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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2.27 노동자야? 노동계급이야?

1988년 대학에 들어가 보니 선배들이 걸핏하면 계급, 계급 하더라고. 계급이 뭔지 20년쯤 고민했어. 알고 보니 별거 아니던데. 벤츠 매장에 가봐. S클래스, E클래스, C클래스…. 이놈 요놈 저놈은 같은 클래스다, 이게 계급(class)이야. 

이런 크나큰 깨달음을 얻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한국에는 ‘노동자’만 있더라고. ‘노동계급’은 없더라고. 현대자동차 직원 평균 연봉은 9000만원대야. 1차 하청업체는 5000만원대야. 2차 하청업체는 3000만원대야. 3차 하청업체는 2000만원대야. 하청업체 직원들한테 물어보자. “현대차 직원들이 당신들하고 같은 클래스라고 생각하십니까?”

알고 보니 ‘역사의 필연’ 같은 건 개뿔이더라고. ‘인간의 의지’가 중요하더라고. 사민주의가 왜 위대한지 알아? ‘클래스가 같아지려는 의지’ 때문이었어. 이 회사 다니는 나, 저 회사 다니는 쟤, 그 회사 다니는 그, 우리 모두 비록 회사는 다르지만 비슷한 월급을 받자는 거잖아. 그래서 임금교섭도 회사별로 따로 하지 말고 한꺼번에 산별교섭을 하자는 거잖아. 우리끼리 임금경쟁 하지 말자는 거잖아. 그래서 우리 노동계급을 만들고 유지하자는 거잖아. 사민당의 3대 가치가 ‘자유, 정의, 연대’야. 투쟁으로 하는 연대만이 아니라 제도로 하는 연대. 임·금·연·대.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세상을 등진 노회찬 의원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씨름한 테마가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었어. 물론, 동일한 일에 대해 동일한 대가를 받는 것이 시장원리에 맞지. 하지만 설마 그가 공정한 시장질서를 확립하고 싶어서 그랬겠어? 그는 어떻게든 ‘노동계급’을 만들고 싶었던 거야. 

독일 노동계급이 왜 위대한 줄 알아? 걔들은 노조가 실업기금을 운영해. 왜? 실업자도 노동계급이거든. 직업교육 정책에 참여해. 왜? 노동계급이 될 아이들이거든. 그런데 현대차 노조는 광주형 일자리를 반대해. 왜? 쟤들의 이익이 자기의 불이익이거든. 민주노총은 노동회의소 설립을 반대해. 왜? 노동회의소가 생기면 노조가 없어도 여기서 교육과 서비스를 받게 되거든. 그러지 말고 얼른얼른 ‘노조’를 만들어서 민주노총에 가입하라는 거야.

네이버에 노조가 만들어지네? 잘된 일이지. 대한항공에 새 노조가 만들어지네? 박수칠 일이지. 근데 이렇게 해서 노동계급이 만들어질까? 그건 아닌 것 같아. 산별교섭? 아직도 그 떡밥을 믿어? 막상 산별교섭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쳐봐. 현대차 노조가 반대할 거야. 하청업체들하고 한꺼번에 임금교섭을 하게 되면, 현대차 직원들은 임금 인상률에서 양보를 해야 하거든. 사민주의는 일종의 ‘양보 혁명’이거든. 그런데 생각해 봐. 가뜩이나 양보도 싫은데, 혁명적으로 양보하는 것은 더 싫겠지.

사민주의 정치의 기본은 노동계급이 지지하는 정당이 홀로 집권하거나, 다른 당과 연합해서 집권하는 거야. 옛날엔 농민당과, 요새는 녹색당과. 그런데 한국에는 노동자만 있고 노동계급이 없잖아. 그러면 정의당의 전략은 뭘까? 정의당은 ‘좀 쎈 민주당’인가? 그렇다면 민주당은 ‘좀 약한 정의당’인가? 민주당은 수권정당, 정의당은 등대정당? 노동계급 대신 청년계급이 있기는 하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보다 청년들의 이해관계가 더 통일시키기 쉬울 것도 같거든. 그런데 이건 안될 것 같아. 두 당의 연줄 돈줄을 보아하니 그러기 힘들어. 무엇보다 ‘의지’가 없어.

노동자만 노동계급인 게 아냐. 실업자도 노동계급이야. 가정주부도 노동계급이야. 중요한 산업예비군이거든. 자영업자도 대체로 노동계급이야. 자영업자 중 70%가 한 명도 고용하지 않는다잖아. 학생은 물론 미래의 노동계급이야. 다들 취업하려고 발버둥치잖아. 그런데 이들과 같은 클래스가 되기 싫어? 같은 계급이 될 의지가 없어? 그래도 ‘노동자’ 운동은 해. 좋은 거니까. 지지해줄게. 하지만 ‘노동계급’ 운동인 척하지는 마. 그건 사기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기.

근데 노동자도 실업자도 주부도 자영업자도 노동계급이 될 수 있다면, 노동계급의 정체는 뭘까? 이건 10년쯤 고민했어. 그런데 뜻밖에, 1988년 선배들이 많이 얘기하던 단어에 답이 있더라고. 그건 ‘민중’이었어.

민중이 별거야? 영어로 그냥 ‘피플’이야. 존 레넌이 노래한 파워 투더 피플. 그런데 피플(people)을 위하는 사상이 포퓰리즘(populism)이라며? 아, 그럼 지금부터 포퓰리즘 해야겠네. 사민주의여, 아듀.

<이범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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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