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 양파가 오고 있다. 황토밭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드센 바닷바람을 꿋꿋하게 버티면서 속을 채운 무안 양파는 아삭아삭하고, 매콤하면서도 달다. 입맛 없을 때, 양파 하나 썰어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그늘에 잘 매달아두면 몇 달이 지나도 무르지 않는다. 늦봄에 받은 양파를 가을까지 너끈히 먹을 수 있다. 

무안에서 나고 자라 어릴 적 내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양파밭으로 달려가야 했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파란 바닷물처럼 일렁이는 초록빛 밭 풍경만 떠올렸다. 일이 있어 무안에 갔을 때 가장 궁금한 것은 양파밭이었다. 바닷가 양파밭의 풍경을 보고 싶었지만, 마침 겨울이었다. 겨울 양파밭은 붉었다. 손가락 길이의 가느다란 이파리를 내민 양파는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 이파리가 해풍에 맞서며 꼿꼿하게 서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는 동안 땅 밑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려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날 양파밭은 허탕이었으나, 우연히 들어간 허름한 식당에서 먹은 백반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무안을 다녀온 뒤로 무안 양파를 받을 적마다 붉은 밭과 푸른 바다와 음식 솜씨가 빼어난 식당을 떠올렸다. 그 무안 양파를 이제는 집에 앉아 받아먹을 수 없겠구나 싶었다. 양파를 보내주던 친구의 아버지가 몇 해 전에 돌아가셨고, 연로한 어머니 혼자 양파 농사를 짓기는 어려우실 테니까. 친구는 주말마다 가서 일을 거들었지만, 몇 해나 버틸까 싶었다.

그런데 친구의 막내동생이 서울에서 내려가 농사를 짓는다고 해서 반가웠다. 지금껏 악착같이 한 게 없어 형제들이 미더워하지 않았는데, 웬걸 동생은 토양에 맞는 좋은 품종을 고르고, 기계를 써서 비용을 낮추고, 직거래 통로를 만들었다 한다. 반년 새 양파 전문가가 된 동생은 동네 어르신들 농사도 돕는다고 했다. 동생은 겨울을 이겨낸 양파처럼 어려운 시기를 스스로 넘어선 것이다. 그 장한 초보 농민의 첫 수확물이 지금 오고 있다. 

며칠 전, 양파값이 폭락해서 출하가 늦어진 양파를 폐기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몸에 좋은 무안 양파를 꼭 챙겨 먹을 때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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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2006년작인 <괴물>의 영어 제목은 ‘The Host’였다. 호스트는 손님을 초대한 주인, 주최자, 숙주(宿主) 등의 뜻이니 조만간 ‘기생충’이란 영화도 나오겠구나 생각했다. <기생충>의 주인공 부부 이름도 기택과 충숙이다. 봉 감독은 근대성, 한국 현대사,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뛰어나게 변주한다. 영화마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일관된 사유가 있다. 이번 작품 도 그 자장 안에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세르의 <기식자(Le Parasite)>는 기식을 인간의 본성 중 하나로 본다. 그래서 책 제목도 기생충(寄生蟲)이 아니라 기식자(寄食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대개 “기생충 같다”라고 표현하지만 기생은 생산성(환경 파괴)을 최고 가치로 삼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기생’은 오해와 낙인이 많은 단어다. 과거 기생은 여성의 직업이었다. 그들은 놀고먹지 않았다. 기예를 갖추고 일하는 이들이었다. ‘기생충’은 여기에 ‘벌레 충’까지 붙었다. 벌레가 생태계에 기여하는 역할을 생각하면, 인간이야말로 벌레보다 못하다. 맘충, 설명충처럼 한국사회에서 혐오의 접미사가 된 벌레는 억울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기생에 해당하는 영어 ‘parasite’는 ‘para’와 ‘site’의 합성어이다. ‘para’는 “옆에, 나란히, 같이” 등의 의미가 있다. 한마디로 기생은 타인과 같이 산다는 뜻이다. 숙주와 기식자는 위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같이 사는 사이다. 삶의 주최자는 손님이 필요하다. 숙주도 다른 숙주에게는 기생하는 존재이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미셸 세르는 최고의 기식자를 왕(王)으로 보았다.

지금 인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포스트 휴먼’이라고 불릴 정도의 기이한 세계를 살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자본주의의 질주가 그것이다. 빈부의 양극화는 건강, 교육, 문화 등 일상은 물론 인생과 자아의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당대 국가와 자본의 목표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재생산은 국가의 부를 생산하는 데 오히려 짐이 되고 있다. 국가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탈락시켜 국민을 ‘잉여’로 만드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고용의 종말은 필연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논란이 되었던 “좌파 신자유주의”는 모순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했는지도 모른다. 비극은 이 폭력적 자본주의 자체는 속수무책이고, 현실 정치는 이 과정의 방식을 얼마나 ‘인간답게’ 다룰 것인가를 둘러싼 속도 조절에 국한돼 있다는 점이다. 

작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자 아베 일본 총리는 자국 영화의 수상을 축하하기보다는 일본 사회의 주변부를 그렸다는 이유로 못마땅해했고, 평소 아베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고레에다 감독은 뒤늦은 총리의 축하전화를 거절했다. 예술이 권력의 선전 도구가 아닌 한 외롭고, 슬프고, 우울한 세계를 조명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통이 없다면 할 이야기도 없고, 따라서 예술도 없다. 

<어느 가족>의 자국어 제목은 ‘좀도둑 가족(万引き家族)’이다. 두 작품 모두 기존의 가족 제도와 양극화 시대를 매개시킨다. 가족은 애초부터 계층 재생산의 핵심이 아니던가. <어느 가족>에서도 일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어느 가족>과 <기생충>은 작품의 분위기는 다르지만 자립과 의존, 주인과 식객, 시혜와 수혜의 의미에 문제제기를 한다는 면에서 닮았다. 

통념과 달리, 자립의 상대어는 의존이 아니라 독점이다. 인간 생활에서 완전한 자립은 가능하지 않다. 자립의 반대는 독점이거나 고립이다. 지역 공동체의 자급자족을 가로막는 것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독점이다. 글로벌 경제란 일국 내부의 자본주의 분업이었던 도시-농촌의 위계가 전 세계적 지역 분업으로 전환된 것이다. 각 나라 ‘특산품’의 품목과 경쟁력은 같지 않다. 미국은 무기부터 쇠고기까지 모두를 팔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그렇지 않다. 빈부 격차는 필연적이다. 

작품의 시선은 기생의 약함이나 쓸모없음이 아니라 기존 개념을 질문한다. 우리에겐 다음과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기생이 뭐 어때서?” “진짜 기생하는 인간들이 누군데!” “기본소득은 당연해!” 이 시대, 기생은 전쟁의 대안이다. 공존하지 않으면 공도동망(共倒同亡)이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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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사회과학은 긴밀히 연관돼 있다. 인문학 가운데 철학과 역사학은 정치학·경제학·사회학 등 사회과학의 기초를 이뤄왔다. 그러면 문학은 사회과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문학 가운데 사회과학에 영감과 통찰을 안겨준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1984>를 들고 싶다. 특히 <1984>는 사회학·정치학·신문방송학 등에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오웰은 이 소설에서 당대 현실을 해부한다. 그가 겨냥한 것은 파시즘과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 비판이다. 둘째, 오웰은 미래 사회를 전망한다. 그가 우려한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감시사회로서의 미래다. 오웰이 예견한 것은 디스토피아 세계다. 권력에 의한 감시와 통제라는 우울하고 섬뜩한 오웰의 경고는 정보사회에 대한 선구적인 통찰을 이뤄왔다. 널리 알려졌듯 <1984>는 초고가 쓰인 1948년의 ‘48’을 ‘84’로 바꾼 것이다. 이 초고가 1949년 6월8일 세상에 나왔으니 지난 토요일은 <1984> 출간 70년이 되는 날이었다.

서구 사회에서 오웰의 <1984>가 누린 명성은 앞선 세대의 고전들에 필적했다. 2009년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주요 언론사와 대형 도서관의 추천도서 목록 및 관련 기록을 토대로 뽑은 ‘역대 세계 최고의 100대 명저’에서 <1984>는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20세기 전반을 대표했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3위를 기록했다. <1984>는 2007년 일간지 가디언에 의해 ‘20세기를 가장 잘 정의한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4>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소설의 제목인 1984년에 치러진 지구적 이벤트였다. 1984년 1월1일,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미국과 유럽을 인공위성으로 연결한 텔레비전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선보였다. 백남준은 텔레비전이 ‘빅브러더’의 대중 통제와 조작의 수단이 될 것이라는 오웰의 전망에 이의를 제기했다. 백남준이 주목한 것은 소통을 위한 매체로서의 텔레비전의 기여였다. 텔레비전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나의 경우 소통의 자유라는 긍정적 측면보다 대중의 통제라는 부정적 측면이 더 크게 보이니 백남준보다는 오웰의 견해에 더 가까운 셈이다.

<1984>가 지난 70년 동안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아우르며 미쳤던 가장 중요한 영향은 감시사회로서의 현대사회의 그늘에 대한 성찰적 계몽에 있었다.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나라 오세아니아는 텔레스크린·사상경찰·마이크로폰 등을 이용해 개인의 생활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한다. 이 감시와 통제를 위해 오웰이 내세우는 허구적 존재가 빅브러더다. 빅브러더는 사회이론가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분석한 일망감시체제인 ‘파놉티콘’(원형 감옥)과 닮아 있고, 오늘날 우리 일상이 속속들이 기록돼 있는 ‘빅데이터’를 떠올리게 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1984>의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당의 슬로건이다. 당은 과거의 기억을 통제하고 조작하며, 이를 바탕으로 미래 사회에 대한 항구적 감시 체제를 완성한다. 감시 체제는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분석하듯 자본주의·산업주의·군사적 힘과 함께 현대성을 이루는 한 요소이자, 정보사회의 도래와 진전으로 더욱 강화돼온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한 그늘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오웰의 비관적인 전망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금 이 칼럼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1984>의 텔레스크린·사상경찰·마이크로폰 등에 대응하는 오늘날의 신용카드·e메일·휴대전화·폐쇄회로(CC)TV·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은 인간의 자유를 확장시킨 것인가, 구속시킨 것인가. 둘 다 옳다는 절충적 관점에서 우리 인류는 정보사회의 진전이 가져온 ‘자유의 확장’과 함께 그 기술적 전체주의가 낳아온 ‘자유의 구속’이 공존하는 ‘이중 사회’의 그물망 속에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오늘날 시민 다수의 사생활을 이제 국가와 기업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추적하고 감시하며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웰이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이러한 권력에 대한 일관된, 그리고 성찰적인 비판이었다. 빅데이터, 가짜뉴스, 포퓰리즘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는 우리 시대에 <1984>는 현재진행형이다. <1984> 출간 70년을 맞이하여 조지 오웰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싶은 이유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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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EU)과 유럽의회를 방문했다. 의회 곳곳을 안내하던 관계자가 메인 프레스룸 입구에 적힌 이름을 가리키며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다. Anna Politkovskaya(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러시아 독립언론 ‘노바야 가제타’의 기자다. 폴리트코프스카야는 체첸 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인권유린을 고발하는 등 러시아 정부 비판 기사로 명성을 얻었다. 용기있는 탐사보도로 수많은 언론상을 받았으나 2006년 10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머리와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였다. 살인범 5명은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EU 출입기자와 유럽의회 의원들은 기자정신을 기려 공식 브리핑이 열리는 프레스룸을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 룸’으로 명명했다.

러시아의 언론환경은 엄혹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거나 누명을 쓰고 체포되는 사례가 잦다. 2009년 ‘노바야 가제타’의 아나스타샤 바부로바 기자가 총에 맞아 숨졌다. 지난해에는 푸틴 정부의 ‘시리아 용병 파견’ 의혹을 파헤쳐온 ‘노비 덴’의 막심 보로딘 기자가 자택 발코니에서 추락사했다. 러시아는 최근 국경없는 기자회(RSF)가 발표한 ‘2019년 세계 언론자유 지수’에서 조사 대상 180개국 중 149위를 기록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러시아 온라인 매체 ‘메두자’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이반 골루노프가 지난 6일(현지시간) 마약 소지·거래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골루노프의 소변검사에선 마약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법원은 이례적으로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두 달간의 가택연금 명령으로 대신했다. 언론은 지면을 통해 골루노프에 대한 연대 의사를 표명했다. 베도모스티·코메르산트·RBC 등 3개 일간지는 10일자 1면을 일제히 ‘나/우리는 이반 골루노프다’라는 헤드라인으로 장식했다.

폴리트코프스카야는 살해당하기 1년 전 운명을 예감한 듯 이야기했다. “위험은 내 일의 일상적 부분이 됐다. 하지만 내 임무를 멈출 수는 없다.”(BBC 인터뷰)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추구하는, 세계의 모든 기자는 ‘이반 골루노프’요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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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시민으로서 자기 견해를 가지고 당당하게 발언하는 여성·청년들은 ‘너는 너무 정치적’이라는 타박을 듣기도 한다. 때로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은 보통의 생활인뿐 아니라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민망하고 부담스러우며, 천박한(?) 것으로까지 간주된다. 요즘처럼 현실정치가 천박한 막말과 서민의 삶과 무관한 정쟁으로 점철되면 다시 탈정치·반정치의 힘은 커진다. 

그런데 이 같은 정치에 대한 의도된(또는 강요된) 무관심은 한편 역사적으로 구성된 정치문화의 일부이다. 멀리 가면 태생부터 외세의 침탈과 극단적 이념대립 때문에 수많은 지사들과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현대 한국 정치가 배경이다. 예컨대 황순원 같은 대작가가 <소나기>(1953) 같은 초등학생들의 ‘순수한’ 우정(?) 이야기 같은 것을 쓰거나 평생 칼럼 같은 ‘잡문’을 멀리한 것도, 그가 겪은 참담한 이념 대립과 강요된 사상전향 때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군부독재 시절 부모들은 자녀들이 운동과 정치에 가까이 갈까 늘 전전긍긍했다. 박정희·전두환에게 저항한 사람들이 어떤 희생을 당했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명박근혜’라 상징되는 퇴행의 시대에는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이 강하게 새로 구조화되었다. 그래서 학생은 학생운동으로부터, 교수는 학술운동으로부터, 시민들은 노동운동과 최대한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누가 조장하고 누구에게 유리한 것이었을까?

과도한 정치열과 정치혐오(냉소)가 동전의 양면으로 상존하는 한국에서 ‘건전하고 성숙한’ 정치적 시민으로 살고 처세하기란 쉽지 않다. 움베르토 에코의 표현을 빌리면 현실정치라는 ‘바보’에게 ‘웃으면서 화내기’도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2016~2017년 ‘웃으면서 화내기’의 높은 경지를 실행해보았다. 촛불항쟁은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온통 망쳐놓은 정치에 대한 고도의 ‘웃으면서 화내기’였다. “이게 나라냐?” 시민들은 실로 어이없고 화가 났지만, 마치 축제라도 벌어진 듯 매주 장수풍뎅이연구회, 민주묘총, 화분안죽이기실천시민연합, 고산병연구회 같은 깃발들을 들고나와서 창의력을 뽐내고 아이와 가족들 또 친구들과 함께 ‘직접행동’을 수행했다. 그것은 혹자들의 안타까운 바람처럼 혁명에는 못 미쳤지만, 분명 대단한 민주주의의 성취였고 세계 어느 나라에 견주어도 높은 ‘반폭력’ 시민성의 증거였다. 시민들이 너무 빨리(?) 정치를 정치인들과 새로 선출된 정부에 맡기고 일상으로 돌아갔던 것은 차라리 아쉬웠다.

그런 고도의 정치능력은 오랜 시간의 단련 덕분에 가능했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원점에는 1980년의 광주항쟁과 1987년의 6월항쟁이 있다. 32년 전의 오늘, ‘웃으며 화내기’는 불가능했다. 쏟아지는 최루가스와 백골단 폭력 앞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학생과 노동자들은 전국의 민정당 사무실과 파출소를 공격했다. 항쟁을 겪었던 부산이나 광주에서만이 아니라, 대구나 대전처럼 얌전한(?) 동네에서도 그랬다. 시민들은 물론 이 ‘반폭력’을 찬성하고 격려해주었다. 

‘87년체제’는 지루하고 낡았지만, 시민들은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권리를 다하며 직접행동과 대의제 양쪽을 다 사용하여 일상과 헌정을 지켜내는 정치적 능력과 경험을 보유하게 되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 ‘선진’ 정치문화가 아직은 대한민국 사람 모두의 것은 아니다. 지역주의, 극우 정치종교에 기댄 시대착오와 냉전 공안 세력이 실재한다. 자유한국당 인사들의 천박한 인식과 사세에 맞지 않는 ‘좌파’ ‘독재’ 따위의 어설픈 수사, 군복과 태극기를 두른 패션이나 군가와 새마을노래 등이 난무하는 태극기집회는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그 수준은 한국 민주주의 문화의 일부이다. 

태극기집회를 눈여겨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그 옆을 지나가는 보통의 시민들과 젊은이들이 거기에 어떤 눈길을 보내는지? 황당함, 불편함, 경멸, 연민 등일 것이다. 그럼에도 90%의 시민들은 그들에게 항의하거나 시비 걸지 않는다. 황당한 내용의 집회를 열고 쿠데타를 선동하거나 성조기를 몸에 두르고 활개 칠 ‘자유’조차 봐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두운 한국 정치사와 타락한 기득권을 반영하는 안쓰러운 행위임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보수’가 조장하는 수준 낮은 정치문화에 대한 시민들과 생활인들의 인내가 차츰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겠다. 이 시민들이 전두환의 포악과 박근혜의 암둔함을 내친 항쟁의 단호한 주체였다는 점을 6월항쟁 기념일에 새겨본다. 특히 여성·청년들에게 ‘너는 너무 정치적’이라 타박하지 마시라.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야말로 ‘꼰대’이거나 새로운 시민정치의 싹을 배제하려는 술수에 동참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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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상사와의 갈등을 겪느라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있었다. 그가 회의 시간에 상사에게 소위 ‘바른말’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주변에서 동료들이 너 한 번만 더 그러면 완전 찍힌다고 경고했을 때 그만뒀어야 한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됐고 결국 마지노선을 넘고 만 거죠.”

그는 그때부터 상사의 교묘한 괴롭힘이 시작됐다 했다. 어느 날은 터무니없게 짧은 시간 안에 한꺼번에 일을 끝내 놓으라 했다가 또 어느 때는 프로젝트에서 아예 배제하는 식이었다. 동료들도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대놓고 이의 제기를 하지는 말라고 충고했다. 시간이 흐르면 상사도 지칠 테니 그때까지 참는 것이 진짜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그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 너무도 힘들다는 점이었다. 

“요즘은 퇴근해서 집에 있는 동안에도 아내나 아이들에게 신경 쓰는 것보다 그 인간 미워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형편이에요. 처음엔 그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죠. 어느 날 아내가 콕 집어서 지적해 주기 전까지는요. 아내가 그러더군요. 자기한테도 말하기 힘들면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요.”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실제 일어난 일보다 훨씬 격렬한 감정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분노라는 한 가지 감정에만 몰두하다 보니 그 감정을 필요 이상으로 계속해서 확대하고 증폭시켜 온 것이었다. 그는 매우 분노한 채로 마음속에 쌓여 있던 감정들을 여과 없이 다 쏟아냈고, 그것만으로도 아주 후련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우리 내면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얼마나 자주 실제보다 어마어마하게 부풀려지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비로소 자신도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것이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물론 그의 사례는 조금도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해 누구라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물체다. 그리고 생물체는 어떤 상황에서도 외부 환경에 반응하는 존재다. 따라서 힘든 일이 있으면 고통스럽고, 좋은 일이 있으면 기쁘고, 불쾌한 일이 있으면 화가 나고, 무서운 것이 있으면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다. 다만 거기에 더해 그런 감정을 확대하고 증폭시키는 매개체가 있으니, 그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다. 계속해서 그 생각에만 골몰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상황을 더욱 나쁜 쪽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황에 맞는 감정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그 감정에 압도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정신건강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기쁨, 우울, 불안, 두려움, 분노 등의 감정은 그것을 겪어내는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또한 상황에 어울리는 적절한 감정들은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어떤 것 때문에 상처를 잘 받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지표가 되어 준다. 특히 그런 감정들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고, 따라서 불편한 감정을 덜 경험하는 지혜를 쌓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 일어난 상황보다 지나치고 부적절한 감정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켜 충동적 행동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상황에 맞는 감정을 적절하게 습득하는 것이야말로 곧 우리의 정신건강을 유지하고 인간관계를 잘 맺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또 하나,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하는 것이 솔직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여과 없이 모두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우리의 뇌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일정한 여과 장치를 거친 다음 표현하는 쪽이 훨씬 더 지혜로운 행동이다. 그에 관해서라면 저 옛날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미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도덕적인 인간이란 적절한 감정을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양창순 |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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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10일 밤 별세했다. 이 이사장은 가족과 지인들의 찬송과 기도 속에 향년 9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인동초 부부’로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 헌신한 고인의 열정과 숭고한 뜻을 기린다.

이 이사장은 정치인 김대중에게 반려 이상의 존재였다. 김 전 대통령이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 길을 내내 함께 걸었던 정치적 동지였다. 박정희 정권에 맞서 해외에서 투쟁하는 김 전 대통령에게 흔들림 없이 싸우라고 편지로 격려했고, 옥중의 김 전 대통령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의 메시지를 바깥 세상에 알렸다. 김 전 대통령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벼린 것이 이 이사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전 대통령 서거 후엔 그 유지를 받들어 민주진보 진영의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세차례 북한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고단했지만 빛나는 삶이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6월 12일 (출처:경향신문DB)

이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의 배우자이기에 앞서 한국 여성의 권리 향상에 헌신한 1세대 여성운동가였다. 당대에 드물게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YWCA 총무 등 여성단체 활동에 앞장섰다.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한 후 동교동 집 대문에 나란히 내건 두 사람의 문패는 양성평등의 상징과도 같았다. 김 전 대통령이 주도해 13대 국회를 통과한 가족법 개정안에는 고인의 의지가 묻어 있었다. 여성부 신설과 여성의 공직 진출 확대 등 시대를 앞서간 김대중 정부의 여성 정책에 미친 고인의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고인은 최근 부부에게 ‘사랑을 베풀어준 국민’에 감사의 뜻을 전한 뒤 “우리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체가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모두가 새겨야 할 말이다.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다. 이 이사장의 유지대로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넘어 화합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고인이 천국에서도 기도하겠다고 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도 완성해야 한다. 10년 전 김 전 대통령 서거 때 이 이사장은 “아프고 견디기 힘든 인생을 참으로 잘 참고 견뎌준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라며 작별을 고했다. 오래 기억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시민들이 그 인사를 되돌려드린다. 고인의 안식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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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는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얼마나 신기했으면 원거리(tele)에서 들리는 소리(phone)라는 뜻에서 텔레폰(telephone)이라 불렀겠는가. 1876년 알렉산더 벨이 세계 최초로 특허를 받은 전화는 세계인의 일상을 바꾸었고 최근 40년 동안 놀랍도록 변화했다. 그 변화의 중심에 무선전화의 등장이 있다. 

북유럽에서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곳까지 유선전화를 설치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에 일찍부터 무선전화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0년대 무선 휴대전화가 등장했다. 처음에는 카폰에 이용되었는데 벽돌 모양처럼 큰 형태여서 불편했지만, 부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1993년 IBM에서 최초의 스마트폰 ‘사이먼(Simon)’을 선보이면서 무선전화에 혁신이 일어났다. 무선 휴대전화는 다목적 컴퓨터 장치를 탑재해 멀티미디어 기능을 가진 스마트폰으로 진화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오늘날의 스마트폰은 초기 스마트폰의 한계를 극복하고 개방된 기술 경쟁과 융·복합을 통해 최첨단 기술제품으로 등장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내부 자원만으로 혁신을 지속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경제 환경의 변화는 빠르고 광범위하다. 기업도 개방을 통한 혁신을 하지 않고서는 이 파고에 좌초하기 십상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1990년대까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품화하지 못한 채 사장시켰던 실패 경험을 거울 삼아 지금 외부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개방형 혁신을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 장착하고 있다. 만약 개방형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전화기가 유선에서 무선으로, 나아가 스마트폰으로 발전하는 혁신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캘리포니아(버클리)대 체스브로 교수는 저서 <개방형 혁신>(2003년)에서 폐쇄적 생산구조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방형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기업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 아이디어와 연구·개발 자원을 함께 활용해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혁신 이론이다. 이 책에서 그는 IBM이 과거 ‘폐쇄형 혁신(Closed Innovation)’을 추구했으나, 2000년대 초반부터 기업 내부와 외부의 집단지성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혁신을 만들었다며 그 예로 들고 있다.

종전에는 기업들이 기업 내부에 최고의 인재를 모아 연구·개발과 판로까지 결정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제품화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경쟁의 심화, 이노베이션의 불확실성, 연구·개발비의 급증, 단기적 성과 요구 등으로 인해 이러한 방식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개방형 혁신이 필요한 이유다. 체스브로 교수는 외부의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제품을 만들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 때 지속적인 경쟁력 유지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방형 혁신>에 이어 <개방형 비즈니스 모델>(2006년), <개방형 서비스 혁신>(2011년) 등 일련의 저서를 통해 제조업은 물론 다양한 분야에도 개방형 혁신이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자. 최근까지도 일부 대기업은 혁신이나 품질 개선을 위한 노력보다는 가격을 낮추어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에 치중했다. 결과적으로 기업생태계가 수직적인 분업 관계에 머물게 되었다. 이처럼 수직관계가 형성되면서 협력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지시나 요구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고, 전속거래라는 폐쇄적 구조가 고착되었다. 이런 구조에서 혁신을 기대하긴 어렵다.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협력 중소기업에 고통을 전담시키는 이른바 수직적인 분업 관계에 의한 가격 경쟁력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최근 개방형 혁신은 제조업뿐만 아니라 서비스업으로도 확산되면서 혁신적인 프로세스로 변화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혁신은 기업과 다른 기업 간, 그리고 기업과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소비자와의 교감을 통해서도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국내 일부 대기업은 아직도 개방형 혁신보다는 수직적 생산구조의 낡은 틀 속에 갇혀 혁신을 이루기 힘든 구조를 고집하고 있다. 국내 일부 주력산업이 급속하게 경쟁력을 잃어가는 것도 개방형 혁신에 머뭇거리는 흐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런 구조에서 우리는 지금 획기적인 발명은 고사하고 작은 혁신도 어려워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우리 경제 성장모델의 한 축으로 혁신성장을 강조한다. 혁신은 원래 기업 경영 분야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경영환경이 만드는 기회와 위협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지속 성장하는 기업이 되기 위해 필요한 시스템을 채택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 경쟁이 날로 심화하면서 혁신의 대상이 확대되고 있다. 기업 단위의 혁신이 국가 경제 발전으로도 범위를 확대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바로 여기에 혁신성장의 필요성과 성장이론의 골자가 담겨 있다.

2010년 OECD에서 ‘혁신성장을 위한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에는 ‘혁신적 경제문화 조성’ ‘경쟁적이고 역동적인 기업활동 장려’ ‘공공부문의 혁신 추진’ ‘사회적 문제 해결에 혁신 적용’ 등 다양한 해법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처럼 경제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혁신성장을 이루려면 근본적으로 기업생태계를 변화시켜야 한다. 먼저, 수평적으로는 산업영역에서 산업 간 칸막이가 제거될 수 있도록 규제 합리화가 이뤄져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공지능, 빅데이터 기술을 융합하고 활용하는 데 불필요한 규제(red tape)가 없도록 세심한 조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수직적으로는 폐쇄적 전속거래에서 탈피해 혁신이 일어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개방형 혁신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선 폐쇄적 의사결정구조를 타파해야 한다. 기업, 기술 개발자, 소비자들이 상호 소통하는 가운데 혁신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정교한 혁신 플랫폼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혁신은 외부의 전문 지식과 참신한 아이디어가 내부의 생산 능력과 결합할 때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수평적 산업 융·복합화와 수직적 개방형 혁신은 결국 동반성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정운찬 |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한국야구위원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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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행정 면책제도를 종합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인사혁신처가 ‘적극행정운영규정’ 제정안(대통령령)을 지난달 21일부터 입법예고하고 있다. 적극행정 면책제도는 적극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절차 위반과 예산 낭비 등을 한 경우 징계책임을 감면하는 제도다. 감사원이 감사원 훈령으로 운영규정을 마련하여 2009년 1월부터 시행한 것이 그 출발점이다. 하지만 10년간의 제도 운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정의 소극적 행태가 문제가 되고 있으며, 국민 일반은 적극행정으로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규제개혁마냥 도돌이표 국정과제의 하나인 셈이다.

사후면책에 초점을 맞추는 이상, 그 성과는 국소적일 수밖에 없다. 행정이 터 잡은 현행 법제의 현주소를 도외시하고, 공무원의 개인적 행태의 차원에서만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국민의 불만 대상이 되는 소극행정 및 방어행정을 낳는 주된 원인이 무엇인지, 정면으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적극행정 역시 법치국가 원리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적극행정이라 하여 초법적 행정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시대와 호흡하지 못하고 196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 모델에 멈춘 현행 행정법제가 소극행정의 근원이다. 국민의 사적 영역과 관련이 있는 인·허가와 같은 대민 법제는 일본식 관헌국가적 전통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가령 독일 약사법은 의약품 제조 허가 신청에 대해 행정청은 일정한 사유에 해당할 경우에만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반면, 우리 약사법은 의약품 제조자가 허가를 얻어야 한다고 규정할 뿐이어서, 허가 여부가 행정청의 의무인지 재량인지 불분명하다. 국민은 인·허가와 같은 행정처분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 관헌국가적 전통에서 국민을 공권력 행사의 객체로 보는 그릇된 사고를 제도적으로 타파하지 않고선 적극행정은 구두선에 그칠 수 있다. 

이런 대민 행정법제의 구조적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행정법제를 구체적으로 집행하는 기본 매뉴얼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른 법집행을 위한 구체적인 매뉴얼이 없는 이상, 일선 공무원이 법집행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민이 법적 매뉴얼에 의거하여 법집행의 위법성을 강하게 질타하기가 쉽지 않은 이상, 일선 공무원이 국민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려는 것 역시 지극히 자연스럽다. 또한 법집행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이 없기에, 국민 역시 자신의 희망과 다른 법집행의 결과에 대해 애써 수긍하지 않으려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관헌국가적 전통에 기반한 행정법제가 여전하고 바른 법집행을 구현하는 기본 매뉴얼도 없는 상황이어서, 국민 친화적인 적극행정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법제도의 바른 운영과 적극행정을 가능케 하는 기초 토대의 마련보다는 공무원 개인의 선의를 기대하는 것은 전근대적이다. 언제까지 적극적인 법집행이 공무원 개인의 품성에 좌우되게 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독일 연방정부의 2016년 규제개혁 보고서 서문에서 메르켈 총리는 독일의 안정과 경제적 힘의 바탕은 훌륭한 법적 틀과 신뢰할 수 있고 효율적인 행정이라고 하였다. 독일은 다른 유럽국가보다 앞서 1976년 행정작용 전반의 매뉴얼을 규정한 행정기본법으로서의 의의를 갖는 독일 행정절차법을 마련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통일 이후에 행정의 간소화와 규제개혁을 과감하게 실천해 유럽연합을 선도하고 있다. 행정작용의 기본 매뉴얼에 해당하는 행정기본법의 제정이 적극행정을 위한 진정한 출발이다.

<김중권 |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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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경기장은 로마의 영광과 질병을 동시에 드러내는 징후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수도 로마의 콜로세움이며, 비운의 폼페이에도 거대한 원형경기장이 남아 있다. 여흥과 오락의 장소인 그곳에서는 연극이 상연되기도 했고, 전차경주가 벌어지기도 했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에는 기독교인의 처형장이기도 했지만, 원형경기장은 무엇보다도 검투사 시합을 연상케 한다. 주로 포로나 노예가 동원된 검투사 시합은 민중을 열광시켰기에, 정치가의 선전을 위한 이벤트로 변질되기도 했다. 카이사르도 대규모 시합을 열었고, 로마 근교의 광장에 연못을 만들고 군함을 띄워 모의해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봉기에서 반란군들은 반대로 로마병 포로에게 검투사 시합을 강요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어느 역사학자는 “이제껏 볼거리 취급을 당했던 이들이 이제는 관객이 되었다”고 기술했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원형경기장은 점차 폐쇄되었고 최고의 오락거리인 검투사 시합은 마침내 공식적으로 금지되고 소멸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프로스포츠는 철저히 규칙화되고 안전이 보장된 현대판 검투사 시합이다. 문명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제전을 건전하고 신사적인 스포츠로 승화시켰다. 그런데 프로스포츠의 세계와 다른 차원에서 여전히 검투사 시합이 펼쳐지는 현대판 원형경기장이 존재한다. 인터넷에 접속할 때 가장 먼저 찾는 포털은 우리를 검색어 순위로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세상사에 심드렁한 도인이 아니라면 순위에 오른 이름들을 무심히 누르게 된다. 그 이름들은 자주 사건, 사고와 연루되어 있고, 우리는 클릭과 함께 그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원형경기장에 입장한다.

범죄의 혐의나 추문의 진위가 논란이 된다. 관심이 고조되고, 소셜미디어에서 격론이 벌어진다. 보도가 쏟아지고, 당사자는 입장을 표명한다. 더러는 고발을 당하고, 더러는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반격에 나선다. 수사기관이 개입하고, 영장이 청구되며, 정치인이 가세한다. 당사자들이 사활을 걸고 싸우는 이 과정은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끝나기도 하고, 본격적인 사법절차로 이어지기도 한다. 며칠이 멀다 하고 새로운 사건이 비슷한 패턴으로 되풀이된다. 이 시합들은 우리가 일용하는 양식이고, 우리의 불안과 선망과 분노와 공포가 투사된다. 패배한 사람들은 직업세계에서 퇴출되고, 불명예를 당한다. 자유를 잃고 감옥에 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목숨을 버린다. 스포츠와 달리 실제로 살고 죽는 진정한 검투사 시합이기에 시민들은 경멸하면서도 빠져든다.

로마의 자유민 중에 돈과 명성을 좇아 스스로 검투사가 된 사람들이 있듯, 현대판 원형경기장에도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인지도는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변환될 수 있는 일종의 화폐다. 그 화폐를 모으기 위해 많은 이들이 상상력을 발휘한다. 자신에 대한 극심한 혐오를 불러일으켜 인지도를 높이고, 그 인지도를 돈과 권력으로 바꾸는 전략을 구사하는 사람마저 있다. 이들은 누가 내몰지 않아도 스스로 칼을 들고 경기장에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이 시합을 벌이고 싶은 사람을 자극적인 방법으로 불러낸다. 대중의 지지를 돈이나 권력으로 변환해야 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은 언제든지 자의든 타의든 원형경기장에 나설 각오를 해야 한다. 대중의 관심이 생명인 정치인들은 각자의 무예를 선보이느라 여념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 나선 검투사로서 연예인보다 더 연예인다워야 생존한다. 반대로 연예인은 정치인보다 더 정치인다워야 살아남는다. 정직해야 하고, 선행을 해야 하며, 자신과 무관한 가족의 빚조차 말끔히 해결해야 한다. 언행일치의 높은 윤리를 갖추지 못하면, 순식간에 버려진다. 정치는 연예화되고, 연예는 정치화된다. 

네트워크와 접속된 민주주의는 소수가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고 관리했던 시대보다 분명히 나아졌다. 언론에 의해 부당하게 명예를 훼손당하거나 국가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스러지던 시대가 있었다. 음습한 범죄가 돈과 권력의 비호 아래 횡행하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이 시대는 상대적으로 공정하고 열린 시대다. 그런데, 언론과 지식인과 국가의 역할이 쇠퇴하면서 생긴 빈자리를 자발적인 검투사들, 관전하며 훈수를 두는 수많은 개인 그리고 클릭 수에 목마르고 덜 진지한 매체들이 채우고 있다. 민주주의가 만개할 줄 알았던 광장이 반지성주의로 점철된 원형경기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국민의 알 권리에 크게 기여한 인사청문회조차 검투사 시합처럼 치러진다. 이것은 이 시대가 앓는 어떤 질병의 징후다. 아니, 마오쩌둥은 어디에서인가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증상이고, 우리가 질병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터무니없는 공격과 거짓 변명으로 어수선한 이 시대의 원형경기장은 과연 괜찮은가. 모든 시민이 언제 어디서나 작은 크기의 세로로 긴 사각형과 큰 크기의 가로로 긴 사각형 모양의 단말기를 통해 원형경기장에 입장하는 이 시대는 이대로 흘러가도 좋은 것일까.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야수성이 온라인 원형경기장에 표출되는 것에는 불가피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공동체의 중요한 의제나 무고한 이들의 운명마저 검투사 시합처럼 다루어져서는 안된다. 민주주의는 소란스러운 것이지만, 이대로 초연결사회로 나아간다면 미래는 비관적이다. 원형경기장을 보다 인간화하기 위한 문화적 변화와 새로운 제도적 설계가 절실하다. 프라이버시와 명예가 어떤 경우에 포기되고, 어떤 경우에 강력하게 보호되어야 하는지, 확증편향과 은밀한 조작에도 불구하고 논쟁과 증명이 어떻게 생산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와 시스템의 보완이 필요하다.

원형경기장이 없는 지루한 사회는 반대한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마저 강제로 끌려나와 맹수의 밥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난투극에 최적화된 자발적 검투사에 의해 사회의 중요한 의제가 줄곧 표류하고 실종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조광희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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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났다. 그렇게 가깝다고 말할 수는 없는 친구지만 마냥 반가웠다. 친구도 어떤 감정이 물밀었던 모양이다.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뻗으며 친구는 물었다. “어떻게 먹고사니?” 친구의 말은 우리를 둘 다 기쁨과 당황 속으로 밀어 넣었다. 친구는 아마도 “잘 지내지?”나 “어떻게 지내?”라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우리는 길 위에서 한바탕 사이좋게 웃었다.

집에 오는 길에 어떻게 먹고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요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크게 네 가지다. 대학교에서 학인들과 배움을 나누는 일, 격주마다 도서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일, 매일 오후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시사 프로그램에 일주일에 두세 차례 출연하는 일, 그리고 읽고 쓰는 일. 어떤 일은 나의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이고 또 다른 어떤 일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그 일을 할 때 비로소 내가 나로 살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 모든 일이 어색하다는 점이다. 시작한 지 얼마 안돼 어색한 일도 있고 여전히 어색한 일도 있다. 몸담은 지 얼마 안된 일은 늘 어색하지만, 더 큰 문제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에 있다. 남들 앞에서 말하고 의견을 피력하고 어떤 물음에 답하는 일, 답하면서 다음에 내가 던질 질문을 헤아리는 일, 이 일 앞에서 나는 보통 작은 상태로 존재한다. 종종 위축되는 것은 물론 겉으로 웃고 있을 때조차 속은 땀범벅이다. 대학에서의 강의, 팟캐스트 <책읽아웃> 진행, 그리고 JTBC <시사토크 세대공감> 출연 등은 신출내기의 어색함이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늘 처음 같은 일도 있다. 바로 읽고 쓰는 일이다. 이 일 앞에서 나는 때때로 묻는다. 실력이 늘지도 않고 적응이 되지도 않는데, 나는 왜 이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 왜 읽지 않으면,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까. 20여년 가까이 썼는데 왜 아직도 백지는 나를 새하얗게 질리게 만드는가. 어색함은 으레 어려움을 동반한다. 이 어려움은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 얼어붙게 만듦으로써 역설적으로 나를 생생하게 한다. 나는 지금 긴장하고 있구나, 머릿속에서 떠올린 문장대로 쓰지 못하고 있구나.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거나 너무 늦게 흐르는 것 같다. 그 시간에는 내가 없는 것 같다.

어색한 일은 맞지 않는 옷처럼 몸을 쭈뼛하게 만든다. 평소의 여유로운 내 모습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나도 몰랐던 나를 만날 수 있다. 나도 몰랐던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몰입이 필요하다. 신문을 애써 가까이해야 하고, 평소라면 지나쳤을 법한 기사에도 따뜻한 눈길을 주어야 한다. 한국문학사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책을 읽고 해당 저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궁금증을 발휘해야 한다. 백지 앞에서 초연해지는 일도 필요하다. 그래야 나는 비로소 어떤 상태에 다다른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소화하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방송에 익숙해지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다. 조리 있게 말하고 여유로운 나머지 방송용 미소로 씩 웃기도 할 때, 나는 아마 스튜디오에 없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일 앞에서는 마음이 동하지 않으므로, 몸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팟캐스트를 들을 때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도 긴장하거나 흥분하면 말의 속도가 빨라지고 특정 발음을 뭉개버리기 일쑤다. 매번 출연하는 게스트가 다르니 그에 맞춰 나의 몸과 마음을 만들어야 한다. 누군가를 돋보이게, 빛나게 해주는 일은 기꺼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가끔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내가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감각이다. 이 감각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깨어 있게 해준다. 나는 편한 쪽에서 불편한 쪽으로 한 발짝 움직인다. 날숨 상태에서 들숨 상태로 기꺼이 몸 상태를 바꾼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공부하겠다는 태도다. 나를 최대한 투명하게 만들고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어색함에 익숙해지겠다는 다짐이다.

삶은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갖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는 나에게 더 가까워질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어색함과 익숙함 사이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중이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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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과 일주일에 한 번 글쓰기 수업을 한다. 짧은 글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눈 후 주제를 잡아 한 편의 글을 쓰는데, 이번 주에는 20대 남성이 쓴 글을 읽었다. 한국의 뿌리 깊은 남성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스스로 젠더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서 얼마나 애써왔는지를 기록한 글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중요한 것을 왜 스스로 알아나갈 수밖에 없었는지 통탄하는 글을 읽고, 아이들은 삶에 꼭 필요하지만 어디서도 배울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고 했다. 

“대화의 기술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엄마 아빠가 서로 대화하다가 말문 막히면 화내고 소리 지르는 게 너무 싫어요.” “알바하다가 월급 떼이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년부터 알바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몰라요.” “계좌이체, 무통장 입금 이런 거 너무 어려워요.” “싫은데도 말 못하고 참기만 하다가 친구들 사이에 호구가 된 적이 있어요.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내 감정을 정확히 전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저는 연애만 하면 꼭 안 좋게 끝나요. 잘 헤어지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맞아 맞아, 서로 추임새를 넣어가며 아이들이 나열한 이 배움의 목록들은 생생한 삶의 기술이다. ‘함께 살아가는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죽어 있는 교과 지식을 넘어 ‘삶의 배움’을 표방하는 대안학교에서는 비형식적 교육과정 속에서 이런 문제들을 다룬다. 심각한 문제나 갈등이 발생하면 예정되어 있던 수업을 멈추고라도 모두 둘러앉는다. 매뉴얼도 안 통하고 똑 부러지는 해결책도 얻기 힘든 이 지난한 과정에 때론 ‘질리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교사도 아이들도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물을 수밖에 없다. 미결 과제로 남는 일들도 많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수업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알아가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교사의 훈계나 학교폭력위원회의 징계로는 결코 도출해낼 수 없는 감동적인 장면도 종종 연출된다. 

얼마 전 받은 우편물에 작은 책자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시와 같은 삶을 살 줄 알았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낸 시집이라고, 중·고 통합 대안학교에서 6년을 함께 보낸 제자가 쓴 거였다. 입학식 날,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아이가 들어서는데 작은 분노 덩어리가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폭력을 쓰는 그 아이로 인해 우리는 자주 둘러앉았다. 얻어맞은 아이도 안쓰럽고, 그렇게밖에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그 녀석도 가여웠다. 때로 벌을 받기도 하고 때로 사람들의 이해를 받기도 하면서 시간은 흘렀다. 다가갈 방법을 몰라 애가 탈 때마다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주먹을 휘두르고 나서 혼자 숨어 우는 녀석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이던 기억도 난다. 그러던 소년이 서른 살 가까운 청년이 되어 “시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니, 인간은 참으로 경이로운 존재다. 교육이 그 아이를 변화시킨 게 아니라, 본디 그러한 내면을 가진 아이였다. 본연의 자신을 찾을 수 있게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아파하며 기다려준 덕이 클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미래교육 담론으로 떠들썩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변함이 없다. 아이들이 알고 싶다는, 그러나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삶의 기술’은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아이들이 갈망하는 그 배움을 차곡차곡 채워가는 것, 어쩌면 그게 교육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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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키 재기’라는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일본에도 ‘도토리 키 견주기’라는 속담이 있는데, 어느 쪽에서 흘러든 것인지 아직 모릅니다). 정도가 고만고만한 사람끼리 서로 잘났다고 다툰다는 말이죠. 도토리는 참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참나무는 몇 종류가 있는데 수종마다 열리는 도토리가 길이도 모양도 제각각입니다. 상수리나무나 굴참나무 도토리는 동글동글하고, 떡갈나무와 졸참나무와 갈참나무 도토리는 다소 기름합니다. 그리고 신갈나무 도토리는 동글납작하죠. 제일 짜리몽땅합니다. 또한 한 나무 한 나무초리에 서넛씩 뭉쳐 달린 도토리 사이에도 크고 작음이 있습니다. 

도토리끼리 희비로 경쟁해봐야 자기들 사이에서나 먹히는 메이저리그 저 밑자락 ‘동네리그’입니다. 동글납작 신갈나무 도토리들 사이에서 으쓱한들 떡갈나무 도토리 옆에 서면 올려다봐야 합니다. 갈참나무 도토리가 껑충하고 날씬한 허리춤에 양손 짚고 고개 세운들 상수리나무 도토리 앞에서는 실한 걸로 깨갱입니다. 이 모두를 피식 웃으며 ‘우리가 왕중왕이군’ 하는 굴참나무 도토리들도 투실한 밤톨 앞에선 올망졸망입니다.

치졸하다는 말에 딱 맞는 게 도토리 키 재기일 겁니다. 생각 유치한 채 큰 사람은 “너넨 이런 거 없지? 이거 못하지?” 애처럼 으스댑니다. 경험과 반경이 좁을수록 ‘내가 왕’입니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모두 성냥갑이요 도토리만 한 성공입니다. 나 좀 대단하다 안달하며 성적과 직장, 연봉과 평수 내비쳐봐야 ‘쥐뿔! 그래, 네 똥 더럽게 굵다’ 주먹감자로 내지르는 팔뚝 세리머니만 받을 뿐입니다. 잘난 도토리는 먹히고 못난 도토리가 참나무로 우렁우렁 클지, 인생사 부침(浮沈)은 도톨도톨 안에선 그 누구도 끝내 알지 못합니다. 비교우위질은 아직 고만고만한 도토리니까 하는 겁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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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자는 언제부터 있었나. 그건 내가 언제 이 세상에 왔을까와 똑같은 물음이다. 따라서 내가 이 세계로 미끄러져 나올 때 그림자도 함께 태어났다고 해야 정확하다. 울음보다도 먼저 그림자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자란, 태양이 너희들은 모두 언젠가 녹여먹을 사탕이야, 라고 지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찍어놓은 불도장 같은 것!  참 시시한 질문 같았는데 말하고 보니 감히 <논어>의 한 대목, 절문근사(切問近思)를 들먹일 수도 있겠다는 궁리와 함께 발밑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그림자를 관찰해 본다. 본다고 다 보는 게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그림자. 그 그림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고등학교 지구과학 시간에 들었던 한마디로 귀결된다. 직진하는 햇빛은 너무나 멀리에서 오기에 지구에 평행하게 도착하고, 그래서 그림자가 생긴다! 이상하게 그 말이 참 마음에 오래 남아 그 이후 그림자에 대한 관심을 간단없이 이어지게 하는 한 이유가 되었다.

낯선 고장에 저물 무렵에 도착하는 건 사소한 축복이다. 뉘엿뉘엿 석양에 반사되는 밀양(密陽) 이정표를 보면서 네이버 옥편을 뒤적였다. 빽빽한 햇빛 혹은 비밀의 햇빛, 밀양. 낮에는 지푸라기처럼 빽빽했다가 밤이면 비밀스럽게 변하는 햇빛인가. 그래서 비밀은 햇빛 속에 다 드러난다는 것인가.

밤이란 지구의 짙은 그림자. 그 그림자에 폭 파묻혀 밀양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유명한 얼음골을 지나 천황산 오르는 길. 볼 게 많았다. 여름임에도 너덜겅의 돌 밑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다. 허준이 스승 유의태를 해부했다는 동의굴의 서늘한 바위에는 짙은 분홍의 설앵초. 얼음골과 그 이름이 잘 어울리는 꽃이다. 꽃도 꽃이지만 오늘은 그림자에 특히 유념하기로 했다.

산에서 나무 한 그루의 사연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심오하다. 쟁반 같은 나뭇잎에 담긴 꽃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별 모양의 흰 꽃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덜꿩나무. 잎은 물론 가지, 줄기에 털이 밀생하는 덜꿩나무. 모양이 반듯해야 그림자도 반듯하다. 이 세계를 두껍고 깊게 복사하는 꽃과 그림자를 찰칵, 찍었다. 덜꿩나무, 산분꽃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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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201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의 노래 ‘Blowing in the Wind’의 첫 소절입니다. 이 노랫말처럼 우리는 사람이라고 불리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걸을 수 있었기에 편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발로 걸으며 얻게 된 두 손의 잉여로 도구를 만들고 불을 다루며 꾸준히 뭔가를 창조해 왔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걸으면서 생각하고, 그러면서 진화해 왔습니다. 

“내가 치는 음표는 다른 피아니스트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음표 사이의 정지, 그렇다. 바로 그곳에 예술이 존재한다.”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의 말입니다. 이 말처럼 걷기란 제 삶에서 쉼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풀기 어려운 사건과 분쟁이 이 땅에서 생겨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실의 입은 너무 커서 사실을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의 손들이 그 입안으로 들락거립니다. 그사이에서 판사는 진실을 가려야 합니다. 

그 무게감이 숙명보다 무거운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저는 걷습니다. 걷다 보면 사건과 단절되고, 그 단절이 오히려 사건 해결에 실마리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풀리지 않는 난제를 걸으면서 풀어갔던 경험을 꽤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업무의 연장인 셈입니다. 그래도 머릿속에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내면서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걸으면서 이보다 더 심오한 일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걸으면서 철학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은 삶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왕의 스승 역할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이라는 사설 학원을 세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매일 아침 산책을 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모임을 ‘소요학파’ 또는 ‘페리파토스학파’라고 불렀습니다. 소요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이란 뜻입니다(표준국어대사전). 페리파토스는 산책길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소요학파는 ‘걷기학파’인 셈입니다. 서구 근대 사상의 근원이 된 학파의 일상이 공부가 아니고 걷는 일이었다니,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고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걷기처럼 격렬하지 않은 운동이 창의성을 기르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 때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신경세포는 계속 만들어지는데, 걷기 같은 운동이 그 생성을 돕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정재승 <열두 발자국>).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암 사망의 3분의 1은 조기검진으로, 또 3분의 1은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예방이 가능한데, 주 5회 이상 꾸준히 걷기만 해도 새로운 세포가 생성되고 암세포는 소멸한다고 합니다(EBS 라디오 캠페인). 

걷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신체 활동이자, 다양한 두뇌 활동이 덤으로 따라오는 꽤 괜찮은 선택입니다. 따로 운동할 시간을 낼 수 없는 현대 도시 생활에 걷기처럼 간편하고 효율적인 신체 활동은 없는 것 같습니다(생계 활동으로 따로 걸을 시간을 내지 못하는 분들께는 양해의 말씀 구합니다). 

철학의 역사, 누군가의 조언, 연구 결과가 알려주듯이, 사람은 걸으면서 현명해졌습니다. 자연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속에 인간이 만든 건축이 얼마나 볼만한지, 내 앞을 사뿐히 지나는 고양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걷다 보면 보입니다. 어느 시인이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뒀던 저녁 거리마다, 어릴 적 뛰놀던 종로 골목마다, 뽀얀 우윳빛 숲속에, 그리고 북녘 땅 천지와 명사십리에 여러분의 발길이 닿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고위 공직자와 기업 임원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걸어 다니기 바랍니다. 걷다 보면 세상이 보이고, 그러면 나라와 기업 모두 현명해집니다.

<함석천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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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20개국(G20)이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기업의 조세도피 행태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지난 9일 폐막한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참가국들은 거대 IT 기업들의 세금회피 목적 편법행위를 막기 위해 2020년까지 새로운 조세체계를 만들기로 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아마존과 같은 거대 디지털기업들이 대상이며 골자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실제로 재화·서비스의 판매가 이뤄지는 나라에서 과세할 수 있도록 권리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조세도피처를 이용하는 관행이 지속되면 여러 나라가 합의해 세계 최저 세율을 도입하는 것이다. 주요 국가들이 IT 기업에 대한 조세징수에 동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거대 IT 기업의 조세도피 행태는 신산업의 출현과 관계가 있다. 디지털 비즈니스가 폭발적인 성장을 하기 전에 과세체계는 본사나 공장 등 물리적인 사업장을 기준으로 하면 충분했다. 그러나 물리적인 거점이 없이 인터넷을 통해 세계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가 출현하면서 기존 과세체계에 사각지대가 생긴 것이다. 여기에다 거대 IT 기업들은 세금을 줄이기 위해 법인세율이 낮은 조세도피처에 본사를 두는 편법을 동원했다. 이들 기업이 큰돈을 벌면서도 나라에 내는 세금은 쥐꼬리만도 못했다. 이에 유럽의 국가들 중심으로 국경을 넘는 비즈니스를 하는 IT 기업에 대한 과세 움직임을 보여왔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구글은 작년에만 구글플레이 앱 판매로 5조4098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국내 최대의 포털인 네이버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세율이 높은 법인세를 거의 내지 않는다. 내는 것은 부가가치세 등 비교적 세율이 낮은 세금뿐이다. 구글의 전체 세금 납부액은 연간 200억원 안팎에 불과하다. 네이버가 내는 세금의 2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이것을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한국 매출은 아시아 본사가 있는 싱가포르 매출로 잡힌다는 이유로 공개조차 하지 않고 있다.


G20이 거대 IT 기업 과세에 동참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걸림돌이 없지 않다. 정작 시행에 나서면 미국의 반발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과세 대상이 미국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들이 돈을 벌고도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공정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국제사회는 공동으로 과세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정부도 한국에 진출한 거대 IT 기업의 조세도피를 좌시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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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업의 구조조정이 한창 진행 중이다. 7조원이 넘는 국민의 세금이 투입된 대우조선이 지난해 흑자로 전환했고, 내부 구조조정이 마무리되어 가던 올해 현대중공업(이하 현중)의 대우조선 인수·합병이 시작했다. 본계약이 완료됐고 5월31일 현중 주주총회(이하 주총)에서는 물적 분할을 통해 산업은행(이하 산은)과 현중이 공동출자하는 형태의 한국조선해양이라는 현대중공업그룹의 중간지주회사가 탄생했다. 공정위와 해외에서의 기업결합 심사만 남았다. 최종 성패는 아직 알 수 없다. 공정위가 부적격 판정을 내릴 수 있고, 해외에서 LNG선 세계시장 수주잔량의 57%를 차지하는 대우조선과 현중의 결합을 독점으로 진단할 경우 부적격 판정이 날 수도 있다. 물론 준비를 잘하면 ‘운용의 묘’를 통해 성사될 수 있다.

생채기가 나고 있다. 대우조선 노동조합(이하 노조)은 1월 말부터 지금까지 매각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인수·합병 절차가 밀실에서 졸속으로 진행됐다고 한다. 인수자를 미리 정해놓고 다른 인수 희망자를 찾는 방식부터 밀실협상의 결과로 해석한다. 노조는 인수·합병 이후 인적 구조조정이 다시 찾아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거제 지역사회에도 매각반대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현중 노조는 물적 분할과 한국조선해양 본사의 서울 이전에 반대한다. 물적 분할 후 노조의 단체협상권은 승계되지 않을 수도 있고, 조합원들은 인적 구조조정에 노출될 수 있다. 송철호 울산시장은 한국조선해양 본사 이전에 반대하며 삭발을 했다. 주총이 예정되어 있던 울산시 한마음회관은 용역과 조합원들의 충돌로 훼손됐다. 현중은 주총 당일 장소를 울산대 체육관으로 긴급 변경했고, 주총은 소액주주인 조합원들의 참여를 막은 채 진행됐다. 지역 방송은 용역들이 조합원들을 도발한 정황을 보도한다.

웃고 있는 자는 분명 현중이다. 물적 분할을 성사시킴으로써 3세 승계를 완성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수자금은 0원에 가깝다. 인수·합병에 성공할 경우 세계 최대의 조선업체가 되며, 실패하더라도 손해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노조와 지역사회의 반대, 기업의 강행 돌파. 많은 중앙 언론은 ‘강성 노조’의 반발을 보도한다.

산은 이동걸 회장은 3월8일 “조선산업 재편을 통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지금의 적기를 놓치면 우리 조선업도 일본처럼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있다”며 산업 구조조정으로서의 인수·합병을 강조한 바 있다. 나는 조선산업 구조조정에 찬성한다. 대우조선의 적합한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논리에 동의한다. 산은이 대주주로 있으면서 발생했던 ‘대리인 문제’, 즉 책임경영이 되지 않았던 문제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현재 인수·합병이 꺼림칙한 지점은 두 가지 차원이다. 우선 이해당사자들의 신뢰를 쌓을 수 있는 협치의 부재다. 노조가 고용보장과 단체협상 승계에 대해 예민한 것은 당연하다. 현중은 보장 원칙만 내세웠을 뿐, 노동자들의 불안을 달랠 수 있는 가시적인 조치를 내밀지 않고 있다. 조선해양기자재 업체들의 생존 문제도 심각하다. 대우조선과 현중의 기자재 업체 중 4분의 3 정도가 겹쳐 물량이 보장된다고 가삼현 사장이 밝혔지만, 나머지 4분의 1만 위기에 처해도 부산·울산·경남 경제에는  치명적이다. 경남도가 기자재 생태계 문제 등을 논의할 조선산업 상생발전협의체를 4월에 제안했지만 답보 상태다. 

더욱 답답한 것은 산은과 정부, 지방정부의 역할 부재다. 산은은 국가가 진행하는 산업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다. 산은이 부실 기업의 대주주가 되었던 것은 책임감 있는 회생을 위해서였다. 한국조선해양 설립 후 산은 보통주 지분율은 7%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1조2500억원의 주식은 배당만 받고 의결권은 없는 우선주다. 현중이 알아서 할 것이니 손을 떼겠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엔 사전준비가 부족해 보인다. 조선산업의 경쟁력을 어떻게 보존하고 키울 것인지와, 인수·합병이 어떤 구조조정 효과를 내는지 산은의 구체적인 설명이 들리지 않는다. 주무부처들도 산은에 모든 역할을 넘기고 특별한 대응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이해당사자 중 하나인 경남도 역시 의견 청취만 하고 별다른 의사결정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영웅 요기 베라가 말한 것처럼 이번 인수·합병과 조선산업 구조조정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직 관문이 남아 있다. 과정이 좋지 않으면 결과가 의미 없을 수 있는 게임이다. 문재인 정부가 산업정책의 첫 번째로 제기한 ‘빅딜’이기에 정치적 의미도 작지 않다. 전통적 제조업의 위기는 부산·울산·경남에 집중되어 있고, 국가의 역할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구조조정에 막대한 영향을 받는 부산·울산·경남 지방정부의 주도로 노·사·정과 지역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협치를 통해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고용과 기자재 생태계를 지켜내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긴요하다. 연구·개발과 엔지니어링 기능을 한국조선해양 본사로 이전하는 문제도 부산·울산·경남에서 우수한 공학인력을 어떻게 키워내고 유치할 것인지까지 고려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

<양승훈 | 경남대 교수·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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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예술을 하는 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말이 몇 주째 소화가 안된다. 장애인의 몸이 표현하는 예술의 가능성과 긍정성을 취지로 한 말일까.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그 예술이란 과연 무얼까. 이런 말이 불편한 건 성격 탓일까. 답답하던 차에 한 문화연구자의 “연극적인 것을 배반하는 ‘춤추는허리’ 연극의 공연 창작 과정”이 궁금하다는 질문에 명치가 뚫린다. 진짜 예술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닌 과연 진짜(정상)가 뭘까를 묻는다. 

내가 참여하는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허리’는 장애, 몸, 예술, 배우. 섹슈얼리티, 독립 등에 대한 사회의 정상적 규범을 연극으로 질문한다. 지적장애 여성 배우는 연습장에 대사를 10번 이상 적으며 자기에게 익숙한 말을 찾기도 한다. “너무나 감동했어요. 저는 지금 장애 극복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지적장애 여성은 이 대사를 “감동이에요. 장애 없어요”로 바꿨다. 대사를 바꾸며 자기 말을 만드는 과정이다. 

비정상성을 무대에 드러내기 위한 과정이 중요하다. 전문적 훈련을 통해 정상적으로 말하고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다. 자기 장애를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대사와 몸짓을 싣는다. 비장애인처럼 정확하게 대사를 발음하거나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몸이 편안하게 움직이는 방향대로 이동시켜 보고 내 호흡과 경련, 뻗침의 주기와 박자를 깨닫는다. 늘 몸과 살아가지만, 내 몸을 상대화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떻게 움직이지? 어디가 아프고 안 움직이지? 움직이기 어려운 곳을 억지로 쓰려 하진 않지만 그대로 두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호흡과 박자를 파악했을 때 배우는 연기가 편안해지고 잘하고 있다고 느낀다고 한다. 아프거나 움직이지 않는 몸의 어떤 부위는 연기할 때 배우들에게 긴장을 일으키는 요소다. 쉽게 말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순간, 관객은 긴장한다. 자기 몸을 ‘제대로’ 아는 배우는 이 긴장을 가장 먼저 안다. 이 긴장과 함께 무대에서 1~2시간을 움직이는 방법을 터득한 장애 여성 배우는 다음이 어디로 갈지 안다. 가장 나다운 동작을 하는 와중에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내 몸의 긴장에 익숙해진 것이다. 보여지는 대상으로 전시되는 것을 거부하고 내 몸을 보여주는 장애 여성 배우가 의도한 ‘무대 위의 일’일지도 모른다. 매일 장애와 살아가는 과정과 유사하다. 

장애등급제가 7월부터 폐지된다. 그러나 장애인 활동지원제도의 경우 이용자 수와 월평균 시간 등을 확대하려면 올해보다 7284억원의 장애인 복지 예산이 인상되어야 한다. 한정된 예산에 끼워 맞추면 지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무대 위에서 장애 여성 배우는 뇌변장애, 지적장애, 시각장애… 진단과 장애명에 맞추어 살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에선 서비스 기준과 양에 맞춰야 하는 처지다. 532점 만점의 종합조사표는 변화된 기준이라고는 하지만 의학적 기준으로 진짜, 가짜 장애인을 판별하고 낙인찍던 방식과 다르지 않다. 장애인의 몸과 삶을 다시 서비스 등급으로 세분화시킨다. 옷 갈아입기, 목욕하기, 구강 청결, 옮겨 앉기, 약 챙겨 먹기, 물건 사기 등 기능 제한 조사 항목에 장애를 끼워 맞춰야 한다. 이 질문이 장애인의 몸과 삶, 사회적 차별을 담아내고 있는가. 장애등급제가 ‘진짜’ 폐지되어야 장애와 정상에 대한 ‘진짜’ 질문이 시작될 수 있다.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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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엄마를 따라온 한국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친구와 학교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출입국사무소를 다녀오던 길이었습니다. 꽉 막힌 거리에 가야 할 거리는 아직 많이 남았지만 서로 주고받을 이야깃거리가 금세 바닥을 들어내고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학교생활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뭔가 괜한 상처가 될까 싶어 입안에만 말이 맴 돌았습니다. 침묵을 견디다 못해 튀어나온 이야기라고는 20년도 지난 옛날 중학생들의 일상이었고, 저 아재의 추억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한 녀석은 손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눈은 창밖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노래가 한 곡 흘러나왔습니다. 요즘 노래가 아닌 오래된 노래인데 최근에 케이블방송 음악 프로그램에서 다시 불리는 모양입니다. 지루했던지 녀석도 조금씩 노래를 따라 불렀고,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놓지 않기로 유명한 저도 나름 화음을 보태 흥얼거렸습니다. 조그마한 차 안에서 옛날 노래 한 곡을 함께 흥얼거리면서, 녀석과 처음으로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눈이 마주칠 때는 서로 피식 웃기도 했습니다. 음악이 가진 오묘한 힘을 새삼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두어 달에 한 번씩 인권지킴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가는 노숙인 사회복지시설 영등포 보현의집에는 윈드 오케스트라가 있습니다. 처음  방문할 때만 하더라도, 노숙인 자활시설에서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는 것이 좀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여러 번 오가며 서로 얼굴을 익힌 다음에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을 부는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오케스트라를 하면 뭐가 가장 좋으냐고. 평소에도 앞니가 빠진 것 때문에 웃을 때 입을 가리며 웃던 아저씨는 수줍어하는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내 소리 내기에 바빴는데 언젠가부터 다른 사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어요. 서로 한 호흡을 맞춰갈 때마다 여기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뭔가 가까워지는 것 같아 좋아요.”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것, 그리고 그 호흡에 내 소리를 맞춰간다는 것, 굳이 평화·인권·공존이라는 어려운 말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음악을 통해 주고받고 있는 삶의 경험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하모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모양도 소리도 서로 다른 악기들이 만나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피부색과 언어와 삶의 배경이 다른 우리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서로 만나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경험을 직접 나눠주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경험을 나눠주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이 자라는 미래에는 서로의 다름이 공동체의 위협이 아닌 풍요로움이 되고, 그 풍요로움이 다시 새로운 가능성이 되는 공존의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다문화 청소년 윈드오케스트라 ‘미라클 윈드오케스트라’ 프로젝트는 그런 마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대림동 주택가 낡은 연습실을 밝고 예쁘게 꾸몄습니다. 올해 초 영등포구 협치 사업으로 선정되어 구청을 중심으로 음악 지도의 전문성을 가진 악기 선생님들과 이주민 지원활동을 꾸준히 해온 ‘이주민센터 친구’등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참여하고 있습니다. 기말고사가 끝날 즈음이면 아이들이 관악기 소리를 들어보고, 직접 불어보는 ‘찾아가는 악기설명회’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중국에서 온 손자를 데리고 할머니가 연습실에 찾아오셨습니다.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중국에서 온 이주 여성 자원활동가의 통역으로 음악선생님과 악기 면접을 마쳤습니다. 지역 시민단체 활동가가 기부해준 오래된 클라리넷을 불어보며 활짝 웃는 꼬마의 모습을 보며 작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미라클 윈드오케스트’가 만드는 기적의 하모니를 위해 따뜻한 격려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조영관 |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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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개소리에 대하여>(필로소피)의 ‘개소리’는 영어 ‘bullshit’의 번역어다. 번역자 이윤은 ‘헛소리’로 옮길까 하다 ‘non-sense’와 차별화가 어렵다는 점 때문에 개소리로 번역했다고 한다. 헛소리엔 무의미한 말이라는 뉘앙스가 있지만, bullshit에는 화자의 숨은 의도가 있다는 저자 논지를 따르려고 했다고도 한다.

개소리란 무엇일까? 소논문 분량의 이 철학책엔 비트겐슈타인이 1930년대 초 러시아어 개인 교사였던 파니아 파스칼을 문병 갔을 때 일화가 나온다. 편도선을 제거하고 요양 중이던 파스칼이 “마치 차에 치인 개가 된 느낌이에요”라고 죽는 소리를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혐오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차에 치인 개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소.”

저자인 미국 프린스턴대 철학과 명예교수 해리 G 프랭크퍼트는 이 일화에서 개소리의 의미를 분석해나간다. ‘비트겐슈타인은 파스칼이 진실에 대한 관심 없이 말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라고 프랭크퍼트는 추정한다. “파스칼은 진술의 정확성이라는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고 진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프랭크퍼트는 “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 개소리의 본질이라고 했다.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

거짓말과는 어떻게 구분할까. 거짓말쟁이는 자신의 발언이 거짓이라고 여기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고 프랭크퍼트는 말한다. 거짓말을 지어내려면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릿값에 관심을 가진다는 뜻이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큰 진리의 적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 같은 사람과 일상 대화를 해나가긴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내뱉는 엄살과 과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도 ‘개소리’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프랭크퍼트가 비판의 지점으로 삼는 건 공적 사안에서 자신의 이익과 속셈을 위해 내뱉는 개소리들이다.

개소리의 뜻과 범주를 확장하는 이 책은 한국 사회 막말과 망언을 분석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한국의 공적 영역엔 사실, 진실, 진리엔 전혀 관심 없이 내뱉는 ‘개소리’들로 그득하다. 최근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가장 부합하는 건 목사 전광훈의 말일 것이다.

“(문재인이) 그의 (주체)사상을 현실로 이루기 위하여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인 국정원, 검찰, 경찰, 기무사, 군대를 비롯하여 언론, 정부, 시민단체까지 주체사상을 통한 사회의 국가를 현실화하기 위하여 동원하고 있다.” 최근 수사조정권을 둘러싼 청와대와 검찰 간 갈등이나, 노동 문제를 두고 벌어진 정부와 민주노총의 대립에 관한 언론 보도를 한두 줄만 봐도 이런 말을 하긴 어렵다.

전광훈의 말들이 대개 이런 식이다. “세월호 사고가 난 거 좌파, 종북자들만 좋아하더라” “전교조에서 성을 공유하는 사람은 1만명이다.” 전광훈의 말은 혐오, 배제, 추방으로 점철된다. “동성애, 이슬람, 차별금지법은 사탄”이라고도 했다. 전광훈을 포함한 한국형 ‘기독교 우파’는 ‘북한’ ‘이슬람’ ‘동성애’ 3대 키워드로 극우 세력을 결집하려 한다.

‘전광훈류’와 단절하고 싶은가? 극우 세력의 ‘개소리’에 대안과 대책은 차별금지법 제정이다. ‘진보개혁’을 자처하는 이들이 차별금지법 문제를 두고 전광훈 앞에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밝힌 게 몇년 되지 않는다. 선거철 표계산을 두고 벌어진 어정쩡한 타협과 이상한 관용, 부끄러운 굴복은 오늘의 전광훈류를 강화·확산하는 데 일조했다.

노무현 정부 말기 법무부의 차별금지법안과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당시 야권 의원들이 낸 의원 입법안은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되거나 철회됐다. 현 대통령도, 현 총리도 당시 발의에 이름을 올렸다. 동성애와 양성애 등 ‘성적지향’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안은 2013년 2월20일 국회에서 마지막으로 발의됐다. 이낙연도 이름을 올린 이 법안은 제안이유를 이렇게 썼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대부분의 인권 선진국들이 채택하고 있음. 그러나 우리나라는 유엔 인권이사회, 유엔 경제문화사회적 권리위원회 등에서 차별금지법 채택 권고 및 촉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채택하지 못하고 있음. 이는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상에 맞지 않는 부끄러운 일임.” 6년이 지났다. 20대 국회에서 정부 발의건 의원 발의건 한 건도 발의되지 않았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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