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교육'에 해당되는 글 458건

  1. 2019.04.16 [학교의 안과 밖]학원으로 내몰리는 중·고교생
  2. 2019.04.10 [사설]OECD 막차 탄 ‘고교 무상교육’, 안정적 재정 뒷받침돼야
  3. 2019.04.02 [학교의 안과 밖]‘알로마더’가 되기로 했다
  4. 2019.04.01 [기고]고입 경쟁에 유보된 ‘사춘기’
  5. 2019.03.18 [기고]사립유치원 앞에 놓인 두 가지 선택
  6. 2019.03.13 [사설]사교육비 역대 최고, 공교육 정상화 정책이 무색하다
  7. 2019.03.06 [기고]고등학교 무상교육을 기다리며
  8. 2019.03.05 [기고]보완책 시급한 교육부 조기 영어교육정책
  9. 2019.03.05 [학교의 안과 밖]3월, 설렘과 두려움 사이
  10. 2019.03.04 [김진경의 교육으로 세상읽기]남북 평화체제와 고등교육의 과제
  11. 2019.03.04 [시선]대학이 ‘청춘’들을 길들이는 법
  12. 2019.03.04 [사설]한유총의 ‘집단휴원’ 강행, 무관용 원칙으로 엄정 대응해야
  13. 2019.02.26 [속담말ㅆ·미]넘어도 안 가본 고개에 한숨부터 쉰다
  14. 2019.02.26 [학교의 안과 밖]대안학교의 존재 이유
  15. 2019.02.19 [학교의 안과 밖]SKY 캐슬, 세습되는 능력주의
  16. 2019.02.13 [공감]대한민국 ‘교복 캐슬’
  17. 2019.02.12 [학교의 안과 밖]이도 저도 아닌 입시 ‘학종’
  18. 2019.01.30 [공감]또 다른 기억의 매개체 ‘미각’
  19. 2019.01.28 [김진경의 교육으로 세상읽기]30년에 300년을 산 사람
  20. 2019.01.15 [학교의 안과 밖]‘쌤’이 문제가 아니라…

대다수의 중·고등학교에서 4월 말과 5월 초에 걸쳐 중간고사를 치르기 때문에 요즘을 중간고사 대비기간이라고 한다. 이 기간에는 중·고등학생이 있는 가정마다 온통 비상이기 마련이다. 학생들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밤 12시를 넘기는 날들이 시작되었으니 당연히 아침에 일어나는 일도 전쟁이 된다. 적으면 3~4시간, 많아야 5시간에 불과한 수면을 하는 것이니 혈기왕성한 아이들이 아침에 별 탈 없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미션일 수밖에 없다. 

이런 비상이 걸리는 곳으로 학원들도 있다. 학원들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2~3주 전부터 시험 대비 수업을 시작했는데 요즘은 대부분 4주 또는 한 달 전부터 시험 대비 수업을 시작한다. 학원들에서 이렇게 긴 내신 시험 대비기간을 설정하는 이유는 학교 성적이 대학입시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학원들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요즘은 예상 시험문제를 잘 가르치는 경쟁에서 학생들에게 내주는 엄청난 과제 분량의 경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한동안은 시험 대비기간을 한 주씩 늘리는 방식으로 경쟁했지만 4주 이상으로 기간을 더 늘리면 사실상 상시 시험 대비라는 무리한 일정이 만들어지기에 대신 숙제를 많이 내주는 것으로 학습 강도를 높이는 경쟁을 하고 있다. 

이런 방법은 학원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학부모들, 특히 어머니들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어서 선호된다. 학생들이 집에 있는 동안 힘겹게 학원 숙제를 하는 모습이 아이들을 잘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도 성적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으면 ‘학원에서는 할 만큼 했는데 학생이 따라오지 못해서 어쩔 수 없다’는 변명도 가능하니 학원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여기에 덧붙여 시험 기간 중 학생들이 학원에 머무는 시간도 늘린다. 평시에 3시간 수업이었다면 4시간 동안 학원에 있게 하고 그중 1시간은 대학생 조교들을 활용해서 시험 대비 문제풀이를 하게 한다. 물론 이 시간도 똑같이 학원비가 과금된다. 

이렇게 학원들마다 숙제량 경쟁과 시간 끌기 경쟁을 하기 때문에 여러 곳의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의 경우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다니는 학원들마다 자신들이 가르치는 과목의 성적을 올리는 데 학습시간을 쓰도록 과도한 숙제를 내주다보니 그것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학생은 매일 새벽까지 학원 숙제를 하느라 진짜 필요한 자신의 공부를 전혀 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이면 학생들은 학교 수업 시간에도 학원 숙제를 하게 되는데, 학교에서 과거와 같이 강의식 수업이 아닌 참여수업을 하는 경우에는 수업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데다 학원 숙제도 못해서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이 된다. 물론, 그런 상황을 모두 다 잘 챙기고 높은 성적을 받아내는 학생들도 있기는 하지만 소수일 수밖에 없고 나머지 학생들은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암담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요즘 학생들의 기초학력이 낮아져서 전국적으로 모든 학생들이 일제고사를 치러야 한다는 주장을 정부에서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주장처럼 학생들이 전국적으로 학습량이 부족해서 기초학력이 낮아졌을까? 아니면 불필요하고 부조리한 교육환경에조차 접근 못하는 열악한 환경의 학생들이 아직도 많기 때문일까? 과거 권위적인 정부와 어떤 면을 슬금슬금 닮아가는 교육당국의 발걸음이 무서워진다.

<한왕근 청소년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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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과 정부, 청와대가 고등학교 무상교육 방안을 확정했다. 올 2학기 고교 3학년부터 시작해 2021년에는 모든 고교생으로 대상을 확대키로 했다. 고교생 1인당 입학금, 수업료, 학교운영지원비, 교과서비 등을 포함해 평균 158만여원(2018년 기준)을 지원받게 된다. 고교 무상교육은 사실 때늦은 감이 있다. 고교 진학률이 99.7%에 이르러 사실상 ‘의무교육’화한 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고교 무상교육을 실시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고교 교육 무상화는 ‘포퓰리즘’이 아니다. 교육의 공공성 강화와 균등한 기회보장을 위해 조속히 실현해야 할 과제다.

문제는 재원 조달 방안이다. 고교 무상교육에 소요될 예산은 올해 3856억원, 2020년 1조3882억원, 2021년 1조9951억원으로 추산된다. 당·정·청이 확정한 안을 보면, 올해 2학기의 고3 무상교육 예산은 각 시·도 교육청이 자체적으로 확보하도록 했다. 전면 시행 이후엔 중앙정부가 47.5%, 교육청이 47.5%씩 부담하고 지방자치단체가 5%를 내게 된다. 교육부는 각 시·도 교육감들과 협의한 결과, 모두 고교 무상교육 필요성에 동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 교육감들이 협조한다 해도 3년 뒤 새로 선출되는 교육감들이 이를 거부한다면 과거 ‘누리과정 사태’ 같은 양상이 재연될 가능성도 있다. 박근혜 정부는 대선공약 사업인 누리과정(만 3~5세 무상보육)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소요 예산 중 상당액을 교육청에 떠넘기려 했다. 이에 교육청들이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 편성을 거부하면서 ‘보육대란’이 발생했다.

고교 무상교육이 재원 문제로 좌초하는 걸 막으려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재정분담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우선은 당·정·청 안대로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을 개정해 ‘증액교부금’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다. 야당도 교육기본권 보장이라는 대의에 공감한다면 개정에 협조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당초 교육부가 구상했던 대로 지방교육재정교부금 교부율 자체를 인상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교육복지에 들어가는 예산은 단순한 지출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위한 투자임을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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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 전, 민철(가명)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아이가 욕설까지 섞어서 하는 틱 장애가 심해 학교생활을 할 수가 없다고. 여러 해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고 있지만 차도가 없고, 집에 있는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 대안학교도 몇 군데 면접을 봤으나 잘 안되었다고. 아이 교육 문제부터 주거, 병원 치료까지…. 울먹이며 쏟아놓는 이야기들은 한 시간가량의 전화 통화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번 만나자 했더니 멀리서 민철이를 데리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긴 이야기를 들은 후, 아이를 보낼 만한 학교가 있을지 묻는 엄마에게 나는 한 농촌마을을 권했다. 사실 아이보다 엄마를 생각해서 한 권유였다. 엄마의 저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이 풀리고 여유를 찾아야, 아이의 어려움도 좀 나아질 수 있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안전하게 머물 곳이 있고, 부모 말고도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해줄 이웃들이 있는 느슨한 공동체가 필요하겠다 싶었다.

내 얘기를 들은 바로 그다음 날부터 무작정 그 마을을 찾아가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난다는 소식이 지인들을 통해 전해졌다. 얼마 후 민철 엄마는 긴 문자를 보내왔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이상하게 이곳에선 그냥 살아질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숨통이 트인다’ ‘가슴이 뻥 뚫린 거 같다’는 표현을 여러 번 반복했다. 

아이는 그대로지만 달라진 건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 그로 인해 민철 엄마가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는 거다. 아이와 엄마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학교’가 아니라 ‘알로마더’였다. C J 슈나이더가 쓴 <엄마는 누가 돌보지?>에서는 엄마 외에도 아이의 양육에 중요한 역할을 나누어 하는 할머니, 고모, 이모, 언니, 삼촌 등 알로마더(allomother), 알로페어런츠(alloparents)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교사’, ‘부모’라는 이름을 달지 않더라도 아이들과 그 가족의 어려움에 책임감을 가지고 함께 돕고자 하는 ‘확대가족’의 마음가짐이 인류를 진화시켜왔다. 

학기 초를 맞아 또다시 돌봄 전쟁이 시작되었다. 서울시는 올해 돌봄의 틈새를 메우는 우리동네키움센터를 94곳에 설치하기로 했다.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마을교육공동체, 교육혁신지구 정책도 가정과 학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교육과 돌봄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고민의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사회적 제도’ 이전의 유대감과 연결감이 필요하다. 민철 엄마에게서 보듯, 전문적인 ‘상담가’보다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웃’이 심리적으로 더 빠른 치료를 가져올 수도 있다. 

지난주, 공간민들레 청소년 열두 명이 입학식을 했다. 그들은 일 년 동안 어떻게 지내고 싶은지 자신들의 고민과 계획을 들려주었다. 부모, 교사, 강사, 그들을 응원하는 어른들이 모여 한 명 한 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질문하고, 조언하고, 공감했다. 입학식은 세 시간 반을 훌쩍 넘겨 끝이 났다. 

여러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올해 내 역할을 가늠해보았다. 손 내밀 때 언제든 잡아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들의 성장을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응원하는 ‘알로마더’로서의 역할로 충분하지 싶다. 어쩌면 그것이 교육과 돌봄을 회복하는 ‘교육적 사회 만들기’의 시작이기도 할 것이다.

<장희숙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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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고 재지정 평가 문제로 교육계가 시끄럽다. 대표적인 자사고인 ‘상산고’ 재지정 평가 기준 하한선을 전북도교육청이 10점 상향해 80점으로 높인 것에 학교 측이 반발했다. 자사고 폐지를 위한 수순이 아닌가 하는 의혹 때문이다. 서울에서도 자사고 재지정 평가 절차에 돌입하자 자사고 연합 측이 이를 거부했다. 재지정 기준 하한선 70점은 자사고 죽이기 차원이라는 것이다. 사실 70점은 자사고를 만든 이명박 정부 시절 재지정 평가 기준이었다. 이를 박근혜 정부가 60점으로 낮추었다가, 현 정부 들어 MB 정부 시절로 회복한 것이니, 자사고 죽이기 정책인지 의아하다. 장담컨대 상당수 자사고들은 70점 하한선을 통과해 그 지위를 유지할 것이다. 

자사고의 심각한 폐해를 생각할 때, 재지정 평가 정책이 과연 이를 바로잡을 적합한 도구인가는 회의스럽다. 재지정 평가 정책은 그 평가를 통과한 자사고는 존속시키겠다는 ‘약속’이 전제된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국가적 폐해를 생각할 때 자사고 존속은 ‘약속’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지위를 해소해야 한다. 즉 자사고 문제를 푸는 길은 재지정 정책이 아니라 시행령을 고쳐 학교의 지위를 일반학교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자사고 문제의 핵심은 고교체계가 서열화되었다는 것이다. 영재고 시험을 치르고 떨어지면 특목고나 자사고에 지원하고, 거기서 떨어지면 자율고나 과학중점학교 등을 거쳐 최종 탈락자들이 일반고를 지원한다. 말이 되는가? 서울대 떨어지면 연대·고대 입시를 치르고 거기서 떨어지면 ‘인서울’ 대학 입시를 치른 후 지방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떨어진 학생들을 전문대가 받아들이겠다면, 어느 국민들이 수용할까? 그런데 이 희한한 입시 정책이 고교 단계에서는 먹히고 있다.

이 체계에 적응하느라 중학생들이 입시 노예가 되어 버렸다. 중학생이란 어떤 존재인가? 사춘기를 통과하는 존재다. 내가 네가 아니고 나인 이유를 찾는 시기, 어른이 아닌데 어른 대접 해달라고 요구하는 질풍노도의 존재들이다. 그 터널을 통과하며 자기를 발견하고 세우는 시기다. 어른이 아니니 너희들에게 그 자유를 줄 수 없다고 해도 소용없다. 누르고 감독하는 존재가 아닌, 자식의 친구로 그 위치를 조정하지 않으면 자식의 마음을 만날 수 없다. 그 준엄한 시기에 부모들이 품안에 움켜쥐었던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자식들에게 “너는 자유인이니, 네 판단과 감정을 존중하겠다” 그렇게 선언함으로써, 관계의 전환을 시도할 때다. 그 시기를 그렇게 거쳐야 자식은 주어진 자유를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며 실패 속에서 성장한다. 부모 역시 그래야 자식을 잃지 않고 끝까지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다. 그래서 진로는 ‘결정’할 시기가 아니라 다만 ‘탐색’할 시기일 뿐이다. 

그 엄중한 때에 허다한 부모들이 임박한 고입 걱정에 얼어붙어 그나마 있던 자유마저 회수하며 아이 목을 잡고 입시 트랙을 달리게 한다. 부모가 열어준 여유의 공간 속에서 퇴행과 방종의 사춘기를 거쳐야, 자식은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종이 아니라 주인으로, 남의 미래가 아닌 내 미래를 사는 존재로 거듭난다. 그 귀한 시도가 모두 억제된 채 경주마로 달리는 삶은 얼마나 불행한가? 대입 경쟁이야 어쩔 수 없다 치자. 고입 경쟁만큼은 막아야 한다. 재지정 평가나 고교 입시만 손질할 일이 아니다. 속히 고교체계도 바로잡아야 한다.

<송인수 |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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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치원총연합회(이하 한유총)에 대한 법인 설립허가 취소 절차에 돌입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또 이를 발표한 이후에도 마음이 편치 않다.

우리는 한유총의 개학연기 투쟁과 반복적인 집단 휴원 및 폐원 협박, 그리고 ‘처음학교로’와 정보공시 참여 거부 등이 헌법 제31조가 보장한 국민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하고 있으며, 한유총의 설립 목적과도 맞지 않고, 민법 제38조가 규정한 ‘공익을 해하는 행위’로써 법인의 설립허가 취소 사유가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결정이 정부가 ‘공익’을 자의적으로 정의해 헌법 제21조가 보장하는 결사의 자유를 약화시키는 선례로 남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그럼에도 검토를 거듭한 끝에 설립허가 취소 절차에 돌입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는데, 서울시교육청은 우리 시민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지키는 것이 교육청의 더 중요한 의무라고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유총의 반교육적인 일부 강경 지도부의 방침은 수십년간 유아교육에 헌신해온 다수 유치원의 의지에 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유총의 강경 노선은 다수 유치원으로부터 기각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유총이 공식적으로 개학연기에 참여한다고 발표했던 1533개 유치원 중 실제 참여 유치원은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에서 한국유치원총연합회설립 허가 취소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다수의 사립유치원은 단순히 정부의 압박에 마지못해 개학연기 투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도부의 반교육적 방침이 다수 국민의 기대에 배치되고, 또한 학부모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는 점을 깊게 인식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사립유치원들은 유아교육의 황무지에서 사재를 털어 국가가 담당해야 할 유아교육에 헌신해 왔다. 그런데 일부 반교육적인 강경 지도부에 의해 휘둘리는 사이, 국민들과의 괴리가 커졌다. 특히 사립유치원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그 한 계기는 아마도 2018년 10월5일 국회 토론회 무산 사태일 것이다. 이는 2017년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장애인 학부모가 무릎 꿇었던’ 강서 특수학교 공청회 이후 특수학교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던 것과 유사하다. 

지금 사립유치원 앞에는 달라진 사회에 부응하는 미래지향적 길과 과거로 회귀하거나 현재에 안주하고자 하는 후진적 길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다. 그동안 유아교육에 헌신해온 사립유치원들이 국민의 달라진 인식과 눈높이에 맞게 미래지향적 유아교육의 길로 함께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호소드린다. 

많은 사립유치원 원장과 운영자들께서 그동안 유아교육에 대한 사립유치원의 헌신과 기여가 폄하되는 것에 대해 가슴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지난 기간 유아교육에 대한 어렵고도 지난한 헌신을 시민들이 다시 생각해볼 마음의 여백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사립유치원 운영의 미래지향적 전환은 필수다.

익숙한 과거와 과감히 단절하는 고통스러운 과정 없이 시민들의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위기가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미래지향적 유아교육으로 전환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럴 때 사립유치원이 다시 시민들, 특히 학부모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조희연 | 서울시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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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중·고교생의 1인당 사교육비가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교육부가 발표한 ‘2018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9만1000원에 달했다. 2007년 사교육비 조사를 실시한 이후 가장 높다. 연간 사교육비 총액 역시 증가세를 이어갔다. 지난해 사교육비는 19조5000억원으로 2012년 이후 최대치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교육 강화정책이 무색할 정도다.

학생의 사교육 참여율은 72.8%로 전년 대비 1.7%포인트 상승했다. 초등학생이 82.5%로 가장 높았고 중학생 69.6%, 고등학생 58.5%였다. 소득 계층별로는 저소득층의 참여율은 증가한 반면 고소득층 비율은 오히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때 교육열이 높은 상류·중산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사교육이 이제 학령과 소득에 상관없이 모든 가정으로 확산되고 있다. SKY캐슬은 더 이상 드라마 속에만 있지 않다.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사교육을 시키겠다는 학부모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는 사회 분위기도 사교육 시장 의존도를 높이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이는 자녀가 적을수록 1인당 사교육비가 높은 데서도 확인된다.

공교육 불신은 사교육 시장을 키우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방과후학교’ 비용은 2015년부터 계속 줄어들고 있다. 자율학습을 위해 제작된 EBS 교재를 구입하는 비율 역시 5년째 감소 추세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방과후학교가 저렴하지만 교육의 질에서는 사교육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공교육 내실화는 사교육을 경감할 수 있는 중요하고 핵심적인 대책이다. 교육의 질을 높이고 교사를 신뢰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방과후학교를 활성화하고 초등돌봄교실을 확충하는 정책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의 생존경쟁을 위해 올인하는 사회에서는 공교육 강화만으로 사교육 의존을 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교육격차는 기회 균등, 제도 공정성만으로 치유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교육 가치가 바뀌어야 한다. 대학이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돼선 안된다. 부모의 돈과 정보력이 아닌 학생의 재능과 특기, 꿈이 대학의 선택 기준이 돼야 한다. 공교육 정상화는 더디더라도 성적지상주의와 학벌주의가 철폐되고 개성이 존중받는 사회와 함께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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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고3이 되는 첫째 아이가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중학교 때에 비해 교육비 부담이 늘어나 부담스러웠다. 3개월마다 수업료를 납부해야 하는데, 중3이 되는 둘째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내년부터는 둘째 아이 고등학교 수업료 부담까지 더해지니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한 달에 이틀 남짓 쉬는 날을 제외하고는 하루 꼬박 13시간씩 시장에서 일하는 우리와 같은 소상공인들에게는 고등학교부터 급격히 늘어나는 아이들 학비 부담이 여간 큰 게 아니다. 

그러고 보니 국가 복지정책이 확대되고 있다고는 하나, 우리 같은 40~50대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것 같다. 아동, 청년, 노인 등 대부분 연령대가 복지정책의 혜택을 받고 있는데, 우리 세대는 지금껏 세금은 꼬박꼬박 내면서도 각종 복지 혜택에서는 소외된다고 느낀다. 이 세대는 소위 ‘낀 세대’로서 아직도 위로는 부모님을 챙겨야 하고, 아래로는 중고생 자녀들에게 들어갈 돈이 태산이다. 정말 경제적으로 어려운 세대가 아닐까 한다. 

우리 세대가 자녀를 키울 때는 모든 게 자비였는데, 지금은 산전 검사부터 출산비용까지 지원되고 육아수당에 어린이집·유치원 교육비도 지원되고 예방접종도 무료가 되었다. 그래도 초등학교, 중학교는 의무교육이라 학비 부담은 없었는데, 자녀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수업료, 학교운영지원비 등의 명목으로 40만원가량의 등록금 고지서가 분기별로 날아온다. 대학 등록금보다야 낫다지만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부담은 상당하다. 

우리 세대는 아무런 혜택 없이 아등바등 자녀들을 키워왔는데, 올해부터는 부모의 소득에 상관없이 모든 아동에 대해 아동수당도 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등학생들의 학비도 지원해 주는 게 맞는 것 아닌가? 심지어 국공립대학 입학금이 폐지되고 사립대학의 입학금도 점차 폐지된다고 하며, 대학생 3명 중 1명은 등록금의 절반 이상을 국가장학금으로 지원받는다고 한다. 고등학교 교육은 정규교육이며 공교육인데, 다른 비용도 아니고 공교육 이수를 위한 학비를 지원받는 것은 같은 세금을 내는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가 아닐까? 세수가 늘어났다고 하는데, 늘어난 세수에 대한 혜택도 공평하게 배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편 현재 저소득층 자녀나 농어민 자녀에게는 고등학교 학비가 전액 지원되고 있으며,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에 다니는 직원 자녀들도 사원 복지 차원에서 고등학교 학비를 지원받고 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현재 자녀의 고등학교 학비를 자비로 부담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소상공인, 자영업자, 영세 중소기업 직원 등 서민층뿐이다.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 교육이 기본교육이 된 지 이미 오래인데 서민층만 혜택을 받지 못하고 학비를 부담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최근에 정부에서도 함께 잘사는 포용국가를 천명하면서 자영업자, 소상공인이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도록 하겠다고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고등학교 무상교육이야말로 이에 부합하는 정책이 아닐까?

그런 차원에서 올해 2학기부터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시행한다는 소식은 반가운 뉴스다. 국가는 모든 학생들이 가정의 여건과 관계없이 마음 놓고 공부하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학부모의 교육열에 기대어 공교육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용수 | 대전 태평시장  상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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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2018년 10월4일 유은혜 장관 취임과 더불어 유치원 방과후 과정에서 ‘놀이 중심 영어’를 허용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는 이전 김상곤 교육부 장관이 유치원 방과후 영어교육 금지에 관한 법 시행을 1년 유예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일이다. 그러나 교육부의 이러한 중요한 영어 관련 정책들이 충분한 학술 및 현장 연구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제한하기로 하였다가 허용되는 등 체계성과 일관성이 결여된 점이 매우 우려스럽다. 특히, 현재 초등학교 1·2학년은 선행학습을 금지하고 있는 공교육정상화법에 따라 2018년 3월부터 학교 현장에서 영어교육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관련 법안 또한 국회에 여전히 계류 중이다. 당장 이번 주부터 신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유치원에서 영어를 접한 초등학교 1·2학년 학생들은 학교에서 방과후에도 영어를 여전히 배울 수 없게 되어 있다. 결국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학원 뿐이다. 오락가락하는 정책을 내놓은 교육행정의 결과가 학교 영어교육을 갈팡질팡하게 하고, 학부모들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교육부에서 사립유치원 개학연기 사태에 대한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행정절차도 문제이지만, 교육적 관점에서도 고려해봐야 할 부분이 많다. 그동안 10세 이전에는 공교육에서 영어교육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교육부의 유치원 방과후 ‘놀이 중심 영어’ 허용을 통해, 영어 시작 연령이 5세(만 3세)로 낮춰졌다. 교육부가 학부모들의 의견 수렴과 요구를 통해 허용하였다고는 하지만, 5세 아동의 언어적, 인지적, 심리 및 정의적 영역 발달에 대한 교육적 연구를 얼마만큼 기반으로 하여 이 정책을 내놓았는지도 의심스럽다. 유치원 방과후 영어교육 허용과 관련하여 명확하게 이해해야 할 부분이 놀이식 교육이다. 유아교육에서 놀이교육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놀이 중심 영어’는 놀이교육이 중심이 되면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해야 한다. 아동의 언어 및 전체적인 영역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아동의 연령에 따른 방법론적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는 교육부의 방향대로 초등학교 1·2학년 방과후 영어가 허용된다면, 이를 어떤 철학을 가지고 개념화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유치원 ‘놀이 중심 영어’와 초등학교 3·4학년 영어과 교육과정 사이에 존재하는 초등학교 1·2학년의 방과후 영어 과정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교육적 큰 틀의 개념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고, 없다면 매우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정부의 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전문가들이 해야 할 또 다른 시급한 일들이 있다. 우선, 유치원의 방과후 특성화 프로그램에 대한 조사와 각 유치원의 영어프로그램에 관련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5세부터 7세까지 연령별 수준에 맞는 놀이식 영어교육에 관한 세부 운영기준을 이론적·경험적 자료를 토대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놀이식 영어교육과 관련해서는 영어전담 회화강사와 같은 제도보다는 현 유치원 교사의 연수가 우선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 더불어 초등학교 1·2학년의 방과후 영어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성격과 교육방법이 빠른 시일 내에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유은혜 장관의 말대로 교육에 있어 중요한 주체가 학부모와 학교일 수 있고, 이들과 활발한 소통을 통해 정책을 시행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육의 대상인 학생들이다. 특히,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영역의 교육은 루소의 철학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아동들이 배움의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면 효율이 떨어지고, 흥미를 잃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교육에서 무언가 가르치는 것을 제한하거나 허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적절한 시기에 호기심을 갖고 배움을 쌓아가도록 환경과 내용, 방법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홍선호 | 서울교대 교수 영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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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들을 기회가 있었다. 교사 모임에서 들은 말은 두려움, 걱정, 불안, 막막함, 설렘, 기대, 희망 등의 단어였고 학생들에게 들은 말도 비슷했다. 차이가 나는 것은 어떤 단어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가였다. 개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과 두려움 사이 긴장을 견디며 두려움의 정체에 대해 좀 더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작하는 3월이고 싶다.

올해 혁신학교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업무와 회의가 많아 힘들다고 가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고, 동료 교사들과 수업을 중심으로 고민하며 실천하는 과정이 힘든 만큼 성장과 보람도 있다고 격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민이 될 때는 어려워 보이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후회를 덜 남긴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혁신학교를 선택할 수 있었다.

개학을 앞두고 전체 교사가 일주일 동안 신학기 준비 연수를 하면서 학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학교의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고 일년 교육과정을 전체, 학년, 교과 등의 다양한 얼개로 짜맞춰 갔다. 힘든 만큼 개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이 가시고 그 공간에 기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1월 28일 개학한 서울 강서구 공항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방학 동안 자란 키를 재보고 있다. 이준헌 기자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학교마다 독특한 분위기에서 업무분장과 한 해 준비를 하는데 아쉬운 것은 늘 일 중심으로 먼저 다가가는 것이고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었다. ‘누가 무슨 일을 맡을 것인가?’가 우선이다 보면 존재로 다가가기보다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결국 학생부장 등 기피하는 업무는 전입, 신규, 기간제 교사에게 맡기는 것을 묵인하게 되고, ‘나도 전입 첫해에는 그랬어’라고 자위하지만 그 결과로 미안함 속에 자신을 가두며 서로 외로워져 간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중심으로 배정하고, 기존 구성원들이 전입, 신규 교사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일을 조정한다면 감사의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다행히 그러한 바람을 올해는 경험할 수 있었다.

개학하기 전 함께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개학 준비를 하지 않으면 학기 초부터 업무와 수업에 쫓겨 정작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쏟기 어려워진다. 그동안 개학 준비 기간이 필요함을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한마음 한뜻으로 실행하는 데는 구성원들의 입장 차이가 있어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새 학교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한 연수를 함께하고 나니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을’ ‘이렇게 하니 좋은 것을’ 하는 마음이 든다.

‘환대란 본질적으로 문턱을 넘게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이반 일리치는 말했다. 공동체가 새 구성원을 맞이할 때 말로 하는 환대가 아니라 배려와 존중이 느껴지는 환대를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낯섦으로 망설이다 문턱을 넘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는가?

새 학기를 맞아 아이들은 어떤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게 될까? 나를 어떻게 여길까? 받아들여질까? 기대와 두려움을 안고 등굣길에 오른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으로서 새로운 공간에 진입한다는 것은 구성원들에게 연결감을 느끼고 서로 받아들여진다는, 그 안에 자신의 자리를 갖게 된다는 의미이다. 학교가 낯선 타자들의 삭막한 공간이 아니라 따뜻하고 존중과 배려가 넘치는 공동체가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환대해야 할까? 낯선 환경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에는 긴장과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환대가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할지라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손연일 월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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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으로 보면 한반도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힘이 맞부딪치는 지점이다. 그래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힘의 관계가 변화할 때마다 역사적 격변을 겪었다. 그간의 역사적 경험은 이 두 세력의 대립이 전쟁과 분단으로 귀결되는 비극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역시 한반도를 둘러싸고 다시 한 번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의 힘의 관계가 변화하는 시기다. 우리는 그간의 역사적 경험을 되살려 두 세력을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상생의 관계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왔다. 그렇게 피스메이커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 한국이 세계와 함께 평화 번영으로 나가는 길이고 한국이 세계의 중심에 서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대를 모았던 하노이 북·미회담이 언론의 표현대로 하자면 결렬되어 우리를 무척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하지만 긴 협상과정의 일환이고, 오히려 피스메이커로서 우리의 적극적 역할을 요구하는 국면으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하면 비관적으로만 볼 일도 아니다. 사실 남북 평화 국면의 출발은 미국이 가져온 것이 아니라 혹한의 겨울을 뜨겁게 달구었던 1000만이 넘는 촛불이 가져온 것이다. 1000만의 촛불이 새로운 정부를 가능하게 했고 새로운 정부로 하여금 평화의 염원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했다. 그 움직임이 북한과 미국을 촉발하여 현재의 평화협상 국면을 조성한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관성으로 미국이 어떠하니 안될 것이라는 식의 수동적 관점으로 상황을 판단할 이유가 없다. 그것보다는 김구 선생 식으로 “남북 8000만이 휴전선을 베고 죽을 각오로 나선다면 어찌 남북 평화체제가 실현되지 않으랴”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남북 평화체제의 실현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과연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남북 평화체제는 협상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일단 고비를 넘기면 급물살을 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북 평화체제는 단순히 남북관계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한국이 해양국가이면서 동시에 동남아를 포함한 유라시아 대륙 국가로 자리 잡아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을 상생의 관계로 이음으로써 세계 평화체제의 중심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적 갈림길에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분단된 남쪽에 갇혀 해양세력 쪽으로 일방화되어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좁고 편향된 의식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는 박근혜 정부 때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개성공단 폐쇄만 보아도 잘 알 수 있고, 그런 좁고 편향된 의식이 얼마나 위험한가는 북·미 간의 중대한 협상 국면에서 미국을 방문한 야권 인사가 했다는 “우리는 전쟁을 원한다”는 발언이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의 협애함과 편향이 단순히 일부 정치세력만의 문제일까?   

글로벌화 시대에 교육 수요자의 요구는 국내에 머물지 않고 국제화되고 있다. 한국의 외국 유학자가 15만명 정도이고 아시아권의 한국 유학자가 10만명 정도이다. 그러나 현재는 아시아권 유학자들에 대한 질 관리가 되고 있지 않고, 한국의 외국 유학자 15만명에 대한 파악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며, 이러한 국제적 지식의 흐름도 속에서 한국의 교육학문 생태계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하는 물음조차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는 남북 평화체제의 진전 속에서 유라시아권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삶의 기반으로 다가오는 시점임을 고려하면 매우 우려할 만하다. 한 나라의 장기적 성패의 관건 중 하나는 세계적 지식의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역할을 하는가이다.

한국은 산업화 시대에는 서구에서 생산된 지식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동남아를 포함한 유라시아권으로 경험과 지식을 수출하고, 한국을 포함한 유라시아권을 기반으로 생산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해 서구 선진국들과 생산된 지식을 주고받는 관계로 세계 지식 흐름도 속에서 위상을 높여야 한다. 이러한 길고 넓은 안목의 조망이 없으면 한국 교육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장기적으로 국가적 실패를 가져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세계적 수준에서 지식 자체의 생산과 흐름, 유라시아권을 기반으로 한 지식 생산과 유통의 가능성, 그 속에서의 한국 교육학문 생태계의 역할 등을 메타지식학적 관점에서 성찰하고 장기적 고등교육 정책을 준비해야 한다.

한국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다룬 영화에서 한국 고위 경제 관료가 IMF의 요구에 대해 보인 반응이 한동안 시중의 화제가 된 바 있다. 그 고위 경제 관료는 IMF의 무리한 요구에 순응적인 수준을 넘어 그러한 무리한 요구를 다행스럽게 여겼다. 지적 종속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내가 더 우려하는 것은 그렇게 심각한 일을 겪었으면서도 그 고위 경제 관료가 그런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세계적 수준에서의 경제학 지식의 흐름과 그 속에서의 한국의 위치, 한국 경제정책에 대한 영향 등에 대한 메타지식학적 성찰이 담긴 논문 한 편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세계적 수준에서 지식 자체의 생산과 흐름, 유라시아권을 기반으로 한 지식 생산과 유통의 가능성, 그 속에서의 한국 교육학문 생태계의 역할 등을 연구 검토하는 메타지식학으로서 유라시아학이라도 창설해야 하는 것일까? 주어지는 과제들에 비추어보면 한국 고등교육의 위기의 심도가 말할 수 없이 더 깊어 보인다.

<김진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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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새로운 여정을 축하하며, 지금부터 주어질 자유와 낭만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물어보세요. 그리고 다양한 지식을 접하는 희열을 느끼면서 시민으로 성장해 주세요.”

12년간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3월 첫 강의 때마다 했던 말이다. ‘어른들이 가라고 해서’ 대학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비싼 돈 들여 발을 내디딘 새내기들에게, 여기는 취업사관학교고 목표는 오직 기업의 노예로 선발되는 것이라고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학과 작별하는 마당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를 하기는 싫다. 빌어먹을 대학이 사람을 어떻게 괴롭히고 길들이는지를 ‘시작부터’ 아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행복은 자기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한다지만 대학은 그럴 수 있는 구조가 없다. 수강신청을 할 때부터 이상하지 않았던가. 듣기 싫은 ‘필수’ 과목은 왜 그리도 많은가. 건학이념 같은 강의는 차치하더라도 영어, 컴퓨터, 읽기와 쓰기 등의 강의를 신청하고 나면 고교 때와 진배없는 시간표가 된다. 게다가 기업의 입맛에 맞추려는 의도가 다분한 CEO 리더십, 글로벌 비즈니스 예절 등의 요란스러운 이름의 강의를 들어야 하니 다양한 강의를 찾아들을 시간 자체가 봉쇄된다. 초과 학점을 신청해서라도 대학에 온 보람을 느끼고 싶어 한들, 이를 만족시킬 만한 강의는 사라진 지 오래다. 대학은 취업률 낮은 학과를 압박했고 자연스레 실용과목 위주로 커리큘럼을 개편했다. 물론, 회사에서 보스에게 사랑받는 법을 외우고 나비넥타이 매는 법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행복을 느낀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많은 이들이 대학의 민낯에 실망하겠지만, 학기가 높아질수록 자신들이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것이다. 면접에서 혹시나 꼬투리 잡힐까 봐, ‘혁명’ ‘마르크스’ ‘노동’ 등의 이름이 들어간 강의를 피해 가는 건 약과다. 실용과목을 너무 많이 접해서일까? 이들은 가급적 적은 시간을 들여 학점을 보장받는 강의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강의 중에 다른 과제를 해도 괜찮은, 그러니까 ‘제대로 듣지 않을’ 과목을 고르는 역설이 이해되는가. 학생들은 파워포인트만 줄줄 읽고 빈칸 채우기 수준의 기계적인 문제를 내는 교수를 보며 무슨 대학 강의가 이따위냐면서 욕하지만, 그렇다고 자유롭게 토론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작성하는 서술형 시험을 선호하지 않는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취업에 필요한 스펙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세상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누구라도 이렇게 길들여질 수밖에 없다.

캠퍼스 풍경은 기가 찰 것이다. 게시판은 토익, 중국어 학원의 전단과 라식·라섹 수술을 특별 이벤트로 대폭 할인한다는 병원 광고로 넘쳐날 것이다. 그 옆에는 ‘예쁜 눈 선발대회’를 열어 우승자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하겠다는 렌즈회사의 소식도 볼 수 있다. 가끔 시대를 비판하는 진지한 내용의 대자보가 붙기는 하는데, 이를 읽는 사람들은 없다. 곳곳에 나부끼는 현수막에는 절반이 기업설명회 소식이고, 나머지 절반에는 그런 기업에 합격한 사람들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이런 공간에서 학력차별을 밥 먹듯 하는 교수를 만나고,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어색한 괴상한 영어강의를 듣는 건 덤이다. 여기서 나름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면 꼭 그렇게 하길 바란다.

이미 실천하는 이들도 있다. 취업만이 정답인 곳에서 많은 이들이 공무원이 되는 것 외에는 정답이 없는 분위기를 인정한다. 스펙을 마련할 돈과 시간이 없다면, 지방대라는 타이틀이 두렵다면,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합격한 일부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례가 되어 합격비법을 전수하기 바쁠 것이다. 그 덕에 공무원이 되길 희망하는 대학생들은 많아진다. 목표가 선명해진 이들은 답 너머의 답을 찾아가는 머리 아픈 강의는 피하면서 슬기로운 대학생활을 할 것이다.

<오찬호 <진격의 대학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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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유치원단체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가 사실상의 ‘집단휴원’을 강행하기로 했다. 한유총은 3일 “국무총리까지 나서 사회불안을 증폭시키며 교육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있다”면서 개학연기 방침을 재확인했다. 전날 이낙연 총리 주재로 열린 관계부처·지방자치단체 대책회의에서, 개학연기 강행 시 시정명령을 거쳐 형사고발하는 등 엄정 대응키로 한 결정을 겨냥한 것이다. 한유총은 개학연기가 준법투쟁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며 “불법적 탄압을 계속하면 폐원투쟁으로 나아갈 것”이라고도 했다. 개학일을 미루는 것일 뿐 집단휴원은 아니라더니, 이제는 폐원까지 거론하며 시민을 협박하는가. 후안무치라는 표현이 이토록 들어맞기도 어려울 것이다.

3일 오전 개학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밝힌 서울시의 한 유치원의 입구가 굳게 닫혀있다. 권도현 기자

한유총은 회계비리 시 형사처분 등의 내용을 담은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과 폐원 시 학부모 3분의 2 이상 동의를 받도록 한 유아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이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론은 싸늘하다. 교육부가 3일 공개한 전화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시민의 81%가 유치원 3법 통과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한유총의 ‘사유재산권 침해’ 주장에 동의하는 비율은 22.9%에 불과했다. 한유총의 개학연기 투쟁이 성공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교육부 집계 결과 개학연기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사립유치원은 381곳(3일 오후 현재)으로 조사됐다. 연기 여부를 밝히지 않은 유치원도 233곳에 이르는 만큼 개학을 미루는 유치원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정부와 각 시·도교육청은 긴급 돌봄체제를 효율적으로 가동해 보육대란이 현실화하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 개학연기를 주도한 한유총 지도부는 물론 참여한 유치원 모두에 대해 무관용 원칙으로 강력한 제재를 가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어린이의 학습권, 부모와 가족의 일상을 뒤흔든 이들은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서울·경기·인천 교육감이 밝힌 대로 한유총의 사단법인 설립허가 취소 조치도 신속히 진행돼야 한다. 한유총은 교육단체로서의 위상을 누릴 자격을 이미 상실했다. 

학부모들도 불안하고 당혹스럽겠지만 교육당국의 안내에 따라 차분하게 대처하기 바란다. 한유총이 협박만 하면 온 나라가 끌려가던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유아교육의 공공성과 투명성 강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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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좀 있는 출판사를 다닐 때였습니다. 일 때문에 교정팀에 갈 때마다 교정지가 담긴 상자들에 성곽처럼 에워싸이다 못해 교정지 묶음들이 책상 밑까지 꽉꽉 차 있는 게 눈에 밟혔습니다. 그래서 물어보니 과실책임 대비로 몇 년 지난 것까지 보관해야 한다며 한숨을 쉬더군요. 그럼 연속급지에 PDF파일 자동생성 스캐너를 쓰면 되는 거 아니냐 하니, 그런 게 있냐고 반색을 합니다. 그런데 그 스캐너가 수백만원은 넘는다고 하니 절레절레 다시 한숨이더군요. 품의서를 올린들 짠돌이 관리부가 받아줄 리 없다며 말이죠. ‘넘어도 안 가본 고개에 한숨부터 쉰다’더니 해보지도 않고 낙심하고 겁부터 내더이다.

이 짐 지고 저 고개 넘을 생각을 하니 가기도 전에 다리가 풀립니다. 넘긴 넘어야 하는데 ‘아이고, 저걸 언제 넘나’ 고개를 떨구면서 땅이 꺼져라 푹 한숨을 쉽니다. 그러나 그 고개는 높지 않습니다. 사실 높이가 없으니까요. 멀리서 볼 때는 높아 보이지만 막상 고갯길 밟아 들면 그저 작은 오르막과 오르막들뿐입니다. ‘가다 보면 가게 되겠지.’ 끙차! 일찍 털고 일어난 사람은 가다 쉴 짬이라도 생깁니다. 미적거리다가 때늦은 사람은 컴컴하게 저무는 숲길만 허겁지겁 내닫게 되고요. 언제 넘나 건너다봄도, 얼마나 남았나 올려다봄도 없이 묵묵히 내딛다보면 어느덧 고갯마루 시원한 바람에 땀 씻으며 온 길 뿌듯하게 돌아볼 겁니다.

아까 그 교정팀 스캐너 건은 어찌 됐냐고요? 내방객의 첫인상과 공간 확보로 업무효율 상승, 타 부서의 다양한 활용 등을 강조하며 비용 대비 이익이 더 크다고 했더니 바로 결재 떨어지더군요. 일의 중요한 고비나 절정도 고개라 합니다. 닥치고 부딪칠 고개 앞에서 ‘죽어도 못해’ ‘저걸 언제 다 해’ ‘아마 난 안될 거야’ 하지 말고 어떻게든 하다보면 어떻게든 됩니다.

가슴에 바람(望) 빵빵 고개 들고 나섭시다. “직진! I am.”

<김승용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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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를 앞두고 교육 상담 전화가 잦다. 대안학교에 대해 묻는 부모들의 전화다.

목소리에서는 갈급함이 묻어나지만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그분들이 원하는 것이 꼭 ‘대안학교’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대안학교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깊지 않은 것 같은데, 무조건 아이를 어느 학교로 보내면 좋을지 묻는다. 그분들이 알고 있는 대안학교는 맨날 사고만 치는 아이를 집어넣을 수 있는 ‘기숙사 학교’, 왕따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피난처’ 정도인 듯하다.

며칠 동안 이런 전화를 연이어 받으며 ‘대안학교는 문제가 있어야 보내는 곳’이라는 인식이 점점 굳어지는구나 싶다. 10여년 동안 대안학교에서 ‘사회의 통념에 줄서지 않고, 자기다운 인생을 살기’ ‘혼자 잘살기보다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를 가르쳐온 나는 이럴 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든다.

20여년 전, 대안학교 초창기부터 ‘문제아들이 가는 곳’ ‘공부 안 하는 학교’라는 인식이 있긴 했지만, 그 이미지가 더욱 강화된 것은 공교육에서 대안교육을 흡수하면서다. 문제 학생들을 따로 모아 대안교실, 위클래스, 위스쿨을 만들면서 대안교육은 ‘보통의 교육’과 더욱 확실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전국에 번지고 있는 공립 대안학교마저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0년 공립 대안학교 태봉고등학교가 개교할 때 ‘공교육의 실패를 인정한다는 말이냐’ ‘대안학교는 문제아 수용소 아니냐’는 이유로 두 차례나 예산을 거부당한 것에서 공교육이 바라보는 대안교육의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아이가 입시에 치이는 게 싫어 대안학교에 지원하고자 하는 학부모에게 중3 담임교사가 말했단다. “아니, 멀쩡한 아이를 왜요?”

1997년 경남 산청에 문을 연 간디청소년학교를 시작으로 2000년대 후반까지 전국에 수백 개의 대안학교들이 생겨났다. 형태는 다양했지만 비인간적인 문명과 자본에 맞서고, 지나친 경쟁과 입시 위주의 교육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공동체적 삶과 생태적인 삶을 회복하는 것이 설립의 주된 목적이었다.

일반학교에 다니기 힘든 아이들,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별 문제가 없는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 건강한 다수의 아이들이 힘든 친구들을 끌고 가며 함께 성장했다. 그건 제도나 규칙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문화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이었다. 그 과정에서 깊어지고 넓어지는 아이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 교사로서 큰 기쁨과 보람이었다. 공교육에서 품지 못하는 소위 문제아 혹은 부적응아를 감당하는 것이 시대가 요구하는 대안학교의 역할이라면 그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과 같은 격리와 수용의 방식은 틀렸다.

진보교육감 당선 이후 공교육이 많은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여전히 학교 바깥의 세계가 필요한 아이들이 있다. 근대학교의 틀을 더 과감히 벗어나 교육 생태계를 다양하게 만드는 실험들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도전과 실험에 전제할 것은 대안교육이 낙오된 자, 격리된 자, 실패한 자를 수용하는 집합소가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이다. 그 공간에 머무는 것으로 스스로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게 될 아이들이 어떤 교육적 효과를 얻게 될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장희숙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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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신성적이 좋고 남자친구까지 있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여학생이 있었다. 부모 입장에서도 이만하면 자녀의 학교생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늘 불안해 보이고 자주 아프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성적이 떨어질 때마다 집에서 휴대폰을 압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받기 위해 외모도 가꾸어야 하고 이성친구도 두고 싶어 한다. 내신과 수능에 대한 압박, 늦은 밤까지 학원수강에 이어 적당한 이성친구까지 사귀어야 하니 에너지가 남아날 리가 없다.

외모까지 능력의 일부처럼 되어버려 젊은 여성들은 적금을 들어 성형수술을 하고 결혼을 하면 배우자나 자녀가 자기 능력의 징표가 된다. 이제 어떻게 해서든지 없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능력을 배워야 할 지경이 되었으니 삶의 어디에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추구하는 기쁨을 만날 것인가?

드라마 4회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야 한다고 압박한다. JTBC 방송화면 캡처

염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능력주의가 모든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혐오와 비난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가 못나서 그래. 네가 노력을 안 해서 그래. 그러니 밖에 나오지 말고 집에만 있어.” 그런데 이 능력이라는 것이 갈수록 혼자 노력으로는 불가능해서 부모를 잘 만나 태어날 때부터 최고의 사교육과 문화적 혜택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또다시 ‘SKY 캐슬’의 주인이 된다. 드라마에서처럼 능력은 3대에 걸쳐 세습되고, 캐슬의 자녀들은 부모의 뒤를 이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온갖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결정권을 행사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하지만 드라마 속의 예서가 자퇴를 하고 수능을 본다고 해서 이미 기울어진 시험장이 평평해지지는 않는다. ‘입학할 때 4등급이면 수능에서도 거의 4등급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 고3 교사들 사이의 정설이고 보면 시험성적으로 한줄 세우고 그것이 곧 선발로 이어지는 지금의 교육은 다른 능력에 대해서는 평가받을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캐슬 바깥에 있는 대다수 학생들을 외면하고 있다. 돈 많고 학벌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 나의 불운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면, 그 불운을 극복할 만큼 네가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언제나 우리의 결론이 된다면, 우리는 교육의 어디에서 공정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내 자식이 잘되고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 부모에게나 절실하며 소중하다. 공교육의 역할은 그래서 더욱 막중하다.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고학년이 될수록 자기 삶의 길을 발견하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며 다음 세대를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관심 있는 과목을 배우면서, 다양한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과목 선택의 기회가 더 많이 주어져야 한다. 그에 맞는 평가 방법으로 자신의 성장을 옆 친구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영역별로 일정한 성취 기준에 비추어서 평가하는 내신 절대평가 방법도 더 많이 도입될 필요가 있다. 진정한 공정성이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모든 아이들을 배움과 평가에서 배제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슴에 품을 때 시작된다. 모든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에 필요한 역량도 하루아침에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 길을 가는데 돌부리가 있다면 골라내고, 가시덤불이 있다면 베어내면서 함께 가면 된다. 그것 때문에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조춘애 광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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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부담 많은 명절이 시작되는 연휴에 방영해놓고 대다수 시청자들에게 공포체험을 하게 한 <SKY캐슬>의 마지막 회를 보면서 나는 드디어 중학생 엄마가 되었다. 드라마 한 편으로 앞으로의 현실을 속단하는 것도 경솔하고, 이제 겨우 중학생이 되는 아이를 두고 입시전쟁의 서막을 연 것 같은 오두방정을 떠는 건 더더욱 우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설레는 만큼 두렵고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직 입학하지도 않은 학교의 졸업생 학부모들에게 전해들은 좋은 사례에 기대를 품었다가 뒤따라 나오는 불합리한 사례를 듣고 겪기도 전에 성토했다가 이 나라의 교육제도를 어찌할 것인가 크게 반문했다 작게 흔들렸다 우왕좌왕하면서 마음을 잡아보려 애쓰던 와중에 정작 엉뚱하게 교복을 구입하러 가서 마음이 상했다.

12일 경기 용인시 기흥구의 한 교복 매장에서 초당고등학교 신입생 원동준군(17)이 새 교복을 입은 뒤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살피고 있다. 용인시 제공

학교에서 정한 지정업체의 교복은 확실히 다른 업체보다는 저렴했으나 옷감의 소재도 딱 그 정도로 저렴해 보였다. 8만원이나 주고 산 교복 재킷은 원단이 부직포였다. 빨아 입어야 하니 여벌을 구매할 수밖에 없는 블라우스도 한 장에 3만원이었다. 섬유로 인한 아토피가 있는 아이라 몸에 닿는 옷만은 따로 구매하고 싶었지만 가정통신문에 적혀 있는 ‘교복지도’라는 문구 때문에 할 수 없이 두 벌이나 샀다. 속에 입는 블라우스 정도는 반드시 지정된 옷을 입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학교에 문의해보고 싶었지만 입학하기도 전에 교복을 가지고 ‘유난을 떠는’ 학부모가 된다며 주위에서 말렸다.

사이즈를 맞춰 보느라 30분 남짓 입고 있던 걸로도 아이의 목덜미는 이미 상처 난 것처럼 벌겋게 됐다. 정해진 공구 기간이 짧고, 그 기간에 가야 입학 전에 맞는 사이즈의 교복을 구입할 수 있다고 해서 기간에 맞춰서 갔는데도 사이즈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맞는 사이즈를 주문하려면 입학 이후에나 교복을 받아볼 수 있으니 이월상품이나 더 큰 사이즈를 사라 했다. 그런데 사실 교복은 대부분 한번 사서 3년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맞는 사이즈라는 개념 자체가 큰 사이즈를 의미한다. 심지어 나는 이번에 교복 치마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도 새로 옷을 구입하지 않고 입을 수 있도록 허리 상단 부분이 두 겹의 치마를 겹쳐놓은 것처럼 디자인되어 있었다. 지퍼도 안과 밖 각각 두 개였다. 추가 구입으로 인한 가계 소비의 불편을 학생들이 몸으로 고스란히 감당하는 상황이랄까. 이런 상황이 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업체를 찾아간 학부모에게서도, 다른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에게서도 비슷한 불평을 들었다. 대체 이런 교복을 왜, 무슨 이유로 반드시 입어야 하는 걸까.

몇 년 전 몇 달 정도 미국 공립학교를 경험할 일이 있었는데, 그 지역의 (사립도 아닌) 공립학교가 모두 교복을 입었다. 우리가 입히는 양복 스타일도 아니고, 학교 마크가 달린 교복도 아니었다. 흔히 폴로셔츠라고 말하는 셔츠에 바지 또는 치마를 입으면 됐다. 학교마다 색깔만 달리했는데, 그마저도 한 학교가 대략 서너가지, 많게는 대여섯가지 색을 지정해서 입었고, 저렴한 대량생산 업체인 스파 브랜드에 가면 쉽게 살 수 있었다. 학교 밖에서 사복으로 입기에도 적당한 복장이었다. 체육복이 따로 없었는데, 따로 있지 않아도 될 만큼 활동성이 보장된 옷들이었다. 딱 그 정도의 제한만으로도 보수적인 어른들이 강조하는 단정함이 있었고, 딱 그 정도의 선택과 다양함으로도 아이들이 제 개성을 살릴 수 있었다. 한번 사서 3년을 입기 위해 굳이 크게 살 필요도 없고, 누가 규정한지 모르는 학생다움을 위해 불편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다. 매주 금요일은 규정과 무관하게 사복을 입을 수 있는 날이었는데, 그날에도 원래의 교복을 입고 오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교복을 한 번도 입지 않은 세대여서일까. 교복의 장점도 모르고, 향수도 없는 나로서는 지금의 교복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반드시 교복을 입어야만 한다면 저 정도의 융통성은 열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어른 대접도 하지 않으면서 어른들이 입는 기성복을 흉내 낸 옷이나 입혀놓고, 지도와 단속이라니, 그게 아이들이 청소년으로 접하는 교육 현장의 첫 모습이라니, 입학도 하기 전에 아찔하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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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SKY캐슬>이 주목한 입시 학생부종합전형이 주는 부담은 그야말로 종합적이다. 최대 4종류의 시험, 수많은 학교활동, 자소서, 면접…,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학종이 초래한 교육 윤리의 타락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다. 작은 위선에서 심각한 거짓까지…,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종 주창자들은 어떤 이유로 학종을 옹호하는 것일까? 가장 자주 접하는 그들의 주장 3개를 살펴보자.

첫째, 학종이 강북이나 지방의 평범한 인문계고에 유리하다는 주장. 과연 그럴까? 현존 입시 중 평범한 일반고에 유리하다고 할 만한 전형은 사실상 학생부교과전형(교과전형) 하나뿐이다. 그 정도가 다른 전형에 비해 현저히 크다. 할당제 입시를 제외한다면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혹자는 서울대 지역균형선발전형(지균) 같은 예외적 사례를 들어 반박하고 싶을 수 있겠다. 하지만 서울대 지균은 학종으로 보기 어려운 입시다. 서울대 지균의 본질은 학종이 아닌 할당제에 있다. 그리고 지균은 학교에 할당된 두 장의 추천티켓을 대부분 내신 1·2등(또는 문과 1등, 이과 1등)이 갖는다는 점에서 교과전형 성격이 강하다. 서울대는 왜 교과전형 성격의 할당제 입시를 굳이 학종으로 분류할까? 주류 학종인 일반전형이 평범한 일반고에 현저히 불리한 입시란 사실을 물타기 하려는 속셈이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배우 김서형, 염정아가 출연한 JTBC 드라마 'SKY캐슬'의 한 장면. 화면캡쳐

그런데 평범한 일반고에 유리해야만 바람직한 입시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상위권 대학이 그런 입시를 다소 확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수능전형과 논술전형에서 내신 비중을 높이는 방법도 있지만 현재로선 교과전형의 확대가 가장 확실하다.

둘째, 학종을 확대해야 객관식 시험과 암기식 공부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 정말 그럴까? 극복은커녕 오히려 더 크게 조장할 수도 있다. 학종의 핵심요소인 학교시험(내신)은 대부분 철저한 객관식 시험이다. 그 폐해를 줄이려 도입된 서술형 문제조차도 실제로는 객관식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서술형 문제가 암기식 공부를 더 심하게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교사만 탓할 일이 아니다. 현 학교내신제도의 필연적 귀결이다. 객관식 시험과 암기 위주 공부를 정말로 극복하고 싶다면 논술전형의 대폭 확대를 주장해야 마땅하다.

셋째, 수능의 문제가 심각하니까 학종이 정당하다는 주장. 즉 수능의 대항마로 학종을 내세우는 주장. 누워서 침 뱉는 격이다. 그 수능이 바로 학종의 구성요소 중 하나다. 또 그들이 말하는 수능의 문제는 대부분 학종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떻게 학생을 냉혹하게 줄 세울 수 있냐고? 어떻게 1점 차이로 당락을 결정할 수 있냐고? 문제의식엔 공감하지만 그것은 수능뿐만 아니라 학종과 그 밖의 다른 입시 모두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수능에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학종은 수능의 장점 하나만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우리 국민이 입시 운영의 원칙으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바로 공정성이다. 대다수 국민은 수능을 가장 공정한 입시라 생각한다. 그것은 문재인 대통령도 인정한 바 있다. “수능이 가장 공정하다는 여론이 압도적인 상황이다.”

학종은 단점의 화려함에 비해 장점이 너무 빈약하다. 교과전형만큼 일반고에 유리하지 못하고, 논술전형만큼 객관식 시험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능전형만큼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 학종은 이도 저도 아닌 입시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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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lt;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gt;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추운 밤, 처진 어깨로 귀가한 주인공이 마들렌 과자 한 쪽을 홍차에 적셔 먹는다. 순간 그는 어릴 적 일요일 아침 고모할머니가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의 미각을 떠올린다. 동시에 당시 광장이며 오솔길, 마을과 정원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찻잔에서 솟아남을 느낀다.

이제 너무 유명해진 이 장면은 여러 저술에서 언급되었고, 그중 하나가 오카 마리의 연구서 &lt;기억 서사&gt;이다. 책의 저자는 마트에서 사온 서양배 주스를 컵에 따라 한 모금 넘기는 순간, 오래전 이집트 유학 당시 하숙집 아주머니가 후식으로 내어주던 서양배의 미각과 더불어 한 시절이 또렷이 복각되던 경험에 관해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일화가 마들렌 예시보다 더 와 닿았는데, 바로 서양배라는 소재 때문이었다.

대학원 시절, 같은 연구실 선배가 구동독 지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재학시기가 겹치진 않았으나, ‘학부생이 올려다본 똑똑한 조교 오빠’ 같던 그가 사형(師兄)임이 남몰래 자랑스러웠다. 사람이 멋있으니 낯선 구동독 지역인 것도 어딘가 근사하게 느껴졌다. 생경한 이름의 그 도시로 가면 다들 선배처럼 낡은 외투 걸치고, 까슬까슬 야윈 얼굴로 소리 없이 ‘파’ 웃으며 맥주잔을 기울일 것 같았다.

언젠가 필요한 국내논문자료가 있다고 하셔서 구해 보냈더니 답메일에 ‘배 삼형제’란 제목의 사진이 첨부되어 왔다. 날마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양배 몇 알을 사서, 저녁식사 후 룰루랄라 깎아 먹는다 하셨다. “그게 요즘 내 낙이다”라면서. 담백한 그 어조도 괜히 나는 좋았다. 한참 지나 다른 나라에서 맛본 서양배는 단감과 무를 섞은 듯 묘한 식감에 달지도 새콤하지도 않았지만, 종종 사서 깎아 먹었다. 그때마다 상상 속 구동독 지역 도서관과 과일가게, 고단한 얼굴로 과일 깎는 선배가 눈앞에 그려졌다. 서양배는 통상적으로 영국배(English pear)라 불리고 내가 그걸 처음 먹어본 나라는 미국이었지만, 나에겐 ‘독일’이란 단어와 유사한 온도와 빛깔을 지닌 낱말이 되었다.

여러 해 흘러, 바로 그 독일의 한 대학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러 가게 되었다. 도움 주신 선생님께 출국인사 드릴 겸 연구실로 찾아뵈었다. 이런저런 조언을 하던 그분이 문득 생각난 듯 하얀 아스파라거스 시즌이 곧 시작될 텐데 대단히 맛난 계절채소이니 반드시 먹어보라 하셨다. 독일어로 슈파겔이라 부른단다. “이소영 선생 요리 실력은 안 봐도 짐작되지만 그건 물에 데치기만 하면 되니 괜찮아” 하시면서 말이다.

도착한 첫 주에 장을 보러 가니 과연 슈파겔(Spargel)이라 적힌 푯말 아래 ‘마’처럼 생긴 하얀 채소들이 쌓여 있었다. 한 봉지 사서 데치고 얇은 껍질을 벗겨 속살을 베어 물었더니, 파 줄기 맛이었다. 소금 치고 버터 조각 녹여 넣어도 대파의 흰색 줄기 맛만 계속 났다. 그 채소와 황금궁합이라던 어떤 소스를 곁들이니 이번엔 느끼한 파 줄기 맛이 났다.

그럼에도 시장 갈 때마다 장바구니에 담곤 했다. 외워둔 강의안을 잊어버려 정전 같은 정적이 흘렀던 첫수업 날에, “시신을 염하다”를 ‘솔트’란 단어로 표현해버렸던 부끄러운 날에, 수업준비하다 지쳐 뒷산 양떼 사이에서 울었던 날에 늦은 밤 철 이른 슈파겔을 먹었다. 베를린필 연주회 보러가고자 푼푼이 모아둔 돈을 털어 한국으로 면접 다녀온 밤과, 그로부터 일주일 후 지구 저편에서 “축하합니다”로 시작되는 메시지를 받고 해처럼 웃었던 이른 새벽, 이번에는 통통해진 제철 슈파겔을 먹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주먹으로 책상 탕탕 두드리는 게르만식 박수를 쳐준 종강일 저녁, 마침내 삭아서 보드라워진 끝물 슈파겔을 먹었다.  

타인에게 선물한 음악은 상대로 하여금 날 기억하게 만드는 반면 책은 내가 상대를 기억하는 매개체가 된다고 어느 작가가 썼다지만, 기억은 매개체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리 남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좋은 사람과 고마운 사람은 음악이나 책뿐만 아니라 과일이나 채소 안에서도 아련한 한 시절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솟아나게 할 수 있다. 내게 서양배와 하얀 아스파라거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소영 |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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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라는 긴 제목의 에세이집을 낸 적이 있다. 책 내용은 제목 그대로였다. 1960년대 이른바 경제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우리 경제는 서구에서 300년 만에 이루어진 변화를 불과 30년 만에 이루어냈다. 참으로 놀랍고 무서운 속도였다. 그 긴 제목의 에세이집은 이러한 맹렬한 변화 속도 속에서 과연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자기정립은 가능할까 하는 물음으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혹시 맹렬한 속도 속에서 갈가리 찢겨져 자신을 잃어버린 채 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제 한번쯤 느릿느릿할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속도에 비추어 이 맹렬한 속도를 반성적으로 성찰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만 성숙한 삶과 성숙한 사회가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물음을 담고 있는 그 에세이집은 7000~8000부 나가고 언젠가 절판되었다.

그런데 20년 넘게 지나 가끔 그 책을 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연락을 받기도 하고, 유명한 방송인이면서 작가인 모씨가 자기 책에 참고했다고 언급해서 그런지 간혹 인터넷에서 책 제목을 보곤 한다. 새삼 왜 이러지? 이제 한 지식인의 자기성찰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제도적, 정책적 차원에서 맹렬했던 산업사회의 속도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온 것일까? 하기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 인공지능 자동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서구 선진국의 지식과 모델을 빨리빨리 받아들여 하루라도 빨리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산업사회 패러다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사회 패러다임을 버리지 않고 추종할 경우 어떤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는 4대강 사업이 잘 보여주고 있다.

강은 그걸 중심으로 자연생태계가 형성되어 유지되고 그에 기반하여 인간의 생활생태계가 형성·유지되는 장이며, 그 기억들이 축적되어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의 장이기도 하다. 여기에 흐르는 시간은 느리고 유장하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 깃들여 사는 내부자의 시각을 잃지 않는다면 강을 단기간에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기 어렵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한 주체의 시각은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자연생태계와 생활생태계, 역사의 장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외부자의 시각이다. 그 모든 걸 원천적으로 배제한 채 강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정해진 5년 임기 내의 가시적 성과를 위해 파헤쳤다. 그 결과는 강의 부패와 수중생물들의 죽음, 회복하기 어려운 생활생태계의 왜곡과 역사의 장의 파괴다.

교육이라고 해서 4대강 사업보다 나을까? 그렇게 나아 보이지 않는다. 교육은 최종적으로 교수자와 학습자의 관계에 의해 완성된다는 점에서 인간 삶의 느릿느릿한 시간이 한 축으로 작동하는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자의 시각에 입각한 산업화의 맹렬한 속도가 일방적으로 작동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현실은 그 곤란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하루빨리 받아들여 될 수 있으면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에게 주입·암기케 함으로써 하루빨리 서구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를 모토로 하는 산업화 시대 학교교육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강력한 수단 중 하나였다. 이렇게 해서 서구에서 수입된 지식을 얼마나 잘 암기했나를 측정하는 시험으로 학교와 학생을 줄 세우고 학생은 자신의 적성이나 특기에 상관없이 점수에 따라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산업사회 교육체계가 형성된다. 이런 교육체계에서는 교수자와 학습자 삶의 느릿느릿한 시간이 작동할 여지는 없다. 이러한 산업사회 교육체계는 지능정보화 사회인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채 관성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여전히 획일적 서열화 경쟁 속에서 학생들은 자기 삶의 시간을 배제한 채 밖에서 요구하는 속도에 따른 선택을 하고 있으며, 교육정책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대의 5년 미만의 주기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어떻게 하면 한국의 교육에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속도와 함께 교수자와 학습자 삶의 느릿느릿한 시간이 중요한 축으로 작동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면 국가교육위원회는 매우 재미있는 시도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래 관성화된 5년 미만 교육정책 입안과 실행 주기를 새로운 교육 거버넌스를 통해 10년, 20년의 주기로 늘리겠다는 건데, 그것 자체가 산업화 시대의 맹렬하고 맹목적인 속도에 대한 제도적 반성과 성찰로 볼 수도 있어 무척 흥미롭다.  어제 구로 마을축제에 뮤지컬 공연을 준비하는 학생들 연습을 보러 갔다. 교실에선 죽어 있던 아이들의 눈빛이 노래하며 동작을 펼치는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며 살아났다. 학교교육 체계에 눌려 있던 아이들 삶의 시간이 살아난다고나 할까? 그러한 눈빛은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아이들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킨다. 무엇이 진정한 교육일까?

우리의 학교는 낙타들에게 곁눈질 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빠른 속도로 사막을 건너 풀과 숲이 우거진 녹지로 가라고만 가르친다. 그러나 소수의 낙타만이 사막을 건너고 대다수 낙타는 사막에 남는다. 학교는 사막에 남는 낙타들에게 너는 낙오했다고 말할 뿐 사막에서 사는 법을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막을 푸른 초지로 바꾸는 것은 이 버려진 낙타들이다. 이 낙타들이 자기 삶의 시간에 눈뜰 때 학교와 사회가 정말로 바뀔 것이다.

<김진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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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그러니까, 도토리랑 콜라가 오해가 있었나 봐.” 공동육아어린이집 학부모가 교사들 이야기를 하는데, 옆 테이블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대안학교나 공동육아어린이집에서는 ‘선생님’이란 호칭 대신 별명을 부른다. 물론 아이들도. “뿡뿡이, 나 쉬 마려워” 이런 식이다. 예전엔 그래도 돌고래, 백곰, 제비꽃, 개나리 등 동식물이 많아 맥락상 의인화하기가 쉬웠는데, 최근엔 콩자반, 발바닥, 배고파 같은 특이한 별명을 선호하는 추세라 서로 이름 부르는 일이 더 재밌어졌다.

공동육아 초창기, 나이와 경험의 위계에서 벗어나자고 교사들끼리 서로 별명을 부르다 나중엔 아이와 부모들까지 그러기로 했다. 대안학교 중에는 교사 이름을 부르는 곳도 있다. “누구누구야” 하는 호격조사는 빼고 이름 두 글자만. 동방예의지국에서 아이들에게 반말을 가르친다니, 함부로 선생님 별명과 이름을 부른다니 과연 제대로 교육이 될까 싶지만 실제로 해보면 장점이 많다. 대안학교나 공동육아어린이집 아이들이 어른에 대한 경계심이 덜하고 낯선 이와도 쉽게 친해지는 건, 이런 언어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사회적 동물이어서, 어린이집에서 그렇게 배웠다고 아무한테나 찍찍 반말을 해대는 아이도 없다.

한국 사회의 유별난 호칭 문제를 개선하고자 직함 대신 서로 이름을 부르거나 ‘님’으로 통일하는 회사들이 늘고 있다. 복잡한 직함을 빼고 ‘쌤’ ‘님’으로 통일하자는 서울시교육청의 발표도 수직적인 공무원 사회의 변화를 노린 것일 텐데, 초점이 좀 어긋났다. 이 안을 ‘아이들에게도 적용하는가’ 하는 문제로 번져 논란이 일었다. 다수는 반대 입장을 드려냈다. 전교조마저 “쌤은 교사를 얕잡아보는 호칭이고, (…) 가뜩이나 교권 침해에 시달리는 교사들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마지막 자긍심과 위안을 느끼고 있다”며 호칭 변경에 우려를 표했다. ‘쌤’은 과연 교사를 낮추어 부르는 말일까. 모든 교사에게 ‘쌤’이라 부르면서, 한 명에게만 ‘선생님’이란 호칭을 고수하는 학생이 있었다. 이유를 묻자 학생은 말했다. 안 친해서 그렇다고.

호칭은 서로의 역할을 드러내는 동시에, 관계를 설정한다. 서로 별명을 불러도 사제지간 혹은 교사와 학생이라는 역할은 바뀌지 않는다. 대안학교에서의 경험으로 보면, 자유로운 호칭을 통해 오히려 교사와 학생을 넘어서는 제3의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역할을 호칭으로 묶어두는 한, 둘의 관계는 그 역할을 넘어설 수 없다.

사실, 오래전부터 학생들은 교사들의 별명을 불러왔다. 앞에서는 공손히 선생님이라 해도, 뒤에선 “야, 수학 온다!” “미친개 떴다!” 하지 않는가. 고등학교 때 물리선생의 별명은 ‘제물포’(쟤 때문에 물리 포기), 교감선생의 별명은 ‘이사도라’(24시간 돌아다니며 감시), 날마다 교문을 지키는 학생주임의 별명은 ‘에이즈’(걸리면 죽기 때문)였다. 그런 험악한 별명으로 불릴 바에야, 맘에 드는 별명 하나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다정하게 불러달라는 건 어떨까.

성급한 발표로 뭇매를 맞고 있지만, 서울시교육청이 제안한 호칭 개편의 배경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교권이 무너지고 위계질서가 엉망진창이 될 거라는 염려는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말이다. ‘선생님’이란 호칭을 지켜낸다고, 진정한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교육이 무너지는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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