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확한 진상이야 알 수 없다. 쏟아지는 언론보도를 좇는 것도 힘들다. 싸움은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펼쳐지고 있다. 복잡하지만 양상은 대개 두 축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부산시 경제부시장 유재수가 뇌물을 받는 등 범죄 혐의가 짙은데도 그에 대한 감찰이 청와대에 의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 축은 청와대로부터 관련 첩보를 받은 경찰이 무리한 수사 끝에 자유한국당 울산시장 후보를 낙선시켰다는 것이다. 다들 아는 것처럼 의혹의 핵심은 모두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겨냥하고 있다. 이건 물론 검찰이 짜놓은 판이다.

공방이 오가는 중에 청와대에 파견 나와 일했던 검찰 수사관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무거운 부담을 느낀 탓이겠지만, 그 실체가 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죄송하고 가족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전해질 뿐이다. 게다가 검찰과 경찰은 죽은 자의 휴대전화를 놓고 뺏고 빼앗기는 희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비밀번호를 걸어둔 최신형 아이폰이라 들여다볼 수 없다면서도 그런다. 아무튼 검찰 수사로 시국은 난국이 되었다. 

윤석열 총장이 취임한 건 지난 7월 말이었다. 겨우 넉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 검찰은 빠르게 ‘윤석열 검찰’로 재편되었다. 그동안 했던 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거악의 핵심인 것처럼 수사력을 집중하는 거였다. 청와대가 가장 심각한 부패집단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대통령에 대한 충정으로 주변의 부패세력을 내치기 위해서인지 아무튼 검찰은 청와대 주변만 맴돌고 있다. 

당장 청와대 압수수색만 해도 그렇다. 유재수에 대한 감찰을 무마했다고 폭로한 사람은 김태우 전 검찰 수사관이다. 그는 자신이 소속되었던 청와대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이 민간인 사찰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그 때문에 지난해 12월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압수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사결과는 별게 없었다. 검찰은 이번에도 김태우의 입에 기대 청와대를 압수수색했다. 

청와대 직원들도 범죄를 저지르면 수사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국정 최고책임자의 집무실이 이렇게 쉽게 털리는 건 차원이 다르다.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는 마구잡이로 휘둘러도 되는 칼이 아니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해야 한다. 물론 합리적인 판단도 거쳐야 하고 다른 방법이 있는지도 충분히 살펴야 한다. 

아무 때나 영장을 통한 강제수사를 해선 안된다. 증거인멸 우려 때문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면, 앞뒤를 살펴야 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수사와 관련해 검찰은 여러 대학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검찰의 주장을 따르더라도 대학들은 조국 일가 때문에 업무방해 등의 피해를 입은 기관들이었다. 그래도 그냥 영장 들고 쳐들어가는 방식을 반복했다. 대학들은 범죄기관 취급을 당했지만, 가장 힘센 기관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영장을 통한 강제수사 이전에 필요한 자료를 제출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먼저다. 검찰에서는 학문의 전당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피해 기관에 대한 도리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학들에 관련 자료를 임의 제출받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그때 가서 강제수사를 해도 된다. 강제수사는 신중 또 신중해야 한다. 

청와대 압수수색도 그렇다. 이미 지난해 12월 엇비슷한 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당했던 청와대 민정수석실이다. 게다가 지난 몇 달 동안 ‘조국 사태’의 한복판에서 검찰을 예의주시했던 터였다. 

검찰이 지목하는 것처럼 어떤 청와대 직원이 범죄와 관련되었다면 수사의 단서, 그것도 자신의 감옥 문을 열게 될 자료들을 컴퓨터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지는 않을 거다. 유재수, 김기현에 조국까지 세상을 매일처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들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러니 청와대 압수수색은 형사법상 증거 확보를 위한 법률행위가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정치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검찰이 정치에 개입하고, 나아가 직접 정치를 하는 행위는 심각한 일탈이다. 문제는 그런 일탈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거다. 

검찰이 왜 난리를 치는지, 왜 나라를 어지럽히는지 짐작하는 건 쉽다. 당장 국회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법안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과 검경 수사권 조정안이 올라 있으니, 이 판을 흔들고 싶을 게다. 황운하 전 울산지방경찰청장의 지적처럼 지난 1년6개월 동안 전화 한 통화 없던 검찰이 갑자기 청와대 하명 사건 운운하고 나서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참 지난 다음에 법원 판결을 통해 검찰의 의혹 제기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져도, 검찰로서는 손해 볼 게 전혀 없다. 수사과정에서 특히 검찰이 흘리는 온갖 이야기들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는 지금의 언론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 검찰은 공익의 대표자, 인권의 수호자, 법률 전문가로서의 역할은 다 제쳐두고 자기 조직의 기득권을 위해 정치적 퍼포먼스를 남발하고 있다. 

록히드 사건의 주임검사로 검사들의 상징처럼 존경받았으며 일본 검사총장(한국의 검찰총장)을 지낸 요시나가 유스케가 평소 강조했던 말이다. “검사는 수사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하면 안된다. 수사로 세상이나 제도를 바꾸려 하면 검찰 파쇼가 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검찰은 오물이 고여 있는 도랑을 청소할 뿐이지 그곳에 맑은 물을 흐르게 할 수는 없다.” 한국 검찰, 특히 ‘윤석열 검찰’은 온통 거꾸로다.

청와대와 법무부의 일개 외청에 불과한 검찰청이 매일처럼 싸우는 볼썽사나운 모습은 사실 청와대가 만든 것이다. 구체적으로 꼽으라면 얼마 전까지 청와대 민정수석이었고, 또 법무부 장관이었던 조국에게 무거운 책임이 있다. ‘윤석열 검찰’을 낳은 것은 청와대였고, 지금 ‘윤석열 검찰’ 문제를 풀 수 있는 것도 유일하게 청와대뿐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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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대공분실. 이 악명 높은 고문시설은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이 시설을 만든 사람은 당대 최고라 칭송받던 건축가 김수근이었다. 88올림픽 주경기장과 체조, 수영, 사이클 경기장을 모두 설계했던 사람이다. 김수근 주변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은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조사자의 공간과 피조사자의 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마치 사람이 사는 집과 짐승 우리가 다른 것처럼, 빛과 어둠이 대비되는 것처럼, 각각의 공간은 너무도 다르다. 먼저 경찰관들이 활동하는 공간은 남향을 기본으로 구성되었다. 잘 꾸며진 일본식 정원, 동시에 두 경기를 즐길 수 있는 널찍한 테니스장, 통유리로 꽤 괜찮은 전망을 만든 식당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배려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제법 울창한 작은 숲도 있다. 똑같이 생긴 방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모든 공간은 용도에 따라 크기도 배치도 제각각이다. 1970년대 건물로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되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반면, 끌려온 사람들의 공간은 출입구부터 북쪽에서 시작한다. 정문에서부터 조사실에 이르기까지 모두 7개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하나의 문이 열릴 때마다 새로운 공포와 맞닥뜨리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좁은 현관문을 통과하면 책상 하나만 놓여 있는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군복으로 갈아입히거나 아예 옷을 벗겨,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전락했음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공간이다. 다시 철문이 열리면, 이번엔 끝없이 반복되는 나선형 계단과 마주해야 한다. 나선형의 좁은 계단을 오르다보면, 결국 도착한 곳이 몇 층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조사실은 5층이고, 대공분실은 7층짜리 건물이지만,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은 자신이 8층 또는 9층, 곧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기억하기도 한다. 자기가 몇 층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함으로써 공간에 대한 감각을 빼앗아 버린다. 공간, 시간 등 기본적인 감각을 빼앗기면 곧바로 공포를 느끼게 된다. 길을 잃었을 때의 공포를 건물 안에서 느끼게 하는 거다. 계단이 끝나는 곳엔 다시 독립된 공간이 나온다. 이곳을 거쳐야만 조사실 복도에 설 수 있다. 여태껏 지나친 공간들을 나누는 건 육중한 철문이다. 조사자들의 공간에는 모두 나무 재질의 문이 달려 있지만, 피조사자들은 7개나 되는 철문을 마주해야 한다.

조사실에 갇히면 그들이 원하는 답을 내놓을 때까지 결코 나갈 수 없다. 조사실에서 먹고 자며 생리현상도 해결해야 한다. 볼일을 보는 장면마저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다. 변기 바로 앞에는 CCTV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도어 아이(door eye)는 밖을 볼 수 있는 장치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에선 밖에서 안을 들여다본다. 고문받는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이 시끄럽다고 조사실 벽엔 흡음판을 붙여놓았고, 자해를 막겠다며 형광등에까지 철망을 붙여놓았다. 책걸상도 볼트와 너트로 고정해놓았다.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모든 건축물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은 그저 악랄하고 잔인한 공간이다.

고문을 일삼던 조사자들은 조사실을 나서자마자 그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7층에는 무도장이란 이름의 체력단련장이 있고, 야외에는 함께 즐길 수 있는 테니스장이 있다. 작은 숲에선 바비큐 파티도 할 수 있다.

도심 한가운데 간판조차 없는 육중한 이중 철문과 철조망이 쳐진 높은 담으로 세상과 구별된 남영동 대공분실은 그야말로 딴 세상이었다. 하지만 담 안의 모든 건물과 시설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조사자의 공간과 피조사자의 공간은 엄격히 구분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유례없이 추악한 건물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참담한 현장도 소중하다. 감추고 싶은 역사의 현장이지만, 다시는 그 같은 야만이 되풀이되어선 안된다는 성찰과 교훈을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과 마찬가지 까닭이다.

그런데 남영동 대공분실이 위기를 맞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 시작은 지난해 말, 남영동 대공분실이 경찰청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이관된 다음부터였다. 정확하게는 민주화운동기념관을 남영동에 짓겠다고 결정한 다음부터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꼽은 기념관 신축 예정지는 바로 테니스장이다. 유감스럽게도 이건 남영동 대공분실을 훼손하는 거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테니스장도 마찬가지다. 테니스 경기를 즐기는 쓸모는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의미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아프지만, 소중한 우리의 유산이다. 그래서 원형을 보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남영동에 민주화운동기념관을 짓겠다는 것이 비싼 역세권 땅을 그냥 놀려둘 수 없다는 실용주의에 기댄 판단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민주화운동의 정신에 맞는 엄격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운동기념관을 남영동이 아닌 다른 곳에 세우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김누리 교수가 제안한 것처럼 대한항공이 호텔을 지으려고 했던 광화문 인근 송현동 부지 같은 곳에 민주화운동기념관이 세워지면 좋겠다. 송현동 부지를 시민의 품으로 돌려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화답할 수 있어서 좋다.

부득이하게 남영동 대공분실이어야 한다면, 테니스장 지하 공간을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지하 공간에 기념관을 짓고, 테니스장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야외 전시 등에 적절하게 사용하면 된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기념관 건립이 가능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부디 남영동 대공분실을 망가뜨리지 않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물려줘야 한다. 우리 세대의 역할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온전하게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어야 한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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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1일 지면게재기사-

광장이 뜨겁다. 200만, 300만, 내친김에 500만을 부르기도 한다. 광장에서 벌어지는 세 대결은 뜨겁다. 

광장은 둘 중의 하나로 갈라져 있다. 한쪽에선 조국 법무부 장관을 검찰개혁의 상징으로 꼭 지켜야 할 보배인 양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쪽에선 즉각 구속해야 할 범죄자로 치부하기도 한다.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구호들도 오간다. 한쪽에선 조국 장관만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까지 끌어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쪽에선 조국 장관을 지키지 못하면 문 대통령, 나아가 민주주의도 지키지 못한다고 염려하고 있다. 

출처:경향신문DB

광장은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지만, 각자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 광장은 배타적인 공간이 되기도 한다. 공정한 사회를 원하지만 문재인 정부를 친북좌파라 규정하고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광화문은 닫혀 있다. 검찰개혁은 절실하지만, ‘조국 수호’에는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서초동은 닫힌 공간일 뿐이다. 

대개 광장은 이랬다. 뜨거운 정치적 쟁점과 만나면 광장은 이례적인 공간이 된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광장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도, 또 보완하기도 했다. 위임해 준 권한을 함부로 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주권자들의 참여 공간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이상한 소굴이 되기도 한다. 

조국 법무부 장관 취임과 조 장관 일가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를 계기로 광장은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공휴일마다 광화문이 뜨겁고 토요일마다 서초동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참석 규모로 민심의 향배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숫자 대결로 결론이 날 싸움도 아니지만, 광장은 연일 타오른다. 

광장이 일상이 되자, 일상은 골목으로 밀려났다. 태풍이 휩쓸고 난 직후여도 광장에는 사람들이 넘쳤다.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난리인데도 광장의 함성은 드높았다. 흔히 ‘민생’이라 불리던 숱한 현안들이 골목에 처박혀 버렸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수납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문제가 그랬다. 민주노총이 한국도로공사 농성 현장에서 대의원대회를 열 만큼 중요한 노동현안이었지만,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안 보였다. 여승무원들을 내쫓았던 코레일 이철 사장이 그랬듯, 사장만 결단하면 얼마든지 풀 수 있는 문제인데도, 이강래 사장은 요지부동이었다. 1500명의 생존권이 걸렸고, 대법원 결정도 진즉에 났기에 법치주의 원칙까지 걸려있었지만,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그저 어두운 뒷골목을 배회할 뿐이었다. 

광장의 싸움은 단호하고 치열하다. 상대는 간단하게 악마로 만들어버린다. 한참 싸움의 기세가 오르면, 사소한 비판마저 금지된다. ‘조국 수호’는 빼고 ‘검찰개혁’만 외치자는 목소리는 그저 ‘내부 총질’이거나 반동으로 여겨진다. 장관이나 대통령, 아니 민주주의란 제도까지 그 본질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우리의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싸움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만 닿아 있다. 

싸움이 시작되면 원칙도 쉽게 훼손된다. 인권은 모두의 것이 아니라, 우리 편만의 것으로 쪼그라든다.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여당과 야당의 차이도 그렇다. 친정부 인사와 반정부 인사의 말은 극단적으로 갈리지만, 어제의 야당이 했던 말은 오늘의 야당이 하는 말과 꼭 닮아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는데, 광장은 디테일쯤은 간단히 무시해버리기 일쑤다. 검찰개혁이 쟁점이 되었지만, 뭐가 검찰개혁인지에 대한 논의는 별로 없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검찰 특수부만 정돈하면 검찰개혁이 되는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내부 부서를 다시 배치하는 게 개혁일 수는 없다. 악명 높았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2013년 박근혜 정권 초기에 없어졌지만, 검찰은 여태껏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정보기관의 이름은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바뀌었지만, 이름을 바꾸는 게 그저 요란한 눈속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검찰 특수부를 아예 없애버린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도 광장은 ‘검찰개혁’만 외친다. 원래 광장에서는 정교한 싸움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검찰 입장에선 개혁의 핵심이 특수부에 있는 것처럼 여론을 끌어내고, 특수부를 줄이는 게 곧 검찰개혁이라는 구도만 만들면, 광장에 200만, 아니 3000만이 모여도 두렵지 않을 거다. 이 정도의 위기는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을 거다. 

광장은 개인들이 만들어냈지만, 정작 개인은 소외되기도 한다. 그래서 최인훈은 그 유명한 작품의 제목을 <광장>이라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광장>의 이명준은 결국 인도양 어디에선가 소멸하고 말았다. 남과 북, 둘 중의 하나만 강요하는 현실에서 이명준의 자리는 없었다. 이명준의 좌절은 곧 개인의 좌절이었다. 모두가 하나 되어 어깨 겯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광장에 개인은 없다. 개인들이 모였으되, 개인은 없는 이 신묘한 판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광장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골목을 서성대는 개인의 자리는 더 좁아든다. 이명준은 그나마 최인훈을 만나 우리에게 화두라도 던져줄 수 있었지만, 최인훈마저 떠난 지금, 개인 곁에는 아무도 없다. 이 스산한 계절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마침,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꿈쩍도 안하던 한국도로공사와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에 합의했다는 소식이다. 민주노총 조합원들과의 합의가 남았기에 반쪽 합의일 뿐이지만, 그래도 진전은 있었다. 이 진전을 이룬 것은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였다. 주목할 만한 성과다. 정치가 자기 역할을 확인하고 모처럼 할 일을 했다.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광장의 함성에 정치권이 화답해야 한다. 계속해서 이렇게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국회는 국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중요한 매듭은 국회만이 풀 수 있다. 광장 문제를 풀고, 이제는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게 정치의 본령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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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는 온갖 사람들이 갇혀 있다. 개중에는 장발장 같은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만, 진짜로 죄질이 나쁜 범죄자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인지 크고 작은 다툼이나 질서위반 행위도 곧잘 일어난다. 질서위반에는 상응하는 벌이 따른다.  

교도소의 징벌은 곱징역이라고 부를 만큼 험하다. 징벌을 받으면 독방에 가두는 금치는 물론, 텔레비전 시청, 신문 열람, 집필, 서신 수수, 실외 운동, 접견 등이 금지된다. 하나같이 수용자에겐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접견 금지를 당하면 천리길을 마다하고 찾아온 늙은 어머니가 자식을 만나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한다. 하루종일 좁은 감방에만 갇혀 있다가 겨우 30분 남짓 햇빛을 볼 기회도 빼앗기게 된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징벌을 받은 수용자는 1만8319명이었다. 직원 폭행처럼 형사처벌을 받는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86건)도 있지만, 가장 많은 건수는 ‘지시불이행’으로 5670건이 발생했다. 지시불이행의 대부분은 ‘입실 거부’로 모두 4580건이 발생했다. 수용자가 자기 방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다 징벌을 당하는 경우가 제일 많은 거다. 먹고 자고 씻는 등 수용생활의 대부분은 감방에서 이뤄진다. 가장 중요한 생활공간인데, 여기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거다.

징벌을 받더라도 감방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건, 감방에서 지내는 게 징벌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징벌로 인한 제약이 많아도 좋다는 거다. 너무 좁은 감방에서 여럿이 함께 지내며 진을 빼는 것보다는 징벌을 받으면 독방에 갈 수 있기에 오히려 좋다는 사람들이 많다. 입실 거부자들은 징벌을 자청하는 사람들이다.

관련 법률은 독거 수용을 원칙으로 제시하면서도(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 제14조), 독거실 부족 등 시설여건이 충분하지 않으면 혼거수용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원칙은 분명하고 일부 예외를 두었지만, 현실의 감옥에선 예외가 원칙이 되었다. 독거는 징벌이나 받아야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입실 거부 사태는 수용자의 잘못이 아니라 법무부, 나아가 대한민국의 잘못이다. 

좁아터진 감방은 감옥에 너무 많은 사람을 가둔 탓이다. 박근혜 정권 때부터 수용자가 급증했다. 살인, 강도, 절도 등의 주요 범죄가 부쩍 줄었는데 수용자는 늘어나는 이상한 현상이 생긴 거다. 이런 현상은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이 넘도록 멈추지 않고 있다. 박 정권 때는 4대악 척결이니 하는 슬로건이라도 내세우며 감옥을 미어터지게 만들었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렇다 할 설명조차 없이 지난 정권의 폐해를 답습하고 있다. 그저 음주운전 등의 범죄에는 가석방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는 등의 포퓰리즘만 돋보일 뿐이다. 정원보다 30% 넘게 가둬놓고도 법무부는 그저 태평하다.

곳곳의 감옥은 사람을 가두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낡았다. 안양교도소는 1963년 준공했다. 56년 된 건물에 수천명을 가두는 건 너무 위태로운 일이다. 잘 지은 아파트라도 30년만 지나면 재건축을 해야 할 텐데, 한국의 감옥은 요지부동이다. 강릉교도소는 49년 전 건물이고, 창원, 제주, 전주, 경주, 홍성, 부산, 공주, 청주, 원주교도소와 부산구치소는 모두 40년이 넘었다. 

상황은 심각한데 대책은 없다. 교정기관이 기피시설이라 지역주민의 반대가 많아 신축이 어렵다는 이야기만 수십년째 반복하고 있다. 서울동부구치소처럼 법원, 검찰청과 함께하는 법조타운 방식이라면, 주민들이 오히려 반길 텐데,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가장 큰 책임을 진 법무부 장관이 감옥의 과밀수용 해소를 위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선 시설을 둘러보기라도 하는지 모르겠다.

백범 김구 선생을 사표로 삼는다는 정치인들이 많다. <백범일지>도 필독서로 꼽히지만, 실제로 읽은 정치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이를테면 감옥에 대한 문제만 봐도 그렇다. 김구 선생이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그가 몸으로 겪은 감옥은 처참했다.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선생은 해방된 조국의 감옥은 일본제국주의와는 달라야 한다는 꿈을 꿨다. “구속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할수록 반대로 수인들의 심성도 따라 악화되어서, 횡령이나 사기죄로 들어온 자라도 절도나 강도질을 연구해서 만기 출옥 후에 더 무거운 형을 받아 다시 들어오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거다. 감옥에 보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거다.

김구 선생은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을)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했다. 체험을 통해 넓힌 새로운 지평이었다.

무릇 감옥은 이래야 한다. 그래야 범죄를 제대로 진압하고, 범죄꾼을 양산하는 악순환도 끊을 수 있다. 나라를 빼앗기고 자신의 몸마저 갇힌 상황이었지만, 선생의 인식은 남달랐다. 몸으로 세상을 배우고 익힌 운동가 특유의 통찰력이 빛났다. 선생이 감옥에 갇힌 건 1910년이고, <백범일지> 상권을 쓴 건 1929년이다. 109년, 또는 9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한국의 감옥은 여전하다. 좀 더 따뜻해졌고 교도관의 매질이 없어졌다는 것 말고 특별히 변한 것은 없다.

법정구속이 늘고, 형사사건에서 자유형을 선고하는 비율도 늘어났지만, 가석방의 문턱은 더욱 높아졌다. 입구는 넓어졌으나 출구는 더욱 좁아졌다. 그래서 과밀수용은 더욱 심각해졌는데, 실효성 있는 대책은커녕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지난 2년4개월 동안 감옥과 관련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갇힌 사람들은 정권교체의 의미를 실감할 수 없었다. 인권변호사가 대통령을 하고 형사법 학자가 법무부 장관을 하는 데도 감옥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장관이 바뀌면 어떨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불안하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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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전. 일단 국면은 경제전쟁처럼 보인다. 일본 아베 정권의 도발에 한국이 대응하는 식으로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대통령부터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2019년은 1919년과 다르다는 결의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기를 기회로 삼자는 다짐도 눈에 띈다. 

아베 정권의 도발에 대해 시민사회는 단호했고 또 지혜로웠다. 일본 국민과 아베 정권은 나눠 봐야 한다며, 서울 중구청이 내건 일본 반대 깃발을 내리게 했다. 보이콧 운동은 민간의 몫이라며 여론을 일으킨 것은 놀라웠다. 시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곧바로 깃발을 내린 중구청의 대응도 좋았다. 꼭 중구청이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보다 성숙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집단지성의 발현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렇다. 이번에는 이겼으면 좋겠다. 아베 정권의 오만한 행패를 묵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싸움에서 이기려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 시작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보장받을 수 있냐는 법리논쟁이었다. 한동안 오락가락하긴 했어도 대법원은 청구권협정과 별개로 개인 청구권은 살아 있다고 판결했다. 국가 사이의 채권·채무관계는 풀었을지 몰라도,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기업에 위자료를 청구할 수는 있다는 거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피해자들의 일본 기업 재산 압류와 매각 절차가 진행되었다. 판결에 따른 민사 집행을 하는 데 행정부의 역할은 전혀 없다. 삼권분립은 민주주의의 대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본의 경제보복은 뜬금없고 가당치 않은 것이다. 반성조차 없는 가해자의 횡포일 뿐이다. 그게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를 염두에 둔 것이든,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정치적 속내 때문이든 상관없다. 전쟁을 일으키고 이웃 나라를 강제 점령해 식민지로 만들어 수탈했던 전범국가가 취할 행보는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 양식 있는 시민들이 분노하고 이번에는 제대로 싸워보자고 벼르는 거다. 

일본 정부는 제국주의 침략에 따른 인권문제를 간단하게 경제전쟁으로 바꿔 버렸다. 이른바 프레임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술책이다. 상대가 프레임을 바꿔 자행한 경제도발에 제대로 맞받아 싸워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대책을 마련하고 또 다른 도발에도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이 싸움이 원래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인권문제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결코 잊어선 안된다. 아니, 단지 잊지 않는 데서 멈춰선 안된다. 경제전쟁의 프레임을 되돌려 가해자가 책임을 지기는커녕 반성도 사과도 없으며, 나아가 객관적 사실조차 부인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내부적으로는 1965년 이후 우리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되짚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이 부족했기에, 피해자들은 법원을 통한 구제라는 우회로를 선택했던 거다. 아쉽게도 지난해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정부 차원에선 별다른 대응이 없었다. 기본적인 인권문제에 대해 미온적이었다. 생존 피해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구체적인 방안을 갖고 보다 신속하게 움직였어야 했다. 

가해자가 반성조차 없고, 엉뚱한 경제보복이나 일삼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비도덕성, 반역사성, 그리고 반인권만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일본과 싸움을 벌이는 한편, 피해자들을 구체적으로 도울 방법도 찾아야 한다. 우리 국민의 피해를 우리 정부가 먼저 걱정해야 하는 당연한 책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야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과거사를 이렇게 푼다는 것도 보여줄 수 있다. 두 나라 사이의 싸움을 지켜보는 여러 나라의 정부와 시민들에게도 한국이 인권문제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대응한다는 점을 확인시켜줄 수 있어서 좋다. 

솔직히 말하면, 인권문제를 두고 일본과 아옹다옹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풍경이다. 일본의 정치지도자 아베 신조는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덕에 정치인이 된 전형적인 도련님이다. 아베 신조는 아버지 아베 신타로가 외무대신이던 시절, 그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아베 신타로가 장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비서를 지낸 것과 같은 방식의 정계입문이었다. 아베 신조는 2021년까지 총리직을 예약해놓았으니, 이대로라면 역사상 최장수 총리가 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유명한 가쓰라 다로 총리의 20세기 초반 기록을 넘어서는 거다.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었을 뿐, 한국에서라면 아베식 성취는 불가능했을 거다. 문재인 대통령의 외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없다. 집안 내력에 따른 후광 따위는 없었다.

두 나라 헌법만 봐도 금세 답을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헌법 제1조는 일본왕이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 규정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평화헌법 조항인 제9조에 이르기까지 제1조부터 제8조까지는 모두 일본왕에 대한 규정들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극단적 대비다. 적어도 국가체제와 민주주의에 관한 한 일본은 한국의 경쟁 상대가 아니다. 일본에는 흔한 국가인권기구도 없다. 일본은 여전히 봉건시대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아베 신조의 직함은 내각총리대신이다. 일본왕의 신하일 뿐이다. 

당장의 경제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인권문제를 풀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지형을 만들 수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가 아니라, 일본 정부는 상상도 못할 새로운 방식으로 싸우는 거다. 우리의 진지한 노력은 일본 시민들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을 거다. 괜히 무시하거나 괴롭혀도 좋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따라 배우고 싶은 부러운 나라가 되는 게 진짜 이기는 거다. 이번에는 제대로 이겨보자.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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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비정규직 때문에 신음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기준으로 친다면 벌써 20년이 넘었다. 당사자와 가족이 아픔을 겪는 것은 물론이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은 양극화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의 계급 분화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건널 수 없는 큰 강을 사이에 둔 것처럼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희망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거다. 희망이 없으니, 한국 사회 특유의 활기도 사라진 느낌이다. 고용 형태의 차이는 꼭 소득만이 아니라, 건강과 수명, 주거와 환경, 교육, 사회적 평판 등 모든 분야에서의 삶의 질을 가른다. 

문재인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부터 해결하겠다고 했다. 모든 비정규직 문제를 한꺼번에 풀 수는 없겠지만, 공공부문부터 모범을 세워 나가겠다는 거다. 공공분야에서 81만개의 좋은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약속도 했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이 한창이던 지난주.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용어부터 잘못이라고 했다. 비정규직이 아니라, 무기계약직이라는 거다. 기한을 정하지 않는 계약직으로 사실상 정년까지 보장되니 비정규직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다수의 비정규직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것은 맞다. 2007년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마련한 이후, 정부는 같은 방향으로 꾸준하게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새로운 이름 말고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화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도 줄곧 이어졌다. 문제는 실속이 없다는 거다. 노동조건이나 삶의 질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무기계약직 노동자들은 “우리는 무기계약직이라는 이름으로 평생 비정규직이 되었다. 또 하나의 계급이 되었다”(강규혁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고 탄식한다. 문재인 정부 역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은 그대로 둔 채, 정규직 전환이라는 허울에만 매달리고 있다. 청와대 상황판에 걸린 정규직 숫자는 늘고 있을지 모르지만, 허울뿐인 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그토록 내세우는 고용안정만 해도 그렇다. 무기계약직 노동자의 신분은 여전히 불안하다. 해고는 쉽고, 해고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공무원처럼 신분 보장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느 부처나 엇비슷한 ‘공무직 및 기간제 근로자 관리규정’을 보면, 무기계약직은 해고, 정직, 감봉, 견책 등 네 가지 징계를 받을 수 있다. 공무원에 대한 징계가 파면, 해임, 강등, 정직, 감봉, 견책 등 여섯 가지인 것에 비하면 두 가지나 부족하다. 게다가 징계를 결정하는 단위도 다르다. 무기계약직 노동자는 해당 기관에서 곧바로 징계를 의결할 수 있다. 관계 공무원들이 모여 결정하면 그만이다. 반면 공무원에 대한 징계는 징계위원회를 중앙기관에 둔다. 징계를 받은 다음의 구제절차도 다르다. 무기계약직도 공무원처럼 재심을 청구할 수 있지만, 재심은 1심 위원 중 위원장을 제외한 위원들만 다른 사람들로 바꾸고 진행한다. 상급 기관에서 재심을 하는 게 아니라, 징계를 의결한 그 기관이 재심도 맡는다. 약간의 형식만 달리할 뿐, 1심 결과가 재심에서 뒤집힐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는 거다. 반면 공무원은 인사혁신처 소청심사위원회에서 재심을 다룬다. 인적 구성은 물론 부처까지 다른 곳에서 다른 판단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규정이 이러니, 무기계약직 노동자는 기관장이나 다른 공무원들에게 밉보이면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다. 최근에 만난 한 무기계약직 노동자의 사례가 꼭 그랬다. 그는 중앙부처 소속으로 10년 넘게 일했지만, 지난달 해고되었다. 그 노동자가 건넨 징계의결서는 읽기조차 민망한 수준이었다. 불화를 조성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갈등관계를 조장했다는 등의 혐의가 잔뜩 적혀 있었지만, 대개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었다. 다른 사람의 생계를 박탈하는 의결서치고는 형식과 내용이 모두 엉망이었다. 

무기계약직에 대한 규정은 공무원들이 만든 것이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는 일정한 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공무원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합리적 구분과 차별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무기계약직의 노동조건은 그야말로 차별적이다. 일단 급여 차이가 너무 크다. 9급 공무원과 비교해도 실질임금은 절반 남짓에 불과하다. 공무원과 달리 승진도 승급도 없으니, 그 차이는 갈수록 커진다. 30년을 일해도 급여는 호봉만 반영되어 고만고만한 수준이다. 게다가 가족수당이나 자녀학비보조수당 등 공무원들이 챙길 수 있는 수당도 받지 못한다. 급여를 받기는 하지만, 이마저 인건비 항목이 아닌 사업비 항목에 편성되어 있다. 예산 편성에 따라 사업비는 얼마든지 줄어들 수도 있다. 노동을 제공하고 받는 임금이 인건비가 아닌 사업비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더 심각한 것은 아예 보수 규정조차 없다는 거다. 공무원연금에도 가입할 수 없다. 임금을 사업비가 아닌 인건비로 편성하는 쉬운 일조차 하지 않는 까닭을 모르겠다. 

대부분의 무기계약직은 공무원이 하기 싫은 일, 부담스러워하는 일을 맡고 있다. 누군가는 꼭 챙겨야 하는 일들이다. 숙련되어야만 가능한 업무가 대부분이고, 대민 접촉 업무도 많다. 그런데도 무기계약직은 정원에 반영되어 있지도 않다. 이런 식의 푸대접은 일상화되어 있다. 

정부 차원의 통일된 규정도 없으니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 것은 어렵다 쳐도, 방향을 제대로 잡고 관련 규정부터 다듬어 차별을 줄여 나가는 것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이 당하는 노골적인 차별을 공공분야에서부터 줄이는 것이다. 그래야 사영 기업들을 견인할 수 있다. 공공부문부터 비정규직 문제를 풀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방향은 옳았다. 문제는 그에 걸맞은 실행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거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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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0.03 23: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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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경찰은 희한하다. 경찰의 임무를 다룬 ‘경찰법’ 제3조에는 ‘치안정보의 수집·작성·배포’라는 규정이 있다. 정보경찰의 임무다. 

문제는 뭐가 치안정보냐는 거다. 보통은 범죄정보를 떠올리겠지만 경찰이 말하는 치안정보의 개념에 범죄정보는 없다. 범죄정보는 경찰청 정보국이 아니라 경찰청 수사국 범죄정보과 같은 곳에서 다룬다. 사이버 범죄정보라면 경찰청 사이버안전국에서, 국제범죄정보라면 외사국에서 다룬다. 범죄정보를 뺀 치안정보라는 게 무엇일까.

사전적으로야 국가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일 텐데, 그 안녕과 질서가 주권자인 시민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다스리는 쪽’, 곧 집권세력 입장에서의 안녕과 질서인 경우가 많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보경찰의 활동은 온통 대통령을 위한 보고서 작성에 맞춰져 있다. 검찰수사로 정보경찰의 민낯이 드러났듯이, 대통령의 사주팔자가 좋아 국운이 상승한다는 식의 유치한 정보보고도 넘쳐난다. 청와대의 요구에 따라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하기도 한다. 대통령 친위세력의 당선을 위해 동향을 파악하고 사전투표소를 염탐하면서 선거판세를 읽기도 한다. 3000명 남짓한 정보경찰은 오로지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해 치안정보를 수집·작성·배포하고 있다. 

경찰 입장에서는 대통령을 위해 일하며 권력의 핵심과 연결망을 만들 수 있어 좋을 게다. 청와대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뭐든 답을 찾아주니 좋을 거다. 

문제는 대통령과 경찰에게 좋다고 시민들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거다. 납세자인 시민이 비용 전부를 부담해야 하는 조직이 주권자인 시민이 빌려준 권한을 이용해 오로지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그저 반민주적인 작태일 뿐이다. 

경찰청은 정보경찰의 역할이 그것만은 아니라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 집회·시위 관리나 신원조사 등을 정보경찰이 맡고 있지만 집회·시위와 관련한 신고 업무라면 경찰서 정보과가 아니라 민원부서가 맡는 게 맞다. 집회와 시위를 하려는 사람들을 위축시킬 의도가 아니라면 분위기조차 비밀스러운 정보과에서 맡을 까닭이 없다. 집회현장에서 정보경찰이 대화를 촉진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도 하겠지만, 그런 일은 원래부터 관련 부처의 몫이다. 괜히 몸값을 올리고 자기 역할을 과장하기 위해 집회현장을 오갈 이유는 없다. 만약 불법행위가 있다면, 수사나 형사 부서가 맡으면 된다. 전형적인 민원부서 일이어야 할 신원조사도 마찬가지다. 뭐라 변명하든 정보경찰의 핵심은 대통령을 위한 정보보고일 뿐이다.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하려면 각계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정보경찰에 의해 걸러지고 다듬어진 정보에 의존하면 더더욱 안된다. 궁금하다면 각계 인사를 직접 만나면 된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전화, 이메일 등 온갖 매개들을 활용하면 된다. 언론보도나 인터넷 등에 귀를 기울여도 좋다. 측근이든 정적이든 상대의 은밀한 움직임까지 알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라면 굳이 정보경찰을 이용할 필요는 없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국가정보원이 국내 정보를 수집하지 않으니 경찰정보가 더 중요해졌다고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대목에서 그렇다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인사검증에 꼭 필요하다지만, 인사검증 자료를 인사혁신처나 관련부서가 아닌 정보경찰에 기댈 까닭도 없다. 범죄 관련 정보를 알고 싶다면, 공직 후보자에게 범죄경력조회를 떼어오라고 주문하면 그만이다. 사영기업도 다들 그렇게 한다. 굳이 필요하다면, ‘세평(世評)’ 정도일 텐데, 믿거나 말거나 식의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평판을 듣기 위해 3000명이나 되는 정보경찰을 운영할 필요는 없다. 만약 꼭 필요한 기능이라면 인사혁신처, 굳이 중복 검증이 필요하다면 국무총리실에 관련 기능을 두면 된다. 

정보경찰의 보고서는 일선 정보관이 작성한 다음 경찰서 정보과 - 지방경찰청 정보부 - 경찰청 정보국으로 이어지는 지휘 라인을 통해 이중삼중의 점검과 보안을 거친 후 청와대 보고용으로 거듭난다. 일제강점기의 특별고등경찰 이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았던 노하우가 있으니 정보경찰이 만든 보고서를 읽는 재미도 괜찮을 거다. 그 재미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대통령이 싫어할 만한 보고는 일선 정보관들부터 기피한다.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양념 치듯 가끔 넣겠지만, 결국은 대통령의 결단만이 나라를 구한다는 식의 보고서가 잇따를 뿐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노동조합도 없고 기본적인 민주시민교육조차 받은 적이 없는, 오로지 정권에 대한 충성만을 거듭한 사람들에게 기댈 일은 없다. 

대통령과 청와대는 정보경찰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면 안된다. 정보경찰의 보고서야말로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인의 장막일 뿐이다. 청와대 직원들이 정보보고서 읽는 재미에 빠져 아무리 그 필요성을 역설한다고 하더라도 넘어가면 안된다. 정보경찰을 악용하지 않을 거란 막연한 자신감도 답은 아니다. 

정보경찰이 망치는 건 대통령만이 아니다. 경찰에도 득이 될 건 없다. 일부 고위직이야 정보경찰을 통해 청와대와의 연결망을 갖게 되어 좋을 거다. 계급정년이 있는 팍팍한 현실에서 승진을 거듭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 수도 있을 거다. 몇몇 정치경찰에게 좋은 일이 10여만명의 경찰관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다. 

경찰은 법 집행기관이다. 종사자도 많고 대민접촉의 폭도 넓고 하는 일도 많다. 그래서 언제나 공정해야 하며 법 집행기관으로서의 권위도 필요하다. 그러니 제발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한 뻔하고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쫓아다니는 일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법률 개정도 필요 없다. 대통령만 결심하면 된다. 앞으로는 정보경찰이 만든 보고서를 읽지 않을 테니, 만들지 말라고 지시하면 된다. 할 일이 없어진 정보경찰 부서는 폐지하고 정보관들은 민생치안 현장으로 시민들을 위한 역할로 돌려보내면 된다. 정보경찰을 없앴을 때의 부작용이나 문제는 하나도 없다. 정보경찰을 그대로 둔 채 진행하는 경찰개혁은 공염불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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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권 조정안이 신속처리법안에 포함되자 검찰이 갑자기 포문을 열었다. 검찰총장은 외국 방문을 취소하고 급히 돌아왔다. 검찰은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진행했던 사법개혁 논의를 정면에서 거부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이 행정안전부 장관과 함께 정부 차원의 논의를 계속했고,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차원에서의 논의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부 차원이든 국회 차원이든 검찰이 의견을 개진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뜬금없는 반발이다. 법무부 장관과 청와대 민정수석까지 나서서 검찰의 주장을 경청하겠다고 했지만, 반발을 멈추지 않고 있다. 어떤 관료도 이렇게까지 오만한 적은 없었다.

반발하는 내용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 동원인지 자원인지 모르겠지만 검찰 주변 인사들은 언론 기고 등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을 거론하며, 수사권 조정이 되면 이승만 정권 때처럼 경찰파쇼가 될 거라 호들갑이다. 때맞춰 정보경찰의 폐해가 검찰발로 잇따라 터져 나오고, 두 명의 전직 경찰청장 등 네 명의 전·현직 고위직 경찰관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기도 하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경찰은 짐짓 점잖게 대응하나 논리 전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검찰 수사과정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이 꽤 많다는 점을 강조한다. 박종철 열사의 비극은 1987년의 일이지만, 검찰이 고문치사사건을 일으킨 것은 2002년이라며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파고든다. 검찰이야말로 국정농단의 주역이라는 점도 부각하고 있다.

양쪽의 말을 다 듣고 나면, 검찰과 경찰의 수사는 조금 낫고 못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엇비슷해서 견줘볼 필요도 없을 만큼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마디로 도긴개긴이다. 시민들의 인식도 다르지 않다. 둘 다 나쁘거나 둘 다 믿지 못하겠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지난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검찰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2.0%, 경찰을 신뢰한다는 것은 2.7%에 불과했다. 약간의 차이야 오차범위 내의 일이다. 믿음직하지도 않고 곧잘 국민을 괴롭히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던 기관들이지만, 그래도 일은 시켜야 한다.

형사사법절차는 국가형벌권을 행사하기 위한 절차다. 형벌의 목적은 범죄자에게 고통을 주겠다는 거다. 그래서 형사사법절차는 정밀해야 하고,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인권보장에도 철저해야 한다. 자칫하면 상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히기도 한다. 비록 사회정의를 위한 일이라지만,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한 일이니, 형사사법절차는 한마디로 무서운 절차다. 신체의 자유를 빼앗는 징역형은 물론, 돈을 빼앗는 벌금형도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수사는 형사사법절차의 시작이지만, 기소와 재판의 전제다. 수사가 없으면 기소도, 재판도 없다. 그래서 수사를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논쟁 중인 수사권이란 말은 그래서 부적절하다. 수사는 어떤 기관이 함부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나 권한이 아니라 책무에 가깝다. 누군가를 혼내주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일은 무거운 짐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검찰과 경찰은 이 무거운 짐을 서로 떠안겠다고 다투고 있다. 애국적 열정이 넘쳐서는 아닐 게다. 외국 순방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돌아와서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그 배짱은 바로 수사가 책무가 아니라 권한, 그것도 막강한 권한이기 때문이다.

수사권 조정 문제는 어떻게 풀면 좋을까. 의외로 답은 검찰총장 문무일이 내놓았다. “형사사법제도의 개선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주적 원칙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단다. 기자간담회에서 했던 말이다. 의도와 맥락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답은 맞혔다. 바로 민주주의다. 수사권 조정을 해야 하는 까닭도, 조정하는 내용도 모두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분산시키며 상호 견제를 통해 균형을 잡자는 거다. 효율성으로만 친다면, 자기가 잡아다 자기가 재판하는 사또 재판이 최고다. 지금 검찰은 사또 역할을 하고 있다. 재판은 법원의 몫이지만, 수사도 검찰, 기소도 검찰, 공소 유지와 형 집행도 검찰이 한다. 검찰은 형사사법절차의 핵심적 대목에서 막강한 권한을 독점적으로 휘두르고 있다. 형사사법은 법원의 역할이 오히려 부차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검찰의 독무대가 되었다.

촛불혁명 이후 시민들이 이구동성으로 가장 시급한 개혁과제로 검찰개혁을 꼽은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선거구제 개편과 함께 신속처리법안으로 지정한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법안은 모두 검찰개혁을 위한 방편들이다. 수사권 조정은 검찰에게 집중된 권한을 일부라도 경찰에게 넘기고 상호 협력관계에서 견제와 균형을 잡아보자는 거다. 지금의 법률안으로 검찰개혁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첫걸음이라도 떼어보자는 거다.

자치경찰이나 정보경찰 개혁이 전제조건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게 꼭 필요한 개혁과제라는 것에는 동의하나, 수사권 조정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수사권은 일을 잘했거나 개혁을 잘했다고 주는 보상이 아니다. 핵심은 검찰의 독점적 권한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자는 데 있다.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없어지면 경찰 수사의 자율성이 커진다며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경찰이 수사한 결과는 모두 검찰에 송치하기에 검찰이 경찰 수사를 통제하는 것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는다. 수사지휘권 대신 보완수사 요구권과 시정조치권을 새롭게 얻기에 별반 달라지는 것도 없다. 게다가 검찰은 경찰의 모든 수사기록을 들여다볼 수도 있고 경찰관의 비위가 의심된다면 직무배제나 징계를 요구할 수도 있다. 검찰의 직접 수사권도 그대로이기에 문제가 있다면 얼마든지 자체적으로 들여다볼 수도 있다.

물론 지금 법안대로 통과될지도 모를 일이다. 국회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겠다. 바라건대, 입법과정에서 보다 풍부한 논의가 있었으면 좋겠다. 국회가 시민의 요구, 민주주의의 일반 원칙만 기억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없다. 수사권 조정은 무엇보다 검찰개혁 차원에서 하는 일이다. 검찰과 경찰이 때론 협조하고 때론 경쟁하면서 수사를 제대로 해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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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운동이 있었지만 독립운동은 질적으로 전혀 달랐다. 헌신과 희생이란 말을 자주 쓰지만 그 말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독립운동가들은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 또는 인권운동과 달리 어디든 기댈 구석조차 없었다. 자신은 물론 가족의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연일 승승장구하던 제국주의 일본과의 싸움은 승산 없어 보였고 독립은 몽상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풍찬노숙도 끝없이 반복했다. 조선 최고의 갑부였지만 나라를 빼앗기자 만주로 떠나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이회영의 형 건영은 상하이에서 굶어죽었다. 당장의 불행은 물론 자식들의 미래까지 불행해질 게 뻔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에 나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돈이 유일신의 자리를 차지한 천박한 자본주의에 길들여지고 실용주의가 어떤 이념보다 앞선 자리를 차지하는 요즘의 우리에게는 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희생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일제에 빌붙은 족속들이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호의호식을 이어가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헌법 제121조의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훼손해도 흔한 윤리위원회에 회부되는 일은 없는 세상이다. 원칙도 염치도 인간의 품위도 돈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는 세상이기에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는 더욱 각별하다. 독립유공자를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그분들 덕에 해방도 건국도 가능했다. 대한민국이 이룬 모든 성취의 근원에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이 있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동안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를 모시는 방식은 너무 편협하고 옹졸했다. 제일 먼저 이념의 잣대로 갈랐다. 사회주의 계열은 유공자로 모실 수 없다는 거다. 독립의 공을 어떤 실천을 했는가를 두고 따지는 게 아니라, 이념의 색깔이 어땠는지 묻고 따지는 거다. 유치한 냉전적 아집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겨우 이 엉터리 기준을 벗어나려 하고 있다. 해방 전 사회주의 활동은 용인하겠다고 했다가, 지난해가 되어서야 해방 후 사회주의 활동에 대해서도 적극 검토하겠단다. 입장 변화는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단서가 없는 건 아니다.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하지 않은 경우만 검토대상이란다.

밀양 사람 김원봉. 일본 제국주의가 그에게 내건 현상금이 김구보다 많았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탁월한 독립투사였다. 제국주의엔 치명적이었고, 우리 겨레엔 영웅이었다. 누구보다 치열한 독립투쟁을 했고 빛나는 공적이 있지만, 그는 문재인 정부의 보훈 정책에서도 배제되었다. 국가는 지금껏 그를 외면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독립에 공이 있는지 아닌지를 따져 공이 있다면 예우하는 게 독립유공자 지정의 핵심인데, 해방된 이후의 행적을 두고 독립운동의 공마저 평가하지 않겠다는 거다.

북한정권과의 연계 여부가 독립유공자 지정의 기준이라는 것은 정당성도 없거니와 법률  근거도 없는 엉터리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은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공헌한 독립유공자”에게 합당한 예우를 하기 위한 법률이다. 법률이 정한 기준은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이다. 다들 인정하듯, 김원봉은 해방의 그날까지 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인데, 독립유공자로 모시지 못할 까닭이 없다. 핵심은 간단하다. 1945년 8·15를 기준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면 그만이다.

의열단장 김원봉은 마치 독립운동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 같았다. 열여덟 나이에 독립투쟁에 헌신하고자 중국으로 망명을 했다.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겠다며 의열단을 조직했다. 정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행동했다. 7년 동안 23차례의 공격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의 독립투쟁은 황푸무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의용대, 민족혁명당, 대한민국 광복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적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숨가쁠 만큼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해방의 그날까지 김원봉의 항일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임정 요인으로 귀국한 다음에도 김원봉의 고군분투는 멈추지 않았다. 여운형과 뜻을 같이하며 좌우합작을 위해 애썼다.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여하였으나, 북에 남았다. 김원봉은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고 했다. 뜻을 함께했던 여운형이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는 등의 모욕을 당한 다음이었다.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기도 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아버지는 유폐되었다 굶어죽었고, 네 명의 형제와 다섯 명의 사촌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자신은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중화민국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혐의였다.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남에서는 노덕술 따위에게 ‘빨갱이 두목’으로 몰렸고, 북에서는 자유진영과 내통한 국제간첩이 되었다. 남과 북 모두에 버림받았다.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김원봉에 대한 건국훈장 추서 가능성을 언급한 이후 김원봉은 다시금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독립운동가 서훈 문제가 자유한국당 특유의 색깔론과 만나면서 정치적 쟁점이 된 것이다. 독립운동마저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정치 공세가 안타깝지만,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문제와 답은 간명하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에 공적이 있으면 법률과 절차에 따라 그 공적을 평가하면 된다. 공이 있으면 상을 주고, 잘못이 있으면 벌을 주는 게 국가의 기본이다. 대한민국이 기본이 바로 선 국가였으면 좋겠다. 독립운동가조차 기억하지 않는 국가에 미래는 없다. 

경술국치와 같은 비극은 다시 없겠지만, 누군가에게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기대하려면, 지금 이 문제를 잘 풀어야 한다. 원칙대로만 하면 된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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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사왜곡마라 2019.04.21 0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원봉이는 단순월북이아님 625전쟁당시 국가검열상國家檢閱相,국방상(國防相)으로 남침의 깊이관여합니다 fact체크-> https://www.unamwiki.org/w/%EB%B6%81%ED%95%9C_%EC%B4%88%EB%8C%80_%EB%82%B4%EA%B0%81



    서울대학교국사학과 조교의 김원봉실체fact체크->
    1 http://www.ilbe.com/6893431720

    2 http://www.ilbe.com/6901524475

    전범625재판소에 세워야할인물인데 문재앙이는 훈장서훈줘야한다고 개소리지껄임 문재앙이 존경한다고 수백억들여 5월달에 중국공산당이후원하는기업과 합작한 의열단출신 공산당 미화드라마 `이몽` 개봉박두

  2. 기자 역삭왜곡마라 2019.04.21 0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쓴 니할애비가 공산당에 죽음 이딴거 못쓰고 625 전쟁중에 공산당에 학살당한 500만 동포를 생각한다면 이런글 못쓴다

    김원봉가족이 김원봉 북한행적때문에 피해본것만 눈에 들어오지?

    이젠 김일성이도 훈장주겠다는거냐? 그게 진짜목표일듯

    김원봉이는 노덕술떄문에월북한게아닌 지향점이 같은 공산당 동지가 많은 북한에 간거임 김원봉의 남파간첩 총지휘했다는 경향신문기사에나왔고 6.25전쟁중에는 김일성에게 직접 전쟁잘했다고 훈장까지받았다

    우리가 왜 친일파를 비판하죠? 친일파가 민족을 선택한게아닌 결국 민족보단 일본의권력을 선택했기떄문아닙니까? 김원봉이도 마찬가지에요 김원봉은 친일파처럼 그의 대상은 일본권력이 아닌 그는 공산당권력을 자신의민족보다 위의두고 선택한겁니다 그래서 공산당이 아니면 625 전쟁으로 자신의 민족에게 총질할수있는거였겠죠 진정 민족을생각했다면 625전쟁중에 공산당 검열상 노동상 최고 고위직을 수행할수없는겁니다 그는 다시한번 말하지만 민족대신 공산당권력을 선택했고 누렸습니다

  3. 지나가던이 2019.06.06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원봉이 독립투사였다고 한국에서 그를 독립유공자로 처리해줘야 하나요?
    북한에서 유공자 대우 해줘야죠. 그는 이념을 그쪽으로 정했으니

  4. ㅇㅇ 2019.06.07 1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 전쟁으로 우리나라에 크나큰 상처를 준 인물을 독립운동했다고해서 유공자로 인정하라고?
    헛소리를 길게도 늘어놓으셨네.

    북한에서나 유공자로 인정하라고 하세요. 우리나라에서 왜 해줍니까?

  5. ㅇㅇ 2019.06.07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 전쟁 이야기는 쏙 빼놓고 이딴 개소리를 써놓은거 보면 의도가 다분하다 진짜.

  6. 문갱이 2019.06.07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북한빨갱이중에 독립운동가가 한둘이냐? 그건 그들이 알아서할일이지.왜 남한에서 북한놈들까지 신경쓰냐?

형벌은 범죄자의 죗값을 고통으로 치르게 하는 거다. 가장 확실한 고통은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감옥은 자유를 제한하여 고통을 주도록 설계된 제도이니 갇힌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고통을 받는다. 신체의 자유 제한에는 가족 관계의 단절, 생계 박탈, 사회적 평판의 추락 등 따라붙는 고통 또한 만만치 않다.

지난해 기준으로 하루 평균 5만4774명이 감옥에 갇히는데, 재판을 받고 있는 미결구금자는 1만8867명으로 전체 수용자의 34.5%다. ‘불구속 재판’이라는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면 상당한 숫자를 줄일 수 있다. 예산도 줄이고, 피고인의 방어권도 보장하며 진짜 범죄자인지를 가리기 전에 형벌을 주는 왜곡도 막을 수 있다. 구속은 증거를 없애거나 도망칠 것 같은 사람을 잡아두기 위한 이례적 절차이지만, 현실에서는 유무죄 판단보다 더 중요한 표지가 되었다.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나쁜 범죄자, 기각되면 죄가 없거나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된다. 간편한 도식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수사기관들은 구속에만 매달린다. 자기들의 수사성과를 과시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이런 욕구를 통제해야 하는 법원에는 거센 여론과 맞설 배짱 같은 것이 부족해 보인다. 구속영장을 발부하지만, 억울하면 나중에 재판받을 때 얼마든지 소명할 수 있을 거라며 스스로 부담감을 덜어내는 식이다.

형사사건의 핵심은 감옥에 가느냐 아니냐로 갈리지만, 이게 꼭 공정한지는 늘 의문이다. 재벌들에게 적용된다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법칙’이 보여주듯, 감옥행이 죄질에 따라 갈리는 것도 아니다. 당장 김학의 사건 등 여러 낯 뜨거운 사건들만 해도, 결국은 누구는 힘이 있어서 다른 누구는 어떤 배경이 있어서 감옥에 가지 않았고, 기본적인 수사조차 피해갔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특권층과의 유착에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이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유독 흉악하거나 매우 위험해서 반드시 사회와 격리해야 하는 사람들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당장 중요 범죄의 발생 건수 자체가 줄고 있는데, 감옥은 연일 과밀수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만 해도 그렇다. 지난 10년 동안 살인, 강도, 절도 등의 범죄로 감옥에 갇힌 사람의 숫자는 꾸준히 줄어들었다. 범죄 자체가 줄어드니 수용자도 줄어드는 당연한 결과다. 2013년 절도사건으로 갇힌 사람은 4650명이었지만, 2017년에는 3858명으로 줄었다. 놀라운 성취다. 반면, 사기, 횡령 등 경제사범으로 구금되는 사람들은 같은 기간 5024명에서 7630명으로 크게 늘었다. 결국 경제적 여건 때문에 갇히는 사람들만 잔뜩 늘어난 셈이다.

법정 구속이 빠르게 늘고 있는 것도 과밀수용의 원인이 되었다. 2013년에는 연간 7532명이었지만, 2017년에는 1만2378명이었다. 법의 준엄함을 보여준 것은 좋지만, 범죄 발생 건수 등에서 별다른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고 주요 범죄 발생은 큰 폭으로 줄어드는 상황에서 유독 법정 구속만 늘고 있다는 것은 좀체 이해하기 힘들다. 각급심의 재판기간이 계속 늘어나는데 법원이 구속재판을 고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입구가 활짝 열린 감옥 문제, 특히 과밀수용 때문에 교정교화든 재사회화든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출구 전략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만, 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감옥에 들어가는 건 쉽지만, 나오는 건 쉽지 않다. 감옥에서 나오는 길은 재판에서 무죄를 받거나, 정해진 형을 다 마치고 만기 출소하는 경우, 아니면 가석방을 통해 조금이라도 일찍 나오는 경우 등이 있다.

가석방은 출구 전략의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만, 무엇보다 교도소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감옥생활은 더딘 시간과의 싸움이 핵심이다. 그러니 수용자 입장에서 가석방은 기대볼 만한 유일한 희망이다. 교정당국 입장에선 확실한 유인책이기도 하다. 질서를 잘 지키거나 사회에 나갈 준비를 열심히 한다는 차원에서 자격증이라도 따면, 교육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교도소 운영에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교정당국이 수용자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당근이다. 징벌을 주거나 심한 경우 추가 범죄로 단죄하는 등의 채찍을 쓸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회도 채찍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감옥에 가두는 것은 형벌을 주는 것이지만, 세상 어떤 나라도 단순한 응보적 형벌만으로 감옥을 운영하지는 않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사회로 돌아가야 하는 만큼, 다시는 범죄로 빠지지 않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할 방도를 마련하는 게 교정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가석방은 교정활동의 실질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

가석방 여부를 정하는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는 수백명의 심사자료를 한꺼번에 검토할 뿐이다. 얼굴을 맞대고 수용자의 재활의지를 직접 묻고 확인하는 일은 없다. 음주운전, 마약, 성범죄 등 가석방 제한 사범을 정해두는 식으로 일괄 처리할 수밖에 없다. 법원, 검찰, 학계와 교정관계자가 참여하는 지금의 틀을 유지하되, 각 교도소마다 가석방심사위원회를 두고 실질적인 심사를 해야 한다. 수용생활을 하면서 어떤 준비를 했는지, 사회에 나가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 믿을 만한 근거는 뭔지 묻고, 직접 답을 듣는 가석방심사가 되어야 한다.

감옥에 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대폭 줄이고, 나오는 사람들의 수는 대폭 늘려야 한다. 그저 가둬두는 것만으로 우리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석방을 활성화해서 수용자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디든 희망이 없는 곳은 그저 지옥일 뿐이다. 진짜 위험한 사람들은 그 위험이 해소될 때까지 격리하는 게 맞지만, 의지를 갖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감옥이야말로 선택과 집중이 절실한 공간이다. 보내는 일에만 집중하고, 나오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 고이고 썩게 된다. 지금 한국의 감옥 현실이 그렇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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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의 무책임한 언동, 근거 없는 모략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쏟아내는 섬뜩한 말조차 매번 반복하는 통과의례라 여길 수도 있다. 집권을 목표로 서로 겨루는 사람들이니 정당 사이의 다툼과 간극은 일상이라 해도 좋다. 서로 다른 의견을 빗대면서 공동체를 발전시킬 지혜를 구할 수도 있고, 갈등 자체가 민주주의의 하나의 과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막말을 쏟아내더라도, 아무리 정쟁을 일삼는 사람들이라도 결코 넘지 않아야 할 선같은 게 있다. 그런 점에서 5·18민주화운동은 일종의 성역이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요구가 무참히 짓밟혔고, 죄 없는 시민들이 잔혹하게 학살되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에 이어 군인들만의 세상을 계속 이어가고픈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반국민·반국가 범죄가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김진태·김순례·이종명 등이 뭐라 핑계를 대든 그들은 5·18의 참담한 고통을 송두리째 모욕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여태까지는 육사 출신 지만원이 그런 일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그저 개인에 불과한 지만원과 국회의원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대통령의 거수기 역할이나 하던 국회가 민의의 전당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민주화투쟁의 성과였다. 5·18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민주화투쟁 등 끊임없는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이 맺은 결실이었다. 그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주최한 행사에서 5·18을 모욕하는 말이 쏟아진 것이다.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은 시민들의 희생과 고통, 그리고 심지어 죽음까지 모욕했다.

한국당 지도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죄송하다면서도 출당과 국회의원 제명에 대해서는 남의 당 일이니 간여하지 말라거나, 유감스럽다면서도 5·18 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두 명을 그대로 추천하겠다고 몽니를 부리는 것도 비슷했다. 형식적인 요건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후보들을 추천해놓고는 청와대와 기싸움을 벌이겠단다. 원래 그 자리는 김진태의 추천으로 지만원을 앉히려던 곳이었다.

한국당은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5·18 문제가 거추장스럽고 또 부담스러울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당 스스로도 거듭 확인하듯, 1990년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이 진짜 원조다.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으로 이름만 바꿨을 뿐이다. 한국당의 뿌리는 전두환·노태우의 민주정의당만이 아니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학살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함께 만든 정당인 셈이다.

얼마 전 당사에 걸린 부친 사진을 떼어달라고 했던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의 말처럼, 한국당에서 민주투사 김영삼의 족적은 찾아볼 수 없다. 김영삼은 누구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던 1983년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단식을 시작했다.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저항은 23일이나 이어졌다. 예전에 ‘상도동계’라 불렸던 사람들이 여전히 현역 정치인으로 뛰고 있지만, 농성장에 잠깐 앉아 있는 것조차 ‘릴레이 단식 농성’이라며 ‘단식’이란 말만 빌려올 뿐, 민주주의 진전을 위한 김영삼식의 노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전두환·노태우를 감옥에 보내고, 5월18일을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하고 광주 망월동 묘역을 국립묘지로 지정하는 등의 노력은 모두 김영삼 정권 때의 일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을 쉽게 폄하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숭고한 역사로 자리매김한 것은 오히려 김대중보다는 김영삼의 공이 컸다.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국가의 중요한 이념으로 자리매김하고, 하나의 원칙으로 삼은 것도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의 정치적 자산을 계승한다는 한국당은 김영삼이 세운 국가적 원칙을 간단하게 뒤집어버렸다. 민주주의 근간을 훼손하고 헌법정신을 파괴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고 있다. 왜 한국당은 김영삼의 길이 아니라, 전두환의 길을 따르려는 걸까. 장점은 계승하고, 단점과 과오는 극복해야만 앞길이 열린다는 간단한 셈법조차 외면하고 왜 극단을 좇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태극기부대가 앞길을 열어줄 거라 기대하는 걸까.

10년 전 우리 곁을 떠난 바보 김수환은 생전에 광주 때문에 아파했다. 그에게 ‘5월 광주’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참극’이었다.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력 진압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다”며 울분을 토했다. 광주의 5월은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면서 “광주에 내려가 시민들과 함께 피를 흘리며 싸웠더라면 그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무릇 사람의 마음은 대체로 이렇다. 실제로 추기경 김수환이 “광주로 내려가 몸으로라도 계엄군을 막”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한 마음, 그 답답한 심경이 그랬다. 대개 5월 광주를 알게 된 사람들의 마음이 그랬다. 광주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자괴감 같은 안타까움이었다. 굳이 거명하자면, 김진태·김순례·이종명, 그리고 김병준과 나경원까지 한국당 사람들이 건드린 것은 그 마음이었다. 그래서 이번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가 사람이고자 한다면, 광주 학살과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그리고 한국당에 분명하게 요구한다.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람들, 민주공화국의 기본이념조차 부정하는 사람들이 다시는 국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당은 국민에게 사죄하고 세 명의 국회의원을 제명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있어야 할 까닭은 전혀 없다. 국회 스스로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직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국민적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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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들었다 놓은 사람은 나폴레옹 3세였다.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제2제정의 황제가 되었지만, 삼촌 나폴레옹 1세의 후광 말고는 달리 설명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파리가 프랑스의 심장이라며 ‘파리 대개조’라 불리는 도시개발을 추진했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17년 동안 도시개발을 추진했다. 좁고 굽은 골목길은 넓고 곧게 바꿨고, 상하수도까지 말끔하게 손봤다. 핵심은 보나파르트 왕가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었다. 교차로마다 자기 동상을 세우고 그 중심에는 삼촌의 위업을 과시하는 개선문을 두었다. 곧게 뻗은 길은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보는 것 같은 바리케이드 시가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민중들의 시위에 대응하고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는 게 속셈이었다. 파리 대개조로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는 파리에서 쫓겨났고 부르주아만의 도시가 되었다. 물론 지금의 파리는 아름답다. 파리 대개조의 후속 작업이 20세기 초까지 이어졌기 때문이고, 작가만이 아니라 문화부 장관으로도 탁월했던 앙드레 말로 등의 부단한 노력이 함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렇게 수도는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쥐고 있는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사람이나 새로운 권력을 꿈꾸는 사람은 뭔가 근사한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서울도 그렇다. 산업화 시대의 서울시장 중에는 별명이 ‘불도저’였던 사람도 있었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직전 서울시장이었던 오세훈은 한강에 인공섬을 띄웠고, 광화문광장을 개발했다. 오세훈의 전임 이명박은 말할 것도 없다. 서울광장을 만들어 잔디를 깔고 청계천 공사로 자신의 대선 출마를 위한 가도를 깔았다. 겨울철엔 스케이트장으로 쓰는 서울광장도, 오세훈이 만든 광화문광장도 그렇다. 급한 일이 전혀 없었는데도 서울시장들은 마치 뭔가 홀린 사람들처럼 일을 재촉했다. 

아고라 때문에 광장은 흔히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나, 대개의 광장은 권위적 통치자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독재자들이나 별로 민주주의자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광장에 집착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지금은 공원이 되었지만 군사독재시절의 여의도에는 커다란 광장이 있었다. ‘5·16광장’은 박정희의 군사반란을 기념하는 광장이었다. 200만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엄청난 규모의 쓸모는 관급 반공궐기대회였다. 

촛불집회 같은 역사적 사건이 도드라져 보여서 그렇지, 사실 광화문광장도 시민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광장은 오히려 시민들을 동원하는 권력의 공간이었다. 광장에 많은 시민을 모을 수 있는 힘을 시민들이 갖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실에선 정치권력과 자본권력만이 가능한 일이다. 월드컵 축구 중계나 유명한 아이돌 공연, 또는 그들이 ‘국가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행사를 치를 때를 제외하고, 광장은 그저 순찰을 도는 경찰관들이나 소수의 관광객들만의 공간일 뿐이다. 

광장은 대개 권위주의적 통치의 산물이다. 중국의 톈안먼(天安門)광장은 30년 전 톈안먼사태 때만 잠깐 열렸던 곳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진압한 다음, 광장의 쓸모는 국가 차원의 열병식 따위에서나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호찌민은 위대한 지도자였겠지만, 그가 묻힌 주변은 그저 공산당만을 위한 광장이 되었다. 베트남의 여러 성취는 놀랍지만, 집회와 시위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평양의 김일성광장은 말할 것도 없다. 인민들이 광장에서 멋진 춤을 추며 놀기도 하지만, 그건 북한식 집단주의 원리처럼 하나가 전체를 위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20세기 산물이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의 광장은 모두 19세기의 나폴레옹 3세가 건설한 저 위대한 파리의 방식을 좇았다. 널찍한 광장, 위대한 인물을 기리는 공간, 그리고 일상적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싶은 권력의 욕구가 함께하는 광장은 20세기에 만들었든, 심지어 21세기에 만들든 모두 19세기적 발상일 뿐이다.

그래서 광화문광장을 지금보다 3.7배나 넓히겠다는 서울시장 박원순의 발상은 생뚱맞다. 국가상징공간이니 잘 가꾸겠다면서도 설계작품의 이름은 ‘딥 서피스’란다. 굳이 번역하자면, ‘깊은 표면’인데, 책 제목 ‘오래된 미래’처럼 기발하거나 가치지향적이지도 않은 그저 멋 부리기에 불과하다. 

오세훈이 새로 개발한 광화문광장의 준공식이 열린 건 2009년 8월의 일이다. 10년도 안되어 광화문광장을 다시 뒤집어 버리겠다는데, 그래야 할 절박한 사정은 어디에도 없다. 오세훈은 광화문광장 공사를 1년2개월 만에 끝냈다. 박원순도 내년에 공사를 시작해 그다음 해인 2021년에 완공하겠단다. 시장 임기를 마치기 전에 속도전을 하겠다는 거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똑같은 광장을 넓히고 새로 만드는 것은 전형적인 후진국형 자원 낭비다. 

이젠 더 이상 서울을 광장 따위로 다른 나라와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정작 비교해야 할 것은 서울시민들의 삶이다. 서울시민이 얼마나 인간답게 사는지가 핵심이어야 한다. 책방과 도서관은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 미세먼지와 폭염에 고생하는 시민들의 건강권은 어떻게 보장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쿠바 아바나에서 식량난을 극복할 때 했던 것처럼 가능한 모든 곳에 나무를 심어 미세먼지 농도를 조금이라도 낮추고, 여름의 열기를 다만 2~3도라도 낮추는 노력이 시급하다. 겉보기만 번지르르한 도시가 도시민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다. 

박원순은 변했다. 이런 이야기도 귀담아듣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일에든 반대는 있기 마련이라며 간단히 퉁 치고 넘어갈 정도로 배포도 커졌다. 얼마 전 인터뷰에선 자기 정치를 하는 게 나쁘냐고 되묻기도 했다. 제발 박원순은 박원순다워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특장을 지워버려서 이제는 박원순다운 게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대선에 나가고 싶어도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삽질을 잘해서 얻어지는 자리가 결코 아니다. 그렇게 대통령이 된 사람은 이명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박원순이 왜 이명박의 길을 따라가려는지 모르겠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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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에 이목이 쏠린 곳은 국회였다. 유치원 3법은 어찌되는지, 김용균씨의 참담한 죽음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있을지 가슴을 졸여야 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회의장 앞에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호소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기준을 확립하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을 조성하여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을 유지하고 증진하자는 것이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이 세계 최악의 산업재해 국가가 거듭날 계기를 만들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만약 이 법이 개정되어 산업재해 사망이 줄어든다면, 그건 온전히 김용균과 어머니 덕분이다.

그동안 산업재해를 줄이려는 노력은 그저 무의미한 구호에만 그치곤 했다. 노동자가 알아서 조심하라는 투였다. 안전모를 꼭 쓰고 각종 안전장비도 잘 챙겨서 산업재해를 피해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을 하청·재하청 업체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만 돌리는 위험의 외주화가 만연한 상황에서 각자 알아서 주의만 기울인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산업안전을 위해 주의를 당부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구조를 바로잡지 않고 주의만 당부하는 건 산업재해의 원인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노동자에게 전가하고픈 자본의 고약한 심보가 반영된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교과서는 자아실현 운운하지만, 누구에게나 노동은 먹고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일에 목숨을 걸지는 않는다. 하나뿐인 목숨을 걸 정도로 무모한 사람도 없다. 노동자가 주의를 기울이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목숨 부지하기 어려운 고약한 산업현장의 구조다.

12월10일 밤. 김용균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참변을 당했다. 그날은 마침 세계인권선언 제70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인권의 생일날, 인권은 저 깊숙한 탄가루 속에 처박혔다.

태안화력발전소는 한국서부발전이 운영하는 공기업이다. 여기에도 낙하산이 잔뜩 내려앉았다. 상임감사와 비상임이사는 노무현 정권 시절 청와대 행정관이 맡고 있다. 비상임이사는 한 달에 한 번 회의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연간 3000만원을 받는다. 김용균이 기본급 165만원에다 연장, 휴일, 야간 수당을 다 합해서 받은 돈은 월 211만원이었다.

김용균의 죽음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고맙게도 경향, 서울, 한겨레가 1면에 보도했다. 그렇게라도 젊은 넋을 달래고 싶었던 게다. 조선, 동아가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것과 크게 달랐다. 역시 신문이라고 다 같은 신문은 아니다.

그리고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와 가족들이 싸움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싸움의 선두엔 어머니가 있었다. 김용균씨의 어머니는 자기 자식은 그렇게 보냈지만, 다른 자식들의 목숨은 지켜야 한다며 싸움에 나섰다. 어머니는 빈소를 지키면서도 집회나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도 했고, 언론에 출연하기도 했다. 국회를 찾아 농성 아닌 농성도 했다. 어머니의 피눈물 덕에 세상은 아주 조금 움직이려 한다.

돌이켜보면 매번 이런 식이다. 어디선가 문제가 터진다. 문제가 터진다고 매번 여론의 주목을 받는 건 아니다. 심지어 누군가 죽었고 어머니가 통곡한다고 관심을 기울이는 세상도 아니다. 젊은이의 죽음, 어머니의 절규, 그리고 언론보도 등 몇 가지 극적요소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면, 참혹한 죽음마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 채 묻히고 만다.

세월호의 참극이 마라도 해상에서 침몰한 선박의 전원 구조로 이어진 건 고마운 일이지만, 매번 이런 극단에만 기댈 수는 없는 일이다. 1인당 소득 3만달러와 세계 10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나라가 이런저런 변수에 기대어 공동체의 진로를 가늠할 수는 없다.

방법이 없을까. 당연히 있다. 가장 확실한 대안은 노동조합에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아주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여전히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겨우 10% 남짓, 복지국가들의 90%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노동조합이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만 산업재해나 노동조건에 있어 노동조합만큼 확실한 안전장치는 없다. 노동조합이 활성화되고 노동조합이 힘을 갖는다면, 그만큼 산업재해는 줄어든다. 노동자 입장에서 노동조합은 가성비 좋은 안전장치가 된다. 조합비를 내고 노조의 이런저런 교육이나 행사에도 참여해야 하지만, 그런 약간의 비용과 수고의 결과는 엄청나다. 노동조합은 노동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느냐, 아니 한국적 현실에서는 사느냐 죽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도 협동조합이나 협회 등을 통해 자기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혼자서만 잘산다는 것은 사회구조가 엄연한 사회에서는 허망한 일일 뿐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주거비, 교육비, 통신비 등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구조 때문이다. 이 구조를 깨뜨리고 살 만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조직된 시민의 힘밖에는 없다. 깨어 있는 시민이, 조직된 시민이 세상을 바꾼다. 아니 세상을 바꿀 유일한 근거는 깨어 있는 시민, 조직된 시민이다.

시민사회단체도 활성화되어야 한다. 더 많은 시민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활동가들의 처우는 개선되어야 한다. 문제도 있고, 사실 답도 다 나와 있다. 문제는 그 문제를 지혜롭게 푸느냐 아니냐에 있다. 더 이상 극단적인 사건사고에 기대고, 어쩌다 주어진 비상한 상황에 기대는 방식으로는 곤란하다. 세상을 밝게 만드는 것이 누군가의 참혹한 죽음이어선 더더욱 곤란하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몫이 있다면,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단체에 가입해서 열심히 활동하는 것일 게다. 이건 우리의 삶을 지탱해줄 튼튼한 진지를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게 기본이고, 여기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곧 새해다. 모두들 뭔가 다른 새해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변화는 대통령의 위대한 결단이나, 정치인들의 훌륭한 리더십 같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참여하는 시민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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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을 우려먹은 이번 정부가 한 게 뭐가 있나.” 국회의원 최연혜의 말이다. KT 통신대란을 꼬집은 말이다. “국가기간시설은 전시나 테러의 1순위 대상이고, 특히 북한의 1순위 타격 대상” 같은 말도 덧붙였다. 이렇게 세월호에다 북한 테러까지 들먹이면 그 말을 경청하긴 쉽지 않다. 꼭 언어의 품격을 따지자는 건 아니다. 자유한국당 사람들이 갑자기 교양인이 되어 한 놈만 팬다는 천박한 이야기를 멀리하고, ‘야지·겐세이·뿜빠이’ 같은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비판할 자격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각종 범죄를 주도하거나 방조한 잘못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의 의정활동도 신뢰할 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 여전히 사립유치원을 감싸고, 예산심사에선 ‘비정’하기만 했다.

최연혜만 해도 그렇다. 지금은 우파 정당에 몸담고 있지만, 시작은 달랐다. 자유한국당의 어법을 빌리면 좌파의 돈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왔다. 유학비용을 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은 지난해 이맘때 한국의 촛불시민에게 인권상을 줬던 기관이다. 유학생 처지에서야 비용을 댄다면야 좌우를 가릴 형편이 아니지만, 그 다음 행보도 오락가락의 연속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유학을 마치고 철도대학 교수로 지내던 최연혜를 전격 발탁한 것은 노무현 정권이었다. 대통령 인수위와 열린우리당 정책연구원에도 참여했고, 철도공사 부사장에다 철도대학 총장까지 맡았다. 2012년 19대 총선 때 한나라당 후보로 지역구에 출마한 최연혜는 3위로 낙마했지만, 보란듯이 철도공사 사장으로 금의환향했다. 자신을 믿어준 박근혜 정권에 대한 충성은 대단했다. 철도파업이 일어나자 4356명의 노동자를 한꺼번에 직위해제했다.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전부였다. 철도공사 사장으로 일하면서 KT처럼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통한 인건비 줄이기에만 골몰했다. 정규직 숫자를 줄이는 만큼 철도 사고는 잦아졌다. 노조에 대한 강력한 대응으로 정권의 신임은 두터워졌고, 2016년 총선에선 비례대표 자리가 주어졌다.

이런 사람의 비판이 집권세력에게 뼈를 깎는 각성의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그냥 흘려버리기 딱 좋은 조건이다. 세월호에 빗댄 대목에선 마음이 상하고, 기회만 되면 반복하는 안보장사엔 말문이 막힌다.

그래서 문제다. 야당은 따끔한 야단도 치면서 집권세력이 긴장을 풀지 않도록 비판하고 견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야당은 비판자로서의 기본적인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다. 너무 낡았고 기본적인 애민의식, 애국심도 찾아보기 힘들다. 기껏해야 너나 잘하란 비판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의 요직 진출은 성황이나, 막상 시민사회는 6월 항쟁 이후 가장 심각한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시민사회를 과잉 대표했던 자들이 근사한 자리를 꿰차는 동안, 정작 그들의 기반은 허물어져가고 있다. 심지어 집권세력에게 섣부른 비판은 삼가라는 충고나 받는 곤궁한 처지가 되었다. 연일 집권세력의 공격을 받는 민주노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집권세력은 오늘도 편안하다. 20년을 넘어 더 오랜 세월도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감추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윤창호의 죽음이 불과 얼마 전인데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음주운전을 하고, 경호실의 30대 사무관은 술에 취해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행패를 부린다. 곳곳에 낙하산을 내려 보내는 행태는 적폐세력을 꼭 닮았다. 이번엔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사무장까지 챙겼다. 일이야 어차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법이지만,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는 법이다.

통신대란으로 서울은 엉망이 되었다. 국가기능이 마비되면서 진짜배기 고통은 약자, 소수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유·무선 전화와 인터넷, 텔레비전까지 모두 먹통이 된 상황은 예리한 칼처럼 약자를 파고들었다. 고통은 새로운 고통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KT의 고객응대업무는 진작 자회사로 분리되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경영진의 잘못을 대신 감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집권세력은 평온하기만 했다. 서울시장 박원순은 고향 일정을 다 마치고 사건 발생 12시간이 넘어서야 현장을 한 번 둘러봤다. 대책회의는 다시 12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리곤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중국 총리도 만나고 여러 도시 책임자들과 교류도 해야겠지만 그건 대구, 충남 등 6명의 시·도지사에게 맡겨도 좋을 일이었다. 서울시민에게 필요한 것은 잠재적 대권주자가 아니라 고통받는 시민의 곁을 지키는 시장이라는 기본조차 잊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건전한 비판세력이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당장 서울시의회만 하더라도 전체 110명 중 민주당이 102명이다. 야당의 목소리는 애써 귀 기울여도 듣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인가. 민주당은 벌써부터 대선 전초전을 치르고 있다. 친문과 비문을 갈라치는 건 예사고, 대선 예비주자들을 놓고 벌이는 싸움은 점입가경이다. 집권여당의 가장 뜨거운 이슈는 적폐청산, 개혁입법 통과가 아니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되었다. 당장의 권력은 물론 미래 권력까지 어떻게 해보겠다는 속셈들이다. 신경쓸 만한 비판세력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배부른 집안싸움을 맘껏 벌이는 거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오로지 대통령의 선의와 집권세력의 호시우보에만 기대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여태까지의 정권들이 숱하게 보여주었다. 역대 정권들도 대개 비슷한 경로로 망했다. 철옹성 같은 지지율도 단박에 무너지고,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야유를 보내는 일은 현실정치에선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긴장이 풀어진 정권이 무너지는 건 일도 아니다. 여태껏 누린 지지율, 그 호시절은 어쩌면 적폐세력 때문에 얻은 반사이익일지도 모른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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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단순히 안보와 치안만을 담당하는 시대는 진작 끝났다. 이젠 국민의 삶 구석구석에 국가의 역할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헌법도 국가운영의 틀을 제시한다는 차원보다는 국민의 삶의 원리를 규정한다는 의미로 거듭나고 있다. 독재시절에는 그저 대통령을 몇 번이나 할 수 있다거나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하겠다는 독재자의 의지만 담긴 것처럼 여겨졌지만 이젠 그런 시대가 아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70조는 다만 하나의 기준을 제시할 뿐이다.

국가는 헌법 전문에서 다짐하는 것처럼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기 위한 가장 구체적이며 실효성 있는 기구다. 어쩌면 유일한 대안이며 안전장치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가 국가의 역할과 닿아 있다. 아파트 값이 폭등하면 곧바로 국가, 구체적으로는 국가운영의 책임을 맡고 있는 집권세력에게 비난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미세먼지 때문에 일상이 힘들어지면 관련 장관의 무능을 성토하는 것도 당연하다. 개인의 안전, 나아가 행복까지 국가가 책임져야 하며, 국민을 위한 국가의 역할은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하지만 국가가 최고의 규범이 정하는 대로, 또는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작동했던 것은 아니다. 2014년 4월 세월호가 침몰하는 순간, 국가는 없었다. 마치 국가기능이 마비된 것처럼 죽음의 행렬을 방치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세월호를 절대 잊을 수 없다며 4년 반이 지나도록 ‘세월호 배지’를 달고 다니며, 이게 국가냐고 묻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싱가포르에서 불쑥 꺼낸 이야기 때문에 부동산 시장이 요동쳤다. 박 시장이 “여의도와 용산을 통으로 개발하겠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서울 부동산 값이 폭등했다. 서울이 온통 부동산 전쟁터로 변하자, 시민들은 이게 국가냐고 물었다. 정부는 도대체 뭘 하냐는 거다. 여당 소속의 서울시장이 국토교통부 등 정부부처와 논의조차 없이 불쑥 꺼내든 카드로 부동산 값 폭등을 부채질하는 게 도대체 말이 되냐는 비판이었다. 박 시장은 부동산 폭등은 예측하지 못했다며 통개발 프로젝트를 7주 만에 철회했지만, 가장 오랫동안 서울시장이었던 사람이 내놓은 변명치고는 옹색했다.

세월호든 부동산이나 미세먼지든 쟁점의 핵심은 국가의 역할에 있다. 국가가 역할만 제대로 했다면 겪지 않아도 될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고통들이 너무 많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늘 답답한 형국이었지만, 최근 사이판 태풍 사태에서 보여준 정부의 대응은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 만큼 좋았다. 사이판에 들이닥친 태풍으로 공항이 폐쇄되고 여행객들은 발이 묶였다. 사이판을 찾은 사람들은 휴양지에서 끔찍한 공포에 직면해야 했다. 이들을 위해 국가는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정부의 대응은 신속하고도 정확했다. 태풍으로 공항에서의 정상적인 이착륙이 불가능해지자, 군용기를 보내 신속한 이송작전을 벌였다. 군용기로 여러 차례 사람들을 옮기는 과정도 좋았다. 노약자들부터 우선적으로 이송했는데, 국가다운 품격 있는 조치였다. 신속하고 정확하되, 품격까지 갖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모처럼 국가다운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박수가 아깝지 않은 대목이다. 그런데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의 강의를 듣다가 정부가 중요한 대목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이판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은 비단 대한민국 국민만은 아니었을 거다. 그런데 우리 정부의 대응은 우리 국민만을 위험지역에서 안전지역으로 옮기는 것에서 멈췄다. 국민들은 세금을 내는 주권자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도 그게 당연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만약 한국 정부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신속·정확은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치자.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 정부는 지금의 한국 정부처럼 신속하게 군용기까지 파견해서 자국민들을 실어 나르곤 할 일 다했다며 사이판을 떠났다면, 그 섬에 남겨진 한국 국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물론 국가의 기본적인 구실도 하지 않는 한국 정부를 원망했겠지만, 자기 나라 국민만 챙긴 그 나라 정부에 대한 원망도 만만치 않았을 거다. 이런 게 바로 인지상정이다.

자기 국민을 먼저 챙기는 건 그 나라 정부의 당연한 책무겠지만, 여력이 닿는다면 국적을 불문하고 도와줘야 한다. 인도주의의 정신이 바로 그렇고, 인류공영에 이바지하겠다는 헌법적 다짐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민국의 품격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아쉽지만, 우리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국가의 역할은 오로지 자기 국민을 구하는 데서만 멈췄다.

국가는 다른 국가와의 경계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다. 높은 담이나 철책으로 국경을 만드는 까닭도 거기 있다. 한국의 휴전선 철책은 이스라엘의 분리장벽과 더불어 가장 극단적인 경계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몰기 위한 분리장벽과 남침으로 참담한 전쟁을 겪었던 우리의 철책은 물론 질적으로 다르지만, 그 쓸모와 규모는 엇비슷하다.

대한민국이 가끔씩이라도 경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150만명이나 되는 난민을 받아들인 독일처럼은 못할지언정 구조의 손길이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골고루 내밀면 어떨까. 경계를 단박에 허무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 경계를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거다. 이찬수 교수에 따르면, 이건 경계를 실선(實線)이 아니라 점선(點線)으로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면 경계가 헐거워진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겠고, 우리가 왜 세금을 내냐며 반발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렇지만 경계가 헐거워진 만큼 외부와의 소통도 자유로워지고, 안과 밖을 넘나드는 일도 훨씬 쉬워진다. 꽉 닫힌 경계 속에서 우리가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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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해설자 이영표는 아내가 분만할 때 ‘주님이 주신 고통’을 느끼라며 무통주사를 거부했단다. 똑똑해 보이는 사람이 왜 유아적 신앙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다. 성서를 잘못 읽은 탓이고, 전형적인 신앙의 왜곡이다. 그래도 이영표는 아내에게 출산의 고통을 강요하지는 않았단다. 폭력이나 위협도 없었고, 다만 권유했을 뿐이고 아내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단다. 부부 사이의 일이니 어쩌면 남이 뭐라 할 영역이 아닐 수도 있다. 아내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진짜 심각한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차별을 조장하고 혐오를 선동하는 사람들이다. 극단적 혐오세력의 뿌리가 보수 개신교에 닿아 있다는 최근 보도들은 충격적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에스더 기도운동’은 그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공허한 구호에 멈추지 않았다. 북한, 이슬람, 동성애라는 구체적인 적을 상정해놓고, 끊임없는 공격을 감행했다. 차별과 혐오를 일삼았고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공장 역할을 했다. 민주개혁세력에 대한 공격도 빠뜨리지 않았다. 2012년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에 대한 가짜뉴스들을 만들며 박근혜 당선, 문재인 낙선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였다. 정권 창출의 과실을 챙기는 데도 열심이었다. 박근혜가 당선되자 국가정보원에 우파 활동가를 양성하겠다며 43억원의 예산지원을 요구했다. 이들은 인터넷 기사에 댓글 다는 연습을 시키는 ‘미디어 선교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에게서 예수 정신을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예수가 제시하는 황금률, 곧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너 자신이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거다. 누구도 혐오 대상이 되길 바라지 않고, 가짜뉴스에 시달리고 싶은 사람도 없다. 기독교의 기틀을 만든 바오로는 코린트 공동체에 보낸 편지에서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하겠다며, 그리스도인의 첫째 덕목으로 사랑을 꼽고 있다. 신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더라도, 온갖 신비를 꿰뚫어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한다. ‘에스더 기도운동’ 같은 극단적 세력들은 성서 구절 한 글자도 귀히 모신다지만, 이런 황금률에 대해서는 철저한 유체이탈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 자기들끼리 예배 보고, 자기들끼리 축복과 은혜를 나누던 이들이 갑자기 인터넷 전사가 되고 거리 집회에 쏟아져 나오는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서울광장에서 개신교도들이 태극기,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기까지 흔들며 통성기도를 하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 까닭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바로 불안감이다. 한국은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의 종단들이 종교 활동 인구를 삼분하고 있는데, 어느 종단 할 것 없이 위기를 맞고 있다. 기세 좋은 교세 확장은 옛날 일이 되었다. 종교 인구는 전반적으로 감소했고, 특히 40대 이하의 종교 인구는 급감했다. 한마디로 장사가 안되는 상황이다. 장사는 안되지만 목회자들은 여전히 넘쳐난다.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도 교도소에서 통신 과정만으로 목사가 되었듯, 누구나 약간의 돈만 내면 목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곳도 꽤 많다. 최소한 먹고살 기반은 있어야 하는데, 종교 인구가 줄고, 목사는 늘면서 이게 만만치 않은 일이 되었다. 이럴 때 교회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면 된다. 누가 봐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 까닭을 찾아보니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어서 그랬다면 선교는 저절로 된다. 물론 삶을 온전히 걸어야 하는 일이니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선교활동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자기 영역이라도 확고하게 지키고 싶을 게다. 이럴 때 흔히 내세우는 게 ‘적’ 개념이다. 가장 오래된 전략은 반공주의다. 북한괴뢰도당이 언제 남침할지 모른다며 시민들을 윽박지르고 인권침해를 일삼았던 박정희의 모델이다. 무슬림이 들어오면 한국이 모두 이슬람화되고, 여성들은 남성들의 성폭력에 견딜 수 없게 될 거란 가공의 공포를 심어주고 확산시키는 거다. 이런 전술은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적개심도 마찬가지다. 지금 동성애를 ‘치료’해주지 않으면 모두들 에이즈에 걸려 죽어버릴 것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런데 반공주의는 물론, 일종의 블루오션으로 선택한 반이슬람, 반동성애도 극단적 개신교도들을 더 고립시킬 뿐, 선교는 물론 자기 세력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지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면 태극기 들고 반대 시위야 나가겠지만, 남북화해협력시대가 열리면서 북에 대한 극단적 증오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을 거다. 반이슬람도 그렇다. 자기 신자들도 무슬림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해외여행도 다닐 테니, 실제로 무슬림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배려도 잘하는지를 보게 될 터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악담도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 또한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으니, 곧 멱살 잡은 손이 부끄러워질 게다.

문제는 비록 일부라지만, 이 극단적 광신도들은 대화나 설득,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거다. 헌법의 원칙을 말하는 것도 무망하다. 게다가 이들은 이미 사람을 혐오하고 사람을 파괴하는 범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형사처벌이 능사는 아니지만, 이제는 국가형벌권을 꺼내 들어야 한다. 가짜뉴스를 만들고 조직적으로 유포하는 사람들, 정치적인 결탁을 통해 제 뱃속만 채우는 사람들을 그냥 둘 수는 없다. 누군가를 해치라는 선동, 의도가 뻔한 거짓말을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다. 종교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지만, 신성불가침의 성역은 아니다. 그 자유라는 것도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보장할 수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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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경북 영천역에서 여성의 치마 속을 불법촬영하던 남성이 붙잡혔다. 현행범이었다. 범인은 육군 대위, 육군 3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들을 가르치는 교수다. 한국 육사에다 미국 육사까지 나온 ‘인재’였다. 이런 경우 일벌백계가 답이다. 가해자를 엄벌에 처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평등 교육, 성폭력 예방 교육 등을 강화했어야 했다. 하지만 3사관학교는 거꾸로 움직였다. 조직, 더 정확하게는 조직의 책임자인 지휘관의 앞날을 걱정했다. 이들에게 급선무는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피해자와의 합의가 중요했다. 사건을 감추고 파장을 줄이는 게 관심의 전부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일을 도맡은 사람은 범죄자 대위의 직속상관인 대령이었다. 피해자와의 합의가 급한데, 이런 일에는 여성이 나서는 게 제격이라며 소령 계급의 여성 장교에게 이 일을 맡겼다. 가해자의 친누나 행세를 하면서 피해자와 합의하라는 거다. 상관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해야 하는 군대지만, 그건 전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목숨을 걸 때의 이야기이고, 그 명령이 정당했을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부당한 지시, 범죄를 은폐하는 모략까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친누나를 사칭해 대신 합의에 나서라는 지시까지 따를 수는 없었다. 그냥 군인도 아닌, 장교를 양성하는 교수들이 이럴 수는 없었다. 3사관학교의 교훈처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올바르게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관이라고 사관생도들에게 가르쳤던 교수의 선택은 분명했다. 고심 끝에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 육군 소령 차성복. 육군 3사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의 고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령의 ‘지시’를 거부한 이후, 차성복은 당연한 것처럼 조직적 왕따를 당했다. 대리 합의를 종용하던 대령은 남자 같으면 때렸을 거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때리는 대신 다양한 보복이 뒤따랐다.

상급자의 보복은 가혹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근무평정을 낮게 주는 것이다. 대령은 차성복에게 ‘열등’ 평정을 했다. 이 때문에 현역 복무 부적합 심의까지 받게 되었다. 심의 결과는 복무 적합으로 나왔지만, 심의를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강의를 빼앗아 버렸다. 갑자기 차성복이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킨다는 문제제기가 쏟아졌다. 평소 품위가 없고, 언행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성을 성추행했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부대 회식 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성 소령의 허벅지를 만졌다는 거다. 부대 안 회관에서의 회식은 문제의 대령이 주관한 회식이었다. 차성복이 대령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남성 소령을 성추행했다는 거다. 피해자라 자처한 소령은 차성복의 뒤를 이어 학과장이 된 사람이었다. 성추행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자, 남성 소령은 허벅지를 몇 번 툭툭 쳤다고 진술을 바꾸기도 했다. 성추행을 했다든지, 언행이 성차별적이라든지 하는 고발들이 이어졌다. 모두 대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다음의 일이었다.

강제로 전역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학과장 자리에서 쫓겨났고, 강의도 빼앗겼다. 사무실도 아무도 없는 빈방으로, 때론 휴가 간 사병의 자리로 강제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게 싫으면 나가라는 뜻이다.

도저히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절차를 밟아 억울함을 호소했다. 차성복의 호소에 대한 육군본부와 국방부의 반응은 기대와는 너무 달랐다. 문제의 대령에게 취한 조치는 ‘서면 경고’가 전부였다. 대리 합의를 지시하면서 폭언이나 협박을 하지 않았고, 합의를 종용한 것도 학교의 위신 추락을 막기 위한 의도로 인정된다는 이유였다. 군대라는 조직에서 대령이 소령에게 뭔가를 지시할 때, 폭언이나 협박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부드러운 말투로 상의하듯 말해도 된다. 가장 분명한 위계 조직에서 ‘부대를 위해 하는 일’에 폭언이나 협박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다. 차성복은 감봉 2개월 징계를 받았다. 마치 덫에 걸린 것 같았다. 차성복이 받은 감봉 2개월 징계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성추행이야 혐의를 벗었고, 나머지 징계 사유도 평소 언행에 품위가 없다는 주장뿐이었다. 이건 애초 사건의 발단이었던 불법촬영 범죄자에 대한 처리와 비교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그 성범죄자에 대한 군 검찰의 처분은 기소유예였다. 범죄 혐의는 인정되나 정황을 참작해 기소하지 않겠다는 거다. 국민을 지키라는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은 현역 장교가 여성의 치마 속을 촬영하는 범죄를 저질렀는데, 어떤 참작할 만한 정황이 있는지 모르겠다. 군대가 경찰, 검찰, 법원 조직을 따로 운영하는 까닭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기소하지 않았으니, 어떤 형사적 처벌도 없었다. 물론 징계를 받기는 했다. 처분은 감봉 3개월. 차성복과는 딱 한 달 차이다. 이쯤 되면 그냥 대놓고 봐주겠다는 거다. 게다가 범죄자는 3사관학교를 떠나 소속 부대를 옮겼다. 그가 옮겨간 곳은 남들이 그토록 선망한다는 한미연합사령부다. 그 범죄자도 군을 떠나면 보국훈장을 받아 국가유공자가 되고, 죽으면 국립묘지에 묻힐 것이다.

희한한 것은 성범죄자 대위, 대리 합의를 지시한 대령, 그리고 그 대령의 뒷배가 되었던 장군까지 모두 육사 출신이라는 거다. 우연의 일치일까.

차성복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군대에서 여성은 어떤 존재일까? 차성복은 현역군인 신분으로 프랑스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실력자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범죄를 무마하는 데 호출되었고,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가혹한 보복을 당하고 있다.

지난 6일은 마침 여군 창설 제68주년 기념일이었다. 국방부는 ‘여군 역량 발휘를 위한 제반 여건 보장’과 ‘여군의 양적·질적 성장 기반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앞으로는 GOP나 해안 초소 등에 대한 여군 보직 제한 규정도 폐지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생도를 교육하는 일, 프랑스어학을 강의하는 교수마저 여성이 할 수 없다면, 도대체 여군의 자리는 어디인가.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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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번째 시민참여형 개혁기구는 경찰청이 만든 경찰개혁위원회였다. 새 정부 출범부터 경찰개혁위원회 출범까지 달포밖에 걸리지 않았다. 구성도 남달랐다. 위원들은 모두 외부 인사였다. 경찰관이나 전직 경찰관이 위원으로 참여하는 일은 없었다. 고위직 경찰관들은 갑자기 낯빛을 바꿔 개혁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처구니없고 속은 쓰렸지만, 그것도 촛불의 성과라 여기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개혁성과였다. 경찰개혁위원회는 모두 30건의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다행히 어지간한 개혁안은 두루 담아냈다. 2005년 남영동 보안분실(예전의 대공분실) 폐쇄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던 전국 각지의 보안분실들이 모두 폐쇄된다. 서울만 해도 홍제동, 옥인동, 신정동, 장안동, 신촌 등지에 보안분실이 있다. 정권 차원에서 눈여겨보는 시국사범들이 경찰서가 아닌 분위기부터 살벌한 보안분실에서 잔뜩 위축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 이상한 일은 앞으론 없게 되었다. 정보분실도 사라진다. 의경들의 노동시간은 최대 주당 45시간을 넘지 않아야 하고,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휴식 기회를 보장받고, 일주일에 한 번씩 외출도 가능하게 된다. 영창제도는 이미 사라졌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경찰관들도 더디지만, 노동기본권을 보장받기 시작한다. 당장 노동조합을 설립할 자유가 보장되어야 마땅하나, 일단은 직장협의회부터 시작한다. 남성 위주의 조직인 경찰청에서 적극적인 성평등 정책도 실현한다. 당장 성평등정책관부터 외부 인사를 채용했고, 적극적인 여성 우대 정책을 인사에서부터 펼치고 있다. 여러 경찰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검찰, 군대, 국정원, 감옥 등 인권침해와 관련한 논란이 많은 곳에서도 다양한 개혁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생각처럼 속도가 나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환영할 만하다. 인권분야에서 구체적인 진전이 있다면 그보다 반가운 일은 없다.

경찰개혁위원회가 낸 개혁방안 중에 ‘시민에 의한 민주적 외부 통제기구 신설’이라는 게 있다. 만약 수사와 기소가 분리되어 경찰이 실질적으로 수사권을 행사하게 된다면, 훨씬 힘센 경찰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우의 부작용과 우려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다. 영국(잉글랜드, 웨일스)의 IPCC(Independent Police Complaint Commission, 독립적 경찰 비리민원조사위원회)를 모델로 시민적·민주적 통제기관을 만들자는 거다. 명칭은 ‘경찰 인권·감찰 옴부즈맨(또는 위원회)’이라고 붙였다. 1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오로지 경찰만 감시하는 기구다. 경찰관의 법령 준수 여부를 감찰하고, 위법 부당한 행위가 드러나면 경찰청에 징계를 권고하거나 경찰관의 범죄사실을 직접 수사할 수도 있다.

영국의 IPCC는 법률 개정으로 IOPC(Independent Office for Police Conduct)로 바뀌고 위상과 업무도 예전보다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없다. 경찰과 전혀 다른 독립적 조직이 경찰을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경찰의 잘못을 시정한다는 게 핵심이다.

문제는 아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기구가 이미 존재한다는 거다. 바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다. 인권위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별도의 전담 감시기구가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인권위에 대한 기대가 적다는 거다.

인권위의 위상은 어디가 바닥인지 모를 지경으로 추락해버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인권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대통령 특별보고를 부활시키고, 정부 부처에 인권위 권고 수용률을 높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는데도 인권위 위상이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인권위 설립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로 탄생한 김대중 정부는 국가인권기구 설립이라는 그동안의 염원을 현실화했다. 입법, 사법, 행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 인권기구는 김대중의 대선 공약이었고, 그 공약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이행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설립과 동시에 조직의 기반을 닦은 인권위는 노무현 정부 때 여러 가지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라크 전쟁 파병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등 인권위가 주도한 쟁점이 많았다. 한마디로 시끌벅적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인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명박 정권은 위상을 추락시킬 방도를 고민했다. 법 개정이 여의치 않자, 위원장 등 지도부를 바꿔 위원회 성격을 변화시켜갔다. 정권의 의도대로 인권위의 위상은 추락했고 누구도 인권위를 자신의 인권을 지켜줄 호민관으로 여기지 않았다.

가장 큰 잘못은 2009년 7월부터 2015년 8월까지 6년 동안 인권위원장을 맡은 현병철이 저질렀지만, 지금 위원장인 이성호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꼭 현병철과 이성호만의 잘못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 즉 상임위원, 비상임위원 그리고 사무처 직원들도 공범의 혐의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현병철 체제에 저항한 일부가 있었지만, 임기가 다 끝나갈 때쯤 사임한다든가 진정성을 믿기 어려운 대목도 많았다. 그렇게 인권위는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혀져 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인권위가 바뀌었는지 뭘 어떻게 고쳤다는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지난 정권과 달리 비교적 민감한 인권의제에 대해 의견을 내는 일도 간혹 있지만, 그건 이미 쟁점화된 사안들에 대한 뒷북이었을 뿐이다. 인권위가 의제를 설정하고 논의를 주도하는 일은 없었다. 설립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인력과 예산이 부족하다는 공염불만 외우며 진정사건 처리 때문에 힘들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온갖 인권문제가 터져 나오는 지금도 인권위는 조용하기만 하다. 그래서 인권위는 지금 악플조차 별로 없는 무플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관료들에겐 무플이 훨씬 좋을 게다. 월급이야 꼬박꼬박 나오는데, 굳이 논란에 휩싸여 일감을 늘릴 일도 감정을 상할 필요도 없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오늘도 인권위는 조용하기만 하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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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딸의 갑질이 시작이었다. 회의 자리에서 유리컵을 던지고 막말을 했단다. 범죄 혐의는 특수폭행이다.

다음은 엄마였다. 딸보다는 혐의가 많았다. 공사현장 작업자, 운전기사 등에게 폭행과 폭언을 했단다.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세 번째로 아빠가 수사 대상이 되었다. ‘가장’의 존재감인지 이번엔 좀 더 죄질이 무거워 보였다. 횡령, 배임, 탈세 등이었다. 첫딸은 땅콩회항을 일으켰고, 아들은 아빠가 주인 노릇하는 대학에 부정 편입학까지 했단다. ‘범죄 가족’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게 생겼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죄질이 얼마나 나쁜지는 살펴봐야겠지만, 가족 모두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은 좀 따져봐야 할 일이다. 특히 엄마에게는 폭행 등으로 한 번, 가사도우미 문제로 한 번, 합해서 검찰이 두 번이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모두 네 번의 영장 청구가 있었고, 결론은 모두 기각이었다.

얼핏 보면 조씨 일가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당연해 보인다. 그저 재벌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부를 갖게 된 사람들의 행태가 너무 고약했다. 사회적 책무는 고사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마저 저버리고 불법행위를 일삼았으니 엄정(嚴正)하고도 단호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맞다. 무릇 모든 범죄에는 죗값이 따라야 한다. 재벌가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게 바로 정의다.

그러나 범죄자에게 묻는 죗값은 딱 죄를 진 만큼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 경찰과 검찰은 법정이 열리기도 전에 사실상 여론 재판을 해버렸다. 단지 범죄 혐의를 의심하는 단계였는데도 범죄 사실은 물론, 범죄와 별 관련 없는 일까지 언론에 알렸다. 조씨 일가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알려주는 게 마치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인 양 굴었다. 애먼 사람들이 누명을 쓴 건 아니었지만, 벌주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다 망신 주고 과잉형벌을 남발했던 옛날의 인민재판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구속영장 청구다. 세 사람에게 네 번의 영장 청구. 어쩌면 네 번으로 영장 청구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씨 일가에게 반복적으로 영장을 청구하는 검찰은 마치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가 속의 특전사와 닮았다. 법률전문가로서의 양식이나 법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구속은 “피고인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형사소송법 제70조)가 있고, 피고인이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거나,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 때에 할 수 있다. 구속할 때는 범죄의 중대성과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 등도 고려해야 한다.

구속은 형사사법 절차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피의자, 피고인이 도망치거나 증거를 없애면 죄를 물을 수도, 죗값을 치르게 할 수도 없기에 마련한 부득이한 절차다. 하지만 많은 경우 형사사건에서의 핵심은 구속이냐 불구속이냐에 달려 있다. 구속이 곧 처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속은 남발하면 안되는, 사실은 이례적으로 적용해야 할 절차다. 그래서 형사소송법은 “피의자에 대한 수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함을 원칙으로 한다”(제198조)고 천명하고 있다. 이 원칙은 ‘준수사항’으로 따로 정해두고 있다. 불구속이 원칙이니 그 원칙을 따르고 좇으며 지키라는 것이 법의 명령이다.

그가 누구든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도록 하고, 감옥에 보내는 일은 재판을 해 본 다음에, 법원의 판결에 따른 형벌이어야 한다는 거다. 이게 원칙이지만, 이 원칙을 지킬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도망치거나 증거를 없앨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구속하라는 거다.

조씨 일가의 범죄들이 형사소송법이 정한 불구속 수사 원칙을 깨뜨릴 만한 것이었는지, 그 깊은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예외 없이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재벌 일가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검찰은 악질 재벌을 단죄하는 정의의 수호신쯤으로 비칠 수도 있다. 시민들의 박수를 받을 수도 있고, 재벌 일가를 구속해서 정의를 확립하라는 시민적 요구와 짝하기에 부담도 없다. 하지만 구속영장을 기각해야 하는 법원은 치도곤을 당한다. 영장 전담 판사의 이름이 검색어 상위를 차지하고 신상이 털리기도 한다. 검찰 입장에서는 이런 게 바로 꽃놀이패다. 영장청구권은 검찰에만 있지만, 그 권한을 아무렇게나 써도 검찰 입장에서는 잃을 게 없다. 모처럼 다수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을 게다.

아무리 고약한 사람이라도 그가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국민 모두가 갖는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재벌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약간 떨떠름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은 지켜야 한다.

미국 연방대법관 홈스가 옹호하려 했던 사상의 자유가 우리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를 뜻하는 것처럼, 보편적 인권은 그가 누구인지를 따로 묻지 않아야 한다. 갑질이나 일삼는 재벌 피붙이에게도 똑같이 공평하게 적용해야만 법이 정의 구현의 수단으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조씨 일가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들만큼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숱한 사람들은 검찰의 마구잡이 영장 청구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재벌가 사람들조차 저런 대접을 받는데 일반 시민들은 오죽할까. 여론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비싼 변호사를 살 수도 없는 시민들은 크든 작든 형사사건에 연루되면 당장 감옥에 갇힌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원칙은 언제나 어떤 경우나 꼭 지켜야 한다. 불구속 수사 원칙도 마찬가지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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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의 투표율은 ‘역대급’이었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을 심판하자는 민심은 더불어민주당의 압승, 한국당 등의 참패로 이어졌다. 한국당 입장에서는 그래도 대구·경북은 지켰다고 자위할지 모르나 대구·경북 지역의 균열도 만만치 않다. 이대로라면, 어디서든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이 민심을 통해 정확히 드러났다.

그동안 한국당, 바른미래당 등의 야당들은 그야말로 딴 세상 사람들 같았다. 역사적인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폄훼하고, 국민이 요구하는 개혁마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민심을 거스르며 자기들만의 성에 갇혀 살았던 셈인데, 그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지방선거 결과가 알려주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당 같은 민심의 무풍지대가 한둘이 아니다. 제 밥그릇만은 절대 내놓지 못하겠다며 저항하는 검찰이 그렇고, 요즘엔 법원의 모습이 꼭 그렇다.

발단은 ‘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 설치라는 자기들만의 숙원사업을 놓고 박근혜 정부와 어떻게 내통했는지 조금씩 밝혀지면서부터였다. 박근혜 정권에 조금이라도 부담되는 사건들이 있다면 대법원이 앞장서 정권의 부담을 덜어주었다는 거다. 재판 결과에 명운을 걸고 있는 숱한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었다. 양승태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처지나, ‘법의 지배’와 같은 철칙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KTX 여승무원, 전교조 조합원, 제주 강정마을 주민과 경남 밀양 주민 등은 정교한 국가시스템에 의해 함부로 내쳐졌다. 피해자는 차고 넘칠 만큼 많다.

문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다. 법원행정처장이 조사단장을 맡은 셀프 조사로도 이 정도이니, 좀 더 객관적인 곳에서 들여다봤다면, 아마 더 흉측한 결과와 직면했을 거다.

이를테면 사건관계자에게 골프와 룸살롱 접대를 받은 판사에 대한 처리를 보면, 그동안 법원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수 있다. 양승태 시절의 법원행정처는 사건관계자에게 골프와 룸살롱 접대를 수십차례 받은 현직 부장판사의 비위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해당 판사는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고 멀쩡하게 법원을 떠나 변호사로 개업해 지금도 잘나가고 있다. 제 식구 감싸기도 이 정도면 ‘역대급’이다.

법원은 삼권분립의 한 축이지만, 선출직인 대통령이 지휘하는 행정부나 구성원 전원이 선출직인 국회와는 차원이 다른 조직이다. 민주적 정당성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법원은 뭔가 다를 거라는 믿음, 법을 전공한 사람들은 다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때로 판결에 승복할 수 없어도 시민들은 참아왔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보듯, 사람 목숨마저 쉽게 앗아버리는 사법살인을 저질러도, 그 막연한 믿음 때문에 법원을 존중하기도 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최종 가해자는 법원이었지만, 그 비난은 온통 박정희와 그의 비밀정보조직에만 쏟아졌다. 법원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이번에 산산이 깨져버렸다.

엄청난 일이 밝혀지고 있는데도 법원의 행태는 완전히 딴 세상 사람들의 것이다. 명백한 범죄가 양승태 대법원에서 자행되었고, 그 증거가 숱하게 쌓여있는데도, 판사들의 대응은 딴판이었다. 명백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판사들은 연일 회의를 반복했다. 수석부장회의, 전국법원장회의, 대법관 간담회, 법관대표회의에다 외부 인사로 구성된 사법발전위원회까지 잇따라 열었다. 해법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형사고발이 필요하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형사고발은 곤란하되, “형사절차를 포함하는 성역 없는 진상조사와 철저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단다. 뿐만 아니다. 고위급 판사들은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와 문제 판사에 대한 탄핵이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양승태 본인과 양승태 시절의 법원행정처장들이 이미 법원을 떠나 탄핵할 수 없는데도 탄핵 운운하고 있다.

이런저런 회의만 열면서 김명수 대법원장은 말을 아끼고 있다.

도대체 어떤 범죄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고, 그 범죄를 단죄하는 일이 여러 번의 서로 다른 회의를 거쳐야 하는 일인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동안 판사들은 시민들을 향해 준엄한 심판을 내려왔다. 사람에게 죄를 묻는 일에 과감했던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 사람들이 정작 자기가 속한 조직의 범죄에 대해서는 시간을 끌면서 시민들의 분노를 달래보려는 꼼수만 부리고 있다.

어쩌면 대법원장은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지방선거의 살벌한 결과를 보니, 더 이상 버티다간 더 큰 조직적 위기를 자초할 거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결론을 내리든 법원은 이미 틀렸다. 양승태가 틀린 것은 물론이고, 김명수도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명백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연일 회의를 거듭했던 것은 마치 법원은 남다른 조직인 것처럼 여기는 오만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론을 달래며 돌파구를 찾으려는 꼼수를 모를 사람은 없다.

법원의 사활적 관건은 신뢰다. 판결을 믿지 못하면 결코 승복할 수 없다. 갈등이 심각한 사회에서 법원의 판결에 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교과서에서나 봤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세상이 될 것이다.

힘 있는 사람들이야 법이 없어도 살 수 있겠지만, 약자, 소수자, 아니 대부분의 시민들은 법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다. 법원에 대한 불신은 그래서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거다. 공동체가 붕괴되는데, 법원이라고 무사할 리 없다. 그러니 지금의 사태가 법원에는 절체절명의 위기다. 각종 인연으로 끈끈하게 엮인 법원이라지만, 그런 소소한 인연 따위에 조직의 명운을 걸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심각한 사태를 두고도 연일 회의만 거듭하는 법원이 안쓰럽다.

잘못이 있다면 어떤 잘못이 있는지 빠짐없이 밝혀내면 되고,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면 된다.

단순한 잘못이 아닌 범죄라면, 죄에 맞는 죗값을 치르면 그만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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