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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가 SK에 넘어갔다.” 이렇게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한때 KT는 SK그룹에 실제 넘어간 적이 있다. KT가 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바뀐 초기, 그러니까 2002년 5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8개월간 KT의 1대 주주는 SK텔레콤이었다.


SK의 인수는 정부에서 매각하는 KT 지분을 싹쓸이 매입하면서 이뤄졌다. 마지막 주식 청약에서 SK텔레콤은 거금 2조원을 써내 KT 지분 11.34%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SK텔레콤이 반칙을 쓴 것은 아니다. 막판까지 연막을 피우다 마감 5분 전 풀 베팅을 한 결과였다. 여러 대기업이 KT 지분을 골고루 나눠갖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정부는 큰 충격에 빠졌고, SK텔레콤에 주식을 도로 내놓으라고 종용했다. 양승택 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분매각이 이뤄진 그날 오후 장관실을 찾은 기자에게 성난 얼굴로 “SK텔레콤의 행위는 정부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해 이를 특종 보도했던 기억이 난다. 정부의 계속되는 압박에 SK텔레콤은 두 손 들었고, 결국 KT가 보유한 자사 주식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처분했다. KT를 품에 안으려던 SK의 꿈은 물건너가고 KT는 주인없는 민간기업이 됐다.


만약 그때 정부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래서 KT를 SK가 소유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느 한 기업이 시장을 다 먹어치우는 구조는 소비자에게 좋을 게 없다. 하지만 정권 바뀔 때마다 KT 사옥에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회계장부를 가져가고 고위 임원들이 줄줄이 불려가 비자금 조사를 받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이석채 회장 퇴진 촉구 (출처 :경향DB)


5년마다 되풀이되는 KT의 비극은 주인없는 민영화 기업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낙하산 최고경영자(CEO)는 이사회를 자기 사람으로 채우고, 이 이사회에서 후임 CEO를 추천하는 구조를 만들어 자신이 다시 경영자가 된다. 어느 날 새로 들어선 정권이 자리를 비켜달라는 신호를 암암리에 보내지만 “임기 중”임을 내세워 거부한다. KT를 좋은 먹잇감으로 여기는 집권세력에게 이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재계 순위 11위에 계열사만 50개가 넘는 대기업이라면 자리가 좀 많을 것인가. 배고픈 늑대처럼 기회만 엿보는 공신들은 이제나 저제나 애타게 기다려왔다.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머리끄덩이를 잡아채서라도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드는 게 권력의 속성이다.


이석채 회장의 임기 중 사퇴에 대한 여론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거의 한결같다. 이 회장 개인으로는 물러나는 게 마땅하나, 안 나간다고 해서 정부가 목에 칼을 들이대는 모양새는 볼썽사납다는 것이다.


이 회장 거취와 관련한 언론 보도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이 “KT 지분이라고는 단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은 정부가…”라는 표현이다. 민간기업 인사에 아무런 권한도 없는 정부가 왜 개입하느냐는 뜻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정부 개입은 무조건 악(惡)이고 불개입은 선(善)인가. 주인없는 민영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기구는 사외이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이사회다. 그런데 KT 이사회는 이석채 회장의 학교 동문 아니면 이명박 정부의 낙하산 인사로 구성돼 있다. 자신을 뽑아준 사람이 강퇴(강제퇴진)당한 상황에서 사외이사들이 누구를 위해 무슨 결정을 어떻게 내릴지 믿음이 안 간다.


보통의 민간기업이라면 이사회 또는 경영자가 회사를 말아먹든 말든 정부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KT는 보통의 민간기업이 아니다. KT의 통신망과 장비는 국가기간시설이며 국민의 자산이다. 정부 지분이 없다고 공공의 성격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위선의 가면을 벗었으면 좋겠다. 정부가 밀실에서 누군가를 낙점해 은밀한 경로를 통해 전달하고, 이사회는 적당히 논의하는 모양새를 취한 뒤 바로 그 분을 추천하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행태는 그만두자는 말이다. 


사실 이번 KT 후임 회장 선출도 결국은 그런 식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다들 예상하는 것 아닌가. KT 직원들조차 말로는 “낙하산 안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부디 좋은 사람을 보내줬으면” 하고 생각한다. 이미 청와대가 정보기술(IT) 전문가급 아무개 아무개에 대해 검증동의서를 받아 인사검증을 마쳤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단 한 주의 지분도 없는 정부”라는 말이 안 나오게 하려면 정부가 차라리 공개적으로 나서는 게 방법이다. 현재 KT나 포스코의 1대 주주는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자산이다. 국민의 자산이 투입되는 기업인 만큼 경영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이유가 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을 이용해 필요한 기업에 사외이사를 파견하면 낙하산 경영자의 전횡을 막을 수 있다.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겠지만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주인없는 기업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여준 KT에서 제일 먼저 시행해봄직하다.


이종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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