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신형철의 뉘앙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4.02 고통의 사회적 위계
  2. 2020.03.05 신천지로 떠난 청년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고통의 차별이 있다. 차별의 고통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니다. 차별이 고통을 낳는데, 그 고통조차도 차별적으로 다뤄진다는 뜻이다. 고통의 차별이 차별의 고통을 완성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우리가 모든 고통에 차별 없이 감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개별 고통의 양을 최대한 정확히 측정할 수 있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의 높낮이를 정확히 잡아내는 절대음감처럼, 고통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는 절대통감이라는 것을 갖추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상상을 조롱한다. 실제의 고통값에 비해 터무니없이 저평가되는 고통들이 있다. 몰랐던 것은 아닌데, 국민청원 게시글 하나가 새삼 이런 생각에 빠지게 했다. 

이미 보도된 대로 조주빈에게 살인을 청부한 공익근무요원이 죽이려고 한 대상은 고등학교 시절 담임교사의 딸이다. 피해자인 여성 교사가 직접 글을 올렸다. 제자에게 9년 동안 스토킹을 당했다. 교무실에 칼을 들고 나타났고, 아파트에 살해 협박 낙서를 남겼으며, 메일을 해킹하여 타인에게 피해자를 사칭했다. 피해자는 여러 해를 고통받다가 2018년 가해자를 고소했다. 그러나 가해자의 복역 기간은 고작 1년2개월이었다. 피해자는 그사이 주민번호와 이름을 바꾸고 직장과 거주지를 옮겼으나, 공익근무요원이 된 가해자는 피해자의 정보를 열람하고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딸을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실제로 조주빈과 모의했다. 그래서 피해자는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글을 올렸다고 했다. 

이 고통은 정당하게 다루어졌는가. 이런 경우 피해자는 최소 세 단계의 고통 계량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첫째, 경찰. 경찰은 강력범죄를 처리하느라 언제나 바쁘다. 스토킹이 충분히 ‘강력’하지 않은 범죄라고 생각하면 돌려보낼 수도 있다. 둘째, 검찰. 다행히 가해자를 기소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스토킹을 가볍게 여기는 현행법이 기다리고 있다. 법대로 구형된다고 해도 가해자에게는 복수심을 단련시키기에 좋은 기간 정도일 것이다. 셋째, 재판. 양형기준이라는 것이 있어 선고할 형량이 다시 조정되는데 여기서 가해자는 감경이라는 행운을 또 한 번 누릴 수 있다. 세 단계를 거치면서 피해자의 고통은 헐값이 된다. 그리고 이제 피해자는 가해자의 출소를 기다리며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세 단계의 과정을 이렇게 망가뜨리는 것은 고통의 사회적 위계다. 고통의 무게를 측정하는 권한은 대체로 다수 가해자의 성별과 같은 성별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 왔다. 입법과 양형의 과정에서 그들은, 경험의 한계 때문이든 성의의 부족 때문이든, 피해자의 고통을 정확히 측정하지 못한다. 9년 동안의 지옥과 1년2개월의 징역이 같은 값이라고 주장하는 법의 수학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처벌의 정도는 고통의 양에 비례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법학 내재적 기준에 따르는 것일 테다. 그러나 우리는 우기고 싶다. 성착취나 스토킹의 대상이 되는 것과 살인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토록 다른 일인가? 피해자가 자살한다면 그것은 가해자의 살인 아닌가? 법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에 우리는 치가 떨린다. 

양심적 방관자들의 몫도 있다. 그들은 악(惡)과 추(醜)의 범주를 혼동한다. 악은 나쁜 것이니 싸워야 하고 추는 더러운 것이니 피해야 한다. 예컨대 정파적 이익을 위해 재난마저 이용하는 특정 언론사들이 추로 파악될 경우 혐오의 대상이 된다. 보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 것이므로.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가? 마찬가지로 어떤 남성들이 성범죄 사건 앞에서 ‘나는 다르다’고 말할 때, 이는 그동안 자신이 악을 추로 분별해왔고, 더러운 놈들과의 ‘미학적 거리 두기’를 잘해왔다고 주장하는 일이 될 뿐이다. 선악 분별이 행해져야 할 곳에서 미추 분별이 행해지면, 피해자의 존재와 그들의 고통이 간과된다. 우리가 깨끗한 방관자가 되는 데 만족하는 동안 악은 점점 더 오만한 악이 될 것이다. 

아마도 2020년은 두 개의 전쟁을 치른 해로 기억될 것이다. 끔찍한 전쟁 서사에서 가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는 때는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생명의 값이 똑같이 다루어질 때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우리는 고통을 차별하지 않는다. 사람을 살리겠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 일을 하기 위해 의료진과 공무원들이 달려갈 때, 그때만큼은 고통이 평등하게 느껴져 눈물이 난다. 그런데 다른 하나의 전쟁은 고통의 오랜 차별 때문에 발발했다. 하나의 전쟁은 모두의 싸움이었지만 다른 전쟁은 절반만의 싸움이었다고 기록되어선 안 되리라. 두 전쟁은 결국 같은 전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신형철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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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신천지’의 자체 추산 30만 교인 중에는 특히 청년세대의 비율이 높다고 들었다. 다른 교단에 비해 유난한 숫자라고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학생들 중에도 그 근처까지 갔다가 빠져나온 사례들이 있다.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솔선할 일꾼이 필요하므로 애초부터 젊은층을 타깃으로 포교한다는 것이었다. 취미 활동 혹은 상담 프로그램으로 위장하여 마음의 빗장을 먼저 열고 교리는 그다음에 주입한다고도 했다. 이런 사전 정지(整地) 작업이 있다고는 해도 그다음 단계에 이윽고 접하게 될 그들의 교리는 정상적인 사유 능력의 소유자가 빠져들 법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늘어나는 확진자 숫자를 근심하는 한편, 나는 그 청년들에 대해서도 며칠을 생각했다.     

신앙 없는 문외한이지만 기독교는 이런 것이라고 알고 있다. 우선, 사상으로서의 기독교가 있다. 그것이 말 그대로 종교(宗敎), 즉 큰 가르침인 이유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의미는 삶의 표층이 아니라 깊이의 차원에 있으며 그 차원이 바로 신 그 자체다. “깊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신에 대해 아는 사람”(<흔들리는 터전>)이라는 파울 틸리히의 유명한 말을 나 같은 문외한도 알고 있다. 이 점에서 신학과 문학은 통하는 데가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는 우리가 소설을 통해 삶의 본질에 대한 가장 심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하며 가장 민주적인 희망”(<소설과 소설가>)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실천으로서의 기독교가 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기독교는 무조건적인 환대로서의 사랑을 지향한다. 가장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예수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했다(마가복음, 12:31). 더 나아가 원수마저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니, 거의 불가능한 사랑을 촉구하는 일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위대한 실천이 된다. 나 같은 필부조차도 숨 막히게 되뇌는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稅吏)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복음, 5:46~7) 

그러므로 사상이자 실천으로서의 기독교를 제 삶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포근한 정신적 복지 프로그램의 수혜자가 되는 일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세속적 정신은 가닿을 수 없는 깊은 곳에서 실존의 의미를 추궁한다는 것이고, 평범한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울 이타적인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다. (기복(祈福)과 반공(反共)을 부르짖는 기독교란 그 자체가 일종의 모순이다.) 자부심 넘치는 합리주의자들은 ‘최악의 기독교’를 과녁 삼아 조롱 섞인 논박을 퍼붓고 그런 자신에게 도취되고는 하지만, 나는 이와 같은 ‘최상의 기독교’ 앞에서 내가 신앙을 갖지 않는 데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갖는 데에 실패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한다. 주변의 겸손하고 헌신적인 신앙인들을 경외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신천지는 저 두 가지 기독교의 본질을 정확히 거꾸로 구현하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종교가 현재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제공할 때 나쁜 종교는 미래에 대한 쉬운 답을 제공한다. 신천지는 묵시록 문학 전통에 속하는 요한계시록의 환상적 이미지들을 일대일 번역이 가능한 암호로 취급하는 천진한 성서 해석학을 휘두르며 그렇게 한다. 덕분에 헬조선의 불안한 미래가 장밋빛 종말로 대체될 수 있었다. 또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144,000’이라는 숫자를, 구원이라는 혜택을 누릴 수 있는 VIP 회원권의 장수로 치환하여 교인들에게 가슴 벅찬 소속감을 부여한다. 사회라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기는커녕 내부에서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요한복음, 5:44) 특권의식을 향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가짜 미래의 유혹이 이 나라의 어떤 청년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는 우리 사회가 그 청년들에게 그들이 합리적으로 상상하고 추구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들을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다. 문화인류학자 백영경의 강연에서 나는 사회적 위기의 효과 중 하나는 그 위기를 통해 ‘언제나 이미’ 위기 중에 있던 사람들의 존재가 비로소 드러난다는 데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공동체의 어떤 이들은 이미 ‘미래 없음’이라는 재난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중의 일부는 신천지를 찾아 떠나버렸다.) 현재의 재난은 그 재난 속의 재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재난을 극복한 뒤에 할 일은 계속 재난을 극복해 나가는 일일 것이다. 오랫동안 진행중이었던, 우리의 미래에 관한 재난을.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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