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가 서울 중구 남대문로 일대에서 운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오는 11일 타다 서비스가 종료된다. 이재웅씨는 자신이 명명한 타다금지법이 통과되기 직전, 페이스북에 ‘1만명의 드라이버는 갈 곳이 없다’라고 썼다. 법이 통과되자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일자리를 잃은 드라이버들에게 사과하라고 호통쳤다.  

보통 1만2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장님이 폐업을 하면,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것은 물론 대표가 사죄한다. 이재웅씨는 혁신적으로 국회와 국가 탓을 했다. 더 황당한 것은 통보 방식이다. 과거에는 문자해고가 문제가 됐는데, 오늘날 혁신가들은 페이스북으로 폐업과 해고 통보를 한다. 대표의 페친이 아니라면, 회사가 망했는지도 알기 힘들다.  

이쯤 되면 경영상 위기를 핑계로 정리해고를 하는 대기업이 착하게 보인다. 전통적 기업들은 희망퇴직 신청을 받아 퇴직금이라도 쥐여주고 내보낸다. 게다가 노동법은 기업이 정리해고를 하려면 50일 전에 근로자 대표에게 통보하고 협의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타다금지법이라는 말도 일방적 주장이다. 여객운송사업법은 빌린 차로 돈 벌지 말라고 못 박아 놓았다. 다만, 가족단위로 놀러 가면 택시를 이용하기 불편하기 때문에 11~15인승 승합차는 예외로 했다. 타다는 이 빈틈을 근거로 11인승 카니발과 운전기사를 빌려주면서 1~2명의 손님을 태우는 비효율적인 콜택시를 탄생시켰다. 택시는 면허수량을 제한받지만 렌터카는 규제가 없다. 렌터카로 콜택시를 하는 걸 허용하면 도로는 카니발로 점령될 것이다. 꼼수로 시작한 사업이, 언제든지 좌초될 수 있다는 것을 대표가 몰랐을 리 없다. 몰랐다면 무능한 거고, 알았다면 투자자들과 1만2000 드라이버들을 기망한 것이다. 국가는 기여금을 내고 사업을 지속해보자고 했지만, 이재웅씨는 여기서 혁신을 멈춘다라는 엉뚱한 말을 하고는 회사를 나와 버렸다. 

사업가가 위험(risk)을 무릅쓰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문제는 실패에 대한 책임이다. 타다가 무책임하게 도망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타다 드라이버들과 근로계약이 아닌 프리랜서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사와 타다 사이에 중간관리업체를 둬 책임을 피했다. 용역계약과 간접고용이 합쳐진 최악의 형태다. 노동법을 지킬 필요가 없으니 사장은 일하는 사람을 맘대로 쓰고 버릴 수 있다. 그런데 승객이 사랑한 타다의 혁신은 프리랜서로 불리는 드라이버들이 근로자처럼 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사들이 출퇴근을 정확하게 하고, 손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며, 승차 거부를 하지 않은 것은 타다의 업무지시를 준수했기 때문이다. 여기엔 고정급 1만원의 비밀이 있다. 타다가 난폭운전을 하지 않고, 택시는 가지 않는 좁은 골목길을 들어간 이유도 많은 승객을 정신없이 태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타다 기사들이 받은 시간당 1만원은 최저임금 위반이다. 이들이 근로자였다면, 주휴수당, 연장, 야간, 휴일, 연차 수당과 퇴직금 등을 받을 수 있다. 타다 기사들도 알고 있었다. 지난 3월25일 박재욱 대표를 만나기 위해 VCNC를 찾은 타다비상대책위 소속 드라이버는 ‘최저임금 위반이라는 걸 알았지만, 타다와 함께하고 싶어서 참고 일했다’고 했다. 그들이 바라는 건, 대표들이 페이스북 대신 자신들과 대화하는 것이었다.

스타트업이 주식시장 상장, 매각, 합병 등을 통해 기업 가치를 실현시키는 것을 엑시트라 부른다. 배달의민족이 딜리버리히어로에 매각되면서 5조원짜리 엑시트를 보여줬다면, 타다는 성공적인 폐업의 엑시트를 보여준다. 만약 타다가 1만2000명의 드라이버에 대한 책임은커녕 진지한 대화 한 번 없이 사업을 종료하고 우리 사회가 이를 방치한다면, ‘잘되면 배민이고 못 돼도 타다’라는 신념을 가진 창업가들이 양산될 것이다. 이것이 스타트업이 말하는 혁신의 슬로건이 아니길 바란다. 사람은 필요할 때 빌려 쓰고, 필요 없으면 버려도 되는 렌터카가 아니다.

<박정훈 |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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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 vote counts.” 영어권 국가에서 투표 참여를 독려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모든 투표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반드시 투표에 참여하자는 독려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모든 투표는 중요하므로 “나 하나쯤이야” 하지 말라는 얘기다.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표현을 들자면 ‘투표는 신성한 권리’라는 말이 있겠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여지없이 들려오는 말들이다.

그런데 ‘중요하다’는 의미의 ‘count’에는 ‘계산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두 번째 의미로 말을 약간 변형하면, ‘모든 투표는 계산된다’이다. 이렇게 말할 때 ‘투표’는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데이터다. 당선자의 득표수와 투표율뿐만 아니라 낙선자 득표수와 무효표 수, 기권율도 기록에 남는다. 이러한 데이터에 해석이 더해지면 여론이 된다. ‘모든 투표는 중요하다’는 믿음이 만드는 것이 당선자라면, ‘모든 투표는 계산된다’는 생각은 선거가 끝나고 난 뒤에도 사회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론을 만든다.

모든 투표가 계산되므로 사표(死票)도 아쉬울 게 없다. 낙선자가 기대보다 많은 표를 받았다면 하나의 정치적 신호가 된다. 2014년 지방선거가 좋은 예시다. 당시 새누리당의 철옹성처럼 여겨지던 대구시장 선거에서 김부겸 후보가 낙선했지만 기대 이상의 표를 얻었다. 이는 대구 지역 유권자들에게 ‘민주당 계열도 가능성이 있다’는 신호가 됐고, 그 결과 2016년 총선에서 김부겸 후보가 수성구갑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사표는 한 사회를 뒤흔들기도 한다. 2016년 미국 대선 민주당 예비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버니 샌더스가 그랬다. 자본주의의 대장국가인 미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나온 그가 그토록 돌풍을 일으킬 거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샌더스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미국 사회에 사회주의가 유행처럼 번졌다. 그는 스스로 깃발이 되어 사람들을 모아냈고, 미국의 청년들은 비로소 같은 정치적 열망을 공유하는 동료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본선 진출도 못한 정치인이 만들어낸 결과다.

심지어 무효표와 기권율도 정치적 신호가 될 수 있다. 어떤 선거에서 눈에 띄게 무효표가 나온다면 이는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 이유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올 것이다. 기권율도 마찬가지다. 직전 선거 대비 기권율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면 역시 분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보통 유권자들의 실망 내지 무관심으로 해석되겠지만, 선거를 앞두고 어떤 이슈가 있었는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 2011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추진한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투표율 33.3%를 넘기지 못해 무산됐을 때 가시적인 투표 보이콧 운동이 전개되어 해석의 틀을 제공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이슈를 만드는 것이 선거만큼이나 중요하다. 선거는 어떤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을 구체적인 숫자로 환산함으로써 공론을 만드는 민주주의의 한 과정이다. 그 누가 뽑힌들 해석되지 못한다면 선거는 단지 사람을 교체하는 행정적 절차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얘기다. 무기력한 투표는 확고한 의지가 담긴 기권보다 무의미하다. 그러니 사표심리에 지배받지 말고 당당하게 투표하자. 뽑고 싶은 사람이 없는데도 꼭 투표해야 한다고 갈등하지 말자. 선거에 참여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번 선거가 ‘촛불정신’의 지속을 결정하는 선거라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촛불정신’이야말로 선거가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 사건이지 않았던가.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조차 탄핵소추안에 동참하게 만든 힘은 선거가 아니라 거대한 운동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무엇이 두렵나. 선거 다음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 공화국의 시민이다. 유권자로서 우리는 단 한 표를 행사할 뿐이지만 시민으로서 우리는 더 많은 권리를 지닌다. 정치와 선거는 동의어가 아니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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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거울을 잘 보지 않던 아이가 문득 몹시 골똘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서는 날이 있다. 10대들의 교실에서 글쓰기 교사로 일하다 보면 그런 순간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자기 모습이 어떻게 보이든 별 관심 없던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이는 이제 자의식의 축복과 저주 속에서 한층 더 복잡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 눈에 비친 내 모습과 남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신경 쓰며, 내가 바라는 나와 실제 나 사이의 괴리를 수없이 느끼며 자라날 것이다. 누구도 그 변화를 늦추거나 멈출 수 없다. 

글쓰기 교사인 나는 아이가 자기 몸을 최대한 덜 미워하기를 혹은 아무래도 좋다고 느끼기를 소망하며 수업을 진행한다. 거울을 유심히 보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자주 건네는 건 몸의 느낌에 관한 질문이다. 지난주의 키와 이번 주의 키가 다른 그들은 최근의 자기 모습과 감각을 기억하며 글을 쓴다. 

열네 살 김시후는 이렇게 썼다. ‘그림을 그리다가 화장실에 가서 불을 켰는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너무 낯설어서 흠칫했다. 3초 정도 멈춰 있다가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라고 생각했다. 요즘엔 몸이 뻐근하고 뭔가 척추뼈가 지그재그로 흩어진 기분이 든다.’ 

자기 신체가 새삼스러운 건 김시후뿐만이 아니다. 열다섯 살 양휘모는 앱 카메라 속 자기 얼굴을 이렇게 증언한다. ‘어느 날 페이스북을 보다가 ‘트루 미러’라는 앱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신의 진짜 얼굴! 아직도 모르십니까?’라고 써있길래 호기심에 바로 깔았다. 앱에 들어가니 좌우반전이 된 카메라가 켜졌고 ‘이것이 다른 사람이 보는 당신입니다’라고 써 있었다. 트루 미러 속 내 얼굴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좌우가 바뀌었을 뿐인데 훨씬 못생겼고 마치 다른 사람과 영상통화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좌우가 뒤바뀐 내 얼굴도 낯설지만 녹음해서 다시 듣는 내 목소리도 낯설기 마련이다. 열두 살의 김지온은 이렇게 썼다. ‘내 목소리가 녹음기로 들어가면 조금 이상해진다. 막막한 느낌이 든다. 녹음기에서 내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별로 듣기가 싫다. 내가 아닌 것 같다.’

한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내 몸에서 나올 때도 있다. 열세 살 기세화는 이렇게 썼다. ‘수학 시간에 다들 조용히 문제를 풀고 있는데 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애들이 모두 날 쳐다보며 웃었다. 내 옆자리에 있던 지윤이가 왜 소리를 질렀냐고 물었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서 그냥 책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기세화의 당황은 원고지에서도 역력하다. 그는 궁금하다. ‘내가 왜 갑자기 소리를 질렀지?’

이들의 글을 보며 나는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 <몸의 일기>를 떠올린다. 한 남자가 10대부터 80대까지 자기 몸의 감각을 기록하는 이야기다. 이 책의 문장은 신체의 성장과 노화와 고통과 쾌감에 특별히 집중하며 쓰여졌다. 소설 속에서 하루 종일 거울 속 자신을 남처럼 노려 보던 유년의 아이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넌 미친 게 아니야, 넌 네 느낌과 놀고 있는 거야. 넌 네 느낌에게 질문을 던지지. 아마 끝없이 계속 물을 거다. 어른이 돼서도, 아주 늙어서까지도. 잘 기억해두렴. 우린 평생 동안 우리의 감각을 믿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단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평생 길고 긴 몸의 일기를 쓰게 된다. 쓰는 동안 그는 어색한 친구와 차차 친해지듯이 스스로에게 적응해간다. 

가장 어려운 우정은 자기 자신과의 우정일지도 모른다. 몸의 감각에 대한 글쓰기는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노력 중 하나다. 다니엘 페나크는 그 일기가 상상력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몸의 온갖 신호로부터 상상력을 보호한다고 말한다. 

자고 일어나면 몸도 마음도 달라져 있어서 당황스러운 10대들과 함께 나는 몸의 일기를 쓴다. 때때로 몸의 일기가 마음의 일기보다 더 확실하고 부드럽게 몸과 마음을 연동시키기 때문이다.

<이슬아‘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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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 약들이랑 있으면 하루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는데… 저것들이 없으면 내가 아파서 잘 수가 없다고….”     

최은미의 장편소설 <아홉 번째 파도>(문학동네, 2017)에서 보건소 약무주사보인 송인화는 방문 복약 상담을 위해 독거노인의 방을 찾아다닌다. 방에 홀로 있던 작고 마른 노인이 내놓은 약상자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과 부작용이 심해서 판매 금지된 치료제가 수두룩하다. 

아픈 노인은 자신의 유일한 위안인 약을 빼앗길까봐 송인화에 대한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는다. 혈압약의 경우에는 꼭 하루에 한 번만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냐는 송인화의 말에 노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거 몰라. 그냥 아플 때마다 먹어.”

<아홉 번째 파도>는 동해안의 ‘척주’라는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핵발전소 유치, 석회광산과 시멘트회사, ‘사이비’ 종교집단 약왕성도회 사이의 역학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이 요즘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이유는 물론 코로나19와 신천지 때문이다. 마약성 진통제인 멕소닐을 20년 가까이 밀수하면서 몸이 아픈 지역 주민들을 유혹하는 약왕성도회는 고통받는 취약층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조직적인 착취를 일삼는 신천지를 떠올리게 한다. 유통기한도 부작용도 개의치 않고 아플 때면 아무 때나 약을 먹는다는 노인의 목소리는 손쉬운 구원에 의존하는 신천지 교인들의 상황과 겹치며 섬뜩하게 들린다.      

그런데 고통을 없애주고 안락을 보장한다는 달콤한 약의 유혹은 ‘사이비’ 종교의 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코로나19 사태는 인재(人災)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최초로 발생한 후에 각국의 방역체계를 뚫고 감염자가 확산되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과정에서 온갖 혐오와 차별의 기제가 작동, 양산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코로나19 사태가 유발하는 공포의 핵심은 호흡기로 곧장 침투하는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가 통제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비가시적인 형태로 기생하는 생명체라는 점에서 정확한 메커니즘을 예측하거나 파악하기 어렵다는 사정도 중요하다.

문제는 ‘통제 불가능한 위험에 대한 공포’가 ‘통제 가능한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쉽사리 전환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코로나19 사태 이후 서구권에서 아시아인들이 극심한 인종차별을 당하고, 확진자의 감염경로와 사적 정보가 공개되면서 특정한 지역, 세대, 성향을 겨냥한 조롱이 집단적인 놀이로 전화되는 장면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실제 확진 여부와 무관하게 바이러스의 이미지는 더럽고 취약하고 ‘비정상’적이라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혐오와 엉겨 붙는다. 

약자에 대한 혐오는 재난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잠재우는 일시적인 효능감을 제공한다.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 직접적인 힘을 가할 수 있는 약자에게 귀속시키면서 불안감을 해소하고 정서적 안정감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혐오를 복용하면서 고통을 마취하는 셈이다. 고통을 없애주겠다면서 극적인 효과를 약속하는 구원의 진통제와 다르지 않다.

약자 혐오를 통해 통제 불가능한 문제에 대한 일시적인 효능감을 충족할 때, 근본적인 해결책은 가려지고 상황은 악화된다. 약자에 대한 제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은 손쉽게 권력과 유착되고 처방에 대한 의존을 심화하기도 한다. 

<아홉 번째 파도>에서 약왕성도회가 밀수하여 신도들에게 나누어준 진통제는 결국 치명적인 부작용을 유발하며 약에 길들여진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을 길들이는 가장 강력한 진통제. 그것은 약이 아니라 독이다. 우리는 혐오를 “그냥 아플 때마다 먹”을 수는 없다.

<인아영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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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두 명의 대학생 동생이 있다. 한 명은 집에서 먼 대학에 다니느라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나머지 한 명은 학교에서 운영하는 고시준비반에 주말에도 간다. 부모님도 모두 출근하고 나면, 5명이 사는 집의 적막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것은 보통 나뿐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럴 새가 없다. 코로나19 때문이다. 대학교 개강이 2주나 연기되고, 학교 건물이 폐쇄되며 동생들은 갈 곳을 잃었다.

학생이라는 신분이 학교에서 교육받는 것으로 부여된다면, 동생들은 지난 2주 본업을 잃어버렸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학생의 신분은 그렇게 쉽게 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등교는 하지 않지만, 이미 등록금은 냈으니까. 수업도 들을 수 없고, 학교 건물도 사용할 수 없지만, 학생이 되기 위한 비용은 지불했으니 아직 학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코로나19의 확산 방지를 위해 교육부는 대학에 2주 개강 연기를 권고했고 대학들은 일제히 그 권고에 따랐다. 예정대로라면 이번 주부터 나는 다시 우리 집의 적막을 즐길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어렵게 됐다. 개강 후 2주는 온라인 강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주부터 대학생들은 온라인으로 개강을 맞는다. 실질적으로 ‘등교’를 하는 개강은 3월 말, 4월이나 되어야 하는 셈이다.

온라인 강의에 대한 학생사회의 우려는 생각보다 크다. 대학생 단체인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가 진행한 설문에서 응답자 1만2613명 중 62.5%가 ‘학사일정 조정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답했다. 피해 내용으로 ‘부실한 온라인 수업’과 ‘실험실습이 필요한 강의에 대한 대체 미비’를 꼽은 학생이 가장 많았다. 등록금 반환이 필요하다고 답한 학생은 80%가 넘었다.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는 청원도 등장했다. 등록 2주 만에 벌써 7만6000명이 청원에 동의했다.

대학은 난색을 보이는 모양이지만, 사실 대학이 학생을 대해온 태도로 봤을 때 이러한 요구는 정당하다. 대학은 지금껏 소비자부담주의를 고수해왔다. 대학 교육은 대학이 제공하는 하나의 서비스로, 이 서비스를 받으려면 학생, 다시 말해 ‘소비자’는 대학이 요구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거다. 그렇다면 학생은 소비자로서, 질 낮은 상품에 분노하며 그 비용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교육부 장관은 이 요구에 “총장이 결정할 사안”이라고 잘라 말했다. 다시 학생이란 무엇인가 생각한다. 교육받을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사람이 학생이라면, 그 교육받을 권리는 누가 부여하나? 교육권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라던데, 우리 사회에서 교육받을 권리는 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돈과 교환해야만 얻을 수 있다. ‘등록금’이 있어야만 교육받을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다.

지난 정부가 반값등록금을 실현했다지만 2019년 기준 평균 사립대 등록금은 700만원대이며, 국가장학금 수혜율은 ‘신청’한 사람의 42%밖에 되지 않는다. 여전히 4개월에 350만원대의 등록금을 내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청년이 이렇게나 많다. 한 해 평균 대학 등록금이 700만원을 웃돌고, 대학 등록금을 구하지 못해 모녀가 동반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교육부는 언제나 시장논리로 대학사회를 바라볼 뿐이다. 교육을 받고 싶다면 빚을 내서 받으라는 학자금 대출 제도와, 학생에게 직접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업을 키우듯 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며 반값등록금을 실현하려는 국가장학금 제도가 그 시선을 그대로 담고 있다.

나는 내가 받은 대학 교육에 감사한다. 대학에서의 4년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됐다. 한 명의 시민으로서, 여성으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기 위한 투쟁을 알려준 곳이 바로 학교다. 그래서 교육은 공공재여야만 한다. 더는 학교와 학생을 서비스 공급자와 소비자로 보지 말자. 국가와 대학, 대학과 학생의 관계를 다시 정의하자.

<조희원 청년참여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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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배우 진 티어니가 떠오른다. 1943년 임신 중이던 티어니는 풍진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그 후유증에 첫아이가 여러 중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감염경로는 우연히 다시 만난 팬을 통해 밝혀졌다. 과거 본인이 풍진에 걸렸지만 티어니를 만나기 위해 격리소를 빠져 나왔다며 애정을 과시한 것이다. 군부대에 위문하러 온 ‘가장 좋아하는 배우’에게 바짝 붙어 대화하고 신체를 접촉하며 풍진 바이러스를 옮긴 것이었다. 이를 들은 티어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뒤 그는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았고, 자살을 기도한 바 있다고 전해진다.

좋아하는 배우의 삶을 고통의 수렁으로 밀어넣은 팬. 심지어 본인의 병을 알았고, 의사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무시하고 접촉했다. 이 이야기를 접하고 너무 화가 났다. 나는 다짐했다. 전염력 높은 병에 걸리면 자가격리를 철저히 하여, 타인의 안녕과 공공의 안전을 해치지 않겠다고.

하지만 보균자인지 본인도 몰라 전파자가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보지 못했다. 코로나19에 대한 정보를 얻을수록 이와 관련된 걱정이 커졌다. 사스나 메르스는 잠복기에 2차 전파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됐지만, 코로나19는 다르다. 잠복기간 중에도 전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호흡기 증상, 발열, 근육통 등이 없었는데 코로나19 양성으로 확진된 사례도 발견됐다. 두려워졌다. 만약 내가 어떤 우연한 접촉으로 병에 걸렸는데, 증상이 없어 스스로 병자인지 모른 채 돌아다녀 누군가 피해를 입는다면?

확진자가 되면 나이, 성별, 동선 등의 정보가 모두에게 공개된다는 사실도 두려움을 자극한다. 동선이 공개된 확진자의 일상을 보고 과한 (심지어 감염병과 관계없는) 해석이나 평가를 얹고, 어떤 장소 방문에 대해 비웃거나, 음험하게 추측하며 희롱하는 등의 일이 왕왕 벌어졌다. 인터넷에 접속한 사람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었다. 이것을 당사자가 본다면, 가뜩이나 아픈 사람이 더욱 아프겠다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동네 확진자의 집주소, 얼굴 사진 등을 공유한 온라인 커뮤니티도 있었다.

물론 당국에서는 그러라고 공개한 게 아니다. 시민들에게 정보를 투명하고 신속하게 공개하고, 시민들은 방역에 협조하여 함께 병의 확산을 막자는 취지였다. 이에 관해 한국이 잘 대처했다는 유수 외신과 타국 의료계의 평가도 있다. 다만 기존에 시행된 바 있는 체계가 아니다 보니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사회적 부작용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나이와 성별을 제하고 동선만 공개하자는 의견, 확진자가 늘어남에 따라 특정인의 동선을 일일이 확인하기도 힘드니 장소와 시간을 중심으로 취합된 정보를 공지하자는 논의가 지금이라도 반영되길 기대한다.

과도한 비과학적 우려로 자영업자의 피해를 가중시키는 현상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해당 식당에서 확진자와 겸상했을 시 전염 가능성이 있는데, 동선 발표 뒤 ‘지금은’ 안전한 식당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편견을 가지는 것이다. 방역소독까지 마친 뒤에도.

모두들 힘들고, 그만큼 예민해져 있다. 산업이 위축돼 휴직하는 직장인,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아 힘든 시기를 버티는 비정규직·프리랜서, 임대료 때문에 막막한 자영업자 등, 이 힘든 시기가 빨리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데 한마음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두려움도 커지는 것 같다. 혹시라도 내가 사태 진화에 걸림돌이 되면,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상황이 오면 어쩌나. 특히 평소 마스크 잘 착용하고 자주 손 씻으며 철저히 바이러스의 틈입을 막았는데, 무증상 전파자와 겸상 한 번 했다가 덜컥 감염되어 과하게 비난받으면 억울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다른 환자들도 너무 비난하지 않기로 한다.

그나저나 요즘 겸상이 그립다. 정을 나누는 일은 왜 이리 감염에 취약한 것인지. ‘죄인’ 될 걱정 없이 마음껏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봄날을 고대하며 오늘도 혼밥을 뜬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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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은 주주총회가 열리는 시즌이다. 주주총회에는 다양한 안건이 오르는데 그중 하나가 기업의 이사·감사를 선임하는 것이다. 

안건을 통해 여러 후보자들을 보게 된다. 교수, 법조인, 퇴직관료의 지분이 가장 높지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 한 회사에 충성한 사람, 좋은 친구를 두어 자리를 얻는 사람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게 된다. 그중 한 사외이사 후보자의 모습은 코로나19 사태로 혼란한 우리 사회의 모습과 겹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지면을 빌려 이 후보자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처음 이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국회의원까지 하셨기 때문이다. 선거가 얼마 안 남은 시점에 사외이사 후보로 올라온 것을 보니 불출마 대열에 참여하신 분이라 생각했다. 양심 있는 정치인이니 사외이사 후보로 손색이 없겠다는 기대로 후보 명단을 검색해봤다. 나의 기대와 정반대로 예비후보 등록까지 하셨다. 사외이사의 임기는 3월 말에 시작되고, 선거는 4월이니 나라면 선거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사외이사를 거절할 것 같은데, 역시 뛰어나신 분은 다르다. 이렇게 뛰어난 데다 열심히 사시는 분은 대체 누구인가 싶어 인물 정보를 더 탐색해 보았다.

이분을 보니 ‘노오력’이 부족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관료를 퇴임하자마자 그 좋다는 공기업 사장이 되셨는데 그 자리를 박차고 18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시더니, 낙선 후 다음해에 C기업의 사외이사가 되셨다. 하지만 이분은 기업의 경영을 하면서도 국가 경영을 잊지 않으셨나보다. 사외이사 임기 중에 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셨다. 이력을 보니 선거 중에도 사외이사는 사퇴하지 않으셨다. 낙선에 대비해 보험용으로 사외이사를 남겨놨다고 생각했는데, 이분은 당선된 이후에도 의원 임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사외이사직을 수행하셨다. 역시 봉황의 뜻을 나 같은 참새는 알 수 없다.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되는 그 순간까지도 회사를 위해 충실히 이사의 업무를 수행하려던 분을 내가 오해했다.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렇게 4년의 임기를 마치고 이분은 다시 야인이 되셨다. 하지만 낭비를 모르시는 이분은 그 해에 법무법인의 고문이 되셨고, 또다시 S사의 사외이사직을 맡으셨다. 남들은 하나도 하기 어려운 자리인데도 동시에 두 자리를 하셨다. 그러면서 사외이사 임기 중에 또다시 20대 국회의원 재·보선에 출마하셨다. 물론 사외이사는 사퇴하지 않으셨다. 낙선을 하고도 계속 사외이사를 하고 계신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21대 국회의원 선거와 사외이사 연임을 동시에 하려 하신다. 아마 이번에도 당선된다면 임기 시작 전까지 기업을 위해 노력하실 것 같다. 국가와 기업을 위하는 이분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지만, 건강이 걱정돼서라도 한 자리는 내려놓으셨으면 좋겠다.

주위를 둘러보면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지만, 어딘가에는 여러 자리를 겸하는 분들이 계신다. 그것도 좋은 자리로만 말이다. 서민들이 약국을 돌며 몇 장 안되는 마스크를 사재기하는 것은 비난받는데, 일자리가 부족한 사회에서 높은 분들의 일자리 사재기는 괜찮은지 모르겠다. 능력이 있어 겸직을 하는 건 괜찮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매크로를 돌리는 것도 능력이고 약국을 순회하는 것도 노력이다. 사외이사는 지배주주나 경영진을 견제하여 기업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자리이지 정치인이 사재기하라고 둔 자리가 아니다. 선거를 하며 기업에서 급여를 받던 분이, 균형 잡힌 입법을 하고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시민들은 불안한 와중에 성금을 내고 마스크를 기부하기도 한다. 이런 시민들을 대표할 사람이라면 선거 전에 사외이사를 제안받아도 스스로 거절할 수 있는 사리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사외이사 후보자만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한다.

<이총희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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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지상파 방송국과 최저임금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약속장소에는 청년 한명이 무거운 장비를 들고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가 꺼낸 카메라엔 방송국 마크가 찍혀있지 않았다. 외주사 프리랜서 직원이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로 노동자들이 받을 피해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걸 찍는 방송노동자는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장님이었다. 

인터뷰는 이야기가 되어, 방송국 비정규직 문제로 이어졌다. 라이더유니온을 시작한 이후에는 특고신분의 라이더노동환경 실태에 대해 찍고 싶어 하는 방송국 PD와 카메라맨들을 자주 만났다. 하루는 촬영이 밤 10시가 넘어가 슬슬 짜증이 났다. “지금부터 야간출연료 주셔야 하는 거 아시죠?”라고 농담을 던졌더니 “우리는 야간수당 못 받는 프리랜서예요”라고 받았다. 그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돌려 자신을 찍으면 거기에 바로 일 시킬 땐 직원, 문제 생기면 사장님인 프리랜서의 애환이 있었다.

퇴근시간 없는 NGO 활동가의 생활을 촬영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그들에게 미안했다가, 나중엔 내가 아니라 당신들을 찍어야 한다고 능청을 떨었다. PD의 잠긴 눈, 카메라맨의 손목보호대, 막내작가의 갈라진 목소리, 차 안에서 잠든 막내스태프의 돌돌 말린 등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부터 아픈 곳이 있으면 매일매일 기록하세요. 나중에 산재 상담해드릴게요.” “노조 만들고 싶으면 연락주세요. 컨설팅해드릴게요.” “나도 당신들도 근로기준법 위반이네요.”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내 마음 편하자고 뱉었던 읊조림이었다. 나는 그들의 얘기를 듣고,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지만 보도하지 못했다. 그건 내 일이 아니었고, 그들의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이재학 PD가 죽었다. 청주방송국 PD였던 고인은 14년 동안 오르지 않은 임금의 인상을 요구했다. 그의 한 달 수입은 160만원이었다. 후배들인 조연출과 방송작가, 촬영스태프들의 처우는 더 열악하니 개선해 달라고 했다. 방송 만들 때 필요한 적정인원도 보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방송국 회의에서 튀어나온 그의 말은 그야말로 수습이 불가능한 ‘방송 사고’였다. 회사는 그 자리에서 일을 그만두라고 통보했다. 이재학의 건당 인생에서 건이 사라졌다. 부당해고라고 생각한 고인은 직장갑질119에 도움을 청했고,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 나섰다. 그러나 프리랜서라면 해고가 아니라 계약해지일 뿐이다.

방송국에서 그의 별명은 라꾸라꾸였다. 회사에서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숙식을 해결하며 정규직 PD의 두 배 이상의 일을 했다. 같은 방송국에서 일하다 과로로 사망한 조연출도 근로자판결을 받았다. 동료들도 형식은 프리랜서지만 회사의 업무지시를 받으며 근로자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고 증언했다. 방송국은 증언을 해준 동료 중 한명을 회유해서 진술을 번복시켰고, 노무법인에 의뢰한 근로자성 검토 자료는 숨겼다. 

법원은 방송국노동자들이 필요하면 펴고 필요 없으면 접어버려도 되는 라꾸라꾸라고 판결했다. 이재학이 만든 프로그램은 청주방송의 것이었지만,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은 방송국 사람이 아니었다. ‘억울해 미치겠다.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2020년 2월4일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기록이다.

타인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 방송노동자들의 존재가 유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엔딩크레디트. 사람들이 영화관을 나가거나, TV채널을 돌리는 찰나의 순간에 그들의 존재가 드러난다. 이제 방송이 끝날 때까지 TV를 보더라도 이재학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 그의 얼굴과 그의 주장이 엔딩크레디트가 아니라 TV화면의 한가운데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가 바랐던 ‘노동자’라는 이름이 판결문과, 수많은 비정규직 언론종사자들 앞에 붙을 수 있기를 바란다. TV는 아니지만 신문의 한쪽에 ‘언론노동자 이재학’을 새기는 이유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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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기행으로 유명한 허경영씨는 매주 토요일 대중강연을 연다. 위치는 서울 종로3가, 서울지하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주요 환승역이자 노인들의 모임터로 알려진 탑골공원이 있는 곳이다. 허씨는 2009년 7월 이후 지금까지 줄곧 이 강연회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가 이번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정당을 하나 만들었다. 이름은 국가혁명배당금당. 그가 만든 당답게 주요 공약들이 허무맹랑하다. 온갖 명목의 현금 지급 공약과 유엔본부를 판문점으로 이전하자는 공약, ‘내수경제를 위축시키는’ 김영란법을 폐지하자는 공약 등이 있다.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하는데 ‘복지국가’도 건설하겠다는 해괴한 지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다수의 공약들이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분류된 수혜대상과 수혜조건을 강조하고 있어 현혹되기 좋다는 점은 언급해둘 만하다.

이 당은 제21대 총선 예비후보 등록 기간 동안 제법 화제가 됐다. 우선 출마자 수. 3월1일 기준으로 무려 977명이 예비후보자로 등록했다. 전체 출마자의 약 40% 정도다. 그리고 전과 전력. 출마자의 30% 이상이 전과가 있다. 음주운전과 성범죄, 심지어는 살인 전과자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좀 더 찬찬히 뜯어보면 나이, 학력, 직업도 보인다. 그들 대부분이 50대 이상의 중장년이며 더러 80대 출마자도 있다. 언론 취재에 따르면 출마자 중 절반이 학력 칸을 비워뒀거나 중졸 이하라고 한다. 이들의 직업은 정말로 현실적이다. 요양보호사, 용달화물 운전자, 미화원, 건설노무자, 마트 캐셔, 백화점 아르바이트, 기계청소부, 택배기사, 페인트공이 대거 예비후보자로 나섰다.

나이나 학력, 직업만으로 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다소의 위험성을 감수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해보자. 허경영씨의 강연이 열리는 장소와 국가혁명배당금당의 선심성 공약들이 어필하는 사회적 계층, 예비후보들의 나이와 학력, 직업을 통틀어 보았을 때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부자와 빈자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 것 같은가? 청년 당사자 정치가 유효하다면 이들의 장년 당사자 정치도 유효할 것이며, 노동자 당사자 정치가 유효하다면 이들이야말로 바로 그 노동자 당사자들이다. 이들의 출마는 간단히 농담거리로 삼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국가혁명배당금당은 정상적인 정당이라기엔 문제가 많은 ‘사이비 정당’이다. 공약들은 실현 가능성을 찾기 어려우며 정치적 책임성도 찾아보기 어렵다. 1인의 사당이라는 느낌을 도무지 지울 수가 없다. 당 로고부터가 허경영씨를 형상화한 모양일 정도다. 한편으론 ‘사이비 종교’스러운 면모들도 보인다. 허경영씨는 강연에서 스스로를 ‘신인(神人)’이라 자칭하고, 지지자들에게 선거에 출마하면 ‘백궁’이라는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독려하는 식이다.

그래서 국가혁명배당금당의 ‘당사자 천 명의 예비후보 출마’라는 성과를 아프게 주목한다. 이 ‘사이비 정당’이 종로3가에서 10여년간 꾸준히 사람들을 모아오는 동안 ‘진짜 정당’들은 어디서 누구를 모아내고 있었던가. 이 ‘사이비 정당’이 요양보호사, 미화원, 백화점 아르바이트, 페인트공들과 만나길 주저하지 않는 동안 ‘진짜 정당’들은 어디서 누구와 만나고 있었던가. 이 ‘사이비 정당’이 비록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듣기에 구체적인 정책을 피부에 와닿게 제시하는 동안 ‘진짜 정당’들은 어떤 정책을 개발하고 또 알리고 있었던가. 왜 ‘진짜 정당’이 있어야 할 곳에 ‘사이비 정당’만이 있었는가.

정치학에는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치한다는 정당들은 늘 이 사실에 당황하며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정작 가난한 사람들의 삶터에서 그들과 꾸준히 만나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물어본 정치인과 정당은 얼마나 있었을까. 허경영과 천 명의 출마자들을 마주하여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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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그날 입은 옷’이라는 글감을 칠판에 적었다. 내가 혹은 누군가가 어느 날 입고 있던 옷을 기억하며 글을 써보자는 제안이었다. 

이따금씩 우리는 무엇을 입었는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을 겪는다. 그 하루는 왜 선명하게 남는가. 누구와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날의 옷차림까지 외우고 있는가. 이 주제로 모은 수십 편의 글 중에서 너무 서투른 옷차림이라 유독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스물다섯 살의 도혜가 쓴 글이다. 

아직 한 번도 알바를 해본 적 없는 아이가 있었다. 열아홉 살의 도혜였다. 도혜는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처럼 부모님께 용돈을 받으며 학교와 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그의 친구 윤이는 달랐다. 고등학생 신분으로도 이미 여러 알바를 해본 아이였다. 그들의 동네가 관광지로 뜨기 시작하여 곳곳에 알바 자리가 생겨나던 2014년 무렵이었다. 방과 후에 윤이는 다양한 식당에서 서빙 일을 했다. 자신의 용돈을 직접 벌고 전기료와 난방비도 직접 내야 하는 사정이 윤이에겐 있었다. 도혜의 반에서 그런 친구는 윤이뿐이었다. 쉬는 날이면 윤이는 자신의 가난한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여 소박한 파티를 하곤 했다. 도혜는 자신이 모르는 슬픔과 낭만을 아는 듯한 윤이의 모습을 남몰래 동경했다. 당시 윤이는 갈빗집 알바와 중국집 알바를 병행했는데 하루는 갈빗집 알바가 길어지는 바람에 중국집 알바 대타가 필요해졌다. 급하게 대타를 찾느라 난처해진 윤이에게 도혜는 용기를 내어 자신이 대신 출근하겠다고 자처했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윤이보다 어리숙한 자기 모습을 생각하다가 이내 자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도혜는 자신에게 부모가 있다는 것과 그들로부터 별 어려움 없이 용돈을 받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그런 게 부끄러운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내게 없는 것 말고 내게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경험 말이다. 염치 때문에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도혜는 가장 아끼는 보라색 맨투맨 티를 입고 윤이가 일하는 중국집 문을 열어젖혔다. 말끔하고 호감 가는 일꾼으로 보이기 위해 신경 써서 골라 입은 옷이었다. 그걸 입고 몇 시간을 일했다. 퇴근할 무렵엔 옷소매에 짜장면 소스와 짬뽕 국물이 잔뜩 튀어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의 대타로 뛰는 첫 알바 날에 가장 아끼는 티셔츠를 골라 입는 도혜의 마음을 우리는 그려볼 수 있다. 윤이 덕분에 도혜는 처음으로 자신의 ‘있음’이 부끄러워졌다. 결여된 것들을 통해 윤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일찌감치 배웠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적힌 문장에 따르면 욕망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지만 사랑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해진다. 도혜가 윤이를 좋아하다가 자신이 무엇에 서툰지 알아가게 되는 과정처럼 말이다. 어떤 사랑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기보다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끈다. 

열아홉 살의 도혜는 스스로가 미덥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 윤이의 일터에서 일한다. 이렇게 부족한 내가 너처럼 빛나는 사람의 자리를 반이라도 메꿀 수 있다면 기꺼이 시간과 몸과 마음을 쓰겠다는 응답과도 같다. 스물다섯 살 도혜의 글은 이렇게 끝난다. “새로운 일이 시작될 때마다 나는 자연스레 윤이를 떠올린다. 윤이야, 너는 다 알고 있었니. 무엇을 더 알고 있니. 이다음은 무엇이니. 이젠 보이지 않는 윤이의 뒷모습을 나는 아직도 바쁘게 쫓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나여서 그 자체로 너무 충분하고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타인의 사랑에 굳이 응답하지 않아도 평안할 것이다. 사랑은 상대에게 없는 것과 나에게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면서 시작되기도 하니까. 가장 아끼는 맨투맨 티를 입고 중국집 문을 열어젖히며 윤이에게 온몸으로 응답하는 도혜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사랑과 우정이 해내는 일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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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본법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을 때, 국회에서 청년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하자며 청년미래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청년 당사자들과 토론회를 연 적이 있다. 기회가 좋아 나도 참관했다. 결국 청년기본법은 우여곡절 끝에 올해 초 통과되었고 8월 시행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날 나는 청년기본법이 통과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절망감을 조금 느꼈다. 청년에 대한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 한 의원을 그 자리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청년은 어떻게 이 사회를 체감하는지, 어떤 제도가 필요한지 진지하게 입법권자에게 전달하러 온 청년 당사자들을 앞에 두고, 그 의원은 듣기도 부끄러운 본인의 성공 신화를 늘어놨다. 시골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본인은 열심히, 좌절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국회 의원회관 한가운데 이렇게 앉아 있다고. 혹시나 청년들이 그 대단한 스토리에 졸지는 않을까 호통까지 치면서 말이다. 나를 비롯해 토론회를 참관한 청년활동가들은 이미 닳고 닳아 유머로 전락해버린 의원님의 ‘라떼는 말이야’ 신화에 작은 웃음 하나 짓지 않았다.

1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지금에야 꺼내놓는 이유는, 최근 이 사람이 강원랜드 채용청탁 혐의로 1년 실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염동열 의원은 지지자 자녀 등 52명이 기재된 명단을 줘 강원랜드에 채용되도록 청탁했고, 재판부는 이 혐의를 인정했다. 청년미래특위가 출범했을 때, 염동열 의원은 이미 청년참여연대로부터 채용청탁 혐의로 고발당한 상태였다. 청년문제를 해결하자는 자리에서 과거 경험을 들먹이며 청년에게 호통을 친 것도 우습지만, 애초에 청년에게 박탈감을 안겨준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부터 말이 안됐다. 그리고 며칠 전 이보다 더 좌절스러운 뉴스를 들었다. 청년참여연대가 염동열과 함께 고발한 권성동의 무죄 선고 뉴스다.

강원랜드 채용청탁 혐의를 받는 권성동이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5일 전의 일이다. 재판부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혐의를 증명하지 못한 것으로 봤다. 맥이 빠지는 건 법의 테두리로 채용청탁을 처벌할 수 없어서다. 사실 고발 내용도 채용청탁이 아니었다. 채용청탁이라는 처벌 사유는 없다. 청년과 강릉 시민의 박탈감을, 업무방해 및 직권남용 혐의 고발로 표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채용비리를 근절하고 채용절차를 공정하게 만들기 위한 대안도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다. 블라인드 채용 의무화. 아무리 학교 이름을 가리고, 부모님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하게 한다고 해도, 이미 ‘세습 중산층’ 사회가 된 이곳에서 지원자의 삶의 경력은 좋은 지연과 정보를 가진 부모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처벌받길 원했다. 지금껏 인맥을 이용하는 행위는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좋은 일자리’를 갖는 것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휴게시간, 출퇴근 시간도 보장받지 못하며, 월급이 안 밀리는 것이 다행이거나, 재계약이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삶. 위험한 작업장에서 다쳐도 산재를 증명하기 어려운 노동도 허다하다. 그렇게 일해도 내 몸 누일 방 하나 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좋은 일자리’ 하나를 가지면 그다음을 보장받는다. 인맥을 이용한 ‘중산층 세습’은 우리 사회에서 조금 더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누구나 해온 일이다.

KT에 딸의 채용을 청탁한 의혹을 받는 김성태 의원은 “딸에게 파견 계약직을 권하는 아버지가 몇이나 있냐”고 말했다. 파견 계약직 노동의 불안을 알고서 한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건 이것을 논거로 채용청탁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자리를 갖더라도 좋은 삶, 안정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드는 일이었다. 청년은 삶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언제까지 경쟁하고, 평등하지 않은 공정 아래 내일을 불안해해야 하는 걸까. 법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오늘도 정의는 지연되고 있다.

<조희원 청년참여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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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박 시 틀니 압수.” 랜선 세계를 떠돌다가 우연히 마주친 표현이다. 여기서 만난 것 대부분이 금세 잊히는데, 이것은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틀니 압수”는 ‘꼰대짓’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맥락에 쓰인다. 노인들이 들으면 서러울 말로, 꼰대짓하는 사람은 대개 나이 많은(그래서 치아가 손실된) 사람일 것이라는 편견이 내재돼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꼰대인가?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꽉 막힌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반박 시 틀니를 압수하겠다고 선언하는 인간은? 반박을 ‘금지’하는 태도는 꼰대의 것으로 보기 손색없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절묘한 아이러니이다. 

꼰대적 태도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득 없이 강요하는 것, 서열 짓고 차별하는 것, 오롯하게 개인으로 보지 않고 당사자가 원치 않음에도 특정 집단의 틀로 규정짓는 것 등 당해보면 불쾌한 폭력이다. 치아의 유무가 기준이 아니다. (나쁜) 매너가 꼰대를 만든다. 

꼰대에게 당해본 이들은 다짐한다. 나는 꼰대가 되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한 친구들 중, 이끌어야 할 후배가 생긴 30대의 고민은 깊어졌다. 후배에게 개선점을 지적한 날마다 친구의 마음은 불편했다. 오늘 후배에게 지나치게 참견했나? 말투에 문제는 없었나?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날을 반복했다. 프로젝트 결과물이 훌륭하면 물론 좋지만, 힘들게 취업했는데 후배가 업계에 오래 발붙이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고 친구는 말했다.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이요, 좋게 말하면 다정함일 텐데 대충 후자라고 해주자. 

어쨌든 그런 날이 반복됨에도 마음을 편히 갖지 않고 계속 스스로를 경계한다는 사실에 희망을 봤다. 이 친구가 중증 꼰대는 되지 않겠구나. 진짜 심각한 꼰대는 자기가 꼰대인 줄도 모를 것이다. 어쩌면 꼰대가 되지 않겠다는 강박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꼰대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나마 괜찮은 꼰대가 되려고 노력하는 게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끊임없이 ‘성찰하는 꼰대’가 되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그는 말했다. 

“넌 회사 안 다니잖아….”

“아무래도 그렇지? 내가 미안해….”

빠른 사과 역시 그나마 괜찮은 꼰대가 되는 길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든, 어디서든 꼰대가 될 가능성이 있다. 10대도 20대도 마찬가지. 뭐든 확신이 문제다. 꼰대는 나와 관계없는 단어라는 확신이 젊은 꼰대를 만든다. 가치관의 어떤 부분은 신선하고 말랑거리겠지만 어떤 부분은 기성의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사회로부터 공기처럼 흡수한 혐오와 차별의 시선이다. 

인터넷 공론장의 쌍방향 소통은 재사회화에 도움이 된다. 인터넷은 상대적으로 위계 없이 대등하게 주장을 주고받고 ‘반박’하며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뒤섞이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거다. 물론 그 전에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타인이 규정짓는 나’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자신을 발견하고, 서사를 쌓아가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간. 그 뒤 (랜선을 통해) 나의 방과 세계는 연결되고 타인과 연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희망편’이고, 지금 한국 랜선 세계에서는 ‘절망편’이 펼쳐지고 있다 하더라. 개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에서도 많은 이들은 ‘집단’에 속하기를 택하며, 특정된 개인들 역시 집단으로 규정하여 쥐어 패고 다닌다고.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진 편견으로 공격하는 일은 꼰대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게다가 다수가 한 사람을 공격할 때 공격받는 개인은 명백히 약자일 수밖에 없음에도, 신원이 노출돼 위험을 느끼는 개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없는지 언어폭력을 멈추지 않는 이들…. 이거 웬만한 꼰대보다 더 나쁜 것 같은데? 이건 솔직히 키보드 2주 압수해도 된다고 본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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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행차를 둘러싼 윤리적 논란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자율주행차를 타고 있는데 갑자기 전방에 10명이 나타났다. 그대로 가면 행인 10명이 죽고 핸들을 틀면 차에 탄 1명만 죽는다. 무엇이 바람직한 선택일까? 이런 경우 대부분은 차에 탄 사람만 죽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사실 이런 문제가 자율주행차 때문에 새로 나온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장마철에 홍수가 나서 아버지의 고향집이 물에 잠긴 적이 있다. 비가 그치고 나서 가보니 집은 거의 2층까지 잠겼다. 댐의 물을 방류했다면 괜찮았겠지만 그랬다면 서울이 위험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도 사람이 많은 서울을 지키기 위해 시골이 희생하는 것은 불가피하지 않느냐고 생각하실 듯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중국 교민들을 수용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자율주행차의 논란에 비추어보면 인구가 적은 곳에 수용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자율주행차의 논란에서 10명 대신 1명이 죽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사람들도,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차라면 사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10명 대신 1명이 희생해야 하지만, 그 1명이 나는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진천, 아산의 일부 시민이 반대시위를 했다고 해서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한다. 일부는 지역색, 정당색까지 들먹이며 비난하기도 한다. 최종적으로는 갈등이 잘 봉합되기는 했지만, 희생이 당연한 우리 사회의 구조가 바람직한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서울은 전국에서 가장 시설 좋은 병원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혹시 환자가 발생할지 모르니 서울공항에 내려 강남과 서울 일대의 시설에 이들을 수용한다고 하면 반대가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방의 희생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희생하지 않으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구조가 더 잘못된 것이다.

서울의 집값을 두고 말이 많지만, 사실 서울의 집값이 비싼 것은 서울이 좋기 때문이며, 서울이 좋은 것은 많은 혜택을 누리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농담으로 서울의 집값을 잡을 복안이 있다고 말한다. 서울을 자족도시로 만들면 된다. 서울에 필요한 전기를 서울의 원전에서 생산하고, 쓰레기장도, 소각장도, 화장장도 다 서울에 둔다면 서울의 집값이 지금처럼 비쌀 이유가 없다. 물론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지방의 누군가에게는 싫은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명분으로 그런 비용을 충분히 지불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보유세를 조금만 올려도 세금폭탄이라고 말하지만, 서울의 집값이 올라가기까지 들어간 공적 비용과, 서울의 일부 지역에 집중되는 자원을 생각한다면 지가 상승에 의한 이익만 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때 논밭의 작물을 따가지 못하게 하자 시골인심 사납다고 비난하는 사람을 본 적도 있다. 누군가 자기 집에서 돈다발을 들고 나오는데도 맘씨 좋게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시골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시골을 기억 속에 박제하며 마음의 고향으로 두고 싶겠지만, 시골은 개발되지 않고 아름답게 남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시골에도 사람이 산다. 당신들과 같은 욕망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말이다. 서울이 누리는 아늑함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러한 주제를 자율주행차를 둘러싼 윤리적 논란처럼 힘겹게 고민하며 토론하고는 한다. 어렵게 고민하지 마시라. 당신은 지금 핸들을 어디로 틀고 있는가?

<이총희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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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형제들이 불공정한 형제들로 변했다. 합병 전이던 지난해 9월 최소배달료 6000원으로 라이더들을 공격적으로 모집하더니, 11월6일부터 12월3일까지는 4500원으로, 12월4일부터는 기본배달료 3000원에 500~2000원의 프로모션을 매일매일 변동해서 지급했다가 합병 후인 올 2월1일부터는 3000원으로 배달료를 삭감했다. 불과 5개월 새 벌어진 변화다.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9월의 6000원 요금제는 신입 라이더에게만 적용됐고, 기존 라이더에겐 3000원을 지급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자유롭게 로그인, 로그아웃하는 형태의 배민커넥터를 모집했는데, 이들에겐 기본료 5000원에 500~1000원의 프로모션을 제공하고 꿀콜이라 불리는 단거리 콜을 먼저 볼 수 있게 했다. 렌털비, 배달 개수 등이 기존 라이더, 배민커넥터, 신규 라이더 간 모두 달랐고, 이들 사이에 위화감이 커지고 갈등이 벌어졌다. 라이더 간 갈등으로 회사에서 운영하던 단체대화방이 폭파되는 사건도 있었다. 단결은커녕 원수가 되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보인다. 배민은 이를 잘 이용했다. 배민커넥터에 대한 우대정책으로 배민라이더스의 불만이 고조되니까 커넥터에 대한 20시간 근무 제한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노조가 매일 바뀌는 프로모션에 문제를 제기하니까 프로모션을 없애버렸다. 일부 라이더들은 노조가 설쳐서 근무조건이 불리하게 바뀌었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2만명이 출근하는 공장도, 함께 밥을 먹는 식당도 없기 때문에 노조가 이에 대해 해명하는 전단 한 장도 뿌릴 수 없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 갈등을 악용해 노조를 탄압했던 대기업들이 한 수 배워야 할 판이다.

플랫폼은 정기적으로 말 많은 라이더들을 자연스럽게 물갈이할 수도 있다. 패스트푸드점은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이 있으면 주마다 바꿀 수 있는 스케줄을 줄여버려 해고 없이 노동자들을 내보낸다. 제로아워라 불리는 고무줄 스케줄이다. 플랫폼은 일방적인 공지나 라이더 수와 일감의 조정을 통해 노동자들을 로그아웃시킬 수 있다. 이것은 플랫폼의 신종 노무관리 수단이다. 플랫폼노동자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였다면 배민의 일방통행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해당되어 라이더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플랫폼노동자들은 개인사업자라는 이유로 저항의 수단이 전무하다. 동의하지 않으면 로그인 자체가 안된다. 배민은 새로 작성한 계약서에 1개월 단위의 계약을 갱신하기로 바꾸었고 7일 전에서 1일 전 계약해지 통보가 가능하다고 적었다. 누가 저항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회사의 문제를 인식하기 힘든 신입 라이더들을 무한대로 뽑을 수 있어 회사의 문제를 공유하기도 힘들다. 지난해 7월 모집한 배민커넥터가 6개월 만에 2만명이 됐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플랫폼은 얼마든지 대체인력을 뽑을 수 있다. 김봉진은 파업의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자본가다.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도 공포다. 라이더들은 커넥터와 라이더스, 신규와 기존 라이더의 휴대폰에 다르게 콜이 뜰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혼자 일하는 라이더들은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가 나에게만 콜이 보이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배민이 자랑하는 고정급 라이더 중에는 서울 동쪽으로 출근했다가 91분이 걸리는 서쪽 끝 배달을 지시받은 적도 있다. 악덕사장의 욕설이 아니라, AI의 알림음이 문제가 되는 시대가 왔다. 배민만의 문제는 아니다. 플랫폼은 입구에서 세련된 계약서에 서명을 받아 합법적으로, 플랫폼과 가맹계약을 맺은 동네 배달대행업체들은 계약서도 없이 자기 맘대로 렌털비, 수수료, 배차시스템, 수리비 등을 바꿔버린다. 

라이더유니온은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대응할 예정이지만 노동에 대한 이해가 없는 기구에서의 법적 해결은 한계적이다. 라이더 전체가 노조에 가입해 파업을 벌이는 것도 어렵다. 앱에 노조 소식을 알릴 수 있도록 보장하고, 서버 파업 등 플랫폼에 걸맞은 노조할 권리 보장이 필요하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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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유튜브를 배회했다. 김해까지 5시간 여정을 하다보면 스마트폰에 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개별 영상들은 5분, 10분 정도의 짧은 길이이지만 영상과 영상을 넘나들면 금방 시간이 사라진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주로 나의 관심사인 동물, 게임, 만화, 소설, 가요 등의 영상을 보여주는데 가끔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요즘 인기있는 영상이라며 관심사 바깥의 영상들을 추천할 때가 있다. 그사이에서 가장 빈도가 많은 것은 소위 ‘사이다’로 불리는 영상이다.

‘사이다’는 ‘고구마’를 잔뜩 먹어 목이 메이고 답답한 상황을 청량하게 풀어주는 속 시원한 서사를 통칭해 이야기한다. 사이다 서사의 예시는 이렇다. 마음이 유약하고 순진해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선후배들의 등쌀에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직원이 있다. 이 직원이 유능한 애인을 사귀게 되었는데 애인이 직접 나서 모든 문제를 앞장서 해결해주고 보상을 타내며, 직원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정의구현을 한다. 

사이다 서사의 구조는 전래동화에서 교훈을 전달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흥부는 제비에게 복을 받고, 놀부는 제비에게 정의구현을 당하고 쫄딱 망하게 되는 것처럼. 고전소설과 사이다 서사의 가장 큰 차이는 기반이 되는 사상의 유무이다. 권선징악 서사는 노골적인 ‘선(善)’과 ‘악(惡)’을 대비시킨다. 아이들에게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당대 도덕관념을 교육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그러나 사이다 서사는 노골적으로 ‘정의구현’을 부르짖지만 그 속에는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답답하게 하는 적(敵)만 존재하며 상대가 나를 때렸으니 나도 때려도 된다는 사적 복수의 당위성만 있다.

사이다 서사는 간편하고 편리하다. 내가 겪는 불행, 불운, 부당하고 불평등한 모든 것들을 복수할 대상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그 존재에게 법의 테두리 안팎에서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되니까. 5~10분 내외 짧은 길이의 영상으로 눈길을 끌어야 하는 유튜브에서 이러한 사이다 서사는 최적의 조합이 된다. 사이다의 장점은 곧바로 단점이 된다. 우리가 겪는 사회의 문제는 사악한 악당이 혼자서 좌지우지하는 협잡 탓이 아니다. 사회는 복잡하게 엮여 있고 때로는 구조 탓에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이 개인의 이득이 교차할 때도 많다. 적을 개인 또는 하나의 집단으로 상정하는 사이다 서사는 구조 속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인과관계를 사라지게 만든다. ‘사이다’를 성공적으로 끝낸 개인은 그 구조에 집중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입은 피해만큼을 보상받으며 모두 끝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이다 서사는 콘텐츠 소비자들을 아주 단순한 이분법 속에 위치시킨다. 서사의 주인공을 방해하는 수많은 안건은 납작하게 분노해야 할 것이 되고 특정 집단이나 사상을 재생산시킨다. 빈부격차나 남녀, 세대의 갈등이 서로 합의를 이루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이해 불가능한 악의로 다가오고, 그것은 사적인 복수로 해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유튜브 속 ‘사이다’ 영상의 댓글은 쉽게 전쟁터가 된다. 오히려 더 심하게 응징해야 한다는 성토부터, 이런 상황을 사이다로 소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얘기가 맞붙는다. 물론 그 두 집단은 그저 자기가 받은 만족감·불쾌감을 표출할 뿐이라 어떤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늘도 유튜브뿐만 아니라 각종 알고리즘이 끊임없이 사이다 콘텐츠를 노출시키고, 해당 영상은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다. 사이다 서사는 고통을 잠재워주는 모르핀이다. 때로는 약효가 아주 강해 진통에서 완전히 벗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곳은 ‘사이다’의 청량함이 아니라 ‘고구마’의 답답함이다. 무엇이 어떻게 왜 우리를 괴롭히는가. 사람들이 끊임없이 사이다를 찾는 이유는 사회가 계속 진통제를 찾아야 할 만큼 병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구마가 계속 남아있다면, 우리는 그저 동물적으로 사이다를 마시고, 그 속의 논리를 재생산하는 것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융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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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글쓰기 수업에서 과제를 걷은 뒤 제목 옆에 적힌 아이들의 이름을 가려보았다. 그리고 과제를 마구 섞어버렸다. 그러자 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워졌다. 이름 없는 여러 편의 글들을 칠판에 붙이고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각각 누가 쓴 것인지 맞혀보자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단번에 글의 주인을 찾아냈다. 같은 종이에 동일한 폰트와 형식으로 적혀있지만 모든 글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다. 글쓰기 수업에 같이 다닌 몇 달 사이 서로가 쓰는 문장의 습관을 알아챈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첫 문장이 있다. “지금부터 내가 비겁했던 순간에 대해 써보겠다. 난 비겁했던 적이 많아서 다 기억나지는 않기 때문에 아주 잘 생각나는 것만 쓸 것이다.” 이것이 열두 살 주현이의 문장임을 아이들은 금세 알아챈다. 그는 늘 자신이 무엇을 쓸지 독자에게 예고한 뒤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지금까지 비겁함에 관한 얘기였다. 이제 마치겠다.” 마치 뉴스 앵커 같다. 조금 경직된 표정으로 독자에게 소식을 전한 뒤 꾸벅 인사를 하고 퇴장하는 듯한 주현이의 글이다.

또 다른 아이의 과제에는 이런 마지막 문장이 적혀있다. “동생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이 한 줄만으로도 아이들은 열두 살 정우의 이름을 외친다. 정우의 글은 언제나 무언가를 궁금해하며 끝나는 경향이 있다. 선생님이 왜 이런 주제를 준 건지도 궁금하고 옆자리에 앉은 형은 글을 쓰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자마자 글을 마치기 때문에 답이 적히는 경우는 없다.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 끝나는 글들이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 문장이 아닌 첫 문장에 질문을 써보자고 말한다. 호기심으로 끝나는 문장 말고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사랑은 궁금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이에 적힌 문장은 훨씬 구구절절하다. “그 애는 나를 그냥 스쳐지나갔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그 애에 관한 온갖 상상에 빠져 단물에 절어있었는데 이제는 마치 티백처럼 손쉽게 건져진 뒤 물기를 쫙 빼서 곶감처럼 말려진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열네 살 예련이의 이름을 외친다. 아주 짧지만 중요한 찰나에 관해 온갖 비유를 끌고 와서 최대한 극적으로 쓰는 것이 예련이의 방식이다.

영화 <매니페스토> 스틸 이미지

아이들 각자의 이 방식들을 나는 글투라고 말한다. 말하는 사람 모두에게 말투가 있듯 글쓰는 사람 모두에게 글투가 있다. 글투는 문체이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는 표정’이기도 하다. 과제에서 이름을 지워도 글쓴이의 표정은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이 표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각자 타고난 얼굴이 있긴 하지만 어떤 작가들을 흡수하느냐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기도 한다. 아이들도 나도 글투를 미세하게 재형성하며 글을 써나간다.

영화 <매니페스토>에는 한 글쓰기 교사가 등장한다. 그는 칠판에 ‘독창적인 것은 없어(Nothing is original)’라고 적은 뒤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독창적인 것은 없다. 어디서든 훔쳐 올 수 있어. 영감을 주거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거라면 뭐든지 얼마든지 집어삼켜. 옛날 영화, 요즘 영화, 음악, 책, 그림, 사진, 시, 꿈, 마구잡이 대화, 건물, 구름의 모양, 고인 물, 빛과 그림자도 좋아. 너희 영혼에 바로 와닿는 게 있다면 거기서 훔쳐 오는 거야. 독창성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훔쳤다는 걸 숨길 필요 없어.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념해도 좋아.” 

그런 뒤에 교사는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장뤼크 고다르가 한 말은 꼭 기억해야 해. ‘문제는 어디서 가져오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져가느냐다.’ ”

아이들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종이 위에서 자기만의 표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표정 때문에 같은 하루를 보내고 나서도 서로 다른 일기를 쓴다. 그들의 글투를 발견하고 수호하고 추가하는 것이 글쓰기 교사의 의무 중 하나일 것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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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저학년 때 종종 ‘비권 총학생회’라는 말을 들었다. 비권은 비운동권의 줄임말이다. 자신은 운동권이 아니니, 정치판과 연결 없는 ‘순수한’ 후보자라는 말이었다. 정치와 순수하다는 형용사가 대치되는 말이었던가, 고민했지만 이런 의문에 속 시원히 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최근 정치판이란 단어를 다시 들었다. “고3 교실까지 선거판으로 만들고 정치판화해야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에서다. 얼마 전 통과된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대한 한 자유한국당 의원이 다그치며 뱉은 질문이다. 이 개정안이 담고 있는 18세 선거권 연령 하향의 내용에 대한 반응이었다. 국회의원은 이 정치체제의 꽃이라는 선거를 통해 직업과 명예, 지위를 얻은 사람이다. 정치판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다른 공간을 선거판, 정치판으로 만들지 말라고 다그친다니 좀 모순적이지 않나. 본인의 존재를 폄하하는 말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도 정치가 순수하다는 형용사와 대치될 수 있는 단어인지 모르겠다. 순수함이 부패하지 않았다의 다른 말이라면 이해할 것도 같다. 지금의 정치판은 오랜 시간 시민이 감시하여 쟁취한 결과다. 지난 시민운동의 역사가 없었다면 더 부패하고 정말 ‘더러웠’을지 모른다. 위 발언은 본인의 정치활동이 누군가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양상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연말 국회는 아수라장이었다. 시민의 개혁 열망을 뒤로한 당리당략, 그로 인한 자가당착만이 가득했다. 특정 정치인, 특정 정당의 정치적 이익 보장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정치라면, 맞다. 교실을 정치판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게 정말 정치인가.

이제 대학 총학생회는 비권과 운동권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 대신 학생의 위치에서 20대가 누려야 할 권리를 말한다. 최근 대학사회에서 가장 크게 청년들의 공감을 얻은 이슈는 부당한 입학금 폐지, 계열별 차등등록금 개선, 성희롱 교수 퇴출 및 교내 인권센터 설립, 기숙사 확충 등이다. 사회경제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일상의 문제이고, 인권의 문제다. 지난 세대에 정치의 필요가 거대권력과의 투쟁을 통한 시민권과 노동권의 성립이었다면, 지금 우리 세대의 대의는 바로 이런 것이다.

요구는 달라졌지만 정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누군가를 대변한다는 거다. 선거 때에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현실적 요구를 정책으로 만들 줄 아는 대표자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최근 정당들의 인재영입 뉴스를 보면 조금 의아하다. 장애, 경력단절 등 사회적 약자의 위치를 ‘극복’해서 큰 성공을 한 누군가가 “정치는 잘 모르지만” 열심히 해보겠다고 한다. 화려한 삶의 전적은 알겠지만 누구를 대변하며, 어떤 정치활동을 해왔는지는 알 수 없다. 정치는 순수하지 않다는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당들이 최근 몇 년 새 우후죽순처럼 만든 ‘정치학교’ 출신 청년들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기계발서의 주인공 같은 인재들을 보면 정치는 역시 히어로들의 전유물인가 싶기도 하다.

얼마 전 정의당 대변인이 된 강민진 대변인은 청소년참정권 활동을 했던 지난 경험에 비추어, “나의 삶 전체가 정치다. 국회의원이 아니더라도, 제도권 정치가 아니더라도. 이런 일을 시작한 이유는 단지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였다”고 인터뷰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정치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그래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나의 권리들이 궁금하고, 또 돌려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 권리 회복을 위해 활동한 사람들, 그 삶을 ‘정치’라고 당당히 말하는 내 세대 동료들이 정치인이 되면 좋겠다. 이런 정치인이 많아질수록 변화가 더 가까워질 거라 믿는다. 

이 시대의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정치란 무엇인지. 아직도 부끄러운 정치만을 정치라고 알고 계시는 분과, 히어로가 세상을 바꿀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주실 때도 됐다.

<조희원 청년참여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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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중인 방송 프로그램의 ‘막내작가’ ㄱ씨를 보면 흰 토끼가 떠오른다. 통통한 하얀 볼, 늘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 도드라진 앞니 두 개. 그런데 그날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찾을 수 없었다. 흡사 억울한 토끼 같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해들은 사연은 이렇다. ㄱ씨는 하나의 집이었던 것을 여러 원룸으로 쪼갠 다가구주택에서 월세로 살았다. 단열·방음 등에 문제 있음은 당연했고, 기타 수리 가능한 문제도 건물 주인이 제때 고쳐주지 않아 불편했다. 그렇다고 전문가를 불러 수리한 뒤 영수증과 함께 비용을 청구하는 방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계약기간 동안 버틸 따름이었고, 기한이 만료되자 쾌재를 부르며 모든 짐과 함께 탈출했다.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벽에 곰팡이가 생겼다는 게 이유였다. 환풍이 어려운 구조를 가진, 노후된 주택 자체 문제라고 ㄱ씨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도배 비용은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임대인은 정확한 비용은 청구하지 않은 채 보증금 1000만원을 돌려주지 않고 버텼다. ㄱ씨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부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집주인은 모친과 통화하며 그동안 ㄱ씨의 집에 누가 방문했는지 사생활을 노출하며 ㄱ씨를 깎아내렸고, 모친에게도 모욕적인 언사를 했다. 사생활 보호에 어찌나 둔감한지, 그는 일전에 잠긴 문을 열고 침입해 ㄱ씨의 비명을 자아낸 적도 있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여서 ㄱ씨는 더욱 놀랐다.

사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다. 나도 이제 1인 가구 6년차다. 6년 동안 더러운 꼴을 많이 봤다. 그럼에도 ㄱ씨의 얘기에 새삼 놀란 것은, ‘종합판’이어서다. 한두 가지 결점을 가진 집주인은 흔하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나 다 갖추다니…. 이제 2020년인데, 이 정도로 낡아빠진 집주인이 멸종하지 않았다니….

ㄱ씨가 서투르긴 했다. 특히 보증금 받기 전 짐을 다 빼고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줬다는 얘기에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서툰 상대라도 이렇게까지 막 나가면 안되는 거잖아. 밟힐 것 같은 대상은 짓밟고 빨대 꽂아 부를 증식하는 삶의 방식, 혹시 나이 지긋한 집주인이 이제껏 살아온 방식이 아닐는지.

배경에는 이를 허용하는 사회가 있다. 자기 소유의 주택이어도 세입자가 사는 동안 권리가 제한되며, 동시에 지켜줘야 할 세입자의 권리가 있다는 기본 중의 기본을 무시하는 임대인에게 그렇게 살면 큰일 난다고 옆구리 세게 꼬집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제부턴가 ‘주택 문제’를 다루는 뉴스에 관심이 줄었다. 대부분이 서울의 아파트 매매 관련 뉴스였기 때문이다. 내겐 1000만원도 큰돈인데, 그것도 오랜 기간에야 간신히 모을 수 있는데, 몇 억원을 우습게 말하는 기사에 박탈감과 불안감이 자극됐다. 자극된 사람이 나뿐만 아니어서 지속적인 집값 상승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설움 안 당하려면 빚내서 집 사야 한다는 ‘심리’.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자산이 있어야 가능하다.

서울에서 아파트 사는 것, 어차피 이번 생엔 가망 없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니, 대한민국 전체 인구를 따지면 이쪽이 다수다. 그럼에도 많은 언론은 서울의 아파트를 가졌거나,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계급을 위한 뉴스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자분들이 감정이입하는 계급인가 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파트 매매가 등락을 매일매일 중계하듯, ‘해도 너무한’ 집주인이 발견될 때마다 한 명 한 명 대서특필한다면? 자신의 행위가 파급력 있는 매체에 보도될 가능성이 높음을 의식한다면, 해도 너무한 짓은 좀 덜 하지 않을까? 세입자가 통화 내용 등 증빙자료와 함께 제보하면 후속 취재를 통해 보도하는 상설 코너가 있는 프라임 타임 뉴스쇼를 그려본다. ㄱ씨와 같은 이들이 제보할 수 있게. 앞으로의 10년은 나아지기를.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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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원씨는 경마장에서 말을 타는 기수였다. 2019년 11월29일 마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산타의 선물을 받았다. 문중원씨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택배로 장난감 화장대세트와 레고를 주문했고 아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하늘에서도 가족을 위해 달렸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문했던 손과 세상에 대한 마지막 주문을 글로 남겼던 손. 행복과 절망의 양손 사이 어딘가 그가 살고 싶었던 삶이 있었을 것이다. 그 손을 잡지 못해 미안하고 미안하다.

한국마사회 내부 비리를 폭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故 문중원 기수의 아버지 문군옥씨(71)가 6일 서울 청와대 앞 길에 놓인 故 문 기수의 빈 상여를 보며 슬퍼하고있다. 故 문중원 기수 시민대책위는 이날 시민분향소가 있는 서울 정부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중원씨 등 부산경남공원에서만 7명이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마사회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며 고인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는 유족과 시민대책위는 이제 문재인 정부의 책음을 물으러 청와대로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자회견 뒤 故 문중원 기수의 유족과 시민대책위 회원들은 빈상여와 조각상을 들고 청와대 사랑채 인근까지 행진을 했다. 고 문중원 기수의 아버지 문군옥씨가 6일 청와대 앞 도로에서 빈 상여를 어루만지고 있다. 문 기수는 지난해 11월29일 마사회 내부 비리를 폭로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 문중원 기수 시민대책위’는 이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빈 상여를 메고 청와대로 행진했다. 이준헌 기자

유서에는 마사회 놈들을 믿을 수가 없어 복사본을 남긴다고 적혀 있었다. 마사회는 경마라는 합법적인 도박을 설계하는 일을 한다. 우선 판 위에 말을 깐다. 마리당 수억원 하는 말을 소유한 마주가 마사회에 등록하고 말이 우승을 하면 상금을 갖는다. 마주는 말의 주인일 뿐 경마 전문가는 아니다. 감독 격인 조교사에게 말을 맡기고 상금을 나눠 갖는 위탁계약을 맺는다. 마사회는 개인사업자인 조교사에게 면허를 교부하고 말을 키우고 관리할 수 있는 마방을 임대해준다. 조교사는 말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달릴 수 있도록 말 관리사를 고용하고 말을 타고 달리는 기수와 계약을 맺는다. 마필관리사는 최저임금 노동자, 말을 타는 기수는 근로자가 아닌 특수고용노동자다. 마사회는 조교사 선정, 마방 임대, 기수 면허 갱신의 권한을 가진다. 간단히 말하면 마사회는 마주의 말을 빌려와서 조교사와 기수와 마필관리사에게 맡기고 알아서 도박판을 돌리라고 한다. 중개만 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이 복잡한 구조는 배달플랫폼과 닮아 있다.

배달플랫폼이 음성적 배달시장을 혁신하겠다는 명분으로 탄생한 것처럼 마사회도 1992년 터진 경마 승부조작 사건을 해결한다는 취지로 위와 같은 ‘개인마주제’를 탄생시켰다. 마사회로 내려온 낙하산의 전횡 때문에 생긴 문제를 땅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넘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마주제는 마사회를 더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기수는 승부조작을 지시하는 조교사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출전하지 못하고, 상금을 타지 못하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 아픈 말을 타라고 하거나, 다루기가 힘들어 낙마할 가능성이 높은 말에 태우기도 했다. 실제로 낙마사고로 사망한 기수들도 있다. 마필관리사들은 말에게 차여 무릎에 철심을 박거나 뇌진탕, 골절 등의 부상에 시달렸다. 2019년에만 60건의 산재사고가 발생했다. 마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세상을 등진 7명이 이들 기수와 마필관리사다. 사장에게 밉보인 배달 라이더들이 한 번에 묶어 갈 수 있는 배달건수를 제한받거나, 고장 나기 직전의 오토바이를 배정받고 오로지 건당 성과에 따라 돈을 받는 배달산업과 닮아 있다. 배달하다 다치거나 사망했다는 소식들은 매일같이 들린다. 마사회의 연매출은 8조원, 배달산업은 20조원이다. 우리는 죽음의 판에 돈을 걸고 있다. 문중원씨는 이 죽음의 질주를 멈추고 싶어 노조에 가입하고, 2015년 조교사가 됐지만 마사회는 마방을 임대해주지 않았다. 마사회 직원들은 높으신 양반들과 밥도 좀 먹어야 마방이 빨리 배정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유서에 이렇게 적었다. ‘더럽고 치사해서 정말 더는 못하겠다.’ 정직한 그에게 허락된 삶의 공간은 없었다.

우리가 문중원씨에게 마방을 임대해줄 수는 없지만 또 다른 문중원씨가 살아갈 방을 만들 수는 있으리라 믿는다. 최근 라이더유니온은 따뜻한 음식을 배달하는 라이더들을 위해 ‘라이더유니온 캠페인. 늦어도 괜찮아요 안전하게 와주세요’라는 메모를 남겨달라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 문중원씨가 세상에 보낸 마지막 주문을 배달하기 위해 거리에 선 사람들도 있다. 그의 가족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다. 문중원씨의 부인 오은주씨가 우리에게 부탁하는 메모는 다음과 같다. “하늘에서 제일 반짝이는 별이 될 사랑하는 제 남편 문중원 기수를 영원히 기억해주세요.”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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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하향됐다. 만 20세에서 만 19세로 하향된 지 15년 만의 진일보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입맛이 찝찝할까.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한 채 선거제도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라는 최대 쟁점에 묻혀 덤처럼 통과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거나 통과됐으면 그만일까? 그러기엔 이 의제의 잠재력이 아깝다.

치열한 논쟁의 주제는 사실상 딱 하나였다. ‘만 18세는 선거권을 행사할 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한가?’ 선거에 참여하려면 정치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주제다. ‘그렇다’와 ‘아니다’라는 쪽이 치열하게 맞붙었지만 접점 없는 논쟁은 공회전만 반복했다.

그런데 만 19세를 넘어가면 정치적으로 충분히 성숙해지는가? 이 질문이 먼저 던져져야 했다. 토요일 저녁 서초동에 선 40세 ㄱ씨는 같은 시간 광화문에 선 60세 ㄴ씨를 정치적으로 성숙하다고 인정할까? 그 반대의 경우는? 같은 시간 어디에도 서기를 거부한 30세 ㄷ씨는 그들 모두의 정치적 성숙함을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 서로의 정치적 미성숙함을 조롱하던 사람들이 만 18세 선거권 이슈에서는 한마음 한뜻으로 ‘만 18세는 미성숙하므로 선거권을 줘선 안된다’고 주장하는 풍경이라니, 우습고 미심쩍다.

‘실제로’ 성숙한지를 검증하려 들면 공회전하거나 삐걱댈 수밖에 없다. 객관적인 평가도 어려울뿐더러, 옳지도 않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나이라는 기준만 만족하면 누구든 평등하게 1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보통·평등선거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 원칙이 중요하다는 말을 다시 하기엔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가 그렇게 짧지 않다고 믿는다.

따라서 선거권에 기준이 필요하다면 ‘실제로’ 성숙해지는 나이가 아니라 ‘제도적 관점’에서 성숙해졌다고 간주할 수 있는 나이일 터다. 제도적으로 고안된 어떤 생애주기를 통과하면 선거권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의무교육 과정은 그 기준이 될 만하다. 의무교육은 국가가 의무적으로 제공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의미도 함께 있다. 교육에 관한 국가의 책임을 규정한 교육기본법에 따르면 교육은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을 이념으로 한다. 그렇다면 의무교육 과정을 통과하는 순간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췄다고 간주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2020년의 민주공화국이라면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통상적으로 의무교육 과정으로서 중학교를 마쳤다고 간주되는 만 16세까지 선거연령을 낮추는 것이 맞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제도교육은 좋은 대학에 진학해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과정에 그쳐왔고,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데는 너무 오랫동안 무관심했다. 만 18세든 만 19세든, 아니면 그 이상 나이 먹은 사람들이든, 제도의 관점으로 볼 때는 민주시민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건 똑같다. 우리 사회는 시민교육조차 ‘사교육’ 또는 ‘각자도생’에 맡겨왔다.

이번 선거연령 하향으로 고등학생도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교육부를 필두로 일부 지자체 교육청들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 참정권 교육을 강화할 것이라는 입장들을 내놓고 있는 것 같다. 고민을 확인했으니 반갑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순서가 틀렸다. 만 18세가 선거권을 갖게 되었으니 그에 맞춰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사후대책이 아니라, 의무교육 과정에 민주시민교육을 확대 편성함으로써 선거권을 더 하향시키겠다는 포부가 필요하다. 

시민·유권자로서 알아야 할 필수적인 교양들을 커리큘럼으로 갖춘 시민교육 과정이 강화되고, 그 과정의 이수 시기가 선거연령의 기준이 되기를 바란다. 유권자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도 성장하도록 하는 교육까지 고민한다면 금상첨화다. ‘이쯤에서 한 살만 낮춰주자’는 정치적 타협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강남규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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