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꿈에 집이 나온다. 옆에는 초등학교가 있고 뒤에는 논이 펼쳐진 층 낮은 아파트. 15년을 조금 안 되게 살았다. 떠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꿈만 꿨다 하면 그 집이다. 그 후로 3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다녔다. 다니던 학교가 멀어서, 가족이 서울에 살아야 해서, 그리고 계약이 끝나서. 지금 가족과 함께 사는 집도 1년 뒤면 계약이 끝난다. 점점 밀려나는 기분이다. 1년 뒤면 또다른 주소지를 갖게 되겠지. 이사 기한이 가까워질수록 독립에 대한 욕구도 커진다. 사실 턱도 없다. 내가 가진 돈의 4배는 있어야 서울에 5평짜리 방 하나를 빌릴 수 있다. 온갖 부동산 애플리케이션, 인터넷 카페를 다 봐도 결과는 같다. 그래서 나에게 집이란 뜬구름이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고개를 들면 다닥다닥 붙은 주택용..
심사숙고하다를 뜻하는 영어 단어 ‘contemplate’는 사원에서 파생되었다. 기도 공간을 뜻하는 temple에 각각 접두사와 접미사가 더해진 이 단어는 ‘곰곰이 생각하다’ ‘사물을 반성하다’ ‘심사숙고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신중함을 넘어서 진중함을 담은 생각을 일컫는다. 즉 눈앞에 펼쳐진 현상의 근본을 고민하는 태도, 사물 이면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자세에 어울리는 단어다. 바쁜 현실을 살아내던 중 갑자기 닥쳐온 ‘현타’에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딘가” “나는 무얼 위해 존재하는가” 등을 질문한다는 것이 곧 삶의 책임을 다하는 심사숙고다. 로마제국의 중흥 시대를 통치했던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근본적 수준의 자연 질서를 심사숙고하는 것을 인간이 해야 할 일로 중요히 여겼다. 오늘날 삶의 배신..
저녁시간, 배민앱과 오토바이 시동을 켰다. 5분이 지나도 콜을 주지 않자 상점이 많은 곳으로 움직였다. 3㎞를 달려도 콜을 주지 않았다. ‘콜사’다. 배달이 없을 때 콜이 사망했다며 부르는 은어다. 단체대화방에는 영정에 ‘콜’을 합성한 사진이 올라왔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만 장송곡처럼 울린다. 곡소리도 비용이 들어 기름을 더 먹기 전에 재빨리 시동을 껐다. 해고다. 취업을 위해 쿠팡이츠 앱을 켰다. 콜을 주긴 주는데 2㎞ 넘는 거리의 단건 배송을 3000원에 갔다 오라 한다. 기름값도 안 나오는 아스팔트 농사 따위 엎어버리고 싶지만 이 시기를 견뎌야 여름이 온다. 기업이 라이더를 직접 고용했다면 회사가 견뎌야 할 고통이다. 주문이 줄어드니 넘치는 인력을 정리해야 하는데 퇴직금이나 해고예고수당을 부담해야 ..
얼마 전 번역자 친구와 어떤 시를 같이 읽었다. 내가 말했다. 이 시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은 게 의심스럽지 않아? 뭔가가 진짜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남발하지는 못할 것 같아. 성실한 시인이라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대신 다른 표현을 찾았겠지. 친구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아니라고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 어떤 소설을 옮기는데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거슬릴 만큼 많이 쓰이는데 그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휘감겨 고민을 너무 많이 한 흔적이고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정말 소설이 아름답게 되었더라는 것이다. ‘훌륭한 문학은 아름답다고 쓰는 대신 아름다움을 보여줘야 한다’ 운운하는 논리는 고지식한 비평가들의 경직된 통념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인의 기막힌 ..
코로나19 팬데믹이 서서히 마무리되는 듯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비롯해 각종 제한이 단계별로 풀리고 있으며, 확진자 숫자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물론 이것이 실제 회복인지, 아니면 코로나19 현상이 일상적으로 변해가면서 무덤덤해지는 것인지는 조심스럽게 살펴봐야 하겠지만 향후 1년, 어쩌면 그보다도 좀 더 빠른 시기 안에 우리는 잃어버렸던 일상을 되찾을지 모르겠다.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요 몇 년 간은 ‘팬데믹’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서사 같다. 소설 작법서 중 란 책이 있다. 이 책의 1권은 인데, 소설의 구조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주인공은 이 일상을 깨뜨릴 만한 강력하고 과잉된 사건을 조우한다. 주인공은 다시금 일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을 저지하려는 무언가와 ..
또 ‘자녀 입시 비리 의혹’이라는 단어가 연일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 중이다.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는 지명부터 논란을 불렀다. 의료인이라는 경력 말고는 복지와 관련한 이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윤석열 당선인의 40년 지기라는 별칭이 먼저 떠올랐으니 전문성이 의심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장관으로서는 좀 부적절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 대세였다면, 자녀 관련 뉴스가 뜬 후론 “정말 낙마할지도”라는 반응이 더 많다. 지난 일요일 후보자 측에서 해명 기자회견까지 진행한 것을 보면 거센 반응이 있던 게 맞는 것 같다. 과거 장관 후보자 뉴스에 단골로 등장했던 단어를 떠올려 본다. 다운계약서, 논문 표절, 위장 전입. 제도를 빠져나가기 위해 ‘꼼수’를 쓰는 행위들이다. 결국 모두 ..
3월30일, 아마도 손님의 휴대폰 화면 속에서는 열심히 달려가던 귀여운 배달 라이더 캐릭터가 갑자기 멈췄을 거다. 손님이 배달을 시키고 실시간으로 배달 라이더를 확인했다면, 배달노동자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쿠팡이츠에 항의 전화를 했을 수도 있다. 회사에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은 라이더는 트럭에 치여 도로 위에서 사망했다. 화면 속 배달노동자는 영정으로 장례식장 단상에 놓여 있었다. 그제야 배달노동자의 이야기가 하나둘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이 둘을 홀로 키우기 위해 하루 8만보씩 배달을 하다 그게 너무 힘들어 전기 자전거로 배달을 시작했다. 이름도 이야기도 없이 죽은 배달노동자들은 더 많다. 배달산업은 노동자의 생명을 먹으며 계속해서 성장하고, 도로는 전쟁터로 변했다. 전사자는 장례식장으로 살아남은 ..
한 소설가가 카페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제 소설에는 ‘한 방’이 없다고 하잖아요.” 비판을 의식해 자기 소설을 방어하려는 모양이다. 그래, 결정적인 한 장면, 에피파니, 와우 포인트가 없으면 소설 쓰는 능력이 부족한 것처럼 여겨지곤 하지.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한 방’일 때가 많으니까. 그런데 소설가는 일부러 그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한다. “소설에 쓴 모든 문장이 그 ‘한 방’을 위해 씌어진 것 같잖아요. (…) 모든 자잘함을 지우며 홀로 우뚝 선 한순간을 지지하는 것에 찜찜함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유난스러워보이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찬양하고 드높이기 위해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것. 한 부분만 돋보이..
- Total
- 6,125,957
- Today
- 376
- Yesterday
- 801
- 국정농단
- 정유라
- 트럼프
- 청와대
- 양승태 전 대법원장
- 미세먼지
- 사법부
- 김기춘
- 촛불집회
- 북핵
- 세월호
- 교육부
- 문재인 정부
- 우병우
- 북한
- 황교안
- 블랙리스트
- 탄핵
- 박근혜
- 새누리당
- 헌법재판소
- 최순실
- 성폭력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 검찰
- 자유한국당
- 촛불
- 문재인 대통령
- 박정희
- 문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