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지는 않지만 아내와도 같은 존재(不室而妻).’ 이덕무가 친구를 정의한 말이다.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匪氣之弟)’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친구관계를 부부에까지 견준 것은 과해 보인다. 18세기 조선에는 전생의 부부로 불린 친구도 있었다. 열 살 터울의 시인 신유한과 최성대는 서로의 시에 마음을 빼앗겨 평생 남다른 우정을 이어갔다. 두 사람이 방 안에서 즐겁게 나누는 대화 소리를 들은 주인집 노파가 꽃다운 여인을 숨겨둔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다. ‘우정’이라는 어휘조차 낡게 느껴지는 오늘, 옛사람들의 우정에 대한 범상치 않은 일화들을 접하면 낡음이 낯섦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정을 각별하게 여기는 전통의 출발도 <논어>에 있다. 공자가 감격스러운 어조로 처음 던진 말이 ‘배우고 익히는 기쁨’ ‘친구와 만나는 즐거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는 인품’이다. <논어>가 그리 체계적이지 않은 대화록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 첫머리에 이 세 가지가 놓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공자가 평생 애독한 <주역>의 “군자는 친구와 함께 배우고 익힌다”라는 구절에 이해의 단서가 보인다. 배움으로 인한 내면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즐길 수 있는 존재가 친구다. 이 즐거움만 있다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난세에 비웃음을 당하면서 끝까지 꿈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

경제가 안 좋다고 하지만 물질적 풍요는 여전히 넘쳐나 보인다. 생활은 편리하고 누구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 각자의 삶은 왜 이리 힘이 들까. 부의 편중과 기회의 불공정, 초고령사회 진입 등이 중요한 원인이겠으나, 그런 문제만 해결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가족과 마을이 무너지고 마음 나눌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 인터넷이 만들어낸 새로운 관계망이 펼쳐진다. 그 신세계에서 소리 높여 속내를 토해 보지만, 그곳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또 다른 이익과 권력의 메커니즘이 광풍처럼 휘몰아친다. 박제가는 ‘말하고 싶다가도 만나면 말하지 않게 되는가, 하지 않으려던 말도 만나면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가’를 보면 우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공허한 대상이 아니라 내 말을 깊이 들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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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사용하는 어휘 중에 의외로 의미의 외연과 유래가 간단치 않은 경우들이 적지 않다. ‘구차(苟且)하다’를 한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살림이 몹시 가난하다’가 첫 번째 뜻으로 나온다. 중국어사전에는 ‘그럭저럭 되는 대로 하다’, 일본어사전에는 ‘일시적이다’가 통용되는 의미로 등재되어 있어서 거리가 꽤 있어 보인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가장 이른 시기의 출전으로 알려진 진(晉)나라 육기(陸機)의 글에서는 통치자에게 ‘구차한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당장 눈앞에 놓인 이익에 좌우되지 말고 굳건해야 함을 강조하는 문맥이다. 한(漢)나라 순열(荀悅)은 진(秦)이 14년 만에 멸망한 이유로 ‘구차한 정치’를 들었는데, 성현이 제시한 보편적 예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많이 달라 보이던 의미들이 대체로 ‘원칙을 고려하지 않고 일시적인 편의에 따라 대충 봉합하며 지나치는 태도’로 수렴된다. 한국어사전의 두 번째 뜻인 ‘말이나 행동이 떳떳하지 못함’과 그 주된 용례인 ‘구차한 변명’ ‘구차한 목숨’ 등의 표현 역시 일맥상통한다.

“성현의 도는 ‘구차하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 18세기 작가 조귀명이 불구(不苟)를 호로 삼은 윤득형을 위해 지어준 <불구설>의 첫 문장이다. 그는 구차함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움이 없음’으로 풀이했다. 무릎 꿇어야 할 때는 누울 생각이 나지 않고 서 있어야 할 때는 앉을 생각이 나지 않아야 구차하지 않다고 할 수 있지, 그저 무릎 꿇고 서 있는 동작을 예법에 맞추어 억지로 행하는 것으로는 구차함을 면치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구차함과 구차하지 않음의 구별은 외면을 보고 판단할 수 없다. 떳떳한 원칙이 체화되어 자연스럽게 표출될 때 비로소 구차하지 않을 수 있다.

무엇이 원칙인지 생각조차 않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 만년의 박지원은 병풍에 ‘인순고식(因循姑息) 구차미봉(苟且彌縫)’ 여덟 글자를 크게 써두고, “세상 모든 일이 다 이 여덟 자 때문에 무너지는 법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해오던 대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임시변통하면서 문제를 덮어두는 태도를 경계한 말이다. 우리는 왜 그다지 빈궁하지 않은데도 이렇게 늘 옹색하고, 그 옹색함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일까? 나는 지금 내 자리에서 구차하지 않은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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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자어의 대다수는 한자문화권에서 공통으로 사용되지만, 각 나라 내에서만 통용되는 한자어도 적지 않다. 의외의 경우 중 하나가 ‘추석(秋夕)’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추석이라는 말은 쓰이지만 말 그대로 ‘가을 저녁’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만 오래전부터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해 왔다. 중국도 음력 8월15일을 4대 명절로 치지만 그 명칭은 중추(仲秋 혹은 中秋)이다. 가을 석 달 중 가운데 달, 그중에서도 한가운데 날을 가리킨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저녁 넉넉한 보름달 아래 풍성한 결실을 즐기는 추석은 농경사회를 살던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 바란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예로부터 시인들은 이 좋은 날을 시로 읊어 왔다. 친지와 함께 즐기는 명절의 풍성함을 노래한 시들도 다양하지만, 그 기쁨이 클수록 더욱 커지는 향수와 그리움을 담은 시도 못지않게 많다. “중추삼오야(仲秋三五夜)”로 시작하는 백거이의 시는 달빛 걸린 마루에서 술잔 앞에 홀로 앉아 멀리 떨어져 있는 네 명의 벗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리움을 절절하게 노래하여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보름달이 주인공인 추석이지만 기대승은 아직 다 차지 않은 추석 전날의 달을 보며 “달이야 내일 밤이 더 좋겠지만, 나는 오늘 먼저 달을 만나네”라고 읊었다. 날이 언제 맑았다가 흐려질지 알 수 없는 일, 가을은 꼭 보름이 아니더라도 환한 달빛 하나만 있으면 밤새워 마실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곡은 “중추절도 열엿새에 달빛 더욱 밝은 법”이라고 노래했다. 추석의 달빛과 중양절(重陽節: 9월9일)의 국화에만 열광할 뿐 하루 넘긴 달과 국화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이 세상인데, 자신은 정작 모두의 관심이 지나간 뒤에 오히려 더욱 밝은 달빛과 은은한 국화 향을 남몰래 즐긴다고 했다.

각종 매체의 발달로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만 쏠리기 더 쉬운 때다. 추석 연휴에는 눈과 귀를 잠시 돌려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몰아치는 말들의 범람 속에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없는지 차분하게 바라볼 일이다. 광풍제월(光風霽月), 선선한 바람과 함께 구름이 열리며 드러나는 환한 달을 만날 수 있는 추석이면 좋겠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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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운전 중에 생소한 경고등이 들어와서 당황한 일이 있다. 찾아보니 ‘D.P.F(Diesel Particulate Filter)’ 가동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다. 디젤 엔진에서는 입자상 물질이 많이 배출되기 때문에, 환경보호를 위해 D.P.F가 걸러낸 물질을 차량 내부에서 높은 온도의 열로 태워 처리함으로써 외부로 배출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이 장착되어 있다. 이 기능이 작동되기 위해서는 일정 속도, 일정 시간 이상 달려 줘야 한다. 그런데 장거리 주행을 하지 않고 단거리 이동에만 반복적으로 차량을 이용하다 보니 배출 물질이 처리되지 못하고 쌓여버린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사실을 알고도 바쁜 일상 때문에 깜박거리는 경고등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몇 차례 짧은 거리를 오가는 운전을 하다가 문득, 이 경고등이 쳇바퀴 돌 듯 일상에 갇혀버린 삶을 향한 신호로 느껴졌다. 반복되는 일상이 만들어내는 이런저런 찌꺼기들이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채 쌓여만 가는데 그 위에 다시 또 일상을 얹어 가는 삶. 문제는 인식도 감각도 거기에 고정되어 간다는 점이다.

18세기 여행가로 유명한 정란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전국 각지를 두루 다 돌아보고 나서 이제 제주 한라산을 유람하겠다고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일상은 팽개친 채 여행만 다니더니 급기야 당시로선 위험천만한 제주도 뱃길에 오르겠다니 상식 밖의 일이긴 하다. 이용휴는 그를 전송하는 글에서 도리어 과거시험 준비나 각종 공무 서류에 빠져 사는 이들을 딱하게 여기며 말했다. “수백 년 후에 과연 지금 비웃는 자의 이름이 남을까, 비웃음을 당한 자의 이름이 남을까?”

일상을 벗어나 떠나는 여행이 주는 가장 귀한 선물은 새로운 인식과 감각이다. 인문학이나 종교에 효용이 있다면, 그 역시 고정된 인식과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데 있을 것이다. 주어진 하나의 시선만으로 일상의 이해관계와 선행관습에 갇혀 살기에는 삶이 너무 짧다. 몸을 위한 스트레칭의 기본은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안 쓰던 방식으로 쓰는 데에 있다. 그럴 때 몸이 새롭게 깨어나면서 조화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무엇에 갇혀 사는지 돌아보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인식, 다른 감각을 경험해 보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볼지 생각해 볼 일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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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따뜻하고 배려심 많던 사람이 지위가 높아질수록 남을 무시하고 위압적으로 대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평소의 기대와 달라진 모습을 접하고 나면 오랫동안 맺어온 인간관계가 무너지기 십상이고, 그렇게 틀어진 관계는 회복되기 매우 어렵다. 우리 사회의 정서에서 “사람이 변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치명적인 일일뿐더러, 그 주어진 지위라는 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전보다 많은 것을 누리다 보니 그렇지 못한 이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자신의 영향력을 실감하면서 사람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측근에 둘러싸여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귀가 막히거나, 쇄도하는 민원 혹은 근거 없는 비방들로 인해 스스로 귀를 막아버리는 일도 일어날 법하다. 다만 이는 실제로 변한 것이라기보다 그전에는 그럴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일 뿐 그것이 그 사람이 지닌 본연의 모습이었던 셈이다.

정작 사람이 변했다면, 접하지 못했던 정보들과 새로 확보된 시야로 인해서 구체적 사안을 대하는 생각이 달라지고 그것이 신념의 변화로 이어지는 경우일 것이다. 전에는 안 보이던 부분까지 고려해야 하고 때로는 안된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이전의 지론과는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관건은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변해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내면에 있다.

군자는 세 번 변한다는 말이 있다. 멀리서 볼 때는 점잖고 무게가 있어서 곁을 주지 않을 것 같은데, 막상 만나보면 따뜻한 얼굴빛으로 편안하게 품어주고, 대화를 나눠 보면 명확한 논리력에 탄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는 입장에서는 세 번의 변화지만 실은 변한 것이 아니라 일관된 내면에서 우러나는 인품이다. 엄숙하면서 온화하기 어렵고 온화하면서 명확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인지라 낙차 큰 변화로 느껴질 뿐이다. 지속 가능한 따뜻함은 내면의 올곧음 위에서만 가능하다. 지위가 오를수록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판단의 근거가 사심인지 공의인지를 끊임없이 되물을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국 스스로 그 지위를 감당할 만한 내면을 지니고 있지 못함을 입증하고야 마는 일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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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면장을 하지.” 면장(面長) 노릇을 하는 데에도 식견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와전되어 사용되는 속담이다. “배우지 않으면 장(牆)을 대면하고 서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lt;서경&gt; 구절에서 유래한 ‘면장(面牆)’이 무지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여왔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뜻의 ‘면면장(免面牆)’이 ‘면장을 한다’는 표현으로 이어진 것이다. 장(牆)은 보통 담벼락으로 풀이되는데,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세워둔 가림막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깨달음을 위해 좌선하는 선사가 아니고서는, 앞이 꽉 막힌 곳에 서 있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면장을 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까닭은 자신의 눈앞에 가림막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배우지 못해서 가림막에 막혀 살면서도 그게 가림막인 줄 몰랐다면, 요즘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가림막에 온갖 정보가 난무해서 세상을 다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에 그 가림막 너머 혹은 바깥에 무언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소수의 일방적인 대중매체에서 정보를 얻던 때에 비해서 무궁하게 선택 가능한 쌍방향의 인터넷 공간을 활용하는 오늘, 오히려 우리 앞의 가림막이 더 견고해지는 면도 있다. 스스로 검색하고 선별했다고 믿는 정보들이 실은 누군가가 거르고 가공한, 혹은 은폐하고 왜곡한 정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과 해석이 혼재된 가운데, 의도적 해석을 거친 사실을 근거로 비타협적인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저마다 자기 앞의 가림막이 전부인 줄 아는 한, 건강한 토론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일관계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견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섣부른 판단에 앞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나의 가림막에 비친 정보들이 과연 누군가 덧씌워 놓은 프레임에서 자유로운지 살필 필요가 있다. 면장을 면하려면 먼저 내 눈앞에 가림막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가림막에 비판적 거리를 두고 조금만 더 품을 팔아서 해석 이전의 사실들에 눈길을 돌리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전문부터 2007년 한일수교회담 백서, 2012년과 2018년의 대법원 판결문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은 날것의 자료들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가림막을 주체적인 사고의 창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이야말로 이 시대에 면장을 면하는 길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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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행동이 갑자기 달라졌음을 부정적으로 표현할 때 흔히 ‘표변(豹變)했다’고 한다. 이 말은 본디 표범이 가을에 털갈이하는 것처럼 허물을 고쳐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좋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 원 출처인 주역 ‘혁괘(革卦)’에서는 ‘혁면(革面)’과 대비되어 사용되었다. 겉 표정만 바꾸는 혁면과 달리 표변은 전면적인 변혁을 뜻한다. 주희의 주석에 의하면 이 둘은 모두 ‘대인호변(大人虎變)’의 결과다. 통치자가 바르고 알맞은 도리로 개혁을 단행하면 천하의 모든 사리가 호랑이 무늬처럼 선명하고 아름답게 드러난다. 그 영향으로 선량한 이들은 온전히 교화되고 이기적인 이들조차 적어도 겉으로는 교화를 좇는 사회가 된다는 맥락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주역의 순서상 혁괘는 정괘(井卦)의 다음에 온다. 우물은 그대로 두면 더러워지고 수시로 바꿔야 청결함을 유지하기 때문에 혁괘로 이은 것이라고 전한다. 혁괘는 연못 아래에 불이 있는 형상이다. 물은 불을 사그라들게 하고 불은 물을 말려 버리므로 서로 치명적이다. 게다가 위로 치솟는 불이 아래에 있고 아래로 흐르는 물이 위에 있으므로 둘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서로가 서로를 변혁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갈등과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중요한 것이 바름을 지키는 꼿꼿함이다. 혁신은 도처에서 강하게 버티는 관성들을 하나하나 누그러뜨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한 치라도 바름이 흐트러지거나 때가 차기 전에 성급하게 꺾으려 들면,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된다.

혁신을 말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기술의 혁신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기술의 혁신이 다시 제도와 생활의 혁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변화의 속도가 높고 폭이 클수록 혁신의 요구도 거세진다. 정치권에서도 역시 언제부턴가 혁신이 화두다. 정부는 창업과 융·복합의 혁신을 강조하며 혁신성장을 전면에 내걸었고 엊그제 당대표에 오른 이는 문화혁신을 키워드의 하나로 삼았다. 공천혁신으로 살 길을 찾는 당도 있다. 그러나 어느 층위에서 말하든 간에, 혁신은 본래 위험하다. 갈등을 감당할 수 있는 내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신중함, 호랑이 무늬처럼 선명한 정당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바름이 있어야 후회가 없다는 혁괘의 경계는 여전히 유효하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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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통과의례 가운데 하나가 자전거 타기다. 세 발, 네 발 자전거만 타던 아이가 보기에, 두 바퀴 위에 앉아 넘어지지 않는 것은 너무도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 능력이다. 나 역시 처음 두 발을 땅에서 떼고 페달을 밟는 순간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다시 떠올리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무리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도 선 채로 균형을 잡을 순 없어. 일단 밟아!”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판문점 회동을 보며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깜짝쇼를 연출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상황에 따라 표변하며 백척간두의 줄타기를 이어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그 사이에서 한발 물러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는 문재인 대통령. 예기치 못했던 역사적 전개에 감격하는가 하면, 실제 성과도 없고 외교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며 개탄하기도 한다. 그중 색깔론에 의지해 온 이들이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허망하다. 종북 세력은 필시 반미주의자이고 한·미 공조 강화는 대북 강경대응으로 이어져야 마땅한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판단이나 역사적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이전에 옳다고 여겼던 관점만으로 더 이상 설명하기 힘든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나아가지 않으면 후퇴하는 것이라고 했다.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것과 같은 학문의 여정에서 가만히 있으면 뒤로 떠내려갈 수밖에 없음을 경계하는 말로 많이 사용되지만, 더 이른 출처는 나날이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없음을 강조한 내용이다. 자신이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어느 땐가 옳았던 시각이 영원히 옳으리라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각주구검의 어리석음에 빠진 셈이다. 이에 관한 한 정치적 입장이 보수든 진보든 마찬가지다.

냉정하게 바라보며 꼬장꼬장 비판할 일이 있고, 비틀거리더라도 마음 모아 밀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언젠가 겨레가 하나 되는 꿈을 이루어가는 길에는 엄청난 난관이 산적해 있다. 위태로울 뿐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조심스레 그러나 과감하게 두 발을 동시에 페달에 올리고 구르는 순간이 없다면, 그 길에 영영 오를 수 없을 것이다. 출발선에 선 채로 아무리 균형을 잡아보려 한들 아무 의미도 없다. 균형은 달려야 잡힌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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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디에 살고 무엇을 먹는 것이 올바를까? 사람은 습지에 오래 살면 반신불수가 되고 나무 꼭대기에 머물면 벌벌 떨지만 미꾸라지나 원숭이는 그런 곳이 더 편안하다. 사슴은 풀을 뜯어먹고 지네는 뱀을 먹어치우며 솔개는 쥐를 잡아먹는다. 소고기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만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널리 알려진 장자(莊子)의 이야기다. 올바름만이 아니라 아름다움도 그렇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미인이라 해도 물고기나 새, 사슴에게는 그저 도망쳐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두고 장자는 과연 무엇이 올바르고 아름다운지 묻는다.

창의와 융합의 시대라고들 말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들이 다양하게 개성을 발휘하고 그것을 서로 인정하는 기반이 없다면 이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획일성을 강요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역이 많다. 이념을 내세운 분단과 대립의 시대로부터 국가가 주도한 경제개발의 과도기를 거치면서는 물론, 민주화의 역정에서조차 단일한 기치 아래 다른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이어져 왔다.

우리 교육이 당면한 문제들이 많지만, 학생 개개인이 다양한 분야를 접할 수 있는 경로가 오히려 더 좁아진다는 점이야말로 정말 심각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고 내신 반영 여부도 불확실한 일부 탐구영역이나 제2외국어 및 한문 등의 교과목들은 중등교육 현장에서 소외된 지 오래다. 개별 과목의 존폐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접해 보지 않고는 무엇이 더 좋은지, 어떤 분야가 나에게 맞는지 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대학 입시에 비중이 높은 교과만 공부하고 남들이 선호하는 전공이 자신에게도 목표가 되는 분위기에서 다양한 개성을 지닌 창의와 융합의 원석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지금은 한두 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다. 오늘 많은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머지않은 미래에도 과연 그럴지는 알 수 없다. 진학도 취업도 지금의 우열이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짜인 틀에 맞추기를 강제하는 시대가 아니라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 가능성을 마음껏 펼칠 장을 마련해야 할 시대다. 미꾸라지와 원숭이의 올바름마저 인정할 때 창의와 융합이 가능하지 않을까.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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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흰자위가 누렇게 변하는 황달은 간염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담즙 색소의 하나인 빌리루빈이 간에서 제대로 대사되지 않아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빌리루빈이 과다하게 쌓이면 청력 장애나 뇌성마비 등의 치명적인 질환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빌리루빈을 완전히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니다. 적당량의 빌리루빈은 유해산소를 제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암과 치매 등 치명적인 질환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이 유해산소 역시 체내의 세균 대사를 위해 소량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이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비밀은 알면 알수록 신비롭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 몸뿐만이 아니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존재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자리와 의미를 지닌다. 미생물부터 포유류까지 수많은 먹이사슬이 그물처럼 얽힌 구조에서 어느 한 종의 멸절은 전혀 예기치 않은 결과를 야기하곤 한다. 인간의 눈에 약육강식은 잔인해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는 생태계에서는 어떤 존재도 선과 악, 옳음과 그름으로 규정할 수 없다.

관건은 균형이다.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적정량을 유지한다면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문제는 일방의 입장을 기준으로 있어야 할 것과 없어도 될 것, 혹은 없애야 할 것을 함부로 구분하고 강제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인(仁)을 이루는 방법으로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서(恕)’였다. ‘서’는 상대 역시 나와 다름없는 마음을 지녔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용서와 관용을 넘어 적극적인 공감과 존중의 자세다. 그럴 때 모든 존재가 더도 덜도 아니고 각자 자신에게 마땅한 자리를 얻어 공생하는 세계를 그릴 수 있다.

공감과 상생은커녕 상대의 존재 자체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극혐’의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들여다보면 나름의 사연과 역사를 지니지 않은 존재는 없다. 물론 생태계와 달라서 인간사에는 선악과 시비의 판단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최소한의 인정도 없이, 애초에 없었어야 할 존재로 상대를 규정한 위에서 과연 온당한 판단이 가능할까? 최상의 균형을 이루는 중용에는 고정불변의 답이 없다. 공감과 존중의 자세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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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은 영욕(榮辱)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이상으로 여겼다. 노생이 한단에서 꾼 꿈이 오래 회자되어 온 것도 영욕의 부질없음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재상의 영예와 역적의 치욕을 번갈아 겪으며 80평생을 살았는데 깨어나 보니 조밥이 채 익기도 전이더라는 이야기다. 영욕이란 이처럼 잠깐 들었다 깨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치욕을 피하고 영예를 얻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영과 욕을 낮과 밤, 추위와 더위처럼 그저 지나가는 자연현상처럼 여겼다는 일화가 숱한 제문과 비문에서 칭송의 문투로 사용되어 온 것은, 영욕에 초탈한 사람이 얼마나 드물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영예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순자(荀子)는 영욕이야말로 성왕이 내세운 기본 원칙이라고 하였다. 그는 영과 욕을 의영(義榮)과 세영(勢榮), 의욕(義辱)과 세욕(勢辱)의 넷으로 나누었다. 의영과 의욕은 자신의 언행으로 인한 영과 욕이고, 세영과 세욕은 외부 조건에 의한 영과 욕이다. 세욕은 소인뿐 아니라 군자라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지만, 의욕은 소인에게만 해당된다. 세영은 소인도 누릴 수 있지만, 의영은 군자만이 누릴 수 있다.

퇴계 이황은 사화에 몰려 퇴출된 이연경을 두고 강호자연 가운데 의영(義榮)을 지닌 인물이라고 평했다. 권세에서 밀려난 상황임에도, 그의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투를 대하다 보면 누구든 마음이 맑아지고 생각이 명료해진다. 이익만 좇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도 이처럼 내면 깊은 곳에서 은은히 향을 발하는 이에 대한 존경은 진실의 힘을 지니고 쌓이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이황은 그가 근심 가운데 진정한 즐거움을 누렸다고 하였다.

군자에게는 의영뿐 아니라 세영도 주어질 수 있다. 사심 없는 군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예가 주어지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다. 다만 소인의 세영과 군자의 세영을 가르는 기준이 있다. 부끄러움과 당당함이다. 소인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에, 그렇 게 얻은 세영을 등에 업고 떵떵거리면서도 끝내 당당할 수는 없다. 군자는 부끄러움을 알아서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분별하였기에, 그렇게 얻은 세영을 겸손하면서 당당하게 누릴 수 있다. 영욕에 초탈할 수 없다면, 영예를 추구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볼 일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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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인플레이션이 갈수록 심각해진다. 표현은 더 과격해지고 공허한 피로와 혐오가 쌓여간다. 정치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이들의 일상이 된 SNS에 오르내리는 말들을 보면, 이성이 마비된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대화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 버리는 날선 표현도 문제지만, 상식을 벗어나는 개념의 사용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조금만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실질과 너무도 달라서 도무지 그렇게 표현할 수 없을 법한 말들이 난무하는 현실을 보며, 실소와 분노를 넘어 의아심이 생긴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잘 알려진 고사성어가 있다.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어느새 사실로 믿게 된다는 점을 비유로 경계한 말이다. 고사의 출처에 의하면, 이 간곡한 경계를 듣고 그 누구의 현혹에도 흔들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왕 역시 결국은 측근들의 지속적인 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만큼 사람은 자신에게 많이 노출되는 말의 영향에서 자유롭기가 매우 어렵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늘날 비상식적인 말들이 확신과 증오를 품고 급속도로 전파되는 데에는, 보고 있는 것만 보게 만드는 웹서비스 구조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별생각 없이 클릭한 포스트와 동영상이 빅데이터로 저장되어 그와 비슷한 콘텐츠들을 맞춤식으로 골라서 보여주는 자동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 안에서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고 대다수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는 결국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른바 ‘가짜뉴스’까지 불사하며 이 불신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대화, 합리적인 해명은 거부되고 그 이면에 다른 속내와 꼼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음모만 영향력을 키운다. 불신이 추측을 낳고 특정한 의도를 지닌 왜곡이 개입될 때 그 폐해는 걷잡을 수 없다. 결국 신뢰의 문제다. 우리는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나름의 맥락들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의 정보와 인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누가 그것을 골라서 나에게 보여주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볼 일이다. 오늘, 측근을 경계해야 할 이는 왕만이 아니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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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스럽던 목련이 이파리를 떨구고 샛노란 개나리가 초록으로 덮이는가 싶더니만, 벚나무와 복숭아나무가 희고 붉은 망울을 터뜨리고, 진달래에 이어 철쭉이 언덕을 뒤덮는다. 풀숲 사이로 고개 내민 제비꽃, 할미꽃을 살피며 걷는 사이, 상큼한 라일락 향이 코끝을 스친다. “꽃길만 걷자”는 말이 온몸으로 실감나는 계절이다. 인생이 늘 꽃길이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렇게 느끼며 사는 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복되고 기쁜 날은 손에 꼽을 정도일 뿐, 힘겹고 불만스러운 날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삶이다.

‘초연(超然)’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에 얽매이지 않고 태연하다는 뜻이다. 눈앞의 현실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일반인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경지다. 도심의 안락한 환경을 즐기던 소식이 어느 날 궁핍하고 불편한 시골 수령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들 고생이 많겠다며 위로하기 급급한데, 그 동생 소철은 형이 즐겨 오르는 누대에 ‘초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어느 곳에 가든 느긋하게 즐길 줄 아는 형의 마음을 표현한 말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소식은 어떤 수련을 닦았기에 초연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을까? 시골 수령 생활이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연이은 가뭄과 메뚜기 떼로 인해 백성은 굶주리고 도적이 들끓었다. 1년 넘게 동분서주하며 구휼과 치안에 힘쓴 끝에야 다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떤 대상이든 어느 구석인가는 볼만한 점이 있기 마련이며, 그렇다면 나름대로 즐길 만하기도 하다는 게 소식의 생각이었다. 공기 좋은 곳에선 산나물에 된장도 별미이고, 멋진 이들과 함께라면 싸구려 술로도 기분 좋게 취할 수 있다. 이게 소식이 환경에 구애되지 않고 즐길 수 있었던 비결이다.

소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앙을 구하고 복은 버리는 길을 간다고 했다. 왜 그럴까. 대상에 갇혀 지내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대상이라 해도 그 안에 갇혀서 바라보면 어마어마하게 커 보이고 상대적으로 자신은 초라해 보이기 마련이다. 즐거움과 근심,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이 오로지 자신을 압도하는 대상에 달려 있다면, 이건 시작도 하기 전에 진 게임이다. 우리가 꽃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꽃이라는 대상 바깥에서 바라보기에 가능하다. 대상에 갇히지 않기를 경계할 일이다. 초연한 자가 꽃길을 걷는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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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을 받으면 겸손하면서 당당하게 답변하라.” 군 복무할 때 상급 부대의 검열을 앞두고 지휘관이 지시한 말이다. 참 좋은 말이긴 한데 실천하기 힘든 모순형용으로 느껴져서 오래 기억에 남는다. 과연 겸손하면서 당당한 태도가, 그런 삶이 가능할까.

<사기열전>에서 서문 격인 ‘백이열전’ 바로 다음을 장식하는 주인공은 관중이다. 그런데 제목이 ‘관중열전’이 아니라 ‘관안열전’이다. 안영이라는 인물을 합하여 열전을 구성한 것이다. 사마천은 관중 이야기 뒤에 안영에 대한 짤막한 일화 두어 개를 실어 두고는 논평에서 “안영이 지금 살아 있다면 나는 그의 마부가 되어도 좋겠다”라며 흠모의 정을 드러내었다. 열전의 인물평 가운데 몇 안되는 극찬이다. 아랫사람을 인정하고 자기 잘못을 돌이킬 줄 알았으며, 평소에는 자신을 낮추고 검소하게 살았지만 직언을 할 때는 왕의 얼굴빛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겸손하면서 당당한 인물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안영의 마부가 어느 날 부인에게 느닷없이 이혼을 통보받았다. 영문을 모르는 마부에게 부인이 그 이유를 말했다. “안영은 왜소한 체구로 재상의 명성을 날리면서도 늘 겸허한 모습인데, 당신은 훤칠한 외모로 남의 마부 노릇을 하면서 너무도 의기양양하더군요.” 안영과 마부의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안영의 관심은 자신의 내면에 있었다. 돌아볼수록 부족하고 부끄러우니 겸손하다. 품은 뜻이 크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니 당당하다. 반면 마부가 자랑스러워한 것은 화려한 재상의 마차를 몬다는 외적 요건 때문이었다. 직함이나 외형의 우월함에서 나오는 것은 당당함이 아니라 거만함이다. 내면을 채운 것이 아니기에 언제든 잃을 수 있으니, 겸손함이 아니라 비굴함이 따른다.

이른바 ‘갑질’이 사회의 화두가 되더니,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내용이 근로기준법 개정안에 포함되어 시행을 몇 달 앞두고 있다. 직위로 인한 횡포를 경험한 비율이 70%가 넘는다는 오늘, 갑질은 일부 재벌가의 일탈적 행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상호 간에 자행되고 있다. 거만함과 비굴함의 사이를 불안하게 오갈 것이 아니라, 겸손하면서 당당한 삶의 이상을 다시 떠올릴 일이다. 순간순간 나의 만족과 실의가 어디에서 오는지 곰곰이 성찰해 보면서.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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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과 융·복합의 시대에 세대와 이념, 전문분야와 준거집단에 따른 반목의 골은 깊어만 간다. 이해를 위한 일말의 노력도 없이 분노에 찬 비판을 서로에게 서슴지 않고 쏟아붓는다. 합리적 의심과 구체적 확인을 바탕으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찾으려는 신중함이 양측 모두에게서 회색분자, 양비론이라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대북관계, 환경문제, 대입전형, 경제정책 등 쉽게 재단하기 어려운 사안들에 대해 너도나도 확신에 찬 쾌도를 휘두른다.

어느 시대든 이견의 충돌은 있었다. 식견과 소신의 차이에 따른 다양한 논쟁과 갈등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사회에서 타협의 여지없는 극단의 반목이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전문가에 대한 존중이 격하되고 언론의 환경도 급변하면서, 시간을 들여 책이나 신문을 읽고 방송을 보기보다는 검색 정보를 부유하며 입맛에 맞는 경로로만 소통하는 것이 대세다. 인터넷 사회관계망의 확장 역시 언제부턴가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끼리의 공유에 제한되고, 여기서 저 놀라운 확신들이 탄생한다. 각종 매체들 역시 이에 편승해서 클릭 수에 좌우되는 실정이니, 이른바 가짜뉴스들이 서식할 최적의 조건이 조성된다. 신뢰도 높아 보이는 통계자료 역시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구성할 수 있다. 엄청난 정보의 바다에서 각자가 섬이 되어 언어의 날만 더 예리해지는 모습을 감내하기가, 참으로 힘겹다.

‘절충(折衷)’이라는 말이 일찍부터 쓰여 왔다. 이견이 갈릴 때 양 극단을 다 고려하고 시비와 경중을 가려 조화로운 대안을 제시함을 뜻한다. 송나라 때 증공은 한나라 유향에 대해서 “잡다한 학설에 현혹되어 절충할 줄을 몰랐다”고 비판하였다. 올바른 준칙을 세워 가려내지 못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유향이 남긴 글을 책으로 편집하여 전한 이가 바로 증공이다. 결점이 많은 책이지만 그 안에 값진 내용들이 섞여 있으니 읽는 이가 절충하여 취사하면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들은 그대로 말하면 되는 줄 아는 구이지학(口耳之學)의 시대에, 사려 깊은 절충의 미덕이 절실하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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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노나라에 맹지반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제나라와의 전쟁에 패하여 후퇴할 때 맨 마지막으로 성문에 들어오며 “말이 하도 달리질 못해서 뒤처지고 말았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공자는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은 점을 높이 쳤다. 전쟁에 져서 도주한 것에 불과한데 이렇게 칭찬한 이유가 무엇일까? 패배와 후퇴가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후미에서 추격해 오는 적과 상대함으로써 퇴각하는 아군을 보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가장 용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맹지반은 사람들이 그 공을 높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자신이 의도적으로 후미에 선 것이 아니라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리 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공을 세우고서도 스스로 겸손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을 두고 ‘노겸(勞謙)’이라고 한다. <주역> 64괘 중의 하나인 ‘겸(謙)’의 세 번째 효, 즉 아래위로 다섯 개의 음효 사이에 끼어 있는 유일한 양효에 붙은 말이다. 겸괘는 산이 땅 아래에 있는 형상이다. 자신의 크고 높은 덕을 드러내지 않고 남에게 굽힌다는 뜻이 담겨 있다. 겸양은 미덕일 뿐 아니라 실리이기도 하다. 가득 찬 것은 덜어내고 모자란 것은 채워 주는 이치는 하늘과 땅만 그런 게 아니다. 차서 넘치는 이는 사람에게도 미움을 받고 귀신의 해를 입기 마련이라 했다. 마지막까지 온전하려면 한없이 낮추고 비울 일이다.

덕성과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삶, 참으로 훌륭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남이 알아주기 전에 자신이 먼저 생색을 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오히려 적절한 자기 과시야말로 성공의 요인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선의와 노력으로 이룬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자랑으로 이어지면 독선과 아집으로 변질될 뿐이다.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이나 정권 역시 마찬가지다. 쉬지 않고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독선과 아집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고 전문가의 조언을 경청하는 자세를 잠시도 놓지 않아야 한다. 정책 결정에 있어서 전문가의 신중한 공적 보고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들려온다. 겸양과 개방을 결여한 폐쇄된 선의와 노력의 끝은 참담할 수 있다. 노겸한 군자라야 끝까지 아름다울 수 있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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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해서 귀하게 대접받는 것들이 있다. 백마는 회색 털로 태어난 말이 나이 들어 노화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위용이 남달라서 고귀한 이들의 의전용 말로 사용되었다. 잎이 하나 더 달린 클로버는 돌연변이이거나 생장점에 난 상처 때문에 갈라진 것일 뿐이라지만, 흔치 않기 때문에 행운의 상징이 되었다. 두 나무의 가지가 연결되어 한 나무처럼 자라는 연리지 역시 어쩌다 이루어진 매우 특이한 현상이지만, 그렇기에 세상에서 보기 드문 효성이나 사랑을 표상한다.

그런데 사람의 신체에 대해서는 유독 특이한 것을 귀하게 여기기는커녕 거부하거나 멸시하는 일이 많다.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가 물갈퀴처럼 붙어 있거나 엄지손가락 옆에 작은 손가락이 하나 더 달린 것은, 비교적 작은 차이에 불과하고 일상생활에 크게 불편한 것도 아니다. 장자(莊子)는 이를 자연을 거스르는 군더더기로 보아서 인위적인 유가를 비판하는 비유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모습일 뿐이다. 단지 많은 사람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꺼림을 당하는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연암 박지원은 서얼에 대한 국가적 차별을 없애자는 주장을 담은 가상의 상소문을 썼다. 그 서두에서 하늘이 나무의 외형이 특이한지 평범한지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비와 이슬을 내리는 것을 들어서 출신의 차이에 구애되지 말고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논리를 끌어내었다. 그가 보기에 서얼의 진출을 막는 법은 정도전, 유자광 등 특정 인물로 인해 어쩌다 생겨서 권세가들의 이기심에 의해 고착된 것일 뿐, 아무런 근거도 실익도 없음이 명백하였다.

우리 시대에 공적인 적서 차별은 없다. 그러나 오늘처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화두로 떠오른 때도 없다. 이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순간, 차별과 배제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신체적 조건, 사회경제적 조건은 물론 성별, 국적, 인종, 가치관, 행동 양식과 취향에 이르기까지,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는 데에서 소통과 이해가 가능하다. 다수와 소수 역시 늘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외국 출신이라서 쫓겨날 처지에 있던 이사(李斯)가 진왕(秦王)에게 한 유명한 말을 다시 음미할 만하다. “태산은 조그마한 흙덩이도 거부하지 않으므로 그처럼 커질 수 있었고, 하해는 가느다란 물줄기도 배제하지 않으므로 그처럼 깊어질 수 있었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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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는 삶이 일상이던 시절에도 밤샘을 하는 이들은 있었다. 3000년 전 중국 정치인 주공(周公)이 밤샘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전의 성군이 행한 훌륭한 정치에 조금이라도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으면 하늘을 우러러보며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빨리 실행하고 싶어서 또 그대로 앉아 뜬눈으로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낮처럼 밝은 밤이 일상인 오늘날, 밤샘을 불사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밤샘인가? 눈앞의 즐거움을 탐닉하며 밤을 새울 수도 있겠으나, 먼 훗날의 즐거움을 그리며 성공의 조건들을 채우기 위해 사력을 다해 밤을 새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목적이 즐거움에 있다면, 자신의 몸을 혹사해 가며 과연 얼마나 지속 가능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까? 장자(莊子)는 진정한 즐거움이란 오히려 무위(無爲)할 때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작은 주머니에 큰 물건을 담으려 하거나 두레박줄은 짧은데 깊은 물을 길어 올리려 하는 데에서 불행이 시작된다. 왕을 모시는 주연과 음악으로 바닷새를 대접한다면 새는 즐거워하기는커녕 괴로워하다 죽고 말 것이다. 모두에게 같은 욕망을 강요하는 교육에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 프랑스 문학과 영화를 즐기는 친구가 불어불문학과에 진학하고 천체 관측의 매력에 빠진 친구가 천문학과나 지구과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마땅한데, 여전히 한 줄 세우기에 급급하다. 전공별 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입시전형이 이루어져야 중·고등학교 교육의 과목 간 차별이 줄어들고 공교육 정상화의 길도 열릴 수 있다.

주공은 불행했을까? 그가 그렇게 노심초사 이루려 한 성군의 정치는 이런 것이었다. 선한 말을 맛난 술보다 좋아하고 편견 없이 훌륭한 이를 등용하며, 약한 이들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고 늘 새로운 마음으로 이상을 추구하며, 가까운 자를 존중하고 먼 자를 잊지 않는 일이다. 주공에게는 이를 실행하기 위한 밤샘이야말로 무위였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그의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우리의 밤샘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아니, 우리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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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후금의 전쟁이 치열하던 1618년, 명의 강요로 파견한 조선의 강홍립 부대가 후금에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빌미로 명에서 조선이 후금과 내통한다는 논의가 일자, 광해군은 이정귀를 사신으로 발탁한다. 1598년 조선이 왜를 끌어들여 명을 치려 한다는 무함이 있을 때 이정귀의 상주문으로 변론을 성사시킨 일을 떠올린 것이다. 이정귀는 광해군의 폐모 정청에 불참한 죄로 유배의 명을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국가 위기의 상황에서 광해군이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거슬리던 이정귀를 찾은 것은, 그가 지닌 ‘화국(華國)’의 능력 때문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화국은 문장력으로 나라를 빛낸다는 말이다. 동아시아에서는 문장이 외교 목적을 달성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현실정치가 힘으로 움직이는 것은 예나 이제나 다르지 않지만, 명분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그 힘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전통이 있었다. 이정귀가 올린 글은 매우 명쾌하였을 뿐 아니라 읽는 이의 눈물을 떨구게 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 문장력이 두 차례나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오늘날 능력으로 나라를 빛내는 일에 무엇이 있을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분들이 많지만, 대중적으로 가장 주목을 받는 이들은 체육 선수다. 한국전쟁 직후 그 어렵던 시절, 원정으로만 치른 월드컵 예선전에서 일본을 완파한 축구대표팀 선수들만큼 국민의 자존심을 세워준 이가 있었을까. 박세리, 박찬호 선수의 낭보가 국가 부도의 시기를 버티게 해줬다는 분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국민체육진흥법’의 제1조가 “체육을 통하여 국위 선양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로 끝맺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심석희 선수의 용감한 고백 이후 여론이 들끓고 정치권에서도 구체적인 대책들이 제안되고 있다. 그러나 강한 기시감을 어찌할 수 없다. 여전히 강조되는 엄한 처벌과 인적 쇄신, 엘리트 체육의 개선 등이 다시금 공염불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결과에만 찬사와 비난을 쏟아붓고 과정의 비위에는 적당히 눈감아주는 한, 우리는 체육계 폭력에 분노할 자격이 없다. 성과 지상주의가 만들어내는 폭력의 치외법권을 근절해야 한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 외교상의 문장력이라면 모를까, 체육의 최종 목적을 국위 선양에 두는 것은 옳지 않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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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류층 저택 단지에서 입시를 두고 벌어지는 암투를 그린 드라마 <SKY 캐슬>이 화제다. 과장된 상황 전개에도 불구하고 이게 바로 우리 교육의 현실이라는 반응이 적지 않다. 이 드라마의 웃음 코드 가운데 하나는, 잘나가는 대학병원 의사이면서 허당 기질이 다분한 정준호 분 강준상 교수의 행태다. 나의 전공 탓이겠지만,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온 장면이 있다. 미리 입수한 정보를 활용해서 국회의원의 환심을 사려던 강 교수가 한자로 적힌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를 마천 신혁사로 잘못 읽는 해프닝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화백

그러나 ‘驪’와 ‘勒’을 쉽게 읽을 수 없는 시청자라면 그냥 웃어넘기기엔 뭔가 찜찜하다. 한글로 쓰면 될 것을 굳이 한자로 써서 망신을 주는 설정이 와 닿지 않아서일까, 오히려 강 교수의 볼멘 항변에 공감이 간다. “저희 땐 한자를 안 배웠습니다. 학력고사 과목에 없었거든요.” 학력고사 전국 1등의 수재라 하더라도, 대학 입시와 상관없는 내용은 몰라도 당당한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국권을 빼앗기고 타의에 강제된 근대화를 겪으면서 한문으로 표기된 전근대 문물은 부정의 대상이었고, 이는 해방 이후 한글 전용의 전격 시행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구사하기 위해서라도 한문 교육은 여전히 필요하다.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 한문 교육의 의의와 내용이 실려 있고, 이를 흥미롭게 구현한 교과서들이 나와 있으며, 전공 교육을 충실히 받은 교사들이 양성되고 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의 한문 교육은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대학 입시에 영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글 전용이 세대를 넘긴 지금, 한문 교육이 우리의 민족 자존감을 무너뜨리거나 전근대적 가치관으로 회귀시킬 것이라 우려할 필요가 있을까? 그보다는 동아시아의 일국으로서 어휘 및 문화 교육의 측면에서 한문 교육의 실용성이 다시 부각되는 시대다. 교육과정의 선택과목 체계에서 한문과의 위상을 재배치하고, 대학 입시에 편중되는 중·고등학교 시수 편성을 정상화하는 원칙 수립이 시급하다. 대학들도 온전한 고등교육을 위한 최소한의 한문 실력을 입시 전형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교육이 철학과 비전 없이 방향성 없는 경쟁으로만 치닫다 보면, 여주를 마천으로 읽는 실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더 큰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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