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학교폭력 발생률은 지난해보다 비교적 낮은 편이지만 집단따돌림, 모욕, 사이버폭력 등 폭력 유형이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어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처음부터 학교폭력이 발생하지 않으면 가장 좋겠지만 학교폭력을 당하고도 말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 아니라 해결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곤 하기 때문에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학생들의 경우 용기를 내어 112, 117에 학교폭력을 신고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교육지원청에서도 학교폭력 예방 추진계획을 실시하고 있으며 학교폭력에 대한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교육지원청 단위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를 내년부터 운영할 예정이다.

경찰에서도 하반기 개학을 맞이하여 지난달 19일부터 10월 말까지 학교폭력 집중관리기간을 운영해 선제적 예방활동을 추진 중이다. 또한 학교전담경찰관을 정예화하고 법무부와 협업으로 ‘청소년경찰학교’를 운영하여 학생들의 경찰체험활동 및 학교폭력 예방 프로그램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장 단속활동 및 경미한 위반자에 대한 선도 프로그램 운영으로 재범을 방지하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청소년을 먼저 찾아 경제적 지원과 면담을 통해 내실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학교폭력은 다 같이 손잡고 풀어야 할 문제다. 학생, 부모, 교사, 경찰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뭉칠 때 학교폭력 없는 학교가 나타날 것이다.

<조현웅 순천경찰서 학교전담경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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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마침내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으로부터 ‘범죄인 인도 조례’(송환법) 공식 철회 발표를 이끌어낸 홍콩 시민들은 위대했다. 우산혁명은 피플파워를 실감하게 했다. 

지난 일요일 홍콩 공항이 시위대에 의해 가로막혔을 때 나는 그 한가운데를 걸어서 지났다. 공항으로 가는 마지막 전철역인 퉁청역에서 4㎞를 도보로 시위대 행렬을 가로질러 건너면서, 홍콩 시민들의 위대한 시민정신을 몸으로 겪었다. 

촛불혁명 연구자로서 홍콩의 우산혁명을 직접 목도하기 위해 나는 지난 8월18일 빅토리아 공원에서 있었던 집회에 처음 참여했다. 800만이 채 살지 않는 홍콩에서 이날 17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홍콩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우산혁명에 참가한 것이다. 집회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때, 갑자기 아열대성 폭우인 스콜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활짝 폈다. 형형색색의 우산들이 빅토리아 공원과 근처 코즈웨이베이역에서 하늘을 뒤덮었다. 우산혁명 기간 동안 가장 아름다운 평화시위의 현장이었다. 

범죄인 인도 조례’(송환법)를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이 8월18일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진 뒤 거리를 가득 메운 채 행진하고 있다. 앞서 시위를 주도하는 민간인권전선이 센트럴 차트로드까지 행진 할 계획에 대해 홍콩 경찰은 폭력 시위를 우려해 불허했다. 홍콩|강윤중 기자

거리로 모여든 사람들의 풍광은 2016년 촛불집회 때 서울 광화문역 근처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빅토리아 공원 쪽 방향에 있는 환승역에서 전철들은 사람들이 꽉 차서 정차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시민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촛불혁명 때 우리가 했던 그대로 평소보다 더 사람들을 배려하고 양보하고 염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만원 전철 안에서도 서로 밀치거나 먼저 가겠다고 부딪치는 사람이 없었다. 역무원들도 촛불 때 서울의 전철역 역무원들처럼 그랬던 것처럼 시민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시민들은 서두르지 않고 역무원들의 안내대로 질서를 유지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축제 같은 분위기에 환희를 느끼는 것 같았다. 새로운 가능성의 혁명이 홍콩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촛불이 그랬듯이 자발적인 시민들의 수평적 연결을 통해 우산은 자연스럽게 시민을 모으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 세계를 향해 외쳤다. 5개의 요구 사항이 있지만 그들이 핵심적으로 원하는 것은 ‘행정장관 직선제’이다. 우리나라의 1987년 민주화 때 대통령 직선제와 같은 맥락이다. 시민이 스스로 자신의 대표를 뽑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소한의 민주주의이다. 

최근의 우산혁명은 송환법 반대운동으로 전개됐지만 2014년 일어났던 우산혁명의 2기라고 할 수 있다. 2014년 일시적으로 패배했던 우산혁명이 더 성숙하고 강인한 모습으로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이 혁명을 사실상 이끌고 있는 민간인권전선은 50여개 시민단체의 느슨한 연대체로 이루어져 있다. 매번 집회에서 나아갈 방향은 수직적인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소셜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시민들과 소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촛불집회가 특정한 세력에 의해 좌우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 시민들의 참여로 완성되었듯이 지금 홍콩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지난 토요일 코즈웨이베이역 거리의 시위 현장에서 밤늦게까지 홍콩 시민들과 함께했다. 간간이 촛불시민연대의 손피켓도 흔들었다. 촛불과 우산이 하나라는 말에 홍콩 시민들은 환호했고, 한국의 촛불이 자신들을 지지하고 지원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한 시간 남짓 면담했던 민간인권전선 부소집자(vice convenor) 웡익모는 ‘홍콩은 홍콩이다’라고 강조하며 한국 촛불시민들의 지지를 다시 한번 요청했다. 우선 한국에 홍콩 시민들의 현장을 잘 알려달라고 했다. 

일요일 한국으로 돌아오는 공항길을 가로막은 시위대는 한목소리로 홍콩의 자치를 요구했다. 위대한 시민의 숲을 걸어나오면서 나는 그들의 절절한 요구를 육성으로 들었고, 세계사에 기록될 시민운동의 순간을 현장에서 경험했다는 점에서 뿌듯했다.  

송환법은 철회되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홍콩 시민들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은 행정장관 직선제이다. 이 시민운동은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촛불이 홍콩 우산에 지지를 보내야 하다. 촛불과 우산은 하나다.

<임채원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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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는 온갖 사람들이 갇혀 있다. 개중에는 장발장 같은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만, 진짜로 죄질이 나쁜 범죄자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인지 크고 작은 다툼이나 질서위반 행위도 곧잘 일어난다. 질서위반에는 상응하는 벌이 따른다.  

교도소의 징벌은 곱징역이라고 부를 만큼 험하다. 징벌을 받으면 독방에 가두는 금치는 물론, 텔레비전 시청, 신문 열람, 집필, 서신 수수, 실외 운동, 접견 등이 금지된다. 하나같이 수용자에겐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접견 금지를 당하면 천리길을 마다하고 찾아온 늙은 어머니가 자식을 만나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한다. 하루종일 좁은 감방에만 갇혀 있다가 겨우 30분 남짓 햇빛을 볼 기회도 빼앗기게 된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징벌을 받은 수용자는 1만8319명이었다. 직원 폭행처럼 형사처벌을 받는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86건)도 있지만, 가장 많은 건수는 ‘지시불이행’으로 5670건이 발생했다. 지시불이행의 대부분은 ‘입실 거부’로 모두 4580건이 발생했다. 수용자가 자기 방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다 징벌을 당하는 경우가 제일 많은 거다. 먹고 자고 씻는 등 수용생활의 대부분은 감방에서 이뤄진다. 가장 중요한 생활공간인데, 여기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거다.

징벌을 받더라도 감방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건, 감방에서 지내는 게 징벌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징벌로 인한 제약이 많아도 좋다는 거다. 너무 좁은 감방에서 여럿이 함께 지내며 진을 빼는 것보다는 징벌을 받으면 독방에 갈 수 있기에 오히려 좋다는 사람들이 많다. 입실 거부자들은 징벌을 자청하는 사람들이다.

관련 법률은 독거 수용을 원칙으로 제시하면서도(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 제14조), 독거실 부족 등 시설여건이 충분하지 않으면 혼거수용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원칙은 분명하고 일부 예외를 두었지만, 현실의 감옥에선 예외가 원칙이 되었다. 독거는 징벌이나 받아야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입실 거부 사태는 수용자의 잘못이 아니라 법무부, 나아가 대한민국의 잘못이다. 

좁아터진 감방은 감옥에 너무 많은 사람을 가둔 탓이다. 박근혜 정권 때부터 수용자가 급증했다. 살인, 강도, 절도 등의 주요 범죄가 부쩍 줄었는데 수용자는 늘어나는 이상한 현상이 생긴 거다. 이런 현상은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이 넘도록 멈추지 않고 있다. 박 정권 때는 4대악 척결이니 하는 슬로건이라도 내세우며 감옥을 미어터지게 만들었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렇다 할 설명조차 없이 지난 정권의 폐해를 답습하고 있다. 그저 음주운전 등의 범죄에는 가석방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는 등의 포퓰리즘만 돋보일 뿐이다. 정원보다 30% 넘게 가둬놓고도 법무부는 그저 태평하다.

곳곳의 감옥은 사람을 가두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낡았다. 안양교도소는 1963년 준공했다. 56년 된 건물에 수천명을 가두는 건 너무 위태로운 일이다. 잘 지은 아파트라도 30년만 지나면 재건축을 해야 할 텐데, 한국의 감옥은 요지부동이다. 강릉교도소는 49년 전 건물이고, 창원, 제주, 전주, 경주, 홍성, 부산, 공주, 청주, 원주교도소와 부산구치소는 모두 40년이 넘었다. 

상황은 심각한데 대책은 없다. 교정기관이 기피시설이라 지역주민의 반대가 많아 신축이 어렵다는 이야기만 수십년째 반복하고 있다. 서울동부구치소처럼 법원, 검찰청과 함께하는 법조타운 방식이라면, 주민들이 오히려 반길 텐데,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가장 큰 책임을 진 법무부 장관이 감옥의 과밀수용 해소를 위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선 시설을 둘러보기라도 하는지 모르겠다.

백범 김구 선생을 사표로 삼는다는 정치인들이 많다. <백범일지>도 필독서로 꼽히지만, 실제로 읽은 정치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이를테면 감옥에 대한 문제만 봐도 그렇다. 김구 선생이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그가 몸으로 겪은 감옥은 처참했다.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선생은 해방된 조국의 감옥은 일본제국주의와는 달라야 한다는 꿈을 꿨다. “구속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할수록 반대로 수인들의 심성도 따라 악화되어서, 횡령이나 사기죄로 들어온 자라도 절도나 강도질을 연구해서 만기 출옥 후에 더 무거운 형을 받아 다시 들어오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거다. 감옥에 보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거다.

김구 선생은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을)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했다. 체험을 통해 넓힌 새로운 지평이었다.

무릇 감옥은 이래야 한다. 그래야 범죄를 제대로 진압하고, 범죄꾼을 양산하는 악순환도 끊을 수 있다. 나라를 빼앗기고 자신의 몸마저 갇힌 상황이었지만, 선생의 인식은 남달랐다. 몸으로 세상을 배우고 익힌 운동가 특유의 통찰력이 빛났다. 선생이 감옥에 갇힌 건 1910년이고, <백범일지> 상권을 쓴 건 1929년이다. 109년, 또는 9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한국의 감옥은 여전하다. 좀 더 따뜻해졌고 교도관의 매질이 없어졌다는 것 말고 특별히 변한 것은 없다.

법정구속이 늘고, 형사사건에서 자유형을 선고하는 비율도 늘어났지만, 가석방의 문턱은 더욱 높아졌다. 입구는 넓어졌으나 출구는 더욱 좁아졌다. 그래서 과밀수용은 더욱 심각해졌는데, 실효성 있는 대책은커녕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지난 2년4개월 동안 감옥과 관련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갇힌 사람들은 정권교체의 의미를 실감할 수 없었다. 인권변호사가 대통령을 하고 형사법 학자가 법무부 장관을 하는 데도 감옥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장관이 바뀌면 어떨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불안하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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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했던 세상이 왁자지껄 시끄러울 때는 다툼이 있단 소리. 야곱이 결혼한 뒤 한참 만에야 친구를 만났다. “자네 부부는 어떻게 지내는가?” 야곱이 우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는 변했다네. 연애 시절엔 내가 주로 얘길 하고 아내가 들었지. 결혼 뒤엔 아내가 주로 얘길 하면 내가 듣게 되더군. 지금은 말이지, 우리 둘이 떠드는 얘기를 이웃사람들이 모두 듣고 산다네. 싸우는 목소리가 담을 넘거든.”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하루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한 달 행복하려면 차를 사고, 일 년 행복하려면 집을 사고, 평생 행복하려면 정직하게 살라고.

사랑과 진실을 품고 살 때 세상 또한 밝아진다. 일을 할 때도 사랑으로 행해야지. “사랑을 품은 가슴으로 일하지 않으려면 성전 앞문에서 구걸을 하는 편이 나을 거예요. 빵을 구울 때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빵맛이 쓸 뿐이죠. 괴로운 맘으로 포도주를 만들면 그 괴로운 마음이 포도주 속에 고스란히 담기죠. 천사처럼 노래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사람들이 결국엔 귀를 막게 될 것입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읽다가 밑줄 그은 구절. 영원한 것은 없지. 사랑도 물론이다. 굳게 각오하고, 이를 앙 물고 지켜내야 날마다 숨을 쉬게 되는 마음. 천사들의 합창, 사랑 노래를 듣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

밤송이가 누렇게 영글고 대추 열매도 굵어지고 있다. 조용조용 깊어가는 가을이다. 노란 불빛의 집들. 바닷가 마을 게가 기어 다니듯 조용조용 찾아온 밤이면 쓰르라미가 목이 터져라 운다. 그래봤자 야곱이 싸우는 소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 세계에서 가장 방귀를 잘 뀌는 ‘까스명수’보다는 턱없이 모자란 쓰르라미 목소리. 사랑으로 부르는 노래, 천사들의 합창으로 밤이 꽉 찬다. 현해탄 건너 부잣집 영감 ‘수표로 밑닦가’ 상이 아무리 태클을 걸어도, 우리들은 단단히 사랑하고 뭉쳐서 잘 이겨낼 거야.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면, 끝내 당당하게 웃을 수 있지.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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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옛 동료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입사 만 20주년이라는 인사였다. SNS 댓글로 옛 동료들 몇몇이 더 모였다. 대부분 여기저기 흩어졌지만 또 몇몇은 여전히 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다들 이모티콘으로 박수를 보냈다). 처음 넥타이를 맸을 때, 세기말이었다. 불안과 희망이 공존하던 때였다. 막 인터넷 콘텐츠 시장이 무르익기 시작할 때였다.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된, 드라마 속에서나 나오는 ‘PC통신’ 회사에서 일을 했다. 콘텐츠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BBS라 불리던 게시판 글 하나하나가 귀했고, 가치 있었다. 그렇게 생산된 콘텐츠를 기획하고 관리하다가, 콘텐츠를 직접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옮긴 게 지금의 일이다.

그러니까 콘텐츠를 다루기 시작한 게 만 20년 됐다. 읽을거리, 들을거리, 볼거리 등 정보와 재미를 담은 ‘콘텐츠’는 20년 동안 제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꿨다. 색깔과 모양만 달라도 신선했던 텍스트 콘텐츠는 영상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면 구닥다리로 평가받는 시대가 됐다. 신문사의 일이 그렇다.

비록 뉴스 콘텐츠는 공짜라도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으니, 콘텐츠를 돈 주고 보자는 결심을 한 게 몇 년 전의 일이다. ‘구독 경제’라는 산업에 편입했다. 카드 사용 내역서를 뒤져보니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세계적 영화 드라마 콘텐츠 플랫폼 N사에 지불한 돈이 월 만원이 넘는다. 여기에 없는 걸 보기 위해 국내 플랫폼 P와 T에 각각 몇천원이 또 들어간다. 음악을 듣는데 어쩌다 보니 2가지 서비스를 이용하게 됐다(아내와 같이 쓰는데, 동시 접속을 막아서다). 스트리밍서비스 B와 최근 열심히 광고를 하는 V를 쓴다. 둘은 사실 같은 회사, 대형 포털 N사의 서비스다. 이게 또 몇천원씩이다.

요즘엔 전자책 시장도 구독 경제 열풍이다. R사에 매달 몇천원을 꼬박꼬박 내고 있다. 그래도 이전보다 읽은 책의 숫자는 확실히 늘었다. 일 때문에 미국 야구책을 읽으려면 미국 전자책 A사를 이용해야 하는데, 여기도 구독 서비스가 있다. 아직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해, 그때그때 사서 읽는다. 지난 1년간 4권을 사는 데 든 비용이 약 6만원인 걸 보니 이것도 구독 서비스를 신청해야 하나 싶다.

미국 야구를 봐야 해서 MLB TV 1년 사용권을 매년 결제한다. 13만원 정도 한다. 미국스포츠잡지 S와 E의 1년 온라인 정기 구독 이용료가 각 4만5000원 정도다. 새로 생긴 미국 스포츠 뉴스 온라인 유료매체 A의 1년 구독료가 약 7만원이다. 앗, 카드로 빠져나갈 때는 몰랐는데, 합해보니 연 80만원이 넘는다. 집에서 보는 신문구독료 2부는 넣지도 않았다. 옆에 있던 아내가 한마디 한다. “추석이라 돈 쓸 곳도 많은데.”

그러고 보니 추석이 1주일 남았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새삼 곰곰이 생각하는데 거실 구석에 해마다 회사에서 추석선물로 보내준 스팸이 잔뜩이다. 그렇다, 한국 추석엔 역시 스팸이 아니던가. 콘텐츠에서 구독을 거쳐 추석을 지나 스팸에 도착했다. 돌고 돌았지만 길은 연결되어 있다. 20년 전이 세기말이었다면, 2019년은 더욱 암울하다.

가짜 뉴스가 문제가 아니라 스팸 뉴스의 시대인 게 문제다. 구독이면 끊으면 되는데 ‘공짜’라는 외피를 두르고 포털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진다. 인터넷 초창기, 요란한 제목으로 유혹하는 스팸메일 더미를 빼다 박았다. 메일 서비스 회사들은 너도나도 ‘스팸차단’ 버튼을 달았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역시 ‘스팸차단’ 기능이 필수다. 스팸뉴스는 뉴스 전체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치밀해서 친절한 뉴스는 스팸 더미에 묻혀 사라지기 일쑤다. 그러니 다들 덜 치밀해 덜 친절한 스팸생산 유혹에 빠진다. 

추석 밤, 휘영청 한가위 달에게 비노니 제발 포털에 ‘스팸뉴스 차단’ 버튼 하나 만들어주소서.

<이용균 스포츠부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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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양극화가 교육의 기회마저 양극화하는 현실. 이에 대한 공분과 개탄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필요한 과정일 것이고, 잠시 들끓다 사라지기보다는 고민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체감하는 불공정이 단지 불완전한 제도만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직장생활 초기, 다소 실험적인 업무를 제안하여 비정규직 팀을 이끈 적이 있다. 큰 고민 없이 모교의 조교실에 추천을 의뢰했고, 몇 명의 여성 후배들을 채용했다. 대졸 여직원이 극히 드물던 시절이었다. 젊고 재능 있는 여성직원 팀에 쏟아지는 관심이 제법 컸고, 대학 타이틀이 후광을 더했다. 활기 넘치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임원 한 분이 “너도 라인 만드니?”라는 농담을 던지셨다. 대개의 임원이 특정 대학 출신이라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무언가 잘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성과를 인정받아 팀원을 늘리게 된 이후로는 채용에 더 신경을 썼다. 

올바름을 실천했으니 성과는 물론 보람도 높아질 차례였다. 휴머니즘 가득한 드라마의 결말은 늘 그랬으니까. 그러나 어쩐 일인지 현실은 사뭇 달랐다. 자부심 강한 이전 팀원들과 새로운 팀원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고 갈등도 발생했다. 학력과 상관없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팀원이 들어와도 쉽게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선배의 뜻은 좋지만, 똑같이 취급하는 건 좀 불공평한 것 같아요”라며 속내를 드러내는 팀원도 있었다. 

다소 특별했던 팀의 위상도 점차 평범한 비정규직 팀으로 하락했다. 주어진 후광과 선망을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 어리석었나 고민도 했다. 부족한 성품에 성숙하지도 못한 초보 관리자가 지향했던 작은 정의의 결과는 드라마처럼 훈훈하지만은 않았고, 꽤 오랜 시간 진통을 감수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들 모두 비정규직의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내부에서 또 다른 계층과 순위를 나누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고질적 사회문제의 근원에는 프랙털 구조처럼 반복하며 확장되는 일상의 불합리가 존재함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나의 불평등과 타인의 불평등을 같은 무게로 인식하지 못하는 둔감성 혹은 이기심이 내 안에도, 그들 안에도, 조직 속에도 무수히 존재했다. 최근 외국대학을 졸업하고 국내 명문대학원에 입학한 학생이 집단따돌림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한 기사를 읽었다. 우리 사회의 학벌 이기주의는 정도를 넘어섰다. 

오랜 사회 경험 속에서 깨달은 엘리트주의의 허구성을 논한 글을 SNS에 올린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중에도, ‘본인의 학력이 낮아 억울한가 보다’라는 조롱 글이 달렸고, 그 글엔 다시 나의 이력을 검증하는 글이 달렸다. 학벌 사회를 바꾸자는 의견조차 스펙을 인정받아야 하고, 약자보다는 기득권자가 논해야 귀를 기울이는 세상이다. 각자의 마음 밑바닥에 자리한 서열중심의 사고와 배타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비정상적인 과열 입시나 경쟁 역시 여하한 제도나 공정한 리더의 등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평등의 리더십이 그리울 때 사람들은 노무현을 소환한다. 기득권을 누리기보다 소탈함과 높낮이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함께하던 그의 남다름을 추억한다. 그가 다시 오면 성공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학력을 이유로 무시한 명문대 출신들만이 아니라, 그가 눈 맞추려 했던 낮은 곳에 있는 이들조차 그를 얕잡아 보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가 권력의 후광을 이용했어야 한다고 애통해한다. 

강자는 강자라서, 약자는 약자여서 힘과 권력을 선호하는 것이 동물적 본능이다. 사람의 모습을 한 동물이 진정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부단한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한다. 동물성은 인간성보다 강력하다. 잠시라도 성찰을 게을리하면 이기의 발톱이 살을 뚫고, 오만의 어금니가 날카롭게 돋아난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앞서서 얼마나 누릴 것인가에 있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박선화 마음탐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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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의 간을 내먹는다는 말을 들으면 천민자본주의 사회를 주도하는 악덕 업주나 호시탐탐 백성들의 등골을 탐하는 탐관오리가 떠오른다. 하지만 직업 때문에 나는 출판된 과학 논문 정보를 제공하는 미국보건원 도서관 웹사이트인 펍메드(pubmed)를 방문한 뒤 벼룩과 간을 검색어로 집어넣고 그 결과를 살펴보았다. 논문은 더러 있었지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논문은 찾지 못했다. 간은 그렇다 치더라도 벼룩은 과연 심장을 가지고 있을까? 그렇다. 몸집의 길이가 2㎜에 불과한 물벼룩도 심장이 있어서 소화기관을 거쳐 온 영양소를 온몸으로 분배한다. 심장은 폐를 통해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온 산소와 간을 통해 역시 몸 ‘안’으로 들어온 영양소를 전신으로 분배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폐와 간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먹을거리인 산소와 영양소를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1차 관문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동물의 간과 폐가 소화기관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다른 기관과 비교하였을 때 간은 혈액이 들어오는 통로가 두 개라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심장에서 출발한 혈액은 뇌, 근육, 콩팥 그리고 간으로 들어간다. 이들 기관에 산소와 신선한 영양분을 전달하는 것이다. 반면 기관을 통과하면서 이산화탄소와 대사 폐기물을 회수한 혈액은 정맥을 타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심장을 중심으로 우리 몸은 이렇게 한 번의 순환을 매듭짓는다. 하지만 우리가 먹은 음식물은 몸의 중앙부를 관통하고 있는 소화기관에서 어떤 경로를 따라갈까? 인간의 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내부 기관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나는 소화기관을 ‘내 안의 밖’으로 간주한다. 입을 통해 들어온 공기가 폐를 거쳐 심장으로 가듯 소화기관에서 아주 잘게 잘린 영양소들은 주로 작은창자에 연결된 모세혈관을 타고 간 문맥(portal vein)을 거쳐 간으로 들어간다. 심장에서 하나 그리고 소화기관에서 하나 이렇게 두 개의 통로를 거쳐 간으로 혈액이 들어온다. 따라서 간은 음식물을 따라 들어올 수도 있는 독성물질이나 이물질을 선별하고 독성을 제거한 다음 이들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수행한다. 

이런 역할을 염두에 두고 과학자들은 간이 출입국을 관장하는 세관과 같은 업무를 맡는다고 비유적으로 말한다. 다른 일부 과학자들은 순환계에서 영양소를 끌어내는 일이 간의 본디 업무였다고 말한다. 사실 알을 낳는 동물들은 그들의 후손이 독립적인 완결체로 자라날 수 있도록 필요한 물질 모두를 노른자(난황(卵黃))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물질은 난황형성 단백질인데 영양소 집하장인 간에서 이 지질단백질을 만든다. 

1990년대 초반부터 한동안 간세포를 직접 분리해온 나는 현미경으로 간세포를 보면서 늘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뒤 초파리에 관한 논문을 읽다가 “앗, 간세포다”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고작해야 5㎜도 채 되지 않는 곤충의 몸 안에 인간의 간세포와 아주 흡사하게 생긴 세포가 발견된 것이다. 이들은 소화기관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온 지방과 단백질을 저장하고 그중 상당부분을 후손에게 할애한다. 벼룩이나 꼬마선충 같은 아주 작은 동물은 간의 역할을 겸한 소화기관에서 난황형성 단백질을 만든다. 동물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모든 척추동물들은 영양소가 풍부하지 못한 환경에서 진화했다. 곰처럼 육식을 하던 판다가 왜 대나무를 먹기 시작했는지 저간의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매일 체중의 10분의 1이 넘는 양의 대나무를 먹어야 한다. 하루 14시간 넘게 먹어야 간신히 살아갈 수 있고 번식을 치러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뭄이 들거나 병충해가 자심하면 대를 잇는 일을 대폭 축소하거나 아니면 상황이 좋을 때까지 번식을 유예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번식 과정에는 성호르몬이 관여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영양 상태에 관한 정보도 중요하다. 이 두 과정에서 간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간은 생식기관에 성호르몬의 재료인 콜레스테롤을 공급한다. 하지만 아미노산과 같은 필수영양소가 풍부한지 아니면 부족한지에 관한 신호도 동시에 내보낸다. 만약 영양소가 부족하다는 신호가 오면 생식기관은 성호르몬 신호가 오더라도 반응하지 않는다. 생식 주기를 멈춰버리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인간 여성에서도 벌어진다. 거식증으로 시달리는 여성들은 아예 월경을 거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알다시피 우리 인간은 알을 낳는 대신 배아를 자궁에서 키우는 전략을 택했다. 알을 낳는 일처럼 이 과업도 두 생물학적 성(sex) 중 여성에만 국한된다. 알을 낳지 않으니까 난황형성 단백질을 만들지는 않지만 산모는 이 고분자 물질과 같은 계열의 지질단백질 및 콜레스테롤을 생식기관에 공급하고 저장된 지방과 포도당을 태아에 공급하는 일을 한다. 여성들이 허벅지와 엉덩이에 지방을 더 많이 저장하는 생물학적 이유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생아에게 한동안 젖을 먹이는 일도 여성의 몫이다. 이때도 여성의 간은 생식과 대사 기능 사이에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필요한 조치를 다한다. 이런 점에서 여성의 간은 일종의 생식기관이다. 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주도하는 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물질 대사의 정치(精緻)함은 남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남성의 혈액은 에스트로겐의 양도 적고 그 호르몬을 인지하는 수용체 단백질도 여성의 3분의 1에서 5분의 1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여성과 남성의 간은 다르다. 흔히 남성과 여성의 성차를 말할 때 뇌의 기능을 언급하지만 남녀 간 뇌 유전자 발현의 차이는 14%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간의 유전자는 양성에서 72%가 다르게 발현된다. 주로 지방 대사, 면역 그리고 독성물질의 대사와 관련된 유전자들이 여성의 간에서 특별히 더 활성화된다. 지방 조직 유전자의 발현도 68%의 성차를 보인다. 먹고살며 후대를 계승하는 일에 남성은 여성들에게 커다란 생물학적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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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의 강연을 들었다고 하는 분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  자녀의 대입 자기소개서를 첨삭해 줄 수 있을지를 물었다. 사실 이러한 요청은 이전에도 한 번 받았고 가끔은 이보다 더욱 특별한 일도 일어난다. 

나는 그에게 “죄송하지만 제가 요즘 글을 쓸 시간도 부족해서요, 그리고 제가 중등교육의 전문가도 아니니 그런 일을 잘하는 분들을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치동이라든가 하는 데서 이미 정보를 많이 얻었고 첨삭도 받았지만, 그러면 너무 ‘관리’를 받은 티가 나니까 나에게 한 번 더 관리를 받고 싶었던 것이라고 했다. 내가 다시 한번 어렵겠다고 하자 그는 대한민국의 엄마로서 살아가는 것이 참 어렵다면서 작가님도 아이가 크면 느끼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이를 대학에 보낼 생각이 별로 없다고, 답하고 말았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사실 정말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왜 아이의 자기소개서에, 그의 인생에 관리가 필요한지. 많은 이들이 어떻게든 아이를 명문대에 보내고 싶어 한다. 위법과 편법의 범위를 넘나들면서 법이 허락하는 그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한다. 특히 당사자가 아닌 그 부모들이, 혹은 한 가문이 총력전을 기울여서 한 개인을 ‘관리’한다. 그러나 나는 아이가 입시를 치를 나이가 된다고 해도 굳이 그러한 세계에 아이와 함께 들어가고 싶지 않다. 아이도, 나도 행복하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아이가 조금 더 좋은 대학에 가게 된다고 해도 나는 아이의 발을 잡고 말리고 싶다. OO아, 지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 하고. 그가 공부하며 행복하다면 물론 공부를 선택하기를 바란다. 본인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확신이 있다면 아무래도 괜찮다. 그 무엇이든 결국 온전히 그에게 달린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과연 무엇을 선택한다고 해도 개인이 행복할 수 있는 곳인가는 잘 모르겠다. 유치원생인 나의 아이는 일주일에 한 번 수영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모든 아이들의 수영모 색깔이 다르다. 태권도복의 띠가 흰색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것처럼 그들의 레벨에 따라 그 색을 다르게 해 둔 것이다. 부모들이 수영장 카페테리아에 앉아 통유리 너머로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수영모를 쓰고 강습을 받는다. 어쩌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보내는 모든 공간에 저마다의 색과 숫자가 있고, 그 구조 안에서 자연스럽게 부모와 아이가 함께 타인과 경쟁하고 있을 것이다. 

학부모와 교사, 특히 자신을 닮은 학생들에게 보내는 자신의 교육론을 쓴 고등학생, <삼파장 형광등 아래서>의 노정석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우리의 인생에서 어떤 숫자가 우리의 행복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어젯밤 전투에서 죽은 전사자의 수, 오늘 일어난 자동차 추돌사고의 사망자, 테러 희생자 같은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에 따르면 숫자는 입시제도가 만들어 낸 허영이고 가짜행복일 뿐이다. 공부라는 것은 더 배우고자 하는 개인의 욕구에서 나온다. 부모도, 학교도, 사회도, 자녀와 학생 그리고 젊은 세대들이 배움에 대한 욕구를 스스로 가질 수 있게 그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처럼 그들을 경쟁과 관리에 매몰시키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전화한 학부모에게 나는 “교수도 대학에서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가장 기뻐하는 일은 누군가가 자신의 논문을 읽어주는 일입니다. 자녀분께서 면접을 볼 때 그들의 최근 논문의 제목과 초록만 읽고 들어가도, 가장 인상적인 학생으로 남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이 역시 대치동 전문가들이 하는 관리의 영역인지, 아니면 대학에서 오래 공부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환상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의 아이가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한다. 경쟁과 관리라는 단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이 누구인지 더욱 명확히 알게 되고 그로 인해 행복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만큼 큰 행복은 없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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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 위협은 이제 더욱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여객기와의 충돌, 공항 마비, 교도소 내 물품 반입, 드론 추락으로 인한 사망이나 부상 등 세계적으로 드론 범죄나 사고가 급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드론 관련 범죄나 위협이 매우 심각해지고 있다. 불법촬영 범죄가 늘어나고 있고, 드론 추락으로 인한 기물파손이나 인명피해 발생도 증가하고 있다. 올해 제주도에서는 드론 불법비행으로 항공기들이 긴급 운항정지를 하기도 했다. 국가1급 중요시설인 원자력발전소에의 드론 침입은 그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럼에도 우리의 드론 위협 대비는 미비한 수준이다. 대부분의 드론 비행 관련 불법행위는 형사처벌이 아닌 과태료로 규정되어 있어 실질적인 처벌이 어렵고 형법 등 기존 법률들도 신기술에 대한 적용이 쉽지 않다. 불법드론을 감지하거나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기술적인 대응 시스템도 가격이나 활용성, 표준화 등의 문제로 아직까지 보편화되지 못하고 있다.

시대 변화에 따른 기술 발전에 맞춰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의무이다. 드론에 대한 탐지, 식별, 무력화 체계를 구축하고 불법드론을 규제할 수 있도록 관련 법령 및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드론산업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과 함께 드론으로부터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뒤늦은 행정과 구멍막기식 법률 보완만으로는 국민안전과 국가안보를 보장하는 일이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이동규 경찰인재개발원 생활치안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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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주류는 보수이고 그 중심에 법조가 있다. 이 법조에서 대통령을 두 번 냈는데 노무현과 문재인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자 가장 강하게 반발한 그룹이 법조다. 경기고는커녕 그 흔한 서울대 출신도 아닌 고졸의 노무현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나이도 많은 상고 출신이 떡하니 연수원 교실 가운데 앉아서 말이야….” 수십년 전 기억까지 끌어다 미워했다. 합격자가 겨우 60명이던 시절 사법시험에 붙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법시험 합격은 법조에서 시민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검찰에 불려 다니다가 목숨을 끊자, 얼음장 같은 말로 조소하던 그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험과 성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곳이 법조다. 경기고를 졸업해도 서울대에 붙지 못하면 소용이 없고, 같은 서울대라도 법학과를 졸업해야 한다. 이런 잣대의 최정점에 사법연수원 졸업 성적이 있다. 더 이상 수험생이 아닌 예비 법조인을 상대로 고도의 논리력과 분석력을 강도 높게 검증한다. 머리 좋은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렇게 나오는 연수원 순위이기에 서로들 인정한다. 목포상고 출신에 성균관대 야간대학을 졸업한 연수원 5기 수석이 김오수 변호사다. 연수원 수석인 그를 상고 출신이라거나, 야간대학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이런 수석들 가운데서도 우수하다는 사람이 12기 김용덕 전 대법관이다. 자신의 능력을 지난 35년 법관 생활로 입증했다. 

김 전 대법관이 수석이던 해 차석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1980년 4월 학생시위를 주도하면서 2차 시험을 치렀고 유치장에서 합격했다. 연수원 순위에 합산되는 사법시험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연수원 시험만으로는 문재인이 수석이라는 얘기도 있다. 김용덕보다 우수한 사람이 문재인 아니냐고 하면, 법조인 누구도 대꾸하지 못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에게도 문재인 같은 친구가 있다”고 한 데는 이런 의미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 대통령이 법원개혁의 적임자로 택한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거치지 않은 김명수 춘천법원장이다. 김 대법원장을 임명한 것 자체가 개혁이고 성적과 같은 낡은 틀을 부순다고 했다. 

하지만 법원개혁이 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최근 사법행정자문회의라는 기구를 대법원이 만들었다. 민변에서는 “개혁안이라 부르기 어려우니 철회하라”고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농단 핵심인 법원행정처 개혁안을 만들라고 지난해 10월 지시했다. 이에 법원 내부독재를 막으려면 외부인사가 과반인 기구가 법원행정처를 대체해야 한다고 사법발전위원회 추진단이 건의했다. 김 대법원장은 이 의견을 무시하고 행정처를 사실상 부활하는 방안을 밀어붙였다. 이 부활안은 추진단이 생기기 전인 같은 해 8월에 법원행정처가 만든 비밀문건임이 경향신문 보도로 드러났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비밀문건대로 추진했고, 이것이 민변도 반대하는 사법행정자문회의다. 

왜 이런 일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달리 법조장악 조건을 갖춘 듯 보이는 문재인 정권에서 벌어질까. 흔히 생각하는 진보와 보수, 개혁과 반개혁이 쉽게 구분되지 않고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곳이 법조이기 때문이다. 당장 사법농단 사건을 주도한 판사들 상당수가 우리법연구회 소속이고, 법원행정처 권력화는 노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작품이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이용훈 대법원과 양승태 대법원은 다르지 않다. 이들끼리 누구는 진보이고 누구는 보수라고 말해 정권의 신임을 돌아가며 얻을 뿐이다. 노 전 대통령이 민주화에 헌신했다고, 문 대통령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법조라는 거대한 집단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법조에는 단단하고 치밀한 자기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요즘 법원의 권위 회복을 호소하는 판사들이 양승태 대법원을 무너뜨린 사람들이다. 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한 대통령이라도 쉽게 장악하지 못하는 곳이다. 지난해 사법발전위원회 추진단이 사법독재를 극복한 유럽처럼 주권자인 국민이 사법부 감시에 관여하는 방식이 우리에게 좋겠다고 건의했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관 대다수의 뜻을 내세워 거부했다. 실제로 법관 다수가 시민의 통제를 거부한다. 이 무렵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개혁을 추진할 법무장관에 조국 서울대 교수를 지명했다. 지금은 금수저의 상징이 되어 있지만 진짜 금수저가 수두룩한 법조에서는 사법시험 출신도 아니지 않으냐는 말부터 나왔다. 

조국 후보자가 금수저들의 실상을 드러내며 위기에 몰리자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수사에 착수했다. 청문회가 무산되자 다시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그로기로 몰고 있다. 이제 조국 후보자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검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검찰이 정치를 주도하고 흔들지 못하게 만들자는 것이 조국 후보자의 신념이었다. 노무현에 이어 문재인마저 법원개혁과 검찰개혁에 실패한다면 당분간 희망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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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우리나라 최초로 ‘성희롱’에 대한 법적 판단이 이뤄졌던 일명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의 1심과 2심의 판결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차이점이 발견된다. ‘기기교육 과정의 성희롱 여부’ 사실판단에서 1심은 피고 신 교수가 기기교육 시 원고 우 조교의 몸에 의도적이고 불필요한 접촉 행위를 지속해 왔다고 보았다. 반면 2심에선 같은 행위에 대해 신 교수가 우 조교의 몸에 접촉한 것은 기기조작 방법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보고 원고 패소를 선고했다.

이처럼 적법과 불법의 경계는 법관의 개인적인 상황 감수성의 차이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같은 행위에 대한 법적 사실관계 구성에서 소위 ‘법 감정’과 개개인의 경험 차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껏 사법기관에 대한 ‘대중 정서’는 이러한 법관 혹은 검사의 정황 감수성에 깊은 불신을 표한 때가 많았다. 여성의 입장에선 여성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법관이 내리는 판결에 공감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소위 ‘있는 자들을 위한 법’을 비판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법이 기득체제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적용되는 현실에 분노한다. 

특히 ‘법무부 장관’이라는 자리는 이러한 ‘법’ 전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개혁을 향한 기대 모두를 상징한다. 따라서 법무부 장관에게 기대되는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이러한 ‘일반의 법 감정’에 준하는 정황 감수성이며, 이는 서민이라 불리는 대다수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치와 수준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 이에 많은 국민들이 이러한 ‘국민 정서’와 배치되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의구심을 표명해온 것은 당연하다.  

특히 많은 젊은이들에게 조국 후보자 자녀의 소위 기득권 교육 사다리 문제는 심각하게 좁은 취업의 문, 노력에 비례하지 않는 각종 사회적 이권의 문제와 맞물려 불평등의 문제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 불평등 감수성의 실체는 단지 언론에 선동된, 그저 조국 후보자 개인에게 과도하게 집착한 선택적·단죄성 도덕 감정만으로 매도될 수 없다.  

일부 인사들은 이러한 대중적 의구심 자체를 반대쪽 언론의 선동에 미혹된 것으로 보고, 이를 사법개혁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기까지 한다. 물론 조국 후보자 가족들에 대한 지나친 사적 관심과 비난의 정서는 과도하고 선동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그와 그가 속한 집단의 삶의 궤적이 국민 정서에 괴리되는데도 왜 적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규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 사태는 정치 공학과 전술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있다. 또 조국 후보자 개인과 그 가족들만의 문제로 협소화될 수 없다. 

같은 기자간담회를 두고도 평행선을 달리는 평가처럼, 지난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양 진영 간 깊은 불신의 이념에 갇혀 ‘조국’이라는 상징을 해석하는 데 몰입하고 서로를 비방하는 역사를 되풀이하고 끝난다면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가 별것 아닌 ‘적법한 것’이라 보는 입장과 하루하루 피 말리는 취업·입시 전선에 서서 개인의 노력 외에 어떤 사다리도 꿈꿀 수 없는 이들이 느끼는 ‘적법’의 지점은 다르다. 그리고 이 지점에 정치·사법 개혁을 향한 염원이 있다. 조국 후보자에 대한 의혹이 결국 모두 ‘적법한 것’이라 해도, 이번 일로 터져 나온 젊은이들의 공분을 ‘우매·선동’이라는 말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전략과 전술이 중요하다 해도.

<이지영 | 연세대 법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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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린 곳은 이층집과 다세대 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동네였다. 좁은 골목이 여러 갈래로 뻗어 있고, 길모퉁이에는 큰 슈퍼마켓이 있었다. 토요일 한낮이니 어디로 놀러 가지도 못한 아이들이 따분한 얼굴로 슈퍼마켓이라도 들락거릴 만한데, 웬일로 아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길옆에 붙어 있는 벽돌집 계단에는 깨진 스티로폼에 심어놓은 나무가 고드러져 꺾여 있고, 그 집과 마주하고 있는 집 현관 유리문은 깨진 채 활짝 열려 있었다. 재개발로 곧 사라질 동네였다. 동네 사람들은 다 떠나버렸고, 남은 이들도 머지않아 떠나야만 하는 곳. 과거에는 학원과 음식점이 있어 부산했을 상가 건물은 깨지고 비틀어지고 더럽혀진 채 버려진 무엇 같았다. 

버려진 것들은 대개 쓸쓸하면서도 흉물스럽다. 2층 비어 있는 태권도 학원 유리문에 둘둘 감겨 있는 쇠사슬과 자물쇠마저 섬뜩한 그 건물 4층에 그림을 그리는 그가 있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오래된 건물처럼 묵직한 그림들이 등을 붙이고 빼곡하게 서 있었다. 곧 전시회를 연다는 작가는 물감이 튀어 있는 방에서 작은 선풍기를 틀어놓고 여름을 난 모양이었다. 전라도에서 구한 흙을 20t이나 갈아 썼다는 그의 그림은 그가 형상화한 세상이었다. 그 특별한 세상 앞에서 내년 봄에는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주중에 서너 곳을 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쳐 얻은 수입이 적어 대출받기가 수월했다는 흔한 얘기를 들었다. 없이 살아도 욕심내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색깔을 갖고 싶다는 그는 그래도 잘됐으면 좋겠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작가들이란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리라 하면서 세상이 봐줬으면 하는 욕망을 감춘다. 예술은 ‘순수’해야 하며, 욕망은 순수하지 않다는 믿음이 아직 존재하는 세상이라. 

그와 두런두런 얘기하는 동안 해가 기울어 조용한 동네를 나와 텅 빈 버스를 탔다. 버스는 이내 재개발이 끝나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고층 아파트는 높아지고 싶고, 남들과 같아지고 싶은 도시의 욕망이다. 고층 아파트가 자꾸 들어서는 건 싫지만, 가난한 작가의 욕망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의 욕망은 무엇인가.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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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맞아 수입 소고기와 조기, 배 등이 국내산으로 둔갑하거나 수입신고를 거치지 않고 불법 판매되는 등 농축산물 불법 유통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단속기관에서는 명절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있지만 제수용품 수요가 급증하면서 외국산을 국내산으로 둔갑시켜 판매하는 부도덕한 상술은 여전하다.

농산물품질관리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원산지표시 위반 적발 대부분이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에 집중됐다고 한다. 현행 ‘농수산물의 원산지표시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원산지 허위 표시, 위장 또는 혼합 판매 행위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형사 처분을 받게 되고, 원산지를 미표시하면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을 받게 돼 있다. 그러나 그동안 법 위반으로 엄중한 처벌을 받은 예는 거의 없고 대부분 약간의 벌금을 내는 데 그쳐 국민의 건강과 건전한 농산물 유통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원산지표시제는 수입품의 국산 둔갑 방지와 소비자의 알권리 신장에 기여하고, 갈수록 수입 농산물의 관세 문턱이 낮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농업과 소비자의 안전한 먹거리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다.

수입품을 국산으로 속여 판매하는 일은 명백한 범죄행위로 처벌을 대폭 강화하여 농업인과 소비자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지금 같은 솜방망이 처벌로 농산물 원산지 위반이 근절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밖에 안된다.

<이재학 | 농협경주환경농업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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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송건호는 1979년, ‘이승만 박사의 정치사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李박사처럼 시비가 많았던 사람도 드물지만 그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인물도 드물다. 그가 말하는 ‘국가’란 곧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인 이승만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평가, 즉 그가 미국을 협박하여 안보 자원을 얻어낸 건국의 아버지(애국자)라는 주장과 해방 후 새로운 점령자인 미국으로의 종속을 더욱 강화시켰다는 입장(사대주의자)은, 동일한 논리가 아닐까. 이광수의 ‘친일 내셔널리즘’처럼, 그에게 미국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겸사겸사 좋은 일이었다. 애국도 하고 국부로 등극했으니 말이다. 

1946년 10월, 당시 이승만을 취재한 시카고 선(紙) 특파원 마크 게인의 평가대로, 그는 파쇼가 아니라 파시즘보다 2세기 이전인 ‘(무능력하면서 왕족 행세나 하는) 부르봉파(派)’ 수준의 인물이었다. ‘미국 박사 이승만’은 근대의 상징이 아니라 봉건적인 인물이었다는 언급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74년이 과연 ‘진정한 광복(光復)’의 시간이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언제나 우리의 8월은 예사롭지 않다. 특히 올해는 아베로부터 시작된 도발과 그 파장으로 인해 대내외적 대립이 유난했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어온 논쟁,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 지배, 약탈했고 우리는 저항했다”와 “일본 덕분에 근대화가 도입, 실현되었다”는 이분법이 여전히 반복되었다. 

지구상의 모든 근대는 식민지를 동반한 근대화였다는 점에서, 위의 두 가지 주장은 동일한 논리다. 제국주의가 수탈을 하려면 식민지에 철도와 항만을 만들어야 하고, 노동력도 착취해야 한다. 당연히, 이러한 과정이 일본 우익의 논리대로 한반도를 문명화시킨 것은 아니다. 동시에 식민지 국가에는 부역자가 있기 마련이며,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이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지위를 가졌던 것도 아니다. 그들도 내부의 계급과 성별, 인종에 따라 근대화의 경험은 천차만별이었다. 서구 역시 근대 국민 국가는 지향이었을 뿐 현실이 아니었다. 국민들 간의 불평등은 지금도 여전하다. 여성은 이등 국민이었고, 흑인은 노예였다. 국가 단위를 넘어서(트랜스 내셔널) 사유하지 않는다면, 흑백 논리는 지속될 것이다. 

역사는 깔끔하지 않다. 역사는 팩트라기보다는 해석, 여파(餘波)에 가깝다. 팩트도 누군가의 기록이며 인간의 인식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정사(正史)나 정명(正名)을 시도하는 작업은 위험하다. 배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올바른’ 역사는 다양한 목소리들의 경합 과정에서의 윤리를 의미하는 것이지, “기록이 없기 때문에 군 위안부는 없었다”거나 “증언은 무조건 진실이다”라는 주장은 모두 신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진보와 보수 불문, 한국 사회의 여론 주도층은 스스로를 양 진영의 대표자 혹은 순교자, 저항자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입장이 유일한 진실이라 확신한다는 것이다. 우리 내부 인식의 분단체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문화 지체 현상’을 겪었다. 이제는 좀 더 나은 논쟁을 할 의무가 있다. ‘친일파’ ‘빨갱이’처럼 편리한 정치적 도구(낙인)가 있는 한,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 사회·문화적 검열이 국가보안법보다 무서운 세상이다. 예전의 다른 목소리는 ‘민주화 열사’였지만, 지금은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증류수 같은 순수한 현실은 없다. 하물며 식민 지배와 피지배로 얼룩진 근대의 글로벌 자본주의체제에서 문화의 잡종성(hybridity), 모순은 당연하다. 식민주의는 한일합병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가 1945년 8월15일 중단된 그런 체제가 아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은 싫어하지만 ‘일본산(産)’은 좋아한다. 한국 사회에서 반도체 부품만 일본의 것인가? 재일 조선인의 노동 없이 일본의 근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일본의 경제 성장을 한국전쟁과 한반도 분단 없이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유는 식민주의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 이른바 포스트 콜로니얼이라는 상황 인식이 아닐까. 포스트 콜로니얼이 ‘~ 탈(脫·de), 탈식민주의’로 번역되면서 마치 식민주의가 끝난 것처럼 오해되고 있지만, 식민주의든 자본주의든 가부장제든 경험은 몸에 각인되기 마련이다. ‘포스트’는 정확한 번역이 불가능하다. 반대, 대항, 변환, 넘어섬, 해체, 문제 제기, 극복 등 다양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국민국가, 포스트 휴먼처럼 포스트는 ‘어떤 것 자체이면서 더 이상은 그것이 아닌 것’에 가깝다. 공식적 주권 회복 이후에도 지속되는 식민주의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피해의식이나 선진국 콤플렉스 대신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과정이 진정한 탈식민 아닐까. 

‘이승만 학당’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승만의 정치경제사상, 독립운동과 건국의 업적을 연구, 교육, 홍보하는 곳이다”. 이승만에게 ‘정치경제사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지만, 나는 이런 학당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승만 학당은 그의 업적을 홍보하는 곳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찬반 논쟁, 식민지냐 근대화냐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논쟁의 장이 되어야 한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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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이 세상을 바꿔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촛불혁명의 여정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더 많은, 더 단단한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나는 그 길을 ‘자치분권’이라고 부르고 싶다. 

‘자치(自治)’의 주체는 시민이다. 시민 스스로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자치는 의지나 신념만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시민이 결정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가 뒷받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분권(分權)’이 함께 가야 한다. 분권은 중앙에 집중된 권한을 지방정부와 나누는 것을 말한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을 통해 우리 국민은 대통령 직접선거권을 쟁취했다. 1995년엔 지방자치제가 부활돼 지방정부의 장을 주민투표로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서열화된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는 여전히 우리 사회 공공 시스템의 근간으로 작동하고 있다. 전국 226개 지방정부는 모두 제각각의 지리적, 경제적, 문화적 특성을 갖고 있다. 지방정부들은 지역주민들이 처한 삶의 모습과 상황에 따라 맞춤형으로 사회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지방정부들은 여전히 중앙정부가 하달한 사무를 처리하는 지방사무소 역할에 머물러 있다.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재원도, 법적 기준 마련도, 이를 시행할 인적 자원의 규모와 조직 형태도 모두 중앙정부가 정해준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지방정부의 공무원들은 중앙정부가 내려준 지침대로 집행하는 것이 모범적인 공무수행 방식이라는 사고가 몸에 배어 있다.

권한이 있는 곳에 책임이 생긴다. 중앙부처가 독점하고 있는 권한을 지방정부들과 나누면 지방정부는 자율성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려 더욱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은 지방정부의 성숙한 정책 파트너로 성장할 것이다. 자치분권이야말로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주권을 광장의 민주주의를 넘어 동네에서 작동하는 일상의 민주주의로 바꾸는 원동력인 것이다.

지난 3월26일,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에 제출되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30년 만에 대대적인 손질을 한 이 법안이 국회에 발이 묶여 있다. 국가사무의 일부를 지방정부에 포괄적으로 이양하는 내용을 담은 ‘지방이양일괄법’ 역시 같은 처지다. 얼마 남지 않았다. 국회는 자치분권의 일보진전을 위해 지금이라도 힘을 보태야 한다. 국민의 뜻에 부응하는 20대 국회로 유종의 미를 거두길 바란다.

<염태영 | 수원시장(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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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 토론회에서 우리나라 40대의 사회학에 대해 발표했다. 40대를 어떻게 부를까를 놓고 내가 선택한 이름은 ‘낀낀세대’다. ‘낀낀’에는 86세대와 2030세대 사이에 놓인, 앞과 뒤가 다 막혀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낀낀세대는 20대였을 때 ‘X세대’라 불렸다. X세대는 작가 더글러스 쿠플랜드의 소설 <X세대>에서 유래했다. ‘X’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앞선 냉전세대나 히피세대와는 다른,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였다. 이들은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탈권위적 의식을 갖고 있었고, 소비문화에 익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성을 중시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 세대를 ‘자유의 아이들’이라고 이름 짓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X세대의 다른 이름은 ‘신세대’였다. 지금 마흔을 넘긴 이들은 1990년대 초·중반 뜨거웠던 신세대 논쟁을 기억할 것이다. 논쟁의 불을 댕긴 것은 1993년 미메시스가 발표한 책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였다. 그 부제는 ‘더 이상 탄원은 없다, 돌파하라’였다. 이들은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와 위선적 성격을 거부하고 신세대의 감성 및 문화를 적극 옹호했다.

사회학자 박재흥은 신세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개인주의·탈권위주의·감성주의·소비주의를 제시한 바 있다. 이 경향 가운데 내 시선을 끈 것은 신세대가 드러낸 개인주의 성향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신세대는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어 했고, 타인을 의식하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욱 충실하려 했던 첫 번째 세대였다. 86세대의 이념주의적 구속성에서 벗어나 신세대는 개인의 감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로부터 결코 작지 않은 세례를 받은 게 분명해 보였다. 이 점에 착안해 나는 신세대를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주의 세대’로 명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신세대의 개인주의는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성립된 97년체제는 개인주의와 연관성이 높은 신자유주의를 자신의 경제원리로 삼았지만, 이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시장에서의 개인의 경쟁력을 특권화시키는 ‘시장적 개인주의’였다. 이 시장적 개인주의는 신세대에게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압박을 강제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감성적 개인주의’와 결합해 신세대의 복합적 내면을 구성하게 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1990년대로부터 시간이 흘러 2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이제 낀낀세대가 된 이들의 내면풍경이다. 젊은 시절 품게 된 감성·사유·세계관은 나이가 들면서 변하지만, 동시에 쉽게 퇴색하지 않는 도장의 붉은 인주처럼 선명히 각인돼 있기도 하다. 오늘날 낀낀세대의 내면세계는 민주화의 가치에 공감하면서도 그 엄숙하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은 거부하고, 신자유주의적 경쟁을 인정하면서도 그 과도하고 비인간적인 강제를 비판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젊은 시절 내면화한 개인주의가 여전히 저류(底流)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일각에선 낀낀세대가 86세대의 장기적 영향력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주도적 세대로 부상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낀낀세대가 선배세대인 86세대와의 경쟁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97년체제의 등장으로 인한 경제적 좌절의 상처와 86세대의 장기적 헤게모니에 따른 사회적 적응의 상처를 주목할 때 낀낀세대는 ‘상처받은 개인주의 세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평균수명의 증가가 가져온 사회활동 연령의 연장을 고려할 때 낀낀세대가 우리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시기는 이제부터라고 볼 수도 있다. 시간을 이기는 세대는 없다. 오히려 낀낀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떤 리더십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것인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낀낀세대는 민주화의 가치를 공감한다는 점에서 86세대와, 개인주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밀레니얼세대와 통한다. 끼여 있다는 것은, 발상을 달리하면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두 세대를 아우를 수 있다는, 그리하여 통합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점에서 40대에게 부여된 과제 중 하나가 점증하는 세대갈등에서 이러한 교량적·포용적·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세대 문제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같은 세대라도 그 안에는 이념 또는 계급에 따른 차이가 존재하고, 이 변수들은 세대를 넘어 더 큰 영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대문화, 세대갈등, 세대정치에서 볼 수 있듯 세대는 분명 사회변화를 이끄는 동인의 하나다. 후자의 관점에서 40대를 지켜봐온 내 생각을 여기에 적어둔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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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수습기자들이 듣는 말이 있다. “사람이 개를 물어야 기사가 된다.” 새롭고 기이한 기사를 착안하라고 할 때 나오는 예시다. 그런 나라에서 ‘개물림’ 뉴스가 줄잇고 있다. 개가 사람을 무는 데 새롭고 놀라고 논쟁할 게 많아진 셈이다. 맹견 핏불테리어는 나흘 전 새벽 거실까지 뛰어들어왔고, 보름 전 자동차 튜닝숍에서 화장실 가는 사람을 덮친 50㎏ 대형견(알래스칸 맬러뮤트)은 입마개를 해야 하는 맹견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나와 남성의 급소를 문 대형견(올드 잉글리시 시프도그)도, 맹견 사이에서 태어나 세 모녀를 덮친 개량견(아메리칸 불리)도, 안락사 문제를 일으킨 작은 폭스테리어도 뉴스를 타고 있다. 500만마리가 넘어선 반려견에게 물려 지난해 119구급대를 부른 사람은 하루 6.5명. 결코 작지 않은 숫자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국에서 개물림이 시끄러워지는 이유는 여럿이다. 견종과 덩치 구분 없이 일어나고, 물리는 사람의 증가율이 반려견 증가율을 앞서고, 개물림을 보는 간극이 큰 까닭이다. “우리 개는 안 물어요” “She is kind”. 공원이나 둘레길에서 한국인·외국인 견주가 ‘순하다’고 하는 말이다. 사고는 그러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돌발했다. 지난해 목줄 없이 개와 산책하다 과태료를 문 것은 서울에서 16건뿐. 개물림 사고에 안전장치와 법은 헐겁고, 사회적 공론은 못 따라가고 있다.

개물림 대책은 가히 올해가 원년이다. 지난 3월 시행된 개정 동물보호법은 맹견(5종) 외출 시 14세 이상 보호자와 목줄·입마개를 의무화했다. 사망사고 시 징역은 3년, 벌금은 3000만원까지 늘렸다. 7월엔 개 목줄도 2m로 줄이기로 했다. 그새 안락사와 ‘개파라치’ 얘기가 달궈지다 유보됐다. 정부는 개물림 문제에 대해 연내 ‘종합계획’ 발표를 예고했다. 조그만 개도 공격성을 따져 입마개를 하는 문제가 도마에 올라 있다. 돌발사고가 꼬리 물자 나온 처방이다. 그럼에도 법은 최소한이고, 펫티켓 교육은 출발선일 뿐이다. 사고 나면 가장 속상하고 놀랄 사람은 소유주다. 안전 문제는 공존의 룰이 긴요해졌고, 피해자 관점이 우선돼야 한다. “개는 개다.” 보고픈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는 미국 동물행동학자 마크 베코프의 말에 답이 있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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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들 덕분에 꼭 해야 하는 일과 중에 아침 산책이 있다. 녀석들이 자연의 리듬에 맞게 여름에는 새벽 다섯 시부터, 겨울에는 조금 봐줘서 일곱 시면 어김없이 내 방 앞에 와서 나가자고 아우성을 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조금 ‘관종’ 기질이 있어서 산책을 하면서 만나는 다른 개 보호자들에게 꼭 먼저 다가가서 아는 체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한마디씩 한다. “어머 너무 예쁘다!” 등등. 그때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녀석들의 발걸음이 통통 튄다. 반면에 어쩌다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오는 날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그 모습을 보면서 관심과 칭찬이야말로 마음 에너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물며 강아지가 저런데 인간이야 말해 무엇 하랴 싶기도 하다. 

우리에게 관심과 칭찬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나의 자존감을 구성하는 뼈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신뢰하는 일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 즉 인간관계, 일, 사랑의 기본은 바로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눈과 귀를 통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낀다. 장자에 보면 “하늘과 땅이 나와 함께 생겨났다”는 말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하늘은 있고 내가 죽은 다음에도 땅은 있다고 하지만 내가 태어나서 그 하늘을 보고 그 땅을 디디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나에게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맹자 또한 한 말씀 했다. “만물이 내 안에 깃들어 있다”고. 따라서 내가 ‘좋은 삶,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와의 관계가 건강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약간이라도 사랑이 있을 때는 최소한 여유가 생겨난다. 덕분에 대체로 주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워하면 나를 화나게 한 상대보다는 내 마음이 먼저 탄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할수록 그 사람 생각이 내 마음을 점령해서 그야말로 다른 것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자리 잡는 곳도 결국은 내 마음속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은 나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결국 마음속에서 그를 지우지 못하고 있어 봤자 나만 손해다.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나는 죽는 날까지 떠나보낼 수 없는 존재이다. 나 자신을 내가 미워하고 학대해 봤자 나만 손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의학과 상담에서 자기를 알아가는 것은 곧 자기를 사랑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을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만점이어서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내 부모나 내 자식이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 친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니 나에 대한 사랑을 포함해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이 내 마음의 에너지 보전 법칙에도 더 들어맞는다. 솔로몬은 ‘인생에서 필요한 피난처는 돈과 지혜’라고 했다. 많은 심리학자들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무력감을 느낀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대로 지갑이 두둑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마음의 에너지 통장도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는 스트레스 중 하나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기 의구심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즉 자기 불신이 스트레스의 한 원인인 것이다. 그러니 내 마음 에너지 통장에 스스로에 대한 신뢰감이 가득 차 있으면 세상에 무서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의 곳간에 나에 대한 이해, 수용, 칭찬, 격려, 믿음이라는 곡식을 채워 넣어야 한다. 그래야만 외부의 비바람이 불 때 내가 흔들리지 않고, 설령 흔들린다고 해도 바로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다. 그 원천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한다. 그러니 미워하기보다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양창순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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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이 다시 촛불을 드는 것을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박근혜 퇴진운동을 벌이며 들었던 촛불은 박 전 대통령의 밀실 측근이라는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받은 성적 특혜라는 반칙 행위에 대한 분노가 단초가 됐다. 이후 광화문의 촛불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퍼졌고 결국 박근혜 정권을 몰락시켰다.

대학생들이 이번에 들고 있는 촛불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의 대학과 대학원 입학, 장학금 수혜 등의 과정에서 나타난 반칙과 특혜와 편법에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보수 우파는 기득권층과 동의어로 간주됐고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기피했다. 반면에 진보 좌파는 정의의 화신으로 자처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기회는 공평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문재인 정부의 아이콘이며 진보 좌파의 대표주자인 조국 후보자는 그동안 각종 매체와 연설을 통해 이를 설파했고 많은 국민이 이에 열광했던 것이 사실이다.

서울대 학생회관 앞에서 8월28일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주최의 ‘제 2차 조국교수 STOP ! 서울대인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대 학생들은 지난 23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다. 우철훈 선임기자

그런데 조국 후보자는 앞에서는 정의를 외치고 뒤에서는 기득권층으로서 온갖 편법과 특혜를 향유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조국 후보자 딸이 고교시절 2주간의 인턴으로 전문 학술지에 제1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무시험으로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고 장학금을 받은 사실들은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보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신기(神技)에 가깝다. 

이번에 또다시 대학생들이 들고 있는 촛불도 분노의 촛불이다. 이건 보수와 진보 간의 이념 투쟁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정의냐, 불의냐의 문제다. 모든 철학자들이 합의한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意)는 없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내세운 대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모두가 용이 될 필요가 없다. 개천에서 붕어나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는 조국 후보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고 싶어 한다. 이들 중 하나라도 얻는 것이 용이 되는 것이다. 이를 얻기 위해 밤잠을 줄이며 공부하고 일을 한다. 그런데 개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붕어나 가재로만 살라면 행복할 수 있겠는가. 특히나 이미 용이 된 기득권층들이 편법과 특혜와 반칙을 하면서 대를 이어가며 더욱더 많은 돈과 큰 명예와 권력을 얻는 사회라면 국민은 절망하고 분노하지 않겠는가. 촛불이 주장하는 것은 강남의 양재천뿐만 아니라 어느 개천이든 용이 나올 수 있도록 기회를 평등하게 하고 과정을 공정하게 해 달라는 거다. 그게 정의로운 사회다.

그동안 진보 좌파는 촛불정신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내세웠다. 그러나 촛불은 진영논리와 상관없이 기득권층이 정의롭지 못할 때 타오른다. 학생들이 지금 들고 있는 촛불은 이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조국 후보자 딸의 입시와 장학금과 관련한 불의에 항의하는 촛불이다. 그러나 이 촛불을 일부 언론과 야당의 선동에 의한 거라는 식으로 폄훼하고 조롱한다면, 이 촛불은 캠퍼스를 넘어 광화문으로 번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법무부를 영어로 정의부(Ministry of Justice)라고 한다. 우리나라 법무부의 영어 표기도 이렇게 되어 있다. 조국 후보자는 정의 구현을 책임지는 정의부 장관 후보자다. 조국 본인이 정의롭지 않은데 어떻게 조국의 정의를 책임질 수 있는지 국민 다수는 믿을 수 없어 한다. 

지금이야말로 문재인 정권이 핵심가치로 내세운 평등·공정·정의를 바로 세울 때다. 그걸 대통령이 못하면 검찰이 해야 하고, 검찰도 못하면 국민이 할 것이다. 개인 조국(曺國)의 운명과 함께 우리 조국(祖國)의 운명이 갈리는 기로에 있다. 촛불을 다시 보며 교차하는 만감 중에 떠오른 단상이다.

<이현훈 | 강원대 국제무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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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차량이 아파트 또는 빌라 주차장 출구에 무단으로 주차돼 있는데 운전자가 없어 여러 대의 차량이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신고가 적지 않다. 하지만 공공의 이익이 현저하게 침해되고 있고, 잘못 없는 주민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라도 현행법상 사유지 주차의 경우 강제로 견인할 방법이 없다. 사유재산은 불가침이 원칙이고, 도로교통법이 적용되지 않아 경찰과 구청이 단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로에 불법주차할 경우 단속이 가능하지만 사유지에 주차했을 때는 단속 및 견인하기 어려운 점을 악용하여 무단주차하는 운전자가 적지 않다.

경찰도 그 장소가 사유지라면 차주에게 연락해 이동주차를 요구하지만, 차주의 전화번호가 없거나 차주에게 연락이 되어도 당장 침해된 법익에 대해 강제로 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 이 때문에 공공기관에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다며 수많은 민원이 접수되고 있다. 

물론 무단주차한 차량을 상대로 손해배상 등 민사 소송을 제기하여 처리할 수 있지만 소송기간이 오래 걸리고 여러 번거로움이 있다. 또한 사유지에서 견인할 경우, 견인 중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손해배상 문제를 견인을 요청한 사람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사유지에서 견인 요청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아파트 진입로 및 주차장 출입구 등에 무단주차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차량 통행에 불편이 발생할 경우 사유지라도 즉시 단속 및 견인이 가능하도록 관련법 개정이 시급하다.

<이장우 | 부산동래경찰서 온천3파출소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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