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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갈등이 문제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 시대의 젠더 갈등을 초래한 한국사회의 ‘성별화된 사회 인식’이 더 문제인 것 같다.

성별화된 사회 인식이란 성별 고정관념에 기대어 사회적 상황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인식론적 틀을 말한다. 예컨대 1997년 외환위기를 “남성=아버지의 위기”로 해석하는 경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포스트 외환위기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유행어가 무엇이었나? “아빠 힘내세요”였다. 더불어서 “부-자되세요!!” “신(新)현모양처”가 있었다.

이 세 유행어는 한국 사회가 외환위기에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를 ‘아버지들의 위기’로 이야기하고, 그들이 “노오력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런 수사 안에서 외환위기는 구조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가 되고, 그 개인의 얼굴은 ‘남성’으로 상상된다. 이때 여성의 자리는 “남편 기 살려주고 자식 건사도 잘하면서 동시에 맞벌이를 하는” 신현모양처였다. 

이처럼 한국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형질전환으로 위기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성별화된 문화적 위로를 경유해 위기를 외면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는 남녀 공히 함께 경험한 재난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대적인 구조조정에서 제일 먼저 해고되어 비정규직화된 것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당시 화제가 됐던 맥주 브랜드 카스의 CF ‘너무 예쁜 그녀-지갑’ 편을 떠올려보자. 맥주값을 낼 돈이 없는 남자 친구에게 커리어우먼인 여자 친구는 자신의 지갑을 건넨다. 하지만 왜인가? 왜 ‘여자’라는 성별이 해고의 기준이 되었던 시대에, 남자의 지갑에도 없는 돈이 여자의 지갑에는 있다고 상상되었는가?

이런 분위기는 2000년대 이후 부성 멜로드라마의 인기로도 이어졌다. <내 딸 서영이>나 <7번방의 선물> 같은 작품들에서 아내는 남편을 버리고 도망갔거나 죽어버렸고, 딸은 홀로 잘났으며, 아들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없다. “고개 숙인 아버지와 똑똑한 딸”이라는 상상력이 지배하는 시대. 욕심 많고 뭐든 잘하는 남자아이들을 ‘알파보이’라고 하지 않는 사회에서 유독 여자아이들만은 ‘알파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2000년대 이후 현상이다.

2016년 즈음, 사람들은 온라인 여성혐오의 원인으로 “나와 연애해 주지 않는 여자”에 대한 남성들의 분노를 꼽았다. 2018년 정부 산하 연구소에서는 한국 저출산의 원인으로 “고스펙 여성들이 하향결혼하지 않는 것”에 주목했다. 한국 여자들은 잘나가고 한국 남자들은 기가 죽고 말았다는 인식이 강화,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녀 공히 불안 위에 서 있을 때에도, 남성의 어려움만은 그토록 짠하고 여성의 투쟁은 ‘알파걸들의 투정’으로 폄하된다(그런데 참 이상하다. 이토록 여성들이 잘났음에도 왜 남녀 평균임금 격차는 여전히 대략 35%나 나는 것일까).

그런데 “나와 연애해 주지 않는 여자”라는 표현 뒤에는 거대 괄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괄호 안에는 “그러나 성공한 남자, 돈 많은 남자와는 결혼하는 여자”라는 말이 숨어 있다. 이런 상상력과 연결된 조어가 바로 “김치녀=남자의 경제력에 빨대 꽂아 사치하는 무개념녀”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남성=경제력’ ‘여자=성공한 남자의 트로피’라는 가부장제의 오래된 도식이 살아 있다. 청년 여성들이 싸우고 있는 것은 이러한 가부장제의 지배규범이다. 반면 어떤 남성들은 가부장제의 판을 용인하면서, 이 위에서 ‘분배 정의’의 문제로 화를 내고 있다. 여자를 비롯한 다양한 자원을 공평하게 나눠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인 셈이다.

그러므로 ‘젠더 갈등’이라는 말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여성운동에서 젠더 갈등이란 가부장제의 성차별주의를 뒤집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면,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말하는 젠더 갈등이란 ‘잘나가는 여자 vs 고개 숙인 남자’라는 판타지로부터 비롯된 날조된 프레임이다. 젠더 갈등을 논하려면 이런 상이한 이해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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