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제자와 공유하는 단톡방에서 카톡이 울린다. 40대 후반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현재 박사과정을 수료한 대학원 여제자다.

“모두 잘 계시나요? 저는 코로나 땜에 무서운 게 아니라 삼시세끼 밥 땜에 무서워요. 친밀성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나갈 데도 없고, 책도 못 보고 논문도 손도 못 대고 답답해요.” 킥킥 웃을 사이도 없이 또 다른 여제자가 메시지를 보낸다. “저는 바깥 코로나가 무서운 게 아니라 집에서 밥 달라는 코로나 때문에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있습니다. 얼른 친밀성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비슷한 글이 연이어 달린다. 

보다 못해 나도 한마디 덧붙인다. “죄송합니다. 성장이 멈춰 혼자 밥상 못 차리는 어린아이라서.” 키득키득 이모티콘이 따라붙더니, 이내 묻는다. “자발적일까요? 비자발적일까요? 남편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코로나19의 전파를 막기 위해 전 사회적으로 펼치는 이방인 사이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엉뚱하게도 가족 사이의 ‘사회적 거리 없애기’로 나타나고 있다. 가게 문을 닫은 자영업자나 재택근무 중인 직장인이나 개학이 미뤄진 아이나 모두 나갈 데가 없어 종일 집 안에서만 북적댄다. TV만 틀면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먹방은 식도락을 강제하지만, 삼시세끼 식구 밥상 차리는 전담자는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밥상 차리는 걸 두고 말다툼이 일어나고 급기야 폭력이 발생한다. 어느새 가해자와 피해자가 된 가족 성원인데도 친밀한 사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통하지 않는다. 

친밀성이란 뭔가? 차가운 근대 개인주의 정서에 맞선 따뜻한 집단주의 정서다. 최근까지도 친밀성은 이성 간 낭만적 사랑을 통해 구성된 근대 핵가족을 모델로 논의돼 왔다. 근대 핵가족은 남녀 간 낭만적 사랑을 고리로 해서 형성된다. 남녀는 서로 신체적·정신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 서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통해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혼해서 평생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자녀를 출산하고 사랑으로 돌보고 온전한 성인으로 사회화시키면서 가족 사이의 친밀성은 더욱 강화된다. 가족은 냉혹한 근대성에 맞서 살아갈 정서적 힘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이렇듯 친밀성을 차가운 근대성에 대한 치유책으로 이상화하게 되면 그 뒤쪽 어두운 면을 못 보게 된다. 친밀한 사이에서는 근대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 여성이 돌봄 전담자가 되어 남편과 아이를 돌보다가 정작 자신의 자아를 돌보지 못해 황폐해진다. 근대 핵가족이 성 불평등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한번 결혼하면 남성가부장의 경제적 부양능력과 전업주부의 정서적 지원능력이 결합해서 평생의 애착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로는 제대로 된 경제적 부양능력이 없는, 설사 있다 해도 소통능력을 상실한 ‘자발적 어린아이’를 돌보고 출산하고 육아하고 살림하느라 여성은 자아를 잃어버린다. 무엇보다 가족성원으로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탓이다.

사람은 어느 장소에 있든 자신의 공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인격적 공간’을 지녀야 한다. 어떤 누구도 이 인격적 공간을 침해당하면 고유의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 모두 자신의 인격적 공간을 침해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이유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과 사회적 공간을 공유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 겹치는 사회적 공간에서 나의 인격적 공간은 물론 상대방의 인격적 공간도 보호하려고 호혜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근대 민주주의 사회적 공간의 특성이다. 친밀성의 공간으로 이상화된 집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공공장소의 사회적 거리를 회복하자는 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이에 더해 집에서 여성의 인격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도 벌여야 한다.

<최종렬 |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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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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