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건을 다뤄왔습니다. 보람을 느끼기도, 안도하기도, 슬프고 아프기도 했습니다. 사건을 종결하고도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남아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은 아동, 청소년이 유명을 달리한 사건들이었습니다. “제대로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어느 선배 판사의 말은 아직도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런 사건은 사실 우리 생활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교통사고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운전자의 부주의 뒤에는 관심 부족, 시스템 부재가 작용하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년간 수출 종목으로 자동차 생산에 전념해왔습니다. 도로를 넓혀서 자동차의 도로 주행 속도를 올렸습니다. 법령을 정비해서 종합보험에 가입돼 있으면 특별한 잘못을 제외한 교통사고에 대해 처벌을 면하는 특례까지 두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사람들은 도로 밑으로 굴을 파서 길을 건넜습니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차가 먼저 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골목에서도 차가 오면 양보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차는 남을 윽박지를 수 있는 권력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몹시 불편합니다. 

‘걷기 좋은 도시’를 추구하면서 걷기 환경은 꽤 좋아졌습니다. 지하도가 있어도 도로 위로 횡단보도를 내줬고, 주말에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차 없는 길을 만들어줬습니다. ‘보행자 주권’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런 노력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실제로 교통사고 사망 사고는 줄고 있습니다. 그래도 길을 걷고 도로를 건너다 보면 보행자는 여전히 을(乙)입니다. 그래서 우회전 차량에 대한 시스템을 정비하겠다는 소식은 반갑습니다. 학교 앞 교통시설에 대해 두 가지 제안을 할까 합니다. 

첫째, 학교 앞 횡단보도 면적 넓히기. 학교 앞 횡단보도의 면적을 지금보다 2배 이상 넓히면 좋겠습니다. 서울 대학로 큰길에 제법 넓은 횡단보도가 있습니다. 넓어진 횡단보도가 보행자에게 어떤 안정감을 주는지 알 수 있습니다. 횡단보도가 넓어지다 보니 그 안에 차가 들어설 수 없습니다. 어지간한 파렴치가 아니고서는 그 넓은 횡단보도에 차를 들이고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차 두세 대 정도 공간이면 횡단보도를 두 배로 넓힐 수 있습니다. 넓어진 자리만큼 차는 공간을 손해 보지만, 사람은 그 몇 곱절 더 많이 그 공간에 다닐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양해는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학교 앞 횡단보도는 지금보다 2배 이상 폭을 넓혀도 됩니다. 

둘째, 교차로 대각선(X자형) 횡단보도 늘리기. 차를 위해서는 동시신호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위한 동시신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4거리 교차로에 횡단보도는 모서리 4개에 대각선 2개, 모두 6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대각선 횡단보도야말로 차가 아닌, 사람을 위한 동시신호입니다. 대각선 횡단보도야말로 ‘횡단’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점점 늘고는 있지만, 지금보다 더 전향적인 생각으로 대각선(X자형) 횡단보도를 대폭 확대하면 좋겠습니다. 특히 학교 주변에는. 

안전 말고도 제가 이런 제안을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질서 의식을 가르치려면 학교 앞에서, 그리고 제일 눈에 잘 띄는 곳부터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횡단보도에 차가 떡하니 들어서 있고, 신호 지키기를 기대하기보다 신호를 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이 많다면 이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단속, 규제, 이런 말에 시민들이 공감하고 따르리라 기대해선 곤란합니다. 우리 시민 의식은 이미 그보다 앞서 있습니다. 정권마다 구호처럼 외치는 ‘법치국가’의 초석을 다지려면 단속하고 규제하기보다, 시스템부터 훑어봐야 합니다. 우회전하는 차 보고 알아서 안전하게 운전하라, 정지선을 지키라고만 이야기해서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시스템을 바꿔서 설득해야 합니다. 불합리한 현상을 그대로 두고 단속할 테니 지키라고만 하면 시대착오입니다. 차에서 내려 현장에 나가보고 직접 걸어 다니면서 역지사지의 마음과 눈높이로 시민의 생각을 읽어야 합니다.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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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근로 및 자녀장려금을 대폭 늘렸다. 2일 국세청에 따르면 올 근로장려금은 388만가구에 4조3003억원, 자녀장려금은 85만가구에 7273억원이 돌아간다. 473만가구에 5조276억원이 지급되는 것이다. 지급대상 가구는 전년 대비 1.8배, 금액은 2.9배 늘었다. 역대 최대 규모다. 올해부터 단독가구 연령 요건이 폐지됐고, 소득·재산 요건이 완화된 데다 최대 지급액이 오른 덕분이다.

근로 및 자녀장려금은 소득이 부족하거나, 자녀 양육비로 어려움을 겪는 저소득층 가정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 아동수당 및 기초연금 확대와 함께 저소득층의 소득을 올려주기 위한 정책이다. 특히 장려금 지급대상에 30세 미만 가구를 대거 포함하면서 청년빈곤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저소득계층의 소득이 한계상황에 다다른 상태에서 이들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당연하다. 소득격차가 벌어지는 현실에서는 더욱 절실하다. 지난달 발표한 2분기 가계동향조사를 보면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간 격차가 역대 최대로 벌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당연히 소득불평등지표인 팔마비율(상위 10% 소득을 하위 40% 소득으로 나눈 값)도 악화됐다. 이대로 사회가 지속 가능할지 의문시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기초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 장애인과가난한이들의3대적폐폐지공동행동, 한국한부모연합이 23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개최한 ‘관악구 탈북 모자 추모제’ 중 이삼헌 무용가가 진혼무를 추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더 심각한 문제는 하위층 가운데서도 소득이 가장 낮은 하위 10%의 열악한 현실이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2017년 연간 평균소득은 305만원으로 상위 10%의 3% 수준에 불과했다. 지금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번 정부의 지원금이 소득 하위 20% 계층 가운데 10~20%에 혜택이 집중된다는 점이다. 지원금은 근로연계형이기 때문에 근로능력 자체가 없는 최빈곤층(하위 10%)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지난 7월 서울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생활고를 겪던 탈북민 모자가 사망한 채 발견돼 사회에 충격을 준 바 있다. 지난달에는 한 다세대주택에서 혼자 살던 50대 장애인이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복지정책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정부는 이번에 저소득층의 소득을 보전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우선으로 보호받아야 할 극빈층을 지원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취약계층의 생존권을 위한 소득보장 없는 소득주도성장은 공허한 구호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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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난 보름간 쏟아진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기사와 사람들의 반응에 마음이 어수선하다. 의혹을 파헤치는 기사나 그를 비난하는 글도 안타깝고, 일방적으로 그를 옹호하는 말도 석연치 않아 불편하다. 어느 순간 차라리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싶었다. 이십대에 맺은 인연 때문이다.

그와 알고 지낸 것은 내가 석사 과정에 입학해 형법을 전공하면서부터다. 그는 학문에 뜻을 두고 박사 과정에 있었고, 이미 학교에서 존재감이 뚜렷했다. 함께 수업을 듣던 내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직후에 그는 진보적인 학술단체에서 활동할 것을 권했다. 대학 시절 변변한 활동을 하지 못해 목이 말랐던 나는 권유에 따랐다. 나는 석사 과정을 마치려 사법연수원 입소를 연기한 채, 학술단체 활동도 하고 자유로운 시간도 보내면서 지냈다. 조교인 그의 방에 가끔 들렀는데, 그가 스스로 다짐하려 적어놓은 독일어 표어가 지금도 기억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내게 “노동자를 교육하는 단체가 있는데, 노동법 수업을 맡아 달라”고 했다. 아직 서슬이 퍼런 군사독재 시절이었고, 관련자가 구속된 비합법단체였다. 잠시 고민했으나, 마다할 명분이 없었다. 아니, 세상에 기여할 기회를 주는 그가 고마웠다. 나는 미미한 활동을 했지만, 그로 인해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을 조금 덜 수 있었다.

그때의 후보자는 연구자로서는 명석했고, 운동에는 헌신적이었으며, 생활태도는 부유한 환경과 달리 청교도적이었다. 자유주의적 사고와 감정에 기울어 방만했던 내게는 보기 드문 인물로 비쳤고,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사법연수원에 다닐 무렵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의 변호인이 피고인의 요청이라며 변론을 도와 달라 하여, 변론의 일부를 작성해 전달했다. 재판을 방청하러 갔는데, 원래 렌즈를 사용하던 그는 임시로 구한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초췌한 모습에 마음이 쓰라렸다. 그가 지금 기준으로 과격한 활동을 했다고 한들, 폭압적인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활동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는 없다.

그 후 이십 몇 년이 흘렀다. 교류가 없던 때도 있었고 가끔 전화하고 만나던 시절도 있었는데, 각별한 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가 달라 소원한 시기가 지난 몇 년간 이어졌다. 그사이 그의 존재감은 점점 커져갔고, 이제 후보자가 되었다.

나는 의혹 중 몇 가지는 모함이라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박사학위 없이 울산대 교수가 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당시에 종종 있는 일이었고, 성실하고 명민한 그에게 그런 정도의 자격은 있다는 것을 주위에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녀가 의외의 장학금을 받았거나 고교 때 의학논문의 저자가 된 문제, 그리고 민정수석 시절에 투자한 펀드에 대해서는 나도 당황했다. 위법 여부는 어차피 절차에 따라 가려질 것인데, 정확한 내막을 모르는 나로서는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다만, 언론이 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후보자가 관여한 것이라면, 그가 천명한 원칙이나 타인에게 적용한 잣대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물론 과연 위법인지, 또는 장관 부적격 사유인지는 더 살펴봐야 할 것이다.

나는 오랜 기억 속 후보자를 떠올리며, 괴롭고 서운한 마음으로 계속 생각해 본다. 어느 날은 잠도 오지 않는다. 내가 알던 성품이나 언행으로 보아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정황상 소극적으로 용인했을 가능성은 엿보인다.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그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그를 잘못 알고 있던 걸까. 세월 속에서 그도 약육강식의 세계에 적응한 생활인이 된 걸까. 그가 가진 많은 자질과 자원이 성찰의 힘을 빼앗은 걸까. 어느 이유든 서글플 따름이다. 물론 누군가 나를 샅샅이 뒤질 것도 없이 슬쩍 흔들어 보기만 해도, 나의 여러 잘못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겨우 조광희이고, 그는 내가 흠모했던 조국이 아닌가.

그가 적극적으로 선을 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 믿음이 잘못인 게 밝혀진다면, 기꺼이 바보가 되어 비웃음을 받겠다. 하지만 작은 틈을 부주의하게 허용해도 유죄가 될 수 있고, 후일에 무죄가 되더라도 몇 년을 힘겹게 싸워야 한다. 검찰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젊은 조국은 구속되고 유죄가 되어도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었다. 불의한 법과 사회적 구조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채 선한 의지와 용기로 맞섰기 때문이다. 지금 제기된 문제들은 그 선한 의지와 용기를 무색하게 한다. 그 점이 괴롭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로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된 사안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적극적인 해명을 통해 의혹의 눈초리가 누그러지고, 대통령이 흔쾌히 임명하며, 검찰개혁을 완수하는 것이 그로서는 최선이다. 나는 이 정부의 역량과 비전에 여러 아쉬움이 있지만, 후보자를 편애하는 마음 때문에 그 최선을 희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임명은 대통령의 권한이지만, 임명 이후에도 그와 주변인 모두가 조사를 받아야 할 처지다. 아무리 좋은 의도와 대단한 능력이 있어도, 그 와중의 개혁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자신만이 아니라 몸담은 정부마저 위태로울 가능성은 과연 없을 것인가.

더위는 누그러지고 있지만, 이제 그에게는 불같이 뜨거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의 잘못이 밝혀져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비난할 사람은 많다. 그가 이십대의 내게 준 삶을 생각하면 나는 그럴 수 없다. 그저 애통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잘잘못을 떠나서 이 논란은 나와 후보자가 포함된 세대가 이른바 헬조선의 기득권자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 세대가 앞으로 더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개개인이 아닌 세대라는 덩어리로서 윤리적 리더십을 주장할 명분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한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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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뛰다가 넘어졌다. 쿵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달려가 아이를 일으켰다. 아이의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으냐고 묻는 건지, 괜찮다고 위로하는 건지 나도 모르게 말을 쏟아냈다. 아이의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뒤편에서 갑자기 “울지 마!”라는 말이 들려왔다.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이의 아버지처럼 보이는 사람이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는 눈을 감았다. 감은 양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는 소매를 들어 눈을 훔쳤다. 울긴 했지만 울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울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울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무도 없을 때 남몰래 더 크게 울지는 않을까. 제때 울지 못한 울음은 언젠가 다시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그때 흐르는 눈물은 누구도 어찌하지 못한다. 그 눈물 속에는 억울함과 섭섭함, 울지 못하게 만든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분노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문득 어릴 때 들었던 날선 말들이 떠올랐다. 가령 “남자는 태어나서 딱 세 번 운다”나 “눈물이 헤프다” 같은 말들. 눈물이 솟구칠 때마다 두 손으로 두 눈을 가리게 했던 말들. 씩씩하지 못하다고, 참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고 나를 다그치던 말들. 그때 참았던 눈물이 흘러나오는 상상을 하니 아찔했다. 저 말들은 이제 케케묵은 것이 되었지만, 사람의 마음에서 이끼처럼, 곰팡이처럼 피어올라 그를 옥죄기도 한다. 내면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책을 읽다가 울었다. 현직 의사 김선영이 쓴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라이킷, 2019)이라는 책이었다. 지은이는 종양내과 의사인데, 아버지를 암으로 일찍 떠나보낸 사람이기도 했다. 공교롭게 그가 근무하는 병원이 작년에 아빠가 항암치료를 받은 병원과 같아서 첫 장을 읽을 때부터 목구멍으로 침을 삼켜야만 했다. ‘사실을 말하면서도 희망을 주는’ 일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의사의 고단함을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책에서 내 마음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던 문장을 옮긴다. 단단하면서도 겸손한 저 문장들로 인해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눈물이 흘러나올 때마다 불끈 주먹을 쥐게 만들었다. 주먹 안에는 “울지 마”라는 타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울지 않을래”라는 내 목소리가 새겨 있었다. 울지 못하게 만드는 외부 기제가 아니라, 울지 않기로 마음먹은 나 자신이 담겨 있었다.

“병원에서 슬픔을 공부할 기회는 언제나 있지만, 그것을 일상에서 건져 올리기는 쉽지 않다. 이것부터 시작하자. 죽음을 안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 타인의 슬픔의 깊이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저리 너머 저 심연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존중하는 것.” 누군가가 슬플 때, 어설픈 위로를 던지기보다는 그 슬픔을 헤아려보는 자세가 소중하다. 어떤 이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다른 어떤 이에게는 일상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슬픔일 수도 있다.

“울지 마”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어느 때는 위로가 되고 어느 때는 폭력이 되는 말. 누군가를 성장시키기도 하고 그 자리에 영영 붙박아두기도 하는 말.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더없이 편리한 “울지 마”라는 말. 실은 많은 말들이 양날을 지니고 있다. 슬픔을 다스리기 위해 했던 말이 슬픔을 더욱 부풀리기도 하고, 참아왔던 울음의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울지 마”라는 말보다 “울어도 괜찮아”라는 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아빠와 함께 거닐던 산책로를 혼자 걷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 날이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 나는 울어도 괜찮다고, 울 수 있어서 실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면 아마 나 자신이 통째로 쏟아졌을 것이다.

뛰다가 넘어져 우는 사람이 있었다. “울지 마”라는 외침에 울음을 삼키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장하며 울음을 참지 않기로 다짐했다. 한바탕 울고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눈물과 타인의 눈물을 둘 다 존중하겠다고 결심했다. 눈물의 농도와 경중을 따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비단 나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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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까지만 해도 평범한 집안에서 대학생이 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198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대학 진학률이 30%를 넘겼으니 대부분의 청년들은 고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합계출산율이 0명에 들어선 요즘은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한 집안에 3~4명 이상의 형제자매가 자라는 것이 보통이라서 누가 대학을 가는가는 아들 우선, 맏이 우선의 원칙에 따랐다. 이렇게 그동안 우리 사회는 경제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도 한정된 자원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밀어주기가 생활의 기본이었다.

이젠 우리 사회도 풍성한 발전을 이뤄 누군가의 희생이 따르게 되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관행이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의외로 고등학교들에서 밀어주기 관행이 남아있다는 소리가 나온다. 대학 입시에서 상위권 학생들을 위주로 챙긴다는 주장은 거의 전국적인 현상이다. 최상위 명문대에 진학할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이 알게 모르게 상도 더 많이 타고 학교에서 학생부 기록도 잘 써준다는 것이 대체적인 우대 내용이다. 사실일까? 아마 그런 우대를 받아본 본인들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주변 친구들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고, 그렇게 학부모들도 인정 아닌 이해를 하고 있다. 많은 기대를 모으는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기대와 지원이 있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최상위권에 대한 밀어주기가 수시전형 때문이라는 주장들도 많은데 사실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얼마 전까지 수능으로 대학입시가 주도될 때는 대놓고 치사한 방법으로 상위권을 밀어줬다. 도서관 특별석을 성적순으로 지정한다거나, 급식 때 우선 배식한다거나, 게시판에 등수를 게시하는 것 등이었다. 그보다 일반적이면서 심하게 차별을 드러낸 것은 성적 좋은 학생들에게만 고액의 방과후 외부강사 특강을 들을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이 경우는 지역의 명예(?)를 위해서 지자체나 동문들이 비용을 부담하는 사례도 많아서 상위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요구받기도 했다. 공부할 자극을 준다는 명목으로 지역사회에서 자극적인 방법의 차별을 당연시한 것이다. 가끔 언론에서 비판기사가 나오기는 해도 보통은 명문대를 보내려면 될 만한 놈들을 밀어줘야 한다는 것이 대중의 인식이었다.

고등학생이 논문을 써서 학회에서 발표하고, 책을 쓰면 다른 나라 대통령이 추천사를 보내주는 일은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차별적인 실적을 바탕으로 명문대학에 쉽게 합격했다고 논란이 크다. 분명히 문제다. 이런 특혜나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특별한 학생들만 지원할 수 있는 입시의 개구멍인 특기자전형이 지난 수십년간 합법적으로 있었고, 그 방법으로 합격한 학생들은 대부분 비슷한 수준의 실적을 갖고 있었다. 특목고의 인기는 차별적인 개구멍 입시를 치를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사람들은 특목고나 특기자 전형을 문제 삼지 않는다. 동네의 인재를 위해서도 차별은 필요하고, 특목고 학생들도 차별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세상이다. 차별이 일상화되면 기득권이 된다. 기득권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소소한 이기심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조만간 수능으로 학생들을 더 많이 뽑을 모양이다. 아직도 이기심의 괴물은 더 클 것 같다. 무섭다.

<한왕근 청소년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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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에서는 먼저 온 사람 먼저 타라고 서로 눈치껏 멈칫멈칫 해줍니다. 하지만 저기서 버스가 오니 자기 앉아 가겠다고 손 흔들며 냅다 뛰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정된 정차 위치가 있으니 버스는 열심히 뛰어오는 사람을 그대로 지나쳐 원래 설 자리에 섭니다. 저 앞까지 쫓아간 사람은 헐레벌떡 다시 쫓아올 수밖에요. 그러곤 결국 맨 나중에 타죠(영리한 사람은 지갑 꺼내 들고 멀리서부터 버스 기사와 아이 컨택을 합니다. 그럼 거짓말처럼 버스가 바로 앞에 섭니다. 그런 상황이 꽤 많습니다).

서둘러 덤벼들다 오히려 남들보다 뒤떨어지게 된다는 속담으로 ‘꼬리 먼저 친 개 밥 나중 먹는다’가 있습니다. 개밥 담아 마당으로 나갑니다. 그러면 자기 먼저 달라고 빠질 듯이 꼬리치며 달려오는 녀석이 꼭 있습니다. 그런다고 그 녀석 앞에 밥그릇 놔줄까요? 개밥그릇조차 옳게 놓일 자리가 있는데요. 영리한 개들은 밥그릇 자리 미리 가서 좋은 위치에 포진하며 기다립니다. 밥그릇 놓이니 서로 주둥이 싸움으로 으르렁댑니다. 먼저 먹겠다고 뛰어간 녀석은 한 발 늦어 주둥이 들이밀 틈이 없습니다. 하나도 안 남으면 어쩌나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애가 탑니다. 사람 먹기도 부족한데 개밥인들 넉넉했겠습니까? 결국 빈 그릇만 핥습니다. 그러고도 매번 개밥그릇 든 걸음 앞으로 또 꼬리치며 달려옵니다.

전철이 멈춰서면 좌우로 늘어선 사람들 무시하고 중앙으로 돌진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내리는 사람들의 짜증스러운 몸짓에 뒤로 뒤로 밀려서 결국 자리 못 앉습니다. 좋은 자리, 괜찮은 해외출장 자기 달라며 눈에 띄게 비나리치는 사람 있습니다. 상사가 바보입니까? 다들 눈 시퍼렇게 노리고 있는데요. 되레 괘씸죄에 왕따로 저 뒷전까지 밀리겠죠. 괜찮은 자리는 조금만 더하면 자릿수 올라갈 만큼 해놓고, 윗사람이 더해주게 아이 컨택 잘하는 사람 차지입니다.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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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벌, 풀 초. 연약한 풀과 싸울 일이 뭐 있으랴만, 풀을 깡그리 제거한 도시에서 듣는 저 단어가 참으로 강력하다, 벌초(伐草). 매미 소리는 하늘의 그물인가. 우렁차서 구멍이 성근 듯하지만 빠뜨리는 법이 없다. 여름의 잔해를 모두 짊어지고 매미들은 지금 입적하고 있는 중! 연례행사로 벌어지는 벌초는 가을로 넘어가는 하나의 고개다. 저 고개를 넘으면서 날씨는 수굿해지고 벼는 고개를 숙인다. 이윽고 가을이 시작되고 추석이 찾아온다.

고개가 하나 더 있다. 벌초하러 시골 가는 길. 고속도로에서는 엉덩이가 특별히 발달한 자동차 꽁무니를 그저 냅다 쫓아가기에 바쁘다. 무주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단정한 국도가 시작되는 곳에 ‘라제통문’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글씨는 최근 것이로되 글자는 신라, 백제 시대로 연결되지 않겠는가. 왼편으로 구부러져 구천동을 지나 덕유산 빼재를 넘는다. 백두대간의 한 구간으로 경상의 거창과 전라의 무주를 사이좋게 잇고 있는 중! 높아서 좋고 그 말맛이 빼어나기에 더욱 좋은 고개. 빼재 이정표가 보일 때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내렸다. 구천동의 청량한 공기가 서울의 묵은 공기를 얼른 쫓아냈다. 코끝을 때리는 고향 냄새를 따라 눈앞의 풍경은 싸늘한 공간에서 비로소 다정한 장소로 바뀐다. 어머니는 아니 계셔도 당신의 친정 근처를 휘돌아들 때마다 옛이야기를 풀어놓던 음성이 바람결에 전해온다.

산소는 양지바른 곳이기에 꽃들에게 좋은 조건을 제공한다. 무릇, 닭의장풀, 달맞이꽃, 여뀌가 무덤 둘레마다 드문드문 피었다. 가장 강렬하게 핀 꽃은 꽃며느리밥풀이다. 곤궁하게 살았던 시절을 상징하듯 서글픈 꽃의 아랫입술 가운데 이빨 혹은 밥풀 같은 게 도드라진다. 그 옛날 이름도 모르고 꼴을 베어 소에게 줄 때 고명처럼 얹어 주었던 꽃일까.

이발하듯 덥수룩한 산소의 머리를 깎고 난 뒤 절을 한다. 그간 얼른 일어나기에 바빴는데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방금 낫에 베인 풀에서 나오는 향기를 작정하고 맡아본 것이었다. 어쩌면 이 순간 확인하는 지하의 근황은 아닐까. 꽃며느리밥풀 곁이기에 더욱 좋았던 기해년의 벌초, 두 개의 고개를 넘으며 끝났다. 꽃며느리밥풀, 현삼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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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처음 만난 제자들이 취업을 하기 시작했다. 교수가 하자는 대로 통계 프로그램을 ‘돌리고’, 공대 수학 수업을 듣고, 공모전을 하느라 밤을 불사른 첫 제자가 취업을 했다. 처음 합격한 회사는 중소기업이었다. 청년내일채움공제로 연봉의 얼마간을 보조금으로 지원받는 회사였다. 중소기업 가면 일 많이 하고 임금은 적어 주저하는 제자에게 “더 좋은 회사 붙기 전까지만 한다고 생각해” 하며 달랬지만, 계약직 연구원 일자리가 나자 그리로 자리를 옮겼다. 박봉이지만 시간 여유가 있어 일하면서 대학원을 다녀보겠다고 한다. 식사를 같이한 학생들은 동기가 회사에서 월급을 300만원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300만원. 10년 전 대기업 신입사원 세전 월급이다. 국민총소득(GNI)이 3만달러가 넘는 선진국에서 300만원쯤 받는 게 대수인가.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월 200만원 안짝의 연봉구조가 보인다. 중소기업, 대학 계약직, 도시재생센터, 시민단체, 사회적기업, 서비스업. 모두 최저임금에 수당 등이 조금 붙는 수준. 월급 몇 십만원 차이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이철승의 책 <불평등의 세대>를 따르자면 노동시장의 위치를 정하는 건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 조직 여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규직 여부. 대기업 다니는 정규직이거나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노동조합이 조직된 회사의 정규직이면 상층에 속하게 된다. 대기업이 아니고 노동조합이 없더라도 정규직이면 중층에 속한다. 졸업생들이 향하게 되는 회사는 중소기업에 비정규직이라 노동조합이 있어도 연봉에 미치는 영향은 별로 없다. 운이 따르지 않으면 300만원 월급을 받을 확률이 높지 않다. 지역에 질 좋은 일자리를 더 만들라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혁신도시를 짓고 공기업들을 대거 이전시켰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는 수도권 인재들과 거점 국립대 응시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지방대생들이 질 좋은 일자리 경쟁에서 밀리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경쟁에서 밀렸다고 임금이 최저임금이라는 바닥 수준에서 올라가야만 하는 걸까. 결국 임금격차라는 분배 문제가 걸린다.

젊은 세대에게 주어진 몫 자체가 작다. 작은 몫을 두고 계급과 학벌과 젠더가 엉켜 경쟁압력을 계속 높이는 것이다.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가 생각났다. 대기업에 손쉽게 취업하고, 외환위기 때 정리해고를 면하고, 연공서열제로 고소득을 쟁취하며, 잡 셰어링을 위한 임금피크제까지도 무력화시키고 정년연장까지 시도하는 86세대. 세대 내 경제적 불평등(계급불평등)은 언제나 세대 간 불평등보다 심하지만, 한국의 86세대와 다른 세대를 비교할 경우 세대 간 불평등을 무시할 수 없다. 세대 간 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어 당시의 1980~1990년대생들은 그냥 두면 세전 88만원이라는 저임금에 갇힌다는 것. <불평등의 세대>는 예언의 실현을 데이터로 드러낸다. 86세대는 대기업-정규직-노동조합 복합체인 노동시장 상층부를 점유한다. 중소기업-비정규직-비노동조합과의 자원 공유는 없었다. 더불어 86세대는 2004년을 거치며 정치권의 다수파 세대가 됐다. 1970~1980년대생들의 의석수는 86세대의 30~40대 시절 비중에 턱없이 못 미친다.

<88만원 세대> 저자들은 해법으로 청년들이 88만원으로 충분히 살 수 있는 생태주의자들의 생활양식을 택하거나, 사회가 젊은 세대의 소득과 직업 안정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노동과 사회를 재구성하는 공진화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전한다. 20대에게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 던지라 한다. 출간 후 10년간 운동과 정책은 반값 등록금이나 최저임금 상향, 청년수당, 청년주거에 매진했고 부분적으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노동시장 상층의 몫을 나누려는 시도는 미약했다. 노동시장 상층은 86세대가 여전히 다수파다. 지역과 젠더 관점에서도 불균등은 개선이 더디거나 외려 심화됐다. 경쟁압력 속에서 ‘텐션’이 떨어진 청년들은 적게 벌고 쓰며 ‘일상을 지키는 데’ 적응해 버렸다. ‘텐션’이 높은 청년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기민하게 찾기에 급급해졌다. ‘더 작은 민주주의’의 강조가 싸워서 쟁취해야 할 분배정치에서 청년 이탈을 만든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일에서 드러나는 분노의 목소리는 권력과 자원을 획득한 이들이 공정하고 합법적으로 만드는 ‘기울어진 운동장’, 즉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다. 말과 글로 공정을 이야기하지만 자신들의 세대와 계급이 만들어낸 기득권은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 기득권의 실체가 드러나면 전선도 분명해진다. 이철승은 “한반도 정주민들은 때로는 외부의 위협에 너무 늦게 반응했”지만 “필요성을 깨달으면, 어느 부족보다 빠르고 집요하게 목적을 달성한다”고 책에서 결론짓는다. 한국사회는 늘 덜컹덜컹하지만 문제가 드러나면 빠르게 피드백을 하며 문제를 해결해 왔다. 또한 10년 전 ‘88만원 세대’ 30대들 중 많은 숫자가 이제 기업과 정부에서 과장급까지 진급하며 실무의 중심에 올라왔다. 지역사회에도 자리를 지키는 젊은 활동가들이 생겨난다. 다른 감각의 다음 세대 주역들이 등장한다. 달라진 시대정신 속에서 새로운 세대 주체들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줘야 할 때인 것 같다.

<양승훈 | 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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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지구촌을 안전하게 관리할 ‘또 다른 유엔’을 만들 것을 꿈꾸며 서울에서 바티칸까지 걷기 시작한 지 2년. 생명·탈핵 실크로드는 올 초 인도까지 5000㎞를 걸은 후, 올여름 중앙아시아에서 기차 등으로 그리스까지 이동했다. 

15개 나라를 거치며 많은 이를 만났는데, 그중 흑해 연안에서 자라면서 온 가족이 암에 걸려 고생한 터키의 30세 젊은이 베르커도 있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방사능은 드네프르강으로 모여서 흑해로 흘러든다. 베르커는 조부모와 숙부를 암으로 잃고 모친은 위독한 상태이며 자신은 여섯 살 때부터 고환암에 걸려 결혼을 포기한 상태다. 이처럼 흑해 연안 사람들은 30년이 넘도록 방사능 공포에 휩싸여 있다.

핵발전소의 근본 문제는 후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양심의 파괴’다. 많은 나라들이 탈원전의 길을 걷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윤리 때문이다. 

내년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장소들이 방사능에 여전히 오염돼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아즈마 야구장에서 야구경기를 치르고, 후쿠시마산 식자재를 선수단 식사에 사용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올림픽 성화 봉송로에서 기준치의 무려 25배나 되는 방사능 수치가 기록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대로는 인류 모두가 공범이 된다. 고대 올림픽과 근대 올림픽의 시발지인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나는 기원했다. 지금이라도 도쿄 올림픽을 재고하기를 그리고 인류가 올바른 길을 선택하기를.


<이원영 | 수원대 교수·국토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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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촛불정부가 출범한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으로 찾은 외부 기관은 인천국제공항공사였다. 그곳에서 대통령은 수십년간 노동계의 바람 중 하나였던 공공부문 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며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천명했다. 선언적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 흥분된 마음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뉴스를 지켜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2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지난 2년간 공공부문 내 기간제 노동자와 파견·용역 노동자 중 18만5000명 정도가 전환 결정되었고 그중 15만7000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무늬만 정규직화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고 그 목소리의 타당성도 있지만, 그 무늬라도 갖추려고 노력한 점은 인정받아야 한다. 내막을 아는 이들은 그나마 이 정도의 성과도 여러 난관 속에서 정규직화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다양한 주체들의 노력의 결과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내실 있게 추진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은 많이 남는다. 우선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 정부 내 경제부처의 태도이다. 우선적으로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부분까지야 범정부적 공감대가 있었을지 몰라도 처우 개선이라는 중장기적 과제에 대해서는 정부 내 온도 차이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온도 차이를 이제는 경제부처의 온도로 맞춰가는 것이 아닌지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대통령의 인천국제공항공사 방문을 시작으로 가속도를 내던 정규직화 정책은 어느 순간부터 가속페달에서 발을 뗀 것처럼 소리 없이 동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관련 정책의 동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비단 정부의 책임만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여러 공공기관의 정규직 전환과정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정규직 노동조합이 이 정책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이러한 정규직 노동조합의 태도 문제는 기간제 교사에 대한 전교조의 입장정리 과정이나 인천국제공항공사를 포함한 여러 공공기관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도 여지없이 튀어나왔다. 이 때문에 자회사를 통한 정규직 전환 방식에 대한 노동계의 거센 비판은 그 속살을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뒷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다. 진정 정부의 의도만으로 자회사 전환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는지 노동계 내부에서부터 냉정한 성찰과 평가가 필요하다. 정규직 전환과정에서 국립대에 재직 중인 나의 입장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현재 시간강사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면 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정규직 노동조합과 과연 다른 주장할 수 있는지. 노동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도 여러 갈래로 파편화되어 있는 우리의 모습을, 결국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를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였다.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은 3단계 계획하에서 3년만 진행하고 그만둘 것이 아니다. 정규직화 정책은 마무리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하는 단계에 있다. 여전히 과도한 자회사 전환방식, 기관 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문제, 기관 간 격차의 문제, 민간부문 정규직화로의 확장성 문제 등이 고스란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를 위한 우리 사회의 노력과 고민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채준호 | 전북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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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있는 시민들께, 언론에, 정부와 청와대에 청원합니다. 무슨 말로 이 청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국 교수가 법무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이후 우리 사회의 공론장은 온통 이 문제를 논하는 말들로 가득한 상황입니다. 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들에 또 하나의 부실한 목소리를 더하는 건 아닌지 우려하면서도, 뜻있는 이들의 공감을 구하고자 이 청원의 글을 씁니다.

조국 후보자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커다란 의문을 일으켰고, 그 의문이 다름 아닌 교육 문제에 집중되어 있음을 우리는 이번에 모두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조국 후보자의 자격 여부를 다시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법개혁의 적임자로 평가되는 그의 자격 여부에 앞서 오히려 교육개혁이야말로 그가 뜻하지 않게 우리 모두에게 던진 과제가 되었음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조국 후보자의 딸이 받았다는 특혜가 과연 사실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 개인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 상위층의 기득권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하게 되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재력과 학벌로 짜인 집단적 기득권 구조가 정-경-관-법-언으로 이어져 다시 기득권층의 집단 이익을 보장하는 ‘합법적’ 불공정의 실상을 보게 되었고, 그 핵심에 교육이 있음을 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조국 후보자 자신부터 이 부분을 뼈아프게 반성하게 되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대학 서열화와 입시 경쟁으로 요약되는 현재의 교육제도가 사회 기득권과 계급적 울타리를 수호하는 보안문 구실을 하게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부모의 재력과 정보력과 신분이 학생의 능력으로 치환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능력이 또한 명문대 졸업으로 추인되고, 그리하여 또 한 번의 기득권과 계급으로 대물림되는 현상을 우리는 분명하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 올라설 수 있다고 오래도록 믿어온 계급 간 사다리를 오히려 교육이 걷어차고 있는 현실을 너무나 뚜렷이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겠다는 이 정부의 의지가 교육에서도 과연 실현되고 있는지 많은 이들이 묻고 있다는 점에서, 마침내 교육의 혁명적 변화를 논의할 적기가 찾아온 듯합니다.

여기서 고등교육의 공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논하는 것은 사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취업과 사회적 성공 여부가 명문대 졸업장에 달려 있고, 그 졸업장이 부모의 능력에 좌우되는 현실, 그것의 한가운데에는 역시 ‘학벌 사다리’로 부르는 대학 서열화가 있습니다. 대학 서열화는 심지어 부모의 능력 덕분으로 기회를 차지한 학생들조차 자기들 내부에서 ‘능력’과 ‘특혜’를 다시 시비하는 우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서울대, 고려대의 촛불집회에서 보듯이 ‘스카이 캐슬’이라 부르는 성채 안의 학생들이 사회적 공정성을 그들만의 계급 내 문제로 번역하는 신공에는 아연할 뿐입니다. 그들끼리 따지는 자기들만의 공정을 회수하여 고등교육 전체의 공공성 문제로 회복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교육에서 시작하여 생애 전체로 이어지는 이 사회의 기득권 구조와 불평등 경로를 무너뜨리는 길은 대학 서열화를 타파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대학 서열화의 타파를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지름길로 ‘전국 국공립대 통합’을 공론에 부치자고 제안합니다.

그간 우리 사회는 입시제도의 공정성이 기회의 평등을 확보하는 열쇠인 양 끝없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왔습니다. 하지만 공정한 선발을 위한 ‘능력’의 기준조차 출신상의 불평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 지금, 수시니 정시니 하는 제도상의 수정은 전혀 불공정을 해소하는 장치가 되지 못했습니다.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 40개 국공립 대학을 묶어 학생들을 통합 선발하고 추첨으로 캠퍼스를 배정하고 자유로운 학점 이동을 보장한다면, 이 사회의 교육 현실은 획기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사립대들의 또 다른 서열화는 어찌 하느냐는 반박은 통합 국립대에서 배출될 수십만의 인재를 생각지 않은, 내용 없는 반대에 불과합니다. 나아가 전국 국공립대 통합은 지방 분권화와 균형발전이라는 과제까지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전국이 수도권에, 서울대에 몰리는 기현상이 사라질 것이며, 그리하여 지역, 계급, 학력에 기초한 기득권 구조도 차츰 허물어질 것입니다. 저는 전국 국공립대 통합이야말로 교육발 혁신이 사회 전체의 혁신을 가져오는 도화선이 될 거라 믿습니다. 뜻있는 이들의 공감과 토론을 청합니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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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부터 국내에서 6개월 이상 머무는 외국인은 건강보험 당연가입 대상자가 됐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회보험제도인 건강보험 가입에 국적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도 가입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건강권 보장이라는 관점에서 올바른 방향이다. 시민단체와 유엔인권기구에서도 장기체류 외국인에 대한 차별 없는 건강보험적용을 여러 차례 권고한 바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작년 7월 건강보험료 부과체계를 개편하면서 “적정 부담능력 있는 곳에 적정 부과 원칙”이라는 사회보험 원칙을 강조한 바 있었기에 외국인의 건강보험제도와 관련한 제대로 된 정책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정부의 장밋빛 정책방향이 실제 현장에는 전혀 다른 기형적인 제도로 이어지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되지만, 단언컨대 이번 외국인 건강보험 당연가입 제도가 그중 가장 최악이다.

도입 과정부터 성급했다. 정책 적용대상이자 보험료 납부 당사자인 체류 외국인에 대한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실태조사가 없었다. 외국인의 보험료 체납을 체류자격과 연결시켜 건강보험료를 3회 초과 미납하면 한국에서 쫓아내겠다는 초강수를 두면서(외국인이 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했다고 체류자격을 취소하는 것이 정당한지도 의문이다. 내국인이 건강보험료를 미납했다고 해서 학교나 직장을 그만두게 하거나, 거주지를 제한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국내 체류 외국인의 체류자격별 평균소득에 대한 기초조사도 없었다. ‘적정 부담능력 있는 곳에 적정 부과 원칙’이라는 보편적 기준은 사라지고,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의적 기준들로 제도가 설계되었다. 지역가입자 보험료 산정기준이 대표적이다.

외국인 지역가입자의 경우 소득과 재산을 기초로 보험료를 산정하지만, 산정된 보험료가 전체 가입자의 평균보험료(2018년 기준 월 11만3050원)보다 적으면 무조건 평균보험료를 납부해야 한다. 통계자료는 이러한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2018년 말 국세청이 발간한 국세통계연보에 따르면 연말정산을 신고한 외국인 근로자의 평균 연봉은 2510만원으로 전체 직장인 평균 연봉(3519만원)의 70% 수준에 불과했다. 외국인 지역가입자의 피부양자 범위도 내국인보다 엄격해서 부모와 성년인 자녀가 함께 거주하는 경우에는 각각 가입대상자가 된다. 그러다보니 가족단위로 체류하게 되는 난민이나 동포들의 경우에는 한 달 소득은 최저임금 수준임에도 매월 30만~40만원의 건강보험료를 내야 한다. 보험료가 사실상 체류를 위협하는 수준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농어촌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사업장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지만, 사업장이 직장의료보험 가입 대상이 아니라 지역가입을 해야 한다. 내국인의 경우 의료 환경이 충분하지 못한 농어촌 및 도서지역의 경우 보험료가 감면되지만 외국인은 그 지역에 살더라도 감면 대상에서 제외된다. 외국인에게 제공되는 의료서비스의 품질도 문제다. 충분한 의료통역이 제공되는 의료기관은 턱없이 부족하고,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이 일상화된 외국인 노동자들은 몸이 아파도 평일에 병원을 가서 진료를 받기란 상상하기 어렵다. 외국인의 의료 접근권에 대한 진지한 성찰보다 고액의 건강보험료 징수와 체납에 대한 징벌적 처벌을 강조하는 것은 보편적 인권보장의 책임이 있는 정부의 역할이 아니다.

문제가 되자 보건복지부는 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기준이 정당한 이유 없이 특정 집단에 적용되지 않거나 반대로 엄격하게 적용될 때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부른다. 우리 헌법은 부당한 차별은 금지한다. 차별은 점차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인종차별적인 건강보험제도의 시행을 멈춰야 한다.

<조영관 |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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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바다로 흘러가는데


길은 어디로 흘러갈까요


솜반천으로 가는 솜반천길


길도 물 따라 흘러


바다로 흘러가지요


아무리 힘들게


오르막길 오르더라도


결국엔 내리막길로 흘러가죠


솜반천길 걸으면


작은 교회


문 닫은 슈퍼


평수 넓지 않은 빌라


솜반천으로 흘러가네요


폐지 줍는 리어카 바퀴 옆


모여드는 참새 몇 마리


송사리 같은 아이들


슬리퍼 신고 내달리다


한 짝이 벗겨져도 좋은 길


흘러가요


종남소, 고냉이소, 도고리소,


나꿈소, 괴야소, 막은소…


이렇게 작은 물웅덩이들에게


하나하나 이름 붙인


솜반천 마을 사람들


흘러가요


현택훈(1974~)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솜반천은 제주의 도심 속에 있는 생태하천이자 천지연 폭포의 상류에 있는 물줄기이다. 사시사철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른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제주에서 살고 있는 시인은 넓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솜반천길을 따라 걸으면서 도중에 만난 것들을 하나하나 집어 말한다. 시인은 신앙, 매일매일 이어지는 생활의 곤란, 어린아이들의 즐거운 동심 등등을 만나고 본다. 그리고 솜반천이 푸른 바다로 나아가는 길에 만든 우묵한 물웅덩이들을 주목한다. 그 물웅덩이들에게 방언으로 특별하게 이름을 부여한 마을 사람들의 푸근한 마음도 읽는다. 이 모두는 솜반천 천변의 시간과 풍경, 일상을 구성하는 것들이며, 평범하고 반복되고 세세해보이지만 매우 귀중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들이다. 아침의 선선해진 공기, 귀뚜라미 울음소리, 밝은 달, 햇사과 등이 9월의 가을을 이루듯이.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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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거나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성립된다.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다스리는 죄질이 나쁜 범죄다. 폭행은 사람의 신체에 직접 폭력을 가하는 일로 판단이 비교적 쉽다. 협박은 상대방에게 해악(害惡)을 고지하여 공포심을 갖게 하는 행위다. 그런데 강요죄는 강요에 의해 발생하는 일을 정당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당하는 입장에서 “폭행,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의 뇌물공여 사건 2심 재판부도 사건의 본질을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의 겁박 때문에 뇌물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고 규정했다. 이런 이유가 양형에 반영되면서 이 부회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8월30일 (출처:경향신문DB)

그런데 강요가 없었다면 어떻게 될까. 강요에 의해 행해진 일들이 위법한지를 따져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국정농단 사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이 같은 일이 발생했다. 재판부는 최순실씨 등이 삼성그룹 등에 재단 출연·납품계약·광고발주 등을 요구한 것을 강요죄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두려움을 느낄 만한 해악의 고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2심 재판부가 법리를 오해했다고 한 사건은 모두 7건이다. 삼성 등 대기업들이 관련된 사건들이다. 강요가 없었으니 대기업들의 출연금 지원이나 광고발주 등은 자의적 판단에 따른 결정이 된다. 다만, 대부분은 ‘의무 없는 일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이나, 2심에서 같은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난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의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줄 가능성은 높다. 다른 기업들도 강요라는 ‘보호막’이 거둬지면서 부당 채용, 광고 발주 등이 위법한 지 따져야 하는 상황이 됐다. 검찰도 판결문 전체를 다시 살펴보겠다고 한다.

최고 정치권력의 부당한 요구가 강요로 인정되지 않은 것은 이 사건의 특수한 성격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강요라는 ‘동전’이 뒤집힐 때 그 다른 한 면이 부당한 요구에 대한 정당한 저항일 때만 법의 단죄를 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권력의 부당한 요구 뒤에 숨는 일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사법부의 경고인 것이다.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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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요즘 화제다. 책 곳곳에서는 소위 ‘꼰대질’을 하는 기성세대와 자신을 ‘호갱’으로 대하는 기업을 외면하는 청년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사고방식, 행동, 양태 차이점을 잘 보여준다. 간단, 재미, 정직이라는 키워드다.

우리 연구소의 20대 연구원도 비슷하다. 관심 없는 내용은 읽지 않고, 3줄 이상의 댓글은 읽지 않는다. SNS에서 큰 이모티콘은 싫어한다. 스마트폰 데이터 비용이 아까운지라 고용량 사진은 사절한다. TV는 보고 싶은 장면만 찾아서 본다. 일상의 대화에서 ‘월급 루팡’(월루)과 같은 알아듣기 힘든 줄임말도 자주 사용한다. 그렇다고 1990년대 청년들이 어설프고 맥락이 없진 않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청년들은 우리 사회가 해석해준 대로 살아야 하는 삶을 당당히 거부한다.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청년들이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더 많은 변화, 더 넓은 참여, 더 나은 미래’를 실현하고자 한다. 우리는 서울청년시민회의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청년시민회의는 2017년 시작되어 3년째다. 올해는 시장 직속의 ‘청년청’과 함께 약 500억원의 청년자율예산제를 논의하는 플랫폼이 되고 있다.

청년시민회의는 지난 6개월간 청년 1000명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자기 목소리를 내온 공간이다. 20대 초반부터 직장인까지 매우 다양한 청년들은 더 나은 변화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학생(193명), 회사원(168명), 청년활동가(97명), 구직 청년(89명), 프리랜서(63명) 등 매우 다양하다. 1000명이나 되는 청년들은 왜, 어떤 이유로 한자리에 모였을까. 학교 졸업 후 대기업 취업을 당연시하거나, 공무원시험 준비가 전부인 것에 대한 거부일지도 모른다. 바뀌지 않는 사회에 대한 변화의 욕구인 것 같다. 아무리 요구해도 변화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섭섭함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년간 학교를 벗어난 청년들에게 자기증명만을 요구했을 뿐, 사회 가치에 대한 목소리를 낼 공간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청년들의 진지함은 1970년생인 내게는 충격이었다. 몇 차례에 걸쳐 자기 시간을 내면서까지 각자도생의 시대에 그들의 언어와 목소리로 청년정책을 만들고 있었다. 시민으로서 평등권을 보장하는 작은 참여를 요구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함께 소통하는 길입니다!”라는 무박2일의 워크숍에서 눈에 띈 문구는 청년 감수성을 가늠케 한다.

도시주거, 건강, 교육, 복지안전망, 일자리경제, 민주주의, 평등다양성 등 30여개 분과로 나뉘어 6개월간 청년정책을 만들었다. 일반(45개), 특별기획(9개), 자치구(42개)까지 총 96개 정책이 제안되었다. 프리랜서 안전망부터 안전한 공간, 은둔형 외톨이, 쫓겨나지 않는 도시, 일터 내 민주주의, 중소기업 복리후생 계좌제까지 현실적 정책들이다. 지난 3월 첫 모임을 시작으로 분과회의, 소주제회의, 부서 간담회까지 치열한 고민을 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사업은 특별기획과 자치구 영역이다. 2개 이상의 영역에 걸쳐 추진돼야 할 특별정책과 지역문제 해결 자치구형 정책을 위해 제안된 것들이다. 특히 서울시 청년자치예산 중 자치구에 5분의 1이 할애됐다. 16곳에 77억원이 배정됐다. 소소한 식탁, 재능 공유 마켓, 마음건강, 1인 가구 기반 조성, 미래직업 양성 등 동네 참여예산의 실현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와 자치구라는 지역을 연결하려는 청년들의 세밀함을 엿볼 수 있다. ‘정책의 변화’와 ‘시선의 확대’를 느낄 수 있다.

청년시민회의를 시작했던 청년들은 ‘1000개의 필요, 500개의 아이디어, 100개의 정책’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경험도, 언어도, 풍경도 낯설었던 행정조직에서 그들은 어떤 상상력을 펼쳤을까. 8월31일 보편적 권리로서 지방정부의 청년정책을 확인하고 싶다. 공정성이 화두인 요즘, 불평등과 격차해소의 중요성이 논의되면 좋겠다. 이제 우리도 핀란드(주택수당, 마음건강), 오스트리아(교육훈련), 프랑스(자기활동계좌제), 영국(사회자본)의 정책들이 청년들의 언어와 상상력으로 도입되길 기대해 본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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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맡은 자리와 위치에서 소임과 본분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대사회에서 ‘자리’와 ‘위치’라는 것은 일단 공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즉 사유화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개인이 일군 기업에서 사장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그 기업이 1인 기업이 아닌 한 그 사장 자리도 기업 내에서 공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다른 사람보다는 많은 권한을 갖게 되지만 그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사장 자리도 없기 때문이다. 사장 자리에 있다고 해서 기업을 자기 마음대로 막 할 수 없다. 교수라는 자리도 대학 내에서 공적인 성격을 갖는다. 회사에서 과장, 부장, 임원 등의 자리도 모두 공적인 성격을 갖는다. 여기서 공적인 성격이 의미하는 바는 그 자리는 그 자리가 부여된 제도나 기관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교수는 대학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리이고, 사장은 기업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리이며, 부장, 임원 등도 기업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리이다. 

너무나 분명하게도 공무원이라는 자리는 ‘어공(어쩌다 공무원)’이건 ‘늘공(늘 공무원)’이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이 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그 자리와 위치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적인 이익이나 사적인 욕구를 충족하려 하면 안된다. 이런 경우 공사구별이 안된다고 표현한다. 교수가 교수라는 자리를 이용하여 학생들을 사적으로 부리고, 그 자리를 징검다리로 하여 권력이나 재물을 추구하면 학교라는 곳이 원래의 목적과 취지에 맞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교수는 교수의 원래 기능에 충실해야 하는 자리이다. 즉 연구하고 교육하는 자리이다. 본인의 연구가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도움이 되어 회사나 국가의 자문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래 교수의 기능 외적인 부의 영역이지 주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이 주의 영역이 되면 컨설팅 회사나 기업으로 직장을 옮기거나, 공무원으로 빨리 자리를 옮기는 것이 학교를 망치지 않는 길이다. 진정한 학문의 발전은 정체되고, 불쌍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내팽개쳐진다. 기업의 과장, 부장, 임원 등의 자리도 각기 맡은 바 소임과 기능이 있다. 그 자리를 이용해 사적인 영리를 기업 안에서 추구하거나, 부하 직원을 회사의 일과 관련이 없는 일로 부리고 괴롭히면, 회사에 해를 끼친다. 회사의 배임과 횡령이 강력하게 처벌되는 이유도, 상사의 부하 직원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처벌되는 이유도 모두 자리가 사적으로 이용되어 회사에 손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기자들도 정확한 사실을 취재해서 보도하는 것이 본분이지만, 기자라는 자리를 이용하여 사적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면 이는 언론사뿐만 아니라 언론 전체를 망가뜨리게 된다. 왜곡된 보도나 선동적인 보도를 통하여 몇몇 사람은 이익을 볼 수 있지만, 국가와 사회라는 공간의 정보 유통이 혼탁하고 망가져 사회에 심한 해를 끼치게 된다. 국가 공무원이 자리를 이용하여 개인의 영달과 재물을 추구하면, 공공성이 파괴되어 국가의 기능이 왜곡되고, 심한 경우에는 나라가 흔들린다. 많은 저개발 국가의 부패한 독재정권이 바로 국가의 공적 자리를 이용하여 개인의 권력과 욕망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2016년과 2017년의 촛불혁명은 바로 이러한 공사 구별이 무너져가는 대한민국에 공공성을 찾기 위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공공성 회복, 즉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 바로 촛불정신이었다. 정권이 아니라 이권을 잡는 정치세력, 국가를 사랑방으로 만드는 정치세력, 기업을 자신의 소유물로 보는 총수들이 존재하는 나라, 공적 자리로 갑질하는 기득권이 활개치는 나라가 아니라 각기 자리에서 맡은 바 공적인 소임을 다하는 그런 전문적이고, 정직하고, 유능한 사람들의 나라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리라는 권력을 획득하여 사유화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리를 통해 제대로 일을 하려는 것이 목적인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우리는 그런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가? 공적 영역의 가장 큰 그릇인 국가에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맡은 바 소임과 책무를 다해야 할 큰 짐을 떠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가지면 사회는 혼돈의 소용돌이로 빨려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국가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이 아무리 우리 편이라도 공공의식이 부족하고 전문성이 모자라면 중요한 곳으로 가면 안된다. 나라가 망가지면 결국 우리 편도 망가진다.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공공의식과 전문성, 그리고 국가가 지향해야 할 공공성의 기준은 이전 정부와의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치를 놓고 절대평가를 해야 한다. 지금 공공성의 회복을 외친 촛불마저도 사유화하려는 세력이 보인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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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9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뇌물공여 등 사건에 대한 2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34억여원의 ‘말 3필’과 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금 16억여원을 뇌물로 판단했다. 뇌물의 출처가 삼성전자이므로 이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에 해당하고, 자금의 성격도 범죄수익이라고 봤다. 무엇보다 삼성그룹 차원의 조직적인 승계작업을 인정했다. “이 부회장이 강압에 못 이겨 돈을 준 것”이라며 말 3필 등에 대한 뇌물·횡령 혐의를 무죄로 보고, 승계작업은 없었다는 2심 재판이 잘못됐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정치권력과의 부도덕한 거래를 통해 재벌 승계작업을 유리하게 이끌려던 자본권력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국민 누구도 법 앞에 평등함을 보여준 판결인 것이다.   

국정농단 사건은 2016년 ‘비선실세’ 최순실씨(본명 최서원)의 국정개입 사실이 드러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으로 이어졌다. 이 부회장 등은 최씨 등을 위해 400여억원 상당의 뇌물을 제공하거나 약속한 사실이 드러나 기소됐다. 1심에서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으로 감형되면서 구속을 면했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2심도 파기하고 되돌려보냈다. 공직선거법상 공직자의 뇌물죄는 분리 선고해야 하는데 1·2심 재판부 모두 이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8월 30일 (출처:경향신문DB)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부정한 청탁은 대가관계가 인정되면 구체적으로 특정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이 사건에서 영재센터 지원금은 대통령 직무와 대가관계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부정한 청탁은 장래 발생될 것으로 예상되는 현안도 청탁의 내용이 될 수 있고, 묵시적 의사표시로도 인정된다”고 했다. 공직자에 대한 부정한 청탁에 대한 단죄의지를 분명히 한 것으로 당연한 판단이다. 삼성그룹이 이 부회장 승계작업이 없었다면 수십억원을 그냥 주고, 수백억원의 지원을 약속할 리 없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이 부회장의 뇌물액수는 90억원 가깝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파기환송심에서 횡령 액수가 50억원 이상 인정되면 이 부회장은 수감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뇌물로 자신과 기업에 유리하게 국가정책까지 바꾸려 했다는 점에서 그에 상응하는 법의 단죄는 당연하다. 그런데 삼성 측은 이날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도움과 성원을 부탁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 부회장과 삼성그룹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저지른 죄에 대해 응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국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법 앞의 진실이다. 이번 판결로 자칫 ‘재벌 봐주기’로 끝날 뻔했던 사건을 바로잡고, 사법정의도 세울 수 있게 됐다. 다시는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이 유착하는 불행한 사태가 반복되지 않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대법원 판결의 의미를 잘 살펴 법과 원칙, 논리와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국민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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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는 ‘과수원 집’이란 택호를 여전히 쓴다. 1960~70년대에도 ‘특작’이라 우대받으며 돈 좀 만지는 농사는 과수와 축산이었다. 그래서 과수원 집 아들, 딸들은 주머니에 철전이라도 넣고 군것질 좀 할 수 있는 동네 부자의 대명사이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해살이 과채보다 과수의 경우 첫 수확에 걸리는 시간도 5년 안팎으로 길고, 기술의 숙련도도 축적돼야 하고, 저장시설 등을 갖추는 등 자본이 많이 투하되는 농업이다.

올해 전국 과수농가들이 마음을 잔뜩 졸였다. 아니 2015년부터 긴장 상태다. ‘과수화상병’이라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사과 주산지인 충주와 제천 등지에서 발생하고 아직도 중부지역에 발생하고 있어서다. 말 그대로 과일나무가 화상을 입듯이 타들어간다는 이 병은 2015년 안성의 배 농가에서 처음 발생하고 올해 177농가가 확진 판정을 받았다. 사과, 배 등 장미과 식물에 발생하는 병이다. 확산이 빠른 데다 치료법도 없어 치명적이다. 확진 판정을 받으면 반경 100m 내외 과수화상병 기주식물은 매몰해야 한다. 게다가 3년간 그 땅에서 기주식물은 심을 수 없다. 그런데 그 기주식물들에 사과, 배, 복숭아, 자두, 딸기까지 포함된다. 폐원 3년 뒤 그 자리에 묘목을 심어 수확하려면 최소 4~5년이 더 보태지므로 7~8년간 농가의 생계는 정지다.

이는 우리를 경악시켰던 구제역의 살처분 풍경과 매우 흡사하다. 오죽하면 ‘과수 구제역’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구제역은 백신이라도 있지만 과수화상병은 그것마저 없으니 ‘과수 아프리카돼지열병’쯤 될 것이다. 다만 가축들은 비명을 지르고 과일나무들은 비명 없이 땅에 묻힌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과수 농민들에게는 나무를 매몰하는 장면이 살풍경이지만 도시인들에게는 큰 충격을 던져주진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안 먹어도 큰일 안 나는 과일이라 여겨서일지도 모르겠다. ‘디저트’로 분류되는 과일은 굳이 국내산 생과일이 아니어도 대체품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그동안 농촌진흥청에서도 예찰과 방제에 대한 농가 교육을 해왔다.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면서 바이러스를 옮기는 것으로 판단해 ‘소독철저’와 ‘신고철저’라는 아주 기본적인 매뉴얼을 수립했지만, 정작 농민들이 궁금한 건 방제약이 효과가 검증됐느냐다. 검증을 하려면 실험을 해야 하고 그건 예산과 인력의 문제다. 그리고 늘 부족한 것이니 핑계로는 영 궁색하다. 예산을 확보하는 것도 결국 기관의 의지 아닌가. 여하튼 과수화상병 피해규모가 커지자 2015년 첫 발생 이후 올해 들어 예산을 확보하고 약제 실험과 예측모형 및 저항성 품종 개발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늦었지만 부디 꼭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

얼마 전 충주에서 발생한 과수화상병의 역학조사 결과가 나왔다. 작년 과수화상으로 폐원한 뒤, 다른 과수원을 빌려 사과 농사를 짓던 한 농가의 이동경로를 지목했다. 가급적 내부 인력으로만 깨끗이 소독된 작업도구와 장갑을 쓰면서 일하라 하지만 고된 과수원 일은 이주노동자들의 조직적인 계절노동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하나 마나 한 소리다. 곤충과 바람으로도 전염된다는 과수화상병의 다양한 원인들 속에서 남는 것은 자나 깨나 농민들이 알아서 조심하라는 것뿐이다. 때 이른 추석이라 덜 여문 과일들이라도 쏟아져 나온다. 추석 명절 하나 바라보고 달려왔을 폐원 농민들은 이 장면이 부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에겐 디저트여도 농민들에겐 생존 자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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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후보자는 법무부 장관이 되어서는 안된다. 제기된 의혹과 관련 증거들이 보여주는 심각한 도덕적, 법적 흠결 때문이고, 이러한 흠결을 지닌 장관은 검찰개혁의 기수가 아닌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다. 

많은 국민들의 눈에는 명확한데 여권 및 진보 진영 주류의 시각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거대한 혼돈에 빠져 있는 듯 보이거나, 진영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마지못해 발언하고 움직이는 듯한 이들도 있는 것 같다. 물론 진심으로 적극적인 옹호를 펼치는 이들도 있다. 거악에 맞서기 위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판단이 그 배경에 깔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국 후보자의 흠결이 정도를 넘어섰다고 보는 이들의 시선에선, 국민의 눈높이를 따라가기에 한참 모자란 억지 논리로, 그간 자신들이 내세운 가치들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 걸로 보인다. 

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청와대 민정수석 때인 지난달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 임명 수여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웃으며 걸어가고 있다(왼쪽 사진). 조 후보자는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 이튿날인 28일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종로구 적선현대빌딩으로 출근하며 굳은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김기남 기자doolee@kyunghyang.com

조국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은 진보의 역사에 있어 거대한 분수령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사태의 역사적 의미를 겸허하게 돌아보며 과감하게 구습을 넘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지금처럼 정치 및 진영 논리에 따라 대충 넘어가느냐에 따라 진보의 미래는 비상할 수도, 몰락할 수도 있다. 

‘조국 논란’은 한국 진보의 역사에서 세 번째 단계의 출발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진보는 첫 단계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이로써 민주, 자유, 평등, 정의, 인권의 보편 가치를 일깨웠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민주화 운동 외에는 무능하다는 비판을 딛고 경제를 비롯한 국가 경영의 모든 일에서도 유능할 수 있는 진보임을 확인시켰다. 

그렇다면 다가올 세 번째 단계에서 진보는 어떤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까? 진보 세력에 잠재됐던 문제가 응축돼 표출된 이번 사태를 보면 답이 나온다. 그것은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 개개인에게 내재된 욕망의 섬세한 이해 및 관리 문제다. 

앞의 두 단계에서 진보는 보편 가치를 구현하는 역사를 주로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만들어가는 데 관심을 갖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여기에 방점을 두다 보니 개인의 내면 및 의식의 문제는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방치했다. 외부로 주창하는 보편적 가치와 개인의 내밀한 욕망이 서로 충돌할 경우 그 충돌을 인지하는 감각도 약할 뿐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후자 편에 서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내면의 욕망을 철저히 이해하고 관리하는 일은 자기 수행의 문제이기도 하다.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 중 일부는 이런 얘기를 접하면 문제는 사회 구조에 있을 뿐이고 개인 의식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그런 도학적 군자 같은 얘기는 그만하라며 내치곤 한다. 그러는 사이 갈등과 모순이 쌓이고,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위선은 진보를 향한 보수 세력의 비판적 구호이기도 한데, 이를 단지 반대 진영의 비난이라고 가볍게 치부할 일이 아니다. 진보가 두 번째 발전 단계에서 무능하다는 보수의 비판을 딛고 일어섰듯이, 세 번째 단계의 진보는 위선이라는 비판을 뼈저리게 돌아보며 이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진보를 자처하는 개개인의 내면 세계를 존재적 차원에서, 보편 가치의 차원에서 돌아보고 관리하는 힘을 기르는 일에 달려 있다. 이제 정치적 삶의 중심에 구도적인 수행을 놓는 진보가 필요한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진보가 이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국민의 신뢰 밖으로 밀려나며 급격히 힘을 잃을 것이다. 이 단계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 ‘조국 논란’을, 진보의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구도에서 냉철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나라가 잘되려면 건강한 보수와 건강한 진보가 양 날개로 서야 한다. 건강하고 균형 잡힌 보수 세력의 안착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은 현 상황에서, 진보에 대한 희망마저 꺾일까 두렵다.

<황금중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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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2014년 9월부터 이달까지 돈을 주고 서울대 단과대 학생회장을 지낸 사람을 정보원 삼아 수십명의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5년 가까이 그의 보고서에 담긴 사람들은 과거 같은 학생운동조직에 있었던 교수·변호사·기자·노무사·영업사원·농민·시민단체 인사였다. 사찰 정황과 증거 물품도 함께 제시됐다. 사실로 밝혀지면, 민간인 사찰을 끊었다는 문재인 정부 국정원의 다짐과 약속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이다.

국정원에서 ‘김대표’로 불렸다는 정보원의 폭로는 구체적이다. 그는 언론에 “운동권 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해 알려주면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국정원 경기지부 공안2팀의 ‘사업’ 제안을 받고 응했다고 밝혔다. 매달 기본급 200만원, 보고서 작성 때나 시민단체에서 간부 승격 시 50만~300만원의 성과급까지 줬다고 했다. 녹음 장비가 숨겨진 가방을 국정원이 줬다며 직접 공개했고, 시민단체 활동가와 같이 살라고 얻어준 방엔 ‘몰래카메라’도 설치됐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민간인을 매수해 정보를 수집한 명백한 범죄행위다. 국정원은 자발적 협조자를 증거수집에 활용한 것은 직권남용이 아니라고 밝혔다. 정보원은 “국정원 사람들이 ‘정권이 바뀌어도 우리 할 일은 한다’고 독려했고, 그만두려 할 때마다 돈으로 회유했다”고 반박했다. 정보원이 검찰에 고발할 뜻을 비쳤으니 시시비비를 분명히 밝히고, 사실이라면 돌출행동인지, 어디까지 보고·지시가 이뤄졌는지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보기관의 ‘사찰 DNA’는 시민들의 불신이 깊다. 그 악몽이 촛불혁명으로 출범한 정부에서 튀어나온 충격은 더 말할 게 없다. 국정원도, 국회 정보위도 진상조사에 머뭇거림이 없어야 한다. 국정원이 2년 전 국내 정보수집 부서를 폐지했지만, ‘보안정보’를 명분 삼는 정보수집이 부활할 소지는 상존했다. 그 분기점이 될 국정원 개혁법안들은 2년째 국회에 계류돼 있다. 정보수집 활동에 대한 국회·사법 통제 장치 논의도 다시 고삐를 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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