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맞는 거 같은데…?”

진만은 손에 든 메모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광역시 외곽에 있는 아파트 단지 정문 앞이었다. 정문 바로 옆에는 ‘하나로 마트’가 있고, ‘LH세탁소’가 있었다. 그 외 다른 상가는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512동이라며? 바로 저기 있네, 뭐.”

정용이 턱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정문 경비실 뒤편, 아직 잎이 돋아나지 않은 플라타너스 가지 사이로 마치 오래된 교과서의 겉표지에 적혀 있는 듯한 숫자 ‘5’와 ‘1’과 ‘2’가 보였다. 가로등이 깜빡깜빡 수선을 피우며 들어오고 있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진만과 정용은 512동 3, 4라인 입구 계단에 앉았다.

“얼굴도 모르고 핸폰 번호도 모른다는 거지?”

정용이 묻자, 진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구 계단 옆 화단에는 개나리꽃이 한창이었다. 개나리꽃 때문인지 남루하고 조용한 아파트 단지는 어쩐지 더 쓸쓸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럼 누군지 어떻게 알아보려고?”

“그냥 느낌이지 뭐. 난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진만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김 사장한테 꼬박꼬박 형님이라고 불렀고, 어쨌든 자기 사업을 했던 사람이니까 서른 살은 넘었을 터. 30대 중반의 남자. 전직 돈가스 전문집 사장 최현수씨.

진만은 1년 전 출장 뷔페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미처 받지 못한 임금이 있었다. 열하루 치 일당에 추가 근무수당까지 총 76만8000원. 그를 고용했던 김 사장은 매일 일이 끝나면 남은 음식을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알바생 한 명 한 명의 손에 쥐여줬던 사람이었다. 진만은 그곳에서 6개월가량 일했는데, 일당도 밀리는 법이 없었고, 추가 근무에 대한 수당도 정확했다. 어느 고등학교 동문회 모임에서 만난 진상 고객(술에 취한 채 알바생에게 계속 자기네 교가를 부르라고 했다)도 김 사장이 나서서 말려주었다.

문제는 마지막 한 달이었다. 김 사장이 아닌 방 실장이라는 사람이 대신 전화를 걸어와 알바 스케줄을 잡더니, 어느 날 그마저도 끊기고 말았다. 김 사장의 전화는 계속 꺼져 있는 상태였고, 찾아가본 사무실도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에이 씨,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진만은 지방고용노동청에 신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주저하지 않았을 텐데, 김 사장은 좀 아니었다. 어쨌든 6개월 동안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진만의 마음처럼 한 달 정도 지난 뒤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 진만아, 내가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말없이 떠나왔거든. 내가 너 밀린 임금하고 계좌번호 알고 있으니까, 빠른 시간 안에 해결해줄게. 정말 미안해.

진만은 김 사장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6개월, 8개월이 넘도록 진만의 계좌에는 아무런 돈도 입금되지 않았다. 이건 그냥 내가 고소할까 봐 시간을 끄는 것은 아닐까? 진만에게 76만8000원은 큰돈이었다. 원룸 월세 두 달 치가 넘는 돈이었다. 월말이 되면 진만은 늘 그 돈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 김 사장에게서 다시 메일이 도착했다.

- 여기 이 주소로 가면 최현수라고, 돈가스 전문집 하던 친구가 살고 있을 거야. 나한테 300만 원 정도 줄 돈이 있는데, 거기에서 85만 원을 너한테 먼저 주라고 그랬어. 그 친구도 갑자기 가게를 접는 바람에 연락이 계속 안 닿았거든. 엊그제 연락이 닿아서 너 얘기해 놨으니까 가면 돈을 줄 거야. 늦어서 미안하다, 진만아.

“근데 왜 나까지 데리고 온 거야. 너 혼자 받으면 되지?”

정용이 조금 짜증 난 목소리로 물었다.

“지난달에 네가 방값 10만 원 더 냈잖아. 그거 그냥 바로 주려고.”

“이건 뭐… 다 물고 물려 있구나.”

최현수씨는 밤 8시가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동안 3, 4라인으로 들어간 사람은 초등학교 아이 두 명이 전부였다. 진만과 정용은 스마트폰으로 프로야구 경기를 보면서 최현수씨를 기다렸다. 봄밤이었지만, 허벅지 아래로 계속 한기가 느껴졌다.

밤 9시쯤, 택배 트럭 한 대가 주차장에 섰다. H택배 유니폼 조끼를 입은 남자가 조수석에 잠들어 있던 남자아이를 업고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남자아이는 유치원 가방을 메고 있었다. 진만은 그가 최현수씨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봤다.

“저기, 김성오 사장님이 찾아가보라고 해서 왔는데….”

최현수씨는 잠깐 진만과 정용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선 짙은 땀 냄새가 났다. 그의 등 뒤에 업혀 있던 아이가 눈을 떴다.

“주말쯤 오실 줄 알았는데…. 일단 저쪽으로 가시죠.”

최현수씨는 아파트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가 “아빠, 누구야?”라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만과 정용은 느릿느릿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이 때문에…. 진만은 어쩐지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하나로 마트 옆 ATM기에 들어갔다 나온 최현수씨는 진만에게 은행봉투를 내밀었다.

“그게 80만 원이거든요. 5만 원은 계좌번호를 적어주시면 다음 주에 바로 보내드릴게요.”

최현수씨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계속 진만을 쳐다보았다. 정용이 툭, 진만의 옆구리를 쳤다.

“아, 아닌데…. 뭔가 착오가 있나 봐요. 제가 받을 돈은 정확히 76만8000원이거든요.”

진만은 봉투에서 1만 원짜리 세 장을 꺼내 최현수씨에게 내밀었다. 2000원은 따로 자신의 지갑에서 꺼내 맞췄다. 그러곤 정용과 함께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뒤돌아섰다.

진만은 생각했다. 왜 받아낼 것이 없는 사람끼리 서로 받아내려고 애쓰는가? 왜 없는 사람끼리만 서로 물고 물려 있는가? 우리가 뭐 뱀인가? 개나리꽃만 지천인 밤이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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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째 날 - 카톡

진만: 성희씨, 잘 들어가셨나요? 전 지금 들어왔어요. 오후 8:42

성희: 어머, 제가 너무 늦게 봤네요. 네, 저도 잘 들어왔어요. 고마워요. 전 빈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이렇게 다시 연락을 주셨네요. 오후 10:12

진만: 아니에요! 늦긴요!! 전 또 무슨 일 있으신 줄 알고... 제가 더 고맙죠. 이렇게 답신도 해주시고... 전 정말 오늘 성희씨 만나고 와서 너무 좋았거든요. 진짜 무슨 인연을 만난 거 같고... 오후 10:13

성희: 저도요. 저도 아까 거리에서 처음 진만씨 봤을 때... 그때 퇴근하던 길이었죠? 오후 10:18

진만: 네, 알바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마을버스 기다리고 있을 때 성희씨가 말을 건 거예요. 오후 10:18

성희: 네, 제가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진만씨 처음 봤을 때 어떤 인연이라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용기를 내 말을 건 거예요. 진만씨, 우리 계속 연락하면서 지내도 되는 거죠? 저는 진만씨를 또 만나고 싶은데... 오후 10:24

진만: 그럼요, 그럼요! 저도 꼭 그러고 싶습니다! 오후 10:24

성희: 그럼 우리 돌아오는 수요일 오늘 봤던 그 카페에서 또 볼까요? 오후 10:42

진만: 네, 네! 제가 거기 일찍 나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후 10:42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2. 다섯째 날 - 카톡

진만: 성희씨, 접니다! 오후 10:11

성희: 네, 진만씨. 제가 또 늦게 봤네요. 핸폰이 진동이라서... 오후 10:32

진만: 아니에요. 오늘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전 성희씨가 안 나올까 봐 걱정했거든요. 제가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서... 쑥스럽지만 전 성희씨를 만나고 있는 시간이 정말 좋습니다! 오후 10:34

성희: 네, 저도 진만씨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진만씨, 아까 우리 카페에서 우연히 미자 언니 만났잖아요. 저도 그 언니를 한 6개월 만에 처음 만나는 거였는데, 그 언니가 진짜 실력 있는 상담사거든요. 아까 우리 심리 테스트 해준 것도 그게 정말 받기 어려운 거라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운이 좋은 거였죠. 진만씨랑 헤어지고 그 언니랑 같이 지하철 탔는데, 언니가 진만씨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라고, 기회가 되면 또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언니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 정말 진만씨가 대단한 사람인가 봐요. 미자 언니가 진만씨에게 연락드려도 되죠? 오후 10:57

진만: 그럼요! 성희씨 선배님인데. 제가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닐 텐데... 좀 얼떨떨하네요. 아무튼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하죠. 다음 주에 제가 성희씨와 선배님께 밥을 사도록 하겠습니다! 오후 10:59

 

3. 열하루째 날 - 카톡

미자: 진만씨, 김미자입니다. 오후 8:09

진만: 아, 네. 오후 8:12

미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진만씨는 영적으로 독특한 사람이에요. 굉장히 열려 있고, 또 한편 연약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지금이 진만씨에게 위기의 시간일 수 있어요. 혹시 요즘 쉽게 지치거나 몸이 무겁지 않으신가요? 오후 8:14

진만: 네... 그거야 제가 상하차 작업도 해서 늘... 오후 8:16

미자: 그거 보세요. 그게 진만씨의 영이 흐려지고 자꾸 장애물이 생겨서 그런 거예요. 이럴 때일수록 누군가 진만씨의 영을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오후 8:18

진만: 근데, 성희씨는 정말 괜찮은가요? 오늘 나오지도 못하고 연락도 안 돼서 걱정이 되거든요. 감기가 맞는 거죠? 오후 8:20

미자: 네, 감기가 맞아요. 성희도 저한테 간곡히 부탁을 하더라고요. 진만씨를 제대로 설 수 있게 도와달라고요. 자기도 열심히 기도해 보겠다고 했고요. 오후 8:23

진만: 네, 고마운 말이네요. 오후 8:28

미자: 진만씨,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성희 통해서 바로 만날 날짜 잡을 테니까, 우리 꼭 얼굴 보고 얘기해요. 제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이게 진짜 진만씨만의 특이한 경우거든요. 오후 8:29

 

4. 열여섯째 날 - 카톡

진만: 네, 좋아요. 제사가 되었든 기도가 되었든 다 해드릴게요. 한데, 성희씨... 성희씨는 어떻게 된 거죠? 성희씨를 만나서 얘기를 듣고 난 후, 제가 말씀대로 다 해드릴게요. 오후 9:11

미자: 진만씨, 지금 성희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제가 계속 말씀드렸잖아요. 성희의 영과 진만씨의 영은 서로 상극이에요. 제례를 올려서 그 원흉을 없애야 서로 만날 수 있는 거라니까요! 성희도 제 말 듣고 일부러 진만씨 만나는 거 참고 있는 거예요. 이 뿌리부터 완벽하게 캐내야 하는 거예요. 지금 진만씨 마음 어지럽히는 것도 다 그 마지막 저항인 거죠. 힘들더라도 며칠만 더 참고 기도해 보세요. 오후 9:22

진만: 네... 오후 9:31

 

5. 스무하루째 날 - 카톡

진만: 성희씨... 오늘도 연락이 잘 안 되네요... 연락이 안 돼도 그냥 여기에 계속 말할게요. 사실 성희씨... 지금 제 마음이 많이 흔들려요. 같이 사는 친구는 그거 다 사기다, 멍청하게 속지 말라고 말하는데... 저는 계속 그 말을 믿지 않고 있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사기라도 좋고 속아도 좋다고요. 그래도 꼭 한번 다시 성희씨 만나서 카페에서 얼굴 보고 커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처럼요... 저는 내일 미자씨 만나서 제례를 드리러 가요. 원래는 70만원인데, 특별히 성희씨 생각해서 50만원에 해주겠다고 하셨어요. 그거 드리면 그분 말처럼 마가 사라진다고 하니까, 그땐 성희씨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마가 사라지든 사라지지 않든, 제 마음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성희씨가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게 전부예요. 기다릴게요. 오전 2:47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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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 뒤쪽으로 재개발을 하다가 수년째 방치된 야트막한 야산이 있었다. 정용은 그곳을 오르다가 평소엔 보지 못했던 커다란 바위 하나가 길 한가운데를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바위는 리어카 크기만 했는데, 절반쯤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이 밖으로 나왔는지 아랫부분이 검고 축축한 모습이었다. 이게 왜 여기 나와 있지?

정용은 바위 둘레를 돌아보며 괜스레 발뒤꿈치로 툭툭 윗부분을 쳐보았다. 윗부분은 제법 평평해 보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누군가 정 같은 것으로 계속 내리친 듯 모나고 깨진 흔적이 많았다. 그 길은 정용이 아주 가끔 마을버스 대신 걸어서 알바하는 편의점까지 가는, 말하자면 지름길이었다. 평상시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구청이나 다른 기관에서도 관리하지 않는 듯 산을 관통하는 작은 오솔길을 제외하고는 온통 잡풀과 빈 막걸리병,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닐봉지, 오래된 시멘트 포대 같은 쓰레기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야산의 3분의 1은 터파기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모습 그대로 방치돼 있었고, 잡풀과 소나무에는 회갈색 먼지가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용은 잠깐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요 며칠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강추위가 대기를 메우더니 바로 그제부턴 날씨가 많이 풀리기 시작했다. 등으로 흘러내린 땀이 그다지 차갑게 느껴지진 않았다. 정용은 담배를 피우면서 어제 어머니에게서 온 문자메시지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어머니는 아버지 혈압이 160까지 올라갔다며, 네가 한번 들렀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었다. 정용은 그 문자를 보고도 아무런 답신을 하지 않았지만, 대신 밤늦도록 잠을 설쳤다. 그러고도 다른 날보다 일찍 잠이 깼다. 그는 자취방 벽에 기대앉아 멀거니 스마트폰으로 포털 화면 메인에 나와 있는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대형교회에서 차명 계좌 수백 개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 그는 또 포털 화면 맨 아래쪽에 배치된 어느 늙은 교수의 동영상 강의도 보았는데, 그는 유럽의 식민지배와 제국주의가 상속받지 못한 자들의 울분을 달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말을 했다. 식민지로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상속에서 밀려난 차남이나 서자 출신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정용은 그 강의를 끝까지 다 보지 않고 중간에서 멈췄다. 그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서 좀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바 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도 더 남아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야산 쪽으로 길을 잡았다.

“이 바위, 젊은이하고 상관있소?”

반대편 길에서 올라온 한 남자가 정용 앞에 멈춰 서서 물었다. 그는 등산화에 등산조끼, 큼지막한 배낭을 멘 차림이었는데, 얼핏 봐서도 60대 초반은 되어 보였다. 그는 손에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아니요. 저는 그냥 잠깐…”

정용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남자가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럼, 내 일 좀 하리다.”

남자는 배낭에서 굵고 긴 밧줄을 꺼냈다. 롤러처럼 생긴 둥근 막대도 몇 개 꺼냈는데, 대부분 쇠로 되어 있는 거 같았다. 배낭 옆에는 접이식 군용 야삽도 매달려 있었다. 정용은 바위에서 두세 걸음 떨어져 남자가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남자는 등산조끼를 벗어 빈 배낭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더니, 이윽고 놀랍도록 맹렬한 속도로 야삽을 이용해 바위 아래를 파 내려갔다. 날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땅은 여전히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바위 아래 흙을 파 내려갔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나 있는 그의 머리와 이마는 어느새 벌겋게 변해버렸다.

“이게…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죠?”

정용이 같은 자리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정용은 어쩐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겠소.”

남자가 허리를 한 번 펴면서 말했다. 그의 목울대 근처로 퍼런 힘줄이 보였다.

“뭔 조화인지 웬 두꺼비처럼 어느 날 아침부터 여기 앉아 있었소.”

남자는 배낭에서 작은 페트병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연한 갈색을 띠는 알 수 없는 물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마셨다. 무언가 단단히 준비를 하고 나온 것 같았다.

“한데, 어르신이 이걸 왜…?”

정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좋지 않소? 할 일도 없었는데…”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야삽을 들었다. 정용은 그냥 그대로 편의점 쪽으로 내려갈까 하다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기로 했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 두 시간도 더 남아 있었다. 정용은 발로 쓱쓱 남자가 퍼낸 흙을 뒤쪽으로 밀어냈다.

“에헤이, 하지 마소. 젊은 사람이 뭐 한다고…”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야산엔 정용과 남자 외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고, 새 한 마리 날아오지 않았다. 남자의 야삽 날이 땅속에 숨은 돌멩이와 부딪히는지 가끔씩 쇳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하지 마세요. 이게 무슨…”

정용은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생각지도 않은 말을, 마치 웅얼거리듯 내뱉었다. 남자가 일을 멈추고 정용을 돌아보았다. 정용은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이건 몇 명이 달라붙어도 어려운 일이잖아요? 괜히 힘만 뺏기고…”

“허허,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소. 나는 이런 걸 보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남자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 후, 다시 땅을 팠다.

그러니까, 그렇게 어르신 좋아서 하는 일만 하지 마시라구요! 차라리 일을 하고 돈을 버세요! 그 힘으로 다른 일을 하시라구요! 이게 뭡니까, 이게! 다른 사람 마음 불편하게 만들고….

정용은 그렇게 남자에게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남자 앞에 버티고 있는 바위를 계속 노려보았다. 정용은 그 바위가 먼 후대까지 이 자리에 계속 버티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젊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고, 나이 든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들면서. 정용은 몸을 돌려 반대편 길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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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까지 상하차 알바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진만은 곧장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시간은 밤 10시. 함께 사는 정용은 편의점 알바를 나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진만은 라면을 끓여 먹을까 하다가, 추리닝 바지에 점퍼만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김밥천국에 갈 작정이었다. 월급을 받은 날이니까, 오랜만에 ‘스페셜 정식’을 먹을 생각이었다. 경양식 돈가스에 원조김밥이 함께 나오는 ‘스페셜 정식’은 팔천원이었다. 진만은 정용과 함께 일주일에 두세 번씩 김밥천국에서 끼니를 때우곤 했는데, 그때는 늘 짬뽕라면에 원조김밥, 떡라면에 공깃밥 하는 식이었다. 가격은 육천오백원. ‘스페셜 정식’과는 불과 천오백원 차이였지만, 그래도 주문은 늘 그렇게 했다.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진만은 마음이 가벼웠다.

밤 10시를 넘긴 시간이었지만, 김밥천국엔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두 명이 함께 온 테이블도 있었지만, 진만처럼 혼자 온 사람이 더 많았다. 양복 차림의 사람도 있었고, 교복을 입은 학생도 눈에 띄었다. 혼자 온 사람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밥을 먹거나 밥을 기다리거나, 모두 한결같은 포즈였다. 진만은 알바생이 안내한 대로 야구모자를 질끈 눌러쓴 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야구모자 남자 역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만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예전, 진만은 산 중턱에 이층짜리 건물을 짓는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었다. 카페인지 가든인지, 예스러운 기와를 올린 건물이었는데 거기에서 시멘트와 모래를 나르는 일이었다. 산 중턱이어서 당연히 ‘함바집’이 없었다. 오전엔 간식으로 카스텔라와 우유가 나왔고, 점심은 산 아래 한솥도시락에서 ‘도련님 도시락’이나 ‘고기고기 도시락’ 같은 걸 단체 배달시켜 먹었다.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한 10월 초였지만, 오전 내내 시멘트와 모래를 나르다 보면 신발까지 땀범벅이 되었다. 머리칼과 눈썹은 시멘트가 묻어 희끗희끗하고 뻣뻣해졌다. 인부들은 손도 씻지 않고 그대로 공사현장 바로 앞에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었다. 진만도 인부들 틈에 끼어 밥을 먹었는데, 그게 좀 불편했다. 며칠 함께 일해서 낯이 익은 인부들은 밥을 먹으면서 계속 참견을 했다. 군대는 다녀왔냐, 고향은 어디냐, 그 김치는 남길 거냐, 등등. 진만은 대답하느라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번은 도시락을 받자마자 약수터에 갔다 온다는 핑계를 대고 건설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등산로 옆 잘려나간 나무둥치에 앉아 혼자 먹었다. 쓸데없는 질문도 없고, 간섭도 없어서 좋았지만, 이번엔 등산객들이 문제였다. 등산객들은 힐끔힐끔 진만을 쳐다보며, 역력히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 중년 여성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등산로를 올라오다가 진만을 발견하자마자 ‘에구머니나!’ 소리치기도 했다. 진만은 그날 이후부턴 그냥 하던 대로 인부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야구모자 남자가 시킨 라면이 먼저 나왔고, 곧바로 진만이 시킨 ‘스페셜 정식’도 같은 테이블에 놓였다. 진만이 시킨 ‘스페셜 정식’은 둥근 플라스틱 접시에 돈가스와 원조김밥이 함께 담겨 나왔다. 젓가락을 들고 라면을 먹으려던 야구모자 남자가 흘깃 진만 앞에 놓인 ‘스페셜 정식’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다시 후루룩 소리를 내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진만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최대한 조용하게 돈가스를 썰었다. 여기 돈가스가 이렇게 컸나. 진만은 처음으로 그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거 좀 조용히 먹읍시다.”

야구모자 남자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오십대 중반의 사내가 말했다. 사내는 정수리가 훤히 드러난 대머리였는데, 술을 한잔 걸쳤는지 얼굴이 불콰했다. 사내 앞에는 짬뽕라면이 놓여 있었다. 라면을 후루룩 소리 내어 먹는 게 문제였는지, 아니면 야구모자 남자 손에 쥐어져 있던 스마트폰이 문제였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다만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 간격이 지나치게 좁았다는 것, 그건 명확했다. 진만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다시 조용히 원조김밥 하나를 입에 넣었다.

“에이씨, 별 꼰대 같은 게 다….”

야구모자 남자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작게 혼잣말을 했다. 대머리 사내는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들은 모양이었다.

“너 이 자식, 지금 뭐라고 그랬어? 뭐라고 그랬어!”

대머리 사내가 젓가락을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야구모자 남자도 지지 않고 젓가락을 매장 바닥에 내던지면서 일어났다. 김밥천국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대머리 사내와 야구모자 남자에게로 쏠렸다.

“이 자식이 진짜! 너 몇 살이야!”

대머리 사내가 멱살이라도 잡을 듯 야구모자 남자에게 다가섰다. 야구모자 남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에이 씨발, 조용히 라면이나 처먹지 왜 지랄인데!”

“이 자식이 그래도!”

대머리 사내가 야구모자 남자의 가슴을 툭 밀치자, 야구모자 남자가 진만의 돈가스 그릇 바로 옆에 놓여 있던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알바생이 ‘꺅!’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대머리 사내는…마치 무슨 분신술이라도 쓰는 사람처럼, 재빠르게 매장 밖으로 도망쳤다. 야구모자 남자는 그런 대머리 사내를 쫓지 않았는데, 그는 다시 툭 나이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했을 뿐이었다. ‘좆도 아닌 새끼가….’ 그는 자리에 앉는 대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알바생에게 라면값을 치르고 김밥천국 밖으로 빠져나갔다.

진만은 그 모든 일을 굳은 듯 지켜보았다. 야구모자 남자가 나간 후, 사람들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라볶이를, 비빔밥을 먹기 시작했다. 진만 또한 자신의 ‘스페셜 정식’을 내려다보았다. 돈가스는 아직 채 반도 썰지 못한 상태였다. 야구모자 남자가 손에 쥐었던 나이프는 테이블 위에 사선 방향으로 놓여 있었다.

진만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그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돈가스를 썰기 시작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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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진만은 욕실 거울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건 뭐 너무 예민하잖아. 욕실문 밖에선 계속 달그락, 달그락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저와 그릇이 서로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가 마치 알 굵은 우박이 슬레이트 지붕 위로 쏟아지는 것처럼 요란했다. 정용은 왜 저렇게 쉽게 화를 내는가? 저것도 병은 아닐까? 진만은 쉽게 욕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정용은 원래 그런 친구가 아니었다. 말이 좀 없어서 그렇지, 요즘처럼 벌컥 화를 내거나 계속 미간을 웅크리고 다니는 친구는 아니었다. 정용이 편의점 알바를 하는 시간에, 진만은 종종 그곳 테이블에 앉아 폐기등록 된 삼각김밥을 얻어먹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정용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그때도 정용은 뭐랄까, 마치 주유소 앞에 세워둔 막대풍선처럼 감정 없이 사람을 대하고 똑같은 표정으로 포스기를 찍는 알바생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자정 무렵이었는데, 그때도 진만은 편의점 안 테이블에 앉아 휴대폰으로 그날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보고 있었다. 정용은 계산대 뒤에 서서 검수기를 꺼내 물건 수량을 확인하고, 빈 물품을 창고에서 꺼내오느라 잠시도 쉬지 않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손님들은 끊이지 않고 계속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중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정용에게 벌컥 화를 냈다.

“너도 나 무시하냐?”

정용은 남자의 얼굴을 1~2초 정도 말없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 손님. 그게 아니구요. 비닐봉지도 따로 20원을 받게 되어 있어서요….”

“그러니까 너도 내가 20원짜리로 보이냐구?”

남자가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물품은 소주 한 병이 전부였다. 진만은 앉은 채로 허리를 길게 빼 남자와 정용을 바라보았다. 정용은 잠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가 이내 비닐봉지에 소주를 담았다. 네, 여기 있습니다, 손님. 정용은 인사말도 빼먹지 않았다.

“잘해, 새끼야. 너도 그러다가 20원짜리 되니까.”

남자는 끝까지 욕을 하고 나갔지만, 정용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손님을 받고 계속 물품 정리를 했다.

“화 안 나?”

손님이 뜸해졌을 때 진만이 정용에게 물었다.

“화나지….”

정용은 계산대 위에 빨대와 나무젓가락을 채우면서 말했다.

“비닐봉지 그냥 주다가 20원씩 받으라는 놈들한테 화가 나지. 걔네들은 20원을 서로 주고받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는 애들이거든. 책상에 앉아서 툭툭. 20원 내라고 하면 일회용품 사라질 거다, 툭툭.”

그랬던 정용이 변한 것이었다. 그제는 퇴근한 정용이 원룸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다 말고 무언가를 세게 바닥에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방에 누워 있던 진만은 슬쩍 욕실 쪽으로 가 보았다.

“뭐야, 왜 그래?”

정용은 진만의 말에 아무 대답 없이 탈탈,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욕실 바닥에는 빈 로션통이 뚜껑과 분리된 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정용이 샀으나, 진만도 함께 쓴 로션. 며칠 전부터 뚜껑에 달린 펌프를 누르면 휘파람 소리만 나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던 로션.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정용은 아무 말 없이 침대에 가 누웠다. 진만은 그런 정용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빈 로션통을 치웠다.

“저기….”

진만은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방에 불이 꺼진 지 20여분이 지난 뒤였다. 정용은 침대에서, 진만은 바닥에 요를 깔고 누운 상태였다.

“요즘 나한테 뭐 화나는 일 있어?”

정용은 끙, 소리를 내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로션 때문에 그래? 네가 사 놓은 걸 내가 막 써서? 그거 내가 인터넷에 주문했는데….”

“뭔 소리야? 잠이나 자. 나 피곤해….”

정용은 2주 전부터 편의점 알바 외에 따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시작했다. 숯불갈비집 설거지 아르바이트였다. 접시만 400개 넘게 닦는 아르바이트. 정용은 토요일, 일요일 밤 9시까지 근무하고, 바로 일요일 밤 10시부터 다시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진만은 정용이 계속 화를 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유튜브에서 무슨 심리학과 교수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화가 나면 그때그때 풀어야 한대. 그래야 마음의 병도 안 생기고 속병도 안 생긴대.”

진만은 아예 정용 쪽으로 돌아누워 말했지만, 정용은 반응이 없었다.

“남들한테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병이 될 수 있고….”

진만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정용이 휙 이불을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용은 침대에 앉은 채 진만에게 말했다.

“야, 도대체 어떤 새끼가 그딴 소리 하니?”

진만은 정용의 말에 살짝 어깨를 웅크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새끼 교수 맞아? 네가 그 새끼 유튜브에 들어가서 댓글 좀 달아. 똑똑히 알고 지껄이라고.”

정용은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리고 말을 이었다.

“너 왜 가난한 사람들이 화를 더 많이 내는 줄 알아? 왜 가난한 사람들이 울컥울컥 화내다가 사고 치는 줄 아냐구?”

진만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정용의 말을 듣기만 했다.

“피곤해서 그런 거야, 몸이 피곤해서…. 몸이 피곤하면 그냥 화가 나는 거라구. 안 피곤한 놈들이나 책상에 앉아서 친절도 병이 된다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거라구!”

정용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진만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정용은 지금 피곤하니까. 피곤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잠자는 것뿐이 없으니까. 진만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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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하다 보면요, 진짜 이상한 사장들, 황당한 점장들 많이 만나잖아요.”

“그야, 그렇죠…. 한데 어디 그게 사장들만 그런가요? 같이 일하는 알바 중에도 이상한 애들이 진짜 많아서….”

“진만씨는 아직… 괜찮죠?”

“네? 뭐가요?”

“아니, 우리 사장한테 이상한 말 안 들었냐고요?” “이상한 말이요? 아니오, 저는 아직….”

“그런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기 나중에 하면 안될까요?”

“잠깐이면 돼요. 이게 진짜 중요한 이야기거든요.”

“제가 버스를 놓치면 걸어가야 하는데….”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 사장이 겉만 보면 진짜 멀쩡하잖아요. 숯불갈비집 사장 같지 않고 카운터에 와이셔츠 입고 앉아서 책이나 보고…. 나는요, 맨 처음에 우리 사장이 부모 잘 만나서 가게 물려받은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한데, 알고 보니까 우리 사장이 원래 절에 들어가서 고시 공부하던 사람이래요. 몇 년 그렇게 하다가 포기하고 내려와서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나 뭐라나. 암튼 그 돈으로 카페 운영하다가 거기서도 또 돈을 더 벌어서 차린 게 지금 이 숯불갈비집이래요.”

“아니, 진짜 제가 막차를 놓치면….”

“진만씨도 우리 사장이 홀서빙 도와주는 거 한 번도 못 봤죠? 우리 사장은요, 아무리 바빠도 카운터에서 일어나질 않아요. 바쁠 땐 알바들이 불판도 닦다가 다시 그 손으로 반찬도 내가고, 테이블도 정리하고, 그래야 해요. 진만씨도 이제 보름 가까이 되었으니까 알 거 아니에요? 우리 사장은 알바가 해야 할 일, 사장이 해야 할 일, 딱딱 구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손님이 기분 나빠하든 말든 아닌 건 때려죽여도 아닌 사람인 거죠.”

“저기 그러면 버스정류장까지 걸으면서 얘기할까요? 제가 진짜 택시비가 없어서요.”

“사실, 전 여기 딱 한 달만 일하고 그만둘 생각이었거든요. 진만씨도 해봐서 알겠지만 이 알바가 이게 장난이 아니잖아요. 숯불도 만들고 기름때도 벗겨내고 서빙도 하고…. 말이 알바지 무슨 조선시대 노비 같잖아요. 그러고 시급 천 원 더 얹어 받는 건데, 여름 되니까 진짜 못 해먹겠더라고요. 그래서 한 달 월급만 받으면 그다음 날 바로 때려치우려고 했는데 한 이십 일쯤 됐을 때던가, 사장이 저만 따로 부르더라고요.”

“저기, 걸음 좀 빨리해주셨으면….”

“손님들 뜸해졌을 때 저를 룸으로 부르더니, 대뜸 가족 중에 제 명까지 못 살고 일찍 돌아가신 분이 없냐고 묻는 거예요.”

“사장님이요? 상수씨한테요?”

“네. 그러니까 좀 이상하잖아요. 그전까지는 뭐해라, 뭐해라, 지시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우리 가족 얘기를 묻고, 그것도 일찍 죽은 사람이 있냐 없냐, 물으니까….”

“거, 왜 그랬을까요?”

“기분이 좀 더럽더라고요. 자기가 사장이면 사장이지, 알바한테 별소리를 다 한다고 생각했죠. 우리 집은 아버지가 좀 편찮으셔서 그렇지 부모님 두 분 다 멀쩡하게 살아 계시거든요. 할아버지 할머니도 여든 넘어서까지 사셨고…. 그래서 그냥 대답도 안 하고 멍하니 바라만 봤더니 사장이 더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어떤…?”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옛날부터 귀신을 좀 본다는 거예요. 사람들 어깨에 올라타 있는 귀신을. 사실 자기가 절에 들어간 것도 고시 공부하러 간 게 아니라, 그거 좀 안 보이게 해달라고 부처님한테 빌러 갔다는 거예요. 한데 절에 있으면서도 계속 신도들 어깨에 붙어 있는 귀신들이 보이니까 그냥 그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는 거예요. 자기가 카운터에만 앉아 있는 이유도 손님들한테 있는 귀신이 자기한테 넘어올까 봐 그러는 건데…. 사장이 그 귀신이 내 어깨에도 한 명 있다는 거예요. 중년 남자 귀신이….”

“네? 아니, 그게 무슨….”

“저도 처음엔 그냥 사장이 놀리려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어요. 괜히 심심하니까 저러나, 하고 말았죠. 한데, 그 말이 자꾸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일할 때도 괜히 어깨가 무거워지는 거 같고. 그래서 막 들고 가던 숯도 쏟을 뻔하고. 그리고 더 결정적인 건 우리 외삼촌 중 한 분이 아파트 공사장 비계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는, 한 십 년 전 어머니가 했던 말을 기억해낸 거예요. 그러니까 더 죽겠는 거예요. 자꾸 뒤돌아보게 되고, 거울도 못 보겠고.”

“어어, 그럼 진짜… 우리 사장이….”

“제가 그렇게 일주일간 계속 잠도 못 자고 고생하다가 우리 사장한테 사정했다는 거 아니에요. 정말 제 어깨에 누가 있는 게 맞냐고? 그럼 이걸 어찌해야 하냐고?”

“그랬더니 사장이, 아니, 사장님이 뭐래요?”

“사장이… 그게 쉽게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시간이 좀 걸린다는 거예요. 자기가 저를 보면서 계속 기도를 드릴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눈앞에 있으라고. 어깨 위 귀신 때문에 네 인생이 지금까지 제대로 풀리지 않은 거라고.”

“좀 무시무시하네요. 그런 얘기는 진짜 어디 영화에나 나오는 건지 알았는데….”

“그래서 제가 여기서 일한 지 벌써 반년이 넘었잖아요.”

“그래, 좀… 괜찮아졌어요? 사장이 진짜 기도도 해주고?”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근데 진만씨, 진짜 더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더, 더 있어요?”

“우리 갈비집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두 분도 다 어깨에 귀신이 있다는 거예요. 사장이 그 아주머니들한테도 그렇게 말해서 아주머니들도 벌써 이 년 넘게 여기서만 일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만두지도 못하고.”

“네?”

“이게 뭘 뜻하는지 아시겠죠? 세상에 진짜 이상한 사장이 많다니까요. 그러니까 진만씨도 조심하라고요.”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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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은 대학교 2년 선배인 철민의 전화를 받았다.

“너, 송 교수님 알지? 송 교수님이 이번에 정년퇴임하시잖니.”

철민 선배의 말인즉슨, 학과 동문회에서 송 교수의 정년퇴임식을 광역시에 있는 한 호텔 연회장에서 열기로 했는데, 시간 괜찮으면 꼭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제가요? 제가 그런 자리에 왜….”

정용은 말꼬리를 흐렸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기 뜻을 전했다고 생각했다. 원래 그런 자리는 성공한 제자들이나 참석하는 행사가 아니던가. 화환도 보내고, 꽃다발도 들고 가고, 지인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처럼 봉투에 돈도 넣고…. 직업이라곤 택배 상하차 알바와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고 있는 처지인데…사촌여동생 결혼식도 부조금이 없어서 못 갔는데….

“그냥 머릿수만 채우면 되는 거야. 그런 행사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제자들 몇 명 왔나, 그게 제일 중요하거든. 경비는 다 채워졌으니까 넌 그냥 와서 밥만 먹고 가면 되는 거야.”

철민 선배는 학과 내 소모임 회장을 2년 연속 맡으면서도 평점 4.0 아래로 한 번도 내려간 적 없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졸업하던 그해, 학과 교수 추천을 받아 지역인재전형으로 공기업에 입사해 지금까지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추천서를 써준 사람이 바로 송 교수였다. 정용은 철민에게 노력해볼게요,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송 교수보다도, 철민을 보는 게 어쩐지 정용에겐 더 자신 없는 일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학부 시절, 송 교수에 대한 추억은 별다른 게 없었다. 송 교수는 허리가 좋지 않아 늘 왼쪽 허리를 한 손으로 짚은 채 강의를 하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강의 시간을 꽉꽉 채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휴강도 없었고, 중간고사 기간이나 축제 기간이라고 어물쩍 넘어가는 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학생들과 무람없이 지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송 교수는 학술답사나 엠티 같은 학과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학생들과 둘러앉아 술자리를 함께하진 않았다. 늘 밤 9시만 되면 소리 없이 숙소로 사라지곤 했다. 세상에, 엠티에 양복 입고 오는 교수님은 전 세계적으로 저분밖에 없을 거야. 그게 바로 송 교수였다.

“그래서? 갈 거야?”

진만이 정용에게 물었다.

“뭐 일도 없고…가서 밥이나 얻어먹고 오지, 뭐.”

정용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자리 가는 제자가 따로 있고, 갈 수 없는 제자가 따로 있나? 오기 같은 게 생기기도 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갈까?”

“넌 송 교수님한테 배우지도 않았잖아?”

“과는 달라도…뭐 어쨌든 동문이니까….”

정용은 갑자기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퇴임식은 오후 5시부터 시작되었다. 호텔은 정용이 생각한 것보다 크지 않았고, 연회장도 일반 식당 정도로 작았다. 정용은 연회장 앞에 코르사주를 단 채 서 있는 송 교수를 보고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양복을 입고 있는 송 교수는 불과 2년 만에 다시 보는 것이었지만, 마치 오래전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을 만난 것처럼 낯설어 보였다.

“어어, 그래. 자네들도 왔는가?”

송 교수는 악수를 청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교수님, 새 출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진만이 허리를 숙인 채 말했다. 정용은 그 옆에서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송 교수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퇴임식은 동료 교수와 제자 대표의 축사, 그리고 송 교수의 퇴임 강연으로 진행되었다.

“이거 봐라, 이거. 마지막까지 강의하신단다.”

연회장 같은 테이블에 앉은 철민 선배가 프린트된 유인물을 나눠주며 말했다. 유인물 맨 위에는 ‘한국 현대사의 쟁점들’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진만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TV프로그램 ‘짤방’을 소리 죽여 보았다. 정용은 송 교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연회장에 온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구두를 신지 않은 사람은 자신과 진만뿐인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진지하게 송 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었다. 그래, 사는 게 팍팍하지 않으면 한국 현대사의 쟁점들이 궁금하기도 하겠지. 최저임금이니 고용상황이니 하는 것들보다, 한국 현대사의 쟁점들도 만만치 않게 중요한 거겠지. 정용의 마음은 점점 더 뾰족하게 변해갔다. 정용은 이 자리에 온 것을 후회했다.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정용은 음식을 한 번 갖다 먹고 난 후, 연회장 밖 주차장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연회장 쪽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는 것 같아서 자세히 보니, 송 교수였다. 정용은 황급히 담배를 감췄다.

“같이 한 대 피우세.”

송 교수는 정용의 옆에 섰다.

“정용군, 박정용군 맞지? 4학년 때 내 강의 C학점 받은….”

정용은 말없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송 교수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

“한심하지, 이런 자리?”

“네? 아니, 저는 저기….”

송 교수는 한 손으로 계속 허리를 짚고 있었다.

“나이 들면 이런 자리 아니면 젊은 사람들을 잘 못 만나.”

정용은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내가 죽기 전에 자네들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겠나? 그 생각하면서 오래 말했네.”

연회장 쪽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은 모양이었다.

“정용군.”

“네, 선생님.”

“와줘서 고맙네. 늙은이들 말 귀담아듣지 말고, 우리 서로 얼굴만 기억함세.”

정용은 계속 자신의 운동화만 내려다본 채 서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기용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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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 무렵, 진만은 남들은 다 먹는 삼계탕은 먹지 못하고, 그 대신 더위를 먹고 말았다.

몇 달 전에도 한 번 해봤던 물류창고 야간 상하차 알바를 닷새째 했을 때였다. 저녁 출근 준비를 위해 샤워를 하는데 이상하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도 무겁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어, 뭐지? 진만은 샤워기를 든 채 가만히 변기 위에 앉았다. 현기증도, 무력감도, 나아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진만이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시간은 밤 9시부터 오전 9시까지였다. 지역에 따라 분류된 박스를 트럭에 쌓는 일이었는데, 예전에 한 번 해봐서 그런지 사흘 정도 하니까 몸이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다. 이런 더위에, 대낮에 일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밤에도 이렇게 더운데… 진만은 쉬는 시간마다 함께 일하는 알바생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다. ‘제가 아는 어떤 형은요,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는데요, 거긴 노가다 십장 아저씨가 삼십 분마다 호스로 물을 뿌려준대요’ ‘어디에? 건물에?’ ‘아니요, 인부들한테요’ ‘인부들이 무슨 젖소냐?’ ‘근데 그 형은 그게 너무 고맙대요. 그거 아니면 쓰러진다고…’ 그래,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 그러니 이런 야밤에 알바를 할 수 있다는 건 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진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대낮이었다. 잠을 자야 하는데… 도통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진만의 원룸은 친구 정용과 함께 사는 반지하의 월세방이었다. 대낮에도 해가 들지 않아 겨울엔 몹시 추웠다. 그러니 반대로 여름엔 시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겨울엔 없던 습기만 더 더해진 꼴이었다.

더운 건 마찬가지인데 습기가 사라지지 않으니, 매일 무슨 적도 부근 정글에 장판 하나 깔고 잠을 자는 것만 같았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일 때마다 쩍쩍, 장판과 팔꿈치, 장판과 종아리가 접착제처럼 서로 헤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먹는 것보다 자는 게 더 중요한데… 진만은 자다 깰 때마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다시 누웠지만, 늘 그때뿐이었다. 더위는 무심하게도 반지하 월세방에도 공평하게 찾아왔고, 진만은 늘 피곤한 상태 그대로 다시 물류창고로 나가야만 했다. 그러니, 몸에 이상이 온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진만은 욕실에서 나와 팬티만 입은 차림으로 방바닥에 누웠다. 팀장에게 몸이 좀 안 좋아서 오늘 못 나갈 것 같다고 문자를 보내니, 바로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래, 아프면 쉬어야지. 그래, 너 대신 다른 알바생들이 박스 3000개만 더 쌓으면 되니까, 괜찮아. 아프면 쉬어야지, 계속.’ 진만은 그 문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몸에 힘이 없는 것은 여전했고, 현기증은 서서히 두통으로 바뀌고 있었다. 뭐 좀 시원하게 잘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한 댓 시간만 깨지 않고 쭉 잘 수만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진만은 허리를 일으켜 원룸 안을 둘러보았다. 죽부인 같은 거, 안고 자면 시원한 거… 원룸 안에는 짐이 거의 없어서, 죽부인 대용으로 쓸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진만은 무릎걸음으로 붙박이장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비어 있는 컴퓨터 박스가 하나 있었다. 진만과 정용은 거기에 양말을 넣어두곤 했다. 컴퓨터 박스의 재질은 종이였지만, 비닐 코팅이 되어 있어서 표면은 그런대로 차가웠다. 진만은 양말을 모두 비우고 컴퓨터 박스를 방 한가운데로 가져왔다. 그런 다음, 누운 상태 그대로 배와 가슴 위에 컴퓨터 박스를 올려놓았다. 시원했다. 약간, 서늘한 느낌마저 일 정도로 컴퓨터 박스는 차가웠다. 무게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마치 얇은 대나무 합판을 맨살 위에 올려놓은 것만 같았다. 진만은 두 눈을 감은 채 양팔로 가슴 위에 있는 컴퓨터 박스를 끌어안았다. 훨씬 더 기분이 나아졌다. 두통도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진만은 그 상태로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진만은 무언가 자신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어 슬쩍 두 눈을 뜨고 말았다. 컴퓨터 박스를 안고 있는 자세 그대로였지만, 어쩐 일인지 무게감이 달랐다. 이게 왜 이러지? 진만은 몸을 조금 버둥거려 보았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컴퓨터 박스를 끌어안고 있는 양팔도 풀 수가 없었다. 가위구나! 이게 말로만 듣던 가위눌림이구나! 진만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컴퓨터 박스에서 누군가의 머리가 스윽,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낯선 할아버지의 머리였다.

진만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주여… 진만은 초등학교 이후 교회를 다녀본 적 없지만, 대뜸 그 말부터 먼저 나왔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가위눌림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올라온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기도를 하니까 바로 가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썼다. 주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모두 주님에게 오라 하셨지 않나요… 주여, 제게서 이 무거운 컴퓨터 박스를 거두어 주소서… 그래서 저 누군지도 알 수 없는 할아버님을 당신 곁으로 데리고 가소서… 진만은 한참을 속으로 기도한 후 다시 슬쩍 눈을 떠보았다. 하지만 박스는 그대로였다. 할아버지는 박스 위로 삐죽 이마와 눈만 나온 상태로 진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할아버지는 호스를 들고 있었다. 아아, 노가다 십장이었구나, 노가다 십장 할아버지였어!   

정용은 퇴근 후, 방으로 들어오면서 진만이 팬티만 입은 채로 컴퓨터 박스를 배 위에다 올려놓고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저건 또 뭐 하는 짓일까? 정용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진만을 바라보기만 했다. 진만은 웅얼웅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여, 제가 젖솝니까? 제가 젖소는 아니지 않습니까?”

정용은 다시 원룸 밖으로 나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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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정용은 한 여자를 보았다. 목이 다 드러나는 짧은 헤어스타일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흰 면티를 입은 여자였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고개가 그쪽으로 갔다. 밤 10시가 지난 시각,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버스가 정류장에 서거나 교차로 앞에 정차할 때마다 술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여 들큼한 과일 향이 났다. 사람들은 과육 안에 점점이 박힌 씨처럼 혼자 서 있거나 좌석에 앉아 졸고 있었다. 여자는 정용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좌석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뭐지? 아는 얼굴인가? 정용은 유리창에 비친 여자의 얼굴을 훔쳐보며 속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명확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알바하다가 본 얼굴인가? 정용은 편의점과 피시방과 한과 공장과 택배 물류창고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었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데, 왜 자꾸 고개가 그쪽으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건 마치 트럭에 쌓아 올린 택배 박스 하나를, 아무 표정 없는 택배 박스 하나를, 오랫동안 쳐다보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정용은 지금까지 그랬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여자와 정용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정용은 여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걸어가면서 그렇게 스스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버스에서 몇 번 마주쳤을 수도 있고, 마트 같은 곳에서 봤을 수도 있지. 낯이 익어서 무의식중에 시선이 간 것이겠지. 정용은 일부러 여자와의 거리를 조금 더 벌렸다. 여자는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걸었다. 편의점 옆을 지날 때, 여자는 잠깐 걸음을 멈췄으나, 그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한 손으로 얼굴 근처 날벌레를 쫓더니, 이내 다시 동네 쪽으로 걸어갔다. 정용도 같은 곳에 서서 잠깐 여자의 행동을 따라 했다.

여자가 들어간 곳은 ‘원흥 원룸’이었다. 정용이 사는 원룸 건물은 ‘원흥 원룸’ 옆 골목으로 5분쯤 더 걸어가야만 나왔다. 하지만 정용은 여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 ‘원흥 원룸’ 앞에 서 있었다. 이층 구석방에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용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단순히 같은 동네에 사는 여자가 아니었다! 정용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여자의 이름은 김명희. 정용이 대학교 1학년 때, 그러니까 군 입대 전에 들었던 교양 과목을 함께 수강했던 여자다. 그때도 정용은 강의 시간 내내 자꾸만 그 여자 쪽으로 시선으로 돌리곤 했다. 왜 그랬는지 몰랐지만, 자꾸만 고개가 갔다. 그 여자를 7년 만에 다시 한동네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날 이후 정용은 밤마다 원룸에서 나와 ‘원흥 원룸’ 앞까지 걸어갔다. ‘원흥 원룸’ 뒤로는 단독 주택이 몇 채 있었고, 긴 초등학교 담벼락이 이어져 있었다. 밤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지 않았고, 골목이 좁아 차들도 잘 다니지 않았다. 정용은 ‘원흥 원룸’ 옆 전봇대에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길고양이와 눈을 맞추거나, 그도 지겨워지면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가 가만히 철봉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여자는 늘 밤 10시가 넘어서 원룸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같은 숄더백을 메고 있었으며, 옷도 하루는 면티, 하루는 폴라티, 하는 식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생수와 컵라면을 사오는 날도 있었고, 식빵과 우유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들고 오는 날도 있었다. 정용은 그 모든 것을 전봇대 뒤에 서서 지켜보았다. 그러나 예전, 대학교 때처럼 정용은 그녀에게 말을 걸진 못했다. 조별과제를 같이한 적도 있었는데, 몇 번인가 전화번호를 따로 물어보려다가 결국은 입을 떼지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휘파람을 불면서 괜스레 남자 기숙사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여자 기숙사 근처를 맴돌았을 뿐, 그것이 전부였다. 정용은 퇴근한 여자의 방에 불이 꺼질 때까지 두세 시간 더 그 앞에 머물다가 조용히 원룸으로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정용은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누군가 정용의 손목을 움켜쥔 것은 그로부터 2주 정도 지난 뒤의 일이었다. 11시 무렵 언제나처럼 ‘원흥 원룸’ 근처 전봇대에 기대 서 있던 정용의 앞으로 한 여자가 휘청휘청 걸어왔다.

“너, 이 새끼, 누구야? 너 스토커지, 너 스토커 맞지!”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키가 작은 여자였다. 여자에게선 술 냄새가 났다.

“너, 내가 여기 사는 거 어떻게 알았어? 너, 내 뒷조사했어? 하, 이 새끼 봐라. 너 이름 뭐야? 진규? 창근이? 아니아니 영진이. 맞지? 하영진!”

정용은 여자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컸고, 하나둘 ‘원흥 원룸’의 창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너, 내가 여기 찾아오지 말라고 그랬지? 찾아와서 뭐? 네가 뭐? 네가 날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런 거야?”

김명희의 방 창문도 열렸다. 정용은 잠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빨리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여자는 더 꽉 정용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런 거야? 날 좋아해서 늘 여기 서 있는 거야?”

여자가 정용의 눈을 보면서 물었다. 여자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그러나 조금 슬퍼보이기도 했다. 정용이 여자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네, 좋아해요. 사랑한다고요!”

정용이 그렇게 말하자 손목을 잡고 있던 여자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여자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제야 정용은 후다닥, 자신의 원룸이 있는 골목길로 뛰어갈 수 있었다. 하나둘, 다시 ‘원흥 원룸’의 창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김명희의 창문도 닫혔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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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답신

오해하지는 말고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해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쪽이 보내온 카톡을 보고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그래도 마냥 모른 척할 수만 없어서 이렇게 용기를 내 답문을 보내는 거예요.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사실 저는 오늘 소개팅을 나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제 처지에 지금 소개팅이라는 것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 거죠. 미향이가 지난주부터 계속 자기 얼굴을 봐서 한 번만 나가달라고 부탁 문자를 보내왔는데, 그때마다 거절했어요. 미향이 얘가 날 앞으로 얼마나 보겠다고 이러는 걸까?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아까 낮에 제가 교육행정직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사실 그건 작년 여름까지만 맞는 말이었어요. 미향이도 거기까지만 알고 있었던 거죠. 저는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시험 문제집 한 번 펼쳐보지 않은 상태예요. 뭐, 포기 상태인 거죠. 그쪽도 공무원 준비한다니까 잘 아실 테죠. 시험 한두 번 보고 나면 스스로 답이 나오잖아요? 이건 마음잡고 몇 년만 노력하면 되겠다, 운만 좋으면 다음 시험에 붙을 수도 있겠다, 괜한 자신감이나 아쉬움 같은 것이 생기고…. 한데, 전 시험을 볼 때마다 더 주눅이 들더라고요. 내가 안되는 길을 억지로, 억지로, 가고 있구나, 불가능한 일들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구나…. 그런 마음을 꾹꾹 숨긴 채 삼 년을 더 붙잡고 있었는데…. 작년 여름엔 그냥 스르르, 언제 손에서 빠진지 알 수 없는 반지처럼, 어느 순간 놓고 말았어요. 그래 봤자, 저는 학원에서 공부한 것도 아니고, 혼자 자취방에서 인강으로만 준비한 거라서, 삶이 그리 달라지는 것도 없더라고요. 낮에는 변함없이 커피전문점에서 알바를 했고, 밤에도 계속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어요. 인강만 안 들었을 뿐, 계속 컴퓨터로 시시한 연예인 소식이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앉아 있었죠. 그 생활을 일 년 가까이 한 거예요. 잠드는 시간도 예전 인강을 듣고 컴퓨터를 끄는 그 시간과 똑같이….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변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상태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않으면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지낸 거죠. 그러니, 제가 무슨 소개팅에 나갈 마음 같은 게 있었겠어요? 그건 그저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건네는 시답지 않은 농담 같은 말이었을 뿐이죠.

한데, 사흘 전에 문득 생각이 변했어요. 이건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도 한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말할게요. 그날 밤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무슨 음식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계속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한두 시간 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한데도 제가 의자에서 일어나질 못하더라고요. 제가 사는 곳은 원룸이어서 화장실까지는 불과 몇 걸음 되지도 않는데… 머리로는 분명 화장실을 가고, 손을 씻고, 다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사실 계속 가지 않은 채 요의를 참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결국 속옷에 찔끔 지리기까지 했어요…. 그때야 문득 두려운 마음 같은 것이 들더라고요. 내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미향이한테 문자를 보내 소개팅에 나가겠다고 한 거예요. 무언가라도 당장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저도 소개팅은 처음이고, 물론 그쪽도 처음이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만나자마자 짜장면을 먹으러 간 건 너무 하셨어요. 저는 그래도 가볍게 차를 한잔 마시고, 점심시간이었으니까 그런 다음에 파스타 같은 걸 먹으러 가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게 제가 들었던 소개팅의 기본 코스였거든요. 한데, 그쪽에서 근처에 기가 막힌 짜장면집이 있다고, 그쪽으로 가자고 했을 때부터, 조금 기분이 상했던 게 사실이에요. 거기다가 우리 그 집 앞에서 대기를 삼십 분이나 했잖아요? 소개팅을 나왔는데, 짜장면집 앞에서,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나란히 서서 삼십 분이나 기다린다는 게, 그게 저한테는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때부터 그쪽이 더 싫어진 것도 맞고요. 그러다 보니까 짜장면집에 들어가서도 그쪽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겠더라고요. 입맛도 없고, 그쪽이 후루룩 후루룩 소리 내서 먹는 모습도 싫고…. 어쩐지 그 모든 게 제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우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짜장면을 먹다가 말고 일부러 화장실도 다녀온 건데… 돌아오다 보니까 그쪽이… 그쪽이 제 짜장면을 조금 덜어서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안 본 척했지만 제가 그걸 봤어요…. 그걸 보니까… 그냥 모든 게 다 서러워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커피라도 한잔하자는 그쪽의 말을 거절한 거예요.

솔직하게 말하는 제 마음을 이해해주세요. 그쪽도 모솔이고, 처음이라서 그랬겠죠. 그쪽도 오랫동안 시험을 준비하다 보니까 누군가를 만나고 대하는 게 어색해서 그랬겠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린 다 그 정도로 살고 있고, 버티고 있는 거겠죠. 미안해요. 내 마음은 지금 딱 그 정도인 거 같아요. 그쪽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겨우 그 정도가 지금의 내가 누굴 이해할 수 있는 최대치인 거 같아요. 이 정도라도 된 것이, 그래서 이렇게 답문을 보내는 것이, 저로선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잘 지내시고, 공부도 열심히 하시길 바랄게요.

 

2. 재답신

죄송합니다. 제가 소개팅이 처음이라서…. 저도 친구 대신 나간 자리였거든요. 공무원 시험은 원래 소개팅 나가기로 한 친구가 준비하는 거고, 저는 그냥 알바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지금은 일을 쉬고 있는데… 그래서 나갔는데… 죄송합니다. 짜장면은… 그쪽이 안 드셔서 불까 봐 그만… 죄송합니다. 저도 그쪽이 힘내시길 바랄게요.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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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우 고객님께서 주문하신 물건이 분실되었습니다. 배달 드론의 신호가 끊긴 것으로 보아 오작동으로 추정됩니다. 동일 제품이 자동으로 재주문되었습니다. 추가 비용은 일절 발생하지 않습니다. 배달에 2일이 소모될 예정입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우는 스마트폰 화면에 뜬 메시지를 읽고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가 주문한 물건은 유기농 채소와 닭고기였다. 다른 물건이라면 신경 쓰지 않고 이틀을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당장 먹을 것이 똑 떨어졌다는 게 문제였다. 신용카드 기한이 사흘 전에 만료되고, 술을 잔뜩 마셔 하루를 그냥 보낸 탓에 뒤늦게 연장하고 보니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다. 부랴부랴 주문했는데 이제는 배달 드론마저 행방불명이라니. 가만히 있으면 꼼짝없이 이틀을 굶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외출’을 하든지.

배가 고프다못해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택배사에 요청 메시지를 보내자 스마트폰의 지도에 드론이 마지막으로 신호를 보낸 장소가 떠올랐다. 정우는 투덜거리면서 장비를 챙겼다. 하얀 압축 필터 한 쌍을 콧구멍에 끼우고, 안구 건조를 방지하는 고글을 쓰고, 군용 방독면보다는 조금 가벼운 방진 마스크를 썼다. 미세먼지가 피부에 들러붙지 않도록 팔이 긴 윗도리와 비닐 장갑을 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정우는 집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빈틈없이 누렇고 탁했다. 곳곳에 검은 녹색이 감돌았다. 정우를 제외하면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관용 전기차 서너 대뿐이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장비를 잔뜩 걸치면 우선 멀리 걷기가 힘들었다. 촘촘한 이중 필터와 마스크 때문에 호흡도 편하지 않았다. 노인이나 아이들은 아예 외출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바깥 거리에 사람이 사라진 대신 하늘에는 물류 전반을 책임지는 온갖 드론이 그득했다.

정우는 이십 분쯤 걷다가 발을 멈췄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고글에 덮인 먼지를 쓸어내고는 스마트폰의 지도를 보았다. 모퉁이를 두 번 돌자 추락한 드론 두 대가 보였다. 그 옆에 한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 드론을 살피고 있었다. 정우와 비슷한 처지인 게 분명했다. 정우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수화로 말을 걸었다. 마스크에 무선 마이크가 있었지만 번거롭게 상대방과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콧구멍이 막힌 채 통화를 하느니 작년부터 많은 사람들이 배우기 시작한 수화가 훨씬 편했다.

- 그쪽도 택배 드론이 추락했나봐요?

- 우리 드론끼리 충돌한 것 같아요.

- 어느 것인지 확인하셨어요?

- 이제 막 지문을 찍어보려던 참이에요.

하지만 두 사람은 망가진 지문 인식 패널을 보고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결국 끙끙거리며 적재상자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하고 나서야 제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수화로 간단히 인사를 나눈 다음 헤어졌다.

그 순간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경고음을 울렸다.

-서울에 고밀도 미세먼지 강습 예상. 최소 지속 시간 30분 예상. 외출자들은 속히 실내로 대피 요망.

그와 동시에 거센 바람이 정우의 오른쪽 어깨를 두드렸다. 가시거리는 더욱 짧아졌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우는 상체와 얼굴을 숙여 땅을 보면서,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공기청정기가 만들어 내는 집안의 공기가 너무나 그리웠다.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가는 정우의 등과 오른쪽 어깨에 누런 먼지가 빠른 속도로 쌓이기 시작했다.

****************************************

비영리단체인 미국 건강영향평가협회(US Health Effects Institute·HEI)는 미세먼지와 대기 오염이 전 세계 사람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발표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가운데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호흡하는 사람은 5%에 불과하다. 여기서 말하는 오염된 공기란 WHO에서 정한 공기 수준 기준치보다 미세입자가 더 많이 포함된 공기를 가리킨다. 오염도가 가장 높은 공기와 가장 낮은 공기의 차이도 점점 벌어지고 있다. 또한 2016년에 미세먼지가 직간접적 원인이 되어 사망한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6000만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된다.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발작, 심장마비, 폐암 등 다양하다.

중국이 쓰레기 소각 설비를 자국 동부 연안, 즉 우리나라 서해 방향에 대거 건설한다는 소식 때문에 더욱 걱정이 되는 요즘이다. 이 글에서 인용한 연구 결과가 절대적인 기준일 수는 없겠지만, 사망자 수를 놓고 볼 때 공기 오염은 흡연, 식습관, 고혈압의 뒤를 이어 건강을 위협하는 4대 원인에 진입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미세먼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층은 아이들일 것이다. 그만큼 오랜 세월에 걸쳐 노출되기 때문이다.

미세먼지가 자연적으로 가라앉고 사라질 때는 지났다. 전 세계가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공기 오염으로 인한 사망은 무차별적으로 우리를 덮치고 가장 약한 사람부터 쓰러뜨리고 말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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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은 무작정 국도 갓길을 걷기 시작했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국도는, 그러나 보름이 가까워진 달과 그 달빛을 한 몸에 받은 벚꽃 때문에 그렇게 어둡진 않았다. 이따금 바람이 한차례 불어올 때마다 어린 나비의 날개 같은 벚꽃이 살아 움직이듯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녔다.

 

 

“더러워서, 진짜….”

정용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혼잣말을 했다. 벚나무와 야산에 가려 물류창고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간다면….’ 걸어서 채 2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정용의 마음이 약해진 건 그 거리 때문이었다. 잠깐 수치스럽고, 잠깐 고개를 숙이면, 일당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또 몇십 킬로미터를 걷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몇십 킬로미터라니, 그게 무슨 편의점에 새로 나온 과자 이름인가? 정용은 까닭 없이 자신이 버려진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부터 정용은 일주일에 세 번, 광역시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물류창고에서 택배 상하차 알바를 시작했다. 주간과 야간 타임을 고를 수 있었는데, 정용은 오후 6시부터 시작해서 오전 6시에 끝나는 야간 근무를 선택했다. 시청 근처에 있는 정류장에 오후 5시쯤 서 있으면 용역 회사에서 마련한 전세버스가 도착했는데, 그 버스를 타고 출근했고, 다시 그 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그만큼 물류창고는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일반 버스 노선이 닿지 않는, 외진 야산 근처에 있었다. 알바생들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나 보지, 뭐. 정용과 달리 주간 타임에서 일하는 진만은 툭, 그렇게 말했다. 과연, 그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일은 고됐다. 하룻밤에 택배 상자 3000개를 트럭에 쌓는 일이었다. 일당은 8만원. 2주 연속 일을 나갔더니 그나마 허리 통증은 덜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침 퇴근 버스를 타면 현기증이 일고 종아리가 쑤셔왔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정용은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길은 다 이어져 있는 거니까, 걷다 보면 언젠간 도착하겠지. 정용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용은 물러설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제 아침, 정용은 일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물류창고 담당 팀장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분명 계약한 시간은 오전 6시까지인데, 왜 7시까지 일을 시키느냐, 그렇게 일을 더 시킬 거라면 추가 수당을 줘야 하지 않느냐, 정용은 때가 잔뜩 묻은 목장갑을 사무실에 반납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40대 초반쯤 보이는 담당 팀장은 컴퓨터 엑셀파일을 정리하다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야, 뭐 우리가 대단한 일 시켰냐? 뭐 어려운 일 시켰어? 버스 오기 전에 잠깐 박스 좀 한쪽으로 정리해달라고 한 건데, 그게 뭐 그렇게 시간 따질 만큼 굉장한 일이라고…. 아, 진짜 요즘 애들은….”

정용은 담당 팀장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데, 그건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말의 태도 때문이었다. 저 인간은 날 언제 봤다고 저렇게 반말을 해댈까? 정용은 지지 않고 더 따지고 싶었으나 버스 시간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자정 무렵 주어진 10분 휴식 시간에 정용은 다시 담당 팀장에게 따져 물었다. “시간을 따질 만큼 굉장한 일이라서가 아니고요, 정확히 하자는 거죠.”

“야,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둬! 그만두면 되잖아. 너 아니어도 매일 일하겠다고 오는 애들 천지야. 아, 진짜 우리 땐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 왜 이러지?”

정용은 그 말에 바로 끼고 있던 목장갑을 벗어 바닥에 던지고 물류창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정용은 후회하진 않았으나, 다리는 아팠다. 이대로 걸어가다 보면 모르긴 몰라도 아침 퇴근 버스보다 더 늦게 도착할 게 뻔해 보였다. 정용은 아름드리 벚나무 아래 서서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벚꽃에 가려 밤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벚꽃이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4월마다 사람들은 난리를 칠까….’ 정용은 괜스레 나무 밑동을 발로 툭 걷어찼다. 꽃잎이 우수수, 아래로 떨어졌다. “좋겠다, 넌, 정리하지 않아도 돼서. 요즘 애도 아니라서….” 나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정용이 한 시간 넘게 국도 갓길을 걸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가왔다. 정용은 거의 반사적으로 차선 정중앙까지 뛰어나가 양팔을 흔들었다. 물류창고를 빠져나온 이후 처음으로 보는 차량 불빛이었다.     

저 차만 얻어 탈 수 있다면, 광역시 근처까지 갈 수만 있다면, 정용은 이 밤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추운 겨울날, 자신을 태우러 다가오는 택시를 만난 것처럼, 정용은 최선을 다해 크게 팔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앞까지 다가온 차는 속도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그를 피해 반대편 차선으로 넘어가면서까지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정용은 두 손을 든 채 멀거니 멀어져가는 차의 트렁크를 바라보았다. 차가 지나간 자리에 벚꽃이 먼지처럼 일어났다가 다시 서서히 내려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그대로 지나칠 것 같았던 차는, 정용과 이삼십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러곤 시동도 끄지 않은 상태로 한 남자가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두워서, 정용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그가 고함처럼 내지르는 말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미쳤어! 네가 멧돼지야! 깜짝 놀랐잖아! 하여간 요즘 새끼들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재빠르게 차 안으로 들어갔다. 차는 더 빠른 속도로 정용과 멀어졌다. 정용은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서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사라진 국도는, 좀 전보다 훨씬 더 컴컴해진 것 같았다. 벚꽃이 만개해 있어도, 벚꽃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그 어둠이 정용은 좀 무서웠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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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빨래를 했다. 봄기운이 확연하여. 봄을 맞는 우리의 자세, 소지. 이번 봄엔 유난히 묵은 빨래를 모조리 다 꺼내 빨아 널고 싶어진다. 따스한 기온으로 은근하게 밀려든 봄이 아니라, 저 밑바닥부터 들썩이며 솟구쳐 나온 봄이어서 그럴까? 봄은 도적처럼 당도한다더니, 도처의 도적 떼들이 한꺼번에 봄을 몰고 온 느낌이다. 이불을 널고 또다시 세탁기를 돌리고 겨울옷을 집어넣고 얇은 옷들을 꺼내 걸다 보니, 지난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이번 겨울이 유난히 추웠었던가? 그것이 지난해였던가? 언젠가는 유난히 눈이 많이 왔던 겨울이 있었는데.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겨울은 대부분 추웠던 걸로 뭉뚱그려진다. 그래도 봄은 왔고 묵은 빨래를 했으니 이제 내 몸의 묵은 때도 벗어야지. 소지의 마지막은 목욕탕으로.

유년의 겨울을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지금보다 훨씬 추웠었던 것만 같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창문에 맺힌 성에꽃. 코끝을 쌩하게 만드는 냉기에 이불을 바싹 끌어당기고 누워 있던 방. 엄마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세면대로 나오면 밤새 연탄보일러 위에 얹혀 있던 양동이 속 더운물은 식구들이 다 써버리고, 나는 고양이세수만 겨우 한 채 학교에 가곤 했다. 지금이야 언제라도 뜨끈한 물로 목욕하고 세수를 하지만, 그때는 한 달에 두어 번 가는 목욕이 아닌 이상 겨울이면 늘 고양이세수. 뜨거운 물에 손을 오래도록 담그고 있으면, 따뜻한 물이 식으면서 팔뚝부터 전해져오는 쌈박쌈박한 기운. 그것은 이젠 목욕탕에 갈 때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시절의 목욕탕 풍경. 작정하고 모아온 빨랫감들을 풀어놓는 여자들. 그러면 되니 안되니 실랑이를 벌이는 때밀이와 아줌마들. 탕 위를 둥둥 떠다니는 때들과, 옆 사람 엉덩이가 맞닿을 정도로 북적거리는 알몸의 여자들과, 도망치는 아이들하고 실랑이를 벌이는 어머니들의 악다구니, 카랑카랑 울려대는 어린애들의 울음소리, 양손에 때타월을 끼고 때를 밀다가 종종 유난스럽게 손뼉을 치며 텅텅 소리를 내는 때밀이들의 추임새까지.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이제 충분히 깨끗해진 것 같은데, 밀고 닦고 다시 돌려세워 닦는 엄마의 때수건이 참으로 야속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본전을 뽑고 가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경연장, 그 겨울의 목욕탕은 작은 전쟁터 같았었다. 그 전쟁터 한쪽에서 알몸의 엄마 몸에 안겨 머리를 감던 감촉만은 여전히 생생하게 아름답다.

습작 시절, 강원도 어느 즈음을 헤매다 들어갔던 목욕탕도 기억난다. 사나흘 바람이나 쐰다고 나온 걸음이, 어쩌다보니 더 깊은 촌구석으로 향하며 길어졌다. 산 깊숙한 곳 참숯 굽는 공장의 매캐한 연기도 맡았고, 우시장의 북적거림도 보았고, 어획량이 줄어 썰렁한 항구에도 갔다. 그땐 운전을 할 줄도 모르고 차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주로 걷거나 가끔 버스를 탔다. 숙박은 민박집에서 해결했다. 여비도 문제였지만 다니는 곳마다 그럴싸한 숙박시설이 없기도 해서였다. 참으로 대책 없이 다닌 여행이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겨울바람에 볼이 터서 쓰라렸고, 사흘 여장을 꾸린 탓에 변변히 갈아입을 옷도 없어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기어이 몸 여기저기 근질근질 각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럴 때는 역시나 목욕탕. 물어물어 목욕탕을 찾아갔다.

먼저 내복을 빨아 사우나실에 널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이미 널려 있던 아줌마들의 펑퍼짐한 속옷들 때문이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목욕탕 주인의 눈치를 보며 한참을 망설였을 것이다. 탕 안에는 사우나실에 들락거리는 살집 좋은 아줌마들과 할머니 몇이 있었는데, 아줌마들은 소리 높여 서로를 부르기도 하고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어대거나 냉탕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 도심의 사우나나 찜질방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의 언성을 들을 만도 했는데 거기선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사우나실을 들락거리던 거구의 여자가 갑자기 한 할머니에게 다가가더니, 순식간에 때타월을 빼앗아 등과 팔 곳곳을 밀어주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가 연신 고맙다고 하는 걸 보아 안면이 있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 비누칠까지 마무리해 준 그 여자가 이번엔 내게로 다가왔다. 아가씨 등 밀 사람 없지, 이리 줘봐. 아까부터 봤는데 그렇게 조물조물해서 때가 밀리겠어? 만류할 틈도 없이 거구의 여인은 다짜고짜 내 등을 밀기 시작했다.

체중을 실어 밀어대는 손매가 맵기도 참 매웠다. 그러다 내 등짝 다 까지겠어요. 말은 못하고 뚝뚝 떨어지는 때가 민망해 고개만 푹 숙이고 등을 맡기고 있다보니 문득, 다음엔 내가 저 거구의 여자 등을 밀어야 한다면 손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내 때를 보인 것도 민망한데, 남의 때까지 굳이 볼 필요가 있나. 그런데 그녀는 내 등을 꼼꼼하게 다 밀고 물까지 끼얹어주더니, 자신은 일행이 있으니 괜찮다며 다시 휙, 사우나실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등짝이 아니라 내 속좁음이 쓰라렸다. 목욕탕을 나올 즈음 널어놓은 내복은 바싹 말라 있었고, 나는 훨씬 개운해진 기분으로 다시 배낭을 둘러멨다. 낯선 고장의 낯선 목욕탕에서 나오던 그날 오후, 겨울 볕이 봄인 듯 따사로웠다.

그리고 이 봄날의 목욕탕. 나는 엄마와 함께 나란히 세신사 목욕대 위에 누웠다. 돈을 주고 때를 민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어 극구 사양하는 엄마를, 이미 지불한 돈을 돌려받기도 민망하다며 우격다짐으로 눕히고서는, 앞으로 뒤로 옆으로 나란히 같이 움직이며 타인에게 몸을 맡겼다. 마음 같아서는 오래전 엄마가 내 몸을 닦아주던 시절처럼, 알몸의 엄마를 알몸의 내가 품고 때를 밀고 어깨를 주물러 주고 싶었지만, 그냥 그렇게 목욕탕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울컥하고 서글퍼졌다. 목욕탕에서 나와 꿀을 넣은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엄마의 어린 시절 얘기를 청해 들었다. 내 어릴 적보다 더 추웠던 내 엄마의 겨울날의 이야기들을.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함께 목욕을 할 수 있을까. 엄마에게는 앞으로 어떤 봄이 도래할까. 그리고 우리의 봄은.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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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만은 생일날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진만이 보거라. 엄마다.

네 생일인데 전화만 달랑 하기 미안해서 몇 자 적어 보낸다. 네가 군 생활할 땐 그래도 엄마랑 종종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땐 그게 그렇게 좋은 건지 잘 몰랐단다. 그 시절엔 엄마도 지금보단 젊었으니까.

타지에서 미역국이라도 제대로 끓여 먹었는지 모르겠구나. 엄마가 가서 챙겨주었으면 좋겠는데, 여기 식당일도 그렇고, 내 무릎도 그렇고, 도통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구나. 무심한 엄마를 이해해주길 바란다.

사랑하는 내 아들 진만아.

네가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새 스물일곱 해가 지났구나. 엄마는 말랑말랑했던 네 손과 발을 씻기던 날들을 바로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단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작고 병치레도 잦아서 엄마 속을 많이 애태우곤 했단다. 엄마 혼자 너를 둘러업고 병원을 뛰어갔던 적도 많았어. 펄펄 열이 나는 너를 안고서 병원 복도에 앉아 있는데, 그런데도 자꾸 까무룩 까무룩 졸음이 몰려와서, 너랑 같이 한 사흘 만이라도 병원에 입원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한 적도 많았단다.

진만아, 너는 엄마 아빠가 이혼하고 따로 살아서 원망이 많겠지만,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단다. 엄마가 예전에도 말했듯이, 너와 꼭 단둘이서만 살고 싶었어. 한데도 네 아빠 그 인간이 그건 안 된다고, 진만이는 장손이라서 죽어도 자기와 살아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내가 한시라도 그 인간하곤 따로 떨어져 살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된 거란다. 또 한편 마음속으로 그래도 나보단 잘 키우겠지, 저렇게 장손 장손 해대는데 모자람 없이 가르치겠지, 생각한 것도 사실이란다. 그 인간이 맨날 돈 벌어온답시고 전국 공사현장 떠돌면서 중학생이던 너를 방치하다시피 한 것을 떠올리면, 그때 내가 더 악을 써볼걸, 조금 더 용기를 내 볼걸, 후회가 되는구나. 그게 너한테도 참 많이 미안한 점이고….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네 아빠 그 인간은 젊은 날에도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었단다. 생활비라곤 단 한 번도 제대로 가져다준 적 없고, 너를 씻겨주거나 네 기저귀를 갈아준 적도 없었단다. 집에 들어오면 그저 자빠져 자거나 어떻게든 나갈 핑계를 만들어서 다시 술이나 퍼마시고 돌아왔지…. 그땐 혼자 된 네 할아버지도 우리가 같이 모시고 살았잖니? 그러니 그 인간이 더 미워지더라. 인간이 미워지니까 그 인간이 풍기는 냄새와 밥 먹는 소리, 하다못해 그 인간이 베고 잔 베개마저도 꼴 보기 싫어지더구나….

진만아, 네 생일 축하한다고 편지를 쓰면서 엄마가 또 괜한 소리를 하는 거 같구나. 엄마가 요새 식당일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괜스레 외롭고 쓸쓸한 심정이 되어 공책에 이것저것 끄적거려 보는데, 쓰는 것들이 모두 다 지난날의 후회뿐이야. 그래서 그런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말거라. 네 생일은 너에게만 의미 있는 날은 아니란다. 그날은 엄마 인생이 바뀐 날이기도 하니, 엄마가 구질구질한 말을 써도 용서해주기 바란다.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하고, 타지에서 몸 성히, 밥 굶지 말고 잘 지내길 바란다. 여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결혼은 나중에 나중에 신중하게 생각해서 하도록 하렴. 네 아빠 그 인간처럼 할 생각이면 아예 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요즘 세상에 네 아빠 그 인간처럼 여자한테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알아서 잘 처신하길 바란다.

진만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받은 다음 날 바로 답장을 썼다.

엄마.

생일 축하해주셔서 고마워요. 오랜만에 엄마 글씨체를 보니까 저도 예전 군대 시절 생각이 나고, 그래서 좋았어요. 제가 군대 있을 때 제게 유일하게 답장을 보내준 사람이 엄마였으니까요.

생일이라고 별다르게 지낸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야간 알바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오니까 같이 사는 친구가 미역국을 끓여줘서 섭섭한 것은 없었어요. 여자친구는 아니고요, 같이 택배 상하차 알바하는 남자 동기예요. 저는 야간반, 그 친구는 오후반. 미역국은 편의점에서 파는 즉석식품이었는데,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나쁘지 않았어요. 편의점에서 파는 건 그런 게 좋거든요. 뭐든 나쁘진 않은 거. 깜짝 놀랄 만한 맛은 없지만, 최소한 나쁘진 않은 거. 그러면 된 거지,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엄마.

엄마 편지 읽고 나니까 저도 엄마 아빠 생각이 많이 났어요. 평소엔 하지 않았는데, 생일날 엄마 아빠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좀 묘하더라구요.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요. 전 정말 엄마나 아빠에게 원망이나 섭섭한 마음 같은 게 없거든요. 어디에서 읽은 적 있는데, 부모는 이해하는 게 아니라 용서하는 거래요. 한데, 저는 그 말도 잘 이해되지 않더라구요. 용서하면 그 뒤엔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면 그다음에 서로 잘 지내야 하는가? 저는 이해도 싫고 용서도 싫어요. 그냥 지금처럼 나쁘지만 않으면 돼요. 저는 지금 그런 상태거든요. 엄마도 그렇게 되시길 바랄게요. 저에게도, 아빠에게도.

생일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엄마. 그리고 제 여자친구나 결혼 문제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엄마 아빠 때는 그래도 결혼도 해보고 이혼도 해보고 그랬지만, 우리는… 아마 안 될 거예요. 하지만 그래서 엄마 걱정하는 나쁜 일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된 거죠,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엄마, 건강하시고요. 엄마도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내시길 바라요.

진만은 자신이 쓴 답장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진만은 그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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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사관’은 보고를 모두 마쳤다.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탁자 주변에 앉아 있는 네 사람의 얼굴 표정을 분석해 보았다. 평균적인 감정 상태는 안도 60퍼센트, 기쁨 56퍼센트, 슬픔 5퍼센트, 무관심 20퍼센트였다. 네 사람은 사관이 정리한 결과를 두고 여섯 시간에 걸쳐 토의한 다음 10퍼센트가량 더 안도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넷 중 세 사람이 회의실을 나갔다. 인공지능 모더레이터인 이수현만이 회의실에 남았다. 그는 ‘사관’의 눈 역할을 하고 있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사관은 이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뉴스와 정보를 모으고, 분류하고, 변별성 있는 항목으로 정리해 빅데이터에서 스몰 뷰를 생성하는 게 사관의 임무였다. 하지만 사관은 사람들이 스몰 뷰를 받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직 추론할 수 없었다. 인공지능 모더레이터가 바로 인공지능 재학습을 책임지는 직책이었다. 이수현이 사관에게 말했다. “이제 질문해도 돼.” 사관은 질문을 문장으로 정리한 다음 음성 파일로 만들어 내보냈다. “결과 보고를 듣고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당연히 기뻤지. 네가 오늘 보고한 건 지난 이백년 동안 인류에게 중요했던 여러 수치를 종합하고 정리한 결과야. 기후 변화, 대기 오염, 자원 활용 분포부터 시작해서 인재 발생률, 범죄율뿐 아니라 네트워크상에서 생산되고 쓰이는 언어의 분석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인류 이백년사를 데이터로 정리한 거야.” “단순히 데이터화했다는 걸로 기쁠 리는 없잖습니까? 기뻤던 이유는 뭔가요?”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야.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학습했지? 욕망은 장기적인 안목과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고 했잖아? 그 결과 어리석은 행동도 불사하는 게 사람이야. 폐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통계치를 발표해도 담배를 끊지 않는 게 사람이고, 도박에서 큰 돈을 딸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수없이 알려줘도 재산을 탕진하는 게 사람이지.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인류 전체가 눈을 가리고 절벽으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될까? 비록 말을 하진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엔 그런 공포가 늘 남아 있었어.” “공포와 희망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수현이 사관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지금까지 가르친 보람이 있네. 그와 동시에 네가 아직 데이터와 세상을 제대로 연결짓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너와 내가 다루는 데이터는 어느 한 순간만 모아서는 의미가 없어. 최소한 백년 단위로 데이터를 모아서 비교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인간은 생물학적인 한계 때문에 학습하고 변화하기 위해서 긴 시간이 필요해. 수억명이 변화하려면 더욱 긴 시간이 필요하고. 물론 변화하지 못할 수도 있지.” “이제 희망을 품은 이유를 말씀해주시죠.” “일곱 가지 수치가 안정적으로 변했어.

오존층 회복률, 기후 안정도, 범죄 감소율, 대기 오염 감소율, 증오 어휘 감소율, 복지 분배율, 자살 감소율. 물론 그 밖에도 여러 수치들이 있지만, 이 결과를 발표하면 인간이 눈가리개를 풀고 제 힘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모두 깨닫게 될 거야.”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지금 하신 말씀에 따르면 그 사실을 깨닫기 전부터 노력을 해왔다는 얘기잖습니까?” 이수현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고 말했다.

“세상은 욕망과 손익이 뒤엉킨 복잡계라 쉽게 변하지 않거든. 그런데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망이 그렇게 복잡한 시스템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꿨잖아. 그게 바로 희망을 품은 이유야.” 사관은 아직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수현 모더레이터는 인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면 늘 복잡계라는 용어를 끄집어냈다. 욕망, 소망, 희망이란 단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이수현의 표정엔 기쁨, 안도, 흥분이라는 감정이 각각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관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이수현이 그런 감정을 만끽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그와 나눈 대화를 학습 데이터베이스의 ‘인간’ 항목에 추가해두었다.

******************************************************************************************

남극 상공의 오존층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다. 인간이 만들어냈던 염화불화탄소가 이 구멍을 만드는 주요 촉매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뒤, 각국은 염화불화탄소의 생성과 사용을 규제한다는 몬트리올 의정서를 체결했다. 몬트리올 의정서는 1989년에 발효되었다.

나사 고다드 우주비행 센터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염소 화합물 농도는 매년 0.8퍼센트씩 감소했고, 현재는 2005년도 측정치보다 20퍼센트가 감소한 상태라고 한다. 이 수치는 인류의 노력으로 오존층이 회복되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인 셈이다. 수많은 디스토피아 소설과 재난 소설이 악화일로를 걷는 인류의 미래를 그리고 있지만 오히려 현실의 우리는 세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끊임없는 관심과 다수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비단 환경 문제만이 아니다. 평등, 자유, 정의와 같은 무형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더 나은 미래는 유토피아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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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만은 어제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던 플래카드가 사거리 횡단보도 반대편 가로수에 묶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플래카드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고 목격자를 찾습니다. 지난 1월16일 밤 12시쯤 이곳 횡단보도에서 일어난 1톤 트럭 사고를 목격한 분은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후사하겠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체감온도가 영하 15를 넘는 밤이었다.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채 가로수 옆을 지나쳤던 진만은, 무언가 생각난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뭐야. 이거 날 찾는 플래카드잖아.’

진만은 다시 걸음을 돌려 플래카드 앞에 섰다. 맞네, 그날이 맞아. 진만은 자신이 건너온 횡단보도를 뒤돌아보았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희끄무레 남아 있는 잔설 위로 차량들만 빠른 속도로 지나치고 있었다. 차도에서는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

보름 전, 진만은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목격했다. 그때도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고, 체감 온도는 자기가 무슨 PC방 최저 시급이나 되는 것처럼 며칠째 영하 15도 변함이 없었다. 허기가 져서, 진만은 계속 자취방 싱크대 찬장에 있는 짜장라면만 생각하면서 빠르게 걷고 있었다. 짜장라면 위에 ‘달걀 후라이’를 올려야지, 노른자는 터뜨리지 말아야지, 마음먹으면서 깜빡깜빡 초록불이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반대편 인도에 도착해 채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를 들었다. 횡단보도 초록불은 이미 빨간불로 변해 있었고, 도로 2차선엔 짐칸에 파란색 방수포를 씌운 1톤 트럭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트럭의 전조등 앞에 누워 있는 한 사람… 트럭 운전석에서 검은색 비니에 목장갑을 낀 남자가 뛰어나왔고, 진만 또한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괜찮으세요?”

검은 비니 아래로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이는 운전사가 물었다. 그는 보풀이 인 회색 스웨터 차림이었는데, 소매 끝에 다시 누런 내복 소매가 튀어나와 있었다. 도로에 누워 있는 사람은 보라색 털외투를 입은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쓰러져 있는 자리 옆에는 접이식 쇼핑카트가 모로 누워 있었다. 쇼핑카트에는 각종 박스들이 마치 부러진 날개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에그… 다리가… 다리가 안 움직이는데….”

운전사는 할머니를 거의 뒤에서 안다시피 해서 부축했다. 진만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접이식 쇼핑카트를 일으켜 세웠다.

“일단 병원부터 가시죠.”

운전사가 할머니를 트럭 조수석에 태웠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가 쇼핑카트를 찾아 진만이 대신 트럭 짐칸에 실어주었다. 그것이 그날 진만이 목격한 사고의 전부였다. 진만은 자신이 무언가 좋은 일을 한 것만 같아 마음이 뿌듯해졌지만, 자취방에 남아 있던 달걀을 정용이 몽땅 달걀찜으로 해놓은 것을 보고 이내 마음이 상했다. 그 마음이 사고의 잔상보다 훨씬 더 오래 남았다. 퍽퍽한 짜장라면이라니….

****************************************

트럭 운전사는 신호등 색깔부터 물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몇 분을 더 고민하다가 진만이 처음 전화를 했을 때였다.

“글쎄요… 아마 빨간색이었던 거 같기도 한데….”

진만이 말을 흐렸지만, 트럭 운전사는 대번에 그렇죠, 빨간색이 맞잖아요, 하면서 말을 이었다. 트럭 운전사의 말에 따르면 초록색이냐, 빨간색이냐에 따라 자신의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고 했다. 초록색일 경우는 11대 중과실 교통사고로 형사처벌까지 받는 것이고, 반대로 빨간색일 경우 할머니의 무단횡단으로 자신의 과실은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저기,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면 그냥 본대로 말씀만 해주시면 되는 거예요.”

트럭 운전사는 목소리가 빨랐고, 또 다급해 보였다.

“할머니는요? 그때 그 할머니는 많이 다치셨어요?”

왼쪽 다리 골절로 8주. 현재 한방병원에 입원 중. 그것이 트럭 운전사가 전한 할머니의 근황이었다.

“꼭 좀 부탁합시다. CCTV도 없고 블랙박스도 없는데, 할머니는 계속 초록불에 건넜다고 우기시니….”

진만은 네, 네, 말끝을 흐리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진짜 증언하게?”

옆에 누워 있던 정용이 슬쩍 진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내가 건너고 있을 때 초록불이 깜빡거렸던 게 사실이니까….”

“그 할머니가 안 됐네…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 할머니가 힘들어질 텐데….”

진만은 팔베개를 한 채 자취방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그냥 말까? 그 할머니 그 시간에 폐지 줍는 거 보면….”

“그럼 또 그 트럭 운전사가 힘들어지겠지. 중과실 사고면 벌금도 엄청 나올 텐데….”

“아이 씨,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진만은 시험을 망친 아이처럼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면서 트럭 운전사에게 전화를 건 자신을 잠깐 원망하기도 했다.

“증언해주기로 했으면 다른 거 말고 사실만 말해야지 뭐. 그게 어려운 거라서 진짜 증언할 거냐고 물은 건데….”

정용이 그렇게 말했지만, 진만은 말이 없었다. 대신 진만은 머릿속으로 그날 밤 사거리 횡단보도를 반복해서 떠올렸다. 초록불이 깜빡거릴 때, 목을 잔뜩 움츠린 채 횡단보도를 건너던 자신의 등 뒤로 탈탈탈, 접이식 쇼핑카트 바퀴가 내던 소리… 슬쩍 뒤돌아보면서 아이고 할머니, 발이 많이 느리시네… 생각하면서도 뒤돌아 다가가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 진만은 어쩐지 자신의 그 마음까지 증언해야 할까 봐, 그게 더 두려워서 밤늦도록 쉬이 잠들지 못했다. 추운 겨울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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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8일자 지면기사-

토요일 밤 9시 무렵, 예고도 없이 진만과 정용이 세 들어 사는 건물 전체에 전기가 나가버렸다. 무언가 퍽, 터지는 소리가 복도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형광등도, 컴퓨터도, 보일러도, 서로 합을 맞춘 노련한 배우들처럼 일순 정지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정적. 그 정적 때문에 정용은 평상시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소음을 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옆방 남자가 끙, 하면서 돌아눕는 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길게 어둠 속에서 울렸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용과 진만은 휴대폰 손전등 기능을 이용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출입구 앞에는 이미 서너 명의 건물 입주민들이 나와 환하게 불을 밝힌 바로 앞 아파트와, 그와는 반대로 오래된 축대처럼 칙칙하게 변해버린 자신들의 거주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원래 칠층짜리 모텔을 원룸으로 개조한 건물은 창턱마다 장미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장미꽃 문양만은 기괴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거, 한전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입주민 중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정용과 진만은 입주민들과 몇 발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추리닝 차림 그대로 나온지라 몸이 떨렸다. 불 꺼진 건물을 올려볼 때마다 목과 어깨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한전이 아니고 건물주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밖으로 나온 입주민들이 더 많이 늘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슬리퍼에 맨발 차림이었고, 수면바지에 담요를 어깨에 친친 감고 나온 여자의 모습도 보였다.

“월세만 받고 관리를 너무 안 해주잖아요.”

또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건물주가 관리를 제대로 안 해주는 것은 맞지만, 정용은 그렇다고 딱히 불만을 품거나 원망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하기엔 월세가 지나치게 쌌다. 보증금도 없이 월세만 내는 처지라 무엇을 더 바라거나 원해선 안 된다고 이삿짐을 들여올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 건물이 근저당이 좀 많이 잡혀 있어요. 아아, 그래도 걱정할 건 하나 없어요. 그래서 보증금도 없는 건데, 뭘…. 처음 정용과 진만에게 방을 소개해준 부동산 중개인은 그런 말을 보태기도 했다. 근저당이 많이 설정되어 있는 건물, 그 건물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정전 때문에 한자리에 모여 서 있는 밤이었다.

“한전에서 30분 안에 기사 보내준대요.” 검은색 롱 패딩을 입은 젊은 남자가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 그제야 몇몇 사람이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더 많은 사람이 건물 앞에 남아 있었다. 일부는 출입문 옆 벽에 기대 서 있었고, 또 일부는 층계에 앉아 있었다. 건물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슨 구경거리처럼 입주민들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사층에 사는 누군지는 몰라도 거 밤에 세탁기 좀 돌리지 맙시다.”

중년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밤에 세탁기를 안 돌리면 언제 돌려요? 낮엔 일하는데.”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되받았다.

“아니, 주말도 있고 정 안 되면 초저녁에 돌리면 되잖아요?”

“주말도 일하고 퇴근하면 밤 열 시인데, 뭘 어쩌라는 거야, 젠장.”

“젠장? 너 근데 몇 살이니? 몇 살인데 반말 찍찍 갈기는 건데!”

층계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서 한 사내 앞쪽으로 다가갔다. 사내도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허리를 더 꼿꼿하게 세웠다. 정용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모두 혼자 사는 사람들이었다. 연차나 반가, 월차 같은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코인 세탁소를 이용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었다. 오직 가전제품이 내는 소리만 듣고 사는 사람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드는 사람들.

서로 멱살을 잡을 듯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은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졌다. 더 이상 반말도, 비아냥도 없었다.

“정전되니까… 괜히 호빵 같은 거 먹고 싶지 않니?”

진만이 정용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정용은 그런 진만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얘랑 너무 오래 살아서 이렇게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신고 전화를 한 지 채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아 붉은색 한전 마크를 단 사다리차가 건물 앞에 도착했다.

“퓨즈가 나갔을 겁니다. 교체하면 바로 괜찮아질 거예요.”

헬멧을 쓴 기사가 모여 있는 입주민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입주민들은 바스켓이 달린 사다리가 서서히 펼쳐지는 모습을 마치 어미를 기다리는 어린 참새 떼처럼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건물 안에 있던 입주민들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스켓에 타고 있는 한전 기사를 바라보았다. 토요일 밤이었지만,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따뜻한 잠자리를 위해 아찔한 허공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직업이었겠지만,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겐 어떤 위로가 되는 모양이었다. 입주민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어, 눈 오네.”

누군가가 그렇게 말을 하자 정말로 하늘에서 벚꽃 같은 작은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떨어지는 눈과 그 눈을 배경으로 하늘에 떠 있는 한전 기사를 계속 쳐다보았다. 올해 첫눈이었지만, 기사는 그런 것쯤 상관도 하지 않고 변압기 여는 작업에만 열중했다. 첫눈이 기사를 더 기사답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건물주도, 근저당도, 세탁기 소음도 첫눈이 온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겠지만, 지금 저 하늘에 떠 있는 기사만큼은 더 선명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야, 진짜 눈 보니까 호빵 먹고 싶지 않니? 올해 첫 호빵.”

진만이 다시 정용의 귀에 속삭였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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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이럴 거면 보험을 안 들겠다니까요!”

“고객님, 자동차를 구입하시려면 보험 가입은 필수입니다.”

“그러니까 필수로 들라고 하면 나한테 선택권은 줘야 할 거 아뇨?”

“… 과학적 통계에 따라 책정된 보험료이기 때문에 고객님께만 특혜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는 22년 무사고 운전자다. 늘그막에 차 한 대 새로 장만하려 했더니 화딱지가 나서 죽겠다. 요즘 다들 자율주행차를 타지만, 당최 컴퓨터한테 운전을 맡길 마음이 안 난다. 그래서 없는 돈 박박 긁어다가 수동 운전도 가능한 비싼 모델을 구입했다. 그런데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려니까 자율주행차량이 아니고 내가 직접 운전하면 보험료가 엄청나게 높다는 것이다.

보험가입 신청서를 작성하는데 운전모드 선택 항목이 있었다. 보험설계사는 지나가는 말투로 ‘아 그건 그냥 &lt;자율주행&gt;에 체크하시면 되고요…’ 하길래 ‘아니 난, 직접 운전할 건데요?’ 했더니 한동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마 뭐라고 설득하면 좋을까 속으로 궁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 직접 운전하시면 보험료가 좀 많이 나오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냥 자율주행으로 하시면 되는데요. 남들 다 그렇게 하듯이.”

“아 난, 컴퓨터를 못 믿겠어요. 그리고 내가 이래 봬도 무사고 운전 20년이 넘어요. 직접 운전하는 게 훨씬 안전해요.”

“그러면 일단 보험료를 다시 산정해드릴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렇게 해서 나온 보험료는 예상을 뛰어넘는 고액이었다. 게다가 이것저것 추가 서약서도 요구했다. 본인 과실로 사고 발생 시 자동차 회사에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 교통흐름 데이터 수집 비용으로 추가 요금이 발생해도 감수하겠다, 일단 수동 운전 옵션으로 보험에 가입하면 1년간 해지할 수 없다 등등….

분통이 터졌지만 도저히 그대로 보험료를 낼 수는 없겠기에 숨을 좀 가라앉힌 뒤 따지기 시작했다. 나이는 칠순을 넘겼어도 나는 아직 청년이나 다름없이 건강하다. 눈도 잘 보이고 운동신경도 둔한 편이 아니다. 지금도 매주 등산을 한다.

“고객님의 건강 상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운전을 하실 수 있는 기본적인 신체 건강만 유지하시면 됩니다. 문제는 옆에 다른 자율주행차량들과 교통정보 교환을 하실 수가 없다는 점이에요.”

“네? 그건 차에 경보 장치가 있잖아요? 차가 너무 바짝 붙거나 하면 삑삑거리니까 조심하면 되죠. 난 그거 잘 못해서 사고 낸 적 한 번도 없어요!”

“자율주행차량들끼리는 전부 IoT(사물인터넷)로 연결되어서 자동으로 스무스하게 차간 거리나 상대속도 등이 조절됩니다. 바로 앞, 뒤뿐만 아니라 대여섯 대 앞의 차들하고도 정보를 주고받죠. 그런데 사람은 컴퓨터에 비해 반응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 사고가 나지는 않더라도 자율주행차들끼리 다니는 것보다 훨씬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고객님께서 아무리 운전을 잘하셔도 자율주행차량들 틈에 끼어서 다니시면 전체 교통 흐름의 효율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어요. 수동운전자에게 보험료를 더 많이 내라고 하는 이유는 자율주행차보다 운전을 못해서라기보다는 교통 효율을 떨어뜨리는 데 대한 분담금의 성격이 높아요.”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아들 녀석이 지나가는 차를 보면서 혼잣말했던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이야… 부자인가 보네. 운전도 직접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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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행차가 대세가 되고 나면 교통 인프라는 근본적인 재편 과정을 겪을 것이다. 도로와 차로 폭은 지금보다 더 좁아지겠지만 교통 소화량은 오히려 늘어날 것이다. 자율주행차량들끼리 서로 데이터통신을 해서 항상 최적화된 주행 상태를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토지에서 도로가 차지하는 면적은 점점 감소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고, 주차 공간도 계속 지하로 들어갈 것이다. 자율주행차량에 의한 무인 주차가 일상화될 테니까. 이렇게 생기는 여유 면적은 공원 등 녹지나 기타 여러 가지 지역공동체의 요구에 부합하는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망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AI(인공지능) 컴퓨터에 사회 각 분야 인프라 시스템의 운영을 어느 정도까지 맡길 것인지 깊은 사전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과연 최선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비효율성을 감수하더라도 인간에 의한 운영의 여지를 상당 부분 남겨두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더 좋을지 다양한 시나리오와 시뮬레이션을 통해 미리 가늠해봐야 한다.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최적의 수익 모델을 추구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성이겠지만, 그것이 곧 휴머니티와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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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곧 절망일 수 있다는 말, 이해하십니까?”

정화는 환자의 전자차트를 묵묵히 정리하고서 보호자인 최연수의 말뜻을 뒤늦게 생각해보았다. 최연수의 어머니이자 환자인 김인경은 간호사 로봇이 진료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보살피고 있었다.

“그다음에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마련이라서요?”

“그런 옛말이 통용되는 문제라면 저도 좋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이 아니라 남은 사람 전부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화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연수로부터 눈을 돌리고 밖으로 나간 환자와 로봇을 잠시 바라보았다. 투명한 진료실 벽 너머에서 김인경은 어린아이처럼 잦은 감정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간호사 로봇은 환자의 질환과 그에 따른 심리 변화에 효과적으로 반응하도록 프로그램 되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김인경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인경도 적극적으로 대화에 동참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화와 연수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김인경과 그만큼 원활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김인경은 중증 알츠하이머 환자였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이해심이나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사랑으로도 넘기 어려운 벽이 김인경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정화는 다시 눈앞에 앉아 있는 연수의 말꼬리를 더듬었다.

“남은 사람이라는 건 여기 무영구 주민을 말씀하시는 거죠?”

“사실 저는 그냥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렇게 표현했다가는 손가락질을 받겠지만요. 안 그래도 전자두뇌를 이식하지 않아서 퇴물 취급을 받는 참에 생각까지 꽉 막혔다고 비난을 받겠죠. 하지만 타고난 두뇌를 그대로 갖고 살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겠다고 무영구(無影區)에 모인 것 역시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불법도 아니고, 전자두뇌 이식자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머니께서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병이 심해지기 전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사리분별이 어려워지더라도 절대 전자두뇌를 이식하지 말라고. 저는 그 말씀을 고스란히 따를 겁니다. 자신의 앞날과 마지막 모습을 선택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자식 입장에서 괴로운 건 또 다른 얘기죠.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뻔히 아는데, 지금이라도 전자두뇌를 이식하면 남은 어머니를 지킬 수 있다는 걸 아는데 말이에요.”

정화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자두뇌를 이식했기 때문에 앞으로 김인경처럼 알츠하이머에 시달릴 위험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김인경과 같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무영구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고민과 고통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화는 문득 깨달았다. 연수는 왜 희망이 곧 절망이라고 말했는가. 얼마 전 밝고 희망 찬 여러 뉴스 끝자락에, 마치 부끄러워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짧게 덧붙어 알려진 소식 때문이었다.

최연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말했다.

“한심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얘깁니다. 뉴스에서 그러더군요. 알츠하이머는 완전히 정복됐다고요. 십 년 동안 전자두뇌를 이식한 사람들에게서 알츠하이머와 비슷한 뇌기능 이상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죠. 그건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무한한 희망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알츠하이머가 정복됐으니 뇌기능 치료를 위한 나노머신 생산을 완전히 중단한다면서요? 이제 무영구에 사는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건가요? 전자두뇌를 이식한 사람들은 우리가 수명을 다하고 사라지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건가요? 그럼 우리를 치료해주는 의사 선생님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거죠? 그림자도 남기지 못할 우리를 앞으로 어떻게 치료해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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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첫째 주가 끝날 무렵 미국 제약업체인 ‘화이자’는 알츠하이머와 파킨슨 병을 치료하는 신약 연구를 중단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국제적인 제약 업체 사이의 정확한 순위는 알지 못하지만, 화이자는 세계 3대 제약 회사에 포함될 만큼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희귀 뇌질환 연구를 전면적으로 중단하는 건 아니며 벤처 투자 형태의 지원을 시작하겠다는 발표가 뒤를 잇기는 했다. 하지만 해당 질병에 고통받는 환자 및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뇌신경과학 종사자들과 연구 지원을 받던 학술 단체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첨단 약품을 개발하고 치료법을 연구하는 일은 극단적인 양면을 모두 품고 있다. 긴 시간과 거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일이기 때문에 채산성을 완전히 외면할 순 없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생명과 미래 복지가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경제논리만으로 재단해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소식을 살짝 비틀어서 거울로 삼아보자. 우리는 지금 새 물을 만난 물고기들처럼 과학과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흥분하고 있다. 그 미래를 예찬하느라 첨단 기술이 우리 생활을 ‘지배’할 거라고 모순적인 어휘를 끌어오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기술이 이익 논리와 직결되는 현실에서, 기술에 지배되는 삶이 마냥 긍정적일 리는 없다. 아니, 애당초 무언가에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건 우리가 최대한 저항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경제 논리와 첨단 기술의 화려함 때문에 져버릴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에 좋은 시기일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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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은 안 오십니까?”

“아…모르셨어요? 지난달에 돌아가셨는데.”

석 달 만에 다시 열린 동네 애서인 모임에서 박 선생은 내 대답에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뭐라고 덧붙이려다 그냥 입을 닫고 말았다. 얘기해 봐야 더 안타까울 뿐이다.

동네에서 책 좋아하는 사람들 몇몇을 모아 애서인 모임을 만든 건 김 선생이다. 그동안 모임 이름도 없이 몇 번 모였다가 ‘다음번엔 멋지게 하나 지읍시다!’ 하고 웃으며 손을 흔든 게 김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를 처음 만난 건 설 연휴 때였다.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곳에 쌓인 책들을 뒤적이다가 뒤표지가 찢어진 <화씨451>을 집어 들고 살펴보는데 그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그거 첫 번역판이네요. 보기 힘든 건데. 번역자가 엉뚱한 사람으로 나와 있거든요.”

그 몇 마디에 심상치 않은 내공(?)이 느껴졌고, 그 자리에서 선 채로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요즘 세상에 그 정도로 책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드문 일이었다. 다독가는 많지만 책이라는 물성 자체를 아끼는 애서가는 점점 멸종해가고 있었다.

그다음 주였나, 김 선생을 따라 옆 동네의 작은 독립서점에 갔었다. 진작부터 한번 가봐야지 하고는 바빠서 통 발길을 주지 못하던 곳이다. 주인과는 잘 아는 사이인 듯 두 사람은 인사도 생략하고 곧장 신변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재계약했어요?”

“…아뇨. 정리하기로 했어요. 남편도 직장을 옮겨야 해서.”

“아이고… 참.”

김 선생은 그 서점이 폐업을 고민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곳에서 알게 된 몇몇 동네 손님들과 대책을 논의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서점이어도 한 줌밖에 안 되는 단골 고객들로는 안정적인 경영이 어려웠다. 결국 지난봄에 서점이 문을 닫은 뒤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 애서인 모임이었다.

지난번 모임에서 김 선생은 불콰해진 얼굴로 맥주잔을 집어 들다 말고 말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나치 독일의 분서도, 1970년대 우리나라의 소위 불량만화 화형식도 다 한때의 과거일 뿐이었는데… 이건 뭐 어떻게 거스를 수가 없을 거 같아요.”

나 역시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기에 그저 침묵만 지켰다. 도서관들이, 서점들이, 그리고 책들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전자책이 종이책의 자리를 대체한 지는 오래되었다. 학교나 도서관에서 전자책이 지닌 정보단말기로서의 장점은 종이책이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주말마다 재활용쓰레기장에 책이 잔뜩 쌓이는 일이 벌써 몇 년째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 기세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도서관의 책들은 극히 일부만이 보존서고에서 생명을 유지했고 방대한 공간을 자랑하던 열람실은 시시각각 전자식으로 탈바꿈했다. 책은 이제 더 이상 정보나 교양을 전하는 수단이 아니라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탐닉하는 문화재일 뿐이었다.

지난달 초, 갑자기 김 선생의 딸이 연락해 오면서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장례까지 치른 뒤였고, 딸은 아버지가 남긴 5000권 가까운 책들을 어찌 처분해야 할지 몰라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모두 재활용쓰레기로 버리려다가 생전에 책을 아끼던 아버지 생각이 나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고인의 수첩에서 애서인 모임의 내 연락처를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책들 중에서 고서적으로 가치가 있거나 그나마 중고서점에서 매입할 만한 책은 채 100권도 안 되었다. 책 하나하나는 모두 인류의 지적 유산이 담긴 위대한 내용들이었지만 도서관에서는 더 이상 개인 장서를 기증받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훨씬 더 풍부한 인터페이스가 달린 전자책으로 소장되어 있는 텍스트들이었다. 정말 피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결국 그가 남긴 책들 대부분은 그냥 폐지로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박 선생에게 말했다.

“<화씨451> 읽어보셨나요? 책이 금지된 사회 이야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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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0대들은 새로운 정보를 검색할 때 구글 같은 문자 포털사이트가 아니라 유튜브부터 먼저 찾아본다고 한다. 즉 문자매체가 아닌 시각매체, 그중에서도 동영상매체를 가장 익숙하게 느낀다는 말이다. 스마트폰이 대세가 된 것은 2010년 이후이다. 21세기에 태어나 자란 세대는 바로 이 시기 즈음부터 초등학생 시절을 보내며 동영상매체라는 환경을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정보단말기로서 책은 이제껏 절대적인 지위를 누려왔다. 작동하는데 에너지가 필요 없고, 어린아이라도 금방 사용법을 익힐 수 있으며, 거친 충격도 문제없이 견디는 튼튼한 내구성을 지녔다. 그래서 앞으로도 책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문자매체보다 시각매체, 동영상매체를 더 편하게 여기는 인류 역사상 첫 세대가 등장하면서, 책의 장점들보다 단점이 점점 더 두드러지는 시대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긴다. 한마디로 말해서 21세기는 ‘구텐베르크 마인드’가 저물어 가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건 단순히 매체 환경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에 기반을 둔 지적 사유를 하는 기성세대와, 이미지를 사고의 기본 도구로 사용하는 새로운 세대. 과연 이 둘의 차이는 인류 문화사에서 어떤 의미를 나타나게 될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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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