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2일 지면기사-

정부도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수를 알고도 방치하거나 연거푸 실수를 한다면 무능한 정부다. 무능한 정부에서 고통은 시민들의 몫이다. 장기불황의 터널을 건너고 있는 일본에서 발생한 일이다. 

1985년 미국 뉴욕의 플라자호텔에서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G5 재무장관들이 모였다. 미국의 요구로 달러 강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리였다. 미국은 달러 강세로 무역수지가 악화일로에 있었다. 참가국들은 달러화 대비 자국 화폐의 가치를 높이기로 했다.  

일본 대장상 다케시타 노보루는 합의에 서명한 뒤 “미국이 일본에 항복했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은 세계 경제강국으로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러나 엔화 절상이 가져올 파장을 과소평가했다. 엔화 가치가 오르면서 일본 제품의 국제경쟁력은 떨어졌고 수출 감소로 이어졌다. 수출주도 경제였던 일본의 성장률도 하락했다. 1986년 일본은 오일쇼크 이후 최악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무역악화로 인한 경기둔화에 일본 정부는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규제 완화로 맞섰다. 산업경쟁력 강화를 통한 기초체력 보강보다는 당장의 효과를 내는 대증요법만 동원한 것이다. 저금리로 풀린 자금은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몰렸다. 투기광풍이 불면서 거품은 커져갔다. 부동산 불패는 신화가 되었다. 도쿄 지가가 폭등하면서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일본 정부는 금리 인하로 인한 자산버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 소비세를 신설했다. 금리를 올리는 것은 맞지만 속도가 너무 빨랐다. 일본은행은 1988년 9월에 2.50%이던 기준금리를 1990년 12월 6.0%까지 인상했다. 여기에 초고강도의 부동산 대출규제에도 나섰다. 1989년 말 정점을 찍었던 주가가 폭락을 시작했으며 부동산도 하락했다. 일본 경제는 어둡고 긴 터널에 들어섰다. 저물가의 저주, 즉 디플레이션에 빠진 것이다. 좋은 약도 많이 쓰면 독이 된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속도조절에 실패하고, 산업구조조정도 실패하면서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일본의 장기불황에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중 일본 정부의 실수가 가장 크다.

물가가 오르는 부작용만을 걱정해왔던 소비자들은 저물가를 반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정 규모의 물가상승은 성장의 자양분이다. 디플레이션은 경제에 활력을 빼앗고 결국에는 고사시킨다. 일본의 소비자물가는 1999년 0.3% 하락한 뒤 2005년까지 줄곧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그동안 경기회복은 장기화됐고 고통도 길어졌다. 가격 하락은 생산 위축, 고용 감소와 임금 하락, 실업과 소득 감소, 상품과 서비스의 수요 감소, 추가적인 가격 하락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디플레이션과 저성장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우리나라에서 디플레이션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지난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을 기록했다. 실제로는 마이너스다. 1965년 통계 작성 이래 처음이다. 정부는 계절적인 요인 때문이지 디플레이션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개발연구원은 수요 위축에 방점을 두었다. 근본적으로 물가상승률이 목표(2%)를 밑돌며 저물가가 지속되는 원인은 수요 위축에 있다고 했다. 

당장의 현상이 아닌 추세를 보자. 한국 경제의 움직임이 어느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가. 성장이냐, 침체냐. 연평균 잠재성장률을 보면 2001~2005년 5.0~5.2%에 달했던 것이 2016~2020년에는 2.7~2.8%로 추락했다. 실질성장률은 더 낮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해 3.2%에서 지난해에는 2.7%로 떨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락세가 가파르다. 올해는 2%가 위태로운 상황이다. 고용은 참사 수준을 벗어났으나 ‘고용의 질’은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빈부격차는 확대됐다. 그렇다고 세계 경기가 좋은 게 아니다. 한·일관계는 최악이다. 경제를 낙관할 호재는 찾기 힘들다. 한국 경제가 저물가·저성장을 향해 가고 있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정부는 내년에 초슈퍼 예산을 편성했다. 10년 만의 적자재정이다. 경제가 어려운 만큼 재정을 풀어 경제를 살리는 데 마중물로 쓰겠다고 한다.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을 투입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재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20년간 정체상태인 산업구조의 개혁과 노동 개혁, 규제 혁파 없이 지속 가능한 성장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정부는 목소리가 큰 집단에 휩쓸려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다. 

한국 경제는 일본 경제를 모방하면서 성장했다. 일본이 장기불황에 빠지면서, 한국 경제에 위험은 예고돼 왔다. 그런데도 일본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우리는 일본의 불황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박종성 논설위원 p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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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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