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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임의진의 시골편지

곡식 곡간

경향 신문 2020. 9. 10. 11:03

오래전 서울 살던 이문구 선생은 강연차 전남 땅을 밟았는데 누가 말을 건넨다. “나 여그 사는 아무개요. 아따 더운디 뭘라고 따분허게 앉어 있소. 쩌그 가서 입주(술 신고)나 허게 나오씨쇼.” 이문구는 소설가 송기숙과 이렇게 만났다. “말거시기 잔이란 생맥주 큰 잔으로 날씨보다도 뜨거운 정종대포 마시는 법, 국수가락 같은 세발 낙지를 졸도시켜 통째로 욱여먹는 법, 문저리라는 망둥이를 된장 양념으로 한입에 먹는 법…. 송 선생을 따라다니며 보았으니 말이지만, 갯가에서 얼씬거리면 날씨와 갯것만 바라고 사는 어부로 보이고, 산길을 걸으면 탄광에서 막장일을 하다 하루 쉬는 광부의 나들이에 진배없으며 보리 영근 들판에 들어서면 하잘것없는 농투산이와 얼른 가려지지 않는다.”

송기숙은 소설 <녹두장군>을 썼는데, 농민군이 밥을 나눠먹는 장면 ‘꽃 한 송이’ 꼭지는 예수의 오병이어 사건을 짐작하게 한다. “허허, 이 한한 사람들한티 저렇게 밥을 삶아주기로 하면 그 쌀이 어디서 다 나오제. 장마에 빗물도 한이 있는 것인디,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당하냐 말이여?” 그러자 농민군이 담배를 빨며 말을 뱉는다. “없는 사람들이 이랄 때나 한본 설을 쇠보제 은제 또 이런 때가 있을 것이요. 야냘말로 낼이라도 감영군이 쳐들어와서 우리가 밀리는 날에는 천장만장 쌓인 저 쌀이 모두 뉘 쌀이 되아불겄소?”

멀리서 보면 고사리 같은 전봇대와 별처럼 반짝이던 아버지의 면도 거울. 가난한 어머니가 떠준 고구마가 반반 섞인 밥그릇의 사랑으로 살아왔다. 훗날을 기약하는 돈은 모두 자본가들이 한탕으로 가져갈 돈. 날도 곧 추워질 텐데 긴급히 곡간을 열고, 돈을 풀고, 정을 나눠야 한다.

걸쭉하고 진한 만남이 있었던 어른들의 세월이 부럽다. 비대면의 시대는 낯설고 물설다. ‘감영군’ 말고는 생계가 암암하고 막막해라. 하루하루 밥 먹고 사는 일이 숨차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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