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외국인이라고 치자. 지금 당신은 한국의 경찰서에 있다. 당신은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선택했고, 그동안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다. 평범한 하루였다. 일터에 여러 명의 경찰관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경찰관들은 동료들 앞에서 당신을 체포했다. 그날 경찰은 당신의 이름과 나이, 국적 등 개인정보를 ‘취재안내’라는 이름으로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TV와 인터넷에는 보도가 쏟아졌다. 사회적으로 당신은 이미 범죄자로 불린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당신은 낯선 타국의 철창살이 주는 고립감과 범죄자에 대한 감시의 시선을 온전히 견뎌야 한다. 그날 저녁 조사가 시작된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경찰관이 앉아 있다. 무방비 상태의 당신에게 오랫동안 훈련된 수사전문가의 준비된 질문이 시작되었고, 이미 당신의 멘털은 붕괴되어 버린 상태이지만 애써 정신을 붙잡고 힘겨운 대답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경찰관이 표정을 싹 바꾸며 묻는다. “왜 거짓말을 하나요?” 여덟 글자밖에 안되는 이 짧은 질문에 당신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공권력은 자기방어가 취약한 사람을 상대로 작동할 때 그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형사소송법의 중요한 원칙들은 늘 가장 힘없는 사람이 만들어 냈다. 수사기관이 용의자를 체포할 때 체포의 이유와 진술거부권,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사전에 알려주어야 한다는 이른바 ‘미란다 원칙’도 1966년 미국 애리조나 주 멕시코계 이주민 ‘미란다’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피의자 미란다가 용의자로 체포된 이후 자신의 권리에 대한 안내 없이 강압적 분위기에서 2시간 동안 조사받으면서 범죄를 전부 자백한 진술서는 증거로 쓸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위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경찰 피의자 신문의 전체적인 주안점은 (중략) 피의자를 감정적 상태에 몰아넣어 합리적 판단 능력을 훼손하는 데 있다”(Miranda v. Arizona 384 U.S. 436, 1966)는 시대를 앞선 통찰을 보여주었다. 

샌프란시스코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자 저명한 형사법학자인 리처드 레오 교수는 그의 책 <허위 자백과 오판>에서 경찰은 피의자에 대한 조사과정을 압력이 거의 개입되지 않은 채 자발적인 자백으로 이어지는 “진실 발견에 관심을 쏟는 중립적인 정보 수집과정”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는 “범행을 부인하는 피의자로 하여금 범행을 시인하게 만들 목적으로 구체적인 일련의 심리적 효과와 반응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처음의 가설로 다시 돌아가 보자. 경찰관은 이후로도 당신에게 무려 수십 차례에 걸쳐 “거짓말을 하지 말라”며 다그쳤다. “100% 거짓말이다”라며 확신에 찬 모습도 보였다. 당신이 일상적인 한국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통역을 왜 불렀느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당신이 필요할 때 언제든 변호사를 부를 수 있는 형편이었다면 먼 타국까지 와서 노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소식을 듣고 선의로 달려온 변호사를 만나기 전에 이루어진 1차 조사는 나중에 보니 질문과 답변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 사실 이건 가설이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어떤 외국인에 대한 조사의 일부다. 수사기관은 당사자의 진술을 “거짓말”이라 판단하여 반복 추궁할 필요가 없다. 진술과 배치되는 거짓말이라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면, 별도로 증거를 통해 진술을 반박하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이를 반복적으로 ‘추궁’하는 것은 피의자에게 자백을 받아내고자 하는 잘못된 의도를 보여줄 뿐이다. 혐의자의 진술의 신빙성을 고려하여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은 법원이 해야 할 일이지 수사기관의 몫이 아니며, 수사기관은 무죄로 추정되는 당사자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설령 그것이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진술할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한다. 특히, 피의자가 외국인이라면 제대로 교육되고 훈련된 통역 인력을 확보하는 게 그 시작이 될 것이다.

<조영관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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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동백나무 그늘의 끝을 막 지나가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갔다


참새 몇 마리가 은행나무 이파리 사이에 숨어 뭐라 뭐라 떠들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갔다


은회색 승용차가 전속력으로 달려갈 때

그가 지나갔다


노란 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줄지어 동네를 돌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갔다


왕개미 한 마리가 제 몸만 한 과자 부스러기를 물고 힘겹게 보도블록 가장자리를 가고 있을 때

그가 지나갔다


세상에!

얼굴도 없이

이경림(194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 여자와 참새 몇 마리, 승용차, 아이들, 왕개미가 각각 활동할 때 얼굴도 없는 그가 지나갔다고 한다. 그는 누구일까. 그가 누구일까를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 아닐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냇물 위에 떠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종이배 같은 시간이 아닐까. 혹은 매일매일에 늘 나의 심중(心中)에 살고 있는, 그리운 사람이 아닐까. 내가 무엇을 보든 함께 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비록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일지라도. 이도 아니면 내가 신앙하는 ‘님’이 아닐까. 이도 아니면 소소하지만 스스로 빛나는 일상의 순간이 아닐까. 여럿의 주체들이 각자 힘껏 살고 있음에도 그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알아채지 못하고, 놓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스침과 사라짐에 빗댄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지낸 하루가 나는 좋았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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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조성 중인 ‘기억공간’이 서울 광화문광장을 제외하고는 5년이 지나도록 첫 삽조차 뜨지 못하고 있다. 경기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조성될 추모공원인 ‘4·16 생명안전공원’은 봉안시설 유치를 반대하는 일부 지역주민의 반발로 4년여를 표류하다, 지난 2월 말에야 조성계획이 마련됐다. 참사로 숨진 단원고 2학년 학생 250명이 다니던 교실을 재현한 ‘기억교실’ 등이 꾸며질 ‘4·16 민주시민교육원’은 오는 9월에나 조성사업이 본격화된다. 부지를 놓고 안산시와 교육지원청이 3년여를 허송하다 최근에야 상록구청 인근 은하수공원에 조성키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전남 진도 팽목항의 ‘기억공간’은 “진도항 확장 공사에 걸림돌이 된다”는 진도군의 반대로 조성 자체가 불투명하다고 한다. 침몰 3년 만에 인양된 세월호 선체는 전남 목포신항 부두에 거치된 채 어색한 모습으로 추모객을 맞고 있다. 국민 모두가 뜻을 모아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도 모자랄 판에, ‘지역 이기주의’ ‘지역개발’ ‘늑장’ ‘눈치 보기’ 등 때문에 기억공간 조성이 늦어진다니 부끄럽고 참담하다.

2일 서울 광화문광장 남측 세월호 천막이 있던 자리에 개관한 추모시설 ‘기억·안전 전시공간’. 이 공간은 80㎡ 규모의 목조건물로 전시실 2개와 재난 안전교육을 진행할 시민참여공간, 안내공간인 진실마중대로 구성됐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진도 팽목항에서 4㎞여 떨어진 ‘세월호 기억의 숲’은 미국 영화배우 고 오드리 헵번의 맏아들 션 헵번의 제안으로 2016년 4월9일 문을 열었다. 300여 그루의 은행나무마다 희생자들의 사진·사연이 걸려있고, 가족·친구 등이 남긴 글을 담은 ‘기억의 벽’이 조성돼 있다. 션 헵번은 조성 당시 “어떤 행동이나 어떤 말도  유가족의 아픔과 비통함을 덜어드릴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의 희생이 절대로 잊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억공간은 참사 희생자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한 국가와 ‘산자’들의 참회와 다짐의 공간이다. 독일이 베를린에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세우고, 미국이 뉴욕에 ‘타이타닉호 침몰사고 추모 공원’을 조성한 것도 같은 이유다. 세월호 참사는 특히 ‘살아있는 기억’이다. ‘4·16 세월호 참사 작가 기록단’의 세번째 책 &lt;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gt;에서 생존학생 엄마 문석연씨는 “생명안전공원 때문에 우리 동네에 현수막이 걸렸어요. ‘납골당 반대!’ 우리 애가 그걸 볼까봐 너무 무서웠어요. 내 아이 좀 살려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억공간 조성은 또 다른 희생을 막기 위한 살아있는 자들의 책임이다. 정부와 지자체, 국민들은 이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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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민주화운동의 거목이신 고(故) 박형규 목사님에 대한 긴급조치위반 등 재심사건에서 제가 무죄구형을 하며 과거사 반성을 했다가, 검찰 내부는 물론 언론에서도 크게 소란이 일었지요. 최초 무죄구형으로 보도되었지만, 과거사 반성은 최초일지 몰라도 재심사건 무죄구형은 그전에도 없지 않았으니 최초는 아닙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엔 검찰이 더러 무죄구형을 하였거든요. 정권의 보수화에 발맞추어 검찰은 황당한 옛날 구형을 반복하거나 속칭 백지구형(법과 원칙에 따라 선고해 달라)을 한 후, 무죄판결이 나면 무죄가 웬 말이냐며 기계적인 항소와 상고로 무죄 확정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악의적인 행태를 강화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때는 수뇌부에서 제 의지를 억지로 꺾지 않아 무죄구형을 할 수 있었는데, 12월 박근혜 후보 당선 후에는 실낱같던 샛길조차 완전히 끊겼습니다. 부득이 공판검사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무죄구형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지요. 무죄를 무죄라고 말하는 것은 검사의 의무니까요. 중징계를 받았지만, 5년에 걸친 소송 끝에 제가 옳았다는 판결을 결국 받아냈습니다.

올해 초, 제주 4·3사건 수형인들에 대한 재심사건에서 검찰이 공소기각을 구형한 후 공소기각 판결에 항소하지 않아 1심 판결이 신속하게 확정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관련된 분들의 환한 웃음을 신문 너머로 보고 있으려니 얼마나 기쁘던지요. 2017년 10월 제 징계취소소송이 상고기각으로 확정될 때까지, 법무부는 현재의 검사가 과거 법원의 유죄 판단을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검사가 무죄구형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제가 헌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험을 발생시켰다고 비난했었는데, 그때 그 사람들이 그대로 있는 검찰의 변화가 상전벽해와 같습니다. 놀랍기도, 씁쓸하기도 합니다만, 더 늦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불의했던 시절 제가 불의에 가담하지 않았음에 안도합니다.

제주 북촌 너븐숭이에는 4·3사건으로 학살당한 마을 주민들을 위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현기영 작가님의 시 ‘새로운 빛으로 되살아나소서’가 새겨져 있지요.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하여 영구불망의 돌을 세운다.’ 그 시 구절 앞에 붙박이장처럼 한참을 서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국가폭력으로 헤아릴 수 없이 숱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고, 권력은 피해자들과 목격자들의 입을 반세기가 넘도록 틀어막는 또 다른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정의의 대변자여야 할 검찰은 국가폭력의 잔인한 집행자가 되어 피해자들과 진실을 말하는 목격자들에게 누명을 씌워 교도소로, 사형장으로 보냈지요. 70여년간 고통받아온 억울한 원혼들, 그날의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유족분들과 침묵을 강요당해온 목격자분들이 그 시 구절처럼 가해자들을, 검찰을 용서해줄지….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2017년 10월 제 징계취소 판결이 확정된 후, 모 간부가 저를 불러 흐뭇한 표정으로 심경을 묻더군요. “저는 무죄판결을 받았을 뿐, 저에게 위법한 지시를 한 자들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과와 합당한 문책을 바랍니다”라고 답하니, 제가 가당치도 않은 과욕을 부린다는 듯 “징계취소해도 문제구먼”이라며 황당해했습니다. 그 간부가, 사과와 문책 없는 검찰이 참 원망스럽더군요.

그런 아픈 기억이 있는 터라, ‘용서하지만…’이란 그 구절이 ‘용서하려고 발버둥치지만’이라는 절규로 읽혀 가슴 먹먹했습니다. 색깔론이 아직도 횡행한 시대, 가해자에게 관대하고 피해자에게 용서와 화해를 강권하는 풍토에서, 한 맺힌 사연들을 조심스레 꺼내며 비명을 참느라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게 보였거든요. 너븐숭이 애기무덤 주변에 피눈물같이 뚝뚝 떨어져 있는 동백꽃이 너무도 처연했지요. 제주 4·3의 상징이 왜 동백꽃인지 그날 비로소 알았습니다.

4·3평화기념관에는 운주사 와불처럼 누워 있는 무서백비(無書白碑)가 있습니다.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는 설명문 앞에 절로 숙연해지지요. 이름을 두고 이념과 진영 간의 논쟁이 끝이 없으니 아직 4·3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백비이나, 사과와 화해를 통한 완전한 평화를 기다려온 원혼들의 오랜 피눈물로 적셔진 혈비지요. 사과는 가해자의 의무이고, 용서는 피해자의 권리입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 앞에 검찰을 포함한 가해자들과 악의 승리를 방관한 우리 사회의 진심 어린 반성문을 백비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백비에 얼룩진 피눈물을 가해자들의 눈물로 닦아 바로 세우는 날, 비로소 4·3이 끝날 테지요. 그날까지 가해자들은 피해자들과 역사로부터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임은정 청주지검 충주지청 부장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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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세계여성의날(3월8일) 때 일이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 향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 세계에 울려퍼질 때 미국에서는 한 성전환 여성이 투옥됐다. 그는 한때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일지와 국무부 기밀문서를 언론에 공개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유명인사였다. 바로 첼시 매닝이다. 그 일로 매닝은 35년형을 선고받았다. 7년반 넘게 투옥된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퇴임 이틀 전 사면돼 석방됐다. 자유의 몸이 된 지 2년3개월 만의 재투옥이지만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대다수의 언론과 시민들이 침묵한 탓이다. 투옥 죄목은 법정모독. 그는 자신의 자료를 공개한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에 대한 조사차 제4연방항소법원 대배심에 출석했다. 그는 증언을 거부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대배심이 비밀로 진행된다는 점, 이미 군사법정에서 모든 것을 공개했다는 점이다. 하루 22시간씩 28일간 독방에서 지내온 매닝은 지난 4일 일반 감방으로 옮겨졌다. 그가 증언하지 않으면 대배심 절차를 마칠 때까지 최대 18개월간 투옥될 수 있다. 

미 정부가 이미 충분히 죗값을 치른 그를 다시 옭아매려는 이유는 뻔하다. 그를 압박해 어산지를 사법처리하기 위함이다. 두 사람은 미 정부에 눈엣가시나 다름없다. 그럴 만도 했다.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된 기밀자료는 미국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 덕분에 테러와의 전쟁,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구실로 해외에서 벌여온 활동의 민낯이 드러났다. 많은 미국인들은 미군의 교전수칙이 망가지고, 그들도 민간인 학살의 공범이 된 사실을 깨달았다. 미 정부가 두 사람을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협을 가한 범법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당연했다. 

‘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 참가자들이 8일 대회 장소인 광화문광장에서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미투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미국의 바람이 통한 걸까. 어산지는 11일 영국 경찰에 체포됐다. 영국 주재 대사관에서 그를 보호해온 에콰도르 정부가 보호 조치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어산지가 망명한 지 6년10개월 만이자 위키리크스가 트위터에 “어산지가 몇 시간에서 며칠 안에 추방될 것”이라는 글을 올려 우려를 표현한 지 일주일 만이다. 망명 지위 철회 이유는 국제협약 위반이다. 전임 좌파 대통령 시절 망명한 어산지는 현 레닌 모레노 대통령 집권 이후부터 갈등을 빚어왔다. 모레노는 최근에도 대통령이 되기 전 자신과 가족의 계좌나 전화 같은 사적 정보를 유포한 어산지를 비난한 바 있다. 어산지의 체포로 그의 미국 송환과 투옥은 시간문제가 됐다. 미 정부는 이미 그를 이적행위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매닝과 어산지는 미 정부의 주장처럼 국가안보의 위협일까. 물론 아니다. 오히려 언론 자유와 시민의 알권리 수호자라 할 수 있다. 당시 세계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찬사를 보낸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최근 언론의 태도는 그때와는 딴판이다. 사실 보도만 할 뿐 이들을 옹호하거나 이들의 투옥이 언론 자유의 중대한 침해라는 목소리를 담은 사설이나 칼럼은 보이지 않는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초선인 민주당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이 지난 2일 매닝 석방을 요구한 것이 고작이다. 민주당은 어산지의 투옥을 바라는 눈치다.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위키리크스가 민주당 대선본부장의 e메일을 공개하는 바람에 패배했다는 악감정이 남아서일까. 침묵 지키기는 여성운동단체나 인권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미 정부는 언론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 위배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또 같은 내용을 공개한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기자를 제쳐놓고 어산지만 사법처리하려는 것이다. 만약 어산지에 대한 관심이 옛날과 같았다면 그는 쉽게 체포되지 않았을 터이다. 오로지 양심에 따른 행동으로 국가 권력의 오만함과 언론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이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때마침 국내에서는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성범죄 의혹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한창이다. 장자연은 권력의 희생자를, 김학의는 권력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윤지오나 피해여성의 용감한 증언이 없었다면 재수사는 불가능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침묵하던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매닝과 어산지, 윤지오와 피해여성은 국가나 권력 앞에 무기력한 개인을 대표한다. 이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은 배반의 침묵을 깨는 양심의 목소리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시민과 약자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을 견제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침묵은 곧 배반을 의미하는 때가 온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되기 정확히 1년 전인 1967년 4월4일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한 반전 연설에서 강조한 말이다. 시민이 깨어 있지 않는다면 언론 자유는 물론 인권,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협에 빠질 수 있다. 지금이 그때일지도 모른다.

<조찬제 국제·기획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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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초등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지를 물으면 ‘물부족 국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물이 부족해 고통스러운 미래를 그리며 캠페인을 벌이니 물부족 국가라는 인식만은 확실히 한 것 같다. 2019년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다시 묻는다면 아마 ‘저출산·고령화’ 시대라고 대답할 것 같다. 청량리역 인구탑을 보면서 인구폭발로 한국이 궤멸할 듯한 위기감 속에서 자랐지만, 막상 내가 아이를 낳을 때는 더 낳아보라 부추기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불과 30년도 내다보지 못한 정책이 인구정책이다. 

얼마 전 경북 의성군에 다녀왔다. ‘롯데리아’마저도 휴무일이 있는 곳이다. 때마침 학교를 마치고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바나나맛 우유를 먹는 의성초등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대도시 풍경과 다르지 않다. 몇몇 중·고생들도 편의점에 들락거렸지만 이내 읍내는 고요해진다. 분식집의 유일한 피크타임일 텐데 제대로 개시를 못한 것 같았다. 장날이 아닌 평일 농어촌 읍내 풍경은 대략 이렇다. 

그래도 계절은 또 돌아와 들판에는 마늘이 쏘옥 올라왔다. 의성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의성마늘’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종종 ‘지방소멸 위험 1위 지역’이 의성을 떠올리는 이미지인 것 같다. 외부인보다는 주민들이 그리 규정한다. 택시에 올라타자 택시 기사는 “읍내에 사는 인구가 1만도 안됩니더. 곧 소멸됩니더”라며 외지인인 내게 의성군을 딱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 인근의 상주시는 인구 10만명 선이 무너지자 공무원들이 ‘상주’ 된 마음으로 검은 상복을 입고 출근하면서, 10만명 지키기에 사활을 건다는 소식을 전했다. 택시 기사는 대학이라도 있는 상주시 상황은 의성에 비할 바가 아니라며 탄식을 보탰다. 

지방소멸에 대한 논의는 일본의 지방소멸 위험을 경고한 ‘마스다 보고서’에서 착안해 2016년 한국고용정보원이 보고서를 냈다. 그리고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공식화된 말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65세 이상 인구수가 20~39세 여성의 수보다 2배 이상 많으면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경북 의성군이 소멸위험지역 1위에 들어서고 만다. 하지만 전국 농어촌 상황은 다 엇비슷하다. 보고서 기준을 적용하면 향후 30년 내에 84개 시·군, 1383개 읍·면·동이 소멸위험이며 이는 전체 마을의 39%에 이른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농촌이 휑한 것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건만, 막상 ‘소멸위험’이라는 말을 들은 지역민들의 박탈감은 매우 큰 듯하다. 자신의 삶의 터전이자 고향이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맥이 빠질 것이다. 경각심을 가지란 뜻에서 만들어진 말이겠지만 중앙집중적인 말이고 말의 온도가 너무 차갑다.  

그래도 의성초등학교 아이들은 재잘대면서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태권도 사범을 따라 태권도 도장으로 몰려간다. 피아노 학원과 문구점도 있으니 아이들은 계속 자랄 것이다. 이 아이들이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는 고장이라면 그 부모는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려 할 것이다. 지금 사과와 마늘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농사지어 살 만하다면 그 모습을 보고 떠나지 않을 농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의성마늘과 의성사과는 여전히 인기 만점일 것이다. 며칠 전 보니 전지작업이 말끔하게 끝난 사과나무에 꽃망울이 웅얼웅얼 맺히고 있었다. 지금을 돌봐야 한다. 그것만이 소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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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집을 나올 때면 가끔 아파트 앞 생활폐기물 수거 차량과 마주친다. 시민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도로 한쪽에 차량을 정차하고 음식물이나 폐기물을 수거한다. 청소 노동자들을 대하는 인식 차이일까. 일본이나 유럽에선 생활폐기물 수집운반이 낮에 진행되는데, 우리는 새벽에 한다. 그러다 보니 업무상 재해나 사망사건도 많다. 1년에 꼭 한 번 정도 청소 노동자의 사망사고를 접한다. 전국에 생활폐기물 운반수거의 87.7%가 민간위탁으로 운영되다 보니, ‘위험의 외주화’는 공공부문에서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민간위탁 노동자 고용의 질은 우리가 꼭 짚어야 할 문제다. 저임금에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가 대부분이다보니 양질의 시민서비스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특히 민간위탁 시설의 법률 위반현상은 심각하다. 연장 및 휴일근무 수당, 연차휴가 등 기본적인 노동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자의 권리가 민간위탁이라는 이유로 숨겨지거나 은폐되고 있는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수탁업체 대표 및 관리자들의 노동 감수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의 힘이 도시를 위해 뭔가 커다란 것을 해주리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이런 믿음을 유지하면서 그간 정부는 다양한 기본 서비스를 꾸준히 외주화했다. 사실 민간위탁은 대시민서비스의 일부를 외부 전문기관에 위임·대행이라는 ‘합리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간위탁의 회계 부정, 용역비 과다청구, 임금 가로채기, 선정 비리, 관리 감독 부실 등이 언론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위법적이고 탈법적 현상들을 지자체는 제대로 점검조차 하지 않고 있다. 공적자원을 시장의 힘에 넘겨버린 민간위탁의 비민주적 속성을 보여준다. 

지난해 기준 공공부문 민간위탁은 1만개가 넘고, 노동자는 약 19만6000명이나 된다. 정부 재정의 1.86%에 해당하는 7조9600억원 규모다. 민간위탁 다수는 사회서비스 시설이다. 어린이집부터 사회복지, 장애인, 아동, 청소년, 정신건강 등 47.2%가량 차지한다. 그러나 도서관, 상수도 검침, 콜센터, 지하철 역사 등 매우 다양한 대국민 공공서비스들이 민간에 맡겨진 상태다. 최근에는 중앙정부가 국고보조 사업으로 지원하는 지자체 ‘센터’들도 민간위탁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정부는 도시의 공공서비스를 민간위탁으로 운영했다. 지자체 평균 100개 정도의 업무들이 공공이 아닌 민간에 맡겨진 상태다. 

공공부문에서 민간위탁 ‘신화’는 IMF 경제위기 이후 비용절감과 조직효율성을 이유로 더 확대되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사이 서울, 광주 등에서 일부 민간위탁을 직영 혹은 재구조화했다. 때마침 정부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3단계 민간위탁’ 내용을 발표했다. 문제는 민간위탁이 공공서비스 전달체계 변경과 관련되어 있다며 기관 자율에 맡기겠다고 한다. 기관 자율에 맡기는 것은 사실상 정규직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지자체 일부 업무들은 노무도급 성격의 용역근로 형태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1단계와 2단계에 해당되어야 할 간접고용 업무들이다. 

우리는 노르웨이 제3의 도시인 트론헤임의 ‘지자체 실험 모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도시는 지자체 공공서비스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민간위탁을 물리치고 직영으로 운영한 공공행정조직의 내부적인 민주적 변화를 이끈 곳이다. 특히 공공서비스를 직영 운영하면서 직원들의 병가 신청자가 11%에서 2%로 줄었고, 일자리 만족도가 높아진 것은 도시의 좋은 일자리 모델의 의미 있는 성과다. 독일 베를린의 생활폐기물 시영회사는 청소 노동자들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심리치료 프로그램(박스 스톱)도 제공하고 있다. 

공공서비스를 시장에 맡겨야 더 효율적이라는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민간위탁 서비스들을 공적 통제 아래로 되돌리려는 선택이 필요하다. 초점은 ‘돈이 아니라 서비스 질 향상’이라는 이점을 봐야 한다. 시민의 삶에 핵심이 되는 국가의 일부를 되찾는 정책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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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 개혁을 비롯하여 중등교육 정상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절박하지만, 작년의 대입 공론화 과정은 이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탄탄하게 형성하지 못한 우리 현실을 잘 보여줬다. 하지만 고교체제 개편의 일환인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교육 공약 중에 자사고 등의 일반고 전환은 국민적 지지가 높은 공약이었다. 2017년 실시된 여론조사들에서 예외 없이 국민 과반수가 찬성했으며(리얼미터 52.5%, TV조선 62.3% 등), 반대 역시 한결같이 30% 미만이었다. 또 2017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더불어민주당 오영훈 의원과 함께 실시한 교사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학교, 일반고, 영재학교·자사고·특목고 등 총 512개교 3494명의 응답 교사 중에 무려 82.4%가 현행 고교체제로 인해 고교서열화의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교사와 일반 국민 모두가 고교체제 개편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된 실망 끝에 입시개혁과 중등교육 정상화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도 널리 퍼져 있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육체적·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할 꽃다운 청소년들이 과로사의 국제기준시간을 훌쩍 넘겨 학업에 시달리는 중이며, 새 시대를 앞서서 이끌 창의적 능력과 자질을 키우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다.

애초에 자사고 등의 일반고 전환은 정부가 적절한 보완책과 함께 초·중등교육법 시행령만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재지정 평가를 통한 일반고 전환이라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며 각 지역 교육청에 부담을 떠넘기고 말았고, 그 덕에 자사고의 집단적 평가거부 소동도 벌어졌다. 그러나 지금도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은 교육개혁의 동력을 살리는 불씨가 될 잠재력이 크다.

9일 고교 무상교육 시행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회에서 열린 열린 당·정·청 협의에서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재지정을 위한 자사고 평가제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현재 자사고는 5년마다 재지정 평가를 받지만, 이 제도 자체가 상식에 어긋난다. 특정한 학교가 자사고로 지정되어 교육 다양성의 명분 아래 학생 우선 선발권을 가지고 일반고와 크게 다른 교육과정을 운영하다 5년 만에 평가에서 떨어지면 도로 일반고가 되어야 한다. 불안정한 제도이며 자율이나 자유와도 거리가 멀다. 짐작하건대 자사고 도입에 대한 반발을 회피하려고 만든 무원칙하고 편의적인 장치이며, 입시 위주의 학교를 허용하는 특혜임을 자인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아예 재지정 평가가 불필요한 자사고 폐지의 길을 택해야 옳다.

자사고의 일반고 환원의 명분은 차고 넘친다. 대부분의 자사고 교육과정은 학생의 재능과 적성에 맞는 다양한 교육을 함으로써 우리 교육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시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 또 중학교 내신성적 상위 10% 이내 학생이 서울 시내 일반고 204개교에는 8.5%이지만, 23개 자사고는 18.5%, 전국단위 자사고 3개교는 무려 88.0%이다.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기 좋은 자사고를 가려는 과열 경쟁과 사교육이 갈수록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 공약이 법적 소송과 헌법소원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은 2017년 말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이 ‘꼼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정공법이 아닌 일반고와 자사고의 ‘고입 동시 실시’라는 우회로를 택해 시행령을 손질했지만, 자사고와 일반고의 중복지원 불허로 자사고에 낙방한 학생이 거주지에서 가까운 일반고에 갈 수 없게 되었다. 타당성이 높은 정책 전환이 아니라 죄 없는 어린 학생에 대한 권리 침해의 측면이 컸다. 이런 허점 탓에 2018년 6월 헌법재판소가 이 대목만큼은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작년 10월19일 서울행정법원은 서울 시내 자사고들이 제기한 2019학년도 고입전형 기본계획 취소 소송을 기각했다. 자사고 측은 학생 우선 선발권이 사학 운영의 자유라는 헌법상의 권리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학생 우선 선발권은 교육의 다양성을 명분으로 주어진 특전이었다. 그러나 자사고가 내세우는 교육의 다양성이 대부분 허구임이 명백한 터에 우선 선발권은 성적 좋은 학생을 독점하는 부당한 특혜일 뿐이며,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정당하다. 어제 4월11일의 헌재 결정도 기본적으로 같은 맥락이지만, 사회적 논란을 끝내기는 역부족인 듯하다.

정부의 소극적이고 일관성 없는 정책 탓에 벌어진 혼선과 갈등을 해결할 길은 자사고 등의 일반고 환원을 흔들림 없이 실천하는 일이다. 만만치 않은 반발과 부작용이 있겠지만,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길도 얼마든지 있다. 고교체제 개편은 대학입시 개선과 중등교육 정상화, 나아가 고등교육체제 개편에 이르는 종합적 교육개혁의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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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의 자유·단결권 보장, 강제노동 폐지 등 국제노동기구(ILO) 4개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사실상 결렬됐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최근까지 노사정 부대표들 간 연쇄회동을 갖고 합의를 시도했으나, 경영계의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 폐지’ 등 주장에 막혀 접점을 찾지 못했다. 경사노위 전체회의가 남아있지만 의미있는 결론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한·EU 자유무역협정(FTA)상 노동 관련 의무이기도 하다. 비준이 늦어지면 전문가패널 권고안 등에 따른 통상 압력은 물론 한국의 국가신뢰도 하락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경영계가 주장하는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등은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ILO정신에 반한다.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한 헌법 33조와도 배치된다. 한국은 28년간 4개 협약 비준을 미루고 있다. 그런데도 이를 고집하는 것은 누가 봐도 ‘판’을 깨자는 것이다. 경영계의 무책임한 태도는 안타까움을 넘어 개탄스럽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선 비준, 후 입법’이다. 경영계와 일부 야당을 제외한 다수가 이의 추진을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정부는 ILO 핵심협약을 즉각 비준하라”고 오랜만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3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ILO 긴급공동행동’은 ILO 핵심협약 우선 비준을 요구하는 입장문을 청와대에 전달했다. 경사노위 공익위원 일부도 “선 비준, 후 입법으로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선수 대법관도 지난해 한 토론회에서 “선 비준, 후 이행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부와 국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서둘러 ILO 핵심협약 비준 및 동의절차를 밟아야 한다. 국회 동의절차를 거친 협약 비준은 그 자체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그럴 경우 EU와의 외교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된다. 무엇보다 노조 조직률 11%에 불과한 한국의 노동자가 ‘노조 할 권리’라는 기본권을 회복하는 일임을 정부와 국회는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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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임신중단·임신중지)한 여성과 수술한 의사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형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1953년 형법 제정과 함께 낙태가 범죄로 규정된 지 66년 만이다. 헌재는 11일 형법 제269조 1항(자기낙태죄) 및 제270조 1항(의사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했다. 재판관 9명 중 4명이 헌법불합치, 3명이 단순 위헌, 2명이 합헌 의견을 내놨다. 국회는 2020년 12월31일까지 관련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 이 기한 안에 개정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해당 조항은 무효화된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 생명권을 존중하고 확장시킨 헌재 결정을 환영한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다. 이번 결정은 국가가 여성의 몸을 자의적으로 통제하고, 그 통제를 거부하는 여성에게 가혹한 책임을 물어온 과거와 결별하고 여성인권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의미가 있다. 헌재는 기존 낙태죄 조항이 임신 초기를 포함한 전 기간에 걸쳐 모든 낙태를 일률적·전면적으로 금지함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모자보건법에서 제한적으로 낙태가 허용되는 경우를 규정하고는 있지만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 갈등 상황’은 전혀 반영되지 않아 여성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선 하루 종일 찬반을 주장하는 기자회견과 시위가 이어졌다. 낙태죄를 반대해온 시민단체 회원들이 형법 제정 이후 66년 만의 헌법불합치 선고 소식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이제 공은 국회와 정부로 넘어갔다. 헌재 결정의 취지를 존중해 형법의 해당 조항을 삭제하거나 개정하고 관련법인 모자보건법도 손질해야 한다. 헌재가 제시한 기한이 1년8개월 이상 남았다고 하나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선 서두르는 게 바람직하다. 일각에서는 낙태가 폭넓게 허용될 경우 무분별한 낙태가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낙태를 보장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다수 회원국은 한국보다 낙태 경험 비율이 높지 않다. 가임기 여성 1000명당 인공임신중절 건수를 의미하는 인공임신중절률은 독일 7.2, 캐나다 12.1(이상 2012년 기준), 노르웨이 12, 프랑스 15(이상 2015년 기준) 등이다. 한국은 15.8(2010년 기준)로 이들 나라보다 높다.

후속 입법 과정에서 임신중절권의 허용범위와 시기, 사유 등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란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하나하나 모두 중요한 쟁점이지만, 논의가 이 부분에만 매몰될 경우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기반한 헌재 결정의 의미는 축소될 우려가 있다. 여성의 선택과 결정을 위한 ‘자격’을 또다시 국가가 심사하는 차원으로 후퇴해선 곤란하다. 국가가 시민의 신체와 관련해 할 일은 ‘처벌’도 ‘승낙’도 아니다. 국가의 역할은 낙태나 출산과 관련해 여성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안전한 보건·의료서비스를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헌재 결정은 인권과 생명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단순히 낙태의 비범죄화를 넘어 ‘재생산권’에 대한 사회적 모색이 필요하다. 재생산권은 아기를 낳지 않을 권리뿐 아니라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권리도 포괄한다. 혼인 여부, 장애, 성적 지향 등에 따라 아기를 낳거나 키우고 싶어도 배제되는 이들이 있다. 더 많은 시민이 정당한 재생산권을 보장받고, 태어난 아이가 차별 없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 구조와 인식의 개선으로까지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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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인데?” 한 친구를 매개로 낯선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거기에는 중년의 남성 다큐멘터리 감독도 있었다. 친구는 그와 내가 공통분모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내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그에게 내 정보를 흘렸고, 그는 관심 보이며 어떤 작품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작품을 준비하며 친구들의 사례를 촬영하고, 랩도 배우고 있다고 답했더니 대뜸 돌아온 말은 별로라는 ‘평가’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별로인지, 만약 정말 별로라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만 뒤따른다면. 그러나 그는 면접관이라도 된 양 질문만을 이어갔고, 내 답변에 대한 반응으로는 “내가 심사위원이라면 네 작품은 안 뽑겠는데?” “내가 프로그래머라면 상영 안 하겠는데?”와 같은 깎아내림만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았다. 관련 경험이 나보다 많은 사람이니 성실히 정보를 제공하면 뭔가 쓸 만한 통찰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나 보다. 헛된 기대였다. 집으로 털레털레 걸어오는 길,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단단히 털린 것만 같은 기분.

“그런 사람들 문창과에도 많아요!” 며칠 뒤 시와 소설을 쓰는 지인들과 만났을 때 그 감독과의 일화를 들려줬다. 다들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겠다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한 소설가는 한 창작 비평 모임에서 써 온 작품에 대해 폭언에 가깝게 깎아내리며 글쓴이를 낙담시킨 뒤, 술자리에서는 다정하게 대하며 격려하는 방식으로 후배를 길들이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선배는 정작 자기 소설은 안 쓰고 남의 소설 평가하는 데 열심이라고. 평가하는 위치를 점할 때 느껴지는 우월감. 자기 말을 귀담아듣는 존재를 눈앞에 두며 일종의 권력을 확인하는 감각에 취한 채 고여있는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길들이기’ 방식으로 연애를 시작한 일도 수차례였다고.

그러고 보니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에 그런 부류의 인간들에게 쉽사리 휘둘렸던 기억이 난다. 회사에 들어간 뒤의 삶을 경험해 본 적 없어 막연했고, 일단 입사를 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고, 손에 쥔 것을 자꾸 남과 비교하게 되고, 내 것이 보잘것없어 보여 불안하고…. 그 시기, 가고 싶은 길을 앞서가는 사람은 영웅처럼 보였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설령 함부로 평가하거나 섣불리 가능성을 재단하는 말이더라도. 이제 생각해보니 그 녀석들도 갓 회사 생활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을 텐데, 후배들 훈계하며 뭐라도 된 기분을 만끽하고, 우러름 받으며 자존감 부풀리고, 잠재적 연애 대상을 물색했던 것이다.

나는 결국 회사에 들어가지 않는 삶을 택했다. 몇 가지 자기 주도 프로젝트를 벌였고, 그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경험은 남들이 뺏어갈 수 없는,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나의 것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덕에 이제는 수평적으로 의견과 감상을 교환할 수 있는 대상과 비틀린 마음으로 폭언을 일삼는 대상을 분별하는 눈을 얻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고 또 당해버렸네.

쉽게 일축할 수 있는 직업적 명사보다 꾸준히 해온 행동이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더 잘 설명한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나를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그 활동은 주로 말과 글로 이뤄졌지만, 더 효과적이라면 다른 방법을 익혀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초심자로서 새로운 기술과 감각을 익히는 시기, ‘자존감 강탈자’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는 것. 나이 먹는다고 절로 인격적 성숙을 이루는 게 아니며, 경험 부족한 이들을 휘두르며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어른들이 적지 않다는 것. 또 한 번 경험했네. 앞으로도 새로운 분야에 흥미 생기면 또 뛰어들 텐데, 그때마다 거듭 당할 수밖에 없는 건가….

어쨌거나 나는 그때 그 다큐멘터리 감독이 혹평했던 그 기획 그대로 작품을 완성했다. 상영의 기회와 관객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고, 영화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와 감정이 와 닿았다고 말하는 관객들의 웃는 얼굴을 마주했다. 그제야 안심이 됐다. 결국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최서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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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만큼 여러 사람을 안달하게 하는 것도 없다. 많은 이들이 수능, 다이어트, 승진과 같은 목표를 위해 자기에게 동기를 부여하려고 한다. 또한 자녀, 학생, 직원에게 동기를 부여하려고 한다. 하지만 동기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미묘한 방식으로 작동하기에 동기를 부여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동기란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 

■ 지나치게 큰 보상의 역효과

흔히들 금전적 보상은 하기 싫은 일도 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수한 인재를 모아 일을 잘하게 만들고 싶을 때는 종종 인센티브를 높이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적당한 인센티브는 효과적이지만 지나치게 큰 인센티브는 역효과를 낸다고 한다. 지나치게 큰 보상이 압박감을 줘서 인지 자원의 활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실제로 지나치게 큰 인센티브의 역효과는 인지 능력이 요구되는 작업에서 두드러진다. 듀크대 경제학과의 댄 애리얼리 교수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컴퓨터 자판을 누르는 것처럼 기계적인 업무와 간단한 수학문제를 푸는 것처럼 인지 능력이 필요한 업무를 시켰다. 이때 같은 종류의 업무를 낮은 보상 수준과 대단히 큰 보상 수준에서 각각 한 번씩 수행하게 했다. 실험 결과 기계적인 업무에서는 높은 보상이 높은 성과로 이어지지만, 인지 능력이 필요한 업무에서는 지나치게 큰 보상이 성과를 낮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나치게 큰 보상은 오히려 압박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시험에서 긴장한 나머지 평소만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이 연구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센티브보다는 적당한 규모의 잦은 보상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 포기의 지혜

동기에는 돈과 무관한 의미도 영향을 준다. 다른 실험에서 댄 애리얼리 교수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레고와 설명서를 주고 조립하게 했다. 참가자가 조립을 마치면 2달러를 주고 한 번 더 하겠느냐고 의향을 물어보았다. 참가자가 응하면 다시 레고를 가져다 주되, 두 번째 작업을 마쳤을 때는 11센트가 줄어든 1.89센트를 주었다. 이런 방식으로 보상을 11센트씩 줄여가면서 참가자가 그만두겠다고 할 때까지 실험을 계속했다. 줄어드는 금액에도 불구하고 조립을 여러 번 한 사람일수록 동기 부여가 더 많이 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실험 참가자들은 무작위로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집단 1에서는 참가자가 조립한 레고들을 그대로 둔 채 다음 레고를 가져다 주었다. 반면 집단 2에서는 참가자가 조립을 하는 동안, 참가자가 이전에 만든 레고를 연구자가 옆에서 해체했다. 어느 집단이 조립을 더 많이 했을까? 첫 번째 집단은 평균 10.6개를 조립한 반면, 애써 만든 성과물이 해체되는 것을 지켜본 두 번째 집단은 평균 7.2개밖에 만들지 못했다. 무의미한 일에 동기를 부여하기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성과가 없는 상황에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서, 물을 싫어하는 쥐를 물이 있는 통에 넣어두면 쥐는 처음에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책이 없음을 알게 된 뒤부터는 노력하기를 포기한다. 이렇게 더 이상 노력하기를 포기한 쥐들이 우울증의 원리와 치료법을 연구하기 위한 동물 모델로 쓰인다.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 때 더 이상 동기를 부여하지 않고 포기하는 상황을 ‘우울’이라고 보는 셈이다.  

■ 노력과 성취의 동기 부여 효과

그렇다면 노력해도 안 되는 상황에서는 저절로 동기가 부여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노력하고 성취하는 것 자체에 동기를 부여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애리얼리 교수는 실험 참가자들을 집단 1과 2로 나누었다. 집단 1의 참가자들에게는 종이로 학이나 개구리를 접을 기회가 주어졌다. 이들은 자기 작품에 대해 가격을 매기고, 이 가격이 컴퓨터가 무작위로 추출한 금액보다 크면, 금액을 지불하고 자기 작품을 가져갈 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자기 작품에 대해 평균 23센트의 가격을 책정했다. 반면, 집단 2의 참가자들은 집단 1의 참가자들이 만든 작품의 가격만 책정할 수 있었다. 이들은 평균 5센트의 가격을 책정했다. 이 실험 결과는 사람들이 자신이 노력을 들여 만든 성과물에 대해서는 훨씬 더 가치있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애리얼리 교수는 종이접기 설명서의 일부분을 삭제해서 일부러 어렵게 만든 뒤 위 실험을 반복했다. 집단 1에 속하는 참가자들은 이전 실험의 집단 1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그 결과 포기하는 참가자들도 생겼다. 실험 결과, 노력을 더 많이 기울여야 했던 이번 실험의 집단 1은 이전 실험의 집단 1보다 자기 작품을 더 높이 평가했다. 단, 종이접기를 중간에 포기한 참가자들은 자기 작품의 가치를 대단히 낮게 평가했다. 이 결과는 노력을 많이 기울여 성취한 대상일수록 애착을 가지지만, 아무리 노력했어도 중간에 포기한 대상은 하찮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작은 성공의 위력

우울하다고 가만히 있으면 노력을 기울여 성취하는 대상도, 노력했기에 좋아하는 대상도 갈수록 줄어들게 된다.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적다면, 그런 세상을 열심히 살아보려는 동기가 부여되기도 어렵다. 소개된 연구들은 노력해도 소용없거나 너무 쉬운 일보다는 적당한 도전이 필요한 일들, 끝까지 완수해낼 수 있는 일들을 자주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려준다. 또한 어렵고 큰 일을 중간 난이도의 작은 일로 나누어서, 좋아하는 대상을 늘려가는 것이 동기 부여에 효과적임을 알려준다. 작은 성공들을 통해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진다면, 훨씬 더 재미있고 살아볼 만하지 않겠나.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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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데 큰 산불 소식. 우리 동네도 몇 해 전 가정집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태웠다. 힘내시라고 성금도 드리고 그랬었다. 아직도 그 집 마당엔 불에 탄 흔적들이 보인다. 다행히 헬기로 물을 뿌려 뒷산으로 번지는 걸 막았다. 산으로 불이 옮았다면 내 거처도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냇가에 살면 홍수가 무섭고 산골에 살면 산불이 걱정된다.

사형수 세 명이 간곡하게 기도하자 하느님은 각자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기로 했다. 한 명은 여자를 구해 달라고 했다. 얼마 못 가 뼈만 앙상한 채로 죽었다. 다른 한 명은 술을 달라고 했다. 주정만 부리다가 죽었다. 나머지 한 명은 담배를 원했다. 그런데 건강하게 살아남았다. 간수가 궁금해서 묻자 죄수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담배만 달랑 주고 성냥불은 안 주셨는데요.”

성냥불 하나, 담뱃불 하나로 큰불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는 상여를 태우다가 산불이 나고, 논두렁 밭두렁 태우다가도 산불이 났다. 아주 어렸을 적에 잠깐 초가집에서 살아도 봤다. 목사관 임시 거처가 초가집이었다. 그즈음 장애인 형이 불장난에 재미를 붙였는데, 나뭇광에 불을 붙이려고 번번이 시도하다가 내게 딱 걸리곤 했다. 장작 아궁이에서 놀다가 손을 데더니만 그 재미와 작별하더라. 집이 타버릴 뻔했다.

“저녁노을 지고 달빛 흐를 때, 작은 불꽃으로 내 마음을 날려 봐. 저 들판 사이로 가면 내 마음의 창을 열고, 두 팔을 벌려서 돌면 야! 불이 춤춘다. 불놀이야.” 명절 때면 깡통에 구멍을 뚫고 불놀이를 하기도 했다. 까딱 잘못했다간 산불로 번지는 위험천만한 놀이였다. 예전엔 불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양동이를 들고 뛰쳐나왔다. 합심하여 불을 껐다. 뜬금없이 교회에서 성령의 불을 받으라고 부흥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 나는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떠올렸다. 불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위험한 무엇이렷다. 이상 저온으로 밤기온이 차다. 잔솔가지 그러모아 난로에 불을 모으고 산다. 날마다 불을 보면서 지내는데, 재를 버릴 때도 그렇고, 꺼진 불도 다시 본다. 자나 깨나 산불조심.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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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지폐 속 인물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을 비롯해 대부분 정치인이다. 유일한 비정치인은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20달러 지폐의 주인공인 해밀턴은 미국 경제의 설계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관세를 통해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국내 기업을 키우는 정책을 택했다. 그 결과 미국은 농업국가가 아니라 제조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길을 독일과 일본에 이어 한국, 그리고 중국이 뒤따르고 있다. 해밀턴은 한때 흑인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이 20달러 새 지폐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면서 ‘퇴출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밀려난 건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었다.

영국의 파운드화 지폐 앞면에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지폐 뒷면에는 다양한 분야의 인물이 올라 있다. 윈스턴 처칠 전 총리,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 소설가 제인 오스틴 등 대중에게 친밀하거나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이다. 중국(마오쩌둥)이나 베트남(호찌민), 인도(간디) 등에서는 국가 건립 영웅이, 군주국에서는 현직 군주의 초상을 넣었다. 각 나라의 현실과 시대정신의 반영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이 새 일왕의 연호를 정하면서 지폐도 새로 발행하기로 했다. 1만엔 지폐에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시부사와 에이치의 초상을 싣기로 했다. 그리고 5000엔 지폐엔 일본 최초의 여자 유학생인 쓰다 우메코, 1000엔 지폐엔 ‘일본 근대의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기타사토 시바사부로가 새 모델이라고 한다. 시부사와 에이치는 일제강점기에 제일은행권 발행과 경인선 철도 부설 등 한국 침탈에 앞장섰던 인사다. 그런 사람의 초상의 지폐 등장은 우리로선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지폐는 나라의 얼굴이다. 한국의 지폐에는 세종대왕, 신사임당, 이이, 이황 등의 초상이 실려 있다. 시기적으로 조선시대에 한정됐고, 넓게 보면 학자들만 있다. 다양성이 부족하고 시대정신을 반영했다고 하기 힘들다. 일본은 대놓고 한반도 수탈의 주인공을 새 지폐의 인물로 선택했다. 임시정부 100돌을 맞아 독립정신과 진취성을 갖춘 미래지향적인 인물을 고민해볼 때가 됐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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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전태일(1948~1970)에겐 우리가 몰랐던 ‘꿈’이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기업, ‘태일피복’의 창업이다. 1969년 11월1일 일기에 미리 쓴 ‘개업 인사글’을 보면, 그가 그렸던 태일피복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본사는 철저한 품질 관리와 생산원가를 고객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고, 생산과정을 소개하여 드립니다. 고객 여러분께서는 생산원가에서 얼마간의 이익을 붙여 주시면 됩니다. 이윤은 기업주와 종업원이 공평하게 분배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인, 종업원을 건강부터 교육까지 철저하게 관리합니다. 본사의 모토는 정직입니다. 종업원을 기업주와 하등의 차이 없이 대우하고도 사업을 해나갈 수 있다는 기본을 보이기 위한 기업체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양심적이며, 실용적인 상품은 논할 것도 없으며, 모든 기업체의 모범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

당시 서울 평화시장 의류공장의 노동환경은 참담했다. 대여섯 평 일터에서 수십명의 노동자들은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 태반이었고, 환풍기도 없어 먼지가 가득했다. 노동자들은 폐병에 안질, 영양실조 등 갖은 질환에 시달렸다. 전태일은 이런 현실을 타개할, ‘동행의 일터’를 만들려는 꿈을 사업계획서에 담았다.     

서울시가 청계천 수표교 인근에 지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를 기념하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 기념관 정면에는 전태일 열사가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요청하며 근로감독관에게 쓴 자필 편지가 패널로 붙어 있다. 서울시 제공

전태일은 1969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쓴 사업계획서에 ‘하루 8시간 근무 등 근로기준법 준수’ ‘사장에서 노동자까지 차별 없는 대우’ ‘이윤의 공평 분배’ ‘종업원 건강 보호와 교육’ ‘생산원가 공개’ ‘정당한 세금 납부’ 등이 이뤄지는 태일피복을 설계했다. 구체적 실행계획도 세웠다. 재단·재봉사는 3만원, 품질관리·배달 담당은 1만5000원, 재봉사 조수는 8000원의 월 임금을 받도록 했다. 그때는 시내버스 요금이 15원, 풀빵이 1원 하던 시절이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하면서도 재봉사 조수가 3000원, 재봉사가 1만원 정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파격이다. 밝은 형광등과 넓은 창, 환풍기가 있는 일터와 음악감상실·도서실·탁구대·농구대 등을 갖춘 휴게실도 조성할 계획이었다. ‘야간 기술학원’을 설립, 노동자 교육도 꿈꿨다. 전태일은 157명의 직원을 고용, 생산원가 공개로 가격 거품을 빼는 대신, 대량생산을 통해 이익을 키울 계획이었다. 서울시내 모든 의류점의 정보를 파악한 뒤, ‘월 1회 카탈로그 발송’ ‘오토바이를 활용한 주문 후 3시간 이내 배송’ ‘자동차로 고객 배웅’ ‘지역별 대리점 운영’ 등 전략도 세웠다. 매월 한차례씩 장학금·오토바이·피아노 등 사은품 증정행사도 기획했다. 

태일피복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전태일은 자신의 한쪽 눈을 희생할 각오로 자본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1970년 11월13일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뒤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꿈은 이뤄졌을까. 하루 8시간 근무는 그때나 지금이나 근로기준법에 분명하게 적시돼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법이 정한 ‘주 40시간’도 아닌 ‘주 52시간 노동’을 이야기한다. 경영계는 이마저도 부족하다며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 혹은 1년으로 늘리자고 한다. “최저임금이 너무 가파르게 오른다”고 아우성이지만 지난해 4분기 5분위 배율(최상위 20%의 평균소득을 최하위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은 5.47배로 통계청 집계 이후 가장 악화됐다. 2014~2017년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의 평균연봉은 직원 평균연봉의 20배가 넘었다. 안전해야 할 일터는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기까지 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백혈병 등으로 숨지고, 김용균 같은 노동자들이 기계에 끼여 숨지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한 해 1000명에 가까운 생명이 ‘일터에서의 사고’로 억울한 죽음을 맞고 있다.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면서까지 원했던 노동조합 할 권리도 취약하다. 노조 조직률 10.7%에서 알 수 있듯, 산업현장 곳곳에서 “노조 할 권리를 달라”는 외침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8개 협약 중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강제노동 폐지 등 4개 협약에 여전히 비준하지 않았다. 

평화시장과 멀지 않은 청계천변에 오는 30일 ‘전태일 기념관’이 문을 연다. 그곳에 ‘태일피복’ 전시공간이 마련돼,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된다. 그곳에 가면, 그가 꿈꾸던 ‘근로기준법을 지키면서 차별 없는 대우와 공평한 분배가 이뤄지는 세상’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숨진 지 49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다섯번 바뀐 시간이다. 

그런데 모든 노동자는 그가 꿈꾸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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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1919년 4월11일 신익희, 이동녕, 조소앙 등 애국지사 29인은 중국 상하이에 모여 만장일치로 대한민국의 탄생을 알렸다. 그들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며 우리나라가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선언했다. 애국지사들은 또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 새로운 나라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임시헌장 10개 항은 민주와 공화, 평등, 자유, 평화 등 근대 민주주의 헌법의 요소를 다 갖추었다. 이러한 헌법의 가치는 제헌 헌법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해 대한민국의 출발이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임시정부 헌법에서 주목할 조항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민주공화제’란 문구를 헌법에 명시한 것은 세계 헌정사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들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황제가 다스린 전제군주국이었다. 일제 강점 직후만 해도 복벽주의, 사회주의, 민주공화주의 등 여러 정치이념이 제시됐다. 이런 와중에서 임시정부가 민주공화국을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주와 자유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특히 3·1운동은 거대한 민주주의의 학습장이었다. 3·1독립선언서는 새로 건립될 조국은 정의·인도·자유의 나라여야 한다고 못 박았다. 

중국 상하이의 대표적 여행지로 전 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와이탄(옛 지명 황푸탄)의 현재 모습(왼쪽)과 옛 모습이다. 황푸강변을 따라 유럽풍 건물들이 들어선 와이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한국인에겐 유명 관광지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피끓는 역사의 현장이다.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을 떠나 배를 타고 이곳에 첫발을 내디뎠다.그리고 임시정부를 세웠다. 와이탄의 저 빌딩들 뒤편 ‘루이진얼루’ 주변의 어느 곳이 임시정부 첫 청사이지만, 아직 우리는 그 정확한 장소를 모른다. 1922년 의열단원 오성륜·김익상·이종암 의사가 ‘황푸탄 의거’를 단행한 곳도 여기다. 상하이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이 해방된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탄 곳도 여기 와이탄이다. 이준헌 기자

임시정부는 해방을 맞기까지 27년간 임시의정원의 의회정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했다. 임시정부의 활동은 의정원의 법령에 기반해 이뤄졌다. 의정원은 모두 5회에 걸쳐 헌법을 개정하고 법령 제정을 위해 39차례의 회의를 소집했다. 임시정부가 갈등과 분열 속에서도 유일 통합정부를 지켜갈 수 있었던 것은 의회정치의 힘이었다. 광복 후 민주와 자유의 가치는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을 통해 더욱 신장됐다. 특히 6월항쟁과 뒤이은 헌법 개정을 통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되는 등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실현됐다.  

반면 공화주의의 진전은 상대적으로 더뎠다. 공화주의는 군주와 같은 특정한 개인이나 계급이 아닌 공공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념이다. 임시헌장 제3조는 남녀·빈부·계급의 차별이 있어선 안된다며 평등 가치를 내걸었다. 정치·경제·교육에서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공화주의 정신이다. 제헌 헌법은 정의·인도·동포애를 명기하며 공화주의 가치를 이어갔다. 그러나 현실에서 헌법의 공화주의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빈부·계급 간 격차는 커져가고 있다. 배려, 협력, 포용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특권층이 부와 권력을 독식하면서 소수자 등 소외계층은 각자도생해야 할 처지다. 

10일 국회에서는 임시의정원 100주년 행사가 열렸다. 11일에는 정부 차원의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이 열린다. 여야 원내대표 5인은 3박4일 일정으로 중국 내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 중이다. 그런 행사도 필요하지만 임시정부의 통합정신, 공화주의정신을 되살리는 게 중요하다. 100년 동안 헌법 제1조를 지켜온 민주공화제를 뿌리내려야 한다. 정치권과 국민 모두 민주주의를 내실화하고 공공의 가치를 실천하는 일, 이것이 100년 전 임정 요인들에 대한 응답이다. 언제까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공허하게 외치기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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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문화체육관광부 합동으로 ‘인문사회 학술생태계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훌륭한 비전임 박사를 대상으로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가칭)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학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대학 밖 연구자에게 연구비를 지원받는 기회를 확대하는 방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인문사회 학술은 직접적인 이익 창출을 하지 않지만, 국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야이다. 세종 시기에 양성된 학자와 그 학문적 성과에 이어진 문화적 융성과 번영은 잘 알려진 일이다. 우리 사회가 성숙한 사회로의 변화를 이루고자 하고 또 과거의 선진국 추격형 국가가 아닌 선도형 국가가 되려면 이 분야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이 분야에 큰 관심을 보여준 관계부처에 고마운 마음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먼저 인문사회 분야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더욱 늘어나야 한다. 2019년 우리나라의 국가 연구·개발 예산은 20조원을 넘어 다른 선진국보다 적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인문사회 분야에 대한 국가의 연구비 지원은 그것의 1.5%인 3000억원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영국은 국가 연구예산의 9% 이상을 인문사회 분야에 투자하며 미국 또한 7%에 달한다. 이에 비할 때 우리 인문사회 분야 예산은 상당히 빈약한 수준이다. 

둘째, 인문사회 학술에 대한 장기적 정책을 수행하고 그것을 집행할 조직이 필요하다. 학술의 활성화는 단순히 연구지원의 규모를 늘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중장기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어느 분야에 어느 정도의 연구 인력이 필요하고, 그들을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학술정책 전반을 다룰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 과학기술계의 경우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등 별도 조직을 통해 해당 분야의 연구·개발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지속적 논의가 가능하다. 그간 인문사회 분야는 어려움을 호소하면 그에 대해 새로운 형식의 연구비를 만드는 미봉책만 제시됐는데, 이는 장기적인 정책과 그것을 수행할 기구의 부재에서 온 것이다.

셋째, 인문사회 학술의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 지식세계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비전임 박사에 대한 지원의 확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강사법의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거나 일종의 취업 기회 확대로 접근하면 안된다. 생계지원 방식의 연구비 확대가 연구자의 증대로 이어지고 다시 그 때문에 연구비의 부족을 호소하고 이에 따라 연구비가 늘어나는 악순환의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이다. 학술의 활성화를 위한 방안은 장기적인 전망으로 건전한 지식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초점이 놓여야 한다.

끝으로 인문사회 분야에 종사하는 기성 학자들의 분발이 요구된다. 인문사회 학술생태계의 위기는 학문 후속세대의 위기이며 동시에 대학 전체의 위기다. 그런데도 급변하는 세계에서 교수들이 혹여 밀폐된 연구실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거나 자신만의 세계 구축에 열을 올리는 건 아닌지, 사회적 임무를 잊고 편안한 직업인에 만족하는 건 아닌지 성찰이 절실하다. 이것은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번 활성화 방안에서 대학 밖 연구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 것이 대학만이 학문의 근거지였던 시대가 지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앞으로 대학 밖에서 더 큰 힘으로 전임교수들에게 변화를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이강재 | 서울대 교수·중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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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이 지났다. 그 봄을 눈물로 통곡으로 보내면서 다시는 흩날리는 벚꽃 잎도, 새파란 하늘도 죄스러워 바라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봄이 다시 왔다. ‘어느덧’이라는 말로 그해 봄은 아득하게 멀어졌다. 기억한다고, 잊지 않겠다고 했지만, 푸른 하늘 아래 눈부시게 피어난 벚꽃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감탄한다. 나 같은 사람은 벌써 멀찌감치 와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간은 5년 전 봄날에 멈춰 있다. 그날 아침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서는 딸을 불러 품에 꼭 안아줬던 기억에서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다. 

“뒤돌아보아도 아프다. 시간을 가슴에 짓이겨 뭉갰지. 멈추어도 아프다. 시간을 어미 발꿈치로 짓밟고 한 발짝 떼어도 아프다.”*

그해 봄 아이를 보낸 어머니가 쓴 시집을 받고 선뜻 책장을 들춰보지 못했다. 교실 게시판에 있던 달력 사진이 박힌 표지만 며칠 동안 힐끔거렸다. 그 봄날에 아이들은 교내 로봇 대회를 했구나. 과학 탐구 대회도 있었구나.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면 진학 특강도 들었겠구나. 달력을 가까이 들여다보니 수학여행 마지막 날인 18일에 적어 놓은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다시 돌아와~”

짧은 수학여행을 아쉬워하며 모두 다시 돌아올 줄 알았던, 다시 돌아와 이제는 스물세 살이 되었을 딸. “내 손으로 너를 지워야”* 했던 어머니는 딸이 성인이 되면 보여주려고 남겨놓았던 배냇저고리를 꺼내 놓고 말한다. 이렇게 슬프게 보려고 남겨둔 게 아니었다고. 딸이 좋아하는 새우의 껍질을 벗겨주던 아빠는 제사상에 새우찜을 올려놓고, 동생을 잃은 언니는 중얼거린다. “왜? 세 개?”*

어머니의 시집은 한 아이의 삶과 그 삶을 함께한 가족의 시간과 기억으로 엮여 있다. 이 가족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같은 아픔을 가진 다른 가족의 기억도 보인다.   

시집을 본 뒤 깨달았다. 그 봄을 기억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삶을 잊지 않는 것이다. 봄처럼 피어나던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니 섣부르게 말할 수 없다. 이제 그만하라고. 

*부분은 시집 <너에게 그리움을 보낸다>(유인애)에서 차용.

<김해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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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개구리는 잠들지 않는다고 한다. 잠을 자지 않고도 어떻게 하루를 버틸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지만, 현재까지 과학자에 의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렇다고 한다. 지구에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저 신기하기 그지없는 생명체가 아주 많다. 가을이 되면 알래스카에서 북멕시코로 이동했다가 봄이 되면 다시 돌아가는 흰정수리북미멧새는 무려 7일 동안이나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잠을 아주 많이 자는 동물도 있다. 들다람쥐는 하루에 14~15시간을 잔다. 박쥐는 한 술 더 떠 20시간가량을 잠으로 보낸다. 지구에서 가장 잠을 많이 잔다고 알려진 생명체는 앙증맞은 외모로 사랑받는 코알라이다. 코알라는 자그마치 하루에 22시간 동안이나 잔다. 코알라에 못지않은 잠보 동물도 있는데, 단단한 껍질로 유명한 아메리카 대륙에만 서식하는 포유류 아르마딜로다. 아르마딜로는 무려 20여시간이나 잔다고 한다. 하마나 나무늘보도 많이 자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의 곁에 있는 고양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잠꾸러기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렇게 잠을 많이 자는 동물이 있는 반면, 어떤 동물은 도통 자지 않는다. 황소개구리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소는 불과 4시간, 노루와 말은 3시간가량, 그리고 기린은 심지어 2시간도 미치지 못하는 시간만을 잠에 할애한다고 한다. 지구는 잠이 없는 동물과 하루를 거의 잠으로 보내는 동물로 극단적으로 나뉘어 있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동물은 밤에 자는데, 낮에 잠을 청하는 동물도 있다. 야행성인 고슴도치는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나 움직인다. 잠이라는 틀로 지구의 생명체를 분류해보면 지구의 종다양성이 실감난다.  

이제 사람의 잠으로 눈을 돌려볼 차례다. 201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은 하루 평균 9시간13분을 잠으로 보낸다. 반면 한국인은 7시간41분 잔다. 영국 국민건강보험(NHS)이 권장하는 건강을 위해 가장 좋은 수면시간은 하루 8시간인데,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은 이 기준을 밑돈다. 사실상 수면 부족인 셈이다. 평균 수면시간은 나라마다 다르다. 영국 사람은 8시간4분가량 자고, 독일 사람은 8시간14분 동안 침대에 있다. 프랑스인도 넉넉하게 잠을 잔다. 프랑스의 평균 수면시간은 8시간29분이다. 미국인은 한국인보다 무려 1시간 이상 더 잔다. 그들은 8시간45분간 수면한다. 수면다양성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잠에 할애하는 시간은 나라에 따라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수면다양성은 그 나라의 사회환경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한국인이 OECD 국가의 평균 수면시간 8시간22분보다 훨씬 덜 자는 이유가 ‘김치’와 ‘마늘’을 먹기 때문일 리 없다. 특별한 유전자를 갖고 있어 다른 나라 사람보다 적게 자고도 버틸 수 있기 때문일 리도 없다. 한국인의 수면 부족 원인을 찾기 위해 노동시간부터 살펴보자. 2017년 기준으로 한국 노동자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024시간에 달한다. OECD 국가 평균 1759시간보다 무려 265시간을 더 일한 셈이다. OECD 국가 중 연간 평균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인은 연간 1356시간 일한다. 독일인은 한국 사람보다 1년에 668시간이나 덜 일한다. 

부지런하다고 정평이 난 독일인이 한국인보다 많이 잘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한국인보다 1년에 668시간을 덜 일한다는 사실로만 설명될 수 있다. 5년마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생활시간 조사는 한국인이 왜 잠이 부족한지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실마리를 제공한다. 2014년 통계청의 ‘한국인들의 생활시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하루 24시간 중 통근 및 통학에 평균 1시간30분을 소비한다. OECD 평균보다 연간 265시간을 더 일하면서 하루 24시간 중 16%를 통근 및 통학에 써야 하니, 우리에겐 잠을 줄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는 셈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처지 때문에 노루나 말처럼 짧은 시간만 자야 한다. 어떤 아이돌 멤버는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한창 바쁠 때 하루 2~3시간 잔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전문가들은 10대 청소년은 하루 10시간 정도 잘 것을 권유하는데, 교육부의 2016년 조사에 의하면 한국 고등학생 10명 가운데 4명이 6시간도 채 자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쑥쑥 자라던 한국 고등학생의 평균 키는 2016년 조사에서는 10년 전보다 남학생은 0.2㎝, 여학생은 0.5㎝나 줄었다고 한다. 나부터도 하루에 2시간을 통근에 할애한다. 항상 부족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어떤 날은 소처럼 조금 자기도 한다. 그보다 더 여유가 없는 날은 황소개구리를 부러워한다. 소처럼 적게 자야만 하는 날이 쌓이다 보면 코알라가 되고 싶어진다. 오늘도 그렇다. 코알라가 되고 싶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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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보호관찰소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청사가 없는 국가기관이다. 청사 이전 시도가 지역민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2009년 성남시 수정구에서 분당구 구미동으로 청사를 옮기려 했지만 공사는 시작도 못했고, 2010년 노동부가 쓰던 야탑동 구청사에 들어가려던 계획도, 2013년 서현동으로 이주하려던 시도도 물거품이 됐다. 

보호관찰소는 법원에서 보호관찰·사회봉사 수강명령을 받은 이들과 가석방자 등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주민들은 보호관찰소가 지역에 생기면 범죄 전력이 있는 보호관찰 대상자들이 청사를 드나들게 되면서 주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이유를 들어 이전에 반대했다. 

청사 이전이 무산되자 성남시청의 중재로 민관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대책위는 성남시청에 관찰소 직원들이 업무를 볼 임시행정사무소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보호관찰 대상자의 신고 접수나 구인 등의 업무는 서울동부보호관찰소와 수원보호관찰소에서 진행토록 했다. 직원들을 위한 사무실은 허락했지만 보호관찰 대상자의 출입은 끝까지 용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행정 사무는 성남시청에서, 보호관찰 대상자 지도·감독 업무는 타 지역 관찰소 2곳에서 처리하는 기형적인 형태로 업무가 진행되고 있다. 

올 초 직원이 늘면서 직원들 대다수가 근무하고 있는 서울동부보호관찰소의 사무공간이 부족해졌다. 이 때문에 2010년 확보만 해놓고 쓰지는 못하던 야탑청사에 문서고를 옮기고 보호관찰 자원봉사자 교육 및 회의 등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하고자 했다. 모두 보호관찰 대상자가 출입하는 시설이 아니다. 그럼에도 야탑3동 주민들은 지난 3월15일 청사 앞에 현수막과 천막을 치고 반대 집회를 벌였다. 주민들은 민관대책위원회가 2013년 야탑동은 보호관찰소 입지 선정에서 제외한다는 의결문을 지키고, 보호관찰소를 이전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법무부가 이행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주민들의 태도와 요구가 과연 합리적인 것인지 묻고 싶다. 변변한 청사도 없이, 직원들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부서 간 원활한 소통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면 제대로 된 보호관찰 업무를 수행하기 어렵다. 보호관찰은 대상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는 것이자 이들의 재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재범 예방 활동이 적절히 이뤄지지 못할 때의 피해는 청사 입지 주변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깝게는 성남시, 넓게는 전국의 시민들이 잠재적 범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성남지역에 거주하는 보호관찰 대상자는 1000명이 넘는다. 보호관찰소를 없앤다고 해서 이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단만 없애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선택이 비록 최선은 아니더라도 훗날 범죄로부터 안전한 성남시, 함께 사는 행복한 성남시를 만들기 위한 차선은 될 수 있도록 시민들의 인식 전환을 바란다.

<신달수 | 법무부 수원보호관찰소 성남지소 관찰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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