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는 전공 2위’라는 말을 들었을 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공이 2위라는 표현은 전공 성적이 2위라는 말인가? 2등이나 했는데 의미가 없다고?’ 등과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검색을 해보고 나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미국의 한 언론이 가장 ‘쓸모없는 전공 10위’를 소개하고 있었다. 인류학 및 고고학, 영화·비디오 및 사진, 미술, 철학 및 종교, 음악, 체육, 역사, 영어영문 등이 불명예를 안았다. 실업률이 높고 연봉이 낮다는 이유였다. 반면에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은 전공은 경영학, 컴퓨터 및 정보과학, 공학, 의학, 수학 및 통계학 등이었다. 이학, 인문학, 문예의 토대 위에 실용과학이 의미가 있다는 건 좀 살아보면 깨달을 수 있는 상식이다. 잘못된 기준을 두고 평가하거나 평가를 위한 평가가 얼마나 의미 없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평가란 좁게는 ‘물건 값을 헤아려 매김’을 뜻하고, 좀 더 넓게는 ‘사물의 가치나 수준 따위를 평함’이라고 정의된다. 즉 돈을 쓸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게 평가의 근본 이유이다. 하지만 사려는 입장에서 값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파는 쪽에서 이런저런 비용을 따져서 ‘희망’ 가격을 매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마저도 어려운 물건의 경우에는 ‘감정평가’를 한다. 하지만 모두가 결과에 만족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복수의 감정평가를 평균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일상적인 상거래에서도 이러한데 다른 목적의 평가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학업의 평가는 시험을 통해 이뤄진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시험을 치른다는 것은 학업의 성취도와 부족한 부분을 살펴 좀 더 효과적인 학습계획을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학생의 등급을 나누기 위한 수단처럼 여겨진다. 이런 평가는 시험을 잘 치르게 할 여력이 되는 부모에게나 유용할 뿐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쓸모없을뿐더러 유해하다. 평가의 방식을 떠나서 목적과 쓰임이 중요하다.

직원들에게 인건비를 지출하는 기업들은 고과를 통해 자사의 인력을 평가하고 급여와 승진에 반영한다. 최근에는 상사가 일방적으로 부하직원을 평가하는 방법에서 탈피하여 다면평가를 도입하기도 한다. 상위자, 동료, 하위자, 고객 등 피평가자와 관련된 모든 사람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방식이다. 이처럼 새로운 평가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도입하는 이유는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서이지만 제대로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친구의 회사를 망하게 하려면 경영 컨설팅을 받게 하고 성과지표를 도입하게 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성과지표는 ‘미래성과를 측정하기 위한 핵심지표들을 묶은 평가기준’을 뜻하며 계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간단하게 계량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러니 우습기만 한 지표들이 버젓이 쓰인다. 보고서 작성 개수, 업무회의 진행 건수, 구매자 면담 건수 등이 진정한 성과가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일반기업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에서도 의미 없는 지표가 종종 쓰이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성과지표를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에도 적용하라는 압력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명분은 지원정책이 얼마나 마을공동체 활성화에 기여했는지 성과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지만, 일반경영에서도 도입이 어려운데 다양한 가치를 품고 있는 마을공동체의 평가에 적절할 리 없다고 여겨진다.

굳이 정책의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면, 일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 정책이 추구했던 목표와 철학이 얼마나 구현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경제정책의 성과를 담당 공무원이나 개별 기업이 아니라 경제성장률이나 고용률 등으로 살피듯이 마을공동체 지원의 성과도 개별 참여자가 아니라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진정으로 살피는 방법을 구해야 좀 더 의미 있는 평가일 것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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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늦은 밤 갑자기 카톡이 울렸다. “대구에서 발표할 일이 있어 왔다가 동대구역 가는 길입니다. 불금의 저녁, 대구도 길이 많이 막히네요. 엄청 덥고요. 기사 아저씨는 계속 문 정부 욕만 하시고.” 아는 교수였다. 답장을 보냈다. “제가 반복적으로 겪는 일 겪으셨군요. 서울 말씨만 쓰면 바로 나옵니다.” 위로의 문자가 왔다. “아…그런 거군요. 대구에서 사는 거 만만치 않으시겠습니다.”

어쩌다가 대구가, 참내. 목구멍으로부터 쓴물이 올라왔다. 2005년 대구로 이사 왔으니 벌써 십 수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택시를 타면 몇 마디 말에 바로 타지 사람인 걸 알아챈다. 구어 활용 습득 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아무리 대구 말씨를 흉내 내도 금방 티가 나는 모양이다. 열의 여섯, 일곱은 ‘소위’ 진보 정권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얼마전에도 그랬다. 서울 갔다 돌아오는 길 동대구역에서 택시를 탔다. 행선지를 말하고 몇 마디 주고받고나니 ‘주 52시간 근무제’와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밤중에 손님이 없다카이요. 주 52시간 정책인동 뭔동 땜에 밤에 일을 안 한다카이. 일을 안 하이 일감이 어데 있심니꺼. 소득주도성장한다꼬 카는데 일하는 시간이 줄었뿌이 소득도 준다카이요. 수출로 묵고사는 나라 아닙니꺼, 우리가. 이기 말이 되는 일입니꺼, 어데요. 최저임금 올린다고 설치뿌리이 원가가 올라가가 수출경쟁력이 똑 떨지는 거 아입니꺼?”

이럴 경우 보통 “예, 예” 하며 짐짓 맞장구를 쳐준다. 집에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택시기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아닌가. “이기 다 자유민주주의 파괴할라꼬 카는 빨갱이 때문이라예. 아이라예?” 나도 모르게 욱했나 보다. “자유민주주의가 뭡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택시기사가 움찔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내뱉었다. “자유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카마 그 뭐라캐야 되노. 자유 아입니꺼? 자유!” 작정을 하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 자유가 뭐냐니까요?” 대답을 못하고 버벅대다 고함을 지른다. “독재 안 하는 기지예. 문재인 함 보이소. 좌파독재 아이라예? 지 혼자 다 해묵잖아예. 국민 생각은 쪼매도 안 하고 저거들 빨갱이만 좋자고 그카는 거 아니라예. 그카다가 문재인이 총 맞아가 죽는다카이요, 죽어.” 깜짝 놀랐다. “아니 대통령을 총 쏴서 죽이는 게 자유민주주의예요?” “그라마 아니란 말인교? 자유민주주의 미국 함 보이소. 케네디도 총 맞아가 죽었잖는교.” 무슨 이런 논리가? “아니 자기랑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고 총 쏴 죽이는 게 자유민주주의예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아이라. 그 말은 그렇다카는 기 아닙니꺼? 누가 문재인 총 싸가 쥑이뿌만 어얘노 카는기지, 내 말은. 그래 좌파독재하다 보만 국민이 가마이 있겠는교?”

갑자기 1970년대 미국의 암울한 현실을 고발한 영화 <택시 드라이버>가 떠올랐다. 베트남전 퇴역군인인 주인공은 심야 택시를 몰며 쓰레기와 같은 추악한 뉴욕 밤거리를 떠돈다. 고작 이따위 나라를 지키려고 베트남에 가서 목숨 걸고 싸웠단 말인가.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싶지만 현실적 힘이 없다. 마지막 희망인 사랑마저도 일그러지자 분노가 극에 달한다. 모든 게 잘못된 정치 탓 같다.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과대망상으로 유력 대통령 후보의 암살에 나선다. 

자신이 처한 참혹한 현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때 무력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 무력감은 가상의 악에 대한 분노와 테러로 돌변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가 말로 의사소통하는 정치제도를 만든 이유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치가 무력감과 분노를 자극하고 조장하는 폭력적인 ‘군사 언어’에 기대면 희망이 없다. 현재 수많은 ‘택시 드라이버’가 군사 언어를 사용해서 무력감과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럴수록 공감을 못 얻고 끼리끼리 고립되어 과대망상 테러를 꿈꾼다. 보다 보편적인 ‘시민 언어’를 써서 자신이 처한 곤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정치의 공간이 활짝 열려야 비로소 문제 해결의 길이 보인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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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201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의 노래 ‘Blowing in the Wind’의 첫 소절입니다. 이 노랫말처럼 우리는 사람이라고 불리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걸을 수 있었기에 편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발로 걸으며 얻게 된 두 손의 잉여로 도구를 만들고 불을 다루며 꾸준히 뭔가를 창조해 왔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걸으면서 생각하고, 그러면서 진화해 왔습니다. 

“내가 치는 음표는 다른 피아니스트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음표 사이의 정지, 그렇다. 바로 그곳에 예술이 존재한다.”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의 말입니다. 이 말처럼 걷기란 제 삶에서 쉼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풀기 어려운 사건과 분쟁이 이 땅에서 생겨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실의 입은 너무 커서 사실을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의 손들이 그 입안으로 들락거립니다. 그사이에서 판사는 진실을 가려야 합니다. 

그 무게감이 숙명보다 무거운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저는 걷습니다. 걷다 보면 사건과 단절되고, 그 단절이 오히려 사건 해결에 실마리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풀리지 않는 난제를 걸으면서 풀어갔던 경험을 꽤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업무의 연장인 셈입니다. 그래도 머릿속에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내면서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걸으면서 이보다 더 심오한 일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걸으면서 철학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은 삶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왕의 스승 역할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이라는 사설 학원을 세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매일 아침 산책을 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모임을 ‘소요학파’ 또는 ‘페리파토스학파’라고 불렀습니다. 소요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이란 뜻입니다(표준국어대사전). 페리파토스는 산책길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소요학파는 ‘걷기학파’인 셈입니다. 서구 근대 사상의 근원이 된 학파의 일상이 공부가 아니고 걷는 일이었다니,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고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걷기처럼 격렬하지 않은 운동이 창의성을 기르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 때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신경세포는 계속 만들어지는데, 걷기 같은 운동이 그 생성을 돕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정재승 <열두 발자국>).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암 사망의 3분의 1은 조기검진으로, 또 3분의 1은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예방이 가능한데, 주 5회 이상 꾸준히 걷기만 해도 새로운 세포가 생성되고 암세포는 소멸한다고 합니다(EBS 라디오 캠페인). 

걷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신체 활동이자, 다양한 두뇌 활동이 덤으로 따라오는 꽤 괜찮은 선택입니다. 따로 운동할 시간을 낼 수 없는 현대 도시 생활에 걷기처럼 간편하고 효율적인 신체 활동은 없는 것 같습니다(생계 활동으로 따로 걸을 시간을 내지 못하는 분들께는 양해의 말씀 구합니다). 

철학의 역사, 누군가의 조언, 연구 결과가 알려주듯이, 사람은 걸으면서 현명해졌습니다. 자연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속에 인간이 만든 건축이 얼마나 볼만한지, 내 앞을 사뿐히 지나는 고양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걷다 보면 보입니다. 어느 시인이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뒀던 저녁 거리마다, 어릴 적 뛰놀던 종로 골목마다, 뽀얀 우윳빛 숲속에, 그리고 북녘 땅 천지와 명사십리에 여러분의 발길이 닿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고위 공직자와 기업 임원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걸어 다니기 바랍니다. 걷다 보면 세상이 보이고, 그러면 나라와 기업 모두 현명해집니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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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권이나 노동정책을 주제로 강연을 하다보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처럼 노동 문제 관련 유엔 산하 전문기구는 없나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충격을 받는다. WHO는 1923년에 설립되었지만, 국제노동기구(ILO)는 그보다 4년이 빠른 1919년 설립되었고, 2019년 현재 187개 국가들이 가입한 상태다. 우리는 1991년 152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사실 ILO는 각국의 노동입법수준을 발전·향상시켜 노동조건과 생활수준을 보장하고 개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실업과 불완전고용, 노사관계, 경제발전, 자동화를 비롯한 기술변화 문제 등에 관한 연구도 한다. ILO는 2019년 100주년을 맞이하여 &lt;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gt;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오는 10일부터 약 10일 동안 100주년 기념 총회도 개최된다. 매년 열리는 총회에는 우리를 포함해 전 세계 노사정 대표가 모두 참가한다. 아마도 이번 총회에서는 ‘미래의 일’과 관련된 10가지 권고사항을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평생교육, 성평등, 보편적 노동권 보장, 좋은 일자리 실현과 기술투자 및 사회적 보호 등이다.

그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급격히 변화하는 노동환경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인공지능, 자동화, 로봇공학 등 기술발전은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가능성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의 새로운 기회가 주는 혜택을 받을 준비가 안된 노동자들이 기술발전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학교에서 배운 교육과 지식은 미래에 창출되는 일자리에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새로 습득한 기술은 오래 못 가 쓸모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한다. 

2019년 대한민국의 노동현실과 일의 미래는 암울하다. 우체국 집배 노동자들이 지난 10년 사이 191명이나 사망했다고 한다. 올해에만 벌써 4명이 과로로 목숨을 잃었다. 언론 기사를 보니 우정본부는 적자 문제로 인력 충원이 더딘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 말에 더 화가 난다. 그럼 앞으로 흑자가 되기 전에는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어도 괜찮다는 것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아직도 여성과 남성 화장실이 분리되지 않는 A공공기관도 있고, B공공기관 자회사 직원들은 별도의 휴게실이 없어 화장실에서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다. 민간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수년째 같은 곳에서 일을 해도 처우개선은 없이 새로운 업체가 바뀔 때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노동시장 상황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일하는 사람 10명 중 4명은 비정규직이다. 여성의 임금은 남성에 비해 여전히 35% 정도 낮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저임금은 다소 해소되었으나 자산의 대물림으로 인한 소득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과도한 노동시간에 시달리거나 산업재해로 매년 목숨을 잃고 있다. 직장 스트레스는 정신건강 위험을 심화시켰다. 그럼에도 90%의 노동자들은 아직도 노동기본권을 누리지 못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일터에서의 권리를 위해 헌법에 보장된 노동조합을 만들고 보니 정규직 전환을 해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 수십년간 우리 사회에서 ‘일터의 권리’는 없었다. 대한민국은 ILO 주40시간 협약을 했어도 세계 최장시간 일하는 곳이다. 산업안전보건 협약을 6개나 비준했지만 OECD에서 가장 높다. 영국 사망률의 26배다. “모든 노동자들은 계약형태나 고용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는 인간적인 노동환경을 보장하는 적절한 노동보호를 누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100년 전 ILO가 선언한 “진정으로 보다 인간적인 노동체제”인 것이다. 

이제 우리도 그 여정에 함께해야 하고, 더 나은 일의 미래를 위한 기회를 포착해야 할 시기다. ILO 100주년 보고서는 유급휴가제도를 통한 평생교육훈련 시행, 플랫폼 노동과 같은 비표준적 고용의 규율,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사회안전망 확대를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 경영참여나, 여성과 청년 문제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ILO 1호 협약이 8시간 노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도 ‘더 나은 미래의 일’을 위한 목표는 절실한 과제일 듯하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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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국가전략의 부재 또는 빈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종종 제기되곤 했지만 5년 단임 정권을 책임진 주체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법 87조에 따라 제정된 국가안전보장회의법을 포함한 어느 법령에도 ‘국가안전보장’ 및 ‘국가안보’의 정의는 없다. 다만 노무현 정부 시절 미국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를 벤치마킹하여 2004년 처음으로 ‘국가안보전략보고서’를 발간, 국가이익(국가목표)을 “국가의 생존, 번영과 발전 등 어떠한 안보환경하에서도 지향해야 할 가치”로 정의했을 뿐이다. 

이후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국가이익(목표)은 온데간데없이 정권의 이익과 전략이 마치 국가이익과 전략인 양 호도됐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태생 탓에 강대국들이 내뿜는 세력정치 자장(磁場)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음에도 5년마다 나타났다 사라진 역대 정권은 예외 없이 국가안보의 한 축인 외교정책을 지지층만을 의식한 국내정치 공학적 관점에서만 다루면서 국가이익과 국가전략의 본래 의미가 실종되는 데 한 요인을 제공했다. 그사이 외교가 차지하는 공간은 눈에 띄게 축소됐다. 더군다나 ‘청와대 정부’라고까지 불리는 상황에서 외교부가 독자적으로 공간을 넓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며, 불길한 징후는 이미 예고됐다. 

2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외교부에)그렇게 훌륭한 엘리트들이 많이 모여있는데도 우리 외교역량이 우리나라의 어떤 국력이나 국가적 위상을 제대로 받쳐주지 못한다는 판단이 많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문 대통령은 외무고시 출신에다 특정 학맥 중심의 조직문화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과거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외교부에 대해 유사한 지적들이 있었다. 그 후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의 문재인 정부에서도 외교부의 뼈를 깎는 환골탈태는 없었던 셈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대사에 외교직 공무원들을 철저히 배제했고, 외교수장에 외교부 주류와는 거리가 먼 외부 인사를 임명했다. 이때만 해도 외교부의 ‘워싱턴 스쿨’ ‘저팬 스쿨’ ‘차이나 스쿨’처럼 폐쇄적 순혈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로 해석됐다. 

그러나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지금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 혁신이 실패를 넘어 자칫 외교의 위기로 이어지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주미 한국대사관 외교관의 위법행위, 깐풍기 대사, 명칭 오기, 그리고 구겨진 태극기 게양에서 드러난 일부 외교부 직원들의 기강해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독 회담 2분’이 상징하는 한·미관계의 불편한 진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무산 등이야말로 한국 외교의 위기를 알리는 대표지표이다. 

이처럼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 불확실성이 이전보다 훨씬 높아진 한국 외교 위기의 본질은 국가이익 전략의 부재에 기인한다. 그래서 묻는다. 임기 중반에 접어드는 문재인 정부는 정권을 넘어서는 국가이익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를 어떤 방식으로 달성하겠다는 로드맵 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북한 비핵화가 국가목표 중 하나라면 비핵화에 대한 입장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북한을 대상으로 양자 간 국익을 정하고 이에 따른 전술이 아닌 전략을 마련했는가? ‘늘공’들을 의전과 현안으로 내몰고 ‘어공’들 위주로 냉엄한 강대국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존망을 가를 수 있는 국가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이 야인시절 쓴 책에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전략실 제2차장 관련 일화가 소개돼 있다. 김 차장이 오래전 외교통상부 외교통상교섭본부장직을 떠나면서 직원들에게 “외교통상부는 장교 요원을 뽑아 사병으로 쓴다”고 했다는 것이다. 조 차관 역시 “정치적 리더십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은 관료집단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했다. 이제라도 국가이익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특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주적이고 유연한, 창의적 외교전략을 수립하기를 기대한다.

<이병철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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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내면은 치열한 싸움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 싸움은 어딘가를 엄숙하게 향하기도 하죠.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던 고상돈이나 모두가 꺼리던 소록도를 향하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의 싸움이 그랬습니다. 때로는 무엇인가를 반대하기 위한 싸움도 합니다. 하얼빈 역에서 방아쇠를 당기던 안중근의 손길, 1987년 종로 한 골목길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소녀의 눈물, 뻔히 질 것을 알며 부산으로 내려가던 한 정치인의 발길에는 아무 말 없어도 그 사람의 진심이 보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고개를 숙이게 되죠.

황교안도 진심을 솔직히 드러냈습니다.

5월17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한다 … 정치적 입장에서도 동성애는 우리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동성애와 관련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하며 교육을 통해 동성애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죠. 정체성 이슈인 동성애를 선택의 문제로 본 그릇된 시각보다 그 배경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의 반대, 그의 싸움이 어디 있는가. 바로 성경입니다.

2017년 한 기독교 강연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놀랄 일은 아니죠. 황교안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50년 동안 주일 예배를 단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 독실한 기독교 전도사입니다. 검사 시절에도 부임하는 곳마다 예배 모임을 만들어 ‘검찰 복음화’를 외쳤죠. 가난하고 공부도 못했던 자기가 관직에 오른 것도, 총리 시절 가뭄을 극복한 것도, 법안 통과도 예수 덕이라며 자기 믿음을 자랑했다죠. 다른 종교를 어떻게 보는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오신날 한 절을 찾은 황교안은 합장도, 예법에 따른 반배도, 의식 참여도 거부했죠. 내 신만 정당하고 그의 가르침 그대로, 온전히 따르며 세상과의 타협을 반대한다는 시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각을 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하죠.

어떤 종교건 근본주의가 활개를 칠 때는 정치적 이유가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디 왕가처럼 권력을 유지하고 공고히 하는 데 쓰곤 하죠. 정부가 역할을 못하면 그 공백을 채우기도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가자지구의 하마스가 그런 경우죠. 정책으로 승부가 안되니 종교를 동원해 표를 모으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봅니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 인도 모디 총리가 그랬고 미국의 공화당도 그랬습니다. 미국 공화당은 기독교 세력을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낙태, 동성애 등 가치 이슈를 들고나와 보수 기독교 표를 쓸어 모았죠. 덕택에 공화당은 부자 배를 불리는 경제정책을 내면서도 가난한 다수의 표를 끌어모을 수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삶은 점점 힘들어지고 그럴수록 성서의 외침을 더 크게 틀어댔죠. 대립과 불신은 커갔습니다. 극단적 정파성은 최근 유례가 없을 정도로 깊어져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교활한 정치가 공화당 자기 발등마저 찍고 있습니다. 극우 정치에는 종교와 가치뿐 정책이 상관이 없죠. 그러다 보니 정책에 무지하고 목소리만 큰 사람이 활개를 칠 판을 깔아준 셈이 되었죠. 거기에 트럼프가 등장한 겁니다. 이제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어 공화당 주류를 다 삼켜버렸습니다. 하긴 공포정치와 전쟁도 벌어지는 마당에 이런 종교의 폐해는 얌전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문제는 심각합니다.

어떤 종교를 따르고 그 믿음이 근본주의적일지 아닐지 선택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교회가 아닌 공당의 대표라면 좀 생각해봐야겠죠. 황교안이, 자유한국당의 정책과 주장이 공익을 해치면서 자기 믿음만 따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당대표직을 맡은 지 두세달 만에 근본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듯한 황교안의 행보가 걱정스럽습니다. 다른 종교를 무시하는 것과 다른 정치세력을 무시하는 것. 자기 신만 신이라는 환상과 좌파독재를 물리쳐야 한다는 환상. 과연 무관한 것일까요?

그냥 정치적 레토릭일 뿐 그의 종교적 신념과 아무 상관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고약한 길로 황교안은 향하고 있으니까요. 사상과 지역 갈등으로 찢긴 나라를 종교로 또 나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 일 없게 정화수 떠 놓고 간절히 기도라도 해야겠습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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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에 출마 선언할 무렵만 하더라도 미국은 물론 국내 정치평론가들은 그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잠시 스쳐가는 거품 인기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슈퍼 화요일이라 불리는 경선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자 트럼프 대세론이 공고해졌다. 뒤늦게 언론과 방송은 트럼프 돌풍의 주요 원인으로 실업률, 무역 적자, 테러 사건 이후 무슬림을 비롯한 해외 이민자에 대한 혐오 등 ‘러스트 벨트(rust belt)’로 상징되는 보수 백인 계층의 불만과 위기의식을 트럼프가 막말을 통해 대리만족시켜준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막말이 널리 유포될 수 있는 미디어 환경과 사회구조의 변화이다. 

1960년 케네디와 닉슨의 TV 토론 이후 60년이 흐르는 동안 미디어 환경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했다. 트럼프의 성공은 변화한 미디어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눈부신(?) 성공은 한국의 정치인들에게도 학습효과와 자극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정치인과 막말이 갑작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정치를 넘어 일상화되어간다는 것이다. 신문, 라디오 그리고 TV 같은 전통적인 대중매체에 케이블방송과 인터넷이 추가되면서 미디어의 영역이 놀랍게 확장되었고,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본격적인 1인 미디어의 시대가 열렸다. 이 같은 변화는 그간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담화들이 실수든, 의도적인 것이든 곧장 공적담론의 장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뜻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개인의 신상정보가 유리벽처럼 투명해지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말과 글, 행위 역시 여과 없이 전파되는 시대란 의미이다. 위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트럼프의 성공에 자극받은 정치권과 신규 미디어는 이것을 기회로 여긴다. 미디어 시장에 후발주자로 진입한 종편, 인터넷 방송이 시청률에 연연하여 극단적인 막말을 묵인하거나 갈등상황을 의도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지율에 목을 매는 정당과 정치인이 정치적 이유로 이런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미디어 연구자들에 따르면 케이블방송 뉴스나 인터넷 뉴스를 즐겨 소비하는 사람일수록 뉴스 보도의 객관성이나 중립성보다는 정파성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는데, 종편의 보도 강도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은 스스로 망언과 페이크뉴스를 만들어내는 미디어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막말과 페이크뉴스에 몰두하는 시청자일수록 대화와 타협보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도덕 불감증 증세를 보인다. 문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견의 차이가 합리적인 토론과 설득, 타협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막말을 통해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청취자들을 향해서만 발언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막말을 중요한 정치수단으로 삼는 ‘부족주의(tribalism)’ 정치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혐오의 정치이며 사회의 신뢰를 파괴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막말과 거짓뉴스가 혐오를 유포하며 제2의 성공을 꿈꾼다. 어떤 이들은 이를 받아 다시 유포하며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J K 롤링의 판타지 소설 <해리 포터>에는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비춰주는 마법의 거울 이야기가 나온다. 그 거울에는 “에리스드 스트라 에루 오이트 우베 카푸루 오이트 온 워시(erised stra ehru oyt ube cafru oyt on woshI)”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 문구를 거울에 비춰보면 “나는 당신의 얼굴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속 소망을 보여준다(I show not your face but your hearts desire)”라는 뜻이다. 

막말과 거짓뉴스가 발호할 수 있는 배경은 자신의 확증 편향에 따라 거짓과 혐오발언을 별생각 없이 소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다. 누군가 당신에게 거짓뉴스를 전달하거나 혐오를 조장하는 막말을 하거나 성범죄 동영상을 공유하려 할 때, 항의하라! 낮고 작은 목소리라도 단호하게 거부하라! 그것만이 우리 자신을, 사회를 지키는 방법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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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잡지, TV, 라디오의 세칭 4대 매체라 불리는 전통적 미디어의 힘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지면과 전파로 전달되는 이 매체들의 특징은 같은 내용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매스미디어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최근 50대의 사용량이 2배 넘게 증가했다는 유튜브 역시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관심을 가져갑니다. 전 국민이 사적인 대화를 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카카오톡의 단톡방 리스트 사이에 드디어 광고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 역시 관심 시장(attention economy)의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Seeing is believing”, 우리가 보는 것들이 우리의 생각을 형성합니다. 

최근 길거리의 거대한 전광판이 다시 힘을 얻습니다. 서울 코엑스 앞의 거대한 LED는 화려한 사인보드로서의 역할을 가져옵니다. 그에 반해 지하철의 광고는 예전의 영광을 잃고 말았습니다. 예전 지하철역마다 가득 쌓이던 스포츠 신문이 무가지로, 다시 그마저도 사라져 버린 것은 승객들 모두 손바닥 위의 작은 기계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 이유입니다. OOH(out of home) 매체라 불리는 길거리에 세워놓은 입간판을 이야기하는 빌보드가 다시 의미 있는 매체가 된 것은, 어쨌든 밖에서는 걷거나 운전을 위해서라도 핸드폰에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뉴욕5번가의 화려한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도 재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핸드폰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앞에 있는 무언가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은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걷거나, 타거나, 공연을 보거나 수업을 받거나 하는 방법밖에는 없지요. 이런 이유로 최근 극장의 광고가 더 힘을 받습니다. 어두운 곳의 거대한 스크린을 보아야만 하고, 핸드폰의 작은 빛도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선 이런 상황이 귀해집니다. 식탁에서도 핸드폰을 옆에 놓거나 눈앞에 두고 먹는 장면이 일상적입니다. 심지어 “포케몬고” 같은 AR게임에 이르기까지 이제 우리는 마치 눈앞에 필터를 끼운 것처럼 세상을 핸드폰을 통해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볼거리에도 본격적으로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되고 있습니다. 실내에서 거대한 사인보드를 중심으로 무대가 만들어지는 e스포츠의 격전장인 “롤파크”가 시내에 자리를 잡습니다. 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를 극장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클래식 라이브 상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저 멀리 유명한 뮤지션의 콘서트 표를 어렵게 구해 가보는 것처럼 5G와 고품질의 영상 음향 전송 기술이 전 지구적인 콘서트를 동시간대에 볼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때 보아야 하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전 국민에게 공통의 관심사가 되는 국가적인 큰 사건이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스포츠 중계, 훌륭한 예술 공연의 실황이 아니라면 반드시 그 시간에 보아야 할 이유는 좀처럼 찾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함께’ 보아야 할 것들은 꽤 있습니다. 이미 방영된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동호회의 모임, 충실히 공부한 명사의 강연 후의 청중의 질의와 응답 같은 것들은 뜻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모든 작은 모임들이 다시 전 세계적인 동호인에게 전파되며 다시 큰 관심으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렇듯 예전 소수의 콘텐츠를 불특정 다수에게 동시에 보여주던 방식은 다양한 콘텐츠를 취향 저격하여 소수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때 하나하나 팬들의 마음에 꽂히는 메시지는 명확한 ROI로 다가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 시청률과 광고 메시지의 인지도와 같은 도달률이 아닙니다. 그보다 팬이 정말 좋아하는 콘텐츠와 딱 맞춰진 메시지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우리가 주는 메시지가 상대의 주의를 흩트리고 그를 귀찮게 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자기반성이 필요해지는 시점입니다.

이제 “보는 것을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보는 세상(believing is seeing)”이 오고 있습니다.

<송길영 | 마인드 마이너 (Mind M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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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는 시의회에서 발주한 연구용역의 제안요청서가 놓여 있었다. 미션은 ‘사회적 경제 주체가 청년층의 주거빈곤을 개선할 방안’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청년의 주거와 빈곤만 다뤄야 할 이유가 잘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이 기회를 잘 활용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을 강조하되 전반적인 주거빈곤을 다룬다고 문제 삼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사회적 경제를 강조하는 새 시장이 당선된 것도 좋은 기회였다. 아주 단순하게 보면 주거빈곤은 소득이 주거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즉 주거비용이 지나치게 높은 상황에서 발생한다. 주거비용을 높이는 유력한 용의자는 주택에 끼어있는 불로소득이다. 불로소득을 걷어낸 비영리 주택을 공급할 수 있다면 문제의 호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적 경제와 비영리는 궁합이 잘 맞는 한 쌍이 아니던가.

많은 연구가 쏟아지지만 당장 정책으로 구현되는 경우를 많이 보진 못했다. 이 연구라고 크게 다르겠는가. ‘사회주택’이라는 개념의 논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딱히 요구사항에 없었던 조례안을 만들어서 보고서에 넣었다. 

놀랍게도 ‘사회주택 활성화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에 관심을 둔 의원들이 있었고, 얼마 동안 논의와 수정을 거친 후 덜커덕 조례안이 통과되었다. 고마웠지만 걱정스럽기도 했다. 실제로 그간 조례의 쓰임을 돌아보니 고쳤으면 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현재 조례는 사회주택이란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상으로 주거관련 사회적 경제 주체에 의해 공급되는 임대주택 등’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앞서 얘기했듯이 보고서가 사회적 경제 주체의 참여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너무 소심했던 것 같다. 기왕 일을 키웠으니 눈치 보지 말고 ‘사회주택이란 서민이 부담 가능한 저렴한 수준으로 30년 이상 장기임대사업에 활용되는 주택’이라고 못을 박는 게 학술적인 개념에 좀 더 부합했을 것이다. 반대 의견도 있었겠지만 15년 정도에서 타협점을 찾지 않았을까.

그동안 주택과 관련된 제도가 바뀐 것도 반영해야 하는데, 사회주택에 해당하는 주택을 세부적으로 짚어줄 필요가 있다. 장기임대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공주택 특별법’에 따라 공급되는 공공임대주택도 당연히 사회주택으로 간주될 수 있다.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공급되는 ‘공공지원민간임대주택’도 저렴하게 장기간 임대된다면 사회주택으로 포함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민간이 공급하는 임대주택이 저렴하게 장기간 임대된다면 사회주택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사회주택을 규정하면 지방자치단체와 그 산하의 공기업이 사회주택을 공급하는 주체로 당연히 포함된다.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주택을 공공에서 담당하고, 그 외 서민을 위한 사회주택을 사회적 경제 주체가 담당하는 분업구조가 될 것이다.

한편 ‘공공주택 특별법’에는 공공과 민간이 공동사업을 벌여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회주택의 공급이 공동사업의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공공과 사회적 경제 주체가 공동으로 출자하는 사업, 공공은 택지를 제공하고 사회적 경제 주체가 주택을 건설하여 운영하는 분담형 사업, 공공임대주택의 운영을 사회적 경제 주체에 위탁하는 사업 등을 조례에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의 사례를 보면, 주택의 계획부터 운영단계까지 입주자의 참여가 이뤄질 때 주택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공동체 활성화 등의 긍정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를 촉진하기 위해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하거나 매입하는 과정에 지역사회주체를 참여시키거나 공공과 공동사업을 진행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전언에 따르면 서울시에서 사회주택 활성화 지원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있고, 조례의 개정도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짚어본 사안들도 충분히 검토되고 논의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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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 우주를 떠돌던 한 우주인이 침팬지 혹성에 불시착했다. 우주선을 간신히 빠져나와 헤매고 다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침팬지 공안에게 붙잡혔다. 이 혹성에서는 지위가 높을수록 허리를 곧추세우고 걷는데 침팬지를 닮지 않은 이상한 자가 ‘곧선 보행’을 하고 다니니 난리가 난 것이다. 침팬지 공안마저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다니는 판에 ‘듣보잡’이 감히 허리를 펴고 다니다니.

과학수사대로 바로 압송돼 인지능력 테스트를 받았다. 컴퓨터 화면상에 0부터 5까지 숫자와 그 위치를 보여줬다. 잠시 후 그 숫자들을 모두 가리고 숫자 순서대로 위치를 짚어내라 했다. 우주인은 순간 기억능력을 활용해 정확히 숫자의 위치를 짚어냈다. 이제 0부터 7까지 숫자를 보여준 후 다시 테스트했다. 이번엔 잘 짚어내지 못했다. 그러자 숫자를 9까지 높였다. 몇 개를 맞히다가, 도저히 계속할 수가 없었다. 침팬지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허리를 펴고 다니는 게 말이 되느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침팬지 혹성의 법전 몇 권을 주고 다 외우라 했다. 일주일 후 4지선다형 시험을 보았다. 단순 암기하지 않으면 시간 내에 풀 수 없는 퀴즈풀이였다.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 시험을 보았다. 예상보다 시험 성적이 잘 나왔다며 침팬지들이 감탄했다. 또 다른 시험지를 가져왔는데, 이번엔 5지선다형이었다. 고향별에서는 이미 이런 시험은 인공지능이 다 대체해 쓸모없게 된 지 오래라 오히려 어려웠다. 논술시험도 보았다. 말이 논술시험이지 법전을 통째로 암기하지 않으면 한 문장도 제대로 쓸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변방으로 쫓겨났다. 수도에 살 수 있는 인지능력이 부족하다고 판정받았기 때문이다. 땅만 보고 걸으라고 척추압박 장치로 허리를 구부러트려 놓았다. 구부정한 허리를 끌고 변방으로 가보니 모두들 땅을 내려다보고 기어 다녔다. 알고 보니 이곳에선 세습제를 없애고 민주주의를 한답시고 시험을 통해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나눈다. 태어나자마자 모두 단기 기억능력 키우는 교육을 받는다. 일정 교육기간이 지난 후 시험 성적에 따라 허리 각도가 정해진다. 

근데 단기 기억능력 시험에 관한 한 침팬지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사진 찍듯이 정확히 사물들의 배치상태를 기억하는 침팬지들은 온갖 시험을 휩쓴다. 그중에서도 법조인이 되는 시험이 압권이다. 이 시험에 붙으면 이들을 한데 모아 교육을 시킨다. 침팬지들 사이에 온갖 끈끈한 동료애가 생긴다. 이후 법조계로 나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다 결국 정계로 진출한다. 형식상으로는 주권을 지닌 인민이 민회를 구성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원로원에 맡겨져 있는데 대개 법조계 침팬지 출신이다. 인민이 직접 뽑은 집정관조차 침팬지 원로원에게는 고개를 조아린다. 침팬지 원로원은 정치를 천적 박멸과 먹고사는 문제로 쪼그라트린다. 입만 열면 천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고 핏대를 올리거나 경제 살리겠다며 게거품을 문다. 놀랍게도 이런 조악한 선동이 인민에게 잘도 먹힌다. 대다수 인민은 주로 변방에 흩어져 사는데 침팬지로부터 개, 돼지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도 시험 못 봐 네발로 기어 다니게 됐다며 스스로를 탓한다. 개는 침팬지 주인을 쫓아 사냥을 다니느라 혼이 나가있다. 보이는 건 모두 주인의 천적으로 간주하고 물어뜯는다. 돼지는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땅 헤집고 다니느라 부산하다. 그래도 과거 궁핍한 삶에 비해 얼마나 풍요로우냐며 앞으로 경제가 더 성장하면 민생 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거라는 침팬지의 부추김에 쉽게 들썩댄다.

침팬지 공화국에서는 서로를 ‘충(蟲)’이라 비하한다. 무엇보다 침팬지 정치가 혐오와 증오의 언어로 인민의 가슴에 적개심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를 보다 못한 우주인이 눈을 들어 하늘을 한번 보라고 일렀다.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으냐며 화들짝 놀란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자를 극형에 처하는 공화국보안법을 모르냐는 것이다. 그럼 평생 허리 한번 못 펴고 땅바닥을 기며 살아갈 것인가? 되묻자, 이번 생은 어차피 ‘폭망’했으니 자식 교육시켜 침팬지로 성공시키는 수밖에 없다는 자못 결연한 답이 돌아올 뿐이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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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에 꽃이 한창입니다. 하얗고 가늘게 뻗은 꽃잎은 하얀 쌀밥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이팝인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름이 참 정겹습니다. 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코를 간지럽힙니다. 이팝나무는 우리 토종 수종으로 알려집니다. 봄날에 남쪽부터 꽃을 피워 5월에 서울에 한창입니다. 

우리 곁에 소중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이팝나무처럼. 사계절이 뚜렷하고, 지구 북반구 중간에 위치한 데다, 바다로 둘러싸이고, 산이 많은 이 땅은 소중한 생명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남의 것으로 알고 지내지만 사실 이 땅이 원산지인 식물들도 꽤 있습니다. 

전 세계에 고급 크리스마스트리로 팔리는 구상나무가 그중 하납니다. 화사한 향기로 익어가는 봄을 알리는 꽃 라일락도 그렇습니다. 라일락의 원종은 수수꽃다리로 알려집니다. 구상나무는 한라산, 지리산과 덕유산 높은 지역에서 군락을 이루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수수꽃다리도 라일락과 함께 짙은 봄 향기를 뿌리며 여전히 어느 낯익은 골목에서 우리와 함께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프랑스 신부가 제주도에서 구상나무를 연구해 해외에 알렸다고 합니다. 1940년대 후반 미국 식물채집가가 북한산, 도봉산에서 수수꽃다리를 채집해서 미국에 돌아가 품종을 개량해 ‘미스 김 라일락’이라는 이름을 붙여 팔았다고 합니다. 수수꽃다리 자료 정리를 도운 분 이름을 땄다고 합니다. IMF 외환위기 때 외국 종자 기업들이 우리 종묘회사를 인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데에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5월, 거리를 거닐다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은 이팝나무 꽃잎을 보면서, 올봄 출근길에 봤던 꽃과 나무를 떠올려 봤습니다. 산수유, 영춘화, 개나리, 진달래, 애기똥풀, 능수벚꽃, 수수꽃다리, 귀롱나무, 봄맞이꽃, 봄까치꽃, 철쭉, 흰제비꽃, 꽃마리, 현호색, 조팝나무, 이팝나무. 몇 걸음만 떼도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을 가진 나무와 꽃들을 금방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울에 곧 찔레꽃 향기가 퍼지겠네요.

나라마다, 지역마다 품종을 법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진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지식재산권 보호의 일환으로 종자를 등록하고 보호하자는 인식이 퍼진 때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을 전후한 때였습니다. 우리 역시 그런 세계화에 발맞춰 1995년 종자산업법을 제정했습니다. 품종 보호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2012년에 식물신품종 보호법을 제정했습니다. 나무, 꽃과 함께 콩과 같은 곡물 씨앗도 우리 토종 종자가 참 다양하고 많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토종 종자와 함께 세계 각국의 종자를 모아서 보관하는 국립종자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눈에 띄지 않아도 다양한 분야에서 품종을 발견, 개발하고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런 노력이 돈을 벌기 위해서, 우리만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류를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우리 품종, 원종과 그에 대한 지식재산권 보호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자기 것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 그런 나라를 보면 자기비하가 심합니다. 자기 것을 부정하며 다른 사람, 다른 나라에 기댈 생각부터 합니다. 자기 것을 잘 지키는 사람, 그런 나라는 곁에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깁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곁에 있는 것들을 아끼며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적어도 청년세대는 자기 것, 곁에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어릴 적 가로수 하면 흔히 떠올리던 나무들이 있습니다. 이팝나무는 그런 나무 대열에 올라있지 못했습니다. 그 흔한 가로수에 남의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시절 5월에, 이 땅 곳곳에서 이팝나무를 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쓸모 있는 것만큼이나 유익하지요.”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가 한 말을 떠올립니다.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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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 주요 화두는 ‘청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졸자의 절반 이상이 취업을 하지 못하고, 취업을 하더라도 비정규직이나 불안정한 일자리들이 대부분인 현실이 15년 이상 지속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을 찾는 데 11개월 정도 소요된다. 1년 이상 장기 미취업 청년도 22만명이 넘는다. 이 시간 동안 청년들은 생계와 취업 그리고 자기 삶을 스스로 모색해야 한다. 일자리를 상실했거나 일 경험이 없는 청년은 실업급여와 같은 소득지원도 받지 못한다. 그사이 신용불량, 건강이상, 사회단절 같은 문제들이 깊어지고 있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청년’이 정부정책으로 등장한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 청년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한 시기였다. 2003년 ‘청년실업 종합대책’ 발표 때부터다. 약 15년이 흐른 지금까지 정부정책은 고용 문제 중심이었다. 2004년 제정된 ‘청년실업해소 특별법’과 2023년까지 연장된 ‘청년고용촉진 특별법’ 또한 고용과 실업에 초점을 둔 법률이다. 문재인 정부 시기 ‘청년 일자리 종합대책’(2018·3·15)도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10여곳의 지자체에서 시작한 청년수당이 ‘청년구직활동지원기금’이라는 이름으로 올해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4월1일 청와대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 간담회에서 엄창환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의 발언을 듣고 있다. 이날 간담회에는 경실련, 참여연대, 범시민사회단체연합, 소비자연맹 등 진보, 보수, 중립성향 단체와 정부 관계자를 포함한 100여명이 참석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부의 청년정책은 어떤가. 미취업 청년들에게 정부는 40여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청년의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많다. 이행기 청년 노동시장의 특성이나 삶의 조건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취준생, 자발적 이직, 불안정 고용, 니트(NEET)까지 매우 다양한 위치에 있는 것이 청년이다. 실제로 2019년 서울지역 2000명의 청년들에게 ‘개인의 행복한 삶의 중요도’를 물었더니 다양한 가치관과 상상력이 확인된다. 이를테면 ‘인간관계를 통한 안정감’이나 ‘건강한 정치문화와 시민으로서의 참여’ 그리고 ‘사회적 지위 등 사회로부터 얻는 안정’이 5위 안에 들었다. 이는 청년들의 가치관이 경제적 가치와 휴식과 문화 이외에도 다양하게 확장되어가는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주 당·정·청은 청년대책을 발표했다. 국회에서 ‘청년기본법’을 추진하고, 총리실 산하에 ‘청년정책조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청와대는 ‘청년정책관실’을 신설한다고 한다. 앞으로 245개 지자체에 청년 관련 행정조직이 만들어지고 지역에서 청년 욕구에 부합한 정책이 마련될 것 같다. 이제 우리 사회가 청년정책 제도화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다만 과거 정부가 발표한 청년정책들이 왜 실패했는지부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국책연구기관의 수많은 보고서들이 왜 청년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는지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앞으로 청년의 삶에 다가가는 정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해결 과제도 확인된다. 무엇보다 청년정책은 청년 당사자들이 정책을 발굴·제안·결정하고 이에 대한 예산 편성과 집행까지 설계할 수 있도록 정책과정이 혁신적으로 변화해야 효과성을 담보할 수 있다. 아마도 정책방향과 제도는 유럽연합(EU)에서 2013년부터 권고한 ‘청년보장제도(youth guarantee)’가 참고할 만하다. 청년보장제는 청년의 삶과 여정에 초점을 둔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정책이다. 물론 정책운영 모델은 서울시의 청년청, 청년의회, 청년정책네트워크, 지원조직 사례 등을 통해 보다 더 진전되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지난 3월 서울시 ‘청년시민회의’ 모임이 열린다기에 찾아가 봤다. 40개 분야별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1000명이나 되는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무엇이 그들을 한곳에 모이도록 했을까.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일까. 국제노동기구(ILO)는 청년의 즉각적인 구직활동을 강제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취지는 국가가 개인적 배경과 관련 없이 모든 청년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민으로서의 청년. 이제 우리 사회에서 ‘청년’이 사회 주체로 미래를 설계하는 모습에 중앙과 지방정부 그리고 국회가 답을 할 때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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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이 칼럼(2018·3·27)에서 속전속결로 진행되던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으로 보았던 동인(動因)으로 첫째, 문재인 정부의 선제적이고 치밀한 준비, 둘째, 북한의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 마지막으로 오랜 제재로 인한 북한 내구성의 약화를 들었다. 그러면서 대화로 포장된 길이 낭떠러지로 이어질 수 있음을 사족으로 달았다. 이후 계절이 네 번이나 바뀐 지금 사족이 점점 불길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판문점회담과 평양회담(9·18~20)에서 남북이 공동 승리자였다면 북·미 정상들이 최초로 마주한 싱가포르회담은 북한의 완승으로 끝났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 후 가진 단독 기자회견에서 쏟아낸 발언에서 북·미 양국은 금방이라도 행동 대 행동으로 나아갈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싱가포르회담 합의문을 두고서 미국 국가안보 엘리트들의 역풍은 예상보다 훨씬 거칠고 집요했다. 뉴욕타임스(2018·6·12)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보다 한 수 아래”였으며 “농축 우라늄 비축량을 98% 줄이도록 규정한 이란 핵합의보다도 훨씬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래서였을까, 싱가포르회담 후 8개월여 만에 개최된 베트남 하노이회담(2·27~28)의 결과는 절치부심(切齒腐心)한 트럼프의 한판승이었다. 존 볼턴, 마이클 코언, 비등가성, 미국 의회 반발 등 여러 변수가 복합적으로 얽혀 나타난 결과였어도 이를 미처 예상치 못한 북측으로서는 충격이 컸다. 이후 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4·12)에서 “연말까지 미국의 변화를 기다리겠다”며 협상 여지를 두면서도, 한 외세(미국)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러시아)를 끌어들이는 ‘균세외교(均勢外交)’를 펼쳤다. 말이 좋아 균세외교이자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일 뿐 김 위원장으로서는 절박하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됐다. ‘자력갱생(自力更生)’이니 ‘우리민족끼리’를 무색하게 만든 나들이였다.

연내까지 미국의 행동변화를 겁박(劫迫)한 북한에 트럼프 행정부가 순순히 응할 가능성은 영(零)에 가깝다.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필두로 트럼프 행정부 내 매파들(hawks)은 드디어 대북 제재 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워싱턴 강경파들이 보기엔 초조한 측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다. 특히 이들은 하노이회담 이후 드러난 북한의 ‘거친 대응’에서 김정은 정권이 제재로 인해 고통을 심하게 느끼는 것으로 ‘인식’했다. 

같은 맥락에서 김정은의 블라디보스토크 열차 여정(旅程) 역시 직면한 위기를 우회하려는 관성적 행동이었다. 하지만 8년 만에 개최된 북·러 정상회담치곤 너무 초라했다. 공동성명 채택은커녕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회담 후 “비핵화와 관련해서 미국과 입장이 동일하다”고 했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허가 찔린 셈이다. 북한 비핵화를 두고서 강대국들이 고공(高空)에서 주고받는 게임의 규칙을 알 리가 없는 세습 왕조국가 북한의 ‘조정대신(朝廷大臣)’들 중 어느 누가 ‘찬배(竄配)’에도 개의치 않고 ‘미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듣고 싶어할까. 21세기에 미국을 상대로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려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거듭되는 대미 강경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잠자고 있는 사람보다 잠자는 척하는 사람을 깨우기가 더 힘들다면 비핵화 시늉을 내는 국가를 완전하게 비핵화시키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힘든 과정으로 여기는 것이 합리적 판단이다. 여기에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자강(自强)을 도모하는 척하면서 북한을 각자 자신들의 영향권 내에 묶어두려 한다. 강대국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북한 비핵화호의 표류, 나아가 침몰까지 예상할 수 있다. 더 늦지 않게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으로 하여금 핵무기가 국제정치에서 더 이상 ‘로열 플러시’(royal flush)가 아니며, 더군다나 ‘벼랑 끝 전술’이 트럼프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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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보면 당대 최고의 재상 제갈량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죽은 제갈량이 적이자 최고의 라이벌이던 사마의를 쫓아낸 일화죠. 

오랜만에 들른 광화문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한 건물에 걸린 독립운동가 초상화가 크기도 했지만 너무 현대적이고 세련됐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3·1운동과 임시정부 관련 행사가 많았습니다. 100주년이어서 그랬겠지만, 민간 행사뿐 아니라 정부 주도 포럼, 전시회, 기념회 등이 열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소녀상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황사처럼 전국을 강타했죠.

모든 사상은 한계를 갖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것은 한계가 더 도드라집니다. 정체성의 경계는 인위적이지만 결국 절대적이 되니까요.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민족’은 현대국가가 세워지며 생겼죠. 순수한 혈통은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민족주의에 환호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또한 역사에 기대는 사상이다 보니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진보적 미래를 꿈꾸기에는 부족하죠.  

그러니 정치판이 과거에 머무를수록 나은 미래를 기다리는 국민은 피곤합니다. 문재인 정부도 예외가 아닌 듯합니다. 이 정부는 그릇된 과거를 타파하는 사명으로 출발했습니다. 그것에 집중하는 게 당연했죠. 덕분에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옳고 저쪽은 적폐라는 구분은 그렇게 그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어진 선은 정부를 옭아맸습니다. 적폐로 지목된 이들은 물러설 곳이 없었고, 배수진을 친 이들의 저항은 치열했죠. 과거에 대한 전투가 치열할 때 거리엔 촛불이 꺼졌습니다. 은행빚과 취업난이 그 거리를 채웠죠. 싸움이 힘들어질수록 쉬운 상대가 눈에 띄는 법. 100년 전 일본만큼 만만한 상대가 있을까요. 시선은 자꾸 과거로 가고 미래에서는 멀어졌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가졌던 과거청산의 소명은 이제 그 유효기간이 지난 듯합니다. 박근혜와 주변 인물들은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정치적 영역을 벗어난 셈이죠. 이제 정치에 충실할 때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첫째, 정치 외연을 넓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총칼 없는 전쟁이죠. 갈등 당사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논의하는 공적 장입니다. 상대가 좋건 싫건 말이죠. 싫다고 배척하는, 내가 옳다고 외면하는 순간 정치의 영역은 좁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갈등의 당사자들은 주먹과 칼에 기댈 수도 있죠. 둘째, 정치적 미래를 제시하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싸움을 과거로 몰아가도 판을 흔들어야 합니다. 불과 1년 전 평화가 있는 미래를 보여줬을 때 국민은 열광했죠. 남북평화가 중요한 미래이지만 그것뿐이라면 곤란합니다. 문재인 정부 탓만은 아니지만, 정권은 문재인 대통령이 쥐고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2일 오전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정근 기자

정치판에서 미래를 보여주지 못하고 그 판마저 좁아지면서 싸움은 국민 사이로 파고든 형국입니다. 정치적 논쟁이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적 공간이 허약해집니다. 분노와 무시당했다는 감정은 해소되지 않고 쌓이기 쉽죠. 이들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고함에 쉽게 동화해 정치세력화할 수 있습니다. 벌써 그런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태극기부대죠. 오는 토요일이면 태극기집회는 122차에 접어듭니다. 그들은 열정과 확신이 있습니다. 울릉도에서 배를 타고 옵니다. 부산에서,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옵니다. 매주 오는 이도 많습니다. 사비를 털어 시위용 트럭을, 동지들 먹일 식사를 준비합니다. 명확한 비전도 갖고 있습니다. 맨주먹으로 정당을 꾸렸다는 자부심도 강합니다. 하지만 공존을, 다양성을 강조하는 진보는 이들만큼은 철저하게 무시합니다. 무시당한 이들을 모아 트럼프는 대통령이 됐죠. 브라질에서도, 독일에서도, 헝가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만 언제까지 예외일까요? 

이런 와중에 자유한국당 해산 국민청원이 2일 현재 170만명에 육박한다니 걱정스럽습니다. 통합진보당 해산의 광기가 생각나는 것은 저뿐인가요? 대화와 설득은 좋아서가 아니라 대안이 없어 하는 겁니다. 하루빨리 정치를 복원해야 합니다. 미래에의 비전을 두고 싸워야 합니다.

죽은 박정희 손에 산 문재인이 실패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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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장기, 어쩌면 세계 최장기였을지 모를 콜텍 노사분규가 4464일 만에 타결되었다. 2007년 ‘비용절감’을 이유로 시행한 정리해고에 맞선 지 무려 13년 만의 일이다. 이제는 복직해도 어느새 정년인 세월이 흘렀다. 이대로 모든 것이 잘 끝난 것일까. 타결 소식을 접한 직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들이 있었다. 콜텍과 함께 복직투쟁을 벌여오던 콜트기타의 방종운 지회장을 비롯한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여전히 거리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어째서 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나는 방종운 지회장과 필자와 편집자라는 작은 인연을 맺은 바 있다. 2013년 ‘황해문화’ 창간 20주년 기념호에 그동안 살아온 삶의 내력을 써달라는 청탁을 했었다. 1958년 베이비붐 세대인 그의 삶은 평범하다면 평범한 것이지만, 우리 현대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서울 미아리에서 살던 그는 도시개발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지만,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해야 한다고 여길 만큼 대단한(?) 애국자였다. 

집을 잃고 떠돌던 그가 선택한 대안은 직업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1978년 공수부대 하사관으로 군복무를 시작한 이듬해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있었다. 

콜텍 노사 조인식이 열린 23일 오전 서울 강서구 콜텍 본사 앞에서 이인근 금속노조 콜텍 지회장(오른쪽부터)과 전날까지 42일간 단식한 임재춘 조합원, 올해 60세로 정년을 맞이하는 김경봉 조합원이 마지막 기자회견을 끝내고 꽃다발을 들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방종운은 데모하는 학생들을 진압하며 “부모가 피땀 흘려 고생하여 대학에 보냈는데 공부나 열심히 해라”라고 말했고, 광주에 투입되었을 당시 5·18민주화운동은 “광주에 간첩들이 침투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굳게 믿었다. 1983년 제대 이후 그는 대우자동차에 입사했고, 연애 끝에 결혼도 했다. 가족과 가정을 일구며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던 그는 성당에 다니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노동조합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해고되었다. 그가 경험한 첫 번째 해고였다. 

1987년 6월항쟁을 거리에서 맞았던 그는 생계가 어려웠기 때문에 같은 해 8월 콜트악기에 입사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콜트악기에도 노조 설립 움직임이 일자 회사는 노동조합을 허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임금 5만원 인상, 자녀 학자금 지급이라는 복지 조건을 내걸었다. 이때부터 콜트악기는 경영이 어렵다며 회사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콜트악기는 창사 이래 최대 흑자인 29억8500만원의 흑자를 냈다. 노동자들은 노조를 설립했고, 회사는 ‘콜텍’이라는 새로운 법인을 만들어 어쿠스틱 기타와 전자 사업부를 이전시켰다. 

이 무렵 현대중공업 식칼테러로 악명을 떨친 제임스 리가 노무 이사로 입사했다. 콜트악기는 2007년 4월부터 부평공장 생산직 노동자 56명을 정리해고했고, 2008년엔 아예 공장을 폐업해 나머지 125명의 노동자가 직장을 잃었다. 사측은 경영조건 악화를 내걸었지만, 1992년부터 2005년까지 꾸준히 순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해고 무효를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고, 2009년 고등법원은 콜트와 콜텍 노동자 해고는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2012년 대법원은 콜텍의 정리해고 위법성을 인정한 고법 판결을 파기 환송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기업의 정리해고도 합법이란 것이었다. 

정권이 교체되고 2018년 5월23일 대법원 특별조사단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거래 의혹리스트를 발표했다. 대법원장의 재판거래 리스트에는 콜트콜텍 소송도 포함되어 있었다. 방종운 지회장이 대법원 앞에서 노숙 농성을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정리해 보낸 원고의 마지막엔 “나아지지 않는 삶이지만/ 인간다운 삶을 찾아서/ 걷는 길”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이들이 고통스럽게 버틴 13년은 국가와 사회가 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라고 강요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정권이 세 번 바뀌는 동안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삶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 덕분이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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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보건기구(WHO)는 국제질병분류(ICD) 코드 도입을 위한 제11차 개정안에 게임을 장애로 규정하는 안을 제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올해 5월 열리는 총회에서 이 안이 통과될 경우 게임은 새로운 질병 코드로 등재된다. 현재 안대로라면, 한국은 2022년부터 게임을 질병 코드로 분류하고, 게임과몰입을 정신 질환으로 분류하여 치료에 필요한 보건정책이 등장할 것이다. 게임과몰입은 이제 질병으로 낙인찍힐 것이며, 마약, 알코올, 도박과 함께 정신의학과 보건의료의 치료 대상이 될 것이다. 

세계보건기구의 추진 안을 보면서 2013년에 논란이 되었던 소위 게임중독법 제정 사태가 떠올랐다. 당시 대한중독정신의학회 출신 신의진 의원의 발의로 촉발된 게임중독법은 게임을 마약, 알코올 등과 함께 중독물질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예방을 위해 국가가 중독관리센터를 설립하여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이 법을 제정하기 위해 제시한 게임중독자 수에 대한 잘못된 통계나, 과도한 게임규제 방안도 큰 문제였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게임을 중독물질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게임의 문화적 가치, 산업적 잠재력, 일상적 놀이의 의미들은 이 정의 하나로 모두 소멸되고 말았다. 만일 이 법이 제정되었다면, 게임을 만드는 기업인들은 마약제조업자와 동급으로 취급받고, 게이머들은 도박 중독자처럼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게임중독법은 제정되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의 이러한 계획은 불행하게도 게임중독법의 망령을 다시 소환시켰다. 등재 즉시 보건복지부는 후속 이행 조치를 추진할 것이다. 게임과몰입은 질병 코드로 분류되어,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정신의학과의 공식 치료 대상이 될 것이고, 게임은 보건산업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당시 게임중독법이 중독의학회의 숙원사업이라는 자기고백대로, 국제기구의 이행 조치는 사실상 게임중독법이나 다를 바 없는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게임과몰입은 과연 질병일까? 아니 정신 질환으로 코드화할 만큼 그렇게 위험한 대상일까? 물론 게임을 과도하게 이용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일상생활이 일시적으로 지장을 받을 수 있다. 간혹 폭력성과 사행성이 강한 게임이 일견 반사회적 범죄행위들의 간접적 원인으로 작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게임을 중독물질로, 게임과몰입을 정신 질병으로 정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렇게 따지면, 국민을 화병 나게 만드는 국회, 청소년들을 극도로 우울하게 만드는 대학입시도 질병 코드로 분류해야 하지 않을까?  

게임이 뇌를 손상시킨다거나, 반복충동을 자극하는 도파민 분비의 원흉으로 운운하는 것은 게임을 애초부터 사악한 물질로 단죄하려는 악의적 의도다. 뇌과학자 다프네 바빌리에는 게임이 오히려 뇌의 원활한 사고와 감각 작용을 도와주는 훌륭한 매체임을 강조했다. 그녀는 비디오게임을 자주하면 주의력 결핍 장애를 일으킨다는 통념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게임에 몰입하는 집중력이 일상의 주의력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고 말한다.

이번 세계보건기구의 게임 질병 코드 추진이 과연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며, 장기적인 임상결과에 따른 것인지 의문이다. 게임의 놀이는 정신의학의 임상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에 기초한다. 게임의 놀이적 속성과 즐거움을 유발하는 반복은 즐거움이 배제된 화학적 과정과는 다른 감각의 차이를 생산한다. 게임의 놀이는 즐거움 없이는 반복할 수 없다. 일반인들이 한심하게 볼 수 있는 게이머들의 맹목적인 행위들은 사실 놀이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한다. 게임의 시간소비와 반복충동은 기본적으로 즐거움과 보상체계라는 원리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질병이 아니라 놀이이고,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행위이다. 세계보건기구는 게임을 정신 질병으로 분류하려는 시도를 중단하고, 게임의 문화적 가치의 의미를 이번 기회에 성찰했으면 한다. 오히려 게임이 각종 사회적 질병을 치유하는 가장 중요한 놀이라는 점을 눈 여겨보았으면 한다. 게임은 질병이 아니라 문화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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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대의 한 창업동아리가 온라인 커뮤니티와 카페에 자신들이 사용하던 볼펜을 판매한다는 글을 올렸다. 취지는 이랬다. “좋은 기운을 전해드리고자 직접 손편지를 쓰고, 공부할 때 사용한 펜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해당 게시물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번지면서 학벌주의에 대한 개탄이 이어졌다. 결국 이 창업동아리는 사과문을 올리고 상품 판매를 중지했다. 

이 ‘우발적인 해프닝’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주술에 빠져 있는지 새삼 일깨워준다. 이 동아리는 ‘공부의 신’이 사용하던 볼펜을 사서 공부하면 ‘좋은 기운’이 수험생에게 전염되어 시험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다. 단지 ‘사물’에 불과한 볼펜이 현실세계에서 ‘실제 효과’를 발휘하는 주술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주술은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합리적 목적을 비합리적 수단을 통해 성취하려 한다.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합리적 목적은 부귀영화와 장수 같은 실제적인 것들이다. 대개 사람들은 일상의 합리적 수단을 통해 이러한 목적을 추구한다. 하지만 아무리 합리적 수단을 활용해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으면 주술에 의지한다. 주술사는 초일상적 힘을 조작하여 현실세계에서 실제적인 목적을 얻으려고 한다. 

현재 한국 사회의 현실세계에서 통용되는 합리적 목적은 ‘생존’과 ‘성공’이다. 한국 사회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합리적 수단으로 교육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교육이 자극-반응 연쇄처럼 깊은 사유 없이 단 몇 초 만에 계속 답해야 하는 퀴즈 풀이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잘 풀려면 교육받은 내용을 최대한 많이 기억하고 있다가 짧은 시험 시간 안에 모조리 토해내야 한다. 나무 위의 침팬지가 먹이와 적이 어디에 있는지 한 장면으로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낸 학자들은 이를 ‘사진기억’이라 부른다. 한국 사회는 사진기억 능력을 테스트해서 그 결과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 차별대우한다.

한국 사회는 사진기억 능력이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노력은 곧 좋은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과 이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매니저 맘’이 판치는 학벌자본 세습사회에서 개인의 노력만으로 사진기억 능력을 키울 수는 없다. 가족 전체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여력이 없는 대부분의 가족에게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사진기억 능력을 키우라는 미션이 부여된다. 하지만 침팬지가 아닌 바에야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벅차다. 공부라는 합리적 수단이 비합리적 결과를 낳는다. 서울대생이 쓰던 볼펜과 같은 초일상적 힘에 기대는 이유다.

우스꽝스럽지만 이 주술이 현실세계에서 실제적인 효과를 낸다. 사진기억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시험에 통과해서 세속적인 복을 마구 누린다. 최근 헌법재판관 후보 부부의 재산 내역에 많은 국민이 놀란 것은 그들이 무슨 엄청난 불법과 편법을 저질렀다거나 국민의 눈높이를 벗어났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사진기억 능력이 휘두르는 막대한 주술적 힘과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부부가 판사와 변호사로 한 20년 일하면 50억원대의 자산가가 될 수 있다! 전관예우와 같은 비윤리적인 행태를 통해서만 떼돈을 버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서울대생이 쓰던 볼펜의 주술적 힘에 의지해서라도 사진기억 능력을 키우고 싶다. 물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힌 고도로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참과 거짓을 인지적으로 식별하는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시장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진기억 능력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들이 과도하게 복을 누리고 있다면 수요보다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서둘러 수요 공급 함수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선 왜곡된 보상 체계를 바로잡기 위해서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다. 사진기억 능력으로 얻은 초일상적 힘을 활용해 복을 누리려고만 할 뿐 생존과 성공을 넘어서는 초월적 목적 하나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는 ‘주술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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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꾼 사건이 있습니다. 그날도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보내고 따사로운 봄날을 맞을 생각에 가슴은 두근댔습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날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고, 우리의 시각을 바꿀 중대한 사건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2014년 4월16일 수요일 아침. 

“그러면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내뱉는 이 말이 내 입에서도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뚫린 사회안전망의 작은 구멍에서 새어나온 오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주시했습니다. 전 국민의 눈과 귀는 이미 바다로, 항구로, 그리고 세월호 속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습니다.

올해로 세월호 사건 5주기를 맞습니다. 세월호에 승선했다가 참변을 당한 아이들도 이젠 하늘에서 바뀐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무던히 외쳐왔고, 끊임없이 호소했고, 속절없이 기다렸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 외침의 의미를. 우리는 그 외침에 호응하지 못했습니다. 

경기 안산시 단원구의 ‘4·16기억저장소’는 ‘기억 투쟁’의 맨 앞에 선 곳이다. 지난 12일 단원고 인근 강서고 학생들이 저장소가 운영하는 4·16기억전시관을 찾아 둘러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아끼던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면 슬픔이 바로 찾아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경황을 살피는 데 시간이 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또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워집니다. 아끼던 사람이 베풀었던 친절이, 그 따스함이, 그 사람이 보여준 사랑이 떠오릅니다. 그 짓궂음이 그리워지고, 다시 티격태격 옥신각신하고 싶어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밀려오는 이 슬픔과 그리움은 줄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오히려 커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을 아끼던 사람들을 공감해야 합니다. 끝까지 공감해야 합니다. 

지난 3월18일,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분향소와 천막을 거뒀습니다. 그 자리의 의미를 새기는 공간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 같습니다. 광화문 거리를 거닐 때면 역사처럼 가슴에 스며든 아이들의 자취를 되새기고는 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의 숨결을 여전히 느낄 수 있기에 진실을 찾는 작업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진실을 찾는 과정은 시간을 잇는 고리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연속하고,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작용하며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 우리는 이제 아이들이 가르쳐준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그 희망은 아이들이 알려준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하지 못했던 스승 역할을 아이들이 대신 해줬습니다. 뒤늦게나마 우리는 그들이 알려준 희망의 의미를 깨달았기에, 두려움을 떨치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희망을 알려주고 가르쳤다는 증거는 세월호에서 나눈 아이들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운명을 예감하고도 사랑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말한 사랑에서 희망을 봤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끝까지 나눴습니다. 자기 것까지 내주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마지막 메시지에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4월을 맞아 윤동주 시인이 쓴 산문 한 구절과 아이들의 마지막 메시지를 옮기며 글을 마칩니다.

“일반은 현대 학생 도덕이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스승을 섬길 줄을 모른다고들 합니다./ 옳은 말씀들입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나 이 결함을 괴로워하는 우리들 어깨에 지워 광야로 내쫓아버려야 하나요./ 우리들의 아픈 데를 알아주는 스승, 우리들의 생채기를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세계가 있다면/ 박탈된 도덕일지언정 기울여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겠습니다./ 온정의 거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손목을 붙잡고 목 놓아 울겠습니다.”(윤동주, ‘화원에 꽃이 핀다’에서)

“내 것 입어”/ “너는?”/ “나? 가져와야지.”

“엄마 사랑해요, 아빠 사랑해요.”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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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집을 나올 때면 가끔 아파트 앞 생활폐기물 수거 차량과 마주친다. 시민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도로 한쪽에 차량을 정차하고 음식물이나 폐기물을 수거한다. 청소 노동자들을 대하는 인식 차이일까. 일본이나 유럽에선 생활폐기물 수집운반이 낮에 진행되는데, 우리는 새벽에 한다. 그러다 보니 업무상 재해나 사망사건도 많다. 1년에 꼭 한 번 정도 청소 노동자의 사망사고를 접한다. 전국에 생활폐기물 운반수거의 87.7%가 민간위탁으로 운영되다 보니, ‘위험의 외주화’는 공공부문에서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민간위탁 노동자 고용의 질은 우리가 꼭 짚어야 할 문제다. 저임금에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가 대부분이다보니 양질의 시민서비스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특히 민간위탁 시설의 법률 위반현상은 심각하다. 연장 및 휴일근무 수당, 연차휴가 등 기본적인 노동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자의 권리가 민간위탁이라는 이유로 숨겨지거나 은폐되고 있는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수탁업체 대표 및 관리자들의 노동 감수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의 힘이 도시를 위해 뭔가 커다란 것을 해주리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이런 믿음을 유지하면서 그간 정부는 다양한 기본 서비스를 꾸준히 외주화했다. 사실 민간위탁은 대시민서비스의 일부를 외부 전문기관에 위임·대행이라는 ‘합리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간위탁의 회계 부정, 용역비 과다청구, 임금 가로채기, 선정 비리, 관리 감독 부실 등이 언론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위법적이고 탈법적 현상들을 지자체는 제대로 점검조차 하지 않고 있다. 공적자원을 시장의 힘에 넘겨버린 민간위탁의 비민주적 속성을 보여준다. 

지난해 기준 공공부문 민간위탁은 1만개가 넘고, 노동자는 약 19만6000명이나 된다. 정부 재정의 1.86%에 해당하는 7조9600억원 규모다. 민간위탁 다수는 사회서비스 시설이다. 어린이집부터 사회복지, 장애인, 아동, 청소년, 정신건강 등 47.2%가량 차지한다. 그러나 도서관, 상수도 검침, 콜센터, 지하철 역사 등 매우 다양한 대국민 공공서비스들이 민간에 맡겨진 상태다. 최근에는 중앙정부가 국고보조 사업으로 지원하는 지자체 ‘센터’들도 민간위탁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정부는 도시의 공공서비스를 민간위탁으로 운영했다. 지자체 평균 100개 정도의 업무들이 공공이 아닌 민간에 맡겨진 상태다. 

공공부문에서 민간위탁 ‘신화’는 IMF 경제위기 이후 비용절감과 조직효율성을 이유로 더 확대되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사이 서울, 광주 등에서 일부 민간위탁을 직영 혹은 재구조화했다. 때마침 정부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3단계 민간위탁’ 내용을 발표했다. 문제는 민간위탁이 공공서비스 전달체계 변경과 관련되어 있다며 기관 자율에 맡기겠다고 한다. 기관 자율에 맡기는 것은 사실상 정규직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지자체 일부 업무들은 노무도급 성격의 용역근로 형태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1단계와 2단계에 해당되어야 할 간접고용 업무들이다. 

우리는 노르웨이 제3의 도시인 트론헤임의 ‘지자체 실험 모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도시는 지자체 공공서비스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민간위탁을 물리치고 직영으로 운영한 공공행정조직의 내부적인 민주적 변화를 이끈 곳이다. 특히 공공서비스를 직영 운영하면서 직원들의 병가 신청자가 11%에서 2%로 줄었고, 일자리 만족도가 높아진 것은 도시의 좋은 일자리 모델의 의미 있는 성과다. 독일 베를린의 생활폐기물 시영회사는 청소 노동자들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심리치료 프로그램(박스 스톱)도 제공하고 있다. 

공공서비스를 시장에 맡겨야 더 효율적이라는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민간위탁 서비스들을 공적 통제 아래로 되돌리려는 선택이 필요하다. 초점은 ‘돈이 아니라 서비스 질 향상’이라는 이점을 봐야 한다. 시민의 삶에 핵심이 되는 국가의 일부를 되찾는 정책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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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장, 의원들 말투는 거칠고 언성은 높습니다. 긴 연설과 장황한 훈계 사이로 질문과 답변은 고춧가루처럼 뿌려질 뿐이죠. 위장 전입, 논문 표절, 탈세, 병역 면제, 부동산 투기 등이 드러나면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잘 몰랐다, 배우자가 했다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공수는 바뀌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욕하고 책임지라는 요구도 전형적입니다. 인재풀이 적다는 비판도 빠지질 않죠. 이렇게 식상한 연속극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청와대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그냥 한국 지도층의 민낯이 드러나는 것 아닐까요.

문재인 정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명망과 전문성을 고루 갖췄다는 김연철 통일부 장관 후보자도 부동산 의혹을 받았죠. 다운계약서 작성, 아파트 분양권 전매, 부동산 차명 거래 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후보자는 처제 탓으로 돌렸고 송구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막말 논란이 더해졌습니다. 한 예로 2016년 김종인 당시 민주당 비대위원장을 “박근혜가 씹다 버린 껌”이라 했다고 논란이 됐죠.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천안함 사건을 “북한 소행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김 후보자의 과거 발언이 문제 됐습니다. 이제 와서 북한 소행이라고 입장을 바꾼 데 대한 추궁이 있었습니다. “편향적 인식”, “친북주의자”, “북한 대변인”, “북한 통일전선부장 후보감” 등 야당 의원들의 원색적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김 후보자는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의해 공격을 받아 침몰당했다는 것은 일관적인 입장이었다”고 해명했죠.

사실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침몰 직후부터 나왔던 의혹 중 시원하게 풀린 게 거의 없죠. 우선 북한 어뢰에 의해 두 동강이 났다는 정부 설명은 너무 미흡합니다. 배 밑에 긁힌 자국, 깨끗한 절단면, 생존자들에게 고막 파열, 화상 등이 전무한 점 등은 폭발이 있었다면 설명하기 힘듭니다. 정부가 제시한 증거도 미덥지 않습니다. 기껏 찾은, 유일한 증거인 어뢰추진체에는 그 유명한 ‘1번’이라는 글씨가 선명해 논란이 됐죠. 여기서 나온, 폭발 과정에서 생겼다는 알루미늄 산화물은 침전으로 생긴 알루미늄 수화물임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억지로 공개한 CCTV 화면도 조작이고, TOD 화면에 나온 물체는 확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즉 어뢰폭발이 있었는지, 그 증거는 있는지, 다른 원인은 없었는지, 아무 대답도 없는 게 정부의 설명 아닌 설명인 겁니다.

북한 어뢰가 아니면 뭐라는 소리냐고 짜증 낼 수도 있지만, 그 답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아닌, 정부가 내놓아야 합니다. 정부가 설마 거짓말을 했겠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크고 작은 범죄를 돌아보면 이는 그냥 희망 사항일 뿐임을 쉽게 알 수 있죠. 그 반대입니다. 그 많은 거짓과 전횡을 언제 다 되돌아볼까 오히려 걱정입니다. 물론 천안함 침몰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으로 46명의 목숨이 사라졌습니다.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최소한의 의심을 갖는 게 예의가 아닐까요. 더군다나 정치 엘리트들이라면 말이죠. 하지만 청문회에서 그런 모습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을 밝히고 거짓을 점검하는 대신 야유와 선동으로 일관했습니다. 그것도 색깔 공세를 펴가며 말이죠. 김 후보자도 자신의 의심이 합리적이었음을 주장하기보다 꼬리를 내리며 이에 동조한 셈이 됐죠.

우리 사회는 반공이 국교인 듯합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북한이 범인이라는 믿음을 퍼뜨리고 입맛에 맞는 증거만 축복합니다. 반론과 의심은 불경이라며 처단하죠. 신자들은 멸공의 노래를 부르며 안도합니다. 그 축복 덕택에 우리는 제주도, 광주의 학살에 눈을 감았고 독재를, 그들의 고문과 살인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렇게 피를 불러온 “빨갱이” 딱지를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는 게 21세기 한국입니다. 그러니 태극기부대가, 박근혜를 향한 그들의 애정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 공산주의가 몰락한 게 1990년대 초이지만 여의도는 1950년대 초에 아직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그런 국회에 미래를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그냥 국민의 생떼가 아닐까요. 그러면, 그 미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그 국회는 왜 있는 걸까요. 그 대답을 위해서라도 국회는, 정부는 천안함 침몰에 대한, 과거 정부의 대응에 대한 조사를 서둘러야 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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