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언론은 황교안 대표의 단식 이후 자유한국당 지지율이 반등했다고 보도했으나, 사실은 그 직전에 잠깐 빠졌던 2~3%포인트를 다시 회복했을 뿐이다. 6개월 전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5월 말에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22%였는데 며칠 전인 11월 말 지지율은 23%로 6개월 동안 딱 1%포인트 올랐을 뿐이다(이하 갤럽 자료 기준). 중간에 많이 올랐다가 떨어진 것도 아니다. 소위 ‘조국사태’가 정점으로 달려가던 10월 중순에 27%를 찍은 것이 가장 많이 오른 것이었다. 자유한국당에 가장 유리한 판국에서도 민주당 지지층 2~3%를 빼앗아 오는 것에 그쳤고, 이들은 한 달 만에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갔다.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왜 오르지 않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두 가지 요인의 결합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 국정농단과 탄핵을 거치면서 많은 국민들에게 자유한국당은 아예 선택지에서 제외되었다.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거대 보수정당이 이런 처지에 놓였다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암울한 현실이다. 둘째, 이런 현실을 타개하려면 자유한국당은 앞장서서 보수의 혁신을 해나가야 할 텐데, 당장 눈앞에 보이는 답이 없다보니 자꾸만 태극기부대를 곁눈질하면서 퇴행한다. 특히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의 리더십은 시대착오적이다. 황 대표는 원외이자 당내 세력 부재의 한계를 절실히 느낄 것이다. 결국 그의 선택은 장외투쟁으로 일관하는 것인데, 그가 당 대표로 재임한 10개월 동안 국민들이 기억하는 것이라곤 장외투쟁밖에 없을 정도이다. 제1야당의 대표로서 정치력을 발휘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보이지 못했다. 나 원내대표 역시 원내대표 1년간 오직 투쟁 일변도의 선택만 해왔다. 그의 선택을 보다보면 15년 전 4대 개혁입법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데자뷔가 겹친다. 강경투쟁과 종북좌파 몰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그때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몇 가지 있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내부 분열과 투쟁이 심각했으나 지금의 민주당은 너무 안 싸워서 문제다. 당시에는 과거사법, 사학법, 언론법 등 사안별로 각당과 계파가 조금씩 입장이 달라서 여당은 여러 개의 전선을 동시에 막기가 어려웠으나, 지금은 선거법과 공수처법으로 전선이 단순하다. 여당으로서는 비교적 수비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 당시 박근혜 대표는 지금의 나 원내대표가 가지지 못한 ‘아빠 찬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뭘 해도 무조건 지지해주는 세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때와 같은 전략은 상당히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사실 지지율이 변하지 않는 것은 다른 정당들도 마찬가지다. 6개월 전 민주당 지지율은 39%, 엊그제 지지율은 38%이다. 조국사태로 민심 이반이 가장 심각했을 때 36%까지 내려간 것이 전부이고 금방 회복되었다. 11월 마지막 주 정당 지지율은 민주당 38%, 자유한국당 23%, 무당층 24%, 나머지 정당 모두 합쳐 15% 남짓이고, 이것은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패턴이다. 자유한국당의 반대쪽 끝에 서있는 청와대와 민주당이 더 이상의 합의정치적 선택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이 패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36%를 지켰으니 마지노선을 확인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공연히 중도적인 모습을 보였다가 지지층 이탈만 불러올 것을 걱정할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당장 기댈 데가 태극기부대 밖에 없어서, 민주당은 지지층 이탈이 걱정돼서 각각 자신들의 영역에 머문다. 그러는 사이 민생은 엉망이 된다. 아마도 외국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199개 법안 필리버스터에 공감할 국민이 몇이나 될까. ‘민식이법’ 원포인트 국회도 성사시키지 못하는 여당의 정치력에 점수를 줄 국민이 몇이나 될까. 여야가 합의한 데이터 3법도 통과시키지 못하는 국회가 성장을 얘기하고 민생을 얘기할 때 공감해줄 국민이 몇이나 될까. 24%의 무당층은 갈수록 더 실망하고 불신을 쌓아간다.

정확히 4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새누리당이 여당이고 20대 총선을 5개월 앞둔 2015년 11월 마지막 주 자료이다. 지지율은 새누리당 40%, 새정치민주연합 23%, 무당층 30%이다. 여야가 바뀌었을 뿐 지지율은 지금과 판박이처럼 똑같다. 총선 결과는 어찌 되었나. 민주당 123석, 새누리당 122석, 국민의당 38석이다. 그 당시 민주당은 대선에서 박근혜를 도왔던 김종인 비대위원장을 영입하는 등 파격적인 혁신으로 지지율 격차를 뒤집었다. 지금 양당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 38%이든, 23%이든 지금 가진 것은 총선에서는 의미가 없다. 마침 보수정권과 진보정권 창출에 모두 기여한 경험이 있는 김종인 이사장은 이번에 중도 빅텐트를 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진보, 중도, 보수 중 누가 혁신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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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공정성이 정치적 화두가 되었다. 장관 한 사람과 그 가족을 둘러싸고 두 달 넘게 이어진 공방을 지켜보면서 결국 유탄의 일부는 대학으로 튈 거라는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교수의 자녀가 다른 교수 논문에 이름을 올리거나 장학금을 받는 일들은 공정성에 대한 사람들의 역린을 자극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따라서 교육 문제를 넘어 정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역시나 대통령의 정시 확대 발언에 이어 교육부는 각 대학에 정시를 얼마나 확대해줄 수 있는지 타진하느라 여념이 없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대학에서 입시를 가장 잘 아는 입학처장들이나 입시전선의 최전방에 있는 교사들은 정시 확대에 부정적이라고 한다. 이들은 공정성이 필요 없다고 보는 것일까.

돌이켜 보면 대통령이 공정성을 강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9년 전인 2010년에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공정사회’를 들고나온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경향신문 칼럼에 이렇게 썼다. “공정성이야말로 굴곡의 현대사를 몸으로 살아낸 한국인들의 가슴 밑바닥에 인두로 지져낸 낙인처럼 찍혀있는 가치”라고. 공정성은 “수많은 한국인들이 겪은 좌절과 부당함과 그래도 실낱같이 붙들고 있는 희망들이 모두 응축되어서 뜨겁게 달구어져 있는 ‘뜨거운 단추(hot button)’ ”라고. 뜨거워서 위험한 공정성이란 단추는 웬만한 각오 없이 누를 수 없다. 뜨거운 단추 다음에 또 누를 수 있는 다른 단추는 없기 때문이다.

학문적으로 공정성은 오랫동안 행동경제학의 주요 연구대상이기도 했다. 행동경제학자로서 노벨상 수상자만 해도 대니얼 카너먼, 로버트 실러, 리처드 세일러까지 세 명이나 되니 이 학문이 들려주는 조언에 귀 기울여볼 가치는 충분하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합리성은 제한되어 있다는 현실로부터 출발해서 합리성의 다양하고도 예측 가능한 왜곡을 밝혀낸다. 환자 600명 중에서 200명을 구할 수 있는 약품 A와 600명이 다 죽을 가능성이 3분의 2인 약품 B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A를 선택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A나 B나 결과는 똑같다. 하지만 A는 생명을 지키는 방식으로 서술되었고, B는 생명을 잃는 방식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A를 택한다. 손해는 크게 생각하고 이익은 작게 생각하는 ‘손해기피(loss aversion)’ 현상이다. 구직자가 많아졌다고 해서 현재 고용하고 있는 직원의 임금을 삭감하는 것은 대부분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재의 직원이 그만두고 새로 채용하는 직원의 임금을 낮게 책정하는 것은 받아들인다. 특정 자동차 모델이 인기가 있어서 몇 달이나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가격을 100만원 올린다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예전에는 100만원 깎아주던 것을 이제는 깎아주지 않겠다고 하면 받아들인다. 공정성과 관련하여 행동경제학이 주는 교훈을 요약하면 간단하다. 공정성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시중에는 소문이 파다하다. 강남 학부모들은 이미 정시확대에 따른 대책회의를 끝냈다고도 하고, 정시가 확대되면 금수저 학생들에게 더 유리하다고도 하고, 정시확대의 최고 수혜자는 주가가 오른 메가스터디라고도 한다. 입시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시험에 대해 여론조사를 해보면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객관식을 원한다. 주관식은 말 그대로 ‘주관’이 개입할 수 있고, 따라서 금수저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금수저들이 객관식 시험을 준비하기는 얼마나 더 쉬울 것이며 따라서 객관식이 격차를 더 벌릴 수도 있다는 점은 ‘디스카운트’해버린다. 정성평가에서 혹시 입게 될지도 모르는 손해는 최대한 피하려 하고 그것이 가져다줄 수도 있는 이익은 별로 높게 생각하지 않는다. 창의적인 다른 생각의 가능성도 닫히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속한 서울대의 전형 방식은 학종과 정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대학에는 없는 지역균형선발 제도가 있고 도입 당시의 우려와는 달리 지역균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잘 해내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입학에서 졸업까지 꾸준히 성과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교육의 효과 아니던가. 서울대에 정시를 확대하라고 요구하기보다 지역균형을 확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떨까.

공정성은 뜨거운 단추다. 이 뜨거운 단추에 손댈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이 가르쳐주듯 우리의 합리성은 제한돼 있고, 공정성은 왜곡되고 한계가 있는 합리성이 작동하는 대표적 영역이다. 단순히 정시냐 학종이냐, 각각을 원하는 국민들이 몇 퍼센트나 되느냐로 귀결될 문제는 아니다. 비록 한도가 있더라도 우리 합리성의 한계를 최대한 넓히기 위한 숙의를 주도해야 하는 것이 정부의 몫이다. 그래야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되찾는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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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8일 지면게재기사-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12월에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집회 참여자의 11%가 원래 새누리당 지지자였다. 원래 새누리당 지지자 중에서 지지를 철회한 사람이 60%를 넘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책임을 물은 사람도 50%에 달했다. 새누리당 의원 중 탄핵에 찬성한 사람이 62명이었다. 잠깐이나마 이건 아니라는, 그러니 바꿔야 한다는 정치적 합의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국민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검찰개혁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 조국 사퇴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 이도저도 지긋지긋하다며 염증을 내는 사람.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손민주주의를 치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손민주주의란 정치학자 볼프강 메르켈이 제시한 개념으로, 민주주의냐 독재냐의 이분법을 넘어 민주주의의 외피를 쓰고 있기는 하되 여러 결함을 가진 하위 유형들을 말한다.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비자유민주주의, 시민권을 제한하는 배제민주주의, 선출되지 않은 자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후견민주주의, 통치자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파트너가 아닌 시민과 직접 연합하는 위임민주주의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한국의 결손민주주의는 무엇보다 대선개입을 통한 선거체제의 훼손과 위헌적 통치행위로 인한 비자유민주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쌓여오던 정치적 압력은 소위 ‘최순실사태’를 통해 밝혀진 대로 대통령의 권한을 비선실세에게 넘겨준 가장 저열한 형태의 후견민주주의 행태까지 드러나자 마침내 폭발했다.

촛불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한계는 결손민주주의 그 자체를 치유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그대로 둔 채 선거에 승리하고 적폐를 청산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민주주의에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촛불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시민은 촛불시민이 되었고, 촛불집회는 촛불시민혁명이 되었으며 촛불의 정신을 이어갈 촛불정부가 태어났다. 촛불시민과 촛불정부의 소명은 적폐청산이 되었다. 그러나 과거 한국적 민주주의가 그랬듯이, 수식어가 붙은 민주주의는 온전한 민주주의이기 어렵다. 19대 대선은 결손민주주의를 치유하고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의 장을 여는 정초선거(founding election)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우리 민주주의의 허점을 그대로 둔 채 정권교체라는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말았다. 

적폐란 오래 쌓여온 폐단을 말한다. 검찰개혁은 오래 쌓여온 폐단을 청산하려는 시도인 것은 맞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허점을 그대로 둔 채 적폐만 청산하려 하면 민주주의의 또 다른 허점을 드러내게 된다. ‘청와대정부’라는 지적이 보여주듯이, 이번에는 대통령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건너뛰고 국민의 직접적 지지에 의존하는 위임민주주의가 아니냐는 혐의이다. 결국 대통령 지지자들은 지나간 보수정부의 비자유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결손을 지적하고, 대통령 비판자들은 현 정부의 위임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결손을 지적한다. 어느 쪽도 전적으로 맞거나 전적으로 틀리다고 할 수 없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국민들은 촛불과 태극기로 나뉘어 격렬하게 맞선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하나씩 잡고 있으니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지만 상대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비토민주주의다. 결손민주주의 대 결손민주주의의 대결이다.

아직까지는 중도층과 민주당·정의당 지지자들이 현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지언정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로 옮겨가지는 않았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그들은 차마 지지할 수 없는 정치세력이라는 결론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의 양상을 보면 이 마지막 교두보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어느 순간 현 정부의 결손민주주의나 지난 정부의 결손민주주의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도달하면 역사적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이 속출할 수도 있다. 적어도 이번에는 시간은 대통령이나 조국 장관의 편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단이 필요하다. 개혁의 길은 결손민주주의 대 결손민주주의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개혁의 동력을 얻으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온전한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촛불에 참여했던 옛 새누리당 지지층, 상식의 힘을 믿는 보수층, 탄핵에 동의한 보수 정치세력까지 아우를 수 있는 합의의 정치를 선언해야 한다. 대의제 정치가 엉망이더라도 그것을 복원하는 것이 정치력이다. 촛불민주주의가 아니라 수식어 없는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 서로가 상대의 길을 가로막기만 할 뿐 아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설사 성에 차지 않더라도 다만 몇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진정하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대통령밖에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 혁명적인 과업을 시도해볼 기회를 가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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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법무장관을 임명했다. 놀란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지금의 상황에서 임명을 하든 안 하든 어차피 독이 든 두 개의 잔이다. 임명과 철회 중 어느 쪽을 선택해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지켜보는 심경은 그저 착잡하다. 국회의 시간도 지나고, 대통령의 시간도 지나고, 격돌의 시간이 다가왔다. 대통령과 조국 장관은 야당과 검찰과 언론과 여론을 상대로 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4중 격돌이다. 격돌의 내용은 무엇일까. 지난 한 달간의 소위 ‘조국 사태’에서 드러난 것들은 이렇다.

첫째, 정의와 상식이 충돌했다. 나는 그동안 여러 차례 ‘386’의 유통기한은 끝났다고 지적해왔지만, 이제는 완벽하게 끝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역사에서 386의 기여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들의 한계도 뚜렷하다. 역사에 기여가 있다고 해서 권력과 정당성을 독점하는 것은 끝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386에 대한 반감은 커져오고 있었는데, 그 얼마 남지 않은 정당성은 이번에 탈탈 털어서 모두 써버렸고, 부채까지 생겼다. 그 정도 의혹이 불거졌으면 일단 사퇴하고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는 상식과 일단 장관이 되어서 의혹을 해소해가며 검찰개혁을 완수하겠다는 386 특유의 정의가 충돌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앞으로 한국 정치에서 386의 정의에 가산점을 줄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던 제자 한 명이 툭 내뱉은 말을 잊지 못한다. “결국 좌우가 아니라 위아래가 문제였군요.”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청와대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둘째, 2019년의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가 충돌했다. 이명박 정부의 문제가 허황한 장밋빛 미래로 기만하는 것이었다면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문제는 과거를 돌아보는 회고벽이다. 박근혜 정부의 시선은 1970년대에 고정되었다. 대통령의 부친이 대통령이었던 그 시절의 사고방식, 문화, 정책, 관행, 그리고 그 시절 이후 누가 배신자였는지 아니었는지에 이르기까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은 386이 20대였던 1980년대부터 시작해서 아직까지도 완수하지 못한 개혁을 바라보고 있다. 그 스스로도 남들과 똑같은 시대를 살아왔고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흠결을 몸에 묻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1980년대의 상징과도 같은 후보자와, 그 후보자를 질타하며 1970년대로 돌아가기를 기대하는 일부 청문위원들을 2019년의 한 화면에서 보는 것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독재에 충실히 복무하며 공안검사로 살아왔던 야당 대표가 후보자의 사노맹 경력을 공격하며 자신이 담당검사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장면과, 똑같이 검사 출신이면서 탄핵무효를 외치는 야당 의원이 후보자가 제출한 부실한 자료를 찢어버리는 장면은 여야 어디에도 1980년대 이후의 세상은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소위 ‘조국 사태’ 한 달 동안 민주당 지지율은 3% 남짓 떨어졌고,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1% 남짓 올랐다. 조국 후보자를 임명하면 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의 예상이 과연 맞을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설사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한국당이 설 자리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동안 한국당이 1970년대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를 말해왔다면 흔들린 민심은 그들의 몫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이다.

셋째, 꽃과 뿌리의 충돌이다. 화분을 오래 키워본 사람은 안다. 겉으로는 아직 꽃이 화려한데 뿌리는 텅 비어버린 화분이 있음을. 꽃은 조만간 떨어지고 화분은 말라죽는다. 유난히 정의로워 보였고 타인의 불의를 서슴지 않고 지적해왔던 조국 장관에게서 여러 건의 편법과 불공정의 혐의가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불법 여부와 상관없이 더 크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지배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 그의 혐의를 조금이라도 나눠 갖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돈이나 인맥을 동원해서 자녀의 스펙을 도와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지 않으니까 하지 않은 사람들은 한국의 상층 중에 얼마나 될까? 미국에서 낳거나 조기유학시킨 자녀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도록 방조하면서 만에 하나 보험 드는 심정을 잠깐이라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입으로는 국민을 위하고 국가를 위한다면서 뿌리는 이미 이 땅을 떠나버린 소위 지도층은 얼마나 많을까? 꽃이 뿌리를 기만하고 뿌리가 꽃을 배신했다.

격돌의 시간이 왔다. 민주화 이후 여러 정부의 경험을 보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민주화 세대의 특권을 잊어버리고 좌우가 아닌 위아래를 봐야 한다. 권력기관 개혁과 더불어 미래를 선점해야 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지금 대한민국에서 미래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무주공산이다. 힘세고 돈 많은 사람일수록 삼가고 나라의 뿌리에 투자를 해야 한다. 화분이 시들려고 하는 순간에 지금껏 싸우기만 하던 이 나라의 상층은 자기 몫만 챙겨 떠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한단 말인가.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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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무역분쟁이 첨예해지면서 점점 도드라지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기업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요즘 무역분쟁 관련 언론보도를 보면 조금씩 희망적인 소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앞으로 1년 정도면 우리 기술력으로 이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오히려 피해는 일본의 수출 기업에 돌아갈 것이라는 전망이 대표적이다. 관련 기술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실현 가능성을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큰 피해를 입을 줄 알았던 우리 대기업들이 이미 상당량의 재고를 확보해 놓았다든가 혹은 일본이 아닌 제3국으로부터 대체 수입원을 확보했다든가 하는 소식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우리의 글로벌 기업들이 위기에 빠질 뻔한 나라를 구해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여기서 잠시 무역분쟁 이전으로 돌아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위 10대 재벌 중 2016년 국정농단 청문회에 불려나오지 않은 그룹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재벌에 비판을 쏟아부었다. 강력한 처벌과 재벌 개혁, 더 나아가 재벌 해체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서 대기업, 특히 재벌은 때때로 모든 악의 근원처럼 비판받는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재벌은 나라를 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이제 차분하게 물을 때가 되었다. 우리에게 재벌은 무엇인가. 무엇이 재벌의 진짜 얼굴인가. 우리의 기업정책은 어디로 가야 하나.

정치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예측 가능하고 생산적인 국가·기업 관계를 설정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견실한 성장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견실한 성장이 없으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진다. 과거 세계 여러 나라의 국가·기업 관계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다. 한국은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가 산업정책을 통해 기업을 이끌어 나가고 금융정책으로 이를 뒷받침하며 수출에 매진하는 발전국가체제였다면, 미국 같은 나라는 기업이 무엇을 하든 자유롭게 내버려두되 몇 가지 시장의 규칙을 어기면 엄하게 처벌하는 규제국가체제였다. 한국에서 과거의 국가·기업 관계는 1987년을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 후 30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무엇이 시장의 질서인지 알 수 없는 ‘제도의 공백’ 상태를 이어왔다. 1987년이 기점인 것은 민주화 원년이라서가 아니라 그해 처음으로 재벌이 제2금융권 계열사를 통해 금융에 대한 국가의 지배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고(故) 정주영 회장이 1992년 대선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국가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업에 대한 국가의 실질적 견제로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는 공정거래법상 출자총액제한제도가 1987년에 도입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 후 규제국가체제로 이행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제3의 어떤 질서를 만들어내지도 못한 채 지금까지 왔다. 혼돈의 시장에서 기업은 규모를 키워갔고 그중 일부는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섰다. 정치는 기업의 권력을 인정하거나(노무현 정부),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대가로 기업을 사적으로 이용하거나(이명박 정부), 기업을 협박하거나(박근혜 정부), 기업에 혼란스러운 시그널을 보내왔다(문재인 정부). 지나간 정부들의 기업정책은 그때마다 달라져왔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표가 필요할 때는 반기업 정서에 기대 기업을 적대시하고 경제가 어려울 때는 기업에 손을 내민다는 점이다. 그러니 기업은 살아있는 권력에 머리를 숙이지만 속으로는 비웃는다. 문제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정치도 기업도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대기업, 특히 재벌에 대한 비판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배구조 문제와 만나게 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대중은 재벌에 대한 반감을 거두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문제는 현실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원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들이 하는 어떤 것도 인정할 수 없다는 근본주의적 태도와 글로벌 대기업에 대한 엄청난 의존도가 더 이상 공존할 수는 없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가·기업 관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지 못하고 처벌과 의존만을 번갈아 해왔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는 직무유기 상태이다. 정치가 먼저 실용주의적 자세로 전환해야 한다. 지배구조 문제를 장기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그 밖의 영역에서 기업이 꼭 지켜야 할 시장친화적 규칙들을 확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영역에서는 기업의 혁신을 총력으로 지원해야 한다. 정치가 혼돈의 시장을 계속해서 방치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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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아베 정부의 계산된 공격은 아프다. 누군가는 등에 칼을 꽂는 행위라고도 했다. 동의한다. 일본은 분명히 선을 넘었다. 물론 일본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한국이 계속해서 일본을 자극했고 거듭된 대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을 넘어 갈등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것은 일본이다. 분노한 국민들은 일본 여행을 취소하고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많은 이들은 외교의 실패를 지적하기도 한다. 도대체 이 지경이 되도록 우리의 외교라인은 무엇을 했느냐는 질책이다.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잘 언급되지 않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여오다가 이제 외부로 드러나기 시작한 우리의 취약성이다. 등에 칼을 맞았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등을 보여주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드러낸 취약성이 무엇이었기에 그들은 과감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나.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일본의 대(對) 한국 수출 규제와 관련한 발언을 하는동안 김상조 정책실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1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굳은 표정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김기남 기자

일본이 이번에 수출규제 목록에 올린 것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에칭가스 이렇게 세 가지이다. 하나같이 우리의 주력산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수적인 부품들이다. 파이낸셜타임스의 분석에 따르면 2018년 한국의 수출 증가분 중에서 반도체가 차지한 것이 무려 92%이고 경상수지 흑자의 80% 이상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 분석을 내놓으면서 반도체 단일 품목에 대한 한국의 의존도는 마치 산유국의 석유 의존도 수준이라고 했다. 우리는 중동의 산유국을 운 좋은 나라라며 부러워하기는 할지언정 선진국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신문의 비유가 아픈 이유이다. 

반도체가 수출 증가의 거의 모든 것인데, 반도체 생산에 차질을 받게 된다면 우리 경제가 입을 타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낙관적으로 전망해서 7월21일 일본 참의원 선거 이후 사태가 빠르게 수습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여파가 최소 금년 4분기까지는 갈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전망인데, 당장 금년도 경제성장률의 하향 조정은 불가피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으로도 작년 1년 내내 소득주도성장 논란에 휩싸였다가 이제서야 간신히 진정 국면을 바라보던 문재인 정부는 또 하나의 악재에 부딪혔다. 게다가 내년 총선은 우울한 경제 성적표를 들고 치러야 할지 모른다는 돌발변수가 생겼다.

복잡하게 얽힌 글로벌 상품사슬과 반도체 부문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세계시장이 받을 파급효과도 만만치 않고 특히 한국에 수출하는 일본 기업도 간단치 않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하지만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2018년 GDP 대비 무역량은 일본이 35%, 한국이 83%이다. 우리는 일본보다 2.5배 정도 더 무역에 의존하는 나라이고, 따라서 외부 취약성도 더 크며, 무역전쟁에 돌입한다면 일본보다 우리가 입을 피해가 더 크다.

블룸버그는 또 하나의 아픈 현실을 지적한다.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실질적인 냉전관계를 유지해왔음이 경제 통계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국 수출의 7.5%만이 일본에 대한 것이고, 일본 수출의 5.8%만이 한국에 대한 것이다. 한국의 해외 직접투자 중 일본에 대한 것은 1.8%로 캐나다, 베트남, 인도에 못 미치고, 일본의 해외 직접투자 중 한국에 대한 것은 2.5%로 브라질, 태국, 싱가포르에 못 미친다. 다른 나라들은 어떤가. 한국, 일본과 더불어 2차대전 이후 제조업 강국으로 꼽히는 독일을 보자. 독일의 수출 대상국 1위에서 15위를 보면 미국이 8.6%, 중국이 7.1%, 러시아가 2%를 차지하는 것을 제외하면 수출의 50% 이상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엮여있다. 미국도 나프타 회원국인 캐나다 및 멕시코에 대한 수출이 30%를 차지한다. 그들은 서로 칼을 꽂을 수 없는 경제적 이유가 있는 반면 한국과 일본은 경우에 따라 칼을 꽂을 수도 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일본은 뜬금없이 전략물자의 북한 유출 가능성을 언급했다. 어떤 이들은 일본도 선거 때면 으레 북한 변수를 활용하곤 했다고 하지만, 6자회담 당사국 중 유일하게 동북아 정세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는 판을 바꿔보려는 의도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협력해야 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한·미·일동맹을 위해 우리는 미국의 처분만 기다리는 처지가 될 것이고, 결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세 가지가 우리의 취약성을 키웠고, 결국 등을 보였다. 하나같이 뻔히 알면서 오랫동안 바꾸지 못했던 것들이다. 산업구조 업그레이드, 무역 다변화, 동북아 협력관계 구축이다. 지나간 여러 정부가 5년짜리 정치적 득실만 계산하느라 손을 놓아버린 분야들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정부들이 알면서도 미뤄두었던 근본적·장기적 과제에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촛불로 탄생한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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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사고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2009년 5월23일 토요일 아침이었다. 조금은 느긋한 주말 기분에 젖어 침대에서 TV를 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알리는 자막이 떴던 순간의 기억이다. 평소에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단어였는데, 왜 이 말이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내가 학교에 몸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우리의 학교에는 선진국에 비해 안전 인프라가 한참 부족한 상태에서 연구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밤을 새우며 실험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일이 간혹 일어난다. 그 장면을 떠올린 것일까. 정당정치와 사회적 합의의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한국에서 정치개혁을 위해 단기필마로 분투하다가 마침내 목숨을 버린 그를 보며 폭발사고의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설명해야만 했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야만 했다. ‘논두렁 시계’ 같은 가짜 설명 말고, 정치개혁을 시도한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도록 하는 한국 정치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 땅에서 사회과학자라는 이름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나 한 사람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다음날 선배 정치학자 한 분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16명의 학자들이 1년간 노무현 정부를 연구했다. 1주기를 맞아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2011년 책이 출판되었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은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부검’이라고 하고 싶었다. 폭발사고를 연상케 한 섬광 같은 비극의 통보로부터 시작된 책의 취지에 걸맞은 제목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책은 다른 제목으로 출판되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원래의 제목으로 남아있다. 책을 세상에 내놓고도 마음의 짐은 쉽사리 덜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조용히 그를 애도한 나만의 방식이었다.

8년 만에 다시 열어보니, 이 책에 포함된 내 원고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 것 같다. 두 번째 시도를 할 기회가 있을 것인지, 그리고 기회가 있다면 그 시도는 또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는 첫 번째 시도의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우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시도를 할 기회가 있을 것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었는데, 무심한 세월이 흘러 어느새 그 두 번째 시도가 진행 중이니 그걸 지켜보는 심정은 복잡하다.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그때 나는 4대 개혁 입법의 실패로부터 세 개의 교훈을 도출했었다. 

첫째, 사회적 소수파 정권의 개혁 전략은 사회적 기득권 정권의 전략과 달라야 한다. 사회적 소수파 정권은 기업도, 언론도, 관료도 자기편으로 가지지 못한다. 기득권을 가진 야당은 굳이 ‘반격’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수파 정권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철옹성 안에 ‘주둔’하면서 적들이 지치고 분열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들의 철옹성은 안보와 성장이다. 자유한국당 지도부가 국회로 돌아와 ‘반격’하지 않고 종북타령이나 하면서 ‘주둔’하는 이유이다. 

둘째, 갈등의 전략을 고민하고 생태적 통제(ecological control)에서 벗어나야 한다. 갈등에는 야당을 상대로 하는 대외적 갈등과 당내에서 벌어지는 대내적 갈등이 있다. 철옹성 안에 주둔하기만 하는 적을 상대로 준비되지 않은 공격을 할 때마다 병사들은 지치고 마침내 대내적 갈등이 시작된다. 열린우리당이 여러 개의 계파로 갈라져 요란하게 갈등했다면, 지금의 민주당은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갈등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생태적 통제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상대에게 너무도 분명히 알려주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면 상대방은 내가 뻔히 밟아나갈 길목만 차단하면 쉽게 나를 통제할 수 있다. 과거 한나라당은 4대 개혁 입법의 본질에 대해 아무런 정면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장외집회를 이어가면서 경제를 망가뜨리고 북한에 종속된다는 거짓 선동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결국은 경제와 안보라는 길목을 거쳐가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지지세력을 찾을 수 있는 정책을 먼저 해야 한다. 진보정부가 하고자 하는 일들은 대부분 공공성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꼭 필요한 일이지만, 문제는 공공성은 공공의 이해에 봉사하지 개인의 이해에 봉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지세력은 찾기 힘들고 반대세력은 쉽게 찾아진다. 개혁을 초창기에 하지 않으면 힘이 빠져 못한다는 말이 정말로 불변의 진리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탄탄한 지지세력을 조직해 나갈 수 있는 작은 정책부터 시작해서 임기 말에 돌이킬 수 없는 개혁을 이루는 것이 나은 전략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시도는 철저하게 전략적이어야 한다. 예측 가능한 개혁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냉정이 필요하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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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뜨면 경제정책이 논란거리지만, 길게 보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성장률은 25년째 하락 중이다. 그사이에 정권교체도 여러 번 있었고, 경제정책도 수없이 바뀌었다. 그래도 백약이 무효로 25년째 하락 중이다. 그러니 경제정책 가지고 논쟁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 경제가 어렵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지금 정도의 논쟁으로는 답이 안 나올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는 운 좋게도 제조업 시대의 성장모델에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머리카락이 쭈뼛해진다. 제1, 제2 금융권과 국민투자기금 등 국내의 가용한 자금이란 자금은 죄다 끌어다 썼고, 대일청구권 자금과 베트남전쟁 참전을 통해 얻은 자원은 물론 불과 몇 년 사이에 세계 최고 수준의 외채 대국이 되었다. 실패하면 온 나라가 쪽박을 찰 수밖에 없는 일대 도박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성공할 가능성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도박에 ‘올인’했는데, 기적적으로 그 판을 휩쓸어버린 것이다. 그 기적을 뒷받침한 정치사회적 기반은 유신이라는 암흑이었다. 아예 반론이 나올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놓고 도박을 벌인 셈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1987년 이후 유신이라는 암흑은 제거되었지만 그 대가는 성장을 뒷받침할 정치사회적 기반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반론이 나올 수 없는 정치는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세상이 되었으니 합의가 있어야 한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은 사회적 연대를 강화해나갈 절호의 기회를 가졌지만 불행히도 임금인상 투쟁에 매몰되었고, 1997년의 경험과 그 후의 정치상황은 그들을 비타협의 좁은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장기적 성장동력은 꺼져감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성장률은 아직도 높은 편이니 정부와 정치권은 근본적 합의를 만들기보다는 정책에 대한 불신만 번갈아 부추기며 정권 싸움에 몰두해왔다. 그렇게 40년이 지났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온 국민이 새로운 성장의 기반을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제조업 시대 성공의 열매를 나눠 먹는 지대추구만 해온 세월이다. 모두가 공범이다.

최근 모빌리티산업을 둘러싸고 펼쳐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과 그러거나 말거나 벌어지는 정치권의 무의미한 소동 퍼레이드를 지켜보면서 착잡할 따름이다. 택시산업이 지금까지처럼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카카오 카풀과 타다가 퇴출되면 택시는 무사할 수 있을까? 우버는? 리프트는? 이지 택시는? 커브는? 디디는? 마치 한국만 스마트폰 안 쓴다는 얘기처럼 말도 안되지만, 이들 모두가 한국 시장에는 얼씬도 못하게 만든다고 치자. 그럼 자율주행 자동차는? 택시업계를 위해 자율주행 기술을 연구하지 못하게 해야 하나? 다른 한편으로 택시기사들의 힘든 현실을 외면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새로운 기술의 영역에서 산업구조 변화가 연착륙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기반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정치가 할 일이다. 지난 40년간 우려먹은 제조업 부문의 성공은 이제 제로성장을 바라보는 지경에 와있다. 누누이 강조하거니와, 4차 산업혁명은 사회혁신 프로그램이다. 일자리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의 일자리를 업그레이드하는 기술로 사용할 것인지를 디자인하는 것이 대규모 기술변동의 시기를 맞아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정책을 만들기에 따라서는 택시도 얼마든지 새로운 모빌리티산업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도 있다. 소비자가 택시를 가장 신뢰할 수 있도록 안전점검을 강화하고, 택시만의 앱을 만들어 카풀보다 더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공공데이터를 제공하고, 개별 소비자의 동선에 맞추어 대중교통과 택시를 연계하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신규 사업자의 진입 덕분에 모빌리티산업의 시장규모는 더 커지고, 택시기사들은 더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더 많은 승객을 태우고, 승객은 경쟁의 효율을 누리며, 관련 산업은 발전하는 선순환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막상 현실은 정반대다. 정치인들은 지역구 이해관계에 따라 관련 법안에 의견을 달리하고, 그나마 간신히 면피만 해놓은 채 국민들이 호응하지도 않는 집회를 이어간다며 가는 곳마다 소동을 벌인다. 여의도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합의의 정치라고 많은 이들이 지적한다. 경제성장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도 합의이다. 새로운 기술의 영역에서만이라도 장기적 설계를 하고, 누가 무엇을 부담하고 무엇을 양보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실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합의해야 한다. 초당파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치적 이해득실 때문에 오늘의 합의는 못한다 치더라도, 합의의 미래조차 만들지 못한다면 그들은 왜 존재하는가.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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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치 그만둘래.” 알고 지내는 정치인들로부터 가끔 듣게 되는 말이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것으로 들린다. 안타까운 것은 정치를 계속해주었으면 싶은 정치인들 중에서 정치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점점 더 자주 듣게 된다는 점이다. 당장 몇몇 사람들 얼굴이 떠오르는데, 오늘은 자유한국당 이야기를 할 생각이어서 원래 그 당 출신 중에 꼽자면 얼마 전 정계를 은퇴하고 스타트업으로 제2의 인생을 살겠다고 선언한 남경필 전 경기지사가 떠오른다. 나는 그와 정치적 견해를 온전히 같이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가 꽤 괜찮은 정치인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한계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는 정치의 의미와 그 부끄러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아주 멈춘 적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좋은 정치인일수록 정치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정치를 왜 하는 것일까? 내가 지켜본 정치인의 삶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일정은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회의는 무의미하기 일쑤이며,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가짜 신념이 진심인 척해야 하고, 운 없으면 밤 늦은 시간 술 취한 시민에게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적어도 지금 한국의 정치는 자신의 행동이 가지는 의미와 그 부끄러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아주 멈추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내면의 고통을 강요한다. 괜찮은 정치인일수록 정치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것은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가 하면 그런 사유를 아주 멈춰버린,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사유를 단 한 번도 시작해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정치인들도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정치를 더 열심히 한다. 내면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가능한 일일 것이다. 10여년 전 나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쓴 책에서 오늘날 한국인들이 겪는 마음의 병을 ‘정체성 폐쇄(identity foreclosure)’라고 진단한 적이 있다. 학벌경쟁의 최정상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조차 자신이 왜 열심히 공부했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입학한 후에도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공부해서 무엇을 하려는지, 왜 그것을 하려는지 모른다. 의미가 없는데도 안 하면 불안하니까 계속 열심히 한다. 입시공부하느라 나는 누구인지, 내가 욕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닫혀버린 것이다. 정체성 폐쇄는 미처 자아가 성숙하기 이전부터 부모가 너는 이다음에 커서 판사가 되어야 한다, 의사가 되어야 한다 같은 목표를 계속해서 주입하면 흔히 나타난다. 나만의 정체성이 형성될 기회가 미리 차단되어 버리는 것이다. 정치의 의미와 그 부끄러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한 번도 시작해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정치인들도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정치인 중에서 정체성 폐쇄의 대표적 사례를 꼽으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당대표 시절에도, 대선후보 시절에도,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는 자신이 왜 정치를 하는지, 아버지 이외에 대통령에게 주어진 막중한 공적인 책무가 무엇인지 사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 제한된 인식의 틀 안에서 직무를 수행하다가 탄핵당했다. 영어의 몸이 된 지금 그는 매우 혼란스러울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인식의 지평 속에서 자신이 왜 갇혀있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정치시평이라는 것을 쓰다보면 집권여당의 책임에 먼저 화살을 돌리게 되는 것이 순리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자유한국당의 폭주는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어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주말 한국당의 광화문 집회에서 나온 발언들을 보자. “좌파천국” “김정은의 대변인” “대북 제재 풀어달라고 구걸” “베네수엘라행 특급 열차” “종북 굴욕외교” 같은 것들이다. 현 정부의 정책에 잘못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정책들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그것이 건강한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한국당은 정말로 이 나라에 평화체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언어의 천박함은 둘째 치고 제1야당으로서의 어떠한 책임감도 찾아볼 수 없다. 

100년 전 이 땅에서 3·1운동이 있기 한 달 전,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강연을 통해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사람만이 정치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설파했다. 종북 타령이 진짜로 그들의 신념인지도 확실치 않지만, 그 책임윤리의 완벽한 결여에 이르면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그래도 그들은 열심히 한다. 정체성 폐쇄이다. 자신이 하는 행동의 부끄러움에 대해 한 번도 사유를 시작해 본 적이 없는 그들의 정체성 폐쇄는 우리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 허탈한 것은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왜 그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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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흥미로운 논문 두 편을 소개할까 한다. 하나는 2016년 말 ‘시민과 세계’에 실린 신진욱 중앙대 교수의 <한국에서 결손민주주의의 심화와 ‘촛불’의 시민정치>라는 논문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달 ‘한국사회학’에 실린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세대, 계급, 위계: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라는 논문이다. 신진욱의 논문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말에 이미 결손민주주의 개념을 통해 사태의 원인과 향후 전망을 발 빠르게 분석해낸 통찰력이 돋보이고, 이철승의 논문은 필자가 평소 ‘386세대의 유통기한 만료 선언’이라고 부르던 현상과 거의 정확하게 같은 문제의식을 정교화한 것이어서 반가웠다. 두 논문을 교차해서 보면 오늘날 한국 정치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대선불복인가요?” 2013년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정치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칼이다. 국가정보원과 군의 대선개입 의혹을 문제 삼으려 하면 새누리당은 대선불복 프레임으로 모든 비판을 억눌렀다. 황우여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역대 어느 대선에서도 선거사범을 문제 삼아 대선불복의 길을 걸은 일이 없다”고 했고,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대선불복의 유혹은 악마가 야당에게 내미는 손길”이라고 했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것은 위헌이고, 선거법 위반이고, 국정원법 위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대선불복인가요?” 이 한마디에 변변히 힘 한 번 못 써보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신진욱의 논문이 말해주는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가 점점 더 퇴행하여 여러 결함을 가진 ‘결손민주주의’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흔히 1987년은 민주주의 원년으로 불린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87년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직선제라는 ‘제도’를 되찾은 것이었다. 그런데 특정 제도가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민주주의를 판별한다면 민주주의는 ‘없는 것’ 혹은 ‘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마치 컴퓨터의 알고리즘처럼 0과 1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1987년 이전에는 0(권위주의), 87년 이후에는 1(민주주의).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세력은 민주주의적 선거제도라는 껍데기만을 뒤집어쓴 채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을 모두 훼손한다. 언론장악, 민간인 사찰, 정치적 의사표현에 대한 검열과 처벌, 마침내는 선출되지 않은 비선실세에 대한 권력 위임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아있을 뿐 모두 훼손되었지만 선거체제라고 하는 바로 그 껍데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애매해진다. “대선불복인가요?” 이 한마디에 야당이 힘을 쓸 수 없었던 이유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민주주의의 내용적 요소 중 정치적 기본권과 시민적 자유에서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문제의 근원인 수평적 책임성, 즉 권력의 상호견제에 있어서는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박상훈의 책 <청와대 정부>가 울림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철승은 “386세대가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에 대항하여 시민사회로부터 국가를 점유해가는 과정”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386세대는 “다른 세대에 비해 더 내적으로 응집된 ‘세대의 권력자원’을 시민사회, 시장, 국가를 가로질러 수립”했다. 그들의 권력은 이제 시작이다. 언론 부문에서 이 현상에 일찌감치 주목해온 ‘주간경향’ 정용인 기자가 ‘장기 386’이라고 부르는 현상이기도 하다. 여러 실증자료를 통해 근거를 제시한 뒤 이철승은 ‘세대 간 형평성의 정치’를 촉구한다. 나 또한 386세대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뜨거웠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30년 전 일이고, 386세대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던 1990년대 이후 20년에 걸쳐 보상받았다. 젊은 세대 일부의 극우화 경향이 처음 관찰되던 몇 년 전, 나는 이것이 ‘386세대의 유통기한 만료 선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고 해서 도덕적 우위와 정치적 정당성을 독점하려는 태도를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386세대의 자기절제 없이 젊은 세대의 우경화를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두 논문을 교차하면 한국 정치의 보이지 않는 난제가 보이기 시작한다. 386세대는 결손민주주의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직선제 쟁취라는 체제변화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을 채우는 데에는 지지부진했던 386세대에게 남아있는 소명은 무엇이고, 그들의 아성에 들어오지 못했던 젊은 세대와 여성에게 넘겨야 할 소명은 무엇인지 구분하는 자기 절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쟁취하는 민주주의’가 아닌 ‘실천하는 민주주의’를 내면화할 수 있을 것인가. 30년 만에, 그들은 다시 한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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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일이다. 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들의 사회모델 비교연구를 위해 몇몇 나라를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의료, 연금, 복지 등을 담당하는 관료를 만났다. 프랑스는 GDP 대비 공적사회지출이 30%를 넘어서 OECD 1~2위를 다투고, 우리에 비하면 거의 세 배 가까이 된다. 문제는 프랑스의 재정적자가 30년 넘게 누적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적사회지출 30위권 바깥의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흥청망청으로 보이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재정적자가 너무 쌓이고 있는 것 아닌가요? 반면 복지지출은 과도해 보이는데?” 그가 곤혹스러워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 즉각 답이 돌아왔다. “프랑스에는 사회적 최저선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동지들이 사회적 최저선 미만으로 살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그들을 위한 지출을 줄이는 건 처음부터 고려사항이 될 수 없습니다. 재정적자는 다른 방법으로 풀어야 해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지들이라고? 처음부터 고려사항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관료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이런 말이 나오는 배경에는 프랑스의 역사와 공유된 사회적 가치가 있다. 공화국을 함께 만들었다는 자부심 말이다.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으로 흔히 자유, 평등, 박애를 든다. 앞의 두 단어는 괜찮은데 ‘박애’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다. ‘박애’의 ‘박’은 한자의 ‘넓을 박(博)’인데, 이렇게 되면 박애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박사’라고 할 때의 ‘박’도 같은 글자인데, 박사는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전공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요즘은 ‘우애’라는 번역도 쓰는데, ‘박애’보다는 낫지만 이것도 ‘친구를 사랑한다’는 밋밋한 뜻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박애’의 원문은 프랑스어로 ‘fraternit’이고 영어로 옮기면 ‘fraternity’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동지애’ 혹은 좀 넓은 뜻으로 옮겨도 ‘형제애’가 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절대왕정을 무너뜨렸고, 오랜 기간의 역사적 간난신고를 거치며 공화정으로의 전환을 이루어낸다. 귀족과 성직자만 인간으로 대접받던 세상에서 모든 시민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세상으로의 전환은 세계사의 획기적인 변곡점이고, 목숨을 걸고 이 전환을 함께 만들어낸 사람들은 ‘동지’이고 ‘형제’이다. 그러니 그들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다. 이것이 공화국이다.

마침 위에 인용한 관료가 소속된 부서의 이름은 ‘보건연대부(Ministry of Health and Solidarity)’이다. 우리로 치면 복지부에 해당하지만, 그들의 관점은 공적사회지출이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복지’가 아니라 ‘동지들의 연대’를 유지하는 수단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작명이다. ‘자유, 평등, 동지애’는 1946년 프랑스 제4공화국 헌법에 처음 명시되었고, 1958년 채택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제5공화국 헌법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공화국의 핵심 가치이다.

이런 역사가 다른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에도 나와 있다. 임시헌장 1조는 민주공화국, 3조는 평등, 4조는 자유를 각각 명시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이 모두 담겨있는 셈이다. 마침 2월18일자 경향신문이 마련한 윤평중 교수와 김호기 교수의 대담은 이 점을 잘 상기시켜주었다. 두 학자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100년 전에 이미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전환을 이루었고 민주와 공화는 유신헌법이나 5공화국 헌법도 감히 지워버리지 못한 채 유지되어 온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이다.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수구적 퇴행의 늪으로 달려가고 있는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의 와중에 김진태, 김순례, 이종명 세 사람이 역사왜곡 전문가를 내세워 저지른 망언 파동이 큰 물의를 빚고 있다. 그들이 저지른 망언은 단순히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망언은 단순히 민주주의 역행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공화국, 즉 우리의 공동체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공화국이 있을 수 없었듯이,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공화국은 없다. 진보·보수가 다를 수 있고 정책에 대한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우리의 공동체 자체를 배신한 자는 더 이상 우리의 동지가 아니다. 알고도 정치적 이득을 위해 망언 소동을 일으켰다면 스스로의 후안무치에 부끄러워해야 하고, 몰라서 그랬다면 스스로의 무지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징계나 제명이 문제가 아니다. 공화국의 배신자들은 두 번 다시 우리 사회의 어떤 공적인 자리에도 설 수 없게 해야 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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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카콜라’와 ‘알릴레오’. 재미난 대결 구도이다. 두 채널의 특징과 향후 예상되는 정치적 파급력을 비교해보자. 우선 홍준표 전 대표가 유튜브 방송을 기획하고 상당한 정도로 선전해온 것은 괄목상대라 할 만하다. 그는 2011년 <나꼼수>에 출연했을 때만 해도 “이거 언제 방송되는 거냐”고 물을 정도로 뉴미디어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사람이다. 

홍카콜라가 많은 구독자와 조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홍 전 대표 특유의 입담도 작용했겠지만, 오프라인의 정치현실도 못지않게 중요했다고 봐야 한다. 온라인 공간은 종종 정치적인 균형추의 역할을 한다. 트위터의 정치적 영향력이 극대화되어 있었던 2011년을 전후해서 보수언론은 트위터가 좌파의 소굴이자 확증편향의 근거지라는 공격성 기사를 쏟아냈었다. 그러한 평가에 동의하지도 않지만, 설사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 이유는 그 당시 오프라인 세상이 우파의 소굴이자 여론호도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온라인은 한쪽으로 치우친 오프라인의 균형을 잡기 위해 반대쪽으로 이동한다. 당시 한나라당은 안상수 대표가 ‘디지털 전사 1만 양병설’을 주장할 정도로 온라인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그 결과 보수정치세력이 선택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금과 국가기관을 동원한 여론조작이었다. 당시에는 온라인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가 그리도 어려웠는데, 왜 지금 홍카콜라는 일정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이는가. 오프라인 세상이 반대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홍카콜라와 같은 우파 채널이 오프라인 세상의 균형을 잡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알릴레오(위)와 홍준표 자유한국당 전 대표의 TV홍카콜라(아래)

하지만 홍카콜라는 알릴레오의 등장과 함께 단번에 따라잡혔다. 알릴레오는 첫 방송 반나절 만에 홍카콜라가 3주 걸려 확보한 구독자 수의 두 배를 기록했고, 지금은 거의 세 배에 육박한다. 어찌 된 일일까. 홍카콜라는 나꼼수를 벤치마킹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 전 대표가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홍카콜라는 나꼼수를 따라하고 있다. 과거 나꼼수는 결집의 매체였다. 김어준, 정봉주, 주진우, 김용민이라는 걸출한 재담가들이 정치적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통렬한 풍자와 정치현상에 대한 분석, 때로는 음모론을 펼치는 자리였다. 그들의 입담이 워낙 재미있었기 때문에 나꼼수는 많은 구독자를 확보했지만, 결과적으로 선거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이미 민주당을 찍기로(혹은 당시 한나라당은 절대 찍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 사람들끼리 여는 축제였기 때문에 확장성이 적었다. 선거는 내 편의 신념을 더욱 강화해봤자 절대 이길 수 없다. 상대편 지지자나 부동층을 설득해서 내 편으로 데려와야 이긴다. 그런 의미에서 나꼼수가 선거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다. 그보다 훨씬 영향이 컸던 것은 리트윗을 통해 퍼져나간 인증샷 놀이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실제로 투표를 하고 있다는 증거는 사람들에게 투표장에 나갈 충분한 동기를 부여해주었기 때문이다. 인증샷 놀이에 실제 참여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남들이 인증샷 놀이 하는 것을 보기만 한 사람도 투표장에 나갈 확률이 몇 배로 뛰어올랐다. 홍카콜라가 나꼼수 모델을 따라하는 한, 이미 문재인 정부에 등을 돌리기로 마음을 정한 사람들에게 콜라처럼 속 시원한 방송이 될 수는 있겠지만 확장성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홍카콜라의 한계는 알릴레오의 장점이기도 하다. 홍카콜라가 저돌적 공격으로 파고든다면 알릴레오는 팩트에 근거한 차분한 담론을 만든다. 팩트를 위해 여론조사 전문가까지 고정 패널로 등판했다. 이런 구성은 홍카콜라의 저돌적 공격보다 합리적인 중도층에게는 훨씬 큰 확장성을 갖는다. 홍카콜라가 공격수이고 알릴레오가 수비수처럼 보이지만, 내 편을 더 많이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알릴레오가 더 위협적이다. 거꾸로 홍카콜라의 장점을 알릴레오는 갖추지 못했다. 무엇보다 알릴레오는 ‘노잼’이다. 예능 프로그램을 연상케 하는 빠른 편집으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홍카콜라에 비하면 알릴레오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같은 느낌이다. 그동안 방송에서 쌓은 유시민 이사장의 내공으로 아직은 버티고 있지만, 노잼 이미지가 굳어지면 어려워질 것이다. 분량을 줄이고 편수를 늘리고 짧은 바이럴을 만들어내야 한다. 다른 한편, 알릴레오가 성공할수록 유 이사장의 정치적 고민은 깊어질 것이다. 그가 본인 말대로 대선에 나오지 않는다면 알릴레오는 중도층을 대거 끌어오는 킹메이커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인이 대선 출마를 결정한다면 알릴레오는 불가피하게 홍보 채널이 될 수밖에 없고 확장성은 줄어들 것이다.

확장하지 못하는 결집의 홍카콜라와 내 것이 될 수 없는 확장의 알릴레오. 눈여겨볼 만한 정치실험이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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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크로스 논란이 한창이다. 문재인 대통령 국정수행에 대한 부정평가가 처음으로 긍정평가보다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비판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사실인데, 다른 한편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설 이전에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이후 여론지형은 매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해야 하나.

첫째, 성장담론을 장악해야 한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성장론자들이다. 안보나 성장보다 인권이나 환경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탈물질주의자의 비중이 다른 OECD 국가들에서 보통 절반 가까이 나오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15% 내외에 그친다. 성장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지 못하면 지지는 없다. 대선이 끝날 때마다 어느 후보에게 투표했는지에 따라 그들이 중시하는 정책을 분석해보면 확실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자유한국당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들이 원하는 정책은 딱 두 가지, 안보와 성장이다. 다른 건 시원치 않아도 이 두 가지만 잘할 것처럼 보이면 지지해준다.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들이 중시하는 정책은 열 가지쯤으로 나뉜다. 그런데 그중 한두 가지만 못하면 지지를 철회한다. 대학입시로 치면 한국당은 국·영·수만 잘하면 되는데 민주당은 전 과목을 잘해야 하는 꼴이다. 억울하겠지만 그게 현실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전 과목을 시험 치더라도 국·영·수의 배점이 크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꼽은 정책에서 경제성장이 거의 50%로 경제민주화나 복지의 3배 가까이 된다. 그러니 성장담론을 장악하지 못하면 안정적 지지는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7일 “새로운 경제정책은 경제·사회의 수용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다. 당장 성과가 나지 않아도 된다. 장기적 성장을 가능하게 할 인프라가 착착 놓여간다는 희망을 공유할 수 있으면 된다.

(출처:경향신문DB)

둘째, 고용으로 평가받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했다는 일자리 상황판이 아직도 있다면 고용노동부 장관실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기술 변화와 인구 변화 양쪽을 모두 고려할 때 고용에서 단기적인 성과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야말로 ‘꿀잼’이다. 자기들이 집권을 했을 때도 못했던 일이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랴. 분기별·월별 통계까지 들이대면서 호통을 쳐대기에 딱 좋고 반론을 해봐야 변명처럼 들린다. 진정성은 높이 사고 싶으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 감당할 필요가 없는 리스크까지 혼자 감당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의 고용노동정책에 대한 세대별 평가를 보면 그나마 20대의 긍정평가가 가장 높다. 취업난의 일차적 당사자들은 생각보다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반면 이미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선 기성세대가 고용노동정책을 그 근거로 들고 있는 양상에 가깝다. 단기 성과의 책임을 대통령이 지는 구도가 아니라, 세계적인 고용 한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장기 대책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구도로 전환해야 한다.

(출처:경향신문DB)

셋째, 20대의 논리를 이해해야 한다. 20대 남성의 지지율이 최저로 떨어져서 데드 크로스를 주도했으며, 그것은 젠더갈등 때문이라고들 한다. 틀렸다. 20대에서 젠더 갭이 25%포인트 크기로 벌어진 것은 이미 평창 동계올림픽 때부터였다.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책은 무엇인가? 친남성 정책인가? 젠더갈등이 원인이라면 친남성 정책은 여성 지지율을 떨어뜨릴 것 아닌가? 사태의 원인을 젠더갈등으로 파악하는 것은 처음부터 답이 없는 진단이다. 20대는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던 전혀 새로운 종류의 유권자 집단이다. 그들은 기성세대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한다. 한 예로 부동산 정책에 대한 반응을 보면 뜻밖에도 아직 부동산과 큰 관련이 없을 것 같은 20대가 크게 반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성세대의 관점은 집값을 낮추어서 서민과 신혼부부의 집 걱정을 덜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은 정책이라는 것이다. 20대의 관점은 이런 것이다. “일자리는 어차피 없다. 그런데 투자는 왜 못하게 하나?” “자기들은 부동산으로 한 밑천 장만했으면서.” “어차피 안정적 일자리도 없는 시대인데 우리는 ‘투자하는 인간’으로 살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다.” 고성장 시대의 정의가 저성장 시대만을 살아온 20대에게는 불의로 비치는 것이다. 오래된 정의와 새로운 정의의 교차지점을 수구 정치 논리가 파고드는 것이 젠더갈등의 한 가지 기반이다. 제로섬의 젠더갈등이 아니라 다각화된 전선에서 정책을 펴야 한다.

내년 한 해가 문재인 정부의 성패를 가릴 승부의 해가 될 것이다. 2020년은 총선 정국에 휘말릴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 총선 이후는 예측불허이다. 집권 마지막 해인 2021년에 큰 변화를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새해에는 골든 크로스 소식을 접하고 싶다는 덕담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자.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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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 2년 전 이 정치시평 칼럼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어떻게 증오가 극우정치를 낳고 있는지를 검토한 바 있다(‘증오로 하나 된 세계’ 경향신문 2017년 1월2일자). 그 칼럼의 제일 끝에는 “1000만 촛불로 열린 광장의 결실이 대선 결과로만 판단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광기의 시대에도 온전히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이성과 관용의 제도화가 그 결실이 되어야 한다”라고 썼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난 2년간 이성과 관용의 제도화는 그다지 진전을 보지 못했고, 한국 사회에서 증오 혹은 혐오는 위험수위를 넘나들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문제가 되어왔던 몇몇 혐오 사이트에 이어 기어코 폭행사건으로까지 이어진 여혐과 남혐, PC방 알바생이나 폐지 줍는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무차별 살인에 이르기까지 이제 우리 사회에서 혐오는 일상이 되었다.

혐오는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는 사회자본이 낮아지고,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며, 부패가 늘어나고, 정부효과성이 낮아지고, 양극화가 심해진다는 연구들이 쌓여있다. 혐오는 방관자를 포함해 모두를 패배자로 만든다.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인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혐오의 공급과 수용에 대한 모델을 내놓은 바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정치꾼들이 상대 정파를 공격하는 흔한 방법은 그들의 정책으로부터 혜택을 보는 소수집단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다(혐오의 공급). 정치꾼이란 직업정치인뿐 아니라 주목받고 싶어하는 정치지망생, 선정적 미디어 등을 모두 포함한다. 이때 그 부추기는 이야기가 사실일 필요는 없다.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가 말했듯이, 선동의 효과는 진실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반복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이 이야기들이 사실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할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에 반복될수록 더 많이 받아들인다(혐오의 수용).

진보정부의 분배지향적 정책에 반대하고 싶은 보수정치세력은 가난한 사람들을 나태하고 게으르고 남에게 얻어먹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며 혐오를 부추긴다. 보수정부의 성장위주 정책에 반대하고 싶은 진보정치세력은 부자들을 욕심 많고 탐욕적이고 편법으로 축재했다며 혐오를 부추긴다. 올바른 정책을 뚜벅뚜벅 실천하면 언젠가 국민들이 알아줄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정책입안자의 탁상공론이 될 공산이 크다. 올바른 정책을 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혐오를 부추기는 이야기를 퍼뜨릴 인센티브가 그만큼 더 커지기 때문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인권을 중시하는 정부에서 혐오가 늘어나는 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그들을 혐오의 표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노예해방 이후 오히려 흑인의 이미지가 ‘멍청한 일꾼’에서 ‘폭도’나 ‘강간범’으로 바뀌었다.

근거 없는 혐오를 일단 수용한 가해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오히려 자신이 원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아내를 때리거나 사람을 죽여놓고는 남들이 자신을 공격하거나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로서는 가해가 아니라 복수인 셈이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묻지마 살인에서도 비슷한 동기들이 확인된 바 있다. 공격당했다는 심리가 방어본능을 일으키고 이것은 혐오와 폭력으로 이어지는데, 그 첫 번째 피해자는 가장 손쉬운 희생양인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공격당했다는 심리를 느끼는 것 자체가 스스로도 사회적 약자라는 뜻이다. 결국 혐오는 약자가 약자를 공격하도록 만든다. 최근 문제가 되는 여혐과 남혐이 주로 세대적 약자인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일베에 대한 김학준의 통찰력 있는 연구는 그들의 혐오가 가장 체제순응적이라고 말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분노는 표출되는 대신 응어리져 사적 공간으로 침잠”하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 평범 내러티브를 내면화하여 현실적인 순응을 강조하는 것이 일베적 멘털리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혐오는 어차피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잘난 척 나대지 말라는 경고(민주화운동 혐오)이거나, 나는 이 암담한 현실에 순응할 테니 대신 아무도 열외는 없다는 주장(여성이나 외국인 노동자 혐오)의 형태로 나타난다.

혐오는 정치 프로젝트이다. 정치꾼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죄 없는 소수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든다. 약자끼리 싸우면서 사악한 정치꾼들의 목적에 봉사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세상에서 서로를 미워한다. 언제까지? 더는 그 정치적 목적이 필요 없어질 때까지. 서로 혐오함으로써 누가 뒤에서 미소 짓고 있는지 눈여겨볼 일이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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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 5·1경기장에 운집한 15만 북한 주민 앞에서 남한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대중연설을 했다. 가슴 뭉클한 장면이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3차 남북정상회담은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장 한 달 이상 내리막길을 걷던 지지율은 10% 이상 급반등해서 60%대를 회복했다. 비판자들은 지지율 하락을 가져왔던 경제정책의 실패를 평화 프레임으로 덮으려 한다고 하고, 지지자들은 역시 문 대통령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어느 쪽이 맞을까.

여기서 퀴즈 하나. 세대별로 보면, 남북정상회담은 어느 세대의 지지율을 가장 크게 견인했을까? 고령층은 반공보수가 주된 이념이고 평화 프레임은 젊은층에 잘 먹힐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답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답은 60대 이상이다. 지지율 최저점인 9월 2주에 32% 지지율로 가장 박한 점수를 줬던 60대 이상은 3차 정상회담 직후인 9월 3주에는 58% 지지율로 급반등해서 50대보다도 훨씬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이하 한국갤럽 자료). 지지율 절대값으로만 보면 20~40대가 더 높지만, 정상회담 직전과 직후의 반등률로는 60대 이상이 압도적으로 높다. 숫자가 속내를 말해주지는 않지만, 미루어 짐작한다면 분단의 고통을 몸으로 느끼는 유일한 세대라는 점, 그리고 문 대통령 연설 직전에 있었던 소위 ‘대집단체조’와 같은 국가주의적 스펙터클에 익숙한 세대라는 점 등이 작용했으리라.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밤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뒤 평양 시민들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이 사례에서 보듯이 문재인 정부의 지지 기반은 상당히 복잡하다. 박근혜 정부 때는 몹시 단순했다. 고령, 영남, 보수, 새누리당 지지자, 주부 및 무직자면 대통령이 무슨 짓을 해도 무조건 지지, 그 반대로 갈수록 지지율 급락이었다. 문재인 정부 지지율도 앞선 모든 정부처럼 장기적으로는 하락추세이지만, 중간중간 반등하면서 완만하게 하락한다. 올해만 해도 평창올림픽 직전 남북단일팀 논란과 ‘평양올림픽 선동’으로 하락했던 지지율은 올림픽 개막 후 급반등했다. 최저임금 및 부동산 정책 논란으로 하락하던 지지율은 3차 정상회담 이후 또 급반등했다.

두 차례의 반등을 비교해보자. 평창올림픽 때는 2030세대가 급격하게 지지를 철회했다가 빠른 속도로 복귀했다. 이번에는 2030은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경제정책 논란으로 40대 이상이 지지를 철회하는 동안 그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이번에 세대별로 주목해야 할 것은 오히려 50대이다. 지난 14주 동안의 변화를 보면 50대는 최고점인 6월 2주 74% 지지에서 최저점인 9월 1주에는 38% 지지로 반토막이 났다. 회복국면에서도 50% 지지로 회복세가 가장 더디다. 앞서 말했듯이 오히려 60세 이상의 회복세가 가장 빠른 형국이다. 직업별로 보면 주목해야 할 것은 자영업자다. 평창올림픽 때도 이미 최저임금은 논란이 되고 있었지만, 자영업자층은 지지를 그리 많이 철회하지도 않았고 회복세도 비교적 빨랐다. 이번에는 6월 2주 76%에서 9월 1주 32%로 지지율이 가장 많이 빠졌고, 9월 3주 52%로 회복되긴 했지만 여전히 주부와 더불어 가장 지지가 낮은 집단이다. 두 번의 반등이 있었지만, 첫 번째 반등을 이끈 집단과 두 번째 반등을 이끈 집단은 상당히 다르다.

정치권에서는 지지층을 ‘집토끼’라 부르고 상대 당 지지층을 ‘산토끼’라 부른다고 들었다. 부동층은 ‘들토끼’라고도 한단다. 그런데 장기 추세를 보면 문재인 정부의 경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영원한 집토끼도 산토끼도 없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최근 몇 달만 보면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던 2030세대는 집토끼인 셈인데, 그들은 평창올림픽 직전 갑자기 가출해서 산토끼가 되었던 적이 있다. 반면 영원한 산토끼인 줄 알았던 60세 이상은 3차 정상회담 이후 갑자기 집에 들어왔다. 물론 언제 또 나갈지 알 수 없다. 그나마 안정적인 집토끼라면 직업별로는 화이트칼라와 학생, 계층별로는 중상층이다(일부의 착각과는 달리 계층별 지지율은 하층에서 꾸준히 가장 낮고 중산층과 상층에서 꾸준히 높다). 그 외의 거의 모든 집단은 집과 산을 번갈아 왔다갔다 한다. 모두가 들토끼인 셈인가.

경제정책 실패를 평화 프레임으로 덮었다는 비판은 틀렸다. 50대와 자영업자는 정상회담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60대 이상이 돌아왔다. 이제야 안심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지지자도 틀렸다. 집토끼가 별로 없다. 이런 현상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수시로 번갈아가며 집 나가는 토끼를 매번 잡으러 다닐 수 없다는 뜻이다. 다수의 국민들이 동의할 합리적이고 포용적인 지점에서 정치 균열을 만들고 그것을 중심으로 정책과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야 한다. 상대가 산에서 들로 내려오기 전에.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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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논란을 지켜보는 심정은 착잡했다. 노·사·언론 할 것 없이 입 달린 사람은 누구나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편의점 업주 등 소상공인들의 최저임금 불복종 운동은 평소 편의점을 드나들며 24시간 영업하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삶을 영위하는지 궁금해하던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공감을 얻는 분위기다. ‘을들의 전쟁’이라는, 씁쓸하지만 부인하기도 어려운 이름이 붙었고 결국 대통령 지지율은 12%포인트가 빠졌다.

이대로라면 최저임금 문제는 해법이 없을 것이다. 편의점 업주들이 나를 잡아가라고 나선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들을 처벌하면 정치사회는 절단날 것이고 처벌하지 않으면 최저임금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문제는 해법이 없는 일들이 최저임금뿐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동산, 교육, 증세, 통일비용, 난민 문제 등등 그 목록은 끝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주요 정책들은 최소 10년 이상의 연도별 시뮬레이션이 함께 나와야 한다. 우리 사회 갈등 사안의 상당수는 시간축을 길게 잡고 보면 전혀 다르게 보이는 문제들이다. 지금은 엄청난 비용을 치르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게 되었다고 후회할 사안들, 혹은 지금은 집단 간 이익다툼의 문제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상생의 문제인 경우들이다. 더구나 세계 최고의 고령화 속도를 감안할 때, 같은 정책이라도 지금의 의미와 10년 후의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어떤 정책을 하면 향후 10년간 해마다 무슨 변화를 겪을 것이고 하지 않으면 10년 후 어떠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정교하게 시뮬레이션하고 국민과 소통해야 한다. 이런 증거기반 정책을 가지고 대통령이나 책임있는 당국자가 진정성 있게 소통한다면 이해해줄 국민은 훨씬 많아질 것이다.

전국편의점가맹점협회에 소속된 편의점주들이 16일 오후 서울 성북구 보문동 영광빌딩에서 전체 회의를 열고 최저임금 차등적용과 가맹수수료 인하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둘째, 급하더라도 정책의 순서를 지켜야 한다. 최저임금이 왜 이렇게 뜨거운 감자가 되었나. OECD 최고의 자영업 비중 때문이다. 우리의 자영업 비중은 OECD에서 두 번째로 높고 적정 규모의 3.5배에 달한다. 자영업자 세 명 중 두 명은 어차피 시장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시장에서의 불리한 지위를 본인과 가족의 무지막지한 장시간 무급 노동으로 때우며 버텨왔다. 이런 상황이 현 정부 들어서 빚어진 것인가.

박근혜 정부 때도, 이명박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나간 어느 정부도 구조조정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자영업이 적정 규모로 구조조정되는 순간 실업률은 치솟을 것이고, 그것은 정치적 타격으로 돌아올 것이 뻔하므로. 정치적 이유로 한계에 선 자영업자들을 방치해온 것이다. 이번에 최저임금이 이슈가 되자 다수의 언론은 그렇지 않아도 알바 정도의 수입이나 간신히 올리던 편의점주들이 이제는 알바만도 못하게 되었다는 논지로 비판에 나섰다. 무책임한 비판이다. 편의점주가 알바 정도 수입이나 간신히 올려왔다면 그것 자체가 비정상 아닌가. 지금까지 이 비정상에 대해 침묵하다가 알바보다 못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면 진의를 의심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영업 문제에 정공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셋째,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는 방식, 즉 거버넌스를 총체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 최근에는 정부부서와 일을 하다보면 그들이 보유한 높은 능력과 지식 수준에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책 자문을 해달라고 요청을 받지만 이미 실무자들이 전문가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거의 항상 ‘정무적 판단’의 영역이 빈칸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국정을 운영하다보면 불가피하게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무적 판단의 영역이 많아질수록 정책의 합리성은 그만큼 증발한다. 정무적 판단에 참여하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고, 그들은 해당 정책에 대해 실무자 수준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분리해서 다루는 기존의 관행도 재고해야 한다. 재정에 대한 세밀한 고려 없이 사회정책이 제시되고, 기재부가 재정을 이유로 사회정책을 난도질하고, 그로 인한 소모적 논쟁이 정책의 동력을 잃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정부 내에서 부문별 사회정책의 필요성과 재정에 대한 토론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합의된 상태에서 정책을 발표하고 추진해야 한다.

우리처럼 정치적·사회적 합의의 메커니즘이 전무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할 것인가가 결과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모처럼 5일간의 휴가를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이 현명한 결론을 가지고 업무에 복귀하길 기대한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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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들은 왜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죠?” 한 30대 여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가 웃으며 답했다. “잘생겼잖아요. 신사적이고요.” 대통령에 대한 지지 여부를 외모나 매너로 결정하다니, 너무 정치의식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헛짚었다. 이 여성은 10년 이상 시민들의 다양한 정치 참여를 이끌어온 현직 활동가이다. 정치의식이라면 평균적인 한국인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는 꾸미지 않은 대답을 들려주었을 뿐이다.

한국 정치의 균열구조가 바뀌고 있다.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장기간 지속될 각인인지 아직은 분명치 않으나, 외국 여러 나라의  사례들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로널드 잉글하트가 1977년에 이미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라고 불렀던, 근본적인 가치관 변화의 한 부분이다. 경제성장은 사회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일자리의 구조가 달라지고, 문화가 바뀌고,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어나고, 가족의 구조가 변하고, 성역할의 고정관념이 사라진다. 이 변화는 크게 보아서는 물질주의 가치관에서 탈물질주의 가치관으로의 변화이다. 안보, 성장, 국가를 가장 중시하는 가치관에서 인권, 자유, 개인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앞의 것이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라면 뒤의 것은 충분조건이다. 앞의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 도입을 위한 환경요건이라면 뒤의 것은 민주주의 공고화의 미시적 기반이다.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자라나는 세대를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시작되기조차 어렵다. 그러니 물질주의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자 환경요건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은 모든 사람이 인권과 자유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고자 함이다. 그러니 탈물질주의는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이자 미시적 기반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꾸준히 높지만, 그중에서도 성별·세대별로 높은 집단을 꼽으라면 단연 20대 여성과 40대 남성이다. 정부의 각종 개혁·평화 정책에 대한 지지도 똑같은 패턴을 보인다. 지난 칼럼(‘젠더 정치의 등장’ 3월13일자)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20대 내부에서 정치적 견해의 젠더 갭(성별 분리현상)은 지역 간 차이의 최대치에 근접한다. 여성과 남성의 정치적 견해차가 대구·경북과 광주·전라만큼 커졌다는 말이다.

앞에 소개한 대화를 보고 너무 정치의식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남성 위주의 정치의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가능성이 크다. 40대 남성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던진다는 생각도 한때는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문 대통령은 도도하게 흘러온 민주화의 역사를 마침내 완성시키는 남성적 거시담론의 영웅일 수 있다. 반면 20대 여성은 ‘신사적’이라는 말 속에 드러나듯이 여성을 포함한 모든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있는 듯한 문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할 수 있다.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외모나 매너 때문에 지지하는 ‘생각 없는’ 지지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 정치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민주주의이다. 20대 여성들이 앞장서서 ‘민주주의의 미시적 기반’이 중요하다고 외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대통령 지지율은 ‘몇 퍼센트’라는 하나의 숫자로 나타나지만, 여성의 문재인과 남성의 문재인은 다르다.

한국보다 20~30년 앞서서 정치적 젠더 갭을 경험했던 외국의 사례들을 보자. 전통적으로는 여성의 정치활동 참여가 남성보다 낮고 더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일정 단계에 이르면 젠더 간 정치적 견해차가 없어지는 ‘해체(dealignment)’ 현상이 나타나고, 그 단계를 지나면 여성이 남성보다 진보적으로 변하는 ‘재정렬(realignment)’이 이루어진다. 적어도 선진산업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들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나는 것이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임신과 출산에 대한 자기결정권, 유리천장의 완전한 해체 요구이다. 한국만이 세계사의 유일한 예외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한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한국 정치의 균열구조를 영원히 바꾸어놓을 것이다.

안보와 성장에만 의존해 살아온 보수야당이 이런 변화에 맞춰 혁신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가치가 젊은 여성들이 요구하는 가치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상태를 바꾸지 못하면 끝장이다. 외국의 경험을 보면, 미시적 차원에서 한번 진보화한 여성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여당에는 운동권의 거대담론 민주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미시적인 일상의 ‘습관’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과제가 있다. 한국 정치에서 ‘남자의 문재인’뿐 아니라 ‘여자의 문재인’이 정당한 대접을 받게 해주지 못한다면 지금의 ‘여당(與黨) 지지’는 ‘여당(女黨) 창당’으로 바뀔 수도 있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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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필자는 두 개의 원칙, 즉 게임전략과 협상 네트워크에 입각해서 지난 몇 달간의 진전을 지켜봐왔다. 주어진 입장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려는 전략을 게임전략, 주어진 입지 자체를 바꾸려는 전략을 네트워크전략이라고 한다. 먼저 게임전략을 보자. 트럼프는 게임이론의 교과서와 같이 행동해왔고, 따라서 대단히 예측 가능한 사람이다. 물론 그는 스스로 했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뒤집어왔다는 점에서 예측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그가 한 말의 ‘내용’에 집중했을 때의 이야기이고, 그가 왜 말을 뒤집는지 ‘의사결정의 원칙’에 집중해보면 그는 매우 예측 가능하다. 그는 이미 20년 전에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금 구사하고 있는 대북 전략을 설명한 바 있다. 첫째, 북핵 대응은 빠를수록 좋다. 둘째, 처음에는 대화로 시작한다. 셋째, 선제타격의 가능성을 닫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북한이 두려워하는 것은 선제타격뿐이므로. 넷째, 미국이 단호하게 나가면 북한은 대화에 응할 것이다. 그는 20년째 예측 가능하고 일관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1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왼쪽)이 가져온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보이며 웃고 있다. 친서를 담은 봉투가 트럼프 대통령의 아랫배를 거의 가릴 정도로 크다. 워싱턴 _ 연합뉴스

대화 시작과 동시에 존 볼턴과 같은 초강경 네오콘을 국가안보보좌관에 앉힌 것은 ‘협박을 믿게 만드는 전략(credible threat)’이다. 대표적 선제타격론자이자 ‘전쟁에 반대한 적이 한번도 없는 인물’이라는 이야기까지 듣는 볼턴이 트럼프의 곁에 있다면 그의 협박을 북한이 흘려듣기는 어렵게 된다. 김정은도 북핵의 위기감을 최고조로 높이고 핵보유국임을 세계에 천명함으로써 몸값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직후 협상에 나서는 것은 담대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의 한계는 만약 협상이 어그러져 미국을 상대로 서로가 목숨을 건 폭주에 나설 경우 결국 막판에 방향을 틀어야 할 것은 북한이라는 데에 있다. 동원할 수 있는 위협의 한계 때문에 김정은은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게임전략에서는 트럼프의 판정승이다.

존 볼턴 임명이 발표된 지 나흘 후 김정은은 전격적으로 시진핑을 방문했다. 게임전략에서 네트워크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기존의 남·북·미 협상 네트워크는 트럼프에게 유리했다. 한·미가 한쪽에 있고 북한은 남한에 의존해야 하는 구도이다. 김정은은 중국을 끌어들임으로써 이 틀을 본인에게 유리하게 바꾸어버렸다. 북·중이 오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를 회복하고 협상 네트워크가 아시아를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미국은 졸지에 태평양 건너편의 관찰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임전략에서의 불리함을 네트워크전략으로 만회한 김정은은 남북정상회담에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었고, 회담 직후 다시 시진핑을 찾아가 협상 네트워크에서의 북·중 고리를 더욱 다졌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자 트럼프는 회담 취소를 선언하고 판을 깨버린다. 결국 김정은은 굴욕적이지만 대화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낼 수밖에 없었고, 트럼프는 즉시 이 메시지를 받아들인다. 상대가 배신하면 즉시 처벌하고, 상대가 협동으로 복귀하면 즉시 용서하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 for Tat)’ 전략의 가르침 그대로이다. 

중국이 아직 배후에 버티고 있으니 트럼프의 게임전략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김정은이 잠시 점유했던 네트워크전략의 우위를 상당부분 무력화시켰다.

이렇듯 지금까지 트럼프와 김정은의 선택은 게임전략과 네트워크전략 두 가지로 대부분 설명된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싱가포르 회담은 열릴까. 김정은은 크게 모욕당하지 않는 한 판을 깰 인센티브가 없다. 트럼프는 최대한의 압박이란 단어까지 거둬들이면서 김정은을 관리하고 있다. 트럼프는 중국이나 러시아가 갑자기 협상 네트워크의 지형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판을 깨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회담은 예정대로 열릴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상당한 정도의 경제적 보상과 같은 입장료를 내지 않는 한 판에 끼어들기 어려울 것이다. 김정은은 애써 조금이나마 바꿔놓은 협상 네트워크에 미국의 또 다른 우방 일본이 끼어들어 판세를 바꾸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고, 트럼프도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 문재인 대통령은 싱가포르로 날아갈까. 아마도 갈 것이다. 

하지만 일각의 예상처럼 비핵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종전선언으로 체면을 살리는 것은 지금까지 보여준 트럼프의 게임전략에 크게 어긋난다. 비핵화의 확실한 약속을 받되 한 번의 회담으로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종전선언이 의미 있는 중간매듭의 역할을 하는 것이 더 그의 전략에 잘 부합한다. 협상결과를 크게 ‘타결’과 ‘결렬’로 나눈다면 김정은은 완전한 타결에서 일부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결렬 쪽에 가까이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 중간선거와 노벨상 가능성 등을 생각하면 11월 이후 트럼프의 협상의지는 크게 낮아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김정은이 치러야 할 대가는 훨씬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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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는 부쩍부쩍 다가오는데 변변한 후보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수뇌부는 그러거나 말거나 연일 보수결집에 여념이 없다. 후보라도 제대로 내놓고 보수 유권자를 결집한다면 이해라도 되지만, 변변한 후보도 없는데 결집만 열심히 하니 진짜 목적은 지방선거가 아니라 딴  데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하다.

이러한 결집의 방법은 애처롭게도 하나같이 철 지난 레퍼토리들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보수세력이나 특정 지역을 말려 죽이려고 한다는 유언비어성 협박,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종북좌파 소굴이라는 색깔론. 그중에서도 백미는 지난 3월 말에 발족한 ‘사회주의 개헌저지 투쟁위원회’이다. 사회주의 개헌이라니, 안될 일 아니겠는가. 반드시 저지하기 위해 투쟁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이 위원회는 아직까지 특별한 활동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 급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사회주의 개헌을 저지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시사 2판4판]마이너스의 손 (출처:경향신문DB)

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 추억. 요즘도 어른들이 그런 짓궂은 장난을 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예전에 걸핏하면 어린아이들 울음보를 터뜨리던 난감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코웃음치고 넘어가면 될 어리석은 질문에 순진한 아이들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결국은 울음보를 터뜨렸고, 어른들은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했다. 어차피 그 질문에 답을 듣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재미만 있으면 되니까.

다시 개헌 이야기로 돌아오자. 필자도 가급적 대통령이 개헌 발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국회가 발의해야 하는데, 국회는 개헌특위만 만들어놓고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개헌은 오랫동안 대다수 국민과 시민사회, 전문가들이 그 필요성을 지적해왔고, 지난 대선에서 모든 주요 후보들이 공통적으로 약속한 사항이기도 했다. 그런데 국회는 아무것도 안 했다. 그러면 대통령이라도 최소한 시도라도 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문 대통령은 새 헌법이 ‘국민헌법’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하에 국민헌법자문특위를 설치했고, 특위는 국민들의 의견을 방대하게 청취했다. 홈페이지 방문 및 의견 제시 52만, 안건 제시 1127건, 16개 시·도 지역순회 간담회, 유관 학계와 시민사회 의견 수렴, 2000명 규모의 전 국민 여론조사, 전국 4대 권역에서 800명이 참여한 숙의형 시민토론회, 160명이 참여한 청소년·청년 토론회가 그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숙의형 시민토론회이다. 길 가는 시민을 붙잡고 물어본다고 가정하자. 대통령중심제, 내각제, 이원집정부제 중 무엇을 선호하십니까? 세 가지 대표적 정부 형태의 특징과 장단점이 무엇이고 그것이 한국에 적용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 답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묻는 꼴이다. 숙의형 시민토론회에서는 개헌의 주요 쟁점별로 상반된 의견을 가진 전문가들이 나서서 자신이 지지하는 개헌의 방향을 말하고 그 근거를 설명했다. 시민들은 그 설명을 듣고 스스로 토론했으며, 토론이 모두 끝난 후에 의제별로 자신들의 의견을 결정했다. 생각의 근거를 가지게 된 시민들은 정치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옳다면 기꺼이 바꿨다. 대표적인 것이 대통령 개헌안 발의 후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총리의 국회 선출 여부이다. 토론 이전에는 국회 선출 반대가 48.3%(찬성은 40.2%)였는데, 토론 이후에는 반대가 68.3%(찬성은 24.1%)로 달라졌다. 개헌안 마련에 적극 참여한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토론회에 만족했다는 응답은 권역별로 97~99%였고, 이런 기회가 마련된다면 또 참여하고 싶다는 응답도 권역별로 모두 95%를 넘었다.

이렇게 마련된 개헌안을 자유한국당은 ‘사회주의 개헌’이라고 부르고 있다. 며칠 전 홍준표 대표가 박근혜 피고인을 ‘공주’라고 부른 것을 보니 그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왕’으로 대접하는 모양이다. 막상 그 왕께서는 순전히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총칼로 개헌을 단행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은 아무것도 안 해놓고, 헌정사상 최초로 방대한 국민이 참여하고, 그렇게 참여한 국민의 97% 이상이 만족한 토론을 거쳐 만들어진 헌법안을 ‘사회주의 개헌’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국민을, 특히 보수성향 국민의 수준을 뭘로 보기에 이런 말장난을 할 용기가 나는 걸까. 어쨌든 자유한국당이 정색하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준엄한 질문을 던진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론 예전 어른들처럼, 대답이 중요한 건 아닐 거다. 나라야 어찌 되건, 그들은 살길만 찾으면 되니까.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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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은 용기 있는 소수의 고발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폭 넓은 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소수의 고발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와 규칙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근거는 최근의 여론조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정치적 견해의 젠더 갭(성별 분리 현상)이다. 오랫동안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는 지역과 이념이었고, 불과 10여년 전부터 세대가 또 하나의 변수로 등장했다. 그런데 최근의 조사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뚜렷한 젠더 갭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창 동계올림픽을 보자. 올림픽 직전에 대통령 지지율이 유의미하게 낮아졌고, 세간에서는 가상통화 규제와 남북 단일팀 구성이 그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동계올림픽이 진행되고 특사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여론은 또다시 요동쳤다.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이 결정된 1월17일에 있었던 리얼미터 조사에서 남북 모두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해야 한다는 응답은 20대에서 38.9%로, 60대(27.0%)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그러나 한 달 후인 2월20~22일 실시된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한반도기 공동 입장이 잘된 일이라는 응답은 20대에서 73%로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높았다. 같은 응답자에 대한 반복조사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 비교는 무리가 있지만,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20대 여론에 일대 반전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한 번의 반전이 있다. 20대 평균은 73%이지만, 남성 20대는 62%로 여전히 60대(54%)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지지를 보이는 반면 여성 20대는 85%로 압도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다. 20대 내부에서 성별 차이는 무려 23%포인트에 달한다. 20대 여론의 반전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은 20대 여성 여론의 반전이었던 것이다. 같은 조사에서 광주·전라의 지지율은 85%였고 대구·경북의 지지율은 57%였으니,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로 간주되곤 하는 지역 간 차이의 최대치가 28%포인트였다. 적어도 20대 내부에서 젠더 갭은 이제 지역 못지않게 중요한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같은 조사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해서도 20대 남성은 43%만 잘된 일이라고 평가해서 모든 세대에서 가장 낮은 반면 20대 여성은 59%로 모든 세대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보냈다. 이 사안에 대해 광주·전라와 대구·경북의 차이가 21%포인트였는데, 20대 내부의 젠더 갭은 16%포인트로 역시 만만치 않은 파급력을 보여줬다.

20대가 아닌 다른 세대에서 성별 차이는 어떨까. 앞서 언급한 갤럽조사 중 한반도기 공동입장에 대해서는 세대별로 성별 분리 효과가 적게는 3%포인트에서 많게는 7%포인트의 차이를 보이는데, 20대의 23%포인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적다. 그나마 50대 이상에서는 성별 견해의 순위가 역전되어 여성보다 남성의 찬성률이 더 높게 나타난다.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해서는 젠더 갭 효과가 적게는 1%포인트에서 많게는 5%포인트의 차이를 보여서 역시 20대의 16%포인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 이번에도 역시 성별 견해의 순위가 50대 이상에서는 역전되어 젊은층에서는 단일팀 구성에 대한 지지가 여성이 더 높고 50대 이상에서는 남성이 더 높다.

다소 길게 수치를 인용했지만, 일관된 발견들을 요약하면 세 가지다. 첫째, 기성세대 여성들은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 남성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20대 여성은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둘째, 정치적 견해차의 크기가 아니라 방향에 주목하면, 기성세대 여성은 남성보다 더 보수적이고 20대 여성은 남성보다 더 진보적이다. 셋째, 20대에서의 젠더 갭 효과는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로 불려왔던 지역 간 차이의 최대치에 견줄 수 있을 만큼 크다. 20대 유권자의 수는 약 676만명인데,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한반도기 공동입장의 경우처럼 23%포인트의 차이를 보인다면 얼추 계산해도 100만표 정도는 쉽게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미국 정치에서 유권자의 젠더 갭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90년대부터다. 빌 클린턴은 1996년 대선에서 여성 표의 54%를, 그리고 남성 표의 43%를 가져갔다. 그는 공화당 후보였던 밥 돌에 비해 800만표를 앞섰는데, 여성 표에서 앞선 것이 1100만표였다. 그 이후 대부분의 주요 정책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은 20%포인트 내외의 견해차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제 젠더 정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 정치세력들은 미투 고발을 지방선거용으로 소비하려 하기보다 미투가 필요 없는 세상을 위해 시급하고도 진지하게 장기 대책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래야 할 정치적 이유도 충분하다. 100만표가 걸려있지 않은가.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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