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르 몸이 떨려올 때 있어요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뼛속에 심은 기억이 깨어나
꽃 피우는 순간이래요
무슨 꽃이 이렇게
가슴 뻐근한 게 있냐고
되묻는 나를 쓰다듬으며
꽃은 원래 울먹이며 피는 거래요
낮술을 퍼먹다 나와
밭고랑에 퍼질러 앉은 내게
네게도 한 무더기 피려나 보다
봄볕처럼 따뜻하게 웃어요

그 말에 더 답답해져 얼굴 돌리면
팔랑팔랑 또 날아와서는
순을 자꾸 꺾으면 가슴이 썩는다고
꽃 피어나려 대궁을 흔들면
조용히 숨길 열어주래요
화병으로 돌아가시더니
어찌 그리 유해졌는지
부드럽게 바람을 타다가
말도 없이 유유히 멀어지네요
할머니가 쉬었다 가는 자리마다
자그마한 꽃들이 피어 있어요

- 길상호(1973~ )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갈등이 얽혀 있는 사회는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일일이 챙겨줄 수 없다. 권력과 다수의 힘으로 굴러가는 사회는 개인의 요구나 희망사항을 가차 없이 막거나 잘라버리기 일쑤다. 그렇게 해서 생긴 좌절과 분노, 괴로움과 슬픔 등은 누가 처리하나. 훼손된 내면은 누가 치유하나. 다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도 모르게 진행되거나 전혀 다른 증상인 것처럼 위장하는 정신 질환이 조금씩은 생기게 된다.

시인의 할머니는 여성이고 어머니여서 울화를 온몸으로 삭여야만 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는 할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울화를 “뼛속에 심은 기억이 깨어나” 피는 꽃이라고 부른다. 울화(鬱火)는 우는 꽃(울 ‘花’)이란다. 부르르 몸이 떨리는 건 그 꽃이 울기 때문이란다. 시인도 자신의 떨리는 몸과 뻐근한 가슴에서 할머니가 겪은 울화를 느끼고 있다. 하지만 시는 내면의 상처를 꽃으로 만들어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시 쓰기는 그 꽃을 꺾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꽃에게 숨길을 열어주어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는 일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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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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