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곧 분단 후 처음 민간에 개방된 DMZ(비무장지대)의 GP(감시초소)를 탐방하게 됩니다.” 철원 ‘평화의 길’ 해설사의 말에 참가자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철책 통문이 열리면서 버스가 ‘금단의 땅’으로 들어갔다. 버스는 역곡천의 배미교를 지나 화살머리고지로 향했다. 탐방객들의 표정에 호기심과 긴장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지난 22일 ‘DMZ 평화의 길’ 탐방단의 일원으로 6·25 최대 격전지였던 철원의 백마고지 전적지와 화살머리고지 인근을 돌아봤다. 1952년 10월 백마고지에서는 열흘간 고지쟁탈전이 이어지면서 국군과 중공군 등 1만8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전협정을 앞두고 벌어진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는 미군과 프랑스군 100여명을 포함해 300여명이 전사했다. 탐방단은 백마고지 전적비 일대를 돌아본 뒤 남방한계선 철조망 너머 DMZ의 백마고지 GP를 올려다봤다.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철책이 없었다면 유럽의 중세 고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DMZ에는 평화와 긴장이 함께 있었다. 

탐방단은 백마고지 조망대에서 공작새능선까지 남방한계선 철책길 3.5㎞를 걸었다. 윤형 철조망을 올린 철책은 삼엄했다. 길 반대편에 펼쳐진 논은 여느 농촌 풍경 그대로였다. 간혹 ‘무장공비 침투지역’ 표지판이 보였다. 경계 위의 전쟁과 평화다. 초병의 인솔로 찾아간 화살머리고지는 ‘평화의 길’ 철원 구간의 하이라이트다. 이곳에서는 6·25 전사자 유해발굴이 한창이다. 국방부는 지난 4월 이후 유해 456점, 유품 3만2000여점을 수습했다. 유품 일부는 GP 벙커에 전시 중이다. 총탄구멍이 숭숭 뚫린 철모가 전쟁의 참혹상을 증언한다. 초소 아래에서는 유해 발굴을 위한 진입로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비무장지대 내 유해발굴은 지난해 9·19 남북군사합의서에 따른 조치다. 남북은 당초 공동유해발굴을 약속했으나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남측 구간에서만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북측의 호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군사분계선(MDL) 너머로 북측이 개설한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남북정상은 9·19 남북군사합의서를 통해 DMZ를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4가지 이행조치를 내놓았다. GP 상호 철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 남북공동유해발굴, 역사유적 공동조사·발굴이 그것이다. 이 중 GP 철수, JSA 비무장화는 순조로운 편이다. 공동유해발굴은 절반만 이행되고 있다. 9·19 군사합의 가운데 가장 뒤처진 분야는 역사유적 조사·발굴이다. 

남북은 9·19합의서에 비무장지대 내 역사유적 공동조사·발굴을 명시했다. DMZ 내 역사유적을 민족정체성 회복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자는 데 합의한 것이다. 서울 면적 1.5배에 달하는 비무장지대에는 도성지, 고분, 산성, 사찰터, 천연기념물 등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이 중 전문가들이 꼽는 조사·발굴의 1순위는 궁예도성(철원도성)이다. 궁예도성은 후고구려(태봉국)를 세운 궁예가 905년 철원 풍천원 벌판에 세운 서울 성곽이다. 외성과 내성의 둘레가 각각 12.5㎞와 7.7㎞로 당나라 장안성이나 발해 동경성보다 크다. 궁예도성터는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DMZ 안에 푹 잠겨 있어 남북 공동 연구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일제식민 시기만 해도 이곳에는 석탑·석등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벽이 무너지고 유물들이 멸실됐지만, 성터 윤곽만큼은 항공사진이나 구글지도에 나타날 정도로 뚜렷하다. 남쪽의 철원 평화전망대에서는 성터를 조망할 수 있다.

궁예도성은 화살머리고지에서 동쪽으로 약 12㎞ 떨어져 있다. 두 곳이 ‘평화의 길’로 연결된다면 철원의 DMZ는 평화와 안보의 산교육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과 달리 궁예도성 조사는 남북 군사합의 10개월이 되도록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있다. 비무장지대 유적 조사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 국방부는 역사유적 공동조사·발굴의 우선조치로 ‘태봉국 철원성’(궁예도성)을 꼽았다. 문화재청은 ‘남북문화재 교류사업단’을 꾸려 궁예도성 발굴·조사에 대비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북한과 개성 만월대를 공동발굴한 경험이 있다. 비무장지대 문화재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도 적극 검토 중이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궁예도성 조사·연구를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문제는 북한의 뜨뜻미지근한 자세다. 정부는 북측에 9·19합의서 이행을 촉구해야 한다. 오는 29일 방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DMZ 인근 초소를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이 DMZ 평화만들기의 전기가 되길 바란다. DMZ 유적 공동발굴만큼 확실한 문화교류는 없다. 그 출발점에 궁예도성이 있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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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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