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의 표적이 된 문재인 대통령의 딸 다혜씨는 공인일까, 사인(私人)일까. 대통령이 공인이라고, 국민의 세금으로 경호를 받는다고 그 가족도 당연히 공인에 해당하는가. 그렇다면 신변보호를 받는 증인도 공인으로 봐야 하지만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공인의 범위를 넓히려는 측에서는 그들의 명예나 프라이버시보다는 언론보도의 자유와 국민의 알권리를 무기로 잡다한 사적 영역까지 감시와 검증의 이름으로 들여다보고 간섭하고 싶어 한다. 특히 언론은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공인의 사생활도 취재보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보면서 공인의 범위를 넓게 잡는다. 혹시 제기될지도 모르는 명예훼손 소송의 방어막을 치기 위한 의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연예인과 프로 스포츠 선수 같은 유명인까지 공인으로 보는 것이다. 언론은 권력남용이나 부정부패의 파수꾼(watchdog)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장관 인사청문회에서도 야당은 후보자의 내밀한 영역인 병력이나 수술이력까지 들먹이며 공인으로서 감수해야 할 것처럼 의혹을 터트리고 언론은 이를 받아 지면을 장식했었다. 대중의 관심이나 흥미를 충족시켜야 하는 언론으로서는 언론보도의 자유가 폭넓게 인정되는 공인의 범주가 넓어야 좋다. 신랄하고 날카로운 공격을 통한 여론형성 기능을 수행하려면 숨 쉴 공간이 넉넉해야 편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공간의 너비를 결정하는 공인 개념의 광폭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렇다면 누가 공인인가. 전통적으로는 사전적 의미를 중시하여 고위 공직자를 공인이라고 불렀다. 저명한 사람도 공인에 포함시켜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다. 공적 인물이라는 용어도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공인 개념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유명 연예인이 음주운전이나 마약, 성폭력 범죄 등 사회적 물의를 빚으면 으레 ‘공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사과하지만 연예인이 무슨 공인이냐는 비아냥거림도 있다. 판례에서 사용하는 공적 인물이나 공인이라는 용어는 언론이나 일반인들의 언어용법 또는 인식과는 차이가 있지만, 연예인이나 뉴스 앵커 같은 유명인도 공인 내지 공적 인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공적 관심사에 관한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인물, 뉴스 가치가 있는 저명성이나 매체의 노출빈도에 근거하여 유명한 인물을 공인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 공직자와 같은 공인으로서의 높은 도덕성과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들의 사생활 영역을 좁힐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적 인물의 범주를 넓히면 넓힐수록 표현의 자유는 확장되지만 공적 관심사나 유명도라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표지 때문에 개인의 인격권이 침해될 소지는 더 커지기 마련이다. 간혹 연예인이나 유명인 대해서는 과도한 언론의 자유가 발휘되지만, 정치적 책임과 공공성이 강조되어야 할 공인에 대해서는 과잉의 명예보호가 되는 역전현상도 나타난다.

공인이란 사회정의와 공익을 실현하고, 도덕적이고 정당한 공적 활동으로 국민의 귀감이 되어야 하는 존재다. 이들에 관한 정보는 공공성을 갖춘 것이므로 알권리에 포함되며 언론보도를 통한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예인이나 유명인을 공인 내지 공적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언론이나 일반인이 통상 인식하는 것처럼 공공의 관심사 또는 유명도를 기준으로 공적 인물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더라도 그들에 관한 언론보도를 넓게 허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피의자 단계에서의 범죄혐의 보도도 마찬가지로 공인보다는 제한적이어야 한다. 보도내용이 공적 관심 사안인지, 순수한 사적 영역에 속하는 사안인지를 준별해야 한다. 공직자인 공인의 경우에도 내밀한 사적 영역이나 비밀영역에 속하는 사항은 보호받아야 한다. 이러한 영역에 속하는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적법하려면 극히 예외적으로 정보공개의 이익이 더 커야 한다. 일반 대중의 정당한 관심사여야 하고, 그 공개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그 표현 내용·방법 등이 적절해야 한다. 그래야 언론보도의 자유와 알권리가 개인의 인격권과 명예보다 우선시되는 것이다. 방송인, 유명 스포츠 선수, 뉴스앵커 같은 유명인과 연예인은 공직자인 공인과는 다르다. 그래서 제한적인 공적 인물이라는 개념으로 그들의 사적 공간이나 사생활을 공직자보다 더 넓게 보호하려 한다. 언론은 항상 알권리를 주장하지만 국민은 그들의 내밀한 사생활 영역까지 들여다보고 싶어 하진 않는다. 대통령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공직자인 대통령에 의해 공적 인물이 되었으므로 제한적 공적 인물에 해당한다. 설사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는 경호를 받고 또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감찰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공인은 아니므로 개인정보와 사생활은 공직자보다 더 보호받아야 한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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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이명박 전 대통령의 보석결정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보석허가율이 40%를 밑돌고 점점 더 낮아지는 추세인데 전직이 고려되어 구치소 담장이 낮아진 것 아닐까 하는 의혹 때문이다. 보통 피고인들은 보석을 신청조차 하지 못하는데, 권력이나 돈 있는 피고인은 심심찮게 보석으로 풀려난다. 주로 병보석이다. 자유를 만끽하던 권력자나 재벌총수들이 좁디좁은 교도소 독방에 갇혀 생긴 병인데 여느 피고인은 상상도 못하는 사유로 풀려나는 것이다. 피고인이 누구냐에 따라 보석 여부가 갈린다고 ‘유권무죄’ ‘유전무죄’라는 말도 유행이다.

피고인 이명박은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피고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보석신청은 기각된 것을 보면 권력자라서 특혜를 준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의혹의 눈초리와 비판적 시각이 적지 않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방어권보장이 형사법의 대원칙이지만 1심에서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의 보석은 시민적 상식과 정의감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다. 재벌총수들이 감방생활을 피하는 수법인 병보석은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법 앞의 평등은 권력 앞에서 맥을 못 춘다는 비판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보석사유가 있으면 석방해서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결정이지만 그동안 보석을 재벌총수와 정치인처럼 막강한 변호인단의 조력을 받는 자들에게 선별적이고 예외적으로 허용해 온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표출된 것이다.

누구든 법 앞에서 똑같이 대접받기를 원한다. 누구든 형사소송법상 구속사유가 있으면 구속되어야 하고, 구속 이후라도 보석사유가 생기면 석방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 피의자·피고인이 대통령이었든, 재벌총수로서 국가경제를 위해 애썼든 그런 사정들이 고려되어서는 안된다. 법과 원칙이 흔들려 나라가 휘청거렸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면 피의자·피고인이 전직 대통령이나 전직 대법원장이라고 달리 대우해서는 안된다. 그들도 법 앞에 평등해야 할 피의자 또는 피고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만 인권이 있고 방어권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권력자들이 피의자로 소환되고 수사대상이 되면서 피의자의 인권과 방어권이 화두가 되었다. 피고인 이명박의 보석결정에서 판사가 무죄추정의 원칙과 방어권을 근거로 제시한 것처럼, 피의자 양승태가 검찰청 포토라인을 무시하자 이를 옹호하기 위해 포토라인 세우기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허무는 야만적 행위라는 비판이 사법부 내에 있었다. 그에게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되자 비로소 영장남발의 문제를 제기하고 사법농단 수사에서 밤샘조사의 반인권성도 부각시켰다. 전직 대통령, 전직 대법원장과 고위법관, 정치인 등의 수사와 재판에서 비로소 기존 관행이 이슈가 되고 인권감수성이 생긴 것이다. 이전에는 아무리 주장해도 듣지도 보지도 않다가 자기 식구들이어서 갑자기 눈과 귀가 트인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실무관행에 대한 자기비판이나 성찰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식구 감싸기와 조직방어의 이기심으로 비칠 뿐이다. 전직 대법원장의 포토라인 관행 무시행위나 보석허가의 근거로 판사가 제시한 방어권 보장 등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결정하거나 행동하고도 때와 장소가 적절치 않아 욕을 먹거나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법과 원칙이 사람 봐가면서 달라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은 심판대에 서 있는 자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고 법과 원칙을 지켜야 정의가 세워짐을 상징한다.

전직 대통령의 보석을 허가한 판사도 안대로 눈을 가렸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힘이 보석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법과 원칙에 따른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고인 이명박의 보석결정이 특혜라며 비판할 것은 아니다. 앞으로 이 결정이 보석결정의 기준이 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구속된 거물급 정치인 피고인이 불구속재판을 청구하면 일응의 잣대가 될 것이다. 구속사유인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더라도 방어권 보장을 위해서 석방하되 거주지 및 통신제한과 같은 엄격한 조건을 부과하면 된다는 취지이므로 보석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듯 보석허가결정의 기준이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돌연사 위험성까지 주장했는데 병보석사유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이제 웬만하면 병보석은 어려워졌다고 봐야 한다. 구치소 내 의료진이 충분하다는 이유다. 나아가 무죄추정의 원칙과 방어권의 중요성이 확인되었다. 재판상 방어권은 권력자나 재벌총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이다. 사법부가 실천하는 법 앞의 평등이 헌법에 생명을 불어넣고 불신의 사법부를 살려내는 길이 될 것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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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 제정 당시 국회는 ‘이해충돌방지’ 규정을 삭제했다.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만 남고 다른 한 축이 빠진 것이다. 이제야 그 배경이 드러났다. 여야가 한목소리였던 이유를 알 만하다. 표면적으로는 ‘경계가 애매모호하다’ ‘적용범위가 너무 포괄적이다’ ‘그래서 의정활동의 족쇄가 될 것이다’ ‘위헌적이다’ 등등의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이해충돌 상황이 자신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옭아맬 법을 제정할 리 없는 국회의원이었다. 국회의원과 그 배우자들 중에는 부동산 임대업자도 있고 기업경영인도 있고 학교법인을 운영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공적 이익과 사적 이해가 충돌하는 상황이 일상다반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수조사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 한둘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친지에게 건물매입을 권유한 뒤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받게 한 의원, 역 개발명목으로 예산을 따온 역세권 건물주 의원이나 지방 일부대학의 역량강화를 위해 국비투입 예산안 통과를 추진한 의원이 그 예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 고위공직자였을 때부터 부친 소유 부동산 근처의 철도사업을 추진했다는 해명을 들어보니 더욱 이해충돌의 소지는 커 보인다. 국비투입 사업지로 선정되기 몇 개월 전에 역 근처 상가건물을 샀다니 더욱 의심스럽다.

이해충돌은 공직자의 사적인 이해관계가 자신이 맡고 있는 공적인 업무 또는 공공의 이익과 서로 상충되는 상황을 뜻한다. 이해충돌은 일상에서, 직업수행에서 늘 맞닥트리게 된다. 이해충돌 상황의 폭은 권한의 크기에 비례한다. 공직자 중에서도 정책결정 권한을 갖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이해충돌 상황의 크기는 다르다. 그런 면에서 국회의원이 마주하게 될 이해충돌 상황은 어마어마하다. 그의 권한이 크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행정부와 사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권한, 입법권한, 예산안 심의의결권한 그리고 정책결정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 등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이 막강하다. 그러니 겉으로는 공적 권한을 행사하면서 뒤로는 사적 이익을 챙기고, 직무로 얻은 정보를 사적으로 이용하고 주변의 편의를 봐줄 수 있는 상황도 많을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도 사람이다. 공적 위치에서 사적인 자신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 내 가족과 친·인척의 이익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공직자윤리법 제2조의2에 ‘이해충돌 방지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공직을 이용하여 사적 이익을 추구하거나 개인이나 기관·단체에 부정한 특혜를 주어서는 아니 되며, 재직 중 취득한 정보를 부당하게 사적으로 이용하거나 타인으로 하여금 부당하게 사용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내용이다. 처벌규정이 없는 선언적 규정이어서 실효성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래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당시에 처벌을 포함한 이해상충 방지가 논의되었다가 아쉽게 삭제되었다. 이후 법제화는 계속 시도되었으나 법안은 잠자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제약으로 다가올 법안에 적극적 관심을 보일 국회의원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손혜원 의원 사건으로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해충돌 방지를 규율하고 범죄화하라는 여론의 압박도 거세졌다. 국회 내부에서도 여러 법안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대 여야는 ‘이해충돌’ 문제로 대충돌 중이다. 1월에 국회를 소집했지만 본회의 한 번 열지 못했다. 2월 국회는 아예 의사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손혜원 국정조사’ 없이는 국회를 열 수 없다는 야당 원내대표의 버티기 때문에 국회 정상화는 안갯속이다. 이해충돌로 대치하고 있지만 여야의 속내는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옭아매고 불이익을 줄 법안은 그들에게는 내키지 않는 법이다. 여야가 한통속이라서 더욱 걱정이다. 세비 인상의 예에서 보듯이 여야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 한 몸처럼 움직이다가도 그들 모두에게 불이익이라면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종종 자신의 이익이나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인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자다. 그들은 ‘국민’을 입에 달고 살면서 정치적 대표성을 강조한다.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정치인으로서의 직업윤리다. 정녕 국민을 위하고 국민으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입법권을 행사해야 한다. 사적으로 유불리를 따져 공적 입법의무를 방기하는 것이야말로 이해상충이다. 전수조사로 이해충돌 사례를 유형화하고 기준을 세워 처벌대상을 좁혀나가면 위헌소지 없는 법안을 마련할 수 있다. 청렴공직사회의 길라잡이가 되고 있는 ‘김영란법’에 이해충돌 방지규정을 끼워 넣는다면 공직윤리규범이 완전체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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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루하루가 신기록이다. ‘고공농성 408일’, 3년 전 사측으로부터 고용, 단체협약과 노동조합 승계를 약속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다시 더 높은 굴뚝으로 올라갔다. 더 이상 동료의 기록이 경신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차디찬 굴뚝에서 죽기 살기로 버티고 있는 두 노동자는 이제 매일매일 슬픈 역사를 남기고 있다. 그곳은 날아다니는 새들이 둥지를 틀고 쉬어가는 곳이다. 새들에게는 낙원일지 모르지만 사람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돌아누울 수조차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풍찬노숙 중이다. 기록적인 폭염을 견뎌내고 칼바람의 혹한과 맞서며 좁디좁은 굴뚝 난간에서 또 한 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누가 이들을 하늘로 오르게 했는가. 이 땅이 노동자를 보듬지 못하고 법과 제도가 자신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자 내몰리듯 높은 곳으로 밀려 오른 것이다. 굴뚝, 타워크레인, 광고 전광판, 이 땅에서 희망을 잃은 노동자들이 오르는 단골 장소다. 2명의 파인텍 노동자들은 3년 전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하늘에 올랐다”는 그의 동료처럼 또 수십미터의 굴뚝으로 올라갔다. 기네스북에 기록을 남겨 영웅이 되려고 75m 상공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노동인권을 살려보려고 올라간 것이다. 그곳에서 소외받고 버려진 약자들이 목숨을 담보로 버티고 있다. 차디찬 겨울을 두 번 맞을 때까지.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약속을 지키라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한뎃잠을 잔 지 400일이 넘자 비로소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정치권과 언론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땅에서는 그들을 살려내기 위한 동조 단식으로 연대하는 이들도 있다. 다행히 노사의 교섭이 시작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진전은 없다. 고용주의 인식이 아직도 3년 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노동자들에게 고용주는 “굴뚝에 올라가면 영웅인가?”라는 야만의 언사도 주저하지 않았다. “농성하는 사람들에게만 인권이 있나. 합법적으로 기업 하는 나도 너무 힘들어서 이 나라에서 살고 싶지가 않다. 이 나라가 법치국가가 맞나”라고 항변도 한다. 이들에게는 욕심 이외의 감정은 없는 모양이다. 벼랑 끝에 내몰린 뼈만 남은 자신의 옛 직원에게 할 소리인지 매정하기만 하다.  

사측은 3년 전 약속이행으로 책임질 일 없다는 주장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때의 약속이행은 불완전 이행이다. 노사합의는 약속이자 법인데 사측은 이를 이행하는 척만 했다. 현재의 파인텍을 세워 노동자의 일터를 만들어 주었지만 임금협상을 차일피일 미뤘고, 복귀한 노동자들에게는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월급만 주고 수당 등을 받을 수 있는 일감은 거의 주지 않았다. 결국 반발한 노조가 파업하자 사측은 공장을 폐쇄하고 새 사업체를 입주시켰다. 책임을 노조 쪽으로 미뤄버린 것이다. 지난 연말께부터 4차례 노사가 마주 앉았지만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빈손이다. 3년 전 불완전 합의이행을 경험한 노조 측이 기존 합의사항을 지키라며 합의가 이행되지 않을 경우 법적 책임을 진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사측은 요지부동이다.

이게 우리 노동인권의 현주소다. 위험천만한 굴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바람에 자칫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곳만이 아니다. 발전소 석탄 컨베이어벨트에 위태롭게 누워 있기도 하고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끼여 있기도 하다. 부당해고, 농성과 단식, 자살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우리의 노동인권의 현주소다. 생명을 걸어야만 겨우 해결되는 수준이어서 노동자의 생명이 존중되지 못하고 수단화되는 현실이다. 작년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이하여 기업들이 너도나도 인권경영을 선언하지만 노동인권은 입에서만 맴돈다. 말과 행동이 각각이고 머리와 손발이 따로 논다. 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는 경영이 인권경영이다. 노동자를 배려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 노동자와 사용자가 공생하는 것이 바로 기업인권의 핵심이다. 인권 감수성을 가진 기업문화가 정착해야 기업의 경쟁력도 커지고 지속적인 성장도 가능해진다. 기업 활동에서의 인권침해는 기업경영의 리스크다. 파인텍의 모기업인 스타플렉스는 해외 거래처가 많다고 한다. 이들에게 반인권적인 회사 대표의 언행이 알려진다면 기업경영에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 작은 것 때문에 더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물론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까지도. 엊그제 굴뚝 위에서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는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람을 살리고 보는 노사교섭이 절실하다.

<히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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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재벌 총수를 ‘오너’(owner)라 부른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그 설립자와 일가들이 회사의 주인이자 소유주라는 의미다. 설립자의 개인능력 덕분에 성공했으므로 오너가 되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자수성가의 신화가 회사를 자기소유, 개인재산으로 여기게 한다. 자기가 키운 회사라는 생각에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자녀에게 물려준다. 사유재산인 보유 지분뿐만 아니라 경영권까지 상속하려 한다. 경영권은 사유물이 아닌데도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지 않는 오너의 잘못된 인식이 가족경영과 경영권세습을 정당한 것으로 여긴다. 이제 재벌 상속과 경영권 대물림이 우리 기업의 독특한 관행이 되었다. 내 것이라는 생각에 권위주의적 오너가 되고 수직적 기업문화가 지배한다.

세습자본주의의 민낯이 오너의 갑질 행태로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한다. 회사는 보통 주식회사이므로 설립자이자 경영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원도 있고 주주도 있다. 아무리 1인 주주의 1인 회사라 하더라도 주주와 회사는 구분된다. 주주와 회사는 별개의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법률적으로는 낮은 지분율로 회사를 지배하는 설립자와 그 일가가 아니라 주주들이 주인이다. 피와 땀이 배어 있다고 재벌총수 일가가 멋대로 할 수 있는 개인재산이 아니다. 국가의 온갖 보호와 특혜로 성장했다는 점에서도 더 이상 개인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 기업 내 민주주의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화두가 되는 이유다. 

5일 오전 참여연대회원들이 서울 영등포구 자유한국당 서울시당 앞에서 유치원 비리근절 3법 통과 촉구 및 자유한국당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소위 ‘유치원 3법’ 개정논란에서도 오너십이 쟁점이다. 사립유치원 설립자들은 토지와 건물, 시설에 자신들의 재산을 투자했기 때문에 개인의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국가가 법을 근거로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유시장경제에 반한다고도 한다. 학교법인에 재산을 출연한 사립학교와는 달리 개인재산이 제공된 사립유치원은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사립유치원은 사유재산’이라는 오너십이 교비를 개인적으로 사용해도 위법이 아니라는 억지논리를 만든다. 사립유치원은 학교가 아니며, 학교로 인정하려면 그에 합당한 인건비와 개인 재산을 공공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임대료 등을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적서비스 제공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2018년의 유치원법 개정은 2005년 사립학교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과 판박이다. 사학들의 부정부패에서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유치원비리 근절을 목적으로 한 유치원법 개정논의는 서로 닮았다. 보수야당과 결합한 이익단체의 집단행동 무기가 사유재산권 보장이라는 점도 똑같다. 학교설립자가 개인의 재산으로 학교를 설립했으니 학교는 사실상 설립자의 것이므로 여기에 누구든 개입하는 것은 설립자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사학의 자율성이 무시된다는 논리였다. 폐교와 폐원으로 학부모를 겁박한 장면도 데자뷔다. 밀리면 끝장이라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대립 구도도 사립학교법 논쟁의 시즌2처럼 보이게 한다. 

법인이 설립한 사립유치원이든, 개인이 설립한 사립유치원이든 유치원은 사립학교다. 현행법상 사립유치원은 ‘학교’면서 법인이 설립해야 하는 초·중·고·대학과는 달리 개인이 설립할 수 있다. 법인이 아니고 설립자 개인이 운영하더라도 교육관계법령상의 학교이자 비영리 교육기관이다. 법인 사립유치원은 설립인가를 신청할 때 건물과 부지를 출연하여 교육용 재산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 유치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법인 사립유치원 역시 개인이 소유한 건물과 부지를 유치원의 교사·교지의 용도로 지정하고 사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법적 규제를 받아들이고 인가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사유재산이지만 시·도교육감의 승인, 지도, 감독을 받는다. 감사도 받아야 한다. 사립유치원은 학교이기 때문에 폐원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사립학교가 공교육의 한 축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국공립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정한 범위 안에서 운영을 감독, 통제할 권한과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 유치원 교육과정은 학교 교육과정으로 명백한 공교육 과정이다. 그래서 국가의 엄청난 공적재원이 투입된다. 학부모 분담금이 유치원 운영자의 사유재산일 수 없다. 엄연히 교비다. 수입을 교육목적 외 개인 용도로 사용하면 불법이다. 사립유치원은 사유재산을 내세워 사설 학원화하거나 스스로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사업자로 격하시키는 우를 범해서도 안된다.

유치원 비리근절 3법은 교육 목적 교비의 사적인 유용을 방지하기 위해 회계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법상 학교에 걸맞은 공공성을 강화하는 개정법률안이다. 국회는 한 해가 가기 전에 충격받은 학부모들이 더 이상 분노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도록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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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가 바뀌는 데 14년이 걸렸다. 대법원이 종교나 신념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드디어 응답한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병역법상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여 형사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오기까지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사법의 원초적 보수성 때문에 판례변경이 쉽지 않은 전례에 비추어보면 이제라도 사회 변화를 수용한 사법부의 결단은 박수받을 만하다.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호소하면서 인권의 새로운 지평을 연 판결이다. 이로써 그동안 형벌과 맞바꿔온 수많은 젊은이들이 양심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양심에 따르다가 전과자가 된 그들이지만 이제 양심을 지킨 자신을 대견해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판결을 계기로 다수와 다르다고 배제하고 차별할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다원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임을 깊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형사처벌을 해선 안된다는 판결을 내린 후 소송의 당사자인 오승헌씨가 취재진에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김창길 기자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법원 판결 이후에 논란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비논리적이고 모순적인 판결 비판과 합리성을 잃은 대체복무제 도입 논의가 그렇다. 군대 간 사람은 비양심적이냐는 비아냥거림이 대표적이다. 병역을 거부한 것이 양심이라면 병역의무를 다한 것은 비양심이냐는 비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대립구도 조작이다. 병역거부가 양심에 따른 결정이라는 의미인데, 의도적으로 ‘양심적’과 ‘비양심적’을 대칭시킨 것이다. 신성한 국방 의무 앞에 열외가 없고 누구나 평등해야 국가안보가 굳건히 세워질 것이라고 믿는 자들은 남북의 대치상황을 들먹이며 판결을 비난한다. 진영논리로 사법을 재단하기도 한다. 분노와 비판의 목소리를 과대 포장해 판결의 의미를 깎아내려는 언론도 문제다. 있는 그대로를 기사화하는 것이 언론의 할 일이라고 하더라도 대법원의 무죄판결에 비난일색인 것처럼 보도하는 것은 언론의 책무와는 거리가 멀다. 국민의 반응이 비논리적이고 반인권적이라면 일침을 가하는 것이 언론의 할 일 아닌가.  

대체복무제 도입 논의도 마찬가지다.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증가할 것이라거나 누가 나라를 지키나 등의 반응을 부각시키거나 양심을 판 병역기피의 불복종 사회가 초래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대체복무에 징벌성을 가하려는 기획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양심을 빙자한 병역기피로 보게 되면 양심을 파는 징병대상자를 막기 위해서 현역복무보다 훨씬 더 힘든 대체복무로 만들어야 할 정당성이 생긴다. 그래서 지뢰제거 작업이나 복무기간 2배, 3배가 합당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처벌로 둔갑하는 것이다. 징벌적 대체복무로 형벌이 대체되는 꼴이다. 그야말로 명칭사기다. 대체복무 논의에도 비논리가 끼어들고 있다. 정당한 사유 없이 양심을 파는 병역거부자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대체복무의 종류와 기간을 정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병역거부가 정당하다면 현역복무에 상응하는 대체복무를 부과하면 된다. 대체복무의 종류와 기간을 정하는데 정당하지 않은 병역거부를 상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함부로 양심을 파는 비양심적 징병대상자를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당한 병역거부자에게는 징벌이 된다. 마치 엄한 형벌을 부과해야 잠재적 범죄자들이 겁을 먹고 범죄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흡사하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형사처벌 여부 논란은 대법원의 사법적 판단으로 종결되었지만 대체복무제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체복무 논의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양심적 신념을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의 취지에 맞게 인권의 관점에서 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는 각자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줄 임무가 있다. 바로 양심의 자유가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하여 올바른 행동으로 인도하고 결정해주는 나침반인 양심을 지켜주어야 한다. 그들이 내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결정은 이제 법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그들이 이행해야 할 대체복무도 병역의무다. 따라서 징벌성을 띠어서는 안된다. 20대 젊은이들에게는 1~2개월도 황금 같은 시간이다. 할 일 많은 그 시기에 양심을 팔기에는 9개월도 너무 길다. 엄청난 불이익으로 느껴질 것이다. 현역 18개월의 1.5배인 대체복무 27개월도 현역복무를 상쇄하고도 넘친다. 정당한 병역거부자에게 정부안처럼 36개월 징벌적 대체복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현역병이 느낄지도 모를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해 줄 것이 아니라 병영문화 혁신과 군 인권향상이 우선이어야 한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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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달구는 사안들은 주로 형사처벌에 관한 것이다. 특히 20만명이 넘는 누리꾼들의 동의를 얻은 청원은 엄정한 수사와 처벌을 요구하는 것들이다. 목숨을 빼앗아간 끔찍한 범죄 뉴스를 보면서 자신이 피해자가 된 것 같은 동질감과 동정심이 든 사람들은 범죄자를 응징해야 한다며 분노한다. 응당 같은 값으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불안감 때문에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오래도록 격리시키길 원한다. 그래서 여전히 사형제를 찬성하는 여론이 우세하다. 응징과 보복의 감정에 기댄 것이다. 최근 10대 청소년들의 강력범죄가 잇따르면서 소년법을 폐지해 성인처럼 처벌하라고 한다. 곧 형기를 마치게 될 조두순을 더 가두어달라는 청원도 수십만을 넘었다.

중형으로 겁을 주어야 일벌백계가 되고, 잠재적 범죄자가 범죄로부터의 유혹에서 벗어날 것이라 믿는다. 대통령도 최근 음주운전 피해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재범 가능성이 높은 음주운전 특성상 초범이라도 처벌을 강화하고 사후 교육시간을 늘리는 등 재범방지를 위한 대책을 주문했다. 더 엄하고 중한 형벌에 대한 여론, 언론, 정치의 요구가 빗발친다.

왜 엄벌과 강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일까. 흉악 범죄로부터의 불안감 때문이다. 자연재난, 질병, 대형 교통사고, 산업재해의 위험에 더해 급증하는 범죄위험은 평화로움을 원하는 시민을 불안하게 한다. 사건보도를 접하는 국민들은 자신은 절대 범죄자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래서 다양한 안전장치들을 요구한다. 범죄수법에 관한 선정적 보도에 더해 범죄피해자와 그 가족의 고통을 가감 없이 노출시키면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응징 욕구는 치솟는다. 범죄자를 사회에서 배제해야 할 악마와 적으로 낙인찍는다. 잔혹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가장 강력한 통제수단으로 여기는 형벌에 거는 기대는 커진다.

이럴 때 정치는 돈이 적게 드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다. 신속하게 뭔가 하고 있음을 유권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인기영합주의가 발동돼 입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여론에 즉각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기회로 삼는다. 정치는 강성화 형사정책을 사회통제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한다. 범죄에 대한 시민의 두려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형법은 날로 비대화되지만 역으로 과잉범죄화가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기도 한다. 입법자뿐만 아니라 국민들은 어떤 금지행위든 형사처벌 규정을 두어야 실효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유해하거나 반사회적인 행위까지 형벌을 확대하려는 경향이 만연하다. 경범죄 처벌, 자전거 음주운전, 자전거 헬멧 미착용, 자동차 안전벨트 미착용이나 심지어 부동산 투기행위에 대해서도 형사제재의 수단을 투입하려고 한다.

정치권과 입법부가 여론의 풍향에 너무 민감하다. 조문 몇 개만 고치는 단발성 입법 발의가 수두룩하다. 그러나 언론과 여론의 폭풍만 지나가면 그 법이 잘 집행되고 있는지, 죽어가고 있는지는 관심 밖이다. 일단 입법자로서 할 일을 다 했으니 끝이다. 그러는 사이 법은 서서히 생명력을 잃고 법에 대한 신뢰는 떨어진다. 형사처벌법을 만드는 것에 그치면 그것만으로 범죄가 예방될 리 없다. 처벌법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법이 때와 장소를 가리고 누구에게 적용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면 법에 대한 신뢰는 사라진다. 항시성과 일관성, 그리고 공정성이 핵심이다. 어쩌다 단속해서 처벌하거나, 처벌도 들쭉날쭉하면 법에 대한 불신만 생겨 준법의식은 옅어진다.

성범죄의 예를 보자. 1990년대 중반부터 특별법 제정, 형법 개정, 신상공개 및 전자발찌와 화학적 거세 등 처벌수단을 강화하고 다양화하는 등 중형주의의 연속이었다. 아동·장애인 성폭력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법정형도 강화하고 제재수단을 총망라했지만 성범죄는 줄지 않고 있다. 오히려 늘고 있다. 범죄자를 가두어 두는 형사정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슈가 되고 있는 음주를 포함한 위험운전치사상죄도 그렇다. 살인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소식이지만 10년 전에도 그랬다. 음주운전 교통사고가 급증하고 사망자의 수가 증가하자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위험운전치사상죄를 신설했다. 음주운전 사고로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지만 느슨하게 적용되니까 오히려 음주운전 사고는 증가추세다. 엄격한 단속과 법적용 및 처벌이 뒤따라야 처벌법의 효과가 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그래야 학습효과가 나타난다. 단속, 수사, 처벌이라는 법집행이 총체적으로 제대로 돌아가야 규범의식과 준법의식이 생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법대로 살면 나만 손해’ 등 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법을 제정하여 선포하는 것만으로는 입법의 홍수만 겪게 될 뿐이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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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 ‘손톱 밑 가시, 암 덩어리’에서 이제는 ‘붉은 깃발법’이 등장했다. 규제를 이르는 전·현직 대통령의 화법이다.

규제완화가 또다시 화두다. 규제를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낙인찍었다. 국가경쟁력을 갉아먹으면서 신성장 산업과 일자리 창출 등 혁신성장의 발목을 잡는 해악으로 여겨지고 있다. 규제완화의 부작용은 감춰둔 채 기업은 물론 보수언론과 정부·여당도 규제완화의 깃발 아래 한 몸처럼 움직인다. 규제가 왜 생겼는지, 왜 존속하고 있었는지, 규제를 없애면 어떤 부정적 효과가 있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규제 때문에 일자리가 창출되지 못하고 경제성장이 뒤처진다고 보는 것이다. 자동차 속도를 마차 속도에 맞추려고 붉은 깃발을 들라는 법이 없었더라면 자동차의 속도에 감이 없었던 시민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허둥대며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자동차 산업의 선두였던 영국이 독일에 자리를 내주었다고 규제를 탓하고 있다.

왜 일자리 숫자와 경제지표에 급급하나. 지지율이 조금 떨어졌다고 조급해하는가. 경기가 둔화되고 각종 지표가 나빠지자 재벌에 기대던 과거 정부의 악습을 답습하고 있는 듯하다. 몰래 만나 주고받던 지난 정권과 다르다면 공개적 만남이라는 것과 금전이 오고 가지 않았다는 것일 뿐 재벌에 대한 특혜이자 특정 기업 봐주기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투자와 고용을 압박하는 수법은 이전 정부 판박이다. 하라는 재벌개혁은 제쳐 두고 재벌에 구애하는 모습만 드러내고 있다. 역시 권력을 잡고 보니 먹고사는 것이 제일이던가. 개혁하라고 쥐여준 권력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경제를 외치는 언론과 재벌에 끌려가고 있다.   

지금의 지지율 50%대가 정상이다. 공약이행과 개혁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 집권 초반의 70%대에서 한참 빠졌다고 방향을 틀 일이 아니다. 오히려 초심 그대로 나가야 할 때다. 이제는 지지기반마저 이탈할지도 모른다. 아니 벌써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역대 최저 지지율은 은산분리 원칙 공약파기와 삼성 껴안기로 개벌개혁이 물 건너가는 것은 아닌지 불만을 느낀 진보 지지층의 거리두기다. 실망한 촛불시민이 하나둘 표심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집권 2년차다. 개혁을 마무리하고 공약을 실천해야 할 때다. 일자리와 혁신성장에 밀려 기업이 하자는 대로 하다보면 규제의 댐은 무너지고 지지층도 균열이 간다. 정부가 약점을 보이면서 기업에 매달리니 벌써 온갖 기업 민원이 쇄도한다. 고용과 투자를 늘리겠으니 대가를 달라고 청구서를 내밀기 시작한다. 경제부총리가 기업총수를 만난 날 미래먹거리인 바이오에 대한 투자와 혁신의 대가로 복제약가를 올려달라는 민원을 들이밀었다. 은산분리 완화는 규제파괴의 서막이다. 개인정보에 관한 규제와 원격의료를 포함한 의료 관련 규제, 규제샌드박스 5법, 규제프리존특별법, 서비스발전산업기본법 등 소위 붉은 깃발 리스트가 대기하고 있다. 찬반의 논란이 적지 않은 분야들인데 너무 성급하다. 혁신 친화적 경제환경을 조성하고 신산업을 육성하는 일은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조급함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그 산업이 가져올 영향도 있을 것이고 규제는 여러 이해당사자의 이익이 복잡하게 충돌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규제는 악이며 규제혁신은 성장과 먹거리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접근해서도 안된다. 규제만 풀면 혁신성장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규제는 국민의 안전·건강·보건 및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화학물질관리법’이나 일회용 플라스틱 컵 사용을 규제하는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그 예다. 기업에는 비용부담의 규제이지만 넘지 못할 규제의 벽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규제완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 세월호 참사, 여전히 높은 산업재해 사망률, 라돈 침대 사태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대참사는 거의 대부분 규제를 완화해준 정부나 국회의 책임이거나 있는 규제를 피해가려는 탈법적 기업운영의 탓이다. 참사로 인한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은 규제완화로 얻을 이익보다 훨씬 크다. 자본의 이익 앞에서 규제는 무력해지기 마련이지만 국민의 생명·안전과 직결된 규제는 경제논리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규제가 완화되어 기업 활동이 법률과 국민의 감시를 피해간다면 언제 참사의 위험이 현실화될지 모른다. 국민의 생명은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국가가 생명보호의무를 뒷전으로 밀어두고 자본의 이익, 일자리, 성장 논리에 밀려 규제혁신에 드라이브를 걸면 경제지표도 끌어올리지 못한 채 지지층 이탈의 원심력만 커진다. 안전·건강·보건 및 환경에 관한 규제의 장벽이 견고해야 국정운영의 지지기반도 더 단단해질 것이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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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제7대 대법원장에 취임한 이영섭 대법원장은 퇴임사에서 ‘회한과 오욕의 나날’이라는 말을 남기면서 사법부(司法府)를 사법부(司法部)라고 썼다. 그는 짧은 민주화 뒤 들어선 신군부의 압력에 견디다 못해 취임 2년 만에 사임하면서 사법부를 행정부의 일개 부처로 취급한 것에 대한 수모와 굴욕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사법부는 어떠한가. 그때는 정권의 외풍에 휘둘려 사법부와 법관의 독립이 침해되었다면 지금은 사법부 내부로부터의 독립이 훼손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 여전히 독립성이 확고하지 못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믿고 싶지 않지만 청와대의 수석비서관과 통화했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대법원장이 아니라 스스로 사법부 장관으로 처신한 것이다. 엄선된 엘리트들이 근무하는 법원행정처에서 법관은 관료적 위계질서 속에서 상관의 지시를 따르고 충성하는 사법행정 공무원이었다. 위법한 지시를 내린 상사나 그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인 이들은 스스로 법관이기를 포기한 직권남용의 공범자들이었다. 소위 ‘사법부 블랙리스트’와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한 조사보고서 속의 법원행정처는 상명하복으로 움직이는 행정부처와 같았다.

법원 내 특정 연구모임에 가입해 활동하거나 대법원장의 사법정책을 비판한 판사의 성향과 동향을 기록한 문건은 지난 정부에서 작성한 문화예술계 인사의 블랙리스트와 다를 바 없다. 일부 보수언론은 진보적이거나 반행정처적 법관목록을 보고도 블랙리스트 의혹의 실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대다수 사법부 구성원들이 상상하기 힘든 문건들이 드러나자 대법원장은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사법행정이라는 이름으로 권한 없이 법관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성향에 따라 분류하거나, 재판이 재판 외의 요소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것으로 오해받을 만한 일”이라고 정의했다. 법관 개인을 감시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유형이나 부류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고 인권침해이자 불법행위다. 사법행정이라는 이름으로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의 방침에 거스르는 법관들에 대한 성향과 행적을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응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한 행위는 분명 직권남용이다.

대법원장의 대국민 사과와 셀프조사·개혁 약속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여러 건의 고발로 검찰수사가 불가피한 가운데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1995년 인천지법 집달관 비리사건을 시작으로 대법원장은 2006년과 2016년 현직 판사 금품수수 의혹에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과했었다. 거의 10년 주기인데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 법원공무원과 법관 개인의 비리였지만 지금은 사법부 내의 조직적 사법행정권 남용이다. 그래서 더 철저한 진상조사가 필요한 것이다.

아직 열어보지 못한 파일이 수백개에 달한다. 파일명만으로도 의심이 가는 것들이다. 법원행정처 심의관의 컴퓨터는 공용물이자 국가소유다. 공적 업무수행에 제공되는 컴퓨터다. 그 컴퓨터에 작성·저장된 파일은 모두 공적 문서다. 그래서 조사에 작성자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판사 개인이 작성했으므로 개인정보라는 주장은 공과 사의 구별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용자가 사적으로 작성한 파일이 있다면 반납할 때 삭제했어야 하고 혹시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제외하고 조사하는 것이므로 사생활 침해는 발생하지 않는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권한남용이 구체적으로 의심되는 상황에서 긴급히 대처할 필요가 있는 경우 업무용 컴퓨터 조사를 상당한 범위로 한정한다면 적법한 조사다. 강제개봉도 아니고 강제조사도 아니다.

단언컨대 고질의 뿌리는 관료화된 법원행정처와 제왕적 대법원장에게 있다. 법원행정처는 법원의 인사·예산·사법정책을 다룬다. 고등법원 부장판사제도를 폐지하고 고법판사와 지법판사로 법관인사를 이원화하면 인사업무는 최소화된다. 사법정책은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의 일이다. 예산은 현직 법관이 아니라 전문가가 담당해야 한다. 그러면 법원행정처는 할 일이 대폭 줄게 된다. 인사가 축소되면 대법원장 권한도 줄어든다. 대법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고 대법관회의에서 호선하면 대통령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 법원장도 각급 법원의 법관회의에서 호선해서 사법행정을 맡기면 법원장 승진인사에 목맬 이유도 사라진다. 이처럼 특단의 개혁방안이어야 거꾸로 가는 사법을 되돌려 바로 세울 수 있다. 대법원장이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과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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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힘은 막강하다. 언론에 등장하면 곧바로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거나 결정이 난다. 여론이 형성되고 사회적 이슈가 되면 순식간에 입법부도 움직이고 행정부도 굴복한다. 때로는 사법부도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언론은 실로 제4의 권부다. 


10대 청소년들의 무자비한 폭력장면이 신문과 방송을 타더니 소년법 폐지 입법청원이 청와대 홈페이지를 뒤덮었다고 한다. 몇 십만이라고 한다. 여기저기서 청소년 폭력사건이 봇물 터지듯 밝혀지고 분노한 여론은 소년법과 형법 개정을 촉구한다. 비록 나이 어린 청소년이라고 하더라도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자유형의 상한을 올려서 엄하게 처벌하거나 무기징역 또는 사형이 가능하도록 소년법을 개정하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형사미성년자의 나이를 낮추라는 목소리도 커졌다. 급기야 여야 정치권이 나서서 불안한 시민을 안심시키고 공분을 잠재우기 위해서 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법무부 장관도 소년법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범죄가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강성화 형사정책이다. 단죄하고 사회로부터 격리하라는 언론과 여론의 요구에 굴복하여 엄벌주의로 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은 절대 가해자가 되지 않을 것이고, 혹시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응보감정은 되살아나고 무관용의 형사정책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범죄의 처벌과 예방에 관한 형사정책이 방향을 잃고 일관성 없이 언론과 여론에 끌려다닌다. 가감 없는 선정적 보도가 여론을 형성하고 표를 의식한 정치권은 처벌법으로 안전을 약속하는 패턴이 지속되고 있다. 이제 형벌을 만병통치약이자 사회갈등의 최우선 수단으로 여기게 되어 사회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형법을 개정하고 형사특별법을 제정하고 양형기준을 상향하는 것이다. 정치권도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일이다. 국가예산에 부담을 주지 않고 정치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돈 들지 않는 입법에 매달리는 것이다. 일관된 형사정책에 따른 입법이 아니라 유권자를 의식한, 여론에 부응하는 임시방편적 입법이다. 그러다 보니 처벌 법률과 범죄구성요건 사이에 부조화와 불일치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수많은 형사처벌법 입법으로 범죄는 줄어들었는가. 청소년범죄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인가. 법이 만능이고 강력한 처벌만이 능사인가. 그렇다면 벌써 범죄는 예방되고 줄었어야 한다. 자유형의 상한이 15년에서 30년으로 상향조정되고 양형기준은 날로 강화되었지만 강력범죄는 줄어들 기미가 없다. 전자발찌도 채웠지만 성범죄자의 재범은 여전하다. 청소년에게는 형사처벌에 의한 범죄억제효과가 별로 없기 때문에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면 처벌받는 아이들만 늘어나게 된다.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청소년만 증가한다. 강력한 형벌로 교도소에 가두어두고 교정과 교화에 힘쓰지 않으면 재범률은 감소되지 않는다. 지금도 소년교도소는 포화상태다. 청소년범죄의 재범률은 성인보다도 높다. 형량을 높여 처벌하고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가두어두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의미다. 당장은 범죄가 잠잠해지고 사회적 공분도 누그러지겠지만 곧 강력범죄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영원히 가두어둘 수 없는 한 사회성을 상실한 청소년이 성인이 되어 출소하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의 유혹에 빠져 재범을 저지르게 된다. 지금도 무수히 많은 청소년이 지옥 같은 가정과 학교를 등지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다.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린 가출팸을 찾는 아이들이 수만명으로 추산된다. 가정폭력에 물들어 스스로 폭력 청소년이 되어 버린 아이들도 수없이 많다. 그들과 어울리다 폭력이 일상이 되고 또래와 어울리다가 집단적으로 생계형 절도나 폭력범죄를 저지르고 성매매도 강요당하고 있다. 그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교도소로 보내는 형사정책이야말로 후진국형이다. 


청소년 범죄자의 처벌과 격리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원인을 찾아내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처방과 대책이 필요하다. 형벌을 가하고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형사정책은 최후수단이어야 한다. 청소년 범죄에서는 더욱 그렇다. 교육과 보호가 우선이어야 한다. 그들이 범죄나 악행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경제정책, 교육정책, 사회정책, 복지정책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가정, 학교, 교회가 바로 서야 한다. 경쟁으로 내몰리고 어디에서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청소년은 범죄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흔들리고 무너진 가정,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학교와 교회의 자리에 경쟁심과 이기심이 자리하는 한 청소년 범죄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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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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