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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이굴기의 꽃산 꽃글

계요등

경향 신문 2019. 7. 23. 11:12

ⓒ이해복

간밤에 비가 왔나 보다. 하루 내내 험상궂은 하늘의 표정. 태풍 다나스는 소멸했지만 그 뒤끝은 남았다. 대서(大暑)가 임박했는데 아직 매미가 기척이 없다. 올해 첫 매미소리는 언제? 하려는데 멀리서 맴맴맴, 이라고 들리는 것 같았다. 소리는 매미답지 못했다. 이내 소리의 꼬리가 툭, 끊어졌다. 혹 내가 머릿속에서 작곡한 매미소리였을까?

동네 한바퀴를 하다가 이웃 초등학교에 가보았다. 예전에는 교사나 계단이 보였는데 이제는 운동장이 눈에 들어온다. 운동장은 늘 반듯한 줄로만 알았다. 실은 몹시 울퉁하고 불퉁하다. 비 오고 난 뒤에는 그 실상이 더 정확하게 드러난다. 아이들이 뛰놀다 간 텅 빈 운동장에 서니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인왕산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책 하나를 썼는데 그 첫대목은 이렇다. “늦은 밤 초등학교 옆을 지나는데 때마침 비 내려 운동장으로 내처 들어간 적이 있는가. 운동장 흰 모래가 밤하늘의 별들과 은밀히 내통하는 시간. 소나기 한 줄금 온 뒤 비릿한 비냄새가 코끝에 아릿할 때 초등학교 깜깜한 운동장에 서본 적이 있는가.” 

이에 촉발되어 내가 나온 초등학교를 찾아간 적이 있다. 오륙도에서 시작하는 갈맷길 꽃탐사를 마치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학교는 기억 속의 모습에서 그리 변한 게 없었다. 다만 새삼 느낀 건 운동장이 퍽 좁아졌다는 것과 화단이 무척 빈약하다는 것. 내 어린 시절을 지켜보았을 우람한 나무를 기대했건만 운동장 사정이 넉넉하질 못했다. 화단을 뒤지니 동백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은 계요등이 눈에 띄었다. 때가 겨울 끝 무렵이라 작년 열매가 저물어가는 희미한 빛을 끌어당기며 여물어가고 있었다. 

그 이후 꽃산행에서 심심찮게 계요등을 만났다. 꽃은 참 야무지고 예쁘기 그지없는데 냄새가 좀 독특하다. 사정이야 어떻든 활짝 핀 계요등은 고약한 냄새를 뚫고 내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는 덩굴이 되었다. 하늘에 구름이 있다면 땅에는 운동장이 있다. 오늘 큰아이가 졸업한 운동장에 서서, 나를 배출한 부산의 그 운동장, 그 안에서 씩씩거리며 뛰놀았던 나, 그런 나를 바라보기도 했을 계요등을 떠올렸다. 계요등, 꼭두서니과의 덩굴성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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