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시냇물 하나 이렇게 흘려 놓으셨나요.’ 

송창식의 ‘사랑이야’ 노랫말(2절)이다. 여기서 ‘당신’은 누구일까. 사랑은 짧다. 연인일 가능성이 가장 작다. ‘당신’에 정체성, 적, 상처, 습관, 질병… 어떤 단어를 대입해도 말이 된다. ‘당신’은 내 몸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평생의 화두가 아닐까. 득도하지 않고서야 ‘당신’과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 인생이요, 역사다. 인생고(人生苦)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알아도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 고민이 멈추지 않는 상태다. 

트럼프를 보면서 ‘한반도의 당신’에 대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1866년 조선은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동강에서 제너럴셔먼호(號)를, 1871년 강화도에서 미군을 물리쳤다. 당시 삼화현감 이기조는 미 군함 세난도호 함장 피비거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들은 우리 강토와 백성들을 차지하려는가, 아니면 우호 관계를 맺고자 하는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가, 그대의 소원을 말하고 아무것도 감추지 말라.”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무것도 감추지 말고 원하는 것을 말하라? 미국이 속마음을 말하겠는가. 조선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가. 알 수 없는 열강 앞에 무력한 모습. 그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미국에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반미, 친미, 비미(批美), 용미(用美), 숭미(崇美), 모미(慕美), 탈미(脫美)…. 이 언설의 경합은 우리 내부의 혼란과 갈등을 반영한다.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현대사에서 미 군정기 3년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가장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본다. 최초의 미군 범죄는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항에 도착한 바로, 그날 일어났다. 일본 경찰은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조선인 두 명을 총살했고, 미군은 이에 감사했다. 환영 인파는 흩어졌다. 미군은 일본의 보호 속에 등장했다. 몇 시간 후 환영차 인천항에 나온 조병옥, 장택상, 정일형 등 연합국환영위원회 대표들에게도 미군은 총을 겨누고 접근을 막았다. 미군과 조선의 첫 만남은 살상과 무시였다. 

그 뒤로도 미국은 떠나지 않았고 군부 독재 세력은 미국을 뒷배 삼았다. 한국인들은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조금씩 ‘당신’, 미국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과 동화되어 가고 있다. ‘미국병’은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미국은 ‘친밀한 적’ ‘짝사랑하는 적’ ‘욕망하는 적’이다. 우리는 문화적, 심리적, 지적으로 개성보다 뉴욕을 훨씬 가깝게 느낀다. 아직도 미국의 주(州)가 남한을 포함하여 51개인 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2018년 4월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이루어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만남이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이제 트럼프 관련 뉴스가 피곤하다. 그가 주도하는 ‘밀당’, 아니 강대국의 농간(‘전략’)이 지겹다. 지난 15일에도 북측이 밝힌 3차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트럼프는 “대화는 좋은 것”이라고 반복하면서도 “그러나 빨리 가고 싶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좋은 관계다, 대북 제재도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1960년 8월,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썼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 하루바삐 나가다오. … ” 그의 지친 분노가 들리는 듯하다.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이처럼 다른 시각과 캐릭터의 지도자가 함께 만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다름이 바로 기회요, 힘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책임이나 탓의 차원이 아니다. 북한이나 미국은 어쩔 수 없는 ‘그들’이지만, 우리 사회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아무리 지정학이 문제라고 하지만, 약소국의 운명이라고 하지만, 캘리포니아주의 2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땅조차 둘로 갈라졌지만, 약자 필패가 필연은 아니다. 중국을 이고 사는 베트남은 약소국이 강대국을 슬기롭게 대처한 좋은 사례다.

반미와 친미의 이분법을 넘어 ‘우리 안의 미국’을 뒤돌아볼 시기다. 

그런데, 새로운 미국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 나타났다. 이언주 의원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죽음은 문재인 정권의 책임이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셨겠는가. 계급혁명에 빠진 좌파 운동권이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한다. 계속되는 그의 몰상식이 원래 사고방식인지 선거 전략인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조 회장의 사인은 폐질환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사망했으니 신미(信美), 미국을 믿으라고 해야 할까.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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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이해했다면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도리스 레싱의 말을 빌리면, 용서란 이런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지만 용서도 할 수 없다. 호미 바바의 말을 빌리자면, 기억(re-member)은 사지(四肢)가 재조합되는 환골탈태의 과정이다. 기억과 용서는 이토록 힘든 일이다.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씨가 지난 11일 법정에 섰다. ‘광주 학살’ 이후 39년 만이다. 치매와 감기 등의 이유로 출석을 피하려고 발버둥치다 법원의 강제구인에 따라 광주지법 201호 대법정에 선 것이다.

나는 서울 토박이로 ‘80년 광주’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전두환씨는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통령이 되기 전 그는 정치인의 활동을 봉쇄하고(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언론인과 공무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정(肅正)했다. 언론인만 711명이 해직되었다. 말이 숙정이지, 독재 국가의 소위 숙청(肅淸)이었다. 내 아버지 이름이 이 명단에 있었다. 우연이 겹쳐, 고교 교사였던 엄마는 박정희 정권 말기에 교직을 그만두셨다. 맞벌이였던 우리 집은 생계부양자가 사라졌고, 나는 그때 초등학생이었다. 아버지의 퇴직금은 소송비용으로 없어졌고 부모님 모두 백면서생인 덕분에, 나는 종종 서무실로 불려가는 학생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대학 생활은 5공화국과 함께였다. 휴교, 최루탄…. 사복 경찰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공부, 여행, 모색 같은 개인의 삶은 없었다. 그냥 상황에 휩쓸렸다. 이후 내 삶의 기준은 오로지 “20대처럼 살지 않으리라”였다. 나는 전두환씨에 대한 증오를 잊은 적이 없지만 ‘광주분’들 앞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동갑인 지인이 “난 대학 생활이 좋았어. 그때부터 소비 사회였잖아?”라고 말했다. 나는 책상에 뛰어올라 그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동시대의 기억이 이렇게 다르다. 전두환씨는 “하필 내가 그때 대통령이어서… 피해자는 나”라고 주장한다.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위 부정론자들은 말한다. “홀로코스트는 없었다, 난징대학살은 없었다, 군 위안부는 없었다, 문서가 없거나 없어졌으므로.” 고통을 경험한 사람의 증언을 ‘종이’로 묵살하는 것이다. 물론, 실증과 실증주의는 다르다. 기록된 역사보다 더 중요한 진실은, 기록도 사람이 만든다는 사실이다.

생존자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에 전두환씨와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행태는, “잊지 말자”는 다짐 정도가 아니라 기억을 둘러싼 비상사태임을 의미한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내전 중이다. 역사가는 기억 활동가(memory activist)라고 말하는 임지현의 신간 <기억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는 이 문제에 대한 흥미진진한 세계사다. 사실(寫實)이 사실(史實)로 만들어지는 사태에서 살아남은 자는 어떻게 주체적으로 연루할 것인가를 묻는다.

식민 지배를 겪은 이후, 많은 국가들이 ‘진실과화해위원회’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었다. 내 의문은 이것이다. 진실과 화해는 양립할 수 있을까, 과연 진상 규명(facts finding)이 가능할까. 진실은 곧 화해로 연결되는가? 오히려 ‘진실’ 자체가 더 문제는 아닐까.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가 달라지고 연구자나 정치권이나 ‘기억 비스니스’에 분주하다. 얼마 전 군 위안부 주제의 학회에서 많은 발표자들이 “제가 위안부 전문가는 아니지만…”이라고 서두를 시작했는데, 기억 연구를 둘러싼 다른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억투쟁은 정의를 위해서이지, 피해자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일수록 “우리가(내가) 가장 피해자” “완벽한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진다. 결국 피해자는 또다시 고통받는다. 강자는 고통을 연구하고 ‘성찰’하지만, 약자는 고통을 경쟁하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누구에게? 가해자에게? 그러므로 기억전쟁은 사회를 바꾸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피해자의 경험이 의심받고 부정될 때, 피해자는 이중적 자아를 갖게 된다.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가 분리되는 것이다. 진실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공동체의 산물이지, 처음부터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기억전쟁>에 의하면, 유대계 폴란드인 역사가 비톨트 쿨라(Witold Kula)는 1980년대 초 이렇게 예견했다고 한다. “예전에 유대인들은 돈과 자질, 지위, 국제적인 네트워크 때문에 질시를 받았다면, 지금은 강제수용소의 소각로 때문에 질시를 받는다.” 인류가 기억의 연대보다 피해의식을 경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해는 인정받지 못하고, 피해의식만 넘쳐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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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 연구자 권김현영이 신간 <미투의 정치학>에 쓴 “그 남자들의 ‘여자 문제’ - 진보 남성의 미투 운동에 대한 이해”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그녀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재판을 내내 모니터링하고 연구했다. 안씨는 1심 공판 최후 진술 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지위가 타인의 인권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당시 그는 무죄를 확신한 듯 진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고, 이 한 마디만 남겼다.

무슨 뜻일까. 진부한 비유지만, 술 마시고 운전했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다?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의 핵심 논리이기도 한 “나는 권력자이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인 듯하다. “지위의 존재와 행사를 분리한 비문(非文)”이라는 권김현영의 분석이 없었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은 강제 외에도 매우 다양하다. 권력은 이데올로기, 어쩔 수 없는 조건, 사회 구조 등에 의해 자가 발전(發電)하는 공동체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설령, 갑이 위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인격적인 사람이라 해도 위력은 존재 자체로 작동한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 아닌가.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는 1심 재판부에 묻고 싶다. 당신들은 권력에서 자유로운 집단인가. 모든 업무를 동의와 합의로만 진행하는가. 당신들은 고시 동기생이 진급하면, 직장을 그만둘 만큼 권력에 민감한 집단 아닌가? 군인들도 동기생이 먼저 승진하면 전역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문화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권력 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인간관계는 권력관계다. 권력 개념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삶에는 힘의 원리가 작동한다.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간단히 구분되지 않는다. 갑을의 처지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더구나 지금 한국사회는 ‘갑을’을 넘어 ‘갑을병정’의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다.

살아남기 위한 자발적 복종, 다양한 협상과 전략은 인간의 오래된 생존 방식이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모두 공기와 같다. 이것을 뿌리 뽑는다는 발상, ‘근절(根絶)’은 관념이다. 인간의 몸은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권력관계가 조금이라도 상식적, 합리적, 인간적으로 작동하기를 바란다. ‘땅콩 회항’, ‘라면 상무’, 양진호씨 사건,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이러한 상황은 권력자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노동 생산성을 저하시키고,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공도동망의 길이다.

성폭행은 인류의 역사와 그 시간이 같기 때문에 오히려 탈역사화되어 ‘남녀 관계’로 변질되어 왔다. 당대의 미투 운동은 노동 시장 문제다. 안희정씨 사건은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이다. 이 사건은 많은 남성들이 생각하듯 개인의 ‘여자 문제’가 아니다. 일국 내부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용 자체가 몰락하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다. 직장 내 권력관계는 개인의 인격과 생사여탈권을 좌우한다. 미투는 생존권 문제다.

안희정씨 사건은 노동 시장에서 성별 권력이 작동한 전형적인 예다. 고용, 급여, 근무 조건, 경력 문제 등 노동 문제를 남녀 간의 성(性)문제로 둔갑시키는, 이 권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가해자의 입장이 그토록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별(젠더)은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지만, 남성 사회는 ‘여자 문제’, 피해 여성 문제로 치부한다. 성별은 남녀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 만일 ‘여성 도지사-남성 비서’ 관계도 위력은 존재하겠지만, 여성이 성폭력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는 드물다.

권력 개념은 유동적이다. 갑과 을은 고정되거나 팩트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가 피해자라고 다투는 이유다. 우리는 모두 위계의 그물망에 걸려 있다. 나를 포함하여 언제든 가해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성차별이나 계급 양극화 외에도 연령주의, 장애인, 성적 소수자, 이주 노동자 차별 등 다양한 힘의 관계가 각축한다.

사실, 이 글의 주장은 제목에 있다. 나는 안희정씨가 본인을 위해서라도, 이 사건을 3심으로 가져가지 않았으면 한다. 2심 이후 안씨 부인의 행동은 민망했다. 노동 인권 사안을 ‘불륜’이라고 주장하는 행동이야말로 윤리적이지 않다. 유일한 명예 회복은 조용히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3심 판결과 상관없이 그는 문귀동 형사, 신정휴(우 조교사건), 조재범, 김기덕, 고은, 이윤택씨처럼 각계의 성폭력 가해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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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게 성폭력(rape) 예방 교육을 할 때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마라, 싫다고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성폭력 가해자의 대다수는 피해자와 아는 사람이고 어린이 성폭력은 더 비율이 높다(80%). 무엇보다, 압도적인 폭력 상황에서 “분명한 의사 표현”이 가능할까. 효과보다 역효과가 클 가능성이 높다.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잠재적 피해 집단을 대상으로 한 교육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오죽하면, 이런 방식을 제안하는 이들도 있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절대로 아저씨를 쳐다보지 마라.” 아저씨라고 썼지만 가해자는 대개 아빠, 삼촌, 아빠 친구, 오빠, 교사, 의사, 경찰 등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이들이니, 모른 척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피해자에게 침묵이 강요되는 이유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 사회는 성폭력 범죄를 다룰 때 구조적 문제나 가해자의 행위보다 피해자의 동의 여부에 집착한다. 남성은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여성은 그것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처럼 결정할 권리가 불평등한 상태에서, 합의 여부를 중심으로 성폭력을 다루는 것은 애초부터 피해자에게 불리하다. 성폭력이 지속되는 이유다. 합의 상황의 복잡성을 다투는 성인 대상 성폭력에 비해, 어린이 성폭력은 사회의 공분을 사지만 생각만큼 제대로 처벌되지도 않는다. 피해 아동이 여러 명인 경우조차 사회(가족, 학교, 교회 등)는 가해자 편에 선다.

‘위계나 폭력 상황에서도 피해자는 선택할 수 있다’는 발상은 피해자의 능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피해자가 운동선수이든 전문직 여성이든 어린이든, 그것이 왜 중요하단 말인가. 성폭력 발생 원인은 남성 중심적 성문화에 있지, 피해자의 인구학적 특성(나이, 학력, 직업…)과는 무관하다. 성폭력도 다른 범죄처럼 가해자의 행위만 판단하면 된다.

조직 내 위계나 물리적 폭력의 정도에 따라 피해 내용이 다를 뿐, 성폭력의 본질은 위계와 결합된 성별 권력 관계다. 이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해결은 없다. 나의 생명과 생계 그리고 평생의 경력을 쥐고 있는 상대방과 어떻게 합의가 가능하단 말인가. 본디, 합의(consensus)는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끼리도 달성하기 어려운 지속적이고 끈질긴 협상 과정이다. “합의였지?”라는 비난 때문에 피해 여성은 분노 속에 침묵한다. 성폭력은 최고의 ‘암수(暗數) 범죄’가 될 수밖에 없다.

남성에게 성(sexuality)은 유용한 도구다. 갑이 남성이고 을이 여성일 때, 권력은 성폭력으로 행사된다. 모 종목의 기대주였던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코치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낙태한 후 선수 생활을 포기한 사례만큼이나, 여자 선수를 지도하는 남성들이 룸살롱에 갈 필요가 없다는 ‘자랑’이 끔찍한 이유다.

이번 조재범씨의 경우는 온 국민이 “강력 처벌”을 바라며, 피해 여성을 응원하고 있다. 하지만 안희정씨 사건의 피해자, 미투를 한 검사도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세 사건은 피해 기간, 가해자와의 관계, 피해 성격은 다르지만 모두 위력에 의한 폭력이다.

하지만 여론은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고른’ 분노를 보이거나 옹호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판단 기준이 가해자의 폭력이 아니라 피해자의 대응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완벽한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만 인정한다. 완벽한 인간도 없는데, 완벽한 피해자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 잣대를 유독 여성에게만 요구한다. 피해 여성은 끊임없이 사건 자체는 물론, 자신의 모든 인생과 과거사를 검열당하고 변명하게 된다. 남성도 상사에게 구타당한 다음 날 ‘웃으며’ 출근하고, 자기를 때린 사람을 위해 맛집을 검색한다. 이것이 피해자가 동의한 증거인가?

체육계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조재범씨 사례는 전형적이다. 빙상연맹은 방관 정도가 아니라 범죄를 조직, 격려했다. 대한체육회, 문화체육관광부는 책임져야 한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해결 의지다. 작년 이즈음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의 모델이 되었던 우리의 미투 운동을 생각해보자. 무엇이 달라졌는가?

강력한 처벌? 필요 없다. 합리적인 처벌을 바란다. 한국은 성폭력 관련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다. 2017년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이자 미시간주립대 의대 교수였던 래리 나사르는 150여명의 여자 선수들의 고발로 360년형에 처해졌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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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 화학상은 세 명의 영미권 학자에게 돌아갔다. 가장 연장자인 미국 미주리 대학교의 조지 P 스미스(77)의 수상 소감이다. “거의 모든 수상자가 자신이 받는 상은 ‘딱 그때 그곳에 있었기에’(강조는 필자) 활용하게 된 수많은 아이디어와 연구, 전례 위에 쌓인 것임을 알고 있다. 노벨상에 이르는 연구는 매우 적고, 사실상 전부가 이전에 진행됐던 것에 기반을 둔 것이며 수상은 우연(happenstance)이다. 내 연구도 기존의 연구 위에 자연스럽게 구축된 것이다.”

대개 이런 말은 겸손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시상식장에서 영화배우들이 “많은 스태프들의 도움이 있었다” “나는 차려진 밥상에 수저만 얹었을 뿐이다”라는 소감처럼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타인에게 공을 돌리는, 그런 겸손 말이다. 영화의 완성 과정도 그렇겠지만, 수천 년 이상 지속된 과학 연구에서 노벨상 수상은 개인의 독자적인 업적일 수 없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과학자는 “우연”이라 말했지만, 인문학에서는 “부수적 사건(contingency)”이라 표현한다. 같은 말이다. 부수적(附隨的)이 ‘좀 더 겸손’하다고 할까. 노벨상 수상은 학문 전체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일 뿐이다. 수상자는 ‘하필’, “딱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중 우연히 받게 된 것이다. 정확한 자기 인식이다.

모든 과학자가 이런 수상 소감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서구 사회 연구자들은 모든 자원이 부족하다. 물론, 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작 뉴턴의 유명한 말, “내가 남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이 이야기도 뉴턴이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여성주의 역사학자 거다 러너는 뉴턴의 말을 약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했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가 아니라 ‘발’ 아래서 세계를 처음 접한다, 사회적 약자는 이미 출발선이 다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출발선이 위로가 된다. ‘우리는’ 어깨 위에서 시작한 이들보다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더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 인도의 철학자 메타(J L Mehta)는 이렇게 말했다. “동양에 있는 우리에게 길은 유럽을 지나는 길 외에는 없다. 이국적인 것, 이질적인 것을 항해함으로써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에게 돌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길은 가장 길게 돌아가는 길이다.” ‘인도’가 자신을 알기 위해선 ‘영국’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우연은 흔히 생각하듯 비합리적이거나 불공정한 운이 아니다. 필연의 반대말은 더욱 아니다. 우연과 필연은 무관하다. 필연은 불가능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인생에 “반드시”는 있을 수 없고 법칙대로 되는 인간사도 없다. 역사는 전사(前史)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다. 우연은 그 해석의 유동성이 낳은 ‘필연’이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지만 어차피 모든 인간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다. 미래(未來)는 글자 그대로 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모르는 집단이나 개인이 고달픈 이유는 미래를 몰라서가 아니라 과거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힐링은 삶의 앞뒤 상황을 해석하는 것이다. 사회적 문맥을 고려하면, ‘성공’에 따른 도취도 ‘실패’에 따른 좌절도 상대화된다. “딱 그때 그곳을 지나가다가”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져 자신에게 차례가 오는 것뿐이다. 이것은 소박한 기쁨일 수도 엄청난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 인생에는 법칙이나 인과 관계가 없음을 어찌하랴. 내 성공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잘나서”라는 자만에 빠지기 쉽고, 고통의 원인을 찾다 보면 더욱 고통스러울 뿐이다.

개인의 행위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사회적 상황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얘기다. ‘금수저 개인’만이 승자가 되는데도, 경쟁과 승부가 강조되다니 이상한 일 아닌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역사적 사유(우연, 부수적 상황)가 불가능하다. 현재 우리 사회는 개인의 극한 노력과 구조의 양극화라는 불공정 게임이 동시에 존재한다. 승패가 정해진 사회에서는 과정조차 의미가 없다. 이제는 과정도, 결과도 아닌 전제를 따져야 한다. 개인의 힘으로 되는 일이 거의 없는데도, 여전히 개인의 성취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많은 이들이 낙오자 정서에 시달린다. ‘셀럽 문화’가 그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실제 개인의 삶은 철저히 구조 속에 갇혀 있는데도, 개인의 노력으로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좌절한 개인들은 관종(‘관심 종자’, 지나치게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기 쉽고, 인간관계는 이들의 자기도취와 허언증으로 파괴된다.

행과 불행, 성공과 실패, 질병과 상실의 고통… 이 모든 것이 내 잘못도 상대의 잘못도 아니라 거대한 역사의 부수적 사건이라면, 나는 그저 망해가는 지구의 나그네라고 생각하면, 덜 괴롭지 않을까. 덜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역사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내가 추구하는 일을 하면서 역사를 흘끗 보자. 힐링은 딱 그때 거기를 지나간 내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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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은 구한말 노비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어디서 왔느냐?(Where are you from?)”였다. 이방인인 그는 이 질문이 고통스럽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모르는 것을 묻는다’는 평범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는 내 땅인데,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뜻이다. 익숙한 논리다. 어린 시절 어깨동무를 하고 편을 갈라 주고받던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 노래가 시작이었을까.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 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訊問),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도 묻는 자의 교양, 인격, 무지, 태도를 알 수 있다. “어쩌다 동성애자가 되었나요?” “자네는 어느 대학을 나왔나?” “왜 아직도 취직을 못했나?” “여자가 왜 이런 일을?” 이런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인권 침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에 노출되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 상대는 어디에 ‘서’ 있는지, 내가 하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것이 평생의 화두여야 한다.

당연시되고 고착된 질문은 폭력이다. 가장 괴로운 질문은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일 것이다. 고문이 대표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질문은, 가해자(피의자)에게 할 질문을 피해자에게 하는 경우다. 성폭력 범죄가 그것이다. 조사를 가장한 피해자 비난, 여론 재판…. 유아 성폭력이거나 가해자가 여러 명인 사건을 제외하곤(?) 피해자가 질문에 시달린다. 피해자는 목숨을 건 저항 여부나 거절이 얼마나 단호하고 절절했는지, 특히 자신이 얼마나 피해자다웠는지 최대한 증명해야 한다.

1991년부터 성폭력특별법이 제정, 개정되는 과정에 참여해온 나는 전 충남도지사 사건을 통해 법정에서는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7년이다. 게다가 올해 봄, 들불과도 같았던 미투 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해자의 동의와 저항에 관한 질문은 집요하다.

이제는 동의, 저항 여부 자체가 쟁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가해자에게 질문하자. 절도나 사기사건, 즉 다른 형사사건의 피해자에게 성폭력 피해자만큼 질문하는가? 아니, 사건 발생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가? 일단, 법정은 가해 용의자에게 질문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궁금한 것이 너무 많고, 뭐든지 질문해도 된다는 권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내가 아는 가정폭력 피해자는 40년 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환갑에 이르러 이혼 소송 중이다. 처음에는 데이트 폭력으로 시작됐다. 주변에서는 모두 결혼하면 나아진다, 아들이 있으면 그만둘 것이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 아이가 결혼하고 손자를 보면… 결국 그녀는 스무 살에 만난 한 남성에게 평생을 구타당했다.

문제는 “고쳐진다”는 통념을 수용한 피해 여성이 남편의 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는 등 상황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통념과 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왜 때린 사람과 결혼했느냐, 왜 경찰에 신고를 안 했느냐,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는데 왜 이제야 이혼하려고 하느냐, 혹시 다른 이유(돈,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피해 여성이 폭력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당사자마다 다르고, 제3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자는 이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다.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운동은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성별 권력관계는 더욱 그렇다. 가해자에게 질문하는 반성폭력 운동을 제안한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왜 여성을 때렸습니까? 아내를 ‘교육시킨다’면서, 교육만 시키지 왜 죽였습니까? 안 때린다고 공증까지 했으면서 왜 또 때렸습니까? 술을 마셔서 때린 게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 거 아닌가요? 술을 마시고도 아내를 때리지 않는 남성이 훨씬 많습니다!

왜 비서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왜 안마를 요구했습니까? 왜 수시로 초과노동을 시켰습니까? 왜 해외 업무에 동반했습니까? 왜 평소엔 여성인권 운운했으면서, 이중적 태도를 보였습니까? 왜 자신의 성폭력 재판에 부인이 나왔죠? 본인이 생각하는 성폭력과 성관계, 사랑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피해자와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왜 불륜이라고 거짓말했습니까?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폭력과 관련한 질문 내용은 그 자체로 가해자의 시각에서 구성한 것이다. 위력의 행사가 자연스럽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가해자의 행동이 궁금하지 않다. 대신 피해자의 대응이 의문시될 뿐이다. 피해와 피해 이후의 심문. 약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법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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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 여고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다. “(가임 적령기인) 30대 초반 여자 인구가 제일 적다며?” “당연하지! 그렇게 여아 낙태를 해댔으니, 여자들이 남아났겠냐.” 이렇게 똑똑한 여성들이 앞으로 한국 사회를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현재 인권 관련 국제기구들은 한국의 심각한 여성 인권 문제를 아내에 대한 폭력(가정폭력)과 성형 시술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분야에서 한국의 ‘상징’은 여아 낙태였다. 한국의 태아 성 감별 의료 기술은 세계적 수준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여아를 원하는 부모들이 성 감별을 통해 남아를 낙태시키기도 한다. 임신 중단 합법화, 즉 기존의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낙태죄 폐지는 너무 당연하다. 찬반 논의는 사회적 역량 낭비다. 낙태죄는 오래전부터 사문화(死文化)된 법이다. 낙태죄 폐지 주장이 제기되자 “낙태가 불법이었어?”라고 되묻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만연한 현상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법적 구속력이 전혀 없는, 있으나 마나한 법이 불법으로 규정함으로써 국민(여성)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해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일부 남성들은 단지 여성을 괴롭히기 위해 낙태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이용한다. 이혼 소송 중인 남성, 상대방의 임신 사실도 몰랐던 남성, 양육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남성들이 여성을 임신 중절로 고소하는 경우다.

가장 의아한 점은 왜 이 논의가 여성의 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대립으로 전개되는가이다. 여성들의 주장대로 “내 몸이 바로 생명이다”. 이토록 간단한 진실이 있을까.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짓밟은 이들이 진정 누구였는가. 1970년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국가 주도의 가족계획 사업(강제 낙태)이 대표적이다.

생명은 평등하지 않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장애 여성, 10대 여성의 임신과 그들의 생명은 사회가 ‘반기지 않는다’. 생명을 그토록 존중하는 나라가 1956년부터 1998년까지 해외 입양 부동의 1위국이었단 말인가(지금은 중국이다). ‘여성의 선택권’ 역시 그다지 억압받은 적이 ‘없다’. 여아 낙태는 가부장제 사회의 강요에 의한 것이든 여성들의 주체적 행위성(동의)이든, 여성들은 이미 충분히 ‘선택’해 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성비(性比·여아 100명당 남아의 숫자)는 100 대 105 정도가 정상이다. 그러나 대구·경북 지역의 경우 셋째 자녀의 성비가 100 대 140을 육박하는 시기도 있었다. ‘여아 학살’로 인한 성비 불균형은 “초등학교 남학생들에게 여자 짝꿍이 없다”는 또 다른 남아 걱정으로 이어졌다. 대책(남아 선호 문화의 폐지) 마련을 문제의 원인(다시 남아 위주)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낙태가 범죄(crime)든 죄(sin)든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사회가 정한다. 죄라고 해도, 성관계에 참여한 남성과 여성 모두의 책임이다. 사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사회적’ 성역할이지 ‘신체적’ 능력에 의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신체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

낙태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가장 염려해야 하는 사항은, 낙태는 여성의 선택권이나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관계 시 남성의 권력과 무책임으로 인한 사후 피임, 즉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콘돔은 인류의 발명품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이었다. 인구 조절이 가능해졌고 여성은 임신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 시대 여성들은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평생을 임신, 출산, 육아로 보냈다. 근대 이전에는 전쟁 시 사망한 사람보다 출산 도중에 목숨을 잃은 여성이 더 많았다.

피임 방법 중 여성이 매일 복용해야 하는 경구 피임약이나 자궁 내 장치보다 남성의 콘돔 사용이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대개 남성들은 콘돔 사용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성별 권력 관계는 피임의 책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성이 남성에게 콘돔 사용을 강제할 협상력이 없고, 콘돔 사용을 “장화 신고 달리기”라며 억울해하는 남성 문화에다, 피임은 여성의 책임이라는 의식이 당연시되는 사회. 여성은 낙태라는 폭력의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낙태죄 폐지는 폭력의 후유증을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절실한 요구일 뿐이다. 남성의 ‘귀찮음’이 여성의 생명권을 침해한다. 낙태죄 존속과 폐지 주장 이전에,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과제는 남성의 인식 교정이다. 성관계는 쾌락, 의무, 교환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모든 전제는, 출산을 원치 않는다면, 피임이다. 피임을 성관계의 일부로 규범화해야 한다.

미국의 여성학자 주디스 앨런은 남성들이 낙태를 왜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하는지 궁금했다. 연구 결과, 남성들은 그릇으로서 여성의 몸(자궁)과 그 그릇에 담긴 것은 모두 ‘내 것’인데 낙태는 주인의 허락 없이 그릇을 비우는 “도둑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농구나 축구에 비유하면, 골이 들어갔는데 여성과 의사가 그물 밖으로 공을 빼는 행위에 대한 분노라는 것이다. 미국 남성에 비하면, 낙태에 관심조차 없는 한국 남성은 그래도 나은 사람들일까?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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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 4월은 4·3과 세월호를 기억하는 달이 아니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4·3을 삭제하려 했고,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다. 예전에 5월은 ‘광주’로만 기억되었으나 2016년 이후에는 강남역 사건이 더해졌다.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애도할 일도 많아지는 법이다. 내달, 6월에는 두 명의 중학생이 생각날 것이다.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중학생 사건(장갑차가 도로 폭보다 넓었다).

최근 출간된 소설가 정찬의 작품집 <새의 시선>에는 2014년 늦은 봄부터 2017년 여름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는 그간의 소설 쓰기가 “넋을 견디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틴다, 견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는 것도 힘겨운 지경인데, 죽은 자의 넋을 견디다니. 나는 이 글귀를 붙잡고 한동안 ‘넋을 놓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재해, 참혹한 ‘과거사’, 양극화된 노동조건, 혐오 범죄로 희생된 타인과 함께하는 삶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일상적 인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몸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쩌면 당장은 무관한 일을 어떻게 내 일처럼 계속 의식하고 살 수 있겠는가. 매순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넋을 견디는 일은 예술가만의 십자가이자 특권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질주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죽음과 모욕이 생생히 구현되는 현장을 살고 있다. 차라리, ‘구조’는 멀다. 공포는 ‘자본의 직격탄’이다. 서울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혼자 일하다 사망한 열아홉 살 청년부터, 용산참사, 세 모녀의 자살, 항공운송업 재벌의 맞춤형 밀수 사건까지.

애도는 소비의 적이다. 자본주의는 사유, 슬픔, 우울을 싫어한다. 낙관과 조증(躁症)이 자본주의적, 근대적 인지(認知) 상태다. 발전 지상주의 사회인 한국은 더욱 그렇다. 세월호 사건 때 택시를 탔는데 기사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4월이 행락철 대목이었는데 황사, 메르스, 세월호로 다 망했어요. 택시도, 관광버스 회사도 피해자예요. 죽은 사람은 안되었지만 산 사람은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의 생계 불안에 공감하면서, 생각했다. 고통 받는 이웃이 있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닌 시대에, 죽은 자의 곁에 있지만 아직은 죽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구의역, 강남역 사건 이후 “너는 나다”는 글귀가 익숙하다. 며칠 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관련한 포스터에서도 “너는 나다”를 발견하고 조금 놀랐다. 예전에는 “그들도 노동자에 포함시키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호가 선의라는 것을 알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호소력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며, 정확히는 비윤리적이다. 그 누구도 타인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과 나는 다른 개인들이다. 우리는 동일한 위험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지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너는 곧 나”라는 주장은 구체적인 피해자의 위치(죽음)를, 아직은 살아 있는 내가 취(取)하는 행위다. 고통에 대한 동일시가 연대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특히 말할 수 없는 처지의 피해자를 대변하려는 사회운동가나 지식인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윤리적 이슈다.

“잊지 말자” “나는 너다”,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하다. 피해자와 유가족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같지 않다. 기억하고 견뎌야 하는 일도 전혀 다르다. 유가족은 “잊지 말자”는 다짐이 필요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잊기 위해 몸부림친다.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다짐을 거듭해야만 잊지 않을 수 있다. 사실 나는 그조차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망자의 넋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행위가 가능한가? “잊지 말자”는 일상이 고통인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그들을 소외시키는 언어다. 슬픔이 일상이라면, 기억 투쟁은 필요하지 않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얼마나 다짐했던가. 그러나 거짓말처럼 비슷한 일이 무섭도록, 빨리,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구조적 해결도, 잊지 말자는 다짐도 다 공염불이다. 한국 사회,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진상 규명, 피해 보상, 명예 회복을 요구하지만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는 문제 해결의 일부분일 뿐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가해자’인 국가 권력이, 다시 문제 해결자로 등극하는 것은 권력의 최종 심급으로서 국가의 위상을 강화하는 행위다.

소설가는 말한다. “만장이 펄럭이는 세계 속에서 넋을 피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죽은 너와 살아남은 내가 같다고 말하기 전에, 일상에서 ‘나’는 ‘너’를 견디고 있는가. 살아 있는 이웃도 견디기 힘든데, 보이지 않는 죽은 자의 넋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그들은 보이지 않고 갈수록 잊혀질 텐데….

“너는 나다”라는 착각 속에서는 넋을 견디는 긴장과 혼돈이 필요하지 않다. 넋을 마주하려면 일상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타인의 혼이 내 몸 안팎을 들락거린다. 산 자와 죽은 자는 동거한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힘겹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위로가 될지 모른다. 안전한 사회는 슬픔의 노래가 지속되는 사회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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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교체기마다 골칫거리 중 하나가 교과서 문제였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버지 콤플렉스’ 때문에 단일 교과서 제정을 강행, 큰 논란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미투 운동으로 교과서 문제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지난 2월27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의 곽상도 의원(자유한국당, 대구 중구·남구)은 작년에 문화체육관광부가 고은·이윤택·오태석씨에게 8억6700만원을 지급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고은의 작품을 교과서에 삭제할 생각이 없느냐”며 ‘의기양양’하게 대정부질문에 나섰다.

이에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고은 시인의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 1개, 고등학교 교과서에 10개 등 총 11개가 실려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저작권은 발행사가 갖고 있다”며 교과서 발행사와 삭제 여부를 논의할 것임을 ‘거듭’ 공언했다. 인상적인 점은 김상곤 부총리와 곽상도 의원, 즉 ‘여야’가 교과서에 대해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12일 서울시 관계자들이 고은 시인의 육필 원고, 도서, 필기구 등을 전시해 놓은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내 만인의 방을 철거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나는 고은씨의 시가 교과서에서 삭제되지 않기를 바란다. 김기덕, 이윤택, 오태석씨도 마찬가지다. 나는 박근혜 정권 당시 국정교과서 제정에도 ‘찬성’했다. 물론 그 전제는 여성노동과 노예노동을 중심으로 “내가 쓰겠다”는 것이다. 여성과 노예 노동을 1000년 정도 배운 후에, 좌우 논쟁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

모두가 동의하는 올바른 역사는 없다. 역사처럼 당파적인 담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국민의 역사로서 국사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모든 역사는 누군가의 입장에서 특정 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주관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사실(事實)’을 사실(史實)로 만드는 과정이 역사이다. 중립적, 보편적 역사가 가능하다는 근대적 역사관에 대한 도전은 “역사는 이어지거나 수레바퀴처럼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베냐민의 주장부터 재일한국인 사학자 이성시(李成市)의 역작 <만들어진 고대(古代)>에 이르기까지 이미 수많은 비판이 이루어져왔다.

미투는 젠더(남성과 여성 간의 권력관계)뿐만 아니라 ‘문화혁명’에 준하는 사건으로, 우리 사회 전반의 뿌리 깊은 인습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에 문외한인 나조차 오래전부터 고은씨의 범법 행위를 알고 있었다. 내용도 알려진 사실보다 심각하다. 그의 행동은 상습적인 범법일 뿐 한량문화도, 기행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시가 계속 교과서에 실리기를 주장하는 이유는 ‘문학적 업적’ 때문이 아니다. 나는 원래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서사시, 대하소설… 한국의 일부 남성 문인들은 자신을 예술가가 아니라 역사 서술의 주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 중 하나다. ‘내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민족을 대표하기 때문에’ 타인은 없는 존재이거나 존재하더라도 그·그녀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그래서 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폭력의 원인이다.

친일과 반공으로 사익을 챙겨온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불가피하다고 믿어온 일부(?) 진보진영의 자기 직면은 지금부터다.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남아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교과서에는 모범적인 저자와 글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현실, 실패한 역사도 포함되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노벨상 타령”으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서구 콤플렉스와 남성 패거리 문화를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서다. “이런 시를 쓴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고 한국 사회는 그를 숭배해 왔지만, 여성들의 투쟁이 있었다”고 적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탄생한 시, 성폭력 가해자가 연출한 작품은 무조건 졸작 혹은 걸작인가. 교과서는 이를 논쟁적으로 제시하는 인식론이 되어야 한다. 김기덕 감독은 <해안선> <나쁜 남자> <빈집> <스톱> 등 작품의 완성도 자체가 황망한 경우부터 목불인견인 영화,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수작까지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공과를 따지기보다 인간과 사회는 복잡하고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유하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투명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를 포함, 현실을 세탁한 모든 텍스트는 ‘껍데기’다. 우리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책들은 넘치고 넘친다. 교사는 말할 것도 없고 학생들은 한국 사회의 실제 모습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현실과의 괴리로 인한 갈등도 적어지고 이후 현명한 대처도 가능해진다. 교과서는 우리를 인식할 수 있는 교사이자 반면교사여야 한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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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에 대한 나의 심정은 복잡하다. 걱정과 분노로 혼란스러울 정도다. 물론 지금 미투는 유사 이래, 어느 사회에서도 없었던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혁명이다. 나도 당사자이기 때문에 임전무퇴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회운동이 그렇듯, 미투 역시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여성들이 수시로 겪는 폭력은 당장 대책이 없다. 마음속으로 미투를 외칠 뿐이다. 고은이나 이윤택씨의 경우는 그들이 속한 커뮤니티(문단, 연극계)의 문제가 더 본질적이다. 망자(亡者)인 남성도 있고, ‘억울한’ 남성도 있다. 범죄의 성격과 경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 사회의 가해자에 대한 태도는 피해자 존중이 아니라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다(민주당의 정봉주씨와 안희정씨에 대한 다른 대처를 보라).

15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범시민행동 출범’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타파하자는 의미에서 현수막을 찢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교활한 상습범은 숨어 있고, 멋모르고 행한 ‘폭력적 애정 행각’은 선정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 즉 젠더는 법적 처벌이 어려운 사회적 모순이다. 공기처럼 작동하는 일상의 정치이기 때문에 탈법, 불법, 합법의 경계가 모호하다.

한편 지금과 같은 미투 운동 이전에 영화계 성폭력에 대한 내부 고발과 반성이 있었다. 영화계 성폭력 실태 조사와 지원 단체가 설립되는 성과가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흔한 적폐가 반복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해명해야 한다.

문제는 “미투를 지지한다”는 정부의 ‘사실상 무대책’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 상담은 고도의 전문성과 다양한 대응을 요구하는 중노동이다.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이명박 정권부터 작년까지, 정부는 무려 122조4000억원을 저출산 대책에 사용했다. 주지하다시피, 성과는 전혀 없었다. 그 돈의 1000분의 1이라도 성폭력 해결을 위해 지원하라. 작년과 올해 모두, 여성가족부 예산은 7640억원으로 정부 전체 예산의 0.18%다.

사회적 통념과 달리 미투로 인해 여성에 대한 폭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숨겨진 범죄가 드러나면서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미투는 남성 사회의 선택적 가시화와 무관하게 계속될 것이다. 사건은 지구의 70%를 덮고 있는 바닷물의 양만큼이나 많다. 문명 이래 가장 오래된, 가장 빈발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굳이 나눈다면 가해자는 크게 두 종류다. 범죄인 줄 알지만 처벌되지 않는다는 확신에서 대담하게 저지르는 이들이 있고, 그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용되어 왔기 때문에 ‘정말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를 탈식민주의 이론에서는 권력이 허락한 무지(sanctioned ignorance),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무지(willing ignorance)라고 한다.

모든 지식, 학문의 지위는 같지 않다. 외국어 능력에도 위계가 있듯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게 약”이고 “어떤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다. 남성 사회에서 젠더는 무지가 당연시되거나 심지어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홍준표씨처럼 여성정책토론회를 열어놓고 “나는 모른다”며 수면을 취하는 정치인의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그에게 여성은 인간은커녕, 유권자도 아니다.

지식의 의미는 권력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예를 들어 피임법은 남녀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무지의 영역이다. 문제는 이 의도적인 무지로 인해 누가 고통받는가이다. 동성애는 무지가 곧 폭력인 경우다. 대개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 가난한 지역에 관한 지식은 무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것을 자신이 중산층인 증거로 삼는 이들도 있다.

미투로 인해 가장 충격받은 이들은 아마도 ‘평범한’ 남성들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차마 그 정도 수준인 줄은 몰랐으며, 그들 덕분에 자신이 “점잖은 분” “여성을 존중하는 신사”로 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하긴, 어느 누가 이 정도 규모로 성차별, 성폭력이 행해지고 있을 줄 알았겠는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음모론 운운하는 김어준씨 같은 이들의 적폐는 그 발상도 발상이지만 수치심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성의 피해를 조롱하거나 성차별을 사소한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최소한 상식적인 남성들은 “너무 몰랐다” “창피하다” “할 말이 없다”고 고백한다.

미투 운동의 의미는 폭력의 감소가 아니라 남성교육에 있다. 한국 남성은 인간의 현실에 대한 무지가 ‘권력’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여성의 말하기가 남성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다. 한국 남성의 근대화는 지금부터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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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의 무너진 ‘적산(敵産)가옥’ 위에서 출발한 문재인 정부.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긴 항해를 거친 듯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더 이상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진사퇴를 불러온 몇몇 인사의 경우, ‘진보 지도층’의 생각지 못한 면모를 보았을 뿐, 완벽한 정부는 없다.

특히 대통령 개인의 인간적 매력과 가치관이 현 정권의 엔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전 사안에 대한 입장은 놀라울 정도다. 세월호, 5·18,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등 고통받는 이들을 대하는 그의 위로와 공감 능력은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서 최고 통치자’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우리는 알고 있고, 잊을 수 없다. 그 역시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다는 것을.

‘경남도민일보’는 문재인 정부의 3중고를 ‘야당, 추미애, 탁현민’으로 꼽았었다(7월11일자, 인터넷판). 국민의당이 대선 당시 제보 조작 사건을 이유미씨의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하자 추미애 대표가 “머리 자르기”라고 발언, 막말 논란을 겪을 때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문재인 정부의 ‘2중고’가 있다면, ‘적폐(특히 MB세력)’의 효과적 정산(正算)과 열렬한 지지층인 이른바 ‘문빠’로 인한 중간 지지층 이탈이다.

하지만 전자는 조사, 처벌 대상이므로 골칫거리가 아니라 국정 그 자체다. 문제는 후자다. 이들의 집단행동은 ‘홍위병’으로 오해(?)받을 만큼 과격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개혁세력이 이들로 인해 언로가 막히고 자기 검열에 갇힌다면? ‘문고리 3인방’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나부터 ‘문재인 팬덤’ 때문에 두려움과 피로를 느낀다. 되도록 현실 정치에 관한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에 대한 청와대 청원 사건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다.

그간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정현백 장관은 인사청문회 당시 탁현민 행정관에 대한 입장을 요구받았고 “그의 여성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대통령에게 경질을 건의하겠다”고 답변했다. 청문회를 주도했던 김삼화 국민의당 의원은 오랫동안 인권변호사로 활동해온 전문가다. 8월22일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국회운영위원회에서 “대통령의 인사권이 존중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정 장관께서는 (탁 행정관에 대해) 듣는 소리를 충분히 잘 전달해 주셨다”고 발언했다. 28일, 정현백 장관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사퇴 의견을 전달했지만, 무력했다”고 말했다.

이후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정 장관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개입하고 자신의 권한인 양 호도하며 (중략) 망동을 거듭하고 있다, 탁 행정관을 흔들지 말라”면서 장관 경질을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이 글은 ‘베스트청원’으로 분류되었다.

일부 언론은 “기이한 청원”(‘허핑턴포스트코리아’), “부적절한 처신이나 책임을 이유로 장관 사퇴를 요구할 수는 있어도 논란의 인물 해임을 건의한다는 이유로 장관을 경질하자는 국민 청원은 드문 일이다. 장관의 ‘충언’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심사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논평했다(서울신문 사설).

두말할 것도 없이, 정현백 장관은 여성가족부 수장으로서 당연한 업무를 수행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는 물론이고, 한시적이었지만 2005년 출범했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와 같은 부처는 정부(GO) 내부의 비정부기구(NGO)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는 본래 임무가 청와대를 포함, 국정 전반의 인권과 성 인지(性 認知) 의식을 감시, 교육하는 것이다. 준(準)정부기관(Semi-GO)으로도 불린다. 이들이 다른 부처와 갈등을 빚는 것은 필연이며, 이는 일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다.

장관이 국민과 야당의 입장을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이 해임 사유라니…. 그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문제는 이번 청원의 발상이다. 나는 ‘이니 팬덤’과 ‘팩트’, 상식, 원칙을 놓고 논쟁할 능력이 없다. ‘사랑’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연은 다소 복잡하지만 대통령의 외모를 문제 삼은 ‘한겨레21’ 표지 사건,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반찬 부실”에 대한 문자, 트위터 폭탄 등 그동안 온갖 웃지 못할 황망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은 ‘우리 이니’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언급을 하는 이들에게 인신공격과 “자유한국당 프락치”라는 식의 비난을 퍼붓는다(아무리 ‘돼지발정제’를 모의했던 이가 대표인 정당이라고 해도, 자유한국당은 제1야당이며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이 있다).

한국 사회에 팬덤 문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90년대. 서태지, H.O.T, 젝스키스의 팬들은 스타의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도록 함께 불우이웃을 돕는다든가 공연장을 청소했다. 그러나 지금 ‘이니 팬덤’은, 같은 지지자들에게도 욕설을 퍼붓는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인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다. 국가 운영에 이처럼 위험한 사태는 없다. 다른 사회에서는 ‘국론분열’을 넘어 내전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나를 포함해서 ‘문빠’는 지난 ‘10년 정권’에 절망한 이들이다. 동시에 이 현상은 출구 없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폭주가 두려운, 마음 둘 곳 없는 이들의 집단 광기다. 현 정부의 지지율에는 이처럼 슬픈 광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서로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야지, 자기 불안을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표출하는 ‘~빠’ 문화는 함께 살아갈 방도가 아니다.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청원 앞에서 분노보다 우리가 많이 초라하다고 느낀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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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면 촛불 꺼진다”던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최근 벌금 20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지난해 20대 총선 당내 경선 당시, 선거구민 9만2000여명에게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공약이행평가 강원도 3위’라는 허위 사실을 문자메시지로 발송했다. 명백한 증거가 있고 국민참여재판이었는데도, 그는 유죄 판결이 문재인 정부의 탓인 양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내 심경은 김진태씨와 정반대다. 세상이 바뀐 것을 빨리 체감했으면 좋겠다. 국회의원에겐 정권 교체의 의미가 크겠지만, 평범한 시민에겐 “새 정부가 잘하고 있다”는 느낌 외엔 큰 변화가 없다. 이 체감의 다름이 ‘난생처음’ 서러운 사람과 언제나 서러웠던 민초들의 차이가 아닐까.

오랫동안 구조적 약자였던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를 합치면 전체 인구의 과반이다. ‘우리’는 소수가 아니다. ‘정상적인 국민국가’는 이들을 위한 정부여야 한다. 하지만 들려오는 뉴스는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다. 세상이 바뀌려면 멀었다는 새삼스러운 자각과 함께, 박근혜 정부와는 또 다른 성격의 ‘권력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절망감이 든다.

평소 “가슴 없는 여자가 탱크톱을 입는 것은 남자에 대한 테러다”라는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이 ‘리버럴 진보’를 자칭, 새 정부 주변에 어른대고 있다. 일반 공무원 채용 시에는 면접을 통해 걸러낼 수 있는데, ‘논공행상’ 인사는 권력자와 가까우면 된다. 대개 이런 이들은 약자에게는 함부로 한다. 성폭력 경력이 파란만장한 교수 출신 고위직 인사는 피해 여성들의 증언이 속출하자(‘품행 민원’) 알아서 물러났다. 앞으로도 ‘사고’가 예상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청와대 부근만이 아니다. 최근 자기 집에서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머리카락에 불을 붙여 머리와 목 부위에 3도 화상을 입힌 남편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살인미수를 집행유예로 판결한 판사는 여성이었다. 다음은, 그 유명한 콘크리트 사건. 며칠 전 받은 어느 독자의 편지다. 

“맨손으로 여자가 죽을 때까지 폭력을 행사하고 시체를 시멘트로 암매장한 것이, 치밀하게 계획한 살인이 아니라면 무엇인가요? 폭행치사죄로 기소한 검사는 대체 누구인가요? 주먹으로 사람을 때려죽인 것이 살인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은 여성을 때려죽인 후에 시멘트로 암매장하고 교도소에서 3년만 살다 나오면 되는 나라입니다. 형사 법정에서 합의가 웬 말입니까?”

물론,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은 인류 역사 내내 있었다. 현 정부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이게 나라냐” “우리가 ‘이러려고’ 광장에서 밤을 새웠나”라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사법 종사자들의 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장준규 육군참모총장은 동성애자 ‘색출’ 함정 수사를 지시하고, 수많은 인파가 보는 앞에서 민간인 기자의 손목을 잡고 비틀었다. 제압. 그 장면, 나는 정말 무서웠다. 지난 5월에는 직속 부하인 대위를 성폭행한 대령이 준강간 혐의로 체포되었고, 피해 여성은 자살했다. 해군 당국의 인식이 점입가경이다. “그런 일(강간)은 어디에나 있다. 아무리 교육해도 술 먹고 그러는 걸 어떻게 막나?” 이들은 성폭력을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모든 남성은 매 순간 성폭행 범행 의지를 참고 있단 말인가?

피살자가 여성인 경우, 범인의 60% 이상이 남편이나 이성 애인이다. 여성 폭력, 막을 수는 없어도 처벌할 수는 있다. 이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현실은 ‘법보다 주먹’이 아니라 ‘법보다 성차별 의식’이다. 사법 개혁의 첫 번째 과제여야 한다.

탁현민

선거 후 며칠 만에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사회 구조와 사람의 인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는가. 이는 정권 차원의 이슈가 아니라 지난한 민주주의의 과정이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그 여정에 믿음직한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지금 정부는 국민의 절대적 희망이다. 해방 이후 이런 정부는 탄생한 적이 없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와 달리, DJP연합이나 이인제씨나 정몽준씨의 ‘도움’도 없었고 2위와의 표차도 압도적이었다. 무엇보다 상대 후보와의 정치적 역학보다 오롯이 시민의 힘으로 탄생한 정부다.

그러나 ‘홍준標(표) 돼지흥분제’는 이 정부에도 있다. 최근 문성근씨는 여성단체의 비판을 받은 탁현민씨에 대해 “뇌가 말랑말랑”하다고 칭찬하면서 “그가 흔들리지 않고 활동하도록 응원하자”고 덧붙였다. 남성연대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권력이다. 한국사회에는 다양한 남성성들(masculinities)이 연대하고 있다. ‘반공주의 남성성’ ‘자본가 남성성’ ‘루저 남성성’ ‘지식인 남성성’ ‘조폭 남성성’ ‘진보 남성성’ ‘군사주의 남성성’…. 성격은 다르지만 남성 특권을 유지하는 데는 ‘대동(大同)’ 단결한다.

이 중에서 특히 진보 혹은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이중성을 가시화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문제 발생 시 대응도 힘들다. 부디, 이들이 문재인 정부를 망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수많은 여성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촛불’은 비폭력을 피하기도, 지속되기도 어려웠다. 꼭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아니어도 좋다. 여성도 ‘국민’이었으면 한다. 여성의 안전과 목숨이 사소하게 취급되지 않았으면 한다. 여성이 직장 일과 가사 노동의 이중 노동에 덜 시달리기를 바란다.

모든 권력의 위기는 내부에서 온다. ‘우리 안의 적폐’가 무엇인지부터 깨달아야 한다. 청문회 5대 점검 사항 중 왜 인권의식(=여성의식)은 포함되지 않는가. 이것이 가장 기본 아닌가.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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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무시할까봐 두려워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한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이 말은 강남역 사건을 묘사한 기사 같다. 작년 5월17일, 서울시 서초동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한 이른바 강남역 사건. 이후 내게 ‘오월’의 이미지는 두 겹이 되었다. 5·18과 강남역.

용의자의 범행 동기는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의 의식은 크게 바뀌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사건 현장 인근,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는 이름도 없이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한 피해여성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며칠 후 비가 내렸고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은 포스트잇이 철거되기 직전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1004개의 추모 쪽지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나무연필, 2016).

지난해 5월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지난 17일 새벽 인근 공용화장실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강윤중 기자

이 사건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일상인 여성 살해(femicide)다. 매일 밤 가정폭력으로, 성산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돼지 흥분제’ 합병증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잃는지 통계가 없을 뿐이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부분 중 하나는 용의자 자신이 일관되고 분명한 태도로 범행 이유를 밝혔는데도, 경찰과 여론은 정신질환 경력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그는 여섯 명의 남성이 화장실을 사용한 후, 여성이 나타나자 살인을 저질렀다. 용의자는 자신에게 범행 이유를 “물어달라”는 확신범이었지만, 경찰과 사회는 “묻지마 살인”이라고 입을 막았다.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피의자 본인의 목소리를 부정하는 것은 인권 침해다. 용의자도 피의자도 수감자도 그 위치에서의 인권이 있다(고문당하거나 진술을 부정, 강요당하지 않아야 한다).

여성 살해를 정신질환 환자의 우발적 일탈로 믿고 싶은 심리. 인류의 반이 자신의 성별 때문에 평생을 공포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구조의 핵심이다. 남성 문화는 성폭력이나 여성 살해를 일부 ‘미친’ 남성의 발작으로 여김으로써 성차별 구조를 은폐한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그들의 존재로 인해 ‘나’는 가만히 앉아서 ‘괜찮은 남자’가 된다.

당연히 이는 진실이 아니다. 단어 사용부터 오류가 있다. 미친 사람, 아픈 사람, 나쁜 사람의 인간관은 각각 다르다. 성폭력 가해자나 여성 연쇄 살인범들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이웃들이 “조용하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어요”라고 증언하는 장면에도 익숙하다.

고정관념의 가장 큰 피해 집단은 건강 약자인 정신질환 환자들이다. 조현병(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에 대한 편견과 무지는 뿌리 깊다. 그들은 아픈 곳이 다를 뿐 보통 환자들과 다르지 않다. 몸이 불편할 뿐이다.

극명한 방증은 ‘여성’ 정신질환자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아무나 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반 남성들도 여성 정신질환자로 인해 일상이 불편하거나 공포에 떨지 않는다. 오히려 “미친 여자”라는 낙인은 ‘창녀’와 함께 여성 환자는 물론 전체 여성을 통제하는 강력한 남성 권력이다. 이번 선거에서 유승민 후보의 자녀가 ‘잘생긴 남성’이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대통령 후보의 아들에게 그런 식의 폭력을 가하는 여성 정신질환자는 상상하기 힘들다. 게다가 유승민 후보는 ‘예쁜 딸로 인해’ “국민장인”으로 불렸지만, ‘훈남’ 아들을 둔 심상정 후보는 “국민 시어머니”라고 불리지 않았다.

군 위안부, 전쟁 시 대량 강간 등 인권 문제의 세계적인 전문가인 샬럿 번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폭력이 사소하게 취급되는 이유를 네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성차별은 사소한 일이어서 생존 문제 다음으로 미뤄도 된다는 인식, 둘째, 여성 학대는 개인적 문제일 뿐 국가가 대처해야 할 정치적 사안이 아니라는 인식, 셋째, 여성의 권리가 인권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는 인식, 넷째, 여성 폭력은 너무 만연한 문제라서 불가피하며 어차피 노력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고방식 등이다. 여성을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발상부터 패배주의까지 다양하다.

남성 문화는 여성에 대한 폭력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있는데 없는 문제인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해는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가장 성차별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성별이 무시된다. 그러니 해결될 리 없다. 아니, 해결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것이다.

나는 성매매가 필요악인지 아닌지 따위에 관심이 없다. 질문은 한 가지. 왜 언제나 파는 혹은 팔리는 사람은 여성이고 사는 사람은 남성인가이다. 성폭력도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여성인 경우는 거의 없다. 만취한 가해 남편은 아무리 필름이 끊겨도 아무나 때리지 않는다. 꼭 집에 와서 아내만 구타한다.

25년 전, 1992년 10월26일. 기지촌 성산업에 종사하던 여성 윤금이씨(당시 26세)가 미군 병사 케네스 마클(당시 19세)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처음도 끝도 아니었다.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자마자 시작되었으며 ‘윤금이 이후’ 격렬했던 여성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희생은 멈추지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여성에겐 모든 곳이 ‘강남역’이다. 나의 바람은 여성 폭력 근절이라기‘보다’ 피해가 드러나는 것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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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은 절반의 기쁨이었다. 전원일치는 다행이지만 혐의 내용 중 최순실씨 건 외에는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일곱 시간’ 행적 논란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박 전 대통령의 무능과 게으름을 상징한다. 평범한 사람의 불성실도 큰 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데,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의 황당한 본분 망각 행위를 불법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대통령의 불성실은 죄(sin)일까, 범죄(crime)일까.

개념상으로는 죄와 범죄는 차이가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그 결과는 다를 바 없는 시대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오히려 사회관계는 밀접해졌고 도미노 현상은 빠르고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 문제에 대해,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보다 정확한 말은 없을 것이다. 과연, 과녁을 명중한 명제다. 그는 미디어(매체)를 몸의 확장이라고 분석했다. 미디어 폭발 시대인 지금, 인간의 몸은 확대되다 못해 부풀어서 서로 부대끼고 있다. 친하지 않아도, 적대 관계라도 상호 영향력은 커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기계를 만들고 기계는 다시 인간을 만든다. 미디어는 지식을 전달하는 요인(agents)이 아니라 사건을 만드는 주체다. 내용은 형식을 따른다. 맥루언은 TV나 인터넷뿐 아니라 도로, 종이, 자동차, 옷, 돈, 시계, 게임, 주택 등 모든 것이 인간의 확장으로서 미디어라고 보았다. 큰 승용차가 작은 차를 무시하는 현상은 차가 인간의 확장, 즉 자아의 확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격(車格)이 인격”인 ‘이유’다.

자동차도 이럴진대 당대 미디어의 대표를 자임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상황은 어떨까. 사람마다 SNS에 대한 접근성과 관계의 밀도는 다르므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감각에도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그것의 비윤리성이다. 장단점 논의와 무관한 문제다. “행사 공지가 빠르다, 내비 기능이 있다”는 식의 발상, 즉 양비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핵심은 새로운 미디어는 인간 본성과 사회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자본의 법칙이다. 나는 SNS가 현대 자본주의의 만성화된 실업에 대한 ‘보상’, 즉 장난감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보내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 소설가 김영하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손 안의 인터넷, 스마트폰은 ‘시간 도둑’이다. (중략)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들일 수 있다.”

나는 그의 의견에 ‘인간의 타락’을 보태고 싶다. SNS의 익명성과 속도는 ‘팩트’를 점검할 필요가 없다. 따르는 사람(팔로어)이 많은 이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 사회가 달라진다면? 파시즘보다 더 무서운 세상이 될 것이고 이미 그러하다. 트위터에서의 이전투구로 ‘멘붕’ 상태를 넘어 ‘생사’를 오가는 사용자가 적지 않다. 지금 이곳은 자기도취와 욕망, 무지로 무장한 인간이 판치는 지옥이다(‘헬조선’). ‘6대 종합’ 일간지 중 하나인 모신문사의 트위터 팔로어는 50만명 선인데, 80만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개인이 존재한다. 모 노동조합의 팔로어는 300명인데, 노동조합 소속(?)의 ‘스타 노동자’는 5만명인 경우가 있었다. 그는 노조의 결정 사항을 사리사욕을 위해 번복,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 ‘보통’ 사람보다 평판을 중요시하는 진보 진영, 페미니스트는 더욱 그럴 가능성이 많다. 나의 요즘 고민 중 하나도 이런 ‘페미’들이다.

페이스북의 ‘페이스(face)’는 흥미롭다. 페이스는 “얼굴, 얼굴 표정, 마주하다, 직면하다, 상황에 처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페이스북은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면하지 않은 곳이다. 이때 페이스는 가상(假想)의 얼굴이다. 가짜 얼굴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인으로 하여금 상상케 하는 이미지다.

나는 이 매체가 부정의의 온상이라고 본다. 이곳에서의 자기 포장은 사기 수준이다. ‘실제’ 그·그녀는 후안무치에 능력은 없으면서 출세에 혈안이 된 인물인데 페이스북에서는 그런 인격자, 매력자, 실력자가 없다. 페이스북은 인격 세탁소다. 이들은 오프라인에서 그 이미지를 활용, 이익을 취한다. 억울하면 당신도 페이스북을 사용하라? 그래서 모든 이들이 페이스북에서 자기선전 경쟁을 해야 할까.

내 가정도 틀렸다. 물론 모든 사용자가 인격을 세탁하지는 않지만 페이스북에서 자신을 나쁘게 말하는 이는 없다. SNS 사용자는 자본의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전위가 되었다. 나더러 19세기 초반 과학의 발전으로 실업위기를 느낀 영국 노동자의 기계 파괴 운동인 러다이트(Luddite)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모두가 과학기술에 열광하고 있으니 러다이트 현상은 없다. 대중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그 열매를 사랑한다.

혐오 발언은 얼굴을 맞대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터넷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사용자의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얼굴을 맞댄다”는 행위는 책임감을 동반한다. SNS에 대한 열광에는 대면 윤리로부터의 도피가 포함되어 있다. 글의 서두로 돌아가면, 나는 대통령으로서 박근혜씨의 대면보고 기피가 더욱 문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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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남성 시민’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나 역시 정권교체를 바라지만, 여성과 남성은 그 방법이 다른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의 나체 합성 그림이 포함된 ‘표창원 의원과 함께하는 ‘표현의 자유를 향한 예술가들의 풍자 연대’ 전시회’, ‘곧, BYE! 展’은 철지난 뉴스가 아니다. 이 사건은 인류 5000년 역사를 요약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반복될 이슈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그림은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올랭피아’를 베꼈다. 이 작품은 지난 1월20일부터 전시되었다가 논란으로 철거된 상태다. 마네는 웬만한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풀밭 위의 점심’ ‘피리 부는 소년’으로 유명한 인상파 화가다. 올랭피아는 당시 매춘 여성들의 흔한 이름이었다.       

이 그림에 대한 내 해석은 ‘흑인 하녀’와 주인공인 ‘창녀’가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선이다. 다시 말해, 흑인 하녀는 최순실씨가 아니고 올랭피아의 당당한 눈동자와 박 대통령의 눈빛은 한참 거리가 있다. 패러디는 원작을 충실히 이해했을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패러디가 아니다. 작가가 가져온 것은 여성의 벗은 몸뿐이다.

이구영 작가의 ‘더러운 잠’ 2탄 작품 ‘블랙’. 정지윤 기자

작가는 “박 정권에 이 정도 저항도 못하냐”라고 항변했지만 천만의 말씀, 이것은 저항이 아니라 권력 행위이며 본인이 그토록 적대하는 세력에 바친 ‘자살골’이다. 이 그림은 현 정권에 분노하는 ‘시민’의 시각이 아니라 ‘남성’의 입장에서 재현된 것이다. “표현의 자유”나 “국회의원의 품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작가의 인권 수준만 보여준 꼴이다.

이 그림은 ‘비상시국’ 때마다 등장하는 ‘일상적인’ 여성에 대한 폭력의 전형이다. 적절한 비교는 아니지만, 전두환씨가 대머리라고 해서 ‘대머리 남성’ 전체의 인권이 짓밟혀서는 안되듯이, 혹은 강남역 살인 사건의 범인이 전직 신학생이라고 해서 모든 신학생이 살인자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여성이 내게 좋은 질문을 했다. 그 그림의 작가가 여성이었다면? 마찬가지다. 여기서 문제는 누가 그렸는가가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작가의 의도를 떠나 사회적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벗은 몸은 성별 중립적이지 않다. 남성에게 여성의 나체는 쾌락이다. 그들은 돈을 주고 구매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험은 다르다. 남성의 성기 노출이 범죄인 이유다.

그림은 표창원 의원이 그린 것도 아니고 그는 작품 선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표 의원의 부인이다. 박사모가 그의 부인을 박 대통령처럼 그려놨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하이라이트’다. 나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표 의원이 박 대통령의 누드화를 그렸다 해도, 복수를 하려면 표 의원의 벗은 몸을 그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의 부인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박사모의 대응이 가장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사모는 남성연대라는 방식으로 그 어려운, ‘여야 대연정’을 실현했다.

상대방이 ‘자기 여자’의 누드화를 제작하고 전시해서 모욕을 느꼈다면, 남성 작가끼리 벗기면 된다. 왜 ‘상대방의 여성’을 벗기는가. 약자의 몸은 강자의 전쟁터다. 청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듯이, 한국전쟁이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이었듯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의 전쟁터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에서, 남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중학생(효순·미선) 사건의 반복이다. 이 참사는 예견된 것이었다. 장갑차가 도로 폭보다 컸기 때문에 탱크 위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은 계속 민원을 제기했으나 묵살당했고 결국 어린 학생이 희생되었다. 축구에 열광했던 시민(남성)들은 갑자기 죄의식에 사로잡혀, 촛불집회를 열었고 ‘Fucking USA(퍼킹 유에스에이)’를 합창했다.

왜 한국 남성은 미국 남성에게 저항하지 않고 미국을 여성화하면서 미국 여성을 강간하자고 외치는 것일까. 결국 남성은 국적을 불문하여 폭력의 주체가 되고 여성은 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된다. 한국 남성의 미국 남성에 대한 동일시 욕망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온 문화다. 남정현의 <분지(糞地)>부터 ‘반미 에로’ 영화 <태극기를 꽂으며>까지. 동시에 수천년 동안 반복되어온 전쟁 시 상대편 여성에 대한 성폭력부터 일상의 성매매까지 여성의 몸이 사용되어온 원리다. ‘군 위안부’를 인권 문제로 보지 않고 “우리도 일본 여성을 강간하자”는 논리가 가장 가까운 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입장은 같지 않다. 어떤 이들은 시민보다 남성 정체성이 더 강하다. 어떤 이들은 정권교체를, 어떤 이들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 서두에 썼듯이 나는 이 글을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남성들이 읽었으면 한다. 범야권은 이번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해야 한다. ‘여성’ 대통령 누드화는 여성과 상식 있는 시민에게 불쾌감을 줄 뿐이다.

‘한남(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표현)’은 국민, 시민, 민중이든 자신을 보편적 인간으로 생각한다. 성찰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남들이 가장 오해하는 단어가 “저항”이다. 일단, 더러운 잠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이후 깨달음의 고통이 있겠지만 언제까지 ‘한남’으로 살면서 나라를 망칠 것인가. 정권교체를 이루고 최순실 무리를 뿌리 뽑아야 풍자다. ‘태극기집회’ 세력과 여성의 벗은 몸을 공유하여, 야권을 남성과 여성으로 분열시키는 것은 저항은 아니라 ‘이적’ 행위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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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김태용 감독의 영화 <여교사>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의 ‘탁월한 선택’에 스스로 감격하고 있는데, 누군가 뒷좌석에서 “나라가 미쳐가니 영화도 미쳤구만, 막장….”이라며 투덜댔다.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집으로 오면서 영화를 복기해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관객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 영화는 “미쳐가는 나라”의 풍경이다. 영화가 현실보다 훨씬 덜 ‘미쳤을’ 뿐이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거칠게 요약하면, 영화는 정규직 교사와 기간제(계약직) 교사인 두 여성의 갈등을 그린다. “○수저” 표현이 진부하지만, 둘은 각각 금수저와 흙수저를 대표한다. 좋은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금수저의 무지와 운명’에 관심이 갔다.

계급 고착 사회에서 흙수저가 겪는 차별과 모욕은 말할 것도 없지만, 금수저라고 해서 모두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주변의 금수저 혹은 준(準)금수저 자녀들을 보면, 다들 골치다. 별별 문제가 다 있다. 최소한의 공부나 노동은 일치감치 굿바이고, 자동차 폭주, 성형, 술….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는 지루한 청춘들에게 소비는 최대의 놀이다. 부모와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난동은 비행기 안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부모들의 호소를 듣고 있노라면, 돈이 사람을 망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부모도 부자고 자식도 성숙하면 좋겠지만, 그런 집은 드물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금수저에 대한 경고다. 정유라씨처럼 근거 없는(?) 기이한 금수저가 아니라면, 즉 ‘정상적’인 금수저도 세상 물정을 알 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의 금수저처럼 “저는 고생을 안 해서 아무 것도 몰라요”로 일관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흔히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말이 아니다. ‘끝’은 원래 끝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금수저라도 모든 욕구를 다 채우며 살 수는 없다. 문제는 선(線)을 모를 때 생긴다. 적정선을 인식하려면 자신과 인간관계, 사회를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흙수저는 선을 밟거나 넘으면 바로 태클이 들어오기 때문에 경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좌절”이다. 아니,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처지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금수저는 이 정치학에 무지하다. 분간이 없다. 주변에서 문제제기가 들어오면 돈, 협박, 거드름으로 대강 안면몰수고 공적인 소란이 생기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그만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놀라고 분노했던 부분은, 타인의 마음을 농락하는 금수저의 일상이다(물론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계속 놀라야만 …한다!). 극중 ‘갑’은 타인에게 더러운 노동을 시킴으로써 ‘을’에게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빼앗는다. 결국 금수저는 처벌 받는다. 이 영화의 금수저는 모든 것을 가졌다. 언니까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언니(실은 하녀)가 자신이 짓밟은 흙수저라는 사실이다. 이 부분이, 선을 넘은 것이다.

그 처벌이 해결은 아니지만, 어차피 인간사에 그리고 자본주의 구조에서 해결이란 없다. 최선의 정의다. 나는 화면 속으로 들어가 김하늘씨(흙수저 역)를 돕고 싶을 정도였다. 서두에서 언급한 관객의 말대로, 나는 미쳤는가? 나는 이 동일시가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장난삼아’ 남의 일자리를 뺏을 수는 있다. 그러나 타인의 진심을 이용하고 노리개 삼는 것은 인격 살해다. 이런 일을 당한 피해자는 온전한 삶을 살수 없다.

이 영화는 금수저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복수론(論)은, 잘못해놓고 처벌 받지 않으려는 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다. 사법 정의를 소유하고 있는 지배 세력은, 복수 외에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는 이들이게 “복수는 너의 것? 너의 끝!”이라고 속삭인다. 주변 사람들도 걱정한다. “복수하면 너만 망가진다”, “잊어라.” 저항, 정의, 복수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를 설명하지 못하면서, 복수는 무조건 나쁘다는 설교는 부정의하다.

영화 <여교사>의 주제는 인간으로서 마지노선을 자각한 흙수저의 승리, 상식적 권선징악이다. 불가능과 좌절을 처절히 깨달을 수밖에 없는 환경, 그것을 자원 삼아 인구의 절대 다수인 흙수저들은 선(善)으로 전진할 가능성이 있다. 금수저의 가장 큰 약점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가 아니다. 무지다. 흙수저가 이 사실을 간파한다면, 무지한 그들을 이길 수 있다.

흙수저와 금수저의 갈등은 젊은이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금수저는 오히려 위태롭다. 그들은 부모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금수저는 부모의 자원이지 그들의 것이 아니다. 수저 논쟁은 상층 ‘부모’와 하층 ‘자녀’의 갈등으로 세대와 계급 모습이 복합되어 있다. 부모 세대에서는 결판이 났을지도 모르지만, 자녀 세대에서는 계급도 세습되지만 동시에 앎의 위치성도 승계된다. 흙수저의 유일한 자산은 한계선 자각에서 오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이고, 금수저의 운명은 무지다.

이것은 계급투쟁이 일방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황과 전선을 아는 것. 상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 자의 대결이라면 누구에게 승산이 있겠는가?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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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단체의 송년 모임에서 간단한 강의를 했다. 나는 ‘올해 지구촌 뉴스’를 전하면서 “박근혜, 트럼프보다 더한 인물이 다음 우리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청중석에서 비명 소리가 나왔다. 박근혜·최순실도 충분히 끔찍한데, 더 나쁜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니 놀란 모양이다.

‘박·최’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국정파탄, 부정부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구토를 부르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노보다는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한계와 절망을 느꼈다. 독점한다는 의미의 ‘농단(壟斷)’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최순실씨 일가가 박태환 선수 협박부터 무기 구입까지 손을 뻗지 않은 곳이 없으나, 그들이 집어 삼킨 것은 좁은 의미의 국가권력(청와대)이 아니라 사회 전체다. 그들은 ‘우리’에게 깊은 자상을 남겼다. 정권이 교체될지 확실치 않지만, 이번 사태가 새누리당 해체나 정권교체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다.

인간관계, 사회성, 민주주의를 해결해주는 과학기술은 왜 등장하지 않은 것일까. 기왕 인공지능이 필요하다면 바둑이나 소설 쓰기 실험 대신 인간의 가장 어려운 문제인 도덕성을 조절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해본다. 삶의 꼭대기에 부와 성공, 물질적 욕망이 등극한 지 오래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자원은 감정의 연대다. 덜 외로운 상태. 스트레스 덜 받는 일상. 자기가 속한 곳에서 인정받는 것. 나의 경우 미세먼지 없는 세상이다. 한국인들이 인간관계의 고통과 불쾌한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쓰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 세계 최고의 1인당 주류 소비량, 국민총생산 대비 최대 규모의 성산업, 쇼핑 중독.

<빵과 장미>라는 영화가 있지만, 둘은 다르지 않다. ‘빵’도 ‘장미(인간으로서 존엄)’의 힘이다. 의식주는 유대와 배려 속에서 생산된다. 정의가 힐링이다. 바람직한 사회제도 역시 선의의 인간이 운용할 때만 인프라로서 힘을 가질 수 있다. 박·최 게이트는 어쩌면 대한민국에서는 이 모든 것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증명 같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e메일을 많이 받는다. 이런 사연이 적지 않다. “저의 이번 생은 망했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요즘은 특히, 마음 둘 곳이 없는 중에, 하소연합니다. 별반 내용도, 목적도 없는 메모가 되고 말았지만… 죄송합니다.”

광장은 불신의 시대에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나누고, 두고 올 수 있는 안전한 곳이 되었다. 광장에 모인 200만이 넘는 사람들의 동기와 생각이 같을 리 없다. 광장의 축제는 일상의 프로작(우울증 치료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촛불은 밤의 시위가 아니라 낮의 우울을 밝히는 데 더 긴요한지도 모른다. 이런 촛불이 “바람 앞에 쉽게 꺼진다”고?

마음 둘 곳. 마음을 두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한때 이데올로기에 마음을 두었고, 한때는 사람에게 마음을 두었지만 지금은 없다. 나의 거처는 나 자신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나 역시 있을 곳이 없다. 옆을 기웃거리게 된다. 외로움과 혼자임은 무관하다. 문제는 자기 충족적인 건강한 외로움이 아니라 불안하고 고립된 느낌이다. 외로운 사람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외로워서가 아니다. 외로움 자체는 죄가 없다. 사회가 따뜻하다면, 외로움은 절실한 연대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경험하다시피 현실은 외로운 사람을 이용한다.

살 만한 현실이 중력처럼 나를 붙잡아주면 좋으련만 세상이 썩었으니 그 끈도 위태롭다. 예전에는 종교에 몸을 맡기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기복은커녕 위안도 되지 못하나 보다. “종교가 없다”는 한국인이 56%가 넘는다.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다가 방황을 멈춘 이들의 결심, 대한민국의 자살과 우울은 상상 이상이다.

마음 둘 곳이 없는 상황은 몸(존재)을 둘 곳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말의 “몸 둘 바(所)를 모르겠습니다”는 겸양, 민망, 사과 등의 의미다. 내 몸이 차지하고 있는 작은 관짝만 한 공간조차 아깝고 부당하다는 자학의 뜻이다. 그런데 비유적으로 “죄송하다”는 의미 말고, 글자 그대로 실제 몸을 둘 곳이 없는 상태. 이것은 외로움을 넘어 존재의 위기다. 나는 어디에 있어야 적합한 사람일까. 타인과 세상에 민폐가 되지 않을까. 진로를 정하지 못한 이들의 스트레스가 이것이다. 자기 몸 둘 곳이 없는 사람에게 사회는 “눈으로 레이저를 쏘며”(‘눈총’에 대한 어느 청소년의 표현인데 실감 났다) 한심하게 여긴다.

나를 포함, 마음 둘 곳도 몸 둘 바도 없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잉여 신세임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알고 있다. 자기계발도, 힐링도 속임수라는 것을 안다. 거기에 투자할 돈도 없다. 다른 쪽 사람들, 고령화사회에서 나이 들어가는 이들의 심정은 또 다른 서러움이다. 세상이 계속 “당신의 존재 자체가 사회문제”라고 하면? 고령화 대책은 좋은데, 그럴 때마다 ‘실제’ 고령인 사람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나는 ‘그들’과 동일시된다.

나의 송년 결론. 한 사람에게라도 의미 있는 사람이면 되지 않을까. 쓸모가 ‘생산과 건설’로 지구를 망치는 일이라면, 쓸모의 의미를 재규정하면 되지 않을까. 내 마음 둘 곳을 찾지 말고, 쉽지 않겠지만 남들이 마음을 둘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이렇게라도 생각을 묶어두어야 새해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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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2006)에서 내가 자주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공효진)은, 엄마의 애인인 유부남의 집에 쳐들어간다. 온 가족이 모인 단란한 식사 시간이다. 그녀는 다짜고짜 “아저씨! 우리 엄마 진짜로 사랑해요?”라고 묻는다. 아저씨는 자기 부인과 자녀들 앞에서 차분하게 말한다. “그래, 나 너희 엄마를 죽도록 사랑한다.” 거짓말을 기대하고 ‘불륜 아저씨’ 집에 화풀이를 하러 갔던 주인공은 풀이 죽어 돌아선다.

나는 인간의 진정성을 믿지 않지만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진정성만큼이나 거짓말도 논쟁적이다. 거짓말이 항상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속된 말로 면전에서 ‘생까는’ 거짓말은 누구에게나 상처가 된다. 몇 분이면 탄로 날 거짓말을 반복하는 사람, 다 아는 사실을 갑자기 잡아떼는 경우, 오랜 친구의 속임수…. 이런 일을 자주 겪다보면 제정신을 간수하기 힘들다. 타인의 잦은 거짓말은 인간의 판단력을 무너뜨린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세 커플의 ‘안타까운’ 혼외 사랑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내 시간, 비용, 지력의 손해가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상담료를 청구할 생각은 없다. 더 큰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아무 이해관계 없이 고민을 들어주었으나, 지금 나는 마피아 영화에 나오는 살인 사건의 증인처럼 ‘도망 다니는 신세’다. 궁지에 몰린 그들이 내가 ‘오해’하고 있다며,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나는 그런 적도, 그럴 이유도 없다.

시민들이 12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3차 범국민행동에 참가해 촛불로 글씨를 만들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며칠 전까지 내게 연애 상담을 했던 이들의 필사적인 책임 전가에, 억울하다기보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짐승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인면수심’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지면에 쓸 사연도 아니고 내용도 복잡하다. 그들은 자신의 ‘부정(不貞)’으로 인해 부정(不正)한 일이 생기자 이를 학력주의, 언론탄압 등으로 프레임을 이동시켰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의 성격(결벽증)을 문제 삼아 “이상한 여자의 의심”이라고 떠들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혼외 관계에 관대했다. 한마디로, 그들이 비난받은 이유는 ‘불륜’이 아니라 관계를 이용해서 공정치 못한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논란이 계속되자 이제는 돌변하여 “아무 관계도 아니다”라며 펄쩍 뛰고 있다.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절친의 배우자와의 사랑, 내연 관계를 이용한 횡령, 애인을 낙하산으로 취직시킨 경우. 결국 사랑보다 비즈니스다. 그들의 필사적인 거짓말은 능력은 없는데 유명세, 돈, 자존심은 유지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가족, 학력, 연줄은 비난받지만 혼외 사랑은 드러나지만 않으면 ‘동아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 여성 모두 여성스러움을 무기로, 남편과 애인의 친구들까지 십분 활용하여 ‘페미니스트 커리어우먼’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들의 거짓말은 e메일이나 통화 기록 등 증거가 분명하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윤리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다들 최순실급 정도만 아니면 눈감아 주자고 한다. 최순실 정국의 최대 수혜자다. 그들은 모두 사회성이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들이어서 거짓말에도 능숙하다. 거짓말과 비방도 이 시대에는 능력인 셈이다.

그런 와중에 멍하니 TV를 보고 있는데, 대통령이 나보다 더 멍한 표정으로 황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갑자기, 박근혜 대통령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거짓말, 연기조차 할 수 없는 사람? 아니, 그저 자신의 기본 업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국정파탄도 파탄이지만 촛불정국 전 과정을 통해, “대통령이 저런 수준인지 몰랐다”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전문 분야는 무엇인가? 학부 전공인 전자공학일 리는 없고 뭐라도 아는 분야가 한 가지라도 있는가? 국정 관심사는 무엇인가. 테니스? 앞서 말한 무고한 타인을 짓밟는 후안무치한 인간들은 세상을 파멸시키고 있고, 이를 통제해야 하는 사람은 지구를 떠나 우주의 기를 독점하고 있으니 완벽한 조합이다.

박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거짓말 각본도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정치력’ ‘통치력’이 전무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현실감각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거짓말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말의 전제인 자기 파악이 안돼 있다.

지금 232만명이 거리에 나온 이 시국에 대통령만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 놀라운 점은 대통령이라는 자의 ‘백치성’이다. 누구처럼 학살자도 아니고, 박식한 사람도 아니고, 바로 전직이었던 이처럼 축재한 사람도 아니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성형(설), 피부 관리, 공주놀이(해외순방)를 하려고 청와대에 들어갔는가. 단지, 간신에게 휘둘린 것인가. 부모가 빙의되는 과정에서 ‘에러’가 난 것인가.

그가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개념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자, 혹시 향후에 정 많은 한국인들이 그의 백치성을 불쌍히 여겨 용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끔찍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은 나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국가 지도자가 이런 유형인 경우 국민은 의미 없는 고민에 빠지고, 공동체는 분노와 의구심으로 소진된다. 박 대통령의 능력은 단 하나, 유신의 유령이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고, 내가 민주주의보다 상식을 원하는 이유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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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문화계 성폭력이 뒷전으로 밀리고, 트럼프 당선으로 최순실씨 뉴스가 가려진다는 우려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세 가지 모두 ‘비슷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 규모나 처벌받을 사람들은 다르지만, 2016년 우주의 ‘나쁜 기운’임엔 틀림없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처럼 결과가 의외이거나 경악스러울 때, 꼭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난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어!” 나도 그런 부류다. 트럼프는 당대를 대변하는 인간형이다. 대중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대의제가 무너진 지 오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대변할 사람보다는 자신이 욕망하거나 동일시하는 사람에게 표를 주기 시작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나 안철수 ‘현상’이 대표적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직업 정치인의 기업인화, 연예인화, 이것은 정치 자체의 붕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1월8일 (출처: 경향신문DB)

문제는 또 있다. 내가 욕망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이다. 그냥 부자인지, 자수성가 타입인지, 인격자인지, 똑똑한 사람인지…. 미국의 선거 전문가와 언론은 트럼프의 음담패설 시리즈 이후 클린턴의 낙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상식 사회의 논리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이상한’ 분들이 지도자인 세상이다.

트럼프의 여성, 인종 관련 발언은 단순한 음란, 패륜이 아니다. 폭력이고 혐오 범죄다. 나는 그가 음담패설을 하면 할수록 지지율이 올라갈 것이라고 보았다. 주요 지지층인 백인 남성들, 즉 평소 트럼프처럼 말하고 싶은 이들에게 그의 말은 ‘사이다’였을 것이다. 그 해방감과 쾌감. 여성 비하, 이민자 혐오가 전 지구촌에 울려퍼졌다. 트럼프의 승리는 선거 전략인, 막말의 승리다.

트럼프로 인한 나의 좌절감은 단순한 국제 문제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일이다. 문화평론가 서동진 교수의 저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는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광풍에 대응하는 개인의 자기계발 현상을 분석한 빼어난 작품이다. 이 책의 후속편이 나와야 한다. 지금은 자기계발을 넘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다. 자기계발이 개인의 성실성(‘노~오력’)으로 구조를 극복하려는 소박하지만 처절한 대응이라면, 각자도생은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에서 생존 여부를 목전에 둔 인간의 지옥도다.

각자도생은 말 그대로, 혼자의 힘으로 생존을 시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도(試圖)’다. 시도는 성공이 아니므로 ‘성공할 때까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는 개인의 세상을 향한 전면전이다. 물론 그 방식은 최씨 사태에서 보듯이 규모의 한계도 염치의 한계도 없다.

한국 사회의 오래된 현상, 힐링 열풍과 더불어 자살과 우울증의 ‘범람’은 각자도생의 결과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그래도 나은 사람이다. 더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어떤 시도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는 가까이에 있다. 바로 인간관계에서 상처와 배신이다. 여기서 가해자는 사회 적응자로, 피해자는 루저가 된다. 옳고 그름이 승패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살아온 이력 때문인지 내 주변에는 대개 진보 진영이나 여성주의자가 많다. 흔히 도덕적일 것이라고 기대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내 경험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폐쇄성이 겹쳐서 그런지, 이 ‘판’도 만만치 않다. 규모가 작을 뿐 ‘우리 안의 최순실, 트럼프’가 한둘이 아니다. 성폭력은 기본이고, 사기, 표절, 계급주의, 학벌주의, 소비주의, 연줄 문화, 약자에 대한 모욕과 막말, 이중성…. 내가 페이스북 근처에 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사람들이 그곳에서 캐릭터 변신을 하고 자신을 미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겪었고 보았다. 진보 혹은 페미니스트라고 자처라는 이들이 사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것을. ‘상록수’는 극소수다.

최근 나는 오래된 친구가 면전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일을 겪었다.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트럼프 당선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내 대통령은 아니다” “내가 몰랐던 미국…”), 믿어지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으니,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를 계속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우울과 자살이 전 사회적 현상이 된다. 정의로운 사회나 전쟁 때처럼 시비가 뚜렷한 상황에는 자살이 적다. 의문이 사라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은 막무가내 캐릭터다. 트럼프는 한때 자신이 불리해지자 “선거를 취소하고, 내가 이긴 걸로 하자”는 ‘명언’을 남겼다. 이것이 세계 최고(?)의 법치국가 미국의 대통령 후보가 한 말이다. ‘인(간)성’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평가적인 표현이 되기 쉬우니 캐릭터(성격)라고 하자. 뻔뻔함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세 캐릭터다. 돈과 힘을 숭배하고 약자를 짓밟아야만 쾌감을 느끼며 후안무치가 주는 강력한 자아의 느낌을 즐기는 사람들. 미국의 저소득, 저학력 백인 남성들은 이것을 욕망했다.

피의자 우병우씨가 검찰 조사실에서 웃고 있는 사진을 보고 혈압이 터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리라. 누가 더 두꺼운 얼굴을 가졌는가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세상. 이것은 앎과 모름의 싸움이다. 뻔뻔함은 ‘악’을 모르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의 법칙이다. 그들은 죄의식과 불편 없이 전진한다. 반면,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사람은 뻔뻔해질 수도 없고, 뻔뻔한 세상을 감당할 수도 없다.

이제 인간의 ‘본질’이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냐, 호모 파베르(도구를 만드는 인간)냐,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냐를 논할 시기는 지난 듯하다. ‘호모 쉐임리스(뻔뻔한 인간)’의 시대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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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목 통증 치료사, 안과 의사, 인문학 강사. 장담컨대 이 직종들은 앞으로 최소 5년 안에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유망한 직업으로, 인력 부족을 겪는 분야가 될 것이다. 인문학 강사의 경우, 대학에서 인문학은 사양길 정도가 아니라 이미 ‘사망’한 지 오래지만(전공자가 대학에 취업하는 것은 어렵지만) 어느 사회나 ‘교양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직업은 스마트폰과 관련한 건강 전문가들이다. 인터넷 인프라 세계 최고, 2013년 현재 스마트폰 보급률 세계 1위, 2015년 3월 가입자 기준으로 성인 83%의 보급률. 우리 주변을 보자.

길거리, 집안, 사무실, 강의실, 버스, 전철 안은 기본이다. 심지어 횡단보도, 불 꺼진 극장, 데이트 중에도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쥔 채 머리를 숙이고 있다. 시력과 경추 부위 이상은 필연적이다. 지금도 많지만 뒷목, 어깨, 윗등 근육통, 두통을 동반하는 거북목증후군 환자가 폭증할 것이다.

본질적인 이슈, 그러나 거의 논의되지 않는 문제는 스마트폰이 인간의 존재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둔하고 싶거나 혹은 실종자로 처리되고 싶다면, 스마트폰만 꺼 두면 된다. 휴대전화 번호가 시민권을 대체한 지 오래다. 어디를 가든 전화번호를 입력하라고 한다. 전자우편 비밀번호 변경, 기차표 예약, 은행 계좌 개설까지. 사회는 누구나 스마트폰이 있다는 가정에서 돌아가고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질문에 왜 사람이 아니라 전화기가 답해야 하는가? 주민등록증 없이는 살아도 휴대전화 번호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세상이다.

통신사가 막대한 비용을 챙기며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소비주의, 자본주의 원리라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소박하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자발적인 전체주의 사회가 있었던가.

공중전화 같은 공공 서비스는 사라져가고, 맥루한의 지적대로 인간은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자기 몸을 확장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 특히 기계류를 좋아하는 일부 남성들은 자신이 소유한 기계의 성능이나 가격이 자아의 크기와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컴퓨터, 휴대전화의 새 기종이 나오면 달려가는 얼리 어답터(early adapters). 나는 이들이 핵, 원자력, 전쟁보다 ‘더’ 두렵다. 인문학의 실종 때문일까. 이 기기들이 양산하는 산업 폐기물의 재앙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다. 가입자 인증을 위한 핵심 부품인 유심(USIM) 칩에 대한 정보는 넘쳐나지만, 이를 구성하는 금속 성분이 다른 물질과 합성될 경우를 대비한 지식은 접하기 힘들다.

한국은 보수, 진보, 페미니스트 할 것 없이 성장주의, 발전주의자들의 사회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전 국민적 스마트폰 사용을 비판하거나 문제제기하는 논의를 들은 적이 없다. 모두가 구입과 사용을 당연시한다.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7 폭발 사건’으로 인한 리콜 비용이 1조5000억원에서 2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회사 측의 폭발 위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 중 환불을 요구한 이들은 10명 중 1명도 안 된다. 아직 100만개가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다. 생존보다 소비가 먼저인 사회다.

100만원을 전후한 ‘갤럭시노트7’이 출시되자 ‘5’는 22만원대로 떨어졌다. 나는 얼마 전 아버지를 위해 ‘노인폰’이라는 2G 폴더폰을 15만원에 구입했다. 스마트폰은 어디까지 진화해야 하는가. 아니, 이것이 진화의 문제일까. ‘7’과 ‘5’의 차이(약 80만원)와 ‘5’와 ‘2G’(7만원)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이는 진화라기보다는 이익을 위한 유행 창출이라는 기업 정신일 뿐이다.

20여 년 전 일이긴 하지만 1997년 어느 대통령 후보는 대선을 치르기 위해 “천억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이 정확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언저리라는 뜻일 것이다. 2조원. 0자리 숫자가 6개(100만원)만 넘어가면 뇌가 멈추는 나 같은 사람에겐 상상할 수 없는 액수다. 그 정도의 돈이 ‘갤럭시7’의 수익 비용도 아니고(!), 리콜이라는 생산 비용의 일부다.

2조원을 다른 곳에 쓴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친환경 급식, 농가 부채 탕감, 가난한 암환자를 위한 치료비, 아르바이트 시급 1만원 책정, 시간강사 월급제, 택시기사 사납금제 폐지, 가정폭력 피해여성 쉼터,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위한 의료 복지, 장애아동을 혼자 감당하는 엄마를 위한 사업…. 잠시 ‘로또’를 꿈꾼다.

물론 그 돈은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돈이고, 5와 7의 차이는 ‘클 것이다’. 하지만, 2조원. 이것은 과학기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향후 자본주의 사회의 방향을 가늠하는 사건이다.

무엇이 더 중요한 문제인가. 기술 발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가 이익을 보는가. (내가 가장 궁금한) 도대체 인류는 누구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것일까. 누가 인간을 우러러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일까. 과학기술 발달의 목표는 편리함인가? 대안적 편리 개념은 없을까. 어디까지 발전해야 성이 찰까. 오래된 질문조차 멈춘 시대다.

발전주의에서 살아남을 방도를 모색할 때다. 발전지상주의는 경제 강국이 아니라 종말론적 신앙이다. 생산과 소비를 무한정 늘리고, 시장 교환 체제를 확대하고, 자연을 얼마나 더 뒤지고 파헤칠 것인가. 스마트폰은 스마트하지 않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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