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있다. 1954년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하여 TV로 옮겨 1982년까지 이어졌고, 2005년부터 다시 방송되고 있다. 여느 오디션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관객들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어린이는 아무리 뽐내도 사랑스럽다.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잘하는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제목이 여전히 어색하지 않다.

정조가 어느 날 역정이 묻어나는 비답을 내렸다. 심낙수가 홍국영, 구윤옥, 송환억 등을 비난하면서 이들이 있어서 치세라고 할 수 없지만 정조가 있으므로 난세라고도 할 수 없다면서 결단을 요구한 상소문에 대해서였다. 정조는 심낙수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그렇게 숨겨진 흠집까지 들추어내어 어지럽게 다투는 행위 때문에 치세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온몸에 퍼진 열병을 잡으려면 정수리에 침을 놓듯이 송환억을 처벌해야 한다는 심낙수의 주장에 대해, 장년의 환자와 달리 노년의 환자의 경우 정수리에 침을 놓았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반박하면서 마지막에 일갈했다. “네 몸을 사랑하듯이 나라를 사랑하라.”

터럭을 불어서 숨겨진 흠집까지 들추어내는 것을 ‘취모멱자(吹毛覓疵)’라고 한다. 요사이 정치계, 언론계를 보면 경쟁적으로 취모멱자에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자유로운 비판은 민주사회의 근간이다. 그것이 차단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 과정에 이웃 중국에서 일어난 사례에서 우리는 목도했다. 그러나 위기와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취모멱자가 만연한 사회 역시 매우 위험하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며 최선의 길을 판단하기란 매우 어렵다. 말은 아끼고 배려와 협조, 그리고 희생을 나누어 감수할 때다.

세상은 동심처럼 아름답지 않다. “누가누가 잘하나” 박수만 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가 “누가누가 못하나”만 찾아내려 혈안이 된다면, 험악한 표정의 관객들 앞에서 그 누구라도 한없이 망가지고 말 것이다. 내 건강을 지키듯이 공동체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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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늘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다. “올해 사업이 잘되었다지?” “건강이 더 좋아졌다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축하하는 덕담을 건네기도 한다. 말하는 데에 돈 드는 것 아니니 부담 없이 하게 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더욱 간편하게 전할 수 있다. 주는 것 없이 받으라 하고, 받은 것 없어도 기분 좋은 것이 덕담이다.

사실 복은 사람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축복(祝福)과 신(神)의 한자에 제단(祭壇)의 모양을 본뜬 기(示)가 공통으로 들어간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복은 본디 초자연적 존재와 연관된다. 한 해 내내 반복되어 온 일상의 고리를 잠시나마 끊고, 새해에는 사람의 의지만으로 잘 안되던 일들까지 술술 풀리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건네는 말이 덕담이다. 그러기에 내가 주지 못하면서도 상대가 받기를 바랄 수 있고, 이미 받은 것처럼 선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덕담은 예로부터 민간에 이어져온 풍속이지만, 사대부의 글에서 그 예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설날 지은 시는 나이 듦을 한탄하거나 도소주 즐기는 풍류를 그린 작품이 대부분이다. 남에게 주는 설날 서신에는 덕담보다 권면이 주로 담겨 있다. <진서(晉書)>에 의하면 설날 아침 대궐 뜨락에 백수준(白獸樽)이라는 술동이를 두고 왕에게 바른말을 올리는 신하에게 술을 내리는 오랜 전통도 있었다. 새로워지는 해에 맞추어 자신을 새롭게 할 길을 권하고 찾은 것이다.

기분 좋은 덕담을 엄숙한 권면으로 바꾸자는 것은 아니다. 비방과 악담이 가득한 세상에 축복의 덕담 한마디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다만 남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덕담을 건넸으면 한다. 덕담인 만큼 현실의 조건에 너무 매이지는 말되, 두루뭉술한 복보다는 구체적인 바람을 담았으면 좋겠다. 맹자는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이룰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고 했다. 복은 사람이 지을 수 없는 것이지만, 두드리고 구하지 않는 이에게는 하늘의 도움도 없다. 설 연휴도 끝나버리고 연말연시를 말할 여유조차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 이때, 각자 나름의 희망을 담은 덕담을 자신에게 조용히 건네 보는 것은 어떨까.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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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다. 이맘때마다 많이 들리는 성어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다. 새해의 시작을 맞아 운동, 금연, 외국어 공부 등 모처럼 작심한 일들이 며칠 가지 못해 흐지부지되고 만 데 대한 후회와 자괴의 마음이 전해지는 말이다.

작심삼일은 고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속담을 한문으로 옮긴 말이다. 사흘 고기 잡고 이틀 그물 말린다는 뜻의 ‘삼천타어(三天打魚) 양천쇄망(兩天쇄網)’이라는 중국어 표현, 머리 깎고 승려가 된 지 사흘 만에 못 견디고 환속한다는 뜻의 ‘삼일방주(三日坊主)’라는 일본어 표현 등이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는 한다. 하지만 작심삼일은 17세기부터 용례가 보이는 우리 고유의 성어다.

사실 어떤 목적을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는 뜻의 작심(作心)이라는 어휘 자체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흔히 쓰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결심(決心)이 더 일반적인 어휘다. 무언가가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의 “작어심(作於心)”이라는 구문은 많이 보인다. 맹자는 변론을 즐긴다는 비판에 대해 이단사설이 횡행하는 것을 막고 유가의 도를 계승하기 위해 부득이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맹자가 말하는 유가의 도는 요임금 때 범람하는 황하를 다스림으로써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든 데에서 출발한다. 홍수가 지나간 땅에 득실거리는 벌레와 도마뱀 따위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것을 표현한 글자가 개(改)이고, 그렇게 바로잡는 행위를 일반화한 글자가 정(政)이다. 환경을 바로잡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정치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생각이 일을 그르치고 결국 정치를 그르치게 되므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라는 것이다.

작심삼일도 사흘마다 한 번씩 하면 된다는 말들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라도 위로받고 늘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그 역시 나쁘지 않겠다. 문제는 오히려 작심삼일이 두려워서 작심 자체를 안 하는 데에 있다. 성찰 없이는 작심도 없다. 끊임없는 성찰과 작심이 아니고는 우리의 삶도, 사회와 정치도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에 달렸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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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송구영신(送舊迎新)이다. 그믐날 뜨는 해와 설날 뜨는 해가 다르지 않음을 알면서도 굳이 구획을 지어 떠들썩하게 의미를 부여해온 데에는, 그렇게 해서라도 구태를 훌훌 떨쳐버리고 새 희망을 맞이하고 싶은 모두의 마음이 담겨 있다. 16세기 시인 노수신은 연말 떠들썩한 분위기 가운데 지은 시에서 “어지러운 잡념들이 꼬리 물고 일어나니, 가볍게 다스려 조장도 망각도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더 번잡해지는 마음을 무겁게 억제하려 하면 오히려 안정을 이룰 수 없는 법, 조바심에 일을 억지로 이루려 하지 말되 그렇다고 손 놓고 방기해서도 안된다는 맹자의 말을 송구영신의 마음가짐으로 삼은 것이다.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송구영신의 때에 등장하는 것은, 적어도 이때만큼은 굶주리는 이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연말연시에 장패(藏牌)의 명이 내려지곤 했다. 범법자를 체포할 수 있도록 순찰 군관에게 평상시 지급하는 것이 금패(禁牌)인데, 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회수하여 보관하라는 명이다. 금지된 도축을 일시적으로 허용함으로써 도성 백성들이 명절 음식을 마련하고 나누어 먹을 수 있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어렵게 사는 이들에게도 팍팍한 현실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송구영신의 시간만큼은 허락되어야 한다는 마음이다.

며칠 전 굶주림 끝에 우유 두 개와 사과 몇 알을 훔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현장에서 발각되었지만 상점 주인도, 경찰관도, 지나던 행인마저 이들에게 처벌보다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이 감동의 후원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보다 더 딱한 사정을 지닌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이렇게 부각된 사례에만 반응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한 해 내내 굶주리는 이들이 즐비하던 조선시대에 연말연시 며칠 동안 고기 맛을 보게 해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반문할 수도 있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알묘조장을 경계하다가 작은 실천의 마음마저 아예 잊고 지내서는 안될 일이다. 아무리 미약하다 하더라도, 온정은 온정대로 가치가 있고 의외의 전염력을 지녔다. 더구나 금패도 거두어들인다는 송구영신의 때가 아닌가.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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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 맞추어 행할 뿐 그 밖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사서삼경에 빠져 살았던 옛사람들은 과연 <중용>의 이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서 욕심 없는 삶을 살았을까? 부귀든 빈천이든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흔들림 없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군자를 이상적 인간형으로 여겨왔다는 사실 자체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셈이다. 늘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한 채 남 탓, 하늘 탓을 일삼는 것이, 예나 이제나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18세기 문인 조귀명은 평생 병석에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종일 서재에서 책만 읽곤 하던 그에게, 가끔 방문을 열면 내려다보이는 뜨락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세계였다. 작은 뜨락이지만 쏟아지는 달빛을 듬뿍 받아 안기에는 충분하다. 그 빛에 어른거리는 꽃과 나무의 그림자들은 맑은 물속에 마름풀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듯 마음까지 일렁일렁 춤을 추게 한다. 고즈넉한 즐거움을 누리는 그에게 누군가 물었다. “그대의 뜨락은 너무 작은 것 아닙니까?” 조귀명은 크고 작음이란 마음에 달린 일일 뿐이라고 답하고는,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들의 근심은 자기 것은 작다고 버려두고 남이 지닌 큰 것을 구하는 데에 있다. 늘 자신보다 잘살고 높이 오른 이들을 바라보며 부귀와 명예를 추구하는 삶에는 끝내 만족이 있을 수 없다. 지금 나는 내 낡은 집으로 제운루와 낙성루의 화려한 건물을 대신하고, 내 작은 뜨락으로 금곡원과 평천장의 아름다운 정원을 대신하며, 내 서투른 시문으로 이백과 한유의 훌륭한 작품을 대신한다. 그 곁에서 거닐고 그 속에서 휘파람 부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들 하는 오늘날, 애써 구하려 하지 말고 처지에 만족하며 살아가라는 충고는 시대착오로 보인다. 거기 기대어 내놓은 조귀명의 자기 위로 역시, 벗어나기 힘든 비교의식의 쳇바퀴를 떨쳐낼 최선의 방도는 아닐지 모른다. 그보다는 행복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다만 정작 심각한 건, 선택조차 해보지 못한 채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욕망을 좇는 삶이다. <중용> 구절이, 그리고 한 문인의 고백이, 분수에 맞게 살라는 케케묵은 충고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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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고조는 스물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둘째 아들인 이세민이 피비린내 나는 냉혹한 권력 다툼 끝에 고조를 무력화시키고 왕위에 오른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이세민도 열네 번째 아우인 이원궤만큼은 유독 총애하였다. 이원궤는 깊은 학식과 바른 행실로 당대에 높이 인정받았다. 자신의 형제 가운데 누가 가장 훌륭한지를 묻는 태종 이세민의 질문에 재상 위징은 “오왕(이원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늘 저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라고 답했다.

이원궤는 선비 유현평과 격의 없이 지냈다. 어떤 이가 유현평에게 이원궤의 장점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장점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아해하는 상대에게 유현평은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에게 단점이 있어야 장점이 드러나는 법이지요. 그분은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데 제가 무엇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모든 면이 완벽해서 특정한 장점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느 한 분야에서만 두각을 드러내면 각광받는 오늘날, 장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개성 없는 인간형이 과연 바람직할까? 조선 시대 문인 조귀명은 유현평의 말이 천하의 지론이라고 하면서 사람의 기질과 연결하여 논의를 발전시켰다. 천성적으로 굳센 사람이 있고 부드러운 사람이 있다. 굳센 기질은 과감함과 엄격함으로 드러나고 부드러운 기질은 따뜻함과 은혜로움으로 드러난다. 문제는 사람들이 일반적인 엄격함을 넘어설 때 엄격한 사람이라고 평하고, 당연한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 때 은혜로운 사람이라고 평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어느 경우든 기질의 치우침을 바로잡지 못한 결과이므로, 관점에 따라 장점이 곧 단점이 되고 말 뿐이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저 책잡힐 일 없이 중간만 가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과감해야 할 때는 더없이 과감해야 하고, 따뜻해야 할 때는 더없이 따뜻해야 한다. 극단의 엄격함이 중용일 때도 있고 한없는 은혜가 온당한 경우도 있다. 관건은 그 판단의 기준이 자신의 기질이나 사람들의 평판에 있는가, 사심 없는 원칙과 명분에 있는가다. 눈앞의 칭찬이나 비판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그것은 시간과 함께 지나가 버릴 것이다. 결국 남는 건, 파르르 떨리는 나침반 바늘처럼 공의를 지향하는 진실한 마음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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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1920년 방정환 선생이 외국 동시를 번안하면서 처음 사용한 이래 어린이날 선포, 월간 ‘어린이’ 발간 등을 통해 점차 일반화된 어휘이다. 근대 계몽운동의 대상이자 주체로서 강조된 ‘소년’과 비교할 때, 어린이라는 말에는 윤리적,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난 완전한 인간으로서 권리를 보장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린이를 뜻하는 한자는 유(幼)이다. 한 가닥 실의 모양을 본뜬 요가 작다, 약하다 등의 뜻이고 여기에 역(力)을 더한 유(幼)는 힘이 약한 아이를 가리키는 글자가 되었다. 2500년 전에 나온 <주례(周禮)>의 백성 양육 정책이 자유(慈幼)와 양로(養老)로 시작된다는 사실에서, 연약한 존재인 아이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인식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유(幼)가 대개 노(老)와 함께 먼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사용되는 데 반하여, 방정환 선생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어린이’는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한 인격 존재임을 부각하였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어린이날이 있는 5월과 가장 먼 계절인 11월에 방정환 선생을 떠올리는 것은, 11월9일이 그분이 태어난 지 120년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문화예술인이기도 한 선생은 1918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재학 시절 연극 <동원령>을 각본, 연출하여 공연하였고, 이듬해에는 최초의 영화 잡지인 ‘녹성’을 창간하기도 했다. 이번주에 탄생 120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100년 차이가 나는 후배들이 <동원령>의 연내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계몽과 독립이 급선무이던 시절,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선언은 낭만적인 이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 지금 우리 사회는 어린이를 지나치게 떠받들고 있으니 어린이날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것 아니냐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공부 경쟁에 내몰린 채 스마트 기기에 영혼을 빼앗긴 어린이들을 보며,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가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라는 방정환 선생의 당부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100년 전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라는 낯선 말을 보급하며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 냈다. 지금 우리는 ‘어린이’라는 낡은 말을 다시 음미하며 그 무한한 가능성에서 우리의 ‘살길’을 찾을 때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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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사용하지 않아 낯설어진 우리말 어휘 중 하나로 새 이름 ‘고니’가 있다. 대신 ‘백조’라는 어휘가 주로 사용되는데 이는 본디 ‘하얀 새’의 통칭이었고, 한자 곡(鵠)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고니다. 백조 혹은 ‘스완(swan)’이라고 부를 때의 우아함이 고니에서는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1980년대 유행한 노래 제목 이후로는 별로 쓰이지 않는 것 같다. 고니는 다른 새에 비해 몸집이 크고 빛깔이 깨끗해서 예로부터 상서로운 새로 여겨졌다. 

그런데 한(漢)나라 왕충(王充)은 사람들이 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닭을 천하게 여기는 까닭이 단지 고니는 멀리 있고 닭은 가까이 있기 때문일 뿐이라고 했다. 옛날의 공자나 묵자만 귀한 줄 알고 동시대 인물이 아무리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도 하찮게 여기는 세태를 비판하기 위해 끌어온 이야기다. ‘귀이천목(貴耳賤目)’이라는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멀리서 전해들은 것은 대단하게 여기고 가까이에서 본 것은 함부로 대한다는 뜻이다. 유독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 것은 예수만이 아니다. 공자 역시 동네에서는 함부로 불렸다. 우(虞)나라의 군주는 궁지기라는 인물이 올린 적절한 간언에 대해 그가 자신과 어릴 적 편하게 어울린 사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다가 나라를 잃고 말았다.

낯익고 친근한 대상을 무시하는 경향은 동서고금에 늘 있어 왔지만, 요즘은 매체의 놀라운 발달로 인해 물리적 거리마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다양한 경로로 정보가 공유되고 성역이 허물어지는 것은 혁명적인 변화다. 그 순기능과 잠재력은 대단하지만, 그런 변화의 의미에 대한 고민은 아직 미미한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전문가가 무시되고 신중한 접근이 가볍게 희화화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공자는 안영을 두고 사람을 사귀는 진정한 도를 지녔다고 칭찬했다. 친하게 지낸 시간이 오래 되어도 상대를 존중할 줄 안다는 이유에서다. 존중의 태도가 필요하다. 강요되는 권위의 허상을 깨는 일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지만, 쉽게 접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정보에 들인 공과 섬세한 적용의 능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한다면 우리는 더 소중한 것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애초에 닭과 고니 사이에 우열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낯익고 흔해 보이는 대상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태도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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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지는 않지만 아내와도 같은 존재(不室而妻).’ 이덕무가 친구를 정의한 말이다.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匪氣之弟)’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친구관계를 부부에까지 견준 것은 과해 보인다. 18세기 조선에는 전생의 부부로 불린 친구도 있었다. 열 살 터울의 시인 신유한과 최성대는 서로의 시에 마음을 빼앗겨 평생 남다른 우정을 이어갔다. 두 사람이 방 안에서 즐겁게 나누는 대화 소리를 들은 주인집 노파가 꽃다운 여인을 숨겨둔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다. ‘우정’이라는 어휘조차 낡게 느껴지는 오늘, 옛사람들의 우정에 대한 범상치 않은 일화들을 접하면 낡음이 낯섦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정을 각별하게 여기는 전통의 출발도 <논어>에 있다. 공자가 감격스러운 어조로 처음 던진 말이 ‘배우고 익히는 기쁨’ ‘친구와 만나는 즐거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는 인품’이다. <논어>가 그리 체계적이지 않은 대화록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 첫머리에 이 세 가지가 놓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공자가 평생 애독한 <주역>의 “군자는 친구와 함께 배우고 익힌다”라는 구절에 이해의 단서가 보인다. 배움으로 인한 내면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즐길 수 있는 존재가 친구다. 이 즐거움만 있다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난세에 비웃음을 당하면서 끝까지 꿈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다.

경제가 안 좋다고 하지만 물질적 풍요는 여전히 넘쳐나 보인다. 생활은 편리하고 누구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 각자의 삶은 왜 이리 힘이 들까. 부의 편중과 기회의 불공정, 초고령사회 진입 등이 중요한 원인이겠으나, 그런 문제만 해결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가족과 마을이 무너지고 마음 나눌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 인터넷이 만들어낸 새로운 관계망이 펼쳐진다. 그 신세계에서 소리 높여 속내를 토해 보지만, 그곳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또 다른 이익과 권력의 메커니즘이 광풍처럼 휘몰아친다. 박제가는 ‘말하고 싶다가도 만나면 말하지 않게 되는가, 하지 않으려던 말도 만나면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가’를 보면 우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공허한 대상이 아니라 내 말을 깊이 들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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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사용하는 어휘 중에 의외로 의미의 외연과 유래가 간단치 않은 경우들이 적지 않다. ‘구차(苟且)하다’를 한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살림이 몹시 가난하다’가 첫 번째 뜻으로 나온다. 중국어사전에는 ‘그럭저럭 되는 대로 하다’, 일본어사전에는 ‘일시적이다’가 통용되는 의미로 등재되어 있어서 거리가 꽤 있어 보인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가장 이른 시기의 출전으로 알려진 진(晉)나라 육기(陸機)의 글에서는 통치자에게 ‘구차한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당장 눈앞에 놓인 이익에 좌우되지 말고 굳건해야 함을 강조하는 문맥이다. 한(漢)나라 순열(荀悅)은 진(秦)이 14년 만에 멸망한 이유로 ‘구차한 정치’를 들었는데, 성현이 제시한 보편적 예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많이 달라 보이던 의미들이 대체로 ‘원칙을 고려하지 않고 일시적인 편의에 따라 대충 봉합하며 지나치는 태도’로 수렴된다. 한국어사전의 두 번째 뜻인 ‘말이나 행동이 떳떳하지 못함’과 그 주된 용례인 ‘구차한 변명’ ‘구차한 목숨’ 등의 표현 역시 일맥상통한다.

“성현의 도는 ‘구차하지 않음’에 있을 뿐이다.” 18세기 작가 조귀명이 불구(不苟)를 호로 삼은 윤득형을 위해 지어준 <불구설>의 첫 문장이다. 그는 구차함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움이 없음’으로 풀이했다. 무릎 꿇어야 할 때는 누울 생각이 나지 않고 서 있어야 할 때는 앉을 생각이 나지 않아야 구차하지 않다고 할 수 있지, 그저 무릎 꿇고 서 있는 동작을 예법에 맞추어 억지로 행하는 것으로는 구차함을 면치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구차함과 구차하지 않음의 구별은 외면을 보고 판단할 수 없다. 떳떳한 원칙이 체화되어 자연스럽게 표출될 때 비로소 구차하지 않을 수 있다.

무엇이 원칙인지 생각조차 않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다. 만년의 박지원은 병풍에 ‘인순고식(因循姑息) 구차미봉(苟且彌縫)’ 여덟 글자를 크게 써두고, “세상 모든 일이 다 이 여덟 자 때문에 무너지는 법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해오던 대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임시변통하면서 문제를 덮어두는 태도를 경계한 말이다. 우리는 왜 그다지 빈궁하지 않은데도 이렇게 늘 옹색하고, 그 옹색함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일까? 나는 지금 내 자리에서 구차하지 않은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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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자어의 대다수는 한자문화권에서 공통으로 사용되지만, 각 나라 내에서만 통용되는 한자어도 적지 않다. 의외의 경우 중 하나가 ‘추석(秋夕)’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추석이라는 말은 쓰이지만 말 그대로 ‘가을 저녁’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만 오래전부터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해 왔다. 중국도 음력 8월15일을 4대 명절로 치지만 그 명칭은 중추(仲秋 혹은 中秋)이다. 가을 석 달 중 가운데 달, 그중에서도 한가운데 날을 가리킨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저녁 넉넉한 보름달 아래 풍성한 결실을 즐기는 추석은 농경사회를 살던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 바란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예로부터 시인들은 이 좋은 날을 시로 읊어 왔다. 친지와 함께 즐기는 명절의 풍성함을 노래한 시들도 다양하지만, 그 기쁨이 클수록 더욱 커지는 향수와 그리움을 담은 시도 못지않게 많다. “중추삼오야(仲秋三五夜)”로 시작하는 백거이의 시는 달빛 걸린 마루에서 술잔 앞에 홀로 앉아 멀리 떨어져 있는 네 명의 벗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리움을 절절하게 노래하여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보름달이 주인공인 추석이지만 기대승은 아직 다 차지 않은 추석 전날의 달을 보며 “달이야 내일 밤이 더 좋겠지만, 나는 오늘 먼저 달을 만나네”라고 읊었다. 날이 언제 맑았다가 흐려질지 알 수 없는 일, 가을은 꼭 보름이 아니더라도 환한 달빛 하나만 있으면 밤새워 마실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곡은 “중추절도 열엿새에 달빛 더욱 밝은 법”이라고 노래했다. 추석의 달빛과 중양절(重陽節: 9월9일)의 국화에만 열광할 뿐 하루 넘긴 달과 국화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이 세상인데, 자신은 정작 모두의 관심이 지나간 뒤에 오히려 더욱 밝은 달빛과 은은한 국화 향을 남몰래 즐긴다고 했다.

각종 매체의 발달로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만 쏠리기 더 쉬운 때다. 추석 연휴에는 눈과 귀를 잠시 돌려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몰아치는 말들의 범람 속에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없는지 차분하게 바라볼 일이다. 광풍제월(光風霽月), 선선한 바람과 함께 구름이 열리며 드러나는 환한 달을 만날 수 있는 추석이면 좋겠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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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운전 중에 생소한 경고등이 들어와서 당황한 일이 있다. 찾아보니 ‘D.P.F(Diesel Particulate Filter)’ 가동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다. 디젤 엔진에서는 입자상 물질이 많이 배출되기 때문에, 환경보호를 위해 D.P.F가 걸러낸 물질을 차량 내부에서 높은 온도의 열로 태워 처리함으로써 외부로 배출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이 장착되어 있다. 이 기능이 작동되기 위해서는 일정 속도, 일정 시간 이상 달려 줘야 한다. 그런데 장거리 주행을 하지 않고 단거리 이동에만 반복적으로 차량을 이용하다 보니 배출 물질이 처리되지 못하고 쌓여버린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사실을 알고도 바쁜 일상 때문에 깜박거리는 경고등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몇 차례 짧은 거리를 오가는 운전을 하다가 문득, 이 경고등이 쳇바퀴 돌 듯 일상에 갇혀버린 삶을 향한 신호로 느껴졌다. 반복되는 일상이 만들어내는 이런저런 찌꺼기들이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채 쌓여만 가는데 그 위에 다시 또 일상을 얹어 가는 삶. 문제는 인식도 감각도 거기에 고정되어 간다는 점이다.

18세기 여행가로 유명한 정란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전국 각지를 두루 다 돌아보고 나서 이제 제주 한라산을 유람하겠다고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일상은 팽개친 채 여행만 다니더니 급기야 당시로선 위험천만한 제주도 뱃길에 오르겠다니 상식 밖의 일이긴 하다. 이용휴는 그를 전송하는 글에서 도리어 과거시험 준비나 각종 공무 서류에 빠져 사는 이들을 딱하게 여기며 말했다. “수백 년 후에 과연 지금 비웃는 자의 이름이 남을까, 비웃음을 당한 자의 이름이 남을까?”

일상을 벗어나 떠나는 여행이 주는 가장 귀한 선물은 새로운 인식과 감각이다. 인문학이나 종교에 효용이 있다면, 그 역시 고정된 인식과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데 있을 것이다. 주어진 하나의 시선만으로 일상의 이해관계와 선행관습에 갇혀 살기에는 삶이 너무 짧다. 몸을 위한 스트레칭의 기본은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안 쓰던 방식으로 쓰는 데에 있다. 그럴 때 몸이 새롭게 깨어나면서 조화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무엇에 갇혀 사는지 돌아보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인식, 다른 감각을 경험해 보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볼지 생각해 볼 일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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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따뜻하고 배려심 많던 사람이 지위가 높아질수록 남을 무시하고 위압적으로 대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평소의 기대와 달라진 모습을 접하고 나면 오랫동안 맺어온 인간관계가 무너지기 십상이고, 그렇게 틀어진 관계는 회복되기 매우 어렵다. 우리 사회의 정서에서 “사람이 변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치명적인 일일뿐더러, 그 주어진 지위라는 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전보다 많은 것을 누리다 보니 그렇지 못한 이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자신의 영향력을 실감하면서 사람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측근에 둘러싸여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귀가 막히거나, 쇄도하는 민원 혹은 근거 없는 비방들로 인해 스스로 귀를 막아버리는 일도 일어날 법하다. 다만 이는 실제로 변한 것이라기보다 그전에는 그럴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일 뿐 그것이 그 사람이 지닌 본연의 모습이었던 셈이다.

정작 사람이 변했다면, 접하지 못했던 정보들과 새로 확보된 시야로 인해서 구체적 사안을 대하는 생각이 달라지고 그것이 신념의 변화로 이어지는 경우일 것이다. 전에는 안 보이던 부분까지 고려해야 하고 때로는 안된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이전의 지론과는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관건은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변해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내면에 있다.

군자는 세 번 변한다는 말이 있다. 멀리서 볼 때는 점잖고 무게가 있어서 곁을 주지 않을 것 같은데, 막상 만나보면 따뜻한 얼굴빛으로 편안하게 품어주고, 대화를 나눠 보면 명확한 논리력에 탄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는 입장에서는 세 번의 변화지만 실은 변한 것이 아니라 일관된 내면에서 우러나는 인품이다. 엄숙하면서 온화하기 어렵고 온화하면서 명확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인지라 낙차 큰 변화로 느껴질 뿐이다. 지속 가능한 따뜻함은 내면의 올곧음 위에서만 가능하다. 지위가 오를수록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판단의 근거가 사심인지 공의인지를 끊임없이 되물을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국 스스로 그 지위를 감당할 만한 내면을 지니고 있지 못함을 입증하고야 마는 일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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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면장을 하지.” 면장(面長) 노릇을 하는 데에도 식견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와전되어 사용되는 속담이다. “배우지 않으면 장(牆)을 대면하고 서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lt;서경&gt; 구절에서 유래한 ‘면장(面牆)’이 무지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여왔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뜻의 ‘면면장(免面牆)’이 ‘면장을 한다’는 표현으로 이어진 것이다. 장(牆)은 보통 담벼락으로 풀이되는데,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세워둔 가림막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깨달음을 위해 좌선하는 선사가 아니고서는, 앞이 꽉 막힌 곳에 서 있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면장을 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까닭은 자신의 눈앞에 가림막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배우지 못해서 가림막에 막혀 살면서도 그게 가림막인 줄 몰랐다면, 요즘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가림막에 온갖 정보가 난무해서 세상을 다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에 그 가림막 너머 혹은 바깥에 무언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소수의 일방적인 대중매체에서 정보를 얻던 때에 비해서 무궁하게 선택 가능한 쌍방향의 인터넷 공간을 활용하는 오늘, 오히려 우리 앞의 가림막이 더 견고해지는 면도 있다. 스스로 검색하고 선별했다고 믿는 정보들이 실은 누군가가 거르고 가공한, 혹은 은폐하고 왜곡한 정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과 해석이 혼재된 가운데, 의도적 해석을 거친 사실을 근거로 비타협적인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저마다 자기 앞의 가림막이 전부인 줄 아는 한, 건강한 토론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일관계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견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섣부른 판단에 앞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나의 가림막에 비친 정보들이 과연 누군가 덧씌워 놓은 프레임에서 자유로운지 살필 필요가 있다. 면장을 면하려면 먼저 내 눈앞에 가림막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가림막에 비판적 거리를 두고 조금만 더 품을 팔아서 해석 이전의 사실들에 눈길을 돌리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전문부터 2007년 한일수교회담 백서, 2012년과 2018년의 대법원 판결문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은 날것의 자료들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가림막을 주체적인 사고의 창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이야말로 이 시대에 면장을 면하는 길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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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행동이 갑자기 달라졌음을 부정적으로 표현할 때 흔히 ‘표변(豹變)했다’고 한다. 이 말은 본디 표범이 가을에 털갈이하는 것처럼 허물을 고쳐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좋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 원 출처인 주역 ‘혁괘(革卦)’에서는 ‘혁면(革面)’과 대비되어 사용되었다. 겉 표정만 바꾸는 혁면과 달리 표변은 전면적인 변혁을 뜻한다. 주희의 주석에 의하면 이 둘은 모두 ‘대인호변(大人虎變)’의 결과다. 통치자가 바르고 알맞은 도리로 개혁을 단행하면 천하의 모든 사리가 호랑이 무늬처럼 선명하고 아름답게 드러난다. 그 영향으로 선량한 이들은 온전히 교화되고 이기적인 이들조차 적어도 겉으로는 교화를 좇는 사회가 된다는 맥락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주역의 순서상 혁괘는 정괘(井卦)의 다음에 온다. 우물은 그대로 두면 더러워지고 수시로 바꿔야 청결함을 유지하기 때문에 혁괘로 이은 것이라고 전한다. 혁괘는 연못 아래에 불이 있는 형상이다. 물은 불을 사그라들게 하고 불은 물을 말려 버리므로 서로 치명적이다. 게다가 위로 치솟는 불이 아래에 있고 아래로 흐르는 물이 위에 있으므로 둘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서로가 서로를 변혁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갈등과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중요한 것이 바름을 지키는 꼿꼿함이다. 혁신은 도처에서 강하게 버티는 관성들을 하나하나 누그러뜨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한 치라도 바름이 흐트러지거나 때가 차기 전에 성급하게 꺾으려 들면,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된다.

혁신을 말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기술의 혁신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기술의 혁신이 다시 제도와 생활의 혁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변화의 속도가 높고 폭이 클수록 혁신의 요구도 거세진다. 정치권에서도 역시 언제부턴가 혁신이 화두다. 정부는 창업과 융·복합의 혁신을 강조하며 혁신성장을 전면에 내걸었고 엊그제 당대표에 오른 이는 문화혁신을 키워드의 하나로 삼았다. 공천혁신으로 살 길을 찾는 당도 있다. 그러나 어느 층위에서 말하든 간에, 혁신은 본래 위험하다. 갈등을 감당할 수 있는 내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신중함, 호랑이 무늬처럼 선명한 정당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바름이 있어야 후회가 없다는 혁괘의 경계는 여전히 유효하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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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통과의례 가운데 하나가 자전거 타기다. 세 발, 네 발 자전거만 타던 아이가 보기에, 두 바퀴 위에 앉아 넘어지지 않는 것은 너무도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 능력이다. 나 역시 처음 두 발을 땅에서 떼고 페달을 밟는 순간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다시 떠올리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무리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도 선 채로 균형을 잡을 순 없어. 일단 밟아!”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판문점 회동을 보며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깜짝쇼를 연출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상황에 따라 표변하며 백척간두의 줄타기를 이어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그 사이에서 한발 물러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는 문재인 대통령. 예기치 못했던 역사적 전개에 감격하는가 하면, 실제 성과도 없고 외교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며 개탄하기도 한다. 그중 색깔론에 의지해 온 이들이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허망하다. 종북 세력은 필시 반미주의자이고 한·미 공조 강화는 대북 강경대응으로 이어져야 마땅한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판단이나 역사적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이전에 옳다고 여겼던 관점만으로 더 이상 설명하기 힘든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나아가지 않으면 후퇴하는 것이라고 했다.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것과 같은 학문의 여정에서 가만히 있으면 뒤로 떠내려갈 수밖에 없음을 경계하는 말로 많이 사용되지만, 더 이른 출처는 나날이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없음을 강조한 내용이다. 자신이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어느 땐가 옳았던 시각이 영원히 옳으리라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각주구검의 어리석음에 빠진 셈이다. 이에 관한 한 정치적 입장이 보수든 진보든 마찬가지다.

냉정하게 바라보며 꼬장꼬장 비판할 일이 있고, 비틀거리더라도 마음 모아 밀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언젠가 겨레가 하나 되는 꿈을 이루어가는 길에는 엄청난 난관이 산적해 있다. 위태로울 뿐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조심스레 그러나 과감하게 두 발을 동시에 페달에 올리고 구르는 순간이 없다면, 그 길에 영영 오를 수 없을 것이다. 출발선에 선 채로 아무리 균형을 잡아보려 한들 아무 의미도 없다. 균형은 달려야 잡힌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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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디에 살고 무엇을 먹는 것이 올바를까? 사람은 습지에 오래 살면 반신불수가 되고 나무 꼭대기에 머물면 벌벌 떨지만 미꾸라지나 원숭이는 그런 곳이 더 편안하다. 사슴은 풀을 뜯어먹고 지네는 뱀을 먹어치우며 솔개는 쥐를 잡아먹는다. 소고기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만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널리 알려진 장자(莊子)의 이야기다. 올바름만이 아니라 아름다움도 그렇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미인이라 해도 물고기나 새, 사슴에게는 그저 도망쳐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두고 장자는 과연 무엇이 올바르고 아름다운지 묻는다.

창의와 융합의 시대라고들 말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들이 다양하게 개성을 발휘하고 그것을 서로 인정하는 기반이 없다면 이는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획일성을 강요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역이 많다. 이념을 내세운 분단과 대립의 시대로부터 국가가 주도한 경제개발의 과도기를 거치면서는 물론, 민주화의 역정에서조차 단일한 기치 아래 다른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이어져 왔다.

우리 교육이 당면한 문제들이 많지만, 학생 개개인이 다양한 분야를 접할 수 있는 경로가 오히려 더 좁아진다는 점이야말로 정말 심각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고 내신 반영 여부도 불확실한 일부 탐구영역이나 제2외국어 및 한문 등의 교과목들은 중등교육 현장에서 소외된 지 오래다. 개별 과목의 존폐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접해 보지 않고는 무엇이 더 좋은지, 어떤 분야가 나에게 맞는지 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대학 입시에 비중이 높은 교과만 공부하고 남들이 선호하는 전공이 자신에게도 목표가 되는 분위기에서 다양한 개성을 지닌 창의와 융합의 원석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지금은 한두 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다. 오늘 많은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머지않은 미래에도 과연 그럴지는 알 수 없다. 진학도 취업도 지금의 우열이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짜인 틀에 맞추기를 강제하는 시대가 아니라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 가능성을 마음껏 펼칠 장을 마련해야 할 시대다. 미꾸라지와 원숭이의 올바름마저 인정할 때 창의와 융합이 가능하지 않을까.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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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흰자위가 누렇게 변하는 황달은 간염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담즙 색소의 하나인 빌리루빈이 간에서 제대로 대사되지 않아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빌리루빈이 과다하게 쌓이면 청력 장애나 뇌성마비 등의 치명적인 질환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빌리루빈을 완전히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니다. 적당량의 빌리루빈은 유해산소를 제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암과 치매 등 치명적인 질환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이 유해산소 역시 체내의 세균 대사를 위해 소량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이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비밀은 알면 알수록 신비롭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 몸뿐만이 아니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존재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자리와 의미를 지닌다. 미생물부터 포유류까지 수많은 먹이사슬이 그물처럼 얽힌 구조에서 어느 한 종의 멸절은 전혀 예기치 않은 결과를 야기하곤 한다. 인간의 눈에 약육강식은 잔인해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는 생태계에서는 어떤 존재도 선과 악, 옳음과 그름으로 규정할 수 없다.

관건은 균형이다.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적정량을 유지한다면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문제는 일방의 입장을 기준으로 있어야 할 것과 없어도 될 것, 혹은 없애야 할 것을 함부로 구분하고 강제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인(仁)을 이루는 방법으로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서(恕)’였다. ‘서’는 상대 역시 나와 다름없는 마음을 지녔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용서와 관용을 넘어 적극적인 공감과 존중의 자세다. 그럴 때 모든 존재가 더도 덜도 아니고 각자 자신에게 마땅한 자리를 얻어 공생하는 세계를 그릴 수 있다.

공감과 상생은커녕 상대의 존재 자체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극혐’의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들여다보면 나름의 사연과 역사를 지니지 않은 존재는 없다. 물론 생태계와 달라서 인간사에는 선악과 시비의 판단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최소한의 인정도 없이, 애초에 없었어야 할 존재로 상대를 규정한 위에서 과연 온당한 판단이 가능할까? 최상의 균형을 이루는 중용에는 고정불변의 답이 없다. 공감과 존중의 자세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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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은 영욕(榮辱)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이상으로 여겼다. 노생이 한단에서 꾼 꿈이 오래 회자되어 온 것도 영욕의 부질없음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재상의 영예와 역적의 치욕을 번갈아 겪으며 80평생을 살았는데 깨어나 보니 조밥이 채 익기도 전이더라는 이야기다. 영욕이란 이처럼 잠깐 들었다 깨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치욕을 피하고 영예를 얻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영과 욕을 낮과 밤, 추위와 더위처럼 그저 지나가는 자연현상처럼 여겼다는 일화가 숱한 제문과 비문에서 칭송의 문투로 사용되어 온 것은, 영욕에 초탈한 사람이 얼마나 드물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영예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순자(荀子)는 영욕이야말로 성왕이 내세운 기본 원칙이라고 하였다. 그는 영과 욕을 의영(義榮)과 세영(勢榮), 의욕(義辱)과 세욕(勢辱)의 넷으로 나누었다. 의영과 의욕은 자신의 언행으로 인한 영과 욕이고, 세영과 세욕은 외부 조건에 의한 영과 욕이다. 세욕은 소인뿐 아니라 군자라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지만, 의욕은 소인에게만 해당된다. 세영은 소인도 누릴 수 있지만, 의영은 군자만이 누릴 수 있다.

퇴계 이황은 사화에 몰려 퇴출된 이연경을 두고 강호자연 가운데 의영(義榮)을 지닌 인물이라고 평했다. 권세에서 밀려난 상황임에도, 그의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투를 대하다 보면 누구든 마음이 맑아지고 생각이 명료해진다. 이익만 좇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도 이처럼 내면 깊은 곳에서 은은히 향을 발하는 이에 대한 존경은 진실의 힘을 지니고 쌓이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이황은 그가 근심 가운데 진정한 즐거움을 누렸다고 하였다.

군자에게는 의영뿐 아니라 세영도 주어질 수 있다. 사심 없는 군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예가 주어지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다. 다만 소인의 세영과 군자의 세영을 가르는 기준이 있다. 부끄러움과 당당함이다. 소인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에, 그렇 게 얻은 세영을 등에 업고 떵떵거리면서도 끝내 당당할 수는 없다. 군자는 부끄러움을 알아서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분별하였기에, 그렇게 얻은 세영을 겸손하면서 당당하게 누릴 수 있다. 영욕에 초탈할 수 없다면, 영예를 추구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볼 일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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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인플레이션이 갈수록 심각해진다. 표현은 더 과격해지고 공허한 피로와 혐오가 쌓여간다. 정치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이들의 일상이 된 SNS에 오르내리는 말들을 보면, 이성이 마비된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대화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 버리는 날선 표현도 문제지만, 상식을 벗어나는 개념의 사용은 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조금만 차분하게 생각해 보면 실질과 너무도 달라서 도무지 그렇게 표현할 수 없을 법한 말들이 난무하는 현실을 보며, 실소와 분노를 넘어 의아심이 생긴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잘 알려진 고사성어가 있다.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어느새 사실로 믿게 된다는 점을 비유로 경계한 말이다. 고사의 출처에 의하면, 이 간곡한 경계를 듣고 그 누구의 현혹에도 흔들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왕 역시 결국은 측근들의 지속적인 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만큼 사람은 자신에게 많이 노출되는 말의 영향에서 자유롭기가 매우 어렵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늘날 비상식적인 말들이 확신과 증오를 품고 급속도로 전파되는 데에는, 보고 있는 것만 보게 만드는 웹서비스 구조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별생각 없이 클릭한 포스트와 동영상이 빅데이터로 저장되어 그와 비슷한 콘텐츠들을 맞춤식으로 골라서 보여주는 자동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 안에서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고 대다수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는 결국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른바 ‘가짜뉴스’까지 불사하며 이 불신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대화, 합리적인 해명은 거부되고 그 이면에 다른 속내와 꼼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음모만 영향력을 키운다. 불신이 추측을 낳고 특정한 의도를 지닌 왜곡이 개입될 때 그 폐해는 걷잡을 수 없다. 결국 신뢰의 문제다. 우리는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나름의 맥락들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의 정보와 인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누가 그것을 골라서 나에게 보여주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볼 일이다. 오늘, 측근을 경계해야 할 이는 왕만이 아니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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