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생태탕, 동태찌개의 맛이란 아련한 추억이다. 북엇국, 황태국은 어떤가. 이 모두가 명태(明太·Alaska Pollack)에서 온다. 생태는 잡은 그대로의 명태이다. 급속 냉동한 것이 동태, 그냥 말리면 북어, 얼다 녹으며 노랗게 부풀도록 말리면 황태다. 나라가 동강나자 동해안의 실향민은 미시령과 대관령 아래에서 황태 문화를 이어갔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해상의 밀수를 통해 북의 명태가 남으로 오고, 남의 곡물이 북으로 갔다고도 한다. 나라는 갈라졌어도 명태 문화는 이어졌다. 그만큼 명태가 한국인의 일상에서 소중한 식료라는 뜻이겠다. 

조선 문인 서유구(1764~1845)도, 일제가 편찬한 <한국수산지>(1908)도 명태를 조선에서 유통 규모가 가장 큰 수산자원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최창대(1669∼1720)는 강원도 고성에서 본 장관을 이렇게 노래했다. “어부가 날마다 잡아온 명태/ 산처럼 쌓여 셀 수가 없네/ 삼백 냥이 바로 오백 냥 되니/ 매일 영서의 장사꾼에게 팔린다네(漁夫日捉明太魚/ 積如丘山不可數/ 靑錢三百直五百/ 日日賣與嶺西賈)”

이런 기록을 펼치고 나면, 명천(明川) 앞바다에서 태아무개가 처음 명태를 잡은 데서 ‘명태’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민간어원설이 허무하기만 하다. 이런 것 따위는 ‘5리도 못 나는 오리를 왜 오리라고 하나요’ 같은 옛 서당의 우스개 같은 것이다. 이는 다만 명태가 한국인에게 친숙한 식료임을 드러내는 비근한 예일 뿐이다. 오히려 이유원(1814∼1888)이 <임하필기>에 남긴 기록이 의미심장하다. 이유원 또한 명천 어부 태씨가 이 물고기를 낚으면서 ‘명태’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당시의 낭설을 기록하고 나서 이렇게 이어갔다. “이후 이 물고기는 해마다 수천 석씩 잡혀 팔도에 두루 퍼지게 되었고 북어라 불렸다. 민정중(1628∼1692)이 ‘300년 뒤에 이 물고기는 아마 지금보다 귀해질 것이다(此魚當貴于今)’라고 했는데 이제 그 말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내가 원산을 지나다가 이 물고기가 쌓여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마치 오강(五江·한강 일대)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귀하다’라는 말은 ‘사물의 품귀’와 ‘귀한 대접을 받다’라는 뜻을 아우른다. 

한국인은 여전히 명태 음식 문화를 이어가고 있으나 한국의 명태 어획은 2008~2009년 사이에 공식적으로 0을 기록했고, 명태는 해가 갈수록 귀해지고만 있다. 민정중은 수산자원 관리의 실패며 기후위기까지 염두에 두고 이렇게 예언했을까? 오늘날 한국인의 밥상에 오르는 명태는 거의 오츠크해와 베링해에서 오는 러시아산이다. 연안에서 잡은 명태로 산도 쌓고 장작도 쌓던 시대는 진작에 끝났다. 생태 덕분에 이어온 맑은 명태탕, 명태김치, 명태깍두기, 명태식해, 서거리(명태 아가미)젓 문화도 따라서 희미해지고 있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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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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