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부담 많은 명절이 시작되는 연휴에 방영해놓고 대다수 시청자들에게 공포체험을 하게 한 <SKY캐슬>의 마지막 회를 보면서 나는 드디어 중학생 엄마가 되었다. 드라마 한 편으로 앞으로의 현실을 속단하는 것도 경솔하고, 이제 겨우 중학생이 되는 아이를 두고 입시전쟁의 서막을 연 것 같은 오두방정을 떠는 건 더더욱 우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설레는 만큼 두렵고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직 입학하지도 않은 학교의 졸업생 학부모들에게 전해들은 좋은 사례에 기대를 품었다가 뒤따라 나오는 불합리한 사례를 듣고 겪기도 전에 성토했다가 이 나라의 교육제도를 어찌할 것인가 크게 반문했다 작게 흔들렸다 우왕좌왕하면서 마음을 잡아보려 애쓰던 와중에 정작 엉뚱하게 교복을 구입하러 가서 마음이 상했다.

12일 경기 용인시 기흥구의 한 교복 매장에서 초당고등학교 신입생 원동준군(17)이 새 교복을 입은 뒤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살피고 있다. 용인시 제공

학교에서 정한 지정업체의 교복은 확실히 다른 업체보다는 저렴했으나 옷감의 소재도 딱 그 정도로 저렴해 보였다. 8만원이나 주고 산 교복 재킷은 원단이 부직포였다. 빨아 입어야 하니 여벌을 구매할 수밖에 없는 블라우스도 한 장에 3만원이었다. 섬유로 인한 아토피가 있는 아이라 몸에 닿는 옷만은 따로 구매하고 싶었지만 가정통신문에 적혀 있는 ‘교복지도’라는 문구 때문에 할 수 없이 두 벌이나 샀다. 속에 입는 블라우스 정도는 반드시 지정된 옷을 입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학교에 문의해보고 싶었지만 입학하기도 전에 교복을 가지고 ‘유난을 떠는’ 학부모가 된다며 주위에서 말렸다.

사이즈를 맞춰 보느라 30분 남짓 입고 있던 걸로도 아이의 목덜미는 이미 상처 난 것처럼 벌겋게 됐다. 정해진 공구 기간이 짧고, 그 기간에 가야 입학 전에 맞는 사이즈의 교복을 구입할 수 있다고 해서 기간에 맞춰서 갔는데도 사이즈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맞는 사이즈를 주문하려면 입학 이후에나 교복을 받아볼 수 있으니 이월상품이나 더 큰 사이즈를 사라 했다. 그런데 사실 교복은 대부분 한번 사서 3년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맞는 사이즈라는 개념 자체가 큰 사이즈를 의미한다. 심지어 나는 이번에 교복 치마에 숨겨진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도 새로 옷을 구입하지 않고 입을 수 있도록 허리 상단 부분이 두 겹의 치마를 겹쳐놓은 것처럼 디자인되어 있었다. 지퍼도 안과 밖 각각 두 개였다. 추가 구입으로 인한 가계 소비의 불편을 학생들이 몸으로 고스란히 감당하는 상황이랄까. 이런 상황이 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업체를 찾아간 학부모에게서도, 다른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에게서도 비슷한 불평을 들었다. 대체 이런 교복을 왜, 무슨 이유로 반드시 입어야 하는 걸까.

몇 년 전 몇 달 정도 미국 공립학교를 경험할 일이 있었는데, 그 지역의 (사립도 아닌) 공립학교가 모두 교복을 입었다. 우리가 입히는 양복 스타일도 아니고, 학교 마크가 달린 교복도 아니었다. 흔히 폴로셔츠라고 말하는 셔츠에 바지 또는 치마를 입으면 됐다. 학교마다 색깔만 달리했는데, 그마저도 한 학교가 대략 서너가지, 많게는 대여섯가지 색을 지정해서 입었고, 저렴한 대량생산 업체인 스파 브랜드에 가면 쉽게 살 수 있었다. 학교 밖에서 사복으로 입기에도 적당한 복장이었다. 체육복이 따로 없었는데, 따로 있지 않아도 될 만큼 활동성이 보장된 옷들이었다. 딱 그 정도의 제한만으로도 보수적인 어른들이 강조하는 단정함이 있었고, 딱 그 정도의 선택과 다양함으로도 아이들이 제 개성을 살릴 수 있었다. 한번 사서 3년을 입기 위해 굳이 크게 살 필요도 없고, 누가 규정한지 모르는 학생다움을 위해 불편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다. 매주 금요일은 규정과 무관하게 사복을 입을 수 있는 날이었는데, 그날에도 원래의 교복을 입고 오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교복을 한 번도 입지 않은 세대여서일까. 교복의 장점도 모르고, 향수도 없는 나로서는 지금의 교복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반드시 교복을 입어야만 한다면 저 정도의 융통성은 열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어른 대접도 하지 않으면서 어른들이 입는 기성복을 흉내 낸 옷이나 입혀놓고, 지도와 단속이라니, 그게 아이들이 청소년으로 접하는 교육 현장의 첫 모습이라니, 입학도 하기 전에 아찔하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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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SKY캐슬>이 주목한 입시 학생부종합전형이 주는 부담은 그야말로 종합적이다. 최대 4종류의 시험, 수많은 학교활동, 자소서, 면접…,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학종이 초래한 교육 윤리의 타락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다. 작은 위선에서 심각한 거짓까지…,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종 주창자들은 어떤 이유로 학종을 옹호하는 것일까? 가장 자주 접하는 그들의 주장 3개를 살펴보자.

첫째, 학종이 강북이나 지방의 평범한 인문계고에 유리하다는 주장. 과연 그럴까? 현존 입시 중 평범한 일반고에 유리하다고 할 만한 전형은 사실상 학생부교과전형(교과전형) 하나뿐이다. 그 정도가 다른 전형에 비해 현저히 크다. 할당제 입시를 제외한다면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혹자는 서울대 지역균형선발전형(지균) 같은 예외적 사례를 들어 반박하고 싶을 수 있겠다. 하지만 서울대 지균은 학종으로 보기 어려운 입시다. 서울대 지균의 본질은 학종이 아닌 할당제에 있다. 그리고 지균은 학교에 할당된 두 장의 추천티켓을 대부분 내신 1·2등(또는 문과 1등, 이과 1등)이 갖는다는 점에서 교과전형 성격이 강하다. 서울대는 왜 교과전형 성격의 할당제 입시를 굳이 학종으로 분류할까? 주류 학종인 일반전형이 평범한 일반고에 현저히 불리한 입시란 사실을 물타기 하려는 속셈이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배우 김서형, 염정아가 출연한 JTBC 드라마 'SKY캐슬'의 한 장면. 화면캡쳐

그런데 평범한 일반고에 유리해야만 바람직한 입시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상위권 대학이 그런 입시를 다소 확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수능전형과 논술전형에서 내신 비중을 높이는 방법도 있지만 현재로선 교과전형의 확대가 가장 확실하다.

둘째, 학종을 확대해야 객관식 시험과 암기식 공부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 정말 그럴까? 극복은커녕 오히려 더 크게 조장할 수도 있다. 학종의 핵심요소인 학교시험(내신)은 대부분 철저한 객관식 시험이다. 그 폐해를 줄이려 도입된 서술형 문제조차도 실제로는 객관식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서술형 문제가 암기식 공부를 더 심하게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교사만 탓할 일이 아니다. 현 학교내신제도의 필연적 귀결이다. 객관식 시험과 암기 위주 공부를 정말로 극복하고 싶다면 논술전형의 대폭 확대를 주장해야 마땅하다.

셋째, 수능의 문제가 심각하니까 학종이 정당하다는 주장. 즉 수능의 대항마로 학종을 내세우는 주장. 누워서 침 뱉는 격이다. 그 수능이 바로 학종의 구성요소 중 하나다. 또 그들이 말하는 수능의 문제는 대부분 학종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떻게 학생을 냉혹하게 줄 세울 수 있냐고? 어떻게 1점 차이로 당락을 결정할 수 있냐고? 문제의식엔 공감하지만 그것은 수능뿐만 아니라 학종과 그 밖의 다른 입시 모두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수능에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학종은 수능의 장점 하나만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우리 국민이 입시 운영의 원칙으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바로 공정성이다. 대다수 국민은 수능을 가장 공정한 입시라 생각한다. 그것은 문재인 대통령도 인정한 바 있다. “수능이 가장 공정하다는 여론이 압도적인 상황이다.”

학종은 단점의 화려함에 비해 장점이 너무 빈약하다. 교과전형만큼 일반고에 유리하지 못하고, 논술전형만큼 객관식 시험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능전형만큼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 학종은 이도 저도 아닌 입시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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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lt;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gt;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추운 밤, 처진 어깨로 귀가한 주인공이 마들렌 과자 한 쪽을 홍차에 적셔 먹는다. 순간 그는 어릴 적 일요일 아침 고모할머니가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의 미각을 떠올린다. 동시에 당시 광장이며 오솔길, 마을과 정원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찻잔에서 솟아남을 느낀다.

이제 너무 유명해진 이 장면은 여러 저술에서 언급되었고, 그중 하나가 오카 마리의 연구서 &lt;기억 서사&gt;이다. 책의 저자는 마트에서 사온 서양배 주스를 컵에 따라 한 모금 넘기는 순간, 오래전 이집트 유학 당시 하숙집 아주머니가 후식으로 내어주던 서양배의 미각과 더불어 한 시절이 또렷이 복각되던 경험에 관해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일화가 마들렌 예시보다 더 와 닿았는데, 바로 서양배라는 소재 때문이었다.

대학원 시절, 같은 연구실 선배가 구동독 지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재학시기가 겹치진 않았으나, ‘학부생이 올려다본 똑똑한 조교 오빠’ 같던 그가 사형(師兄)임이 남몰래 자랑스러웠다. 사람이 멋있으니 낯선 구동독 지역인 것도 어딘가 근사하게 느껴졌다. 생경한 이름의 그 도시로 가면 다들 선배처럼 낡은 외투 걸치고, 까슬까슬 야윈 얼굴로 소리 없이 ‘파’ 웃으며 맥주잔을 기울일 것 같았다.

언젠가 필요한 국내논문자료가 있다고 하셔서 구해 보냈더니 답메일에 ‘배 삼형제’란 제목의 사진이 첨부되어 왔다. 날마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양배 몇 알을 사서, 저녁식사 후 룰루랄라 깎아 먹는다 하셨다. “그게 요즘 내 낙이다”라면서. 담백한 그 어조도 괜히 나는 좋았다. 한참 지나 다른 나라에서 맛본 서양배는 단감과 무를 섞은 듯 묘한 식감에 달지도 새콤하지도 않았지만, 종종 사서 깎아 먹었다. 그때마다 상상 속 구동독 지역 도서관과 과일가게, 고단한 얼굴로 과일 깎는 선배가 눈앞에 그려졌다. 서양배는 통상적으로 영국배(English pear)라 불리고 내가 그걸 처음 먹어본 나라는 미국이었지만, 나에겐 ‘독일’이란 단어와 유사한 온도와 빛깔을 지닌 낱말이 되었다.

여러 해 흘러, 바로 그 독일의 한 대학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러 가게 되었다. 도움 주신 선생님께 출국인사 드릴 겸 연구실로 찾아뵈었다. 이런저런 조언을 하던 그분이 문득 생각난 듯 하얀 아스파라거스 시즌이 곧 시작될 텐데 대단히 맛난 계절채소이니 반드시 먹어보라 하셨다. 독일어로 슈파겔이라 부른단다. “이소영 선생 요리 실력은 안 봐도 짐작되지만 그건 물에 데치기만 하면 되니 괜찮아” 하시면서 말이다.

도착한 첫 주에 장을 보러 가니 과연 슈파겔(Spargel)이라 적힌 푯말 아래 ‘마’처럼 생긴 하얀 채소들이 쌓여 있었다. 한 봉지 사서 데치고 얇은 껍질을 벗겨 속살을 베어 물었더니, 파 줄기 맛이었다. 소금 치고 버터 조각 녹여 넣어도 대파의 흰색 줄기 맛만 계속 났다. 그 채소와 황금궁합이라던 어떤 소스를 곁들이니 이번엔 느끼한 파 줄기 맛이 났다.

그럼에도 시장 갈 때마다 장바구니에 담곤 했다. 외워둔 강의안을 잊어버려 정전 같은 정적이 흘렀던 첫수업 날에, “시신을 염하다”를 ‘솔트’란 단어로 표현해버렸던 부끄러운 날에, 수업준비하다 지쳐 뒷산 양떼 사이에서 울었던 날에 늦은 밤 철 이른 슈파겔을 먹었다. 베를린필 연주회 보러가고자 푼푼이 모아둔 돈을 털어 한국으로 면접 다녀온 밤과, 그로부터 일주일 후 지구 저편에서 “축하합니다”로 시작되는 메시지를 받고 해처럼 웃었던 이른 새벽, 이번에는 통통해진 제철 슈파겔을 먹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주먹으로 책상 탕탕 두드리는 게르만식 박수를 쳐준 종강일 저녁, 마침내 삭아서 보드라워진 끝물 슈파겔을 먹었다.  

타인에게 선물한 음악은 상대로 하여금 날 기억하게 만드는 반면 책은 내가 상대를 기억하는 매개체가 된다고 어느 작가가 썼다지만, 기억은 매개체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리 남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좋은 사람과 고마운 사람은 음악이나 책뿐만 아니라 과일이나 채소 안에서도 아련한 한 시절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솟아나게 할 수 있다. 내게 서양배와 하얀 아스파라거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소영 |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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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라는 긴 제목의 에세이집을 낸 적이 있다. 책 내용은 제목 그대로였다. 1960년대 이른바 경제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우리 경제는 서구에서 300년 만에 이루어진 변화를 불과 30년 만에 이루어냈다. 참으로 놀랍고 무서운 속도였다. 그 긴 제목의 에세이집은 이러한 맹렬한 변화 속도 속에서 과연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자기정립은 가능할까 하는 물음으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혹시 맹렬한 속도 속에서 갈가리 찢겨져 자신을 잃어버린 채 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제 한번쯤 느릿느릿할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속도에 비추어 이 맹렬한 속도를 반성적으로 성찰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만 성숙한 삶과 성숙한 사회가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물음을 담고 있는 그 에세이집은 7000~8000부 나가고 언젠가 절판되었다.

그런데 20년 넘게 지나 가끔 그 책을 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연락을 받기도 하고, 유명한 방송인이면서 작가인 모씨가 자기 책에 참고했다고 언급해서 그런지 간혹 인터넷에서 책 제목을 보곤 한다. 새삼 왜 이러지? 이제 한 지식인의 자기성찰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제도적, 정책적 차원에서 맹렬했던 산업사회의 속도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온 것일까? 하기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 인공지능 자동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서구 선진국의 지식과 모델을 빨리빨리 받아들여 하루라도 빨리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산업사회 패러다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사회 패러다임을 버리지 않고 추종할 경우 어떤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는 4대강 사업이 잘 보여주고 있다.

강은 그걸 중심으로 자연생태계가 형성되어 유지되고 그에 기반하여 인간의 생활생태계가 형성·유지되는 장이며, 그 기억들이 축적되어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의 장이기도 하다. 여기에 흐르는 시간은 느리고 유장하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 깃들여 사는 내부자의 시각을 잃지 않는다면 강을 단기간에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기 어렵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한 주체의 시각은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자연생태계와 생활생태계, 역사의 장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외부자의 시각이다. 그 모든 걸 원천적으로 배제한 채 강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정해진 5년 임기 내의 가시적 성과를 위해 파헤쳤다. 그 결과는 강의 부패와 수중생물들의 죽음, 회복하기 어려운 생활생태계의 왜곡과 역사의 장의 파괴다.

교육이라고 해서 4대강 사업보다 나을까? 그렇게 나아 보이지 않는다. 교육은 최종적으로 교수자와 학습자의 관계에 의해 완성된다는 점에서 인간 삶의 느릿느릿한 시간이 한 축으로 작동하는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자의 시각에 입각한 산업화의 맹렬한 속도가 일방적으로 작동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현실은 그 곤란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하루빨리 받아들여 될 수 있으면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에게 주입·암기케 함으로써 하루빨리 서구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를 모토로 하는 산업화 시대 학교교육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강력한 수단 중 하나였다. 이렇게 해서 서구에서 수입된 지식을 얼마나 잘 암기했나를 측정하는 시험으로 학교와 학생을 줄 세우고 학생은 자신의 적성이나 특기에 상관없이 점수에 따라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산업사회 교육체계가 형성된다. 이런 교육체계에서는 교수자와 학습자 삶의 느릿느릿한 시간이 작동할 여지는 없다. 이러한 산업사회 교육체계는 지능정보화 사회인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채 관성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여전히 획일적 서열화 경쟁 속에서 학생들은 자기 삶의 시간을 배제한 채 밖에서 요구하는 속도에 따른 선택을 하고 있으며, 교육정책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대의 5년 미만의 주기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어떻게 하면 한국의 교육에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속도와 함께 교수자와 학습자 삶의 느릿느릿한 시간이 중요한 축으로 작동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면 국가교육위원회는 매우 재미있는 시도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래 관성화된 5년 미만 교육정책 입안과 실행 주기를 새로운 교육 거버넌스를 통해 10년, 20년의 주기로 늘리겠다는 건데, 그것 자체가 산업화 시대의 맹렬하고 맹목적인 속도에 대한 제도적 반성과 성찰로 볼 수도 있어 무척 흥미롭다.  어제 구로 마을축제에 뮤지컬 공연을 준비하는 학생들 연습을 보러 갔다. 교실에선 죽어 있던 아이들의 눈빛이 노래하며 동작을 펼치는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며 살아났다. 학교교육 체계에 눌려 있던 아이들 삶의 시간이 살아난다고나 할까? 그러한 눈빛은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아이들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킨다. 무엇이 진정한 교육일까?

우리의 학교는 낙타들에게 곁눈질 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빠른 속도로 사막을 건너 풀과 숲이 우거진 녹지로 가라고만 가르친다. 그러나 소수의 낙타만이 사막을 건너고 대다수 낙타는 사막에 남는다. 학교는 사막에 남는 낙타들에게 너는 낙오했다고 말할 뿐 사막에서 사는 법을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막을 푸른 초지로 바꾸는 것은 이 버려진 낙타들이다. 이 낙타들이 자기 삶의 시간에 눈뜰 때 학교와 사회가 정말로 바뀔 것이다.

<김진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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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캐슬 좀 봐. 이제 갈 데까지 갔나봐. 나한테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네? 코디 있냐고? 있어. 연봉 1억원까지는 내가 직접 확인. 수억원인 사람도 있다는데 이건 미확인. 입시가 복잡해져서 애들이 해야 할 게 늘어나잖아. 그러니까 전략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잖아. 그걸 외주화한 게 컨설턴트. 컨설턴트가 매니저를 겸하면 코디. 

입시제도 바꾸면? 그다지 좋아지지 않을걸. 글쎄. 변별을 수능으로? 애들이 다 학원으로 가. 변별을 내신으로? 교실이 지옥이 돼. 변별을 비교과로? 이건 너무 불공정하잖아. 이러다간 나라가 망해. 뭔가 근본적인 게 필요해. 

진보 동네에 오래된 떡밥이 돌아다니네. 아직도 이 떡밥을 무는 사람들이 있네. 2012년 대선 공약집에 있었지.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라고 있었지. 그런데 2017년 공약집에선 사라졌어. 문재인 이념이 우경화 되어서? 민주당 의지가 약해져서?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냐. 지방에는 국공립대가 많아. 그런데 서울·수도권엔 없어. 서울·수도권 수험생이 30만명이야. 근데 이 지역 국공립대는 겨우 1만명이야. 국공립대 공동입학? 공동학위? 도저히 그림이 안 나와. 그럼 2012년 공약은? 엉터리. 시뮬레이션도 안 해본 엉터리. 

그다음 떡밥은 ‘공영형 사립대’. 이걸 또 무는 사람들이 있네. 정부가 돈을 주고 사립대를 사자는 거야. 이사진 절반 이상을 공익이사로 바꾸자는 거야. 이걸 도대체 누가 원한대? 망할 위기에 있는 지방 사립대. 여기에 돈을 퍼주자고? 국민들이 반대해. 그러니 기재부에서 ‘빠꾸’당해. 역시 엉터리. 시뮬레이션도 안 해본 엉터리. 

서울대 폐지론? 박원순이 물었던 떡밥? 서울대 없애 보라지. 연고대가 서울대 되겠지. 왕은 왕이어서 왕이 아니거든. 왕으로 대접받으니까 왕이거든.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카를 마르크스 형님이었던가. 

제발 네 어깨에 힘을 빼. 나도 돈 주자는 데 동의해. 공동입학제에 동의하는 유력 대학에 돈을 주자. 매년 교수 1인당 1억원 비율로 퍼주자. 서울대에 2200억원, 연세대에 1600억원, 고려대에 1400억원, 경북대에 1100억원, 동국대에 700억원…씩 지금보다 더 주자. 그 대신 사립대의 자율권, 인정해 주자고. 학생선발권만 가져오자고. 학생선발권 그냥 뺏어오면 위헌결정 날 거거든. 그러니까 그 대신 돈을 주자고. 그러면 정부 예산의 1%로 해결할 수 있어. 5조원으로 해결할 수 있어. 고졸자 3분의 1 이상 수용하는 전국적 공동입학제 만들 수 있어. 이걸로 인기전공 경쟁은 못 막아. 하지만 인기대학 경쟁은 막을 수 있어. 

대학평준화가 아니야. 대학에 돈을 주는 대신, 교육여건의 ‘하한’만 정하고 ‘평가’만 요구하는 거거든. 나머지 돈은 대학 맘대로 쓰게 해주는 거거든. 대학은 솔깃할 거야. 요새 돈이 없으니까. 돈이 없어서 강사들도 자른다잖아. 

가만히 생각해봐. 누구의 기득권도 해치지 않아. 대학은 정부예산 받아서 돈이 많아져. 학부모는 사교육비 줄여서 돈이 많아져. 학계, 교육계 관료 나으리들 기득권도 그대로. 명문대 동문회는 싫어하겠지만. 쪼끔 더 팬시한 상상 해볼까? 나머지 돈의 일부를 장기연구에 쓰기로 해보자. 노벨상 나올 거야. 어때. 이 정도면 해볼 만하잖아? 

꼰대는 반대할 거야. 사립대와 국립대는 근본부터 다르니라~ 에헴. 유럽식 대학평준화가 답이니라~ 에헴. 미친. 거긴 사립대가 없잖아. 한국은 사립대 비율이 세계 최고야. 미친 체제니까 미친 대안이 나오는 거야. 사학에 왜 국민 세금을 퍼주냐고? 그럼 네 대안을 말해봐. 대안을 말해보라고!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으려면 필요하잖아. 그러니까 흰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 모두에게 먹이를 주자. 등소평 선생님 말씀. 내가 살짝 바꿔봤어. 

누구는 대학 서열이 문제가 아니래. 학부모의 욕망이 문제래. 도덕선생님 납시오~ 부동산 투기를 비난하면, 집값이 내려가기라도 해? 학부모 욕망을 비난하면, 입시경쟁이 줄어? 요새 교육경쟁이 쌍팔년도 출세경쟁인 줄 알아? 양극화로 인한 공·포·경·쟁이 겹쳤단 말이야.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은 경쟁! 그래서 적어도 인서울 지거국 하려는 경쟁. 어휴 지친다. 이런 사람들은 10년 뒤에도 똑같은 소리 할 거야. 설교로 밑밥 깔고 훈계질 계속할 거야. 

나도 알아. 이게 만병통치약은 아냐. 대학 서열로 인한 경쟁은 막을 수 있지만, 노동시장 양극화로 인한 경쟁은 못 막아. 하지만 적어도 경쟁을 대학입학 이후로 지연시켜. 진보 양반들은 고개를 젓겠지. 무엇보다 내 ‘발상’이 맘에 안 들겠지. 사회적 타협을 돈으로 하자는 거니까. 

돈으로 가치를 사? 제발 그러자. 돈으로라도 가치를 사자. 애들 다 죽잖아. 아니, 아예 애를 안 낳잖아. 제발 이 떡밥 좀 물어. 

물기 싫어?…그럼 그냥 지옥캐슬에서 계속 살든가.

<이범 |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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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도토리랑 콜라가 오해가 있었나 봐.” 공동육아어린이집 학부모가 교사들 이야기를 하는데, 옆 테이블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대안학교나 공동육아어린이집에서는 ‘선생님’이란 호칭 대신 별명을 부른다. 물론 아이들도. “뿡뿡이, 나 쉬 마려워” 이런 식이다. 예전엔 그래도 돌고래, 백곰, 제비꽃, 개나리 등 동식물이 많아 맥락상 의인화하기가 쉬웠는데, 최근엔 콩자반, 발바닥, 배고파 같은 특이한 별명을 선호하는 추세라 서로 이름 부르는 일이 더 재밌어졌다.

공동육아 초창기, 나이와 경험의 위계에서 벗어나자고 교사들끼리 서로 별명을 부르다 나중엔 아이와 부모들까지 그러기로 했다. 대안학교 중에는 교사 이름을 부르는 곳도 있다. “누구누구야” 하는 호격조사는 빼고 이름 두 글자만. 동방예의지국에서 아이들에게 반말을 가르친다니, 함부로 선생님 별명과 이름을 부른다니 과연 제대로 교육이 될까 싶지만 실제로 해보면 장점이 많다. 대안학교나 공동육아어린이집 아이들이 어른에 대한 경계심이 덜하고 낯선 이와도 쉽게 친해지는 건, 이런 언어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사회적 동물이어서, 어린이집에서 그렇게 배웠다고 아무한테나 찍찍 반말을 해대는 아이도 없다.

한국 사회의 유별난 호칭 문제를 개선하고자 직함 대신 서로 이름을 부르거나 ‘님’으로 통일하는 회사들이 늘고 있다. 복잡한 직함을 빼고 ‘쌤’ ‘님’으로 통일하자는 서울시교육청의 발표도 수직적인 공무원 사회의 변화를 노린 것일 텐데, 초점이 좀 어긋났다. 이 안을 ‘아이들에게도 적용하는가’ 하는 문제로 번져 논란이 일었다. 다수는 반대 입장을 드려냈다. 전교조마저 “쌤은 교사를 얕잡아보는 호칭이고, (…) 가뜩이나 교권 침해에 시달리는 교사들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마지막 자긍심과 위안을 느끼고 있다”며 호칭 변경에 우려를 표했다. ‘쌤’은 과연 교사를 낮추어 부르는 말일까. 모든 교사에게 ‘쌤’이라 부르면서, 한 명에게만 ‘선생님’이란 호칭을 고수하는 학생이 있었다. 이유를 묻자 학생은 말했다. 안 친해서 그렇다고.

호칭은 서로의 역할을 드러내는 동시에, 관계를 설정한다. 서로 별명을 불러도 사제지간 혹은 교사와 학생이라는 역할은 바뀌지 않는다. 대안학교에서의 경험으로 보면, 자유로운 호칭을 통해 오히려 교사와 학생을 넘어서는 제3의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역할을 호칭으로 묶어두는 한, 둘의 관계는 그 역할을 넘어설 수 없다.

사실, 오래전부터 학생들은 교사들의 별명을 불러왔다. 앞에서는 공손히 선생님이라 해도, 뒤에선 “야, 수학 온다!” “미친개 떴다!” 하지 않는가. 고등학교 때 물리선생의 별명은 ‘제물포’(쟤 때문에 물리 포기), 교감선생의 별명은 ‘이사도라’(24시간 돌아다니며 감시), 날마다 교문을 지키는 학생주임의 별명은 ‘에이즈’(걸리면 죽기 때문)였다. 그런 험악한 별명으로 불릴 바에야, 맘에 드는 별명 하나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다정하게 불러달라는 건 어떨까.

성급한 발표로 뭇매를 맞고 있지만, 서울시교육청이 제안한 호칭 개편의 배경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교권이 무너지고 위계질서가 엉망진창이 될 거라는 염려는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말이다. ‘선생님’이란 호칭을 지켜낸다고, 진정한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교육이 무너지는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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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신음하고 있다. 대표적인 원인을 꼽으라고 하면 선생님들은 주저 없이 학교폭력(이하 학폭)을 든다. 어느 구에서는 두세 학교를 빼고는 관내 모든 초등학교에서 학폭과 관련된 소송이 제기되어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2011년 학폭이 크게 문제가 되면서 이를 관리하기 위해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하 학폭법)이 만들어졌다. 이후 학폭법에 의해 학폭사항이 생활기록부에 기재되고, 치열한 대학입시경쟁에 영향을 미치면서 학교는 더욱 황폐화됐다.

우리의 어린 시절을 상기해보자. 아이들이 싸우면, 때린 부모는 “이놈아, 친구를 그렇게 때리면 되니? 내가 그렇게 키웠니?”라고 말하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질책하고 타일렀다. 맞은 학생의 부모는 팔다리가 부러지고 병원에 실려가는 정도가 아니라면 “아프지? 친구와는 그렇게 싸움도 하고, 아프면서 크는 거야” 하면서 용서의 마음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훈훈한 문화는 사라지고, 지금은 치고받은 아이들은 이미 화해했는데 가해학생의 부모는 가해를 옹호하고 법에 의존하여 가해의 기록이 생기부에 남지 않도록 소송을 제기한다. 이에 맞서 피해학생의 부모는 맞소송을 불사한다.

학폭 자체보다 학폭법에 의한 학폭 관리 문제가 학교를 황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학폭문제를 관장하는 생활지도부장을 구하는 일이 일부 학교에서는 신학기에 교장선생님의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학폭처리를 담당한 교사가 소송이 두려워 정당한 학생지도도 기피하는 등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이제 학폭을 둘러싼 갈등이 ‘악순환’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학폭을 다루는 관리프로세스 혹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일차적으로는 학교에서 학폭 관련 갈등을 교육이나 화해로 풀어낼 수 있는 권한과 공간을 확대해주어야 한다. 지금 학폭법에 의하면 학폭은 경미한 것에서 심각한 것까지 9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출석정지, 학급교체, 전학, 퇴학과 같은 중한 조치와는 달리, 서면사과나 학교봉사 등 경미한 사안은 생활기록부에 기록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불필요한 학폭 갈등을 줄이고 학교가 화해로 종결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또한 바로 처벌을 위한 법적 과정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위한 갈등조정기간을 두고 이 기간 동안 화해할 수 있게끔 하고 사안이 경미하다면 학교장이 종결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경미한 사안인 경우에는 처벌보다는 화해와 교육적 학습의 과정으로 초점을 이동시켜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해학생이 2차 가해행위를 하지 않도록 보완장치를 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폭 중 중대한 사안이나 여러 학교 학생들이 연루되어 있는 ‘학교 간 폭력’의 경우 교육지원청에서 학폭심의위원회를 설치하여 다루도록 함으로써 학교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중대사안이 하나만 나와도 한 학기 동안 그 학교는 거의 ‘쑥대밭’이 된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이다.

물론 다른 한편에서는 학폭으로부터 자녀들이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학부모들의 의식이 존재한다. 학폭이 빈발하고 있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욱 강한 학폭 처리방식을 적용함으로써 학폭을 줄일 수 있다고 하는 방식은 한계에 왔다. 이제 학폭 접근법을 대전환해야 할 때라고 나는 믿는다.

<조희연 | 서울시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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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권에서의 이화여대 정유라 사태를 필두로 작년과 올해의 학종 신뢰도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 최근에 불거진 사립유치원 문제, 숙명여고 사태 등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느낌이다. 불신은 부분적인 것일 때는 몸에 난 종기처럼 짜내고 치료를 하면 그만이지만 전면화되었을 때는 골수에 스민 병처럼 냉정하게 진단을 내리고 정확한 처방을 하지 않으면 치명적일 수 있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나날이 커지는 데는 여러 차원, 여러 측면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 차원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지난 산업화 시대에는 학교교육이 학생들에게 미래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실한 답을 주었다. 학교교육에서의 성공이 상당 정도 직업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졌고, 한번 잡은 직업은 평생 직업으로서 안정적이었다. 그러니 학교교육이 상당한 권위를 갖게 됐다.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학교교육은 학생들의 미래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스카이대 졸업자의 실질적 취업률이 50% 내외이고 직업을 갖게 되더라도 평생 직업으로 보장이 되지 않으니 학교교육에서의 성공이 직업 세계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셈이다. 빠르게 큰 폭으로 변화하는 현실 앞에서 불안해하는 국민들은 미래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하는 학교교육을 시간이 갈수록 더 불신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학교교육이 학생들의 미래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하게 된 데는 기본적으로 지능정보사회, 인공지능 자동화의 급진전 등의 변화가 직업을 불안정하게 하는 특성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학교교육이 여전히 산업사회 시스템에 머물러 있어 학생들에게 빠르게 변화하는 미래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지 못하는 것도 큰 이유이다. 산업사회 시스템과 시장주의를 넘어 미래사회 변화에 부응하는 교육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교육개혁을 더 이상 미루기 어려운 이유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미래사회 변화에 부응하는 교육개혁 추진을 현재의 교육부 시스템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 산업화 시대 학교교육 체계는 “서구에서 생산된 지식을 될 수 있으면 하루빨리 받아들여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에게, 될 수 있는 한 짧은 시간에 주입·암기케 함으로써 서구 선진국을 빨리빨리 쫓아가야 한다”로 요약된다. 교육개혁, 교육정책에 대한 정답 역시 이미 서구 선진국, 특히 미국에서 기성품으로 생산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박정희 시대에 미국 차관으로 설립된 한국교육개발원과 미국 유학파가 주류를 이루는 각 사대, 교대의 연구자들로 하여금 약간 가공하게 하여 써먹으면 되는 거였다. 교육부는 정책에 대한 연구 발주를 하고 그것을 받아 정책으로 내려보내고 그 정책들은 일종의 절대반지로서, 이의제기가 있을 수 없는 정답이기 때문에 그 정책이 학교현장에서 어떻게 시행되는지 점검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교육부에는 중장기 정책기획 기능과 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 기능, 정책 시행과 관련하여 현장과 피드백하는 구조가 매우 취약하다.

그런데 지능정보사회, 인공지능 자동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한국이 따라갈 선진국 모델이 사라졌다. 한국은 이미 선진국의 입구에 들어섰다. 인공지능 자동로봇 밀도가 미국의 3.5배, 일본의 2.5배로 압도적 세계 1위인데 어떻게 앞선 모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제는 앞선 모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이렇게 우리의 현실과 실천에 기반하여 길을 만들어 나가려 할 때 교육부가 선진국 모델 따라가기의 하향식 정책 시스템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심각한 장애요인이 된다. 그러한 시스템으로는 변화하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정책의 혼선과 난맥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고, 교육부에 대한 불신이 날로 깊어질 수밖에 없다. 산업화 시대 선진국 모델 따라가기 정책 시스템을 넘어서서 우리의 현실과 실천에 기반한 중장기 정책기획 기능, 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 기능, 정책 시행에 대한 학교 현장과의 피드백 기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국가교육회의 등 교육거버넌스 개편 논의는 현 교육정책 시스템의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번 곰곰이 짚어보아야 할 것은 지난 정부 정유라 사태부터 지금의 사립유치원 사태까지 학교교육의 국민적 불신을 촉발한 사건의 공통점이 사립학교라는 점이다. 학교교육의 개혁적 변화가 막히는 지점도 사립의 비중이 높은 고등학교부터이고 사립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대학은 개혁이란 말을 꺼내기가 좀 어색할 지경인 게 사실이다. 정부의 경제적 유인책에 의해 확대된 사립재단들의 생존과 발전에 대한 요구는 늘 우리 사회 중상층의 계급 계층적 구별짓기 욕구와 만난다. 자사고, 특목고와 같은 고교 서열화가 그렇고, 서울대를 예외로 하면 대학의 서열화가 그렇다. 이러한 서열화는 우리 학교교육을 산업사회형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왜곡된 학교문화를 만들어낸다. 교육 수요가 늘어나는 시기에 국가가 재정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경제적 유인책을 통해 민간자본을 학교로 끌어들임으로써 학교교육의 공공성을 스스로 훼손한 것은 참으로 오래 치유되지 않을 아픈 상처로 남을 것 같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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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불편함을 넘어 죄스러운 일이다. 학생들의 죽음이지 않은가.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이 저렇게 억울하게 죽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책임이 학교에 있지 않고, 그 잘못이 교사에게 있지 않다는 글을 쓰려 하다니…. (어떻게 또 전혀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은 최근 며칠 사이 전국의 교사들이 느낀 감정이기도 할 것 같다. 최근 며칠간 교사들은 학생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서로를 향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게 왜 학교 책임이지? 그게 왜 교사들 잘못이지?”

그러나 이렇게 말해놓고 교사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이들이 저렇게 억울하게 죽어갔는데…, 겨우 교사로서 한다는 말이 그 죽음이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말이라니….

그런데 왜 교사들이 이런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됐나? 비극적 사고 직후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한 발언과 그가 내린 조치들 때문이다. 그는 대성고 3학년 학생들이 당한 사고의 책임이 전적으로 학교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수능 이후에 학생을 방치한 학교…, 수능 이후의 고3 교실이 엉망이라는 팩트에 근거한 말이지만 완벽한 팩트에 근거한 말이기에 오히려 교묘하게 진실을 가릴 수 있다. 유은혜 장관의 발언으로 인해 갑자기 쟁점이 바뀌고 논점이 흐려져 버렸다. 안전관리 소홀이라는 문제의 본질은 어디 갔는가?

유은혜 장관을 향한 교사들의 분노가 크지만 그것은 단순히 사고 책임을 교사에게 전가했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교육부 장관의 해법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시킬 거라는 판단에서도 비롯된 것이다. 유은혜 장관이 알고 있는 대로 수능 이후의 고3 교실은 엉망이다. 다른 무엇보다 빈자리가 상당수다. 학교에 등교조차 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은 것이다. 교사의 잘못이라고 질책하면 교사들로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교사가 잘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교육 프로그램의 좋고 나쁨을 넘어선 문제다. 그것은 학생들이 가진 열망의 문제다. 학교와 교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수능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특히 수능 이후에 급증하는 그런 열망의 문제인 것이다. 수능 이후, 학생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은 정말 강렬하다. 그리고 그 열망은 정당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교사들이 고육지책으로 마련한 것 중 그나마 반응이 좀 나은 것이 학교 밖의 교육활동과 체험학습이다. 평범한 교사인 나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 그 누구도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 취지가 아니라고 극구 변명했지만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내린 조치들은 바로 이런 교육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수능 이후의 교육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긴 하다. 그것을 부정할 교사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장관이라 해서 마음이 황망한(그가 실제로 한 말이다) 가운데 즉자적으로 말할 그런 사안이 아니다. 면피를 위한 정치성 발언이 아니라면 말이다.

학생들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도 학생들을 괴롭히는 대책을 떠올리는 교육부와 장관의 존재…. 학생들의 죽음에는 턱없이 못 미치지만, 그 또한 적잖이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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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을 열망하는 입장에서 올해 가장 뼈아픈 일은 현 정부의 첫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퇴진이다. 김상곤 부총리 교체의 원인 진단은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치밀한 현실 인식에 기초한 교육개혁 청사진과 실행계획의 부재가 드러났다는 점이다. 어느 한 개인의 약점이 아니라 집권세력은 물론 진보개혁 진영 전반의 한계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솔직한 인정이 교육개혁을 향한 새해의 출발점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고는 관료들의 저항과 태만을 극복하기도 어렵고, 국민의 지지를 얻기도 불가능하다.

사립유치원의 비리는 그야말로 온 국민의 분노를 사며 한국 교육의 맨얼굴을 드러낸 올해 최대의 교육 분야 사건이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국공립이 아닌 사립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교육체제가 교육의 공공성과 운영의 투명성을 지키는 일에 취약하기 짝이 없음이 폭로되었다. 비리 유치원 세력은 기성 정치권을 포함한 낡아빠진 기득권층의 일부이자 든든한 후원자로서 자신의 참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치원 문제는 해결의 가닥을 잡지 못한 채 현안으로 남아 있다.

대학 강사법 개정을 둘러싼 갈등은 사립유치원 비리만큼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심각한 문제이다. 이 역시 어떤 쪽으로 흘러갈지 불확실한 진행형의 사안이지만, 수십년간 쌓인 적폐를 걷어내는 과정이 험난할 수밖에 없음은 명백하다. 결국 내년에도 교육개혁을 위해 싸울 일이 넘쳐난다는 뜻이지만, 지난 10년 동안 고등교육 투자가 외면당했다는 치명적인 문제만큼은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짚어야 한다.

김영철 서강대 교수는 최근 이 문제를 다룬 논문에서 한국의 고등교육 지출에서 연구·개발비(R&D) 예산을 제외한 순교육비를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했다. 우리의 학생 1인당 순교육비는 OECD 평균의 약 70%에 불과하지만, 더 우려되는 것은 최근 10년의 정체 양상이다. 학생 1인당 순교육비는 2003년 6000달러대에서 2009년 8000달러대로 상승한 후 제자리를 맴돌고 있으며, 물가상승률까지 고려하면 하락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반값 등록금’ 달성을 위한 대학 등록금 동결 정책도 이 같은 대학 재정 악화에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2000년대 평균 물가 상승률 3.2%의 약 2배였던 평균 등록금 상승률 6.3%은 ‘반값 등록금’이라는 사회적 의제가 등장한 배경이다.

이 대목에서 김 교수는 색다른 주장을 편다. 그는 “고등교육에 대한 적정 재원 투입은 당연히 국가의 경제력에 비례하는 수준에서의 투입”이라는 타당한 원칙을 전제로 6.3%라는 높은 등록금 상승률이 같은 시기 1인당 GDP 평균 증가율 6.9%에 미치지 못했음을 강조한다. 등록금이 치솟던 시기도 실상 적절한 수준의 고등교육 지출 확보에는 미달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대학의 80%가량을 차지하는 사학들이 물가 상승률의 곱절로 등록금을 올리면서 정말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해 애썼는지는 의문이다. 비리 유치원과 다를 바 없는 문제가 곳곳에 숨어 있다. 그러나 등록금은 묶으면서 정부 고등교육 예산은 늘리지 않는 정책이 장기간 계속됨으로써 대학교육의 부실화가 심각한 것 또한 틀림없다. 최근 강사법을 둘러싼 갈등의 근본적 원인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김영철 교수는 인공지능 등으로 쉽게 대체할 수 없는 고급 능력을 키우기 위해 다른 국가들은 고등교육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여 최근 10년 사이에 OECD 국가 고졸 청년들의 고등교육 이수율이 50%까지 상승했다고 말한다. 70%에 달하는 우리의 대학 진학률을 무조건 거품이라고 말하기 조심스러운 이유이다. 문제는 고등교육의 질이다.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은 언론 기고에서 한국과 달리 스위스는 직장을 다니다 뒤늦게 대학에 가는 이들이 많아 2015년 기준으로 25세 이전 대학 진학의 가능성은 47%이지만 결국 대학교육을 받을 가능성은 71%임을 지적한다. 대학에서 익힌 지식과 능력이 금방 낡아버리는 혁신의 시대에 공부와 일 사이를 오가기 쉬운 질 높은 개방적 대학교육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수도권 집중이 과도하고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우리 현실에서 지방대학은 국가발전, 지역 균형발전의 견인차이다. 지방을 살리기 위해 쏟아붓는 막대한 예산의 일부라도 돌려 전국 각지의 대학에 투자, 연구와 교육의 수준을 혁신하여 지역 경제와 문화의 생태계를 살려야 한다. 내년 예산에 간신히 10억원이 반영된 ‘공영형 사학’ 사업이 사학비리 척결을 통한 대학 운영의 공공성 확보를 전제로 고등교육 투자가 본격화되는 길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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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2019학년도 대입 수시전형 최초합격자 발표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12년이나 되는 초·중·고 학창 시절을 마무리하는 대학 합격자 발표 날은 수십만명이나 되는 청소년들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이니 예나 지금이나 그 긴장감과 설렘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렵다.

그런데 요즘 대입 합격자 발표 날의 분위기는 과거 부모들이 경험하던 때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

부모세대 때에는 대학 합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추억의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처럼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황량한 대학교 운동장이나 체육관 벽에 붙은 수천명의 이름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야 했다. 그때의 긴장감은 요즘처럼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확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당시 발표 현장의 모습을 찍은 언론 보도의 사진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만세를 부르거나 축하의 헹가래를 치는 모습들이 흔했다.

그러나 요즘은 모바일로 모든 것을 확인한다. 합격 여부 확인은 물론이고 대학별 응시원서를 작성하는 것도 인터넷으로 학생 본인이 직접 한다. 이렇다보니 학교 선생님과 상담한 후 학교 밖 사교육 업체에서도 상담을 받아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원서를 내는 경우도 많다. 그나마 필수 제출서류에 추천서가 있어야 하는 대학교나 전형들에서는 누가 어떤 대학교에 원서를 제출했는지 학교 선생님들이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추천서를 요구하는 곳은 상위권 몇몇 대학들뿐이고 이조차 점점 축소되는 추세다. 심지어 원서 한두 장을 부모들도 모르게 지원했다가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영원히 비밀로 한 학생도 보았다. 이것은 과거 담임 선생님이 일일이 펜으로 원서를 작성하고, 학교장 직인까지 찍은 것을 학생들이 직접 원서 접수장에 줄서서 제출하던 부모세대의 입시풍경과 정말 많이 다르다.

다른 것은 이런 과정만이 아니다. 요즘 고3들의 교실에서는 합격한 학생들의 환호나 박수가 사라졌고 낙방한 학생들의 탄식과 눈물도 보기 어렵다. 거의 한 달여에 걸쳐서 수시로 발표되는 여러 대학의 합격자 발표 때마다 합격생들은 합격의 환호가 불합격한 친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저 조용히 있게 되고, 불합격한 학생들은 굳이 결과를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어서 일상의 교실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의도했든 아니든 학생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작은 사회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서 기쁨과 아쉬움도 속으로 삼키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게다가 집에서조차 감정표현을 크게 하지 않던 학생들이, 공부하던 학원이나 과외선생님과는 기쁨을 만끽하거나 아쉬움과 불만을 크게 토로하는 경우가 많다. 경쟁에서의 승리가 목적인 곳에서는 경쟁의 결과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을 즐겨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다.

부모세대들에게는 이런 자녀세대의 모습이 낯설어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 20년이 넘는 세대 간의 간격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보기에는 청소년들이 너무 이상하고 위태로운 선택을 하거나 별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인기 있는 여러 전공이나 직업들도 30년 전에는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다시 생각해보면 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왕근 | 교육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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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교육 제도는 매우 치열하다. 초등학교부터 이어지는 시험과 시험 성적에 따른 분반, 초등학교 졸업시험 결과에 따른 중학교 배정. 그때부터 대충 가늠되는 진로와 미래. 중학교 졸업시험, 고등학교 졸업시험…. 싱가포르 학생들은 이런 과정들을 거쳐 대학에 진학하거나 전문학교에서 취업을 위한 전문기술을 배운다.

싱가포르의 치열한 경쟁 교육 제도 때문인지, 최근 싱가포르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결과는 매우 높다. 최근 몇년간 과학, 수학, 수리력 모든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 교육 시스템에 싱가포르 학생들도 한국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나는 싱가포르 교육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지는 않는다. 이상적인 교육 제도라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싱가포르 교육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변화다.

싱가포르는 교육 시스템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논의되거나, 뭔가 변화를 주어야 한다고 판단될 때 과감하게 변화를 이행한다. 그 한 예로, 너무 치열한 경쟁이 학생들에게 심각한 부담감을 준다고 평가위원회가 결론을 내리자 초등학교 1~2학년 시험을 폐지하기로 과감히 결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초등학교 시험을 모두 폐지하고, 좀 더 세부적으로 교육 시스템의 변화를 추진한다는 결정으로 발전했다. 내년부터는 일종의 성적표인 ‘HDP’(The Holistic Development Profile)에 석차, 집단 평균, 개인 평균 점수, 총점, 통과 또는 낙제 여부 등을 표시하는 지표도 삭제하기로 했다. 이러한 과감한 변화는 내가 싱가포르에서 9년 동안 싱가포르 교육 제도를 분석하면서 가장 부러워한 점 가운데 하나다.

또 한 가지 한국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은 실업계 학교의 증가다. 싱가포르에서는 조기에 실업계 학교에 입학하는 게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학생은 초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실업계 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혹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 폴리테크닉(Polytechnic)이라는 실업계 전문학교에 갈 수 있다. 이렇게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의 비율은 매우 높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2년 동안 전공을 선택해 실질적인 기술을 배우게 된다. 이후 심도 있는 학문을 배우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2015년의 경우만 해도 실업계 학교를 거쳐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 3명 중 1명꼴이었다.

또 한 가지 우리와 다른 점은 대학 진학률이다. 싱가포르의 대학 진학률은 2017년 기준 약 30%다. 이는 최근 대학 수가 증가함에 따라 종전 16~20%에서 많이 올라간 것이지만,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70%인 것에 비하면 매우 낮다.

한국의 일반고 진학률과 대학 진학률은 다소 높다. 나는 한국에서 실업계 학교가 더욱 장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술 습득에 대한 강조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중·고등학교 때 실질적인 기술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업계 학교를 적극 지원해야 하고, 실업계 학교에 대한 경시적인 태도가 있다면 이를 없애는 노력을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싱가포르도 실업계 학교에 대한 경시적인 태도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해 실질적인 기술 및 전문성을 습득할 기회를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추후 더 심도 깊은 학문을 배우고 싶다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놓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의견을 사교육 부문에서 거부할 수도 있고, 많은 대학에서 싫어할 수도 있지만 대학 진학이 절대적인 진로인 것처럼 사회가 주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술에 대한 존중이 절실하다. 기술공의 지위가 높은 스웨덴 사회가 한 예이다. 기술을 습득하는 젊은이들이 지속적으로 있고, 농업고를 선택하는 청년들이 있으며, 젊은 청년 수선공이 대접받는, 그러한 다양한 사회가 건강하다. 특히 이러한 부분은 미래에 다가올 수도 있는 북한과의 적극적인 상호 교류가 이루어질 때 더욱더 필요하리라고 본다.

아무리 4차 산업과 미래 기술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모든 기술은 기초 습득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기초과학을 강조했던 일본에서 다수의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꾸준히 들려오는 일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질투어린 눈으로 보기보다는, 근본적인 이유 및 교육 제도를 비교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러 국가의 교육 제도를 분석해 좋은 점을 어떻게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을지 고심하다 보면, 무쇠와 같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한국 교육 제도가 조금씩 변하게 되지 않겠는가.

<김혜진 | 싱가포르 국립대학 교수·정치국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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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간한 OECD 교육통계(Education at a Glance 2018)를 살펴보다 깜짝 놀랄 만한 수치를 접하였다. 우리나라 대학생의 1인당 공교육비가 초등학생 1인당 공교육비에도 크게 뒤처졌기 때문이다. 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학교교육에 투입되는 모든 재원을 재학생의 총수로 나누어 산출한다. 우리의 경우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는 정부 교부금이, 대학교는 학생 등록금이 재원의 주요한 원천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등학생의 1인당 공교육비는 약 1만1000달러인 데 반해 대학생은 단 8000달러(R&D 재원 제외)에 그쳤다. 중·고등학생은 이보다 훨씬 큰 1만2000달러였다. 대학생 1명에게 투입되는 연간 재원이 초등학생에 비해 3000달러(약 330만원), 중·고등학생에 비해 무려 4000달러(약 440만원)나 부족한 것이다.

이에 매우 당혹하여 곧장 OECD 주요국들의 수치를 비교해 보았다. 역시 우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OECD 평균치로는, 초등학생의 1인당 공교육비는 약 9000달러, 중·고등학생은 1만달러, 대학생은 1만1000달러(R&amp;D 재원 제외)로 집계되었다. 교육단계별로 대략 1000달러씩 순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내 상식에도 부합한다.  

대학교육의 1인당 교육투자가 초·중등교육에도 크게 뒤처지는 이런 ‘황당’한 상황을 이해해 보고자 지난 15년간의 통계 추이를 살펴보았다. 2003년을 기준으로 각각 4098달러(초등학교), 6410달러(중·고등학교), 6213달러(대학교, R&D 재원 제외)로 집계되었다. 과거에는 대학생 1인당 공교육비가 분명 초등학생 1인당 공교육비보다 월등히 높았던 것이다. 중·고등학교의 학생 1인당 공교육비에도 크게 뒤지지 않았다. 

이후의 추이를 따라가 보니, 이상한 조짐은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등록금 동결 및 인하 정책이 도입된 때이다. 2003년 약 6200달러부터 2009년 8000달러까지 꾸준히 상승하던 대학생 1인당 교육비는 그 이후 근 10년간 동일한 수준에 멈추어버렸다. 한편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거침없이 상승하여 2013년에 대학생의 교육비를 추월했고, 이후로는 그 격차를 더욱 벌려왔다. 2015년에 이미 초등학생과 대학생 간,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간 각각 1.4배와 1.5배의 공교육비 격차가 형성되었다.

우리나라의 대학생 1인당 교육비는 여타 OECD 국가들과도 그 격차를 벌려왔다. 2009년을 전후로 1000달러가량 뒤지던 것이 이제는 무려 3000달러나 뒤처지고 있다. 경제성장 및 물가상승에 따라 여타 국가들의 1인당 교육비 투자가 꾸준히 증가한 데 반해 우리의 대학생 교육비 투자는 10년째 동결상태이기 때문이다.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요즘 대학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졸업학점의 축소부터 개설강의 일부 폐지, 동일과목 분반 통합 등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일각에서는 교육의 본질을 등한시하는 대학본부들의 부도덕함을 지적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형태의 재정부담 경감 대책은 이미 수년째 대학가에서는 일상화된 풍경이었다. 연봉 3000만~4000만원에 그치는 비정년트랙 교원이 박사급 신규임용의 과반을 차지한 지 오래다. 무분별한 외국인 유학생 유치로 6만~7만명에 불과하던 유학생 규모는 10년 새 약 2배로 늘어났다. 행정 직원들은 대개 단기 계약직들로 채워지고 있으며, 수업용 기자재나 도서관 장서 등의 구매도 눈에 띄게 줄었다. 현대적 교육공간의 확충은 고사하고 시설 개·보수조차 어려운 대학이 수두룩하다. 가히 초등학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태로 대학교육을 ‘방치’하는 게 옳으냐는 것이다. 대학교육의 학생 1인당 교육비가 OECD 평균의 단 73%에 그치는 것과 달리 초·중등교육의 1인당 교육비는 OECD 평균의 무려 1.25배에 달한다. 국가적 교육재원의 배분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인적자본 전략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을까? 대학교육은 창의적, 창조적, 전문적 인재를 배출하는 종말 단계의 교육이다. 아무리 혁신적인 교육과정을 초·중등교육에서 구현하더라도 대학교육이 정체되거나 후퇴한다면, 사회에 배출될 인재들의 우수성은 결코 담보되지 못한다. 국가가 4차 산업혁명의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그 방향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2009년 (사립대 평균) 741만원이던 등록금은 올해 약 742만원으로 집계된다. 이러한 동결은 사실 정치권의 ‘반값 등록금’ 공약과 맞닿아 있다. ‘반값 등록금’을 빠르게 성취하자면 우선 등록금부터 묶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정치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국가장학금은 무려 4조원대로 불어났다. 기타장학금을 합하여 대학생 1인당 장학금도 약 360만원에 달한다. ‘사실상’의 반값이 실현된 것이다. 결국 대학재정을 희생양 삼아 국민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대학교육의 재정적 위기는 현실이다. 우리의 초·중등교육처럼 OECD 수준의 교육비 투자(1인당 1만1000달러)를 회복해야 치열한 국제경쟁의 각축장에서 경쟁력 있는 인재들을 배출할 수 있다. 그러자면 1인당 약 3000달러의 교육비 재원이 추가로 확보되어야 한다. 원화로는 약 330만원에 달하는 큰 액수이다. 여기에 연간 대학생 수 약 280만명을 곱하면, 대략 9조2000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재정확보가 요청된다. 10년째 묶인 대학 등록금의 대가라 하겠다.

문제는 이러한 재정적 요구에 어떻게 답하냐는 것이다.

혹자는 등록금을 묶었으니 당장 330만원 인상하면 된다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 대안이 못된다. 대학교육의 보편화로 대학등록금이 어느새 준조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등록금 330만원 인상에 따른 ‘조세저항’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다음으로 2010년 법제화된 ‘등록금 인상 상한제’로 인해 물가상승률의 1.5배 이상의 상승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지난 3년간의 연평균 물가상승률 1.2%를 감안하면, 연간 20만원 이상의 등록금 인상은 금지된 것이다. 결국 국가의 적극적 재정투자 외에는 뚜렷한 대안이 없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진정 초등학교보다 못한 대학교육으로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

<김영철 서강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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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유·초·중등교육 부문은 늘 시끄럽다. 지난해부터 올해 중반까지는 대입제도 개편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더니 요즈음은 사립유치원 문제로 분주하다. 그 외에도 늘 자잘한 문제들이 벌어져서 교육현실이 참 절망스럽다는 비판의 말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유·초·중등교육 부문은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으니 회복 가능성이 큰 환자라고 할 수도 있다. 울퉁불퉁 불만을 제기하는 주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치유력이 있는 거라고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환자이다. 내가 보기엔 고등교육이야말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환자이다.

얼마 전 한편으론 흥미롭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끔찍하기도 한 통계를 보았다. 교육개발원에서 2016년 기준으로 대학원, 전문대, 4년제 대학의 학과명이 몇 개나 되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는 대학원 9664개, 전문대학 6884개, 4년제 대학 1만2359개였다.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은 200개 정도 된다. 4년제 대학 200개 중 서로 이름이 다른 학과가 1만2359개나 된다니 참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이 과연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학과를 개설할 만큼 발전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교육개발원 조사에 의하면 1만2359개 학과를 가르치는 내용으로 분류해보면 약 121개로 압축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한 학과에 100개 이상의 다른 이름을 붙여놓은 셈이다. 예컨대 어느 대학에선 국문과가 다른 대학들에선 문화콘텐츠학과, 디지털콘텐츠학과, 스토리텔링학과 등으로 불리는 식이다. 대학들은 왜 똑같은 내용의 학과에 이렇게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는 고등교육 문제의 아픔과 비밀이 숨어 있다.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학령인구의 감소로 학생 모집이 어려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상위권 대학이야 학과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학생들이 오니까 국문과라고 붙여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학생 모집에 곤란을 겪는 대학은 국문과보다는 문화콘텐츠학과, 스토리텔링학과 같은 이름이 트렌드에도 맞고, 뭔가 새로운 것이 있는 것도 같아 학생을 끌어들이기가 쉽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작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는 1만2359개의 학과명은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다른 중요한 이유는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서다. 예컨대 문화콘텐츠를 강조하는 예산지원이 있으면 그 평가기준에 맞추기 위해 국문과의 이름을 곧장 문화콘텐츠학과로 바꾸고 학과의 목적을 프로젝트에 맞게 만들어 서류를 낸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단기적이다. 예산 지원 담당자가 바뀌어 이번엔 디지털 시대를 강조하는 프로젝트 예산지원을 내면 또 문화콘텐츠학과를 디지털콘텐츠학과로 바꾸어 서류를 낸다. 이러한 대학의 모습은 상아탑, 학문의 전당, 자율과 자치의 원리 등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참으로 비참해 보인다. 도대체 왜 대학은 이런 수모를 감수하면서 예산지원에 목을 매는 것일까?

반값 등록금 정책은 교육 불평등을 완화하고 대학교육의 공공적 성격을 높이려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반값 등록금으로 발생한 재정결손을 메워주는 지난 정부의 예산지원 방식에 있었다.  이 방식은 대학이 종합적인 자기계획을 수립하여 통으로 심사를 받고 적절한 수준에서 통으로 지원하는 방식이 합당할 것이다. 그래야만 대학의 자율과 자치가 산다. 그런데 지난 정부는 그러지 않고 수많은 목적사업으로 잘게 쪼개어 예산지원을 하고 사업 하나하나마다 심사기준을 엄격하게 제시해 대학을 평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대학은 이 예산지원을 받지 않으면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그 평가기준에 맞추기 위해 학과 명칭을 바꾸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예산지원을 위한 평가기준의 기본적 원칙은 아마도 기획재정부가 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평가기준을 구체화하는 건 교육부에서 했을 것이다. 기재부가 세우는 기본 원칙은 아무래도 경제적 효율성에 치우칠 수밖에 없고 대학사회의 특성에 잘 안 맞을 가능성이 크다. 대학사회의 특성을 충분히 변론·옹호하지 못한 교육 관료의 책임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취업률을 기본원칙으로 강조하면 예체능계나 인문사회계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고, 그런 식으로 대학사회는 조금씩 무너져 왔다. 이제는 전 정부의 예산지원 방식, 그와 연동된 대학평가 관행이 새 정부에서도 지속되고 있는데 그런 관행에 너무 익숙해져 이제는 비명을 지를 줄도 모른다.           

앞에서 나는 유·초·중등교육이 늘 시끄럽지만 그래도 내부 동력이 살아있어 회복 가능성이 높은 환자와도 같다고 했다. 아마도 유·초·중등교육이 갖는 이러한 힘은 부족하나마 그간에 진전된 교육자치 분권에 힘입은 것이다. 진정 창조적인 동력은 자율과 자치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열어갈 창조적 동력을 얻고 싶다면 반값 등록금으로 인한 재정결손을 보전하기 위한 정부 예산지원과 평가 방식을 대학의 자율과 자치가 가능한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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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앞두고, 학생들에게 “국어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어려웠다. 수능이 끝난 후 학생 하나가 물었다. “선생님, 왜 그런 문제를 낸 겁니까?” 내 답은 무거웠다. “솔직히 문과 학생들을 위한 문제는 아니야. 의대 정시를 위한 거지.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등 의대 사이에 줄 세우기를 위한 문제가 필요했던 거야. 문과에서도 서울대 선발에 필요한 문제는 있어야 했을 테고.”

영어가 절대평가로 전환된 후 국어는 풍선효과를 맞았다. 우리말을 잘 이해하는 능력이 존중받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이슈가 된 ‘31’번 문제는 국어교육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다. 독해와 화법 등 언어 능력과 한국어 문법의 이해, 문학 작품 감상 능력 등이 국어과에서 기대하는 영역이다. 이번 수능에서 다른 문제들은 쉽게 출제되었다. 40대 이상 기성세대들이 접했던 문제들과 비교하면 지금 국어문제는 여러 면에서 실용적이고 과학적이다. 우선 읽기·말하기·듣기·쓰기 전 영역을 고르게 평가하고 드라마 등 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제시문들의 비중도 높고, 작문 역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16페이지나 되긴 하지만 주어진 시간 내 읽으며 풀어나가는 데 큰 부담은 없다. 채무 이행에 관한 문제가 나온 16번에서 20번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상대평가에서 필수적인 문제였다. 다만 수능 전체 변별력, 특히 정시 지원에서 표준점수 차이를 내야 하는 의무를 껴안은 국어에는 난도 최상의 문제가 있어야 했다. 난이도 부담이 덜했다면 ‘31’번 문제는 출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15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에서 성기선 교육과정평가원장(왼쪽)과 이강래 출제위원장이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경향을 발표하는 도중 기자들의 국어영역 오기 질문이 이어지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영어만 절대평가가 되고 수학이 사교육비 부담 우려로 난도를 높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변별력 부담은 국어에 쏠리고, 그 부작용은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교육부가 요구한 정시 확대는 직접적으로 난도를 높이는 외압으로 작용해 국어 재앙은 당분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로 인해 최근 대치동 학원가에서 제일 두드러진 현상이 ‘국어 일타 쏠림’이었다. 절대평가 실시로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은 거의 없고, 부작용만 다른 과목으로 옮겨간 셈이다. 만약 정시 확대가 현실화된다면 국어로 인한 난이도 차별 압박은 심화되어 ‘31’번 같은 문제가 2~3개 추가될 가능성도 우려된다.

이런 점에서 현 수능에서 시급히 논의할 문제가 영어 절대평가이다. 정시가 확대되면 국어의 표준점수는 더욱 세분화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국어의 난도 상승으로 이어진다. 국어 난이도 딜레마는 현행 수능 제도의 모순을 그대로 안고 있다. 영어 절대평가나 난도 낮은 수능 출제라는 상위 원칙은 수시 확대, 교과 중심 선발 확대라는 학생 선발 제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정시 확대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수능 구조 역시 위기를 맞은 것이다. 지난 상반기 교육부는 나름 진통 끝에 대입 제도에 관한 결론을 냈다. 그런데 그 결론이란 게 불분명한 데다, 추론의 책임자마저 바뀐 상태에서 대입 제도의 방향은 혼란스럽고, 출제진 역시 당장 올해 정시 지원에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는 미봉적인 압력에 이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만큼 지난 수능 국어 ‘31’번은 혼란스러운 대입 제도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문제는 학생들의 정신적 피해다. 수능 당일 국어 ‘31’번으로 인해 받은 쇼크를 악착같이 견딘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국어로 인해 ‘멘붕’이 와 다른 과목까지 지장을 받은 학생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년에는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정주현 |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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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종’이라고 불리는 학생부종합전형을 폐지하라는 목소리가 크다. 내신 조작, 시험문제지 유출 등 부정행위가 연이어 벌어지는 상황인지라 당연히 나올 법한 주장이다.

학종을 비판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부자 부모를 둔 아이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에게 불리하다는 점이다.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하는 입시제도가 바로 학종이라는 것이다. 학종을 ‘사교육종합전형’이라고 규정한 칼럼도 보인다. 그러니 수능 중심으로 대학에 가는 정시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지나치게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판단의 기준이 이른바 SKY 대학으로 한정된 느낌도 없지 않다. SKY 대학 몇 명 보냈는가를 가지고 명문고 운운하는 것은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이라고 생각한다.

지방 학생들, 특히 농어촌 지역에 사는 학생들 처지에서는 학종의 긍정적인 측면을 더 보게 된다. 시골 학생들은 사교육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다. 대개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지만, 학교 주변에 변변한 학원도 없다. 그러다 보니 학교와 교사를 믿고 의지하게 된다. 교사들은 ‘어쩔 수 없이’ 책임감이 더 강해진다. 그래서 교사이자 학원 선생님이자 입시컨설턴트의 역할을 모두 수행한다. 밤낮이 없다.

시골 고등학교 교사들은 영양가 있는 생활기록부를 고민하며, 지역 실정에 맞는 다양한 교육 체험의 기회를 마련하고, 응시 대학 선정을 위해 아이와 머리를 맞대고 씨름한다. 성적 좋은 아이하고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밤을 새워가며 아이들의 자기소개서를 검토하고 또 추천서를 쓴다. 사실, 교사가 편하고자 하면 수능만으로 뽑는 정시가 제일이다. 학종이 가장 힘들다. 그런데도 여기에 매달리는 것은 내 아이들이 정시보다 좋은 결과를 얻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시골 아이들은 대개 늦공부다. 도시 아이들처럼 어릴 때부터 사교육을 받지 않는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영어나 수학 등에서 다소 부족한 편이다. 대신, 학교생활을 알차게 한다. 공부밖에 모르는 아이들이 아니다. 이 아이들의 진솔한 열정이 학종을 통해 대학의 문을 열어젖힌다. 영어, 수학이 다가 아니다.

성적만으로는 하위권 대학에 갈 학생이 학종으로 중위권 대학에 가고, 중위권 대학에 갈 학생이 상위권 대학에 갈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이 바로 학종이다. 사교육 없이 그게 가능하다. 가난한 집 아이들도 이렇게 원하는 대학에 간다.

소위 고교등급제를 따르는 대학 입학사정관도 있겠지만, 대개의 사정관은 그렇지 않으리라 여긴다. 맑고 밝은 눈으로 아이들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제대로 된 인재를 뽑으려 애쓰고 있으리라 믿는다.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학종이 공교육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순기능도 갖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사교육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입시 제도가 어떻게 바뀐들 사교육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교육을 절대악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공교육은 사교육에 모든 걸 떠맡기지 말고 사교육과 경쟁한다는 의지를 다져야 한다. 교육을 먹는 것에 비유한다면, 학교 교육은 밥과 김치이고 학원 교육은 비타민이다. 밥 먹는 게 부실한 것 같아 비타민으로 몸을 보강할 수 있지만, 밥과 김치를 무시하고 비타민만 먹어대면 몸이 망가진다.

<이경수 | ‘나는 오늘도 선생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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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잡지 ‘에피’ 겨울호의 한 부분을 수능 수학과 수능 과학의 리뷰를 싣기로 정한 것은 여러 달 전이었다. 벡터와 기하를 수능 범위에서 제외하는 문제를 두고 수학과 과학계가 반발하면서 수능에서 어떤 범위를 다루는 것이 좋은지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설전을 정리하고 싶었다. 당시에 수능 수학의 범위를 축소하는 것과 관련해서 인공지능이 수학의 어떤 범위를 대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전공자도 아닌데, 어려운 문제를 두고 씨름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셈을 할 줄 알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과 셈을 못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 사이에는 깨닫고 얻을 수 있는 것의 차이가 확연하다. 셈을 모르면 응용은 꿈도 꿀 수 없다. 계산기, 혹은 인공지능의 아바타로 살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다가올 미래에 수학이나 과학에 인간이 시간을 덜 쏟아도 된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수능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통해서 이런 논란을 돌아보고 싶었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수능 문제에 대한 리뷰를 청탁하는 것은 순조로웠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중한 과학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물리학자부터 해외 대학에서 오래도록 연구와 교육을 하고 있는 생물학자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전공자들에게 부탁을 했다. 언어영역에 나온 과학 지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급하게 이것에 대한 리뷰도 싣기로 했다. 모두 바쁜 와중에 재미있는 기획이라며 기꺼이 청탁에 응해 주었다. 직접 수능 문제를 풀어보고 그 문제들을 전공자의 입장에서 수준을 가늠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앞으로 전공할 학생들, 혹은 앞으로 전공하지 않을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평가를 해 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정작 이 기획을 시작하게 만들었던 수학 분야에서는 아무도 청탁을 받아주지 않았다. 20여 분의 수학 전공자들에게 퇴짜를 맞았다. 서울, 대전, 광주, 부산, 창원, 포항 등 전국 각지에 수소문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낭패였다. 수능 수학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시작했지만 주변의 몇몇 에피소드 덕분에 호기심은 더 커진 터였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저명한 물리학자가 수능 수학문제를 다 풀지 못하고 100점 만점으로 치면 75점쯤을 받았다고 했다. 그분의 실력을 익히 알기에 깜짝 놀랐다. 또 다른 자리에서 내 또래의 유명한 물리학자가 수능 수학의 마지막 문제를 몇 시간 동안 끙끙대다 결국 풀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분들은 고등학교에서 모두 수학 영재, 혹은 천재 소리를 들었던 분들일 것이고 아직도 수학을 많이 사용하는 물리학을 밥벌이로 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문제들이 이분들을 좌절하게 만들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수학 전공자의 육성으로 수능 수학문제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었다. 헉생들이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하는 이유는? 교육적 효과는? 사회적인 의미는?

그런데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물론, 고작 20명에게 부탁을 해 본 것이니 단지 운이 나빴던 것일 수도 있다. 수학도 분야가 넓고 전공은 세분화되어 있어서, 전공자들이라도 수능 문제를 풀어보는 것이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다. 전공자들조차 푸는 것에 거북함을 느끼는 문제들을 학생들은 왜 풀어야 할까? 또 다른 가능성은 정치적인 공방에 휩쓸리기 싫어하는 수학자들의 생리가 작동했을 수도 있다. 올해처럼 불 수능, 마그마 수능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기대와 다른 점수를 맞은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재수생을 양산할 가능성이 높으면 수능 문제를 두고 구설이 심할 터이니 거기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으리라. 상황이 이러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커진다. 그래도 이런 문제가 수학 분야만의 문제가 아닐 텐데 용기 있는 필자를 만나지 못해서 아쉽다. 개별적인 사정들이 없지 않았겠으나 모두가 입을 다문 상황은 수능 수학문제를 둘러싸고 해야 할 말이 많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수능 수학이 아이들을 점수로 줄세우는 것이 목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교육을 방지하겠다고 학교 범위 안에서 어렵게 내는 모양인데 수학적 직관이나 자질보다는 반복훈련으로 비비 꼰 함정을 피하는 것만 연습하는 데 학원만 한 곳이 없다. 청탁에 실패해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우나 수능 문제가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거나 수학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고등학교 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것만으로는 풀기 어렵고 사교육의 단련을 열심히 받아야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수능 수학문제의 정체를 누군가 나서 속시원히 밝혀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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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로 이민을 와서 큰아이는 한국에서와 같은 4학년으로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청각장애아 특수반이 있는 학교였다. 그 반에는 토론토 여러 지역에서 모인 아이들이 6~7명 있었고, 교사로는 담임과 부담임 두 분이 계셨다. 선생님들은 청각장애 아이들의 특성에 맞춰 수업을 진행했다. 특정 과목에서 학습 능력이 향상되었다 싶으면 아이들을 비장애아 교실로 보냈다. 우리 아이는 수학을 시작으로 메인 스트림에서 공부하는 과목을 차츰 늘려나갔다. 고교에 가서는 모든 과목을 비장애인 아이들과 함께 공부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공부도 공부지만, 이 시스템은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장애아와 비장애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함께 생활하고 또 서로에게 익숙해지도록 하는 데 더없이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특수학교를 따로 만들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학생 사이에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다름’을 있는 그대로 접하게 하다 보니 비장애인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장애와 같은 ‘다름’을 유별나게 여기지 않는다. 새로 이민을 온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인과 이민자는 때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몸이나 언어가 불편한 사람일 따름이다.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런 교육을 줄기차게 받다 보니, 장애인이나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 따위의 감정이 스며들 여지가 거의 없다.

인천 한 아파트 옥상에서 추락해 숨진 10대 중학생을 추락 직전 집단으로 폭행한 혐의를 받는 중학생 A군 등 4명이 16일 오후 인천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고자 인천시 남동구 남동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아이가 학교에 간 지 3개월쯤 지났을 무렵 담임 선생님이 아이 편에 편지를 보내왔다. 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우리더러 학교에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다음날 바로 학교에 갔다. 선생님은 아이의 나쁜 버릇에 대해 이야기했다. 귓속말하기와 소리 지르기.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옆사람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며,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버릇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이에게 여러 번 주의를 주어도 고쳐지지 않으니 급기야 부모를 부른 것 같았다.

선생님이 그 이야기를 얼마나 엄하게 하는지, 우리는 크게 야단을 맞는 학생처럼 눈물이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우리는 아이에게 입이 닳도록 이야기를 했다. 아이는 “알았어요, 알았어요. 이제는 안 그래요”를 되뇌었다. 그런 ‘가정교육’을 1년쯤 지속했을 것이다. 아이는 버릇을 고쳤다.

두 아이를 토론토의 학교에 보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학교는 공동체(사회) 생활이 요구하는 매너와 예의 교육을 어릴 적부터 정교하고 철저하게 시킨다. 마치 ‘서방예의지국’을 만들기라도 하려는 듯,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데 필요한 예의 교육을 공부보다 더 중요시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해마다 이방인 20만~30만명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의 나라이다 보니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매너는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필수 요소이다. 귓속말하기 같은 작은 버릇 하나를 두고도 부모를 호출할 정도이니,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 같은 것은 당연히 범죄 수준으로 다스린다.

얼마 전 한국에서 이른바 ‘다문화 가정’의 중학생 아이가 집단 괴롭힘과 폭행을 당한 끝에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참담한 뉴스를 보았다. 인구절벽에 맞닥뜨린 한국은 싫든 좋든 이민자의 나라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이 올해로 200만명을 넘어섰다니 하는 말이다. 중학생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어린 당사자들만 탓할 문제가 아니다. 학교고 언론이고 부모고 어른들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해서 벌어진 일이다. 생김새가 다른 사람도 ‘우리’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민한 바 없으니, 이런 문제는 필연적으로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 사회는 ‘다름’을 존중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해야 한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생각만 조금 바꾸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야 사람 사는 세상이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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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의 대학입학시험은 학력고사였다. 선 지원이었고, 전기, 후기, 전문대 각각 따로 원서를 쓰고, 따로 시험을 봐야 했다. 전기대 입시는 지원한 대학교에서 있었다. 택시 운전을 하는 아버지가 택시로 교문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긴장을 하면 소화가 안되니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점심시간에 나를 받아줄지 거절할지 알 수 없는 교정에 앉아 같이 시험을 보는 친구가 나눠주는 초콜릿 한 조각을 점심 대신 먹었다. 예외 없이 입시한파가 몰아친 날이었을 텐데, 거짓말처럼 환하던 햇빛만 기억난다. 시험이 끝나고 터벅터벅 교문을 걸어 나가는데, 익숙한 얼굴이 웃으면서 나를 불렀다. 아버지였다. 만나자는 약속도, 기다리겠다는 약속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곳에서 우연처럼 만났다. 그 많은 수험생과 그 많은 학부모들과 그 넓은 대학 캠퍼스의 교문 앞에서 어긋나지도 않고 엇갈리지도 않고 나중에 생각하니 신기했다. 휴대폰은커녕 호출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그 앞에 언제부터 서 있던 것일까. 시험은 어려웠고, 고사장을 빠져나오는 내 미래는 비관으로 가득했지만 교문 앞에 서 있던 아버지를 보는 순간 그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날마다 보는 아버지가 그때보다 더 반가웠던 적이 있을까.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고등학교 앞에서 15일 오전 한 어머니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아들을 시험장에 들여보낸 뒤 기도를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지난주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다. 올해도 변함없이 적잖은 학부모들이 교문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기도도 하고, 응원도 보냈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예외 없이 비판을 받았다. 소위 극성 맘들이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로 보이는 과잉 사랑이라는 것.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교문에 서서 기도하면 애들이 시험을 잘 볼 거라고 믿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전쟁, 이라고 누구나 공감하는 입시현장에 아이 혼자 들여보내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다 보니 시험이 끝날 때까지 서성이게 된 마음 약한 부모도 있을 것이고. 신기한 건 그 하루 교문을 떠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른 부모는 극성으로 비판받았는데, 수능 100일 전부터 보낸 응원의 편지가 담긴 한 수험생의 통장은 감동적인 부모의 사랑으로 내내 회자되었다. 그 두 종류의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시간의 차이일까, 방법의 차이일까.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고 바람직할까. 아이를 기르면서 나는 그 균형점이 늘 헷갈린다. 품에 안으면 과잉이라 비판받고, 내버려두면 방치 혹은 학대로 비난받는다. 제일 어려운 건 아이가 실패했을 때, 그 실패를 껴안아주는 방법인 것 같다.

시험이 끝나고 나를 마중 나온 아버지에게 매운 냉면을 사달라고 했는데, 냉면을 파는 집은 족발집뿐이었다. 그마저도 차가운 물냉면만 팔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집에서 족발도 먹고, 차가운 물냉면도 먹었다. TV에서는 그날 치른 시험 정답이 발표되는 중이었는데, 우리는 그 내용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기억나지 않는 다른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나는 그 시험에서 실패했다. 후기대 입시는 혼자서 갔다. 내가 그러겠다고 했다. 실기시험을 보는 날은 폭설까지 내려서 찾아가는 일이 곤혹스러웠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타야 했는데,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겨우 잡은 택시는 언덕을 넘지 못해서 나는 중간에서 내려 30분을 넘게 걸어 종이 울리기 직전에야 겨우 입실할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거기서부터는 내 몫이고 내가 혼자 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눈길을 걱정했지만 아버지도 내 결정을 말리지 않았다.

부모가 되고 보니 모든 부모의 사랑을 굳이 재단해서 구분하고 싶지 않다. 어떤 사랑이 옳고 어떤 사랑이 그르든, 어떤 사랑 아래 있든, 결국은 저 홀로 살아간다. 혼자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둔다고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다 챙겨준다고 응석받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랑이든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은 홀로 나선 길을 바라보는 용기가 아닐까 싶다. 지금 그 길 앞에 서 있는 아이들과 부모 모두에게 그 용기가 함께했으면 좋겠다.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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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입시가 가장 많은 종류의 사교육을 유발할까? 학종이다. 어떤 입시에 가장 많은 사교육비가 들어갈까? 특기자전형 등을 예외로 한다면 역시 학종이다. 그것은 현존하는 입시전형의 구성요소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학생부교과전형, 학생부종합전형, 수능전형, 논술전형을 위주로 살펴보자. 이들 전형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다.

ⓛ내신 ②수능 ③경시대회시험 ④구술고사 ⑤논술고사 ⑥학생부비교과 ⑦자기소개서 ⑧면접 ⑨추천서 ⑩고교등급제

③은 일반적으로 학생부비교과로 분류된다. 하지만 과목별로 존재하는 경시대회시험은 명백히 또 하나의 학교시험이다. 따로 떼어내야 이해가 쉽다. ④또한 시험이다. 면접형식으로 진행되어 면접과 혼동하기 쉽지만 보통의 면접과는 다르다. 그것은 일종의 대학별 고사다. ⑩은 정부가 금지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은밀히 존재하고 있다. 만약 고교등급제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고 학종 입시지도를 하는 교사나 입시전문가가 있다면 그는 철저히 무능한 자다.

각각의 입시전형은 위의 요소 중 한 개 또는 몇 개를 활용한다. 가장 많은 요소를 활용하는 입시는 학종이다. 최상위권 대학일수록 대체로 반영하는 요소가 많다. 연·고대 학종은 ⓛ+②+③+④+⑥+⑦+⑧+⑨+⑩으로 구성된다. ②수능은 최저학력(등급)을 적용한다. ⑩고교등급제는 대학이 강하게 부인하겠지만 입시의 현실에서 교사와 학부모가 피부로 느끼는 존재다.

이렇게 많은 요소로 구성된 학종이 사교육을 적게 유발한다면 이상한 일이다. 학종 구성요소 중 사교육을 직접 유발하는 건 ⓛ ② ③ ④ ⑥ ⑦ ⑧이다. 물론 구성요소가 많다고 해서 그에 비례해 사교육이 증가하는 건 아니다. 각각의 사교육 간에는 공통부분이 존재한다. 예컨대 내신 사교육과 수능 사교육은 일정부분 중첩된다. 하지만 각각의 사교육에는 독자적인 영역도 상당히 많다. 따라서 구성요소가 많은 입시가 더 많은 사교육을 유발한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부 학종 주창자들이 학종이 수능전형 등에 비해 사교육을 적게 유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한 억지다. 논거 자체가 말이 안 될 때가 많다. 예컨대 그들은 상위권 대학일수록 학종 안에 수능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그러고는 수능 사교육을 오로지 수능전형의 책임으로 돌려버린다. 내신 사교육조차 학종이 아닌 다른 전형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시험 대비 사교육이 학종과 아예 무관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학종 사교육 안에는 수능 사교육, 내신 사교육, 경시대회시험 사교육, 구술고사 사교육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학종 구성요소 중 시험요소가 유발하는 사교육만 해도 다른 입시 대비 사교육을 훌쩍 넘어서지만 학종 사교육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학생부비교과 사교육(학생부 컨설팅 사교육)과 자기소개서 사교육은 사실상 학종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학종이 만들어낸 신종 사교육이다. 이들 사교육은 값이 비쌀 뿐만 아니라 다른 사교육에 비해 매우 비교육적이다. 나는 사교육을 가치중립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학생부 컨설팅 사교육만은 예외다. 그중 상당수는 사교육이라 하기보다는 사기(詐欺) 교육이라 해야 마땅하다.

학종은 사교육 조장에 그치지 않고 그 영역을 사기 행위로까지 넓혔다. 학생부종합전형은 사교육종합전형이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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