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극일을 외칠 줄은 몰랐다. 한국 정치에서 외세, 특히 일본은 단골 메뉴다. 여당이 반일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고 하면, 이 효과를 잘 아는 야당은 극일과 이성적 외교를 주장해왔다. 매체가 메시지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고 들으면 모두 옳은 말씀이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발언을 보면서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작동 원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두 가지가 아닐까. 적대적 공범 관계와 발전 지상주의. 적대적 공범은 분단체제에서 남북한 통치자와 여야 정치인들의 존재 양식이었다. 

발전주의. 우리는 진보·보수, ‘마초·페미’ 불문, 잘사는 나라를 열망한다. 일본은 축구에서라도 이겨야 하고 서구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추격 발전주의다. 그것이 ‘세계 평화’를 위한 이라크 침략이든, IT 강국이든, 한류든 한마디로 전 세계에 태극기가 휘날려야 한다는 강박이다. 물론 한국 사회의 이러한 콤플렉스와 욕망은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동력이기도 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문제는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부재이다. 아니, 부재를 넘어 거의 금기에 가깝다. 나는 예전에 소셜네트워크의 윤리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페미니즘 관련 글을 썼을 때보다 많은 비난을 받았다. 어떤 이가 당시 내 글을 비판한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진보 인사와 페미니스트들이 모두 “좋아요”를 눌렀다. 

한국 사회에서 인터넷과 SNS는 기술 강국과 표현의 자유를 상징한다. 혹은 발언 기회(지면)가 없는 이들의 공간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부작용이 있더라도 양비론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차피 세상사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양비론은 의미 없는 얘기다. 서구에서는 과학 기술 산업을 주도하는 거대 기업에 대한 비판과 스마트폰으로 인한 인간의 조건 변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데, 우리는 이에 대한 문제제기조차 어렵다.

20세기 최고의 시간도둑이 TV였다면, 21세기에는 스마트폰이라는 데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TV와 달리 휴대성과 사용자의 즉각적인 참여, 주체화 측면에서 완전히 성질을 달리하는 매체다. 인간이 만든 도구는 인간의 몸을 확장(extension)시킨다. 나의 일부가, 기억이, 기능이 도구에 의존하거나 옮겨지는 상태다. 우리는 확장된 몸을 ‘나’로 생각하기 쉽다. 자아는 비대해지지만 인간의 능력은 저하된다. 

디지털 치매는 인간의 기억력을 기계가 빼앗아가는 새로운 질병이다. 치매가 슬픈 병인 이유는 환자의 기억이 상실, 대체됨으로써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증 치매에 걸린 사람과는 살아있어도 만나지 못한다. 인간은 곧 기억이다. 죽음은 이 기억이 몸(mindful body)을 빠져나가는 현상이다.

TV가 한때 ‘바보상자’로 불렸다면 지금 스마트폰은 생각하는 인간, 호모사피엔스의 정의를 바꾸고 있다. 페이스북 창시자인 마크 저커버그는 자기 딸은 “열 세 살까지는 페이스북 사용을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실제 페이스북은 13세 이하 아동들의 계정 등록을 막는 정책이 있긴 하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는 여섯 살 유튜버가 100억원짜리 빌딩을 산다.

최근 출간된 <생각을 빼앗긴 세계>는 디지털 유토피아 신화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저자 프랭클린 포어는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이 어떻게 지식과 사상, 프라이버시와 문화를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생각하고 기억하는 능력이 불필요한 시대요, 거대 기업이 인류의 뇌를 독점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도구가 부메랑이 되는 상황은 누구나 아는 문명의 딜레마이지만, 나는 디지털 범죄나 문화 파괴보다 인간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많다. 인간은 타인과 사회 간 부대낌 속에서 자신을 정의하는 과정을 사는 존재다. 그러나 1인 매체 시대에는 자기가 자신을 규정한다. 자기도취, 자기조작 시대다. 

주식 투자 실적을 부풀리고 결국 사기죄로 구속된 모씨는 올해 구형 10년에 징역 5년을 선고받았는데, 그는 기부왕 행세를 하면서 유명해졌다. 그가 페이스북에 쓴 글을 보자. “저는 무엇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원래 가졌어야 하는 분들의 것을 잠시 맡고 있다가 있어야 할 제자리에 돌려놓는 사람일 뿐입니다. (중략) 저는 제 이름이나 업적이 아닌, 정제된 가치관과 철학을 남기고자 합니다. 제가 뿌리는 씨앗에서 열리는 열매가 사회와 공동체에 고스란히 전달되길 바랍니다.”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페미니스트의 페이스북 글이다. “빛나는 연구 실적의 첨탑을 향해 내달리는 숨가쁨이 때론 두통과 복통 등의 신체적 통증으로 번역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한글 논문을 완성하기 무섭게, 다른 주제의 외국어 논문으로 향하고 있는 이 일상에서 연구가 주는 기쁨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 쓰지만 에너지 고갈에 맞닥뜨린다.” 

디지털을 통해 자아를 무한 확장하는 사람들, 거짓과 혐오 행위가 유명세가 되고 악명도 돈이 되는 세상에서 어떤 상태가 ‘제정신’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성의 양극화일까? 한국은 세계 최고의 우울증, 자살률 국가이다.

<정희진 |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판문점 만남을 두고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내가 당황한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전부터 회자되고 있는 ‘트럼프 노벨 평화상 후보론’이고, 또 하나는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언급된 ‘문재인 대통령 조연론’이다. 일단 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인권과 관련한 수많은 유엔 조약을 앞장서서 위반했기 때문에, 아무리 세상이 ‘말세’라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문제는 두 번째 의견이다. 여야 간 정쟁으로 치부하기엔 심각한 사안이다. 국제정치에서 ‘팩실레이터(facilitator)’는 외교력으로 국가 간 갈등이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행위자를 말한다. 촉진자, 조력자, 주동자, 조성자 등의 뜻이 있다. 한마디로, 능력이 있어서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이다. 어떤 종류의 영향력이든 지렛대(레버리지)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이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는 ‘강국’이지만,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나 중재력 측면에서는 ‘중견국(middle power)’으로 분류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야당 일각의 “문재인 조연” 운운은 국제정치에 대한 기본 상식이 없거나 흠집 내기이거나, 둘 다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945년 미 군정 이후 지난 74년 동안, 우리는 프란츠 파농의 표현대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 글자 그대로, 서구가 심어놓은 ‘식민(植民)’이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한의 정치, 경제, 일상은 ‘미국’이거나 ‘미국이 아닌 것(북한)’에 의해 좌우되었다. 독재는 쉬웠다. 미국을 욕망하고 동일시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친북’으로 몰면 그만이었다. 특히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한반도는 미·소에 의한 분단이 아니라 미국이 기준이 된 분단이었다.

분단 체제는 남북 간의 대립이 아니었다. 통치자들에게만 유리한 이데올로기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분단을 이용하지 않은 첫 번째 지도자였다. ‘통일’은 남북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가 여럿이 되는 것이다. 현재 남북은 ‘대립하고 있지 않다’. 가난한 북한은 ‘주적’이 아니라 관심 없는 타자일 뿐이다.

판문점 만남을 두고 자유한국당은 조연이라고 했지만, 실제 우리 정부의 역할은 조정자에 가까웠다. 다른 국제 관계에서는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 기회가 많지도 않고, 이 분야에서는 주연과 조연이라는 용어 자체가 난센스다. 이제까지 국제 사회에서 주연은 주로 전쟁을 일으키는 침략자들이었다. 주연과 조연의 구분과 위계를 강조하는 사고방식도 시대착오적이지만, 요즘과 같은 ‘관종’의 시대에 주연 강박, 주인공병은 위험하다. 이미 주인공병은 위험 수위를 넘었다. 관심을 받는 방법이 주로 혐오 행위이기 때문이다. 막말이나 혐오가 자원으로 연결되는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남북관계에서는 남북 당사자론이 있을 수 있고, 한국 정부가 조정자 역할을 할 경우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최소한, 한국 현대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언설인 “강대국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좌우되었다” 같은 처지에서 벗어나고 있다. 나는 예전에 국방 관련 글을 쓰기 위해 ‘전문가’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한반도가 유사 이래 27번 외침을 당했다는 의견부터 900번 당했다는 주장까지 다양했다. 잦은 국경 접촉 사고까지 외침(外侵)이라며, 2000번이 넘는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이 말하는 ‘약소국의 운명’에는 일종의 공식이 있다. 당나라가 등장하면 고구려와 백제가 망했고, 원나라가 부상하면 몽골군이 쳐들어왔으며, 명나라가 등장하니 고려가 멸망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청나라가 등장하니 병자호란이,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더니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의 식민 지배가 일어났다는 식이다. 물론 이는 단순한 외세 환원론으로, 이 글에서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다.

피해를 당해왔다는 깨달음은 중요하지만, 피해 경험이 자신을 정의하는 정체성이 되는 방식은 위험하다. 피해 사실과 피해 의식은 다르다. 피해는 상황적인 것이지 본질이 아니다. 피해 의식은 개인과 사회의 성숙을 가로막고,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는 상황을 인식하기 힘들게 한다.

나는 이번 회담이 감격스럽다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피해자 콤플렉스를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문화적, 심리적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돈이나 무기로는 살 수 없는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강대국에 대한 피해의식과 아류 제국주의 의식이 뒤섞여 있다. 동전의 양면도 아니고 한 모습이다. 자부심과 자존감은 다르다. 열등감이 자부심으로 포장될 때 세상은 끔찍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제무대에서의 주연 - 미국도 불가능한 일 - 이 아니라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삶, 자신과 상대방을 존중하는 일이다.

<정희진 |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봉준호 감독의 2006년작인 <괴물>의 영어 제목은 ‘The Host’였다. 호스트는 손님을 초대한 주인, 주최자, 숙주(宿主) 등의 뜻이니 조만간 ‘기생충’이란 영화도 나오겠구나 생각했다. <기생충>의 주인공 부부 이름도 기택과 충숙이다. 봉 감독은 근대성, 한국 현대사,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뛰어나게 변주한다. 영화마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일관된 사유가 있다. 이번 작품 도 그 자장 안에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세르의 <기식자(Le Parasite)>는 기식을 인간의 본성 중 하나로 본다. 그래서 책 제목도 기생충(寄生蟲)이 아니라 기식자(寄食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대개 “기생충 같다”라고 표현하지만 기생은 생산성(환경 파괴)을 최고 가치로 삼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기생’은 오해와 낙인이 많은 단어다. 과거 기생은 여성의 직업이었다. 그들은 놀고먹지 않았다. 기예를 갖추고 일하는 이들이었다. ‘기생충’은 여기에 ‘벌레 충’까지 붙었다. 벌레가 생태계에 기여하는 역할을 생각하면, 인간이야말로 벌레보다 못하다. 맘충, 설명충처럼 한국사회에서 혐오의 접미사가 된 벌레는 억울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기생에 해당하는 영어 ‘parasite’는 ‘para’와 ‘site’의 합성어이다. ‘para’는 “옆에, 나란히, 같이” 등의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기생은 타인과 같이 산다는 뜻이다. 숙주와 기식자는 위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같이 사는 사이다. 삶의 주최자는 손님이 필요하다. 숙주도 다른 숙주에게는 기생하는 존재이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미셸 세르는 최고의 기식자를 왕(王)으로 보았다.

지금 인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포스트 휴먼’이라고 불릴 정도의 기이한 세계를 살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자본주의의 질주가 그것이다. 빈부의 양극화는 건강, 교육, 문화 등 일상은 물론 인생과 자아의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당대 국가와 자본의 목표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재생산은 국가의 부를 생산하는 데 오히려 짐이 되고 있다. 국가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탈락시켜 국민을 ‘잉여’로 만드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고용의 종말은 필연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논란이 되었던 “좌파 신자유주의”는 모순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했는지도 모른다. 비극은 이 폭력적 자본주의 자체는 속수무책이고, 현실 정치는 이 과정의 방식을 얼마나 ‘인간답게’ 다룰 것인가를 둘러싼 속도 조절에 국한돼 있다는 점이다. 

작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자 아베 일본 총리는 자국 영화의 수상을 축하하기보다는 일본 사회의 주변부를 그렸다는 이유로 못마땅해했고, 평소 아베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고레에다 감독은 뒤늦은 총리의 축하전화를 거절했다. 예술이 권력의 선전 도구가 아닌 한 외롭고, 슬프고, 우울한 세계를 조명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통이 없다면 할 이야기도 없고, 따라서 예술도 없다. 

<어느 가족>의 자국어 제목은 ‘좀도둑 가족(万引き家族)’이다. 두 작품 모두 기존의 가족 제도와 양극화 시대를 매개시킨다. 가족은 애초부터 계층 재생산의 핵심이 아니던가. <어느 가족>에서도 일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어느 가족>과 <기생충>은 작품의 분위기는 다르지만 자립과 의존, 주인과 식객, 시혜와 수혜의 의미에 문제제기를 한다는 면에서 닮았다. 

통념과 달리, 자립의 상대어는 의존이 아니라 독점이다. 인간 생활에서 완전한 자립은 가능하지 않다. 자립의 반대는 독점이거나 고립이다. 지역 공동체의 자급자족을 가로막는 것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독점이다. 글로벌 경제란 일국 내부의 자본주의 분업이었던 도시-농촌의 위계가 전 세계적 지역 분업으로 전환된 것이다. 각 나라 ‘특산품’의 품목과 경쟁력은 같지 않다. 미국은 무기부터 쇠고기까지 모두를 팔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그렇지 않다. 빈부 격차는 필연적이다. 

작품의 시선은 기생의 약함이나 쓸모없음이 아니라 기존 개념을 질문한다. 우리에겐 다음과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기생이 뭐 어때서?” “진짜 기생하는 인간들이 누군데!” “기본소득은 당연해!” 이 시대, 기생은 전쟁의 대안이다. 공존하지 않으면 공도동망(共倒同亡)이다.

<정희진 |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나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부패한 집단이 직업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에 대한 지나친 비판과 냉소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만 불러올 뿐이다. 통념과 달리, 정치인과 연예인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 윤리적인 조건이 있다. 이들의 생활은 24시간 공중(公衆)의 감시를 받으며, 검찰을 능가하는 ‘누리꾼 수사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최근 남성 국회의장과 여성 자유한국당 의원 사이에 발생한 ‘해프닝’을 두고 여야가 서로 “피해 인정” 투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이 나라의 정치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의 명분과 성별 제도(gender)의 작동 원리를 가장 잘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집단은 국회일 것이다. 

안건의 신속한 처리를 위한 패스트트랙에 한국당이 결사반대하면서, 국회의장과 국회의원 간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여기서 안건의 정당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날치기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물리력을 사용하는 혹은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예전 야당이나 지금 야당이나 마찬가지다. 대화만이 능사는 아니다. 공익을 위한 법안이라면 최선을 다해 관철시켜야 한다. 나의 생각으로는 지역구를 폐지하고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실시되지 않는 한, 국회는 어차피 그들만의 싸움터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문제는 몸싸움이 아니라 그 방식이다. 1990년대 이후 각종 여성폭력방지법이 제정되었다. 정치권은 일반 여성이나 언론과 검찰 권력의 희생양이 된 여성 배우들의 고통과 피해는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서, 이번 국회처럼 ‘성추행’ 사건을 남발해왔다. 합의가 안될 때마다 여성 의원, 보좌진, 국회 직원들을 상대당 앞에 내세워 ‘접촉’을 유도하고, 이를 성추행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이 성추행인지 아닌지는 국회에 율사들이 많으니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문제는 왜 이러한 젠더 전술이 멈추지 않는가이다. 

이성애 제도에서 남성과 남성의 몸싸움은 성추행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상대를 성추행범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당(自黨) 여성을 내세워야 한다. 당연히 접촉이 발생한다. 그러면 “성추행 폭거”라고 주장한다. 최근 사건이 더욱 희비극인 까닭은 “성추행범”이라는 말에 자아가 무너진 남성 국회의장이 분노한 나머지, 한국당 여성 의원의 얼굴을 진짜로 ‘감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셀프 쇼크’로 입원, 피해자 역할을 재현했다. 

이 사건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일까. 여야는 서로 “자해 공갈” “성추행”이라고 주장하지만, 진위를 따지려는 시도 자체가 더욱 부끄러운 처신인 줄 알아야 한다. 분명한 가해자가 있긴 하다. 한국당의 송희경·이채익 의원의 피해자 모욕이다. 이들은 ‘여성=피해자’라는 통념을 강조하기 위해 여성 의원의 외모와 학력, 결혼 여부를 두고 “트라우마와 열등감이 있는 불쌍한 분”으로 묘사했다. 

대개 남성이 여성을 보호한다지만, 실제 그럴까? 이번 사건의 경우 나경원 원내대표와 남성 의원 등 힘 있는 이들은 뒤로 숨었다. 같은 당의 여성 의원과 여성 보좌진들이 남성 의원의 경호원 역할을 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언제나 남성과 남성 사이의 계급 갈등을 수습해주는 범퍼 혹은 ‘총알받이’로 이용되어 왔다. 여기엔 진보·보수, 좌우, 파시즘·자유주의가 따로 없다. 1980년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어머니’들은 언제나 시위대 맨 앞에 섰다. 전투경찰이 ‘어머니’에게는 폭력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하고, 폭력을 쓴다면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모성=평화’라는 성역할 이데올로기가 동원되는 것이다. 

나치의 파시즘 군대는 성적 순수성을 강조했지만 남성 동성애를 우려, 군인을 위한 성매매 제도를 조직적으로 운영했다. ‘성상납’은 남성 연대를 강화하거나 우호 증진을 위한 대표적인 문화다. ‘예쁜’ 여성을 물건으로 선물하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중요한 이유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남성이 여성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줄게”라 하는 프러포즈가 있었다. 요즘 여성들은 말한다. “안 지켜줘도 돼. 너나 잘해.” “네가 제일 무서워.” 보호자와 피보호자 개념, 그 성별성 자체를 문제시해야 한다.

여야 불문, 국회의사당의 모든 남성에게 말하고 싶다. 싸우려면 남성들끼리 싸우기 바란다. 여성폭력방지법은 남성을 위해 만든 법이 아니다.

<정희진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시냇물 하나 이렇게 흘려 놓으셨나요.’ 

송창식의 ‘사랑이야’ 노랫말(2절)이다. 여기서 ‘당신’은 누구일까. 사랑은 짧다. 연인일 가능성이 가장 작다. ‘당신’에 정체성, 적, 상처, 습관, 질병… 어떤 단어를 대입해도 말이 된다. ‘당신’은 내 몸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평생의 화두가 아닐까. 득도하지 않고서야 ‘당신’과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 인생이요, 역사다. 인생고(人生苦)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알아도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 고민이 멈추지 않는 상태다. 

트럼프를 보면서 ‘한반도의 당신’에 대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1866년 조선은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동강에서 제너럴셔먼호(號)를, 1871년 강화도에서 미군을 물리쳤다. 당시 삼화현감 이기조는 미 군함 세난도호 함장 피비거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들은 우리 강토와 백성들을 차지하려는가, 아니면 우호 관계를 맺고자 하는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가, 그대의 소원을 말하고 아무것도 감추지 말라.”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무것도 감추지 말고 원하는 것을 말하라? 미국이 속마음을 말하겠는가. 조선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가. 알 수 없는 열강 앞에 무력한 모습. 그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미국에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반미, 친미, 비미(批美), 용미(用美), 숭미(崇美), 모미(慕美), 탈미(脫美)…. 이 언설의 경합은 우리 내부의 혼란과 갈등을 반영한다.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현대사에서 미 군정기 3년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가장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본다. 최초의 미군 범죄는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항에 도착한 바로, 그날 일어났다. 일본 경찰은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조선인 두 명을 총살했고, 미군은 이에 감사했다. 환영 인파는 흩어졌다. 미군은 일본의 보호 속에 등장했다. 몇 시간 후 환영차 인천항에 나온 조병옥, 장택상, 정일형 등 연합국환영위원회 대표들에게도 미군은 총을 겨누고 접근을 막았다. 미군과 조선의 첫 만남은 살상과 무시였다. 

그 뒤로도 미국은 떠나지 않았고 군부 독재 세력은 미국을 뒷배 삼았다. 한국인들은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조금씩 ‘당신’, 미국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과 동화되어 가고 있다. ‘미국병’은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미국은 ‘친밀한 적’ ‘짝사랑하는 적’ ‘욕망하는 적’이다. 우리는 문화적, 심리적, 지적으로 개성보다 뉴욕을 훨씬 가깝게 느낀다. 아직도 미국의 주(州)가 남한을 포함하여 51개인 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2018년 4월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이루어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만남이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이제 트럼프 관련 뉴스가 피곤하다. 그가 주도하는 ‘밀당’, 아니 강대국의 농간(‘전략’)이 지겹다. 지난 15일에도 북측이 밝힌 3차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트럼프는 “대화는 좋은 것”이라고 반복하면서도 “그러나 빨리 가고 싶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좋은 관계다, 대북 제재도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1960년 8월,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썼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 하루바삐 나가다오. … ” 그의 지친 분노가 들리는 듯하다.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이처럼 다른 시각과 캐릭터의 지도자가 함께 만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다름이 바로 기회요, 힘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책임이나 탓의 차원이 아니다. 북한이나 미국은 어쩔 수 없는 ‘그들’이지만, 우리 사회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아무리 지정학이 문제라고 하지만, 약소국의 운명이라고 하지만, 캘리포니아주의 2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땅조차 둘로 갈라졌지만, 약자 필패가 필연은 아니다. 중국을 이고 사는 베트남은 약소국이 강대국을 슬기롭게 대처한 좋은 사례다.

반미와 친미의 이분법을 넘어 ‘우리 안의 미국’을 뒤돌아볼 시기다. 

그런데, 새로운 미국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 나타났다. 이언주 의원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죽음은 문재인 정권의 책임이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셨겠는가. 계급혁명에 빠진 좌파 운동권이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한다. 계속되는 그의 몰상식이 원래 사고방식인지 선거 전략인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조 회장의 사인은 폐질환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사망했으니 신미(信美), 미국을 믿으라고 해야 할까.

<정희진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뭔가를 이해했다면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도리스 레싱의 말을 빌리면, 용서란 이런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지만 용서도 할 수 없다. 호미 바바의 말을 빌리자면, 기억(re-member)은 사지(四肢)가 재조합되는 환골탈태의 과정이다. 기억과 용서는 이토록 힘든 일이다.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씨가 지난 11일 법정에 섰다. ‘광주 학살’ 이후 39년 만이다. 치매와 감기 등의 이유로 출석을 피하려고 발버둥치다 법원의 강제구인에 따라 광주지법 201호 대법정에 선 것이다.

나는 서울 토박이로 ‘80년 광주’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전두환씨는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통령이 되기 전 그는 정치인의 활동을 봉쇄하고(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언론인과 공무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정(肅正)했다. 언론인만 711명이 해직되었다. 말이 숙정이지, 독재 국가의 소위 숙청(肅淸)이었다. 내 아버지 이름이 이 명단에 있었다. 우연이 겹쳐, 고교 교사였던 엄마는 박정희 정권 말기에 교직을 그만두셨다. 맞벌이였던 우리 집은 생계부양자가 사라졌고, 나는 그때 초등학생이었다. 아버지의 퇴직금은 소송비용으로 없어졌고 부모님 모두 백면서생인 덕분에, 나는 종종 서무실로 불려가는 학생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대학 생활은 5공화국과 함께였다. 휴교, 최루탄…. 사복 경찰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공부, 여행, 모색 같은 개인의 삶은 없었다. 그냥 상황에 휩쓸렸다. 이후 내 삶의 기준은 오로지 “20대처럼 살지 않으리라”였다. 나는 전두환씨에 대한 증오를 잊은 적이 없지만 ‘광주분’들 앞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며칠 전, 어느 모임에서 동갑인 지인이 “난 대학 생활이 좋았어. 그때부터 소비 사회였잖아?”라고 말했다. 나는 책상에 뛰어올라 그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동시대의 기억이 이렇게 다르다. 전두환씨는 “하필 내가 그때 대통령이어서… 피해자는 나”라고 주장한다.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위 부정론자들은 말한다. “홀로코스트는 없었다, 난징대학살은 없었다, 군 위안부는 없었다, 문서가 없거나 없어졌으므로.” 고통을 경험한 사람의 증언을 ‘종이’로 묵살하는 것이다. 물론, 실증과 실증주의는 다르다. 기록된 역사보다 더 중요한 진실은, 기록도 사람이 만든다는 사실이다.

생존자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에 전두환씨와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행태는, “잊지 말자”는 다짐 정도가 아니라 기억을 둘러싼 비상사태임을 의미한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내전 중이다. 역사가는 기억 활동가(memory activist)라고 말하는 임지현의 신간 <기억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는 이 문제에 대한 흥미진진한 세계사다. 사실(寫實)이 사실(史實)로 만들어지는 사태에서 살아남은 자는 어떻게 주체적으로 연루할 것인가를 묻는다.

식민 지배를 겪은 이후, 많은 국가들이 ‘진실과화해위원회’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었다. 내 의문은 이것이다. 진실과 화해는 양립할 수 있을까, 과연 진상 규명(facts finding)이 가능할까. 진실은 곧 화해로 연결되는가? 오히려 ‘진실’ 자체가 더 문제는 아닐까.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가 달라지고 연구자나 정치권이나 ‘기억 비스니스’에 분주하다. 얼마 전 군 위안부 주제의 학회에서 많은 발표자들이 “제가 위안부 전문가는 아니지만…”이라고 서두를 시작했는데, 기억 연구를 둘러싼 다른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억투쟁은 정의를 위해서이지, 피해자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일수록 “우리가(내가) 가장 피해자” “완벽한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진다. 결국 피해자는 또다시 고통받는다. 강자는 고통을 연구하고 ‘성찰’하지만, 약자는 고통을 경쟁하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누구에게? 가해자에게? 그러므로 기억전쟁은 사회를 바꾸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피해자의 경험이 의심받고 부정될 때, 피해자는 이중적 자아를 갖게 된다.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가 분리되는 것이다. 진실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공동체의 산물이지, 처음부터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기억전쟁>에 의하면, 유대계 폴란드인 역사가 비톨트 쿨라(Witold Kula)는 1980년대 초 이렇게 예견했다고 한다. “예전에 유대인들은 돈과 자질, 지위, 국제적인 네트워크 때문에 질시를 받았다면, 지금은 강제수용소의 소각로 때문에 질시를 받는다.” 인류가 기억의 연대보다 피해의식을 경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해는 인정받지 못하고, 피해의식만 넘쳐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희진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여성학 연구자 권김현영이 신간 <미투의 정치학>에 쓴 “그 남자들의 ‘여자 문제’ - 진보 남성의 미투 운동에 대한 이해”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그녀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재판을 내내 모니터링하고 연구했다. 안씨는 1심 공판 최후 진술 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지위가 타인의 인권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당시 그는 무죄를 확신한 듯 진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고, 이 한 마디만 남겼다.

무슨 뜻일까. 진부한 비유지만, 술 마시고 운전했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다?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의 핵심 논리이기도 한 “나는 권력자이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인 듯하다. “지위의 존재와 행사를 분리한 비문(非文)”이라는 권김현영의 분석이 없었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은 강제 외에도 매우 다양하다. 권력은 이데올로기, 어쩔 수 없는 조건, 사회 구조 등에 의해 자가 발전(發電)하는 공동체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설령, 갑이 위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인격적인 사람이라 해도 위력은 존재 자체로 작동한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 아닌가.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는 1심 재판부에 묻고 싶다. 당신들은 권력에서 자유로운 집단인가. 모든 업무를 동의와 합의로만 진행하는가. 당신들은 고시 동기생이 진급하면, 직장을 그만둘 만큼 권력에 민감한 집단 아닌가? 군인들도 동기생이 먼저 승진하면 전역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문화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권력 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인간관계는 권력관계다. 권력 개념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삶에는 힘의 원리가 작동한다.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간단히 구분되지 않는다. 갑을의 처지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더구나 지금 한국사회는 ‘갑을’을 넘어 ‘갑을병정’의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다.

살아남기 위한 자발적 복종, 다양한 협상과 전략은 인간의 오래된 생존 방식이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모두 공기와 같다. 이것을 뿌리 뽑는다는 발상, ‘근절(根絶)’은 관념이다. 인간의 몸은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권력관계가 조금이라도 상식적, 합리적, 인간적으로 작동하기를 바란다. ‘땅콩 회항’, ‘라면 상무’, 양진호씨 사건,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이러한 상황은 권력자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노동 생산성을 저하시키고,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공도동망의 길이다.

성폭행은 인류의 역사와 그 시간이 같기 때문에 오히려 탈역사화되어 ‘남녀 관계’로 변질되어 왔다. 당대의 미투 운동은 노동 시장 문제다. 안희정씨 사건은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이다. 이 사건은 많은 남성들이 생각하듯 개인의 ‘여자 문제’가 아니다. 일국 내부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용 자체가 몰락하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다. 직장 내 권력관계는 개인의 인격과 생사여탈권을 좌우한다. 미투는 생존권 문제다.

안희정씨 사건은 노동 시장에서 성별 권력이 작동한 전형적인 예다. 고용, 급여, 근무 조건, 경력 문제 등 노동 문제를 남녀 간의 성(性)문제로 둔갑시키는, 이 권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가해자의 입장이 그토록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별(젠더)은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지만, 남성 사회는 ‘여자 문제’, 피해 여성 문제로 치부한다. 성별은 남녀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 만일 ‘여성 도지사-남성 비서’ 관계도 위력은 존재하겠지만, 여성이 성폭력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는 드물다.

권력 개념은 유동적이다. 갑과 을은 고정되거나 팩트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가 피해자라고 다투는 이유다. 우리는 모두 위계의 그물망에 걸려 있다. 나를 포함하여 언제든 가해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성차별이나 계급 양극화 외에도 연령주의, 장애인, 성적 소수자, 이주 노동자 차별 등 다양한 힘의 관계가 각축한다.

사실, 이 글의 주장은 제목에 있다. 나는 안희정씨가 본인을 위해서라도, 이 사건을 3심으로 가져가지 않았으면 한다. 2심 이후 안씨 부인의 행동은 민망했다. 노동 인권 사안을 ‘불륜’이라고 주장하는 행동이야말로 윤리적이지 않다. 유일한 명예 회복은 조용히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3심 판결과 상관없이 그는 문귀동 형사, 신정휴(우 조교사건), 조재범, 김기덕, 고은, 이윤택씨처럼 각계의 성폭력 가해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정희진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어린이에게 성폭력(rape) 예방 교육을 할 때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마라, 싫다고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성폭력 가해자의 대다수는 피해자와 아는 사람이고 어린이 성폭력은 더 비율이 높다(80%). 무엇보다, 압도적인 폭력 상황에서 “분명한 의사 표현”이 가능할까. 효과보다 역효과가 클 가능성이 높다.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잠재적 피해 집단을 대상으로 한 교육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오죽하면, 이런 방식을 제안하는 이들도 있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절대로 아저씨를 쳐다보지 마라.” 아저씨라고 썼지만 가해자는 대개 아빠, 삼촌, 아빠 친구, 오빠, 교사, 의사, 경찰 등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이들이니, 모른 척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피해자에게 침묵이 강요되는 이유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 사회는 성폭력 범죄를 다룰 때 구조적 문제나 가해자의 행위보다 피해자의 동의 여부에 집착한다. 남성은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여성은 그것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처럼 결정할 권리가 불평등한 상태에서, 합의 여부를 중심으로 성폭력을 다루는 것은 애초부터 피해자에게 불리하다. 성폭력이 지속되는 이유다. 합의 상황의 복잡성을 다투는 성인 대상 성폭력에 비해, 어린이 성폭력은 사회의 공분을 사지만 생각만큼 제대로 처벌되지도 않는다. 피해 아동이 여러 명인 경우조차 사회(가족, 학교, 교회 등)는 가해자 편에 선다.

‘위계나 폭력 상황에서도 피해자는 선택할 수 있다’는 발상은 피해자의 능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피해자가 운동선수이든 전문직 여성이든 어린이든, 그것이 왜 중요하단 말인가. 성폭력 발생 원인은 남성 중심적 성문화에 있지, 피해자의 인구학적 특성(나이, 학력, 직업…)과는 무관하다. 성폭력도 다른 범죄처럼 가해자의 행위만 판단하면 된다.

조직 내 위계나 물리적 폭력의 정도에 따라 피해 내용이 다를 뿐, 성폭력의 본질은 위계와 결합된 성별 권력 관계다. 이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해결은 없다. 나의 생명과 생계 그리고 평생의 경력을 쥐고 있는 상대방과 어떻게 합의가 가능하단 말인가. 본디, 합의(consensus)는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끼리도 달성하기 어려운 지속적이고 끈질긴 협상 과정이다. “합의였지?”라는 비난 때문에 피해 여성은 분노 속에 침묵한다. 성폭력은 최고의 ‘암수(暗數) 범죄’가 될 수밖에 없다.

남성에게 성(sexuality)은 유용한 도구다. 갑이 남성이고 을이 여성일 때, 권력은 성폭력으로 행사된다. 모 종목의 기대주였던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코치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낙태한 후 선수 생활을 포기한 사례만큼이나, 여자 선수를 지도하는 남성들이 룸살롱에 갈 필요가 없다는 ‘자랑’이 끔찍한 이유다.

이번 조재범씨의 경우는 온 국민이 “강력 처벌”을 바라며, 피해 여성을 응원하고 있다. 하지만 안희정씨 사건의 피해자, 미투를 한 검사도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세 사건은 피해 기간, 가해자와의 관계, 피해 성격은 다르지만 모두 위력에 의한 폭력이다.

하지만 여론은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고른’ 분노를 보이거나 옹호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판단 기준이 가해자의 폭력이 아니라 피해자의 대응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완벽한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만 인정한다. 완벽한 인간도 없는데, 완벽한 피해자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 잣대를 유독 여성에게만 요구한다. 피해 여성은 끊임없이 사건 자체는 물론, 자신의 모든 인생과 과거사를 검열당하고 변명하게 된다. 남성도 상사에게 구타당한 다음 날 ‘웃으며’ 출근하고, 자기를 때린 사람을 위해 맛집을 검색한다. 이것이 피해자가 동의한 증거인가?

체육계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조재범씨 사례는 전형적이다. 빙상연맹은 방관 정도가 아니라 범죄를 조직, 격려했다. 대한체육회, 문화체육관광부는 책임져야 한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해결 의지다. 작년 이즈음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의 모델이 되었던 우리의 미투 운동을 생각해보자. 무엇이 달라졌는가?

강력한 처벌? 필요 없다. 합리적인 처벌을 바란다. 한국은 성폭력 관련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다. 2017년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이자 미시간주립대 의대 교수였던 래리 나사르는 150여명의 여자 선수들의 고발로 360년형에 처해졌다.

<정희진 |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올해 노벨 화학상은 세 명의 영미권 학자에게 돌아갔다. 가장 연장자인 미국 미주리 대학교의 조지 P 스미스(77)의 수상 소감이다. “거의 모든 수상자가 자신이 받는 상은 ‘딱 그때 그곳에 있었기에’(강조는 필자) 활용하게 된 수많은 아이디어와 연구, 전례 위에 쌓인 것임을 알고 있다. 노벨상에 이르는 연구는 매우 적고, 사실상 전부가 이전에 진행됐던 것에 기반을 둔 것이며 수상은 우연(happenstance)이다. 내 연구도 기존의 연구 위에 자연스럽게 구축된 것이다.”

대개 이런 말은 겸손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시상식장에서 영화배우들이 “많은 스태프들의 도움이 있었다” “나는 차려진 밥상에 수저만 얹었을 뿐이다”라는 소감처럼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타인에게 공을 돌리는, 그런 겸손 말이다. 영화의 완성 과정도 그렇겠지만, 수천 년 이상 지속된 과학 연구에서 노벨상 수상은 개인의 독자적인 업적일 수 없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과학자는 “우연”이라 말했지만, 인문학에서는 “부수적 사건(contingency)”이라 표현한다. 같은 말이다. 부수적(附隨的)이 ‘좀 더 겸손’하다고 할까. 노벨상 수상은 학문 전체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일 뿐이다. 수상자는 ‘하필’, “딱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중 우연히 받게 된 것이다. 정확한 자기 인식이다.

모든 과학자가 이런 수상 소감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서구 사회 연구자들은 모든 자원이 부족하다. 물론, 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작 뉴턴의 유명한 말, “내가 남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이 이야기도 뉴턴이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여성주의 역사학자 거다 러너는 뉴턴의 말을 약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했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가 아니라 ‘발’ 아래서 세계를 처음 접한다, 사회적 약자는 이미 출발선이 다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출발선이 위로가 된다. ‘우리는’ 어깨 위에서 시작한 이들보다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더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 인도의 철학자 메타(J L Mehta)는 이렇게 말했다. “동양에 있는 우리에게 길은 유럽을 지나는 길 외에는 없다. 이국적인 것, 이질적인 것을 항해함으로써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에게 돌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길은 가장 길게 돌아가는 길이다.” ‘인도’가 자신을 알기 위해선 ‘영국’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우연은 흔히 생각하듯 비합리적이거나 불공정한 운이 아니다. 필연의 반대말은 더욱 아니다. 우연과 필연은 무관하다. 필연은 불가능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인생에 “반드시”는 있을 수 없고 법칙대로 되는 인간사도 없다. 역사는 전사(前史)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다. 우연은 그 해석의 유동성이 낳은 ‘필연’이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지만 어차피 모든 인간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다. 미래(未來)는 글자 그대로 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모르는 집단이나 개인이 고달픈 이유는 미래를 몰라서가 아니라 과거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힐링은 삶의 앞뒤 상황을 해석하는 것이다. 사회적 문맥을 고려하면, ‘성공’에 따른 도취도 ‘실패’에 따른 좌절도 상대화된다. “딱 그때 그곳을 지나가다가”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져 자신에게 차례가 오는 것뿐이다. 이것은 소박한 기쁨일 수도 엄청난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 인생에는 법칙이나 인과 관계가 없음을 어찌하랴. 내 성공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잘나서”라는 자만에 빠지기 쉽고, 고통의 원인을 찾다 보면 더욱 고통스러울 뿐이다.

개인의 행위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사회적 상황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얘기다. ‘금수저 개인’만이 승자가 되는데도, 경쟁과 승부가 강조되다니 이상한 일 아닌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역사적 사유(우연, 부수적 상황)가 불가능하다. 현재 우리 사회는 개인의 극한 노력과 구조의 양극화라는 불공정 게임이 동시에 존재한다. 승패가 정해진 사회에서는 과정조차 의미가 없다. 이제는 과정도, 결과도 아닌 전제를 따져야 한다. 개인의 힘으로 되는 일이 거의 없는데도, 여전히 개인의 성취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많은 이들이 낙오자 정서에 시달린다. ‘셀럽 문화’가 그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실제 개인의 삶은 철저히 구조 속에 갇혀 있는데도, 개인의 노력으로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좌절한 개인들은 관종(‘관심 종자’, 지나치게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기 쉽고, 인간관계는 이들의 자기도취와 허언증으로 파괴된다.

행과 불행, 성공과 실패, 질병과 상실의 고통… 이 모든 것이 내 잘못도 상대의 잘못도 아니라 거대한 역사의 부수적 사건이라면, 나는 그저 망해가는 지구의 나그네라고 생각하면, 덜 괴롭지 않을까. 덜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역사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내가 추구하는 일을 하면서 역사를 흘끗 보자. 힐링은 딱 그때 거기를 지나간 내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정희진 |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은 구한말 노비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어디서 왔느냐?(Where are you from?)”였다. 이방인인 그는 이 질문이 고통스럽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모르는 것을 묻는다’는 평범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는 내 땅인데,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뜻이다. 익숙한 논리다. 어린 시절 어깨동무를 하고 편을 갈라 주고받던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 노래가 시작이었을까.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 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訊問),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도 묻는 자의 교양, 인격, 무지, 태도를 알 수 있다. “어쩌다 동성애자가 되었나요?” “자네는 어느 대학을 나왔나?” “왜 아직도 취직을 못했나?” “여자가 왜 이런 일을?” 이런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인권 침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에 노출되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 상대는 어디에 ‘서’ 있는지, 내가 하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것이 평생의 화두여야 한다.

당연시되고 고착된 질문은 폭력이다. 가장 괴로운 질문은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일 것이다. 고문이 대표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질문은, 가해자(피의자)에게 할 질문을 피해자에게 하는 경우다. 성폭력 범죄가 그것이다. 조사를 가장한 피해자 비난, 여론 재판…. 유아 성폭력이거나 가해자가 여러 명인 사건을 제외하곤(?) 피해자가 질문에 시달린다. 피해자는 목숨을 건 저항 여부나 거절이 얼마나 단호하고 절절했는지, 특히 자신이 얼마나 피해자다웠는지 최대한 증명해야 한다.

1991년부터 성폭력특별법이 제정, 개정되는 과정에 참여해온 나는 전 충남도지사 사건을 통해 법정에서는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7년이다. 게다가 올해 봄, 들불과도 같았던 미투 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해자의 동의와 저항에 관한 질문은 집요하다.

이제는 동의, 저항 여부 자체가 쟁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가해자에게 질문하자. 절도나 사기사건, 즉 다른 형사사건의 피해자에게 성폭력 피해자만큼 질문하는가? 아니, 사건 발생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가? 일단, 법정은 가해 용의자에게 질문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궁금한 것이 너무 많고, 뭐든지 질문해도 된다는 권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내가 아는 가정폭력 피해자는 40년 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환갑에 이르러 이혼 소송 중이다. 처음에는 데이트 폭력으로 시작됐다. 주변에서는 모두 결혼하면 나아진다, 아들이 있으면 그만둘 것이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 아이가 결혼하고 손자를 보면… 결국 그녀는 스무 살에 만난 한 남성에게 평생을 구타당했다.

문제는 “고쳐진다”는 통념을 수용한 피해 여성이 남편의 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는 등 상황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통념과 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왜 때린 사람과 결혼했느냐, 왜 경찰에 신고를 안 했느냐,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는데 왜 이제야 이혼하려고 하느냐, 혹시 다른 이유(돈,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피해 여성이 폭력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당사자마다 다르고, 제3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자는 이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다.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운동은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성별 권력관계는 더욱 그렇다. 가해자에게 질문하는 반성폭력 운동을 제안한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왜 여성을 때렸습니까? 아내를 ‘교육시킨다’면서, 교육만 시키지 왜 죽였습니까? 안 때린다고 공증까지 했으면서 왜 또 때렸습니까? 술을 마셔서 때린 게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 거 아닌가요? 술을 마시고도 아내를 때리지 않는 남성이 훨씬 많습니다!

왜 비서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왜 안마를 요구했습니까? 왜 수시로 초과노동을 시켰습니까? 왜 해외 업무에 동반했습니까? 왜 평소엔 여성인권 운운했으면서, 이중적 태도를 보였습니까? 왜 자신의 성폭력 재판에 부인이 나왔죠? 본인이 생각하는 성폭력과 성관계, 사랑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피해자와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왜 불륜이라고 거짓말했습니까?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폭력과 관련한 질문 내용은 그 자체로 가해자의 시각에서 구성한 것이다. 위력의 행사가 자연스럽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가해자의 행동이 궁금하지 않다. 대신 피해자의 대응이 의문시될 뿐이다. 피해와 피해 이후의 심문. 약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법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정희진 |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버스 안. 여고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다. “(가임 적령기인) 30대 초반 여자 인구가 제일 적다며?” “당연하지! 그렇게 여아 낙태를 해댔으니, 여자들이 남아났겠냐.” 이렇게 똑똑한 여성들이 앞으로 한국 사회를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현재 인권 관련 국제기구들은 한국의 심각한 여성 인권 문제를 아내에 대한 폭력(가정폭력)과 성형 시술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분야에서 한국의 ‘상징’은 여아 낙태였다. 한국의 태아 성 감별 의료 기술은 세계적 수준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여아를 원하는 부모들이 성 감별을 통해 남아를 낙태시키기도 한다. 임신 중단 합법화, 즉 기존의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낙태죄 폐지는 너무 당연하다. 찬반 논의는 사회적 역량 낭비다. 낙태죄는 오래전부터 사문화(死文化)된 법이다. 낙태죄 폐지 주장이 제기되자 “낙태가 불법이었어?”라고 되묻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만연한 현상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법적 구속력이 전혀 없는, 있으나 마나한 법이 불법으로 규정함으로써 국민(여성)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해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일부 남성들은 단지 여성을 괴롭히기 위해 낙태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이용한다. 이혼 소송 중인 남성, 상대방의 임신 사실도 몰랐던 남성, 양육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남성들이 여성을 임신 중절로 고소하는 경우다.

가장 의아한 점은 왜 이 논의가 여성의 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대립으로 전개되는가이다. 여성들의 주장대로 “내 몸이 바로 생명이다”. 이토록 간단한 진실이 있을까.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짓밟은 이들이 진정 누구였는가. 1970년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국가 주도의 가족계획 사업(강제 낙태)이 대표적이다.

생명은 평등하지 않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장애 여성, 10대 여성의 임신과 그들의 생명은 사회가 ‘반기지 않는다’. 생명을 그토록 존중하는 나라가 1956년부터 1998년까지 해외 입양 부동의 1위국이었단 말인가(지금은 중국이다). ‘여성의 선택권’ 역시 그다지 억압받은 적이 ‘없다’. 여아 낙태는 가부장제 사회의 강요에 의한 것이든 여성들의 주체적 행위성(동의)이든, 여성들은 이미 충분히 ‘선택’해 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성비(性比·여아 100명당 남아의 숫자)는 100 대 105 정도가 정상이다. 그러나 대구·경북 지역의 경우 셋째 자녀의 성비가 100 대 140을 육박하는 시기도 있었다. ‘여아 학살’로 인한 성비 불균형은 “초등학교 남학생들에게 여자 짝꿍이 없다”는 또 다른 남아 걱정으로 이어졌다. 대책(남아 선호 문화의 폐지) 마련을 문제의 원인(다시 남아 위주)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낙태가 범죄(crime)든 죄(sin)든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사회가 정한다. 죄라고 해도, 성관계에 참여한 남성과 여성 모두의 책임이다. 사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사회적’ 성역할이지 ‘신체적’ 능력에 의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신체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

낙태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가장 염려해야 하는 사항은, 낙태는 여성의 선택권이나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관계 시 남성의 권력과 무책임으로 인한 사후 피임, 즉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콘돔은 인류의 발명품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이었다. 인구 조절이 가능해졌고 여성은 임신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 시대 여성들은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평생을 임신, 출산, 육아로 보냈다. 근대 이전에는 전쟁 시 사망한 사람보다 출산 도중에 목숨을 잃은 여성이 더 많았다.

피임 방법 중 여성이 매일 복용해야 하는 경구 피임약이나 자궁 내 장치보다 남성의 콘돔 사용이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대개 남성들은 콘돔 사용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성별 권력 관계는 피임의 책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성이 남성에게 콘돔 사용을 강제할 협상력이 없고, 콘돔 사용을 “장화 신고 달리기”라며 억울해하는 남성 문화에다, 피임은 여성의 책임이라는 의식이 당연시되는 사회. 여성은 낙태라는 폭력의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낙태죄 폐지는 폭력의 후유증을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절실한 요구일 뿐이다. 남성의 ‘귀찮음’이 여성의 생명권을 침해한다. 낙태죄 존속과 폐지 주장 이전에,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과제는 남성의 인식 교정이다. 성관계는 쾌락, 의무, 교환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모든 전제는, 출산을 원치 않는다면, 피임이다. 피임을 성관계의 일부로 규범화해야 한다.

미국의 여성학자 주디스 앨런은 남성들이 낙태를 왜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하는지 궁금했다. 연구 결과, 남성들은 그릇으로서 여성의 몸(자궁)과 그 그릇에 담긴 것은 모두 ‘내 것’인데 낙태는 주인의 허락 없이 그릇을 비우는 “도둑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농구나 축구에 비유하면, 골이 들어갔는데 여성과 의사가 그물 밖으로 공을 빼는 행위에 대한 분노라는 것이다. 미국 남성에 비하면, 낙태에 관심조차 없는 한국 남성은 그래도 나은 사람들일까?

<정희진 |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몇 년 전까지 4월은 4·3과 세월호를 기억하는 달이 아니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4·3을 삭제하려 했고,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다. 예전에 5월은 ‘광주’로만 기억되었으나 2016년 이후에는 강남역 사건이 더해졌다.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애도할 일도 많아지는 법이다. 내달, 6월에는 두 명의 중학생이 생각날 것이다.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중학생 사건(장갑차가 도로 폭보다 넓었다).

최근 출간된 소설가 정찬의 작품집 <새의 시선>에는 2014년 늦은 봄부터 2017년 여름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는 그간의 소설 쓰기가 “넋을 견디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틴다, 견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는 것도 힘겨운 지경인데, 죽은 자의 넋을 견디다니. 나는 이 글귀를 붙잡고 한동안 ‘넋을 놓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재해, 참혹한 ‘과거사’, 양극화된 노동조건, 혐오 범죄로 희생된 타인과 함께하는 삶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일상적 인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몸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쩌면 당장은 무관한 일을 어떻게 내 일처럼 계속 의식하고 살 수 있겠는가. 매순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넋을 견디는 일은 예술가만의 십자가이자 특권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질주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죽음과 모욕이 생생히 구현되는 현장을 살고 있다. 차라리, ‘구조’는 멀다. 공포는 ‘자본의 직격탄’이다. 서울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혼자 일하다 사망한 열아홉 살 청년부터, 용산참사, 세 모녀의 자살, 항공운송업 재벌의 맞춤형 밀수 사건까지.

애도는 소비의 적이다. 자본주의는 사유, 슬픔, 우울을 싫어한다. 낙관과 조증(躁症)이 자본주의적, 근대적 인지(認知) 상태다. 발전 지상주의 사회인 한국은 더욱 그렇다. 세월호 사건 때 택시를 탔는데 기사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4월이 행락철 대목이었는데 황사, 메르스, 세월호로 다 망했어요. 택시도, 관광버스 회사도 피해자예요. 죽은 사람은 안되었지만 산 사람은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의 생계 불안에 공감하면서, 생각했다. 고통 받는 이웃이 있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닌 시대에, 죽은 자의 곁에 있지만 아직은 죽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구의역, 강남역 사건 이후 “너는 나다”는 글귀가 익숙하다. 며칠 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관련한 포스터에서도 “너는 나다”를 발견하고 조금 놀랐다. 예전에는 “그들도 노동자에 포함시키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호가 선의라는 것을 알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호소력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며, 정확히는 비윤리적이다. 그 누구도 타인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과 나는 다른 개인들이다. 우리는 동일한 위험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지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너는 곧 나”라는 주장은 구체적인 피해자의 위치(죽음)를, 아직은 살아 있는 내가 취(取)하는 행위다. 고통에 대한 동일시가 연대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특히 말할 수 없는 처지의 피해자를 대변하려는 사회운동가나 지식인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윤리적 이슈다.

“잊지 말자” “나는 너다”,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하다. 피해자와 유가족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같지 않다. 기억하고 견뎌야 하는 일도 전혀 다르다. 유가족은 “잊지 말자”는 다짐이 필요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잊기 위해 몸부림친다.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다짐을 거듭해야만 잊지 않을 수 있다. 사실 나는 그조차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망자의 넋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행위가 가능한가? “잊지 말자”는 일상이 고통인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그들을 소외시키는 언어다. 슬픔이 일상이라면, 기억 투쟁은 필요하지 않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얼마나 다짐했던가. 그러나 거짓말처럼 비슷한 일이 무섭도록, 빨리,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구조적 해결도, 잊지 말자는 다짐도 다 공염불이다. 한국 사회,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진상 규명, 피해 보상, 명예 회복을 요구하지만 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는 문제 해결의 일부분일 뿐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가해자’인 국가 권력이, 다시 문제 해결자로 등극하는 것은 권력의 최종 심급으로서 국가의 위상을 강화하는 행위다.

소설가는 말한다. “만장이 펄럭이는 세계 속에서 넋을 피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죽은 너와 살아남은 내가 같다고 말하기 전에, 일상에서 ‘나’는 ‘너’를 견디고 있는가. 살아 있는 이웃도 견디기 힘든데, 보이지 않는 죽은 자의 넋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그들은 보이지 않고 갈수록 잊혀질 텐데….

“너는 나다”라는 착각 속에서는 넋을 견디는 긴장과 혼돈이 필요하지 않다. 넋을 마주하려면 일상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타인의 혼이 내 몸 안팎을 들락거린다. 산 자와 죽은 자는 동거한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힘겹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위로가 될지 모른다. 안전한 사회는 슬픔의 노래가 지속되는 사회다.

<정희진 |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정권 교체기마다 골칫거리 중 하나가 교과서 문제였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버지 콤플렉스’ 때문에 단일 교과서 제정을 강행, 큰 논란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미투 운동으로 교과서 문제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지난 2월27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의 곽상도 의원(자유한국당, 대구 중구·남구)은 작년에 문화체육관광부가 고은·이윤택·오태석씨에게 8억6700만원을 지급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고은의 작품을 교과서에 삭제할 생각이 없느냐”며 ‘의기양양’하게 대정부질문에 나섰다.

이에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고은 시인의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 1개, 고등학교 교과서에 10개 등 총 11개가 실려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저작권은 발행사가 갖고 있다”며 교과서 발행사와 삭제 여부를 논의할 것임을 ‘거듭’ 공언했다. 인상적인 점은 김상곤 부총리와 곽상도 의원, 즉 ‘여야’가 교과서에 대해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12일 서울시 관계자들이 고은 시인의 육필 원고, 도서, 필기구 등을 전시해 놓은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내 만인의 방을 철거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나는 고은씨의 시가 교과서에서 삭제되지 않기를 바란다. 김기덕, 이윤택, 오태석씨도 마찬가지다. 나는 박근혜 정권 당시 국정교과서 제정에도 ‘찬성’했다. 물론 그 전제는 여성노동과 노예노동을 중심으로 “내가 쓰겠다”는 것이다. 여성과 노예 노동을 1000년 정도 배운 후에, 좌우 논쟁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

모두가 동의하는 올바른 역사는 없다. 역사처럼 당파적인 담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국민의 역사로서 국사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모든 역사는 누군가의 입장에서 특정 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주관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사실(事實)’을 사실(史實)로 만드는 과정이 역사이다. 중립적, 보편적 역사가 가능하다는 근대적 역사관에 대한 도전은 “역사는 이어지거나 수레바퀴처럼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베냐민의 주장부터 재일한국인 사학자 이성시(李成市)의 역작 <만들어진 고대(古代)>에 이르기까지 이미 수많은 비판이 이루어져왔다.

미투는 젠더(남성과 여성 간의 권력관계)뿐만 아니라 ‘문화혁명’에 준하는 사건으로, 우리 사회 전반의 뿌리 깊은 인습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에 문외한인 나조차 오래전부터 고은씨의 범법 행위를 알고 있었다. 내용도 알려진 사실보다 심각하다. 그의 행동은 상습적인 범법일 뿐 한량문화도, 기행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시가 계속 교과서에 실리기를 주장하는 이유는 ‘문학적 업적’ 때문이 아니다. 나는 원래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서사시, 대하소설… 한국의 일부 남성 문인들은 자신을 예술가가 아니라 역사 서술의 주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 중 하나다. ‘내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민족을 대표하기 때문에’ 타인은 없는 존재이거나 존재하더라도 그·그녀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그래서 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폭력의 원인이다.

친일과 반공으로 사익을 챙겨온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불가피하다고 믿어온 일부(?) 진보진영의 자기 직면은 지금부터다.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남아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교과서에는 모범적인 저자와 글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현실, 실패한 역사도 포함되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노벨상 타령”으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서구 콤플렉스와 남성 패거리 문화를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서다. “이런 시를 쓴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고 한국 사회는 그를 숭배해 왔지만, 여성들의 투쟁이 있었다”고 적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탄생한 시, 성폭력 가해자가 연출한 작품은 무조건 졸작 혹은 걸작인가. 교과서는 이를 논쟁적으로 제시하는 인식론이 되어야 한다. 김기덕 감독은 <해안선> <나쁜 남자> <빈집> <스톱> 등 작품의 완성도 자체가 황망한 경우부터 목불인견인 영화,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수작까지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공과를 따지기보다 인간과 사회는 복잡하고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유하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투명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를 포함, 현실을 세탁한 모든 텍스트는 ‘껍데기’다. 우리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책들은 넘치고 넘친다. 교사는 말할 것도 없고 학생들은 한국 사회의 실제 모습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현실과의 괴리로 인한 갈등도 적어지고 이후 현명한 대처도 가능해진다. 교과서는 우리를 인식할 수 있는 교사이자 반면교사여야 한다.

<정희진 |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미투 운동에 대한 나의 심정은 복잡하다. 걱정과 분노로 혼란스러울 정도다. 물론 지금 미투는 유사 이래, 어느 사회에서도 없었던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혁명이다. 나도 당사자이기 때문에 임전무퇴의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회운동이 그렇듯, 미투 역시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여성들이 수시로 겪는 폭력은 당장 대책이 없다. 마음속으로 미투를 외칠 뿐이다. 고은이나 이윤택씨의 경우는 그들이 속한 커뮤니티(문단, 연극계)의 문제가 더 본질적이다. 망자(亡者)인 남성도 있고, ‘억울한’ 남성도 있다. 범죄의 성격과 경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 사회의 가해자에 대한 태도는 피해자 존중이 아니라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다(민주당의 정봉주씨와 안희정씨에 대한 다른 대처를 보라).

15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범시민행동 출범’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타파하자는 의미에서 현수막을 찢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교활한 상습범은 숨어 있고, 멋모르고 행한 ‘폭력적 애정 행각’은 선정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 즉 젠더는 법적 처벌이 어려운 사회적 모순이다. 공기처럼 작동하는 일상의 정치이기 때문에 탈법, 불법, 합법의 경계가 모호하다.

한편 지금과 같은 미투 운동 이전에 영화계 성폭력에 대한 내부 고발과 반성이 있었다. 영화계 성폭력 실태 조사와 지원 단체가 설립되는 성과가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흔한 적폐가 반복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해명해야 한다.

문제는 “미투를 지지한다”는 정부의 ‘사실상 무대책’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 상담은 고도의 전문성과 다양한 대응을 요구하는 중노동이다.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이명박 정권부터 작년까지, 정부는 무려 122조4000억원을 저출산 대책에 사용했다. 주지하다시피, 성과는 전혀 없었다. 그 돈의 1000분의 1이라도 성폭력 해결을 위해 지원하라. 작년과 올해 모두, 여성가족부 예산은 7640억원으로 정부 전체 예산의 0.18%다.

사회적 통념과 달리 미투로 인해 여성에 대한 폭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숨겨진 범죄가 드러나면서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미투는 남성 사회의 선택적 가시화와 무관하게 계속될 것이다. 사건은 지구의 70%를 덮고 있는 바닷물의 양만큼이나 많다. 문명 이래 가장 오래된, 가장 빈발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굳이 나눈다면 가해자는 크게 두 종류다. 범죄인 줄 알지만 처벌되지 않는다는 확신에서 대담하게 저지르는 이들이 있고, 그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용되어 왔기 때문에 ‘정말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를 탈식민주의 이론에서는 권력이 허락한 무지(sanctioned ignorance),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무지(willing ignorance)라고 한다.

모든 지식, 학문의 지위는 같지 않다. 외국어 능력에도 위계가 있듯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게 약”이고 “어떤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다. 남성 사회에서 젠더는 무지가 당연시되거나 심지어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홍준표씨처럼 여성정책토론회를 열어놓고 “나는 모른다”며 수면을 취하는 정치인의 존재가 가능한 것이다. 그에게 여성은 인간은커녕, 유권자도 아니다.

지식의 의미는 권력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예를 들어 피임법은 남녀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무지의 영역이다. 문제는 이 의도적인 무지로 인해 누가 고통받는가이다. 동성애는 무지가 곧 폭력인 경우다. 대개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 가난한 지역에 관한 지식은 무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것을 자신이 중산층인 증거로 삼는 이들도 있다.

미투로 인해 가장 충격받은 이들은 아마도 ‘평범한’ 남성들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차마 그 정도 수준인 줄은 몰랐으며, 그들 덕분에 자신이 “점잖은 분” “여성을 존중하는 신사”로 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하긴, 어느 누가 이 정도 규모로 성차별, 성폭력이 행해지고 있을 줄 알았겠는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음모론 운운하는 김어준씨 같은 이들의 적폐는 그 발상도 발상이지만 수치심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성의 피해를 조롱하거나 성차별을 사소한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최소한 상식적인 남성들은 “너무 몰랐다” “창피하다” “할 말이 없다”고 고백한다.

미투 운동의 의미는 폭력의 감소가 아니라 남성교육에 있다. 한국 남성은 인간의 현실에 대한 무지가 ‘권력’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여성의 말하기가 남성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다. 한국 남성의 근대화는 지금부터다.

<정희진 | 여성학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근혜 정권의 무너진 ‘적산(敵産)가옥’ 위에서 출발한 문재인 정부.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긴 항해를 거친 듯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더 이상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진사퇴를 불러온 몇몇 인사의 경우, ‘진보 지도층’의 생각지 못한 면모를 보았을 뿐, 완벽한 정부는 없다.

특히 대통령 개인의 인간적 매력과 가치관이 현 정권의 엔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전 사안에 대한 입장은 놀라울 정도다. 세월호, 5·18,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등 고통받는 이들을 대하는 그의 위로와 공감 능력은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서 최고 통치자’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우리는 알고 있고, 잊을 수 없다. 그 역시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다는 것을.

‘경남도민일보’는 문재인 정부의 3중고를 ‘야당, 추미애, 탁현민’으로 꼽았었다(7월11일자, 인터넷판). 국민의당이 대선 당시 제보 조작 사건을 이유미씨의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하자 추미애 대표가 “머리 자르기”라고 발언, 막말 논란을 겪을 때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문재인 정부의 ‘2중고’가 있다면, ‘적폐(특히 MB세력)’의 효과적 정산(正算)과 열렬한 지지층인 이른바 ‘문빠’로 인한 중간 지지층 이탈이다.

하지만 전자는 조사, 처벌 대상이므로 골칫거리가 아니라 국정 그 자체다. 문제는 후자다. 이들의 집단행동은 ‘홍위병’으로 오해(?)받을 만큼 과격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개혁세력이 이들로 인해 언로가 막히고 자기 검열에 갇힌다면? ‘문고리 3인방’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나부터 ‘문재인 팬덤’ 때문에 두려움과 피로를 느낀다. 되도록 현실 정치에 관한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에 대한 청와대 청원 사건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다.

그간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정현백 장관은 인사청문회 당시 탁현민 행정관에 대한 입장을 요구받았고 “그의 여성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대통령에게 경질을 건의하겠다”고 답변했다. 청문회를 주도했던 김삼화 국민의당 의원은 오랫동안 인권변호사로 활동해온 전문가다. 8월22일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국회운영위원회에서 “대통령의 인사권이 존중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정 장관께서는 (탁 행정관에 대해) 듣는 소리를 충분히 잘 전달해 주셨다”고 발언했다. 28일, 정현백 장관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사퇴 의견을 전달했지만, 무력했다”고 말했다.

이후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정 장관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개입하고 자신의 권한인 양 호도하며 (중략) 망동을 거듭하고 있다, 탁 행정관을 흔들지 말라”면서 장관 경질을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이 글은 ‘베스트청원’으로 분류되었다.

일부 언론은 “기이한 청원”(‘허핑턴포스트코리아’), “부적절한 처신이나 책임을 이유로 장관 사퇴를 요구할 수는 있어도 논란의 인물 해임을 건의한다는 이유로 장관을 경질하자는 국민 청원은 드문 일이다. 장관의 ‘충언’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심사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논평했다(서울신문 사설).

두말할 것도 없이, 정현백 장관은 여성가족부 수장으로서 당연한 업무를 수행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는 물론이고, 한시적이었지만 2005년 출범했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와 같은 부처는 정부(GO) 내부의 비정부기구(NGO)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는 본래 임무가 청와대를 포함, 국정 전반의 인권과 성 인지(性 認知) 의식을 감시, 교육하는 것이다. 준(準)정부기관(Semi-GO)으로도 불린다. 이들이 다른 부처와 갈등을 빚는 것은 필연이며, 이는 일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다.

장관이 국민과 야당의 입장을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이 해임 사유라니…. 그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문제는 이번 청원의 발상이다. 나는 ‘이니 팬덤’과 ‘팩트’, 상식, 원칙을 놓고 논쟁할 능력이 없다. ‘사랑’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연은 다소 복잡하지만 대통령의 외모를 문제 삼은 ‘한겨레21’ 표지 사건,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반찬 부실”에 대한 문자, 트위터 폭탄 등 그동안 온갖 웃지 못할 황망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은 ‘우리 이니’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언급을 하는 이들에게 인신공격과 “자유한국당 프락치”라는 식의 비난을 퍼붓는다(아무리 ‘돼지발정제’를 모의했던 이가 대표인 정당이라고 해도, 자유한국당은 제1야당이며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이 있다).

한국 사회에 팬덤 문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90년대. 서태지, H.O.T, 젝스키스의 팬들은 스타의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도록 함께 불우이웃을 돕는다든가 공연장을 청소했다. 그러나 지금 ‘이니 팬덤’은, 같은 지지자들에게도 욕설을 퍼붓는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인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다. 국가 운영에 이처럼 위험한 사태는 없다. 다른 사회에서는 ‘국론분열’을 넘어 내전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나를 포함해서 ‘문빠’는 지난 ‘10년 정권’에 절망한 이들이다. 동시에 이 현상은 출구 없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폭주가 두려운, 마음 둘 곳 없는 이들의 집단 광기다. 현 정부의 지지율에는 이처럼 슬픈 광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서로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야지, 자기 불안을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표출하는 ‘~빠’ 문화는 함께 살아갈 방도가 아니다.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청원 앞에서 분노보다 우리가 많이 초라하다고 느낀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바람 불면 촛불 꺼진다”던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최근 벌금 20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지난해 20대 총선 당내 경선 당시, 선거구민 9만2000여명에게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공약이행평가 강원도 3위’라는 허위 사실을 문자메시지로 발송했다. 명백한 증거가 있고 국민참여재판이었는데도, 그는 유죄 판결이 문재인 정부의 탓인 양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내 심경은 김진태씨와 정반대다. 세상이 바뀐 것을 빨리 체감했으면 좋겠다. 국회의원에겐 정권 교체의 의미가 크겠지만, 평범한 시민에겐 “새 정부가 잘하고 있다”는 느낌 외엔 큰 변화가 없다. 이 체감의 다름이 ‘난생처음’ 서러운 사람과 언제나 서러웠던 민초들의 차이가 아닐까.

오랫동안 구조적 약자였던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를 합치면 전체 인구의 과반이다. ‘우리’는 소수가 아니다. ‘정상적인 국민국가’는 이들을 위한 정부여야 한다. 하지만 들려오는 뉴스는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다. 세상이 바뀌려면 멀었다는 새삼스러운 자각과 함께, 박근혜 정부와는 또 다른 성격의 ‘권력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절망감이 든다.

평소 “가슴 없는 여자가 탱크톱을 입는 것은 남자에 대한 테러다”라는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이 ‘리버럴 진보’를 자칭, 새 정부 주변에 어른대고 있다. 일반 공무원 채용 시에는 면접을 통해 걸러낼 수 있는데, ‘논공행상’ 인사는 권력자와 가까우면 된다. 대개 이런 이들은 약자에게는 함부로 한다. 성폭력 경력이 파란만장한 교수 출신 고위직 인사는 피해 여성들의 증언이 속출하자(‘품행 민원’) 알아서 물러났다. 앞으로도 ‘사고’가 예상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청와대 부근만이 아니다. 최근 자기 집에서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머리카락에 불을 붙여 머리와 목 부위에 3도 화상을 입힌 남편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살인미수를 집행유예로 판결한 판사는 여성이었다. 다음은, 그 유명한 콘크리트 사건. 며칠 전 받은 어느 독자의 편지다. 

“맨손으로 여자가 죽을 때까지 폭력을 행사하고 시체를 시멘트로 암매장한 것이, 치밀하게 계획한 살인이 아니라면 무엇인가요? 폭행치사죄로 기소한 검사는 대체 누구인가요? 주먹으로 사람을 때려죽인 것이 살인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은 여성을 때려죽인 후에 시멘트로 암매장하고 교도소에서 3년만 살다 나오면 되는 나라입니다. 형사 법정에서 합의가 웬 말입니까?”

물론,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은 인류 역사 내내 있었다. 현 정부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이게 나라냐” “우리가 ‘이러려고’ 광장에서 밤을 새웠나”라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사법 종사자들의 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장준규 육군참모총장은 동성애자 ‘색출’ 함정 수사를 지시하고, 수많은 인파가 보는 앞에서 민간인 기자의 손목을 잡고 비틀었다. 제압. 그 장면, 나는 정말 무서웠다. 지난 5월에는 직속 부하인 대위를 성폭행한 대령이 준강간 혐의로 체포되었고, 피해 여성은 자살했다. 해군 당국의 인식이 점입가경이다. “그런 일(강간)은 어디에나 있다. 아무리 교육해도 술 먹고 그러는 걸 어떻게 막나?” 이들은 성폭력을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모든 남성은 매 순간 성폭행 범행 의지를 참고 있단 말인가?

피살자가 여성인 경우, 범인의 60% 이상이 남편이나 이성 애인이다. 여성 폭력, 막을 수는 없어도 처벌할 수는 있다. 이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현실은 ‘법보다 주먹’이 아니라 ‘법보다 성차별 의식’이다. 사법 개혁의 첫 번째 과제여야 한다.

탁현민

선거 후 며칠 만에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사회 구조와 사람의 인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는가. 이는 정권 차원의 이슈가 아니라 지난한 민주주의의 과정이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그 여정에 믿음직한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지금 정부는 국민의 절대적 희망이다. 해방 이후 이런 정부는 탄생한 적이 없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와 달리, DJP연합이나 이인제씨나 정몽준씨의 ‘도움’도 없었고 2위와의 표차도 압도적이었다. 무엇보다 상대 후보와의 정치적 역학보다 오롯이 시민의 힘으로 탄생한 정부다.

그러나 ‘홍준標(표) 돼지흥분제’는 이 정부에도 있다. 최근 문성근씨는 여성단체의 비판을 받은 탁현민씨에 대해 “뇌가 말랑말랑”하다고 칭찬하면서 “그가 흔들리지 않고 활동하도록 응원하자”고 덧붙였다. 남성연대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권력이다. 한국사회에는 다양한 남성성들(masculinities)이 연대하고 있다. ‘반공주의 남성성’ ‘자본가 남성성’ ‘루저 남성성’ ‘지식인 남성성’ ‘조폭 남성성’ ‘진보 남성성’ ‘군사주의 남성성’…. 성격은 다르지만 남성 특권을 유지하는 데는 ‘대동(大同)’ 단결한다.

이 중에서 특히 진보 혹은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이중성을 가시화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문제 발생 시 대응도 힘들다. 부디, 이들이 문재인 정부를 망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수많은 여성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촛불’은 비폭력을 피하기도, 지속되기도 어려웠다. 꼭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아니어도 좋다. 여성도 ‘국민’이었으면 한다. 여성의 안전과 목숨이 사소하게 취급되지 않았으면 한다. 여성이 직장 일과 가사 노동의 이중 노동에 덜 시달리기를 바란다.

모든 권력의 위기는 내부에서 온다. ‘우리 안의 적폐’가 무엇인지부터 깨달아야 한다. 청문회 5대 점검 사항 중 왜 인권의식(=여성의식)은 포함되지 않는가. 이것이 가장 기본 아닌가.

정희진 | 여성학 강사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무시할까봐 두려워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한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이 말은 강남역 사건을 묘사한 기사 같다. 작년 5월17일, 서울시 서초동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한 이른바 강남역 사건. 이후 내게 ‘오월’의 이미지는 두 겹이 되었다. 5·18과 강남역.

용의자의 범행 동기는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의 의식은 크게 바뀌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사건 현장 인근,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는 이름도 없이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한 피해여성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며칠 후 비가 내렸고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은 포스트잇이 철거되기 직전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1004개의 추모 쪽지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나무연필, 2016).

지난해 5월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지난 17일 새벽 인근 공용화장실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강윤중 기자

이 사건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일상인 여성 살해(femicide)다. 매일 밤 가정폭력으로, 성산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돼지 흥분제’ 합병증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잃는지 통계가 없을 뿐이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부분 중 하나는 용의자 자신이 일관되고 분명한 태도로 범행 이유를 밝혔는데도, 경찰과 여론은 정신질환 경력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그는 여섯 명의 남성이 화장실을 사용한 후, 여성이 나타나자 살인을 저질렀다. 용의자는 자신에게 범행 이유를 “물어달라”는 확신범이었지만, 경찰과 사회는 “묻지마 살인”이라고 입을 막았다.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피의자 본인의 목소리를 부정하는 것은 인권 침해다. 용의자도 피의자도 수감자도 그 위치에서의 인권이 있다(고문당하거나 진술을 부정, 강요당하지 않아야 한다).

여성 살해를 정신질환 환자의 우발적 일탈로 믿고 싶은 심리. 인류의 반이 자신의 성별 때문에 평생을 공포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구조의 핵심이다. 남성 문화는 성폭력이나 여성 살해를 일부 ‘미친’ 남성의 발작으로 여김으로써 성차별 구조를 은폐한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그들의 존재로 인해 ‘나’는 가만히 앉아서 ‘괜찮은 남자’가 된다.

당연히 이는 진실이 아니다. 단어 사용부터 오류가 있다. 미친 사람, 아픈 사람, 나쁜 사람의 인간관은 각각 다르다. 성폭력 가해자나 여성 연쇄 살인범들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이웃들이 “조용하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어요”라고 증언하는 장면에도 익숙하다.

고정관념의 가장 큰 피해 집단은 건강 약자인 정신질환 환자들이다. 조현병(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에 대한 편견과 무지는 뿌리 깊다. 그들은 아픈 곳이 다를 뿐 보통 환자들과 다르지 않다. 몸이 불편할 뿐이다.

극명한 방증은 ‘여성’ 정신질환자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아무나 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반 남성들도 여성 정신질환자로 인해 일상이 불편하거나 공포에 떨지 않는다. 오히려 “미친 여자”라는 낙인은 ‘창녀’와 함께 여성 환자는 물론 전체 여성을 통제하는 강력한 남성 권력이다. 이번 선거에서 유승민 후보의 자녀가 ‘잘생긴 남성’이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대통령 후보의 아들에게 그런 식의 폭력을 가하는 여성 정신질환자는 상상하기 힘들다. 게다가 유승민 후보는 ‘예쁜 딸로 인해’ “국민장인”으로 불렸지만, ‘훈남’ 아들을 둔 심상정 후보는 “국민 시어머니”라고 불리지 않았다.

군 위안부, 전쟁 시 대량 강간 등 인권 문제의 세계적인 전문가인 샬럿 번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폭력이 사소하게 취급되는 이유를 네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성차별은 사소한 일이어서 생존 문제 다음으로 미뤄도 된다는 인식, 둘째, 여성 학대는 개인적 문제일 뿐 국가가 대처해야 할 정치적 사안이 아니라는 인식, 셋째, 여성의 권리가 인권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는 인식, 넷째, 여성 폭력은 너무 만연한 문제라서 불가피하며 어차피 노력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고방식 등이다. 여성을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발상부터 패배주의까지 다양하다.

남성 문화는 여성에 대한 폭력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있는데 없는 문제인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해는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가장 성차별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성별이 무시된다. 그러니 해결될 리 없다. 아니, 해결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것이다.

나는 성매매가 필요악인지 아닌지 따위에 관심이 없다. 질문은 한 가지. 왜 언제나 파는 혹은 팔리는 사람은 여성이고 사는 사람은 남성인가이다. 성폭력도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여성인 경우는 거의 없다. 만취한 가해 남편은 아무리 필름이 끊겨도 아무나 때리지 않는다. 꼭 집에 와서 아내만 구타한다.

25년 전, 1992년 10월26일. 기지촌 성산업에 종사하던 여성 윤금이씨(당시 26세)가 미군 병사 케네스 마클(당시 19세)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처음도 끝도 아니었다.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자마자 시작되었으며 ‘윤금이 이후’ 격렬했던 여성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희생은 멈추지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여성에겐 모든 곳이 ‘강남역’이다. 나의 바람은 여성 폭력 근절이라기‘보다’ 피해가 드러나는 것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은 절반의 기쁨이었다. 전원일치는 다행이지만 혐의 내용 중 최순실씨 건 외에는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일곱 시간’ 행적 논란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박 전 대통령의 무능과 게으름을 상징한다. 평범한 사람의 불성실도 큰 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데,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의 황당한 본분 망각 행위를 불법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대통령의 불성실은 죄(sin)일까, 범죄(crime)일까.

개념상으로는 죄와 범죄는 차이가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그 결과는 다를 바 없는 시대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오히려 사회관계는 밀접해졌고 도미노 현상은 빠르고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 문제에 대해,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보다 정확한 말은 없을 것이다. 과연, 과녁을 명중한 명제다. 그는 미디어(매체)를 몸의 확장이라고 분석했다. 미디어 폭발 시대인 지금, 인간의 몸은 확대되다 못해 부풀어서 서로 부대끼고 있다. 친하지 않아도, 적대 관계라도 상호 영향력은 커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기계를 만들고 기계는 다시 인간을 만든다. 미디어는 지식을 전달하는 요인(agents)이 아니라 사건을 만드는 주체다. 내용은 형식을 따른다. 맥루언은 TV나 인터넷뿐 아니라 도로, 종이, 자동차, 옷, 돈, 시계, 게임, 주택 등 모든 것이 인간의 확장으로서 미디어라고 보았다. 큰 승용차가 작은 차를 무시하는 현상은 차가 인간의 확장, 즉 자아의 확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격(車格)이 인격”인 ‘이유’다.

자동차도 이럴진대 당대 미디어의 대표를 자임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상황은 어떨까. 사람마다 SNS에 대한 접근성과 관계의 밀도는 다르므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감각에도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그것의 비윤리성이다. 장단점 논의와 무관한 문제다. “행사 공지가 빠르다, 내비 기능이 있다”는 식의 발상, 즉 양비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핵심은 새로운 미디어는 인간 본성과 사회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자본의 법칙이다. 나는 SNS가 현대 자본주의의 만성화된 실업에 대한 ‘보상’, 즉 장난감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보내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 소설가 김영하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손 안의 인터넷, 스마트폰은 ‘시간 도둑’이다. (중략)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들일 수 있다.”

나는 그의 의견에 ‘인간의 타락’을 보태고 싶다. SNS의 익명성과 속도는 ‘팩트’를 점검할 필요가 없다. 따르는 사람(팔로어)이 많은 이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 사회가 달라진다면? 파시즘보다 더 무서운 세상이 될 것이고 이미 그러하다. 트위터에서의 이전투구로 ‘멘붕’ 상태를 넘어 ‘생사’를 오가는 사용자가 적지 않다. 지금 이곳은 자기도취와 욕망, 무지로 무장한 인간이 판치는 지옥이다(‘헬조선’). ‘6대 종합’ 일간지 중 하나인 모신문사의 트위터 팔로어는 50만명 선인데, 80만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개인이 존재한다. 모 노동조합의 팔로어는 300명인데, 노동조합 소속(?)의 ‘스타 노동자’는 5만명인 경우가 있었다. 그는 노조의 결정 사항을 사리사욕을 위해 번복,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 ‘보통’ 사람보다 평판을 중요시하는 진보 진영, 페미니스트는 더욱 그럴 가능성이 많다. 나의 요즘 고민 중 하나도 이런 ‘페미’들이다.

페이스북의 ‘페이스(face)’는 흥미롭다. 페이스는 “얼굴, 얼굴 표정, 마주하다, 직면하다, 상황에 처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페이스북은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면하지 않은 곳이다. 이때 페이스는 가상(假想)의 얼굴이다. 가짜 얼굴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인으로 하여금 상상케 하는 이미지다.

나는 이 매체가 부정의의 온상이라고 본다. 이곳에서의 자기 포장은 사기 수준이다. ‘실제’ 그·그녀는 후안무치에 능력은 없으면서 출세에 혈안이 된 인물인데 페이스북에서는 그런 인격자, 매력자, 실력자가 없다. 페이스북은 인격 세탁소다. 이들은 오프라인에서 그 이미지를 활용, 이익을 취한다. 억울하면 당신도 페이스북을 사용하라? 그래서 모든 이들이 페이스북에서 자기선전 경쟁을 해야 할까.

내 가정도 틀렸다. 물론 모든 사용자가 인격을 세탁하지는 않지만 페이스북에서 자신을 나쁘게 말하는 이는 없다. SNS 사용자는 자본의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전위가 되었다. 나더러 19세기 초반 과학의 발전으로 실업위기를 느낀 영국 노동자의 기계 파괴 운동인 러다이트(Luddite)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모두가 과학기술에 열광하고 있으니 러다이트 현상은 없다. 대중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그 열매를 사랑한다.

혐오 발언은 얼굴을 맞대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터넷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사용자의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얼굴을 맞댄다”는 행위는 책임감을 동반한다. SNS에 대한 열광에는 대면 윤리로부터의 도피가 포함되어 있다. 글의 서두로 돌아가면, 나는 대통령으로서 박근혜씨의 대면보고 기피가 더욱 문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일반 칼럼 > 정희진의 낯선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재인 정부의 '홍준표'들  (0) 2017.06.12
‘강남역 10번 출구’ 그 후 1년  (0) 2017.05.15
페이스북 시대의 얼굴  (0) 2017.03.20
한국 남성의 더러운 잠  (0) 2017.02.20
금수저의 어려움  (0) 2017.01.16
마음 둘 곳  (0) 2016.12.2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나는 지금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남성 시민’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나 역시 정권교체를 바라지만, 여성과 남성은 그 방법이 다른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의 나체 합성 그림이 포함된 ‘표창원 의원과 함께하는 ‘표현의 자유를 향한 예술가들의 풍자 연대’ 전시회’, ‘곧, BYE! 展’은 철지난 뉴스가 아니다. 이 사건은 인류 5000년 역사를 요약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반복될 이슈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그림은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올랭피아’를 베꼈다. 이 작품은 지난 1월20일부터 전시되었다가 논란으로 철거된 상태다. 마네는 웬만한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풀밭 위의 점심’ ‘피리 부는 소년’으로 유명한 인상파 화가다. 올랭피아는 당시 매춘 여성들의 흔한 이름이었다.       

이 그림에 대한 내 해석은 ‘흑인 하녀’와 주인공인 ‘창녀’가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선이다. 다시 말해, 흑인 하녀는 최순실씨가 아니고 올랭피아의 당당한 눈동자와 박 대통령의 눈빛은 한참 거리가 있다. 패러디는 원작을 충실히 이해했을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패러디가 아니다. 작가가 가져온 것은 여성의 벗은 몸뿐이다.

이구영 작가의 ‘더러운 잠’ 2탄 작품 ‘블랙’. 정지윤 기자

작가는 “박 정권에 이 정도 저항도 못하냐”라고 항변했지만 천만의 말씀, 이것은 저항이 아니라 권력 행위이며 본인이 그토록 적대하는 세력에 바친 ‘자살골’이다. 이 그림은 현 정권에 분노하는 ‘시민’의 시각이 아니라 ‘남성’의 입장에서 재현된 것이다. “표현의 자유”나 “국회의원의 품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작가의 인권 수준만 보여준 꼴이다.

이 그림은 ‘비상시국’ 때마다 등장하는 ‘일상적인’ 여성에 대한 폭력의 전형이다. 적절한 비교는 아니지만, 전두환씨가 대머리라고 해서 ‘대머리 남성’ 전체의 인권이 짓밟혀서는 안되듯이, 혹은 강남역 살인 사건의 범인이 전직 신학생이라고 해서 모든 신학생이 살인자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여성이 내게 좋은 질문을 했다. 그 그림의 작가가 여성이었다면? 마찬가지다. 여기서 문제는 누가 그렸는가가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작가의 의도를 떠나 사회적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벗은 몸은 성별 중립적이지 않다. 남성에게 여성의 나체는 쾌락이다. 그들은 돈을 주고 구매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험은 다르다. 남성의 성기 노출이 범죄인 이유다.

그림은 표창원 의원이 그린 것도 아니고 그는 작품 선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표 의원의 부인이다. 박사모가 그의 부인을 박 대통령처럼 그려놨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하이라이트’다. 나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표 의원이 박 대통령의 누드화를 그렸다 해도, 복수를 하려면 표 의원의 벗은 몸을 그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의 부인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박사모의 대응이 가장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사모는 남성연대라는 방식으로 그 어려운, ‘여야 대연정’을 실현했다.

상대방이 ‘자기 여자’의 누드화를 제작하고 전시해서 모욕을 느꼈다면, 남성 작가끼리 벗기면 된다. 왜 ‘상대방의 여성’을 벗기는가. 약자의 몸은 강자의 전쟁터다. 청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듯이, 한국전쟁이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이었듯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의 전쟁터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에서, 남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중학생(효순·미선) 사건의 반복이다. 이 참사는 예견된 것이었다. 장갑차가 도로 폭보다 컸기 때문에 탱크 위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은 계속 민원을 제기했으나 묵살당했고 결국 어린 학생이 희생되었다. 축구에 열광했던 시민(남성)들은 갑자기 죄의식에 사로잡혀, 촛불집회를 열었고 ‘Fucking USA(퍼킹 유에스에이)’를 합창했다.

왜 한국 남성은 미국 남성에게 저항하지 않고 미국을 여성화하면서 미국 여성을 강간하자고 외치는 것일까. 결국 남성은 국적을 불문하여 폭력의 주체가 되고 여성은 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된다. 한국 남성의 미국 남성에 대한 동일시 욕망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온 문화다. 남정현의 <분지(糞地)>부터 ‘반미 에로’ 영화 <태극기를 꽂으며>까지. 동시에 수천년 동안 반복되어온 전쟁 시 상대편 여성에 대한 성폭력부터 일상의 성매매까지 여성의 몸이 사용되어온 원리다. ‘군 위안부’를 인권 문제로 보지 않고 “우리도 일본 여성을 강간하자”는 논리가 가장 가까운 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입장은 같지 않다. 어떤 이들은 시민보다 남성 정체성이 더 강하다. 어떤 이들은 정권교체를, 어떤 이들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 서두에 썼듯이 나는 이 글을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남성들이 읽었으면 한다. 범야권은 이번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해야 한다. ‘여성’ 대통령 누드화는 여성과 상식 있는 시민에게 불쾌감을 줄 뿐이다.

‘한남(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표현)’은 국민, 시민, 민중이든 자신을 보편적 인간으로 생각한다. 성찰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남들이 가장 오해하는 단어가 “저항”이다. 일단, 더러운 잠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이후 깨달음의 고통이 있겠지만 언제까지 ‘한남’으로 살면서 나라를 망칠 것인가. 정권교체를 이루고 최순실 무리를 뿌리 뽑아야 풍자다. ‘태극기집회’ 세력과 여성의 벗은 몸을 공유하여, 야권을 남성과 여성으로 분열시키는 것은 저항은 아니라 ‘이적’ 행위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일반 칼럼 > 정희진의 낯선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남역 10번 출구’ 그 후 1년  (0) 2017.05.15
페이스북 시대의 얼굴  (0) 2017.03.20
한국 남성의 더러운 잠  (0) 2017.02.20
금수저의 어려움  (0) 2017.01.16
마음 둘 곳  (0) 2016.12.26
거짓말도 제대로 못하는 대통령  (0) 2016.12.0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최근 개봉한 김태용 감독의 영화 <여교사>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의 ‘탁월한 선택’에 스스로 감격하고 있는데, 누군가 뒷좌석에서 “나라가 미쳐가니 영화도 미쳤구만, 막장….”이라며 투덜댔다.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집으로 오면서 영화를 복기해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관객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 영화는 “미쳐가는 나라”의 풍경이다. 영화가 현실보다 훨씬 덜 ‘미쳤을’ 뿐이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거칠게 요약하면, 영화는 정규직 교사와 기간제(계약직) 교사인 두 여성의 갈등을 그린다. “○수저” 표현이 진부하지만, 둘은 각각 금수저와 흙수저를 대표한다. 좋은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금수저의 무지와 운명’에 관심이 갔다.

계급 고착 사회에서 흙수저가 겪는 차별과 모욕은 말할 것도 없지만, 금수저라고 해서 모두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주변의 금수저 혹은 준(準)금수저 자녀들을 보면, 다들 골치다. 별별 문제가 다 있다. 최소한의 공부나 노동은 일치감치 굿바이고, 자동차 폭주, 성형, 술….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는 지루한 청춘들에게 소비는 최대의 놀이다. 부모와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난동은 비행기 안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부모들의 호소를 듣고 있노라면, 돈이 사람을 망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부모도 부자고 자식도 성숙하면 좋겠지만, 그런 집은 드물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금수저에 대한 경고다. 정유라씨처럼 근거 없는(?) 기이한 금수저가 아니라면, 즉 ‘정상적’인 금수저도 세상 물정을 알 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의 금수저처럼 “저는 고생을 안 해서 아무 것도 몰라요”로 일관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흔히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말이 아니다. ‘끝’은 원래 끝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금수저라도 모든 욕구를 다 채우며 살 수는 없다. 문제는 선(線)을 모를 때 생긴다. 적정선을 인식하려면 자신과 인간관계, 사회를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흙수저는 선을 밟거나 넘으면 바로 태클이 들어오기 때문에 경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좌절”이다. 아니,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처지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금수저는 이 정치학에 무지하다. 분간이 없다. 주변에서 문제제기가 들어오면 돈, 협박, 거드름으로 대강 안면몰수고 공적인 소란이 생기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그만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놀라고 분노했던 부분은, 타인의 마음을 농락하는 금수저의 일상이다(물론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계속 놀라야만 …한다!). 극중 ‘갑’은 타인에게 더러운 노동을 시킴으로써 ‘을’에게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빼앗는다. 결국 금수저는 처벌 받는다. 이 영화의 금수저는 모든 것을 가졌다. 언니까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언니(실은 하녀)가 자신이 짓밟은 흙수저라는 사실이다. 이 부분이, 선을 넘은 것이다.

그 처벌이 해결은 아니지만, 어차피 인간사에 그리고 자본주의 구조에서 해결이란 없다. 최선의 정의다. 나는 화면 속으로 들어가 김하늘씨(흙수저 역)를 돕고 싶을 정도였다. 서두에서 언급한 관객의 말대로, 나는 미쳤는가? 나는 이 동일시가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장난삼아’ 남의 일자리를 뺏을 수는 있다. 그러나 타인의 진심을 이용하고 노리개 삼는 것은 인격 살해다. 이런 일을 당한 피해자는 온전한 삶을 살수 없다.

이 영화는 금수저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복수론(論)은, 잘못해놓고 처벌 받지 않으려는 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다. 사법 정의를 소유하고 있는 지배 세력은, 복수 외에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는 이들이게 “복수는 너의 것? 너의 끝!”이라고 속삭인다. 주변 사람들도 걱정한다. “복수하면 너만 망가진다”, “잊어라.” 저항, 정의, 복수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를 설명하지 못하면서, 복수는 무조건 나쁘다는 설교는 부정의하다.

영화 <여교사>의 주제는 인간으로서 마지노선을 자각한 흙수저의 승리, 상식적 권선징악이다. 불가능과 좌절을 처절히 깨달을 수밖에 없는 환경, 그것을 자원 삼아 인구의 절대 다수인 흙수저들은 선(善)으로 전진할 가능성이 있다. 금수저의 가장 큰 약점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가 아니다. 무지다. 흙수저가 이 사실을 간파한다면, 무지한 그들을 이길 수 있다.

흙수저와 금수저의 갈등은 젊은이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금수저는 오히려 위태롭다. 그들은 부모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금수저는 부모의 자원이지 그들의 것이 아니다. 수저 논쟁은 상층 ‘부모’와 하층 ‘자녀’의 갈등으로 세대와 계급 모습이 복합되어 있다. 부모 세대에서는 결판이 났을지도 모르지만, 자녀 세대에서는 계급도 세습되지만 동시에 앎의 위치성도 승계된다. 흙수저의 유일한 자산은 한계선 자각에서 오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이고, 금수저의 운명은 무지다.

이것은 계급투쟁이 일방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황과 전선을 아는 것. 상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 자의 대결이라면 누구에게 승산이 있겠는가?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정희진 여성학 강사

'일반 칼럼 > 정희진의 낯선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페이스북 시대의 얼굴  (0) 2017.03.20
한국 남성의 더러운 잠  (0) 2017.02.20
금수저의 어려움  (0) 2017.01.16
마음 둘 곳  (0) 2016.12.26
거짓말도 제대로 못하는 대통령  (0) 2016.12.05
트럼프, 캐릭터의 승리  (0) 2016.11.1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