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개인 휴가차 가족과 아이슬란드 여행을 다녀왔다. ‘골든 서클’ 일일투어를 도와주는 현지 남성이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곧바로 이렇게 응답했다. “제가 며칠 전 BBC 뉴스에서 여성 K팝 가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구하라였다. 자신은 K팝을 들어 본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기사를 보니 이 여성 가수가 스캔들에 휘말리고 사건을 공론화하고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많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분에게 또 다른 K팝 여성 가수인 설리의 안타까운 죽음 사건도 설명하면서 한국에서 여성에 대한 악성댓글과 불법 동영상 촬영이 얼마나 만연해 있고, 가해자 처벌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알려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BBC 기사를 찾아 읽어보았다. 제목은 “구하라와 남한의 불법촬영 희생자들의 트라우마”였다. 기사는 먼저 가명으로 처리된 은주라는 여성이 당한 불법촬영 사건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가해자는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 남성 동료였다. 그는 여성 탈의실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불법으로 카메라를 설치한 후 옷을 갈아입는 여성들을 지속적으로 촬영했다. 이 남성은 나중에 한 여성의 치마 속을 촬영하다 경찰에 체포됐고, 그의 휴대폰에서 불법으로 촬영된 여성 피해자들의 영상이 나왔다. 은주씨도 그들 피해자 중 하나였다. 은주씨 부모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사건이 있고 난 후 딸은 악몽에 시달렸고,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었다. 그럼에도 직장 주변에서 누구도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은주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검사는 불법촬영 범행을 한 가해 남성에게 2년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BBC 기사는 구하라가 극단적 선택을 한 계기가 단지 전 남자친구인 최종범의 성관계 불법촬영 및 유출 협박과 폭행 때문만은 아님을 강조한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실질적인 원인은 법의 정의에 호소했던 마지막 희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오모 부장판사가 재판과정에서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은 가부장적인 태도, 피해여성이 느끼는 고통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판결문, 가해자가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결과, 그 상황을 가십성으로 보도하는 언론과 대중들의 악성댓글이 아마도 구하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더 큰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BBC 뉴스의 핵심 논조이다. 한국 언론들은 이러한 해외 언론의 문제의식에 비해 얼마나 이 사건을 진지하게 다루었는지 의문이다. 

BBC 기사는 은주씨 부모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라는 문장을 기사 중간의 소제목으로 달았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아마도 지금도 여성을 불법촬영하거나, 불법촬영된 영상을 보고 있는 남성들일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불법촬영 피해 여성들의 고통을 알고도 모른 체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동료들일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사건의 진실보다는 가십성 뒷이야기에 더 관심을 갖는 기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마도 소속된 연예인이 불법촬영 피해를 입어도 별일 아닌 걸로 무마하려는 기획사 대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성 상대 불법촬영과 성희롱 성폭력 사건에 대해 솜방망이 판결을 내린 남성 가부장 의식에 사로잡힌 대한민국 사법부일 수도 있다.

지난 2년간 한국에서 불법촬영 신고가 1만1200건에 달하지만 대부분 판결은 무죄 아니면 벌금형이다. 실형을 사는 경우는 극소수에 그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8년에 조사한 ‘불법촬영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뷰 대상자 2000여명 중 23%가 자살을 고려했고, 16%가 자살 계획을 세웠고, 이 중 23명의 여성이 실제로 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여전히 불법촬영 처벌에 대한 사법부의 태도는 안이하다. 한국과 달리 미국 메릴랜드주 법원은 수영장 파티를 열고 미성년자를 불러 탈의실을 불법촬영한 50대 남성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여성들에게 더 고통스러운 것은 2차 피해를 방치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직장, 언론, 연예계, 학계, 사법부에서 행해지는 잔인한 2차 가해. 과연 누가 구하라를 죽였을까?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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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런데 그 대한민국의 주인이 국민인지 실감할 수 없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현실은 국민이 권력의 주인이란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첫 일정으로 인천공항을 방문해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했다. 그는 “불법파견 판정 시 즉시 직접고용 제도화”를 약속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협력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운송설비를 점검하다 사고로 숨졌다. 2018년 산업재해 사망자는 214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했다. 오늘도 살기 위해 출근한 노동자 중 6명이 퇴근하지 못하고 장례식장으로 실려 간다. 오늘도 무사히! 그것이 지금 노동자들의 소망이다.

촛불시민의 힘으로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렸다.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를 촛불정부라고 불렀다. 이후 4·3항쟁, 5·18민주화운동 추도식 등에서 대통령의 아름다운 추도사, 각본 없이 진행된 그의 행보는 많은 국민을 감동시켰다. 대통령과 촛불정부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크고 높았기에 실망도 깊은 것일까. 빈부양극화가 이 정부 들어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고, 비정규직 노동자, 산업재해 문제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이 정부만을 탓하는 것이라면 너무 야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에 이르면 사람들의 말마따나 그 기원을 대한민국이 아니라 ‘헬조선’부터 따져보라는 말인가. 어느덧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한 지도 절반을 지나 반환점을 돌고 있다.

고백하건대 이른바 ‘수구적폐’라고 욕먹는 정당보다 그들에게 ‘종북좌파’라고 비방당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체감상의 고통은 더욱 깊고 컸다. 저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차라리 맘껏 비판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에 이어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국민의 시대, 국민이 중심’인 문재인 정부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소망하는 개혁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인데 나만 괜한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가 싶다. 얼마 전 어느 분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읽은 글이다. 동네 복덕방 사장이 ‘그때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라고 했는데 왜 집을 구입하지 않았느냐’면서 “아이고, 진짜 바보들이시네. 2년 전이랑 비교해서 지금 40%가 올랐어요. 민주당 정부에서는 무조건 올라요. 무조건 사 놔야 돼.”

20세기 전반기에 인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현대의 대의민주주의는 자본에 잠식당해 권력의 주인들을 정치상품(정당)의 소비자로 만들었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겉보기엔 다양한 상품을 진열해놓고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진열된 상품들은 모두 자본을 등에 업은 독점적인 카르텔에서 생산된다. 비록 다른 상표명과 깃발을 들고 있지만, 새로운 정치혁신, 대안정당의 출현을 가로막을 때만큼은 모두 한패다.

주권재민이란 민주주의의 본질에도 불구하고, 투표기계로서의 역할밖에 할 수 없는 권력의 주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여당 대신 야당에 투표하거나 투표를 포기하는 일밖에 없다. 그러나 주권자의 포기는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의 승리를 의미할 뿐이다. 당연하게도 이 같은 일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자’, 바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촛불 이후의 우리가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 자’가 될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정부’가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노력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힘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세상과 자연, 우주에 대해 함께 기뻐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여길 때 생겨난다. 지난 토요일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김용균 1주기 촛불집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 김미숙씨는 눈물을 흘리며 “너를 비록 살릴 순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삶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 싶단다”라고 말했다. 우리, 맞잡은 서로의 그 손을 놓지 말자, 제발!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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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자유!”를 외친 이들이 있었다. 1886년 5월1일 미국 시카고 헤이마켓광장이었다. 노동절, ‘메이데이’의 기원이다. 

그간 130년이 훌쩍 넘었지만 8시간 노동은 아직 꿈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1970년 11월13일, 청년 전태일이 분신하며 외친 말이다. 1인당 국민소득 약 250달러 시절이었다. 그런데 1인당 3만달러가 넘는 지금도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친다.

실은 근기법 준수도 힘겨운데 되레 퇴보 일로다. 세계적 장시간 노동국의 오명을 벗고자 2004년부터 점진적으로 주 5일제, 하루 8시간, 주 40시간제를 실시하던 중이다. ‘이명박근혜’ 때는 ‘주 68시간제’가 상식처럼 통했다. 촛불혁명 뒤 현 정부조차 ‘주 40시간제’를 ‘주 52시간제’라 부르는 프레임에 빠졌다. 마침내 2020년 1월부터 시행할 ‘300인 미만 기업 주 40시간제’도 유예하려 한다. 설상가상, 초과근로 수당을 주지 않으려고 노동시간 정산기간을 (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려 한다. 소위 ‘탄력근로제’다. 6개월간 노동자에게 일을 들쑥날쑥 시켜놓고 주 평균 40시간 이내면 50% 초과수당을 주지 않아도 된다? 경총이나 전경련은 당초 그 정산기간을 아예 12개월로 하려 했다. 1년 내내 초과수당 없이 일 시킨다는 창조(?)경제! 18세기식 발상! 노조가 기겁을 하니, 못 이긴 척 6개월로 타협하려 한다. 문제는 ‘촛불정부’도 이에 동조하는 점. ‘사람답게 살자’던 촛불민심은 어디에 묻히고 자본의 이윤 욕망만 넘칠까?

누차 강조하지만, 주 52시간이 아니라 주 40시간이 기준이다! 노동자가 동의하면 ‘예외’로 최대 12시간 더 가능하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 기준. ‘8시간 노동’만으로도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하자는 게 촛불민심이다. 노동시간이 줄어도 살림살이가 나아지려면, 부동산 투기와 물가를 확실히 잡고, 보육, 교육, 의료, 교통, 노후 등 삶의 기본을 공공성으로 풀면 된다. 이런 게 그나마 ‘노동존중 개혁’이다.

그러나 고대 노예제와 중세 봉건제 이후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새 세상을 열며 승승장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한국과 같은 반주변부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존중 개혁이 가능한가? 

이미 노동존중 개혁을 했던 유럽 복지국가조차 신자유주의 물결과 글로벌 경쟁 속에 노동, 민주, 진보 진영의 목소리는 위축되고 시스템 퇴행이 계속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이는 자본과 권력의 문제다. 하지만 과연 이런 퇴행이 노동의 협조 없이 가능한가?

“공장노동자 1세대는 고용주로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교육받았다. 2세대는 10시간 노동 쟁취운동을 펼치면서 노동시간단축위원회를 결성했다. 3세대는 초과 노동수당을 위해 파업했다. 그들은 고용주가 제시한 범위를 수용했고 그 안에서 저항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시간이 돈’이라는 교훈을 너무나 잘 깨우쳤다.” 1967년, 영국 노동사학자 E P 톰슨의 <시간, 노동규율, 산업 자본주의>란 글에 나온다. 그나마 1세대는 노동(시간) “자체에 반해” 저항했으나, 갈수록 노동(규율)을 내면화한 나머지 드디어 노동시간에 “관해” (시간을 줄이거나 임금을 높이기 위해) 싸우게 됐다는 얘기다. 요컨대 이제 자본의 지배력이 깊이 뿌리 내린 상태에서 (즉 자본종속 노동을 당연시한 상태에서) 단지 그 조건을 둘러싼 투쟁만 하게 됐다는 통찰이다. 그 뒤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니 오히려 오늘날 한국이야말로 이 지적이 잘 맞는다. 톰슨에 이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볼 수 있다. 즉 4세대 노동자 다수는 임금이 줄어들까봐 노동시간 단축을 두려워하고 외려 더 많은 노동(시간)을 요구할 정도로 되고 말았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본을 넘어설 생각은커녕,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조차 포기하고, 더 많은 노동(시간, 일거리, 정규직)을 원하는 게 오늘날 상당수 노동자의 욕망 아닌가. 자본은 바로 이 노동자의 욕망과 정서를 맘껏 활용한다.

그렇다. 2000만(여·남) 노동자와 3000만 가족들은 노동에 살고 노동에 지친다. 아니, (노동력 준비과정인) 학교에 이어 노동자 삶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좀비’ 같은 상품이다. 이를 강요하는 노동체제 속에, 또 이를 내면화한 일중독 속에, 과연 ‘인간다운 삶’의 출구가 있는가? 이 딜레마를 근원적으로 넘어서자면, 권력에 대해 국민주권으로 맞서듯 자본으로부터 해방을 위해 시간주권으로 연대해야 한다. 시간은 돈이 아니라 삶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아픔에 공감하되, 자본과 남성의 지배를 동시에 넘지 않으면 평생 개고생이다. 돈의 연대가 아닌 삶의 연대야말로 참된 출구다!

<강수돌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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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게 진보는 아재요, 보수는 노땅이다. 둘 다 청년을 가르치려 드는데 ‘진보아재’의 설교는 거짓 위선으로 비치고 ‘보수노땅’의 훈시는 아예 헛소리로 들린다. 진보아재가 잘하는 거라곤 뒤늦게 헛웃음 나오게 하는 말장난 개그뿐이요, 보수노땅이 내세울 거라곤 남들 다 먹는 나이밖에 없다. 진보아재는 정치민주화한답시고 일상의 악습에 젖어들었고, 보수노땅은 경제성장한답시고 인간의 염치를 놓아버렸다. 자기들은 다르다고 항변하는데 서로 욕하고 싸우면서 닮아갔다. 작은 일상도 도덕으로 재단하는 진보아재가 큰 염치를 잃어가니 분노가 치밀고, 대놓고 아랫사람 깔아뭉개는 염치없는 보수노땅이 일상의 악습을 바꾸자고 하니 꼴불견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현실 권력을 두고 다투는데 마치 누가 먼저 소멸하나 내기하는 것 같다.

진보아재는 자칭 민주주의자다. 부당한 위계 없는 소통문화 만든답시고 틈만 나면 아재개그를 날린다. 비가 한 시간 오면? “추적 60분!”, 울다가 그친 사람은? “아까운 사람!”. 듣는 순간 ‘이게 뭐지?’ 어벙벙해지는데 집에 가서 누우면 뒤늦게 킬킬대느라 잠을 설치게 된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얻은 소득을 주로 해서 국민을 성장시키는 정책은? “소주성!” 최저임금 ‘쬐끔’ 올리면 국민이 성장한다는 아재개그를 날려 순간 ‘벙찌게’ 만들더니 지금까지도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헛웃음을 온 국민에게 안겨주었다.

보수노땅은 자칭 성장주의자다. 입만 열면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인정신으로 이만큼 성장했다고 떠벌리는데 마지막에 가면 결국 “우리 때가 좋았지”로 끝맺는다. 군사작전하듯 주어진 목표를 최대한 빨리 달성하기 위해 초인적인 과잉 노동을 하다 보니 변화하는 세상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염치도 잃어버렸다. 온갖 갑질을 휘둘러대는데 부당하다고 항의하면 “다 원래부터 그래, 어쩔래?” 하며 배째라 나온다.

현재 진보아재는 철지난 수출주도성장을 다시 꺼내들고, 보수노땅은 거리를 점거하고 삭발 단식으로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다. 경제성장에 젬병인 진보아재와 권위에 찌든 보수노땅이 재벌총수와 민주투사 코스프레를 펼치고 있으니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좋게 봐주자면 상대방의 가치를 수용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 참 가상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잘하는 것부터 챙기는 게 먼저다. 진보아재는 정치민주화를 이루는 데 뛰어난 역량을 발휘해왔다. 그런데 현재 적지 않은 청년이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능멸하고 있다. 일부 극우 청년의 일탈이라며 무시하지 말고 민주주의가 왜 가치 있는 것인지 ‘진정성 있게’ 설득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면 삶이 얼마나 좋아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보수노땅은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현재 적지 않은 청년이 경제성장의 결과를 비난하고 저주하고 있다. 일부 극좌 청년의 선동이라고 몰아붙이지 말고 경제성장이 왜 가치 있는 것인지 ‘성실하게’ 밝혀야 한다. 자식에게 세습질하는 것 말고 성장하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할 수 있게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 해도 청년이 스스로 이야기해야 한다. 들어주는 사람 없다고 위축되어 입 닫고 가만있으면 안된다. 나이가 젊다고 다 청년이 아니다. 이 땅에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오는 자가 진짜 청년이다. 진보아재는 민주주의 이야기를 가져왔고, 보수노땅은 성장주의 이야기를 들여왔다. 이 이야기가 한계에 처했다면 당연히 이를 넘어서는 보다 호소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평생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온 아재와 노땅에게 청년이 살아갈 새로운 이야기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이야기로 살아왔고, 그 덕분에 나름대로 정치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 이야기가 낡아빠졌다면 청년은 여기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고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해야 한다. 그러려면 청년이 곳곳에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한다. 누가 뭐래도 희망은 교육에서 온다. 무엇보다 청년이 주어진 현실 너머 가능한 세계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으로 학교가 거듭나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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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시.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아이의 아침, 도시락, 준비물 등을 챙겨야 한다. 쉽게 이부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와 실랑이를 하여 깨우고 먹이고 학교에 보내고 난 뒤 밀린 집안일을 부리나케 끝내고 9시 즈음 집을 나선다. 도서관까지 걸으며 다음주 그림책축제 참석자 섭외, 도서관 업무협의, 아이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등으로 통화를 멈출 새가 없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도서관 운영회의를 해야 한다.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은 보조금사업의 정산과 다음달부터 3개월간 진행할 3기 교육프로그램의 기획안 작성이 급하다. 3개월 뒤에 도서관 임대계약을 갱신해야 하는데 보증금과 월세가 많이 오를 것 같아서 걱정이다. 운영회의가 끝난 뒤 곧바로 그림책축제 진행과 관련된 점검회의를 연다. 2시간여의 회의가 끝난 뒤 곧장 구청으로 이동해야 한다. 2시 약속이라 점심 먹을 틈도 없어서 김밥으로 요기를 한다. 구청에서 도서관 지원사업과 관련된 협의를 마친 후 축제 물품을 구매하러 움직인다. 이동하면서 모레 진행할 교육강좌의 강사와 통화한다. 물품 구매가 끝나니 어느덧 오후 4시. 도서관으로 이동하며 남편에게 아이 하교를 챙겨달라 부탁한다. 곧바로 2주 후 진행할 청소년 교육프로그램 참가자 학부모와 통화하여 상담 일정을 정했다. 구매한 물품을 도서관에 두고 바삐 집으로 이동한다. 저녁 챙겨주고 7시까지 다시 도서관으로 와서 저녁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한다. 지원사업 결산보고서 작성도 마무리해야 하고 새로운 사업의 제안서도 작성해야 한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오전 2시. 잠깐 눈을 붙이고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마을에서 서로 배우고, 아이들을 이웃과 함께 키워보자는 일에 뛰어든 어떤 작은도서관 마을활동가의 최근 일상이다. 마을살이를 위해 들이는 하루 18시간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없다. 오히려 활동 중에 자기 지갑을 열어야 할 때가 많다. 공공지원사업을 통해 책정되는 보조금은 용처가 제한되어 있어서 활동가 개인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하니 가족의 지지가 꼭 필요하지만, 정작 우리 가정과 아이는 많이 챙기지 못한다는 현실에 오래도록 인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활동가가 지쳐간다. 헌신에 대한 사회의 인정이 절실하다. 하지만 행정과 의회는 조그만 보조금도 아깝다며 줄일 기세고 지역의 오랜 기득권인 관변단체나 주민자치위원 중 일부는 활동가들을 ‘마을좌파’라며 몰아세우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매정하기만 하다. 

울리히 벡은 일찍이 마을활동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시민노동에 대해 다루었다. 임노동은 경제적으로 인정받고, 가사노동은 사회적 또는 법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에 비해 시민들의 공익활동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인식이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오래도록 세상을 지배해 온 신자유주의, 대의제, 공화주의이다. 시민노동은 대표적인 자원봉사에 해당한다. 즉 자발적인 공공봉사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나 대의제 및 공화주의는 공공영역을 넓게 인정하는 데에 인색하다. 신자유주의는 웬만한 건 시장에 맡기라 하고 대의제와 공화주의는 자격을 갖춘 대표만 공공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사상체계에서 작은도서관을 유지하기 위한 하루 18시간의 치열한 마을활동은 단지 개인활동이고 평범한 주민의 소꿉놀이에 불과할 뿐이다. 세상을 각박하게 하고 사회문제를 키우는 나쁜 생각이다. 

누군가는 공공영역을 애써 좁히려 하지만, 쉽게 보면 자신의 방을 나서는 순간 다른 가족과 관계를 맺는 준공공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이고, 집을 나서는 순간 타인들과 크고 작은, 직간접적 관계를 맺는 공공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임이 자명하다. 참여민주주의나 보편복지는 이런 관점을 기초로 쌓아 올릴 수 있다. 

공공영역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히 국가여야 하지만, 공공행정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을활동과 같은 시민노동이 필요하다. 이를 존중하고 인정하여 세심히 지원하기 위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 있고 따뜻한 태도가 절실하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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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공론화’라는 시민 참여적 의사결정 방식이 활성화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전 국민적 이슈였던 신고리 5, 6호기와 대입제도 공론화가 대표적이다. 2019년 서울교육청(학원 일요휴무제)과 서울시(플랫폼노동)도 공론화를 진행했다. 공론화는 주로 특정한 공공정책 사안이 초래하는 혹은 초래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모색 과정을 의미한다. 

서울시는 올해 두 번째로 시민공론화를 시행했고, ‘플랫폼경제와 노동의 미래’를 주제로 선정했다. 지난 6개월 동안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추진단이 꾸려졌고, 일반 시민과 이해당사자가 참여했다. 추진과정은 의제 선정과 자문회의, 전문가 워크숍과 시민 숙의회의까지 총 15회의 공식회의가 있었고, 시민 250명이 참여했다. 19세부터 69세까지 연령, 성, 지역별 다양한 시민들이 2주간 책임감을 갖고 플랫폼노동의 쟁점을 놓고 토론했다.

플랫폼노동은 무엇이 문제이고, 지속 가능한 플랫폼노동을 위한 대책은 뭔지 의견을 나눴다. 시민참여단은 95% 이상이 참석했고 새로운 주제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의사결정 과정에서 25개 조원들이 제시한 의견들을 존중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공론화 과정에서 시민들은 그간 협소하고 폐쇄적인 전문가주의나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플랫폼노동 확산에 따른 실질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숙의과정에서 오고간 대화에서 시민들의 깊이 있는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서울시 공론화 추진단은 일반시민 1000명과 시민참여단 250명을 대상으로 각기 두 차례 의견조사를 했다. 시민 10명 중 9명은 플랫폼노동이 늘어날 것으로 인식했으나, 플랫폼노동 개념은 잘 알고 있지 못했다. 사실 1차 숙의과정에선 플랫폼노동 개념부터 유형과 실태 등 정보전달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빠른 학습을 통해 대안을 갖고 있었다. 플랫폼서비스의 편리성만이 아니라 사회안전망이나 노동환경 개선 지적이 대표적이다. 

사실 모든 과정은 시민참여가 핵심이다. 시민참여단은 플랫폼노동의 쟁점을 도출하고 타인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갈등해결만이 아니라 협력적 문제해결의 해법도 제시했다. 플랫폼노동자의 고용형태와 적정 수수료 문제, 고객평점제와 분쟁 조정기구 필요성, 사회보험 적용 등 구체적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플랫폼노동의 확산에 따른 쟁점별 시민 인식의 변화는 공론화 성과 중 하나다. 두 차례 시민참여단을 대상으로 한 의견조사 결과 플랫폼노동자의 사회보장 적용(1차 68.9%, 2차 79.8%)과 플랫폼 운영자·노동자·이용자 간 분쟁해결 창구 마련(1차 16.4%, 2차 25.6%) 필요성에 더 많은 공감을 표했다.

<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라는 영화는 사회갈등 해법을 찾기 위한 공론화 장점을 잘 보여준다. 1971년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 더럼 지역의 실제 이야기로, 절대 바뀔 수 없는 제도나 관습처럼 이미 생각이 굳어버린 인종차별에 관한 이야기다.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의 참여와 과정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그간 공공정책은 이해관계자의 요구나 혹은 상층 전문가들이 만든 사례들이 많았다. 그러나 플랫폼노동처럼 새롭게 제기된 노동문제와 관련해서 시민공론화는 또 다른 정책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다. 

시민들은 플랫폼노동의 사회적 보호 필요성(93.2%)을 제기했고, 사회협약이나 조례 혹은 공동기준 수립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때마침 서울시는 국제노동기구(ILO)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좋은 일자리 도시 국제포럼’ 등을 통해 국내외 도시 정부들과도 플랫폼노동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또한 학계나 노동계 의견 수렴을 통해 2기 노동정책기본계획에 플랫폼노동과 같은 새로운 노동형태를 포함할 계획이다. 2019년 플랫폼노동을 처음 접한 시민참여단 후기는 공론화 정책의 효과성을 확인시켜준다. “플랫폼노동을 처음 접했다. 생소한 단어인 만큼 널리 알려져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공공행정에서 시민들이 제시한 정책에 중앙과 지방정부들이 답을 해줄 시점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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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어른들한테서 들었던 말은 이랬습니다. “나라 전체에 산이 70%이고, 여기서 농사할 땅 떼고 공장 지을 땅 떼고 나면 사람 살 땅이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나라다.” 정말 그럴까요? 이 땅 곳곳을 여행 다니고, 때때로 해외도 나가면서 우리가 정말 작은 나라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반나절 생활권이라고 부르지만, 실상 움직여 보면 서울~부산, 서울~광주는 만만찮은 거리입니다. 신의주~부산은 그 부담이 2배, 목포~회령은 또 그 2배 정도 부담이 커지겠죠. 무엇보다 표준어를 제대로 배운 외국인이 지역마다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 고생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그다지 흔하지 않습니다.

“스위스가 작은 나라라고 생각하세요?”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스위스 건축가 춤토어가 던진 질문입니다. “다리미로 산을 쭉 펴면 유럽에서 제법 큰 나라입니다.” 답은 이랬다고 합니다. 이 말을 한국 분이 들었고, 아마 우리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스스로를 작은 나라라고 생각해 왔을까요? 

저는 생각의 차이가 땅 크기에 대한 생각의 차이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물리적인 땅의 크기가 중요한 생존의 요소라고 하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공간의 크기를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정도로 측정할 수 있는 시절은 지나고 있습니다. 정보를 생성하고 저장하고 나누는 사이버 공간이 예전 곡식을 재배하고 저장하고 교환하던 땅보다 더 중요한 자산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작은 부족이었던 몽골이 세계를 지배한 배경에는 역참이라는 통신망과 그 사이를 잇는 신속한 교통수단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정보 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아우를 수 있는 공간 개념을 ‘생각’이라고 봅니다. 인류는 오랜 시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약탈과 전쟁을 부른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물리적인 경계를 가지지 않는 소중한 무엇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꽤 오래전부터 진행돼 왔습니다. 지금 세상에 진정 중요한 자산은 땅의 크기가 아니고 사회에 축적된 정보의 양과 그 정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는 뛰어난 혁신 기술을 만들고도 그 혜택을 널리 퍼트리지 못한 때가 많았습니다. 금속활자 인쇄술이 대표적입니다. 측우기도 있습니다. 최근 사례를 보면, 인터넷 전화서비스, 휴대용 MP3 플레이어는 우리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상용화했습니다. 페이스북과 비슷한 아이러브스쿨이나 싸이월드가 이 땅에서 먼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 세상 처음’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만한 괜찮은 상품이었습니다. 이런 괜찮은 혁신이 왜 우리 땅에만 머물다가 사라져간 걸까요? 

그간 세상읽기 칼럼을 통해 저는 곁에 있는 것부터 소중히 여기자고 말해 왔습니다. 남의 나라, 남의 것 쳐다보기 전에 내 것, 우리 주변에 있는 것부터 관심을 가질 때입니다. 이제는 그래도 됩니다. 나에게 좋고, 남에게도 좋은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나에게 좋은 것을 발명하고 창작했다면,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쓰고 즐길 수 있도록 퍼트릴 생각을 해야 합니다. 15세기 유럽의 인쇄술이 담당했던 역할이기도 합니다. 

금속활자가 이 땅에서 태어날 때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학적이고도 배우기 쉬운 한글로 소통하며 광범위하게 정보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최적의 인터넷 통신 환경을 이용해 그 정보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혁신 기반을 쌓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금속활자 인쇄술과 같은 세기의 발명을 한다면, 그 혜택은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에 뻗어나가리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스스로 왜소하다고 생각하면 그 정도의 역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우리의 자산은 생각의 크기에 있습니다.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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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을 보면 삼전도 굴욕을 견디는 인조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치욕은 잠시였고 인조는 평안하게 여생을 보냈습니다. 수많은 민중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공포와 고통 속에 죽어갔죠. 집과 가족을 잃었습니다. 중국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니 조선 지도자들의 죄는 가볍지 않았습니다. 당시 중국은 명과 청이 교체되던 시기였죠. 중국의 사소한 정치적 변화에도 민감했던 조선에 큰 위기였습니다. 게다가 한족 왕조와 만주족의 대결이니 보통 일이 아니었죠. 싸움을 주시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균형외교가 절실했습니다. 이기는 쪽에 나라와 백성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 처지였으니까요. 하지만 인조의 조정은 균형외교는커녕, 공공연하게 명나라를 지원하고 나섰죠. 결국 청나라의 침략을 자초했습니다. 정묘호란에 이어 두 번째였죠.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실리를 버리고 사대의 명분만 좇았던 인조의 결정은 실수로, 당시에는 잘 알 수 없었다고 봐주기가 힘든 구석이 있습니다. 전임자였던 광해군이 절실했던 그 균형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죠. 하지만 서인들은 균형외교를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불충으로 보았습니다. 이를 구실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바로 ‘인조반정’이었죠. 그러니 인조 조정은 균형외교를 좇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판 셈이죠. 

외세에 민감한 한반도 사정은 아직 그대로입니다. 북한은 중국에 무역 전부를 의존하고  외교적 고립도 중국을 통해 간신히 피하고 있습니다. 남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역은 중국에 기대고 안보는 미국에 기대고 있습니다. 하필 그 두 나라가 세계 패권을 다투는 건 또 무슨 연고인지요. 미국 패권을 중국이 당장 무너뜨리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동아시아 지역만 본다면 사정은 다릅니다. 중국 경제성장은 지역경제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더구나 일대일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을 통해 지역경제의 틀을 다시 짜는 중이죠. 항공모함을 늘리고 해외 기지를 확대하는 등 지역 내 군사적 존재감도 과시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미·중전쟁은 이미 시작한 셈이죠.

그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는 정황이 나오고 있습니다. 벌써 사드 배치로 중국발 홍역을 앓았죠. 이번에는 미국발 수능을 치르고 있습니다. 트럼프 정부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다섯 배 인상하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미 대사가 야당 의원을 줄줄이 불러 방위비 인상을 압박하고, 미국 대표는 협상을 주저 없이 깨버렸습니다. 다섯 배 인상 요구는 애초에 협상이 아닙니다. 미국 의회에서조차 무리한 요구라고 걱정이 나오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 정부 관계자는 “미국 대표단은 자신들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한반도를 방어하기 위한 큰 틀의 노력이란 점을 계속 강조했다”고 밝혔습니다. 그 전략은 다름 아닌 중국을 겨냥한 것입니다. 중국에 맞서는 데 돈을 보태라는 셈이죠. 미국이 이를 공공연하게 떠드는데 중국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겠죠. 한국 정부가 요구를 들어준다면 중국이 반길 리 없습니다. 꼭 이번이 아니라도 이런 행태가 지속된다면 중국은 한국을 잠재적 위협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자연히 북한을 더 거들 것이고 남북 긴장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는 온전히 남북 민중의 몫이 될 테죠.

미·중 사이의 균형을 잡아서 남북 사이 긴장을 낮춰야 하는 일은 선택이 아닌 숙명입니다. 균형을 잡자면 불확실성을 모두에게 심어줘야 합니다. 미군 철수를 감수할지 모른다, 한국 정부만의 복안이 있을지 모른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이고 진정한 협상도 해보려 할 테죠. 

불확실성을 정책으로 바꾸려면 사회적 논의와 정치권의 합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정치권은 균형외교를 외치던 어느 대통령을 조롱했죠. 오늘도 자유한국당 대표는 미국 요구를 따르라며 단식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멧돼지에게 옆구리를 받히고서야 사냥개에 불과했음을 알면 너무 늦지 않을까요. 정치권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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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벨 에포크(Belle Epoque)’를 단순 번역하면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이지만, 이 단어에는 그 이상의 함의가 있다. 프랑스혁명에서 나폴레옹 제정, 보불전쟁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전쟁의 불꽃이 그치지 않는 격동의 시대였다. 거듭된 혼란 끝에 프랑스 국민들은 국민 선거에서 75%의 지지로 나폴레옹 3세를 대통령에 선출했다. 나폴레옹 3세는 영광스러운 프랑스의 재건, 특히 파리의 도시재개발을 추진했다.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기 좋았던 좁은 골목과 오래되고 낡은 건물들이 철거되고, 새로운 대로와 공공건물들이 세워졌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파리는 이 시절에 만들어졌고, 새로운 파리는 전 유럽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던 이 과정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笑劇)으로 끝난다”라고 말했지만, 나폴레옹 3세가 보불전쟁(1871)에서 패배하여 퇴위한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1919)이 일어나기까지 거의 반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유럽인에게 ‘벨 에포크’였다. 이 시기,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1878년 서구 열강은 지구 면적 중 67%를 식민지나 통치령으로 삼았고, 1914년 무렵엔 그 면적이 더욱 넓어져 85%에 이르렀다.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 60주년을 맞이한 1897년 영국은 전 세계 면적의 5분의 1,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지배했다.

제국의 영토에는 해가 지지 않았지만, 그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비유럽인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은 암흑의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다. 서구식 문명화를 명분으로 앞세운 열강의 제국주의와 가혹한 식민 정책 아래에서 세계가 수탈당했다. 그토록 넓은 지역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자유를 빼앗긴 채, 권리도 없이 노예에 버금가는 삶을 살았음에도 오늘날까지 많은 유럽인들 또는 그 시절 부역하며 기득권을 누렸던 비유럽인들 중 일부는 그 시대를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한다. 역사적으로는 가장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노인들 역시 자신의 젊음이 가장 빛났던 시기를 그 같은 시절로 기억하곤 한다.

실제로 나치 정권 치하를 살아낸 독일 노인들 가운데 “당시에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문 앞에 세워둘 수 있었다”는 것과 “장발과 싸움패는 제국노동봉사단에 끌려갔다”는 사실을 제3제국의 업적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고, 무솔리니가 통치하던 파시즘 치하를 “기차가 정시에 도착했던 시대”로 회고하는 이들이 있다. 이제 와서 ‘삼청교육대가 어인 말이냐’라고 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조직폭력배 사건이나 기타 등등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을 향해 ‘삼청교육대에 보내야 한다’고 목청 높이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아마도 박찬주 전 육군대장에게도 ‘삼청교육대’로 상징되는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박찬주가 기억하는 좋았던 시절이란 장군의 부인이 아들에게 부침개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민의 자식인 공관병 얼굴에 부침개를 던지고, 키우던 화초가 냉해를 입자 공관병을 발코니에 1시간씩 가둬두어도 괜찮았던 시절을 의미한다. 그래도 아무 문제 없었던, 누구도 찍소리할 수 없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는 군인권운동가를 ‘삼청교육대에 보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가 기억하는 아름다운 시절이란 군부가 영장이나 재판은 물론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무고한 시민 6만755명을 잡아들여 이 중 순화교육 대상자로 분류된 3만9742명을 군부대 내에서 정화한답시고 강제 노역과 훈련, 폭력과 구타로 모두 54명이 숨지는 국가폭력이 자행되어도 아무렇지 않았던 시대다. 이 시절을 어떤 이는 여전히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할 것이고, 어떤 이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 하겠지만, 우리는 그날의 학살자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여전히 골프장을 들락거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만의 좋았던 시절은 민주공화국의 태양 아래 계속되고 있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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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세대가 공정에 과민하다는 볼멘소리가 들려온다. 선배세대의 진보와 보수가 서로 다투면서 이룩한 민주화와 경제성장이 이들에게는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체험된다. 진보의 민주주의는 공정하지 않다. 소수자라는 이유로 별다른 노력 없이 남이 이룬 성과를 빼앗아 누리는 무임승차자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나는 온갖 진입장벽을 넘어 정식으로 여기 들어왔는데 너희는 평등 운운하며 데모해서 날로 먹겠다고? 보수의 성장주의도 공정하지 않다. 스스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능력주의를 믿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 보상이 부모가 뿌리고 거둔 성과를 누리는 세습과 비교해 너무도 초라하다. 빽 없이 혼자 힘으로 성과를 이루려고 애쓰고 있는데 너희는 잘난 부모 둔 것도 능력이라고 우리를 조롱하며 알맹이를 모조리 차지해?

청년세대가 보기에 선배세대의 가치는 허약하다. 진보와 보수 모두 공적 담론에서는 민주주의와 성장주의를 설파한다. 진보도 성장주의를 말하지만, 보수의 성장주의보다 무엇이 더 낫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보수도 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진보의 민주주의보다 무엇이 뛰어나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둘 다 광범한 호소력을 지닌 보편 서사를 구사할 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별 차이도 없는 규범을 두고 괜한 시비다. 진보는 공적 담론에서는 소수자의 평등을 말하지만, 비공식 일상생활에서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 평등을 훼손하는 온갖 편법을 마다하지 않는다. 보수는 공적 담론에서는 대한민국의 성장을 주창하지만, 비공식 일상생활에서는 남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가족만의 성장을 위해 세습하느라 바쁘다.

선배세대의 기만적인 ‘내로남불’ 싸움을 지켜보는 청년세대는 자조한다. 소수자도 아니고 잘난 부모를 둔 것도 아닌 나같이 평범한 청년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생각해낸 대안이 고시다. 고시야말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는 것. 언뜻 보면 그럴듯하다. 객관식 시험이라 누구든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선 일정 시간 개인의 노력을 투여해야 하고, 시험 보는 과정도 남이 대신해줄 수 없으며, 결과의 차등도 개인 노력의 결과이므로 정당한 불평등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시험이 단편적 지식을 최대한 많이 외웠다가 순식간에 풀어놓아야 하는 ‘순간 기억 능력 테스트’라는 점이다. 창의력이 제일 중요한 4차 산업혁명이 다가오는데 몇 가지 선택지 중 정답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단순 유식’한 인식구조를 가진 인간들을 대거 생산해 어쩌자는 것인가? 시험 결과로 한 줄 세워 평생 신분을 결정하자고? 시험을 통과한 승리자들에게 삐뚤어진 엘리트 의식을 심어줘 끼리끼리 똘똘 뭉쳐 권력을 마구 휘두르게 하자고? 종일 골방에 박혀 암기시험 공부에만 몰두하던 몰사회적 인간이 지배하는 참혹한 몰도덕적 사회는 이미 충분히 겪었다. 인지능력 테스트에만 능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시험에 실패했다는 과도한 패배감에 공정은 둘째 치고 게임의 장에 아예 나가려 하지 않는다. 개, 돼지 취급받기 일쑤다. 조국사태를 계기로 또다시 교육 개편 소리가 나오는데, 순간 기억 능력 테스트로 되돌아가서는 안된다. 대신 청년이 가족 밖에서 인간으로 현상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키워줘야 한다. 학교가 이런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어떤 제도도 완벽할 수는 없다. 기존 제도의 원래 취지가 훼손되고 공정성이 침해됐다면 바로잡아 마땅하다. 윤리적 결함이 드러났다면 이를 고칠 세밀한 지침도 마련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건 가치교육이다. 청년세대에게 좋은 삶에 대한 지향 없이 공정만 추구해선 안된다고 가르쳐야 한다. 공정한 게임을 하는 사회는 정의로울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사회적 삶의 의미를 장기적으로 만들어나갈 수는 없다. 더불어 누릴 수 있는 좋은 삶이 뭔지 물을 때라야 가능성이 열린다. 민주주의와 성장주의는 치열한 현대사를 겪으며 선배세대가 만들어놓은 가치다. 생명력이 다했다면 이제 청년세대가 나은 이야기로 다듬고 새롭게 사용해서 더 좋은 삶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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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언덕 위 아크로폴리스에서 국정을 돌보는 높은 분들이 저 멀리 시장 한가운데 넓은 공간을 보며 저마다 입장에 따라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옅은 미소를 띠기도 한다. 그곳 아고라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사회와 정치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플라톤은 아고라에 모인 시민들이 못마땅했다. 그들은 어디서 이상한 소문만 듣고는 다소 까칠한 지식인을 탄핵하기도 하는 등 불세출의 철학자가 보기에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했다. 반면에 이웃 스파르타는 혹독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과두정을 펼치고 정예군을 형성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다. 플라톤은 이처럼 우중(愚衆)에 좌우되지 않는 철인(哲人)의 정치가 이상적이라 생각했다. 그저 이상론이었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시작부터 민주주의와 함께했지만, 광장만으로 민주주의가 달성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기초이자 마땅히 활용돼야 할 중요한 언로이다. 온라인이 아무리 활성화되어도 직접 사람들을 만나 나누는 대화와 토론의 효용이 줄지는 않는다. 지식인들은 광장의 메시지가 항상 옳은 건 아니라고 비판하지만 똑같은 비판을 지식인들에게도 돌려줄 수 있다. 

최근 오랜만에 많은 시민을 끌어모은 광장에 대해 여러 지식인이 저마다의 소회와 평가를 내놓고 있다. 어떤 분들은 민심이 쪼개진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광화문이든 서초동이든 다양한 생각을 지닌 시민들이 모여 있고, 그래서 다양한 생각이 광장을 매개로 다층적으로 드러나면서 근본적 반목과 균열이 예방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제법 보인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촛불집회를 향해 보수논객들은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공화국에서 시민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이런 논리는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킨다며 주민자치의 확대를 반대하는 기초의원들의 태도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이는 투표가 국민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이니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주장이다.

최근에는 좀 더 정교하게 광장을 비판하는 양상도 보인다. 광장이 민주주의 구현의 장이 되려면 다양한 생각이 모여 합의를 이끌어가는 숙의의 형태를 띠어야 하는데 현재의 광장은 다분히 특정 정파의 목소리만 내고 있으니 직접민주주의의 발현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은 곰곰이 되새겨볼 만한 비판일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의 보도와 달리 현장에 가보면, 심지어 광화문에서도 다양한 생각과 입장을 접하는 게 아주 어렵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현재의 광장이 정파적이라는 데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간혹 광장에 있었던 수백만명 중 한 사람으로서 납득하기 어렵고, 조금 불쾌한 비판도 들린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극단적 유튜버나 종편이 퍼뜨리는 근거 없는 가짜뉴스에 기대어 광장에 모였다는 주장이나, 이런 군중은 훌리건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 등이다. 조금 점잖게는 민주주의의 핵심은 정당정치라고 타이르기도 한다. 광장민주주의 역사가 2000년도 더 넘게 흘렀지만 지식인들의 광장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여전하니 그저 씁쓸할 뿐이다. 광장에서 만난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뚜렷한 자신의 생각과 감탄할 만한 현명함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이러한 생각을 모아 어떻게 합의를 이룰 것인가이다. 그 답이 광장에 모여 시끄럽게 하지 말고 조용히 투표일이나 기다리라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설령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해도 조심스러웠으면 좋겠다. 어리석은 백성은 국사를 논하지 말라는 높으신 양반의 으름장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작은 촌락으로 전락한 스파르타와 달리 여전히 반짝거리는 아테네, 그리고 헌법이 애써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가 뜻하는 바를, 화려한 지식에 앞서 되새길 필요가 있다. 지식인으로서 현재에 대한 비판은 당연한 책무이겠지만, 광장에 나가 사람을 만나 직접 말하고 듣는 것도 학문과 사회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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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은 누구나 쉽게 책을 보고 자료를 찾는 곳이다. 때론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모임 공간이다. 국가와 도시별로 차이가 있지만 지역사회의 다양한 문제해결 공간 역할도 한다. 이런 이유로 외국 도서관에는 직업상담사나 사회복지사가 배치된 곳도 있다. 

도서관 사서 업무는 매우 다양하다. 대출 수납이 주 업무가 아니라 도서관 기획·운영 전반이 핵심 역할이다. 암호 같은 분류기호를 외워 이용자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재분류하는 일도 그중 하나다. 견학, 독서의달, 체험행사, 북스터디 등 다양한 프로그램까지 맡고 있다. 사실 도서관 사서의 핵심업무 중 하나는 장서점검이다. 대출반납 소장자료 목록과 실제 도서관 자료 간의 일치 여부, 자료 폐기, 장서 재배치 등의 업무가 장서점검인데, 어떤 곳은 이조차 수행 인력이 부족하다. 최근에는 과도한 성과평가 때문에 구축제, 동축제, 마을축제까지 참가해야 한다. 

현재 공공도서관 1042곳에는 사서 2만7447명이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사서가 없는 곳도 50곳에 달한다. 문제는 도서관 사서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라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도서관 연장개관 인력은 계약직으로, 주말은 시간제 비정규직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른 전문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초단시간 고용도 특이한 현상이다. 아무리 예산 부족 때문이라지만 실업급여도 못 받는 초단시간 사서가 11%라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문헌정보학과를 나와 사서로 취업하면 187만7000원의 월급을 받는다. 최저임금보다 고작 10만원 더 많은 셈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10명 중 4명은 고용불안과 저임금 탓에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공공도서관 사서의 평균 근속기간은 4~5년에 불과했다. 

문제는 도서관 사서의 인권침해와 부당대우인데, 2019년 실태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특히 비민주적 조직에서나 나타날 법한 현상들이 도서관에서는 일상화돼 있다. 대표적으로 재단이나 종교법인의 행사 차출(45%), 합리적 이유 없는 업무 재배치(27.8%), 연령(20.6%)이나 비정규직(20.6%)에 대한 부당대우 등이다. 수탁 기관 변경과정에서 불이익 발생은 다반사이고, 사서의 81%가 여성인데 육아휴직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곳도 있다. 직영 도서관에 비해 민간위탁 도서관에서 더 심각하다. 위탁 도서관에는 사서 자격증을 갖고 있지 않은 자가 관장을 맡고 있는 곳도 있다. 

게다가 일상적으로 도서관을 찾는 이용객과 대면하다 보니 감정노동도 심각하다. 이용객으로부터의 폭언(67.9%), 성희롱(14.9%), 괴롭힘(48.4%)은 심각한 수준이다. 소위 ‘1급 진상’ 때문에 경찰이 출동할 정도의 소란도 가끔 발생한다. 그럼에도 민원이 들어오면 항상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말만 되풀이하도록 한다. 이용자에게 극존칭을 쓰게 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게 하는 등의 저자세 서비스 강요는 천박한 자본주의와 관료주의의 폐해를 보여준다. 

지역마다 꼭 1명씩 있는 기초의원이나 지역 유지들로부터의 ‘갑질’도 하루이틀이 아니다. 민간위탁 법인 대표가 사서들을 모아 놓고 진행하는 회의들도 문제다. 매월 1회 법인 재단 대표의 낭독훈화는 애교에 가깝다. A종교법인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는 아직도 사서에게 자발적 후원(?)을 강요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항상 ‘주민들을 위해 함께하자!’는 말은 오랜 시간 동안 사서의 인권침해를 은폐시키는 요인이다. 

몇 년 전 영국과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이용한 적이 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이는 전문가 못잖은 지식을 갖춘 ‘사서’였다. 사전에 온라인으로 신청한 자료 제공만이 아니라 연관 자료 목록까지 추가로 전달해 주었다. 반면 국내 공공도서관은 마법과 같은 고용법칙이 존재한다. 정규직 사서와 비정규직 사서, 그 외 보조인력(자원봉사·공공근로·대체복무요원 등)이 각각 3분의 1의 비율로 활용된다. 이런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전문적인 서비스는 불가능하다. 그간 문체부와 지자체, 도서관협회와 대학 교수, 그 누구도 이런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제라도 도서관 책 사이에 숨겨진 사서의 인권을 되짚어봐야 한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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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유명한 책입니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이자 판사였던 몽테스키외가 1748년에 펴낸 책입니다. 집필 기간은 21년이었다고 합니다. 이 책이 소중한 이유는 현대 정치체계 구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삼권분립을 기초로 하는 미국 정치체제가 이 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책 발간 당시 유럽은 절대왕정 시절이었습니다. 유럽 각국의 왕과 귀족은 온갖 권력을 한데 모아서 행사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권력은 쪼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야 권력 주체 사이에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고,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하죠. 책 내용이 이렇다 보니 유럽 왕조가 좋아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의 정신>은 프랑스에서 익명으로 출간됩니다. 그나마도 곧바로 금서로 지정되어 세상 빛을 보기 어렵게 됩니다. 하지만 1750년 무렵 영어로 번역돼서 미국에 알려졌고, 미국 연방헌법의 기초 이론을 제공하는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인류 역사에 삼권분립이 처음 시행되는 계기를 마련한 셈입니다. 이 책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저자는 저술 시점인 18세기까지 세 가지 유형의 정치형태가 존재해 왔다고 설명합니다. 군주정(또는 귀족정, monarchies), 전제정(despotisms), 그리고 공화정(democratic republics)이 그것입니다. 군주정은 명예나 보다 높은 지위와 특권을 얻으려는 열망이 그 기초를 이룬다고 분석했습니다. 전제정은 두려움을 통치 기반으로 삼는다고 설명합니다. 대중에게 끊임없이 통치자에 대한 두려움을 심으면서, 때로 대중적 향락을 제공해 가며 대리인의 횡행을 눈감아 주고, 그들을 활용해서 군주의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체제라고 분석했습니다. 공화정은 선(善)에 대한 사랑(the love of virtue)과 공익을 사익에 앞세우는 의지를 존립 기반으로 하는 정치체제라고 설명합니다. 

우리 주변에 여러 국가가 있습니다. 우리도 여러 체제를 경험해 왔고요. 각각의 국가와 시절에 이 책에 나온 정치체제를 대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국가마다, 시절마다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 선명하게 떠오를 겁니다. 

역사는 한 방향으로만 우리를 안내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진보하거나 계속 퇴보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르침을 주고 기다립니다. 깨달을 시간을 줍니다. 우리는 1960년 4·19혁명에 이어 1961년 5·16군사정변, 1970년대 유신의 정치적 암흑기를 거쳐 민주화 열망을 이어가며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에 이어 2017년 촛불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법의 정신>에서 말한 공화정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선사한 역사의 등락이 오히려 우리를 다부지게 만들었습니다. 

주변에 갈라진 광장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갈라져서 다투기만 하는 속성을 가졌다며 비하하는 발언까지 들립니다. 

하지만 시각을 조금 달리해서 현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두려움 없이 광장으로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뜨겁게 자기 목소리를 냅니다. 생업에 방해를 받고, 여가에 지장을 초래해도 광장으로, 거리로 발길을 돌립니다. <법의 정신>에서 말한 선(善)에 대한 사랑을 그리며 공익을 사익보다 우선시하려는 의지가 표출되는 현장입니다. 선에 대한 해석이 다른 점은 우리가 걸어온 길이 그랬듯이, 등락을 거치다가 곧 역사가 가르침을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외신을 훑어보면 우리를 불편한 모습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프랑스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민주화 경험은 주변으로 계속 퍼져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명한 선택을 위한 집단 의지를 광장과 거리에서 두려움 없이 표출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불편해 보여도, 모순 뒤에는 조화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거리낌 없이 거리로 나서기 위해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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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민주적 진보는 몇 발을 뗐을까요. 문재인 대통령 임기 반환점이 코앞이니 한번 돌아볼 때가 아닌가 합니다. 민주체제 시작은 왕조와의 싸움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특정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권력을 쥐는 체제에의 저항이었죠. 이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민주체제는 여러 갈래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분배라는 큰 방향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소수가 독점하던 권력을 성격에 따라(입법·사법·행정), 지역에 따라(연방제·지역분권제), 능력에 따라(노조·언론·학생·시위대) 나누면서 그 체제는 발전했죠. 

권력이 분산되면서 불확실성도 증가합니다. 민주체제는 불확실성을 제도화하며 진보했습니다. 그 핵심이 선거죠. 선거는 불확실성을 정기화한 제도입니다. 4년에 한 번씩 국회의원은 커다란 불확실성을 마주하죠. 재선될 수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쩌다 한 번씩 시장에도 나오고, 보통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권력 분산, 불확실성 증가는 그런 면에서 민주체제의 중심이고 이를 통해 권력자가 아닌 시민의 인권과 안전을 보장하는 게 민주체제의 가치입니다. 제한도 있고 지연도 되지만 이를 향해 가는 게 민주체제의 진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행보는 조금 우려스럽습니다.

문재인 정권 2년이 지났지만, 비민주적 법안이 아직 많이 남아있고 개혁의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국가보안법이 있습니다. ‘양심의 자유’를 명시한 헌법과도 어긋날 뿐 아니라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도 문제가 심각하죠. 게다가 이 법의 악용으로 많은 이들이 피와 눈물을 흘렸습니다. 국가공무원법도 있죠. 이 때문에 공무원도 노동자이지만 헌법이 명시한 노동3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교조의 경우에서 보듯 헌법과 법률에서 인정한 노조할 권리를 대통령령으로 제한하기도 합니다. 국내외 지적이 꾸준히 이어져 왔고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 시절 개선을 주장했죠. 하지만 국가보안법 개정은 논의조차 안되고 있습니다. 노동3권 확대도 무관심합니다. 재벌개혁은 물 건너갔고 소비자 권리를 강화해줄 집단소송제도의 행방도 묘연합니다. 민주 가치의 중심이 되는 입법개혁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죠. 

지난 4월 민주당과 야 3당은 “본회의 표결 시에는 선거법-공수처법-검경수사권조정법 순으로 진행한다”며 이들의 신속처리에 합의했습니다. 이는 정치적으로 의미가 큽니다. 민주당의 정치적 손해가 예상되는 상태에서 이뤄진 합의였기 때문이죠. 중앙선관위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20대 총선에서 각각 123석과 122석을 얻은 민주당과 한국당의 의석은 선거법 개정안 적용 시 각각 107석과 109석으로 줄었습니다. 소수당은 큰 득을 봤죠. 두 거대정당이 움켜쥐었던 의회 권력을 다양한 정당들이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연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민주당은 “공수처 법안을 최우선으로 처리하는 데 당력을 집중”한다고 밝혀 선거법 처리를 미뤘습니다. 공수처가 검찰 권력을 나누게 될지, 오히려 두 배로 키울지 잘 모르겠지만 민주체제의 진보라는 면에서 선거법 개정보다 급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한국당과의 정치투쟁에 밀릴 수 없다는 절박감이 있었을 겁니다. 어차피 다 개혁이니 순서만 조정한다고 생각했을 법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투쟁에 익숙합니다. 안으로는 반독재 투쟁이, 밖으로는 반북 투쟁이 이어졌죠. 투쟁이 혹독했던 만큼 생채기는 깊고 흉터는 컸습니다. 그래서겠죠. 독재는 끝났고, 북한은 달라졌어도 아직 그 상처를 핥고 보듬는 것 말이죠. 그러면서 우리 모두 민주를 외칩니다. 한쪽에선 권위주의가 아닌 그 모든 걸 민주주의라고 봅니다. 성적소수자, 노동자의 목소리를 외면하며 “민주”를 하고 있다고 말하죠. 다른 한쪽에선 북한만 아니면 민주주의라 외칩니다. 그 때문에 체제 유지를 위한 폭력도 “자유민주” 수호라 외치죠. 1970년대로의 회귀를 울부짖는 이들이야 그렇다 쳐도 민주와 진보를 꿈꾸는 정부·여당의 행보는 안타깝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를 찾아 공정을 강조했습니다. 민주체제의 진보를 여는 공정이 되길 기대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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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罷場) 분위기가 역력하다. 스웨덴 스톡홀름 외곽의 한적한 리조트로 집결한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협상 실무자들은 각자 준비한 카드를 내보이고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 거래가 성사되기가 어렵다고 판단, 본국의 훈령에 따라 보따리를 싸고 기약도 없이 떠났다. 중재국 스웨덴이 다시 회동할 것을 제안했지만 회담 결렬 후 보여준 북한의 격렬한 반응으로 볼 때 성사되더라도 결과는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년 내에 다시 회동할 가능성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합리적이다. 한때 ‘비바치시모’(매우 빠르고 활기차게)로 타오르던 비핵화 불꽃이 돌연 꺼지게 될 운명에 놓였다.

작년 6월 싱가포르에서 두 정상이 역사적 대좌를 할 때만 해도 비핵화 협상이 이렇게까지 곤두박질칠 것으로 예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비핵화 협상이 ‘귀뚜라미 보일러처럼 잘 작동해서’ 새로운 북·미관계가 발아(發芽)되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것으로 내심 기대하면서 합의문이 어떻게 도출될지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합의문은 서로 상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들의 기본 입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합의문이 그러했다. 특히 북한은 합의문 1조에 큰 기대를 했다. 베트남 하노이 회담(2019·2·27~28) 결렬 전까지 8개월의 템포는 ‘프레스토’(매우 빠르게) 이상이었다.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후 성사된 판문점 회동(2019·6·30)은 남·북·미 모두 4개월의 암중모색, 말하자면 ‘렌티시모’(매우 느리게)를 거치면서 생겨난 극적인 정치 이벤트였다. 의도했든 아니든 트럼프는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서 북한 땅을 밟은 최초의 미국 지도자가 됐다. 북한도 판문점 회동을 “정전협정 이후 66년 만에 분단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악수를 하는 놀라운 현실이 펼쳐졌다”며 회담 내용보다는 성사 배경과 회동의 정치·외교적 의미를 부각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노이에서 트럼프에게 굴욕을 당한 김정은은 와신상담 후 ‘소스테누토’(소리를 충분히 끌면서 음을 그대로 지니고)를 고수, 판문점 회동 이후 스톡홀름 실무회담(10·5~6) 직전까지 총 아홉 차례 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 서두르는 듯한 인상이 역력했다. 외무성 제1부상 최선희가 그랬고, 비핵화 실무협상 대표 김명길 또한 그러했다.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올라 미국 주도의 제재를 비난한 김정은의 행보를 ‘위대한 사색’으로 칭송한 노동신문 보도와는 달리 김 위원장에게서 ‘그라베’(장중하게 느리게)의 템포를 찾기란 어려웠다.

김정은은 작년 5월 노동당 7차 대회 중앙위원회 사업총화(결산) 보고에서 “올해부터 2020년까지의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을 철저히 수행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병진노선을 틀어쥐고 에네르기(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면서 인민생활을 결정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어떡하든지 고난을 넘어서려는 김정은의 결기가 도드라졌다. 더군다나 내년은 5개년 전략이 끝나는 연도이자 노동당 창건 75주년이 되는 ‘꺾어지는 해’(整週年)다. 핵 억제력을 확보한 김정은은 이제는 인민들에게 경제적으로 성과를 보여주고, 젊은 지도자로서 선대(先代)와의 차별성을 최대한 부각시키려 애쓴다. 동시에 중국과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관계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하루바삐 정상국가로 도약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김정은의 절박함이 비핵화를 고리로 ‘막가파 트럼프’의 미국을 어떡하든 움직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으리라 본다.

하지만 탄핵 낭떠러지로 몰리고 있는 트럼프는 북핵에 집중할 겨를이 없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마저 민주당 주도 탄핵 조사 목록에 올랐다. 터키와 쿠르드족 간 전쟁을 촉발한 트럼프의 시리아 미군 철수 오판으로 공화당조차 트럼프를 거칠게 비판하고 있다. 비핵화 동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트럼프의 비핵화 시계는 자연스레 ‘렌티시모’다. 활짝 열리는 듯했던 비핵화의 기회의 창이 빠르게 닫히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이래저래 한반도 안과 밖의 풍경이 모두 어둡고, 어지럽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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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에프엑스’의 전 멤버 설리가 지난 14일 안타깝게도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내게는 그의 극단적 선택이 같은 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사임 발표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그 충격의 차이는 단지 직책과 생명의 차이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대, 일상, 젠더의 차이였다. 어린 나이에 수년 동안 지독한 남성 악플에 시달려야 했던 가련한 삶. 데뷔 때부터 ‘에프엑스’의 음악을 좋아했고, 그의 당당함을 응원했다. 오랫동안 누리꾼의 악플에 시달려 극심한 우울증을 앓은 그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여성 뮤지션으로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당당하게 살고 싶은 것이 왜 비난을 받아야 할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보다 더한 시련이 있을까? 그는 그렇게 죽었다. 아니 가수이자 배우로서 ‘연예계’라는 잔인한 도시에서 더 이상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스스로 생을 멈추었다. 

그의 사망 전날 보았던 영화 <조커>의 배경인 고담시와 주인공 아서 플렉이 자꾸 떠오른다. 비정한 고담시의 외로운 무명 코미디 배우 아서 플렉이 내뱉은 대사들은 마치 설리의 내면의 독백과도 같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정신질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척해야 하는 것이야.” “난 살면서 단 1초라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내 죽음이 내 삶보다 가치 있기를.” 

가수 겸 배우인 설리. 이충진 기자 hot@khan.kr

아서 플렉의 대사를 설리에게 대입해보았다. 미쳐 돌아가는 고담시처럼 극한경쟁, 감정노동, 극단적 악플에 시달리는 한국 연예계는 비극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마음의 아픔을 고백하기는커녕 오히려 관객을 향해 미소를 지어야 하는 위선의 시간들, 유명하지만 나는 과연 행복한가를 수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잔인한 아이돌시장, 이해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 여성 아이돌들의 내면의 아픔들, 악플에 시달리면서 삶보다 죽음을 가치 있게 선택한 ‘절망적인 소망’이란 역설. 설리의 황망한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이돌 스타가 되려면, 감정노동과 악플은 평소의 감기처럼 달고 다녀야 한다는 아이돌의 숙명은 특히 여성으로서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이다. 

아이돌이기 이전에 여성주체로서 당당해지기를 원했던 설리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악플은 마음의 심장을 찌르는 백정의 칼날이 되어 그에게 향한다. 아마도 그러한 악플과 공생하는 선정적인 연예 저널리즘이 문제의 발단일지도 모른다. 악의적인 기사는 악플을 낳고, 악플은 다시 악의적인 기사를 재생산한다. 그리고 그의 연예활동을 오랫동안 지원했던 소속사 역시 근원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열일곱 살에 데뷔할 당시 ‘에프엑스’의 막내였다. 연습생 시절부터 과도한 경쟁에 시달려왔던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들, 그것들을 해소할 수 있는 휴식과 대화가 충분했는지 묻고 싶다. 그 어느 당사자들보다 소속사 식구들이 가장 마음 아프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떠나는 일이 없도록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설리의 죽음을 개인의 극단적인 선택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그의 죽음은 그와 동시대를 함께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지난 화요일 밤, 문화방송 <PD수첩>에서 모 방송사 오디션 프로그램의 조작과 부정행위의 의혹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매우 충격적이고, 허탈하다. 

모든 오디션은 각본에 불과하고 팬들의 투표 역시 부질없이 조작된 것이다. 그렇게 부정하게 선발된 멤버들은 그 방송사의 소속사로 묶여서 오랜 기간 동안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노예처럼 일하다가 사라진다. 설리의 죽음의 한 징후를 보는 것 같다. 

우정과 배려가 없는 잔인한 사람, 잔인한 시스템, 잔인한 자본, 잔인한 세상. 이 잔혹한 세상을 떠난 설리에게 말하고 싶다. 죽음이 삶보다 더 값질 수 있도록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행복하기만 바랄게.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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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누구나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참여와 연대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이 자유롭게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고, 서로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은 ‘인터넷 공론장’뿐만 아니라 ‘민주적인 참여’의 기본 조건이다. 슬프게도 인터넷 역시 현실 공간에서 작동하는 제약들이 고스란히 작동한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 이래 민주주의의 이상은 권리를 가진 시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쟁점을 토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교육과 이해가 있으며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때를 가정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항상 ‘과두정’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고, 쟁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시간과 학습이라는 자원과 노력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선 현실공간의 정치적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모두에게 시간적 여유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로마공화정 역시 귀족, 기사, 평민 계급의 투표를 통해 국정 현안을 결정하는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평민들은 공화정에 불만을 표시하며 오늘날 ‘몬테 사크로(Monte Sacro)’라고 불리는 성산(聖山)에 올라 농성했다. 집단 파업을 일으킨 것이다. 절차에 따라 투표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로마공화정의 투표는 귀족, 기사, 그리고 마지막에 평민이 투표하게 되어 있었다. 귀족과 기사 계급이 담합해 투표를 마치고 나면 평민은 표결에 참여하기도 전에 결정이 끝났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쟁점이 발생해도 금세 다른 쟁점에 덮이는 사회라고 한다. 초스피드로 움직이는 이 세계에서 나날이 발생하는 모든 쟁점을 파악하고,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거나 전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상 표결이 끝난 뒤에나 도착한다. 과거 디지털미디어의 주류가 PC 기반의 웹(Web)이던 시절이 영화 &lt;엑스맨&gt;의 ‘퀵실버’가 움직이는 정도의 속도였다면, 모바일 플랫폼 앱(App)의 시대인 현재는 ‘퀵실버’에 더해 공간을 순간 이동하는 ‘나이트 크롤러’까지 합세한 스피드로 움직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정치가 되었든, 문화가 되었든 평론가만큼 힘든 직업은 없을 것이다. 

디지털미디어 시대,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는 계급이 아니라 이슈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이고 분산된 대중이다. 과거의 대중이 조직이나 명망가를 중심으로 몸의 연대를 구사했다면, 오늘날의 대중은 여러 차원으로 분산되고 다양한 구성을 지니고 있기에 분석하기 어렵다. 과거의 대중이 일정한 형태를 가진 고체였다면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대중은 정보와 이슈에 따라 액체처럼 유동하다가 이슈와 함께 증발한다. 문제는 그와 같은 시대이기에 선동(propaganda)에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영주의와 진영논리를 염려하지만, 오늘날의 디지털 대중은 특정한 이즘과 이론을 따르지 않는 탈이념적 대중이라는 점에서 요동치는 물결이다. 과거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대중문화가 사회적 시멘트 역할을 한다고 비판했지만, 오늘날의 대중은 ‘접착’이 아니라 간단한 ‘접속’으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소셜미디어의 개인은 분절과 동종집단화 과정의 무한 반복(폐절, 차단 등의 자체 필터링 과정)을 통해 ‘취향최적화’를 이뤄 나간다. 

동종의 취향을 공유한 집단은 공론화 과정에서 그들의 취향에 거슬리는 집단을 힘으로 억압하고 싶은 손쉬운 유혹에 빠지게 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감과 나눔을 반복할수록 배타적 집단의식이 강화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빚는 것이다. 여기에 선동의 대가인 에드워드 버네이즈나 괴벨스도 울고 갈 만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지식인(Digerati)들이 언론인을 자처하며 미디어 공간을 점유해 나간다. 하이테크놀로지로 무장한 친절한 선동가와 대변자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주변에 당신의 주장과 생각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없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당신은 이미 커다란 위험에 빠졌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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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1일 지면게재기사-

조국과 나경원. 386세대의 대표주자로 각각 진보와 보수의 ‘가치’를 대표한다. 조국은 ‘민주주의’를 최고 가치로 삼는다. 민주주의는 경제민주화와 표현의 자유를 뜻한다. 소득주도성장과 국민성장 모두 경제민주화를 위한 것이다. 검찰개혁은 군사 언어가 통제하는 검찰의 위계질서를 시민 언어로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나경원의 제일 가치는 ‘성장주의’. 성장주의는 경제성장과 시장의 자유를 말한다. 현재 한국 사회가 겪는 모든 문제는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사회주의 포퓰리즘 정책 탓에 생긴 것이다. 기업가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지속해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사회 전 영역에 시장 자유를 확대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성장주의는 한국 현대사의 두 기본가치로 서로 경합하면서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함께 일구어왔다. 진보와 보수 모두 공적 담론에서는 민주주의와 성장주의에 기댄다. 진보도 성장주의를 설파하고, 보수도 민주주의를 찬양한다. 가치의 차원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무엇을 앞세우느냐 정도의 차이다. 그런데도 진보와 보수는 마치 가치의 차원에서 완전히 다른 것처럼 격렬히 다툰다. 진보는 보수를 수구꼴통이라 조롱하고, 보수는 진보를 종북좌빨이라 낙인찍는다. 다소 과한 듯하지만, 이는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주고받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어디에나 나타나는 정상적인 정치 과정이다. 사실 이런 ‘만들어진 차이’ 때문에 선거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가 아주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조국과 나경원의 삶을 접하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사회학에서는 가치를 추구하는 방식을 조절하는 규칙을 ‘규범’이라 부른다.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어도 규범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한 종교 안에 수많은 교파가 존재하는 이유다. 하도 싸우길래 사람들은 조국과 나경원이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어느 정도 믿게 되었다. 그런데 목적달성을 위해 온갖 사회자본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너무나 쌍둥이라 화들짝 놀랐다.

“난 나경원과 관련된 의혹이나 소문 또는 팩트에 대해 별로 놀랍지도 화나지도 않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일 거라는 예상이나 편견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조국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뉴스를 접할 때는 허탈 씁쓸. 때론 다소 분노.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가 이런 거였나?”

지방대 자녀를 둔 한 386세대가 대화 도중 내뱉은 한탄이다. 그는 미국에 장기체류할 당시 자녀를 그곳 학교에 보냈다. 귀국할 즈음 아이를 미국에 남겨둘까 잠시 고민하다가 접었다. 돌아오니 당장 극심한 입시교육이 아이를 맞이했다. 영어 특기생 입학을 노리고 외고에 보낼까 하다 그만두었다. 자신이나 아내 모두 ‘혼자 힘’으로 시험 봐서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주변에서 품앗이로 서로 자녀 스펙 쌓아주느라 바쁠 때도 짐짓 무시했다. 자녀는 정시로 대학시험을 보았고, ‘스카이’는커녕 ‘인서울’도 들어갈 수 없었다. 재수했지만 별무소용. 결국, 지방대로 낙찰됐다. 조국과 나경원으로 도배된 뉴스를 보다, 나지막이 읊조렸다. “미안하다, 아들아.”

가치와 규범이 일관된 보수가 차라리 더 낫다! 아마도 적잖은 사람이 이와 비슷한 삐뚤어진 분노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조국 규탄 촛불집회를 연 일부 스카이대생의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나는 시험 보고 들어왔는데, 저들은 부모 덕 본 것 아닌가? 떳떳이 공정사회를 외친다. 그런데 이 시험이란 게 뭔가? 오지선다형, 단편적 토막지식 암기력 테스트다. 시험 한 번으로 평생의 복권을 기대한다. 그렇다면 부모 덕도 기대할 수 없고, 순간 암기력 테스트에도 능하지 못한 학생들은 어떻게 되는가? 부모의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이 부족하다 보니 고급 스펙은커녕 기초적인 인적자본조차 쌓을 형편이 안되는 ‘지방 청년들’. 이들에게 공정이란 스카이나 인서울끼리 벌이는 내부경쟁에 불과하다. 경쟁 밖에 자신을 놓고 가족 안에서만 살 궁리를 한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으니 우짖지도 않는다. 사실 미래를 만들어갈 청년 대다수는 지방에 산다. 이들의 삶을 살피지 않고선 민주주의든 성장주의든 소수 누리는 자들만의 휑한 잔치일 뿐이다.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 ‘국과원(조국과 나경원)’이 역설적으로 일깨운 진실이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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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8일 지면게재기사-

요즘 유난히 ‘단독’이란 단어를 많이 접한다. 언론 종사자에게는 의미가 큰 것 같지만, 단독이라는 머리를 한 기사가 특별하게 느껴진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포털이 모든 뉴스를 한곳에 모으는 상황에서 단독이라는 제목이 무슨 소용인지도 궁금하다.

곧이곧대로 풀어보면, 단독기사는 기자가 누구보다 열심히 취재하여 다른 언론사에서 인지하지 못한 사실을 밝힌 보도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단독기사가 특별하다고 느껴지지 않으니 의아한데, 아마도 단독이 붙은 기사의 충분성이나 짜임새가 부족하여 그런 것 같다. 예를 들어, 경향신문에 게재된 ‘[단독]검 “정경심 교수 남매, 이면계약서 통해 코링크 돈 횡령” 판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살펴보면 “검찰의 말에 따르면 이면계약서를 통해 10억여원을 불법적으로 횡령했다. 지분 0.99%를 얻은 후 매달 800만원을 받았다. 허위계약으로 매월 200만원의 자문료를 받았다”가 주된 내용이다. 

이 기사를 클릭하며 가장 궁금했던 건 ‘이면계약’의 내용이었다. 어떤 계약을 맺었고 무엇이 문제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기사에 명쾌한 내용은 없었다. 검찰에서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은 것인지, 그렇다면 당사자에게 물어보기는 했는지,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기사를 내는 게 옳은 것인지 의아했다. 

궁금증을 안은 채 기사를 곰곰이 살펴보니 적힌 내용만으로는 검찰의 주장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우선 이면계약서를 통해 횡령한다는 게 가능할까? 계약은 갑과 을이 서로 어찌하기로 약속을 맺는 것이니, 표면계약이든 이면계약이든 ‘을이 얼마를 투자하면 갑이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일 것이다. 통상적인 계약이라면 갑과 을은 별개의 주체이므로 을은 횡령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횡령이란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횡령하거나 반환을 거부함으로써 성립하는 죄이다. 흔한 예는 회사의 자산을 관리하는 사람이 회삿돈을 유용하는 경우이다. 

즉 검찰 주장의 앞뒤가 맞으려면 갑과 을이 내부 관계여야 한다. 예컨대 실질적인 회사의 소유자 및 의사결정자(을)가 자기 회사(갑)와 어떤 계약을 맺어 비정상적으로 돈을 받는 경우 등이다. 검찰이 그간 ‘정 교수가 펀드 운용사 경영에 관여했다’는 식으로 주장하였던 것을 고려하면, 같은 선상에서 취재자료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는 기존에 수없이 보도된 ‘정 교수가 펀드 운용사 경영에 관여했다’라는 검찰 주장의 반복에 불과하니 단독 보도로 다룰 만한 새로운 사실로 부족한 것 아닐까? 

이처럼 판단에 근거가 될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 스스로 어렵게 추측을 이어가야 한다면 충분한 기사는 아닐 것이다. 기존의 검찰 주장을 기정사실로 인식하여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 모르겠으나, 기자와 독자의 정보 및 인식이 같을 수는 없으므로 이해를 돕기 위한 부연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펀드 수익과 자문료 등이 갑과 을이 내부 관계라는 혐의를 키우려는 검찰의 근거라면, 통상적인 펀드 수익 및 자문료와 비교해서 얼마나 과다하고 비정상적 수준인지 취재해서 알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단독 보도는 신속해야 하니 기사 내용을 숙고하지 못한 채 내보낼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서 충분한 내용을 담지 못하거나 짜임새가 떨어진다면 독자 처지에서는 의미가 없다. 한 방송사의 보도국장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몇 시간 빠른 ‘시간차 단독’이라며 최근의 상황에 대해 자조 섞인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피치 못하게 언론사끼리 단독 경쟁을 해야 한다면, 좀 더 찬찬히 짚은 별도의 심층 기사로 보완해 주는 방법도 있다. 취재와 기사 작성에 지쳐있겠지만, 경향신문은 신뢰도에서 수위를 다투는 언론사이다. 독자로서 조금 더 수고해주실 것을 바라 마지않는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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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는 어떤 조건에서 일어날까요? 불만이 커지면 시위가 일어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어떤 이론은 경제, 사회적 조건을 따져봅니다. 지배계층의 균열, 억압의 강도 등 정치역학적 조건을 연구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들이 흔히 간과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시위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첫 번째 이론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세상에 불만 없는 사람 없지만 모든 사람이 늘 시위를 하지는 않죠. 2016~2017년 촛불집회가 절정에 달했을 때 참가자 수가 200만명 정도였습니다. 5000만명을 넘는 인구 10분의 1에도 못 미치지요. 이를 뒤집어 보면 시위는, 특히 촛불집회 같은 대형 시위는 정말 극적인, 과장을 보태면 기적적인 현상입니다. 그 바쁜 사람들이 일상을 포기하고 거리에 나섭니다. 공권력이나 상대방과의 충돌 가능성도 있죠. 게다가 나 하나 안 나가도 시위 크기는 비슷합니다. 시위의 열매 또한 내 참가와는 관계없이 따먹을 수 있죠. 그래서 이를 다 무릅쓰고 일어나는 시위는 그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2016년, 대통령이 나라를 버린 지 오래됐음을 알게 됐습니다. 야당은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지 못한 채 헤맸죠. 그런 탓에 국민이 직접 나섰습니다. 이들이 광화문을 가득 메우고서야 국회, 법원, 정부가 움직였습니다. 이 사례는 민의의 무서움도 보여주었지만, 대의정치를 기본으로 하는 민주체제의 한계도 보여주었죠. 수백만 시민이 거리를 메워야 할 만큼 큰 한계였습니다. 2019년, 또다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지난달 28일 열린 ‘제7차 사법적폐 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에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반포대로와 인도를 가득 메웠죠.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한 검찰수사가 결정적 방아쇠 역할을 했습니다. 과도한 검찰수사로 정치인을 잃은 아픔이 있는 이들은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을 겁니다.

그래서 이번 시위는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일제와 한민족, 전두환과 학생세력, 박근혜와 시민, 이렇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가 아니니까요. 검찰은 법무부 소속 정부 기관일 뿐입니다. 법무부 장관의 지휘를 받는, 대통령 한참 밑의 기관입니다. 이를 상대로 문재인 지지자들이 시위한 셈입니다. 어찌 된 걸까요. 검찰도 문재인 정부의 일부고 윤석열 검찰총장도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했는데 말이죠. 물론 이번 사태가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조국 대전’이라 불리는 이 논쟁은 여러 주제가 섞여 있습니다. 검찰수사가 과도했는지, 정치적인지는 대표적 이슈입니다. 조국 장관 가족의 행태에 대한 법적, 도덕적 논의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검찰개혁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전망도 분명치 않죠. 논쟁의 열기도 대단해 소위 진보진영 안에서도 서로 얼굴을 붉힙니다.

그래도 검찰은 정부 기관일 뿐입니다. 일개 정부 기관을 다스리는데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거리를 메워야 한다면 대통령의 정치력을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돌이켜보면 검찰과의 대립뿐 아닙니다. 정부·여당과 자유한국당 간의 대립은 몇 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박근혜 지지 세력의 목소리도 잦아들지 않고 있죠. 다른 한편으로 노동계와의 관계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기대했던 정치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이 세상은 빨리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달 말이면 미국 하원은 트럼프 대통령 탄핵 절차를 마치리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습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하원에 소환됐죠. 탄핵이 진행될수록 트럼프 대통령의 정부 장악력도 떨어지고 다른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을 겁니다. 북·미관계 개선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크죠. 이렇게 되면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업적인 한반도 평화정착에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상황이 악화되면 중국의 입김은 더욱 커질 테고 미·중 대립은 격화될 겁니다. 

한국은 선택을 강요받을 테죠. 이에 대비하는 외교전략은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일외교, 환경문제 등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죠. 장관 하나를 두고 나라 전체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이러고 있는 게 답답할 따름입니다. 모르고 있다면 그 또한 심각한 문제죠.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칼로 자르는 결단을 촉구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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