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인 MBC의 사장 임면권을 갖고 있는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는 9명의 이사와 1명의 감사로 구성된 특별법인으로 ‘방송 문화의 발전·향상을 위한 사업’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방문진 이사들, 특히 여당 추천 6명 이사들이 ‘방송문화 진흥’을 위해 기여한 적은 전무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들이 지금까지 한 일이라고는 온갖 개인적 비리와 정권편향 프로그램 양산, 비판적 기자·PD에 대한 무더기 보복인사로 MBC를 쑥대밭으로 만든 김재철 사장을 비호하는 것이었다. ‘방송문화 진흥’이라는 취지에 부합하기는커녕 방송문화를 철저히 왜곡하고 유린한 김 사장의 배후세력으로 기능했던 셈이다.

이들 여당 추천 현직 이사 6명과 감사 등 7명 전원이 차기 이사 공모에 지원했다고 한다. 공영방송 MBC를 이명박 대통령 소유물이라는 뜻의 ‘MB씨(氏)’로 전락시켰다는 비난을 받는 김 사장을 적극 감싸온 데다 170일 장기 파업사태에서도 아무런 역할을 못한 이들이 다시 한번 이사 노릇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지금까지의 무능과 몰상식한 행태에 책임을 지고 석고대죄와 함께 즉각 물러나도 시원찮을 사람들이 연임까지 하겠다니 말문이 막힐 뿐이다. 방문진 이사 이전에 일반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연임 신청을 철회해야 마땅하다.

김재철 MBC 사장이 조사를 받은 뒤 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MBC와 KBS가 명실상부한 공영방송이 되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이들 방송사의 사장 인사에 직접 개입하는 현행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게 언론계와 시민사회의 중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장기 과제인 만큼 당장은 방문진 이사진 전면개편이라는 초미의 현안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미 여야는 MBC 파업사태와 관련해 ‘합리적 경영판단 및 법 상식과 순리에 따라 조정·처리한다’고 합의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MBC 황폐화에 누구보다도 책임이 큰 방문진 현직 이사들이 다시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합리성과 상식, 순리 그 어느 것에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의 방송장악 전위대 역할을 해온 현직 이사들의 ‘장기 집권’을 막고 차기 방문진 이사진을 합리적 중립적 인물들로 재편하는 것은 ‘MBC 정상화’에 합의한 정치권, 특히 여당인 새누리당의 의지에 달려 있다. 새누리당과 당의 실질적 최고 권력자인 박근혜 의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명박 정권의 악정(惡政)을 혁파하고 쇄신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새누리당이 방문진 개편에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지 지켜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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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돈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이 어제 “새누리당이 총선 당시 국민에게 했던 약속을 망각한 것 아닌가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병화 대법관 후보자와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을 둘러싼 논란을 지칭한 것이다. 박근혜 의원의 대선 경선캠프에서 정치발전위원을 맡고 있는 그는 김 후보자와 관련해 “새누리당 의원 몇 분은 고위공직자에게 요구되는 도덕성 기준보다 법률가로서의 자질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국민에게 더 중요한 것은 위장전입 같은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연임이 내정된 현 위원장에 대해서도 “이런 분을 또다시 임명할 수 있는가. 당 지도부가 민심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상돈 전 위원의 발언은 정곡을 찌른다. 검찰 출신 김병화 후보자는 위장전입·다운계약서 작성에 저축은행 수사 무마 의혹까지 받고 있다. 평검사·평판사에게도 용인되기 어려운 결격사유가 있는데도 새누리당은 공식적으로 ‘문제 없다’는 입장이다. 총선 때 입만 열면 환골탈태니 쇄신이니 외치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새누리당은 그러면서도 국민들 눈이 겁나 찬성당론을 정하는 대신 자유투표를 하겠다더니, 어제는 강창희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했다. 대법관 장기공백 사태를 우려한다면 야당 제안대로 김 후보자를 제외한 3명의 임명동의안부터 표결하면 되는데, 이는 애써 외면한다. 김 후보자를 지켜주자니 여론이 두렵고, 김 후보자를 포기하자니 우군인 검찰이 겁나는 게 집권여당의 현주소다.

 

박영선, 김병화 후보자는 곤란하다 ㅣ 출처:경향DB

현병철 위원장에 대한 입장도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다. 새누리당은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하지 않는다는 데 야당과 합의했지만, 반대 입장은 밝히지 않고 있다. 현 위원장은 인사청문 대상일 뿐 임명동의 표결 대상은 아니라며 공을 청와대로 넘기는 기류다. 박근혜 의원 역시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경선캠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 표명을 촉구하는데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어제 열린 인권위 전원위원회에서 장명숙 인권위원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청와대 결정과 관계없이 물러나달라”고 현 위원장에게 호소한 뒤 퇴장했다. 이상돈 전 위원이 말한 ‘민심’을 대변한 것일 터이다. 새누리당이 이러한 민심에 귀 막고 문제투성이 공직후보자들을 옹호한다면 대선 가도에 적신호가 켜질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김병화·현병철씨를 계속 감쌀 생각이라면 당의 이름을 걸고 분명한 입장을 밝히기 바란다. 향후 벌어질 사태에 대한 책임도 새누리당이 져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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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선 논설위원

 

<안철수의 생각>이 출간되던 날이다. 부산의 한 기업 방문을 마친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이 회사 관계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동행한 기자들이 “몇 가지 질문을…”하면서 다가섰으나 박 의원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안철수 원장 이야기 들으셨죠” “사실상 대선 출마라는 시각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자들이 따라붙었지만 그는 서둘러 승용차에 올랐다. 기자들은 “기자도 국민인데…”라며 멋쩍음을 달랬다. 이 말은 박 의원이 토론회에 나가 ‘불통’이라는 지적을 받자 “소통이 안되면 총선에서 이겼겠느냐. 국민들과 소통은 잘되고 있다”고 한 해명을 패러디한 것이라고 한다. 현장에 다녀온 기자의 후일담에 비친 박 의원의 모습이다.

박 의원이 예민한 현안을 두고 즉각적 언급을 피하는 일은 흔하다. 며칠씩 두문불출하면서 기자들과의 접촉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 웃고 말거나 원론 한마디로 대신하는 일도 간혹 있다. 생각이 정리되면 입장을 밝힌다. 그 시점을 잘 아는 인사가 진짜 측근이다.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부결 이후에도 기자들과 숨바꼭질을 했다. 이틀 뒤에야 본회의장 앞에서 정 의원의 결자해지론을 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도 ‘아직 책을 보지 못했다’거나 ‘생각을 정리한 뒤 말하겠다’ 정도의 언급은 할 수 있었을 터이나 답은 고사하고 굳은 표정으로 지나쳤다. “기자도 국민인데…”라는 식으로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우리 언론은 지도자, 특히 박 의원에게 관대하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경선 후보 ㅣ 출처:경향DB

역시 불통이 문제다. 박 의원이 4·11 총선 결과를 국민과의 소통 근거로 삼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정당이나 정치인은 표를 먹고산다. 참패가 예상된 총선을 되돌려 놓은 것은 분명 그의 역량에 의존한 바다. 그러나 선거는 상대가 있다. 승패에 대한 책임은 절반이 자신에게 있고, 나머지 절반은 상대에게 있다. 누구의 승리냐도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여당으로선 패배할 게임을 이겼다고 볼 수 있고, 170여 거대 여당을 150석으로 줄여놨다고 할 수도 있다. 여당 승리라기보다 야당 패배라는 시각도 상존한다. 박 의원의 셈법이라면 46% 기권층과 상대적 선택이라는 중간지대는 설 자리가 없다. 한때 경선캠프 사무실 출입을 보안장치로 통제하는 바람에 ‘캠프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냐’는 비아냥을 들은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을 터이다. 박 의원은 지지층만을 상대로 한 반쪽 소통을 원하는 것인가.

5·16을 둘러싼 논란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면서 논란이 일자 일방적으로 논쟁 종료를 선언했다. 자신의 말에 동의하는 국민들도 많다고 전제했으나 실은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바엔 그만하자는 독선과 다를 바 없다. 국민의 삶을 챙겨야 하는데 역사논쟁만 할 것이냐고 물었지만 한 지도자의 세계관이나 철학을 반영하는 역사논쟁은 민생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국민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건 지도자가 내놓은 정책 자체가 아니라 그 이면에 숨은 그 사람의 경험과 역사 인식이다. 지도자의 철학과 역사관이 정책에 힘을 불어넣고 신뢰를 심어준다. 공약(空約)으로 국민을 일시 속일 수는 있어도 역사관이나 철학을 숨기기는 어렵다. 더구나 새누리당이고 민주통합당이고 내놓은 정책에 커다란 차이가 없다. 지도자의 역사관 검증이야말로 최고의 정책 검증이다.

기자는 묻고, 지도자는 답하는 게 숙명이다. 묻느냐, 답하느냐의 차이일 뿐 국민들의 궁금증 해소라는 책무는 동일하다. 기자들은 국민들을 대신해 물을 권리를 위임받았다. 누가 준 권리냐고 물을 요량이라면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때 누구를 먼저 찾는지 반문해 보면 답이 나온다. 과거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빌 클린턴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르윈스키와 관련한 질문에 시달렸다. 심지어 한·미 정상회담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미국 기자들의 관심사는 섹스 스캔들로 쏠렸다. 클린턴은 그 질문이 불편했을지 몰라도 외면하지 않았다. 지도자라면 명예훼손이나 인격모독이 아닐 경우 답해야 한다. 변명만 늘어놓게 하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듯, 하고 싶은 말만 하려는 정치인 역시 지도자가 아니다.

박 의원은 18대 대권 고지에 가장 근접해 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국민이나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 여야와 이념을 떠나 많은 이들이 그의 불통을 얘기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박 의원은 내 말이 곧 끝이라는 인상을 준다”고 한 보수 인사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그간 박 의원은 촌철살인의 정치인으로 통했다. 정치언어의 과잉 속에서 절제를 잃지 않고 핵심을 짚곤 한 덕이다. 그것은 할 말만 해도 되던 야당 시절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영애’로, ‘퍼스트 레이디’로, ‘유력한 대선 주자’로 살아온 그에게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없다면 박 의원의 정치는 반쪽짜리에 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나머지 반쪽 세상과도 만나고 소통하는 게 대권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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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얼마 전 난생처음으로 위 내시경 검사를 했다. 수면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마취에서 깨어나자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암인가 보다’라며 덜컥 겁이 난 나에게 의사는 ‘암 선고’만큼이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교수님, 왜 그렇게 박정희 욕을 하세요?” 마취를 하면 무의식에 있는 이야기를 한다던데, 마취가 되자 박정희 욕을 계속 뱉어낸 것이다. 물론 대학 시절 고문도 당하고 투옥도 되고 제적도 당하고 군대에도 끌려갔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나이가 되도록 깊은 무의식 속에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증오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고 부끄러웠다.

이처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한국현대사에서 피할 수 없는 뜨거운 감자이다. 이 뜨거운 감자는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5·16을 “최선의 선택, 바른 판단”이라고 밝히면서 대선의 중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박 전 위원장은 이 발언이 쟁점으로 부상하자 민생 등 할 일이 많은데 역사논쟁만 할 것이냐며 논쟁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히 지나간 역사에 대한 공허한 논쟁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현재의 선택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논쟁 중단 선언으로 피해갈 문제가 아니다.

 

출처:경향DB

박 전 위원장의 주장이 ‘상황론’에 기초한 매우 위험한 논리임은 여러 사람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정작 문제는 박 전 위원장의 이 같은 주장을 비판하고 있는 이해찬 대표 등 민주통합당의 이중성이다. 김대중 정부를 계승한 민주통합당은 5·16과 유신에 관한 한, 근본적인 원죄를 안고 있다. 1999년 여름 나를 비롯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관계자들은 연일 기자회견을 열고 농성을 벌여야 했다. 왜냐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구를 방문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젠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며 갑자기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약속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김 전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들 기념관이 아니라 박 전 대통령의 기념관만 꼬집어 제안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이해찬 대표 등이 각료로 참여하고 있었던 김대중 정부는 학계, 사회운동 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한 200억원 지원을 결정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5·16 쿠데타와 유신에 관한 한, 한국사 최초의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김대중 정부의 출범 그 자체에도 원죄가 숨어 있다. 5·16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박 전 위원장의 평가에 대해 민주통합당이 길길이 뛰고 있지만, 5·16 쿠데타를 주도한 실질적인 주역, 그리고 유신체제하에서 총리를 지내며 2인자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김대중 정부가 1997년 대선 승리를 위해 손을 잡았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였다. 나아가 김대중 정부는 스스로 ‘제2의 건국’이라고 자임하면서도 초대 총리에 유신 총리였던 김 전 총재를 앉혔다. 5·16과 유신이 그처럼 문제라면 어떻게 5·16 쿠데타와 유신의 주역이던 김 전 총재와 손을 잡고 그를 초대 총리로 앉힐 수 있을까? 1998년 초 김 전 총재의 총리 임명 당시 개인적으로 비판했듯이, 40년 만의 소위 ‘민주정부’의 초대 총리에 유신 총리를 앉히는 것은 해방 후 세운 ‘민족정부’의 초대 총리에 이완용을 앉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민주통합당은 김종필과의 연정이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위해, 박정희기념관이 영남으로의 동진정책과 지역통합을 위해, 문제가 있지만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해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선택을 상황론에 의해 정당화한다면, 5·16이 절차와 수단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지만 국민들을 기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박근혜 전 위원장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중요한 것은 5·16 논쟁이 지나간 공허한 역사논쟁이 아니듯이 김대중 정부와 민주통합당의 원죄 역시 공허한 역사논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민주통합당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현재의 문제이다. 이제는 상황론과 결과 제일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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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어제 <안철수의 생각-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라는 책을 펴냈다. 안 원장은 책에서 자신의 삶은 물론 대한민국에 대한 비전과 사회 현안 진단, 청소년에게 전하는 이야기 등 폭넓은 주제를 다뤘다. 그는 책 출간을 계기로 출판기념회나 지난해의 ‘청춘 콘서트’ 형식을 빌려 시민들과의 접촉을 확대해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안 원장이 연말 대선을 향해 또 한발짝을 내딛는 모습이다.


안철수 책, 벌써 관심 (경향신문DB)


<안철수의 생각>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정책적 비전과 정치참여 의지를 어느 때보다 분명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안 원장이 사회적 현안들에 대해 원론들을 제시한 적은 있으나 자신의 생각들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한 건 처음이다. 이런 생각들은 그가 대선 출마에 나설 경우 대선 공약으로 발전될 것이며, 지난해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지원 때처럼 측면 지원에 그치더라도 야권 대선 후보의 공약에 반영될 공산이 크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책은 안 원장의 국가운영 구상 묶음집이라 봐도 무난할 것 같다. 둘째, 안 원장이 대선 출마 쪽으로 기우는 징후가 보다 명백해졌다. 안 원장은 ‘4·11 총선 패배 후 자신에 대한 정치적 기대가 다시 커지는 것을 느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고, ‘앞으로 내 생각을 보다 많은 분들에게 구체적으로 돌려드리고 많은 분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며 향후 계획도 밝혔다. <안철수 생각>을 사실상의 대선 출사표에 견줄 수 있는 까닭이다.


안 원장의 정책 구상들은 예상대로 ‘친야’ 색깔이 짙어 보인다. 시대의 화두라 할 수 있는 복지는 일자리와 복지의 선순환을 강조했고, 경제민주화는 재벌개혁이 요체라고 정리했다. 사법 개혁을 위한 고위공직자수사처 신설이나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같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역설했다. 안 원장 스스로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고 밝혀온 점을 감안할 때 이른바 보수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와 확연하게 선을 그은 대북정책이 눈에 띈다. ‘통일의 관점을 사건에서 과정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기조 아래 금강산 및 개성관광 재개 등 남북 간 경제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과 용산 참사에 대해서도 “거주민을 고려하지 않고 개발논리만 밀어붙인 것이 원인”이라고 비판적 진단을 내놨다.


서둘러 출간한 기색이 역력한 이번 저서는 대선에서 안 원장의 역할을 둘러싼 국민들의 궁금증에 대한 응답이라고 본다. 안 원장도 이를 의식한 듯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부분도 많지만 다양한 자리를 통해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렇다면 안 원장은 이제 자신이 밝힌 구상을 누구와 더불어,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여전히 외곽을 돌며 여론을 탐색하는 듯한 모습에서 벗어나 국민들과 눈 높이를 맞추고, 직접 만나야 할 시점이 임박해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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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 중앙대교수·정치학


 

장마와 무더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안녕하십니까? 연일 이어지는 각종 토론회, 회견, 지역 방문 등으로 얼마나 바쁘십니까? 경제민주화부터 일자리 창출, 노인 복지까지 실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질문에 끊임없이 답해야하니 더운 줄도 모르고 지내시겠지요? 


새누리당 대선 주자들 처음으로 한 자리에 (경향신문DB)


저는 요즘 수없이 이어지는 대선주자 분들의 인터뷰,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무언가 중요한 고리 하나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대통령에 선출되면, 대통령의 귀한 시간과 에너지의 절반 이상은 대외적인 문제에 쏟게 됩니다. 안보와 국방에서부터 국제경제 동향, 에너지와 식량 확보 등등은 국가의 사활적인 이익이 걸려있는 문제들이고, 최고 결정권자로서는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슈들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요즘 쏟아져 나오는 대선주자 분들의 인터뷰, 토론회에서는 북한 문제만 가끔 다뤄질 뿐 차기 정부와 대통령이 다뤄야할 사활적 대외이슈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언론인들의 한계라기보다는, 우리 정치가 오랫동안 내부 문제를 우선시하는 고질적 습관 때문이겠지요?


지금부터 차기 대통령이 고민하고 씨름해야 하는 중단기 대외적 이슈들을 꼽아보겠습니다. 백면서생의 어리석은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미국, 중국, 일본 등의 지도자들은 이미 수백 번 숙고하고 있고 나름의 깊은 이해와 준비가 되어 있는 이슈들일 겁니다. 


질문 1. 한국의 차기 대통령 임기는 2013~2018년에 걸쳐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중국 낙관론의 예측대로 중국이 미국을 경제적으로 거의 따라잡고, 군사적으로도 이에 도전할 정도의 세력을 키우게 될까요? 이럴 경우 거대한 자원이 묻혀있고, 경제·군사·정치적 요충지인 남지나해의 어딘가에서 미국과 중국의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할 수도 있습니다.(물론 하나의 가상적 시나리오이기는 합니다만) 이때 우리 정부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G2의 제한적 충돌이 현실화할 때, 우리는 고래싸움에 ‘연루’되는 위험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깊이 의존하는 우리의 처지에서, 동시에 군사적으로는 미국과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유지해온 상태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참고로 옛날 역사를 잠깐 말씀드리자면, 중국 대륙에서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조선의 조정은 두 나라 모두로부터 수십 차례의 파병 요구를 받은 바 있습니다.)


질문 2.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이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2013~2018년 사이에 북한이 급변할 사태를 우리가 상정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한의 내부사정이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치닫게 될 때, 우리 정부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한국정부에 의한 단독 위기관리가 가능할까요? 혹은 미국·중국이 참여하는 국제적 위기관리 체제가 가동될까요? 이 문제는 우리 내부의 극심한 대립과 함께 한반도 주변세력들 간의 심대한 불안정을 불러올 수 있는 가상 상황입니다.


질문 3. 이번에는 조금 부드러운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아시는 대로, 녹색경제는 21세기의 큰 흐름입니다. 기업, 개인, 가정 모두가 환경친화적인 생활방식과 사고를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문제는 저탄소경제나 녹색기술이라는 것도 결국은 선진국(북)과 개도국(남) 사이의 대립을 불러오게 됩니다. 프랑스, 독일을 포함한 유럽의 선진국들은 이 분야에서 성큼 앞서가고 있고 개도국들은 크게 뒤처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기후변화 대책을 염두에 둔 저탄소경제의 강화와 실천은 결국 국제적으로는 남과 북의 집단적 대립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 수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후보분들 스스로가 이런 중대한 이슈들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고민과 사색,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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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권 | ‘야생초 편지’ 저자 bau100@empas.com


 

암탉이 20일 넘게 알을 품고 있다가 병아리가 나오면 그 병아리들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죽어라고 어미를 쫓아다닌다. 새끼가 어미를 따라다니는 것은 거의 모든 동물의 공통된 속성이다. 하나의 국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강대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대부분 신생국가들의 정치체제를 살펴보면 예외 없이 식민지 모국을 흉내 내고 있다. 36년간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반도 역시 당시 일본의 천황제 군국주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교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왕정체제가 무너진 후 타의에 의해 식민지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의 통치체제는 거의 유일한 준거틀이었다. 사나운 맹수가 우글거리는 정글과 같은 세계무대에서 단기간에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군국주의만큼 효율적인 체제는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변방의 왜소한 일본 사람들이 단기간에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 그 증거라고 하겠다.


한반도에서 두 개의 나라를 일군 박정희와 김일성은 일본 군국주의의 최전성기에 청년기를 보내며 이 사실을 뼈저리게 겪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는 자진하여 일본군복을 입고 일본 군국주의 체제 속에 들어가 이를 배웠고, 김일성은 일본 군국주의를 상대로 싸움을 하면서 이를 배웠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둘이 만들어낸 결과는 거의 비슷했다.


도서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 삽화 (경향신문DB)


천황제 군국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천황의 신격화이다. 어느 누구도 체제의 우두머리에게 도전할 수 없다. 이 체제의 우두머리는 인격을 초월한 존재이다. 그러기 위해서 국민을 상대로 지속적인 신격화와 우상화 작업을 벌여야 한다. 둘째는 ‘군민일체화(君民一體化)’ 또는 ‘국체(國體)’의 완성이다. 우두머리 혼자 아무리 똑똑해도 소용이 없다. 국민들이 우두머리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효력이 있다. 이는 강력한 정치적 세뇌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국체’가 완성되면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국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개인인 내가 무슨 일을 하건 다 “대한민국 만세!”이고 “어버이 수령님께 감사드립니다!”로 표현한다. 


세 번째는 군대 우선이다. 모든 힘은 강력한 군대에서 나온다. 강력한 군대만이 국민의 행복과 번영을 보장하고 천황체제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모두 헌법을 가지고 있지만 군대만큼은 초법적으로 행동한다. 헌법을 유린한 쿠데타가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지금 적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판국에 법을 따지고 있을 새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북의 ‘선군정치’는 이를 교리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네 번째는 ‘경제의 국가화’이다. 개인과 개별 기업이 경제활동을 벌이지만 모두 강력한 내셔널리즘의 (자기)통제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무리 잘나가는 기업일지라도 국체를 건드리거나 통치자의 비위를 거스르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이런 체제에서는 정경유착이 너무도 단단해 그 속에 아무리 심각한 부정과 비리가 있다 해도 결코 잡아낼 수가 없다. 잡아내려는 행위 자체가 ‘국체’를 뒤흔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천황제 군국주의는 혈통을 중히 여긴다. ‘만세일계’ ‘백두산 가계’ ‘대를 이은 혁명대업의 완수’ 따위는 모두 혈통을 중심으로 천황체제를 이어가려는 수사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과 일본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자 미국의 간섭으로 인해 천황제가 어느 정도 희석되었지만 국민들 가슴속의 천황제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듯하다. 천황제는 단순한 정치체제가 아니라 유사종교체제이기 때문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는 올해에 있을 남한의 대선이 천황제의 법통을 유지하려는 세력과 ‘한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추구하는 세력 간의 치열한 격돌이 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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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안철수 교수 측에서 이른바 ‘아이젠하워 모델’에 따른 출마를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주지하듯이 2차 대전의 영웅이다. 쓸 수 있는 최대한의 자원을 총동원해 생사와 존망을 걸고 치른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으랴. 그런 그였기에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구애를 펼쳤다. 그 인기 덕분에 1948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현직 대통령이던 트루먼은 아이젠하워에게 대통령 후보직을 양보할 생각도 있었다. 최근에 공개된 그의 일기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후보가 되면, 자신은 기꺼이 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직접 했다고 한다. 트루먼의 발상도 놀랍지만, 어쨌든 아이젠하워란 인물이 누린 대중적 선망의 정도가 문자 그대로 족탈불급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한 듯하다.


국회 본회의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경향신문DB)


 흔히 시민대통령 콘셉트로 알려진 아이젠하워 모델에는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엄청난 수준의 대중적 인기가 첫 번째다. 인기라고 해서 무조건 좋아하는 차원이 아니다. 호감을 넘어 국가운영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가 담긴 인기다. 둘째는 공화당의 도움이다. 당시 공화당은 좌·우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1952년 선거에서 유력한 공화당 후보는 우파의 로버트 태프트였다. 이전의 두 번 선거에서 토머스 듀이를 당의 대선후보로 냈으나 패했던 좌파이기에 자파 후보를 낼 처지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고립주의자인 태프트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다. 대안을 물색했고, 듀이와 상원의원 롯지가 적극적으로 아이젠하워 영입에 나섰다.


셋째는 시민운동이다. ‘아이젠하워를 위한 시민 조직’이 전국적 차원에서 결성돼 ‘나와라 아이젠하워’ 운동(Draft Eisenhower movement)을 펼쳤다. 정치권이 일부 개입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발적인 시민들이 ‘시민 대통령’ 기치 아래 모여서 아이젠하워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활동을 전국적으로 펼쳤다. 이런 세 가지 요인이 합쳐져서 아이젠하워가 공화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기만을 가지고 어느 날 갑자기 대세를 장악한 것이 결코 아니다.


(경향신문DB)


안철수 교수가 누리는 인기는 우리 정치를 바꿔보자고 하는 열망을 담고 있다. 시대적 흐름에 따른 정치·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착한 성공’을 일궈낸 안 교수 개인에 대한 호감도 있지만 그만큼 답답한 현실과 무능한 정치에 대한 불만이 안철수현상을 만들어낸 기본 동력이다. 따라서 그의 등장과 실체를 무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나 안 교수의 입장에서도 성찰할 대목은 있다. 자신을 향한 이 거대한 열망을 만약 정치를 통해 구현하고자 한다면 ‘망가질’ 각오를 해야 한다. 정치는 선택이다. 정치적 선택은 호·불호를 넘어 피아를 나누게 한다. 정치의 숙명이다. 따라서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안 교수의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할 수도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면 이런 정치를 피할 수 없으니 먼저 이런 각오부터 해야 한다. 욕을 먹어도 하겠다는 것이 진짜 권력의지다.


또 아이젠하워가 시민운동의 후원과 당의 지원에 힘입어 대통령 후보가 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시민운동은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민주당 내에 안 교수를 호명하고 지원할 수 있는 잠재적 인물이나 세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실제로 나설 명분이 없다. 당장 출마 선언도 없고, 나라를 어떻게 하겠다는 비전이나 정책도 없다. 서민의 입장에서 정치가 달라질 것 같은 기대는 있으나, 그의 정치가 내 삶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그림이 없다. 그렇다고 보수나 여권의 실정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데 누가 감히 그를 거명하면서 돕겠다고 나서겠는가. 안 교수가 아이젠하워 모델을 따르겠다고 한다면 ‘시민’만이 아니라 ‘정당’도 봐야 한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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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지난 주말 폐막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 회의는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갈수록 각을 세우고 있는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을 재확인하게 했다. 아세안은 친중·친미로 갈렸다. 회의 결과를 담은 의장성명은 중국 측의 입장을 고려해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이 요구한 영유권 분쟁의 기본원칙을 담은 행동수칙을 명시하지 않았다. 동시에 필리핀과 베트남 등의 입장을 수용해 무력사용을 금하기로 하는 내용을 포함시켜 갈등을 봉합하는 데 그쳤다.

동아시아 해양분쟁의 한 축은 중국이다. 남중국해에서 필리핀과 황옌다오(필리핀명 스카보로섬), 베트남 등과는 난사군도(스프래틀리군도), 시사군도(파라셀군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다. 동중국해에서는 중·일 간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분쟁이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필리핀과 베트남, 일본 등 중국과의 영토분쟁 당사국들은 미국의 우산 밑에 집결하고 있어 사실상 미·중 갈등이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회의 참석 전 일본·몽골·베트남·라오스 등 중국 주변 국가들을 의도적으로 방문, 강력한 개입 의지를 내보였다. 미국은 중국과 맞서는 동남아 국가들의 역성을 들어주면서 ‘태평양 국가’로 복귀하는 동시에 동남아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경제적, 외교적, 안보적 반사이익을 노리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해 회의 자료를 보고 있다. l 출처:경향DB

이번 회의를 계기로 열린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는 동·남중국해뿐 아니라 한반도 주변에서도 미국의 아시아 복귀 또는 지역 재편구도가 착착 진행되고 있음을 거듭 확인시켜 주었다. 3국 장관들은 실무급 운영그룹을 워싱턴에 설치키로 합의했다. 지난달 워싱턴 한·미 외교·국방장관(2+2)회의에서 강화하기로 한 3각 안보협력을 처음 제도화한 것이다. 3국 장관들은 공동발표문에서 북한의 핵·미사일을 공동의 위협으로 한껏 강조했지만, 중국을 압박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와 맞아떨어질 뿐이다. 중국의 반발로 이어져 서해상의 긴장을 높일 수밖에 없다.

이번 회의 결과는 미·중 사이에서 균형자적 지위를 활용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도모해야 할 시대적 소임을 미룬 채 미국만 바라보는 이명박 정부의 외눈박이 외교안보 정책이 남긴 또 하나의 잘못된 족적이 아닐 수 없다. 남북관계 파탄에 이어 동아시아 신냉전구도에 일조를 해왔다. 군사대국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정이 불발된 것을 여전히 아쉬워하고 있다. 누가 되건 19대 대통령이 물려받게 될 부(負)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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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중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전격 사표를 냈다.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일부 언론 보도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김 실장은 돈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름이 거론된 데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15년 동안 이명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그가 아무 잘못도 없이 언론 보도로 그만둔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대통령 일정을 챙기고, 휴가 때도 수행하는 개인비서 역할을 한다.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사무실이 있어 흔히 ‘문고리 권력’이라고 부른다. 집중적인 로비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김영삼 대통령 때 장학로 실장, 노무현 대통령 때 양길승 실장도 돈을 받았거나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물의를 빚고 물러난 바 있다.

김 실장은 이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이 대통령이 국회의원으로 있던 1997년 비서관으로 보좌하기 시작해 서울시장 시절에는 의전비서관, 2008년 대통령 취임 이후 지금까지 제1부속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래 보좌한 최측근 인사다.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검찰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김 실장이 돈을 받았다는 의혹을 확인하지 못했고, 진술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조사 과정에서 단서가 포착되면 수사한다는 방침이다. 임석 회장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다면서 대통령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을 구속하고, 정두언 의원을 구속하겠다고 서두르던 모습과는 분명 다르다. 의외다. 검찰은 한 점 의혹도 남기지 말고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이상득 전 의원까지 구속한 마당에 뭘 더 망설이겠다는 것인가. 김 실장이 죄가 있는지, 어디까지 연루된 것인지 분명히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만약 김 실장의 금품수수 보도가 사실이라면 그 파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검찰의 적극적 수사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통령도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친인척과 측근들이 저축은행 비리로 줄줄이 낙마하고 있는 마당이다. 국민들에게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아울러 친인척 및 측근 비리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성역없는 수사를 약속해야 한다.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현 정권의 도덕성 추락이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지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다. 지금이라도 서둘러 사과하고 모든 의혹을 밝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성난 민심을 달래주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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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의 새 대표로 강기갑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이 선출됐다. 신주류 쇄신파를 대표하는 강기갑 후보는 지난 9~14일 치러진 당직 선거에서 구주류 당권파의 지지를 얻은 강병기 후보를 11%포인트 차로 제치고 당선됐다. 강 대표가 조직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낙승한 것은 구주류의 비상식적 ‘불통 정치’에 풀뿌리 당원들이 등을 돌렸음을 의미한다. 비례대표 부정경선 논란에 대해 당심도 민심과 마찬가지로 엄중한 심판을 내린 것이다. 최악의 위기를 맞은 통합진보당이 환골탈태를 위한 디딤돌을 마련한 것으로 보고 환영한다.

강 대표는 취임사에서 “당선의 기쁨보다는 치유와 재기의 길을 걸어가야 할 책임감을 더 많이 느낀다”고 밝혔다. 그의 말처럼 강 대표 앞에는 ‘재창당 수준의 혁신’이라는 지난한 과제가 놓여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당내 패권주의를 종식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부정경선과 폭력사태에 대한 반성 없이 자신들만이 절대선(善)인 양 해온 구주류의 행태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구주류의 핵심인 이석기·김재연 의원은 대표 경선 결과를 존중해 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의원총회를 통해 제명하는 길밖에 없다.

 

당기는 강기갑손에 ㅣ 출처:경향DB

강 대표가 이끄는 새 지도부는 진보의 가치를 견지하되 낡은 형식과 관행은 과감히 떨쳐냄으로써 진보의 내용을 새로이 채우는 데 앞장서야 한다. 지난달 혁신비대위 산하 새로나기특위는 “진보적 가치의 혁신과 새로운 비전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면서 대북관 및 대북정책, 한·미동맹, 재벌정책 등에 걸쳐 당이 지향해야 할 바를 제안했다. 특위안이 모두 타당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강 대표가 취임사에서 밝혔듯이 “진보정치를 지지하는 대중이 변화를 요구한다면 이것을 숙명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통합진보당은 향후 깊이있는 토론을 통해 ‘2012년 한국 민중’의 요구를 담아내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쇄신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과제는 자신들이 누구를 대표하는지 재정립하는 일이다. 통합진보당은 일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아닌, 비정규직·미조직·영세 노동자들의 시름을 덜어주는 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각종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고통받는 농민이나 사회복지의 혜택에서 소외된 서민들 역시 보듬어야 한다. 이것이 강 대표가 말한 “세상을 먹여 살리는 진보정당이 되는” 길이다.

통합진보당이 진정으로 거듭나는 일은 강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의 노력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새 지도부 선출을 계기로 당원과 진보적 대중 모두 ‘진보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한국의 진보정치는 통합진보당 사태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든 기회로 바뀔 수 있다. 진보는 재구성될 수 있고 재구성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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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 일본 군국주의나 독일 나치정권 같은 전체주의 체제를 소개할 때 딱 들어맞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나라의 한 역사교과서가 유신독재를 옹호한 대목이다. 뉴라이트 계열인 ‘교과서포럼’이 펴낸 <한국 근현대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보수단체의 공동대표 출신인 박효종 교수가 박근혜 대선캠프에 정치발전위원으로 기용돼 논란이 크다. 역시 정치발전위원인 이상돈 교수도 “5·16을 쿠데타라고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박근혜 의원은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다. 유신체제도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소신을 이제 실천하는 단계로 가는 것 같다. 박 의원은 대선 출마선언에서 경제민주화를 외쳤지만 유신독재에 대한 긍정적 소신을 보면 민주화란 말이 위장전술이나 호객행위로 읽힐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경향신문DB)


5·16에 대한 박 의원의 생각은 이성계의 조선조 창건에 대한 세종대왕의 생각과 같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조선뿐 아니라 고려도 그랬고, 왕조 간 무력투쟁을 정당성 여부로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5·16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을 총구로 뒤엎은 쿠데타 아닌가. 이 두 사실을 어떻게 동일한 기준에서 비교한단 말인지, 나는 귀를 의심한다. ‘박정희 왕조’를 세습하겠다는 공개적 언명으로 들린다. 그렇지 않아도 작년은 5·16 쿠데타 50년이었고 올해로 유신 선포 40년을 맞는다. 유신체제에 대해 따져보아야 5·16의 숨겨놓은 목적을 알 수 있다.


첫째, 유신헌법은 기존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근거한 개헌이 아니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특별선언과 비상조치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것은 헌법에 근거하지 않은 체제 파괴로 사실상 내란행위였다. 둘째, 유신헌법안은 이른바 비상국무회의가 의결해서 국민투표로 넘겼다.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가 그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코미디였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의회가 아니고는 입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규범이 유린된 것이다. 셋째, 유신헌법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에 대한 허가나 검열을 금지한다는 명문 규정을 삭제하고 또 인권보호의 핵심장치인 구속적부심제 등을 폐지한 것은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했다는 증거다. 넷째,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고 어용단체 성격의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간선하도록 한 데다 또 몇 번이고 연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다. 거기에다 대통령은 국회 해산권, 국회 동의가 필요없고 사법적 심사도 배제한 긴급조치권, 국회의원 3분의 1의 추천권, 대법원장과 모든 판사들에 대한 임명·보직·파면권까지 가졌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권력분립이나 견제와 균형을 파괴하고 대통령 1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왕조적’ 체제였음을 의미한다. 다섯째, 박정희는 유신체제의 명분으로 북한의 남침 위협을 내세웠으나 1970년대 초 한반도 주변은 긴장 완화 분위기였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1971년 12월20일자에서 박정희가 선포한 국가비상사태에 대해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적 비상’ ”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새마을운동 성역화사업 준공식에 참석,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만져보고 있다. (경향신문DB)


무엇보다도 유신체제는 박정희 정권이 수많은 비판세력과 야당 정치인들에게 고문과 테러를 자행하면서 만들어냈다. 불법적이고 반문명사적인 강압과 공작정치의 산물이었다. 


19대 국회와 차기 정부는 국민 위에 군림한 ‘유신왕조’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해야 한다. 유신권력이 자행한 고문, 테러, 사법살인, 강제해직 같은 ‘더러운 전쟁’에 대해 역사적 심판을 내려야 한다. 야권의 대선주자 중 이 문제에 확실한 입장을 밝힌 사람은 김두관 전 경남지사다. 그는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을 넘어서 이미 자신이 독재자”라면서 “국민 위의 박근혜를 국민 아래 김두관이 이긴다”고 대선 출마선언의 화두를 열었다. 다른 대선주자들뿐 아니라 시민사회가 함께 이 역사문제에 대해 공론의 장을 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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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직이든 그것을 통솔하는 장(長)이라면 그 조직의 특성에 부합하는 업무 능력과 리더십 등의 자질을 갖춰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일단 조직의 수장을 맡아 직무를 수행하다 보면 그러한 능력과 자질이 있는지는 제3자보다 본인이 더 잘 알 수 있다. 조직의 발전이나 미래를 외면할 정도로 사리사욕에 눈이 어둡지 않다면 그럴 것이다. 특히 국가기관의 장은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더 냉철하게 판단하고 처신해야 한다. 자신의 모습이 공직사회는 물론 국민 생활, 나아가 국가의 대외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난달 청와대가 연임을 내정한 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새삼 국가기관의 장이 갖춰야 할 덕목을 일깨워주는 반면교사가 아닐 수 없다.


최근 현 위원장은 ‘업무상 결격’이라는 평가 외에도 인권위원장 이전 과거 행적에 대한 의혹들이 하나둘 불거지고 있다. 오는 16일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민주당은 현 위원장의 35년간 연구 업적인 논문 21편 중 41%가 타인 논문 표절이거나 자기 논문 표절이라고 주장했다. 인권 관련 연구가 한 건도 없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또 현 위원장이 국회에 제출한 인사청문 자료에는 지난 3년간 재임 중 업적이 부풀려져 있었다고 한다. 전임 위원장 시절부터 추진해온 일들을 모두 현 위원장의 실적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국제인권사회 리더십 강화를 통해 국격을 향상시켰다’는 표현에는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다.


현병철 인권위원장이 인권상 시상을 하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경향신문DB)


민주당은 또 현 위원장이 1983년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에 있는 3㎡짜리 남의 땅에 전입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는 전입한 지 한 달도 안돼 옆에 있던 연립주택으로 환지받아 4년간 주소지를 뒀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위장전입으로 주민등록법을 위반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 현 위원장은 해명자료를 내고 “장안동 부지에 세입자로 전입해 실제 거주했다”고 투기 의혹을 부인했다.


이 같은 의혹들은 인사청문회에서 진실이 가려지겠지만 현 위원장은 자신의 도덕성까지 도마에 오른 현실을 참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현 위원장이 재임 시절 인권위 파행 등으로 국격을 훼손하고 시민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아온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최근 인권위 내부는 물론 정당, 시민단체, 학계까지 나서 그의 연임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오죽했으면 아시아인권위원회 등 국제인권단체에서도 현 위원장의 연임에 우려를 표명할까. 현 위원장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현 위원장이 연임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국회에서 반드시 걸러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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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어제 본회의를 열어 무소속 박주선,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표결에 부쳤으나 결과는 엇갈렸다. 박 의원 체포동의안은 가결됐으나 정 의원의 동의안은 부결됐다. 새누리당이 19대 국회의 쇄신 과제 중 하나로 제시한 바 있는 국회의원의 회기 중 불체포 특권 포기를 제도 정비 없이 밀어붙이려다 보니 생긴 파열음이다.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는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으나 사태의 원인부터 살피는 게 우선이다.


정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부결은 ‘예고된 참사’로 보는 게 옳다. 불체포 특권을 유지하려는 의원들의 꼼수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으나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지금 방식대로 체포동의안이 남용되면 검찰 편의주의만 부추길 것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터다. 특정인에 대해 회기 중 체포동의안이 제출되면 국회는 불체포 특권 악용이라는 비판 여론을 의식한 나머지 동의안을 가결시킬 공산이 크고, 그것만으로도 그 정치인은 국회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리다. 극단적으로 검찰이 특정 정치인을 ‘손 보고 싶을 경우’ 국회 회기 중 구속영장을 청구만 해도 충분하다는 얘기가 된다. 



초조한 정두언 의원 (경향신문DB)



이번 동의안은 영장심사를 위한 절차다. 법원으로선 정 의원이 출두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했다고 할 수 있으나 국회 부결로 영장심사 기회조차 놓치고 말았다. 정 의원이 자발적으로 나와 실질심사를 받든, 서류만으로 구속여부를 판단하든 체포동의안 부결로 구속이 불가능해졌다. 향후 수사가 ‘성실히 임하겠다’는 정 의원의 처분에 맡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자초한 것이다. 이날 새누리당 지도부가 불체포 특권 오·남용의 전비를 털어내자며 동의안 가결을 독려하고, 검찰이나 법원 역시 전례 없는 사태로 하루 종일 허둥거린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불체포 특권 포기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갈망하는 시대 흐름과 맞닿아 있다. 불체포 특권은 과거 독재·군사정권 아래서 의원들의 의정 활동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도입됐으나 의원들이 이를 오·남용함으로써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가치를 깨뜨린 측면이 있다. 불체포 특권 포기는 정치권의 자업자득이고,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바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과거에 특권을 누려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권리가 정치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침해되는 것도 경계할 대목이다. 불체포 특권 폐지의 당위성과 함께 우려되는 동의안 남용에 따른 폐해에도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뜻이 숭고해도 포퓰리즘이 앞서면 동티가 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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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이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현직 대통령의 친형이 구속된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이 전 의원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과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에게서 6억여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 전 의원이 과거 사장을 지낸 코오롱그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1억5000만원을 챙긴 혐의도 구속영장 청구서에 포함시켰다.



저축은행 피해자들로부터 멱살 잡히는 이상득 전의원 (경향신문DB)



구속되기 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에 들어서던 이 전 의원은 저축은행 피해자들에게 넥타이를 잡히고 계란 세례를 받았다. 그는 “(법원이)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통제하지 못했느냐”며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저런 사람들’이란 누구인가. 채소 팔고 생선 팔아 어렵게 모은 돈을 저축은행에 맡겼다가 날리고는 한푼이라도 건지겠다며 울부짖는 서민들 아닌가. 백번 천번 사죄해도 모자랄 터에 ‘저런 사람들’이라 깎아내린 이 전 의원의 오만과 특권의식이야말로 오늘날 그가 차가운 감방에 갇히게 된 까닭일 것이다. 정권 출범 초부터 ‘영일대군’ ‘만사형통(萬事兄通)’ 으로 불리며 권력을 농단해온 이 전 의원의 추락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격언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있다.


이 전 의원의 구속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검찰의 최우선 과제는 그가 챙긴 돈의 사용처를 밝혀내는 일이다. 대선 직전 받은 돈을 어디에 썼을 것인지 예상하기는 사실 어렵지 않다. 검찰 관계자는 “대선자금이 나온다고 덮을 생각은 없다. 단서와 증거가 있으면 수사한다”고 말했다. 검찰의 다짐은 허언(虛言)으로 귀결된 적이 대부분이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기를 기대한다. 삼척동자도 짐작할 만한 사안을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가는 후폭풍을 피하기 어려울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어제 외부 일정을 취소한 채 온종일 청와대에 머물렀다고 한다. 형의 구속에 충격을 받은 탓일 터이다. 하지만 지금은 칩거할 때가 아니라 국민 앞에 고개 숙일 때이다. 법원이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혐의가 소명됐다”고 판단했는데도 사과를 미룬다면 분노로 들끓는 민심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될 것이다.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에 이어 이 전 의원까지 수인(囚人)으로 전락하면서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 자처하던 이명박 정권은 회생불능의 파탄을 맞게 됐다. 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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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이 유력한 대선주자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은 절제된 언행,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는 자세 등 정치지도자로서의 덕목을 대중이 일정 부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그가 반드시 극복·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부정적 의미의 정치적 유산이 바로 그것으로 정수장학회도 그중 하나일 터이다. ‘박근혜 캠프’의 정치발전위원을 맡고 있는 이상돈 중앙대 교수가 얼마전 “박 의원 본인이 정수장학회 등 아버지 시대에 있었던 어두운 부분을 대선과정에서 해소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까닭도 과제 해결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제 박 의원이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정수장학회와 관련해 언급한 것을 살펴보면 이 문제가 이상돈 위원의 개인적 희망사항 피력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박 의원은 “정수장학회는 개인의 것이 아니고 공익법인이며 내가 이사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현재 장학회를 맡고 있는 최필립) 이사장을 그만두라고 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서 언어도단”이라고 말했다. “정수장학회에 문제가 있다면 5년 내내 바로잡겠다고 힘을 기울인 노무현 정권에서 해결됐을 텐데 왜 나한테 하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이는 ‘이사장을 그만둔 이상 정수장학회와 관계없다’는 기존의 입장을 반복한 것이자, ‘정수장학회는 아무 문제가 없는 만큼 더 이상 해결하고 말 것도 없다’는 통첩으로도 읽힌다.



(경향신문DB)



알려진 대로 정수장학회는 박 의원의 양친인 박정희·육영수의 이름 중에서 ‘정’과 ‘수’자를 딴 것이며,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정권이 고 김지태씨의 부일장학회를 ‘자진헌납’ 형식으로 강탈해서 만든 장학재단이다. 물론 정수장학회가 군사정권의 강압행위로 탄생했지만 일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공익재단인 데다 원 소유주인 김지태씨의 유족에게 주식을 반환해야 할 법적 시효도 지났다. 따라서 ‘나는 장학회와 관계없다’는 박 의원의 주장이 적어도 형식논리에서는 틀린 것이 아니다. 그가 ‘법치국가’를 운위한 까닭도 이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법치국가의 ‘법치’는 원래 지배자의 초법적 자의적 통치행위를 법을 통해 제어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개념이다. 국가권력이 불법적으로 강탈한 시민의 재산을 법적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계속 움켜쥐고 있다면 이러한 법치국가의 이념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박 의원이 정수장학회를 김지태씨 유족이나 사회에 환원해야 할 법적 의무는 없다 하더라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장학회의 이사장을 지냈으며, 지금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만큼 문제 해결의 정치적 도덕적 의무는 있는 셈이다. 일종의 ‘정치적 장물’을 토대로 조성한 기금으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준다는 것은 박 의원이 그토록 강조하는 ‘원칙’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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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태 | 전남대 교수·정치학


 

안철수 원장의 일거수일투족이 국민과 언론의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다. “대통령 자리는 선택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그의 말대로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는데 바람이 그냥 놔두지를 않는”(樹慾靜而風不止) 형국이다. 지지도 부동의 1위인 박근혜는 고개를 젓고, 야권 대선 주자들도 숨죽이고 지켜볼 것이다. 안철수는 정치를 하더라도 진영논리에 매몰되지 않겠다고 말했다. 진보좌파 대 보수우파, 어느 블록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일 터다. 


 진보 학자들은 한국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중도세력이 아니라 사민주의와 같은 진보좌파세력이라고 역설한다. 경청할 만한 통찰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 섬세한 관점 같지는 않다. 그간 민주통합당은 적어도 무늬상으론 줄기차게 ‘좌클릭’의 길을 걸었고 대선에서도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를 벼르고 있다. 이 시나리오는 진보좌파 야권연대-보수우파 새누리당의 대결, 이른바 ‘노무현 대 박정희 프레임’이다. 이는 한국 정치가 ‘대공황’으로 가는 양극적 사이클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이런 정치지형에선 시대정신인 경제민주화-보편적 복지국가는 한낱 한여름 밤의 꿈으로 명멸할지 모른다.


(경향신문DB)



1970년대 덴마크·네덜란드의 노조-좌파 정권은 자본-우파와 이념적·정치적으로 날선 대립각을 세우고 복지국가 과잉팽창을 시도했다. 그 결과 재정악화-저성장-고실업-정치위기의 악순환 수렁에 빠졌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이들 국가는 이념블록을 뛰어넘는 정당 간 연정을 구축, 정치적으로 인기 없는 임금억제-노동시장개혁-복지재편의 정치를 안정적으로 작동시켰다. 이런 서유럽 정치의 매력은 진보좌파와 보수우파 사이의 갈등을 완충하고 균형추 역할을 하는 건강한 중도정당의 ‘회전축’ 정치력에 있다.


새는 오른쪽 날개, 왼쪽 날개로만 날 수 없다. 양 날개 없이 몸통으로만 날 수도 없고 몸통 없이 양 날개만으로도 날 수 없다. 무릇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진보좌파의 가치와 보수우파의 가치가 모두 소중하다. 따라서 한국 민주주의는 ‘진보좌파 대 보수우파’의 양극단적인 충돌에 쿠션 역할을 해줄 건강한 중도세력의 ‘몸통정치’를 요구한다. 양 이념블록의 가치를 녹여내는 변증법적 지양의 정치가 절실하다.


안철수는 사민주의자도 시장만능주의자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보수우파도 진보좌파도 거부감이 많지 않은 듯하다. 서유럽에선 좌우를 뛰어넘는 이념블록의 실용주의 정치가 진보좌파의 극단화, 보수우파의 극단화를 견제하고 가교한다. 반면 한국의 양극단적인 정치블록화는 민주주의의 불길한 적신호이다. 이 악성 바이러스를 치유하는 ‘백신 하이브리드 정치’를 안철수에게서 기대하는 것 같다. 친DJ-친노 인사, 일부 보수성향 인사들과 교감하는 유연한 행보들을 조합해보면 그의 대선 전략의 그림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국민적 검증이 없었다는 이유로 그의 리더십을 의심한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검증이 제대로 안돼서 2007년 대선 때 한나라당의 ‘잃어버린 10년’ 프레임이 먹힌 것이 아니다. 문제는 한국 정치지형이다. 안철수는 정치결사체 성격의 유목형 ‘대국민포럼’을 구축하여 좌우를 아우르는 ‘제3의 정치 공간’을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민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포용하여 노동-자본 모두에게 친화적인 정책레짐을 통해 노사정 대타협을 이끌어 낸 네덜란드 중도 ‘기민당’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복지국가-재벌개혁-경제성장-한반도평화의 선순환을 유도할 수 있는 우호적인 정치적 조건이 된다. 


많은 이들이 베일에 싸인 안철수의 대권 레이스에 만시지탄을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마라톤 경기에서 먼저 뛰어 나간 선수가 나중에 들것에 실려 오는 경우를 많이 목격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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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홍욱 정치부 기자 ahn@kyunghyang.com


 

지금이야 수억원대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된 몸이지만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전 차관은 이명박 정부 초기에 잘나갔다. ‘개국 공신’이던 그는 문화부 차관으로, 국무회의 결과를 브리핑하는 정부 대변인을 겸했다. 신 전 차관은 2008년 5월 “국무총리제는 독재시절에 (대통령이) 얼굴 마담을 시키기 위해, 책임으로부터 차단막을 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 당시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책임총리제 강화’를 얘기하자 “대통령제를 잘 모르고 하는 얘기”라면서 이렇게 일축했다.


일개 차관이 여당 대표의 제안을 단박에 뭉갰던 그 말은,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실인 듯하다. 적어도 이명박 정부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 위상을 어떻게 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정부는 부처별 업무조정 등 국정 조정 기능을 총리실에서 청와대로 이관시켰다. 실제 총리가 국정 운영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추진한 일이 무엇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모두발언하는 김황식 총리 (경향신문DB)



이 정부 첫 총리인 39대 한승수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일방적 국정 운영 속에 존재감 자체가 미약했다. 40대 정운찬 총리는 이 대통령 요구에 맞춰 ‘세종시 수정안’을 밀어붙이다 ‘세종시 총알받이’라는 오명을 쓰고 1년 만에 물러났다.


41대 김황식 총리에게도 아쉬운 대목이 많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국무회의에서 밀실 처리한 과정을 보면 총리의 역할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김 총리는 이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인 지난달 26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군사협정을 통과시켰다. 정부가 안보를 위해 체결이 중요하다던 한·일 군사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한 과정은 문제다. 나아가 국무회의 안건을 사전 논의하는 차관회의를 건너뛰고 즉석 안건으로 올려 이 협정을 비밀리에 처리했다. 국무회의 처리 이후에도 알리지 않고 있다가 들통이 났다. 김 총리는 이를 방관했다. 당대 최고의 법률가라는 대법관에, 감사원장을 지낸 그의 이력을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


협정 밀실 처리를 두고 청와대가 시켰느니, 외교통상부가 주도했느니 하는 책임 떠넘기기는 볼썽사납다.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하면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 사표로 끝날 일은 아니다. 이번 사태가 현재까지 홀로 총대를 멘 김태효 기획관이 직책상 상관인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외교부 장관을 뛰어넘어 주무른 것이라면 특히 더 그렇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모른 척 한 발 떨어져 있는 그의 태도는 적절하지 않다. 그의 처신을 두고 ‘부작위(不作爲) 총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비밀·졸속 처리에 대한 여론의 질타가 쏟아지자, 김 총리는 지난 6일 국회 개원에 맞춰 “주요 현안에 대한 정책 방향과 정부 입장을 충실히 설명해 오해를 푸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며 여론 무마에만 신경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정도로 매듭지을 일이 아닌 만큼 행정부를 총괄하는 그의 책임있는 입장 표명이 필요한 시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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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여당 대선 후보가 출마를 공식화하면서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선거용임을 감안하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헛소리로 끝나게 될 말이라 할지라도 정치가가 선택하고 사용하는 언어에는 그 자신의 세계관이나 현실인식이 얼마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기 집권의 가능성이 높은 유력 후보가 ‘국민의 행복’을 언급한 것은 어쨌든 다행스럽다.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국민의 80%가 불행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절망적 현실을 적어도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발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행복’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단지 미래의 일로 약속만 할 게 아니라 집권을 하기 전이라도 지금 당장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자신을 지지하는 확고부동한 유권자를 30% 이상 확보하고 있는 여당 정치지도자는 그 자체로 이미 강력한 권력자이다. 그런데도 이 지도자는 ‘국민의 행복’에 관계된 중대한 현안들에 대해서 늘 침묵하거나 기껏해야 ‘안타깝다’는 모호한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특이한 정치적 행동을 줄곧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국민의 행복’을 운위한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 극히 희극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다. 이것은 ‘독재자의 딸’에게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나라 정치엘리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경제민주화’를 얘기하고 있지만, 그들이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를 극복하고 대중적 빈곤화와 실업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으로 성장보다 분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일자리 창출, 복지를 주요정책으로 내세우는 것은 물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문제의 본질이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민주화라는 과제는 실제로 경제문제라기보다 정치·사회적인 차원에서 얼마나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실천되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오늘날 뒤틀린 경제의 핵심문제는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현상으로 요약될 수 있지만, 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금권정치가 종식되고, 사회정의가 실현되어 ‘작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서 발언할 권리를 회복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답시고 선정을 베풀고자 하는 게 아니다. 올바른 정치는, 요컨대, 민중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넓히는 데 기여하는 노력일 뿐이다. 


민주주의란 까다롭고 복잡한 게 아니라 글자 그대로 민중의 자기통치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근본적인 결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오늘날 선거에 의해 돌아가는 의회제 정당정치는 심각한 불의 혹은 부조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선거란 어차피 돈과 권력이 판을 좌우하는 게임인 이상, 정당한 대표자를 선출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의제 민주주의하에서 민중이 자신의 의사를 국가정책에 반영시킬 수 있는 여지는 지극히 좁을 수밖에 없다. 지금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온갖 위기의 궁극적인 원인은 결국 이러한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진 결함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나라에 따라 민주주의의 질적 수준이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보완장치에 따라 민주주의가 얼마든지 질적으로 높거나 낮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왜 민주주의가 중요한가? 한마디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기관들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를 보면, 최상위는 항상 덴마크나 스위스다. 안정된 복지국가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추측하지만, 덴마크나 스위스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원인이 높은 국민소득이나 빼어난 경관이 아니라 자신들이 향유하는 ‘민주주의’에 있다고 생각한다. 거의 직접민주주의에 근접한 정치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스위스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덴마크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덴마크는 원래 민중의 자치적 협동운동으로 부흥을 이룬 나라이다. 그 전통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오늘날 특히 흥미로운 것은 ‘시민합의회의’라는 제도이다. 1985년에 세계 최초로 창설된 이 제도는 새로운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문제를 시민들의 주체적인 참여에 의해 결정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첨단과학기술에 관련된 최종 결정권이 전문가들이나 업계, 정부 당국이 아니라 일반시민들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회의는 먼저 국회의 ‘기술위원회’가 주관하여 전국적 언론을 통해 자원자를 모집한 뒤에 무작위로 15명을 선정한다. 선정된 이들은 대개 주부, 공장노동자, 환경미화원, 샐러리맨 등 평범한 시민들이다. 그들은 주말을 이용하여 몇 차례 준비모임을 거친 다음에 며칠간 전문가들을 불러서 경청, 질의응답의 결과를 근거로 의견을 모아서 보고서를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 날 국회의사당에서 일반 방청객과 의원들, 그리고 TV를 통해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고서 작성 경위를 설명하고 답변한다. 그동안 이 회의에서 취급된 주제는 유전자조작식품, 방사선식품조사, 인간게놈계획, 전자신분증명서, 유전자치료 등 다양했다. 시민합의회의의 결론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게 아니어서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지만, 대체로 국가정책은 그 결론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간다. 


원래 시민합의회의는 원자력발전 건설 여부를 두고 1980년대 전반기에 치열하게 벌어진 논쟁의 산물이다. 덴마크는 핵분열을 최초로 실험적으로 확인했던 핵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고국이다. 그런데도 1970년대의 석유위기 이후 격렬한 논쟁 끝에 덴마크 시민들은 원전 불가라는 결론을 내렸고, 의회는 그 결정을 따랐다. 그 대신 덴마크는 자연에너지 개발에 전력을 기울여 현재 세계 최대의 풍력발전 수출국가가 되었다. 밥을 제대로 먹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밀도 높은 민주주의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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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이 어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오는 12월19일 대권 고지를 향한 여야의 대선 레이스도 본격화 국면에 접어들었다. 박 의원은 출마선언문에서 경제민주화의 실현과 일자리 창출, 한국형 복지의 확립을 국민 행복을 위한 3대 핵심 과제로 천명했다. 그의 선언문은 ‘1% 대 99%의 세상’으로 상징되는 양극화의 해소라는 시대적 과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번 대선이 국민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실질적이고도 생산적인 경쟁의 장이 되길 기대한다.


박근혜 타임스케어 광장 출마선언 (경향신문DB)


비록 예고된 바이나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박 의원의 정책적 대변신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라면 5년 전 재벌에게 무소불위의 시장 권력을 넘겨주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며, 법질서는 세운다)를 정반대 개념이랄 수 있는 경제민주화로 대체한 것이다. 또 산업화와 민주화의 공존 모색은 국민의 행복으로, ‘국가 중심’은 ‘국민 중심’으로 각각 옷을 갈아입었다. 성장 담론이 복지와 분배로 무게중심을 이동한 셈이다. 5년 전 출마선언식과 달리 시민이나 젊은이들과 어울리고자 한 외형적 틀의 변화는 정책적 변화에 비하면 오히려 사소하다. 5년의 시공을 넘어 두 출마선언문만을 비교하면 한 사람의 정책이고 철학이라고 믿기 어렵다.


문제는 박 의원의 변신을 설명해줄 만한 고리를 찾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박 의원은 2007년 여권 대선 후보로서 직접 조세감면 법안을 제출하는가 하면 ‘규제 제로’ 정책을 추진한 적이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일부 현안을 두고 ‘반(反) MB’ 전선에 서기도 했으나 그뿐이었다.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규제 법안이 무산됐을 때도, 재벌의 중소기업 지배나 공정거래위원회의 불공정한 대기업 봐주기가 문제됐을 때도 침묵했다. 정책적으로 그의 변신을 설명할 수 있는 계기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의원으로선 ‘지난 4년 동안 과연 뭘 했나’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다. 그의 대변신을 놓고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박 의원이 자신의 변신에 진정성을 불어넣으려면 그 과정과 배경부터 국민 앞에 소상히 밝히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박 의원은 “그동안 공정성의 중요성을 간과했고, 그 결과 경제주체 간 격차가 확대되고 불균형이 심화되어 왔다”고 설명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더구나 박 의원은 이날도 정수장학회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했고, ‘불통’이라는 비판은 소신과 구별해달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박 의원이 본질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물며 ‘재벌 개혁론자’인 김종인 공동선대위원장과 삼성 고문, 전경련 부회장을 지낸 현명관씨가 대선 캠프 내에서 공존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박 의원이 전면에 내세운 경제민주화를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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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