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상자와 파란 상자가 있다. 빨간 상자엔 1만원이 들어있고, 파란 상자엔 100만원이 들어있거나 혹은 비어 있다. 당신의 마음을 정확히 읽는 점쟁이가 파란 상자에 돈을 넣을지 말지 결정했다. 당신이 상자 두 개를 모두 가져갈 것이라면, 점쟁이는 벌써 파란 상자를 비워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파란 상자만 가져갈 것이라면, 이미 점쟁이는 100만원을 넣어 뒀을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유명한 뉴컴의 역설이다. 언뜻 생각하면 둘 다 가지는 것이 이익이다. 무조건 1만원은 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쟁이는 당신의 행동을 예측했다. 그러므로 파란 상자만 가지면, 100만원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점쟁이의 행동은 이미 끝나지 않았는가? 현재의 선택이 과거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으니, 두 상자를 다 갖는 것이 더 이득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점쟁이가 이미 읽었으니…. 수십 년째 논쟁 중이다.

문제를 조금 바꿔보자. 빨간 상자에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방역에 실패하여 다수가 사망하는 미래가 들어있다. 파란 상자에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방역에 성공하여 희생을 최소화하는 미래가 들어있거나 ‘혹은’ 없다. 모든 이가 파란 상자를 선택할 요량이라면, 분명 파란 상자에는 바람직한 미래가 있다. 그러나 각자 제멋대로 상자를 골라, 즉 두 상자 다 가져가면, 파란 상자에는 아무것도 없다. 위생의 여신, 히기에이아는 과연 파란 상자를 비워 두었을까? 채워 두었을까?

두 번째 상황은 뉴컴의 논리와는 약간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지금 우리의 행동에 의해서, 히기에이아가 이미 과거에 내린 결정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는 그 결과를 보고 선택을 정당화할 것이다. ‘거봐라. 원래부터 파란 상자에 아무것도 없지 않았느냐?’라고 말이다.

1877년, 밀라노 남쪽 피아첸차에서 희한하게 생긴 유물이 발견되었다. ‘피아첸차의 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청동 조각은 말 그대로 간 모양이었다. 각 부분에 아직 다 해독되지 못한 글이 적혀 있다. 고대 로마에는 양이나 닭의 창자를 보고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고, 세상의 미래를 예측하는 자가 있었다. 이들을 ‘하루스펙스(haruspex)’라고 하는데, ‘하루’는 내장, ‘스펙스’는 본다는 뜻이다. 수메르문명에서 유래한 오랜 전통이다. 구약 에스겔서에도 바빌로니아 왕이 짐승의 간으로 점을 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2020년, 하루스펙스의 시대가 다시 찾아왔다. 의사가 점쟁이의 역할을 내려놓은 지 수천 년이 지났는데, 다시 그 일을 떠맡게 되었다. 재감염자가 나왔다는 말에 환율이 요동치고, 백신이 개발된다는 말에 주가가 폭등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이다. 불안한 이들은 질병관리본부의 ‘예언’만 바라보며 실망과 안도의 한숨을 교차 반복한다. 예전에는 닭 간이었고,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다. 물론 로마 시대의 하루스펙스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럽지만.

“미래가 우리 눈앞에서 현재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급변의 시대, 인간이 이토록 한 치 앞도 확신하지 못한 적은 없었다.”

철학자 에릭 호퍼의 말이다. 그동안 쌓아 올린 문명은 이토록 취약한 것이었을까? 역사책에서 현재에 관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고 호퍼는 단언한다. 과거 세상과 너무 판이하다. 대신 인간의 조건, 즉 심리에 관한 통찰이 원하는 해답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인간 스스로 인류사에 기여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미래에 관한 예언은 호퍼의 말마따나 ‘우리 시대의 의미 있는 역사는 우리가 만든다는 가정’하에 해야 한다. 사실 지금의 팬데믹도 과거의 우리가 선택한 미래다. 히기에이아는 진작에 인류의 미래를 결정해 뒀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행동을 통해, 그가 내린 과거의 결정을 바꿀 수 있다. 두 상자를 모두 가져갈 것인가? 파란 상자만 가져갈 것인가?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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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5일 서울의 한 엘리베이터 안. 마스크를 쓰지 않은 한 남성이 기침하자 다른 남성이 왜 마스크도 안 쓰고 기침을 하냐고 따졌다. 뭔 훈계냐며 맞받아치자 격분해 몸싸움을 벌였다. 3월9일 광주의 한 주차장. 마스크 없이 운전하러 온 대리기사에게 왜 마스크를 안 쓰고 왔냐고 손님이 물었다. 대리기사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분노로 멱살을 휘어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같은 달 17일 부평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지나가던 행인을 한 남성이 쫓아가 따져 물은 후 목을 조르고 폭행했다.

이달 5일 권영진 대구시장은 공공장소에서 의무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정부가 이날부터 ‘사회적(물리적) 거리 두기’를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완화했지만, 코로나19가 가장 심했던 대구는 이와 별도로 강도 높은 방역대책이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5월13일부터는 이를 위반하면 관련법에 따라 고발 조치하여 최대 300만원 벌금형을 받을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대구참여연대는 충분한 논의와 공감 없이 내려진 이번 행정명령이 시민을 계도와 통제 대상으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했다. 대구시는 5월26일까지 계도 기간을 연장하고 그 기간에는 벌금형을 유예하겠다며 한 걸음 물러섰다.

코로나19가 도시 공공장소의 풍경을 뒤바꾸고 있다. 도시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은 대개 서로 이름도 생애사도 모르는 이방인으로 만난다. 그런데도 같은 사회적 공간을 점유하며 함께 질서를 만들어가야만 한다. 이방인들은 상대방에 대한 즉각적인 관찰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상호작용의 질서를 만들어간다. 이를 위해 상대방의 겉모습에서 얻은 정보가 실제의 그를 드러낸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한정되어 있어 그의 진정한 동기, 목적, 의도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심하게 된다.

도시 공공장소의 삶은 신뢰와 의심을 동시에 해야 하는 역설에 놓여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도시 공공장소에 나서는 사람은 모두 자신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야만 한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을 상대방에게 심어주지 않는 겉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누구든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겉모습을 하고 공공장소에 나올 의무를 지닌 이유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이를 ‘몸 숙어’(body idiom)라 불렀다. 어느 사회나 도시 공공장소에 나올 수 있는 몸 숙어는 그 사회 특유의 방식으로 관례화되어 있다. 이 관례화된 몸 숙어를 이해하게 되면 생면부지의 이방인들도 함께 상호작용의 질서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정상적인 몸 숙어를 드러내는 사람은 타자가 접근할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놓는다. 같은 공간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관찰하거나 거꾸로 자신이 그를 관찰하는 게 두렵거나 꺼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정상적인 몸 숙어는 상대방으로부터 온당한 사유가 없는 한 실제 접근되지 않도록 막아준다. 정상적 몸 숙어를 하고 공공장소에 나서는 일은 호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 호혜성의 규범이 깨지면 감정 질서에 균열이 일고 분노가 삐져나와 마침내 싸움으로 번진다. 

한국 사회에서 마스크는 이제 도시 공공장소에 나갈 때 갖추어야 할 몸 숙어의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마스크 착용은 자신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상대방에게 드러내는 규범적 행위다. 이러한 변화된 규범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필요한 충돌과 싸움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특정한 몸 숙어를 법으로 강제해서는 안 된다. 잘못을 따져 처벌하는 법의 정의만 가지고는 공공장소의 질서를 안정되게 만들어갈 수 없다. 서로 접근 가능한 사람으로 열어놓으면서도 온당한 이유 없이는 접근당하지 않도록 안내하는 새로운 몸 숙어를 이해하고 호혜적으로 실천하는 게 먼저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suz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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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학벌없는사회’란 단체 운동을 시작할 때 ‘여기는 학벌 좋은 사람들이 모여 학벌 없애는 운동을 한다’는 비판을 받곤 했다. 특히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주로 그런 식으로 공격했다. 그들의 비판은 문제를 지적해서 운동을 성찰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운동주체를 훼손함으로서 운동의 대의를 훼손하려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우리는 당당하게 반론했다. “이 운동을 학벌 없는 사람이 하면 ‘열등감 때문에’ 한다고 하고, 학벌 있는 사람이 하면 ‘계급적 여유가 있으니’ 하는 거라고 비난하면 이 운동은 대체 누가 해야 합니까?” 

하지만 그런 비판이 꼭 보수우파 쪽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회원 중에는 평생 학벌 때문에 받은 서러움이 사무쳐서 단체에 가입한 사람도 꽤 있었다. 그런 분들의 입으로 저 말을 들을 때, 어떻게 대답했어야 할까? 우리는 조선일보에 돌려주는 대답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맞는 말이지만, 옳은 응답은 아니었다. 물음의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응답하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데 저런 질문으로 공격을 당하다 보니 억울해서 늘 항변이 앞섰다. 말하려고 했던 게 조선일보와 같은 의도는 아니었을 텐데, 물음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논박당한 사람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최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이용수 선생님이 던진 물음 앞에서 같은 고민을 한다. 우리는 제대로 응답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군위안부운동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과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운동, 이 운동이 던진 물음에 실천적으로 응답하려는 수많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용수 선생님은 30년을 그 운동의 역사를 직접 목격해온 산증인이다.

그런 사람이 말하고자 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의미는 해석되지 않고 진위만 파헤쳐진다. 운동도 30년을 지나오면 관성이 생기고, 권력도 생긴다. 헌신적으로 이끌어온 사람은 운동의 상징이 되고, 상징자본을 얻는다. 수요시위와 모금에 대한 비판은 운동의 관성에 대한 제동이 아니었을까?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모른다는 말도, 사업방향과 의사결정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국회 가선 안 된다는 말은 운동의 사유화에 대한 경계가 아니었을까? 지난 총선 당시 일본군위안부운동은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 후보 전략에서 반일투쟁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정대협 윤미향은 알아도 국회의원 윤미향은 모른다는 말은 그런 우려와 불신을 표현한다. 

어쩌면 이 모든 물음들은 한국 시민사회운동에 던져진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운동사회’라는 동질적 집단 속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키워간 우애가 관계자본이 되고, 정부 지원사업이나 프로젝트 수주에서 정보망과 지원망이 되기도 했다. 중간계급 시민의 과대대표성과 타협적 관성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협력관계는 민주정부를 거치면서 점점 강화되었다. 밀착될수록 비판도 요구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선생님은 이 운동이 더 어려워질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난 30년, 노동자 민중도 알게 된 것이 있다. 우파정권하에서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민주정권에서는 정권의 협력자가 되고, 똑같은 친재벌 반노동 정책을 계승해도 문재인 정부에는 침묵한다는 것. 예전에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김영삼이 당선되었을 때 운동권 3분의 1이 떨어져 나갔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재야가 사라졌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다고. 이용수 선생님의 물음도 ‘남은 사람들’의 물음과 닿아있다. 이것은 운동의 주체와 방법과 방향을 멈춰 세워 성찰을 요청하는 소중한 물음이다. 운동 자체를 훼손하려는 우파의 공격에 대응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이 물음에 응답해야 한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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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 이후 고용충격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다. 주위에 문을 닫은 식당이 보이고, 가게 직원들이 보이지 않는 곳도 눈에 띈다. 아마도 잠시 쉬거나 휴직한 것 같다. 그런데 지난 4월 취업자 수가 47만6000명이나 줄어 3월보다 더 안 좋아졌다. 일시·휴직자(148만명)와 일자리 찾기를 단념한 사람(240만명)은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많은 수치다. 취약계층에 덮친 ‘코로나19 고용쇼크’로 불릴 만하다. 통계상 실업자가 줄고, ‘그냥 쉬었다’는 비경제활동인구가 급증한 것은 더 심각한 신호다. 

노동시장의 가장 큰 타격은 사회적 취약층에 집중되었다. 해고가 비교적 쉬운 터라 코로나19 사태의 직접적인 피해는 서비스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코로나19는 여성, 청년, 임시일용직에게 직격탄이었다. 일터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경제적 약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보니 직원이 있는 자영업자는 줄고, 혼자 겨우 버티는 자영업자, 이른바 ‘나홀로 사장님’은 1년 전보다 10만7000명 증가했다. 취업자 수가 이렇게 줄어든 건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 문제는 앞으로 고용상황이 더 나빠질 위험이 크다는 점이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접하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한 번의 파도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는 어떠한 대가가 따르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좀 더 지켜봐야 할 상황이 아니라 지금이 바로 위기 상황이다. 현재는 국민을 보호하고, 향후 경제회복을 도와야 할 시점이다. 그와 동시에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를 해결하는 제도적 개혁을 준비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일자리에서 밀린 취약층의 고용보험 개편이다. 현재 고용보험 가입자는 취업자 10명 중 4명(48.4%)에 불과하다. 1995년 제정된 고용보험은 ‘실업·구직급여, 상병수당’ ‘직업능력개발사업’ ‘육아휴직·출산전후급여’를 보장한다. 고용보험은 직업훈련, 고용촉진 그리고 실업 등 노동시장 위험 예방 효과를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특히 실업급여는 실직자의 생활안정 및 재취업 준비에 큰 도움이 된다. 개인이 부담해야 할 몫을, 정부와 사회가 함께 부담하는 취지가 담긴 것이다.

현재의 고용보험은 ‘정규직’을 주요 대상으로 설계되었기에 미취업 청년, 자발적 퇴사자, 아르바이트, 예술인,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자영업자 등은 배제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다수는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헌법적 권리로 규정하고 거의 대부분 적용받도록 보완해왔다. 사실 미국의 뉴딜(New Deal) 정책은 공공근로와 제도개혁이 같이 진행되었다. 대공황 시기 뉴딜 정책은 미국 경제의 황금기를 만든 배경이며,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하고 노동기본권 보장의 토대였다. 우리도 코로나19 시기에 고용유지와 일자리 창출만이 아니라, 고용보험 제도개혁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최근 토마 피케티나 마이클 샌델도 ‘더 공정한 세상 만들 기회’나 ‘정당하게 보상하는 안전한 세상’ 등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 미친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전 국민 고용보험 기초를 놓겠다”고 했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전 국민 고용보험이 복지국가 핵심으로, 21대 국회 1호 법안이 돼야 한다”는 화두를 던졌다. 고용보험 미가입자(13.8%)만이 아니라, 적용제외 대상(31.4%)까지 포괄하는 고용보험 필요성이 힘을 받고 있다. 

모든 일하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고용보험 모델은 덴마크와 프랑스다. 이들 국가는 조세에 기반한 사회적 보호 차원에서 논의가 시작되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새로운 규범과 표준(New normal)이 아니라, 더 나은 규범과 표준(Better normal)이어야 한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 sadae1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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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을 언어의 형태로 전달할 때 종종 소통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코끼리를 묘사했지만 하마로 알아들으면 방법이 없다. 이런 일은 과학적 발견의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1999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발사한 화성 탐사선이 화성 궤도에서 추락했다. 조사 결과 제작사인 록히드 마틴 팀은 구 영국식 단위를 사용했지만, 발사를 맡은 NASA 팀은 미터 단위를 사용한 탓이었다. 50마일(80㎞)이라고 했는데 50㎞로 잘못 들은 것이다. 소통의 과정에서 혼동의 여지가 없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다.

과학적 개념이 문화적 차이나 언어적 차이로 다르게 전달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물리학이나 화학의 주요 발견은 수학 방정식의 형태로 표현된다. 읽는 사람이 기본적인 수학적 훈련을 받았다면, 인종이나 언어 또는 문화와 관계없이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그래서 수학은 과학의 언어라고 불리는데, 모든 문화적 차이를 넘는 보편 언어의 성격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갈릴레오는 “자연이란 책은 수학이란 언어로 쓰여있다”고 말했다. 

수학의 언어적 측면을 깊이 파고든 대표적인 사람으로 버트런드 러셀을 들 수 있다.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까닭에 그를 철학자 또는 작가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러셀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수학 교수를 지내며 비유클리드 기하학 논문을 썼다. 수학을 논리학과 동일시해서, 모든 수학적 개념은 기호논리학으로 정의되고 증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칸토르 집합론의 한계를 넘기 위해 러셀 패러독스를 창안했고, 화이트헤드와 함께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를 저술했다. 20세기의 저명한 언어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박사과정 제자였는데, 러셀 자신이 이 천재 제자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러셀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평화운동을 벌이다 1916년 케임브리지 교수직에서 해임된 뒤에 나중에 복직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평화 활동 및 저술 활동을 왕성히 벌여서 노벨상까지 받게 됐으니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움직이지 않는 점과 선을 다루는 전통적인 유클리드 기하는 정적인 세계관을 대변하며, 2000년 동안 유럽에서 과학의 언어 역할을 했다. 하지만 17세기에 천체의 운동을 다루는 과정에서 출현한 미적분학은 새로운 동적 세계관의 신천지를 열었다. 움직이는 세계를 다루는 언어가 된 것이다. 물체의 운동을 다루는 뉴턴 방정식이나 전기와 자기의 움직임을 다루는 맥스웰 방정식, 양자역학의 슈뢰딩거 방정식은 모두 미적분의 언어로 표현된 인간 지성의 대표작이다. 미적분이라는 새로운 언어가 근대과학의 발전을 촉발했듯이, 새 언어는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셜록 홈스의 논리적 수사가 수학의 언어적 성격을 보여주는 거라면, 비약적으로 발전한 요즘 과학수사(CSI)는 수학의 과학기술적 측면을 보여준다. 한동안 유행하던 미국 드라마인 <넘버스>는 2005년부터 5년 넘게 여섯 시즌 방영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인기 드라마였다. FBI 요원이 수학 교수인 동생의 도움을 받아 어려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 드라마를 위해 수학 계산 소프트웨어 회사인 울프람은 수학자 자문팀을 구성하여 협조했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 사용된 수식이나 영상은 대강 써 내려간 게 없다. 흐릿한 영상을 컴퓨터로 처리해서 선명한 영상을 얻는 장면은, 부족한 데이터로부터 편미분방정식을 사용한 역문제로 영상을 복원해내는 수학 이론의 쓰임새를 보여준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미 정립된 공학지식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적 형태의 문제가 나타나는데, 알려진 수학적 지식을 일상적으로 응용하는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기도 한다. 이런 문제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요하고 종종 새로운 수학을 창조하기도 한다. 마치 천체의 운동이 뉴턴을 자극한 것처럼.

<박형주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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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백작을 아십니까. 1970년대에 방영된 로봇 만화의 등장인물입니다. 악당 중간보스로 남자, 여자 몸을 반반씩 붙여 만든 충격적 비주얼이었죠. 음식으로 치면 짬짜면쯤 될까요. 요즘 한국은 이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BBC도 산케이도 ‘한국 다시 봤다’ ‘K방역’ 호평 기사 5000건” “24개국에서 文에 쏟아진 K방역 러브콜, 국가위상 달라졌다.” 제목만 봐도 뿌듯합니다. 과장도 아닙니다.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가 한 자릿수까지 내려가고 사회는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프로야구 개막, 등교개학, 해외에서 보는 한국은 그저 부러울 뿐이죠. 선진국이란 말이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정작 선진국에서는 코로나19 위기가 이어지고 있죠. 특히 미국 사정은 심각합니다. 현재 전 세계 확진자 셋 중 하나가 미국에서 나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방과 책임 전가에 여념이 없습니다. 11월 대선 승리를 위해 벌써 경기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일본도 정부 실수로 온 나라가 위기를 겪고 있죠. 독일을 제외한 서구 선진국 거의 다 코로나19 위기를 호되게 겪었습니다. 그러니 한국을 보는 세계의 눈이 다를 수밖에요. 자긍심이 자연 솟구칩니다.

그러나 한국을 선진국이라 하기 힘든 것도 있습니다. 최근 이천 물류센터 화재로 38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대로 “후진적이고 부끄러운 사고”였습니다. 우레탄폼과 용접 작업을 동시에 하면 안 된다는 고용노동부 지침을 어기며 작업을 강행했습니다. 안전관리 책임자도 현장에 없었죠. 희생자 대부분이 하청업체에서 고용한 일용직이었기에 피해보상이 미미할 우려도 제기됩니다. 경영책임자에게 노동자의 안전의무를 광범위하게 부여하고, 어기면 강력히 처벌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2017년 상정됐지만 20대 국회에서 자동폐기될 듯합니다.

위험의 외주화를 경계하는 외침이 끊이지 않지만, 정규직이라고 꽃길을 걷는 게 아닙니다.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노후를 준비해도, 노년층은 결국은 일용직으로 몰리기도 합니다.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란 말이 그 참담함을 잘 드러냅니다. 헌법이 보장한 권리인 노조 설립마저 쉽지 않죠. 이런 권리마저 법적으로 잃어버린 노동자도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코로나19 위기는 전 국민의 위기였습니다. 무게를 똑같이 느끼지는 않았지만, 누구도 온전히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저 사람에의 위협은 내 것이기도 했고, 내 문제는 나만이 것이 아니었죠. 대구로 지원의 손길이 이어지고 물리적 거리 두기가 잘 실천된 이유였습니다. 한 회사나 특정 업종의 문제가 아닌, 나라가 부도날 위기에 처했을 때 온 국민이 뭉쳤던 예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문제에서는 이해가 극명하게 갈립니다. 대기업은 작은 기업을 쥐어짜죠. 그 밑에서 하청업체는 얼마 남지 않은 이윤을 놓고 노동자와 맞섭니다. 정규직 노동자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대신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에 자본과 손을 잡죠. 외국인 노동자는 사회적, 관습적 보호마저 누리기 힘듭니다. 정년을 늘리면 청년이 반대하고, 청년주거를 늘리면 동네가 들고일어납니다. 저 사람에의 위협은 내 이익이고, 내 문제는 나만의 것이니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끝없는 사투를 벌이는 정글과도 같죠.

이 투쟁은 끝이 없습니다. 청년은 결국 노인이 되죠. 비정규직을 벗어나도 정규직으로 싸움을 이어가야 합니다. 회사를 차려도 더 큰 기업을 상대로, 중소기업으로 기껏 키워도 대기업을 상대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노동문제도 코로나19 위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구도 온전히 피할 수 없는, 전 국민의 위기인 것이죠. 모두가 같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착각도 교정해야 합니다. 노동의 위기는 사실 노동만의 문제가 아닌, 문화·도덕·정치·환경·사회 전반을 가로지르는 용마루이기 때문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TXNAM@salisbury.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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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공개석상에 나타났다. 지난달 11일부터 ‘은신(隱身)’한 이후 20일 만이다. 조선중앙방송은 지난 2일 김 위원장이 노동절(5월1일)에 평안남도 순천 인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노동신문이 전날 사설에 “어떤 천지풍파가 닥쳐와도 영도자만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열혈충신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실은 지 하루 만에 건재 소식을 내보냈다.

김정은의 잠행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해 1월26일~2월16일 21일간 북한 매체에서 사라진 적도 있었다. 2014년엔 무려 41일간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8년에 무려 51일 동안 잠적했을 때도 북한 매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의도했든 아니든 세계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한 셈이다.

대조적으로 김 위원장의 소재를 두고 온갖 풍설을 만든 탈북 정치인과 북한 전문가들, 그리고 사실 확인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이를 보도한 일부 국내외 언론들만 머쓱해졌다. 실제 어떤 이는 “김정은이 스스로 일어서거나 걷지 못하는 상태일 것”이라는, 마치 김정은의 최측근으로부터 획득한 듯한 극비의 내용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또 다른 이는 김정은이 “현재 사망했거나 반신불수 상태에 있다”고도 했다. 김 위원장의 사망을 99% 확신하는 이도 있었다. 반대로 “김 위원장은 살아있고 건강하다”면서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족집게 주장’도 나왔다. 대부분 자신들의 경험에 바탕을 둔 ‘감상(感想)’이자 ‘관측’이었다. 왜 이런 인식의 차이가 벌어질까.

인식은 본질적으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보고, 듣고, 만지고, 맛을 보는 일련의 경험들에 우리 뇌가 반응해왔던 기억들을 축적해 나가는 ‘과정’이 인식이다. 인간의 경험을 벗어나서 대상 자체의 인식에 도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식은 인식자(認識者)가 얻은 하나의 결과물이며 개인마다, 집단마다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인식은 선택적 경험이자 기억으로 뇌 속에 존재하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보고자했던 사건(일)과 실제 발생한 사건(일) 사이에서 일어난 판단의 괴리에서 인식의 불일치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김정은의 ‘간헐적 은신’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여전히 숙제이다. 김 위원장이 처음부터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여 의도적으로 숨은 속임수인지, 아니면 김정은으로서는 ‘루틴’한 동선(動線)은 아니긴 해도 애당초 유별나게 숨으려고 한 의도는 없었던 것인지, 어떤 이유에서든 태양절에 불참한 것을 오히려 국외 감시자들이 과잉해석하면서 결과적으로 불필요하게 ‘잠적 승수효과’를 유발한 것은 아닌지 분석은 필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국제정치학에서 국가, 체제, 구조 등 추상적 개념들의 대상이 실제 존재하는가를 두고 오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김정은의 은신 역시 인식자가 어떤 시각 내지 지평에서 보느냐에 따라 젊은 지도자의 잠적이 일과성 해프닝에서부터 ‘4세대 권력계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식론이 존재론을 구성하게 되는 셈이다.

복기를 해보면 한·미·중 당국자들이 영리하게 발신한 신호들에서 ‘특이사항 없음’은 공통적이며, 일관되게 읽혔다. 이는 3국이 각자 가동하고 있는 휴민트와 기술정보들을 바탕으로 김 위원장의 물리적 상황 내지 신체 상태를 놓고서 최소한 유고(有故) 상황은 아니라는 일치된 결론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김 위원장이 금명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임을 강하게 암시했다. 한바탕 소동을 유심히 지켜봤을 극장국가 북한이 코로나19 위기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향후 행보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가 궁금하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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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우파에 일본과 미국이 있다면, 한국 좌파에는 서유럽과 북유럽이 있다. 보수라 불리는 우파는 전기, 가스, 상수도, 병원까지 민영화하자고 주장했다. 진보라 불리는 좌파는 독일, 스웨덴, 핀란드 예를 들며 주거, 의료, 교육 등 다방면으로 복지를 늘리자고 했다. (세금을 올리자는 말은 없었다.) 치고받으며 싸우는 동안 대통령 선거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국정 철학도 정권에 따라 달라져 개혁을 했다가 돌아갔다가, 풀었다가 줄였다가, 시스템을 들여다보면 여기저기 기워 만든 조각보 같다. 대표적인 것이 의료제도로 무슨 모델이라고 말하기도 어중간한 그야말로 한국형이었다.

건강보험 없이 코로나19 치료를 받으면 최소 5000만원이 든다는 미국식 모델은 애초에 갈 길이 아니라고 여겼지만, 막상 스웨덴에 살 때 가장 불편한 점이 도무지 의사를 만나기가 어려운 병원이었던 터라 스웨덴 모델로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한국에 와있는 미국인 의사 친구는 한국의 의료제도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모델이라고 했다. 민간영역으로 두고 경쟁하며 영리를 추구하지만 규제가 많아 공공성이 있고 건강보험 덕분에 미국과 비교해 합리적인 가격에 고품질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어정쩡한 한국형 모델이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같은 시스템이라도 메르스 때는 지금과 달랐으니 단지 제도나 관료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때의 경험에 정치적 결단력, 중앙집권적 통치체계, 높은 시민의식과 창의성, 약간의 유난스러움이 고루 결합해 좌파와 우파가 찬양해 마지않던 어떤 나라보다도 이 고약한 바이러스를 잘 막아냈다.

각종 외신을 통해 쏟아지는 한국식 방역에 대한 찬사를 보며 명치끝부터 솟구치는 뿌듯함에 취하는 일이 코로나19 시기 유일한 낙인 듯 싶었다. 그 와중에 시기 어린 비난도 있었다. “모바일을 활용한 한국의 추적 방식은 사생활 침해” “한국은 군부 독재 경험해 순종적” 각각 프랑스와 네덜란드 매체에 실린 말이다. 언제부터 한국에 관심이 있었다고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런 무례한 말을 할까 싶었지만 다시 보니 무너진 우월감을 감추기 위한 조바심으로 읽혔다.

한편 지향으로 삼던 여러 나라가 위기에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갈피를 잃었다. 우리 것도 아닌 남의 모델을 두고 이 길이 맞네, 저 길은 막다른 길이네 하다가 내비게이션의 전원이 나가버린 격이다. 용케 중간 목적지에 다다랐지만 둘은 여전히 아웅다웅 중이다.

‘포린 폴리시’는 엊그제 “미래는 아시아-하지만 중국식은 아니다”라는 글을 내며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을 실었다. 처음 들은 칭찬에 우쭐대는 아이처럼, 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토록 자신이 없었을까? 의도한 적은 없지만 한국의 어중간한 현재가 우리도 모르는 새 클린턴과 블레어가 추구했던 제3의 길, 루스벨트가 연구했던 스웨덴식 타협안(The middle way) 비슷한 무엇인가가 된 것은 아닌가?

북유럽의 아무리 좋은 제도도 한국에 가져오면 다른 결과가 나온다. 역사와 문화, 맥락에 대한 고민 없이 수십년 가꾼 열매만 보는 것은 사과나무에 접붙여 오렌지를 맺길 바라는 격이다. 북유럽 모델이건, 미국 모델이건 총천연색 세상에서 흑백을 두고 다툴 이유가 무언가? 한국에 맞는 색과 농도를 취해 우리의 길을 가면 될 일이다.

어쩌다 보니 한국의 현재가 이번 위기를 대응하기에 적절했을 뿐, 오늘의 성과에 취해 있을 이유도 없다. 정치권이 여론을 좇아 100% 대 70% 줄다리기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그린뉴딜을 발표해 인프라를 정비하고, 고용유지 지원금을 내려 보내고, 해외자본의 기업사냥을 막기 위한 대비책을 낸 나라도 있다. K모델이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싸울 시간 없다. 2라운드는 경제회복이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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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이더스>에서 인디아나 존스는 네팔로 향한다. 나치가 좇는 성궤의 단서를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스승은 죽었고, 첫사랑이었던 그의 딸 마리온이 술집, ‘레이븐’을 홀로 운영하고 있었다. 속편에서 리버 피닉스가 분한 젊은 인디아나에게 중절모를 씌워준 인물, 에브너 레이븐우드의 실제 모델이 바로 시카고대학의 인류학자 로버트 브레이드우드 박사다.

고고학과 보물찾기의 차이가 별로 없던 20세기 초반, 브레이드우드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소택지를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유물이 쏟아지는 우루크의 와륵(瓦礫, 무너진 기와) 더미에서 보물찾기에 열을 올리던 동료를 뒤로하고, 더 오랜 과거로 찾아나선 것이다. 대학 당국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박물관에 전시할 번쩍거리는 왕관이 없을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인류의 근원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오랜 설득 끝에 겨우 탐사대를 꾸려 자그로스산맥 기슭의 한 언덕, 자르모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대성공이었다. 무려 15층에 이르는 신석기 초기의 주거지를 발굴했다. 다양한 농경 유물은 있었으나, 국가 조직의 흔적은 없었다. 기원전 약 7000년경,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다. 

브레이드우드는 비록 성궤를 찾지는 못했지만, 농경과 국가 형성은 서로 다른 이야기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길가메시가 우루크의 왕좌에 오른 때는 이로부터 한참 뒤, 기원전 2800년경이니 말이다. 이후 여러 발굴을 통해 농경은 신석기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수렵채집인도 종종 정주 생활을 했음이 밝혀졌다. 농경, 정주, 국가, 문명이라는 표준 서사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국가의 성립을 위해서는 수천년을 기다려야 했고, 가까스로 세워진 국가는 단명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기원전 20세기경, 수메르에 한 사내가 살았다. 부유하고 어진 남자였다. 가족과 친구도 많았다. 그러나 어느 날 끔찍한 질병에 걸린다. 설상가상 빈털터리가 되고, 졸지에 외톨이가 되었다. 비탄 속에서 이렇게 신음한다.

“나의 바른말은 거짓이 되고, 악의를 가진 병은 내 몸을 에워싸는구나. 나의 신이여. 대체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고 버려둘 것인가?”

점토판에 쐐기문자로 기록된 사내의 이야기는 이후 ‘루드룰 벨 니메키’란 이름의 시가 되었다. 지혜의 신을 찬양한다는 뜻이다. 구약성서 욥기의 원작이자, ‘고통받는 의인의 시’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인류의 오랜 질문이다. “열심히 올바르게 살았는데, 왜 나는 아픈 질병에 걸리고, 가진 재산을 잃고, 가족과 친구가 떠나가는가?”

농경의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이견이 별로 없다. 바로 질병과 굶주림이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농경이야말로 ‘인류사 최악의 실수’라고 했다. 국가 형성이 반만년 동안 지연된 이유 중 하나도 질병이다. 애써 쌓아 올린 도시가 역병으로 인해 끊임없이 무너졌다. ‘메소포타미아는 만성적이고 치명적인 전염병 확산의 중심이 되었고, 파멸에 파멸을 거듭했다.’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의 말이다. 농경 사회가 수렵채집 사회를 압도한 것은 생산 방식의 효율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풍토병이 된 농경 사회의 전염병이 수렵채집인을 몰살시키며, 점점 주변부로 내몰았다. 

이미 300만명 가까이 코로나19를 앓았고, 20만명 이상이 죽었다. 깊은 애도를 표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후유증은 모두가 고통스럽게 나누어야만 한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은 것일까? 죄는 없다. 질병은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굳이 원인을 찾는다면, 처음에는 농경이었고 이제는 생태계 파괴와 무분별한 세계화다. 수천년 전 수메르인은 아마 자신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한 번은 실수할 수 있지만, 두 번은 곤란하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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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버스, 택시, 고속철, 비행기, 선박을 타고 자유롭게 이동한다. 사무실, 공장, 농장, 공사장 등 일터에 나가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한다. 시장, 백화점, 쇼핑몰, 음식점, 술집, 공원, 야구장, 축구장에 나가 사람들과 함께 소비하고 즐긴다. 교회, 성당, 사찰, 서원에 나가 사람들 틈에 끼여 공동 집회를 연다. 학교, 학원, 유치원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공부한다. 코로나19 확산 이전에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일상의 삶이다. 이 당연한 삶이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을 통해 의심에 처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일상의 삶 자체가 위기에 처한다는 사실이 비로소 도드라진다. 그제야 일상의 삶이 우리 모두 대면 상호작용을 통해 구축하고 유지해온 놀라운 공동의 성취로 보인다. 사회학은 일찍이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사회학의 창건자 중 하나인 게오르크 지멜은 대면 상호작용이 아무것도 아닌 텅 빈 물리적 공간을 유의미한 사회적 공간으로 만든다고 설파했다. 대면 상호작용에 들어간 사람들은 서로에게 감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중에서 눈 마주침은 대면 상호작용의 가장 직접적이고 순수한 형식이다. 눈 마주침을 통해 각자 고유한 영혼을 교환하고 서로 인정하면서 시선의 호혜성이 수립된다. 이 시선의 호혜성이야말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구성하는 근대 사회성의 씨앗이다.

코로나19의 기세가 어느 정도 꺾이자 벌써 사람들은 코로나19 이전 사회로 되돌아갈 희망에 들떠있다. 그런데 그 사회가 과연 돌아갈 만한가? 한국에서는 사회를 구조나 체계와 같은 거대한 힘으로 보는 시각이 막강하다. 구조나 체계가 가하는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대로 산다고 체념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때문에 유연한 노동시장으로 구조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제4차 산업혁명 때문에 로봇과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구조 또는 체계 중심적 사고는 요번 코로나19 재난을 통해 그 한계를 분명히 드러냈다. 거리 두기로 사회가 휘청거린다는 사실은 사회가 사람과 사람의 대면 상호작용에 터한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코로나19 이전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나?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혐오 바이러스가 집 밖 세계에 가득했다. 경제적 효율성을 들어 많은 사람을 대면 상호작용도 할 수 없는 소수자로 내몰았다. 계급, 젠더, 지역, 나이, 교육, 몸, 섹슈얼리티 등 온갖 사회적 범주에서 소수자의 자리를 점한 사람이 집 밖에 나가길 두려워했다. 나갔다가는 소수자 혐오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저항하면 혐오 바이러스 보균자로 취급당해 더한 혐오를 뒤집어쓴다. 사정이 이러하니 소수자는 대면 상호작용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가격리하고 자가봉쇄당했다. 다수자조차도 대면 상호작용을 통해 함께하던 공동 작업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기계와 씨름하게 되었다. 관리와 행정의 편의성을 위해 공공시설의 출입구를 차단하여 오고 가는 사람을 최소화했다. 사회 전체적으로 대면 상호작용하는 사회적 공간이 쪼그라들었다.

한국이 거리 두기를 잘했다고 다른 나라에서 칭송하는데, 이런 사정을 알게 되면 꼭 기뻐할 수만도 없게 된다. 우리 사회가 대면 상호작용 없이도 나름 작동해온 무감각한 기계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비대면 상호작용은 키오스크가 보여주듯 일부 사용자에게 효율성과 자유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극단으로 가면 사회 그 자체를 위협한다. 다른 사람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시선을 호혜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포스트 코로나 사회는 누구나 대면 상호작용의 당사자가 되어 시선을 호혜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감각의 공동체여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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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맑아지고 물이 깨끗해졌다. 자동차로 가득 찼던 도로는 텅 비고, 어디선가 동물들이 나와서 뛰어놀았다. 거짓말 같은 평화였다. 코로나19 사태가 그간 인간이 할 수 없었던 청소를 대신 했다. 해답은 이토록 간단한 것이었다. 지구가 살 만한 곳이 되려면 자동차를 멈추고 공장을 멈춰 세우면 된다. 재난은 종종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과정은 생각만큼 평화롭게 이뤄지지 않는다. 때론 재난보다 더 거대한 폭력을 동반하기도 한다. 누가, 어떻게 멈춰 세울 것인가는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했을 때, 레베카 솔닛은 폐허에서 일종의 ‘재난 유토피아’가 형성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기존의 사회질서가 무너진 곳에서 사람들은 우애와 협동의 정신을 발휘했다. 경찰과 군대, 관료들의 명령이 사라지자 엘리트는 패닉에 빠졌지만, 민중은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힘들을 보여주며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자주적 관리 역량을 맘껏 발휘했다. 

하지만 폐허에서 전혀 다른 것을 상상하는 이들도 있다. 밀턴 프리드먼은 당시 뉴올리언스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학교 대부분이 폐허가 됐지만, 한편으론 교육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바꿀 기회이기도 하다.” 미국기업연구소는 “루이지애나의 교육 개혁가들이 수년 동안 못했던 걸 카트리나가 단 하루 만에 해냈다”며 허리케인을 칭찬했다. 이들에게 대홍수는 공립학교 시스템을 민영화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카트리나 이전 123개였던 뉴올리언스 공립학교는 4개로 줄었다. 이 지역의 강력했던 교사노조도 와해되었다. 

이렇게 대재앙이 사회에 일어난 후 공공부문에 치밀한 기습공격을 가하는 ‘재난 자본주의’를 나오미 클라인은 <쇼크 독트린>이란 책에서 고발했다. 거대한 재난이 사회를 대혼란에 빠트리고, 시민들이 충격에 빠져 있는 동안 자본과 국가는 주도면밀하게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거나 규제완화 법안을 신속히 통과시킨다. 재난 극복을 위해 불가피하게 취해졌던 일시적 조치는 이후에도 제도로 흡수되어 영구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쇼크를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의 IMF체제와 비정규직 제도는 대표적인 사례다. 

현 상황도 마찬가지다. 재난 유토피아와 재난 자본주의가 동시에 전개된다. 용기와 협력, 연대의 시민정신이 차별과 배제의 인종주의적 문법에 맞서 싸우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정보인권을 침해하는 강력한 국가 감시체제가 쉽게 용인된다. 전에도 쉬웠던 해고는 더 쉽게 허용된다. 사회적 공론화를 생략한 비상조치들이 당국의 일방적 결정으로 쉽게 추진되기도 한다. 온라인개학은 대한민국 공교육 시장을 구글, 줌, 네이버 같은 교육플랫폼 기업들에 활짝 열어주었다. 사용자와 데이터가 누적될수록 프로그램은 개선되고 플랫폼의 상품 가치는 높아지겠지만, 학생들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붙들려 앉아 다국적기업들에 채굴당한다. 이 장면은 재난 이후에도 미래 학교의 ‘뉴 노멀’이 될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사태는 어떤 식으로든 사회의 대전환을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누가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달려있다. 재난이 더 큰 재난의 전주곡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사회대협약을 만들어야 한다. 종종 언론은 의료현장에서 코로나19와 싸우는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전해준다. 그러나 여전히 쓰고 버리는 일회용 노동자인 그들이 들고 있는 팻말은 보여주지 않는다. 뉴욕의 돌봄 노동자들은 이런 팻말을 들었다. “우리가 죽으면 누가 당신을 돌볼 것인가?” 건물 외벽에는 이런 낙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경찰과 군대보다 간호사가 더 필요하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외친다. “우리의 생명은 당신의 이윤보다 소중하다.” 나는 그것이 거리에 쓰이고 있는 사회대협약이라고 생각한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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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주고 있다. 경제활동, 공공행정, 보건의료, 학교교육 그리고 사회관계 모두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선택하게 했다.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pandemic)은 노동시장에 전례 없는 충격을 미쳤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지난 한 달간 전 세계 노동시간이 6.7% 감소했고, 전 세계 33억명이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발표했다. 고용감소 현상은 주로 서비스 부문과 영세사업장 및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들에서 나타났다. 무엇보다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묵묵히 일하는 간호사 등 보건의료 분야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문제는 논의조차 안되고 있다. 

국제기구들은 지난 2주 동안의 상황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세계위기로 평가하기도 한다. 국경과 지역, 거리가 봉쇄되면서 경제활동이나 생산량이 감소하고 직장폐쇄가 나타났다. 급격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경제활동 감소로 일자리들이 줄어들었다. 

코로나19는 기존의 불평등에 부정적 영향을 더 미칠 것이다. 2020년 하반기 유럽과 미국의 경제회복 속도 및 정책 조치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노동수요를 증대시킬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와 2015년 메르스 사태 회복에 5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글로벌 공급망의 혼란과 폐쇄가 지속될 경우 국내 제조·건설, 운수·통신 및 지원 서비스 등 수출산업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하반기 전망이 낙관적이지 않은 가운데 코로나19가 노동시장에 준 충격은 균일하지 않고, 비공식 경제나 사회적 취약계층에 더 가혹한 것 같다. 다수가 저임금 비정규직이거나 사회보장 밖의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미 4월 실업급여 신청자 수가 대폭 증가했다. 반면, 신규 취업자 중 고용보험 미가입 일자리가 증가했다. 결국 좋은 일자리는 감소하고, 나쁜 일자리가 증가한 것이다. 지난달 2만2000곳에서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했다고 하니, 소상공인과 자영업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현 시기 실업을 넘어 위험에 처한 노동의 해법은 ‘코로나19 노사정 사회협약’이다. 첫째, 국가는 직접적·간접적 재정 투입을 통해 위기 상황에서 공식부문 일자리들이 비공식부문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단기 실업급여와 고용유지지원금의 기간연장 같은 과감한 정책을 모색해야 한다. 둘째, 정부가 위기·피해 업종의 경영지원과 보조금, 부채 구제 등 즉각적인 접근을 통해 충격 규모를 최소화해야 한다. 이때 기업이 사업유지를 통해 해고가 아닌 고용안정, 고용지원 재배치, 재고용 의무 등의 단서를 달면 된다. 물론 기업의 신규 채용 비용 지원도 같이 검토할 수 있다. 셋째, 노동조합은 해고 방지 및 일자리 보장을 조건으로 단축근무와 단축급여 및 부분실업급여 등을 선제적으로 제안해야 한다. 특히 아르바이트, 프리랜서,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소득손실과 빈곤의 위험대책도 같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 사회협약’은 경제위기로 실물경제 위축과 생산·판매 물량 감축 시기 노동자들의 실업을 막고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전략이 될 수 있다. 불확실성이 높을 때 사회적 대화는 더 필요하다. 경제위기 시기 독일(고용유지 단시간, 파견노동자 적용)이나 프랑스(부분실업급여, 고용지원계약제)가 선택한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4·15 총선 이후 국회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 기회에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고용보험은 소득이 있는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고, 국세청을 통해 소득 파악·증빙을 확인하면 사회안전망이 촘촘해질 수 있다. 현 시기 필요한 것은 긴급성과 정책의 상상력이다. 정책은 가장 절실하고, 절벽에서 겨우 버티고 있는 그 순간 도움이 되어야 한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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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에게 각자의 이름이 새겨진 메달을 미처 이름을 못 보고 나누어 줬어요. 그런데 공교롭게 단 한 명도 자기 메달을 못 받고 엉뚱한 메달을 받은 거예요. 이럴 확률은 얼마일까요?” 몇 년 전에 수학자들 앞에서 내가 실제로 한 질문이다. 

19세기에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되는 국제행사라면 대다수의 사람은 1896년에 시작된 올림픽을 연상한다. 하지만 하나 더 있다. 1897년에 시작된 세계수학자대회(ICM)다. 실험실에서 승부를 보는 실험 학문과 달리 모여서 난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는 수학 분야의 전통 때문이다. ‘여러 나라의 운동선수들을 모아서 올림픽을 열었더니 인간의 한계라던 영역을 넘는 사람들이 속출하더라’라는 스포츠 분야의 각성과 비슷하달까. 4년마다 개최되는데, 개막식에서 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이 수여된다. 2014년엔 서울에서 5200명의 수학자가 참석해서 열렸다. 그런데 맙소사, 4명의 수상자가 모두 엉뚱한 메달을 받았다. 모두가 엉뚱한 걸 받는 분배를 수학에서는 derangement라고 하는데, 그게 실제 일어난 것이다. 물론 식후에 수상자끼리 연락해서 교환했지만….

당시 대회의 조직위원장이던 나에게 이 사실을 전해준 이는 지금은 고인이 된 마리암 미르자하니 교수였다. 완벽하게 당황한 나에게 “이럴 확률은 8분의 3이니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니냐”고 위로해주긴 했다. 미르자하니 교수는 그해 서울에서 필즈상을 수상하며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았지만 3년 뒤에 유방암으로 작고했다. 아직도 역사상 유일한 여성 필즈상 수상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란에서 대학까지 나왔으니 유일한 회교권 필즈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9일간의 대회 기간에 열리는 연회에서 농담을 겸해서 ‘메달 배달 사고의 확률’을 질문한 것인데, 참석한 수학자 수천명은 폭소로 맞아주었다. 질문은 조금 더 이어졌다. “이 사건의 확률은 8분의 3이지만, 대회 직전에 아프리카에서 에볼라 감염병이 확산하는 사태가 일어나서 대회가 취소될 뻔했던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실제로 그랬다.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번지면서 세계 도처에서 공포감이 증대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세계보건기구의 공식 입장에 따라서 서아프리카 3개국 참석자의 등록 취소를 긴급히 결정했는데, 해당자 중 일부는 자국을 출발했다가 중간 기착지에서 돌아가야 했다. 상처받았을 사람들 생각에 심란했다. 여비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생애 처음으로 세계수학자대회에 참석하는 분들이어서 더 그랬다.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라는 표현은, 좋지 않은 일이 겹쳐서 난처한 상황을 말할 때 쓰인다. 우리말로는 설상가상(雪上加霜)쯤 될까. 2014년 8월에 나에게 머피의 법칙은 강력했다. 수학자 수천명이 운집한 개막식에서 개회사를 읽고 있는데, 아니 세상에, 마지막 페이지가 없었다. ‘어디 빠트렸지?’ 잠깐 아찔했지만 기억을 소환해서 겨우 마치긴 했다. 미국과 유럽의 국제수학연맹 지도자들과 에볼라 사태의 대처를 위한 화상회의를 하느라 2주쯤 잠을 잊으며 쌓인 피로의 여파였다. 물론 이 사실은 폐막식에서 내 자해성 블랙 유머의 주제가 됐다.

지금 진행 중인 코로나19 확산은 특정 지역의 이슈를 넘은 팬데믹 상황이어서 대부분의 국제행사가 취소되고 있다. 몇 년을 고생하며 준비한 사람들은 허탈할 수밖에 없다. 참석자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 없으니 수긍은 하지만 불운을 탓하는 마음까지야 어쩌랴. 머피의 법칙은 인생의 필연 같아서 누구나 경험하게 된다.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다른 결과를 내니 위기 극복 능력을 기르는 기회라고 낙관하며 미래를 대비하는 게 최선이다. 어느 때인가는 지금의 갈팡질팡하던 당신의 모습을 인생의 잊지 못할 순간으로 추억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박형주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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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아무리 중요해도 민주체제의 최소 장치일 뿐입니다. 이 기본만큼은 건전하게 유지돼야 민주체제라는 나무가 잘 자랄 수 있죠. 지금 한국 선거는 그 기본은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선거는 민의를 모아 밝히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발전 대 민주화라는 대결 구도는 허물어진 지 오래됐습니다. 사회적 다양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기존 거대 양당이 담을 수 없게 됐죠. 달라진 세상에 맞는 정치개혁, 이 숙제를 지난해 말 선거법 개정으로 겨우 첫발을 뗐습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신설해 민심을 제대로 의석에 반영하라는 것이 국민의 명령입니다. 민주당은 국민의 명령대로 의석이 크게 줄어드는 손해도 기꺼이 감수하고 선거개혁의 길에 나섰습니다.” 작년 12월25일 이인영 원내대표의 글입니다. 개혁안을 지난 20대 총선에 적용해보면 군소정당의 약진이 눈에 띄었습니다. 덕분에 21대 총선에서 정치 판도가 바뀌리라는 기대가 높았죠.

하지만 개혁은 위성정당이란 꼼수 탓에 시작도 못 해보고 사장될 위기에 있습니다. 위성정당을 거느린 거대양당의 의석점유율은 오히려 늘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국회의 의석에 있어 국민 의사의 왜곡을 최소화”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어디다 버렸는지요. 물론 ‘쟤가 먼저 했어요’라는 변명을 합니다. ‘일단은 이겨야 하니까’라는 말도 덧붙습니다. 하지만 이런 변명은 구차합니다. 선거가 이기고 지는 정치놀이에 불과하다는, 꽃은커녕 잡초보다 못하다는 인식의 고백이니까요.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따르는 ‘노짱’이라면 과연 남의 꼼수를 따라 하는 저급한 꼼수를 부렸을까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멈춘 위기상황입니다. 도시 전체가 숨을 죽인 판이죠. 그런데 선거는 멈추지 않습니다. 재외선거사무가 중단된 지역은 40개국 65개 공관이 됐고, 투표할 수 없는 재외선거인도 8만500명(20대 총선 세종시 남자 선거인 총수가 8만3507명), 자가격리자도 7만명이 예상되지만 선거는 예정대로 치러집니다. 물리적 거리 두기를 외치는 지도자들은 당 관계자들을 몰고 다니며 유권자와 껴안고 악수하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마스크 착용을 권장하면서 ‘난 안 할 거야’ 이죽거리는 어느 나라 대통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들에게서 이 위기가 끝났을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어떻게 바꿀지 비전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미뤄야 할 것은 서두르는 이상한 형국이죠.

선거를 굳이 미루고 싶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이슈가 코로나19에 묻혀버렸으니까요. 코로나19 위기와 정부 대응, 재정지원의 크기와 확대 등을 놓고 맴맴 도는 두 정당의 고함뿐입니다. 다른 국가적 이슈에 깊이 있는 논의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슈가 없으니 편 가르기가 편할 수밖에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선거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죠. 정치인들을 위한 선거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당면한 위기에는 관심이 없고 편 가르기에만 바쁜 이들이 4년에 한 번, 딱 2주 얼굴도장 찍는, 그런 슬픈 코미디로 21대 총선은 전락했습니다. 원칙과 신념이 없어 원내에 진출하는 민주주의. 민주주의체제가 그만큼 약화한 것이죠.

정치는 정치인들에게만 맡겨 두기엔 너무 중요한 현실이 됐습니다. 정치인들이 개혁을 거부하니 우리라도 주장해야겠죠. 우선 국회 의석 일부라도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선출하면 어떨까요. 청년, 노인, 성소수자, 여성, 소상공인, 노동자, 노인 등이 국회에 진출할 길을 열 수 있습니다. 정치신인의 등용문 역할도 할 겁니다. 정당 간 편 가르기도 완화될 테죠. 국회의원들의 권위도 약화할 겁니다. 이 위기에서 꼼수에 휘둘리는 선거법 개정이 아닌 전반적 국회개혁, 민주체제에의 전반적 고찰이 필요함을 우리는 배웁니다.

<남태현 |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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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용 위성정당들이 벌이는 ‘막장정치’가 가관이다. 최장집 교수의 주장대로 민주화 이후 정치 엘리트들은 마치 주식투자자들처럼 오직 자신의 정치적 자산의 가치변동에만 관심이 있는 종자가 된 듯하다. 이들이 속한 정당들은 적당한 분화와 재편을 통해 양당 기득권을 유지·확장하고자 하는 좀비가 되어가고 있다. 유수의 정치학자들이 촛불 이후의 전망을 조금 더 예리하게 간파했었더라면 “촛불집회를 통한 정권교체는 광장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가 결합한 결과” “촛불혁명은 참여민주주의의 승리” “촛불혁명은 동아시아 최초의 명예혁명” 등 촛불시위의 신탁에 올린 상찬(賞讚)의 레토릭은 상당히 절제되고 순화되었으리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정당은 본질적으로 정치·경제·사회적 갈등을 대변하고 드러나게 하면서 공익에 부합하는 정책대안들을 조직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 대중을 동원하는 조직이 정당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집권당이 되거나 반대당이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체제하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정당이라면 이러한 갈등을 완화 내지 통합하는 정치기제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기제가 바르게 작동되어야만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발전한다.

3년 전 현직 대통령을 탄핵으로 이끈 ‘촛불혁명’이 어쩌면 한국정치를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고서 이후 전개될 정치에 실낱같은 기대를 품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장삼이사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바꾸겠다고 천명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끝내기 위해 직접 대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야당을 국정운영의 동반자라고 추켜세웠다. 당시 대통령의 메시지는 정치적 수사(修辭)라기보다는 협치의 틀을 실제 만들어 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로 읽혔다.

돌이켜보면 협치는 한국정치의 토양 속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정치 아이템이다. 이젠 어느 당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곳곳에서 탐욕과 노욕을 주제로 막장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마당에 협치의 목소리가 이들에겐 우이독경(牛耳讀經)이겠다는 자괴감이 든다. 한국정치의 고질적 병력(病歷)을 드러내고 치유하기는커녕 장막 뒤에서 이익의 공모(共謀)를 꾀하는 정치 엘리트들과 거기에 기생하는 사이비 정치‘꾼’들이 한국정치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다. 이들에게 불을 끄러가는 소방수의 절박함이란 찾을 수가 없다. 정치 엘리트들은 시간이 생명인 소방수가 마치 부잣집, 가난한 집들을 가려가면서 불을 끄는 것으로 믿는 외계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재난지원금을 갖고 ‘편가르기’를 할 수는 없다.

총선이 이대로 치러지면 그 후과는 ‘정치적 체르노빌’로 나타날 것이다. 첫째, 검증되지 않은 ‘불량품’들이 역대 어느 선거에서보다 많이 선택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각당 연동형 비례제 후보들의 경력을 보면 유권자들이 투표로 정치 엘리트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정치적 정언을 무색하게 만든다. 둘째, 코로나19 사태로 투표율이 낮을 것이기에 당선된 국회의원들의 대표성을 두고 계층·세대·지역 간 갈등이 깊어질 게 확실하다. 셋째, 대의정치의 어두운 그림자인 포퓰리즘의 빠른 확산이다. 위기 포착에 능한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들만이 (낮은 투표율로 드러난) 침묵하는 다수를 대표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총선 후 한국정치는 이렇듯 정치 엘리트만의 리그로 고착화되고 부수적 피해를 일으키면서 코로나19보다 더 위험해질 것이다. 작금의 한국정치에 분노한다면 ‘정치적 거리 두기’를 과감히 포기하고 이번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심판해야 맞다. 정당이 아닌 ‘국가’를 지지하는 애국심을 간직한 정치의병(政治義兵)들이 정치좀비들을 방역할 때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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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회원국 외교관과 오랜만에 만났다. 예정되어 있던 행사가 줄줄이 취소됐지만 본국에 한국의 상황과 대응에 대한 보고를 하느라 정신이 없단다. 국경 봉쇄, 입국 금지, 인도적 지원 등 나라별 코로나19 대응에 따라 외교관계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어 불확실성의 연속이라고 했다. 한국처럼 초기부터 증상자 전원을 대상으로 진단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확진자가 집중된 도시를 봉쇄하지 않고 시민 각자가 도시 간 이동을 자제하는 자발성에 감동했다고, 생필품 사재기가 일어나지 않은 점도 놀랍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안에서 의견이 같았는데 마스크에서 달랐다. 많은 전문가가 마스크가 코로나19 예방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며 자국에서도 아픈 사람이 아니면 쓸 필요가 없다고 발표했단다. 유럽에서는 마스크를 쓰면 병에 걸린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라고 들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감염 경로가 침방울인데 마스크 착용이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문가들도 마스크가 침방울을 막는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코로나19는 잠복기 증상이 가벼워 걸린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도 있으니 마스크는 타인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답했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마스크 쓰기를 권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 착용이 일상인 한국엔 수백개의 생산업체가 있지만 유럽엔 생산시설 자체가 없는 곳이 많다. 한국처럼 비교적 마스크 공급이 안정적인 곳에서도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는데 구하기도 어려운 곳에서 마스크 착용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간 혼란을 넘어 마스크를 향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벌써 곳곳에서 품귀현상이 일어나 정작 필요한 의료현장에 공급하기 어렵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산업구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유럽은 이미 고부가가치 고차 산업 중심으로 경제구조를 재편해 막상 제조시설이 없는 곳이 많다.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스웨덴 약국에 해열제 등 비상약이 씨가 말랐다. 스웨덴에는 굴지의 제약회사가 있지만 공장이 중국에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명품 그룹사 루이뷔통모에헤네시는 향수 공장을 재빠르게 손소독제 생산라인으로 바꿨지만 여전히 마스크는 중국 공장에 의존해야 했다. 그나마 제조사가 본국에 있는 독일의 폭스바겐은 자동차를 만들 때 사용하는 3D 프린터로 인공호흡기를 제작하고 미국의 랠프로런은 생산라인을 바꿔 마스크와 의료용 가운 공급에 나섰다.

고차 산업을 지향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 여겼는데 각 나라 상황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은 1차부터 4차까지 단계별 산업이 공존하고 있다. 위기상황에서 각각의 산업은 나름의 역할을 한다. 4차산업 덕에 마스크 재고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고, 3차산업 덕에 나가지 않고도 배송을 받을 수 있다. 2차산업이 있어 마스크 수급이 원활하다. 더 큰 위기가 닥친다면 1차산업이 가장 중요해질 것이다. BBC는 최근 코로나19로 흔들리기 시작한 식량 주권에 대한 분석을 내놨다. 코로나19가 진정되고 나면 앞으로 더한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무엇이 우선 필요할지, 최악의 경우 일정 기간 나라 전체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어떤 자원과 제조업을 전략적으로 가져갈지 산업의 포트폴리오를 재점검해야 할 것이다.

스웨덴 뉴스를 보는데 기후변화로 지구온난화가 지속될 경우 기온이 0.5도씩 상승할 때마다 경작지가 얼마나 늘고 그로 인한 식량 생산량이 얼마나 증가하는지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있었다. 스웨덴은 기후변화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나라인데도 플랜B를 준비하는 게 인상 깊었다. 대한민국도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한 예측과 복안을 갖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기획재정부는 다 계획이 있을 것이다.

<하수정 | 북유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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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생 개선이 그 어떤 사회적 조치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청결과 (위생)예절이 먼저 확립되지 않는다면, 교육과 종교는 아무 일도 해낼 수 없다.”

1851년, 찰스 디킨스가 런던 보건국 홍보 연설에서 한 말이다. 당시 런던은 그리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5세 이하 어린아이 절반이 감염병으로 죽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관심이 없었다. 어린이는 으레 ‘소아병’에 걸리는 법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는 더럽고 비좁아졌고, 아이들이 쏟아져나왔다. 어린이는 매일 12시간을 공장에서 일했다. 13세 디킨스도 주급 6실링을 받고 구두약 공장에서 온종일 일해야 했다.

형편이 좀 나은 아이는 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공장의 규율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수백명의 학생이 좁은 곳에서 수업을 받았고, 모진 체벌을 받았다. 19세기 초에야 교사가 학생을 때려죽일 수 없다는 법이 통과되었다. 공장을 따라 교실의 창문을 없앴다. 햇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은 구루병에 걸려 팔다리가 휘어졌다. 당시 18세 청소년의 평균 신장은 152㎝에 불과했다.

하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일자리는 주로 도시에 있었다. 부모는 아이에게 공장 혹은 공장형 학교 중 하나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항아리손님(유행성 이하선염)이 찾아오고 호열자(콜레라)가 도시를 덮쳐도 사정은 변하지 않았다. 일부 부유층만이 냄새나고 답답한 도시를 떠나 교외로 향했다. 햇빛이 드는 가정에서 공부하고, 숲과 들판에서 뛰놀 수 있는 어린이는 많지 않았다. 

학교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 매일매일 출석하여 책상 앉기를 견뎌내는 과정은 미래의 블루칼라나 화이트칼라에게 아주 중요한 훈육이다. 하지만 디킨스는 생각이 달랐다. 실질적 지식 전달이 학교의 목적이며, 사회적 순응을 위한 훈육은 부차적이라고 여겼다. 그의 소설, <어려운 시절>의 첫 문장은 이렇다. “저 아이들에게 사실만 가르치시오. 삶에서 필요한 건 오로지 사실이오. 사실에 근거할 때 비로소 이성적인 인간을 만들 수 있소. 다른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되오.”

개학 연기는 단지 물리적 거리 두기의 일환만은 아니다.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등교를 강요당한다면 산업혁명 당시 영국 어린이와 다르지 않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감염병을 무릅쓰고 출석한 학생에게 보건과 위생을 가르칠 수는 없다. 지식과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과 기만을 배울 것이다. 혹시 맞벌이 부모의 출근을 위해서라면 더 슬픈 일이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도 부모는 일터로, 아이는 학교로 가야 한다면 19세기의 런던보다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디킨스는 공공 보건의 선구자였다. 위생 개선, 병원 설립, 의무적 백신 접종에 앞장섰다. 상이군인 지원과 장애아동 교육도 제안했다. 슬럼가를 개선하자며, 빈민층의 높은 사망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를 보면서 그는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할까?

올리버 트위스트의 시대에는 어린이가 넘쳐났다. 절반이 감염병으로 죽어 나가도 세상은 무심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다. 노인이 넘쳐난다. 코로나19는 노인에게 몇 배나 더 위험하다. 하지만 사회적 관심이 몇 배나 되는 것 같진 않다. 학교는 휴교 중이라지만, 요양원은 그대로 괜찮은 것일까? 노인들이 대거 퇴소하여 가족 곁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인류사를 통틀어 어느 때보다도 오래 산다지만, 이래서는 그 빛이 바랜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을 향하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었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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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제자와 공유하는 단톡방에서 카톡이 울린다. 40대 후반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현재 박사과정을 수료한 대학원 여제자다.

“모두 잘 계시나요? 저는 코로나 땜에 무서운 게 아니라 삼시세끼 밥 땜에 무서워요. 친밀성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나갈 데도 없고, 책도 못 보고 논문도 손도 못 대고 답답해요.” 킥킥 웃을 사이도 없이 또 다른 여제자가 메시지를 보낸다. “저는 바깥 코로나가 무서운 게 아니라 집에서 밥 달라는 코로나 때문에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있습니다. 얼른 친밀성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비슷한 글이 연이어 달린다. 

보다 못해 나도 한마디 덧붙인다. “죄송합니다. 성장이 멈춰 혼자 밥상 못 차리는 어린아이라서.” 키득키득 이모티콘이 따라붙더니, 이내 묻는다. “자발적일까요? 비자발적일까요? 남편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코로나19의 전파를 막기 위해 전 사회적으로 펼치는 이방인 사이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엉뚱하게도 가족 사이의 ‘사회적 거리 없애기’로 나타나고 있다. 가게 문을 닫은 자영업자나 재택근무 중인 직장인이나 개학이 미뤄진 아이나 모두 나갈 데가 없어 종일 집 안에서만 북적댄다. TV만 틀면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먹방은 식도락을 강제하지만, 삼시세끼 식구 밥상 차리는 전담자는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밥상 차리는 걸 두고 말다툼이 일어나고 급기야 폭력이 발생한다. 어느새 가해자와 피해자가 된 가족 성원인데도 친밀한 사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통하지 않는다. 

친밀성이란 뭔가? 차가운 근대 개인주의 정서에 맞선 따뜻한 집단주의 정서다. 최근까지도 친밀성은 이성 간 낭만적 사랑을 통해 구성된 근대 핵가족을 모델로 논의돼 왔다. 근대 핵가족은 남녀 간 낭만적 사랑을 고리로 해서 형성된다. 남녀는 서로 신체적·정신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 서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통해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혼해서 평생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자녀를 출산하고 사랑으로 돌보고 온전한 성인으로 사회화시키면서 가족 사이의 친밀성은 더욱 강화된다. 가족은 냉혹한 근대성에 맞서 살아갈 정서적 힘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이렇듯 친밀성을 차가운 근대성에 대한 치유책으로 이상화하게 되면 그 뒤쪽 어두운 면을 못 보게 된다. 친밀한 사이에서는 근대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 여성이 돌봄 전담자가 되어 남편과 아이를 돌보다가 정작 자신의 자아를 돌보지 못해 황폐해진다. 근대 핵가족이 성 불평등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한번 결혼하면 남성가부장의 경제적 부양능력과 전업주부의 정서적 지원능력이 결합해서 평생의 애착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로는 제대로 된 경제적 부양능력이 없는, 설사 있다 해도 소통능력을 상실한 ‘자발적 어린아이’를 돌보고 출산하고 육아하고 살림하느라 여성은 자아를 잃어버린다. 무엇보다 가족성원으로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탓이다.

사람은 어느 장소에 있든 자신의 공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인격적 공간’을 지녀야 한다. 어떤 누구도 이 인격적 공간을 침해당하면 고유의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 모두 자신의 인격적 공간을 침해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이유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과 사회적 공간을 공유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 겹치는 사회적 공간에서 나의 인격적 공간은 물론 상대방의 인격적 공간도 보호하려고 호혜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근대 민주주의 사회적 공간의 특성이다. 친밀성의 공간으로 이상화된 집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공공장소의 사회적 거리를 회복하자는 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이에 더해 집에서 여성의 인격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도 벌여야 한다.

<최종렬 |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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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시간을 셈한다. 몇 번이나 세었을까. 오늘이 한달이다, 오십일이다, 백일이다, 이백일이다. 그렇게 쌓아온 시간이 곧 삼백일이 된다. 강남역 철탑 위,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의 시간이다. 1990년대 삼성항공(테크윈)에 입사해 노조설립을 주도하다 해고당한 그는 노조탄압과 부당해고에 대한 삼성의 사과와 복직을 요구하며, 작년 6월 철탑에 올랐다. ‘무노조 삼성’에서 노동조합을 시도했던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비노조 경영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그룹노사전략’을 수립하고 에버랜드 내 상황실을 설치하여 노조설립을 시도하는 근로자들을 상당 기간 감시하면서 그들의 사생활 비밀을 함부로 빼내고, 징계사유를 억지로 찾아내어 징계하여 회사에서 내쫓으려 하거나 급여를 깎아 경제적 압박을 가하게 만들고,…노조 활동을 한 근로자들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려 한다는 이유만으로 회사 내에서 적대시되고 그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게 된다.”

삼성 에버랜드 노조와해 사건 판결문의 일부다. 김용희에게 일어난 것도 이러한 일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삼성 경영진의 인식을 19세기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에 등장하는 산업도시 코크타운의 공장주에 비유했다. 이 19세기적 노동탄압 사건은 작년 12월 7년 만에 유죄 판결을 받았고, 당시 삼성 미래전략실에서 사건을 주도했던 관련자들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삼성의 조직적인 노조파괴 행위는 김용희 같은 피해 노동자들의 끈질긴 증언과 투쟁이 없었다면 세상에 드러날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스페인, 영국, 독일,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이 ‘코로나 파업’을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감염 위험에도 작업을 강행하거나 노동자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는 회사에 항의하고 대책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파업을 할 수 있을까? ‘노동자들의 위기를 막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는 60일간 해고를 금지하고 덴마크 정부는 임금 보전을 요구하는데, 한국에선 ‘기업의 위기를 막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당한다. 이 차이는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코로나19 사태는 동물들이 위험에 처한 곳에서는 인간도 안전할 수 없고, 노동자가 아픈 곳에서는 다른 시민들도 건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안전망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안전망이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를 당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현실이 계속되는 한, 쿠팡맨이 쓰러져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고 콜센터 노동자들이 집단감염되는 이 현실도 끝나지 않는다. 김용희의 현실은 우리의 현실이다.

최근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 공여 및 횡령 사건 파기환송심을 앞두고, ‘삼성준법감시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지난 3월11일, 이 기구는 삼성그룹이 과거의 노조와해공작 등 노동탄압 문제에 대해 반성하고 국민들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삼성이 정말로 반성의 의지를 보이려면, 제일 먼저 김용희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는 삼성에 의해 파괴당한 노동조합과 노동자를 상징하며, 노동자로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들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김용희의 삼백일은, 삼성이 침묵한 삼백일이다. 김용희의 철탑 위 시간이 길어질수록 삼성의 죄도 그만큼 무거워진다. 사태를 묵인하고 방관한 정부와 여당도 마찬가지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의 2대주주다. 의지만 있다면 구할 수 있다. ‘국민’의 한 사람인 노동자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며 버티고 있다. 그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언제까지 그의 사위어가는 몸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4월4일, 삼백일이 된다. 이제 응답하라. 김용희가 철탑 위에 있는 한, 삼성의 노조파괴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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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현실에서 실험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인류가 어떻게 삶의 방식을 바꾸면 기후변화를 저지할 수 있는지를 인류의 운명을 걸고 실험해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문제엔 수리(數理) 모델링을 사용한다. 기후변화에 영향을 주는 요소 간의 관계를 수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수식 속의 일부 요소는 인간이 바꿀 수 있어서, 특정 요소가 기후에 주는 영향을 실험해 볼 수 있다. 현재 인류가 추진하고 있는 저탄소 정책 등은 이런 방식으로 효과성이 검증된 정책이다.   

감염병은 어떨까. 감염의 시작과 번져간 흔적은 빅데이터에 표현되고, 사후에 수학적 방식의 모델링으로 작동했던 방식을 드러낸다. 일단 수식이 생기면, 그 안에 포함된 일부 요소를 바꿔보는 방식으로, 정책적 대응이 감염 확산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실험해볼 수 있다.   

근대 역사에서 인류 최대의 재앙은 약 100년 전의 스페인 독감이다. 2년 동안 지구상에서 35명 중 1명이 사라졌다. 특히 심한 피해를 본 이란은 인구 5명 중 1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에서는 무오년 독감으로 불리며 14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사망자 대부분이 청년층에서 발생했지만, 이번 코로나19의 사망자는 주로 노년층이다. 이전의 경험이 다음에도 적용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뜻이다.   

감염병을 수학적으로 접근하는 시도는 17세기 페스트 대응에서 실마리가 보이지만, 18세기 스위스 수학자인 다니엘 베르누이가 천연두의 확산을 수식으로 표현한 게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의 수학 실험은 대규모의 예방 접종이 인류의 기대수명을 3년 늘린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현대의 수리감염역학(mathematical epidemiology) 연구자들은 감염병의 확산 과정을 미분방정식이나 차분방정식으로 표현하고 컴퓨터를 사용해서 수치적으로 푼다.   

이와는 다른 네트워크 이론의 접근도 있다. 할리우드의 배우들을 무작위로 분포된 점들로 표현하고, 서로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는 걸 연상해보자. 수많은 점과 선이 있는 사회관계망에서, 선이 별로 없는 건 외톨이이고, 많은 사람과 이어진 건 ‘마당발’이다. 만약 많은 점 사이에 제멋대로(random) 선을 그으면 반드시 몇 개의 마당발이 나온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사실이다. 상호 연결된 인터넷 접속지들의 네트워크에서도 이런 마당발 허브가 여럿 생기는데, 해커가 이런 허브를 공격하면 전체 인터넷의 심대한 접속 장애가 발생한다. 이번에 우리나라 코로나19의 확산을 점과 선으로 표현한다면, 특정 종교단체나 콜센터 등이 이런 ‘마당발’의 역할로 등장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은옥 건국대 수학과 교수팀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 개념까지 반영한 코로나19 수리모델링을 최근에 시도했다. 전통적인 SIR 방식에서는 31번째 확진자 발생 이후 급속도로 확진자가 증가해서 전 인구가 감염될 때까지 확산한다. 6개의 미분방정식으로 구성된 새 모델은,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실행되면 일부 감염으로 끝난다. 행동 변화로 인해 감염전파율이 2%로 줄어들고, 증상발현 후 격리까지 평균 4일 걸리는 경우는 6월 중순에, 격리에 하루 더 걸린다면 10월 말에 종식된다. 3월14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의 훨씬 단순한 무작위성 실험도, 지역 격리는 전체 감염을 늦추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일부 감염만으로 종식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사회문화적 요소를 모두 수식에 반영하기 힘들고 각종 상수 값은 기존 데이터로 추정한 것이라서 종료 시점의 예측 용도로 사용하긴 힘들다. 하지만 수학적 실험이 의미하는 대응 정책은 분명하다. 혹독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행하고, 증상발현 후 최대한 신속히 격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격리에서 하루를 단축하면, 코로나19 종식은 넉 달 빨라진다.

<박형주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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