 갖습니다.

이런 무관심에는 제도적 요인도 큽니다. 이들이 뛰어온 선거판에서는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민주당계 아니면 한국당계 정당 중 하나가 이기는 선거제도에서 다양한,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준연동형 비례제가 통과되면서 변화의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이 제도는 정당 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의 차이를 좁히려는 것이죠. 그래서 20대 총선에서 7.2% 정당득표율에도 불구하고 2% 의석만 차지한 정의당의 비극을 없애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소수정당의 의회 진출이 늘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녹색당, 청년당, 노동당, 동성애자당 등이 원내에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정당이 여러 목소리를 내면 기존 거대정당이 외면했던 이슈가 주목을 받을 겁니다. 법과 정책으로도 발전될 테죠. 당장은 아니더라도 독일처럼 녹색당이 정권을 잡는 날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호주 산불도, 동성 간 결혼도 심각하게 논의하게 될 겁니다. 민주체제 핵심은 권력 분화이니 양당체제를 끝내고 여러 당이 권력을 나누게 되면 그만큼 민주주의는 발전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발전은 쉽지 않겠죠. 기존 정치 지도자들의 퇴행적 행태가 사라지는 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당장 한국당은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을 꾸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를 창피한 줄도 모르고 당당히 주장하는 걸 보면 한심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한국당 황교안 대표처럼 자기 진영 통합을 외치는 것 또한 미래에의 비전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극단적 정당의 출현도 가능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유럽의 경우처럼 극단적 민족주의 정당도 생길 수 있습니다. 

유권자의 책임이 더 커지는 셈입니다. 다양한 정당은 그만큼 우리를 더 잘 대변하게 될 테니까요. 미움과 독선이 가득한 정당들이 득세한다면 우리 사회가 그렇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포용과 관용을 우선시하는 정당들이 득세하는 여의도, 그런 정당을 키워낼 우리 사회를 꿈꾸어 봅니다.

<남태현 |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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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안정과 발전의 밑거름이 된 ‘목요클럽’ 같은 대화모델을 살려 정당과 각계각층 대표들을 정기적으로 만나겠다.” 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가 지난 7일 인사청문회 모두발언에서 한 말이다.

목요클럽의 공식 명칭은 ‘수출과 생산 증대를 위한 협력기구’다. 1946년부터 23년 동안 스웨덴을 이끈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가 시작했다. 한국처럼 대기업 중심 수출 위주 경제인 스웨덴에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가 있었다. 에를란데르는 총리로서 각종 기념행사, 포럼, 회의 등에서 여러 단체의 대표를 만났지만 그때뿐이었다. 1년에 한두 차례 기업 총수와 노동조합 대표를 만나는 공식 모임은 대부분 성과 없이 끝났다. 단체마다 정부가 수용할 수 없는 정책을 요구할 때가 많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정권을 흔들어 좌초시키려고도 했다. 그렇게 첫 임기를 보낸 에를란데르는 1948년 선거에서 승리하자마자 열매 맺는 대화의 장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목요클럽을 조직했다.

2주에 한 번씩 모이는 목요클럽은 재무장관 주재로 경제인연합회, 농업인연합회, 도매인연합회, 무역협회, 중소기업연합회, 노동조합총연맹, 사무직노동조합총연맹 대표가 참석했다. 주요 경제정책과 현안을 두고 논의를 이어갔으며 참가자는 물론 총리 자신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0년대 중반, 정부와 대기업의 관계가 악화되자 목요클럽도 시들해졌다. 에를란데르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는 총리의 하프순드 별장으로 경제계 대표를 초대해 자신이 직접 주재하는 하프순드 회의를 시작했다. 에를란데르는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매일의 다짐을 일기로 남겼는데 “정치권력을 대표하는 사람은 경제권력을 가진 이들과 끊임없이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썼다.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이어진 하프순드 회의는 목요클럽보다 참가자의 폭이 넓었다. 개별 기업 대표, 금융인, 이익단체 대표, 각 부처의 고위 관리자, 노동조합 관계자 등을 회의 이후에도 수시로 만났다. 하프순드 별장에는 호수가 딸려 있는데 에를란데르는 손님과 함께 작은 보트에 올라 손수 노를 저었다. 수행원 없이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는 그 배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에를란데르는 일기에 “이번 상황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듣는 것은 매우 큰 도움이 되었고, 그들 역시 왜 우리가 그렇게 했는지 그 이유를 듣는 것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하프순드 회의를 다녀온 당시 경제인연합회 회장이 한 인터뷰에서 “무척 효과적이고 유쾌한 토론”이었다고 한 걸 보아 양쪽 모두가 만족한 모임이었던 모양이다. 에를란데르 일기장의 하프순드 일정에는 “이번 회담은 무척 잘 진행되었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목요클럽과 하프순드 회의는 사라졌지만 정부와 각 단체가 수시로 만나 협의하는 문화는 남았다. 전통적으로 기업가와 부유층을 대변하는 보수연합이 집권했는데도 어떻게 파업이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2013년 당시 스웨덴의 재무장관은 지난 1년 반 동안 노동조합을 350번 만났다고 답했다.

노동환경 개선과 증세를 주장하는 사민당 대표인 에를란데르가 총리직에 올랐을 때 재계는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했다. 에를란데르는 일기에 여러 차례 괴로움을 털어놓으며 “재계는 나를 민간 기업을 말살하려는 네로처럼 여긴다”고 썼다. 목요클럽과 하프순드를 거치며 에를란데르에 대한 평가는 합리적이고 말이 통하는 정치인으로 변했고 노사정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대화의 끈을 이어갔다.

처음 모임을 시작했을 때 “오페라와 샴페인 이야기를 하는 경제인들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던 에를란데르의 솔직한 고백이 “효과적이고 유쾌한 토론”으로 변하기까지, 23년이라는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고뇌와 노력이 녹아 있을지 정치의 무게를 되새긴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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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인에게 성공이란 무엇일까? 한때 국내 고급차의 대명사로 불리던 자동차 브랜드의 새 광고를 보았다. 시리즈의 제목은 ‘2020 성공에 관하여’. 동창회에서 승진을 자랑하고, 어린 아들과 고향 어머니 앞에서 호기를 부리며, 동료 앞에서 당당하게 퇴사하고, 여전한 젊음을 과시하는 내용이다. 대놓고 속물적인 광고였지만, 제법 마음이 흔들렸다.

가격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저렴한 차는 아니지만, 좀 무리하면 장만할 수 있다. 드디어 성공을 손에 쥘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동네에 자가용 가진 이를 손꼽던 시절의 추억과 도로를 가득 메운 고급 차의 행렬이라는 현실 사이의 파열에서 오는 착시다. 그러니 대단한 성공이라며 으스대긴 멋쩍다. 하긴 고급 세단을 모는 공무원을 단속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장관이나 회장 정도 되어야 타던 차다. 그러나 슈퍼카도 심심찮게 보는 요즘이다. 선망의 눈길을 던질 사람은 없다. ‘예전에는 꿈도 못 꾸던 차였는데, 고생 끝에 이제 나도…’라며 눈물을 잠깐 글썽일 수는 있겠지만.

그런데도 광고에 마음이 동했다. 그렇게 얻고 싶었던 성공을 ‘예상보다 싼값’에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공하지 못한 나로서는 마음이 자못 애틋했다.

각 광고는 듀스의 노래를 듣던 1993년의 10대, 퇴사하는 박차장을 바라보는 동료들, 친구의 승진 소식을 확인하는 동창, 부단한 관리로 총각 소리를 듣는 중년 남성 등의 등장인물을 통해 다양한 성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해당 광고 영상 캡처

조선 시대, 가마는 지체 높은 자만 탈 수 있었다. 특히 쌍가마는 주로 2품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에게만 허락되었다. 말 두 마리를 쓰는 가마다. 하지만 금지는 더 간절한 욕망을 불렀다. 조선 후기가 되자 국법을 어기고 쌍가마를 타겠다는 사람이 넘쳐났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이렇게 썼다. “쌍마교는 아름다운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여자가 출생하면 쌍마교 탈 것을 축원하니 어머니를 모시는 사람은 써야 하겠지만 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럴 것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부녀자가 꼭 소원한다면 마땅히 남의 쌍마교를 빌려 한 역참만 가서 치우면 될 것이다. 하루만 타더라도 태어날 때의 축원을 이룬 셈이니.”

우리 선조도 그러했으니 광고를 보고 가슴 한편이 저릿하다며 자책할 것은 없다. 평생 가마 한번 타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이를 누가 함부로 ‘속물’이라며 욕할 수 있을까. 아무리 변변찮은 살림이라도 가마 타고 시집가고 말 타고 장가가던 오랜 풍습이다. 이도저도 못했다면 죽어서 상여라도 탔다. 물론 상여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조상이 부지기수였겠지만, 간절한 소망마저 비웃을 수는 없다. 단선적 상향 욕망의 맹목적 단단함은 팍팍한 삶의 고통 속에서 응결된 것이다.

반상이 철폐되었다. 이제 말 백 필이 끄는 가마도 안될 것이 없다. 단, 그럴 능력이 있다면 말이다. 계급이 사라진 세상은 역설적으로 박탈감을 부추겼다. 모두가 상향 욕망에 삶 전체를 내맡기며 전력 질주했다. 공식적 계급의 진공 속에 새로운 상징이 대신 들어섰다. 빙글빙글 회전의자 앉으면 ‘사장님’이고, 대출이라도 받아 강남에 등기 치면 상류층이다. 돈으로 족보도 사고, 벼슬도 사고, 몰래몰래 쌍가마도 타던 조상의 후손이다. 이제 맘 놓고 실컷 하라는데, 못하는 놈만 바보다.

하지만 갑오경장 후 벌써 126년이 지났다. 중층 사회에서 진화한 상향 본능이 쉬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때가 지난 상징은 결국 힘을 잃는다. 국법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조선 후기의 가마 열풍은 개화와 더불어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쌍가마를 소원하는 이가 없듯이 고급 차와 강남 아파트라는 낡은 상징도 조만간 위세가 떨어질 것이다. 

사실 ‘2020 성공에 관하여’는 철지난 성공에 관한 이야기다. 유통기한이 다한 상징을 마지막으로 써먹은 것일까? 아무래도 좋다. 하나의 성공을 향해 전국민 레이스를 펼치던 단선 상향의 시대가 지났다. 2020년 한국인의 성공 기준은 더 다양하고 건강해야 한다. 그래도 영 아쉽다면 다산의 조언대로 하루만 빌려 타는 것은 어떨지.

<박한선 |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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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법이 통과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진보와 보수가 다시 격렬하게 다투기 시작했다. 진보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움켜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왔던 검찰을 시민사회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고 환영한다. 검찰과 공수처가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제도의 틀을 마련했다며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감격한다. 반면 보수는 청와대와 정부·여당이 개혁을 빌미로 시민사회의 통제 아래 있는 검찰을 권력의 도구로 전락시킬 거라며 비판한다. 검찰과 경찰이 범죄를 인지한 단계부터 공수처에 보고해야 할 의무를 규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이상인 견제와 균형을 무너뜨렸다고 비판한다.

언뜻 진보와 보수가 다른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둘 다 검찰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검찰은 보편적 연대를 실현하는 시민사회의 제도다. ‘알지 못하는 타자’까지도 포괄할 수 있게 규칙에 따라 운용해야 한다. ‘서로 잘 아는 우리’만 해당하도록 자의적으로 운용하면 특수한 연대에 복무하는 비시민사회 제도로 추락한다. 진보와 보수는 검찰에 대한 이러한 민주주의 코드를 공유하는데도 왜 공수처법을 두고 죽어라 싸우는 것일까? 그건 경험칙상 검찰이 권력자가 입맛에 따라 자의적으로 운용해온 권력의 도구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검찰로 대표되는 제도에 대한 불신은 매우 높다. 검찰이 보편적 연대를 실현하는 시민사회 제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다. 이제라도 이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맞다. 이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제도 문제다. 몇몇 집단이 검찰을 장악해서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민주주의적으로 조절해야 한다는 주장에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보편적 연대를 실현하는 시민사회의 제도인 검찰이 가장 비민주적인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언제까지 용납할 수 있겠는가?

제도개혁은 필요하다. 부족한 점이 드러나면 거듭 다듬어야 한다. 하지만 제도가 모든 것을 다 이루어줄 수는 없다. 제도도 결국 사람이 운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이를 악용해서 그 취지와 어긋나는 일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 제도를 민주주의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의 문화 역량이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악한 습속이 일상을 지배하면 개인이 아무리 문화 역량을 활용해서 제도를 민주주의적으로 운용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검찰이 행사하는 권력의 정당성은 보편적 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기본 전제에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공부를 잘해 고시에 붙어 엘리트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서 권력 행사의 정당성이 나온다. 그런데 이 고시라는 게 무엇인가? 최근 9개월 공부를 통해 사법시험에 붙었다며 공부법을 알려주는 유튜브가 등장했다. 이에 따르면 한 변호사는 중·고교는 물론 대학교 때까지도 게임에 빠져 살다가 단 9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26세 어린 나이에 사법시험에 붙었다고 한다.

9개월 집중해서 공부하면 붙는 시험을 통해 권력집단의 일원으로 상승할 수 있는 ‘고시 사회’.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악한 습속이 공정한 경쟁으로 찬양받는다. 고시 합격자들이 진보와 보수 가리지 않고 지배 엘리트가 되어 우리 사회를 과도하게 좌지우지한다. 이들은 정해진 답 빨리 찾기에는 달인인데,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에는 젬병이다. 다른 문제를 제기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하나 마나 한 학위를 따거나 남의 연구를 통째로 베끼며 빈약한 권력의 정당성을 치장하느라 바쁘다.

형식상 사법시험은 폐지되었다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시험용 공부라는 악한 습속에 빠져 있다. 공부를 많이 했어도 시험에 붙지 못하면 쓸데없는 짓이 되어버린다. 공부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니 기출문제 풀이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단기 속성으로 합격해서 기득권으로 진입하는 공부가 최고다. 이처럼 공부를 출세의 수단으로 보는 도구주의적 관점이 계속 지배하는 한 좋은 제도를 만들어봐야 소용없다. 공정 운운하며 시험결과를 최우선으로 두는 고시 인간이 제도를 민주주의적으로 운용할 문화 역량을 갖췄을 리 없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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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약간의 오해를 담은 한 기사에서 비롯되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이미 같은 서울 서대문구 가좌동에 여러 채의 청년주택을 마련하여 공급해온 터였다. 서울, 부천, 전주에 걸쳐 총 12채의 주택을 마련하였고, 154명의 조합원에게 안정된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연희동에 있는 빈집을 재건축하면 13번째 주택이 생기고 수십명의 청년에게 고시원 같은 열악한 거처를 벗어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한 언론에 기사가 하나 실렸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서 성소수자도 배제되지 않는 주택이 성소수자를 위한 주택으로 소개되었다. 그렇더라도 무엇이 문제인가? 이미 옆 동네 망원동에는 ‘무지개집’ 사례도 있다. 하지만 ‘성소수자가 입주한다’는 보도를 계기로 인근 주민들이 구청과 의회에 집단민원을 넣었다. “성소수자를 위해 분양한다는 그 집은 50m도 안되는 거리에 초등학교가 있는 어린이 보호구역이다” “동성애가 합법화되지 않은 나라에서 남남 커플이 껴안고 돌아다니는 걸 뭐라고 교육할 것이냐” “초등학교 옆이든 아니든 퀴어하우스 자체를 반대한다”며 차별과 혐오가 난무했다. 

적법하게 지어지는 주택의 건축을 막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데 분쟁을 해소하고 오기 전에는 허가를 할 수 없다고 뒷짐을 진다. 건축허가의 권한은 구청에 있다. 연희동의 주택사업은 서울시 공공사업의 일환이다. 서울시가 빈집을 구입하고 그 부지를 사회주택 사업자에게 빌려주는 토지임대부 사업이다. 서울시의 사업이니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에 나서주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구청의 협조가 없으면 뾰족한 수가 없다. 오히려 사업을 추진한 담당자는 왜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어 곤혹스럽게 하냐는 심정일지도 모른다.

반대 주민들에게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자고 청했지만 할 말이 없다며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간신히 통화를 하여 청년들을 위한 주택이라고 설명을 하니, 청년주택도 허용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공공주택을 반대하는 흔한 레퍼토리이다. 청년이 많아지면 동네가 시끄러워진다고 난리이다. “청년들이 내 아이를 폭행하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냐?”며 공공주택 사업자를 몰아붙이는 어처구니없는 생떼가 통하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성동구에 건설될 예정이었던 청년기숙사가 이런 민원에 막혀 백지화되었다. 성북구에서는 집값 떨어진다고 호들갑을 떨어 대학생기숙사의 건설을 막아서고 있고, 양천구, 성남시, 부산시 등 여러 지역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반대 민원이 일어 행복주택의 건설이 난항을 거듭하거나 취소되고 있다. 구의원, 시의원들이 발 벗고 나서 공공주택 반대에 동참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억지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소송을 걸 수도 있다. 실제로 영리 목적의 개발사업을 할 때는 법원판결을 받아 사업 지체에 따른 손해배상까지 받아 내기도 한다. 하지만 사업비용을 최대한 줄여 질 좋은 저렴한 주택을 공급해야 하는 처지의 비영리 사회주택 사업자가 빠듯한 예산을 쪼개어 소송을 진행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행정의 적극적인 문제해결 의지가 없으면 사회주택이나 공공주택 사업은 대부분 지체되고 중단될 수밖에 없다.

공공주택과 사회주택에 대한 억지스러운 반대의 이유는, 얘기를 듣다 보면, 결국 집값 하락에 대한 걱정이다. 그런데 실제 사례를 살펴보면, 공공주택이나 사회주택이 들어서면 주거환경이 좋아져서 오히려 주변 집값이 오르는 경우도 많다. 주택정책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엄청나게 많은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지 않는 한 주변 주택가격이 떨어지지 않는다. 집값 하락이 걱정스러워 공공주택이나 사회주택을 반대하는 건 근본적으로 사회통합에 반하는 집단 이기주의일 뿐만 아니라 기우이거나 허구에 가까운 것이고 사실상 자기 이익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희동에서 어처구니없는 반대에 직면한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은 계속해서 주민들을 설득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얼마 전 구청에 건축허가신청서를 접수하였다. 부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결과가 나오기를 희망한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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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인내하고, 적응하는 직업”으로 지칭되는 일이 콜센터 상담 업무다. 최근 언론에서 보도된 화장실 이용도 허락을 받거나 순번제 운영은 충격적이다. 공공부문 콜센터에서도 휴게시간조차 보장하지 않는 곳이 많다. 콜센터 상담사 거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이기에 고용불안과 노동조건은 매우 열악하다. 감정노동이나 괴롭힘 문제는 지난 수년 동안 사회적 문제로 제기된 바 있다. 

콜센터 법률 위반은 민간위탁으로 운영되는 곳에서 주로 확인된다. 어떤 곳은 연차휴가조차 감점제도를 통해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매월 마지막 주에 연차휴가를 신청하되, 변동은 2회까지만 가능하다. 3회부터는 횟수별로 성과평가에 감점을 받는다. 근로기준법상 보장받아야 할 권리조차 침해받고 있는 것이다. 지자체 한 곳에서는 상담사 콜 수와 통화시간에 비례하여 휴게시간을 부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비스 레벨 제도는 쉴 틈조차 없이 일하도록 하는 ‘인간의 상품화’를 확인시켜 준다.

고객만족과 서비스 향상을 위해 운영 중인 인센티브와 평가방식은 노동통제의 대표적 수단이다. 상담사 콜수, 통화시간, 1차 처리율, 상담이력 충실도, 업무 테스트 등이 실시간 혹은 주기적으로 모니터링된다. 고객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곳에서는 매월 상담사 업무 테스트가 진행되고 있다. 나머지 공부라고 하여 ‘틀린 문제 두 번 써오기’와 같은 숙제도 있었다. 공공부문 콜센터에서조차 ‘고객만족’과 ‘응대율’이 평가의 전부로 인식되고 있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과도한 비인격적 운영방식은 비판받아야 한다. 특히 콜센터 사례관리 및 평가과정(QA) 형태인 ‘콜 코칭’ 과정에서 인격모독이 자행된다. 예를 들면 특정 민원 사례를 지목하고 동료 비판자에게는 포상을 주고, 해당 상담사에게는 1주일간 교육을 시킨다. 상담사가 코칭룸(유리문)에 불려 들어가면 “너는 무슨 생각으로 출근을 하냐?”  등 인격모독을 감내해야 한다. 

지난 2년 새 공공기관 전체 민원 발생(VOC) 건수는 143만건, 감정노동 발생건수는 3649건 정도다. 콜센터 업무 특성상 악성·강성 민원은 상담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문제다. 2018년 10월부터 감정노동보호 법률이 시행 중이지만 정부 각 부처 및 공공기관에서조차 실효성 있는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감정노동자 보호 홍보물 게시와 음성·안내방송 등은 큰 예산이 드는 것도 아닌데, 공공기관에서조차 도입률은 23.5%에 불과하다. 

서울시는 120다산콜재단 설립 이후 고용의 질 개선은 물론 감정노동 해소 방안도 실행하고 있다. 상담사의 감정노동 해소를 위해 적정 휴게시간을 보장하고, 건강 프로그램 등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무조건적인 친절교육이 아닌 현장 업무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이용자로부터 성희롱이나 폭언 등이 진행될 경우 상담사에게 ‘끊을 권리’를 부여했고, 악성 민원인은 서울시 차원에서 법률 대응을 하고 있다. 서울시의 정책실행 이후 악성민원이 대폭 감소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그 답을 준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공공기관과 지자체들에서는 콜센터를 민간위탁으로 운영하려는 곳이 많다. 외부 민간위탁 운영이 전문성과 효율성이 높아 선택한다고 하지만, 하루에 130콜을 받도록 하면서까지 노동자들을 쥐어짜내는 방식이 과연 맞는 선택인지 모르겠다. 노동자 착취를 통한 고객만족이 과연 올바른 공공행정인지 반문해야 한다. 심지어 정부의 공공부문 민간위탁 가이드라인을 비웃기라도 하듯, 새롭게 시작하는 콜센터 업무를 민간위탁으로 운영하는 곳도 있다.

어느 순간 효율성이 공공행정에서 좋은 모델로 인식된 지 오래다. 현재처럼 1년 365일, 24시간 콜센터 운영은 정말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에서 콜센터 상담사에게 전화기를 내려놓고 숨 쉴 틈을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이제 공공행정 민원서비스는 효율성이 아닌, 공공성과 전문성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프랑스 파리나 독일 베를린처럼 전문공공행정 서비스를 추구하는 콜센터 사례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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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재미없이 봤던 영화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평결(The Verdict)>이라는 영화입니다. 평결은 배심원의 협의 과정과 그 결론을 말합니다. 사건 내용은 전신마취를 하려면 식후 9시간은 지나야 하는데 식후 1시간 만에 마취를 해서 구토를 일으키고 식도가 막혀 호흡 곤란으로 코마 상태가 된 환자를 대리하는 변호사 이야기였습니다. 환자는 셋째 아이를 낳다가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보스턴에서 대교구가 운영하는 병원의 유명한 의사 두 명이 연루된 사건인데, 흔한 영화의 전개 과정으로 원고 변호사는 여러모로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반대로 피고 병원 측은 변론 준비를 위한 회의에 10명 이상의 변호사가 참석하고 증인신문 준비를 위해 실제 법정 상황까지 재연하는 열성을 보입니다. 뻔한 구도에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는 뻔한 줄거리라 영화는 지루했습니다. 전개 과정도 지금 우리가 만드는 영화에 비하면 수준 미달이었습니다. 나이 든 폴 뉴먼의 깊은 눈을 바라보는 재미 정도로 졸음을 쫓았습니다. 마지막 반전이라는 것이 4년 전 수술 당시 의료기록을 의사 지시로 조작했다는 간호사를 찾아내 그 증언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1시간 전이라고 기록했는데 의사가 숫자 ‘1’을 ‘9’로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저 같은 법률가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증인이 사전 신청 없이 법정에서 즉흥적으로 채택됩니다. 그리고 4년 전 상황을 진술합니다. 이때 증인이 나중에 문제될 수 있을 것 같아 처음에 ‘1’자로 적어놓은 기록을 사본해 두었다고 하면서 제출하려고 합니다. 원고 대리인은 판세를 뒤집는 진술을 받아내고 안도합니다. 하지만 피고 대리인은 능숙하게 대처합니다. 사전에 반대신문을 준비할 수 없었다, 4년이 흐른 오래전 이야기다, 증인이 소지한 ‘1’자가 적힌 기록은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라고 주장하며 사본을 증거 채택하지 말 것과 증언의 기록 삭제를 신청합니다. 재판장은 피고 대리인의 신청을 받아들입니다. 사실 이 영화 내내 재판장과 피고 변호사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처럼 뉘앙스를 깔았습니다. 재판장은 사본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고, 배심원들에게 증인의 증언은 평결의 근거로 삼지 말도록 설명합니다. 

결론은 어땠을까요? 재판장이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영화의 결말은 원고 승소였습니다. 아무리 재판장이 사본은 없던 걸로 쳐라, 들은 게 있어도 안 들은 걸로 쳐라, 이렇게 요구한다 한들 한번 들은 기억이 어디 가나요? 인식의 조작은 여간해선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결론에 영향을 미친 증거법칙 위반은 항소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배심이 내린 결론은 잘 바꾸지 않습니다. 

제게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 영화에서 배심원을 묘사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배심원은 그저 평범한, 대사 한마디 없는 벽에 걸린 그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시민 12명이 셋째 아이를 낳다가 뇌사 상태에 빠진 여인을 위한, 그리고 저명한 의사 두 명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평결을 합니다. 평결을 하던 딱 그 순간에만 배심원이 누구였는지 제대로 얼굴이 나오고 목소리가 나옵니다. 삶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주인공은 바로 이름 없이 평결을 한 배심원, 말하자면 평범한 시민이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배심재판을 채택하기 전에 제작되고 상영된 영화였습니다.

우리 형사 사건에 배심재판이 가능합니다. 2008년 1월1일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으니까 제법 시간이 흘렀고, 사건 수가 점점 쌓여갑니다. 그런데 갈수록 국민참여재판이 줄고 있다고 합니다. 사법권은 주권자인 국민의 것입니다. 배심재판은 현명한 국민이 선택한 괜찮은 제도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민참여재판은 국민이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재판이기 때문입니다. 

동지섣달 긴 밤에 지루한 영화 한 편, 이 글로 몇 분 만에 감상한 걸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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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개인 휴가차 가족과 아이슬란드 여행을 다녀왔다. ‘골든 서클’ 일일투어를 도와주는 현지 남성이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곧바로 이렇게 응답했다. “제가 며칠 전 BBC 뉴스에서 여성 K팝 가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구하라였다. 자신은 K팝을 들어 본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기사를 보니 이 여성 가수가 스캔들에 휘말리고 사건을 공론화하고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많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분에게 또 다른 K팝 여성 가수인 설리의 안타까운 죽음 사건도 설명하면서 한국에서 여성에 대한 악성댓글과 불법 동영상 촬영이 얼마나 만연해 있고, 가해자 처벌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알려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BBC 기사를 찾아 읽어보았다. 제목은 “구하라와 남한의 불법촬영 희생자들의 트라우마”였다. 기사는 먼저 가명으로 처리된 은주라는 여성이 당한 불법촬영 사건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가해자는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 남성 동료였다. 그는 여성 탈의실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불법으로 카메라를 설치한 후 옷을 갈아입는 여성들을 지속적으로 촬영했다. 이 남성은 나중에 한 여성의 치마 속을 촬영하다 경찰에 체포됐고, 그의 휴대폰에서 불법으로 촬영된 여성 피해자들의 영상이 나왔다. 은주씨도 그들 피해자 중 하나였다. 은주씨 부모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사건이 있고 난 후 딸은 악몽에 시달렸고,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었다. 그럼에도 직장 주변에서 누구도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은주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검사는 불법촬영 범행을 한 가해 남성에게 2년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BBC 기사는 구하라가 극단적 선택을 한 계기가 단지 전 남자친구인 최종범의 성관계 불법촬영 및 유출 협박과 폭행 때문만은 아님을 강조한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실질적인 원인은 법의 정의에 호소했던 마지막 희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오모 부장판사가 재판과정에서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은 가부장적인 태도, 피해여성이 느끼는 고통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판결문, 가해자가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결과, 그 상황을 가십성으로 보도하는 언론과 대중들의 악성댓글이 아마도 구하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더 큰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BBC 뉴스의 핵심 논조이다. 한국 언론들은 이러한 해외 언론의 문제의식에 비해 얼마나 이 사건을 진지하게 다루었는지 의문이다. 

BBC 기사는 은주씨 부모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라는 문장을 기사 중간의 소제목으로 달았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아마도 지금도 여성을 불법촬영하거나, 불법촬영된 영상을 보고 있는 남성들일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불법촬영 피해 여성들의 고통을 알고도 모른 체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동료들일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사건의 진실보다는 가십성 뒷이야기에 더 관심을 갖는 기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마도 소속된 연예인이 불법촬영 피해를 입어도 별일 아닌 걸로 무마하려는 기획사 대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성 상대 불법촬영과 성희롱 성폭력 사건에 대해 솜방망이 판결을 내린 남성 가부장 의식에 사로잡힌 대한민국 사법부일 수도 있다.

지난 2년간 한국에서 불법촬영 신고가 1만1200건에 달하지만 대부분 판결은 무죄 아니면 벌금형이다. 실형을 사는 경우는 극소수에 그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8년에 조사한 ‘불법촬영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뷰 대상자 2000여명 중 23%가 자살을 고려했고, 16%가 자살 계획을 세웠고, 이 중 23명의 여성이 실제로 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여전히 불법촬영 처벌에 대한 사법부의 태도는 안이하다. 한국과 달리 미국 메릴랜드주 법원은 수영장 파티를 열고 미성년자를 불러 탈의실을 불법촬영한 50대 남성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여성들에게 더 고통스러운 것은 2차 피해를 방치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직장, 언론, 연예계, 학계, 사법부에서 행해지는 잔인한 2차 가해. 과연 누가 구하라를 죽였을까?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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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런데 그 대한민국의 주인이 국민인지 실감할 수 없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현실은 국민이 권력의 주인이란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첫 일정으로 인천공항을 방문해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했다. 그는 “불법파견 판정 시 즉시 직접고용 제도화”를 약속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협력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운송설비를 점검하다 사고로 숨졌다. 2018년 산업재해 사망자는 214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했다. 오늘도 살기 위해 출근한 노동자 중 6명이 퇴근하지 못하고 장례식장으로 실려 간다. 오늘도 무사히! 그것이 지금 노동자들의 소망이다.

촛불시민의 힘으로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렸다.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를 촛불정부라고 불렀다. 이후 4·3항쟁, 5·18민주화운동 추도식 등에서 대통령의 아름다운 추도사, 각본 없이 진행된 그의 행보는 많은 국민을 감동시켰다. 대통령과 촛불정부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크고 높았기에 실망도 깊은 것일까. 빈부양극화가 이 정부 들어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고, 비정규직 노동자, 산업재해 문제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이 정부만을 탓하는 것이라면 너무 야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에 이르면 사람들의 말마따나 그 기원을 대한민국이 아니라 ‘헬조선’부터 따져보라는 말인가. 어느덧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한 지도 절반을 지나 반환점을 돌고 있다.

고백하건대 이른바 ‘수구적폐’라고 욕먹는 정당보다 그들에게 ‘종북좌파’라고 비방당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체감상의 고통은 더욱 깊고 컸다. 저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차라리 맘껏 비판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에 이어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국민의 시대, 국민이 중심’인 문재인 정부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소망하는 개혁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인데 나만 괜한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가 싶다. 얼마 전 어느 분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읽은 글이다. 동네 복덕방 사장이 ‘그때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라고 했는데 왜 집을 구입하지 않았느냐’면서 “아이고, 진짜 바보들이시네. 2년 전이랑 비교해서 지금 40%가 올랐어요. 민주당 정부에서는 무조건 올라요. 무조건 사 놔야 돼.”

20세기 전반기에 인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현대의 대의민주주의는 자본에 잠식당해 권력의 주인들을 정치상품(정당)의 소비자로 만들었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겉보기엔 다양한 상품을 진열해놓고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진열된 상품들은 모두 자본을 등에 업은 독점적인 카르텔에서 생산된다. 비록 다른 상표명과 깃발을 들고 있지만, 새로운 정치혁신, 대안정당의 출현을 가로막을 때만큼은 모두 한패다.

주권재민이란 민주주의의 본질에도 불구하고, 투표기계로서의 역할밖에 할 수 없는 권력의 주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여당 대신 야당에 투표하거나 투표를 포기하는 일밖에 없다. 그러나 주권자의 포기는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의 승리를 의미할 뿐이다. 당연하게도 이 같은 일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자’, 바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촛불 이후의 우리가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 자’가 될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정부’가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노력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힘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세상과 자연, 우주에 대해 함께 기뻐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여길 때 생겨난다. 지난 토요일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김용균 1주기 촛불집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 김미숙씨는 눈물을 흘리며 “너를 비록 살릴 순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삶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 싶단다”라고 말했다. 우리, 맞잡은 서로의 그 손을 놓지 말자, 제발!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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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자유!”를 외친 이들이 있었다. 1886년 5월1일 미국 시카고 헤이마켓광장이었다. 노동절, ‘메이데이’의 기원이다. 

그간 130년이 훌쩍 넘었지만 8시간 노동은 아직 꿈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1970년 11월13일, 청년 전태일이 분신하며 외친 말이다. 1인당 국민소득 약 250달러 시절이었다. 그런데 1인당 3만달러가 넘는 지금도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친다.

실은 근기법 준수도 힘겨운데 되레 퇴보 일로다. 세계적 장시간 노동국의 오명을 벗고자 2004년부터 점진적으로 주 5일제, 하루 8시간, 주 40시간제를 실시하던 중이다. ‘이명박근혜’ 때는 ‘주 68시간제’가 상식처럼 통했다. 촛불혁명 뒤 현 정부조차 ‘주 40시간제’를 ‘주 52시간제’라 부르는 프레임에 빠졌다. 마침내 2020년 1월부터 시행할 ‘300인 미만 기업 주 40시간제’도 유예하려 한다. 설상가상, 초과근로 수당을 주지 않으려고 노동시간 정산기간을 (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려 한다. 소위 ‘탄력근로제’다. 6개월간 노동자에게 일을 들쑥날쑥 시켜놓고 주 평균 40시간 이내면 50% 초과수당을 주지 않아도 된다? 경총이나 전경련은 당초 그 정산기간을 아예 12개월로 하려 했다. 1년 내내 초과수당 없이 일 시킨다는 창조(?)경제! 18세기식 발상! 노조가 기겁을 하니, 못 이긴 척 6개월로 타협하려 한다. 문제는 ‘촛불정부’도 이에 동조하는 점. ‘사람답게 살자’던 촛불민심은 어디에 묻히고 자본의 이윤 욕망만 넘칠까?

누차 강조하지만, 주 52시간이 아니라 주 40시간이 기준이다! 노동자가 동의하면 ‘예외’로 최대 12시간 더 가능하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 기준. ‘8시간 노동’만으로도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하자는 게 촛불민심이다. 노동시간이 줄어도 살림살이가 나아지려면, 부동산 투기와 물가를 확실히 잡고, 보육, 교육, 의료, 교통, 노후 등 삶의 기본을 공공성으로 풀면 된다. 이런 게 그나마 ‘노동존중 개혁’이다.

그러나 고대 노예제와 중세 봉건제 이후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새 세상을 열며 승승장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한국과 같은 반주변부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존중 개혁이 가능한가? 

이미 노동존중 개혁을 했던 유럽 복지국가조차 신자유주의 물결과 글로벌 경쟁 속에 노동, 민주, 진보 진영의 목소리는 위축되고 시스템 퇴행이 계속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이는 자본과 권력의 문제다. 하지만 과연 이런 퇴행이 노동의 협조 없이 가능한가?

“공장노동자 1세대는 고용주로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교육받았다. 2세대는 10시간 노동 쟁취운동을 펼치면서 노동시간단축위원회를 결성했다. 3세대는 초과 노동수당을 위해 파업했다. 그들은 고용주가 제시한 범위를 수용했고 그 안에서 저항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시간이 돈’이라는 교훈을 너무나 잘 깨우쳤다.” 1967년, 영국 노동사학자 E P 톰슨의 <시간, 노동규율, 산업 자본주의>란 글에 나온다. 그나마 1세대는 노동(시간) “자체에 반해” 저항했으나, 갈수록 노동(규율)을 내면화한 나머지 드디어 노동시간에 “관해” (시간을 줄이거나 임금을 높이기 위해) 싸우게 됐다는 얘기다. 요컨대 이제 자본의 지배력이 깊이 뿌리 내린 상태에서 (즉 자본종속 노동을 당연시한 상태에서) 단지 그 조건을 둘러싼 투쟁만 하게 됐다는 통찰이다. 그 뒤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니 오히려 오늘날 한국이야말로 이 지적이 잘 맞는다. 톰슨에 이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볼 수 있다. 즉 4세대 노동자 다수는 임금이 줄어들까봐 노동시간 단축을 두려워하고 외려 더 많은 노동(시간)을 요구할 정도로 되고 말았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본을 넘어설 생각은커녕,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조차 포기하고, 더 많은 노동(시간, 일거리, 정규직)을 원하는 게 오늘날 상당수 노동자의 욕망 아닌가. 자본은 바로 이 노동자의 욕망과 정서를 맘껏 활용한다.

그렇다. 2000만(여·남) 노동자와 3000만 가족들은 노동에 살고 노동에 지친다. 아니, (노동력 준비과정인) 학교에 이어 노동자 삶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좀비’ 같은 상품이다. 이를 강요하는 노동체제 속에, 또 이를 내면화한 일중독 속에, 과연 ‘인간다운 삶’의 출구가 있는가? 이 딜레마를 근원적으로 넘어서자면, 권력에 대해 국민주권으로 맞서듯 자본으로부터 해방을 위해 시간주권으로 연대해야 한다. 시간은 돈이 아니라 삶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아픔에 공감하되, 자본과 남성의 지배를 동시에 넘지 않으면 평생 개고생이다. 돈의 연대가 아닌 삶의 연대야말로 참된 출구다!

<강수돌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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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게 진보는 아재요, 보수는 노땅이다. 둘 다 청년을 가르치려 드는데 ‘진보아재’의 설교는 거짓 위선으로 비치고 ‘보수노땅’의 훈시는 아예 헛소리로 들린다. 진보아재가 잘하는 거라곤 뒤늦게 헛웃음 나오게 하는 말장난 개그뿐이요, 보수노땅이 내세울 거라곤 남들 다 먹는 나이밖에 없다. 진보아재는 정치민주화한답시고 일상의 악습에 젖어들었고, 보수노땅은 경제성장한답시고 인간의 염치를 놓아버렸다. 자기들은 다르다고 항변하는데 서로 욕하고 싸우면서 닮아갔다. 작은 일상도 도덕으로 재단하는 진보아재가 큰 염치를 잃어가니 분노가 치밀고, 대놓고 아랫사람 깔아뭉개는 염치없는 보수노땅이 일상의 악습을 바꾸자고 하니 꼴불견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현실 권력을 두고 다투는데 마치 누가 먼저 소멸하나 내기하는 것 같다.

진보아재는 자칭 민주주의자다. 부당한 위계 없는 소통문화 만든답시고 틈만 나면 아재개그를 날린다. 비가 한 시간 오면? “추적 60분!”, 울다가 그친 사람은? “아까운 사람!”. 듣는 순간 ‘이게 뭐지?’ 어벙벙해지는데 집에 가서 누우면 뒤늦게 킬킬대느라 잠을 설치게 된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얻은 소득을 주로 해서 국민을 성장시키는 정책은? “소주성!” 최저임금 ‘쬐끔’ 올리면 국민이 성장한다는 아재개그를 날려 순간 ‘벙찌게’ 만들더니 지금까지도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헛웃음을 온 국민에게 안겨주었다.

보수노땅은 자칭 성장주의자다. 입만 열면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인정신으로 이만큼 성장했다고 떠벌리는데 마지막에 가면 결국 “우리 때가 좋았지”로 끝맺는다. 군사작전하듯 주어진 목표를 최대한 빨리 달성하기 위해 초인적인 과잉 노동을 하다 보니 변화하는 세상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염치도 잃어버렸다. 온갖 갑질을 휘둘러대는데 부당하다고 항의하면 “다 원래부터 그래, 어쩔래?” 하며 배째라 나온다.

현재 진보아재는 철지난 수출주도성장을 다시 꺼내들고, 보수노땅은 거리를 점거하고 삭발 단식으로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다. 경제성장에 젬병인 진보아재와 권위에 찌든 보수노땅이 재벌총수와 민주투사 코스프레를 펼치고 있으니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좋게 봐주자면 상대방의 가치를 수용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 참 가상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잘하는 것부터 챙기는 게 먼저다. 진보아재는 정치민주화를 이루는 데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왔다. 그런데 현재 적지 않은 청년이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능멸하고 있다. 일부 극우 청년의 일탈이라며 무시하지 말고 민주주의가 왜 가치 있는 것인지 ‘진정성 있게’ 설득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면 삶이 얼마나 좋아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보수노땅은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현재 적지 않은 청년이 경제성장의 결과를 비난하고 저주하고 있다. 일부 극좌 청년의 선동이라고 몰아붙이지 말고 경제성장이 왜 가치 있는 것인지 ‘성실하게’ 밝혀야 한다. 자식에게 세습질하는 것 말고 성장하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할 수 있게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 해도 청년이 스스로 이야기해야 한다. 들어주는 사람 없다고 위축되어 입 닫고 가만있으면 안된다. 나이가 젊다고 다 청년이 아니다. 이 땅에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오는 자가 진짜 청년이다. 진보아재는 민주주의 이야기를 가져왔고, 보수노땅은 성장주의 이야기를 들여왔다. 이 이야기가 한계에 처했다면 당연히 이를 넘어서는 보다 호소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평생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온 아재와 노땅에게 청년이 살아갈 새로운 이야기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이야기로 살아왔고, 그 덕분에 나름대로 정치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 이야기가 낡아빠졌다면 청년은 여기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고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해야 한다. 그러려면 청년이 곳곳에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한다. 누가 뭐래도 희망은 교육에서 온다. 무엇보다 청년이 주어진 현실 너머 가능한 세계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으로 학교가 거듭나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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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시.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아이의 아침, 도시락, 준비물 등을 챙겨야 한다. 쉽게 이부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와 실랑이를 하여 깨우고 먹이고 학교에 보내고 난 뒤 밀린 집안일을 부리나케 끝내고 9시 즈음 집을 나선다. 도서관까지 걸으며 다음주 그림책축제 참석자 섭외, 도서관 업무협의, 아이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등으로 통화를 멈출 새가 없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도서관 운영회의를 해야 한다.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은 보조금사업의 정산과 다음달부터 3개월간 진행할 3기 교육프로그램의 기획안 작성이 급하다. 3개월 뒤에 도서관 임대계약을 갱신해야 하는데 보증금과 월세가 많이 오를 것 같아서 걱정이다. 운영회의가 끝난 뒤 곧바로 그림책축제 진행과 관련된 점검회의를 연다. 2시간여의 회의가 끝난 뒤 곧장 구청으로 이동해야 한다. 2시 약속이라 점심 먹을 틈도 없어서 김밥으로 요기를 한다. 구청에서 도서관 지원사업과 관련된 협의를 마친 후 축제 물품을 구매하러 움직인다. 이동하면서 모레 진행할 교육강좌의 강사와 통화한다. 물품 구매가 끝나니 어느덧 오후 4시. 도서관으로 이동하며 남편에게 아이 하교를 챙겨달라 부탁한다. 곧바로 2주 후 진행할 청소년 교육프로그램 참가자 학부모와 통화하여 상담 일정을 정했다. 구매한 물품을 도서관에 두고 바삐 집으로 이동한다. 저녁 챙겨주고 7시까지 다시 도서관으로 와서 저녁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한다. 지원사업 결산보고서 작성도 마무리해야 하고 새로운 사업의 제안서도 작성해야 한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오전 2시. 잠깐 눈을 붙이고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마을에서 서로 배우고, 아이들을 이웃과 함께 키워보자는 일에 뛰어든 어떤 작은도서관 마을활동가의 최근 일상이다. 마을살이를 위해 들이는 하루 18시간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없다. 오히려 활동 중에 자기 지갑을 열어야 할 때가 많다. 공공지원사업을 통해 책정되는 보조금은 용처가 제한되어 있어서 활동가 개인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하니 가족의 지지가 꼭 필요하지만, 정작 우리 가정과 아이는 많이 챙기지 못한다는 현실에 오래도록 인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활동가가 지쳐간다. 헌신에 대한 사회의 인정이 절실하다. 하지만 행정과 의회는 조그만 보조금도 아깝다며 줄일 기세고 지역의 오랜 기득권인 관변단체나 주민자치위원 중 일부는 활동가들을 ‘마을좌파’라며 몰아세우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매정하기만 하다. 

울리히 벡은 일찍이 마을활동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시민노동에 대해 다루었다. 임노동은 경제적으로 인정받고, 가사노동은 사회적 또는 법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에 비해 시민들의 공익활동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인식이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오래도록 세상을 지배해 온 신자유주의, 대의제, 공화주의이다. 시민노동은 대표적인 자원봉사에 해당한다. 즉 자발적인 공공봉사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나 대의제 및 공화주의는 공공영역을 넓게 인정하는 데에 인색하다. 신자유주의는 웬만한 건 시장에 맡기라 하고 대의제와 공화주의는 자격을 갖춘 대표만 공공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사상체계에서 작은도서관을 유지하기 위한 하루 18시간의 치열한 마을활동은 단지 개인활동이고 평범한 주민의 소꿉놀이에 불과할 뿐이다. 세상을 각박하게 하고 사회문제를 키우는 나쁜 생각이다. 

누군가는 공공영역을 애써 좁히려 하지만, 쉽게 보면 자신의 방을 나서는 순간 다른 가족과 관계를 맺는 준공공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이고, 집을 나서는 순간 타인들과 크고 작은, 직간접적 관계를 맺는 공공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임이 자명하다. 참여민주주의나 보편복지는 이런 관점을 기초로 쌓아 올릴 수 있다. 

공공영역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히 국가여야 하지만, 공공행정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을활동과 같은 시민노동이 필요하다. 이를 존중하고 인정하여 세심히 지원하기 위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 있고 따뜻한 태도가 절실하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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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공론화’라는 시민 참여적 의사결정 방식이 활성화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전 국민적 이슈였던 신고리 5, 6호기와 대입제도 공론화가 대표적이다. 2019년 서울교육청(학원 일요휴무제)과 서울시(플랫폼노동)도 공론화를 진행했다. 공론화는 주로 특정한 공공정책 사안이 초래하는 혹은 초래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모색 과정을 의미한다. 

서울시는 올해 두 번째로 시민공론화를 시행했고, ‘플랫폼경제와 노동의 미래’를 주제로 선정했다. 지난 6개월 동안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추진단이 꾸려졌고, 일반 시민과 이해당사자가 참여했다. 추진과정은 의제 선정과 자문회의, 전문가 워크숍과 시민 숙의회의까지 총 15회의 공식회의가 있었고, 시민 250명이 참여했다. 19세부터 69세까지 연령, 성, 지역별 다양한 시민들이 2주간 책임감을 갖고 플랫폼노동의 쟁점을 놓고 토론했다.

플랫폼노동은 무엇이 문제이고, 지속 가능한 플랫폼노동을 위한 대책은 뭔지 의견을 나눴다. 시민참여단은 95% 이상이 참석했고 새로운 주제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의사결정 과정에서 25개 조원들이 제시한 의견들을 존중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공론화 과정에서 시민들은 그간 협소하고 폐쇄적인 전문가주의나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플랫폼노동 확산에 따른 실질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숙의과정에서 오고간 대화에서 시민들의 깊이 있는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서울시 공론화 추진단은 일반시민 1000명과 시민참여단 250명을 대상으로 각기 두 차례 의견조사를 했다. 시민 10명 중 9명은 플랫폼노동이 늘어날 것으로 인식했으나, 플랫폼노동 개념은 잘 알고 있지 못했다. 사실 1차 숙의과정에선 플랫폼노동 개념부터 유형과 실태 등 정보전달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빠른 학습을 통해 대안을 갖고 있었다. 플랫폼서비스의 편리성만이 아니라 사회안전망이나 노동환경 개선 지적이 대표적이다. 

사실 모든 과정은 시민참여가 핵심이다. 시민참여단은 플랫폼노동의 쟁점을 도출하고 타인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갈등해결만이 아니라 협력적 문제해결의 해법도 제시했다. 플랫폼노동자의 고용형태와 적정 수수료 문제, 고객평점제와 분쟁 조정기구 필요성, 사회보험 적용 등 구체적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플랫폼노동의 확산에 따른 쟁점별 시민 인식의 변화는 공론화 성과 중 하나다. 두 차례 시민참여단을 대상으로 한 의견조사 결과 플랫폼노동자의 사회보장 적용(1차 68.9%, 2차 79.8%)과 플랫폼 운영자·노동자·이용자 간 분쟁해결 창구 마련(1차 16.4%, 2차 25.6%) 필요성에 더 많은 공감을 표했다.

<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라는 영화는 사회갈등 해법을 찾기 위한 공론화 장점을 잘 보여준다. 1971년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 더럼 지역의 실제 이야기로, 절대 바뀔 수 없는 제도나 관습처럼 이미 생각이 굳어버린 인종차별에 관한 이야기다.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의 참여와 과정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그간 공공정책은 이해관계자의 요구나 혹은 상층 전문가들이 만든 사례들이 많았다. 그러나 플랫폼노동처럼 새롭게 제기된 노동문제와 관련해서 시민공론화는 또 다른 정책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다. 

시민들은 플랫폼노동의 사회적 보호 필요성(93.2%)을 제기했고, 사회협약이나 조례 혹은 공동기준 수립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때마침 서울시는 국제노동기구(ILO)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좋은 일자리 도시 국제포럼’ 등을 통해 국내외 도시 정부들과도 플랫폼노동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또한 학계나 노동계 의견 수렴을 통해 2기 노동정책기본계획에 플랫폼노동과 같은 새로운 노동형태를 포함할 계획이다. 2019년 플랫폼노동을 처음 접한 시민참여단 후기는 공론화 정책의 효과성을 확인시켜준다. “플랫폼노동을 처음 접했다. 생소한 단어인 만큼 널리 알려져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공공행정에서 시민들이 제시한 정책에 중앙과 지방정부들이 답을 해줄 시점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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