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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류가 몰려온다고 전 세계가 흥분하던 2000년대 초반, 필자는 여성 이슈를 취재하는 기자였다. 대한민국 여성부가 출범한 때가 2001년 1월. 세기가 바뀌는 전환기에 김대중 정부는 방점을 ‘여성, 성평등’에 찍은 것이다. 굵직굵직한 성평등 정책들이 숨가쁘게 논의되고 만들어졌다.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제정(1999), ‘모성보호 3법’ 도입(2001), 성매매방지법 제정(2004), 호주제 폐지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법 개정(2005)…. 19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은 계속 개정되며 보완을 거듭했다. 일간지 대부분엔 여성면이 있었다. 여성학자들, 여성운동단체들은 좌우, 진보·보수 없이 연대해 정책을 만들고, 변화를 만들어갔다. 그런데, 일순간 이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몰아붙인 제도들이 생활 속에 제대로 스며들지 못했는데, 성평등이 거의 다 이뤄진 듯, 성공의 기운에 취해 여성 이슈는 희미해졌다.

다시, 여성들이 뜨겁게 등장하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이후의 ‘미투’ 운동, 페미니즘의 열기를 예고하듯,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2015년 이 현상을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이름 붙였다. 2010년대를 돌아보는 연말 결산 기사들에선 ‘페미니즘’이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 뭔가 많이 달라진 줄 알았는데, 터져나오는 구호들이 그리 낯설지 않다. 여성들의 불안한 삶, 각종 지표가 보여주는 불평등의 현실도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우리 사회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울대 사회학과 배은경 교수는 ‘젠더 관점과 여성정책 패러다임’ 논문에서 “개인으로서는 과거의 여성들보다 주체적이고 공적 노동에 대한 의지도 강해졌지만, 여성들로서의 집합적 정체성이나 연대감은 약화됐다”고 평했다.

또다시 10년 단위 시대의 전환점, 2020년이다. ‘페미니즘’이 주요 키워드로 등장하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일부의 목소리가 아닌, 여성들이 주류로 이끌어가는 질적인 가치의 변화다. 국제면에 부쩍 자주 등장하는 성평등 내각, 여성 리더십의 핵심은 소통과 공감, 환경과 평화, 돌봄, 지속 가능성 등이다. 오래전부터 페미니즘이 강조해 온 가치들이다. 최근 핀란드 총리가 된 산나 마린은 총리 선출 직후 EU 정상회의에 참석해 “더 많이,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며 2050년까지 유럽 대륙의 탄소 배출량이 사실상 없도록 만들자는 EU의 ‘탄소중립’ 목표에 강한 지지를 표명했다. 취임 3년째를 맞고 있는 뉴질랜드의 저신다 아던 총리는 지난해 50명이 숨진 이슬람 사원 테러 당시 히잡을 쓰고 이민자들을 찾아 위로하는 ‘포용과 화합의 리더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8년엔 동거 파트너와 딸을 출산하고, 육아휴직 중 양육수당 신설 등 가족 관련 정책 공개, 유엔 총회에 아기를 동반하는 파격 행보 등이 호평받았다.

지난 연말 미국 CNN방송은 스쿨미투 운동을 조직한 청소년 페미니스트 시민단체 ‘위티’ 양지혜 공동대표를 ‘아시아의 변화를 이끄는 젊은 리더’ 5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해 소개했다. ‘이전과는 질적으로 유전자가 다른’ 페미니즘이 등장하고 있다. 삶 속에서, 일상에서 몸으로 겪은 불합리와 차별을 스스로 바꿔보자는, ‘직접·민주 페미니즘’이라 칭할 만한 움직임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 파편화된 개인으로 살던 기나긴 동면의 시기에 응축된 단단한 힘이 이들을 수면 위로 밀어올렸다. 이들에게서 희망을 느낀다. 여성만이 아니다. 가부장 질서의 갑갑함, 남성들을 옭아매는 ‘맨박스’(남자를 둘러싼 고정관념의 틀)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페미니스트 선언도 이어지고 있다.

‘58년생 페미니스트’ 노혜경 시인이 사이다 제목의 책 <요즘 시대에 페미도 아니면 뭐해?>를 펴냈다. 제목대로 “요즘이 페미‘도’ 아니면 행세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행세는 ‘사람 노릇’이다. 차별을 거부하고 차별 구조에서 벗어나자는 페미니스트는 민주주의자처럼 현대인의 최소한이라고 강조한다. 페미니즘은, 못 쫓아가면 뒤처지고 조롱받는, 이미 국내외에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조류다. 페미니즘의 가치를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고, 확산시켜야 미래가 있다.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를 쓴 최승범 교사의 말을 들어보자.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다. 남성의 숨통도 틔워줄 수 있다. 힘들어도 혼자 이겨내는 것이 왜 남자다운 행동이 되었을까. 여성의 소득이 남성과 비슷해지면 모든 비용을 반씩 부담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육아를 여성에게 미루지 않게 되면 아빠와 아이의 친밀감이 커지지 않을까. 내 가족이, 내 주변 사람들이 일상에서 불쾌감과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까.”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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