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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경향의 눈

가제와 랍스터

경향 신문 2021. 4. 15. 09:40

동네에서 만난 40대 아빠가 갓 중학생이 된 아이를 독해 학원에 새로 보냈다고 말했다. 국어나 영어 학원이 아니란다. 어느 글이든 읽고 뜻을 파악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곳이라 했다. 아이는 학교 시험을 잘 보고 싶어 이 학원 가기를 자청했다고 한다. 국어·영어 말고 수학·과학도 시험 문제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제대로 알아채야 풀 수 있다고 했다. 제 딴에는 과목별 공부를 열심히 해도 막상 문제를 이해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얘기였다.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한 사교육 과목이 또 하나 생겼나 싶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EBS에서 방영한 6부작 다큐멘터리 <당신의 문해력>을 보고 그 또래 아이들의 고충이 예사롭지 않음을 새삼 알았다. 어느 고등학교 2학년 사회 시간에 선생님이 영화 <기생충>의 가제가 ‘데칼코마니’였다면서 가제의 뜻을 묻자 주저하던 아이들 중 하나가 “랍스터”라고 외친다. 다들 그게 맞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아이들이 수업 자료에 나온 양분, 위화감, 기득권 등의 단어 뜻을 몰라 진도가 안 나갔다. 중학교 영어 시간도 비슷했다. 학생들이 영어 단어의 한글 뜻을 모를 때 손을 들기로 했는데 짤막한 한 페이지를 읽는 동안 14번이나 손이 올랐다.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말한다. 교실에 닥친 문해력의 위기를 진단한 <당신의 문해력>은 중학생 2400명을 대상으로 문해력 테스트를 실시한 결과 11%가 초등학생 수준에 그치고 27%가 또래 수준에 못 미쳤다고 소개했다. “(책에) 하얀색이랑 검은색만 있는 게 너무 숨 막혀요” “긴 글을 맞닥뜨리면 제 자신이 쫄아서… 도저히 못 읽겠더라고요”라며 답답해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생생히 전했다.

이 프로그램은 문해력이 저하된 아이들이 공부 의욕을 잃고 소외되는 문제뿐 아니라 소통이 단절되는 심각한 상황을 빚고 있다고 진단했다. 코로나19 방역 대책과 등교수업 일정을 장문의 메시지로 전파한 어느 학교에서는 등교일에 학생이 아무도 나오지 않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문해력이 입사·승진 시험 등 사회생활까지 영향을 미쳐 평생을 좌우한다고도 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날 때부터 디지털을 접한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는 수천년 내려온 문자보다 훨씬 방대한 이미지·음성·영상 등 디지털 정보를 습득하고 있어 글 읽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외려 어려운 한자말이나 불필요한 문어체를 버리고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교육·입시 시스템을 갖추는 게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이해가 빠른 이미지나 영상보다 흑백의 글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 주업인 신문 입장에서는 Z세대의 문해력 저하가 걱정스럽다. 미래 독자인 그들은 이미 텍스트 일색인 뉴스 콘텐츠를 외면하고 있다. 글을 올바르게 읽어 관점을 가지며 글 너머 세상을 연결해 해석할 수 있는 문해력을 키우기는커녕 더 떨어지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당신의 문해력>의 문제 제기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런데 더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기성 언론 매체가 젊은 세대에 외면당하는 이유가 비단 그들의 문해력 때문일까. 행여나 문해력을 핑계 삼아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몇 해 전, 디지털 뉴스를 담당할 때 독자들이 마음에 드는 기사로 고른 이유를 조사해봤다. 짧고 간결해서, 길지만 자세해서, 재미있어서, 친절해서, 공들인 노력이 가상해서, 잘난 체 안 해서, 가르치려 들지 않아서 등이었다. 10대 청소년들에게 어떤 뉴스를 원하느냐고 자세히 물었더니 “10대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달라” “의미와 맥락을 알려달라”는 답이 많았다. 어차피 글을 안 읽는 세대라고 섣불리 단정했다가는 그들의 이런 목소리에 언론이 귀를 닫아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더 쉽고 정확하고 상세하고 젠체하지 않는, 친절한 글을 쓰는 게 언론의 숙제다.

영국 옥스퍼드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에서 해마다 발간하는 ‘디지털 뉴스 리포트’ 보고서에서 한국의 뉴스 신뢰도가 5년 연속 세계 40개국 중 최하위로 조사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2020년 보고서에는 한국의 뉴스 소비 성향이 상당히 편향적이라는 점이 특징으로 꼽혔다. 한국 독자가 ‘나와 같은 관점의 뉴스’를 선호하는 비중이 44%로 40개국 평균(28%)을 훨씬 웃돌고 터키·멕시코·필리핀에 이어 4번째로 높았다. 편향된 뉴스가 주로 읽히면서도 믿지 못할 뉴스로 여겨진다는 것인데 한국 언론은 거기에 기대고만 있어 독자들이 등을 돌리고 있다. 문해력은 상관없다.

차준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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