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걱정 없는 사람 없습니다. 먹고살 걱정에 자식 걱정, 학비 걱정, 진로 걱정, 할 일 산더미라 걱정, 다들 한두 가지씩 매일 걱정과 함께 살아갑니다. 

하지만 때로는 엄청난 걱정이라 잠도 안 오고 밥맛 잃고 일이 손에 안 잡힐 때도 있습니다. 퀭한 눈에 푸석한 얼굴, 초조한 태도로 그저 노심초사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와하하 개그맨이 웃겨도 멍하니 딴생각이고, 산해진미 앞에 두고 젓가락 쥔 손이 식탁 아래로 맥없이 떨어집니다.

지나친 걱정은 해롭기만 하다는 속담 ‘걱정이 반찬이면 상발이 무너진다’가 있습니다. 

걱정이 태산이면 나오는 한숨을 어쩔 수 없죠. 밥 한 술 떠먹고 반찬 집으려다 젓가락 탁 휴~, 국물로 밥 삼키고 또 젓가락 들려다 어깨 축 휴~ 나중에는 무엇 때문에 걱정인지조차 잊은 채 기분의 수렁 속에서 허우적댑니다. 속 시원히 털어놔주면 좋으련만, 구들장 꺼져라 혼자 한숨만 쉬고 있으니 바라보는 사람도 한숨 나옵니다. 

“상 꺼지겠다….” 그만 젓가락 들고 걱정을 내려놓으라 팔 추켜주지만, 젓가락 끝은 여전히 반찬 위를 서성입니다. 상판 꺼지고 상다리 무너지도록 한숨만 쌓이지요. 끼니 거르고 불면의 밤을 보낸들 한숨으로 무엇 하나 바뀔 리 있을까요? 

지나친 걱정은 지능을 원숭이 수준까지 떨어트린다고 합니다. 근심과 불안에 잡아먹히면 걱정이 걱정이고, 해결의 실마리 어른거린들 눈앞 캄캄해 못 보고 못 잡아냅니다. 

종이 한가운데 ‘걱정’이라고 쓰고 동그라미 치십시오. 옆으로 가지 뻗고 ‘왜?’라고 쓰고 또 동그라미로 마감합니다. ‘… 때문에’ ‘도와줄 사람은?’ ‘어디서 구하지?’ 떠오르는 대로 마구 곁가지 뻗어봅니다. 

밥상 책상 앞에서 한숨 쉬면 복 나가고 답 없습니다. 엉클어진 머릿속 대신 한눈에 보이도록 종이 위로 생각 한 상 쭉 차려봅시다. 한숨 대신 생각 나와야 답이든 뭐든 나오지 않을까요?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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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 멱살 잡힌 사람의 몸. 아무리 고급한 생각을 한다 해도 밥 한 톨 삼키지 못한다면 그것을 건사하기가 난망이다. 기생(寄生)이란 말을 굳이 해야 하랴. 항산이라야 항심이라고 했다. 삼시세끼. 이보다도 더 일상을 좌우하는 게 달리 없으니 몸의 안팎이 다 같다. 오죽했으면 삼식이, 라는 참으로 모멸스러운 별명이 등장했을까. 

어디에서 오는지 도무지 그 정체를 모르겠는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배꼽시계가 뻐꾸기처럼 울었다. 또 도래한 점심. 이번 끼니는 출판도시 내 옥호도 사뭇 다정스러운 ‘곰씨부엌’으로 정했다. 곰처럼 우직한 분들이 묵직한 국물을 끓여낼 것만 같은 식당.

좋은 식당은 배고픈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이내 가슴살을 잘게 저민 닭곰탕이 나오고 숟가락을 집었다. 첫술이 들어가고 들척한 국물이 목울대를 휘젓고 내려갈 때, 옛날 생각이 거슬러 올라왔다. 참새 새끼처럼 짹짹거리는 여섯 개의 입을 달래느라, 그 간단없는 삼시세끼를 감당하느라 고단했을 어머니 생각이 났다. 이윽고 허기가 다스려지고, 국물이 바닥을 보일 무렵, 숟가락을 그릇에 걸쳐놓는 여유도 찾았다. 그렇게 천천히 음식을 씹으면서 자연스럽게 바깥의 풍경을 내다보다가 아, 퍼뜩 알게 되었다. 

‘곰씨부엌’ 앞마당의 울울한 나무. 6월의 푸르른 신록이 도드라지는 벚나무들. 그들이 식당을 환히 쳐다보고 있지 않겠는가. 통유리창 바깥은 생생한 현실이다. 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닿은 나무들이 흔들리고, 그 흔들리는 나무에 잎사귀가 춤을 추는 곳이었다. 나처럼 빈틈없는 몸을 가진 나무들을 보다가 새삼스럽게 알아차렸다. 나무들도 식사 중! 이 환한 햇빛 아래로 소풍 나온 듯! 

입안이 씰룩거릴 때마다 정확하게 리듬을 맞추며 흔들리는 벚나무 가지들의 동작. 목구멍 너머로 꿀떡 삼킬 때면 더 크게 끄떡이는 잎사귀들의 움직임. 그것은 나의 저작운동과 때맞추어 궁합을 맞추는 나무들의 식사법이 아니겠는가. 뭐, 그런 생각도 해보면서 벚나무 옆에서 벚나무와 함께 또 한 끼니를 때운 하루. 벚나무. 장미과의 낙엽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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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없는 전공 2위’라는 말을 들었을 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공이 2위라는 표현은 전공 성적이 2위라는 말인가? 2등이나 했는데 의미가 없다고?’ 등과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검색을 해보고 나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미국의 한 언론이 가장 ‘쓸모없는 전공 10위’를 소개하고 있었다. 인류학 및 고고학, 영화·비디오 및 사진, 미술, 철학 및 종교, 음악, 체육, 역사, 영어영문 등이 불명예를 안았다. 실업률이 높고 연봉이 낮다는 이유였다. 반면에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은 전공은 경영학, 컴퓨터 및 정보과학, 공학, 의학, 수학 및 통계학 등이었다. 이학, 인문학, 문예의 토대 위에 실용과학이 의미가 있다는 건 좀 살아보면 깨달을 수 있는 상식이다. 잘못된 기준을 두고 평가하거나 평가를 위한 평가가 얼마나 의미 없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평가란 좁게는 ‘물건 값을 헤아려 매김’을 뜻하고, 좀 더 넓게는 ‘사물의 가치나 수준 따위를 평함’이라고 정의된다. 즉 돈을 쓸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게 평가의 근본 이유이다. 하지만 사려는 입장에서 값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파는 쪽에서 이런저런 비용을 따져서 ‘희망’ 가격을 매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마저도 어려운 물건의 경우에는 ‘감정평가’를 한다. 하지만 모두가 결과에 만족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복수의 감정평가를 평균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일상적인 상거래에서도 이러한데 다른 목적의 평가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학업의 평가는 시험을 통해 이뤄진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시험을 치른다는 것은 학업의 성취도와 부족한 부분을 살펴 좀 더 효과적인 학습계획을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학생의 등급을 나누기 위한 수단처럼 여겨진다. 이런 평가는 시험을 잘 치르게 할 여력이 되는 부모에게나 유용할 뿐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쓸모없을뿐더러 유해하다. 평가의 방식을 떠나서 목적과 쓰임이 중요하다.

직원들에게 인건비를 지출하는 기업들은 고과를 통해 자사의 인력을 평가하고 급여와 승진에 반영한다. 최근에는 상사가 일방적으로 부하직원을 평가하는 방법에서 탈피하여 다면평가를 도입하기도 한다. 상위자, 동료, 하위자, 고객 등 피평가자와 관련된 모든 사람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방식이다. 이처럼 새로운 평가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도입하는 이유는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서이지만 제대로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친구의 회사를 망하게 하려면 경영 컨설팅을 받게 하고 성과지표를 도입하게 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성과지표는 ‘미래성과를 측정하기 위한 핵심지표들을 묶은 평가기준’을 뜻하며 계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간단하게 계량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러니 우습기만 한 지표들이 버젓이 쓰인다. 보고서 작성 개수, 업무회의 진행 건수, 구매자 면담 건수 등이 진정한 성과가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일반기업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에서도 의미 없는 지표가 종종 쓰이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성과지표를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에도 적용하라는 압력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명분은 지원정책이 얼마나 마을공동체 활성화에 기여했는지 성과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지만, 일반경영에서도 도입이 어려운데 다양한 가치를 품고 있는 마을공동체의 평가에 적절할 리 없다고 여겨진다.

굳이 정책의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면, 일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 정책이 추구했던 목표와 철학이 얼마나 구현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경제정책의 성과를 담당 공무원이나 개별 기업이 아니라 경제성장률이나 고용률 등으로 살피듯이 마을공동체 지원의 성과도 개별 참여자가 아니라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진정으로 살피는 방법을 구해야 좀 더 의미 있는 평가일 것이다.

<강세진 |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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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셨다. 92세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으니 호상이라면 호상이었다. 1년가량 알츠하이머를 앓았으며 마지막 두어 달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상태에서 고요히 앉아 지냈고 열흘쯤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가 그곳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 열흘 동안 담당의는 매번 오늘밤이나 내일이 될 거라 일렀고, 그래서 우리는 보호자대기실 의자에 대기상태로 앉아 30분으로 제한된 하루 두 번의 면회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매일 새로운 시신이 실려 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면회시간 외 중환자실 문이 열리면 그래서 눈물부터 새어나오며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자정을 막 넘어선 시간 그녀의 이름이 불렸고, 우리는 진짜 마지막 작별을 고하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침상 주변으로 황급히 커튼이 둘러쳐졌다. 죽음을 목전에 둔 다른 환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우리는 최대한 숨죽여 울었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조부모와 함께 살아야만 했던 내 오라비는, 엄마 대신 할머니의 젖꼭지를 만지며 영·유아기를 보냈는데, 대문과 초인종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할머니 젖꼭지를 초인종 삼아 누르며 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딩동, 문 열어주세요 함니, 저 왔어요 함니, 딩동딩동. 나는 그 젖꼭지가 분홍빛으로 아주 조그마하고 어여뻤다고 기억한다. 그녀와 때때로 목욕탕을 다니며 서로 때를 밀어주곤 했는데, 나는 할매 젖꼭지가 어쩜 이렇게 아가 젖꼭지 같냐 물으며, 아가 볼을 쥐듯 장난스럽게 꼬집기도 했더랬다. 그녀의 젖을 빨아먹고 자란 내 어머니는 그걸 팥 알갱이라 불렀다. 너무 작아 물고 빨기 힘들어서인지 젖먹이 때 꽤나 신경질을 부렸다는 말은 그녀가 기억한 내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자식에서 손주새끼에게까지 이어진 그녀의 젖꼭지. 우리는 그렇게 망자의 젖꼭지를 추억하며 키득키득 울컥울컥 장례를 치렀다. 불경스럽지만 따스해지는, 작고 어여쁜 팥 알갱이였다. 

장례는 고즈넉했다.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안부를 주고받으며 슬픔을 나눴다. 그렇게 고요한 애도를 하고 있던 중, 저 입구에서부터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렁차고도 요란한 곡소리와 함께 이윽고 도착한 한 여인. 신발은 벗는 둥 마는 둥 제단 앞으로 달려가더니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땅을 치며 곡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이고 형님 여기냐 저기냐 어디 계시오. 누구누구가 왔는데 형님은 왜 거기 그러고 계시오. 아이고 아이고 형님은 나한테 이리저리 잘해줬는데, 나는 자주 찾아보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잘못한 죄인이요. 형님 없이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요 아이고 아이고 좋은 세상으로 가시오 나도 곧 따라가겠소. 대략 그런 내용이었다.

슬프기로야 어미 잃은 자식만 하겠느냐 그만하라 누군가 만류해도 여인은 곡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말릴수록 곡소리는 더욱 과격해졌다. 어느 순간 고모할머니 되시는 분이 합류해 서로 끌어안고 밀쳐가며 곡을 보태고 나니, 완벽한 중창의 화음을 가진 리드미컬한 곡소리로 완성되었다. 그들은 기진맥진할 때까지 울었다. 말린다고 끝낼 성질의 것이 아닌 듯했다. 들어가는 인사말부터 나오는 다짐말까지, 아이고 아이고 끝을 봐야만 끝낼 수 있는, 한 편의 서사시. 곡소리라기보다는 남도의 창을 듣는 느낌이었다. 두 여인의 화음은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완벽하게 조화로웠다. 요즘은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곡을 마친 두 여인의 눈에는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눈물이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슬픔을 갖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여인들은 듣고 배운 바대로 예를 갖춰 최대한의 애도절차를 밟았을 뿐이다. 

그런 곡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할아버지의 장례 때였다. 30여년 전이었고, 어린아이였던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보다 할머니의 곡소리가 더 무서웠다. 울음소리는 기괴하고 가락은 지나치게 곡진했으므로. 상복을 입은 여자들이 땅을 치며 온몸을 흔들며 발작 같기도 발악 같기도 한풀이 같기도 생떼 같기도 한 울음을 이어갈 때, 슬픔을 나누는 느낌보다는 요상한 반감이 들었다. 할머니는 그 후로도 제사 때마다 꼭 그와 같은 곡소리를 냈다. 아이고 아이고로 시작해 부르고 찾고 대화하고 인사하고 다시 아이고 아이고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그것이 그녀들이 배운 애도의 예법이었을 것이다.

그날 할머니를 보내며 그 곡진한 곡소리를 들려준 여인이 누구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곡소리냐며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 여인이 고마웠다. 내 할머니가 해왔던 방식 그대로 곡소리를 완성해줄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자식도 손주도 해줄 수 없었던 그 일. 그 소리는 얼마 안 가 사라질 것이다. 살아 있는 육성으로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현실이 묘하게 슬프게 다가왔다. 그 여인이 죽으면 누가 곡을 해주려나. 아이고 아이고. 어쩐지 그 소리가 초인종 소리 같았다. 저 왔어요 딩동, 문 열어주세요 딩동, 저도 언젠가 갈게요 딩동. 할머니 젖꼭지를 누르며 좋아라하던 내 오라비처럼. 젖꼭지의 기억을 공유하는 내 가족처럼. 저 세상의 문을 두들기는, 딩동 아이고 아이고 딩동.

<천운영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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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0일, 검찰과거사위원회(이하 과거사위)는 ‘장자연 사건’에 대한 조사 및 심의 결과를 발표했다. 과거사위의 사건 제목은 ‘장자연 리스트 사건’이었고 결론은 ‘리스트 없다’였다. 제목은 과거사위의 관점을 반영하고, 관점은 사건 및 결과에 대한 해석을 지배한다. ‘리스트’가 핵심인데 핵심이 없으니 김빠진다. 자연스레 사건은 축소되고, ‘리스트’ 관련 논란 당사자에게 책임이 전가된다.

1차 조사대상에서 제외된 ‘장자연 사건’을 국민청원으로 대상 사건에 포함시키며 국민들이 밝히려 했던 것은 ‘고 장자연의 한 맺힌 죽음의 진실’이었다. 그러나 과거사위는 2009년 당시 수사검사의 부당한 불기소처분 및 주요 대상자에 대한 수사 미진, ‘조선일보 방 사장’ 관련 의혹에 대한 결과적 은폐, 주요 증거 확보 및 보존 과정의 부실 수사, 조선일보 관계자들의 경찰에 대한 압력과 협박 등을 확인했다면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다시 사건을 덮었다. ‘리스트 유무’에 집중한 심의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충분한 사실과 증거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리스트’에 대한 논쟁만을 남긴 채 검찰권 남용에 대해 면죄부를 주며 끝을 맺었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시민단체 관계자들이 2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고 장자연씨 사건’ 등의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장자연 사건’을 이렇게 끝낼 수 없다. 검찰 셀프 조사의 한계와 철저한 제 식구 감싸기의 ‘무소불위 권력기관’ 검찰의 실체를 확인했으니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성단체들이 대검찰청 기습시위를 한 이유다. 이제 ‘죽음의 진실’을 밝히길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을 국회가 받아 안아야 한다. 특검을 통해 철저하게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은폐에 대한 책임도 분명히 물어야 한다. 

그런데 과거사위 발표 이후 악의적인 흐름이 포착된다. 조선일보의 윤지오에 대한 공격이 그것이다. 지난 5월22일 “윤지오가 퍼뜨린 의혹…검증 없이 확성기 노릇 한 방송사들” 기사를 시작으로 24일 “장자연 전 남자친구 ‘윤지오 이름 한 번도 못 들어…고인에 치명적인 주장 잔인하다’”, 이어 6월5일엔 “윤지오의 ‘먹잇감’”이란 제목의 부국장 칼럼을 통해 “유명해지고 싶은”, “영악한”, “먹잇감” 등의 단어를 사용해 이전부터 있었던 여러 논란으로 인해 확산된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다. 이후 윤지오에 대한 후원금 반환 집단소송과 사기혐의 고소, 홍준표 명예훼손 피소, 신변보호비용 사기 혐의 고발 등 각종 고소·고발이 끊이지 않는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5월23일 (출처:경향신문DB)

나는 윤지오를 모른다. 그러나 ‘장자연 사건’이 ‘윤지오 사건’으로 옮겨갈 때의 위험성은 안다. 규명되지 않은 사건의 핵심 증인에 대한 도덕적 손상은 결국 사건의 진실을 가리는 데 악용된다. 증언에 대한 진위는 다른 증언이나 정황증거 등을 통해 수사기관이 판단할 몫이지 여론재판의 대상이 아니다. 재조사에서 핵심 증인 채택과 그에 따른 경비 지불은 당연한 국가의 책무다. 그래서 6월12일 “윤지오, 또 고발돼…‘국가와 국민 속이고 호텔비 900만원 지원받아’”란 조선일보 보도와 같은 이유로 박상기 법무부 장관과 민갑룡 경찰청장을 고발한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 박민식 변호사의 행보는 악의적이라 느낀다.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국회가 나서서 ‘장자연 죽음의 진실’과 사건 은폐 이유를 밝히고, 책임을 묻는 것이다. ‘윤지오’를 이유로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국회의원들을 압박해서는 안된다. 윤지오로 장자연을 지우지 마라.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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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이 말에는 우리가 앓는 두 겹의 고통이 들어 있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상처로 인한 생리적 고통만이 아니라 그런 상처를 가졌다는 사실로 인한 해석적 고통도 앓는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의 고통과는 다른 고통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느끼고, 장애인은 손상된 몸이 주는 고통 이상의 고통을 사람들의 편견에서 느낀다. 몸의 멍에 더해 마음의 멍이 생기는 것이다. 

흔히 고통은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치통처럼 간단한 것조차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저마다 자신이 앓던 치통을 떠올려볼 뿐이다. 그래도 생리적 고통은 해석적 고통에 비해 사정이 나은 편이다. 해석적 고통의 경우, 특히 그 고통이 자신이 사회적 척도에 부합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생겨난 경우, 고통의 호소는 부적합한 존재로서 자신을 확증하는 것처럼 느껴져 더 고통스럽다. 상대방은 내 호소를 내가 비정상적이고 뭔가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공감 대신 선고를 받는다. 네가 아픈 이유는 네가 아픈 존재이기 때문이야.

그러다보니 소위 소수자들은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 폭력을 고발하는 경우에도 마치 고발당한 사람처럼 변명의 언어를 쓴다. 내가 당한 폭력, 내가 느끼는 고통을 내 존재의 본래적 성격 탓으로 돌리는 걸 막기 위해서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들의 호소를 곧잘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네가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폭력을 유발한 건 아닌지. 너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너무 고통을 느끼는 건 아닌지.

이것이 사람을 구차하게 만든다. 이때 나의 말은 한없이 구질구질해진다. 내 고통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 삶의 멍든 곳을 다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그 멍은 폭력의 증거가 아니라 내 허약 체질의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자꾸 실패하다보면 설득의 고통이나마 줄이기 위해 나는 결국 나를 설득해버린다. 그래, 내가 좀 이상한 것 같아. 너무 민감하고 너무 신경질적이고, 한마디로 나는 이 세상에 적합하지 않은 체질이야. 그렇게 해서 나는 만성적으로 우울한, 그러면서 이따금씩 까닭 모를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간다.

“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이 문구는 최근 출간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조한진희, 동녘)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제목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픈 사람이 미안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픈 몸으로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미안하지만 회의가 너무 길어지는데 좀 쉬었다가 할까요?” “미안하지만 이번 주 일정을 더 잡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는 왜 미안한가. 일주일에 5일씩, 하루 8시간 노동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서 미안하다. 2시간 넘게 회의를 계속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서 미안하다. 아픈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허약함에 대해 사과하고 양해를 구한다. 일주일에 52시간만 일하자고 해도 펄쩍 뛰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게 일을 시키고도 미안해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정도는 해야 ‘정상’이라고 하니 그럴 수 없는 사람은 미안하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장애인들도 그렇다.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미안하지만 엘리베이터 버튼 좀 눌러주세요. 손이 닿지 않아서요. 미안하지만 빨대 좀 가져다주세요. 손을 쓸 수가 없어서요. 혼자서 옷을 입을 수 없어서 미안하고, 혼자서 밥을 떠먹을 수 없어서 미안하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장애인들은 한없이 구차해진다. 자신은 이런 것도 못하는 존재라는 걸 계속 고해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낮은 곳에 설치만 했어도, 음료를 서빙할 때 빨대 달린 컵을 제공만 했어도 미안하지 않았을 텐데, 우리 사회가 미안해하지 않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미안해진다.

이런 일이 나타나는 데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 책의 저자가 ‘질병의 개인화’라고 부르는 것으로, 문제 원인을 고통의 당사자에게 찾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잘못된 습관, 타고난 체질, 불운한 운명이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을 아프게 하고 장애화하는 환경은 철저히 덮어버린다. 그러면 피해자가 오히려 사회 전체에 돌봄의 짐을 안긴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미안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상의 몸’을 상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어딘가 조금씩은 아프고 근본적으로는 어딘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돈이나 권력을 이용해서 자립의 전도된 이미지를 만들 수는 있으나(돈이나 권력을 쓰면 돌봄을 받는 자가 돌봄을 베푸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없앨 수는 없다. 사실 인간 삶의 의존성은 자립이 아니라 함께 살기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우리는 의존에서 벗어남으로써가 아니라 적절한 의존 방식을 찾음으로써 자율적 삶을 누릴 수 있다. 활동보조인과 함께할 때 장애인이 자율적 삶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저마다 조금 다른 의존 방식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런데 특정한 의존 방식만을 정상과 자립으로 규정하다보니 우리 중 누군가는 양해를 구하며 계속해서 고통과 결핍의 구차한 언어를 꺼내야 하는 것이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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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에서는 ‘솔전’을 부쳐 먹고, 경상도에서는 ‘정구지찌짐’을 구워 먹고, 제주에서는 ‘세우리적’을 지져 먹는다. 음식 재료도, 조리 방법도 다른 것 같은데, 실상은 모두 ‘부추전’을 부쳐 먹는 일이다. 이처럼 우리말 방언은 다양한 형태로 각기 다른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방언의 지역적 분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지도에 옮긴 게 언어지도(言語地圖)이다. 그런데 한 어휘의 언어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국의 방언을 모두 알아야 한다.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다니며, 지역 고유의 방언을 잘 사용하는 제보자를 찾아 방언을 녹음하고, 음성을 글로 옮기는 일이 선행돼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언어지도를 만드는 일에는 막대한 예산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달 27일자 ‘이지누 칼럼’의 “오롯하게 우리말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찾기 어려워지는 지금, 정부 차원에서 나랏말의 다양성과 분포를 정리해 우리말에 대한 언어지도를 발표할 시기가 되었다”는 주장은 매우 공감되는 내용이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사라져 가는 방언을 보존하기 위해 2004년부터 지역어 조사를 실시하여 약 20만 항목의 방언 자료를 모으고, 이를 기반으로 100장의 언어지도를 작성 중이다. 지역 방언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80대 이상의 어르신을 대상으로 방언 음성을 채록하고, 이를 전사하여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있다. 현재 전국 162개 시·군 중에서 111개 시·군의 방언을 조사하였고, 올해에 20개 시·군의 방언을 추가 조사하고 있다.

이 사업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80년대에 시작한 한국 방언 조사의 계보를 이었다. 한국 방언 조사의 질문지를 확대하여 조사함으로써 1980년대의 방언과 2000년대의 방언을 비교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 지역어 조사 결과는 사회적으로는 도시화가, 언어적으로는 표준어화가 급속히 진행된 2000년대의 방언을 기록한 것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한국방언조사자료집>과 비교하면 20년 동안의 언어 변화를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국립국어원의 지역어 조사 결과와 언어지도는 2019년 12월 말 ‘지역어 종합 정보 시스템’을 통해 일반 국민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방언 정보를 쉽게 검색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약 14만 항목의 방언과 대응 표준어, 뜻풀이, 음성 자료 등을 제공한다. 그리고 방언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100개 어휘의 언어지도와 전문가 해설을 싣고, 국민들도 자신만의 언어지도를 작성할 수 있도록 언어지도 작성 프로그램도 함께 제공할 계획이다.

일반적으로 소멸 위기에 처한 방언이라 하면 제주 방언이나 전라 방언, 경상 방언, 강원 방언을 떠올린다. 정작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은 경기 방언과 충청 방언이야말로 진정 소멸 위기에 처해 있는데 말이다. 경기 방언과 충청 방언에는 방언사전조차 없다. 지역어 보존을 위한 노력은 지역별로 차이를 보인다.

문화적 다양성은 언어 다양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언어 다양성은 점점 사라져가는 방언을 보존하여 활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방언에는 지역 고유의 언어문화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역 방언을 전국적으로 균형 있게 보존하고, 그것을 확산시킬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야말로 정부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이다.

<위진 |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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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희호 여사님의 생전에 그분을 뵌 적이 없다. 

지난 2018년, 나의 첫 감독 데뷔작인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김대중평화센터에서 주최하는 ‘김대중 노벨평화영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이희호 여사님께서 “올해는 특별히 여성감독에게 이 상을 수여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시상식장에 직접 오셔서 시상을 하시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오지 못하셨다. 평소에 존경하던 여사님을 추후에라도 뵙고 싶다는 의견을 재단 측에 전달하니 여사님을 뵈러 갈 때 동행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답을 들었다. 여사님을 직접 뵐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되시지 않아 여사님과의 만남이 계속 좌절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나는 비보를 들었다. 

이후 며칠간, 나는 여사님의 삶의 행적에 관한 기사들을 SNS를 통해 읽고 또 읽었다. 

마침내 나는 그분의 빈소를 찾았다. 비록 돌아가신 후였지만 여사님과의 첫 만남이라는 생각에 가는 동안 내내 마음이 슬프고도 설레었다. 그리고 영정 속, 여사님의 환한 미소를 보았다. 이토록 삶으로, 죽음으로, 평화를 증거한 위대한 여성이 또 있을까. 

14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진 '故이희호 여사 추모식’에서 영정이 올려져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영정 앞에 서서, 여사님의 삶의 궤적을 잠시 그려보았다. 

전쟁 통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고통을 머리와 가슴으로 받아내고,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 앞에 당당히 맞서라 독려하면서도 남편과 자녀들이 겪는 고통에 가슴에는 피멍이 들고, 고난으로 단련된 심장은 영부인이 된 후에도 정의를 향한 박동을 멈추지 않았다.

평생을, 정의에 대한 차가운 감각과 고통당하는 약자에 대한 뜨거운 심장을 동시에 지니고 사셨다. 그리고 마지막 가시는 길에 평생 간직하셨던 ‘평화’라는 선물을, 대한민국의 두 손에 유품으로 쥐여주셨다. 여사님의 생애는 고난과 기도로 점철된 십자가의 길, 그 자체였다. 

그분이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무척이나 닮아 있다. ‘평화의 길’은 곧 ‘십자가의 길’이라는 진리를 삶으로 증거하셨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6월12일 (출처:경향신문DB)

이 여사님은 자서전 <동행>에서 “남편이 차디찬 감방에 있는 기간에 홀로 기도하고 눈물로 지새운 밤도 많았다. 독재는 잔혹했고, 정치의 뒤안길은 참으로 무상했다. (중략)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회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희호 여사님의 죽음으로, 분열이 극에 달해 있던 한국 정치권에도 요 며칠 잠시 평화의 기운이 감돈다. 남과 북 사이에도 잠시 평화가 깃든다. 가정에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평화가 깃든다. 대한민국을 가르고 있는 모든 분리된 선들이 잠시 사라진다. 

여사님의 영정 앞에 서서 나는 그렇게 몽상에 빠져들었다. 한낱 꿈일지 모르지만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평화의 사람’이 주는 영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명료하게 깨닫는 시간이었다.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런 분이 우리의 곁에서 호흡하시며 그 모든 역사의 풍파를 지켜보시며 아픔의 시대를 자식처럼 품고 기도하고 계셨구나, 우리는 그렇게 여사님을 재발견함과 동시에 떠나보냈다. 그리고 이제, 천국에서도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겠다는 이희호 여사님의 마지막 유언이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선물이자 거룩한 부담으로 남았다.

<추상미 |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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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눈을 지고도 끄떡없는,

더 새파란 그늘을 펼친 주목 옆에

고사목 하나


모가지 부서지고

어깨가 깨졌지만

살아 있는 것보다 더 곧게


죽음 속에서

죽음을 넘어

마지막 큰 가지를 북대 쪽으로

가라, 

너는 네 길을 가라

혼자서 가라, 거기에 아무것 없을지라도


굶주린 멧돼지와

피투성이 삵과

통곡하듯 번쩍이는 빙벽들의 그믐밤을 부르며


전동균(1962~)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잣눈은 척설(尺雪)과 같은 뜻이다. 많이 쌓인 눈을 일컫는다. 말라서 죽은 나무 위에 눈이 한가득 쌓였다. 그러나 나무는 꿋꿋하게 섰다. 이 가지 저 가지가 군데군데 꺾였으나 위를 향해 곧게 섰다. 의연한 기품으로. 새파랗게 그늘을 펼치며 생생하게 살아 있었을 때보다 더 흔들림이 없이 반듯하게 섰다. 시인은 이 고사목으로부터 기개를 본다. 굽히지 않는, 자신을 신뢰하는, 자립하는 지조를 본다. ‘북대’는 신성하고 고고한 정신의 거처일 테다. 울음과 허기와 피투성이의 계곡 너머에 있는, 차디찬 빙산 그 너머에 우뚝 솟아 있는, 영적인 그런 곳일 테다. 무엇에도 기죽지 말고, 비록 종국에 어떤 보답도 받지 못하더라도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 일을 생각해본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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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물관리기본법이 공포된 지 1년의 시간이 지났다. 지난 4일 시행령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함으로써 하위법령을 포함한 법체계도 모두 완성되었다. 이로써 국가 차원의 통합물관리, 유역 중심의 국민참여형 물관리가 본격적인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물분야 연구와 거버넌스 활성화에 관여해온 학자로서, 물관리 일원화를 주도한 통합물관리 비전포럼의 위원장으로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회가 깊다. 비전포럼을 통해 함께한 관계자들과의 협치 경험이 수자원 관리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991년 발생한 낙동강 수질사고 대책으로 수량-수질 분리의 원칙을 확립하고 수질 업무를 환경부로 이관하면서 물관리의 이원화가 시작되었다. 처음 기대와 달리 예산의 중복투자, 비효율적 물관리 등의 문제점이 부각되었고, 분절되었던 물관리를 다시 통합해야 한다는 요구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일원화 시도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갈등만 증폭되었을 뿐 번번이 무산되었다. 필요성은 계속 제기되었으나 이해관계의 대립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던 노력을 결집하고자 한 환경부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17년 7월 민·관·학 전문가 약 200명이 모여 통합물관리 비전포럼이 출범하였다.

비전포럼은 이해관계자들이 한자리에서 모이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였다. 불신의 벽은 높았으나, 대화를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절충점을 찾기 시작하였다. 전국적 토론회를 개최하여 지자체·시민사회의 공감대도 얻었으며, 순조롭게 합의에 도달하였다. 또한 포럼 내에 6개의 분과를 설치하여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물관리 핵심가치, 정책목표 등 국가비전을 제시하였고, 지역별 물관리 비전과 거버넌스 구축의 기반을 다지는 등 물관리기본법 시행을 차근차근 준비하였다.

이로써 일원화에 대한 공감대는 폭넓게 형성하였지만, 구체적 방안에 대한 의견 차이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원화는 이상기후의 확산으로 더 미룰 수 없는 국가 중대사라는 판단으로, 국회와 민·관·학 주요 인사들에 대한 설득과 중재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 결과 2018년 5월 숙원이었던 물관리 일원화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내었고, 그해 6월 물관리기본법이 공포되었다.

법령 제정으로 큰 틀에서 통합물관리에 관한 합의를 이루었지만 세부 방안을 정하는 더 큰 난제가 남았다. 많은 어려움에도 비전포럼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 논의를 거쳐 물관리위원회 구성 및 역할, 갈등조정 방안 등을 담은 시행령 공포도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환경부가 이 기반을 잘 활용하여 꽃을 피우는 일이다. 어렵게 얻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환경부는 적극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기다. 지금까지 주요 업무가 규제를 통한 감시였다면, 앞으로는 통합물관리를 위한 수요와 공급 및 하천·지하수·농업용수 관리 등의 정책 집행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물 복지를 위해 수익성 없는 영역에도 주도적으로 나서고, 기술개발 지원을 통한 물산업 육성 등의 성과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환경부가 가진 역량에 더하여 국토부에서 이관된 수자원국과 한국수자원공사의 역량을 통합물관리에 활용한다면, 일원화의 성과도 조기에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통합물관리 비전포럼은 임무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있다. 비전포럼이 그려온 이상은 곧 출범하게 될 물관리위원회가 충실하게 실행해 줄 것이라 믿는다. 물관리 여건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며, 제한된 수자원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정부와 국민이 다 함께 협력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허재영 통합물관리비전포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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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경찰은 희한하다. 경찰의 임무를 다룬 ‘경찰법’ 제3조에는 ‘치안정보의 수집·작성·배포’라는 규정이 있다. 정보경찰의 임무다. 

문제는 뭐가 치안정보냐는 거다. 보통은 범죄정보를 떠올리겠지만 경찰이 말하는 치안정보의 개념에 범죄정보는 없다. 범죄정보는 경찰청 정보국이 아니라 경찰청 수사국 범죄정보과 같은 곳에서 다룬다. 사이버 범죄정보라면 경찰청 사이버안전국에서, 국제범죄정보라면 외사국에서 다룬다. 범죄정보를 뺀 치안정보라는 게 무엇일까.

사전적으로야 국가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일 텐데, 그 안녕과 질서가 주권자인 시민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다스리는 쪽’, 곧 집권세력 입장에서의 안녕과 질서인 경우가 많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보경찰의 활동은 온통 대통령을 위한 보고서 작성에 맞춰져 있다. 검찰수사로 정보경찰의 민낯이 드러났듯이, 대통령의 사주팔자가 좋아 국운이 상승한다는 식의 유치한 정보보고도 넘쳐난다. 청와대의 요구에 따라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하기도 한다. 대통령 친위세력의 당선을 위해 동향을 파악하고 사전투표소를 염탐하면서 선거판세를 읽기도 한다. 3000명 남짓한 정보경찰은 오로지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해 치안정보를 수집·작성·배포하고 있다. 

경찰 입장에서는 대통령을 위해 일하며 권력의 핵심과 연결망을 만들 수 있어 좋을 게다. 청와대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뭐든 답을 찾아주니 좋을 거다. 

문제는 대통령과 경찰에게 좋다고 시민들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거다. 납세자인 시민이 비용 전부를 부담해야 하는 조직이 주권자인 시민이 빌려준 권한을 이용해 오로지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그저 반민주적인 작태일 뿐이다. 

경찰청은 정보경찰의 역할이 그것만은 아니라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 집회·시위 관리나 신원조사 등을 정보경찰이 맡고 있지만 집회·시위와 관련한 신고 업무라면 경찰서 정보과가 아니라 민원부서가 맡는 게 맞다. 집회와 시위를 하려는 사람들을 위축시킬 의도가 아니라면 분위기조차 비밀스러운 정보과에서 맡을 까닭이 없다. 집회현장에서 정보경찰이 대화를 촉진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도 하겠지만, 그런 일은 원래부터 관련 부처의 몫이다. 괜히 몸값을 올리고 자기 역할을 과장하기 위해 집회현장을 오갈 이유는 없다. 만약 불법행위가 있다면, 수사나 형사 부서가 맡으면 된다. 전형적인 민원부서 일이어야 할 신원조사도 마찬가지다. 뭐라 변명하든 정보경찰의 핵심은 대통령을 위한 정보보고일 뿐이다.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하려면 각계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정보경찰에 의해 걸러지고 다듬어진 정보에 의존하면 더더욱 안된다. 궁금하다면 각계 인사를 직접 만나면 된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전화, 이메일 등 온갖 매개들을 활용하면 된다. 언론보도나 인터넷 등에 귀를 기울여도 좋다. 측근이든 정적이든 상대의 은밀한 움직임까지 알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라면 굳이 정보경찰을 이용할 필요는 없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국가정보원이 국내 정보를 수집하지 않으니 경찰정보가 더 중요해졌다고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대목에서 그렇다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인사검증에 꼭 필요하다지만, 인사검증 자료를 인사혁신처나 관련부서가 아닌 정보경찰에 기댈 까닭도 없다. 범죄 관련 정보를 알고 싶다면, 공직 후보자에게 범죄경력조회를 떼어오라고 주문하면 그만이다. 사영기업도 다들 그렇게 한다. 굳이 필요하다면, ‘세평(世評)’ 정도일 텐데, 믿거나 말거나 식의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평판을 듣기 위해 3000명이나 되는 정보경찰을 운영할 필요는 없다. 만약 꼭 필요한 기능이라면 인사혁신처, 굳이 중복 검증이 필요하다면 국무총리실에 관련 기능을 두면 된다. 

정보경찰의 보고서는 일선 정보관이 작성한 다음 경찰서 정보과 - 지방경찰청 정보부 - 경찰청 정보국으로 이어지는 지휘 라인을 통해 이중삼중의 점검과 보안을 거친 후 청와대 보고용으로 거듭난다. 일제강점기의 특별고등경찰 이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았던 노하우가 있으니 정보경찰이 만든 보고서를 읽는 재미도 괜찮을 거다. 그 재미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대통령이 싫어할 만한 보고는 일선 정보관들부터 기피한다.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양념 치듯 가끔 넣겠지만, 결국은 대통령의 결단만이 나라를 구한다는 식의 보고서가 잇따를 뿐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노동조합도 없고 기본적인 민주시민교육조차 받은 적이 없는, 오로지 정권에 대한 충성만을 거듭한 사람들에게 기댈 일은 없다. 

대통령과 청와대는 정보경찰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면 안된다. 정보경찰의 보고서야말로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인의 장막일 뿐이다. 청와대 직원들이 정보보고서 읽는 재미에 빠져 아무리 그 필요성을 역설한다고 하더라도 넘어가면 안된다. 정보경찰을 악용하지 않을 거란 막연한 자신감도 답은 아니다. 

정보경찰이 망치는 건 대통령만이 아니다. 경찰에도 득이 될 건 없다. 일부 고위직이야 정보경찰을 통해 청와대와의 연결망을 갖게 되어 좋을 거다. 계급정년이 있는 팍팍한 현실에서 승진을 거듭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 수도 있을 거다. 몇몇 정치경찰에게 좋은 일이 10여만명의 경찰관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다. 

경찰은 법 집행기관이다. 종사자도 많고 대민접촉의 폭도 넓고 하는 일도 많다. 그래서 언제나 공정해야 하며 법 집행기관으로서의 권위도 필요하다. 그러니 제발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한 뻔하고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쫓아다니는 일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법률 개정도 필요 없다. 대통령만 결심하면 된다. 앞으로는 정보경찰이 만든 보고서를 읽지 않을 테니, 만들지 말라고 지시하면 된다. 할 일이 없어진 정보경찰 부서는 폐지하고 정보관들은 민생치안 현장으로 시민들을 위한 역할로 돌려보내면 된다. 정보경찰을 없앴을 때의 부작용이나 문제는 하나도 없다. 정보경찰을 그대로 둔 채 진행하는 경찰개혁은 공염불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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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늦은 밤 갑자기 카톡이 울렸다. “대구에서 발표할 일이 있어 왔다가 동대구역 가는 길입니다. 불금의 저녁, 대구도 길이 많이 막히네요. 엄청 덥고요. 기사 아저씨는 계속 문 정부 욕만 하시고.” 아는 교수였다. 답장을 보냈다. “제가 반복적으로 겪는 일 겪으셨군요. 서울 말씨만 쓰면 바로 나옵니다.” 위로의 문자가 왔다. “아…그런 거군요. 대구에서 사는 거 만만치 않으시겠습니다.”

어쩌다가 대구가, 참내. 목구멍으로부터 쓴물이 올라왔다. 2005년 대구로 이사 왔으니 벌써 십 수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택시를 타면 몇 마디 말에 바로 타지 사람인 걸 알아챈다. 구어 활용 습득 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아무리 대구 말씨를 흉내 내도 금방 티가 나는 모양이다. 열의 여섯, 일곱은 ‘소위’ 진보 정권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얼마전에도 그랬다. 서울 갔다 돌아오는 길 동대구역에서 택시를 탔다. 행선지를 말하고 몇 마디 주고받고나니 ‘주 52시간 근무제’와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밤중에 손님이 없다카이요. 주 52시간 정책인동 뭔동 땜에 밤에 일을 안 한다카이. 일을 안 하이 일감이 어데 있심니꺼. 소득주도성장한다꼬 카는데 일하는 시간이 줄었뿌이 소득도 준다카이요. 수출로 묵고사는 나라 아닙니꺼, 우리가. 이기 말이 되는 일입니꺼, 어데요. 최저임금 올린다고 설치뿌리이 원가가 올라가가 수출경쟁력이 똑 떨지는 거 아입니꺼?”

이럴 경우 보통 “예, 예” 하며 짐짓 맞장구를 쳐준다. 집에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택시기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아닌가. “이기 다 자유민주주의 파괴할라꼬 카는 빨갱이 때문이라예. 아이라예?” 나도 모르게 욱했나 보다. “자유민주주의가 뭡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택시기사가 움찔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내뱉었다. “자유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카마 그 뭐라캐야 되노. 자유 아입니꺼? 자유!” 작정을 하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 자유가 뭐냐니까요?” 대답을 못하고 버벅대다 고함을 지른다. “독재 안 하는 기지예. 문재인 함 보이소. 좌파독재 아이라예? 지 혼자 다 해묵잖아예. 국민 생각은 쪼매도 안 하고 저거들 빨갱이만 좋자고 그카는 거 아니라예. 그카다가 문재인이 총 맞아가 죽는다카이요, 죽어.” 깜짝 놀랐다. “아니 대통령을 총 쏴서 죽이는 게 자유민주주의예요?” “그라마 아니란 말인교? 자유민주주의 미국 함 보이소. 케네디도 총 맞아가 죽었잖는교.” 무슨 이런 논리가? “아니 자기랑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고 총 쏴 죽이는 게 자유민주주의예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아이라. 그 말은 그렇다카는 기 아닙니꺼? 누가 문재인 총 싸가 쥑이뿌만 어얘노 카는기지, 내 말은. 그래 좌파독재하다 보만 국민이 가마이 있겠는교?”

갑자기 1970년대 미국의 암울한 현실을 고발한 영화 <택시 드라이버>가 떠올랐다. 베트남전 퇴역군인인 주인공은 심야 택시를 몰며 쓰레기와 같은 추악한 뉴욕 밤거리를 떠돈다. 고작 이따위 나라를 지키려고 베트남에 가서 목숨 걸고 싸웠단 말인가.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싶지만 현실적 힘이 없다. 마지막 희망인 사랑마저도 일그러지자 분노가 극에 달한다. 모든 게 잘못된 정치 탓 같다.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과대망상으로 유력 대통령 후보의 암살에 나선다. 

자신이 처한 참혹한 현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때 무력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 무력감은 가상의 악에 대한 분노와 테러로 돌변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가 말로 의사소통하는 정치제도를 만든 이유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치가 무력감과 분노를 자극하고 조장하는 폭력적인 ‘군사 언어’에 기대면 희망이 없다. 현재 수많은 ‘택시 드라이버’가 군사 언어를 사용해서 무력감과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럴수록 공감을 못 얻고 끼리끼리 고립되어 과대망상 테러를 꿈꾼다. 보다 보편적인 ‘시민 언어’를 써서 자신이 처한 곤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정치의 공간이 활짝 열려야 비로소 문제 해결의 길이 보인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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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가 유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규약위원회(사회권위원회)에 낸 의견서에서, 정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해 이행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회권위원회는 2017년 한국 정부에 ‘기업과 인권’ ‘차별금지법’ ‘노조 할 권리’ 등 3개 분야 권고안을 제시했고, 법무부는 후속조치 관련 보고서를 지난 4월 제출했다. 인권위 의견서는 사회권위원회 요청으로 제출됐다.

인권위는 국가기구이지만 입법·행정·사법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인권 보호·향상과 관련한 업무를 독립적으로 수행한다. 정부와 국회가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 책임을 방기하는 가운데 인권위가 쓴소리를 낸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인권위는 의견서에서 “최근 한국 사회는 여성, 이주민·난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이 강화되고 조직화되는 등 혐오·차별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면서 “그럼에도 정부는 사회권위원회가 권고한 ‘포괄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6년 인권위의 제정 권고 이후 2007년 법안이 입법예고됐으나 보수 개신교계 등이 ‘성적 지향’ 항목 등을 이유로 반발하며 제정이 무산됐다. 이후에도 몇 차례 법안이 발의됐으나 모두 폐기·철회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20대 국회와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정부입법안이든 의원입법안이든 단 한 건도 발의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사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와 세월호 참사 유가족까지 조롱 대상이 되는 부끄러운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헌법 제11조는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1조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고 밝히고 있다. 헌법과 세계인권선언의 차별금지 정신을 저버리는 일부의 반인권적 주장과 행태를 방기하는 정부의 무책임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을 계속 미룬다면, 그사이 상처받고 피해 입는 이들만 늘어나게 된다.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시민의 분노에 응답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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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겨울에 김동식 작가의 소설집 <회색인간> 출간에 관여하고서부터, 나를 기획자라고 불러주는 분들이 생겼다. 그렇게 거창하게 기획이라고까지 할 게 없는 일이어서 민망했다. 김동식 작가가 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집 출간 이후 출판사 대표는 나에게 단행본 매출의 2%를 기획인세로 지급하겠다는 계약서를 건네면서 “당신이 작가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요다출판사로 데려와 달라”고 했다. 작가의 인세 10%를 건드리지 않고 온전히 출판사의 이익을 나와 나누는 것이었다. 그렇게 출판사로부터 1년간 받은 기획인세는 내가 3년 동안 글을 써서 번 것보다도 더 많았다. 김동식이라는 작가와 그의 글은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고, 나도 덩달아 새로운 업을 하나 추가하게 되었다. 

나는 그 이후 새로운 작가를 찾기 위해 여러 플랫폼의 글들을 계속 읽어 나갔다. 그러다가 2018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에 ‘문화류씨’라는 필명을 가진 작가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여우스님’이라는 글을 읽고는 그에게 e메일을 보냈다. <회색인간>이 출간된 지 정확히 1년이 된 시점이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각색했다는 그의 글에서, 나는 1년 전과 비슷한, 한 작가와 그의 글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문화류씨 작가에게서는 아주 빠르게 긍정적인 답신이 왔고 우리는 곧 만났다. 그는 30대 초반의 앳된 청년이었다. 그는 약간 큰 덩치에 잘 어울리지 않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동식 작가님이 잘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부러웠고, 언젠가 그 기획자인 김민섭 작가님이 연락을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정말 1년 만에 연락을 주신 거예요.” 

김동식 작가의 사례는 무척 예외적이고 특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작가가 다시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를 희망의 증거로 삼아 계속 글을 써 나간 젊은 작가가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를 바라보면서 1년 전의 내가 정말로 기획이라는 것을 했고 그것이 한 개인과 출판사에만 의미 있는 일로 남은 것이 아니구나, 하여,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2019년 6월에, 문화류씨의 소설집 두 권이 출간되었다. 그의 책을 기획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가 휴대폰 자판으로만 단행본 두 권 분량의 글을 썼다고 하는 것이었다. 휴대폰 자판이 더욱 편해서 글을 퇴고할 때만 컴퓨터 자판을 이용한다고 했고, 심지어 누워서 주로 글을 쓴다고 했다. 문자나 톡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무언가 답답해 컴퓨터를 반드시 이용하는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자책이 처음 등장했을 때 ‘모니터로 어떻게 책을 읽나’ 하는 거부감과 불편함을 모두가 가졌지만, 이제는 대부분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수용하고 있는 듯하다. 킨들과 같은 전용기기가 보편화되었고 휴대폰으로 어디에서나 전자책을 읽는다. 그에 따라 손안에 들어올 만한 6인치 내외의 화면에 어울리는 글쓰기 방식이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모바일을 기반으로 노출되는 플랫폼의 경우에는 그 담당자들이 노골적으로 “단락은 문장 2~3개마다 꼭 구분해 주시고요, 이미지도 화면마다 하나씩은 삽입되게 해 주세요”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제도권의 글쓰기 교육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읽는 방식의 변화가 쓰는 방식의 변화를 추동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들뿐 아니라 기자 등 글을 쓰는 모두는 자신의 글이 6인치의 모바일 화면에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이중번역과 같은 방식으로 써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휴대폰에 익숙해진 어느 세대는, 혹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모바일 화면으로 글을 보는 데서 나아가 쓰는 세대로 조금씩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화류씨 작가는 마치 동시번역을 하는 것처럼, 쓰는 동시에 독자들의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구현해냈다. 이제 우리는 그와 같은 ‘손가락 작가’들의 탄생을 계속해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김동식 작가만큼이나, 문화류씨라는 새로운 작가도 잘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그를 희망의 증거로 삼은 새로운 손가락 작가들이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우리 앞에 계속 나타나게 될 것이다. 나로서도 누구 하나 잘되고 끝나지 않는 그런 연속된 기획을 계속해 보고 싶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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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주장이나 종교적인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간혹 사람들은 단식을 한다. 한두 끼는 몰라도 나는 여러 날 굶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날 나는 단식을 하던 빙장 어른 앞에서 회 한 접시에 두 병의 소주를 꿀꺽 한 ‘인정머리 없는’ 짓을 자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분은 나중에 ‘맛있게 먹기 위해’ 지금 단식을 하노라고 말씀하셨다. 매우 흥미로운 얘기였지만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지내다 나중에 미국에서 실험하는 도중에 그 말을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우연히 찾아왔다.

아마 2005년이었을 게다. 누구라도 그렇듯 실험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진행된 최신의 연구 결과물을 열심히 찾아다닌다. 인터넷을 통해 새롭게 발표된 논문을 읽는 게 주된 일과가 된 것이다. 어쨌든 그때 읽었던 논문은 24시간 동안 굶은 섬유아세포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생명의 역사 내내 배불리 먹은 경험이 없기에 동물들이 굶는 일에 잘 적응되어 있다는 따위의 슬픈 사연은 아니었다. 대신 배양액에 혈청이 없어 굶주린 세포 표면에서 안테나 같은 뭔가가 돌출된다는 내용이었다. 돌출된 세포 소기관은 흔히 섬모(cilia, 纖毛)라고 불린다. 보통 이 소기관은 노잡이처럼 단세포인 짚신벌레를 움직이게도 하지만 기도(氣道)의 상피처럼 고정된 세포에서는 먼지나 세균을 붙잡은 점액을 목 밖으로 밀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최신 생물학>에 실린 논문에서 연구자들이 사용한 세포는 섬모를 써서 움직이는 능력은 없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과학자들은 세포의 표면에 돌출된 안테나 모양의 섬모를 운동과 결부된 소기관과 따로 구분하여 일차(primary)섬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꼬리를 움직여 정자가 움직일 때 또는 기도 상피세포가 섬모를 움직여 점액을 운반할 때 관여하는 단백질 묶음은 본질적으로 같다. 움직임을 담당하는 축(axis) 구조가 없는 일차섬모는 세포 안에서 주로 감각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2005년 논문에 등장했던 세포는 과연 무엇을 감지한 것일까? 분명 세포는 배양액의 영양소가 ‘적음’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 뒤 ‘셀’이라는 저널에 게재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혈청을 다시 공급받은 세포 표면에서 일차섬모가 눈 녹듯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즉 일차섬모는 굶주린 세포의 표면에서만 형성된 것이다. 그 뒤로 다양한 종류의 세포에서 일차섬모가 발견되었다. 심지어 지방을 저장하는 세포에서도 그 존재가 밝혀졌지만 섬모는 주로 우리의 감각기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밝음과 어두움을 감지하거나 색상을 구분하는 눈의 세포들도 표면에 섬모가 있다. 평형을 담당하는 귀의 세포 및 후각을 담당하는 세포들 모두 섬모에 의지해 자신의 소임을 묵묵히 수행한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나는 단식을 하는 사람들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나랑 마주했던 그 어른도 단식에 따른 생리적 변화가 바로 저 감각의 예민함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먹을 것이 부족한 환경의 변화를 인식한 세포들이 온갖 감각을 동원하여 먹을 것을 찾으려는 시도를 할 것이라는 정황이 익히 연상되는 것이다. 개별 세포도, 그 세포의 집결체인 생명체도 모두 긴급한 상황에 대응하고자 애를 쓴다. 

이렇듯 굶으면 세포 표면에서 형태학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만 세포 안에서는 자기소화(自己消化, autophagy)라는 세포 과정도 진행된다. 스스로(auto) 먹는다(phagy)는 뜻의 이 과정은 당장 긴요하지 않은 낡은 단백질이나 손상된 세포 소기관을 처분하여 세포가 굶주림을 모면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효모에서 이러한 현상을 오랫동안 연구한 일본의 오스미 요시노리 박사는 201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기도 했다. 오스미 박사 연구팀은 자기소화에 관계되는 유전자를 없애버린 몇 종류의 생쥐 새끼가 고작 12시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탯줄을 통해 어미로부터 영양분을 더 이상 공급받지 못하는 생쥐의 새끼가 초유를 먹기 전까지 자기 스스로 영양소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신생아도 마찬가지다. 출산 직후 신생아의 혈중 포도당의 양을 측정한 연구에 따르면 혈액 안의 포도당은 1시간이면 바닥으로 떨어진다. 정상적인 신생아들은 간에 저장된 글리코겐을 분해하여 혈중 포도당의 양을 회복하고 자기소화 과정을 통해 아미노산을 충당할 수 있기 때문에 별 문제를 겪지 않는다. 그러나 신생아에 대한 영양 공급이 늦어지거나 자기소화 능력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칠 수 있다. 성인들도 하루 정도 굶으면 간에 저장된 창고에서 뇌가 사용할 포도당을 우선 갹출하고 자기소화를 진행하여 아미노산을 충당한다. 하지만 근육에 저장된 글리코겐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지는 못한다. 본디부터 그렇게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근육에 저장된 포도당 덩어리는 포식자 동물로부터 재빠르게 도망치거나 먹잇감을 쫓기 위해 비축된 것이며 다른 목적으로 양도할 수 없는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았다. 잠깐 굶더라도 우선은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굶는 시간이 길어지면 근육단백질, 나중에는 지방산을 분해하여 입맛 까다로운 뇌를 먹여살린다.

굶주린 세포 혹은 생명체가 일차섬모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자기소화를 진행하기도 한다면 이 두 과정 사이에는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최신 연구에 따르면 이들 두 과정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섬모가 없으면 자기소화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아직 정확한 생물학적 전모를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뇌와 주변 기관 모두에서 벌어지는 이런 상호작용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일차섬모가 ‘실질적으로’ 인간의 모든 세포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최근 들어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접하면 나는 자주 뇌까린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모르고 있는 것일까? 과학의 길은 참 멀고도 멀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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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별로 어떤 게 더 나쁜 범죄인지 따질 생각은 없지만, 아동학대는 한 아이의 인생과 그 아이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삶을 파괴하는 범죄다. 대검찰청의 2015년 한 연구용역 보고서는 ‘피해자로서의 아동은 발달 단계에 있으므로 신체적·정신적·성적 가해행위가 성인보다 훨씬 큰 법익 침해를 야기할 위험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이들은 “별것 아니겠지”라며 넘길 수 있는 작은 학대 행위라도 아이에게 장차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이의 부모는 어떤가. 아이를 학대당하도록 뒀다는 자책을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 아이가 커가면서 조금만 어긋나도 과거의 학대 사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아이를 위험한 환경에 두는 국가와 사회를 원망할 것이다. 이로 인해 다니던 직장을 관두거나, 아이를 더 낳으려다 포기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그래서 아동학대범죄는 엄하게 처벌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형법’ 등에서 처벌하는 아동학대관련범죄 종류만 20개에 달하고, 범행의 경중에 따라 가중 처벌도 내릴 수 있게 해놓았다.

하지만 엄격한 법과는 달리 아동학대범들에게 내려지는 판결들을 살펴보면 관대하기 짝이 없다. 소변과 각종 오물이 묻은 휴지로 아이들 입을 닦는 등의 학대를 한 한 보육교사는 최근 판결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00여 차례에 걸쳐 아이들을 학대한 보육교사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지난해 11월 발간자료를 보면 아동학대범죄자의 75%가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 내지 벌금형을 받았다. 가끔은 아동학대범에게 중형이 내려지기도 하지만, 이는 이미 아동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뒤의 경우다.

국회입법조사처의 지난해 5월 보고서를 보면 국내 아동학대 피해아동 발견율은 2016년 기준 2.15‰(인구 1000명당 발견율)로, 미국(9.2‰)·호주(8.5‰) 등에 비해 턱없이 낮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001~2016년 통계를 보면 아동학대 신고접수 및 의심사례 건수의 일관된 증가추세를 보인다”며 “한국사회에 잠재적인 아동학대 사례가 만연한 상태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고 우려했다.

그나마 아동학대 범죄가 적발돼도 범행을 입증하거나 피해사실을 증명하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아동학대로 인한 피해를 막으려면 현실적으로 ‘예방’만이 최선책이다. 아동학대범들에게 형벌 외에도 아동복지법을 통해 학교나 학원, 보육기관 등 아동관련기관에 10년간 취업을 못하도록 제한하는 제도를 둔 이유였다. 누군가는 “가혹하다”고 할 만한 이런 제도가 아이들을 보호하고, 가정을 살리고, 사회 전체를 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에 최근 변화가 있었다. 지난해 6월 헌법재판소는 “일괄적으로 아동학대범에게 10년 취업제한을 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아동학대를 엄벌해야 한다는 취지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안에 따라 10년 제한이 ‘정말’ 억울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도 싶다. 헌재결정에 따라 법이 개정돼 12일부터는 범행의 경중에 따라 최장 10년까지 취업제한을 법원이 내릴 수 있다.

종전 아동학대범들에게는 환영할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법의 부칙이 개정돼 12일 이전에 아동학대로 확정판결을 받은 범죄자들의 취업제한이 기존 ‘일괄 10년’에서 ‘최대 5년’으로 대폭 감경된 것이다. 이에 따라 소변 묻은 휴지를 아이들 입에 들이댄 교사의 경우 예전 같으면 10년이었어야 할 취업제한이 3년으로 줄었다. 벌금형만 받은 학대범들은 1년만 기다리면 재취업이 된다. 취업제한도 일종의 형벌로 본다면 아마도 역대급 ‘감형 이벤트’가 아닐까 싶다. 예정보다 일찍 아동관련기관으로 돌아오게 될 학대범들이 모쪼록 마음을 고쳐먹고 재범에 나서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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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에 운이 좋으면 고수, 스승을 만나게 된다. 파울로 코엘료는 <히피>라는 소설에서, 여행길에 만난 스승 셋을 소개하고 있다. “첫번째 스승은 도둑이었죠. 집에 들어가려는데 열쇠를 잃어버렸지 뭐요. 마침 길 지나던 행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눈 깜짝할 새 문을 따는 재주를 지녔더군. 직업이 뭐냐 물으니 도둑이랍디다. 그는 날마다 실패하고 또 내일 또다시 도전한다고 했소. 두번째 스승은 개였죠. 목마른 개가 강물에 다가왔는데, 자기 그림자를 보고 무서워 뒷걸음쳤다오. 결국 개는 목마름을 참기 어렵자 정면 돌파를 결심, 강물에 뛰어들었죠. 순간 그림자는 사라지고 말았죠. 세번째 스승은 어린아이라오. 촛불을 들고 오길래 그 불 어디에서 났는지 물었지. 그러자 아이가 양초를 콧바람으로 훅 꺼버렸소. 여기 방금 있던 불은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며 오히려 묻더군. 비로소 신성한 불빛, 지혜의 불빛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깨닫게 되었지요. 이처럼 이야기, 춤, 명상기도 속에 참된 지혜의 불빛이 있다오.” 

노력하여 배우지 않으면 야만인이 되고 말지. 야만인의 입에는 추한 막말과 가짜뉴스. 잘근잘근 이웃을 못되게 씹어대니 입끝에 피냄새. 한 고고학자가 정글을 탐험하다가 식인종 부족에게 붙잡혔다. “우리도 이제 옛날 그 무시무시한 식인종이 아니니 안심해라.” 과학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식인종이 컴퓨터 앞에서 검색하고 있는 걸 보고 기절초풍. 쇼핑몰에서 신제품 바비큐 그릴을 검색하고 있더란다. 신종 야만인.

당대 고수를 찾아다니는데, 도둑과 개와 어린아이에게 배우려는 사람은 없겠다. 야만인들 같은 피 묻은 더러운 입들. 철 지난 반공을 팔아 밥벌이를 삼는 자들. 땅밟기 개종 여행이나 다니면 무슨 배움이 생기겠는가. 종교인의 입에서 피냄새가 가장 역하게 나는 아이러니.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빨래를 해서 널었다. 요즘은 귀를 자주 씻고 싶어진다. 세탁기에 귀를 넣어 깨끗이 세척하고 싶다. 상쾌해진 귀로 다정하고 다감한 이야기, 사람을 먼저 살리는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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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에 대한 예의 차원인 ‘조문’과 총성 없는 전쟁인 ‘외교’가 이율배반적으로 결합되는 조문외교. 세계 외교사 페이지에는 조문외교의 성패를 보여주는 사례·교훈이 빼곡하다. 1980년 5월 티토 유고 대통령 장례식에는 58명의 정상이  참석해 ‘인류의 정상회담’이라는 말이 나왔다. 장례식을 계기로 동·서독 정상회담도 열렸다. 주인공은 단연 소련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비동맹 노선의 상징 티토 장례에 나타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반면 부통령을 파견했던 카터 미국 대통령은 조문외교 실패 비난에 시달렸다. 1989년 2월 히로히토 일왕 장례 때 조문외교의 주역은 첸치천 중국 부총리였다. 중·일관계가 해빙되는 계기가 됐다. ‘놀랍게’ 당시 한국에서는 강영훈 국무총리가 조문사절로 갔다.

조문외교가 극한 논란을 겪은 경우가 1994년 북한 김일성 주석 장례 때다. 김영삼 정부는 외교가 아닌 정치로 개입했고, 정상회담을 할 뻔한 남북관계는 이후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상처를 입었다. 반면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애도 성명을 발표하고,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가 제네바 북한대사관으로 가서 조문했다. 이를 비난하고 나선 공화당을 뉴욕타임스가 사설로 꼬집었다. 사설 제목은 ‘어이, 이 양반아. 그런 게 외교인 거야’.

북한은 1994년 문익환 목사 별세 때 김일성 주석 명의의 조전을 시작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고위급 조문단을 파견하는 등 남북관계에서 중요 역할을 한 남측 인사들에게 적극 조의를 표해왔다.

고 이희호 이사장에 대한 높은 수준의 조문이 기대된 것도 그 때문이다. 고인은 2000년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2011년 12월26일에는 김정일 위원장 빈소를 찾아 상주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났다. 박지원 의원이 “정치적 의미를 떠나 반드시 조문사절을 보내야 한다”고 할 만했다. 북한이 어제 판문점에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 명의의 조화와 조의문을 전달했다. 4월 이후 일체의 남북 접촉을 끊고 있는 북한이 부담스러운 조문단을 피하면서 고인에 대해 예를 갖추는 방식을 찾은 셈이다. 조문외교의 신종을 찾을 만큼 작금의 남북관계가 미묘하다는 방증이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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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향기가 난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는 소설의 첫 문장이다. ‘그’라는 존재에 대한 아무런 정보와 서술 없이도 느껴지는 내밀한 설렘. 왠지 그는 갓 씻고 나온 듯한 말간 얼굴에 깊은 눈을 가진, 조금은 호리호리한 청년일 것 같다. 두툼한 살집의 동네 아저씨나 청결 강박증세를 가진 청년일 수도 있으련만, ‘비누 향’이라는 작은 단서가 주는 암시가 제법 강력하다.    

신체와 관련된 감각적 판단은 다분히 원초적이며 보수적이다. 좋은 향기는 안전하며 나쁜 냄새는 위험하다. 썩었거나 부패한 것들이라 간주되기 때문이고, 질병이나 죽음의 예후와 가장 가까운 것이어서 그렇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정신적인 불편함이나 악을 설명하는 경우에도 ‘더럽다, 역겹다, 두드러기 날 것 같다’ 등의 물질적, 신체적 오염을 뜻하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역겹다거나 토할 것 같다는 말은 역한 냄새의 다른 표현인 동시에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기택네는 식구들이 모두 ‘백수’로 피자 박스 접기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간다. 아들 기우(최우식)와 아빠 기택(송강호), 엄마 충숙(장혜진), 딸 기정(박소담·왼쪽부터)이 반지하집에 함께 있는 영화 중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청결치 못한 신체와 냄새에 대한 예민하고 불안한 심리는 오랫동안 악을 구축하는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하층민이나 경멸대상에게는 늘 비슷한 이미지가 사용된다. 어둡고 습한 곳, 냄새 나는 곳에 살고 있는 것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소탕할 수 있는 것들, 크기나 공격력에서 맹수나 인간에 비교할 바가 아닌 것들이다. 이 미물들에게 보이는 경멸과 불안감이 때로는 과도하고 호들갑스럽게도 느껴지지만, 실제적인 바이러스의 유무와 상관없이 이미지란 강력한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유태계 화학자이자 작가 프리모 레비는 증언한다. “나치는 유태인을 ‘독일인의 몸 안에 사는 더러운 기생충들’이라고 묘사하는 동시에, 화장실 출입을 못하게 했다. 이로 인해 독일인들은 수시로 길거리나 승강장에 쭈그려 앉은 유태인을 보게 되었고, 처음엔 동정하던 이들조차 우리를 역겨워하기 시작했다.”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치족의 부족 전쟁,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같은 민족절멸운동(제노사이드)에는 늘 “바퀴벌레”라는 묘사가 동반되었다. 조지 오웰 역시 계급을 나누는 데 있어서 역겨움이 차지하는 비밀스러운 역할을 한 문장으로 묘사한다면, “하층민은 냄새가 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화심리학자 폴 블룸은 신체와 관련된 정치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몸에 대한 역겨움은 타인을 인간성을 결여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고, 불행과 괴로움에 무관심하게 만든다. 이는 잔인함과 비인간화를 촉발하는 힘이 될 뿐만 아니라 응당 받아야 할 고통으로 정당화하며, 심지어 쾌감을 느끼도록 만들기도 한다.” 폴 블룸의 맥락으로 보자면, 특정 지역인들을 ‘홍어’라고 부르거나 세월호 희생자 시신을 어묵이라 조롱했던 행위 역시 그저 생각 없는 이들의 가벼운 언행이라고 볼 수 없다. 독한 냄새와 훼손된 신체에 대한 불쾌감과 두려움을 자극하여 차별의 정당성을 갖기 위한 어두운 심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혐오를 가진 사람들은 늘 신체나 정신의 상처를 희화한다.

영화 <기생충>에는 이러한 낯익은 배타성의 코드가 무수히 드러난다. 어느 때보다 직접적인 제목을 포함하여, 평소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바퀴나 곱등이 같은 벌레들, 지하실, 어둡고 비위생적인 공간, 비좁고 음습한 틈, 격리 수용되는 하층민의 모습들. 그러나 영화는 ‘반지하의 냄새’를 넘어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냄새’로의 확장을 통해 ‘반지하보다는 괜찮은 삶’이라고 안위하던 사람들마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며 자괴감을 불러일으킨다.

배타성이 강한 사회는 타인에 대한 선 긋기를 넘어, 결국 자신의 삶도 부정하게 만들며 결핍과 자기 연민, 우울감을 만들어낸다. 끝없이 올라가야 하는 욕망의 사다리 어디쯤에서 수시로 킁킁대며 나와 타인의 냄새를 확인해야 하는 세계는 황량할 수밖에 없다.

<박선화 마음탐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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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최근 농산물 도매시장과 관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주장이 나오고 있다. 농업인이 생산한 농산물이 제값을 받고 소비자에게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데 중요한 통로가 되는 도매시장에 대해 평소 가지고 있는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농산물 유통에서 도매시장은 매우 중요하다. 도매시장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진정 우리 농업인과 소비자에게 도움을 주는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근거와 논리가 필요하다. 이해관계자들의 파워게임 양상으로 진행되는 것은 시장과 정책 모두의 실패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85년 가락시장부터 건설하여 현재 전국에 33개의 농수산물 공영도매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도매시장 정책은 그동안 정부가 추진한 농업정책 중 가장 성공적으로 평가되며 세계적으로도 내놓을 만한 유통모델이다. 기존 후진적인 위탁상 중심의 유사시장을 흡수해 영세하고 교섭력이 없는 농업인들을 위한 근대적 도매시장과 경매제를 운영해 왔다.

도매시장의 핵심 유통주체는 도매법인과 중도매인이다. 도매법인은 농업인의 농산물을 경매를 통해 중도매인에게 판매하고 수수료를 받는다. 중도매인은 낙찰받은 농산물을 마트, 식당 등 수요처에 판매한다. 이러한 이유로 도매법인은 높은 가격에 팔고자 하고, 중도매인은 낮은 가격에 구매하고자 한다. 서로 견제관계인 두 주체 간 거래에서 결정되는 가격이 우리나라 농산물 거래의 표준 역할을 한다. 

물론 그동안 도매시장 운영 과정에서 유통주체별 역할과 경매거래제도에 대한 문제가 제기돼 왔고, 정부에서도 경매제도의 단점 보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시장교섭력이 낮은 중소 농업인들에게 ‘출하 선택지’를 늘려주기 위해서는 유통주체에 대한 진입규제를 없애고 도매시장 상인 수를 대폭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주장들이 농업인들이 출하하는 농산물의 판매가격을 높이는 결과를 얻을지, 아니면 상인들의 ‘구매선택지’만 늘려 농업인들의 거래교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지 냉정하게 검토해야 한다. 도매법인과 중도매인 간 견제와 균형을 고려하지 않고, 어느 일방의 혜택을 확대,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소 우려가 된다.

도매시장 유통주체에 대한 규제와 거래제도 개선은 농산물 제값 받기와 가격진폭 완화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관련 제도는 유통환경 변화를 고려하여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보완 발전되어야 한다. 다만 가격교섭력이 없는 중소 농업인들을 도외시하고 상인들의 흥정에 의한 거래방식과 가격결정 구조를 늘리는 것이 규제완화이자 자유시장경제라고 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공영도매시장은 농업인과 소비자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상인들은 맘껏 장사하되 공적인 통제를 받는 것이 근본 취지다. 도매시장이 농업인과 소비자를 위한 역할 및 기능이 크게 감소했거나 없어졌다고 판단되면, 거래시스템을 개혁하는 게 마땅하다. 다만 농민의 유일한 소득원이며, 소비자의 먹거리인 공영도매시장의 특성상 운영의 공공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정책방향이다. 정부에서 유통포럼을 운영해 도매시장 문제를 적극 진단하고 개선책을 모색하고 있다니 기대해 본다.

<김병률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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