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김치 한 사발이 간절한 즈음이다. 짭짤하면 짭짤한 대로 삼삼하면 삼삼한 대로 김칫국물 한 사발을 목구멍에 왈칵 넘기고 나면, 그 기분 좋게 쩡한 간질임에 사람의 오감이 새로워질 것만 같다. 처지고 쭈그러졌던 몸과 마음이 주저앉은 자리를 그대로 박차고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다. 물김치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켜고서 ‘세상의 나쁜 기운아 물렀거라, 내가 간다!’ 소리라도 한번 지르고 싶다. 

조선의 문인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일찍이 새봄에 무와 움에서 움튼 무순으로 담근 물김치의 관능을 이렇게 말했다. “(주재료에다) 파와 고추로 담근 물김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문득 봄기운을 일깨운다(令人頓生春意).” 처음부터 의도해 담근 물김치나, 결과적으로 새콤하면서 달큼한 김칫국물이 넉넉히 남아 물김치 노릇까지 하게 된 경우나, 이어지고 서로 통하는 관능이 있다. 앞서 ‘문득 봄기운을 일깨운다’라고 했지만, 그 봄기운을 보다 구체적인 관능과 풍미의 표현으로 바꾸면 역시 쩡함, 산뜻함, 개운함, 시원함 등에 다다를 테다. 

1777년 북경을 다녀온 이갑(李𡊠 ·1737~1795)의 기록도 재미있다. 이갑은 오늘날의 중국 랴오닝성에서 허베이성으로 접어드는 길에서 뜻밖에 중국인이 담근 곤쟁이젓(甘同醢)·배추김치·동치미 등을 맛볼 수 있었다. 조선 사람과 교류가 잦은 중국인은 어느새 조선의 젓갈과 김치, 물김치에 입맛 들이게 되었고, 랴오닝과 허베이 지역의 농수산물로 조선 음식을 해 먹는 데 이른 것이다. 그 맛이 조선 사람의 입에 다 맛난 건 아니었으나 바탕이 되는 감각은 한결같았다. 

이갑은 이렇게 썼다. “동치미만큼은 중국 역관들이 우리나라 방식으로 담근 덕분에 한번 마셔보면 그래도 산뜻함을 느낄 수 있다(一噉亦足醒胃矣).” 어디 18세기만의 감각이랴. 글쓴이는 동치미·미나리물김치·나박김치·산갓물김치·돌나물물김치·참나물물김치·봄배추물김치 등등의 뒤를 밟다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며 이갑의 <연행기사> 등에 다다랐다. 이윽고 물김치의 관능이 ‘봄기운’이라든지 ‘산뜻함’으로 드러난 데서 빙그레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이 김치와 물김치에 바라는 바가 있다. 더구나 새봄에는 더하다. 오감을 일깨우는 부드러운 자극, 개운한 풍미가 주는 상쾌함, 후련함과 시원함을 바라는 마음들이 물김치에 가닿는다. 춘래불사춘, 봄마저 역사상 최악인 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 감각을 마냥 주저앉히기는 싫다. 암만해도 물김치는 좀 담가야겠다. 시장 나가 봄 얼갈이든, 알배추든, 산갓이든, 미나리든 손에 걸리는 대로 장을 보아야겠다. 덕분에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봄기운 솟는지, 한번 시험하겠다. 

 <고영 |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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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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