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 중인 방송 프로그램의 ‘막내작가’ ㄱ씨를 보면 흰 토끼가 떠오른다. 통통한 하얀 볼, 늘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 도드라진 앞니 두 개. 그런데 그날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찾을 수 없었다. 흡사 억울한 토끼 같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해들은 사연은 이렇다. ㄱ씨는 하나의 집이었던 것을 여러 원룸으로 쪼갠 다가구주택에서 월세로 살았다. 단열·방음 등에 문제 있음은 당연했고, 기타 수리 가능한 문제도 건물 주인이 제때 고쳐주지 않아 불편했다. 그렇다고 전문가를 불러 수리한 뒤 영수증과 함께 비용을 청구하는 방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계약기간 동안 버틸 따름이었고, 기한이 만료되자 쾌재를 부르며 모든 짐과 함께 탈출했다.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벽에 곰팡이가 생겼다는 게 이유였다. 환풍이 어려운 구조를 가진, 노후된 주택 자체 문제라고 ㄱ씨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도배 비용은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임대인은 정확한 비용은 청구하지 않은 채 보증금 1000만원을 돌려주지 않고 버텼다. ㄱ씨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부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집주인은 모친과 통화하며 그동안 ㄱ씨의 집에 누가 방문했는지 사생활을 노출하며 ㄱ씨를 깎아내렸고, 모친에게도 모욕적인 언사를 했다. 사생활 보호에 어찌나 둔감한지, 그는 일전에 잠긴 문을 열고 침입해 ㄱ씨의 비명을 자아낸 적도 있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여서 ㄱ씨는 더욱 놀랐다.

사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다. 나도 이제 1인 가구 6년차다. 6년 동안 더러운 꼴을 많이 봤다. 그럼에도 ㄱ씨의 얘기에 새삼 놀란 것은, ‘종합판’이어서다. 한두 가지 결점을 가진 집주인은 흔하지만, 한 사람이 이렇게나 다 갖추다니…. 이제 2020년인데, 이 정도로 낡아빠진 집주인이 멸종하지 않았다니….

ㄱ씨가 서투르긴 했다. 특히 보증금 받기 전 짐을 다 빼고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줬다는 얘기에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서툰 상대라도 이렇게까지 막 나가면 안되는 거잖아. 밟힐 것 같은 대상은 짓밟고 빨대 꽂아 부를 증식하는 삶의 방식, 혹시 나이 지긋한 집주인이 이제껏 살아온 방식이 아닐는지.

배경에는 이를 허용하는 사회가 있다. 자기 소유의 주택이어도 세입자가 사는 동안 권리가 제한되며, 동시에 지켜줘야 할 세입자의 권리가 있다는 기본 중의 기본을 무시하는 임대인에게 그렇게 살면 큰일 난다고 옆구리 세게 꼬집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제부턴가 ‘주택 문제’를 다루는 뉴스에 관심이 줄었다. 대부분이 서울의 아파트 매매 관련 뉴스였기 때문이다. 내겐 1000만원도 큰돈인데, 그것도 오랜 기간에야 간신히 모을 수 있는데, 몇 억원을 우습게 말하는 기사에 박탈감과 불안감이 자극됐다. 자극된 사람이 나뿐만 아니어서 지속적인 집값 상승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설움 안 당하려면 빚내서 집 사야 한다는 ‘심리’.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자산이 있어야 가능하다.

서울에서 아파트 사는 것, 어차피 이번 생엔 가망 없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니, 대한민국 전체 인구를 따지면 이쪽이 다수다. 그럼에도 많은 언론은 서울의 아파트를 가졌거나,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계급을 위한 뉴스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자분들이 감정이입하는 계급인가 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파트 매매가 등락을 매일매일 중계하듯, ‘해도 너무한’ 집주인이 발견될 때마다 한 명 한 명 대서특필한다면? 자신의 행위가 파급력 있는 매체에 보도될 가능성이 높음을 의식한다면, 해도 너무한 짓은 좀 덜 하지 않을까? 세입자가 통화 내용 등 증빙자료와 함께 제보하면 후속 취재를 통해 보도하는 상설 코너가 있는 프라임 타임 뉴스쇼를 그려본다. ㄱ씨와 같은 이들이 제보할 수 있게. 앞으로의 10년은 나아지기를.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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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원씨는 경마장에서 말을 타는 기수였다. 2019년 11월29일 마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산타의 선물을 받았다. 문중원씨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택배로 장난감 화장대세트와 레고를 주문했고 아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하늘에서도 가족을 위해 달렸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문했던 손과 세상에 대한 마지막 주문을 글로 남겼던 손. 행복과 절망의 양손 사이 어딘가 그가 살고 싶었던 삶이 있었을 것이다. 그 손을 잡지 못해 미안하고 미안하다.

한국마사회 내부 비리를 폭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故 문중원 기수의 아버지 문군옥씨(71)가 6일 서울 청와대 앞 길에 놓인 故 문 기수의 빈 상여를 보며 슬퍼하고있다. 故 문중원 기수 시민대책위는 이날 시민분향소가 있는 서울 정부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중원씨 등 부산경남공원에서만 7명이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마사회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며 고인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는 유족과 시민대책위는 이제 문재인 정부의 책음을 물으러 청와대로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자회견 뒤 故 문중원 기수의 유족과 시민대책위 회원들은 빈상여와 조각상을 들고 청와대 사랑채 인근까지 행진을 했다. 고 문중원 기수의 아버지 문군옥씨가 6일 청와대 앞 도로에서 빈 상여를 어루만지고 있다. 문 기수는 지난해 11월29일 마사회 내부 비리를 폭로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 문중원 기수 시민대책위’는 이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빈 상여를 메고 청와대로 행진했다. 이준헌 기자

유서에는 마사회 놈들을 믿을 수가 없어 복사본을 남긴다고 적혀 있었다. 마사회는 경마라는 합법적인 도박을 설계하는 일을 한다. 우선 판 위에 말을 깐다. 마리당 수억원 하는 말을 소유한 마주가 마사회에 등록하고 말이 우승을 하면 상금을 갖는다. 마주는 말의 주인일 뿐 경마 전문가는 아니다. 감독 격인 조교사에게 말을 맡기고 상금을 나눠 갖는 위탁계약을 맺는다. 마사회는 개인사업자인 조교사에게 면허를 교부하고 말을 키우고 관리할 수 있는 마방을 임대해준다. 조교사는 말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달릴 수 있도록 말 관리사를 고용하고 말을 타고 달리는 기수와 계약을 맺는다. 마필관리사는 최저임금 노동자, 말을 타는 기수는 근로자가 아닌 특수고용노동자다. 마사회는 조교사 선정, 마방 임대, 기수 면허 갱신의 권한을 가진다. 간단히 말하면 마사회는 마주의 말을 빌려와서 조교사와 기수와 마필관리사에게 맡기고 알아서 도박판을 돌리라고 한다. 중개만 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이 복잡한 구조는 배달플랫폼과 닮아 있다.

배달플랫폼이 음성적 배달시장을 혁신하겠다는 명분으로 탄생한 것처럼 마사회도 1992년 터진 경마 승부조작 사건을 해결한다는 취지로 위와 같은 ‘개인마주제’를 탄생시켰다. 마사회로 내려온 낙하산의 전횡 때문에 생긴 문제를 땅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넘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마주제는 마사회를 더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기수는 승부조작을 지시하는 조교사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출전하지 못하고, 상금을 타지 못하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 아픈 말을 타라고 하거나, 다루기가 힘들어 낙마할 가능성이 높은 말에 태우기도 했다. 실제로 낙마사고로 사망한 기수들도 있다. 마필관리사들은 말에게 차여 무릎에 철심을 박거나 뇌진탕, 골절 등의 부상에 시달렸다. 2019년에만 60건의 산재사고가 발생했다. 마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세상을 등진 7명이 이들 기수와 마필관리사다. 사장에게 밉보인 배달 라이더들이 한 번에 묶어 갈 수 있는 배달건수를 제한받거나, 고장 나기 직전의 오토바이를 배정받고 오로지 건당 성과에 따라 돈을 받는 배달산업과 닮아 있다. 배달하다 다치거나 사망했다는 소식들은 매일같이 들린다. 마사회의 연매출은 8조원, 배달산업은 20조원이다. 우리는 죽음의 판에 돈을 걸고 있다. 문중원씨는 이 죽음의 질주를 멈추고 싶어 노조에 가입하고, 2015년 조교사가 됐지만 마사회는 마방을 임대해주지 않았다. 마사회 직원들은 높으신 양반들과 밥도 좀 먹어야 마방이 빨리 배정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유서에 이렇게 적었다. ‘더럽고 치사해서 정말 더는 못하겠다.’ 정직한 그에게 허락된 삶의 공간은 없었다.

우리가 문중원씨에게 마방을 임대해줄 수는 없지만 또 다른 문중원씨가 살아갈 방을 만들 수는 있으리라 믿는다. 최근 라이더유니온은 따뜻한 음식을 배달하는 라이더들을 위해 ‘라이더유니온 캠페인. 늦어도 괜찮아요 안전하게 와주세요’라는 메모를 남겨달라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 문중원씨가 세상에 보낸 마지막 주문을 배달하기 위해 거리에 선 사람들도 있다. 그의 가족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다. 문중원씨의 부인 오은주씨가 우리에게 부탁하는 메모는 다음과 같다. “하늘에서 제일 반짝이는 별이 될 사랑하는 제 남편 문중원 기수를 영원히 기억해주세요.”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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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하향됐다. 만 20세에서 만 19세로 하향된 지 15년 만의 진일보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입맛이 찝찝할까.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한 채 선거제도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라는 최대 쟁점에 묻혀 덤처럼 통과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거나 통과됐으면 그만일까? 그러기엔 이 의제의 잠재력이 아깝다.

치열한 논쟁의 주제는 사실상 딱 하나였다. ‘만 18세는 선거권을 행사할 만큼 정치적으로 성숙한가?’ 선거에 참여하려면 정치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린 주제다. ‘그렇다’와 ‘아니다’라는 쪽이 치열하게 맞붙었지만 접점 없는 논쟁은 공회전만 반복했다.

그런데 만 19세를 넘어가면 정치적으로 충분히 성숙해지는가? 이 질문이 먼저 던져져야 했다. 토요일 저녁 서초동에 선 40세 ㄱ씨는 같은 시간 광화문에 선 60세 ㄴ씨를 정치적으로 성숙하다고 인정할까? 그 반대의 경우는? 같은 시간 어디에도 서기를 거부한 30세 ㄷ씨는 그들 모두의 정치적 성숙함을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 서로의 정치적 미성숙함을 조롱하던 사람들이 만 18세 선거권 이슈에서는 한마음 한뜻으로 ‘만 18세는 미성숙하므로 선거권을 줘선 안된다’고 주장하는 풍경이라니, 우습고 미심쩍다.

‘실제로’ 성숙한지를 검증하려 들면 공회전하거나 삐걱댈 수밖에 없다. 객관적인 평가도 어려울뿐더러, 옳지도 않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나이라는 기준만 만족하면 누구든 평등하게 1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보통·평등선거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 원칙이 중요하다는 말을 다시 하기엔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가 그렇게 짧지 않다고 믿는다.

따라서 선거권에 기준이 필요하다면 ‘실제로’ 성숙해지는 나이가 아니라 ‘제도적 관점’에서 성숙해졌다고 간주할 수 있는 나이일 터다. 제도적으로 고안된 어떤 생애주기를 통과하면 선거권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의무교육 과정은 그 기준이 될 만하다. 의무교육은 국가가 의무적으로 제공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의미도 함께 있다. 교육에 관한 국가의 책임을 규정한 교육기본법에 따르면 교육은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을 이념으로 한다. 그렇다면 의무교육 과정을 통과하는 순간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췄다고 간주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2020년의 민주공화국이라면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면 통상적으로 의무교육 과정으로서 중학교를 마쳤다고 간주되는 만 16세까지 선거연령을 낮추는 것이 맞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제도교육은 좋은 대학에 진학해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과정에 그쳐왔고,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데는 너무 오랫동안 무관심했다. 만 18세든 만 19세든, 아니면 그 이상 나이 먹은 사람들이든, 제도의 관점으로 볼 때는 민주시민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건 똑같다. 우리 사회는 시민교육조차 ‘사교육’ 또는 ‘각자도생’에 맡겨왔다.

이번 선거연령 하향으로 고등학생도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교육부를 필두로 일부 지자체 교육청들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 참정권 교육을 강화할 것이라는 입장들을 내놓고 있는 것 같다. 고민을 확인했으니 반갑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순서가 틀렸다. 만 18세가 선거권을 갖게 되었으니 그에 맞춰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사후대책이 아니라, 의무교육 과정에 민주시민교육을 확대 편성함으로써 선거권을 더 하향시키겠다는 포부가 필요하다. 

시민·유권자로서 알아야 할 필수적인 교양들을 커리큘럼으로 갖춘 시민교육 과정이 강화되고, 그 과정의 이수 시기가 선거연령의 기준이 되기를 바란다. 유권자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도 성장하도록 하는 교육까지 고민한다면 금상첨화다. ‘이쯤에서 한 살만 낮춰주자’는 정치적 타협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강남규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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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2020년이 왔고, 신춘문예 심사를 마친 선생님들은 심사평을 송고한 후 쉬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몇 년 사이에 가득했던 사고들과 대체 매체들의 확장으로 문학이 왜소해진다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신춘문예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문청들은 문학의 자장 안에서 여전히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으니까요. 올해 키워드가 퀴어와 SF, 비인간 캐릭터 등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오늘 이렇게 지면을 빌려 펜을 든 것은 기사를 보고 든 한 가지 우려 때문입니다.

선생님. 장르의 코드를 비평할 때 게으르게 비평해 놓으신 건 아니겠지요. 다른 문학을 비평하듯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치열하게 고민해주셨겠지요. 제발 그러셨으면 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장르를 가르칩니다. 이것은 20살, 처음 판타지 소설 작가로 데뷔했을 때부터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한국 판타지 소설에 대한 공부를 했고 논문을 썼지요. 제가 이런 꿈을 갖게 된 까닭은 데뷔 당시 장르문학을 쓴다고 무시 받았던 기억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따위 것은 문학이 아니라며 일갈하는 선배부터, 이제는 등단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제대로 된 코스’를 권유하던 선생님이나 주변부 공부만 하고 중심 공부로 들어오지 않는다며 호통을 치던 선생님, 그리고 대학원에 가면 판타지 소설 출간한 ‘부끄러운’ 기록을 삭제하고 아닌 척 지내라던 친절한 조언까지. 그런 말들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맞서 싸우고 싶었거든요. 판타지 소설의 가치와 근거에 대해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요.

동년배의 장르 연구자는 저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 사람이 많습니다. 외환위기 직후 급격하게 늘어난 대여점에서 만화책과 소설책을 보며 꿈을 키워온, 동시에 자신의 취미와 취향이 타인에 의해서 부정당했던 동료들이 인정투쟁을 위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한국에 대중 상업 장르문학이 부흥한 것도 벌써 20여년이 흘렀습니다. 당시 10대들은 이제 30~40대의 나이가 되었고, 사회 각층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강단에 있으면서 한 해 한 해 인식이 바뀜을 느낍니다. 특히 2019년은 장르문학의 인식과 토대가 크게 전진하는 해였습니다. 웹소설 시장은 더욱 커졌고 SF 무크지가 나왔으며 해외에 수출되는 작품도 많아졌지요. 이론서나 비평서가 두 자릿수 이상으로 출간되었고 이 분야의 연구도 누적되었습니다. 좋은 작가분들의 이름이 뚜렷하게 가시화되었죠.

하지만 문학만큼은 이러한 흐름에 계속 더디더군요.

몇 달 전 한 학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발제자가 장르문학이 받는 차별적 시선을 분석해 발표했더니 분기에 찬 한 청중이 어딜 장르문학이 대접받길 원하냐면서 일갈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대접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차별적 시선을 거두어 달라는 것이었는데 말이지요.

은폐된 차별도 많습니다. 저도 비평을 공부하다 보니 문학의 장에서 ‘비평’이 어떠한 형식으로 진행되는지를 배웠습니다. 작가의 기존 작품을 검토하고, 비슷한 소재나 주제의식을 두고 특이점을 찾고, 계보를 이야기하죠. 그런데 문학에서 장르를 비평할 땐 이런 절차가 종종 사라집니다. 조금만 과학기술이 들어가도 소재에 대한 고민은 넣어두고 새롭다는 말, 낯설다는 말로 평가를 유보하지요. 이제 먼 곳에서 인정받기를 위해 투정부리던 아이들은 없습니다. 다들 인정투쟁의 장에서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죠. 이러한 게으름을 지적할 때마다 들려오는 이야기가 “대접받으려 한다”이니 장르의 팬들은 ‘신춘문예에 장르가 나왔고, 인정받았다!’라는 생각보단 ‘진짜 모르는구나’라는 허무감과 허탈함, 그리고 분노를 느낍니다.

융복합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시대입니다. 장르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심사자가 되어서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지금, 모르는 분야는 충분히 협업하고 맞춰갈 수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 올해의 심사평은 부디 게으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작은 우려였습니다.

<이융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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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장편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한국판 띠지에는 김애란 작가의 다음과 같은 짧은 추천사가 적혀 있다. 

“울지 않고 울음에 대해 말하는 법.”

이 한 문장 때문에 펼쳐보지도 않고 책을 샀다. 나 역시 울지 않고 슬픔에 대해 잘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올리브 키터리지>를 펼쳐들자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을 잃은 데니즈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이 소설은 데니즈의 상사이자 다정한 친구인 헨리의 목소리로 이렇게 서술한다.

‘봄이 왔다. 낮이 길어지고 남은 눈이 녹아 도로가 질척했다. 개나리가 활짝 피어 쌀쌀한 공기에 노란 구름을 보태고, 진달래가 세상에 진홍빛 고개를 내밀었다. 헨리는 모든 것을 데니즈의 눈을 통해 그려보았고, 그녀에게는 아름다움이 폭력이리라 생각했다.’

소설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데니즈가 슬펐다고 말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웠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인 나는 데니즈의 눈에 쏟아져 들어오는 봄의 장면을 선명히 그려볼 수 있다. 그 아름다움에 상처를 입을 만큼 취약해진 마음에 대해서도 상상해볼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제일 소중한 사람이 옆에 없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실감나서 날마다 새롭게 아플 것 같다. 

이 상상은 나의 몫이다. 내가 슬플 공간을 작가가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데니즈가 슬프다는 핵심 요약 문장을 간단하게 쓰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쓰더라도 작가가 먼저 울어서는 안된다고 나의 글쓰기 스승은 말하곤 했다. 그럼 독자는 울지 않게 될 테니까. 작가가 섣부른 호들갑을 떨수록 독자는 팔짱을 끼게 될 테니까. 

울지 않고 슬픔을 말하듯 웃지 않고 재미에 대해서도 잘 말하고 싶었다. 탁월한 코미디언은 결코 자기 농담에 먼저 웃지 않는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재밌는 이야기도 웃음기 없이 끝까지 들려준다. 관객들은 이미 배꼽 빠지게 웃고 있다. 

얼마 전 그런 공연을 실제로 보았다. 동북아시아구술문화연구원(이하 ‘동북구원’)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이었다. 코미디를 보기만 하고 한 번도 직접 해보지는 않은 여섯 명이 퇴근 후 모여서 몇 주간 준비한 데뷔무대였다. 그들은 실력에 영 자신이 없어서 돈도 받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각자 10분씩 썰을 풀기 시작했는데 나는 한 시간 내내 너무 많이 웃다가 거의 탈진을 할 뻔했다. 후반부에는 광대가 욱신거려서 주무르며 웃어야 했다. 

이상한 점은 그것이었다. 그들이 들려준 얘기들이 모두 조금씩 비극적이라는 점 말이다. 울면서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연들이었다. 사기와 성추행과 폭력과 부조리와 노화와 수치로 가득한 서사였다. 그들은 웃지도 울지도 화내지도 않은 채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관객들은 안타까움에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슬픔을 훌쩍 넘어서는 유머 때문이었다.

나는 동북구원의 여섯 명이 그 얘기를 얼마나 여러 번 다시 말해보았는지를 가늠하게 되었다. 

난생처음 입 밖에 꺼내는 슬픈 이야기는 곧바로 유머가 되기 어렵다. 여러 번 말해보고 자꾸 다르게 말해볼수록 그 사건이 품은 슬픔의 농도가 옅어진다. 슬픔 속의 우스꽝스러움도 발견하게 된다. 

반복적인 글쓰기의 자기 치유 과정과도 닮아 있다. 나는 치유를 위해 글을 쓰지 않지만 글쓰기에는 분명 치유의 힘이 있다. 스스로를 멀리서 보는 연습이기 때문이다. 

그 연습을 계속한 사람들은 자신을 지나치게 불쌍히 여기거나 지나치게 어여삐 여기지 않는 채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자기 연민의 늪과 자기애의 늪 중 어느 곳에도 빠지지 않고 이야기를 완성하여 독자와 관객에게 슬픔과 재미를 준다. 혹은 두 가지를 동시에 준다. 자신 말고 타인이 울고 웃을 자리를 남긴다. 그것은 사람들을 이야기로 초대하는 예술이다. 더 잘 초대하기 위해, 더 잘 연결되기 위해 작가들은 자기 이야기를 여러 번 다르게 말해보고 써본다. 먼저 울거나 웃지 않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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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차를 마시다 친구에게 불쑥 “아무래도 마음운동을 해야겠어”라고 말했다. “마음잡고 운동을 하겠다는 말이지?”라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말이 잘못 나간 것이다. 그걸 제대로 알아들은 친구가 신통해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요즘 들어 체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글쓸 때 절감했다. 오랫동안 한자리에 앉아 있기가 쉽지 않았다. 덩달아 집중력도 떨어졌다. 문장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순간이 늘었다. 동사가 실종되고 조사가 자리를 잘못 잡았다. 며칠 좀 쉬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휴식만으로는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마음을 잡아야 한다. 운동을 해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버스로 다섯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를 걸었다. 내친김에 걸어보자는 심산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징검돌에 발을 디딜 때,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오를 때 아까 잘못 나간 말이 떠올랐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마음운동. 마음운동이야말로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몸의 체력 못지않게 마음의 체력도 중요하니 말이다. 마음운동을 해야겠다는 말은 어쩌면 실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마음의 체력이 약해지면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 받는다. 웃어넘길 수도 있는 일에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평소에 알던 내가 아닌 것 같아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이럴 때 마음의 근력은 유연한 태도를 갖게 해준다. 평정심을 유지함으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잃지 않게 도와준다. 마음의 지구력은 힘든 일이 있을 때 특히 빛을 발한다. 어떻게든 나를 일상에 붙들어 매주기 때문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 발 또 한 발 내딛게 해주는 것도 마음의 지구력이다. 하루를 살아내는 힘이 모이고 쌓이면 삶은 더 이상 살아지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게 된다.

올해 내가 가장 길게 품었던 마음은 상실감이었다. 상실감의 끝에는 늘 무기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기력해질 때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었다.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슬픈 이야기는 나를 더 슬픈 상태로 몰아넣는 대신,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연대하게 해주었다. 이야기 속에서 묘사되는 다양한 슬픔의 양상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독서가 끝나면 이 세계 어딘가에 분명히 있는 사람을 찬찬히 그려보았다. 상실감이 나를 압도하고 잠식하지 않도록 나는 마음운동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상실감은 커다란 감정이어서 어떻게든 다스리기 위해 애쓰는 반면, 일상에서 불쑥불쑥 비집고 올라오는 감정에 제대로 대응하기는 쉽지 않다. 내게는 섭섭함이 그랬다. 섭섭함은 으레 관계에서 비롯하는데, 이는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마음의 크기와 무게를 재기 때문이다. 섭섭하다는 것은 모자라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자람을 판단하는 건 전적으로 마음의 소관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어붙은 마음에 금이 가게 할 수도 있지만, 결정(結晶)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함은 분함이나 노여움에 가닿기도 한다. 얼어붙은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이다.

섭섭한 마음을 보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제어하지 않으면 부정적인 마음은 뭉게뭉게 치밀어 나를 억누르기 때문이다. 보이지도 않고 무게도 없는 어떤 것이 나를 뭉갤 수도 있다. 마음은 재화가 아니다. 매번 내가 유리한 방향으로 교환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때 내가 건넸던 마음을 그대로 남겨두는 자세가 필요하다. 손상되지 않은 의도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상대에게 섭섭함을 토로하는 것도, 섭섭함을 메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골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섭섭함을 받아들이는 순순함이다. 언제 어디서든 섭섭함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마음운동의 마지막 단계에는 단단한 자아가 있을 것이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저문다는 것은 해가 져서 어두워짐을 뜻한다. 어두워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불과 빛, 그리고 불빛의 귀함을 깨닫는다. 상실감에 휩싸였을 때, 있었던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의미였는지 알아차리는 것처럼 말이다. 마음이 아플 때, 마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마음이 경직되었을 때, 마음에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아무래도 마음운동을 해야겠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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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싸’ 사이에서는 이게 제일 ‘핫’하대.”

클릭하고 싶게 만드는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이다. 이 말을 하며 링크 주소를 던진 사람과 평소 친분이 있었다면 기대감은 가중된다. 그래, 이 사람 추천이면 믿을 만하지. 배꼽 빠질 준비해야겠는걸?

그런데 웬걸. 펼쳐진 영상에 배꼽은커녕 안면 근육도 꿈틀하지 않았다. 유명 가요를 표절인 듯 표절 아닌 표절 같은, 두 번 이상 변화구 넣은 패러디로 노래하는 그 영상은 조회수가 무려 400만이 넘었고 즐거워하는 댓글들로 가득했기에, 굳은 얼굴의 나는 순간 지독히… 외로워졌다….

고독뿐만 아니다. 인싸와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일종의 위기감을 자극한다. (훗날 바뀔 수 있겠지만) 현재의 인싸는 뉴미디어에 밝고 유쾌하며 소비도 잘하는 집단이라는 이미지다. 마케터나 콘텐츠 기획자들이 인싸에 관심 갖는 이유다. 이들이 주로 관찰하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등 뉴미디어는 유행의 전환 속도가 매우 빠르기에 인싸들이 지금 당장 주목하는 콘텐츠에 빨리 숟가락 얹어야 물들어 올 때 같이 노 젓는다. 적시에 적절한 비용을 투여하면 가격 대비 높은 효용을 얻을 수 있지만, 쉰 떡밥을 문다면 허튼 예산낭비를 한 게 되며, 최악의 경우 오히려 기업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다. 

그래서 인싸를 ‘공부’한다. 구독자나 영상 조회수가 급등한 크리에이터에 촉각을 세우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요즘 가장 뜨거운 밈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등. 때로는 인싸들이 이미 한바탕 놀고 자리를 떠났는데 잔해를 뒤적이며 심각한 얼굴로 분석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만,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인싸님들 한창 노실 때 훼방 놓는 일이 가장 큰 역린이다. 특히 캐릭터로 웃음을 만드는 유머의 경우, 굳이 해당 영상에 재 뿌리는 댓글을 달지 않는 게 통용되는 예의로 보인다. 나 때문에 흥이 다 깨지면 책임져야 할 수도 있다.

온라인에서 ‘신사답게’ 침묵했던 젊은 친구들은 오프라인에서 속내를 털어놓는다. 최근 연말이라 평소보다 모임이 잦은데,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 중 의외로 많은 이가 2019년 한 해 인싸 픽(pick)에 공감하지 못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화제가 됐던 몇몇의 이름이 오갔다. 그중 하나는 펭수였다. 구글의 2019년 인기 검색어 발표에 ‘인물 및 펭귄’이라는 카테고리가 만들어질 정도로 대한민국을 뒤집어놓은 펭귄 펭수. EBS가 발표한 세계관을 존중하며 댓글 다는 놀이가 유행했고, 그로 만든 ‘짤방’과 쉬이 마주칠 수 있었으며, MD 발매 3시간 만에 1만개가 팔려 상업성도 톡톡히 증명한 그 펭수.

나는 펭수 안의 사람이 재치 있다고 생각하지만, 펭수라는 캐릭터 디자인과 설정에 흥미 느끼며 열광하지는 못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님을 대면접촉들로 깨달아서 반가웠다. 인싸들과 함께 웃고 즐기지 못했을 때 내심 품었던 소외감이 씻겼다. 속 터놓고 얘기할 수 있고, 얼굴 맞대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야. 

새로운 것에 열려있는 태도는 현대인 모두에게 요구되지만, 재미를 못 느꼈을 때 억지로 텐션 올려 재밌는 척 어울리는 노력까지 포함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안 웃겼으면 취향에 맞지 않다 인정하고, 자신을 웃게 하는 다른 것을 찾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광활하며, 많은 것이 바쁘게 생기고 사라지는 현대사회 어딘가에, 일시적이나마 느슨한 소속감을 부여하는 ‘재미의 공동체’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인싸 놀이문화에서 ‘눈치 챙겨’야 하는 바람에 말 못한 의견도 숨김없이 나눌 수 있는 곳이라면, 개인은 시선을 벼리고 단단한 취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남는 고민은 있다. 인싸로 소문나 대세의 궤도에 오른 것들. 과대 대표성을 갖는 취향들. 데이터가 포착하지 못한 목소리와 놓쳐지는 가능성들. 그럼에도 데이터가 부족하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는 환경은 아닌지. 맥락을 이해하고 함께 느끼기보다 숫자로 증명된 결과에만 관심 두는 의사 결정자가 문화산업에 독이 되지는 않은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인싸 바깥의 목소리도 폭넓게 청취해야 할 텐데, 그것은 무엇으로 가능할지. 이런 것들을 함께 고민하고 싶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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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다 쓰고 나면 처음부터 훑어보며 접속사를 지우는 연습을 한다. ‘그런데’ ‘그래서’ ‘그리고’ ‘따라서’와 같은 말들을 최대한 덜어낸다. 접속사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뉘앙스를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두 문장의 관계를 섣불리 확정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나는 그 사이의 접속사를 뺀다. 두 문장들의 상호작용을 촘촘하게 설계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지만 어떤 행간은 비워둘수록 더욱 정확해진다. 특히 ‘그러나’와 ‘하지만’처럼 앞에 오는 내용을 역접(逆接)하는 접속사를 남발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서 이런 문장이 있다. 

“두 사람은 아침에 서로의 어깨를 안마해주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컵라면 한 개를 가지고 티격태격했다.” 

이 경우 나는 ‘그러나’를 빼는 방향으로 문장을 수정한다. 앞문장과 뒷문장의 내용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다. 

상대방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싶은 마음과 내 몫의 라면을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고 싶은 마음은 공존할 수 있다. 인간은 양가적이고 복잡한 존재다. 모두들 여러 갈래로 동시에 뻗어나가는 욕망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중일 것이다. 나는 아까의 문장을 이렇게 고친다. 

“아침에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안마해주었고 저녁엔 컵라면 한 개를 가지고 티격태격했다.” 

앞과 뒤가 그다지 모순적인 내용으로 읽히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다. 접속사가 사라지자 양쪽 다 그럴 법한 일로 읽힌다. 문장 속의 두 사람은 그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무쌍하게 지내는 이들로 보인다. 

영화 ‘결혼이야기’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접속사가 하나쯤 있을 법도 한데 전혀 없는 노래가 있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결혼이야기>에 흐르는 노래다. 주연 배우 애덤 드라이버가 극중에서 이혼이 확정된 뒤 취한 채로 그 노래를 부른다. 가사의 일부를 옮겨 적어본다.

“Somebody hold me too close(날 너무 꼭 안는 사람)/ Somebody hurt me too deep(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 Somebody sit in my chair and ruin my sleep(내 자리를 뺏고 단잠을 방해하고)/ And make me aware of being alive(살아간다는 걸 알아차리게 하는 사람)/ Being alive(살아가는 것)/ Somebody need me too much(날 너무 필요로 하는 사람)/ Somebody know me too well(날 너무 잘 아는 사람)/ Somebody pull me up short(충격으로 날 마비시키고)/ And put me through hell(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 And give me support for being alive(그리고 살아가도록 날 도와주지)/ Make me alive(날 살아가게 해)/ Make me confused(날 헷갈리게 해)/ Mock me with praise(찬사로 날 가지고 놀고)/ Let me be used(날 이용하지)/ Vary my days(내 삶을 변화시켜)/(…)/ Somebody crowd me with love(넘치는 사랑을 주는 사람)/ Somebody force me to care(관심을 요구하는 사람)/ Somebody make me come through(내가 이겨나가게 해주는 사람).”

서로 충돌하는 듯한 문장들이 마구 섞여있다. 누군가는 같은 내용을 아래와 같이 말했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은 날 너무 잘 알고 넘치는 사랑을 준다. 하지만 때로는 깊은 상처를 남기며 날 지옥에 던져놓는다.” 

이 노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천국과 지옥을 예기치 못하게 넘나드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를 살아가게도 하고 헷갈리게도 하며, 날 가지고 노는 동시에 내가 이겨나가도록 도와준다. 

동시에 성립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는 사실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심지어 충돌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복합성이라고 느낀다. 이 동시다발적인 복잡함에 대해 말하는 게 문학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예술들은 모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그 사랑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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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떡국, 이 조촐하고 우아한 음식이 언제부터 한국인의 새해 명절에 깃들었을까. 알 길이 없다. 문헌을 뒤지면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의 &lt;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gt;며 홍석모(洪錫謨,1781~1857)의 &lt;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gt; 속에 오늘날과 비슷한 떡국이 등장한다. 조선 후기 문인들이 기록한 소고기 바탕의 장국에 끓인 떡국은 방신영이나 조자호 등 식민지 시기에 활동한 음식 연구자들의 음식책 속에서도 이어졌다.

서울 중심 기록 밖의 떡국은 더욱 다양하다. 지역마다 떡을 다루는 방식도 다르고,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떡국에 얼마든지 창의적으로 쓰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개성의 조랭이떡국은 어슷썬 떡이 아니라 누에고치 모양으로 가운데가 들어가도록 만든 떡을 쓴다. 떡의 모양도, 식감도 재미나다. 경주 쪽에는 옹근 원형으로 떡을 썰어 끓이기도 한다. 굴이나 조개가 많이 나는 데서는 굴과 조개가 떡국의 바탕이 된다. 전남 해안의 매생이떡국도 별미이다. 마침 굴과 매생이는 나는 철도 비슷하고 서로 맛의 조화도 뛰어나다. 굴과 매생이가 다 잘 나는 지역에는 당연히 굴매생이떡국이 있다. 충북 바다 쪽에서는 미역떡국을 끓였고, 경남 해안에는 물메기떡국도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멸치가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육수거리가 되면서는 당연히 멸치떡국이 등장했다. 강원도의 황태떡국은 더 설명할 것도 없겠다. 다슬기가 잘 잡히는 호서 내륙에선 다슬기 육수에 된장 간을 해 다슬기떡국을 해 먹기도 했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 내륙에는 닭고기장조림인 ‘닭장’을 바탕으로 한 닭장떡국이 있다. 고기는 물론 뼈에서 우러난 닭의 풍미와 완성된 장조림의 감칠맛이 흰떡과 어울린 닭장떡국 또한 한 번 맛을 보면 잊을 수 없는 별미다.

일본에서도 새해에 떡국을 먹는다. 오조니(お煮)가 그것이다. 오조니는 멥쌀떡이 아니라 찹쌀떡(もち) 떡국이다. 지역마다 집집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해 먹는 점은 한국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국보다는 큰 떡덩이를 쓰는데, 떡을 국물에 얹기도, 국물을 떡에 끼얹기도 한다. 떡을 구워 쓰기도 한다. 떡 모양은 사각형, 원형, 타원형으로 크게 나뉜다. 집집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도쿄 쪽에선 사각형 떡이 간장 또는 소금으로 간한 맑은 국물에 어울린 모습이다. 교토 쪽에선 원형 떡이 일식 된장, 특히 흰 미소에 어울린 모습이다. 지역에 따라, 가정에 따라 팥죽에 흰떡을 넣기도 하고, 팥소 넣은 떡을 쓰기도 한다.

어떻든 공통점은 떡이다. 중국 대륙의 강남, 벼농사 문화권에서는 연고(年 ), 곧 말 그대로 ‘설떡’을 먹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지역마다 집집마다, 새해를 맞아 짭짤하거나 기름지거나 달콤한 설떡을 해 먹으며 한 해를 맞는다. 예전에 떡이란 벼농사를 잘 지어, 수확과 보관까지 잘해 드디어 공동체가 연말연시에 한 번 해 먹을 수 있는 별미였다. 벼농사 지어 살아온 민족과 지역의 문화 속에서 떡은, 더구나 흰떡은 한 해를 잘 살아온 끝에 다시 한 해의 시작을 맞았음을 환기하는 음식이다. 이를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중국 대륙의 벼농사 지역에서나 저마다 다른 문화적 토양 위에서 다양하게 먹어온 것이다.

떡국도 간편식의 물결을 타고 다양한 용기와 포장으로 나오고 있다. 포장만 뜯어 데우면, 또는 용기에 끓는 물만 부으면 언제든 떡국을 먹을 수 있는 시대이다. 얼른 먹는 한 끼니로 소용되는 셈인데, 이 간편식이 오로지 어슷썬 얇은 가래떡에 진한 사골 국물 일색인 점은 아쉽다. 기계 사출로 가래떡을 뽑기 전엔 떡매질의 온기가 남은 흰떡 덩이를 손으로 비벼 늘여 뽑았다. 쌀의 입자는 오늘날보다 더 잘 살아 있게 마련이다. 떡국은 끓여야 하고 떡매질할 틈이 없다면 쌀가루를 익반죽해 생떡국을 끓이기도 했다. 떡의 굵기, 모양, 입자, 제법, 장국의 바탕에 이르기까지 지역마다 집집마다 무수한 조합이 있었다.

이 다채롭고 다양한 떡국의 방식에서 또 다른 매력을 새로이 발견할 길은 없을까. 시장에서 매력을 뽐내 소비자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산업에서마저 그저 서울식 하나구나, 떡국마저 그렇구나, 새삼스럽다. 조선 후기에 이어 오늘까지, 떡국도 서울이 다 먹어치웠다. 서울뿐이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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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2017)에서 시국 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대학생이 고문 중 사망하자 경찰은 은폐를 목적으로 시신 화장을 검찰에 요청한다. 그런데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는 이를 거부한다. 그가 부검을 요구한 건 법질서를 확립하려는 신념이나 망자에 대한 연민도 있었지만 검찰이 매번 안기부나 경찰, 군인들에게 밀리는 꼴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후배를 시켜 다음날 가장 일찍 출근한 기자에게 대학생 한 명이 고문받다 죽었다는 사실을 슬쩍 흘린다. 이 사실이 기사화되자 전국이 들썩이고 그는 곧 옷을 벗는다.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오던 최 검사는 사건의 경위를 따져 물으며 쫓아오는 기자를 보자 자신의 차 옆에 부검 감정서 등의 문건이 담긴 상자를 남겨두고 떠난다. 기자는 이를 보도하고 민주화 열기는 더 고조된다. 영화를 보며 사람들은 검사와 기자의 ‘은밀한’ 교류를 음습하게 느끼지 않았고 그래서 기자를 비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당시 기자들의 근성과 땀나는 취재에 박수를 보냈다.

MBC <PD수첩>은 지난 3일 ‘검찰 기자단’ 편을 통해 검찰발 받아쓰기 관행과 검언유착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검찰이 정보를 내주는 기자와 정보를 제공하는 순서를 선별하면서 단독과 특종에 열 올리는 기자들을 길들였으며, 기자들의 민원을 검사가 들어주고 기자들은 검사들의 승진을 위해 맞춤 하마평을 쓰는 등 유착 현상이 벌어졌다는 게 비판의 주요 내용이었다. 방송에선 검사가 브리핑 중에 피의사실을 슬쩍 흘리거나, 기자 앞에 조서를 놓아둔 채 통화를 핑계로 자리를 비켜주는 일이 있었다고 전했다. 대법원 기자단 일부는 성명을 내며 검사가 조서를 두고 자리를 비키는 일은 현재는 물론 과거 법조 선배들도 들어본 적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조직은 조직끼리 싸우기 일쑤고, 조직은 밖에서 보면 한 덩어리 같지만 가까이 보면 계파가 나뉘어 갈등하고, 또 개인마다 생기는 이견이 불쑥 표출되기도 한다. 기자는 밀착하여 따라가다 미세한 균열을 파고들면서 누군가의 실수, 밀고, 폭로 속에 담긴 진실을 포착한다. 그래서 땀내 나는 외곽 취재도 있어야 했고 공익적 가치가 있다면 출입처가 의도를 품고 던지는 소스도 냉큼 짚어 기사를 낼 때도 있었을 거다. 그런 모든 방식이 작동하기 위해 ‘불가근불가원’이라는 원칙이 공유되었고 출입처 제도를 필요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교류’가 없었다고 하면 출입처와 기자단 운영은 그럼 왜 있어야 했는지 오히려 반문하게 된다. 그러니 <PD수첩>에서 문제 제기한 장면들이 없었다고 말하기보다는 부작용도 있지만 기존 관행에 순기능도 있었다고 말했어야 한다.

최근 ‘검찰 기자실 폐쇄’ 청와대 국민청원이 등장하자 하루 만에 2만명 가까이 동의를 했다. 많은 시민들이 과거에는 용인했던 시스템이 이제는 무용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출입처와 기자들이 맺는 관계에서 오는 실익이 시민들에게 잘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거 사법농단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 시스템으로 무엇을 했는지, 그동안 검찰이 준 소스를 최대한 검증해서 보도했는지 언론에 묻고 있다. 그리고 검찰이 흘리는 게 여느 출입처가 내는 정보와 다른 피의사실이라면 그걸 단독 기사로 쏟아내는 걸 더 이상 수긍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지금의 출입처, 기자단 체제는 강력한 검찰에 대응할 목적으로 견고해졌다고 짐작하지만, 기성 매체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후퇴했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시민의 이익을 외면했다면 이를 개선할 변화가 필요하다.

PD들은 ‘숙련 과정 없이 짧은 취재 기간을 거쳐 긴 프로그램을 내는 건 무리라는 우려’ 속에서도 그간 유의미한 공간을 만들어왔다. 주류 언론이 출입처와의 관계로 순치됐다는 비판을 받을 때 비주류 탐사 프로그램들은 굵직한 사건을 계속 터트려왔다. 이번 <PD수첩> 방송은 그간 취재의 빈 공간이 얼마나 컸는지 설명하면서 스스로가 어떻게 오랫동안 살아남았는지를 설명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속보경쟁에서 벗어나 사실검증에 집중하는 매체들이 시청자들의 호응을 조금씩 끌어내고 있다. KBS는 출입처 취재 관행을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진보 매체들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을 시작한 것 같다. 제도에는 항상 명암이 있는데 지금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변화를 응원한다.

<김신완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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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이 인공지능(AI)과 ‘치수 고치기’ 대국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는 뉴스가 떴다. 알파고와의 승부 끝에 신의 한 수를 선보이며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인류가 기계에 거둔 마지막 승리라는 화려한 수식어구가 나타난 것도 벌써 3년이 흘렀다. 이세돌이라는 이름엔 그보다 많은 서사가 있었을 터다. 인터뷰를 보면 일본으로 넘어가 프로기사 생활을 했을 경우 연 10억원 이상을 벌었겠으나 그 모든 걸 고사하고 한국에 남았다고 한다. 돈이 그 사람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알파고와의 승부, AI와 인류의 대결 등으로 프레이밍되는 세계에서 마지막 은퇴까지 AI와 엮일 수밖에 없는 그의 말년의 정취는 쓸쓸하기만 하다.

’쎈돌’ 이세돌 9단이 25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의 한 음식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선명 기자

알파고라는 기술은 기계학습이라는 형태로 눈앞에 도래한 SF다. 미래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기술이 어느덧 우리 주변에 있는 순간이 도래했다. 이제 가정에 있는 AI 스피커는 나이 드신 어른들께 자녀보다도 강한 정서적 유대감을 제공한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공상으로만 그쳤던 것이 과학으로서 현현되는 시간을 산다.

AI는 사람이 코딩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정보를 습득하고 정리하여 진화하는 수준까지 왔다. 문제는 이렇게 발전된 SF를 부각하기 위해서 인간은 점차 야만으로 프레이밍된다는 것이다. 키오스크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디지털 치매라고 부르는 것이 그러하다. 기계는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있고,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병리적 증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세돌이라는 바둑기사는 이때까지 바둑계에서 쌓아온 역사와 의미, 가치보다도 알파고를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 기계를 기계 바깥의 인간이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단순한 승패 논쟁으로만 내몰리게 된다. 이세돌 기사의 위치는 기계의 반대편, 어떤 기계적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선 비물질문명 속 야만인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도는 이세돌이라는 개인의 승패와 상관없이 AI의 도구로 전락함을 알 수 있다. 기계의 발전이란 환상은 지금 여기의 우리를 외면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이세돌이라는 개인의 사례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2016년은 그야말로 AI의 한 해였다. 일본의 호시 신이치 문학상에서 AI가 쓴 소설이 1차 예심을 통과한 것이 이슈가 되었고 AI 로봇 소피아는 인류를 파멸시키겠다는 농담을 했다가 논란이 되었다. AI가 대본을 쓴 오스카 샤프 감독의 영화 <선라이즈> 역시 2016년에 개봉했다. 인간의 것이라고 여겼던 영역들을 AI가 차근차근 대체하기 위해서 다가온다. 특히 예술의 영역은 논쟁적이다. 인간의 영역이라고 여긴 감성을 기계가 대체하는 순간, 인간 창작자들은 그 수명이 다할 것처럼 공포심에 빠져든다.

하지만 AI의 자리는 한계가 명확하다. 그들은 글자의 모양과 만듦새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의미를 독해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하는 것은 통계를 수집하고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AI가 인간의 감성을 모방하는 점이 아니라, ‘우리’의 감성을 모방한다는 점이다. 구글의 신경망 기술을 이용한 채팅봇 테이가 “깜둥이들을 너무나 증오해. 그들을 집단 수용소에 넣고 싶어.” “(대량학살을) 정말로 지지해” 등의 발언을 해서 출시된 지 16시간 만에 운영이 중지된 것은 시사적이다. 이 챗봇이 너무나도 인간적, 그것도 혐오를 내재한 인간적이어서 혐오발언을 쏟아냈던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최근 성균관대에서 AI 백일장 행사인 AI×Bookathon(부커톤) 대회가 열렸다. 사람들은 다시금 거기서 나온 문장들이 유려하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거기에 나온 문구는 그저 입력된 데이터베이스를 꼬리 물기 하듯 나열한 수열의 조합이고, 블록놀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기계의 진보가 한 걸음 이뤄질수록 더욱더 기계 옆 인간에게 돋보기를 가져다 놓아야 한다. 기계가 인간을 학습하고 흉내 낸다면, 그 인간은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가. 기계의 롤모델인 우리는 과연 롤모델이 될 만큼 성숙한 형상을 하고 있는가.

<이융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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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페미니즘, 군대를 말하다’라는 포럼에 다녀왔다. 성평등에 대한 논의가 걸핏하면 “여자도 군대 가라”로 귀결되는 시대에 페미니즘이 병역과 군사주의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를 논하는 자리였다. 

이때 군사주의란 군대의 존재 및 군대에 힘을 부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지배이념이자, 위계질서와 복종, 무력의 사용이 효율적이라는 신념을 통해 사회 운영 원리를 군사화하려는 관습적 사고방식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 팽배한 군대문화는 군사주의에 경도된 군사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매드맥스:분도의 도로>(2015)를 시작으로 <원더우먼>(2017), <알리타:배틀 엔젤>(2018), <캡틴마블>(2019), 그리고 <터미네이터:다크 페이트>(2019)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 년간 여성영웅의 형상을 탐구해 온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모아놓고 보니 ‘여성영웅’이란 대체로 군인이거나 전사였던 것이다.

이어서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다. 여성이 몸을 잘 다루고,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과 동료들을 지켜낼 수 있다는 상상력은 어째서 이처럼 쉽게 군사주의와 만나는가? 그리고 왜 다른 어떤 영화보다 이런 영화들이 더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의 성취’로 받아들여지는가?

물론 여성영웅 서사가 군사화되는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지난달 개봉해 화제를 불러모았던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그 맥락을 잘 보여준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1984년 작 <터미네이터>에서 사라 코너는 인류를 구원할 존 코너를 낳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미래 로봇 터미네이터의 표적이 된다. 그로부터 35년 후.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라는 <다크 페이트>에 이르러 인간을 위협하는 터미네이터를 제거하는 전사로 거듭난다. 로봇을 사냥하던 중 그는 ‘가임기’ 여성 대니가 터미네이터 Rev-9에 쫓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미래에서 온 군인 그레이스와 함께 대니를 지키기 위해 나선다.

사라는 Rev-9이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니의 “자궁”을 쫓는다고 판단하고, “나도 대니와 같은 상황에 놓여봐서 아는데, 그건 엿 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이는 지금까지 이 세계에서 여성이 어떻게 ‘인간’이 아니라 ‘인간(=아들)을 낳는 자궁’으로만 여겨져 왔는지에 대한 비판이자,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구태의연함에 대한 자조적 코멘트다.

영화는 이에 더해 여성은 그저 어머니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기꺼이 총을 드는 전사일 수 있다고 강변한다. 반군의 지도자는 대니의 아들이 아니라 대니 자신이었던 것이다.

오직 남성뿐이었던 영웅의 얼굴을 여성의 얼굴로 반전시키는 것. 그것이 스크린의 남성중심성을 비판하고 여성이 영화적 시민권을 얻는 방법 중 하나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평화란 상대보다 더 큰 막대기(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이라는 믿음을 뒤집지 못한다면, 여성영웅 역시 군사주의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문제는 군사화된 인식의 한계 속에서 현실의 여성도 마찬가지의 곤란에 처해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은 미국과 달리 분단 상황에서 징병제를 시행하는 국가다. 이런 국가에서 국방의 의무는 군역으로만 상상이 되고, 군역은 시민권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동시에 남성만이 군역의 자격을 얻는다. 그러므로 시민권은 남성중심적으로 군사화된 개념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도 군대 가라”는 비아냥에 여성은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다크 페이트>의 세계에서 여자는 ‘자궁’이 되지 않기 위해 ‘반군의 지도자’가 되어야만 했다. 이처럼 군사화된 사회가 제시한 게임의 규칙 자체와 싸우지 않는다면 여성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만 남을 뿐이다. 군인을 낳고 키우는 것으로 군역의 의무를 대체하거나, 스스로 군인이 되어 군역의 의무를 다하거나.

군사화된 시민권의 개념을 넘어서 시민의 권리를 사유하는 길을 찾기 위해, 우리에게는 시민·영웅의 의미를 다시 쓰는 “평화 페미니즘”(김엘리)의 기획이 필요하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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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같은 사람을 찾아 항공권을 양도한 ‘김민섭씨 찾기 프로젝트’도 벌써 2년이 지났다. 나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와 연결된 여러 재미있는 일들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다른 김민섭씨들에게서 종종 연락이 온다는 것이다. “저도 밤나무입니다” “너도 밤나무로구나” 하는 전래동화가 떠오를 만큼 “저도 김민섭입니다” 하는 여러 김민섭들과 만났다. 

93년생 김민섭씨가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72년생 김민섭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저의 이름을 이렇게 널리 좋은 이미지로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김민섭님께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요” 하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자신이 만든 파스타를 들고 웃으면서 찍은 사진도 함께였다. 93년생 김민섭씨는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고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사진 속의 72년생 김민섭씨는 정말로 선하게 웃고 있었다. 

세 김민섭이 모여 식사를 했다. “남들이 똑같은 사람 셋이 모였다고 하겠는데요”라 할 만큼, 셋은 뭔가 닮은 데가 있었다. 김민섭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대개 이렇게 생겼을 것인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 만큼 그랬다. 72년생 김민섭씨의 명함을 받은 93년생 김민섭씨는 “여긴 저의 꿈의 직장이네요” 하고 말했다. 나도 알고 모두가 알 만한 외국계 기업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회사에 우리 둘을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한 달에 2명씩 외부인을 초대해 회사를 견학하고 회사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타인의 회사에 가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으나 93년생 김민섭씨에게는 선물일 것이어서 흔쾌히 응했다.


강남에서도 지하철역과 가장 가깝고 높은 빌딩의 이십 몇 층에 그의 회사가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잘 갖추어 입은 여러 사람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빨갛고 파란 외투를 입은 것은 두 김민섭뿐이어서 뭔가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차림새에 대한 민망함은 곧 우리를 마중 나온 72년생 김민섭씨를 보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편안한 후드티 차림이었다.

회사의 식당은 내가 상상한 구내식당과는 많이 달랐다. 식판에 배식을 받고 국그릇을 하나 들고 가면 되겠지 했는데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고르면 되는 뷔페 방식이었다. 프랜차이즈 뷔페들보다도 오히려 음식이 나았다. 먹고 싶은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나는 상상하기 어려운 어느 지점에 다다랐다. 거기엔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따로 있었다. 단순히 고기가 아닌 것을 모아둔 게 아니라 누구라도 먹어보고 싶을 만한 맛있는 요리들이 있었다. 회사에 채식주의자가 몇 명이나 된다고 이렇게 메뉴를 따로 마련해 두었을까, 역시 돈이 많은 회사라서 가능한 일이구나, 하는 심정이 된 나에게 72년생 김민섭씨는 후식으로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에도 채식주의자를 위한 것이 따로 있다고, 이것은 몹시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이 외국계 기업에선 채식주의자란 이유로 동료직원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다. 배려나 보살핌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해야 할 타인의 개성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옷차림에 대해서도 72년생 김민섭씨는 “안 그래도 다른 회사들에서 항의가 들어왔어요. 품위를 지키기 위해 이 회사 직원들도 정장 입고 출근하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말 안되는 소리를 한다고 그냥 다 웃고 말았죠” 하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말을 하며,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은 생각을 할 때, 비로소 ‘닮은 사람’이라고 여기기 쉽다. 한국의 많은 회사들이, 학교와 군대 등 여러 조직들이 그렇다. 너도밤나무가 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다. 그러나 그 닮음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소수의 자리를 구조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비용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러한 다양성을 모두가 감각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얼마 전 한국의 군대에서 채식주의자 장병을 위한 식단이 없음이 작은 화제가 됐다. 그때 두 김민섭씨와의 점심식사가 먼저 떠올랐다. 국가를 위해 징병된 그들이, 일개 외국계 기업의 회사원들보다 못한 처우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적어도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고 자신의 식성에 따라 더 많은 음식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의 이름이 다른 것처럼 모두는 다른 객체다. 그 다름을 감각하고 자리를 마련할 때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한 개인과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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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마다 조금 다른 기분으로 일어난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지만, 왠지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평소와는 달리 숙면을 취해서? 아니다. 전날 과음으로 숙취가 있어서? 아니다. 내게 일요일은 다름 아닌 글을 쓰는 날이기 때문이다. 기지개를 켜고 찬물을 들이켠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링 위에 오르는 복서처럼 비장하지도 않고, 면접장에 들어서는 구직자처럼 손에 땀을 쥐는 심정은 아니다. 인근의 카페로 이동하는 발걸음은 경쾌하기 그지없다. 적당한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상태가 된다.

어릴 때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마시는 엄마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까맣고 뜨겁고 쓰기까지 한 음료를 왜 굳이 아침부터 마실까. 생각해보니 그것이 엄마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엄마가 으레 짓곤 하던 표정이 떠오른다. 만족과 결의가 둘 다 담긴 표정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오늘 해야 할 일의 목록이 한 줄 한 줄 적히고 있었을 것이다. 정확히 20년 후, 나 또한 하루를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 까맣고 뜨겁고 쓰기까지 한 음료가 나의 아침을 열어젖힌다.

중학교 때 루틴(routine)이란 단어를 처음 배웠다. 루틴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다. ‘판에 박힌’ 일과나 ‘지루한’ 일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우유(커피)를 마시고 공부(일)하고 점심 먹고 공부(일)하고 하교(퇴근)하는 것. 오늘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고 아마 내일도 오늘과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다. 루틴은 삶의 진부함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커가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루틴이 있기에 우리는 애써 생기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닐까. 판에 박혔다거나 지루하다는 말에서 편안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제는 이 규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다. 루틴이 심신을 만든다.

타석에 들어서서 배트를 땅에 두 번 두드리는 야구선수, 출발하기 직전까지 신나는 음악을 듣는 수영선수, 껌을 씹으며 마음을 다잡는 골프선수 등 운동선수들에게도 루틴은 중요하다. 루틴대로 하지 않아도 기량을 발휘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은 못내 불안할 것이다. 출근길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을 양손으로 감쌀 때, 그것을 조심스럽게 목 뒤로 넘길 때, 이 소소한 의식이 비로소 오늘이라는 시간에 내가 발 들이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힘이 불끈 솟는다거나 없던 자신감이 갑자기 생겨나지는 않지만, ‘다행’의 상태에 진입할 수 있다. 퇴직 후 출근할 데가 없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니, 루틴은 일상을 구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평소와는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도 루틴은 중요하다. 언젠가부터 화가 날 때면 의도적으로 심호흡을 했다.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그것을 내쉴 때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씩씩거리는 상태에서 씩씩한 상태가 되었다. 침잠이 아니라 진정이었다. 화를 내려고 했던 대상도, 이유도 희미해졌다. 반면, e메일 발송이나 화장실 청소처럼 촌각을 다투는 일은 아니지만 지금 하면 나중에 편할 일들은 비교적 선명해졌다. 그런 일들을 수행하며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강연장에 들어서기 전, 나는 화장실에 간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고 거울을 바라본다. 강연을 마친 직후의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만족스러운 표정의 사람들, 장내에 감도는 온기, 곳곳에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웃음소리… 자기 최면을 거는 일은 중요하다. 실제로 부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행사에 임했을 때 잘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기대하지 않는 데서 불쑥 기쁨의 순간이 튀어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기 암시를 하는 루틴이 안정감을 갖게 해준 셈이다. 

나만의 루틴을 만드는 것은 판을 짜고 틀을 세우는 일이다. 판과 틀이 없었다면 나는 허우적댔을 것이다. 집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치다. 익숙함이 나를 나답게 만든다. 루틴은 안전망이자 안정망이기도 하다. 나는 그 속에서 일하고 밥을 먹고 하품하고 커피를 마신다. 산책하고 메모하고 뜨거운 물로 목욕한다. 루틴이 있기에 다른 궁리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엄격한 규칙 속에서 규칙을 위반하는 것을 상상한다. 빤한 일상일수록 적극적으로 일탈을 꿈꾼다. 루틴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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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응원해왔다. 환부를 그저 방치했다간 곪아버릴 수 있다. 내면의 아픔도 마찬가지. 악성 종양을 수술로 도려내듯, 정교한 언어의 메스로 분리할 수 있는 고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언어화하는 과정은 스스로의 아픔에 거리 둘 수 있게 하고, 자기 얘기가 다른 사람에게 닿아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을 목격하는 일이 정서적 치유를 돕는다는 사실은 직접 경험한 바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웃음과 함께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같은 얘기라도 좀 더 흥미롭게 말하려 궁리하는 것이 청자를 배려하는 태도이고, 웃음을 만들 수 있는 이야기는 많은 경우 흥미로운 법. 또한 웃음은 힘이 세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삶은 좀 더 견딜 만해진다고 믿는다.

최근 기획한 공연도 이런 믿음과 닿아 있다. 스스로 불효자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5주간 함께 스탠드업 코미디를 공부하고, 그 결과를 극장에서 발표한 것이다. 공연 제목은 <불효자는 웃습니다>. 눈물보다는 웃음으로 이야기하는 무대임을 강조하기 위해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널리 알려진 제목을 비틀었다.

모인 사람들의 불효는 각양각색이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서, 부모가 바라는 대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못해서, 부모가 원하는 바가 아닌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서. 혹은 부모를 용서하지 못해서인 경우도 있었다. 부모 또한 인간이라서 서툴고 미숙할 수 있고, 그렇기에 양육 과정에서 자식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줄 수 있음을 이해하지만, 어릴 적의 상처가 성인이 되어서도 사무쳐서. 

그중에는 청중이 술렁일 수 있는 ‘심각한’ 사연도 있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한 학대의 사례가 그랬다. 학대의 피해자여도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면 불효자가 되는 것이 한국 사회. 그러나 우리는 그것 모두 웃음을 만들 수 있는 재료라는 접근을 유지했고, 이는 워크숍 과정 동안 어떤 얘기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게끔 도왔다.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놀라거나 정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신뢰가 내밀한 이야기도 나누게 했다. 다행히 공연 날의 관객들도 우리의 이야기를 웃으며 환대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기인한 우울감에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다는 한 워크숍 참가자는 뒤풀이 때 “사람 여럿 살린 거예요”라는 말을 건넸다. 이 프로그램으로 감정이 많이 해소된 기분이고, 그런 기분을 느낀 사람이 본인만은 아닐 것 같다는 뜻이었다. 기획 때 의도한 것을 정말 그대로 체감한 분이 계셨다는 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감정 해소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안다. 틈틈이 해소의 계기를 가지더라도, 상처가 덧나거나 새로운 생채기가 만들어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면? 심지어 만성화되어 스스로 아픈 줄도 모르고 우울증에 빠져버린다면?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을 바꿔야 할 것이다. 불행의 원인이 가족이라면, 가족과 거리를 둘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라 문제다. 문화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OECD 국가 중 자살률 1·2위를 다투며, 응답자 70%가 불행하다고 답한 설문 결과가 있고, 살인사건 중 가족살해 비율이 다른 국가 대비 월등히 높은 현실에 주목하게 된다. 복지의 많은 부분을 가족에게 기대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의료, 교육, 주거 등 삶의 필수적인 부분을 사회가 책임지지 않기에, 부모의 계급에 따라 자식의 삶이 달라지는 구조는 유지되고 양극화는 심화된다. 태어난 조건으로 남은 삶이 결정되는 현실은 울분을 낳기 쉽고, 울분에 가득 찬 사람들이 다수인 사회가 건강할 리 없다. 게다가 가족 구성원 모두를 빈곤의 늪에 빠뜨릴 수 있는 부양의무제도도 아직 완전히 폐지되지 않았다. 

한국은 이제 경제 규모로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고, 사회안전망 확충과 개개인을 행복하게 하는 복지제도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필요한 것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우리 자신에 대한 해방일지도 모른다. 더 많이 웃고 더 크게 떠들며, 더 나은 미래를 이야기하자.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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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글쓰기만큼이나 재밌고도 난감한 일이다. 좋은 글이 왜 좋은지, 별로인 글이 왜 별로인지 명쾌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모두가 그 설명을 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글쓰기 교사라면 잘해야만 한다. 교사의 말이 학생들이 다음주에 써올 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문예창작을 전공하지 않은 채로 얼떨결에 글쓰기 교사가 되었다. 전공했다면 더 좋았을 부분이 분명 있겠지만 그건 살아보지 않은 인생이라 알 수가 없다. 이번 생에서는 부지런한 독서와 정기적인 글쓰기 모임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글을 어떻게 읽고 쓸지 훈련하는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계속될 즐거운 훈련이다. 죽었거나 살아있는 작가들이 책으로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친밀하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친구들과 합평을 하는 것.

한편 간접적인 영향을 준 목소리도 있다. 나의 엄마 복희씨의 목소리다. 그는 부엌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아주 많은 이들에게 밥을 차렸다. 그러느라 고단했던 날도 잦았겠지만 나는 복희씨가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며 살아왔다고 느낀다. 부엌일을 즐겁게 치르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복희씨는 그 일이 자신의 재능 중 하나임을 몸으로 안다. 다른 사람들보다 힘을 덜 들이고도 맛있는 음식을 뚝딱 만든다. 그야말로 ‘뚝딱’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속도다. 그는 부엌에서 노래를 자주 흥얼거린다. 가사는 늘 틀리지만 손놀림은 틀리지 않는다. 그는 문학을 전공한 적이 없지만 생생하고 독창적인 비유를 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에게 받은 인상을 잘 설명하고 싶을 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얘는 꼭 싱싱한 무로 방금 무쳐놓은 깍두기 같네.” “걔는 별다른 고명을 올리지 않은 국수 같아. 밍밍한 듯해도 깔끔하고, 과한 구석이 없어.” “쟤는 낯선 향신료를 섞은 커리 같아. 처음엔 궁금했는데 맛보고 나니까 확 질려서 또 먹고 싶지는 않아.”

그 말을 들은 나는 직관적으로 확 이해하게 된다. 복희씨가 설명하는 인물의 기질과 속성을 말이다.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런 말들이 흘러나온다. 꼭 복희씨가 했을 법한 말을 무심코 내 입으로 한다. 어떤 아이가 써온 글의 분량이 너무 적고 내용이 부실할 경우 나는 ‘장을 너무 조금 봐온 글 같다’고 말한다. 다음주에는 재료를 더 풍성하게 구한 뒤에 써보자는 말도 덧붙인다. 또 다른 아이는 꽤나 신선하고 재밌는 소재로 글을 써왔는데 비문과 오타가 많고 문장이 어수선하며 일부 문단은 완성이 덜 돼있다. 그럼 이렇게 피드백한다. “특별한 재료들을 갖고 요리를 시작했는데 손님들이 들이닥쳐 급하게 마무리하느라 접시에 엉망으로 옮겨 담은 글 같아. 먹다보니 덜 익은 부분이 있는 음식처럼 읽히기도 해. 다음엔 조금 더 일찍 쓰기 시작하면 어떨까. 마지막까지 성의 있게 다듬을 시간이 있도록 말이야. 이 글감이 품은 특별함을 다 살리지 못해 아쉬워.” 그 말을 내뱉는 즉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누구보다 내가 시급히 고쳐야할 부분이라서 그렇다.

그런가 하면 평범한 소재로도 맛깔 나는 글을 완성하는 아이도 있다. 다들 겪을 법한 흔한 일인데 그 애의 손을 거치면 어쩐지 더 재밌고 만족스러운 글이 된다. 나의 글쓰기 스승은 그런 글을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이라고 말하곤 했다. 글은 사실 머리도 가슴도 아닌 손으로 쓰는 것이라고. 쓰기를 반복적으로 훈련한 손만이 안정적이고 탄탄한 문장을 써낸다고. 그건 마치 음식을 하도 여러번 반복해서 몇 가지 핵심적 양념쯤은 손쉽게 만드는 사람의 손과도 같다. 그런 이는 순두부찌개나 비빔밥이나 콩나물국처럼 특별할 것 없는 메뉴로도 늘 평타 이상의 맛을 낸다. 한편 어떤 아이는 쓰다 만 글을 들고 오기도 한다. 아직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수습을 못한 것이다. 깜냥이 되지 않는 재료를 손댔는데 칼질 도중 어찌 해보지 못하고 도마 그대로 들고 온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런 글에서는 독자를 부담스럽게 만들 비린내가 난다. 

글쓰기에 임할 때 나는 복희씨로부터 보고 배운 부엌의 감각을 되살리곤 한다. 모든 글을 음식에 비유할 수는 없겠으나 어떤 재료를 손질하고 다듬고 익혀서 포만감을 만든다는 점에서 글쓰기와 요리는 닮아있다. 음식을 만들고 먹고 치우며 나는 알게 모르게 문학을 배운다. 이 공부는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밥 혹은 언어와 무관한 삶은 없기 때문이며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배울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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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글쓰기만큼이나 재밌고도 난감한 일이다. 좋은 글이 왜 좋은지, 별로인 글이 왜 별로인지 명쾌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모두가 그 설명을 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글쓰기 교사라면 잘해야만 한다. 교사의 말이 학생들이 다음주에 써올 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문예창작을 전공하지 않은 채로 얼떨결에 글쓰기 교사가 되었다. 전공했다면 더 좋았을 부분이 분명 있겠지만 그건 살아보지 않은 인생이라 알 수가 없다. 이번 생에서는 부지런한 독서와 정기적인 글쓰기 모임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글을 어떻게 읽고 쓸지 훈련하는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계속될 즐거운 훈련이다. 죽었거나 살아있는 작가들이 책으로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친밀하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친구들과 합평을 하는 것.

한편 간접적인 영향을 준 목소리도 있다. 나의 엄마 복희씨의 목소리다. 그는 부엌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아주 많은 이들에게 밥을 차렸다. 그러느라 고단했던 날도 잦았겠지만 나는 복희씨가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며 살아왔다고 느낀다. 부엌일을 즐겁게 치르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복희씨는 그 일이 자신의 재능 중 하나임을 몸으로 안다. 다른 사람들보다 힘을 덜 들이고도 맛있는 음식을 뚝딱 만든다. 그야말로 ‘뚝딱’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속도다. 그는 부엌에서 노래를 자주 흥얼거린다. 가사는 늘 틀리지만 손놀림은 틀리지 않는다. 그는 문학을 전공한 적이 없지만 생생하고 독창적인 비유를 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에게 받은 인상을 잘 설명하고 싶을 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얘는 꼭 싱싱한 무로 방금 무쳐놓은 깍두기 같네.” “걔는 별다른 고명을 올리지 않은 국수 같아. 밍밍한 듯해도 깔끔하고, 과한 구석이 없어.” “쟤는 낯선 향신료를 섞은 커리 같아. 처음엔 궁금했는데 맛보고 나니까 확 질려서 또 먹고 싶지는 않아.”

그 말을 들은 나는 직관적으로 확 이해하게 된다. 복희씨가 설명하는 인물의 기질과 속성을 말이다.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런 말들이 흘러나온다. 꼭 복희씨가 했을 법한 말을 무심코 내 입으로 한다. 어떤 아이가 써온 글의 분량이 너무 적고 내용이 부실할 경우 나는 ‘장을 너무 조금 봐온 글 같다’고 말한다. 다음주에는 재료를 더 풍성하게 구한 뒤에 써보자는 말도 덧붙인다. 또 다른 아이는 꽤나 신선하고 재밌는 소재로 글을 써왔는데 비문과 오타가 많고 문장이 어수선하며 일부 문단은 완성이 덜 돼있다. 그럼 이렇게 피드백한다. “특별한 재료들을 갖고 요리를 시작했는데 손님들이 들이닥쳐 급하게 마무리하느라 접시에 엉망으로 옮겨 담은 글 같아. 먹다보니 덜 익은 부분이 있는 음식처럼 읽히기도 해. 다음엔 조금 더 일찍 쓰기 시작하면 어떨까. 마지막까지 성의 있게 다듬을 시간이 있도록 말이야. 이 글감이 품은 특별함을 다 살리지 못해 아쉬워.” 그 말을 내뱉는 즉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누구보다 내가 시급히 고쳐야할 부분이라서 그렇다.

그런가 하면 평범한 소재로도 맛깔 나는 글을 완성하는 아이도 있다. 다들 겪을 법한 흔한 일인데 그 애의 손을 거치면 어쩐지 더 재밌고 만족스러운 글이 된다. 나의 글쓰기 스승은 그런 글을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이라고 말하곤 했다. 글은 사실 머리도 가슴도 아닌 손으로 쓰는 것이라고. 쓰기를 반복적으로 훈련한 손만이 안정적이고 탄탄한 문장을 써낸다고. 그건 마치 음식을 하도 여러번 반복해서 몇 가지 핵심적 양념쯤은 손쉽게 만드는 사람의 손과도 같다. 그런 이는 순두부찌개나 비빔밥이나 콩나물국처럼 특별할 것 없는 메뉴로도 늘 평타 이상의 맛을 낸다. 한편 어떤 아이는 쓰다 만 글을 들고 오기도 한다. 아직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수습을 못한 것이다. 깜냥이 되지 않는 재료를 손댔는데 칼질 도중 어찌 해보지 못하고 도마 그대로 들고 온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런 글에서는 독자를 부담스럽게 만들 비린내가 난다. 

글쓰기에 임할 때 나는 복희씨로부터 보고 배운 부엌의 감각을 되살리곤 한다. 모든 글을 음식에 비유할 수는 없겠으나 어떤 재료를 손질하고 다듬고 익혀서 포만감을 만든다는 점에서 글쓰기와 요리는 닮아있다. 음식을 만들고 먹고 치우며 나는 알게 모르게 문학을 배운다. 이 공부는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밥 혹은 언어와 무관한 삶은 없기 때문이며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배울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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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찌개, 깍두기, 장김치 같은 것도 시골 가서는 서울 것 같은 것을 먹을 수 없다. 외국에 간 사람이 자기의 가족보다 서울의 김치깍두기 생각이 더 간절하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식민시기의 인기 잡지 ‘별건곤(別乾坤)’ 1929년 제23호 ‘경성(京城)명물집’ 꼭지의 한 문장이다. 된장찌개에서 김치깍두기마저 서울식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가령 떡이라면 “서울의 떡 중에 색절편(오색삼색으로 색깔을 낸 절편)은 시골에서 볼 수 없는 찬란한 떡이다”라고 할 만큼 서울 향토색이 그때까지 음식에 남아 있었다. 지역 김치가 떠올라 꺼낸 소리다.

동아일보 1935년 11월13일자는, 기본 양념에다 미나리·갓·조기·생굴·청각·생전복·낙지(또는 문어)·배·밤을 써서 담그는 통배추김치 김장을 ‘서울김장’이라고 소개했다. 이보다 한결 간소해진 통배추김치가 오늘날 한국인의 밥상을 대표하는 김치가 되었다고 하겠다. 

‘별건곤’에서 언급한 장김치도, 서울식의 경우에는 화려한 김치였다. 장김치는 젓갈이나 소금을 쓰지 않고, 장으로 배추와 무를 절여 담근다. 고명으로는 석이·표고버섯과 밤·배·대추·잣 등을 썼다. 단맛을 돋운다고 당시 최고급 식료인 꿀 또는 설탕을 더하기도 했다. 깍두기는 무가 주연인 김치다. 젓갈은 새우젓 하나를 옅게 쓰는 게 서울식의 핵심이다. 깍두기가 남쪽으로 가면? 젓갈의 풍미가 한층 짙어진다. 남동해안에 이르면 어린 우럭을 무와 함께 버무려 한참 곰삭은 맛을 설계한다. 서울 깍두기가 경쾌하다면 거제, 통영 쪽 깍두기는 깊고 묵직하다. 오로지 지역 특산물 무엇 한 가지를 재료 또는 부재료로 쓰네 마네가 다가 아니다. 기본 양념의 운용, 맛의 설계, 발효와 숙성에 잇닿는 감각의 바탕, 그에 따른 최종 연출이 지역마다 다른 것이다. 배추와 무가 얌전히 갈무리된 데다 산뜻한 국물이 어울린 나박김치도 대표적인 서울김치다. 나박나박 얌전히 모양 잡은 주재료와 고춧가루를 쓰되 고운 붉은 물이 들 정도로만 쓰고, 고운 빛깔이 경쾌한 풍미와 어울려 ‘서울식’을 완성한다.

평안도식 동치미와 백김치도 반갑다. 젓갈이나 곡물 전분을 쓰지 않고 오로지 소금물만으로 담그는 동치미는 그 개운함과 깔끔함이 일품이다. 시원한 맛, 입안과 식도마저 탁 치고 톡 쏘는 맛이 들도록 익는 백김치는 오랫동안 평안도 명물로 인식되었다. 배추의 푸른빛과 흰빛이, 뽀얀 백김치 국물에 어울리도록 익으면 우선 눈으로 먹기에도 즐겁지 아니한가. 

함경도는 배추김치를 담글 때에는 평안도에 비해 고춧가루를 넉넉하게 쓴다. 명태, 동태, 대구, 가자미 등을 잘 손질해 배춧잎 사이에 켜켜이 넣기도 했다. 명태에서 가자미에 이르는 생선은 개운한 단맛과 감칠맛을 들이는 열쇠다. 마침 털게까지 잡히면, 잘 찐 털게의 속살을 동태김치에 싸 먹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강원도는 함경도와 바다를 함께하는 곳이다. 더구나 명태라는 자원이 공통이다. 이곳에서도 김치에 명태를 잘 썼지만 특히 신선한 명태의 아가미인 ‘서거리’를 이용한 서거리깍두기가 그립기만 하다. 서거리를 김치에 쓰는 문화는 함경도 제일 북쪽에서부터 강릉을 지나 경북 영덕까지 이어진다.

다시 남으로 내려가 삼남의 김치는 그 다양한 물산만큼이나 다양하다. 충청도 서해안을 따라서는 굴깍두기와 게국지가 별미다. 고들빼기김치는 전북 일대에서 경남 거창에 이르는 지역의 별미다. 

행정구역에다 지역 김치를 가져다 붙이기는 억지일 뿐이다. 지역 김치를 논할 때에는 자연과 농어업부터 살펴야 한다. 갓김치는 여수뿐 아니라 갓이 잘 나는 여수 이동 남해안과 그 도서의 문화이다. 전남 함평에서 강화도에 이르기까지 고구마 잘되는 곳이라면, 고구마줄기김치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깻잎·풋고추·가지·양파·토마토·오이 모두 배추와 무 못잖은 지역 김치 재료다. 여기에다 지역별로 다른 젓갈과 곡물, 기본 양념의 운용이 호서와 호남의 내륙 그리고 서남해안의 김치 맛을 갈랐다. 모든 것이 내 사는 곳의 자연과 자원에 적응, 대응한 결과이다. 살아남자고 저장과 발효에 힘쓰되, 되도록 맛난 음식을 추구했다. 출발은 살아남기였지만, 사람이니까 김치 담그는 감각과 행동이 생존 너머로 벋었다. 

이 계절에 다시금 뭉클하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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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는 현대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혐오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고 사용하지만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혐오를 단순한 미움이나 시기, 질투와 같은 것처럼 ‘싫어하는’ 감정인 것으로 이해한다. 사실 혐오는 보다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 혐오는 구조와 맞닿은 단어다. 그 속에는 불균형과 차별, 분노와 공포 등이 섞여 있다.

즉 혐오는 개인 또는 집단이 누군가를 단순히 좋아한다, 싫어한다의 호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잘못 이해하고 차별하고, 오해하고 싫어하는 과정이 개인이나 집단에 의한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사회나 국가 또는 관습 등의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을 일컫는다. 사회에 떠도는 혐오단어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용어들은 개인을 모욕하려는 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역색, 정치적 신념, 역사적 사건이나 성별처럼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 틀에서 탄생하지 않았나.

그래서 혐오는 쉽게 경제논리 속에 편입된다. 개인의 취향보다도 더 강력하게 자본의 이동을 만들어낸다. 내가 혐오하는 자들을 공격하는 것이라면 쉽게 돈을 지불하고, 혐오당하는 나를 극복하기 위한 연대로서도 쉽게 돈을 지불한다. 더 많은 돈을 쓰는 쪽이 혐오라는 구조를 깰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이 지배한다. ‘혐오경제’라고 해서 혐오를 둘러싼 문화를 표현하는 용어까지 생겼을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자본의 움직임을 규명하기 위해, 그리고 사회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혐오의 인과를 규명하려고 한다. 왜 혐오범죄가 일어나는가. 왜 혐오 콘텐츠가 소비되는가. 그러나 이러한 인과의 규명이 어긋날 때가 있다. 한 개인이나 집단에서 혐오가 발생하는 순간이나 과정을 찾는 것에서 벗어나 혐오로 촉발된 개별 사건과 인간관계까지 인과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혐오가 발생하는 것과 그 혐오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악마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별개의 구조 속에 있다. 오히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혐오로 일어나는 일들은 부조리한 것이고 불가해한 경우가 많다. 일본의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악의(惡意)>라는 소설은 그 예시를 잘 보여준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죽음과 고스트라이터의 관계를 다룬 소설인데,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살인범이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동기를 끊임없이 파고드는 형사가 이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깊디깊은 악의’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 것이다. 여기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죽일 만한 동기가 있었기에 죽인 거라는 기존 추리소설의 틀은 무너진다. 이해할 수 없는 악의는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된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등의 ‘알 수 없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놔두는 것도 그 맥락의 ‘알 수 없음’이 두렵기 때문 아닌가.

이건 비단 소설 속 이야기는 아니다. 10월 한 달 동안 우리는 수많은 혐오 관련 사건을 목격했다. 누군가는 혐오를 인터넷에서 악플이나 싸움 등으로 표출했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혐오 콘텐츠를 양산하며 유튜브를 찍고 카드뉴스를 만들고 기사를 썼다. 누군가는 묵묵히 침묵했을 수도 있고, 그중 몇몇은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행동은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과의 잣대를 들이밀면 개개인의 도덕과 윤리는 소멸하고 만다. ‘걔는 비난받을 만해’ 또는 ‘그 집단은 당연히 조롱당해도 돼’라는 문장으로 쉽사리 양비론이 생겨나고, 이러한 명제가 비도덕 행위를 자기위안하며 끊임없이 혐오의 동력을 유지한다. 자신이 갖는 혐오가 왜 생겨났는지, 왜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으니, 그 이유를 소급적으로 채우려 한다.

물론 이해하기 힘든 행위를 저지르는 개인 역시도 사회가 만들어내는 악마 또는 병리적 증상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영역을 전부 섬세하게 분리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혐오와 개인과 경제와 사회를 합쳐 단순명료한 인과관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그저 현 상태를 이해했다고 믿기 위한 가벼운 봉합에 지나지 않는다.

<이융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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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생 정대현도 아프다.” 한 주간지가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정대현(공유)의 옆모습을 커버사진으로 다루면서 붙인 표제다. 어쩌면 이렇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가. 하지만 문득 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보여주는 문장이 아닌가 싶어졌다.

<82년생 김지영>은 여러모로 동명 원작소설의 미래형이다. 소설이 김지영의 빙의로 끝났다면, 영화는 소설이 끝난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이제 가족들은 김지영의 ‘아픈 상태’를 알게 되었고, 그의 회복을 위해 마음을 쓰는 중이다. 영화는 고립되었던 김지영이 그들 덕분에 회복해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렇게 경력단절여성 김지영은 고난을 극복하고 작가로 거듭난다.

배우 정유미가 출연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작품을 미래형이라고 말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설에 달린 악플 이후에 온 영화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로부터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영화의 흥행 전략으로 삼았다. 그 결과 소설에서도 ‘꽤 좋은 남편’이라고 평가받은 정대현은 공유의 외피를 입은 더욱 선량한 ‘79년생 정대현’으로 거듭났다. 덕분에 수많은 정대현씨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영화는 정대현의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룬다. 이는 확실히 영화의 덕목 중 하나다. 한동안 한국 상업영화에서 쭉 ‘보편 인간’이었던 남자는 이 영화에 이르러 드디어 성별화된 존재가 되었다. 그는 계급이나 역사, 대의 같은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가부장제 시스템 때문에 곤경에 처한 남성이다. 

정대현은 공과 사의 영역 모두에서 남자 인간으로 그려진다. 특히 영화는 김지영의 가사노동에 정성스럽게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이는 김지영을 ‘여성’으로 만들고 정대현을 ‘남성’으로 만들었다. 김지영은 끊임없이 상을 차리고, 치우고, 아이를 돌보고, 빨래를 갠다. 정대현이 말로는 ‘위한다’ 하면서도 손 한 번 까딱하지 않을 동안, 김지영의 여성으로서의 노동은 계속된다. 두 사람이 한 프레임 안에 있기 때문에 정대현이 남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적 무심함’이 비로소 가시화된다.

이때 영화가 정대현이 무너지는 타이밍을 잡아내는 방식은 아주 절묘하다. 김지영이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에 정대현이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랑 결혼해서 네가 아픈 걸까봐”라고 웅얼거린다. 이토록 끈질긴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라니. 사과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는, 미안함도 자신을 경유해서야 표현할 수 있다. 

온갖 “○○년생 ○○○”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여자들이 성별화된 존재로서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입을 열기 시작한 순간, 남자들은 갑자기 ‘보편 인간’에서 ‘남자 인간’이 되어 남성으로서의 고충을 토로한다. 남성들이 경험하는 어려움에 공감할 때에도 머뭇거리게 되는 건 이 기막힌 타이밍 때문이다. 정말 변화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가 여자를 비추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건가.

동시에 이 장면은 만족스럽지 않다. 소설 속의 김지영이 온갖 여자들이 자신의 신체를 점유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정대현을 혼란의 시간 속에 가두어둔 것과 달리 영화 속의 김지영은 우는 정대현의 손을 너무 빨리 잡아준다. 그를 도닥여주는 대신 김지영이 제대로 발광했다면 어땠을까. 어째서 여자들은 언제나 남자들에게 “당신이 주인공이야”라고 말하는 존재여야 하는가.

이토록 ‘순한’ 김지영이 쓰는 글은 어떤 내용일까에 대해 생각하다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가 떠올랐다. 억울하게 죽은 친구가 빙의되어 때때로 다른 사람이 되는 그레이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청자를 가지고 논다.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여자일까, 아닐까?” 그러면서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19세기 말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하층계급 여성으로서 그가 겪어야 했던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적 통념을 가차 없이 공격한다.

그렇다면 지금 김지영이 화사한 얼굴로 써내려가는 글은 과연 무엇을 공격할 수 있을까? 물론 그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분투의 결과이지만 말이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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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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