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언론 기사를 살펴보면 조국 법무부 장관과 관련되지 않은 걸 찾기 어렵다. 그동안 쏟아낸 기사가 수십만건에 이른다는 얘기도 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것도 많고, 추측기사도 적지 않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신상털기나 가짜뉴스와 다를 바 없는 ‘카더라’ ‘아님 말고’ 식의 기사들을 읽고 나면 피곤과 짜증이 밀려온다. 

언론을 신뢰할 수 있다면 이런 소동들이 소위 ‘알권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전례를 살펴보면, 어떤 언론사는 의도적으로 가짜뉴스를 만들어낸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려울 정도이다. 요즘 시국에 별 관심은 얻지 못하겠지만 한 경제전문지의 이상한 기사에 대해 짚어보았다.

몇 개월 전 한 경제신문에 “시세 80%로 취약계층 위한다는 ‘사회주택’…달동네로 떠밀린 ‘깡통 사회주택’만 속출”이란 기사가 실렸다. ‘달동네’와 ‘깡통’이 뜻하는 바를 상식적으로 풀어보자면, 각각 ‘산등성이나 산비탈 등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비어있음’ 정도일 것이다. 이에 바탕을 두고 기사의 적절성과 사실 여부를 따져보았다.

우선 사회주택정책에 문제가 있다며 제목으로 뽑은 ‘취약계층을 위하는 사회주택이 달동네에 공급된다’는 명제는 사회주택 비판의 논리적 근거가 되기 어렵다. 저소득층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 주변시세보다 더 저렴한 주택이 공급되었다면 주거안정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기자의 신념이 서울시 전역에 사회주택이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달동네에만 공급되는 것을 비판할 여지는 있다. 그런데 ‘달동네에 떠밀렸다’고 단정할 근거가 없다. 

서울시의 사회주택이 공급된 지역은 ‘사회주택플랫폼(http://soco.seoul.go.kr/)’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1인 가구 기준 455가구가 공급되었는데, 동별 공급량이 20가구 이상인 경우를 내림차순으로 살펴보면 성북구 성북동 42가구, 관악구 신림동 40가구, 은평구 갈현동 33가구, 강남구 역삼동 28가구, 종로구 이화동 27가구, 강북구 수유동 27가구, 마포구 연남동 26가구, 은평구 녹번동 25가구, 서대문구 연희동 24가구, 관악구 봉천동 22가구이다. 접근성의 기준인 전철역까지의 거리를 살펴보면, 평균거리는 640m이다. 통상적인 도보생활권의 기준인 500m와 별 차이가 없는데, 전체의 절반이 넘는 232가구가 전철역에서 500m 이내에 위치한다. 21세기 서울에서 달동네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억지에 불과하다.

한편 2019년 8월 말 기준으로 서울시 사회주택의 공실은 82가구이다. 전체 공급량의 18%에 해당한다. 전철역까지 거리에 따라 구분하여 집계해보면 500m 이내의 공실은 31가구, 500m 범위 밖의 공실은 51가구이다. 전철에 대한 접근성이 양호한 곳의 공실률은 13% 수준이며, 전철과 다소 거리가 있어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의 공실률은 23% 수준으로 조금 높다. 하지만 깡통 운운할 정도는 아니다.

같은 기자는 사회주택에 관한 기사를 두 꼭지 더 작성하였다. 각각 “사회주택 먼저 도입한 유럽 각국, 취약계층 주거 보조금으로 선회” “밑 빠진 독 지원하더니…서울시 사회주택기업 ‘연쇄 부도’ 위기”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앞의 기사는 유럽의 사회주택 지원제도를 엉뚱하게 해석하여 유럽에서는 사회주택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식의 잘못된 제목을 달았다. 뒤의 기사는 한 업체가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전체 사회주택이 부실하다고 부풀리기 위해 비약과 억측으로 채워 문제가 많다. 

이런 기사들은 소셜미디어나 커뮤니티에서 무책임하게 생성되는 가짜뉴스와 다를 바가 없다. 

가짜뉴스는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멀쩡하던 회사가 큰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다. 기사의 탈을 쓴 가짜뉴스를 걸러내기 위한 언론의 자정 노력이 절실하다.

<강세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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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비서 성폭력 혐의(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상고심에서 징역 3년6월을 선고받아 유죄가 확정됐다. 지난해 3월 김지은씨가 언론을 통해 피해사실을 폭로한 지 1년 반 만에 나온 법원의 최종판결이다. 위력을 이용한 ‘권력형 성폭력’이 명백한 범죄임을 확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의 상고심 기각 결정을 환영한다고 밝히고 있다. 대법원은 이날 안 전 지사의 상고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유죄 확정 판결을 환영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9일 대법원 2부는 안 전 지사의 10개 혐의 중 9개를 유죄로 판단한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1심은 무죄로, 2심은 유죄로 엇갈린 상황에서 대법원은 2심 판결이 맞다고 판단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사용자를 상대로 법과 정의에 기대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환영했다. 정치권에서도 “사필귀정의 확립(바른미래당)” “피해자다움은 가해자의 무기가 될 수 없다는 이정표를 세웠다(정의당)” “위대한 싸움을 진행한 미투 운동의 승리(민주평화당)” 등 일제히 환영논평을 냈다. 

지난해 초부터 터져 나온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 중에서도 안 전 지사 사건은 특히 1, 2심 판결이 뒤집히며 뜨거운 논란이 일었다. ‘위력이 존재는 했으나 행사되지 않았다’는 논리로, 1심 무죄 판결의 근거가 됐던 ‘위력 행사의 유무’와 ‘피해자다움’이 공방의 핵심이었다. 이 과정에서 양비론이 고개를 들며 꽃뱀 음해와 진영 논리까지 더해져 개인적 불이익과 위험을 감수한 채 성폭력을 고발한 피해자에게 2차 피해가 가해지기도 했다. 가해자 동정여론과 피해자 비난은 위력 행사에 고통을 당하는 ‘보통의 김지은들’과 가해 권력자들의 눈높이 차를 실감케 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이 같은 논란을 잠재우며 국내외에서 도도하게 진행되는 미투 운동이 시대적 대세임을 다시 확인시켜줬다. 공대위가 밝힌 대로 이번 판결이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포함한 모든 성폭력을 끝내는 변곡점이 돼야 한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성평등이 한발 더 전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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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브리지와 런던타워가 빤히 보이는 템스강가 호텔에서 보름 가까이 머물렀다. 창 아래로 2000여 년 가까이 서 있는 성벽의 잔해가 보이는 곳이었다. 성벽은 런던 월(London Wall)이라고 부르며,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서기 190~225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성벽은 높이 6m, 길이 5㎞에 달했으며, 런던타워 앞 템스강 기슭에서 시작하여 당시 로마인들이 살았던 론디니움(Londinium)을 에워싼 후 알파벳 D 형태를 이루며 템스강의 상류 쪽 기슭으로 이어졌다.

현재 성벽은 지하철 타워 힐 역 바로 앞에 가장 길고 웅장하게 남아 있으며, 그곳에서 성벽은 끊어졌다가 다시 현대식 건물 틈새로 길이 60~70m 남짓하게 이어진다. 그곳으로부터 런던뮤지엄까지 이어지는 도로 주변은 금융 중심가답게 초현대식 고층건물들이 즐비하다. 그 건물들 벽에 간혹 파란색 표지판이 붙어 있다. 타워 힐 앞 성벽에는 2번 표지판이 붙어 있으며, 통틀어 모두 21번까지의 표지판이 2000여 년 전 런던 월의 존재를 알려 주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렇기에 빼곡하게 들어 선 고층 건물들 사이로 걷는 길은 로마인들이 닦아 놓은 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곧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는 런던뮤지엄 또한 론디니움을 지키던 요새의 터 위에 지어졌으며 타워 힐로부터 그곳으로 가는 길은 대개 성벽이 세워졌던 곳들이며 로마인들이 걸었던 길이다. 뮤지엄 못 미처 남아 있는 런던 월 잔해 곁에는 중세에 들어섰던 교회조차 허물어져 볼품없지만 갖가지 꽃이 가꿔진 정원이 성벽을 감싸고 곁에는 카페까지 들어섰다. 더구나 그곳에서부터 ‘스카이워크’라고 부르는 공중 육교들이 건물 사이를 이어 주며 박물관까지 오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사실 그곳은 론디니움을 거니는 내내 나의 중요한 휴식 장소이자 샌드위치나 샐러드로 때우는 점심 식사 장소이기도 했다. 2000여 년 묵은 성벽에 기대 앉아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생소할 만큼 훌륭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놀라움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기운을 추스르고 그곳에서부터 군데군데 허물어진 성벽을 따라 중세시대에 세워진 이발사와 외과의사의 집을 지나면 18번 표지판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곳은 지하 주차장 입구이다. 주차장 안을 기웃거리기는 했지만 하필 표지판 앞에 중세시대의 망루가 부서진 채 있으니 처음에는 그것이려니 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날 밤, 고고학을 공부하는 영국인 지인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무턱대고 물었다. 왜 거기 표지판이 있느냐고, 갸우뚱거리며 10m 남짓 들어가다가 돌아 나왔다고 했더니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곤 내일 다시 가서 지하 주차장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보라고 했다.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부랴부랴 그곳으로 향해 그가 말한 기둥의 번호를 찾았다. 멀리서 그 번호가 보일 때쯤 소름이 돋으며 전율이 일었다. 기둥 근처에 성벽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창하게 보호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시멘트로 바른 겉이 떨어져 나가 속이 훤히 드러난 콘크리트구조물처럼 로마와 중세를 거친 성벽이 주차장 서너 칸을 차지한 채 남아 있었다. 

버려진 듯 무심하게 그곳에 남아 있는 성벽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말을 잊었다. 그것은 어이없거나 참담함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대하여 갖춘 예의였다. 허물어지거나 부서진 것들의 아름다움은 새것들이 감히 탐할 수 없는 분방함과 눅진함이 배어 있다. 낡은 전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로마시대 성벽이 지하 주차장 안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구나 그 규모는 앞에 말한 2번 구역의 타워 힐이나 그 옆 3번 구역의 성벽에 비할 바가 되지 않지만 그것조차 허물어버리지 않고 남겨 둘 수 있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생각은 성벽보다 더 높고 견고한 것이지 않겠는가. 

그 다음 날은 길드 홀(Guildhall)을 찾았다. 여러 건물이 에워싼 길드 홀 광장에는 독특하게 검은 돌이 점점이 박혀 있다. 길드 홀 아트갤러리 지하에는 론디니움의 원형극장이 폐허가 된 채 남아 있으며, 광장의 검은 돌은 지하에 있는 원형극장의 외곽을 따라 경계를 표시해 놓은 것이었다. 그 일은 최근에 이루어진 것이다. 갤러리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1987년 지금의 아트갤러리를 철거했다가 그 지하에 원형극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자 그때부터 원형극장의 보존을 위하여 갤러리 설계를 다시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그것은 올더게이트(Aldergate)나 빌링스게이트(Billingsgate)의 오피스 빌딩 지하에 있는 성벽이나 로마시대 주택과 목욕탕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한 모든 장소의 특이한 점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유재산권을 앞세운 건물주들의 재산권 행사에 의하여 유적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랄 일은 금융 관련 미디어그룹인 블룸버그(Bloomberg)의 유럽 본사건물 지하이다. 지하 3층 깊이인 지표면 6m 아래에는 신비한 미트라(Mithras) 신을 모신 로마의 신전 미트라에움(Mithraeum)이 폐허가 된 채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된 2000년 전 장소를 발굴하고 보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 역사적 장소에 21세기의 기술까지 덧입혀서 극대화된 제례의 현장을 재구성하여 공개하는 그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젠 익숙해졌지만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는 거푸 세 차례나 방문할 정도로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미트라에움에서 되돌아 나올 때마다 역사적 장소를 매개로 한 공공이익 창출에 있어서 기업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뿐일까. 바실리카(Basilica) 구조물이 남은 리든홀 마켓(Leadenhall Market)의 이발소, 부두 건설에 사용됐던 나무 기둥이 남아 있는 순교자 성 마그누스(St Magnus) 교회와 같은 론디니움의 흔적도 찾아 다녔다. 그런데 그러한 장소에 갈 때마다 로만브리튼(Roman Britain)의 역사보다 그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더불어,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경외심이 일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사람이 곧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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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달 30일 부산에서 열린 장외집회에서 “문재인 정부는 ‘광주일고 정권’이다.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을 차별하면서 더 힘들게 하는 정권에 대해 부울경 주민이 뭉쳐서 심판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나경원 원내대표는 “서울에 구청장 25명 중 24명이 민주당인데 그중에서 20명이 광주, 전남, 전북이다”라고도 주장했다. 그의 이같은 발언은 명백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선동적 발언이다.

내년 4월 21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과 색깔론 발언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       

국회는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정치인과 색깔론을 조장하는 정치인, 부패 연루 정치인을 지역 유권자가 소환하여 의원직을 박탈할 수 있도록 하는 국민소환제를 도입하여 우리 국회가 정책과 입법에 집중하는 국회로 탈바꿈하기를 바란다.

특히 지역균형발전 없이는 국민통합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정부는 예산과 공직 인사, 정책 등을 균형 있게 시행하여 동서화합과 국가의 균형 발전을 통한 국민통합에 앞장서 줄 것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국회에 있는 110여명의 크리스천 국회의원에게 당부하고 싶다.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상생의 정치와 지역균형 발전과 국민통합, 남북의 평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열강들과의 우호협력강화를 위해 피스메이커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한다. 이는 정치인 이전에 막힌 담을 허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마땅한 본분이다.

<김철영 |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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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이라는 해괴한 단어가 생기기 전에는, 음식점이나 상점 종업원들이 중장년 남성을 부를 때 흔히 ‘사장님’이라는 말을 썼다. 하고많은 직업 중에 왜 꼭 사장일까? 집에 전화기가 있으면 큰 부자로 대우받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이 다방을 개인 연락사무소로 이용했다. 종업원이 “김 사장님 전화 받으세요”라고 소리치면 다방 안에 있던 사람 반이 일어났다는 우스개가 전한다. 고도 경제성장이 시작된 1960년대 중반 이후 회사는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고, 사장도 그만큼 많아졌다. 중장년 남성을 ‘사장님’으로 부르는 관행은, 모르는 상대를 높여 주던 전래의 미풍양속과 회사가 속출하던 시대 상황이 결합해서 생겼을 터이다.

물론 사장보다 훨씬 많아진 사람은 ‘사원’이다. 오늘날 직업을 가진 한국인의 반 가까이는 ‘사원’이다. 회사원, 월급쟁이, 직장인은 모두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사무직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 유통업 노동자와 서비스업 노동자는 서로 다른 직업인이지만, 그래도 모두 ‘회사원’이라는 통합된 이름으로 불린다. 회사원이 아닌 사람도 회사와 관계 맺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먹는 것 일부를 제외하면, 현대인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에 회사 로고가 붙어 있다. 현대는 회사의 시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나라에 회사라는 이름의 기업 조직이 처음 출현한 해는 1883년이다. 이해 10월21일 한성순보에 ‘회사설’이라는 논설이 실렸고, 같은 무렵 평양 상인들이 대동상회, 서울 상인들이 장통회사를 설립했다. 이때의 회사는 ‘결사영상(結社營商)’, 즉 상인들의 동업조합 같은 것으로서 출자자를 사원, 경영자를 총무라고 했다. 사장은 대개 고위 관료가 겸했다. 오늘날의 사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고원(雇員)이나 용인(傭人)이라고 불렀다. 자본주의의 모국인 유럽의 회사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초창기의 회사들도 일종의 특권적 상업 조직이었다. 중앙정부가 발급한 회사 인허장은 잡세 면제증과 같았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정부가 상업 자유의 원칙을 천명한 뒤에도 회사의 특권은 바로 사라지지 않았으나, 점차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의 회사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주식회사라는 이름을 처음 쓴 회사는 1898년 김익승이 설립한 부선주식회사였다. 재고, 자산, 나무 그루 등을 의미하는 영 단어 stock을 중국인들은 고본(股本), 일본인들은 주(株)로 번역했는데, 한국인들은 처음 깃(矜)이나 고본이라고 부르다가 이윽고 일본식 주(株)로 바꿨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정부의 중상주의적 정책에 발맞추어 여러 개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1907년에는 사설 주식 거래소도 생겼다. 이때부터 주식회사의 시대가 열렸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시대 기업 유형 중 하나에 머물지 않았다. 이것은 온 사회 구성원을 자본 아래 통합시키는 마력을 발휘했다. 주권(株券)은 누구나 살 수 있는 물건이고, 10만주를 가진 사람과 100주밖에 못 가진 사람을 같은 ‘이해관계인’으로 묶어준다. 갑 회사에 다니면서 을 회사의 주권을 산 사람은 자기 회사 실적보다 을 회사의 실적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무엇보다도 주식회사는 자체로 압축된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가 곧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둘은 운영 원리가 같을 뿐 그 주체와 기본 이념은 전혀 다르다. 민주국가의 국민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하게 1표씩을 갖는다. 인간을 기준으로 하는 다수결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이다. 반면 주식회사의 주권은 돈에 있으며, 모든 권력은 돈으로부터 나온다. 다수결의 주체는 전적으로 평등한 액면가의 주식들이다. 주식회사를 떠받치는 기본 이념은 문자 그대로 ‘자본주의(資本主義)’이다. Capitalism을 자본주의로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아마도 그 속성이 인본주의에 대립한다는 점을 간파했을 것이다.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다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것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민주주의가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이 병립하는 상황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준다. 어떤 사람이 국가기관이나 공기업에 특혜 입사했다는 소식을 접하면, 모든 사람이 분노한다. 하지만 재벌가 3세가 자기 가족이 대주주로 있는 주식회사에 특혜로 입사하여 초고속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에 분노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공적 기관에는 인본주의를, 사기업에는 자본주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문제는 이 둘 사이에 펼쳐진 회색지대가 매우 넓다는 점이다.

특히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립 법인들에서는 인본주의와 자본주의 중에서 어떤 원칙에 따를 것이냐를 두고 늘 문제가 발생한다. 종교재단에서 원로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직위를 세습하는 것은 온당한가? 사학재단이 이사장 자녀를 교수로 채용하는 것은 온당한가? 언론사가 가족기업처럼 운영되는 것은 온당한가? 다 알다시피 자본주의 원리는 사립 법인 내부에서만 관철되는 게 아니다. 얼마짜리 학원에 보내느냐에 따라 학생 성적이 달라지고, 변호사가 대형 로펌 소속이냐 국선이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진다. 인류평등이라는 인본주의의 대의는 말뿐이고, 일상생활 전반을 자본주의가 지배한다. 인본주의적 선심(善心)이란 본래 아래를 향하는 것인데, 자본주의적 선심은 위를 향한다. 가난한 사람 무시하고 부자에게 선심을 베푸는 건 현대인의 생활 윤리다.

자본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이른바 ‘흙수저’들은 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관건은 인본주의가 지배하는 영역을 어떻게 얼마나 넓힐 수 있느냐에 있다. 인본주의가 차지하는 공간이 넓은 자본주의가,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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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구조기술사 박동훈은 삶이 고달픈 이지안에게 말한다. 건물을 지을 때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설계한다고. 인생도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틸 수 있다고. 

내력이란 물체가 외부 힘의 작용에 저항하여 원형을 지키려는 힘을 의미한다. 일본이 일제 징용 배상 판결에 도리어 경제보복을 하는 것이 외력이라고 한다면 불매운동에 참여하고 진정한 사과를 받을 때까지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내력이다. 우리 역사는 부정선거에 맞서 4·19혁명으로 항거했고 6월 민주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했으며, 국정농단 사태 앞에서 시민의 힘으로 정권을 교체하며 내력을 증명해왔다. 그러나 반복되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그만큼 토대가 허약함을 방증하기도 한다. 김누리 교수는 이를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보며 자아의 문제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파커 J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보면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자아는 독립적이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다. 파머는 그러한 자아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의 역동을 다루는 기회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그 결정적 장소가 교실이라고 보았다. 

교사는 ‘두려움은 어떻게 떨쳐낼 수 있을까?’ ‘죽을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인생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 질문을 통해 학생의 내면 탐구를 자유롭게 도와주어야 한다. 자신보다 커다란 실재에 맞닿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지극히 작은 개인이 큰 이야기와 연결될 때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마음의 습관이 길러진다는 것이다.

국어 수업에서 아이들과 같이 고른 책, 티에리 드되의 <야쿠바와 사자>를 읽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에서는 소년이 전사로 인정받으려면 홀로 사자와 맞서 싸워야 한다. 야쿠바는 힘들게 헤매다 드디어 사자를 대면하지만 사자는 이미 피 흘리고 굶주려 죽기 직전인 상태다. 이대로 사자를 찔러 전사로 인정받을 것인가, 상처 입은 사자를 구해주고 겁쟁이로 남을 것인가. 밤새 고민한 소년은 사자를 살려주고 마을로 돌아온다. 전사가 된 다른 친구들은 사냥을 떠나지만 야쿠바는 마을 외딴곳에 남아 가축을 돌보는 허드렛일을 맡게 된다. 

책을 덮은 후 아이들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았다. 약한 사자를 죽이고 전사가 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인가? 자신에게 당당한 것과 타인의 평가 중 무엇이 중요한가? 스스로 한 결정을 따르기 위해 다수가 바라는 길을 가지 않을 용기가 있는가? 함께 읽은 책은 공동의 경험이 되었고 우리가 만든 질문은 실존의 문제를 지닌 큰 이야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아프리카 어느 초원을 배경으로 둥글게 모여앉은 스무명의 야쿠바들이 되어 스스로 답을 찾아갔다. 우리는 친구가 어떤 생각의 과정을 거쳐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묵묵히 곁에서 들었다. 서로 달라도 평화로울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바랐다. 

야쿠바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닮아있고 아이들은 살아가면서 비슷한 일을 만날 것이다. 고독하게 내면을 탐구하되 서로 곁을 지켜주는 시간이 학교에서 켜켜이 쌓여가길, 그래서 장차 사회에 나갔을 때 타인의 평판에 휘둘리지 않길,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는 내력을 가진 사람이 되길 이 작은 교실에서 꿈꿔 본다.

<위지영 서울 신남성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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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와 주제를 모르고 덩달아 남 따라 하면 끌끌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더니” 한소리 듣습니다. 숭어와 망둥이는 둘 다 기수(汽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강어귀 바닷물)에서 삽니다. 숭어는 물 위로 멋지게 솟구쳐 뛰어오르지만 망둥이는 개펄 위를 찰박찰박 경망스레 뛰어다니기에 이 둘을 비교해 줏대 없는 따라쟁이에게 혀를 찼습니다.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가 있듯이 그런 망둥이 보고 꼴뚜기도 가만 못 있었죠.

이 속담에도 숨은 맥락이 있습니다. 부어( 魚), 이어(鯉魚)가 붕어, 잉어로 바뀌듯 숭어도 수어(秀魚)에서 바뀐 것입니다. 원래 이름이 수어(秀魚)인 만큼 맛 좋은 생선이죠. 그런데다 숭어는 흔하게 잡혀 값도 꽤 저렴했습니다. 이 싸고 맛 좋은 물고기가 느닷없이 어느 때인가 값이 뜁니다. 연일 날씨 사나워 못 잡거나 이상기온으로 자취를 감춰서일 수도 있겠지요. 숭어가 비싸지니 어물전 왔다 헛걸음하기 싫어 망둥이를 사 갑니다. 망둥이 찾는 사람이 많아지니 망둥이 가격도 덩달아 뜁니다(망둥이 가격이 뛰면 꼴뚜기 값도 물 뿜고 따라 뛰겠지요). 뛰는 생선인 숭어와 망둥이로 ‘위로 뛰다’ ‘물가에서 뛰다’와 ‘가격이 뛰다’ ‘물가가 뛰다’를 연결한 셈입니다. 지금은 애초의 의도가 희미해져 분수 모르고 덩달아 남 따라하는 사람을 뭐랄 때만 쓰지만요.

동료가 신형 차를 사니 없는 살림에 차 바꾸고 싶습니다. 옆집 애가 필요한 유학 간다니 불필요한 우리 애도 비싼 코스를 밟습니다. 따라 하지 못하면 돈 없는 자격지심에 화가 납니다. 내 어디가 저만 못해서! 네, 맞습니다. 사람마다 어느 한곳, 어느 한때 남보다 뛰어날 수(秀)가 있습니다. 숭어가 봄에 맛있다면 망둥이가 맛있는 철은 가을입니다. 망둥이 철에 남들 따라 숭어 먹어보겠다니 꼴뚜기마저 비웃습니다. “제때 제맛도 모르고 뛰는 저 얼간망둥이!”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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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수나 운동 선수가 외국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거나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을 때 국내 언론이 반드시 쓰는 기사가 이른바 ‘외신 반응’이다. 미국·유럽 등의 언론이 이 뛰어난 한국인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현지 기사를 찾아내 우리말로 풀어 소개하는 것이다.

외신의 평가를 기사로 작성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거둔 성공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다각도로 조명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기사는 동북아시아 변방 국가 특유의 감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일면식도 없는 남남이지만 같은 한국인이 서구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자랑스러워지는 것이다.

김연아는 기자들에게 수많은 외신 반응 기사를 쓰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힘차고 아름다운 연기로 피겨 스케이팅 최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김연아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에게 밀려 은메달을 획득했을 때였다. 김연아는 의연하게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그를 응원했던 한국 팬들은 판정이 불공정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집단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팬들의 분노가 얼마나 굉장했는지, 이 현상에 대한 외신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김연아가 은메달에 그쳤을 때 한국인들이 분노한 것은 놀랍지 않다”며 “오랜 세월 한국은 국제 대회 성적을 자부심과 결부했던 나라”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한국인들이 전쟁의 폐허와 가난을 딛고 폭발적 경제 성장을 이뤘음에도 여전히 자국을 ‘약소국’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OECD 경제 순위나 국제 스포츠 대회 성적, 노벨상 개수 등 정량화할 수 있는 성과가 한국의 위상을 높여주는 걸로 여긴다고 분석했다. 김연아의 은메달이 불러온 분노의 후폭풍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를 갈구하는 한국인들의 심리를 서구 언론에 드러내 보인 사건이 됐다.

그러나 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인을 응원하는 마음들을 모두 애국심이나 자격지심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해외에서 뛰는 한국인 운동 선수를 국가대항전에 출전한 국가대표 선수인 양 편파 중계하는 방송에 눈살을 찌푸리는 팬들도 많다. 사회가 바뀌고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인들의 해외 활약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해졌기 때문이리라.

LA 다저스 류현진이 7월20일 마이애미전에서 힘껏 공을 던지고 있다. AP연합뉴스

최근 기자들에게 외신 반응을 쓰게 만든 스타는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의 류현진이다. 올 시즌 류현진은 뛰어난 투구로 메이저리그 최정상에 오르며,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 수상 후보로까지 거론돼 왔다. 한국 야구팬들에게 친숙한 얼굴인 류현진의 활약은 반가운 일이다. 류현진의 경기 내용을 소개한 기사에서 악성 댓글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 팬들은 류현진이 외국에서 ‘국위’를 ‘선양’했기 때문에 응원한 게 아니다. 류현진을 덮어놓고 칭송하는 댓글엔 ‘국뽕(애국심에 도취된 것)’이라는 빈정거림이 따라붙는다. 팬들이 류현진에게 원하는 것은 국위선양보다 차라리 ‘힐링’에 가깝다.

우리는 삶에 짓눌려 항상 피곤하고, 별다른 낙이 없다. 정치권엔 믿을 사람이 없고, 경제는 언제 좋아질 것인지 기약이 없다. 웃을 일 없는 사람들에게 류현진은 정교한 투구를 지켜보고 감탄하는 즐거움과 승리의 기쁨을 안겨준다. 경기에 몰입하는 동안은 걱정과 잡념을 잊을 수 있다. 적잖은 팬들이 “요즘 류현진 보는 맛에 산다”고 고백하는 이유다.

류현진은 최근 몇 경기에서 부진했다. 사이영상을 받는다면 개인의 영광이자 한국인의 메이저리그 도전사에 한 획을 긋겠지만, 사이영상을 못 받아도 실패는 아니다. 남은 경기에서 잘 던진다면 한국 팬들은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즐기려 보는 게 스포츠 아니겠는가.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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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갈나무, 참나무과의 낙엽교목. ⓒ이해복

어디에서 왔을까. 그건 아주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자. 거기에 무어라 말할 하늘이 아니다. 여름이 차례를 지켜 덥고, 나는 순서가 되어서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 지금 해야 할 일은 자꾸 산으로 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궁리가 든다.

지난 일요일은 입춘 이후 열다섯 번째인 백로였다. 대부분의 24절기가 뜻만 무뚝뚝하게 전하는 데 비해 백로는 그 이름이 퍽 우아하다. 덕유산 삿갓재에서 1박 하는 산행을 계획하였다가 링링에게 발목이 잡혔다. 파주출판단지로 허전한 발길을 돌리는데 뿌리째 뽑힌 가로수가 많았다. 거리에 수북한 상수리나무의 가지를 관찰하니 접촉면이 너덜너덜했다. 아직도 바르르 떠는 가지를 들고 한 달 전의 춘천으로 달려갔다.

나보다 먼저 이 세상에 나오신 형님들과 김유정문학촌의 금병산 오르는 길. 산은 그야말로 소설가의 뒷배를 담당한 듯 오솔길이 호젓했다. 어두웠던 시대를 감당해야 했던 김유정의 그 많은 고민과 문장을 받아준 산책길. 바닥에 박힌 바위들이 닿소리라면 지나가는 바람결은 홀소리라고 해둘까. 

금병산 길바닥에 신갈나무 가지가 떨어져 있다. 가지와 접했던 부위를 보면 누군가 예리하게 칼로 자른 듯 매끈했다. 이는 도토리가 달리는 참나무를 괴롭히는 도토리거위벌레의 소행이다. 녀석은 신갈나무 열매에 알을 낳고, 주둥이로 가지를 잘라 밑으로 떨어뜨린다. 충격을 완화하려고 프로펠러처럼 잎을 몇 개 매단 채. 그냥 자연스럽게 무위하게 부러진 게 아니다.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는 거리에서 생각을 더 달려본다. 훤칠한 나무일수록 태풍은 더 집요하게 덤벼드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백두대간에서 가장 많은 나무는 신갈나무라고 한다. 나무는 나무, 사람은 사람이겠지만 결국은 하나로 반죽이 된다. 우리는 이 산들을 등뼈로 삼아 각각 살아가는 중이다. 

우리는 누구일까. 무용한 질문이지만 안 할 수도 없는 물음이다. 어쩌면 신갈나무가 그에 대한 답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이굴기 궁리출판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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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2일 고려대에서 열린 삼성 이건희 회장 명예철학박사 수여식은 아수라장이었다. 학생들이 식장을 에워싸고 반대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게 진행됐다. 파장은 컸다. 다음날 고려대 총장이 사과했고, 청와대까지 나서서 유감을 표시했다. 대학과 시민단체에서는 ‘명예박사 논쟁’이 불붙었다. 고려대는 이 회장에 대한 명예박사 수여의 근거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신경영과 사회공헌활동’ 등을 들었다. 그러나 반대 측은 ‘고려대 100주년기념관 건립비(418억원) 기부’의 대가라며 자본의 대학 영향력 확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했다.

명예박사는 교육부에서 인가하는 정식 학위가 아니다. 말 그대로 ‘명예’로 주는 학위다.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47조에는 ‘학술 발전에 특별한 공헌을 했거나, 인류문화 향상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한다’고 나와 있다.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 김수환 추기경 등 취지에 부합하는 명예박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엄격한 기준이나 잣대가 없다보니 대학들이 학위를 남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사립대 명예박사 학위가 정·재계의 실력자들에게 돌아가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가령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국내 대학에서 받은 명예박사 학위는 7개나 된다.

동양대 최성해 총장의 박사 학위가 진위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주 국회 청문회 전까지 최 총장은 교육학 박사로 알려졌다. 최 총장은 그동안 학교 공식문서뿐 아니라 포털사이트, 언론인터뷰에서도 ‘워싱턴침례신학대 교육학 박사’라고 밝혀왔다. 그러나 청문회에서 박사 학위 의혹이 제기되자 ‘교육학 박사’ 이력을 지웠다. 네이버 인물정보에서 최 총장의 학력은 ‘박사’에서 ‘명예박사’로 수정됐다.

최성해 총장의 박사 학위 보유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사립대 총장은 박사 학위가 없어도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허위 사실을 내세우며 총장으로, 교육자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앞서 최 총장은 ‘교육자의 양심’을 얘기하면서 조국 법무장관의 딸이 받은 동양대 표창장의 조작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 쏟아지는 ‘학력위조’ 의혹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최 총장은 이 의혹부터 해명해야 한다. 그것이 명예박사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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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오고 있다는데도 길을 나선 건 순전히 무기력 때문이었다. 특별히 심란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맥이 툭 풀린 상태로 며칠이 흘렀고, 머릿속에서 위험신호가 울렸고, 몸을 밀어서 심장과 머리를 움직이라는 한 시인의 말이 떠올랐고, 불현듯 일어나 집을 나서게 된 것이었다. 무기력을 털어내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 태풍은 제주를 지나 목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북진 중이라고 했다.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바깥의 바람은 수상함을 넘어 노골적인 경고를 뿜어내고 있었다. 도적떼처럼 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시커먼 구름들하며, 날아다니고 넘어지고 부러지는 온갖 움직임들이 제법 심란하고 꽤나 위험하게 느껴졌다. 정처 없이 행복, 번영, 진흥의 이름이 붙은 길을 걷다가 도착한 곳은 재래시장이었다. 

시장은 추석 대목을 앞둔 주말임을 감안하면 한산한 편이었다. 푸덕거리는 천막을 옭아매고 입간판이나 설치물들을 들여놓는 손길이 분주했다. 그 와중에 고구마줄거리 껍질을 벗기고 있는 노인의 손놀림에는 서두름이 없었다. 그 일은 조급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법이다. 빈 소쿠리를 흘끔거리며 안달한다고 능률이 오를 수 없는, 손과 손톱이 저절로 움직이게 두면 어느 결엔가 채워진 소쿠리를 발견하게 되는, 무념무상이 최고 기술인 그런 종류의 일이다. 태풍이 오고 있는데 고구마줄거리 껍질 벗기기라니. 나는 어쩌면 그걸 보기 위해 길을 나섰는지도 몰랐다. 시장 할머니들 손끝에서 하염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 그리하여 채워진 한 소쿠리의 보드라운 고구마줄거리나 말끔히 다듬어진 쪽파나 부추 같은 것들. 그리고 어쩌면 나 또한 그럴 만한 거리를 찾아내 무념무상의 기술을 발휘하길 원했는지도. 그리하여 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콩나물 가게였다. 한 소쿠리 사서 대가리와 잔뿌리를 제거하리라. 말끔하게, 하염없이. 

그런데 문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콩나물을 얼마나 달라고 해야 하나. 천원? 이천원? 오천원? 일단 콩나물 가격이 얼마인지를 몰랐고, 얼마치를 사야 노동의 정도에 이르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시장에 와서 콩나물을 산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콩나물을 구입한 것은, 포장지에 포장되어 나오는 제품으로, 그것도 인터넷 클릭 몇 번에 새벽에 배송까지 받는 방식이었으니. 그게 대략 얼마쯤 됐더라? 

식당을 하는 동안에는 거의 매일 시장에 갔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시장에 가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무엇이 제철을 맞아 기름이 돌고 살이 올랐는지. 올해 양파나 배추의 작황이 어땠는지. 폭염이나 장마가 올해 상추와 깻잎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서해의 꽃게나 갑오징어의 어획량이 어떻게 줄어가고 있는지. 모든 척도는 가격이었다. 시장가격은 요식업에 아주 민감한 사항이었다. 피부에 와 닿는 정도가 아니라 폐부를 찌르는 정도의 체감. 어제의 가격과 오늘의 가격, 여름의 가격과 겨울의 가격. 그러고 보니 오뉴월 바지락도 지나가고 여름 무화과가 끝물에 이른 것도 모르고 지나왔구나. 어쩐지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순간. 아무리 시장에서 멀어졌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콩나물 가격을 몰라? 이래저래 복잡한 머리를 굴려, 나름 정교한 계산을 거친 뒤, 콩나물을 청했다. 

콩나물 이천원어치가 그렇게 많을 줄 미처 몰랐다. 주인아주머니가 담고 또 담고 마지막으로 꾹꾹 눌러 담은 콩나물은 20ℓ쯤 되는 커다란 봉지를 채우고 넘쳐서, 내게 건네주는 사이 벌써 콩나물 몇 줄기가 봉지를 비어져 나올 정도였다. ‘콩나물 가격이라도 아껴서’라는 말이 실감나는 양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통용되었던 그 말이 여전히 유효한 것도 놀라웠고, 기껏해야 콩나물인데 손가락에 자국이 생길 정도로 무거운 것도 놀라웠다. 뜬금없이 만원버스와 콩나물시루 같은 단어들이 생각나면서, 이걸 언제 다 다듬고 언제 다 먹나,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천원어치의 거대한 콩나물 봉지를 받아들고 시장을 빠져나왔을 때, 바람은 조금 더 신경질적이 되어 있었다. 태풍의 도착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집으로 곧장 돌아가야 했으나, 발걸음은 집을 지나쳐 등산로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그곳 음식점에 콩나물을 배달하러 가는 사람처럼, 하기 싫은 일감을 피해 도망친 사람처럼. 이윽고 도착한 등산로 입구는 이미 부러진 나뭇가지들로 어지러웠고, 나무들은 온몸을 비틀며 태풍과 맞서거니 물러서거니 하고 있었다. 굴참나무 아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자리에서 태풍을 맞으리라 마음먹었다. 숲의 나무들이 그러는 것처럼 태풍을 온몸으로 통과하고 나면, 무력의 잔가지들을 다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곧 자리를 떠야만 했다. 우박처럼 떨어지는 도토리 때문에. 툭 부러져 어깨를 내리친 굵은 나뭇가지 때문에. 갑자기 굵어진 빗방울 때문에. 콩나물 봉지를 머리에 인 채 집을 향해 냅다 뛰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 많던 콩나물은 반쯤 남아 있었다. 태풍을 통과하겠다더니, 빗방울 좀 피해보겠다고. 결국 그날 나는 문단속을 단단히 한 다음, 창으로 태풍의 기세를 훔쳐보며, 반으로 줄인 무념무상의 노동을 수행했다. 나머지 반은 태풍의 몫이었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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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 때문에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돼 대물림될 가능성이 큰 만큼 심각한 범죄이다. 자녀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남겨주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가정폭력이 명백한 범죄임을 인식하고, 가족들이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서로 대화하고 존중해야 한다. 이를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9년 6월까지 약 19만건의 가정폭력 사건이 발생해 검거 인원이 21만5000명에 달했다. 피해자의 75%가 여성이었다고 한다. 또 가정폭력 가해 경험이 있는 응답자 중 52.8%는 본인이 아동기와 성인기 모두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아동일 때 학대를 당한 경험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정폭력 가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주로 여성, 노인 등 약자들이며 가정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더 큰 상처가 되므로 많은 관심과 보호가 필요하다. 그래서 경찰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치유해 다시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피해자 보호 지원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임시숙소 및 치료비, 심리적·법률적 지원을 하고 있다. 여성 긴급전화(1366), 해바라기센터, 이주여성의 경우 다누리콜센터(1577-1366) 등 관계기관과 연계해 심리적 안정을 도와주고 있으며, 신변 보호 요청 시 스마트워치 제공, 대한법률구조공단 등의 각종 법률서비스 지원을 하고 있다. 가정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중대한 범죄행위이다.

<강원 삼척경찰서 미로파출소 경위 박왕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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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절대적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지금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국 사태’를 지켜보면서 1970년대 반독재 투쟁 당시 유행했던 영국의 역사학자이며 정치인인 액턴경의 말이 떠오른다.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선 반드시 권력이 필요하다. 정치적 권력은 근본적으로 국민을 위한 권력이다. 그렇지만 권력이 국민의 삶을 책임지기보다는 정권의 유지와 확대를 위해 오용될 때, 권력은 부패하기 시작한다.

모든 정치적 개혁은 부패한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시작한다. 기득권 세력은 이미 갖고 있는 제도적 특권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익을 보존하고 확대하는 특권층이다. 기득권 세력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함으로써 지배하고, 지배적 가치를 독점한다. 우리 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교육과 학력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기득권 세력이고, 교육기회를 독점하는 것도 기득권 세력이다. 현대사회에서 기득권의 가장 커다란 무기는 물론 법과 제도이다. 규칙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은 현상(status quo)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기득권의 보루일 수밖에 없다.

기득권이 법 준수를 강요한다면, 이에 저항하여 사회의 기본 질서를 바꾸려는 운동권은 항상 도덕성을 강조한다. 기득권이 썩고 부당하고 부도덕하다면, 운동권은 순수하고 정의롭고 도덕적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일궈낸 굴곡진 현대사를 거치면서 이런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우리의 의식에 스며들었다.

지난 세월 산업화에 매진했던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부도덕한 기득권 세력으로 매도당하고,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은 도덕성의 프리미엄을 얻기 시작했다. 여기서 강한 의문이 든다. 민주화 세력은 정말 도덕적인가? 운동권은 부패하지 않는가?

나라를 온통 어지럽히고 있는 ‘조국 사태’는 이 물음에 분명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도덕적이라고 여겨진 운동권도 도덕성을 단지 정권 획득과 유지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입으로는 교육 평등을 외치면서 자신의 아들딸들은 특목고에 보내고, 앞으로는 잘못된 경제현실을 비판하면서 뒤로는 이권을 챙기는 표리부동한 행태는 오히려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이기심으로 돌릴 수 있다.

문제는 386운동권이 이미 586기득권이 되어 편법과 위법을 넘나들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도 여전히 도덕성을 부르짖고 있는 이중성이다. 이미 가진 자신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활용하여 특권과 특혜를 호혜적으로 누리는 ‘그들만의 리그’가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586기득권 세력이다.

기득권에는 좌우가 없다. ‘조국 사태’는 ‘좌파 기득권’의 진짜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첫째, 기득권 세력은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합법성’을 강조한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각종 의혹에 대해 시종일관 ‘불법은 없다’고 강조하지만, 합법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당한 것은 아니다. 정당성은 시민의 자발적 동의에 근거한다. 겉으론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끼리만 호혜적으로 주고받는 입시 특혜의 품앗이가 아무리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정당성은 없는 것이다. 법조차도 국민의 정의감과 정당성에 부합하지 않으면 바뀌기 마련이다. 법무와 검찰의 개혁이 자신의 책무이며 소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당성 없는 합법성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둘째, 기득권 세력은 항상 진보적 사상가 마르크스의 말처럼 자신의 이익을 전체의 이익으로 위장한다. 일반적으로 기득권은 항상 소수의 권력 엘리트로 대변되고, 운동권은 국민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여 기득권과 투쟁한다. 운동권은 약자와 피지배자의 편에서 강자와 지배자에 대항하여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정치 질서를 실현하려고 한다. 투쟁의 대상이 명확하고 누가 보더라도 사악할 때, 운동권은 투쟁 자체만으로도 정당성과 도덕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운동권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는 헷갈리게 된다. 자신들이 이미 기득권인데도 마치 아닌 척하면서 여전히 도덕성을 내세운다. 자신들이 하는 것은 모두 국민 전체를 위한 것이고, 따라서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생각에 빠진다. ‘조국 사태’는 운동권은 절대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무오류성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환상인지를 폭로한다.

셋째, 좌파 기득권은 도덕을 수단화함으로써 도덕을 궁극적으로 타락시킨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정치적 집단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지만 조국을 포함하여 그를 지키려는 운동권 진영은 국민이 왜 분노하고 허탈해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 도덕성은 모든 사람이 같은 의견일 때 타락한다고 한다.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세력은 도덕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

운동권이 도덕성을 상실하면 반드시 부패한다. 도덕성을 수단으로 기득권이 된 운동권이 더 이상 도덕적이지 않으면서도 도덕적인 것처럼 행세하는 도덕적 도착(倒錯) 현상을 앞으로는 ‘조국 증후군’으로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도덕성을 상실한 진보는 진부하다.

<이진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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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입술을 빠져나온

동그라미 담배 연기처럼

뜨거운 목구멍 문양으로

쓰라린 목젖 문양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한 코 한 코 엮어

태피스트리를 짠 사람이 있다


호시탐탐 달아나는 바람의 코를 꿰어

벽에 걸어놓고야 말겠다고


핏빛 노을 번져드는 사막에

웅크리고 앉아 컵라면을 먹던 사람

그가 놓친 건 무엇이었을까


셀 수 없는 정지화면이

모여 한 생애가 되고


한 번 멈춰두고 영원히 잊어버린

영화의 한 컷처럼 나는

지직거린다


한 코만 놓치면

주르륵 풀어져버리는

마음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정채원(1951~)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태피스트리는 여러 가지의 색실로 그림을 짜서 넣은 직물을 뜻한다고 한다. 한 코 한 코를 서로 끼워서 뜨개 옷이 되듯이 하나하나의 색실을 엮어서 면직물이나 모직물 등을 만드는 것일 테다. 

시인은 우리의 생애도 씨실 혹은 날실과 같은 수많은 정지화면이 모인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경우라면 한 장면의 사진, 즉 스틸이 모이고 모여서 영화의 필름을 완성하듯이. 

그러나 우리의 삶의 시간은 연기와 같고, 한줄기의 바람과도 같아서 이내 뿔뿔이 흩어지고 잊히기 쉽다. 우리의 마음 또한 코와도 같은 하나의 실마리에 의해 풀어져버리기 쉽다. 

물론 가뭇없이 사라지는 시간들 속에 강렬한 기억의 한 순간이 있다. 한 번 세차게 쏟아진 소나기와도 같은 정지화면의 시간이 있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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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유튜브에서 재미난 동영상 한 편을 봤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아주 먼 옛날 거북이와 토끼는 누가 더 빠른지 시합을 했고 한참을 앞서간 토끼가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는 사이, 꾸준히 기어간 거북이가 결국 이겼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동영상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경주에서 진 토끼는 너무 속상한 나머지 거북이와 다시 달리기 시합을 한다. 자만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토끼는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달려 거북이를 큰 차이로 이긴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도저히 토끼를 이길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거북이는 경주장소를 바꿔 달리기 시합을 제안한다. 토끼는 최선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결승점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넓은 강 앞에서 멈춰 선 동안, 거북이는 여유 있게 헤엄쳐 건너 결승점에 도착한다. 

몇 차례 달리기 시합을 한 토끼와 거북이는 꽤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고 둘은 함께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이번엔 토끼와 거북이가 한 팀이 되어 마지막 달리기를 하기로 한다. 둘은 출발했고 강에 도착하기 전까지 토끼가 거북이를 업고 달린다. 강에선 거북이가 토끼를 등에 태우고 건넌다. 강 건너편에선 다시 토끼가 거북이를 업고 달려 함께 결승점에 도착하면서 이 서사가 끝난다. 토끼와 거북이 둘 다, 전에 느꼈던 것보다 더 큰 만족을 느낀다. 경쟁과 갈등 상황에서 천천히 꾸준히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고, 신속하고 일관되게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경 변화에 맞게 협력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각자의 제한된 역량만으로 평균 이하의 성과에 머물 수도 있고, 협력하여 공동의 목표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최근 서울시가 추진하는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갈등 소재로 다시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행정안전부는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이 이해관계자를 포함한 시민의 폭넓은 이해와 대표성 있는 시민단체 및 전문가들의 참여 속에 추진되어야 하고, 월대 발굴조사를 위한 임시우회도로 설치 등 전반적인 공사에 대한 인근 주민들의 이해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공감대를 확보한 후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서울시는 시민 의견수렴을 이미 충분히 거쳤고, 올 초에 청와대 주관으로 공식회의를 거쳐 큰 틀의 합의를 봤으며, 최근까지도 수차례 실무협의를 통해 광화문광장 앞에 있는 정부서울청사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대부분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는 입장이다. 

두 기관 모두 광화문광장이 더 좋은 시민의 광장으로 재탄생해야 한다는 목표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입장에 시민들의 의견이 얼마나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는 구체적인 데이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주장하는 내용과 다른 여론이 확인되면, 입장을 굽혀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수 있다. 정작 시민들은 광화문 재구조화 사업이 무엇이고 어떻게 바꾸겠다는 것인지, 왜 두 기관이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인지 모를 수 있다. 광화문광장은 2017년 촛불혁명이 일어난 곳이고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복원되어야 할 광장이다.

더 늦기 전에 광화문광장 재구조화를 위해 시민이 주인이 되어 토론하고 숙의하는 공론의 장이 열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서울시와 행안부가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공론화위원회를 공동으로 구성하고, 일반 시민들과 광화문광장 인근 상인들에 대한 광범위한 사전조사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하여 공론화를 추진하면, 두 기관의 서로 다른 입장보다는 시민들의 생각이 우선 반영된 사업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공론화는 좀 더 개선된 여론을 확인하고 보다 개선된 대안을 찾을 수 있는 협의와 협력의 민주주의다. 토끼와 거북이의 새로운 이야기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최정묵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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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영웅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일개 사병인 테르시스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호메로스가 하찮은 지위의 인물을 자세하게 다룬 것은 테르시스가 유일하다. 그는 ‘짧고 휘어진 다리’ ‘안으로 굽은 어깨’ 등 혐오감을 주는 외양에다, 음란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트로이전쟁에 참전해 아가멤논을 욕심쟁이, 아킬레우스를 겁쟁이라고 해 오디세우스의 분노를 샀다. 그리고 아마존족의 여왕 펜테실레이아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하는 아킬레우스에게 시체를 사랑한다고 조롱했다. 그는 남들이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의견을 내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서구에서 테르시스는 반(反)영웅의 전형으로 다뤄진다.

영웅담은 대부분 이상적인 인물의 이야기다. 영웅들은 공동체의 운명을 어깨에 지고 세상을 구원한다. 이들은 이상주의와 도덕, 용기로 무장돼 있다. 명예와 영광을 위해 싸운다. 반대편에 반영웅이 있다. 이들은 때에 따라 도덕적인 선택을 할 뿐이다. 이들은 개인의 사적인 이익에 따라 행동하며 전통적인 윤리를 부정한다. 

반영웅의 이야기는 고전 그리스의 연극이나 로마의 풍자, 그리고 문학, 영화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는 대표적인 반영웅 영화 가운데 하나다. 영화는 베트남전 퇴역군인의 모습을 통해 1970년대 미국의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택시운전을 하며 뉴욕 밤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거리의 쓰레기’로 생각한다. 무기력과 망상에 빠져 살던 그는 거리의 소녀를 구하겠다고 나선다. 그는 포주를 죽이며 의도치 않게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살인자에 가깝다. 

7일(현지시간) 열린 제76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가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배트맨의 숙적인 조커가 주인공이다. 영화는 코미디언으로 살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멸시로 좌절한 주인공을 다루고 있다. 조커가 외톨이에서 악당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담은 반영웅물이다.

영웅담은 꿈과 희망을 준다. 하지만 현실은 반영웅담에 가깝다. 베니스가 &lt;조커&gt;를 수상작으로 택한 것은 꿈속의 세상이 아닌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을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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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임명 여부를 놓고 막판 숙고 중이라고 한다. 논란이 컸던 만큼 청문회를 지켜본 시민의 판단과 각계의 여론을 면밀히 수렴해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기대한다. 

조 후보자 임명 여부에 상관없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검찰의 행태다. 첫째, 검찰은 조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끝나기 직전인 지난 6일 밤 후보자의 부인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를 사문서위조 혐의로 기소했다. 조 후보자 딸이 동양대 총장 표창장을 받은 시점이 2012년 9월7일이고, 6일 밤 12시에 공소시효(7년)가 만료되기 때문에 기소가 불가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부산대 의전원 입학원서에 제출한 시점은 2014년 6월(공소시효 7년)이다. 사문서위조 혐의 공소시효가 끝나더라도 위조사문서 행사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 양형엔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검찰은 당사자 조사 한번 하지 않고 서둘러 기소했다. 검찰의 기소는 조 후보자에 대한 여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설령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고도의 정치적 행위를 한 셈이다. 

둘째, 여권에서 ‘검찰권 남용’이란 비난이 나오자, 이를 반박하는 검찰발 보도가 나온 것도 석연치 않다. 7일 밤 SBS 뉴스는 “검찰은 정 교수의 업무용 PC에서 동양대 총장의 직인이 파일 형태로 저장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이 업무용 PC는 검찰이 임의제출받아 분석 중인 것으로, 검찰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용이다. 공교롭게도 이런 수사기밀이 기소 다음날 언론에 흘러나온 건 검찰이 구시대적 언론플레이를 한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정 교수는 “동양대 어학교육원장 등 부서장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원들로부터 여러 파일을 받았기 때문에 그중 일부가 PC에 저장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라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누구 주장이 맞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당사자의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고, 다른 관계자의 진술과 객관적 증거로 혐의 유무를 신중히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압수수색 3일 만에 이뤄진 기소는 과연 충분한 수사를 마치고 내린 결정인지 의문이다. 이 밖에도 검찰 아니면 볼 수 없는 자료들이 청문회상에서 돌고, 야당 의원들의 공세에 활용된 것도 사실관계를 밝혀야 할 대목이다.  

검찰의 조 후보자에 대한 수사는 시기, 범위, 방법 등 거의 모든 부분이 통상의 관례에서 벗어나 진행되고 있다. 정치권의 검증에 앞서 수사에 착수한 것부터 검찰이 대신 검증해주겠다고 나선 것과 같다. 이런 검찰에 대해 뭐라 지적하면 ‘수사 개입’이라고 반발한다. 그러면 도대체 검찰은 누구의 견제를 받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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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추석 택배 물량 배달을 마치고 우체국으로 돌아가던 충남 아산우체국 집배원 ㄱ씨(57)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ㄱ씨는 평소보다 4배나 많아진 추석 택배 물량을 처리하느라 일몰을 넘겨서야 일을 마칠 수 있었다. ㄱ씨의 교통사고는 업무량 과다에 따른 신체적·정신적 부담이 초래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집배원 사망은 올해만 벌써 12명째다.

집배원은 고위험직군이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66명이 사망했다. 10년간 매달 한두 명꼴이다. 원인은 암, 교통사고, 자살 등 다양하지만 노동환경과 무관치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집배원의 산업재해율이 소방관보다 높다는 통계도 있다. 이처럼 재해율이 높고 죽음이 계속되는 것은 집배원들이 장시간·고강도 노동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집배원 노동조건개선 기획추진단’(기획추진단)의 조사에 따르면 집배원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745시간으로 국내 임금노동자의 2052시간보다 34%나 많다. 게다가 집배원들은 명절 등 연휴기간에는 ‘특별소통 기간’이라는 이름으로 연장근무에 들어간다. ㄱ씨 역시 숨진 당일 ‘우편물 특별소통 종합계획’에 따라 ‘일몰 후 집배 금지’ 규정을 어기고 늦은 시간까지 배달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집배원 죽음의 행렬을 막기 위해서는 살인적인 노동환경을 바꿔나가는 것이 시급하다. 지난해 9월 기획추진단은 집배원 2000명 증원과 토요일 근무 폐지 등 7가지 방안을 정부에 건의했다. 그러나 인력만 부분적으로 증원되고 토요 근무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집배원들은 지난 7월 사상 초유의 총파업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다행히 파업은 예정일을 하루 앞두고 노사가 합의안을 도출함으로써 철회됐지만, 집배원들의 요구가 실현될 때까지는 갈 길이 멀다. 

집배원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증원이 필수적이다. 노사가 합의한 위탁택배원 750명 증원은 신속히 이행돼야 한다. 또 집배원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토요 근무 폐지는 필수적이다. 정부는 예산상의 이유로 노동조건 개선에 미적대고 있다. 그러나 우정사업본부는 우체국예금 사업으로 매년 수천억원의 이익을 내고 있다. 이를 국고로 돌리지 않고 집배원 처우와 복지에 사용하면 된다. 우편사업을 영리 차원이 아닌 국민 편익 제고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우편·택배 업무를 시장논리로 바라보는 한 집배원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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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올해 5번째 1000만 관객 돌파 여부가 관심일 만큼 흥행 중인 재난영화 <엑시트>의 주인공은 청년백수 용남이다. 용남 엄마의 칠순 잔치가 배경인데, 큰누나는 장손(長孫)이 취업 못한 백수라고 집안 어른들께 얘기해야 하는 상황을 답답해한다. 결혼한 누나들이 있지만 막내아들 용남이가 장손으로 나온다. 재난상황에서 가족을 구해 내는 백수의 반전 활약상이 인기 포인트다. 2년 전 개봉한 한국 영화 <부라더>에도 장손이 나온다. “난 꿈이 고아였어”라고 말할 만큼 종갓집 장손이라는 짐이 싫어 가출했던 주인공이 아버지 장례식에 집에 오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되는데, 영화 내내 동화 같은 비현실적인 종갓집 풍경이 연출된다. 장손이라고 말하면 이처럼 으레 대가족 속 남성이 떠오른다. 그런데 장손을 사전에서 찾으면 ‘한집안에서 맏이가 되는 후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성별의 의미는 특별히 담겨 있지 않다.

영화 '엑시트'의 한 장면. CJ ENM 제공

최근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장손 취업지원 때 기준으로 삼았던 장손의 기준을 남녀구분 없이 ‘첫째 자녀의 첫째 자녀’로 내부 지침을 바꿨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3월 “성 평등에 맞도록 지침을 바꾸라”고 권고한 것을 보훈처가 수용한 것이다. 아버지의 외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ㄱ씨가 보훈처에 취업지원 신청을 했지만, ㄱ씨의 아버지가 ‘장손’이 아니라는 이유로 혜택받을 수 없다고 답변하자 인권위에 진정한 것이 발단이 됐다. 지난 4일에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맹성규 의원이 ‘장손’을 ‘장남의 장남’으로만 해석하지 않도록 ‘맏이’로 변경하는 내용의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3월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취업지원 대상자 자료를 보면, 지정권자(장손) 228명 중 남성은 222명(97%)인데, 여성은 6명(3%)뿐이다.

부계혈통 중심의 호주제가 ‘위헌적·반인권적’이라는 이유로 폐지된 지 14년째이지만, 이처럼 일상 곳곳엔 불합리한 호주제의 잔재들이 스며 있다. 외둥이들이 많아지면서 딸·아들 할 것 없이 ‘모두가 장손’인 시대가 됐다. 권리와 책임을 함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법과 제도, 일상, 관습 속에서 남녀의 ‘뉴노멀’(새로운 표준)을 찾아가야 한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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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싸고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어떤 이들은 그가 한때 대한민국의 체제전복을 꾀했던 사노맹 소속으로 활동했다는 점을 들어 빨간색을 덧칠한다. 또 어떤 이들은 진보주의자가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십억원대의 자산가가 될 수 있었냐며 냉소를 퍼붓는다. 다른 이들은 그의 딸이 온갖 편법으로 스펙을 쌓아 명문 대학에 입학한 것 아니냐며 분노한다. 앞의 둘은 별 관심이 안 갔지만, 마지막 문제는 달랐다. 한국 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스펙에 빠져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가시적 징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하루 앞둔 5일 오후 국회에서 방송사 관계자들이 중계 준비를 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2007년 당시 고교 1학년이던 조국 후보자의 딸은 한 의과대학 연구소에서 2주간 인턴 활동을 한 후 국내에서 발행하는 SCI 학술지에 제1저자로 영어 논문을 실었다. 일반인들은 SCI가 무엇이고 그것이 한국 과학계에서 어떤 지위를 누리고 있는지 짐작조차 어려울 것이다. SCI는 Science Citation Index의 약자로 과학자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과학 논문을 한군데 모아놓은 데이터베이스다. 원래 1960년대 미국의 민간 과학정보연구원이 세워 운영하다가 현재는 거대 글로벌 기업이 도맡아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있다.

한국 학계에서 SCI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세계화 바람이 거세게 불 때부터다. 이전까지 한국 학계는 일종의 동호인 소모임과 비슷해서 아는 사람끼리 학술지를 만들어 서로 논문을 실었다. 심사가 제대로 이뤄질 리 없고 안면과 인맥으로 논문의 운명이 결정되곤 했다. 이러한 부끄러운 관행은 교육 당국이 SCI 학술지에 영어 논문을 쓰라고 압박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학이 아무리 중립성과 객관성을 내세우고 있다지만 외국 학술지에 영어 논문을 싣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과학계는 앞다투어 국내 학술지를 SCI 학술지로 바꿔치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 과학계는 나름 SCI 학술지를 여럿 거느리게 되었다. 굳이 외국 SCI 학술지에 기를 쓰고 논문을 투고해야 할 필요가 줄어들었다. 국내 SCI 학술지에 논문을 많이 싣게 되니 교육 당국이 그토록 원하는 세계화 지수가 가파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기 국내 SCI 학술지에 조국 후보자 딸의 영어 논문이 실렸다. 영어 번역에 힘쓴 것이 고마워 연구책임자가 호의로 제1저자에 넣어준 것이라 한다. SCI 학술지가 과학자와 고등학생이 스펙용 성과를 서로 주고받는 호혜성의 장으로 돌변한 것이다. SCI 논문이 취업, 승진, 연구비 확보를 위한 스펙용으로 위력이 있다는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대학입시에도 효용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스펙 사회! 자연과학의 SCI를 본떠 사회과학에는 SSCI(Social Science Citation Index), 인문학에는 A&HCI(Arts and Humanities Citation Index)가 있다. 세계화 바람을 등에 업은 교육 당국은 글로벌 사기업이 만든 지표를 토대로 대학의 세계화 정도를 재고 차등 지원해 왔다. 등록금 동결로 한 푼이 아쉬운 대학은 더 많은 재정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SSCI와 A&HCI 학술지에 영어 논문을 실은 학자를 우대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존 학자는 물론 학문 후속세대마저도 독창적인 문제를 제기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스펙용 논문을 싣는 ‘방법’ 터득에 몰두하게 되었다.

적폐청산을 외치며 출발한 문재인 정부는 다른 건 몰라도 학계에서 일어난 세계화 적폐에는 손도 못 대고 있다. 그러는 사이 학술지가 연구자는 물론 가족과 지인의 스펙을 쌓는 장으로 오염되고 있다. 연구자의 윤리 결핍도 문제지만, 외국 지표를 무기로 단기 성과를 내라고 윽박지르는 정책도 그에 못지않다. 정작 외국 학계에서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지표를 맹종하는 정책을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당장 폐기하기 어렵다면, 교육 당국이 국민 세금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KCI(Korea Citation Index)에서 제대로 된 지표라도 만들자. ‘소위’ 전문가집단의 스펙 쌓는 데에만 도움이 되는 학술지 대신 우리 삶의 문제에 대해 우리 언어로 새로운 연구 질문을 던져 토론과 논쟁의 장을 만들어나가는 학술지를 우대하라!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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