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을 보고 외국인들이 많이 하던 말은 “빨리빨리!”였다고 한다. 동작도 빠르고, 성격도 급하고, 빨리 먹고 등등의 예시가 등장하곤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게 과연 “빨리빨리!”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몸이 굼뜨거나 말이 느릴 때 혹은 밥을 천천히 먹는다고 “빨리빨리!”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아서다.

한국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느릿느릿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답답한’ 것을 싫어한다. 답답하다는 것은 뭘까? 국어사전에 ‘답답하다’를 표제어로 입력하면 “애가 타고 갑갑하다”와 “융통성이 없이 고지식하다”고 풀이한다. 애타는 데 답을 안 줄 때를 떠올리면 “속이 터진다” 혹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떠오른다. 빨리 알려주는 걸 좋아한다. 융통성 없이 고지식한 사람을 떠올리면 뭔가 의견을 냈을 때, 절차를 지나치게 따지거나 안 되는 이유만 찾는 사람이 떠오른다. 결정 안 난 불안정한 상황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한국인은 드물다.

요컨대 사람들이 답답하다고 말할 때는 ‘피드백’이 늦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드백은 “어떤 일로 인해 일어난 결과가 다시 원인에 영향을 미치는 자동 제어 원리”라고 위키백과는 정의한다. 원래 과학기술 용어인데 회사 등에서 쓰면서 일상어가 됐다. 피드백이 늦다는 건 누군가의 요청에 기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거다. 몸을 빨리 움직이든, 늦게 움직이든, 타이핑이 빠르든 느리든, 중요한 것은 요청과 질의가 왔을 때 뜸들이지 않고 어느 정도 더 ‘진전된’ 답을 내놓는 게 된다.

일상에서도 피드백이 중요해지는 상황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은 애인이나 상사와의 채팅창에서 1이 사라진 후 반응이 오는지로 초조해한다. ‘읽씹’(읽고 대꾸 안 함)은 고통이고 무례함이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역 개찰구에서 교통카드가 안 찍힐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재빨리 자리를 비키곤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자리를 비켜주면서 “여기요!” 하고 소리를 지른다. 능숙한 역무원은 목소리가 들리면 대답부터 하고 개찰구로 다가와 문제를 해결한다. 시민들이 답답해하는 역무원은 느긋하게 걸어오는 역무원이 아니다. 버튼을 여러 번 누를 때까지 대답이 없는 승무원이다.

일을 잘한다는 것도 피드백이 빠르다는 의미다. 상사나 동료가 물었을 때 완벽하게 대답하는 것도 좋지만, 파악할 수 있는 최대한을 통해 ‘진전된’ 답을 내놓는 것이 핵심이다. ‘진전된’ 답을 내놓으려면 일머리를 꿰고 있어야 한다. 일머리는 일의 내용, 방법, 절차를 의미한다. 매 시간 혹은 몇 시간마다 선배 기자에게 상황 보고를 해야 하는 신입기자의 수습과정이나, 군대에서 ‘중간보고’의 중요성을 신병에게 가르치는 교육 모두 그러한 일머리를 숙지시키는 훈련이다. 빽빽하게 짜인 ‘표준교범(FM)’은 보고를 거치는 동안 성과를 위한 융통성 앞에서 늘 조정될 수 있다.

빠른 피드백을 바라는 가치 지향은 조직문화를 넘어 한국 사회의 특성 같아 보인다.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국민들의 분노와 좌절감은 ‘답답한 일처리’로 ‘골든타임’을 놓친 것에서 출발했다. 아무도 결정하지 않았고 진전된 상황 처리를 하지 못했다. 믿을 수 있는 정부의 ‘컨트롤타워’는 세워지지 않았고, 국가의 최종 의사결정권자는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의사결정을 방기했다. 상황의 내용, 조치의 방법과 절차 파악은 때가 지난 후 지지부진하게 이뤄졌다. ‘답답해 미치는 상황’이 실제 벌어진 것이다. 반대로 얼마 전 강원 고성 산불 대응은 시민들이 정부에 기대했던 피드백이 잘 이뤄진 상황이었다. 정부는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시민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상황상황마다 성가실 정도로 분명한 지침을 줬다. 집권하자마자 20만 이상의 시민이 민원을 제기했을 때 답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방’부터 개설한 정부의 돋보이는 대응이었다.

피드백이 빠른 사회, 피드백을 빨리 하길 바라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진상 소비자’나 ‘진상 민원인’의 갑질이 문제인 사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슈가 발생해 공론화되어 빠른 상황 파악, 빠른 조치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이 아닐 때도 많다. 심지어 과학기술자들의 기초연구마저 짧은 기간마다 ‘중간보고’를 해야 하다 보니 보고서만 쓰다 끝난다는 말도 나온다. 진득하니 앉아서 지루한 토론과 조심스러운 해법 제시가 필요한 순간, 미봉책만 세워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세상에 늘 시급하고 중요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빠른 피드백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피드백을 빠르게 해야만 하는 세상을 어떤 사람들은 어질어질하고 피곤하다고 한다. 덜컹덜컹 시행착오를 겪으며 피드백을 통해 고쳐갈 거면, 애초에 찬찬히 잘 만드는 게 낫지 않냐는 말도 한다. 그런데 이런 문화와 행동양식을 쉽게 맘먹는다고 바꿀 수 있긴 한 걸까? 외려 피드백 사회의 특징들에 맞게끔 일하는 방식, 경영방식, 정치가 기민하게 대응해 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한국 사회가 잘 온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산업계에서 한국이 제품 애프터서비스(A/S)의 최고 선진국이 되고, 신제품을 실험할 최고의 ‘테스트 베드’가 된 이유기도 하다. 이따금 관점을 달리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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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수소경제 선도를 천명했다. 수소경제는 수소를 에너지원으로 삼는 경제시스템이다. 수소는 흔하다. 우주의 75%를 차지하며, 지구상에 10번째로 많은 원소다. 백금 등을 촉매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백금보다 훨씬 싼 루테늄 촉매 개발도 초입이다. 수소는 방전이 있는 배터리 보관과 달리 액화 상태로 부피를 줄여 보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동력원으로 쓸 때 탄소 배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친환경적이다.

1월17일 정부는 수소경제 활성화 로드맵을 발표했다. 2040년까지 수소(연료)자동차 620만대를 생산하고 그중 330만대를 수출해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겠단다. 내수 비중이 절반에 가깝다는 이야기는 국내 시장에서 구동률을 높여서 테스트베드로 활용한 후 시행착오를 개선해 세계시장에서 선발주자(first mover)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정책이 돕겠다는 뜻을 함축한다. 지난해 14개였던 수소충전소도 2022년까지 310개, 2040년까지 1200개로 확대한다고 한다. 이달엔 규제 샌드박스 승인 첫 사례로 도심지역 수소충전소 설치를 허용했고, 당장 국회에 들어설 예정이다.

쉴 새 없이 수소 이야기를 들었다. 과학기술자 모임에서는 4차 산업혁명과 정부 정책을 토론하다 화제가 전기차냐 수소차냐 하는 논쟁으로 옮겨갔다. 전기차는 충전된 전기로 모터를 구동하고, 수소차는 수소연료전지로 전기를 만들어 모터를 구동하여 운행하는 차다. 운전하며 듣는 경제 팟캐스트에서는 전기차 전문가와 수소차 전문가가 격렬하게 토론한다. 주식 하는 사람들은 ‘수소 테마주’를 찾는다. 경제성, 환경, 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사안이라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도 자연스럽다. 기술 논쟁은 엔지니어들에게 맡기더라도, 짚고 갈 사회적 논점이 몇 가지는 보였다.

먼저 예산의 크기로 볼 때 ‘거대한 낭비’가 아니냐는 것이다. ‘4대강 살리기’를 언급하며 수소경제가 대형 ‘스캔들’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4대강 살리기 총 예산이 31조원이었다. 수소경제 투자는 기존 에너지 정책이나 제조업 정책과 ‘병행해서’ 진행할 수 있을 만큼 예산 규모가 작다. 2019년 정부 1년 예산은 약 470조원이다. 수소충전소 개당 설치비는 현재 30억원이다. 전국에 1200개를 한번에 지어도 3조6000억원으로 정부 예산 중 0.7%에 그친다. 계획대로 22년에 걸쳐 나눠 진행할 경우 매년 0.03% 수준의 예산만 쓰게 되는 셈이다. 물론 수소 파이프라인 설치는 비용이 더 들겠지만, 기존 액화천연가스(LNG) 파이프망을 활용하든 신규 매립을 하든 스캔들 수준의 비용이 예측되진 않는다. 외려 ‘활성화 로드맵’ 이름에 비해선 적은 예산 투입이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정부 예산 470조원 경제에서 ‘스케일’ 감각은 바뀌어야 한다. 수소경제에 ‘올인’하는 것 같은 현대자동차도 수소차와 전기차 모두의 양산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둘째로 대기업이 원하는 인프라를 왜 정부가 설치해주냐는 논란이 있다. ‘기업의 일은 기업이, 정부의 일은 정부가’라며 수소경제를 기업의 일로만 보는 시각이다. 테슬라는 전기차 충전소를 자체 경비로 설치했다. 4년간 자체 충전소 ‘슈퍼 차저’의 충전비도 무료로 했다. 마찬가지로 현대차나 부생수소를 팔기 바라는 거대 정유사들이 인프라 투자에 돈을 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한다. 실리콘밸리처럼 벤처캐피털이 투자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듣는다. 그런데 대한민국 경제사는 원래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국가가 주도적으로 투자하고 개입하면서 움직였다. 물류 네트워크를 형성하려 정부 주도로 고속도로를 개통했다. 중화학공업화를 위해 1973년부터 철강, 조선, 기계, 전자, 화학, 비철금속공업 6개 분야를 콕 찍어 ‘관치금융’을 이용해 육성해 왔다. 2000년대 정보기술(IT) 산업 역시 김대중 정부의 산업정책을 통해 힘을 받았다. 위험도가 높은 과제를 국가가 힘을 주어 공적으로 지원하는 방식. 명암이 있지만, 한국이 잘해온 방식임에는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왜 수소였을까”를 고용 측면에서 생각해보게 된다. 생산직을 쉽게 늘릴 수 있으면 많은 고용을 만들 수 있다. 그것도 안되면 기자재 업체 등 후방산업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수소차는 복잡도가 높아 고용을 더 많이 만들어 낸다. 전기차의 경우 자동화로 인해 직접 고용하는 생산직이 거의 없다. 배터리 업계를 제외하면 후방산업 연계도 별로 없어 추가 고용도 미미하다. 수소차 생태계는 수소 생산·저장·운송·활용 차원에서 후방산업을 육성할 수 있다. 2040년까지 42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니 정부가 ‘꽂힐 수’밖에 없다. 대기업이라 특혜를 준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앞으로의 에너지 전환과 이로 인한 산업과 고용, 사회와 문화의 변화가 어찌 될지 아직 예측하기에는 섣부르다. 삶의 방식 전환에 대한 시민들의 준비도 필요할 것이다. 정부가 계획대로 목표 달성을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규모의 경제와 기술혁신을 통한 비용 절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소경제 선도 추진은 스캔들(이른바 ‘사화’)이라 하기에 너무 소소한 일이다. 그저 추이에 맞춰 사회적 논의를 차근차근 하면 될 일이다.

<양승훈 |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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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집중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단 한번도 뒤집히지 않았다. 통계청 2017년 지역소득(잠정) 추계 자료와 행정안전부가 제공하는 2017년과 2018년 시·도 인구통계를 봤다. 인구를 보자. 서울의 인구 중 약 10만명(0.9%)이 한 해에 줄어들었으나 경기도의 인구는 20만명(1.53%)이 늘었다. 인천도 0.2% 정도 늘었다. 수도권 인구비중은 대한민국 인구의 50%를 채우고 있었다. 사실 더 크다고 봐야 한다. KTX와 국철로 1시간 거리로 연결된 충청권을 포함하면 인구 중 60%가 된다. 충남은 1만명(0.5%)의 인구가 늘었다. 충북도 5000명(0.3%)의 인구가 늘었다. 행정기관이 대거 이전한 세종시에는 3만명(12%)의 인구가 늘었다. 그사이 호남(광주·전북·전남)은 3만5000명의 인구(0.7%)가 줄었다. 대구·경북에서는 2만8000명의 인구(0.5%)가 줄었다. 동남권(부산·울산·경남)에서도 4만5000명의 인구(0.5%)가 줄었다. 강원도에서도 7000명의 인구(0.5%)가 줄었다. 젊은 연령대가 소도시나 군·면 단위에서 줄어들고 노령화가 지속돼 인구가 줄어든다는 ‘인구소멸’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시를 제외한 7대 광역시·특별시 중 인천을 제외한 모든 대도시의 인구가 줄고, 감소를 주도한 곳이 호남과 영남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꼭 소도시와 군·면 단위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권역 내에서는 대도시로 청년들이 일자리와 대학 진학 등 때문에 떠나고, 권역 사이에서는 수도권과 충청권으로 나머지 지역 사람들이 이주를 한다.

경제비중을 봐도 경향은 같다. 한때 동남권의 경제력이 30% 이상을 차지했지만 2017년 기준 15% 내외로 줄었다. 구미의 전자산업을 포함해야 간신히 영남이 25%를 넘기는 수준이다. 호남은 9% 수준으로 그나마 남해안 벨트의 철강과 석유화학을 포함해서 가능한 일이다. 2017년 전체 GDP 상승률 3.2%를 초과한 권역은 경기(5.9%), 인천(4.0%), 충북(3.4%), 충남(3.3%), 제주(3.3%)인데 이 중 넷이 넓은 의미에서 수도권에 포함된다. 경기도 화성·기흥·천안·이천과 충청북도 청주의 반도체산업이나 충남의 석유화학산업 등을 떠올려 보면 수출을 주도하는 산업이 수도권에 몰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위기를 겪은 자동차·조선·기계산업이 위치한 곳은 동남권과 호남이다.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힘이 수도권이 강하기 때문에 인구를 더 흡수할 수밖에 없다. 수도권 집중을 반전시킬 핵심 요소가 아직 등장하지 않는 셈이다. 

혁신도시 조성. 분권화와 균형발전을 위해 최근까지 해온 정부의 조치다. 153개 대상 수도권 소재 공공기관을 뽑고 150개의 기관을 지난해까지 이전 완료했다. 광역자치단체마다 십수개씩 분산시킨 꼴이다. 혁신도시는 균형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있을까? 인구 유입은 공공기관 직원 이주 외에는 같은 권역의 중소도시와 농촌 인구를 흡수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인구 이동을 보더라도 성장이 아니라 흡수하는 거점에 그친다고 볼 수 있다. 수도권의 범위만 세종까지 넓어졌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아직 혁신도시가 정착되지 않았고, 지금의 수도권 집중화는 경기침체의 여파일 뿐 혁신도시의 잠재성은 유효하다고도 볼 수 있다.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혁신도시 자체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GTX 착공을 기다리며 어떻게든 수도권에 버티겠다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순회국회’다. 수도권은 대기업 본사들이 위치하고 미디어, 서비스 산업의 중심이면서 정치권력의 중심이기도 하다. 행정권력은 이전했지만, 민의를 대표하기 위해 선출된 입법권력은 70년간 여의도에서만 모든 것을 처리해 왔다. 권력의 지리적 분권화가 안된 셈이다. 주민 관점에서 보면 의원들을 선거 때 외엔 보지 못하고, 보좌진·입법관련 기관과 유관업계는 지역 사정을 통계자료와 지표, 인맥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하기 일쑤다. 의원들은 지역구 SOC 예산을 따기 위해 경합을 벌이지만, 실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파악하기 어렵다. 만약 국회가 1년에 한 번씩 호남·영남·충청·강원·제주 권역의 혁신도시나 거점도시를 순회하면서 열리면 어떨까. 박원순 서울시장은 수도권 과밀화를 억제하기 위해 국회의 이전도 고려해 봐야 한다고 했는데, 국회를 순회해 운영할 경우 한 도시로 옮길 때의 논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순회국회는 국회의원들이 현장 관점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보좌진도 지역에 대한 감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것들을 준거로 균형발전 관련 입법을 할 수도 있다. 공기업·공사도 좋지만 젊은 지역인재들이 입법부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그들과 지역사회의 정치적 지평을 넓히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매년 국회를 여는 도시들이 나라의 진짜 중심이 된다. 행정부가 지리적 중심인 세종으로 옮겨간 마당에 서울의 행정부와의 근접 소통이 어렵다고만 막기도 궁색하다. 국정감사를 행정부가 위치한 세종에서 개최하는 것도 방법이다. 막대한 비용을 말하려면 분권화를 위해 쓰는 예산을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분권화와 균형성장을 위한 순회국회. 국회가 나서서 한번 고민해 보면 어떨까 싶다.

<양승훈 |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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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한 <백종원의 푸드트럭> 그리고 지난주에 다시 시작한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열심히 보는 중이다. 요식업 사업가이자 요리 전문가인 백종원이 창업하려는 청년이나, 식당을 하는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방송이다. <푸드트럭>이 소자본으로 창업하려는 청년층을 타깃으로 삼았다면, <골목식당>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쇠락한 서울 이화여대 앞 골목 가게들을 찾는다.

두 가지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먼저 <푸드트럭>에서 ‘안 좋은 의미’에서 화제가 된 청년 출연자의 표정이다. 푸드트럭에서 팔려고 내놓은 메뉴와 그 식재료에 대한 질문을 받고 중언부언하고 변명하다 굳어버린 그의 모습은, 결국 참지 못해 화를 내버리고 마는 백종원의 표정과 함께 공유됐다. 방송 이후 청년의 태도를 향한 비난이 많았다.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비난받기 딱 좋은 모습으로 TV에 출연한 셈이다. 말귀를 잘 알아듣고 잘 대응하고, 필요하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유재석 같은 태도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악마의 편집’은 그런 모습을 극적으로 집어냈다.

출처: 백종원의 골목식당 홈페이지

두 번째는 지난주 <골목식당>에 등장한 백반집 주인 여성의 표정이다. 그녀는 식당의 메뉴가 백종원의 ‘레시피’를 다 따라한 거라고 너스레를 떨며, 자신이 내놓은 음식을 “주변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라며 손님의 평가에 기대 자랑한다. 백종원이 맛과 위생을 지적하자, 그녀는 자신이 식당을 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이거 하고 싶어서 시작한 거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하게 된 거지.” 옆에 같이 앉아 있던 남편은 눈물을 훔친다. 사회자와 제작진은 부부를 달래며 가게를 살리려고 한 이야기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위로한다. 방송 이후 이들의 이야기는 ‘찬란했던 90년대 이대 상권’과 함께 블로그 등에 노스탤지어를 건드리는 이야기로 묘사되었다.

<푸드트럭>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패감이 누적되고 위축된 청년들의 표정이 연상됐다. 경직되어 있고 제대로 된 말로 대응하지 못하고, 언제든 터질 것 같은 표정. 자신이 못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말하기보다는, 지금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억지로 둘러대서라도 방어하기 일쑤였다. 칭찬을 듣기보다 혼나고 지적받는 데 익숙해서 그렇다. 달리 말해,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중·고등학교에서 특별히 입시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거나 적성과 특기를 고려해서 진로를 잡지 못한 채, 지방대를 다니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거나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겠다고 시도하다 실패만 누적된 많은 청년들이 있다. 10대 어느 순간에 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고 잠을 청했던 숱한 ‘평범한 학생’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힘듦’을 잘 들어주며 ‘희망’을 설계해줄 ‘어른’을 만나기 어렵다. 대개의 평범한 한국 부모는 그저 “뭐든 하고 싶은 거를 해” 정도의 독려만 해줄 뿐 ‘전략적’으로 어떤 ‘선택지’를 제시하진 않는다.

공부 대신 10대 때부터 다양한 알바를 하며 온갖 ‘사회생활’을 경험해본 학생들은 공부만 열심히 한 교사의 말을 존중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다 총력 입시체제에서 뒤처지고, 뭐든 하고 싶은 거 하라는 방침 속에서 그들은 붕 뜨고 20대가 되는 셈이다. 실업계나 전문대를 나와 사무보조, 정규직 생산직으로 대표되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자리로 들어가기 어려워진 시대와 궤를 함께하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비숙련노동에 대해 ‘조무사’라고 조롱하거나, 비정규직들에게 정규직 전환을 함부로 넘보지 말라는 대못을 박는 멸시까지 넘쳐난다.

그런데 <골목식당>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아직까지 버틴 이유”가 떠올랐다. 백반집을 하는 여성은 경제성장기를 겪은 ‘건강한’ 세대, 평범한 사람들의 익숙한 천연덕스러움을 갖고 있었다. ‘국제시장’의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온 처신일 것이다.

50~60대 내 부모님 세대에게 늘 듣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들은 대개 농촌사회에서 태어났고 다양한 공동체의 ‘관계’ 속에 존재했다. 도시에 살아도 쌀과 간단한 채소라도 부쳐주는 가족이 있었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보통은 여성이) 희생하여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고향 사람’이라는 다소 옅거나 짙은 관계도 있었다. 번듯한 직장을 갖지 않고 소소한 장사를 하더라도 상부상조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친척이든 동네사람들이든 모아서 계를 활용했고, 은행 융자가 안되는 등 ‘사정’이 어려우면 이야기를 해서 곗돈을 당겨 받을 수도 있었다. 이따금 잘못을 했을 때도 적어도 울타리 안에선 ‘사정’을 이야기하고 ‘선처’를 빌면 용서를 받을 수도 있었다. 배신도 당하지만 은혜도 입고 답례도 하면서 관계들을 유지하거나 키워갔다. ‘사정’을 봐줄 수 있는 ‘관계’ 바깥에서 살 엄두를 내기는 쉽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가 왔어도 사람의 감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어려울 때마다 이런저런 ‘비빌 언덕’에 서로 의존하며 그 나름대로 ‘버텨온’ 것이다. 근대식 교육을 받아도 사회성 측면에서는 농경사회에서 익힌 관계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안정적인 삶의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좀 더 따져 물어야 하는 것은 ‘별일없이 사는 것’이 어려워진 지금 한국 사회에 대한 평가라고 본다. 국가는 물론 좀 더 넓은 그물을 쳐서 폭넓고 효과적인 직업교육을 유도하고, 노동시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정책을 써야 할 게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모두가 탁월해져야 하는 세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탁월함을 뽐내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세상”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평범한 청년’들도 ‘스스로의 서열’을 매기며 위축되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좋은 ‘어른’과 ‘친구’의 중요성을 곱씹게 된다. TV 프로그램을 찾아 조언까지 구해야 하나. 스스럼없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가까이에 있는 어른. 그리고 스스럼없이 의논하고 선물을 주고받고 답례할 수 있는 친구 사이. 대가족과 마을 대신 핵가족과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사회성과 풍부한 표정을 지켜낼 수 있는 마지노선이 아닐까 싶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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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 있을 때 면담하러 오는 학생들이 있다. 학생들은 진로를 묻기보다, 책벌레 선생에게 책 이야기를 묻고, 연애 상담을 하고,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 가곤 한다. 찾아오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왜 남학생들은 배낭여행을 잘 가지 않을까?” 몇몇은 외국에 간단다. 방학이 되면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번 돈과 용돈으로 방학이 끝날 무렵 삼삼오오 일본이나 중국을 갈 거라고 했다. 극소수지만 부모와 함께라면 여행거리는 좀 더 길어진다. 싱가포르나 호주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방학 하기 전까지 줄창 안 가본 나라에 꼭 가보라고 당부했지만, 개강 후 물으면 정작 해외에 나간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여학생들이다. 얼마 전 캐나다에서 잠시 귀국한 선배는 비행기에 탄 한국인은 죄다 노인들이라고 했다.

1990년대 중반 국제화 물결을 타고 여행자유화가 시행되면서 배낭여행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청춘의 중요한 의식 중 하나로 여겨졌다. 특히 유럽 배낭여행이 그랬다. 10여년 전 대학 동기 중 적지 않은 숫자가 1~2학년 때 유럽으로 향하곤 했다. 그들은 로마와 파리, 런던으로 대표되는 로맨틱한 유럽 도시를 거닐며,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을 관람하고, 샹젤리제 거리를 사진으로 찍어 담아오겠노라고 하면서 항공기표를 자랑하곤 했다. 여행을 마친 친구들과 술자리를 할 때면 ‘로맨틱 유럽’ 이야기는 잠시, 대개 ‘고생담’만 한없이 풀어놓곤 했다. 함께한 친구와 싸워서 유럽 어느 도시에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유스호스텔과 게스트하우스에서 ‘못볼 꼴’을 보고, 동양인이라서 인종차별을 받은 것 같다는 이야기 등등. 이야기는 “그래도 정말 좋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긴 했다. 스마트폰 없이 종이지도를 너덜너덜해질 지경까지 붙들고, 길을 물으려니 영어가 잘 안돼 손짓 발짓을 하면서 고생을 했어도 말이다.

젊은이들의 배낭여행 현황을 보려고 해외여행 통계를 뽑아봤다. 2006년 출국관광통계와 2016년 국민여행실태조사를 살펴봤다. 일단 40대 이상 해외여행객이 상대적으로 늘었다. 2006년에는 40대 이상의 비율이 48%가량이었는데, 2016년에는 57%로 늘었다. 특히 50~60대 관광객 비율이 증가했다. 고령화 사회와 청년세대의 어려움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그런데 데이터를 볼 때 정말 도드라진 특징은 성별 여행 패턴이다. 20~30대가 가장 많이 가는 유럽과 아시아를 살펴봤다. 일단 20대 남성은 점점 해외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유럽 여행의 경우 2006년에는 여행자 중 60%가 여성, 40%가 남성이었는데 2016년에는 80% 대 20%로 격차가 늘어났다. 10년 전 30대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더 많이 유럽으로 나갔지만, 이제는 여성들이 유럽을 더 많이 간다. 아시아 관광에서는 65% 대 35%에서 60% 대 40%로 성별 격차가 줄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여행 목적지가 성별에 따라 달랐다. 일본은 성별 상관 없이 많이 찾지만, 남성들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를 찾을 때, 여성들은 홍콩이나 대만, 인도를 찾았다. 통계는 10년 사이 아시아를 벗어나지 않는 젊은 남성의 여행 성향과, 글로벌 세계를 누비는 젊은 여성의 여행 성향이 양극화되는 추세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유럽 여행을 가는 젊은이들의 성별이 확연히 갈린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유부터 따져봐야 한다.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 기대라는 ‘압력’이 달라서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들이 입대 전이라 먼 곳 가기를 꺼리고, 제대하면 취업 준비 때문에, 취업하고 나면 결혼 준비 때문에 해외여행을 꺼린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꼭 그런지는 의문이다. 10년 전에 남성에게 주어졌던 경제적 압력이 지금에 비해 더 작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취업경쟁에서 특별히 여성이 훨씬 많이 승리했다는 증거와, 남성의 임금이 여성에 비해 특별히 떨어졌다는 징후는 드러나지 않았다.

외려 가치관과 문화의 차이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취업, 연애, 결혼 등에 대한 ‘압력’을 느낄 때 한국의 젊은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르게 대응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젊은 여성들이 ‘압력’에서 비켜나, 좀 더 민주적이고 수평적이며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알려진 유럽을 다니면서 ‘대안’과 ‘해방감’을 찾는 동안, 남성들은 그 ‘압력’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해석을 그쳐서는 안된다. 젊은 여성들을 ‘무책임’하게 먼 나라 가서 소비나 하는 비난의 대상으로 만드는 여성혐오로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이런 여행에 대한 성별 가치관 차이가 한국의 가부장적인 문화와 남성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산업화 시기 경제가 만들어낸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 검색을 하다가 유럽 여행 가서 ‘무시’를 당했다는 한국 남성들의 ‘경험담’을 많이 발견했다. 큰맘 먹고 갔는데 ‘대접’받질 못하고 백인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다는 식이다. 글의 아래에는 며칠간 동남아 여행을 가는 게 낫다는 댓글이 달린다. 자신이 디뎌본 ‘장소’보다는 자신의 ‘지위’에 대해 더 예민한 것이 한국 남성들이라는 문화연구자들의 연구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젊은 남성들을 백인들이 많은 나라로 더 많이 배낭여행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 안에서 ‘소수자’가 되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세계 속에서 인종과 성별에 따라 어떤 시선들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산 경험이 무엇일까.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인식틀과 세계관이 다양한 경험에서 온다는 것은 상식이다. 스스럼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문화와 경관과 마주해 ‘나’와 ‘남’의 문제를 살피는 젊은 여성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감각과, 아시아를 잘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를 고려하는 젊은 남성의 감각은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젊은 남성들의 독서와 문화 향유가 십수년 새 큰 폭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말이다. 어떤 남성과 여성을 한국 사회가 길러내고 요구하고 있는지 ‘여행 감수성’이라는 기준으로 반문해봐야 하지 않나. 물론 그런 차이로 누군가를 규탄한다고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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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다닐 때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라는 오래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속 배경은 뉴욕시, 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아 재판에 회부된 소년에 대한 배심원 합의가 진행 중이다. 12명의 배심원들이 만장일치 합의를 끌어내서 그 결과를 판사에게 알려주면 된다. 배심원들은 유죄냐 아니냐만 결정할 수 있다.

판사는 만약 유죄 합의를 이끌어낼 경우 소년에 대해 사형을 언도하겠다고 귀띔한다. 배심원들은 최종 합의를 이끌어낼 때까지 밀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첫 배심원 투표 결과는 무죄 1 대 유죄 11. 모든 배심원이 유죄를 생각하는 가운데 무죄라고 손을 든 배심원은 끊임없이 사건의 면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것을 주장한다. 어떤 배심원은 야구 보러 빨리 경기장에 가고 싶어 평결을 빨리 끝내자고 하고, 또 누군가는 생떼를 쓰고 악만 지른다. 주인공은 “꼭 그렇다고 확신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도 생각해 봅시다” 하고 설득을 멈추지 않는다.

배심원들은 처음의 대세를 뒤집고 무죄 12명으로 합의를 해낸다. 개개인들이 합리적이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 의견을 내지만, 누군가는 대세가 기울기 때문에 편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몇 시간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서로의 의견을 듣고, 의견을 내고 ‘합리적 의심’을 통해 합의를 해낸다. 영화는 우리의 통념들에 대해서 반문한다. “딱 보면 뻔하다”는 말 대신 미묘하게 어그러진 사실의 맥락과 조각들을 끊임없이 맞추려는 시도가 억울한 사형집행을 막아낸 것이다.

최근 특정인에 대한 ‘폭로’와 폭로에 뒤따르는 SNS상의 ‘공론화’, 공론화에 이은 ‘인신공격’이 유행병이 됐다. 지난달 건대입구역 정류장에 정차한 버스에서 엄마와 같이 탑승했던 7살 어린이가 엄마 없이 먼저 내리고 버스가 떠나가버렸다. 엄마는 300m 떨어진 곳에서 내려서 아이를 찾을 수 있었다. 기사는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승객을 내릴 수 없었다는 원칙을 지켰다. 사건 직후 누리꾼 한 명이 본인이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사건을 폭로한다. ‘공감한’ 누리꾼들은 사건을 SNS를 통해 ‘공론화’했고, 사실관계 확인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여론의 ‘단죄’가 버스기사에게 쏟아졌다. “중년 남성 기사가 여성의 목소리를 무시했다”는 호소가 진실을 덮었다. 적지 않은 미디어가 SNS와 폭로자들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전달하는 이른바 ‘팝콘 튀기기’를 했다.

사실관계가 파악된 직후 SNS와 언론 등에서 태세전환이 벌어졌다. 버스기사를 비난하던 분위기는 뒤바뀌어 아이 엄마를 ‘맘충’이라며 비난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처음 폭로를 한 누리꾼은 사과를 약속했지만 곧 조용히 사라졌다. 버스기사와 아이 엄마의 가슴에만 멍이 들었다. 모두의 확신은 근거가 부족했지만 단정은 무차별적 공격으로 이어졌다. 영화 <김광석> 개봉 후에 벌어지는 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영화가 가해자로 의심하는 서해순이 법의학자들의 판단처럼 무죄로 밝혀진다면 어떻게 책임을 묻고 사건을 정리할까?

모든 사람들은 일정한 편견을 갖고 있고, 온전한 정보도 갖고 있기 어렵다. 영화 속 배심원들이 효율적인 다수결 투표가 아닌 지루한 만장일치 합의를 하는 것은, 서로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꺼내 토론하면서 불완전한 개인의 한계를 넘자는 취지에서 출발한다. 답답한 것은 어떤 이슈가 벌어질 때마다 보이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푸는 실력이다. 시민들이 납득하는 공론을 만드는 기제가 미흡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함께 모여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합의해 해결해본 적이 별로 없다. 초등학교부터 ‘모둠 수업’은 합의하기보다 목소리 큰 사람들이 말한 대로 흘러간다.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무임승차’만을 비난할 뿐이다. 교육학자들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원하는 모습을 “개성 있지만 무난한” 사람이라고 정리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싸우면 시시비비를 가려주기보다는 “형(언니)이니까 양보하라”며 혹은 “동생은 형(언니) 말 듣는 거야” 하고 혼을 낸다. 직장의 회의에서도 결론이 정해지면 맞춰 따르는 데에 익숙하다. ‘송곳’ 같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지만, “나대지 말라”는 경고를 듣거나, 경고를 무시하면 왕따를 당한다. 조정과 협상의 경험이 부족하고 절차는 겉돈다.

한국에서 억울한 사람들의 선택지는 개인적 보복이 아닌 이상 두 가지다. 단체행동으로 몰아치거나, “법대로” 해결하는 것이다. 노동조합과 소비자운동 등은 기업이나 정부를 상대로 단체협상을 통해 엇갈리는 의견을 검토하며 문제를 푸는 과정을 가졌다.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의 흐름은 검증과 합의의 단계, 협상의 언어를 생략한다. 혹여 폭로 대상인 개인이 코너에 몰려 실언이라도 하면 실언은 ‘팩트’가 되어 온라인 공격의 빌미가 된다. 상황의 맥락, 당사자의 처지 등 현실의 미묘함은 해석 대상에서 제외된다. 개인들은 온라인 공론장에서의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명예훼손과 무고죄 등의 법적 구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익명성에 기댄 공격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교실에서 왕따 주동자를 찾아 처벌하는 것처럼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공론화’라는 단어는 공론을 모아내는 것보다 온라인 부족들이 특정 목표물을 폭격하자는 신호이기 일쑤다. 무리의 확증편향이 극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론화의 대의가 옳다 한들 이는 문제해결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판단을 정지한 채, 영화 속 배심원들처럼 적절한 절차를 통해 충분히 의견을 교류하고 합의해야 ‘공론’이 안착한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토론회처럼 이해당사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의견을 교류해야 합의를 만들어낼지,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 내용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야 한다. 이런 판국에 지식인까지 나서 온라인의 ‘단죄’라는 광란의 ‘도가니’에 단편적인 판단으로 기름을 끼얹으며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시민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 공론을 모으는 합의의 경험이 누적된 게 민주주의 사회의 실력이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꼭 그렇다고 확신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도 생각해 봅시다”라는 말을 하는 의인들의 목소리를 여기저기서 듣고 싶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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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인간을 닮아가고 있다. 고작 가진 언어가 켜짐(1)과 꺼짐(0)만 있었던 컴퓨터가 인공지능(AI)을 탑재하고 사람을 닮아간다. 초창기 컴퓨터의 유일한 장기는 사칙연산밖에 없었다. 빠른 연산 실력으로 숫자를 통해 하는 모든 일들을 해냈다. 계산기는 진화해 컴퓨터에 깔려 있는 엑셀이 됐고 직장인들은 엑셀이 없으면 복잡한 계산 자체를 못하게 됐다. 통계학이 발전하고, 컴퓨터가 다루는 정보처리 용량이 늘고 속도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모든 일을 예측하는 중이다. 비가 올 확률을 예측하고, 공장에서는 불량이 날 확률을 예측한다.

그럼에도 컴퓨터가 인간을 닮아간다는 게 체감된 순간은 바로 음성인식과 안면인식부터였다. 터치 패드로 스마트폰을 켤 때만 해도 마냥 편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스마트 스피커가 목소리를 알아듣고 노래를 틀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이 올려놓은 사진을 통해 주변 친구들 모두의 얼굴을 읽어 이름을 맞혀 보겠다고 제안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다를 넘어 섬뜩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컴퓨터가 인간을 닮아가는 건 수많은 잡동사니 데이터를 수집해 컴퓨터의 일처리 방법인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하고, 내부적으로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가장 적합한 것’을 통계적으로 찾아내는 과정(기계학습)이다. 끊임없는 시뮬레이션과 시행착오를 통해 근사치에 가까운 99.99999999%에 도전하게 된다. 많은 엔지니어들은 이를 위해 컴퓨터의 정보처리 시스템을 인간의 신경망과 뇌처럼 만들려고 알파고로 유명해진 ‘딥러닝’ 기술이 차용하는 인공신경망 등 다양한 방법을 찾아 정착시킨다. 컴퓨터가 사람을 흉내 내는 속도는 무어의 법칙을 따라 점점 빨라질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공지능과 데이터과학을 발전시키는 정보기술(IT) 엔지니어들의 일하는 방식이다. ‘시행착오를 통한 배움’은 오픈소스라는 공개적인 작업 방법으로 수행할 때 더욱 더 빠르고 강력해지는 경향이 있다. 오픈소스는 소프트웨어의 기본 코드 소스를 공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그래머들이 자신이 노력해 제작한 프로그래밍 코드를 공개하는 것은, 초창기에는 유료 프로그램들이 갖고 있는 지식재산권을 반대했기 때문이지만 점차 온라인에 있는 ‘엔지니어 고수’들의 코멘트를 통해 자신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이나 데이터 분석 방식을 검증하고 더 발전시키기 위한 활동이 됐다. 개인이 구상을 해서 아무리 탁월한 프로그램을 만들더라도 다른 사람 눈에는 부족한 점이나 오류가 발견될 수 있다는 사소한 진리 때문이다.

오픈소스에 기반을 둔 데이터과학 커뮤니티인 캐글(Kaggle)에서는 초심자부터 고수까지 다양한 데이터 엔지니어들과 사회과학도들이 실력을 뽐내면서 더 효율이 좋은 분석 기법을 공짜로 풀어놓는다. 지구상의 모든 인터넷을 장악한 구글은 이 커뮤니티를 높은 가격에 인수했다. 집단지성을 통해 좀 더 실현 가능한 알고리즘을 만드는 캐글의 가능성을 높이 산 것이다.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이 작업한 코드를 저장하고 구직을 할 때 여러 명이 동시에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플랫폼인 깃허브(Github)를 활용한다. 자신의 활동이 얼마나 많은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기여했는지를 알리기 위해서다. 인공지능이 성장하면서 엔지니어들의 일하는 방식 역시 성장한 셈이다. 그런데 컴퓨터가 기계학습을 통해 사람을 닮아가고, 우수한 엔지니어들이 공동작업과 집단지성을 통해 학습과 일을 결합하는 혁신의 과정을 보면서 맘이 편치 않다.

당장 지방대의 인문대생들에게 사회학과 데이터 분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고민이 많아진다. 데이터과학의 쓸모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캐글에서 활약하던 사회학을 배운 데이터 분석가들은 샌프란시스코시 범죄가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통해 실제 정책에 도움을 줬다. 선거를 예측하기도 하고, 대학들은 캐글에 지속적으로 공공정책 데이터를 제공하기도 한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수리적 판단력과 통계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학습자들에게는 분명 이러한 오픈소스 기반의 글로벌 학습망과 캐글 같은 오픈소스 커뮤니티가 구직과 이직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미국의 MOOC(대규모 공개 온라인 강좌)들은 능동적으로 학생의 참여를 유도하는 컴퓨터공학, 경제학, 경영학, 수학 수업을 개설했다. 공짜로 청강할 수 있되, 수업료를 내고 과정을 이수하면 학위증을 수여하고 이 중 몇몇은 구직을 보장하기도 한다.

영어만 잘한다면 수학 실력은 평생교육 관점에서 만회할 기회가 있다. 실리콘밸리의 교육 회사 칸 아카데미는 유치원 수준부터 대학 수준까지 이어지는 수학교육의 로드맵을 구축해뒀다. 펜과 종이가 있고 영어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으면 직접 손으로 풀면서 부족한 수학 실력을 높일 수 있다. 글로벌한 데이터과학 학습의 문턱은 낮아진 셈이다. 문제는 영어다. ‘수포자’(수학 포기자)만큼이나 많은 ‘영포자’(영어 포기자)들이 있다. 많은 지방대 학생들은 영어 동영상 수업을 따라가기 어렵다. 수업시간마다 캐글도 알려주고 깃허브도 알려주지만 영어 때문에 학생들은 늘 망설인다. 물론 정부 사업으로 개설된 KOCW나 KMOOC 같은 공개강좌가 있지만, 대부분 대학 수업을 녹화했을 뿐 아직 개별 학생이 필요로 하는 ‘수준별 학습’에는 미치지 못한다.

취업난과 인구절벽 앞에서 진행되는 대학 구조조정의 복판, 한국 대학교육과 노동의 양상도 더욱 계층화될 것이다. 더불어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집단지성을 활용하는 일·학습의 병행 체제는 학생과 일하는 사람들의 경계를 흔들 예정이다.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갱신하라는 압박은 점차 심해진다. 그런데 여전히 전공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학생과, 취업에 도움 되는 쪽으로 하라는 학교 사이에서 수업을 새로 짜야 하나 하는 딜레마부터 풀기가 어렵다. 인간의 감각마저 닮아가고 있는 기계문명의 사회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대학생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취업과는 어느 정도는 동떨어진 전공 학습에 대한 동기 부여일까, 데이터과학과 MOOC 같은 새로운 방식의 학습 모델일까,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공무원 시험 문제집일까, 다른 방향의 삶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대안적인 일자리들일까? 대학생들에게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한다는 국가는 어떤 미래사회 직업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나? 당장 문과생 채용문 자체가 바늘귀가 된 지금, 학생들에게 어떤 직업 전망을 보여줘야 할지부터 쉽지 않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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