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지난해 5월 29일 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조사를 읽고 있다.





노무현 전대통령 묘소에 60대 남성이 분뇨를 투척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노 전대통령 국민장의 공동장의위원장을 맡았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이 사건을 바라보며 공식 홈페이지 <한명숙의 세상이야기>에 참담한 마음을 담은 글을 실었습니다.

전문을 옮겨옵니다. 원문은 http://v.daum.net/link/11282675 에 실려 있습니다.



아무리 모진 시절이지만 어떻게 또 이런 일이
노무현 대통령님 묘역에서 자행된 만행을 전해 들으며 제 귀를 막고 싶었습니다.
살아 생전 지켜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이 아직도 사무치는데

가슴 저미는 아픔에 말문이 막히고치미는 울분에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슬픔과 분노로 속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께선 어떻게 하셨을까


한명숙 지키자 카페에 어떤 회원이 올린 글에서 저는 대통령님의 뜻을 읽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 모르는 그 사람 우리가 욕하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도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께선 어쩌면 허허 웃으시며 그 사람을 용서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승에 남은 저희에겐 여전히 씻지 못할 회한과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지난 해 9월엔 김대중 대통령님 묘역이 능욕을 당했습니다.

그 분께 평생 빨갱이이라는 굴레를 씌웠던 보수단체가 영면의 자리인 묘까지 파헤치는
소위 부관참시의 퍼포먼스의 만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묘역의 잔디에 불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범죄를 막고 엄벌해야 할 공권력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처했습니다.


이쯤 되면 사람과 단체만을 탓할 문제가 아닙니다
전직 대통령의 묘역에 이러한 모욕적 만행이 이 정권에서 왜 자꾸 반복될까요?
 


정부는 지난 해 노무현 대통령 묘지와 주변을 제1호 국가보존묘지로 지정했습니다
전직 국가 원수 묘역의 위상에 걸맞게 역사적 문화적으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그럴듯한 얘기도 곁들였습니다

그러나 허울뿐인 말장난이었습니다
묘역 관리 비용도 없고 경비를 위한 경찰 인력도 배치하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G-20을 성공적으로 치러 국격이 높아진 만큼 내부적으로도 품격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며 
후속조치를 지시했다고 합니다.


전임 두 대통령의 묘역이 훼손되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대낮에 버젓이 저질러지는 
참담한 상황에서 나라의 품격을 높이겠다는 말이 공허하기만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생전에도 지켜드리지 못했는데 가신 후에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겠습니다 


2010 11월 15    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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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휘 (사)씨즈 청년네트워크사업단 단장·노리단 단장 whee212@theseeds.asia



1. 청년들은 간절하게 일하고 싶고 열심히 노력한다.
2. 그러나 사회구조상 청년들이 점점 더 일할 수 없게 되어 간다.
3. 해서 청년들은 아예 일을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한국의 청년실업 문제는 이 삼단 논법을 왔다갔다 한다. 이것이 고착 조짐을 보이면서 신빈곤, 워킹푸어, 니트족 등 여러 설명이 뒤따른다. 문제는 이러다가 청년들이 정말 일하기 싫어하는 상태로 들어가면 일을 포기하고 안드로메다의 세계로 망명하거나 또는 분해서 국가와 기성세대에 죽기살기로 대들다가 파국으로 가는 것이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문제는 현상만 보면 기존의 괜찮은 일자리는 계속 줄고 마음을 끄는 새 일자리는 안 보여서다. 

청년들은 아직까지는 할 수 없이 열심히 공부하며 바늘구멍 같은 확률에도 열정을 다 쏟고 있다. 청년들의 스펙 쌓기와 고시촌 쪽방생활은 절제와 인내로 점철된 그야말로 눈물겨운 몸짓이다. 어느 선배들도 이렇게 극기의 청춘을 보낸 적이 없을 것이다. 이를 향해 보수는 눈높이를 낮추라 하고 진보는 저항하라 하지만 양자 모두 청년들의 기만 죽이거나 화만 돋울 뿐이다.

사회구조로 접근하면 청년실업 문제는 한국 경제를 ‘고용 있는 성장’으로 바꿔야 해결되며 노동, 복지, 교육의 삼박자 정책이 분명하게 뒷받침되어야 한다. 해서 청년의무고용제, 생애 첫 자금, 기본소득, 혁신학교 등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위해 필요조건처럼 청년들이 먼저 헌신을 보이라고 주문하는 것은 악순환이며 시간만 끄는 책임 회피다. 창의교육 한다면서 아이들의 잠재된 창의성까지 고갈시키는 제도와 관행과 의식의 모순을 어른들 스스로 먼저 끊지 않으면서 아이들이 못한다고 탓하는 꼴이다.




정말 걱정할 점은 이렇게 지지부진하는 동안 청년들이 영혼마저 쪼그라들어 사회적 존재로서 데뷔도 하기 전에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청년 사회적기업가 정신의 부흥에 주목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물론 청년 사회적기업가 만명이 양성돼도 한국 사회의 구조는 꿈쩍도 안할지 모르고 청년 다수의 실업양상 역시 꿈틀도 안할지 모른다.
그러나 청년 사회적기업가가 백명, 천명, 만명으로 계속 늘어나면 같은 자리를 맴돌며 망연자실 고군분투하는 청년들 사이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촉진하는 신호가 생길 수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지난 10월27일 고용노동부 주최의 ‘청년 사회적기업가 육성을 위한 대토론회’에 갔었다. 여기서 나는 청년 사회적기업가 정신의 해외 사례로 티치 포 아메리카(미국), 유쓰 스타 캄보디아(캄보디아), 테캄파니에(독일), 카사(인도) 등을 꼽았다.
국내에선 노리단, 오가니제이션 요리, 함께일하는세상(경기), 이음(전주), 원주의료생협(원주) 등을 말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상식을 깨뜨리는 발상으로 다들 미쳤다고 할 때 도전을 시작했고 사회적기업에 대한 표준 개념을 벗어나 자기만의 실체를 만들어간다는 점이다.


사회적기업이란 사회와 경제에 대한 각각의 새로운 상상력이 수많은 조합을 실험하면서 다양성의 생태계를 만들어가야 성공하는 법이다. 이 상상은 현 사회적기업육성법의 규정 안에 갇혀서는 나올 수 없다.
또한 기존의 전통적인 복지 분야 뿐 아니라 지식창조, 문화예술, 기술기반, 환경농업, 뉴미디어와 소셜네트워크의 여러 영역에서 새로운 실험들과 만나야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사회적기업의 모델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나는 청년 사회적기업가 정신의 부흥에서 기대한다.


그 영향력은 이를테면 연매출 100억원 이상의 강소 사회적기업 수십개가 등장해 연대하는 모습일 수도 있고 연매출 1000억원 이상의 스타 사회적기업들이 본보기처럼 여럿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청년 또래만이 아니고 여러 세대가 상호주의 문화로 함께 일하는 새로운 기업문화의 대안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변화의 풍경이 한국이라는 화폭 전체에선 여전히 일각일지라도 그것은 대기업의 조직문화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대기업 채용담당자 입에서 ‘요즘 젊은 인재는 사회적기업으로 간다’는 너스레가 나올 정도는 되어야 한국 사회에서 뭐가 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입장에서 청년 사회적기업가 양성 과정에 시민사회, 대학, 기업, 정부 모두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청년들 스스로 실험하고 실패하고 재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벤처정신은 도전의 극단적 실행이지만 도움을 주는 처지에선 실패에 투자하는 정신이다.  실패를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청년들은 반드시 큰다.

둘째는 지속적인 창업자금의 조성과 순환적 흐름이다.
단기성 자금을 갖고는 알리바이만 만들고 끝난다. 청년 사회적기업가의 양성이 최종 1등을 가리는 게임이 아니라면 빨리 실패해보고 빨리 회복해 다시 도전하게 견인하는 창업자금의 크기와 쓰임새가 중요하다.


끝으로 국내외와 다세대의 네트워크 환경에 청년들이 놓여야 한다.
빌 게이츠는 당신이 내게 사업계획서를 보여줄 때면 이미 늦었다고 말했다. 망하는 지름길은 같은 대학, 같은 학과, 같은 나이끼리 창업하는 것이다. 다양한 자극과 다양한 도움의 손길이 쉽게 겹칠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수적이다.
이 원형이 마을이며 최근 유럽과 북미에서 번지는 허브 개념이자 예술계에서 거론되는 제4의 공간이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을 가지는 순간부터 창업은 성공을 향한 첫 문턱을 넘어서게 된다.


청년 사회적기업가의 길은 청년들이 간절히 일하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고 열심히 공부하는 자세가 살아있는 지금 더 늦기 전에 그 욕구의 호흡과 공부의 방향을 바꾸는 파랑새가 될 수 있다.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옆도 바라보고 뒤도 돌아보며 서로 등을 보여주며 업힐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그렇게 서로 등을 맞대고 사방팔방으로 다양한 삶의 길을 내다보며 자기 인생의 창업자이자 경영자가 되는 청년 사회적기업가
의 모습에서 많은 청년들이 기분 좋은 영감을 얻을 것이다.

청년 사회적기업가 만명도 너무 많은지 모른다. 천명만 있어도, 백명만 있어도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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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주요 20개국(G20) 회의가 다가오면서 정부도 홍보에 열을 올리는 것 같다. 한국이 이런 세계적 회의를 의장국 자격으로 주최함으로써 국제적인 위상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는 투이다.
솔직히 한국에 대한 세계의 시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공사판이었던 서울 시내 곳곳이 더 심란하게 파헤쳐지고, 교통체증을 겪어야 했던 것은 확실하다.


앞으로 새롭게 재편될 세계체제에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사 진행에 급급해서 정신이 없는 것인지, 한국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나 전망은 눈에 띄지 않는다.
실제로 한국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목도하는 국제정세의 변화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역량을 과연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여전히 한국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충직한 ‘푸들’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정부나 정치인에게만 해당사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나 지식인집단에도 던져 봐야할 사안이다.

최근 관심을 끌었던 노벨문학상을 사례로 문제점을 한번 짚어보자.


고은 시인이 거듭 수상 기회를 놓치는 것도 ‘역량 부족’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일각에서 냉소적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노벨문학상은 단순하게 특정 개인의 문학에 대한 예술적 평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은 시인.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금까지 역대 수상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상은 문학적 성취보다도 항상 정치적인 쟁점을 평가의 중심에 놓았다. 노벨문학상을 받는 순간, 특정 지역이나 민족의 문제는 ‘보편적인 것’으로 세계의 관심사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근대문학이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결정적 매개체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런 노벨문학상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한국이 아쉽게 노벨문학상에서 멀어진 까닭 중 하나엔 동북아를 중심으로 한 국제정세도 한몫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한국의 문학이 과연 동북아에서 중요한 쟁점을 형성하고 있는 문제들에 적절하게 개입했는지를 자문한다면 대답이 궁색해지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문인들을 비롯한 한국의 지식인들은 협소한 남북관계에 매몰된 나머지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미·일갈등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하토야마 내각을 길들이기 위해 오바마 정부가 한국의 천안함 사건을 어떻게 이용했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짚어내는 언론들도 거의 없었다.


보수언론들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강력한 적’으로 북한을 분칠함으로써 하토야마 내각을 압박해서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리고자 했던 오바마 정부의 계획을 도왔다.



일본 오키나와현 후텐마의 미군 비행장. 사진 www.walrus.com



덕분에 한국은 오바마 정부로부터 일본보다 더 우선권을 부여해야할 나라라는 칭찬을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현재의 동북아 정세에서 일본보다 더 충실하게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국가로 주변국들에 비치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과연 이런 이미지가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중국의 입지가 부상하는 이 시점에 장기적으로 한국에 이득을 줄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여하튼 사정이 이러하니, G20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것 자체를 두고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고 마냥 자랑만 늘어놓을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남에게 보여주는 것보다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더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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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숙명여대 석좌교수



‘공짜’ 지하철을 타게 되면서 여러 가지를 느낀다. 

무엇보다 감사하는 마음이다. 나라가 있으니 생전에 이런 대접을 받게 되는구나, 그러면서 노인을 배려하는 이런 따뜻한 복지가 계속되자면 나라 살림에 주름살이 없어야겠다고 기도한다. 미안하게 생각하는 때도 없지 않다. 아직은 여유가 있는데 대접을 그대로 받는 것이 염치없는 짓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지하철의 노약자 보호석 주변의 수많은 노인들을 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 때는 이 늙은 것들이 다음 세대에 짐이 되어서는 안되는데 하는 생각도 한다. 

신임 김 총리가 작심한 듯, 현행복지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노인들의 공짜표도 언급했다. 그는 “약자라고 무조건 봐주지는 말아야 한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가 혜택받는 보편적 복지에 반대한다”고 하면서 지하철이 적자를 면치 못하는데 65세 이상이라고 무조건 공짜 표를 주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그는 노령수당도 문제삼았다. 그의 말은 법과 원칙에 따라 사회적 약자를 돌봐주는 복지여야 하고, 정작 필요한 사람은 도와주되 부자들에게는 혜택을 줄여야 한다는 의미의 복지를 언급했다. 





그의 발언의 의도는 수긍 못할 내용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동안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한 정치인들에 비하면 꽤 용기있는 말이다. 
그의 발언에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먼저 따지는 약삭빠름이 안 보였고, 청문회 때의 자신을 향해 가졌을 국민의 부정적인 의식도 개의치 않았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은 그의 발언은 이 나라 공직자들의 귀감이 될 만했다. 그런 소신에 존경심까지 생긴다. 





총리의 발언이 돌출적인 것이 아니고 또 개인적인 소신을 밝힌 것이 아니라면, 발언에 앞서 더 숙고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있다. 발언 후 시중 여론에는 수십조에 이르는 부자감세를 그대로 둔 채 행한 그의 발언이 과연 균형잡힌 것인가 하는 반응이 있었다. 
노령수당을 시비하기 전에 공무원 월봉에 복지수당이 필요한 이유도 숙고해야 했다. 총리의 말이 아니더라도 지하철 혜택을 못받는 농어촌에 더 큰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한편 지하철의 적자문제와 관련, 이런 생각도 했다. 듣건대 서울지하철에는 노인의 공짜표로 연간 2천억원이 넘는 적자가 난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거금은 부가적 효과를 유발하지 않는가. 아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보다 몇 배의 경제적 효과를 내고 있다. 몇년 전 공짜표를 걱정하는 고위공직자에게, 그 액수가 엄청나다 하더라도 노인들을 뒷방살이 시켜 스트레스 등으로 생길 사회적 비용에 비교하면 훨씬 적을 것이라고 했다. 
무슨 말이냐고 뜨아해 하기에 이렇게 말했다. 공짜표는 노인들을 지하철로 가게 했고 건강을 유지하게 했다. 노인들이 집에 틀어박혀 있음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족간의 갈등까지 고려하면 공짜표는 그런 갈등을 예방하는 효과도 유발했다. 
노인의 외출은 가족간의 마찰을 줄였고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엄청나게 줄였다. 이것은 몇 천억원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효과다. 이를 알았기 때문일까, 부모를 모신 서울시의 한 간부는 지하철이야말로 일등효자라고 성언했다.  

여기서 지하철 공짜표가 한국의 노인복지의 수준이나 한국 복지의 현주소, 한국의 높아진 국격을 의미한다는 말은 불필요하다. 지금의 민주화와 산업화가 지하철 공짜표 세대가 피땀흘린 대가라는 속보이는 말도 하지 않겠다. 
다만 경제적 이해득실로 봐서라도 지하철 공짜표에 투입되는 재정 효과만한 투자가 있는지를 묻고 싶다. 휙휙 표를 내던지듯이 하던 매표구 직원의 무례한 행동으로 자존심 상했던 시절, 이왕 노인들에게 무료권을 주려면 자존심을 살려달라는 건의를 받아 시니어카드를 도입한 배려에 고마워했던 심정이 총리의 ‘사리분명한’ 발언으로 공짜표 승차가 더 수치감을 느끼게 될까 우려한다. 

개인적으로 외출할 때마다 승용차를 이용하느냐, 지하철을 이용하느냐 고민한다. 그러나 승용차 유혹을 뿌리치고 교통체증과 대기오염이라도 줄여줄 수 있다면 그 또한 늙은이로서의 사회봉사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곤 한다. 

총리의 소신에 따라 지하철 공짜표에 변동이 생긴다면 혹시라도 노인들의 스트레스가 늘어나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고 교통체증, 대기오염이 더 심화되지 않을까 염려도 해 본다.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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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0일은 북한 노동당 창건 65돌이 되는 날이다. 2010년의 북한은 남북관계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지난 4년여 동안 바깥나들이가 없었던 김정일 위원장이 건강 악화설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5월과 8월 중국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8월 방중 때에는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을 초청해 놓고 정작 본인은 중국 방문 길에 나서는 계산된 행동으로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일 년에 한 번 열던 최고인민회의도 4월과 6월 두 차례 개최되었다. 그리고 지난 9월에는 44년 만에 당대표자회의를 열었다. 1980년 6차 당 대회 이후 최대 규모의 회의였다. 이렇게 2010년 한 해내내 북한 내부는 매우 긴박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서 우리는 북한이 일관되게 두 가지 현실적 과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가 북한 체제의 안정화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악화와 만성적 경제난 등으로 흔들리는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동안 선군정치 하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왔던 주민들과의 스킨십을 강화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원래 이 일이 본업이었던 당의 기능을 정상화하려는 것이다.
당대표자회를 통해 김정은의 후계자 지위를 공식화하는 것을 포함하여 북한 노동당의 지도부를 전면 쇄신, 재정비한 것이 그것이다. 선군정치 10여년에 피폐해진 민심을 결집해 나가기 위해서는 당이 전면에 나서서 본래의 역할을 다하는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김정일 통치의 근간인 선군정치를 포기할 수는 없다. 당을 통해 선군정치를 구현하는 과도기간이 설정된 것이다.
김정은이 당과 기존의 선군정치의 양 측면에서 모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은 것도 이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앞으로 후계자로서의 권한과 역할을 계속 늘려 나갈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둘째는 북미관계 정상화로 압축되는 체제 생존에 적합한 대외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번 당대표자회에서는 김정일의 당 총비서 추대를 비롯하여 당규약 개정과 당중앙 지도기관 선출이 의제였다고 발표한 것으로 미루어 당대표자회의 기능 중의 하나인 당의 노선과 정책과 전략에 대해서는 토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 규약의 개정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당의 최종목표에서 삭제함으로써 일부 국제사회의 조류와 그동안 남측의 요구를 수용한 흔적을 남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미 김정일 위원장의 두 차례 중국방문을 통해 북한의 입장이나 향후 노선이 중국에 전달되었고 중국을 통해 미국에도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 정부에도 직간접적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현 단계에서 주목되는 것은 북한이 대남 대화공세를 적극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9월 초 대승호 억류선원 석방에 이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실무접촉, 남북군사실무회담,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한 실무회담 등을 북한이 먼저 제의하였다.
북한이 이 시점에 남북대화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북미대화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북미대화를 위해서는 남북대화의 진전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사실 미국 정부도 그동안 북미대화를 위해서는 남북대화의 진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최근 미 국무부는 천안함 국면이 지루하게 지속되면서 핵문제 해결이 미궁에 빠지고 있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클린턴장관의 지시로 대북정책에 대한 '신선한 대안(fresh options)'들을 점검해 왔다. 여기에는 과거에 검토되지 않은 다른 대안들도 토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내의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김정일 위원장은 창춘에서 열린 후진타오 주석과의 회담에서 “중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한 6자회담의 조속 재개를 희망”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견지한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북한이 북미대화 재개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는 신호를 미국에 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지난 달 서울을 방문한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외교부 고위관리와 면담을 끝낸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과 멀지 않은 시점에 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였다. 더욱이 북한에서 당대표자회를 통해 당 체제를 정비하고 후계자를 공식화하는 등 새로운 체제의 출범은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의 새로운 지도체제와의 대화 필요성을 자극하고 있다.
미국은 새롭게 면모를 갖춘 북한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북한이 중국에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을 그냥 나 몰라라 내버려 두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북한은 당 창건 65돌을 맞아 그동안 물밑에 진행해 왔던 후계체제를 공식화함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지만 이는 북한 내부의 일로 간주되고 기정사실화될 것이다. 오히려 북한은 스스로 김정일 이후에 대비하고 있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국제사회를 향해 체제 안정성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이다.
아울러 북한은 현재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한데 묶는 3대연합을 유일한 대안으로 합리화하려 할 것이다. 당 창건 65돌 행사를 계기로 이를 노골화하고 있다.
북한은 2010년을 전환의 시점으로 기록하려할 것이다. 내부적으로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식화한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이 1998년 국방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내세운 선군정치의 목표였던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자신의 주도하에 마무리 짓고자 할 것이다. 대미관계 개선을 위해 정면 돌파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남북대화로 여건을 조성하면서 북미대화를 적극 추진 할 것이다.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핵능력 강화를 통해서라도 대화의 여건을 조성할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중국의 중재 역할을 요청할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협력이 용이한 후진타오 주석의 재임 기간 에 이를 마무리하고자 할 것이다. 김정은으로의 후계체제도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통해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 정부의 대응 전략이다. 북한과 국제정세의 흐름을 치밀하게 읽고 큰 틀에서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신선한 대안’은 정작 우리가 모색해 나가야 할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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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5형제의 막내”라는 대답을 자연스럽게 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6형제였다. 맨 위 큰형은 필자가 어렸을 때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일이니까 필자 나이 일곱 살쯤 되었을까.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던 어느 날 큰형은 대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고 곧바로 수돗가 앞에 쓰러졌다. 입가에서는 거품이 끊이지 않고 흘러 나왔는데, 그렇게 농약 마시고 죽는 것으로 뭔가에 항의하고 싶었겠지만, 어린 나이 때문이었는지 필자는 눈앞에서 목격한 큰형의 죽음에 대해 그 어떤 비극성이나 두려움을 느꼈던 기억이 없다.

오래도록 나를 슬프게 한 기억이 있다면, 관을 묻는 것을 함께 지켜보던 셋째형의 긴 울먹임이었다. 그렇게 죽은 큰형은 나머지 5형제와 배가 달랐다. 큰형의 어머니는 한국전쟁 끄트머리에 아들 하나를 낳고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새엄마와 동생들 때문에 큰형의 삶이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누구보다도 엄마는 큰형을 감쌌고 동생들도 큰형을 따랐다. 큰형이 죽음을 선택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큰형은, 떡방앗간을 운영하는 일로 가정경제를 책임졌던 엄마를 돕기위해 우리 집 식모로 들어온 한 여성을 좋아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

남북 화해 공존 불가역적 흐름

그걸 반대한 것은 할아버지·할머니였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두 분이 가진 낡은 생각 때문이었다.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할아버지가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양반 가문의 혈통을 잇고 있다는 것, 전통 교육을 받아 한문에 능했다는 것뿐이었다.
무능한 남편을 만난 할머니 역시 양반 가문에 시집왔다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두 분은 자신들의 초라한 삶에 대한 보상을 과거 시대에나 어울리는 위신과 혈통에 매달려 찾으려 했는데, 그것이 가져온 비극은 당시 우리 가족에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큰형 몫이 되고 말았다.
결혼을 그렇게 결사반대만 안 했어도 큰형은 물론 다른 사람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큰 형이 떠오를 때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생각이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멀어지는 남북 국방부가 대북심리전 재개를 결정한 가운데 지난 5월 24일 중동부전선 GOP장병들이 확성기를 점검하고 있다(왼쪽). 북에서 추방된 금강산 민간업체 직원들이 4월2일 귀환하고 있다(가운데). 지난 6월 2일 판문각에서 북한 병사가 남측 지역을 경계하고 있다(오른쪽). | 연합뉴스·경향신문자료사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낡은 생각 때문에 상처받고 희생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새로이 진취적인 미래를 개척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에서는 그게 쉽지 않은 일 같다. 공동체의 안정과 평화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제대로 된 보수파라면, 민주화와 탈냉전이 가져온 여러 불가역적인 변화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보수의 미덕은 바로 그런 것이다. 따라서 돌이키기 어려운 변화를 돌이키려 하면서 치러야 하는 갈등의 비용이 얼마나 큰지를 보수파 정권 아래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북한이 식량난 해소와 수해 복구를 위해 도움을 요청한 사실을 통일부가 밝히길 꺼려 며칠간 감추고 있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아마도 그것은 남쪽의 식량 지원이 북한군의 군량미를 늘려줄 뿐이라며 모든 문제를 낡은 이념의 틀로 보는 잘못된 신념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평화협력 기여 때 보수 인정받아

그렇지 않고는 윤리적으로 비난받고 현실적으로도 얻을 게 없는 그 어리석은 일을 하는 데 며칠간 고집을 세울 수가 있었을까.
필자는 세계적 차원의 탈냉전과 그에 병행하는 남북한의 화해 공존은, 글로벌한 차원에서 불가역적 흐름이자 동아시아 평화체제를 위한 기본 과제이며 동시에 우리 안에서도 이미 강력한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았다고 본다.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했고 어느 정도 사회 다수가 동의하고 있는 민주적 성취와 대북정책의 성과를 인정하는 위에서도 얼마든지 보수적 길을 확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때, 보수파 정권은 사회 평화와 통합에 기여하는 독자적인 업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본다.

보수가 진보를 이기는 방법은 남북한 화해 협력과 평화 공존에 더 유능한 성과를 보일 때이지 다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보수도 인정받고 그것의 좋은 효과로 진보도 건강하게 성장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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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트의 원문은 `한명숙의 세상이야기'(http://www.hanms.net/)'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원문보기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오후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지법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1.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 대한 검찰의 부당한 표적수사가 2009년 11월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7개월이 넘는 기간 검찰은 피의사실 공표와 언론 플레이를 되풀이 하며 전 정부의 국무총리에 대한 흠집내기에 몰두해 왔습니다. 공대위는 그동안 검찰의 이런 불법, 부당한 수사방식을 결코 인정할 수 없음을 거듭 분명하게 밝혀왔습니다.


2.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의 오락가락하는 코미디 같은 진술로 범벅된 뇌물수수혐의에 대한 무죄판결이 채 선고되기도 전에, 검찰은 다시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정치자금법위반이라는 혐의를 언론에 흘리는 방법으로 무죄판결의 의미를 깍아내렸고, 정치자금법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기소 전 증인 신문이라는 또 하나의 편법적 방식으로 한 전총리의 여동생을 법정에 세워서 조사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3. 검찰이 기소전 증인신문의 대상으로 신청한 사람은 한 전총리의 여동생입니다. 피의자의 친족은 형사소송법에 따라 법정에서 증언을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검찰은 피의자의 친족이 자발적으로 협력하지 않는 이상 그 진술을 강제할 수 없으며 친족의 증언 외에 다른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인 증거들을 찾아내어 기소여부를 결정하여야 합니다.


4. 그럼에도 검찰이 비록 절차상 적법성의 모양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여동생의 증언을 보고 기소 방향을 정하겠다고 하면서 법원에 기소 전 신문을 신청한 것은 결국 검찰 스스로 혐의를 입증할 아무런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여전히 정치자금법 수사가 한총리에 대한 정치적 의도 하에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5. 한명숙 전 총리는 지난 4월9일 무죄판결을 받은 때와 똑같이 이번 사건에서도 결백합니다. 여동생과 관련해 검찰이 불법적으로 언론에 흘리고 있는 내용 또한 허위입니다. 한명숙 총리와 여동생은 검찰이 기소를 결정해 정식 재판이 이루어지고, 법정에서 진술이 필요하다고 재판부가 판단할 경우 사실 그대로를 진술해 진실을 밝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기소전 증인신문이라는 방식을 통한 모욕주기, 흠집내기 수사에는 결코 응할 수 없습니다.


6. 공대위는 검찰이 이번 사건이 보복, 표적수사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수사를 중단할 것을 촉구해 왔습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낄 때 그만두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책입니다. 그러나 검찰은 확실한 증거가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면서까지 증언거부권이 있는 친족에 대해 기소전 신문이라는 방식을 통해 압박을 가하면서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리한 수사방식은 당장에 중단되어야 합니다.


7. 공대위는 지난 4월 9일처럼 다시금 검찰이 국민들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증거가 있으면 기소해서 법원의 판단을 구하면 되는 것이고, 증거가 없다면 한 전총리와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수사를 중단하기 바랍니다. 

2010. 7.12.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이명박정권·검찰·수구언론의
정치공작분쇄 및 정치검찰 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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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정치 현상을 묘사하는 말에는 민주적 가치와 충돌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표현들이 가끔 있다. ‘독대’라는 용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는 사라질 법도 한데 여전히 자주 접하게 된다. 최근에는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 가릴 것 없이 “정 총리, 이 대통령과 독대”라는 표현이 모든 매체의 표제어로 사용되었다.
 
제1야당인 민주당 원내대표도 국회 교섭단체 연설을 통해 “정운찬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을 독대해 청와대 참모진의 인적 쇄신을 건의하려 했지만 청와대 참모진이 총리의 대통령 독대를 막았(다)”며 독대의 허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진보정당들도 다르지 않다. 이들 사이에서도 누군가가 당대표와 따로 만나는 것을 독대한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많다.

독대란 과거 왕조 시대에 사용되었던 용어로, ‘벼슬아치가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임금을 대하여 정치에 관한 의견을 아뢰던 일’을 뜻한다. 왕이 절대 권력자로서 통치하는 시대의 느낌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내기는 어렵겠지만, 그만큼 민주주의가 하나의 사회적 합의처럼 이야기되고 있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11일 퇴임식을 갖는 정운찬 국무총리를 가볍게 얼싸안고
그동안의 노고를 격려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면, 정부 정책에 대한 최고 책임자들로서 대통령과 총리가 일상적으로 대화하고 협의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할 것이다. 또 그 형식에 있어서 배석자나 참모 없는 만남도 잦아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총리가 따로 만나 협의하는 것 자체도 드물고 그런 만남 자체가 대대적인 뉴스가 된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시대착오적인 느낌의 표현, 독대

그만큼 대통령이 소수의 측근을 제외하고는 협의를 별로 하지 않는 한국의 정치 현실을 실증하는 것이기도 하고, 대통령의 의사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다보니 대통령과 총리가 단둘이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언론을 위해 기획된 연출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과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독대라는 표현을 지금처럼 무비판적으로 즐겨 사용해도 좋은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인 동시에, 생각을 만들어 내고 행동의 방향을 안내하는 지표와 같은 것이다. 말의 좋아짐 없이 인간관계나 공동체를 좋게 만들 수 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권위주의적이고 전근대적 정치 언어가 지배하는 곳에서 민주적 가치가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런 말이 지배할 경우 그때의 정치 언어는 풍부한 생각의 그릇이기보다 낡은 관행과 습속을 지속시키는 생각의 감옥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레바논 출신 소설가이자 시인인 칼릴 지브란이 말하듯 그런 말들 속에서 “생각은 항상 절반쯤 살해”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적 운동가들의 잘못된 언어 습관을 고치는 일에 말년을 바친 사울 알린스키라는 교육자가 있었다. 그의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박순성 박지우 옮김, 아르케) 속에서 인용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읽으면서 참으로 재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적절한 단어와 거의 적절한 단어의 차이는,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와 같다.” 독대는 적절하지도 않거니와 거의 적절한 단어도 아니기에, 독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사용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보다 분명 더 클 것이다.

민주정치 이상 말의 힘 통해 실현

민주정치의 이상은 강제나 억압보다 설득의 힘, 말의 힘을 통해 실현되는 공동체를 향해 있다. 그런데 정치의 세계를 다루는 말과 언어가 좋지 않다면 그 이상에 다가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적절한 말을 쓰는 것은 중요하고, 그래서 좋은 말을 찾고 발견해 사용하는 것이 정치가나 언론인의 좋은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다. 공동체를 사람 살 만한 풍요로운 곳으로 만드는 데는 생산의 역할도 중요하고 새로운 기술 개발도 필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좋은 말의 효과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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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가 깊은 악순환의 구조에 빠진 게 아닌가 싶다. 집권당과 반정부연합 사이, 진보와 보수 사이에 갈등과 적대는 격렬한데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는 점점 줄어드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가장 피해를 보고 있는 정치세력은 진보파다. 정치가 이성적 기반 없이 무작정 양극화로 치달을 때 힘이 약한 진보정당의 후보들은 선택의 범위에서 쉽게 제외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악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진보파 역시 기여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사태를 보수나 집권세력 탓으로 단순화하고, 즉자적으로 화만 내고 내용 없이 주장만 앞서다보니 비판적 판단을 가진 유권자조차 피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정치운동단체인 ‘진보의 합창’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11.04.02. | 경향신문 DB
 
금년 초 총학생회 선거가 한창인 어느 대학에 갔을 때 “100% 비운동권 후보”라는 홍보 현수막을 보았다. 운동권이 아닌 총학생회장의 출현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듣던 일이었지만, 운동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앞세우는 것이 득표에 도움이 되는 상황까지 된 것 같아 생각이 복잡했다. 한 모임에서 만난 대학생들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면서 운동권에 대한 인식이 정말로 그렇게 나쁜지, 나쁘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된 지 꽤 되었으며 대체로 운동권이란 자기 확신이 과도해서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고 소통되지 않는 자신들만의 언어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정형화된 집단으로 보고 있었다. 

성실함보다 주장 앞세워서야

며칠 전 후배 교수로부터도 유사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친교 모임에 진보적 사회운동을 하는 한 사람이 우연히 참석했는데,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보였단다. 후배는 자신조차도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점점 불편해진다고 말했다. 필자가 보기에 운동권이나 진보 쪽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심리적 결함 가운데 하나는 강한 이념지향성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잘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견을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차이를 사소하게 다루지 못해 다투고 나서는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중대 사안에 대한 것일수록 이성적인 대화나 토론은 적다. 그보다는 윤리적 강요나 일방적 진영 논리가 더 압도적이다. 따라서 논란은 주장의 강도가 센 사람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목소리가 낮은 사람들은 참여에서 배제된다. 기록을 남기는 것을 경시하고 잘못된 판단이 가져온 결과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을 힘들어하니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할 때가 많다. 조직의 체계나 규율은 약하고 개개인의 자유의지가 과도하게 부각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 생계 때문이라며 사기업에 취직한 뒤에는 자신이 다니는 기업조직의 일사불란함을 격찬하는 경우가 있어 놀랄 때가 있다.

어느 틈엔가 진보 안에서 자조적인 분위기가 소리 없이 확산되고 있는데, 최근 이들로부터 본래 자신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에 가까운 사람이라거나 자기도 운동권 싫어한다는 황당한 말을 자주 듣는다. 아마도 운동권이나 진보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개개인의 무의식적 반응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은데,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친근한 인간적 매력 느껴지게

그렇다면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주체적 사고의 기초 위에서 말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적었다는 것인데, 그런데도 격렬한 갈등이 여전히 담론시장을 압도한다 할 때 그 격렬함이 담고 있는 진실이 뭔지 회의하게 된다. 성실함보다 주장을 앞세우지는 않았는지, 상대를 욕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 했다고 한 적은 없는지 돌아봤으면 좋겠고, 누구나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인간적 매력이 느껴지는 진보가 될 수 있는 길을 넓히는 노력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런 노력 없이 진보가 잘 된다면 그것 역시 진보적인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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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의 필요 때문에 정치가 만들어졌지만, 그러나 정치를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에는 불가피한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또 정치 현실을 경험할수록 더욱 그렇게 된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지켜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수많은 여론조사의 예측을 크게 벗어난 개표방송 앞에서 필자는, 수천만의 유권자가 분출해낸 정치적 열망을 경이롭게 바라볼 따름이었다. 당황하는 한나라당의 모습이든 환호하는 민주당의 반응이든 ‘북풍’이 어떻고 ‘노풍’이 있었다 없었다 하는 해설들 모두 지극히 사소한 일로 보였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결과의 불확정성을 최대의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정치제도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실감하게 된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6·2 지방선거 전국 228개 기초단체 시장·군수·구청장 당선자, 광역의원 정당별 당선자 수, 기초의원 시·도별 정당 당선자 수

 

진보의 가치를 정치의 방법으로 실천해보고자 했던 이른바 진보정당들의입장에서는 이번 선거 결과가 흔쾌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다양한 선호의 표출을 어렵게 하는 불합리한 선거제도, 이번엔 ‘반MB’ ‘민주대연합’으로 표현되었지만 매번 작은 정당들에 희생을 요구하는 보수양당제의 부정적 효과 등 이들로서는 항변하고 싶은 억울함이 클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진보정당 후보들이 사퇴해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 역시 이들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연합과 협력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소수파의 권리를 억압하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배려하는 자세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획일주의를 교정하는 데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한다. 

진보정당 희생 요구 선거제도

물론 한국 정치의 이 모든 불합리에 억울함을 느낀다 해도 결국 문제의 해결자는 진보정당 스스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선거의 경험을 정치적으로 더 지혜로워지는 학습의 기회로 삼는 과제 역시 그럴 것이다. 따라서 심상정 후보의 사퇴를 둘러싸고 진보정당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이 정치적 냉소주의로 귀결될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전기로 작용할지는 주목할 만한 일로 여겨진다.

필자는 진보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는 아주 ‘좁은 길’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길을 개척해가는 일에 성과가 있으려면 정치의 논리를 이해하고 그것에 창조적으로 적응해야 한다고 본다. 

진보의 가치를 앞세우는 것만으로 정치에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진보의 가치, 조직으로서의 정당,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조차 정치를 구성하는 부분에 불과하며 정치는 그보다 훨씬 넓고 풍부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다루는 문제의 범위만큼 크고 강력한 것은 없다. 참여자의 규모에 있어서 현대 대중 정치에 비견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 때문에 정치는 인간 사회의 다른 어떤 영역보다 큰 ‘가능의 공간’인 동시에 매우 위험한 분야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 이유는 ‘권력’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는 데 기인한다. 정치에 있어서 권력은 전체 공동체의 질서와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면서 타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강제성을 본질로 한다. 
따라서 현실에서 정치란 운명적으로 권력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 하는 ‘적극성’의 문제와 권력을 다투는 사람들에게 책임성을 어떻게 부과할 것인가의 ‘제한성’의 문제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나 정치학자도 이 딜레마를 ‘이해’하는 데 기여할 뿐이며,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은 결국 정치를 소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좋은 정당을 만드는 문제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키우고 지키는 일 중요

정당론의 마지막 패러다임’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안젤로 파네비안코라는 이탈리아 정치학자가 있다. 그는 왜 어떤 진보정당은 정치적으로 성공하고 왜 어떤 정당은 그렇지 못했나를 탐구했다. 그는 성공한 진보정당은 정치가와 지도자의 역할을 유연하게 허용하는 당내 결정구조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결론이 절대적 진리가 될 수는 없지만, 늘 협소한 조직논리를 우선시한 우리 사회 진보정당들은 생각해봐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정치가를 키우고 지키는 일의 중요성은 진보에 더 절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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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학을 다닌 필자는 학부 4년을 공부 외의 일로 소진한 뒤 사실상 대학원에 가서야 제대로 수업을 들었다. 정치사상사 과목 첫 시간의 주제는 정치학이라는 학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동서양의 역사와 고전을 소재로 해서 다양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학문의 출발을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에서 찾는 소크라테스의 테마가 오랫동안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런데 그 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일이란 단순히 학문의 출발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력과 깊이를 보여주는 척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식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과도한 자기 확신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확실한 것은, 모든 걸 다 알 수 없고 또 그런 채로 죽는다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대단한 철학자라도 그럴 수밖에 없고, 그 어떤 위대한 이론도 인간 사회의 일부분만을 설명하며,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이론에 의해 대체된다. 그러므로 내가 틀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하며, 그래서 내 생각을 조정하고 때에 따라서는 묵인과 타협, 포기 등도 감수해야 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역사가 신의 세계보다 더 풍부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정과 배움

또한 인간은 천사가 아니기에 해결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를 갖는다. 정직하려 하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것으로 인간 사회의 평화와 안녕이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현실이 아닐 것이다. 권력과 통치 없이 질서를 세울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 사회의 조직 원리는 근본적으로 악마적 요소를 포괄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유로운 인간적 충동과 열정의 표출은 늘 절제와 책임감, 고민을 동반하게 되며 그런 것들이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가끔 필자는 정치적 문제들과 관련해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비교적 단순한 문제에 대한 판단이라면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를 조금만 확장하면 쉽지 않다는 게 곧 드러난다. 그러다보니 정당은 어떻게 해야 좋아질 수 있을까, 선거제도는 어떻게 바꾸는 게 좋은가, 정당 및 시민단체들이 모여 하는 선거연합의 시도는 어떻게 봐야할까 등등 이른바 내 전공 영역에 대한 판단을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늘 유보적이게 된다.

더 나아가 인간과 사회는 얼마나 자유롭고 평등해질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하는 질문에 이르면 판단은 더욱 어려워지고 사실상 거의 좌절할 때가 많다. 물론 충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고 해서 괴로워할 일은 아니다. 그런 질문 자체가 의미가 있고 그런 질문에 대한 끝없는 탐색과 고민이 사고를 더 넓고 깊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너무나 강한 자기 확신과 절제 없는 주장을 대면하게 되면 몹시 불편해진다. 최근 한 일간신문에서 민주대연합을 강조하는 유명 지식인의 대담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분은 진보개혁세력의 연합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연합이 성사되면 선거 승리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고”, 연합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야당은 “역사 앞에서 죄인이 된다”고 말했다.

절제없는 주장과 대면하면 불편

종교적 죄를 심판하는 대심문관이든 역사의 죄를 따져 묻는 지식인이든 어떤 인간도 윤리적 판단을 독점할 수 없다고 믿는 필자로서는, 왜 그리 세상 이치를 다 아는 듯 말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강요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진보하고 개혁하자는데, 표현이 뭐 문제냐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필자는 견해를 달리한다고 말하고 싶다. 민주대연합은 하나의 의견일 뿐, 그 이상으로 강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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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지방선거를 관찰하러 온 외국인 정치학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주요 선거 이슈는 무엇인가?” 세종시, 4대강, 반정부 선거연합 등을 열거했다. 논리적으로는 사회 전체를 찬성과 반대로 양분하는 ‘최대 동원의 정치’를 불러올 만한 이슈들이다. 격렬한 갈등이 이어지고 그에 따라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투표 참여 의지 역시 고조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투표율이 얼마나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질문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서울 마포구의 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 경향신문DB

평등한 투표의 권리가 정치공동체 전체의 정당한 결정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선거의 민주성’을 말할 수 있는 최소조건이라고 할 때, 일정 정도 이상의 투표율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50년 동안 “서유럽 민주주의의 안정성”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기 동안 서유럽 국가들이 평균적으로 80% 가까운 투표율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떨까? 민주화 이후 최초 선거였던 1987년 대선과 88년 총선에서 한국의 투표율은 각각 89.2%와 75.8%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는 63%와 46.1%로 떨어졌다. 정확히 20년 만에 26.2%와 29.7%의 유권자가 투표시장을 떠났고, 비율로 보면 각각 29.4%와 39.2%가 감소했다.

투표율 20년새 급격한 하락

내가 아는 한 이보다 빨리 투표율이 떨어진 나라의 사례는 없다. 전쟁이나 혁명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다. 20세기 초 미국처럼 유권자 자신이 나서 등록해야만 하는 제도를 도입해 하층의 투표를 어렵게 한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어찌됐든 한국 정치에서 명실상부한 제1당은 무당파가 되었다. 누가, 왜 투표하지 않을까?

정당이론의 패러다임 하나를 개척한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상당수의 투표 불참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체제에서 해소되지 않은 역사적 긴장의 본질에 대해 통찰력을 갖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투표 불참자의 수는 결국 그들이 “기대하는 대안이 억압된 크기”를 말해준다고 보았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선거란, 경쟁하는 정치조직 가운데 하나를 보통의 시민이 선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유권자에게 표를 요구하는 정치세력들이 먼저 우리 사회가 해소해야 할 “역사적 긴장들” - 남북관계와 평화체제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압축적 경제성장의 부정적 효과를 개선하는 문제일 수도 있고, 급격히 심화되어 온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 에 대해 선택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을 충실히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대다수 보통의 시민 유권자들에게 정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 없이, 또 그런 기준에서 볼 때 우리 정치가 결핍한 것들에 대한 비판적 반성 없이, 나아가 왜 다수 유권자들이 현재의 정당들을 선택의 대안으로 느끼지 못하는지 하는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함 없이, 투표를 해야 할 유권자의 의무를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을 홍보대사로 위촉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으로는 지금과 같은 나쁜 상황을 변화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정치 힘은 ‘목소리’ 주는 것

지난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사명을 “목소리 없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치에서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하층의 유색인종들이 투표를 통해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는 이번 의료보험 개혁안을 통해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무보험자 3200만명에게 목소리를 줄 가능성을 열었다. 
 
민주정치가 갖는 민중적 힘은 적어도 미국 정치에서 그런 식으로 표출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누가 목소리 없는 다수 유권자들에게 목소리를 갖게 할 수 있을까? 이번 선거도 그렇고 아마도 한동안 한국 정치의 중심 문제는 바로 이 질문이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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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누군가 필자에게 왜 민주주의라는 가치 내지 이념을 좋아하는지를 묻는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이 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평등의 원리가 아니라면 민주주의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권능에 공동체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 정치 체계’라고 정의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또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비범한 일을 해내는’ 민주적 성취에 경탄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는 데 있어서 재산, 교육, 태생, 신념 등과 같은 자격조건을 따지지 않는 정치체제는 민주주의가 유일하며, 공적 이슈를 둘러싼 논의와 결정 과정에서 일정 연령 이상의 구성원 모두 평등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상상은 오로지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

<경향신문DB> 

그러나 필자의 이런 생각이 그리 넓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에서는 더하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최대 약점을 평등에서 찾는 이론이나 주장이 훨씬 더 많다. 정치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은 평등한 정치 참여의 권리를 갖게 된 보통의 시민들은 쉽게 어리석은 우중으로 변질된다고 보았고, 그래서 그는 교육받은 엘리트들에 의해 계도되는 정치를 바랐다. 

평등의 원리, 민주주의 가치 핵심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위대한 관찰자로 알려진 토크빌 역시 평등해지고 유사해진 보통의 사람들은 사사로운 욕망과 즐거움의 추구에 의해 압도되는 경향이 있는 바, “결국은 정부라는 목자 아래 소심하고 부지런한 한 떼의 가축과 같은 국민이 된다”고 보았다. 평등화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약화시킨다거나, 자유와 평등을 서로 대립적인 가치로 당연시하는 주장이 근거 없이 통용되는 곳도 정치학이다.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유사한 논리가 만연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진보를 앞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한 원인을 “대중의 보수화” 내지 뉴타운 개발과 같은 “대중의 욕망” 때문으로 설명하는 것이 한 사례라면, 한나라당이 압승했던 2008년 총선 결과를 서민 대중들의 “계급배반 투표” 때문으로 보았던 설명은 또 다른 사례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각성된 의식의 “깨어있는 시민”과 같은 자격 조건을 필요로 한다거나, 일반시민들이 “조·중·동 프레임에 포획”되어 있어서 문제라는 주장도 다르지 않다. 나아가 젊은 세대를 향해 유리한 취업 조건에만 신경 쓰고 사회 정의에 관심이 없으니 “세상이 이 모양”으로 되었다고 질타하거나, 서민들이 먹고 사는 데만 급급하고 공적 문제에 참여하지 않아 이명박 정부가 전횡을 일삼게 되었다는 주장에 이르게 되면 이들의 생각이 정말 민주적인가에 깊은 회의가 들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우리 사회 서민들과 젊은 세대들은 시민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했다. 표를 던졌고 재정적 후원도 했으며 촛불도 들었다. 그런 그들의 자유 의지를 위축시킨 것은 불평등이 급격히 심화된 때문이지 시민됨의 의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런 그들이 현실의 불평등에 힘들어하고 민주주의와 진보를 주장했던 세력들에게 실망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들을 향해 민주주의의 종말이 오고 있는데 헛된 욕망이나 추구한다며 화를 내고 깨어나라며 훈계하고 야단칠 수 있는 특권을 누가 가질 수 있을까. 

신뢰 못 얻는 정치세력에 책임

지난 정부들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운동권 인사들의 시국토론회에 갔다 온 내 친구는 어땠느냐고 묻는 나에게 “보수적 기득 엘리트와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기득 세력의 출현을 보는 것 같았다”라고 말해 깜짝 놀랐는데, 그렇다고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문제는 시민이 아니라 이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정치세력에 있다는 생각의 전환은 왜 어려운 것일까. 그런 전환을 억압하면서 시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알리바이 담론은 언제쯤 사라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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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일년 전쯤 어느 저녁식사 모임에서 정부 산하단체 기관장을 만났다. 지난 정부에서 임명된 대표적인 운동권 인사였는데, 이명박 정부하에서 해임될 가능성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같이 자리한 사람들에게 이 정부의 요직을 맡고 있는 사람을 알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의 자리는 국가적으로 너무 중요하고 자신이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므로 로비를 좀 해서라도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특별히 추천하는 사람이 없자 그때부터 그는 이 정부의 반민주성과 무도함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면서 진보니 개혁이니 할 것 없이 모두가 연대해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안 그러면 자기 같은 사람들은 다 쫓겨난다는 것이다. 같이 있던 한 국립대 교수는 이 정부를 파시스트 정부라고 규정하면서, 더 심하게 당해봐야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던 사람들도 뉘우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앞의 두 정부에서 자문교수 역할을 했던 그는, 이 정부의 지나침에서 일종의 심리적 보상을 얻는 것 같았다. 그 두 사람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기관장과 교수를 하고 있다.

입으로만 ‘민주연합’ 외치는 그들

가까이 지내는 한 사람이 있다. 1981년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했고 졸업 후에는 노동운동을 했다. 햇수로 19년 동안 그렇게 했다. 민주노총 대변인을 끝으로 현장을 떠난 그는, 못다 한 공부의 끈을 다시 잇고자 했고 내가 있는 출판사에서만 두 권의 책을 냈다. 

경향신문 DB

 
작년 그의 생일날, 그의 처는 남편 몰래 깜짝 생일잔치를 준비했는데 나도 초대를 받았다. 거기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났다. 조합원 2만5000명을 이끄는 노동조합의 위원장이었다. 80년대 중반 노동운동을 하다 만난 그 두 친구의 뗄 수 없는 인연과 재밌는 일화를 들으며, 언제까지나 두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노조위원장 친구는 이 정부의 공기업 구조조정에 맞서다 구속되었다. 지난주 친구를 면회하러 가는 그를 따라 나도 서울구치소에 갔다.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면회실에 들어서자 113번을 단 그의 친구가 들어왔고, 투명 칸막이 너머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마이크를 통해 짧은 대화를 나눴다.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마라”며 자기 방 사람들은 먹을 것을 포함해 뭐든 같이 나누는 “서울구치소에서 가장 민주적인 방”임을 자랑했다. 

가족들 안부를 서로 묻고 각자의 근황을 말할 때, 둘은 너무 쾌활했다. “대학원 박사과정은 합격했나?” “와! 축하한다.” “박사 친구 두게 생겼네, 공부 열심히 해라.” 구속된 현실을 어떤 말로 안타까워하고 위로해야 할까를 걱정하며 면회실에 들어섰던 나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는 깊은 연대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꾸 나는 마흔아홉 동갑내기 두 남자에게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쓸쓸함을 느꼈다. 노동운동 하느라 돌보지 못했던 부모와 처자식에 대한 애틋함을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오면, 흙집 지어야지?” “꼭 그럴 거다. 같이 짓자.” “난 손재주가 좋다.” “난 끈기가 있다.” 
그리고 서로 빙그레 웃는다. “몸은 어때? 약은 챙겨 먹지?” “빼놓지 않고 먹는다. 걱정마라. 주전부리 일절 안하고 나오는 밥 먹고 운동 열심히 한다.” “그래, 꼭 그렇게 해야 한다.”

노동현장을 믿는 건강한 운동가

오순도순 살아갈 그들의 미래, 그 흙집을 그들은 짓게 될 것인가. 인덕원역 긴 계단을 내려오면서 내가 묻자, “집 짓는 데만 3억원이나 든다는데”라며 웃는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서글픈 이야기일 수 있지만, ‘민주대연합’의 이름을 걸고 자기 자리를 위하여 만인의 투쟁을 희생시키려는 사람이나, 더 당해봐야 한다며 삐뚤어진 심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만날 때보다 수천, 수만 배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현장은 건강하다”며 자신의 조합원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이야말로 이 정부의 가혹한 정치에 진짜로 반대하고 진짜로 싸우는 사람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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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했고 지금은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 대학 동기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그는 우리 사회 진보파의 언어가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때로는 폭력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는 말을 했다. 그러다보니 진보적 매체나 논의의 장에 더 이상 참여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게 되더란다. 

미국 진보파들 사이에서 정신적 지주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울 알린스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1930년대 시카고에서 빈민운동을 주도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진보적 활동가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가 교육했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말의 공격성 혹은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향해 ‘돼지’나 ‘파시스트’라고 인격적으로 비난하는 활동 방식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운동권이 원래 그렇지”라는 식으로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게 해 사회운동의 고립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일반 대중의 경험세계 속에서 자신의 말이 어떻게 공명될 것인지를 중시해야 하고, 또 “상대의 가치관을 온전히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진보의 언어적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진보파의 언어 때론 폭력적

최근 인터넷 글쓰기의 영향이 커지면서 진보파들의 언어습관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보여 주목되고 있다. 집권세력과 그 수장을 ‘MB’ 내지 ‘2MB’로 표현하고 거기에 ‘명박이’ ‘쥐박이’ ‘생쥐’ ‘바퀴벌레’ 등의 모욕적 이미지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진보파들의 말과 글에서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통치의 가혹함에 대한 강렬한 항의의 소산이겠지만,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 

한번은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진작시키기 위한 콘서트에 갔는데, 시작에 앞서 사회자가 그 취지를 설명했고 해직교사 한 분을 무대로 초청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해직교사가 자신의 사례를 설명하면서 현 정부를 “이명박 정부”라고 지칭하자 사회자는 “MB 정부를 좋아하시나 보네요”라고 물었다. 이명박 정부와 MB 정부 사이의 언어 선택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사회자에게는 예민하게 포착되었던 듯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객석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조용했는데, 사회자가 농담이라고 말한 다음에도 여전히 조용했다. 진보파들과 그렇지 않은 일반 시민 사이에 언어습관의 괴리가 커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말이 갖는 공격성 내지 폭력성은 주로 보수적 정향이 강한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폭도나 빨갱이, 친북좌파라고 공격하는 일이 허다했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비이성적 논리가 강요되기도 했고, 빨갱이들은 개조가 안 되고 대화로 풀어보려 했다가는 자칫 말려들기나 한다며 “때려잡자”거나 “북한에 보내자”는 무서운 주장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 억압적인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진보파들 사이에서도 말이 자꾸만 나빠지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마음 불편한 일이다. 

인간적 따뜻함 뒷받침될때 힘

흑인이라는 정체성 속의 이중적 억압성을 날카롭게 문제 삼는 작품들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은, “문학은 정치적인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적인 주제를 진지하게 다룬다면, 분명 이 말과 글은 파당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성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자로서 진보파가 갖는 사회적 가치 또한 파당적이 됨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세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파당성은 공정한 태도와 인간적인 따뜻함 그리고 말의 부드러움에 의해 뒷받침될 때,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진보적인 것의 가치도 소중하지만 그보다 인간적인 것의 가치가 더 넓고 풍부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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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우리 사회 진보파 가운데는 개인 삶을 돌보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진보를 위해서는 개인 삶을 희생해야 한다거나, 사적 영역 자체를 부정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돈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다.
 

<경향신문DB>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한 민주노동당은 소속 국회의원과 보좌관, 중앙당 및 지역조직 상근자 등, 이른바 진보정치를 직업으로 삼게 된 사람들에게 평균 127만3000여원의 월급을 줬다. 국가 예산으로 지급된 국회의원과 보좌관 급여는 당이 환수했다. 이 모든 게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받는다”는 논리로 이루어졌는데, 그 후 약간의 증액은 있었지만 그 원칙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 지켜지고 있다.


결과는 어땠을까? 가족을 건사하고 자녀를 교육하는 등 생활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요구나 불만조차 잘 표출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자칫 돈을 밝히는 사람이거나 진보의 대의에 헌신하려는 자세가 안돼 있는 사람으로 비난받기 쉬웠기 때문이다.

노동자 평균임금 받는 국회의원

그렇다고 진보에 대한 도덕적 헌신은 강해졌을까? 그것도 아니다. 개인 삶의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열정은 식고 현실의 압박은 커졌기 때문이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빠져나갔고 또 재능 있는 사람들이 진보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게 되니, 조직의 인적 역량도 시간이 갈수록 약해졌다. 그렇다고 이들을 교체할 수도 없었다. 저임금 구조에서 고용 안정마저 위협되는 것을 누가 수용할 수 있겠는가. 결국 유능한 인력이 충원되고 순환되기보다는 남아있는 사람들을 저임금 구조로 통합·유지하는 조직, 공식적으로는 급여를 올리기 어렵다보니 편법을 통한 소득 보전을 강구해야 하는 진보 아닌 진보정당이 되고 말았다.

공직에 대한 보상을 노동자의 평균 임금으로 한다는 생각은 파리코뮌의 원칙이었다. 달리 말해 혁명 내지 혁명정부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혁명의 원칙으로 실천되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에게 기반을 두는 정치체제이고, 진보정당도 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면 평범한 보통사람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수용되고 실천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개인 삶을 희생하는 진보는 혁명의 원칙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민주주의의 원리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차티스트 운동을 단순히 노동자 참정권 주장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때 제기된 요구 가운데 하나는 대표들에게 세비를 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개인 삶을 희생하지 않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공직에 돈을 요구하는 것은 천박하다며 반대한 사람들은 돈 걱정이 없는 귀족들이었다. 고대 아테네에서도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공직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급여를 주기 시작했는데, 그래야 정치 참여와 개인 삶이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지켜지는 개인 삶이 튼튼할 때 민주주의가 사회 속에 뿌리내릴 수 있듯이, 진보의 이름으로도 개인 삶이 안정될 수 있어야 자기 삶을 걸고 진보를 지키려는 의지가 커질 수 있고 또 오래갈 수 있다. 돈이 진보정치를 타락시킬까 두려워하고 그래서 그런 문제를 없애기 위해 저임금을 강요하는 것은 곤란하다.


민주주의 원리와 양립 어려워

돈은 인간의 경제행위를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데 꼭 필요한 존재이다. 돈을 잘못 다뤄서 인간이 타락하는 것이지 돈 그 자체 때문에 문제인 것은 아니다. 돈에 무심하다거나 돈 욕심이 없다는 것을 진보인 양 자랑하거나 돈이 가치를 잃어야 인간성이 되살아난다는 진보의 통념은, 자칫 온정적 엘리트주의나 변형된 귀족주의이거나 현실의 고용·피고용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나타날 때가 많다. 진보를 이유로 개인 삶이 희생되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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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자 |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 이임혜경 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

최근 ‘조두순 사건’ 등 아동 성폭력 사건에 대해 사회 전체의 분노가 터져나오고 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인 조씨에 대해 법원이 징역 12년형을 선고했지만 잔혹한 범죄에 대한 국민의 공분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급기야 서울 광화문 광장 등에서는 법원의 양형제도와 정부의 무책임을 비판하는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밀려 정치권에서는 성폭력범을 상대로 ‘화학적 거세’ ‘평생 전자발찌’ 등 더 강력히 처벌하는 방안들이 속출하고 있다. 피해자의 억울함과 국민 법감정 차원에서라도 지금의 양형은 너무 낮다는 여론이 우세한 것은 사실이다. 

반면 모든 관심이 가해자의 처벌 문제에만 휩싸여 있고 정작 피해자의 인권이나 사후 보호·지원 문제는 뒤로 밀려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건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을 처벌이 아닌 다른 쪽에서 찾자는 반론이다. 이 같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냄비처럼 끓었다가 식는 여론과 언론의 ‘마녀 사냥’식 보도에도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지난 10일 ‘처벌 강화’를 주장하는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45)와 ‘처벌 강화보다는 가해자 교육과 피해자 지원대책이 보강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는 이임혜경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39)이 만나 의견을 나눴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왼쪽)와 이임혜경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이 
조두순 사건으로 불거진 성폭력 범죄자 처벌 강화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강윤중기자
 

곽대경 교수(이하 곽대경) = 이번 사건으로 판사들도 뜨끔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형기준에 따른 법원의 선고와 국민이 실제 기대하고 있는 아동성폭행 처벌 간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시킨 사건이었다.
법관들이 내린 결정이 국민의 생각과 맞지 않는 옷임이 사실상 확인된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사법부도 깨달아야 한다. 국민 법감정과 사법부 판결의 차이가 너무 달랐던 부분을 좁히기 위해서라도 양형을 높여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양형이 필요하다.

이임혜경 소장(이하 이임혜경) = 복잡한 심경이다. 상담자 입장에서 매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처벌 얘기만 나오는 게 안타깝다. 엄격하게 처벌하는 것은 맞지만 “사형시켜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것은 당혹스럽다.
정부와 정치권 등은 국민 여론만 읽어 가해자 처벌을 강화하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 인기 편승적 방안일 뿐이다. 가해자가 어떻게 그런 사건을 저지르게 됐는지 다각도로 분석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 마련이 먼저 얘기돼야 한다고 본다. 양형을 높이자는 의견은 사안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곽대경 = 법이라는 것은 추인(追認)하는 것이다. 사회를 뒤따라가며 바뀌어야 한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변화함과 동시에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 법감정도 이에 따라 바뀌게 되는 점을 사법부가 인식해야 한다.

특히 아동 성폭력범처럼 전 국민을 경악시킨 사건 같은 경우 기본 6~9년, 가중 시 7~11년이라는 현행 양형기준이 있다. 정부에서는 이번에 현행 양형 기준을 기본 7~11년으로 상향 조정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국민의 분노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조씨 사건의 경우 법원이 최고형을 선고했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아동 성폭력 사건의 판례들을 분석해보면 처벌 자체가 그렇게 무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법원 스스로 양형에 의문을 제기하고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다.


이임혜경 = 지금 있는 양형제도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엄격한 처벌을 내릴 수 있는 제도는 이미 갖춰져 있다. 조씨의 경우 법원이 술에 취한 상태였다는 점을 감형 요소로 채택해 감형해줬다.
술이라는 것에 관대한 우리 사회의 경향이 문제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경향을 분석해 양형을 했더라면 결과는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선고가 나왔을 것이다.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 없이 자꾸 눈에 보이는 형벌만 강화하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감경 사유에 술에 취한 상태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양형위원회에서도 논의가 됐지만 결국 이번에 이렇게 결과가 나왔다. 법원이 양형 기준을 기계적으로만 적용한 것이다.

곽대경 = 범죄 예방 효과는 크게 특별 범죄 예방 효과와 일반 범죄 예방 효과 등 두 가지가 있다. 특별 범죄 예방 효과는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그 사람들에게 포커스를 맞춰서 교정기관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재범을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일반 범죄 예방 효과는 가해자의 처벌을 보고 ‘저런 일을 저지르면 저렇게 처벌받는구나’라는 것을 일반인들에게 알려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다. 엄한 처벌이 중요한 이유다. 우리 사회가 이런 범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임혜경 = 성범죄 신고율은 10%밖에 안 된다. 기소율은 더 낮다. 나머지 90%는 고소도 안 되는 상황이다.
가해자 교육 등을 통해 봐도 기본적으로 그들은 잡힐 것을 가정하고 저지르지 않는다. 형량을 세게 한다고 얼마나 범죄가 예방될지는 모를 일이다.
아동 성폭력의 경우 주변의 아는 사람이 저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성폭력을 폭력으로 해석하지 않고 ‘인간관계’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귀여워서” “아는 애니까”라는 성인들의 시각이 아동 성폭력을 묵인하고 있다. 그게 더 큰 문제다. 사회 전반적인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다.

곽대경 = 대증요법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대안들도 고려해 봐야 한다. 국민의 분노에 대해 임기응변적 정책들이 나올 가능성은 많지만 냉정하게 대안들을 검토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화학적 거세’의 경우 범죄 예방 차원의 방안으로서 기본적으로 찬성하지만 아직 우리나라 현실에는 연구가 부족한 듯싶다. 우리 사회에 어떤 효과가 있을지, 부작용은 어떤 것이 발생할 수 있는지 잘 연구해 추진해야 한다. 전자발찌의 효용은 이미 증명되고 있다. 재범도 거의 없다.

이임혜경 = 그런 대안들을 국민적 감정이 끓어오르기 때문에 고민 없이 마구잡이로 내놓았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미 가해자 신상공개나 전자발찌 제도 모두 시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점점 더 센 정책을 내놓는 것에 경쟁이 붙은 것처럼 느껴진다.

성폭력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정책이나 제도 등 여러 가지를 새로 고민해 볼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독일의 경우처럼 검사뿐만이 아니라 피해자에게도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제도가 더 실효성 있는 대책이 될 수 있다.
이번 조씨 사건의 경우 검사가 항소하지 않으면 피해자는 항소할 길이 없었다. 피해자들이 대개 어린 아이일 때에는 신고하지 못했다가 성인이 돼서야 신고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감안해 공소시효를 일정 기간 정지시키는 방안도 필요하다.


곽대경 = 국민 법감정은 더 엄한 결정을 원하고 있다. 10년, 20년 형을 더 올린다 하더라도 거기에 어떤 내용을 채울 것인지도 문제다. 가둬만 놓을 경우 더 무서운 괴물이 돼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있다.
기간 연장도 중요하겠지만 가해자들의 개별 상황에 맞게 범죄를 반성할 수 있도록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분석해 실질적으로 그에게 필요한 상담이나 정신과 치료, 그가 갖고 있는 왜곡된 성관념을 바꿔줄 수 있는 수감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또 출소 뒤 체계적인 재범 방지 관리도 지금보다 더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

이임혜경 = 이 사건을 처음 공개한 것은 언론이었다. 언론에서 문제제기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후 자꾸 가해자에게만 포커스를 맞춰 사건이 한 번 들끓다가 끝날 수밖에 없게 했다. 강경대책들만 내놓게 되고 그 사건의 원인이나 사회 변화의 문제들에는 관심이 없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아동 성폭행이 계속 일어나는 원인이 뭘까’라는 질문은 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현재 사회 문화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데 언론이 그런 부분은 하지 않는 것이 아쉽다.

곽대경 = 성폭력 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연구가 부족한 점은 인정한다. 성폭력범죄가 왜 끊임없이 발생하는지에 대해 범죄자들 개개인이 갖고 있는 특성과 환경에 대해 기초적인 조사도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피해자에 대한 보호도 절박하게 필요한 부분이다. 정신적인 지원이나 상담시스템도 절실하다. 가족들도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상담치료와 지원 서비스가 요구된다.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고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에 이번만은 잠깐 관심을 쏟다가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임혜경 = 정부 차원의 법률·의료지원은 이미 갖춰져 있다. 성폭력상담소도 전국에 100개가 넘는다. 그러나 양보다는 질을 따져봐야 한다. 사회 속에서 성폭력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성폭력 가해자는 어느 누구도 될 수 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도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모두 깨달아야 한다. 그런 인식 없이 쏟아내는 대안은 ‘모래 위에 성쌓기’에 불과하다. 피해자 지원 내용에 대한 점검과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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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