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경찰은 희한하다. 경찰의 임무를 다룬 ‘경찰법’ 제3조에는 ‘치안정보의 수집·작성·배포’라는 규정이 있다. 정보경찰의 임무다. 

문제는 뭐가 치안정보냐는 거다. 보통은 범죄정보를 떠올리겠지만 경찰이 말하는 치안정보의 개념에 범죄정보는 없다. 범죄정보는 경찰청 정보국이 아니라 경찰청 수사국 범죄정보과 같은 곳에서 다룬다. 사이버 범죄정보라면 경찰청 사이버안전국에서, 국제범죄정보라면 외사국에서 다룬다. 범죄정보를 뺀 치안정보라는 게 무엇일까.

사전적으로야 국가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일 텐데, 그 안녕과 질서가 주권자인 시민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다스리는 쪽’, 곧 집권세력 입장에서의 안녕과 질서인 경우가 많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보경찰의 활동은 온통 대통령을 위한 보고서 작성에 맞춰져 있다. 검찰수사로 정보경찰의 민낯이 드러났듯이, 대통령의 사주팔자가 좋아 국운이 상승한다는 식의 유치한 정보보고도 넘쳐난다. 청와대의 요구에 따라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하기도 한다. 대통령 친위세력의 당선을 위해 동향을 파악하고 사전투표소를 염탐하면서 선거판세를 읽기도 한다. 3000명 남짓한 정보경찰은 오로지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해 치안정보를 수집·작성·배포하고 있다. 

경찰 입장에서는 대통령을 위해 일하며 권력의 핵심과 연결망을 만들 수 있어 좋을 게다. 청와대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뭐든 답을 찾아주니 좋을 거다. 

문제는 대통령과 경찰에게 좋다고 시민들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거다. 납세자인 시민이 비용 전부를 부담해야 하는 조직이 주권자인 시민이 빌려준 권한을 이용해 오로지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그저 반민주적인 작태일 뿐이다. 

경찰청은 정보경찰의 역할이 그것만은 아니라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 집회·시위 관리나 신원조사 등을 정보경찰이 맡고 있지만 집회·시위와 관련한 신고 업무라면 경찰서 정보과가 아니라 민원부서가 맡는 게 맞다. 집회와 시위를 하려는 사람들을 위축시킬 의도가 아니라면 분위기조차 비밀스러운 정보과에서 맡을 까닭이 없다. 집회현장에서 정보경찰이 대화를 촉진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도 하겠지만, 그런 일은 원래부터 관련 부처의 몫이다. 괜히 몸값을 올리고 자기 역할을 과장하기 위해 집회현장을 오갈 이유는 없다. 만약 불법행위가 있다면, 수사나 형사 부서가 맡으면 된다. 전형적인 민원부서 일이어야 할 신원조사도 마찬가지다. 뭐라 변명하든 정보경찰의 핵심은 대통령을 위한 정보보고일 뿐이다.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하려면 각계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정보경찰에 의해 걸러지고 다듬어진 정보에 의존하면 더더욱 안된다. 궁금하다면 각계 인사를 직접 만나면 된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전화, 이메일 등 온갖 매개들을 활용하면 된다. 언론보도나 인터넷 등에 귀를 기울여도 좋다. 측근이든 정적이든 상대의 은밀한 움직임까지 알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라면 굳이 정보경찰을 이용할 필요는 없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국가정보원이 국내 정보를 수집하지 않으니 경찰정보가 더 중요해졌다고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대목에서 그렇다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인사검증에 꼭 필요하다지만, 인사검증 자료를 인사혁신처나 관련부서가 아닌 정보경찰에 기댈 까닭도 없다. 범죄 관련 정보를 알고 싶다면, 공직 후보자에게 범죄경력조회를 떼어오라고 주문하면 그만이다. 사영기업도 다들 그렇게 한다. 굳이 필요하다면, ‘세평(世評)’ 정도일 텐데, 믿거나 말거나 식의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평판을 듣기 위해 3000명이나 되는 정보경찰을 운영할 필요는 없다. 만약 꼭 필요한 기능이라면 인사혁신처, 굳이 중복 검증이 필요하다면 국무총리실에 관련 기능을 두면 된다. 

정보경찰의 보고서는 일선 정보관이 작성한 다음 경찰서 정보과 - 지방경찰청 정보부 - 경찰청 정보국으로 이어지는 지휘 라인을 통해 이중삼중의 점검과 보안을 거친 후 청와대 보고용으로 거듭난다. 일제강점기의 특별고등경찰 이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았던 노하우가 있으니 정보경찰이 만든 보고서를 읽는 재미도 괜찮을 거다. 그 재미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대통령이 싫어할 만한 보고는 일선 정보관들부터 기피한다.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양념 치듯 가끔 넣겠지만, 결국은 대통령의 결단만이 나라를 구한다는 식의 보고서가 잇따를 뿐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노동조합도 없고 기본적인 민주시민교육조차 받은 적이 없는, 오로지 정권에 대한 충성만을 거듭한 사람들에게 기댈 일은 없다. 

대통령과 청와대는 정보경찰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면 안된다. 정보경찰의 보고서야말로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인의 장막일 뿐이다. 청와대 직원들이 정보보고서 읽는 재미에 빠져 아무리 그 필요성을 역설한다고 하더라도 넘어가면 안된다. 정보경찰을 악용하지 않을 거란 막연한 자신감도 답은 아니다. 

정보경찰이 망치는 건 대통령만이 아니다. 경찰에도 득이 될 건 없다. 일부 고위직이야 정보경찰을 통해 청와대와의 연결망을 갖게 되어 좋을 거다. 계급정년이 있는 팍팍한 현실에서 승진을 거듭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 수도 있을 거다. 몇몇 정치경찰에게 좋은 일이 10여만명의 경찰관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다. 

경찰은 법 집행기관이다. 종사자도 많고 대민접촉의 폭도 넓고 하는 일도 많다. 그래서 언제나 공정해야 하며 법 집행기관으로서의 권위도 필요하다. 그러니 제발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한 뻔하고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쫓아다니는 일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법률 개정도 필요 없다. 대통령만 결심하면 된다. 앞으로는 정보경찰이 만든 보고서를 읽지 않을 테니, 만들지 말라고 지시하면 된다. 할 일이 없어진 정보경찰 부서는 폐지하고 정보관들은 민생치안 현장으로 시민들을 위한 역할로 돌려보내면 된다. 정보경찰을 없앴을 때의 부작용이나 문제는 하나도 없다. 정보경찰을 그대로 둔 채 진행하는 경찰개혁은 공염불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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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권 조정안이 신속처리법안에 포함되자 검찰이 갑자기 포문을 열었다. 검찰총장은 외국 방문을 취소하고 급히 돌아왔다. 검찰은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진행했던 사법개혁 논의를 정면에서 거부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이 행정안전부 장관과 함께 정부 차원의 논의를 계속했고,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차원에서의 논의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부 차원이든 국회 차원이든 검찰이 의견을 개진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뜬금없는 반발이다. 법무부 장관과 청와대 민정수석까지 나서서 검찰의 주장을 경청하겠다고 했지만, 반발을 멈추지 않고 있다. 어떤 관료도 이렇게까지 오만한 적은 없었다.

반발하는 내용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 동원인지 자원인지 모르겠지만 검찰 주변 인사들은 언론 기고 등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을 거론하며, 수사권 조정이 되면 이승만 정권 때처럼 경찰파쇼가 될 거라 호들갑이다. 때맞춰 정보경찰의 폐해가 검찰발로 잇따라 터져 나오고, 두 명의 전직 경찰청장 등 네 명의 전·현직 고위직 경찰관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기도 하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경찰은 짐짓 점잖게 대응하나 논리 전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검찰 수사과정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이 꽤 많다는 점을 강조한다. 박종철 열사의 비극은 1987년의 일이지만, 검찰이 고문치사사건을 일으킨 것은 2002년이라며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파고든다. 검찰이야말로 국정농단의 주역이라는 점도 부각하고 있다.

양쪽의 말을 다 듣고 나면, 검찰과 경찰의 수사는 조금 낫고 못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엇비슷해서 견줘볼 필요도 없을 만큼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마디로 도긴개긴이다. 시민들의 인식도 다르지 않다. 둘 다 나쁘거나 둘 다 믿지 못하겠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지난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검찰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2.0%, 경찰을 신뢰한다는 것은 2.7%에 불과했다. 약간의 차이야 오차범위 내의 일이다. 믿음직하지도 않고 곧잘 국민을 괴롭히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던 기관들이지만, 그래도 일은 시켜야 한다.

형사사법절차는 국가형벌권을 행사하기 위한 절차다. 형벌의 목적은 범죄자에게 고통을 주겠다는 거다. 그래서 형사사법절차는 정밀해야 하고,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인권보장에도 철저해야 한다. 자칫하면 상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히기도 한다. 비록 사회정의를 위한 일이라지만,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한 일이니, 형사사법절차는 한마디로 무서운 절차다. 신체의 자유를 빼앗는 징역형은 물론, 돈을 빼앗는 벌금형도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수사는 형사사법절차의 시작이지만, 기소와 재판의 전제다. 수사가 없으면 기소도, 재판도 없다. 그래서 수사를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논쟁 중인 수사권이란 말은 그래서 부적절하다. 수사는 어떤 기관이 함부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나 권한이 아니라 책무에 가깝다. 누군가를 혼내주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일은 무거운 짐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검찰과 경찰은 이 무거운 짐을 서로 떠안겠다고 다투고 있다. 애국적 열정이 넘쳐서는 아닐 게다. 외국 순방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돌아와서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그 배짱은 바로 수사가 책무가 아니라 권한, 그것도 막강한 권한이기 때문이다.

수사권 조정 문제는 어떻게 풀면 좋을까. 의외로 답은 검찰총장 문무일이 내놓았다. “형사사법제도의 개선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주적 원칙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단다. 기자간담회에서 했던 말이다. 의도와 맥락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답은 맞혔다. 바로 민주주의다. 수사권 조정을 해야 하는 까닭도, 조정하는 내용도 모두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분산시키며 상호 견제를 통해 균형을 잡자는 거다. 효율성으로만 친다면, 자기가 잡아다 자기가 재판하는 사또 재판이 최고다. 지금 검찰은 사또 역할을 하고 있다. 재판은 법원의 몫이지만, 수사도 검찰, 기소도 검찰, 공소 유지와 형 집행도 검찰이 한다. 검찰은 형사사법절차의 핵심적 대목에서 막강한 권한을 독점적으로 휘두르고 있다. 형사사법은 법원의 역할이 오히려 부차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검찰의 독무대가 되었다.

촛불혁명 이후 시민들이 이구동성으로 가장 시급한 개혁과제로 검찰개혁을 꼽은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선거구제 개편과 함께 신속처리법안으로 지정한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법안은 모두 검찰개혁을 위한 방편들이다. 수사권 조정은 검찰에게 집중된 권한을 일부라도 경찰에게 넘기고 상호 협력관계에서 견제와 균형을 잡아보자는 거다. 지금의 법률안으로 검찰개혁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첫걸음이라도 떼어보자는 거다.

자치경찰이나 정보경찰 개혁이 전제조건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게 꼭 필요한 개혁과제라는 것에는 동의하나, 수사권 조정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수사권은 일을 잘했거나 개혁을 잘했다고 주는 보상이 아니다. 핵심은 검찰의 독점적 권한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자는 데 있다.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없어지면 경찰 수사의 자율성이 커진다며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경찰이 수사한 결과는 모두 검찰에 송치하기에 검찰이 경찰 수사를 통제하는 것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는다. 수사지휘권 대신 보완수사 요구권과 시정조치권을 새롭게 얻기에 별반 달라지는 것도 없다. 게다가 검찰은 경찰의 모든 수사기록을 들여다볼 수도 있고 경찰관의 비위가 의심된다면 직무배제나 징계를 요구할 수도 있다. 검찰의 직접 수사권도 그대로이기에 문제가 있다면 얼마든지 자체적으로 들여다볼 수도 있다.

물론 지금 법안대로 통과될지도 모를 일이다. 국회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겠다. 바라건대, 입법과정에서 보다 풍부한 논의가 있었으면 좋겠다. 국회가 시민의 요구, 민주주의의 일반 원칙만 기억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없다. 수사권 조정은 무엇보다 검찰개혁 차원에서 하는 일이다. 검찰과 경찰이 때론 협조하고 때론 경쟁하면서 수사를 제대로 해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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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운동이 있었지만 독립운동은 질적으로 전혀 달랐다. 헌신과 희생이란 말을 자주 쓰지만 그 말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독립운동가들은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 또는 인권운동과 달리 어디든 기댈 구석조차 없었다. 자신은 물론 가족의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연일 승승장구하던 제국주의 일본과의 싸움은 승산 없어 보였고 독립은 몽상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풍찬노숙도 끝없이 반복했다. 조선 최고의 갑부였지만 나라를 빼앗기자 만주로 떠나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이회영의 형 건영은 상하이에서 굶어죽었다. 당장의 불행은 물론 자식들의 미래까지 불행해질 게 뻔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에 나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돈이 유일신의 자리를 차지한 천박한 자본주의에 길들여지고 실용주의가 어떤 이념보다 앞선 자리를 차지하는 요즘의 우리에게는 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희생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일제에 빌붙은 족속들이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호의호식을 이어가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헌법 제121조의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훼손해도 흔한 윤리위원회에 회부되는 일은 없는 세상이다. 원칙도 염치도 인간의 품위도 돈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는 세상이기에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는 더욱 각별하다. 독립유공자를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그분들 덕에 해방도 건국도 가능했다. 대한민국이 이룬 모든 성취의 근원에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이 있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동안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를 모시는 방식은 너무 편협하고 옹졸했다. 제일 먼저 이념의 잣대로 갈랐다. 사회주의 계열은 유공자로 모실 수 없다는 거다. 독립의 공을 어떤 실천을 했는가를 두고 따지는 게 아니라, 이념의 색깔이 어땠는지 묻고 따지는 거다. 유치한 냉전적 아집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겨우 이 엉터리 기준을 벗어나려 하고 있다. 해방 전 사회주의 활동은 용인하겠다고 했다가, 지난해가 되어서야 해방 후 사회주의 활동에 대해서도 적극 검토하겠단다. 입장 변화는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단서가 없는 건 아니다.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하지 않은 경우만 검토대상이란다.

밀양 사람 김원봉. 일본 제국주의가 그에게 내건 현상금이 김구보다 많았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탁월한 독립투사였다. 제국주의엔 치명적이었고, 우리 겨레엔 영웅이었다. 누구보다 치열한 독립투쟁을 했고 빛나는 공적이 있지만, 그는 문재인 정부의 보훈 정책에서도 배제되었다. 국가는 지금껏 그를 외면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독립에 공이 있는지 아닌지를 따져 공이 있다면 예우하는 게 독립유공자 지정의 핵심인데, 해방된 이후의 행적을 두고 독립운동의 공마저 평가하지 않겠다는 거다.

북한정권과의 연계 여부가 독립유공자 지정의 기준이라는 것은 정당성도 없거니와 법률  근거도 없는 엉터리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은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공헌한 독립유공자”에게 합당한 예우를 하기 위한 법률이다. 법률이 정한 기준은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이다. 다들 인정하듯, 김원봉은 해방의 그날까지 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인데, 독립유공자로 모시지 못할 까닭이 없다. 핵심은 간단하다. 1945년 8·15를 기준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면 그만이다.

의열단장 김원봉은 마치 독립운동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 같았다. 열여덟 나이에 독립투쟁에 헌신하고자 중국으로 망명을 했다.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겠다며 의열단을 조직했다. 정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행동했다. 7년 동안 23차례의 공격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의 독립투쟁은 황푸무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의용대, 민족혁명당, 대한민국 광복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적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숨가쁠 만큼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해방의 그날까지 김원봉의 항일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임정 요인으로 귀국한 다음에도 김원봉의 고군분투는 멈추지 않았다. 여운형과 뜻을 같이하며 좌우합작을 위해 애썼다.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여하였으나, 북에 남았다. 김원봉은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고 했다. 뜻을 함께했던 여운형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는 등의 모욕을 당한 다음이었다.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기도 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아버지는 유폐되었다 굶어죽었고, 네 명의 형제와 다섯 명의 사촌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자신은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중화민국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혐의였다.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남에서는 노덕술 따위에게 ‘빨갱이 두목’으로 몰렸고, 북에서는 자유진영과 내통한 국제간첩이 되었다. 남과 북 모두에 버림받았다.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김원봉에 대한 건국훈장 추서 가능성을 언급한 이후 김원봉은 다시금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독립운동가 서훈 문제가 자유한국당 특유의 색깔론과 만나면서 정치적 쟁점이 된 것이다. 독립운동마저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정치 공세가 안타깝지만,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문제와 답은 간명하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에 공적이 있으면 법률과 절차에 따라 그 공적을 평가하면 된다. 공이 있으면 상을 주고, 잘못이 있으면 벌을 주는 게 국가의 기본이다. 대한민국이 기본이 바로 선 국가였으면 좋겠다. 독립운동가조차 기억하지 않는 국가에 미래는 없다. 

경술국치와 같은 비극은 다시 없겠지만, 누군가에게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기대하려면, 지금 이 문제를 잘 풀어야 한다. 원칙대로만 하면 된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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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은 범죄자의 죗값을 고통으로 치르게 하는 거다. 가장 확실한 고통은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감옥은 자유를 제한하여 고통을 주도록 설계된 제도이니 갇힌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고통을 받는다. 신체의 자유 제한에는 가족 관계의 단절, 생계 박탈, 사회적 평판의 추락 등 따라붙는 고통 또한 만만치 않다.

지난해 기준으로 하루 평균 5만4774명이 감옥에 갇히는데, 재판을 받고 있는 미결구금자는 1만8867명으로 전체 수용자의 34.5%다. ‘불구속 재판’이라는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면 상당한 숫자를 줄일 수 있다. 예산도 줄이고, 피고인의 방어권도 보장하며 진짜 범죄자인지를 가리기 전에 형벌을 주는 왜곡도 막을 수 있다. 구속은 증거를 없애거나 도망칠 것 같은 사람을 잡아두기 위한 이례적 절차이지만, 현실에서는 유무죄 판단보다 더 중요한 표지가 되었다.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나쁜 범죄자, 기각되면 죄가 없거나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된다. 간편한 도식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수사기관들은 구속에만 매달린다. 자기들의 수사성과를 과시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이런 욕구를 통제해야 하는 법원에는 거센 여론과 맞설 배짱 같은 것이 부족해 보인다. 구속영장을 발부하지만, 억울하면 나중에 재판받을 때 얼마든지 소명할 수 있을 거라며 스스로 부담감을 덜어내는 식이다.

형사사건의 핵심은 감옥에 가느냐 아니냐로 갈리지만, 이게 꼭 공정한지는 늘 의문이다. 재벌들에게 적용된다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법칙’이 보여주듯, 감옥행이 죄질에 따라 갈리는 것도 아니다. 당장 김학의 사건 등 여러 낯 뜨거운 사건들만 해도, 결국은 누구는 힘이 있어서 다른 누구는 어떤 배경이 있어서 감옥에 가지 않았고, 기본적인 수사조차 피해갔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특권층과의 유착에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이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유독 흉악하거나 매우 위험해서 반드시 사회와 격리해야 하는 사람들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당장 중요 범죄의 발생 건수 자체가 줄고 있는데, 감옥은 연일 과밀수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만 해도 그렇다. 지난 10년 동안 살인, 강도, 절도 등의 범죄로 감옥에 갇힌 사람의 숫자는 꾸준히 줄어들었다. 범죄 자체가 줄어드니 수용자도 줄어드는 당연한 결과다. 2013년 절도사건으로 갇힌 사람은 4650명이었지만, 2017년에는 3858명으로 줄었다. 놀라운 성취다. 반면, 사기, 횡령 등 경제사범으로 구금되는 사람들은 같은 기간 5024명에서 7630명으로 크게 늘었다. 결국 경제적 여건 때문에 갇히는 사람들만 잔뜩 늘어난 셈이다.

법정 구속이 빠르게 늘고 있는 것도 과밀수용의 원인이 되었다. 2013년에는 연간 7532명이었지만, 2017년에는 1만2378명이었다. 법의 준엄함을 보여준 것은 좋지만, 범죄 발생 건수 등에서 별다른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고 주요 범죄 발생은 큰 폭으로 줄어드는 상황에서 유독 법정 구속만 늘고 있다는 것은 좀체 이해하기 힘들다. 각급심의 재판기간이 계속 늘어나는데 법원이 구속재판을 고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입구가 활짝 열린 감옥 문제, 특히 과밀수용 때문에 교정교화든 재사회화든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출구 전략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만, 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감옥에 들어가는 건 쉽지만, 나오는 건 쉽지 않다. 감옥에서 나오는 길은 재판에서 무죄를 받거나, 정해진 형을 다 마치고 만기 출소하는 경우, 아니면 가석방을 통해 조금이라도 일찍 나오는 경우 등이 있다.

가석방은 출구 전략의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만, 무엇보다 교도소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감옥생활은 더딘 시간과의 싸움이 핵심이다. 그러니 수용자 입장에서 가석방은 기대볼 만한 유일한 희망이다. 교정당국 입장에선 확실한 유인책이기도 하다. 질서를 잘 지키거나 사회에 나갈 준비를 열심히 한다는 차원에서 자격증이라도 따면, 교육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교도소 운영에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교정당국이 수용자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당근이다. 징벌을 주거나 심한 경우 추가 범죄로 단죄하는 등의 채찍을 쓸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회도 채찍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감옥에 가두는 것은 형벌을 주는 것이지만, 세상 어떤 나라도 단순한 응보적 형벌만으로 감옥을 운영하지는 않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사회로 돌아가야 하는 만큼, 다시는 범죄로 빠지지 않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할 방도를 마련하는 게 교정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가석방은 교정활동의 실질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

가석방 여부를 정하는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는 수백명의 심사자료를 한꺼번에 검토할 뿐이다. 얼굴을 맞대고 수용자의 재활의지를 직접 묻고 확인하는 일은 없다. 음주운전, 마약, 성범죄 등 가석방 제한 사범을 정해두는 식으로 일괄 처리할 수밖에 없다. 법원, 검찰, 학계와 교정관계자가 참여하는 지금의 틀을 유지하되, 각 교도소마다 가석방심사위원회를 두고 실질적인 심사를 해야 한다. 수용생활을 하면서 어떤 준비를 했는지, 사회에 나가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 믿을 만한 근거는 뭔지 묻고, 직접 답을 듣는 가석방심사가 되어야 한다.

감옥에 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대폭 줄이고, 나오는 사람들의 수는 대폭 늘려야 한다. 그저 가둬두는 것만으로 우리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석방을 활성화해서 수용자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디든 희망이 없는 곳은 그저 지옥일 뿐이다. 진짜 위험한 사람들은 그 위험이 해소될 때까지 격리하는 게 맞지만, 의지를 갖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감옥이야말로 선택과 집중이 절실한 공간이다. 보내는 일에만 집중하고, 나오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 고이고 썩게 된다. 지금 한국의 감옥 현실이 그렇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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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의 무책임한 언동, 근거 없는 모략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쏟아내는 섬뜩한 말조차 매번 반복하는 통과의례라 여길 수도 있다. 집권을 목표로 서로 겨루는 사람들이니 정당 사이의 다툼과 간극은 일상이라 해도 좋다. 서로 다른 의견을 빗대면서 공동체를 발전시킬 지혜를 구할 수도 있고, 갈등 자체가 민주주의의 하나의 과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막말을 쏟아내더라도, 아무리 정쟁을 일삼는 사람들이라도 결코 넘지 않아야 할 선같은 게 있다. 그런 점에서 5·18민주화운동은 일종의 성역이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요구가 무참히 짓밟혔고, 죄 없는 시민들이 잔혹하게 학살되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에 이어 군인들만의 세상을 계속 이어가고픈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반국민·반국가 범죄가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김진태·김순례·이종명 등이 뭐라 핑계를 대든 그들은 5·18의 참담한 고통을 송두리째 모욕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여태까지는 육사 출신 지만원이 그런 일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그저 개인에 불과한 지만원과 국회의원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대통령의 거수기 역할이나 하던 국회가 민의의 전당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민주화투쟁의 성과였다. 5·18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화투쟁 등 끊임없는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이 맺은 결실이었다. 그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주최한 행사에서 5·18을 모욕하는 말이 쏟아진 것이다.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은 시민들의 희생과 고통, 그리고 심지어 죽음까지 모욕했다.

한국당 지도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죄송하다면서도 출당과 국회의원 제명에 대해서는 남의 당 일이니 간여하지 말라거나, 유감스럽다면서도 5·18 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두 명을 그대로 추천하겠다고 몽니를 부리는 것도 비슷했다. 형식적인 요건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후보들을 추천해놓고는 청와대와 기싸움을 벌이겠단다. 원래 그 자리는 김진태의 추천으로 지만원을 앉히려던 곳이었다.

한국당은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5·18 문제가 거추장스럽고 또 부담스러울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당 스스로도 거듭 확인하듯, 1990년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이 진짜 원조다.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으로 이름만 바꿨을 뿐이다. 한국당의 뿌리는 전두환·노태우의 민주정의당만이 아니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학살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함께 만든 정당인 셈이다.

얼마 전 당사에 걸린 부친 사진을 떼어달라고 했던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의 말처럼, 한국당에서 민주투사 김영삼의 족적은 찾아볼 수 없다. 김영삼은 누구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던 1983년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단식을 시작했다.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저항은 23일이나 이어졌다. 예전에 ‘상도동계’라 불렸던 사람들이 여전히 현역 정치인으로 뛰고 있지만, 농성장에 잠깐 앉아 있는 것조차 ‘릴레이 단식 농성’이라며 ‘단식’이란 말만 빌려올 뿐, 민주주의 진전을 위한 김영삼식의 노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전두환·노태우를 감옥에 보내고, 5월18일을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하고 광주 망월동 묘역을 국립묘지로 지정하는 등의 노력은 모두 김영삼 정권 때의 일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을 쉽게 폄하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숭고한 역사로 자리매김한 것은 오히려 김대중보다는 김영삼의 공이 컸다.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국가의 중요한 이념으로 자리매김하고, 하나의 원칙으로 삼은 것도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의 정치적 자산을 계승한다는 한국당은 김영삼이 세운 국가적 원칙을 간단하게 뒤집어버렸다. 민주주의 근간을 훼손하고 헌법정신을 파괴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고 있다. 왜 한국당은 김영삼의 길이 아니라, 전두환의 길을 따르려는 걸까. 장점은 계승하고, 단점과 과오는 극복해야만 앞길이 열린다는 간단한 셈법조차 외면하고 왜 극단을 좇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태극기부대가 앞길을 열어줄 거라 기대하는 걸까.

10년 전 우리 곁을 떠난 바보 김수환은 생전에 광주 때문에 아파했다. 그에게 ‘5월 광주’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참극’이었다.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력 진압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다”며 울분을 토했다. 광주의 5월은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면서 “광주에 내려가 시민들과 함께 피를 흘리며 싸웠더라면 그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무릇 사람의 마음은 대체로 이렇다. 실제로 추기경 김수환이 “광주로 내려가 몸으로라도 계엄군을 막”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한 마음, 그 답답한 심경이 그랬다. 대개 5월 광주를 알게 된 사람들의 마음이 그랬다. 광주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자괴감 같은 안타까움이었다. 굳이 거명하자면, 김진태·김순례·이종명, 그리고 김병준과 나경원까지 한국당 사람들이 건드린 것은 그 마음이었다. 그래서 이번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가 사람이고자 한다면, 광주 학살과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그리고 한국당에 분명하게 요구한다.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람들, 민주공화국의 기본이념조차 부정하는 사람들이 다시는 국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당은 국민에게 사죄하고 세 명의 국회의원을 제명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있어야 할 까닭은 전혀 없다. 국회 스스로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직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국민적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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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들었다 놓은 사람은 나폴레옹 3세였다.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제2제정의 황제가 되었지만, 삼촌 나폴레옹 1세의 후광 말고는 달리 설명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파리가 프랑스의 심장이라며 ‘파리 대개조’라 불리는 도시개발을 추진했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17년 동안 도시개발을 추진했다. 좁고 굽은 골목길은 넓고 곧게 바꿨고, 상하수도까지 말끔하게 손봤다. 핵심은 보나파르트 왕가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었다. 교차로마다 자기 동상을 세우고 그 중심에는 삼촌의 위업을 과시하는 개선문을 두었다. 곧게 뻗은 길은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보는 것 같은 바리케이드 시가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민중들의 시위에 대응하고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는 게 속셈이었다. 파리 대개조로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는 파리에서 쫓겨났고 부르주아만의 도시가 되었다. 물론 지금의 파리는 아름답다. 파리 대개조의 후속 작업이 20세기 초까지 이어졌기 때문이고, 작가만이 아니라 문화부 장관으로도 탁월했던 앙드레 말로 등의 부단한 노력이 함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렇게 수도는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쥐고 있는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사람이나 새로운 권력을 꿈꾸는 사람은 뭔가 근사한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서울도 그렇다. 산업화 시대의 서울시장 중에는 별명이 ‘불도저’였던 사람도 있었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직전 서울시장이었던 오세훈은 한강에 인공섬을 띄웠고, 광화문광장을 개발했다. 오세훈의 전임 이명박은 말할 것도 없다. 서울광장을 만들어 잔디를 깔고 청계천 공사로 자신의 대선 출마를 위한 가도를 깔았다. 겨울철엔 스케이트장으로 쓰는 서울광장도, 오세훈이 만든 광화문광장도 그렇다. 급한 일이 전혀 없었는데도 서울시장들은 마치 뭔가 홀린 사람들처럼 일을 재촉했다. 

아고라 때문에 광장은 흔히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나, 대개의 광장은 권위적 통치자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독재자들이나 별로 민주주의자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광장에 집착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지금은 공원이 되었지만 군사독재시절의 여의도에는 커다란 광장이 있었다. ‘5·16광장’은 박정희의 군사반란을 기념하는 광장이었다. 200만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엄청난 규모의 쓸모는 관급 반공궐기대회였다. 

촛불집회 같은 역사적 사건이 도드라져 보여서 그렇지, 사실 광화문광장도 시민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광장은 오히려 시민들을 동원하는 권력의 공간이었다. 광장에 많은 시민을 모을 수 있는 힘을 시민들이 갖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실에선 정치권력과 자본권력만이 가능한 일이다. 월드컵 축구 중계나 유명한 아이돌 공연, 또는 그들이 ‘국가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행사를 치를 때를 제외하고, 광장은 그저 순찰을 도는 경찰관들이나 소수의 관광객들만의 공간일 뿐이다. 

광장은 대개 권위주의적 통치의 산물이다. 중국의 톈안먼(天安門)광장은 30년 전 톈안먼사태 때만 잠깐 열렸던 곳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진압한 다음, 광장의 쓸모는 국가 차원의 열병식 따위에서나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호찌민은 위대한 지도자였겠지만, 그가 묻힌 주변은 그저 공산당만을 위한 광장이 되었다. 베트남의 여러 성취는 놀랍지만, 집회와 시위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평양의 김일성광장은 말할 것도 없다. 인민들이 광장에서 멋진 춤을 추며 놀기도 하지만, 그건 북한식 집단주의 원리처럼 하나가 전체를 위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20세기 산물이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의 광장은 모두 19세기의 나폴레옹 3세가 건설한 저 위대한 파리의 방식을 좇았다. 널찍한 광장, 위대한 인물을 기리는 공간, 그리고 일상적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싶은 권력의 욕구가 함께하는 광장은 20세기에 만들었든, 심지어 21세기에 만들든 모두 19세기적 발상일 뿐이다.

그래서 광화문광장을 지금보다 3.7배나 넓히겠다는 서울시장 박원순의 발상은 생뚱맞다. 국가상징공간이니 잘 가꾸겠다면서도 설계작품의 이름은 ‘딥 서피스’란다. 굳이 번역하자면, ‘깊은 표면’인데, 책 제목 ‘오래된 미래’처럼 기발하거나 가치지향적이지도 않은 그저 멋 부리기에 불과하다. 

오세훈이 새로 개발한 광화문광장의 준공식이 열린 건 2009년 8월의 일이다. 10년도 안되어 광화문광장을 다시 뒤집어 버리겠다는데, 그래야 할 절박한 사정은 어디에도 없다. 오세훈은 광화문광장 공사를 1년2개월 만에 끝냈다. 박원순도 내년에 공사를 시작해 그다음 해인 2021년에 완공하겠단다. 시장 임기를 마치기 전에 속도전을 하겠다는 거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똑같은 광장을 넓히고 새로 만드는 것은 전형적인 후진국형 자원 낭비다. 

이젠 더 이상 서울을 광장 따위로 다른 나라와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정작 비교해야 할 것은 서울시민들의 삶이다. 서울시민이 얼마나 인간답게 사는지가 핵심이어야 한다. 책방과 도서관은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 미세먼지와 폭염에 고생하는 시민들의 건강권은 어떻게 보장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쿠바 아바나에서 식량난을 극복할 때 했던 것처럼 가능한 모든 곳에 나무를 심어 미세먼지 농도를 조금이라도 낮추고, 여름의 열기를 다만 2~3도라도 낮추는 노력이 시급하다. 겉보기만 번지르르한 도시가 도시민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다. 

박원순은 변했다. 이런 이야기도 귀담아듣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일에든 반대는 있기 마련이라며 간단히 퉁 치고 넘어갈 정도로 배포도 커졌다. 얼마 전 인터뷰에선 자기 정치를 하는 게 나쁘냐고 되묻기도 했다. 제발 박원순은 박원순다워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특장을 지워버려서 이제는 박원순다운 게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대선에 나가고 싶어도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삽질을 잘해서 얻어지는 자리가 결코 아니다. 그렇게 대통령이 된 사람은 이명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박원순이 왜 이명박의 길을 따라가려는지 모르겠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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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에 이목이 쏠린 곳은 국회였다. 유치원 3법은 어찌되는지, 김용균씨의 참담한 죽음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있을지 가슴을 졸여야 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회의장 앞에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호소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기준을 확립하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을 조성하여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을 유지하고 증진하자는 것이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이 세계 최악의 산업재해 국가가 거듭날 계기를 만들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만약 이 법이 개정되어 산업재해 사망이 줄어든다면, 그건 온전히 김용균과 어머니 덕분이다.

그동안 산업재해를 줄이려는 노력은 그저 무의미한 구호에만 그치곤 했다. 노동자가 알아서 조심하라는 투였다. 안전모를 꼭 쓰고 각종 안전장비도 잘 챙겨서 산업재해를 피해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을 하청·재하청 업체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만 돌리는 위험의 외주화가 만연한 상황에서 각자 알아서 주의만 기울인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산업안전을 위해 주의를 당부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구조를 바로잡지 않고 주의만 당부하는 건 산업재해의 원인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노동자에게 전가하고픈 자본의 고약한 심보가 반영된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교과서는 자아실현 운운하지만, 누구에게나 노동은 먹고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일에 목숨을 걸지는 않는다. 하나뿐인 목숨을 걸 정도로 무모한 사람도 없다. 노동자가 주의를 기울이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목숨 부지하기 어려운 고약한 산업현장의 구조다.

12월10일 밤. 김용균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참변을 당했다. 그날은 마침 세계인권선언 제70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인권의 생일날, 인권은 저 깊숙한 탄가루 속에 처박혔다.

태안화력발전소는 한국서부발전이 운영하는 공기업이다. 여기에도 낙하산이 잔뜩 내려앉았다. 상임감사와 비상임이사는 노무현 정권 시절 청와대 행정관이 맡고 있다. 비상임이사는 한 달에 한 번 회의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연간 3000만원을 받는다. 김용균이 기본급 165만원에다 연장, 휴일, 야간 수당을 다 합해서 받은 돈은 월 211만원이었다.

김용균의 죽음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고맙게도 경향, 서울, 한겨레가 1면에 보도했다. 그렇게라도 젊은 넋을 달래고 싶었던 게다. 조선, 동아가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것과 크게 달랐다. 역시 신문이라고 다 같은 신문은 아니다.

그리고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와 가족들이 싸움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싸움의 선두엔 어머니가 있었다. 김용균씨의 어머니는 자기 자식은 그렇게 보냈지만, 다른 자식들의 목숨은 지켜야 한다며 싸움에 나섰다. 어머니는 빈소를 지키면서도 집회나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도 했고, 언론에 출연하기도 했다. 국회를 찾아 농성 아닌 농성도 했다. 어머니의 피눈물 덕에 세상은 아주 조금 움직이려 한다.

돌이켜보면 매번 이런 식이다. 어디선가 문제가 터진다. 문제가 터진다고 매번 여론의 주목을 받는 건 아니다. 심지어 누군가 죽었고 어머니가 통곡한다고 관심을 기울이는 세상도 아니다. 젊은이의 죽음, 어머니의 절규, 그리고 언론보도 등 몇 가지 극적요소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면, 참혹한 죽음마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 채 묻히고 만다.

세월호의 참극이 마라도 해상에서 침몰한 선박의 전원 구조로 이어진 건 고마운 일이지만, 매번 이런 극단에만 기댈 수는 없는 일이다. 1인당 소득 3만달러와 세계 10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나라가 이런저런 변수에 기대어 공동체의 진로를 가늠할 수는 없다.

방법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가장 확실한 대안은 노동조합에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아주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여전히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겨우 10% 남짓, 복지국가들의 90%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노동조합이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만 산업재해나 노동조건에 있어 노동조합만큼 확실한 안전장치는 없다. 노동조합이 활성화되고 노동조합이 힘을 갖는다면, 그만큼 산업재해는 줄어든다. 노동자 입장에서 노동조합은 가성비 좋은 안전장치가 된다. 조합비를 내고 노조의 이런저런 교육이나 행사에도 참여해야 하지만, 그런 약간의 비용과 수고의 결과는 엄청나다. 노동조합은 노동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느냐, 아니 한국적 현실에서는 사느냐 죽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도 협동조합이나 협회 등을 통해 자기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혼자서만 잘산다는 것은 사회구조가 엄연한 사회에서는 허망한 일일 뿐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주거비, 교육비, 통신비 등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구조 때문이다. 이 구조를 깨뜨리고 살 만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조직된 시민의 힘밖에는 없다. 깨어 있는 시민이, 조직된 시민이 세상을 바꾼다. 아니 세상을 바꿀 유일한 근거는 깨어 있는 시민, 조직된 시민이다.

시민사회단체도 활성화되어야 한다. 더 많은 시민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활동가들의 처우는 개선되어야 한다. 문제도 있고, 사실 답도 다 나와 있다. 문제는 그 문제를 지혜롭게 푸느냐 아니냐에 있다. 더 이상 극단적인 사건사고에 기대고, 어쩌다 주어진 비상한 상황에 기대는 방식으로는 곤란하다. 세상을 밝게 만드는 것이 누군가의 참혹한 죽음이어선 더더욱 곤란하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몫이 있다면,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단체에 가입해서 열심히 활동하는 것일 게다. 이건 우리의 삶을 지탱해줄 튼튼한 진지를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게 기본이고, 여기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곧 새해다. 모두들 뭔가 다른 새해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변화는 대통령의 위대한 결단이나, 정치인들의 훌륭한 리더십 같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참여하는 시민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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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을 우려먹은 이번 정부가 한 게 뭐가 있나.” 국회의원 최연혜의 말이다. KT 통신대란을 꼬집은 말이다. “국가기간시설은 전시나 테러의 1순위 대상이고, 특히 북한의 1순위 타격 대상” 같은 말도 덧붙였다. 이렇게 세월호에다 북한 테러까지 들먹이면 그 말을 경청하긴 쉽지 않다. 꼭 언어의 품격을 따지자는 건 아니다. 자유한국당 사람들이 갑자기 교양인이 되어 한 놈만 팬다는 천박한 이야기를 멀리하고, ‘야지·겐세이·뿜빠이’ 같은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비판할 자격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각종 범죄를 주도하거나 방조한 잘못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의 의정활동도 신뢰할 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 여전히 사립유치원을 감싸고, 예산심사에선 ‘비정’하기만 했다.

최연혜만 해도 그렇다. 지금은 우파 정당에 몸담고 있지만, 시작은 달랐다. 자유한국당의 어법을 빌리면 좌파의 돈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왔다. 유학비용을 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은 지난해 이맘때 한국의 촛불시민에게 인권상을 줬던 기관이다. 유학생 처지에서야 비용을 댄다면야 좌우를 가릴 형편이 아니지만, 그 다음 행보도 오락가락의 연속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유학을 마치고 철도대학 교수로 지내던 최연혜를 전격 발탁한 것은 노무현 정권이었다. 대통령 인수위와 열린우리당 정책연구원에도 참여했고, 철도공사 부사장에다 철도대학 총장까지 맡았다. 2012년 19대 총선 때 한나라당 후보로 지역구에 출마한 최연혜는 3위로 낙마했지만, 보란듯이 철도공사 사장으로 금의환향했다. 자신을 믿어준 박근혜 정권에 대한 충성은 대단했다. 철도파업이 일어나자 4356명의 노동자를 한꺼번에 직위해제했다.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전부였다. 철도공사 사장으로 일하면서 KT처럼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통한 인건비 줄이기에만 골몰했다. 정규직 숫자를 줄이는 만큼 철도 사고는 잦아졌다. 노조에 대한 강력한 대응으로 정권의 신임은 두터워졌고, 2016년 총선에선 비례대표 자리가 주어졌다.

이런 사람의 비판이 집권세력에게 뼈를 깎는 각성의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그냥 흘려버리기 딱 좋은 조건이다. 세월호에 빗댄 대목에선 마음이 상하고, 기회만 되면 반복하는 안보장사엔 말문이 막힌다.

그래서 문제다. 야당은 따끔한 야단도 치면서 집권세력이 긴장을 풀지 않도록 비판하고 견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야당은 비판자로서의 기본적인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다. 너무 낡았고 기본적인 애민의식, 애국심도 찾아보기 힘들다. 기껏해야 너나 잘하란 비판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의 요직 진출은 성황이나, 막상 시민사회는 6월 항쟁 이후 가장 심각한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시민사회를 과잉 대표했던 자들이 근사한 자리를 꿰차는 동안, 정작 그들의 기반은 허물어져가고 있다. 심지어 집권세력에게 섣부른 비판은 삼가라는 충고나 받는 곤궁한 처지가 되었다. 연일 집권세력의 공격을 받는 민주노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집권세력은 오늘도 편안하다. 20년을 넘어 더 오랜 세월도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감추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윤창호의 죽음이 불과 얼마 전인데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음주운전을 하고, 경호실의 30대 사무관은 술에 취해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행패를 부린다. 곳곳에 낙하산을 내려 보내는 행태는 적폐세력을 꼭 닮았다. 이번엔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사무장까지 챙겼다. 일이야 어차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법이지만,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는 법이다.

통신대란으로 서울은 엉망이 되었다. 국가기능이 마비되면서 진짜배기 고통은 약자, 소수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유·무선 전화와 인터넷, 텔레비전까지 모두 먹통이 된 상황은 예리한 칼처럼 약자를 파고들었다. 고통은 새로운 고통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KT의 고객응대업무는 진작 자회사로 분리되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경영진의 잘못을 대신 감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집권세력은 평온하기만 했다. 서울시장 박원순은 고향 일정을 다 마치고 사건 발생 12시간이 넘어서야 현장을 한 번 둘러봤다. 대책회의는 다시 12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리곤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중국 총리도 만나고 여러 도시 책임자들과 교류도 해야겠지만 그건 대구, 충남 등 6명의 시·도지사에게 맡겨도 좋을 일이었다. 서울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잠재적 대권주자가 아니라 고통받는 시민의 곁을 지키는 시장이라는 기본조차 잊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건전한 비판세력이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당장 서울시의회만 하더라도 전체 110명 중 민주당이 102명이다. 야당의 목소리는 애써 귀 기울여도 듣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인가. 민주당은 벌써부터 대선 전초전을 치르고 있다. 친문과 비문을 갈라치는 건 예사고, 대선 예비주자들을 놓고 벌이는 싸움은 점입가경이다. 집권여당의 가장 뜨거운 이슈는 적폐청산, 개혁입법 통과가 아니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되었다. 당장의 권력은 물론 미래 권력까지 어떻게 해보겠다는 속셈들이다. 신경쓸 만한 비판세력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배부른 집안싸움을 맘껏 벌이는 거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오로지 대통령의 선의와 집권세력의 호시우보에만 기대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여태까지의 정권들이 숱하게 보여주었다. 역대 정권들도 대개 비슷한 경로로 망했다. 철옹성 같은 지지율도 단박에 무너지고,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야유를 보내는 일은 현실정치에선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긴장이 풀어진 정권이 무너지는 건 일도 아니다. 여태껏 누린 지지율, 그 호시절은 어쩌면 적폐세력 때문에 얻은 반사이익일지도 모른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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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단순히 안보와 치안만을 담당하는 시대는 진작 끝났다. 이젠 국민의 삶 구석구석에 국가의 역할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헌법도 국가운영의 틀을 제시한다는 차원보다는 국민의 삶의 원리를 규정한다는 의미로 거듭나고 있다. 독재시절에는 그저 대통령을 몇 번이나 할 수 있다거나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하겠다는 독재자의 의지만 담긴 것처럼 여겨졌지만 이젠 그런 시대가 아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70조는 다만 하나의 기준을 제시할 뿐이다.

국가는 헌법 전문에서 다짐하는 것처럼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기 위한 가장 구체적이며 실효성 있는 기구다. 어쩌면 유일한 대안이며 안전장치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가 국가의 역할과 닿아 있다. 아파트 값이 폭등하면 곧바로 국가, 구체적으로는 국가운영의 책임을 맡고 있는 집권세력에게 비난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미세먼지 때문에 일상이 힘들어지면 관련 장관의 무능을 성토하는 것도 당연하다. 개인의 안전, 나아가 행복까지 국가가 책임져야 하며, 국민을 위한 국가의 역할은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하지만 국가가 최고의 규범이 정하는 대로, 또는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작동했던 것은 아니다. 2014년 4월 세월호가 침몰하는 순간, 국가는 없었다. 마치 국가기능이 마비된 것처럼 죽음의 행렬을 방치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세월호를 절대 잊을 수 없다며 4년 반이 지나도록 ‘세월호 배지’를 달고 다니며, 이게 국가냐고 묻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싱가포르에서 불쑥 꺼낸 이야기 때문에 부동산 시장이 요동쳤다. 박 시장이 “여의도와 용산을 통으로 개발하겠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서울 부동산 값이 폭등했다. 서울이 온통 부동산 전쟁터로 변하자, 시민들은 이게 국가냐고 물었다. 정부는 도대체 뭘 하냐는 거다. 여당 소속의 서울시장이 국토교통부 등 정부부처와 논의조차 없이 불쑥 꺼내든 카드로 부동산 값 폭등을 부채질하는 게 도대체 말이 되냐는 비판이었다. 박 시장은 부동산 폭등은 예측하지 못했다며 통개발 프로젝트를 7주 만에 철회했지만, 가장 오랫동안 서울시장이었던 사람이 내놓은 변명치고는 옹색했다.

세월호든 부동산이나 미세먼지든 쟁점의 핵심은 국가의 역할에 있다. 국가가 역할만 제대로 했다면 겪지 않아도 될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고통들이 너무 많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늘 답답한 형국이었지만, 최근 사이판 태풍 사태에서 보여준 정부의 대응은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 만큼 좋았다. 사이판에 들이닥친 태풍으로 공항이 폐쇄되고 여행객들은 발이 묶였다. 사이판을 찾은 사람들은 휴양지에서 끔찍한 공포에 직면해야 했다. 이들을 위해 국가는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정부의 대응은 신속하고도 정확했다. 태풍으로 공항에서의 정상적인 이착륙이 불가능해지자, 군용기를 보내 신속한 이송작전을 벌였다. 군용기로 여러 차례 사람들을 옮기는 과정도 좋았다. 노약자들부터 우선적으로 이송했는데, 국가다운 품격 있는 조치였다. 신속하고 정확하되, 품격까지 갖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모처럼 국가다운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박수가 아깝지 않은 대목이다. 그런데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의 강의를 듣다가 정부가 중요한 대목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이판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은 비단 대한민국 국민만은 아니었을 거다. 그런데 우리 정부의 대응은 우리 국민만을 위험지역에서 안전지역으로 옮기는 것에서 멈췄다. 국민들은 세금을 내는 주권자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도 그게 당연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만약 한국 정부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신속·정확은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치자.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 정부는 지금의 한국 정부처럼 신속하게 군용기까지 파견해서 자국민들을 실어 나르곤 할 일 다했다며 사이판을 떠났다면, 그 섬에 남겨진 한국 국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물론 국가의 기본적인 구실도 하지 않는 한국 정부를 원망했겠지만, 자기 나라 국민만 챙긴 그 나라 정부에 대한 원망도 만만치 않았을 거다. 이런 게 바로 인지상정이다.

자기 국민을 먼저 챙기는 건 그 나라 정부의 당연한 책무겠지만, 여력이 닿는다면 국적을 불문하고 도와줘야 한다. 인도주의의 정신이 바로 그렇고, 인류공영에 이바지하겠다는 헌법적 다짐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민국의 품격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아쉽지만, 우리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국가의 역할은 오로지 자기 국민을 구하는 데서만 멈췄다.

국가는 다른 국가와의 경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다. 높은 담이나 철책으로 국경을 만드는 까닭도 거기 있다. 한국의 휴전선 철책은 이스라엘의 분리장벽과 더불어 가장 극단적인 경계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몰기 위한 분리장벽과 남침으로 참담한 전쟁을 겪었던 우리의 철책은 물론 질적으로 다르지만, 그 쓸모와 규모는 엇비슷하다.

대한민국이 가끔씩이라도 경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150만명이나 되는 난민을 받아들인 독일처럼은 못할지언정 구조의 손길이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골고루 내밀면 어떨까. 경계를 단박에 허무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 경계를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거다. 이찬수 교수에 따르면, 이건 경계를 실선(實線)이 아니라 점선(點線)으로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면 경계가 헐거워진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겠고, 우리가 왜 세금을 내냐며 반발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렇지만 경계가 헐거워진 만큼 외부와의 소통도 자유로워지고, 안과 밖을 넘나드는 일도 훨씬 쉬워진다. 꽉 닫힌 경계 속에서 우리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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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해설자 이영표는 아내가 분만할 때 ‘주님이 주신 고통’을 느끼라며 무통주사를 거부했단다. 똑똑해 보이는 사람이 왜 유아적 신앙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다. 성서를 잘못 읽은 탓이고, 전형적인 신앙의 왜곡이다. 그래도 이영표는 아내에게 출산의 고통을 강요하지는 않았단다. 폭력이나 위협도 없었고, 다만 권유했을 뿐이고 아내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단다. 부부 사이의 일이니 어쩌면 남이 뭐라 할 영역이 아닐 수도 있다. 아내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진짜 심각한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차별을 조장하고 혐오를 선동하는 사람들이다. 극단적 혐오세력의 뿌리가 보수 개신교에 닿아 있다는 최근 보도들은 충격적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에스더 기도운동’은 그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공허한 구호에 멈추지 않았다. 북한, 이슬람, 동성애라는 구체적인 적을 상정해놓고, 끊임없는 공격을 감행했다. 차별과 혐오를 일삼았고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공장 역할을 했다. 민주개혁세력에 대한 공격도 빠뜨리지 않았다. 2012년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에 대한 가짜뉴스들을 만들며 박근혜 당선, 문재인 낙선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였다. 정권 창출의 과실을 챙기는 데도 열심이었다. 박근혜가 당선되자 국가정보원에 우파 활동가를 양성하겠다며 43억원의 예산지원을 요구했다. 이들은 인터넷 기사에 댓글 다는 연습을 시키는 ‘미디어 선교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에게서 예수 정신을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예수가 제시하는 황금률, 곧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너 자신이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거다. 누구도 혐오 대상이 되길 바라지 않고, 가짜뉴스에 시달리고 싶은 사람도 없다. 기독교의 기틀을 만든 바오로는 코린트 공동체에 보낸 편지에서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하겠다며, 그리스도인의 첫째 덕목으로 사랑을 꼽고 있다. 신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더라도, 온갖 신비를 꿰뚫어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한다. ‘에스더 기도운동’ 같은 극단적 세력들은 성서 구절 한 글자도 귀히 모신다지만, 이런 황금률에 대해서는 철저한 유체이탈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 자기들끼리 예배 보고, 자기들끼리 축복과 은혜를 나누던 이들이 갑자기 인터넷 전사가 되고 거리 집회에 쏟아져 나오는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서울광장에서 개신교도들이 태극기,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기까지 흔들며 통성기도를 하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 까닭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바로 불안감이다. 한국은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의 종단들이 종교 활동 인구를 삼분하고 있는데, 어느 종단 할 것 없이 위기를 맞고 있다. 기세 좋은 교세 확장은 옛날 일이 되었다. 종교 인구는 전반적으로 감소했고, 특히 40대 이하의 종교 인구는 급감했다. 한마디로 장사가 안되는 상황이다. 장사는 안되지만 목회자들은 여전히 넘쳐난다.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도 교도소에서 통신 과정만으로 목사가 되었듯, 누구나 약간의 돈만 내면 목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곳도 꽤 많다. 최소한 먹고살 기반은 있어야 하는데, 종교 인구가 줄고, 목사는 늘면서 이게 만만치 않은 일이 되었다. 이럴 때 교회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면 된다. 누가 봐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 까닭을 찾아보니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어서 그랬다면 선교는 저절로 된다. 물론 삶을 온전히 걸어야 하는 일이니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선교활동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자기 영역이라도 확고하게 지키고 싶을 게다. 이럴 때 흔히 내세우는 게 ‘적’ 개념이다. 가장 오래된 전략은 반공주의다. 북한괴뢰도당이 언제 남침할지 모른다며 시민들을 윽박지르고 인권침해를 일삼았던 박정희의 모델이다. 무슬림이 들어오면 한국이 모두 이슬람화되고, 여성들은 남성들의 성폭력에 견딜 수 없게 될 거란 가공의 공포를 심어주고 확산시키는 거다. 이런 전술은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적개심도 마찬가지다. 지금 동성애를 ‘치료’해주지 않으면 모두들 에이즈에 걸려 죽어버릴 것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런데 반공주의는 물론, 일종의 블루오션으로 선택한 반이슬람, 반동성애도 극단적 개신교도들을 더 고립시킬 뿐, 선교는 물론 자기 세력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지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면 태극기 들고 반대 시위야 나가겠지만, 남북화해협력시대가 열리면서 북에 대한 극단적 증오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을 거다. 반이슬람도 그렇다. 자기 신자들도 무슬림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해외여행도 다닐 테니, 실제로 무슬림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배려도 잘하는지를 보게 될 터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악담도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 또한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으니, 곧 멱살 잡은 손이 부끄러워질 게다.

문제는 비록 일부라지만, 이 극단적 광신도들은 대화나 설득,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거다. 헌법의 원칙을 말하는 것도 무망하다. 게다가 이들은 이미 사람을 혐오하고 사람을 파괴하는 범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형사처벌이 능사는 아니지만, 이제는 국가형벌권을 꺼내 들어야 한다. 가짜뉴스를 만들고 조직적으로 유포하는 사람들, 정치적인 결탁을 통해 제 뱃속만 채우는 사람들을 그냥 둘 수는 없다. 누군가를 해치라는 선동, 의도가 뻔한 거짓말을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다. 종교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지만, 신성불가침의 성역은 아니다. 그 자유라는 것도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보장할 수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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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경북 영천역에서 여성의 치마 속을 불법촬영하던 남성이 붙잡혔다. 현행범이었다. 범인은 육군 대위, 육군 3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들을 가르치는 교수다. 한국 육사에다 미국 육사까지 나온 ‘인재’였다. 이런 경우 일벌백계가 답이다. 가해자를 엄벌에 처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평등 교육, 성폭력 예방 교육 등을 강화했어야 했다. 하지만 3사관학교는 거꾸로 움직였다. 조직, 더 정확하게는 조직의 책임자인 지휘관의 앞날을 걱정했다. 이들에게 급선무는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피해자와의 합의가 중요했다. 사건을 감추고 파장을 줄이는 게 관심의 전부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일을 도맡은 사람은 범죄자 대위의 직속상관인 대령이었다. 피해자와의 합의가 급한데, 이런 일에는 여성이 나서는 게 제격이라며 소령 계급의 여성 장교에게 이 일을 맡겼다. 가해자의 친누나 행세를 하면서 피해자와 합의하라는 거다. 상관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해야 하는 군대지만, 그건 전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목숨을 걸 때의 이야기이고, 그 명령이 정당했을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부당한 지시, 범죄를 은폐하는 모략까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친누나를 사칭해 대신 합의에 나서라는 지시까지 따를 수는 없었다. 그냥 군인도 아닌, 장교를 양성하는 교수들이 이럴 수는 없었다. 3사관학교의 교훈처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올바르게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관이라고 사관생도들에게 가르쳤던 교수의 선택은 분명했다. 고심 끝에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 육군 소령 차성복. 육군 3사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의 고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령의 ‘지시’를 거부한 이후, 차성복은 당연한 것처럼 조직적 왕따를 당했다. 대리 합의를 종용하던 대령은 남자 같으면 때렸을 거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때리는 대신 다양한 보복이 뒤따랐다.

상급자의 보복은 가혹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근무평정을 낮게 주는 것이다. 대령은 차성복에게 ‘열등’ 평정을 했다. 이 때문에 현역 복무 부적합 심의까지 받게 되었다. 심의 결과는 복무 적합으로 나왔지만, 심의를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강의를 빼앗아 버렸다. 갑자기 차성복이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킨다는 문제제기가 쏟아졌다. 평소 품위가 없고, 언행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성을 성추행했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부대 회식 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성 소령의 허벅지를 만졌다는 거다. 부대 안 회관에서의 회식은 문제의 대령이 주관한 회식이었다. 차성복이 대령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남성 소령을 성추행했다는 거다. 피해자라 자처한 소령은 차성복의 뒤를 이어 학과장이 된 사람이었다. 성추행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자, 남성 소령은 허벅지를 몇 번 툭툭 쳤다고 진술을 바꾸기도 했다. 성추행을 했다든지, 언행이 성차별적이라든지 하는 고발들이 이어졌다. 모두 대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다음의 일이었다.

강제로 전역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학과장 자리에서 쫓겨났고, 강의도 빼앗겼다. 사무실도 아무도 없는 빈방으로, 때론 휴가 간 사병의 자리로 강제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게 싫으면 나가라는 뜻이다.

도저히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절차를 밟아 억울함을 호소했다. 차성복의 호소에 대한 육군본부와 국방부의 반응은 기대와는 너무 달랐다. 문제의 대령에게 취한 조치는 ‘서면 경고’가 전부였다. 대리 합의를 지시하면서 폭언이나 협박을 하지 않았고, 합의를 종용한 것도 학교의 위신 추락을 막기 위한 의도로 인정된다는 이유였다. 군대라는 조직에서 대령이 소령에게 뭔가를 지시할 때, 폭언이나 협박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부드러운 말투로 상의하듯 말해도 된다. 가장 분명한 위계 조직에서 ‘부대를 위해 하는 일’에 폭언이나 협박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다. 차성복은 감봉 2개월 징계를 받았다. 마치 덫에 걸린 것 같았다. 차성복이 받은 감봉 2개월 징계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성추행이야 혐의를 벗었고, 나머지 징계 사유도 평소 언행에 품위가 없다는 주장뿐이었다. 이건 애초 사건의 발단이었던 불법촬영 범죄자에 대한 처리와 비교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그 성범죄자에 대한 군 검찰의 처분은 기소유예였다. 범죄 혐의는 인정되나 정황을 참작해 기소하지 않겠다는 거다. 국민을 지키라는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은 현역 장교가 여성의 치마 속을 촬영하는 범죄를 저질렀는데, 어떤 참작할 만한 정황이 있는지 모르겠다. 군대가 경찰, 검찰, 법원 조직을 따로 운영하는 까닭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기소하지 않았으니, 어떤 형사적 처벌도 없었다. 물론 징계를 받기는 했다. 처분은 감봉 3개월. 차성복과는 딱 한 달 차이다. 이쯤 되면 그냥 대놓고 봐주겠다는 거다. 게다가 범죄자는 3사관학교를 떠나 소속 부대를 옮겼다. 그가 옮겨간 곳은 남들이 그토록 선망한다는 한미연합사령부다. 그 범죄자도 군을 떠나면 보국훈장을 받아 국가유공자가 되고, 죽으면 국립묘지에 묻힐 것이다.

희한한 것은 성범죄자 대위, 대리 합의를 지시한 대령, 그리고 그 대령의 뒷배가 되었던 장군까지 모두 육사 출신이라는 거다. 우연의 일치일까.

차성복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군대에서 여성은 어떤 존재일까? 차성복은 현역군인 신분으로 프랑스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실력자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범죄를 무마하는 데 호출되었고,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가혹한 보복을 당하고 있다.

지난 6일은 마침 여군 창설 제68주년 기념일이었다. 국방부는 ‘여군 역량 발휘를 위한 제반 여건 보장’과 ‘여군의 양적·질적 성장 기반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앞으로는 GOP나 해안 초소 등에 대한 여군 보직 제한 규정도 폐지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생도를 교육하는 일, 프랑스어학을 강의하는 교수마저 여성이 할 수 없다면, 도대체 여군의 자리는 어디인가.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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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번째 시민참여형 개혁기구는 경찰청이 만든 경찰개혁위원회였다. 새 정부 출범부터 경찰개혁위원회 출범까지 달포밖에 걸리지 않았다. 구성도 남달랐다. 위원들은 모두 외부 인사였다. 경찰관이나 전직 경찰관이 위원으로 참여하는 일은 없었다. 고위직 경찰관들은 갑자기 낯빛을 바꿔 개혁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처구니없고 속은 쓰렸지만, 그것도 촛불의 성과라 여기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개혁성과였다. 경찰개혁위원회는 모두 30건의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다행히 어지간한 개혁안은 두루 담아냈다. 2005년 남영동 보안분실(예전의 대공분실) 폐쇄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던 전국 각지의 보안분실들이 모두 폐쇄된다. 서울만 해도 홍제동, 옥인동, 신정동, 장안동, 신촌 등지에 보안분실이 있다. 정권 차원에서 눈여겨보는 시국사범들이 경찰서가 아닌 분위기부터 살벌한 보안분실에서 잔뜩 위축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 이상한 일은 앞으론 없게 되었다. 정보분실도 사라진다. 의경들의 노동시간은 최대 주당 45시간을 넘지 않아야 하고,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휴식 기회를 보장받고, 일주일에 한 번씩 외출도 가능하게 된다. 영창제도는 이미 사라졌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경찰관들도 더디지만, 노동기본권을 보장받기 시작한다. 당장 노동조합을 설립할 자유가 보장되어야 마땅하나, 일단은 직장협의회부터 시작한다. 남성 위주의 조직인 경찰청에서 적극적인 성평등 정책도 실현한다. 당장 성평등정책관부터 외부 인사를 채용했고, 적극적인 여성 우대 정책을 인사에서부터 펼치고 있다. 여러 경찰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검찰, 군대, 국정원, 감옥 등 인권침해와 관련한 논란이 많은 곳에서도 다양한 개혁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생각처럼 속도가 나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환영할 만하다. 인권분야에서 구체적인 진전이 있다면 그보다 반가운 일은 없다.

경찰개혁위원회가 낸 개혁방안 중에 ‘시민에 의한 민주적 외부 통제기구 신설’이라는 게 있다. 만약 수사와 기소가 분리되어 경찰이 실질적으로 수사권을 행사하게 된다면, 훨씬 힘센 경찰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우의 부작용과 우려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다. 영국(잉글랜드, 웨일스)의 IPCC(Independent Police Complaint Commission, 독립적 경찰 비리민원조사위원회)를 모델로 시민적·민주적 통제기관을 만들자는 거다. 명칭은 ‘경찰 인권·감찰 옴부즈맨(또는 위원회)’이라고 붙였다. 1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오로지 경찰만 감시하는 기구다. 경찰관의 법령 준수 여부를 감찰하고, 위법 부당한 행위가 드러나면 경찰청에 징계를 권고하거나 경찰관의 범죄사실을 직접 수사할 수도 있다.

영국의 IPCC는 법률 개정으로 IOPC(Independent Office for Police Conduct)로 바뀌고 위상과 업무도 예전보다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없다. 경찰과 전혀 다른 독립적 조직이 경찰을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경찰의 잘못을 시정한다는 게 핵심이다.

문제는 아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기구가 이미 존재한다는 거다. 바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다. 인권위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별도의 전담 감시기구가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인권위에 대한 기대가 적다는 거다.

인권위의 위상은 어디가 바닥인지 모를 지경으로 추락해버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인권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대통령 특별보고를 부활시키고, 정부 부처에 인권위 권고 수용률을 높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는데도 인권위 위상이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인권위 설립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로 탄생한 김대중 정부는 국가인권기구 설립이라는 그동안의 염원을 현실화했다. 입법, 사법, 행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 인권기구는 김대중의 대선 공약이었고, 그 공약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이행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설립과 동시에 조직의 기반을 닦은 인권위는 노무현 정부 때 여러 가지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라크 전쟁 파병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등 인권위가 주도한 쟁점이 많았다. 한마디로 시끌벅적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인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명박 정권은 위상을 추락시킬 방도를 고민했다. 법 개정이 여의치 않자, 위원장 등 지도부를 바꿔 위원회 성격을 변화시켜갔다. 정권의 의도대로 인권위의 위상은 추락했고 누구도 인권위를 자신의 인권을 지켜줄 호민관으로 여기지 않았다.

가장 큰 잘못은 2009년 7월부터 2015년 8월까지 6년 동안 인권위원장을 맡은 현병철이 저질렀지만, 지금 위원장인 이성호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꼭 현병철과 이성호만의 잘못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 즉 상임위원, 비상임위원 그리고 사무처 직원들도 공범의 혐의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현병철 체제에 저항한 일부가 있었지만, 임기가 다 끝나갈 때쯤 사임한다든가 진정성을 믿기 어려운 대목도 많았다. 그렇게 인권위는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혀져 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인권위가 바뀌었는지 뭘 어떻게 고쳤다는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지난 정권과 달리 비교적 민감한 인권의제에 대해 의견을 내는 일도 간혹 있지만, 그건 이미 쟁점화된 사안들에 대한 뒷북이었을 뿐이다. 인권위가 의제를 설정하고 논의를 주도하는 일은 없었다. 설립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인력과 예산이 부족하다는 공염불만 외우며 진정사건 처리 때문에 힘들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온갖 인권문제가 터져 나오는 지금도 인권위는 조용하기만 하다. 그래서 인권위는 지금 악플조차 별로 없는 무플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관료들에겐 무플이 훨씬 좋을 게다. 월급이야 꼬박꼬박 나오는데, 굳이 논란에 휩싸여 일감을 늘릴 일도 감정을 상할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오늘도 인권위는 조용하기만 하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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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딸의 갑질이 시작이었다. 회의 자리에서 유리컵을 던지고 막말을 했단다. 범죄 혐의는 특수폭행이다.

다음은 엄마였다. 딸보다는 혐의가 많았다. 공사현장 작업자, 운전기사 등에게 폭행과 폭언을 했단다.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세 번째로 아빠가 수사 대상이 되었다. ‘가장’의 존재감인지 이번엔 좀 더 죄질이 무거워 보였다. 횡령, 배임, 탈세 등이었다. 첫딸은 땅콩회항을 일으켰고, 아들은 아빠가 주인 노릇하는 대학에 부정 편입학까지 했단다. ‘범죄 가족’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게 생겼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죄질이 얼마나 나쁜지는 살펴봐야겠지만, 가족 모두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은 좀 따져봐야 할 일이다. 특히 엄마에게는 폭행 등으로 한 번, 가사도우미 문제로 한 번, 합해서 검찰이 두 번이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모두 네 번의 영장 청구가 있었고, 결론은 모두 기각이었다.

얼핏 보면 조씨 일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당연해 보인다. 그저 재벌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부를 갖게 된 사람들의 행태가 너무 고약했다. 사회적 책무는 고사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마저 저버리고 불법행위를 일삼았으니 엄정(嚴正)하고도 단호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맞다. 무릇 모든 범죄에는 죗값이 따라야 한다. 재벌가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게 바로 정의다.

그러나 범죄자에게 묻는 죗값은 딱 죄를 진 만큼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 경찰과 검찰은 법정이 열리기도 전에 사실상 여론 재판을 해버렸다. 단지 범죄 혐의를 의심하는 단계였는데도 범죄 사실은 물론, 범죄와 별 관련 없는 일까지 언론에 알렸다. 조씨 일가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알려주는 게 마치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인 양 굴었다. 애먼 사람들이 누명을 쓴 건 아니었지만, 벌주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다 망신 주고 과잉형벌을 남발했던 옛날의 인민재판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구속영장 청구다. 세 사람에게 네 번의 영장 청구. 어쩌면 네 번으로 영장 청구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씨 일가에게 반복적으로 영장을 청구하는 검찰은 마치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가 속의 특전사와 닮았다. 법률전문가로서의 양식이나 법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구속은 “피고인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형사소송법 제70조)가 있고, 피고인이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거나,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 때에 할 수 있다. 구속할 때는 범죄의 중대성과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 등도 고려해야 한다.

구속은 형사사법 절차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피의자, 피고인이 도망치거나 증거를 없애면 죄를 물을 수도, 죗값을 치르게 할 수도 없기에 마련한 부득이한 절차다. 하지만 많은 경우 형사사건에서의 핵심은 구속이냐 불구속이냐에 달려 있다. 구속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속은 남발하면 안되는, 사실은 이례적으로 적용해야 할 절차다. 그래서 형사소송법은 “피의자에 대한 수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함을 원칙으로 한다”(제198조)고 천명하고 있다. 이 원칙은 ‘준수사항’으로 따로 정해두고 있다. 불구속이 원칙이니 그 원칙을 따르고 좇으며 지키라는 것이 법의 명령이다.

그가 누구든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도록 하고, 감옥에 보내는 일은 재판을 해 본 다음에, 법원의 판결에 따른 형벌이어야 한다는 거다. 이게 원칙이지만, 이 원칙을 지킬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도망치거나 증거를 없앨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구속하라는 거다.

조씨 일가의 범죄들이 형사소송법이 정한 불구속 수사 원칙을 깨뜨릴 만한 것이었는지, 그 깊은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예외 없이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재벌 일가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검찰은 악질 재벌을 단죄하는 정의의 수호신쯤으로 비칠 수도 있다. 시민들의 박수를 받을 수도 있고, 재벌 일가를 구속해서 정의를 확립하라는 시민적 요구와 짝하기에 부담도 없다. 하지만 구속영장을 기각해야 하는 법원은 치도곤을 당한다. 영장 전담 판사의 이름이 검색어 상위를 차지하고 신상이 털리기도 한다. 검찰 입장에서는 이런 게 바로 꽃놀이패다. 영장청구권은 검찰에만 있지만, 그 권한을 아무렇게나 써도 검찰 입장에서는 잃을 게 없다. 모처럼 다수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을 게다.

아무리 고약한 사람이라도 그가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국민 모두가 갖는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재벌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약간 떨떠름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은 지켜야 한다.

미국 연방대법관 홈스가 옹호하려 했던 사상의 자유가 우리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를 뜻하는 것처럼, 보편적 인권은 그가 누구인지를 따로 묻지 않아야 한다. 갑질이나 일삼는 재벌 피붙이에게도 똑같이 공평하게 적용해야만 법이 정의 구현의 수단으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조씨 일가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들만큼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숱한 사람들은 검찰의 마구잡이 영장 청구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재벌가 사람들조차 저런 대접을 받는데 일반 시민들은 오죽할까. 여론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비싼 변호사를 살 수도 없는 시민들은 크든 작든 형사사건에 연루되면 당장 감옥에 갇힌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원칙은 언제나 어떤 경우나 꼭 지켜야 한다. 불구속 수사 원칙도 마찬가지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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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의 투표율은 ‘역대급’이었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을 심판하자는 민심은 더불어민주당의 압승, 한국당 등의 참패로 이어졌다. 한국당 입장에서는 그래도 대구·경북은 지켰다고 자위할지 모르나 대구·경북 지역의 균열도 만만치 않다. 이대로라면, 어디서든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이 민심을 통해 정확히 드러났다.

그동안 한국당, 바른미래당 등의 야당들은 그야말로 딴 세상 사람들 같았다. 역사적인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폄훼하고, 국민이 요구하는 개혁마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민심을 거스르며 자기들만의 성에 갇혀 살았던 셈인데, 그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지방선거 결과가 알려주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당 같은 민심의 무풍지대가 한둘이 아니다. 제 밥그릇만은 절대 내놓지 못하겠다며 저항하는 검찰이 그렇고, 요즘엔 법원의 모습이 꼭 그렇다.

발단은 ‘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 설치라는 자기들만의 숙원사업을 놓고 박근혜 정부와 어떻게 내통했는지 조금씩 밝혀지면서부터였다. 박근혜 정권에 조금이라도 부담되는 사건들이 있다면 대법원이 앞장서 정권의 부담을 덜어주었다는 거다. 재판 결과에 명운을 걸고 있는 숱한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었다. 양승태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처지나, ‘법의 지배’와 같은 철칙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KTX 여승무원, 전교조 조합원, 제주 강정마을 주민과 경남 밀양 주민 등은 정교한 국가시스템에 의해 함부로 내쳐졌다. 피해자는 차고 넘칠 만큼 많다.

문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다. 법원행정처장이 조사단장을 맡은 셀프 조사로도 이 정도이니, 좀 더 객관적인 곳에서 들여다봤다면, 아마 더 흉측한 결과와 직면했을 거다.

이를테면 사건관계자에게 골프와 룸살롱 접대를 받은 판사에 대한 처리를 보면, 그동안 법원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수 있다. 양승태 시절의 법원행정처는 사건관계자에게 골프와 룸살롱 접대를 수십차례 받은 현직 부장판사의 비위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해당 판사는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고 멀쩡하게 법원을 떠나 변호사로 개업해 지금도 잘나가고 있다. 제 식구 감싸기도 이 정도면 ‘역대급’이다.

법원은 삼권분립의 한 축이지만, 선출직인 대통령이 지휘하는 행정부나 구성원 전원이 선출직인 국회와는 차원이 다른 조직이다. 민주적 정당성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법원은 뭔가 다를 거라는 믿음, 법을 전공한 사람들은 다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때로 판결에 승복할 수 없어도 시민들은 참아왔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보듯, 사람 목숨마저 쉽게 앗아버리는 사법살인을 저질러도, 그 막연한 믿음 때문에 법원을 존중하기도 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최종 가해자는 법원이었지만, 그 비난은 온통 박정희와 그의 비밀정보조직에만 쏟아졌다. 법원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이번에 산산이 깨져버렸다.

엄청난 일이 밝혀지고 있는데도 법원의 행태는 완전히 딴 세상 사람들의 것이다. 명백한 범죄가 양승태 대법원에서 자행되었고, 그 증거가 숱하게 쌓여있는데도, 판사들의 대응은 딴판이었다. 명백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판사들은 연일 회의를 반복했다. 수석부장회의, 전국법원장회의, 대법관 간담회, 법관대표회의에다 외부 인사로 구성된 사법발전위원회까지 잇따라 열었다. 해법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형사고발이 필요하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형사고발은 곤란하되, “형사절차를 포함하는 성역 없는 진상조사와 철저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단다. 뿐만 아니다. 고위급 판사들은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와 문제 판사에 대한 탄핵이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양승태 본인과 양승태 시절의 법원행정처장들이 이미 법원을 떠나 탄핵할 수 없는데도 탄핵 운운하고 있다.

이런저런 회의만 열면서 김명수 대법원장은 말을 아끼고 있다.

도대체 어떤 범죄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고, 그 범죄를 단죄하는 일이 여러 번의 서로 다른 회의를 거쳐야 하는 일인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동안 판사들은 시민들을 향해 준엄한 심판을 내려왔다. 사람에게 죄를 묻는 일에 과감했던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 사람들이 정작 자기가 속한 조직의 범죄에 대해서는 시간을 끌면서 시민들의 분노를 달래보려는 꼼수만 부리고 있다.

어쩌면 대법원장은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지방선거의 살벌한 결과를 보니, 더 이상 버티다간 더 큰 조직적 위기를 자초할 거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결론을 내리든 법원은 이미 틀렸다. 양승태가 틀린 것은 물론이고, 김명수도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명백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연일 회의를 거듭했던 것은 마치 법원은 남다른 조직인 것처럼 여기는 오만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론을 달래며 돌파구를 찾으려는 꼼수를 모를 사람은 없다.

법원의 사활적 관건은 신뢰다. 판결을 믿지 못하면 결코 승복할 수 없다. 갈등이 심각한 사회에서 법원의 판결에 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교과서에서나 봤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세상이 될 것이다.

힘 있는 사람들이야 법이 없어도 살 수 있겠지만, 약자, 소수자, 아니 대부분의 시민들은 법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다. 법원에 대한 불신은 그래서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거다. 공동체가 붕괴되는데, 법원이라고 무사할 리 없다. 그러니 지금의 사태가 법원에는 절체절명의 위기다. 각종 인연으로 끈끈하게 엮인 법원이라지만, 그런 소소한 인연 따위에 조직의 명운을 걸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심각한 사태를 두고도 연일 회의만 거듭하는 법원이 안쓰럽다.

잘못이 있다면 어떤 잘못이 있는지 빠짐없이 밝혀내면 되고,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면 된다.

단순한 잘못이 아닌 범죄라면, 죄에 맞는 죗값을 치르면 그만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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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한 과정. 문무일 검찰총장은 일선 수사진에 대한 질책을 민주주의라 했다. 검사동일체 원칙이 법률에서 사라진 건 맞지만, 검찰의 동일성은 남다르다. 상명하복, 일사불란은 더하면 더했지, 군대보다 못할 바가 아니다. 상명하복의 정점엔 검찰총장이 있다. 검찰총장은 단순한 조직의 대표가 아니다. 인사권과 징계권을 바탕으로 조직 말단까지 틀어쥔 막강한 자리다.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단이 권성동 의원을 소환하려고 하자, 검찰총장은 직접 수사책임자인 춘천지검장을 불러 호되게 질책했단다. 명백한 수사개입이며, 노골적으로 봐주기 수사를 주문한 것이다. 하지만 검찰총장은 “검찰권이 바르고 공정하게 행사되도록 관리·감독하는 것은 총장의 직무”라고 밝혔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검찰총장은 수사진을 질책한 것이 “이견을 조화롭게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라 했지만, 검찰총장이 질책, 곧 잘못을 꾸짖어 나무라는 것은 그저 무조건 복종을 전제로 한 명령과 지시에 다름 아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검찰이 권성동 의원을 소환하기는 했다. 그러나 비공개였고, 소환한 날도 모두의 관심이 판문점에 쏠려있던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에 맞췄다. 같은 사건으로 불려간 같은 당의 염동열 의원은 물론 현직 청와대 정무수석이던 전병헌 전 의원이 공개 소환으로 포토라인에 섰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특혜였다. 검사 출신에 대한 전관예우에다 검찰 관련 업무 전반을 다루는 국회 법사위 위원장이라는 점을 빼곤 설명할 수 없는 특혜다.

어떤 권리를 몇몇 특별한 사람들만 누린다면 특권,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릴 수 있다면 인권이다. 특권은 헌정질서에 반하는 폐습이지만, 엄연히 우리 사회 곳곳에 살아 있다. 심각한 것은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의 특권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거다. 전·현직을 막론하고 검사들은 그 특권의 정점에 있다.

구속된 피의자도 수사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공범관계도 캐야 하고, 여죄도 추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전혀 다르다. 경찰은 구치소를 방문해 접견조사를 하지만, 검찰은 피의자를 검찰청으로 부른다. 구치소 수용자를 검찰청에 보내려면, 매우 번거로운 일을 겪어야 한다. 일단 수용자에게 수갑을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포승까지 채운다. 여럿을 한꺼번에 옮기는 경우라면, 연승이라고 해서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묶는 포승을 채운다. 버스에 태운 다음에는 교도관 여럿이 계호를 하며 검찰청까지 가야 한다.

아직 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사람들인데도 이렇듯 굴비 두름 엮이듯, 묶인 채로 검찰청에 끌려 다니는 것은 피의자 입장에서는 모욕적이고, 교정당국 입장에서는 실무인력을 잔뜩 투입해야 하는 번잡한 일이지만, 매일처럼 반복된다. 그래서 얻는 이익이라곤 그저 바쁜 검사들의 편의를 봐주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바쁘기로 친다면, 구치소 수용자를 검찰청까지 데려다주고 데려와야 하는 교도관들도 마찬가지고, 수사접견을 위해 구치소를 찾는 경찰관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경우라면 다르다. 검찰청과 법원은 격도 다르지만, 공개재판을 받아야 하니, 수고스럽더라도 구치소 피의자가 움직이는 게 맞다. 검찰청을 법원처럼 오가게 하는 것은 검사만을 위한 특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검사의 특권을 위해 쓸데없이 인력과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 이웃나라인 일본만 하더라도 조사가 필요하면 검사가 구치소를 찾아간다.

검찰이 이런 특권을 누리는 것은 사법기관도 아니면서, 자기들이 법원과 엇비슷한 ‘준사법기관’이라는 인식, 게다가 검찰이 누리는 막강한 권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42명의 검사장들이 차관급 예우를 받으며 기사 딸린 승용차까지 제공받았던 것은 아무런 법률적 근거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자기들끼리 만든 내부 보직 규정만으로 국가 예산을 맘껏 썼던 거다. 그런 폐습을 없앤다니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중요한 쟁점은 따로 있다.

지방검찰청, 고등검찰청, 대검찰청으로 되어 있는 조직구조만 해도 그렇다. 법원을 본떠 만든 것인데, 법원이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의 조직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재판을 3번하기 때문이다. 지방법원은 1심 재판을, 고등법원은 2심, 대법원은 3심을 각각 나눠 맡는 구조다. 사람의 목숨이나 운명, 재산이나 명예가 걸린 재판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는 취지다. 마치 비슷한 일을 하는 듯, 지방법원 옆엔 지방검찰청이, 고등법원 옆엔 고등검찰청이, 그리고 대법원 옆엔 대검찰청이 있지만, 검찰은 법원과는 위상은 물론 기능도 완전히 다르다. 행정부의 부처 중 하나인 법무부의 외청에 불과한 검찰이 3권 분립을 보장받는 법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도 우습지만, 3번의 재판을 하는 법원과 달리 수사도 한 번, 기소도 한 번만 하는 검찰이 고등검찰청과 대검찰청을 두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고등검찰청과 대검찰청을 둘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건 일종의 망상의 산물이다. 검사도 판사처럼 똑같은 사법시험이나 변호사시험에 합격했으니, 판사들처럼 대접받고 싶다는 욕구가 이런 일탈을 만들었다. 당장 고등검찰청이나 대검찰청을 없애도 시민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손해나 불편은 없다. 그저 고위직 검사들 자리만 잔뜩 만들어내는 이상한 구조를 계속 용납할 까닭이 없다. 국민의 혈세에 기댄 특권을 그냥 둘 이유는 없다.

검사들은 현직에서 누리는 특권 말고도 권성동 전 검사의 경우처럼 퇴직한 다음에도 특권을 안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검찰개혁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수사권과 기소권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검찰을 기소전담 기관으로 환골탈태시키는 것이겠지만, 검찰이란 조직과 검사란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 그것도 퇴직한 다음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특권을 없애는 것도 중요한 관건이다. 어떤 것이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1년 동안 검찰개혁에 관한 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쉬운 대목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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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임명한 금융감독원장이 단박에 날아갔다. 임기 3년은커녕, 역대 최단기 재임기록을 남겼다. 피감기관의 돈이나 정치자금으로 부적절한 해외여행을 다녀왔고, 자신이 책임 맡은 연구소에 5000만원을 ‘셀프 후원’했다는 시비 때문이다. 잠깐 금융감독원장이었던 김기식은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게다가 의정활동도 남달랐다. 그런 평가를 받는 사람의 행보치고는 실망스러운 대목이 한둘 아니다. 피감기관의 돈에 기대 해외여행을 꼭 갔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그게 국회의 관행이라면 그런 관행을 깨트리는 데 시민운동가 출신 국회의원의 역할이 있었을 거다. 시민들이 모아 준 정치자금을 국회의원 임기 말에 무슨 땡처리하듯 급하게 써야 했던 까닭도 모르겠다. 그 돈을 왜 자기가 일하는 연구소에 기부했는지 등 아쉬운 대목이 많다. 아무튼 김기식은 국회의원 시절의 돈 문제 때문에 물러났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금융개혁의 적임자가 안타깝게 낙마했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맞지 않는 감투를 쓰려다 실패한 일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도 좋다. 그래도 이런 사달을 겪었으면 뭔가는 남겨야 한다.

이번 사태를 통해 공직자의 자질에 검증조차 모호한 업무능력이나 전문성 따위를 넘어 국민 평균의 감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도덕성까지를 포함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장 인사를 둘러싼 논란에서 개운치 않은 대목은 다시 짚어야 한다.

자체 검증은 물론, 야당과 언론의 의혹 제기 이후의 재검증까지 거친 청와대가 끝까지 문제없다는 태도로 일관한 까닭이 뭔지 모르겠다. 검증 시스템이 허술한 탓인지, 아니면 논란이 된 정도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여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검증에 실패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청와대는 재검증까지 거쳤다면서 정작 판단은 선관위에 맡겼다. 이상한 일이다. 선출직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가 선관위에 비해 자격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청와대와 달리 선관위에 아주 특별하고도 남다른 전문성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당장 쏟아지는 야당의 공세를 넘어서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든 선뜻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선관위가 위법이라고 판단하는 사안을 청와대에서 놓쳤다면, 청와대의 검증 시스템에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위법 여부를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당장 청와대 개편부터 해야 할 큰일이다. 그게 아니라, 선관위의 권위에 기대려 했다면 그건 촛불정부를 탄생시킨 시민들에 대한 모독이다. 뭐든 개운치 않다. 금융감독원장의 진퇴는 끝까지 청와대의 책임으로 풀었어야 했다.

선관위의 판단도 이상하다. 선거도 이미 끝났고 출마조차 하지 않은 사람에게 선거법을 적용하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김기식은 이미 2년 전에 같은 사안으로 선관위에 신고를 했단다. 여태껏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다가 청와대의 요청에는 재빨리 답했다. 법은 그대로인데, 2년 전에는 합법이었다가, 지금에 와서 위법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엔 업무가 많아서 꼼꼼하게 살펴보지 못했다지만, 그렇게 업무가 많은 기관이 청와대의 요청에는 그토록 신속하게 답변을 내놓은 건 또 뭔가. 선관위의 직무유기가 일을 키웠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교훈은 남겨야 한다. 한판 푸닥거리에도 교훈마저 남기지 못한다면, 그건 당장의 인사 실패를 넘어 훨씬 더 치명적인 실수가 될 것이다.

가장 먼저 청와대부터 변해야 한다.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에 안주하면 안된다. 역대 대통령 모두 한때는 높은 지지율을 자랑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인사문제 검증은 철저해야 하고, 다른 사정을 두지 않아야 한다. 검증 자체가 허술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식구들에 대해서는 유난히 허술하거나 전혀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닌지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이런 식의 인사 실패가 반복되면, 문재인 정부의 개혁동력은 내부에서부터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공직자의 해외여행에 대해서도 분명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김기식의 낙마 덕에 새로운 기준을 얻었다. 국회의원 같은 공직자들이 피감기관의 돈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안된다는 거다. 선관위의 판단과 달리, 관광 일정으로 허송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관광은 휴가를 얻어 자기 돈으로 다녀오는 게 떳떳하다. 보다 철저한 해외여행 규정을 만들고,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부터 철저하게 지키도록 해야 한다.

언젠가 한국을 찾은 베트남 공무원들을 만난 적이 있다. 한국을 방문한 공무원들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과 한결같이 젊은 분들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한국처럼 가부장적 문화가 강한 곳이라 여성 공무원들이 해외출장이라도 가야 가사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배려란다. 그리고 남의 나라까지 가서 뭔가를 배운다면, 앞으로 베트남을 이끌고 나갈 젊은이들의 몫이어야 한다는 거다. 한국과 같은 접대성, 공로성 해외출장은 없단다. 적어도 해외출장에 관한 한 베트남은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우리가 배울 게 많다.

높은 분을 접대하기 위한 해외여행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해외여행이라면, 지금 당장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적어도 김기식이 속했던 19대와 지금 20대 국회의원들의 해외여행에 대한 전수조사가 바로 그것이다. 누가 어느 나라에 어떤 일정으로 얼마 동안 다녀왔는지, 여행 목적은 무엇이고, 그 경비는 어디서 지불했고, 수행은 누가 했는지도 모두 공개해야 한다. 김기식의 경우처럼 모두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공정사회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거다.

우리가 주권자라면 그런 것쯤은 알아야 한다. 아는 것부터 시작하자. 알아야 판단할 근거도 생기고, 그래야 시민을 위한 정부와 의회도 제대로 구성할 수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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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은 격동의 시절이었다. 박종철에서 직선제 대통령 선거까지, 세상은 빠르게 변했지만 시대의 요구는 명확했다. 이젠 민주주의를 제대로 해보자, 앞으로 나가자는 거였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고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5년 단임제 개헌은 1노 3김의 셈법이 맞아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한 번씩은 대통령을 할 수 있는 안전장치라고들 했다. 결국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순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87년 헌법을 그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세상이 너무 뜨거웠다. 제6공화국 헌법은 그 뜨거운 열기를 담고 세상에 나왔다. 기본권 조항은 훨씬 더 탄탄해졌고, 헌법재판소 설립으로 헌법 수호 기능은 강화되었다. 잘 만든 헌법이었지만, 헌법 개정 과정에서 주권자의 몫은 없었다. 주권자의 역할은 단지 국민투표에서 그쳤다. 과정은 없고, 결과만 민주주의였던 셈이다.

(출처:경향신문DB)

많은 사람들은 헌법을 그저 권력구조에 대한 기준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처럼 헌정질서를 망가뜨린 독재자들의 추악한 권력욕 때문에 생긴 착시 현상일 게다. 하지만 헌법은 그 나라 국민들의 삶의 원리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다. 해서 헌법은 함부로 고칠 수 없고, 국민 전체가 참여하는 국민투표를 통해서만 개정할 수 있다. 어떤 헌법을 선택할지는 주권자만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참모를 통해 사흘 연속 발표한 헌법 개정안은 지난 31년의 역사적 성과와 국민적 염원을 잘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시대상황도 잘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인권을 보장받을 주체를 ‘국민’이 아닌 ‘사람’으로 규정한다든지 ‘근로’를 ‘노동’으로 바꾸고, 공무원에게도 노동3권을 보장하도록 했다는 대목은 반가웠다. 우리나라도 이젠 다른 나라 부럽지 않은 인권선진국이 될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대통령 개정안은 생명권과 안전할 권리를 분명히 밝히고, 토지공개념 원칙을 제시하는 등, 현행 헌법의 부족한 면을 잘 보충하고 있다. 확실한 진전임에는 틀림없다.

그래도 아쉽다. 민주주의에 관한 가장 유명한 명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란 측면에서도 그렇다. 개헌안은 ‘국민을 위한’ 것임은 분명해 보이는데, ‘국민의’ ‘국민에 의한’이란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지금 벌어지는 헌법 개정을 둘러싼 온갖 논란 속에 국민의 자리는 별로 없다.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는 국회 논의야 그렇다 쳐도, 대통령은 좀 달랐어야 한다.

대통령이 구성한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지난달 13일 출범했다. 이 위원회가 대통령에게 헌법 개정 자문안을 보고한 것은 지난 13일. 꼭 한 달 만의 일이다. 위원회는 지난 한 달 동안 분과위 차원에서 2박3일 합숙토론도 했고, 1박2일로 끝장토론도 했단다. 분과회의는 합해서 17번을 했고, 전체회의는 4번, 여러 차례의 간담회도 했단다.

그러나 ‘내 삶을 바꾸는 헌법’을 위해서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전국을 4개 권역으로 나눠 숙의 토론회를 했고, 청소년, 청년들과도 숙의 토론을 했다지만, 모두 일회적 행사였다. 어쩌면 위원들이 지닌 전문성 덕에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촛불혁명을 계승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선택치고는 너무 졸속이었다.

70년 전 유엔이 세계인권선언을 만드는 과정은 그래서 참고할 만하다. 유엔은 세계인권선언 기초위원회가 만든 초안을 두고 2년 동안 치열하게 논의했다. 모두 85번의 공식회의를 거쳐 수정을 거듭했다. 유엔 인권위원회가 만든 최종안은 유엔총회의 사회·인도 및 문화적 사안에 관한 제3위원회로 넘겨져 넉 달 동안에만 모두 100차례가 넘는 회의를 거쳐 검토했다. 이 기간에만 모두 1233회의 투표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산고에 비견할 만한 과정이었다. 그랬기에 세계인권선언은 스테판 에셀이 &lt;분노하라&gt;에서 그토록 강조한 것처럼 인권의 야전교범이 될 수 있었다. 세계인권선언의 역할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야당의 발목잡기 때문에 일종의 비상사태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헌법 개정의 방향이나 내용도 모두 좋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국민이 그저 좋은 선물에 마냥 흡족해하는 피동적 존재라 여기는 게 아니라면, 헌법 개정 논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개헌의 적기가 언제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언제 개헌을 하든 개헌 논의 과정에 국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은 일종의 헌법 학습장이 되기도 할 거다. 국민 참여가 그저 이런 것도 넣어주세요, 이건 꼭 포함되어야 합니다, 라는 식으로 건의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게 아니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 듯, 치열한 논의를 꾸준하게 해보자는 거다.

“국가는 진보적 규범에 입각하여 일체의 차별 없이, 모든 개인의 인권이 포기되지 않고 분할되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으로 향유되고 행사될 수 있도록 보장한다. 모든 공권력 기관은 헌법과 공화국이 서명하고 승인한 인권조약과 관련 법률들에 따라 인권을 존중하고 보장할 의무를 진다.”(베네수엘라 헌법 제19조)

인권교과서에 그대로 옮겨도 좋을 만큼, 완벽한 조문이다. 1999년 우고 차베스가 이끈 베네수엘라의 헌법 개정은 확실히 돋보였다. 350개조(한국은 130개조)의 헌법은 분량만이 아니라, 내용도 세계적이었다. 수도 카라카스에서 헌법전을 들고 시위를 벌이던 그 나라 국민들에게는 확실히 좋은 선물이었다. 그 좋은 선물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는 우고 차베스가 죽고 난 다음, 완전히 딴 나라가 되었다. 희망을 찾기 어려울 만큼 엉망이 되었다. 좋은 지도자에게 기댄 헌법이 얼마나 무력한지 베네수엘라가 잘 알려주고 있다. 반면교사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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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암에 걸렸지만 왜 아픈지 알 수 없었다. 고통은 심했고 몸무게는 40㎏이나 빠졌지만,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아파서 견딜 수 없었기에 소년원 의무과를 서른한 번이나 찾았다. 갈 때마다 고통을 호소했지만 의무과에선 으레 하는 소리만 반복할 뿐이었다. 처방이라곤 변비약이 전부였다. 항문에서 피가 나온다고 호소하면 항문이 찢어져서 그런 거라는 말뿐이었다. 소년원은 병을 키우는 곳이었다. 병은 악화되었고 소년원을 나올 때까지 그렇게 아픈 까닭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소년원 당국자들은 꾀병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소년원생들이 거짓말을 잘하고, 꾀병도 심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을 수도 있다. 아무리 마음이 굳게 닫혀도 그렇지, 청소년을 이런 식으로 죽음으로 내몰면 안 된다. 설령 꾀병이라도, 서른한 번이나 찾아간 성의를 봐서라도 아프다는 호소에 한번만이라도 귀 기울였어야 했다. 춘천소년원은 그러지 않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춘천소년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주소년원에서도 같은 이유로 청소년이 실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소년원 당국은 외부 진료 요청을 번번이 묵살했다.

문제는 심각하지만, 그 문제를 어떻게 푸는가에 따라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잘못이나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거다. 대장암 걸린 청소년을 방치했다는 언론보도에도 꿈쩍하지 않던 법무부는 실명 사태까지 불거지고, 여론의 질타가 쏟아진 다음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늦은 대응이었다.

법무부 대응의 핵심은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불시’에 소년원을 방문해 실태를 점검하고, 개선책을 지시했다는 거였다. 장관의 소년원 방문 자체가 이례적이라 그 자체로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불시’는 거짓말이었다. 장관의 방문은 오후였는데, 법무부는 오전에 보도자료를 내고 ‘불시’를 강조했다. 장관의 소년원 방문 모습은 텔레비전 뉴스에 방영되기도 했다.

게다가 불시에 방문했다는 곳은 탈이 난 춘천이나 전주가 아닌, 안양소년원이었다. 장관님 오가시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법무부 정부과천청사에서 가까운 곳을 골랐던 것이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장관은 소년원을 방문해 의료시스템 현황을 보고받고, 생활관, 진료실, 관제시스템 등 시설을 ‘세심하게’ 점검했단다. 소년원생들을 만나서는 “중한 질병이 의심되는 때는 참거나 숨기지 말고, 담당교사, 의무과장 등에게 즉시 알려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단다. 의무과에만 서른한 번이나 찾아갔던 소년원생들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마치 중한 질병에 걸렸는데도 제대로 알리지 않아서 병을 키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은 소년원 관계자들에게는 “수용 중인 학생 부모들의 마음을 헤아려, 학생들이 소년원에서 병을 키우는 일이 없도록 다각적인 의료시스템 개선 방안을 신속히 마련하라”고 했단다. 아울러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법무부 장관이 소년보호기관들을 직접 방문하여, 의료서비스 전반을 점검하고 전문 의료인들의 자원봉사를 통해 의료시스템을 보완하는 등 종합적인 개선 방안을 수립·실행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계획을 어떻게 수립할지 모르지만, 법무부가 제시한 대안은 단 하나, 의료인들의 자원봉사로 시스템을 보완하겠다는 거다. 피해당사자는 물론, 시민들을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장관을 비롯해 여러 주요 보직을 탈검찰화하고, 인권 주무부서로 거듭나겠다는 법무부가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법무검찰개혁위원회를 통해 적폐청산과 개혁을 다짐하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하긴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여태껏 검찰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것도 제대로 된 검찰개혁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검사들이 불편해하지 않을 수준에서만 맴돌고 있을 뿐이다. 법무부가 책임지는 출입국, 범죄예방, 소년보호, 인권 등은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럴 거였다면, 차라리 위원회 이름을 그냥 ‘검찰개혁위원회’라고 붙였어야 했다. 아 참, 같은 이름의 위원회는 대검찰청이 따로 운영하고 있다. 희한한 일이다. 법무부와 검찰이 한 몸인데, 검찰개혁을 다루는 위원회는 두 개나 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더니, 두 위원회 모두 막상막하다.

소년원의 가장 큰 존재이유는 소년 보호에 있다. 범죄 청소년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기능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이 재범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호하는 거다.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청소년들에게만 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 어떤 환경에 놓였나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미성년자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청소년 범죄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어야 한다. 아이는 마을이 함께 키우기에 아이의 잘못은 마을 전체의 책임이어야 한다. 그래서 처벌이 능사는 아니고, 법률이 정해 둔 것처럼 보호가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의 소년원에서 구금 이상의 기능은 찾아보기 힘들다. 간판은 무슨 학교라고 근사하게 붙여놓았지만, 번듯한 건 이름뿐이다. 옛날 군대식 내무반처럼 수십 명이 한꺼번에 부대껴야 하는 좁은 곳에서 교육활동이라고 제대로 할 리 없다. 그저 가둬놓고 혼내주며 질서를 잡는 게 전부다. 언젠가 소년원을 찾았을 때, 열흘 전 내린 눈에도 운동장엔 발자국 하나 없는 걸 보았다. 쉬는 시간이면 운동장으로 달려가 농구라도 한판 뛰어야 하는 혈기왕성한 청소년들을 운동장조차 밟지 못하게 통제한 까닭이다. 생활실이라 부르는 좁은 감방에 가둬놓는 게 일상이다. 적절한 진료도 해주지 않고 외부 진료도 보내주지 않아서 대장암을 키우고, 실명까지 이르게 한 것은 어쩌면 하나의 신호일 뿐이다. 몸만 망가지는 게 아니라, 소년원이 총체적으로 인생을 망가트리는 곳이어선 곤란하다. 소년원에 다녀왔다는 게 비행을 일삼는 청소년들에겐 훈장이 되고, 착실하게 살려는 경우엔 낙인이 되는 수준에서 멈추면 안 된다. 무거운 책임이 법무부에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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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9일자 지면기사-

견제와 균형. 청와대가 발표한 권력기관 개혁의 핵심이란다. 옳은 방향이다.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가 활동에 들어가고 영화 <1987>로 권력기관 개혁에 대한 시민적 요구도 높은 때이니, 이쯤에서 청와대가 청사진을 밝히는 것도 좋다.

하지만 막상 공개한 내용만으로는 뭘 어떻게 개혁하겠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건 없다. 청와대 발표대로라면 권력기관 개혁이 가능하다고 진짜로 믿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런 식이라면 권력기관 사이에 견제와 균형을 잡는 개혁은 불가능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이 모두 개혁 대상이며, 범죄나 과오로 친다면 막상막하겠지만, 그 위세나 영향력으로 보면, 역시 핵심은 검찰개혁이다. 검찰은 ‘검찰공화국’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국가기관 중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단연 독보적이다. 수사권과 경찰 등에 대한 수사지휘권, 영장청구권, 기소권, 그리고 형집행권 등 형사사법과 관련한 모든 권한은 검찰이 틀어쥐고 있다. 이런 권한에 비하면 훨씬 작지만, 법무부를 장악하고 여러 부처 파견을 통해 국정 전반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검찰개혁의 핵심은 검찰이 지닌 막강한 권한을 쪼개는 데 있다. 그게 민주주의 원칙에 맞고, 시민들의 인권보장을 위해서도 그리해야 한다.

그런데 청와대 발표에는 검찰 권한을 민주적으로 나누는 방안이 전혀 없다. 겨우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과 법무부 탈검찰화밖에 없다.

공수처 설립은 법무부와 법무검찰개혁위원회의 갈등에서 보듯, 어떤 공수처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이미 법무검찰개혁위원회의 원안이 훼손된 상태인 데다, 뒤가 구린 탓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야당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이기에 또 어찌 될지 모르겠다.

공수처를 통해 검사들의 개인 비리는 단속할 수 있겠지만, 검사들이 범죄를 일삼는 사람들은 아닐 테니, 검찰이 막강한 권한을 바탕으로 국정을 농단하고 시민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악순환을 막을 방도는 아니다. 법무부 탈검찰화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시도했던 일이다. 인권국장, 출입국관리국장 등 여러 요직에 검사가 아닌 사람들을 임명했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자 교정본부장을 제외한 모든 자리는 다시 검사들 차지가 되었다. 불가역적 개혁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때보다 다만 몇 걸음 더 나아간다고 개혁이라 부를 수는 없다. 핵심은 검찰 권한을 쪼개는 데 있다.

청와대는 수사권 조정마저 검찰이 ‘특수수사 등’은 계속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수사는 경찰이 맡는 방안을 제시했다. 검찰이 계속 맡아야 한다는 특수수사는 개념부터 모호하다. 대충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 같지만, 법률 용어도 아니고, 특수수사와 그렇지 않은 수사를 나누는 경계조차 없다. 검찰이 특수수사라고 규정하면 특수수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원래 권력 중에 가장 센 권력이 바로 ‘정의(定義)하는 권력’이다. 게다가 청와대는 특수수사에다 ‘등’까지 붙여줬으니, 검찰로서는 잃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도 경찰이 전체 수사의 98%를 담당하고, 검찰은 선택적으로 ‘특수수사 등’만 골라서 직접 수사를 하고 있다.

경찰 수사에 대한 수사지휘권도, 영장청구권이나 기소독점권도 그대로다. 형집행권도 여전히 검찰의 권한이다. 청와대 발표대로라면 검찰개혁은 단박에 물 건너간다.

경찰도 마찬가지다. 넘겨받는 수사권도 없고, 검찰의 지휘도 여전하기에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갖는 건 아니지만, 경찰도 엄연한 개혁대상이다. 하지만 경찰개혁 방안도 별 게 없다.

자치경찰제를 시행한다지만, 지금의 국가경찰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제주도 모델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단다. 경찰의 힘을 분산하는 데 아무 도움도 못된다. 광역단체장은 수천명 규모의 자치경찰을 부릴 수 있어서 좋겠지만, 시민에겐 어떤 새로운 이익이 있을지 모르겠다. 범칙금 부과 건수야 확실히 늘겠지만, 민생치안이 얼마나 좋아질지 모르겠다. 제주도민들이 자치경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치안서비스를 받는다면 좋겠지만,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제주는 범죄 분야에서 3년 연속 가장 낮은 5등급에 머물러 있는 유일한 광역시·도다. 정부 공인 ‘범죄도시’에만 자치경찰이 있는 거다.

경찰을 통제할 좋은 방안은 이미 제시되었다. 경찰개혁위원회가 경찰청에 권고했고, 경찰청도 수용하겠다는 경찰 전담 감시기구 신설이다.

영국의 ‘독립적 경찰비리민원 조사위원회’가 모델인데, 수백명의 인원으로 밤낮없이 경찰을 감시하는 별도의 수사기관이다. 감시만 제대로 한다면, 경찰은 시민을 위한 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발표에서 왜 이런 핵심이 빠졌는지 모르겠다.

행정경찰과 수사경찰의 분리도 내치와 외치를 분리한다는 것처럼 공허한 이야기다. 교과서에선 가능할지 모르지만, 조직을 완전히 떼어내지 않는 한 불가능한 공상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국가수사본부가 경찰청 소속 경찰관으로 구성되는 한, 인사권과 감찰권을 지닌 경찰청장, 나아가 대통령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런 정도의 개혁안으로 권력기관이 바뀌는 일도, 이 기관들이 오로지 시민들만을 위해 거듭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청와대의 이런 태도가 권력을 잡고 난 다음에 생기는 일종의 안도감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권력기관을 이용해 시민들을 괴롭히지 않을 테고,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모두 정권 차원에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더군다나 적당한 선에서 개혁을 마무리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결국 그런 막연한 생각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참한 지경으로 내몰았고, 지난 10년 동안의 적폐를 불러왔다. 개혁은 원칙대로, 불가역적으로 해야 하고 청와대가 아니라, 불과 1년 전 야당이었을 때의 심정으로 해야 한다.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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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만기가 3년이나 남았는데도 벌써부터 사람들은 민감하다. 상대가 조두순이어서 그렇고, 피해자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짐승의 탈을 쓰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어서 모두들 공감하고 또 공분했다. 대법원까지 형이 확정된 다음에 피고인에게 벌을 더 주자는 재심은 불가능하다거나, 이미 결정된 처분 말고 다른 처분을 부과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일사부재리 원칙은 초등학생이면 모두 아는 상식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청와대 청원에 그토록 많은 시민들이 마음을 모은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분노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두순이란 악당을 향한 분노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악당들에 대한 안전장치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더 중요하다.

시민들의 뜻을 좇으려 청와대가 나서서 입장을 밝히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잠깐 놓치는 것이 있다. 그건 조두순이 바로 교도소에 있다는 거다. 조두순은 12년형을 선고받았고, 9년째 수감되어 있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의 조두순과 지금의 조두순은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일단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그만큼 늙었을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교도소의 목적이 범죄자에 대한 교정·교화를 통해 범죄자의 재사회화를 촉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교정이 완전히 실패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조두순은 과거 범행 당시의 조두순과는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교도소는 기본적으로 범죄자가 죗값을 치르는 곳이다. 핵심은 신체의 자유 제한. 이로써 인간은 사람으로 살아가기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죄다 놓치게 된다. 집에 있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지낼 수도, 생업에 종사할 수도 없다. 여행을 다닐 수 없는 건 물론, 아주 기본적인 종교생활을 제외하곤 일체의 문화생활, 취미생활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받는다. 사형을 빼고는 징역이나 금고 등 자유형을 가장 무섭고 무거운 형벌로 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주 놓치는 것은 교도소가 단순히 범죄자를 혼내주는 곳만은 아니라는 거다. 단순히 혼을 내준다고 얻을 건 별로 없다. 핵심은 그 범죄자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온다는 거다. 그래서 교도소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범죄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거다. 다시는 이웃에게 못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사람 자체를 바꿔버리는 데 그 설립 목적이 있는 거다. 물론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이 쉽게 변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변화를 위한 노력조차 포기할 수는 없다. 교도소에서 지내면 누구나 고통을 받는다. 어차피 고통을 받는 건 일상이니, 교도소의 목적의식적 활동은 능동적으로 교정교화를 촉진하는 데 있다. 그게 현대 교정의 이념이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위한 필수적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의 교도소는 부족한 게 너무 많다. 이 추운 겨울, 교도소 52곳 중에서 10곳의 교도소는 난방이 전혀 안된다. 법무부는 ‘복도 간접식 난방’이라 부르지만, 교도관이 활동하는 복도에만 라디에이터가 설치되어 있고, 생활실(감방)에는 아무런 온기조차 없다. 교도소의 역할은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서 멈춰야지, 이 엄동설한에 추위에 떨게 하는 불필요한 고통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은 지 50년이 넘은 안양교도소 같은 곳은 난방이 전혀 안되는 것은 물론, 건물 자체가 위험하다. 그래도 이전 계획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 난방이 안되는 한심한 건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두순 같은 범죄자들에게 잘해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악당들에게 국민의 혈세로 잘해 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지금 걱정하는 것처럼 조두순 같은 악당도 언젠가는 사회로 돌아온다는 거다. 저 악당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우리의 품격이 달려 있다는 멋진 말이 사회적 공감대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은 잘 안다. 사연을 따져보면 정말 딱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것보다 우리가 곧잘 잊는 것, 교도소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모두 우리의 이웃으로 돌아온다는 거다.

몸이 아픈 것이 개인적 질병역학 탓만이 아니라, 사회역학의 탓도 있는 것처럼, 범죄도 오로지 개인의 일탈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같은 범죄여도 전과가 있느냐에 따라, 또 그가 놓인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따라 구금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가혹한 벌을 받는 사람도 많다.

거듭 강조하건대,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은 사회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다. 범죄자를 영원히 가둘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사회로 돌아온 다음에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돕는 것이 국가의 몫이다. 범죄자를 검거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동원하고, 엄청난 예산을 쓰는 것보다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의 요인을 찾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더 저렴하며 효과도 확실하다.

법무보호공단을 거쳐 간 출소자들의 재범률이 현저하게 낮은 것처럼, 사람들은 어떤 조건에 어떤 대접을 받는가에 따라 다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교도소는 학교여야 한다. 뭔가 배우는 게 있고, 그 배움이 수용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방영하는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의미 있다.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이 비록 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부터 마약, 사기 등 각종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들에게도 각자 나름의 이유는 있다. 범죄에 이르게 되는 과정 같은 게 있다. 그런 걸 제대로 들여다보면 그저 범죄자만 탓할 수 없다.

교도소를 본격적으로 바꿔보자. 너무 춥거나 덥지 않아야 하고,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힘들게 사는 현실도 바꿔야 한다. 먹고 자는 문제, 아프면 진료받는 문제를 해결하고, 제대로 된 교육활동을 진행하는 학교로 바꾸자. 너무 춥지만, 그런 꿈은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 연말연시가 바로 그런 때가 아닌가.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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