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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이굴기의 꽃산 꽃글

각시수련

경향 신문 2019. 8. 6. 11:22

나의 꼭대기가 숲처럼 우거지고 그 속에 큰 고민이 살고 있듯 산의 상층부에 습지가 있다. 부드럽기 이를 데 없어 아래에 처하기를 좋아하는 물을 높이 받들고 있는 터라 세상의 신비와 고요가 집합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나의 고민에 상응하듯 혹 이무기라도 살고 있는 걸까.

내 안에 이리도 많은 구멍이 있었구나. 닭똥 같은 땀방울이 마구 빠져나오는 이열치열의 상쾌함을 느끼면서 서늘한 기운이 밀집한 습지의 물가로 접근하면 내 어린 시절 기억의 한 토막도 따라 나온다. 흘러가는 시냇물. 물에는 물고기가 제 몸뚱이 하나를 밑천으로 살았다. 물 바깥에서 물속의 물고기를 보는 건 기이한 느낌이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쉬리 떼를 발견하는 건 언제 보아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느 날은 바지를 걷고 매미 소리를 귀에 꽂으며 직접 물에 들어갔다. 물에서 물고기를 이길 수 있겠나. 하지만 물낯에 튕기는 햇살을 얼굴에 바르며 일렁이는 물살 아래 미끈거리는 돌과 모래를 더듬다가 운 좋게 모래무지, 동사리, 꺽저기를 잡기도 했다. 그렇게 물에서 물고기를 떼어낼 때의 짜릿한 흥분을 어찌 잊으랴. 

강원도 고성의 어느 습지. 미리 알고 가는 길이었지만 짐작 못한 곳에서 습지는 툭 튀어나왔다. 숲에서 뱀을 만나듯, 점빵에서 알사탕을 눈으로 훔치듯 숲속의 습지는 뜻밖의 발견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낡은 길에는 고사목이 쓰러져 있고 어느 태풍의 소행인 듯 나무는 뿌리째 뽑혀 밑동과 잔뿌리가 수직으로 허옇게 드러나 있기도 하였다.

물가에 좀 더 접근해 본다. 습지에 깊숙이 물구나무서 있던 산과 구름은 더 깊은 속으로 빠져들면서 나에게 자리를 비켜준다. 땀에 전 한 사내의 모습을 떠받쳐 주는 건 각시수련이다. 주로 오래된 습지에서 드물게 자라는 매우 귀한 식물이다. 연꽃의 잎과 줄기가 공중을 짚는다면 수련은 수면에 그 높이를 맞춘다.

수련(睡蓮). 문자적으로 졸음과 관련이 있으니 수련은 물을 이불처럼 깔고 누워 망중한을 즐기는 중일까. 어쨌든 저를 제대로 보려면 물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라는 것이니 그 옛날의 기억을 확실하게 반짝 일깨우는 각시수련, 수련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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