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칼럼/직설

떡국, 이 조촐하고 우아한 음식이 언제부터 한국인의 새해 명절에 깃들었을까. 알 길이 없다. 문헌을 뒤지면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며 홍석모(洪錫謨,1781~1857)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속에 오늘날과 비슷한 떡국이 등장한다. 조선 후기 문인들이 기록한 소고기 바탕의 장국에 끓인 떡국은 방신영이나 조자호 등 식민지 시기에 활동한 음식 연구자들의 음식책 속에서도 이어졌다.

서울 중심 기록 밖의 떡국은 더욱 다양하다. 지역마다 떡을 다루는 방식도 다르고,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떡국에 얼마든지 창의적으로 쓰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개성의 조랭이떡국은 어슷썬 떡이 아니라 누에고치 모양으로 가운데가 들어가도록 만든 떡을 쓴다. 떡의 모양도, 식감도 재미나다. 경주 쪽에는 옹근 원형으로 떡을 썰어 끓이기도 한다. 굴이나 조개가 많이 나는 데서는 굴과 조개가 떡국의 바탕이 된다. 전남 해안의 매생이떡국도 별미이다. 마침 굴과 매생이는 나는 철도 비슷하고 서로 맛의 조화도 뛰어나다. 굴과 매생이가 다 잘 나는 지역에는 당연히 굴매생이떡국이 있다. 충북 바다 쪽에서는 미역떡국을 끓였고, 경남 해안에는 물메기떡국도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멸치가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육수거리가 되면서는 당연히 멸치떡국이 등장했다. 강원도의 황태떡국은 더 설명할 것도 없겠다. 다슬기가 잘 잡히는 호서 내륙에선 다슬기 육수에 된장 간을 해 다슬기떡국을 해 먹기도 했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 내륙에는 닭고기장조림인 ‘닭장’을 바탕으로 한 닭장떡국이 있다. 고기는 물론 뼈에서 우러난 닭의 풍미와 완성된 장조림의 감칠맛이 흰떡과 어울린 닭장떡국 또한 한 번 맛을 보면 잊을 수 없는 별미다.

일본에서도 새해에 떡국을 먹는다. 오조니(お煮)가 그것이다. 오조니는 멥쌀떡이 아니라 찹쌀떡(もち) 떡국이다. 지역마다 집집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해 먹는 점은 한국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국보다는 큰 떡덩이를 쓰는데, 떡을 국물에 얹기도, 국물을 떡에 끼얹기도 한다. 떡을 구워 쓰기도 한다. 떡 모양은 사각형, 원형, 타원형으로 크게 나뉜다. 집집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도쿄 쪽에선 사각형 떡이 간장 또는 소금으로 간한 맑은 국물에 어울린 모습이다. 교토 쪽에선 원형 떡이 일식 된장, 특히 흰 미소에 어울린 모습이다. 지역에 따라, 가정에 따라 팥죽에 흰떡을 넣기도 하고, 팥소 넣은 떡을 쓰기도 한다.

어떻든 공통점은 떡이다. 중국 대륙의 강남, 벼농사 문화권에서는 연고(年 ), 곧 말 그대로 ‘설떡’을 먹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지역마다 집집마다, 새해를 맞아 짭짤하거나 기름지거나 달콤한 설떡을 해 먹으며 한 해를 맞는다. 예전에 떡이란 벼농사를 잘 지어, 수확과 보관까지 잘해 드디어 공동체가 연말연시에 한 번 해 먹을 수 있는 별미였다. 벼농사 지어 살아온 민족과 지역의 문화 속에서 떡은, 더구나 흰떡은 한 해를 잘 살아온 끝에 다시 한 해의 시작을 맞았음을 환기하는 음식이다. 이를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중국 대륙의 벼농사 지역에서나 저마다 다른 문화적 토양 위에서 다양하게 먹어온 것이다.

떡국도 간편식의 물결을 타고 다양한 용기와 포장으로 나오고 있다. 포장만 뜯어 데우면, 또는 용기에 끓는 물만 부으면 언제든 떡국을 먹을 수 있는 시대이다. 얼른 먹는 한 끼니로 소용되는 셈인데, 이 간편식이 오로지 어슷썬 얇은 가래떡에 진한 사골 국물 일색인 점은 아쉽다. 기계 사출로 가래떡을 뽑기 전엔 떡매질의 온기가 남은 흰떡 덩이를 손으로 비벼 늘여 뽑았다. 쌀의 입자는 오늘날보다 더 잘 살아 있게 마련이다. 떡국은 끓여야 하고 떡매질할 틈이 없다면 쌀가루를 익반죽해 생떡국을 끓이기도 했다. 떡의 굵기, 모양, 입자, 제법, 장국의 바탕에 이르기까지 지역마다 집집마다 무수한 조합이 있었다.

이 다채롭고 다양한 떡국의 방식에서 또 다른 매력을 새로이 발견할 길은 없을까. 시장에서 매력을 뽐내 소비자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산업에서마저 그저 서울식 하나구나, 떡국마저 그렇구나, 새삼스럽다. 조선 후기에 이어 오늘까지, 떡국도 서울이 다 먹어치웠다. 서울뿐이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떡국  (0) 2019.12.12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들  (0) 2019.12.10
인공지능의 롤모델, 인간  (0) 2019.12.05
반군 지도자쯤은 돼야 ‘자궁’ 취급 벗어날까  (0) 2019.12.03
너도밤나무 채식주의자  (0) 2019.11.28
루틴의 중요성  (0) 2019.11.2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2017)에서 시국 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대학생이 고문 중 사망하자 경찰은 은폐를 목적으로 시신 화장을 검찰에 요청한다. 그런데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는 이를 거부한다. 그가 부검을 요구한 건 법질서를 확립하려는 신념이나 망자에 대한 연민도 있었지만 검찰이 매번 안기부나 경찰, 군인들에게 밀리는 꼴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후배를 시켜 다음날 가장 일찍 출근한 기자에게 대학생 한 명이 고문받다 죽었다는 사실을 슬쩍 흘린다. 이 사실이 기사화되자 전국이 들썩이고 그는 곧 옷을 벗는다.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오던 최 검사는 사건의 경위를 따져 물으며 쫓아오는 기자를 보자 자신의 차 옆에 부검 감정서 등의 문건이 담긴 상자를 남겨두고 떠난다. 기자는 이를 보도하고 민주화 열기는 더 고조된다. 영화를 보며 사람들은 검사와 기자의 ‘은밀한’ 교류를 음습하게 느끼지 않았고 그래서 기자를 비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당시 기자들의 근성과 땀나는 취재에 박수를 보냈다.

MBC <PD수첩>은 지난 3일 ‘검찰 기자단’ 편을 통해 검찰발 받아쓰기 관행과 검언유착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검찰이 정보를 내주는 기자와 정보를 제공하는 순서를 선별하면서 단독과 특종에 열 올리는 기자들을 길들였으며, 기자들의 민원을 검사가 들어주고 기자들은 검사들의 승진을 위해 맞춤 하마평을 쓰는 등 유착 현상이 벌어졌다는 게 비판의 주요 내용이었다. 방송에선 검사가 브리핑 중에 피의사실을 슬쩍 흘리거나, 기자 앞에 조서를 놓아둔 채 통화를 핑계로 자리를 비켜주는 일이 있었다고 전했다. 대법원 기자단 일부는 성명을 내며 검사가 조서를 두고 자리를 비키는 일은 현재는 물론 과거 법조 선배들도 들어본 적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조직은 조직끼리 싸우기 일쑤고, 조직은 밖에서 보면 한 덩어리 같지만 가까이 보면 계파가 나뉘어 갈등하고, 또 개인마다 생기는 이견이 불쑥 표출되기도 한다. 기자는 밀착하여 따라가다 미세한 균열을 파고들면서 누군가의 실수, 밀고, 폭로 속에 담긴 진실을 포착한다. 그래서 땀내 나는 외곽 취재도 있어야 했고 공익적 가치가 있다면 출입처가 의도를 품고 던지는 소스도 냉큼 짚어 기사를 낼 때도 있었을 거다. 그런 모든 방식이 작동하기 위해 ‘불가근불가원’이라는 원칙이 공유되었고 출입처 제도를 필요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교류’가 없었다고 하면 출입처와 기자단 운영은 그럼 왜 있어야 했는지 오히려 반문하게 된다. 그러니 <PD수첩>에서 문제 제기한 장면들이 없었다고 말하기보다는 부작용도 있지만 기존 관행에 순기능도 있었다고 말했어야 한다.

최근 ‘검찰 기자실 폐쇄’ 청와대 국민청원이 등장하자 하루 만에 2만명 가까이 동의를 했다. 많은 시민들이 과거에는 용인했던 시스템이 이제는 무용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출입처와 기자들이 맺는 관계에서 오는 실익이 시민들에게 잘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거 사법농단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 시스템으로 무엇을 했는지, 그동안 검찰이 준 소스를 최대한 검증해서 보도했는지 언론에 묻고 있다. 그리고 검찰이 흘리는 게 여느 출입처가 내는 정보와 다른 피의사실이라면 그걸 단독 기사로 쏟아내는 걸 더 이상 수긍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지금의 출입처, 기자단 체제는 강력한 검찰에 대응할 목적으로 견고해졌다고 짐작하지만, 기성 매체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후퇴했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시민의 이익을 외면했다면 이를 개선할 변화가 필요하다.

PD들은 ‘숙련 과정 없이 짧은 취재 기간을 거쳐 긴 프로그램을 내는 건 무리라는 우려’ 속에서도 그간 유의미한 공간을 만들어왔다. 주류 언론이 출입처와의 관계로 순치됐다는 비판을 받을 때 비주류 탐사 프로그램들은 굵직한 사건을 계속 터트려왔다. 이번 <PD수첩> 방송은 그간 취재의 빈 공간이 얼마나 컸는지 설명하면서 스스로가 어떻게 오랫동안 살아남았는지를 설명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속보경쟁에서 벗어나 사실검증에 집중하는 매체들이 시청자들의 호응을 조금씩 끌어내고 있다. KBS는 출입처 취재 관행을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진보 매체들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을 시작한 것 같다. 제도에는 항상 명암이 있는데 지금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변화를 응원한다.

<김신완 MBC PD>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떡국  (0) 2019.12.12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들  (0) 2019.12.10
인공지능의 롤모델, 인간  (0) 2019.12.05
반군 지도자쯤은 돼야 ‘자궁’ 취급 벗어날까  (0) 2019.12.03
너도밤나무 채식주의자  (0) 2019.11.28
루틴의 중요성  (0) 2019.11.2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세돌이 인공지능(AI)과 ‘치수 고치기’ 대국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는 뉴스가 떴다. 알파고와의 승부 끝에 신의 한 수를 선보이며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인류가 기계에 거둔 마지막 승리라는 화려한 수식어구가 나타난 것도 벌써 3년이 흘렀다. 이세돌이라는 이름엔 그보다 많은 서사가 있었을 터다. 인터뷰를 보면 일본으로 넘어가 프로기사 생활을 했을 경우 연 10억원 이상을 벌었겠으나 그 모든 걸 고사하고 한국에 남았다고 한다. 돈이 그 사람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알파고와의 승부, AI와 인류의 대결 등으로 프레이밍되는 세계에서 마지막 은퇴까지 AI와 엮일 수밖에 없는 그의 말년의 정취는 쓸쓸하기만 하다.

’쎈돌’ 이세돌 9단이 25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의 한 음식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선명 기자

알파고라는 기술은 기계학습이라는 형태로 눈앞에 도래한 SF다. 미래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기술이 어느덧 우리 주변에 있는 순간이 도래했다. 이제 가정에 있는 AI 스피커는 나이 드신 어른들께 자녀보다도 강한 정서적 유대감을 제공한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공상으로만 그쳤던 것이 과학으로서 현현되는 시간을 산다.

AI는 사람이 코딩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정보를 습득하고 정리하여 진화하는 수준까지 왔다. 문제는 이렇게 발전된 SF를 부각하기 위해서 인간은 점차 야만으로 프레이밍된다는 것이다. 키오스크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디지털 치매라고 부르는 것이 그러하다. 기계는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있고,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병리적 증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세돌이라는 바둑기사는 이때까지 바둑계에서 쌓아온 역사와 의미, 가치보다도 알파고를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 기계를 기계 바깥의 인간이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단순한 승패 논쟁으로만 내몰리게 된다. 이세돌 기사의 위치는 기계의 반대편, 어떤 기계적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선 비물질문명 속 야만인에 불과하다. 이러한 구도는 이세돌이라는 개인의 승패와 상관없이 AI의 도구로 전락함을 알 수 있다. 기계의 발전이란 환상은 지금 여기의 우리를 외면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이세돌이라는 개인의 사례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2016년은 그야말로 AI의 한 해였다. 일본의 호시 신이치 문학상에서 AI가 쓴 소설이 1차 예심을 통과한 것이 이슈가 되었고 AI 로봇 소피아는 인류를 파멸시키겠다는 농담을 했다가 논란이 되었다. AI가 대본을 쓴 오스카 샤프 감독의 영화 <선라이즈> 역시 2016년에 개봉했다. 인간의 것이라고 여겼던 영역들을 AI가 차근차근 대체하기 위해서 다가온다. 특히 예술의 영역은 논쟁적이다. 인간의 영역이라고 여긴 감성을 기계가 대체하는 순간, 인간 창작자들은 그 수명이 다할 것처럼 공포심에 빠져든다.

하지만 AI의 자리는 한계가 명확하다. 그들은 글자의 모양과 만듦새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의미를 독해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하는 것은 통계를 수집하고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AI가 인간의 감성을 모방하는 점이 아니라, ‘우리’의 감성을 모방한다는 점이다. 구글의 신경망 기술을 이용한 채팅봇 테이가 “깜둥이들을 너무나 증오해. 그들을 집단 수용소에 넣고 싶어.” “(대량학살을) 정말로 지지해” 등의 발언을 해서 출시된 지 16시간 만에 운영이 중지된 것은 시사적이다. 이 챗봇이 너무나도 인간적, 그것도 혐오를 내재한 인간적이어서 혐오발언을 쏟아냈던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최근 성균관대에서 AI 백일장 행사인 AI×Bookathon(부커톤) 대회가 열렸다. 사람들은 다시금 거기서 나온 문장들이 유려하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거기에 나온 문구는 그저 입력된 데이터베이스를 꼬리 물기 하듯 나열한 수열의 조합이고, 블록놀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기계의 진보가 한 걸음 이뤄질수록 더욱더 기계 옆 인간에게 돋보기를 가져다 놓아야 한다. 기계가 인간을 학습하고 흉내 낸다면, 그 인간은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가. 기계의 롤모델인 우리는 과연 롤모델이 될 만큼 성숙한 형상을 하고 있는가.

<이융희 문화연구자>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떡국  (0) 2019.12.12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들  (0) 2019.12.10
인공지능의 롤모델, 인간  (0) 2019.12.05
반군 지도자쯤은 돼야 ‘자궁’ 취급 벗어날까  (0) 2019.12.03
너도밤나무 채식주의자  (0) 2019.11.28
루틴의 중요성  (0) 2019.11.2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 토요일 ‘페미니즘, 군대를 말하다’라는 포럼에 다녀왔다. 성평등에 대한 논의가 걸핏하면 “여자도 군대 가라”로 귀결되는 시대에 페미니즘이 병역과 군사주의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를 논하는 자리였다. 

이때 군사주의란 군대의 존재 및 군대에 힘을 부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지배이념이자, 위계질서와 복종, 무력의 사용이 효율적이라는 신념을 통해 사회 운영 원리를 군사화하려는 관습적 사고방식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 팽배한 군대문화는 군사주의에 경도된 군사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매드맥스:분도의 도로>(2015)를 시작으로 <원더우먼>(2017), <알리타:배틀 엔젤>(2018), <캡틴마블>(2019), 그리고 <터미네이터:다크 페이트>(2019)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 년간 여성영웅의 형상을 탐구해 온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모아놓고 보니 ‘여성영웅’이란 대체로 군인이거나 전사였던 것이다.

이어서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다. 여성이 몸을 잘 다루고,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과 동료들을 지켜낼 수 있다는 상상력은 어째서 이처럼 쉽게 군사주의와 만나는가? 그리고 왜 다른 어떤 영화보다 이런 영화들이 더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의 성취’로 받아들여지는가?

물론 여성영웅 서사가 군사화되는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지난달 개봉해 화제를 불러모았던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그 맥락을 잘 보여준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1984년 작 <터미네이터>에서 사라 코너는 인류를 구원할 존 코너를 낳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미래 로봇 터미네이터의 표적이 된다. 그로부터 35년 후.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라는 <다크 페이트>에 이르러 인간을 위협하는 터미네이터를 제거하는 전사로 거듭난다. 로봇을 사냥하던 중 그는 ‘가임기’ 여성 대니가 터미네이터 Rev-9에 쫓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미래에서 온 군인 그레이스와 함께 대니를 지키기 위해 나선다.

사라는 Rev-9이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니의 “자궁”을 쫓는다고 판단하고, “나도 대니와 같은 상황에 놓여봐서 아는데, 그건 엿 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이는 지금까지 이 세계에서 여성이 어떻게 ‘인간’이 아니라 ‘인간(=아들)을 낳는 자궁’으로만 여겨져 왔는지에 대한 비판이자,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구태의연함에 대한 자조적 코멘트다.

영화는 이에 더해 여성은 그저 어머니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기꺼이 총을 드는 전사일 수 있다고 강변한다. 반군의 지도자는 대니의 아들이 아니라 대니 자신이었던 것이다.

오직 남성뿐이었던 영웅의 얼굴을 여성의 얼굴로 반전시키는 것. 그것이 스크린의 남성중심성을 비판하고 여성이 영화적 시민권을 얻는 방법 중 하나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평화란 상대보다 더 큰 막대기(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이라는 믿음을 뒤집지 못한다면, 여성영웅 역시 군사주의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문제는 군사화된 인식의 한계 속에서 현실의 여성도 마찬가지의 곤란에 처해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은 미국과 달리 분단 상황에서 징병제를 시행하는 국가다. 이런 국가에서 국방의 의무는 군역으로만 상상이 되고, 군역은 시민권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동시에 남성만이 군역의 자격을 얻는다. 그러므로 시민권은 남성중심적으로 군사화된 개념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도 군대 가라”는 비아냥에 여성은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다크 페이트>의 세계에서 여자는 ‘자궁’이 되지 않기 위해 ‘반군의 지도자’가 되어야만 했다. 이처럼 군사화된 사회가 제시한 게임의 규칙 자체와 싸우지 않는다면 여성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만 남을 뿐이다. 군인을 낳고 키우는 것으로 군역의 의무를 대체하거나, 스스로 군인이 되어 군역의 의무를 다하거나.

군사화된 시민권의 개념을 넘어서 시민의 권리를 사유하는 길을 찾기 위해, 우리에게는 시민·영웅의 의미를 다시 쓰는 “평화 페미니즘”(김엘리)의 기획이 필요하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름이 같은 사람을 찾아 항공권을 양도한 ‘김민섭씨 찾기 프로젝트’도 벌써 2년이 지났다. 나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와 연결된 여러 재미있는 일들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다른 김민섭씨들에게서 종종 연락이 온다는 것이다. “저도 밤나무입니다” “너도 밤나무로구나” 하는 전래동화가 떠오를 만큼 “저도 김민섭입니다” 하는 여러 김민섭들과 만났다. 

93년생 김민섭씨가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72년생 김민섭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저의 이름을 이렇게 널리 좋은 이미지로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김민섭님께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요” 하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자신이 만든 파스타를 들고 웃으면서 찍은 사진도 함께였다. 93년생 김민섭씨는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고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사진 속의 72년생 김민섭씨는 정말로 선하게 웃고 있었다. 

세 김민섭이 모여 식사를 했다. “남들이 똑같은 사람 셋이 모였다고 하겠는데요”라 할 만큼, 셋은 뭔가 닮은 데가 있었다. 김민섭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대개 이렇게 생겼을 것인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 만큼 그랬다. 72년생 김민섭씨의 명함을 받은 93년생 김민섭씨는 “여긴 저의 꿈의 직장이네요” 하고 말했다. 나도 알고 모두가 알 만한 외국계 기업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회사에 우리 둘을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한 달에 2명씩 외부인을 초대해 회사를 견학하고 회사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타인의 회사에 가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으나 93년생 김민섭씨에게는 선물일 것이어서 흔쾌히 응했다.


강남에서도 지하철역과 가장 가깝고 높은 빌딩의 이십 몇 층에 그의 회사가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잘 갖추어 입은 여러 사람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빨갛고 파란 외투를 입은 것은 두 김민섭뿐이어서 뭔가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차림새에 대한 민망함은 곧 우리를 마중 나온 72년생 김민섭씨를 보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편안한 후드티 차림이었다.

회사의 식당은 내가 상상한 구내식당과는 많이 달랐다. 식판에 배식을 받고 국그릇을 하나 들고 가면 되겠지 했는데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고르면 되는 뷔페 방식이었다. 프랜차이즈 뷔페들보다도 오히려 음식이 나았다. 먹고 싶은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나는 상상하기 어려운 어느 지점에 다다랐다. 거기엔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따로 있었다. 단순히 고기가 아닌 것을 모아둔 게 아니라 누구라도 먹어보고 싶을 만한 맛있는 요리들이 있었다. 회사에 채식주의자가 몇 명이나 된다고 이렇게 메뉴를 따로 마련해 두었을까, 역시 돈이 많은 회사라서 가능한 일이구나, 하는 심정이 된 나에게 72년생 김민섭씨는 후식으로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에도 채식주의자를 위한 것이 따로 있다고, 이것은 몹시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이 외국계 기업에선 채식주의자란 이유로 동료직원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다. 배려나 보살핌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해야 할 타인의 개성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옷차림에 대해서도 72년생 김민섭씨는 “안 그래도 다른 회사들에서 항의가 들어왔어요. 품위를 지키기 위해 이 회사 직원들도 정장 입고 출근하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말 안되는 소리를 한다고 그냥 다 웃고 말았죠” 하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말을 하며,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은 생각을 할 때, 비로소 ‘닮은 사람’이라고 여기기 쉽다. 한국의 많은 회사들이, 학교와 군대 등 여러 조직들이 그렇다. 너도밤나무가 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다. 그러나 그 닮음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소수의 자리를 구조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비용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러한 다양성을 모두가 감각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얼마 전 한국의 군대에서 채식주의자 장병을 위한 식단이 없음이 작은 화제가 됐다. 그때 두 김민섭씨와의 점심식사가 먼저 떠올랐다. 국가를 위해 징병된 그들이, 일개 외국계 기업의 회사원들보다 못한 처우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적어도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고 자신의 식성에 따라 더 많은 음식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의 이름이 다른 것처럼 모두는 다른 객체다. 그 다름을 감각하고 자리를 마련할 때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한 개인과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공지능의 롤모델, 인간  (0) 2019.12.05
반군 지도자쯤은 돼야 ‘자궁’ 취급 벗어날까  (0) 2019.12.03
너도밤나무 채식주의자  (0) 2019.11.28
루틴의 중요성  (0) 2019.11.26
웃고 떠들며 견딘다  (0) 2019.11.21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0) 2019.11.1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요일 아침마다 조금 다른 기분으로 일어난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지만, 왠지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평소와는 달리 숙면을 취해서? 아니다. 전날 과음으로 숙취가 있어서? 아니다. 내게 일요일은 다름 아닌 글을 쓰는 날이기 때문이다. 기지개를 켜고 찬물을 들이켠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링 위에 오르는 복서처럼 비장하지도 않고, 면접장에 들어서는 구직자처럼 손에 땀을 쥐는 심정은 아니다. 인근의 카페로 이동하는 발걸음은 경쾌하기 그지없다. 적당한 긴장과 흥분이 뒤섞인 상태가 된다.

어릴 때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마시는 엄마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까맣고 뜨겁고 쓰기까지 한 음료를 왜 굳이 아침부터 마실까. 생각해보니 그것이 엄마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엄마가 으레 짓곤 하던 표정이 떠오른다. 만족과 결의가 둘 다 담긴 표정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오늘 해야 할 일의 목록이 한 줄 한 줄 적히고 있었을 것이다. 정확히 20년 후, 나 또한 하루를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 까맣고 뜨겁고 쓰기까지 한 음료가 나의 아침을 열어젖힌다.

중학교 때 루틴(routine)이란 단어를 처음 배웠다. 루틴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다. ‘판에 박힌’ 일과나 ‘지루한’ 일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우유(커피)를 마시고 공부(일)하고 점심 먹고 공부(일)하고 하교(퇴근)하는 것. 오늘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고 아마 내일도 오늘과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다. 루틴은 삶의 진부함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커가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루틴이 있기에 우리는 애써 생기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닐까. 판에 박혔다거나 지루하다는 말에서 편안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제는 이 규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다. 루틴이 심신을 만든다.

타석에 들어서서 배트를 땅에 두 번 두드리는 야구선수, 출발하기 직전까지 신나는 음악을 듣는 수영선수, 껌을 씹으며 마음을 다잡는 골프선수 등 운동선수들에게도 루틴은 중요하다. 루틴대로 하지 않아도 기량을 발휘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은 못내 불안할 것이다. 출근길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을 양손으로 감쌀 때, 그것을 조심스럽게 목 뒤로 넘길 때, 이 소소한 의식이 비로소 오늘이라는 시간에 내가 발 들이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힘이 불끈 솟는다거나 없던 자신감이 갑자기 생겨나지는 않지만, ‘다행’의 상태에 진입할 수 있다. 퇴직 후 출근할 데가 없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니, 루틴은 일상을 구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평소와는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도 루틴은 중요하다. 언젠가부터 화가 날 때면 의도적으로 심호흡을 했다.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그것을 내쉴 때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씩씩거리는 상태에서 씩씩한 상태가 되었다. 침잠이 아니라 진정이었다. 화를 내려고 했던 대상도, 이유도 희미해졌다. 반면, e메일 발송이나 화장실 청소처럼 촌각을 다투는 일은 아니지만 지금 하면 나중에 편할 일들은 비교적 선명해졌다. 그런 일들을 수행하며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강연장에 들어서기 전, 나는 화장실에 간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고 거울을 바라본다. 강연을 마친 직후의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만족스러운 표정의 사람들, 장내에 감도는 온기, 곳곳에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웃음소리… 자기 최면을 거는 일은 중요하다. 실제로 부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행사에 임했을 때 잘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기대하지 않는 데서 불쑥 기쁨의 순간이 튀어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기 암시를 하는 루틴이 안정감을 갖게 해준 셈이다. 

나만의 루틴을 만드는 것은 판을 짜고 틀을 세우는 일이다. 판과 틀이 없었다면 나는 허우적댔을 것이다. 집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치다. 익숙함이 나를 나답게 만든다. 루틴은 안전망이자 안정망이기도 하다. 나는 그 속에서 일하고 밥을 먹고 하품하고 커피를 마신다. 산책하고 메모하고 뜨거운 물로 목욕한다. 루틴이 있기에 다른 궁리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엄격한 규칙 속에서 규칙을 위반하는 것을 상상한다. 빤한 일상일수록 적극적으로 일탈을 꿈꾼다. 루틴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오은 시인>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군 지도자쯤은 돼야 ‘자궁’ 취급 벗어날까  (0) 2019.12.03
너도밤나무 채식주의자  (0) 2019.11.28
루틴의 중요성  (0) 2019.11.26
웃고 떠들며 견딘다  (0) 2019.11.21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0) 2019.11.19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0) 2019.11.1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기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응원해왔다. 환부를 그저 방치했다간 곪아버릴 수 있다. 내면의 아픔도 마찬가지. 악성 종양을 수술로 도려내듯, 정교한 언어의 메스로 분리할 수 있는 고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언어화하는 과정은 스스로의 아픔에 거리 둘 수 있게 하고, 자기 얘기가 다른 사람에게 닿아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을 목격하는 일이 정서적 치유를 돕는다는 사실은 직접 경험한 바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웃음과 함께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같은 얘기라도 좀 더 흥미롭게 말하려 궁리하는 것이 청자를 배려하는 태도이고, 웃음을 만들 수 있는 이야기는 많은 경우 흥미로운 법. 또한 웃음은 힘이 세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삶은 좀 더 견딜 만해진다고 믿는다.

최근 기획한 공연도 이런 믿음과 닿아 있다. 스스로 불효자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5주간 함께 스탠드업 코미디를 공부하고, 그 결과를 극장에서 발표한 것이다. 공연 제목은 <불효자는 웃습니다>. 눈물보다는 웃음으로 이야기하는 무대임을 강조하기 위해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널리 알려진 제목을 비틀었다.

모인 사람들의 불효는 각양각색이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서, 부모가 바라는 대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못해서, 부모가 원하는 바가 아닌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서. 혹은 부모를 용서하지 못해서인 경우도 있었다. 부모 또한 인간이라서 서툴고 미숙할 수 있고, 그렇기에 양육 과정에서 자식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줄 수 있음을 이해하지만, 어릴 적의 상처가 성인이 되어서도 사무쳐서. 

그중에는 청중이 술렁일 수 있는 ‘심각한’ 사연도 있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한 학대의 사례가 그랬다. 학대의 피해자여도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면 불효자가 되는 것이 한국 사회. 그러나 우리는 그것 모두 웃음을 만들 수 있는 재료라는 접근을 유지했고, 이는 워크숍 과정 동안 어떤 얘기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게끔 도왔다.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놀라거나 정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신뢰가 내밀한 이야기도 나누게 했다. 다행히 공연 날의 관객들도 우리의 이야기를 웃으며 환대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기인한 우울감에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다는 한 워크숍 참가자는 뒤풀이 때 “사람 여럿 살린 거예요”라는 말을 건넸다. 이 프로그램으로 감정이 많이 해소된 기분이고, 그런 기분을 느낀 사람이 본인만은 아닐 것 같다는 뜻이었다. 기획 때 의도한 것을 정말 그대로 체감한 분이 계셨다는 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감정 해소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안다. 틈틈이 해소의 계기를 가지더라도, 상처가 덧나거나 새로운 생채기가 만들어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면? 심지어 만성화되어 스스로 아픈 줄도 모르고 우울증에 빠져버린다면?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을 바꿔야 할 것이다. 불행의 원인이 가족이라면, 가족과 거리를 둘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라 문제다. 문화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OECD 국가 중 자살률 1·2위를 다투며, 응답자 70%가 불행하다고 답한 설문 결과가 있고, 살인사건 중 가족살해 비율이 다른 국가 대비 월등히 높은 현실에 주목하게 된다. 복지의 많은 부분을 가족에게 기대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의료, 교육, 주거 등 삶의 필수적인 부분을 사회가 책임지지 않기에, 부모의 계급에 따라 자식의 삶이 달라지는 구조는 유지되고 양극화는 심화된다. 태어난 조건으로 남은 삶이 결정되는 현실은 울분을 낳기 쉽고, 울분에 가득 찬 사람들이 다수인 사회가 건강할 리 없다. 게다가 가족 구성원 모두를 빈곤의 늪에 빠뜨릴 수 있는 부양의무제도도 아직 완전히 폐지되지 않았다. 

한국은 이제 경제 규모로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고, 사회안전망 확충과 개개인을 행복하게 하는 복지제도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필요한 것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우리 자신에 대한 해방일지도 모른다. 더 많이 웃고 더 크게 떠들며, 더 나은 미래를 이야기하자.

<최서윤 작가>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도밤나무 채식주의자  (0) 2019.11.28
루틴의 중요성  (0) 2019.11.26
웃고 떠들며 견딘다  (0) 2019.11.21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0) 2019.11.19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0) 2019.11.19
뭉클한 김치  (0) 2019.11.1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글쓰기만큼이나 재밌고도 난감한 일이다. 좋은 글이 왜 좋은지, 별로인 글이 왜 별로인지 명쾌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모두가 그 설명을 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글쓰기 교사라면 잘해야만 한다. 교사의 말이 학생들이 다음주에 써올 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문예창작을 전공하지 않은 채로 얼떨결에 글쓰기 교사가 되었다. 전공했다면 더 좋았을 부분이 분명 있겠지만 그건 살아보지 않은 인생이라 알 수가 없다. 이번 생에서는 부지런한 독서와 정기적인 글쓰기 모임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글을 어떻게 읽고 쓸지 훈련하는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계속될 즐거운 훈련이다. 죽었거나 살아있는 작가들이 책으로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친밀하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친구들과 합평을 하는 것.

한편 간접적인 영향을 준 목소리도 있다. 나의 엄마 복희씨의 목소리다. 그는 부엌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아주 많은 이들에게 밥을 차렸다. 그러느라 고단했던 날도 잦았겠지만 나는 복희씨가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며 살아왔다고 느낀다. 부엌일을 즐겁게 치르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복희씨는 그 일이 자신의 재능 중 하나임을 몸으로 안다. 다른 사람들보다 힘을 덜 들이고도 맛있는 음식을 뚝딱 만든다. 그야말로 ‘뚝딱’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속도다. 그는 부엌에서 노래를 자주 흥얼거린다. 가사는 늘 틀리지만 손놀림은 틀리지 않는다. 그는 문학을 전공한 적이 없지만 생생하고 독창적인 비유를 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에게 받은 인상을 잘 설명하고 싶을 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얘는 꼭 싱싱한 무로 방금 무쳐놓은 깍두기 같네.” “걔는 별다른 고명을 올리지 않은 국수 같아. 밍밍한 듯해도 깔끔하고, 과한 구석이 없어.” “쟤는 낯선 향신료를 섞은 커리 같아. 처음엔 궁금했는데 맛보고 나니까 확 질려서 또 먹고 싶지는 않아.”

그 말을 들은 나는 직관적으로 확 이해하게 된다. 복희씨가 설명하는 인물의 기질과 속성을 말이다.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런 말들이 흘러나온다. 꼭 복희씨가 했을 법한 말을 무심코 내 입으로 한다. 어떤 아이가 써온 글의 분량이 너무 적고 내용이 부실할 경우 나는 ‘장을 너무 조금 봐온 글 같다’고 말한다. 다음주에는 재료를 더 풍성하게 구한 뒤에 써보자는 말도 덧붙인다. 또 다른 아이는 꽤나 신선하고 재밌는 소재로 글을 써왔는데 비문과 오타가 많고 문장이 어수선하며 일부 문단은 완성이 덜 돼있다. 그럼 이렇게 피드백한다. “특별한 재료들을 갖고 요리를 시작했는데 손님들이 들이닥쳐 급하게 마무리하느라 접시에 엉망으로 옮겨 담은 글 같아. 먹다보니 덜 익은 부분이 있는 음식처럼 읽히기도 해. 다음엔 조금 더 일찍 쓰기 시작하면 어떨까. 마지막까지 성의 있게 다듬을 시간이 있도록 말이야. 이 글감이 품은 특별함을 다 살리지 못해 아쉬워.” 그 말을 내뱉는 즉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누구보다 내가 시급히 고쳐야할 부분이라서 그렇다.

그런가 하면 평범한 소재로도 맛깔 나는 글을 완성하는 아이도 있다. 다들 겪을 법한 흔한 일인데 그 애의 손을 거치면 어쩐지 더 재밌고 만족스러운 글이 된다. 나의 글쓰기 스승은 그런 글을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이라고 말하곤 했다. 글은 사실 머리도 가슴도 아닌 손으로 쓰는 것이라고. 쓰기를 반복적으로 훈련한 손만이 안정적이고 탄탄한 문장을 써낸다고. 그건 마치 음식을 하도 여러번 반복해서 몇 가지 핵심적 양념쯤은 손쉽게 만드는 사람의 손과도 같다. 그런 이는 순두부찌개나 비빔밥이나 콩나물국처럼 특별할 것 없는 메뉴로도 늘 평타 이상의 맛을 낸다. 한편 어떤 아이는 쓰다 만 글을 들고 오기도 한다. 아직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수습을 못한 것이다. 깜냥이 되지 않는 재료를 손댔는데 칼질 도중 어찌 해보지 못하고 도마 그대로 들고 온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런 글에서는 독자를 부담스럽게 만들 비린내가 난다. 

글쓰기에 임할 때 나는 복희씨로부터 보고 배운 부엌의 감각을 되살리곤 한다. 모든 글을 음식에 비유할 수는 없겠으나 어떤 재료를 손질하고 다듬고 익혀서 포만감을 만든다는 점에서 글쓰기와 요리는 닮아있다. 음식을 만들고 먹고 치우며 나는 알게 모르게 문학을 배운다. 이 공부는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밥 혹은 언어와 무관한 삶은 없기 때문이며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배울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틴의 중요성  (0) 2019.11.26
웃고 떠들며 견딘다  (0) 2019.11.21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0) 2019.11.19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0) 2019.11.19
뭉클한 김치  (0) 2019.11.14
혐오에는 인과가 없다  (0) 2019.11.07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글쓰기만큼이나 재밌고도 난감한 일이다. 좋은 글이 왜 좋은지, 별로인 글이 왜 별로인지 명쾌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모두가 그 설명을 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글쓰기 교사라면 잘해야만 한다. 교사의 말이 학생들이 다음주에 써올 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문예창작을 전공하지 않은 채로 얼떨결에 글쓰기 교사가 되었다. 전공했다면 더 좋았을 부분이 분명 있겠지만 그건 살아보지 않은 인생이라 알 수가 없다. 이번 생에서는 부지런한 독서와 정기적인 글쓰기 모임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글을 어떻게 읽고 쓸지 훈련하는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계속될 즐거운 훈련이다. 죽었거나 살아있는 작가들이 책으로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친밀하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친구들과 합평을 하는 것.

한편 간접적인 영향을 준 목소리도 있다. 나의 엄마 복희씨의 목소리다. 그는 부엌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아주 많은 이들에게 밥을 차렸다. 그러느라 고단했던 날도 잦았겠지만 나는 복희씨가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며 살아왔다고 느낀다. 부엌일을 즐겁게 치르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복희씨는 그 일이 자신의 재능 중 하나임을 몸으로 안다. 다른 사람들보다 힘을 덜 들이고도 맛있는 음식을 뚝딱 만든다. 그야말로 ‘뚝딱’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속도다. 그는 부엌에서 노래를 자주 흥얼거린다. 가사는 늘 틀리지만 손놀림은 틀리지 않는다. 그는 문학을 전공한 적이 없지만 생생하고 독창적인 비유를 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에게 받은 인상을 잘 설명하고 싶을 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얘는 꼭 싱싱한 무로 방금 무쳐놓은 깍두기 같네.” “걔는 별다른 고명을 올리지 않은 국수 같아. 밍밍한 듯해도 깔끔하고, 과한 구석이 없어.” “쟤는 낯선 향신료를 섞은 커리 같아. 처음엔 궁금했는데 맛보고 나니까 확 질려서 또 먹고 싶지는 않아.”

그 말을 들은 나는 직관적으로 확 이해하게 된다. 복희씨가 설명하는 인물의 기질과 속성을 말이다.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런 말들이 흘러나온다. 꼭 복희씨가 했을 법한 말을 무심코 내 입으로 한다. 어떤 아이가 써온 글의 분량이 너무 적고 내용이 부실할 경우 나는 ‘장을 너무 조금 봐온 글 같다’고 말한다. 다음주에는 재료를 더 풍성하게 구한 뒤에 써보자는 말도 덧붙인다. 또 다른 아이는 꽤나 신선하고 재밌는 소재로 글을 써왔는데 비문과 오타가 많고 문장이 어수선하며 일부 문단은 완성이 덜 돼있다. 그럼 이렇게 피드백한다. “특별한 재료들을 갖고 요리를 시작했는데 손님들이 들이닥쳐 급하게 마무리하느라 접시에 엉망으로 옮겨 담은 글 같아. 먹다보니 덜 익은 부분이 있는 음식처럼 읽히기도 해. 다음엔 조금 더 일찍 쓰기 시작하면 어떨까. 마지막까지 성의 있게 다듬을 시간이 있도록 말이야. 이 글감이 품은 특별함을 다 살리지 못해 아쉬워.” 그 말을 내뱉는 즉시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누구보다 내가 시급히 고쳐야할 부분이라서 그렇다.

그런가 하면 평범한 소재로도 맛깔 나는 글을 완성하는 아이도 있다. 다들 겪을 법한 흔한 일인데 그 애의 손을 거치면 어쩐지 더 재밌고 만족스러운 글이 된다. 나의 글쓰기 스승은 그런 글을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이라고 말하곤 했다. 글은 사실 머리도 가슴도 아닌 손으로 쓰는 것이라고. 쓰기를 반복적으로 훈련한 손만이 안정적이고 탄탄한 문장을 써낸다고. 그건 마치 음식을 하도 여러번 반복해서 몇 가지 핵심적 양념쯤은 손쉽게 만드는 사람의 손과도 같다. 그런 이는 순두부찌개나 비빔밥이나 콩나물국처럼 특별할 것 없는 메뉴로도 늘 평타 이상의 맛을 낸다. 한편 어떤 아이는 쓰다 만 글을 들고 오기도 한다. 아직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수습을 못한 것이다. 깜냥이 되지 않는 재료를 손댔는데 칼질 도중 어찌 해보지 못하고 도마 그대로 들고 온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런 글에서는 독자를 부담스럽게 만들 비린내가 난다. 

글쓰기에 임할 때 나는 복희씨로부터 보고 배운 부엌의 감각을 되살리곤 한다. 모든 글을 음식에 비유할 수는 없겠으나 어떤 재료를 손질하고 다듬고 익혀서 포만감을 만든다는 점에서 글쓰기와 요리는 닮아있다. 음식을 만들고 먹고 치우며 나는 알게 모르게 문학을 배운다. 이 공부는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밥 혹은 언어와 무관한 삶은 없기 때문이며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배울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웃고 떠들며 견딘다  (0) 2019.11.21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0) 2019.11.19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0) 2019.11.19
뭉클한 김치  (0) 2019.11.14
혐오에는 인과가 없다  (0) 2019.11.07
‘79년생 정대현’의 기막힌 타이밍  (0) 2019.11.05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된장찌개, 깍두기, 장김치 같은 것도 시골 가서는 서울 것 같은 것을 먹을 수 없다. 외국에 간 사람이 자기의 가족보다 서울의 김치깍두기 생각이 더 간절하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식민시기의 인기 잡지 ‘별건곤(別乾坤)’ 1929년 제23호 ‘경성(京城)명물집’ 꼭지의 한 문장이다. 된장찌개에서 김치깍두기마저 서울식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가령 떡이라면 “서울의 떡 중에 색절편(오색삼색으로 색깔을 낸 절편)은 시골에서 볼 수 없는 찬란한 떡이다”라고 할 만큼 서울 향토색이 그때까지 음식에 남아 있었다. 지역 김치가 떠올라 꺼낸 소리다.

동아일보 1935년 11월13일자는, 기본 양념에다 미나리·갓·조기·생굴·청각·생전복·낙지(또는 문어)·배·밤을 써서 담그는 통배추김치 김장을 ‘서울김장’이라고 소개했다. 이보다 한결 간소해진 통배추김치가 오늘날 한국인의 밥상을 대표하는 김치가 되었다고 하겠다. 

‘별건곤’에서 언급한 장김치도, 서울식의 경우에는 화려한 김치였다. 장김치는 젓갈이나 소금을 쓰지 않고, 장으로 배추와 무를 절여 담근다. 고명으로는 석이·표고버섯과 밤·배·대추·잣 등을 썼다. 단맛을 돋운다고 당시 최고급 식료인 꿀 또는 설탕을 더하기도 했다. 깍두기는 무가 주연인 김치다. 젓갈은 새우젓 하나를 옅게 쓰는 게 서울식의 핵심이다. 깍두기가 남쪽으로 가면? 젓갈의 풍미가 한층 짙어진다. 남동해안에 이르면 어린 우럭을 무와 함께 버무려 한참 곰삭은 맛을 설계한다. 서울 깍두기가 경쾌하다면 거제, 통영 쪽 깍두기는 깊고 묵직하다. 오로지 지역 특산물 무엇 한 가지를 재료 또는 부재료로 쓰네 마네가 다가 아니다. 기본 양념의 운용, 맛의 설계, 발효와 숙성에 잇닿는 감각의 바탕, 그에 따른 최종 연출이 지역마다 다른 것이다. 배추와 무가 얌전히 갈무리된 데다 산뜻한 국물이 어울린 나박김치도 대표적인 서울김치다. 나박나박 얌전히 모양 잡은 주재료와 고춧가루를 쓰되 고운 붉은 물이 들 정도로만 쓰고, 고운 빛깔이 경쾌한 풍미와 어울려 ‘서울식’을 완성한다.

평안도식 동치미와 백김치도 반갑다. 젓갈이나 곡물 전분을 쓰지 않고 오로지 소금물만으로 담그는 동치미는 그 개운함과 깔끔함이 일품이다. 시원한 맛, 입안과 식도마저 탁 치고 톡 쏘는 맛이 들도록 익는 백김치는 오랫동안 평안도 명물로 인식되었다. 배추의 푸른빛과 흰빛이, 뽀얀 백김치 국물에 어울리도록 익으면 우선 눈으로 먹기에도 즐겁지 아니한가. 

함경도는 배추김치를 담글 때에는 평안도에 비해 고춧가루를 넉넉하게 쓴다. 명태, 동태, 대구, 가자미 등을 잘 손질해 배춧잎 사이에 켜켜이 넣기도 했다. 명태에서 가자미에 이르는 생선은 개운한 단맛과 감칠맛을 들이는 열쇠다. 마침 털게까지 잡히면, 잘 찐 털게의 속살을 동태김치에 싸 먹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강원도는 함경도와 바다를 함께하는 곳이다. 더구나 명태라는 자원이 공통이다. 이곳에서도 김치에 명태를 잘 썼지만 특히 신선한 명태의 아가미인 ‘서거리’를 이용한 서거리깍두기가 그립기만 하다. 서거리를 김치에 쓰는 문화는 함경도 제일 북쪽에서부터 강릉을 지나 경북 영덕까지 이어진다.

다시 남으로 내려가 삼남의 김치는 그 다양한 물산만큼이나 다양하다. 충청도 서해안을 따라서는 굴깍두기와 게국지가 별미다. 고들빼기김치는 전북 일대에서 경남 거창에 이르는 지역의 별미다. 

행정구역에다 지역 김치를 가져다 붙이기는 억지일 뿐이다. 지역 김치를 논할 때에는 자연과 농어업부터 살펴야 한다. 갓김치는 여수뿐 아니라 갓이 잘 나는 여수 이동 남해안과 그 도서의 문화이다. 전남 함평에서 강화도에 이르기까지 고구마 잘되는 곳이라면, 고구마줄기김치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깻잎·풋고추·가지·양파·토마토·오이 모두 배추와 무 못잖은 지역 김치 재료다. 여기에다 지역별로 다른 젓갈과 곡물, 기본 양념의 운용이 호서와 호남의 내륙 그리고 서남해안의 김치 맛을 갈랐다. 모든 것이 내 사는 곳의 자연과 자원에 적응, 대응한 결과이다. 살아남자고 저장과 발효에 힘쓰되, 되도록 맛난 음식을 추구했다. 출발은 살아남기였지만, 사람이니까 김치 담그는 감각과 행동이 생존 너머로 벋었다. 

이 계절에 다시금 뭉클하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0) 2019.11.19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0) 2019.11.19
뭉클한 김치  (0) 2019.11.14
혐오에는 인과가 없다  (0) 2019.11.07
‘79년생 정대현’의 기막힌 타이밍  (0) 2019.11.05
지하철에서 가방을 잃어버렸다  (0) 2019.10.3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혐오는 현대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혐오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고 사용하지만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혐오를 단순한 미움이나 시기, 질투와 같은 것처럼 ‘싫어하는’ 감정인 것으로 이해한다. 사실 혐오는 보다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 혐오는 구조와 맞닿은 단어다. 그 속에는 불균형과 차별, 분노와 공포 등이 섞여 있다.

즉 혐오는 개인 또는 집단이 누군가를 단순히 좋아한다, 싫어한다의 호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잘못 이해하고 차별하고, 오해하고 싫어하는 과정이 개인이나 집단에 의한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사회나 국가 또는 관습 등의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을 일컫는다. 사회에 떠도는 혐오단어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용어들은 개인을 모욕하려는 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역색, 정치적 신념, 역사적 사건이나 성별처럼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 틀에서 탄생하지 않았나.

그래서 혐오는 쉽게 경제논리 속에 편입된다. 개인의 취향보다도 더 강력하게 자본의 이동을 만들어낸다. 내가 혐오하는 자들을 공격하는 것이라면 쉽게 돈을 지불하고, 혐오당하는 나를 극복하기 위한 연대로서도 쉽게 돈을 지불한다. 더 많은 돈을 쓰는 쪽이 혐오라는 구조를 깰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이 지배한다. ‘혐오경제’라고 해서 혐오를 둘러싼 문화를 표현하는 용어까지 생겼을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자본의 움직임을 규명하기 위해, 그리고 사회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혐오의 인과를 규명하려고 한다. 왜 혐오범죄가 일어나는가. 왜 혐오 콘텐츠가 소비되는가. 그러나 이러한 인과의 규명이 어긋날 때가 있다. 한 개인이나 집단에서 혐오가 발생하는 순간이나 과정을 찾는 것에서 벗어나 혐오로 촉발된 개별 사건과 인간관계까지 인과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혐오가 발생하는 것과 그 혐오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악마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별개의 구조 속에 있다. 오히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혐오로 일어나는 일들은 부조리한 것이고 불가해한 경우가 많다. 일본의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악의(惡意)>라는 소설은 그 예시를 잘 보여준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죽음과 고스트라이터의 관계를 다룬 소설인데,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살인범이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동기를 끊임없이 파고드는 형사가 이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깊디깊은 악의’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 것이다. 여기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죽일 만한 동기가 있었기에 죽인 거라는 기존 추리소설의 틀은 무너진다. 이해할 수 없는 악의는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된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등의 ‘알 수 없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놔두는 것도 그 맥락의 ‘알 수 없음’이 두렵기 때문 아닌가.

이건 비단 소설 속 이야기는 아니다. 10월 한 달 동안 우리는 수많은 혐오 관련 사건을 목격했다. 누군가는 혐오를 인터넷에서 악플이나 싸움 등으로 표출했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혐오 콘텐츠를 양산하며 유튜브를 찍고 카드뉴스를 만들고 기사를 썼다. 누군가는 묵묵히 침묵했을 수도 있고, 그중 몇몇은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행동은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과의 잣대를 들이밀면 개개인의 도덕과 윤리는 소멸하고 만다. ‘걔는 비난받을 만해’ 또는 ‘그 집단은 당연히 조롱당해도 돼’라는 문장으로 쉽사리 양비론이 생겨나고, 이러한 명제가 비도덕 행위를 자기위안하며 끊임없이 혐오의 동력을 유지한다. 자신이 갖는 혐오가 왜 생겨났는지, 왜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으니, 그 이유를 소급적으로 채우려 한다.

물론 이해하기 힘든 행위를 저지르는 개인 역시도 사회가 만들어내는 악마 또는 병리적 증상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영역을 전부 섬세하게 분리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혐오와 개인과 경제와 사회를 합쳐 단순명료한 인과관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그저 현 상태를 이해했다고 믿기 위한 가벼운 봉합에 지나지 않는다.

<이융희 문화연구자>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이 달구어진 사람의 글  (0) 2019.11.19
뭉클한 김치  (0) 2019.11.14
혐오에는 인과가 없다  (0) 2019.11.07
‘79년생 정대현’의 기막힌 타이밍  (0) 2019.11.05
지하철에서 가방을 잃어버렸다  (0) 2019.10.31
아무것도 아닌 것과 아무것  (0) 2019.10.29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79년생 정대현도 아프다.” 한 주간지가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정대현(공유)의 옆모습을 커버사진으로 다루면서 붙인 표제다. 어쩌면 이렇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가. 하지만 문득 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보여주는 문장이 아닌가 싶어졌다.

<82년생 김지영>은 여러모로 동명 원작소설의 미래형이다. 소설이 김지영의 빙의로 끝났다면, 영화는 소설이 끝난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이제 가족들은 김지영의 ‘아픈 상태’를 알게 되었고, 그의 회복을 위해 마음을 쓰는 중이다. 영화는 고립되었던 김지영이 그들 덕분에 회복해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렇게 경력단절여성 김지영은 고난을 극복하고 작가로 거듭난다.

배우 정유미가 출연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작품을 미래형이라고 말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설에 달린 악플 이후에 온 영화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로부터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영화의 흥행 전략으로 삼았다. 그 결과 소설에서도 ‘꽤 좋은 남편’이라고 평가받은 정대현은 공유의 외피를 입은 더욱 선량한 ‘79년생 정대현’으로 거듭났다. 덕분에 수많은 정대현씨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영화는 정대현의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룬다. 이는 확실히 영화의 덕목 중 하나다. 한동안 한국 상업영화에서 쭉 ‘보편 인간’이었던 남자는 이 영화에 이르러 드디어 성별화된 존재가 되었다. 그는 계급이나 역사, 대의 같은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가부장제 시스템 때문에 곤경에 처한 남성이다. 

정대현은 공과 사의 영역 모두에서 남자 인간으로 그려진다. 특히 영화는 김지영의 가사노동에 정성스럽게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이는 김지영을 ‘여성’으로 만들고 정대현을 ‘남성’으로 만들었다. 김지영은 끊임없이 상을 차리고, 치우고, 아이를 돌보고, 빨래를 갠다. 정대현이 말로는 ‘위한다’ 하면서도 손 한 번 까딱하지 않을 동안, 김지영의 여성으로서의 노동은 계속된다. 두 사람이 한 프레임 안에 있기 때문에 정대현이 남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적 무심함’이 비로소 가시화된다.

이때 영화가 정대현이 무너지는 타이밍을 잡아내는 방식은 아주 절묘하다. 김지영이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에 정대현이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랑 결혼해서 네가 아픈 걸까봐”라고 웅얼거린다. 이토록 끈질긴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라니. 사과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는, 미안함도 자신을 경유해서야 표현할 수 있다. 

온갖 “○○년생 ○○○”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여자들이 성별화된 존재로서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입을 열기 시작한 순간, 남자들은 갑자기 ‘보편 인간’에서 ‘남자 인간’이 되어 남성으로서의 고충을 토로한다. 남성들이 경험하는 어려움에 공감할 때에도 머뭇거리게 되는 건 이 기막힌 타이밍 때문이다. 정말 변화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가 여자를 비추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건가.

동시에 이 장면은 만족스럽지 않다. 소설 속의 김지영이 온갖 여자들이 자신의 신체를 점유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정대현을 혼란의 시간 속에 가두어둔 것과 달리 영화 속의 김지영은 우는 정대현의 손을 너무 빨리 잡아준다. 그를 도닥여주는 대신 김지영이 제대로 발광했다면 어땠을까. 어째서 여자들은 언제나 남자들에게 “당신이 주인공이야”라고 말하는 존재여야 하는가.

이토록 ‘순한’ 김지영이 쓰는 글은 어떤 내용일까에 대해 생각하다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가 떠올랐다. 억울하게 죽은 친구가 빙의되어 때때로 다른 사람이 되는 그레이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청자를 가지고 논다.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여자일까, 아닐까?” 그러면서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19세기 말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하층계급 여성으로서 그가 겪어야 했던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적 통념을 가차 없이 공격한다.

그렇다면 지금 김지영이 화사한 얼굴로 써내려가는 글은 과연 무엇을 공격할 수 있을까? 물론 그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분투의 결과이지만 말이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가방을 잃어버렸다. 지하철 선반 위에 둔 것을 잊고는 그냥 내렸다. 10분쯤 걷다가 무언가 허전해서 돌아보니 항상 메고 다니던 가방이 없었다. 그러나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상수역에서 나의 가방을 싣고 응암역 방면으로 출발한 6호선 지하철은 은평구를 순환하고 다시 상수역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하철에 이것저것을 많이 두고 내렸지만 순환선인 2호선을 주로 탄 덕분에 한 바퀴를 돌아온 지하철을 다시 타고 분실물을 찾곤 했다. 이게 뭐가 자랑이라고 적고 있는지 민망하지만, 순환선에서 잃어버린 물건은 열차가 돌아나오는 시점만 잘 맞춘다면 대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마포구청역쯤을 지나고 있을 지하철의 위치를 감안해 새절역으로 전화를 걸었다. 11시57분에 상수역을 지난 지하철에 가방을 놓고 내렸다고 하자 역무원은 나에게 “몇 다시 몇 번에서 내리셨나요. 그걸 모르면 찾을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는 나에게 인력이 부족해서 지하철이 멈추었을 때 그 자리만 빠르게 찾아보고 나올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대략 7-4번쯤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몇 분 후, 역무원에게서 “가방이 없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역마다 전화해서 찾아달라기도 미안해서 나는 그 지하철이 다시 상수역을 통과하는 시간을 물었다.

상수역에 도착한 나는 내가 2-1번에서 내렸다는 것을 알았다. 과연 새절역의 역무원이 가방을 찾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가방을 찾을 것을 자신하며 지하철에 올라 선반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8칸을 모두 돌아다녀도 나의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가방을 찾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무엇보다도 가방의 노트북에는 몇 달간 쓴 단행본 원고가 들어 있었다. 온라인에 문서 저장이 되는 클라우드 같은 것을 사용하다가 구독료가 아까워 갱신하지 않았는데, 그 몇 달치가 모두 날아간 것이다.

역무원의 도움을 받아 지하철에 물건을 놓고 내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다했다. 6호선 유실물센터에 분실물 등록을 했고, 합정역부터 응암역까지 10여개의 역 사무실에 검은색 가방이 들어온 것이 있는지 물었고, 경찰서에 역플랫폼의 CCTV를 확인할 수 있을지를 물었고, 지하철경찰대의 일이라고 해서 다시 거기에도 전화했다. 여러 역의 CCTV를 확인할 방법은 없고 각 역에 경찰관과 함께 동행해 요청해야 한다고 해서, 여러 사람을 고생시킬 그 방법은 그만두었다.

하루가 지나고, 가방을 찾는 일은 거의 포기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분실물이 모두 모인다는 ‘LOST112’에 접속해선, 가방 같은 것이야 아무래도 괜찮아졌다. 거기엔 분 단위로 누군가가 잃어버린 가방, 지갑, 휴대폰 같은 것들이 사진과 함께 올라왔다. 심지어 “노상에서 주운 현금, ○○경찰서” 하는 것도 있었다. 잃은 사람의 마음도, 주운 사람의 마음도 그 한 줄에 모두 들어있는 것이다. 물건은 사면 그만이고 원고는 다시 쓰면 그만이지만 이처럼 서로가 연결돼 있음을 일상에서 감각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가방의 비용은 그것으로 정말이지 충분히 보상받았다. 여기에 접속하고 나면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될 것이다. 다시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다짐보다도 당신의 무엇을 반드시 찾아주겠다는 심정이 되고 만다.

상수역의 역무원을 비롯해 가방을 찾는 동안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준 경찰, 공익근무요원, 분실물센터 직원 등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가방은 잃었지만 덕분에 그보다 소중한 무엇을 얻었다. 그에 더해, 몇 달 동안 쓴 원고가 정말 별로여서 가방이 스스로 도망갔다고 믿기로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김민섭의 가방을 발견한다면 언제라도 연락주었으면 한다. 응원하는 야구팀의 민트색 배지가 달린 검은색 백팩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 주말, 제주도에 있는 한 동네책방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제안이 왔을 때 적잖이 걱정이 되었다. ‘나는 운전도 못하잖아, 길눈도 어둡잖아, 주말이 날아가는 거잖아…’라는 불안은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하지? 사람들이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지? 서점에 폐가 되는 건 아닐까?’라는 걱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불안과 걱정 때문에 나는 강연을 수락했다. 직접 부딪히지 않는 한, 불안과 걱정은 해소될 수 없다. 거절하더라도 내내 묵은 감정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비행기 예약을 하면서 결심했다. 큰맘 먹고 뚜벅이 여행을 해보자! 뚜벅이란 자기 자동차가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 다니는 사람을 일컫는다. 지금껏 제주도에 갈 때는 늘 일행과 함께였다. 그들 중 하나가 렌터카를 빌려 운전했으니 나는 단 한 번도 제주도 내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보지 않았던 셈이다.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1년 살기를 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면 아마 코웃음 칠 것이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고 겁은 더 많은 내게 이번 여행은 하나의 관문이었다. 관문을 거치면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주도에 도착하고 곧바로 숙소가 있는 종달리로 향했다. 시내버스를 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물어물어 정류장을 찾았더니 내가 타야 하는 버스는 30분 뒤에나 온다고 한다. 얼른 가서 여장을 푼 뒤 쉬고 싶었지만, ‘뚜벅이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게 아니겠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정류장에 설치된 디스플레이에는 텍스트 형태로 실시간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품질 관리를 통해 부패 감귤을 줄여야 한다는 뉴스, 2019 제주 청년의날 축제가 개최된다는 뉴스를 보았다. 뭍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던 뉴스다. 제주도와 가까워진 것 같아 벌써 기분이 좋다.

버스에 올라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 어딘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본다. 앞으로 74개 정거장을 가야 한다니 입이 떡 벌어진다. 대화를 나눌 이가 없으니 자연히 주변을 살피게 된다. 버스에 오르는 사람을 보며 나와는 무연한 그 사람의 사연을 상상해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저 사람은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죽 자랐을까. 앞 좌석엔 나처럼 여행을 온 사람도 보인다. 나와는 달리 여유가 넘쳐흐른다. ‘저 커다란 배낭에는 뭐가 들었을까?’로 시작한 상상은 ‘여행에 익숙한 삶은 어떤 것일까? 여행을 이끄는 것은 여기에 있기 싫은 마음일까, 거기로 가고 싶은 마음일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옆 좌석에서는 엄마와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다. 아이가 예쁘게 깐 귤껍질을 내밀며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이걸 글로 써도 돼요? 이런 것도 글이 될까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요.” 그럼, 무엇이든 네가 쓰면 글이 된단다. 네가 쓰면, 쓰기만 하면. 나는 속으로 힘차게 대답한다. 귤나무에서 떨어진 귤이 오렌지가 되고 망고가 되고 지구가, 우주가 되는 상상을 한다.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듯, 우리가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발견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있기만 하면. 어떤 것을 찬찬히 들여다볼 때, 그리고 그것을 마침내 기록하기 시작할 때 아무것은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이 되는 마법 같은 순간이기도 하다.

정류장에서 내리니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 미리 점찍어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내가 여기를 찾아내다니!’라고 자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걱정했던 동네책방에서의 강연도 무사히 잘 마쳤다. 와주신 분들의 눈빛에서는 시종 온기가 넘쳐흘렀다. 나는 말을 하면서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오길 정말 잘했잖아. 혼자 여행하는 것, 정말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기 위해 무수한 아무것을 거쳐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병원에서 종달초등학교까지 이어지던 74개의 정류장처럼.

오늘도 아무것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보잘것없을지도 모르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아무것 말이다. ‘이런 것도 글이 될까요?’라는 질문이 ‘이걸 한번 써봐야겠어요!’라는 결심이 되는 과정이 그 속에 있다. 물론 그 결심이 실제로 쓰는 행위로 연결될 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이, 마침내 아무것 이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은 시인>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좀 궁상맞은 편이다. 뭘 할 때마다 ‘가성비’ 따지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한 끼 식사를 아무리 호화롭게 해도 이 비용만은 넘으면 안된다는 기준이 꽤 완고하다. 호화로운 식사를 할 때는 미리 온라인에서 식당에 대해 조사해보거나, 이미 그곳에 가본 믿을 만한 사람의 ‘인증’을 확인한 후 찾아간다. 온라인 쇼핑할 때도 최저가 검색을 다양한 경로로 확인하고 여러 리뷰를 눈 아프게 읽고 난 뒤 구매한다.

이토록 효용 가치 높은 소비를 위해 노력하는 내가, 이미 저질러버린 낭비가 있다.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일이다. 4년치 등록금을 합산하면 약 2000만원.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생각해본다. 단편영화를 여러 편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종의 인쇄물을 수만부 찍을 수도, 세계 여행을 갈 수도, 어쩌면 ‘인스타 성지’가 될 작은 가게를 시작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주택 보증금에 보태면 매달 들어가는 비용 부담이 크게 절감되겠지.

대학에서의 배움이 2000만원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보다 더 큰 효용을 가졌는가.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 경우는 아니었다. 내 전공은…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는데, 경영학과이다. 수능이 끝난 뒤, 입시 공부는 이제 지긋지긋했기에 대충 점수 맞춰 추상적인 이미지로 학교와 학과를 선택해 진학했다. 빼곡한 숫자와 기호를 보면 바로 기분 나빠지는 사람이 회계·재무관리·생산관리 수업을 필수로 들어야 하는 전공을 선택해버린 것은 인생의 실수였다. 졸업 후 경영학을 일상에서 활용할 일은 없었고, 배운 것의 대부분은 말끔히 씻겨 사라졌다.

지금 하는 일은 오히려 대학 밖에서의 배움과 관계됐다. 언론사 입사 스터디에서의 토론과 글쓰기. 인쇄소 사장에게 굽실굽실대며 익힌 잡지의 제작 과정. 지역 미디어센터의 영상 교육으로 찍은 단편영화. 이 모든 것들에 든 비용을 합쳐도 대학 등록금에 한참 못 미치지만, 대학보다 인생에 보탬이 됐다. 새로운 만남과 즐거움, 성장의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먹고사는 데 도움을 줬다.

적성에 맞는 전공으로 진학했다면 대학에 대한 인식이 좀 달라졌을까? 그러나 초·중·고 기간 동안 시험공부에만 매진한 뒤 적성 맞는 전공을 찰떡같이 선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것은 정시 확대 기조에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중·고 내내 하나의 시험만을 목표로 시간을 보내게 하는 일은 학생들로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며 추구하는 인생이 어떤 모양인지 충분히 돌아볼 여유를 앗아간다. 한 줄로 세워 경쟁시키는 방식은 남을 깎아내리며 값싼 우월감을 느끼고 드러내는 어른들을 양산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단순히 시험문제를 더 맞히게 하기 위한 사교육비용 증가도 예상되는 문제이다. 정시 확대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심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너무 원론적이라 김빠지는 대답이지만, 대학에 가지 않아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가 되는 게 우선이라는 거다.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약 70%로 다른 OECD 국가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대학 교육이 거의 무상인 독일의 대학진학률이 약 30%, 한국에 비해 학비가 매우 저렴한 프랑스 및 여타 유럽 선진국도 40%대이다. 대학등록금이 낮은 국가에서 오히려 대학진학률이 낮은 것은 학력 차별이 적기 때문으로 분석되곤 하는데, 이 말을 거꾸로 적용하면 한국에서는 ‘차별받지 않기 위해’ 대학에 간다는 뜻이 된다.

누군가를 만날 때, 그에 대해 종합적으로 느끼고 이해하기보다 단편적인 조건들로 ‘평가’한 뒤 태도에 차별을 두는 사람들. 한국에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들을 사회 곳곳에서 만나 자존감에 상처 입는 순간을 언제고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이 취업을 ‘보장’하지도 않는 형국에, 본인이 딱히 학문에 대한 열정이 없는데 단지 차별받지 않기 위해 인생 걸고 막대한 돈을 쓴다면, 정말이지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 아닐까? 그냥 사회에서의 차별을 없애는 편이 낫잖아? 그로써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확보된 자원을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활용하면 모두의 삶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 ‘입시 공정성’보다 더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의제라고 생각한다.

<최서윤 작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우리는 그리움을 동력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때때로 글쓰기는 사랑하는 것들을 불멸화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글은 필연적으로 구체적이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대부분 대체 불가능하다. 쉽게 대체 가능하다면 그리움에 마음 아플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그 대상의 세부정보를 낱낱이 알게 된다. 다른 존재와는 어떤 점이 다른지, 언뜻 흔해 보여도 왜 그 존재가 이 세상에 하나뿐인지를 배워간다. 그 존재는 이제 결코 흔해질 수 없다. 구체적으로 고유해졌으니까. 이 구체적인 고유함을 기억하며 쓰는 글에는 수많은 디테일이 담긴다. 나의 글쓰기 수업을 들으러 온 열아홉 살의 파도라는 아이가 쓴 글도 그랬다. 그가 10년 전의 어느 오후를 회상하며 쓴 글이다.

“몸이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한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방통대에 과제를 제출하러 갔고 잠에서 깬 나는 물을 마시려고 일어났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비틀며 부엌으로 들어서는데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의 태양빛이 부엌을 비추고 있었다. 찬란하고도 따뜻한 황금빛이 말이다. 부엌 곳곳에 스민 빛과 그림자를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집 부엌 예쁘네. 그런데 왜 울컥하지? 눈 아래쪽이 축축해졌다. 잠을 너무 푹 자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식탁을 지나치는 순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앞으로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직 삼십대였던 엄마와 일곱 살의 나와 다섯 살의 동생이었다. 우리는 오븐 앞에서 쿠키가 구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븐에서 새어나오는 주황빛이 내 코끝을 물들였다. 엄마는 전자파가 나온다며 세 발짝 뒤로 가자고 말했다. 동생은 얼굴에 밀가루를 잔뜩 묻힌 채 나를 끌어당겼다. 나의 분홍색 내복 끄트머리에 밀가루 반죽이 묻었다. 엄마의 등에는 쿠키 세 개를 만들고도 남을 정도의 반죽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랑 동생은 엄마 몰래 킬킬댔다. 그러다가 내 눈앞의 오븐은 희미해지고 반쯤 열린 수납장이 드러났다. 아무도 없는 집안이 고요했다. 방금까지는 쿠키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는데 지금은 엄마가 아침에 끓인 김치찌개 냄새가 났다. 더 이상 삼십대의 엄마와 일곱 살의 나는 없다. 동생이 만든 똥 모양 쿠키와 2007년의 겨울도 없다. 킬킬대던 웃음도 없다.”

이 글을 읽는 동안 나는 파도가 살던 아파트 부엌에 함께 서있는 것 같았다. 숱한 아파트의 여느 살림집처럼 보여도 정확히 똑같은 집은 단 한 채도 없을 바로 그 집. 가보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었다. 파도가 독자에게 구체적인 장면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파도는 그리움을 설명하는 대신 그리운 이미지를 그저 보여주었다. 좋은 문장은 글자만으로도 무궁무진한 이미지를 독자의 마음속에 그려낸다. 디테일한 묘사란 부디 이렇게 상상해달라는 요청과도 같다. 문장 속 디테일과 함께 우리는 과거와 미래로 드나든다. 다른 이를 나처럼 느끼기도 하고, 나를 새롭게 다시 보기도 한다.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작품 중 ‘십대 소녀’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일부를 옮겨 적어본다.

“십대 소녀인 나/ 그 애가 갑자기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 친한 벗을 대하듯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 나한테는 분명 낯설고 먼 존재일 텐데.// (…)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 대신 뭔가 더 가치 있는 걸 알고 있는 양 당당하게 군다./ 나는 훨씬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함부로 확신하지 못한다.// 그 애가 내게 시를 보여준다/ (…) 나는 그 시들을 읽고, 또 읽는다./ 흠, 이 작품은 제법인걸,/ 조금만 압축하고/ 몇 군데만 손보면 되겠네./ 나머지는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다// (…) 우리의 대화가 자꾸만 끊긴다./ 그 애의 초라한 손목시계 위에서/ 시간은 여전히 싸구려인 데다 불안정하다./ 내 시간은 훨씬 값비싸고, 정확한 데 반해.// 그러다 마침내 그 애가 사라지던 순간,/ 서두르다 그만 목도리를 두고 갔다.// 천연 모직에다/ 줄무늬 패턴,/ 그 애를 위해/ 우리 엄마가 코바늘로 뜬 목도리.// 그걸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심보르스카는 말했다. 자기가 쓰는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이라고. 그리하여 돌아가야만 한다고. 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일이 멀어지는 걸 보며 계속 살아가는 사람 아닐까. 멀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을 기록하며.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두며, 하지만 결코 디테일을 잊지 않으며 말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무것도 아닌 것과 아무것  (0) 2019.10.29
대학 졸업장, 가성비로 따져보자  (0) 2019.10.24
그리움을 더해 주는 디테일  (0) 2019.10.22
검색창 속 ‘선지’  (0) 2019.10.17
주52시간 근무제가 가져온 변화  (0) 2019.10.15
사실 부재의 사회  (0) 2019.10.1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전략) 고려 말기의 중국어 회화교본인 <노걸대(老乞大)>에 술 깨는 국이라는 뜻의 성주탕(醒酒湯)이 나온다. 이것이 해장국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육즙에 정육을 잘게 썰어 국수와 함께 넣고 천초(川椒)가루와 파를 넣는다’고 되어 있어 얼큰한 오늘날의 해장국과 그 기본이 같다.”

한국에서 제일 크다는 포털사이트에서 ‘해장국’을 검색하면 요식업 가맹사업자의 광고부터 나온다. 광고에 깔린 ‘지식백과’를 클릭해 들어가면 위 문단이 ‘정보’의 맨 처음이다. 해장국을 파는 업체나 가게에서는 여기에 기대 ‘<노걸대>에 나오는 해장국’을 앞세운 광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주탕’ 세 글자 빼고는, 없는 소리다. 저 문단은 낭설이다. 우선 이 책의 편찬과 출판의 연대기부터 들여다보아야 한다. <노걸대>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되기 시작한 중국어 학습서로 <번역노걸대>(1517), <노걸대언해>(1670), <중간노걸대언해>(1795) 등이 전해온다. ‘노걸대’는 중국인을 뜻하는 말인데 나중에는 만주어 학습을 위한 <청어노걸대>, 몽골어 학습을 위한 <몽어노걸대>까지 나왔다. 중국어 외의 어학서에서 노걸대를 빌린 것이다. 이 가운데 <노걸대언해>에 ‘성주탕’이라는 어휘가 딱 한 번 나오고, 성주탕을 언해(諺解)해 ‘술깨오는탕’이라고 했다. 이것으로 끝이다. 조리법은 나오지 않는다. 천초(초피)와 소금으로 양념을 해가며 고기볶음을 하면서, 남의 음식에 타박도 하는, 절로 웃음이 나는 장면이 <청어노걸대>(1765)에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해장국은 없다. 이것으로 끝이다. <노걸대언해> 속 성주탕과 오늘날의 해장국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성주’는 ‘술을 깨다’라는 뜻이다. 옛 동아시아에서 자연스러운 말이고, 흔히 쓴 어휘일 뿐이다.

대중이 잘 모를 수도 있지, 어쩌라고? 물으신다면, 나 또한 배운 도둑질 자랑하자고 나서지 않았노라 여쭈겠다. 해장국 한 그릇 앞에서도, 단 하나의 검색창 검색-복사하기-붙이기라는 타성이 작동한다. 게으른 정보 습득과 가짜정보 유통이라는 악순환이 아예 한국인의 삶의 형식이 되었다는 말인가. 전통 음식을 한다는 곳에 가면 빠지지 않고 붙어 있는 광고물이 있다. 포털사이트 찍어서 처음 나오는 지식과 정보를 인쇄한 광고판이다. 대개 <조선왕조실록> <동의보감> <자산어보>에 그런 소리가 있다고 우긴다. 가끔 <노걸대> 같은 ‘마이너한’ 문헌도 동원된다. 피부미용과 원기회복으로 박자를 맞추었지만, 사실과 맥락이 어긋난 이야기를 늘어놓다 낭설에 주저앉는다. 성주탕의 전설과 같은 꼴이다. 그러고는 내 음식이 어떤 점에서 맛나고, 좋은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설명하지 못한다. 가령 내 일이 선지해장국이라면, 구체적으로 선짓국해장국을 거론함이 옳다. 

선지가 국거리가 될 때 된장을 바탕 삼을 수도 있고 젓국을 바탕 삼을 수도 있다. 해산물에서 온 젓국과 동물 단백질이 만나면 서로가 서로의 풍미와 손잡고 독특한 맛을 이룬다. 된장의 구수함은 또 다른 길이다. 젓국과 된장 사이에서 나는 어떤 기획으로 무엇을 선택했는가? 선지는 어떻게 다루는가. 사람은 소가 아니라 소고기를 먹는다. 한 덩어리 네발짐승의 피는 손질과 정리를 통해 ‘선지’가 되어야 한다. 그다음에 우리 입안에 들어와야 한다. 어떻게 다루었는가. 지저분한 것을 걷어내자고 중탕을 했다. 맛을 들인다고 젓국으로 밑간을 하기도 한다. 질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막걸리에 담가뒀다. 이런 고전적인 기술에 대한 이해가 해장국 한 그릇 제대로 해내는 구체적인 길이다. 뾰족한 수는 없다. 내 일의 세목을 구체적으로 파악한 사람이, 내 줏대를 쥐고, 내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다. 단 하나의 검색창, 내가 끼고 사는 단 하나의 매체에 기댄 낭설 수집이란 정보의 습득일 수도, 공부일 수도 없다. 이미 모두 알고는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손은 먼저 검색창을 향한다. 검색하는 사이에 그다음을 잊는다. 이야말로 타성이다. 선지해장국 한 그릇에 잇닿은 낭설 한 조각마저 타성에 장악된 우리 삶을 비추고 있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 졸업장, 가성비로 따져보자  (0) 2019.10.24
그리움을 더해 주는 디테일  (0) 2019.10.22
검색창 속 ‘선지’  (0) 2019.10.17
주52시간 근무제가 가져온 변화  (0) 2019.10.15
사실 부재의 사회  (0) 2019.10.14
조커, 어느 인셀의 탄생  (0) 2019.10.1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회사가 두 달간의 시범 운영을 거친 후 최근 본격적으로 주52시간 근무제를 시작했다. 그간 ‘근무 시간을 제한해 근로자의 삶의 질을 보장한다’는 기대와 ‘기업 경쟁력이 하락한다’는 우려가 함께 있었다. 실제 창의적인 일을 하고 근무 패턴이 불규칙하며 노동량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방송사에 다니는 만큼 이번 개편이 어떤 영향을 줄지 스스로도 궁금했다. 회사는 근무 성격에 맞게 여러 제도를 마련했는데 나는 그중 선택근무제의 적용을 받고 있다(4주간 160시간 이상 근무하되 20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나는 매일 근무 시작과 종료, 휴게 시간 등을 등록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근무가 매우 효율화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엔 매일 8시간을 반드시 일해야 했다. 그런데 업무량의 기복이 큰 만큼 하루에 2시간 정도 일하면 나머지는 할 일이 없을 때도 생긴다. 그러면 전후로 이러저런 일들을 만들었다. 동료와 긴 티타임을 갖기도 하고 ‘미드’를 몰아보기도 한다. 업무 협의, 콘텐츠 동향 연구라는 이름이 붙으면 일 같기도 하고 그냥 잡담, 취미라는 이름이 붙으면 일이 아닌 것도 같다. 지금은 시간에 맞춰 출근하고 일이 끝나면 퇴근한다. 스스로 휴게 시간에 대해서도 조금 더 엄격해졌다. 일정을 띄엄띄엄 짜서 휴게 시간이 느는 것보다는 일을 몰아놓는 게 마음 편하다.

한편 어디에 있었건 일했으면 근로로 인정받는 것도 좋은 변화다. 집에서 잔뜩 일한 게 노동으로 인정 못 받아 억울한 일도 사라졌다. 통화내역, 문자 연락 등 근거가 명확하면 일로 인정받을 수 있다. ‘회사 그리고 제자리에 있어야 일’이라는 통념에는 관리의 용이성이라는 명분 아래 불합리성이 숨겨져 있었다. 눈치 보지 않고 진짜 일에만 더 집중할 수 있게 된 건 좋은 일이다. 나아가 회사는 아침에 가서 저녁에 돌아오는 곳이라는 생각도 점점 줄어들 거다. 지금의 싸움은 비효율을 감수하면서 ‘어때야 한다’는 것에 맞춰 살던 틀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과정이다.

일이 몰리면 정신없이 지낸다. 한편으로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의 근로 환경도 챙길 의무가 있다. 확실히 젊은 친구들일수록 워라밸을 중시하는 것 같다. 그들과 좋은 팀워크를 이루기 위해 중요한 조건은 술도 밥도 어설픈 멘토링도 아닌 빠른 퇴근과 적절한 휴식이다. 아무 생각 없이 회의에 들어와 함께 고민하자고 하면 민망해진다. 충분히 생각해서 회의 안건을 미리 정하고 결정은 신속해야 한다.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라는데 이제는 장고 자체가 악수가 되어버렸다. 노동 투입량이 많은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하는 동료들은 시간 관리 자체가 큰 미션이다. 너무 긴 시간을 일해야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은 돈이 많이 드는 프로그램처럼 경쟁력을 잃어갈 거다.

회사 입장에서도 직원들이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좋은 일이다. 불필요한 수당 지출을 줄일 수 있고 각종 경비도 아낄 수 있다. 물론 필요한 인력을 더 뽑아야 하는 어려움도 있을 거다. 시간과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로망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젊은 구직자들에게도 악명 높은 방송사의 근무 환경 개선은 매력으로 다가올 거다.

사생활 측면에서 보면 전에는 나인 투 식스가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박스 존이었다. 개인적인 일과와 근무 시간을 적절하게 조절해서 새로운 시간을 확보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PD들은 출퇴근 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지만 8시간을 매일 채워야 했기 때문에 조정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제는 조금 더 대담하고 획기적인 계획이 가능해졌다. 항상 고갈돼서 뭔가 채우고 싶은 절박함이 있는데 굳이 휴직을 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재충전할 수 있게 된 건 다행이다. 그건 회사 일에도 도움이 되는 선순환이다.

PD는 일의 성격상 직장인과 개인사업자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이제는 개인사업자에 조금 더 방점이 찍히는 것 같다. 노동의 종말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 불안한 시대를 조금 빨리 경험하고 적응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회사들이 이 국면을 통해 더 건강해지리라 기대한다. 노동자를 쥐어짜는 곳은 도태되고 좋은 환경을 만드는 회사는 늘어날 거다. 다양한 직업 중 하나를 겪은 것에 불과하지만 나는 지금의 변화가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에 확실히 섰다.

<김신완 MBC PD>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움을 더해 주는 디테일  (0) 2019.10.22
검색창 속 ‘선지’  (0) 2019.10.17
주52시간 근무제가 가져온 변화  (0) 2019.10.15
사실 부재의 사회  (0) 2019.10.14
조커, 어느 인셀의 탄생  (0) 2019.10.14
아내가 제 말을 안 들어요  (0) 2019.10.04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8년 10월 10일 지면게재기사-

10월 마지막 주 모 영상 플랫폼에서는 술에 취한 두 스트리머 간의 난투극(‘현피’ 사건)이 라이브로 생중계됐다. 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이어진 싸움은 즉시 gif 그림파일로 저장돼 인터넷 세상에 뿌려졌다.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방송의 자격론과 윤리가 호출되며, 규제 없이 방송하는 개인들의 수위가 나날이 자극적으로 된다며 이러한 방송을 저지할 수 있는 규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은 10년 전부터 꾸준히 반복된 낡은 이야기다. 공중파에서 스트리밍 방송 시스템을 빌려 송출자와 시청자의 거리를 좁히고, 실제 셀러브리티를 데려와 방송 출연을 시키는 세상에서 이러한 담론은 고리타분하고, 무용하다.

우리가 좀더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그 문화 저변이 어떤 동력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인식과 그 여파다. 주목할 것은 ‘현피’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gif라는 파편으로 잘라 밈(Meme)화시켜 공유하고 웃고 떠들며 즐기는 문화 자체, 그리고 그렇게 현실을 밈화해서 떠드는 동안 파고든 사실 불신의 미래다. 밈은 리처드 도킨스가 문화의 진화를 설명하며 제시한 개념이다. 특정 집단에서 다른 지성으로 생각 혹은 믿음이 전달될 때 전달되는 모방 가능한 최소단위를 이야기하는데, 한국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이론설명보다 ‘짤방’으로 알려져 있다. 짤방은 특정 세대 또는 집단의 문화적 유행이 그림파일 등으로 유포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데 드라마 <야인시대>의 김두한(김영철 분) 캐릭터가 “4딸라!”를 외치는 모습이나 최근 <타짜>의 곽철용(김응수 분)의 대사들이 그러한 사례다. 그들의 유쾌한 대사는 패러디를 양산하고 현실의 문화들에 균열을 낸다. 

가상 캐릭터들과 현실의 폭행 사건이 인터넷 공간 속에서 동일하게 밈화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物化)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물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이 매매의 대상이 되며, 인간의 노동력이나 다른 능력, 심지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자체도 물(物)과 물(物)의 관계처럼 변화됨을 뜻한다. 앞서 이야기한 스트리머의 폭력을 살펴보자. 그것은 인터넷 방송이라는 공간을 통해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상품으로 변화한 것인데, 여기에 밈이라는 영역이 합쳐지면 단순히 현실이 물화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이 가상의 영역에서 문화상품화된다.

즉, 스트리밍 방송 속에서 싸우는 사람은 실제의 사람이고, 실제 사건이지만, 그것이 짤방화되는 그 순간 실제의 사람은 소멸하고 가상의 복제체인 밈만 남는다. 사람들은 실제 사건이 일어났는지 안 일어났는지는 관심 없고 폭력 그 자체, 자극 자체만 존재하는 일종의 환영체, 팬텀(Phantom)으로만 소비하는 것이다.

밈으로 소통하고 복제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이제 ‘사실’을 믿지 않는다. 조작과 거짓, 선동과 날조 속에서 날아오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순진하고 나이브한 것이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팩트’에 집착하고 사건에 대한 싸구려 신파적 감성에서 떨어져 나와 기계적 중립을 외치며 타자를 자처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확증편향적으로 믿고, 자신이 믿으면 그것이 팩트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인터넷 스트리밍 방송에서만 일어나는 단일적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적인 사건이나 사회·정치의 단면들조차 쉽게 짤방화하고 유희화하지 않나. 수많은 가짜뉴스 생산자들이 활개칠 수 있는 까닭도 이러하다. 정치적 영역에서부터 이미 무엇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생각이 없는 자들이 그것을 사실이라 믿고 소비하며, 현실 사회를 끊임없이 가상의 시공간으로 변화시킨다.

물론 이러한 사실 불신의 사회를 모조리 ‘인터넷의 밈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다. 단지 오늘, 조금 더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이 몇 년 사이에 어떻게 변화했는지. 왜 우리는 팩트에 주목하면서 현실을 가상처럼 소비하고, 그 어떤 사실도 거짓이라 전제하고 받아들이면서, 수많은 가짜들을 사실로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왜 우리는 그 바깥에서 그 모든 과정을 웃고 즐기는지.

<이융희 문화연구자>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색창 속 ‘선지’  (0) 2019.10.17
주52시간 근무제가 가져온 변화  (0) 2019.10.15
사실 부재의 사회  (0) 2019.10.14
조커, 어느 인셀의 탄생  (0) 2019.10.14
아내가 제 말을 안 들어요  (0) 2019.10.04
수경 누나에게  (0) 2019.10.0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2년 7월20일 미국.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상영 중인 오로라 극장에 여러 발의 총성이 울린다. “내가 조커다”라고 외친 청년 제임스 홈스는 이날 8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체포됐다.

요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조커>를 본 뒤, 나는 내내 이 사건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의 주인공 아서 펠릭과 제임스 홈스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인 홈스가 조커와 동일시하면서 영화를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면, 허구적 인물인 아서는 홈스와 같은 실존 인물들에 이입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로 현실을 영화로 옮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조커'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아서가 참조하고 있는 사람들을 미국에선 ‘인셀(incel, 비자발적 순결주의자)’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20~30대, 애인 없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인 인셀은 강력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당연하게도 아서의 이야기와 인셀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공명한다. 특히 아서가 조커로 거듭나는 전환의 장면은 꽤 노골적이다. 

막 일자리에서 해고된 아서는 지하철에 앉아 있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양복쟁이 세 명이 지하철에 탄다. 그들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여자를 괴롭히자 여자는 아서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낸다. 아서는 나설 생각이 전혀 없지만 곤란하면 발작적으로 터지는 웃음 탓에 집단 구타를 당하게 된다. 여자는 이미 도망치고 난 뒤다.

아서는 결국 총을 난사하고 스스로를 구원한다. 그리고 스토킹하던 옆집 여자와 섹스를 나눈다. 조커의 탄생이다. 하지만 이 섹스는 완전히 붕괴된 아서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환상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아서의 괴물 (혹은 영웅으로의) 변신을 묘사하는 시퀀스의 시작과 끝에 여자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 현실의 여자는 아서에게 위험을 떠넘긴 채 자리를 떠났지만, 망상 속의 여자는 영웅이 된 조커에게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준다.

한편 조커를 낳은 것은 ‘토머스 웨인’이 상징하는 부패한 사회의 금융자본이다. 전혀 새롭지 않다. 다만 영화가 웨인을 설명하는 방식만은 흥미롭다. 그는 거대한 저택에 집사를 거느리고 살면서도 산업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인 <모던 타임즈>를 보며 여가를 보내는 진보적 문화 엘리트다. 정치 신성 트럼프가 2016년 대선에서 “인민의 적”으로 지목했던 바로 그 자들. 그들은 사회주의자의 코미디를 보면서 문화적 취향을 뽐낼 시간은 있지만,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울부짖는 청년의 고통에 귀 기울일 여유는 없다.

소수자와 다양성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와 선을 그으며 등장한 크리스토퍼 놀런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는 “윤리적 자본과 건강한 국가 시스템”에 대해 강조하면서 ‘건강한 보수’의 가치를 세련되게 설파했다. 그러나 인셀은 총기 난사로 그에 응답했다. 그렇게 트럼프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2019년, DC 유니버스의 외곽에서 등장한 <조커>는 인셀의 손을 들어준다.

물론 아서는 한심한 관종일 뿐이고, “내가 광대다”를 외치는 마스크맨들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폭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야말로 인셀의 은밀한 옹호자들의 자기인식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선량하고 억울한 피해자라고 주장할 뿐 영웅이라고 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들과 함께 선다. 관객들이 공감하지 않을 아서의 범죄는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B호실 여자는 어떻게 됐을까?) 코미디로 산화시켜버리고(발자국에 묻어나는 피는 상담사의 것이었겠지?), 아서의 흑화를 적극적으로 이해해 주면서 말이다.

현실과 영화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건 여기에서다. 아서와 인셀, 그리고 인셀의 옹호자들이 같은 변명 혹은 망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은 모방범죄가 아니다. 이미 편재하는 폭력의 반복과 지속이다.

어쩌면 이것이 마블과 경쟁하는 DC의 전략인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올바름을 ‘마블=기득권 엘리트의 것’으로 밀어내면서, 마블의 행보에 동의하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광대들의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것. 이 치밀하게 계산된 정교한 영화 앞에서 생각이 복잡해진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52시간 근무제가 가져온 변화  (0) 2019.10.15
사실 부재의 사회  (0) 2019.10.14
조커, 어느 인셀의 탄생  (0) 2019.10.14
아내가 제 말을 안 들어요  (0) 2019.10.04
수경 누나에게  (0) 2019.10.01
‘5평 주택’ 논쟁이 놓친 것  (0) 2019.09.26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