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기분 좋게 세수를 마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기초화장품 한두 가지만 겨우 쓴다고 생각했는데 화장대에는 의외로 이런저런 병이 꽤 있다. 마트에 장보러 갔다가 충동구매한 발뒤꿈치크림, 친구가 선물로 준 핸드크림, 손님이 쓰다가 두고 간 스킨까지 알록달록 다양한 병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문득 이 알록달록한 화장품병의 뒷면까지 보고 싶어졌다. 나는 얼마나 쓰레기를 만들고 있을까. 크림도 스킨도 모두 PP(폴리프로필렌)와 페트 재질이라니 재활용은 되겠구나 싶었는데 마트에서 충동적으로 샀던 튜브형 화장품이 발목을 잡는다. other라고 쓰여 있는 이상 재활용은 무리라고 보면 된다. 사실 잘 바르지도 않아서 언제쯤 내 화장대를 떠날지 알 수 없지만 내 손을 떠난대도 결국 지구 어딘가를 돌아다닐 플라스..
1997년 외환위기. 우리나라는 당시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아 4년 뒤 외환위기에서 벗어났지만, 환란이라 이름 붙일 만큼 고통이 뒤따랐다. 수많은 회사가 부도로 무너졌고 경영위기를 맞았다. 대량해고와 경기 악화로 사지에 내몰린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 국민은 나라의 부채를 갚기 위해 집 안에 두었던 돌 반지와 목걸이 등 227t의 금을 내놓았다. 이 일은 국민의 자발적인 희생정신을 대표하는 사례로 지금까지 해외 언론에서 소개되고 있다. 이후 국가적 대전환을 통해 세계적인 정보통신 강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생긴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2위의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고 있다. 2020년 코로나 위기. 우리나라는 다시 심각한 고통을 겪으며 코로나19 국난에 대처하고 ..
무언가를 쓰고 말하며 먹고살다 보니, 무언가를 입에 넣을 때 간혹 그 먹거리가 만들어져 나에게까지 온 거리를 생각하곤 한다. 플랫폼이니 머신러닝이니 무언가 새로운 비즈니스를 우리는 손쉽게 먹거리라고 부르곤 하지만, 진짜 입에 넣는 그 먹거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좀 더 원론적으로 생각하자면, 그 모든 것들의 기원은 넉넉한 식량 생산이다. 먹고 남을 만큼 만든 농부의 거래는 다른 이로 하여금 먹고사는 것 이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사회에 제공한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현대사회의 상거래와 유통, 교환의 장은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활동의 근본이 어디인지를 잊게 만든다. 2020년 출시된 게임 ‘천수의 사쿠나히메’는 겉보기엔 평범한 액션 게임이다. ‘슈퍼마리오’처럼 점프하며 던전 안의..
“노예제는 미합중국의 사법권이 관할하는 영역 내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12월18일 미국 의회를 통과한 수정헌법 제13조의 내용이다. 이로써 노예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흑인 노예를 사고파는 방식의 전통적인 거래는 사라졌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현대판 노예제도’는 이후에도 오랜 기간 계속되었다. 특히 여성과 아동, 이주노동자 등 취약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해온 국제사회는 결국 2000년 11월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합의에 이른다. ‘인신매매, 특히 여성 및 아동의 인신매매 예방·억제·처벌을 위한 의정서’라 불리는 ‘유엔 인신매매 방지 의정서’가 세계 159..
엊그제 설날 아침에 아내와 둘이서 차례를 지냈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한테 오지 말라고 했다. 산골 마을에는 나이 드신 어르신이 많아 혹시라도 코로나19에 걸려 안타까운 일이라도 생기면? 귀농한 지 16년이나 지났지만 산골 어르신들이 보기에는 아직도 ‘도시에서 들어온 놈’이다. 백 번 잘하다가 한 번 잘못해도 “들어온 놈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듣기 쉽다. 나쁜 감정으로 하시는 말씀은 절대 아니다.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이곳에서 뿌리내리며 살고 계신 어르신들 말씀이라 잘 새겨들어야 한다. 코로나19가 아무리 지독하다 해도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많이 움직이는 설에 혹시라도 마을 어르신 가운데 누가 코로나19라도 걸리면 ‘비상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한평생 후..
드라마 속 주인공 오미주(신세경)의 직업은 외화 번역가이다. 번역을 위해 같은 장면을 수없이 ‘되감기’해야 하는 직업이다. 언젠가 지인에게서 언어를 번역하는 일이란, 언어와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과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기에 그 의미가 왜곡되지 않도록 단어, 행간, 공기 등을 곱씹는 과정 즉 되감기가 중요하다. 그의 이름이 하필 ‘미주’인 것도 흥미롭다. 챕터나 문서의 마지막 페이지에 몰아서 주석을 다는 방식을 미주(尾註)라 한다. 미주는 언어나 상황의 의미를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도록 돕되, 본래의 것보다 앞서서 독해를 방해하지 않도록 문서의 뒤에 놓인다. 물론 미주는 각주보다 느리고 불편하다. 미주를 참고하기 위해서는 책의 맨 뒤로 갔다가 다시 앞으로 와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의 직..
지인이 시골에서 칼국수 가게를 열었다. 코로나19 시국에 먹는장사를 결심한 당사자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했을까. 걱정 반, 응원 반의 심정으로 방문했다. 주방은 아내가, 홀은 아들이, 카운터는 지인이 담당했다. 가족 종사자의 노동이 결합된 대한민국 자영업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점심때만 돕는 딸까지 포함하면 가족 회사나 다름없었다. 직원 채용을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이들은 가진 것을 다 털었지만 겨우 살얼음판 위에서 버티고 있다. 절규하는 자영업자들이 뉴스에 연일 등장하는데, 잘못되면 가족 전부가 어그러질 수 있는 무모한 결정을 왜 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코로나19로 절벽 앞까지 내밀렸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수년 전에 퇴직한 지인은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고 공연장 무대 및 조명을..
지난 1월22일은 ‘오이도역 장애인 리프트 추락 참사’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참사를 계기로 새로운 변혁의 주체들이 한국 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쇠사슬을 온몸에 감은 채 지하철 선로와 버스를 점거하며 이동권을 주장하는 중증장애인들 말이다. 그들에게 쇠사슬은 ‘장애인차별철폐투쟁가’의 가사처럼 “수십 년 세월을 골방에 갇혀 시설에 처박혀” 살아가도록 만드는 이 세계의 억압을 상징했다. 동시에 그 비장애중심주의적 세계를 자신의 몸과 연결해 한 뼘씩 이동시켜내는 무기이기도 했다. 20년 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기도 했고, 바뀌지 않기도 했다. 대다수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저상버스와 특별교통수단이 도입되었지만, 대도시 이외 지역의 이동권은 처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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