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에 해당되는 글 275건

  1. 2019.04.18 전화 소동
  2. 2019.04.11 성냥불
  3. 2019.04.04 북한 여행 회화
  4. 2019.03.28 개그맨
  5. 2019.03.21 실업자
  6. 2019.03.14 마음의 크기
  7. 2019.03.07 흉가
  8. 2019.02.28 교회 없는 마을
  9. 2019.02.21 전기장판
  10. 2019.02.14 짜라빠빠
  11. 2019.02.07 세 가지 자랑
  12. 2019.01.31 공기청정기
  13. 2019.01.24 그리운 사람의 별명
  14. 2019.01.17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15. 2019.01.10 오십대
  16. 2019.01.03 근사한 유리창
  17. 2018.12.27 수고한 이들에게
  18. 2018.12.20 북극여우와 여관
  19. 2018.12.13 ‘보해미안’ 랩소디
  20. 2018.12.06 겨울 염소

차단을 해도 자꾸 걸려오는 전화 가운데 주택에 태양광을 설치하라는 소리. 시골에 산다고 다짜고짜 노인 취급을 한다. 아버니임~으로부터 시작되는 코맹맹이 소리. 죄송합니다, 라고 전화를 서둘러 끊으면 재차 또 걸려오곤 한다. 짜증이 욱 올라온다. 태양광 소리만 들어도 이젠 뒷골이 땅길 지경이다. 탈곡기를 사라는 전화도 온다. 마을 전화부를 어떻게 알고 이런 전화를 다 하나 싶다. 손전화기로 걸려오는 보이스 피싱도 두어 번 받아보았다. 귀하의 은행정보가 털렸다고 하길래 은행에 저축한 돈이 없는데 괜찮다고 했더니 딱 끊는다. 좀 더 전화를 해도 되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 언젠가는 대출을 해준대서 이미 콩팥 장기까지 팔았다고 했더니 딸칵 끊더라. 

대학생인 아들이랑 통화를 하다보면 ‘이 녀석이 요새 돈이 없구나’ 느껴질 때가 있다. 술값이 없든지 책값이 없든지 아니면 데이트 비용이 없든지 셋 중 하나일 테다. 사내아이는 보이스. 낚시는 피싱. 대부분의 부모는 보이스 피싱을 당하고 산다. 해준 것 없는 아비에게 마음을 내는 걸 보면 나로선 감사한 일. 적은 돈이지만 잘 받았다는 문자를 받으면 마음에 저장해둔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낙들 둘이서 자식 걱정을 했다. 한 아낙 왈 “대학교 댕기는 아들이 만날 돈만 부쳐달라는데, 도대체 무슨 학생이 그렇게 돈이 많이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학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푸념을 늘어놓자, 듣고 있던 다른 아낙 왈. “차라리 그렇다면 속이나 편하겠네요. 우리 딸은 돈을 달란 소리를 전혀 안 해요. 도대체 어디서 돈이 생겨 옷 사고 가방 사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자녀들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빼앗기는(?) 편이 낫다 싶기도. 

몽글몽글 구름이 피어나더니 서산을 넘는다. 어떤 날은 전화가 하도 많이 걸려와 소동에 가까운 날이 있고, 어떤 날은 공치는 심심한 날도 있다. 번호부를 뒤지면 얼굴조차 희미한 사람. 인연이 다한 사람. 아쉽지만 가벼워지고 싶어 ‘삭제’를 누른다. 오래전 죽은 사람이지만 기억하고 싶어 저장해 둔 이름도 있다. 그리운 노란 리본의 이름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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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데 큰 산불 소식. 우리 동네도 몇 해 전 가정집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태웠다. 힘내시라고 성금도 드리고 그랬었다. 아직도 그 집 마당엔 불에 탄 흔적들이 보인다. 다행히 헬기로 물을 뿌려 뒷산으로 번지는 걸 막았다. 산으로 불이 옮았다면 내 거처도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냇가에 살면 홍수가 무섭고 산골에 살면 산불이 걱정된다.

사형수 세 명이 간곡하게 기도하자 하느님은 각자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기로 했다. 한 명은 여자를 구해 달라고 했다. 얼마 못 가 뼈만 앙상한 채로 죽었다. 다른 한 명은 술을 달라고 했다. 주정만 부리다가 죽었다. 나머지 한 명은 담배를 원했다. 그런데 건강하게 살아남았다. 간수가 궁금해서 묻자 죄수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담배만 달랑 주고 성냥불은 안 주셨는데요.”

성냥불 하나, 담뱃불 하나로 큰불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는 상여를 태우다가 산불이 나고, 논두렁 밭두렁 태우다가도 산불이 났다. 아주 어렸을 적에 잠깐 초가집에서 살아도 봤다. 목사관 임시 거처가 초가집이었다. 그즈음 장애인 형이 불장난에 재미를 붙였는데, 나뭇광에 불을 붙이려고 번번이 시도하다가 내게 딱 걸리곤 했다. 장작 아궁이에서 놀다가 손을 데더니만 그 재미와 작별하더라. 집이 타버릴 뻔했다.

“저녁노을 지고 달빛 흐를 때, 작은 불꽃으로 내 마음을 날려 봐. 저 들판 사이로 가면 내 마음의 창을 열고, 두 팔을 벌려서 돌면 야! 불이 춤춘다. 불놀이야.” 명절 때면 깡통에 구멍을 뚫고 불놀이를 하기도 했다. 까딱 잘못했다간 산불로 번지는 위험천만한 놀이였다. 예전엔 불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양동이를 들고 뛰쳐나왔다. 합심하여 불을 껐다. 뜬금없이 교회에서 성령의 불을 받으라고 부흥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 나는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떠올렸다. 불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위험한 무엇이렷다. 이상 저온으로 밤기온이 차다. 잔솔가지 그러모아 난로에 불을 모으고 산다. 날마다 불을 보면서 지내는데, 재를 버릴 때도 그렇고, 꺼진 불도 다시 본다. 자나 깨나 산불조심.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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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행사로 한 달 넘는 장기간 여행을 떠나곤 하는데, 계획을 묻는 이들이 종종 있다. 작년부터는 북한이라고 답을 하는데, 기도를 섞어서 하는 소리다.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니길 빌어본다. 이민이나 월북은 능력도 없고 간뎅이가 붓지 않아서리. 길거리 친구들을 사귀고 같이 맥주 한 잔 마실 수 있다면 지구 어디라도 좋아. 시나 편지를 쓸 수 있는 연필과 종이가 있다면 그 어디나 “가즈아”!

북한에 가려면 먼저 생활 북한어 공부를 해둬야 한다. 최근에 여행가 김준연씨가 펴낸 <북한 여행 회화>를 읽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 먼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식당에서부터 챕터 원이 시작된다. 북한에선 오징어를 낙지라 부르고, 낙지를 오징어라 부른다. 그러니까 연포탕을 만약 주문하면 오징어탕이 나오게 되시겠다. 닭알두부(계란찜), 고기떡(소시지), 줴기밥(주먹밥), 고기마룩(고깃국), 썩장(청국장), 보가지국(복어국), 꼬부랑국수(라면), 곽밥(도시락), 김치남비탕(김치찌개), 발쪽(족발), 날맥주(생맥주), 빼주(고량주), 우림술(과일주) 뭐 이런 식이다. 회화 공부를 왜 해야 한다는 말인지 이제 짐작이 조금 가실 게다.


챕터 투는 호텔. 발바리차(택시), 유람뻐스(관광버스), 초대소(고급호텔), 건발기(드라이어), 간데라(촛불), 색텔레비존(컬러 티브이), 얼군제품(냉동식품), 사과단졸임(사과잼), 썩음막이약(방부제), 쫑대바지(레깅스), 보안원(경찰), 끌신(슬리퍼), 쪽머리 아픔(편두통), 머리물 비누(샴푸), 계단 승강기(엘리베이터)…. 이 정도만 외우면 무사히 먹고 자고는 가능하겠다.

거리나무(가로수)와 드림버들(수양버들)이 늘어선 강변에 앉아 있노라면 이런 방송소리가 들린단다. “남존녀비 사상과 썩어빠진 부르조아적 생활양식이 지배하는 남조선 사회에서 녀자들이 남자에게 아양을 떨기 위해 하는 코맹맹이소리. 그것마저 영어, 일본어, 한자말이 섞인 온갖 잡탕말….” 이것을 대한민국 표준말이라고 아나운서 리춘희 할머니가 마구마구 뭐라고 까신다나. 흐흐. 맞는 말씀도 있고 아닌 말씀도 있는데, 몸에 좋은 약은 귀에도 쓰고 아프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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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인디안밥, 점심에는 고래밥, 저녁에는 사또밥. 대충대충 먹고 살아도 되는데 부산스럽게 또 상차림을 하게 된다. 한 처자가 절대로 결혼은 않겠다고 장담하면서 친구들에게 그랬다. “사내놈들은 다 늑대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늑대밥은 안될 거니 어디 두고 보라고.” 그랬다가 느닷없는 반전 결혼식. 이번에는 말이 바뀌어 “늑대도 밥은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니.” 친구들이랑 밥 먹다가 이런 밥 타령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밥이 코로 들어갔다. 

나는 어디서 주워들은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외우는 편이다. 진지한 말의 성찬은 아무리 영혼의 양식이라도 앉아 있기 괴롭지. 우울한 수도원은 내가 머물 곳이 못된 듯싶다. 인연이 쌓여서 강연을 부탁받기도 한다. 거마비도 못 주는 궁핍한 현장들. 시민단체나 노동조합도 가끔 가곤 했다. 웃을 일이란 하나 없는 표정으로, 아무리 재밌는 소리를 해도 시큰둥. 놀부와 스님의 “주나봐라 주나봐라, 가나봐라 가나봐라” 불경외기 싸움처럼 거대한 벽 앞에 맞닥뜨린 느낌이랄까. 그러면 나 혼자 웃다가 온다. 나라도 살아야지. 

소설가 김성중의 <개그맨>은 이렇게 시작된다. “느린 말투의 느린 움직임, 한순간 던진 말로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후 각자의 연상 끝에 터지는 폭소. 대중이 그의 개그를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가 무명시절일 때 만났다. (중략) 개그맨은 떨어진 빗물을 바라보면서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나도 무언가를 부지런히 적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습관이 있다. 우리는 이 슬픔의 도성에서 웃음거리를 그래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이 모이면 어디선가 폭소가 터진다. 일행도 아닌데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진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엿들어 알고 싶다. 친구가 재밌는 말을 하면 일부러라도 많이 웃어주고 그러자. 실없는 이야기라도 좀 웃어주자. 만두 두개, 그만 두게! 할 때까지 말이다. 시샘추위로 한껏 움츠러든 며칠이었다. 노랑나비를 보았다. 마당에서 개그맨과 노랑나비가 콤비로 쇼를 했다. 웃을 일이 있어야만 세상살이가 좋아지는 게 아니다. 일단 웃고 나면 세상살이가 어느새 행복해진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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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 절집엔 고목 매화들이 듬뿍한 꽃들을 내밀고 있더라. 입술연지처럼 고운 꽃을. 지난겨울 동치미가 먹고 싶었나 캥캥 울던 고라니도 간데없고 외따롭게 지붕을 인 암자엔 노승의 기침소리만 뎅그렇다. 같이 나들이한 친구가 “나 절에 들어가서 살까?” 실없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절집도 장기 투숙자는 골라서 받는다. 또 행자스님이라도 아무나 받는 게 아니지. 피식하면 하는 소리가 ‘고향에 내려가서 살겠다, 절에 들어가 살고프다’ 어쩐다 하지만 그게 말만큼 쉽나. 만만한 게 절집이다. 정치인이 선거운동을 하면서 “유권자 여러분. 일단 저를 실업자로 만들지만 말아주세요. 실업에서 구해 주시면 반드시 유권자 여러분에게 구직으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능청도 좋아라. 그래놓고는 몰라요로 하세월이렷다.

구름이 비를 꾹 참고 있다. 꾸물꾸물하다. 전화기 저편에서 한 아이가 실업자 신세가 되었노라 하소연을 했다. 짐마차를 모는 근면한 노동자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아이. 이제 뭘 할 거냐 물으니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다시 구직활동을 해보겠노라고. 그 아이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혼자 벌어 월세를 내고 햇반을 데워 먹으며 살아간다. 친구들 다 가는 대학도 가지 못했다. 복날에 술 취한 개도 “개장수들 다 나오라고 그래!” 허풍을 떤다고 하지. 이 아이는 항상 마음을 움츠리고 어깨도 굽어 있다. 목소리도 모기소리만 하다.

지금은 실업급여라도 있어 다행이어라. 전에는 당장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했고, 당일부터 알거지였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정년도 뭣도 없고 좋아. 다만 시집이 팔리지 않는다는 점. 실업자 아닌 실업자라는 점. 누가 그랬다. 아직도 원고료 몇 푼이라도 받고 사는 작가가 몇이나 되겠냐고. 운 좋은 거라고. 쥐꼬리만 한 원고료를 한번은 동생 스님이 계시는 절집에 시주했다. 스님도 시를 쓴다. 실업자 시인들, 모두 원고료를 받는 세상이 속히 오기를 바라면서 살짝 밀어드렸다. 그 덕분인지 요즘 시가 솔솔 써진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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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에도 바람막이숲이 있어 양지마다 쑥이 쑥쑥. 나는 벌써 쑥버무리를 해먹고 쑥국도 끓였단다. 봄이면 어머니가 해주시던 쑥떡 생각이 간절해라. 쫄깃한 떡을 뜯어 콩고물에 찍고 입에 물려주시던 그 손. 당신도 기억하실 게다. 쑥떡을 떼어주시던 우리 어머니들.

친구가 낚시를 가자는 걸 나는 쑥 캐러 가자고 그랬다. “아니 아줌마들 속에 끼여서 쑥을 캐자고?” “칫! 낚시 가봐라. 새까만 사내들뿐이지. 들에 가보면 쑥 캐는 여인들이 콧노래를 부른당.” 내 말에 어이가 없어한다.

“푸른 잔디 풀 위로 봄바람은 불고, 아지랑이 잔잔히 끼인 어떤 날. 나물 캐는 처녀는 언덕으로 다니며 고운 나물 찾나니 어여쁘다 그 손목. 소 먹이던 목동이 손목 잡았네. 새빨개진 얼굴로 뿌리치고 가오니 그의 굳은 마음 변함없다네. 어여쁘다 그 처녀. 들과 언덕 지나서 시냇가에 가니, 꼬리 치는 금붕어 뛰고 있었다. 버들 꽃을 뜯어서 봄바람에 날리니 허공 위에 닿는 꽃. 어여쁘다 그 처녀. 나무하던 목동이 손목 잡았네. 새빨개진 얼굴로 뿌리치고 가오니 그의 굳은 마음 변함없다네….” 새빨개진 얼굴로 지종지종 지지배배 노래를 불러본다.

쑥에서 시작해 봄나물이 곧 산동네에 범람하리라. 봄도 사랑도 이렇게 확대되고 커가야 한다. 사랑을 증명하는 단계에서들 주변을 정리하고 오직 한 사람에게 속박되려 하지만, 둘의 사랑을 키우되 그간의 우정들 또한 이어갈 줄 알아야 한다. 남자의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여자의 친구들과도 잘 지내야 한다. 마음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 지팡이를 짚던 할머니가 병원에서 나올 때 보니 허리를 곧게 펴고 나타나셨다. 깜짝들 놀라 “수술을 받으신 거예요?” “아니여. 지팡이를 좀 긴 걸루 써보라 해서 말이여.” 작은 지팡이를 짚고 쑥만 캐러 다닐 일은 아니다. 봄누리엔 납작 엎드린 달래 냉이 씀바귀만 있는 게 아니다. 이제 곧 키만 한 두릅나무에 쌉싸름한 두릅이 영글면 저기 산자락 너럭바위에 앉아 동동주 한 잔 마셔야지. 마음도 커가고 사랑도 커가고, 모두가 함께 커가는 봄.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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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이라 삼짇날, 새 풀을 밟으면 꽃바람이 난다지. 아침부터 부지런한 농부 말고 군인들이 보였다. 옆 동네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는데, 콩 볶는 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한 달에 두어번 이질적인 총소리. 그래도 축사의 냄새보다는 낫지 싶어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그치기를 기다려본다.

우리나라는 한·미연합훈련을 하지 않아도 이미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나라. 길거리에 가보면 ‘대포집’이 얼마나 많은가. 거기선 폭탄주를 아무나 제조한다. 건너편 식당은 부대찌개. 길에 보면 총알택시가 쓩쓩 날아다닌다. 미세먼지 연막탄은 한 치 앞도 분간 못할 만큼 자욱하다. 무슨 가공할 미사일이 있어 미세먼지를 헤치고 명중을 하겠는가. 또 모두가 핵가족으로 각지에 흩어져 산다. 핵가족은 독재 아니라 독재 할아버지의 말도 듣지 않는다. 여기다가 공포의 흉가들이 마을마다 버티고 있다. 세기의 강심장들도 나가자빠진다.

우리 동네도 흉가에 폐가가 한 집 건너. 앞 동네는 너른 평지라 부자들이 별장을 짓고 난리 브루스인데 고갯마루 접어들면 노루 사슴이 기웃거리고 멧돼지가 괄괄거리는 산촌. 게다가 혼불이 출몰하는 빈집, 흉가가 시뻘건 혀를 날름거린다.

귀신은 자기 말만 한다. 할매들도 귀신이 되려고 자기 말만 하고 산다. 나는 글을 쓰니까 해소라도 하지만 말동무가 없으니 그러시는 거겠지. 귀신도 누가 들어주질 않으니 혼잣말로 시부렁거린다. 흉가에서는 씨부렁씨부렁 묘한 소리가 난다.

다행히 봄이면 그 소리가 조금 잦아든다. 꽃바람 봄바람에 귀신도 참하고 순해지는 모양. 아가씨가 방구가 마려워 “자기야! 사랑해!” 큰소리를 지르며 동시에 뿡 싸질렀는데, “뭐라고? 방구 소리 때문에 안 들렸어.” 무안하게시리. 귀신 소리도 봄이 오는 소리 때문에 들릴락 말락. 금방 귀신의 계절 여름 칠팔월이 올 테고 그땐 살맛나게 떠들어대려무나. 흉가라도 있어 귀신도 살고, 어쩌면 다행이지 싶다. 귀신도 못 사는 세상이 더 무서운 게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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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엔 다행히도(?) 교회가 없다. 오래전 내가 집을 짓자 교회를 짓는 거 아니냐며 쫓아온 주민이 있었는데, 건설인부들과 막걸리를 나눠 마시는 걸 보자 안도하며 돌아갔다. 일요일마다 여러 대 교회 승합차가 와서 주민들을 골라 싣고 간다. 각자 떨어진 교회들로 고고. 가끔 전도를 나오기도 하는데, 전도거절용이나 방어용으로다가 대문에 교회 간판을 하나 붙여버릴까 싶기도 해. 대꾸하기도 귀찮고 종파를 설명하기도 머리가 아파서리. 얘기를 나눠보면 백이면 백 붉은 토끼 눈알이 되어 공격적인 말투.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거라며 협박하는 부분에서는 진짜 나로 하여금 불쌍한 마음도 드는 표정이었다. 목사라고 안 하고 그냥 촌놈이라고 했던 게 문제. 흐흑.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건 시골 교회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할머니 교인들이 꼬맹이 취급할까봐 그랬다. 한번은 문익환 목사님이 내 수염을 근사하다고 칭찬해 주셨는데, 서로 수염을 만져보며 웃었던 기억. 목사님 수염을 만져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 나이가 같아 보여 좋다던 할매들은 내가 수염이라도 밀면 코털이라도 빨리 기르라고 나무라셨다. 비슷한 얼굴을 하고 비슷한 옷을 걸치고서 알콩달콩 지내다가 훌쩍 길을 떠나왔다.

한 인기 강사가 튀는 옷을 입고 강의를 갔는데, 그곳은 하필 교도소. 재소자들 속에서 튀는 옷이 순간 부끄러웠다고 한다. 소통을 이야기하러 간 강사가 옷부터 소통이 안된 것. ‘그들과 같은 옷을 입어라.’ 마음에 새겼다고 한다. 아버지가 물려준 치렁치렁한 목사 성의가 있었는데, 그런 옷 좋아하는 목사에게 줘버렸다. 치마도 뭣도 아니고 그런 이상한 옷을 걸치고 설교단에 서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 성경 교사일 뿐이다. 

태극기집회 분들과 극우 기독교가 만나 흥미로운 미래 정치를 약속하는 마당이다. 소통이 문제인데, ‘소통불가 고집불통 맹신’으로 무장하여 나라를 온통 분란과 불화로 끌고 갈까 염려된다. 일요일마다 마을을 갈라놓듯이 나라를 갈라놓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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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호랑이가 참다못해 마을로 내려왔어. 두둥게둥실 애기를 키우는 집에서 말소리가 났지. “이놈의 징글징글한 가난. 떨어지지도 않고 벗어날 길도 없소. 호랑이보다 무서운 이 가난. 아이고 팔자야.” 엄마랑 애기가 우는 소리. 듣자하니 저보다 무서운 가난이란 게 있다는데 고건 뭘까. 요전날 서당 마당을 어슬렁거릴 때 훈장이 내뱉은 소리도 기억났다. “적을 모르면 백전백패 진다. 그러나 적을 알면 백전백승 이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면 살 수가 있지. 쫄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면 된단다.” 이 말에 덜컥 놀랐던 일. 호랑이는 ‘알지 못하는 적 가난’이 두려웠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는 얘기.

입춘 지나자 보일러 기름을 아껴보자며 전기장판 한 쪼가리 등에 대고 누운 어르신들. 깔밋한 새집에 전기장판이 놓인 방은 드물다. 대개 거우듬하고 울퉁불퉁한 방바닥. 냉기로 썰렁한 방은 어쩌다 한 번씩 기름보일러를 돌린다. 아랫목이 자글거리던 옛집은 꿈속만 같아라. 나무를 해올 기운도 없고, 기름 값은 호랑이보다 무섭지.

땟거리 장만하여 동태나 된장국으로 끼니를 삼는다. 전기장판에 누워 솜이불에 체온을 실으면 스르르 눈이 감긴다. 늙으면 초저녁잠이 많아지는 법. 봄 아지랑이가 필 때까지 빨간 내복과 전기장판으로 의연하게 견디는 분들.

“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난다. 어떤 추위에도 끄덕하지 않는다. 부연 입김이 터져 나오는 꿈이라도 따뜻하다…. 종일 떨다 돌아온 날에는 온도조절기에 빨갛게 불이 들어온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 세상 끝 옥탑에 보일러가 도는 기분.” 박소란 시인의 ‘전기장판’이란 시다. “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난다. 어떤 슬픔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간난이 할머니가 누워 잠든 전기장판. 생각하노라니 민들레의 사투리가 ‘말똥굴레’라 일러주신 권정생 샘의 오두막이 떠오른다. 민들레는 전기장판에 납작 누워 있는 사람들 같다고도 하셨다. 나는 그다음부터 민들레를 보면 똥을 굴리던 말똥구리가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 전기장판에 누워 하얀 솜이불을 덮은 할매들 모습을 동시에 상상하게 되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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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의 노래 가운데 ‘예순네 살이 되었을 때’가 있다. 웬 아임 식스티 포. “시간이 흘러간 뒤에 머리숱도 없어지고, 나이는 지긋해져도, 밸런타인데이 때나 아니면 생일날 내게 와인과 엽서를 보내주고 그러실 거죠? 당신은 따뜻한 난롯불 곁에서 스웨터를 짜세요. 일요일 아침이면 드라이브도 같이 가요. 꽃 마당을 돌보며 잡초도 뽑을게요. 예순네 살 때에도 당신에게 나는 필요한 존재겠죠? 근검절약하다 보면 여름마다 흰 섬에 유람도 떠날 수 있을 거예요.” 예순 살 넘어서까지 다투지 않고 함께 여행 다닐 친구가 있다면 행운아. 나이 들면 부인이 남편을 보통 이겨먹게 된다. 옆집 영감들은 다들 죽어 산에 누워 자는데 아직도 방에서 자고 일어나 귀찮게 구느냐며 타박도 듣겠지. 그러기 전에 적당할 때 알아서 떠나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여자가 남자보다 수명이 좀 더 길다고 한다. 천국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할 시간을 특별히 주신 거겠지. 화장을 하지 않아도 무조건 예쁜 것은 눈에 콩깍지가 낀 때문이다.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선물처럼 달콤한 사랑을 나누는 사이들은 질리지도 않는지 오래도록 눈을 마주친다. 사랑하는 사이엔 보고픔이 더 커서 시선에 민망함이 없다. 요새 아이들은 앞에 친구를 두고도 휴대폰만 만지작댄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사랑한다고 노래할 수 있으랴. 수십 년 된 사이들을 보면 아직도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한다. 되레 정성을 더 쏟으면 쏟았지 소홀하게 굴지 않는다. 주기보다 받기를 바라면서 변덕이 죽 끓는 사람에겐 예순네 살의 친구란 그림의 떡이겠다. “짜라빠빠 그대는 아름다워. 짜짜라 짜라빠빠빠. 짜라빠빠 당신은 믿음직해. 짜짜라 짜라빠빠빠. 짜라빠빠 수줍어하지 말고. 짜짜라 짜라빠빠빠. 짜라빠빠 즐겁게 노래해요. 짜라짜라 빠빠빠.” 늙어 죽을 때까지 짜라빠빠 노래하고, 누군가의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성공한 인생.

티베트 속담에 “서두르면 라싸에 도착하기 어렵다. 천천히 걸어야 목적지에 닿게 된다”는 말이 있다. 짜라빠빠 주문을 외우며 오늘부터 천천히, 일단은 예순네 살까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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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오랜만에 사람 소리가 담을 넘는 집집들. 영화 <정무문>에서 이소룡이 한 놈씩 덤비면 ‘꺄아악’ 소리를 지르며 격파(?)해가는 것처럼, 첫째부터 막내까지 우르르 몰려온 ‘가족 난리’를 잘 치러냈다. 대개 할아버지들은 손주 사랑이 각별한데, 늘 그렇듯 두 번 고맙다. 한 번은 와주니 고맙고 두 번은 가주니 고맙다.

배며 사과며 통조림, 식용유까지 오랜만에 선물세트로 살림이 늘었겠다. 나는 그런 걸 사올 은인도 없고, 그냥 친구들이랑 떡국이나 쑤어 먹었다. 명절을 대가족과 보낸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되면 피차 고달플 것 같아서 나부터 혼자 잠수를 타고는 했었다.

옛사람들은 세 가지 자랑을 하지 말라고 했다. 첫째는 조상 자랑이다. 조상님을 존경하는 것이야 아름다운 미덕이나 그걸 자랑 삼는 순간 조상님 얼굴에 먹칠이 들어간다. 예수를 자랑해야 할 교회가 배후를 알 수 없는 선교사들과 목사를 자랑한다. 오늘날 개신교의 초대박 붕괴 원인이 이게 아닐까. 둘째는 자식 자랑이다. 자식은 잘되어도 고민, 못 되어도 애물단지다. 두고 봐라. 자식 잘된 집치고 행복한지. 자식은 무덤에 누울 때까지 잠재울 수 없는 시련의 파도와 같다. 셋째는 재물 자랑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이가 가진 재산을 자랑하는 인간이렷다. 사돈네 팔촌까지 벌떼처럼 손 벌리고 몰려올 것이다. 방송에서 집 자랑 돈 자랑 하는 치들을 보면 어리석기가 짝이 없다. 사람들은 그때 환호하는 듯싶으나 쫄딱 망해버리기를 또 바라는 묘한 이중성이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자랑해야겠다. 첫째는 눈물이다. 함께 울 수 있는 마음이다. 남들 앞에서 눈물을 비칠 수 있는 사람은 친구로 삼아도 후회 없다. 당신과 헤어지면 눈물을 흘릴 사람이겠기에…. 둘째는 미소다. 미소가 예쁜 사람은 절대로 굶어죽지 않는다. 항상 은인이 생긴다. 맑은 미소를 가진 사람은 또한 진실하다. 셋째는 친구다. 여럿이 말고 단 한 명의 친구. 둘도 필요 없다. 그런데 이걸 막상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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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아지랑이 속삭이네. 봄이 찾아온다고. 어차피 찾아오실 고운 손님이기에. 곱게 단장하고 웃으며 반기려네. 하연 새 옷 입고 분홍신 갈아 신고….” 산에는 분홍빛깔 진달래가 움을 틔우거나 기지개를 켜고, 성질 급한 매화 무당은 벌써 방울을 쩔렁이면서 굿판을 벌일 태세다. 어차피 오실 손님이기에 어서 오시라 반기련다. 삼한사온은 옛날 얘기고 이제는 삼한사미라던가. 꼬박 사흘 동안 미세먼지로 극성. 봄꽃이 출렁이는 분홍빛깔 산허리도 먼지에 가려 안 보이고, 아지랑이도 미세먼지에 가려질 판. 어서 빨리 대안에너지, 태양에너지로 가뿐히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길.

흙먼지가 일상이었던 지난 시절. 비포장도로뿐인 시골에서 태어나 비포장 마당에서 흙놀이하며 자랐지. 바지 밑단에는 흙먼지가 한 움큼씩 담겨서 털지 않고 방에 들어왔다간 이불도 흙범벅. 시멘트 가루를 먹는지 미숫가루를 먹는지 모를 정도로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는 시멘트 먼지가 동네에 자욱했다. 지붕으로 썼던 석면 슬레이트는 아무 데나 버려졌다. 거기다가 돼지고기를 올려서 구워먹던 사람들은 암에 안 걸린 게 기적. 버스가 한번 지나가면 온 동네가 사막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먼지에 휩싸였다. 이맘때면 들불을 놓는데, 논밭의 비닐을 태우자 시꺼먼 연기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공장 굴뚝처럼 연기가 도처에서 뿜어져 올라왔다. 안전하고 청명한 세월이 얼마나 되었던가. 미세먼지 폭풍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틈새시장이라고 공기청정기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들었다. 나도 누가 차에다가 놓고 쓰라며 작은 공기청정기를 보내왔는데, 웅웅거리는 소리가 싫어 쓰지 않고 있다. 진짜 공기청정기는 이 나쁜 먼지들을 말없이 다 들이마시는 저 숲속의 나무들이겠다. 나무에 미안하고 감사하다.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줄이는 방법은 전기며 석유, 석탄, 이런 기존의 에너지를 아껴 쓰고 줄이는 길뿐이다. 숲의 나무들 말고도 공기청정기 같은 사람들이 많아져야겠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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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황해도에선 장인을 가시아바이, 장모는 가시오마니라고 부르고 친정은 가싯집이라 한단다. 신혼초야를 마치고 가싯집에 인사를 가는데, 닭과 술과 떡을 장만했다. 바보 신랑은 닭이 생각이 안 나 ‘꺽거덕 푸드덕’. 술은 ‘울르렁 출르렁’. 떡은 ‘찐덕찐덕’. “허허. 이름도 하나 기억을 못하는 바보천치 사위를 얻었구먼. 불쌍한 내 딸.” 가시오마니는 열불이 터져 울었다. 신랑은 주는 대로 덥석 받아먹으라는 부모님 말씀대로 삶은 콩을 껍질 채 홀라당 삼켰지. 각시가 껍질은 벗겨먹으라고 나무라자 송편을 까설랑 알맹이만 쏙 파먹더란다. 떡보에 바보인 새신랑은 그래도 진실하고 착했어. 둘은 쥐두리별(북극성)이 높이 뜬 날, 수왕길(은하수의 황해도말) 건너는 끝날까지 콩 먹고 떡 먹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지.

요새는 떡보를 구경하기 어렵다. 길거리에 떡집은 없고 빵집만 성황. 어려서 나도 흔한 떡보다는 귀한 빵에 환장했다. “이 돈은 교회에다 헌금해라.” 엄마가 헌금하라고 용돈을 주시면 “빵 사먹고 빵집 주인이 헌금하게 하면 안될까용?” 머리가 요쪽으로 텄던 놈이다. 읍내에 빵집이 한 군데 있었는데, 카스텔라 크림빵이 먹고 싶어서 어머니 손을 끌고 졸랐지. 그러나 당도한 곳은 호떡을 굽는 노점상. 호떡도 감지덕지였다.

나이가 먹은 뒤, 그토록 침을 흘렸던 빵은 관심 밖. 떡이 문득 궁금해진다. 난롯불에 하얀 가래떡을 구워설랑 꿀에다 콕 찍어먹고 싶어라. 찐덕찐덕 입안에 녹아 구르는 떡과 꿀.

입맛이 담백하면 삶조차 소박해진다. 미식가는 성질머리만큼 고약한 똥냄새. 대식가는 변소에 쭈그려 앉아 남보다 배는 더 길게 대사를 치러야 한다. 간뎅이가 붓고 대담한 사람은 구설수 환란을 비켜갈 수 없다. 아이스크림이 도처에 깔린 겨울, 떡보는 쑥떡을 먹게 될 봄을 기대하며 침을 꿀꺽 삼키지. 욕심조차 소박해라. 찍어먹으려면 꿀단지도 아껴야 해. 작은 걸 아끼고 귀히 여기는 마음. 낮고 천한 사람도 그처럼 깍듯하게 대하리라. 예전에는 떡보, 울보, 째보, 땅딸보, 느림보, 털보, 뚱보, 꾀보, 바보가 친구의 모두였다. 그리운 사람은, 바로 그런 별명의 친구들이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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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목화꽃처럼 탐스러운 눈이 소르르 내렸다. 개울가 수렁논배미도 딱딱하게 얼어붙어 고두밥만큼 부풀었다. 성크름한 바람이 불긴 하지만 햇살이 따뜻해설랑 눈은 아침나절에 녹아버렸다. 마당에 있는 바위옹두라지에 개가 앉아 털을 고르면서 해바라기를 즐겼다. 개처럼 사람들도 가만히 앉아 비루하고 추저분한 인생을 추스를 짬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염치도 부끄러움도 없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거나, 얼굴을 뺀질댄다거나, 괘꽝스러운 망언을 해대지는 않을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자아를 성찰함으로써, 내면의 침잠으로부터 시가 나오게 되면 당신은 그 시를 들고나가 누구에게 어떠냐 물어보지 않게 되리라. 문예지에 작품을 보내 관심이나 평가를 요구하지도 않게 된다. 이미 당신의 글은 자랑스럽고 자연스러운 재화 즉 자기 생명의 한 편린, 한 생명의 노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적 필연성에서 이루어진 모든 예술작품은 위대하다. 내가 드릴 수 있는 충고는 한 가지뿐. 자기 자신을 살아가며 당신 생명의 밑천으로 노래하라. 심연의 고독 속에 파고들라. 그러다보면 허깨비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 시를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 보통사람 가운데 한 명인 자기로의 복귀도 나쁜 건 아니다. 차라리 그 길이 시인의 길인지도 모른다.”

평온한 바다에선 뱃사람이 배울 게 없다. 일상이 힘들면 힘든 대로, 이웃의 아픔과 눈물을 헤아리는 연민으로 글감을 삼으면 된다. 릴케는 더 말하기를 “글은 최종적으로 쓰는 것이다”라고 했다. 매일 매 순간 습관처럼 쓰지 않으면 안된다. 미세먼지로 바깥출입이 어려운 때, 책을 더 읽고 글을 더 써본다면 좋겠다. 영화 <말모이>는 한글학회가 걸어온 길을 재미있게 담고 있다. 영화를 통해 엉덩이와 궁둥이 차이를 처음 알았다. 엉덩이와 궁둥이를 떡하니 붙이고서 우리말 신간을 한 권이라도 더 읽어야지 욕심 먹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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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히로카네 겐시’는 오십대 중년 시기를 잘 사는 6가지 비법을 소개했는데, 1. 작은 욕심 부리기(예컨대 따뜻한 찌개를 안주 삼아 마시는 술 한 잔의 즐거움. 싸고 맛있는 세계의 즐거움이 있음), 2. 과거 따위 돌아보지 않기(묵은 감정 깨끗이 정리하고 이름조차 잊기. 가슴 뛰지 않는 물건 버리기), 3. 망설임 없이 즐거움으로 향하기(언제 죽을지 모르니 매일을 진지하게 즐기고, 오래 살지 모르니 배우는 일에도 새삼 도전하기), 4. 방황하지 않기(제발 좋아하는 일만 찾아서 하고, 피차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기), 5. 감정 온화하게 다스리기(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뭘 줘도 아깝지 않은 존재를 갖기. 뭘 받을까가 아니라 뭘 줄까에 관심 쏟기. 자식이 있다면 부모 품을 떠나도록 놓아주기), 6. 인생은 일장춘몽임을 깨닫기(평소에 유서쓰기. 가급적 이별은 산뜻하게). 나나 당신이나 버릴 것 하나 없이 6가지가 빠짐없이 필요하겠다.

촌락에서는 오십대도 이팔청춘. 환갑은 돌잔치나 비스무리. 품바 몸뻬 바짓가랑이를 걷어 입고 이태리 가짜상표가 붙은 오일장 목도리를 펄럭이고서 활개를 치는 아낙네들. 어깨허리치마를 해 입고 만세를 부르던 3·1운동 여학생들의 피가 흐르는 분들. 후반생을 이리 산다고 생각하니 없던 정도 생겨나고, 미운 정은 미운 정대로 고마워라. 어쩌다보니 오십대에 와 닿은 나는 젊고 대찬 ‘차도녀’는 ‘무섬증’부터 덥석 든다. 또 젊은 사내의 원대한 꿈이나 패기에 찬 언변을 감상하는 자리도 얼른 피하고 보는 게 상책. 냉대를 할 것 같으면 냅다 망설임 없이 집으로 향하기. 방황하지 않기, 인생은 일장춘몽. 방어가 최선의 공격. 수비가 튼튼한 축구는 재미가 없으나 결승전에는 그런 팀들이 남더라.

인생 중반이 되면 개그도 하나 외울 줄 알아야 한다. 소가 죽으면 다이소. 얼음이 죽으면 다이빙. 김밥이 죽으면 김밥천국. 아몬드가 죽으면 다이아몬드. 죽기 전에 외우라. 실없이 웃다가 잠들면 꿈자리도 좋지. 밤새 싸우다가 한을 품고 등져 눕는 오십대 부부도 많다더라. 등이 가려울 때는, 여깃다! 효자손. 오십대 필수품 가운데 하나인데 편의점에서는 왜 팔지 않는지 모르겠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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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엔 고구마를 간식 삼아 자주 먹는다. 난롯불에 구운 고구마는 혀에 닿자마자 녹는다. 나도 먹고 강아지도 먹이고 하면서 둘이 볼살이 통통 올랐다. 고구마를 먹으면서 창문 밖을 똑같이 바라본다. 하루 일과의 꽤 많은 시간을 창문 밖 구경에다 쓴다. 신문 방송에서 보는 다사다난한 바깥 세계와는 다른 ‘내면과 자연의 세계’를 마주하는 유리창. 나란한 신발과 얼멍얼멍 자란 수풀과 아물거리는 별빛이 내다보이는 창가는 어쩌면 문명과 다른 세계와의 조우다.

한 기자가 수도자에게 찾아와 물었다. “무슨 기도를 바치시나요?” “저는 주로 말하기보다는 듣습니다.” “정말이오? 그럼 하느님은 무슨 말씀을 들려주시나요?” “그런데 그분도 듣는 걸 좋아하셔서 별로 말씀이 없으세요.” 이 동네 분들은 사투리가 입에 붙어서 하늘에 ‘동시통역사’가 있어야지 안 그러면 말이 안 통해서라도 피차 침묵. 사투리 덕분에 손주들 맡아보는 수고도 덜게 되니 더욱 사투리를 쓰는 듯싶다. 손주들 맡기 싫으면 무조건 사투리로 말을 하고, 밥을 씹어서 입에다 넣어주고, 말도 못 배운 아이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방바닥 닦는 걸레로 입이나 얼굴을 닦아주면 애 엄마 아빠가 펄쩍 뛰면서 아이를 냉큼 데리고 가버린다지. 그러면 이제 나름 재미나고 고요한 여생을 마음껏 즐기면 된다. 고구마를 삶는 집집마다 연기가 송송 올라온다. 주민들은 고구마를 먹으면서 나처럼 창문 밖을 오래도록 구경하고 계실 것이다.

나는 세상을 여행하면서 많은 숙소를 옮겨 다녔다. 카운터에서 똑같은 부탁을 반복하는데, 바깥 풍경이 좋은 방을 달라는 말. 커튼을 열었을 때 햇볕이 드는 방이었으면 좋겠고 나무 한 그루쯤 보이길 바란다. 요새 가난한 청춘들은 집이 아니라 방을 전전하고, 그 단칸방도 월세가 지독하여 좁아터진 방만큼 숨 막히는 세월이라지. 사람에게는 창문이 필요하고, 마당이 필요하고, 나무와 새와 별과 구름과 햇살과 바람이 꼭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이 사람으로 완성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없는 세상은 당장 바꿔내야 한다. 모든 이들이 근사한 창문을 한 개씩 가지는 세상. 오버 더 레인보, 창문 너머 무지개가 뜨고 행복은 거기 있으니까.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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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라보라레(Laborare)’에는 ‘일하다’라는 뜻과 함께 ‘고생하다’라는 뜻도 포함된다. 수도승 ‘프란체스코 드 살’은 말하기를 “각자의 구두에 작은 돌멩이들을 집어넣은 뒤 그걸 신고 길을 나선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고 했다. 다들 발바닥이 얼마나 아플까. 어느 라디오 방송에선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인사말로 방송문을 연다. 찡하니 마음에 위로가 되는 멘트다. 고생 끝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들. 세밑 창가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는 불빛들을 바라본다.

장 자크 상페의 <사치와 평온과 쾌락>에 실린 글귀를 저 꽁무니마다 달아주고 싶어라. “내 포부는 사치와 평온과 쾌락이라오. 이렇게 겨울비가 내리는 날엔 정든 낡은 스웨터를 걸치고 지내면 좋지. 오래전부터 즐겨했던 음반들도 좋아. (중략) 언제나 똑같은 꿈을 꿔. 펠레가 상대 수비수들을 따돌리고 플라티니에게 공을 패스하지. 기차게 좋은 상황에서 내게 골을 넣으라고 다시 패스를 해. 나는 냅다 슛을 날려요. 그런데 비웃으면서 한 손으로 공을 막는 골키퍼는, 바로 내 마누라예요.” 가족들이나 가까운 친구가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생하고 와서도 정작 쉴 데가 없다.

하늘에 구름 떠가는데, 구름 속에 세계 최장기 고공 농성장. 파인텍 노동자들이 누리고픈 아주 소박한 사치와 평온과 쾌락이 있다면 어서 지상에 내려와 흙을 밟는 일. 대지의 사람들과 국밥 한 그릇 나누는 일. 매번 국회의원들이 공을 가로막는 골키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 시절 고생한 모든 이들에게 평화가 찾아오는 그믐밤. 세상에 ‘고생 끝 낙’이 한 번이라도 있었으면 바라며 축복을 빌어본다. 축복이란 밥상에 초대하는 것. 노동하는 이들에게, 배고픈 이들에게, 정에 굶주린 아이들에게, 외로운 친구에게 같이 밥 먹자는 약속의 말. 인류의 성인들이 날마다 했던 똑같은 말. 같이 밥 먹자는 말. 수고하고 고생한 노동자들은 밥 먹을 자격이 충분해. 종교인이나 정치인들도 밥 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과 좀 식사자리를 같이하길. 침을 뱉고 멸시하며 무시하는 세계에서는 모두가 굶주리고 아플 따름이다. 서로들 세심하게 존중하고 귀담아들어야 한다. 수고한 손들을 매만지는 밤이 되길.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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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선 여우를 영깽이라고 한다. 강원도민 율곡 선생이 십만 양병설을 주장할 때도 영깽이를 들먹이셨다는 우스갯소리. “왜눔들이 움메나 빡신지 영깽이(여우) 같애가지고요. 조총이란 것을 맹글었는데요. 쪼그마한 구녕을 뚤봐서 눈까리를 들이대고 존주어서리 들이 쏘며는요. 쎄사리가 빠지쟌소. 일이만은 택도 없고 십만 군사는 길러내야 떼까리로 뎀비도 끄떡없지비요.” 조선시대에도 야생에 흔했던 여우, 여시, 영깽이.

야생사진가 호시노 미치오는 사십대 초쯤 불곰에 습격당해 죽었다. 알래스카에서 대학생활을 했는데, 여우 사진을 많이 찍었다. 북극여우는 깜찍하고 귀여우나 먹이 앞에선 날렵하고 생존 능력도 뛰어나다. 연보랏빛 야생 크로커스가 핀 강가 둔덕. 가문비나무숲이 흐드러진 에스키모 마을. 바다표범 육포를 나눠 먹으면서 겨울을 나는데 배고픈 겨울엔 큰사슴 무스와 카리부, 여우도 사람 사는 마을에 출몰한다. 사진가는 “여우가 사람 길목에 나타날 때는 ‘아~ 정말 춥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술회한다.

덴마크 작가 요른 릴은 그린란드에서 16년을 살았다. 일기 삼아 쓴 &lt;북극 허풍담&gt;은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폐지수집상이 하도 글씨체가 특이하고 내용도 재밌어서 출판사에 보내 빛을 보게 된 책. 어둠과 추위 속에서 개들을 기르고 곰을 사냥하고 여우를 만나는 일. 북극은 사람이 하도 귀하고 소중해서 비정규 인력이다 뭐다 사람을 괄시하거나 착취하진 않는데, 사기꾼들은 어디나 있다. “개벼룩을 함께 나눌 예쁜 여자가 있다면 좋겠네.” 허공에 키스를 날리던 고독한 아이슬란드인. 문명인들은 이 원주민들 상대로 사기를 치고 총을 팔고 사람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바리장대로 사방을 두른 여관. 북극권 툰드라 캠프. 정성을 다해 먼 길 손님을 마중하던 원주민들. 주인은 마치 제 친척이나 자녀가 온 것처럼 손님을 맞았다. 장작불 아래서 커피를 마시며 첫 사냥길을 들려주던 그 촌로들은 이제 죽고 없어라. 카리부 사슴뿔이 걸려있는 북극 시골 여관. 앙금쌀쌀 다가온 북극여우가 불빛에 안도하며 살길을 찾던 집. 그런 여관은 이제 책 속에나 있는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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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키는 혹독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때 만난 이웃사촌을 평생 잊지 못했다. 시인과 매춘부, 나환자와 수녀, 부두노동자, 무덤 파는 인부, 묘지 경비원, 교수형 집행인, 도둑과 거지, 소매치기 사기꾼, 살인 수배자,  양치기, 열쇠와 시계제조공, 이발사, 마법사, 고물상, 곱사등이, 새장수, 낚시꾼 어부, 재봉사, 결핵환자, 떠돌이 악사들.

공동묘지 파는 인부는 무덤 팔 때도 아코디언을 짊어졌단다. 그는 지옥을 안 믿었다. 의로운 자는 거룩한 곳으로 가고 죄인의 영혼은 육체 속에서 벌레들이 다 파먹을 때까지 남는다 말했다. 그는 죽은 자를 위해 세속 노래를 연주해줬는데 불경스럽다며 신부에게 욕을 얻어먹었다. 고리키는 신부가 아니라 무덤 파는 인부를 성스럽게 여기고 글로 남겼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도 고생스러운 생애였다. 10대에 고아가 되어 막노동을 전전했다. 어찌 저찌 시인 소리를 들으며 행복도 잠깐. 장남은 콜레라로 병사, 차남은 자살. 큰딸은 정신병원에, 넷째는 병사. 우울증이 깊어진 시인은 추운 겨울 병상에 누워 성탄별을 보았다. “세상은 그래도 사랑하기에 좋은 곳이에요. 이런 곳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요새 무시는 쌩으로 묵어도 이상 달어라. 코가 잘래나가도록 추와야 단물이 싹 들지라. 사람도 추와야 잔 사는 거 같어부러. 더와서 쌔(혀) 내놓고 다닐 땐 사람이 아니재. 갱아지재.” 막 파낸 굵은 무를 한소쿠리 안겨주고 간 할매. “짐치 못 담궈묵겄스믄 기냥 깎어서 깍깍 씹어 자셔. 방구 냄시도 맛나고이.”

보해소주 잎새주를 마시는 이쪽 동네는 ‘보헤미안’이 아니라 ‘보해미안’ 랩소디. 무국을 마시면 간밤 술이 벌떡 깬다. “마마 저스트 킬 어 맨… 우우우….” 날마다 죽고 또다시 사는 신비로운 겨울나기. 명함도 보잘것없으며 아예 있지도 않은 이들이 눈보라를 견디면서 살아가는 산동네. 앞집에서 들바람을 막아주지 않으면 뒷집이 춥고, 뒷집에서 산바람을 막아주지 않으면 앞집이 추운 골목길.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우쭐거리면서 청기와집 인연을 자랑해댄다. 기와공이 죽어가는 세상에서 기와집을 자랑하는 머저리가 아닌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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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보이던 염소가 한 마리도 안 보인다. 아기를 가져 배가 남산이 된 염소, 귀염둥이를 데리고 다니는 염소, 맴맴 돌다가 목줄에 감긴 염소, 우두커니 먼산바라기를 하는 수행자 염소, 뺀질뺀질한 양아치 염소, 안 가겠다고 삐대고(버티고) 앉은 떼쟁이 염소, 입삭낭구(잎사귀)를 죄다 뜯어먹고 배터지기 직전의 부잣집 염소, 졸다가 경운기 소리에 자망해서 뒤로 나자빠진 염소. 뿔자랑을 하며 깔짝깔짝 싸움을 거는 염소. 세상 뭐 있어, 디룩디룩 살찐 염소, 멀뚱멀뚱 똥개를 쳐다보는 염소, 부잡스러운 염소, 시부렁거리는 염소, 암컷을 쫓아댕기는 염소, 명주 솜털만큼 보드랍고 얌전하니 시말스러운 염소. 흑사탕처럼 검은 똥을 뻐르적뻐르적 싸놓은 염소…. 갑자기 하얗고 검은 염소들이 보고 싶어라. 내년 봄까지 기다려야 하나.

김성동의 소설 <염소>는 여덟 달을 살다간 흑염소 빼빼의 이야기. 노랑내 난다고 소금을 한 주먹 집어먹게 한 뒤 칼잡이는 빼빼에게 덤벼들고, 순간 빼빼는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린다. 충남 보령 솔미마을. 입만 열면 “떠야지, 떠야 혀”라고 말하는 주민들 속에서 어디론가 떠나고팠던 빼빼. “편지해!”라는 청삽살이의 배웅을 받으며 장으로 끌려갔다. 중간 상인을 들이받고 잠시 자유를 얻기도 했다.

“내가 사람의 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움직였을 때, 나는 이미 힘없이 끌려만 다니던 어제의 염소가 아니라는 것을….”

빨강 에나멜 구두나 또각거리는 도심에선 볼 수 없는 염소를 만나러 북인도나 중동땅에 가고는 했다. 파키스탄에선 염소가 사람만큼 흔하다. 염소들이 맞아준 검은 밤엔 로티빵을 씹으며 염소젖을 먹어보기도 했다.

눈앞에서 사라지자 문득 보고 싶은 무엇들이 생기질 않던가. 하지만 다시 봄이 되어도 보기 싫은 얼굴들이 있다. 옥에 갇힌 적폐의 얼굴들. 그들을 누구 맘대로 석방 운운인가. 잠시 한뎃바람을 피하자는 겨울 염소도 아니고 말이다. 염소는 악마의 얼굴을 닮았다지만 진짜는 다른 데 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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