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김형, 이리로 오라니까.” 우형이 나의 옷깃을 당기며 넌지시 말한다. 김형,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다. 평론가님, 작가님, 선생님, 형, 오빠, 김작…. 살면서 참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지만 성이 김씨라는 것 외에는 어떤 정보값도 없는 호칭, 김형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사는 게 힘들어졌다. 상반기 강연과 행사가 쓰나미처럼 휩쓸려 나갔다. 글값만으로는 생계를 감당하기 곤란하다. 음악이나 미디어 업계에 있는 지인들에게 일감 좀 없냐고 손을 벌려볼까 생각했다. 이내 관뒀다. 그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공연과 행사가 다 취소돼 있는 직원도 줄여야 할 판이다. 이런저런 대출을 알아봤지만 근로소득세, 사업소득세를 내지 않는 프리랜서를 위한 대출은 없다. 기타소득세 3.3%만 내는 세입자를 위한 나라는 없어 보인다. 어쩌겠는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용직의 삶을 시작했다. 일정이 없는 날이면 수도권에 있는 물류센터에 나가기 시작했다.

보통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었던 새벽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 됐다. 오전 5시 반쯤 일어나 6시에 집을 나선다. 6시30분에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물류 센터에 도착하면 오전 7시20분. 서울과 수도권 여기저기에서 출발한 셔틀버스에서 수백명이 쏟아져 나온다. 마치 양떼가 우리에 들어가듯 하나뿐인 입구로 줄을 서서 들어간다. 열외 없이 마스크를 쓰고 열감지기를 통과한 후 사물함에 휴대폰을 포함한 모든 짐을 보관한 후 각자의 작업장으로 향한다. 이름은 사라진다. 휴대폰 번호 8자리로 만든 바코드를 찍고 일에 투입된다. 창고의 물건을 집품하거나 포장하거나 분류한다. 하루 종일 PDA로 물건마다, 그 물건들을 담는 박스마다 박혀 있는 바코드를 찍으면서 일을 한다. 누군가와 대화는커녕, 인사를 나눌 틈도 없다. 바코드로 인식되고 바코드를 찍는 사람들은 아직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는 부품이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로 인간이 부품화된 현대사회를 풍자한 영화를 찍은 게 1936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게 똑같다는 생각을 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주문에 따라 물건을 담고, 포장하고, 재고파악을 하고, 분류하며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별별 물건들을 주문하고 소비하는 게 자못 신기하기도 하다. 시간의 상대성을 절실히 깨달을 때도 있고, 편의와 환경은 필연적으로 반비례 관계임을 체감하기도 한다. 마스크와 목장갑을 착용하고 보내는 침묵의 하루들을 모으면 책 한 권은 금세 쓸 수 있을 듯싶다.

일이 익숙해지니 사람들이 보인다. 대부분은 휴학생이나 주부이다. 자주 나와 얼굴을 익힌 또래 사람들끼리 그룹을 지어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을 보낸다. 내 또래 남자들도 가끔 보인다. 흡연실에서 한두 명씩 얼굴을 익히다 보니 넉살 좋은 누군가 먼저 말을 건다. 그룹이 된다.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다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3.3% 인생이라는 것.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해 직격타를 맞은 업종에 있다는 것. 이벤트 회사에 다니던 사람, 영화판에 있는 사람, 지역축제를 기획하는 회사에 있는 사람… 대출을 받을 수도 없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폭탄을 맞아 일거리를 구걸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통성명을 하지만 이름은 기억하지 않는다. ‘실장’ ‘대표’ ‘팀장’ 등 원래 직함으로 부르지도 않는다. 약속이라도 한듯 서로를 ‘김형’ ‘최형’으로 부르며 각자의 ‘본캐’를 지킨다. 이것은 원래 우리의 삶이 아니라는 무의식적 담합의 호칭 같다. 점심을 먹은 후 그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며 15분 남짓한 시간을 보낸다. 다시 오후의 일을 시작한다. 셔틀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들과도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인사는 “내일 봅시다”가 아니다. “빨리 여기서 안 봐야 할 텐데”다. 3.3% 인생들이 본래의 하루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김작가 |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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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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