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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모여 자신들을 위한 나라를 건설했다. 남성은 오로지 짝짓기를 위해 사육되었다. 짝짓기가 끝나면 남성은 누이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짝짓기는 오로지 한 명의 여성을 위한 것으로, 다른 여성은 아기를 가질 수 없었다. 이를 어기면 죽어야 했다. 오랜 계율이자 도덕이었다.’

공상과학소설의 이야기일까? 그러나 지금도 200만개가 넘는 사회가 이런 관습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인간 사회는 아니다. 꿀벌 사회다.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일부를 바꿔 옮긴 것이다. 다윈은 ‘쓸모’가 없어진 남성을 죽이고, 임신한 딸을 죽이는 행동에 대해 ‘아무도 이론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종의 행동 양식이라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혁명가 꿀벌은 언제 나타날 것인가? 수벌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모든 일벌에게 번식 기회를 공평 배분하자. 그러나 지난 1억년간 기다리던 해방은 오지 않았다. 그들에게 오빠와 남동생, 임신한 딸을 죽이는 것은 영겁의 세월 동안 반복된 ‘신성한 의무’다.

여기서 잠깐, 여성과 남성을 바꾸어 보자. 여전히 이상하지만, 조금 ‘덜’ 이상한 느낌이다. 전제군주제 사회의 하렘이 바로 그랬기 때문이다. ‘왜 왕만?’이라며 항의하는 내시는 없었다. 수십, 수백의 후궁이 단 한 명을 위해 존재했다. 다행히 인간 세상에는 다른 사회도 많았고, 다른 생각을 하는 이도 많았다. 하렘은 일부 지역에서 수천년 동안 ‘짧게’ 지속했을 뿐이다. 만약 1억년 정도 지속되었다면, 군주의 독점적 하렘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도덕률이 되었을 것이다.

진화적으로 도덕성은 주로 ‘감정’에 의해 빚어진다. 불편하거나 부당한 느낌, 처벌을 향한 충동과 분노, 애착과 연민, 혐오와 배제의 정서 등이다. 그러나 감정 기반의 도덕 원칙은 합리성과 보편성을 담보할 수 없다. 낙태와 영아 살해가 대표적이다. 출생 여부를 기준으로, 두 행위에 관한 도덕적 판단이 극단적으로 나뉜다. 낙태는 최근에야 가능해진 의학적 시술인데, 별도의 도덕 감정이 진화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종류의 인식을 빌려다 쓴다. 누구에게는 ‘인체의 일부’지만, 누구에게는 ‘귀여운 아기’다. 이에 따라 감정의 온도도 달라진다. 심지어 한 사람의 마음에도 두 인식이 공존한다. 이렇게 보면 이게 맞고, 저렇게 보면 저게 맞다. 감정 기반의 도덕성은 원시적 도구다. 현대 사회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이런 사이코패스 같으니! 도덕 규칙의 위배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면, 먼저 일어나는 반응이다. ‘나의 도덕’에 공감하지 못하니, ‘너는 사이코패스’라는 식이다. 심지어 공감하는 이의 수가 많으면, ‘더 우월한 도덕’이란다. 도덕의 인기 투표다. 이런 식이라면 전제 사회의 하렘도 비판할 수 없다. 중국에는 거대한 하렘이 있으니, 조선의 하렘도 더욱 ‘발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할까?

감정의 뜨거움은 솔직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에 기반한 도덕이 우월한 건 아니다. 우리는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살인 사건에 공분한다. 하지만 온난화나 해양오염에 비하면 ‘작은’ 문제다. 그런데도 여태껏 오존층 파괴에 깊은 도덕적 자책감을 호소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 감정 기반의 도덕성은 진화사를 통해 자주 겪던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해양오염이나 오존층 파괴는 인류가 처음 겪는 일이다. 그러니 반응도 영 미지근하다.

도덕이 단지 감정적 열렬함의 총합으로 결정된다면, 모든 형사 범죄는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고, 복잡한 금융 범죄는 잊혀질 것이며, 인기 많은 사기꾼 지도자는 하렘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이성에 기반한 도덕 판단은 애매하고, 어렵고, 느리다. 종종 직관과 반대다. 가슴이 후련하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의 도덕성은 꿀벌의 본능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기반해야 한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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