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이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내가 살아남은 것은 고전과 교양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만 68세의 나이로 자기 집에서 투신자살해 충격을 주었다. 그 모진 수용소 생활도 견뎌냈던 그가 무엇 때문에 자살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평소 인간이라면 도저히 겪어서는 안되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처참한 경험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래서 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는 그 점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레비 자신을 포함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반복해서 꾸는 꿈에 대해서도 털어놓곤 했다. 그들은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청중들이 아무 반응 없이 듣거나 역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하고 말하는 꿈을 반복해서 꾸곤 했다는 것이다. 레비는 그럴 때마다 경험하는 무력감, 실망감, 절망감이 너무 크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한 감정이 그를 자살하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즉 현실의 고통보다도 남들에게 자신의 고통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일들이 남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그냥 그런 이야기로 치부되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이야기는 삶에서 의미와 희망을 잃었을 때 인간은 곧 살아갈 힘마저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상담하면서 자기가 저지른 실수나 다른 사람들에게 당한 모욕, 멸시, 간섭 등 과거의 기억 때문에 괴롭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그들은 매번 “그런 과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인간은 기억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기억 때문에 살아가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억이 인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기도 하다”는 요지의 말을 들려주려고 노력한다. 과거에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그 과거의 기억이 현재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더불어 그 기억을 바탕으로 내가 나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에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태어난 이래로 경험한 모든 것들이 다 우리 뇌에 저장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기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 전의식의 세계에 자리 잡고 있다가 뭔가 그 기억을 자극하는 것에 의해 다시금 회상되어 의식의 세계로 나타난다고. 그런가 하면 융은 인류가 지구상에서 경험한 모든 것들이 우리의 유전자를 통해 전해져 내려온다는 집합 무의식을 주장했다.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단지 회상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의 기억이라는 세계에는 어마어마한 정보가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그처럼 우리 뇌에 등록되고 저장되었다가 회상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 곧 기억이다.

뇌 자체에 문제가 생기면 등록도 안되고 저장도 안된다. 하지만 단지 심인적인 문제인 경우엔 회상만 안되거나 회상이 되어도 왜곡돼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회상 과정에 감정이 연관된다. 즉 내가 기쁘면 즐거운 기억이, 내가 괴로우면 힘들고 괴로운 기억이 회상되는 것이다. 이는 정신의학과 의사들이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회상에 문제가 생기는 상태가 곧 치매이다.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회상할 수 없는, 그야말로 ‘빈 서판’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존재해도 내 삶의 의미를 모르게 되니 스스로나 주위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경험한 사건들에 대해 그것을 회상하고 그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회적 치매에 놓였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레비가 자살한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양창순 |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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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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