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야 놀자>라는 제목의 그림책이 있다. 일전에 한 선배 선생님의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그분이 책장에서 꺼내 보여주셨다. 

첫 페이지를 넘기면 여름날 바닷가에 작은 여자아이가 서 있다. 바다를 처음 본 것인지 표정이 상기된 아이는 엄마 손을 놓고 뛰어간다. 넘실대는 물살에 겁을 먹었다가 주저앉아 파도를 관찰하기도 하다 용기 내어 물가로 다가선다. 물에 발을 담그더니 이내 참방참방 물장구치면서 아이는 신이 난다. 밀려가는 파도를 쫓아 달리면서 ‘메롱’ 약을 올리기도 한다. 그러다 ‘나랑 놀자’ 하듯 되돌아온 커다란 파도더미에 옷을 적신다. 

이 부분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글자는 없고 그림만 나오는 페이지들을 휙휙 넘기던 내게, 선생님이 그림책은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고 일러주셨다. 한 장면씩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오롯이 읽힌다고 말이다. “여기서 유심히 보면 어딘가 바뀌어 있지 않나요?” 아아, 그제야 내게도 보였다. 아이가 바닷물에 흠뻑 젖은 다음 장면에서 이제껏 내내 하얗던 하늘색이 바다 빛깔로 바뀌어 있었다. 파도를 온몸으로 대해본 아이의 세계가 파도의 푸른빛으로 물든 것이다. 

그때 생각을 했더랬다. 우리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 맺는 과정이 저 꼬마가 파도와 친해지는 과정 같지 않을까 하고. 경계심으로 뒷걸음치다 호기심이 일어 손 내밀었다가, 이리저리 살피기도 하고 한 발짝 다가가 보기도 하고 말이다. 그중 유달리 각별한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상대방이 파도더미처럼 나를 휘감아 부지불식간에 흠뻑 적셔지는 순간이 찾아들기도 한다. 그 감정이 우정이든 연정이든 동경이든, 자신에게 유일무이하고 대체 불가능한 어떤 대상의 존재감이란 그런 것 아닐까. 그가 지닌 고유한 빛깔이 나의 하늘을 물들이는 것. 다듬어진 대사나 정제된 설명 한 줄 없이 흰색과 파란색 물감만으로 그런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음이 경이로웠다. 책 이름을 외워 와서 나도 한 권 구입했다.

그 책이 다시 생각난 것은 그해 겨울,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보면서였다. 머리카락을 파랗게 물들인 매력적인 화가 엠마로 인해 연인 아델의 삶이 푸른빛으로 채색되는 과정을 지켜보다 ‘상대가 지닌 고유한 빛깔로 나의 하늘이 물드는’ 그림책 속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동일한 설정이, 그런데 이번에는 경이롭지 않고 슬펐다. 극중 엠마의 관심이 다른 이에게로 향하고, 둘의 관계가 흔들리다 깨어진 이후에도 아델의 세계는 여전히 푸른색이었으니까. 그녀가 살아내야 할 하루하루는 상대방이 새겨넣어준 빛깔 그대로였으니까.

시간이 흘러 아델과 재회한 엠마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지만 너에 대해 무한한 애틋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네가 귀찮았던 적 없다고. 하지만 막상 푸른색 옷으로 한껏 단장한 아델이 본인 전시회에 찾아오자 엠마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그녀가 진정 귀찮지 않은 존재가 되려면 아름답던 시절의 색채와 ‘돌이킴’에 대한 가느다란 기대마저 내려놓아야 했던 것이다. 그게 마음 아팠던 나는, 그날 밤 돌아와 괜히 그림책만 책장에 거꾸로 뒤집어 꽂았다.

얼마 전 책장 정리를 하다 그 책을 오랜만에 펼쳐보았다. 파도가 모래사장으로 밀어다놓은 조개껍질과 소라고둥을 갖고 노는 아이 머리 위로 하늘이 여전히 파랗게 빛나는 후반부 페이지들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귀찮지 않은 존재가 되고자 애써 자신의 하늘에 흰색 물감을 덧칠해야 할까. 가능하긴 한 일일까.

기뻐 어쩔 줄 몰랐던 찰나부터 가장 작은 배움의 조각까지, 이는 파도가 선물한 조개껍질과 소라고둥인 셈이다. 하나도 버리지 않겠다. 각별했던 존재들이 파도더미를 일으키며 되돌아오지 않아도, 어쩌지 못할 기대가 또 깨어져도, 그들이 한때 각인해 놓았던 푸른빛 흔적을 억지로 지우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숲을 만나면 자연스레 초록이 덧대어지고, 밤에는 예쁜 먹색을 입기도 할 것이며, 맞갖은 때에 이르면 알록달록한 빛깔도 얻을 테니 말이다. 

조개껍질과 소라고둥의 선물들을 품고, 여전히 파란 물감이 칠해진 나의 세상에서 나는 매일의 걸음을 걷겠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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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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