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직설

‘사이다’라는 진통제

경향 신문 2020. 1. 30. 10:01

본가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유튜브를 배회했다. 김해까지 5시간 여정을 하다보면 스마트폰에 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개별 영상들은 5분, 10분 정도의 짧은 길이이지만 영상과 영상을 넘나들면 금방 시간이 사라진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주로 나의 관심사인 동물, 게임, 만화, 소설, 가요 등의 영상을 보여주는데 가끔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요즘 인기있는 영상이라며 관심사 바깥의 영상들을 추천할 때가 있다. 그사이에서 가장 빈도가 많은 것은 소위 ‘사이다’로 불리는 영상이다.

‘사이다’는 ‘고구마’를 잔뜩 먹어 목이 메이고 답답한 상황을 청량하게 풀어주는 속 시원한 서사를 통칭해 이야기한다. 사이다 서사의 예시는 이렇다. 마음이 유약하고 순진해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선후배들의 등쌀에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직원이 있다. 이 직원이 유능한 애인을 사귀게 되었는데 애인이 직접 나서 모든 문제를 앞장서 해결해주고 보상을 타내며, 직원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정의구현을 한다. 

사이다 서사의 구조는 전래동화에서 교훈을 전달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흥부는 제비에게 복을 받고, 놀부는 제비에게 정의구현을 당하고 쫄딱 망하게 되는 것처럼. 고전소설과 사이다 서사의 가장 큰 차이는 기반이 되는 사상의 유무이다. 권선징악 서사는 노골적인 ‘선(善)’과 ‘악(惡)’을 대비시킨다. 아이들에게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당대 도덕관념을 교육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그러나 사이다 서사는 노골적으로 ‘정의구현’을 부르짖지만 그 속에는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답답하게 하는 적(敵)만 존재하며 상대가 나를 때렸으니 나도 때려도 된다는 사적 복수의 당위성만 있다.

사이다 서사는 간편하고 편리하다. 내가 겪는 불행, 불운, 부당하고 불평등한 모든 것들을 복수할 대상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그 존재에게 법의 테두리 안팎에서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되니까. 5~10분 내외 짧은 길이의 영상으로 눈길을 끌어야 하는 유튜브에서 이러한 사이다 서사는 최적의 조합이 된다. 사이다의 장점은 곧바로 단점이 된다. 우리가 겪는 사회의 문제는 사악한 악당이 혼자서 좌지우지하는 협잡 탓이 아니다. 사회는 복잡하게 엮여 있고 때로는 구조 탓에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이 개인의 이득이 교차할 때도 많다. 적을 개인 또는 하나의 집단으로 상정하는 사이다 서사는 구조 속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인과관계를 사라지게 만든다. ‘사이다’를 성공적으로 끝낸 개인은 그 구조에 집중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입은 피해만큼을 보상받으며 모두 끝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이다 서사는 콘텐츠 소비자들을 아주 단순한 이분법 속에 위치시킨다. 서사의 주인공을 방해하는 수많은 안건은 납작하게 분노해야 할 것이 되고 특정 집단이나 사상을 재생산시킨다. 빈부격차나 남녀, 세대의 갈등이 서로 합의를 이루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이해 불가능한 악의로 다가오고, 그것은 사적인 복수로 해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유튜브 속 ‘사이다’ 영상의 댓글은 쉽게 전쟁터가 된다. 오히려 더 심하게 응징해야 한다는 성토부터, 이런 상황을 사이다로 소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얘기가 맞붙는다. 물론 그 두 집단은 그저 자기가 받은 만족감·불쾌감을 표출할 뿐이라 어떤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늘도 유튜브뿐만 아니라 각종 알고리즘이 끊임없이 사이다 콘텐츠를 노출시키고, 해당 영상은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다. 사이다 서사는 고통을 잠재워주는 모르핀이다. 때로는 약효가 아주 강해 진통에서 완전히 벗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곳은 ‘사이다’의 청량함이 아니라 ‘고구마’의 답답함이다. 무엇이 어떻게 왜 우리를 괴롭히는가. 사람들이 끊임없이 사이다를 찾는 이유는 사회가 계속 진통제를 찾아야 할 만큼 병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구마가 계속 남아있다면, 우리는 그저 동물적으로 사이다를 마시고, 그 속의 논리를 재생산하는 것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융희 문화연구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