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시냇물 하나 이렇게 흘려 놓으셨나요.’ 

송창식의 ‘사랑이야’ 노랫말(2절)이다. 여기서 ‘당신’은 누구일까. 사랑은 짧다. 연인일 가능성이 가장 작다. ‘당신’에 정체성, 적, 상처, 습관, 질병… 어떤 단어를 대입해도 말이 된다. ‘당신’은 내 몸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평생의 화두가 아닐까. 득도하지 않고서야 ‘당신’과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 인생이요, 역사다. 인생고(人生苦)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알아도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 고민이 멈추지 않는 상태다. 

트럼프를 보면서 ‘한반도의 당신’에 대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1866년 조선은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동강에서 제너럴셔먼호(號)를, 1871년 강화도에서 미군을 물리쳤다. 당시 삼화현감 이기조는 미 군함 세난도호 함장 피비거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들은 우리 강토와 백성들을 차지하려는가, 아니면 우호 관계를 맺고자 하는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가, 그대의 소원을 말하고 아무것도 감추지 말라.”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무것도 감추지 말고 원하는 것을 말하라? 미국이 속마음을 말하겠는가. 조선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가. 알 수 없는 열강 앞에 무력한 모습. 그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미국에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반미, 친미, 비미(批美), 용미(用美), 숭미(崇美), 모미(慕美), 탈미(脫美)…. 이 언설의 경합은 우리 내부의 혼란과 갈등을 반영한다.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현대사에서 미 군정기 3년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가장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본다. 최초의 미군 범죄는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항에 도착한 바로, 그날 일어났다. 일본 경찰은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조선인 두 명을 총살했고, 미군은 이에 감사했다. 환영 인파는 흩어졌다. 미군은 일본의 보호 속에 등장했다. 몇 시간 후 환영차 인천항에 나온 조병옥, 장택상, 정일형 등 연합국환영위원회 대표들에게도 미군은 총을 겨누고 접근을 막았다. 미군과 조선의 첫 만남은 살상과 무시였다. 

그 뒤로도 미국은 떠나지 않았고 군부 독재 세력은 미국을 뒷배 삼았다. 한국인들은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조금씩 ‘당신’, 미국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과 동화되어 가고 있다. ‘미국병’은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 미국은 ‘친밀한 적’ ‘짝사랑하는 적’ ‘욕망하는 적’이다. 우리는 문화적, 심리적, 지적으로 개성보다 뉴욕을 훨씬 가깝게 느낀다. 아직도 미국의 주(州)가 남한을 포함하여 51개인 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2018년 4월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이루어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만남이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이제 트럼프 관련 뉴스가 피곤하다. 그가 주도하는 ‘밀당’, 아니 강대국의 농간(‘전략’)이 지겹다. 지난 15일에도 북측이 밝힌 3차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트럼프는 “대화는 좋은 것”이라고 반복하면서도 “그러나 빨리 가고 싶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좋은 관계다, 대북 제재도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1960년 8월,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썼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 하루바삐 나가다오. … ” 그의 지친 분노가 들리는 듯하다.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이처럼 다른 시각과 캐릭터의 지도자가 함께 만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다름이 바로 기회요, 힘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책임이나 탓의 차원이 아니다. 북한이나 미국은 어쩔 수 없는 ‘그들’이지만, 우리 사회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아무리 지정학이 문제라고 하지만, 약소국의 운명이라고 하지만, 캘리포니아주의 2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땅조차 둘로 갈라졌지만, 약자 필패가 필연은 아니다. 중국을 이고 사는 베트남은 약소국이 강대국을 슬기롭게 대처한 좋은 사례다.

반미와 친미의 이분법을 넘어 ‘우리 안의 미국’을 뒤돌아볼 시기다. 

그런데, 새로운 미국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 나타났다. 이언주 의원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죽음은 문재인 정권의 책임이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셨겠는가. 계급혁명에 빠진 좌파 운동권이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한다. 계속되는 그의 몰상식이 원래 사고방식인지 선거 전략인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조 회장의 사인은 폐질환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사망했으니 신미(信美), 미국을 믿으라고 해야 할까.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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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고 천문기술 발전과 제도혁신을 도모한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그는 또한 임신한 여자노비에게 산전휴가 30일과 출산휴가 100일, 남편에게는 출산휴가 30일을 주어 당시의 선진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인 복지제도를 소개한 바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 시대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제도 설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왕조실록과 역사연구 등에 의하면, 조선 태종 대에 설립된 명통시라는 장애인단체가 있었는데, 이는 독경사(경전을 읽고 외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로 활동하는 시각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해 나라가 설립한 조직이었다. 명통시에 소속된 시각장애인 독경사들은 국가행사에서 독경을 담당하고 대가로 쌀과 베를 지급받았다고 한다. 

평생 척추장애인으로 살았지만, 장애의 벽을 넘어 명성을 떨치며 귀감이 된 허조라는 분이 있다. 그는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개국 후 네 임금(태조·정종·태종·세종)을 섬기며 법전을 편수하고 예악제도를 정비한 인물로, 세종 때에는 예조판서·이조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지내 장애가 장애가 되지 않은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정창권 교수의 저서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등에 의하면, 세종 때 관현맹인(관악기와 현악기를 연주하던 시각장애인)에게 장악원의 일반 악공에 준하는 직책과 녹봉을 주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한국 3대 악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조선 전기의 음률가인 박연은 관현맹인들을 사회적 약자 계층에서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세조 때에는 신체활동이 불편한 지체장애인의 일상생활을 돕도록 오늘날의 근로지원인과 같은 부양자를 지원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 장애인 제도는 양반사회라는 당시의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역량을 발휘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오늘날의 장애인 정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애인이 장애로 인한 어려움 없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그간 정부는 7·9급 공채의 장애인 구분모집제도, 중증장애인 경력경쟁채용을 통해 공직 내 장애인 채용을 지속적으로 개선해왔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확대독서기와 점자프린터, 지체장애인을 위한 특수작업의자, 청각장애인을 위한 소리증폭장치 등 과학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보조공학기기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장애로 인해 업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는 중증장애인 공무원에게 근로지원인을 지원하고 있다. 

문제는 예산사정 때문에 공급상황이 수요에 크게 못 미친다는 점이다. 장애인의 공직 채용을 확대하고 근무지원사업을 늘려가야 한다. 공공분야이건 민간분야이건 장애인이 자립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 노력이 배가되어 진정한 포용사회가 하루속히 정착되기를 기대한다.

<김판석 | 연세대 교수 전 인사혁신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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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렇지만 내 주변에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 서로 키우고 있는 녀석들 사진을 교환해서 보기도 한다. 나 역시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들 사진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할 때가 많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지인이 ‘맘에 상처받을 일은 없겠다’라는 내용의 답신을 보내왔다. 자식이든 손주이든 사람은 상처를 주고받는데 강아지들은 그럴 일이 없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왜 사람들이 반려견이나 반려묘와 같이 있으면 행복감과 편안함을 느낄까? 그것은 상대가 나를 어떻게 여길지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남녀관계가 가장 좋으면서도 또 가장 불안한 관계인 이유는 늘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상대의 평가에 마음을 쓰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마음이 식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참으로 오묘한 존재이다. 혼자 있고 싶어하면서 또 혼자 있기를 싫어하고, 같이 있고 싶어하면서 또 같이 있기를 싫어한다. 나를 주장하고 싶어하면서 또 나를 주장하기를 두려워하고, 상대의 평가를 두려워하면서도 그 평가를 신경 쓰지 않게 되면 더 이상 그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정신적 건강함이란 이 모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축이 잘 버텨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축이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상대의 평가에 흔들린다는 것은 나의 축이 확고하지 않다는 것이다. 

출처:pixabay

어린아이일 때 우리는 연약할 수밖에 없다. 아직 나의 축이 확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하는 자기 이미지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남이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로 이루어진다. 

사실 아이들은 직관적으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지를 안다. 다행히 부모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이 그러한 자신의 선택을 믿어주고 격려해주고 수용해주면 아이들은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갖게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린 끊임없이 그렇지 않다는 경험에 직면한다. 할 수 있다는 격려보다는 “안돼”라는 말을 들으면서 성장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그러니 내가 추구하는 게 좋은 것인지,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에 대한 의심이 생겨난다.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가 더 커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성장하면서 직접 경험하는 것들에 의해 스스로 생각하는 이미지가 더 커진다. 즉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남이 보는 나보다는 내가 보는 나의 영역이 더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보는 시각이 건강해야 한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죽는 날까지 나와 같이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므로 그런 나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가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다음은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내 인생의 리더는 바로 나 자신이므로 나의 변화를 주도할 사람도 바로 나라는 생각이야말로 흔들림 많은 인생에서 나를 붙들어주는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버팀목은 기본적으로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토양에서 싹튼다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다.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나의 친구이고 내 인생의 리더는 바로 나이며 내 인생을 변화시키는 주체도 바로 나라는 생각의 통합이다. 그런 통합을 가질 때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을 수용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처럼 소중한 나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즉 나의 삶은 나 자신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당당히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운 경우가 너무 많은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실제로 우리가 여러 소소한 부분에서 자신에게 얼마나 야박한지를 안다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통합을 이루려면 일단 먼저 나 한 사람을 사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양창순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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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픈 ‘기억의 꽃’이 영그는 4월, 그 16일을 맞이했다. 사랑하는 이를 이유도 모른 채 떠나보낸 유족, 갑작스레 닥친 참사에 영문도 모르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삭이기는커녕 갈수록 선명해지는 그날이다. 올해도 서울과 안산, 진도 등에서 추모와 애도의 노란리본이 물결치고,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5년 전의 다짐과 약속을 되새겼다. ‘진실규명’의 외침을 멈추지 않았던 유족과 생존자들이 있었기에 한국 사회는 세월호와 그 교훈을 잊지 않았다. 한편으로 지난 5년은 안전보다 이윤을, 생명보다 효율을 중시해 생때같은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국가와 사회가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가혹해질 수 있는지 확인해온 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아픈 4월이 오면, 어김없이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들을 욕보이고 조롱하는 야만이 공론장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게 참담하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4월17일 (출처:경향신문DB)

자유한국당 경기 부천소사 당협위원장을 맡고 있는 차명진 전 의원은 지난 15일 페이스북에 “세월호 유가족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 먹고, 찜 쪄 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 진짜 징하게 해 처먹는다”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세월호 유가족을 욕보이고 조롱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피해자의 고통을 모욕하고 제압할 대상으로만 대해온 박근혜 정부와 한국당의 병든 유전자의 재현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시체 팔이’ ‘죽음의 굿판’ 같은 짐승의 언어로 자식 잃은 부모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더니, 아직도 이런 몰상식한 폭언을 지껄일 수 있는지 참담할 따름이다. 문제는 차명진과 같은 패륜의 생각을 갖고 행동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버젓이 국회의원인 한국당 정진석 의원은 16일 “오늘 아침 받은 메시지”라며 “세월호 그만 우려먹으라 하세요. 죽은 애들이 불쌍하면 정말 이러면 안되는 거죠. 이제 징글징글해요”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에 안상수 의원은 “불쌍한 아이들 욕보이는 짓들이죠”라는 댓글을 달았다. ‘그날이 오면’, 차마 잊힐 리야 잊힐 리 없는 아픔에 무너지는 유가족들에게 위로는 못할망정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는가.

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별도의 입장문을 내고 “세월호와 관련된 부적절하며 국민정서에 어긋난 의견표명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며,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들께 당 대표로서 진심 어린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들의 세월호 유가족 모욕과 조롱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찾아볼 수 없는 만행이다. 우리 사회가 수용할 한계를 넘어섰다. 황 대표의 사과가 진정성을 얻으려면, 당사자들에 대한 엄중한 책임 물리기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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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굽어보는 국립현충원에 봄이 가득하다. 하얀 목련이 고결한 자태를 뽐내고, 홍매화의 핏빛이 영롱하다. 호국영령들의 단심(丹心)을 상징하는 듯하다. 충무정 주변에 핀 벚꽃이 공원을 방불케 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언뜻 충무공의 고뇌를 그린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 첫 구절이 떠올랐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시인의 시편도 내 뇌리를 맴돈다. 

지난 12일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서는 3·1운동의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의 49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바로 전날은 1세기 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다. 지난주 그 무렵, 워싱턴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평양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다시 추대되었다.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로 100돌을 맞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부터 생각해 보자.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은 독립국이고 조선인은 자주국민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지 불과 한 달 열흘 뒤 제국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백성의 나라, 민국(民國)의 시대를 새로 연 것은 엄청난 역사적 진전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난 100년 동안 우리 대한민국은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잿더미 위에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지난해에는 드디어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었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50-30클럽에 가입한 것이다.

나는 2016년 9월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한국의 동반성장’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한국은 인구가 5000만명이 넘으면서 동시에 1인당 소득이 3만달러가 넘는 6개 나라에 가장 근접해 있다. 따라서 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 다음의 세계 7대 경제강국은 코리아”라고 주장했다. 비록 비공식 통계이기는 하지만 구매력 기준으로는 한국도 2016년 이미 1인당 소득이 3만달러를 넘었다.

그곳 교수들의 반론이 잇따랐다. “캐나다는 G7 국가다” “중국은 세계경제를 좌우하는 G2 아니냐”. 나는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캐나다는 1인당 소득이 4만5000달러를 상회하지만 인구는 3400만명 정도밖에 안되고, 중국은 인구로는 초대국이지만 1인당 소득은 1만달러 내외이므로 내 기준으로는 한국이 내실 있는 7대 경제대국이라고 했다.

영어 표현으로 5000만 인구에 1인당 3만달러 소득을 뜻하는 50-30클럽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분류도, 실제로 존재하는 기구도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같은 신흥경제국이 쟁취한 50-30클럽 멤버십은 밤낮없이 돌아가는 산업현장에서, 열사의 건설현장에서, 전쟁터와 다름없는 수출전선에서 5000만 국민이 피와 땀과 눈물로 쌓아올린 금자탑임에 틀림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4반세기 동안 대호황을 구가하던 세계경제는 1970년대 들어 스태그플레이션을 맞았다. 더 이상의 독주가 어렵게 되자 미국은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던 일본·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캐나다와 더불어 경제정책의 보조를 맞추자며 G7을 창설했다. 1990년대에는 냉전 종식 이후 러시아를 끌어들여 G8을 만들더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한국 등 12개국을 추가하여 G20이 탄생하였다.

한국을 경제강국으로 성장시킨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 교육 및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다. 두 번째 요인은 “하면 된다”는 과감한 도전정신이었다. 

교육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와 과감한 도전이 가능했던 것은 더 나은 미래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기에 강력한 공동체의식이 생겨났다. 희망을 공유하고 함께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경제는 성장요인이 많이 소진되어 어느덧 저성장이 새로운 현상으로 자리 잡았고, 불균형성장 정책의 결과 양극화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대통령이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리더십을 발휘해 우리 사회에 “경제하려는 의지”를 북돋우고 기업가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다행히 최근 정부가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워 전자(반도체), 자동차, 바이오 등 전통적 핵심 제조업을 중요한 산업정책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은 단기적으로 우리 경제의 회생을 위한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구체적 내용은 더 살펴보아야겠지만 말이다.

중장기적으로는 교육혁신을 통해 창의적 인재를 길러야 한다. 무엇보다도 학원자율화가 시급하다. 또한 ‘함께 가자’는 동반성장을 우리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도 시급하다. 갈기갈기 찢어진 사회를 공동체정신으로 되살리자는 것이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은 ‘새날은 언제 어떻게 오는가’라는 글에서 이런 일화를 들려준다. 

옛날 인도의 한 성자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은 새날이 온 것을 어떻게 아느냐?” 제자들의 중구난방식 답변이 이어졌다. 묵묵히 듣고 있던 스승은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좌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날이 밝아 너희들이 밖을 내다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너희 형제들로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날이 온 것이니라.”

내 이웃과 공동체 구성원들의 고통과 아픔을 내 형제들과 똑같은 것으로 느낄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여와 야,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조석으로 혈전을 벌이는 정치권도, 갑과 을이 반목과 갈등을 겪고 있는 산업현장도 다를 바 없다. 남·남 갈등과 남북 분단의 해법도 여기에 있다. 

남북관계나 한·미관계는 자존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1953년 휴전협정 조인식에는 대한민국 대표의 자리가 없었다. 북·미 정상회담을 남·북·미 3자 정상회담으로 바꾸어 상징성과 실효성을 고양해야 한다. 북핵 문제를 해결한 토대 위에, 남북한과 지구상에 퍼져 있는 한민족을 하나로 통합한 8000만 한민족경제공동체를 건설해야 우리가 세계경제를 주도할 수 있다. 이것이 선열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시대적 사명이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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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 중에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딸인 카산드라에게 자주 매료된다. 예지력을 얻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설득력이 없는 그녀는 닥쳐오는 미래를 거듭 예언하나 파국을 막지 못한다. 아폴론에게 예언의 능력을 받았지만, 그의 사랑을 거절한 대가로 설득력을 빼앗겼다고 한다. 그녀는 트로이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으면 안 된다고 절규하지만, 사람들은 외면한다. 앞으로 전개될 일이 뻔히 보이는데도 설득하지 못할 때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할까.

동독의 소설가 크리스타 볼프는 1983년 신화 카산드라를 재해석한 소설 <카산드라>를 발표한다. 카산드라는 트로이 멸망 후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전리품이 되고, 아가멤논이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죽임을 당할 때 같이 살해당한다. 볼프는 카산드라의 마지막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처절했던 일생을 회상하게 한다. 볼프는 집권 통일사회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했지만, 동독을 비판한 작품들로 인해 당국의 문책을 받았다고 한다. 볼프가 이 소설을 쓴 것은 몰락해가는 동독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심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파국으로 치닫는 트로이를 바라보는 카산드라의 심정이나, 동독의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는 볼프만큼은 전혀 아니겠지만, 대한민국의 앞날을 생각하며 씁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 성향에 따라 씁쓸함의 이유와 느낌은 다르겠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거대 함선이 제대로 항해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다. 

익숙한 패턴이 머리에 떠오른다. “화려한 출범, 높은 지지, 일정한 성과의 실현, 능력과 도덕성에 대한 의문, 지리멸렬 그리고 쓸쓸한 퇴장.” 이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떤 정부에도 불가능한 것일까. 탁구공이 오가는 것처럼 정권이 교체될 뿐, 함선은 제대로 된 항로에 들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우선 정부의 능력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정부는 그 지향과 능력에 따라 함선의 방향을 조금 바꾸고 조금 더 빨리 달리게 할 수 있으나, 갑자기 하늘을 날아 목표인 항구에 도달하게 할 수는 없다. 아니 여태껏 달리던 속도에서 조금만 가속해도 배가 휘청거린다. 게다가 선의만으로 성과를 내기에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다. 믿을 수 있고 윤리적이고 유능한 내 편은 너무나 적다. 민주주의 원리상 야당을 함부로 다룰 수도 없다. 여론은 변덕스럽고, 야속한 언론은 고분고분하지 않는 것이 본래의 임무다.

그런데 집권을 위한 선거전에선 장밋빛 약속이 필요했다. 유권자는 “반대하는 국민의 의견도 경청하며 신중하게 개혁을 추진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정치인에게 표를 줄 만큼 느긋하지 않다. 정직하게 캠페인을 할수록 불리하며, 호언장담의 압력에 시달리게 된다. 정치인만의 탓도, 유권자만의 탓도 아니다. 정치인과 유권자와 언론이 연주하는 삼중주다. 

실제로 기성 정당은 정부의 운영보다는 캠페인에 최적화되어 있다. 공장의 생산성과 상품의 품질은 부족한데, 영업과 광고 부문은 전문성이 있는 것이다. 선거에 이기지 못하면 포부를 펼칠 기회도 없고 선거에서는 마케팅이 당락을 좌우하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랬던 국민과 언론이 생산성과 품질을 요구한다. 부풀린 약속은 당연히 지킬 수 없다. 그런데 해낼 수 있는 약속조차 막상 그것을 실행할 자원은 부족하고, 우군은 줄어든다. 어느 정부든 쓸쓸한 퇴장이라는 귀결을 피하기 어려운 게 현실인 것이다.

기대에 못 미친 정도가 아니라 배반을 일삼았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비한다면, 이 정부는 분명히 진일보했고, 정상적인 정부다. 내가 보기에는 아주 큰 잘못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실망을 극복할 기회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경쟁자들은 은근히 상황을 즐기고, 유권자와 언론은 점점 가혹해진다. 이것은 정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의 속성이고, 시효를 다해가는 낡은 정치 시스템의 필연적 결과다. 상대편을 향한 프로파간다 능력의 우위가 선거의 성패를 좌우하는 정치체제를 개선하지 않는 한, ‘승자의 저주’와 같은 패턴을 피할 수 없다.

정치를 내전의 축소판으로만 다루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구조는 어떠한가. 과거 같으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했을 다양한 세력들을 의사당에 모아놓은 것이 정치이기는 하다.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정치인들의 면면을 보면, 유혈사태가 없을 뿐 내전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가 아무리 불의하게 보여도, 적이 아무리 위선적으로 보여도,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답을 찾고 설득하는 정치를 원한다. 그런데 근거 없이 자극적인 비난을 일삼는 사람과 세력이 인지도를 높이고 정치적 이익을 얻는다. 진영논리와 확증편향을 양손에 들고 싸움터에 나선 사람들이 앞장서는 상황에서는, 어느 편이든 집권할 수는 있지만 국정운영의 성공은 요원하다. 자신과 남에게 고른 잣대를 들이대고 실사구시의 자세로 탐구하는 사람들이 밀려나는 구조에서는 결국 모두 빈손으로 떠나게 된다. 

그래도 이 세상은 신화의 세계와 다르기에, 나는 카산드라와 달리 낙관한다. 바람에 못 미치지만, 세상은 점점 나아진다. 불행해지거나 뒤처지는 영역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계속 발전한다. 유예되는 개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안타깝지만, 정치가 정체되고 심지어 뒷걸음쳐도 역사는 꾸준히 갈 길을 간다. 굶는 사람은 줄고, 전쟁은 드물어진다. 암은 퇴치되고 수명은 늘어날 것이다. 기술과 과학 그리고 그에 기반한 문제 해결 능력이 발전하는 한, 경제도 정치도 그에 걸맞은 시스템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

지난주에는 낙태죄가 헌법에 어긋난다는 결정이 있었고, 블랙홀의 사진이 공개됐다. 나는 역사 발전에 대한 낙관을 포기할 생각이 없고, 기대보다 더딘 것에는 더 너그러워질 생각이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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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꼭 5년이 흘렀다. 당시 나는 미디어를 통해 전원 구조 속보를 접한 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고가 나자마자 재빨리 대처해 승객을 구해내는 ‘그런 나라’에 산다는 사실에 우쭐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당 뉴스가 오보였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전원이 구조되었다가 수백명에 이르는 사람이 순식간에 실종자 상태가 되었다. 사는 곳과 상관없이 우리는 한동안 팽목항에 마음을 보냈다.

당시 대한민국에 만연한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단순히 슬픔이라는 단어로 통칭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는 오히려 비탄이나 통탄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슬픔은 점점 더 구체화되었다. 놀람은 어처구니없음으로, 무기력은 분노로 바뀌었다. 비탄은 어이없음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슬픔과 다르다. 아직까지 비탄이 가시지 않은 데는 제대로 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하고 있다. 지난달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세월호 폐쇄회로(CC)TV 관련 증거자료가 조작·편집된 정황을 밝히면서, 전면 재수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 설치를 촉구하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경기 안산시 단원구의 ‘4·16기억저장소’는 ‘기억 투쟁’의 맨 앞에 선 곳이다. 지난 12일 단원고 인근 강서고 학생들이 저장소가 운영하는 4·16기억전시관을 찾아 둘러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안산에 있는 4·16 기억저장소에서 유가족들은 아직도 울고 있다. 참사 당시와 진상규명 투쟁을 할 때보다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으니, 애써 억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하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상실감은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사람의 속에 있다가 느닷없이 사람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길 가다 거센 바람이 불 때, 현관의 센서 등이 갑자기 켜질 때, 무슨 징조처럼 나뭇잎 한 장이 손바닥 위에 떨어질 때,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은 망연해진다.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 조성된 ‘세월호 기억의 벽. 서성일 기자

그러므로 어떤 감정 앞에서는 “지겹다”고 말하면 안 된다. 슬픔이나 괴로움 앞에서 우리는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자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다. 감정은 보통 시간이 흐르면서 옅어지지만, 반대로 밀도가 높아지기도 한다. 한없이 빽빽해져서 그 감정 이외의 다른 감정을 일상에 불러들일 의욕을 잃게 만든다. 코미디를 보며 웃기도 하고 벚꽃이 흩날리는 장면을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하겠지만, 그마저도 어느 순간 더 큰 슬픔이 된다. 내가 웃었다는 사실 때문에, 어떤 것에 신기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움이 배가되는 것이다.

지난 주말, 영화 <생일>을 보았다. ‘생일 시’를 읽는 후반부 장면에서 관객들은 너나없이 울었다. 생일 시는 마치 옆에서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가 어느 순간에는 애간장을 저미는 편지 같았다. 이 시는 실제로 정혜신·이명수씨 부부가 기획한 세월호 유가족 생일 모임에서 낭독되었는데, 생일 시들은 한데 묶여 <엄마. 나야.>(난다, 2015)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시들은 학생의 육성을 통해 생생하게 전개되는데, 이는 이 책의 저자가 시인이 아닌 서른네 명의 단원고 아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배우 전도연, 설경구가 출연한 영화 '생일'의 한 장면. NEW 제공

기억은 힘이 세다. 기억 때문에 우리는 좌절한다. 아무리 애써도 기억은 쉬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기억은 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선명해져서 섣불리 내일을 기대하지 못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 기억이라도 남아 있어서 살아갈 최소한의 힘을 얻기도 한다.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이다. 남은 자는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과거의 자리에 미래를 포갠다. 그렇게 기억은 ’다시’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여전히 기억하고 다시 아파하겠다고 다짐하게 만든다.

김상혁의 시 ‘길은 어떻게든 다시’(<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 현대문학, 2019)를 읽는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길은 어떻게든 다시/ 소리…… 침묵…… 소리로 이어져 형은 다시/ 동생의 손을 잡고 개는 최고로 주인을 사랑하고/ 모든 자동차들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남은 이들은 어떻게든 다시 살고 있다. 어김없는 일들 사이에서 더 이상 같지 않은 일을 헤아리며 길 위에 소리와 침묵으로 이뤄진 발자국을 찍고 있다.

내년에도 4월16일이 올 것이다. 4월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여전히 기억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시 기억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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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애인이 생겼다 하면 다들 이죽거립니다. “어쭈, 짚신벌레도 짝이 있다더니!” 축하 반 놀림 반으로 하는 말이지요. 누구라도 자신에게 맞는 짝은 있는 법이라는 속담 ‘짚신도 짝이 있다’를 응용한 요즘 속담입니다(짚신벌레는 성별이 없지만 유전적으로 접합 가능한 개체가 정해져 있으니 분명 짝이 있습니다). 나막신도, 기차표 고무신도 다 짝이 있는데 아무렴 누군들 짝이 없겠습니까(사실 옛 신발은 좌우 구분 없이 만드는 대신 앞코에 여유 두어 신고 다니며 늘려 맞추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짚신은 애초에 짝이 없습니다. 무조건 짝 없이 만듭니다. 짚신 삼을 때 끼우는 신틀에 짝이 없으니까요. 짚은 신축성이 좋아 신고 다니다보면 마치 맞춘 것인 양 발가락과 발볼 맞춰 금세 착 들어맞습니다(특이한 발 모양 때문에 기성화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지요). 발 치수대로 다양하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신데렐라 언니들이 신어도 다 맞는, 진정한 프리사이즈가 짚신입니다. 또한 짚신이란 게 대개 서민들이 신던 것이지요. 내구성 떨어지는 대신 싸고, 손재주 좀 있으면 직접 삼아 신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잘난 사람들만 짝 맞춰 시집·장가 가란 법 없듯, 짚신 삼는 가난뱅이 방자·향단이라도 배필 삼을 짝이란 꼭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나이, 몸, 돈, 처지에 낙심해 지레 마음 접지 말고 만남 속에 익숙해져 같이 짝을 맞춰 가라는 것이죠.

봄 춘, 팔짱 끼고 허리 감고 다니는 커플들 보면 외로워서 화가 날 이도 있을 겁니다. 기성품같이 고르자면 내 스타일 없습니다. 좀 안 맞을 성싶던 옷도 입다보면 몸에 맞듯, 성에 안 차더라도 신축성 있게 만나다보면 호감 생기고 좋아 죽는 커플이 됩니다. 여기 없으면 저기 있고 이짝저짝 없어도 어딘가는 제짝 있습니다. 사람은 알아가는 거고 사랑은 맞춰가는 겁니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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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은 없고 물에 빠진 닭이 있다. 난처한 사정이 아니다. 점심시간에 닭백숙집에 왔다는 이야기이다. 오늘은 어떤 모임이 있다. 상을 잇대어 붙이고 미팅 대열로 나란히 앉았다. 단순한 점심이 아닌지라 여러 사람들의 말로 일순 식당이 시끌벅적해졌다.

구규(九竅)는 몸에 뚫린 아홉 가지 구멍을 말한다. 구규가 있기에 인체는 외부와 소통하고 연락하면서 겨우 유지·건사한다. 

하부의 것은 그렇다 치고 상부에 난 건 주로 얼굴에 집중되어 있다. 눈 하나가 뒤통수에 달리면 사방을 두루 꿰지 않을까. 일견 더 나은 조건일 수도 있겠지만 사공 많은 배가 산으로 가듯 그건 부작용이 많은 게다. 그러니 차라리 한쪽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몰두하라는 함의로 나는 이해한다. 

한편 얼굴에 모인 일곱 개로 생각이 뻗어나가다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사실 해부학적으로 콧구멍은 겉으로만 두 개일 뿐 실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어디에 있을까? 입은 두 개로 간주해야 한다. 말하는 구멍과 먹는 구멍.

모처럼 소임을 만난 나의 입은 토실한 토종닭의 육질을 실컷 즐겼다. 다음은 또 다음의 기관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런저런 구규에 관한 실없는 생각과 함께하면서 점심을 끝냈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말은 먹이를 찾아간다. 사람들 사이에 먹을 게 떨어지면 대화도 금방 시들해진다. 이윽고 나는 섬을 퐁당퐁당 떠났다. 어려운 상황이 아니다. 참석한 사람들과 일일이 마당에서 악수하고 헤어졌다는 이야기.

불룩한 배도 꺼줄 겸, 차를 버리고 심학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산 너머 출판도시의 사무실까지 걷기로 한 것이다. 산 초입의 약천사 돌화단에 영산홍이 있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추위에 아직 꽃망울도 보이지 않는 작은 나무들이다. 그 아래 누군가 나무팻말을 세워놓았다. 자세히 보니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깨알같이 적어놓았다. 영산홍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예용 나무다. 거룩한 불심을 보살피는 나무판으로 인해 오늘의 영산홍은 퍽 달리 보였다.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 반야심경의 마지막 진언을 세 번 외며 심학산으로 내처 올라갔다. 영산홍, 진달래과의 반상록관목.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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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꾼 사건이 있습니다. 그날도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보내고 따사로운 봄날을 맞을 생각에 가슴은 두근댔습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날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고, 우리의 시각을 바꿀 중대한 사건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2014년 4월16일 수요일 아침. 

“그러면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내뱉는 이 말이 내 입에서도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뚫린 사회안전망의 작은 구멍에서 새어나온 오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주시했습니다. 전 국민의 눈과 귀는 이미 바다로, 항구로, 그리고 세월호 속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습니다.

올해로 세월호 사건 5주기를 맞습니다. 세월호에 승선했다가 참변을 당한 아이들도 이젠 하늘에서 바뀐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무던히 외쳐왔고, 끊임없이 호소했고, 속절없이 기다렸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 외침의 의미를. 우리는 그 외침에 호응하지 못했습니다. 

경기 안산시 단원구의 ‘4·16기억저장소’는 ‘기억 투쟁’의 맨 앞에 선 곳이다. 지난 12일 단원고 인근 강서고 학생들이 저장소가 운영하는 4·16기억전시관을 찾아 둘러보고 있다. 이준헌 기자

아끼던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면 슬픔이 바로 찾아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경황을 살피는 데 시간이 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또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워집니다. 아끼던 사람이 베풀었던 친절이, 그 따스함이, 그 사람이 보여준 사랑이 떠오릅니다. 그 짓궂음이 그리워지고, 다시 티격태격 옥신각신하고 싶어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밀려오는 이 슬픔과 그리움은 줄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오히려 커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을 아끼던 사람들을 공감해야 합니다. 끝까지 공감해야 합니다. 

지난 3월18일,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분향소와 천막을 거뒀습니다. 그 자리의 의미를 새기는 공간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 같습니다. 광화문 거리를 거닐 때면 역사처럼 가슴에 스며든 아이들의 자취를 되새기고는 합니다. 이렇게 아이들의 숨결을 여전히 느낄 수 있기에 진실을 찾는 작업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진실을 찾는 과정은 시간을 잇는 고리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연속하고,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작용하며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 우리는 이제 아이들이 가르쳐준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그 희망은 아이들이 알려준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하지 못했던 스승 역할을 아이들이 대신 해줬습니다. 뒤늦게나마 우리는 그들이 알려준 희망의 의미를 깨달았기에, 두려움을 떨치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희망을 알려주고 가르쳤다는 증거는 세월호에서 나눈 아이들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운명을 예감하고도 사랑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말한 사랑에서 희망을 봤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끝까지 나눴습니다. 자기 것까지 내주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마지막 메시지에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4월을 맞아 윤동주 시인이 쓴 산문 한 구절과 아이들의 마지막 메시지를 옮기며 글을 마칩니다.

“일반은 현대 학생 도덕이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스승을 섬길 줄을 모른다고들 합니다./ 옳은 말씀들입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나 이 결함을 괴로워하는 우리들 어깨에 지워 광야로 내쫓아버려야 하나요./ 우리들의 아픈 데를 알아주는 스승, 우리들의 생채기를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세계가 있다면/ 박탈된 도덕일지언정 기울여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겠습니다./ 온정의 거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손목을 붙잡고 목 놓아 울겠습니다.”(윤동주, ‘화원에 꽃이 핀다’에서)

“내 것 입어”/ “너는?”/ “나? 가져와야지.”

“엄마 사랑해요, 아빠 사랑해요.”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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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을 보고 외국인들이 많이 하던 말은 “빨리빨리!”였다고 한다. 동작도 빠르고, 성격도 급하고, 빨리 먹고 등등의 예시가 등장하곤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게 과연 “빨리빨리!”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몸이 굼뜨거나 말이 느릴 때 혹은 밥을 천천히 먹는다고 “빨리빨리!”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아서다.

한국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느릿느릿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답답한’ 것을 싫어한다. 답답하다는 것은 뭘까? 국어사전에 ‘답답하다’를 표제어로 입력하면 “애가 타고 갑갑하다”와 “융통성이 없이 고지식하다”고 풀이한다. 애타는 데 답을 안 줄 때를 떠올리면 “속이 터진다” 혹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떠오른다. 빨리 알려주는 걸 좋아한다. 융통성 없이 고지식한 사람을 떠올리면 뭔가 의견을 냈을 때, 절차를 지나치게 따지거나 안 되는 이유만 찾는 사람이 떠오른다. 결정 안 난 불안정한 상황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한국인은 드물다.

요컨대 사람들이 답답하다고 말할 때는 ‘피드백’이 늦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드백은 “어떤 일로 인해 일어난 결과가 다시 원인에 영향을 미치는 자동 제어 원리”라고 위키백과는 정의한다. 원래 과학기술 용어인데 회사 등에서 쓰면서 일상어가 됐다. 피드백이 늦다는 건 누군가의 요청에 기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거다. 몸을 빨리 움직이든, 늦게 움직이든, 타이핑이 빠르든 느리든, 중요한 것은 요청과 질의가 왔을 때 뜸들이지 않고 어느 정도 더 ‘진전된’ 답을 내놓는 게 된다.

일상에서도 피드백이 중요해지는 상황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은 애인이나 상사와의 채팅창에서 1이 사라진 후 반응이 오는지로 초조해한다. ‘읽씹’(읽고 대꾸 안 함)은 고통이고 무례함이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역 개찰구에서 교통카드가 안 찍힐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재빨리 자리를 비키곤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자리를 비켜주면서 “여기요!” 하고 소리를 지른다. 능숙한 역무원은 목소리가 들리면 대답부터 하고 개찰구로 다가와 문제를 해결한다. 시민들이 답답해하는 역무원은 느긋하게 걸어오는 역무원이 아니다. 버튼을 여러 번 누를 때까지 대답이 없는 승무원이다.

일을 잘한다는 것도 피드백이 빠르다는 의미다. 상사나 동료가 물었을 때 완벽하게 대답하는 것도 좋지만, 파악할 수 있는 최대한을 통해 ‘진전된’ 답을 내놓는 것이 핵심이다. ‘진전된’ 답을 내놓으려면 일머리를 꿰고 있어야 한다. 일머리는 일의 내용, 방법, 절차를 의미한다. 매 시간 혹은 몇 시간마다 선배 기자에게 상황 보고를 해야 하는 신입기자의 수습과정이나, 군대에서 ‘중간보고’의 중요성을 신병에게 가르치는 교육 모두 그러한 일머리를 숙지시키는 훈련이다. 빽빽하게 짜인 ‘표준교범(FM)’은 보고를 거치는 동안 성과를 위한 융통성 앞에서 늘 조정될 수 있다.

빠른 피드백을 바라는 가치 지향은 조직문화를 넘어 한국 사회의 특성 같아 보인다.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국민들의 분노와 좌절감은 ‘답답한 일처리’로 ‘골든타임’을 놓친 것에서 출발했다. 아무도 결정하지 않았고 진전된 상황 처리를 하지 못했다. 믿을 수 있는 정부의 ‘컨트롤타워’는 세워지지 않았고, 국가의 최종 의사결정권자는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의사결정을 방기했다. 상황의 내용, 조치의 방법과 절차 파악은 때가 지난 후 지지부진하게 이뤄졌다. ‘답답해 미치는 상황’이 실제 벌어진 것이다. 반대로 얼마 전 강원 고성 산불 대응은 시민들이 정부에 기대했던 피드백이 잘 이뤄진 상황이었다. 정부는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시민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상황상황마다 성가실 정도로 분명한 지침을 줬다. 집권하자마자 20만 이상의 시민이 민원을 제기했을 때 답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방’부터 개설한 정부의 돋보이는 대응이었다.

피드백이 빠른 사회, 피드백을 빨리 하길 바라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진상 소비자’나 ‘진상 민원인’의 갑질이 문제인 사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슈가 발생해 공론화되어 빠른 상황 파악, 빠른 조치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이 아닐 때도 많다. 심지어 과학기술자들의 기초연구마저 짧은 기간마다 ‘중간보고’를 해야 하다 보니 보고서만 쓰다 끝난다는 말도 나온다. 진득하니 앉아서 지루한 토론과 조심스러운 해법 제시가 필요한 순간, 미봉책만 세워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세상에 늘 시급하고 중요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빠른 피드백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피드백을 빠르게 해야만 하는 세상을 어떤 사람들은 어질어질하고 피곤하다고 한다. 덜컹덜컹 시행착오를 겪으며 피드백을 통해 고쳐갈 거면, 애초에 찬찬히 잘 만드는 게 낫지 않냐는 말도 한다. 그런데 이런 문화와 행동양식을 쉽게 맘먹는다고 바꿀 수 있긴 한 걸까? 외려 피드백 사회의 특징들에 맞게끔 일하는 방식, 경영방식, 정치가 기민하게 대응해 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한국 사회가 잘 온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산업계에서 한국이 제품 애프터서비스(A/S)의 최고 선진국이 되고, 신제품을 실험할 최고의 ‘테스트 베드’가 된 이유기도 하다. 이따금 관점을 달리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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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섬마다 산란 행렬이 시작된다. 먼바다에서 겨울을 보낸 참돔이 육지 가까이 떼 지어 들어온 것이다. 4월 이맘때, 수온이 16~18도로 오르면 제주 서남단 모슬포 앞바다, 가파도와 차귀도는 알을 품은 참돔으로 가득 찬다. 봄 바다가 요란스럽다. 어민들도 덩달아 바빠진다. 벚꽃 향 가득한 어린 참돔은 세대를 이어 어미와 같은 모습으로 모슬포 바다를 유영할 게다. 서해 칠산바다를 향하는 조기 떼의 울음은 모슬포를 기억할 것이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어린 실뱀장어의 3000㎞ 긴 여정도 모슬포에서 쉬어간다. 

음력 2월 제주도 영등할망의 눈물이 끝나야 비바람이 멈추고 비로소 육지의 봄이 솟구친다. 찬 북서풍이 한풀 꺾이고 따뜻한 남풍이 불어온다. 사람 키 몇 배씩 자라 바다 숲을 이뤘던 모자반과 감태 군락은 물결에 쓸려간다. 제주 농부들의 파종은 그때 시작된다. 가파도의 봄은 청보리 연초록으로 더욱 빛난다. 한평생 했던 물질이지만, 해녀의 굽은 허리는 놀랍게도 바다에서 펴진다. 갯무꽃의 보라와 유채꽃의 노랑이 엉켜 공동묘지조차 아름답다. 자연은 제각각의 모습으로 한껏 존재를 뽐낸다. 우리는 그 존재로부터 상호 역동하는 거대한 생태 그물망을 알아차리고 겸손해진다. 단 한 번이라도 봄을 지긋이 지켜본 사람이라면 자연을 폭력적으로 다루진 않을 것이다. 

모슬포의 봄을 오롯이 느끼려면 서귀포 안덕에 위치한 군산오름에 올라도 좋다. 골 깊은 안덕계곡과 대평리 너른 땅, 박수 해안의 수직 절벽을 품 안에 담은 절경이다. 등 뒤로는 한라산의 위엄, 섶섬 문섬 범섬의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중문 해안과 주상절리, 난드르의 평평한 들판, 범접하기 힘든 산방산의 기세, 형제섬을 품은 송악산 해역의 천연보호구역 ‘제주연안연산호군락’, 남방큰돌고래 바다와 푸른바다거북 산란지, 모슬포 앞 가파도와 마라도의 일몰, 한라산에서 화순으로 그리고 차귀도 바다를 감싼 숲 ‘한경-안덕 곶자왈’. 이들이 그곳에서 서로의 모습을 거침없이 뽐낼 때, 찬란한 봄은 비로소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그들이 살아갈 집이 필요하다. 참돔의 산란을 위한 집, 봄꽃이 자유롭게 피어날 집, 모슬포 대자연의 풍광을 담아낼 집, 강을 거슬러 오를 물고기의 길, 바람이 불어오고 갈 그런 공간. 그러나 지금, 자본의 문명은 사람의 집과 ‘자연의 집’을 폭력적으로 점거하고 있다. 연산호와 구럼비를 걷어낸 제주 해군기지, 원주민 토지를 강제수용한 예례 휴양단지, 비자림로 숲을 베어낸 직선의 도로, 송악산 경관을 독점하고 절단 낼 리조트 계획. 하루가 멀다고 집이 사라지는 위태로운 철거의 시대! ‘집을 지키는 것’은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 되었고, 집에서 쫓겨난 이들은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대자연의 반격은 재앙으로 돌아왔다.

집을 잃은 그들에게 마음도 몸도 회복되는 ‘모슬포의 봄 레시피’를 바친다. 마시면 쌉쌀하고도 비릿한 맛이 묘하게 바다 향을 닮은 쐐기풀을 넣었다. 해조류의 향이 입가에 남는다. 봄의 초록을 머금은 가파도 청보리도 말렸다. 곶자왈의 첫 번째 봄소식을 알린 쑥도 한 소쿠리 캤다. 미묘하게 혀를 자극하고 감각을 깨우는 동백동산 백서향도 구해 차를 우렸다. 그러니 그대,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고 더 행복해지면 좋겠다. 봄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집을 잃지 않기를, 사라지지 않기를.

<윤상훈 녹색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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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하고 너그러운 아저씨, 유머러스하고 짓궂기도 하지만 솔직 겸손해서 왠지 안전한 아저씨, 남을 잘 배려하고 베푸는 아저씨, 머릿속에서는 이런 이상적인 아저씨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다르다. 길거리에서 매일 마주치는 퉁명스러운 중년들처럼 나는 아마도 성마르고 지루한 비호감의 아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까운 동년배 친구 중에는 앞의 이상적인, 닮고 싶은 아저씨도 분명 있는데 말이다. 내 주변을 잘 아는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지 금방 눈치챌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친구도 지방 강연을 위해 탄 KTX 안에서는 독서를 방해하는 전화통화들과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시끄러운 대화들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친척을 욕하고, 용돈을 덜 줬다고 자식을 험담하고, 아이의 대학 합격을 자랑하는 대화를 SNS에 고자질하며 괴로움을 토로한다. 

3번 열차 4C 좌석의 집사님, 아이가 대학에 간 건 예수 잘 믿어서가 아닙니다. 저도 원고 좀 씁시다.

공공의식의 부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성마른 나는 대중교통 안에서 자주 낯을 붉힌다. 휴대전화를 들고 30분씩 통화하는 사람들은 아줌마, 아저씨, 아가씨의 구분이 없다. 계속 눈치를 줘도 의식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던진다. “통화 좀 줄이죠. 조용한 버스 안에서는 아무리 작게 얘기해도 신경이 쓰인다고요.” 전화통화는 흘려들을 수 있는 잡담소리와는 또 달라서 한쪽의 이야기만 귀에 들어오니 신경을 긁는다.

버스에서 내려서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다보면 사람이 걷고 있는데도 그 앞을 휙 지나가는 승용차, 짐차가 부지기수다. 멈칫거리는 기세도 없이, 바쁜 나를 누가 방해하느냐며 돌진한다. 광화문 사거리에 나가면 매일처럼 예수 전도단이 진을 치고 확성기와 스피커로 지나는 사람을 괴롭힌다. 그 앞을 지나다가 귀가 멀 정도의 큰 소리에 혼비백산했다. 그들이 찬양하는 천국은 내게는 지옥이다. 

경찰은 왜 이런 행위를 방치하는가? 단속이라도 하면 종교탄압이라고 항의하겠지?

사적인 것과 공적 공간이 한데 뒤섞여 잡탕을 이룬 도시는 서로에 대한 불신 지옥으로 변해가고, 이상적인 인격을 지키고 싶은 이 아저씨는 점점 성마르고 퉁명스러운 아재가 되어간다.

나는 ‘대중’이라는 말로 우리들 시민을 집합적인 하나로 묶어 비난하거나 떠받드는 모든 담론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우리 모두는 한 명의 유권자이지 백 명의 유권자로 모인 것이 아니다. 

개인의 권리와 욕망을 모두 등가물로 환산하여 하나의 표를 부여하지만, 그 표들은 집단적 욕망으로 뭉쳐서 ‘광주항쟁’을 북한군의 공작이라 떠드는 정치인을 대표자로 옹립한다. 표현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 자체에 대한 폭력이 되어도 표현의 자유로 옹호해야 한단다. 

시민다움을 배반하는 이들을 시민으로 옹호해야 하는가? 그런 점에서 김수영의 시를 빌려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자책한 박완서 선생의 반성은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 시민 일개인의 사적 욕망과 행위가 공적 공간에서 함부로 허용될 때는 그 시민들의 권리를 가능하게 하는 공적 토대를 흔들 테니까.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으로 나누고, 시장의 영역을 사적인 것에, 공동체적 토론과 합의를 공적인 것에 각각 배정한 바 있다. 

특이한 점은 우리가 완전 경쟁과 동등한 권리로 참여하는(참여한다고 믿는) 시장에서의 활동을 사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적 ‘필요’에 따른 활동이 시장이라는, 이해관계와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영역을 구성한 것이니까. 개인으로서 자신의 필요를 해결해야 하는 시장 속의 인간은 사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는 타인의 존재를 전제하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들(가령 공동체 유지와 함께 사는 환경의 보존 같은)을 할 때 비로소 공적 영역에 들어선다.

시장은 이렇게 본질적으로 공적인 것과 대립하지만, 우리는 시장에서 체화된 경쟁의 감각을 공적인 영역에서도 적용하고자 한다. 대중교통과 도로의 공적 공간을 사유화하고, 그것을 함께 이용하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그의 존재를 무시한다. 

이렇게 공적 공간이 사유화되면 가령 임대아파트의 주민들과 아이들이 대형아파트를 가로질러 등교할 수도 출근할 수도 없는 일까지 벌어진다. 

사소하고 작은 것으로 치부하는 우리들 각자의 시장화된 욕망은 그 자체로 문제일 뿐만 아니라 헬조선의 오늘을 만들어낸 주범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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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편성 과정에 국민의 참여를 보장함으로써 재정의 투명성과 민주성을 제고하기 위해 2018년 국민참여예산제도가 도입됐다. 작년 국민참여예산에는 1200여건의 사업이 다양한 국민에 의해 제안됐다. 그중 국민참여단의 숙의와 일반 국민의 선호조사를 통해 30여건의 국민참여예산이 선정돼 집행되고 있다. 지방정부 예산과 달리 중앙정부 예산은 주민의 선호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기 어렵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이 사업을 제안하고 제안사업을 선정하는 숙의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참여예산제도의 효과에도 불구하고 한계로 언급되는 것은 국민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사업을 선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참여예산제도의 운영은 사업의 제안과 심사, 선정과 같은 절차적 측면보다는 국민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질적 측면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재정당국은 올해부터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인 사회적 난제를 선정해 집단지성을 통해 해결책을 완성해가는 문제 해결형 국민참여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사회적 난제 해결을 위한 국민참여예산제란 기존 국민이 사업을 제안하고 선정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어려운 사회적 난제의 해결방안을 국민들의 지혜를 모아 모색하는 방식이다. 단순 아이디어의 공모와 채택이 아니라 정책 수요자 입장에서 국민이 사회적 난제를 제안하고 해결방안을 토론을 통해 찾아나가는 문제 해결형 참여방식이다. 물론 국민뿐만 아니라 부처와 민간의 정책전문가가 함께 문제 해결과정에 참여한다. 의견 제안자, 일반 국민, 관계부처,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온·오프라인 토론을 개최해 사회적 난제 해결방안에 대해 토의한 후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방향을 도출하고 관련 사업을 발굴한다. 이를 위해 이슈, 문제점 진단, 정책 대응방안에 대한 온·오프라인 토론 과정 및 결과 등을 담은 국민참여 보고서가 작성되고 공유될 예정이다. 

사회적 난제 해결을 위한 국민참여예산제도 도입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효과적으로 작동할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과거 지자체에서 시행해온 많은 참여예산제도가 실질적인 효과를 내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운영되어 생색내기에 그쳐왔기 때문이다. 사회적 난제 해결을 위해 참여하는 국민들이 전체 국민들을 대표할 수 있는지, 전문가도 어려운 난제를 생업에 바쁜 국민들이 해결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고민해 볼 문제이다. 참여 국민들의 대표성과 전문성을 보완하는 꼼꼼한 제도 설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다른 참여예산제도가 그랬듯 보여주기식 행사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제도가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정부의 세심한 제도 설계를 주문하고 싶다. 가급적 다양한 국민들로부터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하고 정부부처와 민간 전문가의 지원을 통해 참여 국민들이 문제의 본질과 쟁점에 대해 충분히 숙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원하에 국민들이 지혜를 모을 수 있도록 충분한 숙의 과정에 대한 설계가 성공의 필요충분조건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올해 국민참여예산제에선 새로운 방식의 참여예산 선정 과정을 통해 여러 사회적 난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들이 참여예산 사업으로 선정되기를 기대한다.

<오영민 | 동국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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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외국인이라고 치자. 지금 당신은 한국의 경찰서에 있다. 당신은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선택했고, 그동안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다. 평범한 하루였다. 일터에 여러 명의 경찰관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경찰관들은 동료들 앞에서 당신을 체포했다. 그날 경찰은 당신의 이름과 나이, 국적 등 개인정보를 ‘취재안내’라는 이름으로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TV와 인터넷에는 보도가 쏟아졌다. 사회적으로 당신은 이미 범죄자로 불린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당신은 낯선 타국의 철창살이 주는 고립감과 범죄자에 대한 감시의 시선을 온전히 견뎌야 한다. 그날 저녁 조사가 시작된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경찰관이 앉아 있다. 무방비 상태의 당신에게 오랫동안 훈련된 수사전문가의 준비된 질문이 시작되었고, 이미 당신의 멘털은 붕괴되어 버린 상태이지만 애써 정신을 붙잡고 힘겨운 대답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경찰관이 표정을 싹 바꾸며 묻는다. “왜 거짓말을 하나요?” 여덟 글자밖에 안되는 이 짧은 질문에 당신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공권력은 자기방어가 취약한 사람을 상대로 작동할 때 그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형사소송법의 중요한 원칙들은 늘 가장 힘없는 사람이 만들어 냈다. 수사기관이 용의자를 체포할 때 체포의 이유와 진술거부권,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사전에 알려주어야 한다는 이른바 ‘미란다 원칙’도 1966년 미국 애리조나 주 멕시코계 이주민 ‘미란다’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피의자 미란다가 용의자로 체포된 이후 자신의 권리에 대한 안내 없이 강압적 분위기에서 2시간 동안 조사받으면서 범죄를 전부 자백한 진술서는 증거로 쓸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위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경찰 피의자 신문의 전체적인 주안점은 (중략) 피의자를 감정적 상태에 몰아넣어 합리적 판단 능력을 훼손하는 데 있다”(Miranda v. Arizona 384 U.S. 436, 1966)는 시대를 앞선 통찰을 보여주었다. 

샌프란시스코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자 저명한 형사법학자인 리처드 레오 교수는 그의 책 <허위 자백과 오판>에서 경찰은 피의자에 대한 조사과정을 압력이 거의 개입되지 않은 채 자발적인 자백으로 이어지는 “진실 발견에 관심을 쏟는 중립적인 정보 수집과정”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는 “범행을 부인하는 피의자로 하여금 범행을 시인하게 만들 목적으로 구체적인 일련의 심리적 효과와 반응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처음의 가설로 다시 돌아가 보자. 경찰관은 이후로도 당신에게 무려 수십 차례에 걸쳐 “거짓말을 하지 말라”며 다그쳤다. “100% 거짓말이다”라며 확신에 찬 모습도 보였다. 당신이 일상적인 한국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통역을 왜 불렀느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당신이 필요할 때 언제든 변호사를 부를 수 있는 형편이었다면 먼 타국까지 와서 노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소식을 듣고 선의로 달려온 변호사를 만나기 전에 이루어진 1차 조사는 나중에 보니 질문과 답변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 사실 이건 가설이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어떤 외국인에 대한 조사의 일부다. 수사기관은 당사자의 진술을 “거짓말”이라 판단하여 반복 추궁할 필요가 없다. 진술과 배치되는 거짓말이라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면, 별도로 증거를 통해 진술을 반박하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이를 반복적으로 ‘추궁’하는 것은 피의자에게 자백을 받아내고자 하는 잘못된 의도를 보여줄 뿐이다. 혐의자의 진술의 신빙성을 고려하여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은 법원이 해야 할 일이지 수사기관의 몫이 아니며, 수사기관은 무죄로 추정되는 당사자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설령 그것이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진술할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한다. 특히, 피의자가 외국인이라면 제대로 교육되고 훈련된 통역 인력을 확보하는 게 그 시작이 될 것이다.

<조영관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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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동백나무 그늘의 끝을 막 지나가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갔다


참새 몇 마리가 은행나무 이파리 사이에 숨어 뭐라 뭐라 떠들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갔다


은회색 승용차가 전속력으로 달려갈 때

그가 지나갔다


노란 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줄지어 동네를 돌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갔다


왕개미 한 마리가 제 몸만 한 과자 부스러기를 물고 힘겹게 보도블록 가장자리를 가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갔다


세상에!

얼굴도 없이

이경림(194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 여자와 참새 몇 마리, 승용차, 아이들, 왕개미가 각각 활동할 때 얼굴도 없는 그가 지나갔다고 한다. 그는 누구일까. 그가 누구일까를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 아닐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냇물 위에 떠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종이배 같은 시간이 아닐까. 혹은 매일매일에 늘 나의 심중(心中)에 살고 있는, 그리운 사람이 아닐까. 내가 무엇을 보든 함께 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비록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일지라도. 이도 아니면 내가 신앙하는 ‘님’이 아닐까. 이도 아니면 소소하지만 스스로 빛나는 일상의 순간이 아닐까. 여럿의 주체들이 각자 힘껏 살고 있음에도 그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알아채지 못하고, 놓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스침과 사라짐에 빗댄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지낸 하루가 나는 좋았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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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조성 중인 ‘기억공간’이 서울 광화문광장을 제외하고는 5년이 지나도록 첫 삽조차 뜨지 못하고 있다.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조성될 추모공원인 ‘4·16 생명안전공원’은 봉안시설 유치를 반대하는 일부 지역주민의 반발로 4년여를 표류하다, 지난 2월 말에야 조성계획이 마련됐다. 참사로 숨진 단원고 2학년 학생 250명이 다니던 교실을 재현한 ‘기억교실’ 등이 꾸며질 ‘4·16 민주시민교육원’은 오는 9월에나 조성사업이 본격화된다. 부지를 놓고 안산시와 교육지원청이 3년여를 허송하다 최근에야 상록구청 인근 은하수공원에 조성키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전남 진도 팽목항의 ‘기억공간’은 “진도항 확장 공사에 걸림돌이 된다”는 진도군의 반대로 조성 자체가 불투명하다고 한다. 침몰 3년 만에 인양된 세월호 선체는 전남 목포신항 부두에 거치된 채 어색한 모습으로 추모객을 맞고 있다. 국민 모두가 뜻을 모아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도 모자랄 판에, ‘지역 이기주의’ ‘지역개발’ ‘늑장’ ‘눈치 보기’ 등 때문에 기억공간 조성이 늦어진다니 부끄럽고 참담하다.

2일 서울 광화문광장 남측 세월호 천막이 있던 자리에 개관한 추모시설 ‘기억·안전 전시공간’. 이 공간은 80㎡ 규모의 목조건물로 전시실 2개와 재난 안전교육을 진행할 시민참여공간, 안내공간인 진실마중대로 구성됐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진도 팽목항에서 4㎞여 떨어진 ‘세월호 기억의 숲’은 미국 영화배우 고 오드리 헵번의 맏아들 션 헵번의 제안으로 2016년 4월9일 문을 열었다. 300여 그루의 은행나무마다 희생자들의 사진·사연이 걸려있고, 가족·친구 등이 남긴 글을 담은 ‘기억의 벽’이 조성돼 있다. 션 헵번은 조성 당시 “어떤 행동이나 어떤 말도  유가족의 아픔과 비통함을 덜어드릴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의 희생이 절대로 잊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억공간은 참사 희생자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한 국가와 ‘산자’들의 참회와 다짐의 공간이다. 독일이 베를린에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세우고, 미국이 뉴욕에 ‘타이타닉호 침몰사고 추모 공원’을 조성한 것도 같은 이유다. 세월호 참사는 특히 ‘살아있는 기억’이다. ‘4·16 세월호 참사 작가 기록단’의 세번째 책 &lt;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gt;에서 생존학생 엄마 문석연씨는 “생명안전공원 때문에 우리 동네에 현수막이 걸렸어요. ‘납골당 반대!’ 우리 애가 그걸 볼까봐 너무 무서웠어요. 내 아이 좀 살려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억공간 조성은 또 다른 희생을 막기 위한 살아있는 자들의 책임이다. 정부와 지자체, 국민들은 이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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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민주화운동의 거목이신 고(故) 박형규 목사님에 대한 긴급조치위반 등 재심사건에서 제가 무죄구형을 하며 과거사 반성을 했다가, 검찰 내부는 물론 언론에서도 크게 소란이 일었지요. 최초 무죄구형으로 보도되었지만, 과거사 반성은 최초일지 몰라도 재심사건 무죄구형은 그전에도 없지 않았으니 최초는 아닙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엔 검찰이 더러 무죄구형을 하였거든요. 정권의 보수화에 발맞추어 검찰은 황당한 옛날 구형을 반복하거나 속칭 백지구형(법과 원칙에 따라 선고해 달라)을 한 후, 무죄판결이 나면 무죄가 웬 말이냐며 기계적인 항소와 상고로 무죄 확정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악의적인 행태를 강화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때는 수뇌부에서 제 의지를 억지로 꺾지 않아 무죄구형을 할 수 있었는데, 12월 박근혜 후보 당선 후에는 실낱같던 샛길조차 완전히 끊겼습니다. 부득이 공판검사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무죄구형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지요. 무죄를 무죄라고 말하는 것은 검사의 의무니까요. 중징계를 받았지만, 5년에 걸친 소송 끝에 제가 옳았다는 판결을 결국 받아냈습니다.

올해 초, 제주 4·3사건 수형인들에 대한 재심사건에서 검찰이 공소기각을 구형한 후 공소기각 판결에 항소하지 않아 1심 판결이 신속하게 확정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관련된 분들의 환한 웃음을 신문 너머로 보고 있으려니 얼마나 기쁘던지요. 2017년 10월 제 징계취소소송이 상고기각으로 확정될 때까지, 법무부는 현재의 검사가 과거 법원의 유죄 판단을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검사가 무죄구형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제가 헌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험을 발생시켰다고 비난했었는데, 그때 그 사람들이 그대로 있는 검찰의 변화가 상전벽해와 같습니다. 놀랍기도, 씁쓸하기도 합니다만, 더 늦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불의했던 시절 제가 불의에 가담하지 않았음에 안도합니다.

제주 북촌 너븐숭이에는 4·3사건으로 학살당한 마을 주민들을 위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현기영 작가님의 시 ‘새로운 빛으로 되살아나소서’가 새겨져 있지요.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하여 영구불망의 돌을 세운다.’ 그 시 구절 앞에 붙박이장처럼 한참을 서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국가폭력으로 헤아릴 수 없이 숱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고, 권력은 피해자들과 목격자들의 입을 반세기가 넘도록 틀어막는 또 다른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정의의 대변자여야 할 검찰은 국가폭력의 잔인한 집행자가 되어 피해자들과 진실을 말하는 목격자들에게 누명을 씌워 교도소로, 사형장으로 보냈지요. 70여년간 고통받아온 억울한 원혼들, 그날의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유족분들과 침묵을 강요당해온 목격자분들이 그 시 구절처럼 가해자들을, 검찰을 용서해줄지….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2017년 10월 제 징계취소 판결이 확정된 후, 모 간부가 저를 불러 흐뭇한 표정으로 심경을 묻더군요. “저는 무죄판결을 받았을 뿐, 저에게 위법한 지시를 한 자들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과와 합당한 문책을 바랍니다”라고 답하니, 제가 가당치도 않은 과욕을 부린다는 듯 “징계취소해도 문제구먼”이라며 황당해했습니다. 그 간부가, 사과와 문책 없는 검찰이 참 원망스럽더군요.

그런 아픈 기억이 있는 터라, ‘용서하지만…’이란 그 구절이 ‘용서하려고 발버둥치지만’이라는 절규로 읽혀 가슴 먹먹했습니다. 색깔론이 아직도 횡행한 시대, 가해자에게 관대하고 피해자에게 용서와 화해를 강권하는 풍토에서, 한 맺힌 사연들을 조심스레 꺼내며 비명을 참느라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게 보였거든요. 너븐숭이 애기무덤 주변에 피눈물같이 뚝뚝 떨어져 있는 동백꽃이 너무도 처연했지요. 제주 4·3의 상징이 왜 동백꽃인지 그날 비로소 알았습니다.

4·3평화기념관에는 운주사 와불처럼 누워 있는 무서백비(無書白碑)가 있습니다.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는 설명문 앞에 절로 숙연해지지요. 이름을 두고 이념과 진영 간의 논쟁이 끝이 없으니 아직 4·3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백비이나, 사과와 화해를 통한 완전한 평화를 기다려온 원혼들의 오랜 피눈물로 적셔진 혈비지요. 사과는 가해자의 의무이고, 용서는 피해자의 권리입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 앞에 검찰을 포함한 가해자들과 악의 승리를 방관한 우리 사회의 진심 어린 반성문을 백비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백비에 얼룩진 피눈물을 가해자들의 눈물로 닦아 바로 세우는 날, 비로소 4·3이 끝날 테지요. 그날까지 가해자들은 피해자들과 역사로부터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임은정 청주지검 충주지청 부장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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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세계여성의날(3월8일) 때 일이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 향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 세계에 울려퍼질 때 미국에서는 한 성전환 여성이 투옥됐다. 그는 한때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일지와 국무부 기밀문서를 언론에 공개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유명인사였다. 바로 첼시 매닝이다. 그 일로 매닝은 35년형을 선고받았다. 7년반 넘게 투옥된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퇴임 이틀 전 사면돼 석방됐다. 자유의 몸이 된 지 2년3개월 만의 재투옥이지만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대다수의 언론과 시민들이 침묵한 탓이다. 투옥 죄목은 법정모독. 그는 자신의 자료를 공개한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에 대한 조사차 제4연방항소법원 대배심에 출석했다. 그는 증언을 거부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대배심이 비밀로 진행된다는 점, 이미 군사법정에서 모든 것을 공개했다는 점이다. 하루 22시간씩 28일간 독방에서 지내온 매닝은 지난 4일 일반 감방으로 옮겨졌다. 그가 증언하지 않으면 대배심 절차를 마칠 때까지 최대 18개월간 투옥될 수 있다. 

미 정부가 이미 충분히 죗값을 치른 그를 다시 옭아매려는 이유는 뻔하다. 그를 압박해 어산지를 사법처리하기 위함이다. 두 사람은 미 정부에 눈엣가시나 다름없다. 그럴 만도 했다.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된 기밀자료는 미국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 덕분에 테러와의 전쟁,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구실로 해외에서 벌여온 활동의 민낯이 드러났다. 많은 미국인들은 미군의 교전수칙이 망가지고, 그들도 민간인 학살의 공범이 된 사실을 깨달았다. 미 정부가 두 사람을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협을 가한 범법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당연했다. 

‘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 참가자들이 8일 대회 장소인 광화문광장에서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미투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미국의 바람이 통한 걸까. 어산지는 11일 영국 경찰에 체포됐다. 영국 주재 대사관에서 그를 보호해온 에콰도르 정부가 보호 조치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어산지가 망명한 지 6년10개월 만이자 위키리크스가 트위터에 “어산지가 몇 시간에서 며칠 안에 추방될 것”이라는 글을 올려 우려를 표현한 지 일주일 만이다. 망명 지위 철회 이유는 국제협약 위반이다. 전임 좌파 대통령 시절 망명한 어산지는 현 레닌 모레노 대통령 집권 이후부터 갈등을 빚어왔다. 모레노는 최근에도 대통령이 되기 전 자신과 가족의 계좌나 전화 같은 사적 정보를 유포한 어산지를 비난한 바 있다. 어산지의 체포로 그의 미국 송환과 투옥은 시간문제가 됐다. 미 정부는 이미 그를 이적행위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매닝과 어산지는 미 정부의 주장처럼 국가안보의 위협일까. 물론 아니다. 오히려 언론 자유와 시민의 알권리 수호자라 할 수 있다. 당시 세계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찬사를 보낸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최근 언론의 태도는 그때와는 딴판이다. 사실 보도만 할 뿐 이들을 옹호하거나 이들의 투옥이 언론 자유의 중대한 침해라는 목소리를 담은 사설이나 칼럼은 보이지 않는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초선인 민주당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이 지난 2일 매닝 석방을 요구한 것이 고작이다. 민주당은 어산지의 투옥을 바라는 눈치다.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위키리크스가 민주당 대선본부장의 e메일을 공개하는 바람에 패배했다는 악감정이 남아서일까. 침묵 지키기는 여성운동단체나 인권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미 정부는 언론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 위배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또 같은 내용을 공개한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기자를 제쳐놓고 어산지만 사법처리하려는 것이다. 만약 어산지에 대한 관심이 옛날과 같았다면 그는 쉽게 체포되지 않았을 터이다. 오로지 양심에 따른 행동으로 국가 권력의 오만함과 언론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이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때마침 국내에서는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성범죄 의혹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한창이다. 장자연은 권력의 희생자를, 김학의는 권력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윤지오나 피해여성의 용감한 증언이 없었다면 재수사는 불가능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침묵하던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매닝과 어산지, 윤지오와 피해여성은 국가나 권력 앞에 무기력한 개인을 대표한다. 이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은 배반의 침묵을 깨는 양심의 목소리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시민과 약자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을 견제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침묵은 곧 배반을 의미하는 때가 온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되기 정확히 1년 전인 1967년 4월4일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한 반전 연설에서 강조한 말이다. 시민이 깨어 있지 않는다면 언론 자유는 물론 인권,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협에 빠질 수 있다. 지금이 그때일지도 모른다.

<조찬제 국제·기획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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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초등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지를 물으면 ‘물부족 국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물이 부족해 고통스러운 미래를 그리며 캠페인을 벌이니 물부족 국가라는 인식만은 확실히 한 것 같다. 2019년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다시 묻는다면 아마 ‘저출산·고령화’ 시대라고 대답할 것 같다. 청량리역 인구탑을 보면서 인구폭발로 한국이 궤멸할 듯한 위기감 속에서 자랐지만, 막상 내가 아이를 낳을 때는 더 낳아보라 부추기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불과 30년도 내다보지 못한 정책이 인구정책이다. 

얼마 전 경북 의성군에 다녀왔다. ‘롯데리아’마저도 휴무일이 있는 곳이다. 때마침 학교를 마치고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바나나맛 우유를 먹는 의성초등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대도시 풍경과 다르지 않다. 몇몇 중·고생들도 편의점에 들락거렸지만 이내 읍내는 고요해진다. 분식집의 유일한 피크타임일 텐데 제대로 개시를 못한 것 같았다. 장날이 아닌 평일 농어촌 읍내 풍경은 대략 이렇다. 

그래도 계절은 또 돌아와 들판에는 마늘이 쏘옥 올라왔다. 의성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의성마늘’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종종 ‘지방소멸 위험 1위 지역’이 의성을 떠올리는 이미지인 것 같다. 외부인보다는 주민들이 그리 규정한다. 택시에 올라타자 택시 기사는 “읍내에 사는 인구가 1만도 안됩니더. 곧 소멸됩니더”라며 외지인인 내게 의성군을 딱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 인근의 상주시는 인구 10만명 선이 무너지자 공무원들이 ‘상주’ 된 마음으로 검은 상복을 입고 출근하면서, 10만명 지키기에 사활을 건다는 소식을 전했다. 택시 기사는 대학이라도 있는 상주시 상황은 의성에 비할 바가 아니라며 탄식을 보탰다. 

지방소멸에 대한 논의는 일본의 지방소멸 위험을 경고한 ‘마스다 보고서’에서 착안해 2016년 한국고용정보원이 보고서를 냈다. 그리고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공식화된 말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65세 이상 인구수가 20~39세 여성의 수보다 2배 이상 많으면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경북 의성군이 소멸위험지역 1위에 들어서고 만다. 하지만 전국 농어촌 상황은 다 엇비슷하다. 보고서 기준을 적용하면 향후 30년 내에 84개 시·군, 1383개 읍·면·동이 소멸위험이며 이는 전체 마을의 39%에 이른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농촌이 휑한 것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건만, 막상 ‘소멸위험’이라는 말을 들은 지역민들의 박탈감은 매우 큰 듯하다. 자신의 삶의 터전이자 고향이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맥이 빠질 것이다. 경각심을 가지란 뜻에서 만들어진 말이겠지만 중앙집중적인 말이고 말의 온도가 너무 차갑다.  

그래도 의성초등학교 아이들은 재잘대면서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태권도 사범을 따라 태권도 도장으로 몰려간다. 피아노 학원과 문구점도 있으니 아이들은 계속 자랄 것이다. 이 아이들이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는 고장이라면 그 부모는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려 할 것이다. 지금 사과와 마늘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농사지어 살 만하다면 그 모습을 보고 떠나지 않을 농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의성마늘과 의성사과는 여전히 인기 만점일 것이다. 며칠 전 보니 전지작업이 말끔하게 끝난 사과나무에 꽃망울이 웅얼웅얼 맺히고 있었다. 지금을 돌봐야 한다. 그것만이 소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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